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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준수 서울대 의대 교수팀 “강박증 원인은 뇌회로 이상”

    행동이나 생각이 경직돼 있고,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뇌의 인지기능과 정보처리 부위에 문제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팀은 인지적 경직성이 높은 강박증 환자의 뇌가 일을 수행할 때 정상인의 뇌와 비교해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 규명한 연구결과를 뇌과학 학술지 ‘뇌(Brain)’ 최신호에 게재했다고 1일 밝혔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다가 다른 생각이나 행동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인지적 유연성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이다.그러나 강박증 환자들은 이런 인지적 유연성이 결여돼 타인으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강박증 환자는 여러 가지 일을 복합적으로 처리하거나,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만 일을 처리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권 교수팀은 자기공명영상장치(fM RI)를 이용해 강박증 환자와 일반인 각각 21명을 대상으로 두 가지 과제를 빠르게 전환하며 수행할 때 뇌에서 활성화되는 영역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관찰했다.그 결과 정상인들은 일반적으로 인지기능과 관련된 등쪽 전두-선조체 회로(dorsal frontal-striatal circuit) 등의 영역이 활성화됐으나 강박증 환자에서는 이런 활성이 없었고 감정과 보상 같은 정보를 처리하는 영역 등 배쪽 전두-선조체 회로(ventral frontal-striatal circuit)에서도 다른 활성 패턴이 나타났다. 권 교수는 “이 결과는 강박증 환자의 인지적 유연성 문제가 등쪽과 배쪽 전두-선조체 회로 간 불균형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인지적 유연성 문제와 뇌 회로 이상의 관련성을 밝혀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이를 이용해 치료 방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 ●계운궁(啓運宮) 상례(喪禮) 논란 병자호란을 겪을 때까지 인조 정권은 안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주된 까닭은 인조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등극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정변을 통해, 신료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인조는 늘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신료들과 갈등을 빚었다. 정통성 확보와 관련된 첫 현안은 인조의 생부모(生父母)를 왕실의 종통 속에서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인조는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왕실의 법통상 조부인 선조를 계승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1580∼1619)과 생모인 계운궁(啓運宮) 구씨(具氏,1578∼1626)를 사친(私親)으로 대접할 것인지, 아니면 인조의 왕통 속으로 끌어들여 ‘왕’과 ‘왕비’로 대접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후자를 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정원군과 구씨를 사친의 예에 따라 대접해야 한다고 맞섰다. 논란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1626년 1월, 인조의 생모 계운궁이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계운궁을 위해 몇 년 상을 치러야 하는지가 당장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3년 상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대신들과 예조판서는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멸사봉공의 입장에서 사적인 예는 축소해야 한다.’며 3년 상에 반대했다. 그들은 1년 상을 치르되 ‘상주가 지팡이를 짚지 않는(不杖期)’ 상례를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이귀를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이 선조의 대통을 계승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내세워 3년 상을 치러도 무방하다며 인조에게 영합했다. 대신들과 예조는 인조가 상주(喪主)가 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인조는 왕통으로 볼 때 이미 선조에게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생모를 위해 상주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이 상주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신료들의 공론을 무시했다. 예조판서를 비롯한 반대하는 신료들은 사직을 요청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상주가 되려 하고 사친을 위해 국상(國喪)을 고집하는 것은 참월할 뿐 아니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인조는 결국 신료들의 반발에 밀려 상주 역할을 동생 능원군(綾原君)에게 넘겼다. ●신료들 “인조 아버지는 선조” 인조가 상기(喪期)와 상주 문제를 놓고 신료들과 논란을 빚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계운궁의 상례를 ‘왕비’의 예로써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실제로 5일 만에 빈소를 차리고(成殯),6일 만에 상복을 입고자(成服)했는데 예조는 그것이 ‘왕비의 예’라며 반대했다. 신료들은 3일에 ‘성빈’하고 4일에 ‘성복’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자신의 명을 듣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신료들을 위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시간을 끌면 어차피 자신의 의도대로 5일 ‘성빈’,6일 ‘성복’을 관철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운궁의 상례와 관련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계운궁의 관을 궁궐 안에 두는 문제, 반혼(返魂) 의식을 궁궐에서 하는 문제, 인조가 산소까지 따라가는 문제 등도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운궁을 모신 김포의 산소 이름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명명했다.‘사친을 왕비의 예로 대접하면 안 된다.’는 신료들의 반발과 공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추대된 왕’으로서 자신이 지닌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인조는 더 나아가 작고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다. 신료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반발했고 당연히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추숭을 둘러싼 논란은 정원군과 인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예학(禮學)의 권위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은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왕통으로 볼 때 인조의 아버지(考)는 선조’라고 못박았다. 왕통은 사적인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내세워 정원군을 ‘아버지’로 대접하려는 인조의 의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선조와 인조를 부자 관계로 하면 정원군과 인조는 형제가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김장생의 의견에 반대했다. 대다수 신료들이 ‘왕통은 사적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김장생의 의견에 동조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귀와 박지계(朴知誡) 등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여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인조에게 철저히 영합했던 것이다.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논의는 1624년경에 제기되었다가 정묘호란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 8월, 음성(陰城) 현감 정대붕(鄭大鵬)이 다시 제기했다. 그는 ‘계운궁의 상례를 국상으로 치르고도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인조는 그의 의견이 반가웠지만 대다수 신료들은 반발했다. 정대붕의 상소를 계기로 이귀는 정원군을 추숭하고, 그를 모시는 묘(廟)를 세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이귀는 무리를 동원하여 추숭을 요청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리게 하는 등 ‘여론 조작’까지 시도했다. 이원익, 김류, 오윤겸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대신들은 모든 대소 신료들을 이끌고 인조를 압박했고, 성균관 생도들까지 나서 인조에게 ‘공론을 따르고, 비례(非禮)’에 집착하지 말라.’고 외쳐댔다. 정치판은 바야흐로 인조, 이귀, 박지계, 최명길 등 소수의 ‘추숭 찬성론자’들과 대다수의 ‘반대론자’들로 나뉘어졌다. ●1632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집권 이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한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 이귀는 그 과정에서 솔선해서 ‘총대를 멨다.’그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추숭을 주장하다가, 반대하는 신료가 있으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성토하고 모욕을 주었다. 인조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숭 문제를 놓고 신료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결국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을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이어 5월에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원종과 계운궁을 모신 산소는 장릉(章陵)으로 승격되고,1635년에는 그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데도 성공했다. 신료들의 반대와 조야의 공론을 모조리 무시하고 밀어붙여 얻어낸 ‘성과’였다. 당시 조선은 가도의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하려 시도했고, 유흥치는 곧 심세괴(沈世魁)에게 피살되는 등 서북 변경 상황이 몹시 심각했다. 후금 또한 조선에 대해 이런 저런 경제적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역시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을 통해 왕권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지만 물경 10년 가까이 계속된 ‘추숭 논란’은 신료들 사이에 불신의 벽을 높이고 국력을 갉아먹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추스르고 국방력을 제고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는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민속학으로 풀어본 ‘쥐’] 설화에 나타난 ‘쥐’의 캐릭터

    함경도 지방의 창세가(創世歌)에 보면 불과 물의 근원을 알려준 새앙쥐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이 세상이 생길 적에 미륵이 해와 달을 이용하여 별을 만들고, 옷을 짓는데, 그 크기가 엄청났다. 미륵은 날곡식을 그대로 먹었는데, 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곡식을 먹을 때마다 익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물과 불의 근본을 모르는 미륵은 풀메뚜기를 잡아다가 불기를 치며 물었다.‘풀메뚜기야 물과 불의 근본을 아느냐!’ 풀메뚜기는 자신은 모르지만 풀개구리는 알 것이라고 하였다. 역시 풀개구리를 잡아와 볼기를 치며 물과 불의 근본을 물으니 풀개구리도 자신은 모르나 새앙쥐는 알 것이라고 추천하였다. 새앙쥐를 잡아다 물으니 ‘가르쳐 드리면 무슨 공을 주시겠습니까?’했다. 이에 미륵은 ‘네가 가르쳐 준다면 이 세상의 모든 뒤주를 네가 차지하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새앙쥐는 ‘그렇다면 가르쳐 드리지요. 불의 근본은 금정산에 들어가서 한쪽이 차돌이고 한쪽이 무쇠인 돌로 툭툭 치면 불이 날 것이니 알 것이오. 그리고, 물의 근본은 소하산에 들어가면 샘물이 솔솔 솟아나서 물의 근본을 이룬 것을 알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미륵은 새앙쥐의 말을 듣고 금정산과 소하산에 들어가 불의 근본과 물의 근본을 밝혀 냈다. 이때부터 이 세상은 물과 불을 쓰게 되었다. 민속학자 임석재가 채집한 함경도 성인굿에서 서술되는 천지개벽 신화의 전개양상은 조금 다르나, 귀결점은 같다. 애초에 땅 위를 차지하고 있던 미륵을 석가가 사술(詐術)로써 내쫓고 그 땅을 차지한다. 이 석가가 쥐로 하여금 불을 마련하게 한다. 여기서도 쥐가 불을 처음 마련한다는 점에서 창세가의 쥐와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쥐는 인간을 창조한 미륵신에게 불의 근원과 물의 근원을 가르쳐 주는 정보력을 과시한다. ‘황금구슬’이라는 옛날 이야기에 쥐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잉어를 놓아준 대가로 얻은 황금구슬로 부자가 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쁜 할머니에게 속아 황금구슬을 도둑맞자 그 집의 개와 고양이가 황금구슬을 되찾으려고 나쁜 할머니의 집에 가서 대왕쥐를 잡는다. 개와 고양이가 대왕쥐를 잡는 이유는 쥐에게서 황금구슬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쥐는 집안의 곳곳을 돌아다녀 집안 사정이나 집안의 보물이 어디 있는지를 완전히 꿰뚫어 알고 있는 정보체로서 인식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설화로 볼 때, 우리 선조들은 쥐는 비록 작지만 어느 곳이나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어서 여기저기에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조그만 정보통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쥐가 정보화(IT) 시대에 걸맞는 안성맞춤의 캐릭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 [기고] 아차산에서 고구려 해맞이를/정송학 서울 광진구청장

