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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악산은 1박2일! 이벤트는 1석2조!

     더욱 가까워진 강원도를 떠올리며 재미있는 이벤트도 참여하고 푸짐한 경품도 받자. 불우이웃돕기는 훈훈한 ‘덤’이다.  서울춘천고속도로는 춘천에서 동홍천 구간을 개통하며 12월8일까지 기념 이벤트를 진행한다.  이제는 설악산도 1박2일 코스로 다녀올 수 있게 된 것을 이용해 무박, 또는 1박2일로 가능한 강원도의 아름다운 여행지를 추천하면 추첨을 통해 카메라, 네비게이션, 하이패스 등 푸짐한 선물을 제공한다. 이벤트 참여는 서울춘천고속도로 홈페이지(event.schighway.co.kr)에서 하면 된다. 당첨자 발표는 12월 21일에 진행된다.  또 개인 블로그나 카페, 커뮤니티에 강원도의 자랑거리를 올리면 불우이웃돕기에도 동참할 수 있다. 자랑거리를 올린 웹페이지 주소(URL)를 이벤트 게시판에 첨부하면 자동적으로 강원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가 된다. 1회 참여할 때마다 1000원이 기부되며,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기부금은 차곡차곡 쌓인다.
  • 속초 설악모노레일 본격 추진

    강원 속초 설악동 모노레일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된다. 속초시는 16일 시청 상황실에서 사업 시행자로 선정된 ㈜다해인터내셔날과 설악동 모노레일 설치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다해인터내셔날은 설악동 모노레일 사업자로 인정받아 다음달 중 설악동 모노레일사업 추진을 위한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할 예정이다. SPC에는 현재 벽산종합건설(토목 및 건축), 다해인터내셔날·이레E&C(설계), 에이스웨이브텍·한터기술(시스템), 성신산업(차량)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한다. 설악동 모노레일은 설악동 소공원 입구~C지구 야영장의 4.8㎞ 구간에 걸쳐 기존 도로 위에 설치되며 1211억원의 민간자본이 투입된다. 시는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한국철도기술연구원과 관광성수기 만성적인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소음 등 환경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악동 신교통체계 도입 연구용역을 추진했다. 용역 결과 구조물이 슬림하고 자연경관 훼손이 적은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인 모노레일 시스템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어 추진방향을 설정했다. 올해 모노레일 사업 추진을 위해 민간투자업체 2곳에서 제안을 받아 심사를 통해 지난 6월 다해인터내셔날을 우선협상 대상업체로 선정했다. 내년 2월 중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공원계획 변경, 사전환경성 검토, 환경영향평가협의 등 각종 행정절차의 이행과 실시계획을 수립, 오는 2011년 1월 착공해 2012년 12월 완공할 계획이다. 채용생 속초시장은 “설악동 모노레일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사업 시행에 필요한 행정처리와 인허가 절차 이행 등 행정서비스 지원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속초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동해고속도 현남~하조대 구간 27일 개통

    동해고속도로 양양군 현남~하조대 구간이 오는 27일 개통된다. 한국도로공사 강원지역본부는 양양군 현남면 정자리에서 말곡리에 이르는 총연장 15.2㎞ 구간 공사를 마치고 27일부터 차량을 통행시킬 계획이라고 12일 밝혔다. 도공 강원본부는 이 구간에 신공법을 적용해 친환경 고속도로로 건설했다. 동물 이동 육교와 유도 울타리, 생태복원 배수로 등도 설치했다. 2004년 12월 착공해 총사업비 2959억원이 투입된 현남나들목~하조대나들목 구간 개통으로 설악권 관광지 접근성 향상은 물론 연간 216억원의 물류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또 앞으로 동해안 지역의 교통수요 분담과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원주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양식화된 그림을 거부하는 두 작가를 만나다

    양식화된 그림을 거부하는 두 작가를 만나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의 그림은 1950년대의 작품이 1980년대의 후기 작품보다 높이 평가받는다. 당연히 미술시장에서 가격도 초기 작품이 높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올까. 미술가들은 뷔페가 말년에 양식화된 기술로 작품을 기계적으로 그린 탓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사람들은 작품에 익숙해지면 금방 혼이 담긴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을 골라낼 수 있다고 한다.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작가들은 작품활동을 할 때 관람객들은 대부분 작품이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작가들은 그 비슷해 보이는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양식화를 피하고자 노력하면서 일필휘지의 느낌을 강조한 작품들이지만, 그 크기에서는 서로 다른 두 명의 전시가 열린다. ●설원기 초대전 - 새달 6일까지 금호미술관 “양식화된 그림은 싫다.”는 설원기(58) 한국예술종합대 교수는 서울 소격동 금호미술관 전관에서 12월6일까지 초대전을 갖는다.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려온 설 교수의 특징이 이번 전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페인팅 60점, 드로잉 200점을 걸었다. 드로잉도 페인팅도 대체로 20호 안팎이다. 드로잉은 복사지 A4용지 크기의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서 대형 작품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여자의 누드와 꽃 정물, 얼굴 초상화 등이 소재다. 설 교수가 지난해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을 때 그린 드로잉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설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 대신 종이와 마일러 필름(Mylar Film)이라는 미끈거리는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사용해 드로잉과 페인팅을 선보였다. 그는 “붓질의 예민함과 물감의 물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덧칠을 할 경우 그림의 맛과 멋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마일러 필름에 그린 그림도 그러했다. 이를테면 얼굴 선을 몇 번 이어 그렸는지 보이게 되는데, 설 교수는 대체로 일필휘지로 한 번에 인물을 그려냈다. 그림이 그리 크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설 교수는 “나는 내 그림이 커다란 빌딩의 로비에 걸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사람의 눈을 매혹하는 작품에 매력이 없다.”라면서 “서재에 걸리는 그림, 보고 난 다음 생각나서 또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계산하는 성격에 따지기도 좋아하고 술· 담배도 하지 않아 예술가적 기질과 거리가 있다는 설 교수는 원래 법학대학원을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국 위스콘신주의 벨로이트 대학교에서 우연하게 미술분야를 한두 과목 수강한 뒤 3학년 때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20살 무렵이다.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석사를 했다. 어려서부터 화가수업을 받지 않고도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나선 덕분이다. 미술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하나의 수단이자 목적”이었다고 한다. 전시장은 마치 고등학교 미술반처럼 다양한 종류의 그림과 드로잉이 걸려 있고, 열정과 실험정신이 가득한 것 같아 부담이 없다. (02)720-5114. ●김종학 초대전 - 13일부터 가나아트 설악산을 그린 서울대 김종학 전 교수와 구별하도록 ‘젊은 김종학’으로 불린다는 세종대 김종학(56) 교수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13일부터 12월6일까지 초대전을 연다. 가나아트 1~3관까지 전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김 교수는 4년 전 토탈미술관에서 보여줬던 극사실주의적 꽃 작업과 다른, 거칠고 힘찬 드로잉을 커다란 화면에서 보여준다. 전시 제목은 ‘이미지와 기억’. 이번 전시에서 변신을 시도한 김 교수의 캔버스는 흰색 아크릴판. 그 위에 김 교수는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색깔이 더 도드라지는 자동차 도료로 드로잉하듯이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냈다. 붓의 움직임을 동적으로 표현한 이번 작품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를 한 화면에 담아낸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자동차 도료를 페인팅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라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계로 넘어가는 사이에 끼인 세대들의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림의 소재는 꽃이나 사과, 배, 포도 등 ‘별것 아닌 것들’이다. 이 별것 아닌 사물들은 김 교수의 손에서 대형 이미지로 재현돼 관객들을 압도하거나 매혹할 것이다. 이 그림의 원형은 1989년 파리 유학길에서 찾아낸 것이다. 서울대 서양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양식 그림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며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서양에 가자 동양인인 자신이 더 잘 보이고, 동양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질 수 없을 무렵 어느 날 저녁 디저트로 나온 포도를 보면서 그는 ‘득도’를 한다. 그 포도가 수박만 한 크기의 검은색 알맹이로 보인 것이다. 다음날 그는 가로 4m, 세로 3m 크기의 캔버스에 수박 크기의 검은 색 포도 알갱이를 그리고 몹시 흡족해했다. 삶의 열정과 에너지를 포도의 형태에서 발견했다고나 할까. 그 후로 서양 배나, 욕망의 상징 같은 붉은 사과, 한국적 이미지가 숨어 있는 마른오징어 등 별것 아닌 소재를 뻥튀기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관객들이 작품의 이미지를 통해 서양과 동양, 세대와 세대의 차이를 찾고, ‘나는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빌딩의 로비에서 보게 되는데, 워낙 작품 크기가 커서 개인이 소장하기에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크기에서 오는 압도적인 힘, 매력을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02)720-1020.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정읍 내장산 단풍길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정읍 내장산 단풍길

