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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대통령 독대/이목희 논설위원

    나라의 최고지도자들이 은밀한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은 동서고금에서 공통이다. 조선조 세종 임금은 신하와 독대(獨對) 문제로 여러 차례 분란을 불렀다. 주요 독대 대상은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원로대신들. 사간원에서 독대의 폐해를 읍소하는 직언이 잇따라 올라갔다. 그 결과 6품 이상 관원들이 조를 짜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아뢰는 윤대(輪對) 제도가 만들어졌다. 세종은 윤대도 사관과 신료들의 배석을 물리쳐 독대처럼 활용하곤 했다. 지켜보는 눈초리가 있으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기 힘든 게 인지상정이다. 거짓을 구별할 능력이 전제된다면 1대1 대화는 유용하다. 하지만 성종 임금의 생각은 달랐다.“간사한 말을 믿지 않으려 해도, 의심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게 되면 어쩌겠는가.”라면서 독대 자체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최고지도자와 독대 횟수는 권력의 척도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코언은 ‘드래곤 파이어’란 저서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장관보다 센 이유를 명료하게 밝혔다.“집무실이 대통령 곁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통령과 자주 만남으로써 안보보좌관의 말이 대통령의 뜻으로 들린다고 했다. 과거 정부에서 국정원장 등 정보기관 수장이 셌던 이유도 독대의 힘이었다. 공직자 동향을 비롯, 수집 정보를 대통령과 독대를 통해 보고하니 모두들 떨었다. 장관과 청와대 수석이 아닌 민간인이라도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날 기회가 잦으면 실세로 떠올랐다.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초 독대를 없애겠다고 공언했다. 그렇다고 참여정부 시절 비선(秘線)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청와대 역시 대통령과 수시로 만나는 ‘그들만의 비서관그룹’이 따로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격의없는 독대를 즐기는 타입이다. 밤이고, 낮이고 필요한 이를 부르거나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하고 자문을 구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에서는 대통령 독대가 공식 부활하리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성종 임금이 경계했듯이 충언(忠言)과 참언(讒言)을 구별할 능력이 있다는 자신이 있을 때 청와대 독대 제도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사설] 민주당 공천혁명 국민 눈높이로 해야

    4월 총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의 공천작업이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엊그제부터 공천심사위를 본격 가동했으나, 여태 공천기준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인사들에 대한 공천여부를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다. 민주당이 이런 딜레마에서 헤어나려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공천 잣대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대선서 국민의 심판을 받은 뒤 민주당 지도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공천혁명을 다짐했다. 당 기여도와, 당선가능성 및 도덕성을 공천기준으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레토릭은 실제 공천지분을 갖고 있는 당내외 제세력의 이해다툼 앞에 빛을 잃고 있다.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도덕성을 공천기준에 넣느냐, 마느냐가 논란거리가 될 정도다. 이런 논란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 대한 공천여부가 핵심 쟁점이다. 이들은 개인비리나 대북 송금사건서 직권남용 혐의로 사법처리를 받은 전력이 있어 도덕성이란 잣대를 들이대면 ‘과락’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당이 공천의 기준선조차 긋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당내 계파의 시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민주당이 대선 패배를 딛고 제대로 된 야당으로 다시 서려면 공천혁명이 최선의 대안이다. 여당이야 국정운영 실적으로 평가받지만, 야당은 참신한 이미지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개인 비리나 심각한 선거법 위반 혐의자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공천에서 배제해야 할 이유다.
  • [CEO칼럼] 사회적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

    [CEO칼럼] 사회적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

    최근 국보1호 숭례문이 화재로 인해 소실된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한순간에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문화 유산이 화마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시민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관문으로서 위용을 자랑했던 숭례문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고귀한 문화 유산이다.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지만 숭례문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는 어떠한 노력으로도 재건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와 무관심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고는 특정인의 잘못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과거 문화재 화재를 계기로 ‘문화재 방재의 날’을 지정하여 관계 당국과 시민들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화재에 대비해 매년 소방 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문화재 주변에 방재 장비를 설치하여 화재를 사전에 진압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책임 의식이 이러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일조를 한 것이다. 이는 모두가 사회적 책임을 공감하고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의식의 자각은 사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 시민(Co rporate Citizenship)이라는 말처럼 사회구성원의 일부로 경제 주체로서의 활동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발전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기업은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획득한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여 사회적 주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기업을 경영하는 최고경영자(CEO)의 입장에서 ‘사회적 책임’을 기업의 이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요구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는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아름다운 기업’ 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기업 자체에 존재감을 부여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 2006년 우리 회사는 새로운 CI(기업 이미지) 선포식에서 사회적 책임과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 될 것을 천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1사1촌 운동과 자연 보호, 친환경 제품 생산 등의 친환경 활동, 소외계층 지원 등의 사회 공헌 프로그램들을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기업은 일차적으로 소비자에게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덧붙여 지역사회 공헌과 사회적 책임을 통해 건전한 사회 발전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위는 더욱 광범위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사회적 책임의 범위를 단지 윤리적인 부분으로 제한했지만 이제는 기업이 사회의 발전, 더 나아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주체로서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책임의 주체는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깊게 느끼게 됐다. 미국의 저명한 경영학자 필립 코틀러가 말한 바와 같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경영은 이제 단순히 ‘하면 좋은 일’이 아닌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은 ‘보여주는 쇼’가 아닌 가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선묘조제재경수연도’중 조찬소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선묘조제재경수연도’중 조찬소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거(李·1532∼1608)는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 격인 한성우윤으로 있던 선조 37년(1604년) 11월12일 72세의 나이로 형조참판에 발탁됩니다. 그러나 사관(史官)은 이 인사가 마뜩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날짜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거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나이도 노쇠한데 101세의 편모가 있으므로 이 벼슬에 제수되었다.’고 편치 않은 심기가 담겨있습니다. 실제로 이거가 참판에 오르는 데는 어머니 채씨의 존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조는 이거의 노모 이야기를 두해전 승정원으로부터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고 하지요.7년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의 참혹함 속에서도 이거의 어머니가 백수(白壽)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나라에 좋은 징조라고 여겼습니다. 선조는 채씨를 기쁘게 하려고 어머니를 잘 모신 효자 아들 이거를 형조참판에 임명한 데 이어 이거의 아버지에게는 이조참판을 추증하여 채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높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진흥군 강신 등 13명은 ‘어르신을 받드는 이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을 봉로계(奉老契)를 만들게 되지요. 이들도 모두 편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특히 강신과 공조판서 윤돈, 여흥군 민중남, 병조참지 윤수민, 장악원 첨정 권형의 어머니는 모두 팔순을 넘은 고령이었습니다. ●모두 5폭… 중신 부모 장수축하연 그려 이들이 채씨 정부인과 자신들의 노모를 모시고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에 선조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왜란의 뒤끝이라 환갑잔치 말고는 풍악을 금지한다는 하교가 있었지요. 예조는 ‘이들의 모친이 모두 죽음에 임박한 연세로서 날을 받아 함께 모여 한 집에서 즐겁게 노는 것이 크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선조에게 건의하여 풍악을 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조 38년(1605년) 4월9일 삼청동에 있는 예조의 부속건물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게 되지요.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는 이날 잔치의 모습을 다섯 폭으로 나누어 그린 기록화입니다.‘선조 시대 여러 재상이 참여하여 펼친 경로잔치 그림’쯤으로 풀이할 수 있겠지요.▲손님을 맞는 대문 안팎의 정경에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임시 부엌 ▲계원들이 회동하는 광경 ▲대부인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 ▲주인공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연회 장면을 담았지요. 이런 종류의 기록화는 대개 참여한 사람의 숫자만큼 그려서 나누어 갖곤 했습니다. 경수연도도 최소한 13권이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과거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록화가 훼손되거나 없어지면 모사본을 만들었습니다. 또 집안의 대소종가에서도 모사하여 갖고 있는 게 보통이었지요. 현재 세 가지 ‘선묘조제재경수연도’가 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전통음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 이 가운데 홍익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 원본 격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려대박물관이 갖고 있는 것은 18∼19세기, 국립문화재연구소 것은 19세기에 다시 모사한 것이지요.‘남씨 집안에 내려오는 귀중한 문서’라는 뜻을 가진 ‘남씨전가경완(南氏傳家敬翫)’이라는 표제의 두루마리에 담긴 고려대박물관 소장본은 의령 남씨 집안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봉로계의 일원으로 의령 남씨인 당시 형조참판 남이신의 후손이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이 경수연도에서 조찬소(造饌所) 또는 숙설소(熟設所)라고 불리는 야외의 임시 부엌을 묘사한 두번째 그림이 특히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하지요. 일반적으로 풍속화나 기록화에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나 부엌의 모습은 잘 등장하지 않는데, 이 그림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장소와 사람, 접대하는 장면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엌 장면뿐만 아니라 다른 네 폭의 그림에서도 음식의 종류나 가짓수, 독상차림, 상의 형태나 그 위에 굄새로 담아진 모습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dcsuh@seoul.co.kr
  • [구청장 현장브리핑] 최용호 강동구청장 권한대행 ‘선사주거지 복원’

