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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장품 브랜드 DPC, ‘2019 퍼스트 브랜드 대상’ 3관왕 영예

    화장품 브랜드 DPC, ‘2019 퍼스트 브랜드 대상’ 3관왕 영예

    토털 홈 케어 뷰티브랜드 DPC(대표 서문성)가 지난 19일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2019 퍼스트 브랜드 대상’ 시상식에서 쿠션 파운데이션·피부 리프팅기·클렌징 디바이스 뷰티 등 3개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대한민국 퍼스트 브랜드 대상’은 한국소비자포럼 주관으로 국내 소비재, 서비스 브랜드들에 대한 소비자의 선호도와 만족도 결과를 취합해 2019년 가장 기대되는 브랜드를 선정하는 행사다. 특히 지난 10월 24일부터 11월 6일까지 온라인 및 모바일, 유선조사를 통해 전국에서 180만건의 참여 건수를 기록했다. 이번 시상식에서 ‘DPC 핑크 아우라 쿠션’은 쿠션 파운데이션 부문에서 2년 연속 수상을 거머쥐며, 핑크쿠션의 인기를 증명했다. 수상 제품은 기존 베이지 컬러를 기반으로 한 메이크업에서 화사한 핑크 광채 메이크업 트렌드를 이끌며 여성들에게 큰 사랑은 받은 제품이다. 시즌을 거듭하며 최근 출시한 시즌4의 경우에는 트리플 회오리와 함께 완벽히 업그레이드된 제품력으로 출시 전부터 핑크쿠션을 사랑했던 팬들과 함께 뷰티 인플루언서들에게 큰 관심을 모았다. 또 피부 리프팅기 부문에서 ‘스킨 아이론’, 큰렌징 디바이스 부문에서 ‘스킨럽 스파’가 대상을 받았다. 다리미 모양으로 출시 때부터 큰 이슈를 일으켰던 스킨 아이론은 5가지 안티에이징 기능을 하나의 기기로 누릴 수 있는 멀티 디바이스이다. 미세전류, 진동, 온열, 음이온, LED 기능이 모공 속 노폐물을 빼주고 콜라겐을 생성해 탄탄한 피부를 가꿔준다. 별다른 힘 없이도 번거롭지 않게 홈케어가 가능해 20대 직장인 여성부터 50대 주부에게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출시한 스킨럽 스파의 경우에는 ‘스킨케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클렌징’ 이라는 DPC만의 새로운 클렌징 트렌드를 만들어내며, 대중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제품이다. 무자극 실리콘 브러시를 이용해 위생적이고, 최초로 3-헤드 시스템을 적용해 딥클렌징과 더불어 리프팅과 마사지까지 동시에 실현한다. DPC 서문성 대표는 “지난 2018 퍼스트 브랜드 대상에 이어 이번 2019년에도 핑크 아우라 쿠션이 2년 연속 대상 수상을 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면서 “피부 리프팅기와 클렌징 디바이스까지 소비자들에게 만족도와 함께 내년이 기대되는 제품으로 인정받은 만큼, 글로벌 소비자가 인정하는 K뷰티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내년 한해 더욱 더 브랜드 성장과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옳은 일엔 목숨 걸고라도 나서야죠… 평생의 마음가짐입니다”

    [인터뷰 플러스] “옳은 일엔 목숨 걸고라도 나서야죠… 평생의 마음가짐입니다”

    해방 정국과 새마을 운동, 지방의회의 출현. 학교 교과서 속에 나올 만한 이야기들이다. 정수선 선생은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살아내며 참여해 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1934년생으로 망우동 동래정씨 집성촌을 지키며 중랑구에서 25년 동안 6개 동의 동장을 역임했다. 동래정씨 승지공파 양원종중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라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의 변화 폭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다양한 자리에서 사회에 참여하며 봉사하는 정수선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는 그에게서 ‘연륜’이라는 말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편집자 주→1934년생이시니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이십니다. -제가 해방되던 해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그때는 여기 망우동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양주군이었습니다. 그때는 생필품이 많이 없을 때였죠.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나요. 나막신을 신다가 끈이 끊어지면 그걸 또 손 시리게 들고 오곤 했습니다. 그런 기억을 해보면 어릴 때 참 힘들었구나 생각이 드네요. →이후에 1970년부터 망우동장으로 취임하셔서 동장으로 오래 일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사업을 꼽는다면. -제가 할 일이 많았던 때이고, 사실 제가 자랑하고 싶은 일도 많이 있습니다. 1970년에 망우동장으로 제가 발령을 받기 전엔 여기 전기도 안 들어왔었어요. 그때 제가 농어촌 가설 자금을 융자받아서 전기를 끌어왔고, 그 이후 동장으로 취임하고 상수도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수돗물도 나오게 했지요. 또 면목2동장으로 일할 때는 82개 골목을 보도블록으로 정비하기도 했어요. 그때 예산이 없으니까 종로에서 공사하는 데에 쓰던 보도블록을 밤낮 사람을 보내 실어왔습니다. 새마을사업 중 하나였는데, 그렇게 보도블록 80만 장을 가져와서 골목에 깔았습니다. →지역을 발전시키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일들을 하셨군요. -그땐 그런 일들이 필요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업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동장으로 와서 제일 먼저 시작했던 일이기도 한데,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이에요. 옛날 중랑천변에는 무허가 건물들이 많았는데 거기 어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학교를 못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아이들이 중학교를 못 갔던 거예요. 학교를 못 가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동사무소에 ‘새마을 학교’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3년 동안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서 검정고시를 볼 수 있게 하고 고등학교를 보냈죠. 그게 제가 동장으로 한 첫 사업이었습니다.→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네요. 특히나 그 시절에 교육 복지를 동에서 생각하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저도 그 일에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20명 넘는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안 했으면 공부를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그 친구들 중에 다시 만났던 건 두 명 정도밖에 없어서 어떻게들 지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도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정수선 선생은 1970년에 망우동장으로 취임해 1995년 6월까지 25년 동안 동장으로 일했다. 면목2동, 망우1동, 중화2동 묵1동, 상봉2동장을 거치면서도 직책에 대한 욕심 없이 지역 생활을 살피는 동장으로만 지역민을 섬겼다. 제2대 중랑구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지방의회에서 25년 지역 행정 노하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공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중랑구 해병사회단체 연합회, 평화대사협회 한유화 연구 협력회장으로 사회를 위한 일을 이어왔다.> →25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역을 위해 일하셨다는 게 정말 대단합니다. 그 생활을 마감하실 때 아쉬움도 크셨을 것 같습니다. -공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잖아요. 시키는 일만 하고, 안전하게 정해진 대로만 일한다는 불만이 있죠. 저는 내 마음껏 일했어요. 남이 안 하는 일을 많이 했고, 잘했다고 생각해요. 25년 동안 동장만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습니다. 그저 아직 할 일이 더 있다는 생각에 욕심이 남았었을 뿐이죠. 누구나 어느 자리를 떠날 땐 아쉬움이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과 사회를 깊이 생각하시는 성정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자리에서 사회적인 활동을 해오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1961년에 지역에서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을 쭉 해왔어요. 그렇게 돌아보니 조금 남다른 성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일에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 하고, 정의에 있어서는 생명을 바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옳은 일이면 나서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어요. 조상의 뜻을 지켜온 이의 당부 →망우동 정 씨 집성촌이 몇 차례 화제에 오른 적 있습니다. 동래정씨 승지공파 양원종중 회장을 지내신 바 있으신데, ‘정 씨 집성촌’에 대해 조금 말씀해주시죠. -저희 선조 할아버지께서 망우동에 오신 것이 1395년입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여기에 산 지가 620년이 넘었죠. 저는 16대손입니다. 저희 선조이신 정구 할아버지께서 고려 말에 좌간의 대부셨어요. 태조임금이 조선을 세우신 이후 공신인 할아버지께 이 일대 토지를 하사하셨고, 그때부터 동네가 ‘정서방네’라고 불려왔습니다. 현재까지 25가구가 남아서 여기 살고 있습니다. <정수선 선생의 말처럼 망우동 동래정씨 집성촌을 이룬 이들은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의 후손들이다. 망우동은 태조와 인연이 깊은 지역인데, ‘망우동’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에도 태조가 한 말에 기인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명당을 정하고 오는 길에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於斯吾憂忘矣)라고 한 데에서 ‘망우’(忘憂·근심을 잊음)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우물물을 마신 뒤 물맛을 칭찬해 양원리(養源里)가 됐다고도 한다.> →서울 안에 2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는 40세대가 넘었다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1971년에 그린벨트가 발표되면서 내 땅을 가지고도 집을 못 짓게 됐으니까 땅값도 떨어지고…. 결혼하면서 나가기도 하면서 줄어들었습니다. →요즘은 가문이 모이는 일이 많지 않은데, 모임이 잘 이뤄지나요. -비교적 많이 모이는 편입니다. 종중 정기총회를 하면 설학재공 할아버지 편으로만 종친들이 한 300명 모이고, 그 아래로 중추공 150명 정도 모이고요. 전국적으로 나가 있는 건 40만 명이 넘습니다. 자손이 전체적으로는 40만 정도 되는데, 여기 양원리에 살거나 제사 지내러 오는 건 300명 정도입니다. 제가 어떤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다들 부모를 섬기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기에 유지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희 대에 비해서는 많이 줄었죠. 저는 이 부분이 참 안타깝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자식이 어디서 태어났겠습니까. 부모를 생각하지 않고, 조상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만 것 같아요.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역사를 지켜보셨고, 또 현실로 참여해 오신 입장에서 지금의 사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끝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젊은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선 어른을 섬길 줄 알고, 친구를 마음으로 믿고, 올바른 일에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참여하는 마음을 가지길 당부하고 싶어요. 국가의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있지 않겠습니까. 어른을 섬기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육이 부족한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가정교육·인성교육이 필요합니다. 정부에도, 정치하는 분들에게도 꼭 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인성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태기 객원기자 jtk3355@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무능·교활한 사대부의 폭력, 여인들을 권력 유지의 제물로 삼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무능·교활한 사대부의 폭력, 여인들을 권력 유지의 제물로 삼다

