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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칼럼] 5·18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손성진 칼럼] 5·18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여학생을 어떻게 했다더라.” “여성의 가슴을 어떻게 했다더라.” 5·18이 있었던 38년 전에는 기자가 아니었다. 대학 신입생, 어린 학생이었다. 시위대를 따라다니면서 이런 소문을 여러 번 들었다. 5월 15일 밤 서울역의 대학 연합 시위 현장에 있었다. 최루탄에 쫓겨 골목 안 작은 식당으로 피신했다. 학생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시민도 없지 않았다. 식당의 중년 신사는 “데모를 왜 하느냐”고 우리를 나무랐다. 흉흉한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어린 학생들’을 몰아세웠다. 유언비어 날조는 계엄령 위반이라고 했다. 눈으로 보지 못한 학생들은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틀 후, 오늘과 같은 날짜인 17일 밤 12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18일 새벽 공수부대가 대학 캠퍼스 안으로 진입했다. 공수부대는 학교 기숙사로도 들이닥쳤다. 잠에 빠진 학생들을 모두 깨워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다. 대검으로 굵은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잘라 마구 폭행했다. 이유 불문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이유 하나였다. 그러면서 유언비어를 왜 퍼뜨리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심하게 다친 학생도 있었다. 군부독재의 폭력성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후 새내기 대학생들은 더는 ‘어린 학생들’이 아니었다. 이런 정도의 폭력이야 5·18의 잔혹한 진압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38년이 흐르는 동안 5·18의 감춰진 크고 작은 진실은 한 꺼풀씩 벗겨졌다. 기숙사 운동장의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이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것도 많다. 특히 성폭력이 그렇다. 피해 여성들은 스스로 쉬쉬하고 살았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앞서 용기를 내지 못했다. ‘5·18 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성폭력은 사실상 소외됐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폭로는 고사하고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끌려간 사실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광복이 되었지만 할머니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50년이 걸렸다. 고 안점순 할머니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성노예 피해를 당하고도 수치심 때문에 떳떳하게 밝힐 수 없었다. 어렵사리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할 때도 가명을 썼다. 대인기피증도 앓았다. 안 할머니가 실명을 되찾고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나서기까지 10년이 걸렸다. 38년 동안 가슴앓이를 했던 5·18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전기가 마련됐다. ‘미투 운동’이다.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10대 여고생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을 앓다가 여승이 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5·18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김선옥(60)씨도 용기를 내는 데 38년이 걸렸다. 그는 체포돼 고문을 받고 석방되기 전날 수사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여학생을 어떻게 했다더라”라는 미확인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순간들이다. 유언비어가 다 유언비어는 아니었다. 국가 권력에 짓밟혀 숨죽이고 살았던 피해자들의 상처는 아직도 곪은 상태다. 이 시점에서 국가가 할 일은 가해자들을 찾아내 법적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이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갖고 산 그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해 주는 길이다. 아르헨티나도 ‘더러운 전쟁’(Dirty War·1976~1983)으로 불리는 군부의 공포정치를 겪었다. 군부는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자행했다. 아르헨티나는 이후 성폭행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인권유린 행위를 대대적으로 수사했다. 공소시효 문제가 걸린다. 해결할 방법은 특별법 제정이나 개정이다. 사망, 상해, 실종 등만 다루는 ‘5·18 진상규명특별법’ 대상에 성폭력도 넣어서 처벌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독일은 1946년 나치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중단하고 나중에는 폐지했다. 프랑스는 나치협력자를 처벌하고자 1964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륜적 범죄’라는 새 개념을 도입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5·18 성폭력’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야 하고 국가는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보호하고 대응책을 제시해야 한다. 국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 [서울포토] 소녀상 우산 씌워주는 학생

    [서울포토] 소녀상 우산 씌워주는 학생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35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학생이 우산으로 소녀상을 씌워주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비 맞으면 안되는데…’

    [서울포토] ‘비 맞으면 안되는데…’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35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학생이 판넬로 소녀상에 맞는 비를 막아주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제1335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서울포토] 제1335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35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구호를외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비 맞은 소녀상 닦아주는 학생

    [서울포토] 비 맞은 소녀상 닦아주는 학생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35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학생이 수건으로 소녀상을 닦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뉴욕 도심에 등장한 ‘끌려감’, 위안부 문제 알린 청년

