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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갑사 범종 승려상(한국인의 얼굴:97)

    ◎공덕 많이 쌓은 고승 인가/삭발 머리뒤로 은은한 후광 조선시대 범종무늬 가운데는 승상이 있다.그러나 승려의 자태를 그린 승상을 범종의 무늬로 끌어들인 경우는 흔치 않았다.조선의 범종에서는 전시대 고려의 범종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비천상 계통의 무늬가 사라졌다.보살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릴리프 형식의 비천상 대신 서거나 앉은 선각의 보살상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범종에는 유독 보살이 아닌 승려가 나타났다.모두 네 구의 승상이 들어있다.젖꼭지 모양의 유두를 가두어 둔 사다리꼴 유곽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승상을 끼워넣었다.높이 131㎝의 이 종은 어깨띠 견대와 윗띠인 상대를 맞물려 돌리고 중대는 생략했다.그리고 아랫띠 하대를 돌렸다.승상은 상대와 하대 사이 종 몸뚱이 한복판에 배치했다. 갑사 범종의 인물상은 삭발인지라 머리카락이 없다.모자를 말하는 관모도 쓰지 않았다.그래서 승려가 분명한데,머리 뒤에서는 불·보살상처럼 후광이 빛났다.깨달으면 다 부처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승려라고 후광이 비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수행을 게을리 하지않고,공덕을 꽤나 쌓은 대덕의 고승을 그린 모양이다.두 눈썹 사이에 백호도 들어있다.고리가 달린 긴 지팡이 석장을 들어 승려의 위엄도 갖추었다. 얼굴이 둥글다.선을 응용한 돋을새김이어서 윤곽이 뚜렷했다.눈과 눈썹,입은 제대로 표현되었다.다만 코가 어설프다.눈 언저리에서 시작한 두 줄의 선이 내려왔으나,코를 그려야 할 자리를 비켜났다.코를 그런 모양새로 그려놓을 리가 만무했다.그렇다고 팔자수염을 새길 자리는 더욱 아니었다.종을 만드는 일,즉 주성에 참여한 조각장의 실수쯤으로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 승상은 자비로운 눈길로 대중을 굽어보고 있다.오른 손에 석장을 든 승려는 왼 손에다 둥근구슬 보주를 받쳐들었다.보주를 든 손이 섬세하다.그리고 옷주름이 곱게 흘러 내려 매무새가 유려한 승려는 지녀야 할 물건 지물을 다 가지고 있다. 이 승려상 범종은 16세기 후반에 주성되었다.범종에 나오는 새김글씨 명문에는 「만력12년7월」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선조12년인 1584년의 일이다.명문은 종을 주성하기 전해에 전국 절의 종을 다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주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종정의 사표(외언내언)

    조계종 신도 1천여만명,스님 1만3천600여명,사찰 1천700여개를 거느리고 있는 한국불교의 으뜸종단.해방후 새로지은 사찰과 암자를 제외하면 전국에 산재해있는 고찰 거의 전부가 이종단 소속이다.법맥계승의 정통성이나 교세에서 한국불교=조계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 종단이 배출한 불교계의 거봉도 수없이 많다.조선조 말엽 선종의 중흥조로 추앙받았던 경허대선사를 비롯,만공 용성 효봉 청담 탄허 성철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이 조계종의 법맥을 이어왔다. 이 종단의 법통을 대표하는 어른은 종정 스님.종단행정이 총무원장중심제로 되어 있어 실권은 없지만 그 상징성과 영향력은 막강하다.현 종정은 통도사 방장인 월하스님.지난 94년 5월14일 제9대 종정으로 추대 됐다.18살때 출가한 그는 58년동안 통도사에서만 수행해온 원로스님.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성철스님에 비해 소탈하고 부드러워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다. 문중의 최고 어른이면서도 신도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 하고 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소와 빨래를 직접 한다.돈 많은 신도가 승용차를 사드리겠다고 여러번 간청했지만 끝내 거절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박한 월하종정이 최근 열린 원로회의에서 돌연 사표를 제출,종단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월하종정은 『취임당시 1년만 하겠다고 했는데 이미 2년이 지났으므로 더 이상 이자리에 앉아 있을수 없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는 것이 총무원의 해명.그러나 종단주변에서는 월주 총무원장의 종단운영에 불만을 품고 사의를 표명 한 것으로 보고 있다.종정 스님의 사표제출은 종단으로서는 큰 사건이다.종단의 어른이 임기(5년)도 끝나기전에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자체도 그렇지만 그동안 종정자리를 놓고 종단내의 문중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여 왔기 때문.이번에는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수없지만 이것이 종단내분으로 번지지 않고 원만하게 수습되기를 기원한다.
  • TV 진품명품 쇼에 바란다/조유전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KBS-2TV가 인기리에 방송하는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문제점이 많다고 해서 한국고고학회가 방송 중단을 요청하는 사태가 일어나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TV프로그램에 대해 사회단체도 아니고 학술단체인 고고학회에서 방송중단을 요청한 것은 방송사가 문을 연 이래 처음 있는 일로 그 귀추가 주목된다.필자도 기회가 있을때 시청하기도 하지만 역시 끝까지 보기를 포기하곤 한다.그것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어서이다.한마디로 값매김 때문이다.아무리 그 프로그램의 목적이 시청자나,물건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 가격을 매겨줌으로써 재미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유산을 공개리에 몇사람이 가격을 매기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건일지라도,그것에 선조들의 손때가 묻어 있으면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함부로 천시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 해준 것이리라.이는 매우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값매김은 고미술전문상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때나 가능한일인데도 마치 모든 유산에 고정된 값이 있는 것처럼 시청자에게 비춰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이러한 행위는 만사를 돈으로 환산하는 황금만능주의 사고를 부지불식간에 시청자에게 심어줄 소지가 많다. 가정에 있는 조상의 유품이나 고미술품의 가치는 값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전통과 역사적인 안목,그리고 문화사랑에 있음을 알려주고 긍지를 심어주는,그런 프로그램이 이제 개발되었으면 한다.더구나 이 프로그램이 보도에서와 같이 일본 것을 모방했다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수 없다.모방이 아닌 새롭고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생명력을 갖출 것이고,나아가 시청자들에게 더욱 사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작년 산불피해 여의도 면적 7배/이인화(공직자의 소리)

    우리의 산림환경을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 정부에서는 매년 식목일·육림의 날 행사를 하고 산불예방 캠페인을 벌이고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산불피해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작년 한해만 해도 520여건의 산불이 발생해 5천300여㏊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7배에 해당된다. 더구나 산불피해는 생태계를 파괴시켜 3년이 지나야 토양이 회복되고 10년이 지나야 나무가 자랄수 있다.지난해 4월에 강원도 고성군에서 발생한 산불은 건국이래 최대 규모로 향후 50년이 지나야 생태계가 회복된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될 것이다. 올해도 가뭄과 이상 건조기가 계속되면서 3월5일 현재 전국적으로 130여건의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지난해 같은 기간의 300여㏊보다 훨씬 많은 400여㏊이 피해를 입었다. 산불은 봄철,특히 3∼5월에 가장 많이 발생(64%)하고 등산·행락객이 버린 담배불이나 성묘객의 실화 및 어린이 불장난 등이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내무부는 산림청과 함께 등산로를 폐쇄하거나 입산을 통제하고 산불감시 인력의 집중배치,행락인파가 붐비는 주말에 대대적인 산불 캠페인을 펼치는 등 전행정력을 투입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그러나 전국토의 65%(6만4천520㎢)나 되는 광활한 산림을 일선 행정력만으로 계도·단속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모든 국민이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행전에 불씨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습성을 가져야 한다.취사도구는 물론 라이터·성냥 등 불씨는 절대 지녀서는 안된다.산행중 담배를 피우지 말고 야간산행 또한 삼가하여 산불을 예방하겠다는 시민의식을 높여가야 하겠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 선조로부터 물려 받았듯이 우리의 후손에게도 푸르른 우리 금수강산을 그대로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내무부 재난관리과 서기관〉
  • 국정쇄신에 힘 모으자/김석준 이대 정보과학대학원장·정치학(시론)