    너른 벌판 위를 달리던 한줄기 바람이 갑작스레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곳. 백두대간의 광주산맥 끝을 이루고 남쪽을 향해 우뚝 솟아 아차(峨嵯)라고 불리는 곳.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품은 채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함께 고구려인의 기상과 숨결이 가득한 그 곳이 아차산이다.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250여년 동안 각축을 벌이다 고구려가 160년간 점령했던 전략적 요충지다. 고구려의 군사보루인 홍련봉을 비롯해 17개의 보루 유적(사적 455호)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호), 아차산 봉수대지(서울시 기념물 15호), 신라 의상대사가 문무왕 12년에 창건한 영화사와 천연 암굴 등 유적이 많다. 현재는 평일 5000여명, 휴일 1만여명의 등산객들에게 휴식과 활력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에 내려 오솔길을 따라 약 15분만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아차산에서는 해마다 새해 첫 태양을 바라보며 한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 해맞이를 위해 등산로를 오르다 만난 약수터에서 샘물 한 모금을 마시면 묵었던 고단함이 씻겨지고 정갈한 마음이 든다. 무자년 첫날 오전 7시47분이면 해맞이 광장에서 첫 태양을 볼 수 있다. 아리수를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태양이 떠오르면 한해의 소망을 빌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우렁찬 환호성이 1500년 전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함성이 되어 울려 퍼진다. 대북타고와 2008개의 풍선이 두둥실 떠올라 해맞이 인파의 꿈과 희망을 싣고 날아오른다. 아차산 정상에서 사방 아래를 둘러보면 길게 누운 용처럼 한강이 흐른다. 경기도 남양주 일대와 서울 강남·송파의 너른 벌판, 남한산이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곳이다. 팔각정에서 아차산성길로 접어들면 1500년 전 삼국의 흥망성쇠 역사를 간직한 아차산성을 볼 수 있다. 아차산 입구 맞은편에는 홍련봉 1·2보루가 있다.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연구소가 발굴한 홍련봉은 남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고구려의 연화문와당, 토기, 철기 등 문화재가 출토된 곳이다. 아차산에는 17개 보루 가운데 9개의 보루가 광진구에 있다. 이 한반도 남단 최대의 고구려 유적지인 아차산에 고구려 역사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아차산 기슭에 그동안 발굴된 유물과 새로 출토될 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할 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사업이다. 북한, 중국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의 재현 및 온달장군, 평강공주 고분, 강서대묘 고분과 평양성도 재현할 계획이다. 아차산 고구려 역사공원은 단순한 지역사회 문화시설이 아니다.‘미래를 꿈꾸는 국민 모두의 것’이기에 박물관 건립 촉구 범시민서명운동에 1만여명의 시민이 동참했다.10만명의 의지를 모으는 것이 목표다. 이와 함께 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민간기구인 사단법인 ‘아차산고구려역사공원조성추진회’를 발족해 민간 차원의 박물관 지원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역사공원은 송파구에 건립 중인 ‘한성백제박물관’과 강동구의 ‘선사유적지’를 연계한 트라이앵글의 ‘역사·문화·관광벨트’를 구축,1200만명 외국인관광객 시대를 여는 서울 브랜드 마케팅의 충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2008년 쥐띠 해의 첫날, 해돋이를 보러 교통대란을 겪으며 굳이 먼 지방까지 갈 필요 없다. 새해 첫 새벽에 지하철을 타고 가족, 이웃과 함께 손 맞잡고 출발하자.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고구려인이 올랐던 길을 따라 아차산에 올라보자. 서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첫 일출의 감동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보자. 희망찬 새해 첫날 아차산에서 모든 이들의 건강과 행복, 화합과 번영을 기원한다. 정송학 서울 광진구청장
  • [기고] 도쿄에 한옥 대사관을 건축하자/임성준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최근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전통 주거 양식인 한옥의 아름다움과 이에 숨겨진 선조들의 건축에 대한 지혜를 재발견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필자는 과거 외교부에서 대미외교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정동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에 여러 번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대사관저에 갈 때마다 나는 대사 부부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보다는 한옥으로 지어진 대사관저의 아름다움에 더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 한국 외교관으로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한옥 미국대사관저는 덕수궁 등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우아한 한국의 자태를 보여 주고 있다. 과거 미국 대사관이 관저 신축을 할 당시 백악관과 같은 미국식 건물을 건축했을 법도 한데 당시 하비브 대사는 이를 마다하고 우리 전통 한옥식 관저를 건축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담았다. 이 한옥 관저는 대사의 뜻을 기리고자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로 명명되고 미국의 많은 재외공관 관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이 한옥은 우리 전통건축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외교공관으로서의 기능적 요구와 현대적 감성을 잘 담고 있어 현대사회의 시대적 요구를 잘 담아낸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외공관의 대사관저는 주재국 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 등 다양한 외교행사를 벌이는 장소이다. 이에 각 국가의 대사관저는 각국의 전통가구와 예술품으로 꾸며 그 나라의 문화의 수준과 품격을 보이는 외교활동의 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재외공관 중 격을 갖춘 한옥 관저가 한 군데도 없다는 현실을 볼 때 미국대사관 한옥 관저가 우리에게는 더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는 건축한 지 30년이 된 주일대사관 청사와 관저를 재건축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필자는 초임 외교관 시절 주일대사관에 근무하면서 관저 건축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당시에는 오래된 일식 건물을 헐고 현대식 건물을 짓는 데에만 급급하여 한국도 일본도 아닌 국적 없는 건축물을 짓고 말았다. 이제 새롭게 지을 관저는 앞으로 100년을 내다 보면서 우리의 전통양식인 한옥으로 지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건축양식은 한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으로 자연환경과 교감속에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한옥 역시 우리의 자연을 따라 만들어져 온돌의 과학성이나 마당의 정취는 그 속에 머물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문화의 정수이다. 그러기에 기후나 환경이 너무 다른 곳에서는 건물의 장점을 보일 수도 없으며 제대로 집 구실을 할 수도 없다. 결국 일본과 같이 우리나라와 자연환경이 비슷한 지역에 지어야 그 멋과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과거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반도에 많은 일본 문화를 심어 놓았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한류(韓流)를 통해 우리의 대중문화에 열광하고 있고, 일본 문화의 뿌리가 한반도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일본 도쿄의 한 복판에 새롭게 신축할 관저를 멋진 한옥으로 건축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의 건축가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설계를 하고, 우리의 나무, 돌, 기와로 우리의 장인들이 정성스럽게 지은 한옥 주일대사관저는 앞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일본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100년을 내다 보고 주일 대사관저를 한옥으로 건축할 것을 외교통상부 등 정부당국에 건의한다. 임성준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 식품자급률 ‘사상 최저’

    식품자급률 ‘사상 최저’

    집안의 식탁에 콩나물무침, 쇠고깃국, 생선조림이 올랐다면 국산이 아닐 확률이 높다. 콩은 10% 남짓 국내에서 생산되며, 쇠고기의 국산 자급률은 절반 이하다. 생선은 절반 가까이가 수입산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개방화로 농산물 수입이 급증하고 식생활도 서구화하고 있는 데 따른 현상이다. 12일 농림부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06년 식품 수급표’ 등에 따르면 지난해 주류를 제외한 식품의 자급률(물량 기준)은 59.7%로 추산됐다.1년 전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농림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식품 자급률은 일본을 빼고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하위다. 품목별로 보면 곡류의 자급률은 27.8%였다.2005년에 비해 1.5%포인트 줄었다. 쌀 자급률은 95.3%로 2005년보다 0.4%포인트 하락했다. 보리는 46.5%로 13.5%포인트 급감했다. 옥수수는 0.9%에서 0.8%로 감소했으며, 밀은 0.2%로 증감이 없었다. 콩의 자급률은 2005년보다 3.8%포인트 늘어 13.6%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낮다. 콩나물용 콩은 해마다 7만t이상 소비되는데, 국산 콩은 1만t에 불과하다. 특히 98년 이후 자급률 100%를 유지하던 계란 자급률은 99.4%로 하락했다. 육류 전체의 자급률은 78.4%로 1년새 3.2%포인트 감소했다. 돼지고기가 84.3%에서 77.4%로 6.9%포인트나 급감했다. 어패류 자급률은 60.2%였다. 생선 등 어류는 56.0%, 조개 등 패류는 78.2%다. 배추·무 등 채소는 92.2%로 1년 전보다 2.3%포인트 줄었으며, 사과·배 등 과실류는 82.7%로 2.9%포인트 하락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용어클릭] ●식품자급률 국내에서 소비되는 식품의 양에서 국산 식품이 차지하는 비율(국내 생산량÷국내 소비량×100)을 뜻한다.
  • “아직도 살아숨쉬는 조상의 숨결 느껴”

    “아직도 살아숨쉬는 조상의 숨결 느껴”

