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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사 지휘권, 지검에 안 넘겨 중수부 폐지 눈가림식 개혁”

    “수사 지휘권, 지검에 안 넘겨 중수부 폐지 눈가림식 개혁”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 21일 발표한 검찰개혁안은 검찰개혁의 핵심인 ‘검찰의 정치적 독립 방안’이 빠져 ‘속 빈 강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폐지하겠다면서도 각 지검 특수부를 지휘할 부서를 신설한다는 계획은 ‘눈가림식 개혁’이라는 지적이다. 오는 25일 공식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는 국회 인사청문 절차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검찰을 지휘·통제하는 ‘대통령-국무총리-청와대 민정수석-법무장관’의 4각 체제를 완벽하게 갖췄다. ‘정홍원(69·사법연수원 4기) 국무총리 후보자-곽상도(54·15기) 민정수석 내정자-황교안(56·13기) 법무장관 후보자’로 이어지는 검찰 통제 라인이 모두 성균관대 법대·검찰 출신으로 역대 어느 정부보다 검찰 통제가 쉬울 것이라는 관측이다. 곽 내정자는 인사청문 대상도 아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2일 박 당선인의 이 같은 내각 및 청와대 수석 구성에 대해 “박 당선인의 인사를 보면 검찰개혁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데 검찰개혁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면서 “총리, 장관, 민정수석 모두 검찰 출신에다 같은 대학 선후배들로 구성해 놓고 무슨 근본적인 개혁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대검 중수부도 명칭만 폐지했을 뿐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역대 정권마다 문제가 된 ‘청와대-법무장관-검찰총장’으로 이어지는 검찰 수사 개입을 막을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수부를 폐지하면서 수사 지휘권을 일선 지검에 넘기지 않는 것은 눈가림식 속임수 개혁”이라면서 “중수부 폐지의 가장 큰 이유가 대통령이 임명한 총장이 청와대 하명 수사를 지휘했기 때문인데 인수위 발표 내용대로라면 수사는 일선 지검에서 하되 지휘·감독은 총장이 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인수위가 발표한 국정과제 중 ‘검·경 수사권 조정’이 원칙론에 그친 점을 지적하면서 “수사권 조정을 통해 경찰이라도 검찰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좌세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검찰을 개혁할 의지가 있다면 법무장관에는 비검찰 출신 인사를 내정했어야 한다”면서 “중수부 폐지 취지를 살리면서 검찰의 비대한 권한을 견제하려면 청와대와 법무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된 성격의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탕평보다 측근 안배보다 쏠림

    탕평보다 측근 안배보다 쏠림

    박근혜(얼굴) 대통령 당선인이 19일 내놓은 청와대 인선안은 한마디로 ‘친정 체제’ 구축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박 당선인의 ‘대통합 탕평 인사’ 원칙에 생채기가 났다. ‘작은 청와대’ 구상 역시 지켜질지 아직은 미지수다. 우선 청와대 참모진에 측근 인사들을 대거 포진시킨 게 눈에 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몸을 담았던 유민봉(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 국정기획수석과 곽상도(정무분과 전문위원) 민정수석, 최성재(고용복지분과 간사) 고용복지수석, 모철민(여성문화분과 간사) 교육문화수석 내정자 등 4명이 청와대로 수평 이동했다. 허태열 비서실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이정현 정무수석, 최순홍 미래전략수석, 이남기 홍보수석 내정자 등도 대선 과정에서 박 당선인과 호흡을 맞춘 인사들이다. 박 당선인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국정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라는 두 가지 책임을 동시에 부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청와대에 박 당선인의 측근들이 대거 기용되면서 ‘강한 청와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책임총리·책임장관제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박심’(朴心·박근혜 뜻)을 앞세울 경우 청와대 참모진들의 영향력이 내각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사위원장을 겸하는 비서실장과 정치권과의 소통 창구가 될 정무수석에 박 당선인의 핵심 측근인 허태열·이정현 내정자를 기용한 것도 청와대로 힘이 쏠릴 것으로 보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다. 능력과 전문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대탕평 인사 원칙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출신 학교나 배경이 유사한 ‘쏠림 현상’도 두드러진다. 3실장·9수석 내정자 12명 중 성균관대 출신이 무려 5명이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도 눈에 띈다. 허태열 내정자와 박흥렬 경호실장 내정자는 부산고, 이남기 내정자와 이정현 내정자는 광주 살레시오고, 최순홍 내정자와 조원동 경제수석 내정자는 경기고 선후배 사이다. 행정·사법·외무 고시에 합격하거나 육사를 나온 엘리트 관료 출신이 각각 6명과 2명이다. 반면 청와대 참모진 인선 과정에서 여성은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와의 정책적 차별화에 무게를 두면서 현 정부에서 이른바 ‘잘나가던’ 인사들을 인선에서 배제하는 사실상의 역차별이 이뤄졌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공직사회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박 당선인이 35명의 비서관을 비롯한 청와대 후속 인선을 어떻게 할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My soul is dark” 김수영 시인 고백에 반해서 그 지독한 주사 다 견뎠지

    “My soul is dark” 김수영 시인 고백에 반해서 그 지독한 주사 다 견뎠지

    “동공은 빛을 잃었고 귀에선 피가 흘렀습니다.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만이 숨이 붙어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1968년 6월 16일, 새벽 5시쯤.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김수영(왼쪽) 시인은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無)의 세계에 들었다. 선불로 받은 번역료로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고 귀가하던 시인은 서울 마포구 구수동의 인적이 드문 길에서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받혀 풀잎처럼 쓰러졌다. 20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김현경(오른쪽·86)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는 지난 두 달간 구술로 김수영의 삶을 풀어놨다. 원고는 조만간 자전적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 펴냄)으로 빛을 보게 된다. 에세이에는 생전 김수영이 탈고했던 시구 속에 숨은 창작 배경과 일화가 오롯이 담겨 있다. 김수영은 평소 집에서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말수도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술만 취하면 무궁무진한 애교로 웃음을 자아냈다. 장기는 무성영화의 변사 역할, 레퍼토리는 ‘수일과 순애’였다. 하지만 비위가 거슬려 술을 마신 날이면 주사가 심했다. 이혼 얘기가 입에 오르내리고 열흘간 별거까지 했다.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으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 ‘이혼 취소’는 이런 부부의 삶을 말해 준다. 몸도 돌보지 않고 폭주를 하는 날이면 시인은 자유당과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곤 했다. 4·19 직후 부정 선거에 대한 칼럼 청탁을 받고 동아일보에 원고를 보냈는데, 지면에는 김수영 이름 석자만 있고 휑하니 비어 있었다. 김수영은 “멋있잖아, 이런 게 저항이지”라며 오히려 신이 나 했다고 한다. 김현경은 진명여고 2학년이던 1942년 5월 김수영을 만났다. 만남을 주선한 이는 이종구(1990년 사망)로, 광산을 경영하던 김 여사 부친의 첩의 남동생이었다. 이종구와 김수영은 선린상고 2년 선후배로 일본 도쿄에서 함께 유학한 사이였다. 김 여사는 6살 차이인 김 시인을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고, 이후 일본에 유학 중이던 시인과 편지로 사랑을 나눴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 귀국한 김수영은 ‘마이 솔 이즈 다크’란 한마디 영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1949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이번엔 6·25전쟁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김 여사는 부산 피란살이 기간 동안 이종구와 동거한 뒤 김수영과 재결합했다. 이렇게 정착한 곳이 서울 성북동집. 김 여사는 “원래 거부 백낙승의 별장이었는데 내가 그곳에 세를 얻었다”면서 “정원 한쪽에 비가 오면 폭포가 되는 절벽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시 ‘폭포’를 썼다”고 회고했다. 1968년 발표한 절명시 ‘풀’은 그해 5월 29일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무성한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 김수영의 삶 속엔 현대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1950년 8월 인민군에 끌려가 의용군으로 징집된 김수영은 총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8남매 중 가장 총명했던 넷째 수경은 의용군에 자원 입대했고, 셋째 수강은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을 하다 납북됐다. 여동생 김수연씨 내외도 1969년 KAL기 납북 때 북쪽으로 끌려갔다. 김 여사는 현재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 살며 김수영의 육필 시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살아생전 ‘김수영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고 전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기획·예산 밝은 EPB라인…둘 다 실무형이라 ‘약체 경제팀’ 우려