    뉴욕 도심에 등장한 ‘끌려감’, 위안부 문제 알린 청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모티브로 한 설치물을 뉴욕 도심에 등장시킨 이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박태준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박씨는 해외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알리기 위해 고(故)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인 ‘끌려감’을 모티브로 실물 크기의 설치물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자비로 제작한 이 설치물로 뉴욕 도심에서 게릴라 광고 진행을 했습니다. 박씨는 친구들과 함께한 광고 진행 과정을 지난달 25일 유튜브에 띄웠고, 공개 후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응원을 받고 있습니다. 영상을 보면, 뉴욕 시민들은 그의 설치물에 높은 관심을 보입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이도 있고, 잘못된 역사에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를 질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태준씨는 “전 세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려 더 많은 사람이 남은 생존자들의 편에 설 수 있게 하고 싶었다”며 이벤트 목적을 전했습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추사 김정희(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추사 김정희(1786~1856)를 30여년간 연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재조명한 추사의 일대기. 탄생부터 만년까지 까칠한 천재가 위대한 예술가가 된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림 ‘세한도’와 글씨 ‘침계’ 등 280여점의 컬러 도판이 추사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600쪽. 2만 8000원.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얀 루프 오헤른 지음, 최재인 옮김, 삼천리 펴냄)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 때 일본군으로부터 성학대를 받은 사실을 증언한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 오헤른의 회고록. 평화와 여성 인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가 지난 50년간 가슴속에 담아둔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놓는다. 308쪽. 1만 7000원.요코 씨의 말 1~2권(사노 요코 지음, 기타무라 유카 그림, 김수현 옮김, 민음사 펴냄) 가식 없는 솔직담백한 에세이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일본 작가 사노 요코가 생전에 발표한 작품 중 큰 공감을 얻었던 글을 엄선해 기타무라 유카가 그림을 붙였다. 노년의 일상, 소박한 기쁨, 잃어버린 것에 대한 쓸쓸함 등 가벼운 소재이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들이 묶였다. 각 권 180쪽. 각 권 1만 4000원.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이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 연세대 중국연구원의 전문 연구원인 저자가 천년 고도 시안, ‘삼국지연의’ 낙양으로 잘 알려진 뤄양, 송나라의 카이펑, 중국 시인 소동파의 고장 항저우, 근현대사의 비극이 서린 난징, 중국의 수도 베이징 등 중국 역사의 심장부를 이룬 여섯 도읍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24쪽. 1만 8000원.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이수희 지음, 부키 펴냄) ‘아이 없는 삶’을 비주류 혹은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한국의 가족주의 사회에서 아이 없이 사는 여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다양한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직면하는 일에 당당하게 대처하는 법도 일러준다. 264쪽. 1만 3800원.공감의 언어(정용실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명사 인터뷰와 책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알린 26년차 아나운서 정용실이 공감을 끌어내는 대화와 소통의 가치를 설명한다. 저자는 진정한 호기심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살피는 훈련을 해야 유연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44쪽. 1만 3000원.
  • 베트남 민간인 학살 어렵게 입 뗀 생존자 “참상 알려져서 다행”

    베트남 민간인 학살 어렵게 입 뗀 생존자 “참상 알려져서 다행”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책임 등에 관해 공식 인정하라.”지난 22일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재판장을 맡은 김영란 전 대법관의 주문 선고에 원고로 참석한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이겼다”며 환호했다. 비록 모의법정이지만 5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과도 같은 기쁨이었다. 당시 시민법정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임재성(38·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는 25일 “시민법정에 생존자들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가해자의 논리로 폭력의 증거로 삼는 건 아닌지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두 분이 손을 꽉 잡고 활짝 웃으며 나와 모든 걱정을 내려놨다”고 설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중심으로 50개 시민단체가 추진한 시민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과 비슷한 모양새를 띠었다. 임 변호사에 따르면 원고가 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1968년 2월 같은 시기 인근 마을에서 비슷한 학살을 겪고 살아났고 이름도 같았다. 마을 주민 74명이 희생된 베트남 꽝남성의 퐁니·퐁넛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58)은 2015년에 이어 두 번째 한국에 왔지만 135명이 사망한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61)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용기를 내는 것부터 한국에 오도록 설득하는 데 꼬박 두 달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하미마을의 응우옌티탄은 한국군의 수류탄 때문에 어머니와 사촌 동생을 잃고 자신도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된 상황을 법정에서 또박또박 밝혔다. 불도저로 마을 전체가 휩쓸려 증거가 남지 않은 하미마을의 학살을 자신이 대표해서 알리게 돼 기쁘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임 변호사 등 민변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계획하고 있다. 1968년 퐁니마을의 진상 조사를 벌이기도 했던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내 다음달 11일 첫 변론이 열린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뉴스클로즈업]“한국 정부, 사과해야” 50년만에 용기 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