    내장산은 몰려든 인파에 휩쓸려 허둥지둥 단풍 구경하고 돌아서기에 아까운 산이다. 내장(內藏)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안으로 간직한다.’는 뜻이고, 내장사의 옛 이름이 ‘신령을 숨기고 있다.’는 영은사(靈隱寺)이니 예나 지금이나 ‘숨기고 감추어 간직하는’ 뜻만은 변함없다. 산세는 내장 9봉이라 일컫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형으로 안을 둘러싸고 있다. 이처럼 안으로 감춘 산세는 임진왜란 때에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을 지켜낸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정읍의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가 ‘조선왕조실록 825권 830책과 고려사 등의 기타 전적 538책’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낸 것이다. 당시 다른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원적계곡~벽련암길 백미 내장산 산행은 추령에서 시작해 내장 9봉을 종주하는 산길을 으뜸으로 꼽지만, 단풍구경을 하기에는 내장사에서 원적계곡을 거쳐 벽련암까지 작은 원을 그리는 코스가 아주 좋다. 거리는 3.6㎞로 넉넉히 잡아 2시간쯤 걸린다. 산길은 그 유명한 108그루 단풍터널 입구인 내장사 일주문에서 시작한다. 하늘도 땅도 사람들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드는 길에 서면 저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연두색, 초록색, 붉은색, 흰색으로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이 길을 걸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했을까. 어쩌면 사람들의 웃음과 행복을 구경한 단풍나무들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이곳 단풍나무는 100여년 전 내장사 스님들이 깊은 골에 자라는 단풍나무를 캐다가 백팔번뇌를 모두 벗어나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108그루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느리게 걸어 다다른 내장사. 절 마당에 서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방을 둘러보니 내장 9봉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다. 이 자리에 내장산 아홉 봉우리의 정기가 모인다고 한다. 정혜루 앞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원적계곡으로 들어서면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북적거리던 내장사와 달리 사람들이 뜸해서 좋다. 원적암 입구에서 돌계단을 오르면서 왼쪽에 자리한 모과나무를 유심히 봐야 한다. 300살이 넘은 우락부락한 풍치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무줄기에 손가락만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자랐고, 기특하게도 붉은 단풍잎을 매달았다. 원적암을 지나면 600년 묵은 우람한 비자나무가 앞을 막는다. 내장산은 단풍 말고도 남방계 식물과 북방계 식물들이 어우러지기에 생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는 더 이상 북쪽으로 뻗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떼 지어 모여 사는 북방한계 군락지를 형성한다. 이제 길은 평지처럼 순한 산비탈을 타고 돌다가 너덜지대를 만나는데, 이곳을 ‘사랑의 다리’라고 부른다. 연인을 업고 소리 내지 않고 지나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이 얽힌 곳이다. ●벽년수 약수에 목을 축이고 너덜겅을 가만히 밟아보지만 덜컥! 돌 사이에 틈이 있어 소리가 안 날 수 없다. 이곳을 지나면 옛 내장사 자리였다는 벽련암. 암자 뒤로 힘차게 솟은 서래봉 암봉의 기상이 웅혼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내장산의 최고봉은 신선봉(763m)이지만, 그 형세나 기상으로 보아 서래봉(624m)이 주봉 역할을 한다. 암자 마당에서 스님이 건네주는 녹차를 ‘벽련선원’ 현판이 적힌 누각에 올라 조망을 즐기며 마신다. 건너편으로 장군봉에서 연자봉으로 이어진 주릉과 연자봉에서 내려와 전망대가 세워진 문필봉으로 흘러내리는 지릉이 눈에 들어온다. 저 산세를 풍수지리에서는 제비가 모이를 먹이는 형국이라 한다. 문필봉이 제비 머리, 양 날개가 장군봉과 신선봉에 해당한다. 연소(燕巢), 즉 제비둥지에서 새끼가 모이를 받아 먹는 자리가 바로 벽련암이다. 벽련암을 나와 백년수 약수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내려오면 내장사 일주문이다. 여기서 다시 단풍터널을 한동안 서성거린다. 내장산을 한 바퀴 돌아보니 화두처럼 질문 하나가 자라나고 있다. 내장산처럼 내 안에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글ㆍ사진 mtswamp@naver.com ●가는 길과 맛집 자가용은 호남고속도로 정읍 나들목으로 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15분쯤 간다. 대중교통은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정읍행 버스가 오전 6시30분∼오후 11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정읍에서 내장산행 시내버스 171번은 정읍역과 터미널 앞에서 30분 간격. 내장산은 30가지 반찬이 나오는 산채정식이 유명한데, 30년 전통의 한일관(063-538-8981)의 맛이 정평이 나 있다. 정읍 시내의 한정식집 ‘정촌’(063-537-7900)은 1만원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남도 밥상을 만끽할 수 있다. 설악산에서 시작된 단풍은 내장산에서 절정을 맞는다. 우리 땅의 단풍 기상도는 늘 그렇다. 단풍의 남하 속도는 하루 25㎞, 시속 1㎞의 거북이걸음으로 울긋불긋 떼 지어 내려간다. 날이 쌀쌀해지면 단풍의 발걸음은 토끼걸음으로 바뀐다. 그래서 가을은 문득 왔다가 쏜살같이 사라진다. 내장산 단풍 소식이 들릴 무렵 사람들은 불현듯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서둘러 단풍 구경에 나서면서 내장산은 몰려든 사람들로 홍역을 치른다. 내장산이 없었다면 단풍 구경 제대로 못하고 겨울을 맞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 [발언대] 안전한 등산문화가 정착되길/최운규 국립공원관리공단 탐방지원처장

    [발언대] 안전한 등산문화가 정착되길/최운규 국립공원관리공단 탐방지원처장

    늦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등산은 국민들이 가장 즐기는 여가활동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등산을 하는 인구가 1560만명이나 되고 국립공원 방문객도 크게 증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국립공원을 비롯한 전국의 유명산을 찾고 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하면 육체적인 건강과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행복감을 높인다. 그러나 산악지역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올해에도 등산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4월에는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등반 중 매듭이 풀려, 5월에는 설악산에서 술을 마시고 하산하다 추락사했다. 또 6월에는 도봉산 오봉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모자를 잡으려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등산문화가 정착되기를 염원하며 안전 등산수칙을 소개한다. 먼저, 등산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익혀둬야 한다. 안락한 도시생활과 자연 속에서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공단이나 산악단체에서 진행하는 안전 등산교실에 참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히 암반을 오르고 싶다면 암벽 등반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둘째, 지정된 등산로를 이용해야 안전하다. 정규 등산로는 필요한 곳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이용객이 많아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도움 받기가 쉽다. 그러나 관리되지 않는 샛길에서는 이용객이 적어 조난을 당하는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다음으로, 등산 중에 음주는 금물이다. 요즘 산에 가면 반주로 술을 마시는 등산객들이 많은데 술은 균형감각,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심장에 무리를 준다. 무엇보다 산에 오를 때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는 게 중요하다. 산에 오를 때는 잠시 방문하는 손님의 자세로 대한다면 한층 신중해질 것이다. 프로든 초보든 안전수칙을 잘 지켜 더 이상 안타까운 산악사고가 없기를 기대한다. 최운규 국립공원관리공단 탐방지원처장
  • 관세청장 ‘산상대화’ 한라산서 마감

    관세청장 ‘산상대화’ 한라산서 마감

    허용석 관세청장이 최근 무사히 마친 ‘산상대화’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허 청장은 지난해 8월부터 15개월여간 전국의 세관 직원들과 등반을 같이하며 산상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달 31일 제주세관 직원 30여명과 한라산 등반을 마무리할 때까지 설악산 등 전국의 주요 산 23곳을 직원들과 함께 등반했다. 한라산 산행을 마친 허 청장은 “실핏줄같은 현장이 제대로 돌아야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면서 “오늘 전원이 완주한 것처럼 모두 믿고 단결해 나가자.”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이날 제주세관 직원 30여명은 허 청장의 얼굴이 그려진 플래카드를 제작해 완주를 축하했다. 허 청장은 이를 통해 그동안 700여명의 직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중소기업을 방문해 업체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지원대책을 설명하는 등 기업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데도 활용됐다. 허 청장의 산행 원칙은 토요일 오전 8시 시작해 정오에 무조건 끝을 내는 것. 주말 오후시간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부의 한 직원은 “청장과의 산행은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고 소속감과 책임감을 높이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열린세상] 가을, 생의 아름다운 램프/시인 최창일