    기획·예산 밝은 EPB라인…둘 다 실무형이라 ‘약체 경제팀’ 우려

    새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조원동 한국조세연구원장이 내정되면서 ‘현오석 부총리-조원동 수석’이라는 박근혜 경제팀의 진용이 갖춰졌다. 경제팀의 두 기둥이 기획과 예산 등을 주력으로 하는 경제기획원(EPB) 출신으로 채워지면서 현 정부에서 부상했던 모피아(옛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가 지고 EPB가 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다만 자녀에 대한 증여세 편법 경감과 아파트 특혜 분양 의혹을 받고 있는 현오석 후보자와 더불어 조원동 내정자 역시 과거 음주운전 경력과 부동산 투기 혐의가 있어 순항을 장담하기는 이르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두 사람 모두 실무형인 것도 ‘약체 경제팀’에 대한 우려를 키운다. 19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초기 경제팀은 이명박 정부 초기와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5년 전에는 강만수 재정부 장관이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모피아 시대를 열었다면 이번엔 참여정부 시절과 유사하게 EPB에서 잔뼈가 굵은 현 후보자와 조 내정자가 차기 정부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EPB의 전성기가 시작된 셈이다. EPB 출신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현 후보자와 조 내정자가 거시경제와 기획 부문의 최고 전문가라는 점에서 현 정부와는 (경제팀) 분위기가 좀 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두 사람은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선후배다. 현 후보자가 행정고시 14회, 조 내정자가 23회로 기수 차이는 상당하지만 1999년 경제정책국에서 국장과 정책조정심의관(부국장)으로 호흡을 맞췄다. 재정부 관계자는 “사실상 원톱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귀띔했다. 조 내정자는 기획력이 특히 강점으로 꼽힌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세종시 원안론’을 고수할 때 수정론을 주장했음에도 수석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EPB가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기간이 오래가기는 쉽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새 정부가 옛 재무부 출신들이 장점을 갖는 가계부채 정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박 당선인이 예전 경제 개발 연대에 대한 향수로 EPB 출신들을 중용하고 있지만 속도와 성과에 익숙한 모피아 출신 관료들에게 조만간 중독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내정자가 과거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것도 꼬리표로 남아 있다. 조 내정자는 2006년 10월 재정부 인사 때 차관보 승진이 유력했지만 청와대 검증 과정에서 음주운전 경력이 발견돼 승진이 6개월 늦춰졌다. 정부 관계자는 “음주운전뿐 아니라 단속 당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숨긴 것이 괘씸죄로 지목됐다”고 떠올렸다. 상대적으로 부동산이 많다는 점 역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국무총리실 사무차장 시절인 2010년 고위 공직자 재산 신고 때 28억 6830만원의 재산을 신고했고 이 중 22억원 가까이를 배우자 명의의 종로구 내수동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3채와 강남구 대치동 선경아파트 등의 부동산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2007년에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재산이 6억 9635만원 증가했다. 세종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 [박근혜 첫 내각 인선 완료] 현오석도 세금 탈루·부동산 투기 의혹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의 세금 탈루 의혹과 부동산 투기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17일 서울신문이 국세청 인터넷등기소 등을 취재한 결과 현 후보자는 2005년 7월 2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주공1단지 전용면적 140.33㎡(42.5평형) 아파트를 장녀에게 증여했다. 당시 이 아파트의 매매가는 16억원 정도였고, 증여세의 기준인 기준시가는 12억원 내외였다. 하지만 현 후보자는 증여 이틀 전인 20일 신한은행으로부터 이 아파트를 담보로 3억 3600만원을 빌렸다. 당시 현 후보자는 16억원 상당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파크뷰 182.23㎡(55평형) 아파트를 보유할 정도로 상당한 부동산 자산가였다. 더구나 4년 뒤인 2009년 기준 예금 19억 7000만원을 포함해 재산이 35억 6583만원에 달했다. 3억원 정도의 자금이 부족해 은행 대출을 받을 이유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부동산 업계에서는 증여세를 적게 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증여세 세율은 5억~10억원은 30%, 10억~30억원은 40%의 세율을 매긴다. 기준시가 12억원 정도의 아파트를 증여할 때 증여세는 2억 8800만원 정도다. 하지만 3억 3600만원의 대출이 포함되면 증여세의 기준이 되는 금액 역시 대출만큼 빠지면서 1억 7118만원 정도만 내면 된다. 총 1억 1700만원 내외의 증여세 절세 효과가 발생한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측은 “후보자가 자녀의 부담 없이 아파트를 증여하는 대신 일부는 자녀가 부담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해 반포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면서 “이후 자녀 부부가 판사와 변호사로 재직하면서 대출금을 모두 갚았다”고 해명했다. 현 후보자는 또 반포동 아파트 외에 2001년 부인 천모씨의 이름으로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파크뷰 주상복합아파트를 매입했다. 당시 정자동 파크뷰는 투기 논란이 일었던 대표적인 주상복합아파트다. 현 후보자는 또 이명박 정부 초기(2008~2009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단장으로 있으면서 인천국제공항에 의도적으로 낮은 점수를 주면서 민영화에 앞장섰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시 평가단장으로서 ‘인천공항 매각’을 위한 유리한 환경 조성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당시 인천공항 인수에 나섰던 ‘맥쿼리그룹’과 현 후보자 간 인맥은 촘촘하게 엮여 있다. 맥쿼리IMM 대표이사로 있다가 골드만삭스의 인수로 골드만삭스-맥쿼리 인프라 재간접 펀드를 운용하던 이는 이 대통령의 조카(이상득 전 의원 아들)인 이지형씨였다. 이씨는 현 후보자와 경기고 선후배 사이다. 같은 맥쿼리 계열 펀드인 맥쿼리인프라투융자회사 감독이사는 현 후보자와 경기고 65회 동기다. 또 다른 감독이사인 송경순씨는 현 후보자와 같은 국제개발협력위원회 위원이었다. 세종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숭실대 최웅석씨의 나눔 체험

    숭실대 최웅석씨의 나눔 체험

    얼마 전 현대차정몽구재단에 충북 진천의 이월초등학교 강옥남 교장으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왔다. 강 교장은 “지난해 여름방학(7월 30일~8월 3일) 현대차정몽구재단에서 후원한 ‘신나고 즐겁게 음악으로 꿈꿔라’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오카리나와 잼베라(아프리카 북), 마라카스(저음 호각) 등을 배우면서 자신감을 키운 것은 물론 졸업 연주회도 멋지게 했다”면서 “이 작은 학교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게 한 것은 무더위와 싸우면서도 우리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준 최웅석씨와 동료 덕분”이라며 편지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최웅석(숭실대 경영학부 4학년)씨는 “저도 다빈치교실에 참가하면서 재능 기부를 알게 됐고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면서 소중한 경험을 했다”면서 “대학생의 재능 기부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도록 연합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자 어려운 생활을 경험한 최씨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자신이 잘하는 것을 나눌 때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난여름 다빈치교실을 통해 느꼈다고 한다. 최씨는 “지난여름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저녁 학생 부모님과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학생들이 짧은 시간에 배운 악기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면서 “그 자리에서 재능 기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씨는 봉사활동에서 만난 친구와 선후배에게 연락해 ‘씨엣스타’(SEE@STAR)라는 대학 연합 동아리를 만들었다. 재능 기부를 하고 싶은 대학생들을 모아 기업이나 자치단체 등 다양한 곳과 연결해 주는 것이다. 동아리 회원들이 가진 재능을 분석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를 하는 식이다. 최씨는 “혼자만 가지고 있기에는 아까운 이들의 재능이 어려운 곳을 돕는 하나의 도구로 바뀌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6개 부처 장관 후보 발표] 전통 명문 경기·서울고 - 성균관대 ‘약진’

