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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儒林(287)-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87)-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퇴계는 둘째아들 채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가난하여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비를 빌려 쓸 지경이었으며,2월의 봄추위인데도 눈보라가 심하여 가매로 묻어 놓고 뒤에 이장키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채의 무덤은 사후 10년 후에야 외할아버지 선산에 이장될 수 있었는데,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에 묻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둘째아들 채와 정혼을 했던 며느리였다. 비록 혼례를 올리진 못하였지만 정혼을 한 처지였으므로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생과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법도는 ‘여자는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어 다시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즉 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기르며 아들을 따라야 했는데, 이를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며느리는 혼례를 올리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정혼을 한 이상 퇴계의 집식구였던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퇴계는 가슴 아파하였다. 자신이 성리학의 대가였으므로 이를 어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퇴계는 뒤채를 거닐다가 며느리 방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란다. 방안에서 며느리가 어떤 사람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퇴계는 크게 놀라 가까이 다가갔는데, 방안에서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서오세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아세요.” “나도 당신을 보고 싶었소.” 그렇다면 뒤채에 홀로 살고 있는 며느리가 외간남자를 불러들여 정이라도 통하고 있단 말인가. 크게 놀란 이퇴계는 문틈으로 방안을 엿보았는데, 잠시 후 벌어진 방안의 풍경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며느리는 베개에다 남편의 옷을 입혀놓고 밥상을 차려 베개에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주며 혼잣말을 하면서 슬피 울고 있었던 것이다. “서방님 이 음식은 아주 맛이 있어요.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며느리는 다시 혼잣말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혼자서 대답하였다. “역시 당신의 음식솜씨는 최고요.” “그러니 이제 자주 오세요.” 현진건의 ‘P사감과 러브레터’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었던가 아니면 다만 야담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 이퇴계가 며느리를 친정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아내를 버리거나, 내보내거나, 쫓아버리거나 하는 일은 있어도 이혼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사정파의(事情罷議)라 하여서 의절하여 내보내는 일은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의절의 증표로 아내가 입던 저고리의 깃을 자르는데, 이를 할급휴서(割給休書)라 했던 것이다. 원래는 남편이 아내가 입던 저고리의 깃을 자르는 것으로 소유권을 포기하는 의식이었는데, 아들은 이미 죽었으므로 퇴계는 은밀히 며느리를 불러 혼례 때 입으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며느리의 갑사저고리의 깃을 자신이 직접 가위로 잘라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제 너는 우리 집 귀신이 아니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로써 너는 부부로서 인연을 끊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멀리 떠나서 새생활을 하도록 하여라.”
  • 儒林(28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8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조선 중기에 문인이었던 이광려. 호는 월암(月巖)과 칠탄(七灘)으로 양명학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오히려 실용적인 학문에 전념하여 조엄(趙漸)에 의해 고구마가 전파되기 전에 고구마 종자를 전국 각지에 시험 재배하였던 실학자였다. 노자를 연구하여 ‘담로후서(談老後序)’란 문집을 남긴 이광려는 따라서 평생을 은둔생활하였는데, 두향의 묘를 참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고 있는 것이다. “외로운 무덤이 관도변에 있어 거친 모래에 꽃도 붉게 피었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에 강선대 바윗돌도 없어지리라.” 이퇴계 사후 150년 후에 두향의 무덤을 이광려가 찾았던 것은 그처럼 이퇴계와 기생 두향의 사랑이 시공을 초월한 로맨스였기 때문이었을까. 택시는 다리를 건너 운전수가 말했던 나루터로 향하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인공호수로 빚어진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아직 우기가 아니어서 수량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지난겨울 쌓였던 눈들이 녹아 흐르고 얼어붙었던 물들이 따뜻한 양광에 녹아 굽이쳐 흐르고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이었다. 이곳에 제15대 군수로 온 이퇴계는 단양의 빼어난 절경에 감탄하여 ‘단양산수기’란 기행문을 지었다. 이 속에서 이퇴계는 암벽과 어우러진 산속에 피어 있는 철쭉꽃의 봄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위의 사면에는 봄에는 철쭉꽃이 피어 마치 깊은 노을과 같고, 가을에는 단풍이 바위 위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다.” 호수를 끼고 있는 산들은 기암괴석으로 마치 선경과도 같았다. 그 사이에는 드문드문 붉은 철쭉꽃들이 이퇴계의 표현처럼 ‘깊은 노을(蒸霞)’이 되어 열(熱)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찬란한 봄날이었다. 불과 9개월밖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이퇴계는 이곳 단양을 애중(愛重)하였다. 이퇴계는 직접 빼어난 절경에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도담삼봉, 석문(石門), 사인암(舍人巖), 상·중·하선암(下仙岩), 구담봉(龜潭峰), 그리고 옥순봉(玉筍峰)의 팔경을 지정하고 일일이 그곳에 이름을 명명하고 그 모습을 산수기에 묘사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퇴계는 옥순봉을 지정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산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담봉에서 여울을 거슬러 나가다가 남쪽 언덕을 따라가면 절벽 아래에 이른다. 그 위에 여러 봉우리가 깎은 듯이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천길백길이 되는 죽순과 같은 바위가 높이 솟아 있어 하늘을 버티고 있다. 그 빛이 혹은 푸르고, 혹은 희어 푸른 등나무 같은 고목이 아득하게 침침하여 우러러볼 수는 있어도 만져볼 수는 없다. 이곳을 내가 옥순봉이라 이름지은 것은 그 모양 때문이다.” 이로써 옥순봉은 이처럼 희고 푸른 암벽에 비온 뒤에 죽순이 솟은 것 같다 하여서 이퇴계가 지은 이름임을 알 수 있는데, 이퇴계는 옥순봉의 선경을 따로 노래하였다. “…누가 달여울에 가로앉아 시선(詩仙)을 부를 것이며, 늦게 취하여 신공의 묘함을 알 수 있으랴. 일 많은 가을 얼굴을 한번 씻으니 푸른 물결 가운데 옥 같은 병풍이 높이 꽂혔네. 누가 능히 신선을 불러와서 묘하게 깎고 새 공을 같이 상줄 수 있으랴.…”
  • 儒林(28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8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그러나 이퇴계가 이처럼 병약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시적 운치와 풍유를 즐겼던 풍월객(風月客)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평생 동안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었고,91수의 매화시를 집대성한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까지 낸 퇴계라면 매화보다 맑고 매화보다 향기로운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심하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고향의 봄날 그 화려한 꽃동산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보면서 시정을 노래한 감춘(感春)이란 시를 보면 이퇴계가 뛰어난 성리학자이면서도 빼어난 시인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섬돌엔 여린 풀이 돋아나고 향기로운 동산에는 꽃나무들 흩어 있네. 비 내리자 살구꽃 드물고, 밤들자 복사꽃 활짝 피었어라. 붉은 앵두꽃은 향기로운 눈이 되어 나부끼고 하얀 오얏 꽃은 은빛바다가 들끓는 듯.”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화려한 고향의 봄을 느낄 수 있는 이퇴계가 어찌 꽃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감흥을 느끼지 않았으리요. 특히 말년에 도산서당에서 지은 매화를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를 보면 이퇴계가 얼마나 뛰어난 시적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한다.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고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그림자는 몸에 가득해라.” 이처럼 빼어난 시적감수성을 갖고 있던 이퇴계가 과연 여인에 대해서 무심하고 여인의 향기에 대해서도 근엄하였을까. ―아마도 나는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닐 것이다. 이퇴계는 이 단양에서 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무렵 두향이라고 불리던 아름다운 기생과 진실된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시인 조남두가 노래하였던 것처럼 두향이가 부르는 옥가락의 노래 소리가 감돌아 휘감기며 이퇴계는 한바탕의 춘사(春思)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얕은 언덕 위에 세웠던 역사였으므로 탁트인 산야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역사광장에는 단양팔경 중에 제1경이라고 할 수 있는 도담삼봉(嶋潭三峰)을 본 따 만든 모형수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도담삼봉은 특히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명소인데, 이곳! 단양출신인 정도전은 젊은 시절 이곳 도담삼봉에서 자연과 벗 삼아 학문을 익혔으므로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까지 지었던 뛰어난 성리학자였던 것이다. 이름 그대로 세 가지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담삼봉. 가장 높은 봉오리는 가운데 있는 중봉으로 높이는 6m가량인데, 이곳의 군수로 온 이퇴계가 이 절경을 보고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도담삼봉을 보며 이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짓는다.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강은 모래벌로 빛나는데 삼봉은 석양을 이끌며 저녁노을을 드리우네. 신선은 배를 대고 길게 뻗은 푸른 절벽에 올라 별빛 달빛으로 너울대는 금빛 물결 보러 기다리네.” 도담삼봉의 모형수석을 보며 이퇴계의 옛 시를 떠올린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퇴계와 명기 두향과의 상사는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이퇴계는 홀로 도담삼봉에 올라 별빛달빛으로 너울대는 금빛 물결을 본 것이 아니라 두향이와 함께 배를 대고 푸른 절벽에 올라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달뜨기를 기다린 것이다.
