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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法 권위자에게 듣는 판례 재구성] 친일재산 국고 귀속 특별법 합헌 결정

    판례의 재구성 11회에서는 2011년 3월 친일파 후손 64명이 “친일재산이라도 당시 재산법제에 의해 취득한 재산을 다시 국가에 귀속하도록 한 특별법은 소급입법에 해당한다”며 제기한 헌법소원사건에 대한 헌재의 결정(2008헌바141)을 소개한다. 헌재 결정의 의미와 해설을 헌법 분야의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부터 듣는다. ‘친일재산 몰수 규정 합헌’ 결정은 헌재가 지난해 9월 창립 25주년을 맞아 ‘헌재 주요 결정 10선’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1554표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친일재산 국고 귀속 논란은 친일재산 환수 작업에 반발한 친일파 후손들이 헌법소원과 민사소송을 잇따라 내면서 촉발됐다. 1992~1997년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가 “국가에 몰수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에서 승소한 이후 친일파 후손들의 반환 소송이 이어졌고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친일재산을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2006년 7월 출범한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2010년 7월까지 활동하면서 친일행위자 168명의 재산 1000억여원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한일병합에 기여해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 등 친일파 후손들이 2008~2010년 헌법소원을 내면서 헌재는 특별법에 대한 위헌성을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헌재는 2011년 3월 친일파 후손 64명이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5(합헌)대 2(일부한정위헌)대 2(일부위헌)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해당 조항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입법 목적이 정당하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의 재산 가운데 후손 스스로 경제적 활동을 통해 취득한 재산, 친일재산 이외의 상속재산 등을 단지 선조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몰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좌제 금지 원칙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헌재는 특별법이 소급입법의 형식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제헌헌법 부칙은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등 역사상 과거사 청산에 관한 다수 입법들에서 소급입법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용인돼 왔다”고 판시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에서도 전쟁이 끝나고 나치의 괴뢰정권 정부를 위해 복무한 자들을 소급적으로 처벌했다”며 “이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반성의 산물이고,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결의와 성찰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헌재는 친일재산과 관련, ‘러일전쟁 개시 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파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재산으로 추정한다’는 조항에 대해서는 “어떤 재산이 친일재산인지 국가가 일일이 입증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재산 취득자나 그 후손들은 경위와 내역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아 이들에게 이를 입증하도록 한 것은 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부한정위헌 의견을 낸 이동흡·목영준 재판관은 “친일파 후손은 1904년 이전에 친일재산이 아니라 다른 경위로 토지를 취득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데 당시 사실관계를 입증할 서증이나 증인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며 “입증 책임을 다하지 못해 친일재산과 무관한 재산까지도 박탈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밝혔다. 이강국 소장과 조대현 재판관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단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에 합치되는 방법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해당 조항은 소급입법에 해당해 헌법에 위반된다”며 일부위헌 의견을 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法 권위자에게 듣는 판례 재구성] 정의의 요청을 법적 안정성에 우선하는 것으로 평가, 친일반민족행위 불법성 심각… 시효인정 불가 판단

    [法 권위자에게 듣는 판례 재구성] 정의의 요청을 법적 안정성에 우선하는 것으로 평가, 친일반민족행위 불법성 심각… 시효인정 불가 판단

    법이론과 법실무의 핵심은 실정법 조항들의 해석과 적용이다. 헌법이론과 헌법실무 역시 실정헌법의 해석과 적용을 중심으로 하지만 헌법과 법률의 충돌이 문제될 경우의 헌법문제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최고법인 헌법에 비추어 법률의 합헌성 여부를 따지는 과정은 헌법의 해석과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의 유·무효를 결정하는 것이며 그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법재판소가 친일재산귀속법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린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결정이다. 헌법재판소는 ①‘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를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 가목, ②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하 친일재산)으로 추정하는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2호 후문, ③친일재산을 그 취득·증여 등 원인행위시에 국가의 소유로 하도록 규정한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본문(이하 귀속조항)에 대하여 모두 합헌결정을 내렸다. 친일재산의 환수 문제는 오래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1990년대부터 이완용의 증손자, 송병준의 후손, 이근택의 조카손자 등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과 관련한 소송이 이어졌고,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2005년 12월 친일재산의 국고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 당시부터도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 금지(헌법 제13조 제2항)의 위반으로서 위헌이 아닌지 논란이 있었다. 그 밖에도 연좌제금지(헌법 제13조 제3항) 위배, 평등권(헌법 제11조) 침해 등이 쟁점으로 대두됐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헌법 조항들의 형식논리적 해석만으로 올바른 답을 내기는 어려우며, 정의와 법적 안정성이라는 법의 이념이 이 문제에서 어떻게 구현돼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즉 친일재산의 환수라는 정의의 요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소급효 등으로 기존의 법질서를 흔들게 될 경우에 발생하는 법적 안정성의 문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양자의 충돌을 합리적으로 조율하는 대안의 마련 내지 어느 쪽을 더 비중 있게 고려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친일재산의 국고귀속조항이 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함을 인정하면서 해당 조항의 정당성까지 인정한 것은 결국 정의의 요청을 소급효 금지라는 법적 안정성에 우선하는 것으로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결론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다. 법이 정의라는 이념을 망각하고 현재에 안주할 경우에는 더 이상 진정한 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소수의견에서도 나타나듯이 진정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박탈이 정당화되는 것은 헌법해석의 문언적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친일재산의 국고귀속이 정의의 요청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방식 내지 절차의 정당성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이후의 소급입법들이 보여주듯이 경솔한 소급입법의 오·남용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친일재산의 국고귀속을 합헌으로 판단함에 있어서는 “친일재산의 소급적 박탈은 일반적으로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던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친일반민족행위가 행위시법으로 규율하기 힘든 곤란한 예외적 상황이었다는 점, 그 불법성의 정도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시효를 인정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는 점, 친일재산의 문제도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헌법재판소도 연좌제 금지와 관련해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의 재산 중 그 후손 자신의 경제적 활동으로 취득하게 된 재산이라든가 친일재산 이외의 상속재산 등을 단지 그 선조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은 아니므로, 연좌제금지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친일재산 환수의 과도한 확장을 경계하고 있으나, 진정소급입법의 예외는 더욱 한정적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 결정을 통해 과거 친일재산의 처리에 대해 혼선을 빚던 법원의 태도가 확실한 기준을 잡을 수 있었고, 정부의 입장 또한 확실해졌다는 점에서 이 판례의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해방 직후에 이러한 문제들이 법적·제도적으로 명확하게 정리되었다면 뒤늦게 이런 문제가 제기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 시기뿐만 아니라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친일파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과거청산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까지 친일재산의 환수 등에 관한 문제가 계속됐다. 이를 법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인 친일재산귀속법 제정과 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에 의해 비로소 마무리됐다고 할 수 있다. ■장영수 교수는 ▲고려대 법학사 ▲고려대 법학 석사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법학 박사 ▲헌법재판소 제도개선위원회 위원 ▲안전행정부 정보공개심사위원회 위원 ▲한국헌법학회 자문위원
  • [탈북 한의사 김지은의 고려의학 이야기] 당근 달인 물로 식중독 예방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이 시기 특히 주의해야 할 질병이 식중독이다. 식중독에 걸리면 심한 설사와 구토로 탈진해 위독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탈수 증상으로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해지면 생체기능이 저하되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게 된다. 식중독을 극복하려면 우선 수분을 충분히 공급해주면서 포도당이나 식염수로 전해질을 보충해주고 비타민, 미네랄 등을 섭취해 전체적인 신체 균형을 회복시켜 나가야 한다. 북한 주민들은 여름철에 당근 달인 물을 복용하며 식중독을 예방하고 극복한다. 북한에서는 당근을 ‘홍삼’이라고 표현한다. 홍삼에 비견될 정도로 당근에는 신체에 유익한 여러 가지 성분이 들어 있다. 한방본초학 고전은 당근을 ‘득은 있되 실은 없는 채소’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선조들도 당근의 효능을 인정했다. 당근은 비타민이 아주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미네랄도 골고루 들어 있다. 당근 달인 물은 당근을 작은 토막으로 잘라 충분히 끓여 만든다. 당근을 푹 우려낸 물을 하루에 여러 번 나눠 마시면 우선 소변량이 증가하고 독소 배출이 빨라진다. 당근에 함유돼 있는 나트륨, 칼슘, 칼륨 등은 몸의 전해질 균형을 고르게 해 신체가 정상기능을 회복하도록 큰 도움을 준다. 당근 달인 물은 특히 어린이 식중독에 효과가 있다. 식중독에 걸린 어린이에게 당근 달인 물을 수시로 마시게 하면 의아할 정도로 회복이 빨라진다. 당근 달인 물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는 당근 주스를 만들어 먹이거나 당근을 찜통에 쪄서 먹이는 방법도 좋다. 찜통에 찐 당근은 그 효능뿐만 아니라 흡수율이 아주 좋고 익히지 않은 당근보다 소화도 잘돼 간식 같은 느낌으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다만 당근에 지나치게 열을 가하면 비타민이 파괴되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우리의 전통 난방 방식인 ‘구들’ 놓는 사람들

