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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김해지역 가장 오래된 최초 읍지(邑誌) 발굴

    경남 김해지역 가장 오래된 최초 읍지(邑誌) 발굴

    경남 김해지역의 가장 오래된 읍지(邑誌)가 발굴됐다. 김해시는 20일 시 문화재과 시사편찬연구팀이 ‘김해시사’ 편찬을 위해 관내 마을 기초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진영읍 신용리 한 주민이 보관하고 있던 읍지 ‘분성여지승람신증초(盆城輿地勝覽新增抄)’를 발굴해 기증을 받았다고 밝혔다.분성은 김해의 옛 이름이다. 시에 따르면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김해지역 읍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최초의 읍지로, 편찬 시기는 18세기 전반기인 1730년대 중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읍지가 발굴되기 전까지 확인된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읍지는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김해진김해도호부’(1775년)이고 다음으로 ‘김해부읍지’(1786년)가 있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각촌 항목에서 주촌, 상동, 진례, 생림, 활천, 칠산 등 동리별로 위치, 인구, 토지 결수를 구분해 상세히 기록했다. 끝 부분에 김해 전체 인구와 결수를 표기했다.18세기 이후 편찬된 읍지에서는 분성여지승람신증초와 같은 표기 방식이 사라지고 김해 전체 인구와 호수, 토지 결수만 간략히 기재했다. 동리별로 상세하게 표기한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로 알려진 1587년(선조20년)에 편찬된 함안의 ‘함주지’와 비슷하다. 시는 따라서 분성여지승람신증초 최초 판본 편찬 시기는 ‘함주지’가 편찬된 16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시에 따르면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몇 차례 증보된 것으로 확인됐다. 김해도호부사 안몽윤이 쓴 ‘임관선생안’ 서문 작성 연도인 1630년(인조 8년) 무렵에 첫 신증(新增)이 이뤄졌다. 이 책 발문에는 1699년(숙종 25년) 조정의 명령을 받은 김해 사람 송수(宋洙), 노문필(盧文弼), 조구령(曺九齡) 등이 1700년(숙종 26년)에 증보하였다는 서지(書誌) 사항이 기록돼 있다. 이후 김해부사 한형(韓珩) 재직 시기(1733년 9월~1736년 7월, 영조 9년~12년)에 한 차례 더 증보됐다.시는 분성여지승람신증초에는 김해의 연혁과 성씨, 인물, 고적, 풍속, 효행, 산천, 토산물 등 김해의 박물학적 내용이 모두 기록돼 있어 조선중기 김해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 된다고 밝혔다. 시는 이 책을 토대로 이후 김해읍지가 계속 추가 보완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시 관계자는 “가장 오래된 김해읍지인 분성여지승람(신증초)은 18세기 후반 ‘김해읍지’부터 1929년에 마지막 편찬된 ‘김해읍지’의 모본(母本) 역할을 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시는 분성여지승람신증초 관련 연구를 보완해 사료 가치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고증한 뒤 앞으로 김해시사 편찬에 기초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인사]

    ■인사혁신처 ◇국장급 전보△윤리복무국장 임만규 ■관세청 ◇과장급 전보△자유무역협정집행기획담당관 이철재△자유무역협정협력담당관 양영준△기획심사팀장 최재관△국제조사팀장 이민근△서울세관 조사1국장 우현광△서울세관 조사2국장 이병학△부산세관 감시국장 김영우△양산세관장 정광춘△관세청 박희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본부장급△원자력안전본부장 황태석△방사선안전본부장 장재권◇단·부장급△원자력검사단장 장창선△안전평가단장 조상진△안전연구단장 김만웅△안전정책단장 정구영△방사선규제단장 김경화△폐기물해체규제단장 안상면△생활방사선안전센터장 김용재△경영관리부장 최윤성△전문위원 김용범◇실·팀장급△검사총괄실장 허창욱△고리규제실장 신호상△한빛규제실장 최용석△한울규제실장 김윤일△월성규제실장 이재도△심사총괄실장 이정재△신고리5·6PM 허병길△PSR PM 배용범△연구로PM 김선재△기계·재료평가실장 이상민△계통평가실장 김종갑△구조·부지평가실장 정래영△규제검증평가실장 신안동△안전정책실장 최영성△국제협력실장 이영일△안전기준실장 윤영식△규제법무실장 장영순△방사선규제총괄실장 이복형△방사선규제PM 박재정△운반가속기PM 한상은△폐기물해체규제총괄실장 서은진△핵주기PM 지용기△방사선평가실장 전제근△처분규제실장 박진용△해체규제실장 정해용△환경방사능평가실장 김철수△생활방사선총괄실장 최원철△생활방사선조사평가실장 김홍석△생활방사선측정평가실장 임성아△기획실장 이상원△예산실장 정현복△사회가치경영실장 한덕규△소통협력실장 유정△총무실장 정병준△인사실장 박정섭△회계실장 김현성△구매실장 권오석△인재개발실장 명창연 △대외교육운영실장 정재웅△면허시험관리실장 감성천△정보기술실장 진형식 ■한국지질자원연구원△부원장 김광은 ■경북 봉화군◇5급 승진△기획감사실 정상대△총무과 남병진△주민복지실 이영미◇농촌지도관 승진△농업기술센터 김성용 ■광주상공회의소△경영지원본부장 채화석△기획조사본부장 이후형△협력사업본부장 이명수△회원사업본부장(나주지부장 겸직) 강조병 ■신영증권 ◇보직△리서치센터장 김학균△산업분석팀장 서정연◇전보△Coverage부 차장 김태우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명이 트집잡던 ‘조·종’ 호칭 해결… 35세 명문장이 조선을 구했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명이 트집잡던 ‘조·종’ 호칭 해결… 35세 명문장이 조선을 구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1564∼1635)는 탁월한 문장가로, 중국어에도 능통한 최고의 외교관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중국 명·청 교체기를 거치는 동안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복잡다단한 외교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다시피 했다.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노인이란 사람이 바다에 표류해 중국 소주와 항주 지역에 이르렀다. 그 지역 선비들이 모두 이정귀의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외면서 “조선사람 이정귀의 글”이라고 했다. 숭정 을해년(1635년)에 동지사로 홍명형이 중국에 갔더니 광녕 옥전의 선비가 역시 이 ‘무술변무주’ 베낀 것을 가지고 와 이정귀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무술변무주’는 당시 중국 사람들도 인정한 명문장이었던 셈이다.#중국서도 문명 떨친 외교관 “조(祖)·종(宗)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소방(小邦)은 해외의 먼 나라로서 삼국시대 이래 예의(禮義)의 명호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서로 비슷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에 이르러서는 무릇 분수에 넘치는 것들을 일절 고치고 바로잡아 미세한 절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중을 기함으로써 상하의 분한(分限)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금석처럼 굳게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유독 칭호만은 신라·고려 때부터 이러한 잘못이 있어왔는데, 신민(新民)들이 잘못된 옛 습속을 그대로 이어받아 외람되이 존칭(尊稱)을 계속 사용하면서 고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 글은 이정귀가 35세 때인 무술년(1598년) 선조 31년에 지은 ‘무술변무주’의 일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람 정응태가 찬획주사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해 조선을 무함했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를 치도록 일본과 내통해 일본 군대를 끌어들였으니, 조선이 참람되게 천자의 묘호(廟號)인 ‘조·종’을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조선은 건국과 함께 천자의 칭호인 조·종을 사용해 원나라에 복속되면서 잃었던 천자국의 자존심을 다시 세웠던 것인데, 이 일로 명나라는 조선을 위협하면서 조·종의 호칭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참혹한 전란의 와중이었고 명나라는 막대한 국력을 쏟아부어 조선을 구원했기 때문에 그만큼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지고 나라의 자존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정귀의 ‘무술변무주’의 힘이 컸다. 이 일로 이정귀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리고 1618년 명나라가 후금과 전쟁할 때 조선이 원군으로 파견했던 강홍립의 군대가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적군에 투항하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해 심지어 ‘조선을 감호(監護)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감호란 나라를 감독해 속국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이를 예전의 정응태 무고사건보다 더 큰 변고라 여긴 광해군은 1620년 다시 이정귀를 진주상사로 북경에 보냈고, 이정귀는 역시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해 사태를 잘 무마했다. 이정귀가 북경에 있을 때 왕휘 등 많은 중국 선비들이 찾아와 지은 시문을 보여 달라고 간곡히 청하기에 사행 중에 지은 시들을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이란 제목으로 묶어 주었다. 이에 왕휘가 서문을 붙여 한 권으로 간행하고 섭세현이란 사람이 운남 지방으로 가면서 그 판본을 가져갔다. 왕휘는 서문에서 중국 문장의 대가들인 후한의 조식과 유정, 당나라 이백, 두보보다 낫다고 극찬했다.#한문사대가 중 한 사람, 격동시대 살다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한 사람으로 꼽히는 문호 이정귀는 세조 때 명신 이석형(李石亨·1415∼1477)의 현손으로, 1564년 10월 8일 서울 청파리에서 태어났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해 정9품인 승문원정자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전문 관료로 출발한 것이다. 이정귀는 이로부터 46년 동안 청요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특히 예조판서를 아홉 번 역임하고 대제학이 두 번 돼 문형(文衡)을 잡았다. 장유(張維)는 ‘월사집서’(月沙集序)에서 “고금의 문인을 통틀어서 공만큼 재능을 인정받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정귀는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의 조정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광해군 때에는 전란은 없었지만 1613년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계축옥사는 역옥(逆獄)으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선왕인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든 대신들과 함께 영창대군을 추대하기로 했다는 게 죄목이었다. 신문 과정에서 이정귀도 연루됐으나, 명·청 교체기에 유능한 외교관이 필요했던 광해군의 옹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17년에는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자는 소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 이정귀는 병을 칭탁해 조정회의에 불참하며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만난다. 백발의 몸으로 다시 만나니 여생은 모두 성은으로 얻은 것 우리들 앞엔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세상사는 말하고 싶지 않구려 물이 드넓으니 교룡이 숨고 겨울이 따스해 기러기 놀란다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 이정귀가 술을 가지고 백사 이항복을 찾아가 작별하며 지은 시로 당시의 위태한 정황과 결연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라는 두 구절은 널리 인구에 회자된다. 마지막 구절인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에서 ‘목릉’은 선조(宣祖)의 능이니, 목릉촌은 선조의 능이 보이는 마을이다.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알림 고전의 향연과 번갈아 격주로 연재되던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필자들의 사정으로 4회에서 끝을 맺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 [김태의 뇌과학] 습관의 뇌과학