    [열린세상] 가을, 생의 아름다운 램프/시인 최창일

    가을이 되면 누구나 퇴색한 하나의 은행잎을 만지게 된다.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던 꽃 웃음에 취해 보기도 한다. 먼 해조음에 한사코 씻기는 물새 울음으로 스산한 동굴. 해마다 가슴에 피는 소중한 추억제(追憶祭)의 향불을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이다. 애써 잃어버리며 사는 그 영롱한 벗의 영토가 지금은 마음의 머언 유적지(流謫地)에 저물어 가고 있다. 해변의 모래밭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로만 들어선 모른다. 맨발로 그 모래밭을 밟아 보아야 한다고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糧食)’에서 말했다. 그렇다. 시린 물방울처럼 손바닥에 떨어지는 하나의 현실, 분명 그것은 이 땅의 중년 남성에게는 있다. 그리운 시간의 바다, 그러나 일제히 흔적도 없이 흘러가 버린 자취를 따라 가을이면 곧 안개처럼 피어나는 환상의 원경(遠景)이 있다. 어느덧 청춘의 오후를 서성이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며 어느날 세찬 감동으로 가슴 설레던 바다의 항구와 단발머리 소녀를 생각한다. 수많은 생의 스토리가 다가선다. 평생을 경찰 생활에 헌신한 친구가 명예퇴직을 하였다. 분명 무수히 잠 안 오는 밤을 위하여 창호지에 얼룩지는 한숨과 고독을 곱씹는 요적(寥寂)한 시간 속에 성장하고 해체되고 흘러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설악의 단풍을 향하여 잃어버린 영롱한 시간을 회상하는 시간을 만들자고 했다. 다짐의 약속도 필요 없이 다음날 설악을 향하여 달린다. 최후로 남는 인생의 허무를 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영원히 묻어 둘 수도 있는 소중한 삶의 향기들을 이 가을에 소중하게 꺼내 보자는 취지였다. 젊은 날의 삶은 사실 맹목이었다. 아니 맹목이었던 만큼 순수한 불꽃이었다. 다함없이 출렁이는 파도의 교향악. 결국 한줌 바람 소리만도 못한 허무요, 물 한 방울도 못 미칠 무게로 남는 게 인생이라고도 하지만, 그 때문에 불살라야 했던 영혼의 부피와 충격은 무엇으로 견줄 길이 없다. 우리는 지금 풍요로운 세대를 맞아 자기와 어울리는 색을 찾게 되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장과 스타일 맞는 색상의 옷을 말한다. 사실 중년을 넘긴 이 땅의 주인들은 자기 색을 찾기엔 너무 취약한 시절을 살았다. 적성이 맞지 않아도 주어진 직장에 감지덕지 충성을 다하는 세대였다. 옷이 자신의 품에 맞으면 어울리는 색상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중년 남성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일에 가치를 두었다. 어떤 일에도 그 안에 다양한 가치가 있다. 그 일 가운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하였다. 생은 거부 하지 않고 늘상 깨어 있는 자에게 환희와 축복을 준다. 땅속에 깊숙이 묻어둔 하나의 불씨. 그것이 어느 날 활활거리며 이승의 온갖 것을 태우고 황량한 폐허를 이겨내는 것처럼 우리들의 불씨도 창조를 향한 원점으로 되돌려 어둠에서도 뜨거운 눈망울을 가지는 것이다. 누가 가을을 소멸의 시간이라고 말했는가? 밀레의 만종은 추수의 계절에 나온 명화다. 밀레의 기도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은혜가 되어버렸다. 멀리 가려면 함께 천천히 가라는 말이 맞나 보다. 말하는 사이 설악은 붉은 단풍을 꺼내주며 “당신들의 젊은 날의 심장의 색깔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설악의 종주를 통해 우리는 인생은 삶의 열정이요, 사랑과 관용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누구에게나 통고(痛苦)의 시간은 주어지기 마련이다. 어둠에서 우릴 지킬 때 생의 아름다운 램프는 밝게 빛나는 것이다. 시인 최창일
  • [10·26 30주년] 박상범 전 실장의 인터뷰 전문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인 26일을 사흘 앞둔 박상범 전 대통령 경호실장의 소회였다. 1979년의 ‘10·26’ 당시 경호계장이었던 그는 궁정동 저격 현장의 경호실 관계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말년에 유신헌법을 개정한 뒤 물러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비화를 들려줬다. 즉, “박 대통령이 집권 18년 정도 됐을 때인데 ‘1∼2년 뒤에는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는 얘기였다. 경호 실무자로서 피경호대상을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을 넘어 그의 표현대로 “경제적으로 세계사에서 드문,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 전대통령이 평화적 권력이양까지 일구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배어있는 듯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안 꺼낼려고 했다.”며 서울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하던 그였지만, 본지 취재진이 지난 23일 서울 방배동 민주평통장학재단 그의 사무실을 찾자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의 뒷얘기에서부터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경호 및 남북관계 전문가로서 견해를 담담하게 피력했다. 합기도 등 각종 무술이 도합 10단이 넘는 무골답지않게 담담한 어조였다.  ●‘10·26’ 3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텐데.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30년이 된 요즘에 와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는 학술대회도 열고, 유물·기록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라.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 60년만에 이 만큼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확히 이야기 하면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약 40년만에 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데 최소한 100~150년 걸렸다. 그런걸 보면 당시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강력하게 뒷받침 해줬던 국민의 저력이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해외 나가면 특히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한국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느낀다. 서거 30년이 흘렀지만 매년 개인적으로 현충원을 간다. 그분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최근 국제학술회의에서 진보쪽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다. 한 교수는 김일성 유일체제인 북한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반대 세력을 허용한 박정희의 남한이, 그리고 개방적·국제적 전략을 택한 남한이 폐쇄적 전략을 취한 북한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당시 그 분을 모시고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다녔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인 조선, 제철, 자동차 등이 짧은기간에 상당한 발전을 했다. 과학분야도…. 요즘 두각을 나타내는 군수산업. 그게 그 당시에 기초가 다져지고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가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국내를 다니다 보면 관광지 재정비 한 곳을 많이 보는데 대부분 그 때 시작한 것이다. 그 족적을 보면서 당시의 지도자로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신 때 데모하다가 호주에서 공부한 김형아 호주국립대교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재평가를 하게됐다는 말을 했다. 여러 면에서 박 대통령의 캔두이즘(Candoism)이 큰 기반이 됐다 하더라.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이 국민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그런 신념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라는 신념을 심어준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것들이 경제나 문화쪽에서 보인다. 최근 광화문 세종대왕 좌상이 생겼지만, 그 전에 이순신 장군 동상 세워지고…. 여주의 영릉이나 아산의 충무공 사당도 그 때 다 성역화됐다. 처음에 갔을때는 초라했는데 그분이 성역화시키고, 그게 우리 역사에서 계속 남는 거다. 사석에서 말씀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갖고 계셨다.  ●경호를 하시면서 사선(死線)을 수차례 넘나들으셨겠지만, 그 중에서도 ‘10·26’ 현장이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텐데. 1983년의 아웅산사태 때도 아슬아슬했겠지만.  -경호했던 사람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다만 그 이후에 후배들에게 나와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는 뜻에서 경호 기법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엄청난 연구를 통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소위 경호라는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최소화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10·26’도 봐야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경우라도 경호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사를 접근하고 매사 들어봐야한다.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한다는 건가.  -그렇다. 아웅산 사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경호관계자 중 ‘10·26’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것은 그 때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 후배가 평소에 후덕한 모습을 기억하고 일부러 비껴 쏴서 허벅지와 옆구리를 스치게 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확인사살 과정에서 버클에 맞췄다는 얘기도 있었고.  -제 3자를 통해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고, 중정 직원들도 다 사형당했으니.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중정 직원들도 참 고생 많이 했다. 대통령 경호원과 한 집안 식구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사람들 고생하는거 보고 서로 따듯하게 해서 깊은 우정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사실 정말 안타까웠다. 정말 제가 아끼는 후배들도 있었고 그 중에 저를 참 좋아하는 후배들도 꽤 많았다.  ●정황상으로는 어떤가.  -그 현장이 한 10평 그 정도 밖에 되지않는다. 가운데 직사각형의 막힌 조리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으니까 확인사살은 실수할 리가 없다.  ●군출신 아닌 첫 문민 경호실장을 지냈는데, 박종규, 차지절, 장세동, 안현태, 이현우씨등 군 출신의 여러 경호실장들의 노후는 불행했거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 욕심 탓인지, 아니면 권력의 비정한 생리나 속성 때문인지.  -둘다로 본다. 하나는 권력의 속성 탓이다. 당시 여러 사회적 여건이 그 자리에 그분들이 있을 때 여건이 그런쪽으로 갈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각 개인의 성격에도 (다소) 문제가 있지 않겠나 싶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으로서 그런 행로를 답습하지 않아야겠다는 철학을 정립했을 것 같은데.  -거기서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니 많은 상사들을 모시고 이런저런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확신은 안서지만 내가 만약에 과장자리. 처장자리에 갔을 때 ‘이러이러한 것은 내가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어느 직장이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우선 권위라는건 꼭 필요하지만 배타된 권위는 안된다. 예컨대 정부 각료들 회의 때 경호실장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 안에 근접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팀장도 있기 때문에 굳이 국가 정책 논의하는 그 자리에 경호실장이 꼭 들어가서 앉을 필요가 있느냐. 교육도 참 중요한것 같다. 2년 있는 동안 교육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어차피 경호도 국제화되기 때문에 많은 국빈들이 오고 우리 대통령도 1년에 몇 번씩 해외를 순방하고 그런 시대가 돼서 이제 어학 문제라든가 이런것을 체계적으로 해서 경호원들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1년 코스이지만 해외 유학도 보냈다. 지금은 우리 후배들 보면 아주 상당한 수준에 와있다는 생각이다. 통역 필요없이 업무를 직접 협의할 정도까지 상당한 직원들이 와 있다. 경호실이 예전처럼 권위적이지 않다. 한 때는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직이란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주 순수한 전문 조직으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호라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경호하는것이지 인간 누구를 경호하는것 아니다. 적어도 경호실은 그런 생각을 갖고 전문 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월권 등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알력이 생겨 박 대통령 서거라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는 쪽도 있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이 3선후 유신체제로 가면서 장기집권하는 통에 산업화 이끈 훌륭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불행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저는 계장급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치적이나 정책적인 면 잘 모르지만 다 일리가 있다. 다만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저격된 뒤 차지철 실장이 들어왔을때 사회적 환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차 실장이) 장관들을 배석시킨 채 국기하강식을 한다든가 하는 월권도 저질렀다는데.  -주말마다··· 그랬다. 굉장히 힘들 때가 있었다.  ●차 실장의 다른 독특한 면은.  -차 실장은 그런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금전, 돈 에 대해서 상당히 깨끗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아무것도 남겨놓은 게 없다. 돈에 있어선 깨끗했다.  ●최근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했는데 당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사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때가 (박 대통령 집권) 18년 정도 됐을때인데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좀 앞당겨 실현됐더라도 ‘10·26’ 같은 불행한 일은 없었을텐데.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자료를 폐기했다고 남 전총리가 구체적으로 증언했던데.  -2년 정도 뒤에 하야하려고 생각하셨던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그때 그런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 하실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1994년 있을뻔 했는데, 그 때 경호 관련 협상에서 어느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었나.  -어느 단계에 가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냐면 경호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가 다 끝나고 일주일 뒤에 우리 경호 선발팀들이 들어가게 돼 있었을 때였다. 물론 총기 휴대하고. 제일 문제된 게 위성 통신 문제였다. 그것까지도 다 원만하게 잘 협의가 돼서 일주일 뒤에는 최종적으로 선발팀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게 중지돼 버렸다.  ●그 때 김일성 사망을 예상하는 꿈을 꿨다는 비화가 있던데.  -당시 윤여준씨가 안전기획부 제 3특보였고, (별세한) 엄익준이 북한 국장이었다. 나중에 통일부 장관 지낸 정세현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있었다. 오찬하는데 저한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경호실에서 인원을 정리해줘야겠다는 연락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리를 다 했다. 경호 쪽에서 인원 줄이고…. 오찬이 끝나고 제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정상회담 안될거 같다.’라고 말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경호실장이 그런 이야기 하니 (무슨) 특별한 정보있는줄 알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길래 내가 농담처럼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서 관에 입관하는 꿈을 꿨다.’고 얘기했다. 당시에 정책비서관이 ‘맞으면 도사로 모시겠다.’고 농담으로 말하더라.  ●김영삼 대통령에겐 보고했나.  -안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끝났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일주일 전에 꿈을 꿨다. 새벽 3시쯤 깜짝 놀래서 깼다. 집사람을 깨워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하니 집사람이 ‘절대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라. 경호실장이 그런 말 하면 북한가기 싫어서 이야기 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당시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남북관계 큰 진전 있었을 텐데 김일성주석 답방도 있을 수 있고.  -그렇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의, 한반도의 운명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꿈으로 나타날 정도면 신경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 사상 최초로 북한에 가는 남쪽 정상을 경호 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상당했을 것 같다.  -처음 이뤄지는 일이고 민감한 일이었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실 잠이 안왔다. 현장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여건들이 많았는데,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옥쇄할 수 밖에 없다는 각오까지 했었다.  ●요즘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한다는 보도가 잇다르고 있다. 그런데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문제로 답방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호상 여러가지 가정도 있는데 그쪽도 똑같은 가정을 놓고 검토를 할 것 아니겠는가. 