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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임진년(壬辰年) 새해에 임진왜란을 되돌아보게 된다. 작금의 국내 정치 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보면 그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왜군이 부산을 침략해온 1592년 4월,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 그해도 임진년이었다. 16세기 말 동북아가 격동의 시대였다면, 아시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간에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지금의 정세도 긴박하긴 마찬가지다. 과거 동인·서인 간 당쟁으로 국가 재정과 민심이 피폐해진 것도 오늘과 닮았다. 선진국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 기로에 서 있지만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정치권은 여야 모두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가 중대사도 사사건건 보수·진보로 나뉘면서 국론이 분열돼 있다. 임란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조총을 갖고 싸웠지만 조선은 변변한 무기도 없는 병졸을 데리고 7년을 싸웠다. 오죽하면 임란에 개입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도망 잘 치는 군대’라고 비웃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어렵사리 이겼다. 조선 최고 재상으로 일컫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임진왜란이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는지를 ‘징비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하도다. 20여일 사이에 국도(國都)가 떨어지고 8도(八道)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播遷)의 길에 올랐다.” 흔히들 임란 하면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백척간두에 섰던 조선의 운명을 다잡은 이는 다름 아닌 유성룡이었다. 그는 임란 1년 전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말직에 있던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한 인물로만 알려졌지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 대신 정치·군사 등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이었고, 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한 탁월한 리더였다.(이덕일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무엇보다 유성룡은 국혼(國魂)을 지닌 지도자였다. 서울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에서 머물던 선조가 명으로 피신하려 하자 “한 발자국이라도 (국경을) 나가면 조선은 내 땅이 아닙니다. 지방의 지사들이 며칠 안으로 크게 일어날 텐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넙니까.”라며 겁에 질린 임금을 붙잡는다. 만약 선조가 도망치듯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으로 도망갔다면 조선은 없어지고,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체(國體)를 오늘날까지 온전히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세가 힘에 부치자 명을 끌어들여 반격의 기선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능수능란한 외교력으로 명과 왜가 조선을 분할 통치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적고 있다. 임란이 한·중·일 3국의 국제전임을 처음 인식하고, 명이 조선에서 철수하면 위협받을 것이라는 ‘후퇴불가론’을 내세워 명으로 하여금 계속 조선과 연합전선을 펴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약 서애가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르게 조선이 분단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니 참으로 아찔한 역사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다.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 교체가 이뤄진다. 동북아 질서 새판짜기가 시도될 가능성이 높다. 그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시기다. 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긴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백성을 지켜냈던 서애 같은 영웅 말이다. 지금도 난세라면 난세다. 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제 정세를 훤히 꿰뚫어 그 속에서 국가의 미래 좌표를 제시하며 국정을 제대로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서애가 죽자 백성들은 선조가 명한 ‘3일장’을 치르고도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살아 남았겠는가.”라며 하루를 더 애도했다고 한다.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우리도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갖고 싶다면 무리한 욕심일까. bori@seoul.co.kr
  • 北최고위급이 AP통신에 ‘경제개혁’ 첫 언급 까닭은

    북한 최고위급인 양형섭(86)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최근 김정은 체제에서의 경제 개혁을 처음으로 언급해 주목된다. 특히 북한에서 금기시된 ‘개혁·개방’이라는 용어를 최고위급이 외신과의 회견에서 사용한 점, 그리고 양 부위원장이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의 북측 중앙보고회 기념보고를 한 당사자라는 점에서 긍정적 메시지로 해석되고 있다. 양 부위원장은 지난 16일 평양에 종합지국을 두고 있는 미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지식기반 경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중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의 경제 개혁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양 부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종매부로 북한 1세대 지도부 인사이며, 2007년 평양을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영접하고 전송했었다. 양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이어받은 김 부위원장의 영도를 받아 안심하고 있다.”며 “김 부위원장은 수년 전부터 군사 정책뿐 아니라 경제를 비롯한 다방면에서 김 위원장을 지근에서 돕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언은 최고지도자인 김 부위원장과 사전에 교감된 ‘의도적 발언’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개혁·개방이라는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 금기어가 된 상황에서 아무리 힘 있는 원로라도 이를 언급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김정은 체제’가 북한 내부에 안착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향후 경제적 지원을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통일부 당국자는 18일 “북한이 2002년 개혁·개방을 위해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도입한 바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양 부위원장의 경제 개혁 언급이 나온 것으로 본다.”며 “북한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좋은 선택을 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 신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일 사망 한달 만에 개혁·개방이 언급된 건 김 부위원장의 지도력이 확고하다는 방증으로 보인다.”며 “북한이 내부적으로 전향적인 경제 정책을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체제가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지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앞서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지식기반 경제’를 언급한 바 있다. 김 부위원장의 대표적 업적으로 컴퓨터수치제어(CNC) 기술을 선전하고, 첨단 기술을 통한 지식경제 강국 건설을 새 경제 노선으로 내세웠다. 홍순직 한국경제연구원 통일경제센터장은 “김 부위원장이 첨단 정보기술(IT) 등에 관심이 많고 젊은 IT 지도자로 부각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며 “김정은 체제의 안정은 경제난 해소에 달린 만큼 개혁·개방의 속도를 내고 이를 최고지도자의 성과로 내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장영실이 측우기 발명했다고? 세종 아들 문종 아이디어였다”

    “장영실이 측우기 발명했다고? 세종 아들 문종 아이디어였다”

    도시인들은 비가 오면 짜증스러워하지만 도시 농부로 살다 보면 ‘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6월 하순부터 지루한 장마와 태풍으로 말미암은 범람 위기까지 겪고 나면 ‘비’에 대해 경기를 일으킬 만큼 징글징글하다는 감정을 갖게 되지만, 사실 한반도의 봄가뭄은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로 볍씨를 직접 뿌리기(직파)보다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이 대중화되면서 모내기 철인 양력 6월에 비가 충분하지 않으면, 천수답 등 수리불안전답이 70~80%에 이른 조선에서는 모내기 자체를 못 해 한 톨의 쌀도 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 영·정조 때에도 이앙법을 반대하는 상소들이 적지 않았다. 양력 4월에 직파를 할 경우 최소 30%의 쌀이라도 수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농촌경제硏 선임 연구위원으로 정보 추적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이하상 지음, 소와당 펴냄)는 제목처럼 가뭄이 다반사인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 벼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조선왕실의 대비 태세가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 준다. 저자는 서울대 농대를 나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일하며 농사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추적해 이 책을 냈다. 벼농사는 중국 남부처럼 비가 연간 1200㎜ 이상 내리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잘된다. 우리와 위도가 비슷한 중국 북부는 연간 강수량이 600~700㎜에 불과해 밭작물인 기장이나 보리, 수수, 밀 등을 재배하고 수확하지만, 한반도에는 다행히 ‘6~7월 장마’가 있어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파종이나 모내기 철인 양력 4~6월의 심각한 가뭄이다. 전형적인 농업국가였던 조선의 물, 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드러난다. 민간에서 모내기 철에 오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른다. 봄 가뭄으로 단비를 기다리던 태종이 죽어가면서도 해갈을 기원하였고, 그 결과 그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매해 빠지지 않고 비가 왔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이는 조선의 기상기록인 ‘서운관지’에 ‘200년이 지나 선조 신묘년(1591년)에 처음으로 이 날이 됐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게 되자 아는 사람들은 이를 몰래 걱정했다.’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태종의 아들 세종이나 손자인 문종도 비가 왔느냐, 얼마나 왔느냐를 두고 노심초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측우기와 관련한 첫 기록은 세종 23년, 1441년 음력 4월 29일 세종실록에서 비롯된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를 땅을 파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조사하였다.’ 그해 8월 18일 세종실록에 다시 ‘측우기’라는 정확한 명칭이 나오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 2자가 되고, 지름은 8치가 되게 하여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중략)’라고 기록돼 있다. 현대적 단위로 환산하면 60cm 높이에 지름 24cm의 쇠로 만든 측우기가 나타난 순간이다. 1442년 세종실록에 나타나는 측우기는 길이가 1자 5치, 지름이 7치로 원래보다 작게 수정돼 있다. 이 측우기는 누가 만들었을까? 일반적으로 천민 출신 과학자 장영실(1390?~1450?)로 알려졌다. 그러나 저자는 왕조실록과 국고 기록에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저자는 측우기와 비슷한 것이 처음 나타난 1441년 세종실록의 기록을 들어 측우기의 발명자가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조사하였다.’는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1441년 당시 이미 28세로 장성한 세자 문종은 세자 신분으로 한글 창제와 자격루 제작에도 깊숙이 개입했었는데, 측우기 제작에도 깊이 개입해 주도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서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를 만들었는데 이순지(1406~1465)가 이를 주관했다.’는 대목에 대해서는 “측우기가 나타난 지 1년 뒤인 만큼 측우기를 여러 개 만들어 지방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상청도 세미나서 ‘문종의 측우기… ’ 발표 저자는 17일 “측우기를 장영실 등 세종 주변의 과학기술 인력이 만들었을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세종이 측우제도를 추진하고 문종이 측우에 관심을 두고 실제 측우기를 사용한 것도 사실인데, 이런 경우 아이디어 제공자가 실제 제작자보다 우선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내용은 사실 저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기상청은 2010년 5월 14일 서울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열린 ‘세종대왕 탄신 613돌 기념 측우기와 측우대 세미나’에서 ‘문종의 측우기 발명’을 발표했다. 그럼 측우기가 없었을 때는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어떻게 측정했을까? 입토심(入土深)이라고 해서 가뭄 끝에 비가 와서 메마른 토양에 스며든 깊이를 조사했는데, 쟁기가 들어갈 정도, 호미가 들어갈 정도 등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면, 중국은 측우기를 발명한 것이 조선이 아니고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1770년 영조가 세종의 측우기를 재건하면서 영영측우기 받침대에 ‘건륭경인오월조’라고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탓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2)해남 녹우당(錄雨堂)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2)해남 녹우당(錄雨堂) 은행나무

