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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행의 원인? 인류 생존의 키워드!

    2007년 4월 아침, 미국 버지니아공대 재학생 조승희는 알 수 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몹시 흥분한 상태로 학생 스물일곱 명과 교수 다섯 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현실 검증 능력, 도덕적 판단력,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손상으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한인을 대상으로 한 미국 시민들의 반감과 보복을 걱정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오히려 개인 범행에 한국인이 집단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위로했다. 게다가 조승희가 느꼈을 소외감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그의 안식을 위해 추모석까지 세웠다고 한다. 대개 세상은 복수심을 수많은 악행의 원인이라고 바라본다. 복수심은 비정상적인 감정으로 터부시한다. 또 일반적으로 복수는 쉽고 용서는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에 관한 문제와 종교 행위의 진화론적 토대 및 결과를 연구하고 있는 미국 심리학자 마이클 매컬러프 교수는 ‘복수의 심리학’(원제 Beyond Revenge·살림 펴냄)에서 복수는 더럽고 위험하며 전염성이 있는, 금기시된 질병이나 결함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다. 특히 찰스 다윈의 진화론 관점에 기대 인류의 조상이 번식을 하고 뿌리내리는 데 복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인간 사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복수를 적응의 기제로 선택했다는 말이다. 복수 성향은 인류의 조상이 자신에게 한 번 공격을 가했던 개체로부터 두 번째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에 선택됐다. 또 애초에 잠재적 가해자들로 하여금 준비하던 공격 행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데 필요했다. 끝으로 복수는 인류 조상들의 사회 집단에 협력하지 않는 구성원들을 벌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적합한 기여자로 변화시키기에 유용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을 위험에서 구해준 해결책인 복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던져 준다. 방화, 교내 집단 따돌림, 불륜, 부정한 남편이나 아내를 향한 총격, 범죄 집단 간의 분쟁, 에이즈 바이러스 고의 감염, 테러, 제1·2차 세계대전 등에 이르기까지 그 이면에는 복수심이 작용한 것이다. 복수심에 휘둘린 인간들은 그대로 무너져 버리는 것일까. 하지만 용서가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용서는 복수의 치료제나 해독제가 아니라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성급한 복수가 인간 관계 내에서 불필요한 악순환을 낳으며 또 유전적 친족이나 그 밖에 가치 있는 사람 등 가까운 상대에 대한 복수는 그 관계를 깰 수도 있다는 것을 익히며 진화시킨 본성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동물 실험 및 관찰 결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생물학, 사회학, 인류학, 근대 역사, 인간 뇌속의 뉴런 등으로 방대하고 흥미로운 근거를 내세운 끝에 지은이는 복수와 용서가 한 팀이라고 주장한다. 또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등으로 불리는 인간에게 호모 이그노센스(Homo Igno scens), 호모 울토르(Homo Ultor)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각각 용서하는 인간, 복수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복수를 잘 통제하고 용서를 촉진하는지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이를 위해서는 본성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인간이 처한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범죄와 무질서가 난무하는 곳, 치안이 허술하고 정부가 무력하며 생명이 위험한 곳에 살 때 사람들은 문제 해결 전략으로 복수를 선택한다. 반면, 협력 관계가 복잡해서 서로 의존도가 높은 곳, 사법 체계가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곳에서 살 때 더 많은 용서로 반응한다. 지은이는 맥락 민감성, 문화적 생물, 협력적 생물 등 인간에게는 용서를 촉진하는 환경을 만들어 미리 대비하는 특성이 있다고 강조하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1만 6000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로컬플러스] 제주대 새 병원 30일부터 진료

    국립 제주대 부속병원이 30일 제주시 아라1동 새 병동에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한다. 23일 제주대병원에 따르면 제주시 아라1동 8만 2200㎡ 부지에 사업비 1468억원을 들여 지하 2층, 지상 6층 연면적 7만 5552㎡ 규모로 세워졌다. 병상수는 기존 300병상에서 531병상으로 증가하고 수술실도 4실에서 11실(외래 포함 13실)로 크게 늘어났다.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 인력 200여명을 충원하고 방사선종양학과 등 모두 24개과에 진료를 개설해 하루 평균 재원환자 500명, 월평균 외래환자 4만명을 목표로 진료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지역암센터와 심혈관, 응급의료, 건강증진, 뇌신경, 척추관절센터 등을 마련했고 병원 의료장비의 80%를 최첨단으로 교체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열린세상] 종교계 큰어른들의 청빈/박준철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열린세상] 종교계 큰어른들의 청빈/박준철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명동 한복판에 운집한 수십만명의 추모 행렬이, 일생을 참된 목자로 산 그의 선종을 애도하던 광경이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그가 가르치고 실천한 사랑과 나눔의 큰 뜻은 종교와 이념을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성직자 김수환의 진면목은 청빈한 삶에서 두드러진다. 얼마 되지 않는 사재를 털어 줄곧 불우계층을 도왔던 그는 정작 식구들에게는 물질적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고 한다. 대주교이자 추기경의 반열에 오른 그가 남기고 간 것은 낡은 의복과 안경 그리고 푼돈이 들어 있는 통장이 전부였다. 그는 권력에서도 청빈했다. 엄격한 위계가 규범화한 사제 조직의 수장이자 수백만 가톨릭 신자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그는 권위를 내세우며 민중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바보’로 지칭하고 모든 것을 ‘내 탓이오(Mea Culpa).’라고 고백하면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다가간 소탈한 이웃집 할아버지였다. 노사연의 ‘만남’을 즐겨 부르곤 했고, 몸소 철거민의 발을 씻어 주었으며, 명절 때는 성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위해 혼자 나가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권위주의에 대해 자성의 칼날을 세웠기에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그릇된 권력을 그는 주저 없이 질타할 수 있었다. 청빈이 도리어 베푸는 삶으로 승화할 수 있고 권위에 대한 초연함이 진정한 권위로 귀결된다는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가야산 호랑이’ 성철 큰스님도 청빈의 전범이었다. 조계종 종정인 그는 누더기가 될 때까지 승복을 손수 기워 입었고, 이쑤시개를 한 번 쓰고 버리지 않았으며, 화장지도 몇 조각으로 나누어 사용하곤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를 찾았을 때 그는 백련암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5공화국 시절에도 종교인과 정치인은 가는 길이 다르다며 청와대 방문 요청을 번번이 거절했다. 물질과 권력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구도자로서 외길을 걸은 그는 정녕 성직자의 사표였다. 개신교에는 한경직 목사가 있다. 한평생 봉사와 헌신에 매진한 그는 이산의 고통과 가난에 시달리는 월남민의 친구였고 고아와 병자와 장애인들의 아버지였다. 별다른 재산이 없었던 그는 1992년에 받은 템플턴상의 상금 100만달러를 북한 선교에 쾌척했다. 한국 개신교의 상징인 영락교회를 이끈 기라성 같은 목사였건만 그는 은퇴 후 남한산성에 마련된 조그만 외딴집에서 기거하다 여생을 마쳤다. 많은 것을 주고 갔다. 불교와 기독교는 모두 청빈을 본연의 정신으로 삼는다. 한낱 찰나에 불과한 이승의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다. 현세의 부귀영달은 그저 덧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요체다. 요컨대 극락정토와 천상낙원은 철저한 자기부정과 무소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의 종교계는 과연 청빈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가. 웅장한 사찰과 화려한 교회를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지만, 빈곤에 허덕이는 중생과 피조물들을 보면 왠지 심사가 뒤틀린다. 사판승 요직을 둘러싼 스님들의 난투극에 당황했던 우리는 최근 한 개신교 교단에서 감독회장 직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공방에 또다시 좌절한다. 사찰을 개인의 생활방편으로 악용하는 승려와 교회의 공금을 횡령하고서도 한없이 당당한 목사 앞에서 무소유의 정신을 본받기가 만만치 않다. 성직자와 종교단체가 권력과 물질에 미련을 두는 것은 명백한 자기모순이다. 또 거듭되는 자기모순은 준엄한 응징을 초래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청빈을 온몸으로 실천한 종교계 큰어른들이 새삼 그립다. 박준철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 김우중 전 대우회장 “아직 재기 생각해 본 적 없다”