    노동법사태와 한보비리사건이 온 나라를 총체적 난국으로까지 몰아가다가 지금은 다소 진정국면에 들어간 셈이다.대통령의 공식사과,청와대 비서실 개편과 총리를 포함한 개각,노동법과 한보비리에 대한 국회기능의 활성화,수원과 인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의 낮은 투표율과 집권당의 패배,인사개편에서의 탕평책 배려와 대통령의 인사스타일 변화,신임총리와 부총리의 역할 강화와 내각의 기능 강화등이 최근에 전개된 일련의 일들이다. 이제 많은 국민들이 우려했던 97년 봄이 돌아 왔다.모두가 파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 시국이 난국을 지나 진정국면에서 새로운 도약의 시기로 정착될 것을 온 국민은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다.이러한 국민적인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정국관리와 국정운영을 담당하는 정부여당은 물론 야권과 사회단체 등 모든 주체가 국정쇄신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난국극복 재도약 기회로 첫째,대통령의 국정운영스타일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비공개성과 의외성을 특징으로 하던 인사방식을 벗어나 여론의 검증을 거치면서 총리와 부총리 등의 인사를 여론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발표한 점은 다행스러운 변화이다.독선과 오만 보다는 국민의 지지를 중시한 점이 평가된다.특히 지역성을 배제하여 지역간 형평성을 유지하고 국정운영의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을 발탁한 점이 여론의 지지를 얻게 한 요인들이라 생각된다.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말고 더욱 민주적인 리더십으로 거듭나야 한다. 둘째,국가기관들의 자율성 회복과 위상확립을 위한 노력이ㄷ. 그동안 내각제적 요소를 가미한 대통령제를 채택한 우리는 수년전 이회창 총리 사퇴파동에서 보듯이 총리와 각료의 법적 권한과 실질적인 기능사이에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또한 검찰의 중립성과 국회와 같은 국가기관의 독립성이 법제도적으로는 보장되어 있음에도 현실 정치에서는 『사람에 의한 지배』가 되어 왔던 잘못이 컸다.앞으로 총리와 각료의 기능이 법대로 운영되고,검찰과 국회도 법에 따라 운영되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셋째,국정쇄신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각종 규제 혁파,금융실명제보완,부패척결,경제살리기,남북통일 대비 등의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때 국정쇄신의 기본철학을 지켜야 한다.문민정부의 통치철학인 개혁과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자본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국정쇄신이 이루어져야 한다.일부에서 우려하듯이 새로 등용한 인사들이 「전문성」보다 「구시대의 경험」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국정은 쇄신보다 후퇴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넷째,국정쇄신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개를 통해 공론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그동안 우리는 국가정책에 대한 공론화과정이 부족하여 권위주의를 더욱 공고화시키는 잘못을 저질러왔다.이는 국정운영에서 민주성보다 능률성을 중시한 당연한 결과이다.이 때문에 한보비리 사건에서 보듯이 국가가 공조직이나 공론화를 통하기 보다 「비선조직」을 통해 무책임하게 운영되어왔음을 국민들은 비통해했던 것이다.이점에서 중요한 국정과제일수록 정부와 사회단체 및 전문가의 폭넓은 참여위에 거침없이 토론하고 공론화를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민주적 절차확립은 문민정부의 본질적인성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섯째,국정쇄신을 위한 정치권의 반성과 자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보궐선거와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치권에 대해 유례가 없을 정도의 냉소와 무관심을 보이는 것을 정치권은 무서워해야 한다.집권당부터 지도부 개편을 계기로 당내 민주주의 확립하고 대선후보완전경쟁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여야 모두 대선경쟁이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21세기의 국가경영 비전」을 제시하는 생산적인 경쟁이 되도록 거듭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과 노동분야도 「경제살리기」와 국가 재도약의 주체로 당당히 서야할 것이다.또한 시민단체나 사회각계도 국정쇄신과 난국타개의 선도자로 앞서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정책 공론화과정 거쳐야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여당의 몫이다.개각과 집권당 개편을 통해 면모쇄신이라는 외형적인 변화나 구호보다는 실천과 결과를 통해 국민에게 신뢰를 주어야 할 것이다.청와대,내각,집권당이 활발한 의견조정,통합,합의를 거치되 각 기관들이 법에 의해 주어진 권한과 자율성을 최대한 살려야 할 것이다.국정쇄신은 소수의 지도부가 아니라 수십만명에 달하는 조직원을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결실로 나타날 것이다.개각이 국정쇄신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싼 쌀값… 귀한줄 모르면 버력입어(박갑천 칼럼)

    쌀도 물건이니 사고판다.한데 우리겨레의 쌀을 팔고사는데 대한 생각은 유다르다.사는걸 일러 반댓말 「팔다」를 쓰잖은가.체면을 중시하여 없어도 있는체 사러가면서 『팔러간다』고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돈구실하던 쌀을 돈같이 여기면서 생긴 말이라고도 한다.쌀을 산다는건 돈을 파는 것이므로 『돈팔러간다­쌀팔러간다』로 됐다는 생각이다. 사고파는데는 값이 있다.그값은 사람에게도 매겨진다.그래서 공자도 아름다운 옥(미옥:공자를 가리킴)을 팔아야 하느냐 간직해야 하느냐는 자공의 물음에 대답한다.『팔아야지(고지재),팔아야 하고말고.난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논어」자한편).비싸게 팔리고자 했던 것이리라.그값은 같은 물건이라도 형편따라 오르고 내린다. 쌀값의 오르내림도 그렇다.「지봉유설」(재리부)을 보자.태평했던 신라태종때는 베 한필값이 벼 30∼50섬이었는데 고려공민왕때는 흉년이 들어 쌀 다섯되로 바꾼다.조선 선조때인 계사(1593)갑오(1594)년은 왜구로 황폐해지면서 무명 한필값이 쌀 두되였으며 말 한마리도 쌀 서너말에 살수있었다.그때의 베나 쌀은 돈구실을 해주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쌀소비량은 한사람앞에 104.9㎏으로 95년의 106.5㎏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국민의 한끼 소비량은 96.8g이라는 계산이었으니 돈으로 칠때 2백원이 채못된다.식생활에서의 쌀값 비중을 알게하는 숫자다.그런만큼 돈으로만 따지면서 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잊어간다.먹다 남기면서 버리는 일쯤 예사롭게 생각하는 것도 그맥락이라 하겠다. 정재륜은 쌀에 대해 엄격했던 효종임금 얘기를 그의 「공사견문록」에 써놓았다.그가 궁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밥을 물에 말아 몇숟갈 뜨고서 밀쳐놓았다.이를 본 임금이 먹을만큼만 떠다먹어야지 무슨 짓이냐면서 하늘이 내린것을 귀한줄 모르고 버릴때 그죄를 면할길 없다고 귀띄게 야단친다.나중에 수랏상 나가는걸 보니 밥그릇에 밥알 한톨 묻어있지 않았다.농민의 피땀어린 쌀에는 하늘의 비틈한 뜻도 곁들여 있음을 임금은 깊이 새겨 알고 있었다. 금덩이속에 묻혀사는 사람에겐 금이 흙같을 수도 있다.그러나 금은 금이다.흔하고 싸다하여 귀함을 잊고 존절을 모를때 하늘이 버력내릴걸 왜 모르는고.굶주리는 북녘땅 겨레만 생각한대도 쌀을 허투루 다룰 일인가.〈칼럼니스트〉
  • 여천공단 주민/암발생률 전국의 15배/역학조사

