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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나는 너다’ 송일국, 강남역+이태원,+홍대 뜬다 ‘게릴라 핸드프린팅’

    연극 ‘나는 너다’ 송일국, 강남역+이태원,+홍대 뜬다 ‘게릴라 핸드프린팅’

    연극 ‘나는 너다’ 출연진들이 지난 20일부터 5박6일동안의 백두산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바로 안중근 의사 거사일에 맞춰 10월 26일 서울 도심 일대에서 게릴라 핸드프린팅을 진행한다. 연출자인 연극배우 윤석화를 비롯해 대한민국만세 아빠 송일국, 대한의군들이 참여하고, 장소 별로 특별한 게스트가 깜짝 합류해 독립군가를 부르며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핸드프린팅 및 다채로운 행사도 이어질 예정이다. 게릴라 핸드프린팅은 26일 오후 1시부터 강남역 9번 출구 앞, 3시 이태원, 5시 홍대 일대에서 펼쳐진다. 이와 함께 동아제약 박카스에서는 박카스 10000병을 협찬해 게릴라 이벤트 현장에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줄 계획이다. 연극 ‘나는 너다’는 민족열사 안중근과 일제에 의해 철저히 훼절된 삶을 살았던 그의 아들 안준생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적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 송일국은 1인 2역으로 안중근과 그 아들의 역할을 동시에 맡는다. 송일국은 행사 취지에 대해 “대한민국이 존재하기까지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 많은 선조들이 독립을 외쳤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윤택한 삶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얹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안중근 의사의 거사일을 기념하여 작은 행사이지만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연극 ‘나는 너다’는 11월 27일부터 압구정동 BBCH홀에서 막이 오른다. (예매:인터파크1544-1555, 문의:돌꽃컴퍼니 02-3672-3001) 사진 = 돌꽃컴퍼니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이번엔 ‘은피아’ 도마에

    수출입은행의 퇴직자들이 줄줄이 수은과 거래했던 기업으로 옮겨가 ‘은피아’(은행+마피아) 비판을 사고 있다. 부실 채권도 급격히 늘어 건전성 지표에 노란불이 켜졌다. 수출입은행이 2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최재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수은 퇴직자 8명이 성동조선해양과 대선조선의 등기이사 및 감사로 선임됐다. 성동조선과 대선조선은 모두 수은의 주 거래 기업이다. 성동조선에는 수은뿐 아니라 또 다른 채권기관인 우리은행과 무역보험공사 출신도 1명씩 근무하고 있다. 최 의원은 “채권은행들이 ‘갑’의 위치를 이용해 거래기업으로 재취업하는 사례가 빈번해 은피아 논란이 커지고 있다”면서 “국책은행 채권이 퇴직자들의 재취업 통로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수은 측은 “채권단 주도의 기업 경영정상화 추진을 위해 관련 직원을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수은의 건전성 지표도 크게 나빠졌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원리금 상환이 석 달 이상 연체된 수은의 부실 채권(고정이하여신)은 올 9월 말 현재 1조 7476억원이다. 2012년 말(5550억원)과 비교하면 3배가 넘는다. 돈을 떼여도 얼마만큼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실 채권 커버리지 비율(대손충당금÷고정이하여신)은 올 9월 말 기준 117.7%로, 2012년 말(489.4%)보다 371.7% 포인트나 급락했다. 수은 측은 “수출입금융을 취급하는 특성상 선박, 건설 등 경기 민감 업종의 채권이 많은데 최근 경기 침체로 이들 기업의 업황이 크게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민간 금융사와 달리 수은은 국책은행이어서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어떻게든 이를 보전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사고도 (건전성 악화의) 한 요인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꼬집었다. 수은의 유망 기업 육성 프로그램 ‘히든 챔피언’도 난타당했다. 오제세 새정치연합 의원은 ‘히든 챔피언’으로 선정된 267개 기업 가운데 93개(34.8%)가 선정 1년 전보다 매출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특히 갑작스러운 법정관리 신청으로 ‘실적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모뉴엘도 2012년 수은의 히든 챔피언이었다. 같은 당 김영록 의원은 “모뉴엘이 히든 챔피언 기업으로 선정된 뒤 2472억원의 금융지원을 받았다”면서 “히든 챔피언 인증으로 모뉴엘을 ‘히든 폭탄’으로 만든 게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안미현 기자 hyun@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의미있는 변화와 혁신, 누가 시작할까/안혜련 주부

    [옴부즈맨 칼럼] 의미있는 변화와 혁신, 누가 시작할까/안혜련 주부

    서울신문을 2년 가까이 구독하고 있다. 그동안 눈길 한번 가지 않았던 면이 두 면 있다. 서울신문만이 아니라 어느 신문을 막론하고 요사이 그 두 면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과 휴대전화 이용이 일상화되고 홈쇼핑과 종합편성채널이 늘 우리 곁에 있게 된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긴 변화다. 광고에 던지는 단 몇 초의 시선조차 받지 못하는 두 개의 지면, 그것은 TV프로그램 편성면과 증권시세면이다. 어느 한 채널, 어느 한 개의 프로그램을 정해놓고 찾아서 보는 것이 언제 적 일인지 모른다. TV를 켜는 순간 우리는 온갖 뉴스와 광고와 영화와 드라마에 둘러싸인다. 손끝만 까딱하면 보기만 해도 엔도르핀이 샘솟는 멋진 연예인들이 내게 웃음을 보내고, 손끝만 까딱하면 화려한 경력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세계경제 분석과 주식 시황을 실시간으로 전해주며 내 돈을 확실히 불려줄 것만 같다. 손안에 휴대전화가 있을 때는 TV조차 거추장스럽다. 손가락 몇 번 쓱쓱 하면 온갖 정보와 지식과 연예계 정보가 마구 밀려온다. 별도의 추가 요금 없이. 새로운 변화는 어느 것에서나 시작된다. 그리고 누군가 그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고 시작한다. 혁신이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시되는 신문의 가로쓰기도 1980년대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0년대 증면 경쟁이 가열되면서 12면이었던 지면이 48면까지 늘어나고 1995년 10월 중앙일보가 섹션체제를 도입해 전면 가로쓰기를 시도하면서 본격적인 가로쓰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2009년 3월 일간지 판형을 베를리너판으로 바꾼 중앙일보의 시도도 획기적이었다. 현재 프랑스의 르몽드(Le Monde),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 이탈리아의 라 레푸블리카(La Republica), 스페인의 스탐파(La Stampa) 등이 채택할 만큼 베를리너판은 세계적인 추세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윤전기 교체 시기라는 현실적 문제로 가로쓰기만큼의 파급력은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수십 개의 TV채널과 내 손안의 모바일이 동영상과 실시간 정보를 전해주는 시대다. 아침마다 신문의 엷은 잉크 냄새로 하루를 시작하던 일은 이제 어쩌면 추억 속의 한 장면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새롭게 얻는 정보와 지식, 신문지에 그냥 버려지는 정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문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그 차이를 찾고 차별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속도와 영상에서 방송과 휴대전화 같은 매체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인 이상, 신문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실시간 정보들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읽히지 않는 지면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대중성을 담보하면서도 정보 가치가 높은 지면 만들기를 고민해야 한다. 방송과 온라인과의 연계성을 지속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한 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일부 종합편성채널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간지 신문기사 비교 분석을 역으로 접근해 신문에서 각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을 비교분석할 수도 있고, 인터넷에서 호응이 좋은 무명작가들에게 소설이나 소품을 연재할 지면을 제공할 수도 있다. 경쟁적으로 개최되는 방송사 각종 오디션, 체험 프로그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이템 위주로 풀어보아도 좋겠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민해서 서울신문이 의미 있는 변화와 혁신을 하나라도 먼저 시작해 보길 기대한다.
  • 해외여행 | 실크로드를 따라 1,200km를 달리다

