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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과 토론하던 그들… 조선 경연의 모든 것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은 어떻게 유교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고, 이를 정사에 반영할 수 있었을까. 원리주의적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어떻게 임금을 유교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대학자 기대승·율곡 이이 기록 생생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경연이 무엇인지, 그 역할과 내용을 당시 기록에 근거해 풀어놓았다. 유래와 역사와 함께 경연에서 쓰인 교재, 경연관의 선발 방법, 경연이 이루어지는 절차와 목표 등을 당시 자료들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했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유교의 국가 조선에서 왕들의 생각을 어떻게 가다듬게 하고 벼리게 했는지를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경연에 참여, 왕과 토론을 벌이는 경연관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의 기록도 한 장으로 엮어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기대승의 ‘논사록’(思錄)과 율곡의 ‘경연일기’ 일부를 번역하고 설명해 놓았다. 기대승이 명종 때 홍문관 수찬으로, 선조 때 승지로 왕의 아침 경연인 조강(朝講)에 참여한 27일 31회의 기록을 후학들이 모은 것이 논사록. 이이의 경연일기는 이이가 경연에 참여해 보고 듣고 겪은 내용과 건의한 내용, 당시 사회상들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경연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함께 유교 경전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했다. 이 자리는 단순한 경서 공부를 넘어서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들을 유교적 덕목과 가르침에 비추어 토론하는 자리가 됐다. 임금과 신하가 경서의 내용은 물론 실제 사건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가치를 논하면서 보다 나은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연은 왕권의 남용을 규제하고 보다 나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자리이기도 했다. 당시 경연은 아침의 조강과 정오의 주강(晝講), 오후 석강(夕講)의 삼시강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강, 보강 형태의 소대(召對)로 구성됐다. ●왕의 공부·정책모색 과정 알 수 있어 왕과 신하는 경연의 자리에서 논어, 맹자, 예기, 중용 등 경서는 물론 다양한 역사서를 인용하고 검토하면서 현실 문제의 척도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경연은 정책의 일관성과 함께 유교적 가치가 정치와 행정에 미치는 직접적인 자리가 되기도 했다. 논사록에서 기대승은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명종에게 진언했고, 을사사화때 화를 입은 이언적 등에 대한 신원문제를 비롯한 사화에 대한 재평가 문제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방납 등 당시 공물 납부 문제점 등 행정 폐단을 거론했고, 송나라 효종과 신종 등 격변기 중국의 군주들을 논하면서 왕을 경계시키기도 했다. 2만 2000원.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경상북도 봉화-산골마을에 퍼지는 ‘워낭소리’

    경상북도 봉화-산골마을에 퍼지는 ‘워낭소리’