아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전부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니까 힘들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꼭 물리적인 위해가 아니더라도 김 위원장 쪽에선 남쪽 보수단체에서 계란이라도 던지지 않나 이런 것 신경쓰는 거 아닌가.  -그런것도 있고. 예를 들어 근접 경호하는 사람 중에 약간 정신적으로, 순간적으로 문제가 발생돼 총이라도 뽑고 한다면 그건 큰일이 생기는 거다.  ●영화 쉬리의 한 장면 떠오르는데.  -그럴 경우 전쟁터가 되는 거다. 사실 초청한 쪽에선 그런 의도 없더라도…. 그게 젤 위험하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그런 생각 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 몇분 모셨나.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등 다섯분을 모셨다. 김종필 총리 인준이 안되는 바람에 (인수인계가 늦어져) 김대중 대통령 취임 초반 (보훈처장으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다.  ●경호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성품을 가까이서 봤을텐데.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건강하다. 그게 아주 공통되는 거 같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이 있었던 분들 같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은 공과가 있겠지만, 30~40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김영삼 대통령도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보스형 리더십의 소유자인가.  -그렇죠.  ●노태우 대통령은 좀 다르지않나.  -좀 다르다. 최규하 대통령도 그렇고.  ●어느 정부든 할거 없이 대통령 아들 때문에 속썩인 일이 많은데.. (김영삼 대통령 아들인) 현철씨 관련해서 경호실장 하면서 김 대통령에게 직언하자 언짢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런거 보다도…. 김현철씨 같은 분 보면 예의도 바르고 총명하고 그렇다. 대인관계도 좋고.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아버님이 두 번씩 대선에 출마할 때 김영삼 대통령과는 부자간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대선 때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모역할을 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저도 한 2년 현철씨를 접촉했지만 예의바르고 대인관계 좋고 그랬는데, 대통령학에 대한 책도 좀 읽어보고 했지만 집권후 1년, 1년반 지나다 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자꾸 모이게 되지않나. 어떤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본의 아니게 본인 생각과는 전혀 관계 없이 그런 문제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다섯 분 대통령 모시면서 보고 느꼈던 일이고, 김현철씨도 그랬던 듯하다. 그래서 그 당시 대통령께 (박관용 비서실장 등을 포함해) 여러분들이 고언을 드렸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씨와 관련한 에피소드중 기억나는 것은.  -박지만씨가 몇년 전 결혼해서 축복해 주기도 했지만, 그때는 육사를 다녔다. 아주 어릴 때인 1974년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신 뒤로 정신적 어려움이 많았고, 그래서 저항적인 그런 쪽으로 한 때 잠깐 바뀌었던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까 약물도 시작하게 됐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오죽 외롭고 했으면 그랬겠나 하고 이해도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더군다나 비명에 가시지 않았나. 자연사로 가신것도 아니고…. 다행스러운건 지금 새 보금자리 만들어 잘 살고 있고….  ●육 여사 서거후 지만군을 돌보라고 박 대통령이 특별히 밀명 준건 없나.  -그런 건 없고, 그 당시에 지만군이 주말에 나오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외출나와서. 대통령이 찾으니까 차지철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지만이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명동에서 찾아서 데리고 갔던 그런 일도 있고…. 나중에 지만씨가 약물 때문에 보훈병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제가 1997년 초에 보훈처장 할 때였다. 지금은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이루고 애도 갖고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권부 근처에 있었으니 일부 측근들이 엉뚱한 권력을 행사하는것을 보는 등 온갖 인간 군상들을 목격했을 듯한데.  -그런 것들이 대통령의 자제분들이나 가까운 친척 분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역시 사람이 젤 중요하다. 사회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지난 대선에 나온 허경영 후보가 공중부양한다는 농담같은 얘기가 나도는 데 무술의 달인으로서 말하자면 원조 공중부양 전문가라는 소문은 사실인가.  -(손을 내저으며) 에이, 지금은 세월이 흐르니 아픈데도 생기고…. 요즘엔 무술 훈련은 안하고 하루에 한시간 반 정도 집에서 열심히 헬스는 하고 있다. 지금 나이에 무슨 헬스 하냐고, 또 얼마나 오래살라고 그러냐고도 하는데 적어도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야 통일되는 것도 보고, 요즘 G20 그러는데 (한국이) G10 되는 건 보고 죽어야 할것 아니냐는 농담도 한다. 열심히 운동한다. 한 시간 헬스가서 운동하면 기분 좋고 정신도 맑아지고 의욕도 생기고 그렇더라.  ●다친 무릎 때문에 고생한다는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 등산은 하지않는다. 가끔 골프할 때는 보호대 차고 한다.  ●공직 땐 골프 안했는데 입문 1년만에 싱글했다는데.  -1998년 3월 중순까지 보훈처장으로 일했다. 그 직후 집사람과 골프 시작해 6개월 만에 80타 쳤다.  ●경호 전문가지만 민주평통 사무총장, 보훈처장 등 남북관계나 안보전문가로서 식견을 사회에 환원할 복안은.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 많이 한다. 1996년 평통 총장 막바지에 장학재단을 하나 만들었다. 장학재단 일이 다 봉사다. 수익사업 하는것도 아니고.  ●강의 같은 것도 하나.  -강의를 그만둔게 한 3년 됐다.대전 배재대에서 경제학부 학생들이 인간관계론을 강의해달라 해서 2년, 경기대에 경호문제 및 대테러 문제로 석·박사 과정 학생들 한 2년 지도했는데 무척 힘들더라.  ●10·26 사태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  -신문이나 언론을 통해 수없이 많이 보도 됐다. 합동 수사팀들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런 사건을 당했던 사람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더 일들이니까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모르잖아요. 총맞고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공식)기록이 가장 중요하다. 작년에 어느 매체에서 1974년 문세광 사건 재조명한다고 했다. 한 11년동안 음성전문가 동원해서 준비했다는데, 어떤 결론을 내놓고 그쪽으로 몰아가니까.  ●경호원이 육 여사 돌아가시게 했다는 추측성 보도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런 뉘앙스로…. 하도 그래서 내가 한 말이 있다. 총알은 절대 거짓말을 안한다. 탄환이 다 있다. 건물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탄환이 없을리 없잖아요. 총알은 각도가 있다. 그렇게 이해시키려 했는데, 자칫잘못하면 왜곡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10.26 사건도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합동수사팀의 조사결과가 젤 정확하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합동 수사팀에 검찰도 다 들어가고 했기 때문에 숨길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고는 벌어질 수가 없다. 물론 원인도 다들 아시잖아요. 차 실장과 김재규씨하고 인간관계도 있고. (유신정권의)권력독점 문제 등도 있고.  ●호사가들은 미국 CIA가 배후조종했다는 설도 제기하는데요.  -(고개를 저으며)원래 그런 사건에 별별 추측이 다 일어나거든요.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나요.  -그분도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성장하셨던 분이지만,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었죠. 외모를 보면 아주 매섭고, 단구에다가 깡마르고, 눈매도 무섭고. 하지만 인정은 많았죠. 예전에 골프를 가끔 나가시면 추울 때나 더울때나 근무자를 꼭 챙기셨다. 아주 서민적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74년도에 영부인 서거한 뒤에 굉장히 외로워하셨죠. 박근혜씨가 영부인 대행하셨지만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죠. 그러다 보니까 국정에만 몰두해서 74년 이후 쭉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단이나 산업단지 조선소 등이 그 때 건설된 거죠. 창원 신도시에서 창원 공단, 풍산에는 풍산금속 등이 하나하나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70년 초만 해도 우리나라가 철모도 하나 못만들었지요. 철모가 간단한거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총알이 맞아도 튕겨나갈 정도가 돼야하는데 그걸 못만들었으니까. 안면도에는 제 2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로켓을 만들었고 타코마라는 회사가 당시 마산에 있었는데 거기서 잠수함 만들기 시작했지요. 허전함을 그런 일로 푸셨던 듯합니다.  ●말년에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유난히 많이 다녔는가요.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가끔 여행하다 보면 그분의 족적을 볼 수 있다. 지금 관광지인 설악동인가요, 그게 그 당시엔 정말 형편 없었거든요. 그런 걸 그 때 다 정비하는 등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양제철소는 본래 아산에 만들려고 결정됐다가 광양으로 바뀌었죠. 그때 모시고 현장에 갔을 때 중국 쪽에서 바람이 부니까 매연이 내륙으로 들어오고 그러니까 전문가들이 건의하고 그래서 현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럼 광양으로 하자고 결정했던 억들이 납니다  대담 구본영 편집국 수석부국장·정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10·26 30주년]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10·26 30주년]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인 26일을 사흘 앞둔 박상범 전 대통령 경호실장의 소회였다. 1979년 ‘10·26’ 당시 경호계장이었던 그는 궁정동 저격 현장의 경호실 관계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하던 그였지만, 본지 취재진이 지난 23일 서울 방배동 민주평통장학재단 그의 사무실을 찾자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대담:구본영 편집국 수석부국장 →‘10·26’ 3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텐데.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지 30년이 된 요즘에 와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는 학술대회도 열고, 유물·기록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라.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 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 60년 만에 이만큼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약 40년 만에 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 데 최소한 100~150년 걸렸다. →최근 국제학술회의에서 진보쪽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다. 한 교수는 김일성 유일체제인 북한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반대 세력을 허용한 박정희의 남한이, 그리고 개방적·국제적 전략을 택한 남한이 폐쇄적 전략을 취한 북한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당시 그분을 모시고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다녔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인 조선, 제철, 자동차 등이 짧은 기간에 상당한 발전을 했다. 과학분야도…. 요즘 두각을 나타내는 군수산업도 당시에 기초가 다져지고 그랬다. 참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유신 때 데모하다가 호주에서 공부한 김형아 호주국립대교수가 박 대통령을 재평가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여러 면에서 박 대통령의 캔두이즘(Candoism)이 큰 기반이 됐다 하더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이 국민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그런 신념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 라는 신념을 심어준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경호를 하면서 사선(死線)을 수차례 넘나들었다. 그 중 ‘10·26’ 현장이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텐데. -경호했던 사람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다만 그 이후에 후배들에게 나와 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는 뜻에서 경호 기법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엄청난 연구를 통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경호라는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최소화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10·26’도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경우라도 경호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사를 접근하고 들어봐야 한다.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경호실장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1994년 있을 뻔했는데, 그때 경호 관련 협상에서 어느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었나. -경호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가 다 끝나고 일주일 뒤에 우리 경호 선발팀들이 들어가게 돼 있었을 때 김 주석이 사망했다. 총기 휴대하고. 제일 문제된 게 위성 통신 문제였다. 그것까지도 다 원만하게 잘 협의가 돼서 일주일 뒤에는 최종적으로 선발팀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게 중지됐다. →그때 김일성 사망을 예상하는 꿈을 꿨다는 비화가 있던데. -당시 윤여준씨가 안전기획부 제3특보였고, (별세한) 엄익준씨가 북한 국장이었다. 나중에 통일부 장관 지낸 정세현씨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있었다. 오찬하는데 “아무래도 경호실에서 인원을 정리해 줘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찬이 끝나고 제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정상회담 안 될 거 같다.”라고 말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경호실장이 그런 이야기하니 (무슨) 특별한 정보있는 줄 알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기에 농담처럼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서 관에 입관하는 꿈을 꿨다.”고 얘기했다. →요즘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 한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문제로 답방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호상 여러가지 가정도 있는데 그쪽도 똑같은 가정을 놓고 검토할 것 아니겠는가. 아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전부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니까 힘들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호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성품을 가까이서 봤을 텐데.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건강하다. 그게 아주 공통되는 거 같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이 있었던 분들 같다. 특히 박 대통령 같은 분은 공과가 있겠지만, 30~40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육 여사 서거후 지만군을 돌보라고 박 대통령이 특별히 밀명 준 건 없나. -그런 건 없고, 그 당시에 지만군이 주말에 나오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외출나와서. 대통령이 찾으니까 차지철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지만이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명동에서 찾아서 데리고 갔던 그런 일도 있고…. 나중에 지만씨가 약물 때문에 보훈병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제가 1997년 초에 보훈처장 할 때였다. 지금은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이루고 애도 갖고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년에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많이 다녔나. -지금 관광지인 설악동인가, 그게 그 당시엔 정말 형편없었다. 그런 걸 그때 다 정비하는 등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광양제철소는 본래 (충남) 아산에 만들려고 결정됐다가 (전남) 광양으로 바뀌었다. 그때 모시고 현장에 갔을 때 중국 쪽에서 바람이 부니까 매연이 내륙으로 들어오니 전문가들이 건의하고 그래서 현지에서 박 대통령이 “그럼 광양으로 하자.”고 결정했던 기억이 난다. →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성장하셨던 분이지만,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었다. 외모는 아주 매섭고, 단구에다 깡마르고, 눈매도 무섭고…. 하지만 인정은 많았다. 전에 골프를 가끔 나가시면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근무자를 꼭 챙기셨다. 아주 서민적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1974년 영부인이 서거한 뒤 굉장히 외로워하셨다. 그러다 보니 국정에만 몰두해서 74년 이후 쭉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단이나 산업단지 조선소 등이 그때 건설됐다. 안면도에는 제2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로켓을 만들었고 타코마라는 회사가 당시 마산에 있었는데 거기서 잠수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허전함을 그런 일로 푸셨던 듯하다. 정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박상범 전 靑 경호실장 인터뷰 전문 보러가기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42) 청송 주왕산 주방계곡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42) 청송 주왕산 주방계곡