    [뉴스클로즈업]“한국 정부, 사과해야” 50년만에 용기 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각 국가배상법 제3조에서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책임 등에 관해 공식 인정하라.” 지난 22일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재판장을 맡은 김영란 전 대법관의 주문 선고에 환호와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비록 모의법정이지만 원고로 참석한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이겼다”며 환호했고, 5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상처를 보듬어준 것처럼 기뻐했다. 1968년 2월, 같은 시기 인근의 마을에서 일어난 비슷한 학살사건의 생존자인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은 시민법정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18일 한국에 왔다.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닌 두 사람이 자신들에게 아픔을 준 나라에 발을 내딛는데, 인천국제공항의 입국장 문이 열리자마자 손을 꼭 잡고 활짝 웃으며 나왔다. 시민법정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임재성(38·변호사시험 4회)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25일 “시민법정에 생존자들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가해자의 논리에서 폭력의 증거로 삼는 것 아닌지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두 분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걱정을 내려놨다”고 설명했다.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마을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58)씨와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61)씨가 이번 시민법정의 원고였다. 퐁니마을의 응우옌티탄씨는 2015년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을 찾았고,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은 베트남에서도 자신의 아픔을 알리는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어서 50년 만에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상처를 꺼내는 용기를 낸 것이었다. 시민법정에 참석하도록 설득하는 데 꼬박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어렵게 낸 결심이어서인지, 25일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국회와 청와대에서 기자회견도 했지만 두 사람이 가장 힘있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곳은 바로 시민법정이었다고 임 변호사는 전하며 “그 분들의 그 많은 고민 속에서 이뤄진 결심이 시민법정 내내 너무 당차보였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중심으로 50개 시민단체가 주최한 시민법정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론화를 위해 추진됐다.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과 같은 양상이지만, 당시 도쿄의 시민법정은 이미 사법부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온 뒤였다.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993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이 나온 이후부터였다. 더 늦기 전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도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변호사들이 모여 국가 손해배상 소송을 계획했다. 과거의 시행착오들을 최대한 줄이고, 생존자들에게 보다 더 진실한 방법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고민하다가 시민법정을 열게 됐다. 일종의 연극과도 같은 모의법정에도 무게감이 달랐다. 재판장인 김영란 전 대법관을 비롯해 이석태 변호사와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재판부로 선정됐는데 “각본이 짜여진 연극이라면, 더구나 내용이 부실하다면 참여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고 한다. “원고 패소 판결을 해도 되느냐”고까지 물었다. 준비위원회에서 만든 소장과 각종 증거, 자료들을 재판부도 매우 꼼꼼히 검토했고 정식 재판을 진행하듯 진지하게 임했다.법복을 입은 재판부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 명의 응우옌티탄씨는 힘있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특히 불도저로 마을 전체가 휩쓸려 학살의 증거가 남지 않은 하미마을의 응우옌티탄씨는 “153명의 희생자들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섰다”며 한국군의 수류탄 때문에 어머니와 사촌동생을 잃고, 자신도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된 당시 상황을 또박 또박 밝혔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내놨다. 그러면서도 “저는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어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저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셔서 제가 용기를 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라며 오히려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도 시민법정에 나와 연대 발언을 하려 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우리는 아직까지 사과를 받지 못했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과를 받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면서 “여러분은 꼭 사과를 받길 바란다”며 두 사람에게 응원의 뜻으로 100만원씩을 건네기도 했다.시민법정을 넘어 실제로 우리 법원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임 변호사는 “재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증거와 자료는 이미 충분히 확보했다”고 자신하면서도 “베트남과의 외교 문제 등 실제 소송으로 이어지기까진 검토할 것이 많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에서는 아직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임 변호사는 “원고 두 분이 진짜로 소송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어 추진할 계획”이라면서 면밀히 검토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라고 강조했다. 1968년 퐁니마을의 진상조사를 벌이기도 했던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내 다음달 11일 첫 변론이 열린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국가 책임”…50년을 기다린 진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국가 책임”…50년을 기다린 진실

