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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개부처 업무보고] 농협중앙회 20%이상 군살빼기

    [4개부처 업무보고] 농협중앙회 20%이상 군살빼기

    농림수산식품부는 22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농협법 개정’을 내년도 8대 핵심과제의 첫머리에 올렸다.농협을 속속들이 뜯어 고치지 않고서는 농식품 산업의 선진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최근 불거진 농협 비리사건과 범 정부 차원의 공공기관 구조조정 바람은 농협의 개혁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와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 등이 농협 비리로 이날 구속기소돼 묘한 대조를 이뤘다.농협 외에 수협과 산림조합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도 함께 보고됐다. 농식품부는 농협 대표이사 등에 대한 중앙회장의 인사 추천권을 없애 사실상 명예직화하고,이사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 실질적인 의결기구로 만들기로 했다.중앙회 사업 대표이사의 집행 권한도 강화키로 했다.대표이사는 이사회의 사업계획을 집행하고 이사회는 그 성과를 평가·감독하는 방식으로 가겠다는 것이다.중앙회의 신용부문(금융)에서 발생한 이익금은 농산물 수집,가공·처리,도매거래 등을 확충하는 등 경제사업 활성화에 우선 지원되도록 할 계획이다. 조합원들의 조합 선택권을 허용해 조합 간 경쟁을 유도하고 합병이 이뤄지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조합의 광역화·대형화를 유도하겠다는 취지다.중앙조직 20% 이상 축소,상위직급(1∼2급) 통·폐합 등을 통해 강도 높은 인적 쇄신과 구조조정도 추진하기로 했다.일선조합장이 1인1표 방식으로 투표하는 현재의 중앙회장 선출 방식도 개편한다. 지난 9일 정부와 농협 및 민간 전문가들이 모여 출범한 ‘농협개혁위원회’는 내년 1월3일까지 농협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최종안을 마련해 2월 임시국회에서 농협법 개정에 나설 예정이다.인적쇄신과 구조조정 작업은 내년 3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신용부문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문제는 내년 2월까지 검토를 마치고 4월부터 신용부문과 경제부문의 분리 작업을 시작해 내년 말까지 확정키로 했다. 수협중앙회의 개혁방향도 농협과 비슷하게 잡혔다.중앙회장을 비상임화해 대외 활동에 전념하도록 하고 중앙회장 및 일선 조합장 선출제도도 바꾸기로 했다.지도·경제 사업 부문을 통합해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 적자 사업장 통·폐합,판매 사업장의 자회사 전환 등을 통해 인력을 줄이기로 했다.산림조합도 중앙회 인력을 15%(100명) 줄이고 전 직원 임금을 동결하는 한편 부실조합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서기로 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육지의 이순신’ 정기룡 잊혀진 영웅을 비추다

    ‘육지의 이순신’ 정기룡 잊혀진 영웅을 비추다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 60전 60승을 거둔 불패의 장수가 있었다.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땅에는 그가 있었다.왜군은 최신식 화약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했으면서도 벌벌 떨며 그가 지키는 도읍은 애써 돌아가야 했고,그가 공격하면 성을 내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다.하지만 그에 관한 역사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매헌실기’뿐이다.임진왜란사는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종전 직후 9단계로 나눠진 109명의 공신 명단에서도 배제됐다.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무려 7년이 지난 뒤인 1605년(선조 38년)에야 슬그머니 ‘선무 1등 공신’으로 추서됐다.결국 이순신,권율,원균에 이은,딱 네 명 있는 임진왜란 1등 공신이 된 것이다. 민간에서는 벌써부터 ‘육지의 이순신’으로 추앙받던 정기룡 장군이다. 그의 생애를 다룬 역사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박상하 지음·일송북 펴냄)가 나왔다.전쟁이 나던 1592년 당시 서른 한 살 종8품의 젊은 장수는 당파에 속하지 않았고,중앙 정치에 줄을 대지도 않았다.선조도,당쟁에 골몰하던 당사자 어느 누구도 ‘젊은 전쟁영웅’의 출현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작품 속에서 정기룡 장군은 삼국지의 조자룡을 연상케 한다.조총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앞장서 적진으로 달려가 적을 베어낸다.동료 장수의 실수로 왜군의 포위망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빛나는 계략을 발휘,나무 몽둥이 하나로 부하들을 무사히 이끌기도 한다.이는 역사적 사실의 고증에 의한 것. 작가 박상하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빛나는 승리는 널리 알려졌지만 육지에서 거둔 변변한 승리는 권율의 행주산성 승리 정도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게 됐다.”면서 “그러다가 조총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은 채 빛나는 연전연승을 이끌어냈던 정기룡 장군을 만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상하는 소설을 쓰는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수도 없이 뒤지며 80군데 남짓에서 관련 기록을 확인했다.주 전적지인 상주를 수없이 오갔고,그의 정기가 서린 속리산 문장대에도 올랐다.그는 “아직도 정기룡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앞으로 역사학계에서 관련 연구가 진행되어야 잃어버린 ‘반쪽의 임진왜란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사측은 내년 1월부터 서울과 대구,상주,부산 등에서 ‘정기룡 장군 학술 세미나’를 잇따라 가질 예정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내 유일 돌다리 연구가 손광섭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내 유일 돌다리 연구가 손광섭

    개울가에 돌 하나만 툭 던져놓아도 징검다리가 된다.그리곤 개울을 건너,가지 않았던 인생길을 걷는다.태초의 어떤 만남도 그렇게 시작됐을 터.너와 나의 만남,남녀간의 사랑도 말이다.헤어짐도 당연지사였겠지.올해초 2008년이라는 개울 앞에 하나 둘 돌을 놓기 시작했다.벌써 해가 저문다.지금까지 어떻게 건너왔는지 잠시 되돌아본다.아마 세가지로 분류되지 않을까. 돌다리를 두들겨보지도 않고 천방지축 손오공처럼 건넜을 테다.삼장법사처럼 신중하게 두들겨보고 건너기도 한 것 같다.또 바둑의 이창호 9단처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겠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석두론(石頭論)을 좋아했다.개혁·개방을 설계하면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摸着石頭過河)’고 주창했다.또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내세웠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논리를 폈다.덩샤오핑은 이 두 가지로 중국대륙을 호령했다. 이래저래 돌다리는 인생철학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그런데 오랜 세월,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돌다리들이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사라져 가고 있다.여기서 잠깐! #문제1: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징검다리는?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 있으며 수곡리와 추포리를 연결한다.길이 2.5㎞,돌덩이가 무려 3만 6000여개에 이른다.말 그대로 한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300여년 전인 조선시대 추포도에 사는 문씨와 장씨 성을 가진 주민들이 하나 둘 돌을 던지며 연결했다.옛날에는 이 징검다리로 새색시들이 가마 타고 시집갔다.이때 가마꾼들 사이에 불려진 노래가 지금도 전해진다.‘띄었냐? 띄었다! 뒤쪽의 가마꾼이 띄었냐? 앞쪽의 가마꾼이 띄었다!’ #문제2:현존하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이다.통일신라 때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청운교는 높이 3.82m,너비 5.11m이다.백운교는 높이 3.15m,너비 5.09m,길이 6.3m이다.이름 그대로 푸른 구름과 흰구름 다리를 뜻한다. 다리 위는 천상의 세계요,다리 아래는 속세를 표현한다.하여,이 다리를 건너면 부처의 나라로 들어간다.하지만 기원전 37년에 만들어진 청주 남석교가 가장 오래됐다.애석하게도 이 다리는 일제 때 땅속에 묻혀 여전히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아울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량공사는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 완성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발굴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문제3:현존하는 돌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는? 뭐니뭐니 해도 진천의 ‘농()다리’를 꼽는다.고려시대 몽골 침략 때 세워졌으며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다리 중 동양에서 가장 오래됐다. 길이 93.6m,폭 3.6m인 이 다리는 거대한 지네가 물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다리답게 사연도 많다.안질을 앓던 세종대왕이 초정리로 가다가 물을 마셨다는 소습천(어수천·御水川), 많은 장수들과 말발굽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이렇게 돌다리만 고집스럽게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손광섭(66) 청주건설박물관장.15년째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돌다리를 찾아내 거기에 담긴 천년의 세월을 끄집어내고 있다.다리품을 모아 7년 전 청주에 다리박물관인 ‘건설박물관’을 세웠다.또 2004년 단행본 ‘천년후,다시 다리를 건너다’를 발간했다.책에서 송광사 삼청교,강경 미내다리,함평 고막천 석교,광한루 오작교,논산 원목다리 등 전국 30여개의 돌다리를 소개했다.최근에는 돌다리 연구 완결편인 ‘천년후,다시 다리를 건너다Ⅱ’를 펴냈다.목릉 금천교를 시작으로 제주의 명월교에 이르기까지 전국 27개의 돌다리를 새로 추가했다.특히 보길도 굴뚝다리,봉화 돌다리 등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거나 훼손돼 위험에 처한 다리까지 실었다.그가 국내 유일의 ‘돌다리 전문가’로 불리는 까닭이다. 청주건설박물관에서 손 관장을 만났다.박물관 안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진다.전국을 찾아다니며 직접 찍은 돌다리 사진이 사방 벽으로 쭉 전시돼 있었다.유리 전시관 안에는 조선시대에 사용됐다는 저승과 이승을 잇는 돌다리,당시 유배지로 떠나던 선비가 사용했던 화장실,조선시대 각종 건설장비 등을 비롯해 발해시대의 석등탑과 삼족우,송나라 때 사용됐던 소뿔먹통,타이타닉 배에서 뽑았다는 못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박물관 3개층에 걸쳐 시대별로 진열돼 있었다.예멘의 벽돌,페루 마추픽추의 관련 흔적 등 해외자료까지 합하면 무려 수십만 점은 족히 돼 보였다.이런 소문이 나 외국인들도 이곳을 찾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떻게 해서 돌다리를 연구하게 됐습니까. “원래 아버지로부터 건설회사를 이어받았습니다.자연스럽게 전국을 다니게 됐죠.그때마다 지방 마을에 있는 돌다리를 접하면서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다리의 돌 하나하나에 예술이 있고,선조의 삶과 해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1993년쯤부터는 아예 주말마다 거의 전국에 흩어진 돌다리를 만나러 도시락 싸들고 떠났지요.” →세월 속에 없어진 돌다리도 많을 텐데 자료찾기는 쉽던가요. “고서점은 물론 국회도서관에 가도 없더군요.결국 그동안 간간이 소개됐던 도지(道誌)와 군지(郡誌) 등을 뒤졌습니다.그걸 바탕으로 시골동네 어르신들에게 찾아가 밥과 술을 사드리면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요.암태도의 징검다리 돌덩이 숫자가 3만 6000여개인 이유도 일년 365일 평안을 기원하는 속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우리나라 돌다리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깃든 설화와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무대가 된 남해의 돌다리,형제가 쌀 천섬을 들여 만든 거창의 쌀다리,17세기 우리 교각의 형태를 볼 수 있는 벌교 도마교 등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많습니다.이런 돌다리에 서서 천년 전,누가 무슨 일로,무슨 생각을 하면서 건넜을까 생각하면 막 흥분이 되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옛다리들을 보면서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놈,잠 잘생겼다.예술이다.”라고 중얼거리다 보니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술회한다.세계 어느 조각작품에도 뒤지지 않은 순수한 자연미를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서였다.현실적으로 다리를 한 곳에 옮겨다 놓을 수 없기에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다녔다.또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된 개성의 선죽교 등 북한에 있는 것은 방북했을 때 어렵게 그림을 얻어다가 전시해 놨다.그는 “수십번 찾아가도 항상 말없이 반겨주는 것이 돌다리였다.”면서 남은 생애에 여건이 된다면 북한의 돌다리 연구를 꼭 해보고 싶다며 웃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길 1943년 청주에서 태어났다.청주고와 청주대학을 나와 1968년 아버지로부터 건설회사를 이어받았다.그러던 어느 날부터 돌다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1993년부터 본업보다는 아예 돌다리 연구에 매진했다.고서점이나 국회도서관 등에도 돌다리에 관한 자료가 없어 어려움도 많았다.결국 수소문하면서 도지(道誌)나 군지(郡誌) 등을 뒤져 자료추적을 했고 산골마을에 직접 찾아가 동네 어른들을 만나 돌다리에 얽힌 얘기를 기록했다.2001년 1월 청주에 국내 최초의 돌다리박물관인 ‘청주건설박물관’을 설립했다.이어 2004년 산야에 묻혀 사라져 가거나 훼손된 돌다리들을 찾아내 ‘천년후 다시,다리를 건너다’라는 단행본을 펴냈고 최근 돌다리 연구의 완결편인 ‘천년후 다시,다리를 건너다Ⅱ’를 추가로 발간,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9) 춤추는 남녀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9) 춤추는 남녀

