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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뒷골목 맛세상] 안성의 요리 명가

    [뒷골목 맛세상] 안성의 요리 명가

    경부고속도로 안성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시내로 향하다 보면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 정문과 나란히 안성맞춤 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에는 바로 ‘안성맞춤’이란 단어를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바뀌게 한 안성유기의 역사며 제작방법에서부터 수저와 그릇 같은 반상기, 제기, 불구(佛具), 징이며 꽹과리 같은 악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흔히 놋쇠라고 부르는 유기는 만드는 기법에 따라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로 나누어지는데, 나로서는 놋쇠를 불에 달구어 일일이 메질을 되풀이하며 얇게 늘려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방짜유기에 예사롭지 않은 관심이 갔다.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낸 섬세하면서도 정교한 모양도 모양이지만,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공간에서 새나오는 것 같은 은은하면서도 황홀한 빛은 흡사 무슨 향기로운 생명이라도 깃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져 자칫 바라보기마저 외경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럴지도 몰랐다. 소위 많은 명품들이 그렇듯이 안성유기 또한 그것을 만든 이들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이 낱낱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안성에서 살아 숨쉬는 장인정신은 비단 유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맛세상에서 만난 요리에서도 어렵잖게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대저 요리에 있어서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요리 하나 하나에 자신의 생명까지 불어넣을 정도로 몰두하여 마침내 자신의 삶과 요리가 기꺼이 한 몸이 되는 경지가 아니랴. 장자(莊子)의 양생주(養生主)에는 ‘포정’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정은 숙수 혹은 주방장 같은 요리사를 일컫는 말로, 옛날에는 직업으로 이름을 삼는 일이 흔했다. 포정이 양나라 혜왕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는데, 그 손을 놀리는 것이나 어깨로 받치는 것이나 발로 딛는 것이나 무릎을 굽히는 것이나 쓱쓱 칼질하는 품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흐름마저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문혜군이 그 재주를 감탄하자 포정이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도는 재주에 앞서지요.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은 소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 뒤에는 소가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오직 마음으로 일할 뿐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곧 손발이나 눈 따위 감각기관은 멈춰버리고 마음만이 작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 몸뚱이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릅니다. 뼈와 살이 붙어있는 큰 틈바구니를 젖힐 때나 뼈마디가 이어져 있는 큰 구멍에 칼을 넣는 일들은 모두 자연의 이치를 따라 갈라갑니다. 그래서 제 재주는 뼈와 살이 맺힌 곳에서도 아직 한번도 칼이 다치지 않도록 하지요. 하물며 큰 뼈에 부딪치는 일이 있겠습니까. 솜씨 있는 포정은 일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요, 보통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부딪혀 칼을 부러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칼은 이제 19년이나 지났고 잡은 소의 수가 수천 마리에 이르는 데도, 칼날이 지금 막 새로 숫돌에 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저의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넣기 때문에,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9년이나 지난 칼인데도 막 숫돌에서 새로 간 것 같지요. 그러나 지금도 막상 뼈와 심줄이 한데 얽힌 곳을 만났을 때는 저도 그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며 조심합니다. 눈길을 집중하고 몸놀림을 천천히 하며 칼놀림 또한 매우 미묘하게 합니다. 마침내 뼈와 살이 쩍 갈라지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철썩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때에야 저는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품에 간직합니다.” 문혜군은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훌륭하구나! 포정의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양생법을 깨우쳤도다!” ‘안일옥’(031-675-2486)은 옛날의 안성장에서부터 비롯하여 80년이 넘게 소위 쇠전머리 장국밥의 입맛을 대물림해오는 3대 전통의 명가다. 예부터 안성장은 유기뿐만이 아니라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 또한 유명하여 전국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드는 큰 장으로 발전되었는데, 바로 안성장에서 떠돌이 장돌뱅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장국밥이 안일옥에서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작고한 1대의 이성례에서 비롯하여 2대의 이양귀비(87세),3대의 우미경(42세)에 이르면서, 요리에 몰두하여 마침내 자신의 삶과 요리가 기꺼이 한 몸이 되는 도의 경지는 더욱 깊어졌으리라. 한 가지에만 전념하여 80년,3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안으로 흐르는 장인정신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할 터이다. 벌써 아흔에 가까운 이양귀비 할머니는 더 이상 식당일에 관여하지 않지만,3대의 우미경은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방에서 손수 요리를 다루고 있다. 어찌 며느리 우미경뿐이랴. 이양귀비의 3남 6녀의 자녀들은 이미 작고한 장남 김종선이 송탄에 안일옥 분점을 낸 것을 필두로,2남 김종안이 도기동 쇠전머리에 새집을 지어 장터국밥집을 열 준비를 하고 있고,3남 김종열이 안일옥 본점을 맡고 있다. 4녀 김종숙이 평택에,5녀 김종금은 안일옥 본관 바로 옆에 별관을 열어 약간 색다른 메뉴로 보신탕이며 삼계탕을 선보이고 있다. 이만하면 가히 요리만으로 명가다운 집안을 이룬 셈이다. 이중에서 3남이면서도 안일옥의 전통을 내리 이어받은 김종열은 아내 우미경을 도와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일찍이 중앙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거기에서 외식산업경영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는 둥, 경험과 학문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직 중학생인 아들 김형우를 시흥에 있는 조리과학고등학교에 입학시켜, 미리부터 4대를 이을 준비도 하고 있다. 안일옥의 메뉴는 일찍이 쇠전머리 장국밥에서 발전하여, 해장국(4000원)부터 설렁탕(5000원), 곰탕(5000원), 내장곰탕(5500원), 갈비탕(5500원), 꼬리곰탕(1만원), 도가니탕(1만원), 족탕(1만 2000원), 안성맞춤우탕(1만 5000원), 소머리수육(1만 5000원), 도가니수육(2만원), 모듬수육(2만 5000원), 꼬리수육(3만 5000원), 족수육(4만원)으로 다양하여졌다. 만일 모처럼 외식에 나섰거나 몸이 허약해서 보양식을 찾는 중이라면 약간 무리하다 싶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꺼이 안성맞춤우탕을 권하겠다. 안일옥에서 특별히 만들어낸 메뉴인 안성맞춤우탕에는 한 그릇 가득히 우족을 위시해서 꼬리, 도가니, 갈비, 소머리고기가 다양하게 들어 있는데, 맛도 맛이지만 양 또한 넘쳐나서 비싸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우정집’(031-675-4029)은 냉면전문집이다. 그리고 과연 냉면전문집답게 메뉴는 냉면과 비빔냉면 딱 둘뿐이다. 흔히 냉면과 함께 팔기 마련인 수육마저도 없으며 소주나 맥주 같은 주류도 없이 다만 냉면뿐인 것이다. 혹시 종교적인 이유에서 술을 팔지 않는 것인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술을 팔다 보면 술꾼들 때문에 냉면이 좋아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누가 될까 싶어서 팔지 않는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수육의 경우는 자칫 수육을 그날 팔지 않으면 냉장고에 넣어 보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다음날은 수육의 고유한 맛을 잃어버릴 터이고, 그런 수육을 차마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가 없어서 아예 포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우정집의 주인 배석윤은 황해도 출신으로 갓 스물 무렵에 서울 수표동의 유명한 음식점 경희장의 주방에서 요리사로서의 첫 수업을 쌓아 경력 40년이 훌쩍 넘은 소위 요리의 장인이다. 그이가 안성에 터를 잡은 것은 1968년 당시 미화장이라는 안성에서 가장 큰 음식점 주방장으로 내려오면서부터였다. 미화장이 없어지자 그이는 바로 미화장 앞에 터를 잡아 1975년에 냉면전문집을 열었다. 그런 그이가 요즈음 들어 애오라지 하는 일이란 전혀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이다. 그이는 나와의 인터뷰마저도 아내 복경순과 이미 대학의 외식산업과를 나와 전문요리사가 되어있는 아들 배승태에게 맞긴 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듯이 우정집은 이미 경기도 지정업소며 모범업소로 선발되었지만 어디에도 인정서 따위는 보이지 않고, 붙은 것은 냉면과 비빔냉면 각각 5000원이라고 적힌 메뉴판이 전부였다. 우정집에서 생각 없이 냉면을 먹다 말고, 나는 자칫 입에 문 냉면 몇 올마저도 목구멍으로 흘려 넘기기가 불현듯 외경스러운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런 이도 있는 것일까. 전문요리사출신인 아들마저 아버지의 길은 옆에서 보아내기만 해도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 도저히 뒤따르지 못하겠다며 그만 포기하고만 길을 걷는 이. 길이 깊어지다 못해 이제는 애오라지 자신을 세상에서 숨기려 드는 이. 그렇게 장인정신 깊어지면 안으로 갈무리되어 어디론가 또 다른 공간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느 날 눈 밝은 이를 만나면 은은하면서도 황홀한 빛을 내어 무슨 향기로운 생명체로 다시 새나오는 것일까. 안성교육청 앞에 숨어있는 ‘향교식당’(031-675-4288)이라는 4000원짜리 가정식백반집도 나로서는 장인정신이 빛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집은 기실 안성 부근에 작업실이 있는 내가 일주일에 한번 꼴로 들르는 단골집이다. 어떤 날은 향교식당의 백반을 먹다 말고 자칫 심약해진 나머지 눈물마저 글썽일 때가 없지 않다. 나를 그렇듯 심약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반찬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이 집 주인의 선의(善意)이다. 누군가는 한갓 가정식백반에서 장인정신 운운하는 나를 너무 싸구려라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구태여 한 마디 변명하자면, 손님에 대한 선의가 없이 어떻게 장인정신이 우러날 수 있으랴, 되물을 수밖에. 시어머니 오은자와 며느리 서강열이 사이좋게 솜씨를 내는 향교식당 4000원짜리 백반의 반찬은 가짓수가 무려 16가지가 된다. 돼지불고기, 꽁치조림, 청국장찌개, 고추버섯볶음, 소고기장졸임, 미역쌈, 무장아찌, 시금치, 오이소박이, 어묵볶음, 오이노각, 김, 깻잎장아찌, 멸치땅콩볶음, 콩나물, 깍두기…. 반찬들의 어느 하나 고부의 정성이며 선의가 깃들지 않은 것이 없지만, 김같이 사소한 것도 쉽게 사서 쓰는 일이 없이 일일이 품을 팔아 들기름에 구워내는 식이다. 뿐이랴,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시켜서 양껏 밥을 먹고 나면, 한 양푼 가득히 갓 끓여낸 누룽지탕을 다시 가져다준다. ● 설렁탕 역사는 수백년 설렁탕이 조선시대 선농단과 왕실소유 토지인 직전에서 해마다 봄이면 거행된 왕의 친경행사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친경행사에서 왕이 선농제라는 일종의 풍년제를 올린 후 제사에 쓴 소를 재료로, 문무백관이며 인근의 백성들까지 두루 나눠먹게 하기 위하여 솥 가득히 끓여낸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라는 식이다. 이 설렁탕은 원래 선농탕이 변한 것이다. 이후 민간에서는 요리법이 차츰 발달하여, 우선 사골을 넣고 10시간 정도 끓인 다음에 소머리, 양지고기를 넣고 다시 3시간 정도 끓여서 고기만을 건져낸 다음에 부위별로 썰어내고, 뼈는 다시 푹 고아서 손님에게 내게 되었다. 설렁탕에 반해 곰탕은 사골 같은 뼈는 쓰지 않고 주로 내장 위조로 푹 고아서 말 그대로 곰탕을 만들어낸다. 해장국은 선지에 우거지를 넣어서 고아낸다.
  • [송기원 맛세상]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송기원 맛세상]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그대가 아무리 먹는 일에 무관심할지라도 얼핏 남대문 시장의 갈치조림골목에 대해서 한두 번은 흘려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들은 풍문에 따라 어느 날 정오 무렵 문득 갈치조림 골목을 찾아간다면,그대는 우선 남대문 시장 초입에 있는 본동상가라는 낡은 건물을 발견할 것이다.그리고 그 본동상가 건물 사이사이로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쳐야 하는 골목도 발견할 것이다.너무 비좁고 어두운 데다가 지저분하게만 여겨지는 골목 앞에서 그대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을 때,문득 골목 안 저편에서 한 줄로 늘어서서 무언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단의 행렬을 발견할 것이다.마침내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한 그대가 그 행렬을 따라가보면,그대는 마침내 푸른 가스불 위에서 맹렬하게 끓고 있는 열 개 남짓한 뚝배기들도 발견할 것이다. 어디 그 행렬 앞에서 뿐이랴,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골목 여기저기에서 끓어대는 뚝배기들로 인하여 그대는 삽시간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듯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야릇도 해라,그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가슴마저 두근두근 뛰고 있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끓어대는 뚝배기 뚝배기 속에서 맹렬하게 끓고 있는 것은 바로 갈치조림이다.그대로 하여금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겨우 5000원짜리 갈치조림이라는 사실에 그대는 피식,헛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그러나 좀더 안으로 기억을 더듬어오르다 보면,그대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따라나선 시골장터 풍물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장터의 모든 풍물들이 무슨 요술처럼 신기하기만 한 어린 촌놈인 그대에게,더군다나 흡사 넋이라도 빼앗아 갈 것처럼 현란한 것은 여기저기에서 한 솥 가득 넘치게 끓고 있는 국밥이며 팥죽이며 칼국수며 갖가지 떡들이었을 것이다. 