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선조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현지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총장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증액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진해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07
  • [부고]

    ● 탤런트 전운씨 탤런트 전운씨가 26일 오전 8시30분 지병인 대장암으로 별세했다.67세. 전씨는 19살 때 부산 MBC 성우로 출발해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60년대 후반 TV 탤런트로 무대를 넓혔다. 드라마 ‘대원군’‘113수사본부’‘남자의 계절’‘해뜨고 달뜨고’ 등에서 넉넉한 웃음과 편안한 연기를 선사했다. 2년 전 암이 발병한 뒤부터는 연기 활동을 중단하고 한국방송문화원장으로 일해 왔다. 유족으로는 박정순씨와 현철, 경식, 현희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9시.(02)3410-6915. ●임송학(서울신문 편집국 지방자치뉴스부 부장급)씨 빙모상 26일 전북 익산시 원광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10시 (063)842-4386 ●김병국(서울신문 전산제작부 차장)씨 빙부상 강선조(만안구청 건설과)선필(도시철도공사)선호(공주경찰서 수사과)씨 부친상 27일 샘안양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31)467-9771 ●김홍우(충남일보 서울지사장)씨 별세 수지(경희의료원)씨 부친상 홍규(평택 신한고 교사)홍성(대우건설 부장)홍엽(강사)씨 아우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9시 (02)3010-2262 ●홍오선(전 한국광고주협회 부회장)씨 별세 승훈(한국금융신문 기자)씨 부친상 이재진(우리증권 과장)씨 빙부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410-6917 ●원유광(미국 거주)유황(전 대림산업 부장)씨 모친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410-6919 ●손병대(전 성문산업 회장)씨 별세 학중(성문산업 대표)씨 부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3010-2292 ●이원백(대구지방경찰청 감찰계장)씨 부친상 26일 대구 가톨릭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30분 (053)656-3445 ●안재흥(전 대한지적공사 부사장)씨 별세 성준(국방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성욱(자영업)씨 부친상 김대환(자영업)전홍필(캐나다 거주)씨 빙부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30분 (02)3410-6901 ●이정철(캐나다 거주)씨 모친상 이낙근(외환은행 상무)씨 빙모상 26일 부평 세림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32)508-1341 ●정원병(전 한일약품공업 부회장)씨 별세 태영(BAY&YOUNG CEO)씨 부친상 임기방(T&S KOREA 고문)김종준(하나은행 상무)정태돈(미국 HP COMPUTER)씨 빙부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3010-2239 ●조충호(전 대림산업 부장)덕호(한밭대 교수)용호(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완호(갑진 부장)신호(고려e스쿨 원장)씨 부친상 김관진(전 동진산업 근무)송방식(서울지방교정청 보안과장)씨 빙부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10시 (02)3410-6914 ●이임희(전 한일염공 대표)씨 별세 성근(커뮤니케이션 윌 부회장)씨 부친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7시 (02)3410-6912
  • 儒林(312)-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2)-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연보의 기록대로라면 앉은 채 좌탈입망하여 숨을 거둔 이퇴계. 그는 죽기직전까지도 분매에 물을 주라 일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음일까. ‘매화에 물을 주라.’일렀던 이퇴계의 마지막 유언은 세기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아테네의 청년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며 죽게 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태연히 독약을 마신다. 이를 보던 제자들이 얼굴을 감싸고 통곡하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웬 곡소리들인가. 이런 창피한 꼴을 보게 될까봐 아낙네들을 먼저 보냈거늘,‘사람은 마땅히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A man should die in peace)’고 들었었네. 조용히 하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뻣뻣해지며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덮었던 천을 벗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크리톤,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기억했다가 대신 갚아주게나.” 진리의 성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은 의미심장하다. 아스클레오피스는 그리스인들의 의신(醫神). 뱀이 기어오르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오늘날에도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뱀의 지팡이로 상징되는 아스클레오피스의 문장을 내걸고 있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이승의 삶은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나 죽음으로써 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니 직접 가서 아스클레오피스신전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못하므로 친구인 크리톤에게 대신 닭 한 마리의 제물을 바쳐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매화에 물을 주라’는 이퇴계의 유언과 상통하고 있다. 이퇴계는 사람이 낳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일생이 매화에게 물을 주는 일상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듯 앉은 채 죽음을 조용히 하고 편안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듯 임종을 지켰던 매화분 하나가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행장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매화는 도대체 누가 주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의 매화가 선조의 소명을 받고 68세 때인 7월에 잠시 한성에 입조하였다가 69세 때인 3월에 귀향하기까지 8개월간의 체류기간 중 한성우사(漢城寓舍)에서 지낼 때 애완하던 분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가 이 분매를 퇴계에게 기증하였는지, 혹은 퇴계가 이 분매를 직접 구하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한양객사에서 이 매화를 즐기다가 임금의 허락을 받고 다시 안동으로 내려갈 때 이 매화를 가져가지 못하는 슬픔을 퇴계는 ‘분매답(盆梅答)’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듣건대 도선(陶仙)과 나 서늘하다 하셨으니,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 원컨대 님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玉雪)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 매화의 이별을 퇴계는 마치 사랑하는 님과의 이별처럼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분매는 마침내 퇴계의 손자였던 이안도가 배로 운반하여 퇴계가 숨을 거두던 바로 그해 정월에 도산서원으로 옮겨지는데, 이때 퇴계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儒林(311)-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1)-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퇴계는 평생 동안 특히 매화를 사랑하였다. 퇴계는 일찍이 북송(北宋)시대 때의 은사 임포(林逋)를 마음 깊이 사숙하고 있었다. 임포는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았고,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냈으며, 학을 사육하고 매화를 완성하며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같이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리었다. 후세 사람들은 ‘매처학자’라는 말로 풍류생활을 비유하였는데, 퇴계는 임포의 매화와 일치된 삶을 본받고자 하면서 평생 동안 75제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던 것이다.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며 부르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도 편집하였다. 특히 퇴계는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이란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매화는 죽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이 문장의 뜻을 통해 선비의 기개와 정신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매화꽃을 꺾어 책상 위에 꽂아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뜨락의 매화를 바라보며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시를 여러 차례 읊고 있다. 때로 매화 아래서 찾아온 문인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음을 개탄하는 시까지 읊었다. 예부터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봄을 기다렸다.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간이 구구(九九)에 해당하는 것이다. 흰 매화꽃 81개를 그려 놓고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색을 칠해서 81개째가 되면 백매가 모두 홍매로 변하는 그림인데, 이때가 대충 3월12일 무렵이 되는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솔, 대, 매화, 국화, 연(蓮)의 다섯을 벗으로 삼아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꿈꾸었다. 61세 때는 도산서원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란 단을 쌓고 솔, 대, 매화, 국화를 심어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結社)를 이룬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솔과 국화는 도현명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하여서 참가 못했던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은 이퇴계. 그는 이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사랑하며 매화를 형으로까지 부른다. 그리하여 임종에 가까운 68세 때에는 다음과 같이 매화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내 벗은 다섯이니 솔, 국화, 매화, 대, 연꽃/사귀는 정이야 담담하여 싫지가 않네. 그중에 매화가 특히 날 좋아하여/절우사에 맞이할 제 가장 먼저 피었네. 내 맘에 일어나는 끝없는 매화 생각에/새벽이나 저녁이나 몇 번을 찾았던고.” 새벽 안개 속에서도 저녁 노을빛 아래에서도 달빛 머금은 어스름한 밤에도 매화 향기를 찾아가는 노년의 이퇴계. 이퇴계는 죽기 직전 매화꽃에 물을 주라고 유언한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선조 3년(1570년) 12월8일. 유시(酉時:저녁 6시경)에 숙소에서 종명(終命)하다. 이날 아침 시봉하는 사람을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명하다. 저녁 5시경에 와석(臥席)을 정돈하라고 명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니 조용하고 편안하게 돌아가시다.”
  •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한 외국인의 기록을 본지가 입수, 소개한다.20세기 초 20여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인 선교사 안드레 에카르트가 독일 귀국후인 1923년에 발간한 조선어교제문전(朝鮮語交際文典·이하 문전). 건국대 명예교수인 류태영(69) 박사가 이스라엘에서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으로, 원래는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가 쓸 수 있는 어학교재용으로 만든 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인 눈에 비친 조선의 이런저런 민담과 풍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는 점이 더 관심을 끈다. 문전은 책 구성에서부터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를 위한 어학교재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양 부분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씌어져 있다. 한국어 부분 역시 물론 에카르트가 직접 쓴 것이다. 또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됴션언문(朝鮮諺文)’에서는 한글자모의 발음을 로마자(羅馬字)로 설명하는 등 문자체계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리고 45개의 조선어로 된 이야기들로 본문을 구성했다. 부록으로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의 일부가 실려 있고 독일어 번역을 위한 짧은 연습문 45개도 있다. 책 마지막에 저자 이름으로 ‘옥락안(玉樂安)’이라는 에카르트의 한국식 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정가금오원’과 ‘불허복제’라는 가격과 저작권 보호 표시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본문 내용이다. 에카르트는 서언(緖言)에서 본문의 45가지 ‘니야기’(이야기)는 “조선 13도를 통하야 방방곡곡을 천답(踐踏)하며 연구에 연구를 가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에카르트의 성실한 노력 덕분에 교재를 읽다보면 어떤 이야기들이 1920년대 당시 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지 엿볼 수 있다. ●만담과 해학 산을 넘다 육혈포(권총)를 가진 도적을 만나 주인양반의 돈을 다 빼앗긴 하인이 “오늘 길에서 도적을 만났다하면 그 양반이 내 말을 곧이 아니 듣고 나를 의심하겠으니 당신 가진 육혈포로 내 옷에 구멍을 뚫어주면 그 보람으로 주인 양반에게 빙거(憑據·증거를 대다)하겠다.”고 도적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미련한 도적은 그만 “철환(총알)이 없다.”고 대답해버렸다.‘헛총만 가진 것’을 안 하인은 빼앗긴 돈을 되찾고 도적을 흠뻑 두드려주고 간다.(세번째 이야기 ‘도적을 속인 진담’) 이처럼 문전에는 만담류의 우스갯소리가 20여개로 가장 많다. 그냥 만담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판소리풍의 걸죽한 입담 역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땡볕에 김매는 팔자에 울상짓던 아내한테 괄시받은 한 농부는 벼슬하겠다며 서울로 훌쩍 올라간다. 이 농부 어찌어찌 벼슬얻어 풍악을 울리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데 이 풍악소리를 듣고 내뱉는 아내의 말이 감칠맛이다.“우리 양반인지 닷돈 세뭉치인지, 벼슬인지 닭의 벼슬인지, 군수인지 국수인지, 감사인지 곳감인지 한다고 시골인지 서울인지 가더니 아니오니 이 노릇을 장차 어찌하잔 말이냐.” ●조선의 풍습 조선의 풍습에 대한 글도 찾아볼 수 있다. 풍습에 대해서는 에카르트의 세심한 관찰과 묘사가 잘 드러난다.‘조선에서 혼인하는 법’에서는 에카르트가 마치 결혼식을 옆에서 지켜본 듯 신랑·신부의 행색부터 결혼식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또 조선의 풍습을 잘 모르는 외지인과 조선사람간의 대화체로 꾸며진 ‘귀신을 위하는 이야기’에서는 성주·터주 등 전통신앙에서부터 종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제사 풍습에 대해 순차적으로 설명해준다. ●피할 수 없는 시대상황 어학교재인데다 각 지방의 얘기들을 채록하는 형식이다보니 정치나 사회문제 같은 민감한 소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은근슬쩍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서울구경’편은 강원도 산골에 사는 김 생원이라는 사람의 서울 유람기가 담겨져 있다. 하루는 김생원이 임금 사는 곳을 보겠다며 경운궁으로 가는데 당시 경운궁에 유폐돼 있던 태황제(고종)를 두고 한 경인(京人)과 나눈 대화가 이렇다.“그러면 국사를 시방 누가 상관하오.”라고 김 생원이 묻자 “예 일본 통감부에서 모든 정사를 다 상관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그전보다 국민간에 모든 정사가 밝게 됩니까.”라고 묻자 “예 그 전보다 백성들이 참 평안히 살고 국사가 개명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한다.‘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설정된 한 촌부의 질문이 묘한 느낌을 준다. 또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가 겪는 고초도 ‘임금이 피란함’편에 상세히 실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에카르트 신부는 안드레 에카르트는 1909년 천주교 베네딕트선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조선어를 익힌 뒤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강의했다.1928년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20여년에 이르는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뮌헨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언어, 미술, 음악, 무용,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글을 남겼다. 한국인 제자도 많이 길러냈는데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전혜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의 저작 가운데 1929년 쓴 ‘조선미술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조선 미술에 대한 최초의 통사 형식 서술이었고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아직도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으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거대하지만 실속은 없는 중국미술, 오밀조밀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인 일본미술과 달리 한국 미술은 단아하고 소박한 자연미가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다 개개의 예술작품을 통해 한국의 미를 추출해내는 접근법을 쓰고 있어 책에 실린 500여점 도판은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카르트는 그다지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사가 2003년에서야 열화당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이스라엘 유학중 ‘…文典’ 입수한 류태영박사 국내에서 이스라엘 전문가로 손 꼽히는 류태영 박사는 이 문전을 1973년 이스라엘 유학시절 히브리대 중앙도서관 서고에서 처음 접했다. 히브리대 중앙도서관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에카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단다. 류 박사는 “독일 선교사인데도 또록또록한 한글로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잘 풀어내서 ‘한국에 있었던 선교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읽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하다 골치가 아프면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이 책을 자주 읽다가 아예 복사본까지 마련해뒀다. 귀국한 뒤 이 내용을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해줬더니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아 최근에는 복사본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유 박사는 “출판사에 물어보니 펴낸 지 80년이 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틈나는 대로 현대문으로 풀어내 출간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히브리 도서관에는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세계 각지에 흩어 살던 유대인들이 기증한 자료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 관련 자료도 엄청난데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며 아쉬워 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해경4명 억울한 옥살이 12년