    [6개 부처 장관 후보 발표] 전통 명문 경기·서울고 - 성균관대 ‘약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주요 인선에서 전통의 명문인 경기고·서울고와 성균관대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날 발표된 장관 후보자 6명 중 경기고 출신이 3명, 서울고 출신이 2명이다. 경기고 출신 중 최연장자는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1967년 경기고를 졸업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 후보자와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각각 1972년, 1976년 졸업해 후배의 연을 이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와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각각 1971년, 1975년 서울고를 졸업한 4년 선후배 지간이다. 국무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김용준 인수위원장도 서울고를 나왔다.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가 졸업한 제물포고는 인천 지역에서 명문고로 이름을 날렸다. 경기고·서울고를 비롯한 비평준화 시절의 서울 4대 명문고 졸업생은 인수위 안팎에 포진해 있다. 진영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도 경기고 출신이다. 홍기택 인수위 경제1분과 위원이 그보다 1년 후배로 1971년 졸업했고 유일호 당선인 비서실장은 1974년 졸업생이다. 장순흥 인수위 교육과학분과 위원과 이승종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위원은 각각 경복고와 용산고를 나왔다. 지난달 사퇴한 최대석 전 인수위 외교국방통일분과 위원도 경복고 출신이다. 성균관대의 약진은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와 황교안 후보자가 주도했다. 두 사람은 각각 1971년과 81년 법학과를 졸업한 학과 선후배 사이다. 황 후보자는 성균관대 법대 동문회장을 연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위 내에서는 유민봉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와 안종범 고용복지분과 위원이 각각 성균관대 행정학과와 경제학과를 나와 모교에서 국정관리대학원과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모철민 여성문화분과 간사도 경영학과를 졸업한 성균관대 인맥이다. 한편 행시 동기들의 입각도 눈에 띈다. 서남수·유진룡 후보는 나란히 행시 22회로 당시 문교부와 문화공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유정복 후보가 한 해 늦은 23회로 그 뒤를 잇는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6개 부처 장관 후보 발표] 친정 복귀하는 엘리트 관료들… 朴의 ‘책임장관제’가 시작됐다

    [6개 부처 장관 후보 발표] 친정 복귀하는 엘리트 관료들… 朴의 ‘책임장관제’가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3일 발표한 6개 부처 장관 후보자에는 관료 출신이 대거 중용됐다. 새 정부의 국정 운영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전문성과 조직 장악력 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조각(組閣) 명단에 포함된 6명 모두 자신이 몸담았던 ‘친정 부처’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의원 중 가장 먼저 내각에 입성한 ‘1호 장관’이지만 이에 앞서 1979년 행정고시 23회에 합격한 뒤 행정안전부의 전신인 내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나머지 5명의 장관 후보자도 해당 부처에서 차관급 이상 정무직을 지냈을 정도로 잔뼈가 굵은 ‘엘리트 관료’ 출신들이다. 박 당선인이 그동안 내각 인선 기준으로 강조해 온 전문성과 업무 능력 등을 감안한 것으로 평가된다. 윤병세 외교부, 김병관 국방부, 서남수 교육부,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등 4명의 장관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직을 떠난 인물들로, 이명박 정부와 ‘정책 차별화’를 하겠다는 박 당선인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도 풀이된다. 또 외교부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은 지난달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정부조직개편안에 따라 기능과 업무가 축소되는 대표적인 부처들이다. 장관 후보자에 내부 인사를 조기 기용함으로써 조직 안정을 꾀하겠다는 뜻도 깔려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 당선인의 대선 공약인 ‘책임장관제’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공안 검사’ 출신의 황교안 법무부,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각각 내정한 데는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따른 안보 위기 상황을 감안해 보수색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출신 지역은 서울이 3명(황교안·윤병세·서남수), 인천 2명(유정복·유진룡), 경남 1명(김병관)이다. 박 당선인이 인선 기준으로 전문성 못지않게 ‘탕평’도 강조해 온 만큼 향후 조각이나 권력기관장 인선 등에서 호남, 충청 출신 인사가 상당수 포함될 가능성도 커진 것으로 관측된다. 책임총리 구현과 관련해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의 제청권 행사 여부도 관심사다. 정 후보자는 이날 “당선인과 충분히 상의하고 추천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제5조 1항에 따라 아직 국회 임명동의를 받기 전이라도 총리 후보자 신분으로 법적으로 장관에 대한 추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정 후보자가 황 법무장관 후보자와 성균관대 법대 선후배 사이라는 점에서 정 후보자가 추천한 게 아니냐는 후문도 있다. 하지만 후보자 일부는 박 당선인이 이미 결정해 놓은 인사를 정 후보자가 동의하는 수준에 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유정복 안전행정부 후보자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박 당선인으로부터 2월 초에 연락을 받았다”고 밝혀 정 후보자 지명 시기(2월 8일)보다 더 일찍 내정 연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 후보자가 남은 각료 임명은 물론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자신의 각료 추천권을 ‘충분하고 적극적’으로 행사해 책임총리제를 실현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인선 발표도 언론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면서 박 당선인 특유의 ‘철통 보안 인사’ ‘깜짝 인사’가 재연됐다. 전날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이 인선안 발표를 예고한 직후 언론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 인선 범위는 물론 인선 대상자도 그동안 언론이 내놓은 하마평을 넘어섰다. 앞서 ‘박 당선인은 쓴 사람을 또 쓴다’는 평가가 우세했지만 서남수, 황교안, 김병관, 유진룡 후보자는 이러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 ‘깜짝 카드’로 분류된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산소통·동력 없이 서로에 기대어… 대학 20년 선후배, 에베레스트로

    산소통·동력 없이 서로에 기대어… 대학 20년 선후배, 에베레스트로

    지난해 산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황금피켈’ 아시아상을 받은 산악인 김창호(44)씨. 그동안 사람이 오르지 못했던 봉우리 중 가장 높았던 네팔의 ‘힘중’(7140m)을 등정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가 1988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지 25년 만인 다음 달 졸업한다. 그저 산이 좋아 쫓아다녔다는 그는 졸업 요건을 채웠다. 그는 오는 3월 딱 20년 후배인 같은 대학 물리학과 08학번 전푸르나(24·여)씨와 함께 에베레스트 등반을 떠난다. 개교 100주년(2018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진행되는 이번 여정에서 두 선후배는 에베레스트 정상(8848m)에 모교의 깃발을 꽂고 돌아올 계획이다. 김씨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동료들의 추락사 등 사고로 기회를 놓쳤다. 이번 등반은 무동력·무산소가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자동차와 항공기로 베이스캠프(5400m)까지 이동, 이곳에서 원정을 시작하지만 이들은 동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제 힘으로 오르기로 했다. 인도 벵골만에서 카약으로 150㎞, 사이클로 1000㎞, 도보로 150㎞을 이동해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계획이다. 슬로건도 ‘0m부터 8848m까지’로 정했다. 그는 현재까지 8000m급 히말라야 13좌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이번 등정에 성공하면 아시아 최초로 14좌 무산소 등정 기록을 세운다. 1987년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가 세운 세계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 기록(7년 11개월 14일)도 넘어선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8125m)에 처음 오른 후 7년 10개월 만이다. “산 앞에 섰을 때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면 절대 오르지 못해요. 준비가 됐다고 느끼고 열정과 애정이 커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전할 겁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4대강 사업 감사 결과 감사원장 따라 서로 달라

