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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감 하이라이트] 새마을금고도 한때 집단인출… 40일간 1兆 빠져나가

    [국감 하이라이트] 새마을금고도 한때 집단인출… 40일간 1兆 빠져나가

    지난 2월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무더기로 영업 정지됐다. 같은 제2금융권이자 1664만명이 이용하는 새마을금고도 집단인출 사태를 겪은 것으로 확인됐다. 40여일 동안 1조원 이상의 예금이 빠져나갔다. 20일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새마을금고의 건전성 강화대책이 이슈였다. 유정복, 서병수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해 윤상일 미래희망연대 의원 등 여러 의원들이 새마을금고의 건전성 강화 대책 마련과 강력한 구조조정 추진 등을 주문했다. 행안부가 보고한 ‘새마을금고의 운영 및 구조조정 현황’을 분석한 결과, 7개 저축은행이 일제히 영업정지를 당한 지난 2월 17일 이후 3월 말까지 전체 1464개 금고에서 1조 150억원이 인출됐다. 영업정지 전날인 2월 16일 80조 2028억원이던 새마을금고의 전체 수신고는 2월 말 79조 4537억원, 3월 말 79조 1878억원까지 떨어졌다. 특히 예금자보호를 받을 수 없는 1인당 5000만원 이상 예금은 9조 6091억원이었다. 예금자 숫자로는 25만 2471명이었다. 새마을금고 수신고는 이후 조금씩 회복돼 지난달 말에야 사태 이전 수준으로 올라왔다. 유 의원은 “이러한 무더기 인출은 제2금융권에 대한 서민들의 불안감을 반영한 것으로서 철저한 관리 감독의 필요성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영세한 자산규모로 구조조정 필요성도 제기됐다. 전체 1464개 금고 가운데 100억원 미만의 자산을 가진 곳이 80개였고 이 중 30억원 미만의 자산 규모를 가진 곳이 5개, 20억원 미만이 6개로 확인됐다. 그럼에도 재정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세운 구조조정 계획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영세한 자산 또는 경영부실로 지난해 구조조정 대상이 됐던 105곳 중 실제로는 53곳에서만 계획을 이행했다. 올해 역시 8월 말까지 53곳을 구조조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24곳에 그쳤다. 경영실태평가 등급별 현황을 봐도 마찬가지다. 전체 새마을금고 중 취약하다고 드러난 곳은 48개, 위험한 곳은 1개였다. 이에 따라 행안부가 경영개선조치를 내린 곳이 올해에만 78곳에 이르렀다. 행안부 측은 “저축은행 사태 직후인 2월 18일 건전성을 확대하고 서민대출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 등을 담은 ‘새마을금고 선진화 10대 계획’을 중앙회 쪽에 통보했고, 지난 19일에도 다시 한번 권역 외 대출을 자제하고 동일인 대출 한도를 준수하도록 하는 등 공문을 보냈다.”면서 “재정건전성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또한 “새마을금고는 신협, 수협 등에 비해 경영지표가 좋은 편”이라면서 “그동안 자율적으로 행해 온 외부회계감사를 올해부터 45개 새마을금고에서 의무적으로 시범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도봉의 얼 기릴 역사 탐방로 만들것”

    “도봉의 얼 기릴 역사 탐방로 만들것”

    “도봉에는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또 1960~80년대 산업화 시기에 민주화를 위해 애쓴 역사적 인물이 많아,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최근 ‘도봉구 근·현대사 인물 탐방로’를 기획하고, 현장을 확인한 소감을 19일 이렇게 밝혔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가인 김병로, 벽초 홍명희,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 등이고, 민주화 운동가로서는 씨알의 소리의 함석헌·계훈제 선생, 노동운동가 전태일, 시인 김수영 등이다. 이 구청장은 “도봉에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각별한 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데, 그 시작은 16세기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도봉서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15일 가을을 시샘하듯 인디언서머가 찾아와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훌쩍 넘긴 가운데 그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2시간 남짓 땡볕을 견디며 걸었다. 가장 먼저 중종 때 개혁적 선비로 이름을 날린 조광조(1482~1519)를 떠올렸다. 사림의 대표로 기존 정치세력과 맞서지만 실패하고 1519년 그의 동료 70명과 함께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개혁에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린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즉위한 1568년 기대승의 청원을 들어 조광조의 신원을 회복시켰고, 5년 뒤 경기도 양주목사는 그를 기리는 ‘도봉서원’을 지을 수 있었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던 도봉은 1963년에 서울시 성북구로 편입됐고, 1973년 다시 도봉구로 갈라져 나왔다. 이 구청장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등 독립운동가들이 도봉에 많이 살았던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탄이 일어나고서 이듬해 10월 15일 창동역을 개통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은 일본 관원의 눈초리를 피하면서 서울과 접근성이 좋고 집값 또한 싼 곳을 찾았을 텐데, 창동역 개통에 때맞춰 이쪽으로 이주하신 거죠. 당시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었습니다. 가인 선생이 맨 먼저, 홍명희·김진우·송진우 선생 등이 들어온 거죠. 도산 안창호 선생도 김병로 선생에게 놀러 왔다가 오고 싶다고 해서 가인 선생이 방학동 쪽에 집 계약을 대신했는데, 검거돼 옥사하시는 바람에 이주를 못하셨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살았던 집으로는 함석헌과 김수영의 본가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고 대부분은 사라졌다. 작은 초가였던 홍명희의 집은 창5동 신도브래뉴아파트 출입구로, 송진우의 집은 한신휴아파트 주차장으로, 김병로의 집은 안경점으로, 정인보의 집은 노래방으로, 계훈제의 집은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전태일이 살던 쌍문동 6평 무허가 집도 삼익세라믹아파트로 바뀌었다. 이 구청장은 “표석을 세운다든지 해서 이분들을 알리고, 특히 1930~40년대 ‘창동의 3사자’로 불렸던 김병로, 김진우, 정인보 선생을 기리는 공원을 조성하고 싶은데, 현재 창5동 공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해남-끄트머리土末에서의 시작 기억이 사는 곳, 해남

