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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3)강역(江域)-자연상징(상)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3)강역(江域)-자연상징(상)

    한반도의 모양은 흔히 대륙으로 도약하려고 웅크린 호랑이에 비유된다. 이때 호랑이의 등뼈에 해당하는 것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백두대간이란 용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신경준의 저술로 알려진 ‘산경표(山經表)’에 처음 등장한다. 민족의 발상지 백두산 우리 조상들은 산을 이어지는 줄기로 파악하였는데, 우리 국토의 뿌리인 백두산에서 시작해 낭림·금강·설악산 등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속리·덕유산으로 이어져 지리산에서 멈춘 가장 크고 뚜렷한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불렀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생명선이다. 한반도의 주요 강이 백두대간에서 시작되고, 대부분의 산이 백두대간으로 연결되어 생명의 통로가 된다. 또한 백두대간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의 저장고이다. 옛 사람들에게 백두대간은 신앙의 대상이자 수련의 장소였으며,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고 고달픈 삶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두대간은 가장 중요한 자연유산이며, 여가와 관광, 그리고 교육의 공간으로 그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백두대간의 시작인 백두산(白頭山)은 우리나라 산의 시조(始祖)이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졌는데,‘조선왕조실록’에는 1597·1668·1702년에도 백두산에서 분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큰 산으로, 머리에는 천지(天池)라는 커다란 호수를 이고 있어 사람들이 외경심과 신비감을 가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여기고, 성산(聖山) 또는 영산(靈山)으로 신성시해 왔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에 걸쳐 있다. 그래서 백두산을 둘러싼 양국의 분쟁도 끊이지 않았는데, 최근 중국이 백두산을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상품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마음이 편치 않다. 백두대간에 속한 산 가운데 경치로는 금강산(金剛山)이 최고로 꼽힌다. 화강암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를 받아 만들어진 ‘일만 이천 봉’과 기암괴석, 그리고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인들도 금강산을 직접 구경하는 것을 소원하였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도 금강산 구경을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뿐 아니라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답사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금강산은 사찰과 문화재, 전설을 많이 간직한 산으로도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산 여행이 오늘날의 해외여행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을 통해 간접 여행하는 ‘와유(臥遊)’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금강산은 남북화해의 상징이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은 아직 금강산의 절반인 외금강만 구경할 수 있는 반쪽 관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더 좋아했고 그래서 더 많이 찾았던 내금강을 하루빨리 구경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며칠 전 광복절을 맞아 생각나는 강역으로 독도(獨島)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 국토의 동쪽 끝인 독도는 동해(東海) 한가운데 있는 섬이다. 독도는 행정구역 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이며, 우편번호는 799-805이다.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독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라, 동도와 서도 2개의 큰 섬과 주위에 89개의 부속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독도(獨島)’라고 표기해 ‘외로운 섬’,‘홀로 섬’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돌섬’을 ‘독섬’으로 발음하면서 ‘독도’로 표기한 것이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측 자료에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나, 일본은 계속해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강역과 관련된 민족문화상징으로 독도를 꼽은 것은 이러한 일본의 억지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우리 국토의 막내이기 때문이다. 일본자료에도 “한국땅” 독도 독도를 품고 있는 동해(東海)도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바다이다. 동해를 둘러싼 문제는 영역이 아닌 명칭 때문인데, 같은 바다를 두고 우리는 동해(East Sea), 일본은 일본해(Sea of Japan)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동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기원전 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에 대한 기사에 동해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약 2000년 전부터 동해라 부른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자체가 7세기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해 명칭이 일본해에 비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만큼 동해는 동해로 불러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지도에서 동해 표기는 90% 이상이 일본해로 되어 있다. 국제사회에서 동해가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족문화상징에 해양강역으로 동해가 선정된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 강역에 대한 정보를 조선시대 사람의 눈으로 집대성한 것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이 지도는 한반도를 북에서 남까지 동서로 끊어 22폭으로 나누어 담았다. 이 22폭을 상하로 모두 이으면 가로 약 3.3m, 세로 약 6.7m의 거대한 대축척 전국지도가 만들어진다. 대동여지도는 한반도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렸을 뿐 아니라 백두대간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도로망·역·창고·성곽 등 각종 인문지리 정보도 풍부하게 담고 있어 19세기 중엽 우리 국토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한마디로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고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우리 문화와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문화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자연경관으로는 황토, 갯벌, 풍수 등 3가지가 선정되었다. 황토(黃土)는 한국인과 가장 친한 흙이다. 우리 조상들은 황토로 만든 집에서, 황토로 빚은 옹기에 저장한 음식을 먹으며 평생을 보냈다. 황토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할 뿐 아니라 습도도 저절로 조절된다.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종자로 쓰기 위해 황토벽에 걸어두면 이듬해 봄까지 온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화·산업화의 바람 속에서 황토벽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시멘트벽에 걸린 종자는 겨울을 나는 동안 상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황토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적당히 가열된 황토가 몸에 이로운 원적외선을 방출한다고 하여 ‘황토침대’,‘황토방’이 유행한다. 옛날 어른들이 온돌방에서 ‘지지고’ 나면 몸이 가뿐해진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자연경관 ‘황토·갯벌·풍수’ 황토는 바다의 적조 제거에도 한몫을 하며, 가축의 사료로도 쓰인다. 황토의 흡수력, 해독력을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과 가축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황토를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한하운의 시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이라는 대목이 나오듯이, 우리나라 황토가 누런색이 아닌 붉은색을 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술용어로는 ‘적색토’라 불린다. 황토는 전국적으로 나타나지만, 특히 서해안의 해발 150m 이하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에 넓게 분포한다. 갯벌은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운반해온 미세한 흙이 쌓인 해안의 평평한 땅을 말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발달한 갯벌은 그 규모에서 세계적이다. 우리는 과거 갯벌을 쓸모없거나 간척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갯벌은 일찍부터 ‘바다밭’이라 불린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갯벌에 자라는 각종 조개를 캐거나 어살을 설치해 물고기를 잡는 일은 서남해안 어민들의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우리가 갯벌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은 무분별한 대형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많이 사라지고 나서부터이다. 갯벌은 어민들의 생활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다양한 동식물이 자라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동시에, 각종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거대한 정화조’이다. 우리나라 갯벌은 국토면적의 2.5%를 차지하는데, 돈으로 따지면 연간 10조원에 가까운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갯벌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이다. 보존과 함께 지속가능한 이용도 필요할 것이다. 풍수(風水)는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된 전통적 환경사상이다. 풍수는 그 이론들이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나,8세기경 우리나라에 도입된 뒤, 우리 나름의 생각과 가치가 더해지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풍수를 묘 자리나 보는 지술(地術)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풍수는 죽은 사람의 쉴 자리보다는 산 사람들의 살 자리를 찾는 일종의 입지론이다. 풍수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수도에서부터 마을의 터 잡기까지, 그리고 도시와 마을의 공간배치와 구성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따라서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상징이 풍수인 것이다. 정치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Zoom in서울] 서울시 9급→5급 14년 단축