    6월에 6·25전쟁을 떠올린다면 12월엔 병자호란을 기억하자. 자진한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염하(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를 흐르는 한강 하구)를 하얗게 덮었다는 그 겨울,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저희의 아내요 어머니요 딸인 이 땅의 여인들을 주검으로 내몬 저 사대부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교활과 폭력을 돌아보자.강화도는 무능한 권력자들에게 천혜의 도피처였다. 13세기 고려말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38년간 간 피란살이를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에 콕 박혀 40일 가까이 버텼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판단 잘못으로 남한산성으로 도주했지만, 도착한 다음날 새벽 강화도로 탈출을 시도했다. 12월 14, 15일의 일이었다. 인조보다 한나절 빨리 나선 탓에 강화도로 갈 수 있었던 세자빈과 왕실 가족 행렬 뒤로는 수많은 권세가의 가족들이 줄을 이었다. 영의정 김류는 아들(경징)을 안찰사로 삼아 왕실을 호종하면서 처첩, 며느리, 손녀 등을 딸려 보냈다. 강화 유수 장신은 우의정 장유의 동생이었다. 척화 및 주전론을 이끈 김상헌의 형 김상용도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무능 앞에선 천혜의 요새도 무용지물이었다. 1월 22일 새벽 청군은 특별한 저항 없이 갑곶 등에 상륙했고 불과 반나절 만에 강화성을 함락했다. 김경징과 장신은 사직과 왕실을 내팽개치고 나룻배로 도망쳤다. 함락된 강화도 여인들의 운명은 참혹했다. 적의 칼에 찔려 죽으면 다행이었다. 지아비나 아들로부터 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엔 참상의 일부가 나온다. 윤선거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맸다. 이돈오의 아내 김씨는 시어머니 동서와 함께 목을 찔렀다.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에 숨어 있다가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 유인립의 아내는 끝까지 버티다 꼿꼿하게 선 채로 죽었다…. 김경징이 도망간 뒤 남겨진 여인들은 남자들의 강요로 자살했다고 한다. 정선흥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아내를 꾸짖어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자결토록 했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부연했다. “염하엔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사람들은 애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인 잔혹사의 시작일 뿐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간 피로인은 추정치로 대략 50만~60만명. 당시 조선 인구가 1000만여명이었으니, ‘온 나라 백성 중 태반이 연루돼 있’었다. 여인은 20만여명.청은 인질로 끌고 왔지만 너무 많아 부담스러웠다. 청 태종은 이듬해 속환을 지시했다. 사대부 권력자들이 사람을 놓아 흥정했다. 좌의정 이성구는 아들의 속환가로 1500냥을 내놓았고, 영의정 김류는 첩과 딸 속환가로 1000냥을 내놓았다. 조선인 몸값은 수십, 수백 배 뛰었다. 정묘호란 당시 속환가는 남자 닷 냥, 여자 석 냥 정도였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 양반이라도 열 냥을 넘지 않았다. 서민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심양일기’에 이런 이야기를 실었다. ‘한 어머니가 딸을 속환하려고 200냥까지는 어찌어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은 300냥을 불렀고, 다시 250냥으로 낮췄지만 그다음부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집안 사정을 아는 딸은 자신의 몸값으로 말미암아 부모님이 겪을 어려움을 생각하고는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 보다 못해 최명길이 심양으로 가 청 태종과 담판을 했다. 돌아올 때는 3만여명의 조선인이 그와 함께 귀향했다. 그즈음 조정에서는 해괴한 논의가 벌어졌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인조편 1938년 3월 11일자. 봉림대군의 장인 장유와 전 승지 한이겸이 상소문을 동시에 올렸다. 장유는 “며느리가 속환되어 왔는데 조상의 제사를 차마 받들 수 없으니 외아들이 이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고 한이겸은 “딸이 어렵사리 속환되어 왔는데 사위가 딸을 버리겠다고 하니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조정의 논의는 “이미 정절을 잃어 대의가 끊겼으니 억지로 결합하게 할 수 없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최명길이 나섰다. “나라가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허다한 부녀자들은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될 것입니다.”임진왜란 때도 있었던 논란이었다. 선조는 이항복 등 중신의 뜻에 따라 전쟁 중 인질로 붙들려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부인들을 내쫓지 못하게 했다. 인조는 최명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물러설 사대부가 아니었다. 실록 5월 1일자. 부제학 이경여, 교리 심동구·성이성, 수찬 최유해가 상소문을 올렸다. “어찌 강제로 다시 결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비록 일제히 이혼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더라도 재취하거나 그대로 데리고 살거나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이 자유의사지 실은 한 가정의 며느리요 아내요 어미를 멋대로 내치는 것을 합법화하라는 것이었다. 패륜이 ‘사대부의 가풍’이었다. 인조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경연 자리에서 특진관 조문수가 다시 꺼냈다. “돌아온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어찌 다시 억지로 합해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조선을 동방패륜지국으로 만들면서도, 입술엔 동방예의지국을 올렸다. 6월 13일 사헌부와 예조가 문제를 제기했다. “정절을 잃은 부인에게 어찌 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며 대를 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구가 이들을 거들었고, 최명길이 반론을 펴자 우의정 신경진이 반박했다. 인조는 잘라 말했다. “선조 때의 사례에 따르도록 하라.” 이른바 ‘대의’와 ‘절의’는 주전파 사대부가 전쟁으로 나라를 거덜 내고도 권력을 쥘 수 있는 유일한 핑계. 1640년 9월 22일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장유의 부인이 낸 상소문이었다. “(내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합니다.” 인조는 흔들렸다. 자신의 안사돈(봉림대군의 장모)이 칠거지악까지 들고 나온 데다 주변엔 최명길 같은 신하도 없었다. “특별히 그의 소청만 윤허하니 이 일을 관례로 삼지 말라.” 장유의 아들에게만 허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과 며느리를 버리기 시작했다. 병자호란 이후 10년간 돌아온 여인은 2만 5000여명에서 5만여명(추정치). 사대부들의 생떼가 빗발치자 인조는 인질이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홍제천을 회절강으로 삼았다. 환향녀가 그곳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을 되찾은 것으로 간주해 내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 회절강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1649년 ‘북벌’의 기치와 함께 주전파를 중용한 효종이 즉위했다. 효종은 즉시 환향녀 소박을 자유화했다. 평민 가정에서도 며느리를 내치기 시작했다. 환향녀에 대한 손가락질은 집안에서 시작돼 동네로 번졌다. 환향녀의 이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없도록 한 마을도 있었다. 집안의 환향녀는 들보에 목을 매거나, 칼로 손목을 그었다. 내쳐진 여인들은 회절강에 몸을 던졌다. 홍제천 모래내엔 여인들의 주검이 하얗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간 여인이 1만여명에 이르렀다나? 죽지 못한 이들은 서대문 밖에서 술과 몸을 팔았다. 청국 사람들과 심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도 있었다. ‘환향녀’의 참극은 사대부 주전론자들의 행운이었다. 전쟁 책임론을 덮고, 대의명분 논쟁의 주도권과 함께 권력도 쥘 수 있었다. 그 손끝에서 나온 실록의 ‘역사’는 예컨대 이러했다.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가 최명길이다. 통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장유는) 조정에서는 명신이었고,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공훈은 마원과 등애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와 구양수를 앞질렀다.” 흑백을 바꿨다. 대명천지에. 논설고문 kbc@seoul.co.kr
  •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박물관 사실상 버려져… 학계도 무관심 안중근·조명희 기념비 사후 관리 부실 “여행업계, 고증없이 사실화 안타까워… 한국 정부가 직접 유적 발굴·관리해야”“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일대에는 아직도 고려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이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며 크라스키노(연추) 한인마을을 탱크로 파괴했지만 지금도 이곳에 가면 우리 선조들이 쓰던 물건이 발굴됩니다. 올해 5월에도 연자방아와 무너진 초가집을 새로 찾았으니까요. 3·1 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대한한국 정부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죠.” 고려인 3세로 러시아 내 한인 독립운동사의 최고 권위자인 송지나(67) 러시아 극동연방대 한국어과 교수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연해주 고려인 유적에 대한 발굴과 관리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60년 제정 러시아는 청과 베이징 조약을 맺고 연해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매서운 추위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곳에 1864년부터 조선인들이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후 “연해주에 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한인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렇게 러시아에 정착한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고려인들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도 공헌했지만 상대적으로 정부나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송 교수는 아쉬워했다. 실제로 서울신문이 ‘임시정부 100주년 기획 취재’를 위해 찾아간 연해주 포시에트(목허우)에는 러시아 학자가 평생 발굴한 고려인 기와와 벽돌, 맷돌 등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그는 책임지지 않는 우리의 기념비 관리 문화에도 일침을 가했다. 송 교수는 “독립운동가 기념비는 개인이 임의로 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사후 관리가 부실해지면 되레 위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라며 “우수리스크(쌍성자)에 있는 안중근(1879~1910) 의사 기념비나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이 깜짝 방문해 화제가 된 조명희(894~1938) 작가의 블라디보스토크 기념비 모두 한동안 관리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안 의사가 손가락을 끊어 독립 의지를 다진 것을 기리는 단지동맹 기념비(크라스키노 소재)가 두 개나 세워져 있는 것도 기념비 관리가 제대로 되고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한국 여행업계가 연해주 이곳저곳에 ‘OOO 선생이 살던 집’이라는 식의 유적 표지판을 설치한다. 여행 상품을 만들려고 역사적 고증도 거치지 않은 내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며 “한국관광공사나 주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도 이런 현실을 애써 모르는 척해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송 교수는 “가능하다면 내가 그들에게 고려인 독립운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 지식을 강의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서울·포시에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한옥마을, 한옥체험관광지로 조성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한옥마을, 한옥체험관광지로 조성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한옥마을이 한옥체험 관광 마을로 조성된다. 산청군은 14일 신등면 단계한옥마을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관광 정비사업 기본 계획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단계리 한옥마을은 건립된지 100년이 넘은 여러 고택과 등록문화재인 오래된 돌담 등이 어우러져 전통 한옥의 멋과 선조들의 옛 생활상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군은 주민 의견수렴과 타당성 조사 등을 거쳐 내년 2월까지 ‘단계한옥마을 관광자원개발사업 기본계획안’은 마련할 예정이다. 기본계획안 수립과 함께 2019년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균특) 예산으로 30억원을 확보하고 2020년 실시설계 및 사업 착공을 해 2021년 완공할 계획이다. 군은 등록문화재 제260호로 지정된 ‘산청 단계마을 옛 담장’, 오래된 전통 한옥 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전통한옥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군이 계획하고 있는 주요 사업은 마을 경관을 해치는 시설 등을 정비하는 담장 정비사업을 비롯해 마을안길 정비사업, 전통한옥 정원화 사업, 전통한옥 체험프로그램 개발 등이다. 단계한옥마을은 1919년에 지어진 권씨고가를 비롯해 박씨고가, 최씨고가 등 오래된 전통 한옥과 돌담, 토석담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오래된 한옥 주택 뿐 아니라 보건소와 파출소, 참기름집, 분식집 등 단계시장 안 상가들도 한옥 구조다. 특히 단계초등학교 교문은 한옥의 솟을삼문을 본 떠 지었고, 학교 담도 마을 담처럼 돌담으로 만들었다.군은 산청지역 대표 문화·관광자원 가운데 한 곳인 단계한옥마을을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 완공되면 주민 소득증대와 지역 관광산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씨줄날줄] 백의종군/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백의종군/김성곤 논설위원