    해남-끄트머리土末에서의 시작 기억이 사는 곳, 해남

    1 두륜산 케이블카에서 내려 전망대까지 이르는 산책로는 소사나무 군락지다. 10월에는 그 열매를 볼 수 있다 2 땅끝 전망대를 향하는 길에는 어김없이 연인들의 맹세가 굳게 잠겨 있었다 3 수군들이 성을 세우고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은 이진마을. 지금은 평화롭기만 하다 끄트머리土末에서의 시작 기억이 사는 곳, 해남 해남은 첫사랑 같은 곳이다. 아주 오래전, ‘휴가’라는 것이 처음 생겼을 때, 해남을 선택했었다. 처음 만나는 남도. 그후 해남은 시간과 함께 멀어지기만 했었던 것 같다. 다시 찾은 해남에서 나는 적지 않은 기억을 되찾았고, 또 수정해야 했다. 익룡이 살던 중생대 백악기,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던 조선시대까지 다녀왔고, 시작을 위한 끝이라는 땅끝 전망대에서 ‘유구함’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아득하게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 첫사랑처럼 또렷한 기억의 각인들을, 말이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전남대 생태관광연구센터 www.ecotourlab.org 되찾은 기억은 이런 것이다. 첫 해남 여행은 아주 추운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국토의 끝이라니. 돌아보면 청승 무모한 청춘의 자작극이다. 게다가 보길도에서 돌아 나오는 배가 풍랑으로 뜨질 못해 여행은 하루가 더 길어져 버렸다. ‘섬에 갇히는 로망’은 그때 그렇게 허무하게 이뤄져 버렸다. 아무튼 당시의 내게 해남은 고산 윤선도의 땅,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의 끝이었고, 김지하 선생이 그러했듯(그는 땅끝에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있단다) 청춘의 고뇌를 끝장내 버리고 싶었던 곳이었다. 수정된 기억은 이렇다. 땅끝의 사자봉 위에는 높다란 전망대와 미니레일이 있었고, 두륜산 정상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1박2일>팀이 다녀갔던 여운이 곳곳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불사는 대흥사, 미황사의 모습을 많이 바꾸었고, 그때는 템플스테이라는 것도 없었다. 우항리에 세워진 공룡박물관과 화석지는 ‘메가급’ 변화에 속했다. 10년 세월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내가 고이 품어 온 기억은 따로 있다. 문학과 풍류에 선행하는 생존 자체의 문제, 그래서 목숨을 걸고 이 땅을 지켜냈던 민초들의 어제와 오늘이 보였다. 쉽게 말해 ‘명량대첩’ 같은 전쟁의 기억이다. 주인공은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지만, 승리의 기쁨은 모두를 초대하는 축제가 됐다. ‘강강술래’를 추며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는 축제의 마당에는 나름대로의 ‘격한’ 드라마가 있었다. 또한 달량진성처럼 아직도 ‘역사의 잔해’로만 남아있는 쓸쓸한 풍경들도 껴안았다. 고장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과 동동주 기울이며 그 마음도 전해 받았다. 더 나아갈 길 없는 막다른 곳, 땅끝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땅끝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해남 앞바다.바삐 오가는 노란 모노레일은 바다 속을 드나드는 것만 같다 ‘해남이쿠누스 우항리엔시스’를 만나다 한양에서 1,000리라 했나. 땅끝土末을 품고 있는 해남으로 내려왔으니 가장 먼 과거로, 무려 8,300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가뿐했다. 우항리 공룡박물관이다. 내게 공룡의 기억이 없으니, 공룡을 ‘노래’했던 기억을 좀 빌려 써야겠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그럼 무엇이 생겼었을까. 공룡이 헤엄치고 익룡이 날아다니고 아주 심심한 것 같은데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80년대에 ‘꾸러기들’이라는 팀이 부른 이 엉뚱한 노래를 꽤 좋아하여 즐겨 불렀었다. 그 익룡들을 우항리에서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발자국(35cm)은 이곳의 지명을 따 ‘해남이쿠누스 우항리엔시스’로 명명되었다. 세계에서 7번째, 아시아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공룡 화석의 보고인 우항리의 백악기 퇴적층이 드러난 것은 금호 방조제 공사 이후 이 지역이 담수호를 낀 육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후반에 국내외 과학자들이 조사한 이후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공룡박물관까지 설립할 수 있었다. 우항리 화석지(33만 평방미터)는 이런저런 공룡의 발자국 화석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발자국 크기가 작게는 52cm, 크게는 95cm나 되는 초식공룡의 몸집은 얼마나 컸던 걸까(몸통길이만 7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발자국 105개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보호각(대형 공룡관)이 세워졌다. 익룡 발자국 443점과 물갈퀴새의 발자국(전세계에서 발견된 물갈퀴새 발자국 중 가장 오래됐다) 1,000여 점을 보호한 익룡 조류관, 조각류 공룡관까지, 보호각은 총 3개가 있다. 화석으로만 남아있는 공룡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은 공룡박물관에서 얻을 수 있고 연꽃이 가득한 연못에 공룡 모형을 설치한 야외공원은 기념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다. 우항리 공룡박물관 | 주소 전남 해남군 황산면 공룡박물관길 184 개관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문의 http://uhangridinopia.haenam.go.kr 1, 2 우항리 일대는 공룡 발자국 화석으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하다. 공룡뼈와 화석 모형을 전시하고 있는 공룡박물관의 규모도 공룡사이즈라 꼼꼼히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3 단청을 벗어버린 대흥사 대웅전은 한결 부드러운 인상이다 4 소가 멈춘 자리에 지었다는 미황사는 달마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전설은 알수록 재미있고, 절은 볼수록 아름답다 5 두륜산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고계봉(638m). 맑은날에는 제주도까지 보인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땅끝으로 달려가는 공룡의 등뼈 최고最古의 다음은 최장最長이다. 두륜산에는 국내 최장거리의 케이블카(1.6km, 왕복 성인 8,000원)가 연결됐다. 다행히도 직행으로 고계봉(638m)에 내려주는 것은 아니고 내려서 286개의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뿌연 안개가 사방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전망대 위에 섰을 때에는 한반도 지도 모양의 마을도, 월출산도, 주작산도, 완도, 진도 등의 섬들도 모두 안개에 숨어들었다. 골짜기에 들어앉은 대흥사도 고계봉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힘차게 달려온 소백산맥이 두륜산(703m)을 통과해 남쪽의 달마산(489m)을 지나고 급기야 땅끝의 사자봉(155m)에 이르러서야 수그러드는 모습을 어렴풋이 목격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암봉으로 이어진 능선을 타고 바다까지 흐르고 싶지만 산행은 금지되어 있어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대흥사 입구까지는 차로 이동했다. 구림구곡九林九曲의 10리 숲길을 배신하는 마음이 아팠지만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地處로 불렸던 안전한 절집은 전쟁을 피해 곱게 늙었다. 1,000개의 불상이 모셔진 천불전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정조대왕이 쓴 표충사 현판도 남아 있어 살아있는 ‘서예 박물관’으로 불린다. 도를 닦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과 같다 했는데禪茶一如,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차를 즐겼다는 일지암에 가지 못한 것도, 차 한잔을 마시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차창 밖으로 달마산이 나타날 때마다 내 시선은 고정되었다. 유홍준 교수는 암릉으로 솟아오른 산의 모양새를 ‘공룡의 등뼈’ 같다고 했었다. 그럴싸한 표현이다. 누군가는 달마대사가 살고 있다고도 했다. 달마Dharma·法산, 진리의 산이라니, 과감하고 멋진 이름이다. 설화 속의 어떤 이는 같은 산정을 두고 1만개의 불상을 보기도 했다. 그게 바로 미황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금인金人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우전국(인도)에서 온 금인이 검은 소를 따라가다 주저앉는 자리에 불경을 모시라는 말에 따라 미황사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黃’은 금인의 황금빛을 뜻한다. 1754년 이후 단청을 덧칠하지 않아 색이 바래 버린, 아니 화장을 벗은 대웅보전은 해질 무렵마다 아름다운 황금빛이 된다. 기둥 아래 주춧돌에 게와 거북이가 새겨진 이유는 ‘대웅보전’이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알수록 흥미로운 절이다. 솟아오른 등뼈의 릴레이가 멈추는 곳이 땅끝土末(북위 34도17분21초)이다. 노란 모노레일(395m, 왕복 4,000원)을 타고 사자봉 정상의 전망대(38m)로 올라가는 대신 시비가 도열해 있는 산책로를 선택했다. 연인들의 간절한 마음과 언약은 이곳에서도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앞날을 어찌 알겠나. 꼭 그만큼 불투명한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희미해서 더 아름다운 풍경. 여기가 끝이 아니라 저 너머 무엇이 있으리라는 희망 없이는 사랑도, 여행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다의 눈물이 거둔 승리 해남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억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대패시켰던 명량대첩(1597년 9월16일)에 대한 기억이다.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을 읽어 적벽에서의 승리를 이끌어 냈듯, 울돌목 거센 물살의 방향을 예측하여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거둬낸 명량대첩은 ‘기적의 해전’이라는 수식까지 달고 있다. 고작 13척의 전력으로 133척의 왜군은 대파한 것. 명량대첩은 매년 가을 축제를 통해 다시 재현되는데 올해는 9월30일부터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 보게 될 ‘우수영 국민관광지’에는 충무사, 어록비, 전시관 등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을 기념하는 여러 시설과 조각상,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또 우수영과 진도 사이, 울돌목 물길에는 여름 내내 거북배가 바삐 움직였다. 뱃시간을 놓쳐 버렸지만 울돌목의 물결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치는 소리와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의 아우성. 예부터 바다가 운다鳴梁고 한 이유를 알겠다. 명량해전의 승리는 그 눈물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일 터. 때마침 주말이라 펼쳐진 명량역사체험마당은 흥겨운 시간이었다. 등에 ‘수水’를 새기고 행렬하는 수군들의 교대식은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고 뒤이어 남도 소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판소리 한판과 절제된 듯 화려한 군무, 강강수월래 무대가 이어졌다. 목숨을 바쳐 땅을 수호한 선조들을 기억하는 따스한 몸짓, 갸륵한 아우성이었다. 1 명량해전을 펼쳐졌던 울돌목에는 아직도 ‘긴 칼 옆에 찬’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있으니 듬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큰하다 2, 3 우수영관광지에서는 여름 동안 주말마다 명량역사체험마당을 펼친다. 각각 수문장 교대식과 강강수월래 공연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9월의 해남 여행, ‘초요기를 올려라!’ 알고 보니 9월의 해남은 여러 축제와 행사가 오버랩되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여름 내내 토요일마다 깃발을 나부꼈던 명량역사체험마당이 9월24일까지 개최되고, 곧 이어 명랑대첩축제가 9월30일부터 10월2일까지 개최된다. 땅끝작은음악회도 그 마지막 무대를 9월17일에 대흥사에서 펼쳐 놓는다.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생태관광연구센터의 기획으로 진행되는 해남여행상품 ‘초요기를 올려라’는 명랑대첩축제와 명량역사체험마당 등의 이벤트와 함께 땅끝마을, 두륜산, 대흥사 등의 해남 명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구성했다. 여행상품 초요기를 올려라 출발 2011년 6~11월 매주 토, 일요일 및 공휴일 출발. 명량대첩축제기간(9월30일~ 10월2일)에는 매일 밤 출발. 서울 교대역 9번 출구, 오전 7시 출발. 요금 1박2일 11만9,000원(왕복 교통비, 1박 3식, 가이드, 입장료, 보험 포함) 문의 여행스케치 www.toursketch.co.kr 당신이 아직 모르는 해남이야기 우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는 모든 여행지는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찾아가 보면 초라하고 허망할 수 있는 해남 북평면의 무명소無名所들. 그 이름들을 기억해 두시라. 해남군의 예산 지원이 확정된 북평면 일대가 완도의 길목이었던 시절의 활력을 되찾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허망한 남창장’에 언능 와보소” 박상일 지역활력연구소 소장 이름부터 에너지가 넘치는 지역활력연구소의 박상일 소장. <해남신문>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해남포럼, 해남습지 보전모임, 남도문화관광센터를 만들었던 그는 남도의 음식과 풍습에 대해 막힘이 없다. 요즘 그가 ‘꽂힌’ 대상은 ‘남창장’이다. 혹시 ‘허망한 남창장’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다른 장에 비해 일찍 서고 일찍 파장이 되어 버리기에 낭패를 본 사람들에게서 나온 푸념이 허무한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해남에서 완도로 넘어가는 다리가 생기기 전에 남창장은 인근 섬에서 해산물을 가득 실은 채 모여들고, 제주도에서도 밀감을 싣고 올 정도로 흥한 장이었다. 현재는 규모도 손님도 줄었지만, 혹시 2일, 7일에 해남에 오게 되거든 장차 ‘풍물 어시장’으로 달라질 남창장을 기대해 달라는 것이 박상일 소장의 당부다.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옛 시절의 영광은 멀어졌지만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장터의 기능만은 유효하다. “달량진성, 이진진성, 그대로랑께요” 노명석 북평면 청년회장 40대의 청년회장이라고 소개를 받은 것이 쑥스러운 듯 웃기만 하던 그가 북평면 남창리에 도착하자 성큼 앞장서며 말했다. “여기 보세요. 돌담이 그대로 남아있죠. 이렇게 잘 보존된 성벽은 별로 없다네요. 저기, 저 집들은 안에 들어가 보면 뒷담이 모두 옛 성벽으로 되어 있어요.” 조선시대 이 자리에 수군의 진지였던 달량진達梁津이 설치됐고, 그 안에 남쪽의 조운창(조세를 거둔 현물을 모아두던 창고), 즉 남창을 두었기에 그 이름이 남창리다. 1498년(연산군 5년)의 일이니 500년이나 서 있었던 돌담은 정말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지난해 달량진성이 향토유적으로 지정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주민들에게 떨어진 즐거운 숙제다. 아직은 쇠락한 상태인 시골 마을의 풍경을 등에 지고 뭔가 고민에 빠진 듯한 그의 얼굴에 듬직한 ‘청년’이 있었다. 그가 두 번째로 안내한 곳은 멀지 않은 이진진梨津鎭성터였다. 약 2.5km의 석벽 중 940m 정도가 남아있으니 역시 양호한 상태다. 서문터에 남아있는 옹성에는 우물터까지 보존되어 있다. 마을에서 까만 현무암이 발견되는 것은 제주에서 이곳까지 배에 조랑말을 싣고 왔던 흔적이라고 했다. 역사의 파편들이 골목마다 박혀 있었다. “우리집의 포석정 볼라요?” 함박골큰기와집 김순란 여사 새로 지은 한옥집. 그러나 모양만 한옥집인 숙소가 아니라 한옥의 가치와 정신을 살리되 현대인 편의를 더한 한옥집. 그게 바로 ‘함박골큰기와집’이다. 고향인 해남 북평면 오산리에 돌아와 민박을 꾸린 김순란 여사는 직접 황토를 발라서 건강한 한옥집을 완성했다. 그 집에 머무는 자체가 일종의 치유였다. 직접 담그는 동동주는 가장 먹기 좋을 때 내놓는 것이라 실패가 없고, 숙취도 없다. 두 동의 사랑방은 각각 넓은 마당을 끼고 있으니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기 일쑤. 자리끼 물병에 민트 잎을 따 넣어 주고, 동동주에도 꽃잎을 따 넣을 줄 아는 그녀는 풍류의 고수이기도 하다. 마당 한쪽에 직접 고안하고 복원한 미니 포석정에 물을 채우고 동동주잔을 올리니 정말 술잔이 한 바퀴 돌아 내 앞으로 돌아왔다. 선비처럼 시를 읊어야 할 것 같은 밤이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은 뜻밖의 것이었다. 급하게 손끝으로 대충 짓이겨 새끼손가락에 얹어 주었던 봉숭아꽃이 지금 고운 살구빛으로 내 몸에 스며들어 있다. 각인된 추억이다. 주소 전남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 1016-2(차경리) 요금 4인실은 5~8만원, 8인실은 15~20만원 문의 011-9606-7557 www.hanbakgol.c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낙인’ 대학 학생들 “학교 없어질까봐 불안”