  • 儒林(27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7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절대 권력은 지상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기 마련이다. 절대 권력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지위가 만드는 것이다. 힘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권력자는 그 지위가 가진 힘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절대 권력자는 자신이 발휘하는 힘이 절대선이라는 함정 속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져야 하는 윤리의식과 도덕주의는 태생부터 권력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법과 정의는 제우스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 권력을 가진 이가 하는 모든 일, 그것은 그대로 법이고 정의일 수밖에 없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이 구절은 권력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명언인 것이다. 인류가 낳은 3대 성인 중의 하나인 공자의 현존도 위나라의 영공을 변화시킬 수 없었으며, 노나라의 권신이었던 계씨들에게 정의를 심어주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예수를, 수천 년간 메시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이 바로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역설적인 죄를 뒤집어씌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아이러니처럼 위대한 완성자였던 공자의 충고도, 설득도 그 무렵 정치가들의 마음에 전혀 윤리의식을 심어주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직 ‘권력을 가진 이가 하는 일이 곧 법이고 정의일 뿐이다.’라고 말한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기록이 오히려 권력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공자조차 이루지 못한 왕도정치를 그보다 2000년 후에 감히 권력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조광조.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예지자였던가. 예지자라면 비록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어 서서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어야 할 텐데 조광조의 순교에도 왕조 500년의 권력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 있음이다. 어디 왕조뿐이겠는가.21세기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는 권력을 가진 자가 제정하는 법과 정의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음이니. 권력은 여전히 총구(銃口)에서 나오고, 힘은 여전히 독재에서 출발하고 있음인가. 그에 비하면 이퇴계(李退溪:1501~1570). 조광조보다 불과 18년 늦게 태어난 이퇴계는 같이 공자의 유교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와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조광조가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실천적 제자라면 이퇴계는 공자의 말년 6년 동안에 집중된 학문과 사상을 계승발전시킨 동양최고의 학문적 제자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어 당나라의 선종을 거쳐 발전되어 오다가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성인, 원효(元曉)에 이르러 불교의 정수가 매듭지어진다. 마찬가지로 유가사상이 25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유교의 정수도 해동의 이퇴계에 의해서 매듭지어졌으니, 인류사상 최고의 정신문화의 유산인 불교와 유교가 모두 우리나라의 두 거인에게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나라를 변방의 작은 소국이라고 자괴할 수 있을 것인가. 원효와 퇴계를 낳은 세계 최고의 정신문화 선진국. 이퇴계의 위대함은 조광조와는 달리 유가사상에만 전념하여 공자의 사상을 성리학으로 완성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평생 동안 79번이나 벼슬자리에서 스스로 사퇴하였다. 본명이 이황(李滉)이었던 그가 퇴계라는 호를 지은 것도 말년에 자신의 고향인 토계( 溪)로 돌아와 마을이름을 퇴계라 고치고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과 완전히 손을 끊겠다는 의지를 논어에 나오는 ‘조정에서 물러나다(退朝)’에서 따온 ‘물러갈 퇴(退)’자를 사용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요즘은 ‘우담발라’가 꽤 자주 피는 것 같다. 연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최근에도 충북 단양군청과 충남 논산 성불사에 우담발라가 피었다고 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법화경’에 보면 우담발라는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성인이 출현할 때만 핀다고 한다.3000년에 겨우 한 번 필까 말까 한다는데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실상 풀잠자리알 또는 곰팡이에 불과하단다. 어쨌든 우담발라가 피어 있는 성불사의 금륜 스님은 상서로운 징조라며 “을유년에는 평화와 번영, 남북통일을 기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담발라. 작디 작은 몇십 송이 꽃인가, 곰팡이에 스님은 참 크고 묵직한 기원을 매달았다. 그런데 나는 우담발라가 피면 등장한다는 전륜성왕과 ‘정감록’의 진인왕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세속적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불경을 결집한 아소카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심이 깊고 태평성대를 실현할 왕이 바로 전륜성왕인데 민중은 진인왕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기대했다. 정감록의 진인은 무엇보다 현실의 고난을 헤쳐 간 민중의 꿈을 형상화시킬 의무를 졌다. 진인왕은 조선왕조의 기득권층인 양반을 벌주고 신분구조를 뒤엎으며, 서구열강과 그들의 종교를 물리치고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할 민중의 구세주였다. ●진인은 못된 양반을 생지옥으로 1785년 정조 9년 또 한 차례 정감록 사건이 터졌다. 주모자들은 나라가 셋으로 쪼개진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유씨, 장씨, 김씨가 삼국의 왕이 된다고 했다. 그 뒤 나라를 통일할 진인(眞人)은 제주 700개 섬 가운데 어딘가 숨어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그 진인이 마음대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이미 서씨와 정씨 두 사람이 진인의 명에 따라 사람들의 허물을 낱낱이 기록한 일종의 ‘선악적(善惡籍)’을 작성중이라고 했다. 18세기말 민중이 진인의 출현에 걸었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게 그 ‘선악적’이란 장부다. 딱히 양반의 허물만 기록한다고 명기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평민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의 악행을 기록하는 데 그 중점이 있다고들 여겼을 것이다. 진인은 민중의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바뀌어도 무식한 아랫사람들로서야 당장 무슨 벼슬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저 양반놈들 망하는 꼴 좀 보자.’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였다. 여러 지방에서 양반들은 동약(洞約)이나 향약을 실시해 장부를 비치해두고 말 안 듣는 하층민들을 기록해 뒀다가 벌을 줬다. 윗사람을 몰라본다, 불효한다, 형제간에 불화한다는 등의 죄명이 양반들의 ‘선악적’에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인이 민중의 편에서 선악 장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은 진인의 인기를 더욱 높였을 법하다. 통상적으론 양반 편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양반을 벌줄 수 있는 선악적이라니 얼마나 통쾌하랴. 진인의 상벌은 현세에서 시행된다는 점도 민중으로선 무척 달가운 일이었다. 자기들은 별다른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약자들을 괴롭히며 놀고먹는 양반, 놀부 같은 그들이 밉고 싫었을 것이다. 민중은 자기들 눈앞에서 그런 못된 양반들이 생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지옥이란 말을 꺼낼 때마다 자연스레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옥(범어 나라카·Naraka)은 사후세계란 뜻인데 그 참혹한 광경은 ‘목련경’에 자세하다. 석가모니의 큰 제자 목련존자의 지옥방문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문맹인 사람들도 지옥도란 종교화를 통해서 지옥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불교의 지옥은 종류도 많아서 각기 8대 열지옥(뜨거운 지옥)과 한지옥(추운 지옥)이 있고, 그 아래 또 32개 소지옥이 있다고 한다. 진인은 선악 장부에 기록된 악인을 문자 그대로 생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푸른 옷(靑衣)은 천주교 신부요, 서구열강이다 진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다. 어찌 보면 좀 뜬금없는 소리 같기도 한데, 진인은 서양 종교인 천주교도 퇴치해야만 했고 서구열강도 물리쳐야 했다. 물론 이런 기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일행이 거기 와 있던 예수회 신부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7세기부터였으나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어 본격적인 신앙운동이 벌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조정은 잔뜩 긴장하여 천주교를 엄금하였지만 그 세력은 제법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층민들의 일부는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정의 ‘계몽’도 한몫했지만 천주교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게 그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반발과 두려움은 정감록에도 감지된다.1923년판 정감록의 일부인 ‘무학비결(無學秘訣)’에서 푸른 옷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데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여태 한반도엔 없었던 새로운 부류의 성직자 즉, 신부들이 침략자란 것이다.‘푸른 옷’은 본래 좀더 먼저 쓰인 ‘도선비결(道詵秘訣)’에서만 하더라도 미지의 외부인으로 해석될 뿐이었다.‘푸른 옷을 입고 남쪽에서 오니 오랑캐도 아니요, 왜적도 아니다.’라고 했다. 하필 왜 푸른 옷인지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가 천주교의 국내 활동이 심각성을 띠게 되자 푸른 옷은 어느덧 서양신부로 비화됐다. 19세기 초에는 서양 함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천주교 신자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여론이 비등했다. 연달아 천주교박해사건이 터졌으며 국내에 잠입한 프랑스 신부도 처형되었다.19세기 중반에는 그 여파로 프랑스 함대가 공격했고 설상가상 통상문제로 미국함대도 쳐들어 왔다. 그러자 이제는 서구열강 자체가 침략의 장본인으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기록한 것이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다.‘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한다. 이때 정씨가 바다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 역사란 아이러니요, 거기서 나는 또 정감록이 갖는 현실 적응력을 본다. 서양선박의 출몰을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해도진인설이 등장했었는데(연재3호 참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엔 거꾸로 해도진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서양함대요, 서양신부였으니 말이다. ●동학의 최제우 새 세상 구현할 진인으로 1859년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동학’이란 이름의 새 종교를 만들었다. 그 뒤 1894년 동학은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고 탐관오리를 내쫓아 백성을 구하겠다며 갑오동학농민운동을 벌였다. 한 마디로 동학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내부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외세란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바탕 위에 동학은 새 세상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이른바 ‘후천개벽’이다. 