    정치권에 난데없이 백의종군(白衣從軍)이 화제다. 더불어민주당의 잠재적인 대권 주자이자 광역자치단체장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김경수 경남지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재판이 끝날 때까지 백의종군하겠다”면서 모든 당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먼저 시동을 건 사람은 이재명 지사다. ‘친형 강제 입원’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과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이 지사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당의 단합을 위해 필요할 때까지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돌아가 당원의 의무에만 충실하겠다”면서 백의종군 의사를 밝혔다. 하루 뒤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 지사도 백의종군을 선언한다. 이 지사가 백의종군을 선언했는데 자신만 가만히 있기도 난처했을 법하다. 이들이 백의종군을 선언하자 일각에서는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하다가 순국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왜 들먹이느냐”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백의종군은 연산군 때부터 등장한다. 이후 60여건의 백의종군 기록이 나온다. 그중에 두 번은 이순신 장군의 것이다. 첫 번째는 선조 20년인 1587년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직책을 맡던 중 북방 오랑캐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에 처한다. 두 번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과의 갈등에다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 간첩의 작전에 휘말린 선조가 수군통제사 자리를 뺏고 백의종군을 명한다. 기록에 보면 이순신 장군은 첫 번째 백의종군 때 완전 졸병이 아닌 ‘우화열장 급제’라는 전투편제에 속하게 된다. 갓 급제해 장교 보임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대우인 셈이다. 지금으로 보면 행시 합격 후 수습 사무관 정도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백의종군 때에도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자문 역할을 하며, 둔전 경영도 책임진다. 예전 부하들로부터 전쟁 상황도 보고받곤 했다. 이순신을 각별하게 챙겼던 권율의 배려도 있었지만, 백의종군 시에도 일정 수준의 예우는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인이었고, 지휘권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큰 상실감을 맛보지만, 묵묵히 견뎌 내다가 복권돼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해 성웅이 된다. 이 경기지사와 김 경남지사는 민주당의 당원권이 정지되고, 각종 위원장 자리를 내려놓은 것은 맞다. 그러나 도정을 총괄하는 도지사직은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차이는 그뿐이 아니다. 이들이야 자발적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모함 등으로 임금으로부터 백의종군을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대의 두 백의종군이 같은 듯 많이 다르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kr
  • 삼일대로에 이름 새기고, 3·1운동 정신 기리고

    삼일대로에 이름 새기고, 3·1운동 정신 기리고

    서울시가 3·1운동의 발상지 삼일대로에 추진하는 ‘3·1시민공간’ 조성 사업에 시민은 물론 해외동포들의 기부가 잇따르고 있다. 시민단체인 ㈔사람숲(이사장 양길승)은 지난 6월부터 시작한 3·1시민공간 조성 기부자 모집에 최근까지 2000여명이 신청했다고 13일 밝혔다. 국내는 1000여명, 해외 모집에는 목표(1031계좌)를 넘는 1700여계좌를 달성했다. 해외의 경우 미주한인서부연합회, 실리콘밸리한인회, 이스트베이노인봉사회 등 샌프란시스코 지역 교민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이뤄졌다. 샌프란시스코 ‘김진덕정경식’재단의 김순란 이사장과 김한일 대표의 노력이 컸다고 사람숲은 전했다. 특히 주목받는 해외 인사들의 기부도 많았다.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영문 논픽션 에세이로 고발한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의 부모가 딸과 자신의 이름으로 기부금을 냈다. 또 캘리포니아 주의회 중국계 미국인 의원들과 일본계 미국인 마이크 혼다 의원, 중국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인 장솽빙(張雙兵)도 동참했다. 기부 금액은 3·1운동의 의미를 담아 최소 3만 1000원부터이며 오는 20일까지 신청받는다. 기부자는 사람숲이 주도하는 탑골공원 후문광장, 서북학회 터,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 운현궁 앞 등 5군데 작은 공원에 설치하는 걸상과 바닥재 등 한 곳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 경기 남양주시에 거주하는 이모(47·회사원)씨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도에 태어나신 외할아버지는 내 이름과 내 말을 쓰는 게 소원이셨다”며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그의 소원을 영원히 담아드리고 싶어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앞서 서울시는 3·1운동의 발상지인 삼일대로 안국역~탑골공원 구간을 3·1시민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역사가 숨 쉬는 공간인 만큼 선조들의 이야기를 시민에게 전달하고 3·1운동 정신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데 주안점을 두겠다는 방침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내년 3월 1일 완공될 예정이며 사람숲은 이 중 거리공원 조성에 참여한다. 배다리 사람숲 상임이사는 “삼일대로는 100년 전 시민 스스로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외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라면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조성하는 역사적 상징 공간이야말로 3·1운동을 현재화하고 3·1운동 10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화성시 “독립영웅, 그들의 후손을 찾습니다”

    화성시 “독립영웅, 그들의 후손을 찾습니다”

    화성시는 화성지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화성지역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는다고 밝히며, 온라인 포털 배너광고 등 다양한 온·오프라인 홍보를 진행하고 있다. 관계자는 “화성 독립운동가의 희생을 기억하고 선양하기 위해 아직 후손이 확인이 되지 않은 화성지역 독립운동가 92명중 31명의 명단을 1차 공개하고 그들의 후손을 찾고있다”고 밝혔다. 시는 공공자료만으로 부족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삶에 대한 살아있는 자료 확보하고 지속적인 조사 발굴 및 업적 전파사업과 독립운동가 예우사업 추진에 후손들의 의견과 자료를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화성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송산, 우정에서 2명의 일본 순사를 처단하고 우정·장안에서만 2천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독립운동이 펼쳐진 곳으로 2013년부터 지역 내 미서훈 독립운동가 조사·발굴사업을 펼쳐 총 39명을 발굴, 6명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지난 10월에는 3·1운동에 헌신하고도 자료 부족으로 독립유공자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김흥식(우정), 이봉구(장안), 전도선(송산), 황칠성(송산), 박광남(동탄)의 관련 자료를 발굴해 서훈을 신청했다. 독립운동의 행적이 밝혀진 명단 외에도 아직 연구나 기록에 확인되지 않았으나 화성지역 독립운동 활동에 대한 선조의 이야기를 들었거나 관련 자료를 보유한 후손의 연락도 기다리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화성시청 홈페이지,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 컷 세상] 까치밥

    [한 컷 세상] 까치밥

    직박구리 한 마리가 ‘까치밥´을 먹고 있다. 추운 겨울을 보낼 날짐승을 위해 따지 않고 몇 개 남겨두는 감.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선조들은 ´까치밥´을 남겨두었다. 까치가 먹든 직박구리가 먹든 어떠하리. 그 마음만 전해진다면.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주민 물음에 단체장 답하다] “구도심 재생 뉴딜… 광주 역전 스타트업 밸리 만든다”

    [주민 물음에 단체장 답하다] “구도심 재생 뉴딜… 광주 역전 스타트업 밸리 만든다”