어떤가.그대의 기억이 끓고 있는 갈치조림 뚝배기에 겹쳐 저 까마득한 시절의 장터풍경에 이르렀다면,하찮은 갈치조림 앞에서 가슴마저 두근거리고 있는 자신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지 않으랴.어쩌면 그대뿐만이 아니라 저렇듯 길게 늘어선 행렬들은 갈치조림 보다는 정작 장터에서 보았던 국밥이며 팥죽이며 떡같은 추억을 먹고 싶은 것이리라. 갈치조림 골목을 지나 반대편 입구에 다다르면 그대는 무심코 1950년대 적산가옥처럼 생긴 낡은 이층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 이층 건물에 붙어 있는 ‘막내횟집’(02-755-5115)이라는 입간판도 아울러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내가 그대에게 소개하고 싶은 곳은 갈치조림 골목보다는,바로 골목의 연장선상에 있는 ‘막내횟집’이다. ●특색이라고는 별로 없는 허름한 풍경 금방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횟집의 문을 열면,그대는 별로 넓지 않은데다 별 특색이라고는 없는 허름한 횟집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아니,그대가 이제 막 어스름이 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에 횟집의 문을 밀쳤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그대는 이미 좌석을 꽉 채운 손님들로도 모자라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문 앞에서 서성이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바로 그대 앞에서 만날 것이다. 그대가 손님들 뒤에서 언제까지 서성이고 있어봤자 손님은 물론 회 접시를 들고 분주하게 오가는 주방 아주머니들까지 누구도 그대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대가 먼저 나서서 주인인 듯싶은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다. “저어,자리가 없을까요?” 약간 당돌한 듯,그리고 무슨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어딘가 건방져보이기까지 한 주인 아주머니는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에게 아는 채를 할 것이다. “예약은 하고 오셨어요?” “아니요.” “그럼,오늘은 안되겠네요.” 그대는 결국 명함 한 장만 달랑 손에 들고 가파른 계단을 되짚어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만일 그대가 예약을 하고 다음 날 저녁에 막내횟집을 다시 찾는다면 그대는 당연히 자리를 잡을 수 있다.그대가 횟집에 오면서 설마 일행도 없이 혼자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대가 일행과 같이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에,메뉴판에 적힌 대로 주문을 한다면,느닷없이 여기저기서 킥킥,웃음소리가 터질지도 모른다. 막내횟집의 메뉴판이야말로 엉터리다.광어 얼마,도다리 얼마,농어,우럭,아나고,낙지 얼마,얼마하고 적혀 있지만,누구도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하는 사람은 없다.이 집에서 나오는 메뉴는 단 한 가지 ‘모듬회’뿐이다.대중소로 나누어져서 각각 4만원,3만원,2만원 하는 모듬회도 손님 마음대로 시킬 수가 없다.대중소로 나누는 것마저도 주인아주머니 마음대로이다.손님이 두 명이면 소,세 명이면 중,네 명 이상이면 대다. ●엉터리 메뉴판… 주문도 주인 마음대로 어떤가,횟집 주인이 이 정도로 횡포를 부리면 정의감 넘치는 그대는 이쯤에서 당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그대 이외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인의 횡포에 항의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손님이 없다.만일 그대가 다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서 주인아주머니가 주는 대로 회며 기본안주를 먹고 소주를 마신다면,결국 계산대에 서서야 그대는 비로소 주인아주머니의 횡포에 대하여 왜 누구 한 사람 나서서 항의를 하거나 따지지 않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막내횟집의 모듬회는 완도에서 날마다 직송해오는데,철에 따라 횟감의 종류가 조금씩 달라 어느 때는 광어와 도다리,어느 때는 우럭과 농어,어느 때는 숭어로 대개 두세 가지를 함께 낸다.기본안주는 달랑 5가지이다.어린아이 주먹만큼 큼직큼직한 감자조림과 고등어조림,오징어볶음,매운탕이 나오고,회를 다 먹으면 야채비빔밥이 나오는데 이 비빔밥이 별미다.만일 정말로 회를 많이 먹는 이라면 회 또한 덤으로 더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실컷 먹고 마신 가격이 한 사람당 1만 5000원 수준이다.아무리 많이 먹고 마셔도 결코 2만원 수준은 넘지 않는데,주인아주머니의 특별한 배려 때문일 터이다.그렇게 계산이 끝나고 나서야 그대는 비로소 약간 당돌한 듯,그리고 무슨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어딘가 건방져보이기까지 한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에 대해 이해하게 되리라.막내횟집은 결국 넘쳐나는 손님들을 주체하다 못해 다음 골목의 연세악세서리 주차장 옆에 똑 같은 이름으로 별관(02-776-6445)을 내었다. ●계산 마치고 나면 모든걸 이해 나에게 처음 막내횟집을 소개해준 극작가 안종관 선배는 소위 놀량패로 호가 난 이다.놀량패답게 마음씨 좋은데다가 마당발이기도 해서 문단은 물론 연극계며 음악,무용같은 예술인들과 두루 통하고,그이들 중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남모르게 뒷바라지 잘하기로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이이가 또 호사가 기질이 다분하여 엉뚱하게도 호텔 일식당 주방장 출신을 데려와 막내횟집 횟감을 시식하게 한 바,일류 일식집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을 흔쾌하게 인정받았다고 한다.나를 처음으로 데려간 날 안종관은 자랑스럽게 주방장 출신의 말을 전하면서 덧붙였다. “나,이번 주일에만 오늘로 네 번 왔어.” 주인아주머니 김선자(金善子) 여사는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스무 살이 갓 넘어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역시 좋은 횟집으로 이름이 높던 ‘할머니횟집’의 종업원으로 들어와 15년 가까이 막일을 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횟집을 차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막내횟집이란 옥호의 ‘막내’는 아마도 할머니가 부르던 호칭이지 않았나 싶은데,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이 지금은 없어진 할머니횟집의 정신적 계승자임을 분명히 한다. 돌이켜보면 주인아주머니는 회를 만지는 일로 청춘을 보내고 어느덧 반백 년의 나이에 이른 셈이다. 결국 주인아주머니의 손님들에 대한 횡포나,표정에 있어서의 당돌함과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 자신감은 20년도 훨씬 넘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인지도 모른다.회에 대해서 만큼은 대한민국의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나에게는 그런 자부심이 어쩔 수 없이 눈부시다. 막내횟집의 한쪽 벽에는 우리은행에서 강연을 하는 주인아주머니의 사진이 생뚱맞게 걸려있다.내가 무슨 사진이자고 묻자,주인아주머니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회 뜨고 손님들 접대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부장급 이상 간부들한테 이야기하래요.그래서 그대로 이야기해줬더니 그걸 보고 마케팅전략인가 뭔가 그러대요.” ●갈치조림 골목의 이모저모 점심시간에 갈치조림 골목에서 손님들이 가장 많은 곳은 희락(02-755-3449)과 중앙식당(02-752-2892)이다.이 두 집은 서로 원조임을 내세우고 있는데,적잖게 매스컴을 타서 식당 홀 중앙에 TV에 방영된 사진이 위압적으로 걸려있다.갈치조림 골목에 온 첫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렬의 끝에 붙어서서 두 집 중 한 곳으로 들어가 어렵사리 자리를 차지하고는 쫓기듯이 서둘러 갈치조림을 먹어야 했다.두 번째 갔을 때 나는 두 집을 피하여 다른 집을 찾아들었다.당연하게 손님이 적어서 넉넉한 시간에 천천히 갈치조림 맛을 음미할 수 있었는데,그래서일까,첫 번째 집보다 훨씬 맛이 깊은 느낌이었다.모름지기 너무 매스컴을 믿지 말 일이다. 갈치조림 골목에서 나는 갈치조림보다는 닭진미(02-753-9063)의 닭곰탕(5000원),닭내장탕(4000원),고기백반(6000원) 같은 각종 닭요리나 진주집(02-753-9813)의 해장국(4500원),설렁탕(5000원)이나 꼬리곰탕,방치찜,꼬리찜 같은 별미를 권하고 싶다.두 곳 다 40,50년이 넘는 동안 다져온 맛과 솜씨가 숨은 보석처럼 갈치조림 골목에서 빛나 보인다.
  •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설렁탕 서울을 대표하는 토속음식이다.조선시대 왕이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몸소 쟁기를 끄는 친경례(親耕禮)를 하면서 60세 이상의 노인에게 곰국을 대접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왕은 친경례에서 수고한 백성에게 석잔의 술과 음식을 내려줬다.이때 내린 것으로 술은 막걸리,음식은 설렁탕이었다.설렁탕은 현장에서 쟁기질 하던 소를 잡아 끓인 것이 아니다.소를 마구 잡는 법이 아닌데다 설렁탕은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오려면 하루는 족히 끓여야 하기 때문이다.쇠고기는 성균관 인근에서 살면서 서울의 쇠고기를 독점 생산,판매하던 반촌(泮村)의 반인들이 댔다고 한다. ■“손기정·김두한·박헌영씨도 한때 단골” “맛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게 100년 장수의 비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 알려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뒤쪽 이문설농탕 주인 전성근(田聖根·59)씨는 역사의 비결을 묻는 물음에 “오래 됐다고 손님들이 오는 게 아니라 맛이 똑같기 때문에 옵니다.”라고 말했다. 1907년 개업,한 자리에서 98년째 문을 열고있는 최고의 음식점 주인 말치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신선하다.하지만 그 말 속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 담겨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이 넘는다곤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식당은 참으로 드물다.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치열했던 근세사를 건너기가 쉽지 않은 탓일 것이다. 최근 외식산업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취업도 어렵고,정년도 짧아진 세태에서 쉽게 생각하고 창업하는 것이 ‘먹는 장사’다.한 집 건너 새로 문을 열고 그만큼 간판을 내리는 업종이 외식업이다. ●70대는 ‘어린’단골 이런 까닭으로 최고(最古)의 이문설농탕이 주목받는다. 이문설농탕은 전씨 집안이 전적으로 일으킨 가업은 아니다.전씨의 어머니 유원석(2002년 작고)씨가 1960년,양모씨로부터 이문설농탕을 인수해 지켜오다 아들인 전씨에게 물려줬다. 이문설농탕의 간판을 처음 단 사람은 홍모씨로 알려져 있고 그뒤 양씨가 인수해 운영해왔다.이들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창업 연도도 여러 갈래다.당시 경복궁 주위의 경기·배재·중앙·휘문고보 등을 다녔던 노인들의 기억에 따르면 멀게는 1902년부터 짧게는 1907년까지 거슬러 간다.그래서 전씨는 가장 짧은 1907년을 개업 연도로 삼고 있다. 전씨는 “옛날에 이 부근에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할아버지가 돼 손자들 손을 잡고 오시지요.3·4대째 단골이 많지요.저희 집에선 70대는 청춘이고 90대가 돼야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60∼70년 단골이 부지기숩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70년대 초 건국대 농대를 졸업한 전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과 함께 목장을 운영했다.목장이 사실은 할아버지(田熙哲)대부터 내려온 가업.할아버지는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초대교장을 지낸 목회자였다. 전씨가 식당일에 나선 것은 어머니를 돕기로 한 1981년부터.2∼3년 ‘잠시’ 돕겠다고 식당에 나왔다.“당시만해도 식당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선입견이 달갑잖았지요.”하지만 식당일을 계속하면서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이집은 보통 집이 아니야.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이야.”하는 노인들의 격려에 힘을 얻은 전씨는 식당 운영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오늘의 이문설농탕이 있게 한 공로를 어머니께 돌렸다.그의 어머니 유씨는 1930년대에 이화여전 가사과를 나온 당시의 ‘신여성’이었다.동기로는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의 어머니 이원숙씨가 대표적이다.한국전쟁중이던 50년대 초 부산 광복동에서 유씨는 이씨와 동업으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유씨는 이후 음식점 운영의 길을 걸었다. 이 집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단골들도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시영부통령,국어학자 이희승박사,남로당 거물 박헌영,주먹천하의 김두한 등이 단골이었다.김두한은 10대때 한때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전해온다. 80년대는 먹성좋은 운동선수 특히 유도 복싱 레슬링 등 격투기 선수들이 많이 찾았다.당시 유도대표 선수들은 YMCA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고,유도선수들의 소개로 복싱 레슬링 선수까지 이어진 것이다.유도의 하형주,복싱의 김광선 문성길 등이 대표적이다. 단골이 많은 이 집의 한결같은 맛은 100년 전이나 똑같은 설렁탕을 끓여내는 방식에 있다.단지 장작이 연탄에서 액화석유가스(LPG)로,다시 액화천연가스(LNG)로 바뀌었고,무쇠솥이 압력솥으로 변한 것 뿐이다.건물도 일제시대 그대로다. ●퓨전을 이기는 전통의 맛 이 집의 설렁탕은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넣고 15시간 푹 곤다.국물이 뽀얗고 맛이 담백하면서도 짙다.그래서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부른다. 농후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국물에 분유나 프림 등을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때 많은 집들이 타격을 입었다.하지만 제대로 끓여내는 것으로 단골로부터 인정을 받아온 이문설농탕은 오히려 더 장사가 잘됐다. “음식을 엉터리로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알아차립니다.”그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유혹도 많지만 맛에 대한 고집으로 프랜차이즈나 분점도 내지 않고 있다. 상호는 1970년대에 이미 등록했다.“요즘 젊은 사람들이 ‘국적없는’ 퓨전 음식을 찾지만 이들도 나이가 들면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문설농탕은 일본 언론매체가 특집으로 다루면서 10여년 전부터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특히 아침 손님은 일본인이 더 많다.전씨는 이런 이유로 이문설농탕은 이제 자신 개인소유의 식당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역사의 명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이 된 까닭이다.“저희 집은 값도 마음대로 못올립니다.단골 어르신들에게 먼저 의향을 여쭤봅니다.”설농탕 보통 한 그릇에 5000원.수십년째 가격에 못이 박혔다. 뽀얀 국물처럼 햇빛에 바래 역사가 쌓이고 있는 이문설농탕.“전통을 잇는 장인의 각오로 이 자리를 지켜나가겠습니다.”라는 전씨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 피맛골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 피맛골