최제우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에게서 진인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최제우란 존재는 새 세상을 구현할 초인이었다. 진인은 서양세력의 위협에서 민중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가져다줄 구세주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진인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방씨, 두씨 및 곽씨 성을 가진 3장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각각의 성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이 ‘토정가장결’에 나와 있다. “곽장군이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과 서남 오랑캐를 무찌른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돕고 이씨를 공격한다. 그러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나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인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한다 두어 줄밖에 안 되지만 숨가쁜 격변, 그것도 국제적인 변화를 예언한다. 하층민중이 국제정세에 민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들 나름의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일본과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조선의 이씨왕조를 무너뜨린다고 한 점이다. 먼저 외부에서 제기된 문제를 극복하고 그런 다음 비로소 내부문제에 착수한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다. 다 아는 대로 일·청 두 나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한국을 괴롭힌 장본인으로 수백 년이 지난 뒤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두 나라는 19세기말 한국에 진출, 내정을 간섭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 민중은 진인이 나타나 그들 두 나라도 없애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멸망에 대한 기대가 커, 일본 정벌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정감록의 한 파트인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엔 호랑이해부터 뱀해 사이 진인이 일본을 쳐서 항복을 받는다고 했다. 호랑이는 섬나라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왕이며 뱀은 용과 더불어 성인, 또는 왕을 상징한다. 구한말 한반도 지도를 그릴 때도 한국 사람들은 이를 호랑이로 인식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포항과 장기 앞바다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기도 했다. 그곳은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데 등대가 세워지면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른 셈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를 죽이려는 계략이라며 등대를 당장 허물라고 했다. 웃고 넘어갈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막강한 일본을 이기려면 그런 주술에라도 호소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언서에 언급된 일본정복설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한국산 미곡을 수입했고, 값싼 면직물을 한국으로 대량 수출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민중은 전례 없는 쌀 부족에 시달렸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산 면직물을 당해낼 길 없어 일반 농가의 면포(綿布) 생산은 위축돼 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뒤 한국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예언서에는 그런 역사적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던 민중의 열망이 표현돼 있다. ●진인왕과 보양법, 밀교 그야말로 초인적인 업적을 이룰 진인왕에 관해 정감록의 일부인 ‘동차결’은 이렇게 점치고 있다.‘태조의 성은 정(鄭), 이름은 홍도(紅桃), 자는 정문(正文), 무오생이다. 섬 가운데 평실에서 나와 계룡산에 건국한다.’ 정진인의 이름 ‘홍도’(붉은 복숭아)는 도교적이다. 복숭아는 수명과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특히 그 빛이 붉다면 복숭아 중에서도 일품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름은 ‘정문’, 문(文)을 바로잡는다고 돼 있다. 통치 질서와 윤리도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진인은 유교적 덕성을 겸비한 존재다. 무오생이라 함도 의미가 있다.10간의 5번째인 ‘무(戊)’와 12지의 7번째인 ‘오(午)’는 각기 중간의 홀수, 즉 중양(重陽)이다. 진시황의 생일도 단오 또는 중양이었다. 이런 남성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한다. 진인왕은 도교적 성격이 강한 만큼 도교서적에 나오는 진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도교에선 양기, 성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면 절로 진인이 된다고 본다. 그것이 양생법이다. 불교의 분파인 밀교에도 거의 똑같은 가르침이 있다. 당나라 때 도사 손사막이 지은 ‘방중보익(房中補益)’을 보면, 정액을 잃지 않고 93명의 여성과 성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몸에 내재한 이성성(二性性)을 살리게 돼 진인이 된다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밀교는 물론 힌두교에서도 다 그렇게 봤다. 정액을 몸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변화시켜 뇌로 보낼 수만 있다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유사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를 빙자해 간음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들로서는 진인 될 수행을 했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1937년엔 백백교 사건이 발생했는데 교주 전해룡은 간음과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무려 350명의 남녀신도를 살해했다고 한다.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의 특징을 ‘동차결’은 이렇게 적어놓았다.‘여러 대를 두고 내려오던 양반은 상사람이 되며, 상사람은 오히려 양반이 된다.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재를 뽑아 쓴다.’ 짧은 내용이지만 정감록을 믿던 민중에겐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진인왕이 평등사회를 실현한다고 볼 순 없지만,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뒤엎고자 한 민중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상사람이 양반되고 양반이 상사람 된다고 하였으니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진인왕은 유불선 삼교합일의 바탕 위에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불교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재를 불교에서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나는 조선후기 민중이 성리학적 지배 이념에 반발해 불교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음을 본다. 조선말의 혁명가 김옥균도 불교신자였으며, 이동인과 같은 개화승려도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융성시킬 진인왕은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경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은 모두 4명이다. 공교롭게도 예언서에서 진인왕에게 왕업을 도울 세 아들이 있다고 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신라의 진평왕도 아들의 이름을 동륜, 금륜 등으로 불렀다. 그 역시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봤다는 증거다. 전륜성왕 가운데 첫 왕은 철륜왕인데 진인왕이 그에 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동륜왕·은륜왕·금륜왕이 차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신자로서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은 진인왕의 협력자인 세 아들에게도 당연히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 전륜성왕이 출현할 때 우담발라가 핀다고 했다. 서두에서 말했듯 이미 우담바라는 피었다. 과연 전륜성왕은 오는 것일까. 전륜성왕이 가진 7개의 보물 중 하나인 거사보(居士寶)는 고아, 노인, 병자 등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더러 전륜성왕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예언서 속의 진인왕은 서양열강, 중국, 일본을 평정하고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구축한다고 했다. 정감록은 당대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었다. 그 예언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느냐는 별개 문제다. 대안이란 점에서 정감록은 예언서로서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儒林(27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7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쓰다 목숨을 잃었던 순교자였다. 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순교자였던 것이다. 종착역이던 안동역까지의 소요시간은 무려 6시간, 아침을 거르고 나온 나는 열차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파는 승무원에게 도시락을 샀다.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면서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열차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예전 그대로의 산야였고, 어쩌다 스쳐가는 강과 계곡은 의구하였지만 피란기차와도 같았던 열차의 내부는 마치 위생적인 병원의 복도처럼 정갈하였고 승무원이 파는 도시락 역시 훌륭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뜨거운 물을 마시며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평일이었으므로 승객들은 만원이 아니었지만 마침 봄이라 드문드문 등산객과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도록 의자의 방향을 바꾸어 앉아서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철도노선에는 소백산이나 태백산, 치악산 같은 명산들이 있어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조춘(早春)이라 산야에는 벚꽃들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먼저 피는 진달래나 개나리와 같은 성미 급한 봄꽃들이 홍역을 앓는 어린아이의 몸에 돋아난 붉은 발진처럼 울긋불긋 피어나 있어 그런대로 신열(身熱)이 오른 나른한 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일부러 중앙선열차를 타고 단양까지 가고 있는 것은 참혹했던 청춘의 옛 추억을 반추해 보려는 낭만적인 생각보다는 지난 1년 동안의 역사추적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조광조로부터 시작된 역사추적은 2500년 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공자로까지 이어졌었다. 조광조가 그토록 실현하고 싶어 했었던 공자의 유교식 개혁정치, 즉 왕도정치가 무엇인가를 나는 공자의 생애를 더듬어봄으로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 나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조광조가 유가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였던 정치가라면 공자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무려 13년 동안이나 주유천하를 하였지만 마침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실패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실패한 정치가란 점에서는 한 개의 수정란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째서 공자의 정치적 주유천하가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공자의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개혁정치를 펼치다 역시 실패하여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던 것일까. 어째서 조광조는 이미 실패로 끝난 공자의 왕도정치의 철학을 개혁정치의 신 이데올로기로 맞아들인 것일까. 그렇다면 조광조의 유교적 개혁정치는 처음부터 실패로 끝날 것임이 예정되어 있음이 아닐 것인가. 공자의 왕도정치. 그것은 우선 군주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의 높은 윤리의식과 엄격한 도덕주의가 요구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절대 권력자들이 인·의·예·지의 유교적 이념을 철저히 실천하여 군자가 되는 것이 바로 공자의 지치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 정도령은 누구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 정도령은 누구인가