    광주 북구는 호남고속도로 진입로와 맞닿은 광주의 관문이다. 무등산 자락과 국립5·18민주묘지, 광주비엔날레전시관 등 관광자원이 산재해 있다. 광(光)산업이 집중 배치된 첨단산업단지와 전통 제조업 위주의 본촌산업단지가 어우러진 경제벨트를 끼고 있다. 인구는 44만여명으로 광주시 5개 자치구 가운데 가장 많다. 한때 유동인구로 북적였던 광주역 일대는 현재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구도심의 노령인구 증가로 복지예산이 해마다 늘면서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문인(60) 북구청장을 3일 만나 지역경제 활성화와 도시재생 등 구정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민생·혁신·소통을 구정의 최고 목표로 뒀는데. -몇 년 전 북구 부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지역 사정을 낱낱이 경험했다. 이를 통해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도심 재생과 민생경제의 중요성을 충분히 파악했다. 젊은층은 신도시로 이주하고 재래시장 등은 활력을 잃어 가는 게 현실이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실타래처럼 얽힌 도시문제를 푸는 데는 한계에 봉착했다. 그래서 한 달에 4~5차례 소상공인과 노인·저소득 계층 등을 직접 찾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지난달 28일엔 북구사회적경제연합회를 찾았다. 사회적기업 대표 등과 자립기반 마련과 안정된 경영환경 구축 방안 등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주민 생활불편 해소에도 역점을 둔다. 지금까지 파손된 이면도로 등 불편사항 1600여건을 발굴해 1300여건을 즉시 해결했다. 또 관내 27개 모든 동에 생활불편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주택관리 상담센터와 공동주택 품질검수단을 운영하는 등 종합적 생활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역 중소기업 육성·지원에 ‘올인’하는 이유는.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도 지역경제도 함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민선 7기 제1호 공약으로 ‘경제 종합지원센터’ 설치를 내걸었다. 취임 즉시 첨단 2지구에 ‘경제종합지원센터’를 설치, 운영 중이다. 중소기업이 집중된 첨단·본촌산업단지 민원을 접수하고 해결책을 찾는 게 1차 목표이다. 또 센터를 중심으로 산업단지 구조 고도화, 산학연 클러스터 구축, 일자리 매칭 등 현장 경제활동을 종합적으로 지원한다. 그동안 25개 업체의 도로보수 요구 등 애로사항 37건을 해결하고, 산업단지 내 임대전용부지 입주기업 선정 기준을 완화하는 등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 ‘워크넷’을 통해 200여건 구직 알선도 이뤄냈다. 아울러 산업단지, 대학, 연구소 등 11개 기관이 참여한 산학연관 협력시스템을 마련했다. 이를 중심으로 인공지능(AI), 증강·가상현실(AR·VR), 드론 등 3개 분야의 ‘미니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북구의 신성장 동력 창출 기반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지역 내 2만 6000여개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담지원 기관과 협업체계를 구축했다. 금융 및 교육·컨설팅, 청년 창업 등 지속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구도심 활성화 등 ‘도시 뉴딜’이 ‘발등의 불’인데. -북구는 첨단지구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구도심이다. 이 가운데 전남대와 광주역 일대의 도심 리모델링이 가장 시급하다. 전남대 주변은 중앙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중심시가지형) 지구로 선정됐다. 대학 자산을 활용한 창업기반 조성과 지역상권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국비 150억원 등 모두 400억원을 들여 지역공헌센터와 도시재생 복합 앵커시설·어울림 플랫폼·세계문화공유 특화사업 등 30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들 사업이 끝나면 일자리 229개, 생산 유발 280여억원, 부가가치 94억원의 효과가 기대된다. 또 호남고속철(KTX) 종착역에서 배제된 광주역 일대도 뉴딜사업지구(경제기반형)로 선정됐다. 이곳은 ‘광주 역전(逆轉)’ 창의문화사업 스타트업 밸리로 조성된다. 국비 등 500억원을 투입해 미래형 문화콘텐츠산업 전진 기지로 육성한다. 스테이션G(문화콘텐츠 신경제 거점), 도시재생 창업은행, 아시아문화 마당 등이 들어선다. 이 밖에 특별교부세 200억원을 확보해 말바우시장 일대 주차시설 개선 사업 등도 추진한다.→도시기반시설 확충 방안은. -오치동·용봉동 일대에서 제2순환도로(옛 호남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진입 램프 개설이 현안이다. 서울 방향으로 370m와 순천 방향으로 350m를 각각 개설할 경우 북구 일대의 교통난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한국도로공사는 이미 4000여억원을 들여 용봉IC~서광주IC 1.3㎞ 구간 왕복 8차로 확장공사에 들어간다. 실시설계비 140억원의 국비가 확보됐다. 이 구간 확장 공사 때 진입램프 개설도 추진한다. 이 밖에 신안교~광천1교, 북부순환도로 1공구, 문흥지구~자연과학고 뒤편, 원삼각마을 진입로 등을 개설해 안전하고 쾌적한 도로 환경을 조성한다.→문화관광자원 개발 구상은. -무등산 시가문화권~국립5·18민주묘지~옛 광주교도소~비엔날레전시관 등으로 이어지는 북구문화벨트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충효동 풍암정·환벽당 등 조선조 누정과 광주호 생태문화권·무등산 원효사지구 등을 연계한 ‘무등산 남도피아’를 조성, 문화 관광의 허브로 육성한다. 문흥동 옛 교도소부지 10만여㎡ 가운데 8만여㎡에 5·18 정신을 담은 복합문화공간을 만든다. 역사체험, 세계 인권도시와의 연대·교류 공간 등을 배치한다. 나머지 1만 8000여㎡에는 법무부 주도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솔로몬 로 파크를 건립해 법 체험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복지예산 확충 방안과 해결책은. -북구의 재정자립도는 13.7%, 재정 자주도(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예산비율)는 27.2%인데 비해 복지비 부담률은 70%에 육박한다. 이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그럼에도 중앙정부는 재정 자주도는 반영하지 않은 채 노인 인구 비율만 적용해 국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런 만큼 해마다 지자체 자부담이 느는 형편이다. 지난해 자부담액은 98억 7366억원이었으나 올해는 110억 6982만원으로 늘었고, 내년에는 30억원 이상 추가 부담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최근 자치분권위원회를 찾아 기초연금과 보육료 등의 국비 부담률을 상향해줄 것을 건의했다. 또 세입 확충과 세출 절감을 위한 전담팀(TF)을 구성해 일회성·전시성 행사로 예산이 낭비되지 않도록 꼼꼼히 체크하고 있다. 사회복지비 등에 대한 구비 매칭비율 조정을 꾸준히 건의할 예정이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현안사업들은 공모 등을 통해 자체 부담을 줄여 나갈 방침이다. →광주시가 추진 중인 자치구 경계조정 문제가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광주시가 내년 초까지 자치구 간 경계조정안을 마련키로 하고 최근 연구용역 보고회를 가졌다. 지역 간 인구 편차를 줄이고 균형발전을 꾀한다는 명분에는 큰 틀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구로 편입이 거론되는 지역주민의 반발이 거세다. 2011년 소폭 조정 때 동천동이 서구로 편입되면서 지방세가 연간 37억원 줄었다. 두암동 등 동구로 편입된 주민들의 만족도도 높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해당 지역주민들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인구 배분과 정치적 논리에 따라 선 긋기 식으로 하는 경계 조정은 찬성하기 어렵다.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와 논의가 더 필요하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로켓포 날고 몸수색당하는 삶… 이·팔 국민들 “평화 오길”

    로켓포 날고 몸수색당하는 삶… 이·팔 국민들 “평화 오길”