    “마음이 매우 아늑해진다.” 정유재란때 남원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자기 노예의 후손 도고 가즈히코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가 7일 남원을 찾아 밝힌 첫 소감이다.<서울신문 11월2일자 26면 보도> 1598년 지리산 자락 남원 도공들이 일본군에 끌려간 뒤 400여년 만에 이뤄진 귀향이었다. 설렘으로 도고 교수는 전날 밤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새벽에는 숙소인 서울대 호암생활관에 서설이 내려 기대가 더 커졌다. ●“가고시마 마을과 산세 너무 비슷” 오전 8시 정각. 남원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국의 눈덮인 산하를 차창밖으로 구경하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3시간 반 만에 남원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남원시청 김순호 계장과 김전형씨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 옛날 도공들도 먹었음직한 서민적인 점심식사를 한 뒤 김전형씨가 “예정된 곳을 둘러본 뒤 시간이 나면 질그릇을 굽는 인월요업에 가보자.”고 말하자 도고 교수는 “그곳이 가장 가보고 싶다.”고 말해 곧바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이동중 차창밖으로 지형을 살피던 도고 교수가 외친다.“할아버지 등이 사시던 가고시마 미야마 마을의 들판과 산세가 너무 비슷하다.”고 말한다. 언덕 위에 신사가 없는 것만 다르단다. 인월요업 김종찬 이사가 “1998년 가고시마의 유명한 도예가 심수관씨가 다녀갔다. 남원 가마의 불씨를 우리가 구운 화로에 담아갔다.”고 소개하자 “놀랍다.”며 감탄했다. 인월요업은 최근에 질그릇 제작에 특화했다. 이어 옛 선조 도공들이 장작을 채취하기 위해 누볐을 지리산중 달궁 일원도 둘러봤다. 그리고 50여㎞ 떨어진 남원시내로 다시 와 광한루와 향토박물관, 도예대학을 찾아봤다.1995년 일본에 간 조선도공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오늘이 오늘이소서’ 탑과 만인의총도 마지막으로 참배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돼” 특히 도고 교수는 향토박물관에서 ‘정유재란 때 나에시로가와(옛 미야마)로 박평의, 아리타(규슈 사가현)로 이삼평씨 등이 끌려갔다.’는 안내에 눈을 번쩍 떴다. 박평의(朴平意)가 자신의 선조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자는 물론 한글 발음도 물어 소중하게 적어 가져가겠다고 했다. 저녁에는 반찬이 20가지나 나온 5000원짜리 식사를 하며 게장을 두 손으로 잡고 맛있게 먹자 김전형씨가 “너무 소탈하다. 얼굴 생김새를 봐도 남원사람의 후손 같다.”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그리고 소감을 묻자 “이곳저곳을 보고 여기서 무슨 일이(역사가) 있었는지 알게 돼 크게 감동했다. 놀랍다.”를 연발했다. 막판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남원시 발전을 위한 조언을 계속했다.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춘향이의 순애보를 활용하라고 강조했다.10년 계획으로 남원의 옛 농촌마을 모습을 실제로 재현하라고도 권했다. 미야마 등지와 자매결연을 맺어 정기교류를 할 것도 추천했다. 남원시내를 흐르는 요천을 본 뒤 “강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활용방안을 다각도로 강구해봐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남원을 한·일 양국 교류의 거점으로 활용하라.”고 권하면서 앞으로 부인과 함께 다시 와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들에게 선조들의 체취가 살아있는 남원을 설명해 주겠다면서 오후 7시50분 용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도자기에서 조상의 숨결·전통이 살아숨쉰다는 걸 확인했다. 기대보다 훨씬 즐거웠다.”고 말할 때 그도 벌써 남원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본 외무성 전 국장인 그는 23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글 남원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 유방암·당뇨극복 도우미 ‘콩’

    옛날엔 노예들의 음식이었다가 지금은 브라질의 대표 전통음식으로 거듭난 페이조아다. 이 검은 콩 요리는 브라질 사람들의 특별한 보양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또 중국에서도 산후의 단백질 섭취원으로 산모들이 즐겨 챙겨먹는 음식이 콩이다. 4일 오후 10시2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생로병사의 비밀’에서는 세계인의 건강식품인 콩에 대해 알아본다. 8년 전 유방암 3기를 판정받은 김복순(55)씨. 항암치료 후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한 그녀는 현재 완치판정을 받았다. 김씨는 꾸준한 콩 음식 섭취로 유방암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흔히 여성들은 4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면 여성 호르몬이 서서히 감소되며 폐경이란 특수한 상황을 겪는다. 지난 2002년 브라질의 연방의대, 식품연구소 등이 폐경여성 80명에게 하루 100mg의 이소플라본을 섭취시킨 결과,85%의 여성이 갱년기 증상이 완화되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12%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문가들은 동물성 단백질보다 저지방 고섬유질의 콩을 일정량 섭취하는 것이 유방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4년간 당뇨를 관리하고 있는 김태영(54)씨. 우연한 사고로 당뇨를 발견한 그는 철저한 식이요법으로 현재 당화혈색소 수치를 정상인에 가까운 6.4%로 맞췄다. 육류를 좋아했던 김씨는 당뇨관리에 들어간 이후 고기 대신 점심상에 청국장과 된장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여성건강식뿐 아니라 대표적 장수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콩. 이 밖에도 올해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와 호서대 박선민 교수가 함께 진행한 전통 콩 발효식품 중 청국장의 발효산물 및 당뇨예방 효능에 대한 연구결과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콩 발효식품의 효능을 두루 짚어본다.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1) 천안 광덕~성환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1) 천안 광덕~성환

    차령고개를 내려오자마자 만나는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는 주막촌이었다. 고개를 힘겹게 넘다 보니 술로 목을 축이거나 국밥으로 허기를 끄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터이다. 저녁 때 고개를 내려온 행인들은 하룻밤 머물다 떠났다. 주민 김재옥(79)씨는 “옛날에는 도로변에 주막이 꽉 찼다.”고 말했다. 그것이 50여년 전 일이라고 전했다. 마을에서 만난 박상선(87·여)씨는 “문기네, 용하네…. 마을 전체가 주막촌이었다.”고 회고했다. 마을 입구에는 ‘원터’라고 쓴 바위가 있어 옛날 마을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김옥균이 양자 가기 전 3년간 살던 곳 주민들은 지금도 자기네 마을을 ‘주막’이라고 불렀다. 나그네들이 북적거리며 흥정망청대던 마을은 옛날의 영화가 사라지고 누추한 모습으로 있다. 좀더 걸어서 내려오면 이 마을 안쪽에 김옥균의 흔적이 있다. 논 옆에 ‘김옥균 선생 성장지’라는 비석이 서있다.1853년 이 마을로 이사와 형조참의이던 서울의 재당숙네 양자로 가기 전 3년간 살았다고 비는 전한다. 100평 정도의 땅에 울타리를 쳐놓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옥균 유허를 둘러보고 “작은 비라도 세워줘라.”고 해 1979년 비가 세워지고 울타리가 쳐졌다고 한다. 마을 이장 김용성(55)씨는 “제사는 지내는 게 없고 해마다 풀만 깎아준다.”고 말했다. 울타리 안에는 김옥균이 살 때부터 있었는지 늙은 감나무가 하나 있다. 금세라도 떨어질 듯한 수많은 감이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냈다. ●400∼500년 전통의 왕버들·장승 마을 옛길은 곡교천을 따라 달린다. 조치원과 천안으로 갈라지는 구정마을 삼거리에서 국도 1호선으로 바꿔 천안방면으로 뻗는다. 그러다 잠시 국도를 벗어나 연기군 소정면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정리역 못미처 곡교천 옆에 왕버들군락지가 있다. 키가 20∼30m쯤 되는 왕버들 수십그루가 자라고 있다. 조선 초기에 한 선비가 낙향을 해 집성촌을 조성하면서 “마을의 꼬리가 짧다.”는 풍수에 따라 냇가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1만 5000평에 달했으나 일제가 토지조사를 실시해 지금은 3000평 정도만 남았다. 주민 이병두(51)씨는 “400∼500년 된 왕버들은 7∼8년 전 얼어 죽었다.”며 “봄이면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많이 몰린다.”고 전했다. 소정역 옆으로 난 옛길을 따라 2∼3㎞쯤 가면 대곡4리 자연마을인 ‘한자골’이 나온다. 일제 때 지어진 소정역은 2년 전 화재로 전소된 뒤 다시 지어져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자골 마을 입구에는 장승 5∼6개가 서 있다. 윤년이 오면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 전날 장승을 새로 깎아 박고 제를 지낸다. 주민들은 장승이 마을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다. 주민 류재두(72)씨는 “500년 전 마을이 조성될 때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라며 “묵은 장승과 새 장승을 동아줄로 묶어 놓고 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애틋한 사랑 전하는 천안삼거리 옛길은 곧바로 국도 1호선과 만나거나 결별하면서 천안시에 진입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조한 고려 윤사덕 장군이 왜구와 싸운 도라티(고개)를 거쳐 천안삼거리로 접어든다. 천안삼거리는 충청과 호남, 영남이 만나는 삼남의 요로다. 어사 박현수와 기생 능소의 애틋한 사랑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 전설은 옛날 홀아비 한 사람이 ‘능소’라는 어린 딸과 어렵게 살다 변방의 수자리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변방으로 떠나던 그는 천안삼거리에서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이 지팡이에 잎이 필 때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며 딸을 주막에 맡겼다. 능소는 이곳에서 기생이 돼 아비를 기다리다 과거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는다. 박현수는 장원급제 후 어사가 돼 내려오다 능소와 재회한다. 이때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하는 흥타령을 불렀다고 한다. 이 지팡이가 자라고 퍼져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전해진다. 천안삼거리에서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는 수양버드나무는 이래서 능소버들이나 능수버들이라고 따로 부르고 있다. 이도령이 한양을 오간 길이고 스토리도 ‘춘향전’과 비슷하다. 옛길을 따라 이런 이야기가 유행했던 모양이다. 삼거리공원은 삼거리에서 시내로 빠지지 말고 우회전, 경부고속도로 목천IC 방면으로 400m쯤 가면 나온다. ●삼거리공원에 ‘하숙생´ 노래비 공원은 넓고 대형 연못도 있다.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노래비가 연못 주변에 서있다.‘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천안 입장 출신인 고 김석야씨가 노랫말을 지었다고 해 2001년 7월 비석이 세워졌다.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83)의 시비(詩碑)도 있다. 그는 천안 수신면 장산리가 고향이다.‘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겠소/재주스럽지 못하니 헛명예 있을소냐’ 홍대용은 자명종을 만들고 ‘지구는 돈다.’고 생각한 북학파의 선구자였다. 이 시비는 1983년 4월 건립됐다. 연못 옆에는 ‘영남루’도 있다. 영호남의 관문인 화축관(華祝館)의 문이었다. 화축관은 왕들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묵어가던 숙소다.1601년 선조 때 세워졌고 규모가 20여칸에 달했다. 일제 때 경찰서 숙소, 헌병대 사무실에서 해방 후에 학교 관사로 사용되다 헐리고 이 문만 남아 1959년 이곳에 옮겨졌다. 문화재자료 12호. 공원을 산책하던 김청동(67·삼룡동)씨는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옛날에는 이 주변이 모두 주막촌이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도로변의 능수버들만 천안삼거리의 내력을 일러준다. 옛길은 다시 시내 쪽으로 나와 천안시청이 있던 구도심을 지난다. 시청이 신도시로 옮기면서 구도심은 최근 누리던 영화가 갈수록 사라지고 있었다. 고려 왕건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천안공대 뒤편 부대동을 지나 시름새로 접어든다. 시름새는 왕건이 후백제를 치러 가다 성거산에 오색 구름이 뜬 것을 보고 “산에 신이 있다.”고 여겨 제사를 지내줬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은 읍내 규모의 시가지 모습이다. ●숭어와 배가 드나들던 안성천 5분쯤 더 가면 성환읍 대흥리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사적비가 나온다. 국보 7호다. 고려 현종이 1021년 아버지 안종의 뜻을 받들어 280칸짜리 사찰을 짓고 이 비석을 세웠다. 고려 10대 사찰의 하나였지만 ‘망이·망소이난’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비만 남았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고 있는 고려 최충이 지었다. 고려 때 이곳은 갈대밭이 우거져 강도가 많았다고 한다. 현종이 사찰을 세운 것은 나그네를 보호하려는 뜻도 있다. 현재는 갈대밭은 거의 없고 국도변 좌우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옛길은 이어 안성천에 이른다. 그 전에 길은 국도에서 약간 동쪽으로 갈라진다. 옛길이 있던 곳은 다리는커녕 징검다리도 없다. 안성천에 붙어 있는 성환읍 안궁5리 송동수(51)씨는 “아산만방조제가 생기기 전 안성천에서는 숭어와 망둥이 등 바닷고기도 많이 잡혔다.”며 “갯벌이 뒤덮여 있었고 배도 자주 들락거렸다.”고 회고했다. 안성천교를 건너면 경기 평택·안성 땅이다. 두 지역의 경계 부근이다. 글 사진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한·중·일 격전지 성환 충남 천안시 ‘성환’은 일본이나 일본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간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의 승패에 이 일대 전투가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멀게는 백제시대 때다. 백제가 660년 멸망한 뒤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벌일 때 일본이 돕는다. 일본은 663년 이곳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붙었다.3만명의 일본군은 아산만으로 전함들을 상륙시켰다가 갯벌에 묶였다. 화공을 퍼부은 당나라에 대패했다.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산만과 이어졌던 안성천교 주변을 지금도 지역 주민들이 ‘몰왜보(沒倭洑)’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성환읍 안궁리와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일대이다. 천안 직산위례문화연구소 백승명 소장은 “이 전투는 신라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이 부근 직산에서 조선을 지원하러온 명나라군과 싸운다.1597년의 일로 역시 일본이 대패한다. 왜장 구로다가 이끌던 이 전투에서 진 일본은 부산까지 밀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철군한다. 사가들은 ‘직산전투’를 행주대첩·평양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꼽는다. 일부에서는 직산전투 대신에 ‘진주대첩’을 넣기도 한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이곳에서 다시 맞붙는다. 청나라군과 첫 전투다. 일본은 이 전투에서 대승해 청나라군을 평양 위로 밀어내고 기선을 제압했다.‘안성천’이란 이름도 이 전투에서 지어졌다고 백 소장은 말한다. 이처럼 성환은 한국, 중국,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한 중요한 격전지로 평가되고 있다. 백 소장은 “일본은 3차례 전투 가운데 최후에 자존심을 되찾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이런 자긍심 때문에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됐을 때 성환역의 역장을 다른 역장보다 한 계급 높은 간부를 앉혀 성환에 특별 대우를 했다.”고 말했다.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선택2007 D-20] 李, 행복도시서 충청 껴안기