    우리의 전통 난방 방식인 ‘구들’ 놓는 사람들

    항균과 탈취가 잘되는 황토집, 자연통풍이 잘되는 한옥 등 전통 방식으로 지은 집은 선조의 오랜 지혜가 쌓인 결과물로 각광받는다. 우리 고유의 난방 방식인 구들도 습기 조절과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장점이 알려지면서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30㎏에 육박하는 구들돌을 하나하나 날라 바닥에 쌓는 일부터 바닥을 뜯어내다가 붕괴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작업까지, 구들을 설치하는 과정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2일 밤 10시 45분에 방송하는 EBS ‘극한직업’은 구들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전국을 누비며 고된 작업을 해내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강원 강릉시에 있는 한 한옥집 공사 현장에서는 50㎡ 면적에 구들 놓는 작업이 한창이다. 보통 방의 크기가 15㎡ 내외인 점을 고려하면 작업량은 만만찮다. 5일 동안 작업자 10명이 투입돼 구들돌 120장을 깔아야 한다. 벽돌을 쌓아 ‘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구들돌을 올려 마무리하는 작업까지 90% 이상 수작업인데, 작업 인원 중 5명이 교육생이라 전문가들의 손은 더 바쁘다. 고래 사이사이를 왕겨로 막고, 구들을 얹은 틈새로 연기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황토를 덧바르는 일을 마치고서야 1차 작업이 끝났다. 기존의 보일러 방을 구들로 바꾸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집의 내부를 해체하는 작업이라 자칫 집이 무너질 수도 있다. 좁은 공간에서 시멘트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일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몸은 힘들지만 전통을 잇는다는 보람에서 힘을 얻는다는 ‘구들 놓는 사람들’의 치열한 작업 현장 속으로 들어가본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정본 백범일지 복간 이기웅 열화당 대표

    [김문이 만난사람] 정본 백범일지 복간 이기웅 열화당 대표

    인생의 발걸음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곡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기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어나 평생을 사는 동안 누구나 기록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길 것이다. 때문에 기록은 자연스럽게 후대의 밑거름이자 귀감이 되는 일이다. 비록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진실된 노력과 성찰의 흔적이기에 소중한 유산으로 남게 된다. 지난달 14일 강릉 선교장의 열화당에서 ‘백범일지를 어떻게 복간할 것인가’에 대한 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기웅(74) 열화당 대표는 모두발언을 통해 “위대한 기록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우리 시대에 용기를 주는 제 목소리 그대로 염(殮)하려 하니 많은 성원을 해주시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백범일지’는 알다시피 김구 선생이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어 유서 대신으로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기록한 것이다. 장대한 감동이 있기에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읽히는 훌륭한 저술이다. 그렇다면 ‘백범일지’ 복간작업은 언제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지난달 25일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 내에 있는 출판사 열화당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헌책을 옆에 놓고 열심히 필사를 하고 있었다. 내용을 물었더니 최초의 한국계 미국 작가 강용흘이 쓴 ‘초당’(1947년)이란 책을 보여준다. 그는 “필사를 하다 보면 초조해지지 않고 앞서 살다간 인생 선배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 같은 책들을 읽으면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느냐”며 웃는다. 그러면서 2년 전 설립한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에 대해 설명을 한다. 이 학교는 세종 이도의 디자인 정신을 섬기며 타이포그라피를 가르침의 바탕으로 삼는다고 했다.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넓게 배우는 한배곳(대학), 실무프로젝트를 통해 배우는 더배곳(대학원)이 어우러진 자율적 공생을 지향하는 대안학교라는 것이다. 그의 사무실 출입구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고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노자 사상에 나오는 말이다. 대안학교 설립취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이 대표는 “김동리 선생이 27세 때 쓴 글씨인데 당시 받을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보니 아주 좋다”고 말한다. ‘백범일지’ 복간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표(師表)이신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가 간행돼 온 역사를 보면 우리는 하나의 소중한 기록이 여러 환경과 여건에 따라 그 본의가 잘못 전달되고 있음을 목격했고 이것이 역사의 기록으로 전해질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이제라도 백범의 숨결이 그대로 담긴 육필원고와 파란만장했던 일생의 자취를 정성껏 염하는 심정으로 ‘정본 백범일지’를 복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찍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출판단지를 조성하는 일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오다가 지금에야 복간작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백범일지’는 광복 후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국사원, 1947년)라는 표제로 출간된 것이 그 효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본을 현대문으로 윤문하는 과정에서 친필 ‘백범일지’와는 그 내용과 표기방법, 서술형식이 다른 판본이 됐다. 이후 1994년 백범의 후손 김신 장군이 친필 원본을 공개하고 ‘친필을 원색 영인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집문당)가 간행되면서 친필 원본이 일반 독자에게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친필 ‘백범일지’는 그 위상에도 불구하고 영인본이기에 일반 독서를 위한 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뒤따랐다. 촘촘히 써내려간 백범의 달필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글씨가 바랜 곳은 판독조차 힘들고 결락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이 대표는 책의 형식 면에서 세로짜기, 한자의 사용 등까지 그대로 전달해 백범의 숨결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반듯한 판본, 즉 진정한 의미의 정본을 복간하겠다고 말한다. 복간분량은 모두 5권이다. 제1·2권은 친필본 상·하권과 구술본 하권 등을 원본의 한자와 한글을 그대로 표기한 세로짜기 형태다. 제3권은 원본 내용을 한글 위주 현대어로 쉽게 풀어 낼 예정이다. 제4권은 친필본(보물 제1245호)을 원래 형태로 영인한 복각본으로, 제5권은 김구 선생의 사진 화보와 연보를 포함한 자료편으로 펴낸다. 선교장 열화당이 생긴 지 200년이 되는 내년에 복간을 완료할 예정이다. 그가 정본 ‘백범일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기록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평소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갑골문자와 수메르 문자 등이 생겨나면서 뭔가 기록하는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그 문자가 역사를 거듭하면서 일정한 종이책의 양식을 창안해 가다듬어왔고 우리는 인류 유산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인 기록문화, 책으로 금자탑을 쌓아왔습니다. ‘백범일지’의 복간은 우리의 올바른 ‘말뿌리’와 ‘글뿌리’를 찾고자 하는 출판정신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지요.” 그가 기록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에 대해서는 2000년 1월 안중근 의사의 공판기록을 엮어 펴낸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나의 영원한 스승 안의사의 치열했던 기록이, 용기를 잃고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혀 그들이 용기를 회복하고 자신 있는 삶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출판단지 조성은 이렇듯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출판을 중흥시키는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1989년 열악한 출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구체적인 전략으로 ‘출판 관련 산업의 협동화 사업계획’에 착안했다. 이 계획은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라는 문화산업도시를 건설하는 계획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즘에는 쌀농사와 사람농사를 축으로 하는 인간중심의 친환경문화도시를 만드는 일에 역점을 두고 있다. 쌀농사와 책농사가 주가 돼 이를 통해 사람농사를 지어가며 여기에서 파생되는 환경 중심의 종합미디어시티를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첨단 문화산업이 가장 원시적인 쌀농사와 함께 공존하는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또한 그는 ‘영혼도서관’ 설립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서의 ‘영혼’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정신의 실체를 말합니다. 진실된 자서전을 쓰는 일은 한 인간의 육신을 정성껏 염하듯이 영혼을 온전히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평생 계속해서 참다운 자서전을 쓰는 일에 착수하면 얼마나 맑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영혼도서관’에서는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자서전을 쓸 수 있도록 주선해주는 곳입니다. 인생의 깊은 성찰을 통해 인간 본연의 진정성을 터득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평생 자서전을 쓰다가 목숨을 다하게 되면 영혼도서관은 유족과 함께 고인이 남긴 원고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한 뒤 영혼도서관에 꽂게 된다. 그 자서전은 제한적으로 열람이 가능하며 영구히 보존된다. 고인의 영혼이 한 권의 아름다운 책 속에 따뜻하게 묻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완공은 되지 않았으나 영혼도서관에는 현재 몇 권의 책이 있다.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와 고 민영완 목사의 회고록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김익권 장군 자서전’, 그리고 고 이청준 작가의 복간된 작품집인 ‘별을 보여드립니다’ 등이 있다. 이처럼 그는 앉으나 서나 항상 아이디어를 개발해내고 부지런하게 일을 추진한다. 그런 정열이 어디에서 나올까. 이 대표는 선교장에서 자랐다. 어려서 선조들로부터 검소와 절제 등 삶의 지혜를 배웠다. 어른들은 모든 물건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했다. 선교장을 지킨 자긍심과 자존심을 알게 했다. 선교장의 열화당은 5대조인 오은(鰲隱) 이후(李厚)가 1815년에 지었다. 열화당 건물의 구조를 보면 도서관 형태를 하고 있다. 당시 문집과 족보도 찍었다. 고건축을 하는 사람에게는 연구 대상이다. 작은 문화센터라고 할 만큼 많은 장서와 서화 등도 있다. 그는 5~6세 때부터 군불을 때고 여러 가지 심부름을 했다. 장마가 지나가면 쌓여 있던 책들을 그늘에 말리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곰팡냄새 때문에 싫었지만 점차 익숙한 냄새로 변해갔다. 자연스럽게 출판을 어떤 사명의식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결국 1971년 열화당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미술 전문 출판사를 차렸다. 주위에서는 돈이 되겠느냐고 했지만 우리의 전통공예를 소개하는 ‘한국의 칠보’를 시작으로 ‘열화당 미술문고’ 시리즈와 ‘한국문화예술총서’를 내면서 오늘날의 열화당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의 발걸음은 나이답지 않게 힘차고 빨랐다. 중학교 때에는 30리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를 했단다. 지금도 걷는 습관은 변함이 없다. 매일 아침 일찍 자택 근처인 일산 호수공원에서 한 시간 이상 빨리 걷는다. 이 같은 부지런한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 기록문화유산을 ‘반듯하게’ 이어나가지 않을까 싶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기웅 대표는… 1940년에 태어나 강릉 선교장에서 자랐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1960년대 일지사 편집자로 출판계에 몸담은 후 1971년 미술 전문출판사 열화당을 설립했다. 1988년 뜻있는 출판인들과 함께 파주출판도시 추진을 입안하면서 그 조직의 책임을 맡아 25년 동안 출판도시 건설에 힘써 왔다. 한국일보 백상출판문화상을 10여차례 수상했고 출판학회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중앙언론문화상, 가톨릭 매스컴대상,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 인촌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2001년), 사진집 ‘세상의 어린이들’(2001년), ‘내 친구 강운구’(2010년)가 있고 옮겨 엮은 책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2000년)와 엮은 책 ‘의리를 지킨 소 이야기’(2007년) 등이 있다. 현재 열화당 대표와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정도전 후속 드라마, 서애 유성룡 주인공 ‘징비록’