    김우중 전 대우회장 “아직 재기 생각해 본 적 없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일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의 창립 기념행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김 전 회장이 전직 임원 모임인 ‘우인회’에 참석한 것은 10년 만이다. 김 전 회장은 이날 사업 재개와 관련,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시중에 떠돌던 ‘재기설’에 대해 선을 그었다. 그는 “건강이 다 나은 것은 아니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면서 “따뜻한 베트남이나 태국, 중국 등에서 요양을 하며 계속 몸을 추스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옛 대우맨들을 만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건배사에서 “고맙고, 미안하다.”며 10년 만에 만난 옛 대우맨들에게 지난 시절의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이어 “1년 정도 몸을 추스를 테니 다시 또 보자.”며 해마다 참석할 의사를 나타냈다. 이날 분위기는 수차례의 건배사가 이어질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김 전 회장이 앉은 ‘헤드 테이블’에는 강영원 전 대우인터내셔널 사장과 이경훈 전 대우그룹 무역부문 회장, 권영철 전 대우자동차 전무, 신봉섭 전 대우자동차 부사장, 김재용 현 대우인터내셔널 회장 등이 앉았다. 모임엔 200여명의 대우맨들이 참석해 김 전 회장을 환영했다. 김 전 회장은 최근 활발해진 행보와 관련, “베트남에 다녀온 것은 요양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지난달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던 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뵙고 싶어 찾아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우그룹 전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명예회복을 하기에는 아직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면서 “(회장께서) 언젠가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조업중단 속출… 속수무책에 암담”

    “조업중단 속출… 속수무책에 암담”

    개성공단 통행이 지난 일주일 사이 두 번이나 차단되면서 공단 입주기업들의 불안감이 극심해지고 있다. 물류 수송이 끊겨 자재 부족에 따른 생산 차질이 현실화하는 데다 완제품이 북쪽에 묶이면서 바이어에게 물품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5일 개성공단입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4일 개성 현지에서 열린 입주기업 법인장 회의에서 72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5일을 기준으로 이후 6일 이상 인력·물자 통행이 막힐 경우 90%(68개)가 넘는 업체가 가동 중단이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이미 10개 기업은 정상 가동을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가스와 식자재의 경우 ‘6일치 이상’ 재고를 갖고 있는 업체는 하나도 없었다. 디엠에프 박영두 대표는 “지난 일주일 사이 북측의 통행 차단 조치가 두 번이나 있었고 특히 2차 조치는 사흘째 계속되면서 자재 공급이 막혀 지난 13일부터 조업이 멈췄다.”면서 “최악의 상황이며 암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주에도 개성공단 육로 통행 차단이 계속되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거래처와의 계약을 지키지 못하는 입주업체도 늘고 있다. 매년 200만달러어치의 침구류를 생산하는 평안의 오회택 대표는 “매일 40피트짜리 컨테이너에 원자재를 실어 보내면 1300명의 북측 근로자들이 침구류를 만들어 왔는데 개성공단 입·출경 중지로 가스나 유류, 식자재 등의 물자가 올라가지 못하게 돼 3일간 생산이 중단됐다.”면서 “거래처와의 계약도 거의 다 끊겼다.”고 말했다. 의류를 생산하는 문창기업의 문선종 대표도 “17일까지 통행이 재개되지 않으면 공장 가동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면서 “납품지연으로 입주기업들은 국내외 바이어들로부터 신뢰를 잃어 거래선이 끊기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협의회 부회장인 유창근 에스제이테크 대표는 “출입차단으로 개성공단에 진출한 130여 업체뿐만 아니라 4800개 협력업체의 장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주문 취소 등이 심해지고 있다.”면서 “국내에 모(母)기업이 있는 업체들은 그나마 다행인데 개성에 ‘올인’한 소규모 업체들은 출입차단이 2~3일 정도 더 지속되면 경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성공단기업협의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개성공업지구법상 기업활동 보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통행을 즉각 정상화하고, 남북 당국은 이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창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故 김수환 추기경이 최인호 작가에게 던진 수수께끼 같은 화두