    해양경찰 대원이 1955년 중국으로 피랍돼 12년동안 옥살이를 했으나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사실이 23일 뒤늦게 밝혀졌다. 당시 해양경찰대 소속 경비정인 ‘견우정’ 대원이었던 안영진(80·충북 보은군 수한면), 박래봉(79·부산시 동래구 명장2동), 김창호(77·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주시완(81·인천시 남구 봉춘동)씨 등 4명은 지난 6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이같은 사실을 진정했다. 안씨는 당시 계급이 경사였고 박씨 등 3명은 순경이었는데, 이들은 같은해 12월25일 오전 4시쯤 200t급 견우정에서 근무중 야음을 틈타 평화선을 침범해 불법 조업하던 중공 어선을 나포하던 중 오히려 피랍됐다. 견우정의 제1승선조인 이들은 당시 중공 선단중 한 어선에 재빨리 올라탄 뒤 저항하는 어부들을 신속히 제압하고 조타실, 기관실 등을 장악했으나 어둠속에서 추격해온 7∼8척의 중공 어선과 교전중 본선인 견우정과 떨어지면서 피랍되고 만 것. 이들은 피랍 과정에서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 등으로 유혈이 낭자하게 구타당한 뒤 중공 정부로 넘겨져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시의 감옥에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극한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1967년 4월 중공 정부가 구형한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 홍콩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돌아왔으나 이미 행방불명을 이유로 면직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피랍된 뒤 1961년11월까지 종전대로 가족들에게 임금을 지급해 왔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마저도 중단해 가족들 역시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처참한 생활을 이어갔었다. 이들은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온 뒤 7개월만에 복직됐다 스스로 그만두거나 정년퇴직했으나 중국에서의 옥살이 기간이 복무기간에서 빠져 퇴직금. 연금에서도 손해를 보아야만 했다. 특히 이들 중 주씨는 작년 8월 옥살이에서 얻은 지병 등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박씨는 당시 고문으로 청각을 잃었고 안씨와 김씨도 모두 심각한 후유증을 앓아 매일 병원 신세를 질 정도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여성들 ‘春情’ 근거 있을까

    여성들 ‘春情’ 근거 있을까

    봄을 가리켜 ‘여성의 계절’이라고 한다. 옛 말에도 봄을 맞아 설레는 여성의 마음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봄바람은 처녀바람이고 가을바람은 총각바람’이라는 속담도 봄엔 처녀 가슴이 설레고, 가을철엔 총각들이 들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성과 봄바람은 실제로 관계가 있을까. ●봄은 여성의 계절 사람과 자연현상이나 사물을 연결짓는 사고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중시하는 동양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음양오행에서 여자는 나무(木)에 속하고 봄은 나무에 새생명을 불어넣는 계절로 풀이된다. 서정범 경희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선조들은 봄을 ‘번식의 계절’,‘여성의 계절’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봄은 식물로 보면 나무(木), 색깔은 청(靑), 방향은 동(東)으로 봄 춘(春)자는 태양이 밑에서 싹을 키우는 모습”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봄바람이란 곧 여성의 생산능력이 왕성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봄XX’가 쇠젓가락을 녹이고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가을X’이 쇠판을 뚫는다.’등 다소 점잖지 못한 속담도 선조들의 사고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면서 “춘정(春情), 춘심(春心), 춘풍(春風) 등 봄과 관련된 단어들은 봄을 맞은 여성의 바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봄바람은 자연스러운 것” 역술인들은 봄이 ‘여성의 계절’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G철학원 엄창용(71)씨는 “역학적으로 여자는 버드나무에 비유되는데, 버드나무는 생명력이 강하고 물가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이 있다.”면서 “봄이 되면 나무가 물을 만나 파란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여성 역시 봄이 되면 만개한다.”고 밝혔다. 인간 역시 삼라만상의 하나로 봄 기운의 영향은 다른 동·식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K철학원 김정희(51)씨도 “인(음력 1월), 묘(음력 2월), 진(음력 3월)달에 해당하는 봄은 양기가 강한 시기”라면서 “따라서 봄에는 음양이 조화가 이루어져 여성이 활발해지고 화장도 잘 받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은 땅(土)에 비유되기도 한다. 봄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인 만큼 많은 남자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김씨는 “나무가 봄기운을 만나서 꽃을 피워 아름다워지면 나비가 달려들게 마련”이라면서 “아름다움으로 시선이 집중되면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만큼 봄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봄이 여성의 계절인 것 만은 사실이지만 개인차가 있는 만큼 섣부른 일반화는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역술인도 있다.S사 만월(58) 스님은 “남성이면서도 여성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고, 여성이면서도 남성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는 만큼 세세히 따져 봐야 한다.”면서 “40% 정도는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데, 봄을 맞는 반응이 역술적인 해석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호르몬 증가와 심리변화가 원인” 의학계에서는 일조량이 늘어나는데 따른 신체변화와 봄이 주는 심리변화가 ‘설레임’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봄이 되어 일조량이 늘어나면 뇌에서 멜라토닌의 분비가 증가해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것이다. 뇌의 송과선에서 밤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멜라토닌은 일종의 신경전달 호르몬으로 인간의 생체리듬을 조절한다. 하규섭 분당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일부 호르몬은 햇볕을 받으면 분비되는 특성이 있는데 멜라토닌이 대표적”이라면서 “일조량이 늘어나면 호르몬 분비도 왕성해져 기분이 좋아지고 활동량도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실제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이나 겨울이면 우울증세를 유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심리적인 변화도 적지않다.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도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되면 성적인 측면에서 왕성한 활동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도 활동적이 되고, 사고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봄을 느끼는데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날까. 아직 검증된 정답은 없다고 한다. 이동수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아직은 남녀간 뇌영역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라면서 “남성보다 감성적으로 발달한 여성은 멜라토닌의 분비량 등 변화에 더 민감해 심리적인 반응의 폭이 크다는 것이 의학계의 통설”이라고 전했다. 이 교수는 “그렇지만 현재까지 정신과적 측면에서 가정한 유력한 학설일 뿐 단정하기는 곤란하다.”면서 “특히 남녀의 차이를 명확히 정의내리기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고 개인 간 차이도 크다.”고 밝혔다. 유영규 박지윤기자 whoami@seoul.co.kr ■ 속담속의 여성 이미지 김소자(51)씨는 똑부러진 성격으로 살림을 알뜰하게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어른들은 “여자가 주장이 강하면 집안 일이 되지 않는다.”고 타일렀다. 하지만 요즘 김씨는 주변에서 ‘여자가 나서야 집안이 흥하는’ 대표적 사례로 오르내리고 있다. 우리 속담에서 여성은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곤 했다. 언어학자 김수진(35·경남대 강사) 박사는 “한국속담에서 여성은 대부분 남성보다 열등하게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속담 속에서도 여성이 동물에 비유될 때 더욱 폄하되곤 했다는 것이다. ‘사나운 암캐같이 앙앙 하지 말라.’는 여자는 온순해야 한다는 뜻으로 기가 센 여성을 개에 비유하고 있다. 여성을 닭에 견주면서 비웃는 듯한 표현도 적지 않다.‘양지마당의 씨암탉 걸음’이나 ‘노류장화는 사람마다 꺾으려니와 산닭 길들이기는 사람마다 어렵다.’에서 여성은 각각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씨암탉이나, 자유분방하여 다루기 힘든 산닭으로 비유됐다. 여성을 닭으로 비유한 속담에는 가부장적인 의식이 엿보이는 것도 있다.‘암탉이 울어서 날 새는 일 없고, 장닭이 울어서 안 새는 날 없다.’는 여성과 남성을 각각 암탉과 장닭에 견주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그린다. ‘여자는 사흘을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는 여성을 교활한 특성을 지닌 존재로 그린다.‘여자 속은 뱀창자’라거나 ‘여편네 벌이는 쥐벌이’에서도 여성을 음흉하게 표현하거나 여성의 경제력을 무시한다. 여성의 정조와 관련된 속담으로는 ‘까마귀 학이 되랴.’가 있다. 부정한 여성은 피부색이 검은 까마귀로, 정숙한 여성은 피부색이 하얀 학으로 상징된다. 방운규(47) 평택대 국문과 교수는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속담이 남아있다.”며 ‘여자팔자는 시집을 가봐야 안다.’와 ‘여자와 쌀은 칠수록 좋다.’를 예로 들었다.‘여자와 쌀은 칠수록 좋다.’는 속담은 여자는 가꿀수록 보기 좋아진다는 뜻이다. 진민자(61) 청년여성문화원 이사장은 “유교시대에는 여성을 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속담이 이용됐지만 이제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의 지위가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여성비하적인 속담은 설자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종화 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는 “속담은 전통사회에서는 하나의 지침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을 낮추는 속담들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말했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독신이다.’라는 신세대 격언처럼 여성은 이제 속담에서 남성과 비교되는 존재로 언급되는 것 조차 혐오하고 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儒林(310)-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0)-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퇴계를 태운 가마가 죽령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으리, 나으리.” 퇴계를 쫓아온 관졸들이 손에 다발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가마를 세우고 퇴계가 묻자 관졸들이 말하였다. “나으리, 이것은 삼베를 짜는 삼이옵니다. 이것은 아전(衙田)에서 거둔 것인데, 퇴임하는 사또께서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바칩니다.” 아전이란 관청에 딸린 밭으로 동헌 근처에서 심은 삼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국가의 소유로 대부분 관아에서 사용하는 비용이나 혹은 사또의 개인 사비로 충당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삼은 줄기껍질로는 섬유를 짜서 삼베를 만들고 씨로는 기름을 짜는 대마(大麻)라 불리던 유용식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례에 따라 군졸들이 삼베를 거두어 퇴임하는 퇴계에게 가져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고 이덕홍(李德弘)은 퇴계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선생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왜 그것을 가지고 왔느냐.’하고 이내 물리치셨다.” 이 일을 기록한 이덕홍은 이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고 성리학과 역학에 뛰어난 문인이었다. 이덕홍은 스승이 이 무렵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퇴계가 단양의 군수에 재직하고 있을 무렵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상날짜가 임박해지는구나. 제상은 여기서 보낼 작정이다. 쌀과 면을 만들 감은 보낼 형편이 못된다. 그러니 집에서 준비하여라. 다만 저축해둔 곡식이 없을까 걱정이다.” 편지 중에 나오는 대상이란 퇴계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권씨의 장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무렵 퇴계의 집은 저축해둔 곡식이 없을 만큼 궁핍하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아들 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편지도 바로 이 무렵 쓴 것이다. “…내 갓과 신이 다 닳아서 새로 장만하여야 하겠다. 스무날께 베를 보내다오. 옷과 갓을 인편에 부치거라.” 옷을 만드는 베조차 부족하여 이를 보내달라는 퇴계의 청렴한 공복(公僕)정신은 오늘날 공무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정신인 것이다. 따라서 전근하는 퇴계에게 군졸들이 삼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이러한 사또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거두어 온 것인데, 퇴계는 단호히 이를 물리쳤던 것이다. 이때 퇴계의 처신을 제자였던 김성일은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단양을 떠나 돌아갈 때에는 선생의 행장에는 쓸쓸하게도 다만 괴이한 수석이 두 점 있었을 뿐이었다.” 단양은 예로부터 괴석과 수석이 유명한 곳.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행장에는 괴석 두개만 달랑 들어 있었다는 것이 김성일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짐 속에는 김성일의 표현대로 괴석 두 개만 들어 있었을까. 아니었다. 퇴계의 행장 속에는 매화분 하나가 남의 눈에 띌세라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 [이현세의 만화경] 독도가 우리 땅이라면