    [Zoom in서울] 서울시 9급→5급 14년 단축

    서울시 인사제도가 획기적으로 바뀐다. 이 제도를 적용하면 9급에서 5급까지 승진하는 데 걸리는 최단 기간은 16년이면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평균 29년 9개월이 걸렸다. 내부감사 제도를 심사평가제로 바꾸면서 승진기간이 대폭 단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이같은 인사제도는 공직사회에서 처음 시도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3일 기자간담회에서 “시민에게 질 높은 민원봉사를 하려면 직원들부터 창의적으로 신명나게 일을 해야 한다.”며 새로운 인사 및 감사제도를 도입,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감사’와 ‘심사평가’는 그 내용면에서 차원을 달리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만약 10일 이내에 처리할 업무를 감사한다면 10일을 넘긴 민원에 대해서만 과실 여부를 따지는 게 감사이고 10일이내에 잘 처리된 민원을 대상으로 왜 3일안에 처리되었는지, 왜 기한을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따져 보완점을 찾는 게 심사평가”라고 설명했다. 다시말해 구청에 30일안에 처리토록 한 건축허가 민원이 들어왔을 때 담당직원이 민원처리에 필요한 토목·교통·환경·청소·상하수도 등 관련업무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처리하면 하루만에 허가를 내줄 수 있다. 하지만 현행처럼 관련 과에 협조문을 보내고 서류답변을 기다리면 30일 안에 처리하더라도 비효율적인 업무태도가 된다. 이때 감사에선 아무런 지적을 받지 않지만 심사평가에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서울시는 곧 직제개편을 통해 경영기획실에서 제역할을 못하던 심사평가 기능을 감사관실에 넘기고 고유 감사기능은 집행적 성격을 갖도록 할 방침이다. 고유 감사기능은 심사평가에서 지적된 문제점에 대해 징계 및 개선조치 등을 다루게 된다. 아울러 공정성을 위해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감사 심의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Zoom in서울] 서울시 9급→5급 14년 단축

    [Zoom in서울] 서울시 9급→5급 14년 단축

    서울시 인사제도가 바뀌어 9급에서 5급까지 승진하는 평균기간이 현행 29년 9개월에서 16년으로 크게 단축된다. 현행 내부감사 제도를 심사평가제로 바꾸면서 승진기간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공직사회에서 첫 시도라 성공적인 시행 여부가 주목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3일 기자간담회에서 “시민에게 질 높은 민원봉사를 하려면 직원들부터 창의적으로 신나게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소신”이라며 새 인사 및 감사제도의 시행을 밝혔다. 시 관계자는 ‘감사’와 ‘심사평가’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를 들었다. 그는 “만약 10일이내에 처리할 업무에 대해 감사를 한다면,10일을 넘긴 민원에 대해서만 과실 여부를 따지는 게 감사이고 10일이내에 잘 처리된 민원을 대상으로 왜 3일안에 처리되었는지, 왜 기한을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따져 보완점을 찾는 게 심사평가”라고 설명했다. 즉 구청에 30일안에 처리토록 한 건축허가 민원이 들어왔을 때 담당직원이 민원처리에 필요한 토목·교통·환경·청소·상하수도 등 관련업무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처리하면 하루만에 허가를 내줄 수 있다. 하지만 현행처럼 관련 과에 협조문을 보내고 서류답변을 기다리면 30일 안에 처리하더라도 비효율적인 업무태도가 된다. 이 경우 감사에선 아무런 지적을 받지 않지만 심사평가에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곧 직제개편을 통해 경영기획실에서 제역할을 못하던 심사평가 기능을 감사관실에 넘기고 고유 감사기능은 집행적 성격을 갖도록 할 계획이다. 고유 감사기능은 심사평가에서 지적된 문제점에 대해 징계 및 개선조치 등을 결정하게 된다. 아울러 공정성을 위해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감사심의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공무원에 대해선 국·실장의 평가에 따라 표창, 성과금, 성과연봉, 해외여행 등 혜택을 주도록 했다. 반면 벌칙도 다양화해 징계 외에도 교육명령, 부서변경 등 인사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특히 마일리지와 포인트 개념을 도입, 일을 잘하면 파격적인 승진이 보장된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경북, 본관도 관광상품화

    경북도가 성씨의 본관(本貫)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로 해 눈길을 끌고 있다. 성씨별 유적과 문화자원 등을 관광상품으로 개발,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복안이다. 17일 경북도에 따르면 도내에 본관을 둔 청송 심씨, 안동 권씨, 경주 김씨 등 성씨별 유적과 인근 관광지를 연계한 ‘조상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관광상품을 개발, 판매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도는 우선 오는 9월말까지 안동 김·권씨, 경주 김·손씨, 영양 남씨, 풍양 조씨, 성주 이씨, 인동 장씨, 의성 김씨 등 13개 성씨 본관별 시조묘나 종택, 서원 등 관련 유적과 유품, 인근의 유명 관광지 등을 대상으로 관광상품을 만들기로 했다. 상품의 주요 내용은 조상의 시조묘나 종가, 제사, 집성촌 등을 성씨별로 파악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가훈과 가풍 등 조상의 내력, 시조 이야기, 자녀 교육관 등이다. 또 조상들의 훌륭한 업적과 그 사례, 선조들의 유물·유품을 비롯한 주요 문화재, 대종친회와 파종친회 개최 시기와 장소, 종손 소재지 등도 집중 소개한다. 본관별 제사상 차리기, 차례 지내는 법 등을 익히고 종택에 머물면서 가훈 쓰기, 전통음식 담그기 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1박 2일짜리 코스 등 다양한 관광 상품을 패키지로 내놓기로 했다. 실례로 청송 심씨 관광코스는 시조묘∼종택∼만세루(재실)∼송소고택(숙박체험)∼국립공원주왕산∼주산지∼야송미술관∼달기약수터 등으로 구성된다. 도는 이 상품이 개발되면 종친회 및 경북관광 홈페이지(나드리) 등에 관련 상품을 소개하고 조상 뿌리찾기 캠페인, 아름다운 종택 가꾸기 사업 등에도 적극 나서기로 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2007년 ‘경북방문의 해’를 앞두고 본관과 관련한 관광상품을 개발하게 됐다.”면서 “경북에 본관을 둔 전국의 후손들을 위한 유익한 교육·관광 상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문경길(하)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문경길(하)