    피맛골이라는 지명을 스쳐듣고 우연히 그곳을 찾아든 이들은 대부분이 우선,‘에게,이게 뭐야.’ 하고 눈살부터 찌푸릴 터이다.당연한 반응이다.서울의 어디를 가나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풍경이 애써 나들이한 발걸음을 선뜻 골목 안으로 한 걸음 더 옮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에 남아 있는 피맛골은 고작 두 사람이 지나쳐도 쉽게 어깨를 부딪치게 마련인 비좁은 골목길에다가 길이도 20여m를 넘지 않는다.그렇다고 무슨 뛰어난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찬 것도 아니다.고작해야 열차집이라는 두어 평 남짓한 빈대떡집과 대림식당이라는 생선구이집,그리고 반대편 초입에 서린낙지라는 간판의 낙지집이 한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의식주 해결할 물산의 집합소 이 교보문고 뒤편의 피맛골 말고도 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접어드는 어름에 또 다른 피맛골이 남아 있다.서피맛골이라는 이름으로 제법 그럴듯한 장명등 간판까지 내걸고 떠들썩한 주점가로 변하여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정작 인사동 일대의 관광지구 작업에 편입되어 피맛골 자체를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변질시킨 듯한 싸구려 지분 냄새를 숨길 수가 없다. 피맛골이란 이름의 이 특이한 뒷골목은 원래 종로 1가 교보문고 뒤편에서 시작하여 종로 2가를 거쳐 3가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었지만,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도중에 여기저기 골목이 끊기는 바람에 결국 두 곳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나로서는 이 두 곳 중에서도 피맛골 하면 역시 교보문고 뒤편의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골목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 같아서 못내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에는 지금 종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 부근을 운종가라고 하였는데,이 운종가는 소위 ‘상것’들이 사는 곳이었다.운종가의 이 ‘상것’들은 사농공상이라는 봉건 가치의 가장 아랫자리를 차지한 상인들로,종이나 백정 혹은 갖바치 같은 다른 상것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 당시의 가장 윗자리 신분에 있던 사대부의 입장에서 보자면,이 운종가의 상것들은 여느 상것들과도 달리 참으로 처치곤란한 일종의 필요악이었다.애오라지 학문과 수신에만 힘써 마침내 입신출세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필생을 바쳐야 하는 사대부로서 비록 굶어 죽을망정 어찌 당장에 급하다 하여 먹고 입고 자는 따위 천한 값어치에 눈길을 줄 수가 있으랴. 바로 그런 윗자리 신분의 필요에 따라 그들 대신에 먹고 자고 입는 데 필요한 모든 물산들을 주무르는 이들이 모여 이룬 거리가 다름 아닌 운종가였다.종각 네거리 일대에 이른바 육의전이 늘어섰으니,포목 무명,명주,종이,모시,생선 등이 운종가의 주된 물품이었으며,나아가 구리개나 동대문의 배우개 저자거리에는 옥패물,유기며 사기그릇,호랑이 가죽이며 수달가죽,엽초,과일 등 조선 팔도의 모든 물산들이 빠짐없이 다 모여들었다. ●윗자리 행차 피한데서 유래 운종가가 번화하면 할수록 높은 가마 위에 앉아 물렀거라,비키거라,호령과 함께 이곳을 지나치는 윗자리들은 저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외로 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쯧쯧,선현께서 이르시되 상업이 흥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느니….’ 운종가의 상것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윗자리들이 또한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비록 신분상 아랫자리에 위치한 천한 상것이라지만,누구보다 영리하고 사리에 밝아 윗자리들의 허허실실이며 허장성세를 뚜르르 꿰뚫는 데다가 이재와 처세술 또한 뛰어나 정도 이상의 부를 이루어 먹고 입고 자는 일에 신분에 걸맞지 않은 호화를 누리는 그들로서는 윗자리의 때 아닌 눈살이며 외고개짓이 마음 편할 수는 없었다. ‘쳇,그놈의 잘난 벼슬 좀 잡았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란….’ 이런 아랫자리와 윗자리 사이의 눈살이며 외고갯짓이 한데 어울려 운종가 뒷골목에 언제부터인가 희한한 명칭의 골목길이 생겼으니,바로 피맛골이었다. 운종가에 한번 윗자리의 행차가 떴다 하면,아랫자리들은 재빨리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윗자리의 행차를 피하다 보니 뒷골목 이름 자체가 피맛골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듯 윗자리를 피해 숨어든 아랫자리들을 노려 다시 싸리나 간짓대에다가 술을 빚는 용수를 내건 선술집이 생기고,그 옆에는 다시 1m 남짓한 백지 괘등을 내건 장국밥,설렁탕,곰탕집들이 생겨나니,피맛골은 윗자리들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랫자리들만의 공간이 된 것이다.아랫자리들이 만든 이 소중한 놀이공간은 피맛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봉건시대 500여년을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만일 그대가 아직도 이 시대의 아랫자리라고 여기거나 혹은 사는 일 자체를 힘들어한다면 한번쯤은 피맛골로 발걸음을 옮길 것을 권하고 싶다.함께 올 동료가 없다면 스스럼없이 혼자 와도 좋다.그리하여 이제 막 땅거미가 스멀거리기 시작하는 피맛골에 접어들어 열차집(02-734-2849)의 허름한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라.벌써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자리라도 가서 낯선 사람에게 합석할 것을 부탁하라.백이면 백 기꺼이 응해줄 터이다. ●빈대떡에 소주 몇잔… 세상 시름 훌훌 마침내 자리를 잡으면 3장에 7000원인 빈대떡 한 접시에다 소주 한 병을 시켜라. 빈대떡이 아니라면 굴전이나 파전을 시켜도 좋다.그리하여 술과 안주가 탁자에 놓이면 소주 한 잔을 따라서 목 안에 깊이 털어넣어라. 그리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그대는 이미 혼자가 아니다.얼핏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그대에 비해 크게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는 얼굴,한 잔의 소주 혹은 한 사발의 막걸리에 이미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얼굴,바로 그대 자신의 얼굴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서 그대를 이 시대의 아랫자리에 위치하게 한 윗자리들의 허허실실과 허장성세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을 터이다. 그대가 술과 함께 밥도 먹을 작정이라면 열차집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대림식당(02-730-1665)으로 가도 좋다.삼치와 굴비,고등어 따위 생선구이 백반들이 저마다 5000원에다가 된장찌개 또한 맛이 뛰어나다.이 대림식당을 끼고 좀더 골목으로 접어들면 몇 걸음 안 가서 부산복집과 처마를 나란히 한 청진식당(02-732-8038)을 만나게 된다.불고기와 오징어볶음이 4000원에 비하면 넘칠 정도로 풍부한 양에다가 반찬은 물론 공기밥 한 그릇이라도 더 주기 위해 꾹꾹 눌러담는 주인아주머니의 큰 손이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까지도 공연스레 즐거워지게 한다. 만일 그대가 혼자가 아니라 서너 명의 벗들과 함께라면 좀더 골목을 에돌아 5000원짜리 한정식으로 이름난 남도식당(02-734-0719)을 찾거나 교보문고 뒷길에 있는 안성또순이집(02-733-5830)에 가서 20년 동안 생태찌개 한 가지만을 지켜오는 특별하고 맛깔스러운 고집을 만나기 바란다.비록 한 냄비에 4만원이지만 네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아 크게 비싸지는 않은 편이다. 일찍이 시인 신경림은 노래했다.‘못난 놈은 서로 얼굴만 봐도 반갑다.’피맛골 안의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결코 낯설지 않은 얼굴,바로 자신을 닮은 얼굴들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잘난 놈만 먹고 노는 게 아니라 못난 놈도 즐겁게 먹고 놀 수 있는 놀이공간이 피맛골이다.
  • 얼음재킷… 휴대선풍기… 점심2시간

