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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지침이 될 한 줄 名文

    사람은 누구나 문장 하나쯤은 갖고 산다? 백범 김구 선생은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이라는 구절을 하루에 세 번씩 낭송했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뜻이다. 서산대사의 명언에 나오기도 한다. 광복 직후 어지러운 상황, 편을 갈라 싸울 때에도 늘 옳은 길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이렇듯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아가는 한 문장의 힘은 크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보다 한 줄 문장이 지닌 통찰이 오히려 폐부를 찌른다. 그렇기에 옛 선인들은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장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한 문장 덕분에 자신을 다독일 수 있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떤 문장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까. 신간 ‘새기고 싶은 명문장’(박수밀·송원찬 지음,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은 ‘당신의 가슴 속에는 한 문장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침으로 여겼던 문장들을 지금에 사는 독자들에게 새삼 던지고 있는 것. 따라서 치열하게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순히 명문만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전후좌우의 맥락이나 원문장 전체를 함께 실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틱낫한은 말했다.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지금 대지를 밟고 있는 것이고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어제라는 고통에 갇히고 내일이라는 두려움에 막혀 현재라는 선물을 발로 차버릴 수 없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날의 일을 미리부터 걱정해봐야 내 정신 건강만 해칠 뿐이다. 오늘을 열심히 살자.’(본문 141쪽) 1만 5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0)부산 나루공원 팽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0)부산 나루공원 팽나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 떠나간 사람이 그리워질 때면 옛사람들이 꺼내 들던 오래된 말이다. 함께 지내던 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편하게 지내지만,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그의 빈자리가 아쉽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다. 사람만 그런 건 아니다. 떠난 뒤에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대상으로 나무만 한 것이 없다. 나무만큼 흔한 것도 없기에 평소에는 일쑤 나무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난다. 꽃 피울 때나 단풍 물이 짙게 올라 도드라지게 화려한 자태를 보여 줄 때에만 겨우 한 번씩 바라보는 게 전부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끝 모를 공허함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이른바 ‘뒤늦은 존재감’이다. ●2010년 작별인사… 이주비 2억 5000만원 “봄에 노란 꽃을 아롱아롱 피우고, 여름 지나면 검붉은 열매를 맺는 팽나무는 마을 살림의 중심이었죠. 놀거리도 먹거리도 많지 않던 어린 시절의 모든 생활은 바로 이 나무 곁에서 이뤄졌어요. 나무 주위를 뛰어다니고, 기어오르다 떨어진 일이 다반사였죠. 여름 지나면 나무 한 가득 맺히는 조그만 열매의 맛은 잊지 못합니다.” 부산 강서구 가덕도 율리 마을 지킴이 김성진(41) 통장은 마을의 수호목인 두 그루의 팽나무가 2년 전 대형 바지선에 실려 뱃길 50㎞의 먼 길을 따라 이사 가던 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12가구만 남은 작은 마을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지만 나무에 대한 추억은 누구보다 많이 기억한다. 그러나 나무는 속절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할배나무, 할매나무라는 이름을 얻고 500년 동안 수굿이 마을의 살림살이를 지켜 주던 나무가 율리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건 2010년 3월이다. 키 10m, 줄기둘레 7m의 큰 나무를 옮겨 심는 공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두 달 넘는 준비를 거쳐 이사를 완료한 공사에는 2억 5000만원이 소요됐다. 나무가 원치 않는 이사를 채비한 건 가덕도 일주도로 개설 계획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를 설계하고 보니 도로 곁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나무 곁으로는 35가구의 살림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살림집은 적당한 보상과 함께 이주할 수 있었다. 마을의 생명줄 가운데 하나였던 마르지 않는 샘을 갈아 엎는 것까지도 사람들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을 지켜 주던 늙은 한 쌍의 팽나무가 그냥 쓰러지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무만큼은 살리고 싶었어요. 마을을 처음 일으킨 선조가 심고 대대로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 살림살이의 기둥이고 삶의 역사거든요. 나무가 쓰러지는 건 우리가 쓰러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죠. 하지만 확정한 도로 설계는 조금도 변경되지 않더군요.” ●율리 마을의 살림살이를 지켜 온 수호목 김성진 통장의 부친 김영수(76) 노인은 나무가 곧 자신의 살아온 역사 그 자체였다고 보탠다. 마을 사람들은 온몸으로 공사를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촌 사람들의 힘으로 현대화의 급속한 물결을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공사를 주관하는 쪽에서는 효과적인 완공에만 적극적이었다. 하릴없이 나무에 얹혀진 500년 삶의 무게는 산산히 부서져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때 부산시에서 나무를 살리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사 집행자 측의 계획을 절충하고자 했다. 오랜 토론 끝에 한 쌍의 팽나무를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전당’ 앞 수영강변 ‘APEC 나루공원’으로 옮겨가기로 결론지었다. “자리를 옮겨서라도 살 수 있게 됐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지만 나무가 떠난 뒤로 마을 살림살이는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지천으로 널린 피조개·새조개를 잡아서 아주 풍요롭게 살았지만, 갯벌을 갈아엎은 뒤로는 먹고사는 일이 묘연해졌죠. 살림이 힘들어질 때마다 우리를 지켜 주던 나무가 그리워질 수밖에요.” 불과 이태 전의 살림살이를 되돌아보며 한숨짓는 김 통장의 속내는 능히 짐작할 만하다. 김 통장의 손에 이끌려 나무가 서 있던 옛 마을 터를 찾았지만, 나무가 살았던 흔적은 이미 가뭇없이 사라졌다. 오순도순 살던 살림집들의 자취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여전히 마음속으로 나무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환영에 빠진다. 그러나 마을 초입의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낯선 도로가 달콤했던 옛 추억을 깨뜨린다고 덧붙였다. 나무가 사라진 자리를 감도는 공허감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온몸에 감겼던 붕대 풀고 싱그러운 잎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처음 생명의 싹을 틔운 자리에서 말없이 희망의 새싹을 틔우는 이 즈음, 율리 마을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떠난 할배·할매 나무를 만나기 위해 해운대 나루공원을 찾았다. 멀리 떠난 나무의 안부가 궁금해 도무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는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오래 바라보면서 두 손을 모으고 말없이 나무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오로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고마운 마음이었다. 옛 마을에서는 낮은 지붕 위로 삽상한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였거늘 이제 그는 거꾸로 빌딩 숲 그늘에 덮였다. 바로 곁의 넓은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도시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걸이도 나무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그가 500년을 보낸 율리 마을의 안온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그래도 나무는 미라처럼 온몸에 칭칭 감겼던 붕대를 벗고, 싱그러운 잎을 틔워 올렸다. 율리 마을 사람들의 실낱같은 안도감이 나무를 감돌자 나무는 오랜 벗을 만난 기쁨에 상큼한 바람을 허공으로 던진다. 낯선 곳에서도 끝내 생명을 내려놓지 않은 건 그동안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성장과 개발, 그리고 사람과 나무의 더 평화로운 어울림이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글 사진 부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부산 해운대구 우동 1494 APEC 나루공원. 부산 APEC 나루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주변 주차 사정도 좋으니 자가 운전을 이용하면 편리하고 빠르게 나무를 찾아갈 수 있다. 부산 시내 어디에서 출발하든 광안리 방향으로 길머리를 잡고, 광안대교 못미처에서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전당이나 신세계백화점을 찾으면 된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신세계백화점 주차장에서 나무까지는 불과 100m 남짓밖에 안 된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3) 사육신과 단종 복위