    춤을 지나치게 좋아한다거나 그래서 ‘춤바람’이 났다면,무언가 온당치 않은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다.그 이유는 아마도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기 위한 가부장제에 있을 것이다.추측건대 ‘춤바람’이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20세기 후반 사교춤이 유행하고 난 이후의 일일 것이다.춤을 즐기는 것은 원래 한국인의 오랜 전통이었다.아니 이 세상 모든 나라의 모든 민족은 모두 춤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다. 각설하고,신윤복의 ‘춤’(그림 1)을 보자.그림의 윗부분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고,아래쪽 넓은 공간에 춤을 추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그림 오른쪽에 네 명의 악공이 있는데,장구를 치는 사람이 하나,피리를 부는 사람이 둘,해금을 켜는 사람이 하나다.춤을 추는 여성은 아마도 이 악공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기생일 것이다.조선 후기에는 악공과 기생이 한 팀을 이루어 민간의 초청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여기서 이 악공과 기생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터인데,당연히 지금 춤을 추고 있는 양반과 그 왼쪽의 두 사내다.짙은 나무 잎사귀로 보아,계절은 여름이 틀림없다.어느 여름날 시원한 산그늘을 찾아가 풍악을 잡히고 기생과 춤을 추면서 보내는 한때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양반들이 잔치에서 춤추는 건 흔한 일 그런데 그림 왼쪽에 있는 두 사내의 포즈가 가관이다.한 사내는 갓끈을 풀고 갓을 젖혀 쓰고 있고,아래쪽 사내는 비스듬히 누워 있다.둘 다 검은 갓끈을 하고 있고,또 아주 젊은 얼굴로 보아 벼슬하지 않은 젊은이다.근엄한 양반들이 어찌 갓끈을 풀고 갓을 젖혀 쓰고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남녀 한 쌍의 춤을 감상하고 또 직접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인가.조선시대 양반에 대해 지금 사람들은 오해가 많다.즉 양반이면 모두가 예를 지키고 법도를 따라 근엄한 표정으로 행동을 삼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옛날 양반이 지금 사람들보다는 유가가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그리고 예를 더 지킨 것은 사실이겠지만,그것이 모든 양반들에게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마도 조광조나 율곡이나 퇴계,남명 선생 정도일 것이다.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이고,이 그림에서처럼 더우면 갓끈을 풀고 비스듬히 기대기도 하고 기생과 어울려 춤도 추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찾아보면 춤에 관한 기록은 결코 드물지 않다.예컨대 ‘실록’에는 그런 자료가 적지 않게 나온다.여기서는 조선 후기의 ‘실록’을 몇 구절 읽어보도록 하자.‘사변록’이란 책에다 주자와 다른 경전 해석을 써서,정적들에게 사문난적으로 찍혀 곤욕을 치렀던 박세당은 1703년 귀양살이가 결정되지만,제자 이인엽이 숙종에게 입이 닳도록 간청하여 겨우 유배를 면하고 곧 세상을 뜬다.그날조 ‘숙종실록’의 사신은 박세당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박세당은 젊은 시절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의 집안 잔치에 참석했을 때 일어나 춤을 추기까지 하였으므로,사론(士論)이 비루하게 여겨 그를 전랑(銓郞)에 추천하는 것을 막았다.”박세당이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양반들이 잔치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음은 ‘풍산김씨세전서화첩(豊山氏世傳書畵帖)’에 실린 ‘해영연로도(海營宴老圖)’(그림 2·작자 미상)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1529년 김양진이란 분이 황해도 감사가 되어 감영에서 노인들을 불러 양로연을 베풀었을 때의 광경을 그린 것이다.전문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서 그림은 미숙하지만,기생 두 명의 춤과 노인들이 일어나서 일제히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조실록’ 49년 8월 9일 기로소 의정부 중추부 주원(廚院)에서 진찬(進饌)하였을 때다.잔치가 무르익자 영조는 영의정 한익모 부자,판서 조영진 부자,조창규 김사목에게 대무(對舞)하라고 명한다.그들은 왕명에 당연히 일어나 춤을 추었다.왕과 신하가 참석한 잔치에서 신하가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은 드물기는 하지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물론 깐깐한 사신은 한마디 한다.“한익모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소매를 들고 너울너울 악공들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또 아버지와 아들은 짝을 지어 춤을 출 수 없는 법인데도 경솔하게 일어나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비웃었다.”한익모가 영의정이라서 비난을 받은 것이지 춤 자체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소매 떨치고 여자는 손 뒤집어 사정이 이러니 조선조의 양반들 역시 당연히 춤을 즐기고,또 여성과도 춤을 출 수가 있는 것이다.‘영조실록’ 18년 9월 3일조를 보면,대간(臺諫)은 함안군수 이휘진이 악기를 쥐고 악공들과 어울려 연주를 하고,기생과 마주보고 춤을 추었다고 하여,대간 후보에 오른 것을 빼 버리라고 요청하고 있다.여성,특히 기생과 춤을 추는 것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또 영조가 대간의 청을 수용하지 않는 것을 보면,기생과 춤을 추는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춤을 어떻게 추었던가.유득공의 ‘경도잡지’는 남녀의 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춤은 반드시 대무(對舞)인데,남자는 소매를 떨치고 여자는 손을 뒤집는다.”대무를 춘다는 것은,춤을 추면 으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춘다는 것을 의미한다.‘경도잡지’는 서울의 풍속에 대해 쓴 책이니, 유득공이 살던 시대,즉 18세기 서울에는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어 춤을 추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그림(1)이 풍습의 증거가 된다.‘경도잡지’의 “남자는 소매를 떨치고 여자는 손을 뒤집는다.”는 구절의 원문은 ‘男拂袖,女?手’인데,무엇이 소매를 떨치고 손을 뒤집는 것인지,또 이 춤이 어떤 춤인지는 견문이 짧은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하지만 그림(1)을 보면,남자의 옷소매는 손을 감출 정도로 길고,여성은 손을 드러내고 있으니,‘경도잡지’가 말한 바의 춤인 것이다. ●조선전기 여진족의 춤 ‘목후무´ 유행 조선 전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 만난 여성과 춤을 춘 경우도 발견된다.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이른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인데,그는 1485년 친구들과 개성 일대를 유람하고 ‘송경록(松京錄)’이란 기행문을 남긴다.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중양절 날 동서남의 여러 산 곳곳마다 남자 여자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여 자못 태평한 기상이 있었다.…첨성대로 갔다가 우연히 야제(野祭)를 지내는 남녀를 건덕전 터에서 만났다.남녀가 다투어 우리를 맞이했는데,백원(百源·李摠)을 윗자리에 앉히고 우리들은 그 다음 줄에 앉았다.자용(子容)이 맨 처음이었고,정중(正中·李貞恩)이 그 다음,회녕(會寧·宋會寧)이 그 다음,석을산(石乙山)이 그 다음,숙형(叔亨)이 그 다음,내가 그 다음이었다.…백원이 정중을 돌아보며 비파나 금을 타라고 하였다.회녕은 피리를 불고,석을산은 노래를 불렀으며,자용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비파와 노래와 피리가 각기 그 오묘함에 이르자,자용이 남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여자와 마주 보고 춤을 추었다.춤이 끝나자 목후무(沐?舞)를 추었는데,모든 동작이 음악에 맞았다.그것을 보고 주인 남녀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목후무란 여진족의 춤이다.성종 당시 공경대부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어쨌거나 좋다.남효온 일행은 개성의 첨성대를 찾아갔다가 굿을 하는 한 무리의 남녀를 만났던 것이고,그 자리에 끼어서 같이 춤을 추며 놀았던 것이다.특히 자용이란 사람은 가장 젊은 여자를 파트너로 하여 춤을 추었고,그 춤에 모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하니,모르는 여자와 춤을 추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 여행을 하다 보니,춤을 추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되었다.공원에서 얼후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대한민국에는 그런 풍경이 없다.생활에 여유가 없어서인가? 춤은 모두 어두운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으로 퇴각해 버린 것인가.가무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으로 소문이 난 한국인이 어찌 이리되었는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하재봉의 영화읽기]신기전