    [선택2007 D-20] 李, 행복도시서 충청 껴안기

    27일 경부선을 타고 국토 종단 유세를 펼쳤던 이명박 후보가 28일에는 국토의 허리인 충남 민심 잡기에 나섰다. 충남 최대 현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경제살리기가 공략 포인트였다. 이날 오전 행복도시 현장을 방문한 이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여권에서 ‘이명박이 되면 행복도시는 없다.’고 모략하는데 저는 한번 약속하면 지킨다.”며 강력한 추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어 “명품 첨단도시,‘이명박표 세종시’를 만들겠다.”면서 “자족능력 강화를 위해 세계적인 국제과학기업도시 기능을 더하겠다.”고 역설했다. 공주대학교에서 열린 금강새물결 포럼에 참석한 이 후보는 “한반도의 물길을 잇자. 그래서 백제 문화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곳(충남)에 아주 큰 박물관을 지어 중앙박물관의 백제 유물을 여기에 다 갖다놓고 백제 유물을 보게 하겠다.”며 충남 표심에 호소했다. 충남 아산 온양재래시장 방문에서는 “장사 잘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상인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경제대통령 이명박’을 각인시켰다. 충남 천안의 한 백화점 앞에서 열린 유세에서는 현 정권을 다시 한번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후보는 “일할 줄 모르고, 자기들이 일할 줄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옛날 방식에 국민들이 속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다.”며 현정권과 범여권을 ‘모르쇠 정권’으로 몰아붙였다. 이 후보는 유세에 앞서 충남 아산의 현충사를 방문했다. 분향을 마친 그는 지지자들에게 “열렬한 지지에 감사한다.”며 “12월19일 꼭 당선돼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방명록에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선조에게 올린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네 자를 적었다. 아산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바다를 품은 사찰’ 김제 망해사

    ‘바다를 품은 사찰’ 김제 망해사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나들목을 나서면 횡으로 드넓은 평야가 확 펼쳐진다. 국토의 3분의2가 산지인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은 풍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김제·만경평야다. 내 나라 안 으뜸가는 곡창지대. 그 지평선의 끝자락, 그리고 막 수평선이 시작되는 곳에 망해사(望海寺)가 자리잡고 있다. 동해 양양의 낙산사, 남해 여수의 향일암 등 바다에 접한 명찰들과 규모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해조음(海潮音) 가득한 망해사 또한 서해를 대표할 만큼 빼어난 주변 경관을 갖고 있다. 망연히 바다만 바라보고 서 있을 것 같은 절. 승속의 구분이 엄연한 절집 이름에서 여전히 끊어내지 못한 세속에의 그리움이 느껴지는 불경을 범하며 절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절집 망해사로 가는 길의 초입은 드넓은 평야다. 조정래는 소설 ‘아리랑´에서 ‘그 끝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얼마나 들판이 넓었으면 ‘징게맹갱 외애미뜰(김제 만경 너른 들)´이란 말이 나왔을까. 망해사는 지평선이 수평선과 만나는 진봉산자락 한 귀퉁이에 비좁게 서 있다. 징게맹갱 외애미뜰의 장대한 규모에 비교하면 손바닥보다도 작은 사찰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과 학승 몇 명이 기거한다는 낙서전, 그리고 요사채와 범종각 등이 절집의 전부다. 거기에 팽나무 몇 그루가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내려보며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절집 뜨락만은 세상의 어느 거찰보다 넓다. 바다-새만금간척사업이 바다를 갈라놓았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하자면 육지 속 바다라고 불러야 옳을 듯하다-를 앞마당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물과 강물소리를 듣는 절집은 흔천이지만, 지척에서 바닷물이 들고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해우소의 창문은 차라리 해학적이다. 슬며시 미닫이문을 열면 바다가 한걸음에 달려오는 듯하다. 살아온 연륜도 짧지 않다. 처음 세워진 시기에 대해 백제 의자왕 2년(642년)에 부설거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부설스님이 지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개창 시기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세(寺勢)를 크게 확장시킨 인물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인 진묵대사다.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자료 128호로 지정된 낙서전도 1589년(선조22년)에 그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 작지만 풍광만은 너른 곳 낙서전 앞 바닷가쪽에 7∼8m 거리를 두고 선 팽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끈다. 나이는 400세 남짓. 전라북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이 나무들에는 각 각 할배나무와 할매나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안쪽의 할매나무는 바깥쪽 할배나무에 비해 다소 왜소한 편이다. 할배와 더불어 거친 세상과 마주하며 애면글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할매의 신산한 삶을 보는 듯하다. 절집 위쪽의 전망대에 오르면 작은 진봉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치고는 참으로 넓은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군산에서 김제, 부안까지 내쳐달리는 황톳빛 바다가 망망대해를 이루고, ‘징게맹갱 외애미뜰´의 누런 들판이 비슷한 크기로 뭍을 뒤덮고 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로 눈을 돌리면, 오른쪽엔 내륙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온 만경강이 마지막 줄기를 토해내고, 왼쪽으로는 심포항이 바다 위에 고즈넉하게 걸려 있다. 대해(大海)와 단절된 탓일까. 광대하기는 하나 어딘가 쓸쓸함을 감출 수 없는 풍경이다. 범종각에 걸린 낙조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대해의 위세를 잃어버린 바다 아래로 몰락하는 해가 여느 곳보다 유난히 붉을 듯하다. 김제땅에서 바닷가와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곳은 심포항이다. 백합 산지로 많이 알려진 곳. 물때에 따라 끝이 4㎞에 달한다는 심포 갯벌은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새만금 물막이공사로 인한 갯벌 생태계 변화가 걱정거리지만 어민들은 여전히 조개를 캐고, 물고기를 잡는다. 요즘은 관광단지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찾는 발길은 많지 않은 편. 아직까지는 때묻지 않은 소박한 어촌풍경을 느낄 수 있다. 닻을 내린 채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고깃배들의 모습이 평온하기만 하다. 비승비속의 호방한 행적으로 유명했던 진묵대사는 심포항에서 지척인 불거촌 태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得魚忘筌)´이란 경구를 후세에 남겼다고 한다. 새만금 물막이공사의 당사자들은 거대한 둑으로 물길을 막아도 갯벌이 예전과 같은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기왕 고기는 잡았더라도, 통발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글 사진 김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서김제 나들목→삼거리 우회전→29번 국도 만경 방향→만경고 삼거리→좌회전→702번 지방도 심포항 방향→망해사. 심포항은 망해사를 지나쳐 직진하면 된다. 김제시청 063)540-3114, 망해사 543-3187. # 맛집 김제 시청 인근 매일회관(542-7345)은 청국장, 김치찌개 등에 20여가지 반찬이 딸려나오는 백반집.5000원.‘가격대비 성능’이 좋다. 시청 지나 지평선마트 사거리에서 우회전, 시장길을 따라가다 새마을금고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낙원예식장 근처다. 시내 수협 옆의 변산온천산장바지락죽 김제점(546-3939)은 바지락죽으로 유명한 변산온천산장의 김제 분점.2만원짜리 바지락정식을 주문하면 바지락전, 바지락죽, 초밥, 백합구이, 조개구이 등이 나온다. # 주변 관광지 금산사(geumsansa.org)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아들에게 감금된 역사를 간직한 대찰이다.3층탑 형식의 미륵전(보물 62호)은 내부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독특한 건물.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자락에 있다.1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최고의 치수시설인 벽골제가 지척이다. 김제시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부량면 방향으로 달리면 된다.
  • [요리전문가 김수진의 계절별미 오감만족] 계절의 별미 ‘도루묵’

