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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수씨 ‘대가성’ 시인/한보 항소심 2차공판

    ◎“황병태씨 대출알선조건 5억 추가요구” 한보사건 항소심 2차 공판이 18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황인행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피고인에 대한 직접신문과 정일기 전 한보철강 사장 등 증인 11명에 대한 신문이 진행됐다. 이날 공판에서는 지난 4월 중순 이후 실어증으로 말을 하지 못했던 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 피고인이 4개월여만에 입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공판에는 정피고인과 국회의원 홍인길 황병태 권노갑 피고인,전 조흥은행장 우찬목 피고인,한보그룹회장 정보근 피고인 등 6명의 피고인만 출석했으며 심리가 분리된 정재철 김우석 신광식 이철수 피고인 등 4명은 나오지 않았다. 정피고인은 “황병태 피고인이 공소장에 적힌 2억원 수수외에도 산업은행으로부터 3천억원을 대출받게 해준다며 5억원을 추가로 달라고 했다”고 새로운 사실을 폭로했다. 또 “권노갑 피고인에게 돈을 준 것에는 앞으로 한보그룹을 잘 봐달라는 뜻이 포함돼 있었다”고 대가성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 동해항 임시출국대서 간단한 수속/방북단 출발 이모저모

    ◎한전직원·기관장·시민 2백여명 환송 대북경수로사업 착공식에 참석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대표단이 18일 하오 7시 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인 한나라호를 이용해 동해항을 출발,방북길에 올랐다. 장선섭 경수로기획단장,스티븐 보스워스 KEDO사무총장 등 대표단 81명은 동해항에 마련된 임시출국대에서 방북증명서를 발급받은뒤 세관검사,출국신고 등 출국수속을 간단히 밟고 대기중이던 한나라호에 승선했다. 이날 동해항에는 경수로기획단 관계자,한전 및 시공업체 직원,동해시 각급 기관장과 시민 등 2백여명이 나와 역사적인 대북경수로사업 착공식에 참가하는 대표단을 열렬히 환송했다. 장단장은 “숱한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거쳐 착공식을 계기로 경수로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됐다”면서 “경수로사업은 남북교류와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므로 국민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성원해 달라”고 당부했다. 석양속에서 한나라호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출발하자 환송나온 시민들은 “잘 다녀오세요”라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어 대표단을 격려했다. 대표단이 탄 한나라호 측면에는 한글로 ‘장도 북한원전부지정지공사 착공식’이라는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한편 이날 대표단이 승선한 한나라호는 3천600t급으로 대선조선(주)이 건조한 국산선박이며 순항속도는 15노트로 북한 양화항에는 19일 상오 10시30분께 도착할 예정이다.
  • 김윤환 고문 신주류론 눈길/경선 낙선자 껴안기식 당운영 비판

    ◎당내 자세력 묶는 화학적 통합 주장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 이회창 후보 만들기에 앞장섰던 김윤환 고문측이 ‘새로운 정치주체론’을 들고 나왔다.김고문은 “이대표를 중심으로 당을 이끌고 대선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신정치주류를 형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기했다.당내 제세력,즉 민정계 민주계 신진정치그룹 등을 한데 묶는 화학적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고문측의 신정치주류는 지금처럼 단순히 경선후유증 치유를 위해 낙선자들을 껴안는 식으로 당운영을 해서는 안된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또 최근 당 3역 개편 등에서 드러난 이대표측과 김고문측 사이에 형성된 난기류를 반영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속내는 당 대표,대선기획단 구성 등 앞으로 있을 주요 인선은 명분용인 구색갖추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요구인 셈이다.정권재창출을 위해선 풍부한 경험의 능력있는 인사들을 주요 포스트에 전진배치해야 한다는 논거다.정국상황이 어렵운 때여서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김고문계도 이대표 측근들 못지않게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김고문이 최근 “김영삼 대통령도 민정계 중심의 선대본부와는 별도의 기획위원회를 가동,대선조직을 이원화했었다”며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선후 낙선후보 진영의 냉소적인 태도를 감안할 때 신정치주류 형성은 이대표로서도 절실한 현안임은 물론이다.기회있을 때마다 “이제 당내에 더이상 계파는 없다”고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를 반증한다. 때문에 이대표는 당내 제세력 통합을 서두를 것으로 관측된다.다만 김고문측의 요구가 그대로 받아 들여질지는 미지수다.자칫 그 과정에서 김고문측과 사이가 벌어질수도 있어 신주류 구성은 이대표 정치력의 시험대가 될 공산이 크다.
  • 재목 올바로 키울줄 아는 풍토로(박갑천 칼럼)

    파천황.하늘과 땅이 혼돈돼 있는 태초의 상태를 깨어연다는 뜻에서 출발하여“전에 아무도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해냄”을 이르면서 쓰인다. 이말은 합격하기 어렵기로 으뜸간다는 중국의 과거시험과 관계되는데〈북몽쇄언〉에 나온다.당나라때는 형주(지금의 후난·후베이지방)에서 과거합격자가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기에 천지가 안열렸다는 뜻으로 그곳을‘천황’이라 불렀다.그러다가 유세란 사람이 합격함으로써 비로소 깼다.그래서 생긴‘파천황’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험이었건만 신라사람 고운 최치원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18세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하다가 28세에 귀국한다.특히 그의 “황소를 치는 격문”은 명문으로서 알려진다.최고운뿐인가.고려로 내려와서도 가령 목은이색같은 사람이 원의 정동행성 향시에 합격한 다음 연경회시에 합격하고 이어 전시에서는 2등으로 올라서고 있다. 한문의 본고장에서 제제다사 제치고 그어려운 관문을 뚫은 재능들.그래서 조선조의 재사 정인지는 술이 거나할때 이렇게 넘늘었다고 한다.“내가 공자문하에있었다면 안자나 증자에는 못미쳤다해도 자유나 자하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서거정)의 〈필원잡기〉1권).실제로 문명높은 명나라 사신 예겸은 그와 시를 주고받는 가운데 탄복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다. 우리청소년들이 수학·과학 등 국제학술경시에서 상위권에 오르는 소식이 가끔 전해진다.학술뿐 아니라 기능면에서도 그러함을 기능올림픽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바둑도 그렇다.일본에 간 우리 젊은이들이 그 바둑나라에서 솟고라져 오른다.그런터에 근자에는 야구가 도드라진다.국내에서는 “별로…”였다는 선수가 미국에서 파천황의 전적으로 놀라움을 안긴다.또 일본에 가있는 선수들도 야구 애호가들 마음을 사로잡는판이고.공부를 포함한 모든분야에 걸쳐 재주가 많은게 우리겨레 아닌가 느끼게 하면서 어깨가 으쓱해진다는건 사실이다. 그렇긴해도 우리에겐 구슬을 구슬답게 갈고닦는 토양이 모자란 것만 같다.그래서 가능성지닌 재능들을 꽃피우지 못한채 시들게 하는 것아닌가 싶기만 하다.재목을 손주어 키울줄 알고 키울수 있는 풍토를 다져 나가야겠다.〈칼럼니스트〉
  • 땅이름 국토사랑/강길부 지음(화제의 책)