    [김태의 뇌과학] 습관의 뇌과학

    습관이란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우리는 수많은 습관 속에서 살고 있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며, 다리를 떨기도 한다. 우리의 의식이 알아채지 못한 채 이뤄지는 수많은 행동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뇌과학으로 밝혀진 습관의 비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우선 습관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측정 가능한 정의가 필수적이다. 에이드리언 헤이스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습관을 연구하고자 했다. 우선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목적 달성에 가까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목적지향 행동’과 목적과 관계없이 발생하는 ‘습관 행동’이다. 예를 들어 퇴근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 집에 가려고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바로 와버렸다면 목적 지향 행동을 하지 못하고 습관 행동이 발생한 것이다. 허기진 실험쥐를 미로에 넣고 먹이를 일정한 장소에 넣어 주면 실험쥐는 쉽게 그 장소를 찾게 된다. 그런데 충분한 먹이를 먹은 상태에서 같은 미로에 넣어 주면 실험쥐는 습관화된 장소를 찾아가지만 정작 먹이를 먹지 않는다. 이런 현상 역시 습관 행동이 나타난 것이다. 습관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목적지향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 행동으로 바뀐다. 새로운 행동을 학습하는 과정 초기에는 목적지향 행동이 이뤄지다가 습관 행동으로 전환돼 의식의 판단 없이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목적지향 행동을 주로 하며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목적지향 행동은 반복적인 연습의 과정을 통해 습관 행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현상일 때가 많다. 실제로는 습관 행동이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을 차지하고 있다. 습관이라는 형태로 ‘세트 메뉴화’된 행동은 의식이 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작동 가능한 장점이 있다. 그럼으로써 의식은 다른 중요한 판단을 하는 데 활용돼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게 된다. 설치류 뇌의 등쪽 내측 선조체(영장류에서는 미상핵)는 목적지향 행동을, 등쪽 외측 선조체(영장류에서는 조가비핵)는 습관 행동을 만들어내는 데 관여한다. 이 회로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작용해 최선의 행동을 만든 결과가 습관이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대체로 쉽지 않고 수많은 의식적 반복행동을 통해서만 새로운 습관이 형성된다. 우리는 걷기와 말하기부터 글씨를 쓰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신발 끈을 묶고, 전화를 받고,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습관화된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라는 ‘자동항법장치’를 켜고 살면서 중요한 사안의 결정에만 효율적으로 뇌기능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습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통해 더 나은 습관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 ‘방씨 부인’ 이순신 장군 부인 실명 “방수진” 확인

    ‘방씨 부인’ 이순신 장군 부인 실명 “방수진” 확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 부인의 실명이 ‘방수진(方守震)’임이 국보 기록물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7일 전라남도 이순신 연구소에 따르면 현충사에 보존 중인 국보 76호 서간첩(書簡帖)에 이순신 장군의 선친과 부인의 실명이 함께 기록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간첩은 이순신 장군이 영암에 사는 현건과 현덕승 등 연주 현씨 문중 지인에게 보낸 친필편지를 모아 엮은 기록물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주 현씨 문중에서 200여년 간 보존됐던 서간첩은 충무공의 8대손이자 영암군수였던 이능권에게 발견돼 지금은 현충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서간첩 상단에는 편지 내용, 서체와는 무관한 다른 형태로 충무공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처(妻) 방수진(方守震), 아버지는 정(貞)이라고 쓰여 있다.노기욱 전남 이순신 연구소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소장한 국보 76호 서간첩 문서 이미지를 사용 허가를 받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기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충무공 부인은 목민관인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로,이름은 태평, 연화 등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 충무공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상주 방씨(尙州方氏) 가문의 딸과 결혼했고 문과 시험을 공부하다가 결혼 이듬해부터 무과 시험을 준비했다. 선조는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에게 우의정을 증직하고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고유의 행시,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 문인 많아”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고유의 행시,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 문인 많아”

    정동희 한국행시문학회장이 말하는 행시의 매력“행시를 사람들이 우습게 아는데, 우리 조상이 썼던 고유의 시이자 문학입니다. 언젠가는 제대로 대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내용적으로는 독보적인 장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운이 있는 문학은 행시 밖어 없어 그 가치가 매우 큽니다.”(행시(行詩)는 두 자 이상의 운(韻)을 맞춘 시로, 주로 시구 첫 단어에 운을 맞춘다.) 정동희(68) 한국행시문학회 회장은 “혼탁하고 복잡한 세상을 딱 한 큐에 아우러지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행시의 묘미”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유일의 행시문학 계간지이자 행시인들의 등단 통로인 ‘한행문학’ 34권째 냈다. 또 개인적으로는 2010년부터 해마다 1권의 행시집을 냈다. 영어 행시집까지 냈다.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 순수에서 그를 만났다. 붉은 조끼에 모자를 걸친 그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나왔다고 했다. - 행시의 매력은. ☞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언어유희를 즐길 수 있습니다. 묘한 만족을 주지요. 행시를 쓰는 행시인에겐 운과 행을 멋지게 어울리게 해서 거기에 메시지를 담죠. 쓰고 나면 만족감과 성취감, 행복감을 줍니다. 이게 매력이어서 밤새 쓰고 또 씁니다.- 행시를 쓴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 일반인들은 즉석에서 운을 불러줍니다. 보이는 대로 ‘만. 두. 국.’처럼. 그런데 소위 제도권 문학에서는 ‘그게 뭔데···.’ 하는 식으로 이상하게 봅니다. 10년 전에 저는 한울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만, 행시를 발가락에 때만큼도 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야, 이것 해보니 어렵더라.’는 시인도 있습니다. - 행시를 접하게 된 계기는. ☞ 행시를 접하기 이전엔 문학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군대에서는 ‘화학 장교’로 약 30년간 생활했습니다. 대령으로 예편하던 2001년, 한일월드컵 개최 1년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월드컵 붐 조성을 위한 행시를 모집하더군요. 거기에 ‘w. o. r. l. d. c. u. p.’이란 알파벳을 이용해 8행시를 응모했는데, 댓글이 굉장하게 달렸습니다. 예편 직후 지방에 있던 회사에 다니면서 인터넷을 배우고 싶어 카페에 가입했습니다. 그때 가입한 인터넷 카페가 ‘인터넷을 즐기는 아름다운 40대’였는데 줄여서 ‘인즐아사’라고 하기에 ‘인.즐.아.사.’와 ‘지.방.서.도. 가.입.되.나.요.’를 두운으로 행시 100여편을 써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카페 회원들이 따라 쓰고 난리 났었지요. 그 뒤 지금까지 행시만 쓰고 있습니다. - 행시를 잘하면 직장에서 인기가 좋았겠다. ☞ 웬걸. 군대생활 잘하고 있던 내게 모 대기업 회장이 ‘우리 회사에 와서 나 좀 도와다오’라고 해서 그 회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이 서툴러 에프엠(FM)대로 처신하다 보니 1년 만에 쫓겨났습니다. 군대에서 동시통역도 하고, 화학장교로서 나름대로 스펙이 좋았는데, 그 회사에서 쫓겨나니 오갈 데가 없더군요. 그래서 행시 쓰는 데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 카페 활동도 열심이던데. ☞ 2002년도에 처음으로 행시 전문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행시를 보급하고, 동호인들끼리 소통하자는 취지였죠. 이게 10년이 넘었는데 네티즌이 많이 알고. 여러 행태의 행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많이 하는 삼행시, 가나다라 행시(일명 14행시), 퍼즐행시, 11자 행시, 주먹행시 등등. 카페 활동 초창기에는 겨우 운에 말만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펄펄 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행시인들 수두룩합니다만 그 밑바탕을 제가 깔았다고 자부합니다. - 우리 선조들은 행시를 얼마나 즐겼나. ☞ 조선실록에도 행시가 많이 등장합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겐 신행시, 관직을 그만두거나 이별할 때 송행시, 행사나 잔치에서는 증행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하륜, 권근, 한명회 등이 행시를 지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선 행시로 말운으로 인재를 뽑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방랑시인 김삿갓도 행시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지요. 물론 서양에서도 소네트(sonnet)라는 행시가 있었지요. 이런 걸 보면 행시가 최근 하늘에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우리 조상이 쭉 해왔던 것입니다.- 주먹 행시는 무엇인가. ☞ 시가 너무 짧아서 한 주먹에 다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주먹시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3행시 17글자로 5-7-5조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 운을 붙여 2009년부터 시를 지으며 ‘주먹 행시’로터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주먹행시의 효시이지요. 사실 5-7-5조 17글자 단시는 압축과 절제미를 상징하는 일본 하이쿠(俳句)가 연상되지요. 이 하이쿠는 조선시대의 통신사가 일본에 전파한 것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조선후기 장한종이 편찬한 유머집인 ‘어수신화’에 작시 17자가 등장합니다. - 이런 유서 깊은 행시가 왜 한국문인협회 등록 안 됐나. ☞ 지금은 힘이 없고, 세력이 약해서 ‘행시 분과 하나 주세요.’해도 기득권인 제도권의 그들은 눈도 끔뻑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사고방식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더 잘 표현하고, 독보적인 장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면 행시분과가 떳떳이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성의 시인이나 시조시인들, 작가들이 행시를 지어보다가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행시는 아무나 쓸 수는 있지만 잘 쓰기는 쉽지 않거든요.- 운이 있으면 감정 표현에 어렵지 않나. ☞ 운이라는 제약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제약을 뚫고 나온 작품들 가운데 문학성이 높은 아주 좋은 작품들도 많습니다. 개막한 운에 재치가 번득이는 행시도 많고. 운이 들어 있는데도 일반 시처럼 보이는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도 보입니다. - 일반인을 위해 행시 짓기 조언을 한다면. ☞ 혼자서 익히기보다는 가능하면 행시동호인들과 함께하는 것을 권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학 하려고 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운은 쉬운 글자로 하는 게 좋습니다. 두음법칙은 허용하지만, 운을 변형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녹색’을 ‘록색’으로 바꿔도 무방하지만 ‘로미오’를 ‘노미오’로 해서는 안됩니다. 한 행은 20자 이내로 함축성과 절제미를 살리면 좋습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 종묘(宗廟)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 종묘(宗廟)