    “수업시간에도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안심시키려고만 해요. 그냥 다 괜찮다고만 하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도 없어요.” 경기도 A대학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이모(24·여)씨는 요즘 학교 가기가 두렵다. A대는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재정지원 제한 대학에 포함됐다. 학교 분위기는 엉망이다. 이씨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취업에 지장이 생길까 봐, 후배들은 등록금 내고 다닌 학교가 없어질까 봐 걱정이 태산”이라며 “군대에 있는 친구들까지 전화해 상황을 묻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학 교수 김모씨는 “일부 교수들도 주변에 새로운 자리를 문의하고 있는 처지”라며 “학교에선 ‘학생들을 잘 달래라’, ‘재단에서 곧 지원책을 발표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정지원 제한 대학, 학자금대출 제한 대학 등 교과부의 구조조정 리스트에 오른 사립대 재학생과 교직원들은 개강 이후 여름방학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학교 교육 환경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주변의 시선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대학들은 자체 개혁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해당 대학생과 교직원들은 리스트에 포함된 것 자체를 ‘부실대학’이라는 낙인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18일 각 대학에 따르면 상명대는 앞으로 4년간 500억원의 대학개혁 예산을 투입하고 신입생에게는 학자금 대출을 대체할 수 있는 보전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경남대는 300억원을 쏟아부어 2∼3년 이내에 교육지표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전체 학생장학금 수혜율을 50%로 올릴 방침이다. 목원대는 교직원 복지를 삭감해 100억원인 장학금을 157억원으로 확충하고, 서원대는 전임교수와 직원들이 다음 달부터 자발적으로 급여의 1%를 기부할 것을 제안했다. 원광대는 장학금 50억원을 추가 배정하고 2학기부터 교수 37명을 신규 채용하기로 한 데다 2013학년도 입학정원을 380명 감축할 계획이다. 그러나 대학 내부에서는 이 같은 조치를 놓고 ‘근본적인 해결’ 대신 ‘지표를 높이려는 편법’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재정지원 제한대학인 전북 모 대학 교수는 “장학금 수혜율을 일부 높이고, 정원을 줄여 충원율을 높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일부 교수들이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학교는 리스트에서 빠지는 것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18일 “대학 구조개혁은 대학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당장 퇴출이 우선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장관은 오전 KBS 방송에 출연, “구조조정의 초점은 하위 대학을 바로 퇴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서 “재정지원제한대학, 대출제한대학, 경영부실대학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대학은 과감하게 퇴출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덕수궁, ‘경운궁’ 되나

    덕수궁, ‘경운궁’ 되나

     사적 124호인 덕수궁(德壽宮)의 명칭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는 방안이 추진된다.  문화재청은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 일각에서 제기됨에 따라 여론 수렴을 거쳐 문화재위원회에서 명칭 변경 여부를 심의해 결정하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하지만 덕수궁이라는 이름이 100년 넘게 사용돼 이를 바꾸면 사회·경제적 비용이 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명칭 변경론자들은 경운궁이 1611년부터 300여년간 사용한 역사적인 명칭인 데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이곳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명실상부한 법궁으로 쓰였다는 정통성을 내세운다. 일본 제국주의 압력으로 1907년 덕수궁으로 개칭된 만큼 원래 명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궁궐 전각이 소실돼 머무를 곳이 없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던 곳을 1593년 임시행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로 등장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김한민 감독 “긴박·통쾌한 액션 사극 전 연령층 가슴에 꽂혔죠”

    김한민 감독 “긴박·통쾌한 액션 사극 전 연령층 가슴에 꽂혔죠”