    경북 봉화는 ‘소’같다. 긴 속눈썹에 크고 깊은 눈망울, 무던하고 천진한 입매의 그 소를 닮았다. 봉화가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북 봉화는 ‘소’같다. 긴 속눈썹에 크고 깊은 눈망울, 무던하고 천진한 입매의 그 소를 닮았다. 봉화가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간의 채찍질에도 아랑곳없이 길가의 풀을 뜯는 소처럼, 봉화는 오지라 불러도 좋을 산골어귀에서 당신과 나의 고향인 듯 터를 잡고 있던 탓이다. 잠시 봉화라는 달구지에 몸을 실어 볼 것. 딸랑… 딸랑… 아련하고도 청량한 워낭소리가 산바람에 실려 환청인 듯 들려올 것이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동철 취재협조 봉화군청 culture.bonghwa.go.kr 1 최 노인의 집은 누추하지만 정겨웠다. 마당 한 쪽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영화 속 장면이 담겨 있어 <워낭소리>를 추억하게 한다 2 영화의 주요 장면과 줄거리가 새겨져 있는 마을 입구의 조형물 3 최 노인과 누렁이가 논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재현한 동상도 마을 입구에 서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누렁이, 여기 잠들다 차는 봉화 읍내를 지나 내성천을 건너고 다시 봉긋한 산들로 둘러싸인 마을에 들어선다. 여기 어디쯤이라는데, 여느 호젓한 시골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풍경에 영화 <워낭소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넓은 논 사이로 가지런히 난 흙길을 따라 터덜터덜 느릿한 걸음을 옮기는 소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엔 거짓말처럼 영화 속 주인공인 최 노인이 달구지에 실려 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30년 넘게 반복되어 온 풍경이 그렇게 재현되고 있었다. 변한 것은 소 한 마리뿐이다. 영화에 나왔던 소는 죽어 땅에 묻혔고, 지금은 튼실해 보이는 젊은 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푸석푸석했던 털은 윤기가 흐르고 할아버지처럼 바싹 말랐던 몸은 근육질을 자랑한다. 요 녀석의 나이는 일곱 살, 이 누렁이도 그전 누렁이처럼 마흔 살(사람으로 치면 120살쯤 된다고 한다)까지, 잘 살아 줄까? 그들이 걸어 나왔던 길을 되짚어 가니 누렁이와 할아버지의 일터가 나타났다. 논밭 주위로는 영화 속 대사가 적힌 벤치들이 수시로 발걸음을 붙잡는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나한테는 이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농약 치면 소 먹고 죽어. 사료 먹이면 살쪄서 애 못 낳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듯 생생한데, 그중 한 대사에 코끝이 찡하다. “노인네들 겨울 잘 보내라고 나무를 이레 해놓고 떠났다 아입니꺼.” 그 옆엔 누렁이가 묻힌 무덤과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누렁이(1967~2008)’ 할아버지 최고의 친구이자, 최신의 농기구, 최고급 자가용인 누렁이가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코뚜레와 워낭을 내려놓고 편히 쉬고 있을는지. 일터에서 할아버지 댁까지는 약 1km 정도. 소처럼 느릿하게 걸어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에 자리한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서니 영화 속 정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이른 새벽 허연 김을 뿜어내며 쇠죽을 끓이던 솥이며, 여기저기 쌓여 있는 나뭇짐 그리고 아담한 외양간 들이 묻혀 있던 기억을 속속 끄집어낸다. 외양간에는 아까 그 젊은 누렁이가 긴 혀로 여물을 먹고 있다. 가끔씩 녀석의 턱에 매달린 워낭이 딸그랑 소리를 냈다. 그 워낭소리가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청아하게 마당에 울린다. 어쩌면 변한 것은 없는지도 몰랐다. 우직한 일소들은 하나같이 똑 닮아서 크고 깊은 눈망울에 덤덤하고 천진한 입매를 하고 있다. 그 믿음직한 얼굴과 몸짓이란. 할아버지를 부탁해! 1 거북바위와 연못 그리고 가지런한 돌다리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는 청암정 2 충재 종택은 고향 할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다. 소풍을 나온 아이들도 할머니 댁에라도 온 듯 마음껏 재잘거린다 3 계곡에 바짝 다가선 석천정사는 자연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옛 사람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4 향기로운 전통차를 음미하며 청량산의 풍광까지 감상할 수 있는 안심당은 청량사의 명물이다 5 청량산의 하늘다리는 보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그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쾌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금닭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할아버지와 누렁이를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석천정사石泉精舍’이다. 내성천의 지류인 석천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울울창창한 숲길을 지나 멋스러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너르게 흐르던 물길은 좁아지며 콸콸콸 시원한 물소리를 내고, 그 물길만큼이나 수려한 석천정사가 자연 속에 폭 파묻힌 채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석천정사는 16세기 중반 충재 권벌의 장남인 청암 권동보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것이다. 정사를 정자와 구분할 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의 유무를 따진다는데, 그래서인지 꽤 규모가 크다.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계곡에 바짝 붙어선 모습은 자연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옛 사람들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정사에 올라서면 계곡과 바위와 숲이 온통 ‘내 것’인 듯 유유자적한 풍경이 펼쳐진다. 석천정사에서 더 상류로 올라가니 갑작스레 숲이 잦아들고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그 너머로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충재 권벌이 조선시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리를 잡기 시작해 안동 권씨의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내앞마을 그리고 이곳 ‘닭실마을’까지를 영남의 4대 길지로 꼽는단다.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넉넉한 논과 밭이 이어지다간 깨끗한 물길이 마을을 감싸고 흘러간다. 마을 이름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금계포란金鷄抱卵에서 따온 것이다. 세월을 살짝 비껴간 듯한 마을은 고향의 냄새로 가득하다. 명절 때면 5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닭실마을의 한과를 만드는 손길이 분주하고, 우뚝한 솟을대문을 자랑하는 충재 종택에는 안동 권씨의 일가친척들이 모여 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할 터이다. 가지런한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억 속의 할머니가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처럼 정감 그득한 마을이다. 닭실마을 동쪽에 자리한 ‘청암정靑巖亭’은 마을 산책의 즐거움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거북이 모양의 넓적하고 거대한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그 주위를 둥글게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 정자를 등에 진 거북이가 연못 위를 노니는 형상이랄까. 연못을 건너 정자로 넘어가는 약 6m의 돌다리도 멋스럽기 그지없는데, 우리나라의 직선으로 된 돌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이라고. 거북바위, 정자, 돌다리, 연못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어딘가 낯익다면 기억을 더듬어 보시라. 특히 청암정의 돌다리는 <동이>와 <바람의 화원>을 비롯해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애틋한 장면이 연출되었으니 꼭 한 번 건너봐야 한다. 원수를 만나는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비껴갈 수 없는 사랑의 외돌다리(?)이니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닭실마을┃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63 문의 054-674-0963 www.darsil.kr 열두 연꽃잎으로 감싸인 청량사 청량산(870m)으로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가파른 길은 ‘청량사淸凉寺’까지 부단히도 이어지며 장딴지를 묵직하게 했다. 사찰의 경내로 진입해서도 마찬가지. 어찌 이런 지형에 사찰을 건립할 생각을 했던 것인지 경이로울 만큼 가람배치가 독특하다. 가파른 산의 경사면에 건물을 올리려니 높다란 석축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여느 산사들보다 더욱 입체적인 가람배치가 형성된 것이다. 이른 아침 산안개가 자욱하게 몰려드는 경내에 서 있자니 주위가 온통 봉우리들로 가득하다. 주봉인 장인봉을 비롯해서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화봉, 향로봉 등 12개 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고, 청량사는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형국이다. 열두 연꽃잎에 감싸인 꽃술이 바로 청량사인 셈이다. 특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5층 석탑에 서면 청량산의 장쾌한 풍경이 펼쳐져 산행의 고단함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원효대사가 663년 창건했다는 청량사에는 그 깊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이곳 청량사에 들렀다고 한다. 약사여래를 모신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이 바로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하며, 사찰 오른편에 자리한 응진전에는 공민왕과 그의 부인인 노국공주의 영정이 걸려 있기도 하다. 또 통일신라 말기의 뛰어난 학자였던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운대와 독서당, 명필 김생이 10년간 은거하며 글을 썼다는 김생굴,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 등이 산 곳곳에서 여행객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청량사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산길을 더듬어 한 30분 정도 오르면 ‘하늘다리’이다. 해발 800m의 높이에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다리는 보는 것만으로 아찔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가장 높은 현수교라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출렁이는 것이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태백산맥 끝자락에 걸린 봉화는 면적의 83%가 산이다. 산과 산들이 중첩을 이루며 하늘 끝으로 멀어져 가고, 그 사이사이 작은 마을들이 들어선 모양새는 아득하고 또 신비롭다. 청량사로 되돌아와서 산을 내려오려는데 어디선가 그윽한 차향이 흘러나온다. 시원한 통유리로 청량산의 정경을 감상하며 솔바람차, 오미자차, 작설차 등 전통차를 음미할 수 있는 찻집이다. 그 이름도 ‘안심당安心堂’이다. 차 한 잔을 시키고 창밖을 바라본다. 문득 영화 <워낭소리>가 떠올랐다. 누렁이가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와 5층 석탑 앞에서 소의 영혼을 위해 기원을 드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마치 워낭소리인 듯 ‘딸랑’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다. 청량산도립공원┃주소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로 255 문의 054-679-6653 mt.bonghwa.go.kr Travel to Bonghwa ▶봉화 찾아가는 길 경상북도 봉화를 찾아가는 관문 도시는 영주, 안동, 영양, 울진, 태백 등지다. 사통발달 길이 통해 있지만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시내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울에서 영주까지 기차(무궁화호)로는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영주와 봉화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 종일 5~1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봉화버스터미널 054-673-4400, 영주여객(시내버스) 054-633-0011 ▶봉화에서 가볼 만한 곳 재래시장의 질펀한 흥겨움‘봉화시장’ 봉화군청에서 철길을 건너면 왁자한 시장골목이 시작된다. 봉화시장은 예로부터 영월, 삼척, 울진, 안동, 예천 등지에서 장을 보러 올 만큼 사람들로 붐벼 ‘들락날락 봉화장’이라는 유행어까지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인 ‘문전성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장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해졌다. 오일장(2, 7일)이 서는 날이면 각설이 공연에 민속품 경매까지 흔히 볼 수 없는 장터 풍경이 펼쳐지니 살 것이 없더라도 눈이 즐겁다. 시장문화사랑방 054-674-2008 이몽룡은 실존인물이다! ‘계서당’ 봉화 읍내에서 내성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몽룡의 생가로 알려진 계서당이 나온다. <춘향전> 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오랜 연구 끝에 이몽룡이 실존 인물이었음을 밝혀낸 것. 이몽룡은 본래 봉화의 성이성이란 사람이었는데, 계서당은 그가 1610년 즈음 건립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이중으로 기단을 올려 높다랗게 지은 사랑채와 오른쪽 끝에 만들어놓은 간이 화장실(?)이 볼거리이다. 주소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그 씁쓸하고 톡 쏘는 맛! ‘오전약수’ 봉화군에는 두내, 다덕, 오전 세 개의 약수터가 유명하다. 그중에서 물야면 오전리에 자리한 오전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기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국 약수대회에서 1등 약수로 선정됐다고도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탄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톡 쏘는 맛이 강하고, 철도 많아 매우 씁쓸한 것이 특징이다.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던 보부상들이 발견했다고 하여 약수터 옆에는 보부상 조각이 서 있기도 하다. ▶봉화의 맛 3선 송이돌솥밥 봉화는 매년 9~10월 즈음에 ‘봉화송이축제’를 개최할 만큼 자연산 송이가 맛난 지역이다. 송이돌솥밥은 얇게 저민 송이를 밥 위에 살짝 얹고 쪄낸 것으로 향긋한 송이의 향이 입 안을 감도는 맛이 일품이다. 봉화읍내의 ‘솔봉이’ 식당이 송이돌솥밥으로 유명하다. 송이돌솥밥 1만5,000원, 송이전골 1만5,000원, 송이구이 4만원.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232-11 문의 054-673-1090 봉성돼지숯불구이 봉화군 봉성면에는 ‘봉성돼지숯불단지’가 형성되어 있어 식사 때가 되면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암퇘지 고기를 소나무 숯불에 구워내는 남다른 향에 사람들이 장보는 것도 잊고 고기를 즐겼다고. ‘상봉숯불식당’도 봉성돼지숯불단지에 자리한 식당 가운데 하나이다. 돼지숯불구이 9,000원, 생삼겹살 1만원. 주소 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363-1 문의 054-672-9783 봉화한약우 봉화는 산악지형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작약, 당귀 등 약초 재배가 활발하다. 이러한 한약재를 첨가한 사료를 먹여 키워낸 한우를 ‘봉화한약우’라 한다. 올레인산을 비롯한 불포화지방산의 함량이 높기로 잘 알려져 있다. 봉화읍내에 자리한 ‘은하숯불회관’도 봉화한약우 전문식당이다. 육회 3만원, 생갈비살 2만원, 소고기버섯전골 1만원.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352-2 문의 054-673-1303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21일 대학로서 ‘시조의 날’ 행사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한분순)는 오는 21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 다목적홀에서 ‘제6회 시조의 날’ 행사를 갖는다. 현대시조의 정체성과 관련한 종장 율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세미나가 눈길을 끈다. 김학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시조의 절주와 종장 운용의 바람직한 방향’을,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성리학적 세계관과 시조미학의 현재적 가능성’을, 시조시인 홍성란이 ‘시인이 본 시조 종장 운용의 문제점’ 등을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다.
  • [열린세상] 우리들의 자화상과 정체성/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열린세상] 우리들의 자화상과 정체성/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요즘 모임에 가 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세상이 너무 삭막해지고 헝클어져서 도대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헷갈린다고 한다. 가정에서는 돈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식은 부모를 해치는 패륜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성추행당하고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는 막장사고가 터진다. 지하철에서 젊은이가 노부부에게 막말로 위협하는 추태를 볼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어떤 일을 하자고 합의하고도 불리해지면 혼자 밥을 짓든 죽을 끓이든 알아서 하라고 발을 빼면서 자기 갈 길로 가버리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는 정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 의견이 수렴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치부한다. 아름다운 인간미를 버리고 슬픈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작금의 이 사태는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일까. 그동안 우리는 삶의 전부를 생계를 유지하는 데 바쳐 왔고 그런 나머지 사람의 도리를 잊어 버렸다. 이 때문에 스스로 정체성을 잃고 본래의 의지, 곧 마음의 동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로 세울 수 없었고, 비록 풍요롭게 살지만 서로 나눌 조그만 인정조차 메말라 버린 흉흉한 사회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 이어지는 이유도 마음이 끊어진 철로 위에 있는 것처럼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이기론(理氣論)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이기론은 우주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존재하는 형태 등을 물질세계로서 기(氣)라고 본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이 목적이나 의식에 의해 일정한 법칙이나 원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정신세계로서 이(理)라고 본다.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로 정신세계에 해당하는 마음자세가 이(理)이며, 육신은 물질의 형태이므로 기(氣)라고 한다. 조선 후기 이기론에 대한 논쟁은 인성교육의 중심을 이와 기 가운데 어디에 둘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다. 이(理)는 사람마다 가진 품성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교육하자는 것으로, 도덕성을 마음의 심성에 두고 접근한다. 반면 기(氣)는 사람의 몸에서 발현되는 본능, 즉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심 등 감정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교육의 중심에 둔다. 이같은 세상의 변화는 이기(理氣)의 상호 균형적인 반복 작용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먹고사는 물질의 문제에 우선적으로 대응하고 적응해 왔기 때문에 따뜻하고 훈훈하며 넉넉한 마음에 의한 사람다운 변화는 마치 배부른 자의 사치처럼 매도하거나 무시돼 왔다. 하고자 하는 목적과 합리적인 과정이 무시되고 단지 결과만을 강조하고 탐닉해온 습관이 사람답게 사는 이치를 버리게 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우주의 주관자답게 사회의 굴절된 단면이 있다면 이(理)의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다시 새로운 긍정의 기(氣)로 시작하여 아름다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정글북’이란 책에서 야생동물에 의해 길러진 늑대소년 ‘모글리’가 동물처럼 행동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실제 1920년 인도의 밀림에서 구출된 2살 아말라와 7살 카말라는 늑대처럼 행동하고 날고기만 먹었고, 2008년 러시아에서 새집에 갇혔다 구출된 반야라딘 소년은 손을 쪼거나 새처럼 날갯짓을 하는 등 새의 습성을 보였다. 외양은 사람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마음이 파괴되어 사람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몸체의 본능만 남아 행동하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해서 이를 모글리 현상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 오직 물질에 혈안이 되어 다투고 있는 우리는 동물처럼 행동하는 모글리 소년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이 사회가 마음의 윤리가 말라 버린 상태라면 물질의 풍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모두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 서로를 아껴주지 못한다면 더없이 우울하고 파괴적인 다툼만이 가득한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저자와 차 한 잔] ‘궁궐장식’ 펴낸 허균 민예미술연구소장