    4대강 사업 감사 결과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전·현직 감사원장이 대립각을 세우는 모양새가 됐다.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긴급 현안보고에 참석한 양건 감사원장은 이날 4대강 사업 재검증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총리실의 입장 발표를 놓고 “대단히 심각한 사태”라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감사원장이었던 2010년 9월 실시했던 4대강 사업 1차 감사에서 감사원은 일부 비용 과다지출 외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냈었다. 반면 양 원장은 지난해 5월부터 현장 조사를 실시한 2차 감사 결과, 부실이 심각하다는 내용의 상반된 결론을 공개했다. 2차 감사 결과 발표 이후 예상보다 훨씬 큰 후폭풍이 일면서 감사원은 연일 곤혹스러운 분위기다. 법사위 보고에서 양 원장의 “대단히 심각한 사태” 발언 이후 감사원과 총리실이 대결하는 모습으로 비쳐지자 “양 원장의 멘트는 총리실이 감사원 감사결과에 대해 재검증한다면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며 “4대강 사업 자체를 다시 검증하겠다는 총리실 방침에 반대하는 게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어떻든 2차 감사 결과가 논란을 빚어 결국 총리실 주도로 재검증 작업에 들어가게 된 상황에서는 앞으로도 양측의 묘한 심리전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어느 쪽 감사 결과가 정확하느냐에 따라 전임과 현 원장의 자질과 신뢰성까지 저울질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울대 법대 선후배 사이다. 감사원장은 국무총리보다 직급이 낮은 부총리급이지만 총리실까지 감사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법부처럼 독립성이 강하지는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번 일은 헌법기관으로서의 감사원 위상과도 연관된 문제인 셈이다. 만약 총리실이 재검증에서 2차 감사 결과를 뒤집는다면 감사원과의 갈등이 자존심을 건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황수정 기자 sjh@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정치인이 더 많은 체육계 회장선거

    정치인이 더 많은 체육계 회장선거

    연초를 달구고 있는 체육계 선거에 정치권 인사들이 대거 나서 시선을 끌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55개 정가맹단체(협회·연맹) 회장 선거가 다음 달 초까지 줄을 잇는다.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여권 인사들이 주종을 이루는 게 특징이다. 최대 관심사인 축구협회장 선거에는 ‘친박(친박근혜)계’로 널리 알려진 윤상현(51) 새누리당 의원이 뛰어들었다. 쌍벽을 이루는 야구협회장 선거에는 강승규(50) 현 회장과 이병석(61) 새누리당 의원이 나란히 출마했다.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해 야인 신세가 된 강 회장에게 현역 의원이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고려대 선후배 관계인 두 후보는 모두 ‘친이(친이명박)계’로 알려져 있다. 배구협회장 선거에는 임태희(57) 현 회장이 연임에 도전했다. 대통령실장을 지낸 임 회장은 출마 여부를 고심하다가 배구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선거에 나선다고 밝혔다. 민주통합당 원내부대표인 신장용(50·중고배구연맹 회장) 의원도 출마해 맞대결을 벌일 전망이다. 컬링경기연맹 회장 선거에서도 김병래(60) 현 회장의 4선에 도전에 친박계 재선 김재원(49) 새누리당 의원이 맞불을 놓았다. 그동안 경기인 출신이 계속 수장을 맡았던 배드민턴에서는 이례적으로 신계륜(59) 민주당 의원이 홀로 등록했다. 경기단체장 선거에 정치권 인사들이 많이 나서는 것은 앞선 선거에서 밀렸거나 현 집행부에 불만을 품은 대의원들이 집권당의 실력자들을 옹립해 집행부를 장악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다. 정치인들은 손쉽게 얻은 감투로 유명세를 더하게 되고 집행부 반대파는 그들을 등에 업고 반격을 노릴 수 있다. 떠밀리듯 맡던 과거와 달리 자진 출마가 늘어난 것은 활발한 마케팅으로 재정이 탄탄해져 직접 금전적으로 후원하는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정치인은 해당 종목과 별 인연이 없는 데다 열정도 없어 경기인들의 빈축을 사기 일쑤였다. 해서 체육계에선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 단체장 선거 판도는 이들이 대의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대한체육회장 선거(2월 22일)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더욱 관심을 끈다. 박용성(73) 현 회장의 출마 여부가 최대 변수지만 자천타천으로 하마평에 오른 후보들은 단체장 선거 판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일본통신] ‘황금의 오른팔’ 오릭스 테라하라 팀 떠나다