    집에는 주인의 이름을 표시한 문패를 건다. 문패에는 단순히 주인의 이름을 적을 뿐 아니라, 몇 가지 장식을 덧붙여 그 집의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옛 선비들은 주인의 삶과 철학을 상징하는 집 이름, 즉 당호(堂號)를 붙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집을 효과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집 안팎에 크고 작은 나무를 심었다. 집안에서 즐기는 정원수 외에도 옛 선비들은 대문 앞에 높이 솟구치는 큰 나무를 심어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처음에는 한 집안의 상징으로 키워지겠지만, 이 나무가 오래 살아남으면 마을 전체를 가리키는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그 나무 안에 집 주인을 중심으로 마을 전체의 사람살이가 담기는 건 당연한 순서다. ●비자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초록의 빗소리 땅끝마을 해남에는 초록빛 비가 내리는 집이 있다. ‘초록 비의 집’으로 해석되는 ‘녹우당’(雨堂)이라는 당호의 이 집은 조선시대의 시인 윤선도가 머물던 유서 깊은 살림집이다. ‘초록 비’를 느낄 수 있는 열쇠는 이 집의 사랑채에 걸린 편액 ‘정관’(靜觀)에 담겼다. ‘고요하게 바라보라.’는 뜻대로 집 안에 들어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열면 사철 어느 때에라도 싱그러운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빗소리는 집 뒤로 이어지는 덕음산 숲의 초록 비자나무들이 바람에 스치며 지어내는 소리다. 그래서 녹우(雨)다. 국어사전에는 ‘녹우’를 “늦봄과 초여름 사이 잎이 우거진 때 내리는 비”라고 풀이하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사전적 뜻보다 비자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잎새들의 소리를 빗소리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윤선도의 시심(詩心)이 살아있는 집인 까닭이다. “뒷산은 바위 산이에요. 선조들은 이 산에서 바위가 허옇게 드러나면 부락이 융성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바위를 초록 빛으로 덮기 위해 나무를 심으셨죠. 자연히 사철 푸른 잎을 떨구지 않는 비자나무를 고르신 겁니다.” 녹우당에서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이 집을 처음 지은 어초은 윤효정의 18대 종손인 윤형식(80) 노인의 이야기다. 녹우당의 뒷산 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해남 연동리 비자나무 숲이다. 이 비자나무 숲은 예전만큼 무성하지 않다. 윤 노인은 나무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모양이라며 아쉬워한다. 센 바람에 맥없이 쓰러지는 나무도 있고, 더러는 저절로 나이가 들어 죽는 나무도 있다고 사정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여전히 3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무성한 뒷산은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숲이다. ●윤선도 선조, 아들 과거급제에 심은 나무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땔감으로 쓰던 옛날에도 선조들은 뒷산의 비자나무만큼은 절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철저히 관리했다는 게 윤 노인의 이야기다. 선조들은 비자나무의 열매를 모아 마을 사람들에게 구충제로 쓰도록 나눠 주기도 했다. 또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비자 열매 강정을 만들어 손님의 다과상에 내놓기도 한다. 녹우당은 원래 조선 효종이 윤선도를 위해 수원 화성 지역에 지어준 살림집이다. 만년의 윤선도가 이곳 해남에 머무르게 되자, 옮겨온 것이다. 그동안 녹우당을 비롯한 주변 유적지 일원을 녹우단이라 했지만,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공식적으로 ‘녹우당’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했다. 녹우당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대문 앞에 우뚝 서서 나그네를 반기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다. 주변에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지만 이 집을 대표하는 나무는 단연 대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이 은행나무다. 윤선도의 4대조인 어초은이 이 집에 살던 때, 그의 여러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걸 기념하며 심었다. ●줄기 둘레만 5m… 나이보다 젊은 나무 나이는 500살, 키는 20m까지 컸다. 줄기 둘레도 5m 가까이 된다. 단아한 기와 돌담으로 이어진 대문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이 나무는 이 집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때 어초은 할아버지는 은행나무를 네 그루 심으셨다고 해요. 그 중 한 그루는 오래전에 불이 나서 수세가 형편 없게 됐어요. 하지만 그 나무들 모두가 여전히 뒷동산에 살아 있어요. 물론 그 중에 제일 튼튼하고 잘생긴 나무가 대문 앞의 이 나무이죠.” 윤 노인은 비자나무와 은행나무를 심은 어초은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선조들이 대를 이어 집 주위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덧붙인다. 녹우당 주변에서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윤 노인은 대문 앞의 은행나무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나무는 단지 집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였을 뿐 아니라, 지체 높은 가문의 살림집임을 알리는 상징이기에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 나무가 500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가문의 자랑을 넘어 마을의 랜드마크가 됐다. “누가 따로 돌봐 줄 필요는 없어요. 한눈에 봐도 건강하고 싱그럽잖아요. 그래도 나이가 많으니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암나무이지만 열매가 자잘하고 많이 맺지도 않아요. 하지만 해남군에서 때맞춰 영양도 보충해 주고, 병충해도 방제하며 철저히 관리하니,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살아갈 겁니다.” 나무가 아름답게 살아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선조들의 믿음은 확고했다. 나무가 죽고 뒷산이 헐벗어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융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긴 것도 그래서다. 지금 눈 감고 초록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준 옛 선조들의 보살핌에 고개가 숙여진다. 글 사진 해남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번지 녹우당. 서울에서 목포를 잇는 서해안고속국도를 이용해 남도에 들어서서 땅끝마을이 있는 해남군청까지 간다. 해남군청에서 남쪽으로 난 지방도로 806호선을 이용해 대흥사 방면으로 간다. 곧게 난 아름다운 길을 따라 4㎞쯤 가면 ‘고산윤선도 유적지’로 들어서는 마을 길과 연결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좌회전하여 조붓한 농로를 따라 1.3㎞ 가면 숲 사이로 주차장과 매표소가 나온다. 은행나무는 매표소에서 200m쯤 걸어 들어가면 녹우당 대문 앞에서 만날 수 있다.
  • 흑룡氣 팍팍…팔용산·용두산 새해나들이