    정도전 후속 드라마, 서애 유성룡 주인공 ‘징비록’

    정도전 후속 드라마, 서애 유성룡 주인공 ‘징비록’ 정도전 후속작으로 조선 중기 문신 서애 유성룡을 소재로 한’ 징비록’이 방영된다. 29일 KBS 관계자에 따르면 드라마 ‘징비록’은 유성룡이 집필한 징비록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조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명종 21년(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선조 25년(1592년)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로 임명돼 군무를 총괄했으며,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천거한 것으로 유명하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 1592년(선조 25)부터 7년에 걸쳐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네티즌들은 “정도전 후속 드라마 유성룡 징비록, 너무 재밌겠다”, “정도전 후속 드라마 유성룡 징비록, 기대된다”, “정도전 후속 드라마 유성룡 징비록, 앞으로 잘 만들어주세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빌딩숲 사이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서울을 만나다

    빌딩숲 사이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서울을 만나다

    늘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빼곡한 빌딩숲 사이에도 지금의 서울을 있게 한 역사의 흔적이 엄연히 우리 곁에 있다. 30일~7월 4일 오후 9시 30분 EBS ‘한국기행’에서 권기봉 작가와 함께 서울을 거닐며 그 현장들을 만난다. 조선시대 때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이 거주했던 북촌 한옥마을은 하루에도 수백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30일 1부에서는 북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맹사성 대감의 집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을 내려다보는 곳 등 북촌팔경을 감상해 본다. 조선시대 한성의 역사를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봄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적혀 있다. 선조들은 이를 ‘순성놀이’라 했다. 인왕산, 백악산, 낙산, 남산. 이 네 개의 산을 기점으로 약 18㎞ 길이로 축조된 서울 한양 도성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울의 달동네 장수마을을 만날 수 있다. 7월 1일 2부에서는 30년 넘은 라디오, 4호선 개통식 때 받은 최초의 전철 표 등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오광석 할아버지의 집과 마을 잔치를 위해 다 함께 음식 장만을 하는 동네 사랑방 등 구수한 옛이야기가 흐르는 정겨운 곳을 찾아간다. 2일 3부에서는 왕의 길을 걷는다. 정사에 지친 왕이 심신을 치유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 있다. 1000여종의 수종이 분포된 창덕궁 후원.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수많은 왕이 사랑했던 공간이다. 왕이 걸었을 궁궐의 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천상선계(天上仙界)라 불리며 모든 사람이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 했던 경회루의 밤을 만나 본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정도전 후속 드라마, 서애 유성룡 일대기 ‘징비록’ 네티즌 관심 집중

    정도전 후속 드라마, 서애 유성룡 일대기 ‘징비록’ 네티즌 관심 집중

    정도전 후속 드라마, 서애 유성룡 일대기 ‘징비록’ 네티즌 관심 집중 정도전 후속작으로 조선 중기 문신 서애 유성룡을 소재로 한’ 징비록’이 방영된다. 29일 KBS 관계자에 따르면 드라마 ‘징비록’은 유성룡이 집필한 징비록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조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명종 21년(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선조 25년(1592년)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로 임명돼 군무를 총괄했으며,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천거한 것으로 유명하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 1592년(선조 25)부터 7년에 걸쳐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네티즌들은 “정도전 후속 드라마 유성룡 징비록,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도전 후속 드라마 유성룡 징비록, 어떤 내용으로 나올까”, “정도전 후속 드라마 유성룡 징비록, KBS가 주말 드라마로 사극을 많이 준비했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참을 수 없는 기록의 가벼움/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참을 수 없는 기록의 가벼움/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출판 담당으로 많은 책을 접하게 되면서 기록물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정민 교수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 펴냄)을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제대로 된 기록이 훗날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해 줬기 때문이었다. 책은 정 교수가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초빙을 받아 1년간 머물면서 그곳 도서관에서 발견한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의 소장 자료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며 써내려간 18세기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들의 문화·학술 교류사다. 쉽게 왕래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만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교류는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졌고 서찰과 문집을 통해 소중하게 가꾼 결과 나라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지적 커뮤니티를 이뤘다. 200년 전 꽃핀 한·청 지식인의 우정을 오늘의 학자가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들이 주고받은 서찰과 문집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대의 세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록물은 대체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지닌다. 우리가 문자로 기록을 남기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된다. 아무리 단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지라도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글 한 자 쓰는 것에 대한 책임이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사업을 창설하고 세계의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활용하기 위해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선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최근 역사적 기록물과 관련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원본성이 크게 훼손된 채 반복 출판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범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국독립을 위한 의거를 계획하던 1928년 봄 무렵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필하기 시작해 상권을 완성했다. 이어 1942년 중경임시정부 청사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 ‘두 아들에게 아비의 경력이라도 알게 할 목적으로’ 하권을 완성했다. 해방 후 귀국과정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구술기록한 부분에 ‘나의 소원’을 덧붙여 1947년 국사원에서 출간한 것이 백범일지의 효시다. 문제는 처음 출간 당시 춘원 이광수가 원고의 교열을 보면서 긴박했던 독립운동 현장에서 기록한 원본의 생생함이 많이 희석되고, 백범 특유의 문체가 깔끔하게 다듬어지는 등 백범의 냄새가 거의 지워진 것이다. 심지어 친필본에서 선조가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국사원본에서는 이를 ‘안동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라고 시작부터 왜곡했다. 국사원본이 백범 선생의 서문을 받아 수록했고, 발간승인을 얻은 유일본이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백범일지 판본은 80여종이 존재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열화당 출판사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백범일지의 친필 원본을 토대로 복간 작업을 하고 있다니 기대가 크다. 26일은 백범 선생이 경교장에서 숨을 거둔 지 65주기가 되는 날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힘주어 외치며 조국을 위해 몸을 사른 선생의 뜻을 바르게 알고, 가슴깊이 간직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lotus@seoul.co.kr
  • [인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기관 승진△관리국 선거1과 김종국 임병철△조사국 조사1과 강남형△홍보국 공보과 김진묵△울산북구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 정창호△고창군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 정한금△고흥군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 오의성◇서기관 전보△관리국 선거2과 김문배 (7월 1일자) ■한국조폐공사 ◇하부기관장 임용△ID본부장 김기동△기술연구원장 서태원◇1급 승진△기획처장 이재만△경영평가실장 김인동△화폐본부 주화처장 방창일△기술연구원 위조방지센터장 윤준희◇1급 전보△영업개발단장 박경택△미래사업단장 김영석△조달실장 김흥림△화폐본부 인쇄처장 채정수 ■한국남동발전 △상임감사위원 김낙규 ■고려대 △정경대학장(정책대학원장 겸임) 김병국△공과대학장(그린스쿨대학원장·공학대학원장·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겸임) 박진우 ■머니투데이 △산업1부장 오동희△디지털뉴스부장 유병률 ■수출입은행 ◇부서장급 승진△기술환경심의실장 류현하△해양기업개선실장 김판수△원주출장소장 이병창△대선조선 경영관리단장 이호영△인사경영지원단소속 부장 홍기철 임채환◇부서장급 전보△기획부장 권우석△해운보증기구 설립준비반장 황훈하△여신총괄부장 김영수△전략사업부장 문준식△홍보실장 황국환△재무관리부장 이승건△자금부장 윤희성△국제투자실장 정호섭△법무실장 이경환△자원금융실장 배인성△투자금융실장 정창호△해양금융종합센터 이전추진단장 최성영△해양기업금융실장 박명하△기업금융1부장 유승현△기업금융2부장 김성철△기업금융3부장 류창열△무역금융실장 김영섭△기업성장지원부장 조영조△중소중견금융부장 박경순△국별전략실장 장영훈△경협지원실장 배상욱△남북협력기획실장 하윤철△리스크관리단장 강승중△비서실장 서우택△미래경영실장 이상호△창원지점장 김진태△청주지점장 유연갑△구미출장소장 서석형△파리사무소장 홍성훈△수은아주금융유한공사장 백남수 ■교보생명 ◇본부장 전보△대구FP 박재동△기업금융사업 조혁종△소매여신사업 유영식 ■삼정KPMG ◇승진△대표 서원정△부대표 정대길 한은섭△전무 국창수 박문구 박용수 변영훈 손호승 신장훈 염승훈 이강수 이용호 이재현 장석조 정성호 최재범△상무(파트너) 김동훈 김일훈 김진귀 노상호 민성진 박기현 박민규 백승현 송정화 신재준 오해균 윤권현 장현민 정윤호 조장균 최윤식 한기원 량차오
  • 박지원 “‘만만회’ 비선조직이 국정 농간 방치하면 안돼”…‘박지만, 이재만, 정윤회’ 이름 따서 ‘만만회’