    故 김수환 추기경이 최인호 작가에게 던진 수수께끼 같은 화두

    가톨릭 작가 최인호가 김수환 추기경 선종 후 처음으로 월간 <샘터> 4월호(3월 10일 발행)에 게재된 연작소설 ‘가족’을 통해 추모의 글을 발표하였다.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고 며칠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작가는 김 추기경과 나눈 마지막 대화를 시작으로 한 일간지에서 기획했던 대담 때의 추억과 얼마 전 자신이 꾼 김 추기경의 꿈을 소개하고 있으며, 언젠가 김 추기경과 함께 천상의 식탁에서 지상에서 미뤘던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글을 맺고 있다 ■ 천상의 점심식사 글 최인호(소설가) 그림 이우범 지난주는 참 많이도 울었다. 일주일 내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렸으니 어지간히 많이도 운 셈이다. 나를 그토록 슬픔에 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김수환 추기경이다. 살아생전에 추기경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적은 없다. 손꼽아보면 대여섯 번 뵌 것이 고작일 것이다. 한 번은 신문사 인터뷰로, 두어 번은 여럿이서 함께 나눈 식사모임에서, IMF 때는 금 모으기를 하던 서초동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신문사에서 주최한 미술 전람회장에서. 그때 나는 두 신문에 연재하고 있어 몹시 바빴으므로 관람이 끝나고서 추기경님을 모시고 점심을 하기로 한 자리에 빠지게 되어 “죄송합니다, 먼저 가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함께 식사를 하지그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무리하면 얼마든지 참석하고 늦게 돌아와 원고를 써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겐 이상하게도 쌀쌀맞은 구석이 있어 추기경님이라도 내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냉정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 함께 식사를 하지그래’라는 말씀은 이 지상에서 추기경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인연인데도 일주일 내내 추기경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때 추기경님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섭섭해하시던 그 눈빛. 쓸쓸한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다. 언제나 젖어 있던 추기경님의 그 입술, 코에서부터 입까지의 유난히 긴 인중 밑에 언제나 침을 흘리는 어린아이처럼 젖어 있던 그 입술. 그 입가에 항상 번져 있던 미소, 생전에 동료 신부에게 ‘정말 못 해먹겠다’라고 고백하였다던 추기경이라는 성직자의 짐, 그 무거운 십자가, 끊임없이 엿보고 떠보던 지상의 율법학자들과 교묘한 권력자들. 최고의 성직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수도자, 아니 한갓 평범한 평신도로 살아가고 싶어 하셨던 그 모순된 영적 갈등과 시대적 아픔, 수십 년의 불면증(평생 불면을 모르던 나는 최근에야 불면의 고통을 실감하고 있다)과 신경안정제, 그 고통 속에서 피어난 추기경의 천진한 미소들이 떠올라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2003년이었던가. 새해를 맞아 나는 동아일보에서 기획한 새해특집에 추기경님과 대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대담의 첫머리를 나는 이렇게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디딤돌 위에 고무신이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멀리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하여도 집안은 평화롭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집의 어른, 우리 시대의 아버지다….” 그때 벌써 추기경님은 6년 뒤 자신의 임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담의 마무리를 자신의 간절한 소망으로 맺고 있었다. “…그보다도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은 생 동안 하느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에요. 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받아주실까. 물론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용서해주시는 분이지만, 그래도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부끄럽지 않은 영혼으로 서고 싶은데 그것이 걱정이에요. 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요즘 소망이에요. 나이와 함께 오는 여러 가지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도 잘 받아들일 만큼 하느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는 것, 그것이 요즘 간절한 기도 제목이지요.” 지난 7월, 두 번째로 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추기경님이 같은 병동에 입원해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찾아뵙고 싶었지만 그 깔끔하시던 분께서 대소변조차 혼자서 해결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지셨다는 소식을 듣자 문병을 포기하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나라도 누군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기경님이 같은 병동에서 같은 환자로 누워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불면의 밤이면 그분께서도 불면의 고통으로 뒤척이고 계시다는 생각에 얼마나 용기를 얻었던지. 그 지긋지긋한 치료 중에서 내게 찾아온 이 병이 추기경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던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부끄럽지 않은 영혼으로 서고 싶은데 추기경님보다도 천 번 만 번 더 깊은 죄인을 과연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실까?’ 그런 간절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지난 2월 16일 밤. 추기경님이 마침내 선종하셨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나는 얼마나 고맙던지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하면서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거의 동시에 쏟아지는 각종 언론매체의 전화들. 아마도 내가 가톨릭 작가이므로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글을 써달라는 그들의 청탁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추기경님을 위해서 당신도 뭔가 써야 하잖아. 잘 생각해봐.” 아내가 말하자 나는 심각하게 고민을 했고 그리고 일체의 청탁을 거절하기로 하였다. 일찍이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였던 라 로슈푸코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귀중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라 로슈푸코의 날카로운 지적은 진리다. 나는 추기경님을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나 자신을 미화하는 자애심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추기경님은 그날 대담에서 내게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긴 여행이 뭔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 이 짧아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추기경님의 빈소를 찾은 그 많은 사람은 추기경님을 가슴으로 느낀 사람들이다. 살아 계셨을 때는 추기경님의 진면(眞面)을 모른다. 사람의 향기는 죽었을 때야 피어난다. 추기경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이 시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의 심안心眼을 열리게 한다. 살아 계실 때 추기경님을 만나려면 우리는 혜화동에 있는 주교관을 찾아가야 한다. 추기경님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 약속을 하고 정해진 장소에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보고 싶으면 우리는 언제든 마음속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도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다. 그것이 죽음의 신비다. 나는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러한 신비 속에서 그분을 뵈었다. 그분이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돌아가신 다음다음 날, 정확히 2월 18일 새벽이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무엇엔가 쫓겨 복도를 황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복도 끝에 흰 운동화 한 켤레가 있었다. 나는 그 신발을 신고 다시 도망쳤다. 내가 도착한 곳은 다락방. 다락방에는 수많은 성직자가 수도복을 입고 경건하게 앉아 있었고, 내가 들어가자 성직자들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았다. 뭔가 집중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따뜻한 손이 나타나 내가 수술받은 왼쪽 얼굴을 정확히 두 번 쓰다듬으셨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는데 나는 그 손길이 추기경님의 것임을 확신하였다. 생전에 병원으로 수많은 병자를 찾아가 손수 문병하셨던 추기경님이었으므로. 추기경님은 마침내 누군가의 도움 없이 휠체어도 타지 않으시고 이처럼 자유롭게 나를 찾아와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주신 것임을 나는 믿. 는. 다. 대담기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아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죄 많은 김수환 추기경을 용서하소서. 우리는 인간 김수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요즘 나는 내 서재 앞 벽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초상을 내걸고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젠가 천상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지상에서 미뤘던 점심식사를 하게 될 것을 나는 믿. 는. 다. ‘가족’은 최인호 작가가 1975년 9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잡지 역사상 가장 긴 소설로, 394회까지 매달 한 번씩 한결같이 월간샘터에 연재를 하다가 지난해 6월 암 수술을 받고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잠시 집필을 중단했었다. 월간샘터 2009년 3월호 제395회 ‘새봄의 휘파람’ 편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이번 월간샘터 4월호 ‘천상의 점심 식사’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을 소재로 삶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족’은 앞으로 월간샘터 2009년 8월호 게재를 기준으로 총 400회에 이르게 된다 [출처] 故 김수환 추기경이 최인호 작가에게 던진 수수께끼 같은 화두|작성자 샘터지기2009년 3월
  • [서울광장] 상처 없는 치유자는 없다/황진선 논설위원

    [서울광장] 상처 없는 치유자는 없다/황진선 논설위원

    요 즘 지인들에게서 “언론이 정반대의 기사를 싣는다.”는 말을 듣는다. 엊그제도 법조인 몇 분을 만났는데 신영철 대법관 사퇴 불가론과 자진 사퇴론을 펴는 몇몇 신문을 거명했다. 용산 참사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강제진압에 나선 공권력에 더 책임이 있다는 논조와 법을 무시하고 경찰에 저항한 철거민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조가 맞서고 있다. 미디어 관련 법안을 둘러싼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렇게 언론이 극렬하게 대립한 것은 1945년 해방공간 이후 처음일 듯싶다. 당시 언론은 좌우익 세력의 선전지의 성격이 강했지만 요즘엔 언론이 자사이기주의에 따라 스스로 파당성을 띠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 지난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사회통합을 위한 과제 및 추진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통합지수는 2005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국 가운데 19위다. 그만큼 갈등과 대립이 심하다는 경고다. 그나마 좌우갈등, 이념갈등은 사회통합지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으로는 일자리 부족, 소득 불평등, 식품안전·의료 보장 문제, 교육 기회의 불평등, 자산의 불평등 심화를 꼽았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우리나라는 경제 위기를 맞아 올해 상반기에 사회통합지수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최근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5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출판계에서는 ‘엄마를 부탁해’ 신드롬이 경제위기 속에 사회적으로 모성애를 갈망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한다. 얼마전 소설가 이문열은 우리의 지식인 사회가 서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면서 내 상처와 내 아픔이 더 크다고 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고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뒤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사회통합의 중요성을 일깨웠다고 보도했다. 온 국민이 김 추기경을 애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저변의 사랑과 통합을 갈구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김 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을 보면 헨리 나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구세주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 앉아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에 붕대를 한꺼번에 전부 풀었다가 다시 감고 있는데 비해, 자기를 필요로 하는 때를 기다리며 상처에 붕대를 하나씩만 감고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도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남을 생각할 줄 알고 남을 돕기 위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마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구세주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내 상처가 다 아문 뒤에야 누구를 돕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돕지 못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더불어 살기와 일자리 나누기의 실천이야말로 갈등과 분열을 화합의 시대로 이끄는 길이다. 특히 가진 사람들이 고통을 나누겠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김 추기경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돌봐주던 신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평생 사랑과 겸손의 삶을 살았던 김 추기경조차 그런 절대고독을 느꼈다고 하니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 또 어떠해야 하는지 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황진선 논설위원 jshwang@seoul.co.kr
  • 워크아웃 대한조선 선박 건조