    영화 ‘최종병기 활’의 흥행 돌풍이 심상치 않다. 올해 국내 개봉한 영화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인 개봉 11일 만에 300만 고지를 명중시킨 이 작품은 100억원대 대작들이 경쟁을 벌인 올여름 토종 블록버스터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청나라 군대에 여동생을 빼앗긴 신궁 남이(박해일)가 청나라 장수 주신타(류승룡)와 벌이는 추격전을 그렸다. 지난 19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김한민(42) 감독을 만나 흥행 비결을 들어봤다. →흥행 기세가 무섭다. 예상했나. -워낙 빡빡한 촬영 일정 속에 영화를 만드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격년마다 한국 블록버스터가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는데, 그중 한 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봉 첫 주 지방에 무대 인사를 갔더니 젊은 친구들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관객층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이 흥행 청신호이자 이 영화의 정확한 지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극 중에서도 ‘왕의 남자’ 등을 제치고 흥행 속도가 가장 빠른데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극이면서도 새로운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 활을 가지고 하는 액션과 추격의 느낌이 긴박하면서도 통쾌함을 줬고,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역사적인 정서가 충족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영화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드라마적인 힘과 액션적인 쾌감을 관객들도 좋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친숙하지만 다소 심심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 활을 소재로 한 까닭은. -혹시 그럴까봐 제목에 ‘최종병기’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활이란 것이 원초적인 느낌으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활시위를 팽팽히 당길 때의 긴장감과 ‘탁!’하고 시원하게 날아가는 느낌이 좋았다. 온기를 가진 활이 대상에 꽂혔을 때 느껴지는 타격의 쾌감도 원초적으로 인간이 좋아하는 속성이 아닌가. 항상 가까이 있고 봐 왔던 무기였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세밀하게 보게 되니 좋은 점이 많았다. →‘극락도 살인사건’(2007) 뒤 ‘핸드폰’(2009)이라는 영화를 찍은 것도 그래서인가. -그때는 정보기술(IT) 강국에서 왜 휴대전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는지 궁금했다. 이번에도 활도 잘 쏘고 각종 국제대회에 나가면 항상 금메달을 따는 한국에서 왜 활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는지 의아했다. →영화를 위해 양궁을 직접 배웠다던데. -1년간 대한궁술원 관계자에게 배웠다. 단전에 힘을 주고 깊은 호흡과 함께 활을 쏘다 보면 잡생각이 없어지고 집중력이 생긴다. →영화가 숨돌릴 틈 없이 빠르다. 그 속도감이 흥행 비결 중 하나로 꼽히기는 하지만. -몇 장면에 관객이 쉬어 갈 틈을 만들어 놓긴 했는데, 그렇게 숨이 찼나(웃음). 추격의 긴박감과 서스펜스를 강하게 주는 것이 영화의 생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몰아치는 느낌보다는 전체적인 리듬감을 갖고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완급조절을 하면서 서서히 치고 올라가는 데 초점을 맞췄다. →후반부 추격전은 ‘조선판 추격자’라고 할 만큼 인상적이다. 각종 장애물이 많은 숲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빠른 속도로 촬영이 가능했나. -촬영감독의 역작이다. 장비를 따로 쓴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핸드헬드(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로 찍었다. 배우들보다 체력적으로 더 힘들었다. 한명은 손에 카메라를 들고 전후좌우로 동물적인 감각으로 뛰고, 다른 한명은 먼 곳에서 줌 렌즈를 통해서 잡았다.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로 숨어서 찍기도 했다. 바로 내가 현장의 중심에서 쫓기는 듯한 느낌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대상에 밀착해 촬영했다. →활 전투 장면도 인상적이다. -활이 날창날창하게 생명력을 갖고 에너지 있게 날아가는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고속카메라로 촬영하고 특수 효과로 화살이 날아가는 느낌을 살렸다. 여기에 질감 있는 사운드 등이 어우러지면서 3D(3차원) 같은 2D(일반영상)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치 관객 자신이 활을 쏘고 맞는 듯한 생생함을 주려 했는데 어느 정도 적중했다. →서사가 빈약하다는 비평도 있다. -자인(문채원)과 서군(김무열)의 멜로가 더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두 남자(남이와 주신타)의 대결을 강조하는 구성에서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임진왜란의 역사 3부작을 완성하고 싶다. 근래에 위축되거나 소실된 측면이 많지만, 우리 선조들의 기개와 고귀한 정신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부러질 듯 부러지지 않고 꺾일 듯 꺾이지 않는 활 같은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그리고 싶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활을 표현하고자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청소년 관람불가였던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을 몰래 본 뒤 ‘영화감독이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가슴 뛰면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김 감독. 자신이 받은 상패에 적혀 있는 글귀처럼 “영화감독은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마술을 부리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그는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명쾌하고 쉽게 영화를 표현하고 싶다.”고 밝혔다. 마치 사극의 주인공처럼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를 틀어올린 김 감독이 다음엔 어떤 역사 속 이야기를 끄집어낼지 자못 기대된다. 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환승할인제 큰 효과… 일부 노선 조정 필요”

    “환승할인제 큰 효과… 일부 노선 조정 필요”

    “시내버스 적자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버스요금 현실화와 노선 다이어트, 그리고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윤혁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교통연구실장은 21일 고질적인 경영적자를 면치 못하는 버스를 흑자로 전환하고 시민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는 해법을 이처럼 제시했다. 서울시는 2004년 적자를 안고 달리는 버스를 과감하게 개혁했다. 1990년대 승용차가 급격히 늘면서 버스의 운행속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좌석은 텅텅 비었기 때문이다. 버스 회사들은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노선을 폐지하는 등 악순환을 거듭했다. 서울시는 이에 중앙버스차로를 도입하고 티머니카드, 환승할인, 버스정보관리시스템(BMS)을 도입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다. 특히 지하철 요금과 묶는 환승할인제는 상당한 효과를 냈다. 더 나아가 서울시는 노선조정·감독권 외에 운영권을 버스 회사에 넘겨준 준공영제를 도입했다. 표준운송원가를 정해 버스가 움직이면 사람을 태우든, 안 태우든 일정 힛수를 뛰면 돈을 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서민들의 발인 버스 요금이 매년 동결되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는 연 3000억원을 버스 회사에 보조금으로 지급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윤 실장은 “초기 투자비가 더 드는 지하철의 경우 적자가 5000억원에 이른다. 앞으로 대중교통의 적자는 1조원에 이를 전망이다.”면서 “시민이 낸 혈세인 1조원으로 싼값에 계속 타느냐, 아니면 요금을 현실화하느냐는 기로에 놓였다.”고 말했다. 버스요금은 2년마다 100원씩 올리게 돼 있는데 그동안 두세 차례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버스 요금이 1200원쯤 돼야 혈세를 더 쓰지 않게 된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버스 요금이 현실화되면 보조금으로 들어가던 예산을 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개선비로 사용할 수 있어 버스 시스템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전기버스로 개량하거나 리무진 버스 같은 맞춤형 버스를 도입해 승용차 이상의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버스 이용률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긴 버스 노선을 짧게 해주거나 과다경쟁 노선을 정리해 주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하철과 연계된 버스 노선은 ‘콩나물 버스’ 시절처럼 초만원을 이루고, 그렇지 않은 노선은 늘 적자에 허덕인다고 지적한다. 또 버스 노선이 길게 되면 자연적으로 속도도 덩달아 떨어지고 도착시간도 늦춰질 수밖에 없어 노선조정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왕과 토론하던 그들… 조선 경연의 모든 것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은 어떻게 유교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고, 이를 정사에 반영할 수 있었을까. 원리주의적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어떻게 임금을 유교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대학자 기대승·율곡 이이 기록 생생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경연이 무엇인지, 그 역할과 내용을 당시 기록에 근거해 풀어놓았다. 유래와 역사와 함께 경연에서 쓰인 교재, 경연관의 선발 방법, 경연이 이루어지는 절차와 목표 등을 당시 자료들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했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유교의 국가 조선에서 왕들의 생각을 어떻게 가다듬게 하고 벼리게 했는지를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경연에 참여, 왕과 토론을 벌이는 경연관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의 기록도 한 장으로 엮어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기대승의 ‘논사록’(思錄)과 율곡의 ‘경연일기’ 일부를 번역하고 설명해 놓았다. 기대승이 명종 때 홍문관 수찬으로, 선조 때 승지로 왕의 아침 경연인 조강(朝講)에 참여한 27일 31회의 기록을 후학들이 모은 것이 논사록. 이이의 경연일기는 이이가 경연에 참여해 보고 듣고 겪은 내용과 건의한 내용, 당시 사회상들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경연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함께 유교 경전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했다. 이 자리는 단순한 경서 공부를 넘어서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들을 유교적 덕목과 가르침에 비추어 토론하는 자리가 됐다. 임금과 신하가 경서의 내용은 물론 실제 사건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가치를 논하면서 보다 나은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연은 왕권의 남용을 규제하고 보다 나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자리이기도 했다. 당시 경연은 아침의 조강과 정오의 주강(晝講), 오후 석강(夕講)의 삼시강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강, 보강 형태의 소대(召對)로 구성됐다. ●왕의 공부·정책모색 과정 알 수 있어 왕과 신하는 경연의 자리에서 논어, 맹자, 예기, 중용 등 경서는 물론 다양한 역사서를 인용하고 검토하면서 현실 문제의 척도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경연은 정책의 일관성과 함께 유교적 가치가 정치와 행정에 미치는 직접적인 자리가 되기도 했다. 논사록에서 기대승은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명종에게 진언했고, 을사사화때 화를 입은 이언적 등에 대한 신원문제를 비롯한 사화에 대한 재평가 문제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방납 등 당시 공물 납부 문제점 등 행정 폐단을 거론했고, 송나라 효종과 신종 등 격변기 중국의 군주들을 논하면서 왕을 경계시키기도 했다. 2만 2000원.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軍, 北 NLL 포격 때 ‘先조치 後보고’ 지키지 않았다