    ◎임파선·골수계통… 63%는 “악성종양” 전남 여천공단 인근 암환자중 임파선조직과 골수기관계통의 암발생률은 전국 평균보다 15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6일 여수·여천환경운동연합(공동의장 김정명 목사) 의료보험연합회측으로부터 여천지역암환자들의 진료기록을 분석한 결과를 입수해 발표하면서 밝혀졌다. 환경운동연합측의 자료에 따르면 여천석유화학공단을 끼고 있는 이 지역 주민 암환자 3천964명을 대상으로 림프조직(임파선)과 조혈기관(골수)에 대해 검진한 결과 이들중 63.3%인 2천510명이 악성종양으로 판명됐다.이는 전국적으로 1백38만여명이 검진을 받아 3.9%인 5만3천311명이 악성종양으로 확인된 것과 비교할때 15배가 높은 수치다. 이 지역에 사는 2천510명중 1천621명(64.6%)이 림프종양중 발생빈도가 높고 악성인 호즈킨병으로 나타났다.이 수치도 전국에서 5만3천여명이 검진을 받아 1천9백72명(3.7%)이 발병한 것과 비교하면 15배나 많다.
  • 요선철릭(외언내언)

    노리끼리한 제 색(소색)을 살린 생모시인가 했더니 연한 분홍색이라고 한다.열다섯살 남자아이의 옷에 이꽃(홍화)물을 들인 이의 고운 마음과 세모시의 투명한 질감,그리고 정교한 바느질솜씨가 어울어진 「요선철릭(요선천익)」.「비단 100년,종이 1000년」이라는 말도 있거늘 잠자리날개처럼 가벼워 보이는 이 옷이 7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이 얼핏 믿어지지 않는다. 해인사 비로자나불상의 복장유물로 발견된 고려시대 의복 「요선철릭」은 오늘의 패션디자이너도 놀랄 만큼 아름답고 기능적이다.홑옷임에도 정교하게 박음질한 허리부분(요선)에 생명주로 안단을 댔고 가는 주름을 풍성하게 준 치마부분은 왼쪽 트임을 두되 자락이 겹치도록 해서 미적 요소와 활동성을 최대한 살렸다. 철릭은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들어온 포의 일종.고려시대에는 수십종의 포가 있었으나 조선조말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됐다.저고리에 주름잡은 치마를 이어붙인 모양의 철릭은 조선조 세종때엔 왕의 곤룡포 속에 입는 받침옷구실을 했다.나중 왕과 문무백관의 일상복인 편복이 됐고 임진왜란때는 왕 이하 신하가 모두 철릭을 입고 칼을 차,관복처럼 됐다.혜원과 단원의 풍속화에서는 철릭 입은 서민과 군졸·무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한쪽 혹은 양쪽 소매를 반소매로 만들고 따로 긴 소매를 만들어 매듭단추로 연결하기도 했다.패션평론가 김유경씨에 의하면 철릭은 오늘의 바바리코트처럼 실용적인 옷이다. 철릭으로서 뿐만 아니라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옷이라는 점에서 「요선철릭」의 보존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보존처리를 마쳤다지만 이런 문화재는 공기와 빛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급속히 변질되는 만큼 사람의 입김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아울러 오늘의 옷감으로 정교하게 복제해 일반인에게 이 옷을 보여주면 좋을 듯싶다.「요선철릭」 이전까지는 가장 오래된 옷으로 알려진 고려조의 백저포(일명 문수사포)는 한복디자이너 이리자씨가 지난 84년 재현해낸 바 있다.
  • 모든거리에 이름을 붙이자/박우서 연세대교수·도시계획학(서울광장)

    노들길,곰달래길.모래내길 등 한국적 맛을 풍기는 길 이름이 서울에는 많다.을지로,퇴계로,소월길과 같이 역사적 인물을 상징하는 길도 또한 많다. 그러나 정작 주소를 가지고 집을 찾으려면 큰 문제가 생긴다.수십여채의 집이 같은 번지를 쓰고 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대로변에 있는 사무실을 찾을때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이다.짝수와 홀수가 구분된 것도 아니고 한 건물이 몇개의 번지를 같이 쓰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였을까? 몇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길 이름을 알 수 없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도로표지판을 보아도 길이름은 없고 시청 또는 구청 등의 관공서나 김포공항,고속버스터미널과 같은 사람들이 흔히 아는 시설물을 중심으로 방향을 표시하고 있다.심하게는 도로표지판 자체가 잘못 표시된 경우도 있다. ○시설물 중심 방향표시 두번째는 우리의 관행에서 나온 문제이다.대충 이 동네 저 동네 정도로만 알고 사용하고 있지 정확한 지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말 중에는 상황적 어려움을 쉽게 넘길수 있는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말들이 많다.「두서너개」,「이삼십분」,「대여섯채」 또는 「아무거나」 등으로 표현하므로 분명한 의사보다는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여 겸양의 미덕을 살리려는 지혜를 엿볼수 있다. 이러한 관행이 일상화되어 정확하게 표현해야 할 때까지도 대충 표현하고 있다.「커피마실래 홍차마실래」라고 물으면 커피면 커피고 아니면 홍차지,「아무거나 주세요」하고 답한다.그래서 물은 사람은 당황할 수 밖에 없다.이런 경우는 방향제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나자」고 한다면 정확히 어디인지를 알수가 없다.그래서 「교보빌딩 앞에서」라든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라고 해서 지점을 정해야 한다.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시설물들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대충 경험으로 해결하고 있다.정초에 옛 스승댁을 찾아 갈때도 그 집을 아는 사람을 앞세워 가지 않으면 안된다.남의 사무실을 처음 찾아 갈때도몇 번이고 물어물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외국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경험한 결과 그들은 큰 길의 왼쪽은 홀수지번을,오른쪽은 짝수 지번을 쓰고 있으며 모든 길에는 길이름을 부여하고 있다.난생 처음 찾아가는 남의 사무실이라도 길이름과 번지만 있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도시계획위원회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는 길이름을 작명하는 일이다.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고장의 멋을 내는 길이름부터 유명인사를 기리는 길이름,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해서 모든 길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큰 거리의 교차로에서 만나자고 할때도 교차로의 「동남쪽 모서리에서」라든지 「서북쪽 모서리에서」 만나자고 하여 분명한 지점을 밝히고 있다. ○정확한 길이름 사용해야 이제 우리도 경험에만 의존해서 살던 선조들의 관행을 벗을 때가 됐다.겸양지덕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분명하게 사용할 줄 알때가 되었다는 말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장의 멋을 나타내는 이름을 거리에 붙여 사용해야 한다.1가,2가,3가 또는 1번도로,2번도로,3번도로 등과 같이 아라비아 숫자도 사용해야 한다.미국의 많은 도시들은 거의 예외없이 「브로드웨이」라는 도로를 가지고 있다.한국의 모든 도시들이 「퇴계로」를 가지면 안될 이유가 없다.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정확한 길이름을 사용하는 습관도 길러야겠다.
  • 외국인 폭력조직 41명 검거/인·파키스탄인