    10일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에 자리한 대한조선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상태에서도 네 번째 선박을 건조해 선주에게 인도했다. 이 선박은 대한조선의 주력선종인 17만 5000t급 벌크선(원료운반선)으로 길이 289m, 폭 45m에 15.4노트로 운항된다. 당초 이 선박은 지난해 12월까지 건조돼야 했으나, 회사의 자금난으로 인도시기가 2개월가량 늦춰졌다. 대한조선은 지난달부터 경영관리단의 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자금운용 등에서 숨통이 트였다. 해남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37)한국 시·소설 25권 번역 佛 테제공동체 소속 안선재 수사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37)한국 시·소설 25권 번역 佛 테제공동체 소속 안선재 수사

    한국문학은 작품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그 독특한 어휘와 토속적 뉘앙스를 외국어로 옮기는 번역의 어려움 탓에 세계무대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서야 뒤늦게 번역의 중요성에 눈뜬 문학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여전히 한국문학의 번역은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우리 한국문학을 번역해 세계에 알리는 어려운 작업을 벌이고 있는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의 수사(修士)가 있다. 오래도록 서강대 교수로 살다가 정년퇴직하고 서강대 옆 오피스텔에 연구소를 꾸려 여전히 한국문학 번역에 매달려 있는 테제공동체의 안선재(67·본명 브러더 앤서니·영국) 수사. 얼마 전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의 ‘한국에 와달라.’는 주문에 선뜻 응해 한국 땅을 밟아 귀화까지 한 생활 속 수도자다. 신촌역과 서강대 캠퍼스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오뚝하니 선 허름한 오피스텔 12층. 꽃샘추위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을씨년스러운 날, 작은 방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오피스텔을 찾았다. 궂은 날씨와 어둑한 조명 때문인지 조금은 어둡다 싶은 오피스텔 초인종을 누르니 기다리고 있던 노 수사가 큰 손을 내밀어 손을 반긴다. 왠지 꾸밈이 없을 것만 같은 편안한 얼굴. 푸근한 인상에 편한 마음으로 손을 잡았지만 잘 정리된 집안의 분위기가 순간 객을 긴장하게 만든다. 사방의 벽에 빼곡히 꽂힌 한국 책들, 책상 위에서 몸을 사르는 은은한 향 내음, 그 향 내음에 잘 어울리는 다기들, 그리고 공간 곳곳을 장식하는 그림과 붓글씨들. 번역 작업에 매달리는 서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도자의 은밀한 신앙공간 성격이 강한 독특한 방이다. ● 천상병 ‘귀천’·고은 ‘화엄경’등 번역 “번역을 하다가 가끔씩 머리를 식히려 향을 사르곤 하는데 마음에 드시는지요.” 지리산 자락에서 어렵게 구한 차라며 우려내 따라 주는 차 맛이 일품이다. 생각대로 화제는 자연스럽게 번역에서부터 풀어졌다.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아 번역을 하고 있지만 정말 쉽지 않아요. 텍스트를 정해 1차번역 정도만 하고 세밀한 번역은 전문가에게 맡기지요.” 지금까지 안선재 수사의 손을 거쳐 번역되어 책으로 마무리된 한국 시, 소설만 해도 25권. 천상병의 ‘귀천(Back to Heaven)’, 고은의 ‘화엄경(Little Pilgrim)’,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Faint Shadows of Love)’, 서정주의 ‘밤이 깊으면(The Early Lyrics)’ …. 수사가 손에 잡히는 대로 빼어서 객에게 보여주는 책들이 모두 굵직굵직한 한국 문인들의 시, 소설. 그 공으로 해서 받은 상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상(1991년), 대산문학상 번역상(1995년), 옥관문화훈장(2008년)…. 어떻게 이 많은 작품들을 골라 번역해 냈을까. “1988년 서강대에서 영문과 강의를 하던 중 문득 한국문학을 번역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학생들에게 영문학 강의를 하는 것보다 직접 한국문학에 파고들고 싶은 욕심이었지요.” 서강대 교수에게 뜻을 전해 가장 먼저 1990년 구상 시인의 시를 파고들었고 지금까지 모두 25권의 책을 번역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수사의 이름 ‘안선재’도 고은 시인의 ‘화엄경’을 번역하면서 얻은 이름. 인도를 돌아다니며 53명의 스승을 만난 선재 동자의 역정에서 자신의 한 면을 보았고 또 닮고 싶어 본명 앤서니와 비슷하게 붙인 이름이다. 벽면에 걸린 그림이며 글씨들로 눈길을 옮기자니 사연들을 들려준다. “편액 ‘난석산방’(夕山房)은 고은 시인이 연구소에 달라며 써준 것이고 ‘다선일미’(茶禪一味)는 김지하 시인의 선물입니다. 그 옆의 불상 사진은 구상 선생이 일본에서 구해 선물하신 것이지요.” 53명의 다양한 선지식을 만나고 다닌 화엄경 속 선재 동자만큼이나 안 수사의 삶은 다양한 가지를 쳐왔다. 옥스퍼드의 수재 문학도가 수사의 길을 택해 한국 땅을 밟고 대학교수에서 한국문학 번역가로 살아가는 파격의 연속. 그의 삶은 수사 자신의 말마따나 ‘예측불허’이다. 어려서부터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교회를 다녔지만 중·고등학교는 감리교 계열의 학교에 진학했다고 하니 그의 신앙과 생각은 처음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세, 근대 영문학을 전공해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딴 뒤 공부를 계속할 요량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인연을 맺은 테제공동체가 한국에 온 계기다. 1940년 프랑스의 테제에서 시작된 테제공동체는 개신교와 가톨릭 등 종파를 가리지 않는 독특한 공동체. 화해와 일치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갈등 극복과 평화 찾기 운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가는 수사들의 모임이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혼란기, 자유로운 생각의 소유자였던 그가 테제공동체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내가 갈 길은 이것이다.” 그토록 매달려 살던 모든 학문과 종전의 삶을 송두리째 버리고 평생 구도자의 길을 선택, 파리 공동체에서 5년간을 살았고 1977년 필리핀 남부 다바오의 판자촌 주민들과 어울려 살던 무렵 우연히 판자촌을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한국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는 1972년 이미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시 사제의 신분으로 파리 테제공동체에 들렀던 김 추기경은 한국의 암울한 군사독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테제공동체 수사들이 기도하는 모습에 몹시 감명 받았던 것 같아요.” 7년 뒤 머나먼 필리핀에서 사목하다가 우연히 김 추기경을 다시 만났고 한국에 관심 많던 수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달라.”는 추기경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 故 김수환 추기경 요청으로 한국 와 귀화 격동기인 1980년 한국에 들어와서도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주일 미사 때 김수환 추기경은 영문 자료 번역 등을 자주 수사에게 맡겼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화곡동의 테제공동체 한국 지부를 찾았던 일화도 들려준다. “테제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던 김 추기경이 찾아왔는데 대접할 게 없었어요. 라면을 끓여 드렸는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았다며 웃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서강대 교수로 살기 시작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대학 문이 굳게 닫혔던 1980년. 외국인만 학교를 출입할 수 있었던 시절 우연히 방문한 서강대측이 프랑스어 회화를 가르칠 교수가 없다고 해서 학교 문이 다시 열린 뒤부터 2년반 동안 프랑스어 기초를 강의했다고 한다. 이후 영어회화와 영문학 전임강사로 줄곧 강단에 섰고 학과장도 두 번이나 지낸 뒤 지난 2007년 2월 정년퇴임하고 이곳에 연구소를 차린 것이다. 화곡동 테제공동체 한국지부에서 프랑스, 스위스 출신 수사 3명과 함께 살며 아침 일찍 이곳 연구소로 출근해 하루 종일 번역에 매달려 살다가 화곡동 숙소로 돌아간다. 주일 미사에 참석해 강론을 하기도 하고 화곡동 공동체를 찾아오는 한국인 신자들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미사도 함께 드린다. 생의 극적인 전환을 계속해온 안선재 수사. 한국에 귀화한 노 수사의 앞날이 궁금해진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숱하게 옮겨 살았지만 한국은 정착한 땅이지요. 하지만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은 아직도 끝이 안 잡힙니다.” ‘인생은 40세가 돼야 비로소 시작하는 것’(Life begins at 40)이라는 영국 속담을 들려주는 노 수사는 “한국에서 인생이 시작됐고 그 삶은 곧 신앙이고 거스를 수 없다.”며 언제까지나 ‘어린 나그네’(고은 시인의 화엄경 번역서 이름)로 살아가겠다고 한다. ■ 안선재 수사는 ▲1942년 영국 잉글랜드 출생 ▲1964년 옥스퍼드대 학사 ▲1967년 옥스퍼드대 석사 ▲1969년 박사학위 논문 준비중 파리 테제공동체 방문, 수도자의 삶 결정 ▲1969~1974년 파리 테제공동체에서 생활 ▲1977년 필리핀 판자촌에서 사목중 김수환 추기경 만남 ▲1980년 수사로 한국 생활 시작 ▲1980~2007년 서강대 교수, 학과장 ▲1990년 한국문학 번역 시작 ▲2007년~ 서강대 정년퇴임 후 오피스텔에서 한국문학 번역 글 사진 kimus@seoul.co.kr
  • 최인호씨 연작소설 ‘가족’ 통해 김수환 추기경 회고