    박지원 “‘만만회’ 비선조직이 국정 농간 방치하면 안돼”…‘박지만, 이재만, 정윤회’ 이름 따서 ‘만만회’

    ‘박지원 만만회’ ‘비선조직’ ‘비선라인’ 박지원 만만회 비선조직 문제 제기가 정치권의 관심을 끌고 있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조직과 관련, “청와대 문고리 권력, 그 분들의 이름을 따서 만만회, 그리고 4인방이 움직인다는 것은 다 알고 있더라”라면서 ‘만민회’가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 대통령 동생 박지만 EG회장, 정윤회씨의 이름 마지막 글자들을 딴 용어임을 분명히 했다. 박지원 의원은 이날 오후 뉴스Y ‘뉴스 일번지’에 출연해 “구체적으로 제가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냐?”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비선라인이 국정에 개입하면 농간이 되기 쉽다”며 “김영삼 전 대통령 때 그런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대한민국을 위해서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서도 김기춘 비서실장은 그러한 비선라인의 농간을 제거해 줘야 한다”며 비선라인 세력의 국정 농간을 우려했다. 그는 문창극 낙마 사태와 관련해서도 “그건 김기춘 비서실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소위 비선라인에서 문창극 총리후보를 추천했기 때문에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비선라인도 ‘만만회’, ‘4인방’ 이러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말도 있지만, 비선라인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막는 일도 비서실장이 할 일이고, 더욱이 인사위원장으로서 검증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검증을 계속해서 잘못했다고 하면 반드시 김기춘 비서실장도 함께 사퇴를 해야 옳다”며 김 실장 퇴진을 거듭 촉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나를 지웠다, 이 오래된 정원에서…

    나를 지웠다, 이 오래된 정원에서…

    알아야 잘 보인다. 모르면 봐도 별 감흥이 없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명승 제40호)이 그랬다. 오래전 소쇄원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고백건대 잘 지은 정자와 잘 조성된 정원을 구경했다는 것 외의 감흥은 받지 못했다. 대개의 범부들이 이와 비슷할 텐데, 건축가 승효상이 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란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저자는 책을 통해 소쇄원 안에 담긴 인문 정신을 헤아려야 비로소 소쇄원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간다. 제월광풍(霽月光風, 비 갠 저녁 무렵 휘영청 떠오른 달빛에 섞여 부는 맑은 바람) 일렁이는 곳으로. 소쇄원(瀟灑園). ‘맑을 소’(瀟), ‘깨끗할 쇄’(灑)다. 맑고 깨끗한 기운이 넘치는 곳이란 뜻이다. 소쇄한 곳으로 길을 이끄는 건 뜻밖에 오리다. 소쇄원 초입의 시냇가에서 늘 볼 수 있는 오리들이 내방객들을 홍진 너머의 세계로 안내하는 방자 노릇을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1503~1557)의 발자취를 좇다 보면 알게 된다. 양산보는 담양 북쪽의 창평 출신이다. 열다섯 살 때 한양으로 올라가 조광조를 사사한 양산보는 불과 열일곱 되던 해에 과거에 나가 제꺼덕 급제한다. 한데 그해 겨울,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전남 화순으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는다. 유배지까지 따라나섰던 양산보는 스승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온다. ●양산보가 30대에 짓기 시작… 3代 걸쳐 완성 낙향한 ‘정치 신인’ 양산보는 30대에 이르러 소쇄원을 짓기 시작한다. 바로 이 대목부터 후손들의 주장과 구전 등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내용은 이렇다. 양산보가 어느 날 작은 계곡에서 노닐던 오리와 마주하게 됐다. 계곡 상류로 뒤뚱뒤뚱 달아나는 오리를 쫓던 양산보는 작은 폭포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양산보는 오리가 알려 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꾼다. 이게 시작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아들과 손자 등 3대에 걸쳐 완성됐다. 현재 소쇄원의 면적은 4060㎡(약 1230평)다. 하지만 조성 당시엔 이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양인용(77) 문화관광해설사는 “예전엔 담장을 기준으로 내·외원으로 나뉘었으나 주변 여건이 변하면서 담장 안쪽의 내원 지역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대봉대·애양단 등 인문학적 의미 담겨 소쇄원의 들머리는 대나무숲이다. 어둑한 대숲을 지나면 한순간 하늘이 탁 트이고, 그 아래 작은 계곡이 나온다. 이른바 ‘올곧은 선비의 오래된 정원’은 볕 환한 계곡 위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 오래전 소쇄원을 찾은 객들이 ‘이리 오너라’라며 통자를 넣었던 곳도 필경 이쯤이었을 터다. 대숲을 나서면서부터는 주변 사물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인문학적 사유가 스미지 않은 게 없으니, 당연히 허투루 보아 넘길 것도 없다. 맨 처음 마주하는 건 두 개의 작은 못이다. 계곡수 일부를 상지(上池)로 끌어들인 뒤, 하지(下池)를 거쳐 다시 계곡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연못 위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정자 대봉대(待鳳臺)다. 원두막 형태의 정자는 근래 지어진 것이지만 다진 바닥은 옛 모습 그대로다. 대봉대 맞은편엔 벽오동(碧梧桐) 한 그루가 서 있다. 비췻빛 수피를 가진 오동나무다. 봉황은 벽오동에만 깃들고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하니, 소쇄원 초입의 조경 속엔 성군의 출현을 기다리는 양산보의 바람이 담겼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처럼 소쇄원 곳곳에 식재된 나무들은 저마다 뜻을 갖고 있다. 동백나무는 효를, 매화나무는 선비의 기상을 상징한다. 장수를 기원하는 복숭아나무도 심었다. 담장 안쪽의 모퉁이는 애양단(愛陽壇)이다. 소쇄원 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지역이란다. 담장이 꺾어지는 한복판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단정하게 서 있다. 가장 따뜻한 지역에 효를 상징하는 동백나무를 심은 뜻, 부모에게 따스한 볕 한 줌 선물하려는 바람이란 것쯤은 누구라도 쉬 짐작할 터다. ●정적인 제월당·동적인 광풍각 결국 하나로 바로 옆은 오곡문(五谷門)이다. 암반 위로 계류가 ‘갈지’(之)자를 그리며 다섯 번 돌아간다 해서 오곡이다. 오곡문은 담장과 계곡이 만나는 곳에 세운 담장 겸 수로다. 담 아래 투박한 돌을 쌓아 주춧돌로 삼고 그 사이 구멍으로 계곡수를 흘려보내는 구조다. 얼핏 부실해 뵈지만 450년이 넘도록 온갖 물난리에도 끄떡없이 버텼다고 한다. 걸핏하면 붕괴 사고를 일으키는 부실한 후손보다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오곡문을 등지고 서면 건물 두 채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위의 세 칸 집은 주인이 머무는 제월당(霽月堂), 그 아래 날아갈 듯 팔작지붕을 인 집은 주로 객이 머물던 광풍각(光風閣)이다. ‘비 갠(霽) 저녁 무렵 떠오른 달빛(月)에 부는 맑은 바람(光風)’은 바로 이 두 건물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쯤에서 전문가의 해석을 듣자. 승효상의 감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제월당과 광풍각이 들어앉은 자세가 대단히 교묘하다. 제월당의 레벨은 나무와 담장 등 정적인 요소들이 수평으로 연결돼 있다. 반면 광풍각은 활개 치듯 오르는 처마선과 변화무쌍한 바위, 계곡수가 만드는 음향 등 동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두 레벨 사이엔 통로가 삽입돼 있다. 이 통로는 때로는 바위를 건너고, 때로는 물길을 돌며, 또 때로는 단을 딛도록 설계돼 두 레벨이 서로 교류하고 부딪치게 한 뒤 결국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매개공간 노릇을 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위를 절단하고 물길을 틀고, 지형의 레벨을 조작하기도 했다. 자, 이처럼 정원과 건물 전체가 인위적인 공간을 자연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승효상의 답은 명료하다. “그 모든 조작의 결과가 결단코 부자연스럽지 않으니, 여기에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희롱하려 드는 모자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자연과 적극적으로 공존하려는 자세이며 자연과 나를 서로 납득시키는 지식인의 창조적 태도이다.” 이게 바로 인문 정신이며 소쇄원은 그 치열한 작가 정신의 소산이라는 얘기다. ●제월당 뒤 낮은 굴뚝… 선비 정신 엿볼수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나. 제월당 뒤편에 키 낮은 굴뚝이 있다. 효율만 따지자면 굴뚝은 높아야 옳다. 그래야 연기가 잘 빠지고 온기도 온전하게 방으로 전달된다. 한데 굳이 무릎 높이로 만든 건 다소 불편하고 부족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내핍을 강제하는 것, 그게 선비 정신일 테니 말이다. 담양읍내에도 볼거리가 많다. 이맘때라면 관방제림을 ‘강추’할 만하다. 200여년 전 관방천을 따라 조성된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숲이 2㎞가량 운치 있게 이어졌다. 담양 대나무 축제는 27~30일 죽녹원과 관방천 일대에서 열린다. 대나무 소망탑 쌓기, BMX(묘기 자전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글 사진 담양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소쇄원은 담양 남쪽, 관방제림 등은 북쪽에 있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소쇄원은 호남고속도로 창평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가장 알기 쉽다. 이어 광주 방면 60번 지방도를 따라 고서교차로까지 간 뒤 887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소쇄원 방면으로 곧장 가면 된다. 이 루트에 명옥헌 원림, 창평 삼지내 마을 등 명소들이 밀집돼 있다. 소쇄원 요금소 381-0115. 관방제림, 죽녹원 등을 먼저 보려면 88고속도로 담양나들목을 이용하는 게 낫다. 이어 죽향대로를 타고 무주읍내 방면으로 곧장 가면 된다. 죽녹원 380-2680. →맛집:죽녹원 건너편 영산강변에 국수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옛 담양장이 활기를 띠던 시절, 장터를 찾은 이들에게 싼값에 국수를 말아 주던 집들이 하나둘 늘면서 이제는 20여개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잔치·비빔국수, 약계란 등을 맛볼 수 있다. 대나무에 밥을 지은 대통밥은 읍내 박물관앞집(381-1990)이 이름났다. 슬로시티 중 하나인 삼지내 마을 초입 전통시장 주변에 국밥집이 몰려 있다. 창평시장국밥(383-4424)이 그중 유명하다. →잘 곳:옛 한옥에서 묵으려면 삼지내 마을로 가야 한다. 일반 숙박업소는 담양읍내에 많다. 고가의 숙소로는 담양온천호텔이 꼽힌다. 380-5000.
  • 관심병사에게 총 쥐어준 軍