    [요리전문가 김수진의 계절별미 오감만족] 계절의 별미 ‘도루묵’

    “말짱 도루묵~~!!” 노력을 기울인 보람도 없이 헛되게 되는 일을 얘기한다. 도루묵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일이다. 정작 도루묵은 아무 잘못도 없이 이런 누명(?)을 듣는 것이다. 세상 일이 이렇게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일이 종종 있다. 오늘은 필자가 도루묵의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도루묵은 농어목 도루묵과에 속하는 몸길이 25㎝ 내외의 생선으로 한자로는 목어(木魚), 은어(銀魚), 환목어(還木魚), 환맥어(還麥魚), 도로목어(都路木魚)라고 한다. 도루묵의 이름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조 후기에 이의봉이 지은 ‘고금석림’에 의하면, 고려 때 이민족의 침입으로 왕이 피난을 가게 됐다. 워낙 다급한 지경이라 제대로 짐을 싸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피난을 가던 중 어떤 어촌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워낙 가난한 마을이라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임금님의 행차라 송구한 마음이 든 마을의 촌로가 미천한 백성들이 먹는 것이지만 이것을 반찬으로 식사를 하시라며 한 생선을 바쳤다. 그 생선을 먹은 왕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처음이었다.”면서 생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촌로는 “특별한 이름은 없고 다만 저희들은 ‘목’이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목’이라는 이름은 가당치 않다면서 은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뒤 다시 궁궐로 돌아온 왕은 어느날 피난 때 한 어촌에서 먹었던 그 생선의 맛을 잊을 수 없어 은어를 올리라고 명을 하였다. 수라간에서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왕에게 음식을 올렸다. 그러나 피난 당시의 맛을 생각하고 생선을 먹은 왕은 너무나 맛이 없어서 실망하였다. 피난 때 지치고 배고픈 상태에서 맛있게 먹었던 그맛이 아니었다. 왕은 은어라는 이름이 가당치 않다면서, 다시 생선 이름을 목이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도로 목’이라고 했고 나중에는 ‘도루묵’이 되었다. 대표적 요리 두 가지를 소개한다. ■ 도루묵 조림 재료 및 분량(2인분) 도루묵 5마리, 무 300g, 쪽파 2대, 양념장(고추장 1큰술, 물 반컵, 맛술 1큰술, 다진마늘 1작은술, 물엿 1작은술, 간장 1큰술, 참기름 1큰술, 깨 1작은술) 만드는 방법 1. 도루묵을 통째로 깨끗이 씻어 맛소금 1작은술에 1시간 정도 재운다. 2. 양념장을 만든다. 3. 무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4. 쪽파는 약 2㎝ 길이로 썬다. 5. 양념장 1큰술에 무를 넣어 약한 불에 조린다. 6. 무가 2/3 정도 익으면 도루묵을 무 위에 올리고 양념장을 올려가며 약불에서 조린다. 7. 이때 쪽파를 고명으로 올린다. 8. 조려진 도루묵을 그릇에 담아낸다. ※뚜껑을 덮고 조리게 되면 살이 물러지므로 뚜껑을 완전히 열고 조린다. ■ 도루묵 구이 재료 및 분량(2인분) 도루묵 5마리, 맛소금 2/3큰술, 백후추 1/2작은술, 식용유 1큰술. 만드는 방법 1. 이 계절의 도루묵은 알이 많이 있으므로 통째로 깨끗이 씻는다. 2. 소금과 후추를 뿌려 밑간을 해둔다. 약 3∼5시간 재운다. 3. 팬을 달궈 식용유 두르고 중불에 도루묵을 올린다. 4.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알이 익을 수 있도록 튀겨 낸다. ※뚜껑을 완전히 덮고 튀기면 수증기에 의해 도루묵 살이 물러져 형체가 없어지므로 뚜껑을 1/3정도 열어 공기가 들어가도록 구워야 한다. 푸드앤컬처코리아 원장
  • 튼살치료! 겨울부터 준비하세요!

    튼살치료! 겨울부터 준비하세요!

    튼살의 의학적인 명칭을 팽창선조라고 부르는데 허벅지,복부,피부 등이 얇게 갈라지는 증상이 대부분이다.튼살이 생기는 원인은 갑자기 살이 쪄서 피부 밖으로 속살이 비집고 나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실질적으로는 부신피질호르몬이 갑자기 늘어나 진피층의 콜라겐이 파괴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방에서 보면 피부내의 기혈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튼살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료시기라고 할 수 있다.초기의 붉은색을 띠고 있을 때는 치료가 쉽지만 후기 단계로 넘어가면서 전체적으로 제대로 된 효과를 얻기가 어렵다.하지만 요즘에는 의학 기술도 많이 발달하여 흰색의 튼살까지 없앨 수 있는 시술법으로 발전되고 있는 추세이다. 튼살을 비롯한 피부 치료로 유명한 명옥헌 한의원은 최근 튼살을 치료하려는 환자들로 붐비고 있다. 명옥헌 한의원 김병호 원장은 “튼살 치료는 내부에 잘못 형성된 콜라겐층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포가 재생되는 침술로서 튼살을 치료하는데 대략 3∼6개월이 걸리기에 내년을 대비해서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최근 고3학생들 중 시험을 일찍 끝낸 학생들은 종아리 튼살을 없애기 위해 많이 내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튼살은 발생 전의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에 대해 김원장은 “튼살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마사지 법이 있는데,아랫배 쪽의 튼살은 손가락으로 꼬집듯이 살을 잡았다가 탁 놓는 것을 반복하면 도움이 되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나선형으로 원을 그리면서 위쪽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또한 “허벅지는 양손바닥을 번갈아 가면서 아래에서 위로 힘있게 쓸어 올려주면 예방에 도움이 된다.이 원리는 우리 몸에 흐르는 경락이 기혈이 흐르는 통로로서 안쪽으로는 육장부와 통해 있고 바깥쪽으로는 근육과 피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라며 “모든 경락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마사지를 하게 되면 몸에 양의 기운을 보태게 되어 비만 등에 도움이 되고 반대쪽으로 하게 되면 음의 기운을 더하게 되어 건조한 피부에 효과적” 이라고 강조한다. 도움말 : 명옥헌한의원 김병호 원장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3)김시습과 만복사 석불입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3)김시습과 만복사 석불입상