    [구청장 현장브리핑] 최용호 강동구청장 권한대행 ‘선사주거지 복원’

    “서울시가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한강을 시민에게 되돌려준다면 우리 구는 죽어 있던 ‘6000년 전의 선사주거지’에 생기를 불어넣겠습니다.” 최용호 강동구청장 권한대행은 19일 암사동 선사주거지 복원을 올해 첫번째 과제로 꼽았다. 복원도 건물 중심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소프트웨어 복원에 중점을 둘 계획이다. ●역사·자연 접목한 ‘강동 마케팅’ 그는 선사주거지가 올림픽대로로 끊어져 있어 사실상 죽어 있다고 지적했다. 최 대행은 살아 있는 선사주거지로 복원하기 위해 “이 일대의 올림픽대로를 지하화해야 한다.”면서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과 연결지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며,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한강 접근이 쉬워져 시민과의 소통이 원활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 대행은 “1988년 개관 이후 보존과 관리에만 치우치다 보니 체험 시설과 볼거리가 많이 부족하다.”면서 “옛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체험 장소로 활용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선사주거지 규모도 확대된다. 기존 7만 8700㎡에서 2만 3200㎡가 더 늘어난다. 한강을 이어주는 선사마루와 선사체험장, 역사박물관, 수경시설 등이 들어선다. 그는 “선사주거지 리노베이션이 외국인 관광객 1200만명 유치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사주거지 옆에 암사 역사생태공원도 조성된다. 구암서원이 복원되며, 잔디광장, 분수, 연못, 실개천, 야외 공연장이 곳곳에 들어선다. 광진교도 역사 테마와 결합돼 ‘걷고 싶은 다리’로 꾸며진다. 최 대행은 “마치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것처럼 ‘한성 백제’와 ‘아차산 고구려’의 상징을 광진교에 담아서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명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일자산 자연공원도 오는 7월 완공된다. 실내 배드민턴장과 실내 체육관,X-게임장, 잔디광장, 가족캠핑 공원이 들어선다. ●동부수도권의 경제 허브도시 올해 또 하나의 중점 사업은 경제 허브도시의 위상 다지기다. 이를 위해 강일2택지개발지구 내에 4만 7800㎡ 규모의 첨단업무단지가 하반기에 착공된다. 천호뉴타운 개발과 둔촌지구를 비롯한 재건축 추진, 천호대로변 개발 등도 올해 첫 발을 내딛는다. 이와 함께 강동문화예술회관과 해공·암사 도서관 등도 건립된다. 최 대행은 “강동구는 서울의 동쪽 진입 관문으로서 예전엔 변두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주변 지역인 구리시와 남양주시, 하남시를 아우르는 동부수도권의 경제 허브도시로 커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토종 원예자원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토종 원예자원

    꽃은 종족번식을 가능케 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것을 좇아온 인류가 꽃을 아름다운 것 중의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잎의 모양이나 특징이 특별한 것, 수형이 좋은 것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 선조들은 한란이나 춘란이 보여주는 형태와 생태적 습성이 군자의 고고함을 상징한다 하여 가까이 두어 즐겼다. 사시사철 살찌지 않고 변함이 없는 난초의 잎에서 지조(志操)의 덕을 찾으려 했고, 절제 속에서도 사방을 풍성하게 하는 꽃향기를 발산하는 데서 지족(知足)의 정신을 찾고자 했다. 일본인들도 풍란을 사무라이의 상징처럼 여겨 귀하게 길러왔다. 서양인들이 장미, 붓꽃, 백합 같은 식물에 보이는 애정은 그 역사가 깊다. 사람들이 꽃이나 잎, 수형을 즐기기 위해 심는 식물을 원예식물이라 한다. 야생에서 온 것을 대량으로 증식만 시켜서 심는 것도 있지만, 원예식물 대부분은 화단이나 화분에서도 잘 자라며, 꽃을 더욱 크고 아름답게 개량한 것들이다. 이런 과정을 품종개량이라 하는데, 교배, 접목, 돌연변이 유도 등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원예품종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종(原種)의 확보다. 다양한 특징을 가진 원종이 많으면 많을수록 새로운 품종, 보다 나은 품종을 개발하기 쉽다. 이 때문에 선진국들은 원종을 확보하거나 지키기 위해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종자전쟁’이니 ‘유전자전쟁’이니 하는 말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백합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은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나리 원종을 수집해 이를 유전자원 삼아 다양한 품종을 개발해 냈다. 서양의 원예회사들과 식물원들도 아시아의 옥잠화류, 붓꽃류, 작약류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품종개량에 아시아의 어떤 원종이 유전자원으로 사용되었는지조차 밝히지 않은 채 수많은 개량종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 자생식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럽, 미국, 일본 등 원예 선진국에 일찌감치 유출되었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의 98% 정도가 이미 외국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경부의 멸종위기야생식물로 지정된 나도승마는 자생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오래 전에 유럽으로 건너간 후 그곳의 많은 식물원에서 키워지고 있다. 유럽으로 건너간 구상나무는 인기 높은 크리스마스트리로 팔리고 있다. 서울 북한산의 정향나무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스킴라일락이 되어 우리나라에 역수입되고 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미선나무는 일본에 나가 흰개나리로 둔갑된 후 다시 수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적으로 울릉도에만 나는 섬말나리는 나리 가운데 크고 탐스러운 꽃이 피는 것으로 유명한데, 일본에서 이미 ‘죽도백합’이라는 이름으로 인기가 높다. 흑산도 등 서남해안의 섬에 자라는 토종 옥잠화 종류는 미국으로 건너가 잉거비비추가 되어 세계 옥잠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꽃이 예쁠 뿐만 아니라 상록성이지만 추위에 강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외국에 유출되지 않은 토종식물 가운데, 개느삼 같은 식물은 원예종으로 개발할 가치가 매우 높다. 키가 적당하고, 꽃도 아름다우며, 키우기도 어렵지 않으니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다른 토종식물들의 경우에도 종 자체는 이미 유출되었다 하더라도 유전자원 측면에서는 풍부한 유전자원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원예식물로 개발할 여지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원예식물로 개발한 우리 꽃이나 우리 꽃을 개량하여 만든 원예품종이 국제 원예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은 접한 적이 없다. 서양의 장미, 카네이션, 튤립, 선인장을 들여와 잘 재배하여 세계시장에 내다 파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꽃을 인기 높은 원예식물로 개발해 세계시장에 내놓을 때 부가가치는 더욱 높다. 우리 꽃, 우리 유전자원을 개량하여 세계 원예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노력은 어쩐지 부족한 감이 있다. 우리 꽃을 세계에 파는 것은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지구촌에 심는 일이기도 한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 [한국의 토종] 곧고 단단해 소나무 중 으뜸…문화재용 목재로 인기