    ●정도령과 진인 ‘정감록’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계룡산 밑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는 ‘정도령’이다. 달리 ‘진인(眞人)’이라고도 한다. 누구나 빤히 아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만 따져들면 실체가 애매한 것이 바로 그 진인이고 정도령이다. 실체를 잘 모르면서도 사람들은 정도령에게 제법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여러 해 전 일이었다. 대기업 총수 정모씨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는데 당시 칠순 노인이던 그를 가리켜 ‘정도령이 나왔다.’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도령치곤 참 늙은 도령이었다. 맨손으로 일어나 굴지의 대기업을 키운 사람이었던 만큼 그 뚝심이면 못 할 일이 없다고들 봤던 것일까. 하여간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그 뒤에도 정도령 감은 몇 명 더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 안 보인다. 고작 ‘정성(鄭姓)’ 또는 ‘진인(眞人)’이 언급되는 정도다. 때론 그 정씨와 진인이 같은 인물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내가 조사해 보니 민중들이 쉬쉬하며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됐고, 한참 뒤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등장했다.18세기 후반 들어 ‘왕조실록’에 ‘정성진인’이란 단어가 보인다. 물론 체통 있는 양반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정감록’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에 섞인 단어다. 그런데 정진인이 난데없이 웬 도령인가? 알다시피 도령은 양반집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도령은 정진인에 대한 일종의 애칭이다. 도령이란 호칭을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진인이 초능력자라 해도 정식으로 민중 앞에 나서기 전엔 아직 검증이 안 된 인물이다. 시쳇말로 딱지를 못 뗀 일종의 미성년이다. 진인으로 검증을 받을 때까진 정도령, 검증이 끝난 한참 뒤에는 성스러운 임금이다. 진인이 정씨라는 수사의 논리는 무엇인가? 정감록에 그 답이 있다. 이 예언서는 이성계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몽주의 선조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으나 3인이 두 집안의 실제 조상은 아니었다. 상상속의 인물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민중은 유독 정감을 더 사랑했다. 엄밀한 의미에선 책 제목을 3인의 대담집이라 해야 옳을 테고 실제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한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매우 드문 경우고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그 제목엔 역사의 승리자는 조선왕조의 적대자들, 즉 정씨 성을 가진 진인과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그런데 새 왕은 왜 하필 정씨여야 하는가? 정씨는 ‘정감록’의 맥락에서 볼 때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다. 조선왕조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정씨로 대표된다는 뜻이다. 이 주장의 배후엔 민중들의 집단적 기억이 배경에 깔려 있다. 민중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다 죽은 정몽주 이야기를 잊지 못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으나 태종에게 제거된 정도전, 선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여립, 영조 때 일어난 반란 사건에 연루된 정희량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다. 정씨는 조선왕조와 상극(相剋)이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민중의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김씨, 이씨, 박씨 등 다른 성씨 중에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사람은 수두룩했다. 그런 점에서 정씨 자손이 다음 세상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논법은 너무 순박하다. 진인이 반드시 정씨 집안에서 출생해야 될 이유는 없었다.20세기 전반 어느 종교 운동가는 ‘정(鄭)도령’은 ‘정(正)도령’이라고 했다. 정씨 진인설의 핵심을 찔렀다고 본다. 정도령은 성씨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민중이 믿고 따를 만큼 도덕적인 사람인가가 최고 검증요건이었다. ●진인이란? 조선시대엔 성리학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고, 그에 따르면 ‘도덕군자’가 제일이었다. 그 군자를 제쳐 두고 갑자기 왜 진인이란 생소한 존재가 나타나 왕조를 뒤엎는가? 그 이유를 나는 민중의 숨은 뜻에서 찾는다. 새 시대는 군자 되기를 외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민중의 노여움이 느껴진다. 성리학을 아주 폐기처분하지는 못할망정, 민중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뜻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진인(眞人)의 사전적 정의는 참된 도(道)를 깨달은 사람, 또는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진인이란 표현은 본래 도교 용어다. 영어로 된 도교전문 서적을 뒤적여 봤더니 ‘완벽한 인간 존재(perfect human-being)’라고 한다.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 신선과 비슷한 존재가 도교의 진인이다. 불교 쪽은 어떤가 싶어서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현대의 임제선에선 진인을 핵심개념으로 삼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신문 기자가 서옹 스님(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에게 진인의 개념을 물었다. 그때 서옹의 답은 이러했다. “거짓말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지. 거짓이 없으면 양심에 부끄러울 게 없고, 양심이 깨끗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있는 거야. 정치인, 경제인, 관리들 정말 거짓말 너무 많이 하더군.” 서옹 덕분에 현대 불교의 진인 개념이 명료해졌다. 진인은 절대자유인이라 불릴 만한 참사람, 수행의 최고단계에 오른 사람이다. 조선후기 민중은 그런 진인이 나와서 세상을 확 뒤집어 놓기를 바랐다. 정감록에 함께 실린 예언서 ‘동차결(東車訣)’에는 진인왕이 건국한 뒤엔 불교신자가 대접받는다고도 되어 있다. 불교적 진인관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이 글을 쓰다 말고 잠시 나는 호남지방에 퍼져 있는 진묵 대사 설화를 떠올렸다. 진묵은 석가모니의 현신이었다는 전설도 있긴 한데, 그는 발달된 기계기술 문명을 가져다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려고 잠시 서역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육신은 절간에 두고 진묵의 영혼만 잠시 떠났던 것인데, 속된 유학자 김봉국이 그 육신을 불태우는 바람에 그만 개화의 꿈이 허망하게 무너졌다고 한다. 사실 진묵은 17세기 인물이었고 문명개화와는 무관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민중은 유교가 못 이룬 개화의 꿈을 진묵이라면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민중이 기다리던 진인은 도덕적으로 특출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도덕성을 통치자의 필수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각은 양반들의 정치관을 닮았다. 유교의 성현(聖賢)이 진인으로 대체되고 만 느낌이다. 민중은 기존질서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지만, 제도가 아니라 인물을 최우선으로 삼는 유교적 사유의 틀에 갇혀 버렸다. 그런 한계를 인정해도 민중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대안을 궁리하였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민중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진인은 구원자라는 점에서 미륵불 또는 기독교의 재림 예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에 앞서 벌어질 아마게돈에서의 선악의 일대결전이나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은 진인의 출현과 무관하다. 진인이 세상에 나올 때 전쟁과 환난이 예정되어 있긴 해도 그것으로 역사가 완결되지는 않는다. 예수는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도 불러다 영생을 준다지만 진인은 산 사람들을 좀더 살기 좋은 사회로 이끌 따름이다. 진인은 미륵불처럼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성불시키지도 못한다. 진인의 문제해결은 한시적이고, 부분적이다. 진인은 예수나 미륵불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때가 이르면 환상의 섬에서 나올 진인 현대의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조선후기 민중은 섬에서 진인이 나온다고 보았다. 깊은 산골짜기의 신비한 동굴도, 오랜 암자도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 이상향으로 상정된 섬이 있고, 거기서 때가 되면 진인이 출현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상향을 말하다 보니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로 시작되는 제주의 이어도 타령이 생각난다. 그 노래에는 이어도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이어도는 파랑도라고도 하는데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馬羅島)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수중섬(水中島)이다. 엄밀히 말하면 암초(暗礁)다. 해수면 아래 깊이 잠겨 있어 파도가 몹시 심할 때만 모습이 잠깐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이어도는 예부터 이상향으로 자리매김돼 왔다. 서양에서도 미지의 섬을 이상향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1478∼1535)는 1516년 정치 공상소설 ‘유토피아(아무 데도 없는 나라란 뜻)’를 발표했다. 모어는 히스로디라는 뱃사람에게 어떤 신기한 섬나라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유토피아’인데 실제로는 당시 영국사회를 호되게 비판하고 저자가 동경하던 이상세계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 섬은 공화국이고, 모든 시민은 하루 6시간만 노동하면 된다고 했다. 거기선 남녀 모두 교육 혜택을 받아 교양이 풍부하다. 전쟁이나 다툼도 전혀 없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평등하다. 누구나 이상향에 가보고 싶겠지만 그곳을 찾아가긴 불가능하다. 토머스 모어는 자기가 속한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자고 했다. 조선시대 민중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민중이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조선왕조의 정치적·사상적 통제력은 그 시대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 그래서였을 테지만 민중은 이상향에서 구원자를 불러오고자 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엔 법과 제도가 구원을 보장해 주었다. 그곳엔 구원자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이상향은 그 반대였다. 사람이 문제를 푸는 열쇠였다. 민중은 진인이란 구원자를 통해 현실 문제를 풀려 했다.17세기 후반부터 역사기록에 나타난 해도진인(海島眞人)이 그것이다. 섬에 희망을 걸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나? 바다는 신화시대로부터 생명이 숨쉬는 희망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민중은 대부분 뭍에 살며 농사에 종사했다. 