    ◎불법체류자 상대 폭행 돈뜯어 법무부는 26일 국내에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며 돈을 뜯어 온 보핀더 싱씨(29) 등 인도인 조직폭력배 23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불법취업을 시켜주고 수수료를 챙긴 모드 칸씨(41) 등 파키스탄인 조직원 18명도 함께 적발,조사중이다. 보핀더씨 등은 지난해 6월 서울 은평구 수색동 지하셋방에서 「페이먼트 비즈니스」라는 조직을 결성한 뒤,불법취업한 인도인들이 송금의뢰한 돈을 가로채거나 불법취업을 알선해 왔다. 파키스탄인 모드 칸씨 등은 지난해 9월 불법취업 알선조직을 만들어 1인당 5백여만원씩을 받고 80여명의 파키스탄인들을 입국시킨 뒤,경기도 일대의 염색·목재공장 등에 취업시켜 준 것으로 드러났다.
  • 유전자 조작 양 복제 성공/인간도 복제 가능성 증명

    ◎영 로스린연,세포 체취… 다른 암양에 이식 출산 【런던 AP AFP 연합】 완전히 자란 포유동물을 복제하는 첨단유전공학기술이 최초로 영국에서 성공,성인인간의 복제도 과학적으로 가능하게 됐다. 영국 에든버러 로스린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 박사는 23일 6년생 암양으로부터 채취한 유전자를 실험실에서 자체의 유전암호가 제거된 난자와 결합시켜 이를 암양의 자궁에 이식,새끼를 낳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이 새끼는 첫번째 암양을 유전적으로 똑같이 복사한 것이라고 윌머트 박사는 밝혔다. 윌머트 박사는 암양의 유선조직으로부터 채취한 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특수화학처리를 통해 세포핵을 휴면상태에 빠지게 하는 한편 수정되지 않은 다른 양의 난자로부터 세포의 유전자중앙통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세포핵을 제거한 다음 전류를 이용하여 유선세포를 세포핵이 제거된 난자와 결합시켰다고 말했다.
  • 김병수 연세대총장·장상 이화여대 총장/연대·이대총장 졸업시사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24일 교정에서 학위수여식을 가졌다.김병수 연세대 총장과 장상 이화여대 총장의 축사를 간추린다. ◎김병수 연세대총장/“이시대 이끄는 사명감 갖자” 사람의 일생은 삼등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 삼분의 일은 훈련의 세월입니다.이 세월은 대학 졸업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이 기간은 여러분의 선조들이 발견한 지식을 배우는 데 보낸 시간입니다. 두번째 삼분의 일은 첫번째 삼분의 일의 세월에서 습득한 지식을 더욱 갈고 닦아 선조들이 이룩한 지식위에 새로운 지식을 보태는 데 보내는 세월입니다.여러분에게는 오늘이 모교에서 수업을 듣는 마지막 날이지만 새로운 지식을 찾는 첫 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삼분의 일은 여러분들이 발견한 새로운 지식을 후대에게 물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찾는데 밑거름이 되게 하는 세월이 될 것입니다.이렇게 볼 때 오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의미있는 날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여러분에게 졸업의 날임과 동시에 시작의날이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연세대학교는 여러분에게 「인생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을 부디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럼으로써 앞으로 한국에서 새로운 뉴턴과 파라데이와 하비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탄생하길 기대해 봅니다. 오늘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날입니다.지금까지 우리는 서양이 발견한 근대과학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100여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여러분은 20세기가 배출하는 마지막 졸업생의 하나입니다.그러나 몇 년후의 졸업생은 21세기가 배출할 것입니다.그때에는 서양이 발견한 과학지식에 더하여 우리가 발견한 과학지식을 습득한 연세인이 배출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이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지식의 첨병이 된다는 것을 본인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그만큼 여러분의 어깨에는 21세기를 이끌어 가야하는 사명감이 얹혀 있습니다.21세기에는 세계지도가 다시 그려질 것입니다.민족의 운명도 뒤바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연세대학교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우리나라의 「희망의 푯대」가되어줄 것을 당부합니다. ◎장상 이화여대총장/“21세기는 준비하는 자의 것” 오늘날 인류사회는 가치규범 체계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이 시대의 양식있는 사람들은 인류와 지구의 안위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국제적 현실과 우리 사회의 현실은 무관하지 않습니다.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분야에서 우리 사회도 가치 갈등을 겪으면서 대립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문제들은 어느 한쪽을 승자로,다른 한쪽은 패자로 만드는 식의 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오히려 함께 발전하는 길,함께 사는 길,통합적 공존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하고 그 길을 터득하고 그 길을 개척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앞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이 모든 문제들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사람들은 우리들 스스로라는 점입니다.더 이상 선진국이 우리 사회문제를 진단하여 처방하는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인으로 활동하게 되는 시기는 정보화의 시대,국경없는 세계화의 시대로서 진정한 선진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 전국가적인 노력이 경주되는 시기입니다.그러므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지성으로서 여러분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살기위해 이 시대의 과제를 통찰하고 그 어느때보다 창조적인 상상력과 전문능력,사려깊은 시민적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나는 여성이 지닌 특성과 잠재능력은 참으로 이 시대의 결핍을 상쇄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그들의 오랜 과거로부터 무수한 고통과 편견의 무게를 지니고 왔기에 전통으로부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를 판단할 삶의 직관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주신 생산력으로 인한 자연친화적인 경험이 그들 삶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처한 생태파괴와 비인간화 구조에 회의하는 마지막 보루로 남습니다. 준비없이는 다음 세기 내내 역사의 뒤안길에서 다시 방관적으로 남을 밖에 없습니다.21세기는 준비하는 자만의 것입니다.
  • 해인사 대불사(외언내언)