    ◎역사가 숨쉬는 땅의 이름 변천과정 고찰 우리 민족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땅이름의 뿌리와 변천과정을 고찰한 연구서.땅이름을 살펴보면 국어음운의 변화양상은 물론 당대의 역사와 문화,정치사의 변천까지도 고스란히 엿볼수 있다.그 한 예로 살곶이다리라는 지명을 들 수 있다.한강물과 중랑천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곧 합수에 살곶이다리가 있다.이 다리의 이름은 ‘물살이 세다’고 해서 물살의 ‘살’과 아우라지의 흙이 쌓인 턱이 뾰족하게 나왔다고 해서 ‘곶’이라는 말을 따다 붙여 생긴 이름이다.그러니까 ‘살곶이’는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뜻이다. 일제는 한국을 지배하기 의한 기초작업의 하나로 면·동·이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행정조직을 정비했다.이 책은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과 땅이름 변경의 실상을 밝힌다.서울은 조선조 들어 5부 52방으로 나누어졌다.또한 방 밑에 있는 각 지역의 명칭은 계·동·이·촌·평·포 등 다양했다.조선총독부는 이같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고 그 이름을 정·동·통·로 등 네가지로 바꿨다.‘로’는 종로 한 곳뿐이고 통은 광화문통·태평통·남대문통·의주통·삼판통·한강통 등 6곳을 두었다.대통령비서실 건설교통비서관으로 재직중인 지은이는 “땅이름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아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집문당 1만원.
  • 치매 치료·요양시설은 문턱 낮게(박갑천 칼럼)

    문장이 뛰어난데다 예학에도 밝았던 조선조 문신 포저 조익.50년 벼슬살이 상신이었건만 집 한칸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그의 아버지 첨지중추부사 영중은 아흔을 바라보면서 치매에 걸린데다 변비까지 겹쳐 고생이 많았다.환갑을 넘긴 틀수한 정승아들은 손가락에 꿀을 발라서 그 아버지의 변을 손수 긁어냈다.그는 아버지와 같은방을 썼다.아버지는 그에게 ‘사촌’이라 부르면서 자리밑에 감추어오는 약과를 꺼내어주곤 했다.오죽 더러웠으랴만 먼지도 터는법 없이 맛있게 먹었다.〈대동기문〉 등에 적혀 내려오는 일화다. 이런경우는 그래도 낫다고 하겠다.가령 박양한의 〈매옹한록〉에 나와있는 사간 이수록의 경우를 보자.〈매옹한록〉은 “그에게 광증이 있어 밤낮으로 뛰돌아다녔다”고 적어놓았지만 그 ‘광증’이란게 치매현상이었던지도 모른다.그의 아들 정여가 “몸이 상하는줄도 모르고 힘을 다해 쫓아다니다 병이 생겨 죽었다”지 않은가.여든대는 아버지 그느르노라고 병이 났을 정도니 당해낼 일이 아니었음은 미뤄 짐작할 만하다. 그같은 치매는오늘날에도 있다.전 미국대통령 레이건옹도 못고치는걸 보면 백약이 효험없는 듯하다.옛날에도 그랬겠지만 특히 효가 스러져가는 오늘날에는 치매걸린 노인의 괘꽝스런 언행이 온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다.화목하던 분위기도 간곳 없어지면서 가족 모두를 ‘치매현상’으로 몰고간다.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지난봄 울산에서는 8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치매걸린 늙은아내를 죽이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겠는가. 99년까지 치매예방과 진단·치료를 맡는 종합센터가 서울시에 세워지리라 한다.또 2001년까지는 8곳에 1천600병상 규모의 요양시설이 세워진다는 것이고.‘넋잃고 대화잃은 가정들’에 기쁜 소식이다.한데도 더러는 어버이란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전통적 생각에 매여 그런 시설에 맡기는걸 ‘죄악시’하는 사례도 있다 한다.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환자 본인을 위해서나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나.다만 그런 시설들은 더많이 지어지면서 친절하고 문턱낮게 만들어가야 한다.서울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돼야 함은 더 말할게 없겠고.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그 죽음이 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지 않겠는가.〈칼럼니스트〉
  • 서울 도심에 ‘야외목욕탕’/삼청공원 영무정 주변 새 피서지로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알몸목욕 도심 한복판에산에서 흘러내리는 자연수로 알몸 목욕을 할 수 있는 피서지가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산책로를 따라 400여m를 가면 암벽으로 둘러싸인 야외목욕탕이 나온다.비와 햇빛을 피할수 있는 철제 파라솔에는 ‘시를 읊고 춤을 추는 정자’라는 뜻의 ‘영무정’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이곳에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야외 ‘알몸 목욕’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여름철 이곳을 찾는 시민은 하루 평균 200여명.열대야가 계속되는 요즘은 한밤중에 찾는 사람이 절반을 넘는다. 윤대석옹(79·서울 종로구 청운동)은 “30년전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무정을 찾는다”면서 “처음에는 알몸 목욕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막상 탕에 들어가면 어릴적 추억이 떠올라 젊어지는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삼청공원 관리사무소 김성회 소장(60)은 “삼청공원은 24시간 개방을 하기 때문에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야외목욕이야말로 선조들이 무더위를 즐겼던 방법”이라고 말했다.
  • 행주대첩 실질 지휘/조경 장군 영정 공개/선조가 하사한 공신상

    ◎후손,중앙박물관 기증 국립중앙박물관은 임진왜란 당시 권표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의 작전을 짜고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해 큰 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봉된 무장 조경(1541∼1609)의 영정을 29일 공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조경의 13대 후손인 조돈환씨(61·서울 은평구 응암동)로부터 기증받은 가로 90㎝,세로 165㎝ 크기의 이 영정은 선조가 이순신 등 18명에게 하사한 공신 초상화중 하나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무공신상이다.대례복 차림의 좌상인 이 영정은 담홍색의 옅은 얼굴색에 얼굴과 턱 주위에 희끗희끗한 수염까지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존하는 초상화가 주로 문신 초상화인데 비해 이 영정은 대례복을 착용한 보기드문 무신의 초상으로 제작연도가 확실해 17세기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 도예가 윤광조(이세기의 인물탐구:139)