    관심병사에게 총 쥐어준 軍

    전역을 3개월도 남기지 않은 육군 병사가 동부전선 최전방 일반전초(GOP)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탈영한 데다 아군과 총격전까지 벌인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4명의 사망자를 낸 2011년 7월 인천 강화도 해안소초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최악의 참사로, 군의 허술한 관심병사 관리 체계와 병영 생활 개선 문제 등 총체적 부실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22일 국방부에 따르면 동부전선인 강원 고성군 육군 22사단 55연대 소속 GOP에서 주간경계근무를 마친 임모(22) 병장이 전날 오후 8시 15분쯤 소초(생활관)로 복귀하려던 동료 부대원들에게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K2 소총 10여발을 발사한 뒤 무장한 채 달아났다. 이 사고로 GOP 동료 장병인 김모(23) 하사 등 5명이 사망하고, 문모(22) 하사 등 7명이 부상했다. 군 당국은 사건 발생 2시간 후인 오후 10시 12분 고성지역에 북한의 국지도발 징후 발견 시 발령되는 방어 준비 태세 중 최고 수준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군은 사건 발생 사실을 오후 10시 40분쯤에야 언론에 공개했고, 실제 사고 현장에서 4~5㎞ 떨어진 곳에 민가가 밀집해 있어 국민 안전에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군 당국은 사건 발생 18시간이 지난 이날 오후 2시 17분쯤 사고 현장에서 10여㎞ 떨어진 강원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제진검문소 북쪽 300m 지점 숲 속에 은신한 임 병장을 발견했다. 하지만 임 병장이 먼저 소총을 발사해 총격전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소대장 한 명이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군은 인근의 명파리 주민들에게 대진초등학교로 대피령을 내리고 대치 상태를 이어 갔다. 2012년 12월 17일 입대해 올해 9월 16일 전역 예정이던 임 병장은 지난해 1월 해당 부대에 신병으로 전입했을 때부터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관심병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 병장은 지난해 4월 인성검사에선 특별관리대상인 A급 관심병사로 지정돼 근무 부적격으로 분류됐으나 11월 2차 인성검사에서 중점관리대상인 B급 관심병사 판정을 받아 같은 해 12월 GOP 근무를 시작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용어 클릭] ■GOP 북한과 대치하는 비무장지대(DMZ) 아래 남방한계선 이남에서 적의 동태를 살펴 주력 부대를 적으로부터 방호하는 초소다. DMZ 내에서 북한 초소의 동태를 24시간 감시하는 최전방 관측소 GP보다 후방에 있지만 비상사태 발생 시 ‘선조치 후보고’를 실현해야 하는 전진기지로 초병 상호 간의 신뢰와 정신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갓영표’도 조상 덕? 내기·투자 잘하는 유전자 있다 (연구)

    ‘갓영표’도 조상 덕? 내기·투자 잘하는 유전자 있다 (연구)

    2014브라질월드컵에서 여러 경기결과를 족집게처럼 맞춰 ‘문어영표’ ‘갓영표’라는 애칭을 얻게 된 이영표 해설위원도 이 유전자가 특히 발달한 것일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UIUC) 공동 연구팀이 16일 사람이 내기나 투자할 때의 행동에는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국제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문제의 유전자는 쾌락 신호를 보내고 ‘보상을 요구하는 동기’가 되는 뇌화학물질인 도파민의 역할에 영향을 준다. 도파민이 사회적 교류에서 역할을 하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연구팀은 유전자에 의해 뇌의 도파민 기능이 좌우되는 일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연구를 이끈 밍쓰 UC버클리 하스경영대학 부교수는 “이 연구는 인간의 유전자가 복잡한 사회적 행동 중 특히 전략적 행동에 관여함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연구팀는 싱가포르 국립대학(NUS) 학생 217명의 게놈을 분석하고 약 70만개의 유전자 다양체를 탐구, 그중 도파민 조절에 관련된 유전자 12개 종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학생들에게 익명의 상대와 컴퓨터를 통해 내기를 하는 게임을 하도록 했으며 그때 뇌의 모습을 MRI 이미지로 촬영했다. 그 결과,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학생은 뇌의 전두엽 피질 안쪽 부분에서 도파민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3개의 유전자에 변이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시행 착오적인 학습으로 내기에서 이겨가는 학생은 주로 뇌의 선조체(線條體·Striatum) 부분에서 도파민에 영향을 미치는 두 유전자에 변이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팀은 이 연구를 통해 의사 결정에 있어서 유전자의 역할이 “놀라운 수준의 일관성을 보였다”며 “사회적 환경 요소에 관계없이 도파민의 기능이 여러 분야에서의 가치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민선 6기 새 인물] 나진구 서울 중랑구청장 당선인