    고모산성을 지난 옛길은 문경읍을 거쳐 새재길로 들어선다. 문경읍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하늘재길을 이용했다. 안태현(38)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하늘재는 문헌상 가장 오래된 고개로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 이사금 3년에 개통됐다.”며 “신라시대에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도로 등의 역할을 했으나 조선초 문경새재에 그 역할을 넘겨주면서 관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옛길의 중심에 있다. 당시 새재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 일행과 중앙에서 부임하는 관리들, 과거길에 올랐던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들로 늘 붐볐던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이 새재를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다. ●조선시대 한양·동래 잇는 옛길의 중심 따라서 예로부터 ‘문경’이라 하면 ‘새재’를 연상케할 정도로 문경새재의 명성은 높았다. 새재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새들도 이 고개에 막히면 넘지 못한다고 해서 유래됐다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또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옛 문헌의 기록도 있다. 그리고 ‘새’를 ‘사이’로 풀어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새로운’으로 풀어 ‘새재’로 해석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엔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전멸당한 통한도 간직하고 있다. 새재공원 입구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는 3.5㎞.‘영남제일관’이라는 현판글씨가 보인다. 주흘관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으며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이 있어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제1관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편에 큰 기념탑이 하나 나온다. 경북도가 개도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96년에 세운 타임캡슐이다. 첨성대형을 띠고 있으며 100품목 475종의 물품이 매설돼 있다. 이 캡슐은 경북개도 500주년이 되는 2396년 10월 23일에 후손들의 손에 의해 개봉된다. 타임캡슐 건너편에는 고려와 백제시대의 왕궁, 초가집 등이 들어선 KBS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장이 보인다. 이 곳이 문경새재를 ‘한국의 할리우드’로 도약시켰다.‘무인시대’,‘불멸의 이순신’,‘해신’ 등의 대하드라마가 촬영됐고 최근 흥행 신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의 장면 일부도 문경새재에서 촬영됐다. 이 곳에서 30년째 살고 있다는 이승원(58)씨는 “드라마촬영장 일대에는 20여가구의 주민들이 살았으나 지난 1996년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밑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촬영장을 지나면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이용됐던 조령원터가 나온다. 지난 1977년 두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을 벌여 기와와 토기, 자기, 담뱃대, 손칼 등이 출토 되었다. ●드라마 ‘태조왕건´등의 촬영장 조령원터에서 용추로 오르다 보면 왼편에 초가 한 채가 보인다. 문경시청 엄원식(38) 학예사는 “이 초가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을 오르던 선비와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그리고 갖가지 사연을 품고 새재길을 넘다들던 사람들이 여행의 피로를 풀고 정분을 나누던 주막이다.”고 설명했다.1993년까지 장사를 했으나 지금은 건물만 남아있다. 팔왕폭포라고도 불리는 용추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인 팔왕과 선녀가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새재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도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추 바로 위 오른쪽 길가에 있는 교구정은 관찰사들이 업무를 인수 인계하던 곳이다. 안 학예연구사는 “교구정은 조선시대 새로 도임하는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하는 관찰사가 관인을 인계하던 곳”이라며 “지금은 건물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고 주춧돌만 남아 옛 정취를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500m쯤 더 가면 훈민정음으로 쓴 ‘산불됴심’표석이 눈에 띈다. 당시에도 산불이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제2관문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조곡폭포는 근래에 문경시에서 만든 폭포. 비록 인공폭포이긴 하나 시원한 물줄기가 무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관문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은 문경새재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 설치됐다. 제1,3관문보다 100여년 앞선 것이다.1907년 일제에 의해 없어졌으나 1975년 복원됐다. 문루이름도 옛 조동문을 버리고 조곡관이라고 적었다.2관문을 지나자 관광객들 발길이 뜸했다. 안 학예연구사는 “대부분 관광객들이 2관문 옆에 있는 조곡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되돌아 간다.3관문까지 왕복하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조곡관을 지나 500m쯤 가면 자연석을 깎아 ‘새재아리랑’을 새긴 비를 만난다.‘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문경새재 넘어 갈제/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라는 노래에서 갖가지 사연을 안고 고개를 넘나들었던 나그네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새재아리랑비에서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진을 쳤다는 이진터를 지나 1㎞쯤 가면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돼 있는 동화원이 길손을 맞는다. 동화원은 제3관문 못미쳐 있는 새재의 마지막 마을이다. 고려 왕건이 남쪽을 칠때 행재소로 사용한 곳이다. 고려 공민왕은 이 곳에 행궁을 짓고 홍건적의 난을 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떠났다. 마침내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했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때 쌓았고 숙종때 중창했다. 제3관문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충주다. 제3관문 오른쪽에는 군막터가 있다. 이곳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가 있었던 곳이다. 왼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새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여기에서 빌기도 했다. 새재를 넘으면 한양은 삼 사일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문경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장원급제 길’ 문경새재 예로부터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는 한양으로 가는 길이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문경새재가 있었다. 그런데 영남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경새재를 ‘과거길’ 또는 ‘장원급제의 길’로 부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문경새재입구에는 선비상이 우뚝 서 있다. 또 제2관문에서 동화원을 지나 제3관문 아래쪽에는 책바위가 있다. 책바위에는 장원급제와 관련된 전설이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해 용한 도사를 찾아가 물으니 “집을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정성을 들여 기도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 부자는 도인의 말대로 3년 동안 아들에게 담장의 돌을 하나씩 책바위 뒤로 옮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아들의 몸이 튼튼해졌으며 공부도 열심히 해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출세해 가문을 일으켰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선비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했다는 것. 현재의 책바위는 지난 1998년 문경시가 이 전설에 따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입시 철만 되면 하루 수백여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책바위를 찾아와 합격을 빌고 간다. 문경시는 최근 책바위 주변을 새단장했다. 책바위 뒤편 돌무더기 위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6m, 폭 0.5m크기의 입석을 세운 뒤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등산로를 보수했다.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경쟁률은 자그마치 수천대 1이나 되었다.”면서 “이런 이유로 문경새재를 넘은 영남선비들의 합격률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크게 높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경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사설] 광복 61년만에 되찾는 친일파 재산

    겨레가 빛을 되찾은 지 61년만에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거나 친일행각을 벌인 자들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게 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김창국)는 오는 18일부터 친일파 재산에 대한 본격 조사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친일파 척결은 인적 차원과 물적 차원이 있으나 우리는 지난 60여년간 물적 차원의 청산은 손도 대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친일파 후손들은 친일의 대가로 선조들이 차지하게 된 땅을 찾겠다고 정부의 도움을 얻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파렴치한 행태로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번 조사작업은 광복 61년, 반민특위가 해산된지 57년만에 민족의 정기를 세우는 작업이 물적 차원에서 재추진되게 됐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편 부끄럽지만 다른 한편 이제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친일파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조사 없이 추정치만이 제시되곤 하였다. 친일파 재산이 모두 합쳐 1억 3484만평(445.75㎢)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가 하면, 이완용·송병준 등 대표적 친일파 11명이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소유했던 토지가 440만평에 이른다는 추정치도 있다. 정확한 조사작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우리는 친일파 재산 조사작업이 신속하고 철저하게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범정부 차원의 긴밀한 협조, 지방자치단체와 국민 모두의 적극 동참이 불가결하다. 조사작업의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선의의 인수자가 느닷없는 손실을 입거나 친일파 후손들이 행정소송을 남발해 환수작업이 차질을 빚을 우려, 브로커나 사기범들이 준동할 가능성등이 지적된다. 조사위는 이러한 점도 충분히 고려해 환수작업이 실효성 있게 진행되도록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 [열린세상] 공직자의 숙명적 윤리와 철학/이종철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조선조 양반사회에서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라 하였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악이고 사회적 부채일 수도 있다. 불평등이 절대악이라는 공산주의와 필요선이라는 민주주의의 이념 논쟁 속에서 우리는 불평등이 공정한 경기규칙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인가 아니면 불공정한 게임룰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문제삼는다. 옛 속담에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이웃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갑종 근로소득세나 세금 한 푼 안 내고 재산만 불린 일부 정치인과 소수의 엘리트층이 손에 옹이가 박이도록 일한 보통사람보다 재산소득이 엄청 많을 때 결과의 불평등을 필요선이라고 공감할 사람이 있겠는가. 변호사, 의사, 회계사, 고위공직자와 국민을 대표하는 선량이 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들은 모두 벌거벗은 국민의 혈세와 사랑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이다. 이제 현대의 귀족층인 그분들이 화사한 꽃들의 자태를 한껏 뽐내며 국민에게 마음의 보답을 해야 한다. 이것이 꽃의 아름다운 소명이다. 최고의 전문성을 가지고 국민의 생활향상, 복지실현, 지역경제와 기업의 활성화, 교육 문화 육성에 앞장서는 것은 우리들의 소망이다. 더불어 남모르는 자선과 이웃 사랑 또한 그들의 도리이다. 지금껏 자신을 키워준 가족과 사회, 국민을 위하여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눠 베푸는 것은 이 시대의 아름다운 책무이다. 조상을 잘 둔 탓에 또는 천운이 좋아서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지는 것은 보통의 행운이 아니다. 하지만 창조적 엘리트들은 돈이 인생 행복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수단이라는 것을 각심해야 한다. 건강공단의 2005년 통계에 의하면,1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고소득자가 9만 6500명에 달하지만 월급 100만원 미만의 직장인은 무려 180만 8000명이라 한다. 부디 2007년 공직자 재산신고 때부터는 1급 이상 공직자, 국회의원, 판·검사 등 1000여명 중 재산 신고액이 20억원이 넘는 사람들은 사회기부금이나 자선란을 만들어 작게는 1년에 1000만원에서 크게는 4000만원 정도는 불우이웃, 중증장애어린이집, 노인요양시설, 장학재단에 쾌척하는 선행이 있기를 빈다. 사회지도층이 되어 현직에 오르려는 선택된 계층은 검증에 앞서 스스로 기부하는 정신을 발휘하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남을 도와보지 못하고 겸손과 정직, 신념과 목표가 없는 명사는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독버섯일 뿐이다. 1993년 공직자 재산등록제가 실시된 이후 현직에 있는 고위직들의 재산이 공개될 때마다 천진한 국민들은 허탈감과 무력감, 때로는 배신감까지 느껴왔다. 최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의 자리는 돈과 부동산을 굴려서 재산을 증식하는 자리가 아니다. 업무상 우월적 직위를 남용한 부당한 부의 축적과 부정부패와 소득의 누락을 멀리하며 국민과 국가에 멸사봉공하여 헌신하는 자리이다. 국민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심어줄 참 공직자의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이 이루어질 때 갑작스러운 수마에 허탈하여 망연자실한 국민의 이반된 민심을 달랠 수 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 급속한 산업화의 발전 과정에서 30년 동안 수많은 공직자들이 건강까지 버리며 밤낮없이 일해왔다. 가족과의 정담과 자녀와의 사랑을 나눌 겨를도 없이 명예를 지키며 헌신한 창조적 엘리트 집단이 공직자이다. 국민은 공직자에게 전문성, 공정성, 정직, 성실, 멸사봉공, 애국애족과 함께 선비적인 청빈과 청백리를 기대한다. 이것이 곧 공직자가 품어야 할 숙명적 윤리이며 철학이다. 공직자가 국민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존경받는 풍토여야만 나라가 살고 정부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국민은 법적 논리에 앞서 정서적 공감을 기대한다. 이종철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 儒林(66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3)