    “주문.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제3조에서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 등에 관하여 공식 인정하라. (중략) 피고 대한민국은···.”재판장이 판결 주문을 낭독했습니다. 원고의 소송 청구 취지가 모두 반영된 원고 승소 판결이었습니다. 재판이 끝나자 원고석에 앉아 있던 두 베트남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통역을 통해 승소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오랫동안 굳어있던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턱 아래로 두 손을 모았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21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시민평화법정’(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공개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모의재판은 과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 소송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원고는 ‘퐁니·퐁넛 사건’의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탄(58)과 ‘하미 사건’의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탄(61)이었습니다. 동명이인입니다.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일명 ‘청룡부대’) 예하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이 1968년 2월 12일 오전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해 저지른 학살(74명 사망)로 응우옌티탄(58)은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 동생을 잃었습니다. 당시 자신도 배에 총을 맞았습니다. 또 청룡부대 예하 5대대 26중대 소속 군인들이 1968년 2월 22일 오전 하미 마을로 진입해 일으킨 학살(135명 사망)로 응우옌티탄(61)은 어머니, 남동생, 작은 어머니, 사촌 동생 2명을 잃었습니다. 자신도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 허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 때 입은 상해로 현재까지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재판에 대법관과 국민권익위원장을 지낸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재판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장을 지낸 이석태 변호사, 과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국제여성전범법정’ 남북한 공동 기소단의 검사 역할을 맡았던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재판관으로 참여했습니다. 재판부는 재판 첫날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시민평화법정은 (중략)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민간인 학살이 과연 존재했는지, 만약 존재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심리할 것입니다.” 형사법정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민간인들을 학살한 가해자들의 유무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어 재판부는 “참전군인을 비난하고 그들의 명예를 실추하는 자리가 결코 아닙니다”라면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과거의 불행을 이제부터라도 정직하게 드러내 직시하고, 거기에서 찾게 될 진실을 공유하면서 따뜻한 위로와 함께 온당한 치유책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참전군인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그들의 참된 명예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피고는 ‘대한민국’입니다. 앞서 재판부는 소송 서류들을 법무부에 송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자가 법무부 장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무부에서는 첫 변론기일이 열리기까지 아무런 답변도 없었습니다. 결국 정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변호사들이 정부를 대리하는 ‘역할’을 위해 피고 측 대리인단으로 나서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 진상규명, 공식 사과 등의 책임은 베트남 전쟁(1964년 8월~1975년 4월)이 끝난지 4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피고 측 대리인단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정적인 증거라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 1968년 6월 4일 주월미군사령관에게 보낸 공문을 제시했습니다. 이 공문은 퐁니·퐁넛 사건이 당시 한국군의 적이었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 세력이 저지른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피고 측 대리인단은 하미 사건도 26중대가 학살 가해자라는 객관적 증거가 없고, 당시 하미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많은 관련성이 있었다며 하미 마을 주민들은 보호 의무가 있는 민간인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 등을 내놨습니다.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국방부가 1972년 발간한 공식자료인) ‘파월한국군전사’의 1968년 2월 12일자 퐁니·퐁넛 마을에서의 작전 기록에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세력이 퐁니 마을 수십명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실이나 이에 대해 당시 퐁넛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이 사건 1중대가 즉각 대응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서 “특히 (중략) 베트남 주민 수십명이 집단적으로 살해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기록인 파월한국군전사에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퐁니·퐁넛 사건으로 살해된 마을 주민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세력이거나 그 동조세력이었다는 피고 대한민국의 주장과, 이 사건으로 살해된 마을 주민들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세력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라는 주월한국군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결국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세력이 그 동조세력을 죽였다는 심히 모순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서 “이는 논리칙과 경험칙상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하미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판부는 “(원고가 증거로 제출한 하미 사건 생존 피해자들의 인터뷰 영상 속) 피해자들은 (중략) 이 사건 26중대 소속 한국군인들이 마을에 찾아와 마을 주민들을 여러 곳에 모아놓은 뒤 총격을 가하여 살해하였다는 점을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 바, 진술의 신빙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면서 “또한 베트남 정부에서도 (희생자 명단이 적혀 있는) 위령비를 유적지로 인정함으로서 하미 마을에서 피고에 대한 민간인 학살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 신빙성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피고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전시에도 전투 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국제인권규범을 위반한 점도 문제가 됐습니다. 지난 21일 있었던 당사자 신문 중 일부입니다. “한국군이 총을 쏠 때, 베트남 사람이나 가족 중에 한국군에 대항해서 총을 갖고 있었다든지 칼을 갖고 반격한 사람이 있었나요?” (양현아 재판관) “저희 가족은 (집에서) 나오는 대로 총을 맞았습니다. 저희가 다 이렇게 쓰러져서 누워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이모가 아직도 아이를 안고 있었고 한 한국군인이 집에 불을 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모가 말리려고 했는데, 손 들어서 말리려고 했었는데 옆에서 한국군인이 이모 배를 칼로 찔렀어요.” (퐁니 사건의 응우옌티탄) “저항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당했다는 진술로 보입니다.” (양현아 재판관)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어렵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보이지 않는 적’의 저격 등과 싸워야 했던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피고 측 대리인단의 주장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퐁니·퐁넛 사건에서는 7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는데 (중략) 수십명의 민간인 살해된 사건을 두고 과연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라고 볼 수 있는지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 나아가 피해자의 거의 대부분이 노인, 여성, 어린이들이었고, 심지어 한 살 미만의 영아까지 살해되었으며 이들은 비무장 상태였다는 점까지 감안해 본다면, 퐁니·퐁넛 사건이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된다. (중략) 오히려 의도된 집단 학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미 사건 역시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는데 (중략) 상당수는 아동과 유아였다. 또 이른 아침 하미 마을 주민들을 여러 곳으로 모아놓은 뒤 학살했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그 다음 날 불도저로 시신을 훼손했다. 의도치 않는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이유들을 종합해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선고했습니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제3조에서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 등에 관하여 공식 인정하라. 피고 대한민국에게 1964년~1973년 사이에 베트남 지역에서 피고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가 일어났는지 여부에 관한 진상조사 실시를 권고한다. 피고 대한민국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포함한 피고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모든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에 대한민국 군대가 원고들에게 불법행위를 하였다는 사실 및 (중략) 진상조사 결과를 함께 전시하고, 향후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홍보하는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을 설치할 경우에도 같은 조치를 취하라.” 선고 내용을 들은 응우옌티탄(58)의 말입니다.“제가 너무 기뻐서 지금 온몸이 떨리고 있습니다. 저는 진짜 머나먼 베트남에서 아주 힘들게 이 법정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까 판결 내용 들었을 때 너무 기뻤습니다. 이렇게 기쁜 소식 가지고 이제 베트남에 당당하게 갈 수 있고요. 74명의 희생자들과 살아남은 많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응우옌티탄(61)은 “이번 법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소감을 전했습니다. 물론 이번 재판은 정식 재판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법정에서의 선고가 구속력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일어난 국가범죄이자, 전쟁 중에도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규범을 위반한 전쟁범죄입니다. 원고 측 대리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비록 학살을 행한 주체는 한국군이지만, 학살 사건을 50년 동안 은폐시킨 것에 대한 책임은 우리 공동체 모두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학살의 진실이 망각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호사카 교수 “위안부는 성노예… 日정부 책임져야”

    호사카 교수 “위안부는 성노예… 日정부 책임져야”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노예였습니다.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가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작성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문서 80건을 번역해 그 의미를 분석한 책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을 10일 출간했다. 호사카 교수는 이날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가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나온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과거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일본 정부는 그 범죄성을 우선 인정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40년 10월 11일 다카모리 부대가 작성한 문건 ‘경비구역 내 지방상인의 영업에 관한 규정’을 소개했다. 특수위안업무 규정 내용이 담긴 이 문건에 대해 호사카 교수는 “‘위안소 위안부는 황군(일본군) 100명에 1명꼴’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위안부 1명이 100명의 병사를 상대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며 “위안부들은 병사들의 성적 도구, 성노예였다”고 지적했다. 또 위안부들이 산책할 수 있는 구역을 지정해 신체의 자유를 빼앗았다는 내용도 이 문건에 담겨 있다. 그는 “일본은 신분 증명서를 발행해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척했지만 그 방법은 생략되거나 종군간호사·야전병원 잡역·군식당 종업원 등 군 관계자라는 신분으로 속였다”고 설명했다. 또 “위안부 강제 연행 지역 중 대만, 일본, 남태평양제도 등에 대해서는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아 이번 자료집에서 밝히지 못했다”며 “이 지역에 대해서는 후속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 책 출간 중간 발표회 직후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 등의 협박 메일을 받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별세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별세