    ◎분청사기만을 고집하는 영원한 ‘도공’/전통양식에 자기 특유의 ‘작품 혼’ 담아/삶의 규칙·구속 배제하는 ‘자유주의자’ 질끈 동여맨 동자머리에 광목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운동화나 짚신을 신고 윤광조는 전혀 예기치 않은 자리에 바람처럼 나타난다.나이를 비껴가는 해사한 용모탓에 대부분은 그를 여자인줄로 착각하는 예가 흔하다.그림을 그린다든가 시를 쓴다든가 절에서 도를 닦는 현대화된 여승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전 국립박물관장이던 최순우씨가 그렇게도 아끼고 자랑해 마지않던 ‘분청사기의 명인’, 바로 그 윤광조인 것이다.도예가는 많지만 분청사기만을 고집하는 희소성으로 인해 그는 지금도 평자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해사한 용모 여증 착각 경기도 광주에 머물다가 그가 가마를 경주로 옮긴 것은 지금부터 3년전이다.경주시내에서 한 시간이상 골짜기로 꺾어지르는 안강에 칩거해 있다가 전시가 있을때만 서울에 올라와서는 대낮부터 술독에 빠져버린다.그리고 그를 구속하려는 모든 규칙이나 구속을 배제한채 ‘나는어디 한군데 걸릴 것 없는 바람’임을 스스로 자랑삼는다.심지어는 가족에게 얽매이지도 않고 그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마저 그의 고독에 지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에서 가족은 서울에 남겨두고 그는 주로 경주에 파묻혀 오로지 도공으로만 살고 있다.반면 정감이 넘치고 친구를 좋아하되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고집에서 대선배 최순우씨와 원로 화가 장욱진씨만을 스승으로 손꼽고 뉴욕에서 활동하던 화가 정찬승과의 우정을 소중히 간직한다.그러나 그들마저 모두 타계한 지금 그는 극도로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는 처음부터 도예가의 꿈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자유롭고 낙천적인 성격탓에 백색 세라복을 입는 해군이나 태평양을 누비는 마도로스,정치가나 사업가를 꿈꾸기도 했다.공무원이던 윤득호씨와 대한부인회 초대조직부장을 지낸 박채련씨의 4남2녀중 아들로 막내.부친은 6·25때 작고하고 홀어머니밑에서 자랐으나 활동적인 어머니는 아들이 정치가가 되기를 바랐고 그는 해군사관학교와 연세대 경제과 낙방후 홍대미대에 진학했다.도자기로 돈 것은 홍대에 강의를 나오던 최순우씨가 도자기만의 깊고 푸른맛, 특히 분장청회사기의 남성적인 소박한 매력을 끊임없이 권유해주었기 때문이다.또 도예를 하기 위해서는 도자기와 관련된 문학 철학 미술 역사를 두루 공부할 것을 충고했다.이른바 과묵하고 심도있게 지도하면서 정성껏 만든 작품을 보여드리면 스승은 ‘좋으네’ 한마디 뿐이었다. 74년에는 문공부가 주관하는 도자기수업을 위해 도일,그때도 임진왜란때 건너간 도공의 후예들이 어떻게 도자기를 이어가고 있는가,개인공방에서 작가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가마를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었다.수업기간은 3년예정이었으나 그들의 도자기가 하나같이 일본화된 것을 보고 그는 ‘내가 자란 땅에서 우리의 흙으로 나의 것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1년만에 귀국해버렸다. 윤광조의 분청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수반 항아리 문방구 제기 합과 화분을 통해 분청사기의 여러 기법을 다양하게 선보이게 되면서부터다.형태나 문양에서 전통적인 분청사기의 형식을 갖추되 연적이나 합,지통같은 원통형과 발의 형태를 절충하고 문양에서도 상감문과 귀얄문,조화와 인화를 고루 사용하면서 조선조 분청의 질서에 지나치게 맹종하지 않았다.76년 개인전 팸플릿에서 최순우씨는 ‘그의 표현애속에 깃든 아첨없는 양감과 장식은 한국인다운 소탈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길어올리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지속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다.그러다가 78년 현대화랑 박명자대표가 기획한 장욱진과의 합작전에서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기면이 마르기 전에 작은 태토를 덧붙여 화장토를 바르거나 튀어나온 부분을 긁어내고 흙띠를 두르는 방법,또 기면을 무작위로 찔러 큰 붓질로 화장토를 입히고 그릇 전면에다 백토를 분장한 분청사기에다 장욱진 화백의 꾸미지 않은 동화는 절묘하게 어울렸다.평론가 이구열은 이때의 전시를 가리켜 ‘윤광조의 무심과 장욱진의 소박한 동심이 절로 맞아떨어져 마치 한 작가의 작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어릴땐 마도로스 선망 이무렵 그는 스승 장욱진씨의 손에 끌려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화신뒤 옹달샘에서 두주불사로 언제나 명정을 면치 못했다.‘술이 취해야만 모든 구태한 생각을 떨궈버리고 새로운 창의력을 얻는다’는 술철학으로 ‘술없이는 예술도 못하고 살맛도 없다’는 태도다.다만 아무리 취해도 ‘종횡무진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의 특기이자 남들이 놀라는 점이다.장욱진합작전에서 전람회개막 30분만에 작품이 모두 팔려나가자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나 경기도 광주에다 가마를 마련했고 그때 최순우씨가 집앞에 흐르는 맑은 곤지암천에 뜬 달을 보면서 ‘급월당’이란 당호를 지어내렸다. 이후 분청예술과 선종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깨달은 그는 83년 겨울 송광사에 입산,목탁을 두들기고 단소를 부는 좌선내관으로 도예의 형상에 무념무상의 자율성을 결합시킬수 있었다.형태는 더욱 명상적으로 되었고 ‘정’과 ‘화음’‘관’ 등의 화두로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방하착’의 상태에서 무늬를 자유롭게 그려 나갔다.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아무렇게나 빚은듯한 편안한 경지와 나무와 바람의 이미지를 속도감있게 긁어낸 추상적 조화의 성취가 그것이다. ○“술없이는 살맛도 없다” 도자기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단한번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흙과의 끝임없는 대화와 실험과 도전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며 과도한 장식이나 세련된 묘사보다 ‘무작위의 작위’에 이르기 위해 그는 피와 살과 영혼까지도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일념으로 추구해 나갔다.윤광조의 모습은 최순우씨의 표현대로 ‘물위에 뜬달’처럼 허심탄회하다.그래서 늘 자유롭게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인위와 조작이 없는 자연그대로의 ‘무하유지향’에서 그는 고매하고 순수한 예술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연보 ▲1946년 함남 함흥 출생 ▲1970년 홍대 미대 공예학과 졸업 ▲1973년 동아공예대전 대상수상 ▲1976년 서울신세계미술관 개인전 ▲1978년 경기도 광주 초월면에 급월요개설,서울현대화랑 개인전 ▲1979년 공간도예대전 우수상 수상 ▲1984년 서울예화랑 개인전 ▲1986년 일본 교토크래프트센터 갤러리및 서울 한국미술관 개인전 ▲1987년 서울현대화랑 개인전 ▲1991년 호주시드니 맥쿼리갤러리 및 부산지니스화랑,서울선화랑 개인전 ▲1994년 경북 경주 안강읍이주 ▲1997년 서울 다도화랑 및 통인화랑 ‘윤광조 그릇전’,독일 프랑크푸르트(10월) 및 삼성갤러리 오픈기념전(11월)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호암미술관,워커힐미술관,런던 대영박물관,호주시드니 NSW아트갤러리외 간송 전형필 선생 동상도판제작
  • 한강8경과 문화서울(사설)

    서울시가 한강변에 산재해있는 문화유적지 가운데 우선 8곳을 ‘한강8경’으로 선정해 대대적으로 복원·정비하기로 했다(서울신문 7월19일자 19면 보도).때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한 결정이다.조순 서울시장이 밝힌 한강8경은 노들섬 및 선유도,암사 선사유적지,풍납토성,아차산성,압구정지,새남터,절두산,망원정 등이다. 서울을 낳은 한강이기에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있지만 이번에 선정된 8곳은 그중에서도 선조들의 숨결을 깊이 느낄수 있는 사적지며 풍광 또한 뛰어난 곳이다.지난 94년 서울 정도600년에 맞춰 한강변 문화유적지 복원사업이 펼쳐지긴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아쉽던 터에 나온 계획이어서 더욱 반갑다.문화서울의 면모를 갖추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한강은 서울의 젖줄이자 한반도의 중심지역이다.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강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집을 짓고 밭을 갈며 살았다.때로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다.그 자취가 암사 선사유적지와 풍납토성,아차산성에 남아있다.조선시대 세조와 예종·성종조때 재상을 지낸 한명회가 지은 정자 압구정이 있던 터는 아파트숲에 가려 흔적조차 찾을수 없다.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와 대원군의 천주교박해때 수천명의 신자들이 참수된 절두산은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철교가 지나면서 면모가 크게 훼손됐다.세종 6년에 지은 망원정 역시 지난 89년에 복원되긴 했으나 주변정비가 제대로 되지않아 가치를 잃고 있다. 서울시는 이 유적지들의 정비에 곁들여 선유도와 노들섬에는 문화예술공간을 만들고 밤섬에는 더 많은 철새가 날아들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로 했다.이런 계획들이 차질없이 이루어지려면 서울시도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아울러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가 수반되어야 할것이다.
  • 경선갈등 치유… 범여 결집 모색/김 대통령과의 정국조율