    [하재봉의 영화읽기]신기전

    역사적 고증과 과학적 합리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는 하나, 의심할 바 없이 <신기전>의 영화적 위치는 고양된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는 데 우뚝 서 있다. 설계도가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로켓 <신기전>의 흥분된 이야기는, 조선 건국 초인 1448년, 세종 30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고려조의 유민이 아직 잔존해 있던 건국 초기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조공을 바치던 강대국 중국의 눈치를 보며 조선이 명나라 몰래 놀라운 병기, 세계 최초의 로켓포를 계발하려고 했다는 가설을 <신기전>의 내러티브는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물론 <신기전>의 근거는 지금도 문헌으로 남아 있는 《총통도감》에 기초해 있지만, <신기전>의 피와 살을 형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내러티브는 모두 허구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신기전>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30년 9월 13일, 세종은 총통등록을 각 도에 전달하며 ‘화기를 개발하고 쏘는 연습을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총통등록》은 최무선에 의해 화약이 계발된 이후 화기인 주화로부터 시작된 신기전, 그리고 화기를 나르는 화차 개발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세종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과 싸우며 4군 6진을 만들고 영토확장을 이루는데 신기전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기전은 소·중·대 3가지 종류가 있는데 화살 끝에 화약이 장착되어 있으며 대신기전의 경우 화차에서 발사되면 약 2km 이상을 날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서양의 로켓 개발보다 무려 300여 년 앞선 과학적 쾌거였다. 임진왜란을 거쳐 영조 4년(1728년) 안성에서 반군을 제압하는데 신기전이 사용되었다는 문헌 이후 우리 역사 속에서 실종된 신기전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1975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박사에 의해서였다. 채 박사에 의해 다시 발견된 신기전의 설계도는 세계우주항공학회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로켓 설계도로 인정받았다. 왜 조선 역사 속에서 신기전의 존재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나중에는 실종되어 버린 것일까? 중국이나 일본 등 신기전 개발을 달가워하지 않던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부국강병의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신기전>은 사료에 기초해서 신기전 개발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국제역학관계를 현실에 빗대어 생각할 수 있게끔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영화 <신기전> 속 꿈같은 이야기는 상당 부분 역사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이만희는 이러한 사료를 기초로 작가적 상상력을 작동시켜, 고려 유민의 후손으로 반역죄로 처형당한 아버지의 한을 품고 상인으로 살아가는 설주(정재영 분), 최무선의 손녀딸로 신기전 계발의 핵심 역할을 하는 홍기(한은정 분), 세종의 밀명을 받고 명의 감시를 피해 신기전 개발에 힘을 보태는 호위무사 창강(허준호 분), 명나라의 감시를 피해 학계의 응축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민간차원에서 신기전이 개발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세종(안성기 분) 같은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었고, 현실적으로 수긍할만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신기전>의 드라마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분위기로 시작된다. 창강은 신분을 알 수 없는 홍리의 신변보호를 상인 설주에게 의뢰한다. 물론 거액의 보수가 따르지만, 창강이 특별히 설주에게 홍리를 부탁한데는 이유가 있다. 홍리는 고려 말 화약 제조자 최무선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홍리와 함께 신무기 개발을 하던 중 명나라 자객단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조선이 로켓포를 만드는 것을 경계해 왔던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세종과 궁궐 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세종은 명나라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히 신기전이 완성될 수 있도록 창강에게 명하고 창강은 신기전 개발의 키를 쥐고 있는 홍리를 설주에게 맡긴 것이다. 지금은 상인이지만 그 역시 역모혐의로 처형당한 아버지와 함께 화약 개발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다. <신기전>은 크게 명나라의 감시를 피해 설주-홍리 커플이 신기전을 개발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미묘한 감정이 싹트는 두 사람의 사랑, 명나라와 여진의 10만 연합군에 맞서 신기전을 이용해 조선군이 승리를 거두는 피날레로 이루어져 있다. <신기전>에는 상투적인 로맨스, 신파에 가까운 사랑 장면이 들어 있고, 국수주의적 시각도 있지만, 강대국 아래서 자주국방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세종의 신기전 개발 이야기가 현재 우리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 <신기전>을 볼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이만희 작가의 튼튼한 극본 때문이다. 이만희 작가는 “침대에 누워 졸린 눈을 달래가며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꾸역꾸역 읽어 내려가다 나는 어느 대목에서 벌떡 일어나 고쳐 앉았다. 그것은 ‘발칙한 조선은 듣거라’ 라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칙서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 말이었다.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발칙한 조선이라니…, 이런 저급한 말은 하인에게도 아니 쓴다. 아, 조선은 이랬구나.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초라하게 당했구나. <신기전>은 울분으로 쓴 작품이다. 이런 굴욕과 울분은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 난 신기전을 통해 선조들이 이 강산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약속>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신기전>을 만들면서 김유진 감독은,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연출 감각을 보여준다. 웃음을 줄 때와, 긴장감을 지속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할 때의 완급조절을 부드럽게 이끌면서 결과적으로 긴장과 이완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대중적 재미와 흥행력을 갖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감독은 “신기전은 우리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아주 명쾌하고 유쾌한 영화다. 웃음, 슬픔, 액션,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까지… 복합적인 재미를 주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서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김유진 감독은 기대하고 있었다. “온 가족이 볼 수 있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생각하고 만들었다. 신기전은 그렇게 오락영화를 추구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면서 사실과 허구의 차이점에 대해 묻는 질문에 핵심을 피해나갔다. “신기전은 사극이지만 코미디와 멜로 요소가 많이 들어 있으며, 처음부터 액션, 사랑, 웃음, 슬픔을 한 구조 속에 녹여서 가려고 생각했다. 흥행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도 당연히 코미디와 멜로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기전>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와의 경계를 교묘하게 흔들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흥행력과 영화적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야사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허구적 상상력의 소산인 종반부 명나라와의 대결에서, 조선의 비정규군이 사용하는 신기전 발사 장면은 통쾌함을 안겨준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 그때 만약 우리가 신기전을 진짜 개발했고 그것을 이용해서 만주 땅을 되찾았다면, 혹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초토화시키고 대마도까지 정벌해 버렸다면. 이런 가정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런 가정이 지금의 현재적 역사에 주는 교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국수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며 민족적 자긍심에 기대어 흥행 홈런을 노리는 <신기전>이지만, 그 이유만으로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미래의 역사라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며, 과거의 역사가 새로운 현실인식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면 충분한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 조선시대 호된 신참관리 신고식

    “새로 온 놈[新鬼] 양정(暘鄭·놀리기 위해 성과 이름을 뒤집음)은 듣거라! 생각컨대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써 외람되게도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중략)거위,담배,돼지고기,닭고기 등을 즉각 내어와 우리에게 바치도록 하라.선배(先進)들 씀.” ●선배들의 탄압 벗어나려면 대접해야 18세기 무렵 조선시대 정양(鄭暘)이란 사람이 신참 하급 관리로 배속받은 뒤 선배들을 접대하기 위해 가진 일종의 ‘신고식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작성한 문서다.불콰하게 취한 듯 글씨는 삐뚤빼뚤하다.문서 마지막에 선배 세 사람은 각자 ‘일심결(一心決·일종의 사인)’을 남겼다.후배를 동료로 받아들이기 전 마지막 통과 의례로 볼 수 있다.선배들의 장난끼와 후배의 곤혹스러워함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토지박물관은 조선시대 관가에서 횡행했던 면신례(免新禮·신참딱지를 떼는 의식)를 기록한 면신첩 2점을 10일 공개했다.지금까지 면신례 관련 자료로는 2004년 경기도 화성시에서 공개한 정조 시대 ‘김종철 면신첩’이 유일했다. ‘정양의 면신첩’은 면신례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반면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그러나 또 다른 면신첩인 ‘면신입안(免新立案)’은 작성 연대를 정확히 기록하는 등 비교적 공식문서 형식을 갖췄다. ●또 다른 면신례선 신참을 벌레에 비유 영조 34년(1758) 11월에 쓰여진 것으로 문서 제목은 ‘영방입안(營房立案)’이다.‘영방’은 각 군영(軍營)이나 도(道) 단위 감영(監營)에서 관리가 집무를 보던 관청을 말하며,‘입안’은 판결문·공증서와 같은 일종의 공식 문서다. 짐짓 근엄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문서에서도 선배들의 짓궂음은 여전하다.문서는 ‘풀벌레[草蟲] 정국량은 면신례를 관례대로 한 차례 시행했고 이에 의거해 입안을 발급해준다.’고 기록하고 있다.아마도 면신례 뒤 술에서 깬 다음 이같은 문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토지박물관 김성갑 학예연구사는 “‘정양 면신첩’은 기존의 김종철 면신첩과 유사하지만,‘정국량 면신입안’처럼 공식문서 형식을 띤 자료는 유례가 없다.”면서 “당대에도 극심한 폐해가 지적돼 국법으로 금해왔던 면신례 방식이 18세기 중반 무렵 변한 것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조선시대 면례식은 초기의 미풍양속에서 벗어나 금품을 갖다바쳐야 하거나 후배가 선배에게 맞아 죽기도 하는 등 폐해가 극심한 것으로 알려졌다.조선 선조 때부터 국법으로 태형 또는 유배를 보내는 등 엄격히 금지했지만 계속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인구 20%가 죽은 기후 대재앙