    [선택! 역사를 갈랐다] (13) 사육신과 단종 복위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난(癸酉靖難), 아니 계유사화(癸酉士禍). 어떤 사건이 크면 클수록 그 직접적인 영향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계유사화 같은 정변도 그러하다. 계유사화는 그 자체로 엄청난 살상극이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목숨을 잃은 사육신 등을 포함하면, 필자의 추산으로 70명 이상의 인재가 조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에게 불의가 무력을 이용하여 정의를 대신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뿌리 깊은 내상(內傷)을 심어주었다. 신숙주·정인지·한명회 등은 공신(功臣)이 되어 노비와 전답을 하사받고 잘 먹고 잘살았다. 홍윤성 같은 자는 멋대로 양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만행을 부려도 세조는 눈감아 주었다. 공신들의 세상. 원래 불의의 특권이 더 달콤한 법이다. ●원기(元氣)가 손상된다는 것 반면 찬탈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죽고 가족은 노비가 되었다. 이래서 뜻있거나 젊은 사람들은 세조 정권을 외면했다. 김시습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시습이 조정에서 별로 활동한 일도 없는데 자꾸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공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저항하고 비판하였으되 이름을 남기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 그것이 김시습이었다. 남효온이 젊은 나이에 과거를 그만두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김시습이 “나는 세종의 은혜를 받았으니 당연하지만, 그대는 나와 다르니 세상을 살아갈 계책을 세우라.”고 충고했을 때, 남효온은 “소릉(昭陵·문종 비 현덕왕후의 능호)이 추복되었을 때 나가도 늦지 않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조의 찬탈은 오랫동안 바로잡히지 않았다. 비판은 좌절되었고, 공신들의 득세는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사마천은 물었던 적이 있다. 왜 좋은 사람들은 해를 입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자들은 떵떵거리며 잘사는가, 하늘의 도라는 게 옳은가 그른가? 어디 사마천만 했던 질문이었겠는가? 역사 속에서 숱한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요, 지금 우리도 던지는 질문 아니겠는가? 이 질문을 던질 힘이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다. 냉소하는 것, 애써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좌절, 원기의 손상은 거기서 시작된다. 세조의 찬탈은 한동안 조선 사람들의 원기를 손상시켰다. 그것이 세조가 남긴 진짜 업보이다. ●찬탈은 간신(奸臣)을 낳고 임사홍(任士洪)은 그 아들들이 예종과 성종의 사위였으며, 이를 기회로 권력을 등에 업고 횡포를 자행하던 조선조의 대표적인 간신이었다. 도승지에 올라 유자광(柳子光)과 파당을 이루어 전횡을 부렸으며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에는 신진 사림들을 김일손(馹孫)의 사초(史草·후일 정리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관이 그때그때 적어놓는 1차 자료) 사건에 얽어 숙청하였다. 무오사화는 아다시피 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의 비위사실을 있는 대로 적은 사관 김일손 등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애도한 글이라고 몰아가 모반죄로 얽음으로써 일어난 사건으로 연산군 폭정의 서막이었다. ‘조의제문’을 종종 한글을 읽는 호흡에 따라 ‘조의-제문’하는 식으로 읽는 분이 있는데, ‘조-의제-문’하는 식으로 읽어야 한다.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한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김종직이 실제로 세조의 찬탈에 비유하여 이 글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임사홍 등이 그 글을 세조 찬탈을 풍자한 것이라고 하여 김종직 등을 모반죄로 얽었던 데는 그 글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세조찬탈의 명분에 대해 임사홍 일당과 김종직 등 사림들 간에 첨예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 명분의 차이는 경제 정책의 기조, 정치 운영의 원칙 등의 차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역사의 인과응보는 참으로 알 수 없어,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세조 때의 공신들은 무덤에서 죄를 받았다. 딸 둘을 왕비로 들여보냈던 공신 한명회나 공신 정창손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생모 폐비(廢妃) 윤씨가 사약을 받았을 때 동조했다는 이유로 연산군에게 보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홍귀달, 이유녕 등 다수의 사림 역시 해를 당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었지만, 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 등 개혁세력들이 공신세력들의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았던 공신들이 왜 또 사화를 일으켰는가? 공신이라는 특권을 제한하려는 조광조 등의 견제에 대한 반격이었다. 그리고 반정공신의 행태는 세조시대 이지러진 특권의 향유와 행사를 본받았고, 그 결과 출발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영화를 위한 특권을 형성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타락했다. ●기억하는 사람들 언제부터 사육신을 사육신이라고 불렀을까? 단종은 언제부터 노산군이 아닌 단종이 되었으며, ‘노산군일기’는 언제부터 ‘단종실록’이라고 불렸을까? 중종 때 소릉을 복위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인데, 어머니 최씨와 아우 권자신(權自愼)이 처형된 뒤 폐위되었고 능의 석물이 훼손되었다. 중종 8년 반정의 기운이 남아 있어 다행스럽게도 소릉은 복위되었다. 그러나 단종과 사육신은 여전히 금기 대상이었다. 사림정치가 본격화하는 선조대에 이르러서도 이들에 대한 복권은 여의치 않았다. 선조 2년 어느 날 경연에서, 퇴계와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그들의 의도는 상왕(단종)을 복위하려는 것이었는데 세조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오해하였다.”며 복위를 건의한 일이 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기대승의 논리는 세조에 대한 ‘반역’과 상왕 복위를 분리하여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실은 이 논리밖에는 없었다. 이미 사육신이 세상을 뜬 지 100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기대승의 문제 제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선조 9년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가져다 본 선조는, “내가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데도 떨린다. 지난날 우리 광묘(光廟·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필묵을 놀려 국가의 일을 드러나게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아조(我朝)의 죄인이다.”라고 단언했다. 민간에서 알음알음 전해오면서 읽어오던 책이 ‘육신전’이었는데, 이는 곧 금서(禁書)였던 것이다. ●군(君)에서 대군(大君)으로 그러나 당색을 막론하고 노산군을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이어졌다. 곧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바꾸는 일이 현실화했다. 숙종 7년(1681), 그러니까 숙종 즉위년부터 정권을 담당했던 남인(南人)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1680)으로 실각하고, 서인(西人)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 7월 무더운 어느 날의 낮 공부(晝筵) 시간에 숙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정실의 왕비 소생은 대군이나 공주라고 부르니, 노산군도 대군으로 불러야 한다. 대신들은 의논하라.” 이에 따라 논의한 결과 대신들도 대군으로 고쳐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숙종의 견해는 참으로 기발했다. 이것은 이 사건에 대해 200년 이상 축적된 합의가 낳은 대안이며,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위한 여러 단계 중의 하나였다. 원래 노산군이라고 할 때의 ‘군’(君)은 서자(庶子) 왕자에게 붙이는 칭호와 글자는 같아도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폐위된 임금을 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에서 만든 역사 기록 범례의 하나였다.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숙종의 착상인지 이전에 어떤 의논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위의 논리는 노산군에게서 ‘폐군’의 혐의를 벗기고 ‘적실 왕비의 왕자’라는 지위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단종’으로, ‘충신’으로 이로부터 10년 후, 숙종은 노량진에 자리한 사육신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복관 조치를 내림과 함께 사당에도 편액을 하사한다. 당시 이미 민간 차원에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오던 터였다. 그러므로 편액을 내리는 것으로 사당 건립을 사후 승인한 셈이었다. 이런 배경에는 숙종 6년, 강화유수 이선(李選)이 세조도 아들인 예종에게 ‘사육신은 충신’이라고 유시(諭示)했다는 것을 근거로 사육신을 정려할 것을 요청했던 상소에서도 나타나듯이, 사육신을 충신으로 표창해야 한다는 공론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숙종 24년(1698)에는 현감(縣監)을 지낸 적이 있는 신규(申奎)가 노산대군의 왕호를 회복하라고 상소했다. 이후 숙종은 조정의 신하는 물론 지방관과 이미 관직을 그만두고 초야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의견을 묻도록 하였다. 한 달 뒤인 10월에 숙종은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노산대군의 왕호를 추복하게 하였다. 단종이 영월 땅에서 승하한 지 햇수로 242년 만의 일이다. 이후 곧바로 온 나라의 축하 속에 단종 복위가 반포됨으로써, 강봉된 노산군은 243년 만에 후손들에 의해 단종으로 복원되었다. 우리가 장희빈만 기억하는 시대, 조선사람들의 유전인자에 냄비근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기나긴 역사바로세우기가 마무리되었다.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국가기관 보유 콘텐츠 7만건 민간 무료개방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쓴 ‘계원필경’, 18세기 실학사상의 최고봉이었던 박지원의 ‘연암집’ 등 국가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문집 등이 민간에 무료로 개방된다. 행정안전부는 18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화정보센터에서 국가 데이터베이스(DB) 사업으로 디지털화한 역대 선조들의 문집과 한국 전통 문양 원형 등 7만 건에 가까운 자료를 공개한다.”면서 “원문 자료는 상업적 활용, 가공 등에 필요한 저작권을 확보해 제공하는 만큼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영리·비영리 목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계원필경, 연암집 외에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이의 ‘율곡전서’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역대 저명한 문집을 디지털화해 기계 가독형 문서(XML 형식)로 제공한다. 또 연화문수막새와당 기와 문양, 채화문단 복식 문양 등 전통 문양을 디지털화해서 공유자원포털(Data.go.kr)에서 내려받을 수 있게 했다. 모두 6만 9606건이다. 단 고전번역총서 177건은 문집총간(973건), 전통 문양(6만 9606건)과 달리 심의를 거쳐 비영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범위를 한정지었다. 이로써 지난해 7월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 중 모바일용 앱 등 신규 서비스로 재창출할 수 있도록 만든 공유자원포털의 콘텐츠 이용 빈도는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지금까지 9696건의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 등이 민간에 제공됐다. 장광수 행안부 정보화전략실장은 “국가 DB로 구축된 가치 있는 공공 정보가 민간 분야에서도 자유롭게 활용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제공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면서 “이번에 개방한 자료들 역시 교육용 콘텐츠, 민간 포털의 백과사전, 게임 그래픽 디자인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돼 문화 한류를 더욱 확대, 재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데스크 시각] 철강왕 드라마에 대한 오해/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데스크 시각] 철강왕 드라마에 대한 오해/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풍광이 좋은 전남 여수에서 해양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여러 볼거리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탄성을 자아낸다고 한다. 그런데 눈여겨볼 명물이 박람회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여수 진입부에 개통된 이순신대교는 우리나라를 사장교 첨단기술의 세계 6번째 자립국에 올려놓은 자랑거리다. 이순신대교는 광양과 여수산업단지를 이어주는 길이 2.2㎞의 사장교. 높이 270m의 주각 2개와 직경 5.35㎜의 케이블 2개가 무게 4t짜리 왕복 4차로 상판을 거뜬하게 잡아당겨 준다. 케이블 속에는 지구를 두 바퀴나 돌 수 있는 초고강도 강선 1만 2800가닥이 촘촘히 엮여 있다. 사장교는 유연하면서도 질긴 철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과를 과시하려고 1851년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산업박람회를 열었다. 이때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명물 중의 하나가 세번 강에 만든 최초의 ‘아이언 브리지’(철교) 콜브룩데일 다리다. 철의 단단한 성질만을 이용한 길이 42.7m의 작은 아치교인데, 지금 보면 초라할 뿐이다. 하지만 산업혁명 전까지는 철의 가치가 은에 견줄 만했고, 그런 철을 378t이나 들여 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도록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철은 인류 역사에서 힘과 기술의 상징이었다. 고대 터키 지역의 히타이트는 처음으로 철을 제련해 강한 무기와 전차를 제작, 최강국 이집트를 누르고 제국으로 변신했다. 로마는 강하고 날카로운 글라디우스 칼로 세계를 제패했고, 아랍은 더 예리한 시리아 다마스쿠스 칼로 유럽의 십자군을 물리쳤다. 철광석에서 철재를 추출하는 것은 보편적인 기술이었다. 하지만 누가 앞선 제련술을 갖고 철을 떡처럼 주무르느냐에 그 운명이 달렸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철의 기술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고구려의 찰갑은 로마 판갑의 성능을 능가했고, 또 우리는 철의 녹는 점이 1538도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터득해 선진 주물법으로 우수한 농기구를 찍어낼 줄을 알았다. 일본도(日本刀)의 원형질은 고대 한반도의 도래인(渡來人)에게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오늘날과 같은 제련술로 철의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다. 뉴욕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마천루와 디트로이트에서 쏟아지는 자동차를 통해 미국이 강대국으로 변모하는 토대를 만든 주역이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우리에게 옛 ‘철의 강국’을 되돌려준 인물로 평가된다. 6·25전쟁 후 폐허가 된 한반도에, 칼바람만 불던 황량한 포항에 맨손으로 제철공장을 지어 현재의 포스코가 있게 했다. 포스코는 꿈의 제철 기술이라는 ‘파이넥스’ 설비 등을 통해 우리 철강사를 다시 쓰고 있다. 얼마 전 포항시와 한 드라마 제작사가 박 명예회장의 일대기를 그린 TV극을 만들려고 하다가 제동이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방송사 측이 예정대로 12월에 드라마가 나가면 대선과 맞물려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 점이 답답하다. 아마 박 명예회장과 여권의 유력한 대선 후보(정확히 후보의 아버지)와의 어떤 연관성, 시대적 배경 등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그건 지나친 해석이다. 드라마 제작진의 생각은 단순히 박 명예회장의 서거 1주기(12월 13일)에 맞추려는 것뿐이지, 달리 무슨 복선이 있겠는가. 그걸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이나,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사람이나 모두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우주 탄생 때 26번째 원소인 철은 초기 별의 죽음으로 비롯된 초고온과 초고압에서 제 몸의 구조를 쪼개며(핵분열) 27번째 원소인 코발트를 탄생시켰다. 철은 여전히 뜨거운 불 속에서 자신의 순수한 결정을 드러낸다. 철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카네기가 철강업에 뛰어든 지 1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철강왕 드라마를 보고 싶다. kkwoon@seoul.co.kr
  • 정몽주 고향 영천에 ‘제2의 선죽교’