    [한국의 토종] 곧고 단단해 소나무 중 으뜸…문화재용 목재로 인기

    이 땅에서 선조 대대로 내려온 토종 동·식물은 우리 모두가 지켜야할 공동의 자산이며 자자손손에게 물려줄 귀중한 유산이다. 오늘날 우리의 토종은 크고 빨리 자라는 수입종에 밀려서 구경조차 힘들어졌다. 토종의 유산을 잃었을 때 우리만의 고유한 삶은 침체된다. 토종은 하나의 씨앗으로서 ‘종 의 영속수단’이고 차세대의 식량으로서 ‘근원적인 자원’이다. 새로운 종자가 지적재산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만큼 현대는 종자전쟁의 시대이다. 따라서 환경오염속에서도 살아남은 다양한 장르의 토종과 그것을 발굴. 보존하는 사람들을 정확히 알림으로써 토종자원의 무분별한 대외유출과 소멸을 예방하고 나아가 우리의 ‘종자주권’을 지키고자 한다. 예로부터 마을 어귀에는 ‘당산나무’라 불리는 수호나무가 있었다. 당산나무는 숭상과 두려움의 대상이며 하늘과 땅, 신과 사람이 만나는 신성한 곳이라 하여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다. 당산나무로는 소나무가 많았다. 우리문화를 ‘소나무 문화’라고 부를 정도로 소나무는 우리민족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고, 소나무 서까래를 얹은 집에 살다가, 죽은 뒤에는 태어날 때 심은 그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영면에 들었다.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벌채가 금지될 정도로 귀한 영물로 취급됐다. 세종은 송목금벌지법(松木禁伐之法)을 만들어 소나무를 함부로 벨 수 없게 했다. 또 궁궐 건축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특정 산림을 금산(禁山)으로 지정, 함부로 오르지도 못하게 했다. 지금도 소나무를 수호신처럼 여기는 마을들이 적지 않다. 강원도 보호수로 지정된 강릉시 연곡면의 ‘제왕송(帝王松)’은 500년 동안 마을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그곳에서 5대째 살고 있는 전명찬(46)씨는 “매년 초파일에 서낭당에서 재를 올리고, 천재지변이나 재앙이 있을 때 마다 재를 올리면서 수호목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한다. 소나무중에서도 금강송(金剛松)을 단연 으뜸으로 여긴다. 흔히 춘양목이라고 불리는 금강송은 나무가 곧고 질이 단단하다. 또한 송진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최고의 건축용 목재로 꼽힌다. 현재 토종 소나무의 멸종위기는 일제 강점의 아픈 역사와 무관치 않다. 당시 산업용도의 무분별한 벌채로 울창했던 송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식목일을 제정해 묘목을 심는 등 대대적인 노력이 이뤄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30∼40년산의 ‘청년기 소나무’는 전체 소나무의 60%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이 나무들은 앞으로 30년 이상 지나야 건축용 소나무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근래 들어 소나무재선충병이 확산되면서 토종 소나무 되살리기에 다시 비상이 걸렸다.2007년 한 해 피해면적만 6855㏊에 이를 정도다. 산림청은 피해나무들을 공중에서 촬영 분석하고, 약제살포, 나무주사 등 적절한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보수 및 복원에 사용될 목재 확보를 위해 강원·경북지역 국유림에 있는 금강송 숲 811ha를 ‘문화재용 목재생산림’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산림청 목재이용팀 이종건 팀장은 “우리 땅에서 자란 나무를 이용해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국민의 자존심을 높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하며 토종 소나무 보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사진 글 강릉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부고]

    ●이필상(전 고려대 총장)씨 모친상 서현숙(이화여대 의무부 부총장 겸 의료원장)씨 시모상 김선조(사업)이경희(오픈코리아 대표)씨 빙모상 14일 이대목동병원, 발인 16일 오전 8시30분 (02)2650-2743●김종민(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씨 빙부상 13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5일 오후 2시(02)590-2540●이정희(대전시의회 의원)씨 모친상 14일 을지대학병원, 발인 16일 오전 9시 (042)471-1652●김승겸(전 영등포구청장)웅겸(건축사업)씨 모친상 13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5일 오전 10시 (02)3410-6916●김정수(고려주판 대표)씨 부친상 이중완(KBS 영상편집제작팀 차장)씨 빙부상 14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6일 오전 8시30분 (031)787-1511●이강조(프로축구 광주 상무 감독)씨 부친상 1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6일 오전 6시 (02)3010-2294●오성석(김해시 교통기획단장)씨 부친상 14일 김해 장유 누가병원, 발인 16일 오전 8시 (055)313-4973●유태은(미국 거주)태삼(제노코 회장)태우(명지전문대 교수)태부(중국 광주 동순 총경리)씨 모친상 이항성(사업)노재인(싱가폴 거주·사업)씨 빙모상 1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6일 오전 8시 (02)3010-2291●권종관(영화감독)씨 모친상 13일 서울 수유1동성당, 발인 15일 오전 10시 (02)983-9191●김영호(실업축구 ING FC 감독)씨 모친상 13일 경희의료원, 발인 15일 오전 7시30분 (02)958-9549●김성만(세람저축은행장)씨 부친상 13일 경기 이천 효자원장례식장, 발인 15일 오전 11시 (031)631-4465●장쾌호(커리어케이 전무)씨 빙부상 13일 대구 모레아장례식장, 발인 15일 오전 9시30분 (053)801-9999●김인영(한국폴리텍Ⅳ대학 교수)씨 빙모상 경택(국민일보 기자)씨 외조모상 14일 양평 길병원, 발인 16일 오전 9시30분 (031)775-0051●이정효(중앙대 의대 교수)씨 부친상 14일 청구성심병원, 발인 16일 오전 8시30분 (02)357-4014●김은국(전 오마이뉴스 편집장)씨 부친상 1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6일 오전 9시 (02)3410-6909●이홍규(현대증권 첨단지점장)씨 빙부상 14일 광주 효사랑병원, 발인 16일 오전 9시 (062)941-4770●김성국(이화여대 교수)안국(구산중 교사)씨 모친상 김봉식(전 국민카드 부사장)기현두(새온교회 담임목사)최용진(원묵중 교사)씨 빙모상 14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8일 오전 9시 (02)392-3499●양정수(사업)씨 부친상 이국채(사업)조덕제(우리은행 IT관리본부장)씨 빙부상 14일 부산의료원, 발인 16일 오전 (051)607-2990
  • 머리 숙인 서울 중구청장

    숭례문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서울 중구의 정동일 구청장이 13일 사과문을 통해 사죄의 뜻을 밝히고 숭례문 복원 및 문화재 보호에 적극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정 구청장은 “국보1호 숭례문 관리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수많은 외침과 전란 속에서도 600여년을 꿋꿋하게 버틴 숭례문을 지키지 못해 선조와 후손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는 또 “국민 여러분의 절망 속에서 나오는 따가운 질책을 뼛속 깊이 새겨, 이런 참사가 더 이상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문화재 점검을 실시함으로써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정 구청장은 지난 10일 화재 발생 직후 현장에 도착, 진화 과정을 지켜본 뒤 11일부터 소방서·경찰서 등 관계기관과 대책회의를 갖고 있다. 한편 중구는 이날 ‘노숙자들이 숭례문 누각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술을 마셨으며 잠까지 잤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의 해명 자료를 냈다. 중구는 “숭례문의 주변과 양쪽 출입구 계단에 감지기가 설치돼 있어 누가 접근하면 경비업체 직원이 출동하는 동시에 구청 및 경찰에 연락돼 누각에서 절대로 잠을 잘 수 없다.”고 반박했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아,숭례문!