    입추·말복까지 지났지만 ‘10년 만의 무더위’가 이달 들어서도 계속되는 가운데 산업현장이 막바지 더위 식히기에 여념이 없다.단순한 사원 복지 수준이 아니라 더위 자체가 생산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위 관리도 중요한 생산관리의 일환으로 인식되고 있다. 삼성전기는 더위에 지친 임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지난 9일부터 사흘간 수원사업장에서 ‘아이스웰빙 페스티벌’ 행사를 벌이고 있다. 임직원들은 사내식당에서 한방설렁탕과 얼음열무국수 등 ‘보양식’을 먹은 뒤 얼음조각 예술가의 공연을 보고 직접 얼음을 조각하며 더위를 이기고 있다.또 태국의 마사지 전문가 20여명을 초빙해 마사지를 받고 물풍선 던지기 등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게임에도 참여했다. 삼성전기 이상표 상무는 “매년 여름 보양식을 제공하는 등 이벤트를 벌여왔지만 올해는 워낙 더워 좀더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자동차·조선·중공업 등 유독 더위를 타기 쉬운 현장도 직원 건강 챙기기에 바쁘다. 경남 진해 STX조선은 낮 기온이 섭씨 29도 이상 올라가는 날이면 점심 시간이 2시간이다.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도 28.5도 이상이면 30분,32도 이상이면 1시간씩 점심 시간을 늘린다.또 영양닭죽,쇠고기영양탕,장어수제비,장어구이 등 거의 매일 보양식을 내놓는다. 거제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밀폐 사업장에 대형 옥외 에어컨 126대를 설치했다.개인용 에어재킷 2000여개와 제빙기 44대,에어컨 880대를 선박 조립 공장에 제공했다.부산 한진중공업은 용접 직원 700여명에게 시원한 공기가 나오는 에어쿨링 재킷을 지급했다. 현대중공업도 10억원을 들여 옥외에어컨 52대와 현장용 에어컨 30대를 긴급 설치했다.개인용 휴대선풍기 7000여대도 지급했다. 2000도의 용광로와 씨름을 해야 하는 철강업계도 ‘비상’이다. 포스코는 지난달 중순부터 의사,간호사,산업위생사 등으로 구성된 보건지원팀이 고열 작업장 14개 부서를 돌며 직원들의 땀띠나 무좀,내과 질환 등 건강 상태를 점검해 주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제철소라도 공장 내부가 바깥보다 덥지는 않지만 여름철에는 용광로 부근 작업자 등에게 방열복 외에 얼음재킷을 따로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인천 INI스틸은 제빙기와 냉장고 등을 작업 라인에 설치했고 대한제강도 기중기 운전자에게는 냉동팩 재킷을 입게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허경화 연구원은 “무더위가 계속되면 작업능률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도 커진다.”면서 “정제염보다는 오이냉국 등 음식으로 부족한 전해질을 보충하고 휴식시간도 자주 갖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우리 결혼해요]박태준(26·서울대 국사학과) 장은미(26·LG생활건강 인재개발팀)

    “천사,악마의 설렁탕 한 그릇에 넘어오다.” 저는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인문대 악마’라고 불리곤 했습니다.이곳저곳 술자리에 빠지지 않으며 장난끼있는 행동을 많이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저는 생긴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100% 연관성이 있다고들 하지요.제 신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인문대 천사’라고들 했습니다.누구에게나 웃음 가득한 얼굴로 친절한 한마디를 건네는 그녀는 그러나 그때까지는 저의 천사가 아니었지요. 1999년 겨울,저는 집에서 나와 학교 앞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고 있었습니다.마침 서울에 올라오셨던 어머님께서 친구와 먹으라면서 설렁탕을 싸주셨습니다.우유팩에 담긴 설렁탕을 달랑달랑 손에 들고 학교로 올라가자,제 신부를 포함한 동기들은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공부는 무슨 공부야.맛있는 거 싸왔으니깐 얼른 내려가서 소주나 한잔 하자.”출출했던 친구들은 흔쾌히 동의했고,자취방에 모여서 설렁탕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어,쌀이 없다.은미야,집에 가서 쌀 좀 가져와라.”친구의 한마디에 제 신부는 집에 가서 쌀을 퍼와야 했고 저는 그 길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이전부터 호감을 가졌던 여자와 단 둘이 걷는 그 날 밤의 싱숭생숭한 마음. “은미야,춥지?”손 한번 잡고자 건넸던 말에 돌아온 답은 무뚝뚝하게도.“아니.” 그날 밤 30여분을 걸으며 “춥지?” ,“아니!” 를 몇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릅니다.설렁탕에 소주 한잔 걸치고 은미를 집까지 데려다주며 수줍게 고백을 했습니다. “난 사랑보다는 정을 믿는다.너라면 평생 정들어서 함께 살고 싶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거든.사흘 후에 대답해주면 안될까?” 제 평생 가장 길었던 사흘이었을 겁니다.사흘 후 돌아온 대답은,“그날 밤 설렁탕 너무 맛있었어.나중에는 더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거지?”였다. 그렇게 맺어진 지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좋은 신부를 얻을 수 있게 미끼를 제공해주신 어머님께 감사드리며,허술한 미끼에 모른 척 넘어와 준 신부에게도 고마움을 느낍니다.처음 고백했던 그 마음 그대로서로에 대한 믿음을 지켜가고자 합니다.˝
  • [삷과 경영이야기] (13) ‘마라톤 CEO’ 구자준 LG화재 사장

    지난 4일 오전 서울 다동 LG화재 본사 사장실.인터뷰 도중 구자준 사장의 휴대전화에서 ‘띠리링∼’ 문자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5월 손익 ○○억원 초과 달성.목표치 상회.상세보고 예정-권중원 드림’경영기획본부장의 보고를 받은 구 사장이 노란색 최신형 카메라폰 위로 잰 손놀림을 이어간다.‘수고했음.오후에 상세보고 바람-구자준’ 분당 200타는 됨직한 능숙한 문자입력 솜씨.“허리춤에 전화기 차고 다니면 아저씨 취급 받는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나요.” 구 사장에게서 대기업 오너라는 딱딱한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침에 직원들과 달리기로 땀을 낸 뒤 설렁탕 한 그릇 하는 걸 최고로 친다는 그 스타일 그대로다.미사일공학 엔지니어에서 보험업계 대표 경영인으로 연착륙하기까지의 경험과 철학을 들어봤다. ●미사일공학 엔지니어가 보험CEO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창업자 가족치고는 너무 늦게 최고경영자(CEO)가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하지만 나는 그런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집안 전통이기도 하다.대학 졸업하고 금성사(현 LG전자)에 말단으로 들어가 남들과 똑같은 과정 밟아 입사 13년 만인 1986년에야 처음 임원이 됐다.우리 연배의 경우 사원에서 임원까지 평균이 15년이 걸렸으니까 2년 정도 혜택 본 것 아니냐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만일 위에서 배려해 주었더라도 내가 거부했을 것이다.폼잡는 데 익숙해지 있지 않다.어려서부터 부잣집 아들이란 소리 신물나게 들었지만,남들 다 걸어가는데 나 혼자 차 타고 편하게 갈 성격이 아니다. -원래 나는 서울대가 목표였다.그러나 68년 초 대학입시를 얼마 안 남기고 급성맹장염에 걸려 시험을 제때 보지 못했다.그래서 잠시 미국행(캔자스대,미주리대)을 하기도 했지만 70년 다시 돌아와 한양대에 들어갔다.다른 건 몰라도 수학만큼은 천재소리를 들었던 나는 공과대학을 택했고 74년 금성사에 입사했다. -현장에서 직원들과 같이 생활했는데 동료들은 ‘저 사람은 사주집안 자식이니까 곧 경영진이 될 것’이라고 수군거렸다.하지만 내 스타일을 알게 된 뒤 금세 친구가 됐다.얼마 후 방위산업 부문이 금성정밀로 분사됐고,나는 이곳에서 대학 전공을 살려 미사일 개발 분야를 맡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미사일 연구를 가장 많이 한 축에 내가 끼지 않을까 싶다.그때 우리 팀에서 해낸 일이 미국산 호크 미사일의 재(再)장착 작업 국산화였다.미사일은 실전배치된 뒤 몇년 지나면 정기적으로 내부 전자장비 등을 개보수해 재장착을 해야 한다.그때까지 우리나라는 기술력이 없어 재장착을 하려면 일일이 미사일을 미국으로 보내야 했다.미사일 기술 국산화는 지금도 나에게 커다란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마침 이번에 그 회사(현 LG이노텍내 방산부문)가 LG화재에 인수돼 ‘넥스원 퓨처’라는 계열사로 다음달 1일 출범한다. -99년 LG그룹 계열분리로 나는 생전 몰랐던 보험업계에 발을 들였다.용어부터 낯선 보험업계는 생각보다 어려움이 많았다.농사꾼이 사무실에 넥타이 매고 앉은 격이었다.“어이쿠,바로 일에 뛰어들었다가는 괜히 회사에 방해만 되겠다.” -2000년 1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보험전문대학원 TCI에 입학했다.우리 나이로 50줄에 접어든 때였지만 여유 부릴 계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해 여름 LG화재의 자회사였던 럭키생명이 최악의 경영난에 직면했다.서둘러 귀국했다. ●퇴출위기 회사맡아 ‘마라톤경영’ 시작 -럭키생명 사장은 CEO로서 첫자리치고는 너무나 여건이 가혹했다.직원 월급 주기도 빠듯한 퇴출 직전의 회사였다.사장 한달 접대비가 고작 200만원.마냥 고민할 만큼의 여유도 나에겐 없었다.더욱이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원들 앞에서 나까지 힘든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골프를 끊었다.당시 내 골프실력은 핸디3에 이를 만큼 수준급이었다.“많지 않은 돈으로 직원들을 다독일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마라톤이었다.새벽이나 휴일에 직원들을 불러모았다.1시간 정도 뛰고 나서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으면 50명이 모여도 20만원이면 족했다.가장 힘들다는 영업소의 소장들을 선발해 함께 달리기를 하기도 했다.나는 매번 꼴찌였다.맨 뒤에 처져 있는 소장들을 도착점까지 이끌어야 했다.1년여 전 시작한 달리기는 많은 힘이 돼 주었다. -자연스럽게 사내 술자리가 줄었다.어려운 회사일수록 술자리가 잦다.쓰린 마음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다음날 컨디션이 안 좋으니 열심히 일을 안 하고,그러다 보니 실적 안 오르고,또 술을 찾게 되는 ‘술의 악순환’ 고리가 끊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마라톤 경영’이라고 명명한 경영기법은 여기에서 비롯됐다.마라톤과 보험업은 비슷한 점이 많다.둘다 한번 경쟁에서 처지면 선두를 따라잡기 힘들다.제조업은 한번 대박이 터지면 수직상승을 하지만 10원,10원씩 꾸준히 돈이 쌓이는 보험은 그게 불가능하다. -보험과 마라톤에는 철저한 준비와 기초체력이 필요하다.순간적인 재치나 순발력,기술만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지구력도 마찬가지다.보험의 ‘보’자만 들어도 고개를 돌리는 게 사람들 심리다.그때마다 지쳐 포기한다면 레이스는 그걸로 끝이다.적응력과 순발력도 보험과 마라톤의 공통점이다.마라톤 코스에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는 것처럼 보험업도 순간순간 바뀌는 영업환경에 적응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다.마지막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란 점이 똑같다.통상 42㎞ 구간 중 35㎞ 지점이 되면 도저히 못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나 거기에서 포기하면 35㎞까지의 고생과 노력도 말짱 헛일이 된다. -흔히 쓰는 말 중에 ‘못 먹어도 고’란 게 있다.왜 먹을 수가 없는데 ‘고’를 하나.당연히 ‘스톱’이어야 한다.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접어야 한다.대신 확실하게 판단을 내려 게임에 뛰어들었으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우리 LG화재 경영의 1차 목표는 ‘이기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단지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자기 마라톤 기록을 2시간30분에서 2시간으로 단축시킨다 한들 남들이 1시간30분에 들어왔다면 자기 자신한테는 이겼을지 몰라도 다른 선수에게 이긴 것은 될 수가 없다. -LG화재는 ‘비전 2010’이라는 경영목표를 갖고 있다.지금은 업계 3∼4위이지만 2010년에는 확고한 2위를 차지해 1위 도약의 발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그 핵심수단이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기본기,지구력,순발력 등 모든 조직역량을 총동원하는 ‘마라톤 경영’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뷰로크라시’(관료주의)다.금성사에 있을 때부터 뷰로크라시를 없애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회사내 상관은 휴일에 등산 가서도 상관이고,골프를 칠 때도 상관일 때가 많다.그러면 그 회사는 경직돼 있는 것이다.윗사람에게 문제점을 제대로 건의하지 못한다는 말도 된다.내가 보고를 휴대전화나 문자메시지로 받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왜 다들 바쁜데 사장실 앞에 서류철 들고 죽 늘어서서 기다리나. ●‘이기는 회사’ 목표 줄서기부터 없애 -사장실 앞 줄서기는 내부 줄서기와 무관치 않을 수 없다.직원의 업무능력이 인사 고과평가의 90% 이상이 돼야 하는 데 줄서기가 만연하면 그게 어렵게 된다.직원들의 신뢰가 깨지면 인사고과의 공정성이 사라지고 투명한 인사로 평가받지 못한다.줄서기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이기는 회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인사청탁은 있을 수 없다.정기인사때 일정 직급 이상 직원의 인사파일을 모두 내가 외우듯이 들여다보는 이유다. -우리 사회 전반에 비효율이 너무 많다.예를 들어 해외에서 쓸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으려면 미국에서는 단돈 10달러와 자국 면허증만 있으면 되는데,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여권 사본을 내야 한다.여권없이 해외 나가는 사람도 있나.어차피 출국할 때 없으면 안되는 서류를 왜 번거롭게 중복해서 한번 더 제출하게 하나.대입 수능시험도 그렇다.해마다 한번씩 직장인 출근시간을 늦추고,경찰들이 수험생을 실어나르기 위해 오토바이 비상대기를 한다.차가 막혀 도착하지 못한 수험생이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시험시간을 몇 시간 늦추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 아닌가.인감증명은 일제시대 잔재인데 정작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다. -어른들을 위해 한마디.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자녀에게 직접 사랑을 표현해 보라.어색하지도 번거롭지도 않고 즉석에서 바로바로 답장이 날아온다.부모와 자녀간의 대화를 늘리는 데 이것만한 게 없을 것 같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구자준 사장은 구자준(具滋俊·53) LG화재 사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동생 고 구철회 회장의 4남4녀 중 막내다.반도상사(현 LG상사)와 락희화학공업(LG화학) 등의 사장을 지낸 구철회 회장은 창업주와 동고동락하며 그룹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구 사장은 LG전자·LG상사 등을 거쳐 1999년 LG화재가 LG그룹에서 떨어져 나올 때 부사장으로 취임했다.‘마라톤 경영’을 주창해온 그는 국내 2회,해외 3회 등 5차례의 완주경험(최고기록 4시간28분)을 갖고 있다. 해발 8611m의 세계 2위봉인 K2원정대(2001년)와 남극원정대(2003년)의 원정대장으로 현지에 동행,강철 같은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지난해 11월에는 개인홈페이지 ‘준스 스토리’(Joon’s Story)를 개설해 직원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보고의 상당부분을 휴대전화로 해결하는 능률 위주의 전문경영인이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그의 좌우명이다. ˝
  • [오늘의 눈] 새 지사가 할 일/이정규 사회교육부 부장급