    흑룡氣 팍팍…팔용산·용두산 새해나들이

    촌스럽긴 합니다. 용의 해가 됐다 해서 용과 관련된 여행지를 소개한다는 게 말입니다. 한데,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옛 경남 마산의 팔용산과 용두산은 꼭 한 번 가볼 만합니다. 팔용산은 960개의 돌탑이 장관이고, 용두산은 해양 트레킹로 ‘비치 로드’를 따라 바닷가를 걷는 맛이 각별하지요. 돌탑을 만나러 가는 길은 풍경을 보러가는 발걸음과는 다릅니다. 누군가의 바람이 켜켜이 쌓인 곳이니, 새해 스스로의 소망을 다지기 딱 좋습니다. 여기에 마산에서 옛 진해까지 이어진 해양관광로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다도해 너머로 때론 소박하고, 때론 장쾌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960개 돌탑 통일을 꿈꾸다 내 나라 안에서 명자깨나 날리는 돌탑군(群)을 꼽자면 전북 진안의 마이산 돌탑이 가장 앞줄에 설 게다. 강원 강릉의 노추산 돌탑길도 명성으로는 마이산 돌탑에 뒤질 망정, 규모로는 뒤지지 않는다. ‘탑돌이 할머니’가 26년째 3000개 가까운 돌탑을 쌓고 있다. 경북 문경 새재의 ‘꽃밭서덜’은 오래 전 한양을 오가던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하나하나 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인들의 소망이 축적된 곳인 만큼, 풍겨나오는 기운도 범상치 않다. 이들에 견줘 팔용산(328m) 돌탑군은 쌓아 온 연륜만큼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어법에 맞는 이름은 ‘팔룡산’(八龍山)이지만, 현지에선 팔용산으로 통용된다. 돌탑을 쌓은 이는 이삼용(63)씨다. 전직 마산시 공무원이었던 이씨는 1993년 임진각에서 망향제를 올리는 실향민을 TV를 통해 본 뒤, 이산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정성으로 풀어보겠다고 결심한다. 이른바 ‘통일기원탑’ 쌓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돌탑을 쌓고, 오전 8시쯤 시청으로 출근하는 ‘이중 생활’이 19년 동안 이어졌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돌탑을 쌓다 보니 가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무릎에도 이상이 생겨 지난해 수술까지 받았다. 이씨는 “한번도 휴가를 못 가 늘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지금은 내 뜻을 이해하는 건 물론, 힘을 북돋워 준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여느 돌탑들이 자신의 기복(祈福)을 위해 세워졌다면, 팔용산 돌탑은 다른 이들의 바람을 위해 세워진 셈이다. 돌탑은 현재 960개가 세워져 있다. 1m짜리 소형탑부터 8m짜리까지 다양하다. 목표는 1000개다. 이씨는 “999개까지 쌓은 뒤, 마지막 1개는 통일이 되면 쌓겠다.”고 했다. 물론 통일이 되지 않으면, 돌탑군은 미완의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어찌나 정교하게 쌓았던지, 지난 2003년 태풍 매미가 마산을 강타했을 때도 끄덕없었다고. 돌탑을 품고 있는 팔용산은 일제 강점기엔 반룡산이라 불렸다. 그러다 광복이 되면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산정에서 보면 아래로 뻗어내려간 여덟 줄기가 꿈틀대는 용을 닮았다 해서 이름지어졌다. 예전엔 마산과 창원의 경계가 됐던 산으로, 시민들이 휴식처 겸 등산로로 즐겨 이용한다. 팔용산 산행은 2시간이면 넉넉하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닥인데 돌탑군이 있는 먼등골 코스가 일반적이다. 까마득한 절벽 ‘상사바위’가 절묘하고, 정상에서 보는 마산 시내와 마산만(灣) 풍경도 빼어나다. 정상엔 커다란 무덤 한 기가 남아있다. 성주이씨 문중에서 적어 둔 사연을 읽자니 조선 숙종 때 북면 고암 출신의 선조가 사망하자 운구 비용 2만냥을 들여 묘를 조성했단다. 팔용산 중턱의 봉암수원지 주변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길이 제법 넓고 웅숭깊어 자분자분 걷기 좋다. ‘연인의 다리’ 건너엔 용두산 마산의 남쪽 끝자락에 저도 연륙교가 있다. 마산 사람들이 첫손 꼽는 관광 명소다. 누워 있는 돼지 형상의 저도(猪島)와 육지를 잇고 있다. 그런데 같은 이름의 다리가 둘이다. 하나는 1987년 만들어진 철교, 다른 하나는 2004년 세워졌다. 바로 옆에 새 연륙교가 놓여지면서 옛 철교는 사실상 ‘은퇴’했다. 차량통행은 금지됐고, 요즘엔 사람들만 걸어서 오간다. 빨간색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옛 다리는 ‘연인의 다리’로 불린다. 사랑도 이음이 중요하니, 별칭으로 제법 그럴싸 하다. 생김새가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 속의 다리와 닮았다고 해서 마산의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다리는 사연을 품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면 사랑이 이뤄지고, 중간에 손을 놓으면 헤어지게 된단다. 또 다리 위에서 빨간 장미 100송이를 건네주며 프러포즈하면 사랑이 맺어진다고도 한다. 다리 철제 난간에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는 자물쇠들이 빼곡히 매달린 것도 그런 까닭이다. 밸런타인데이 등 기념일이 되면 다리는 연중 최고의 주가를 올린다. 용두산(龍頭山, 203m)은 ‘연인의 다리’ 너머에 있다. 용두산 산행은 다리 왼편 버스정류소에서 출발해, 용두산 정상과 지난해 조성된 ‘저도 비치로드’(Beach road)의 제1·2·3바다구경길 등을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코스는 다소 복잡하지만 이정표가 잘 갖춰져있어 헷갈릴 염려는 없다. 먼저 용두산 정상에 오른 뒤, 섬을 에두른 ‘저도 비치로드’를 걷다가 다시 용두산 능선을 넘는다. 산행 거리는 약 8㎞.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정상만 찍고 내려올 경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용두산 정상에 서면 저도 연륙교 주변과 멀리 옛 마산, 진해 인근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나비섬, 곰섬, 닭섬, 자라섬, 고래머리 등 모양에서 이름을 딴 섬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다. 작은 산에서 보는 풍경치고는 참으로 넓다. 남해 쪽 풍경은 비치로드의 사각정자나 제1·2전망대에서 보는 게 좋다. 거제와 고성 앞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다소 오르막내리막은 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섬 산행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명불허전’ 해양관광로 저도 연륙교를 뒤로 하고 옛 마산 시내 방향으로 돌아 나오면 신촌삼거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해양관광로, 오른쪽은 1002번 지방도다. 둘 다 시내로 향한 길이지만, 다소 돌더라도 해양관광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해양관광로는 해양드라마세트장을 지나 옛 진해 시내까지 연결된다. 남해안을 끼고 도는 길 가운데 아름다운 길로 예전부터 ‘명성이 자자’ 했다. 최근 해안선 굽이마다 크고 작은 조선소들이 들어서면서 옛 정취가 적잖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도시인들이 보기엔 여전히 명불허전이다. 한 걸음에 작은 시골 포구의 고즈넉한 풍경이, 또 한 걸음엔 너른 남해의 장쾌한 풍경이 폐부를 씻어낸다. 이 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해거름 풍경이다. 장구섬 등 고만고만한 무인도 너머로 해가 지는데, 여간 장관이 아니다. 해넘이는 해 지기 전 10분, 지고난 뒤 10분이 하이라이트다. 해가 넘어갔다고 서둘러 자리를 뜨지는 말라는 얘기다. 화염에라도 휩싸인 듯, 바다와 하늘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며 색의 축제를 벌이는데, 화려하다 못해 선정적이다. 글 사진 창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5)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남해고속도로→동마산 나들목→14번 국도 통영 방면→덕동·가포 방면→덕동삼거리→ 저도 연륙교 방면 좌회전→저도 순으로 간다. 관광 명소인 만큼 여러 곳에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다. 팔용산은 동마산 나들목을 나와 14번 국도를 타고 마산역 방향으로 진행하다, 마산역 앞에서 좌회전, 양덕광장 오거리를 지나 봉양로로 갈아타면 등산로 표지판이 나온다. →맛집:저도 연륙교 주변에 굴구이 집이 여럿 있다. 마산합포구 오동동에 길 하나 사이로 ‘아귀찜 거리’와 복 요리집들이 늘어선 ‘복거리’가 조성돼 있다. 애주가라면 ‘통술거리’를 찾아도 좋겠다. 월남동 신마산 주변과 오동동 중심가 뒤편 골목길에 있다. →잘 곳:호텔 사보이(247-4455)는 한국관광공사의 호텔 체인인 베니키아 가맹점이다. 가족들이 묵어도 좋을 만큼 깔끔하고 저렴하다. 7만~10만원 선. 팔용산 가기 전 마산 수출자유지역공단 근처에 있다. 호텔 사보이 뒤편엔 모텔들이 밀집해 있다. 3만~4만원 선.
  • 해저 2400m 남극서 ‘잃어버린 세계’ 찾았다