    민족 문화유산의 상징인 국보1호 숭례문(남대문)이 사라졌다. 그제 발생한 화재로 누각은 전소해 내려 앉았고 그 자리에는 타다 만 나무들의 잔해만이 석축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을 뿐이다. 숭례문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8년 완공돼 지난 600여년 민족의 도읍지를 지킨 성문(城門)이었다. 그 무게는, 단순히 역사가 오래되었다거나 건축물의 웅장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대 외침(外侵)과 동족상잔인 6·25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위용을 유지한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그 민족의 자존심이, 오히려 평화로운 시기에, 후손들이 방심한 탓에 일순 잿더미로 변했다. 이 막중한 역사적 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숭례문에 불이 나 전소한 과정을 되짚어 보면 우리가 과연 선조의 유산을 향유할 자격을 갖고나 있는지 자괴하지 않을 수 없다. 숭례문은 2006년 일반에게 개방됐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유로이 성문을 드나들며 가까이서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 역사적 의미를 즐길 수 있었다. 반면 개방에 따른 보존·관리 대책은 전무하다시피해 항상 불안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특히 야간에는 상주 관리인이 없어, 이번 화재에서 보듯이 돌발사건에는 속수무책일 것임이 예견됐다. 게다가 숭례문에는 그 흔한 스프링클러조차 없이 소화기 몇 개만 비치한 것이 화재 대책의 전부였다니 이러고도 우리에게 국보를 보유할 자격이 있는지 다만 부끄러울 따름이다. 화재진압 과정의 미숙함 또한 지적받아 마땅하다. 처음 불이 나 연기가 솔솔 뿜어져 나올 때만 해도 숭례문이 몽땅 타버리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훼손 위험성만을 들어 신중한 작업을 요구했고, 소방 당국은 당국대로 조기 진압한 것으로 오판해 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국보1호가 불에 타고 있는데도 문화재청·소방당국·서울시 등 어느 부서 하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니 우리는 숭례문을 비롯한 주요 문화유산에 관한 화재예방·진화 매뉴얼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화재 원인과 진화 과정을 철저히 점검해 관련자들을 엄중 문책하는 한편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게끔 대책을 완벽하게 마련해야 한다. 더욱 걱정되는 일은 숭례문 말고도 전국에 산재한 주요 문화재 가운데 목조건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사회불만자들의 방화 역시 급증하는 추세이다. 수원 화성의 서장대가 방화범에 의해 재로 화한 것을 비롯해 숱한 문화유적이 이미 불길에 사그라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는 관리·경비 인력을 강화하고 일반인 출입을 일정부분 제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책은 우리 국민 누구나가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이 기회에 뼈저리게 체득하는 일이다. 문화재는 우리 세대만이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손 만대에 넘겨 주어야 할 민족 공동의 자산이라는 사실에 공감해야 한다. 지금 숭례문은 흉측한 몰골로 우뚝 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무책임을 꾸짖는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통한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국보1호 상실’이라는 고통과 분노, 좌절을 딛고 일어서 숭례문을 다시 세워야 한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라도 숭례문의 원형을 찾아 완전하게 북원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지은 죄를 그나마 줄이는 유일한 길이다. 숭례문 복원에 온 민족이 슬기와 땀을 한데 모으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 “분신 잃은 듯 가슴 아파”

    “분신 잃은 듯 가슴 아파”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大木匠) 기능보유자인 전흥수(69)·신응수(66)·최기영(63) 도편수는 11일 숭례문 화재 현장을 찾아 “너무도 처참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문화재청의 요청이 있다면 보수 공사에 참여할 것”이라고 일제히 밝혔다. 최기영 대목장은 “숭례문의 화재 모습을 10일 밤부터 현장에서 지켜보았다.”면서 “내 선조가 세운 숭례문이 붕괴된 현장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최씨는 조선 초기에 한성부판사를 지내면서 숭례문 축조를 지휘했던 최유경(1343∼1413)의 후손. 그는 “숭례문의 원형 복원은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면서 “옛 장인들의 솜씨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복원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경복궁 복원 사업의 총감독격인 신응수 대목장도 최 대목장과 함께 이날 문화재청이 화재 현장에서 소집한 문화재위원회 긴급회의에 참석했다.1962년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해체 보수공사를 할 때 도편수를 맡았던 조원재 대목장의 제자로 당시 복원공사에도 직접 참여한 신 대목장은 “내 분신을 잃은 것 같다.”며 복원공사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전 대목장은 자신이 세운 충남 예산의 한국고건축박물관에서 숭례문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현장을 둘러보고는 “너무도 가슴 아프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 자리를 손아래인 신 대목장에게 양보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는 “숭례문의 옛 모습을 되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6) 쌍겨리와 소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6) 쌍겨리와 소

    김홍도의 그림 ‘쌍겨리’다. 그림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위쪽을 보자. 남자 둘이 쇠스랑을 들고 일을 하고 있다. 쇠스랑은 주로 두엄을 쳐내고 퇴비를 긁어 올리는 데 사용하며, 드물게는 밭을 가는 데도 사용된다. 쇠스랑은 그림에서처럼 발이 세 개인 것이 일반적이고 이따금 둘인 것도 있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로 만들고 발은 당연히 쇠로 만든다. 그런데 이 그림의 농부 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엄을 쳐내는지, 퇴비를 긁는지, 아니면 밭을 가는지 그림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지방마다 쟁기 끄는 소의 마릿수 달라 아래쪽의 사내는 소 두 마리로 쟁기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소 엉덩이에 똥이 묻은 것까지 자세하게 그렸으니, 어지간한 관찰력이다. 어쨌거나, 쟁기질이라니, 아마도 봄이리라. 흥미로운 것은, 쟁기를 끄는 소가 두 마리라는 것이다. 소 한 마리에 멍에를 지우는 것을 외겨리, 혹은 독겨리라 하고, 쌍멍에에 소 두 마리를 지우면 쌍겨리라 한다. 대개 논과 밭을 갈 때 땅이 평평하여 쉽게 흙을 팔 수 있으면 외겨리로 하지만, 화전 같은 경사지거나 흙이 단단하거나 돌이 많은 곳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쌍겨리로 하는 것이다. 대개 쌍겨리는 땅을 깊이 갈기 위해 고안된 방법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귀양 가서 ‘탐진농가’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흥미롭게도 외겨리, 쌍겨리 이야기가 나온다(탐진은 강진의 옛이름이다). 모두 10수인데,7번째 작품을 보자. 게으른 습성은 정말이지 옥토에서 생기는 법 상농(上農)도 해가 중천인데 잠에 빠졌다가 느릅나무 그늘에서 술주정을 부리다 말고 느지막이 소 한 마리 몰고 마른밭을 가는구나 이 시에 주석이 붙어 있는데,“경기 지방의 마른밭은 소 두 마리로 간다.”라고 되어 있다. 곧 전라도 강진에서는 외겨리로 밭을 갈지만, 경기도에서는 쌍겨리로 갈았던 것이다. 우하영의 ‘천일록’은 지방에 따라서 쌍겨리로 밭을 가는지, 외겨리로 가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관동지방은 영서·영동을 막론하고 쌍겨리로, 황해도 봉산·재령·신천·안악 등도 쌍겨리, 경상도는 대개 쌍겨리로 하고, 남쪽 지방은 외겨리로, 전라도는 산간 지방은 쌍겨리, 평야 지대는 외겨리로 한다는 것이다(주강현,‘두레’). 혼자 소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소란 것이 농민이면 누구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니어서, 이웃과 함께 어울려 소 두 마리를 메기도 하였던 것이다. 위의 그림도 그런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쌍겨리로 논밭을 갈면서 부르는 노래를 ‘쌍겨리소리’라 하는데, 경기도 가평의 쌍겨리소리를 들면 이렇다.“어져, 저 소야, 줄 잡아 당겨라. 이랴, 이랴. 먼저 나가지 말고, 두 마리가 잘 잡아 당겨라.” 물론 노래는 소리를 길게 뽑고 후렴구를 넣기도 하여 길게 늘어진다. ●농우 확보위해 도살 금했지만 ‘고려공사 사흘´ 농우는 농사를 짓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에게 소가 언제나 넉넉하게 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성종 때 시인이자 관료였던 강희맹이 쓴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보면 농촌에 소가 아주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동리에 100집이 있는데, 가축이 있는 집은 10집 남짓이고, 소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거기서 송아지를 제외하고 농사일을 맡길 만한 소는 겨우 몇 마리에 불과하다.100집의 밭을 몇 마리 소가 갈자 하니 힘이 부치기 마련이다.”라고 하고 있으니, 농사지을 소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도둑떼까지 소를 잡아먹어 남은 소로는 경작이 불가능해 하는 수 없이 사람이 쟁기를 끄는데, 아홉 명이 쟁기를 끌어도 소 한 마리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농업사회인 조선조에는 소가 늘 부족했다. 소 전염병도 자주 돌았다. 예컨대 인조 15년,16년 두 해에는 소 전염병이 너무 심하여,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올리는 봄 가을의 제사, 곧 석전 때도 제물로 소 대신 돼지를 쓰게 했으며, 현종 11년 전국의 소가 거의 다 죽어 사람이 대신 쟁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데 소가 모자라는 가장 큰 이유는 쇠고기의 소비 때문이었다.‘세종실록’ 7년 2월4일조를 보면 국가에서는 농우의 확보를 위해 소의 도살을 금지하고 있다.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에서 나오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였고, 중국에서는 쇠고기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후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지속된 세 가지 금령이 있는 바, 소나무의 벌채를 제한하는 송금(松禁), 술을 빚는 것을 금하는 주금(酒禁), 그리고 바로 소의 도살을 금하는 우금(牛禁)이 그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처럼 소의 도살을 막았지만, 그것이 성공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책을 수립하는 지배층 자체가 쇠고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는 농가 최고 재산… 세금 못내면 끌고가기도 정조 때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 의하면 당시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한다 하였다. 서울에는 쇠고기를 파는 24개의 푸줏간이 있고, 지방 300여 고을 관아에서도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을 열고 있다 했으니, 실로 쇠고기의 소비량이 대단했던 것이다.‘정조실록’ 17년 9월11일조의 대사간 임제원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이해 가을 작황을 보니 좋은 날씨로 인해 유례 없는 풍년이 들었는데도, 뜻밖에도 모내기도 못한 곳이 있다면서 그 이유로 농사지을 소의 부족을 들었다. 즉 소를 잡아먹는 일이 최근 너무 심해져 소가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큰 도시에서 쇠고기를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으며,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이 가장 쇠고기를 먹는 데 열중한 나머지 소 값이 올라 논밭을 가는 소가 모자라게 되고, 그 결과 사람이 대신 쟁기질을 하므로 모를 내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를 잡아먹는 것을 금하자는 것이었지만, 고려공사 사흘이라고 아무리 금령을 발동해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소는 농사를 짓거나 고기만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짐을 끄는 것도 소가 하는 중요한 노동이었다. 영조 때의 시인인 홍신유가 쓴 시에 ‘우거행(牛車行)’이란 작품이 있다.‘수레를 끄는 소에 대한 노래’란 뜻이다. 서울 한강 근처에 강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양곡이며, 땔나무를 도성 안으로 옮기는 수레를 끄는 소를 제재로 삼은 것이다. 이 작품의 소는 짐을 싣고 도성으로 들어가다가 큰 비로 생긴 웅덩이에 빠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나오지만, 다시 좁은 비탈길에서 양반네 행차를 만나 놀란 나머지 진흙 구덩이에 빠져 버둥거리다 죽고 만다. 시인은 소를 가엽게 여겨 이렇게 말한다.“한 해 가고 두 해 가면/ 전신은 성한 데 없고/ 가죽은 마르고 살은 쫄아 붙어/ 영락없이 고사목처럼 되고 말지/ 그 소 마침내 푸주로 끌려와서/ 잡아먹히게 되는데/ 수레 끄는 소는 고기 맛이 없다고/ 말들 한다네/ 소의 힘 모두 빨고/ 마침내 그의 고기까지 먹으니/ 사람들 잔인하기/ 어찌 이와 같단 말가?”(임형택 편역,‘이조시대 서사시(상)’) 평생 노동력을 빼앗고, 죽으면 고기까지 먹으니, 인간처럼 잔인한 짐승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소는 농가의 최고 재산이었다. 조선시대 한시를 보면 세금을 내지 못한 농가에 아전들이 들이닥쳐 소를 끌고 가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아니,20세기에도 소는 대학생의 등록금이 아니었던가. 위 그림의 소를 부려 농사짓는 사람은 그나마 넉넉한 농민이었던가 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5) 목욕터 풍경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5) 목욕터 풍경