    7일 오전 제32대 경남지사로 취임한 김태호(金台鎬) 지사는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민생현장을 찾았다.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변화다.취임식 자체는 전임 지사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지만 식후 다과회 등이 모두 생략됐다. 그는 마산 어시장에 들러 상인들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지난해 태풍 ‘매미’에 찢어진 상처를 달랬다.이어 오후에는 장애인 시설도 둘러봤다.저녁에는 창원시내에서 근로자와 택시기사,장애인 등 서민들과 설렁탕으로 저녁을 때웠다.그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민생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민들을 만나고 돌아설 때였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이제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할일을 찾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잇따른 선거로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묶는 일이다.선거과정에서의 대립과 갈등을 털어내고,도민들이 일상생활로 되돌아 가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특히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허물을 들추고,약점을 지적했던 이들에게도 아량을 보이기 바란다.대선이 끝난 지 1년6개월이 됐지만 아직까지 ‘친노와 반노’로 갈라진 채 반목하면서 국력을 낭비하는 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들떠있는 공직사회의 분위기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한다.총선에 이은 재·보선으로 공무원들의 기강이 풀어진 것은 사실이다.이를 다잡아야 하지만 물리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공정한 인사만이 공직사회에 신바람을 불어넣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지금 공직사회에는 선거결과에 따른 논공행상식 하마평이 무성하다.선거에 이겼으니 논공행상이 없을 수 없겠지만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마치 점령군들이 전리품을 챙기듯 공직을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도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던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이정규 사회교육부 부장급 jeong@seoul.co.kr˝
  • 이번 주말 축제약속 어때요

    이번 주말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2004 Hi-Seoul 페스티벌 행사가 절정을 이룬다.특히 페스티벌이 끝나는 9일 오후에는 패션쇼와 콘서트 등이 열려 서울의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는다. ●서울을 느끼자 먼저 8일 오후 5시 서울광장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거리응원이 재연되며,시청 건물을 활용한 빛의 축제(PiGi쇼)가 2차례(오후 8시·10시20분) 펼쳐져 흥을 돋운다.빛의 축제에서는 한글이 춤을 추는 장면과 600년전 서울의 지도 등이 시청본관에 영사될 예정이다. 9일 오후 1시에는 서울광장 인근도로에서 서울을 동서남북 4개팀으로 나눠 1000여명이 참가하는 시민화합 줄다리기가,오후 3시 종묘앞∼종로∼세종로∼시청에 이르는 2㎞구간에서는 군악대 등 2000여명이 참여하는 퍼레이드가 각각 개최된다. 이어 페스티벌을 마감하는 화려한 PiGi쇼가 오후 8시부터 펼쳐지고 8시20분에는 앙드레김이 연출하고 강수연·안재욱·장서희·이세은·공유 등이 참여하는 한류 패션쇼가,9시20분에는 엄정화·베이비복스·왁스·쥬얼리·한경일 등이 출연하는 한류스타 콘서트가 각각 열린다. 또 1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는 서울의 열기라는 주제로 시청앞과 명동,동대문,인사동,종로 등지에서 마련될 각종 행사가 시민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을 맛보자 서울광장에서 정보통신부 건물에 이르는 거리에는 원조음식과 퓨전음식,가족음식 등이 함께 어우러진 음식한마당 축제인 하이 서울 서울사랑음식축제가 펼쳐진다.‘서울을 맛보자’란 주제로 열리는 이 행사에는 45개 음식점과 10여개 관련단체가 참가하고 110여개의 부스가 설치된다. 서린동 낙지센터·원조 최대포 돼지갈비·이남장 설렁탕·남포면옥 냉면 등의 테마별 음식마당을 필두로 대학생동아리 음식마당,녹두전·묵 등을 소개하는 가족음식마당,퓨전치킨 등의 퓨전음식마당이 열린다.시음·시식 코너도 마련돼 맥주·탁주·아이스크림·오리고기 등이 무료로 제공된다. 이에 따라 8일 오후 3시부터 9일 오후 9시까지는 서울광장↔소공로,서울광장↔무교동사거리,서울광장↔롯데호텔 구간의 교통이 전면통제된다.또 9일 오전 10시∼11시30분에는 시민걷기행사가 열리는 장충단공원→국립극장→남산북측순환도로→힐튼호텔→남대문→서울광장 구간이,오후 3시∼4시30분에는 시민퍼레이드 행사로 종묘→시청 구간이 각각 부분통제된다. 장세훈 이유종기자 shjang@seoul.co.kr˝
  • 20일 선농제향 재연 행사

    서울 동대문구(구청장 홍사립)는 오는 20일 오전 10시 제기2동 선농단에서 선농제향(先農祭享) 의식을 재현하는 행사를 갖는다.선농제향은 당시 ‘농업의 신(神)’으로 전해오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위한 제사를 모시던 절차다. 선농제향 재현행사 당일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찰악대를 시작으로 구청에서 선농단까지 1.3㎞ 구간에서 어가행렬이 이어진다.오전 11시부터는 선농제향 봉행,백일장 행사,전통설렁탕 재연행사 등이 진행된다. 송한수기자 onekor@ ˝
  • [Doctor & Disease] 고대 안암병원 우울증센터장 이민수 교수