    해외여행 | 실크로드를 따라 1,200km를 달리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가슴 한 켠에 품고 있을 실크로드. 동양과 서양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용광로 같던 그곳. 건조한 바람만이 퍽퍽하게 불어대는 길을 낙타에 비단을 싣고 한 걸음씩 나아갔을 대상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실크로드’는 1877년 독일의 리히트호펜이라는 지리학자가 비단이 오갔던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이 길을 통해 오간 것은 비단뿐만이 아니다. 각종 물품과 보석, 불교와 이슬람교가 그 길을 통해 흘러가고 흘러들어왔다. 기원전 한무제 때 장건이 사신으로 서역에 다녀온 후 길이 트이기 시작한 실크로드는 세계무역의 중심지였다. 아름다움만큼 약탈 경쟁으로 인한 아픔을 품고 있는 실크로드. 굽이굽이 내려오고 있는 역사와 문화, 자연과 사람들을 만나며 실크로드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 보자. ●황허의 도시,란저우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으로 황토색이 지배하는 간쑤성의 성도 중국 지도를 펼쳐 보면 한가운데에 ‘란저우蘭州’라는 지명이 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의 출발점은 란저우. 1,4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란저우는 실크로드 문화유산이 풍부한 간쑤성의 성도로 교통과 문화, 역사, 경제의 중심지다. 칭하이성에서 발원한 황허가 처음 만나는 대도시로 중국인들이 ‘어머니의 젖줄’이라는 황허가 도시 가운데를 유유히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란저우에 가면 어디에서든 황토색이 눈에 들어온다. 란저우 시민들과 여행자들은 시내에 있는 물레방아 공원에서 유유히 산책을 하며 황허를 만난다. 란저우를 황토색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황허뿐만이 아니다. 희토류를 비롯한 35종류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는 누런 산들이 란저우를 둘러싸고 있다. 황토색 물에 황토색 산, 란저우에 가면 세상이 온통 황토색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다. 실크로드의 문화유산이 가득 모여 있는 간쑤성 박물관과 함께 란저우에서 손꼽히는 것 중 하나는 란저우 라멘이다. 중국 다른 지방에 가도 ‘란저우 라멘’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음식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고기를 곁들인 란저우 라멘의 맛은 매콤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네 입맛에도 잘 맞는다. 란저우에서 나와 허시후이랑河西走廊을 따라 달린다. ‘허’는 황허를 뜻하는 단어로 허시후이랑은 황허강 서쪽의 긴 복도라는 뜻이다. 한쪽에는 평균 해발 4,000m의 치렌산맥이, 또 다른 한쪽에는 황무지 같은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900km 길이에 폭은 40~100km. 실크로드 상인들은 이 좁고 긴 평지를 따라 비단을 나르고 전쟁을 하고 오아시스를 찾았을 것이다. 일직선으로 뻗은 허시후이랑에는 허시사군으로 불리는 우웨이, 장예, 주취안, 둔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들이 이어져 있다. 먼지를 풀풀 내며 달리고 또 달려도 창밖의 풍경은 변하지 않고 사막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버스를 타고 있는데도 온몸이 사막으로 변해 가는데, 그 옛날 대상隊商들은 어떠했을까. 이곳을 말과 낙타를 타고 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로 머리가 조아려진다. 자연이 그린 수채화 허시후이랑을 따라가다가 장예를 만난다. 장예는 란저우에서 510km 떨어진 도시로 마르코폴로가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장예에서 꼭 가 봐야 할 곳은 자연이 만든 예술품인 치차이산七彩山. 어떻게 흙에서 저런 색이 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빨간색과 노란색이 섞여 오묘한 빛을 내는 산들이 펼쳐져 있다. 정식명칭은 ‘장예단하국가지질공원’으로 ‘단하’는 붉은 노을을 의미한다.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퇴적작용으로 만들어진 치차이산은 계곡을 따라 510km나 이어져 있다. 전체 공원은 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구역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보여 준다. 희게 보이는 곳은 소금 성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 넓은 곳이 과거에 바다였다는 설도 있다. 치차이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산에서 뿜어내는 색을 가지고 주름치마를 만들어 입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자연의 색이다. 비가 오면 색이 진해져 더 아름답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장예를 찾은 날은 구름만 가득했다. 곽거병의 술샘 치차이산의 감동을 안고 서쪽으로 가다 보니 유인 우주선 발사기지가 있는 주취안酒泉에 닿는다. 주취안이라는 지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무제가 전쟁에 승리한 곽거병 장군에게 승리의 선물로 술을 한 병 내렸는데 곽거병 장군은 이 술을 혼자 마실 수 없다며 앞에 있는 샘에 술을 부어 부하들과 함께 마셨다는 것. 이 정도의 리더십은 있어야 실크로드에서 장군이 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곽거병 장군이 술을 부은 샘이 있는 곳이라 도시 이름이 주취안이 되었고 주취안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꼭 들르는 곳이 그 샘이다. 둔황을 향해 허시후이랑을 따라 부지런히 또 달린다. 이번에 나타난 곳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이다. 웅장하고 장엄하다. 자위관은 서역의 침입에 대비해서 1372년 명나라 때 만든 것으로 높이 10m, 둘레 733m의 거대한 성이다. 자위관의 크기만으로 서역의 군사들이 겁을 먹지 않았을까. 자위관에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3개의 망루가 있으며 박물관에서는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실크로드의 꽃,둔황 세계 불교 미술의 보고 둔황의 백미는 모가오쿠다.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는 이들은 거친 땅과 예측할 수 없는 기후, 적들의 침략 속에서 항상 불안했다. 그들은 무사안녕을 빌기 위해 석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세웠다. 그리고 벽화를 그려 넣었다. 그렇게 1,000년 동안 무려 1.7km에 달하는 깎아지른 절벽에 735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석굴 하나는 절 하나와 마찬가지. 735개의 사찰이 아파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처음 석굴에 들어가 벽화를 보았을 때 소름이 돋고 전율이 흘렀다. 모가오쿠가 처음 생긴 것은 16국 시대인 366년. 낙준이라는 승려가 석산 위에 나타난 부처의 상을 보고 만든 것이 시작이다. 이후 14세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가 석굴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석굴 안의 불상과 벽화에는 당시의 생활상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놀랍게도 건조한 기후와 빛이 들어가지 않은 굴 속에 자리해 1,000년 전 신비로운 색이 남아 있다. 까맣게 변한 것도 있고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오묘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옥색이나 자주색, 노란색 등 여러 색이 석굴 안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다. 수많은 석굴 중 가장 중요한 석굴은 17호 굴. 16호 굴에 들어가자마자 오른편에 난 문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호 굴이다. 고대의 불교경전이 쌓여 있던 굴로 장경동이라고도 불린다. 17호 굴이 발견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1900년대 초 석굴을 관리하던 왕원록이라는 노인이 모래를 치우다 우연히 작은 굴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책이 가득했던 것. 보물창고를 발견한 것이다. 둔황에서 실크로드의 중요한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세계 각국에서 날아들었다.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미국의 워너가 수만 점의 보물들을 각자의 나라로 빼돌렸다. 문서와 유물을 가져간 것에서 그치지 않고 벽화를 뜯어가기까지 했다. 그래서 모가오쿠에 가면 1,000년 전 벽화의 아름다움에 한번 놀라고 약탈 현장의 처참함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둔황이 아니라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7호 굴을 보고 난 후에는 61호 굴을 챙겨 봐야 한다. 61호 굴은 현존하는 세계 최대 실사 지도로 꼽히는 오대산지도라는 벽화가 있는 굴로 지도에서 신라 고승의 사리탑으로 추정되는 탑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220호 굴과 335호 굴에 그려진 벽화에는 새의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쓰고 있는 인물들이 있는데 조우관은 고구려시대에 흔하게 발견되던 모자다. 우리 선조들도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니 실크로드의 이야기들이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모가오쿠 남아있는 석굴은 수백 개에 이르지만 관람객들이 볼 수 있는 석굴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미리 예약을 해서 가이드와 함께 1시간 동안 10여 개 정도 석굴을 돌아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특별히 보고 싶은 석굴이 있으면 가이드에게 미리 요청을 해 놓는 것이 좋다. 모래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 모가오쿠를 본 후에 사막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둔황 시내에서 남쪽으로 5km 위치에 바람이 불면 모래가 노래를 한다는 밍샤산鳴沙山이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크기에 입구에서부터 입이 떠억 벌어진다. 높이 1,600m에 동서로 40km, 남북으로 20km나 이어져 있는 모래산. 실크로드 하면 떠오르는 사막을 가르는 낙타의 행렬이 눈앞에 펼쳐진다. 요즘에는 과거 대상들 대신 여행자들이 낙타 위에 앉아 있다.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인 웨야취안月牙泉을 보기 위해 사막을 오른다. 곱고 부드러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진다. 땀이 흐르지만 건조한 날씨에 금세 증발한다.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모래산에 올라 뒤돌아보니 신비로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2,000여 년 전부터 기록에 등장하는 웨야취안은 오랜 시간 동안 사막의 나그네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해 주었다. 모래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수천년간 마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만 하다. 연간강수량 39mm에 증발량이 2,800mm라니 더욱 놀랍다. 밍샤산에 오르면 웨야취안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멀리 둔황이라는 또 다른 오아시스가 보인다. 모래산을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 모래 사이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사람들, 곱디 고운 모래로 장난을 치는 사람들, 그윽한 눈으로 멀리 둔황시내를 바라보는 사람들. 같은 밍샤산에 올랐지만 이곳을 느끼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모두 달랐다. 끝과 시작이 있는 곳 시안西安을 시작으로 란저우와 장예, 자위관을 거쳐 둔황에 도착한 상인들은 이곳에서 서역으로 갈 채비를 한다. 실크로드는 둔황에서 북로와 남로로 갈라진다. 북로로 가려면 옥문관을 통해, 남로로 가려면 양관을 통해서 길을 떠나게 된다. 둔황 시내에서 80~100km 떨어져 있는 옥문관과 양관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비단을 낙타에 실은 상인들에게 익숙한 곳의 끝, 새로운 서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옥’이 오갔다고 해서 이름 붙은 옥문관은 거대한 문 하나만 달랑 남아 있고, 서역 남로 입구인 양관은 높이 4.7m의 봉화대만 남아 있다. 옥문관을 넘어 바라보는 길도 아름답지만 양관의 봉화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더 없이 황홀하다. 높은 곳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고비사막을 내려다보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길이 안겨 주는 막막함과 그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비장함이 함께 느껴진다. 당나라 시인 왕유는 양관에서 ‘그대에게 한 잔의 술을 권하니, 서쪽 양관으로 나가면 옛 벗이 있겠는가’라고 읊기도 했다. 익숙한 것과 이별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가는 두려움. 얼마나 위험한 일이 펼쳐질지,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그 마음. 실크로드 여행을 마무리하는 양관에서 수천년 전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 나간 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travel info Airline 동방항공이 인천-란저우 노선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요시간은 약 3시간이다. 대한항공 특별 전세기는 인천에서 우루무치까지 약 5시간 소요된다. 두 항공편 모두 10월 초까지 주 2회 운영한다. TIP 시차 베이징과 동일하게 서울보다 1시간이 늦지만 서쪽에 위치해 밤 10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 주의사항 건조하기 때문에 물을 잘 챙겨 마셔야 하며 수분크림과 미스트를 준비해 가면 도움이 된다. 선글라스와 모자는 필수. activity 둔황 야시장도 놓치지 마세요 둔황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해주는 것은 둔황 야시장. 과일과 견과류, 각종 기념품과 먹거리가 넘친다.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밤을 즐기기 좋은 곳. 여러 먹거리가 있지만 양꼬치가 특히 인기다. 원하는 부위를 고르면 즉석에서 구워 준다. 꼭 맛봐야 할 것이 하미과. 멜론처럼 생겼는데 겉은 노랗다. 둔황에서 세상에서 가장 달달한 메론을 맛보게 될 것이다. 기념품으로 많이 찾는 제품은 밤에도 보인다는 술잔과 실크로드의 아이콘인 낙타인형이다. 그리고 한 땀 한 땀 손으로 파 낸 목판 장식품이 있다. 야시장에서는 낙타의 모습이 담긴 각종 기념품들이 인기다 에디터 손고은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남성 여유증 치료, 여유증 원인 파악하는 것이 중요