    정몽주 고향 영천에 ‘제2의 선죽교’

    고려 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1337~1392)의 충절이 깃든 선죽교가 그의 고향 경북 영천에 새로 조성됐다. 영천시는 13일 “포은 정몽주 선생 서거 620주년을 맞는 오는 24일 임고면 양항리 임고서원에서 성역화 1단계 사업 준공식을 갖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한 이 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에 세워졌으며, 선조 36년(1603년)에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를 위해 시는 2006년부터 임고서원 일대 부지 4만 7000여㎡에 198억원을 투입해 선죽교, 유물전시관(포은유물관), 생활체험관(충효관), 연못 등을 조성했다. 준공식에서는 고유제, 지신밟기,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송탑비 제막식 등을 가지며 ‘포은 선생 재탄생’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도 열린다. 문학제, 학술대회, 전국청소년미술실기대회 등 부대행사도 열린다. 시는 내년부터 2018년까지 500억원을 투입해 정몽주 생가 중창, 단심로 조성, 부래산 및 유허비 정비 등 임고서원 성역화 2단계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김영석 영천시장은 “영천이 낳은 포은의 충효사상을 재조명하고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선죽교(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는 고려시대인 919년(태조 1년) 송도(지금의 개성시)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다리로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 널다리이다. 이 다리는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보낸 일파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영천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8) 경북 의성 사촌리 향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8) 경북 의성 사촌리 향나무

    이 땅에 처음으로 초록 세상을 일군 건 나무였다. 초록의 땅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은 나무가 좋았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여름 뙤약볕을 피했고 비바람 눈보라도 나무 둥치에 기대 이겨냈다. 그래서 사람은 나무 곁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사람은 그 보금자리 앞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더 심었고 오래도록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가 아프면 사람도 아팠고 나무가 쓰러지면 사람의 집도 덩달아 무너앉았다. 사람과 나무와 집은 서로 다른 개체이지만 하나로 연결된 생명체였다. 식물과 동물, 심지어 주변의 모든 무생물까지 아우른 ‘천지만물이 본디 사람과 한 몸’이라는 양명학(陽明學)의 만물일체설이 바로 그것이다. ●유성룡의 외조부, 벼슬 버리고 내려와 심어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다고 할 만큼근사한 정취가 느껴지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안동 김씨 만취당파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랜드마크는 김사원(金士元) 선생이 살던 고택이다. 선생의 호를 그대로 따서 만취당(晩翠堂)이라 이름한 이 집의 대청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하늘 가장자리에 걸리는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 바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인 의성 사촌리 향나무다. “내가 향나무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이만큼 좋은 향나무는 그리 많지 않을걸요. 500살이나 된 나무가 젊은 나무 못지않게 싱싱한 데다 잘생기기도 했잖아요.” 나무 그늘에 기대어 자리 잡은 살림집에 사는 김재열(79) 노인은 가만히 선조의 얼이 담긴 나무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나무를 심고 애지중지 키운 사람은 김 노인의 방계 13대조인 조선시대 문인 김광수(金光粹, 1468~1563)다. 서애 유성룡의 외조부인 김광수는 연산군 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벼슬살이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이 마을에서 시를 읊으며 평생을 보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그는 강가에 영귀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짓고 자연에 묻혀 안분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사촌리 향나무는 500년 전에 그가 손수 심은 여러 나무 가운데 한 그루다. 오래전부터 선비들이 살던 사촌리는 여태까지 전통 가옥을 보존하고 덧붙여 몇 채의 초가를 복원해 옛 전통 선비마을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옛날에는 아주 큰 마을이었지요. 한창 때 400가구가 넘게 살았는데 지금은 죄다 떠나고 고작 60가구만 남았어요. 천천히 돌아보면 알겠지만 옛 모습은 많이 남아 있어도 지금은 빈집 투성이예요.” 사촌리를 대표하는 만취당 역시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살아있는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건 만취당의 기와가 도도하게 빚어낸 곡선에 맞닿은 채 당당한 기품으로 서 있는 사촌리 향나무다. ●모진 풍파 이겨내고 하늘로 치솟은 가지 사촌리 향나무는 키가 8m에 불과하고 나뭇가지도 사방으로 3m 정도 펼쳤을 뿐이다. 규모에서 결코 큰 나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옛 선비의 전통과 품격이 남아있는 마을 중심을 지키고 서 있는 나무의 기품은 여느 향나무를 훌쩍 뛰어넘는다. 나무를 스쳐 간 모진 풍파를 이겨낸 자취라도 되듯 나무는 몽실몽실 피어나는 뭉게구름처럼 올망졸망 덩어리를 이뤘다.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점잖게 뻗은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이룬 덩어리는 하늘로 솟구쳤고 저마다 끝 부분은 뾰족하게 마무리했다. 줄기 곳곳에는 가느다란 가지들을 정성껏 다듬어낸 흔적도 눈에 들어온다. 정원수로 잘 가꾸려 애쓴 옛 사람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광수가 살던 당시, 마을의 길가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소나무를 좋아한 그는 무시로 소나무 그늘을 찾았다. 더불어 그는 권세와 부귀를 좇지 않으며 소나무 그늘에 머무르는 은자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송은(松隱) 처사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 심고 키운 한 그루의 나무에는 ‘만년을 살아야 할 소나무’라는 뜻에서 만년송(萬年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가 심은 나무는 사실 향나무다. 자연에 묻혀 자연의 생명을 닮으며 살았던 그에게 향나무와 소나무를 구별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무처럼 제 본분에 만족하는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자 한 그에게 세상의 모든 나무는 하나로 연결된 생명이었을 뿐이다. 평생 자연을 벗했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일생을 모범으로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천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던 그의 가르침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연과 하나 되는 만물일체설의 삶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많이 오면 나뭇가지가 조금씩 부러지기도 하고 잎이 떨어져 내 집 지붕에 쌓이지요. 청소가 번거롭기야 하지만 그걸 불편하다고 할 수는 없죠. 그게 다 자랑스러운 선조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지요.” 선조들이 가꾸어 온 자연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 노인의 느릿한 말투에 사람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옛 선비의 자연주의 정신이 배어 있다. 선조의 정신을 올곧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후손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이되 그 가운데 사람의 마음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양명학의 정신에 다가선 지혜를 닮은 생각이다. 노인의 지혜로운 말들이 사뿐히 내려앉은 나무 그늘에서는 무더기로 피어난 파란 빛깔의 제비꽃이 생명의 노래를 외장쳐 부른다. 나무와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사람의 맑은 마음을 따라 피어난 풀꽃이 빚어낸 선비마을의 늦은 봄 풍경이다. 글 사진 의성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5. 중앙 고속국도의 남안동나들목으로 나가서 3㎞ 가면 나오는 운산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의성 방면의 국도 5호선을 이용한다. 1.4㎞ 가면 나오는 교차로에서 고운사 방면의 오른쪽 나들목으로 나가 고가도로 아래로 좌회전한 뒤 다시 우회전하여 4㎞ 남짓 간다. 팽목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9㎞ 가면 후평 삼거리에 닿는다. 좌회전하여 4㎞쯤 가면 사촌리 가로숲이 나오고 길가에 주차장이 보인다. 나무는 마을 안쪽에 있으나 주차 공간이 없으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는 게 좋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통영 충렬사 앞 여황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통영 충렬사 앞 여황로