    최인호씨 연작소설 ‘가족’ 통해 김수환 추기경 회고

    소설가 최인호(64)씨가 연작소설 ‘가족’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했다. 최씨는 10일 출간되는 월간 ‘샘터’ 4월호에 수록한 연작소설 ‘가족’의 제396회 ‘천상의 점심 식사’에서 “김 추기경 선종 소식을 듣고 일주일 내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렸다.”고 글을 시작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김 추기경이 돌아가신 뒤 각종 언론매체에서 쏟아지던 원고 청탁에도 일체의 청탁을 거절한 이유도 고백했다. ‘우리는 귀중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만, 실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프랑스 라 로슈푸코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그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미화 없이 추기경에 대해 그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생전 추기경과 대여섯 차례 만났는데 마지막 만났을 때 ‘아무리 추기경님이라도 내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냉정하게 식사를 할 수 없다.’고 돌아섰는데, “왜 함께 식사를 하지 그래.” 하던 추기경과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마음에 맺혔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 추기경님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2003년 신년 대담에서 김 추기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긴 여행이 뭔지 아느냐?”고 묻고는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으로, 나 역시 평생 이 짧아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기엔 멀었소.”라고 말했다고 최씨는 회고했다. 지난해 7월 암 수술을 받은 작가는 당시 같은 병동에 입원해 있던 추기경을 차마 문병하지는 못했지만 “추기경님이 같은 병동에서 같은 환자로 누워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불면의 밤이면 그분께서도 불면의 고통으로 뒤척이고 계시다는 생각에 얼마나 용기를 얻었던지….”하고 회고했다. 그는 또 추기경 선종 이틀 후인 2월18일 새벽 꿈속에서 “어디선가 따뜻한 손이 나타나 내가 수술받은 왼쪽 얼굴을 정확히 두 번 쓰다듬으셨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는데 나는 그 손길이 추기경님의 것임을 확신하였다.”고 적기도 했다. 작가 자신의 일상을 바탕으로 한 연작소설 ‘가족’은 최씨가 1975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국내 최장수 연재 소설로, 오는 8월이면 400회에 이르게 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군위군 김추기경 음덕 ‘톡톡’

    군위군 김추기경 음덕 ‘톡톡’

    인구 2만 5000여명에 불과한 초미니 지방자치단체로 변변한 지역 특색마저 없어 전국에 알려지지 않은 경북 군위군이 뜨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군위읍 용대리 옛집에 전국 가톨릭 신자는 물론 일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전국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5일 군위군과 김수환 추기경 생가관리위원회(가칭)에 따르면 김 추기경이 선종한 지난달 16일 이후 어제까지 16일간 추기경의 용대리 옛집을 방문한 참배객은 모두 4000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방문객이 250여명인 셈이다. 군위성당과 군위군청에는 추기경의 옛집을 참배하려는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참배객들은 대구·경북은 물론 서울, 경기, 전남, 부산 등 전국에 망라돼 있다. 이들은 추기경의 옛집을 찾아 집과 마을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생가 주변을 둘러 본다. 추기경이 남긴 큰 뜻인 감사와 사랑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추모한다. 일부는 김 추기경이 5년간 공부했던 군위초교(옛 보통학교)를 둘러보기도 한다. 용대리 박정현(60 ) 이장은 “인적이 드물어 한적했던 우리 마을이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전국의 참배객들로 북적대고 있다.”면서도 “마을 진입로가 좁고 선형도 심해 험한 데다 주차장마저 없어 참배객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아쉬워했다. 군위군 관계자는 “요즘처럼 외지인들이 줄지어 군위를 찾는 것은 사상 처음”이라며 “선종한 김 추기경의 음덕(陰德)으로 지역이 크게 홍보돼 기쁘다. 참배객들을 위해 빠른 시일 내에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군위성당 사목평의회는 김 추기경의 옛집을 방문하는 참배객들이 크게 늘자 이달 중 평의회원 10여명으로 김수환 추기경 생가관리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했다. 평의회 측은 추기경의 생가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용대리 옛집이 생가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다고 판단, 이번에 구성할 생가관리위원회에 ‘생가’라는 용어를 넣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경북도는 올해 영화 ‘워낭소리’ 촬영지인 봉화~김수환 추기경 옛 집~경주 최부잣집 등을 연계하는 주말 테마여행 코스를 개발, 운영하기로 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 [사설] 홀몸 할머니들도 전 재산 기부하는데