    14살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고인, 생전에 증언할 시간 얼마 남지 않은 걸 안타까워 해 위안부 피해자인 안점순 할머니가 별세했다. 향년 90세. 안 할머니 별세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9명으로 줄었다.30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안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구 복사골에서 태어났다. 14살,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인 앳된 소녀는 방앗간 앞으로 나오라는 동네 방송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나갔다가 군인들의 손에 끌려갔다. 소녀는 내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아야 했다. “그놈들은 우리를 짐승처럼 대했지. 인간으로 취급 안 했어. 낮에 밥풀떼기 두 개를 단 장교가 왔더라고, 나를 살피고 가더니 저녁에 긴 칼을 차고 왔어. 요구하는 걸 안 들어준다고 그냥 칼을 빼들고는 죽인다고 했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6집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에 나온 안 할머니의 악몽같은 기억이다. “(군인들이 안 올 때에는) 그냥 엎드려 있거나 앉아서 노다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거지 뭐. 괴롭고 힘드니까. 아직 눈물이 안 말랐기에 지금도 이렇게 눈물이 나지.”광복을 맞은 1945년, 안 할머니는 18살이 되었다. 해방 직후 8개월을 중국 베이징에서 지냈다. 이듬해 톈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안 할머니는 23살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져 대구로 몸을 피해 자리를 잡았다. 1992년 수원으로 이사한 안 할머니는 이듬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평생 홀로 산 할머니는 자식이 없었다. 경기 수원에서 조카 내외와 살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 왔다. 안 할머니는 생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우리는 지금 현재도 시간이 갈수록 그 고통을 이야기할 증언들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사무친 고통과 치욕의 시간을 풀어낼 길이 여전히 부족합니다. 결코 잊어서도 안 되고 잊혀져서도 안 되는 역사를 그들이 말하는 해결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알앤비 거장’ 알 켈리, 미성년자를 성노예로 훈련”

    “’알앤비 거장’ 알 켈리, 미성년자를 성노예로 훈련”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I believe I can fly)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미국의 팝가수이자 알앤비(R&B)의 거장으로 불리는 알 켈리(R.Kelly)가 미성년자를 성 노예로 삼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을 주고 있다.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켈리의 전 여자친구인 키티 존스는 영국 시간으로 28일 BBC3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켈리가 나와 교제할 당시 자신의 애완동물이라며 보여 준 사진에 여성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더욱 충격적인 증언은 켈리가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들을 성 노예로 ‘훈련’ 시켰다는 것이었다. 존스는 “그는 내게 보여 준 사진 속 여성 중 한명의 경우 14살 때부터 ‘훈련을 시켰다’(trained)고 말했다”면서 “사진 속 여성들은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나와 만날 때에도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을 녹화했었다”고 주장했다. 켈리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남성의 증언도 나왔다. 그는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켈리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흥미를 보인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으며, 그는 나에게 보다 어려보이는 여자 아이들을 찾아오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켈리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편 그는 1996년부터 3년간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고 이를 촬영한 혐의로 2002년 기소된 바 있다. 오랜 재판 끝에 시카고 법원은 2008년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2017년 그는 또 다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5명을 애틀랜타에 있는 자택에 감금, 노예로 부린 혐의로 고발당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윤소영 교수 “위안부는 자발적 성매매, 이것이 국제 상식”

    윤소영 교수 “위안부는 자발적 성매매, 이것이 국제 상식”

    윤소영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가 강의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폄훼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23일 아시아경제에 따르면 윤소영 교수는 지난 9일 국제경제학과 1학년 전공필수 과목인 ‘경제학개론1’ 수업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발적인 매매춘이었으며 강제 연행 주장은 날조된 역사로 근거가 없다”면서 “위안부들은 일본군들에게 자발적으로 성을 제공했고, 이것이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에 의하면 윤소영 교수는 몇년 전부터 각종 강의에서 비슷한 주장을 반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소영 교수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반대하는 학생들의 토론 요구를 일축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신대 총학생회와 위안부 문제 관련 동아리 ‘평화나비’ 등이 지난 21일 윤소영 교수와 만나 해명 및 사과를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윤소영 교수는 “발언 취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잘못된 예시를 들은 것 같다”면서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 슬픈 역사이며 비하할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면담도 양측이 만족할 만한 마무리를 맺지 못했다. 윤소영 교수는 유감은 표시했지만 사과는 거부했다. 게다가 면담에 참가한 학생들의 소속 학과를 일일이 묻고, 해당 과 교수들을 비난하는가 하면, 촛불집회를 주도한 젊은 세대를 가리켜 “일진회 같다”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총학생회 측은 지난 18일 공식 성명서를 발표해 윤소영 교수를 비판했다. 총학은 “위안부가 반인간적인 성범죄의 결과라는 것은 한국, 중국, 베트남 등의 당시 식민지 국가들의 여성들이 증언하는 사실이자, 유엔과 국제 사회가 인정한 범죄”라면서 “명예를 훼손당한 (위안부) 피해자들과 반인륜적 역사관을 강요당한 학생들 모두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학계 일각에선 윤소영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이 평소에 피력해 온 ‘성매매=성노동 인정’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고 있다고 아시아경제는 설명했다. 윤소영 교수는 2004년 한 저서에서 ‘성노예’라는 관점을 부정하는 한편, 성 상품화의 현실성 인정·자발적 성매매 여성의 성노동권 보장 등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커버스토리] 女공무원 10명 중 5명 “성추행당했다”… 그런데 왜 조용하지?