    [저자와 차 한 잔] ‘궁궐장식’ 펴낸 허균 민예미술연구소장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눈앞의 형상만을 볼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과 뜻을 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문화재를 대할 때 외형만의 천착과 표피적 바라보기에 치우치기 십상이다. 최근 책 ‘궁궐장식-조선왕조의 이상과 위엄을 상징하다’(돌베개 펴냄)를 낸 허균(64)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은 그런 측면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발로 뛰어 전국 문화재의 속살을 알기 쉽게 드러내 보이는 문화재 길라잡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흔치 않은 인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편수연구원,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감정위원·심사평가위원을 지낸 그의 전공은 한국미술사(홍익대 대학원)다. 전공 때문인지 그는 전문가들로부터 “주제넘게 문화재의 영역을 침범하느냐.”는 지적을 숱하게 받았단다. 그가 펴낸 책들을 보면 그가 지향하는 바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사찰장식-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전통 문양’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한국의 누와 정’ ‘서울의 고궁산책’…. 전문가와 사가들의 질시와 빈정에도 그의 주장은 또렷하다. “어차피 당시대를 살지 못했다면 문화재의 직접적인 기록과 그 언저리에 묻힌 것들을 통해 실체를 밝혀야 합니다. 문화재의 형상을 뛰어넘어 그 배후를 속속들이 알아내려는 연구는 학제와 전공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의 문화재는 유형물이지만 그것을 만들고 그 자리에 있게 한 것은 사람인 만큼 그 사람의 미의식과 철학을 더 깊숙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 궁궐에 담긴 경천애민 정신 새 책 ‘궁궐 장식’을 출간하게 된 배경도 바로 조선 궁궐에 담긴 상징이며 조형물의 숨은 뜻 찾기에 있다. “조선 궁궐은 큰 틀에서 유교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문화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유교 철학·유교 윤리가 몸에 밴 조선 왕이며 사대부들이 궁궐 곳곳에 세우고 가꾼 전각과 장식들엔 유교 양식의 건축물을 뛰어넘는 철학과 미의식이 고스란히 담겼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백성들이 겪는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자며 경복궁 천추전 서쪽 뜰에 세운 흠경각이며 하늘을 관찰하기 위한 창경궁의 관천대, 바람을 읽기 위한 경복궁·창경궁의 풍기대를 단지 건축물로만 볼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경천애민의 정신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경복궁 근정전 주변의 12지상과 사신상은 중국 궁궐에선 찾아볼 수 없는 조형물이고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 펼쳐진 그림인 일월오봉병도 성리학적 배경의 산수풍광이지만 자연의 도(道)를 담은 독특한 우리 전통산수화 양식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재는 선조들의 철학 만나는 매개체 결국 그의 지론은 한군데로 모인다. 역사와 내력도 중요하지만 그 진면목을 밝히고 이해하는 쪽으로 문화재를 보는 안목과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궁궐을 다룬 연구만 하더라도 대부분 건축구조와 기법 중심으로 치우쳐 정작 궁궐에 담긴 상징이며 배후의 진실은 도외시되기 일쑤란다. “문화재는 선조들의 정신·철학과 만나는 결정적인 매개체입니다. 문화재를 통해 선조들의 생활철학과 사고구조, 미의식을 제대로 알아내는 방법이 결국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지름길이죠.”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3) 주자학자 퇴계 이황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3) 주자학자 퇴계 이황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엄격한 숙부 밑에서 수학했으며 기묘사화 등을 경험하면서 사림의 처세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경(敬)의 실천으로 요약되는 그의 일생은 이와 같은 내적·외적 이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퇴계는 이 모든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퇴계는 한 인간이 의지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높고 깊은 인격의 다른 이름이었다. 얼핏 보면 퇴계의 삶은 건조하고 답답하다. 매우 진지하고 실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공부만 해도 그렇다.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공부를 못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로서는, 퇴계의 공부 사랑은 결코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퇴계에게 공부는 일상이었다. 그는 밥 먹듯이 공부했던 사람이 아니라 앉거나 서거나 걷는 것처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공부가 생활이고 놀이이자. 단순히 배움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 퇴계는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다. 퇴계가 정확히 언제부터 주자학에 몰두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주자를 만나면서 퇴계는 인생의 분명한 비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자전서’의 글자가 희미해질 정도로 주자를 읽었다. 그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성현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본받아서, 조용히 찾고 가만히 익히는 것” 이었다. 요컨대 공부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가 보기엔 “바쁘게 말하여 넘기고 그저 예시로 외우기만 하는 것”은 가장 나쁜 독서다. 성현의 말씀과 내 생각이 다르다면 일단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다. 그럴 땐 “성현의 말을 더욱 믿어서 딴 생각이 없도록 간절히 찾아야” 한다. 이 간절함이 퇴계 공부의 요체다. 간절했기에, 퇴계에게 책 속의 글자들은 일상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출렁이며 되살아나야 했다. 퇴계는 책과의 치열한 싸움만큼, 일상의 유연함 속에서 배움을 일궜다. 그렇기에 그의 노력에 엄숙함이나 비장함을 떠올리는 건 사실상 오늘날의 우리가 공부에 대해 갖는 편견의 결과일 뿐이다. 퇴계는 천재라기보단 노력파였다. 천지가 배움으로 가득차 있어 끝없이 질문하는 것에 머물고 싶었던 진솔함. 배움 앞에선 자신을 잊어버리면서까지 까마득히 몰입해 들어가고 또 무얼 배웠는지 따져보지 않으면서도 어느 순간 배움을 이루어내는 성실함. 퇴계는 배움을 ‘즐기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한 경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책과 치열한 싸움·일상의 유연함으로 배움실천 퇴계는 34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사했다. 홀어머니를 생각하라는 주위의 충고가 없었다면 아예 벼슬할 생각조차 접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 벼슬에 뜻이 없었던 까닭에, 그는 곧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사대부로서 출사하는 일 자체가 무용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하고 큰 공부를 원했다. 이후 공직(公職)에서 물러나기 위해 그가 벌인 노력은 처절하리만치 눈물겹다. 번번이 사표는 반려되었고, 사양할수록 더욱 높은 품계와 작위가 되돌아 왔다. 한번 잘못 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렇게 늪처럼 퇴계를 붙잡았다. 완전한 물러남! 퇴로를 찾을 때까진 어떠한 틈도 보이지 말아야 했다. 명종의 눈물겨운 구애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마치 자동응답 기계처럼 사퇴의 이유들을 되풀이했다. 아픕니다, 능력이 부족합니다, 관례에 어긋납니다, 시기가 적절치 않습니다, 집안에 상이 있습니다. 또 아픕니다…. 줄기찬 줄다리기. 급기야 몸이 단 임금의 친필까지 등장했지만, 퇴계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어리석음을 숨기면서 벼슬하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종종 보게 되는 인사청문회는 퇴계 인사 풍경의 네거티브 버전이라 할 만하다. 퇴계를 향한 구애는 명종에서 선조로 이어졌다. 68세의 퇴계는 5개월간 7차례나 관직을 제수하는 선조의 공세에 대해 바른 군주의 몸가짐을 충고하는 여섯 조목(‘무진육조소’)과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열 장의 그림(‘성학십도’)을 올리며 버텼다. ‘제발 성학(聖學)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고, 도덕과 학술로 인심을 밝히시길’(‘무진육조소’), ‘길(道)은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는 법!’(‘성학십도’) 요컨대 답은 이미 자신에게 있으니, ‘부디 나를 찾지 말고, 스스로 답을 구하시라!’ 퇴계에게 공부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 삶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 나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 시선들을 계산하고 챙기느라 바쁜 곳, 그것이 관직의 세계다. 한 마디로 나를 위한 공부(위기지학)의 장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퇴계가 140여회나 계속되는 군주의 청을 거절한 이유였다. 1558년 겨울,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는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昇)의 방문을 받았다. 젊은 고봉은 퇴계의 학설을 비롯해 성리학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몇 달 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생각이)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 보았습니다.” 얼핏 보면 이 문장은 마치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배의 문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것은 퇴계였다. 이에 대한 기대승의 답장. “그렇게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 ●유명한 기대승과 서신 논쟁도 퇴계-고봉의 서신 논쟁이 시작되었다. 고봉은 주자의 글을 배경삼아 따졌고, 퇴계는 주자의 마음을 가지고 응수했다. 논쟁의 핵심은 순수 도덕 감정인 사단(四端)(측은, 수오, 사양, 시비)과 비도덕 감정인 칠정(七情)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理)와 기(氣)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리에 해당하는 사단이 기와 상관없이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주자의 기본 구도에 따르면 이치는 결코 기를 떠나 존재할 수 없었다. 8년에 걸친 논쟁의 결론은 파격적이었다. 퇴계는 결국 ‘이치도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던 것. 퇴계와 고봉의 논쟁은 표면상 ‘고봉의 승리’처럼 보인다. 퇴계가 주자(학)를 이탈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퇴계에게 주자는 세계(우주)였다. 그에게 그 세계 밖은 상상의 외부였다. 그러했기에 퇴계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언설들이 주자의 구도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논쟁의 한복판에서, 기대승의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한 퇴계가 두 차례나 자신의 논지를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고봉이 주자의 논리에 근거했다면, 퇴계에게 중요한 건 주자의 ‘뜻’에 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성인의 길을 묻는다. 주자는 그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그런 길을 정말 우리가 갈 수 있느냐고. 불가능하다고, 너무 이상적이라고. 그런데 퇴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길을 정말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길 위에 서서 걷는 자! 하지만 그 길은 이전의 길이 끝난 길이었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그렇게 퇴계는 주자를 넘어서 버렸다. 주자의 삶을 살고자 한 자, 그래서 주자가 다다르지 못한 길마저 개척한 자. 그럼으로써 주자마저도 새롭게 만든 자. 퇴계는 주자학의 내부에서 주자를 넘어가 버린 유일한 주자학자였다. 문성환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그가 공직임명을 140차례나 거부한 이유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엄격한 숙부 밑에서 수학했으며 기묘사화 등을 경험하면서 사림의 처세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경(敬)의 실천으로 요약되는 그의 일생은 이와 같은 내적·외적 이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퇴계는 이 모든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퇴계는 한 인간이 의지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높고 깊은 인격의 다른 이름이었다.   주자학을 꿰뚫었던 ‘공부의 신’ 선생(퇴계)은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를 구하여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조용히 읽기를 시작하여 한 여름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혹 누가 더위로 몸이 상하지 않을까 경계하면, 선생은 “이 글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하였다.(‘언행록’)    얼핏 보면 퇴계의 삶은 건조하고 답답하다. 매우 진지하고 실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공부만 해도 그렇다.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공부를 못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로서는, 퇴계의 공부 사랑은 결코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퇴계에게 공부는 일상이었다. 그는 밥 먹듯이 공부했던 사람이 아니라 앉거나 서거나 걷는 것처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공부가 생활이고 놀이인 자. 단순히 배움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 퇴계는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다.  퇴계가 정확히 언제부터 주자학에 몰두하게 되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주자를 만나면서 퇴계는 인생의 분명한 비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자전서’의 글자가 희미해질 정도로 주자를 읽었다. 그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성현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본받아서, 조용히 찾고 가만히 익히”는 것이었다. 요컨대 공부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가 보기엔 “바쁘게 말하여 넘기고 그저 예시로 외우기만 하는 것”은 가장 나쁜 독서다. 성현의 말씀과 내 생각이 다르다면 일단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다. 그럴 땐 “성현의 말을 더욱 믿어서 딴 생각이 없도록 간절히 찾”아야 한다.  이 간절함이 퇴계 공부의 요체다. 간절했기에, 퇴계에게 책 속의 글자들은 일상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출렁이며 되살아나야 했다. 퇴계는 책과의 치열한 싸움만큼, 일상의 유연함 속에서 배움을 일궜다. 그렇기에 그의 노력에 엄숙함이나 비장함을 떠올리는 건 사실상 오늘날의 우리가 공부에 대해 갖는 편견의 결과일 뿐이다.  퇴계는 천재라기보단 노력파였다. 천지가 배움으로 가득차 있어 끝없이 질문하는 것에 머물고 싶었던 진솔함. 배움 앞에선 자신을 잊어버리면서까지 까마득히 몰입해 들어가고 또 무얼 배웠는지 따져보지 않으면서도 어느 순간 배움을 이루어내는 성실함. 퇴계는 배움을 ‘즐기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한 경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군주의 100여차례 관직 요청을 퇴짜놓다  퇴계는 34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사했다. 홀어머니를 생각하라는 주위의 충고가 없었다면 아예 벼슬할 생각조차 접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 벼슬에 뜻이 없었던 까닭에, 그는 곧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사대부로서 출사하는 일 자체가 무용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하고 큰 공부를 원했다.  이후 공직(公職)에서 물러나기 위해 그가 벌인 노력은 처절하리만치 눈물겹다. 번번이 사표는 반려되었고, 사양할수록 더욱 높은 품계와 작위가 되돌아 왔다. 한 번 잘못 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렇게 늪처럼 퇴계를 붙잡았다.  완전한 물러남! 퇴로를 찾을 때까진 어떠한 틈도 보이지 말아야 했다. 명종의 눈물겨운 구애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마치 자동응답 기계처럼 사퇴의 이유들을 되풀이했다. 아픕니다, 능력이 부족합니다, 관례에 어긋납니다, 시기가 적절치 않습니다, 집안에 상이 있습니다. 또 아픕니다. 줄기찬 줄다리기.  급기야 몸이 단 임금의 친필까지 등장했지만, 퇴계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어리석음을 숨기면서 벼슬하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이쯤되면 우리가 종종 보게 되는 인사청문회는 퇴계 인사 풍경의 네가티브 버전이라 할 만하다.  퇴계를 향한 구애는 명종에서 선조로 이어졌다. 68세의 퇴계는 5개월간 7차례나 관직을 제수하는 선조의 공세에 대해 바른 군주의 몸가짐을 충고하는 여섯 조목(‘무진육조소’)과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열 장의 그림(‘성학십도’)을 올리며 버텼다.  ‘제발 성학(聖學)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고, 도덕과 학술로 인심을 밝히시길’(‘무진육조소’), ‘길(道)은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는 법!’(‘성학십도’) 요컨대 답은 이미 자신에게 있으니, ‘부디 나를 찾지 말고, 스스로 답을 구하시라!’  퇴계에게 공부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 삶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 나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 시선들을 계산하고 챙기느라 바쁜 곳, 그것이 관직의 세계다. 한 마디로 나를 위한 공부(위기지학)의 장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퇴계가 140여회나 계속되는 군주의 청을 거절한 이유였다.   저 유명한 기대승과의 서신 논쟁  1558년 겨울,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는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昇)의 방문을 받았다. 젊은 고봉은 퇴계의 학설을 비롯해 성리학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몇 달 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생각이)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 보았습니다.” 얼핏 보면 이 문장은 마치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배의 문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것은 퇴계였다. 이에 대한 기대승의 답장. “그렇게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  퇴계-고봉의 서신 논쟁이 시작되었다. 고봉은 주자의 글을 배경삼아 따졌고, 퇴계는 주자의 마음을 가지고 응수했다. 논쟁의 핵심은 순수 도덕 감정인 사단(四端)(측은, 수오, 사양, 시비)과 비도덕 감정인 칠정(七情)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理)와 기(氣)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리에 해당하는 사단이 기와 상관없이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주자의 기본 구도에 따르면 이치는 결코 기를 떠나 존재할 수 없었다.  8년에 걸친 논쟁의 결론은 파격적이었다. 퇴계는 결국 ‘이치도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던 것. 퇴계와 고봉의 논쟁은 표면상 ‘고봉의 승리’처럼 보인다. 퇴계가 주자(학)를 이탈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퇴계에게 주자는 세계(우주)였다. 그에게 그 세계 밖은 상상의 외부였다. 그러했기에 퇴계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언설들이 주자의 구도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논쟁의 한복판에서, 기대승의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한 퇴계가 두 차례나 자신의 논지를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고봉이 주자의 논리에 근거했다면, 퇴계에게 중요한 건 주자의 ‘뜻’에 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성인의 길을 묻는다. 주자는 그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그런 길을 정말 우리가 갈 수 있느냐고. 불가능하다고, 너무 이상적이라고. 그런데 퇴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길을 정말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길 위에 서서 걷는 자! 하지만 그 길은 이전의 길이 끝난 길이었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그렇게 퇴계는 주자를 넘어서버렸다. 주자의 삶을 살고자 한 자, 그래서 주자가 다다르지 못한 길마저 개척한자. 그럼으로써 주자마저도 새롭게 만든 자. 퇴계는 주자학의 내부에서 주자를 넘어가 버린 유일한 주자학자였다.  문성환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박명재 세상 추임새] 다시 최명길을 생각한다