    ◎어제 세차례 회동… 허심탄회한 의견교환/권역별 선거관리·낙선후보 중임 등 거론 신한국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는 22일 하룻동안 3차례나 만났다.둘 사이의 ‘긴밀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비쳐졌다.특히 청와대 단독만찬을 통해 김대통령과 이후보는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눴을 것이다. 앞으로 정국운영 방향에 있어 두사람 사이에 큰 견해차는 없다.경선과정에서 생긴 당내 갈등을 치유하는게 급선무라는 인식도 같다.정치개혁안을 만들고,연말 대선에서 여당이 승리해야 한다는 목표도 동일하다. 두사람은 같은 시국인식 아래 우선 ‘당추스리기’에 나서고 있다.김대통령은 금명간 경선 낙선후보들과 청와대에서 만난다.이후보 중심의 대선체제 정비를 당부하며 “소외세력이 없도록 하겠다”는 점을 강조하리라 예상된다.이후보도 ‘범여권 단합’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할 것이다. 8월초 당정개편,그리고 9월 대선기획단 출범,10월 김대통령의 총재직 이양에 따른 집단지도체제 도입 검토,11월 본격 대선조직 출범 등 대강의 정치일정에도 김대통령과 이후보는 뜻을 같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의 면모일신과 대선체제 출범은 이후보의 대선승리를 위한 ‘역량 극대화’에 모아져 있다.전통적 여당 표밭이었던 영남권에서 득표력을 제고하기 위한 ‘권역별 선거관리’,그리고 경선낙선후보의 부총재 혹은 선대위원장 선임 등이 벌써 거론되고 있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김대통령과 이후보의 ‘밀월’이 멀지않은 장래에 깨질 것이라는 비관적 시각도 있다.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들은 “경선에서 중립을 지킨 김대통령이 이제부터는 당에 진짜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당화합과 대선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3김시대 마감” 대쪽신화 막오른다/이회창 후보 선출­누구인가

    ◎정계입문 18개월만에 집권당 평정/소신·원칙 앞세워 정계 새바람 기대 ‘대쪽총리’ 이회창이 신한국당 차기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오랜 공직생활 동안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한 이후보는 3김정치의 청산을 기치로 새로운 정치 한마당을 펼쳐 나갈 전망이다.그것은 21세기 선진대국을 향한 화합과 통합의 정치로 요약된다.그의 일대기와 정치철학,국가관 등을 2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죽룡(대쪽 용)의 승천­.‘정치인 이회창’신화의 막이 올랐다. 지난해 1월 정계 입문 이후 불과 18개월만에 그는 집권 여당의 차기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그를 선택하기 위해 21일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인물위주의 새로운 정치마당을 마련하려는 ‘이회창식 정치 실험’을 선언했다.파벌과 지역주의로 대변되던 ‘3김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이대통령후보는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평생의 애독서로 삼고 있다.그는 전쟁터를 옮겨 다니던 마르쿠스 황제를 “위태로운 권력 암투 속에서도 맑은 샘물처럼깨끗하게 자신을 지켜내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한다.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소신과 초심을 지켜 나갈 그의 행보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회창식 정치실험 선언 이후보의 호는 경사­‘곧은 역사’다.호에 걸맞게 그는 타협해서는 안될 것과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말아야 할 것에 당당했다.때문에 60년 25세의 나이로 인천지법 판사로 임관한 이후 30년이 넘는 공직생활 기간동안 항상 ‘대쪽’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서슬퍼런 5공시절 대법관으로서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 사건 16건중 10건에 ‘소수의견’을 낼 정도로 소신과 원칙이 뚜렷했다. 문민정부의 초대 감사원장으로 발탁된 그는 ‘소신 감사’를 밀어붙이다 청와대와 갈등끝에 백의종군한다.당시 그는 청와대 비서실,감사원,안기부 등 ‘성역’을 감사의 도마에 올렸다.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평화의 댐,율곡감사와 관련해 서면조사를 받아야 했다.93년 국무총리로 기용된 뒤에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운영 등 헌법상 총리의 역할과 대통령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마찰을 일으켜 4개월7일만에 다시 사표를 던진다. 그러나 그의 강성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은 그를 “가슴이 따뜻한 사람” “만나면 편한 사람”이라고 말한다.아랫사람에게 결코 화내는 일이 없고 무슨 말이든 경청하는 습관이 있어 그를 상관으로 모신 사람들은 그를 후하게 평가한다. 판사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도 유명사건이 아니라 배추장사를 하던 어느 청년의 절도혐의를 벗긴 것이었다.경찰서장 집 도난사건과 관련,혐의를 받던 젊은이에게 당시 이판사는 “범인이 아니라면 진실을 제대로 밝힌 재판제도에 감사해야 하지만 범인이라면 판사를 용케 속였다고 좋아할게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무죄를 선고했다.“항상 약자를 눈여겨 보고 약자가 부당하게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틈만나면 그는 후배 법관들에게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불의와 타협않는 성품 이후보는 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아버지 이홍규옹(93)과 어머니 김사순씨(86)의 4남1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고향은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이다.본관은 전주이며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안사공의 셋째형 영습공을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이후보의 큰 아버지 이태규 박사(1902∼1992)는 우리나라 자연과학계의 태두이며 아버지 이옹은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전 출신으로 검찰지청 사무원으로 일하다 해방후 광주지검검사로 특임,20년간 봉직했다.이옹은 충북도지사 구호물자 횡령사건,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등을 담당하면서 강직한 소신을 보였고 이승만 대통령과 친한 충북지사를 구속하는 바람에 괘씸죄에 걸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조사받기도 했다. ○노부모와 매주말 식사 어머니 김사순씨(86)는 전남 담양의 천석꾼 집에서 태어났다.외삼촌 3명이 모두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뼈대있는 가문이다.형 회정씨(65)는 삼성의료원 병리학과장이고 서울대 상대를 나온 동생 회성씨(52)는 에너지경제연구원 고문이다.막내동생 회경씨(48)는 연세대와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를 거쳐 현재 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중이다.형제들은 요즘도 매주 토요일 저녁 혜화동성당에서 노부모와 함께 미사를 드리고 식사도 같이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다. ○부인과 슬하에 2남1녀 어린 시절 이후보는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그는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5학년때 월반해 광주서중학교에 진학했다가 곧바로 청주중학교로 전학했다.그리고 경기중학 2학년에 편입,경기고를 거치게 된다.그는 청주중학 시절 가출경험을 자주 회고한다.60점 만점의 수학시험에서 20점을 받고 그 길로 조치원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우다 헌병에게 발견됐다.헌병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가 아무 말없이 자신을 가슴에 안았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크고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이후보는 부인 한인옥씨(59)와 2남1녀를 두고 있다.큰 아들 정연씨(35)는 서울대 수학과를 거쳐 대외경제연구원에서 근무중이며 둘째아들 수연씨(32)는 동국대를 졸업,유학준비중이다.딸 연희씨(34)는 출가했다. 이후보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당내 지지위원장이 10명 미만이었다.그러나 그 숫자는 불과 6∼7개월만에 1백40여명으로 불어났다.쿠데타나 민중봉기가 아니면 이처럼 단기간에 집권당을 ‘접수’한 사례는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정가에서는 이를 이후보의 독특한 퍼스낼리티와 정치권의 기대심리가 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해석한다.이후보가 단기필마로 당에 몸을 담긴 했지만 이미 ‘대쪽’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각인돼 있었고 정치권내에서도 3김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새로운 정치구도의 등장에 대한 컨센서스가 물밑에서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요 고비마다 운도 따라 특히 주요 고비마다 시운은 이후보의 편에 섰다.대표 임명 과정이나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와의 마찰때도 그랬고 경선후보간 전선이 ‘이대 반이’로 단순화되는 바람에 한결 승부가 쉬웠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김심의 중립도 이후보에게는 큰 힘이 됐다.지금까지 이후보의 정치역정은 김대통령과 묘한 공조관계를 유지해 왔다.김대통령은 민주계와 이후보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하면서도 정치고비때마다 ‘대쪽’에게 중책을 맡겼고 4·11총선 이후 대망을 품은 이후보도 김대통령에게서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보가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시작된 두사람의 인연은 93년 쌀파동과 대형사고 등 곤혹스런 정치상황 속에서 이후보가 총리에 전격 기용되면서 계속 이어졌다.6·27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김대통령은 4·11 총선직전 삼고초려끝에 ‘대쪽’을 당 선대위의장으로 영입했고 지난 3월 노동법사태와 한보사건으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김대통령은 예상을 뒤엎고 그를 당 대표에 앉혔다. 이후보는 학창시절 체구가 작아 권투와 당수를 배웠다.골프와 테니스,탁구실력은 수준급이다.독실한 천주교도인 그의 세례명은 ‘올라프’.노르웨이 수호성인 이름이다.정치 고비때마다 “사람이 못하면 하느님이 할 것”이라며 앞날을 낙관하는 것도 깊은 신앙심때문으로 여겨진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지음(화제의 책)