    [내 책을 말한다] 인구 20%가 죽은 기후 대재앙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500년 동안 대기근이 자주 발생했음을 발견했다.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만큼 강력한 대기근도 있었다. 특히 17세기에는 이상기후로 인한 잦은 대기근으로 심각한 위기 상태에 빠졌다.이에 대한 연구가 미진해 대기근과 기후변화가 경제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알아보고자 했다.특히 최근 급격한 기후변화에 전 지구적 관심이 높아졌음을 알고 집필을 서둘렀다. ‘대기근,조선을 덮치다’(푸른역사 펴냄)는 조선 역사상,5000년 민족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기근인 ‘경신 대기근’(1670~1671년, 현종 11~12년)을 다룬 것이다.‘경신 대기근’이라는 현미경으로 17세기 사회를 들여본 셈이다.그래서 당시 자연재해 현황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대기근의 참혹함과 민심 동향,조정의 대책도 자세히 검토했다. 서리,우박으로 인한 이상저온 기후에 가뭄,홍수,태풍,병충해까지 겹쳐 유례없는 농작물 피해를 입었다.식량고갈 사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고,유랑하고,도적질을 하고,살상을 하고,아이를 버리고,반란을 꿈꾸고 그리고 죽어 갔다. 무려 조선인구 510만명 가운데 100만명 가까이 죽었다.대기근이 절정에 오른 1671년 봄·여름철에 굶주린 사람은 당시 인구의 20~30%를 상회했다. 전염병과 가축병의 창궐로 민생은 파탄이 났고 사회는 불안의 늪에 빠졌다. 근거없는 괴담이 난무하는 상태에서 서인과 남인으로 나눠진 정치권은 기근 해결 방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당시 청나라 건국 이후 명나라 부흥운동으로 불안한 동아시아 정세는 조선의 대기근 극복에 걸림돌이 되었다. 청의 병사 요청설,명 잔당의 조선 침입설 등으로 불안했다.조선조정은 국고가 바닥난 상태에서 군량비축곡을 방출했고,공명첩(신분 매매)을 남발했으며,각종 세금을 감면했다.그 과정에서 서인 정국이 실무형 남인에게 넘어갔고,현종 또한 건강을 챙기지 못하여 단명의 길로 들어서고 숙종이 즉위한다.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17세기 일련의 대기근이 전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시론적이나마 밝혀보고자 했다.17세기는 ‘소빙기’라고 불릴 만큼 극심한 이상기후로 기근이 끊이지 않아 위기가 일상인 시대였지만 위기 뒤에 기회도 있었다. 위기와 기회는 기후변화가 남긴 대재앙이자 ‘블루 오션’이었다.정부는 수습책 마련에 100년의 세월을 보냈지만,그 노력은 결실을 보고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안정을 되찾으며 다시 번영을 누렸다. 이 책의 의의는 기후사를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는 점,경제란을 두려워하면서 자연재해에 무관심한 지구 온난화 시대의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도록 한다는 점, 정치사와 연기대기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학문의 영역을 한뼘 늘린 셈이다.100년 만에 찾아왔다는 경제위기 속에서 미국의 정권 교체기에 우리 정부가 어떻게 정책을 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1만 6000원 김덕진 광주교대 역사학 교수
  • [주말탐방] 25m급 대형망원경 보유했으면

    보현산 천문대 사람들은 천문학자이자 사진작가이며 동시에 기술자이기도 하다.천문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산 위에서 스스로 해결한다.94년 들여온 프랑스제 ‘텔라스’ 망원경.지금은 일만원권 뒤에 자랑스럽게 박혀 있지만 처음 이 망원경이 들어왔을 때는 한국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조하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당시 천문대에서 망원경 개조에 참여했던 천문연구원 이서구 박사는 “텔라스는 8m급 대형망원경 전문업체라 한국측의 주문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다.”면서 “습도가 높고 흐린 날이 많은 한국 사정에 맞춰 망원경 전체를 사실상 렌즈만 빼고 모두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대형망원경은 첩보위성 감시 등에 사용되는 군사기술이기 때문에 물건을 팔았다고 해도 세부기술은 공개하지 않는다.그러나 망원경을 개조하다 보니 연구원들은 망원경 구동부와 관련 소프트웨어 등 대부분의 노하우를 알게 됐다.전영범 연구원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면서 “이제는 렌즈 기술만 따라잡는다면 초대형 망원경을 만들고 운용하는 것도 우리 기술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천문대가 거둔 성과는 또 있다.2000년 이후 천문대에서 10여개의 소행성이 세계 최초로 발견됐다.특히 처음 발견된 보현산을 비롯해 최무선,이천,장영실,이순지,허준 등 선조과학자들의 이름이 새로운 소행성 이름으로 전 세계에 공표됐을 때 연구원들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 것을 물론이다.  그렇다면 천문대 연구원들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일까?당연히 더 큰 망원경을 갖는 일이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날씨가 변화무쌍한 한국에 더 이상의 대형 망원경은 필요가 없다.천문대가 서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은 하와이나 남미 등지다.  일년 내내 관측하는 이웃 일본의 경우 하와이에 ‘스바루’로 불리는 8.2m급 세계 최대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경재만 천문대장은 “더 멀리,더 크게 보는 나라가 앞서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라며 “한국도 내년부터 외국 국가들과 컨소시엄을 만들어 25m급 대형망원경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25m 대형망원경을 갖기 위해서 한국이 투자해야 하는 돈은 1000억원 남짓.그나마 1조원에 달하는 망원경 제작비용을 생각하면 10%의 지분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박석재 천문연구원장은 “CCD나 망원경 기술이 방위산업이나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바는 둘째 치더라도 국민의 삶의 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면서 “어린 시절부터 별을 보고 자란 선진국 국민들이 더 풍부한 감성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영천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 풍속사] (47) 기녀와 하룻밤

    [그림이 있는 조선 풍속사] (47) 기녀와 하룻밤

    ‘밤길’(그림 1)은 신윤복의 작품인데,신윤복 풍속화 치고는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나는 조선 후기 풍속화를 논하는 자리에서,혹은 풍속화로 만든 달력이나 기념품 등에서 이 그림을 본 적이 없다.하지만 이 그림은 퍽 꼼꼼히 따져볼 만한 것이다.그림 위쪽에 하현달이 떠 있는 것을 보면 밤이 분명하다.또 담뱃대를 문 기생이 팔에 털토시를 끼고 있는 것을 보면 겨울밤이 틀림없다.참고로 말하자면,조선시대 여자는 몸 전체를 가리는 방한의(防寒衣)가 없었으므로 단지 팔에 털토시만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여자의 털토시 말고 방한구(防寒具)는 또 있다. ●화려한 옷차림 기방의 운영자 대전별감 등불을 들고 앞서서 길을 인도하는 어린 사내종이 오른쪽 팔에 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털가죽으로 만든 이 물건은 위쪽에 끝을 죄는 줄이 있다.곧 펼친 상태에서 착용하고 끈을 죄어서 오므리는 것이다.끈이 있는 방한구로는 풍차나 만선두리 같은 것이 있지만,이 그림만으로는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어쨌거나 방한구를 착용하거나 들고 나선 추운 겨울밤인 것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왼쪽의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별감이다.이 사람을 순라군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결코 아니다.이 사람은 앞서 ‘기방의 난투극’에서 한 번 등장한 적이 있는,기방의 운영자 대전별감이다.대전별감은 옷차림이 화려하다 했는데,이 그림의 복색을 보아도 과연 그렇다.대전별감만이 입을 수 있는 홍의(紅衣) 안에 푸른 색,분홍색,갈색 누비옷을 겹쳐 입고 있다.신발 역시 가죽신이다.또 초립 아래는 방한구인 털가죽으로 만든 ‘풍뎅이’를 쓰고 있다.과연 서울 시내 복색의 유행을 주도하는 별감답게 잔뜩 사치한 모양이다.  기생과 대전별감 사이에 있는 남자는 양태가 넓은 갓을 쓰고,중치막을 입고,가죽신을 신었다.양반이다.기생과 기부(妓夫)인 대전별감,그리고 이 양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그림 속의 인물이 말을 하지 않으니,알 수가 없다.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물들의 동작을 보자.중치막을 입은 양반은 오른손으로 갓의 양태를 잡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고,대전별감은 왼손으로 앞을 가리킨다.저 쪽으로 가라는 신호로 보인다.기생은 대전별감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양반 왼쪽에 있다.즉 기생은 대전별감과 떨어져 양반과 함께 밤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양반과 기생이 같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은,그들의 앞에 사방등을 든 어린 사내종이 길을 인도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만하다. 자,그렇다면 어떤 장면인가.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원래 기부는 기생과 동침을 원하는 손님이 있으면 그날 밤을 손님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나는 이 그림이 기부인 대전별감이 고객에게 기생을 딸려 보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 생각한다.이의가 없으신지? ●기녀제도 양반들의 성욕 위해 500년 유지 기생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하지만 기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조선조에 와서 기생을 없애려고 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 일파의 거듭된 요청으로 일시 기생이 없어지지만,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다시 기생제도가 부활하였다. 전에 언급했듯 기생은 두 가지 목적으로 존재하였다.춤과 노래를 익혀 궁정과 양반들의 잔치에 동원되는 것,그리고 하나는 양반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즉 조선 양반 체제는 양반-남성의 결혼이란 합법적 방식을 벗어난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갑오경장 때까지 거의 500년 동안 관기제도(官妓制度)를 유지시켰던 것이다.  그림(2) 역시 신윤복의 작품이다.제목은 ‘국화 옆에서’.서정주의 시 제목을 가져온 것이다.그림의 왼쪽에는 국화꽃이 피어 있고,오른쪽에는 사내와 늙은 할미가 있다.그리고 그 앞에는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처녀가 있다. 사내는 아직 앳된 기운조차 느껴지는 젊은 나이고,여자는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옆모습만 보아도 젊은 처녀임을 알 수 있다.남자가 웃통을 벗고 있는 것으로 보아,조금 전까지 남자는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그리고 이제 막 대님을 치는 것으로 보아,바지도 벗었다가 이제 다시 주워 입는 것이다.여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그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자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남자와 여자는 이미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곧 이 사내는 여자의 초야권을 샀던 것이다.흔히 ‘머리 얹어준다.’는 말은,기생의 초야권(初夜權)을 사서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릴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다.동기(童妓)의 초야권을 사는 사람은 이부자리와 의복과 당일의 연회비를 담당해야만 했는데,아마도 젊은 오입쟁이는 그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기생의 성을 판매하는 조방군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늙은 할미다.얼굴이 검고 깡마르고 약간 간교하게 보이는 할미는 입을 가리고 여자에게 소곤대고 있다.내용이야 확인할 수 없지만,여자를 어르고 달래는 말이 아니었을까. 이 할미는 도대체 누구인가?어두운 성의 거래에는 반드시 중개인 역할을 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수호지’에서 바람둥이 서문경과 유부녀 반금련 사이에 다리를 놓아 간통을 성사시킨 것은 이웃에 사는 늙은 여자 왕파였다. 그렇다면 그런 역할을 하는 여자가 과연 있었던가.19세기의 가사 ‘우부가(愚夫歌)’에 그런 여자가 나온다. ‘우부가’는 세 사람의 어리석은 사내의 행각을 그린 작품이다.개똥이·꼼생원·꾕생원 세 사내는 돈을 펑펑 써대며 온갖 놀이와 황당한 행각으로 결국 재산을 거덜내고 파멸하고 만다.그 중 꼼생원의 행각을 그린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리 모여 노름 놀기,저리 모여 투전질에/기생첩 치가(治家)하고,오입장이 친구로다/사랑에는 조방군이,안방에는 노구할미”   보다시피 꼼생원이 하는 일은 패가망신하는 일이다.맨 끝부분의 조방군과 짝을 이루고 있는 노구할미란 부분에 주목해 보자.조방군이란 기부를 말하는 것으로 기생의 성을 판매하는 역할을 하는 자다.따라서 노구할미 역시 그런 성의 판매를 중개하는 사람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노구는 한자로 쓰면 ‘?’가 된다.문자 그대로 직역하면,‘늙은 할미’ 뜻이지만,사실은 뚜쟁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노구장이’란 말이 있는데,이것은 뚜쟁이 노릇을 하는 늙은 할미라는 뜻이며,‘노구질’이라고 하면 뚜쟁이 노릇이란 뜻이다.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설(?上雪)’에 장안 계집을 깡그리 노구질하다 못 해서 조카딸까지 팔아먹는 것이로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곧 노구질이란 늙은 할미가 하는 뚜쟁이 노릇을 말하는 것이다.그림(2)의 할미의 정체는 밝히자면 이런 것이다.  물론 뭔가 찜찜한 구석은 있다.나는 그림(2)의 젊은 여성을 기생으로 보았는데,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서울의 기생과 지방의 기생의 출신 성분이 같지만,기생업의 경영 방식에 다른 점이 있다.즉 서울의 기생은 기부(妓夫),즉 남자가 기생을 지배한다.그림(1)에서 등장하는 대전별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하지만 지방의 기생은 기모(妓母),즉 기생의 어미가 지배한다. 기모의 경우는 춘향이와 월매를 떠올리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신윤복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생은 모두 서울의 기생들이다.그렇다면 기부가 나오지 않고 노구할미가 난데없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인 것이다. 물론 젊은 여성이 기생이 아닐 수도 있다.여염집의 가난한 젊은 처녀 혹은 어떤 사정이 있어서 돈이 필요한 여성일 수도 있다.이럴 경우 그림(2)의 할미는 돈 많은 남자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는 역할을 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추측은 가능하지만 어떤 쪽도 확언할 수는 없다.그렇다면 우선 덮어둘 수밖에.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옛 그림, 춤바람나다