    [이현세의 만화경] 독도가 우리 땅이라면

    3·1절이 있는 이 달은 우리 민족에겐 의미가 남다른 달이다. 삼천리 강산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만세를 부른다고 목이 잘리고, 태극기 흔든다고 손목이 잘린 달이다. 하필이면 그런 3월에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일본이 억지 쓰는 탓에 이 나라 삼천리 강산은 다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제 땅도 못지키는 꼴이 되었을까…. 20년쯤 전이다. 일제 때 강제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된 위안부를 두고 강제동원이 아니라 돈을 받고 스스로 성전에 참여했다는 일본 우익들의 발언에 분노해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나는 학도병 얘기를 그렸다. 그 만화가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였다. 그러나 며칠 봄철에 들불 일듯이 들끓던 극일의 목소리는 이내 잠잠해졌고 이 만화는 이웃국가를 필요이상으로 자극한다는 이유로 심의에서 관동군 막사에 일장기도 못 그리게 했다. 그리고 10여년쯤 전, 이번에는 일본이 교과서에 이 땅을 침략하고 수탈한 기록을 삭제 왜곡시키고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슬쩍 흘려서 우리 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때는 나는 내 속의 불길을 감추지 못하고 ‘남벌’이라는 만화를 그렸다. 남쪽 일본을 벌한다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이 만화는 석유 자원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고 결국 북한과 손을 잡아 일본과 전면전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여론은 며칠 가지 못했고 정부나 정치인들의 대응도 국민 감정무마용 정도로 끝이 났다. 그리고 이 만화는 신문연재 시에 무슨 이유에선지 북한 잠수함의 인공기가 삭제되었고 지나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를 부채질한다고 S대 학생들과 모 평론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그리고 10년 뒤 오늘, 독도문제를 가지고 일본은 다시 돌아왔다. 일본의 망언은 묘하게도 10년의 주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의도적인 일본의 공습이라고 본다. 독도는 분명 공습을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본은 이 공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독도는 외로운 우리의 땅이다. 독도는 우리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한, 그래서 서글픈 땅이다. 신라시대 때 겨우 호적에 올려진 독도는 조선시대까지 홀로 무인고도로 버려져 있다가 한일병합때 그래도 자식이라는 죄로 같이 일본에 끌려갔다. 그러다 한·일수교때는 피해보상금을 받아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자국부모로부터 폭사당할 뻔했다. 세월이 흘러 잘 먹고 잘 살던 이 땅에 느닷없이 IMF가 왔을 때도 돈을 빌리기 위해 서로 사용하지 말자는 공창의 매춘부 꼴을 당했고, 그 뒤로는 제 나라 우표에 독도 그림을 넣는데도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제 땅인데도 함부로 못 가고 근처에서 고기도 잡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렸다. 독도는 이렇게 애물단지였다. 제 자식을 이렇게 귀여워하지 않으니, 아시아의 동네 깡패 같은 일본은 이제 룸살롱 주인이 되어서 동네 명사가 되고 제 편을 끌어들여서, 독도는 제 딸이라고 마구 우기고 다닌다. 그러다 그 딸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다. 독도의 바다아래 엄청난 무공해 에너지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일이 갈수록 태산이다. 일본은 과거 깡패시절에 대해서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고 없던 역사도 만들어서 족보에 올리며 자신도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서 원폭을 맞고 희생당했노라고 억지를 쓰고 다닌다. 동네 장터의 돈과 힘에 주눅이 들어 쉬쉬하던 못난 부모는 이제 와서 안달이 났다.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집이 없고 공부를 시키지 않으면 자식들의 미래가 없다. 도둑이 담을 넘어오면 피를 흘려서 싸움을 해야 한다. 기억하기도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지만 몇 년 전에 집에 떼강도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목숨을 잃어가며 그 떼강도들을 막아주어서 우리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한 가정을 지키는 데도 이렇게 피와 땀이 필요하다. 영토도 마찬가지다. 피 흘리고 지키지 않으면 국경선은 언제나 바뀐다. 우리의 국경선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는 유구한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 속에는 목숨을 걸고 독도를 지킨 영광의 시대도 있고 독도를 포기한 더러운 시대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제 땅을 양보하고 세계화를 위해 역사 교과서를 던져버린 작금의 우리에겐 독도의 미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진리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 마산시 ‘대마도의 날’ 조례 맞불

    경남 마산시의회가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에 대응해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 파장이 예상된다. 마산시의회는 18일 오후 본회의에서 하문식 의장의 발의로 대마도의 날 조례안을 긴급 상정, 재석의원 29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 조례는 4조 부칙으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의 동질성을 지닌 대마도가 한국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고,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대마도의 날은 조선조 세종1년(1419년)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한 6월19일로 정하고,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역사적 증거를 입증하는 데 노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의회는 조례제정 배경설명에서 “일본의 역사왜곡과 ‘다케시마의 날’ 제정 등 일련의 행태를 주권침략 행위로 간주한다.”면서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한국 땅인 대마도의 고토(故土)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주가 조선의 속주가 될 것을 자청했으며, 조선 조정은 대마도를 경상도 계림에 예속시켰다.”며 역사적인 사실을 밝힌 뒤 “이후 우리나라는 이 땅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이 없으므로 대마도를 찾는 고토회복운동은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마산시로 이송됐으며, 시는 정부 및 관계기관과 협의를 거쳐 공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산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해남 전복 직판장 개장

    한반도 최남단인 땅끝 국민관광지에서 싱싱한 전복을 맛볼 수 있게 됐다. 전남 해남군은 18일 땅끝인 송지면 갈두리에 갈두어촌계가 자율관리하는 전복 직판장을 열었다고 밝혔다. 이 직판장은 갈두어촌계가 전국 최우수 어장 자율관리 공동체로 선정돼 받은 상금 5억원을 들여 3층 건물로 개장, 어민소득을 높이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층(35평)에는 땅끝 특산물인 전복을 판매하고 시식할 수 있으며, 멸치·새우·다시마·미역·김 등 이 지역 수산물이 도매가로 판매된다. 이곳에서는 현지 판매와 함께 인터넷과 우편으로도 주문을 받는다. 특히 생산자인 어민들이 직접 전복을 팔기 때문에 싸고 믿을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양도 넉넉하다 보통 ㎏당 6만∼8만원이고,10만원어치면 4명이 만족하게 먹을 수 있다. 또 직판장 옆에는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인 보길도로 가는 선착장이 있다. 지난해 땅끝을 찾은 관광객은 27만여명으로 집계됐고, 요즘 주말이면 2300여명이 이곳에서 남녘의 봄을 만끽한다. 한편 해남군은 정유재란(1597년·선조 30년)때 충무공의 명량대첩지인 울돌목이 내려다보이는 문내면 학동리 진도대교 앞에 253억원을 들여 전라 우수영 관광단지(6만여평)를 만들고 있다. 또 반대쪽에 자리한 진도군은 15억원으로 군내면 녹진리 녹진관광단지(3만여평)에 국내 최대인 20m짜리 충무공 동상을 내년 상반기까지 세운다. 해남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중등학교 시절, 우리 세대가 자주 외우던 시조 가운데 고려말의 충신, 포은(圃隱) 선생의 ‘단심가(丹心歌)’가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인용하자면 “이 몸이 죽어죽어 일 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내용으로 가히 섬뜩한 공포감을 자아내게 할 만큼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시조였다. 이 무렵의 우리들은 선조들의 이같은 충절의 미덕을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마치 왕이나 국부처럼 칭송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충절에 대한 이 맹목적 흠모의 교육 탓일까. 오늘의 대통령을 포은이 노래한 봉건 왕조의 왕으로 착각해서인지 몇 주전 노무현 대통령과 국민의 대표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노인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는 해프닝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다. 오늘의 가치관에서도 충절이란 물론 존중되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국민에 대한 것이지 한 특별한 개인에 대해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국의 대통령도 허물이 있거나 국가 이익에 심각하게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이다. 충절이란 존중되어야 할 덕목이긴 하지만 이렇듯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 때문일까. 유럽사람들과 달리 우리들은 충(忠)뿐만 아니라 충에 유사한 행위들도 유달리 높이 사는 관습적 사고에 젖어 살고 있는 듯하다. 그 중 하나가 ‘소신’이라 부르는 어떤 정신자세이다. 오죽하면 ‘소신에 죽고 산다.’는 말까지 생겼으랴. 물론 소신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정당하고 올바른 신념에 대한 소신은 가능한 한 실천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충절이 그러하듯 소신 또한 한사코 고수하는 일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의 시대-민주주의 시대-가 그러하다. 봉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한 개인의 통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 모두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 구성원 각자가 지닌 각기 다른 생각, 다른 신념들이 조정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성원을 구성하는 각자는 그 지적 수준, 정서적 감수성, 인격, 능력, 성별이 어떠하든 모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 판단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 참여자의 한 사람일 뿐인 어떤 자가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무작정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려 한다면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하물며 그 같은 소신을 가진 자 바로 인간이며, 하늘 아래 인간이란 그 누구든 완전치 못함에랴. 최근 우리 사회에는 이렇듯-그 주장하는 바 신념이 옳든 옳지 않든-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만의 소신을 관철하려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엊그제 아수라장이 된 민주노총 총회가 그러하고, 몇 주전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건설을 중지하라며 한 스님이 죽기 살기로 벌였던 단식투쟁이 그러하고, 몇 달전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반대, 마치 종교 의식처럼 전국토를 종단하여 포퓰리즘에 불을 지른 종교인들의 삼보일배가 그러하다. 그들의 상대가 어떤 태도로 그들을 대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들의 주장이 과연 최선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소신을 무작정 관찰하려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 누구나 귀를 활짝 열고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에 의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옛 성현도 말하지 않았던가.“귀 있는 자 들어라.” 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 [日 3·16도발] “日 독도영토론 근거 희박 한국 주장에 일리 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 일본의 저명한 원로 역사학자가 독도의 일본 영토 주장은 잘못됐으며 한국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밝혀, 주목된다. 일본 시마네(島根)대학 명예교수인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76)는 17일자 도쿄신문과의 회견에서 “막부가 17세기 중반까지 독도를 실질 지배했다는 주장은 매우 조잡한 설명으로 일본 정부의 독도 ‘고유영토론’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영토로 편입할 당시 독도는 주인이 없다는 이유로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을 내세웠으나 한국은 이보다 5년 앞선 1900년 독도가 울릉도에 포함된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나이토 교수는 일본이 1696년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으며 이는 일본이 독도를 영유할 의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후 독도로 가는 일본인은 없었고 당시 일본에서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식됐다고 설명했다. 나이토 교수는 또 1876년 민간인이 울릉도 개발을 신청하자 일본 정부는 이듬해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을 통해 “울릉도와 다른 한 개의 섬(독도)은 본국과 관계없다.”고 거부한 사실을 강조했다. 일본이 에도와 메이지 시대에 걸쳐 독도는 일본과 무관한 섬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시마네 지방신문의 기고에서도 “1696년 막부가 3년에 걸쳐 조선 정부와 교섭한 결과 독도는 조선 영토임을 확인했다.”며 “1867년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시인했다.”고 말했다. 나이토 교수는 일본이 17세기 중반 돗토리고 요나고 주민에 도항허가를 내준 점을 실효지배의 근거로 삼지만 그같은 문서를 만든 것은 도항허가를 받은 인물의 2,3대 후손으로 선조의 업적을 과대평가했다고 설명했다. 나이토 교수는 교토대 대학원을 수료하고 시마네대 법문학부장을 거쳐 93년 은퇴한 지역 사학계의 권위자다.‘시마네현의 100년’,‘독도 관계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도쿄신문은 이날 2개 면의 독도 특집기사에서 나이토 교수 이외에 일본측 논리를 편 시모조 기사오(下條正男) 다쿠쇼쿠(拓殖)대학 교수의 회견도 나란히 실었다. 독도가 일본 오키섬에서는 160㎞, 울릉도에서는 90㎞ 떨어졌다는 지도도 곁들였다. taein@seoul.co.kr
  • [日 독도주권 침해] 역사속의 독도