    “예전엔 사람들이 우울증을 ‘마음의 병’이라고 믿었어요.마음이 문젠데 약물치료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후 원인이 드러나,마음이 아니라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이상이 있다는 게 확인이 된거죠.당연히 치료도 되고요.” 고대 안암병원 우울증센터장을 맡고 있는 ‘우울증 박사’ 이민수(53) 교수.그의 우울증 얘기는 재밌고 명쾌해 우울하지 않았다. ●정상적 생활 가능하면 ‘우울감’일 뿐 우울증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질환으로서의 우울증은 일반 사람들이 단속적으로 느끼는 우울감과는 구별된다.슬프다,괴롭다는 느낌은 누구나 갖는 감정인데,이런 감정이 일상적 수준을 넘어 2주 이상 지속적으로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경우 우울증으로 진단한다.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면 그건 우울감이지,우울증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발병 실태는 어떤가. -국민의 평생유병률,즉 일생동안 한번 이상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전 국민의 7∼8% 정도이니,가볍게 볼 질환이 아니다.최근에는 우울증의 진단 범위가 확대돼 보다 적극적인 우울증 판정이 가능해졌다.사회구조가 단순했던 옛날에 비해 우울증 발현의 소지는 크게 높아졌다. 원인은 어디에 있나. -우리 사회의 모든 환경이 원인이다.예컨대,신세대 자녀가 컴퓨터를 모르는 부모에게 “e메일 보냈으니 챙겨보세요.”라고 한다.부모에게 이건 압박이고 소외다.이런 게 우울증의 단초가 된다.타고난 경우도 있고,스트레스,암 등 다른 질환이 주는 절망감,사고에 의한 뇌손상,핵가족화에 의한 의지처의 상실,평균 수명 증가에 따른 뇌기능 약화 등이 다 원인이 된다. 유전적 소인은 어느 정도 되는가. -드러난 환자의 10∼15%가 유전적 소인을 갖고 있다.이보다 훨씬 많은 40∼50%의 환자는 체내 신경전달물질의 생성 및 공급체계에 이상이 있는 경우다.이걸 신경생화학적 요인이라고 하는데,뇌하수체가 통제하는 노르에피네프린이나 세로토닌,토파민 등이 부족해 발병한다.이런 우울증은 비교적 치료가 쉽다. ●‘양념’이 없으니 삶이 재미없고 우울한 것 그는 우울증을 설렁탕으로 설명했다.“우리 삶이 설렁탕이라면,먹기 전에 거기에는 소금과 다른 양념을 넣어 맛을 내야 하는데,양념에 해당하는 신경전달물질이 체내에서 조달되지 않습니다.그러니 삶이 재미없고 슬퍼지죠.”그는 얘기 도중,조울증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우울증이 슬픔,괴로움,절망감 등 정상보다 처지는 감정을 느끼는 질환이라면,조울증은 이런 감정과 함께 정반대되는 비현실적 망상이 교차되는 질환입니다.증상이 복합적이라 우울증보다 다루기도 어려운데,헤밍웨이가 대표적인 조울증 환자였죠.그는 조증 발현 때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다가,우울증이 발현돼 자살을 했습니다.” 의학적 진단 기준은 무엇인가. -증세에 따라 경도,중등도,고도로 구분한다.주요 증상과 부수적인 증상의 발현 정도를 가려 판정한다. 우울증과 자살은 어떤 상관성이 있나. -우울증은 공격성과 파괴성을 갖는데,그런 성향이 타인을 향하면 타살,자신을 향하면 자살이 된다.조사해 보니 자살자의 뇌에서는 세로틴이 정상인보다 훨씬 적었다.실제로,우울증 환자의 60∼70%는 한번 이상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으며,이중 10∼15%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인데,이는 정상인의 40배가 넘는 수치다.성별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자살을 3배나 더 많이 시도하지만,성공률은 남자가 여자보다 3배 정도 높다.노인도 성공률이 높다. 증세의 심각성에 비해 일반인들의 이해도는 낮은 편인데. -그게 문제다.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 사람이 전체 환자의 20%에 불과하다고 보고있다.나머지 80%는 치료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명백하게 ‘뇌의 병’으로 입증된 우울증을 아직도 ‘마음의 병’으로 아는 무지,우울증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게 하는 사회적 편견,그리고 우울증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지 못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문제다. ●항우울제 좋아 감기보다 치료 잘돼 그러면서 그는 우울증은 반드시 치료받아야 하고,또 양질의 항우울제가 많이 개발돼 감기보다 치료 효과가 좋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울증은 치료되는 병인가. -당연하다.치료만 받으면 환자 10명중 8명은 정상 생활이 가능하며,나머지 1명도 약물과 정신·재활·행동인지치료 등으로 치료할 수 있다.어떤 질병도 이렇게 높은 치료율을 보이지 않는다.약도 좋다.예전의 약물은 치료효과가 좋고 값이 싼 대신 심장에 부담을 주거나 녹내장,체위성저혈압 등 부작용이 있었다.그러나 요즘 약제는 부작용을 대폭 개선한 것들이다. 난치성 우울증도 있을텐데. -망상증 등 정신병과 겹치거나 유전적 소인이 있는 경우,또 예전에 치료반응이 안좋았거나 알코올중독,불안장애 등 다른 증상이 겹치면 치료효과가 떨어진다.그러나 꼭 약물로만 치료하는 건 아니다. ●사회적 편견 없애는 데 정부 나서야 우울증에 대한 그의 확신이 미더웠다.그는 정부가 우울증에 대한 계몽과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진단 및 발굴,그리고 사회적 통념을 제거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한 사람의 우울증 환자는 가족 등 주변 사람도 우울하게 만듭니다.이런 점에서 우울증은 전염되지 않지만,전파되는 병입니다.그래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끝으로,그는 이렇게 덧붙였다.“모든 병은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심신이 우울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규칙적인 운동과 활발한 사교활동,취미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며,가족들도 언젠가는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돕고 기다려야 합니다.포기는 절망입니다.” 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
  • 주말매거진 We/서울탱고-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강바람에 실려오는 알싸한 냄새와 불빛…. 마포의 밤은 그렇게 변함이 없다.강건너 영등포에는 여전히 불빛이 반짝이고 겨울바람에 묻어오는 강 냄새는 코끝을 파고 든다. 밤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곳없는 나도 섰다/강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밤/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1967년 은방울자매가 불렀던 ‘마포종점’은 4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울의 종점에서 도심으로 변했다.‘종점’이던 곳은 중간역으로,지상에 있던 역이 지하로 내려갔고 여의도 비행장은 빌딩 숲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근대화의 상징이던 당인리발전소는 한강변에 들어선 아파트촌으로 왜소해졌다. 마포를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통금시간(밤 12시)에 쫓겨 밤전차에서 내려 허겁지겁 달리지않아도 되고 종점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어디든지 찾아 나설 수 있다. 마포나루에서 풍기던 새우젓 냄새는 온데간데없다.전차의 종점지역인 마포동에는 방송국(불교방송),호텔(홀리데이 인 서울)과 음식점들이 즐비해 구수한 고기굽는 냄새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건너편 용강·신수동쪽의 설렁탕,해장국집들은 유흥주점과 어울려 불야성을 이룬다.썰렁하기만 했던 새남터는 성지로 지정돼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인근에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상암월드컵 경기장이 위용을 자랑한다. 숱한 사람들의 사연을 싣고 다녔을 전차는 사라지고 지하철이 대신하고 있다.동대문을 출발해 종로∼광화문∼서대문∼아현동∼애오개∼마포종점을 오가던 전차길 밑으로 지하철 5호선이 누비고 있다.마포종점이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은 마포동 마포어린이공원에 위치한 작은 ‘마포종점비’뿐이다.노래비도 나란히 자리잡고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은 곳이라 왠지 쓸쓸해 보인다. ‘서울이야기’라는 수필집에서 마포나루의추억을 엮은 서원석씨는 “마포종점에 다달아…뗏목들이 물가에 묶여 있고,많은 범선에서는 새우젓 독을 지게에 메고 분주히 나르고,…저 멀리 강 건너 밤섬에는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강변의 운치를 더하였고,…반짝이는 백사장 뒤쪽에는 자그만한 비행장이 있었다.”고 마포종점 부근을 회고했다. 은방울자매의 맏언니 박애경씨는 “마지막 밤전차는 ‘홍등’을 달아 쓸쓸함을 더했다.”고 말했다.마포에서 우리의 대중가요사를 집필하고 있는 ‘한국대중예술문화연구원’의 지명길 공동대표부회장은 “마포는 전차뿐 아니라 한강물길의 종점으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다.”며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은 당시의 이 지역 풍광에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잔잔한 곡에 잘 접목함으로써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동구 기자 yidonggu@ 은방울 자매 맏언니 박애경씨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은방울자매의 맏언니 박애경(사진·67)씨는 ‘마포종점’의 인기비결이나 생명력은 서울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분위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요즘도 방송에 출연할 때면 이 곡만 요구해 난처할 때도 종종 있다.”며 여전한 인기를 자랑한다. 우리 가요를 사랑하는 대다수의 팬들은 ‘은방울자매’하면 ‘마포종점’을 떠올린다.자매의 대표곡이자 우리 모두의 애창곡이 됐다는 방증이다. ‘마포종점’과 은방울자매의 인연은 ‘박춘석사단’의 입성으로 시작된다.이전에는 후배 김영희(현재 LA거주)씨와 함께 ‘삼천포아가씨’ ‘무정한 그 사람’ 등을 부르며 ‘은방울자매’라는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하지만 자매의 이름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게 된 것은 바로 ‘마포종점’이다. 1967년에 나온 이 곡은 당시 최고의 작사·작곡가였던 정두수·박춘석씨 작품. 이들은 마포종점 주변의 한 음반회사에서 자주 밤샘작업을 하면서 이 노래를 만들어 냈다.“두 분이 심야작업중 해장국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여의도,영등포,마포의 전경을 그리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발표 당시에는 이처럼 오랫동안 사랑받을 줄 몰랐다.”고 털어놨다.“하지만 당시로서는 64년에 발표된 이미자씨의 동백아가씨 이후 최대의 히트곡으로 음반 판매량도 10만여장에 이른다.”고 말했다.오디오(전축)시설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은방울자매의 음반을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판매량이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기에 마포의 야경을 담은 노랫말과 감성을 자극하는 곡으로 우리네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동구기자
  • “참여정부 솔직히 일못한다”/강법무 “법치 기반 약하고 전문성 없어 나의 진짜꿈은 노는것… 진짜 사랑도”

    “솔직히 일 못하고 실질적인 법치가 구현될 기반이 약하다.” 강금실(사진) 법무부장관이 최근 월간 신동아 1월호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낮은 지지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강 장관은 ‘참여정부의 지지도가 역대 정권보다 낮은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솔직히 첫째는 일을 못하기 때문이고,둘째는 실질적인 법치가 구현될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라면서 “참여정부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전문성이 없고 기량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강 장관은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듣고 섭섭해도 이는 사실”이라면서 “참여정부가 가진 원칙과 철학이 바람직하지 못하면 두들겨 패지만 말고 잘못해도 기다리고 격려해 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치권이 밀어붙인 특검에 대한 소신 비판도 나왔다.강 장관은 “수사의 문제가 아니라 정략적인 이유로 일반 수사 시스템을 중단시키는 것은 국가 시스템을 흔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강 장관은 “설렁탕 집에서 ‘특’을 주로 팔면 ‘보통’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러려면 차라리 검찰을 없애고 특별검사가 하게 해야 하나 국가기관이 그럴 순 없다.”고 비판했다. 강 장관은 “나의 진짜 꿈은 노는 것이고 기회가 있다면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고백도 했다.강 장관은 “공부 잘한다고 해서 그냥 법대 보냈는데 갈등이 많았으며 지금까지 내가 한 일중 가장 잘한 일은 춤을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관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춤을 배웠고 96년 변호사 시절에도 춤에 매료돼 살풀이 인간문화재인 김숙자 선생의 딸에게 1년 정도 춤을 배웠다. 안동환기자
  • 숨고… 쫓고…/불법체류 단속 첫날… 식당 주인들 일손 없어 ‘발동동’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단속 첫날인 17일 불법체류자와 단속반 사이에는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이어졌다.단속 현장에서는 하루종일 하소연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옥탑방 기습… 옷가지·사진만 덩그러니 이날 오후 1시 서울 구로구 오류역 주변 여관밀집지역.합동단속반원 30여명이 들이닥쳤다.시 외곽부터 뒤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불법체류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단속반이 E모텔 옥탑방으로 올라갔지만 방에는 가족사진과 중국제 약,옷가지들만 남아 있었다.모텔 주인은 “일하던 종원업이 놔두고 간 것”이라고 해명했다.단속반원들은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영장이 없기 때문에 모든 방을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발길을 돌렸다. 비슷한 시간 서초·강남·동작구를 맡은 합동단속반 4반 소속 6명은 강남구 신사동 주변 식당들을 뒤졌다.탐문 끝에 한 삼겹살 집에서 지난해 2월 입국한 이모(39·여)씨를 발견했다.이씨는 한국인과 결혼한 것으로 돼 있었고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있었지만 위장결혼 여부를 가리기 위해 출입국관리소로 보내졌다.이어 한 설렁탕집에서 2000년에 입국했다는 중국 동포 강모(21)·이모(31)씨가 적발됐다.이들은 외국인등록증에 등록된 업체와 실제 일하는 곳이 달랐다.이들은 “전에 일하던 곳의 형편이 어려워 이달초 옮겼다.”면서 “근무장소를 바꾸는 것이 불법인지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절박함 하소연·탄식… 전국서 70명 붙잡아 낮 12시쯤 경기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에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러시아인 클라우디아(50·여)가 안산역 앞에서 인천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검문에 걸린 것.그는 호송차에 실려 인천 출입국관리사무소 보호실로 옮겨졌다.외국인노동자센터 차승만 소장은 “강제로 잡혀가면서 절박함을 호소하는 전화가 잇따르고 있다.”면서 “이처럼 무차별로 잡아간다면 죽음의 사슬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실제 지난 2001년 입국해 한국 남성과 결혼한 중국동포 김모(25)씨는 최근 이혼당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하자 강제출국당할 것을 우려해 지난 14일 밤독극물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나 생명이 위독하다. 상인들은 사람을 구하기 어렵고 인건비가 크게 올랐다며 울상을 지었다.신사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이민자(44·여)씨는 “인건비가 크게 올라 생활정보지에 한달에 130만∼140만원을 준다고 해도 연락이 안온다.”면서 “한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라도 고용하려고 아르바이트생 4∼5명이 살 수 있는 전셋집을 1억원을 주고 구해놨다.”고 한숨을 쉬었다.이날 밤 10시 현재 서울과 경기 남부지역에서만 불법체류자 30여명이 적발되는 등 전국에서 모두 70여명이 붙잡혔다. ●단식농성 중국동포 탈진자 속출 중국동포 3000여명은 서울과 경기 지역 8개 교회에 나뉘어 나흘째 단식 농성을 벌였다.서울 명일동 명성교회에서 농성 중이던 중국 지린(吉林)성 출신 문분선(57)씨 등 7명은 이날 탈진,병원으로 실려갔다.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와 민주노총이 주축이 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단’은 명동성당 입구에서 사흘째 농성했다. 한편 법무부는 지난 15일까지 단속대상 2만 3441명이 자진출국했다고 밝혔다.또 11월 들어 출국자가 늘어 단속대상자는 10만명 정도로 줄었다고 덧붙였다. 유영규 이유종기자 kbchul@
  • 駐中 대사관 탈북자 실태 / 최소 2~3개월 ‘칼잠’자야 3국행