    남성 여유증 치료, 여유증 원인 파악하는 것이 중요

    요즘 들어 여유증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하게 비만인구의 증가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를 비만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는 마른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여유증을 고민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여성형 유방증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201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의하면 남성 유방비대증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2007년 8,640명에서 2011년 1만1,070명으로 연평균 6.4%가 증가했다. 특히 10대가 약 3천 1백 명(28.6%), 20대가 약2천 2백 명(20%)으로 전체 진료환자 중 10-20대가 48.6%에 달해 눈길을 끈다. 여유증의 원인은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여성호르몬의 증가’이다. 10대 청소년들은 특히 에스트로겐과 안드로겐 등의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여성 호르몬이 증가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남자임에도 여자처럼 가슴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2차 성징의 발달 상태 및 경과를 지켜 보아야 하고, 혈액검사 및 고환 초음파 등의 남성성징관련 추적관찰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과체중이나 과도한 비만으로 가슴에 지방이 축적된 경우다. 이는 특히 10대와 20대 여유증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한번 축적된 지방조직은 식이요법이나 운동으로도 그 부피를 줄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흉부근육운동으로 더 도드라지게 보일 수 있다. 여유증의 세 번째 원인은 40~50대 이후의 연령층에서 피부 탄력 저하로 나타나는 ‘노화’로 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갑상선, 뇌하수체, 부신 등 내분비계나 고환에 종양이 있는 경우에도 여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관련, 수원에 위치한 더쎈남성의원의 방준호 원장은 “정확한 치료를 위해 여유증 유발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단순히 가슴에 지방이 많은 것이 이유라면 남성 가슴부위의 대흉근을 고려한 지방흡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지방과 유선조직이 함께 발달한 경우라면 남성 유선제거를 함께 시행해야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재발도 방지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여유증 수술은 남성호르몬 분비 및 2차 성징과 관련한 사항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특히 남성의원에서 시술을 받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시술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지청천 장군 딸’ 故 지복영 여사 회고록 연내 출간

    ‘지청천 장군 딸’ 故 지복영 여사 회고록 연내 출간

    ‘8월 29일은 우리 민족의 가장 부끄러운 날, 나라 잃은 날로 이날은 어느 집을 막론하고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1888~1957) 장군의 딸인 고 지복영(1919~2007) 여사의 회고록이 연내 출간돼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 독립운동의 기개와 애환 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 여사가 생전에 쓴 A4 용지 160여쪽 분량의 회고록과 별세 1년 전 진행된 구술 인터뷰를 바탕으로 회고록 집필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12일 밝혔다. 편찬은 두 아들인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저술가 이중연씨가 맡았다. 지 장군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하며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한국광복군 등에 몸담은 대표적인 독립투사다. 해방 이후에는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 여사 역시 1924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나 지린(吉林)성 일대와 장쑤(江蘇)성 난징(南京),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등으로 옮겨 다녔으며 청년기에는 본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1940년 9월에는 아버지가 이끄는 광복군에 입대해 기관지 ‘광복’을 발간하는 데 힘을 보탰다. 회고록에는 항일 활동을 하며 겪은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다. 지 장군이 만주 벌판을 달리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통에 아버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어린 시절도 엿볼 수 있다. 지 여사는 “사진 속 아버지 얼굴만 기억했다. 거리에 지나가는 말 탄 사람을 보고도, 양복을 입고 점잖게 지나가는 분만 봐도 ‘아버지 온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우리가 누리는 삶은 선조가 겪은 힘든 삶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역사 교육 차원에서 젊은 세대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출간 계기를 밝혔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서동철의 시시콜콜] 구봉, 율곡, 우계 역사문화벨트