    8m 높이의 잿빛 장벽이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 ‘가자’를 둘러쌌다.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은 지평선을 따라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그것은 가자를 이스라엘로부터 격리하는 벽이자, 세계로부터 격리하는 벽이었다. 분리장벽 꼭대기 초소 기관총 총구는 가자지구 쪽을 향했다. 장벽과 지면이 맞닿은 곳에 노란 꽃이 피었다. 가자지구를 실질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 수백발을 발사해 양측의 긴장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지난 17일 가자지구 분리장벽과 맞닿은 이스라엘 중서부 마을, 유대인 25가구 약 1000여명이 사는 네티브하사라에 갔다. 거대한 차량 출입 통제기가 마을 입구를 막았다. 검문소에 마을을 둘러보려고 한국에서 왔다고 설명하자 통제기가 열렸다.놀이터에서 유대인 남성 오베르 마르코비치(47)를 만났다. 그는 6세 아들과 놀고 있었다. 마르코비치는 “이 마을에 산 지 16년이 됐다”면서 “가자에서 수시로 로켓포가 날아온다. 나도 나지만, 내 아이들이 더 걱정된다. 아들 말고도 딸 둘이 더 있다”고 했다.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사느냐고, 왜 떠나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마르코비치는 “여기에 내가 지은 집이 있고 내 부모님이 있고 내 친구가 있다. 다른 곳에 가서 살 수는 없다”고 답했다. 마르코비치는 “지난 20년간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은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다”고 지적했다. 마르코비치의 아내 탈리(44)가 기자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탈리는 정착촌 1세대인 부모를 따라 네티브하사라에 왔다고 했다. 탈리는 “20년 전에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너무 두렵다”면서 “지난주 하마스 공격 때에는 집안 방공호에서 24시간 동안 떨었다”고 했다. 차로 30여분을 달려 가자지구 북쪽 장벽에서 불과 2㎞ 떨어진 인구 2만 5000의 소도시 스데롯으로 이동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위협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 스데롯 경찰서 앞에는 가자지구에서 날아온 포탄 잔해 수백발이 쌓여 있었다.한 여성에게 가자지구에서 쏜 미사일이 실제로 위협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여성은 기자를 동네 놀이터로 안내했다. 그는 종잇조각처럼 찢어지고 절단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놀이터의 철제 구조물을 보여 줬다. 여성은 “넉 달 전 가자에서 쏜 포탄이 이곳을 강타했다”고 했다. 포탄 파편이 튀어 시커먼 구멍이 뚫린 시소가 눈길을 끌었다. “아이가 다친 적은 없다”고 그가 덧붙였다. 딸 둘과 놀이터에 나온 주민 니심 몬틴(28)은 “하마스의 공격은 일상”이라면서 “아이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오토바이, 비행기 소리에 경기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에게 바람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는 “오직 평화, 평화만 바란다”고 말했다. 이튿날 기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관할하는 ‘서안지구’의 도시 헤브론 내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정착촌 중에서도 긴장 수위가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힌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스라엘에서 20년 넘게 생활한 가이드가 동행했다. 가이드는 “헤브론 정착촌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은 8가구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헤브론에 군대를 보냈다”면서 “그러나 그 이면에는 종교적 이유가 있다. 헤브론에는 이슬람교와 유대교 양측이 선조로 모시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의 묘 ‘막벨라 사원’이 있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라고 설명했다.마을 입구에서 이스라엘군이 정착촌 주위를 오가는 팔레스타인 청년의 몸을 수색했다. 청년은 주머니를 까뒤집어 검문소 군인에게 보여 줬고 벨트를 풀어 검색대에 올려놓았다. 인근에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 정착촌 주변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떠났다. 원래 여기는 우리 상인들이 장사하던 시장 골목이었다. 활기차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시멘트로 봉쇄한 한쪽 골목을 가리키면서 “이 벽 너머는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통행을 못 하게 막은 것”이라고 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라진 상점 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적막한 거리에 이스라엘 국기만 나부꼈다. 정착촌을 가로질러 강철로 만든 출입구를 빠져나갔다. 출입구 너머는 별세계였다. 그곳은 왁자지껄한 팔레스타인 도시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웃고 떠들고 터키시 커피를 마시고 케밥을 먹었다.헤브론 시민인 팔레스타인인 압둘 하미드(50)는 “유대인들이 와서 도시가 쪼개졌다. 재산과 집을 저쪽에 두고 밀려난 사람들이 많다. 우리와 이스라엘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아예 저쪽 통행로를 막아버린다”면서 “헤브론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란다. 다시 예전처럼 마음대로 이쪽저쪽으로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가 영어로 시간을 내줘 고맙다고 하자. 그는 “앗살라무 알라이쿰”(신의 평화가 당신에게)이라고 인사했다. 양측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평화는 그러나 요원해 보였다. 20일 오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정부 측 입장에 정통한 익명의 소식통을 만났다. 그는 “평화 협상을 하려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하마스는 헌장에 이스라엘을 파괴하라는 내용을 명시한 집단이다. 하마스와 항구적인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마스를 실질적 위협으로 규정한 이스라엘은 가자를 분리장벽으로 가뒀을 뿐 아니라, 첨단 기술을 사용해 감시한다. 같은 날 오후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국영 군수업체 IAI를 방문했다. 인근 활주로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가 아니었다. IAI의 무인 정찰기 ‘헤론’이었다. 헤론은 약 10초 만에 활주로에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IAI 관계자는 “헤론은 한 번 뜨면 45시간 공중에 머무른다. 헤론 여러 대가 1년 365일 가자를 감시한다”면서 “보통 상공 1만 피트(약 3㎞)에서 기동한다. 헤론의 존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헤론 작전통제실은 컨테이너 박스 1개 크기였다. 거기에는 모니터 10여개가 설치돼 있었다. 조종사들이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원격 카메라 조종기로 헤론이 보내는 영상을 확인했다. 헤론은 상공 1만 피트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식별할 수 있는 수준의 영상을 찍었다. 또 다른 IAI 관계자에게 이스라엘이 자살 드론(폭탄을 장착해 목표물을 타격하는 무인기)을 보유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밀이다. 답해 줄 수 없다”고 했다. IAI 측은 또 원격 조종으로 움직이는 무인 군용 자동차, 은폐·엄폐물을 뚫고 생물체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는 레이더 등 각종 군수 장비를 소개했다. 기자는 이스라엘에 오기 전 사진으로 본, 가자 분리장벽을 향해 돌팔매를 던지던 팔레스타인 청년을 떠올렸다. 글 사진 네티브하사라·스데롯·헤브론·예루살렘·텔아비브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한국 고천문 강국 가능성 충분…그러자면 고천문박물관이 필요하죠”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한국 고천문 강국 가능성 충분…그러자면 고천문박물관이 필요하죠”