    “왜적 대장 평수가(平秀家)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경동(驚動)하여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선조실록 26권, 국편영인본 21책 486면> 1592년 음력 4월30일 새벽, 선조는 서울을 급히 빠져 나간다. 4월 14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과 열흘 만에 한성이 함락될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에 임금은 백성의 원성은 뒤로 한 채 급히 몸을 개성으로 옮긴다. 이 때 임금보다도 먼저 서울을 빠져나간 것이 바로 종묘와 사직에 있던 신주와 위판이었다. 조선에서 임금이라는 자리는 말 그대로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상징이자 유교의 심장인 종묘(宗廟)다. 종묘(宗廟)를 둘러보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덕수궁 등지를 휘적휘적 카메라 셔터 누르며 지나치는 발걸음과는 사뭇 다른 곳이 종묘다. 종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마음인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인 백(魄)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하는데, 신혼은 사당으로 모시고 체백은 능이나 묘로 모셔진다. 여기서 조상의 마음, 즉 몸을 떠난 혼령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사당에 있는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다. 흔히들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종묘는 바로 조선의 왕과 왕비들의 혼령, 즉 신주가 모셔진 사당이다. 지금의 종묘(宗廟)는 1395년 9월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종묘에서 가장 중심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으로, 예전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는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현재 정전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원래 종묘는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쳐 흘러 들어온 길지(吉地)에 자리 잡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나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때 광화문에서 이화동으로 통하는 도로(현재의 율곡로)를 내어 종묘로 들어오는 지맥을 끊었다고 한다. 현재 다행스럽게도 율곡로를 덮고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복원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진 듯한, 별스러운 장소인 종묘(宗廟). 우리는 이곳에서 낡아버린 조선 왕실의 옛 시간을 느낄 수가 있지 않을까? <종묘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야? -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가볼만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족.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3. 위치는? - 지하철 종로3가역 (1호선)11번 출구, (3호선)8번 출구, (5호선)8번 출구 도보 5분 4. 꼭 봐야하는 곳은? - 정전, 영녕전, 신로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지만 의외로 관람객들은 많지 않은 편. 6. 여행의 의미는? - 역사서에 늘 나오는 ‘종묘와 사직을’에서 진짜 종묘를 만날 수 있다. 7. 주의할 점은? - 종묘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하고 가기를. 혹은 반드시 해설사와 함께 투어를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s://jm.cha.go.kr/agapp/main/index.do?siteCd=J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세운상가, 창경궁, 창덕궁, 인사동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서울 시내 역사적인 장소로서는 으뜸인 의미가 있다. 조선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인 종묘 방문은 적극 추천! 토요일 자유관람. 화요일 휴무, 나머지날은 시간제 관람이어서 종묘 홈페이지를 참조.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정조가 임명한 장승 우두머리, 수호신 되어 노량진 품었구나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정조가 임명한 장승 우두머리, 수호신 되어 노량진 품었구나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7회차 동작-장승배기의 전설 편이 9월의 첫 주말인 지난 1일 진행됐다. 5회에 걸친 여름야행 프로그램이 지난주 마무리되고, 장승배기의 전설을 품은 동작구에서 주말 오전 프로그램으로 돌아왔다. 서울 그랜드투어는 올 연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에 열린다.치열한 예약전쟁에서 승리한 낯익은 얼굴과 새로운 얼굴 40여명이 이날 오전 10시 정각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6번 출구를 출발했다. 장승배기역은 집결지와 출발지로 알맞은 장소이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 한 쌍이 정겹게 참가자들을 맞아주고, 옆에는 벤치도 마련돼 있다. 일행은 장승과 장승제가 열리는 동작도서관을 지나 송학대에 올랐다. 높이 40m의 선유봉 절집이 폭파되면서 갈 곳을 잃은 돌부처를 모신 극락정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를 구경했다. 고구동산 길과 서달산 자연공원으로 이어지는 제법 깊은 숲길을 트레킹한 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짧지만 긴’ 투어를 마무리했다. 적당한 높이의 산자락과 숲에 안긴 동작은 한강 남쪽의 강변도시라는 고정관념을 불식시켰다.해설을 맡은 박정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 거실 안까지 들어가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현장을 살펴볼 수 있도록 섭외,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또 숭실대 캠퍼스 안 한국기독교박물관 관계자는 휴일인데 출근해 문을 열어줬다. 희망자에 한해 담당 학예사가 1시간짜리 해설을 제공했다. 모두 27명이 참여한 전자 설문조사에서 주관식 소감을 밝힌 11명은 “김 전 대통령 사저와 기독교박물관 탐방이 인상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유익한 트레킹” “특별한 대접을 받은 기분”이라고 답했다. 동작구는 동작진(동재기)이라는 한강의 나루에서 이름을 따왔다. 노량진과 흑석진이라는 만만찮은 이웃 나루와의 경쟁을 물리치고 자치구 지명을 거머쥐었다. 동작이라는 지명 아래 노량진과 흑석진을 품었으니 한강진(한남동)과 용산 사이 서울 강남과 강북을 잇는 주요 간선망을 통합한 셈이다.조선 시대 한강(경강)에 놓인 13개의 주요 나루는 동쪽에서부터 광진(광나루)~송파진(송파나루)~삼전도(삼전나루)~뚝도(뚝섬나루)~두모포(두무개나루)~한강진(한강나루)~서빙고(서빙고나루)~동작진(동재기나루)~노량진(노들나루)~용산(용산나루)~마포(삼개나루)~서강(서강나루)~양화진(양화나루)을 꼽는다. 경강을 한강·용산·서강 등 3개의 나루로 크게 나누면 3강이고, 여기에 마포·양화진 2개를 더하면 5강이라고 파악했다. 두모포·서빙고·뚝섬을 합쳐 8강이라고도 호칭했다. 모두 강북 쪽 나루이다. 그러나 현대의 나루인 다리는 강남쪽 노량진(한강대교, 제1한강교)에 먼저 놓여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했고, 이어 양화진(양화대교, 제2한강교)과 한강진(한남대교, 제3한강교)에 각각 개설됐다. 연도로 따지면 광나루에 놓인 광진교가 2번째이지만 제2한강교라는 영예를 얻지 못했다. 전국과 서울을 잇는 철도와 고속도로 부설 순서에서 동쪽 나루가 밀린 탓이다. 한강나루와 다리의 역사를 보면 서울과 전국, 서울과 세계를 잇는 물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3강, 5강, 8강 사례로 보면 한강 건너편 강남에 위치한 동작진이나 흑석진, 노량진은 주요 나루로 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강진의 강남 쪽 부속 나루쯤으로 여겼다. 다만 노량진은 나루의 역할보다 강남 쪽 군사기지의 역할이 컸다. 한강진이라는 나루의 개념 속에는 반포대교가 놓인 서빙고와 강 건너 사리진(신사동)은 물론 동작진, 흑석진, 노량진이 포함됐다. 경강이 점차 한강이라고 불린 이유도 한강진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이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한강진은 한강 이남으로부터 수도 한양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한강진의 강북 쪽 나루 기능은 서빙고나루가 맡았고, 강 반대편에 사리진, 동작진, 흑석진, 노량진이 늘어섰다. 한강진은 서울의 물류가 광주, 과천, 시흥을 거쳐 삼남(충청·경상·호남)으로 내려가고, 올라오는 중앙통로였다.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동쪽 통로는 광나루, 강화도를 거쳐 서해로 나가는 길목은 양화진이 담당했다. 동작과 노량진은 강폭이 좁아 서울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최단거리였지만 마포와 서강에 비해 물이 얕아 큰 배가 다니지 못하는 게 흠이었다. 진경산수화 시대를 개척한 겸재 정선이 1744년에 그린 ‘동작진’에는 산과 고개 그리고 나루로 이뤄진 온화한 풍광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민가가 빼곡한 오늘의 국립현충원 자리 뒤로 관악산과 청계산이 솟아 있고, 남태령을 거쳐 과천으로 가는 길과 반포(서릿개), 흑석동의 수려한 모습도 담겨 있다. 흑석동 앞 한강을 ‘금호’(琴湖)라고도 불렀는데 이 일대에 권문세가의 별서(별장)들이 즐비했다. 흑석동이 일제강점기 ‘명수대’라는 국적 불명의 일본인 별장지대로 둔갑하면서 망가진 것도 빼어난 경관 탓이다. 국립현충원은 선조의 조모 창빈 안씨가 이곳으로 묘를 옳긴 뒤 선조가 이후 역대 왕의 혈통을 장악한 천하의 명당이다. 다행히 현충원이 들어서면서 명당을 노리는 사람들의 욕망을 좌절시켰다. 동작진이 동재기나루~사당~남태령~과천으로 가는 길이라면, 노량진은 노들나루~장승배기~시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수원에서 합쳐진 뒤 삼남으로 흩어진다. 두 길 모두 정조라는 걸출한 임금에 의해 전설이 만들어졌다. 정조는 옛 수원(경기도 화성)에 마련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찾을 때 두 길을 이용했다. 정조재위 24년 가운데 모두 66회의 행차가 있었는데 이 중 현륭원 참배가 12차례였다. 1795년 노들나루에 배다리를 놓고 건너기 이전까지는 주로 남태령을 넘었다. 한번은 남태령 고갯마루에서 쉬면서 고개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이 “남태령”이라고 답했다. 여우고개로 알고 있던 정조가 되묻자 이방이 “요망한 짐승의 이름을 댈 수가 없어서 남쪽의 가장 큰 고개라는 뜻에서 둘러댔다.”라고 고했다.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남태령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장승배기라고 부르는 지명과 이곳에 세워진 두 개의 장승 또한 정조의 작품이다. 민가가 없고 숲이 울창한 곳에 가마를 멈추고 휴식을 취하던 정조가 “이곳에 장승 두 개를 세우되 남자장승에는 천하대장군, 여자장승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이름을 새기라”라고 명했다. 어명에 따라 세워진 노량진 장승은 팔도 장승의 우두머리 대방(大房) 장승이 됐고, 임금의 행차 길을 알리는 노량진의 랜드마크가 됐다. 또 “경기 노강(노들강) 선창(부두) 길목에 대방 장승을 찾아가서 문안한 연후에 원통한 사연을 아뢰기에…”라는 판소리 ‘변강쇠가’가 전한다. 변강쇠가 경상도 함양의 장승을 뽑아다가 장작으로 사용해 재로 변한 장승이 원통해 노량진 대방 장승을 찾아가는 대목이다. 이후 전국 길의 경계나 마을입구, 절 입구에 장승이 세워졌다. 장승은 장생, 벅수라고도 불리면서 액을 막는 마을의 수호신이나 이정표가 됐다. 망원동, 염곡동, 우면동, 염창동, 흑석동 등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 여러 곳에 장승이 세워졌고,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었다.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고 관리하는 주교사라는 관청이 들어서고, 왕이 쉬어 가는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의 용양봉저정이 주교사 옆에 세워졌다. 공식 명칭은 노량진행궁이다. 조선 최고의 볼거리는 왕의 행차였고, 그중 노들나루 배다리 건너기가 압권이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송파(백제의 꿈) ●일시 : 9월 15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상호금융, 2012년 대표이사 체제 전환…서민금융기관으로 발돋움