    [일본통신] ‘황금의 오른팔’ 오릭스 테라하라 팀 떠나다

    이대호(31.오릭스)의 소속팀인 오릭스 버팔로스의 선발 투수 테라하라 하야토(29)가 팀을 떠났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획득한 테라하라가 선택한 곳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테라하라의 친정팀이다. 오릭스는 테라하라 대신 2011년까지 소프트뱅크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마하라 타카히로(31)를 보상 선수로 획득했다. 아라가키 나기사(소프트뱅크), 마쓰자카 다이스케, 테라하라 하야토, 다르빗슈 유(텍사스), 츠지우치 타카노부(요미우리), 타나카 마사히로(라쿠텐), 사토 요시노리(야쿠르트)는 2000년대 들어 고시엔이 배출한 강속구 투수들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다. 그중에서, 프로데뷔 후 잠시나마 반짝 활약한 아라가키와 2005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156km의 강속구를 뿌려 대회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한 츠지우치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선수들이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일본 최고의 투수로 주목받았던 마쓰자카와 지난해 미국에 진출한 다르빗슈, 현 일본 최고의 선발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타나카와 야쿠르트의 옛 명성을 재현 할 투수로 손꼽히는 요시노리는 이미 화려하게 전성기를 보냈거나 앞으로 보여줄게 더 많은 투수들이다. 2004년 일본에 진출했던 이승엽(36. 삼성)의 첫 홈런(150m 장외) 상대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아라가키는 아직까지도 제구력 찾기의 퍼즐이 완성되지 않아 잊혀진 유망주가 됐다. 그리고 친정팀에 복귀 한 테라하라 역시 들쑥날쑥 한 피칭으로 과거와 같은 기대감은 많이 사라졌다는 평가다. 하지만 테라하라는 과거 자신과 비슷한 평가를 받았던 고시엔 출신의 선후배 투수들이 프로데뷔 후 승승장구 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 선수였다. 미야자키 출신인 테라하라는 니치난학원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인 2001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 참가 해 고시엔 대회 역대 최고구속인 154km를 기록했다. 이 구속은 이후 사토 요시노리가 2007년 고시엔에서 155km를 그리고 그해 열린 미일 친선경기에서 157km의 광속구를 뿌리는 바람에 곧바로 잊혀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강속구 투수에 대한 로망은 일본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전도유망한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 테라하라는 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의 왕정치 감독으로부터 “황금의 오른팔”이란 찬사를 받으며 1순위로 지명, 2001년 전체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다이에 유니폼을 입는다. 당시 다이에가 3순위로 지명한 스기우치 토시야(현 요미우리)보다 테라하라가 더 높은 순위의 지명을 받았을 정도로 팀에서 생각하는 테라하라의 위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입단 첫해 6승(1세이브, 2패 평균자책점 3.59)을 올리지만(드래프트가 시행된 이후 다이에 구단 사상 신인 최다승) 본인은 첫해의 성적에 실망감을 표현했다. 이듬해인 2003년 시즌에 접어 들며 다이에의 선발 전력은 기대감과 더불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중, 사이토 카즈미(Saitoh), 와다 츠요시(Wada), 아라가키 나기사(Arakaki), 테라하라 하야토(Terahara)로 이어지는 선발 4인의 첫 영문 이니셜을 따와 불리게 된 ‘SWAT’는 당시 개봉한 영화의 제목과 똑같은 것으로 그만큼 다이에를 바라보는 마운드 높이에 대한 위압감을 미루어 집작할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후 소프트뱅크로 팀명이 변경된 후 선발 4인이 생각만큼의 활약을 똑같이 보여주지 못해 이러한 기대는 어긋났지만 아직도 소프트뱅크 팬들은 이 시절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다. 이후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며 공백기를 가졌던 테라하라는 2006년 시즌 후 타무라 히토시와 맞트레이드 돼 요코마하 유니폼을 입는다. 소프트뱅크에서 단 한번도 두자리수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테라하라는 이적 첫해인 2007년 12승(12패, 평균자책점 3.36)을 거두며 프로 첫 10승대 투수가 된다. 요코하마의 타력이 워낙 약해 패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150km대의 속구가 되살아 난 게 고무적이었다. 아마 시절의 명성을 회복했다는 진단과 더불어 이제부터 테라하라의 본 기량이 나올 것이란 전문가들의 평가도 상당했었다. 2008년 개막전 선발 투수가 됐던 테라하라는 그러나 이후 마무리 투수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팀 전력이 워낙 떨어져 역전패가 많았던 요코하마는 그나마 믿음직스런 테라하라로 하여금 뒷문을 책임지게 했지만 이기는 경기가 드문 팀 형편상 세이브 기회가 적어 그해 22세이브가 그쳤다. 이해 테라하라는 9패(평균자책점 3.29)를 기록했는데 마무리 투수로서 등판 간격이 들쑥날쑥 해 컨디션 조절등의 어려움을 겪었던게 평범한 성적을 남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다시 선발로 돌아온 테라하라는 2007년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잦은 어깨부상으로 인한 재활과 복귀를 반복하며 허송세월을 보낸 후 2010 시즌 후 타카미야 카즈야와 함께 오릭스 버팔로스로 맞트레이드 된다. 2011년 테라하라는 시즌 초반 7연승을 질주 하는 등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약체 오릭스를 포스트시즌에 진출 시킬 적임자로 평가 받았지만 그를 또다시 주저 앉게 만든 건 역시 부상이었다. 부상과 복귀를 반복하며 그해 12승(10패, 평균자책점 3.06)을 올린 테라하라는 지난해엔 허리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말소되는 등 초반부터 팀 전력에서 이탈하며 개인 성적은 물론 팀의 꼴찌 추락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테라하라의 방황은 지난해 FA 자격을 획득하면서 끝이 났다. 돌고 돌아 다시 소프트뱅크로 이적 했는데 이제 30대를 바라보는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리고 과거의 명성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을 생각하면 마지막 불꽃을 태워야 한다. 비록 ‘SWAT’는 해체 된지 오래지만 한때 후쿠오카 팬들의 가장 큰 염원 중 하나였던 테라하라의 본모습과 고시엔이 배출한 강속구 투수 중 반드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야 하는 테라하라에 대한 기대치는 아직도 후쿠오카 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기 때문이다. 소프트뱅크 구단은 지난해 리그 3연패에 실패 한 것을 올 시즌 테라하라로 하여금 우승을 되찾게 한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바 있다. 테라하라는 최고 155km의 포심 패스트볼과 컷 패스트볼, 커브, 슈트볼(인사이드 역회전볼), 포크볼, 그리고 종에서 대각선 모양으로 떨어지는 빠른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한다. 다만 마운드 운영이 아쉬운데 좋은 피칭을 하다가도 위기상황에서 연속 안타 등으로 집중타를 맞으며 대량 실점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지난해 오릭스에서도 위와 같은 모습을 종종 노출하며 안정적인 선발 투수로서는 부족한 선수였다. 하지만 지난해 빈타에 허덕였던 오릭스 타선과 다른 소프트뱅크라는 점을 감안하면 안정감 면에선 더 나은 조건에서 활약 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한편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대표팀으로 뽑히는 등 불같은 강속구가 돋보이는 마하라 타카히로(31)는 올 시즌 오릭스 유니폼으로 갈아 입는다. 지난해 어깨 수술로 인해 마운드에서 그 모습을 볼수 없었던 마하라는 부상과 재활을 끝내며 뒷문이 불안한 오릭스 마운드를 책임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하라의 오릭스 이적은 소프트뱅크 입장에선 커다란 손실로 다소 충격적인 일이다. 통산 180세이브에 빛나는 마하라는 수술 전력 때문에 소프트뱅크가 28인의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했고 오릭스는 기다렸다는듯 마하라를 얻는데 성공했다. 물론 마하라 없이도 그를 대체할만한 선수가 많다는 소프트뱅크의 입장이지만 이미 검증이 끝난 마무리 투수를 같은 소속의 리그 팀에게 보낸 것은 다분히 모험적인 일이다는 평가다. 소프트뱅크는 선발감인 테라하라를 얻었지만 2011년까지 뒷문을 책임진 ‘수호신’ 을 잃어 올 시즌 팀 전력에 있어 얼마만큼의 손익계산이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 진다. 사진= 테라하라 하야토 일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부고] ‘희망 전도사’ 이우재 중앙지법 부장판사

    [부고] ‘희망 전도사’ 이우재 중앙지법 부장판사

    ‘법조계의 희망 전도사’로 불리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 이우재 부장판사가 지난 10일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48세. 이 부장판사는 2008년 3월 인천지법 부장판사로 있을 때 과거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자신의 아픈 경험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그는 당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건강 문제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했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또 누구나 치료 가능하다”며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줬다. 이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일일이 상담하고 편지에 꼬박꼬박 답장하며 용기를 북돋워 법조계 안팎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지난 4일까지 정상적으로 근무했던 고인은 6일 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10일 오후 7시 39분 숨을 거뒀다. 사인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인한 패혈증 쇼크로, 의료진은 2주 전 발병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부장판사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30회에 합격, 1994년 3월 판사로 임용됐다.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 등을 지냈고 민사집행법 분야의 권위자로 불렸다. 테니스를 즐기고 소탈하며 쾌활하고도 따뜻한 성품으로 선후배 법관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왔다. 재판업무 외에도 민사집행법 주석서 편찬, 법무부 민사집행법 개정위원회 업무 등을 병행해 왔으나 약 2개월 전부터 입술이 부르트고 잦은 기침을 하며 피로감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 발인은 12일 오전 7시 30분이다.(02)3410-3151.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교육도 대물림…특혜받은 인생