    [커버스토리] 女공무원 10명 중 5명 “성추행당했다”… 그런데 왜 조용하지?

    본지 ‘늘공’ 549명 대상 설문조사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듯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라 계속돼 온 여성인권운동의 일부라는 것이다. 실제 미투의 원조격인 고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성노예제 실상을 폭로했다. 1993년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反)성폭력운동이 있었고, 최근엔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성폭력 필리버스터 등이 이어졌다. 지금은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을 폭로하면서, 미투는 문화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확산했다. 미투가 우리 사회 이슈의 블랙홀이 됐지만 어제도 오늘도 무풍지대가 있다. 바로 공직사회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의 성폭행 폭로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지만, 그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어서 정치인에 더 가깝다. ‘늘공’(늘 공무원·직업 관료를 빗댄 말) 세계에서 여전히 미투는 다른 나라의 혁명과도 같다.공직사회가 청렴해서 폭로될 만한 성폭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신문이 국가공무원노동조합과 함께 지난 9일부터 15일까지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성폭행은 분명 존재했다. 여성 공무원 10명 중 6명은 언어적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고, 10명 중 5명은 신체적 성추행까지 당했다고 답했다. 성폭행은 만연했지만, 미투는 언감생심이었다. 공직사회 특유의 폐쇄성과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낙담에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여성 공무원에게 공직 입직 후 상급자나 주위 동료로부터 언어적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1~5회 당했다는 응답이 44.1%였다. 6~10회가 6.6%, 11~20회가 7.2%였다. 수시로 당하고 있다는 응답도 4.8%나 됐다. 응답자의 62.8%가 성희롱을 당했다고 답한 것이다. ‘신체적 성추행’을 당했다는 응답은 46.5%였다. 1~5회가 36.6%, 6~10회가 5.9%, 11~20회가 3.8%였다. 수시로 당하고 있다는 응답도 0.3%였다. ‘신체적 성폭행’(강간 또는 강간미수)을 당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4.9%가 그렇다고 답했다. 1~5회가 4.5%, 6~10회가 0.4%였다.# 84.3% “성폭력 당해도 알리거나 신고 안 해” 한 중앙부처 10년차 여성 공무원 A씨는 “몇년 전 친근감의 표시로 부하 여직원들을 공개적으로 포옹하는 고위직 간부가 있었다”며 “문제는 포옹 도중 그 부분이 느껴졌다는 건데,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없고, 매우 당황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하는 5년차 여성 공무원 B씨는 “공직사회는 다른 민간 기업보다는 성추행 정도는 심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도 “회식 자리나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간부들이 성추행을 했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고 말했다. 실제로 성희롱 등 성폭력을 당했을 때 주위에 알리지 않고, 신고하지도 않은 이들은 84.3%였다. 대부분 혼자서 참으며 조용히 넘어간 셈이다. 주위에 알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는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것’이 34.3%로 가장 많았다. ‘튀면 안 되는 공직사회 특유의 폐쇄적 분위기 때문에’가 21.7%, ‘조직 내 왕따, 인사상 불이익 등 2차 피해가 두려워서’가 15.4%, ‘피해 사실 입증이 어려워서’가 12.6%로 뒤를 이었다. 중앙부처 여성 공무원 C씨는 “예전에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장난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여서 말로 제재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었다”며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최고 보수집단 사회에서 누가 공론화하겠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위 동료로부터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들었다’고 답한 사람은 26.8%에 그쳤다. 동료로부터 피해 사실을 듣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도 많지 않았다. ‘피해 여성 곁에서 문제를 공론화하고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응답은 11.0%였다. ‘피해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을 뿐 그 동료와 얘기를 나눈 적 없다’는 46.6%, ‘이야기만 나누고, 공론화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28.8%였다. 중앙부처 여성 공무원 D씨는 “포옹이나 농담처럼 건네는 말 자체를 성폭력이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보수집단의 최고봉에 있는 공직사회에서 누가 공론화하겠느냐”며 “가까운 직원이 아닌 이상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고, 가해자가 상사인 만큼 더 힘들어질 게 뻔하니까 없던 일처럼 넘기게 됐다”고 회고했다. 공직사회 내에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 참여하겠다고 응답한 이들은 51.0%였다. 참여하겠다고 응답한 중앙부처 여성 공무원 E씨는 “심각한 성추행이 아니더라도 한 번 당하고 나면 수치심이 너무 심해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며 “내 피해를 공론화해야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 것 같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이에 반해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한 지자체 여성 공무원 F씨는 “아무리 피해를 당해도, 인사상 불이익, 주변의 부정적 인식, 소문 등으로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며 “튀는 행동으로 주목받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설문 자체를 거부하는 男공무원도 다수 남성 공무원들은 미투를 어떻게 바라볼까. 응답자의 91.2%가 미투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매우 공감’이 46.9%, ‘대체로 공감’이 44.3%였다. ‘대체로 공감하지 않는다’ 7.5%, ‘매우 공감하지 않는다’ 1.3%였다. 다만, 남성 공무원은 설문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감 이유로는 ‘단 한 사람이라도 피해자가 나와선 안 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48.0%로 가장 많았다. 또 ‘공직사회 내 권위적 문화를 청산해야 하기 때문’이 44.6%였다. 다만 ‘권위에 의한 성폭력이 공직사회 내에 만연하기 때문’이 5.9%, ‘성폭력 피해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 1.0%였다. 공감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선 ‘미투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가 30.0%, ‘공직사회 내엔 권위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가 25%, ‘성폭력 피해를 당한 동료 여성을 본 적 없어서’가 20.0%, ‘여성의 피해 호소가 과장돼 있어서’가 10.0%였다. #男공무원 7.6% “상사에게 나도 당했다” 남성 공무원의 7.6%도 권위에 의한 성폭력을 당한 적 있다고 답했다. 1~5회가 6.3%, 6~10회가 0.9%, 11~20회가 0.5%였다. 이 가운데 11.8%만 주위에 적극적으로 알렸고, 나머지는 알리지 않았다. 알리지 않은 이유로는 ‘유별나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33.3%, ‘공직사회 특유의 폐쇄적 분위기 때문’이 26.7%였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응답한 남성 공무원 G씨는 “성추행을 저지른 직장 상사와 사이가 나빠질까봐 주변에 알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남성 공무원의 96.4%는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될까 하는 불안은 느끼지 않았다. 불안하다고 답한 경우 그 이유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추행을 저질렀을까봐’(중복응답)가 75.0%로 가장 높았고, ‘과거 실수했던 상황들이 떠올라서’와 ‘사내 정치에 악용될까봐’가 각각 12.5%였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설문조사 어떻게 서울신문은 국가공무원노동조합과 함께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일주일간 중앙부처·지방자치단체 공무원 549명을 대상으로 ‘공직사회 미투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 서비스 업체 ‘서베이몽키’를 통해 온라인 설문을 했다. 설문은 공통 질문과 성별 질문으로 구성됐다. 모든 질문에 답한 공무원은 468명이었다. 성별로는 남성 236명(43.5%), 여성 307명(56.5%)이었고, 응답자 평균 나이는 41.5세였다. 기관별로는 중앙부처 392명(72.6%), 지자체 148명(27.4%)이다. 직급별로 보면 7급이 201명(37.0%)으로 가장 많았고, 8급 101명(18.7%), 6급 93명(17.2%), 5급 65명(12.0%), 9급 28명(5.2%), 4급 20명(3.7%), 3급 5명(0.9%) 순이었다. 무기계약직과 임기제는 28명(5.2%)이었다.
  • 亞위안부 “동물 취급했던 日, 제대로 사죄·배상해야”