    길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삶 사이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대처로 떠나는 자식의 발걸음이 잠시 떨리며 머뭇거렸음을, 옷고름 사이로 떨어진 어미의 눈물방울이 짭짜름했음을 동구밖 길은 아주 오래 기억했다. 동네 사이마다 아로새겨진 길이 2014년부터 우리네 삶의 새로운 주소로 본격 쓰인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잠시 낯설더라도 이내 편안해질 것임을 믿는다. 동네를 감아 도는 길에는 감칠맛 나면서도 예쁜 이름이 오롯이 붙어 있다. 서울신문은 매주 그 길의 결마다 숨겨진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 여기에 남겨진 의미를 되새겨본다. 1930년대 중반 그 봄,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으면 통영 앞바다가 훤히 펼쳐졌을 게다. 여황산자락 아래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이어진 집들을 지난 눈 속에는 쉴 새 없이 고깃배가 오갔고, 부푼 꿈을 안고 오는 이, 또 다른 꿈을 이고 타향으로 떠나는 이가 엇갈리는 낡은 선창이 비쳤을 테다. 하지만 사랑을 잃은 사내에게는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도 오롯이 아름답기 어려웠으리라. 한참 나중에 호사가들이 통영을 일컬어 ‘한국의 베니스’ 운운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칭송했지만, 스물넷 평안도 출신의 청년시인 백석(1912~1995)에게는 실연의 상처가 훨씬 컸을 수밖에 없었다. 백석은 사랑을 위해 멀리 남쪽 바다까지 헛걸음을 반복해야 했다. 한 번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다른 두 번은 사랑을 기억하며 가슴 먹먹함을 달래기 위해 찾았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이 돌아올 리는 없는 법. 통영을 다녀왔던 길은 그의 작품 속 중요한 지역의 하나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으로 갈무리됐다. ●삼도수군통제영 복판 여황산 끼고 돌아 백석의 발길로부터 80년 가까이 흐른 5월에 통영을 찾았다. 그가 시 ‘통영1’에서 묘사한 것처럼 통영 여황로에는 마침 ‘김 냄새 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차들은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고, 타관의 학생들을 실은 수학여행 버스들은 줄을 지어 여황로 길을 지나고 있었다. 여황로는 174m의 야트막한 여황산(艅山)에서 비롯된 이름의 길이다. ‘여황’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임금이 아끼던 화려한 배로, 훌륭한 군세를 갖춘 큰 전선을 상징했다. 통영항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산세를 펼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복판에 자리잡은 산이니 딱 걸맞은 이름이다. 도로명 새주소를 만들기 전까지 통영 사람들은 그저 산복도로라고만 불렀으나 이름을 붙인다고 했을 때 여황로라는 이름을 다는 것에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통영시 북쪽 여황산 아래쪽으로 4113m 이어지며 문화동, 북신동, 명정동 등을 감싸고 돈다. 통영은 현대문화예술의 보물창고와도 같다. 특히 여황로 하면 일단 백석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여황로 251번 충렬사 앞에는 백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2’라는 시다. 편의상 ‘통영1’, ‘통영2’라고 했지만 발표 당시 원래 제목은 모두 ‘통영’이었다. ‘통영2’는 그가 통영에 대해 쓴 시편 중 가장 길고 유려하며 음율을 잘 살렸다. 그는 ‘통영2’에서 이곳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또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에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고 노래했다. 사랑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여황로 길가에 앉아 한껏 달떠서 혼자 히죽거리는 백석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곧 깨지고 말 단꿈이었지만. 여기에 원체 아름다운 통영의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왔으니 시인의 시심이 절로 우러났을 것임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백석 시비 앞 명정샘 박경리가 소설에 써 ‘난’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막 문청을 벗고 등단해 시인이 된 그는 한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통영 출신의 이화고녀 졸업반이던 박경련을 만나고, 첫눈에 반해 사귄다.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그는 박경련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통영을 찾았지만 걸음이 엇갈려 만남이 어긋나게 됐다. 난의 집이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이 그의 직장(조선일보)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가 난과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다. 사랑과 친구를 함께 잃은 아픔 탓이었을까. 그는 그해 조선일보를 그만뒀다. 그리고 기생 자야(子夜·본명 김영한·역시 백석이 붙여준 애칭이다)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나눴고, 고향집 부모님의 성화에 다른 여인과 혼례를 치렀지만 다시 자야에게 돌아갔다. 1940년 자야마저도 떠나 고향땅인 신의주, 정주로 갔다. 그가 통영에 대해 직접 남긴 작품은 ‘통영 1, 2’ 외에 ‘남행시초2-통영’ 등 모두 세 편이다. 특히 ‘남행시초2-통영’ 시편 마지막에는 난의 외사촌 오빠인 ‘서병직씨에게’라고 적었다. 그를 통해 통영 장터며 선창 등을 둘러봤음을 알게 해준다. 백석이 들여다본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골 명정샘은 지금도 여황로 시비 앞에 있었다. 충렬사 문화해설사인 옥복주(47)씨는 “일(日)정과 월(月)정 두 개의 샘이 있어 명정(日+月=明井)이 됐다.”면서 “1670년 만든 이후 몇 년 전까지 330년 넘도록 식수로 썼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은 여전히 맑지만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통영2’ 중)을 찾을 수는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명정골은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1926~2008)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문장 속에도 그 흔적을 흩뿌려 놓았다. 박경리는 명정골에 대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고 했다. 박경리의 생가는 여황로 충렬사 주차장 맞은편 바로 곁의 좁은 골목길인 ‘토영 이야길’을 따라가면 있다. 새주소로는 충렬1길 76-38이다. 하지만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표지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남편과 사별한 시조시인 이영도(1916~1976)에게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무려 5000통의 연서를 보냈던 유부남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사연이 남겨진 곳도 그리 멀지 않다. 유치환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중)고 노래했던 통영중앙우체국(세병로 5)은 여황로에서 서문로를 따라 7~8분 남짓 내려오다가 세병로(청마거리) 오른쪽으로 접어든 뒤 3~4분쯤 걸어가면 있으니 그리 멀지 않다. ●지긋한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읊어 이른 아침 여황로 어귀에서 만난,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는 늙수그레한 중년의 김모(58)씨는 “그 사람들이야 먹고살만 하니까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썼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유치환, 이영도의 ‘아름다운 불륜’이며, 시인 김춘수, 화가 김용주,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박경리 등 통영 출신 예술가의 이름들을 줄줄이 들먹였다. 흔히 돈을 잘 버는 동네에서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들 하는데, 통영이라면 ‘중늙은이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소설 한 토막쯤 읊조린다.’는 말이 좋이 쓰일 법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후딱 오른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통영시내 쪽으로는 강구안길이며, 여황산이 보이고, 다도해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산도, 매물도, 그리고 멀리 대마도까지 한눈에 푹 안긴다.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과분할 만큼의 통영이다. 이곳의 길 위에서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그 옛 기억과 향취까지 가져간다면 더욱 어울릴 법하다. 글 사진 통영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역사의 보고 통영의 길들 동피랑·서문까꾸막… 토박이말 길이름 천국 통영은 바다의 왜적들과의 싸움, 그리고 평화에 대한 바람으로 다져진 곳이다. 통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뚜벅뚜벅 들어감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세운 뒤 ‘통영’이라는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통제영의 약칭에서 따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충렬사와 통제영의 일종의 객사 역할을 했던 세병관(洗兵館·세병로 27), 그리고 북포루(北樓) 등은 통영 출신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이고, 다른 지역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 필수 방문지다. 길 이름 역시 이러한 역사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세병로, 충렬로 등은 물론이고 통제영을 굳게 지키던 문들도 이름을 남겼다. 동문로(東門路)와 서문로(西門路)는 모두 옛 통영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였던 동문과 서문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두 문 모두 고갯마루의 정상쯤에 위치해 있었으니, 통영 토박이들의 말로 ‘동문까꾸막’(동문고개), ‘서문까꾸막’(서문고개)이라고 불렀던 길들이다. 북신로(北新路) 역시 통영성 북문 바깥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세병로와 여황로 사이를 잇는 갈림길인 운주길은 옛 통제영의 관아였던 운주당(運籌堂)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남해안대로에서 갈래져 나온 원문마을길은 통제영 입구였던 원문성(轅門城)에서 따온 마을 이름을 달았다. 이 밖에 통영을 찾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동피랑길은 정겨운 마을 벽화로 유명하다. ‘피랑’은 벼랑을 일컫는 통영 말이다. 통영시의 동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통영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자랑한다. 통영성과 동포루(東樓)의 유적이 있다. 이는 서피랑길 역시 마찬가지. 서쪽 벼랑 즈음에 있으며 통영성과 서포루의 유적이 복원 과정에 있다. 통영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구조조정 아직도? 저축銀 주가 급락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저축은행의 주가가 급락했다. 지난 6일 영업정지된 한국저축은행의 계열사인 진흥저축은행이 거느리고 있는 경기저축은행을 팔기로 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저축은행 구조조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8일 진흥저축은행 주가는 1830원으로 전거래일보다 14.99%(320원) 하락했다. 서울저축은행과 푸른저축은행도 각각 11.53%(170원), 9.91%(365원) 내린 1305원과 3320원을 기록했다. 증시에 상장된 6개 저축은행 중에 영업정지 처분으로 거래가 중지된 솔로몬·미래저축은행을 제외하고 신민저축은행만 전날보다 6.68% 상승했다. 이날 저축은행 주가 급락은 솔로몬·미래저축은행의 퇴출 후 업계 4위인 진흥저축은행마저 불안해 계열사인 경기저축은행을 매각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날 한국거래소의 조회공시에 진흥저축은행은 “재무건전성 향상을 위해 자회사인 경기저축은행의 매각을 추진했지만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지난 6일 금융당국 관계자는 “한국저축은행 계열사 중 한 곳의 경영개선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날 진흥저축은행과 경기저축은행의 예금 인출액은 지난 7일의 절반 이하를 기록해 뱅크런(대량 인출 사태)은 없었다. 이성원기자 lsw1469@seoul.co.kr
  • ‘육지속의 섬’ 경북 영양 오무마을 이야기