    영국 연구팀이 남극대륙의 깊은 바다속에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4일 보도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사우스햄튼 대학과 영국 남극조사단이 합동으로 조사한 결과 남극 바다 수심 2400m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해양생물 수백 종이 최초로 세상에 공개됐다. 여기에는 군집생활을 하는 게와 문어, 불가사리, 말미잘 종(種)등이 포함돼 있으며, 모두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생물들이다. 이들 생물이 발견된 곳은 남극 대륙의 열수분출공(Hydrothermal vents·뜨거운 물이 지하로부터 솟아나오는 구멍) 주변으로, 평균 온도가 380도에 달한다. 이들은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어둠속에서 살아가지만,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연기 속에 함유된 독성화학물질을 분해해 이를 에너지로 삼는다. 이중 ‘예티 크랩’(Yeti crab) 일명 설인게 종으로 알려진 한 신종 게는 길이가 16㎝가량으로,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등 부분이 까맣게 그을려진 채 발견됐으며 이는 생물이 살기에 매우 극한 환경임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생물이 존재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생명체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며, 더 나아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생명체를 찾아내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구를 이끈 옥스퍼드대학의 알렉스 로져스 박사는 “우리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열수분출공 인근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유기체 집단을 발견했다.”면서 “탐사가 진행되는 8주 동안 연구팀 전체는 깊은 바다 속 새로운 환경에 대해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해양탐사에는 해저석유개발에 쓰이는 미니버스 크기의 무선조종장치에 수중용 카메라와 화학샘플 등을 채취할 수 있는 장비를 장착한 특수 탐사선이 활용됐다. 연구결과는 과학저널 ‘플로스 바이올로지(PLoS Biology)’ 최신호에 게재됐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열린세상] ‘시티즌 오블리주’가 더 절실한 오늘이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시티즌 오블리주’가 더 절실한 오늘이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임진(壬辰)년 새해가 밝았다. 오리무중 속 우리 시민사회의 진로는 시계 제로이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등장과 총선, 대선이 연이어 치러지는 ‘선거의 해’가 몰고 올 불안정성이 우리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한 세기 전 아픈 역사의 기억이 가슴을 찢는다. 조선왕조가 기울어 가던 개화기(1876∼1910)의 시대적 과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데 있었다. 그때 우리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 사회를 넘어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에 실패했다. 우리의 지도층은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국민으로 거듭나지 못해 일왕의 신민(臣民)이 되고 말았다. 역사는 우리의 앞길을 비추는 등대다. 실패라는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늘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적 소명은 둘로 요약된다. 하나는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된 국민국가 세우기라는 미완의 근대 과제 달성이다. 다른 하나는 혼혈인과 이주노동자와 같은 타자에 대한 차별 넘어서기, 남녀 동권의 양성 평등사회 만들기, 그리고 환경을 지키는 녹색성장 이루기 같은 근대 이후 과제이다. 이 두 과제도 중요하지만 우리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는 사회통합, 국민통합이 더 시급한 초미의 과제이다. 지금의 현실을 들여다 보면, ‘역사는 반복하는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보수와 진보’, ‘친미와 반미’. 오늘 우리 안의 이분법은 한 세기 전 망국을 초래한 ‘개화와 수구’, ‘친일과 반일’의 분열과 진배없다. 벌어진 골과 갈등의 날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국민통합의 상징인 화폐의 도안 인물이 이를 잘 보여준다. 건국에 공이 있는 인물이나 자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나 과학자들의 초상을 실은 외국과 달리 우리 지폐는 조선조 인물을 담는 역설을 범한다. 민주주의와 산업화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과 박정희, 문호 이광수, 양성평등을 외친 나혜석은 독재자와 친일파란 이유로 세종대왕, 이황, 신사임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필수적인 역사교육을 둘러싼 갈등은 최근 국사교과서 서술지침을 놓고 벌어진 자유민주주의 논쟁이 웅변하듯 봉합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무상급식과 부자 증세 같은 복지문제, 4대강 사업과 원전 건설 같은 환경문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같은 교역문제를 둘러싸고도 좌와 우, 여와 야는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같이 파국을 낳을 뿐인 치킨게임만 일삼고 있다. 한 세기 전 조선의 망국은 전제군주와 특권 양반이 책임을 져야 한다. 통치의 객체에 지나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사는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은 더 이상 훈육되는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리더를 뽑을 권리를 갖고 있는 시민은 통치의 또 다른 주체로 공동체의 번영과 안위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의 몫이 있다. 그렇기에 권력자나 지배세력의 리더십만이 아닌, 시민사회의 펠로십(Fellowship)도 중요하다.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지도층이 배려와 나눔을 체화하는 정신적 성숙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시민 모두가 자신보다 못한 사회적 약자와 타자의 권리 보호에도 눈을 돌리는 교양 있고 품격 있는, 깨어 있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일기 시작한 안철수 돌풍이 웅변하듯 시민사회는 구태의연한 기존 정치세력에 식상했다. 우리 시민사회는 갈등을 해소하고 분열을 통합하는 치유의 리더십에 목이 말라 있다. 아직 논란의 불씨는 남았지만,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한 선거운동을 막는 것이 위헌이라는 유권해석을 냈다. SNS가 만들어낸 새로운 시민 공론장이 어떤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 낼지 자못 궁금하다. 더 가진 자의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만큼이나, 시민 개개인이 갖추어야 할 도리와 의무인 ‘시티즌 오블리주’(citizen oblige)가 더없이 필요한 오늘이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0)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0)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네덜란드 출신의 그림책 작가 레오 리오니의 작품 중에 ‘잠잠이’(최근 ‘프레데릭’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가 있다. 주인공인 새앙쥐 잠잠이는 봄부터 가을까지 햇살 좋은 양지 녘에 쪼그리고 앉아 낮잠만 즐긴다. 일은 안 하고 졸기만 하는 잠잠이를 모두들 불만스러워하지만 잠잠이는 끈질기게 잠만 잔다. 그리고 새앙쥐 마을에 겨울이 찾아왔다. 대지에 찬란하던 빛깔도 요란하던 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침묵에 들었다. 새앙쥐들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권태를 견디기 힘들었다. 잠잠이가 그때 모두의 앞에 나섰다. 봄부터 가을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모아두었던 빛깔과 소리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잠잠이는 결국 침묵과 권태의 계절인 겨울에 모두에게 봄의 희망, 생명의 노래를 전해 주는 아름다운 시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 사람의 마을에 매운 바람이 불어오면 세상은 침묵으로 잦아든다. 하얀 눈까지 소복이 쌓이는 날이면 시골 들녘은 적막이 감돌 만큼 고요해진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찾아 눈길을 헤치고 도착한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들녘이 꼭 그랬다. 찬바람 맞는 게 결코 좋을 수 없는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어서 대문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다. 눈 내리는 단전리 마을에는 들녘의 커다란 느티나무만 홀로 겨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키 20m, 줄기 둘레 10.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다. 사람 없는 들녘에서 나무는 하얗게 침묵으로 잦아드는 겨울의 권태와 적막을 덜어 내기 위해 가물가물 잊혀 가는 옛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림책 속의 새앙쥐 ‘잠잠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도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줄기 안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많은 이야기를 서리서리 펼쳤다. 나무 이야기는 이곳 단전리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던 400년 전의 옛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단전리는 임진왜란 직후에 도강김씨(도강은 전남 강진의 옛 이름) 가문이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살아온 오래된 집성촌이다. 마을을 일으키는 중심 역할을 한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는 김충로라는 분이다. 산 좋고 물 좋은 자리에 보금자리를 근사하게 일구긴 했으나 그에겐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었다. 함께 하지 못한 형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충로의 형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산화한 김충남이라는 장군이다. 보금자리를 이루기는 했으나 함께해야 할 가족을 잃은 김충로는 설움을 달래지 못했다. ●단전리 입향조가 처음 심고 키운 나무 그가 마을 들녘에 나무를 심은 건 그래서였다. 물론 마을을 처음 일으킨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크게 자라서 마을에 들고 나는 악한 기운을 막겠다는 뜻도 있고, 마을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김충로라고 그런 뜻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가 나무를 심을 때에는 전사한 형, 김충남 장군의 넋을 기리자는 생각이 더 컸다. 집성촌인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가문의 선조이기도 했으니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무를 심은 김충로도 전쟁터에 나가서 형처럼 목숨을 잃었다. 전사한 형제를 나라에서 선무원종공신으로 제수한 게 그나마 가문의 한을 위로할 뿐이었다. 장군으로 불리던 사람도 그를 기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그의 동생도 장군이 되어 똑같이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들녘의 나무만 주인을 잃은 아픔을 안고 무럭무럭 자랐다. 장군 형제의 넋이 담긴 들녘의 느티나무를 사람들은 그때부터 ‘장군 나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한 해에 한 번은 나무 앞에 모였다. 장군 형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닷샛날 치른 당산제가 그것이었다. 단전리 당산제는 유난히 즐거웠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사람들은 우마제(牛馬祭)를 지냈다. ●애국 충정의 찬란한 기억으로 살아남아 농사의 동반자인 소와 말의 먹이를 나무 뿌리 주위에 가지런히 내려 놓고 소와 말의 건강을 빈 것이다. 우마제 뒤에는 나무가 바라다보이는 공터에 나무를 쌓고 불을 피웠다. 이글거리는 불 가장자리에서는 농악대가 풍물을 쳤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춤을 췄다. 사람의 풍경을 바라보는 나무도 따라서 즐거웠다. 평화롭게 세월이 흐르던 1950년, 장군의 넋과 장군 나무가 지켜 주는 단전리에 다시 전쟁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마을을 떠났다. 참혹한 전쟁의 폭풍이 지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떠난 뒤였다. 그때부터 누가 결정하지도 않았건만 우마제도 풍물놀이도 당산제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단전리에는 전쟁 전에 70가구가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20가구와 일흔 고개를 넘나드는 노인들만 남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입향조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젊은 시절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많은 어른들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세월은 마치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하얀 눈처럼 세상살이의 흔적을 하나둘 덮을 것이다.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을의 기억도 종작없이 사라질 것이다. 마을에는 하릴없는 적막감이 찾아오고, 견디기 힘든 권태감이 휩쌀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어도 나무는 옛 마을의 영화를 온전히 기억하고 우뚝 서서 찬란했던 옛 마을의 평화로운 빛깔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은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마치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에 나오는 새앙쥐 주인공 잠잠이처럼. 글 사진 장성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291. 호남고속국도의 백양사나들목으로 나가서 백양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호남선 백양사역을 조금 지나면 사가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백양로를 타고 5㎞쯤 가면 장성호 관광지에 닿는다. 장성호를 끼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을 3㎞ 가면 북하면 소재지인 약수리에 들어서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계속 3.5㎞쯤 고갯길을 넘어가면 처음으로 나오는 주유소 맞은편에 나무가 있다. 주유소 근처의 빈자리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한다.
  • [기고] 독도에 당산숲을 조성하자/최재웅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기고] 독도에 당산숲을 조성하자/최재웅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예부터 우리 선조는 터를 잡고 살 곳을 정하면, 가장 먼저 그 지역의 자연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신성한 장소를 택해 당산나무를 심고 당산 숲을 조성해 왔다. 주로 마을 뒷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동안 많이 소실되어 사라지고, 교육이 잘못되어 많은 도시민은 이러한 소중한 숲이 우리 농어촌마을에 남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당산 숲에서 마을주민들은 주로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수백년간 지내오고 있다. 또 자연재해 방지용으로 하천변 등에 비보 숲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해 왔다. 일본은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를 꿈꾸며 독도 침탈의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고, 그런 구실을 찾을 방법을 획책하고 있다. 독도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의 승패는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국가 홍보전에서 어느 나라 국가브랜드가 높은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의도대로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 재판대에 올려진다면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일본에 유리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동해 대신 일본해를 지지하는 미국, 영국이 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일본은 독도와 관련하여 지난 수십년간 국제사회에 여론전을 펼치고 국제여론을 바꾸고자 세계 각국의 교과서 출판사, 국가기관, 세계지도 보급사, 관광 가이드북, 언론사 등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로비를 펴 왔다. 독도가 세계지도에서 한국 영토로 인정받고, 일본이 독도 침탈의 꿈을 꾸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은 우리 선조가 이제껏 해 왔던 것을 독도에 실행하는 것이다. 즉, 독도에 전통마을 숲인 당산 숲·비보 숲을 조성하고 매년 당산제를 거행하는 것이다. 독도는 작은 섬이기 때문에 당산 숲이 어렵다면 당산나무 한 그루만 심어도 되며, 비보 숲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제주도 해안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사탑(防邪塔)을 조성하면 된다. 당산제를 지내는 소식이 국내에만 보도된다면 의미가 없다.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한 당산제 관련 정보가 전달되어야 한다. 제주, 제관 등 당산제를 지내는 당사자는 독도 주민, 울릉도 주민 등 민간이 주도하고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것이다. 당산제가 끝나면 보통 풍물을 앞세운 지신밟기·달집태우기 등을 하는데, 이 시간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소녀시대 등 K팝 가수들의 노래를 듣게 한다면 효과가 배가될 것이다. 즉, 당산제와 뒤풀이 과정은 CNN·BBC·CCTV 등 세계 유명 방송사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교과서 출판사, 세계지도 보급사, 관광 가이드북, 언론사 등의 관계자를 독도로 직접 초청해서 보여주고, 그 이외의 세계사람들에게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중계하는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상대국 여성들에게 천인공노할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추악한 국가로 주변국을 위협하는 믿지 못할 나라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한편, 독도에서 행하는 당산제와 뒤풀이, 곧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문화가 세계인이 즐기고 공유하는 국제적인 축제로서 올해부터 계속된다면 한국의 이미지와 국가브랜드는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며, 국제사회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김정일의 삶, 통치, 그리고 권력