    우리나라에는 삼보사찰이 있다.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경남 양산군의 통도사가 불보사찰,스님의 수행도량으로 이름높은 전남 승주군의 송광사가 승보사찰,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가 법보사찰이다.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애장왕 3년(802년).월드컵축구가 이땅에서 펼쳐지는 2002년이면 창건 1천200주년을 맞게 되는 고찰이다.창건 당시는 암자에 불과했으나 신라말의 주지스님 휘랑이 고려 태조의 건국을 도운 인연으로 크게 확장됐다.지금은 14개동의 건물과 75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산. 해인사가 이 사찰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태조 7년(1398년).고려 고종때(1236∼1251년) 판각된 후 강화도 선원사(선원사)에서 소장해 오다 옮긴 것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중의 하나인 해인사가 오는 5월부터 「해인불교단지」를 조성하는 대불사를 봉행한다.10개년계획으로 추진되는 이 불사로 일주문 1㎞ 아래에 있는 2만여평의 대지위에 성보박물관,삼존대불,불교회관,대장경연구센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해인사는 창건 이후 소실과 중창을 거듭해왔지만 모두 사찰경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사찰밖에서 봉행되는 이 불사는 제2의 창건과 다름없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신도교육이나 포교활동등 불교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시설은 거의 없는 실정.그런 의미에서 해인사가 대규모의 불교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아무쪼록 이 불사를 계기로 해인사가 사부대중의 청정도량으로 거듭나기를 부처님께 기원한다.
  • 백자연적 기우동자(한국인의 얼굴:95)

    ◎피리소리에 취한듯 지긋이 감은 눈 조선 백자에는 욕심이 없다.물욕과는 거리가 먼 청빈한 마음 같은 태깔.호사스럽거나 떠들썩하지 않은 절제가 배었다.그것이 백자의 아름다움이고 기품이다.백토를 앙금내어 수비로 걸러내기가 어디 한두번이었는가.애초 티끌 하나 끼어들지 못한 태토로 그릇을 빚었다.그리고 나서 백자로 번조하기까지는 정성어린 손길이 닿기 여러 차례였다. 백자는 조선조가 통치이념으로 삼던 유교윤리와 무관치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그럴듯한 설득력을 갖는다.백자의 첫 등장은 고려말이다.그러나 조선시대 전기에 걸쳐 큰 자리를 차지한 분청사기와 청화백자에 덜미를 잡혔다.백자가 이들 도자기를 따돌리고 최고수준의 자기시대를 연 것은 18세기 전반이었다.그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시대가 막 시작한 영조 초기와 맞물려 있다. 세상사람이 으뜸으로 치는 조선의 공예품은 백자다.그러나 지금은 흔하게 돌아다니지는 않는다.더구나 백자인물상은 그릇에 비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렵다.오늘날 일본 국립도쿄박물관이 소장한 백자기우동자연적 정도가 명품이 아닌가 한다.문자 그대로 소를 탄 소년을 묘사했다.표현기법이 뛰어난 조각이자 걸출한 도자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조각품 백자연적의 높이는 14.1㎝여서 연적치고는 좀 컸다.실용성보다는 예술성에 중점을 두었던 모양이다.소는 엎드렸다.그 소잔등에 걸터 올라탄 소년은 다리 하나를 쭉 뻗고,오른 다리를 불러들여 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소는 그까짓 동자 하나쯤 무게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동자 역시 소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그리고 가로 대고 부는 피리 횡적을 불고 있다. 동자는 피리를 부느라 고개를 슬쩍 젖혔다.무슨 가락인지는 몰라도 피리소리에 저절로 도취되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그래도 긴 눈썹과 선을 같이 한 눈매가 시원스럽다.어린아이치고는 코가 큼직하고,피리를 들여댄 아랫입술이 도탑다.쌍머리를 뿔마냥 바싹 틀어올려서인지 이마가 훤칠했다.피리를 잡은 솜씨가 제법 능숙한 동자는 벌써부터 어떤 삼매경에 빠져 있다. 이 걸작의 백자기우동자연적은 국립도쿄박물관 소장품이지만,본래는 오쿠라컬렉션(소수창수집품)이었다.일제때 대구를 근거지로 1천110점이나 되는 엄청난 유물을 거두어들인 오쿠라 다케노스케(소창무지조)의 수집품인 것이다.
  • 다방 애환(외언내언)

    차를 마시는 장소로서의 다방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신라시대로 추정된다.경주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에 새겨진 「다연원」이란 명문이 그 근거다. 다방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이 때의 다방은 「진다」의식 등 차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국가기관의 이름이었다.「진다」의식이 「다례」로 이름이 바뀐 조선조 후기엔 국가기관으로서의 다방은 유명무실해진다. 커피를 마시는 현대적 의미의 다방이 처음 선보인 곳은 독일계 여인이 1902년 고종이 하사한 땅에 세운 손탁호텔.고종은 처음 커피를 마신 한국인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꾸민 최초의 다방은 「장한몽」을 연출한 영화감독 출신의 이경손이 1928년 관훈동에 개점한 「카카추」.이후 1930년대 천재시인 이상이 「제비」 「식스나인」 등을 열어 화제가 된바 있듯이 한동안 다방은 연극영화인·화가·문인 등 예술가들이 경영하기도 하고 주요 고객이 돼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명동의 「갈채」다방 같은 곳은 한국문학사가 생생하게 만들어지던 현장이었다. 다방이 예술가나 특별한 사람들의 장소에서 대중적인 만남의 장소로 바뀐 것은 60∼70년대.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차 한잔값을 들고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연인을 기다리는 남녀가 출입문을 초조하게 지키기도 하고 가난한 대학생이 가정교사 광고를 내고 전화 오기를 기다리던 곳이었다.그당시 달걀 노른자가 들어간 「모닝」,도라지 위스키를 한두방울 떨어뜨린 「위티」 등 비싼 차를 시킨 손님은 마담과 레지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카페와 레스토랑에 밀리면서 다방은 쇠퇴기를 맞는다.90년대 들어서는 넓은 유리에 탁 트인 공간의 커피전문점이 등장하고 기존 다방들은 갈곳 없는 노인들의 장소가 돼버렸다.다방업중앙회가 「다방」이란 간판을 「휴게실」로 바꾸기로 했다 한다.한국만의 독특한 다방문화가 이렇게 막을 내린다.세태 변화의 결과지만 최소한의 여유마저 잃은듯 해 섭섭하다.
  • 중 고고학자가 재해석한 백제금동대향로