    [서동철의 시시콜콜] 구봉, 율곡, 우계 역사문화벨트

    삼현수간(三賢手簡)은 구봉 송익필(1534∼1599), 우계 성혼(1535∼1598), 율곡 이이(1536∼1584)가 주고받은 편지를 후대에 4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나란히 한 살 터울인 구봉, 우계, 율곡은 서로 절친한 벗이자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대가(大家)라는 공통점이 있다. ‘세 현인의 손편지’라는 제목처럼 당시의 성리학 이슈를 치열하게 토론한 내용이 담긴 만큼 학술적·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아 2004년에는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구봉, 율곡, 우계가 살던 곳은 현재의 경기 파주시의 산남리, 율곡리, 눌노리다. 산남리는 출판단지와 맞붙은 심학산 아랫동네다. 심학산은 조선시대 구봉산(龜峯山)으로 불리며 구봉(龜峯)이라는 송익필의 호를 낳았다. 이곳은 지금 파주시지만 조선시대에는 고양 땅이었던 듯 하다. 그대로 율곡(栗谷)의 호가 된 율곡동(栗谷洞)은 임진각에서 멀지 않은 임진강변이다. 율곡동과는 지척인 우계(牛溪)는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눌노천(訥老川)변이다. 한강과 임진강은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에서 합류하니 세 사람은 물길을 따라 사이좋게 줄지어 살고 있었다.개인적으로 파주 교하에 자리 잡은 것이 벌써 10년이 됐다. 내가 살아가는 고장의 역사와 그 자취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특히 구봉, 율곡, 우계처럼 우리 정신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킨 주역들의 체취를 가까이서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실제로 율곡리 화석정과 율곡의 무덤이 있는 자운서원, 우계를 배향한 눌노리의 파산서원을 종종 찾는다. 둘레길이 있는 심학산에도 자주 간다.율곡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진하던 선조가 강을 건너려 할 때 화석정에 불을 붙여 폭우가 내리는 밤길을 밝혔다. 반면 우계는 달려오지 않아 노여움을 오래도록 샀다. 우계는 깊은 산으로 피란해 몽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산남리에는 ‘구봉산 아래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을 양성했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구봉의 말년이 불우했던 때문인지 유허비 말고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율곡과 우계의 인심도심논쟁(人心道心爭)은 한국 철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상적 격돌의 하나이기도 하다. 율곡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고, 우계를 기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럴수록 친구지만 사상적으로는 방향을 달리했던 율우의 자취를 한데 엮어 의미를 부여하면 관심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구봉의 유적은 본격적인 정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주시는 ‘구율우(龜栗牛) 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면 어떨까.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이웃 문화재가 시너지 효과를 거두는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장원 급제의 꿈

    장원 급제의 꿈

    5일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제21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 참가자들이 열심히 답지를 쓰고 있다. 서울시는 선조의 선비정신을 되새기고자 매년 과거 재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호정 기자 hojeong@seoul.co.kr
  • 어울나래의 ‘신나는 예술여행’, 줄타기 한마당

    어울나래의 ‘신나는 예술여행’, 줄타기 한마당

    가을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맑고 화창한 날이 계속돼 나들이 하기 좋은 계절로 꼽힌다. 이에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가을을 맞아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풍성한 문화축제가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전통연희단 어울나래(대표 이보라)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전국 임대주택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전통연희단 어울나래의 줄타기 한마당’을 진행한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로 올해는 작년보다 공연 횟수가 늘어, 총 19회가 열릴 예정. 지난 5월 제주에서 시작된 공연은 대구, 분당, 인천, 울산, 부산 등 전국을 거쳐 성황리에 개최됐으며 현재 천안, 사천 등 가을 공연만을 앞두고 있다. 줄타기 한마당은 풍물패의 길놀음을 시작으로, 화려한 개인놀이가 돋보이는 소고춤, 12발 상모놀이, 버나 돌리기 등이 어우러진 전통 예술공연. 삶의 애환을 달래는 창과 판소리, 전통무용인 장검무, 민요와 함께 줄꾼 박회승의 화려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줄타기 공연이 이어져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3m나 되는 줄 위에서 펼쳐지는 줄꾼 박회승의 줄타기 공연은 숨죽여 집중하게 만드는 묘기에 팔도 사투리를 더한 특유의 재담으로 관객 모두에게 웃음과 감동을 전해준다. 공연을 진행하는 어울나래 관계자는 “판소리, 줄타기 등이 어렵고 낯선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삶과 함께 해왔던 전통문화예술공연이라는 점에 착안, 남녀노소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며 “공연 중간 중간 소리꾼에게 판소리 한 대목과 추임새를 직접 배울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해 관객과 하나가 되는 공연이 되도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 2014 전통연희단 어울나래의 줄타기 한마당은 현재까지 13회의 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됐으며, 앞으로 6회의 공연이 남아 있는 상태다. 10월에 열리는 순회공연은 ▲청양읍내 1관리소(10월 1일, 16시) ▲천안병천신한관리소(10월 7일, 15시) ▲경남사천벌리1관리소(10월 15일, 14시) ▲칠곡왜관2관리소(10월 18일, 14시) ▲안산고잔1관리소(10월 22일, 13시) ▲대구명곡2관리소(10월 24일, 14시) 등에서 차례로 펼쳐진다. 전통연희단 어울나래의 줄타기 한마당은 ‘2014 복권기금 문화나눔 사업’인 ‘신나는 예술여행’의 일환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어울나래 주관하며 주택관리공단과 SH 공사 협력,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후원으로 개최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난공불락 요새 18세기 방랑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경기도 여주 서쪽은 광주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광주부)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화가 결정되고 나서도 국도(한양)를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중요한 성이라 생각해서, 성 안에다 절 아홉을 세워 스님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으로 삼았다. 해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후한 녹을 주는 까닭에 스님들은 오로지 활과 살로써 업을 삼았다. 조정에서는 나라 안에 스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힘을 빌려 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인조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내려온 것이지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3세기 전 세계를 휩쓴 무적 몽골군의 두 차례 공격과 병자호란 당시 12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파상공세도 47일간 막아냈다. 해발 4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본성과 외성을 합쳐 11.7㎞가 넘는 성벽을 쌓았는데 내부는 넓고 평평했다. 우물이 80곳, 연못이 45개에 이를 정도로 물이 풍부해 군량미와 소금만 잘 비축하면 수만 명의 병력이 장기농성할 수 있는 철벽의 금성탕지였다. 우리나라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다 합쳐 3000여개의 성이 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니 1리마다 1개의 성곽을 쌓은 셈이다. 가히 ‘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남한산성은 산성 축성기법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성곽유산으로는 평지 성인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1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문화대국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등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며 조선의 자주와 독립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 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이며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의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남한산성이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63%, 하남시에 24%, 성남시에 13%가 속해 있다. 광주는 고려 태조가 이름 짓기 이전까지 한강 남쪽의 넓고 오래된 땅 한산(漢山)이었다. 하남이라는 지명은 한강의 남쪽,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쪽에 면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서울과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공간적 존재감을 알 만하다. 남한산성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의 안전을 담보하는 보장처였다. 왕의 선택지는 대개 강화 섬이 아니면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주로 광주행궁이라고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는 23곳에 이르는 행궁이 있었다.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했다. 전란에 대비한 광주행궁, 양주행궁(북한산성), 강화행궁, 전주행궁을 비롯해 능행을 목적으로 화성행궁, 이천행궁, 파주행궁, 고양행궁, 풍덕행궁을 지었다. 왕은 질병 치료와 휴양차 온양행궁, 청주행궁, 목천행궁, 고성행궁, 전의행궁 등에 행차했다. 온양행궁 가는 길인 과천행궁과 수원행궁에도 머물렀다. 행궁의 역사는 오래다. 백제본기에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라는 최초의 기록이 남았으며 고려사에는 40건의 행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했다.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임시 수도로서의 위상이다.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으며 광주부가 1917년 경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29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 도시였다. 규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행궁은 두 개의 궁으로 나뉘었는데 상궐은 73칸, 하궐은 154칸으로 총 227칸의 당당한 규모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 경복궁은 7715칸, 창덕궁은 4500칸이었다. 화성행궁은 576칸, 북한산성 행궁은 124칸이었다. 대부분의 행궁은 말이 궁이지 왕이 실제 머문 횟수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가 모두 6차례 행차했고 머문 기간도 농성 47일을 비롯해 50일을 넘었다. 이후 숙종과 영조가 서장대를 둘러보았고, 정조는 서성과 남성을 거쳐 북성까지 돌아보고서 서장대에서 군사훈련까지 했다. 이후 철종과 고종 등 모두 6명의 왕이 찾았다. 남한산성이 몽골과 청은 물론 일제에 항거한 외세 저항의 본거지였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광주, 이천, 여주 지역 의병 1600명으로 이뤄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면서 삼남지방 및 강원도 지역 의병 3000명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하기로 한 을미의병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을사의병과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산성 안 행궁과 사찰을 불태우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광주읍성도 성 아래로 옮겨버렸다. 1, 2차 대몽항쟁의 승전지에다가 척화론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윤집, 오달제, 홍익한 세 학사를 모신 현절사가 세워진 항청의 기운이 항일로 옮아붙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여기에 깃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남한산성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숭열전이 있다. 정조실록 등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군사를 독려하다 앉아서 잠시 조는 사이 꿈에 온조가 나타났다. “적이 사다리를 타고 북성을 오르는데 뭐하고 있는가”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들어 군사를 보내 격퇴했으며 이에 감읍해 온조왕의 묘를 지어 제사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서라는 장군이 배향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환궁한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묘를 세워준 것이 고마우나 혼자서는 지내기 외로우니 이서 장군을 보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이서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인조는 온조가 이서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 숭열전에 배향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정말 백제의 왕도였을까 남한산성은 과연 백제의 왕도였을까. 택리지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서들이 남한산성을 백제의 고성(古城)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으론 입증된 바 없다. 18세기 홍경모가 지은 ‘중정남한지’에는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고,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다”면서 “백제의 도읍은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는 다른 설을 주장했다. 현재까지 하남시 이성산성과 교산동 유적은 물론 남한산성에서도 백제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는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한산주(광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원조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사 4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주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해서 신라가 쌓은 한강 이남의 방어거점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7년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군량미 창고 터가 발굴돼 ‘주장성=남한산성’의 신빙성을 높였다.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이라고 불렸다. 한강과 한양의 북쪽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산과 남한산성이 있다는 논리에 따른 작명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인조의 성’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역사상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와 함께 비운의 임금 1, 2위를 다투는 인조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즉위했으나 반정공신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달아나야 했다.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내세우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등 세 번이나 도피행각을 벌였다. 즉위 2년 만인 1624년 남한산성 축성을 명하였고 1626년 성이 완성되자 서부면에 있던 광주부를 옮긴 것도 인조였다. 남한산성은 축성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순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이 땅에는 3000개에 이르는 성이 있었지만, 성의 역할을 제대로 한 성은 평양성과 진주성, 강화성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외세에 빼앗기지 않았던 ‘서울지킴이’ 같은 존재이다. 항몽, 항청, 항일의 구국 혼이 살아 숨 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새정치연 비대위 초반부터 삐걱