    김정일의 삶, 통치, 그리고 권력

    17일 사망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사망으로 권력을 승계받은 뒤 17년간 봉건시대를 능가하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김정일 정권이 공식 출범한 것은 1998년으로 그가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뒤부터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한 것은 그가 1974년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이후부터다. 불우했던 유년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양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密營)의 귀틀집에서 김일성과 그의 전처인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북한의 발표와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으로 알려진다.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출생지에 대해서도 북한은 1980년부터 백두산이라고 선전하면서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그 이전에는 김일성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경력 때문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아명도 러시아식으로 ‘유라’로 불렸다. 김 위원장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인 김정숙과 그의 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러나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6·25 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란살이를 가야만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김 위원장의 모성애 결핍을 낳았고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은 후에 후계자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냉혹함을 보이게 했다. 휴전 이후 김 위원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후계자 발돋움 김 위원장은 1967년부터 당의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71년 부부장으로 승진했고 1973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을 거쳐 당 조직 및 선동선전담당비서라는 막강한 지위에 올랐다. 그는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 정권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김일성의 신뢰를 얻은 김 위원장은 생모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 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다음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 때부터 ‘지도자 동지’ ‘당 중앙’이라고 호칭됐으며 1975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후계자 내정을 앞둔 1972년 12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주석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또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동상, 혁명사적지 등 북한 각지에 두 부자와 그 가계를 선전하는 시설물 건설과 외국에서의 주체사상 홍보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부었다. 김 위원장은 당과 군부 등 국정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도록 체제를 정비한 뒤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호칭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변경됐다. 이후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를 모두 마무리했다. 17년 1인 독재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에 전념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가 붕괴해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된 무정부 상태와 같았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고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김정일 시대가 공식 출범했다. 김정일 시대의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이는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으며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했다. 2002년에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성대국론·신(新)사고론·실리주의 등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외교적 행보는 파격적이라고 평가받는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김 위원장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교류를 추진했다. 2000년 6월 13일에는 반세기 만의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6·15 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과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이들 국가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이어갔다. 그러나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 노력은 ‘자위적 억제력을 보유해야만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는 선군정치 논리에 묻혀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드러냈다.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다. 경제적으로는 2009년 11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해 경제적 어려움을 격화시켰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동안에도 김 위원장은 지난해 5월과 8월, 지난 5월 등 1년여 동안 세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황금평과 나진 특구 건설에 뜻을 모았으며 지난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 등에 합의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주말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MBC 일요일 밤 11시 50분) 1592년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전쟁의 기운이 조선의 숨통을 조여 온다. 민초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던 선조 25년. 정여립, 황정학(황정민), 이몽학(차승원)은 평등 세상을 꿈꾸며 ‘대동계’를 만들어 관군을 대신해 왜구와 싸운다. 하지만 조정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동계를 해체시킨다. 대동계의 새로운 수장이 된 이몽학은 썩어 빠진 세상을 뒤엎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키워 친구는 물론 오랜 연인인 백지(한지혜)마저 미련 없이 버린 채 세도가 한신균 일가의 몰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란의 칼을 뽑아 든다. 한때 동지였던 이몽학에 의해 친구를 잃은 전설의 맹인 검객 황정학은 그를 쫓기로 결심하고, 이몽학의 칼을 맞고 겨우 목숨을 건진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와 함께 그를 추격한다. 15만 왜구는 순식간에 한양까지 쳐들어 오고, 왕조차 나라를 버리고 궁을 떠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몽학의 칼 끝은 궁을 향하고, 황정학 일행 역시 이몽학을 쫓아 궁으로 향한다. ●하바나 블루스(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쿠바 아바나의 무명 뮤지션인 루이와 티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살아 가는 젊은이들이다. 자신들의 열정을 담은 첫 콘서트를 기획하던 중 실력 있는 신인을 찾으러 온 스페인의 유능한 음반 프로듀서를 만나게 되고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꿈에 부푼 두 사람은 평생 나가 보지 못했던 쿠바를 떠나 스페인 큰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음반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계약이 노예계약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루이와 티토는 고민에 빠진다. 루이는 부인과도 이혼의 위기에 놓이고 나라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티토는 자신들의 인생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잡아야 된다고 하면서 갈등을 빚게 된다. ●꼬마 유령 캐스퍼(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유령이 출몰한다는 대저택 ‘윕스태프’에 두 소년이 잠입한다. 이들은 이 으스스한 곳에서 증명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용기를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유령이 나타나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친다. 사실 이곳의 터줏대감은 꼬마유령 캐스퍼와 그의 삼촌들인 유령 삼총사다. 캐스퍼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다들 캐스퍼가 나타나기만 하면 기겁하고 도망치는 바람에 늘 외롭다. 그러던 어느 날 저택의 상속자인 캐리건과 그녀의 오른팔 노릇을 하는 딥스가 이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찾아온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캐스퍼와 짓궂은 유령 삼총사의 등장에 기겁을 하고 도망친다. 그렇게 캐리건과 딥스는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고스트 버스터스’에 철거반까지 동원하는데….
  • [‘鐵의신화’ 박태준 별세] 박대통령 제철소 특명 받아… YS와 악연으로 정치시련 겪어

    [‘鐵의신화’ 박태준 별세] 박대통령 제철소 특명 받아… YS와 악연으로 정치시련 겪어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철의 사나이’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도 병마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이 우리 근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1960년대. 모래 바람만 자욱하던 경북 포항에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의 세 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세웠다. 당시 모두가 ‘무리수’라고 비난했지만 오로지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냈다. 이런 고인의 노력을 바탕으로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t 규모의 조강 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4위권 철강사로 성장했다. 포스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국민의 성원도 있었지만 ‘박태준 명예회장’의 리더십이 보태지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철강산업과 전혀 관련이 없던 박 명예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으로 철강 왕국의 꿈을 품게 된다.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쌓았다. 이것이 훗날 이 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돼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다. 1969년 박 명예회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의 특명을 받았다. 당시 박 명예회장의 좌우명은 ‘제철보국’과 ‘우향우(右向右)정신’.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국가와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 또 ‘우향우정신’은 선조의 피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며,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또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1977년 3기 설비의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가 80% 진행된 상태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구조물을 부수고 다시 짓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박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1987년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을 설립함으로써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3개를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정치인으로서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1981년 11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와는 달리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박 명예회장은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권과 연을 맺은 데 이어 이듬해 11대 민정당 전국구(현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포스코 회장을 유지하면서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으며 집권여당인 민정당 대표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며칠 만에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합당하면서 정치적 시련을 맞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악연 때문이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더 큰 난관에 직면했다.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은 데 이어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는 등 혹독한 정치 보복을 당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5월 경북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감수해야 했고, 같은 해 7월 포항 북구 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정치적 영욕의 세월을 거친 박 명예회장은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1월 ‘21세기 첫 총리’로 발탁되면서 의욕을 불태웠지만, 불과 4개월 만에 낙마해야 했다.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다시 한번 불명예 퇴진을 감수해야 했다. 전광삼·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생명의 窓] 누비이불의 미학/차동엽 인천 가톨릭대 교수·신부