    어제와 그제 일부 언론이 모처럼 훈훈한 이야기를 전했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그것도 기초생활 수급자인 80∼90대 할머니 셋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며 각각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것이다. 서울 금천교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93세 김정연 할머니가 전세금·예금 등 2300만원을 내놓았으며 92세 배복동 할머니와 85세 박부자 할머니가 전세금 500만∼900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번 재산 희사 소식이 유별나게 가슴에 와닿는 까닭은, 의지가지없는 이 할머니들이야말로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도 꿋꿋이 생활해온 것은 물론 힘들게 모은 재산을 한 푼 남기지 않고 이웃에게 나눠 주려는 그 마음씨 때문이다. 보도를 보면 할머니들은 전 재산 기부 전에도 수해복구 지원금, 불우이웃 돕기 성금 등에 힘닿는 대로 꾸준히 동참하는 삶을 살았다. 이 할머니들보다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물질 축적에만 신경 쓰느라 이웃의 어려움에 눈감아온 대다수 보통 사람들로서는 할머니들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기부에 나서는 이들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구미 각국의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불황 탓에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 간다. 다만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 기증을 비롯한 기부의 가치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부는 관련 규정을 하루빨리 정비하고 기부·기증제도 운영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해 이 사회의 기부문화 정착을 앞당겨야 하겠다.
  • 사순절, 그의 사랑 더 깊어진다

    사순절, 그의 사랑 더 깊어진다

    ‘사순절에 되살리는 김수환(얼굴) 추기경의 감사와 사랑’ 사순절(四旬節)을 계기로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큰 뜻인 감사와 사랑을 적극적으로 사회에 확산시키자는 운동이 천주교계에서 일고 있다. 사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40일간. 이른바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 부활 전날까지의 46일 중 일요일을 뺀 40일로, 다음달 11일까지 계속된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기간이자 영혼의 죄를 씻는 시간임을 새기는 것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재의 수요일’과 부활절 전 마지막 금요일인 ‘성금요일’(4월10일)에 각각 하루 한 끼 이상을 금식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禁肉齋)를 지킨다. 천주교계가 올해 사순기를 각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지난달 16일 선종(善終)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 기간과 겹치기 때문. 김 추기경 선종 후 처음 맞는 사순절 기간 중 김 추기경의 유지인 ‘감사·사랑’ 운동을 확산시킬 것을 천명하고 나섰다. 천주교 각 교구와 지역 성당들은 사순절이 시작된 지난달 25일부터 ‘사순 저금통 모으기’ ‘사랑의 쌀 한줌 모으기’ ‘헌혈 캠페인’ 등의 이웃돕기 운동을 일제히 시작했다. 이에 발맞춰 한국카리타스(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사랑의 단식재’와 ‘공동헌금의 날’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서울대교구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서울 가톨릭사회복지회를 중심으로 ‘하루 100원 모으기’ 운동과 함께 골수, 장기 기증을 독려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일미사 등 성당에 출석하지 않는 ‘냉담자’의 동참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사순절 기간 중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도록 한 천주교 특성을 살려 세례 받은 본당 신자들에게 우편물을 보내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고해성사를 안내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경남어린이병원 3일 문열어요

    경남어린이병원 3일 문열어요

    국내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춘 어린이전문병원이 경남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에서 문을 연다. 경남도는 1일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경남어린이병원’이 3일 오후 4시 개원식을 갖고 진료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어린이병원 개원에 따라 경남을 비롯해 부산·울산 지역의 어린 환자들이 서울에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전문 진료를 받게 됐다. 경남어린이병원은 2005년 공사를 시작해 국·도비 475억원을 들여 지하 2층, 지상 9층 규모로 건립됐다. 133개의 일반병상과 인큐베이터 병상, 특수병상을 비롯해 첨단 의료시설을 갖추고 소아청소년과와 소아방사선종양학과 등 13개 진료부와 소아심장센터를 포함한 17개 클리닉 등을 운영한다. 특히 어린이병원에는 전국 최초로 인가받은 초등학교가 개설돼 소아암과 백혈병 등으로 오랫동안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어린이들의 학업문제도 해결된다. 양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인사]