    고천문학자 민병희 연구원이 말하는 고천문박물관 필요성 “기술은 집중 투자하면 단시간 추격…과학은 기초부터”“천문 관련 유물 복원·전시…단편 아닌 통시적 이해”“정체 파악 힘든 유물은 목륜…北은 이미 복원 전시중”“놀라운 유물은 경주 첨성대…1300여년된 동양 最古”“18세기 제작 아스롤라베에 서울 위도 새겨…日서 환수”“복원중인 옥루엔 당시 최첨단 과학 총동원…우주 담겨”“관상감 천문대, 현대건설 사옥 건설 탓에 위치 이동”“우리나라는 고천문(古天文)의 강국이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2천년 동안 꾸준히 적은 천문현상 기록도 수만건으로 풍부하고, 독창적인 유물도 많습니다. 기록으로만 전하는 고천문 유물을 복원해보니 오늘날 사용해도 될 정도로 정확도가 높습니다. 일반인들이 과학 지식과 그 발달 과정에 대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천문박물관 설립이 필요합니다.” 인류가 만든 구조물이 달을 거쳐 태양계를 넘어가는 21세기, ‘미신’처럼 보였던 고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대의 천문우주 연구도 벅찰텐데 고천문이라니…. 천문학자들은 인적이 없는 산꼭대기에 설치된 천문대에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거나 별자리 운행을 계산하느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천문학자는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한자로 된 책만 파고들지 않을까하는 선입견이 들었다. 지난 14일 서울 출장길에 오른 민병희(45)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을 만났다. - 고천문, 어떤 사람들이 연구하나.☞ 대학에서 천문우주를 공부하고, 석·박사 과정도 이쪽으로 전공한 사람들입니다만 고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국내에서 여남은 명뿐입니다. 큰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 그리고 고천문학은 아주 한국적 표현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천문기록을 통해 현대 천문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사천문학’, 역사를 통해 천문학 발전 과정을 탐구하는 ‘천문역사학’, 유물 등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고대 천문학적 문화를 추척하는 ‘고고천문학’ 등이 뒤섞인 말입니다. 천문학적 지식이 생활이 끼친 영향을 연구하는 ‘민속천문학’도 아우르고 있습니다. - 그런데, 고천문학과 점성술은 뿌리가 같지 않나.☞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 즉 별자리, 해와 달의 움직임을 통해 날짜를 정하고 시간을 계산했던거죠. 날짜를 정하는 것이 역법 곧 달력이었고, 국가나 개인의 운명을 예지하는 게 역술 내지 점성술이었던거죠.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였던 이원철(1896~1963) 초대 국립중앙관상대 대장은 “점술은 미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후 천문학은 점성술을 제외했습니다만 최근에서야 점성술은 천문역사학이나 민속천문학에서 다뤄야 할 중요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점성술을 어떻게 과학적 코드로 받아들일 것이냐가 사실 고민거리입니다. - 고천문학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전공을 천문우주로 하다보니…. 고천문학을 하고싶은 열병이나 심한 무병을 앓았던 것은 아니고, 한국천문연구원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은 2009년쯤 세종대왕의 소간의(小簡儀·행성과 별의 좌표와 시간, 고도와 방위를 측정하는 기구) 복원 작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조선에서는 소간의를 바탕으로 혜성이나 객성(초신성·신성)을 관측하고 ‘측후단자(測候單子·관측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남겼지요. 이들 천문현상 기록 중에는 한국에만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고천문학에 서서히 물들었던 거죠. 한글판 조선왕조 실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원문을 보게 되었고, 한문을 더 잘 읽어내기 위해서 사서삼경도 읽기 시작했죠. 한문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만 요즘도 관상감에서 펴낸 책들을 읽으면서 한문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고천문박물관 건립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현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천문학은 과학 지식의 출발이자 발달 과정을 품고 있으며 집대성된 분야입니다. 과거 천문학을 통해 지식을 찾아가는 인류의 도전과 그렇게 얻은 지식을 인류 문명을 위해 접목한 과정을 미래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고천문박물관이 필요한 거죠. 기술은 집중적으로 투자하면 금방 선진국 수준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과학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합니다. 과거 지식을 아는 것이 필수고요. 그래야 과학지식은 조금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의 천문 관련 기구나 유물을 복원해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이를 통해 부분적 스토리가 아닌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고천문박물관은 영국, 중국, 오스트리아, 일본 심지어 터키까지도 있습니다. - 고대 천문학은 왕이나 왕실이 주도했다.☞ 왕은 하늘이 정한다거나 하늘의 아들이니 뭐니 해도 농경시대 일반 백성은 오늘의 무슨 날이며, 언제 씨를 뿌리고 거두는가 가장 중요했던 거죠. 이걸 왕이 역서(달력)를 만들어 오늘은 여름시작(立夏), 오늘은 동지(冬至) 등으로 알려줬습니다. 한양에선 시간도 북을 쳐서 알려주곤 했습니다. 왕의 역할이었던 거죠. 역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측하고, 자료를 모아 계산하고, 예측을 했던 거죠. 이게 과학의 토대지요. 왕이 없는 지금도 날짜의 시작과 계산법은 국가가 정합니다 대한민국의 연호는 서력기원(서기)로 한다는 ‘연호에 관한 법률’이 그 증좌입니다. 1948년 제헌국회는 단기(檀紀)를 사용한다며 연호에 관한 법률을 처음으로 정했다가 1962년에서야 서기로 변경한 겁니다.- 복원했던 천문관측 기구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현종 10년(1669년), 송이영이 만든 자명종 시계인 혼천시계(渾天時計·고려대 소장)입니다. 이 시계는 매우 특이한 기계 시계로, 추를 동력으로 한 장치는 서양적이지만 혼천의가 달려 있는 건 한국 고유의 형식이지요. 이 시계의 근원을 쫓아가면 세종이 기획하고 장영실이 제작하였다는 ‘흠경각루(欽敬閣漏)’에 이릅니다. 흠경각루에는 물시계인 옥루기륜(玉漏機輪·일명 옥루)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중앙과학관과 한국천문연구원이 복원 중에 있습니다. 당시 최첨단 과학이 다 집대성된 겁니다. 물시계인 옥루는 15세기 이슬람 과학이 유행시켰던 자동운행 인형을 응용한 것으로 동아시아의 걸작입니다. 외형은 산의 형태로, 시계 장치를 가리고 있습니다. 위에는 혼천의, 중간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인형들, 아래에는 12지신과 농사짓는 백성이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고, 한글 창제 원리인 천지인(天地人) 정신이 녹아들어 있죠. 옥루는 북한이 1990년대 후반에 복원해 전시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옥루 내부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 복원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복원한 옥루와 국립중앙과학관 등이 개발하는 옥루가 서로 차이가 크게 날 것으로 보입니다. 남북한이 옥루 복원에 교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 요즘 가장 복원에 공들이는 천문기구는.☞ 조선의 많은 천문관측기기 가운데 여전히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 많습니다. 1525년(중종 20년)에 개발한 목륜(目輪)이 대표적인 난제지요. 왕조실록에는 “이순이 전에 혼의-혼상 감수관으로 관상감에 있으면서 ‘목륜’의 제도에 의해 제작한 것을 오늘 진상했습니다(李純向以渾儀渾象監修官, 在觀象監, 因‘目輪’之制, 而造作, 今日進上矣)’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학사학자들은 목륜이 이슬람 천문 관측기기 가운데 하나를 본 뜬 것이라는데 의견이 대체적으로 모입니다. 목륜의 대상이 아스트롤라베(astrolabe·천체 관측기구)인지, 토르퀘툼(torquetum·우주를 입체적으로 축소해 만든 천문 관측기구)인지 논란이 분분하지만, 최근에는 토르퀘툼이라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놀라운 우리 천문 기구는.☞ 실학박물관이 소장한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류금(1741~1788)이 제작한 이건 우리에겐 ‘아스트롤라베’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아랍에서 유래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에 다 보급됐을 텐데, 아직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발견됐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이 아스트롤라브가 ‘벽면사분의’로 개선되고 유럽에 전해져 ‘케플러 법칙’이 만들어지게 하는 등 현대 천문학을 열어젖힌 관측기구의 원형입니다. 세계적인 유물이죠.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가 환수된 문화재여서 더욱 애착이 갑니다. 이 기구의 고리 위쪽에 ‘한양의 위도와 함께 약암 선생을 위해 만든 것(北極出地三十八度 乾隆丁未爲約菴尹先生製)’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한양 즉 서울의 위도가 38도로 적혀있었던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가장 놀라운 것은 저는 뭐니뭐니해도 경주 첨성대라고 생각합니다. 축조된지 1300여년이 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지요. 한자리에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경주 첨성대(국보 31호)는 우리 고천문학의 역사와 깊이를 반증합니다. 서울 한양에도 첨성대가 있다는 사실 아세요? - 한양에도 첨성대가 있었다고?☞ 세종대왕이 그 유명한 칠정산을 만들기 위해 경복궁에 관상감 하나를 더 만들었는데, 이 때부터 한양에는 두 개의 관상감이 있었던 거죠. 관상감에는 첨성대가 있었고, 이게 순조 18년(1818년)즈음 ‘관천대’로 불립니다. 그 이전에는 첨성대로 불린거죠. 지금 우리는 첨성대 그러면 경주 첨성대를 가르키는 고유명사로 바뀌었지만, 조선 중기만 해도 첨성대는 천문현상을 관찰하는 곳이란 의미의 보통명사였다고 봅니다. 관상감 첨성대(보물 제1740호)는 현재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현대그룹 본사 부지에 있습니다만 여기에도 곡절이 있습니다. 현대그룹 본사 사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 착공에 들어갔는데 그곳이 당시 휘문고교 자리로, 조선시대 관상감 터였습니다. 여기에 있던 첨성대가 사옥 건립에 걸림돌이 되었던 거죠. 이 첨성대를 원서공원으로 옮긴다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에 과거에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10m, 동쪽으로 50m를 옮겨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던 겁니다. 이 과정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과학사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과거 천문기록 얼마나 잘 맞나.☞ 조선왕조 실록에 나와 있는 천문기록은 대부분 실제로 관측하여 남긴 것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15분을 시각의 단위로 측정하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정밀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조선에서만 기록된 자료들이 종종 키맨 역할을 합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1437년 전갈자리 신성이나 선조실록에 기록된 1604년 케플러초신성의 일부 기록은 전세계적으로 유일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과거 천문기록은 나름의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별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데, 그 변화가 활발히 진행되는 시기가 적어도 수백만년입 걸립니다. 그러니까 망원경이 발견되기 이전의 기록자료까지 동원해야 별들의 변화과정을 좀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고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과거 천문기록이 돋보이죠.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서 출토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서 출토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사적 제346호)에서 조선시대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발견됐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무장읍성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수혈(竪穴·구덩이)과 주변 퇴적토에서 비격진천뢰 11점을 발견했다고 15일 밝혔다. 비격진천뢰는 선조(재위 1567~1608) 때 군기시에 소속된 화포장 이장손(생몰년 미상)이 발명했다고 알려진 작렬(炸裂·터져서 쫙 퍼짐) 시한폭탄이다. 외부는 무쇠로 된 둥근 박처럼 생겼고, 내부는 화약과 얇은 철 조각, 발화 장치인 죽통(竹筒)을 넣게 돼 있다. 죽통 속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木谷)이 들어있다. 목곡은 폭파 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 골을 나사 모양으로 팠다. 이번에 출토된 비격진천뢰는 지름 21㎝, 무게 17~18㎏으로 크기가 비슷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모두 6점으로 그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한 점이 보물 제860호로 지정돼 있다. 호남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비격진천뢰가 구덩이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누군가가 일부러 묻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비격진천뢰가 나온 수혈 인근에서는 포를 설치했던 포대(砲臺) 유적이 발견됐다. 지름 170㎝ 규모의 원형으로 돌을 편평하게 깔아 견고하게 만든 후 흙을 다져 바닥면을 만들었다. 남쪽에서는 포를 거치하기 위해 뚫은 기둥구멍 2개가 나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16세기 책쾌부터 e북까지…‘독서 천국’ 송파에 다 있다

    16세기 책쾌부터 e북까지…‘독서 천국’ 송파에 다 있다

    8296권 확보…시대별 책 문화 전시 어린이 체험실서 동화 음악 감상도 전시물 비치 후 내년 4월에 문 열어 “한국 독서문화 이끄는 상징물 될 것”“전시·교육·휴식이 어우러지는 송파의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구민들의 수준 높은 문화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작은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쏟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14일 개관을 앞둔 서울 송파구 가락1동 ‘송파 책 박물관’을 찾은 박성수 송파구청장은 공사 관계자들에게 “대한민국 독서문화를 이끄는 상징물이 될 것”이라며 이같이 당부했다. 송파 책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책을 주제로 한 공립박물관이다. 독서와 함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책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2014년 착공했다.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6200㎡ 규모로, 지하 1층엔 수장고, 지상 1층엔 어린이 책 체험실과 북카페, 지상 2층엔 상설·기획전시실, 미디어라이브러리 등이 들어선다. 현재 박물관 건축은 모두 끝났고, 내부 전시물 비치만 남았다. 내년 2월 시범 운영을 거쳐 4월 정식 개관한다. 구 관계자는 “현재 도서 8296권과 공예·회화 작품 172점을 확보했다”며 “전시를 통해 선조들의 독서에 대한 열정도 보여 주고, 가족 간, 세대 간 독서문화를 이해하는 즐거움도 선사할 것”이라고 했다. 어린이 책 체험실에선 세계명작동화 속 건물과 음악 등을 접할 수 있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집을 볼 수 있고, ‘빨간구두 아가씨’와 ‘브레맨 음악대’의 춤과 연주도 감상할 수 있다. 상설전시실에선 시대별 독서문화를 파악할 수 있다. 1950년대 애국·반공서적, 1960~80년대 금서, 현재의 전자책까지 보여 준다. 만화가 김용환의 1947년작 컬러만화 ‘삼국지’, 정현웅의 1948년작 만화 ‘노지심’, 1956년 제작된 한국 최초 점자 성경책,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발간된 교과서 등도 비치된다. ‘책쾌’도 전시된다. 책쾌는 16세기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당시 민간 서점이 없고 책이 귀했을 때 책을 유통한 서적상을 말한다. 기획전시실에선 김성환 화백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만화책을 통해 시대상을 보여 주는 ‘고바우영감’ 전시가 진행된다. 어린이 동반 가족과 초·중·고등학생 단체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박 구청장은 “송파 책 박물관을 비롯해 다양한 독서 정책을 펼쳐 지역 주민은 물론 송파를 찾는 모든 분들이 독서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배불리 채울 수 있는 ‘독서문화 대표도시’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정세현 “한국은 북 비핵화 동분서주, 미국은···“