    [생명의 窓] 누비이불의 미학/차동엽 인천 가톨릭대 교수·신부

    자연세계에 ‘회색’이라는 색깔이 있다. 이 색깔을 두고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은 흑인가, 백인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흑이야!”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백이야!” 하지만 자연의 실재(實在)는 외친다. “아니야, 나는 ‘회색’이야. 회색이라고!” 비극은 사람들에게 있다. 아무도 그 색깔을 ‘회색’이라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데 우리 시대의 아픔이 있다. 자연의 세계는 다채로움의 향연이다. 색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오만 가지 색채가 각각 자기 색깔을 뽐내는 가운데 이 모두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이렇거늘, 유독 대한민국 정치판에서는 흑과 백만 존재하는 듯이 경색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회색만 입장이 난처한 것이 아니라, 빨주노초파남보로 대표되는 색의 스펙트럼 전체가 그 풍요로움을 잃고 흑백의 냉혹하고도 초라한 체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요즈음 정치 지형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지각변동을 넘어 아예 새판짜기 수준이다. 정치 패러다임이 바뀔 형국이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다. 차제에 대혁신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흑백논리가 아니라 스펙트럼 논리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그리하여 각계각층의 견해와 이권을 최대공약수로 담아낼 수 있는 정당문화가 새롭게 기반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끼여 있는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장차 통일을 이뤄 이 양국의 무등을 타고 세계를 호령할 날이 오리라는 원대한 비전을 품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 대전제가 정치발전이며 다채로운 국민 저력의 소통과 융합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너무도 크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뿐인데, 1990년대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한 제시 잭슨 목사의 유명한 연설을 접하게 되었다. 순간 전율에 가까운 감동이 밀려 왔다. “나의 경쟁자 듀카키스의 양친은 의사와 교사였고 나의 부모는 하인이요 미용사였으며 경비원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종교와 인종의 차이,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의 진수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부친은 이민선을 타고,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우리들의 앞 세대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를 함께 타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만든 이불이 아니라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합니다. 유년시절 어머니께선 털 헝겊, 실크, 방수천, 부대자루 등 그저 구두나 간신히 닦아낼 수 있는 조각천들을 모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힘찬 손놀림과 튼튼한 끈으로 조각천들을 꿰매어 훌륭한 누비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을 상징합니다. 이제 우리도 이른바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 20년이 지난 오늘의 미국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희망사항을 전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신선한 영감을 주는 발상이었다. 거의 완벽한 짜임새와 철학으로 우리에게 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는 다채로운 존재들이 서로의 ‘차이’를 뽐내고 있다. 이는 ‘경험’과 ‘관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의 소명은 그것들로 ‘누비이불’을 만드는 것이다. 누비이불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말에 공감이 간다. 누비이불은 ‘힘’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들이 연합하여 시너지를 분출하는 대자연의 다이내믹이다. 누비이불은 ‘아름다움’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들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예술의 극치다. 누비이불은 ‘교양’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지 않는 관용의 발로다. 지금 우리 앞에는 ‘다름들’이 미결의 과제로 턱하니 태산처럼 가로막고 있다. 이 다름들을 꿰매어 누비이불로 만들 줄 아는 정치공학은 언제 우리 것이 될 것인지가 자못 기대되는 것이다.
  • 연말 송년회 국립·도립·시립 예술단체 공연 한편 어떠세요

    연말 송년회 국립·도립·시립 예술단체 공연 한편 어떠세요

    세밑이다. 이맘때면 ‘국·도·시’ 문화예술단체는 팬 서비스 차원의 특별한 무대를 꾸민다. 술자리에 지친 당신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풍성하고 다채로운 공연이 마련돼 있다. 국립, 도립, 시립인 덕에 일정 ‘품질’을 보장하면서도 대중 스타나 해외단체 공연보다는 저렴하다. 대신 서둘러야 한다. ●국립오페라단 ‘갈라콘서트’-오페라, 합창·발레를 만나다 국립오페라단은 29일과 3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011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연다. 가수들이 아리아만 부르는 보통의 갈라와 달리 합창과 발레를 곁들였다. 1부는 ‘파우스트’ 등 올해 공연작 중 하이라이트를 모았다. 2부는 내년 프로그램의 맛보기다. 히든카드는 오페라와 발레가 만나는 2부 마지막 순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에 안무를 넣었다. 지난해 러시아 페름 아라베스크 콩쿠르에서 베스트 파트너상을 받은 정영재와 김리회 등 국립발레단 남녀 무용수 20명이 폴카와 왈츠가 어우러진 무대를 선보인다. 이미 VIP석(10만원)과 R석(5만원)은 동났다. 1만~10만원. (02)586-5284. ●정명훈의 서울시향-히트 상품 ‘말러’ 만날 올 마지막 기회 클래식계의 최고 히트 상품인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말러 시리즈가 막을 내린다. 정명훈 예술감독 겸 지휘자와 서울시향이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8번을 연주한다. ‘천인 교향곡’으로 불리는 8번은 8명의 독창자(소프라노 트와일라 로빈슨·이명주·캐슬린 킴,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양송미, 테너 강요셉, 바리톤 김주택, 베이스 전승현)와 대편성의 오케스트라, 합창단(국립·서울시·수원시립·안양시립서울모테트·나라오페라합장단 등) 등 5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무대에 올라 장관을 연출한다. 일부 남은 물량과 반환 표를 놓고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2만~12만원. 1588-1210. 임헌정 지휘자가 이끄는 부천필하모닉의 31일 제야 음악회(부천시민회관, 1만~3만원, 1544-1555)와 김대진 지휘자가 이끄는 수원시립교향악단의 9일 공연(경기도문화의전당, 5000~2만원, 031-228-2813)도 있다. ●국립국악원 ‘왕조의 꿈’-정조의 잔치풍경 현대적 재탄생 국악 공연도 있다. 국립국악원은 10~18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왕조의 꿈, 태평서곡’을 공연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아들 정조는 11살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정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대신했다. 혜경궁의 60번째 생일에 정조는 7박 8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정조 때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이 잔치의 진행 과정, 참석자, 춤과 음악, 심지어 쌓아 놓은 음식 높이까지 상세히 묘사돼 있다. ‘왕조의 꿈’은 이 잔치 풍경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켰다. 1만~3만원. (02)580-3300. 28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공연되는 경기도립국악단의 드라마 콘서트(‘송년 가족음악회-내 생애 가장 소중한 선물’)도 눈에 띈다. 이순재, 이주실, 송옥숙 등 베테랑 연기자들이 출연한다. 2만~7만원. 1544-2344. ●서울시무용단 ‘나우, 무브먼트’-중견안무가 3인의 노련한 몸짓 서울시무용단은 15~16일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나우, 무브먼트’(Now, Movement)를 올린다. 정혜진, 장해숙, 양대승 3명의 중견 안무가 작품으로 꾸몄다. 정혜진은 시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 3대의 관계를 다룬 ‘가문Ⅱ’를, 장해숙은 오수환 화백의 연작 ‘곡신’(谷神·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텅 비어 있기에 물이나 바람이 모여들 수 있는 계속 상태)에서 모티프를 따온 ‘화첩기행Ⅱ-곡신에서 몸을 풀다’를 선보인다. 양대승은 600년 전 선조들이 타임캡슐을 남겨 놨다면 어떤 내용을 적었을까 하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올드 & 뉴’를 내놓았다. 2만~3만원. (02)399-1766. 조태성·임일영기자 cho1904@seoul.co.kr
  • “자기변혁 때 놓친 日 자민당 결국 버림받아… 한나라 닮은꼴”

    “자기변혁 때 놓친 日 자민당 결국 버림받아… 한나라 닮은꼴”