    儒林(66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3)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3) ‘성학십도’를 받쳐 올리면서 퇴계의 차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 이황은 삼가 재배하고 아룁니다. 신이 가만히 살펴보니 도(道)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낙서(河圖洛書)가 나오매 성인이 그것을 근거로 괘효(卦爻)를 지은 뒤 그 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부터 착수하여야 하며 옛 교훈(古訓)은 천만가지가 되니 어디서부터 따라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성학(聖學)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지적하여 설(說)을 만들어 사람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文)’과 ‘덕을 쌓는 기틀(積德之基)’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후현(後賢)들이 부득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된 분의 한 마음(一心)은 온갖 정무(萬幾)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며, 온갖 책임(百責)이 모이는 자리이며, 또한 뭇 욕심이 갈마들며 침범하고, 뭇 간사함이 갈마들며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히 하여지면서 방종하여 간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 같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후략)…” 퇴계가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면서 17살의 어린 선조에게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조건을 갖추는 ‘제왕학(帝王學)’의 길을 가르치려는 충정에서 그러한 서문을 지어 올렸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명문인 것이다. 차문에 나오는 ‘하도낙서(河圖洛書)’란 복희씨 때 황하에서 길이 8척이 넘는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주역 팔괘의 근원이 되었으며, 또한 낙서는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글로 이는 모두 주역의 근거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퇴계의 ‘성학십도’는 비단 선조만을 위한 제왕학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성리학을 통해 ‘천도와 심성에 근거하여 대륜(大倫)을 밝히고 덕업(德業)에 힘쓰며 또한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敬畏)의 태도를 높인다.’면 반드시 성인이 될 수 있음을 설법하는 퇴계 최후의 역작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중 제1도인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 퇴계 스스로 지은 해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는데, 동(動)의 상태가 지극하면 정(靜)하여지고, 정하여지면 음(陰)을 낳는다. 정의 상태가 지극하면 다시 동하게 된다.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하는 것이 서로 뿌리가 되어 음으로 나누어지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음양의 별칭)가 맞선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 등의 오행을 낳는데, 이 다섯 가지 기(五氣)가 점차로 퍼져 네 계절이 돌아가게 된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인 것이다.…”
  • 儒林(66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2)

    儒林(66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2)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2) 이 말을 들은 퇴계는 대답하였다. “공자께서는 그 선물이 의로웠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받았던 것이다.” 그러자 이덕홍이 다시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찌하여 김이정이 보낸 노새를 돌려 보내셨습니까.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타고 다시니라고 보내온 노새는 의로운 선물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 선물이 의롭지 않은 선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의롭지 않은 선물이라고 생각지 않으시다면 왜 노새를 돌려 보내셨습니까.” 퇴계가 정색을 하며 대답하였다. “그러나 남의 선물을 받는 데에는 법도가 있는 법이다.” “그 법도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퇴계는 대답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집에 부모가 생존해 계시면 남에게 거마를 선물로 주는 법이 없었다. 김이정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법도를 몰라도 단순한 호의로 나에게 노새를 보내주었겠지만 그 법도를 알고 있는 나로서야 어찌 그 노새를 받을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이덕홍은 새삼스럽게 스승의 덕행에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김이정은 스승에게 노새를 보낼 정도로 극진히 퇴계를 섬기고 있었고 퇴계 역시 자신을 친부모보다 더 섬기고 있는 김이정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김이정은 고봉과도 각별한 우정을 쌓고 있어서 퇴계와 고봉 사이에 중간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10월 15일 보낸 퇴계의 편지에서도 그러한 삼각관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인 것이다. 즉 고봉은 우연히 김이정을 만났을 때 퇴계가 주장한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物格).’는 내용과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란 해설에 대해 나름대로 치열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스승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입바른 직언을 날려야 직성이 풀리는 고봉의 거친 성정을 엿보게 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데, 그 무렵 퇴계는 17세의 어린 나이인 선조를 위해 ‘성학십도(聖學十圖)’란 말년의 유작을 완성하고 있었다. ‘성학십도’는 퇴계가 도산에 퇴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강학에만 전념한 끝에 마침내 68세에 지은 만년 작으로 그의 학문의 온축(蘊蓄)를 남김없이 쏟아 부은 명저인 것이다. 제1도인 태극도(太極圖)로 시작되는 이 책은 대학도(大學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 10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시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총결산서와 같은 것이었다. 퇴계는 이 책에서 당시까지의 우주설과 이기설을 도형(圖形)과 해설의 방법으로 총체적이면서도 중점적으로 요령 있게 정리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퇴계학의 규모와 성격과 깊이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명저인 것이다. 퇴계는 1568년 선조에게 ‘차문(箚文)’을 지어 함께 바쳐 올린다.
  • [문화마당] 두 번의 백의종군/고운기 연세대 국문학 연구교수