그런 판국인데 진인이 낯선 섬에서 나온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로 씨름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이런 짐작을 해봤다. 진인을 하필 섬에서 찾는 이유는 민중을 괴롭혀온 조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공백 지대는 음모와 꿈이 무르익을 수 있다. 게다가 17세기부터 먼 바다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낯선 서양 선박(황당선, 이양선)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의외의 사건소식을 접한 민중은 바다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해도진인설로 굳어졌다고 본다. 서양 선박에 관해 좀더 이야기해 보자. 그때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조선 배보다 수백 배나 큰 거함을 타고 대서양·인도양을 가로질러, 대만을 지나 제주 남쪽 해상을 통과하여 일본을 오갔다.18세기 후반이 되면 그 큰 서양 선박들이 가끔 서남해에 나타났다. 그 소식을 듣고 실학자 박제가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배 안에는 생김새, 언어, 습관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서양 선박은 조선 해안에 표류하기도 했다. 박연, 하멜 등이 그들인데 훗날 하멜은 도망에 성공,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그는 ‘하멜표류기’를 통해 유럽각국에 한국을 알리기도 했다. 조선후기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서양 사람은 외계인이었다. 얼마나 먼지 거리조차 짐작할 수조차 없는 곳에서 큰 대포를 장착한, 초대형 선박을 타고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양 선박의 출현은 민중의 공포심과 신비감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까지 아직 서양 함대가 조선을 침략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 못지않게 신비스러움이 컸다. 이양선이 출몰하는 서남해는 경이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 바다에 서양 선박이 나타난 것이 전혀 뜻밖이었듯, 언제 또 새로운 존재가 등장할지 호기심 많은 민중으로선 귀추가 주목되었다. 동해나 서해에도 이상향이 있다는 소문이 가끔 떠돌았지만 남해설은 좀더 유력했다. 어느덧 서남해는 진인의 고향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물론 서양배의 출현만 가지고 해도진인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조선후기엔 무인도가 이주지로 각광을 받게 됐다는 점도 언급돼야 한다. 당시는 육지의 개발이 이미 끝난 상태였다. 가난한 민중은 삶의 터전을 섬에서 일구기 시작했다. 한번 민중의 눈길이 바다 쪽으로 쏠리자 수십의 무인도가 유인도로 바뀌었고, 율도·무석국 등 상상의 섬들이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 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둘 때 ‘진인(眞人)이 남해에서 계룡(산)으로 나오면 (새 왕조의) 창업을 알 수 있다.’는 예언의 의미가 충분히 살아난다. 서남해에 서양 선박이 출몰하고, 무인도가 개척되는 가운데 민중은 해도진인의 출현을 동경했던 것이다. 육지로 나온 진인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진인의 정체를 밝히려는 나의 탐구는 다음 호로 이어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儒林(263)-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3)-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이처럼 공자 스스로 정하였던 공문십철의 십대제자 중 민자건과 자하(子夏) 두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학문을 버리고 정계로 나아가거나 질병으로 중도하차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는 예수의 경우와는 정반대현상인 것이다. 예수도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한 후 12명의 제자를 뽑는다. 이들 중 예수를 단돈 은전 서른잎에 팔아넘긴 배신자 가롯 유다를 빼놓으면 모든 제자들은 스승이었던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순교하였는데, 이에 비하면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학문의 길을 버리고 벼슬을 하였던 것이다. 석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석가의 제자들도 스승이 열반하자 제1대 수법제자인 마하가섭(摩詞迦葉)의 사회로 왕사성 밖에 있는 필발라굴에서 500여 성승(聖僧)이 모여 경전을 결집하는 작업에 정진하였던 일과도 대비되는 일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와 석가는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의 미망을 깨우치기 위해 사바세계로 뛰어든 천지창조 이전부터 준비된 영원의 빛이라면 공자는 철저하게 인간 그 자체였던 위대한 인격의 완성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기독교와 불교를 창시한 교주인 예수와 석가와는 달리 철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성인이라기보다는 철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공자가 예수와 석가와 더불어 세계 3대 성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공자가 창시한 유교가 종교나 신앙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후대의 양명학이나 성리학 같은 인간학의 학문으로 발전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공자가 스스로 제정한 10대제자 중 말년에 공자가 편저한 경전과 고대문화 연구의 성과를 다시 해석하고 또 후세에 전하여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공헌하였던 사람은 복상(卜商)이라고 불리었던 제자가 유일하다. 그의 자는 자하로 위나라 사람이었다. 자하는 공자보다 마흔네 살이나 아래였으니, 마흔다섯 살이나 아래였던 자유와 더불어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막내였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정계로 나아가 벼슬을 하였던 것에 비해 자하는 주유열국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에 죽을 때까지 6년간 학문에 정진하였던 스승의 곁에서 경전의 편저를 도왔을 뿐 아니라 중국의 옛 문헌 및 고대문화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하였던 수제자였다. 불교의 경전이 25년간 시자로 있었고, 석가의 사촌아우로 뛰어난 미모와 빼어난 총기로 항상 석가의 곁에서 총애를 받았던 10대 제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아난다가 마침내 법상위에 올라 “비구의 여러 권속들이/부처님을 떠나서는/넓고 넓은 허공에 퍼진 별들이 /달(月)을 여윈 것처럼 광범치 못하노라.”하고 노래 부른 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오서 아무 곳에 계시면서 아무 것을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인간과 하늘이 받들어 행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경전을 기록하는 제1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초기 경전의 시작은 아난다가 기억하는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의 편찬도 자하의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오고 있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중요한 유가의 경전들은 모두 그 전승에 있어 자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자하가 시, 서, 악, 춘추와 같은 경전에 누구보다 깊이 연구하고 박학하였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인 것이다.
  • 선현들 편지에 담긴 묵향

    “당계서색구홍약(當階瑞色句紅葯) 임수문광정록천(臨水文光淨綠天)” 추사 김정희가 당대의 서예가였던 유상에게 써준 ‘대련 서색문광(對聯 瑞色文光)’의 한 대목이다. 뜨락의 상서로운 빛은 붉은 작약과 같고, 물에 임한 아름다운 빛은 하늘처럼 푸르다는 내용이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지인이 보내온 전복과 해초를 받고 그 고마운 마음을 간찰(간지에 적은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는 다산의 고결한 인품과 심성은 물론 당대의 풍속과 사회상까지 고스란히 전해준다. 13일부터 27일까지 서울 관훈동 우림화랑에서 열리는 ‘선현들이 남기신 묵향’전에는 이처럼 선현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1500년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서예가 156명의 서간 200여점이 선보인다.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과 퇴계 이황, 개화파 김옥균, 독립운동가 오세창까지 다양하다. 이번 전시와 관련, 초정 권창륜 한국서예학술원장은 “선현들이 남긴 묵적(墨蹟)은 대부분 간찰 글씨다. 한편 한편의 편지에도 모두 쓴사람의 개성과 심경이 확연히 드러나며 완상의 흥취를 북돋워준다.”고 말했다. 우림화랑측은 전시에 맞춰 156점의 작품과 해설이 실린 도록을 발간, 간찰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02)733-3738.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열린세상] 조선 사림파와 386정치권/이덕일 역사평론가

    우리 역사에서 조선의 사림파만큼 주목받았던 정치세력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전횡과 부패를 일삼는 훈구파와 맞서 싸우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니 감동한 사람들이 그가 시정(市井)에 나가면 몰려들어 ‘우리 상전(上典:주인이라는 뜻) 오셨다.’라고 받들었다.”고 적을 정도였다. 사림파가 훈구파의 공작정치인 4대사화를 극복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탄압을 받을수록 백성들의 신망은 더욱 올라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 도학정치(道學政治)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사림파는 명종 말∼선조 초에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사림파가 보여준 행보는 ‘선비의 배반’으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 집권과 동시에 둘로 분열한 사림파는 훈구파와 싸울 때 이상으로 맞서 싸웠으니 그것이 바로 당쟁이었다. 양란(兩亂:임진왜란·병자호란) 때 극도로 무능했던 것은 둘째 치고 양란 이후 낡은 성리학적 질서의 극복과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요구하는 일반 백성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사림파는 성리학적 질서의 강화라는 과거지향적인 길을 걸었다. 그 결과는 진보세력에서 수구세력으로의 전락이었다. 박하게 말하면 사림파는 집권하지 않는 것이 그 자신을 위해서나 역사를 위해서 더 나았을 정치집단에 불과했다. 그들의 역사적 효용은 훈구파의 비정을 공격하는 정도에 있었지 집권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무능집단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386정치권을 볼 때 조선의 사림파가 연상되는 것은 그만큼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강한 이념지향성, 남다른 결속력, 사회 주류세력과의 끈질긴 투쟁 등이 그것이다.386정치권이 정권의 주류로 등장한 것은 불과 2년 남짓하므로 이 시점에서 그 성패를 단정짓기는 이를 것이다. 그러나 현 정권 2년의 중간성적을 기준으로 볼 때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런 박한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IMF외환위기 때보다 더하다는 경제위기 때문일 것이다. 386정치권은 이념적 문제에나 관심이 있지 경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일각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올해 정치권은 여야 할것 없이 이념적인 문제, 비경제적인 문제로 죽고 살기로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지만 이는 대다수 국민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중산층 이상 국민들의 관심이 웰빙에 있다면 중하층 국민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생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자리를 잃은 30대 영세민의 5살 난 아들이 영양실조로 숨졌다는 최근의 기사는 우리가 정말 21세기에 살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한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닌 오늘 이 나라에서 어찌 사람이 굶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많은 경제학자들, 특히 한국의 경제문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해외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침체를 경제외적인 요인, 즉 정치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분석이 맞느냐 틀리냐의 여부는 오늘 국회가 무엇을 가지고 죽기살기로 싸우는지를 보면 자명해진다. 대한민국 국회는 16대나 17대나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다.386정치권마저, 아니 386정치권이 앞장서 그들만의 리그에 전력을 투구하는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조선의 사림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자신이 극복의 대상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시야를 미시적으로는 한 끼 식사거리를 못 구해 고통 받는 극빈층에게 돌려야 하고, 거시적으로는 세계와 미래로 돌려야 할 것이다. 기존의 선명성에 이런 현실적·개방적·미래지향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할 때 이들은 미래 한국정치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386정치는 어떤 점에서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답은 앞으로의 행보에 있을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특별한’ 청자·목공예품 한눈에