    농협상호금융은 1960년대 농촌에 만연했던 고리사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당시 농촌은 소득수준이 낮아 자기자본만으로는 농업 경영비를 충당하기 어려웠고, 대금업자나 이웃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기 일쑤였다. 일반적으로 상호금융(Cooperative Banking)이란 협동조합의 구성원 간 자금융통을 통해 자금이 부족하거나 남는 상황을 해결하려는 상호부조적 금융업무를 뜻한다. 농촌의 여유자금, 사채자금을 저축으로 흡수한 뒤 대출이 급한 농업인에게 저리로 빌려주는 것이 기본 구조다. 예수금 3억원, 대출금 3억원, 전국 150개 조합으로 출발한 농협의 상호금융은 1969년 도입 직후부터 사금융 수요를 흡수해 3년 만에 예수금과 대출금 잔액이 각각 100억원을 돌파하면서 정착 단계에 들어섰다. 이때부터 상호금융은 지역금융으로서 지역 내 자금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순환하도록 도우면서 지역균형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상호금융은 1982년 자기앞수표를 발행하고 1989년 비과세예금 판매를 시작하면서 농민들의 자산 형성에 기여했다. 특히 농촌경제 활성화를 위한 농업 관련 정책자금을 정부로부터 농가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농민과의 접점을 더욱 넓혔다. 1990년대 이후로는 농민뿐 아니라 지역 서민들을 위한 카드, 외환 등 금융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서민금융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올해 7월 기준 1123개 농·축협, 4696개 영업점을 보유하며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금융소외지역에서도 서비스를 유지하고 있다. 예수금 309조원, 대출금 239조원, 활동고객수는 1853만명이다. 농협상호금융은 2012년 농협중앙회가 사업을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으로 분리하는 구조개편 과정에서 상호금융총본부가 아닌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했다. 2011년 농업협동조합법 개정에 따라 농협중앙회는 농협경제지주와 농협금융지주에 각 사업을 이관하면서 ‘1중앙회 2지주회사’ 형태를 갖췄는데, 상호금융은 신용사업 중 유일하게 중앙회 내에 남게 됐다. 당시 조직개편은 중앙회 사업이 수익사업과 비수익사업으로 섞여 있어 경영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앙회가 신용사업에 치중해 협동조합 본연의 역할인 유통 등 경제 사업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교육지원 업무와 상호금융 업무를 중앙회에 남긴 채 경제·금융지주를 신설해 전문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뤄졌다. 상호금융사업도 별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일선조합에 대한 지도·감독 기능이 분산돼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현재 농협경제지주 아래 하나로유통, 남해화학 등 20개 자회사가 있다. 농협금융지주는 NH농협은행, NH투자증권 등 8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중앙회는 두 지주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지만 예산이나 인사 등 주요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중앙회는 조합원에 대한 지원 및 지도사업에 필요한 재원 명목으로 금융지주 자회사로부터 영업수익 또는 매출액의 2.5% 이내에서 일종의 ‘브랜드 사용료’를 받고 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세월호 ‘반쪽 결론’ 평가 아쉽지만… 침몰 원인 큰 가닥 잡아”

    “세월호 ‘반쪽 결론’ 평가 아쉽지만… 침몰 원인 큰 가닥 잡아”

    내인·외력설 대립처럼 비쳐진 것 아쉬움 풀리지 않은 의혹 있다면 추가 조사 동의 모형실험 은폐 의혹에 사의 표명 ‘고비’ 국민에 대한 도리 아니기에 완주 결심“‘반쪽 결론’이라는 평가가 아쉽지만 무사히 보고서를 확정한 데 대해 감사합니다.” 지난 1년여 동안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를 이끈 김창준 전 선조위원장은 3일 “선조위 활동이 힘든 과정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내서 다행”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출범한 선조위는 지난달 진상 조사 결과를 담은 종합보고서를 의결하며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김 전 위원장은 “결론이 가장 아쉽다”면서도 “논란은 있지만 선조위가 침몰 원인의 큰 가닥은 잡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가 3년 동안 물속에 잠겨 있어 대부분 부식돼 블랙박스, 수밀문 등을 제외하고는 핵심 증거로 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며 “현실적으로 상당히 높은 개연성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고 돌이켰다. 선조위는 선체 자체의 문제로 침몰했다는 ‘내인설’과 외력을 포함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열린 안’이라는 두 가지 안을 내놓았다. 두 안을 지지하는 위원 수는 3대3으로 갈렸다. 그는 “(열린 안을 지지했던) 장범선 전 위원이 사실상 선체 자체의 원인에 주목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의결 당시 입장을 명확히 했다면 다수결 원칙 아래 결론이 명쾌하게 났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김 전 위원장은 “마치 내인설 대 외력설의 대립처럼 비쳐진 것과 ‘반쪽 결론’이라는 평가가 아쉬운 측면이 있다”며 “나 역시 내인설을 주장하지만 풀리지 않은 의혹이 있다면 추가 조사를 하는 데 대해서도 동의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선조위원 일부가 4년 전 실시한 세월호 사고 모형항적실험 은폐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사의를 표명했을 때가 최대 고비였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나 역시 사표를 낼 뻔했다”며 “하지만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완주를 결심했다”고 강조했다. 또 “더불어민주당도 변호사로서 객관적 증거에 의한 사실 판단을 30년 이상 직업으로 삼아 왔다는 이유로 나를 추천했다”고 덧붙였다. 김 전 위원장은 선조위가 선체 거치 장소를 정하지 못한 것과 관련, “안산과 목포를 놓고 내부 의견이 갈렸다”며 “저를 포함한 3명은 갈등 방지 등을 이유로 목포를 지지한 반면 나머지는 교육적 효과 등을 이유로 안산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선조위로부터 공을 넘겨받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2기 특조위)를 향해서는 “자신을 추천한 기관에 구애받지 말고 중립적이고 독립적이며 객관적인 활동을 펼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와우! 과학] 인류는 언제부터 살이 찌기 시작했을까?