    새정치연 비대위 초반부터 삐걱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초반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당내 비노무현 그룹의 반발에 이어지는 데다 내년에 치러질 차기 당대표 선거를 겨냥해 비대위원들 간에 조기 경쟁에 돌입한 모양새다. 친노의 구심점인 문재인 의원이 차기 당권을 향한 발걸음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문 의원의 측근인 문성근 전 민주당 대표와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등과도 최근 교류가 잦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비노무현 측 의원들의 촉각이 곤두서 있는 상황이다. 특히 모바일투표가 차기 전당대회에서 부활할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모바일투표는 전당대회에서 일반 국민이 휴대전화로 정당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강한 친노(친노무현) 진영에 유리하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비대위원인 박지원 의원은 이날 트위터에 문 비대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모바일투표 재도입을 시사한 것과 관련, “문 비대위원장에게 공사석에서 발언을 조심하라고 말씀드렸다”고 썼다. 박 의원은 “(모바일투표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가장 큰 문제”라며 “특히 비대위에서 논의도 안 됐고, 비대위가 출범하자마자 이런 시비가 시작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날 그의 발언은 차기 당권을 노리고 있는 박 의원이 경쟁 상대인 문재인 의원을 의식해 문 비대위원장에게 경고를 날린 것으로 해석된다. 비대위 구성에서 제외된 당내 중도혁신파 의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됐다.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 소속 김성곤·김동철·유성엽 의원은 이날 문 비대위원장과 만나 중도파를 대변하는 비대위원 임명을 추가 요청했다. 세 의원이 거론한 3대 중도세력은 안철수계, 손학규계, 중도파 의원 모임인 ‘민집모’다. 이런 복잡한 계파 간 갈등 속에서 이날 비상대책위원회는 첫 외부 일정으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당 혁신 의지를 다졌다. 이날 방문에는 문 비대위원장을 포함해 박영선 원내대표, 정세균 상임고문 등 비대위원 전원과 조정식 사무총장 등 30여명이 대거 참석했다. 문 비대위원장은 방명록에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나온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한자로 남겼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군의 330척에 맞선 것처럼 당 상황이 어렵지만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비대위원들은 현충탑 참배에 이어 김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 자리에는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아들 홍업·홍걸씨, 권노갑 상임고문, 정균환 전 의원 등이 동행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정병석의 경제산책] 조선의 진상품과 작은 재정론