    ‘특별한’ 청자·목공예품 한눈에

    국내 3대 사립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서울 신림동 호림박물관이 14일부터 내년 2월28일까지 ‘호림박물관 구입문화재 특별전’을 연다. 호림박물관이 지난해 구입한 문화재 100여점 중 특별히 예술ㆍ학술적 가치가 큰 작품들을 골라 선보이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자양각연판문표형주자(靑磁陽刻蓮瓣文瓢形注子)를 비롯한 청자와 백자 등의 도자기류와 목공예품 90여 점이 공개된다. 청자류 전시는 순(純)청자와 상감청자, 철화청자를 중심으로 꾸며진다. 특히 청자양각연판문표형주자는 은은한 비색과 정교한 문양이 돋보이는 걸작. 또 조선시대 제작된 청자장군은 백자의 바탕흙에 청자유약을 입힌 작품으로, 조선시대에도 청자 제작기술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청자·분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이 백자다. 백자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지만 조선 건국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돼 조선 말까지 꾸준히 이저졌다. 조선 전기에 등장한 순백자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조선 중기 이후에 나온 철화백자는 순백자와는 다른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선 후기 백자 문화를 대표하는 청화백자류는 광주 분원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번 전시품중 백자청화괴석모란문병은 농담을 잘 살린 문양 솜씨가 일품으로,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목공예품으로는 조선 후기의 목가구류와 나전칠기류가 나온다. 목제경상(經床)은 단아한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을 엿보게 하며, 목제나전화조문경대에서는 사대부가 여인들의 취향이 묻어난다. 목공예품의 일종인 나전호작문 베갯모는 민화의 친숙한 소재인 까치와 호랑이가 나전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 점이 눈에 띈다.(02)858-2500.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도토리’ 발음 가상문자로? 수능 이색문제들

    ‘도토리’ 발음 가상문자로? 수능 이색문제들

    17일 치러진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창의성을 요구하거나 실생활과 연관된 문항들이 보였다. 타성적인 공부습관에 허를 찌르는 이색 문제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지만, 착실히 공부한 수험생이라면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반응이다. ●퇴계 이황이 조지훈 수필에 발문(跋文)을 쓴다면? 언어영역의 ‘생활·언어’지문에서는 ‘도토리’의 발음을 가상의 새로운 문자로 표기하는 방법을 묻는 문항이 나왔다. 기하학적인 도형을 도, 토, 리 라는 발음에 따라 문자로 배열하는 것이 과제였다. 음운 문자와 자질 문자의 특성을 반영해 새로운 가상문자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과학고 입시문제와 비슷했다. ‘도산십이곡’을 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 퇴계 이황이 조지훈 시인이 쓴 수필 ‘멋설(說)’을 추천하는 글을 써보게 한 문항도 눈길을 끌었다. 또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작가 이효석의 특성이 드러날 수 있는 문학제 초청장을 선택하는 문항은 새로운 형식의 출제라고 평가됐다.‘판유리 생산공정의 혁신과정’을 서술한 기술 관련 지문도 제시됐다. 사회 지문에서는 언론사가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 미국 대선의 선거보도 효과를 묻는 문항이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 듣기 평가 지문에서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로 시작되는 만화영화 ‘들장미 소녀 캔디’의 한·일 양국 가사를 비교하는 문제가 나와 수험생을 잠시 웃음짓게 했다. 수리영역은 인문계인 ‘나형’에서 총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이상인 ‘초고령화 사회’의 예측 시기를 묻는 시사 문제가 나왔다.‘나’형 22번은 수열의 규칙성을 찾고 행렬을 만드는 일반적인 문제에 비해 행렬의 성분의 합이 수열을 이룬다는 아이디어가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남편은 면도기, 딸은 리모컨, 엄마의 정체는? 외국어영역은 사고력과 창의력을 측정하는 통합교과형과 시사적인 문제가 나왔다.‘태풍 피해’와 ‘화성 대접근’이 출제됐다. 듣기 문항에서는 대화를 듣고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문제가 나왔다. 기존의 언어영역에서 많이 출제됐던 글의 순서를 배열하는 문항도 나왔다. 두 지문을 하나의 지문으로 요약하는 문제는 다소 어려웠다는 평가이다. 어휘력과 문법 지식이 동시에 필요했던 23,24번 문항도 까다로웠다. 특히, 지문에서 ‘adopt/adapt’‘economic/economics’ 등 철자가 비슷한 단어의 의미와 올바른 문법적 쓰임새를 파악하고 있는지를 동시에 요구했다. 충전지를 의인화해 면도기(shaver) 남편과 사진기(snapshot)인 아들, 리모컨(remote)인 딸을 소개한 뒤 정체를 맞히는 문제도 출제됐다. 사회·과학탐구 영역은 지난해처럼 도표와 지도, 그래픽을 활용한 시사 문제가 많이 눈에 띄었다. 정치에서는 올해 4·15 총선에서 처음 실시된 정당명부제와 관련된 문제가 전체 20문항에서 2개나 출제됐다. 한국지리는 지역별 대표 산업을 예시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특화산업 육성의 장점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세계지리는 이라크 전쟁을, 한국 근·현대사는 동북공정과 간도 문제 등 중국과 영토분쟁이 시의적절하게 출제됐다. 윤리는 인간 배아 복제 실험과 양성 평등, 법과 사회에는 호주제가 출제됐다. 화학Ⅰ은 수돗물의 정수 과정을 수영장의 물의 소독이나 두부의 제조 방법과 연관시켰고, 생물Ⅰ은 생활하수처리, 물리Ⅱ는 컴퓨터 자판의 원리를 묻는 등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도 꽤 출제됐다. ●수험생들 “이런 문제 까다로웠다” 오산고 서모(18)군은 “고전을 연계시킨 이황과 조지훈의 복합지문이 철학적이어서 어려웠다.”고 말했다.EBS 언어영역에서 다뤄진 최치원의 ‘최고운전’도 2개의 지문을 제시해 특이했다는 반응이다. 서울고 장보성 국어교사는 “척추동물의 호흡계 진화과정을 물은 과학지문도 다소 까다로웠다.”고 지적했다. 수리영역인 ‘가형’에서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안타까워하는 수험생들이 많았다. 재수생 김모(20)군은 “새로운 유형으로 느껴지는 문제가 전체의 20%정도 됐고 난해한 계산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서울고 유충균 수학교사는 “가형에서 연속함수와 가우스를 다룬 10,11번 문항은 평소 수험생들이 접하기 어려운 문제로 미적분, 함수, 급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설명했다. 배화여고 이철희 진학부장은 “가형에서 새로운 유형이 등장했지만 난이도가 아주 높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중경고 박모(18)군은 “외국어 영역은 문법과 어휘 문제가 특히 어려웠고 지문 전체에서도 낯선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고 전했다. 서울과학고 이모(18)군은 “개념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문제가 아닌 단순 암기성 문제도 있었다.”면서 “열 경화성 수지의 재활용을 묻는 문제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당혹스러워했다. 안동환 박지윤기자 sunstory@seoul.co.kr
  • 선비의 배반/박성순 지음

    ‘높은 학식과 대쪽 같은 기개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청렴결백의 상징’.일반적으로 조선 선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올려다 보기 힘든 고고한 인품을 갖춘 성인군자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섣불리 이의를 달지 않았다.소장 역사학자인 박성순 단국대 겸임교수가 쓴 ‘선비의 배반’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전복적이고,모험적이다. ●성리학은 사대부 위한 정치적 무기 저자의 문제의식은 의외로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한다.‘조선이란 나라는 그토록 자기 수양의 정도가 높은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궁극적으로 나라의 운명은 왜 그리됐을까.’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실마리로 조선 선비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성리학’에 주목한다. 성리학이 순정 성리학자를 자임했던 사림파들에 의해 ‘선비들의 심신을 수양하는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왕권을 억압하는 한편 아래로는 민에 대해 일방적으로 군림하는 사대부 독존의 사회체제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무기’였다고 규정한 것. 저자는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사림파 성리학자들이 ‘심경’을 경연 과목으로 정착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사례를 내세운다.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선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던 성리학 경전 ‘심경’이 조선 중기 이후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배경에는 민생과 관계없이 임금을 훈도하고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사림파들의 정치적 야욕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마침내 효종대에 ‘심경’이 정식 경연과목으로 채택된 이후 왕권과 사림파 성리학자들의 충돌은 격화된다. 저자는 이같은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효종과 송시열간의 북벌논쟁을 든다.송시열은 당시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산당세력의 입지확보를 위해 효종의 북벌대의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을 뿐 현실적인 사업전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한다.즉 도덕적,내적 수양을 강조한 ‘심경’의 추종자들인 사림파 선비들은 고매한 학문적 이상과는 별개로 현실에선 백성이나 국가보다 가문과 당파의 안녕을 더 염려했고,이같은 사족 지배체제의 강화가 궁극적으로 조선의 멸망을 불러들인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정치인의 이중적인 태도 오늘날도 비슷 조선 선비를 박제된 성인군자에서 기득권 수호를 위해 표리부동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재조명한 저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요즘 정치 현실에 대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저자는 후기에서 개혁을 화두로 내세운 현 참여정부의 인물들이 대의명분과 달리 속으로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배반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충고한다.1만 1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이런 책 어때요]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허시명 지음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우리 술의 진경을 소개.과거보는 사람들이 시험 전날 마셨던 머리를 맑게 하는 잎새곡주,녹두장군 전봉준이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관군에 끌려가면서도 찾았다는 소주 죽력고(竹瀝膏),시인 조지훈이 직접 빚어 마셨던 삼도주,퇴계 이황이 탐독했던 ‘활인심방’에 등장하는 개고기로 빚은 무술주 등 우리 술의 진수를 전해준다.전통술 품평가인 저자는 400가지 꽃으로 빚는 백화주를 우리 술의 절창으로 꼽는다.명주는 전통이요 문화다.백화주엔 성리학 정신이,무술주에는 퇴계의 사상이,초화주엔 이규보의 시심이 담겨 있다.1만 4000원.