    [日 독도주권 침해] 역사속의 독도

    역사적으로 독도를 거론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서기 500∼514) 13년조에 보인다.‘…우산국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는 이 기록이 독도를 분명하게 지칭하고 있지는 않으나, 독도의 존재가 통상 우산국(울릉도)과 함께 취급돼 왔다는 점에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때 신라에서는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을 아우르고 왕토(王土)로 삼았으니, 이 해가 512년임을 감안하면 벌써 1500년 전부터 독도는 우리 영토로 존재해온 것이다. 이렇게 우산국과 함께 우리 영토에 귀속된 독도는 고려시대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땅으로 인식돼 왔다. 고려사 태조 13년조와 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 등에는 ‘…신라 때 우산국이라 불렀는데, 무릉 또는 우릉이라 하며… 신라 지증왕 13년에 항복해왔다. 우산, 무릉 두 섬은 거리가 가까워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적어 지리적으로 근접해 우산국과 세트로 인식된 독도가 분명히 우리 땅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후 고려 현종 때까지 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는 지배체제가 정비되면서 덕종 원년부터 우릉으로 불렸으며, 이곳 성주가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고 적어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에 대한 역사적 지배권의 향배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인종, 의종, 고종조에도 울릉도의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많은데, 특히 고종조에는 원주민 외에 별도의 주민들을 육지에서 이주시켜 살도록 하려다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면서 무산된 사실을 기록해 울릉도가 신라 지증왕대 이후 지속적으로 우리의 통치권 하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울릉도에 대한 통치기조는 민간의 거주를 막는 ‘공도(空島)정책’으로 바뀌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태종조에 부역과 납세를 면탈하기 위해 이 섬으로 도망친 자들을 붙잡아 오도록 했다(공도화)는 기록이 전한다. 세종·세조 연간에도 이런 문제로 조정의 논의가 많았는데, 특히 세조 때에는 중추부사를 지낸 유수강이 우산과 무릉, 즉 울릉도와 독도에 현읍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다스리자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우산과 무릉에 현읍을 설치할 경우 수로가 험하고 왕래가 어려워 지키기 어려우니, 배가 오가기 좋은 날을 골라 이곳에 거주하는 강원도의 주민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게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주민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도록 했다.’는 이른바 조선조의 공도정책.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 섬이 무인도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공도정책은 유인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책’이라며 일본측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하고 있다. 이후 공도정책으로 이곳에 왜구가 들끓자 숙종 23년(1697)에 왜구를 축출하기 위해 수토제(搜討制)를 정례화했으며, 영조는 이곳 특산물인 산삼의 밀거래를 막기 위해 지방관아에 체계적인 채삼(採蔘)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는 고종이 1900년 10월 대한제국 황제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편하고, 그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하는 직제 개편을 단행하는데, 이는 일본정부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는 무인도로 타국이 점령 지배하고 있지 않으므로 일본령으로 삼는다.’는 억지 주장을 편 것보다 5년이나 앞서 있었던 사실(史實)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특별시에 집성촌?서울 양원리등 10여곳 수십 가구씩 오순도순 유영규(42·대구시 남구 대명동)씨는 어려서 자신보다 나이는 적지만 항렬이 높아 아저씨뻘 되는 아이에게 ‘꿀밤’을 먹였다가 집안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이어 눈을 피해 이 아이를 또 혼냈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야단을 맞기도 했다. 유씨로서는 어린 마음에 억울한 일이 줄을 이었다. 시골지역의 집성촌(集姓村)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아직도 ‘아랫집은 사촌 형님, 윗집은 숙부, 옆집은 조카, 앞집은 당숙’ 하는 식으로 친인척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 10여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집성촌들은 그린벨트로 묶이고, 세태의 변화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1동 259 일대에는 서울이라고는 얼른 떠올려지지 않는 ‘양원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동래 정씨들이 38가구나 모여 산다. ●조선 태조가 하사한 땅 이 마을 정수선(71·새마을금고 운영)씨는 “조상님들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1394년보다도 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으니 벌써 610년을 넘겼다.”고 말했다. 정씨 말대로 이성계가 고려 말 역성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일등공신인 정구(鄭)에게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24대째를 내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도 태조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무덤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고개를 넘으면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忘憂), 고갯마루에서 쉬다가 마신 우물물의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해 양원리(養源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무래도 개발제한이 풀리면 집성촌 유지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마을사람들이 내놓는 대답은 ‘천만에’였다. ●사라져가는 집성촌 정씨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건물을 못 짓고, 땅값이 주변의 10분의1밖에 안되는 등 불이익(?)에 따른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건물을 짓지 못하는 불편 때문에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개발이 늦어져 오래 모여 살아오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세월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수선씨는 또한 “집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다른 성씨가 10가구 들어와 집성촌이라는 명맥은 이어가지만 이미 순수혈통 마을에서는 약간 벗어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한 핏줄끼리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자부심도 있긴 하지만….”이라며 씁쓸해했다. 정씨는 슬하에 7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민섭(28)씨를 빼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집성촌에서 나와 사실상 ‘타향 살이’를 하고 있다. 민섭씨 또한 아버지의 마을금고 사업을 도와주려고 머무는 것이니 ‘동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죄다 믿음이 간다오” 정씨의 집 앞에는 7촌 조카, 그리고 바로 옆에는 6촌 동생이 살고 있어 “이곳이 과연 집성촌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망우동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일때는 집성촌이 10개나 있었다. 현재 구리시로 한 단계 뛰어오른 구리면은 망우·상봉·중화·묵·신내·교문·토평·갈매·수택리 등 9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바꿔 말하면 한 마을에 두 가지 성씨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마을에서 북부간선도로를 가로질러 자동차로 10분쯤 가면 구릉산 아래로 신내1동 산6 일대에 경주 임(林)씨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능말(큰 능이 있다고 해서 붙은 능마을의 준말)이 나타난다. 임씨 집성촌이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선조 36년인 1603년쯤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400년 남짓한 전통으로 정씨네 집안에는 ‘한끗발’ 뒤지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들인 양원 마을과는 달리 전체의 절반인 15가구가 아직도 이 지역의 특산물인 ‘먹골배’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종친회 총무 임현만(59)씨는 “하루 온종일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조상들의 묘를 지키며 오랫동안 ‘모여 사는 정’에 익숙해져 좀처럼 외지로 나가기가 힘들었다.”고 귀띔했다. 함께 사는 임씨의 아들 준성(29)씨도 “아무래도 집안 어르신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예의범절이 절로 몸에 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의 범절 저절로 배워요” 강동구 강일동 ‘벌말’ 청송 심(沈)씨네는 5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집성촌이다.410여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예산에서 피란온 선조들의 후손이다. 벌말이란 벌판에 마을이 섰다고 할 정도로 너른 땅을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지명에는 평촌(坪村)이 있다. 벌말에서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은 이에게 존칭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함부로 호칭하다가 혼이 나는 일도 적지 않다. 서로 새해인사를 하는 경우 나이는 자녀뻘이지만 항렬이 높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강동구의회 의장을 지낸 25대손 심재풍(69)씨는 “10대 할아버지께서 정착한 이래, 마을 규범 때문에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성씨가 같아서인지 금방 화목을 되찾는다.”며 마을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이어 “최근 다른 성씨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10촌 이상 촌수가 벌어지면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두 모여 집집이 옮겨다니며 차례를 지내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옛 풍습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무슨 사연·어떤 자랑거리 있나 서울 시내엔 10여가구가 모여 작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모두 6곳이 있다. 도봉구 방학4동 ‘원당마을’에는 파평 윤(尹)씨, 강서구 외발산동 ‘광명마을’에는 경주 최(崔)씨,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한강으로 흘러드는 두 여울이 갈라져 흐르는 곳이란 뜻)에는 남평 문(文)씨 집안이 있다. 또 창녕 조(曺)씨들이 대대로 일군 서초구 염곡동 ‘염통골’(마을 생김새가 염통 모양)과 경주 김씨의 내곡동 ‘능안마을’에다 아예 성씨를 따 ‘홍씨 마을’이라고 부르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 속에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자랑거리도 수두룩하다. 먼저 도봉구 방학동 원당마을에 있는 서울시의 보물덩어리가 된 830살짜리 은행나무가 손꼽힌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다. 높이가 24m, 둘레는 9.6m나 된다. 관악구 신림동 산112의1에 있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수령 1010년)와 종로구 삼청동 106 총리공관 등나무(천연기념물 254호·수령 920년)에 이어 ‘수령’이 서울에서 세 번째다. 원당마을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나라의 큰 변고를 알리는 등 신통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이 나무에 까닭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나 소방차가 출동, 진화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2월 중순이면 이곳에 30여명씩 모여 떡과 술을 놓고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목대신제’(杏木大神祭)를 올리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이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옮겨오면서 파평 윤씨들이 뒤따라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으로 찾아볼 수 없어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당마을 윤주현(71)씨는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연산군의 경우 3족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비(尹妃)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외척들이 돌봐야 한다고 여겨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곳엔 또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해온 ‘원당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태조가 물맛을 본 뒤 칭찬했다는 망우동 양원마을 우물과 비슷한 사례다. 피란민이 숨어들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자연부락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 심씨들의 마을에도 흥미 넘치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심재익(67)씨는 “옛날 한 백성이 산에서 도적을 만났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화를 면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와 똑같이 생겨 그 사건 이후에 그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령이라고 믿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해마다 음력 7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길일(吉日)을 가려 ‘큰말(벌말의 딴 이름으로, 큰 마을이란 뜻) 산신제’를 지낸다. 앞산 꼭대기에 올라 집집마다 추렴한 쌀로 떡과 술을 빚고 소머리를 제단에 올린다. 서울시내에서 행하는 유일한 산신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열린세상] 한석봉 어머니는 이제 그만/김민환 고려대 언론학 교수