    [정병석의 경제산책] 조선의 진상품과 작은 재정론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궁중 요리경연대회를 보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갖가지 식재료를 사용하여 왕과 왕비를 위해 최고의 음식을 요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또한 온갖 약재를 써서 왕실의 약을 짓는 모습도 나온다. 이때 쓰이는 식재료와 한약재가 주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들이다. 본래 진상품이란 특정 지방을 관장하는 수령이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나라의 어른인 왕에게 선의의 선물로 바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또 하나의 세금과 같이 운영되었다. 진상품의 목록을 보면 식재료와 약재, 생필품 등 별별 것이 다 들어 있다. 전국 각지에서 사시사철 특산품을 수집하여 왕실에 운반하는 것은 엄청난 물류 유통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왕에게 직접 진상하는 것이므로 최고의 제품을 골라 품질을 유지하면서 운반해야 했다. 진상품에는 갖가지 생물이 망라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꿩, 사슴, 노루, 돼지 등을 산 채로 잡아 한양으로 운반하고 해산물도 생대구, 생오징어, 생낙지, 생굴, 생문어, 살아있는 게, 생홍합, 산 참조기, 산 쏘가리 등을 진상해야 했다. 도로나 운송수단 등 물류 시스템이 유달리 취약했던 조선 시대에 이런 생물을 조달해야 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더구나 산 꿩을 진상하는 경우 살이 조금만 상처 나도 납품 관리들이 접수하지 않으므로 매가 잡은 것은 바치지 못하고, 많은 백성들이 산과 들을 에워싸고 맨손으로 꿩을 잡아서 바쳐야 했다. 이것이 전국 각지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심지어 전란 중에도 이런 진상품은 약간 탕감되기는 하였으나 계속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선조 29년(1596년) ‘백성들이 가엾으니, 혹시 손상된 꿩이라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시도록 진언’하자 이를 왕이 큰 도량으로 윤허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도별로 분담된 진상품은 도의 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가 산하의 각 관청에 배정한다. 산하 관청에서는 일부는 관청에서 직접 조달하고 나머지는 민간에 부과한다. 관청의 진상품을 확보하기 위해 수영과 예하 진영에서 설치한 관설 어장에 수군들을 내보내 진상물을 포획하게 하는 것이다. 진상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점은 왕실의 소요품을 무상으로 백성들에게 부담시키고 징수했다는 것이다. 유형원이나 유수원 등 실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차라리 경제원리를 적용하여 왕실에 일정한 금품을 배정하고 소요 물품을 이 돈으로 시장에서 구매하게 했다면 백성들의 부담도 줄이면서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오늘날 여러 지방에서 과거의 진상품을 찾아내어 왕실에 납품하던 특산품이라고 내세우면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고나 할지. 정도전을 비롯한 초기 건국자들은 조선을 설계할 때 국민에게 조세 부담을 최소화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국가경비를 축소하는 것이 민본국가의 이념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국가의 재정을 적게 편성하면서 정부의 운영비, 관리의 인건비도 제대로 책정하지 않고 왕실의 식자재, 생필품 등 운영비도 배정하지 않았다. 재정이 부족하면 중앙 정부 관료의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지방 향리들의 봉급은 대부분 배정하지도 않았다. 권력을 가진 관청에 운영비와 인건비를 주지 않고 알아서 자체 조달하라고 하면 그것이 민간 백성에게 몇 배로 전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 작은 정부는 이상적인 정책이었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더 큰 부담을 끼쳤다. 최근 담뱃값 인상논란을 보며 문득 조선의 진상제가 떠올랐다. 세율을 올리지 않기 위해 담뱃값을 대폭 올리고 30조원이 넘는 국채를 발행하려는 것은 국민에게 현재의 세금을 늘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줄지 몰라도 결국 실질적 부담이 커지는 것은 아닌지? 국가의 정책은 국민이 이해할 수 있게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 15대 심수관 “전통 도자기 활성화 기여하고 싶어”

    15대 심수관 “전통 도자기 활성화 기여하고 싶어”

    15대 심수관(55)이 19일 경북 청송을 방문했다. 심수관은 청송에 뿌리를 둔 도예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심당길이 일본으로 끌려간 뒤 420여년 동안 가문을 이어 가며 일본 도예계를 주도했다. 12대 후손부터 심수관이란 이름을 이어받아 선조들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했다. 15대 심수관이 그의 본향인 청송을 찾은 것은 지난 3월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부동면 하의리 주왕산관광지에 들어선 심수관도예전시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심수관도예전시관은 청송군이 58억 2000만원을 들여 건립했다. 12~15대 심수관 작품 30여점과 돌의 가루로 도자기를 빚은 500년 전통의 청송백자 40여점 등이 전시돼 있다. 15대 심수관은 평소 ‘청송은 나의 영원한 성지’라며 청송에 대해 강한 애정을 보였다. 또 청송은 ‘심가’ 일족의 본관지이며 본관은 성씨의 뿌리라고 했다. 청송군은 15대 심수관의 청송 예찬론에 지난해 11월 명예군민증을 전달하며 화답했다. 이날 그는 일본인 부인 오사코 스미코(55)씨와 동행했다. 청송읍 덕리에 위치한 시조 묘에서 한복을 입은 15대 심수관과 기모노를 입은 그의 부인이 함께 성묘도 했다. 이어 파천면에 있는 송소고택을 둘러봤다. 송소고택은 99칸 한옥으로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지었다. 오후에는 심수관도예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 관람 후 그는 “심수관 도자기가 청송백자와 더불어 전통 도자기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15대 심수관의 청송 방문에는 한동수 청송군수도 함께했다. 한 군수는 “심수관가는 청송의 자랑거리다. 심수관도예전시관을 야송미술관, 객주문학관 등과 연계해 문화가 함께하는 청송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밝혔다. 청송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배설 장군 후손들, ‘명량’ 관계자 고소 “최소 4곳 왜곡” 영화 속 장면보니..

    배설 장군 후손들, ‘명량’ 관계자 고소 “최소 4곳 왜곡” 영화 속 장면보니..

    ‘배설 장군 후손들’ ‘배설 장군’ 영화 ‘명량’에서 악역으로 등장, 이순신 장군을 배신한 캐릭터로 그려졌던 배설 장군의 후손들이 영화 관계자들은 고소했다. 지난 15일 배설 장군의 후손 경주 배씨 문중의 비상대책위원회는 경북 성주 경찰서에 ‘명량’의 김한민 감독, 전철홍 작가, 소설가 김호경 씨를 형법상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배설 장군 후손들이 고소장을 접수한 이유는 배설 장군이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됐기 때문이다. 영화 ‘명량’에서 배설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반대편에 서서 거북선을 불태우고 이순신 장군의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그려졌다. 이에 배설 장군의 후손들은 “영화에서 묘사한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며 “17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에게 실존 인물인 배설 장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배설 장군 후손들은 칠천량 해전 장면, 이순신 장군 암살 시도, 거북선 방화, 도망치던 중 거제현령 안위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 장면 등 최소 4곳이 다르다고 밝혔다.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소설 작가와 영화 제작사 측은 지금까지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으면서 언론을 통해 무책임하고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화의 성공에 편승한 금전적 보상 따위가 아니라 훼손된 선조 배설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뿐”이라고 전했다. 한편 영화 ‘명량’의 제작사 빅스톤픽처스 관계자는 “극중에서 배설 장군을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밝힐 것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배설 장군 후손들의 명량 관계자 고소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배설 장군 후손들, 역사랑 다르면 화날 만 하겠다”, “배설 장군 후손들, 최소 4곳이 다르다고?”, “배설 장군 후손들, 영화적 허구도 중요하지만 사실도 중요하지”, “배설 장군 후손들, 팩트 왜곡한거면.. 고소할 수도 있을 듯”, “배설 장군 후손들, 영화에서 배설 장군이 배신하는 캐릭터인가?”, “배설 장군 후손들, 이번 기회로 배설 장군이 누군지 알려졌으면 좋겠네”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서울신문DB(‘배설 장군 후손들’ ‘배설 장군’) 연예팀 mingk@seoul.co.kr
  • 명량서 배설장군 악인 묘사 후손들 제작자 등 3명 고소

    명량서 배설장군 악인 묘사 후손들 제작자 등 3명 고소

    17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불러 모은 영화 ‘명량’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배설(1551∼1599) 장군의 후손인 경주 배씨 문중이 영화 관계자들을 고소했다. 경주 배씨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15일 영화 명량 제작자인 김한민 감독, 전철홍 각본가, 김호경 소설가 등 3명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경북 성주경찰서에 고소했다. 비대위는 “영화 명량 제작자 등이 배설 장군을 역사적 사실과 달리 이순신 장군을 살해하려 하고 거북선을 붙태우고 도망치다 부하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왜곡 묘사해 명예를 훼손한 것은 물론 후손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며 고소 이유를 설명했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등에 따르면 배설은 1597년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병을 치료하겠다고 이순신 장군의 허락을 받아 뭍에 내렸다가 종적을 감췄으나 2년 뒤인 1599년 구미(선산)에서 권율에게 붙잡혀 참수됐다가 이후 무공이 인정돼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써 영화 속에서 배설의 모습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허구의 모습인 셈이다. 배윤호(59) 비대위 대변인은 “배설 장군이 명량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는데도 사실과 다르게 묘사돼 명예가 훼손됐다”면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강조한 제작자 측은 정작 후손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영화로 봐 달라는 자기편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외국어 습득능력 올리는 ‘유전자 돌연변이’ 존재 규명 [MIT]

    외국어 습득능력 올리는 ‘유전자 돌연변이’ 존재 규명 [MIT]