    [와우! 과학] 인류는 언제부터 살이 찌기 시작했을까?

    유인원과 인류의 공동 조상은 1250만 년 전부터 체내에 지방을 축적하기 시작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독일 튀빙겐대학 연구진이 약 10년간 오스트리아 남부 카린시아(케른텐)에서 발견된 1250만년 전 선조의 치아를 분석한 결과, 당시 치아에서 충치를 비롯해 체내에 지방이 축적된 흔적을 발견했다. 1953년 발견된 이 치아는 유인원의 선조로 여겨지는 드리오피테쿠스(Dryopithecus)의 것으로 추정된다. 드리오피테쿠스는 침팬지와 오랑우탄, 고릴라, 인류의 공동 조상으로 여겨진다. 연구진이 해당 치아를 정밀 분석한 결과, 현존하는 인간이나 고릴라, 오랑우탄 등에 비해 요산분해효소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요산분해효소의 결핍은 혈액 내 요산의 수치를 높이고, 이는 섭취한 당분이 체내에서 지방으로 축적되는데 영향을 미친다. 또 요산이 많으면 고혈압이나 신장병, 지방간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산분해효소가 적으면 과당(프룩토오스)가 증가하고 이것이 체내 지방 저장 효과를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드리오피테쿠스의 치아의 충치와 체내 지방 축적을 유발한 원인을 찾기 위해 치아가 발견된 카린시아의 나무와 관목, 포도나무의 화석을 분석한 결과, 야생 체리와 딸기 등 총 9종의 고당 과일의 흔적을 발견했다. 또 꿀을 채취할 수 있는 46종의 식물(나무) 흔적도 발견했다. 연구진은 “과거 식량이 부족할 당시 살아남기 위해 우리 조상은 체내에 지방을 저장했어야 했을 것이다. 요산분해효소의 결핍이 체내 지방 축적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환경이 1250만 년 전 조상의 충치를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농업이 싹튼 초기 신석기보다 훨씬 앞선 시점부터 충치를 가진 고대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했다”고 설명했다. 또 과도한 지방 축적이 당뇨와 비만 등의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러한 과정은 유인원을 유라시아에 정착하게 하고 종의 다양성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상업적인 식량 생산이 이뤄지는 현대에 들어 (질병을 유발하는) 장애물이 됐다"고 지적했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30일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 최신호에 실렸다. 사진=123rf.com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방사선 기술로 이용해 문화재 보존 나선다

    방사선 기술로 이용해 문화재 보존 나선다

    # 1968년 일본 사이탐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금착명철검에는 칼 앞뒤로 글자가 쓰여져 있어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명확하게 판독되지 않던 글자들은 1978년 X선과 감마선 투과 시험 결과 115자의 한자가 금으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이후 1983년 금착명철검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 1977년 프랑스는 원자력청 소속 문화재 보존처리 전문기관인 지역보존연구소(ARC-Nucleart)를 통해 문화재 보존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1977년에는 방사선 조사기술을 이용해 이집트 람세스 2세 미라의 생물학적 손상을 억제하도록 처리했다. 선진국들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분석하는데 방사선 기술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방사선을 이용한 문화재 보존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는 28일 대전 국제원자력교육훈련센터에서 방사선을 이용한 문화재 분석과 보존기술 개발을 위한 상호협력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으로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와 뫼스바우어 분광기, 감마선조사시설, 전자선실증연구시설, 이온빔가속기 등을 활용해 문화재 진단, 보존처리를 비롯해 문화재 관련 공동연구 및 학술발표 등 다양한 방면의 협력을 하게 될 전망이다. 특히 감마선 공명현상을 이용해 가장 미세한 에너지까지 측정할 수 있는 뫼스바우어 분광법은 오래된 건물의 단청 안료, 도자기 유약 등에 포함된 철 화합물의 상태를 확인해 원본과 비슷하게 복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또 철 화합물과 수분을 포함하는 대기질이 석조 문화재에 주는 영향도 비파괴 검사 방식으로 바로 측정할 수 있게 된다. 또 방사선 조사기술을 이용해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의 생물학적 손상을 일으키는 흰개미, 권연벌레와 곰팡이도 문화재 손상 없이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된다. 목재 뿐만 아니라 서적, 의복 등 유기질 문화재 보존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방사선 고분자 중합기술을 이용하면 부식이 심한 목재도 단단하게 강화시킬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방사선 기술로 문화재 건전성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한편 손상된 문화재도 복원하는 기술이 국내에서도 자리잡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재주 원자력연구원장은 “문화재 보존 연구는 방사선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는 사회현안 문제이면서 기초과학 연구의 실용화 노력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발효 젓갈 ‘셀링(sailing)’… 한류화로 세계 시장 도전”

    [인터뷰 플러스] “발효 젓갈 ‘셀링(sailing)’… 한류화로 세계 시장 도전”