    옛 그림, 춤바람나다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궁중기록화와 풍속화를 비롯한 조선시대 그림이 춤으로 재현된다.국립국악원은 새달 5일 예악당에서 ‘옛 그림 속 춤과 음악’을 공연한다.정악단,무용단,화동정재예술단,남사당놀이보존회 등 150명이 대거 출동해 처용무,동기포구악,취타 등을 선사한다.교과서나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림에 숨겨진 다양한 춤과 음악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 ‘옛 그림 속 춤´ 새달 5일 공연  공연은 2부로 나누어 펼쳐진다.궁중기록화를 바탕으로 한 1부에서는 나라의 잔치나 귀빈을 맞이할 때 추었던 처용무,뱃놀이가 바탕이 된 선유락,공 넘기기를 하며 추는 포구락 등 화려한 춤과 음악을 선보인다.특히 포구락에선 화동정재예술단 어린이 단원 10명이 출연해 궁중 연희 중 어린이공연인 동기정재무를 보여준다.  2부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이 배경이다.서당에서 책 한 권을 떼면 훈장에게 감사하고 친구들과 자축하며 음식을 나눠먹던 ‘책거리’를 창작 무용극으로 그려냈다.서당에서 교재로 쓰던 ‘동몽선습’을 읽는 모습을 재현하며 조선시대의 소박하지만 정감 있는 서당 풍경을 연출한다.  남사당 놀이패가 펼치는 우리나라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이,무동놀이,살판(남사당놀이),판굿 등도 펼쳐진다.  ‘광화문 아트 쇼’,‘백남준 특별전’ 등 미디어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김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전통과 현대,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접목한 독특한 무대를 꾸민다. ●다채로운 행사로 관객참여 유도  공연은 물론 책거리 떡 맛보기,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은 그림엽서 보내기 등 관객 참여 행사도 다양하게 마련해 오감(五感)을 만족시키는 시간으로 구성했다.  국립국악원 관계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옛 그림이 담고 있는 미학과 선조들의 풍습을 좀 더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오후 7시30분 예악당.1만~2만원.(02)580-3300.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줌] 경북 청송 전통 메주쑤기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줌] 경북 청송 전통 메주쑤기

    가을걷이가 끝나고,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지난 지도 어느덧 나흘이 됐다.  과거 농경사회 시절 24절기는 따로 헤아려볼 필요가 없는 우리네 ‘삶’ 자체였다. 요즘 사람들은 캘린더의 ‘공휴일’은 열심히 챙겨도 절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부네야 네 할 일 메주 쑬 일 남았도다.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 권농(勸農)을 주제로 매달 할 일을 노래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11월(양력12월)령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첫얼음이 얼며,첫눈이 내리는 소설 즈음에 옛 여인네들은 너나없이 메주를 쒔다.특히 메주 맛에 따라 그 해 반찬의 밑천인 장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길일을 택하고,금기사항을 엄격히 지키는 등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메주맛을 좌우 하는건 콩보다 물  “죽처럼 쑤는 것도 아닌데 왜 ‘메주쑤기’라고 할까?”하고 의아해 했던 어린 시절.이맘때면 온 식구가 들러붙어 메주 만드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콩을 삶으면 아이들은 발로 밟고,아버지는 볏짚으로 묶어 매달았다.“메주가 단단해지게 구석구석 잘 밟으라.”는 어머니의 성화. 지금은 일반 가정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한 해 동안 쓸 메주를 쑤는 일은 김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월동준비였다.지난주 말 도시보다 일찍 겨울맞이를 하는 산골마을을 찾았다.  지명에서부터 맑은 기운이 뚝뚝 묻어날 것만 같은 경북 청송(靑松). 당나라에 반기를 든 주왕이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주왕산. 그리 높지는 않지만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로 유명하다.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산기슭엔 어느 새 서리가 하얗게 내려 앉았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30여분쯤 산길을 들어가니 ‘하늘아래 첫 동네’ 간판이 나온다. 부동면 항리의 속칭 ‘얼음골’이다.이원식(65)씨는 1999년 암투병차 도시를 떠나 부인과 함께 이곳에 정착한 귀농인이다. “제대로 된 된장을 만들어 먹을 요량으로 콩농사를 시작했지요.” 그의 장 담그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아예 본격적인 ‘메주인생’을 살게 되었다.  해마다 11월 중순이면 햇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이듬해 정월에는 된장을 담근다.이씨는 “장은 어머니의 손맛과 사람냄새가 배어 있어야 한다.” 면서 전래의 메주 쑤는 방식을 고집한다.  이씨는 특히 메주 맛을 좌우하는 주 재료로 콩보다 물을 더 중시한다.한여름 물을 받으러 오는 이들이 줄을 선다는 청송 얼음골 생수가 그의 비기다.다음으로 깨끗이 씻은 국산 콩을 가마솥에 넣고 고온의 장작불로 짧은 시간에 익히는 게 중요하다. “손으로 비벼서 뭉그러질 때까지 충분히 익어야 진이 많이 뜹니다.” 삶은 콩은 물을 뺀 후 네모 모양으로 만든다.손으로 대충 만들면 ‘메주처럼 정말 못생긴 놈’이 나올까봐 나무로 만든 사각 틀에 넣고 모양을 낸다.  메주를 말릴 때는 짚을 깔아 서로 붙지 않게 한 뒤,곰팡이가 날 때까지 띄운다. 알맞게 뜨면 지붕이 있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짚으로 묶어서 매단다.여기까지 해야 메주쑤기가 비로소 끝이 난다.나일론 끈은 사절이다.구하기 어려워도 반드시 짚으로 묶어서 매단다.푸른곰팡이가 잘 퍼지게 하기 위해서다. ●전통방식 고집… ‘한결같은 맛´  옛날 조상들은 식약동원(食藥同原),즉 음식과 약의 뿌리가 같다고 여겨 밥상 위에 오르는 음식으로 건강을 챙겼다.메주는 인공첨가물이 없고 원료 그대로의 맛을 살린 전통의 웰빙식품이다.  이씨는 집 앞마당에 빽빽이 들어선 항아리 속의 된장이 모두 ‘한결같은 맛´이라고 자랑한다.콩을 비롯한 재료가 예나 지금이나 같고, 전통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팥으로 메주를 쑤는 법’이 없듯이 한결같은 ‘우리의 맛’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청송은 ‘별들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밤하늘이 온통 ‘별천지(星天地)’다.별무더기를 손으로 꼽다보니 자연 달력에 맞춰 농사짓고 하늘의 뜻을 살필 줄 알던 옛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jongwon@seoul.co.kr      
  • [사설] 대북정책 남남갈등 우려한다