    남북한 7000만 동포가 다 아는 실화(實話)가 하나 있다. 주인공은 한석봉의 어머니다. 아들이 학업에 정진하지 않아 애가 탄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등잔불을 꺼놓고 아들과 시합을 벌인다.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씨를 쓴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한데 아들이 쓴 글씨는 그렇지 못하다. 석봉은 대오각성하여 서예에 정진해 드디어 독특한 서법을 남길 만큼 대가가 되었다. 아들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 옮긴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동양 현모(賢母)의 귀감이라면 석봉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표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조선조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석봉이 살았던 16세기에 서구에서는 역사의 대전환이 활기차게 이루어졌다. 석봉이 태어나기 50여 년 전에 이미 콜럼버스가 바하마제도와 쿠바를 발견했다. 얼마 뒤 마젤란은 태평양 항해를 서둘러 필리핀에 도착했다. 탐험가들이 새로운 항로를 발견함으로써 돛을 단 것이 서구 자본주의였다. 서구 경제는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뒤이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서구사회에서 봉건제는 급격하게 퇴조하고 자본주의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16세기에 석봉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명필이 되라고 하기보다는 장인(匠人)이 되라고 했어야 한다. 석봉에게 글씨를 쓰게 하기보다 떡 써는 기계를 만들라고 했다면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떡을 써는 기계, 세상에서 가장 가지런하게 떡을 써는 기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그런 기계를 만들었더라면 그의 어머니는 떡을 써는 힘든 숙련노동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석봉 자신은 큰돈을 모았을 것이다. 그 시절에 조선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관리나 명필이 되도록 강요하지 않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게 했더라면 조선도 당당한 자본주의 나라로 발전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16세기에 아들이 떡 써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보다 서예를 하는 선비가 되기를 선호한 어머니가 절대다수였다는 사실(史實)이 아니다. 압축성장으로 자본주의 도약의 신화를 일군 우리나라에서 오늘날도 거의 대부분의 어머니가 석봉의 어머니와 같은 바람으로 자식을 키우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事實)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도 선비 좋아하는 봉건제적 유한(遺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16세기에 항해술을 택한 나라가 3세기 뒤에 제국이 되는 데 반해 명필을 택한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어머니의 이런 경향은 교육 분야에 여과 없이 투영되고 있다. 이공계에 대한 인기가 현저하게 떨어지고 이공계 중에서도 순수과학 분야는 그야말로 고급두뇌가 약속이나 한 듯이 기피해 명문 대학의 대학원 과정마저 학생정원 채우기가 쉽지 않다. 이공계 중에 그나마 의과대학이 명맥을 이어가지만 그 분야도 들여다보면 기초는 사람이 없고 안과니 성형외과니 하는 분야만 법석거린다. 이공계가 파리를 날리고 있는 데 반해 사회계는 때 아닌 활황이다. 그것도 실용적인 사회과학분야가 인기를 끌고 있다. 우수한 학생은 거의 법대와 경영대가 쓸어가고, 요즘은 불황이 장기화되어 그런지 사범계가 새 바람을 타고 있다. 법조나 기업이나 학교가 일할 만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공계가 부실한 상황에서 사회과학분야, 그것도 응용분야가 인재를 싹쓸이하는 건 아무래도 불안하다. 자본주의는 뭐니 뭐니 해도 이공계 없이는 제대로 굴러가기 어렵기 때문이다.21세기는 정보사회라니까 그런지 내가 속한 신문방송학 쪽도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자꾸 공허한 느낌이 드는 건 숨길 수 없다. 강한 나라 어머니는 과학자나 엔지니어를 사랑한다.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 교수
  • [儒林 속 한자이야기] (62)

    儒林 290에는 ‘春來不似春(봄 춘/올 래/아니 불/비슷할 사/봄 춘)’이 나오는데,‘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春’자는 원래 ‘풀이 햇빛을 받아 돋아나는 모습’을 나타냈으니 ‘봄철’을 의미한다. 봄은 만물이 蘇生(소생)하는 季節(계절)이요 일년의 시작이므로 ‘젊은 시절’을 나타내기도 하고,‘戀情(연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글자의 用例(용례)로는 ‘春困(춘곤:봄철의 나른한 기운),春華秋實(춘화추실:문화와 덕행),回春(회춘:중한 병에서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음)’ 등이 있다. ‘來’자는 ‘보리’가 본래 의미인데,‘오다’라는 의미의 낱말과 음이 같아 더 널리 쓰이자 본래의 뜻을 보존하기 위하여 麥(보리 맥)을 새로 만들었다.‘來者可追(내자가추:이미 지난 것은 어찌 할 수 없으나 미래의 일은 조심하여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渡來(도래:외부에서 전해져 들어옴),從來(종래:일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부터 지금까지에 이름)’ 등에 쓰인다. ‘不’은 나무나 풀의 ‘뿌리’를 본뜬 象形字(상형자)이나 본래의 의미보다 ‘아니다.’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용례로는 ‘不動心(부동심:마음이 외부의 충동에도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아니함),不世出(불세출: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할 만큼 뛰어남),不朽(불후:영원토록 변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함)’ 등이 있다. ‘似’자는 다른 사람과 ‘닮다.’는 뜻을 위해서 考案(고안)한 것이다.金文(금문)에 보이는 似자는 嗣(이을 사)와 以(써 이)의 결합으로 되어 있는데,嗣는 宣祖(선조)의 뒤를 잇는 사람을 뜻한다. 조상의 뒤를 잇는 사람, 혹은 흉내내는 사람의 뜻에서 ‘닮다.’의 뜻이 나타났고, 후에 ‘비슷하다.’는 뜻으로도 확대 사용됐다.用例로는 ‘似而非(사이비: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類似(유사:서로 비슷함) 등이 있다. 漢書(한서)의 記錄(기록)에 의하면 王昭君(왕소군)은 紀元前(기원전) 33년 흉노의 酋長(추장) 呼韓邪單于(호한야선우)에게 시집갈 貢女(공녀)로 뽑혔다. 당시의 상황을 西京雜記(서경잡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元帝는 궁중화가 毛延壽(모연수)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여 화첩을 만들었다. 궁녀들은 화공에게 앞다투어 賂物(뇌물)을 건네며 실제의 모습보다 예쁘게 그려줄 것을 주문하였다. 이런 가운데 화공에게 한 푼의 뇌물도 주지 않은 왕소군의 몰골이 추하게 그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화첩을 보고 왕소군을 落點(낙점)하였다. 그런데 흉노의 땅으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絶世(절세)의 佳人(가인)이 아닌가. 황제는 크게 노하여 화공 모연수를 斬刑(참형)시켰다. 흉노의 땅에 다다른 왕소군은 호한야선우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으나 異域(이역)에서의 생활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찬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겨울은 한없이 길었고 여름은 건듯 부는 바람처럼 짧았다. 어떤 詩人(시인)은 이런 왕소군의 心情(심정)을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온들 봄 같지 않도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라고 읊었다. 그녀는 春來不似春의 척박한 땅에서도 여인들에게 베 짜는 법, 바느질을 가르치는 등의 敎化(교화)에 힘썼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한나라와 흉노는 60여년간의 和平(화평)을 維持(유지)하였다고 한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씨줄날줄] 서울의 하루/육철수 논설위원

    하루의 길이는 해뜨는 시각부터 이튿날 해뜰 무렵까지의 낮과 밤일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정부터 이튿날 자정까지 24시간이다. 세계 연인들의 심금을 울린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명우(名優) 그레고리 펙(신문기자역)과 오드리 헵번(공주역)은 하루 동안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았다. 케사르와 나폴레옹은 하루 만에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니 ‘하루’는 역사상이나 개인적으로나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2005년 3월 9일 서울에선 오전 6시53분에 해가 떴다.10일 아침에는 6시51분에 일출이 있었다. 서울이 워낙 넓어 곳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는 서울의 일출·일몰 체크포인트인 동경 126도 58분, 북위 37도 33분 지점(서대문구 아현동 부근)을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다. 이 하루 밤낮 사이에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1000만 개의 인생’이 모여사는 곳이니까 겉은 그대로되 속으로는 온갖 변화무쌍한 일들이 벌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마침 서울의 평균적인 하루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나왔다.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의 하루’(2003년 기준)를 보면 서울에서는 하루에 274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103명이 하늘나라로 떠난다.199쌍이 새 가정을 꾸리며 89쌍의 부부가 갈라선다.1049건의 범죄가 발생해 시민을 불안케 하기도 한다. 소 990마리와 돼지 1만 917마리가 서울시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인간사에만 있는 줄로 알았더니, 서울도 이렇게 생명이 살아 숨쉬듯 생동감 넘치는 도시라는 걸 새삼 실감한다. 서울의 위용과 면면을 훑어 보면서 가슴아픈 게 있다면 10년 전(1993년 기준)보다 신생아의 출생이 하루에 217명이나 더 줄고, 이혼부부는 52쌍이나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2.2명에서 1.4명으로 감소한 것이다. 서울의 인구는 조선조 세종 10년(1428년)에 11만명이었는데 지금은 100배 불어난 1028만명이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서울도 600년간 풍상을 견뎌 오늘에 이른 것이다. 세계의 중심도시로 우뚝 선 서울이 미래에는 어떤 ‘얼굴’로 변모해 갈지 궁금하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웰빙된장 맛을 찾아서