    ‘육지속의 섬’ 경북 영양 오무마을 이야기

    경북의 3대 오지로 불리는 봉화, 영양, 청송. 그중 한 곳인 영양은 높은 산마루에 갇혀 있는 심심산천의 고장이다. 내륙 깊숙이 자리한 탓에 찾아가는 길 또한 멀고도 힘든 영양은 면적이 서울의 2.5배나 되지만, 울릉도 다음으로 적은 인구 2만 명이 사는 오지 중의 오지이다. 7일부터 11일까지 매일 밤 9시 30분에 방영되는 EBS 한국기행에선 척박한 환경을 일구며 자연 그대로의 청정함을 간직한 영양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한다. 8일 방송에선 육지 속의 섬, 오무마을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지 중의 오지 영양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립무원으로 손꼽히는 오무마을. 끝없이 펼쳐진 산속에 자리한 마을의 모습이 마치 외로이 떠있는 섬과도 같아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린다.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디딜방아는 쌀이 없던 가난한 시절 할머니들이 보리나 쌀을 빻아 먹던 추억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오무마을에는 디딜방아와 함께 세월을 간직한 집이 있다. 200년 된 초가집을 지키는 김통분 할머니다. 열아홉 살에 시집 와서 평생을 함께한 초가집은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일까. 세월의 흔적을 피해 옛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오무마을 사람들을 만나 본다. 9일 방영되는 3부에선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소개한다. 영양의 또 다른 수식어는 바로 ‘문향의 고장’이다. 이 수식어를 대변해주는 영양군 석보면의 두들마을은 석계 이시명 선생이 세운 재령이씨의 집성촌이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맘때쯤의 두들마을은 겨우내 낡은 고택의 문풍지를 새로 고쳐 바르고, 한 해 요리에 사용될 된장을 뜨는 등, 고운 봄 풍경이 펼쳐진다. 또한, 영양에는 340년 전의 요리법과 음식 저장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 장계향이 쓴 ‘음식디미방’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한글 조리서로, 146가지의 요리법과 음식 저장법이 기록돼 있다. 양반가의 음식이 후대에도 전해지길 바랐던 장계향 선생의 마음을 잇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현재 재령이씨 13대 종부 조귀분씨이다. 그는 음식디미방 회원들과 함께 맛을 재현해내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통을 지키며 사는 두들마을 사람들을 만나 본다. 10일 방송에선 일월산이 품은 맛, 각종 산나물을, 11일 방송에선 씨름인 이봉걸씨와 함께 시골 오일장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영양장의 모습을 전한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열린세상] 한미 FTA 피해의식 언제까지 가려나/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열린세상] 한미 FTA 피해의식 언제까지 가려나/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2012년 4월 23일 한 신문은 ‘맥쿼리 건드리면 ISD 대상, 9호선·광주순환로 인수 난관’이라는 제목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가 현실적 위협이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불평등한 한·미 FTA로 국가기간시설에 대해서도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고 과대 포장되어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그러나 보도는 진실을 과장한다. 원래 FTA 투자자국가소송제도의 본질은 자본의 국제거래를 활성화하고 안정성을 담보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가 국제 표준적인 상거래 관행을 준수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경제질서를 규율하여, 국제 자본투자자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 객관적인 분쟁해결제도를 확보해 주자는 것뿐이다.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시장으로 변모하는 오늘날 해외자본의 활발한 유치는 경제 번영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해외투자자 입장에서는 경제거래가 국제 표준적인 상거래와 거리가 멀고 예측이 어려운 경제 후진국가에는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진출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전쟁의 폐허에서 단기간 내에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것을 전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우리 부모 세대가 오직 불굴의 열정과 맨주먹으로 기술확보 경쟁에 뛰어든 것은 불가능으로 보였었다. 당시의 기술 도입 계약이나 차관계약을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노예계약이었을 것이다. 선진 기술보유국가나 금융자본국가들은 보잘것없는 우리 기업들과 기술양여계약이나 차관공여계약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 세대는 그들이 요구하는 곳곳에 숨겨진 지뢰밭 같은 불공정한 계약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성실과 근면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현실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미국 유학 중의 개인적인 경험은 더욱 위험했다. 로스쿨 앞에 있는 월세 1000달러짜리 아파트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서 조문만 100여개다. 내가 아파트에서 마약을 하다가 가스밸브를 잘못 건드려 화재를 유발하여 소방관이나 경찰이 출동, 아파트 입주민들이 입을지도 모를 물적·정신적 손해는 물론이고 특별히 정신적·육체적으로 연약한 사람이 입은 특별한 손해에 대해서도 배상하고…. 말도 안 되는 불평등 계약이라고 해서 아쉬운 내가 계약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러나 나는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하게 학업을 마쳤다. 미국은 원래 계약의 나라이고 문서의 나라이다. 보도된 사례의 경우에 원래 지방자치단체의 계약은 FTA 투자자국가소송의 대상도 아니다. 실제로 소송이 전개되려면 손해는 직접투자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했다고 하는 경우에도 지방자치단체의 인수행위와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모든 조건을 충족한 경우에도 해외투자자들은 마지막으로 정책 판단을 할 것이다. 대한민국처럼 역동적인 나라와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투자자들은 영원히 대한민국을 떠날 것이 아니라면 소송은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필요성이고 우리 기업들의 대처방법이다. 생각하건대 한·미 FTA를 현실적으로 불공정한 조약으로 전이시킬 가장 위험한 요소는 오히려 내부의 패배주의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의 소송 촉구와 피해 자초 발언이다. 또한 원정파업과 정권 타도 같은 정치적 노사분규로 해외 투자자에게 손해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 투자자국가소송이 발동될 위험성이 더 크다. 그러한 행동들은 모두 국제적 상거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행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의 피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무리 위험하고 불공정해 보이는 조건도 결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 갈 수 있는 DNA의 저력이 있다. 그럼에도 도대체 언제까지 한·미 FTA의 위험성이나 문제점에만 매몰되어 있을 것인가? 피해의식과 위험의식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계약의 나라 미국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부조건을 달아서 한·미 FTA를 체결한 것에 대해 제발 더 이상 패배의식을 가지지 말자.
  • 못난 수컷들…“원시인보다 힘·미모·성적 능력 못한데… 솔직하지도 못해”

    못난 수컷들…“원시인보다 힘·미모·성적 능력 못한데… 솔직하지도 못해”

    “지금 이 책을 읽는 남자나 이 책을 선물로 받을 남자는 역사상 가장 ‘못난’ 남자다. 아, 토 달지 말라. 당신은 못난 남자다. 이상.” 이렇게 포문을 여는 ‘남성퇴화보고서’(피터 매캘리스터 지음, 이은정 옮김, 21세기북스 펴냄)는 읽는 내내 배꼽을 잡게 만든다. 저자는 제목 그대로, 오늘날 남성이 옛 시절 원시인 남자만도 못한데다, 그럼에도 감히 옛 조상보다 진화했다고 잘난 척해대고 있다고 논증하는 호주의 고고인류학자다. 첫 포문에서 짐작하듯 저자의 입담은 보통 아니다. 마지막 결론도 이런 식이다. 호모 에렉투스를 현대 세계에 데려와 마이크를 쥐어준다면 예수의 목소리를 비틀어 “아들들아, 아들들아, 어찌하여 나를 버리느냐.”라고 할 것이라 해뒀다. 그렇다면 각론으로 들어가서, 어떤 분야로 비교해볼까. 저자는 두운도 맞췄다. Brawn(힘), Bravado(허세), Battle(싸움), Balls(운동능력), Bards(말재주), Beauty(미모), Bairns(육아), Babes(성적 능력) 등 8개 분야다. 힘, 허세, 싸움, 운동능력이야 그럴 만도 하다. 영화 ‘300’, 미드 ‘스파르타쿠스’를 떠올리면 된다. 근육이 너무 현대적이고 인위적으로 부각됐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늘씬 쭉쭉빵빵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옛 남자들이 현대 남자에 비해 육체적 힘에서는 월등할 것이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생존이 달렸으니 말이다. 다만, 저자가 풀어놓은 다양한 사례들을 쭉 읽은 뒤 다시 ‘300’과 ‘스파르타쿠스’를 본다면, 잔혹하고 야한 장면들이 흥행을 위해 적당히 과장을 섞어넣은 게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는 차이점은 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재주, 미모, 육아, 성적 능력 분야다. “그래 원시인이라면 힘은 강할 테지. 그러나 우리 문명화된 남자들은 그런 거 가지고 으스대는 유치한 짓 따윈 안 한다구.”라면서 거듭 자기위안해왔던 남자들을 처절하게 짓밟아 나간다. 아니, 철따라 유행따라 옷 맞춰 입고 화장품 바꿔가며 피부관리하고, 여자 앞에만 서면 목소리 톤을 바꾸고 부드럽게 배려하는 태도로 환심사려고 불철주야 노력을 하고, 결혼 뒤엔 다정다감한 아빠가 되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낮에는 짐승들 쫓아다니다가 밤에는 툭하면 강간하듯 여자를 취하던 원시인들만 못하다고? 이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 두가지만 뽑자면, 하나는 미모. 저자는 영국의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을 불러낸다. 베컴은 10년간 89가지 헤어스타일을 갈아치웠을 정도로 멋을 부린 남자다. 여성스럽다는 비난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답하고, 동성애 잡지 기자로부터 당신이 동성애자의 우상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찬사를 많이 받아서 좋다.”고 응수했다. 그런데 아프리카 니제르의 우다베족이 치르는 게레올축제에 비하자면 베컴의 치장은 새발의 피다. 게레올 축제는 3명의 미녀가 최고의 남자를 뽑는 행사다. 이를 위해 우다베족 남자는 화장을 하고, 구슬로 만든 의상과 벨트를 차고, 깃털머리장식을 한다. 남성적 아름다움을 이으려 잘생긴 아들을 얻기 위해 아내가 잘생긴 남성과 동침하는 것도 허락한다. 아프리카 중부 투아레그족은 아예 남자들이 온몸을 베일로 감싸고 다닌다. 여자가 남자의 아름다움에 충격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고대 타히티족 남자는 백옥 같은 피부를 위해 사춘기가 지나면 아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아닌 남자가. 다른 한 가지는 성적 능력. 저자가 이번에 불러오는 인물은 LA레이커스 센터로 활약하면서 한 경기당 100 득점 등 NBA 기록만 72개를 보유하고 있는 농구선수 월트 체임벌린이다. 체임벌린은 농구실력 못지 않게 난잡한 파티를 즐기는 실력이 유명했고, 스스로도 2만명의 여자와 즐겼다고 떠벌렸던 사람이다. 늘 그랬듯, 저자는 체임벌린 따윈 상대가 안 된다는 이런저런 사례를 제시하는데, 이건 직접 읽는 게 좋겠다. 저자가 이 같은 얘기들을 늘어놓는 이유는 뭘까. 빨리 포기하라는 거다.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람 속(屬) 가운데 ‘몸집이 작은 수컷’에 속한다. 다만, 오랑우탄처럼 솔직하지는 못하다. ‘몸집이 작은 수컷’ 오랑우탄은 적어도 자신의 2등급 지위를 인정하고 활용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덩치 큰 수컷’의 가면만 쓰려고 한다.” 인간, 그것도 선조에 비하자면 힘쓰는 일은 물론, 아이 돌보기와 여성 만족시키기 등에서 선배들에게 한참을 못 미치는 주제에 킹콩 가면 쓰고 으스대며 돌아다니지 말라는 얘기다. 그래서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실체를 홀라당 벗긴 김정운 교수가 떠오른다. 모였다면 정치 얘기에 핏대 올리다가, 밤이면 룸살롱에 가서 폭탄주나 돌려돌려 하다가, 어쩌다 쉬는 날엔 우르르 산에 몰려다니면서 막걸리나 퍼마시다보니, 은퇴해서 명함 떨어지고 나면 할 일이 없다는 거다. 그러고보니 김 교수의 주장도 결국 한시 바삐 덩치 큰 킹콩 수컷의 가면을 벗어던지라는 제안이다. 그게 씁쓸한 일인지, 아니면 바람직한 일인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540초의 성공’ 운영모드 돌입… 나로호 세번의 실패는 없다