    ◎조선은 과연 당쟁때문에 망했는가 우리 역사학계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살핀 교양서.우리는 보통 당쟁을 싸움만 일삼던 조선 사대부의 행각으로 치부하거나,조선 역사의 흐름을 당쟁의 시각에서 들여다보는 일 자체를 식민사관의 소이로 여겨 금기시해왔다.지은이는 ‘조선은 과연 당쟁때문에 망했는가’라는 진지하고도 본격적인 의문을 던지며 가려진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 조선왕조 개창이래의 만년 야당 사림파는 집권세력인 훈구파의 수차례에 걸친 탄압,즉 사화를 극복하고 100여년만인 제14대 선조 때에 이르러 정권을 장악한다.그러나 야당 시절 성리학이라는 확고한 정치이념과 학통에 의해 하나로 뭉쳤던 사림파는 이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다.집권이 분열로 이어지는 현대 정치사의 숱한 장면들의 한 전형을 이루는 이 동서분당이 바로 300년에 걸친 조선당쟁의 시작이다.이 책은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꼼꼼히 살피는 한편 ‘당쟁망국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당쟁 자체보다는 집권사대부층이 새로운 정치구조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 망국의 원인이었다”는게 지은이의 결론이다.석필 1만원.
  • 울산 변천사/62년 시승격·특별공업지구 지정

    ◎1백만 돌파… ‘한국성장의 축소판’ 울산시는 지난달 23일 인구 1백만명을 넘어섰다.7번째 큰 도시가 됐다. 지난 62년 6월 시로 승격될 당시의 7만9천여명에 비해 35년만에 12배가 늘어났다. 행정구역도 확대일로를 치달았다. 95년 울산시 1백81여㎢에 울산군 8백70여㎢를 합쳐 서울보다 1.7배나 큰 도시가 형성됐다. 구릉과 논밭만이 즐비하던 이 곳이 이처럼 급성장한 것은 시승격과 때맞춰 ‘특별공업지구’로 지정된데 따른 것이다. 정유 화학 자동차 조선 등 각종 국가기간산업설비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발전이 거듭했다. 발전속도는 공업부문 생산규모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시승격 당시 제조업 생산규모는 1백70만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약 52억달러선을 기록해 무려 3천여배 이상 증가했다. 이같은 급성장으로 한때 울산시는 ‘고속성장의 쇼윈도우’로 불렸다. 울산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무척 깊다.고려때 울주로 불렸다 조선시대 선조 31년 처음으로 울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92년 대통령선거때 광역시 승격이 공약으로 제시됐고그동안 ‘보류’‘시행’을 오가다 마침내 94년말 광역시 승격이 확정돼 지난해 말 ‘울산광역시 설치법률안’이 국회를 통과,광역시 승격이 이루어지게 됐다. 울산시는 2천년대를 맞아 ‘한국성장의 축소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범 대도시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 전통염색공예전 새달11일까지 경복궁서

    ◎“선조들의 색채감각 보러오세요” 지난 9일부터 경복궁내에 있는 한국전통공예미술관서 열리고 있는 전통염색공예전은 우리 선조들이 자연에서 택한 색채감각이 뛰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색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볼수 있는 특별한 볼거리다. 우리 선조들이 택한 전통적인 색은 오행사상에 의한 오방색(청 백 적 흑 황)과 여기에 오간색(녹 벽 홍 주황 자)을 보태는 색깔을 기본으로 써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그러나 이같은 색은 1800년대말부터 화학염료에 밀려 점차 사라져가는 실정이다. 이번 전시는 전통염색의 원료가 되는 자초,홍화,치자,감나무 등 초목의 열매와 뿌리를 보여주면서 실제 염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실연을 통해 볼 수 있도록 꾸민게 특징. 궁중유물전시관,단국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사전자수박물관,강릉시립박물관 등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전통염색 공예물 120여점과 함께 전통염색을 재현한 직물염색,염색작품,염색공예품 등 50여명이 출품한 536점 등 총 650여점이 나와 있다.이와 함께 문화상품으로 개발한 가리개나 찻상보 부채 지갑 의자쿠션 등도 다양하게 전시돼 눈길을 끈다.8월 11일까지.
  • 화가 권영우(이세기의 인물탐구:137)