    웰빙된장 맛을 찾아서

    ‘장(醬)은 정월장’이라며 매운 겨울날씨에 팔을 동동 걷어붙인 어머니가 큰 항아리에 메주와 붉은 고추, 숯을 넣어 장을 담그던 모습은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장은 음식 간을 맞추는 것이지만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 ‘말이 달면 장맛이 쓰다.’는 옛말처럼 장이란 음식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장담그는 집안이 드물다고, 편안함을 좇는다고 여성들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아파트에서 메주를 띄울 수도 없고, 항아리를 놓을 공간도 마땅치 않다. 더욱이 햇볕에 따라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닫아줄 손길도 없어졌다. 된장을 사 먹게 된 시대를 거스를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정성을 담은 장맛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면 맛있는 장맛을 찾아 떠나자. ●죽염으로 만든 절 된장 충남 공주시 장기면 장군사 자락 영평사란 절에서 만든 된장을 따라 길을 나섰다. 스님이 만드는 된장이라니 우선 믿음이 간다. 환성 스님은 영평사 부속 영평식품이란 회사를 만들어 6년째 된장을 만들고 있다.“절 재정에 도움이 될까 해서 만들어 팔고 있는데 매년 손해예요.”스님이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 한 번 안 하니 아직은 덜 알려졌고, 제대로 된 된장을 만드느라 아홉번 구운 죽염을 쓰기 때문이다.“자부심없이는 된장 못 만들어요.10㎏에 2만원의 낮은 가격의 된장이 시중에 나와 있지만, 그 가격에 우리 콩 쓰면서 1년 숙성시킬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예요.” 스님은 된장은 우리 콩을 사용하는 것만큼 어떤 소금을 쓰느냐, 어떤 물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천일염은 바다가 오염되면서 함께 오염됐다. 그래서 스님은 천일염을 대나무에 넣고 800℃에서 구워내기를 8번, 그것도 부족해 아홉번째에는 1500℃로 죽염을 굽는다. 그러면 죽염이 녹아내려 자주색 덩어리가 생긴다. 그것이 유명한 자죽염이다. 물은 영평사 뒤에서 나는 천연 석간수를 사용한다. 그러니 장맛이야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웰빙’이라면서 몸에 좋은 음식들을 골라먹는데 우리가 제일 많이 먹는 것은 물하고 소금인데 어찌 그것은 가려먹지 않는지 답답하다.”고 스님은 걱정했다. 절 뒤편에 수백 개의 항아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항아리 뚜껑을 모두 열어 하늘의 좋은 기운과 신선한 공기를 받게 한다. 이렇게 하기를 여섯 달, 그래야만 제대로 된 된장이 된다. 된장은 1㎏에 1만 5000원, 고추장은 1㎏ 2만원. 간장과 죽염도 판매한다.www.young pyungsa.org,041-857-1854. ●찬란한 백제의 숨결 백제 문화를 대표하는 곳 무령왕릉이 근처에 있다.1호부터 7호분까지 발굴된 송산리 고분군 중 7호분이 바로 무령왕릉. 그러나 아쉽게도 무령왕릉에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다. 보존관계로 영구 폐쇄됐기 때문. 대신 무령왕릉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형 전시관을 볼 수 있다. 입장료 어른 1500원. 공산성은 백제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해발 110m 언덕에 있다. 산성을 따라 고즈넉한 산책로를 걷노라니 여유가 생긴다. 공산성의 길이는 모두 2.6㎞로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족하다. ●다양한 박물관을 찾아 공주에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공주박물관(gongju.museum.go.kr,041-850-6302)부터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들이 많다. 웅진교육박물관(www.wjem.or.kr,041-853-4569)은 조선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옛날 교과서와 어린이 잡지, 우표, 문서 등을 모아놓은 곳으로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인기가 많다. 충남산림박물관은 중부권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산림교육장이다. 산림박물관, 야생동물원, 연못, 팔각정 등이 있어 아이들의 야외학습에 그만이다. ●공주국밥을 찾아 공산성 앞쪽에는 근사한 식당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 새이학가든(854-2030)의 ‘따로국밥’은 유명하다. 사골 뼈와 잡뼈 등을 넣고 이틀 동안 고은 국물에 양지 사태 등을 삶아놓고 파, 마늘, 소금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을 풀면 그 맛이 얼큰하고 담백하다. 공주에 가면 꼭 들러볼 만한 집이다. 국밥 5000원. 아이들과 함께라면 장수고을(856-0208)도 강추. 돌솥에 막 지은 밥과 18가지 반찬이 함께 나오는데 가격은 1인분에 4000원으로 저렴하다. ■ 광양 나종년 농장 가볼까 ●신지식인이 만드는 된장 볕 좋은 전남 광양 백운산 자락에 자리잡은 나종년 농장(061-762-3937)은 고로쇠 된장으로 유명한 집. 집에 들어서니 메주를 한창 닦고 있던 할머니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흘깃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장 담그는 날은 바빠서 원래 남의 집 방문을 삼가는 것이 예의인 것을…” 어쩔 줄 몰라 머리를 긁적이고 서 있느니, 인상좋은 나종년씨가 인사를 건넸다.“저희 어머니는 장 담그는 날 사람들이 오는 것을 싫어하세요….” 나씨의 모친 정정원 할머니는 손맛뿐 아니라 마음가짐까지 옛날방식 그대로였다. 올해 신지식인에 선정된 나씨는 어머니의 손맛에 과학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우리의 전통음식은 그냥 하던 대로, 관습적인 부분이 많은데 이것을 분석해보면 그렇게 과학적일 수 없습니다.”라며 선조들의 생활속 지혜에 감탄했다. 나씨는 백운산에서 나는 고로쇠 물로 장을 담근다. 나씨 가의 장은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의 성분검사결과, 뼈에 이로운 칼슘이 다량 함유되었으며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이렇게 고로쇠수액으로 만든 된장과 간장 덕에 그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앞으로도 더덕, 도라지 간장, 재첩된장, 쑥된장 등 다양한 기능성 장류에 도전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된장 1㎏에 1만원, 고추장 1만 2000원. ●남도의 명산 백운산 광양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남해안 최고봉인 백운산. 해발 1218m로 전남에서는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며, 주능선이 16㎞에 이르는 큰 산이다. 또한 4월에는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백운산은 ‘신비의 약수’ 고로쇠나무 수액이 한창이다.8개 마을의 민박농가 174농가에서 채취 판매하고 있으며 18ℓ 한 통에 5만원. 광양시청 산림과(061)797-2423. 또 동곡계곡에 만들어진 백운산 자연휴양림은 신발을 두손에 들고 맨발로 황토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황톳길, 등산로, 산책로 등이 좋다. 입장료 성인 1000원. 주차료 2000원. ●천년의 역사를 느끼며 나종년농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옥룡사지가 있다. 옥룡사는 신라 말에 조그만 암자였던 것을 도선국사가 864년부터 35년 간 거처하며 수백 명의 제자들을 키운 곳이다. 하지만 1878년 화재로 소실된 후 폐찰됐다. 지금은 절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천년 세월의 찬란했던 당시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옥룡사지 입구에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7000여 그루의 동백림은 해마다 이맘때면 붉은색으로 장관을 이룬다. 이 밖에 광양읍에는 16세기 광양현감 박세후가 만든 ‘유당공원’이 고을의 깊은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유당공원은 수령 400년의 이팝나무를 비롯, 수백년 묵은 고목 수십 그루와 연못이 조화를 이룬 고유의 정원이다. ●광양의 별미 불고기 광양을 대표하는 음식이 불고기.한국식당(761-9292)은 4대째 가업을 이은 불고기집이다. 고기에 양념이 거의 없는 선홍빛의 고기가 한 접시 나온다. 한우의 등심을 얇게 썰어서인지 고기 군데군데 떡심이 붙어 있다. “불고기의 맛은 고기를 손질하는 기술과 양념하는 기술이 맛을 좌우합니다. 갓 잡은 한우의 등심에 붙은 힘줄과 비계를 떼어내고 살코기는 결 반대로 얇게 썰어 내어 손님이 주문하면 바로 양념에 묻혀서 냅니다.”라고 주인 박영희(54)씨는 말한다. 우윳빛 누룽지도 별미. 불고기는 1인분에 1만 3000원. 누룽지는 2000원. 광양읍사무소 뒤에 있다. ● 전통된장이란 발효식품인 우리의 전통 된장이 몸에 좋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맛과 향이 사먹는 된장이나 일본 된장과는 구분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바실러스(Bacillus)라는 세균 때문이다. 즉 메주와 된장은 새끼줄이나 짚을 좋아하는 세균, 곰팡이, 효모 등이 작용하여 혈전용해능력, 항암효과 등 각종 효능을 갖는다. 우리 전통된장은 보통 음력 10월에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볏짚에 묶어 약 1개월 동안 두어 미생물을 자연배양한다. 정월 초에 30℃ 내외의 방에서 15일 정도 발효시킨다. 이때 메주의 표면이 갈라지고 그 틈에 각종 세균과 미생물이 자란다. 다음에는 메주를 씻고 잘게 부숴 말린 다음 항아리에 물과 소금을 적당량 섞어 장을 담근다. 그다음 3개월이 지나면 물과 메주를 분리한다. 그 물을 달이면 간장이 되고, 메주는 곱게 갈아 풀과 소금을 넣어 항아리에 담아 6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된장이 맛있게 익는다. 대표적인 슬로 푸드인 셈이다. 개량된장은 곰팡이의 일종인 황국균을 쌀에 미리 길러 콩과 섞어 만드는데 시간도 단축되고 간편하다. 하지만 1년 동안 항아리에서 숨을 쉬며 적당한 햇살과 좋은 공기로 발효시킨 전통된장과 2주일만에 뚝딱 만들 수 있는 된장을 비교할 수는 없다. ■ 가볼만한 된장마을 ●안성 서일농원 1991년부터 장을 만들기 시작한 서일농원은 수천 개의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있는 놓여 있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주인 서분례씨가 옛 문헌의 고증을 통해 철저하게 된장을 만들고 있다. 된장 1㎏ 2만 5000원, 고추장 4만원.(031)678-3171. ●양평 수진원 수진원은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을 만든다. 물론 농약을 전혀 치지 않으며 황금색의 태광콩만을 고집한다.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는 간장, 즉 5년 숙성시킨 조선간장이 유명하다. 된장 900g 1만 2000원, 고추장 500g 2만원. 간장 500㎖ 1만원.(031)773-3747. ●정선 메주와 첼리스트 첼리스트가 만드는 된장으로 익히 알려진 도완녀씨가 강원도 햇콩과 두메산골의 공기와 햇볕, 깨끗한 물을 버무려 예술된장을 탄생시킨다. 청국장환과 된장환까지 제품도 다양하다. 된장 550g 9900원. 고추장 550g 1만 1900원. 청국장환 300g 2만원.(033)562-2710 ●보성 성원식품 보성에서 차밭을 하던 안효성씨가 우연히 된장을 관심을 갖게 되면서 녹차향이 담긴 기능성 된장이 탄생했다. 전통된장보다 녹차의 향 때문인지 된장냄새가 덜하며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 녹차된장 1㎏ 1만 5000원, 녹차고추장 2㎏ 2만원.(061)853-3529. 글· 사 진 광양·공주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변신된장 쌩뚱맛죠 ● 된장 치킨 샐러드 재료 닭 가슴살 6쪽, 양상추 1/5통, 샐러드용 야채 적당량, 식용유 2컵, 올리브 기름 2큰술,튀김옷(밀가루 1컵, 달걀 1개, 된장물(된장 1큰술, 물 1/2컵), 밀가루 조금),닭양념(양파즙 2큰술, 청주 1큰술, 소금·후춧가루 조금씩),된장소스(된장 2큰술, 마요네즈 3큰술, 머스터드소스 1큰술, 꿀 2큰술) 만드는 법 (1)닭 가슴살은 손가락 굵기로 길쭉하게 썰어 준비한 양념을 넣고 섞은 다음 간이 배도록 잠시 재어 둔다.(2)그릇에 밀가루를 담고 밑간한 닭고기를 넣어 애벌로 밀가루옷을 입힌 후 가볍게 턴다.(3)된장 1큰술을 물 1/2컵에 걸러 풀어 고운 된장물을 만든 다음 밀가루에 붓는다. 여기에 달걀을 깨뜨려 넣고 고루 섞어 튀김옷을 만든다.(4)밀가루옷 입힌 닭고기를 튀김옷에 넣었다가 건진 후 180℃로 끓는 기름에 넣어 바삭하게 튀겨 건진다.