    ‘540초의 성공’ 운영모드 돌입… 나로호 세번의 실패는 없다

    10월에는 ‘실패의 교훈’을 결실로 바꿀 수 있을까. 지난 2009년과 2010년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Ⅰ)의 1차, 2차 발사를 연달아 실패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은 2차 실패 이후 2년 반 만인 오는 10월 3차 발사를 앞두고 있다. 1차와 2차 실패 이후 명확한 실패 원인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의 교훈조차 얻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도 불구,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의 나로우주센터에서는 지난 2년간 꼬박 매달려온 3차 발사 성공을 위한 연구가 한창이었다. 발사까지 5개월여의 시간을 앞두고 있지만 이미 운영모드에 접어든 센터에서는 발사 당일의 긴장감이 먼저 찾아와 있는 듯했다. ‘540초’(로켓발사부터 위성 궤도 안착까지 걸리는 시간)의 성공을 위한 수년의 도전, 그 결실을 확인할 수 있는 나로우주센터를 지난 26일 찾았다. 26.46㎢의 면적에 3000명 내외의 인구를 가진 작은 섬 외나로도는 2009년 이후 국내 우주개발 기술의 상징성을 갖게 되기 전까지 수려한 풍광을 가진 조용한 해안마을로 더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바다에 나가 섬을 바라봤을 때 비단을 펼쳐놓은 모양새라 해서 이름 붙여진 나로도(老島)는 여전히 한적한 마을이지만 나로호 발사 때마다 수백명의 연구진과 1000여명이 넘는 취재진이 모여드는 최첨단 과학기술의 집결지다. ●9월 나로호 총조립 돌입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우주센터의 발사대는 남해바다의 수려한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한 해발 380m의 절벽 위에 서 있다. 발사대의 위치는 로켓 발사 시 안정적인 발사각 확보와 로켓의 비행경로가 인근 국가의 영공을 통과하지 않는지, 발사 후 분리된 우주발사체의 낙하지점에 대한 안전성 등을 고려해 세워졌다. 2009년 완공된 지하 3층 깊이의 발사대는 러시아에서 제공한 2만 3000여 페이지의 상세 설계문서를 전부 우리나라에 맞는 수치와 단위로 바꿔 6000여장의 설계도면을 다시 그리는 과정을 통해 지어졌다. 민경주 나로우주센터장은 “당시 설계도면을 한 장 그릴 때마다 전부 러시아의 사인을 받아야 했다.”면서 “이 과정을 통해 기술 이전을 거부한 러시아로부터 많은 기술을 배워 현재는 90% 이상 부품에 대해 국산화를 이뤘다.”고 말했다. 항우연 연구진들은 현재 발사 4시간 전부터 나로호에 추진체와 산화제 등을 충전해 주는 케이블 마스터와 발사 순간까지 나로호를 지지해 주는 450t 무게의 발사패드의 시스템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항우연은 제1발사대 인근에 1t급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제2발사대를 세울 예정이다. 항우연은 이달부터 본격적인 발사 준비 일정에 돌입한다. 이달에는 상단 개선과 보완조치를, 6월에는 상단 탑재부 상태 모니터링에 들어간다. 7월에 상단과 1단을 우주센터로 이송해 점검한 뒤 8월에 발사대 시스템 점검이 완료되면 9월엔 나로호 총 조립에 들어간다. 로켓의 성능 점검과 조립과정에 쓰이는 지상장비 점검도 한창 진행 중이다. 발사체 종합 조립동에서는 나로호 1단과 동일한 지상검증용 기체(GTV)를 이용, 발사 직전까지 성능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지상검증용 기체는 실제 러시아에서 조립하고 있는 1단과 엔진을 제외한 크기와 무게, 각종 전자장비 등 모든 것이 동일하다. 실물크기의 모형(목업·Mock-up) 엔진을 단 이 기체는 러시아에서 개발한 1단 로켓이 들어오기 전까지 실제와 같은 환경에서 나로호 발사 준비를 하는 데 쓰인다. 조광래 나로호 발사추진단장은 “지상 검증용 기체를 우리 센터에 남기는 문제를 두고 러시아와 실랑이를 벌였다.”면서 “우리 우주개발 기술 발전에 두고두고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온 연구진 16명도 현재 조립동에 머물며 1단 로켓을 들여왔을 때 검사해야 할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3차 성공 위해 2단 FTS 화약장치 제거하기로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나로호 3차 발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과거 두 차례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 그 자체다. 지난 2009년 8월 첫 번째 발사된 나로호는 이륙한 지 216초 만에 한쪽 페어링이 분리되지 않아 바다로 추락했고, 2010년 6월 2차 발사 때는 1차 발사 때보다 더 짧은 136.7초 만에 발생한 통신 두절로 제주 남단의 공해로 추락했다. 나로호 발사의 성패는 지상에서의 이륙부터 위성 궤도 진입까지 단 540초 안에 좌우된다. 연구진들은 1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의 성공을 위해 시험과 개발,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김승조 항우연 원장은 “100% 준비를 완벽하게 해도 아주 작은 것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주 발사체”라면서 “로켓은 완벽 속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항상 있다.”고 말했다. 항우연은 10월로 예정된 3차 발사의 성공 가능성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 두 가지 기술을 변경한다. 지난해 한·러 공동조사단의 실패 원인 분석 과정에서 제기된 2단부 비행종단시스템(FTS) 에러 가능성에 대비해 FTS에서 화약장치를 없애기로 했다. FTS는 발사체의 비행 궤적이 잘못돼 민가 피해 등 문제가 예상될 경우 자폭하기 위한 장치다. 항우연은 또 폭발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위성 상부 페어링 분리장치의 고전압 기폭장치를 저전압으로 바꾼다. 저전압 장치는 고전압 장치에 비해 방전이 안정적이지만 전자파 장애를 많이 받는다. 조 단장은 “지난 3월까지 저전압 장치 전자파 환경시험을 마쳤다.”면서 “비행체 개선조치를 마무리 짓고 발사대와 발사체 통제센테에 대한 점검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고흥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동양사상·건축의 신비?… 왜곡·연출로 덧입혀진 그 실체를 증명하다