    [민선 6기 새 인물] 나진구 서울 중랑구청장 당선인

    “아이고, 개표 때 밤잠 설치게 해 죄송합니다. 껄껄껄.” 이젠 웃을 수 있다. 전 서울시 행정1부시장이란 꽤 무게감을 갖고 출마했다. 지역 개발이 간절한 중랑에선 ‘나진구처럼 중량감 있는 사람 낙선시키면 굴러 들어온 복 제 발로 걷어차는 꼴’이란 말까지 돌았다. 그럼에도 워낙 야당세가 강한 곳인 데다 세월호 여파까지 밀어닥쳤다. 악전고투였다. 투·개표 당일 밤 12시 무렵까지 뒤지다 막판 역전승을 거뒀다. 48.62% 대 46.56%. 2위 후보와 불과 3700여표 차. 나진구 서울 중랑구청장 당선인은 그럼에도 긍정적인 면을 봤단다. 전엔 동별로 표가 명확히 갈렸지만, 이번엔 18개 동 가운데 15곳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중화, 면목 같은 곳은 야성이 엄청 강해요. 그런 곳에서 이겼습니다. 진 곳에서도 표 차이는 미미했죠. 골고루 표가 나온 게 거의 처음이고 기적이라는 말도 나왔어요.” 거꾸로 부담이기도 하다. 이젠 구민들에게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입증할 차례다. 상황은 나쁘다. 25개 구 가운데 재정자립도 21위다. 새로운 사업을 할 분위기가 아니다. 나 당선인의 최대 관심사가 자주재원 마련인 이유다. 상봉역을 코엑스로 바꾸고, 망우리공동묘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신내역 복선화를 성사시키겠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재산세 공동과세 등 자신이 부시장 때 만들었던 제도를 다시 한번 바꾸도록 건의하는 방안도 고심 중이다. 서울시와의 관계도 물었다. 아무래도 시와 잘 상의해야 할 문제가 많아서다. 나 당선인은 오세훈 전 시장 시절 부시장이었다. 박원순 시장과 껄끄러울 수 있다. “선거 뒤 통화했습니다. 선거나 당을 떠나 잘해 보자 하셨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디어 내고 적극 협조할 겁니다. 박 시장도 균형 발전을 생각하니까 중랑을 한번 더 돌아볼 것이라 믿습니다.” 새누리당 소속이라고 개발에만 치우친 건 아니다. 당장 인수위원장만 해도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을 지낸 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를 앉혔다. 서민이 많은 지역인 만큼 복지, 장애인 문제도 중요하다. 나 당선인은 “부산에 아흔하나, 여든여덟 되신 부모님이 계신데 이런 고민 하느라 아직 당선 인사도 못 드렸다”며 웃었다. 나 당선인은 인터뷰 내내 초심을 강조했다. “출마하기로 한 뒤 줄곧 들은 얘기가 ‘그런 경력에 이왕 나선 것, 열심히만 하면 재선, 3선 보장되는 강남 3구로 가지 왜 하필 재선조차 불투명한 중랑구냐’는 것이었어요. 머릿속 계산기만 두들기면 그 말이 맞을 수 있죠. 그러나 가슴속 열정으로 살 작정입니다. 중랑 발전, 꼭 이뤄 내겠습니다.” 글 사진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불꽃인지… 꽃불인지…무주, 초여름밤의 축제

    불꽃인지… 꽃불인지…무주, 초여름밤의 축제

    요즘 다소 달라졌다고는 하나, 전북 무주는 여전히 나라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오지다. 두메 곳곳마다 질그릇 같은 투박함이 스몄다. 한데 무주의 초여름 밤 풍경은 달랐다. 매끈하고 고혹적이었다. 남대천 물길 위에서 펼쳐진 낙화(落火)놀이가 특히 그랬다. 정념을 갈무리한 불꽃이 비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화사하면서도 절제미가 돋보였다. 밤하늘을 형광빛으로 수놓은 반딧불이의 혼인비행도 그에 못지않게 단아했다. 투박함 위로 고졸한 정취가 덧씌워진 풍경, 무주의 초여름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무주를 횡으로 가르는 남대천. 그 물길 위로 주황빛 불꽃들이 분분히 날리고 있다. 한 올 한 올 여인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닮은 불꽃이다. 30분 남짓 현란한 풍경이 이어지는데도 강변을 딛고 선 사람들은 입을 열 줄 몰랐다. 말을 잊게 하는 강한 힘, 그게 무주 남대천 낙화놀이엔 있었다. 낙화놀이는 낙화봉에서 불꽃들이 떨어지는 모양새가 꽃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줄불놀이, 낙화유(落火遊) 등으로도 불린다. 장대에 연결된 줄에 200개 정도의 낙화봉을 달고 불을 붙이면 불꽃이 아래로 휘날리며 불꽃쇼를 펼친다. 오래전엔 음력 정월대보름이나 사월 초파일 등 특별한 날에 열렸지만, 요즘엔 지역 축제장에서도 간혹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주 남대천 낙화놀이다. ●낙화봉은 뽕나무·참나무 태워 만든 숯이 주재료 낙화봉은 뽕나무나 참나무를 태워 만든 숯이 주재료다. 여기에 소금, 말린 쑥 등을 섞어 한지 위에 올린 뒤 둘둘 말아서 만든다. 낙화봉에 불을 붙이고 나면 30분 이상 불꽃이 떨어져 내린다. 초여름 밤을 수놓기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의 양이다. 서양의 불꽃놀이나 중국의 폭죽놀이가 화려하고 역동적이라면 낙화놀이는 더없이 잔잔하고 서정적이다. 물 위로 빛 그림자를 드리우며 떨어지는 불꽃을 보자면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단박에 알게 된다. 무주 낙화놀이의 시발지는 안성면 금평리 두문마을이다. 덕유산 자락에 기댄 산골마을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맥이 끊긴 낙화놀이를 마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되살렸다. 마을 위쪽의 작은 방죽에서 소규모로 벌이던 낙화놀이는 입소문을 타고 금방 퍼졌고, 몇 해 전 무주 반딧불축제에 첫선을 보인 이후부터는 축제의 핵심 볼거리로 자리를 잡았다. 축제는 끝났지만 낙화놀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다. 두문마을에서 오는 8월 1~2일 낙화놀이를 벌인다. 규모는 작아도, 한여름밤의 정취로 보자면 남대천 낙화놀이에 전혀 뒤질 게 없다. 마을 홈페이지는 ‘불꽃이춤추는마을.kr’이다. 기상 상황이 낙화놀이의 가장 큰 변수이니만큼, 방문에 앞서 일기예보를 꼼꼼히 살피는 게 좋겠다. 낙화놀이 체험, 목공예 체험 등 다양한 농촌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천연기념물 반딧불이들의 ‘혼인 비행’ 도 장관 낙화놀이가 사람이 만든 작품이라면 반딧불이의 비행은 자연이 그린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관찰되는 반딧불이는 운문산반딧불이와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등이다. 나라 안에서 청정 지역으로 소문난 무주에서조차 반딧불이가 귀해 녀석들의 서식지를 천연기념물(제322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무주에선 3개종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운문산반딧불이가 가장 먼저 나오고, 뒤이어 애반딧불이와 늦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수놓는다. 반딧불이는 종에 따라 발광신호가 다르다. 운문산반딧불이와 애반딧불이는 점멸광, 늦반딧불이는 지속광이다. 다만 애반딧불이의 경우 빛의 밝기가 현저히 낮고, 활동 반경도 다른 종에 견줘 상대적으로 작다. 따라서 반딧불이를 보았다면 열에 여덟아홉은 운문산반딧불이일 가능성이 높다. 빛의 형태가 무엇이건, 빛을 내는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짝짓기를 앞둔 혼인비행이다. 반딧불이 암수는 빛으로 유혹의 춤사위를 펼치며 서로를 찾아간다. 그러니 반딧불이의 비행을 본다는 건 녀석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것과 다름없다. 반딧불이 출몰 시기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운문산반딧불이의 경우 무주에선 보통 5월 하순경에 관측됐다. 하지만 올해 5월을 달군 기상이변으로 반딧불이 출몰시기가 당겨졌다. 현재 무주에서 운문산반딧불이의 집단비행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애반딧불이와 늦반딧불이를 관찰하는 것으로 목적을 변경하는 게 좋다. 세 종의 반딧불이 가운데 가장 늦게 등장하는 늦반딧불이는 해가 진 뒤 1시간가량 빛을 내며 날아다닌다. 기상여건에 따라 변화가 심해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예년의 경우 8월 초순부터 하순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다만 올해 운문산반딧불이가 1주일 이상 일찍 관찰됐듯, 늦반딧불이 또한 다소 일찍 혼인비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 무주군에선 토요일인 8월 23·30일 오후 7시 30분 ‘늦반딧불이 신비 탐사’를 떠난다. 참가 신청은 반딧불이 축제 홈페이지(www.firefly.or.kr)에서 받는다. ●무주 읍내 등나무운동장에서는 ‘산골영화제’ 무주 읍내의 등나무운동장은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무주 군민들이 나라 안 운동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운동장으로 꼽는다는 곳이다. 무엇보다 운동장 조성 경위가 인상적이다. 오래전 주민체육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더운 날이었는데, 하필 ‘본부석’에만 차양막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관중석에 앉아 쏟아지는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아야 했던 주민들에게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주민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를 안 군수가 관중석에도 등나무 그늘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고, 그 작업을 ‘감응의 건축가’라고 불리는 고 정기용(1945~2011)에게 맡겼다. 당시 무주에서 인간미 물씬 풍기는 건축물을 여럿 설계했던 정기용은 생전 자신이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을 건축물을 이 운동장에 세운다. 그게 바로 등나무 스탠드다. 정기용은 등나무와 비슷한 굵기의 철봉을 엮어 관중석 전체에 지줏대를 세웠다. 줄기 뻗을 자리를 만난 등나무는 순식간에 자랐고, ‘본부석 차양막’보다 훨씬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등나무 그늘에 들면 건축은 홀연히 사라지고 자연이 오롯이 주인공으로 남는다.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감성을 일깨워준 곳”이란 정기용의 표현 그대로다. 등나무운동장에서 산골영화제가 열린다. 올해 2회째를 맞은 새내기 행사다. 26~30일 창, 판, 락, 숲, 길 등 5개 부문으로 나뉘어 무주 일대에서 열린다. 17개국 51편의 영화가 관객을 찾는다. 등나무운동장에선 5개 부문 가운데 ‘락’ 부문 행사와 개막식이 펼쳐진다고 한다. 가족·고전 영화와 음악공연 등이 준비됐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6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무주읍 방면으로 가다 당산교차로에서 한풍루로로 갈아탄 뒤 곧장 가면 등나무 운동장이 나온다. 한풍루, 예체문화원 등이 이곳에 몰려 있다. 경관 조명이 아름다운 ‘사랑의 다리’(남대천교)는 등나무운동장에서 무주군청 쪽으로 가면 나온다. 두문마을을 먼저 보겠다면 덕유산 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낫다. 이어 19번 국도로 사전교차로까지 간 뒤 덕유산로로 갈아타고 곧장 가면 된다. 일곱 못과 일곱 폭포, 이른바 칠연칠폭(七淵七瀑)으로 유명한 칠연계곡도 지척이다. 묶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맛집 무주구천동 초입의 별미가든(322-3123)은 산채정식, 무주읍내 금강식당(322-0979)은 어죽, 무주나들목 만남의광장 반디어촌(322-1141)은 어탕국수와 다슬기 수제비로 이름난 집들이다. →잘 곳 적상면 사천리 서창마을의 ‘언제나봄날’(적상산 황토펜션)은 가재잡이와 반딧불이 투어 안내로 이름난 집. 설천면 청량리 ‘통나무펜션’(320-5665)도 깔끔하다. 일반 숙박업소는 무주읍내에 많다. 무주관광안내소 324-2114. 글 사진 무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내기 잘하는 ‘족집게 유전자’ 따로 있다 - 美연구