    [박명재 세상 추임새] 다시 최명길을 생각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은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이었다.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참화가 있었지만 비교의 차원을 초월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금이 직접 세자와 문무백관을 이끌고 적장인 청 태종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고 수차례 절을 올리고, 청을 종주국으로 섬길 것을 맹약하고, 왕의 장남·차남·비빈·대신과 그 부인 등 200여명이 인질로 잡혀 갔다. 또한 청군이 철군하면서 약탈과 폭행은 물론 부녀자를 비롯한 무려 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참상이요, 민족적 대굴욕이었다. 이 참혹한 국난의 와중에 최명길(崔鳴吉)이라는 주역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이조판서로서 나라의 절망적 상황을 직시하고 위기에 빠진 왕과 백성을 구하고 역사의 단절을 막기 위하여 구국과 치국의 방편으로 화친이라는 실리를 택해 비록 굴욕적이지만 수차례 적진을 오가며 끝내 화의를 이끌어낸다. 당시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작성할 때 예조판서 김상헌(尙憲)이 세 차례나 문서를 찢으며, 종묘사직을 욕되게 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군주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불충한 역적이라고 맹비난하며 최명길의 목을 베라고 외쳐댔다. 성리학이 주조를 이루었던 사대부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명분과 논리였다. 최명길은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끝내 청과 화친을 이끌어낸다. 뒷날 두 사람은 청나라에서 다 같은 포로 신세로 조우하여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으나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라고 화해한다. 요즈음 우리사회에 과거에 보지 못했던 국가적 과제와 정책 현안에 대한 갖가지 갈등과 혼란이 증폭되고 표출되어 어지럽기 짝이 없다. 세종시와 4대강 문제는 이미 정부정책으로 확정되어 시행되고 있지만, 초과이익공유제를 둘러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 신공항 건설 및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둘러싼 지역 간 갈등, 반값 등록금·무상 급식·부자 감세 철회 등 친서민 정책에 대한 여야·당내 갈등, 천안함과 연평도 피격으로 고착된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보수와 진보진영의 갈등, 이동통신 요금 및 기름값 인하 등과 관련한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 등 무엇이 정부정책의 목표와 방향인지, 어떤 정책방향이 옳고 바람직한지 쉽게 가늠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어떤 정부정책이 만고불변의 진리이거나 영원히 추구해야 할 국가적 이념과 가치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정부정책은 국가를 어떤 목적하에 어느 방향으로 조타해 나가야 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과 함께 이 시대 인류가 추구하고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보편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정책의 당위성과 방법론에 대한 정책논쟁과 대결이 이뤄져야 한다. 당은 당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지역은 지역대로, 자기 입맛, 자기 생각, 자기 이익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 무조건 이념 색깔 덧씌우기, 무조건 변절로 몰아치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양상이다. 최명길을 이 시 점에서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분과 실리라는 이분적 잣대가 아니라 그의 행동과 주장에는 구국과 역사의 지속이라는 절대적 명제와 치열한 결단이 있었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정부정책의 주장과 논의 뒤에 절대적 기준과 판단이 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 대한민국 역사 발전이어야 한다. 그러나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작금의 정책 발상과 추진·논쟁이 국민의 눈에는 오로지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표심 잡기를 위한 포퓰리즘 정책의 극치로 비쳐지고 있다. 도무지 정책의 진성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도, 지금 정부도, 미래 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정자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시대를 생각한다고 한다. 진정한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 준엄한 역사의식과 치열한 시대정신을 가지고 선거에 흔들리지 않는 정책으로 역사 발전과 국가선진화를 이룩하기를 갈망한다. CHA의과학대 총장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0) 남해 난곡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0) 남해 난곡사 느티나무