    북한군이 지난 10일 서해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에 해상으로 포격했을 때 우리 군의 대응이 허술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해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강조됐던 ‘선(先)조치, 후(後)보고’ 방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보고·지휘 라인에도 혼선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18일 국회 국방위 소속 민주당 신학용 의원이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사건 당시 일지에 따르면 지난 10일 오후 1시쯤 북한군이 쏜 포탄 3발 중 2발은 NLL 인근 북측 해역에, 1발은 NLL을 넘어 0.6㎞ 거리의 남쪽 해역에 떨어졌다. 군은 폭음 청취 후 11분 뒤에 착탄 지점을 확인했고, 포격 1시간 2분 만인 당일 오후 2시 2분에야 NLL 선상에 K9자주포 3발을 발사했다. 군은 1시간여의 공백 동안 북한군의 의도를 분석하는 한편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와 연평부대, 제2함대사령부, 합참을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연결해 대응 방안을 논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연평도에서 2㎞ 밖 해상에 대한 평시 작전 담당인 제2함대사령부는 ‘3배 대응’ 원칙에 따라 모두 10발을 사격하도록 연평부대에 지시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이후 합참과의 화상회의 후에야 NLL을 넘은 포탄 1발에 대해서만 포격 이후 3발의 대응 사격을 하기로 결정됐다. 이와 관련,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사격훈련으로 보고 어떻게 대응할지 토의한 만큼 1시간이 걸린 건 문제가 없으며, 우리 측 피해가 없는 만큼 ‘선조치 후보고’ 제외는 맞다.”고 밝혔다. 또 “이번 포격은 훈련을 가장한 새로운 형태의 도발로, 아군의 대응 능력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김 장관은 이어 “서북 도서 및 해안 2㎞ 이내를 기준으로 하는 거리 개념은 상징적일 수 있어서 혼선이 없도록 (서방사와 2함대사의) 책임 지역 범위를 구역 개념으로 묶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북한의 암살조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추측성 보도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김병일 사람과 향기] 겸손과 헌신이 사람을 움직인다

    [김병일 사람과 향기] 겸손과 헌신이 사람을 움직인다

    요즘 우리들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모두 자기와 관련된 일을 하느라고 바쁘다. 자신과 가족, 회사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일을 위해 바쁘다. 물질적, 금전적으로 이득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남을 돌볼 겨를이 적어지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짓밟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당연히 이러한 곳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고 사회도 불신과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세계가 경탄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우리 한국의 행복지수와 투명성지수는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개인이 더 행복해지고 서로 신뢰하는 선진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이미 그런 삶을 사는 분들의 향기가 널리 퍼지도록 하여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 이근필 옹과 이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이다.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과 한국국학진흥원의 연수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이 두 분과의 대화 시간이다. 이근필 옹은 현재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하얀 두루마기 차림으로 꿇어앉은 채 수련생을 맞이하는 자세는 어느 강사보다 진지하다. 선조인 퇴계 선생의 행적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자기의 복을 짓는다는 뜻의 ‘예인조복’(譽人造福) 글귀를 강조하면서 다른 집안 선현들의 미담을 곁들인다. 재작년 101세로 작고한 부친 이동은 옹이 100세 때 쓰셨다는 ‘수신십훈’(修身十訓)을 나눠주면서, 이는 복사된 인쇄물이기 때문에 멀리서 오신 손님에게 이것만 드릴 수 없다며 정성스레 손수 쓴 ‘譽人造福’ 글귀를 같이 선물한다. “시원찮은 글씨를 드려서 죄송하다.”는 말과 더불어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십시오.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당부도 함께 한다. 작년에 2만장을 썼는데도 할 일이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퇴계종택을 나와 인근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하면 단정한 한복 차림의 이옥비 여사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갓 시집 온 새색시가 시어른께 여쭙듯 겸손하게 아버지 육사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비옥할 옥(沃)자에 아닐 비(非)자를 쓰지요. 제 이름이 왜 옥비(沃非)인 줄 아세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소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평생의 선물이에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렸을 때엔 독립운동가로서 시인으로서 아버지가 제게 안겨준 무게가 힘겹기도 했지만, 문학관을 찾는 분들이 저를 아껴주시기 때문에 요즘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가까이 느낀 적이 없다.”고 덧붙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후손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그들을 볼 때마다 겸손과 헌신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린다. 이근필 옹은 남의 말을 들을 수 없고, 이옥비 여사는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다. 온전한 몸도 아닌 상태에서도 항상 바르고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그런 모습들을 보고 이곳을 찾는 수련생들은 자신도 이렇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들을 한다. 겸손과 헌신이 사람을 움직인 것이다. 퇴계 선생과 이육사 선생은 분명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훌륭한 것은 학문적으로 뛰어났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생 동안 추구한 겸손, 배려, 헌신 등의 가치들이 오랫동안 향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향기가 그대로 후손들에 이어져 이 시대를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겸손과 헌신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아닐까 싶다. 그럴 때 대한민국은 국격이 올라가고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 전남 중학생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찾아

    전남 중학생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찾아

    전남 지역 중학생들이 광복절인 15일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등을 찾아 독립정신의 의미를 되새겼다. 전남도교육청이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해 마련한 ‘선상 무지개학교’에 참가한 도내 중학생 200여명은 임정청사 앞에서 조별로 나뉘어 임시정부의 역할과 독립의 의의, 독립지사들의 중국 활동 등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발표문 낭독 등을 하며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이 행사는 광복 66주년에 맞춰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의 삶의 자취와 정신을 배우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학생들은 “독립지사들의 혼이 서려 있는 현지에서 광복절 행사를 하고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게 돼 뜻깊다.”면서 “독립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불굴의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했다. 학생들은 이날 오전 ‘새유달호’ 갑판에서 장만채 교육감이 참석한 가운데 제66주년 광복절 기념식을 열어 애국가 제창과 함께 한국에서 가져간 태극기를 들고 만세 삼창 하며 독립의 의의를 되새겼다. 선상 무지개학교는 목포해양대학의 실습선 새유달호를 타고 1개월간 국내외를 돌며 견문을 넓히는 체험 활동으로 지난 9일 중국을 향해 출항했다. 17일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해 원폭자료기념관, 평화공원 등지에서 해외 문화체험 행사를 하고 오는 20일 귀국한다. 학생들은 앞선 지난 4일 독도를 찾아 ‘과거·현재·미래에도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라는 주제로 독도사랑 글짓기, 그림 그리기, 수비대 위문편지 전달 등의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이번 프로그램에는 성적 우수, 모범 학생, 사회적 배려 대상자 등 전남 지역 중학생 200여명과 중국 윈난(雲南)성, 저장성(浙江省)의 학생과 교사 12명도 참가했다. 무안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도서관 향교서 충·효·예 배워요”

    Q:“왜 우리의 전통문화가 사라졌을까요.” A:“지키지 못해서요.” Q:“누가 지키지 못한 걸까요.” A:“음…. 우리가요.” 10일 광진구 광장동 광진정보도서관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마련된 ‘도서관 향교’의 수업 풍경이다. 30여명의 어린이와 선생님이 모인 가운데 기초예절교육이 한창이었다. 평소 학교 수업시간에 장난치며 노닥거리던 아이들은 사흘이 지나자 의젓한 모습으로 유교의 기본 정신인 충·효·예를 몸으로 깨우치기 시작했다. 오지은 관장은 “예부터 향교는 지방교육의 중심이었다.”며 “도서관이 지역사회의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향교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구는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지난 8일부터 오는 20일까지 매일 오전 9시~낮 12시 전통문화교육을 통한 향교교육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사자소학(四字小學·옛 어린이 한자교과서)에서부터 고사성어 읽기, 원문에 담긴 교훈 이해, 절하는 법, 차(茶) 마시는 법까지 프로그램 또한 다채롭다. 성동초교 6학년 장보윤(12)양은 “고사성어를 퀴즈로 풀고 TV에서나 봤던 다도법을 알게 돼 기뻐요. 곧 재료비 5000원만 내면 닥종이 인형·부채 만들기, 된장 샌드위치 만들기도 할 수 있어 다음 수업도 손꼽아 기다려져요.”라며 웃었다. 구는 창건 600돌을 맞은 한국 제1의 향교인 강서구 가양동 양천향교와 손잡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절전통놀이 전문강사 정규승씨를 비롯해 한문 담당 이광희, 다도·음식 담당 최진·윤옥희씨가 강사로 나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이수자 최숙희씨도 민요를 가르친다. 서울시 향교재단 정규승(61) 부설연구원장은 “한류가 대세인 요즈음 아이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선조들이 남긴 삶의 지혜를 몸소 익히게 해주고 싶다.”며 “성균관에서 지역별로 다른 배례법을 비교해 표준을 뽑아 보급 중인데 이런 배례법 경연대회나 조선조 벼슬 놀이인 ‘승경도 놀이’ 수업을 통해 당시 행정·직위체계를 저절로 터득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디캐프리오, 할리우드 男배우 수입 1위