    신윤복의 그림 ‘목욕하는 여인들’. 단옷날 여성의 목욕 장면을 그린 것이다. 왼쪽 아래에 젊은 여인 넷이 시냇물에 몸을 씻고 있다. 네 사람 모두 윗도리를 벗었고, 그 중 맨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이 치마를 걷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속옷도 아마 입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고, 씻으러 나온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 여성 목욕 장면 담은 유일한 그림 오른쪽 위에는 붉은 치마와 노란 저고리로 한껏 멋을 낸 젊은 여인이 그네를 뛰고 있고, 그 옆의 여성은 참으로 거창한 크기의 어여머리를 풀어 매만지고 있다. 두 여자의 옷은 고급스럽다. 저고리의 끝동, 깃, 곁마기, 고름을 모두 자주색으로 하면 삼회장이라 하여 가장 잘 차려입은 것으로 치는데, 그네를 타는 여자와 어여머리를 만지고 있는 여성은 모두 삼회장이다. 다만 맨 오른쪽의 여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흰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보퉁이를 이고 오는 여자는 짚신을 신고 행주치마를 두른 것을 보건대 입성이 초라할 뿐만 아니라, 남들 노는 데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니, 계집종임이 분명하다. 이고 온 보퉁이에 술병 모가지가 비쭉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옆에 보이는 물건 역시 안주를 담은 찬합일 것이다. 요컨대 단옷날 시내로 나와 목욕하는 여성들(기생으로 짐작된다)이 마시고 먹을 술과 안주를 날라 오고 있는 참이다. 이 그림은 놀랍도록 충격적이다. 조선조 500년에 걸쳐 유사한 그림은 없다. 그 충격의 이유는 여성의 나신을 드러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흰 피부에 진홍의 젖꼭지와 입술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특히 여성의 유방을 보라. 인터넷이 온갖 영상을 퍼 나르는 시대에 여성의 나신은 그다지 별스럽지 않다. 하지만 때는 유가의 도덕이 시퍼런 조선시대다. 어찌 충격이 아닐 수 있겠는가. 여성의 젖가슴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그것은 성의 두 가지 기능과 관계된다. 인간에게 있어 성은 쾌락이면서 생식이다. 여성의 가슴 역시 그것에 대응한다. 가슴은 성적 쾌락의 도구, 곧 성기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식을 기르는 수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수유의 도구는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과거 여성들이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의 가슴을 열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보고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모성의 가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퉁이를 진 여성의 젖가슴을 보라. 이 젖가슴은 신기하게도 성적 상상을 유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욕하는 여성의 분홍빛 유두와 흰 가슴은 성적 쾌락을 상상케 한다. 저 숨어서 훔쳐보는 젊은 까까머리 스님들의 시선도 분명 성적 쾌락을 향해 있다. 이 그림이 또한 희한한 것은 여성의 조선시대의 목욕 장면을 형상화한 유일한 시각자료라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회화는 인간의 구체적 일상을 담은 그림이 참으로 희소하거니와, 이 그림 외에는 목욕이라는 재제가 등장하는 그림은 없다. 게다가 목욕 자체에 대한 문헌의 언급도 희소하다. 과거 기록에서 목욕은 온천과 관련하여 주로 등장한다. 눈병으로 고통을 겪었던 세종과 심한 피부병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세조는 자주 온천을 찾았다. 따라서 이들의 온천행과 관련된 목욕이란 어휘가 더러 등장한다.30년도 더 된 예전의 일이다. 나는 창덕궁에 갔을 때 궁궐 안에 있는 목욕탕을 보았는데, 그것은 신식이었다.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몸 전체를 씻었던 것일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재계하라는 말이 허다하게 나오지만, 나는 정작 그 ‘목욕’재계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방법, 도구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세종실록’ 7년 7월19일조를 보면, 세종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습진과 같은 피부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를 듣고 선공감에 명하여 욕통(浴桶)을 만들어 지급하게 한다. 이 욕통이란 것이 조선시대의 목욕문화의 핵심일 것이다. 지금처럼 대중탕이나 혹은 집안에 따로 욕실을 만들지 않고, 욕통을 만들어 적당한 공간에 비치하고 물을 데워서 목욕을 하는 것이 목욕문화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조차 일반적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보편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인구의 대부분이 소작농이거나 극히 적은 농토를 소유한 자작농이었으니, 삶의 수준이란 것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판에 집집마다 욕통을 갖추어 놓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단독주택에 욕통을 비치할 공간을 거의 마련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다면, 조선시대의 목욕문화를 대개 짐작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청결히 했을까 하는 것은 더욱 궁금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헌적 해답은 없다. 상상하건대 아마도 부엌 바닥에 물을 데워놓고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몸을 씻지 않았을까. ●개울에서 목욕하는 것은 오랜 전통 다만 여성이 비교적 자유롭게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은, 개울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하기야 늘 그렇듯이 남성의 관음증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아, 훔쳐보는 사람(스님 둘)이 있기 마련이지만. 개울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의 역사책에 고려에 대해 실어놓은 기록에 의하면, 그 풍속이 모두 다 깨끗하다 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고려 사람들은 늘 중국 사람들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반드시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선다. 또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 목욕을 하는데, 거개 시내에서 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내외를 하지 않고 의관을 모두 벗어 언덕에 던져두고 물가를 따라 벌거벗되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위쪽 부분이다. 고려 사람은 청결하고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는 말을 중국인 스스로 하다니 말이다. 서긍의 말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부터 하고 외출을 하고, 여름에 하루 두 번 목욕을 한다 하니, 조선과는 사뭇 다른 풍습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여름철 시내에서 목욕을 하되, 남자 여자가 내외를 하지 않고 나신을 드러내고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분별이 없이 옷을 언덕에 벗어놓고 몸을 씻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위의 엿보는 선비도 이런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이렇듯 자유롭던 개울가의 풍경이 바뀐 것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조선조는 알다시피 양반-남성 국가다. 양반-남성의 국가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을 분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양반-남성은 ‘소학’의 규정대로 여성의 역할을 조리와 의복에 제한했다. 조리와 의복 마련은 조선에서도 여성이 맡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고려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 성리학은 남성과 여성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여성을 오직 가정 내부에 유폐할 것을 요구했다. 여성은 밖으로 나다니지 말아라. 여성은 뜰 밖에 나와서도 안 된다. 이것이 양반-남성의 요구였다. ●감추라 하면 더욱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본능 ‘고려도경’의 언급처럼 고려사회는 시냇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조선사회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치달았다. 몸을 가려라. 이것이 여성에 대한 주문이었다. 사대부가의 여성이 외출할 때면 장옷과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렸고, 처녀의 경우 비단보자기를 씌워서 업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만약 형편이 된다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여성의 신체를 완벽하게 차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도덕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감춘 것은 더욱 보고 싶은 법이고, 감추라 하면 더욱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양반-남성의 도덕은 여자의 몸을 죄의 근원처럼 여겼다. 과연 그런가. 여성의 몸이 죄의 근원이라면 모든 인간은 죄의 근원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거짓이 어디 있겠는가. 혜원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 빨래터의 여자와 남자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 빨래터의 여자와 남자