    이순신의 4형제는 신(臣)자 돌림이었다. 희신(羲臣)·요신(堯臣)·순신(舜臣)·우신(禹臣)이 그들이다. 알다시피 희·요·순·우가 모두 고대 중국의 이름난 성군이니, 굳이 뜻풀이를 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들이 그 같은 성군을 모시는 신하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4형제 누구도 성군의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음 또한 잘 아는 사실이다. 신하는 되었을지언정 목숨 바쳐 충성하고픈 임금의 아래는 아니었다. 넷 가운데 가장 처절한 길을 가기로야 순신만한 이가 없다. 노량 앞바다 전투에서 숨을 거두기 하루 전날 밤, 그러니까 선조31년(1598년) 11월17일까지 기록한 그의 일기 이곳저곳에서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무장(武將)의 회오(悔悟)가 점철된다. 하루치 일기 끝에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느니,“분통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느니,“뼛속까지 아파서 말을 하지 못했다.”며 더러더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그 대상은 적에게만이 아니라,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우리 쪽 장수나 조정을 향하기도 한다. “뱃전에 홀로 앉았노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닭이 벌써 울었다.”는 대목은 임진왜란이 터진 다음 해 7월 어느 날의 일기 마지막 구절이다. 이순신이 쓴 저 유명한 시조를 연상시키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밤을 지새우며 노심초사하는 역전의 장수를 본다. 그런 이순신 장군에게 대명사처럼 따라 다니는 말이 백의종군이다.53세 되던 정월, 무고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 직전까지 몰렸었고,4월 초하루 기사회생하여 옥에서 풀려나서는 나라를 위한 싸움에 가없는 처지로 참전한다. 말이 쉬워 백의종군이지, 일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면,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기구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새벽에 꿈이 몹시 어지러워 마음이 편치 못했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는 일기는 옥에서 풀려난 열흘 후쯤에 씌어졌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러 그가 있는 곳으로 배를 타고 오고 있었는데, 온다는 어머니 대신 아랫사람이 부고를 전한다. 거기서 “나는 뛰쳐 나가며 발을 굴렀다. 하늘의 해마저 캄캄했다. 찢어지는 아픔을 다 적을 수 없다.”는 대목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아픔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은 그는 어머니의 장례마저 끝까지 지켜 보지 못했다. 그러기에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관직을 삭탈당한 간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수모와 억울함을 넘어, 중병의 어머니가 아들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 달려오다 맞는 슬픈 가족사의 비극과 겹쳐진다. 그런데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이 한번만이 아니었다. 꼭 10년 전, 이순신의 나이 43세 때, 녹둔도의 둔전관으로 있다가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순신은 정황상 필요하므로 군사를 더 파견해 달라고 상관에게 청한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외딴 섬이다. 그때 상관인 절도사 이일은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북방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오고, 이순신은 선전했으나 뼈아픈 패배를 맛본다. 절도사 이일은 모든 책임을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순신이 겨우 미관말직이나마 다시 얻은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45세 때였다. 전라순찰사 이방의 조방장이었다. 그리고 3년후 임진왜란은 터진다. 순 임금 같은 성군 아래에서 신하가 되기를 바랐던 이순신은 성군은커녕 두 번씩이나 백의종군케 하는 나라의 장수로 살다 갔다. 그러나 그것이 두 번이라 할지라도, 아니 정녕 그였다면 스무 번이 되었을지라도, 나라의 명령을 엄중히 여겨 원통한 마음일랑 속으로 묻고 끝내 묵묵히 제 길을 갔을 것이다. 진정 그가 성웅(聖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순신의 길은 아무나 따라갈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아무에게나 와서도 안 된다. 누구나 해낼 일이 아닌 까닭이다. 고운기 연세대 국문학 연구교수
  • 儒林(66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9)

    儒林(66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9) 그러므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감히 거친 성정을 바로잡아 중도(中道)에 부합되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마음속에 의지가 굳지 못하고 배움이 보잘것없어 저를 알아주시는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두려운 생각으로 밤낮 편히 지내기 어렵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스승 퇴계가 ‘저를 알아주심’ 즉 임금 선조께 추천해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변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째서 ‘경이 신하 중에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굽니까. 학문을 착실히 한 사람은 누굽니까. 짐에게 경계하고 싶은 말을 해주면 날마다 힘쓸 테니 솔직히 가르쳐주시오.’라는 선조의 질문에 고봉을 추천하였던 것일까. 조선의 역사상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성리학자로는 율곡이 손꼽힌다. 율곡도 퇴계에게 찾아와 2박 3일간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퇴계의 실질적인 제자. 그뿐인가. 그 무렵 퇴계에게는 기라성 같은 문하생들이 따르고 있었다. 김성일(金誠一)과 김부륜(金富倫), 이덕홍(李德弘)과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과 정유일(鄭惟一) 등 하나같이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착실히 배웠던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대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어째서 제자이긴 하였지만 직계문인이 아닌 고봉을 선조에게 그것도 아직 수렴(收斂), 즉 정신수양이 모자란다는 단서를 붙이면서까지 고봉을 천거하였던 것일까. 그러한 반증은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즉 고봉은 퇴계로부터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物格)’또는 ‘무극(無極)’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이로 인해 ‘평소 어지럽게 오가던 것이 끝내 한가지로 매듭되어 춤을 추며 뜀을 뛰어도 그 즐거움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퇴계의 가르침에 대해서 극진하게 사례(謝禮)하고 있었던 것이다. 26살의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13년 동안 백여 통이 넘는 편지를 통해 이처럼 고봉은 퇴계에게 학문에 있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묻고 때로는 퇴계의 학설에 대해 신랄한 비판까지 가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봉이 비록 퇴계의 문하생은 아니었지만 가장 치열했던 퇴계의 수법(受法)제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선생님께 올리는 글’,‘퇴계 선생님께 올립니다.’라고 시작되는 일상적인 문안편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대부분 평소에 궁금하던 학문에 대해서 묻는 별지(別紙)형식의 추신이었던 것이다.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도 이런 별지가 따로 첨부되어 있었다. 고봉이 퇴계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물격(物格)과 무극(無極)에 대한 보다 상세한 별도 사연이 별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 日수군 후손들 진도 ‘보은 방문’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장인 전남 진도 백성들의 훈훈한 인정이 400여년이 흘러 한·일 양국 후손들의 화해와 우정으로 이어진다. 일본 수군의 후손 20여명이 선조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된 ‘왜덕산(倭德山)’을 오는 15일 방문하고 이 지역 조선군 후손들과도 만난다. 당시 일본 수군들은 이순신에 의해 울돌목의 거센 물살에 수장됐다. 그러나 진도 백성들은 해변에 떠밀려온 시체 100여구를 수습해 마을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이 언덕은 벽파진과 3∼4㎞쯤 떨어진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에 있다. 언젠가부터 ‘왜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본군에 덕을 베풀었다는 뜻이다. 이를 전해 들은 향토사학자 박주언(61)씨는 역사문헌을 뒤져가며 취재를 시작했다. 이어 2004년 ‘진도 사람들’이라는 잡지에 이를 기고하면서 외부에 처음 알려졌다. 이후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 수도대학 히구마 교수가 진도를 방문했다가 박씨로부터 왜덕산의 존재를 알게 돼 후손들의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번 방문단은 일본 시코쿠 에이메현 이마바리 지역 출신으로 정유재란에 참전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장군 현창보존회 임원과 히로시마 수도대학 학생들로 구성돼 있다. ‘왜덕산’은 개간과정에서 일부가 사라졌고, 현재 칡넝쿨 등 잡초로 우거져 있다. 현재 왜군의 묘 50여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조계종, 범종단 반환운동 나서