    정세현 “한국은 북 비핵화 동분서주, 미국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15일 “미국이 북핵 문제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미래 핵 동결 수준에서 봉합하지 않게 문재인 정부가 컨틴전시 플랜(위기대응 비상계획)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한반도비핵화대책특별위원회 창립총회 강연에서 “문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미국은 남북 관계 선행에 반대하고 대북제재 완화 요구를 한미공조 파괴 행위로 규정하며 ‘선 비핵화·후(後) 보상’의 북핵 정책(리비아 방식)을 추종하길 바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6월 12일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1항에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2항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담은 것을 지적하며 “미국이 수교하고 군사적으로 치지 않으면 왜 핵을 갖겠냐는 25년간의 북측 논리를 받아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베이징 6자 합의 등에는 북핵 활동 금지 뒤에 경제적 지원 및 북·미 수교를 열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리비아 모델로 회귀하지 말고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내용을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실무관료들에 의해 북측의 선행동을 요구하는 25년의 인습으로 회귀하는 모양새”라며 “대북 정책을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서서히 실무진 쪽으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한다”고 우려했다. 최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북한 내 13개 미사일기지 확인과 관련한 미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대해서는 “1998년에도 북한이 별도 핵활동을 하고 있다는 미군 관계자의 전언을 실어서 결국 식량 60만톤을 주고 확인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며 “3월 29일 사진으로 몰아갔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바로 가짜뉴스로 규정한 게 다행”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정 전 장관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시간끌기에 우려를 표명했다. 또 그는 “평화협정 체결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외교적 협조에 의한 평화체제 구축은 북한의 리비아 방식에 대한 공포를 해소할 수 있다”며 “문 대통령은 북한이 선조치를 일부 이행하도록 직접 설득해 싱가포르 합의 이행에 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황성기의 시시콜콜]일본 절(お寺), 스님의 서바이벌 변신

    [황성기의 시시콜콜]일본 절(お寺), 스님의 서바이벌 변신

     일본에는 절이 7만 7000개 가량 있다. 신사(神社)의 8만 8000개에 버금가는 숫자다. 일본 문화청의 2015년 ‘종교관련통계자료집’에 따르면 ‘종교를 갖고 있거나 믿는 일본인은 28%로 10명 중 7명(72%)은 종교가 없거나 믿지 않는다. 그래도 ‘저 세상’을 믿는 일본인은 40%나 있다. 그래서 선조를 받드는 사람이 65%에 달한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장례에 관한 조사를 보면 일본인의 67.6%는 한해 1회 이상 성묘를 한다. 종교를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가진 종교가 불교이든 아니든 묘지의 상당수가 절에 있고, 많은 장례에는 스님이 독경을 한다. 33만명에 달하는 스님(자격증을 보유한 숫자)들은 어떻게든 먹고 살아가는 게 일본이다.  하지만 한국 만큼 불교 신도가 많지 않기 때문에 관광객에 인기가 많은 대형 사찰을 빼놓고는 일본 절과 스님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넉넉치 않다. 몇 년 전부터 장의사에 고용된 승려들이 출현했을 정도다. 승려 전문 인재 파견회사에 등록한 스님들은 장례식장이나 묘지에 의뢰인의 요청을 받으면 출장을 나가 독경을 하고 돌아온다. 이들 대부분은 절에는 소속돼 있으나 신도가 얼마 없거나 절에서 배운 사람들 가운데 취업을 못한 스님들이라고 한다.  사찰의 경영난 만이 꼭 이유는 아니지만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최근 일본 절과 스님의 화려한 변신이 두드러진다. 절에 근사한 카페를 차려놓고 신도는 물론, 일반인들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지역과 밀착한 이벤트로 주민들의 관심을 모으는 절도 있다. 심지어는 스님이 손수 전기사업에 참여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도쿄의 옛 수산시장 옆 츠키지에 자리한 400년 역사의 혼간지는 지난해 연말 카페 ‘츠무기’를 오픈했다. 이 곳의 아침식사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 10월 중순부터 선착순 110명에 한해 아침식사를 팔고 있다. 밥을 포함해 총 18가지가 큰 쟁반에 나오는 식사는 식욕을 돋구는 반찬들로 가득하다. 가격은 1944엔으로 고기 반찬도 있고, 오후 4시부터는 가벼운 술도 판다. 메이지 정부 때인 1872년 포고령을 내려 스님들이 결혼은 물론, 육식, 음주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도쿄와 멀지 않은 야마나시 현 가이시에서는 정토종의 ‘고토쿠인’이란 절을 빌려 ‘테라고항’이란 이벤트가 지난해 11월부터 열리고 있다. 종파를 초월한 불교도 모임인 ‘보즈도’가 ‘어린이와 어른이 절에서 함께 밥을 먹자’는 컨셉으로 시작한 이 이벤트는 절에 20~30명의 어린이와 어른이 모여서 스님의 독경도 듣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신변잡기도 주고받는다. 한달에 1회 개최를 목표로 지난 10월까지 12차례나 열렸다. 지난달 8일에는 교토 시내에서 정토진종 혼간지파 소속 승려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전력소매회사 ‘Tera Energy’를 설립해 내년 4월부터 전기사업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종파에 관계없이 절이나 신도들에게 전력을 팔아 매출의 일부를 사찰 개보수나 지역활동에 쓰겠다는 계획이다. 본사를 교토 시내에 두고 소매전기사업자 등록도 신청했다. 사장을 맡은 다케모토 료고 스님은 광고비 등의 지출을 억제해 대형 전기사업자보다 2% 싸게 요금체계를 설정한다면서 첫해 매출은 7억엔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회사가 38개 절을 대상으로 사전 조사를 했더니, 28개 절이 ‘Tera Energy’의 전기를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 회사는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발전한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무형문화재 익산목발노래 공연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익산목발노래의 공개공연이 10일 오후 1시 익산시 함라면사무소 야외마당에서 열린다. 익산시에 따르면 목발노래는 산을 오가는 나무꾼들이 지겟다리인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던 산타령, 등짐노래, 지게목발노래, 작대기타령, 둥당기타령, 상사소리 등을 통칭한다. 목발노래는 무거운 짐, 가벼운 짐, 빈 지게 등에 따라 곡조와 장단이 다르게 나타난다. 익산목발노래보존회는 공연에서 나무를 베면서 부른 느린 진양조장단의 산타령,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올 때 부른 등짐노래를 들려줄 예정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나 나뭇짐을 지고 신바람이 날 때 부른 엇모리장단의 지게목발노래와 빠른 굿거리장단의 작대기타령, 둥당기타령, 상사소리도 재현한다. 새타령, 육자배기, 자진산타령, 등짐노래 등도 들려준다. 익산목발노래보존회는 지게장단으로 유일하게 보존되는 익산목발노래로 전승하고 있다. 보존회 측은 “삶의 애환과 고단함을 노래로 승화한 선조들의 전통 가락을 접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전통문화 명맥을 잇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이낙연 “길동무 돼 달라”… 비서실장에 정운현씨