    亞위안부 “동물 취급했던 日, 제대로 사죄·배상해야”

    “일본군에게 끌려가 강간과 폭행을 당하는 등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런 만행을 사실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합니다.”세계여성의날인 8일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15차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한 중국의 첸리안춘(92)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낮에는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매일 10명이 넘는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며 눈물을 훔쳤다. 중국 하이난 성의 작은 마을에 살던 그는 14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납치됐다. 그는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 아들을 낳았다”며 “마을 사람들은 내 아들을 일본군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일본 정부는 피해자에게 반드시 사죄, 배상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인도네시아의 누라이니(88) 할머니는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13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성 노예 생활을 했다”며 “일본이 패망한 뒤 마을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조차도 부끄럽다며 한탄하셨다”며 울먹였다. 이어 “일본군이 우리에게 한 짓에 대해서 사죄받고 싶다. 나를 짐승처럼 취급했던 일본의 사죄를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도네시아의 자헤랑(87) 할머니는 12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고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는 “나를 동물 취급했던 모든 행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고 싶다”며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원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한 길원옥(90) 할머니는 자신이 평소에 즐겨 부르던 노래 ‘남원의 봄 사건’을 열창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길 할머니는 지난해 생애 첫 음반 ‘길원옥의 평화’를 발표했다.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는 기조발제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은 피해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을 때 비로소 그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면서 “이번 15차 아시아연대회의를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제언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을 제안한다”고 강조했다. 1992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아시아연대회의는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행동을 결의하고, 국제사회를 향한 요구를 발표해 왔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동티모르, 대만, 일본, 미국, 뉴질랜드, 독일 등의 생존자와 활동가들이 참가해 일본군의 만행을 비판했다.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 초등교과서 ‘위안부’ 표현 4년 만에 부활