    봄바람에 실려 온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먼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마치 조상 모시듯 정성으로 보호하는 나무’라며 할아버지 댁이 있는 시골의 정자나무를 소개한 제자의 편지다. ‘송글송글’이라는 유쾌한 이름의 여(女)제자는 편지에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가 잘될지 아닐지까지도 나무를 보고 짐작한다.”며 나무가 농사를 비롯한 모든 살림을 관장하는 큰 어른 같은 대상이라고 했다. 송양은 여러 각도에서 손수 촬영한 사진까지 첨부했다. 나무가 있는 곳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은진 송씨 집성촌인 경남 남해군 난음리 난음마을이다. ●女제자가 보낸 편지 속의 느티나무 송양이 편지에서 그려낸 것처럼 느티나무는 마을 앞의 너른 논을 거느리는 듯한 마을 수호목의 융융한 위용을 가졌다. 나무의 풍광을 더 근사하게 하는 건 나무 곁에 서 있는 ‘난곡사’라는 한 채의 아담한 사당 건물이다. 난곡사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유학자 백이정(1247∼132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 유림들이 세운 사당이다. 난곡사와 느티나무, 그리고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녘은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난음마을이 정신과 물질 모두의 풍요를 누리는 아름다운 마을임을 짐작게 한다. 송양은 편지에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의 잎이 예쁘게 잘 돋아나면 풍년이 들고, 잎이 잘 나지 않으면 흉년이 들 것”을 예측한다고 썼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뤄진 믿음이겠지만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느티나무에 잎이 나는 계절은 농사를 시작하는 때다. 곡물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이 즈음의 날씨는 한 해 농사를 쥐락펴락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느티나무의 잎이 무성하게 돋아난다는 건 곡식의 씨앗이 뿌리를 튼튼하게 내릴 수 있을 만큼 날씨가 좋다는 이야기다. 풍년을 예감할 수 있는 기미다. 그래서 이 같은 이야기는 난음마을뿐 아니라 큰 나무가 서 있는 농촌 마을에서라면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내내 나무를 바라보며 그 그늘 아래서 산다고 해도 되지요. 농사일이 바빠지면 모두 저 나무 앞에 모여들지요. 한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선답니다.” 마침 느티나무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나무 전체에 푸른 잎이 골고루 돋아나는 느티나무를, 풍년을 예감하듯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젊은 시절 대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송동우(77) 노인이다. ●마을 생활의 중심인 정자나무 농사일과는 무관했을 송양도 마을을 생각할 때마다 맨 먼저 나무가 떠오른다고 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만 가면 사촌 형제들과 나무 곁에 나와서 놀았어요. 나무에 기대어 숨바꼭질도 하고 기어오르기도 했지요.” 마을 어귀는 사람들의 모든 들고 남이 스쳐 지나는 곳이다. 나무는 아침저녁으로 들녘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을을 찾아온 어린 아이까지 긴 세월 내내 모두를 품어 안았다. 느티나무보다 ‘정자나무’로 더 많이 불리는 나무는 얼핏 보아도 난음마을의 중심이자 가장 상쾌한 쉼터임을 알 수 있다. 크고 듬직해서만이 아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 놓은 평상은 여느 마을의 평상과 달리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담겼다. 무성하게 펼친 느티나무 가지를 지붕 삼아 공 들여 지은 정자다. 평상 앞에는 은진 송씨의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흉상이 자존심처럼 꼿꼿하게 세웠다. 얼핏 보아도 이 자리가 마을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대전 인근에 살던 조상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곳곳을 다니다가 여기까지 내려온 거죠. 이곳에 터를 잡은 게 700년은 됩니다.” 송 노인은 느티나무가 마을이 처음 이뤄졌을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나무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군청에서 세운 보호수 표석에는 나무를 650살로 표시했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는 이야기다. 700년이라는 긴 세월은 나무 밑동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성껏 충전재로 메운 커다란 구멍이 나무가 지내 온 긴 세월의 풍상을 짐작하게 한다. 더 안타까운 건 나무 줄기의 윗부분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하릴없이 나무는 더 이상 키를 키우지 못하고 옆으로만 널찍하게 가지를 펼쳤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 편지에서 송양은 “할아버지는 옛날에 이 나무의 뿌리를 타고 개울을 건너서 이웃 마을로 마실 다녔다고 하셨다.”고 썼다. 물론 송양의 할아버지가 타고 넘었다는 나무 뿌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느 느티나무 못지않게 큰 나무를 놓고 누구라도 보탤 수 있는 말이지 싶다. 옛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나무는 무척 크다. 가지는 사방으로 20m쯤 펼쳐져 있고 키는 19m, 가슴 높이에서 잰 줄기 둘레는 6m나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나무는 실제 크기보다 더 커 보인다. 700살 된 느티나무 곁에 20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까닭이다. 마치 한 뿌리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붙어서 자라는 두 그루는 한 그루의 풍성한 나무처럼 보인다. 두 그루의 나무가 가까이에서 자라는 게 생육에 좋을 리 없다. 그러나 700년의 삶이 지어 낸 넉넉한 품은 젊은 나무를 너그러이 품어 안았다. 두 그루가 전혀 다툼 없이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를 이뤘다. 나무를 한참 바라보자니 송양의 편지에 담긴 속뜻이 살아 오르는 듯하다.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마다 맨 앞자리에 떠오르는 나무의 존재감을 되새기면서 송양은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를 짚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슴에 품은 젊은 여제자의 편지에서 느티나무 잎새의 연초록 향기가 알싸하게 차올랐다. 글 사진 남해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문화마당] 외규장각 도서의 대여와 정신의 반환/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외규장각 도서의 대여와 정신의 반환/신동호 시인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가 창고에 던져졌을 때 조선의 왕운도 기울고 있었다. 단지 외규장각이 불타고 도서가 침탈당한 건 아니다. 그때 ‘홍익인간‘이 불타고 예(禮)가 바다를 건너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는 조선의 예를 담기에 비좁고 어두웠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날을 기다렸을까. 500년을 켜켜이 쌓은 나라의 법도와 조선성리학의 정신은 넓고도 견고했으니 갑갑했으리라. 왕은 의궤를 읽고 또 읽으며 백성을 생각하고 예를 다하여야 했다. 왕이 그 지독한 법도를 따를 때 백성들은 비로소 스스로를 반추할 거울이 생기는 법이다. 잊었으리라. 남대문은 불탔다. 2008년이었다. 나라 전체가 화(火)에 휩싸였다. 예고된 일이었다. 가속이 붙은 물질만능을 제어할 브레이크 장치가 부족했다. 투기와 개발이 미화되었고, 미덕과 가난은 천대받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약게 살라.’고 가르쳤다. 그저 생활전선에서 싸워야 했던 아버지는 대화를 잃었고 가정교육에 소홀했다.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지도자가 선거에 당선되었다. 부덕이 부덕을 낳았다. 모두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선(善)이 있었지만 행할 기회가 없었다. 양보는 거듭될수록 무능으로 낙인찍혔다. 끼어드는 차량을 향해 욕을 내뱉는 자신을 발견하고도 어느새 무감각했다. 윤리를 반추할 거울이 없었으니 국보1호는 불탔다. 우리 현대사에 화를 도닥였던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민주화에 대한 헌신은 권위주의와 부딪치며 화를 다스렸다. 정치가 행하지 못한 윤리를 재야와 민간, 종교에서 대신했다. 장준하·문익환·김수환 등 지금은 잊혀 가는 이름들, 그들로 인해 도덕이 목숨을 부지했다. 가혹한 희생은 화를 잠재우는 과정이었다. 4·19의 김주열, 청계천의 전태일, 5·18의 광주시민 등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개개인 마음속에 불타던 화가 진화됐다. 예측할 수 없는, 이유 없는, 혹은 잔인한 행동이 도덕과 정의 앞에 무릎 꿇었던 시절이었다. 미덕이 칭송받고 양보와 희생에 예를 다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이 동양을 배우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자본주의조차 도덕과 정의, 공익을 끌어들인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킨다.’고 말한 애덤 스미스, 그가 윤리학자였다는 것을 새삼 들춰낸다. 그가 주장한 분업과 협업, 공정한 교환과 이윤이 이야기될 때 동양의 도덕과 정의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서양에서 실현되는 듯하다. 우리의 예가 향교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저 멀리 프랑스에서 울고 있는 의궤와 논어집주(주희가 엮은 논어의 주석들)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아주 작은 일들과 초라해 보이는 것들과 소수인 것들에 대한 예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탈한 외규장각 도서 297권 가운데 1차분 75권이 돌아왔다. 145년 만이다. 정확히 말하면 대여되었다. 여전히 우리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으며, 연구를 위한 대여와 전시도 프랑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도서에 담긴 정신까지 대여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부는 아직 돌려받아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환영 행사를 자제하고 있으나 문화재 환수가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은 단지 국가유물의 소유 이전 문제가 아니다. 조선이 꿈꿔온 예의 나라를 되찾는 일이다. 조선은 끊임없이 기록했고 기록을 통해 후대가 그 이상을 되새기길 원했다. 대장금도, 다모도, 조선명탐정도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만났다. 의궤에 소상히 새겨진 왕실과 국가의 예를 통해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것들은 제국주의 침탈로 피폐되었던 세계사의 반성이며 다가올 시대의 공정성이다. 또 개인에게는 선을, 국가는 민간에 신세 졌던 윤리를 비로소 실천할 계기점이다. 이것이 반환받아야 할 우리의 정신이며 오히려 프랑스에 대여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박제가(그림·1750~1805)는 ‘서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서얼은 신분상의 제약과 차별 때문에 실력을 갖추어도 기량과 경륜을 펼치기 어려웠다. “우리를 믿지 않고 소인이라 하니, 무한한 마음속 계책 누구에게 말해 볼까?”라는 고민은 박제가에겐 숙명적인 것이었다. 박제가는 양반이면서 양반이 아닌, 경계인으로서 그 ‘존재성’에 대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패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지당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인습에 저항했다.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을 떼어내고 천하를 응시하여 ‘심지를 열고 이목을 넓히라.’고 외쳤다. ●이덕무 “답습한 시는 가짜 시다” 박제가는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나누는 우정의 향연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시와 글씨와 그림을 연마했다. 박제가에게 친구는 ‘기운을 나누지 않은 동기요, 한 집에 살지 않는 부부’였다. ‘나와는 둘이면서 하나인’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 유금, 백동수와 같은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박제가는 세상의 시와는 다른 시를 거침없이 쓸 수 있었다.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어서 시는 서로 답습할 수 없다네. 답습한 것은 가짜 시라네.”라고 채찍질한 이덕무와 같은 친구가 그의 곁에 있었다. 1700수가 넘는 시 작품엔 박제가와 이 멘토들의 우정의 숨결이 함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제가는 고군분투했다. 틀에 박히고 고루하고 진부한 시와 문장을 혐오하며 나만의 글쓰기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여겨 배웠고, 다음은 당나라 시, 그 다음은 송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시를 배웠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범에 매달리는 글쓰기는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했다. 자기 시대의 현장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만의 글쓰기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 고인의 글쓰기에 다가가는 길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형암선생시집서’·炯菴先生詩集序) 지금-여기 살아 있는 만물 각각의 미묘한 움직임과 그 지극한 경지를 포착하는 것. 이것이 시의 출발이다. 사물에 대한 미세하고도 예리한 관찰은 시인에게는 절대적인 지상과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당대의 문장을 순정한 문체로 되돌리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 부응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자송문’(自訟文)에 어울리지 않게 반성은 하지 않고 항변에 열을 올렸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맛의 문장! 이것은 박제가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글쓰기의 보루였다. 이는 당대의 복고, 혹은 의고문에 저항하는 방식이었으며, 더 나아가 만물의 보편 원리나 질서를 따르는 당대 성리학의 이념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오직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하는 그 시대 ‘권력’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청나라 선진 문물 도입이 부국강병의 길 박제가는 29세 때인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종사관 자격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곳곳에서 맞닥뜨린 청나라의 문명은 실로 눈이 부실만큼 풍요롭고 세련되고 화려했다.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균·이조원·반정균·옹방강·나빙·이정원 등 청나라의 학술부흥운동을 주도한, 명망 있는 지식인들이 일개 조선의 선비와 흉금을 터놓고 학문을 논하자, 그들의 자유로움과 벽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제가는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전환한다. 가난한 조선, 비문명국 조선의 갈 길은 북벌이 아니라 북학이라고. 진정한 오랑캐가 누구인지 먼저 분간하고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를 힘써 배워야 한다고. 박제가는 ‘가난’을 싫어했다. 권력에 아부하기 싫어 ‘차라리’ 가난하게 산 것이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장인 이관원이 검소하게 살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꾸했다.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 박제가에게 ‘안빈낙도’는 자신을 속이는 말이었다. 명분에 매이지 않고 욕망에 솔직했던 박제가.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그는 확신했다. 조선의 빈곤 타파와 갑갑한 습속의 개혁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만 가능함을. 이 때문에 연행을 다녀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한다. 이 책에는 청나라의 수레, 기와, 벽돌, 수차, 화폐, 종이, 의복, 문화예술 등을 적극적으로 배워 조선을 부강한 문명국으로 이끌고 싶다는 박제가의 패기가 넘쳐난다.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북학의’) 가난하고, 학문은 고루하고, 견문은 좁고, 문화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조선. 박제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조선이 풍요롭고 세련된 문명 세계가 되기를, 조선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문화의 향기가 넘쳐나기를. 박제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향기 나는 사회다. 재화의 유통이 활발하고, 사치가 가능하며, 문화적 수준도 상당한 사회. 박제가는 문화예술과 사치품에 관해 논할 때 도덕주의적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은 재화와 물품을 마르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순간 조선의 선비 박제가는 소박하고 질박한 생활을 표상했던 유학적 가치와 완전히 결별한다. 박제가는 더 나아간다. 조선이 빠르게 청나라에 맞서는 문명국이 되려면 언문이 일치되는 중국어(북경어)를 사용하잔다. 영어공용론에 맞먹는 상상력이다. 중국어를 제2의 국어로 사용하자는 제안은 실로 급진적이다. 그에게는 조선 땅이 너무 좁았으며 조선의 현실이 너무 답답했다. 문명세계를 향한 박제가의 욕망은 중국어공용론으로 거리낌 없이 내달린다. 이런 정황상 북벌을 절대 이념으로 수호했던 당대 선비들이 이 열혈 북학자에게 당괴(唐魁) 혹은 당벽(唐癖)이라는 비방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무 조숙한 세계주의자… ‘나’를 둘러싼 사회와 세계는 늘 살아 움직이고 변화한다.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여 변화를 보지 못하고 인습적 규범에 갇혀 있다면 그건 진흙 소상을 모방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박제가는 그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비겁하지 않게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 그러나 박제가는 지나치게 조숙한 문명주의자요, 세계주의자였다. 북학파 중에 가장 급진적이었고 가장 앞서 나아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명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어쩌면 조선의 ‘현재’와 ‘새로운’ 문명 사이를 조율할 수 있는 천리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비호해주던 정조의 죽음 직후 박제가는 대비 김씨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다. 그는 외롭게 고투했다. 그가 희망한 바, “1000년 뒤에도 1000만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주말 하이라이트]