    베이징 동부 자오양(朝陽)구 싼리둔(三里屯) 외교단지내 주중 한국대사관과 영사부의 문은 13일 현재 굳게 닫혀 있다.지난주부터 현재 수용된 탈북자들의 수가 수용한계를 넘어,더 이상 영사업무를 볼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주중 대사관 영사부에 들어와 기거하는 탈북자들은 현재 120∼130명선으로 영사부의 적정 수용 능력인 50명선의 두배를 훨씬 웃돌고 있다.탈북자의 출국을 담당하고 있는 중국 공안(公安·경찰)측의 조사가 늦어진 것이 주요 원인이다.이들의 출국을 원활히 하기 위한 중국당국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이는 앞으로도 영사부는 이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상적인 영사업무는 계속 보기가 힘든 형편이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평소 업무가 시작되는 오전 9시부터 비자발급을 위해 장사진을 이룬 인파들이 사라져 영사부 앞은 극히 한산하다.주중 대사관이 “영사부내 탈북자들의 수가 급증해 정상적인 업무를 볼 수 없다.”며 업무 중단조치를 내린 것은 지난 7일.1주일째 영사부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영사부 정문에는 게시된 업무 중단 고시문을 읽고 발길을 돌리는 민원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한국의 거래처에서 초청장을 받고 입국 비자를 신청하러 왔다가 “꼭 가야 하는데…”라며 발길을 돌리는 중국인들이 간혹 눈에 띌 뿐이다.흰색 영사부 건물 현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이곳에 진입한 탈북자들의 임시 숙소가 나온다.외부와 엄격히 차단됐고 촘촘한 창살로 막아 놓은 창문 앞에는 탈북자들이 말리려고 내건 빨래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고 있다. 영사부 관계자는 “올초에는 하루에 1명꼴로 탈북자들이 이곳에 들어왔는데 최근 두세달 동안 두배 이상이나 늘었다.”고 밝혔다.평균 1명의 탈북자가 영사부에 진입 후 제3국으로 출국하기까지 최소한 2∼3달이 걸린다.새로 탈북자가 영사부 진입에 성공할 경우 이 사람은 그동안 들어온 탈북자 처리 때문에 15∼30일 정도 영사부에서 대기해야 한다. ●영사부앞 발길돌리는 민원인 줄이어 자기 순번이 와도 중국 공안의 조사 대상은 하루 2명에 불과하다.통역 등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조사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중국 공안의 무성의도 처리 지연의 큰 이유중 하나라고 한다.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20명이면 열흘이라는 시간이 조사로 허비되고 사실 확인까지 다시 한달 정도가 소요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여기에 중국 관료체제 특유의 ‘만만디 행정’도 출국 처리 지연에 한몫한다. 이 때문에 대사관측은 올들어 수차례나 처리 속도를 빨리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제대로 시정되지 않고 있다.탈북자 처리문제를 놓고 중국 공안 내부의 강온파간의 갈등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탈북자들의 처리속도를 빠르게 할 경우 더 많은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중국 경찰내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한 외교 소식통은 주중 대사관이 탈북자들의 주요 루트가 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중국 공안내 세력들이 처리 속도를 지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주중 대사관의 영사업무 중단 조치도 내심 중국 공안을 압박하는 일종의 카드”라고 밝혔다.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중국공안이 인원을 늘려 조사기간을 단축하고 불필요한 행정절차를 줄이는 것이 탈북자 처리 속도가빨라지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영사부내에서 자율적으로 단체생활 현재 주중대사관 영사부내에는 120∼130명의 탈북자들이 숙식을 하고 있다.이들은 아침 7시에 기상해 밤 11시 취침까지 외부인들과 엄격히 단절된 채 자율적인 단체생활을 한다.창밖에 내걸린 빨래를 제외하곤 여기가 탈북자 수용시설이라는 징표를 발견할 수 없다.영사부 내부건물은 500여평이고 이중 3분의1 정도가 탈북자 수용 시설이다.50명선의 적정 수용 능력을 두배 이상이나 뛰어넘은 상황이다. 영사부 직원 휴게실과 창고 등을 개조해 강당 크기의 큰 방 1개와 중간크기 방 2개,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뤄졌다.휴게실은 물론 면담실까지 모두 탈북자 숙소로 변한 것이다.방마다 실장이 있고 일요일 오후에는 자체적으로 예배 등 종교활동도 허용됐다.24시간 건물 안에서 나올 수 없지만 쓰레기 당번만은 예외다.바깥 바람을 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경쟁률’이 높다고 한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남녀간 취침 장소가 구분돼 있으나 한 가족의 경우 가급적 한 방을 내주고 있다.”고 전했다.잠은 군대 내무반처럼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지만 5명 정원의 방에 12명이 ‘칼잠’을 자는 것이 현실이다.이들은 하루 세번의 식사 시간 이외에 대부분 자유시간이 주어진다.이 시간 동안 독서를 하거나 남한 TV를 시청하지만 일부는 영어회화 등에도 열심이다.하지만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섞여 있어 갈등도 표출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식사.하루에 300그릇이 넘는 식사를 대기 위해 베이징 인근 한국식당들을 번갈아 한달 정도 지정한다.김치찌개와 된장찌개,설렁탕 등이 주 메뉴다.건강관리 또한 주요 관심사다.보통 의사들이 정기적으로 왕진을 한다.지난 4월 사스파동 때 노심초사했다는 것이 대사관측 설명이다. ●중국정부,국제여론 의식해 감시 느슨 지난해 5월 23일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영사부에 진입한 이후 그동안 200여회에 걸쳐 500여명이 이곳으로 들어왔다.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철조망을 넘거나 육탄돌격도 마다하지 않던 탈북자들은 올들어 가짜 중국 공민증(주민등록증)을 들고 버젓이정문으로 들어온다.탈북자 문제가 더 이상 국제적 이슈로 되지 않기를 바라는 중국정부가 상대적으로 감시를 느슨하게 풀어준 것도 주요 이유다. 중국의 한 외교 소식통은 “올초부터 미국과 독일 스페인 등 제3국 대사관 영사관 진입을 시도했던 탈북자들이 최근 들어 감시가 소홀한 주중 대사관 영사부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고 귀띔했다.한국행을 기다리는 탈북자 대부분은 북한을 탈출한 이후 2∼3년씩 중국 대륙을 떠돌며 한국행을 노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이 과정에서 탈북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나 조선족 브로커들과 선이 닿아 이들의 도움으로 가짜 공민증을 만들어 주중 대사관에 진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가짜 공민증 비용은 보통 200(3만원)∼300위안(4만 5000원)이지만 한국행이 성공할 경우 정착금(3000만원) 중에서 대략 1000만원 안팎의 거금을 브로커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동북 3성에 20여만명 떠돌아 최소 1만명에서 최대 20만명(시민단체 주장)으로 추정되는 탈북자들은 대부분 지린과 랴오닝,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에 퍼져있다.지린성 옌볜조선족 자치구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중국에서는 지난해 6월 탈북자 색출을 강화한 이후 이들을 숨겨준 중국인(조선족 포함)들에게 무거운 벌금형을 내리고 신고하면 포상도 있다. oilman@ ■중국내 탈북자 실태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내 탈북자들은 제대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 언제 북한으로 송환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탈북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어 중국내에서도 불안한 생활이 계속된다.이런 상황에서 기본적 인권을 침해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다.대부분 극빈 생활을 하고 있고 심각한 인권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탈북 여성들이 주로 농촌지역에 사는 중국동포 노총각의 결혼 상대로 소개됐으나 지금은 한족 남성들의 탈북 여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매매혼이 성행하고 있다.탈북자는 중국에서 결혼을 해도 법적으로 인정된 혼인관계가 아니어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다. 최근엔 일부 탈북 여성들이 산간 오지나 농촌,향락업소에 팔려가 감금된 채로 성폭행을 당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과 매춘을 강요당하기도 한다.또 탈북을 원하는 북한 여성들을 데려와 매춘을 알선하는 전문조직도 활동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탈북자들은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착취당하고 있다.친척 등의 도움을 받고 있는 탈북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은신처를 구하기 위해 산간 오지에서 양몰이를 하거나 벌목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현지인들이 꺼리는 힘든 작업을 하면서도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체불 임금을 요구할 경우엔 고발하겠다는 협박을 받거나 폭행당하기 일쑤다.임금을 요구하다 중국 당국에 고발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거나 피신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여론 조사에 따르면 일하면서 생활하는 탈북자들 중 40%가 숙식은 제공받지만 임금은 전혀 못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탈북자 안전문제에 대해 국제적인 여론 환기가 시급하다고 이들을 돕는 인권단체들은 호소하고 있다.
  • 이집이 맛있대요 / 울산 포천식당 ‘선지해장국’

    술 마신 다음날 숙취에다 속까지 살살 쓰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이 국물이 시원한 해장국이다. 울산 남구 달동 남구청 옆 ‘포천’은 이럴 때 딱 맞는 맛집이다.문을 연지 4개월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소문 난 해장국집이 됐다. 주방장 겸 주인 최동호(48)씨는 “부모의 보약을 달이는 정성으로 음식을 만든다.”며 맛만큼은 자신한다.그래서 ‘먹고난 뒤 맛이 없다고 생각되면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가도 된다.’는 안내문까지 내걸어 놓았다.주 메뉴는 선지해장국과 설렁탕. 담백한 국물맛의 비결은 물 양과 불 세기를 철저하게 조절해가면서 소뼈를 이틀 동안 삶아 우려낸 육수에 달려 있다. 선지해장국은 이처럼 정성을 다해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다 몇번씩 깨끗하게 씻어 냄새를 없앤 소내장,우거지,콩나물,대파 등 10가지가 넘는 재료를 넣어 끓인다.먹을 때 고추씨 기름을 양념으로 곁들인다. 설렁탕은 육수 국물에다 양지머리(소 가슴 부위 뼈와 살) 등을 넣어 끓여 국수사리와 같이 낸다. 젓갈 대신 육수를 사용해 담가 섭씨 영하20도에서 숙성시킨 뒤 내놓은 김치도 별미.설렁탕에 척척 얹어서 먹으면 맛깔스럽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
  • 100년전의 한국 / “호랑이 가죽 팝니다” 신문 광고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1904년은 서양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던 개화기의 끝자락이었다.이듬해 을사조약 체결이 보여주듯 일본의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절,우리네 삶은 근대 문물과 전통이 혼재한 가운데 소용돌이처럼 급변하고 있었다.종로 거리를 전차가 차지하고,전화가 등장했다.양복이 한복을 대신했고,여인네들은 장옷을 벗어던졌다.대한매일신보가 첫 선을 보였던 시절,당시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지 100년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외국인들에게 ‘코리아’의 상징물로 잘 알려진 남대문.성벽도 없는 흉물(?)로 변해버린 것은 일본에 의해서였다. 1908년 당시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일 황태자를 초청하면서 남대문을 헐자고 했던 것.“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하는데 냄새나는 조선 대문을 걸어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전체를 허무는 것은 무산됐지만 결국 서쪽 성벽을 헐고 큰 길을 내 황태자가 탄 마차를 통과시켰다.다음해에는 동쪽 성벽마저 허물어 남대문은 ‘두 팔’을 잃었다. ●전차 아무데서나 세워 1904년 당시 서울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는 전차였다.전차가 처음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 17일.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연결하는 8㎞ 구간으로 1896년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 두번째였다.전차요금은 상등 3전5푼,하등은 1전5푼이었다.당시 대한매일신보 한 부의 가격이 2전5푼임을 감안하면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거장은 따로 없었다.승객의 요구에 따라 아무곳에서나 섰다.당시 전철이 개통되자 이를 신기해하며 하루 종일 전차를 타고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왔다갔다 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차가 항상 인기만 누리던 것은 아니었다.당시 큰 가뭄이 들었는데 전차가 원흉으로 지목됐다.전차가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해서 가물다는 황당한 유언비어였다.결국 사고가 터졌다.개통 10일만인 5월 26일 종로 2가에서 전철길을 건너던 5세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즉사했다.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전차에 덤벼들었고 성난 군중이 전차 2대를 불질렀다.이후 4달동안 운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 인기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아 1930년대에는 하루 평균 232대의 전차가 2000여명의 승객을 실어날랐다. 인력거는 택시역할을 했다.1911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육상교통수단은 자동차와 인력거,말수레,승용마차가 담당했다.하루종일 달리다보니 인력거꾼의 체력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운동회가 열리면 달리기대회 1등은 항상 인력거꾼이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기 2년 전인 1902년,처음으로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됐다.당시 전화가입자는 24명.이중 조선인은 2명에 불과했다.시외전화가 먼저 개통된 것은 시내의 경우 하인을 보내 연락한 탓에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1920년대 이후에야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정착,1924년 서울의 전화가입자는 5969명까지 늘었다. 점점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 패션도 서구화됐다.1900년 문관들의 복장이 양복으로 바뀌었고 앞서 1896년에는 육군복장규칙이 제정되면서 구미식 군복이 등장했다.그러나 당시 양복은 개화에 영향을 받았거나 돈이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을 뿐 서민들의 옷차림은 무명옷이었다.갑오경장 이후 여성들의 외출이 훨씬 자유로워지면서 외출시 덮어썼던 장옷이나 쓰개치마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대신 등장한 것이 검정 우산.얼굴을 내놓고 다니기 쑥스러운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선호되면서 검정우산은 외출 여성들의 필수품목 1호가 됐다.당시 서울 자하문 밖으로 소풍을 갔던 한 여학생은 소풍감상문에 “양산에 가려 경치라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하루 종일 내 발등만 보고 다녔다.소풍이란 발등만 보는 운동회다.”라고 할 정도였다. ●성냥·비누 가장 잘 팔려 여성 옷차림의 변화는 1907년 김활란씨가 도쿄에서 귀국하면서 챙머리 헤어스타일에 발목 위까지 올라가는 검정 통치마를 입은 것이 발단이 됐다.이 패션은 여성들 사이에 ‘양장미인,단발미인,모단걸(毛斷傑·modern girl)로 불리며 신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미(美)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욕구는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화장품이라고 해봐야 머리빗는데 쓰는 동백기름,분꽃의 씨를 빻아만든 분가루 등 천연재료가 전부였다.팥이나 녹두가루는 비누를 대신했다. 비누는 1882년조선과 청나라가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입됐는데 잡화상이 밀집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에서는 성냥과 함께 최대 히트상품이었다.1904년 당시 비누 1장의 가격은 1원.당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 80전이었던데 비하면 엄청나게 비쌌다.비누향은 ‘멋쟁이 냄새’로 통했는데 일부러 세수할 때 비누기를 남겨 향이 오래가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대중에 연분 화장품 인기 당시 가장 대중적인 화장품은 연분(鉛粉)이었다.고급 화장품에 비해 값이 싼데다 화장이 잘 퍼졌기 때문.특히 화류계 여성들에게 인기만점이었는데 연분 때문에 신세를 망친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연분은 납조각에 식초를 바르고 숯불에 달궈서 생기는 하얀 가루를 원료로 하는 일종의 가짜 화장품.바를수록 납에 중독돼 얼굴이 시퍼렇게 망가지는 납중독 증상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자리가 없던 시절,가장 보편적인 직업은 식모나 급사 등 집안 일을 돌보는 ‘가사사용인’이었다.지게꾼과 인력거꾼 등 일용노동자가 그 다음으로 많았는데 이들의 일당은 최고 40전으로 설렁탕 한 그릇(15전)도 마음놓고 먹기 어려웠다.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에서 주인공 박첨지가 운수가 억세게 좋아야만 설렁탕을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 당시의 노동 현실이었다. 서민들의 삶터는 역시 초가집이었다.1899년 7월 서울의 주택은 4만2870호에 인구 20만992명이었다.이 가운데 초가집은 2만9831호로 전체의 69.6%를 차지했다. 양옥도 등장했는데 ‘쉬익-’소리를 내는 스팀 난방시설 때문에 웃지못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918년 호텔을 개조해 만든 이화학원 기숙사의 스팀 난방을 본 학부모들은 뜨거운 김이 음기(陰氣)를 죽여 불임증을 유발한다며 기숙사 사용을 거부했다. TV가 없었던 시절,광고는 신문광고가 거의 전부였다.최초의 광고는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 제4호에 등장한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광고였다.판매물품은 호랑이와 수달 가죽에서 사람 머리카락,담배,돼지발톱,성냥 등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취급했다.처음에는 잡화광고와 책광고가 대부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생필품 광고는물론 다이어트 광고까지 등장했다. ●기사는 이경재씨의 ‘한양이야기’와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펴낸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에서 일부 발췌해 재구성했다. 김재천 기자 patrick@
  • “딱 반병만 酒”강남 직장인 낮술로 인기