    “일본 자민당의 붕괴를 보면서 사람이나 조직이나 진정 변해야 할 때를 놓치면 참 어려워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민당의 가장 큰 위기는 리더십의 상실이었다.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했다. 본질적인 자기 변혁을 외면해 국민에게 버림받았다. 지금 한나라당도 비슷한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변혁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지….” 3년 2개월 동안의 주일대사를 마치고 지난 6월 귀국한 권철현 세종재단 이사장은 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은 일본 자민당의 몰락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7대 국회까지 한나라당 소속으로 3선 의원을 지낸 권 이사장은 주일대사 시절 겪은 ‘역사적 사건’들을 언급하며 한나라당의 현주소를 통렬히 비판했다. 9일 주일대사 경험을 담은 ‘간 큰 대사, 당당한 외교’(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펴내기에 앞서 그를 만났다. ●“리더십 상실이 자민당의 위기” “일본 자민당은 무능과 부정부패, 세습정치에 경제 침체까지 겹쳐 무너져 내렸다. 시대정신에 맞춰 재창당의 수준을 넘어서는 투철한 자기 변혁을 이뤄내야 했다. 계란이 알 껍질을 깨야 생명체가 나온다. 그런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라는 한 사람의 인기에 기대, 안이하게 세월을 흘려보냈다. 역사적 가르침은 어느 나라에나 마찬가지다.” 권 이사장은 최근 한나라당의 모습과 관련해 본질적인 변혁의 때를 놓친 것은 아닌지, 한나라당도 역사적 사명을 다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시대정신에 맞는 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귀국해서 국민들의 절망적인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소수가 부와 지위를 독점하고 ‘그들만의 잔치’만 있다고 국민들은 여긴다. 한나라당이 무엇을 놓쳤는지 모른다면 더 심각한 상황이다.”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는 기존 정치인들에게 절망한 국민과 젊은이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찾다가 그에게서 자기 헌신과 양보, 나눔의 지도자 상을 본 탓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존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욕망의 화신처럼 비쳐졌는데, 그는 45%의 지지율로 5%의 지지율을 가진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했고, 연구소 주식을 헌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21세기 한국의 리더십으로 충분한가. 기존 리더십에 대한 단순 반발로서는 부족하다. 글로벌 리더십을 갖고 있는지, 사회적 통합과 국가 현안 해결 능력과 비전을 갖췄는지 검증과 선택은 국민 몫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도덕성의 리더십과 참신함을 보여 줬지만 무능과 시행착오로 레이건 정권을 불러들였다.” ●“왕실의궤 반환…이제 면목 생겨”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대표적 일본통 정치인으로 꼽히는 권 이사장은 대사 시절 업무 이야기를 꺼내자 굳었던 얼굴을 이내 폈다. 엊그제 환국한 왕실의궤 1205점의 도서 반환에 대해선 “선조와 국민들을 뵐 면목이 생겼다.”고 말해 그동안의 분주함을 잊은 듯했다. “지난해 8월 15일은 강제 병합 100년이었다. 총리 등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 담화는 두 나라의 새로운 100년을 맞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왕실의궤 반환도 같은 차원에서 설득했다. 일본 측도 진심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당시 8월 10일 총리 담화 직전에 내부 격론을 거쳐 의궤 반환을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민주화 이후 주일대사직 최장수인 3년 2개월을 지내면서 풍파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독도 문제와 후쿠시마 대지진이다. “대사로 와 보니 독도에 끌려다니는 외교를 하고 있었다. 우리 측은 일본 주요 인사들을 붙들고 독도 문제를 제발 꺼내지 말라고 부탁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될 말이냐. 말보다는 행동, 일본 행동에 상응하는 행동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대지진때 日서 버텨… 교민 안정” 후쿠시마 대지진 때는 처조카 결혼식에 맞춰 귀국해 있던 부인을 다음 날 불러들였고, 두 살 된 손녀를 끝까지 귀국시키지 않았다. 당시 유럽 국가들처럼 왜 긴급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느냐는 비난도 받았지만 그는 버텼다. “대사와 대사관의 조치를 주재원과 모든 재일 한국인들이 쳐다보고 있다. 방사능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라 도쿄는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여진의 공포와 위험은 있었지만 공직자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대지진 이후 3일 동안 도쿄에는 180번의 여진이 있었다. 160여명의 대사관 직원들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도쿄 현지에 남았고, 교민사회도 이를 보고 안정되기 시작했고, 긴급 대피로 인한 혼란도 없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한국과의 통화 스와프 확대를 반대하는 재무대신을 설득하던 막후 교섭 일화, 일본을 다루는 ‘포석외교’ 등도 신간 ‘간 큰 대사, 당당한 외교’에 담았다. 그는 책을 쓰고 보니 결국 리더십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조직 구성원들이 스스로 창의적으로 움직이는 ‘창발적 리더십’의 결과가 지난 3년 2개월 동안의 일본 생활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말했다. 세종연구소를 자유주의 가치의 본산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이 어떻게 진행될까. 글 이석우편집위원 jun88@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국보급 ‘훈민정음 해례본’ 훔친 범인 법정서 함구중인데…

    국보급 ‘훈민정음 해례본’ 훔친 범인 법정서 함구중인데…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됐다 이내 사라진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제작한 한문 해설서로 세상에 나왔지만 수백년간 사람들이 몰라 보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뒤늦게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무가지보’(無價之寶)라며 치켜세우더니 소유권 다툼 끝에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됐다.<서울신문 11월 11일 자 12면> 지난달 2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1호 법정. 조모(66)씨가 상주에서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해례본 상주본을 훔치고 은닉, 훼손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배모(48)씨 재판에 문화재 도굴 일인자로 알려진 서상복(50)씨가 증인으로 출석했다.<서울신문 11월 26일 자 8면> 서씨를 증인으로 부른 박순영 검사가 “증인이 절취한 고서의 표지, 일명 ‘가오리’를 보고 훈민정음 해례본임을 알 수 있었나.”라고 묻자 서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박 검사가 “경북 안동 광흥사에서 훔친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거기서 나왔다.”고 답했다. 서씨는 광흥사 대웅전의 나한상 등에 들어 있던(복장·腹藏) 수십 권의 고서를 절취했는데 그 중 한 권이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70호와 동일 판본인 상주본이었다. 그는 조씨에게 간기(刊記·출간한 연도 기록)가 직지심체요절보다 50년 앞선 고려 금속활자본 불경을 1억원에 팔았다. 며칠 뒤에는 상주본을 비롯한 고서 한 상자를 500만원에 넘겼다. 광흥사에서 훔칠 당시 상주본 상태에 대해 그는 “표지와 내용을 몇 장 들춰보고 해례본임을 알았으며 뒷장이 떨어져 나가고 너덜너덜했다.”고 증언했다. 문제는 상주본을 빨리 회수해 제대로 보존하는 일. 대법원이 지난 6월 조씨에게 상주본을 돌려주라고 판결했지만 배씨는 입을 다물고 있고 법원의 강제집행, 검찰과 경찰의 압수수색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검찰과 문화재청은 국보급 문화재를 회수하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지만 해법은 다르다. 검찰은 복장 유물이자 장물로 보기 때문에 배씨는 물론, 조씨에게서도 압수하겠다는 입장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가액을 따져 징역 25년까지 구형 가능한 점으로 압박할 수 있다고 보며 서씨를 증인으로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문화재청은 신라 때 창건된 광흥사 불상에서 불경이 아닌 상주본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선조의 유품이라고 주장하는 조씨 소유를 인정한다는 전략. 배씨를 설득해 조씨에게 돌려주도록 한 뒤 보상금을 주고 사들여 국가에서 보존한다는 복안이다. 서씨는 공판 뒤 “몰래라도 국가가 배씨에게 일정액을 보상하고 양형도 조절해주지 않으면 배씨가 절대 내놓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재판을 지켜본 문화재청 사범단속계 강신태 반장은 “범죄자에게 돈을 건네는 것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강 반장은 “배씨가 (상주시 낙동면의) 자기 집에 숨겨놓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탐침기구와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는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정밀 수색밖에 해법이 없다는 게 중론. 배씨가 3년 전 감정 받기 위해 낱장으로 분리한 상주본을 이곳저곳에 은닉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구의 고미술상 박진규씨는 “고서는 비닐에 쌌더라도 땅에 묻히는 순간, 급격히 부패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손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주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Weekly Health Issue] 태교