    ■한국은행 ◇국·실장 이동△지식정보실장 정광섭△재산관리〃 이경태△국고증권〃 안태훈△광주전남본부장 천승희△포항〃 박찬형◇1급 승진△조사국 임호열△정책기획국 윤면식△금융경제연구원 이종규△대구경북본부 양재룡△광주전남본부 이은모△대전충남본부 김영찬△제주본부 서정곤△경기본부 김윤철△금융감독원 파견 서영식△한국금융연구원 〃 이종건◇1급 이동△조사국 박광민△경제통계국 김현의△금융시장국 이용회△발권국 송규성△국제국 변재영△외화자금국 오재권△경제교육센터 김유곤◇2급 승진△기획국 김태석△전산정보국 이무식△총무국 오인석△조사국 차현진△경제통계국 박진욱△금융안정분석국 나상욱△금융시장국 강지광△국제국 최원형△감사실 남상병△부산본부 김성주△대구경북본부 조용승△목포본부 성경창△광주전남본부 전경진△충북본부 김남영△제주본부 이문형△포항본부 문봉득△한국금융연수원 파견 전승철◇2급 이동△기획국 김덕영 김한중 손동희△금융통화위원회실 이명종△공보실 안희욱△총무국 강철 백상호 이창기(전 기획국) 최창복△연수원 교수연구팀 정구창△조사국 오호일△정책기획국 박성준△금융결제국 김인섭 박하종△국제국 김한수 손민호△외화자금국 최동현△감사실 조희근△대전충남본부 이창기(전 금융안정분석국)△경기본부 백종만△강남본부 고용수△총무국소속 서정국 선종인 이재철◇3급 승진△기획국 송두석△금융통화위원회실 김석원△총무국 소창수△조사국 김종욱 배준석△경제통계국 박성빈△금융안정분석국 김기환△정책기획국 홍경식△금융시장국 양대정△금융결제국 전법용△국제국 이동현△금융경제연구원 김배근△감사실 이윤성△부산본부 김상섭 김형식△목포본부 이종필 정형윤△광주전남본부 권관주△제주본부 배용주△경남본부 서정민△울산본부 최수일△총무국소속 권용준 박준서 이성호 이용주◇3급 이동△법규실 김동명 김영설△금융통화위원회실 오금화 최철호△전산정보국 이윤형 정재욱△총무국 김성묵 박유찬 이병천△경제통계국 장완섭 허남수△금융안정분석국 김광호 정권△정책기획국 김상기 이환석△금융시장국 장정석△금융결제국 나승근 장희만△발권국 김광명 김덕재 정영선△외화자금국 전귀환△감사실 박기용 박상우 방승이 전도희△대구경북본부 국맹수 김용문△광주전남본부 김연태△충북본부 윤태학△인천본부 정옥환△경기본부 이복수 정문갑△강릉본부 남병우△포항본부 배해원△강남본부 박병수 이승우△총무국소속 김진용 신창식 이명희 ■한국농어촌공사 △감사 김경안 ■생명보험협회 ◇임원 승진△상무보대우 김재훈◇부서장 승진△상품제도부장 지정훈△자격시험관리실장 이재운◇부서장 전보△종합기획부장 김기성△보험산업개발〃 윤상△판매채널지원〃 이재용△사회공헌지원센터 〃 남태민△감사실장 정규엽△소비자보호실장 이성열◇지부장 전보△서울 김병식△부산 고기갑△광주 강성규△대전 현춘순△강릉 조홍철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정책연구본부장 정용헌△녹색성장연구〃 오진규△에너지정보통계센터소장 김진우△감사실장 김정수△경영지원부장 이대양△에너지산업연구〃 김기중△에너지정책연구실장 문영석△국제협력연구〃 박용덕△집단에너지연구팀장 최병렬△신재생에너지연구실장 권혁수△에너지모형연구〃 임재규△동북아에너지연구부장 김남일△에너지시장연구실장 이문배△자원개발연구〃 정우진 ■KT&G ◇승진 <상무> △제조본부장 김광준△지원〃 강주원<상무보>△글로벌본부장 홍문봉△감사실장 이수영<임원대우>△전북본부장 전준영◇임원대우 전보△지원본부 정보실장 이광훈△북서울본부장 권봉순△경기〃 민병한△충남〃 최상철△경남〃 김창렬△강원〃 이관주△경북〃 이갑수△원주제조창장 박성훈◇1급 전보△충북본부장 이권성 ■한국교직원공제회 ◇1급 전보 △감사실장 김인상△대구지역본부장 조재열<출자회사>△대교개발 대표이사 김석봉△교원나라제주호텔 〃 이건호△교원나라상호저축은행 〃 박건용△천마개발 〃 이은 ■서울대 △수의과대학장 권오경△자유전공학부장 서경호△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최양희 ■분당서울대병원 △사무국장 윤인희△홍보실장 김상은△경영혁신〃 김형호◇센터장△척추 김현집△뇌신경 박성호△폐 전상훈△진료협력 이재호△의료정보 이학종◇부장△중환자진료 도상환△특수검사 한호성 ■한성대 △교무처장 윤재건△기획협력〃 정승환△학생지원〃 홍승애△총무〃 김영웅△입학홍보〃 고영란△인문대학장 김창룡△사회과학〃 황진수△예술〃 이상원△공과〃 이재득△대학원장 이종수△행정〃 권해수△경영〃 신민철△국제〃 신민철△예술〃 이기향△지식서비스&컨설팅〃 정진택△학술정보관장 김덕자△사회교육원장 홍용식△전자계산소장 정인환△산학협력단장 황기태△언어교육원장 신경숙△인문과학연구〃 박준철△공학교육개발센터장 이재득△공학교육개발센터 혁신위원장 이민석△공학연구센터장 강상욱△산학협력단 부설 미래경영연구원장 홍용식△역사문화학부장 조규태△행정학과장 윤경준△기계시스템공학과장 최재봉△공학교육개발센터 학과프로그램PD 조세홍 ■용인대 △기획처장 최종삼△학생〃 김관현△대학원장 조경동△교육〃 이근일△체육과학〃 조효구△예술〃 김창유△경영〃 송호달△무도대학장 이병익△체육과학〃 허남양△산업정보〃 성낙현△도서관장 박종수△산학협력단장 김철△국제교육원장 한일동△국제스포츠과학연구〃 김기홍△대학원교학부장 박순호△무도연구소장 김규수△특수체육연구〃 최혜라△체육지원실장 조용철 ■세계일보 △경영지원본부 부장(비서담당) 김희준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상무이사 여재천 ■대신증·투신운용 <대신증권> ◇전보△기획실장 홍대한△법무〃 박찬명<대신투자신탁운용> ◇신규선임△상무 김범철△법무본부장(이사대우) 최정석 ■이트레이드증권 ◇상무 △리서치센터장 박병문△법인영업사업본부장 김종빈
  • “장기기증은 수명의 2~3배 더 사는 것”

    “장기기증은 수명의 2~3배 더 사는 것”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비롯한 복지부와 산하기관 직원 1795명이 27일 명동성당에서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김운회 이사장에게 장기 기증 신청서를 전달했다. 장기기증 신청에는 윤여표 식품의약품안전청장과 송재성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등 기관장도 참여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진석 추기경은 “장기 기증은 자신의 일부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고 수명의 2, 3배를 살아가는 것”이라면서 “장기 기증이 급속히 확산되면 우리 국민의 수명이 2, 3배 연장된다.”고 기뻐했다. 전 장관은 이후 정 추기경과의 비공개 면담에서 “개신교와 불교 등의 모든 종파가 함께 장기 기증 운동에 참여하고 캠페인을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관을 포함해 1000명 이상의 공무원 및 산하기관 직원이 동시에 장기 기증을 신청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행사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 이후 확산되고 있는 장기 기증 열풍을 이어가고자 하는 전 장관의 권유로 마련됐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1988년 김 추기경이 장기 기증 신청 접수 등의 사업을 목표로 설립한 뒤 초대 이사장까지 지낸 사회봉사단체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복지부는 다음달 2일부터 연말까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대한이식학회와 함께 ‘장기 기증 범국민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장기 기증의 날’ 제정 사업도 추진된다. 대한이식학회도 최근 김 추기경이 선종한 2월16일을 장기 기증의 날로 만들자고 추천한 바 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백상예술대상] 대상 김혜자 “빚 대신 빛 발하는 배우 될터”

    [백상예술대상] 대상 김혜자 “빚 대신 빛 발하는 배우 될터”

    김혜자가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진행된 제 45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TV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김혜자는 지난해 방영됐던 KBS 2TV 주말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 출연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김혜자는 트로피를 안고 “저에게 상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좋은 작품 써주신 김수현씨께 감사드린다. 상을 받는다는 건 배우로서 가슴 설레고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되돌아보게 된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이어 “저를 사랑해주는 분들께 빚을 지는 기분이다. 갑자기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난다. 그분은 세상에 빚을 남기지 않고 빛을 남기셨다. 저도 빚을 내지 않고 빛을 발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사진출처 = 서울신문NTN DB) 서울신문NTN 김예나 기자 yeah@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길섶에서] 성인(聖人)/ 오풍연 법조대기자

    고 김수환 추기경의 여운이 여전하다. 많은 이에게 슬픔보다는 희망을 던져 주었다. 온 국민의 추모속에 떠난 그를 다시 생각한다. 조문기간 4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명동성당에 몰렸다. 김 추기경을 40년 보필했던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생각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추위 속에 3, 4시간을 기다리며 추모하던 행렬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마지막 모습을 보러 왔다기보다는 ‘고맙다.’는 인사하러 다녀간 것 같다.”고 했다. 질서정연한 추모행렬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외신들도 이 같은 모습을 타전하기에 바빴다. 추기경님은 떠났다. 선종 후 보수 진보의 잣대로 평가했던 일부의 평이 새삼 부끄럽다. 그만 한 인물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지난 족적을 보면 그의 그림자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더욱 그리운지 모른다. 하지만 성인을 그냥 보내기만 하면 안 된다. 그분의 모든 것을 한 단계 더 승화시켜야 한다. 지금 나라가 무척 어렵다.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추기경님을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내자. 오풍연 법조대기자 poongynn@seoul.co.kr
  • “추기경님의 발톱은…” 마지막 1년 지켜본 신부의 일기