     북한이 다음달 1일부터 개성공단의 기업 활동 말고는 육로를 통한 남북 교류를 사실상 중단시킴에 따라 정부의 대북 조치에 국민은 물론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북한은 이같은 조치가 ‘1차적인 조치’라고 발표했다.당분간 한반도 정세는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을 보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오히려 남남갈등만 격화시키지 않을지 우려된다.  북한의 발표 후 정부는 유감 표명과 철회 촉구에 이어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고려해 후속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내놓지 못했다.청와대로부터도 “북한의 행동에 놀라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꿀 이유는 없다.”는 원칙론이 되풀이 제시됐을 뿐이다.구체적 조치를 결여한 채 원칙론만 되풀이한 것은 지난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관계장관회의 때도 마찬가지였고,그에 앞서 대북 전단 대책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당인 한나라당도 대표는 원칙론,원내대표는 실용적 접근론을 내놓는 등 중구난방으로 각자의 의견만 제시하고 있다.예견된 사태를 놓고도 당 내부에서조차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하물며 국민과 야당의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해 북한에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도통 신뢰하기 어렵다.민주당과 민노당 등 야권은 25일 대표 회담을 갖고 정부의 비핵개방 3000 정책의 폐기,6·15,10·4 선언의 실질적 이행 선언 등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며 여권을 압박했다.  남북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 정부는 상황악화를 방치하고,정치권은 설전만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이래서야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고 남남갈등이 심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당리당략을 넘어 구체적이고 분명한 남북관계 개선조치를 마련,국민에게 제시하고 북한 설득에 나서야 하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공통된 의무다.
  • 인생의 긴 항로에 ‘명리학’이 숨어있다

    인생의 긴 항로에 ‘명리학’이 숨어있다

     ■ 오늘 이 시간에는 ‘명리학문’이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고통스러울 때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이처럼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운(運)이 좋은지,나쁜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이에 따라 명리학(命理學)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유익한 학문의 하나로,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무대 뒤의 학문(學文)이라 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식층으로부터 외면되어 왔었다.하지만 최근 들어 명리학(命理學)이 현대인에게 새롭게 그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학문(學文)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이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 그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에 따라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구청,문화센터,언론사,대학 사회교육원 등 공공기관의 교양강좌를 주도할 수 있는 명리학 엘리트 지도자 양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이는 분명 이론적(理論的)·논리적(論理的) 지식체계와 함께 학문적 원칙을 확립하는 작업인 동시에 제도권안에서도 명리학(命理學) 중심의 세대교체(世代交替)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과학이나 다른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그런 관점에서 명리학(命理學)을 가르치는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 인간이란,소우주(小宇宙)이기에 무한무교(無限無敎)의 영역을 보유하고 있다.이와 같이 우주의 공간속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의 세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과학이 극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 학문만 유독 소멸(消滅)되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존재하는 이유는 암흑 속에 쌓인 본지로부터 자기의 운명을 밝혀 주는 등불인 명리학(命理學)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예부터 명리학(命理學)을 만학(萬壑)의 제왕이라고 칭하여 왔다.그 이유는 본 학문자체가 그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뜻한다.또한 어떠한 학문과도 연결되는 명리학(命理學)을 연구함으로써 그만큼 박학다식(博學多識)해 진다는데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명리학(命理學)의 본질이 무분별한 난립으로 그 이치가 퇴색되고 있는 현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오해와 편견으로 정립된 명리학(命理學)을 통해 재조명하기 위해 옛 문헌을 정리는 물론 끊임없는 학습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그 깊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학문이다 보니 연일 공부를 거듭해야 함에 있어 어렵겠지만,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책이란 글로 이루어졌고 글이 나오기 전에는 대자연이 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옛 선인들은 대자연을 먼저 이해하고 글을 표현했으나 후학들은 대자연을 파악하지 못한 채 글을 쓰고 있다. 대자연을 표현하지 못한 글은 가치가 없다는 얘기다.그렇다고 해서 고전적 이론에만 치우친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적용해서는 맞지 않는다.    고전이론을 타파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고전적 이론을 10년 이상 공부하고도 자신의 사주팔자(四柱八字)조차도 분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이제 명리학(命理學)이 미신이라는 불신과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고전이론을 토대로 보다 과학적인 학문으로서 명리학(命理學)을 더욱 연구·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명심하자.    명리학(命理學)의 기원은 출생이 일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신비로운 진리를 밝힌다는 데서 시작되며,이미 3천년 전부터 행하여져 왔음이 문헌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이를 통해 고대 중국인들은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출생이라는 것이 가장 우연적인 사실이며,이 우연에 의해 어떻게 필연적인 인생행로가 전개되어 나가는가에 대한 규명을 위해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치를 원용하며 학문적인 체계를 이룩해 왔다.    우리나라의 사주명리(四柱命理)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후인 조선조에 들어와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제도상으로는 태조 원년인 1392년부터이지만 과거제도의 잡과(雜科)에 음양과(陰陽科)가 편성되면서부터이다.초기에는 문신,후기에는 기술관이 훈도(訓導)에 임명되었으며 과거제도의 음양과는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과 함께 명과학(命課學)을 두어 각 분야별 인재를 등용하는 관문으로 기능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문신,후기에는 기술관이 훈도에 임명되었으며 시험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주관하여 별도로 훈도(訓導)를 두고 생도를 모집하고 명과학(命課學)의 인재를 양성하였다.이들이 시험을 치르거나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는 원천강(袁天綱) · 서자평(徐子平) · 응천가(應天歌) · 범위수(範圍數) · 극택통서(剋擇通書) · 삼진통재(三辰通載) · 대정수(大定數) · 육임(六任) · 오행정기(五行精記) · 자미수(紫微數) · 현여자평(玄輿子平) · 난대묘선(蘭臺妙選) · 성명총화(星命摠話) ·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으로 1차 시험인 초시(初試)와 2차 시험인 복시(覆試)로 나뉘어 3년마다 시행되었으며,복시는 예조(禮曹)에서도 함께 주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리학(命理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누구든 큰 틀의 운명(運命)을 갖고 태어난다.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때문에 운명을 결정지을 경우의 수는 무한한 셈이다.이런 점에서 보면 명리학(命理學)의 운명론(運命論)적 사고는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지만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즉,사람의 운은 90% 이상 정해져 있고,이에 따라 근본적인 운(運)은 변하지 않지만 주어진 운명(運命)에 대해 어떻게 순응하고 개척하느냐,얼마나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느냐가 일생(一生)의 성패(成敗)를 가름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리학(命理學)의 본질은 개인의 그릇(命)과 운(運)을 보고 ‘때’를 알아 진퇴(進退)시기를 분별하는 데 있다.명(命)과 운(運)은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뜻하며,운(運)이란 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실상은 변하는 이치도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필연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얘기다.    명리학(命理學)은 그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듯,그에 따른 의미처럼 죽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오직 살아 숨쉬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그래서 명리의 명(命)은 목숨 ‘명’자를 쓰는 이유이다.우리 인간은 실존 즉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목적인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게 되어 있다.그것이 끝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우리는 현재의 육신(肉身)으로 그것을 인식 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또한 명리학(命理學)은 사주(四柱)의 여덟 글자를 통해 인간의 명(命)을 나타내는데 사주(四柱)는 그 사람의 초년(初年),중년(中年),말년(末年)의 운(運)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해 표시하고,10년을 단위로 변하는 대운(大運)과 해마다 바뀌는 세운(歲運),그리고 월(月)·일(日)·시(時)의 운(運)을 표시한다.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재를 편히 살 수 있는 것이기에 사주(四柱)에 의거하여 일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는 학문이 명리학인 것이다.이에 따라 명리학(命理學)은 사주학(四柱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사주(四柱)의 기원은 출생을 가장 중요시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주(四柱)는 그 사람의 조상,부모,형제,배우자,자식의 운(運) 그리고 학문,직업운을 말해 주며 신체의 질병과 요수(夭壽)를 말해 준다.뿐만 아니라 성격과 이성관계,궁합과 택일 등 인생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표시해 준다.개인의 사주,즉 생(生)·연(年)·월(月)·일(日)·시(時)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운명을 예지하고 대비하려 한 것은 사주(四柱)가 가장 우연한 결과로 인간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또한 연(年)·월(月)·일(日)·시( 時)가 각각 독특한 기(氣)를 띠고 있을뿐만 아니라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    인간의 운명을 사주(四柱)를 통해 관찰이 시작됐고,그것이 점차 학문적 체계를 갖춤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명리학(命理學)을 성립하게된 것이다.이처럼 자연의 이치,우주의 원리,나의 근원으로부터 시작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생극제화로 이루어진 학문(學文)인 명리학(命理學).특히 생명의 태어남과 함께 부모가 주는 가장 큰 선물로,운세에도 좋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없을 것이다.하늘의 변화와 땅의 신비를 가진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인식하고 음양오행(陰陽五行)에 기초를 둔 학문(學文)으로써 말이다.    명리학(命理學)에 의해 매일 일운(日運)을 보지 않더라도 예감이나 꿈을 통해서도 사고를 예견할 수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고 사고를 당한 후에야 비로소 인정하는 것이 바로 명리학(命理學)인 것이다.이는 사건을 예지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긴 항로를 갖가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전자를 근거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이를 미리 알고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는 사람이다.악재가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미리 알고 대처하면 대길(大吉)한 사주(四柱)를 가지고도 이를 알지 못하여 기회를 놓치고 운(運)을 잡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윤택하고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명리학(命理學)이 인생의 운(運)과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알아 그것에 잘 대처하여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지,결코 정해진 운명(運命)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비관적 운명론(運命論)을 주지시키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누구를 막론하고 명리학문(命理學文)을 배움으로써 자아발전(自我發展)은 물론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명리학(命理學)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 도움말-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명리학과 노재환 교수  
  • ‘우호학술상’ 이혜순·오생근·정재서씨