  •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승격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승격

    문화재청은 보물 제432호인 ‘태안 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을 국보 제307호로 승격 지정하고,속리산 법주사 철확(솥의 일종) 등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30일 발표했다. 이 가운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서산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에 앞서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란 점이 인정돼 국보 승격이 결정됐다. 보물로 새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법주사 철확(제1413호) 외에 경기 안성 ‘봉업사 명(銘) 청동향로’(제1415호)와 ‘삼현수간’(三賢手簡,제1415호)이 있다. 무게 20t 정도의 큰 사발 모양인 법주사 철확은 제작자와 제작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청동보다 용융 온도가 훨씬 높은 주물 솥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봉업사 명 청동향로는 몸체와 덮개,기대(器臺) 부분에 삼족(三足) 받침이 있는 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다.삼현수간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송익필(宋翼弼),성혼(成渾),이이(李珥) 사이에 왕래된 편지를 4첩(帖)으로 묶은 간찰첩이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창간 100주년- 학술대회·지면분석]

    서울신문이 국내 현존 언론 중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구국독립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에도 바른 보도로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대한매일신보에서 시작되는 민족언론의 뿌리가 서울신문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이 시대에 대한매일신보가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한 학술회의가 지난 7일 열렸다.서울신문사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다. ●정리 논설위원실 1. 창간의 역사적 의의 /정진석 외대 명예교수 대한매일신보 창간 이래 오늘날까지 100년을 이어온 발자취는 한국 현대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암과 굴절이 많았다.이 신문이 한국의 언론사와 더불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고 중요하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열강의 침탈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창간돼 1904년부터 6년 동안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력한 항일언론을 펼쳤다.한일병합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는 매일신보로 제호가 바뀌면서 총독부의 기관지가 됐다.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재출발했다가 한때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고,이제 또다시 서울신문이 됐다.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굴절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비극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신문으로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자 소유주였던 배설이 영국인이었고,그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발행인 배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영국인이었기에 대한제국의 법률로는 처벌할 수 없었으며,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도 그를 추방하거나 신문의 발행을 금지할 수 없었다.대한매일신보는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됐다. 한국의 민족진영은 이 신문을 열렬히 지지하고 성원했다.반면에 일본은 이 항일신문을 침략정책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여겼다.영국의 입장에서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치외법권을 손상받지 않도록 하려 했다. 영국과 일본이 처음에는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 또는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결국은 영국의 법정에서 진행하는 재판에 회부하게 됐다.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던 한말에 있었던 재판은 다섯 차례나 됐고,한국·영국·일본의 법관이 이를 다루었으며,재판 장소도 서울과 상하이까지 걸치게 됐다.재판은 한일병합 후까지 계속됐다. 대한매일신보사는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기도 했고,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은 논설로써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으로는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해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따라서 이 신문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대한매일신보는 한말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신문의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국한문·한글·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자주개화운동의 근본으로서 한글 사용을 주장했다.또한 지면에 실린 항일 시가(詩歌) 등은 국문학상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을 고종 또는 민족진영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나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경영한 주체는 배설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고종이나 민족진영의 자금지원이 있었지만,그것이 신문발간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울신문을 한말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과거의 역사로부터 단절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관(史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그것은 언론의 역사를 민족사관(民族史觀)에서 파악하는가,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증사관(實證史觀)의 입장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1945년 11월23일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바뀔 때에는 대한매일신보에서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이어받아 13738호부터 시작했다.제호는 바뀌었지만 신문의 역사는 계승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 3월23일부터는 매일신보의 역사를 단절하고 지령을 다시 조정했다. 1998년 11월11일부터는 단절시켰던 과거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고 지령도 새롭게 계산했다.대한매일신보를 지령에 넣되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부분은 지령에서 뺌으로써 매일신보를 건너뛰고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혔다.2004년 1월1일부터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다시 환원했다.이 날짜 지령은 20095호로 역시 한말 대한매일신보 지령을 합친 것이다.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역사를 이은 것이다. 2. 참여인물·언론사상/박정규 한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한 인물 중 배설과 양기탁에 대해서는 완벽할 정도로 연구가 이뤄져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논객이었던 박은식과 신채호의 재직 기간 중 활동,지사(支社)설치 상황과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또,기명이 안된 사설의 집필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배설은 영문 논설이나 기사 외에 국한문판 신보에 직접 집필한 형식의 글들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배설이 한국어로 쓴 기사라기보다 한국인 기자들이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배설의 이름을 빌려 사회문제 등에 대해 맘껏 필봉을 휘둘렀다고 보아야 한다. 박은식은 성리학자였던 만큼 전통 한문체의 글을 썼다.1907년 박은식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신채호는 가장 영향력이 컸던 논객이다.신채호는 애국사상이 담긴 특유의 선동적 문장을 통해 국민들의 국권회복 정신을 북돋우는 등 독자를 감동시켰다.양기탁의 글로 알려진 ‘학계(學界)의 화(花)’ 등 2편의 논설은 집필시점과 문체로 보아 신채호가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 경영 외에 국채보상운동과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해 논설집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보는 국한문판 발행을 본격화하면서 1905년 평양,선천,장련 등 관서재방 세 곳에 최초의 지사를 설치하게 된다.장련의 지사는 백범 김구가 운영했다.1908년 평양 태극서관 지사장을 맡은 안태국은 교사이자 이 지역 신민회의 중심적 인물이었다.신보의 전국 지사 중 절반이 평안도에 집중 돼 있었던 것은 총무 양기탁이 이 지역 출신이었고 안태국과 같은 지사원의 활약에 힘입었기 때문이다.1910년 6월 전국 지사 수는 59개소,지사원은 250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신민회의 지방거점,국권회복운동가들로 추정할 수 있다.회계 임치정은 양기탁이 가장 신임한 동지였다.이완용 암살미수사건,신민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신채호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3. 국채보상운동 주도/이연 선문대 교수 차관을 이유로 조선민중을 식민지의 올가미에 옭아 매려는 일제의 획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현 수창초등학교 뒤 대성사 자리)에서 시작됐다.“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우리 2000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강점하의 물산장려운동이나 해방 후 국산품 애용운동,1998년 IMF 이후의 금모으기 운동처럼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애국운동으로,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운동이었다.최초 발의는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나,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농민들이나 봇짐장수,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적으로 확산됐다. 이 운동을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게 동력이 됐다.이 신문들은 기사나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와 당위성을 호소하면서 날마다 의연자의 명단 및 납부금액을 게재해 온 국민들의 동참을 역설했다.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조선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개탄했다고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조선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하면서 갖은 탄압과 모략을 획책했다.일제는 을사 5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과 일진회의 송병준,이용구 등 친일파를 동원해 반대하는 책동을 일으키게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 배설 사장과 양기탁 총무는 이러한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계속 전개했다.일제는 결국 이들의 언론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배설의 국외추방과 양기탁을 탄압해 제거하기에 이른다. 4.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논설/김덕모 호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평가된다. 제1기는 창간 때부터 1905년 3월10일 일시 휴간 때까지의 시기이다.6면중 4면은 ‘The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영문면을 만들고,나머지 2면은 대한매일신보라는 제호로 국문면을 만들었다. 제2기는 대한매일신보를 속간하기 시작한 1905년 8월11일부터 1907년 3월말까지의 단계다.이 시기에는 ‘을사5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제3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기 시작한 1907년 4월 초부터 대한매일신보사가 이장훈에게 팔려 양기탁 등 신민회 간부들이 대한매일신보사를 떠난 1910년 6월13일까지의 시기다. 제4기는 배설에 이어 사장직을 승계한 만함이 일제의 공작에 말려들어 회사 일체를 사원 이장훈에게 매도하고 귀국해버린 1910년 6월14일부터 일제가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병합하여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켜버린 1910년 8월29일까지의 2개월 반 간의 기간이다. 제1기에는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여 국가의 안녕질서에 대한 모든 주제에 대해 공평한 변론을 전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2기는 한국인의 문명지식을 계몽하고 세계 각국에 대한 견문을 공유하기 위한 개화의 목적에 역점이 두어졌다. 제3기 이후는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에 초점을 맞춰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매일신보가 개화기 구국계몽운동의 선봉이 될 수 있었던 데 대해서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에 광무신문지법에 의한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어왔다. 그러나 신용하 교수 등의 연구는 이러한 외적요인에 더하여 대한매일신보가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기관지가 된 이후 더욱 과감하게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논설 분석 결과로도 입증된다. 이 시기 논설은 민족의 자립정신,교육과 나라정신,산업진흥,친일언론과 단체에 대한 비판,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식민 지배를 감추기 위한 기만책임을 통렬히 비판하고,국채보상운동,헤이그 특사 파견,고종황제 퇴위,한일병합조약,동양척식회사 설립 등 역사적 사건을 맞을 때마다 과감하고 열렬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제 오늘의 신문들은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5.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광고/안종묵 외대 연구원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때부터 광고를 게재했다.사기업인 대한매일신보는 신문의 안정적인 발행을 위해 광고가 중요했다. 창간 초기의 광고료는 1인치에 50전이었고 한달에 5원이었다.발행부수가 다른 신문의 3배 이상이어서 광고의 효과면에서 대단히 컸다.한글과 영문이 혼용된 6면이 발행된 시기에는 운수광고(16%),은행(14%),잡화점(9%) 등이 주요 광고주였다.광고주의 국적은 한국이 13%,외국이 43%,미상이 44%다. 1907년 5월23일부터 발행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는 그해 하루 평균 5.26개이던 것이 1910년에는 10.25개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대 광고업종은 약국,서적,사고광고 등이었다.약국 가운데 이응선의 종로 화평당약방과 이경봉의 남대문 제생당약방이 최대 광고주였다. 서적광고는 전체의 16.5%를 차지했다.애국계몽운동가인 이승훈이 운영하던 태극서관이라는 서점 광고가 집중적으로 등장했다.‘국한문신옥편’이라는 실용적인 서적부터 ‘서사건국지’‘애국부인전’ 등 국권회복을 자극하는 계몽적 성격의 서적들이 광고됐다. 1908년과 1909년에는 사고(社告)광고가 많이 등장하는데 명함 인쇄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사고였다.국채보상운동 취지를 제일먼저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흥미로운 것은 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을 촉구하고 있을 때 일제 담배광고가 많이 광고되었던 점이다.이는 광고가 국채보상운동과는 큰 관계없이 운영되었음을 말해준다. 6.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독자 인식/김영희 서울대 강사 대한매일신보 독자들이 투고한 기서(寄書)에서 신문에 대해 가장 자주 요구한 것은 춘추필법으로 공정하게 계도하는 엄한 스승으로서의 언론의 모습이었다.다음으로 많이 주문한 것은 다양한 분야의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는 문명진보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이 두 요인 또는 인식은 지금까지 개화기 신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설명된 것으로,이 시기 신문발행에 참여한 발행 주체들의 신문에 대한 인식이 일반 신문 독자들의 인식으로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로 자주 언급된 것으로 신문이 독립자유의 감발심(感發沈)을 격동케 하고,새로운 자각을 유발시킨다는 인식이었다.