    김홍도의 그림 ‘빨래터’다. 아낙네 몇이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그림 왼쪽의 어린아이가 딸린 여성은 머리를 풀어헤쳐 감은 뒤 다시 땋고 있다. 앞에는 빗이 놓여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어린아이다. 아랫도리를 홀랑 벗고 있는데 이놈은 심심한 것인지 배가 고픈 것인지 엄마 젖을 만지고 있다. 그 아래의 여성은 긴 빨래를 비틀어 짜면서 건져내고 있다. 그 오른쪽에 방망이질 하는 여성 둘이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빨래터는 온갖 수다가 난무하는 곳이 아닌가. 시누이 험담인가, 동서 험담인가, 아들 자랑인가, 건너 마을의 아무개 남편의 이야기인가. 우물과 빨래터는 여성들 고유의 일터이자, 수다판이다. ●여성의 일터이자 은밀한 이야기 나누는 곳 빨래는 밥짓기와 함께 여성노동에 속한다. 아니, 속하는 것이 아니라, 빨래와 밥짓기는 여성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좀 더 어렵게 말해 여성성을 규정하는 본질적 노동이다. 곧 밥과 빨래란 가사노동은 곧 여성이란 말과 등치된다. 밥짓기와 빨래가 언제부터 여성 노동으로 규정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가부장제 사회가 성립하고부터가 아니었을까.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옷을 빨고 비단이나 베를 희게 말리는 것은 모두 부녀자의 일이다. 비록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해도 감히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은 대개 시내 가까운 곳에 한다. 우물 위에는 두레박을 걸어 함지박에 물을 긷는다. 함지박은 배의 모양과 같다. 빨래는 오래 전부터 여성의 노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려나 조선이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조선의 여성은 고려의 여성에 비해 훨씬 부자유하였다. 지난 호에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의 양반-남성들은, 여성의 외출을 금했다. 하지만 고려조의 여성은, 남편의 승진과 출세를 도모하기 위해 엽관운동을 하러 남편의 상관을 찾아가는 일도 가능했고, 굿을 하기 위해 신당을 찾거나, 불공을 올리기 위해 절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구경거리가 생겼을 때도 당연히 떳떳하게 외출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여성의 외출은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외출이 완전히 봉쇄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금지의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활동의 의지를 축소시켰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아 있는 여성의 합법적 탈출로, 곧 해방구는 우물과 빨래터였다. 그것은 힘든 노동의 공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동네의 소식을 주고받고 은밀한 험담을 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곳은 성적 담화가 가능한 해방의 공간이었다. 단원의 그림 오른쪽 위의 갓을 쓰고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양반, 이 양반의 자세는 분명 성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사내의 포즈는 지난 호에서 소를 타고 길을 가던 여인의 얼굴을 훔쳐보던 그 사내의 포즈와 같다. 부채를 넘어서 보내는 눈길의 속내는 곧 남성의 성욕인 것이다. 빨래터 그림은 이것 말고 더 있다. 아래쪽의 그림은 신윤복의 그림 ‘빨래터의 사내’다. 개울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 흰 천을 펼치는 할미, 그리고 목욕을 마쳤는지 젖은 어여머리를 땋고 있는 젊은 여성이 있다. 이 젊은 여성은 저고리 아래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의 젊고 늘씬한 몸매의 사내를 보라.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반이 분명하다. 이 사내의 눈길은 젊은 여성의 가슴에 꽂혀 있다. 우물가가 남성과 여성이 접촉하는 성적 공간인 것처럼 빨래터 역시 성적인 공간이다. 고려가요 ‘제위보’를 들어 우물가의 성적 접촉의 실례를 확인해 보자.‘고려사’에는 국문가사는 없어지고 이제현이 한시로 번역한 것이 남아 있는데, 이 노래의 사연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어떤 아낙이 죄를 지어 제위보에서 노역살이를 하던 중 남자에게 손을 잡혔는데, 씻을 방도가 없어 노래를 지어 자신을 원망했다. 이제현이 한시로 그 노래를 풀어 옮겼다. 빨래터 시냇가 수양버들 아래서 손을 잡고 자기 마음 말하던 흰 말 탄 그 사람 처마에 석 달 비가 내린다 해도 손 끝에 남은 향기 어찌 차마 씻을 수 있으리. 아낙이 지은 죄의 구체적 내용이야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애정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 자신과 관계하던 남자가 빨래터에서 일을 하던 여자를 찾아왔다. 여자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는 말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이내 떠난다. 손끝에 남자의 체취가 남아 있다. 석 달 비가 쏟아진다 해도 씻을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를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이처럼 빨래터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신호가 오가는 그런 공간이었던 것이다. ●황진이는 빨래터에서 만난 남녀의 작품 ‘제위보’는 이별을 노래한 것이지만, 빨래터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17세기 초 이덕형이 쓴 ‘송도기이’란 책은 개성에 관계된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거기에 황진이가 태어난 내력을 밝힌 부분이 있다. 이 이야기는 이덕형이 공무로 개성에 머무를 때 채록한 것이기에 당시 개성에 유포되어 있던 이야기다. 황진이의 어머니는 이름이 현금인데,18살에 병부교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 훤칠한 대장부 하나가 다리 위에서 나타나 현금을 보고 웃기도 하고 손으로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잘생긴 사내라, 현금의 마음도 적잖이 쏠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사내는 갑자기 사라졌고, 빨래하던 아낙들도 모두 흩어졌다. 인적이 끊어지자 그 사내가 다시 나타나 기둥에 기대어 노래를 한 곡 뽑는다. 노래가 끝나자 사내는 현금에게 물을 한 잔 달랜다. 현금이 냉큼 물을 떠 주었더니, 반쯤 마시고 돌려주면서 마셔보라고 하였다. 현금이 마시자 물이 아닌 술이었다. 말하자면 마술을 동원한 ‘작업’이었던 바, 현금은 거기에 넘어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황진이는 빨래터에서 만난 두 남녀의 작품이었다. 우물가에서 만나 왕비가 되었던 그런 이야기는 빨래터에도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빨래터에서 만난 여성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고려의 두 번째 왕이 된다. 왕건은 태봉의 궁예의 장수로서 903년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 땅인 나주를 공격한다. 목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있는데, 멀리 오색 구름이 서린 동네가 보인다. 찾아가 보니, 어떤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다. 즉시 ‘신원조회’를 해 보니, 처녀의 할아버지는 부돈, 아버지는 다련군이란 사람이었다. 다련군이 사간 벼슬을 지낸 연위란 사람의 딸 덕교와 혼인해서 낳은 딸이 바로 이 처녀다. 뭐 이렇게 말해 보아야 감이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요약하자면, 그 여자는 그 지방 호족의 딸이었다. 보니, 인물이 괜찮다. 무슨 말로 수작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여자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시집 안 간 처녀를 건드려 놓고 왕건은 여자의 출신 성분이 낮다 하여,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 해서 돗자리에다 사정을 한다. 그런데 이 처녀의 행동이 놀랍다. 여자는 전날 밤 용이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용은 곧 왕이 아닌가. 여자는 이불에 흘린 정액을 쓸어 넣었다. 일종의 인공수정인 셈인데, 어쨌거나 임신이 되었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혜종은 특이하게도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다. 원래 왕건이 사정한 곳이 돗자리였으니, 말이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혜종을 ‘돗자리 대왕’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한다. 빨래터는 용흥사란 절이 되었다. 용흥은 용이 나타났다는 뜻이다.‘고려사’는 혜종이 용의 아들답게 늘 물을 잠자리에 뿌리고, 큰 병에 물을 담아 팔꿈치를 씻었다고 전한다. ●남성이 성적 욕망 따라 여성 관찰하던 곳 이제 빨래터가 단지 옷을 세탁하는 공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빨래터는 남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이 시키는 바에 따라 여러 여성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또 여성은 자신의 나신 일부를 슬쩍 남자들에게 보일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단원과 혜원의 빨래터 그림에 남자가 등장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中서 10만년 전 인류 두개골 화석 발견