    ●출발 드림팀 시즌2(KBS2 일요일 오전 10시 35분) 매회 웅장한 스케일과 스릴 넘치는 종합 장애물 5종 경기를 선보이고 있는 ‘출발드림팀2’가 이번에는 드림팀 종합장애물 경기 사상 최초로 남녀선수가 함께 도전하는 커플장애물 6종경기를 펼친다. 우여곡절 끝에 선정된 10팀의 커플 중 과연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커플 왕좌를 차지할 주인공은 어느 팀이 될까. ●학자의 고향(KBS1 일요일 오전 7시 20분) 송시열이 유배되었던 제주도 글씐바위에는 그의 한이 담긴 글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왕조 500년 중 가장 혼란했던 17세기에 살았던 우암 송시열. 그는 당쟁의 중심이자 18세기 조선 성리학의 초석이기도 했다. 그의 유배 흔적이 묻어 있는 그가 은거했던 화양동의 아름다운 절경과 그의 사상, 삶을 들여다본다. ●주말특별기획 드라마 욕망의 불꽃(MBC 토요일 밤 9시 50분) 태진이 있는 별장을 찾아온 나영은 민재를 설득해 데려가려 하지만 민재는 할아버지처럼 살겠다고 거절한다. 밤늦게 다시 태진의 별장으로 찾아온 나영은 어린 날 자신이 보았던 지옥 같은 장면들을 이야기하며 죗값을 치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나영은 태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것이 알고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1990년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던 아동범죄의 피해 아동들. 사건 후 부모 품으로 돌아갔던 그들은 잘 지냈을까. ‘추적 사건과 사람들’에서 방송돼 큰 화제를 모았던 서커스 소녀 심주희양과 아버지가 보험금 때문에 아들 손가락을 잘랐던 사건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현재 모습을 살펴본다. ●사랑을 믿어요(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윤희는 우진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셔츠를 선물로 사지만 우진이 아이들을 야간 업소에서 노래 부르게 한 줄로 착각하고 미사리 공연장까지 쳐들어간다. 우진은 자신을 오해한 윤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윤희는 울음을 터트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한편 승우는 혜진의 재능과 일에 대한 기회들을 하나씩 마련해 준다. ●반짝반짝 빛나는(MBC 일요일 밤 8시 40분) 정원은 금란에게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자고 말한다. 그런 금란은 평창동 집에 가서 나희와 함께 자신이 살게 될 방을 꾸미고 정원의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지웅처럼 편집일을 배우게 될 거라고 선언한다. 한편 금란은 승준에게 앞으로 연락해도 되느냐고 묻고, 정원은 승준과 함께 있는 금란의 모습을 보게 된다. ●SBS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규모 9.0의 일본 역사상 최악의 대지진이 벌어졌다. 대형 쓰나미와 원전 폭발까지 이어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누군가의 집과 학교와 회사가 사라졌다. 쓰나미가 몰려와 손써 볼 틈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 둔 채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현장을 찾아가 본다.
  • 실학은 성리학과 대립학풍 아닌 연장

    실학은 성리학과 대립학풍 아닌 연장

    조선시대 실학을 둘러싼 논란 포인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기존 성리학과 그렇게 대립적이었느냐 하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설사 그렇게 대립적이었다 해도 어쨌거나 정조 때나 잠깐 반짝하고 만 것 아니냐는 부분이다. 즉, 실학이라는 훌륭한 개혁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했고, 이 때문에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도식이다. 이는 영·정조, 특히 정조 시대를 다루는 연구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데 반해 19세기 조선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르네상스기를 들여다볼 맛이 나지, 망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는 게 즐거울 리는 없다. 반년간지 ‘한국사 시민강좌’ 2011년 상반기 호에 실린 특집 기획 ‘한국 실학연구 80년’은 이런 통념을 뒤집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학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은 늘 있어 왔다. 유학 자체가 노장 사상이나 불교에서 주는 가르침을 허(虛) 혹은 공(空)한 얘기라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언제나 삶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실학’(實學)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모든 유학자는 실학자라는 얘기다. 때문에 특집의 초점은 기존 성리학과 실학을 단절적이 아닌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그렇기에 실학이 정조 때 반짝 돌출했다가 사라진 게 아니라 조선 시대 내내 은은하게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데 맞춰져 있다.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고종 초기 강관(講官) 박규수(1807~1876)의 복권과 연관 있다. 유봉학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실학의 계보와 학풍’이란 글에서 ‘유학:탁상공론, 실학:실제적 학문’이라는 도식을 깨자고 제안한다. “실학은 주자학과 반대되거나 대립되는 학풍이 아니라 그 일각의 특정 학풍을 지칭한 것이고 조선 후기 주자학의 전개 과정과 연동되고 있었다.”는 게 유 교수의 주장이다. 실학의 학문적 뿌리를 추적해보면 결국 서경덕, 조식, 이황, 이이, 성혼 등 16세기 사림파에 맥이 닿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오랜 세월 실학은 성리학의 대척점에 놓였을까. 유 교수는 “일제 강점기 이래 주자학 혹은 성리학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 편견이 실학자들을 ‘정권에서 소외된 재야 지식인’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해외를 바라보는 북학’이란 글을 통해 박규수를 본격적으로 거론한다. 이 위원장은 박규수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손자로 1870년 전후 시기에 고종의 측근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종은 1873년 경복궁 안에 건청궁을 짓고 그 안에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을 나란히 세운다. 이어 청나라에서 수천권의 책들을 들여와 이곳에 갖다 놓았다. 이는 청나라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게 이 위원장의 설명이다. 김명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실학과 개화사상’에서 박규수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김 교수는 “실학 연구자들은 박지원에서 박규수까지 시야를 확대한 적이 없고, 개화사상 연구자들은 박규수에서 박지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했다.”면서 “이런 연구상의 단절이 실학과 개화사상과의 연관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가 주목하는 부분은 박규수의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이다. 서구문명이 압도적이지만 그 과학기술 자체는 중국에서 건너간 문물이니 따서 쓰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서학중원설의 핵심이다. 이는 청나라가 오랑캐이지만 그 문물은 따로 볼 필요가 있다는 박지원의 북학파적 태도와 연결된다. 김 교수는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 박규수의 인맥이다. 고종 즉위 초기에 강관이 된 박규수는 이후 10년 동안 고종의 학문을 지도했다. 최고 권력자의 정치사상적 지도자였던 셈. 그의 제자들은 김윤식(1835~1922), 김홍집(1842~1896), 박영효(1861~1939), 유길준(1856~1914) 등의 개화사상가들이었다. 성리학은 위정척사파(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인 성리학을 수호하고 성리학 외 모든 사상은 배격)로만 치닫는 게 아니라 실학을 매개로 개화사상과도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정조 체제’ 조기붕괴는 정조 탓?