    서울 강남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장진부(30·송파구 오금동)씨는 ‘주당’으로 통한다.그러나 퇴근 뒤 소주 한잔 못 걸친 게 벌써 두 달째다.저녁 때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기 때문.대신 점심 때면 근처 식당에서 소주 반병만 따로 파는 ‘반병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장씨는 “업무에 지장이 없을 정도여서 다른 직장인도 많이 즐긴다.”고 말했다. 요즘 강남 서초동 교보타워 사거리 주변 등지의 식당가에서 낮술용 ‘반병주’가 인기를 끌고 있다.불경기의 여파로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어학 실력을 쌓거나 자격증을 따느라 퇴근 뒤에도 술 한잔 못할 정도로 분주한 직장인이 늘고 있는 탓이다.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집안 일 때문에 일찍 귀가하는 직장인도 ‘반병주’를 많이 찾는다.‘추억의 반병 소주’ 등 식당 메뉴에 적힌 이름도 다양하다.반병주라고 해서 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한 병을 시켜 반만 마시되 한 병의 반값인 1500∼2000원만 받는다.남는 술은 고기 냄새 제거 등 조리에 쓴다. ‘반병주’를 취급하는 서초동 곰나무집 설렁탕 직원 이현수(31)씨는 “매일 점심마다 20병 이상 나간다.”고 말했다.부담없이 낮술을 즐기려는 직장인을 중심으로 수요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
  • [맛 에세이] “죄송합니다”

    3년 전,열흘 정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습니다.커피를 따라주던 스튜어디스가 실수로 제 옷에 커피 한 방울을 흘렸습니다.그때부터 난리가 났습니다. 바비 인형처럼 예쁜 스튜어디스가 물수건을 들고 제 옆에 앉아 ‘sorry’를 연발하는데 나중에는 제가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잖아도 10년 전에 사서 오래도 입었고,출장 기간 중에 줄곧 입고 있던 재킷이라 도착하면 이제는 그만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옷이라는 설명을 하자 그제야 그녀는 돌아가더니 그 항공사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갖고 왔습니다. 청진옥에서 해장국을 먹다가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생각났습니다.하루 종일 푹 고아낸 쇠뼈 국물에 뚝배기 하나 가득한 선지에 양지,내장이 너무 푸짐해 뿌듯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앗!’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종업원이 어떤 손님의 발에 물을 좀 흘리고 당황해서 소리를 냈나 봅니다. 그런데 좀 있다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카운터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손님에게 물수건을건네며 “손님한테 실수를 했으면 ‘죄송합니다.’ 해야지 ‘아싸!’는 뭐냐.”고 그 종업원을 나무라는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으니까 그 손님 눈 꼬리가 단번에 내려가더군요.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습니다. 음식점에서도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납니다.종업원이 접시를 떨어뜨리거나,손님이 물을 엎지르거나,종업원이 손님에게 피해를 주거나,손님이 종업원에게 함부로 대해서 말 싸움이 시작되는 등의 일 말입니다.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간난신고 희로애락처럼 당연한 일입니다.하나의 작은 사회 안에서 사람들끼리 부대끼다 보면 늘 일어나는 일이죠.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는 것이지요.대응 방법이 음식점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게 신기하죠.음식 스타일도 그렇고 분위기도 캐주얼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종업원이 실수로 컵을 떨어뜨려 컵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면 그 ‘랑’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주방과 홀의 종업원들이 한목소리로 동시에 “죄송합니다!”고 외치죠.때론 컵 깨지는 소리보다그 죄송합니다라는 소리에 더 놀라 웃곤 합니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코스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종업원이 웬만큼 서툴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 어쩌다 실수가 일어나면 지배인이 홀을 한 바퀴 돌며 손님들과 눈을 맞추면서 분위기를 읽죠. 한식당에서요? 기대 안 합니다.유명하다고 해서 가면 손님 대접은커녕 그집 음식 얻어먹는 것도 고마울 지경이니까요.앞 사람이 하는 얘기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설렁탕 집에서는 컵이 아니라 쟁반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니 제 옷에 깍두기 그릇이나 안 엎어지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지요. 이런 현실에서 청진옥 아주머니가 건넨 한마디가 저에게는 참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60년을 한결같이 해장국만 끓여내면서 이광수나 최남선 등의 문인들을 비롯해 문화 예술인,언론인들을 사로잡은 이유를 알겠더군요.‘사람다움’에 쉽게 빠져버리는 글쟁이들이 숙취를 한 번에 풀어주는 그 국물 맛도 국물 맛이지만 손님을 손님으로 대우하는 그 국물만큼 따뜻한 마음에 더 빠져버렸기 때문인 듯합니다. 신혜연 월간 favor 편집장
  • “종갓집 며느리 생활 30여년 진달래술 비법 절로 터득했죠”/ 전통 진달래술 복원한 이 복 수

    서울 수유동에서 설렁탕집을 하는 이복수(54·여)씨는 평소 ‘술을 잘 빚는다.’고 평판이 나 있다.이웃은 물론 설렁탕집 단골 가운데 ‘간혹 한 번씩 나오는 이씨의 술맛을 못 잊어’ 찾는 이가 제법 된다.제사 땐 친척들이 ‘술맛 좋다.’며 병에 담아가기 일쑤였다. 이같은 술 제조 비방은 어릴 때 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배운 것.충남 논산이 고향인 이씨는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진달래꽃을 딴 뒤 술을 담근 기억을 돌이켰다.“그때 할머니가 담그던 방법을 옆에서 거들면서 눈여겨 봐 두었지요.진달래술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시댁에 제사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21살이던 70년 결혼,서흥 김씨 종가의 맏며느리가 된 이씨는 자주 돌아오는 제사 때마다 직접 술을 담갔다.이렇게 30여년간 특별한 이름도 없는 술을 담그곤 했다.가게 손님들에게도 한 잔씩 돌렸다. 그러던 차에 서울 강북구청이 ‘향토민속 우수가양주 선발대회’를 최근 열었고,이씨는 ‘술맛이 좋다.’는 주위의 평판과 권유만 믿고 출품했다.심사위원 8명 가운데 5명이 가장 맛이 좋은 술로 꼽아 대상을 차지했다. 이씨가 출품했던 술은 자신도 정확히 잘 몰랐던 ‘진달래술’이었다.그동안 맥이 끊어진 것으로 알려진 진달래술이 어릴 때 할머니를 거들면서 곁눈질로 배운 이씨를 통해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진달래술 빚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니고요,어릴 때 할머니와 친정 어머니가 하던 것을 흉내냈을 따름이에요.” 이 술의 진가를 알아챈 이는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박 소장은 이 술을 맛보고 부녀필지,규합총서,시의전서 등의 옛 문헌에 전해 오는 ‘뼈대있는’ 진달래술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더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이씨 집을 방문,제조와 숙성과정을 직접 관찰했다.그 결과 충남 당진군 면천면에서 전해져 오던 두견주와는 제조과정이 전혀 달랐다.박 소장은 “이씨의 술은 묽게 끓인 보리차 빛깔로 아주 밝으며 향이 좋다.”면서도 “솔잎을 넣은 탓인지 약간 떫은맛이 있다.”고 말했다.청주보다 조금 더 독하다.진달래술은 단맛이 강하고 진달래의 고운 빛깔이 그대로 살아 있으며 독특한향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특징.박 소장은 이씨의 술로 일부러 크게 취해보았다.물론 속이 메슥거리는지 다음날 깰 때 머리가 아픈지 여부를 알기 위한 테스트의 연장이었다.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다른 이들도 만찬가지였다.막걸리를 마셨을 때의 고약한 트림도 없었다. 진달래술은 담그기가 상당히 어렵다.진달래의 꽃술을 모두 떼어 낸 다음 그늘에 말려 두어야 한다.올 봄에도 부산에 사는 시어머니가 진달래꽃을 한껏 따 보내주었다.생쌀을 끓는 물에 넣어 설익힌 다음 손으로 문질러 가루로 만들어 밑술을 만들어야 둔다.“손으로 밑술을 만들기가 너무 힘들어 몸살이 날 지경”이라는 게 이씨의 말이다.또 찹쌀과 멥쌀로 따로 고두밥을 쪄 진달래,밑술,고두밥,누룩의 순으로 켜켜이 담가야 한다.생쌀을 쓰고 진달래를 누룩과 섞지 않아야 한다.요즘 같은 날씨엔 술독에 담요를 덮어둔 채 20일가량 지나면 술이 익는다. 그러다가 술독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코를 갖다 대 냄새를 맡아보고 구수한 냄새가 나면 잘 숙성된 것으로 판단,청주를 뜨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용소를 박는다.찹쌀 1말,멥쌀 1말에 생쌀 3되 비율로 만들면 청주는 10ℓ가량 나온다.이씨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빚는 진달래술임을 이제야 알게 됐다.”며 웃었다. 이기철기자 chu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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