    |베이징 이지운특파원|10만년 전 인류 두개골 화석이 중국 허난성 쉬창(許昌)시 구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됐다.중국 국가문물국은 22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거의 완벽한 모습의 고인류 두개골 화석을 쉬창 링징(靈井) 구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굴했다고 발표했다.이번에 발굴한 고인류 두개골 화석은 모두 16조각으로 화석 조각 복원 결과 완전한 사람 두개골 화석이었다.중국과학원의 고고인류학자들은 이번에 발굴한 화석을 관례에 따라 ‘쉬창인’으로 명명했다. 이들은 쉬창인이 8만∼10만년 전의 두개골로 드러났다면서 쉬창인은 중국 현대인의 기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발굴을 주도한 리잔양 허난문화유적고고학연구소 연구원은 “두개골의 형체가 거의 완벽한 것은 물론 두개골 내부에 화석화된 막조직이 있어 놀랐다.”면서 “따라서 구석기시대 선조들의 신경조직을 추적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링징 구석기시대 유적지는 지난 1965년 우물을 파다가 발견됐으며 2005년 발굴 시작 이후 인류 두개골 화석 외에 동물 화석과 구석기시대 석기 등 3만여점의 유물이 발견됐다.jj@seoul.co.kr
  • [사설] 김현철씨 출마 선언을 보는 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어제 경남 거제에서 18대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김씨는 조만간 거제에 사무실도 마련하고 한나라당 예비후보로 등록하겠다고 한다. 거제는 김 전대통령의 고향이자 현철씨의 본적이 있는 곳이다. 아버지의 후광,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국정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를 하든 말든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문민정부에서 ‘문민 황태자’‘소통령’으로 불리며 국정을 농단하고 나라를 파탄으로 몬 장본인이 아닌가. 국민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외환위기 직전에 터진 정권 말기의 한보사태와 김현철 게이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비선조직을 운영하며 정·관·재계를 주물렀다. 대통령 아들이라는 영향력을 행사해 한보가 거액을 부정하게 대출 받도록 했으며, 크고 작은 공직 인사에도 간여했다. 안기부를 개인의 정보수집 창구로 썼다. 갖가지 이권에도 개입하고 대선 자금 관리에도 손을 뻗쳤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의 공천권에도 개입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사법처리까지 된 인물이다. 김씨는 “CEO출신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거제와 국가발전을 뒷받침하겠다.”고 했다. 그는 10년간의 반성으로 족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악의 상징인 그가 정치 무대로 복귀하는 것을 반기는 국민은 없다. 이명박 당선인을 지지한 아버지가 적극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당선이 보장되는 한나라당 공천을 따겠다고 공언했다. 김씨 출마는 이제 한나라당의 ‘개혁공천’을 가르는 잣대가 됐다.
  • [씨줄날줄] 리베로 장관/구본영 논설위원