    ‘우호학술상’ 이혜순·오생근·정재서씨

    우호문화재단(이사장 장영철)은 24일 ‘제1회 우호학술상’ 수상자로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 등을 선정했다고 밝혔다.우호학술상은 인문과학분야의 학술연구를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2년 이내 국내에서 발행된 한국문학,외국문학,비교문(화)학 분야의 우수 학술 저서를 선정해 시상한다.시상식은 28일 오후 6시30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열린다.수상자는 다음과 같다.▲한국문학=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조선조 후기 여성 지성사’) ▲외국문학=오생근 서울대 교수(‘프랑스어 문학과 현대성의 인식’) ▲비교문(화)학=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 [열린세상] 다음 세대를 생각하라!/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

    [열린세상] 다음 세대를 생각하라!/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

    ‘영국은 길을 잃었습니다.’.훗날 철의 여인으로 불리게 되는 마거릿 대처의 위대한 여정은 이 말로 시작됐다.1979년 그는 이 단순하고 강렬한 슬로건으로 야당이던 보수당을 승리로 인도했고 18년 장기집권의 시대를 열었다.그는 위기에 빠진 영국을 구할 책임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실제로 만성적 재정적자와 노사분규로 상징되는 ‘영국병’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치유했다.  지금 대한민국도 길을 잃었다.인류의 생태 위기,세계의 경제 위기,한반도의 불확실성 증대,거기다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국내의 여러 가지 위기의 징후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큰 위기가 오고 있다고 하며,어떤 이들은 위기이지만 감당할 정도라 하며,또 어떤 이들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 한다.위기인지 아닌지를 갖고 싸우는 판에 이 위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논할 리 만무하다. 우리가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 때문인지는 안다.걱정 말고 따라오라며 맨 앞에 서서 지도자인 체하는 정치인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오른쪽으로 가야 하네,왼쪽으로 가야 하네, 곧장 가야 하네 사사건건 싸움질이다.아무리 뛰어난 홈런 타자도 감을 잃으면 바운드 볼에도 방망이가 나간다.한국 정치가 꼭 그 꼴이다.인정하고,대화하고,타협하고,통합하는 방법을 잊었다.불신과 분열,분노와 증오만 남았다.  그러나 정말로 가슴 아프고 슬픈 것은 한국 정치가 ‘꿈’을 잃은 것이다.최고의 정치가는 국민들에게 꿈을 준다.케네디,클린턴,오바마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공화당으로부터 정권을 뺏어 온 40대의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것과,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감동적으로 전달한 지도자라는 것이다.그들의 연설은 언제나 꿈으로 가득차 있다.미국의 꿈,선조의 꿈,서민의 꿈,이민자의 꿈,유색인종의 꿈,한마디로 말하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한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학자인 제임스 클라크는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한국 정치인들은 어떤가? 자기들끼리 모인 데서도 “정치인들의 꿈이야 다시 한 번 더 하는 거지.”라고 하는 판에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정치가가 몇이나 될까? 원래 꿈은 비주류의 것이지 기득권의 것이 아니다.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어찌 다음 세대에게 꿈을 주는 위대한 정치가가 될 수 있겠는가? 꿈을 말하지 않는 정치에 위대함이 어찌 깃들까?  위대한 지도자들의 연설에는 ‘우리 아이들에게는’,‘다음 세대에는’,‘오늘 태어난 아이들은’,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라는 표현이 넘쳐 난다.그런 면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은 위대한 연설의 모범이다.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가 쓴 책의 제목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담대한 희망’인 것은 그가 어떤 정치를 꿈꾸는지 잘 보여 준다.그를 일거에 스타로 만든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연설 주제는 ‘미국은 하나’지만 그 날도 그는 ‘내 할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담대한 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교서에는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갖고 일하고 또 일하고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그리하여 먼 훗날 소가 밭을 가는 오늘의 이 현실을 아득한 옛날의 전설이 되게 합시다.’라는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꿈’의 메시지보다 더 나은 선거 전략은 없다.우리도 위대한 정치가의 위대한 연설을 듣고 싶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
  • 英 경찰 헬리콥터, 한밤중 UFO와 마주쳐

    영국에서 경찰 헬리콥터 한 대가 미확인 비행물체(UFO)로 의심되는 물체와 마주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다. UPI통신사 및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5월 웨스트미들랜즈주 버밍엄에서 경찰 헬리콥터가 임무 중에 미확인 비행물체와 마주쳤다.”고 21일 보도했다. 문제의 헬리콥터는 조종사와 경찰 두 명을 태우고 수색작업을 하던 중 고도 457m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와 충돌할 뻔 했다. 항공교통사고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헬리콥터에 타고 있던 세 명은 이 비행물체에 대해 “크기가 작고 계속해서 파란색과 초록색 불빛이 났다.” 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 전까지 100m 밖에서 헬리콥터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고 전했다. 조종사는 처음 이 물체를 무선으로 조종되는 모형 비행기로 여기고 열카메라로 주변을 조사했지만 어떠한 움직임도 포착하지 못했다. 영국 모형비행기 협회는 “이 비행물체는 무선조종 비행기가 날기에 너무 높은 고도에서 날고 있었다.”며 이같은 추측을 부인했다. 영국 국방성의 UFO 조사데스크를 책임졌던 닉 포프(전 UFO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이 사건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목격자들이 야간 비행에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믿을 수 있는 정보”라며 관심을 표명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문설주 기자 spirit0104@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이황·정철도 보통 사람이었다

    이황·정철도 보통 사람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을 향해 간단없이 시선이 쏠려온 배경은 따로 있었다. 후세 사가들에게 그들은 십중팔구 학문적 성과나 정치적 업적을 고려할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 뿐, 그들도 엄연한 ‘생활인’이었다. 그들의 삶을 추동한 힘 역시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학문적·정치적 업적 뒤에 가려진 희로애락 ‘선비의 탄생’(김권섭 지음, 다산초당 펴냄)은 그래서 탄생한 책이다.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지은이는 조선의 선비들을 둘러친 가림막을 벗겨냈다. 그들의 선비정신을 빛내준 진정한 힘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인간관계를 속속들이 들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 책에 등장하는 조선의 대표 선비는 모두 9명.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다. 경북 안동의 진성 이씨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 퇴계 이황(1501~1570).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글을 읽었다.”는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지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퇴계에게 세상의 가장 큰 울타리는 어머니였다. 20대에 죽은 전처의 소생 2남1녀까지 합해 모두 6남1녀를 혼자 떠맡아야 했던 어머니의 삶은 억척스럽기 그지없었다. 끼니를 마련하느라 길쌈을 하며 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엄격하면서도 또 말할 수 없이 자혜로웠던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퇴계는 무너지는 억장으로 회고글을 썼다. “여러 아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스승을 좇아 공부하도록 학비를 마련하였다. 언제나 훈계하시기를, 다만 학문과 예술만 할 것이 아니라 몸가짐을 삼가는 것이 귀하다고 하였고, 사물에 알맞은 비유로 가르침을 전하였다. 언제나 간절히 경계하시기를,‘세상에서는 과부의 아들이 배움이 없다고 말하니 너희들이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선 대표 선비들 인간적인 삶 파헤쳐 퇴계는 삶의 말없는 나침반이 돼준 어머니를 “스스로 깨우쳐 이해하는 바가 있는 사군자(士君子)와 다를 바 없었다.”고 회억했다. 우리 문학사에서 애주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선비가 송강 정철(1536~1593)이다. 자신을 꼭 닮아 술을 심하게 밝힌 셋째 아들 때문에 속앓이한 사연이 새삼스럽다. 아들에게 편지를 써 술과 여자를 경계하라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세상 여느 아버지의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너는 대체 날로 고달프다 하면서도 아직도 양부(兩斧)를 경계할 뜻을 모르니 이로 나는 항상 마음이 초조할 뿐이다. 천만 조심하라.”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사 유배를 떠나는 날 아침, 송강은 일찍 청상과부가 된 딸이 그만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딸의 빈소에도 가볼 수 없이 귀양길에 올라야 했던 그는 몇자 제문으로 딸과 영결해야만 했다. “이렇게 요절하는 것이야말로 아비의 잘못이니 백 년 동안 뼈아프게 뉘우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구나. 살아서 겪은 슬픔은 비록 괴로웠지만, 죽어서 즐거웠을 것은 틀림없다.(네 무덤이) 우리 선산과 서로 마주 보게 되었으니, 훗날 우리 혼백이 함께 날아오를 것이다. 너도 괴로운 생각 잠시 덜어놓고 와서 이 아비의 술잔을 들거라.” 뚝뚝, 눈물로 떨어져 내리는 붉은 회한이 편지글 행간에서 스며나온다.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시조 한 편이 새삼 마음자락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길 위의 두 돌부처 벗고 굶고 마주 서서 / 바람 비 눈서리를 싫도록 맞을망정 /인간의 이별을 모르니 그를 부러워하노라” 조선의 사유를 대변하는 큰 선비들이 작정하고 덧칠되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보여준다. 그들의 내면을 숙성시키고 정련시킨 일상을 더듬는 작업에는 메시지가 분명하다.‘지금, 여기’ 현재를 채우는 인간관계 속으로 문득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다독이는, 후덕한 책이다.1만 8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인종 벽을 넘다-美 오바마 시대] 오바마 “변화는 이제 시작”