    경북 내륙의 오지인 청송이 시끌벅적할 때가 있다. 차가 뜸한 시내에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청송에서 방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워진다. 주왕산이 단풍 절정기인 10월25일쯤이다. 이때는 우리나라 단풍의 흐름으로 보아 설악산은 절정이 지났고 내장산은 좀 이른 시기로 주왕산이 그 가운데를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주왕산은 예전 석병산이란 이름처럼 걸출한 암봉들과 어울린 단풍의 자태가 빼어나고 산길이 순해 인기가 좋다. ●주왕의 전설 서린 기암 천국 주왕산은 구석구석 좋은 곳이 많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주방계곡과 절골, 전망 좋은 장군봉과 가메봉, 그리고 100년 묵은 왕버들이 잠겨 있는 주산지 등. 볼거리가 많다 보니 하루 산행으로 주왕산을 둘러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도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곳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주방계곡이다. 대전사에서 내원동까지 이어진 계곡은 수려한 암봉 사이를 이리저리 휘돌아가며 단풍과 어울린 절경을 선사한다. 거리는 약 4㎞쯤 되지만 길이 순해 2시간이면 충분하다. 주차장에서 대전사로 가는 길은 난전 분위기가 물씬 난다. 인근 농가의 아낙들이 자리를 잡고 사과, 대추, 고추, 산수유 등을 내놓고 식당들은 길가에서 빈대떡을 요란하게 뒤집는다. “이따가 와요. 맛있게 해줄게.” 호객하는 아주머니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가노라면 어느덧 대전사. 보광전 뒤로 우뚝 솟은 기암은 주왕산의 상징으로 산행 초입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는다. 생김새는 메 산(山) 자의 모양에 45m 높이의 봉우리가 살며시 홍조를 머금고 있다. 기암은 기이한 바위가 아니라 깃발을 꽂은 봉우리(旗岩)란 뜻이다. 주왕산은 특이하게도 중국에서 왔다는 주왕의 전설이 굽이굽이 서려 있다.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 진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켰던 주도로 알려졌다. 거사를 실패한 주도는 신라 땅까지 쫓겨 왔고, 당나라의 요청을 받은 신라의 마장군 형제들에 의해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 토벌에 성공한 마장군은 주왕산에서 가장 잘 보이는 암봉에 깃발을 꽂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암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최근에 주왕이란 인물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나왔다. 청송의 향토사학자 김규봉씨는 주왕이 신라 헌덕왕 때 왕권의 잦은 교체로 사회가 혼란스럽던 와중에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과 그의 아들 김범문이라고 주장한다). ●3개의 폭포와 단풍이 어우러진 주방계곡 대전사를 지나면 갈림길, 왼쪽으로 좀 가면 백련암 앞에 화사한 국화밭이 있어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기암을 올려다보는 맛이 기막히다. 백련암을 구경하고 다시 주방계곡을 따르면 본격적으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들바위를 지나 제1팔각정에서 주왕굴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올라갈 때는 계곡을 따르고 내려올 때 주왕굴을 들르는 것이 좋다. 여기서부터는 거인의 얼굴 모양의 기암(奇巖)들의 영접을 받는다. 먼저 급수대가 오른쪽에서 고개를 쳐들고, 다음은 시루봉과 학소대가 차례로 얼굴을 내민다. 급수대가 험상궂다면 시루봉은 인자한 할아버지 얼굴이다. 학소대 앞의 다리를 건너면 길은 거대한 협곡 사이로 들어가는데, 꼭 비밀의 세계로 통하는 문 같다.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협곡으로 들어서면 화려한 단풍이 병풍처럼 둘러싼 암봉을 물들이고 그 아래 1폭포가 걸려 있다. 어느 무릉도원이 이보다 화려할까. 폭포를 지나 500m쯤 가면 2폭포 갈림길. 여기서 100m쯤 떨어진 2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계곡을 따르면 3폭포에 이른다. 3폭포는 3단 폭포로 주방계곡의 폭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가을 가뭄 때문에 물줄기가 좀 약한 것이 흠이다. ●내원동 오지마을에는 쓸쓸한 억새의 물결이 3폭포를 지나면 협곡이 끝나면서 길은 평지로 이어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상하게 넓어진다. 세 그루 서어나무가 기품 있게 서 있는 곳에 ‘내원동’이란 팻말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하니 돌무더기 가득한 서낭당이 보인다. 내원동은 몇 년 전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마을로 유명해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고 한 집만 남았다. 국립공원에서 생태보전을 위해 내원동 주민들을 아랫마을로 내려 보냈기 때문이다. 성황당을 지나면 예전 집들이 드문드문 있었던 자리에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길은 계곡과 억새밭 사이를 구불구불 이어지다 산수유농장을 만난다. 내원동에 마지막 남은 집으로 등산객들에게 산수유차를 팔고 있다. 마침 할머니와 손자가 산수유를 고르고 있다. “이젠 우리 집도 내려가야 해요. 참 좋은 곳인데….” 주방계곡 산행은 여기까지다. 할머니의 쓸쓸한 말처럼 하산의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글ㆍ사진 mtswamp@naver.com ●가는 길과 맛집 자가용은 중부내륙고속도로 서안동 나들목으로 나와 안동과 청송을 거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주왕산행 버스는 06:20, 08:40, 10:20, 11:40, 15:00, 16:30에 있으며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주왕산에서 동서울행은 08:20, 10:30, 13:00, 14:08, 15:48, 17:05에 있다. 맛집은 명일여관식당(054-873-5259)의 산채정식이 유명하고, 내원동에서 오랫동안 내원산장을 운영했던 부부가 문을 연 내원산장식당(054-873-3798)의 약수한방백숙도 괜찮다. 또한 월외리 달기약수 근처에는 백숙을 하는 집들이 몰려 있다.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40) 인제 내설악 만경대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40) 인제 내설악 만경대