    최근 조계종 현등사(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163)가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현등사 사리구반환 청구소송’에서 패소한 가운데 조계종이 사리구 반환을 위한 범종단 차원의 운동에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계종은 2일 “지난달 20일 현등사 사리구와 관련한 서울서부지방법원의 판결은 1700년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해온 조계종의 법통을 정면 부정한 것으로, 현등사 사리구 환수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계종은 이와 관련해 빠른 시일 안에 기획실, 문화부, 현등사, 현등사 본사인 봉선사 등으로 대책위를 결성키로 했다. 조계종이 이처럼 강도높은 반응에 나선 것은 무엇보다 재판부가 소송의 쟁점인 사리·사리구의 소유권 판단을 유보한 채 옛 현등사와 지금의 현등사를 동일성이 없는 별개의 사찰이라고 적시한 때문. 조계종은 이 대목에 대해 비단 현등사 사리구 반환 차원을 넘어 한국불교의 연속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만약 판례로 남을 경우 향후 조계종의 도난·발굴문화재 등 불교문화재 환수 추진에 큰 지장을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재판부는 “사리구에 음각된 ‘운악산 현등사’가 지금의 현등사인지 인정할 근거가 부족한데다 1829년 화재로 사찰 건물이 모두 불탄 기록이 있고 조선조 400여년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사찰의 동일성이 유지돼 왔다고 보기 어렵다.”며 “현등사라는 이름이 같다 하더라도 별개의 권리주체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패소 판결했었다. 이와관련, 현등사 주지 초격 스님은 “전국을 통틀어 폐사지를 포함해 현등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은 지금의 가평 현등사가 유일하다.”며 “사리구에 ‘운악산 현등사’라는 이름이 분명히 명시돼 있는데도 무시한 채 엉뚱하게 옛날 현등사와 오늘날 현등사가 전혀 다르다고 한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억측”이라고 주장했다.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儒林(660)-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儒林(660)-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퇴계가 말하였던 정자(程子)는 북송의 뛰어난 유학자였던 정호(程顥)와 정이(程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 유학사상 최초로 이기의 철학을 내세우고 유교 도덕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두 형제였으나 그들에게는 윤순(尹淳)이나 양시(楊時)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인 중에서 누구를 취할 만한가.’하고 왕이 물었을 때도 ‘취할 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던 고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대답한다.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전하를 속이고 누가 특별하다고 취할 만하다고 여쭈오리까.” 그러나 선조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선조는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으로 독대(獨對)를 하는 퇴계로부터 인물 하나를 반드시 천거받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학문을 착실히 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소.” 그러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기대승 같은 사람은 글을 많이 읽었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해서 그 견해가 유학에 정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퇴계는 기대승을 추천하면서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고 한다. “…다만 수렴공부는 아직 적은 듯싶사옵니다.” 수렴(收斂). 이 말은 ‘몸을 잘 단속하여 근신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학자로서의 정신수양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이를 통해 퇴계 역시 고봉의 거친 성정과 반골기질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조와의 독대를 끝으로 퇴계는 마침내 8개월간의 마지막 한성체류를 끝내고 우사를 떠난다. 도성을 나온 퇴계는 강변에 있는 목뢰정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튿날 한강을 건넌다. 이때 고봉은 사방에 수소문하여 스승 퇴계가 있는 목뢰정을 방문하게 되었고 새벽녘에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서 작별인사를 고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퇴계와 고봉이 이승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상봉. 고봉은 한강을 건너는 배 안에서 스승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이별시를 읊었던 것이다. “밤낮으로 도도히 흐르는 한강수야.(江漢滔滔日夜流) 선생님 행차를 네가 좀 말려다오.(先生此去若爲留) 강가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일부러 어정대며 시간을 끌었다.(沙邊 纜遲徊處) 애끓는 이별의 정 엄청난 이 슬픔 그칠 줄을 모르네.(不盡離腸萬斛愁)” 퇴계가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관리들은 관청을 비웠고 장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한강변에 몰려와서 떠나는 퇴계를 전송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배를 타고 따라왔고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퇴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작별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儒林(65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

    儒林(65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 따라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호남과 영남이 막히고 멀어 찾아뵈올 길이 없으니 몸소 경계의 말씀을 받들거나 의심나고 애매한 것을 여쭤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종이를 펴놓고 앉아 있으니, 슬픈 생각이 일어 동쪽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표현하였던 것은 바로 자신이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처신’을 하고 고향인 광주로 낙향해 있는 자신의 신세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음인 것이다. 더구나 고봉은 이 무렵 선조로부터 중국 가는 사신인 부경사로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면직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봉이 보낸 마지막 편지 직전의 서한에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난날 중국 가는 사신에 임명되었으나 의리로 보아 억지로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면직을 청하였습니다. 마음 속에 품은 뜻을 다 숨길 수 없기에 그저 몇 가지 말로 임금께서 굽어 살피시길 바랐던 것인데, 바깥의 헐뜯음과 나무람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두려워 떨면서 스스로를 책망할 뿐입니다.” 물론 퇴계는 이러한 고봉의 거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569년 3월4일 아침. 퇴계가 자신의 마지막 벼슬인 우천성을 사직하기 위해서 대궐로 들어와 선조를 만나 걸해골을 하는 장면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퇴계가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이 물러가야 하는 까닭을 진언하자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선조는 ‘금세에 경과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지금 경이 돌아가면 늙은 사람은 아무도 남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떠나려 하십니까.’라고 한탄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선조는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꼭 가야 한다면 경이 조정 신하 중에서 추천해 줄 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퇴계는 대답한다. “오늘날 대신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 청렴하고 신절(愼節)이 있는 분들이며, 육경(六卿)은 사특하지 않고 감출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영의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위험과 어려움을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으며 나라를 편안케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주석지신(柱石之臣)을 중히 여겨 의지하시면 됩니다. 이 사람들 이외에는 별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만족지 않았다. 선조는 퇴계를 대신할 수 있는 왕의 스승으로 왕사(王師)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신하 중에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학문을 착실히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짐에게 경계하고 싶은 말을 해주면 날마다 힘쓸 터이니, 솔직히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임금이 정자(程子)에게 ‘문인 중에서 누구를 취할 만한가.’하고 물었을 때 정자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취할 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문경길(상)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문경길(상)