이러한 인식은 신문의 춘추필법과 지식 제공으로 자극을 받아 생성되는 기쁨,감격,분노,안타까움,흐뭇함 등의 정서적 반응이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읽은 독자들이 남긴 다양한 글에서도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황현은 대한매일신보를 설명하면서 “각 신문사에서도 의병들을 폭도나 비류(匪類)로 칭하였지만 오직 매일신보는 의병으로 칭하며,그 논설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들은 대로 모두 폭로하였다.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품귀 상태에까지 이르렀고,1년도 못되어 매일 간행되는 신문이 7000∼8000장이나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읽었던 김윤식은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통쾌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이러한 논의들은 신문의 공공성을 지키면서 보도와 논평 기능을 통해 환경을 감시하고,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제공하여 국민을 개명 진보로 이끌고자 한 대한매일신보의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한 대한매일신보의 모습을 신문의 전형으로 인식했음을 알려준다. 7.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잡보(사회면)/채백 부산대 교수 오늘날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하는 것이 ‘잡보’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 중에서는 사실보도가 전체의 76.1%를 차지했다.반면 의견이 개입된 기사,즉 사실+해설과 해설기사를 합치면 전체의 14.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독립신문의 분석결과와 비교해 보면 의견기사가 줄어들고 사실보도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부 관련 정보였다.전체의 24.5%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는 사회문제,유명인사 동정,관의 비리와 폐해 순서로 나타났다.사회문제 기사에서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활발했던 의병 관련 기사나 교육 관련 기사가 포함됐다. 독립신문에서는 해외토픽류의 흥미 위주의 기사가 있었지만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런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반면 일식이나 태풍,자살 기사 등이 ‘사고와 흥미거리’ 기사에 포함됐다. 잡보란에 등장하는 기사들의 관련지역을 보면 한성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아 전체의 59.6%에 이른다.그밖의 지역은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외국에 대해서도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특히 일본이 가장 많았다. 잡보기사의 주인공도 다양했다.잡보 기사의 주인공으로는 지식인과 단체가 26.3%로 가장 많았고,그 다음으로 왕실과 정부가 22.3%를 차지했고,일반인이 15.6%로 그 뒤를 이었다. 잡보기사의 보도태도를 긍정,중립,비판 세가지로 분류해보면 긍적적이 6.8%,중립적이 85.8%,비판적이 7.4%의 분포를 보였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에 나타난 주요 특징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기사의 건수가 독립신문에 비해 대폭 늘었다는 점이다. 이는 지면의 판형이 커지고 단수가 늘어나는 등의 외형적 요인 외에도 신문이 정착기에 들어가면서 취재여건이 다소나마 좋아졌던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다음으로는 사실보도와 중립적 보도태도가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이는 신문이 지향해야 할 이념으로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는 객관저널리즘에 좀 더 접근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사실보도 위주로 가면서 단위 기사의 분량도 점차 짧아지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세번째로는 기사의 관련 지역이나 주인공,정보원 등에서 특정의 편향을 강하게 보였다는 점이다.지역면에서는 한성,주인공이나 정보원 측면에서는 정부나 관리에 대한 의존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儒林(11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가르쳐주고 또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성인의 심법(心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디까지나 옛 성인,즉 공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공자가 가르친 대로 행하고,공자의 심법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마음을 지켜나가는 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조광조의 개혁정신은 자명해지는 것이다.조광조는 공자의 마음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던 것이다.조광조는 자신뿐 아니라 중종도 공자가 되어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인과 공자의 덕은 바로 왕도이며 공자의 도덕과 윤리야말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경계하여 본받고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율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광조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발에 신겨진 검은 신과 흰 신.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바꾸지는 못하는 가죽신은 바로 공자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수수께끼의 참언은 이제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이제야 알겠으니 조광조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것이다.조광조는 비록 실패했지만 공자의 사상으로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선각자였던 것이다.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적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썼던 구도자였다.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유교적 이차돈인 것이다.따라서 조광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구도의 궁극(窮極)이었으니,조광조야말로 순교자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시는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지난 6개월 동안 추적해왔던 조광조의 생애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이제 내 앞에는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그것은 조광조의 발자취를 좇아 500년 전의 과거에서 25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자의 행적을 좇아가는 길일 것이다. 조광조가 신었던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마치 조광조로부터 바통을 전해받은 장거리주자처럼 계주(繼走)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조광조의 무덤을 우러러보았다.문득 조광조가 살아 생전 지었던 한 수의 시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길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 문왕은 어디가고 빈 배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조광조의 시처럼 언덕 위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석양의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는 시구처럼 풀밭 위로는 어지러운 나비 떼들만 춤을 추며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여,안녕. 개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조광조가 내게 준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서둘러 차가 주차되어 있는 심곡서원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어느덧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 儒林(11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가르쳐주고 또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성인의 심법(心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디까지나 옛 성인,즉 공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공자가 가르친 대로 행하고,공자의 심법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마음을 지켜나가는 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조광조의 개혁정신은 자명해지는 것이다.조광조는 공자의 마음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던 것이다.조광조는 자신뿐 아니라 중종도 공자가 되어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인과 공자의 덕은 바로 왕도이며 공자의 도덕과 윤리야말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경계하여 본받고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율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광조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발에 신겨진 검은 신과 흰 신.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바꾸지는 못하는 가죽신은 바로 공자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수수께끼의 참언은 이제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이제야 알겠으니 조광조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것이다.조광조는 비록 실패했지만 공자의 사상으로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선각자였던 것이다.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적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썼던 구도자였다.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유교적 이차돈인 것이다.따라서 조광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구도의 궁극(窮極)이었으니,조광조야말로 순교자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시는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지난 6개월 동안 추적해왔던 조광조의 생애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이제 내 앞에는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그것은 조광조의 발자취를 좇아 500년 전의 과거에서 25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자의 행적을 좇아가는 길일 것이다. 조광조가 신었던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마치 조광조로부터 바통을 전해받은 장거리주자처럼 계주(繼走)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조광조의 무덤을 우러러보았다.문득 조광조가 살아 생전 지었던 한 수의 시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길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 문왕은 어디가고 빈 배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조광조의 시처럼 언덕 위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석양의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는 시구처럼 풀밭 위로는 어지러운 나비 떼들만 춤을 추며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여,안녕. 개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조광조가 내게 준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서둘러 차가 주차되어 있는 심곡서원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어느덧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 儒林(11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주자는 공자가 말한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서 공부했지만 요즘의 학자는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해서 공부한다(古文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라는 구절에서 자기 자신의 도덕적 함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으며,이것을 타파하는 길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길임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주자의 핵심 철학인데,이는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그리스 시대에 대유행을 보이던 소피스트,즉 궤변주의에 대해 ‘너 자신을 알아라.’라고 질타하였던 소크라테스의 육성을 연상시키는 사자후인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변론술은 ‘비논리적인 것을 논리적인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기만술’인데,주자가 살았을 당시에도 지식인들은 진정한 깨우침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궤변술을 통해 명성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이를 주자는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오늘도 경전을 토론하는 사람들에게는 네 가지의 병폐가 있다.그 하나는 본디 저속한 것을 끌어올려서 숭고하게 만들고,본디 비천한 것을 끝까지 캐물어서 심오하게 만들고,본디 비근한 것을 이끌어서 고원하게 만들고,본디 명확한 것을 굳이 희미하게 만든다.” 유학이 주자에 의해서 중흥된 것은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민족의 북방 지배는 한족에 대한 정치적 위협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치명적이었던 것이었다.또한 정부는 부패하고 부도덕하며,당파싸움은 치열하며 많은 지식인들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한족의 문화적 전통이었던 유학은 이미 1000년 이상 불교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민족의 교의에 무릎을 꿇게 되면 한족의 정신적 뿌리인 유학은 어떻게 되겠는가.” 주자는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유학의 도를 부흥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위대한 사상가였다.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 역시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려 후기의 학자 안향(安珦)이 1289년 원나라를 왕래하여 주자서를 베껴 오고,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온 후 주자학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게 된 것이다.그후 성리학은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는데,특히 정도전,권근(權近) 같은 성리학자는 이성계를 도와 법전을 제정하고,국시(國是)를 유교로 삼는 정치이념을 성립함으로써 활짝 꽃피게 되었던 것이었다. 특히 조광조가 살았던 당대는 중종이 알성시의 문제에서 말하였듯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도 못하고,나라의 법도도 정해지지 않은 난세 중의 난세였던 것이다. 세조는 어린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하였으며,중종 역시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서 물러난 연산군 대신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 허수아비 왕이었던 것이다.왕조의 건립 이래 두 번이나 신하가 임금을 쫓아내고 죽이는 불충의 난이 일어난 무법천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안내문에 나와 있던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개혁은 실패하고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나는 아껴 마시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봉분 옆 풀밭 속에 웃자라 있는 들꽃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었다.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나비의 날개를 붙잡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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