    멸치액젓 찌꺼기 재활용해 에너지 생산사업 등 자원화 추진“젓갈은 전통 발효식품 중 하나로서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소화 흡수가 잘 되는 식품입니다. 새우젓은 특히 키틴 올리고당 성분이 면역력을 강화시켜 각종 바이러스와 감기 예방 등에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김희정 아리랑 전통젓갈 대표는 “새우젓은 온갖 종류의 염증 질병에 치료 효과가 좋다”면서 “식도염, 위염, 장염, 구강염 같은 소화기관의 염증에 좋은 식품이다”는 젓갈의 효능을 자랑하듯 설명했다. 새우는 한방에서 양기를 북돋아 신장을 강하게 하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김 대표는 ‘젓갈의 메카’라 불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친족경영으로 전국 최고의 ‘셀링(sailing) 젓갈’(상표 등록)을 생산해 도소매하고 있다. 김 대표는 선친 고(故) 김병선 씨로부터 젓갈 만드는 기술과 젓갈의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노하우를 배웠고, 젓갈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강경지역에서 젓갈을 생산하면 생기는 부산물 잔사의 자원화로 산업폐기물 처리비용의 획기적인 절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김 대표는 발효과정이 젓갈과 유사한 전통차 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차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장관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10월 10일에서 14일까지 5일간 열리는 ‘강경젓갈축제’를 앞두고 젓갈의 메카 강경에서 ‘갓 잡은 새우와 멸치 등을 곧바로 염장’해 숙성 발효식품인 ‘셀링 젓갈’을 생산하는 김 대표를 인터뷰했다. “젓갈의 한류화로 세계시장에 도전할 역량을 기워가는 것이 꿈”이라고 인터뷰하는 김 대표. 그의 꿈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젓갈의 메카’ 강경에서 선친의 가업을 인수해 친족 경영을 하고 계신데요. 그간의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젓갈의 1번지 강경에서 태어나 젓갈과 함께 ‘젓갈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 시절 외에는 강경을 떠나보지도 않았죠. 당시 젓갈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김병선 씨)로부터 젓갈 만드는 기술과 젓갈의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강경 젓갈 1호’라는 별명을 들었을 만큼 발효식품인 젓갈의 전문가였습니다. 또 아버지께서는 군산과 서천, 목포와 낙월도 등 전국 방방곡곡의 거래처를 수없이 방문하셨죠. 젓갈에 열정을 바치신 거죠. 아버님의 생전의 열정과 뜻을 이어 지금은 어머니와 언니, 동생과 함께 ‘젓갈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젓갈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요. 대표님께서 특히 아끼는 젓갈, 말하자면 ‘아리랑 젓갈’을 대표하는 젓갈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다양한 것이 젓갈 종류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생선을 잡으면 어디 한 부분 버리는 것 없이 모두 젓갈로 담갔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젓갈이라면 새우젓, 멸치젓, 조개젓, 토하젓, 낙지젓갈, 어리굴젓, 오징어젓, 명란젓, 창난젓, 갈치속젓 등 많습니다. 이 중에서 생선을 통째로 염장한 젓갈은 새우젓, 멸치젓이 대표적이고요. 내장은 창난젓과 갈치속젓, 알은 명란젓이죠. ‘아리랑 젓갈’을 대표하는 브랜드 젓갈은 새우젓과 조개젓, 멸치젓 등입니다. 새우젓은 여름철 입맛 없을 때 사라진 입맛을 되돌아오게 한다는 말로 유명한 젓갈입니다. 짭조름하니 감칠맛이 일품이죠. 새우젓은 잡는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다양한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육젓은 주로 6월에 수확한 산란기의 새우로 담근 젓갈입니다. 새우젓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품질을 자랑합니다. 조개젓은 신석기시대부터 먹어온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젓갈입니다. 잔 조갯살을 소금에 절여 삭힌 젓갈로 어떤 젓갈보다 감칠맛이 뛰어납니다. →대표님의 말씀처럼 젓갈은 우리나라 특유의 저장식품으로 독특한 맛과 향, 영양을 갖춘 발효식품인데요. 우리 건강에 미치는 효능은 어떻습니까. -젓갈은 생선이나 조개류 또는 그 내장과 알을 원료로 하기 때문에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우선 풍부합니다. 또 이 단백질이 발효되어 글루탐산, 핵산 물질과 휘발성 성분 등으로 젓갈 특유의 구수한 맛과 영양을 높여줍니다. 특히 쌀밥을 주식으로 할 때 부족하기 쉬운 필수 아미노산 즉 라이신과 트레오닌을 보충해 줍니다. 또한 식욕 증진, 간 보호, 비타민B 보급에 좋으며 감칠맛의 기본이 되는 성분으로 글루탐산, 알라닌 또는 글리신이 대체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새우젓은 키틴 올리고당 성분이 면역력을 강화시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면역력을 높여 각종 바이러스와 감기 예방 등에 효과적이라고 하죠. 그렇다 보니 온갖 종류의 염증 질병에 치료 효과도 좋다고 합니다. 식도염, 위염, 장염, 구강염 같은 소화기관의 염증에 좋은 식품인 거죠.→강경하면 젓갈, 젓갈 하면 강경인데요. 강경젓갈에 대해 자랑한다면 어떻습니까. -강경은 우리나라 굴지의 내포항으로 서해 해산물과 교역량이 많아 한 세기 동안 영화를 누리던 곳으로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습니다. 1930년대 최대의 성시를 이루었던 강경포구는 새우젓을 담가 금강의 물줄기를 이용해 배를 타고 나가 충청북도 부강까지 가서 새우젓을 팔았습니다. 특히 강경은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를 세운 곳이고, 한국 침례교가 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강경 젓갈’의 특징은 모든 재료를 원산지에서 직접 가져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전통비법에다 현대화된 저장시설로 정갈하게 제조한다는 겁니다. 전국의 어느 젓갈과 비교될 수 없는 옛 고유의 참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 대표적인 산업형 축제로 ‘강경 젓갈 축제’가 발전했습니다. 당초 IMF가 한창이던 1997년 경제극복의 일환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상인들의 소득증대 취지에서 강경 젓갈 상인들의 뜻을 모아 시작한 축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2007년부터 ‘강경젓갈축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젓갈이 염장식품이라는 단순개념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젓갈, 발효식품’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다진 결과 관광객들의 호응도 훨씬 높아졌죠.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을 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2013~2015년 최우수축제, 2016~2017년 우수축제의 영애를 안았습니다. 올해 20회를 맞는 강경젓갈축제는 문화광광 우수축제로 선정되어 볼거리, 먹을거리 풍성한 지역 문화축제가 될 겁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젓갈이 잘 삭혀져 숙성발효가 잘되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젓갈의 맛은 발효기술로 결정됩니다. 젓갈 속에 순백으로 하얗게, 마치 박꽃이 피듯 한 젓갈입니다. 그러니까, ‘젓갈 속에 박꽃이 피면 그 제품은 아주 숙성이 잘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젓갈 속의 박꽃’이 징표입니다. →현재의 젓갈 노하우를 얻기까지 시행착오는 없으셨습니까. -어느 분야이든 전문가가 되자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저 역시 한해에 수없이 많은 젓갈을 버리는 등 국민과 소비자 건강을 위해,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그렇다면 그 노하우는 무엇인가요. -지역 특성에 맞는, 논산딸기를 이용한 ‘딸기 젓갈’을 개발했죠. 이어 ‘동백하 새우젓 액젓’ ‘키조개 젓갈’ 등을 개발했습니다. 특히, 젓갈을 숙성하는 ‘당고’도 제가 처음으로 개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은 젓갈의 표준화를 이루는 겁니다. 다양한 젓갈의 생산과 판매에 필요합니다. 또 저염젓갈 개발과 발효식품으로서의 과학적 근거제시, 원산지 표시, 원료와 젓갈의 투명성 확보, 위생상태 등 수 많은 해결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고급의 양질 젓갈을 생산하자면 부산물, 즉 젓갈 잔사가 생기는데요. 이 젓갈 잔사에 미생물 등을 첨가하는 최첨단 방법으로 ‘에너지 환원’을 통해 사업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잔사 처리비용의 획기적인 절감과 농어촌지역의 악취, 토양의 염류축적 방지 등 환경문제 해결, 그리고 재활용 에너지화라는 1석 4조의 시너지를 창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젓갈의 세계화에도 일익을 담당해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싶습니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
  • “언어·피부색 달라도 태권도로 우리는 하나”

    “언어·피부색 달라도 태권도로 우리는 하나”

    경기 양평서 개최…16개국 1500명 참가 김경덕 조직위원장 “우정 다지는 기회”“언어, 피부색, 문화 풍습이 달라도 태권도로 하나가 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2018 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을 성공리에 치른 김경덕(경기도태권도협회장) 조직위원장은 19일 경기도 물맑은양평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회를 마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경기도태권도협회와 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조직위원회가 사흘 일정으로 열린 행사를 공동 주최했다. 스페인, 러시아, 튀니지, 중국, 대만, 인도 등 해외 15개국과 국내 초·중·고교에서 다문화 학생 등 모두 1500명의 엘리트 및 일반 선수들이 참가해 승단 심사를 받거나 내년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체전) 및 전국소년체전 최종선발전 출전권을 놓고 기량을 겨뤘다. 김 위원장은 “유난히도 긴 무더위 속에서 태권도의 백절불굴 정신으로 모두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보니 기쁘고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태권도는 지혜로운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가장 값진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식후 행사에서 세계태권도연맹 지저스 카스텔라노스 푸에블라 유럽 부회장과 태국 파타야 위치얀 포파닛 부시장 등 세계 각국에서 온 내빈과 관객 3000여명은 30여분에 걸친 광개토부대원들의 화려한 격파시범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태권도는 207개국에서 수련자 1억명 이상을 기록한 글로벌 무예로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한류 열풍의 주역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은 전국 다문화가족 중 3분의1이 거주하는 경기도에서 화합과 우정을 다지는 소중한 기회를 선물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2018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 성료

    2018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 성료

    “언어, 피부색, 문화 풍습이 달라도 태권도로 하나가 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3일간의 ‘2018 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을 성공리에 치른 김경덕(경기도태권도협회장) 조직위원장은 19일 경기도 물맑은양평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회를 마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이번 행사는 경기도태권도협회와 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조직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경기도체육회 양평군 등이 후원했다. 스페인 러시아 아프리카 중국 타이완 인도 등 해외 15개국과 국내 초·중·고에서 다문화 학생 등 모두 1500명의 엘리트 및 일반 선수들이 참가해 승단 심사를 받거나 내년 열리는 전국체전 및 전국소년체전 최종선발전 출전권을 놓고 기량을 겨뤘다. 김 위원장은 전날 열린 개막식 대회사에서 “유난히도 긴 무더위 속에서 태권도가 지니고 있는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모두가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보니 기쁘고 반갑다”면서 “태권도는 지혜로운 선조들이 물려준 가장 값진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식후 행사에 화려한 격파시범 등을 보여 준 육군 1군단 광개토부대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세계태권도연맹 지저스 카스텔라노스 푸에블라 유럽 부회장과 태국 파타야 위치얀 포파닛 부시장 등 세계 각국에서 온 내빈들과 3000여명의 관객들은 광개토부대원들의 화려한 격파시범에 30여분 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태권도는 207개국에서 1억 명 이상이 수련하는 글로벌 무예로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류 열풍의 주역이기도 하다”며 “국제다문화태권도한마당은 전국 다문화가족 중 3분의 1이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에서 우리 모두가 태권도를 통해 화합과 우정을 다지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자평했다. 앞서 경기도태권도협회는 지난 5월에는 세계 5대 관광도시이자, 무예타이 종주국 태국 파타야에서 ‘제8회 태국프린세스컵국제태권도대회’를 태국한인태권도사범연합회(회장 박종화)와 공동으로 성황리에 치렀다. 경기장에는 안남 파타야 시장과 노광일 주 태국대사, 선수 1600여명 등 모두 3600여명이 참여해 태권도에 대한 태국 내 인기를 실감케 했다. 한편 국기원 태권도 9단 고단자회 사무총장 등을 지낸 김 위원장은 초등학교 시절 부터 태권도 외길인생을 걸어온 정통의 태권도인이다. 대한민국태권도협회 상임부회장도 맡고 있다. 용문고, 경희대 태권도학과, 경희대 대학원 스포츠외교학과 등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도 힘써 왔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황성기의 시시콜콜]“얘들아! 추석 때 딴 데서 묵으면 안되겠니”