    ◎윗부분의 새는 봉황아닌 백제 천계/천계가 밟고있는 알은 동명왕 「난생설화」 상징/악기 연주상의 머리모양은 마한처녀의 모습 세기적 보물로 평가받은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중국 고고학계에서 나와 주목을 끌었다.중국 원로고고학자 웬위청(온옥성)은 현지 고고학전문지 「중국문물보」 최근호에 실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라는 글에서 한국학자들 시각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지난 93년 12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한 이 향로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는 먼저 윗부분에 새를,아랫부분에 용을 형상화한 백제대향로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그러나 윗부분의 새는 한국학자들 주장처럼 봉황이 아니라는 것이다.봉황 머리에 나타나는 깃털이 없을 뿐 아니라,닭벼슬 계관이 뚜렷한 것으로 미루어 천계라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그 밑에 작은 5마리의 새들이 다섯 방향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천계와 5마리의 새는 왕과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했다.천계는 물론 왕이고,바로 아래 작은 새들은 오부의 백성이라는 논리를 폈다.백제의 오부는 중국 북조때 사서인 「주서」 백제조에 나온다.「도아래 만가가 있고,5부로 나뉜다」는 귀절이 그것이다.다섯이라는 숫자는 천하의 오방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천계의 꼬리에 주목하고 있다.꼬리가 무척 길다는 것인데,그런 생김새의 닭은 바로 백제의 특산물이라는 것이다.그 근거는 「후한서」 동이전 마한조와 「삼국지」 등에서 찾았다.이들 중국의 사서가 백제의 특산물로 「꼬리가 5자나 되는 닭」을 꼽았다는 기록을 들추어내고,천계와 관계된 또다른 해석 하나를 더 곁들였다. 그것은 천계가 목을 휘어 주둥이 아래 끌어안은 둥근 물체와 발로 밟고있는 큰 둥근 물체다.그는 둥근 물체를 알로 보았다.그리고 고구려 동명왕의 어머니 유화가 「햇빛을 받아 잉태하고 알을 낳았다」는 「삼국유사」기록에 연관시켰다.백제를 세운 온조왕은 동명왕의 세째 아들.그러니까 알을 통해서 선조들이 태어난 이야기 난생설화를 향로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이 금동향로에 나온 악기와 연주자인 악인(낙인)을 살핀 그는 우선 완함(●함)과 배소(배소)를 제외한 다른 악기는 모두 백제 고유의 것으로 가려냈다.향로에 나오는 소(소)와 고(고),다섯 줄의 금이 백제악기라는 기록을 「수서」 동이전 백제조에서 확인하고 있다.또 악인들 머리형태는 마한지역 처녀들 헤어스타일로 추정했다.이는 「머리를 한가닥으로 땋아 오른 귀쪽으로 늘어뜨린다」는 「주서」의 백제조와 일치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또 「주서」에서 「백제의 왕은 하늘과 오제신,시조묘에 제사지낸다」는 내용을 찾아내고 제사와 금동향로의 연관성을 살폈다.그런 제사때 쓴 기물이 바로 금동향로라는 것이다.그리고 악인상의 헤어스타일로 보아 제사때 음악연주는 미혼의 처녀들이 맡았을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였다. 금동향로 뚜껑에 삐죽삐죽 나온 뫼뿌리는 동양인들이 이상적으로 상상한 봉래산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한국학자들이 내놓았던 봉래산설을 부정한 그는 금마산으로 보는 것이 옳다면서「삼국유사」권1의 내용을 상기시켰다.「옛날에 마한이 일어나고 세상이 융성하여 백제가 금마산에서 건국했다」는 줄거리가 「삼국유사」에 들어있다. 그는 여러가지 정황을 토대로 향로의 제작연대를 백제 위덕왕에서 무왕에 이르는 시기인 AD554∼641년으로 잡았다.그리고 걸작의 보물 이름을 「백제금동천계금마산제대향로」로 바로잡자고 제안했다.
  • 일본속의 한국/송상용 한림대 사학과 교수(굄돌)

    보름전 일본 규슈 여행길에 미야마에 들렀다.가고시마 못미쳐,이주인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데 사쓰마도자기를 굽는 집들이 모여 있었다.거기에 임진왜란때 잡혀온 한국 도공의 14대 후손 심수관옹의 수관도원이 있다. 한식 대문에는 사쓰마도자기 종가와 주 가고시마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관의 두 문패가 걸려 있었다.마침 휴일이어서 도자기 수장고는 못보았으나 용케도 마당에 서 있는 심옹과 마주쳤다.한글 명함을 건네니 4백년 전에 와서 한국말을 못한다고 했다.일본말을 잘 하는 후배가 온 뜻을 말하니까 안으로 안내해 차 대접을 했다. 심옹은 한시간 가까이 여러가지 기막힌 얘기를 했다.한국 도공들이 와서 일본문화에 크게 이바지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아 섭섭하다고 했다.그 다음 얘기가 기막혔다.한국의 어느 유명한 대학교수가 찾아와 심옹이 한국말도 못하고 작품은 왜색이 짙다고 반말로 꾸짖더라는 것이다.그러면서 왜색을 띠지 않았으면 어떻게 오늘까지 살아남았겠느냐고 했다.낯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옹은 와세다대학을 나온 지식인으로 대를 이었는데 조금도 교만한 데가 없는 인자한 분이었다.아들을 한국에 유학보내 옹기 굽는 법을 배워오게 했다면서 15대까지는 확실한데 그 다음이 이어질지는 모르겠다고 했다.그는 마당에 육각정을 지어 놓고 단군을 모셨던 옥산신사 쪽을 바라본다고 했다.한국사람이 한국 돌로 만든 큰 석물을 갖다 놓고 싶다고도 했다. 내년은 정유재란때 심옹의 선조가 일본으로 잡혀간지 4백년이 되는 해다.지금 재일교포는 70%가 일본사람과 결혼하며 무서운 속도로 민족을 잃어가고 있다.4세기나 한국을 이어 온 일본사람 「진주캉」에게 머리가 숙여진다.
  • 국경마을 「삼차구」의 새바람(송화강 5천리:18)