    지난 1년간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남자 배우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인 것으로 나타났다. 1일(현지시간) 포브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7700만 달러(약 809억원)를 벌어 5000만 달러(약 525억원)의 수입을 올린 조니 뎁을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작년 조사에서 5위에 그친 디캐프리오는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의 동반 히트에 힘입어 4계단이나 상승했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4편인 ‘캐리비안의 해적 4-낯선조류’에 출연한 조니 뎁은 한계단 떨어졌지만 여전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애덤 샌들러는 ‘그로운 업스’ 등에 출연해 4000만 달러(약 420억원)를 벌어 3위를 차지했다. ‘맨 인 블랙 3’에 출연한 윌 스미스와 ‘로맨틱 크라운’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호흡을 맞춘 톰 행크스가 각각 3600만 달러(약 378억원)와 3500만 달러(약 367억원)를 벌어 4, 5위에 올랐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항공모함’ 메이플라워호 우리 조상도 탔을까?

    ‘항공모함’ 메이플라워호 우리 조상도 탔을까?

    조선 최대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족보다. 발달하는 인쇄술이 가장 널리 적용된 곳이 서양에서는 ‘면죄부’였다면, 조선에서는 족보다. 면죄부가 남발됐듯 족보에도 늘 위조의 위험이 따라다녔다. 천한 신분이 아니라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족보 위조의 위험을 경고하는 논의가 종종 등장한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서양 족보 연구자들 사이에선 “메이플라워호는 항공모함이었다. 미국 건국사 연구는 선박 제조 기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농담이 나돈다. 초기 미국 이주자들이 대부분 유럽의 중범죄자나 부랑인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외가 있다면 청교도 신앙에 충실한 메이플라워호 탑승자였다. 조상이 부랑자나 중범죄자였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터. 그러니 너도나도 조상을 메이플라워호에 ‘태웠다’. 그 많은 사람을 다 태우려면 결론적으로 메이플라워호는 항공모함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게 서양 농담의 배경이다. 그렇다면 조선 족보도 그처럼 쉽게 위조될 수 있었을까. 최양규 한국계보학회 부설 한국계보인물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한국족보발달사’(혜안 펴냄)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서글프다. 족보가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지방 호족을 복잡한 혼맥 관계로 중앙정부에 묶어두기 위해 성과 본관을 하사하면서 족보가 시작됐다. 대개의 족보들이 시조를 고려 시대로 상정하거나, 그 이전에 시조가 있다 해도 고려나 조선 시대의 중흥조에서 서술을 시작하는 이유다. 이때까지만 해도 적서 차별, 남녀 차별, 친외손 차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강퍅해진 것은 조선 태종 들어서다.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한 태종은 왕위 서열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이원계·이화 등 태조의 이복 형제들과 정종의 형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엄격한 적서 차별을 만들어냈다. 서자를 차별해야 이들이 자연스럽게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실족보는 ‘선원록’(직계만 기록), ‘종친록’(태조와 태종의 적자만 기록), ‘유부록’(본처 공주와 후처 소생들 기록) 3가지로 쪼개졌다. 왕실을 모방하는 사대부 가문들도 당연히 이런 차별을 받아들였다. 이후 18~19세기 들어 족보 편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최 연구원은 말한다. 하나는 양반들의 자기 존재 근거 마련이다. 이는 군역 회피와 연결된다. 군역 면제가 가진 자의 특권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여서 번듯한 양반 가문임을 드러내는 족보가 필요해졌다. 이들은 그간 미처 정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족보를 다시 편찬한 뒤 관아에 탄원서를 내는 방식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 또 한 가지는 양민 증가다. 양반 특권 사회였던 조선은 양반에게 평등하게 군역을 부담시키기보다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평민을 늘리는 정책을 썼다. 종에서 신분 상승이 이뤄진 양민들은 양반을 본떠 족보 만들기에 혈안이 됐다. ‘뼈대’를 더 굵게 하기 위해 족보 위조도 일부 시도됐다는 게 최 연구원의 분석이다. 그는 19세기 세도가였던 풍양조씨 족보를 그 예로 들었다. 최 연구원은 “한 권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던 별보(別譜·한 집안이라는 근거가 확실치 않아 족보에 완전히 편입시키지 않은 상태의 기록)가 1826년에는 2권으로 늘어났다가 1890년에는 다시 1권으로 줄었다.”면서 “이는 세도가에 붙은 가문들이 크게 늘었다가 다시 구한말 사회 혼란기에 원보에 합쳐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조상을 미화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럼에도 족보 위조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최 연구원은 잘라 말한다. 그 이유로 ▲지역 유림사회가 워낙 강고해 족보 위조에 대한 상호 감시가 엄격했고 ▲문중에서 족보를 낼 때 계파 간 상호 견제가 치열했으며 ▲족보에 번호를 매겨 한정적으로 공급한 점을 든다. 이로 인해 유출이나 조작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 연구원은 “따라서 왕조실록 같은 거대 사료뿐 아니라 족보 같은 개인 기록 연구를 통해서도 신분제 등 조선조 사회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일상속 문화의 뿌리 되살리고 싶어”

    “일상속 문화의 뿌리 되살리고 싶어”

    말·글은 역사와 문화를 담아 전하는 그릇이라 한다. 선대의 의식구조나 풍속은 물론 선조가 살아내며 형성한 문화의 과정과 가치관까지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통용되는 말의 뿌리를 알려는 노력은 민족문화의 저변을 파고 드는 지름길로 여겨진다. 일상에서 쓰이는 상용어와 지명 가운데 불교에 뿌리를 둔 것만을 추려 정리한 사전이 처음 나와 불교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전 농협대 교수 박호석(62)씨가 4년간의 고생 끝에 세상에 내놓은 ‘불교에서 유래한 상용어 지명 사전’(불광출판사 펴냄). 상용어 630개와 지명 551종을 정병조 금강대 총장과 최명환 공주교대 명예교수의 꼼꼼한 감수를 거쳐 수록했다. “정년퇴직 후 기독교 관련 신문의 고정 칼럼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심금’이니 ‘다반사’ 같은 말은 불교 용어이니 기독교인은 써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글이었지요.” 일상에서 종교와 관계없이 널리 통용되는 말을 굳이 집단의 차원에서 배제하려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단다. 그래서 각방으로 수소문해 파악한 결과 불교에서 시작돼 흔히 쓰이는 말 중 공식적으로 정리된 게 고작 50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각종 사전과 사료, 지방자치단체의 문헌 등을 샅샅이 훑어 결과물을 내놓았다. “불교가 전래된 지 1600년이 흘렀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합니다. 국가 문화재의 큰 부분을 불교가 차지하는 게 그 증거 아닐까요. 흔히 쓰는 상용어며 지명 역시 종교의 차원이 아닌 문화의 차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유형의 문화재만 보존 유지할 게 아니라 일상 속에 깊숙이 스민 문화의 뿌리를 먼저 찾아 되살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탓에 대중에 널리 퍼진 불교문화의 말살과 왜곡이 진행된 데다 일제시대의 민족혼 말살 차원의 불교문화, 아니 민족문화 정리가 전국적으로 있었지요. 최근만 해도 행정체계 정리 과정에서 빚어진 용어나 지명의 왜곡 또한 만만치 않은 수준입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근 시행과 관련해 물의를 빚은 새 도로명 주소에도 불만을 숨기지 않는다. “새 주소대로라면 그 지명에 담긴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실종된다고 봐야 합니다. 새 도로명 주소 체계가 경제·사회적 이점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역사·문화적 고리와 중요성만큼은 충분히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가 다르게 소멸되고 왜곡되는 중요한 정신문화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는 일반인 못지않게 불교계도 마찬가지라고 꼬집는다. “기독교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장로며 예배는 불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오히려 불교계가 노장이며 예불로 바꿔 쓰는 실정이니 안타깝지요.”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400년 전통 산치성제 아시나요