    [황성기의 시시콜콜]“얘들아! 추석 때 딴 데서 묵으면 안되겠니”

    일본도 우리만큼이나 양대 명절인 정월(양력 1월 1일)과 오봉(양력 8월 15일) 때 친가나 처가에 가는 고향 앞 러시를 이룬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의 추석에 해당하는 오봉을 맞아 귀성 피크를 이룬 지난 11일 일본 고속도로는 최장 45㎞의 정체 구간이 형성될 정도로 하행선 곳곳에서 고향길에 오른 차량들로 몸살을 앓았다. 고속전철인 신칸센도 마찬가지. 지정석이 아닌 자유석에서는 승차율 180%를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귀성인파로 콩나물 신칸센이 됐다. 말이 승차율 180%이지, 1량에 100석 있는 신칸센 자유석이라면 100명은 앉아 가고, 80명은 서서 간다는 얘기다. 과거 북새통을 이뤘던 우리의 비둘기호 같은 완행열차처럼 승객이 가득 차 운행하는 진풍경을 한 해 두차례 반드시 볼 수 있다. 자식·손주는 ‘와서 기쁘고, 가서 더 기쁘고’ 이런 고생을 해도 고향을 찾는 게 즐거운 일인지, 아니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기쁨을 안겨드릴 요량으로 귀성길에 오르는 것인지, 그리고 부모의 마음은 어떤지 모를 때가 종종 있다. 지난 7월 20일자 아사히신문의 독자 코너인 ‘코에(聲)’란에 60세의 정신과 의사가 기고한 글이 화제다. 제목은 ‘친가·처가로의 귀성, 숙박은 호텔에서’이다. 의사는 명절 때 자식 가족의 귀성에 대해 “와서 기쁘고, 돌아가서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소개한다. 시골에서는 홀로된 노인이나 노부부가 대부분인데 명절 때 많은 식구들이 찾아오면 그만큼 피로가 금세 쌓인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당일치기가 아닌 하루이틀 머물기라도 하면 식사준비 외에도 미리 이불을 꺼내 말리고, 돌아간 뒤에는 세탁 등으로 노인들은 중노동에 시달린다. 그래서 정월, 오봉 명절이 끝나면 몸이 안 좋다고 호소하는 고령 여성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의사는 제안한다. 귀성하더라도 잠은 호텔에서 해결하라고. 식사도 가급적이면 밖에 나가서 때우고 절대 부모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마냥 자식과 손주의 귀성이 반갑지만은 않은 다른 사례. 자연주의자로 시골에 사는 할머니는 빵이나 요구르트 같은 음식은 스스로 만들어 먹는데, 도시 음식에 익숙한 손주들에게 수제 음식을 내면 “할머니가 만든 밥, 맛 없어!”라고 타박을 받기 일쑤다. 안 받아도 될 마음의 상처를 자식의 귀성에 받는 셈이다.자식들도 귀성 비용, 친가·처가 선택에 큰 고민 귀성을 기다리는 자의 고민이 이렇다면 귀성하는 자의 고민은 뉴스 사이트 ‘닛칸 SPA’가 소개하고 있다. 귀성이 괴로운 것은 아내 뿐만이 아니라 남편도 비슷하다. 43세 회사원의 ‘귀성 우울’은 초여름부터 시작됐다. “제대로 된 휴가를 쓸 수 있는 것은 오봉 뿐입니다. 친가가 있는 홋카이도에 가족 4명이 귀성하자면 저가항공이나 조기할인 비행기표를 이용하더라도 여비만 20만엔(200만원) 들고, 한 번의 귀성에 30만엔 이상을 지출하게 됩니다. 싼 항공권의 발매개시가 5월경인데 발매일이 되면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대기하면서 필사적으로 예약에 매달립니다. 30만엔 있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귀성하는 자의 다른 고민도 있다. 37세의 남성은 아파트를 구입하면서 생사여탈권을 처가에 바친 케이스다. “아파트 구입 때 처가로부터 계약금을 빌린 이후 장인에게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 전까지는 연말연시나 오봉 때는 제 친가에서 지냈는데, 어느 날 장인으로부터 ‘오봉 때라도 손주를 데리고 우리집에서 편하게 지내지 않겠나’라는 얘기를 듣고는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오봉 때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눈도장 찍는 영업활동된 귀성 의미 되돌아봐야 사회학자인 메이지대학 후지타 유이코 교수는 일본의 오봉 문화 자체가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금은 집에 오봉 등불을 설치하거나 가지나 오이로 장식물을 만들고 승려를 불러 독경을 하는 전통을 지키는 가정은 적어지고 있다. 귀성하는 이유가 선조를 기리는 게 아니라 부모와 친척에 눈도장을 찍는 행사가 된 상황”이라면서 “명절 때마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상속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어떤 의미로는 귀성이 영업활동의 하나가 됐다”고 지적한다. 올해의 우리 추석은 9월 24일. 우리의 귀성 의미도 한 번쯤 되돌아 보면 어떨까.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남명-퇴계를 통해 보는 조선 선비의 아름다움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남명-퇴계를 통해 보는 조선 선비의 아름다움

    우리 옛시조보다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문학작품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들이 쓴 몇 줄의 평론문이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더 조선선비의 내면을 잘 비춰주기도 한다. 먼저,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남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인물평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송시열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거물이다. 우리나라 유학자 중 ‘자(子)’자가 붙은 유일한 인물로, 송자(宋子)라 불린다. 말하자면 성인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당대의 유학을 영도한 두 거두 중 한 사람으로, 그야말로 조선 선비정신의 화신이라 할 만한 강직한 인물이다. 그는 나라의 정치가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상소문에서 왕의 모후 문정왕후와 명종에 대해 “대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 뿐이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거리낌없이 쓰기도 했다. 임금이 그 문구에 진노했다지만, 그래도 조식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한 것을 보면 조선의 위대함이 새삼 느껴진다. 일개 신민으로서 조식을 능가하는 강골(强骨)은 동서고금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같은 남명에 대해 한 세기 뒤의 후학 송시열이 쓴 인물평은 다음과 같다. “천길 절벽에 우뚝 서서 일월(日月)과 빛을 겨루는 기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품게 하여, 완악한 벼슬아치들을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선비들을 떨쳐 일어나게 한다.” 이처럼 서릿발 같은 인물이었지만 남명이 남긴 시조 한 편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겨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지리산의 딴 이름. *두 갈래 물줄기 재미있는 것은 위의 시조와 똑같은 소재와 주제로 짝이 될 만한 시조 한 수를 퇴계도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 닮음이 자못 신선하고 재미있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수다스러우랴. *고기잡이 남명 조식은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살았다. 처사(處士)란 세속에 발을 들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이 시조에서 보듯이 자연에 완전 귀의하여 처사로 살다가 동갑인 퇴계가 죽은 이듬해 표표히 떠났다. 앞으로는 큰 여울이 흐르고, 뒤로는 수려한 산을 등지고 있는 산청의 덕천서원이 남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다른 평론은 퇴계 이황(1501~1570)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어부가’를 평한 것으로 이 또한 명문인데, 우선 농암이 살았던 곳의 빼어난 풍광부터 일별해보자. 안동 도산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예안의 농암 고택은 운치 넘치는 고가로, 앞으로는 낙동강 상류인 분강(汾江)이 흐르고, 강 건너편으로는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다. 이 강에서 고향 선후배간인 농암과 퇴계는 가끔 배를 띄우고 술잔을 물에 흘려보내면서 음풍농월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나이차가 34년이나 되는데도 함께 즐김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퇴계의 집에서 농암 종택은 강을 따라 두어 시간은 좋이 걸어야 하는 거리로, 참으로 아름다운 강변 길이다.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이 길의 아름다운 풍광이 빚어낸 노래이다. 농암은 서른 둘에 벼슬길에 올라 일흔 넷이 되어서야 겨우 병을 핑계로 낙향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조선조 5백 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은퇴식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의 은퇴식에는 임금과 당시 정계, 학계 실력자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전별시들을 지어 그를 전송했다. 배 타러 한강으로 가는 길에는 장안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그를 전송했다. 평생을 벼슬살이했지만 배에 실은 짐이라고는 화분 몇 개와 책보따리 그리고 바둑판 한 개뿐이었다고 한다. 청춘에 집을 나서 백발에 귀향길에 오른 농암이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며 지극히 사랑했던 고향 분강촌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부사’의 한 편이 그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굽어는 천심녹수 돌아보니 만첩청산 십장 홍진*이 언매나 가렸는고 강호에 월백하거든* 더욱 무심하얘라 *열 길이나 되는 속세 먼지. *달이 밝거든 밤이 되어 강과 호수에 달빛마저 휘영청하면 마음은 무욕, 더없는 평화로움을 누리는 심경을 농암은 담담히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10여 년을 더 유유자적 자연 속을 노닐다가 떠났다. 참으로 복 받은 삶이라 하겠다. 이 농암이 남긴 연시조 ‘어부사’의 발문을 퇴계가 썼는데, 그 평론이 실로 멋스럽기가 한량없다. “부귀를 뜬구름에 비기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생각을 물외(物外)에 부쳐 낚시터를 노니는 선생의 강호지락(江湖之樂)은 가히 진의(眞意)를 얻었다.” 이보다 멋스러운 평론이 또 있을까. 역시 사람들이 멋스러우니 이런 멋스런 글도 나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선비들은 실로 아름다웠다. (위 시조들은 ‘우리 옛시조 여행(이광식 저)’에서 인용)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가해 책임’ 또 입 닦은 아베…“깊은 반성” 언급한 일왕