    전설적 축구 스타 프란츠 베켄바워는 ‘야전 사령관’ 같은 선수였다. 주장 완장을 찼든, 않든 그의 발끝에서 독일 대표팀의 모든 전술이 시작됐다. 중앙 수비수였지만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공격에도 적극 가담했다. 이처럼 축구 포메이션 전술의 역사를 바꾼, 그의 창조적 플레이에 힘입어 서독팀은 1974년 뮌헨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베켄바워가 이탈리아어로 ‘자유인’이란 뜻의 ‘리베로’란 신조어의 주인공이 된 배경이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발표한 정부조직 개편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중 하나가 특임장관직 신설이다. 정부조직법상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될 2명의 특임장관은 일상적 국정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굳이 유사한 직제를 찾자면 3공 때의 ‘무임소 장관’(부·처의 수장이 아닌 장관)이나, 김영삼 정부 때까지 유지됐던 ‘정무장관’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인수위 측의 설명은 다르다. 과거 정무1장관은 대 국회·야당 업무를 관장하고, 정무2장관이 현 여성가족부의 양성평등 업무를 맡았던 식과는 판이하다는 것이다. 인수위 핵심 관계자들은 “특정업무에 제한받지 않고 대통령이 관심을 갖는 여러 프로젝트를 맡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미 “해외 자원 개발이나 투자유치를 맡을 것”,“남북관계에 특별한 사항이 발생하면 특임장관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당선인의 뜻”이라는 등 구체적 활용 아이디어까지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특임 장관=리베로 장관’인 셈이다. 정부내 계선조직에서 비켜나 핵심 국정과제를 수행할 특임장관에 대한 관계의 반응을 떠보았다. 한 인사는 “공사 수주가 이뤄지면 그때부터 팀을 꾸리는 건설업계식 인사 스타일로 보인다.”고 평했다. 잘만 활용하면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잘못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축구에서도 베켄바워처럼 제몫을 다하는 리베로는 약이 되지만, 잘못 운용되면 게임을 망치게 된다. 기왕 할 바에야 다채로운 역량과 도덕성을 갖춘 리베로 장관을 뽑아 운용의 미를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 일부 정무장관들처럼 과도한 권한으로 밀실 거래를 일삼다 국정운영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15)전남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15)전남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정확한 형성 연대를 알 순 없지만 대략 신라 흥덕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말기 승려 도선이 우연히 이인을 만나 세상사를 물었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모래 위에 삼국도(三國圖)를 그려 삼국통일의 징조를 암시해 주더란다. 도선이 이에 크게 깨달아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다’란 뜻의 ‘사도리’란 이름을 얻었고, 일제 때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각각 상사리와 하사리로 구분해 나누었다. 지리산 노고단(1507m) 남녘 기운을 고스란히 받고 선 윗마을 상사는 구례군내는 물론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장수마을로 꼽힌다.1986년 인구통계조사 결과 국내 제1의 장수마을에 선정된 적도 있을 정도다. 상사마을 사람들의 장수비결은 ‘지리산 약초 뿌리가 녹아 있다’는 조그만 샘물 ‘당몰샘’에 있다.1980년대 중반 모 대학 예방의학팀의 수질검사 결과 대장균이 한 마리도 검출되지 않아 최상의 물로 진즉에 판명 받았고,2004년엔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이 마을 토박이 의성 김씨 선조가 조선 후기 명당을 찾아 전라도 땅을 헤매다가 당몰샘을 발견, 물을 저울에 달아보았더니 다른 곳보다 무겁고 수량도 풍부해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는데 실제 동량의 수돗물보다 이 샘물의 무게가 더 나간다. 지난해 SBS-TV의 의뢰를 받아 전남보건환경연구원이 시행한 수질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주는 미네랄 성분이 유독 많이 함유되었다고 한다. 몇 해 전만 해도 100세를 넘긴 분이 계셨고 90대 분들도 여럿 되었지만 지금은 모두 작고했고 현재는 88세의 황영복 할아버지와 동갑내기 황금숙 할머니가 마을 최고령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들 오환수(65)씨와 살고 있는 황금숙 할머니는 구한말 애국지사 매천 황현의 증손녀이다. 아들 오씨는 하루 종일 담장을 손보는 일로 분주하다. 길가에서도 툇마루에 누운 어머니의 모습이 보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담을 이어 쌓고 옆으로 새 출입로를 내는 중이다. 상사마을에 뿌리내린 지 57년된 모자의 집은 인근 오미리 시절부터 치자면 무려 300년도 넘는 고택이다. “군에서는 이 마을을 한옥문화촌으로 지정할 모양이에요. 저희 집을 포함,10여호의 한옥이 잘 보존돼 있고요.3월부터는 군 지원 하에 열두 채의 한옥이 더 지어질 예정입니다. 당몰샘 옆의 ‘쌍산재’는 5대가 함께 살았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종손만 거주 중이고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활용 중이지요.” 마산면 일대에서 가장 많은 농지를 갖고 있는 곳이 상사라지만 20여년 전부터는 논농사 외에도 녹차 재배가 한창이다. 아직까진 찻잎을 재배해 타 지역에 판매하는 게 전부인데 상사마을 이름을 건 제품이 출시될 날도 그리 머지않았다. 당연히 농약은 일절 살포하지 않은 무공해 찻잎이다. 상사마을엔 그 흔한 역병도 없었고,‘산손님’으로 통하던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서 시달린 일도 없었으며, 몹쓸 흉년도 없었다. 오환수씨는 그게 다 당몰샘 덕분이라고 믿는다. 돌아가신 백부로부터 그렇게 듣고 자라기도 하였다. 처음 60여호쯤 살았던 곳에 하나 둘 외지인이 들어와 최근엔 13호쯤 가구 수가 늘었으니 그것도 당몰샘의 신기한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을 가득 담아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따라 당몰샘은 오늘도 전국 각지로 지리산 생명력을 고루고루 흩뿌리고 있다. 글·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www.emountain.co.kr) ▲ 가는 길 :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부산 사상 서부터미널에 구례까지 가는 버스가 있고, 기차는 전라선 구례구역에서 하차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장수IC,88고속도로 지리산IC 등에서 남원으로 간 다음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로 진입한다. 남해고속도로는 하동IC를 경유해 구례로 갈 수 있다. 구례에선 화엄사 방향을 따르다 청천초등학교 옆길로 우회전한다. 중간중간 쌍산재 이정표가 보인다.
  • 李당선인·姜대표 회동 주요발언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의 15일 회동에서는 최근 심화되고 있는 당내 공천 갈등과 관련한 발언들이 주목을 받았다. 먼저 한시간여 동안 진행된 회동에서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국회에서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인식을 같이 했다. 이 당선인은 ‘국정의 첫 틀’임을 강조하면서 원안 통과를 주문했다. 강 대표는 한나라당 출신인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에 언급,“크게 보면 우리와 코드가 맞다.”고 국회 통과를 낙관했다. 그러면서 “(신당이)정부조직법이나 총리(인사청문회)는 잘 협조해 줄 것 같다. 국민이 압도적으로 지지한 대통령이 일하겠다는데 총선을 앞두고 뒷다리를 걸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곧 이어 당내 공천 갈등문제로 대화가 이어지면서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강 대표는 “당이 품위를 유지하고 독립성을 가지면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최대한 실천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그 첫 걸음은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는 것”이라고 중요성을 짚었다.“200석은 말이 안 되고 겸손하게 과반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 대표는 이어 “당은 원래 공천을 하면 시끄러운데, 중심을 잘 잡아서 국민의 뜻에 맞도록 하겠다.”면서 “당선자 측근들도 불필요한 말을 안하도록 군기를 잡아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당선인 비선(秘線)조직에서 공천한다는 잡음이 일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줄 것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당선인은 “나는 측근이 없다. 전부 다 강 대표 측근이 됐다.”고 신뢰를 표했다. 이어 “비선은 없고 또 비선조직에서 공천 준비를 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천 시기는 물론 공천심사위원회 구성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는 점을 의식한 듯 강 대표는 “원활한 국정 운영에 필요한 안정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노·장·청을 골고루 안배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적합한 인물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 공천을 하겠다.”고 나름의 원칙을 밝혔다. 이 당선인은 “공천과 관련해서 강 대표 중심으로 당이 중심되어 공천을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당의 역할을 당부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수메르, 최초의 사랑을 외치다

    사랑이 인간을 낳았다면 신화를 낳은 신화가 있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신화인 수메르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신화가 끊임없이 회자된 이유는 신화가 지닌 철학적 사유의 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신화가 가진 세계관과 사상 속에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있는 이야기의 ‘재미’는 몇 번을 반복하여도 퇴색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가 여전히 새로운 판본을 배출해 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와 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신화의 상상력은 기적적이라 할 만큼 경이롭다. 특히나 문명이 존재하지 않던 인류의 원시시대라고 알려진 선사시대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말이다. 바로 그 시기에 수메르에서 최초의 신화가 탄생하였고, 문명이 꽃피었다. 나는 이 ‘최초’를 찾아 꽤 오랫동안 희로애락을 거듭 반복했다. 예전에 길가메시를 만났고, 그리고 이번에 수메르의 여신과 조우했다.2000년을 묻혀 있던 여신은 오랜 시간의 흐름을 딛고 다시금 부활했다. 저승의 문턱을 넘어서고도 살아 났던 것처럼. 그녀의 이름은 ‘인안나’이다. 하늘과 땅의 여왕, 전쟁, 풍요, 다산(多産), 완전하고 다양한 여성성, 여성적인 삶의 원리, 여성들의 수호천사, 품위 있고 당당한 부인, 수많은 도시와 왕들의 수호신, 금성(金星) 등으로 상징화된 여신들의 본바탕에 자리잡고 있던 진정한 여신이다. 그녀와 죽음을 불사하고 사랑을 나눴던 이의 이름은 ‘두무지’였다. 수많은 목자의 선조로서 왕의 자리에 올랐던 남신. 그들은 죽음과 부활을 넘나들며 사랑을 기록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사랑은 ‘아키티’라는 신년 축제로 자리 잡아 국가적 행사로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수메르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 뒤에도 1500년의 세월 동안 신명을 바꿔 명맥을 이을 정도로 열렬한 사랑이었다. 잊혀졌던 목소리를 점토판의 행간을 더듬으며 ‘최초의 사랑’을 되살려 내는 것은 분명 고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신화가 시간의 흐름을 넘어 생생한 육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야기 되어야만 한다. 연인들의 사랑이 그들의 입술사이를 오가는 밀어를 통해 완성되듯이 수메르에서 시작된 사랑이 이 책을 통해 현실에 재생되기를 빌었다. 수메르의 열정적 연인들을 둘러싼 세계관을 통해 신화의 지적 토대에 대한 인식과, 인간 기원의 틈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도. 인안나와 두무지의 밀월여행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수메르에 대한 관심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로맨스의 기원을 향한 걸음을 뗄 것인가 아닌가는 독자들의 선택 영역이다. 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사랑을 읽어 주고 이야기 해주기를, 그리하여 잠들어 있던 그들의 사랑이 공백을 넘어 깨어나길 희망한다. <김산해·수메르 신화 저술가 http:////blog.naver.com/gsh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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