     돈 많은 부모님. 빌딩. 강남 고가 아파트. 부모 재산 다 알 수가 없다. 바이올린, 클라리넷, 농구, 스키 배우며 친구 관리. 입시 부담 싫어 중 2때 유학. 고 3때 귀국. 면접만 보고 법대. 남동생은 국회의원의 딸과 여동생은 고위 공무원과 결혼. 또 다른 백. 아들 공부 시원찮다. 괜찮다. 유학 보내면 되지 뭐. 내 꿈. 그까짓 꺼 대충 돈이면 다 되는데 뭐….    서울 강남의 B법률사무소 변호사 신영진(40·가명)씨. 돈 많은 부모님 덕분에 쉽고 편하게 인생을 즐기고 있다. 경기 수원시에 여러 동의 빌딩과 서울과 부산 아파트 등 부모님의 재산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자식들도 잘 모를 정도다. 신씨는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했더니 강남의 나름 잘나가는 변호사가 됐다.”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들 모두 유학 갔다 와서 변호사 아니면 의사, 교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은 상당수가 이처럼 부모가 제공한 사교육이나 조기 유학 등을 통해 좋은 직장과 부를 물려받는다. 나아가 그들만의 네트워크로 정보와 인맥을 교환하며 그 위치가 더욱 공고해지는 게 현실이다. 신씨는 동생들과 함께 고향인 수원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1983년 서울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강남 생활이 시작됐다고 한다. 폭넓게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배려(?)였다. 신씨는 “강남에서 개인 과외와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각종 악기와 농구, 스키 등의 스포츠 레슨을 받으면서 이것들이 모두 당연한 듯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생들과 함께 타이의 외국인 학교로 유학을 갔다. 1987년 당시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고 인터넷도 없었지만 신씨 부모님은 어디서 들었는지 미국이 아닌 타이를 유학지로 선택했다. 국내 또래들이 느끼던 대학 입시의 부담감도 없이 영어 공부를 하며 해외 감각을 키웠다. 그리고 고3 때 다시 대치동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인 1992년 신씨는 명문대 법대, 동생은 공대에 입학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잘 몰랐다. 다른 친구들처럼 몇 년 머리 싸매고 공부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과 면접으로만 입학했다. 잘난 부모님의 능력이다. 신씨는 “당시에는 어떻게 입학했는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법대를 다닐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라고 했다. 법대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운동과 음악 등에 능한 김씨는 선후배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르지 않는 호주머니라는 별명처럼 항상 먼저 밥과 술을 사는 좋은 동료, 멋진 선배로 자리 잡으며 대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4학년부터 사법시험 족집게 과외를 받았다. 매일 아침 유명 강사가 신씨 집으로 와서 하루 스케줄과 진도, 숙제 등을 체크하고 오후에는 새로운 출제 경향 분석과 문제를 설명해 줬다.  하지만 사법고시의 벽은 높았다. 아무리 부모님의 전격적인 지원에도 1년 만에 통과는 무리였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군대 가기 전에 사시 패스를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 때문이다. 그는 선생님에서 매달 얼마를 주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냥 1000만원 정도라고만 알고 있다. 신씨는 “사시 준비할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 시간이었다”면서 “부모님이 미국 로스쿨로 가라고 했지만 국내에서 사시 패스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신씨는 족집게 선생님과 본인의 노력(?) 덕분에 남들은 몇 십 년이 걸려도 힘들다는 사시를 2년만 합격했다. 물론 연수원 성적 때문에 어렵기도 했지만, 검사와 판사는 체질에 맞지 않아서 변호사를 선택했다.  강남 뚜쟁이 아줌마의 소개로 국회의원의 딸과, 행정고시에 합격한 고위 공무원과 동생들이 결혼하면서 집안에 또 다른 든든한 ‘백’이 생겼다. 정치권과 고위 공무원 등 어려움이 생기면 상담할 수 있는 혈연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혈연이라는 끈끈함으로 더 높은 ‘성’을 쌓으며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부모님 친구의 로펌에서 3년 근무하고 2004년 서울 강남에 있는 부모님 빌딩에다 근사한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주변에서는 망하는 변호사도 많다고 하는데 신씨는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이 몰아주는 일감에 어렵지 않았다. 생활비는 매달 부모님이 아내에게 주시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자신을 닮아서인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공부 재주가 영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금세 해결됐다. 주변 지인의 조언을 듣고 아들을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으로 보냈다. 아내와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이 좀 불편했지만 애들 걱정은 덜었다. 그는 “아들은 대학까지 미국에서 마친 뒤 대학교수를 하거나 로스쿨에 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프랑코가 곧 죽을 모양이다. 사르트르가 그자를 ‘라틴의 돼지’라고 부르고 그놈이 어서 죽기만 기다리노라고 말한 것이 통쾌하다. 거리의 사람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 의병의 역사, 봉기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것의 분출 자체가 타자 의존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저항보다 순응과 피동의 역사가 더 길다. 혁명, 영구혁명은 관념인가.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 1975년 11월 15일 고은(당시 42세)은 청소년기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온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는 대목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서 ‘문학인 101선언’을 주도했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결단이 느껴진다.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에는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는 철학이 강하게 배어 있다. 함박눈이 쏟아진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에서 만난 고은은 책으로 벽을 쌓아 지은 고분 같은 서재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쪽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서재는 어두운 듯하면서 환했다. 미닫이문을 터서 만든 10평 안팎의 장방형 서재는 시인에게 어머니 자궁 같은 안온함을 준다고 했다. 짙은 감색 셔츠에 같은 색 실크 머플러를 목에 두른 고은은 고요했다. 전설처럼 떠돌던 술에 전 낭만의 시인이나, 열정의 시인, 독재에 저항하는 시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팔순의 성찰하는 고은이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고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고흐를 열망한 내 소년기를 부쉈다 ‘한국의 고흐’가 되고 싶었던 17살 예술지상주의자였던 소년의 운명을 맨처음 뒤틀어 놓은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본 고흐의 화보집을 보며 꿈을 키우던 고은에게 한국전쟁은 감당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 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됐다. 군인들이 와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 하면 서로 죽이는 행위, 고향 하면 핏줄끼리도 이데올로기 때문에 싸우는 그런 것만 연상됐다. 죽음에 대해 아무 준비도 없던 10대 어린애가 그것을 만난 것이다. 소년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고아의 의식이 투철하다는 고은은 한국전쟁으로 조상과 끈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고향도 무섭고, 핏줄도 무서웠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피에 주려 있는가를 본 소년의 정신은 온전해지지 못했다. 정신착란으로 집을 뛰쳐나갔고,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전쟁통에 군산고를 중퇴했는데, 전쟁 중에 그는 모교인 군산북중학교 국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혐오들이 밀려오던 터에 1952년 출가를 했다. 1957년에 전등사 주지를 지냈고, 1958년 ‘불교신문’을 창간해 주필을 맡았던 그는 1962년 환속했다. 등단은 1958년, 26살 때다. 시인협회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이 실렸다. 현대시인이 1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라 그는 현대문학 2세대 정도되는데도 1세대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김동리, 오상순, 김수영 등과 어울리며 살았다. 유미주의자였던 그의 예술관과 삶의 방식을 전복시킨 것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이었다. 잊어버린 과거가 된 전태일의 죽음이 술에 절어 나른했던 시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지금은 서울 무교동에 현란한 고층건물들이 서 있는데, 당시에는 바라크였다. 낮은 건물뿐이었다. 통행금지 시절이었는데, 술을 마시고 돌아갈 수가 없으니 주모에게 사정하고 아첨해서 술집 탁자 같은 데서 자곤 했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인데 신문 쪼가리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더라. 묵은 신문이었는데, 사회면과 사설면에 ‘노동자 분신자살!’이라고 써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죽음이 워낙 육친화되어 있다 보니 죽음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떠지더라. 어, 이것 봐라! 일종의 죽음의 비교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풀빵 10개로 점심을 때우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우이동 판잣집까지 버스비가 없어 한밤중까지 걸어가고, 그런 인간의 삶이 나오더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게 뭔가. 현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착취와 비인간화, 허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지옥의 밀실 같은 곳에서 소녀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고,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민주화 전위? 뒤늦게, 엉거주춤 서 있었다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그를 두고 사람들이 ‘초개’라고 했는데, 그는 밀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각성이 됐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1970년대 봉제공장의 노동현실을 설명하던 그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사람들은 내가 민주화 운동의 전위에 섰다고 하는데, 사실 뒤늦게 뒤꽁댕이를 따라다니면서 한 것이다. 뒤늦게 엉거주춤하게 거기에 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때 전태일의 죽음에 나만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들도 다 깨쳤다. 나중에 감옥에서 만난 조영래, 장기표, 걔네들도 다 깨쳤더라. 나는 지식인이랄 것도 없고 예술인이었는데 전태일의 죽음의 폭풍이 나까지 몰아세웠다. 그래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작가들도 뭔가 해야겠다. 그때 자기 몸을 던지는 행복이 생겼다.” 동료 작가들은 물론 선후배 작가들까지 뭉치도록 앞장서서 나갔다. ‘나를 빼고 몰래 하면 안 된다’는 작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설득하면 다소 보수적인 현대문학 1세대 선배들도 동참했단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간사가 된 배경이다. 당시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주장은 5가지였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라 등이었다. 당시 세종로에서 시위하고 그와 조해일, 윤흥길, 박태순 등 7명이 연행됐다. 고은의 본격적인 빵살이(감옥살이)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부터 시작됐다. 1977년, 1979년이 자유실천문입협회 건이었다. 1980년에는 김대중내란음모죄에 연루됐다. 죽음이 목젖까지 찾아왔던 때다. 1988년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들을 해금하자, 고은은 더 나아가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북한의 작가동맹 소속 작가들과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한다. 이것이 문제가 돼 1989년 다시 투옥됐다. 국가가 달아준 ’별’이 4개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될 때 그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987년)를 맡았다. 국가와의 갈등이 완화된 건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그의 나이 60세 때다. 1993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임시여권만 발급됐다. 시인 고은이 ‘세계의 시인 고은’이 된 시점도 그때부터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23년간 그는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의 각종 폐해를 해소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의 시인’으로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그는 이제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는 독특한 통일 이론이 있다. 다연방 통일제를 주장한다. 북한의 언어는 문화어(표준어)-평양중심의 언어로 통합된다. 남한은 표준어는 서울 종로에 사는 중산층의 언어다. 마포에서 쓰는 언어도 아니다. 그런데 표준이나 통합은 말살이다. 시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투리, 지역어는 다 신성한데 다 말살되고 있다. 이것은 나쁜 단일화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와 지역어가 존중될 수 있도록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20여개 연방으로 만들어서, 수상최고회의를 국가최고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한 통일된 국가를 꿈꾼다. 스위스, 말레이시아, 미합중국, 넓게 보면 중국도 다 연방 아니냐.” 그는 100년 안에 아시아에도 유럽연합(EU)과 같은 국가연합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구상이 한낱 백일몽에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올해로 80세인 고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태어나 식민지와 1945년 해방과 분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민주화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극복까지. 롤러코스터보다 더 다이내믹한 인생이다. 침묵할 수 없던 시대, 그것은 선물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조용할 수 없는 시대였지만, 남들보다 더 격렬하게 부딪치며 살아온 측면이 있다. 시대가 나에게 준 것도 있고, 내가 시대에 준 것도 있다. 이것이 맞물려서 심상치 않은, 비일상적인 삶의 연대기를 갖게 됐다”며 허허롭게 웃은 뒤 “사람들은 나를 ‘풍운아’라고도 부르지만, 돌아보면 시대가 나에게 준 선물과 같은 것이 많다”고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고은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언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의 유산을 정리해본 적이 없다. 민족끼리 싸우는 삼국시대, 후삼국시대를 고스란히 복제하고 있다. 그런 바보 같은 땅이 어디 있나. 치유되지 않은 삶을 자손들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다. 피의 흔적을 닦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당대의 정당성이 있겠지만, 이대로 가면 역사라고 할 수도 없다. 길들여져 있는 체제에 의해 쉽게 변경될 수 없는 관행, 제도가 있으니 현안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당대에 손가락질당하고, 역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온한 꿈을 꾸고 확산해야 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2013 빛낼 스포츠스타] (3) 여자 탁구 세대교체 기수 송마음