    [Weekly Health Issue] 태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준비한다. 그렇게 설계된 유기체가 인간이다. 물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제각각 이지만, 자신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무엇인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준비 중에서도 태교는 가장 본질적이고 의도적인 행위 중 하나다. 2세, 즉 종족의 번식이 본능이라면 태교는 그 본능의 질적 가치를 결정하는 준비된 행위에 해당한다. 이런 태교의 중요성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간명하게 설명된다. 그러나 태교의 중요성이 부각 되면서 근거가 없거나 상업적으로 태교를 이용하려는 시도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태교에 대해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강진희 교수로부터 듣는다. ●먼저, 태교란 무엇인가. 태교란 동양사상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아이를 밴 여자가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태교 개념이 서양에서도 최근 몇십년 사이에 확고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의학적 관점에서 태교는 어떻게 해석되나. 임신부의 불안장애, 우울증과 아이의 정서장애가 서로 연관이 있다는 연구에서부터 관심이 시작됐다. 이후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임신부의 호르몬, 신경전달물질이 전달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런 가운데 유전적·환경적 요인에 의해 개체의 건강이 결정되는데, 특히 초기 발달단계의 중요성에 대한 개념이 ‘태아프로그래밍 가설’로 정립되면서 태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태교가 왜 필요한가. ‘태아프로그래밍 가설’이란 유전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후 발생·분화·발달 과정에서 자궁내 환경의 영향이 태아의 각 장기 기능에 영향을 미쳐 개체의 건강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그만큼 태내 환경이 태아에게 중요하다는 과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임신부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최적의 건강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이것이 태교를 통해 한 인간의 건강과 품성, 자질의 바탕이 된다. ●태교의 조건이 따로 있는가. 태아를 위한 최적의 태내 환경은 충분한 영양상태가 기본이고, 여기에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태아의 발달을 위한 자극은 우선 다양해야 하고, 엄마의 좋은 정서자극과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임신부의 기분 좋은 오감자극과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 상태가 유지돼야 한다. 임신부에게 행복하고 좋은 정서적 감정이 많을수록 좋은 신경전달 물질의 자극이 많아지고, 이런 물질들이 태아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음악태교도 임신부가 들으면서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태교운동 역시 체형 변화에 따른 불편감 해소는 물론 임신부와 태반의 건강 증진, 기분 전환에 좋고 안전해야 한다. ●태교가 갖는 또 다른 의미가 있나. 태아와 함께한다는 행복감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태교이고, 태아를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은 엄마·아빠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이기도 하다. 부부가 함께 태아를 생각하며 뭔가를 준비를 하는 것은 이후 육아와도 연결돼 가정의 행복을 위한 중요한 투자가 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태교란 어떤 것인가. 중요한 것은 임신부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다. 여기에 오감을 자극하는 적절하고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일을 하는 여성들이 많은데, 즐겁게 일에 몰두하는 것도 좋은 태교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임신부들은 항상 태아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세상을 향한 시선을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좋은 태교를 위해 마음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라고 한 선조의 가르침은 놀라운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태교와 관련된 잘못된 속설은. 특정한 음악을 들어야 한다거나, 따로 많은 돈을 들여 가며 특정 태교 시설을 찾아 따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옳은 태교 자세가 아니다. 또 이런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자체가 태교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이미 가장 훌륭한 태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상업화된 태교에서 경계해야 할 문제는. 아이를 많이 낳지 않기도 하고, 또 늦게 아이를 갖는 여성들이 늘면서 임신·육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덩달아 이런 점을 겨냥한 태교 관련 상품이 주변에 넘친다. 대부분 효과를 과장하거나 필요없이 돈만 요구하는 것들이다. 조급해 하지 말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태교의 의미를 되새겨 임신부와 태아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기별로 태교에 대해 설명해 달라. 임신 초기는 ‘별 일 없어 보이는’ 외형과 달리 급격한 호르몬 체계의 변화와 적응 때문에 임신부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또 태아의 장기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입덧으로 대부분의 임신부가 힘들어하는 때이므로 이 기간을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태교에 집중해야 한다. 엽산 보충과 함께 입덧을 완화시켜주는 식이와 식사습관을 찾고, 충분한 휴식을 가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임신 중기에 들면 입덧도 완화되고, 서서히 체형도 변한다. 중기 이후부터는 충분하지만 과하지 않고 적절한 영양 섭취에 신경을 써야 한다. 권장 칼로리와 영양분을 고려한 식단에 신선하고 안전한 식재료를 선택해야 하고, 여기에 철분을 추가로 보충해 주면 좋다. 이때는 산모의 오감을 자극하는 태교가 중요하다. 맛있는 음식으로 미각과 후각을, 기분 좋은 소리로 청각을, 아름다움으로 시각을, 즐거운 활동으로 촉각을 자극하는 활동을 하고, 적절한 운동과 기분 좋은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30일 TV 하이라이트]

    ●행복한 교실(KBS1 오전 11시) 외국 한 번 나간 적 없지만 토플 120점 만점, 토익 990점 만점, SSAT 만점, 각종 스피치 대회와 토론 대회에서 다수 수상에 빛나는 중학생이 있다. 바로 김현수양이다. 이런 현수가 있기까지 어머니 이우숙씨가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유대인 엄마들의 ‘이중언어 교육’에 감동받아 어릴 때부터 한글과 영어를 동시에 깨우치게 했다는데…. ●TV소설 복희누나(KBS2 오전 9시) 상처를 입고 길을 헤매던 태주는 덕천 시내에서 데이트하던 점례와 달봉에게 발견되고 만다. 그렇게 자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 태주의 소식을 전해들은 정애는 극심했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혼절하고, 복희는 본능적으로 엄마라고 외치며 달려든다. 그 바람에 복희가 정애의 딸임을 모두 알게 된다. ●수목미니시리즈 나도, 꽃(MBC 밤 9시 55분) 도균을 통해 재희(윤시윤)가 병가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봉선. 재희의 빈 자리에 괜스레 시무룩해지고, 심상치 않은 봉선의 상태를 지켜보던 마루는 집으로 찾아가 보라고 조언한다. 한편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봉선의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재희는 봉선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한다. ●SBS 대기획 뿌리깊은 나무(SBS 밤 9시 55분) 이도가 만들어낸 한글이라는 것이 28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기준, 모든 백성이 글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정기준은 이도와 거래를 하려는 이신적을 막으려 하고, 한글의 위력을 알게 된 밀본은 불안에 휩싸이고 마는데…. 한편 정기준은 윤평에게 급히 이방지를 찾으라고 명한다. ●한국기행(EBS 밤 9시 30분) 경북 군위군의 한밤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바로 마을 대부분의 집들이 북향으로 지어진 것이다. 홍석규씨의 100여년이 넘는 남천 고택은 아직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팔공산의 기를 피해 북향으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기행’에서는 선조들의 지혜 서린 한밤 마을을 찾아간다. ●나는 전설이다(OBS 밤 11시 10분) 최고의 스타 자리에 있었던 만큼 인기도, 스캔들도 많았던 가수 문주란. 당시 최고의 가수 남진과 있었던 스캔들의 진상은 무엇일까. 당시 실제 사귀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예인은 가족’이라는 철두철미한 연애신조까지. 화려한 솔로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그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 본다.
  • 11년간 한전 전력선 입찰 담합 32개사 적발

    11년간 한전의 전력선 입찰에 물량배분과 가격담합으로 부당이득을 본 LS 등 32개 전선업체가 적발됐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료 때문에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한전은 이들의 담합으로 전력선 구매에 2772억원을 추가 지불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 한전이 발주하는 지하전력선 등 11개 품목의 전력선의 물량을 배분하고 낙찰가격을 담합한 LS 등 32개사를 적발하고 총 38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고 27일 밝혔다. 적발된 회사 중 LS·대한전선·가온전선·전선조합 등 4개사는 검찰에 고발됐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은 매년 한전 전력선 입찰물량의 품목별 대·중소기업 간 실행배분비율을 합의하고 기업군 내 품목별 수주 예정자를 선정했다. 입찰과정에서 선정된 기업은 99% 수준의 낙찰가를 제시하고 나머지 업체들은 이보다 3% 높게 입찰하는 방식 등으로 수주예정자가 물량을 낙찰받았다. 낙찰받은 수주예정자는 낙찰 물량을 해당 기업군에 속해 있는 기업들끼리 일정 비율로 재분배했다. 이 같은 행위는 입찰 220여회에 총물량 1조 3200억원에 대해 이뤄졌다. 공정위는 담합으로 인해 한전이 총금액의 21%(2772억원)를 추가로 지불한 것으로 추정했다. 공정위는 필요시 한전이 법위반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안도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로 송배전원가가 일부 낮춰질 전망이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씨줄날줄] 지중해/임태순 논설위원

    지중해(地中海)는 오랫동안 인류 역사, 문명의 주 무대였다. 서양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문명이 이곳에서 싹을 틔웠다. 고대 로마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화려한 제국시대를 열어간다. 아랍 이슬람은 7세기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복속시켜 사라센 제국을 건설했으며, 이에 맞서 중세 신성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오가며 십자군 전쟁을 벌인다. 지중해를 빼면 서양역사를 논할 수 없는 셈이다. 지중해는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으로 둘러싸여 있는 바다다. 말 그대로 ‘땅 가운데 있는 바다’이지만 서양 문명의 발상지였던 만큼 은근히 ‘지구의 중심’이라는 오만함도 느껴진다. 하기야 고대 그리스인들이 델포이 시를 ‘옴파로스’(지구의 배꼽)라고 했으니 이러한 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지중해는 코발트색 바다에 온화한 기후, 화려한 풍광까지 자랑하고 있어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곳이다. 여기에 야채, 견과류, 올리브 등의 식재료를 사용하는 지중해 음식은 세계인들의 건강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천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현재에 집중하라, 순간을 살라.”는 뜻을 지닌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시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평온한 바다에 붉은 태양이 없었다면 ‘오 솔레미오’라는 노래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중해는 풍요, 번성, 안온, 여유의 상징이다. 반면 같은 내해라도 남중국해, 동중국해, 동해 등은 평화, 번영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우리나라 등 인접국들의 영토분쟁이 얼룩져 갈등, 분쟁, 반목의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지중해 연안 7개국의 정권이 모두 교체됐다. 남유럽 국가들은 높은 실업 등 경제난을, 북아프리카 나라들은 장기독재에 따른 민주화 요구를 이기지 못해 무너졌다. 미국의 뉴스전문채널 CNN은 이를 두고 지중해가 ‘권력자의 무덤’이 됐다고 말한다. 이들 국가는 그동안 천혜의 자연조건과 역사유적을 바탕으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 쏠쏠한 수입을 올렸다. 특히 남유럽 국가들은 현재에 집중하고 순간에 살라는 선조들의 가르침대로 복지 등에 있어 과도한 혜택을 누렸다. 경제에는 공짜점심이 없다는데 오랫동안 공짜점심에 길들여져 온 그들이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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