    내기 잘하는 ‘족집게 유전자’ 따로 있다 - 美연구

    간단한 내기에 매번 지거나 투자에 빈번하게 실패하는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를 탓해야 할 듯하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UIUC) 공동 연구팀이 16일 사람이 내기나 투자할 때의 행동에는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국제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문제의 유전자는 쾌락 신호를 보내고 ‘보상을 요구하는 동기’가 되는 뇌화학물질인 도파민의 역할에 영향을 준다.   도파민이 사회적 교류에서 역할을 하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연구팀은 유전자에 의해 뇌의 도파민 기능이 좌우되는 일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연구를 이끈 밍쓰 UC버클리 하스경영대학 부교수는 “이 연구는 인간의 유전자가 복잡한 사회적 행동 중 특히 전략적 행동에 관여함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연구팀는 싱가포르 국립대학(NUS) 학생 217명의 게놈을 분석하고 약 70만개의 유전자 다양체를 탐구, 그중 도파민 조절에 관련된 유전자 12개 종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학생들에게 익명의 상대와 컴퓨터를 통해 내기를 하는 게임을 하도록 했으며 그때 뇌의 모습을 MRI 이미지로 촬영했다. 그 결과,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학생은 뇌의 전두엽 피질 안쪽 부분에서 도파민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3개의 유전자에 변이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시행 착오적인 학습으로 내기에서 이겨가는 학생은 주로 뇌의 선조체(線條體·Striatum) 부분에서 도파민에 영향을 미치는 두 유전자에 변이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팀은 이 연구를 통해 의사 결정에 있어서 유전자의 역할이 “놀라운 수준의 일관성을 보였다”며 “사회적 환경 요소에 관계없이 도파민의 기능이 여러 분야에서의 가치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사진=포토리아(위), UC버클리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내기 혹은 투자 잘하는 유전자 따로 있다 (美 연구)

    내기 혹은 투자 잘하는 유전자 따로 있다 (美 연구)