    400년 전통 산치성제 아시나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청송 심씨의 조상들은 호랑이 등에 업혀 전쟁의 화를 피했다. 호랑이가 이들을 업고 간 곳은 한양에서 멀지 않은 갈산 인근 ‘벌말’이었다. 심씨 선조들은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정착하게 됐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강동구 강일동 지역이다.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모시고 풍요와 도움을 비는 ‘산치성제’를 400년 가까이 지내왔다. 강동구는 이 지역에서 이어져 온 전통행사인 산치성제를 2일 오후 6시 강일동 갈산에서 진행한다. 본래 이 의례는 청송 심씨가 주도하고 이 지역 주민들이 함께 지내는 민간 주도의 마을제였다. 1626년 처음 시작돼 매년 음력 7월 1일에 열렸는데 2000년대부터는 규모가 축소됐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강일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하며 구 연례 행사로 격상시킨 것이다. 자치위는 자치센터 예산으로 소머리 등 제물과 제주 등을 마련하고 마을 사람 중 세주, 하주, 축관 등을 선정해 의례를 진행한다. 구 관계자는 “본래 이 지역은 청송 심씨 집성촌이었는데 재개발로 원주민이 이탈하면서 산치성제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며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자치위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3차 희망버스 큰 충돌 없이 끝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을 지지하기 위한 ‘제3차 희망버스’ 행사가 큰 충돌 없이 31일 오후 마무리됐다. “불법 집회는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경찰의 예고와 부산 시민들의 반대 여론, 폭우피해 등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전국에서 모인 3000여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지난 30일 오후 6시부터 부산역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동문 인근 대선조선 2공장 앞으로 이동해 밤샘 집회를 했다. 이어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중구 한진중공업 RD센터 앞으로 이동해 기자회견을 한 뒤 오전 11시 30분쯤 부산경찰청 앞에서 항의집회를 갖고 오후 1시 30분쯤 자진해산했다. 희망버스 주최 측은 4차 행사 시기와 일정 등을 조율하고 있다. 한편 ‘희망의 버스’ 행사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행사장인 부산 영도에 진입하는 시내버스를 가로막는데도 경찰이 방관했다며 한 대학원생이 국가를 상대로 ‘1000원짜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1일 서울중앙지법에 내기로 해 귀추가 주목된다. 부산 김정한·서울 백민경기자 jhkim@seoul.co.kr
  • [인사]

    ■울산광역시 ◇3급 승진 △환경녹지국장 한진규△기획관 신동길△동구 부구청장 요원 김지천△종합건설본부장 성봉경◇3급 전보△중구 부구청장 요원 장광대△상수도사업본부장 김선조 ■제주도 ◇3급 승진 △인재개발원장 강산철△제주시 부시장 오홍식△서귀포시 〃 이명도◇4급 승진△서귀포의료원 홍성익△제주컨벤션뷰로 강권선<과장>△마을발전 장호성△건설도로 김영일△스마트그리드 강시철△환경정책 강승부△녹지환경 고영복△해양개발 김창선◇전보△도시디자인본부장 박용현△수자원〃 김찬종△해군기지건설갈등해소추진단장 양병식△공보관 강문실△예산담당관 조상범△세정〃 김남근△도의회사무처 이신호△농업기술원 총무과장 안전영△인재개발원 교육운영과장 고경윤△수자원본부 상수도관리과장 김성훈△〃 하수도관리부장 김은배△문화예술진흥원장 김용구△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장 양윤호△동물위생시험〃 허창현△제주시 자치행정국장 장명규△〃 주민생활지원국장 한재신△국회사무처 이용철△문화예술재단 홍성택△수출진흥관 김성도<과장>△평화협력 유종성△특별자치 이상헌△복지청소년 변태엽△노인장애인복지 정미숙△도시계획 김민하△건축지적 우명훈△교통항공 문순영△향토자원산업 이원순△환경자산보전 양창호 ■코트라 <팀장>△기간제조산업 황필구△해외전시협력 박종근△기술협력소싱 전미호△중아CIS 정영화<방산물자교역지원센터>△GtoG지원팀장 정은주<지역총괄>△북미(뉴욕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무역관장 겸임) 엄성필△구주(프랑크푸르트 〃〃) 정종태△CIS(모스크바 〃 〃) 김상욱△파리 고광욱△뉴델리 김경율△호찌민 허병희△실리콘밸리 권중헌△디트로이트 김기준△테헤란 이병우△리야드 김형욱△마닐라 최조환△함부르크 윤주영△시카고 전상현 ■금융결제원 ◇부서장 승진 △고객지원실장 임병안△IT개발부장 박완성△IT운영〃 김승호◇부서장 전보 <부장>△총무 정길용△전자금융 전융△전자인증 김호술△IT기획 한창현<실장>△e사업 송창수△감사 한상환 ■서울대 △학생처장 정철영 ■한양대 <서울캠퍼스>△대학원장 박재옥△공학대학원장(공과대학장 겸임) 최재훈△정책과학대학장 김상규△생활과학〃 이상선△음악〃 양연섭△산학협력단장(학술연구처장 겸임) 최덕균△학생처장 김성제△대외협력〃 김용수△정보통신〃 김회율△류마티스병원장 배상철△교양교육원장 손대원△산학협력부단장(학술연구부처장 겸임) 안주홍△공과대학 교무부학장 김홍배△〃 기획부학장 김찬형△〃 연구부학장 송윤흡△〃 대외부학장 안진호△국제어학원장 서원남△호스피탈리티아카데미 부원장 조민호△ERICA 부총장 노시태△과학기술대학장 안일신△국제문화대학장 박상천△언론정보〃 이종수△교양교육원장 윤성호△입학관리본부장 양내원△기획홍보부처장 원호식△ERICA 학술정보관장 배우근△국제어학원장(사회교육원장 겸임) 남상남△한양상담센터장(양성평등센터장 〃) 김경숙 ■대구가톨릭대 △교무처장 성한기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신규 선임 △주식운용본부장 한종석
  • [굿모닝 닥터] 튼살의 진실

    최근 ‘팻’(fat)이란 책이 출판계를 달구고 있다. 인류학자와 비만인권운동가들이 ‘살찐’, ‘기름진’, ‘지방’, ‘비만’, ‘윤택’ 등 팻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냈다. 실제로 아프리카 니제르에서는 튼살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긴다. 살찐 모습을 아름답다고 여기기 때문에 튼살을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심지어는 애들 인형에도 튼살 자국을 만든다. 보기 흉하다며 튼살을 없애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우리와는 확실히 다르다. 갈라져 희끗거리는 튼살은 여간한 스트레스가 아니다. 튼살은 비만이나 임신, 청소년기의 급속한 성장 등에 의해 피부 표면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진피 내 교원섬유와 탄력섬유가 변성되어 발생하며, 팽창선조라고도 불리는 피부질환이다. 초기에 붉은 빛을 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희게 변하게 된다. 이런 튼살은 붉은 기가 도는 초기에는 비교적 잘 치료되나 환부가 흰색으로 변한 뒤에는 치료가 더디다. 따라서 빠른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에 주목받는 레가또와 마이셀스 PRP(혈소판 풍부혈장)를 이용한 복합시술이 바로 튼살 치료법이다. 레가또와 마이셀스 PRP 복합시술은 튼살 표면에 프락셔널한 방식으로 미세한 채널(구멍)을 만든 후 임팩트 초음파로 PRP 핵심성분을 침투시켜 피부재생을 유도, 튼살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이전의 치료법들이 색소침착 등의 문제를 보인데 비해 이 치료는 마이셀스 PRP의 TGF-β 성분에 의한 미백효과로 색소침착을 크게 줄인 것이 특징이다. 물론 튼살도 예방이 중요하다. 임신 중에는 보습크림을 충분히 바르고, 샤워 후 오일이나 로션으로 마사지를 해주는 것도 좋다. 또 급격한 체중 증가를 막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것도 잊지 말자. 만약 튼살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자외선 노출을 막아야 튼 부위가 검게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상준 아름다운나라 피부과 성형외과 원장
  • [김문이 만난사람] 세계적 옻칠예술가 전용복