    ◎‘그리는 그림’아닌 생명의 혼 터치/순백의 캠버스에 명암따라 부조 성취/‘종이의 화가’ 대부… 파리·LA서도 개인전 ‘종이의 작가’로 알려진 화가 권영우의 그림작업은 ‘흰무명을 볕에 바래어 표백하는 과정’처럼 생략과 절제가 끈질기게 중복된다.먹을 가는 동안 화상을 가다듬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종이 자체에서 그는 ‘깨끗하고 고요한 담벽과 담흑색’을 캐내고 싶어한다.‘한국화’라는 전승표현의 범주에서 벗어나 화면에 구멍을 뚫거나 찢는 변칙은 종이가 지닌 불가사의한 생명력을 추구하려는 그만의 조형수단이다. ○작품세계 생략·절제 중복 서울대 미대시절에도 동양화과에 다녔으나 나체모델이 배당된 서양화 실기실에 드나들었고 선묘 위주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70년대이후 기하학적으로 윤곽처리된 묘사적 화풍에다 광활한 여백을 화면에 함축하는 것이 특징이다.그런 한편으로는 동양화에 있어 거의 숙명적이라고 할수 있는 종이의 섬세한 재질감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물들이는 수묵 농담의 수법에서 언제나 과묵하면서도담소한 감수성을 지킨다.이른바 백색 일색의 종이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화판에 담기는 층이나 명암에 따라 리듬의 부조를 성취시키는 것이다.물기가 아련히 스며든 여러층의 마티에르는 지루하리만큼 수많은 구멍들이 모래벌판에 찍힌 철새의 발자국이나 고공에서 바라본 비늘구름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에 혁혁함을 던져준다.조용한가 하면 행동적인 데가 있고 전위적인가 하면 전통을 고수하는 곡진한 그의 방법에 대해 “결국 미의 종합세계를 이루어놓고야 말았다”는 평론가 박래경의 말은 옳다.그는 실제로 ‘그리는 그림’이 아닌 ‘만들어진 흰빛의 그림’속에 순백의 적요를 흩뿌리면서 ‘거울같이 맑고 고요한 수면보다는 빗방울이 떨어져 소용돌이가 일고 물결치는 상황’으로 작품을 몰아나간다. 그의 추상화면은 작은 알들이 깨지는듯한 ‘껍데기가 깨지는 아픔’과 ‘탄생의 기미’를 창출하면서 직선과 사선과 횡선에 먹번짐과 균열과 누빔을 엇가르고 총총하게 뚫어진 화면은 온통 보석타래가 흩어진 형국이다.그렇게 인위적으로뚫린 그의 창들은 내면과 외부를 향해 저마다 쏘듯이 다른 광채를 내뿜고 있는 것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직선에서의 영롱한 물방울무늬를 얻어낸 그는 76년 파리의 권위있는 자크마솔화랑 초대전을 갖게 되었고 파리의 미술평론가 알랭 보스케는 “더없이 다양한 추상풍경화의 경이”로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그때 자신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끝없는 추상의 전조를 예감하고 그는 전업작가로 남기 위한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기에 이른다.이른바 자신의 테마에 파고들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파리여정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국내에서 다진 명성과 중앙대교수직을 버리고 오십이 넘은 나이에 새출발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앞날이 막막한 보장 없는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그러나 그만의 방법과 그만의 세계를 부여잡게된 이상 그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파리전시 2년후인 78년에 도불,예술은 다만 ‘던지는 것’이며 ‘전력투구로 매달릴뿐’ 어떤 방해도 그를 막을순 없었다.연약해 보이는 체구에 말이 별로 없는 대신 고집이세고 일단 마음먹은 것은 만류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파리시내에서 25㎞ 동쪽으로 떨어진 트로시의 아틀리에에 틀어박힌지 2년만에 아트포럼 앙테나쇼날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평론가 데니스 로제로부터 “맑고 투명하고 평화로운 공기속에서 작가는 빛과 깊이의 이중감정을 실천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그 무렵 이일씨가 표현한 ‘종이의 정교한 무표정속에서 무한한 진폭을 지닌 무구한 정신성’과 ‘동양으로의 현대적 회로’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함경남도 이원에서 소사업을 하던 권태인씨의 1녀3남중 차남.그는 부친을 따라 한국인 밀집지역인 북간도 용정에서 광명중학에 다닐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그가 도불을 결심하게 된것은 광명중 시절의 미술스승이던 석희만씨가 “둑을 지키는 포플러가 아닌,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 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서울로 와서 해방 다음해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고 ‘비어있는 것이 저장되어 있는것’이라는 ‘무사무위’의 노장사상을 그림에 적용하여그만의 ‘숭려’를 체득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2년간 생활 남천 송수남은 “그의 묵시적이면서도 금욕적이고 수도자적인 자세는 누구라도 일단 외경심을 갖지 않을수 없다”고 전제한다.“화선지의 흰빛에 흐르는 무구한 숨결과 그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무관심성은 요약과 절제로 일관된 것 같으나 실은 허세없는 작가의 본성이 그속에 창만해 있다”는 것이다.과연 그의 그림에서는 어둠을 가르는 여명이 새어나오고 그 순백의 새벽빛은 모든 광원의 색광들을 반사한 본질색이며 화선지가 포용하는 영험하고 신비스러운 통합적 상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가의 근작은 또다른 실마리를 추구하려는 자세다.먹과 과슈에 의한 설채의 도입,또 뚫고 찢기 위해 찰상을 가하는가 하면 예리한 칼날로써 형성된 선조는 물감과의 교호작용으로 운율의 파문을 현란하게 일으켜준다. ○독자적인 동양화추상 고수 10여년만에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도심을 피해 전원적인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 정착하여 주로 한밤중에 일어나 작업에 임하고 있다.최근의 대형화면들은완고한 예술정신과 심도가 스민 발색을 존립시키고 ‘순수무결’과 ‘세련미’는 남이 넘볼수 없는 도저한 화풍으로 경도되지 않을수 없게 한다.서울대 미대 동기동창이며 동갑인 부인 박순일씨는 스승인 월전의 소개로 만난 사이.자녀는 아들만 둘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류에 물들지 않은 독자적인 동양화추상’을 지키는 그의 집념은 결국 카뮈의 요나처럼 어느날 화면에 점 하나를 찍게 될지도 모른다.이순을 넘긴 지금도 조용하고 시적인 소년의 자세를 변치않는 이 혁신적화가는 예술의 끝을 향해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면서 대양을 이루기 위한 만리심을 좀처럼 잠재울줄 모른다.〈사빈논설위원> □연보 △1926년 함남 이원 출생 △1951∼57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졸업 및 동대학원 졸업 △1956∼77년 국전출품 △1966년 개인전(서울신세계화랑) △1970∼79년 한국미술대상전 출품 △1974년 개인전(서울명동화랑) △1976년 파리 자크마솔화랑 개인전 △1977년 개인전(서울신세계화랑) △1978∼89년 프랑스 파리체류 △1980년 파리 개인전(아트포럼 앵테나쇼날화랑),아세아현대미술전 △1982년 파리(주불한국문화원) 및 서울개인전(현대화랑) △1983년 주불한국인화가전(파리) △1984년 LA개인전(삼일화랑) △1986년 서울개인전(현대화랑) △1987년 LA(아트코아화랑) 및 토론토 개인전(브리지스톤화랑) △1988년 조선일보현대작가초대전 △1990년 서울(호암미술관) 및 일본오타와대학초대 개인전 △1991년 선재현대미술관개관기념초대전(경주),한국현대회화유고전 △1992년 개인전(서울현대화랑) △1993년 대전 한림갤러리개관기념전 △1994년 에꼴드서울전(관훈미술관) △1996년 후소회 창립60주년기념전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중앙비엔날레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장 〈수상〉 국전문교부장관상(58·59년),국전초대작가상(74년)
  • 벽산그룹 김인득 명예회장

    벽산그룹의 김인득 명예회장이 10일 하오 7시45분 서울 마포구 마포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향년 83세. 1915년 8월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태어났다.조선조 대유학자 김굉필의 14대 손이다.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고 지난 51년 무역과 영화수입을 주종으로 하는 동양물산(83년부터 벽산그룹)을 창업,기업인의 길을 걸어왔다.91년 9월 장남 희철씨(현 벽산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지난 3월에는 기업가 정신과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유족은 희용(벽산 부회장)·희근씨(벽산 부회장) 등 3남2녀.빈소는 삼성의료원,발인은 14일 상오 9시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02)3410­0915
  • ‘바잉파워’(유통시장 개방1년/잠식당하는 국내상권:2)