    동양사상·건축의 신비?… 왜곡·연출로 덧입혀진 그 실체를 증명하다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김경일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서현 지음, 효형출판 펴냄). 두 책을 덮고 나면 귀에서 환청이 들린다. “데끼놈!” 위대한 선조의 얼과 숨결이 담겨 있다고 누누이 배우고 가르쳐온 것들을 뒤집어 봐서다.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인 신화 대신 구체적인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쯤 된다. 그럼에도 마냥 불편하지만도 않은 것은 독자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는 점이다. ‘선수’들 사이에선 일부 알려진 내용이지만 독자와 함께 상상하고 추리해 보는 점이 매력 포인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 같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살을 더 붙이자면 ‘동양고전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중화사상으로 인해 오염되고 뒤틀린 전통’이란 입장이다.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의 저자 이름 ‘김경일’을 보면 아마 낯익다 싶을 독자도 있을 것이다. 환청이 들리는 게 무리만도 아닌 게, 1999년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 펴냄)로 유림을 벌컥 뒤집어놨던 한국인 갑골문 박사 1호이자 상명대 중문과 교수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비유한다. “클래식 복서에게 무에타이 발길질을 해댔다.” 동양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경전을 중심으로, 그러니까 절제된 풋워크와 스윙을 통해 복싱이 폭력이 아닌 예술임을 주장하는 것이 기존의 연구라면, 자신의 연구는 피와 땀이 튀기는 원시적 폭력성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우아함은 잊으라는 거다. 저 언급에서 드러나듯, 책은 동료나 친구들에게 얘기를 건네듯 써놔 읽기에 어렵지 않다. 책을 펴면 일단 4장 ‘기상천외한 정치적 레토릭’부터 읽길 권한다. 동양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역사적 배경설명이어서다. 중국 고대 상(商)나라 왕의 계보는 무정-조경-조갑-형신-강정-부을-문무정으로 이어지는데, 저자는 건국초기 어정쩡한 타협을 타파하고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에 목숨을 건 조갑의 쿠데타와 이에 대항해 부을 시대에 이뤄지는 무당과 연계된 기존 토속권력자들의 반동적 복고운동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 부분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쉽게 풀어 쓴 것인데, 정치적 급변과 거기에 따른 사회문화적 변동을, 갑골문에서 ‘제’(帝)자를 어떻게,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를 대들보 삼아 추적해 들어간다. 이렇게 고대 중국 사회에 대한 워밍업이 끝났다면 이제 처음으로 돌아와 동양문화의 뿌리, 공자를 만날 차례다. 저자는 복서가 아니라 무에타이 선수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재보는 잽을 던지느니 바로 상대방의 숨통에다 킥을 날린다. 바로 온 천지사방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다. 자기계발과 처세술을 다루는 온갖 책들뿐 아니라, 공자를 봉건제국의 이데올로그라고 손가락질해야 할 좌파들마저 ‘옛 동양고전 읽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소.’라며 고르는 책 가운데 하나가 논어다. 이유가 뭘까.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이처럼 기꺼워하는 데다, 논어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좋은 말씀들 중에 배우고 익히는 것에 대한 얘기를 제일 앞에다 배치할 정도니 공자는 정말 성인답구나 하는 감탄이다. 저자는 피식 웃는다. 갑골문에 기반한 해석은 이렇다. “왕실 제사를 진행하는 궁궐에서 제례 절기에 따라 제반 절차를 실제로 실습하는 과정이,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춘추전국시대 때 묵가에서 유가 무리들을 일러 제사상을 쫓아다니며 단물만 빨아먹는 ‘상갓집의 개’라 부르며 경멸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사실 후대 유학자를 괴롭힌 공자의 개인사 가운데 하나는 공자가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비유적으로 쓰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들판에서 결합한 것이다. 제사를 그토록 강조한 공자건만, 야합의 결과물이었기에 정작 공자는 제사 지낼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많은 학자들은 원시난혼과 모계사회 풍습이 남아 있던 당시에 야합은 별스럽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곤혹스러운 것은 공자가 밥 먹고 화장실 갈 때조차도 성인의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고 굳게 믿은 후대 유학자들이었다. 말씀이야 해석을 달리해 분칠하면 그만이지만, 어느 날 밤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원나이트 스탠드를 즐긴 결과물이 공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공자 역시 이게 걸림돌이었다. 야합이 흔한 풍속이었다지만 그건 하층민 얘기고, 지배층은 그렇지 않았다. 출세욕이 강렬했던 공자는 지배계층의 문화를 깊이 연구해 그 속에 편입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지배계층의 문화란 요즘 말로 ‘상위 1% 계층의 이너서클 파티’라 부를 수 있는 제사다. 공자가 어릴 적부터 제사놀이에 심취했었다는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해서 학습(學習)이란 끝없는 배움의 열정이 아니라 권력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추파다. 나도 공부 많이 해서 잘 아는데 왜 안 끼워주느냐는 호소다. 저자가 공자와 노자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노자는 “집요한 사색가”이지만 공자는 “사유라 이름짓기조차 초라”하다고 평하는 이유다. “혈족의 끈이 없었기에 당시 주류사회에서 벼슬을 할 수는 없었던” 사람, “파티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그 파티 멤버로는 참가할 수 없는 사람”, “바로 파티에서 서빙하던 사람”, “당시 귀족들의 주류문화에 심취한 제례 마니아”,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례 평론가”에 불과했던 사람, 그게 공자의 실체라는 것이다. 저자는 동양고전을 통해 “인간의 가치나 정신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고 한다.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중화사상이다. 그런 순수한 마음이 실은 “중국인들과 중화사상이 오랫동안 만들어낸 해석에 충실”한 것은 아닌지 되묻는 것이다. 저자는 갑골문을 통해 중화주의가 덧칠한 신화를 벗겨내고, 권력의 간계가 스며든 핏빛 역사를 복원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이 다시 읽힌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로. 책에는 공자의 논어뿐 아니라 주역과 노자 등에 대한 다양한 얘기가 실려 있다. 갑골문을 통해 붕(朋), 도(道)처럼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여러 한자들을 달리 풀이해 주기 때문에 읽는 맛도 상당하다. 1만 7800원.
  • 사명대사 가사·장삼 밀양서 첫 일반공개

    사명대사 가사·장삼 밀양서 첫 일반공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명대사가 직접 착용한 가사와 장삼이 밀양시립박물관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밀양시립박물관은 23일 올해 임진년을 맞아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자 탁월한 외교가인 사명당 송운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호국의 대성(大聖) 사명당 송운대사’ 특별기획전을 오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연다고 밝혔다. 개막식은 29일 오후 7시에 한다. 이번 특별전은 사명대사의 유품과 당시 외교활동 관련 유물을 통해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특히 사명대사가 직접 착용한 금란가사와 장삼 진품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한다. 사명대사의 가사와 장삼은 중요 민속자료 제29호로 밀양 표충사에 보관돼 있다. 사명대사의 가사는 선조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중국의 황금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가로 270㎝, 세로 80㎝이다. 흰색의 무명으로 만든 장삼은 길이 144㎝, 품 55㎝, 등솔에서 소매 끝까지 화장 길이는 143㎝이다. 밀양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인간’ 허균의 기개와 번뇌

    허균(1569~1618) 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설 ‘홍길동전’이고, 더 나간다면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한정록’ 정도일 터. 늘 그의 작품이 먼저이지 정치와 사상에서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이자 최고의 시인, 문장가, 파직과 재기용을 되풀이한 관리로서의 모습은 쉽사리 언급되지 않는다. 선조~광해군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고민이나 ‘점잖은’ 사대부 사회에서 아연실색할 돌출행동 때문에 파직이 거듭되면서도 문학적 역량과 방대한 지식으로 재기용될 수밖에 없던 인물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허균의 기개가 한껏 드러나는 듯한 제목을 달고 나온 신간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지음, 정길수 편역, 돌베개 펴냄)는 그의 면모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시집이자 정치철학서이며 문학평론이고 자서전이다. 허균에게는 명예와 이익을 향한 욕망을 벗고 은거하고픈 마음이 일생 내내 교차했다고 한다. 해서인지 ‘압록강을 건너며’, ‘진상강에서’, ‘수레 위에서’ 등 많은 시에서 ‘어디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이 가득하다. ‘이대로 떠나 산방 주인 되면 어떨까/내 책 일만 권을 차례대로 꽂아 놓고’(‘설날’ 중에서)라는 소망을 가졌던 허균은 ‘어떡하면 만년에 내 마음 지킬까/옛사람의 책 읽고 또 읽으리라.’(‘읽고 또 읽으리라’ 중에서) 바랐지만 2년 후 역모죄를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은 신랄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고, 그중에서도 호걸스러운 백성(豪民)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이지 한 사람이 윗자리에서 오만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수령 노릇을 하는 자는 호민이 출현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유명한 ‘호민론’이다. 대단한 독서광인 허균은 평론도 명쾌하다. ‘양한연의’는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고, ‘제위’는 졸렬하고, ‘수호전’은 속임수가 교묘하니 모두 교훈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 호평받은 ‘수호전’을 박하게 평가한 것은 오늘날 수호전을 재평가하는 목소리와 맞닿아 있어 흥미롭다. 이 책 한 권으로 당대의 천재든 혁명가든 반항아든, 허균을 두고 적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어떤 삶의 결을 가졌는지, 어떤 사상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95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목수 양성 사관학교’ 청도한옥학교를 가다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목수 양성 사관학교’ 청도한옥학교를 가다