    이미 대청봉에는 불이 당겨졌다. 대청에 부는 바람 속에서 겨울을 감지한 나무들은 서둘러 잎에 저장된 양분을 줄기로 보낸다. 이 과정에서 잎에 남아 있던 색소가 붉게 혹은 노랗게 드러나는데, 이것이 단풍이다. 식물에게 단풍은 생존 방식이지만, 인간에게는 매년 찾아오는 자연의 축복이다. 설악산에서 부담없이 단풍 구경하기에 내설악 만경대만한 곳이 없다. 백담사에서 만경대로 가는 길은 만해 한용운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의 시구절이 떠오르는 그윽한 단풍 숲길이다. ●6.4㎞ 오세암 가는 길에 숨은 비경 설악산에는 만경대가 셋이다. 오세암 직전의 내설악 만경대, 양폭산장 위쪽의 외설악 만경대, 오색 근처의 남설악 만경대. 만 가지 경치를 두루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니, 단풍 풍광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옛 문헌에는 내설악 만경대만 기록되어 있지만, 점차 외설악과 남설악이 하나씩 생겼다. 내설악 만경대가 깊은 맛이 있다면, 외설악 만경대는 눈이 멀도록 화려하다. 그리고 남설악 만경대는 가장 늦게 생긴 탓에 아는 이가 드물다. 세 개의 만경대 중에서 가장 찾기 쉬우면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내설악 만경대다. 국내 최고를 자부하는 설악의 단풍을 즐기려면 서둘러야 한다. 내설악의 단풍절정기는 10∼13일쯤이다. 일기예보에서 단풍절정기(10월 20일쯤)란 말을 듣고 떠났다가는 찬바람만 두들겨 맞기 십상이다. 산행 코스는 오세암 가는 길과 같다. 내설악의 산문 격인 백담사에서 시작해 영신암을 거쳐 만경대에 올랐다가 오세암을 찍고 되돌아가는 일정이다. 백담사에서 오세암까지는 6.4㎞, 3시간30분쯤 걸린다. 길은 험준한 설악산답지 않게 순하고 부드러워 아이들도 잘 올라간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진 백담계곡은 예전에는 걸어 다녔지만, 요즘은 셔틀버스를 타고 절 앞까지 오른다. 버스에서 내려 백담사로 이어진 백담교를 건너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하지만, 계곡을 물들인 화려한 단풍빛에 온몸이 벌렁거린다. 절에 들러 만해 한용운 동상 앞에서 인사를 드리자마자 붉게 물든 계곡으로 달려간다. 물가에 있는 나무들의 단풍이 더욱 곱고 진하다. 백담사를 지나면 수렴동계곡을 따라 평지처럼 순한 길이 이어진다. 계곡물은 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띠고, 길섶에는 붉고 노란색의 단풍들이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그 찬란한 풍경 속을 걷다보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올챙이처럼 두 눈을 뜨고 감탄을 연발한다. 어쩌면 한용운 역시 이 길을 산책하다가 ‘님의 침묵’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1시간쯤 지나면 암자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중창불사를 한 영심암에 이른다. 이곳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10분쯤 더 가면 갈림길, 여기서 오세암과 봉정암이 갈린다. 오세암 방향으로 들어서면 슬그머니 길은 오르막으로 변한다. 작은 고개를 넘어 두 번째 고갯마루에서 만경대로 올라가는 것이 이번 산행의 포인트다. 만경대란 이정표가 없기에 오세암 직전의 고개를 기억하면 되겠다. ●다섯 살 동자와 관음보살의 순수한 교감 고갯마루에서 가파른 산길을 10분쯤 올라가면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정상부가 나온다. 이곳이 내설악 만경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북동쪽으로 훤히 보이는 오세암. 공룡능선을 병풍처럼 두른 모습이 한눈에도 기막힌 명당자리다. 단풍과 전나무의 초록, 그리고 천수관음보전의 청기와 지붕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대로 동화 속의 한 장면이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설악산의 제왕인 대청봉의 육중한 모습이 드러나고, 그 앞으로 대청을 지키는 수호신 용아장성릉의 암봉들이 육식 공룡 이빨처럼 드러나 으르렁거린다. 용아장성릉 뒤로 보이는 높은 능선 마루금은 귀때기청봉(1577m)에서 대청으로 이어진 서북능선이다. 과연! 이곳 만경대처럼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내설악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만경대를 내려와 고갯마루를 내려서면 오세암. 다섯 살 아이가 홀로 폭설 속에 고립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순수한 교감을 나누며 성불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내려오는 소박한 암자다. 이 전설은 동화작가 정채봉의 손에 의해 오누이의 이야기로 변주되면서 우리의 심금을 더욱 울리기도 했다. 오세암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그동안 달아올랐던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한다. 설악의 깊은 아름다움이 시나브로 슬픔의 감정까지 불러오는 것은 왜일까. 내설악을 찬란하게 비추던 빛이 점점이 사라지며 땅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땅거미가 가야 할 길을 집어삼킨다. 글 사진 mtswamp@naver.com ●가는 길과 맛집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담사행 버스가 오전 6시15분부터 오후 6시40분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길이 좋아져 2시간30분 밖에 안 걸린다. 백담사 일대에는 황태요리와 순두부가 유명하다. 할머니황태구이(구 할머니순두부·033-462-3990)집은 30년간 산꾼들에게 뜨끈한 순두부와 황태요리를 선사했다. 단풍철이면 속초 동명항에 양미리가 제철이다. 항구 노천에서 연탄불을 피워 양미리를 구워준다. 1만원이면 두 사람이 배 부르게 먹는다.
  • [건국 60돌 中國이 다시 뛴다] 청융화 中대사의 한국생활은