(5)양상추를 비롯한 샐러드용 야채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턴 후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올리브 기름으로 가볍게 버무린다.(6)준비한 소스 재료를 한데 넣고 고루 섞어 소스를 만든다.(7)야채와 닭튀김을 서로 어우러지도록 담은 후 소스를 듬뿍 끼얹는다. ● 두부 바지락 된장소스찜 재료 두부 1모, 바지락 300g, 대파 1/2뿌리, 붉은고추 1개, 다진 파슬리 1작은술, 된장·식용유 1큰술씩, 카레가루 2작은술, 소금 조금 만드는 법 (1)두부는 씻어 물기를 닦은 다음 주사위 모양으로 썬다. 썬 두부는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소금을 조금 뿌려 간하면서 볶는다.(2)바지락은 연한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토하게 한 다음 껍데기끼리 마주 비벼가며 깨끗이 씻는다.(3)냄비에 물 2컵을 붓고 깨끗이 손질한 바지락을 안친 후 대파를 넣어 삶는다. 바지락이 익어 입이 벌어지면 불에서 내린다.(4)바지락 삶은 물에 된장, 카레가루를 넣어 고루 푼 다음 중간 불로 끓인다. 조개 삶은 국물 자체가 짭짤하고 된장의 짠맛이 있으므로 간은 따로 하지 않는다.(5)그릇에 볶은 두부를 담고 된장, 카레가루를 풀어 끓인 (4)의 바지락찜을 떠서 얹은 다음 다진 파슬리와 붉은 고추를 뿌리듯 얹어 낸다. ● 된장 돈가스 재료 돼지고기 안심 400g, 양배추 1/4개, 오이·당근 1/2개씩, 붉은 양배춧잎 3장, 치커리 조금, 식용유 2컵, 된장 2큰술, 물엿 1큰술,돼지고기 양념(청주 2큰술, 양파즙 5큰술, 소금·후춧가루 조금씩),튀김옷(달걀 2개, 빵가루 1컵, 밀가루 1/2컵),된장소스(된장 2큰술, 토마토 케첩 5큰술, 설탕 1작은술, 물 1/4컵) 만드는 법 (1)돼지고기는 돈가스용으로 준비해 앞뒤로 잔 칼집을 넣은 후 양파를 갈아 넣고 소금·후춧가루를 뿌려 밑양념을 한다.(2)밑양념한 돼지고기에 된장과 물엿 섞은 것을 고루 발라 잠시 그대로 둔다.(3)된장 바른 돈가스에 밀가루옷을 입힌 후 달걀물에 담갔다가 빵가루를 묻혀 튀김옷을 입힌다. 마지막에 빵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가볍게 누른다.(4)끓는 기름에 튀김옷을 입힌 돈가스를 넣어 바삭하게 튀긴 후 건져 기름기를 뺀다.(5)양배추와 붉은 양배추는 굵은 심을 도려낸 후 곱게 채 썰어 물에 담갔다가 건지고, 오이와 당근도 채 썬다.(6)튀긴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접시에 담고 손질한 야채를 곁들인 후, 준비한 소스 재료를 고루 섞어 듬뿍 끼얹는다. ● 북어포 된장구이 재료 북어포 2마리, 참기름 1큰술, 통깨 1작은술, 식용유 3큰술,된장 양념장(된장·다진 실파 3큰술씩, 다진 붉은고추 2큰술, 청주 1큰술, 참기름·고춧가루 1/2큰술씩, 물엿·설탕 1작은술씩) 만드는 법 (1)북어포는 대가리를 잘라내고 반으로 자른 후 물에 담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불린다. 불린 북어포는 흐르는 물에 한 번 씻어 물기를 충분히 뺀다.(2)된장양념 재료를 분량대로 넣고 고루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3)물기를 뺀 북어포에 된장 양념장을 고루 바른 후 양념장이 충분히 배어들도록 잠시 그대로 둔다.(4)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양념을 바르지 않는 껍질 쪽이 아래로 가게 놓아 한 번 구운 후 다시 뒤집어 다른 면도 익힌다.(5)노르스름하게 구운 북어포를 접시에 담고 참기름과 통깨를 뿌려 맛을 더한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놓으면 편리하다. ■ 사진 도서출판 리스컵 제공 ■ 그때그때 발라~요…된장소스 6가지 ‘된장요리의 달인’ 최승주씨는 여성잡지에서 10여년간 요리를 진행하다 손맛과 적성에 맞아 요리연구가로 방향을 돌렸다. 서울 서초동에서 올리브쿠킹(02-568-8141)이란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그는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요리를 많이 소개한다. 집에서 담가 먹던 된장·판매 된장·음식점의 된장에서 맛의 차이를 느끼면서 된장에 관심을 집중, 토속음식에서 퓨전까지 된장요리 65가지를 소개한 ‘몸에 좋은 된장요리’란 책도 냈다. ● 된장, 정말 맛있네 ‘음식 맛은 장맛이다.’,‘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속담이 있다. 예로부터 장은 우리 음식문화의 근본이자 음식 맛을 내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조미료로 자연히 장에 관련된 속담도 많다. 그런데 우리음식 맛의 근본인 된장은 늘 밥상에 오르지만 의외로 된장요리 전문점을 찾기 어렵다. 대체로 ‘된장요리’ 하면 된장찌개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게다. 하지만 된장 샤부샤부, 된장수육, 된장 칼국수 등 된장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장맛을 찾아 1년 넘게 전국을 다녔다고 하면,‘어느 집 장맛이 제일이냐?’ ‘된장요리 맛집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장맛은 어릴 적부터 먹던 입맛에 따라 기호도가 달라지므로 쉽사리 추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요하게 된장요리 맛집을 캐묻는 이들에게 된장으로 맛을 낸 음식도 먹고 장맛도 볼 수 있는 곳을 권한다. 경기도의 슬로푸드 마을로 선정된 파주의 통일촌에 가면 장단콩마을식당(031-953-7600)이 있어 장으로 만든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지난 1987년부터 관광객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숟가락을 들고 장독까지 따라올 정도로 장맛이 남다른 곳이다. 직접 농사지은 장단콩으로 담근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장떡 맛이 구수하고 깊다. 된장과 간장으로 맛을 낸 장아찌와 나물 등 밑반찬도 감칠맛이 제대로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질마재 고개 국도변의 호산죽염된장(043-832-1388)은 장을 사가는 사람들에게 손맛과 장맛이 어우러진 밥상을 차려낸다. 된장을 사러 왔다가 공짜로 한끼 대접받는 음식이라 맛에 후한 점수를 매기는 건 결코 아니다. 직접 장을 담그는 이정림씨의 요리솜씨가 쏠쏠해서다. 된장찌개와 장아찌 맛이 토속적이다. 이 집의 된장양념 돼지고기 숯불구이는 특유의 누린내가 나지 않고 뒷맛도 느끼함이 덜하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의 전통장집 서일농원에 있는 전통음식점 솔리(031-673-3171)도 된장한정식이 유명하다.‘솔리’밥상에는 된장찌개를 중심으로 더덕, 가죽, 감, 미역, 무, 깻잎, 파래 등 장아찌와 쌈을 싸먹을 수 있는 야채가 나온다. 음식 맛을 평하자면 평균 이상이지만, 유명세에 비해 깊은 맛은 떨어지는 편. 된장찌개와 장아찌 등 전체적으로 짠맛이 약간 강하다. 이밖에 특별한 된장요리를 원한다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바로 옆에 있는 깡장집(02-720-6152)도 들 수 있다. 뚝배기에 된장을 넉넉히 깔고 그 위에 돼지고기, 양파, 오징어, 마늘, 청양고추를 넣고 자작하게 끓여낸다. 청양고추와 고추장이 들어가 칼칼한 끝맛이 입맛을 돋우는 깡장에다 밥을 비벼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정말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오장동 사거리 골목 안에 있는 장칼국수(02-2276-1715)에서는 된장국물로 끓인 독특한 칼국수와 수제비를 맛볼 수 있다. 오로지 된장으로 맛을 내고, 근대나 아욱, 감자와 같이 된장과 잘 어울리는 야채가 듬뿍 들어가 담백하고 뒷맛이 시원하다. 특히 술 마신 다음날 땀 흘리며 한 그릇 비우면 속이 후련해진다. 인천시 구월동 된장요리전문점 해월 토장집(032-467-6221)은 매스컴 보도로 유명해진 집이다. 된장수육, 토장전골, 된장동태찜, 된장비빔밥, 된장야채전 등 특색있는 된장요리를 맛보기에 좋은 곳이다. 된장육수에 새우, 낙지, 조개 등 해물과 야채를 익혀 샤부샤부식으로 소스에 찍어 먹고 시원한 국물로는 소면이나 밥을 넣어 비벼 먹는 토장전골 맛이 이색적이다. 푸드칼럼니스트 이진랑 이진랑씨는 라디오와 주·월간지에서 푸드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음식평론을 쓰고 있다.‘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약 된장의 달인들’이란 책의 공동 저자인 그는 “단순히 먹을거리 정보 전달에 머물지 않고 음식문화를 읽어내겠다.”고 말했다.
  •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기생 신세를 면하게 되자 이듬해 봄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퇴계가 70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두향은 이곳 적성산 초당에서 22년간을 수절하였다. 두향이가 이퇴계를 만난 것이 몇 살 때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퇴계가 숨을 거뒀을 때에는 아마도 초로의 아낙네였을 것이다. 22년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재회한 적이 없고 서신도 교환한 적은 없다. 다만 이퇴계가 말년에 지은 시 한 수가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연애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 보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해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이 시의 처음 두 행은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이퇴계의 근황을 알리는 것이지만 뒤의 두 행은 비록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매화를 보고 거문고를 타면서 지냈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랑 노래가 아닐 것인가. 나는 술을 받쳐 올리고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배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술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원래 흠향(歆饗)한 술은 음복(飮福)하는 법. 나는 빈 컵에 다시 술을 따라 나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고마운 선원에게 잔을 내밀며 말하였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곁에 서서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선뜻 술잔을 받았다. “5월 초에 오셨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요.” 사내는 술을 마시며 대답하였다. “해마다 5월 초면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제가 올려집니다. 그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지요. 축문도 읽고 분향도 올리지요.” 무덤 앞까지 밀려든 강물은 소용돌이를 치면서 굽이치고 있었다. 선조 3년 경오년(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밤 유시(酉時). 이퇴계는 마침내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퇴계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전해 듣자 목욕재계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소복까지 준비하고 단신으로 안동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단양에서 안동까지 200리 험난한 태산준령을 여자의 몸으로 나흘 만에 무사히 안동고을을 거쳐 도산서당이 있는 토계리까지 도착한 두향은 집집마다 걸려진 만장(輓章)을 보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해가 안치된 한서암(寒棲庵)을 보며 밤을 새워 망곡을 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서거하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이퇴계에게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였다. 그런 관계로 장례는 의정예법(議政禮法)에 따라 이듬해 3월에야 거행한다는 말을 듣고 두향은 그대로 단양으로 돌아와 초당에 궤연(筵)을 꾸미고 신주를 모셔 놓은 후에 아침저녁 상식을 올리며 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내가 죽으면 그 시신을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선대 위에 묻어 주옵소서.”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9) 십승지란 어디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9) 십승지란 어디인가