    외국어 습득능력, 언어구사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주는 유전자 돌연변이의 정체가 규명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의학전문매체 메디컬 엑스프레스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맥거번 뇌 연구소, 독일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대학,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공동 연구진이 인간의 언어구사력, 외국어 습득능력을 향상시켜줄 특수한 유전자 돌연변이 현상을 규명했다고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 유전자 돌연변이의 구심점은 인간의 언어 구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유전자 ‘FOXP2’다. FOXP2를 실험용 쥐에게 주입한 결과, 해당 쥐는 기존 쥐와 달리 빠른 시간 안에 복잡한 미로를 돌파해내는 등 놀라운 지능 향상 효과를 보였는데 인간형 FOXP2 유전자가 쥐 유전자와 결합돼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초래된 특징으로 연구진은 추정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인간형 FOXP2 유전자는 쥐의 행동습관과 통신능력을 관할하는 뇌의 선조체(striatum) 영역을 확장시키고 신경세포(뉴런)의 접합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뇌 신경세포를 자극해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분비를 촉진, 기억력 향상에도 일부 영향을 줬다. 이는 FOXP2 유전자가 뇌의 학습능력, 언어통신능력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DNA적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FOXP2 유전자는 지난 2001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에 의해 처음 발견됐으며 1년 후 같은 연구진에 의해 이 유전자가 인간에게만 특정 돌연변이를 일으켜 동물과는 다른 독보적인 언어체계를 구축시키는데 기여했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FOXP2의 유전자 돌연변이는 12만~20만년 전에 처음 발생됐으며 현재 인간이 가진 형태의 유전자 돌연변이는 최소 1만~2만년 전 확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FOXP2 유전자의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연구진은 FOXP2 유전자 돌연변이는 말하기 능력, 언어 이해력, 외국어 습득능력 형성에 밀접한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즉, FOXP2 유전자 돌연변이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학습능력, 언어 습득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란 점이 이번에 밝혀진 것이다. 연구진은 “FOXP2가 혹시 체내 다른 유전자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지, 이를 밝혀내는 추가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연구결과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됐다.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그리고 그는 그의 마음을 미지의 기술에 바쳤다.” 책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제8권에서 인용한 말이다. 이 문장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가 크레타 섬에서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대목으로, 이 책의 주인공인 스티븐의 대사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이 그를 크레타 섬에 가뒀을 때 손수 날개를 만들어 달고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탈출한 인물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표상이다. 주인공 ‘스티븐’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이름이고, 디달러스는 ‘명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이달로스의 이름이다. 바로 이 인용문과 이름에서 작가가 예술가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예술가는 갇혀 있는 체제 속에서 격리되고 추방되는 동시에 창조를 통해 탈출하며 순교하는 자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대사인 “삶이여, 오라. 나는 이제 백만번씩이라도 경험의 현실과 만나러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의식을 벼려 내러 간다”는 탈출에 성공해 비상하는 다이달로스의 이미지와 겹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으로의 비상을 표현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창조했다. 의식의 흐름은 개인의 의식에 떠올라 그의 이성적 사고의 흐름에 병행해 의식의 일부를 이루는 시각적·청각적·물리적·연상적·잠재의식적인 수많은 인상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다. 의식의 흐름은 인물이 갈등하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주로 주인공의 내적 독백으로 서술된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으며 스티븐의 예민한 의식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의 내적 진실과 맞닥뜨린다.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인 ‘에피퍼니’는 매 장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1장에서 스티븐이 돌란 신부에게 억울하게 매를 맞으며 종교의 부당한 권력에 대해 자각하는 순간, 2장에서 가정 경제의 몰락으로 인한 현실인식을 하는 순간, 3장에서 죄를 범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 4장에서 바닷가에서 치마를 과감하게 걷어 올린 한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는 스티븐에게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 순간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에피퍼니인 바닷가 소녀를 보는 장면은 스티븐의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는’ 삶과 연관이 있다. 이는 당시 부모가 그에게 요구했던 아일랜드의 질서 안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나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장이 요구했던 경건하고 순결한 성직자의 삶도 아니다. 온갖 관습과 의무를 벗어난 새로운 길인 것이다. 스티븐의 감수성과 의식은 가정, 학교, 정치, 성, 종교, 민족, 언어, 예술 등과 대면하며 갈등을 겪게 되는데 크게 가정, 종교, 국가와 충돌한다. 먼저 가정은 스티븐에게 안정을 주지도 못하고 평화롭지 않다. 경제적으로나 지성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게으른 암캐”라고 아들을 지칭하며 스티븐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어린 스티븐에게 포근한 이미지였던 어머니는 주체적인 여성이라기보다는 맹목적으로 아들에게 종교를 종용하는 대변인이다. 스티븐에게 어머니는 “뚫고 날아가야 할 자신의 영혼 위에 덧씌워진 그물”일 뿐이다. 스티븐은 정신적 고아다. 종교 또한 스티븐에게 회의와 저항감을 줄 뿐이다. 전형적인 아일랜드 중류가정의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스티븐에게 종교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굴레였다. 스티븐은 성직자의 횡포와 위선을 겪으며 종교적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스티븐에게 가톨릭 설교는 인간의 감각적인 욕망을 지나치게 절제시켜 영혼을 짓누를 뿐이다. 스티븐은 신이 원하는 모습은 진실한 마음이지 강압적인 수행이나 고행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작문 시간에도 현실순응적인 테니슨보다 저항적이고 자유분방한 바이런의 강렬한 시적 표현에 심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이 종교인보다는 예술가에 있음을 인식한다. 국가 역시 자유와 안식을 주지 못한다. 아일랜드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상태였으며 가톨릭에서 심한 억압을 받았다. 민족독립운동가인 파넬이 독립을 이뤄낸 듯했으나 이후 불륜으로 실각하면서 자유를 쟁취하지 못한다. 독립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배신과 변절 등 사회 내부적 갈등이 산재해 있었다. 조이스는 이러한 아일랜드에 환멸을 느낀다. 이런 상황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돼, 이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상상력과 더불어 작가의 내면과 당시 아일랜드의 도시와 시민, 의식, 정치, 역사 등을 체험하게 한다. 주인공 스티븐의 성격묘사와 배경이 되는 더블린의 모습은 젊은 시절 조이스가 살던 더블린을 반영하고 있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실제 아일랜드의 정치와 역사적 사실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스티븐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은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고 영국문화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옛 고전 문화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스티븐은 이러한 문예부흥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 미래가치적인 것을 품고 나가려는 스티븐에게 과거 지향적인 문예부흥 및 민족주의는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택했어….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라며 국가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결국 스티븐은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조국이든 나의 종교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라며 가족이나 종교, 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예술가로 살아갈 것임을 선포한다. 실제로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내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조국과 불화를 겪었는데, ‘더블린 사람들’이나 ‘율리시스’ 등 조이스의 작품은 삭제요구와 소송제기의 위협, 출간 금지를 당하며 고국의 핍박을 받았다. 그는 고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조국과 화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대부분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 억압이나 속박을 알고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거기서 자유롭게 탈피하지 못하고 예속된 삶을 살아간다. 스티븐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예술가적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를 찾아갔다. 그것은 자유로운 영혼의 길이며 예술의 방식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자각을 통해 비상하려는 이들에게 공감과 용기를 준다. 스티븐은 예술에서 그 길을 찾았다. 스티븐처럼 비록 시대와 불화하더라도 참된 자유를 누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어느 세계로 비상할 것인가. 이 물음은 욕망으로만 삶을 담보할 수 없는, 내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신운선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 내 고장 역사 인물 마케팅사업 애물단지 전락