    간단한 내기에 매번 지거나 투자에 빈번하게 실패하는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를 탓해야 할 듯하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UIUC) 공동 연구팀이 16일 사람이 내기나 투자할 때의 행동에는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국제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문제의 유전자는 쾌락 신호를 보내고 ‘보상을 요구하는 동기’가 되는 뇌화학물질인 도파민의 역할에 영향을 준다.   도파민이 사회적 교류에서 역할을 하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연구팀은 유전자에 의해 뇌의 도파민 기능이 좌우되는 일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연구를 이끈 밍쓰 UC버클리 하스경영대학 부교수는 “이 연구는 인간의 유전자가 복잡한 사회적 행동 중 특히 전략적 행동에 관여함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연구팀는 싱가포르 국립대학(NUS) 학생 217명의 게놈을 분석하고 약 70만개의 유전자 다양체를 탐구, 그중 도파민 조절에 관련된 유전자 12개 종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학생들에게 익명의 상대와 컴퓨터를 통해 내기를 하는 게임을 하도록 했으며 그때 뇌의 모습을 MRI 이미지로 촬영했다. 그 결과,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학생은 뇌의 전두엽 피질 안쪽 부분에서 도파민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3개의 유전자에 변이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시행 착오적인 학습으로 내기에서 이겨가는 학생은 주로 뇌의 선조체(線條體·Striatum) 부분에서 도파민에 영향을 미치는 두 유전자에 변이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팀은 이 연구를 통해 의사 결정에 있어서 유전자의 역할이 “놀라운 수준의 일관성을 보였다”며 “사회적 환경 요소에 관계없이 도파민의 기능이 여러 분야에서의 가치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사진=포토리아(위), UC버클리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왕권의 존엄성을 성곽에 세우다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둘러싼 백악~낙타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흐른다. 성곽은 암벽을 만나면 멈춘다. 자연이 인공을 대리하는 절묘한 경관이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내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잊게 된다.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 안팎을 차단하는 데 반해 한양도성 성곽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다. 성곽이 산수(山水)와 한 몸을 이루는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경관이다.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중국식 성과는 뚜렷하게 다른 조선만의 것이다. 조선 개국의 기획자이자 서울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한양팔경’에서 “성은 높아 철옹인데 천 길이요/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해마다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 즐기네”라고 도성의 풍광을 맘껏 읊었다. 성종 때 온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서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였다/산들이 성벽을 둘러싸며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도성 출입자를 통제하거나, 침입자를 막는 단순 용도에 머물지 않았다. 성 밖을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없다는 것은 방어개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드나드는 8개의 크고 작은 문 중 숭례문 밖 남지(南池), 흥인지문 밖 동지(연지), 돈의문 밖 서지(반송지)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은 물의 부족과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기법이었다. 성문은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 종루에서 울리는 인경(밤 10시)과 파루(새벽 4시)의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성문의 개폐가 곧 통행금지와 해제를 뜻했다. 한양도성 내 일상생활의 시작과 끝이 한양도성 성곽에서 비롯되고 맺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무너진 도성 성곽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지어 허술한 방어체계를 보완한 숙종의 속마음이 ‘비변사등록’에 드러나 있다. 숙종은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조선 왕들은 도성 축조에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 왕들이 그토록 한양도성 성곽의 축조와 개·보수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통치질서를 확인하고, 외적 방어와 내부 적대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국력을 표현하면서, 왕권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무릇 성(城)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관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태조가 18㎞의 울타리를 처음 정한 이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한 육백 년의 역사 층위가 오롯이 살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렇듯 큰 수도성곽이 유지돼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 성벽에 새겨진 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네 임금이 주로 쌓았는데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석축기법이 성곽에 남아 있다. 개국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따라 도읍의 윤곽을 정한 자리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산성 축조기법을 주로 썼고 성곽의 3분의2는 흙으로 쌓았다. 이성계는 석재를 구하려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돌을 바치도록 독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 세종은 흙 성을 메주 크기의 돌로 바꿨다. 현재의 한양도성 성곽을 사실상 재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은 무용지물이었다. 선조는 싸울 의지도, 겨를도 없이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흥인지문 옹성의 위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가 60일을 끈 것을 참작하면 조선관군이 한양도성에서 버텼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 후 병자호란에 휘말렸다. 청은 항복 조건에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간 결사항전하자 함락에 실패한 분풀이였다. 이후 축성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조선 국왕들은 청의 감시를 틈타 도성과 산성의 개·보수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숙종과 순조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장정 4명이 들 정도의 크고 반듯반듯한 돌을 사용하는 등 성석(城石)의 대형화와 규격화를 꾀했다. 조선왕들은 태조에게서 성곽 쌓기라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성곽 돌에 새겨진 이름과 지명 등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 따르면 2013년12월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252개의 각자성석이 존재한다. 각자성석에 나타난 시대를 분석한 결과 14명의 임금 이름이 등장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44개(17%)는 제외됐다. 이 중 세종 때 것이 113개로 44%를 차지했고 순조 40개(15%), 태조 23개(9%). 숙종이 19개(7%)의 순서였다. 그래서 어느 임금 때, 어느 지역에서 동원된 인력이 성곽을 쌓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태조 대의 토성은 남산 일대에 일부 남아 있고 세종대에 쌓은 돌 성이 현재 남아 있는 성곽 12km 중 메주돌 부분이다. 이성계는 1, 2차에 걸쳐 98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4대문(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과 4소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의 이름을 지었다. 토성이 칠할, 석성이 삼할을 차지했다. 토성이 장마에 무너지자 세종은 4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견고한 돌 성으로 개축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호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672만명이었고 도성 인구는 10만명이었다. 일부 신하들을 중심으로 인력동원의 문제와 석재난 등을 들어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무악재~남산 부분만 돌로 쌓자고 건의했으나 상왕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이 빗발치자 10만명을 줄여 32만 2400명의 동원을 결정했다. 석공 등 장인 2211명은 별도였다. 태조 때 봄·가을 2차례에 걸쳐 19만 7000명을, 고려 현종 때 개경 나성 축조에 23만명을 동원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역사였다. 도성 인구의 3배를 넘는 인력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세종은 엄격했다. 병력을 늦게 보낸 경상도 관찰사에게 죄를 묻고, 수령은 봉고파직시켰다. 태종과 세종은 수시로 술을 내려 격려했다. 공사는 38일 만에 끝났지만 87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도성에 쌀이 동나고 전염병이 돌아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조선 최대 역사(役事)가 최고 역사(歷史)로 남다 한양도성 축조는 막무가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부역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안배됐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다.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성터 전체가 영조척(營造尺·약 30㎝)으로 5만 9500자이므로 백악에서 시계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이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다. ●조선의 국혼 깃든 도성 축조… 항일의병 촉발 원동력 공사의 감독체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총감독으로부터 아래로 점차 구역별 책임자가 늘어나는 피라미드식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자호(字號) 구간은 600자 구간을 다시 6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100자(약 30m)를 가장 작은 구역 단위로 삼았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이라는 감독관을 두었다. 성곽을 담당한 지역의 이름과 감독자,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 무너지거나 부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었다. 요즘 서울시내 보도블록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가 이때 이미 실행된 셈이다. 도성 축조의 대역사는 신생국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팔도에서 몰려든 장정들은 한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타지방의 정보를 얻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이웃 고을과 먼 고을을 보고 물산을 터득했다. 도성 축조는 단순한 부역동원이라기보다 당시 백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무학대사의 이야기와 세종과 한양의 풍광에 대한 얘깃거리가 방방곡곡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조선 초 한양도성 성곽 축조로 말미암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때 처음 본 한양에 대한 인상이 내 자식은 한양으로 벼슬살이를 보내겠다는 서울중심주의를 형성했을 것이다. 한양도성과 성곽의 축조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역사’(歷史)가 되었다. 조선이 오백 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한 원천이 됐다. 내 손으로 지은 도성의 위용을 경험한 백성의 마음속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혼이 깃들었다. 이것이 의병과 위정척사, 항일의병을 촉발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임진왜란은 성전” 화려한 그림 속 추악한 제국주의

    “임진왜란은 성전” 화려한 그림 속 추악한 제국주의

    그림이 된 임진왜란/김시덕 지음/학고재/360쪽/1만 7000원1592년(선조 25년)부터 7년간의 임진왜란을 우리는 ‘임진년에 왜구가 일으킨 난리’라고 간단히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북아 질서를 뒤흔든 근세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이후 이 지역에서 전개된 제국주의 국가 간 충돌을 예고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나라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의 기록을 남겼다. 신간 ‘그림이 된 임진왜란’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입장에서 삽화로 담아낸 7년 전쟁의 기록이다.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는 김시덕(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박사가 썼다. 앞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년·학고재)에서 일본 근세의 외전과 그들의 관점을 분석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 고문헌에 삽입된 17~19세기 일본의 목판화와 채색화 300여점을 통해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을 소개한다. 17세기 후기~18세기 초 ‘조선정벌기’와 ‘에이리 다이코기’, 18세기 후기의 ‘에혼 무용 다기코기’, 19세기 전기의 ‘에혼 조선군기’와 ‘에혼 다이코기’, 19세기 중기의 ‘에혼 조선정벌기’ 등 7개 문헌에 수록된 삽화를 주로 담았다. 임진왜란이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되고 문헌으로 정착한 것은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에도막부 때였다. 당시 출판인들은 상품으로서의 서적에 대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목적으로 임진왜란을 적극 활용했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로 다양한 계급의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면서 문자해독률이 높지 않은 중하급 무사 및 상인·농민들을 겨냥해 되도록 많은 삽화를 실었다. 우키요에(浮世繪)의 발달도 이런 경향에 일조했다. 결과적으로 에도시대 집필된 임진왜란 문헌군에는 삽화가 많이 포함돼 있지만 삽화의 형태로 실린 그림 자료는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돼 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 그림자료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의 실상을 밝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본인들이 조선과 대외 전쟁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훌륭한 자료들”이라며 “그림 자료에 보이는 일본인들의 인식은 근대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인식과 상통한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이들 목판 출판물에 수록된 삽화들은 17~19세기 일본인들이 임진왜란과 바깥 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와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에혼 무용 다이코기’에는 히데요시가 원리주의 불교 종파인 일연종 신도였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하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중·근세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불교와 신토(神道)를 함께 믿는 일본의 위엄을 해외에 빛내는 ‘성전’(聖戰)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에혼 조선정벌기’에는 ‘조선왕 이연(선조)이 여색에 빠져 국정을 망치다’라는 제목의 기이한 삽화가 들어 있다. 전쟁 전 조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명나라가 구원해 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는 명나라의 ‘양조평양록’ 사관을 답습한 것으로 17세기 전기 이후 제작된 일본의 많은 문헌에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세운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무용담은 임진왜란 문헌에 반드시 등장하고 삽화로도 즐겨 그려졌다. 문헌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과장되게 해석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뒤를 따라 서둘러 북진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의 부하들이 조선의 부녀자를 겁탈하는 모습을 보고 화내며 조선인을 보호해 주자 구출된 부녀자의 가족이 가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앞다투어 가토군에 투항해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고 일본식 이름을 받았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단편적인 정보와 상상력에 의존해 목판화를 제작한 삽화가들은 한국인지 중국인지 구분하지 않고 대충 이국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집의 실내 장식이 중국풍으로 묘사되고 중국풍 헤어스타일에 중국풍 옷을 입은 조선 여인이 등장하기 일쑤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명나라 군대를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기도 한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임진왜란 문헌들에는 전쟁 당시 활약상을 보인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일본인들이 남긴 임진왜란 문헌이 류성룡의 ‘징비록’을 적극 인용한 결과다.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경도에 진입한 가토 기요마사를 저지하려다 패한 거인 장군 한극함이 등장하고 특히 이순신은 불패의 장군이자 모함을 받았다가 복귀한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저자는 “근세 일본인의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그 어색한 느낌은 전근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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