    “나로 말하면 흔히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에 견주어 조선 최고의 예언자라 불리는 남사고(南師古·1509∼1571)라오. 호는 격암(格菴)이라 했고, 학문을 업으로 삼았으되 평생 유가(儒家)의 경전이라곤 그저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을 뿐, 그밖엔 온 마음을 쏟아 역학·풍수·천문·복서(卜筮)·관상 등을 즐겨 배웠고, 마침내 도통해 대예언가 소리를 듣게 된 거였지. 오늘날에도 ‘남사고비결’이니 ‘격암유록’이란 비결 책을 내가 쓴 것으로 다들 믿고 있다던데. 그야 어쨌든 내 예언은 항상 정확히 들어맞았소.1575년(선조8) 조정이 동서 양편으로 분당될 것을 난 미리 짐작했고, 뒤이어 임진왜란(1592)이 발생할 것도 진즉에 알고 있었소. 사람은 영물이라, 열심히 도를 닦아 이루지 못할 게 그 무어겠소? 풍수에 관심이 깊은 나는 조선8도의 명산을 빠짐없이 둘러보았고, 그 결과 미래까지 꿰뚫어보는 안목을 얻었다고나 할까.” 남사고는 정감록 산책을 함께하고 싶었는지 과거로부터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는 남사고 자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해놨다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설명이다. 남사고는 본래 십승지의 원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정감록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돼 있는지는 사실 미지수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며 복을 듬뿍 주는 길지(吉地)다. 남사고는 편지의 서두에서 예언서 가운데 가장 체계적으로 십승지의 문제를 다룬 ‘감결’의 성격을 논의한다. 노대가의 안광이 날카롭다. ●감결의 성격 “정감이 이심과 이연 형제와 더불어 방방곡곡을 유람하면서 조선의 국운을 예언한 대화체 예언서가 바로 ‘감결’ 아니겠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정감은 천문에 밝았고 이심은 아마 풍수에 정통했나 보오. 그런가 하면 이연은 세상사를 이모저모 따져 두 사람의 말을 보충한 것 같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세 사람이 금강산에서 유람을 시작, 삼각산을 거쳐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가야산에서 대화를 마친단 점이야. 서북쪽에도 묘향산, 구월산 같은 명산이 많은데 거기엔 발길이 전혀 미치지 않아. 이걸 보면 정감록은 서북지방을 버려진 땅으로 본 모양이야. 그와 대조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을 몹시 중시하고 있어. 하긴 이 3두 산이 백두대간의 허리니까. 또 하나 재밌는 점이 있어.‘감결’은 역사상 한국의 수도가 평양, 송도, 한양, 계룡산, 가야산으로 옮긴다고 봤다는 점이지. 나라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한단 말인데, 남부지방이 한반도의 중심이란 이야기야. 그렇담 요새 행정수도를 공주 연기 쪽으로 옮긴다고 야단들인데 그도 그럴듯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 여하튼 말세엔 천지가 온통 전쟁, 질병, 경제대란, 환경파괴 등으로 한바탕 진통을 치르게 돼 있다고 하지. 바로 그때 십승지를 찾아가야 하는 거야. 십승지는 전쟁과 흉년이 들지 않으므로 지각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십승지로 들어가야 옳겠지. 글쎄, 나도 알아. 십승지가 과연 특정한 공간이냐 아니면 어떤 특수한 정신적 단계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단 걸 말이지.” ●십승지의 으뜸 풍기 금계촌과 예천 금당동 십승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논쟁을 남사고와 벌이고도 싶지만 그는 내게 그럴 겨를을 안 준다. 대신 그의 편지는 십승지를 하나씩 직접 거론한다. “이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를 하나씩 소개해 보자고.‘감결’의 내용을 줄기로 삼고 그밖에 다른 예언서들도 참고한다면 설명이 제법 들을 만할 거야. 첫째가는 곳은 풍기(豊基)지.‘토정가장결’에서도 풍기를 피난처로 손꼽았어. 내가 쓴 걸로 돼 있는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菴山水十勝保吉之地)’에선 산수가 은밀한 태백·소백 두 산의 그늘이 남쪽으로 드리워진 풍기라고 했어. 풍기의 예에서 보듯 한국 최고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에 포근히 안겨 있단 말야. 난 또 풍기의 길지를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이라고 좀더 자세히 밝혀놓기도 했어. 금계촌은 마을 북쪽에 소백산이 있고 산 아래 두 개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야.‘피장처’에도 역시 같은 말이 나오지. 물론 내가 지금 언급한 ‘남격암’ 등의 비결 책들은 모두 정감록의 일부야.” 풍기 금계촌이라면 나도 잘 안다. 이미 답사를 다녀온 곳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의 답사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다. 남사고의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풍기 못지않은 곳이 예천(醴泉)이야.‘토정가장결’에도 예천이 나와 있지.‘남격암’에선 예천에서도 금당동(金堂洞) 북쪽이라고 제법 자세히 밝혔어. 그러고 보면 내 책이 다른 비결서에 비해 역시 가장 세밀해. 금당동은 사실 큰 길에서 가까워. 십승지로선 이례적인 경우인데 그래도 병란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평안을 누릴 만한 곳이야. 다만 임금이 이쪽으로 피난을 올 경우엔 화가 미쳐.” 아마도 남사고는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봉화까지 피난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엄밀한 의미로는 ‘남격암’을 남사고의 저서라 주장할 근거가 없고 그저 속설일 뿐이다. ●경상도의 십승지 남사고의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십승지를 선정하는 1차적인 기준은 풍수다. 특히 백두대간 가운데서도 태백산 이남에서 길지를 구하고 있다. 십승지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풍기와 예천은 행정구역상 경상도에 속한다. 둘째, 셋째, 넷째 그리고 여덟째 십승지도 역시 그러하다. 적어도 십승지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단 말이다. 경상도는 퇴계 이황을 비롯해 큰 선비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라 세평이 좋아 그렇게 된 점도 있겠다. “십승지의 둘째는 안동(安東) 화곡(華谷)이야.‘남격암’에선 화산(花山)의 북쪽에 이른바 소령고기(召嶺古基)가 있다고 했고 그곳은 내성현(奈城縣)의 동쪽, 태백산의 양지바른 곳이라고 토를 달았어.‘두사총비결’에선 그저 영가(안동)의 백운산이라 했고,‘토정가장결’은 그저 안동이라고만 썼는데,‘피장처’엔 경상도 내성현의 북면, 안동 북면 소라고기부 동쪽과 극히 양지바른 서쪽이라고 말했지. 비결 책마다 십승지의 설정이 꽤 다르게 돼 있군. 어느 쪽이 맞느냐 하는 문제는 단언하기 어렵지. 사람들 생각이 서로 다른 걸 어떡하겠어? 셋째 십승지는 개령(開寧)의 용궁(龍宮)인데, 어느 비결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아마 한때 각광을 받았지만 그 뒤론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나봐. 넷째는 가야(伽倻)라고.‘남격암’엔 가야산 밑 남쪽에 만수동(萬壽洞)이 있다며 그 둘레는 200리가량 되어 몸을 보전할 수 있지만 가야산의 동북쪽은 나쁘다고 했어. 만수동이란 이름은 사실 각지에 다 있었어. 만 살까지 살 수 있는 마을이라니 이름이 좋지 않아? ‘감결’이 여덟째로 꼽는 십승지 봉화(奉化)도 역시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가까운 곳이지.‘남격암’도 봉화를 언급했어. 열 번째 십승지도 태백 즉, 태백산이라 했지만 강원도 쪽보다는 경상도를 중시한 느낌이고, 심지어 아홉 번째 십승지인 지리산도 전라도에만 속한 것은 아니거든. 이렇게 보면 십승지의 대부분은 경상도 땅에 있다고나 할까.” ●충청도의 십승지 “충청도엔 모두 세 곳의 십승지가 있지. 모두 소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어.‘감결’이 다섯째로 언급한 단춘(丹春)이 우선 주목되네.‘남격암’은 단양(丹陽)군의 영춘(永春)에 있다고 했고,‘피장처’에선 춘양면의 땅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단양 가차촌을 거론하지. 깊고 기이하고 경치 좋은 곳이라는데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여섯째 십승지는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이야.‘남격암’은 공주의 유구(維鳩)·마곡 두 물줄기 사이로 보았지. 그 둘레가 백리나 되는데 전쟁의 피해를 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거론되는 신행정수도가 바로 이쪽이지. 명당이야! 그런데 말이야, 내 후배인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에 이런 말을 적어 놨더군. 무성산(茂盛山·공주의 서쪽 산)은 차령의 서쪽 지맥의 끝이다. 산세가 빙 돌며 마곡사와 유구역을 만들었다. 그 골짜기의 마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많고, 논이 기름지며, 목화, 수수, 조를 심기에 알맞다. 사대부와 평민이 한 번 여기 들어와 살게 되면, 풍년과 흉년을 잊는다. 생활이 넉넉하게 돼 다시 이사를 떠날 염려가 적다. 대체로 낙토(樂土)라 하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내 말을 인용했어.‘남사고는 십승기란 글에서 유구와 마곡의 두 강 사이가 병란을 피할 만한 땅이라 했다.’고 말이지. 내 십승기는 결국 유실됐지만 여하튼 난 십승지를 피난지로만 봤어. 그런데 이중환의 안목은 나보다 깊었던 거야.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단 말야.” 이중환은 1721년에 일어난 신임사화(소론이 노론을 무고한 사건)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았다. 그 뒤 그는 다시 등용되지 못한 채 평생 전국을 유람했다. 그의 책 ‘택리지’ 가운데는 십승지 가운데서도 유독 유구와 마곡에 관해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중환은 기후가 좋고 물산도 풍부해 양반은 물론 평민까지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그 지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밖에 일곱째 십승지는 진천(鎭川)의 목천(木川)이야. 역시 백두대간의 한 마디지. 그런데 말이야, 다른 비결 책들엔 목천에 대한 설명이 조금도 없어. 이처럼 십승지라 해도 사람들의 선호도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어.” 남사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른바 십승지란 것은 일정하게 고정된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보기만은 어려운 것 같다. 다음 기회에 좀더 알아볼 생각이지만, 비결 책마다 십승지에 준하는 수많은 명당이 열거돼 있다. ●전라도의 십승지 “전라도 땅에 있는 십승지는 하나뿐이야.‘감결’이 아홉째로 언급한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이 그거지.‘남격암’엔 이를 지리산이라고도 했고 더욱 구체적인 설명도 나와 있어. 운봉 땅 두류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백리 안은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라고 말이야. 이곳에서 장차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들이 연달아 나온다고도 했어.‘토정가장결’에서도 운봉의 두류산은 지형이 기이하고 아름답기가 궁기(弓其)만은 못해도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어. 궁기란 나중에 말하겠지만 한국 최고의 명당인데 지리산은 그 다음이란 뜻이야. 내가 사랑하는 후배 이중환도 지리산을 극찬했어.” 내가 택리지를 살펴보았더니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다.“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瀛洲)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이다.” 이중환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리산에 태을성신(太乙星神·하늘 북쪽에 있어서 병란, 재화 및 생사를 다스리는 신령한 별)이 산다고 믿었다. 그밖에 여러 신선들이 그 산에 모인다고도 생각했다. 지리산은 계곡이 깊고 크며 땅이 기름진 데다 골짜기의 바깥은 좁으나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어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숨어 살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산속 깊은 데서도 농사가 잘 돼 승속(僧俗)이 섞여 산다는데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문제가 없단다. 이중환은 지리산 사람들은 흉년을 모르고 살므로 아예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고 불렀다. 지리산을 백두대간의 종착점으로 인식한 점에서 이중환의 생각은 ‘정감록’의 지리관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중환은 정감록에 미처 언급되지 못한 중요한 사실도 거론했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지리산 주변의 경제 여건이 좋다는 점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난세에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택리지’의 설명은 이어진다.“지리산 남쪽에 화개동(花開洞·악양동의 동남)과 악양동(岳陽洞·지리산 남쪽 섬진강변)이 있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사는데 산수가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심해지자 화가 일어날 것을 짐작했다. 관직을 버린 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악양동에 숨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찾아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한유한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도 신선이 돼 가야산과 지리산을 왕래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선조 때 한 스님이 지리산의 바위틈에서 종이 한 장을 주웠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동쪽나라 화개동은 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신선이 옥 베개를 밀고 일어나 보니 이 몸이 이 세상에서 벌써 천년을 지냈구나(仙人推玉枕 身世千年).” 이중환의 말로는 그 필적이 최치원의 것과 동일했다 한다. 남사고 역시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이중환은 신선의 땅 지리산에서 최고의 복지로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 두 곳을 손꼽았지. 만수동은 조선후기에 구품대(九品臺)로 알려진 곳이요, 청학동은 매계(梅溪)란 말야.18세기부터 조금씩 사람들이 출입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리산 북쪽도 나쁘지 않아. 경상도 함양 땅인데 그곳의 영원동(靈源洞·지리산 반야봉 북쪽), 군자사(君子寺·함양군 마천면 군자동) 그리고 유점촌(鍮店村)을 일찍이 난 복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도계(道界)를 뛰어넘은 십승지 지리산에 관한 이중환과 남사고의 설명을 음미해 보니 지리산을 전라도만의 십승지라고 주장하기는 어렵겠다. 만수동, 청학동 등의 지명은 누구도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군자사 등은 행정구역상 엄연히 경상도 땅이었다. 사실 지리산은 조선시대에 전라 경상 2도에 걸쳐 있었으므로, 도계를 초월한 십승지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따지고 보면 지리산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가장 큰 마디인 소백산도 그러했다. 특정한 지역이 과연 십승지가 될 만한가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곳이 백두대간에 속한 명산이 빚어놓은 명당이냐 하는 것이었다. 십승지에 대한 남사고의 설명은 다음회로 이어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