    초등교과서 ‘위안부’ 표현 4년 만에 부활

    ‘유신체제’는 ‘유신 독재’로 수정 자유민주주의 용어는 그대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위안부’ 표현이 다시 명시됐다. 한·일 합의 직후인 2014년 교과서에서 빠진 이후 4년 만이다.5일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새 학기부터 사용되는 초등 6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목의 사진과 함께 ‘식민지 한국의 여성뿐 아니라 일제가 점령한 지역의 여성들까지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고통을 당했다’는 설명이 실렸다. 이전 교과서에서는 위안부라는 표현은 빠지고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만 표기됐다. 교과서에 실린 사진은 1944년 9월 미군이 중국 윈난성 ‘라모’ 지역에서 찍은 위안부 모습이다. 교육부는 2014년 제작한 6학년용 사회 교과서 실험본에서 ‘위안부’ ‘성노예’라는 표현이 초등학생이 학습하기에 적정하지 않다며 “초등학생 발달 수준을 고려해 기술하되 사진 등은 삭제했다”면서 위안부 표현을 뺐다. 교육부는 이와 관련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수록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해 지난해 말 위안부 표현이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새 교과서에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진 날로 정의했고, 기존에 ‘유신체제’나 ‘유신헌법에 따른 통치’라는 표현도 ‘유신독재’나 ‘독재정치’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최근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시안에서 빠지면서 논란이 됐던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소단원 제목으로 그대로 남았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 30명 총살”…영상기록 최초 공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 30명 총살”…영상기록 최초 공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를 학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상이 최초로 공개됐다.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3·1절 99주년을 기념해 27일 개최한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콘퍼런스에서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을 촬영한 날짜는 텅충 함락 다음 날인 1944년 9월 15일로 함락 당시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 생존한 23명을 제외한 조선인 위안부 대부분은 일본군이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초 분량의 이 영상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인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텅충에서 미·중 연합군이 찍은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후 한꺼번에 버려진 참혹한 모습을 담고 있다. 시신을 매장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중국군 병사가 시신의 양말을 벗기는 장면도 포착됐다. 이는 미·중 연합군의 문서에 “1944년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라고 적힌 내용을 뒷받침하는 영상기록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증언, 기사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학살 현장을 담은 영상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 연구팀은 2016년 발굴한 위안부 학살 현장 사진과 같은 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확인했다. 연구팀은 전쟁 당시 미군 사진부대의 사진·영상 촬영 담당 병사가 2인 1조로 움직였다는 점에 주목해 영상을 추적했다. 사진이 있으니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찍은 영상도 있을 것이라고 보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된 자료를 뒤져 조각조각 끊어진 필름더미 수백 통을 일일이 확인했다.미·중 연합군은 1944년 6월부터 중국-미얀마 접경지대인 윈난성 쑹산과 텅충의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같은 해 9월 7일 쑹산을, 일주일 뒤인 14일엔 텅충을 함락했다.당시 이곳엔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 70∼80명이 있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은 패전이 임박하자 당시 일본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가 쑹산·텅충 주둔 일본군에게 사실상의 ‘옥쇄(강제적 집단자결)’ 명령을 내렸고 이를 거부한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부 민간인과 함께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이런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은 연합군도 인지하고 있었다. 연구팀은 앞서 텅충이 함락되기 직전인 1944년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고 기록한 연합군 정보 문서를 발굴해 공개한 바 있다. 연구팀 소속의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진성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 이후 세계 이곳저곳에서 깊이 묻힌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 자료들이 할머니들의 증언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연구팀의 위안부 자료 발굴을 2016년부터 지원해온 서울시는 “전시에 여성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성적 위안의 도구로 사용하다 학살하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일본은 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사과해야만 반복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영상=유튜브 서울시-서울대 인권센터 제공
  • “일본은 사과하라” 1323번째 수요집회

    “일본은 사과하라” 1323번째 수요집회

    21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청소년들 너머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탈을 쓴 한 참석자가 ‘죄송합니다’라고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쓴 피켓을 목에 건 채 서 있다. 1323차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정부가 10억엔 반환과 화해치유재단 해산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日, 진실 마주하길”… 화폭에 담은 전국 74곳 소녀상

    “日, 진실 마주하길”… 화폭에 담은 전국 74곳 소녀상

    “전국의 소녀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장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소녀상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입니다.”경기 성남시청 공감갤러리에서 ‘소녀, 평화를 외치다’라는 주제로 소녀상 그림 전시회를 열고 있는 김세진(30·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4학년)씨를 1일 만났다. 김씨는 ‘소녀상 농성 대학생 공동행동’ 회원으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 반대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2016년 겨울 ‘촛불’로 뜨거웠던 광화문에서 한 시민이 전국 어디에 몇 개의 소녀상이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었을 때 답을 하지 못해 창피했다며 이를 계기로 소녀상을 그리게 됐다고 한다. 김씨는 전국 74곳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수채화 그리기 작업을 위해 휴학했다. 공사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1000만원에 이르는 비용도 마련했다. 지난해 5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104일간 폭염 속에서 노숙을 해 가며 전국의 소녀상을 찾아 화폭에 담았다. 지역마다 다른 표정과 배경의 소녀상 모습을 따뜻한 색채로 섬세하게 묘사했다. 김씨는 위안부 문제 합의와 관련해 한국 정부의 추가 조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정부에 대해 “일본은 역사와 진실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로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교류가 많아 고통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인 만큼 재협상 요구가 아닌 파기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졸업 후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웹툰 작가가 되고 싶다는 그는 “소녀상을 화폭에 담으면서 일본의 반인륜적 폭력에 희생된 할머니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면서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 투쟁해 오신 할머니들 한 분 한 분이 인권운동가”라고 말했다. 전시장인 공감갤러리에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어머니 손을 잡고 온 어린이도 많았다. 성남여고 2학년 김혜령양은 “그림을 보고 그동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하게 됐다”며 “소녀상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게 됐고 학생으로서 방관만 할 게 아니라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대일초등학교 6학년 황지은양은 “전국에 소녀상이 이렇게 많은 것을 처음 알게 됐다”면서 “관심을 갖고 친구들에게도 전하겠다”고 했다. 글 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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