    [김문이 만난사람] 세계적 옻칠예술가 전용복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최고의 명작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500여년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도료나 아교 등으로 덧칠을 해 놓아 원래의 ‘모나리자 미소’를 잃은 지 오래다. 만약 무덤에서 다빈치가 일어나 그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장탄식을 하겠다. 좀 더 오래가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을 놓고 후회막급할 것이다. 여기서 잠깐, 고민하는 다빈치에게 우리 전통의 옻칠을 얘기해 주자. 1500년 전의 고구려 벽화나 700여년 전의 팔만대장경 글씨가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예로 들면서 우리 조상의 옻칠에서 그 비결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첨단 과학의 시대에 그저 산에 나는 옻을 사용했다는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이참에 제대로 보여 주고 싶다. 그만큼 옻칠은 나무의 결이나 그림을 고스란히 살려 주는 동시에 장구한 세월을 견디는 생명력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옻이란 무엇인가. 옻을 잘 모르는 사람도 ‘옻오리탕’ ‘옻닭도리탕’ 정도는 들어 봤을 것이다. 또 ‘옻이 올랐다’는 얘기도 있다. 좀 더 전문적으로 알기 위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옻칠 예술가 전용복(58)씨를 만나러 간다. 인터뷰에 앞서 유명한 일화를 떠올렸다. 지난해 7월이었다. 문화재청이 주최한 ‘전통공예의 산업화·세계화 심포지엄’에서 전씨는 직접 옻칠한 손목시계를 선보였다. 옻을 입힌 제기와 상, 장롱 등은 수없이 보았으나 손목시계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확 주목을 끌었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손목시계는 8억원과 3억원짜리 1개씩, 그리고 5000만원짜리 30여개. 4년 전 세이코 시계 회사의 주문을 받아서 시계 금박에 옻칠을 해 영원 불멸의 작품을 만들었던 것. 또 있다. 1991년 11월 13일. 도쿄 시내의 국보급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1920년대 일본의 고급 문화를 담은 호텔, 연회장, 예식장으로 쓰인 복합 건물)이 오픈되는 날이다. 거기엔 이례적으로 태극기가 휘날렸다. 전씨가 3000여명에 달하는 일본 옻칠 장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3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해 낸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60년 전 조선의 장인들이 나라 잃은 울분을 삭이며, 피와 땀을 흘렸던 과거의 한을 떠올리며 대역사를 재현해 내 일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미술관 엘리베이터나 사계절 산수화 등의 창작품에는 전씨의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었다. 서울 화양리 네거리에 위치한 ‘전용복 옻칠예 아카데미’. 자리에 앉으면서 “옻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거봐요, 기자라는 사람이 저러니 참으로….”라고 야단부터 맞았다. “옻은 만년의 신비를 갖고 있습니다.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지요. 첫째, 옻칠은 지구상에서 그 어떤 물질보다 오래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둘째, 옻칠은 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이므로 자연 친화적이며 인체에 유익한 물질을 생성합니다. 셋째, 옻칠은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 줍니다. 옻칠만이 가지고 있는 신비스러움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수액을 제공하는 옻나무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 4월 중국 문화부 중외문화교류중심 초청으로 베이징에서 ‘전용복 칠화전’을 가졌다. 이때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축사를 통해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는 중국 땅에서 서양인들이 선망해 오던 칠공예를 아시아 문화 발신의 기점을 만든 전용복 선생에게 큰 기대와 함께 경의를 표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걸어간 거대한 발자국이 드디어 대륙 땅에 찍히는 순간 옻칠은 다채롭고 찬란한 아침 햇살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일본에서 24년을 살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가 당당히 중국 문화부 초청으로 전시회를 가진 무대였으니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관심이 쏠렸다. 중국 문화부 관계자 뤼진은 “이번 전시는 만년의 빛이라는 테마로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전시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 전시를 얘기하는 전씨에게 요즘 무슨 일로 바쁜지 물었다. “서양 가구에 옻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크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옻칠을 갖고 우리의 생활공간에 어떻게 아름답게 접목할까 하는 것입니다. 4년 전부터 연구해온 것을 구체화하고 있지요. 한국의 전통 옻이 친환경적 소재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전씨는 또 “옻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옻을 이용한 작품 개발 등 순수 예술도 있지만 이제는 일반 서민들도 옻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대중화해야 한다.”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화에도 힘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얘기를 하나 꺼낸다. 다름 아닌 오는 11월 세계 유네스코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이 방한할 때 세계 문화재 보존을 위한 전 세계 투어 전시회 협약을 맺기로 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일대와 미국 남미 등에서 옻예술 전시회를 갖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 옻예술이 서양 세계를 향해 떠나는 최초의 길이라고 말했다.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지 1년밖에 안 됐다. 소식을 듣고 한 수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들 중 몇몇이 선발돼 ‘옻칠예 아카데미’에서 작품 활동을 같이 하고 있다. 수제자로 할 만한 사람은 15명. 전씨는 현재 세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다. 첫 번째는 창작 전시 작품, 두 번째는 주거공간에 쓰이는 생활작품, 그 다음에는 후진 양성을 위한 일이다. 그는 얼마 전 부산 영산대 석좌교수로 초빙을 받았고 올가을 학기부터는 이화여대에서 특강을 하기로 예정돼 있다. 최근에는 가구 회사인 바로크C&F와 협약을 맺어 서양 가구에 우리의 전통 옻을 입히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완성된 물건이 1만년 가는 것은 옻밖에 없습니다. 살균력이 좋고 전자파도 잘 흡수합니다. 이러한 장점을 활용해 산업 부문에도 적용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예술적 접목도 다양할 때가 됐지요. 젊은 작가와 젊은 디자이너, 그리고 우리 공예를 지켜온 사람과 결합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실험작품을 내놓았다. 앞서 얘기한 옻칠한 금속시계뿐만 아니라 비올라·첼로 등 악기에도 옻칠을 했던 것. 특히 피아노의 경우 음향판에 옻칠을 했더니 소리가 무척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완성된 물건에 옻은 어떻게 칠할까. 오묘한 색깔은 어떻게 빚어낼까. “옻나무 수액을 처음 채취했을 때에는 막걸리 색깔과 비슷합니다. 이에 열을 가하면 맥주병 색깔로 변하지요. 이런 정제 과정에서 돌가루를 적당히 섞어 가면서 여러 가지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옻을 음용하다 보니 옻나무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요즘에는 중국에서 수입해야 할 형편입니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훨신 많은 1년에 70t 정도 사용하고 있지요.” 그는 6·25전쟁이 끝날 무렵 부산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살림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길거리에서 과일과 국화빵 장사를 했다. 연탄 배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관심을 두었던 것은 동네 어귀마다 자리한 나전칠기 가구나 장롱을 만드는 곳이었다. 화가가 되는 꿈도 꾸었다. 소나무 판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또 손재주가 좋아 목재소에서 헌 나무토막을 주워 와 토끼집이며 개집을 직접 만들어 이웃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견디며 청년이 돼 해병대에 입대했고 전역한 뒤 목재 회사에 입사했다. 1978년 당시 월급은 57만원. 솜씨가 워낙 좋아 회사로부터 특별 배려를 받았다. 열정과 패기까지 있어 젊은 나이에 기획실장과 디자인 회사 재정까지 맡았다. 잘나가던 그에게 어느 날 ‘전용복식 가구’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회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기 마석에 예린공예사를 차렸다. 고기비늘처럼 반짝이는 공예품을 만들어 내려는 뜻에서 예린(藝鱗)이라고 했던 것. 이후 그의 작품은 서울에 있는 고급 가구상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향인 부산으로 옮기면서 가구공방 운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활로를 모색하던 중 도자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 기법’을 생각해 냈다. 독학으로 1200년 전의 기술을 익히면서 옻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가구와는 점점 멀어졌고 순수한 옻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로 탈바꿈했다. 1986년 한국현대공예미술전에 와태칠 작품을 출품해 대상을 거머쥐는 등 타고난 실력을 발휘했다. 얼마 후였다. 일본인 무역상이 오래된 ‘오젠’ 밥상 하나를 들고 와 수리를 부탁했다. 그 일본인은 도쿄예술대학에서 얘기를 듣고 찾아왔다고 말했다. 밥상 윗부분에는 고운 빛깔의 나전으로 두 마리의 학이 아름다운 자태로 입혀져 있었다. 전씨는 새것처럼 깔끔하게 수리를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구로가조엔 복원 작업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지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실렸으며 한때 귀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옻칠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혼의 정수(精髓)이자 영원불멸의 유산입니다. 일본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나는 조선의 옻칠장이’라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이 땅의 옻칠 문화를 되살리는 데 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전용복씨는…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1년 일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 내 세계적인 옻칠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23년 동안 일본에서 살다가 1년 전 귀국했다. 지난 4월 중국 정부 초청으로 전시회를 가져 그의 진가를 새삼 입증했다. 그의 이력은 이렇다. 1980년 예린 칠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3년 일본 한국문화원 초대 전시회, 1986년 한국 현대미술전 대상 수상, 일본 이와테 현 미술공방전 특상(1988),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통령 표창장 수상(2000), 이와테 현 가와이무라 약사도칠예관 명예관장(2000), 대통령 표창 수상 기념 개인전(2001), 이와테 칠예미술관&동관대표 취임(2004), APEC기념작품전시회(2005), 세계 최고급 옻칠 시계 발표(2008), 온스타일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공동 기획 아트도네이션 작품 기증(2009) 등이다. 현재는 서울 화양리에서 제자들과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생활공간에 어떻게 옻을 적용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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