    상주 옛길은 경북선(김천∼영주) 철로를 건너 문경시 모전동으로 들어선다. 곧바로 문경 시외버스정류장 앞에서 충북 보은군으로 통하는 국도 3호선과 만난다. 이어 공설운동장을 지나 1㎞쯤 거슬러 오르면 공평동 표석골 마을에 다다른다. 표석골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당교(唐橋)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승기념비를 세웠다는 데서 유래됐다. 그러나 그때의 표석은 찾아 볼 수 없다. ●유곡 찰방역의 ‘둔전’ 공평·유곡들 이곳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길은 올해 초 왕복 4차로로 넓혀져 시원스럽게 나 있다. 길 양쪽으로는 공평·유곡들이 온통 푸르름을 자랑하며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 이 들판은 유곡찰방 소속 1300여 역졸들의 군량을 충당하던 둔전(屯田)이었다. 둔전 북쪽 끝자락에는 장승백이 마을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 도로 중앙에는 ‘장승백이’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현재 장승은 없다. 63년전 이 마을로 시집왔다는 이분남(78) 할머니는 “마을 앞 길가에 조상대대로 세워졌던 장승은 올해 길이 확장되면서 사라졌다.”며 서운해한 뒤 “빨리 다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시대의 장승은 세워진 위치에 따라 그 역할이 달랐다고 한다. 동행한 안태현(40·민속학 전공)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길가의 것은 이정표 또는 경계 등의 구실을 했고, 마을 입구의 것은 주로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전염병이나 역병 등을 물리치는 주술적 역할도 겸했다.”고 설명했다. 장승백이 마을을 벗어나 국도 3호선을 따라 곧장 가면 유곡동에 도착한다. 영남역지상의 유곡 찰방역이 있던 곳이다. 유곡역은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역도체계에서 상주도의 으뜸역이었다. 이 역은 덕통·낙동·구미·지보·소계역 등 지금의 문경을 비롯한 상주·의성·예천·안동·구미·군위·청송 등지의 19개 역을 관할했다. 이곳에는 역리 1238명과 노비 67명 등 모두 1305명이 소속됐었다. 상등마 2마리와 중등마 5마리가 배치됐다. 특히 유곡 찰방역의 규모는 문헌상 조선시대 찰방역 가운데 가장 자세히 남아 있다. 영남역지에는 유곡 찰방역의 경우 찰방이 역무를 총괄하는 행정 관서인 동헌 6칸을 비롯해 찰방이 잠을 자는 침소인 내동헌 및 사환고 각 4칸, 마구간인 마단 5칸, 천교정·내삼문·문루·형사청·사령청 각 6칸, 역리들이 실무를 보는 곳인 작청 10칸, 진휼창 20칸 등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상주도의 으뜸역 유곡 찰방역 안 학예사는 “찰방역 전체에 대한 상세 기록은 유곡 찰방역이 유일한 정도”라며 “따라서 복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곡동 한복판을 지나는 옛길변에는 관찰사 박문수, 어사 박이도 등 관리 15명의 선정비 또는 불망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 아낙들이 빨래판으로 쓰거나 버려진 것들을 이곳에 모아 정비했다고 한 주민은 귀띔했다. 유곡역을 벗어난 옛길은 3번 국도 왼쪽 아래로 잠시 비켜난 뒤 불정동 원골에서 다시 만난다. 원골은 고려시대 원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원골로 불린다. 원골 앞을 지난 길손은 영강 상류지점의 견탄(犬灘)을 건너야 했다. 옛날 견탄 여울에는 개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견탄을 건넌 옛길은 대성광업소 직원 사택촌으로 잘 알려진 호계면 견탄 3리 입구에서 영강과 나란히 1㎞쯤 상류 불정마을 건너편까지 강변쪽으로 난다. ●한양길 최대 험로 토끼벼랑 이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산허리를 올라서면 관갑천 잔도(串甲遷 棧道)가 나온다. 일명 토끼벼랑(兎遷)으로 옛길상의 험로로 가장 악명(?) 높은 곳이다. 잔도는 강가의 험한 벼랑부분의 암반을 파서 낸 길을 말한다. 또한 토끼벼랑은 이곳에서 길을 잃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토끼가 달아나면서 벼랑길을 열어 주어 진군했다는 데서 연유했다. 역시 동행한 엄원식(38) 문경시 학예사는 “토끼벼랑은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옛길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며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험난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과연 잔도 400여m 전 구간은 전율을 느낄 만큼 위험하다. 폭이 1m 내외로 좁고 위쪽은 깎은 듯한 절벽이, 아래쪽은 70도 이상 경사진 낭떠러지이다. 마침 장마철인 관계로 길마저 미끄러워 다리를 후들거리게 한다. 잔도 끝부분은 바윗길로 표면은 금세 길손이 짚고 간 듯 반질거린다. 불현듯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지나다녔으면 이처럼 반질반질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잔도를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오면 고모산성이 자리하고 있다.1500여년전에 축조된 이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의 접전지로, 둘레가 1.6㎞에 이른다. 산성은 막바지 복원공사가 한창이며, 탐방로도 말끔히 정비돼 있다. 산성 초입에서 몇 발짝 옮기면 돌고개가 나온다. 달리 ‘꿀떡고개’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과거객들에게 꿀떡을 팔았던 곳이라 해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인근 마성면 오천리 새터 주민들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꿀떡을 사 먹으며 과거에 붙게 해 달라고 기원했던 곳”이라고 들려줬다. 돌고개 옆 옛길가의 주막거리가 정겹다. 문경시가 올해 초 복원한 것이다. 주막은 2동의 초가와 헛간, 창고 등 옛 양식대로 지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막에는 주모가 없어 목을 축이거나 요기를 면할 수는 없다. 옛길은 돌고개를 넘어 눈앞에 펼쳐지는 문경새재로 향한다. 글 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길손들의 쉼터 ‘주막’ 주막은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 옛 풍물 중 하나이다. 선조들의 삶의 애환과 체취가 오롯이 묻어 있는 곳이어서 못내 아쉽다. 주막은 17세기를 전후해 국가 관할인 원(院·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사상(私商)의 발달과 함께 본격화됐다. 주막집·탄막(炭幕)·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鋪)·봉놋방이라고도 했다. 주막은 개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했던 일반 여관으로 민초들이 단골고객이었다. 관리나 거상(巨商)들이 주로 출입했던 고급여관인 보행객주(步行客主)와는 구분됐다. 주막 또는 주막촌은 주로 시골장터와 삼거리 길목, 나루터 등 길손의 통행이 잦은 곳에 자리잡았다. 옛길에는 평균 4㎞ 간격으로 100여곳의 주막촌이 분포했다. 그러나 팔조령 등 험로지역에는 1∼2㎞ 간격으로 자리했다. 주막은 대개 한두 개의 침실과 술청을 갖춘 작은 건물로 형성됐으며, 식당·주점·여관 기능을 함께 했다. 또 상거래 장소이자 팔도의 소식과 문물을 교류하는 문화적 기능도 겸비했다. 메뉴로는 국밥이나 국수가 전부였고, 술도 탁주가 주종이었다. 방값은 음식 등을 사 먹고 잠을 자는 곳이라 별도로 받지 않았다. 대신 많게는 10여명씩 혼숙을 해야 했다. 잠자리는 선착순으로 아랫목·구석·마루를 차지했지만, 지위와 권세가 낮으면 순서와 상관없이 구석이나 마루로 밀려나야 했다. 주막은 경우에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층민이 주로 이용한 주막은 도박꾼과 강도들로 득실댔다. 때문에 죄인 색출의 요지이기도 했다. 일부 주막의 주모들은 자신이 직접 몸을 팔거나 들병이(술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술을 파는 장수)를 고용한 윤락업도 병행했다. 주막의 바깥 주인인 ‘식주인’은 관아의 끄나풀로 손님들의 동향을 정탐해 밀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막은 보행에 의존하던 길손들의 문화가 70년대 이후 교통수단으로 대체되면서 급격히 사라졌다. 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儒林(658)-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

    儒林(658)-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 그러나 퇴계의 강력한 추천으로 시독관(侍讀官)에서 오늘날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나 고봉은 사사건건 당시 복잡하게 얽힌 정치상황 속에서 실권을 잡은 대신들과 충돌하는 일이 빈번했다. 고봉은 이른바 트러블메이커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봉의 반골(反骨)정신은 그의 집안내력이기도 하였다. 고봉의 집안은 대대로 절개를 지켜왔던 기골(氣骨)의 가문이었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봉의 고조부인 건(虔)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단종이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던 절의파였다. 그는 세조가 다섯 번 찾았으나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또한 숙부 기준(奇遵)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죽임을 당한 사림파의 거두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 진(進)은 아우가 죽자 집을 광주로 옮기고 벼슬도 사양한 채 학문에만 힘을 썼던 은둔거사였다. 고봉이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약관에 이미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가문의 기질 때문이었던 것이다. 고봉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항상 자신의 정치이념을 사림파의 거두였던 숙부 준의 정신을 본받아 부패하고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는 병조좌랑, 이조정랑의 요직을 거쳐 마침내 퇴계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관직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영의정 이준경과의 충돌 때문에 해직당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고봉이 강직한 성품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골정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고봉은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경연 등을 통해 국가 기강쇄신과 민생보호를 역설하였으며, 특히 훈구파를 중심으로 한 간신들의 횡포를 비판하였다. 왕도정치의 확립을 도모하는 선봉장으로 언로를 넓게 열 것과 민심에 따를 것을 직언하였다. 특히 고봉이 부르짖었던 왕도정치는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조광조와 숙부 기준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거친 성정’ 때문에 자신의 ‘지난날 처신이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고’ 자신의 의견이 (임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련 없이 벼슬에서 떠나버린 사실에 대해서 ‘제가 비록 못났지만 마음속으로 늘 이것을 걱정했던 까닭에 벼슬에 나온 이후로는 감히 제 몸을 보존하겠다는 생각을 접은 지가 오래입니다.’라고 변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봉 스스로가 변명하고 있는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처신’ 바로 그것은 이른바 김개(金鎧)에 대한 탄핵사건이었다. 고봉이 퇴계로부터 강력한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오를 무렵 그는 오래 전부터의 숙원이었던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와 숙부였던 기준 등을 추증(追贈)하고 그들을 성인군자로 복권시킬 것을 선조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이때 김개는 이를 정면에 나서서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고봉은 이에 대해 상소문을 올리고 홀연히 낙향하여 고향인 광주에서 낭인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65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