    “추기경님의 발톱은…” 마지막 1년 지켜본 신부의 일기

    ‘추기경님 발톱 - 2008년 9월 12일  우리 추기경님은 발톱이 못 생기셨습니다.  무좀이 오래 되어서인지 삐뚤빼뚤 이상하게 변형되었습니다.  특히 오른쪽 발 가운데 발톱은 발톱 위에 카라멜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이 기형으로 자랐습니다.늘 불편해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음먹고 신문지 깔고 주저앉아서 발톱 원형복구 공사(?)를 감행했습니다.  땀이 비오듯 했습니다.드디어 30분 정도 걸려 갈고 닦아서 성공적으로 원형을 복구해드렸습니다.  수녀님과 간병인께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을 해주었다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추기경님도 흡족하신 것 같았습니다.  추석 선물로 추기경님 달구경 시켜드리고 싶었는데 그것은 못해드리고 발톱 깎는 선물을 해드렸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인 루가 고찬근 신부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홈페이지(cardinalkim.catholic.or.kr)에 지난 22일 올린 ‘추기경 투병기’가 또다른 감동을 전하고 있다.고찬근 신부는 김 추기경의 불꽃이 사위어가던 지난 1년여 ,한달에 한 두번 많게는 서너번 꼴로 추기경을 찾아뵜을 때 있었던 일과 느낌들을 일기 형식으로 꼼꼼히 기록했는데 많은 망설임 끝에 홈페이지 추모 게시판에 올린 것.홈페이지를 찾은 신도 등이 꼭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고 신부는 “죽음을 맞이 하시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고매한 인격을 전하고 싶고,추기경님을 열심히 간병한 많은 분들의 노고를 함께 기억하고자” 이 글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기에는 김 추기경이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장면도 나온다.  ’선종의 은혜를 구하며 - 2008년 1월 20일  추기경님 어머니는 무척 엄하셨답니다.  특히 막내인 추기경님께 엄하셨고 당신도 어머님께 무뚝뚝하게 대해드렸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 징병되어 나간 학병시절에 바다에 빠져 돌아가실 뻔하다 살아나셨는데 바다 위에 어머니의 모습이 비치고 그 순간 당신이 어머니의 품에 돌아가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마음속으로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추기경의 어머니는 추기경이 신부가 된 뒤 본당신부 시절에는 사제관에 모시고 살았으나 주교님 비서가 되고는 모실 수 없어서 셋방살이를 했다고 고찬근 신부는 설명했다.추기경은 어렵사리 어머니께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해드려 형수와 조카들이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겨울이 끝나가던 사순절 어느 날,고해성사를 보고 집에서 갑자기 쓰러졌고, 급히 찾아간 아들 신부 무릎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고 신부는 어머니 얘기 끝에 추기경이 “많은 사람이 당신(나) 때문에 고생하고 걱정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씀하길래 “(추기경님은) 정말로 우리시대의 큰 산으로, 거목으로 우리를 위해 훌륭하게 잘 사셨기에 주위 사람들의 그런 돌봄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드렸다고 돌아봤다.그러자 추기경은 “아니야, 겉으로 보기에만 그랬어. 많이 부족했어.”라고 답했다는 것.  2008년 10월 4일 고 신부의 일기에는 하루 종일 깨어나지 못했던 추기경이 밤 11시 30분쯤 눈을 뜨고 “아야, 아야!”라고 신음하며 온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고 적혀 있다. 고 신부는 ‘추기경의 고통을 호소하는 그 “아야, 아야” 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라고 적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일기에는 변비 때문에 고생많은 추기경의 관장을 송구스럽게도 직접 지켜보고 발을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는 고 신부의 일상이 담겨 있다. 그는 ‘추기경님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꾸 “가라, 가라.” 하신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재미없다 하시며 “가라, 가라.” 하신다.그래도 좀 더 오래 있으면 좋아하신다.’고 회상했다.이밖에도 ‘개구쟁이 추기경님’ ‘달을 사랑한 소년’ 등 눈에 띄는 제목의 일기가 적지 않다.  고 신부는 추기경이 선종한 지난 16일 퇴근 시간에 차가 워낙 많이 밀려 강남성모병원에 이르지도 못하고 선종 소식을 전화로 들었던 사연을 18일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그는 이날 일기에 ‘날씨는 춥지만 추기경님을 애도하는 조문 행렬 속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적을 맛본다.생전에 당신 고독의 든든한 벗은 되어드리지 못했지만 철없던 우리의 따뜻해진 마음을 보시고 고독의 기억은 지워버리세요.’라고 추기경께 마지막 감사를 전했다.  인터넷서울신문 윤창수기자 geo@seoul.co.k
  • 故김추기경 선물 장기나눔 바이러스 조명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지난 16일 평생 동안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벗이 됐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도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김 추기경. 그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지만, 생전에 한 약속대로 그가 기증한 안구는 다른 두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안겼다. KBS 1TV ‘생로병사의 비밀’은 26일 오후 10시에 방송되는 ‘생명의 빛을 나누다 - 고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선물’편(연출 최기록)에서 김 추기경이 세상에 남기고 간 장기기증의 불씨를 쫓아 그 의미를 되새긴다. 또 장기기증 현장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들과, 장기기증으로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사랑과 나눔의 한평생을 살고 간 김 추기경, 그가 떠난 자리는 나눔 바이러스로 채워지고 있다. 추기경의 안구 기증 이후 장기 기증 신청자 수가 눈에 띄게 늘면서 장기기증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관심이 일어난 것. 제작진은 그가 남기고 간 아름다운 생명의 빛을 추적해 본다. 현재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KO NOS)에 등록된 각막이식 대기자는 3645명. 하지만 실제로 각막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다. 이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남기고 간 각막은 세상의 빛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유순상씨는 26년 전 작업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양쪽 눈을 잃었다가 지난 2007년 각막을 기증받은 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래서 유씨는 김 추기경의 선종과 안구기증 소식이 더 고맙고 가슴 아프다. 제작진은 건강과 활기를 되찾은 유씨를 다시 찾아가 본다. 각막뿐이 아니다. 2004년 뇌사 기증자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시작한 김상돈씨. 김씨는 당시 5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다. 하지만 성공적인 간 이식 후 김씨는 건강을 회복해 갔고, 히말라야를 등반할 정도로 건강해졌다. 제작진은 이와 함께 기증자의 사연도 들어 본다. 2008년 7월19일, 생후 8개월의 찬희는 뇌사판정을 받았다. 찬희의 부모님은 어렵지만 뜻 깊은 결정을 내렸다. 찬희의 죽음을 인정하고 장기를 기증하기로 한 것. 결국 찬희는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났지만 세 명의 또래 아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남겼다. 찬희가 떠난 지 7개월, 제작진은 가족들을 만나 마음 속에 남은 찬희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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