    우리 고유의 전통 주거가 사라지고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비롯해 서양식 주택이 들어선 지 오래다. 간혹 길을 가다가 한옥을 마주하면 문득 그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상을 놓고 누울 수 있는 널찍한 마당과 시원한 대청마루, 햇살이 은은히 비치는 창호. 그리고 처마 밑 풍경이 아름다운 ‘한옥’.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 느끼는 답답함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창호·처마·대청마루의 건강함을 찾아 최근 한옥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내 손으로 직접 한옥을 짓는 방법을 배우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찾아간 곳은 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산 중턱에 위치한 ‘청도한옥학교’. 전통 한옥의 맥을 잇기 위해 설립한 지 10년째 되는 일명 ‘목수(木手) 양성 사관학교’다. 정문 구실을 하고 있는 일주문을 뒤로하고 학교에 들어서자 나무 향기가 물씬 풍긴다. 목재를 쌓아 놓은 실습장과 실습생들이 만든 사모정과 육모정이 곳곳에 눈에 띈다. 지금 47∼49기(기별 3개월 과정) 교육생 80여명이 한옥 공부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참선과 요가로 마음을 다스린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 한옥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된 한옥을 지을 수 있다는 일념에서다. 교육생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대학생부터 공무원, 중소기업 사장, 교사, 교수, 금융인, 한의사, 현직 목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직업군을 아우른다. 변숙현(52) 교장은 “간혹 손수 한옥을 지어 살고 싶어 찾아온 사람도 있지만 목수의 길을 걸으려는 전업 희망자, 한옥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한옥학교의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했다.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한옥에 대한 꿈과 열정은 하나같이 뜨겁다. 대구에서 온 한의사 신명훈(61)씨는 “노부모를 모시고 아파트에서 일곱 식구가 사는데 식구들의 건강을 챙겨 주는 집을 짓기 위해 지금 짬을 내서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풍수에 맞는 한옥 마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전남 순천의 마흥식(54)씨와 서울에 살다 귀농을 결심한 강정수(39)씨는 전업 목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교육생은 대학생부터 사장까지… 9년간 2000명 졸업 목수로서의 기초과정을 배우고 나면 30여명의 수강생이 직접 나무를 깎고 기둥을 세워 한옥을 짓게 된다. 심화과정은 6개월에 걸쳐 진행된다. 기초이론 과정을 마친 2학년생들의 실습장에선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손길이 분주하다. 홍일점인 고선미(33)씨는 서울 대치동의 영어 학원 강사 출신이다. 그녀는 “아직은 대패질이 서툴지만 조금씩 늘고 있다는 교수님 칭찬에 어깨가 아픈 줄도 모른다.”며 웃는다. 교육과정이 끝나면 교육생들이 함께 한옥 한 채를 짓는데 그렇게 해서 세운 한옥건물이 많기도 하고 양식도 갖가지다. 청도한옥학교는 2003년 문을 연 뒤 지금까지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중 70%가 목수가 됐다. 변 교장은 “선조들의 멋과 지혜에, 현대인의 가치관과 기술을 접목해 시대에 걸맞은 한옥을 짓는 법을 가르치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서툰 솜씨로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을 하며 저마다의 꿈을 담아 자연과 더불어 사는 멋을 배우며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 이들 초보 목수들이 흘리는 땀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창조했던 한옥의 문화를 재음미해 본다. 글 사진 jongwon@seoul.co.kr
  • [서울광장] 시대정신 잘 읽어야 대권이 보인다/구본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시대정신 잘 읽어야 대권이 보인다/구본영 논설위원

    4·11 총선은 역대 어느 총선보다 뜨거웠다. 연말 대선의 전초전다웠다. ‘정권 심판론’과 ‘거대 야당 견제론’이 창과 방패처럼 부딪쳤다. 그 맨 앞줄엔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 등 대선주자들이 섰다. 또 다른 대선 잠룡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투표 독려 멘션을 날리며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무대의 열기에 비해 관객들은 심드렁했다. 조국 교수와 김제동·김미화씨 등 야권 성향 소셜테이너들이 투표율 제고 치어리더로 나섰다. 안철수 원장은 “투표율이 70% 넘는다면 미니스커트 입고 노래까지 하겠다.”고 했다. 조(兆) 단위 ‘무상 시리즈’ 공약도 넘쳐났다. 그런데도 투표율은 54.3%에 그쳤다. 생뚱맞은 상상일까. 선거 유세 무대와 객석의 온도차를 느끼면서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로 만든,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다. 주인공 개츠비는 참 이중적 인간이었다. 가난 때문에 실연한 뒤 밀주사업으로 떼돈을 번 속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옛 연인 집 건너편에 대저택을 짓고 밤마다 파티를 열어 첫사랑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순정파였다. 개별 유권자들도 개츠비처럼 양면적일 수도 있다. 이번에도 지역주의에 휘둘리거나 포퓰리즘에 흔들리는 유권자들이 적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긴 눈으로 보면 유권자의 총합으로서 국민은 언제나 현명했다. ‘위대한 국민’은 이번에도 투표 참여를 통해, 혹은 ‘거기가 거기 같은’ 이전투구 선거판을 외면함으로써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고 봐야 한다. 그 결과는 야권연대(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의 패배로 귀착됐다. 이른바 여권의 트리플 악재(레임덕, 측근 비리, 민간인 사찰 파문)로 인해 야권이 유리할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민심의 번지수를 잘못 짚은 업보다. 애당초 국민의 바람은 여야의 상대 당에 대한 네거티브가 아니라 스스로의 집권 역량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을 듯싶다. 영화 속 개츠비가 간절히 기다린 것은 첫사랑 데이지였지, 파티에 몰려든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입에 발린 칭송이 아니었듯이…. 그럼에도 선거 직전 민주당은 여당 시절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론과 제주 해군기지 무효화론을 들고 나왔다. 첫 실착이었다. 이후 통합진보당의 경선조작 파문과 나꼼수 김용민 후보의 저질 막말 파문이 터졌다. “유영철을 풀어 미 국무장관 라이스를 ××해 죽여야 한다.”니, 상식으로 이해가 될 말인가. 그런데도 대응 태도가 더 나빴다. 물러난 민주당 한명숙 당시 대표는 나꼼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통진당 이정희 대표는 “김 후보를 신뢰한다.”고 했다. 민심을 들을 요량은 않고 진영의 논리만 오만하게 들이댄 꼴이다. 이러니 지역적으론 충청과 강원, 성향 면에서 중도층이 야권연대에 등을 돌렸다고 봐야 한다. 가뜩이나 야권연대의 지나친 ‘좌클릭’에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던 유권자들이었다. “과격한 이들의 억지와 열정은 중도층에 염증만 안겨줄 뿐”이라는 진보논객 진중권 교수의 분석이 그럴싸하다. 그렇다고 해서 새누리당 박 비대위원장의 대선 가도에 청신호가 켜진 것인가. 여당의 서울·수도권 총선 성적표는 외려 그 반대 징후다. 박 위원장이 여전히 수도권의 젊은 민심 흡인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야권연대를 중심으로 한 진보진영,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 등 범보수진영의 정당 득표율은 48대48이었다. 대선 레이스는 이제부터인 셈이다. 연말 대선에서 승리하려는 주자라면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 ‘시대정신’은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옥타브 높은 목소리에 있지 않음을 이번 총선 결과는 말해준다. 대선주자들이 보수든 진보든 양 극단에 속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다수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kby7@seoul.co.kr
  • “살아있는 전통문화 체험해요”

    선조들의 숨결과 옛 정취가 살아 있는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다음 달 18일부터 20일까지 제19회 낙안 민속문화축제가 열린다. 낙안 민속문화축제는 여수세계박람회 기간 ‘살아 있는 전통문화, 찾고 싶은 낙안읍성’이란 주제로 선조들의 삶과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전국 가야금 병창 경연대회와 임경업 군수 부임 재현 행렬, 수문장 교대의식, 낙안읍성 두레놀이, 전통 혼례식, 평양 예술단 공연, 전통무예 등 다채로운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이번 축제에는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꺽기도’ 출연진을 특별 초청해 초·중·고생은 물론 젊은층들을 위한 세대공감 프로그램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 또한 단순히 보고 스쳐가는 관광이 아닌 옛 전통 놀이와 생활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짚물공예, 길쌈시연, 천연염색, 전통민속놀이, 큰 줄다리기 등 마당행사와 전시체험 행사도 마련했다. 순천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해외 긴급구조체계는

    미국이나 일본의 112 신고 시스템은 철저히 신고자 중심이다. 신고 즉시 경찰과 소방서, 응급실 등에 동시 연결돼 신속하게 위급 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미국의 소방·경찰 통합 긴급 신고전화인 911은 신고자가 911로 전화하면 신고자의 목소리는 경찰, 소방, 응급실에 중계된다. 대응은 일사불란하다. 미국의 911 신고는 신고와 동시에 신고자의 위치를 자동 전송받는다. 긴급상황에 대한 대처도 유연하다. 예컨대 신고 뒤 신고자가 침묵할 경우 “경찰이 필요하면 1번, 구급차가 필요하면 2번을 눌러 달라.”고 조용히 신고를 접수한다. 위협이나 공포 등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고 판단, ‘선조치’하기 위해서다. 수원 살인사건 때처럼 반복해 ‘주소 좀 다시 불러 주세요.’라는 식의 대처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모든 상황 대처에 대한 원칙은 매뉴얼에 따라 이뤄진다. 일본도 미국과 비슷하다. 신고자가 ‘110’ 긴급번호를 눌러 신고하는 즉시 중앙 경찰, 지역 경찰, 신고자가 위치한 지역 순찰차 등 3곳으로 동시에 신고가 접수된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한 자동차 위치추적 시스템을 통해 현장 상황은 관할 경찰서나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순찰차에 전해진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현장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2007년 기준으로 일본 경찰의 출동시간(신고 후 현장 도착 시간)은 전국 평균 7분 2초로 집계됐다. 일본은 또 전화 강제연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신고자가 위급한 상황에 몰려 신고를 채 마치지 못하고 끊더라도 전화 연결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도록 한 덕분에 신고 접수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 차이도 없지 않다. 선진국은 신고량이 우리나라에 비해 적어 실제 긴급 출동이 필요할 때 대처가 용이하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이유는 유료화에 있다. 미국은 911이 기본적으로 유료 서비스다. 문을 열어 달라는 등의 민원을 위해 911을 이용하면 수천 달러짜리 비용청구서가 날아올 것을 각오해야 한다. 사소한 일 때문에 911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조치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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