    이낙연 “길동무 돼 달라”… 비서실장에 정운현씨

    친일파 연구… “율곡처럼 쓴소리 할 것”신임 국무총리 비서실장(차관급)에 정운현(59) 상지대 초빙교수가 임명됐다. 정 실장은 경남 함양 출생으로 대구고와 경북대 문헌정보학과를 거쳐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중앙일보를 시작으로 서울신문 문화부 차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과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를 역임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와 친일파 연구에 매진했다. ‘친일파 죄상기’, ‘친일파는 살아 있다’,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 등의 책을 썼다. 그는 전날 페이스북에 이낙연 총리가 자신에게 비서실장을 어떻게 제안했는지를 자세히 적었다. 이 총리는 정 실장을 총리집무실로 불러 “길동무가 좀 돼 달라”고 말했다. 정 실장은 이에 대해 “아둔한 나는 길동무가 돼 달라는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새삼 놀랍다”면서 “그런 얘기를 그렇게 멋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다”고 전했다. 이어 “총리비서실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은 전혀 뜻밖이었다”며 “MB 정권 초기인 2008년 10월 언론재단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10년간 야운비학(野雲飛鶴)을 벗 삼아 초야에 묻혀 지냈다. 일개 서생인 나는 정치에 대한 감각도 없고, 책략가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총리는 내가 부족한 두 가지를 가진 분이니, 꼭 도와 달라. 하나는 역사에 대한 지식, 또 하나는 기개라고 말했다”고 정 실장은 소개했다. 그는 “단소리보단 쓴소리를 많이 하면서 마치 선조에게 극언조차 서슴지 않던 율곡 이이처럼 하겠다”면서 “공직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총리는 전부 승낙했다”고 적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선농단 향나무는 기억한다 풍년 기원하는 왕의 손길을 빼앗긴 봄 암울했던 세월을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선농단 향나무는 기억한다 풍년 기원하는 왕의 손길을 빼앗긴 봄 암울했던 세월을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6회 청량리(약령시의 기억) 편이 지난 27일 동대문구 휘경동·전농동·청량리동·제기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을이 농익은 서울시립대에서 낙엽이 흩날리는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했다. 또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청량리 수산시장, 동부청과시장, 청량리 재래시장, 청과물도매시장, 서울약령시(경동시장)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5개 개별시장이 뭉친 슈퍼시장의 위용을 체감했다. 때마침 26일부터 이날까지 ‘제24회 서울약령시 서울한방문화축제’ 기간이어서 흥겨운 한방축제 분위기에 젖었고, 한방박물관 무료관람 혜택도 누렸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1호선 회기역에 집결한 투어단은 의병장 허위 장군의 호를 딴 왕산로를 따라 내려오다 110년 전통의 시조사를 보고 동광대장간을 들렀다. 떡 파는 가게가 즐비했던 떡전교를 지나 서울시립대에서 경농관과 자작마루를 둘러봤다.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배봉산은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청량리 육교 위에서 수십 갈래로 쪼개지는 철길의 행렬을 지켜본 뒤 청량리역~금강헤어라인~청량리청과물시장~서울약령시~제기동성당의 순서로 2시간 20분간의 바쁜 일정을 마무리했다. 해설을 맡은 김은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철저한 사전답사와 준비를 통해 만족스러운 투어를 선사했다. 서울시립대는 자작마루의 문을 열어줬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동광대장간, 금강헤어라인의 장인으로부터 자부심 어린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아리아가 흐른 10월의 마지막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였다.청량리는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 청량리계에 속하는 고요한 성 밖 동네였다.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청량리,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를 거쳐 1946년에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으로 자리잡았다. 서울과 경기도를 들락날락한 동쪽 교외(동교)였다. 겸재 정선이 남긴 ‘동문조도’(東門祖道)라는 진경산수화에 300년 전 동대문 밖 풍경이 등장하는데 낙산과 동망봉, 안암, 용마산 아래 동묘와 청량리 일대가 펼쳐져 있다. 조도란 길 떠나는 사람을 송별한다는 뜻이니 동대문 밖 청량리가 서울을 벗어난 첫 지점이라는 장소성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용두동·제기동·전농동 등 이른바 청량리 일대는 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적전)을 두고 제사를 모신 점에서 여타 교외 지역과는 격을 달리했다. 적전은 한성과 개성 2곳에 뒀는데 한성의 적전을 동적전, 개성의 적전을 서적전이라고 지칭했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지도에 동적전을 안암천(성북천)과 정릉천 사이에 표시하고 있고 동적전의 관리청인 필분각이 있던 텃골과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마을인 창마을(倉村)이 오늘의 서울시립대 앞 전농로에 있었다. 선농단의 친농의례는 종묘제와 사직제, 환구제의 대사(大祀)에 이어 중사(中祀)의 위상을 가졌다. 조선 성종 6년(1475)에 적전의례가 처음 실행된 뒤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광해군 때 1회씩 거행됐으며 이후 영조와 고종, 순종 때 자주 거행됐다. 선농대제가 끝난 뒤 소를 잡아서 참가자들에게 나눠 준 게 설렁탕(설롱탕)의 유래가 됐다. 청량리(淸凉里)는 신라 고찰 청량사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청량이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청량산에서 따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북한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적었다. 또 고려 예종 12년(1117) 왕이 남경(서울)에 행차하면서 청량사에 머문 사실도 전한다. 세종 5년(1423) “태조의 공신은 청량사에, 태종의 공신은 승가사에서 주상의 탄신일에 장수를 기원하자는 재를 열자”는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 청량사의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청량사는 1897년 명성황후가 홍릉에 들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선농단 일대는 참담한 변화를 겪는다. 고종은 영조 이후 100년 넘게 거행하지 않던 친경례를 부흥시켰고, 순종은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친경례를 행했지만 1908년 개정된 제사제도 칙령에 의해 선농단의 위패는 사직단으로 옮긴 뒤여서 사실상 폐지된 것과 다름없었다. 일제는 선농단 터에 느닷없이 잠업기술 및 기술자를 양성하는 잠업시험소의 전신 원잠종제조소를 설치했다. 또 1934년 경성여자사범학교 부지로 제공, 기숙사를 짓는 과정에서 원형을 잃었다. 일제강점기 선농단은 청량대(淸凉臺)라는 공원으로 훼손됐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책동이었다. 지금도 청량대라고 새겨진 빗돌 하나가 누워 있다. 광복 후 주민들이 넘어뜨려 울분을 달랬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선농단은 1950~60년대 서울사대부고나 서울사범대생들에게 개나리와 벚나무, 측백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농단 터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왕이 농사를 지은 장소 정도로 알았다. 휴식과 축제 장소로 사용했다. 대학신문 1961년 4월 27일자 ‘청량대 새 단장’이라는 기사에서 “왕이 백성들의 농사하는 모습을 살피려고 올라서곤 했던 청량대 비석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도록 그 위치를 옮긴다. 가장 큰 나무인 향나무에 중점을 두고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제거 혹은 이식시킨다”고 적혀 있다. 선농단 터는 제기동에 속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제기동과 용두동 경계에 걸쳐 있었다. 이후 116개의 필지로 분할됐다. 우뚝 솟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선농단의 존재를 말없이 증언하고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높이 10m, 줄기의 둘레 2m에 이르는 600년 묵은 이 노거수는 다른 향나무처럼 휘어지지 않고 위로 곧게 자란 게 특징이다. 청량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청량리역, 588 집창촌, 서울약령시로 이름을 바꾼 경동시장 등이다. 주민의 삶이 아니라 외부인의 시각이다. 청량리의 두드러진 정체성은 철도이다. 청량리역은 1950~60년대 철도교통의 발달에 따른 도시적 확장 과정의 산물이다. 근대교통기관인 전차가 1899년 처음으로 홍릉까지 왕래했고, 수송의 중심이 전차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1968년 70여년간의 전차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전차노선의 중심이었다. 1911년 경원선 철도가 일부 개통됐고 1939년에는 경춘선이 성동역(제기역)을 기점으로 운행된 데 이어 중앙선까지 연결되면서 청량리는 물자 유통과 여객 수송의 요충지이자 철도 중심지로 명맥을 이었다. 1974년 개통된 지하철 1호선이 근대 전차의 첫 목적지였던 청량리 궤도를 여전히 달리고 있다. 관사주택과 부흥주택, 도시 한옥, 시민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도심주변부 근대도시 주거지의 역할을 해냈다.서울약령시는 1000여 한의약 관련 전문 업소가 모여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전국 한의약 약재의 70%가 거래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문학3(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일시 : 11월 3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한·일 문화교류 상징 조선통신사선… 200여년 만에 역사적인 항해

    한·일 문화교류 상징 조선통신사선… 200여년 만에 역사적인 항해

    조선은 선조 40년(1607년)부터 순조 11년(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단을 파견했다. 한 번 파견될 때마다 300~500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사신들이 일본에서 6개월에서 1년 정도 머무르다 돌아왔다. 조선의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을 일본에 전파한 조선통신사들이 탔던 배가 200여년 만에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6일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조선시대 한일 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선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공개했다. 2015년 6월 기초설계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완성한 배다. 조선통신사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 1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날 진수식에서는 현판 제막식을 비롯해 뱃고사, 국악관현악 공연, 시승식 등이 진행됐다. 그에 앞서 배 내부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귀영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조선통신사선은 국왕을 대신해 일본에 가는 사신이 타는 배이기 때문에 고품격으로 지었다”면서 “왕이 사는 공간을 장식했던 단청으로 배를 꾸민 것 역시 배가 지닌 그러한 상징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1억원을 들여 완성한 이 배는 사신의 우두머리인 정사(正使)가 타고 간 ‘정사기선’을 재현했다. 뱃머리, 판옥, 취사 공간, 창고, 조타실로 구성돼 있고 판옥 아래에는 배에 짐을 싣거나 사공을 도왔던 격군(格軍)들이 머무른 널찍한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선체는 길이 34m, 너비 9.3m, 높이 3m, 돛대 높이 22m, 총 무게 149t으로 72명이 승선할 수 있다. 홍순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사는 “신안선(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원나라 무역선)의 길이가 32m이고 거북선이 28m인 점을 고려하면 조선통신사선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선박의 목재는 강원 삼척과 홍천, 태백 등지에서 벌채한 수령 70~150년에 이르는 금강송 900그루를 사용했다. 홍 연구사는 “나무 직경은 최소 45㎝에서 최대 90㎝이며 최고 길이는 13.5m”라며 “구조별로 선수와 배밑, 외판에는 수령이 100~150년된 나무를, 배 내부와 격벽, 선미판 등에는 70~100년된 나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다양한 문헌과 그림을 참고해 조선통신사선을 재현했다. 선박 운항 실태를 기록한 ‘계미수사록’(1763), 조선통신사선의 주요 치수를 기록한 ‘증정교린지’(1802), 선박 전개도와 평면도가 있는 ‘헌성유고’(1822) 같은 자료다. 그림은 ‘조선통신사선견비전주선행렬도’(1748), ‘조선통신사선도’(1811), ‘근강명소도회 조선빙사’(1811) 등 일본 회화를 주로 참고했다. 홍 연구사는 “‘조선통신사선도’ 등을 통해 파도가 배로 넘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파도막이 구조가 조선통신사선에 있음을 새롭게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조선통신사선 재현선은 현재 계류된 장소에서 작은 전시장이나 선상 박물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면서 “배 내부 공간이 충분히 크기 때문에 시 낭송회나 워크숍, 학술·예술 행사 등에 사용하거나 연안 지역이나 항구에서 진행되는 문화 축제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들과 만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이 배로 일본에 가는 방안까지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목포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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