    매월당 김시습(1435∼1493)처럼 전국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은 옛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매월당이 최후를 마친 충남 부여 무량사에는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가 있습니다. 무량사에는 그의 초상화도 영정각에 모셔져 있는데, 유·불·선(儒·佛·仙)을 넘나든 이 사상가가 이곳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선사(禪師)로 대접받았음을 뜻합니다. 최근 매월당의 관향(貫鄕)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강릉의 경포대에는 김시습기념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태어난 오죽헌이 지척이지요. 율곡은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의 전기를 짓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인연이 깊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1455년(단종 3년) 마침내 보위에 오르자 책을 불사르고 방랑을 시작합니다. 그는 모두 2200편에 이르는 시를 남겼습니다.‘유관서록(遊關西錄)’과 ‘유관동록(遊關東錄)’,‘유호남록(遊湖南錄)’,‘유금오록(遊金鰲錄)’은 일종의 기행연작시이지요. 시의 제목을 훑어가다 보면, 전국적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보다 닿지 않은 곳을 찾는 편이 오히려 빠를 지경입니다. ‘유금오록’은 김시습이 30대 시절, 오늘날에는 남산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경주 금오산에서 지은 것입니다. 짐작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소설인 ‘금오신화’도 그가 금오산 남쪽 용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 썼습니다. ‘금오신화’는 5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것으로,‘만복사 저포놀이(萬福寺樗蒲記)’도 그 하나이지요. 저포란 나무로 만든 일종의 주사위를 던져서 승부를 겨루는 중국 놀이라고 하는데, 우리식의 윷놀이도 한자로는 저포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복사는 전북 남원의 기린산에 있었던 절입니다. 지금도 남원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가에서 절터를 찾을 수 있습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문종(1019∼1083)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요. 탁발을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가는 스님의 행렬(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하고 있습니다. ‘만복사 저포놀이’는 양생(梁生)이란 노총각이 만복사를 찾아가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여 이기고는, 소원대로 불공을 드리러 온 처녀를 만나 이승의 3년에 해당하는 꿈 속 같은 3일을 지내고는 헤어진다는 내용입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처녀는 왜구의 난리를 만나 죽임을 당한 혼령으로, 이후 양생도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만복사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탔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씌어진 ‘만복사 저포놀이’에 벌써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퇴락의 원인도 왜구의 침입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만복사에는 창건 당시 조성된 석불입상이 하나 전하고 있습니다. 원만하고 양감있는 얼굴과 유려하고 굴곡있는 신체 곡선이 자연스럽습니다. 전체 높이가 2m라지만 대좌와 광배를 제외하면 부처님은 사람키와 비슷하지요. 저포놀이를 하자는 양생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 같은 친근한 모습입니다. 매월당은 세조 8년(1462) 여름을 순천 송광사에서 보내다 남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광한루에 오르니 피리소리 들리다’는 시를 남겼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 때 만복사에 머물며 지금은 보물 43호로 지정된 이 석불입상을 만났을 것입니다. 춘향과 판소리의 고장에서 뜻밖에 ‘금오신화’의 주인공과 마주치고, 매월당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dcsuh@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충남 논산시 상월에서 공주시로 넘어온 옛길은 계룡면 경천에 다다른다. 이곳에 섰던 5일장은 한때 공주에서 가장 컸다. 저녁 때 도착한 이 시장터는 한가한 분위기에 파리만 날렸다. 이곳에서 20년째 경천철물점을 운영하는 이영수(70)씨는 “옛날에 시장이 섰을 때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면서 “10여년 전 시내버스가 들어온 뒤로 5일장이 죽었다.”고 말했다.1000평은 됨 직한 장터는 차들만 몇대 주차돼 있고 텅 비어 있다. ●마을에 승병 영규대사의 묘 그 전에는 신원사, 갑사는 물론 신도안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계룡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한복판인 이 시장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장이 서면 철물점에 농기구를 사려는 손님이 들끓었다. 국밥집마다 손님이 넘쳐났고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둥그런 시장 주변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이씨는 “그때를 기억해서인지 5일장이 섰던 2일과 7일에 떠돌이 옷장수 2명이 찾아온다.”고 씁쓰레하게 웃는다. 일제 때 경천에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30년 월암리로 이전했다. 이씨는 “정석모(전 내무부 장관) 아버지가 면장할 때 옮겼어.”라며 아쉬워했다. 옛길은 국도 23호와 갈라져 소로로 내달린다. 계룡초등학교 담을 끼고 바로 좌회전해 농로를 따라가면 유평1리가 나온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을 일으킨 영규대사(?∼1592년) 묘가 있다. 이 마을 출신이다. 영규는 서산대사의 제자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옆 마을인 월암리로 피신했다 숨졌다. 묘는 충남도기념물 15호이다.1810년 순조 때 세워진 비석도 있다. 주민 박상희(70·여)씨는 “동네 주민들이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준다.”고 전했다. ●‘정감록´ 흔적이 배인 땅 길은 계룡면 사무소 앞에서 국도 23호와 합쳐진다.3㎞쯤 달리면 널티고개가 나타난다. 경사가 완만하다. 이 고개에 물이 넘치면 ‘정씨 왕조’가 세워진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정감록에 나오는 왕조를 일컫는다. 널처럼 속이 비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무넘이’라고 불렀다. 고개가 관통하는 동명리 이장 유병상(67)씨는 “정씨 왕조 얘기는 잘 모르지만 우리와 인근 마을에 농수를 대기 위해 기산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관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처럼 닦인 국도를 타고 10㎞쯤 내달리면 금강 앞이다.1㎞ 전방에서 빠져 시내쪽으로 가다 보면 소학동이 나온다.‘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가 이 마을에 있다. 향덕은 통일 신라 경덕왕시절인 755년 부모가 가난과 유행병으로 시달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기록에 있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알려졌다. 왕이 향덕의 효행을 알고 벼 300석과 집 등을 하사했다. 이후 ‘효가리(孝家里)’라고도 불려졌다. 비석 앞에는 48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 11m, 둘레 3.3m로 매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빈다. ●“귀향온 사람 나루터 건너자 목 베어”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로 1㎞쯤 넘어 가면 공주대교 앞 장기대나루가 나타난다. 공주대교 밑에 만든 게이트볼장에 있던 팔순 가까운 할아버지는 “30년 전만 해도 노를 저어 강을 건너주는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양에서 귀양 오는 사람들이 나루터를 건너면 목을 많이 쳤다.”며 “옛날에는 강 옆 산에 시신을 묻은 고린장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지금은 강에 펌프장이 설치돼 있다. 나루터에는 수백년 된 팽나무가 있었다. 나룻배를 묶어두고 손님들이 쉬어가던 나무다. 교량이 건설되면서 공주대로 옮겨 심었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이곳에서 시내를 지나서 7㎞쯤 떨어진 곳에 우금치가 있다. 이 고개는 전봉준 장군이 1894년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운 동학혁명전투 중 최대 격전지다. 공주대 윤용혁(역사교육과) 교수는 “주력 동학군은 이인쪽을 통해 공주로 올라왔지만 일부는 공주 구간 옛길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동학혁명은 우금치 전투의 대패로 결국 실패했다. 금강을 건넌 옛길은 공주대와 신관초교를 거치지만 지금은 길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정안천 주변을 따라가던 길이 국도 23호와 만나는 곳은 조선조 숙박시설이 있었던 모란 마을이다. 얼마 안가 국도변에 붙어 있는 ‘석송정’이 나온다. 마을 이름도 정안면 석송리다. 이 정자는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올 때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 인조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 유림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세금 감면을 해줬다고 한다. 훼손된 것을 1985년 공주시가 복원했다. 정자 주변에 인조가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생가터에 비석만 잠시 국도와 헤어진 옛길은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1851∼94년)과 만난다. 그가 6세까지 산 정안면 광정리 생가터다.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것처럼 생가터는 썰렁하다. 유허비와 안내판만 잔디에 서 있을 뿐이다. 10여가구가 있었다던 마을은 사라졌고 ‘감나무골’로 불리듯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몇 그루만 서있다. 그의 묘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다. 김옥균 생가터에서 나오면 옛길은 곧바로 국도와 합쳐진다.3∼4분을 달리면 길은 또다시 국도와 갈라져 차령고개로 오른다. 차령산맥의 모태가 되는 지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서 ‘차령고개 이남, 금강 밖은 등배(반역)의 산세이므로 그 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마라.’고 한 곳이다. 지금은 국도가 따로 나 차들이 드물다. 울창한 숲만이 옛 위용을 알려준다. 차령고개 밑 정안면 인풍리 주민 조주형(67)씨는 “옛날엔 숲이 더 우거졌었다.”면서 “50년 전만 해도 천안 행정리 5일장에 가려면 고개에 도둑떼가 많아 혼자 소를 끌고 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주변에 ‘도둑골’이라는 마을까지 있었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당초 ‘금북정맥’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공주와 천안의 경계 지점으로 정상에 오르자 천안시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인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태조 이성계 금강변 신도안에 도읍 구상 충남을 가로지르는 금강은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에 이어 항상 한 나라의 수도로 떠오른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금강변 공주·연기지역에 행정도시 건설이 추진되지만 수도로 거론된 역사는 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위례성에서 건국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유역인 현재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구려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 밀리면서 백제 문주왕이 475년 다음 수도로 정한 곳이 금강변 웅진, 충남 공주다. 지금은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으로 불리다 금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져놓은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제26대 성왕이 538년 이전한 수도는 ‘사비’이다. 충남 부여로 역시 금강변에 위치한다. 부여를 통과하는 금강은 별도로 ‘백마강’으로 불린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룡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말로 용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바위인 조룡대(釣龍臺)는 고란사 앞에 있다. 백제는 660년 사비시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만다. 금강변이 다시 수도로 떠오른 건 조선 건국 때.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자락인 신도안을 수도로 정했었다. 금강에서 가까운 곳이다. 한양에 밀려 공사가 1년 만에 중단됐지만 아직도 주춧돌 등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서 ‘정씨 진인이 나타나 새 왕조를 세운다.’는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이다. 선조 때에 발생한 정여립(1546∼89년)난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의 파괴력이 지속되면서 무속인이 신도안으로 몰렸다.1975년에만 해도 상제교, 태을교 등 104개 신흥종교 시설이 있었으나 계룡대를 조성하는 ‘620사업’으로 거의 사라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금강변 공주·연기를 행정 수도로 검토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이곳을 행정수도로 정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일부 국민들의 반대로 ‘행정도시’로 격이 낮아졌지만 이 사업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전북 장수군에서 충남 서천 금강하구둑까지 394㎞를 흐르는 금강.2014년까지 대통령 직속기관 4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총 49개 중앙행정기관이 들어서는 행정도시 ‘세종시’가 백제의 옛 영광을 재현할지 기대되고 있다. 공주대 윤용혁 교수는 “한반도 중심인 한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밀리면 다음으로는 천상 금강이 가장 적지다.”며 “대외적으로 교통이 좋은 강을 끼고 있고 넓은 평야지대 등 수도로서는 조건이 무척 좋다.”고 말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기고] 벽오동 심는 뜻은…/정헌율 행정자치부 지방행정정책관