    청융화(55) 대사와의 인터뷰까지 가는 길은 까다로웠다. 중국대사관 측에서는 사전에 질문 수를 정해줬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청 대사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질문”이라는 ‘하얀 거짓말’을 수차례 해가며 정해진 질문 분량을 넘기는 기자의 꾀를 싫은 기색 없이 끝까지 받아줬다. 지난해 10월 부임한 그는 지난 1년간의 한국생활에 대해 “두 나라(한국과 중국)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나 습관이 너무 비슷하다.”면서 “한국 음식이 약간 매운 게 좀 다른 점이지만, 많이 익숙해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좋아하는 한국 음식으로는 불고기와 김치를 꼽았다. 그는 “공무가 바빠서 한국 드라마는 끝까지 다 본 게 없지만, 내 자녀(1녀)를 비롯해 중국 젊은이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성장했다.”고 했다. 인상 깊었던 여행지로는 “제주도는 역시 관광명소였고, 동해안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얼마전 갔던 설악산도 좋았다.”고 했다. 대사로서 이명박 대통령을 접하면서 받은 느낌을 물었더니 이런 답을 했다. “이 대통령 내외분이 청와대에서 중국 쓰촨(四川)성 지진 피해자 대표들을 긴 시간 만나준 적이 있다. 그때 이 대통령이 쓰촨성에 갔을 때 안아줬던 아이를 청와대에서 다시 안아줬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나는 물론 참석자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설악권지역혁신 회의 참석

    황종국 강원 고성군수 28일 경동대 교수세미나실에서 열린 설악권지역 혁신협의회 의장단 회의에 참석했다.
  • ‘미디어 기업 콘텐츠 전략’ 워크숍

    중견 방송인 단체인 여의도클럽과 디지털미디어 콘텐츠 포럼이 지난 18일부터 이틀 동안 설악 썬밸리리조트에서 ‘글로벌 미디어 기업의 콘텐츠 전략’을 주제로 워크숍을 공동 주최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이 행사에서는 전범수 한양대 교수와 김경환 상지대 교수가 해외 주요 미디어 기업의 글로벌 전략 사례를 소개했고 홍성주 SBS 아트텍 사장 겸 여의도클럽 회장, 김영환 KT 부사장, 조용택 KT 대외협력 전무 등이 패널로 참여해 국내 미디어 기업의 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 설악산 눈향나무 소멸 위기

    설악산 대청봉에 자생하는 난쟁이 나무인 ‘눈향나무’가 소멸위기에 처한 것으로 조사됐다.21일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유전자원보존연구팀이 동위효소 표지유전자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유전자 소실 위험도를 나타내는 고정지수가 0.38로 나타났다. 고정지수 0은 현 상태 유지를, 0보다 크면 유전자 소멸위험, 최대치인 1은 유전자의 완전 소멸을 의미한다.반면 한라산 집단은 -0.08로 안정적인 구조를 보였다. 향나무 중에서 하늘로 향하지 않고 지표면을 따라 누워서 자란다고 이름 붙여진 눈향나무는 동북아시아에 한정 서식하며 멸종위기식물에 위기종으로 등재됐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skpark@seoul.co.kr
  • [열린세상] 아름다운 마을/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열린세상] 아름다운 마을/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얼마 전 영국의 아름다운 마을들을 견학하고 돌아왔다. 영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마을로 꼽는다는 바이버리와 보튼온더워터에서부터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에 이르기까지 아름답다고 소문난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참관해 본 것이다. 마침 필자가 속한 ‘미래상상연구소’에서 민간 차원의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캠페인을 벌여 오던 차여서 오랫동안 유럽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곳들은 과연 어떤가 본격적인 견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문난 아름다운 작은 도시와 마을들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건축물들이 자연 앞에 겸손하다는 점이다. 한결같이 나무와 숲과 물길들을 소중히 하고 그 조화를 살려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산자락 끝에 슬쩍 비켜서 아늑하게 위치하고 있거나 물가에 작고 단아하게 지어져 있어서 건축물 때문에 경관이 손상되지 않도록 배려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무엇보다 눈을 씻고 보아도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 간판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점마다 중간색 톤으로, 그것도 보일 듯 말 듯 작고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어서 저절로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간판 자체가 예술이었다. 건축물의 외벽색 또한 자연과 잘 어울려 그 일부분인 듯 보일 정도였다. 건물 때문에 자연이 손상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변이 돋보일 만큼 형태와 색채들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중에는 오래된 건물들도 많았는데 세월의 더께가 얹혀 아름다움에 신비감까지 더하고 있었다. 그 마을과 도시들을 견학하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미추의 구별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선험적으로 체득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20여년 전 유럽과 일본 등지를 여행하면서 처음 건물과 간판들의 아름다움에 접하며 놀랐을 때만 해도 내심 이제 우리나라도 여행이 자유화되고 새로운 세대가 장년이 될 20여년 후면 사뭇 달라져 있으려니 기대를 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발견은 사람들이 절대로 길을 막고 서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시골의 소도시는 물론 아무리 붐비는 박물관이나 지하철 같은 곳이라 해도 반드시 통로 쪽을 비워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을 타도 어딘지 헐거운 느낌이 들 정도이다. 서울에 돌아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원색의 야만적 시각 폭력의 거리와 골목을 거닐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하도나 백화점 할 것 없이 어디에서나 툭툭 어깨를 치고 지나가거나 길을 막고 삼삼오오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왜’라는 물음이 절로 고개를 들곤 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선진국을 갈망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로 내세우는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제 지표상으로는 잡히지 않는 선진국의 또 다른 조건들이 함께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중에 한 가지가 도시 미관의 문제이고 거리 간판의 문제이다. 빨주노초의 눈을 찌르는 원색에다 터무니없이 큰 간판들이 무질서하게 도시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한, 그리고 크고 작은 길에 모여 서서 보행을 막아 버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 한 진정한 선진국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일각에서 대한민국에 긍지를 갖자는 슬로건이 내걸리고 있다. 나라를 자랑스러워하자는 것이야 백번 당연한 일이지만 나라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거창한 슬로건으로 몰아가서 되는 일은 아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세계 시민으로서 내 나라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조건 중에 나는 거리 미관이나 질서의 문제를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섬진강이나 낙동강 자락의, 아니면 설악산이나 지리산 자락의 아름다운 마을들을 구경 오는 날들을 그려 본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 설악권주민 미시령 통행료 50% 감면