    알려진 것과 달리 성리학적 세계관이 북학파와 개화파를 품고 있을 정도로 유연했다면, 조선이 망한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백성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남는 것은 ‘임금 탓’이다. 성리학 자체도 유연하고 우국충정 가득한 유학자들도 넘쳐났다면, 이를 잘 가려 쓰지 못한 왕의 잘못이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의 ‘정조 사후 63년-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연구’(창비 펴냄)다. 정조의 리더십을 연구했던 저자가 정조 이후 63년간 지속된 세도정치를 분석한 책이다. 박 실장이 보기에 조선의 최후는 이미 정조 시대에 잉태되어 있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박 실장이 거머쥔 키워드는 ‘공론정치’다. 공론정치는 사림의 여론정치로 조선 성리학이 드러나는 형식이기도 하거니와 이 때문에 당쟁으로 격하되기도 하고 붕당으로 부활하기도 한 개념이다. 조선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공론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정조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바로 이 공론정치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박 실장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다. 정조실록을 토대로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고위 공직자에 대한 대간(臺諫·고위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대관과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관을 합쳐 이르는 말)의 탄핵 활동을 통계치로 뽑아봤다. 그 결과 재위 20년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나왔다. 이때를 고비로 매해 7~40회에 이르던 탄핵 건수가 1~5건으로 급격하게 감소한다. 동시에 이 시기 이후 탄핵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0건이 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를 금지시키는 금령(禁令)도 빈번하게 행사됐다. 재위 기간 동안 정조는 모두 163건의 금령을 내렸는데 이 가운데 109건(66%)은 특정 사안에 대한 상소나 언급을 금지하는 등 공론정치에 관련된 내용이다. 널리 알려졌듯 정조는 조선의 개혁을 꿈꿨다. 왕과 백성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사림 세력이라 불리는 중간 세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체계를 수립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때문에 신하들의 목소리를 당쟁에 빠진 목소리라 규정해 국정에서 배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박 실장은 정조 사후 ‘정조 체제’가 그렇게 빨리 무너져 버린 이유를 정조 자신에게서 찾는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것은 결국 “권력 독점 및 부패를 방지하고 정책 아이디어와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조선 왕조의 공론정치 체제가 형해화된 상태에서 견제받지 않은 소수의 외척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1) 글쓰기 ‘프리랜서’ 연암 박지원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1) 글쓰기 ‘프리랜서’ 연암 박지원

    ●두 개의 미스터리 하나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청나라에서 들어오던 명청소품 및 패관잡서에 대해 강경하게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리기 위해서다. 동시에 과거를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문이 실시된다.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고 고문(古文)을 부흥시킨다는 명분 하에 정조와 노론계 문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한 이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이다. 사건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정조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한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온 지 이미 10여년이 지났고, 당시 연암은 개성 근처 연암협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근데, 열하일기가 사건의 배후라고? 웬 뒷북? 아니면 국면전환용 포즈? 둘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 법/ 연암 시를 본 이 몇이나 될까?/ 우담바라 꽃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를 쓸 때라네”-연암 그룹의 일원인 박제가의 시다. 3000년에 한번 핀다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유명하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 그가 웃는다고? 차라리 황하가 맑아지기를 바라는 게 나을 터. 그렇다! 연암은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시가 사대부 교양의 척도였던, 하여 저 이름 없는 향촌의 선비들까지 수백, 수천 수를 남기던 그 시대에 연암은 고작 평생 50수 정도를 남겼을 뿐이다. 대체 왜? ●청년기 - 우울증과 탈주 연암 박지원.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에서 태어났다. 노론 일당독재 시절에 노론 벌열가문에서 태어났고,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는 꿈의 예시까지 받았으니 일단 출생은 고귀했던 셈이다. 초상화로 보건대 거구에다 카리스마 또한 장난이 아니다. 명문가의 천재에게 주어진 코스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뿐. 하지만 연암의 생애는 그 입구에서부터 꼬여버린다. 십대 후반 한창 과거공부에 매진할 즈음,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년 연암은 저잣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분뇨장수, 건달, 이야기꾼 등 수많은 ‘마이너 그룹’과 접속한다. 이들에 대한 ‘톡톡 튀는’ 기록이 처녀작 ‘방경각외전’이다. 우울증과 ‘마이너리그’, 그리고 글쓰기. 이 일련의 체험 속에서 연암은 돌연 과거를 포기한다. 평생 권력의 외부에 남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 또한 미스터리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탈주를 감행케 한 것일까? 흔히들 정쟁의 격화 때문이라 여기지만 과연 그럴지는 미지수다. 만약 그 때문이라면 이 청년의 기질상 오히려 현실참여 의지가 솟구쳐야 더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기본적으로 그는 격식과 관습에 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타고난 천재가 까다로운 격률이 싫다며 한시를 그토록 멀리했으니,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으랴. 말하자면 그는 ‘본 투 비 프리랜서’였던 것. 우울증은 이런 ‘원초적 본능’을 일깨워주기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 아니었을지. ●‘백탑청연’ - 18세기 소셜 네트워크 사대부 문인이 과거를 포기하면 남는 건 시간이다. 연암은 그 시간들을 사유와 글쓰기로 충만하게 채웠다. 더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을 ‘벗’들과 함께했다는 것.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그의 평생의 철학 또한 타고난 기질에 속한다. 문중별, 당파별 강학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연암은 당파와 신분을 가뿐히 뛰어넘는 ‘우정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근거지는 다름 아닌 백탑(탑골 공원). 이덕무, 박제가, 정철조 등 다양한 벗들과 더불어 백탑 근처에 모여 살면서 밤마다 맑고 드높은 지성의 향연을 누렸다. 이름하여 백탑청연! 그들이 주고받은 지식의 스펙트럼은 실로 드넓다. ‘시서예화’는 기본이고, 천문지리에서 기술문명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인생과 우주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그런 점에서 백탑청연은 18세기 지성사의 ‘소셜 네트워크’였던 셈. ‘청 문명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의 이념이 탄생된 것도 거기였고, 소품문과 척독(편지글)을 통해 고문의 기반을 뒤흔드는 문체적 실험이 일어났던 것도 그 장에서였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정판이 바로 열하일기다.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1780년, 연암의 나이 44세,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여행의 기회가 다가왔다.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단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애초 목적지는 연경이었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는 무려 2300리. 때는 바야흐로 폭우에 무더위가 교차하는 한여름이다. 천신만고 끝에 연경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동북부 변방의 피서지, 열하에 가 있었던 것. 그리고 한밤중 당장 열하로 들어오라는 황제의 명령이 도착한다. 이리하여 연암과 그의 일행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고북구 장성을 넘는다. 그것도 ‘무박나흘’의 살인적 여정으로. 이 지독한 고난이 그의 글쓰기 본능을 촉발했던 것일까. 이 여정에서 불후의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5000년래 최고의 문장이라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생사의 문턱을 넘으면서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를 통해 우주의 이치를 터득하는 ‘상기’(象記) 등등.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급력은 실로 뜨거웠다. 당장 태워버려야 한다는 극단적 ‘안티’에서 천고의 기이한 문장이라는 열렬한 찬사까지. 그래서인가. 열하일기는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공적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오직 필사본으로 떠돌면서 수많은 버전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호학군주였던 정조는 충분히 감지했으리라. 고문에서 소품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가 성리학적 지반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그런 점에서 문체반정 때 열하일기를 배후로 지목한 것은 ‘뒷북’도, ‘쇼’도 아니었다. 열하일기 없이 18세기 지성사를 논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음을 왕의 입으로 직접 증언해준 것일 뿐이다. 연암은 묘비명의 대가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누이와 홍대용, 정철조에 대한 묘비명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에 해당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정작 연암 자신에 대한 묘비명은 없다. 이 또한 미스터리다. 안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 아무튼 지금이라도 누군가 그에 대한 묘비명을 쓴다면, 아마도 이 한 줄이면 족하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연암 vs 다산 -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18세기는 별들의 시대였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정조의 시대이자 연암의 시대였고, 또한 다산의 시대였다. 이 화려한 ‘스타워스’에는 아주 놀라운 수수께끼가 하나 숨어 있다. 연암과 다산, 조선 후기 실학사에서 한쌍의 커플처럼 따라다니는 이 두 거성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둘 다 서울 사대문 안에 거주했을뿐더러 정조를 중심으로 늘 양편으로 분립했던 두 파벌(연암그룹/ 다산학파)의 대표주자였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연암의 절친들이 다산과도 깊은 교유를 했었는데도 말이다. 더 놀랍게도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둘은 전혀 상이한 궤적을 밟았다. 연암이 일찌감치 권력의 궤도로부터 이탈해갔다면, 다산은 정반대로 권력의 중심을 향해 달려갔다. 재야 남인 출신임에도 그는 정계에 입문한 이후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왕의 남자’였다. 그 엇갈림이 극단적으로 연출되었던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이다. 보다시피 연암은 배후조종자로 찍힌 반면, 다산은 정조의 입장을 옹호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린다. “국내에 유행되는 것은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 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리라.”는. 요컨대, 그 둘은 평행선이었다.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헤어지지도 않는다!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이 운명적 조우 속에서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된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던가. 어디 친구만 그런가. 적을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실로 인복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을 벗들과의 교유 속에서 살았고, 사후엔 이토록 강력한 라이벌을 짝으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지복은 그가 평생을 권력의 외부에서 글쓰기의 향연을 누렸기에 가능했던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고미숙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조선 고종 어진화가 채용신 작품 엿보기

    조선 고종 어진화가 채용신 작품 엿보기

    조선 시대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로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던 석지 채용신(1850~1941)의 작품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선생의 70주기를 맞아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곽동석)이 다음 달 27일까지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특별전을 연다. 채용신은 무과 출신 관료였으나 그림에 탁월한 재주를 숨기지 못해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많은 인물화들을 남겼다. 그림을 보면 조선시대 전통 인물화의 바탕 위에 서 있으면서도 당대에 도입된 사진술을 많이 응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극세필을 이용해 얼굴에 드러난 주름살 같은 흔적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콧대처럼 도드라진 부분에 흰색을 칠해 빛의 느낌을 주는 기법 등이 그렇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기법을 많이 쓴 것이다. 말년에는 전북 지역에 낙향, 그곳에 숨어든 유학자들을 주로 그렸다. 개화를 반대하는 원흉으로 불리기도 하고 조선 최후의 정통 성리학자라 불리는 전우(1841~1922)의 초상화 등이 이때 남긴 작품들이다. ‘무이구곡도10폭 병풍’ 등 그가 남긴 산수화 등도 엿볼 수 있다. 오는 26일에는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이 ‘석지 채용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주제로 박물관에서 특별강연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1980년대 좌파 다 어디로 갔나