    옛날 장롱이 첫번째 혼숫감이던 시절,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안뜰에 벽오동을 심었다.20년 후를 내다보는 선조들의 지혜를 보면서 행정을 담당하는 우리 공무원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동사무소의 명칭이 지난 9월 동주민센터로 바뀌었다. 서운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그동안 동사무소는 읍·면사무소와 함께 국가행정의 최일선에서 국가시책을 주민들에게 침투시키는 접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출생신고를 시작으로, 취학통지서·징집통지서·예비군훈련통지서를 배부했고, 각종 공부열람, 세금납부는 물론, 사망 신고를 함으로써 동사무소와의 인연을 마감한 것이다. 동사무소는 읍·면사무소와는 달리 시대상황에 따라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일제시대 이래 ‘리’와 동일한 지위를 유지해 오다 1961년 행정동제 도입을 거쳐 1988년 읍·면과 동일한 지위로 격상됐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교통·통신의 발달로 행정의 광역화 추세가 강화되면서 동사무소는 또 한차례 변화를 겪게 됐다. 단속·동원업무 등 권력적 행위는 시 본청으로 이관하고 동사무소는 단순 생활민원업무만 담당토록 하면서 그 여유공간에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해 탈관청화(脫官廳化)가 진행됐으며, 이 과정에서 281개의 동사무소가 통·폐합됐다. 이번에 추진되는 동의 명칭변경도 이러한 진화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양적·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동사무소에 가지 않고도 전국 1600여개소에 설치된 무인민원발급기 등에서 70여종의 민원서류 발급이 가능해져 동사무소의 존재 이유가 없어졌다. 반면 복지행정 수요가 급증하면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도록 주민복지서비스 전달체계의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복지 선진국인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는 지역별로 설치된 복지센터에서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자원봉사자에 가까운 사회복지사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독립된 공간의 상담실에서 개별상담을 통해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복지서비스를 추출, 도움이 필요한 주민들에게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설계해 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먼 남의 나라 얘기 같지만, 이젠 우리에게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정부는 최근 신설된 87개 복지관련 사무를 포함한 368개의 8대 주민생활지원사무를 통합·관리하고, 전담 포털시스템을 구축해 동주민센터에서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토록 추진 중이다. 자원봉사단체 등과 민관협력체계를 구축, 수요자 입장에서 실질적인 복지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준비도 하고 있다. 또 이미 전국의 동주민센터 2118개소에 상담실을 설치하고,3900여명의 사회복지사를 배치했으며, 장기적으로는 나머지 공무원들도 사회복지사로 배치할 계획이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동사무소의 명칭변경이라기보다는 기능이 다한 동사무소를 폐지하고, 새로운 주민센터를 탄생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제는 더이상 동사무소가 공급자 중심인 행정관청이 아니라, 수요자인 주민이 주인이 되는 주민센터가 돼야 한다. 다소 생소한 제도이고, 이제 막 시작단계이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명칭을 바꾸게 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국민들이 애정을 가지고 자꾸 불러주면 주민센터는 한송이의 꽃이 되어 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이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정헌율 행정자치부 지방행정정책관
  • [4일 TV 하이라이트]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을 표현할 때 흔히 ‘신주단지 모시듯 하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부터 조상들은 집안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쌀이 담긴 단지를 안방이나 대청 등지의 가장 윗자리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을 신주단지라고 했다. 스튜디오에서 직접 신주단지에 쌀을 담아봄으로써 선조들의 소박한 정신을 엿보기로 한다. ●겨울새(MBC 오후 9시40분) 경우는 정회장에게서 건네받은 돈으로 개업을 준비하게 되고, 경우모는 살판 난 사람처럼 진두지휘하며 설친다. 그런 경우모의 모습에 이여사와 은숙, 민희는 불쾌해하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한편, 영은은 정순을 통해 경우모가 이여사한테 임신축하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굿모닝 세상은 지금(SBS 오전 7시40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고 자전거 타기를 장려하는 정책 경쟁이 불붙고 있다. 자전거 교통분담률이 겨우 2%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지자체들이 앞다퉈 자전거 이용확대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이번 주는 자전거 열풍과 함께 인기작가 김훈과 떠난 자전거 여행을 소개한다. ●얼쑤! 일요일 고향 愛(SBS 오전 6시50분) 고즈넉한 마을 풍경만큼이나 후덕한 인심을 자랑하는 충남 서산 칠전리. 서산에서 생강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토굴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생강은 서리가 내리게 되면 수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열흘 정도 부지런히 수확을 해야 한다. 속이 꽉 찬 생강만큼이나 풍성한 칠전리 마을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영화특선 ‘결사대작전’(EBS 오후 11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한국 해병대 강상호 중령에게 특공대를 조직하도록 명령한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팔미도의 등대에 불을 밝혀야 하는 것. 강중령의 명을 받은 박대위는 험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남성들을 모아 특공대원으로 조직하고 맹훈련을 시킨다.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8시30분) 필리핀에서는 해마다 특별한 국제 미인 선발대회가 열린다. 대자연과 환경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미스 어스 선발대회가 열리고 수상자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각종 환경 세미나에 참가하는 등 환경 보호에 앞장선다. 덴마크에 사는 환경운동가는 건강한 환경을 위해 친환경 소재로 만든 집들과 연구소를 직접 세웠다. ●조강지처클럽(SBS 오후 9시55분)길억과 나미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호텔 레스토랑을 찾고 복수와 기적도 연애시절을 떠올리며 같은 호텔에 간다. 기적과 마주친 나미는 당황하는 기적에게 지금 당장 5분만 시간을 내라고 요구한다. 원수와 같이 있다 남편의 전화를 받은 지란은 시중이 따뜻한 말을 건네며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자 눈물을 글썽거린다. ●EBS스페이스-공감(EBS 오후 10시) 재미교포 기타리스트 잭 리의 스페셜 프로젝트 콘서트가 열렸다. 잭 리와 음악적 교류가 깊었던 정상급 뮤지션들이 진행하는 이 무대는 각 뮤지션의 대표곡들을 ‘재즈’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다국적 감성으로 융합해내는 특별한 재즈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1629년 겐포(玄方) 일행은 상경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명령을 받아 온 사자(國王使)라고 강변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이 진짜 국왕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홍명(鄭弘溟)을 선위사(宣慰使)로 왜관에 보냈다. 하지만 겐포 일행은 국왕사가 마땅히 지참해야 할 국서(國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조선은 당연히 상경을 다시 거부했다. 겐포는 국왕사라고 우기며 협박을 계속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상경을 둘러싼 실랑이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외교전문가로 길러진 겐소의 제자 겐포 겐포(1588∼1661)는 17세기 초반 조·일 관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승려였다. 그의 정식 이름은 기하쿠 겐포(規伯玄方)였고 호를 백운(白雲) 또는 회계(晦溪)라고 했다. 규슈 하카다(博多)에서 태어난 그는 출가한 이후 쓰시마로 건너갔는데,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겐포에게 외교술을 가르쳐준 스승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였다. 본래 하카다의 성복사(聖福寺) 주지였던 겐소는 1580년 쓰시마로 건너갔다. 겐소는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쓰시마에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과의 교역이 경제적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쓰시마의 입장에서는 능숙하게 외교문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절실했다. 문화적으로 일본인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조선 관인들과 접촉하려면 한문 실력뿐 아니라 시문(詩文) 등을 수작(酬酌)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재능도 필요했는데 겐소는 바로 그 같은 임무에 적격이었다. 겐소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왜란 당시 명군 지휘부는 그를 일본군의 모주(謀主)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여 그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상금을 주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겐소의 활약은 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후 쓰시마의 소오씨(宗氏)는 겐소를 내세워 조선과의 강화를 성공시켰다. 겐소는 조선 사절의 도일(渡日)을 이끌어내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겐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겐포는 17세부터 쓰시마의 이정암(以酊庵)이란 곳에 머물며 겐소를 보좌하면서 조선과의 외교를 배웠다.1611년 겐소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이어 쓰시마의 외교문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오씨는 겐포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그를 교토(京都)로 보내 좀더 학문을 닦도록 했다. 겐포는 1619년부터 쓰시마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621년에도 국왕사라는 직함을 갖고 부산에 왔던 적이 있었다. 요컨대 겐포는 스승 겐소와 쓰시마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길러진 외교 전문가, 조선 전문가였던 셈이다. ●조선, 논란 끝에 상경을 허용하다 겐포가 상경을 고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인조는 강경했다. 그는 ‘왜놈들은 우리의 원수’라고 전제한 뒤 일단 금제(禁制)를 풀면 이후의 폐단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대의(大義)를 고려하여 상경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상경을 허용하면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는 셈이 되고, 일본은 분명 조선에 사람이 없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료들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병조판서 이귀(李貴)는 ‘선조(宣祖)께서도 일본을 이웃나라로 대우했는데 이웃 사신의 상경을 불허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는 현실론을 내세웠다.‘호란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현실에서 왜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으며 유순한 태도로 강자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보국(保國)의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신료들의 생각도 대체로 이귀의 주장과 같았다. 하지만 인조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여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겐포가 왔을 무렵 안팎의 사정이 너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1629년 2월,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가 서울에 들어왔고, 같은 달 후금군은 선사포에 있는 모문룡의 둔전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후금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피란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3월에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내와 ‘조선이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모문룡과 관계를 끊으라.’고 다시 협박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에 명화적(明火賊) 등이 발생했다. 이정구(李廷龜)는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조선을 가리켜 ‘공허한 나라(空虛之國)’라고 표현했다. 이귀가 다시 나섰다. 그는 ‘후금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사단을 만들 수는 없다.’는 논리로 상경을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이정구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는 겐포 일행 가운데 몇 사람만 ‘특소(特召)’라는 명목으로 상경을 허용하되 나머지 인원은 부산에서 접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도 상황 논리에 밀려 결국 신료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절충안이 부산으로 전달되었다. 조선 조정은 겐포 일행에게 상경을 허용하면서 그들을 국왕사가 아닌 바로 아래의 거추사(巨酋使) 급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국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사의 사절 정원은 25인이었는데 거추사의 정원은 15인이었다. 겐포는 반발하면서 거추사의 인원에 수행원 4인을 더 추가해야 한다고 강청했다. 또 자신이 ‘보행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가마를 타고 상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홍명은 겐포 일행의 집요한 요구에 밀려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1629년 4월6일,19명으로 구성된 겐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상경 길이었다. ●돌아갈 때 목면 600동까지 챙겨 겐포 일행은 4월22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4월25일, 경덕궁(慶德宮, 오늘날의 경희궁)에서 인조에게 인사를 올리는 숙배(肅拜)를 행하고 5월21일 출발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조를 알현할 때 진상품으로 조총 20정을 비롯하여 화약 원료인 유황(硫黃)과 염초(焰硝) 수백 근을 바쳤다. 조선이 후금과 막 전쟁을 치렀던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전쟁을 치른 조선이 가장 아쉬워 할 수밖에 없는 무기류를 헌상함으로써 쓰시마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했다. 겐포가 이끄는 사절단의 본래 목적은, 막부의 명령을 받아 정묘호란 이후의 조선과 대륙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겐포 일행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 내부 사정은 물론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심했다. 조선인들을 통해 얻어들은 정보를 기행문 등에 꼼꼼하게 적었는가 하면, 대동했던 화가들을 시켜 목도했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겐포 일행은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島主)가 특별히 보낸 스기무라(杉村采女)는 무기류 등을 헌상하여 조선의 환심을 사는 한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목면(木棉)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기무라가 요청한 목면의 양은 600동(同)이었다. 자그마치 3만 필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거절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겐포 일행은 5월21일 서울을 뛰쳐나갔다.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에게 보내는 서계(書契)의 접수도 거부했다. 조선 조정은 난감했다. 최명길 등은 남변(南邊)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달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은 결국 목면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왜관에 머물며 조선의 수락 소식을 들은 겐포 일행은 6월12일 유유히 귀국선에 올랐다. 정묘호란을 겪은 직후 ‘공허지국’ 조선의 외교를 이끌던 당국자들의 고뇌가 눈에 밟힌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튼살, 초기에 잡아라!