    ◎막강한 자금력으로 글로벌 마케팅/본국서 싼 금리로 차입… 직거래·체인망 확장/국내 가전업계에 저가 납품 요구… 타격 클듯 외국 유통업체들의 무서운 기세는 어디서 나올까. 국내업계는 이들의 막강한 자금력과 거대규모에서 나오는 ‘바잉파워’(상품구매력)를 꼽고 있다.월마트와 까르푸 등 외국 대형 할인점들은 바잉파워를 바탕으로 ‘질 좋은 상품을 가장 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국내 유통업체들은 우선 자금면에서 외국 업체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자금을 동원할 때 국내 업체들은 13∼16%의 금리를 부담하는 반면 외국 업체들은 본국에서 3∼5% 정도의 금리를 적용받아 금융비용으로 인한 가격차이만도 엄청나다.10% 포인트 이상 차이나는 저금리로 외국업체들이 국내 곳곳에 체인망을 구축하고,이를 바탕으로 국내 제조업체들에게도 막강한 바잉파워를 휘두르게 된다는게 업계의 분석이다. 똑같은 상품을 똑같은 회사에서 구입해도 거래량과 거래조건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실정에서 ‘다점포화’는 상품을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최우선조건임에 틀림없다.외국 업체들은 ▲세계에서 가장 싼 지역에서 원료 구입해서 ▲생산성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 가장 싼 인건비로 제품을 생산하며 ▲이를 전세계 매장에서 판매하는 이른바 ‘글로벌 마케팅’을 실현한다. 까르푸는 현지 생산자로부터 직접 상품을 공급받는 ‘직거래(서플라이 체인)’전략을 채택하고 있다.계약이 맺어지면 상품이 출하되기까지 모든 단계에 직접 관여한다.품질과 가격을 철저히 관리한다.프랑스에만 이같은 직거래선이 40여곳에 이른다.유럽과 남미,동남아시아 등 품목에 따라 경쟁력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거래관계’(파트너 십)를 맺는다.노르웨이의 연어,멕시코의 육류농장,포르투갈의 과수원,말레이시아의 채소농장,이탈리아의 치즈 공장이 그같은 예이다.가격경쟁력을 갖춘 상품은 17개국 279개 매장에 진열돼 ‘가장 싼 값’에 팔리게 된다. “아직까지는 할인점의 수입품 비율이 5∼10% 정도에 불과해 외국 업체들이 특별히 바잉파워를 발휘할 필요가 없지만 해외 수입품이 늘어나게 되고 해외 소싱(해외 상품구매)이 일반화되면 이들의 경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될 것이다” 킴스클럽 이무렬판촉실장의 지적이다. E마트의 관계자도 “월마트의 경우 해외 제조업체와 독점 공급 계약을 맺어 판매하는 상품 비율이 70%에 달할 정도로 막강한 바잉파워를 갖고 있다”며 “우리에게도 곧 그러한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타격을 많이 입게 될 품목으로는 백색가전 제품이 꼽힌다.할인점에서 똑같은 34인치 TV이면서도 일제 소니제품은 1백30여만원이지만 삼성전자나 LG전자 제품은 2백만원이 넘는다.까르푸가 지난해 국내 가전사들에게 국내에서 가장 싼 값으로 물건을 납품할 것을 요구한 것은 시작인 셈이다.외국 유통업체가 진출한지 3개월만에 3대 가전사가 문을 닫은 대만의 전례가 남의 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까르푸의 관계자는 “다국적 유통업체의 바잉파워가 국내 시장에 반드시 악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전세계 까르푸 매장에 깔린 ‘퍼스트라인’브랜드의 가전제품은 남미에서 만든 대우,삼성 제품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전세계까르푸 매장에 롯데껌이 진열돼 있고 곧 모나리자 화장지와도 계약을 맺어 각국에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가천문화재단 이형석 부장 학술발표회 논문 요지

    ◎“송화강 상류 일부는 우리땅”/압록·두만강국경 통념오류… 북·중 조약서 확정 우리 한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송화강.서울신문이 매주 금요일자 11면에 그 자취를 따라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의 삶을 돌아보는 ‘송화강 5천리’를 게재,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송화강의 근원을 깊이있게 천착한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한국땅이름학회와 백두문화연구소가 최근 서울 한글학회 강당에서 마련한 학술발표회에서 하천연구가이자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겸 가천문화재단 문화부장인 이형석씨는 ‘송화강의 명칭과 하계망 분석’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송화강과 관련한 일부 그릇된 통념을 반박했다.다음은 이날 발표된 이씨의 발표문 요지다. 송화강 유역은 우리 선조들이 말타고 활쏘며 누비었던 지역으로 고조선,부여,발해 등 나라를 세우고 살았던 우리민족의 터전이었다.이 송화강 유역은 많은 사람들이 옛날에는 우리의 땅이었으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이 확정된 뒤 우리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현재 송화강 상류지역 일부는 북한지역으로 편입돼 분명하고 확실한 우리 땅이 되었다.즉 조선 숙종38년(1712년)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를 기준으로 할때 백두산 천지와 송화강은 우리 국토 밖이었으나 1962년 북한과 중국이 체결한 조중변계조약에 따른 신국경비를 기준으로 할때 백두산 최고봉인 백두봉과 천지의 5분의 3과 송화강 상류지역 일부가 우리 땅이 된 것이다.그리고 중국정부로부터 조선족 자치주와 자치향으로 지정된 송화강 유역을 비롯,압록강 두만강의 중국측 유역에는 우리 동포들이 자치권을 부여받아 모여살고 있다. 송화강의 명칭을 중국에서는 ‘쑹화강’이라 부른다.송화강은 두개의 발원지가 있다.북쪽 발원지는 이러후리산맥에서 발원하는 눈강이고 남쪽 발원지는 백두산(장백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제2송화강이다.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도백하를 통해 제2송화강으로 흘러든다.이 두 강은 길림성 대안현 부근에서 합친뒤 송화강이라 부르며 계속 동북쪽으로 흘러 동강 부근에서 흑룡강으로 흘러든다.천지로부터 계산하면 송화강의 길이는 1천927㎞이고 유역면적은 54.5만㎢로 동북지방 토지면적의 60%를 차지한다. 처음 시작하는 물줄기를 1차하천(1차수)이라 하고 1차하천이 둘 이상 모이면 2차하천이 된다.2차하천과 2차하천이 합류하여야만 3차하천(3차수)이 된다.1980년 간행된 중화민국공화국지도에서 송화강의 수계차수를 조사,최장 1차수를 찾아 하천의 본류와 지류를 구분해 보면 송화강의 발원지가 일반 상식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송화강 하구에서 눈강과 제2송화강 합류점까지의 길이는 877.5㎞였고 눈강의 최장 1차수까지의 길이는 1천50㎞로 제2송화강의 최장 1차수 750㎞보다 300㎞ 더 길었다.따라서 송화강의 최장 발원지(1차수)는 눈강의 상류로 그 길이는 1천927.5㎞였으며 제2송화강의 전 길이는 1천627.5㎞였다.그리고 제2송화강의 최장 1차수 또한 백두산 천지가 최장 발원지가 아니었다.같은 방법으로 지도상에서 곡선자로 계측한 결과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이도백하와 삼∼사도백하와의 합류점에서 각 물줄기 끝까지 계측한 결과 증봉산에서 발원한 고동하가 제2송화강의최장 발원지란 결론이 나왔다. 이처럼 송화강의 본류는 제2송화강이 아니고 눈강이며 제2송화강은 송화강의 제1지류가 된다.따라서 송화강의 본류는 제1송화강인 눈강으로 수정돼야 하며 송화강의 최장 발원지 또한 천지에서 눈강의 상류로 바뀌어야 한다.그리고 백두산 천지는 습관상 송화강의 발원지로 호칭하고 있으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모든 문헌에서 수정돼야만 한다.〈정리=김성호 기자〉
  • 건축가 승효상(이세기의 인물탐구:136)