    [2013 빛낼 스포츠스타] (3) 여자 탁구 세대교체 기수 송마음

    여자탁구 실업 3년차 송마음(21·대우증권)은 끼가 많다. 누구와 만나도 뒤로 빼거나, 움츠리거나 자신을 숨기는 법이 없다. “마음이는 팔딱팔딱 튀죠. 완전 신세대예요. 그런 마음이에게 3년 전 제 마음을 빼앗겼어요.” 김택수 감독이 허허 웃었다. 그런데 정작 송마음은 웃지 않는다. 탁구장에선 ‘포커페이스’로 소문났다. 매서운 눈매, 날렵한 스매싱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의 라켓에는 냉랭함마저 묻어난다. 송마음은 지난해 5월 KRA컵 SBS탁구챔피언전 여자 단식 결승에서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웃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깜찍하게 머리칼을 틀어 올린 작은 얼굴의 ‘사과머리 소녀’가 말했다. “경기장에선 안 웃어요. 탁구 칠 땐 선후배 없이 냉정해야 하거든요.” 그건 순전히 ‘방송용 멘트’였다. 진짜 이유는 뭘까. 송마음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탁구 라켓을 처음 잡았다. 아버지 송용철(55)씨는 고교 때까지 탁구 선수였다. 그래서 김연아 모녀처럼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대물림했다. 마음이는 라켓만 쥐면 펄펄 날았다. 초등학교 때 자신을 밟고 1위로 올라선 또래를 두고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선수가 경기하다 웃는 건, 더욱이 잘하지도 못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금기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송마음도 그랬다. “아유, 웃기는 어디서 웃어요. 잘하건 못하건 그냥 입 꾹 다물고 탁구공만 쳐다보는 거죠.” 그러다가 습관이 돼 웃는 법도 까먹었단다. 그는 탁구를 잘 칠까. 한 차례 정상에 오르긴 했지만 냉정히 말하면 아직은 아니다. 그러나 그만의 뛰어난 ‘감각’이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김 감독은 그 날만을 기다린다. 감각은 위기 상황을 헤쳐나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송마음을 중학생 때부터 지켜본 김 감독은 그래서 아직은 원석에 불과한 송마음을 보석이 되도록 다듬고 깎는 중이다. 송마음이 계사년 새해를 맞는 각오는 각별하다. 10일부터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전이 열린다. 선발 인원은 남녀 각 20명. 탁구는 1년에 한 번 상비군을 선발한 뒤 큰 대회가 열릴 때마다 다시 몇 명을 추려 대표팀을 꾸린다. 송마음은 사실 대표팀 명찰을 딱 한 번 달고 뛰었다. 2년 전 네덜란드 로테르담 세계선수권 1회전에서 탈락했다. 그해 가을 레바논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다시 뽑혔지만 대회가 연기돼 두 달 만에 대표팀을 재구성하는 바람에 두 번째 명찰을 빼앗겼다. 그 뒤에 슬럼프가 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죠, 뭐.” 2일 대구체육관에서 전국종합선수권대회 단체전 첫 경기를 마친 송마음이 땀을 닦으며 웃었다. 상비군 선발전은 올해부터 ‘계급장’ 다 떼고 열린다. 랭킹이니, 특전이니 아무것도 없다. 김경아를 비롯해 은퇴를 앞둔 노장들이 많이 빠지지만, 그래서 더욱 힘들다. 그는 이날도 변함없이 사과머리였다. “처음엔 흉터를 가리느라 머리를 묶어 올렸는데, SBS최강전에서 덜컥 우승했지 뭐예요. 시야가 넓어져 좋기도 하고요. 그래서 계속 묶고 다니려고요.” 그러면서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 “대표팀 되면 헤어스타일 바꿀 거예요.” 글 사진 대구 최병규 기자 cbk91065@seoul.co.kr 송마음은 누구 ▲1992년 11월 8일 전북 군산 출생 ▲164㎝, 53㎏ ▲군산 대야초-옥구중-군산 중앙여고▲송용철·이향순씨의 2녀 중 막내 ▲취미 피아노(스트레스 해소용) ▲별명 사과머리, 너구리 ▲2011년 로테르담세계선수권 단식 64강·대통령기 시도대회 복식 3위, 2012년 SBS최강전 단식 우승·종별선수권 복식 준우승·대통령기 시도대회 단식 준우승
  • 부장판사·판사시보로 만나 각별한 인연