    ◎통행증 없이 왕래… 변경무역 도시로/중·러 장사꾼 몰려 여관 식당 “우후죽순”/아낙은 옷장사 남편은 집안살림 신풍속도/조선족이 일군 옥토… 30년대 강제추방 시련도 중국에는 변방검사소가 모두 234군데에 있다.검문소 기능을 가진 변방검사소 가운데는 공항소 50군데,항구소 119군데,육지소 62군데,검사본소 3군데가 포함되었다.그런데 흑룡강성에는 15군데나 되는 변방검소가 들어섰다.중국의 대외개방정책에 따라 흑룡강성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중국에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로 나가는 길목일뿐 아니라 러시아와도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지역이 흑룡강성이다. 흑룡강성은 특히 러시아와 3천45㎞나 되는 긴 국경선을 이루었다.그래서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러시아의 도시 20여개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또 중국에서는 국경지대 24군데에 통상구를 설치했다.그런데 조선족진인 동녕현에도 통상구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조선족 유일의 이 통상구는 동녕현 삼차구에 들어앉은 동녕통상구이다.수로와 육로를 통해 곧바로 러시아와 연결되었다. 그 동녕통상구가 있는 삼차구로 가기위해 목단강시에서 버스를 탔다.수분하로 가는 아스팔트길을 달리다 수분하 10㎞를 앞두고 마록구쪽으로 굽어들었다.험준한 산악도로를 넘어 벌판에 들어서자 동녕현성이 나타났다.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7㎞를 더 달려 삼차구에 닿았다.수분하와 후부투하가 합수하는 삼각지대라고 해서 삼차구라는 이름이 붙었다.흑룡강성의 강남으로 불리는 삼차구는 기후가 좋아 목화와 고구마농사가 잘 되었다. ○“흑룡강성의 강남”으로 불려 삼차구는 얼마전 만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변경지대였다.90년대 들어서야 개방되었다.변경통행증이 없으면 차에도 못 올랐던 시절이 있었다.지금은 자유자재로 오갈수 있을 만큼 세상이 달라졌다.머리털이 나고 처음 밟아보는 땅이라 그런지 감개가 무량했다.더구나 우리민족이 일찍 개척한 땅이 아닌가.선조들의 개척정신이 새삼스럽게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경북도 경원군 송하면 사람 이창호일가가 맨 먼저 삼차구에 들어와 첫 괭이를 박았다.지금으로부터 100년을 훨씬 더거슬러올라가는 1882년의 일이다. 1923년 기록을 보면 삼차구 조선족은 324가구에 2천125명으로 되어있다.동녕현 조선족은 1930년 1천40호 5천200명에서 1935년에는 1천433호 7천703명으로 늘어났다.현재는 9천여명으로 현 전체인구(2만1천명)의 48%를 차지했다.삼차구는 만주국 시절 얼마동안은 현 소재지이기도 했다.그러나 1937년 장고봉전투에서 진 일제가 구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는 바람에 현 소재지를 동녕으로 옮겼다.일제는 국경선으로부터 10㎞이내에 마을을 두지않기로 한 요구를 받아들여 삼차구의 주민들을 강제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목단강,영안,해림 등지로 뿔뿔이 떠나버렸다.광복이 되어 다시 모여들었는데 바로 오늘을 사는 삼차구 조선족들이다.삼차구진 소재지 마을은 동녕현 소재지 못지않게 흥청댔다.길 양쪽에 음식점과 여관들이 촘촘하고 소학교 뒤 공터에는 장이 섰다.장마당에는 팔고사는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그리고 큰길로는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컨테이너 트럭과 택시들로 해서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불과 3∼4년전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마을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이다. ○1991년 조선족자치진 지정 국경은 마을 끝자락을 지나갔다.개울이나 다름없는 강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콘크리트 다리가 있고,양쪽 다리끝에는 두나라 변경검사소가 자리잡았다.국경에 다리를 놓은 지도 10여년 밖에 안되었다.처음에는 중국쪽 주민들과 러시아쪽 주민들 사이에 물물교환으로 시작한 거래가 지금은 덩치가 커졌다.사사로운 민간무역이 통크게 발전하더니,80년대 두나라 친선관계가 강화되면서 개방이 급속도로 가속화했다. 삼차구는 1991년에 조선족자치진이 되었다.지난해는 주민 1인당 연간평균 2천476원을 올렸고,올해는 3천원을 내다보고 있다.농사수입보다 변경무역이 더 큰 수입원이다.동녕통상구가 열리면서 천지개벽과 같은 현실을 맞는 것이다.삼차구가 자치진이 되었던 해는 밀수가 판을 치던 때라 돈을 긁어모았다.밀수꾼들이 몰려와 헛간에도 손님이 들 정도여서 여관과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지금은 밀수길이 막혔지만,경기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국경의장사꾼은 대개 두 부류이다.밑천이 든든하면 옷장사고,작은 밑천으로는 채소나 과일장사를 한다는 것이다.옷장사는 여자들 몫으로 삼차구 부녀주임 박정금은 지난해 몇만원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러시아 우스리스크까지도 멀지않다.드나드는 옷장사가 여자들 몫이라,부부역할이 뒤바뀌었다.그래서 남자들이 집안살림에 매달리는 가정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삼차구는 개혁개방 덕분에 살기좋은 고장이 되었으나 새 풍속도가 생겨난 셈이다.돈도 돈이지만 옛날 분위기에 비하면 삼차구는 별천지가 되었다.을씨년스러웠던 시절을 삼차구에서 보낸 백원만씨(63)의 말을 들어보면 삼차구는 무시무시한 국경지대였다.처음에는 교편을 잡다가 형이 사는 삼차구로 와서 경찰에 들어간 그는 오랫동안 파출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내 여기서 11년간 경찰질 할 때는 중·소관계가 팽팽했던 시절이었수다.구 소련땅에 친척이 살아도 간첩으로 몰렸지비.별별일이 다 있었수다.중·소관계가 악화한 1969년에는 밤낮 비행기가 뜨고 하루에도 몇번씩 공습경보가 내리지 않았겠슴등.국경넘어서 달리는 소련군 탱크 소리에 모두가 겁에 질렸지비.기리고 1979년 중국이 월남을 쳤을 때도 삼차구 코앞에까지 소련군이 집결했었수다』 그러고 보면 삼차구는 많이 달라졌다.문화대혁명 시기 러시아어를 하면 간첩이었는데,지금은 러시아어가 대접을 받고있다.백원만씨 딸도 노어전문학교를 나와 무역회사에 입사,시집밑천을 벌써 모아놓았다고 했다.
  • 「한보 철강」경영 정상화 “잰걸음”/새임원진 오늘부터 현업 투입

    ◎경영 전반 1차평가 월내 완료 한보철강에 대한 27명의 임원진이 새로 구성되고 포항제철의 지원반이 현장에 파견되는 등 한보철강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이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손근석 한보철강 재산보전관리인은 11일 상오 가진 기자회견에서 『채권은행단 대표와의 협의를 통해 자신이 한보철강 사장을 맡았다』며 『27명의 새 임원진은 이달중 한보철강 경영전반에 대한 1차평가가 가능하도록 12일부터 현업에 투입된다』고 밝혔다. 이같은 임원진 선임과 맞춰 김종진 포철사장은 이날 하오 포철내에 설치된 한보철강 지원반과 함께 헬기편으로 당진제철소로 내려가 현장을 둘러보고 현황을 점검했다. 이에 따라 제철소장 겸 부사장에 이 전 포철상무가,건설본부장 겸 부사장에는 김동식 포스코개발 전무가,기획조정실장 겸 전무이사는 고창현 포철이사가 각각 선임되는 등 12명의 포철 및 계열사 출신 임원이 기획.총무.조업.건설 등 핵심부문을 맡고 안정준 전 한보철강 부사장 겸 제철소장은 기술상임고문으로,박종수 전 한보철강 상무이사가 제철소 연구소장으로 선임되는 등 12명의 전 한보철강 임원은 열연.냉연.제강.환경에너지.정비 등 현장 기술부문을 전담하게 됐다.인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임(포항제철측) ▼사장 손근석(보전관리인) ▼부사장 △제철소장 이재운 △건설본부장 김동식 ▼전무이사 △기획조정실장 고창현 △건설본부 엔지니어링 부본부장 장호천 ▼상무이사 △기획조정실 홍보·법무담당 장준영 △총무본부장 강웅규 △구매본부장 김형준 △영업본부장 김송 △제철소 조업부소장 손위락 △〃정비부소장 김덕진 △〃코렉스 부소장 신영만 △건설본부 건설 부본부장 김진수 ◇유임(한보철강) ▼기술상임고문 안정준 ▼상무이사 △제철소 연구소장 박종수 △영업본부 판매담당 구본우 ▼이사 △제철소 냉연담당 손승용 ▼이사대우 △ 〃 제강담당 송옥호 △ 〃 열연담당 정경호 △〃환경에너지담당 황선조 △ 〃 설비관리담당 최천식 △ 〃 기계정비담당 하영준 △〃전기정비담당 이영호 △ 〃 코렉스 담당 박강균 △건설본부 공정관리담당 심대석
  • 서예가 조수호(이세기의 인물탐구:120)