    새해 1월1일부터 강원 속초·양양·인제·고성지역 등 설악권 주민들에게 미시령터널 통행료가 50% 감면된다. 강원도는 15일 설악권 4개 시·군 주민들의 차량에 한해 가구당 통행료를 50% 감면해 주는 감면카드를 1장씩 발급한다고 밝혔다. 감면카드에는 가족 4명까지 등록이 가능하다. 감면카드를 발급받은 설악권 지역주민들은 현행 경차는 1500원, 소형차 3000원, 중형차 5000원, 대형차 6500원의 통행료 가운데 50%씩 감면을 받게 된다. 이들 지역 주민들에 대한 통행료 감면으로 발생되는 사업자 손실금액 가운데 50%를 부담한다는 조건이다. 도는 이 같은 내용 등이 담긴 미시령터널 통행료 지원조례 시행규칙안을 입법예고했다. 미시령터널 통행료 지원조례 시행규칙에 대한 찬반 등에 대해서는 오는 23일까지 강원도청 도로교통과로 의견서를 제출하면 된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설악산 새달 1일 단풍

    설악산 새달 1일 단풍

    올해는 단풍을 평년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기상청은 다음달 1일 설악산에서 가장 먼저 단풍이 들 것이라고 10일 밝혔다. 단풍이 물드는 시기는 전국적으로 평년보다 1~8일가량 늦어 중부지방과 지리산은 10월1~20일쯤, 남부지방은 10월20일~11월5일쯤 될 것으로 보인다. 단풍 절정기의 경우 설악산은 10월20일, 내장산은 11월5일 전후로 예상되고 중부지방·지리산은 다음달 24~29일쯤, 남부지방은 11월 상순으로 관측된다. 보통 하루 최저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단풍이 드는데 단풍이 산 전체의 20%를 차지하면 첫 단풍, 80% 정도면 절정기라고 본다. 기상청 관계자는 “올 여름 강수량이 많았고 9~10월에 이동성고기압의 영향으로 맑은 날이 많으면서 일조량이 풍부하고 일교차가 클 것으로 예상돼 어느 때보다 고운 단풍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36) 화악산(華岳山) 실운현~북봉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36) 화악산(華岳山) 실운현~북봉

    그동안 화악산은 서글펐다. 경기도 최고봉으로 높이가 무려 1468m에 이르지만, 오래전부터 군부대가 정상부를 꿰차고 있어 산꾼들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산은 그 값을 하기 마련이다. 화악산은 태백의 금대봉에 견줄 만한 야생화 천국이며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대길복지 명당이다. 화악산 북봉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면 밝은 기운 가득한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경기 오악(관악, 운악, 감악, 송악, 화악) 중에서 으뜸인 화악산은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 그 남서쪽 중봉(1446m)이 옹색하게 정상 역할을 해 왔다. 그래서 산꾼들은 서너 시간 비지땀을 흘려 중봉에 올랐다가 군부대 철조망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셔야 했다. 총 7∼8시간쯤 걸리는 험준한 산길을 생각하면 두 번 찾기 힘든 고된 산행이다. ●화악터널 개통으로 접근 쉬워진 북봉 화악산이 재발견된 것은 화악지맥을 종주하는 선구적인 산꾼들 덕분이다. 화악지맥은 한북정맥의 국망봉과 백운산 사이에서 가지를 쳐 화악산, 북배산, 보납봉 등을 빚어내고 북한강에 그 맥을 가라앉힌다. 화악지맥을 따르면 석룡산, 화악산 북봉, 실운현, 응봉이 마루금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화악산 북봉이 산행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화악산 북봉 코스는 작년 말에 개통한 화악터널에서 시작해 실운현(1044m)에서 능선을 타고 북봉까지 오르내리는 코스가 좋다. 화악터널(890m)에서 북봉(1435m)까지는 약 2.5㎞, 2시간쯤 걸린다. 이 길은 험준한 화악산을 부드럽게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초가을에 볼 수 있는 금강초롱, 투구꽃, 진범, 쑥부쟁이 등의 야생화를 만끽할 수 있다. 산행의 들머리는 화천 방향에서 화악터널을 보았을 때, 오른쪽으로 이어진 군사도로다. 임도처럼 널찍한 이 도로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다. 가평 쪽 화악터널 앞으로 새로운 군사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봉선, 두메고들빼기, 까실쑥부쟁이 등이 흐드러진 길을 30분쯤 오르면 실운현 사거리를 만난다. 왼쪽 바리케이드가 있는 곳이 응봉 군부대로 가는 길이고, 북봉은 오른쪽이다. 도로 공사 중인 길을 100m쯤 오르면 오른쪽으로 헬기장이 보인다. 본격적인 산길은 헬기장에서 능선을 타면서 시작된다. 능선에 접어들면 숲에서 내뿜는 서늘한 공기가 밀려오고 며느리밥풀과 큰세잎쥐손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 길섶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금강초롱을 발견하면서 희열이 솟구친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너 송이가 모두 진한 꽃을 머금고 있다. 금강초롱은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금강초롱이란 이름이 붙었다. 화악산의 금강초롱은 다른 산의 꽃보다 유독 색이 짙어 식물 애호가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진범, 투구꽃, 단풍취, 금강초롱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부드러운 능선을 1시간쯤 오르자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화악산에서 만고풍상을 겪은 고사목 한 그루 뒤로 응봉의 웅장한 품이 펼쳐진다. 이곳의 고도는 대략 1380m, 높은 산 특유의 알싸한 공기를 마시니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앞쪽으로 화악산 정상부의 군부대 시설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군부대가 파놓은 교통호 지대를 통과해 15분쯤 더 오르면 정상 능선에 올라붙는다. 능선 오른쪽으로 뭉툭하게 튀어나온 봉우리가 북봉이다. ●한반도의 중심으로 쏟아지는 밝은 기운 북봉에는 정상 이정표가 없지만 군부대의 시멘트블록이 있어 산꾼들은 그것을 정상의 상징으로 삼는다. 북봉의 조망은 중봉보다 한 수 위다. 여기서 지그시 세상을 굽어보면 우리가 사는 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선 북쪽으로 국망봉(1168m)∼광덕산(1046m)∼복주산(1152m)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마루금이 시원하고, 남쪽으로 정상의 군부대 오른쪽으로 명지산과 운악산의 모습이 근육 좋은 맹수처럼 꿈틀거린다.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은 동쪽이다. 화악산의 한 봉우리인 응봉(1436m) 뒤로 첩첩 산들이 이어지는데, 그 높이와 톱날 같은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응봉 왼쪽 멀리 손톱만하게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봉우리가 바로 설악산 대청봉이다. 설악산을 발견하니 기분이 하늘로 둥실 떠오른다. 예로부터 화악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정중앙으로 알려져 왔다. 중봉이란 이름은 정상아래 중간 봉우리란 뜻이 아니라 한반도의 중앙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볼 때 전남 여수에서 북한 중강진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선이 국토 자오선(동경 127도 30분)이다. 여기에 가로로 북위 38도 선을 그으면 두 선이 만나는 곳이 바로 화악산 정상이다. 그래서 선조들은 화악산을 신선봉으로 부르며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북봉에서 빤히 보이는 정상부로 가면 좋겠지만, 군부대 철조망이 완강하게 길을 막는다. 아직도 우리가 분단국가임을 실감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올라온 길을 천천히 되짚어 내려가 화악터널 앞의 화악약수터에서 갈증을 달래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가는 길과 맛집 화악산 북봉 산행은 화악터널에서 시작하므로 자가용을 가져가는 것이 편하다. 수도권에서는 47번 국도에서 자동자 전용도로를 타고 춘천 가는 46번 국도로 합류하는 길이 빠르다. 대중교통은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6시50분부터 운행하는 사창리행 버스를 탄다. 사창리에서 화악터널까지는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비는 1만 2000원선. 가평 북면 이곡리의 ‘자연다슬기 해장국’(031-582-4210)은 직접 담근 된장으로 구수한 맛을 낸 다슬기해장국을 내온다. 글 사진 mtswam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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