    부장판사·판사시보로 만나 각별한 인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김용준(왼쪽) 위원장과 진영(오른쪽) 부위원장의 남다른 인연이 화제다. 박 당선인과 함께 인수위를 이끌어 갈 ‘투톱’인 만큼 두 사람 간의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조계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1976년 김 위원장이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할 당시 진 부위원장이 판사시보로 일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진영 부위원장은 30일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내가 사법고시 합격 후 1년쯤 지나서였다. 내가 판결문 쓰면 고쳐 주는 식의 교육을 (김 위원장에게) 받았다.”면서 “(김 위원장이) 소아마비여서 몸이 불편한데도 어찌나 밝으셨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대법관 등을 거쳐 2대 헌법재판소장을 지내면서 50여년간 법조계에 몸담았고, 진 부위원장은 1980년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로 1년여간 재직한 후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만남이 이어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제 대통령직인수위원으로 인연을 이어 가게 됐다. 지난 28일 김 위원장과 첫 상견례를 가진 자리에서 진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은) 존경하는 선배였다. 저희가 정치계에서 이렇게 만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진 부위원장이) 큰 힘이 된다.”고 화답했다. 김 위원장은 회동 후 진 부위원장과 함께 사무실을 나오면서 “우리 법조인이…”라며 동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현재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 진 부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비서를 통해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길섶에서] 퇴직 선배/오승호 논설위원

    고향 선후배들이 만나 정담을 나눈다. 송년회 자리다. 최근 인사에서 승진이 되지 않아 퇴사해야 하는 대기업 상무는 한번도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1958년생이니 베이비부머다. 송년회인 만큼 태연한 표정이지만,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경기침체기에도 실적이 좋았는데…. 동석자 중 1년 전 대기업에서 상무로 옷을 벗은 이는 한결 여유가 있다. 같은 연배이지만 ‘퇴직 선배’다. 직장을 그만두는 이에게 ‘자문역’이라는 명함은 돌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특히 회사 다닐 때 경쟁업체 사람들에게는 꼭 그렇게 하란다. 다들 이유는 묻지 않고 “알았다.”는 대답만 한다. 그런데 회계사인 한 참석자가 나이 들수록 회계사나 세무사가 가장 좋은 것 같다고 운을 뗀다. 평소 갑(甲)과 을(乙)의 입장을 다 경험하기 때문이란다. 샐러리맨들은 환경이 바뀌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적잖이 걸리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인사의 계절이다. 잘나갈 때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음미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제3회 ‘지방행정의 달인’ 윤곽 드러났다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했던가. 삶이 향기로운 이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꼭꼭 숨기려 해도 절로 드러난다. 마찬가지다. 애써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지만 전국 지방자치단체마다 보물 같은 공무원들이 꼭 한명씩은 있다. 3년째 지역의 숨은 일꾼을 찾는 ‘제3회 지방행정의 달인’ 후보들이 가려졌다. ●10일부터 서류심사 시작 행정안전부는 6일 “자천, 타천을 거친 달인 후보자들의 실적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세종시를 포함한 전국 17개 시·도 소속 112명이 예비 달인 후보로 올라왔다.”면서 “10일 서류심사를 시작으로 한 달 동안 세 차례 심사를 거친 뒤 내년 1월 최종 본심사 이후 시상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반행정 분야 34명을 비롯해 지역경제 분야 18명, 환경개선 분야 13명 등 문화관광·정보통신기계·교육사회복지 등 8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는 달인 심사는 일단 7~11일 8개 분과별로 서류심사를 갖는다. 13~14일 전체위원회를 열어 45명 안팎으로 걸러낸다. 17~28일 매의 눈을 가진 심사위원들이 두 차례의 예비심사에서 살아남은 달인 후보들의 공적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현지 실사를 진행한다. 실적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 검토는 물론, 동료·선후배 등 주변 사람들의 증언까지 청취한다. 마지막으로 내년 1월이 되면 후보가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심사위원은 물론 1회와 2회 달인들이 질의하는 심층면접을 실시한다. 이렇게 촘촘한 검증 및 심사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제3회 지방행정의 달인이 결정지어진다. ●‘옛골목 투어 프로그램’ 등 눈길 특히 이번 후보들의 공적 내용을 살짝 들여다만 봐도 달인을 고르기 위해 머리를 싸맬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옛골목 투어프로그램을 개발한 후보, 세계 최초로 오미자 가공 상품을 만들어 오미자 재배 붐을 일으킨 후보, 일용직으로 시작해 통계 조사에 25년을 매진한 후보, 대파·양파 농사에 바닷물을 이용한 농법을 개발한 후보, 도심 미관을 해치는 현수막 매듭 끈 제거 방법을 개발한 후보 등 실적서 제목만 봐도 그 쟁쟁함은 물론, 공무원으로서 그간 자신의 업무에 얼마나 치열하게 매진해 왔는지 짐작하게 하는 이들이 많다. ●행안부 “내년부터 달인제도 심화” 행안부 관계자는 “지방행정의 달인이 상당 부분 고갈된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마치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지역에서 달인이 나오는 것을 보며 지방행정의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서 “내년부터는 구체적인 분야 하나하나씩을 특화시켜 지방행정의 달인제도를 더욱 심화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황석영 등단 50년’ 9권짜리 선집 낸다

    ‘황석영 등단 50년’ 9권짜리 선집 낸다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소설가 황석영(69)을 축하하는 자리를 후배 문인들이 마련했다. 6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황석영 문학 50년 축하 모임’이 열린다.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과 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시인 김정환·김사인, 소설가 신경숙·이승우 등 6명이 주축이 돼 선후배 문인들을 초청해 황석영 문학이 걸어온 길을 되짚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김사인 시인의 사회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문학평론가 김병익, 연극인 손숙, 황종연 동국대 국문과 교수가 축사하고 가수 전인권과 해금 연주자 강은일이 축하 공연을 한다. 출판사 문학동네, 자음과모음과 함께 축하 모임을 후원하는 창비는 등단 50년을 기념해 황석영의 대표 작품을 9권짜리 세트에 모아 한정판 1000질을 낸다. 세트에는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등의 장편소설과 희곡 전집 등이 포함됐다. 이 이사장은 “황석영 작가가 고등학생 때 데뷔해 지금까지 50년간 쉼 없이 작가의 길을 걸어온 것이 후배들로서는 자랑스러워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며 “작가로서의 긴장을 잃지 않은 선배 작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했다. 황석영은 1962년 단편 ‘입석부근’으로 등단해 지금까지 대하소설 ‘장길산’을 비롯한 장편소설과 중단편을 꾸준히 써 냈고 올해 등단 50년을 맞아 장편 ‘여울물소리’를 출간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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