    1980년대 좌파 다 어디로 갔나

    ‘인터뷰-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그린비 펴냄)은 최근 학계 논란이 궁금한 이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소속이던 김항·이혜령 두 필자가 논쟁적 주장을 내놓은 15명의 중견학자들을 찾아가 만난 인터뷰집이다. 인터뷰의 초점은 1991년 사회주의권 붕괴 뒤 20년 동안 한국 인문학이 어떻게 변했나하는 점이다. 쉽게 말해 ‘1980년대 그렇게 넘쳐나던 좌파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다. 때문에 눈길을 끄는 것은 각 학자들의 주장 자체보다 그 주장으로 인도했던 전환점에 대한 얘기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제3세계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한국의 근대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가령, 문단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했던 황종연(동국대)은 한국 좌파의 지적 태도를 ‘농본주의적 사회주의’라 언급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도시화, 산업화 자체를 죄악시하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지목한다. 근대성이 있었기에 민족주의가 가능했다는 지적은 그의 좌표를 알려준다. 이와 관련, 동아시아 담론을 내세우는 백영서(연세대)는 얼마전 타계한 리영희 선생에 대한 기억을 공개했다. 1970년대 감옥에서 만난 김지하에게 중국혁명을 공부하고 싶다 했더니 리영희 선생을 추천해줘 사제지간이 됐다고 한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19 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동양 좌파에 대한 기대감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 비판으로 소련식 전체주의에 실망한 서구 신좌파들은 대체재로 동양의 마오이즘을 추켜세웠고, 한국의 젊은이들도 여기에 영향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1980년대 후반기 주사파로 이어졌다고 본다. 또 임지현(한양대)은 우리가 2차세계대전기 마르크스주의자 하면 떠올리는 인물 가운데 한명인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 “정작 고향 폴란드에서는 로자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전해준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시한 마르크스주의자보다 강성대국을 추진하면서 히틀러와 동맹도 불사했던 피우수트스키를 더 높게 평가한다. 주사파 면전에서 “너희들은 박정희의 사생아”라 언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유명한 이영훈(서울대)은 양극분해론의 입증 실패를 근거로 든다. 중간층이 소멸한다는 양극분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노무현 정권 시절 ‘양극화’ 얘기에 우파 인사들이 알르레기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영훈은 조선 후기를 검증해본 결과 양극분해 대신 전반적인 하향평준화가 나타났고, 결국 조선 후기 도덕경제가 실패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조선 후기 부농이 등장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했다는 식의 자본주의맹아론에 비토를 놓는 이유다. 김철(연세대)의 얘기도 재미있다. 뉴라이트 역사관으로 선전됐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이영훈과 함께 책임편집자로 참여했던 그는 처음으로 그 사태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내가 반박하고 싶은 논문도 있지만, 어떻게 일거에 친일논리로 매도할 수 있느냐.”면서 “식민성의 핵심은 수탈이나 억압이 아니라 상상력의 박탈”이라고 정의한다. 오직 식민지를 미화하느냐 아니냐의 여부만으로 재단해 버리는 세태에 대한 울분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문화계 블로그] 이덕일&백승종

    [문화계 블로그] 이덕일&백승종

    역사학자 이덕일(왼쪽·50)이 다시 논란이다. 그를 둘러싼 논쟁이야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cafe.naver.com/mhdn)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잠시 다른 역사학자 얘기를 해 보자. 최근 ‘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을 펴낸 백승종(오른쪽·54)이다. 이덕일과 백승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알기 쉬운 역사책을 써 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에 관심은 있으나 쉽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존재는 귀하다. 하지만 방법론으로 들어가면 두 사람은 사뭇 다르다. 백승종의 ‘강이천’은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연상시킨다. ‘치즈’는 16세기 이탈리아 농부 메노키오에 대한 종교재판 기록에서 출발한다. 메노키오는 우유에서 치즈가 나오고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기듯이 우주와 삼라만상이 창조됐다고 주장했다. 천지창조와 삼위일체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하찮은 농부를 용납할 수 없었던 기독교는 종교재판 끝에 그를 화형시킨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얘기인데,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가 치즈와 구더기의 비유를 스스로 생각해 냈다고 주장한 점에 주목했다. 당시 농부가 체계적 논증법이나 수사학을 배울 수는 없다. 아마 당대에 떠돌아다니던 민담에다 농사짓던 체험 등을 모조리 섞었으리라.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진술을 통해 그 어느 공식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16세기 유럽 민중사를 들춰 낸다. 백승종도 강이천에 대한 재판 기록 ‘죄인강이천등추안’을 파고들어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개혁 군주인가, 아니면 보수 반동 군주에 불과한가. 조선이 망한 것은 정조의 개혁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정조의 성리학 근본주의가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던 때문은 아닌가. 민속화가 김홍도는 혹시 왕실의 어용화가가 아닌가. 파격적인 주장임에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 때문이다. 다시 이덕일로 돌아가 보자. 그의 핵심 주장은 노론 망국론이다. 노론이 친일파로 이어지고, 이들이 일제 식민사학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일제 식민사학 하수인’ 취급을 받고 가만 있을 사람이 어딨겠는가. “이덕일에게 이를 갈고 있는 학자가 100명은 된다.”는 농담처럼 주류학계는 “노론 망국론은 조선을 부정하기 위해 일제 식민사학이 만들어 낸 것”이라며 따라서 “이덕일이야말로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반격한다. 학계에 논쟁이 많은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려되는 것은 감정적 대립이다. 서로에게 ‘식민사학 후예’ ‘학자인 양하는 장사꾼’이라는 식의 꼬리표 붙이기 말이다. ‘치즈’는 역사서임에도 추리소설처럼 쓰여서 문학과 역사학의 행복한 만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백승종도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사료를 끄집어내 자신이 품은 의문을 독자와 함께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강이천’을 썼다. 이 같은 접근법을 이덕일과 그 반대 진영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이제는 모진 언사로 상대를 깎아내리기보다, 자신은 조금 다른 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는 책으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떨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불온선물세트’ 강이천 ‘개혁군주’ 정조를 궁지에…

    ‘불온선물세트’ 강이천 ‘개혁군주’ 정조를 궁지에…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비’ 강이천이 한 역사학자에 의해 되살아났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백승종 지음, 푸른역사 펴냄)은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 시대에 ‘문화투쟁’을 벌이다 옥중에서 사망한 강이천(1768~1801)을 주인공으로, 조선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다.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등의 책을 쓴 저자 백승종씨는 정감록을 연구하다 강이천을 만나게 된다. 현재 백씨는 충남의 한 시골마을에서 한문고전과 독일어 성경을 가르치며 마을 사람들의 구술생애사를 연구 중이다. 18세기만 해도 천주교는 당시 크게 유행했던 예언서인 ‘정감록’과 밀접한 관계였다. 몇몇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에 담긴 ‘해도진인’(海島眞人·섬에서 진인이라 불리는 영웅이 나와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설)이란 관념을 빌려 갔다. 정감록 신앙집단은 천주교의 말세관에서 왕조 교체의 심층적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다. 일찍이 진사 시험에 합격했고, 소년 시절부터 몇 차례나 정조 앞에 불려 나가 시를 짓기도 했던 강이천은 꽤 유명한 선비였다. 하지만 천주교뿐 아니라 정감록에도 마음을 빼앗겨 결국 정조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꼴이 되고 만다. 흔히 ‘조선 시대의 개혁 군주’라 불리는 정조에 대해 백씨는 “정조처럼 개인적으로 특출한 능력을 갖춘 왕이라면 응당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 성향을 띠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런 믿음은 그릇된 것으로, 정조는 결코 실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정조는 도교와 불교는 물론 새로 도입되기 시작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오직 주자의 사상만을 정학(正學)으로 여겼고 양명학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나온 신간 서적의 수입도 엄금했다. 이른바 ‘패관소품’(요즘의 단편소설이나 수필에 해당하는, 사람이 느낀 감정을 거짓 없이 기록하는 글.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당시 이런 문체를 대표함)의 문체가 조금이라도 묻어 있는 글이면 무조건 과거시험에서 떨어뜨렸다. 이는 조선의 왕들은 보수 성향을 띨 때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게 저자의 분석이다. 조선의 어떤 왕보다 두뇌가 명석했던 정조는 기득권 세력인 양반의 특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국왕의 권위는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 나왔고, 이를 부정하는 북학이나 실학, 천주교와 서양의 새로운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가는 왕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칫하면 목숨조차 건지기 어려웠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정조는 누구보다 보수적인 왕이었다. 하지만 강이천은 조선 사회가 요구하던 성리학 공부에 묻히기를 거부했다. 조선의 지배층이 이단으로 규정한 천주교와 정감록, 패관소품에 관심을 뒀다가 1797년 불길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혹세무민한 죄로 유배를 갔고 정조 사후 이 사건으로 결국 옥중에서 숨진다. 저자는 강이천이 18세기 불온한 분위기를 한몸에 지닌 ‘종합선물세트’였으며 정조를 궁지에 빠뜨린 공상적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한다. 존재 자체가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던 강이천의 말로가 결국 옥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만 65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남명 조식선생 숭모비 건립

    남명 조식선생 숭모비 건립

    경남 하동군은 20일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1501~1572)이 어린시절 머물며 학문을 배웠던 옥종면에 선생의 숭모비를 세워 제막했다. 옥종면 양구 삼거리에 세운 숭모비는 대리석 재질의 3단 기단에 높이 2.4m 넓이 0.8m의 오석으로 제작됐다. 비문에는 선생의 업적과 하동(옥종)과의 관계, 건립 계기와 의의 등을 새겼다. 하동군과 숭모비 건립추진위원회에 따르면 남명 선생은 어릴 때 할머니의 친정이 있는 옥종을 자주 오가며 공부했다. 그 뒤에도 하동지역 섬진강, 악양, 쌍계사, 청학동, 불일암 등지를 유람하는 등 곳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하동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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