    미국이 모든 게 가능한 나라라는 걸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밤 그 대답을 얻었을 겁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여러 시간 투표소에서 기다리며 귀중한 한 표를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바로 변화입니다. 선거에 참여한 공화당원, 민주당원, 남녀 노소 등 미국민들이 바로 미국의 힘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희망의 날이고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하는 날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이뤄낸 일들이 바로 미국의 변화입니다. 방금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기심을 없애고 그와 함께 나가겠습니다. 매케인과 페일린, 그들과 함께 우리가 약속한 것을 이뤄나가겠습니다. 이번 선거에 함께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와 함께 고생한 조 바이든 부통령 후보에게 감사합니다. 지난 16년 동안 변함 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여준 미셸 오바마가 없었으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 저의 외할머니는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합니다.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그분께 진 빚과 입은 은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국민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거자금도 부족했고 선거유세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찰스턴에서 저는 5달러,10달러,20달러씩 푼돈을 모아 작은 유세를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건국 후 두 세기가 지나서 드디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우리 앞에 많은 현안이 쌓여 있습니다. 금융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택 대출금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하며 잠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학교와 교육시설도 지어야 합니다. 과제가 많습니다.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결할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물론 어려울 겁니다. 실수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 여러 정책에 대해 여러분이 반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겁니다. 이 나라를 재탄생시키는 데 여러분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굳은살 박인 손으로 이 나라를 재건할 것입니다. 오늘의 승리가 변화를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정신이 필요합니다. 바로 애국심과 책임감, 여러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당파적인 싸움과 정치싸움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국가의 단합을 믿습니다. 이런 신념 아래 우리는 한 데 모였습니다. 링컨 대통령 시절에는 미국이 더 분열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단결과 애정을 깰 수 없습니다. 오늘 애틀랜타에서 표를 던져준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오랫동안 미국에서 노예생활을 한 선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동안 흑인이라는 이유로 투표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투표를 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노력이 바로 이 자리에서 보상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한 표, 한 표가 이번 대선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해냈습니다. 몽고메리와 버몬트 등 모든 곳에 있는 지지자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우리는 해낼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듯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일들이 한 표를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묻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음 세기에 어떤 변화를 보게 될까요. 바로 이 자리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일자리를 만들고 아이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겠습니다. 번영과 자유 그리고 진실을 이뤄내겠습니다. 냉소주의와 많은 의혹이 있었지만 우리는 극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의 은총이 미국에 있기를... . 정리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2) 조선의 대표술집, 선술집과 색주가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2) 조선의 대표술집, 선술집과 색주가

    술은 유쾌한 것이다. 아마 인류의 발명품 중 최대의 발명품을 꼽으라면, 술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이런 술이니만큼 술에 대한 문헌은 적지 않다. 한데 여기에도 구멍은 있다. 술은 집에서도 마시지만, 대개는 술집에서 마신다. 술집은 오로지 술 마시는 데 집중하기 위한 음주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술집에 대한 문헌은 참으로 드물다. 우리가 만약 고려시대의 술집이나 조선시대의 술집에 대해 무언가 알고자 한다면, 막막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신윤복의 ‘선술집’(그림1)과 같은 눈으로 술집을 보여주는 그림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조선시대 술집 그림으로 단 하나 남은 것이니,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어디 그림을 감상해 보자. 그림의 정중앙의 붉은 옷에다 노란 초립을 쓴 사내는 젓가락을 들고 무언가를 집으려 하고 있다. 이 사람은 별감이다. 별감은 전에 설명한 바 있는데, 액정서란 관청에 소속되어 궁중의 열쇠, 임금의 심부름 따위를 맡는 사람이다. 이들이 조선후기 기방의 운영자인 기부(妓夫)가 되고, 또 서울의 연예인과 유흥계를 장악한 사람이라는 것도 말한 바 있다. 별감이 술집에 나타난 것도 그들이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계통을 장악한 축이기 때문이다. 별감 옆에 사내 둘이 있는데, 이들의 복색만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림 맨 오른쪽의 사내는 약간 별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사람은 의금부 나장이다. 이 사내가 걸치고 있는 검은 색 옷은 까치등거리 또는 더그레라고 하고, 쓰고 있는 뾰족한 모자는 깔때기라고 한다. 더그레와 깔때기는 오직 의금부 나장만이 입는 옷이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형장(刑杖)을 써서 국사범을 문초하는 권력기관이었다. 나장은 다른 관청에도 물론 있지만, 의금부가 원래 권세 있는 곳이라, 의금부 나장만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별감을 위시한 다섯 사내는 모두 술을 마시러 온 술꾼들이다. 그런데 그림 맨 왼쪽의 맨상투 차림의 총각은 술꾼이 아니다. ‘중노미’라 부르는 술집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다. 술잔을 나르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하는 허드렛일을 한다. ●조선 정조시대 금주령 풀리자 술집 번창 이 술집 그림에서 희한한 것은 술을 따르는 주모만 앉아 있을 뿐, 아무도 앉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서 마시는 집을 선술집이라고 한다. 요즘 선술집이라면, 대개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싼 술집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선술집에서는 모두 서서 마시기에 선술집인 것이다. 조선시대 문화에 대해 해박했던 김화진 선생은 ‘한국의 풍토와 인물’이란 책에서 선술집에 대해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선술집에서는 백 잔을 마셔도 꼭 서서 마시고 앉지 못하였다고 한다. 만약 앉아서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술꾼들이 “점잖은 여러 손님이 서서 마시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주저앉았담. 그 발칙한 놈을 집어내라.”고 시비를 걸었고,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위 그림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선술집에서는 술 한 잔을 사면 안주 하나를 끼워준다. 요사이 술집은 술과 안주를 각각 셈하지만 조선시대 선술집은 술값에 안주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면 술꾼들은 목이 마르다. 선술집을 찾아 들면서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집어 들고 너비아니·날돼지고기·삶은 돼지고기·편육 따위의 진안주를 집어 석쇠 위에 놓고 주모가 앉아 있는 목로 앞으로 와서 ‘두 잔 주어’ 하면, 주모는 술단지에서 국이(국자 비슷하게 생긴 것)로 잔수대로 떠서 양푼에 붓는다. 그리고 그 양푼을 물이 끓고 있는 솥에 넣어 찬기운을 없앤다. 냉기를 사라지게 한다고 하여 이것을 ‘거냉(去冷)’이라고 한다. 술값 계산은 술꾼이 잔을 입에서 뗄 때에 중노미가 안주접시를 목로에 놓으면서, “몇 잔 안주요.” 하고 잔 수를 계산해 준다. 이런 술집이 생긴 것은 조선조 정조 때부터다. 그 이전에도 술집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정조 때부터 생겼다고 하는 것은 왜인가. 정조 바로 앞의 임금인 영조는 1724년에 즉위하여 1776년까지 무려 5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올해가 2008년이니까 1956년부터 왕위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라. 장구한 세월이 아닌가. 한데 반세기를 넘도록 영조가 양보 없이 지켜온 정책이 금주정책이었다. 아무도 반세기 동안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술집은 모두 문을 닫아야했다. 이 혹독한 금주령은 정조가 왕이 되면서 비로소 풀렸고, 서울 시내에 술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이니, 선술집 역시 정조 시대 이후 번창하게 된 것이다. 정조가 믿고 의지했던 좌의정 채제공은 이 술집의 번창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술집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점차 교묘해지면서, 현방(懸房)의 쇠고기나 시전(市廛)의 생선은 태반이 술안주로 소비됩니다. 맛난 안주와 국이 술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젊은 사람도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어울려 술을 사서 마시니,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자신을 망치는 자가 부지기수입니다. 시전의 반찬거리의 값이 날이 갈수록 뛰어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술집에서 안주를 경쟁하듯 개발하여 내 놓는 바람에 시전에서 파는 쇠고기와 생선의 태반이 술안주가 되고, 술안주를 탐하느라 젊은이들이 빚을 지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정조 시대 술집의 성황을 알 만하다. 술집은 선술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외주점이란 것도 있었다. 이 술집은 술손님이 찾아가면 주인 여자는 손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말로 주문을 하고 술상을 내보내고 하여 주인과 손님이 내외를 하기에 ‘내외주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선술집보다는 조금 고급한 집이다. ●색주가는 손님들에게 바가지 씌우기 일쑤 이보다 낮은 수준의 술집이 있는데, 색주가(色酒家)가 그것이다. 색주가는 여자가 나와서 노래를 하고 아양을 떨고 술을 파는 곳이다. 그림(2)는 김준근의 ‘색주가 모양’이다. 술상 앞에 짧은 갓을 쓴 남자 셋이 앉아 있고, 젊은 여자가 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만으로는 색주가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그림에 ‘색주가 모양’이라는 제목이 없다면 색주가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다. 색주가의 여자는 기생이 아니다. 기생은 기방에 있는 법이고, 기방은 제일 고급 술집이었다. 기생은 가곡이나 시조를 부르지만, 색주가의 여자는 오직 잡가만 부른다. 색주가는 여자가 있다 뿐이지 안주도 술도 맛없는 곳으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색주가는 홍제원에 집단적으로 있었고, 뒤에 이것을 본떠 남대문 밖 잰배(紫巖)와 서울 파고다 공원 뒤와 동구안(授恩洞) 서편 뒷골목에 집단으로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잰배 등의 곳은 언제 생겼는지는 미상이다. 김화진에 의하면, 색주가는 밖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색주가의 문 앞에는 술을 거르는 도구인 용수에 갓모(비가 올 때 갓 위에 걸어 쓰는 모자)를 씌워 긴 나무에 꽂아 세우고, 그 옆에 자그마한 등을 달아놓는다. 낮에는 나무에 용수 씌운 것으로 표시를 한다. 집집이 긴 나무를 세운 것과 등불을 꽂아두었으니, 색주가가 있는 동네는 밤이 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독특한 분위기의 동네가 되었던 것이다. 해가 지고 거리에 등불이 하나 둘 켜지면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이 나와서 잡가를 부르면서 지나는 행인을 붙잡는다. “이 집은 술맛도 좋고 색시도 예쁘니 한 잔 잡숫고 가시지요.” 하기도 하고, 혹 손을 끌어 잡기도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알리라. 이 풍경은 불과 십 수 년 전까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의 밤에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없어져서 아쉽냐고? 아니, 그 여성들의 신산(辛酸)했을 삶을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Local] 경산시립박물관서 민화 특별전

    경북 경산시립박물관은 23일부터 내년 2월1일까지 박물관 영상기획실과 특별전시실에서 ‘우리 문화의 멋스러움, 목가구와 민화’ 특별 전시회를 갖는다. 전시회에서는 최근 4년여간 관련 전문가들의 세심한 평가를 통해 구입한 유물 70여점이 선보인다. 목가구 전시 코너에서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던 농, 버선장, 머릿장, 빗접, 경대 등의 안방가구와 남성 가구인 사방탁자, 경상, 고비, 책장, 벼루함, 의걸이장 등을 만날 수 있다. 민화 코너에는 산수도, 문자도, 고사도, 화조도, 모란도, 영모도 등 다양한 작품이 종류별로 전시된다. 경산시립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는 우리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세련된 예술성, 그리고 멋과 지혜를 감상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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