    ‘가해 책임’ 또 입 닦은 아베…“깊은 반성” 언급한 일왕

    日패전일추도식서 6년째 전쟁 반성 없어 야스쿠니신사엔 공물료 내며 “불참 죄송” 고이즈미 총리 아들 등 의원들 집단 참배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올해 자국의 8·15 종전일(패전일)에도 전쟁을 일으킨 ‘가해 책임’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2012년 말 제2차 집권 이후 6년째다.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는 올해에도 돈을 보냈다. 아베 총리는 15일 제73회 종전일을 맞아 도쿄 지요다구 부도칸에서 열린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해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겸허하게 역사를 마주하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결연한 맹세를 지키겠다”고 연설했다. 그러나 과거 일본 총리들이 언급했던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한 ‘손해와 고통’, ‘깊은 반성’ 등의 단어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1994년 무라야마 정권 출범 이후 모든 일본 총리들은 종전일에 자국의 가해 책임을 언급해 왔다. 아베 총리도 1차 집권 때인 2007년 종전일에는 “많은 나라들에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줬다. 전쟁의 반성에 입각해 부전의 맹세를 견지하겠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2차 집권 이후 처음 맞은 2013년 종전일부터는 ‘반성’과 ‘부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내년 퇴임 전 마지막으로 추도식에 참석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총리와 달리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2015년 종전일 이후 4년째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 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에 앞서 야스쿠니신사에 개인이 아닌 ‘자민당 총재’의 명의로 공물료를 보냈다. 그를 대리해 온 시바야마 마사히코 자민당 총재 특보는 기자들에게 “아베 총리가 선조들의 영혼에 꼭 참배해 달라고 말하면서 오늘 오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가 종전일에 야스쿠니신사에 공물료를 낸 것도 2012년 이후 6년 연속이다. 2013년 12월에는 직접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한국 등 주변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거센 반발을 부른 바 있다. 한편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들은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재의 아들이자 미래의 총리감으로 불리는 고이즈미 신지로 자민당 수석부간사장도 이날 야스쿠니신사에 왔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아베 총리, 6년 연속 야스쿠니 신사 공물 납부…여야 의원들 집단 참배

    아베 총리, 6년 연속 야스쿠니 신사 공물 납부…여야 의원들 집단 참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의 종전기념일(패전일)인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료를 납부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공물료는 자민당 총재 이름으로 납부됐다. 시바야마 마사히코 자민당 총재 특보는 기자들에게 “아베 총리로부터 ‘참배하지 못해 죄송하다. 선조들을 꼭 참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취임 이후 6년 연속 패전일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의 일종인 다마구시(물푸레나무 가지에 흰 종이를 단 것) 대금을 내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재임 중이던 2013년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참배하면서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 등 주변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온 바 있다.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여야 의원들은 이날 야스쿠니 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재의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 자민당 수석부간사장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경세·문장 모두 탁월… 임진왜란 위기 헤쳐나간 명재상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경세·문장 모두 탁월… 임진왜란 위기 헤쳐나간 명재상

    낙동강 물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감싸고 돌며 수려한 긴 모래사장을 형성한 마을, 고색창연한 한옥과 전망 좋은 정자가 즐비한 마을, 산세가 험하지 않고 그늘이 없이 밝은 마을, 바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이다. 조선 명재상으로 꼽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배출한 곳이다.#이름을 짓기 어려운 큰 그릇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상촌 신흠은 서애를 수행했을 때 기억을 이렇게 술회했다. “공은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는 이유로 반드시 나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 입으로 불러주어 문장을 이루게 하였다. 줄줄이 이어지는 문서나 편지를 비바람 몰아치듯 신속히 지었는데, 붓이 멈추지 않고 문장에 점 하나 더하지 않았어도 찬란하게 격을 이루었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까지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우리가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을 선현 중에는 경세에 능했던 인물도 있었고, 문장에 능했던 인물도 있었고, 학문에 능했던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한 인물이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커다란 능력을 드러낸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문장이나 학문에 능한 사람은 경세나 행정에 어둡고, 경세에 밝은 사람은 문장이나 학문이 얕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애는 그런 상식에서 예외적인 인물이다. 영의정,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경세가이자 ‘맹자’의 문체를 체득한 이름난 문장가였다. 주자학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당시 학자들이 이단시하던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설에까지 관심의 범주를 넓혔던 학자이자 병법에 밝은 실무형 이론가이기도 했다.#퇴계 수제자… 병법에도 밝은 실무형 이론가 퇴계 이황의 수제자를 꼽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서애다. 21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퇴계의 문하에 들어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서를 배웠는데, 퇴계는 그를 만나 보고 나서 하늘이 낸 인재라고 찬탄했다 한다. 퇴계의 예언대로 서애는 임진왜란 당시 국가가 위난에 빠졌을 때 크게 공을 세웠다.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이 땅을 벗어나시면 조선은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선조는 여차하면 중국으로 넘어갈 요량으로 국경과 가까운 곳으로 피란하려 했다. 조정의 일부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지만 서애는 극구 반대해 자칫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민심의 동요를 잠재웠다. 선조가 장수로 삼을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했을 때는 지방 수령으로 있던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역전시키게 만들었다. 소극적이던 명나라 원군을 설득해 끝까지 왜적을 몰아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명나라의 신병법인 기효신서법을 배워 군사들을 조련했고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력 향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파에 따라 서애의 활약상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이 몇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그의 탁월한 안목과 기여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사상의 정수가 담긴 잡저 서애의 문집은 가장 먼저 ‘잡저’(雜著) 부분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서애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잡저는 송(宋)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당대에 귀감이 될 만한 사건들에 대한 평설(評說)을 기록한 ‘독사여측’(讀史測) 등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정주학(程朱學) 계통의 이론을 담은 ‘주재설’(主宰說) 등과 양명학을 비판하는 ‘왕양명이양지위학’(王陽明以良知爲學) 등은 서애의 학문적 사상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글들이다. 일견 여타의 정주학자들과 비슷한 견해를 보이지만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읽어 보면 양명의 주장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은연중 보여 주기도 한다. “왕씨의 의도를 잘 살펴보면, 대개 당시 세상의 학문이 외면적인 것으로만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결같이 본심(本心)을 위주로 하여, 무릇 마음을 써서 강구하는 행위를 모두 행(行)이라고 여겼던 것이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치게 곧게 된 경우이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서애는 부단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계속해서 윤허하지 않았다. “의리상으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였으나 정으로 볼 때에는 친구 사이와 같았다. 나만큼 경을 잘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 당인들은 집요하게 그를 공박했다. 마침내 그가 57세이던 1598년에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애초에 벼슬에 초연했던 서애로서는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전란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유비무환의 교훈을 담은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을 담고 있어 숙종 연간에 이미 일본에서 입수해 출판하기도 했다. 이후로 다시는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지만, 나라를 향한 서애의 충정은 죽는 날까지 식지 않았다. “나라 위한 마음은 늙어서도 그대로라 세모(歲暮)에 빈산에서 비장하게 읊조리네 노년이라 매사에 감회가 일어나니 무단히 눈물이 홀연 옷깃을 적시네.” #사관(史官)도 놀란 조문 행렬 대신이 세상을 떠나면 사흘 동안 조정은 공무를 중지하고 시장은 문을 닫는 것이 전례였다. 서애가 고향 풍산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는데, 시장 상인들은 애도의 뜻으로 하루 더 문을 닫았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 사관의 평이 흥미롭다. 1000여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한때 서애가 살았던 묵사동 빈집에 모여 조곡(弔哭)을 하였던 일을 전례가 드문 일이라고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인물이 조정에서 발자취가 끊어졌고 상(喪)이 천리 밖에서 났는데도 온 성안 사람들이 빈집을 찾아 모여서 곡을 하였으니, 아마도 시사(時事)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후임으로 수상(首相)이 된 자들이 모두 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추억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 역시 불쌍하다.” 선조실록은 북인이 중심이 돼 기술했기 때문에 서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내용이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사람들이 서애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서애집’은 서애집(西厓集)은 조선 선조 조의 명재상이었던 류성룡의 시문집이다. 원집(原集) 20권 10책, 별집(別集) 4권 2책, 연보(年譜) 3권 2책 등 총 27권 14책으로 구성됐다. 인조 11년(1633년) 봄에 합천 해인사에서 원집과 별집을 합쳐 초간했다. 고종 31년(1894년) 가을에 하회의 옥연정사에서 연보를 추가 중간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82년에 번역, 출간했다. 류성룡의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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