    ◎장식 아닌 생략·절제의 미 창조/김수근공간연구소 거쳐 빈 공대서 수학/작품철학엔 문학적 취향에 종교성 가미/‘빈자의 미학’ 선언… 건축계의 기린아로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작업은 장식적이 아닌 생략과 절제의 묘미가 특징이다.건축철학 역시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 취향과 함께 종교성을 포함시키는데 있다.일찍이 김수근이 이끌던 공간건축연구소에 소속되던 시절에는 외부공간과 외곽을 연결하여 아기자기한 내부를 꾸미는 수사성에 집착했으나 오스트리아 빈에 유학하면서 「장식성의 무의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유럽시절 영향을 받은 것은 19세기말 「귀먹어리들아, 들어라!’라는 글로써 「장식의 죄악성’을 통박한 아돌프로스의 로스하우스를 접하면서부터다.빈 중심가에 자리잡은 이 건물은 아래층은 상가이고 위층부분은 아파트로 분리된 실용적 건물로 한때는 「눈썹없는 사람’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철학자 칼 크라우스가 「그것은 건축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호평하면서 20세기 모더니즘의 효시가 된다. ○스승에 “틀렸다” 직언도 빈에서 돌아온 승효상은 건축가가 완벽하게 분할하고 장식하고 구성하던 기존관념에서 벗어나 ‘프레임만을 정해주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개성과 취미와 생활을 담을수 있도록’ 선택의 여지를 남겨주게 되었다.그가 세우는 흰벽과 마당,그가 만들어 내는 공간들은 오브제적 아름다움과 고전적 비례감을 성취하면서 ‘이제까지의 미적통념에서 벗어난 과장과 축소로 우리의 일상을 진리의 세계로 연결시키고자하는 처절한 순례의 결과’라는 것이 건축가 민현식의 평이다. 승효상은 신사적인 건축예술가로 소문나 있다.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서 누구에게도 쉽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피력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선에서는 무가내하일만큼 양보가 없다.만일 토론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의사를 수용하는데 비해 승효상은 격론의 대상이 대선배나 스승일지라도 「틀렸다’고 맞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이른바 중앙청을 철거할때도 경복궁복원은 당연하지만 좀더 긴 논의와 철거의 타당성을토론으로 이끌었어야 한다는 주장을 철거가 끝난 지금도 멈추지 않을 정도다.그만큼 고집이 센편이다. 그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건축적 요건이란 건축이 놓이는 ‘땅에 대한 장소성’이며 건축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성’,그리고 ‘집은 집답게’‘학교는 학교답게’‘교회는 교회답게’허세와 과시와 사치를 배격하면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건축속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다. 이후 승효상은 참건축의 의미인 ‘빈자의 미학‘을 선언하면서 건축계의 주목을 받는 기린아의 이미지로 떠오르게 되었다.또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가 다 건축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건축가없는 건축이 더욱 살아있는 인간을 담은 건축적’이란 독설은 한동안 건축계에 긴장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건축을 향한 그의 정신은 한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이 언제나 치열하다.그래서 ‘나는 고루한 인습에 묶여있지나 않은가’‘타협하기 위해 비겁하지 않았는가’를 자문하면서 「남이 믿는 것을 믿지 않고’‘남이 믿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는 모순’을 스스로 통제하기도 한다. 그가 이러한 투철한 건축을 추구하게 된데는 그의 성장과정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평북 정주출신의 독실한 크리스천인 승병조씨(안디옥교회 장로)의 3남1녀중 장남, 부산피란시절에 부산에서 태어났다.이북에서 피란온 여러가구가 서대신동 꼭대기에서 함께 살게되면서 그는 벌써 나눔과 베품,남에게 주는 기쁨인 가족공동체를 체득할 수 있었고 허례와 과장이 아닌 실용적 공간을 추구하게 되었다.예를 들어 그는 에게해 산토리니섬의 벼랑끝에 다닥다닥 붙여지은 집들이라든가 아키펠라고의 군도적 삶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손꼽고 있다. 그들의 삶은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마당을 내 마당처럼 건너지르거나 남의 베란다를 나의 지붕으로도 쓸 수 있다는 여유와 낭만을 강조한다.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달동네는 사실이기 때문에 아름다울수 없겠지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측면과 흰눈이 내려 모든 것을 덮으면 사실은 안보이고 사실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름답고 인간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건축가 공일곤은 승효상의 건축이론은 「언제나 앞장서서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창의력으로 대담하게 무엇이나 시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번뜩이는 재능과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은 기라성같은 서울대 선배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게되었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품을 탄생시키고야말 인물’로 지적되기도 한다.따라서 ‘그가 종종 사용하는 빈자의 미학은 이 시대가 필연적으로 갖춰야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명쾌히 꿰뚫는 선언일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최근의 건축이 침묵하는 몸짓을 보이며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본질만의 뼈대로 구성되는 것은 세장하고 유약한듯 하면서도 엄청난 긴장과 압축의 미학에 접근된 자코메티의 구원의 빛과 비견되어 ‘물리적으로 빈한한 자의 어쩔수 없는 퇴행적 미학이 아닌 오히려 스스로 빈자이고자 하는 실천적 미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실용적 공간미학 추구 이 정신은 ‘인간성이 피폐해가는 세기말적 징후들과 결연히 맞서보려는 의지로서 자연에 대한 경외,도에 대한 갈구,높은 안목,그래서 청빈한 삶을 생활화한 조선조 선비들에게서 흔치않게 발견되어지는 구도자적인 자세일 것이다.미대를 나온 부인 최덕주씨와의 사이엔 아들만 형제. 대장간에 칼이 없듯이 이 시대를 주도하는 주역답지 않게 둔촌동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다.아침에 동숭동 샘터빌딩에 위치한 사무실에 출근하면 일과 두주불사로 자정직전에나 귀가,드로잉솜씨가 일품이고 모든 철학서적을 난독한다. 지적 감수성으로 보편적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 건축가라고 한다면 「빈자의 미학’을 구가하는 그의 건축철학은 「현대의 선비적 자세’에 틀림없다. □연보 ▲1952년 부산 출생 ▲74년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75∼78년 공간연구소(대표 김수근)근무 ▲80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졸업 ▲80∼96년 한양대 이대 등 출강 ▲81∼82년 오스트리아 빈공대 수학,마하르트 뫼비우스운트 파트너근무 ▲85∼현재 대한건축사협회정회원 ▲86∼89년 공간연구소 대표이사 ▲86∼현재 한국건축가협회 정회원 ▲89년 승효상건축연구소 대표 ▲90년 대한민국건축대전초대작가 ▲93∼현재 서울건축학교운영위원 ▲94∼현재(주)종합건축사사무소 이로재 대표이사,분당주택전람회 ▲97년 현재 서울대 공대 출강 〈작품〉 광복30주년기념전시관(75년) 국립청주박물관(79년) 미노리텐광장·국제경제센터(81년 오스트리아 빈) 서울대공원·차병원(82년) 서울법원청사·주미한국대사관저(84년 워싱턴DC)눌원빌딩(87년) 강남크리닉·초량오피스빌딩(90년) 학동 수졸당(92년) 문화공간예술종합관(93년) 천주교풍납동성당·순천향대 도서관(94년) 경주율동법당 등 다수 〈저서〉 「빈자의 미학」(도서출판 미건사)「한국현대건축산책」외 〈수상〉 대법원장표창(89년) 건축가협회상(91·92년) 김수근문화상건축상·대한민국건축문화대상 본상(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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