    ◎석고문을 법첩으로 독창적 행장구축/“글씨보다 인품”… 흐트러짐 없는 자세 일관/“개인전은 최상의 기량때 일생 한번” 고집 동강의 글씨는 패기와 강유를 겸하고 그의 난죽은 칼날 같고 풋솜 같고 세찬듯 부드럽다. 음악에 음조가 있듯이 명필에는 선조가 숨어 있다.옛대가의 서체를 두루 완수한 동강의 행초는 「천변만화를 구사하는 경지」에서 일생일작을 놓고 냉엄한 생사의 소명을 수행하는 시기다. 그는 서단에서는 여러 모로 남다른 존재다. 첫째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다.동양화가 아닌 서양화를 전공한 것은 서구적인 미학의 특성과 이질감을 접목하여 동양예술을 심도 있게 탐색,창조하자는 의도에서다.둘째는 미대재학중 「사군자」성적이 「100점」 만점을 기록한 일화가 있고 25세인 49년 제1회 국전 특선이후 57년부터 연 4회특선,아직 30대초반에 국전추천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만만치 않은 기세로 서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서양학과 전공 이색경력 또 서예를 보는 눈과 이론에 정연하여 강물처럼 쏟아내는 명강의로 유명하다.84년,중국정부주최로 열린 「안진경 서거 1천2백주년 기념 국제서법학술대회」에서 그가 강의한 「안진경의 위치와 중국서법에 끼친 영향」은 중국서단의 거봉인 요몽각·우우임을 감동시켰고 그 내용이 중국 문화일보에 전면게재된 바 있다.이에 앞서 「예술의 파죽지세」로 지칭되는 그의 대작 「난죽도」를 대북의 역사박물관과 중국서화회겸 중국서법학회 이사장이던 마수화와 황군벽이 구입하여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강의 예술관은 「글씨에 앞서 고매한 인품을 먼저 형성시켜야 한다」는 자세가 굳건하다.문자의 의상에서 창출되는 서예술은 글씨의 점과 획,장법도 중요하지만 「부단한 노력과 수련을 통해 진실을 발견해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는 지론이다.그런 맥락에서 그는 「누에가 실을 토할 때」의 「여잠토사」와 「송곳으로 모래를 그린다」는 「추획사」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언제나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심신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붓을 잡는다. 그가 좋아하는 법첩은 전예해행초가 모두 들어 있는 「석고문)」을 최고로 꼽고 있다.「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는 천가지 비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글씨를 이룰 수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와 안진경·구양순을 임서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형태에 중점을 두는 「형임)」과 운필과 필세를 체득하는 「의임」,마음속으로 외워서 쓰는 「배임」의 과정을 섭렵한 끝에 자신의 체질에 맞는 정묘하고 유심한 행초의 세계에 접근하게 되었다. ○정연한 논리의 달변가 그는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웃의 부탁을 받아 「입춘대길」을 쓰기 시작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통사회의 엄격한 집안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묵향에 젖어들게 되었고 대구사범 심상과에서 현재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의 부친인 우당 김용하 선생에게 서예와 교육심리학을 배웠다.그때 스승이 추천해준 왕희지의 「난정서」와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은 서법수업에서 일생의 지침서가 되었다. 평소의 성격은 괴팍하며 불의가 싫은 나머지 이에 저항하는 기질이과격한 편이다.가식과 겉치례를 경멸하고 현실과 의기투합한 속물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친구의 범위도 산정 서세옥이나 오정 김진해에 한하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스승인 월전(장우성)을 극진히 모신다.지금도 청년같이 건강하여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정의감은 「원문 한줄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국전이나 서예전에서 입·특선하는 기미가 보이면 추호의 용서없이 몰아붙인다. 『나에게 순탄하고 행복한 역정을 지내왔다고 하지만 나나름대로 고통과 인내,탄압과 분노,좌절과 희망으로 점철된 청춘기를 보냈다』고 그는 돌아본다.『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일제시대에는 사상이 불온한 반일교사로 지목되어 왜경의 감시에 시달리다 징병으로 끌려간 적이 있고 6·25때는 굶주림과 뼈저린 외로움을 겪었으며 죽음을 넘긴 여러 번의 체험 탓인지 어떤 일도 함부로 포기하는 일이 없어졌고 침식을 거르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하면서 자신의 운명에 책임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고 국제서법학술대회에 참여하면서도 75년 문예진흥원이 주관한 국전초대작가상 수상기념전에 응한 것 외에 서울에서는 정식으로 개인전을 연 적이 없다.이에 대해 동강은 『자연의 사계가 다르고 해마다 피는 꽃의 자태와 빛깔이 다르듯이 나만의 빛과 나만의 자태와 나만의 향기가 절로 우러나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새롭고 신묘한 기운」이 현현할때 일생 단 1회 개인전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힌다.다만 그 시기는 예정된 것은 아니지만 첫특선이 50주년이 되는 99년에 지금까지의 화업과 서업을 한자리에 펼쳐 스스로를 돌아보고 검토하고 반성하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다. 90년 서울교대 정년퇴임후 종로3가 세운상가에 있는 서실에 나와 그는 아침부터 난과 죽의 은은한 향기를 눈부신 백지에 뿜는다.일생을 걸고 한판 승부를 건 듯한 그의 서체는 세상을 질타하는 듯한 필획과 결구를 표출하여 「한획보다는 한폭에 흐르는 탐신의 미학이 구축된」 독창적 풍모다. 가족은 「글씨를 사랑하여 나를 따르던 묘령의 착한 소녀가 어느새 백발로 변한 아내」와 장남의 가족과 함께 종로구 구기동에서 살고 있다.아호는 달 밝은 밤이면 강이나 산으로 밤새도록 헤매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월명」을 지어 가졌으나 고향이 낙동강부근이라는 데 착안하여 소전(손재형)이 「동강」을 내려주었다. ○퇴임후 종로에 서실 내 사람과 글씨가 함께 무르익는 「인서구로」를 지나 「마음속에 이미 대를 그리고 있는 흉중성죽」을 성취한 동강은 「묵과 획이 서로 화목하고 운치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심오한 유현의 세계를 유유자적으로 누리는 시기다. 그러나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예술가는 선택된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과 「예술가는 자기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태워나가는데서 희열을 느낀다」는 진언은 바로 자신을 향한 심혼의 혈서일지도 모른다. □연보 ▲1924년 경북 선산 출생 ▲45년 대구사범 심상과 졸업 ▲47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 입학, 전국대학생미전 「고궁」특선 ▲49년 제1회 국전 서예부문 「어부사」특선 ▲57·58·59·60년 국전 서예부문 연속4회 특선 ▲51년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졸업, 김용진·손재형·김용준·장우성사사 ▲62년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 ▲68∼90년 서울교육대학 교수 ▲74년 국전초대작가상 수상 ▲75년 초대작가상수상 세계일주기념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77∼83년 제1·2·3회 아시아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76년 한중교류전(대북역사박물관) ▲78∼81년 문교부 1종도서 중학교서예교과서 개발위원장 ▲81년 중화민국 중화학술원서 명예철학박사,중국정부초청 서화개인전 ▲83년 제1∼3회 아시아 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84년 중화민국정부주최 「안진경서거 1천2백주년기념」국제서법학술대회 한국대표,대구매일신문사 특별초대전 ▲85년 문교부 중·고교미술교육과정 심의위원 ▲86년 중화민국 서법학회명예이사,부산일보 초대개인전 ▲91∼현재 한국국제서법연맹 회장 ▲94년 대북국제서법연토회 한국대표 ▲95년 광복50주년기념 95 서울국제서예전 대회장(예술의 전당) ▲96년 대구국제서예전 대회장(대구 문화예술관) 〈저서〉 「근례비편해열」(80년) 「동강 조수호서화집」(81년) 문교부검인정교과서 「고교서예」편찬 〈수상〉 경북문화상(60년) 국민훈장목단장(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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