    儒林(65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 거친 성정(性情). 우선 고봉 스스로가 스승 퇴계에게 자신의 ‘거친 성정’으로 인해 ‘저를 알아주신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두려운 생각으로 밤낮 편히 지내기가 어렵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깊은 사연이 있다. 지난해 3월, 퇴계는 선조에게 벼슬에서 물러갈 것을 결심하고 ‘걸치사(乞致辭)’하였다. ‘걸치사’란 말은 문자 그대로 ‘물러갈 것을 구걸한다.’는 의미로 ‘걸해골(乞骸骨)’에서 비롯된 말이었다.‘걸해골’은 늙은 신하가 임금에게 사직을 청원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이 말의 뜻은 신하란 본디 심신을 모두 군주에게 바친 것이니, 사퇴를 원하고 나올 때에는 오직 썩어 버릴 해골만이 남으므로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항우가 유방의 이간책에 속아 충신이었던 범증(范增)을 의심하자 ‘이미 천하의 대세는 정하여졌습니다. 신은 내려주시는 해골을 받아 옛날처럼 이름 없는 병졸로 되돌아갈까 하나이다.’라고 물러가는 데서 비롯된 성어. 여기서 퇴계가 선조에게 걸치사를 통해서 썩어빠진 해골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퇴계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이때 퇴계는 선조를 위해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성학십도는 유학사상을 체계화하여 이것을 정치실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퇴계 최후의 유작이었다. ‘성학(聖學)’이란 것은 성왕이 되는 학문이란 뜻이요, 곧 ‘철인의 왕자’란 의미인 것이다. 성왕이 되기 위해서는 도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 퇴계는 도의 올바른 인식과 실천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도학의 문헌을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다. 선조는 그것을 열 폭의 병풍으로 꾸며 정원(政院)에 두고 작은 장첩으로 만들어 밤낮으로 성람(聖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선조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계에게 ‘그렇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재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다. 이때 퇴계가 서슴없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고봉. 퇴계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을 일절 배제하고 고봉을 천거하였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 그뿐인가.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봉에게 편지를 보내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갈문(墓碣文)을 써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던 것이다. 기라성같이 뛰어난 당대의 수많은 제자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고봉에게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세우는 묘표에 새기는 갈문을 부탁한 퇴계의 행장은 퇴계가 얼마만큼 고봉을 아끼고 고봉을 단순히 사제지간이 아닌 도반(道伴)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산증거인 것이다. 고봉은 퇴계의 이러한 천거로 인해 선조로부터 마침내 한때 퇴계가 역임하였던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제수받게 되는 것이다.
  • 반출문화재 국민 힘으로 되찾다

    반출문화재 국민 힘으로 되찾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내린 18점의 선무 공신교서(功臣敎書) 가운데 하나인 충무공 김시민(1554∼1592) 장군의 공신교서가 일본 고서점상의 손을 떠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화재 환수운동을 펼치고 있는 MBC ‘느낌표´ 제작진은 25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단체와 함께 벌여온 대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던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를 24일 매입,29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에서 일반에 공개한다고 밝혔다. 국민모금으로 우리 문화재를 되찾은 것은 처음이다. 이날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서는 이 공신교서의 귀국을 알리는 고유제도 열렸다.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는 지난해 11월 일본의 한 경매에 나와 고서점상에게 팔렸고, 이 사실을 처음 접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교수가 지난 5월 ‘느낌표’ 제작진에 알림으로써 구체적인 환수방안이 논의됐다. 이 공신교서는 약탈된 것이 아니라 일제때 총독부에 의해 학자 등이 무상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반환이 아닌 매입을 통한 환수방법이 채택됐다.‘느낌표’ 제작진은 이달 1일부터 인터넷을 통해 범국민 모금운동을 벌인 결과, 고서점상이 제시한 1400만엔(약 1억 2000만원)을 모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모금운동 소식을 들은 일본 고서점상은 당초 제시한 1500만엔에서 100만엔을 깎아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3000여명이 동참함으로써 20여일만에 모금액을 채우게 됐다. 이들은 24일 일본으로 건너가 고서점상에게 모금액을 전달했고, 공신교서는 이날 저녁 고국의 땅을 밟았다.‘느낌표’ 제작진이 공신교서를 박물관에 기증키로 함에 따라 교서는 29일부터 한달간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뒤 김시민 장군이 전사한 진주의 국립진주박물관에 영구 보관·전시될 예정이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儒林(65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

    儒林(65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 1570년 선조 3년 11월. 도산 서당의 퇴계 앞으로 편지 한 통이 전해졌다. 퇴계에게 편지를 전해준 사람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다만 퇴계가 보낸 답장에서 ‘먼 길을 애써 달려온 사람으로부터 부치신 귀한 편지와 별지를 함께 받아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사사로이 사람을 고용하여 인편으로 퇴계에게 편지와 별지를 황급히 보내온 것처럼 보여진다. 편지를 보내온 사람의 이름은 기대승(奇大升). 흔히 고봉(高峯)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무렵은 퇴계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이었으므로 퇴계가 고봉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였다. 두 사람은 26살의 나이 차이가 나고 있었지만 나이와 직위를 초월하여 13년 동안이나 서로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00여 통이 넘는 편지 중 퇴계에게 전해진 최후의 편지가 이제 막 도착한 것이었다. 퇴계는 의관을 정제하고 고봉으로부터 온 서한을 뜯었다. 두 사람은 퇴계의 나이 58세 때, 고봉의 나이 32살 때 한양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1558년 명종 13년 10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 총장급인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백면서생이었다. 따라서 퇴계와 고봉이 나누었던 100여 통이 넘는 편지에서 퇴계가 고봉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처음에는 ‘기선달(奇先達)’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선달은 문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처음 만났을 때 고봉은 32살의 나이로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기선달’이라는 통칭으로 불린 것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고봉의 대명사는 ‘기정자(奇正字)’로, 나중에는 ‘기정자명언(奇正字明彦)’이라는 정식호칭으로 불러 고봉에 대한 예우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봉은 한결같이 ‘퇴계 선생님께 올립니다’라는 극존칭으로 13년 동안 퇴계를 스승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또한 세월이 흘러갈수록 고봉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나중에는 ‘명언에게 절을 하며 아룁니다’혹은 ‘절하며 답해 올리는 글’이라는 식으로 서두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고봉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하였다. “선생님께 올리는 글 얼마 전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여쭙는 편지 한 통을 올린 뒤 갑자기 무안(務安)사람이 와서 전해 주는 10월15일의 선생님 편지를 받았습니다. 삼가 건강히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고 위로되는 마음 한량없었는데 하물며 자세하신 가르침을 받았으니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극한 감명이 한층 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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