    튼살, 초기에 잡아라!

    임신이나 갑작스런 체중 증가나 키 성장 등으로 생겨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튼살.최근 쌩얼이라 하여 피부가 좋은 미인들이 각광을 받는 이 시점에 튼살은 여성들에게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튼살은 사실 ‘팽창선조’라는 피부질환의 일종이다.갑자기 살이 쪄서 살이 피부 밖으로 비집고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학적으로는 부신피질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해 피부 진피층(안팎 두 겹으로 된 피부의 안쪽)의 콜라겐이 변성된 것이다.콜라겐과 함께 피부 세포의 탄력 조직을 형성하는 단백질이 엘라스틴인데,피부가 갑자기 팽창하면서 콜라겐과 엘라스틴이 찢어져 ‘살트임 현상’이 나타난다. 튼살은 내분비 질환이나 만성 소모성질환이 있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고 스테로이드 제제 연고를 장기간 바른 후에도 생길 수 있다.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부신피질 호르몬은 사춘기나 임신기에 분비량이 갑자기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비만하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생길 수가 있다는 점이다. 체중 증가뿐 아니라 몸에 꽉 끼는 속옷 역시 튼살을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이다.몸에 꽉 끼는 속옷은 피부세포에 산소 공급을 방해하고 신진대사를 원활하지 못하게 만들어 피부를 붓게 하고,이것은 피부의 표면적을 넓혀 ‘살트임’의 원인이 된다.살트임은 증상을 잘 살펴 되도록 초기에 치료해야 한다.튼살은 초기 푸른빛 또는 붉은색 선이 엉덩이,넓적다리,아랫배,무릎 뒤,그리고 유방 등에 나타나는데 자세히 보면 정상피부보다 가라앉아 있어 만져보면 약간 울퉁불퉁하게 느껴진다.이 같은 초기 병변은 시간이 지나면서 흰색으로 변한다. 명옥헌 한의원 김병호 원장은 “임산부보다는 사춘기에 발생하는 다리와 사타구니의 튼살이 더 흔하고,다이어트를 많이 하는데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살트임 현상도 늘고 있다.”고 말하고 “튼살이 후기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치료가 어려워지므로 가능한 한 초기에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부위별 튼살 예방 마사지 방법 ▶가슴: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듯이 마사지한다.양손으로 가슴을 외측부터 중앙부위로 쓸어내리듯 마사지 한다. ▶가슴 옆선:바깥쪽에서 겨드랑이 쪽으로 직선을 그리면서 마사지 한다. ▶배:배꼽을 중심으로 나선을 그리면서 바깥쪽으로 마사지한다. ▶허벅지:양손 바닥을 번갈아 나선을 그리면서 아래에서 위로 힘있게 쓸어올린다.허벅지를 절반으로 나눠 무릎 윗부분부터 쓸어주듯 마사지한다. ▶종아리:양손 엄지를 사용해 허벅지 아래 부위와 종아리 윗부분을 쓸어준다. 도움글:명옥헌 한의원 김진형 원장
  • [그의 삶 그의 꿈] 전통음식 외교사절로 부활한 대장금

    [그의 삶 그의 꿈] 전통음식 외교사절로 부활한 대장금

    고궁으로 초대받은 유엔 외교사절단 삼계선, 오절판, 더덕찹쌀구이, 해물잡채, 연저육찜, 월과채, 잣국수, 행적, 전복수삼냉채, 어채, 궁중떡볶이, 감로빈, 보슬단자, 포도화채, 당근정과……. 이름만 들어도 용포 입고 수라상 앞에 앉은 기분이다. 이 한국 전통음식들이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를 보름 동안 점령했다. 자신들의 음식문화에 저마다 길들여진 세계인들에게 한국 음식의 진정한 맛과 멋을 보여 주었다.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제4회 한국 음식 페스티벌’이 열렸다. 지난 7월 16일부터 27일까지 약 2주일 동안 세계 각국의 유엔 대사들과 외교사절들 외에도 많은 뉴요커들이 한국 음식의 맛과 멋을 감상했다. 음식도 어엿한 한 나라의 문화. 이런 점에서 이번 행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궁에의 초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의 궁중 요리들이 하루 20여 가지씩, 행사 기간 동안 200여 가지가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처음엔 200명 내외의 손님들이 다녀갔다. 한국 음식의 맛과 멋에 매혹된 외국인들이 행사 끝무렵엔 500명을 훌쩍 넘었다. 음식을 맛본 그들이 원더풀과 환타스틱을 연발했다.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한국의 전통 요리를 꼭 다시 맛보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유엔의 현 사무총장은 한국인 반기문. 그 분이 수장으로 있는 유엔 본부에서 한국 전통음식을 세계인에게 소개한 8인의 요리사를 이끈 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소장 윤숙자. 생에 기록될 만한 보람된 행사를 치루고 미국에서 막 돌아온 분을 만났다. 안내를 받고 들어서니 자신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환하게 웃으신다.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 이름만으로 선생의 이미지를 빌리자면 청경채 같다. 입고 있는 하얀 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 문학소녀에서 전통음식의 세계로 “외국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식품 재료를 지속적으로 구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뉴욕 한국문화원의 도움으로 행사를 무난하게 치를 수 있었습니다. 뉴욕 한국문화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그리고 조리했던 유엔 본부 식당의 조리실은 양식 위주의 용기들이어서 높이가 다 높아 고생했어요. 느낀 보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소감을 묻자, 상큼한 대답이 돌아왔다. 계속 물었다. 이것저것, 두서 없이. “고향이 개성입니다. 어머니는 교사셨는데, 원칙을 강조하는 엄격한 분이셨고, 요리를 아주 잘 하셨어요. 다들 그랬겠지만, 저도 소녀 시절엔 문학소녀였지요.” “문학 뿐만 아니라 요리도 사실은 감수성의 결정체가 아니던가요? 제가 보기엔 요리 실력도 유전적으로 물려받으신 것 아닌가요?”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요리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조리학과가 춘천에 있는 한 대학에 생겼는데,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전통요리의 대가셨던 고 왕준연 선생님께도 배웠죠.” 떡ㆍ부엌살림박물관 “이곳 8층까지 올라오기 전에 아랫층에 <떡박물관>과 <부엌살림박물관>이 있어서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고향이 시골인데, 눈에 익은 것들이 많아서 잠시 어린 시절 고향으로 돌아갔다 왔습니다.” “머지 않아 사라질 수도 있을 것들을 모아 놓았는데,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요.” “현실의 부엌 풍경과는 많이 다르던데요?” “부엌도 삶의 공간이니 삶의 변화, 생활의 변화가 부엌에도 오는 건 당연하겠죠. 끊임없이 ‘편리’를 추구하지만 그 ‘편리’가 좋기만 한 건가는 모두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해요.” 말씀 대로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라질 지도 모를 것들. 저 달그락거리고 낡아 있는 삶의 뿌리들. 우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먹거리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한국 전통음식을 세계인의 먹거리로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에 그치지 않고 만든 이의 철학과 정성과 마음도 담아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선생은 농림부에서 위촉한 한국농식품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우리 전통음식을 세계에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음식은 길들여지지 않으면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지난 유엔본부 행사와 같이 외국인들에게 지속적인 ‘우리 음식 맛보이기’도 중요하고, 우수한 조리인을 양성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지요. 지역, 문화적인 특성에 따른 세계인의 입맛 연구도 뒤따라야 하겠구요. 조리법의 표준화를 이루어내는 일도 과제의 하나예요. 음식 이름은 같은데 집집마다 맛이 다르면 문제가 되지 않겠어요?” 선생은 조리법 책자의 올바른 해외 번역 노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현실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음식 전도사로서의 소명감이 느껴진다. “우리 민족의 좋은 덕목 중의 하나인 은근과 끈기도 음식 문화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해요. 발효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음식들은 기본 재료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거든요. 오래 기다릴수록 맛의 깊이가 더해지죠. 선조들의 지혜는 시간과 속도의 시대인 현대에도 배울 점이 많아요.” “옛날보다 오래 살지만 그에 비례해서 건강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고혈압이나 당뇨, 비만과 같은 성인병은 특히 심각한데, 저는 ‘식食이 곧 약藥’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좋은 음식은 건강을 담보하는 가장 큰 도우미이자 보증수표가 아닌가 하거든요.” 맛깔스러운 말씀들을 듣지 않고 받아먹은 듯한 느낌. 기분 좋게 배가 부르다. 포만감이 주는 행복을 느낀다. 선생의 말씀대로 음식은 과학이며 철학이며 만병통치약이다. 나설 때 손에 들려주신 떡 상자를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몰래 열어본다. 너무 예뻐서 차마 입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음식은 눈맛이기도 한 거로구나. 다시 떠올리는 선생의 모습이 다시 그렇다. 글 최준 시인, 사진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제공     월간 <삶과꿈> 2007.09 구독문의:02-319-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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