    내 고장 역사 인물 마케팅사업 애물단지 전락

    경북 지방자치단체들의 무분별한 역사 인물 마케팅 사업이 예산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15일 경산시에 따르면 지난해 6월까지 총 443억원을 들여 남산면 상대로 일대 부지 26만 2774㎡에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을 완공했다. 원효·설총·일연선사 등 경산에서 탄생한 삼성현의 역사적 업적과 일생을 기리고 문화도시로서의 경산 이미지 부각을 위해서다. 이 공원은 삼성현 유물·유적 전시실을 비롯해 공연장, 국궁장, 산책로, 광장, 다목적 운동공간 등을 갖췄다. 그러나 공원은 완공된 지 1년이 넘도록 문을 열지 못한 채 예산만 낭비하고 있다. 연간 공원 유지와 관리에 예산 4억원을 쏟아붓고 있어서다. 시가 삼성현 관련 유물 및 콘텐츠 확보 등의 사전 준비 없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탓이다. 시는 연말까지 삼성현과 관련한 인물 검색과 스토리텔링, 애니메이션 등의 개발을 끝내고 내년 3월 문을 열 예정이지만 이마저도 불투명하다. 예천군도 지역 출신 효자 도시복(1817~1891) 등을 기리기 위한 충효테마공원 조성 사업을 벌였지만 결국 예산 낭비만 초래하고 있다. 감천면 포리 일대 부지 21만여㎡에 총 208억원으로 들여 조성, 2010년 개장했지만 방문객이 평일 30~40명, 주말 100여명에 그친다. 이 공원에는 충신 정탁(1526~1605)·효자 도시복 이야기를 비롯해 충신과 세계 충효 이야기 등 각종 체험장과 농경문화 전시실이 있다. 군은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2012년 공원 활성화와 새로운 볼거리를 위해 F-5B, F-4D 2대의 퇴역 전투기를 전시하는 꼴불견을 연출했지만 방문객은 늘어나지 않고 있다. 연간 운영비가 1억 8000만원에 이른다. 구미시도 2009년 구한말 항일의병장을 지낸 왕산 허위(1854~1908) 선생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39억원을 들여 선생의 고향인 임은동에 ‘왕산기념관’을 건립했고, 지난 3월에는 23억원이 투입된 조선조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 기념관을 개관했지만 방문객의 발길은 뜸하다. 이런 가운데 안동시가 2016년까지 풍천면 도청 신도시 부지 3만 3000㎡에 서애 류성룡기념관을, 서후면 학봉종택 인근 2만㎡에 학봉 김성일기념관을 각각 100억원을 투입해 건립할 예정이다. 하지만 지역 사회단체 등은 특정 문중을 위한 사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경북도와 영주시도 내년부터 300억원을 들여 이산면 신암리 봉화 정씨 시조 묘역 일원에 ‘삼봉 정도전 기념공원’ 조성에 나서 2017년 완공하기로 했다. 주민들은 “지자체들이 단체장의 치적 쌓기와 문중, 사찰, 권력에 휘둘려 무분별한 역사 인물 재조명 사업을 벌이면서 엄청난 혈세가 낭비되고 있다”면서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지자체 관계자들은 “전국의 많은 시·군·구가 지역 출신 종교인, 문인, 장군 등의 위대한 업적 등을 기리고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관련 사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면서도 “사업이 당초 계획대로 성과를 내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한국전쟁 최대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서울사수’를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전쟁발발 이틀 만에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면서 한강 다리마저 폭파해 150만 서울시민을 적지에 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전에 머물면서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녹음방송을 내보내 국민을 속였다. 국회가 서울 사수 결의를 전달코자 했을 때 대통령은 경무대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그때 한강 다리를 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의 원한이 부동산 투기로 이어져 오늘의 강남 아파트공화국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몽진(蒙塵)의 역사는 길다. ‘서울 사수’는 한국전쟁 때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고려 이후로 역사를 좁혀도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도읍 송악(개성)이 함락돼 현종이 나주로 몸을 피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9차례 일어났다. 조선 선조와 인조, 고종 등 3명의 왕이 5차례에 걸쳐 의주와 강화, 남한산성, 러시아공사관으로 각각 몸을 피했다. 인조는 강화, 남한산성에 이어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도피한 비운의 ‘몽진 3관왕’이었다. 그 이전에 4명의 고려 왕(현종·고종·충렬왕·공양왕)이 거란과 몽골을 피해 강화, 안동 등을 30년 가까이 전전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몽진이나,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간다’는 파천(播遷) 같은 왕에게만 쓰는 고상한 용어로 헛갈리게 하지만 이승만식 야반도주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성수성론 대 서울사수론 1751년에 나온 영조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은 봉건 전제군주의 폭탄선언이었다. 이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도성수성론’(都城守城論)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본격 거론된 것이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지 114년 만이고,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기 145년 전의 일이다. 사실 도성과 도성민은 방어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적이 침입해 도성에 접근하면 왕은 신속하게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상륙 18일 만에,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한양도성을 손에 넣었다. 유사시 왕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별도의 보장처(피신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해 두는 것을 동양 병법의 전통으로 여겼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왕뿐이었다. 개성, 강화, 화성, 광주 등 4곳에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중앙관서로 삼았다. 왕이 도성 밖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이자 피신처였다. 이 중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 수원 화성과 더불어 외침에 대비한 농성 장소였다. 1712년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끝낸 숙종은 북한산성에 올라 “내 어찌 도성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념시를 지었다. 외침이 있으면 이곳에 들어와 백성과 더불어 성을 지키겠다는 얘기다. 이때 19살이던 연잉군(영조)은 부왕을 부축해 산성에 올랐다. 도성민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결코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도성 사수 의지가 가슴에 깃든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수성윤음이 무색하게 200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남하 3일 만에 대통령은 서울을 버렸다. 영조가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도성 방어 전략의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엽 서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상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도성의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고, 상공업의 발달로 서울은 거대한 소비도시가 됐다. 중세 유럽의 대도시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선비들의 낙향문화는 사라지고,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벼슬길 독점이 극심했다. 서울은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대도시였고, 서울을 떠난 왕은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서울을 버릴 수 없는 속사정과 함께 이제는 중국과 일본을 향해 큰소리칠 때가 왔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숙종 이후 영조에 걸쳐 삼군부를 중심으로 도성 방어 군사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들 병력을 동원해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더불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도성 방어체제가 비로소 갖춰졌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서울 사수 방송은 대국민 사기극이었지만 영조가 직접 지어 반포한 도성 수성 의지는 탄탄한 국력의 과시이자 거듭된 환난에 고생한 대국민용 위로였다. ●북한산과 남한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조선 개국 이후 서울의 정식 명칭은 한성(漢城)이었다. 백성은 한양(漢陽)이라는 별칭을 즐겨 썼다. 삼국시대 이래 지역명 한주(漢州), 한산(漢山)의 맥을 이어받은 지명이다.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가 터 잡은 이후 한강(漢江) 아래쪽 지금의 강남 땅이 중심이었지만 1392년 조선이 백악 아래 오늘의 사대문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강 이북으로 중심지가 북상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산은 북한산(北漢山)이요, 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삼각산은 세 개의 뿔(백운대·만경봉·인수봉)을 이르는 신령스런 산이름이지만 한강 북쪽 산은 모두 북한산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본래 산이름이 희미해졌다. 한강 남쪽 산은 남한산(南漢山)이요, 성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인 점도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세계 최강 10만 청군의 공격을 45일간 버틴 금성탕지(城湯池)이자 난공불락의 철옹성(鐵甕城)이었다. 남한산성은 함락된 것이 아니다. 강화도 함락과 주사파와 주화파의 분열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자 왕이 스스로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받을 것’이 6번째 항복조건일 정도였다. 남한산(522m)이 최고봉이고 산성은 일장산과 주장산 두 산 사이에 걸쳐 쌓았다. 우리에게 북한산은 산의 개념이 강하지만 남한산은 산성이라는 인식이 더 세다. 서울의 성곽축조 역사는 한성백제, 삼국의 한강 쟁패,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양도성 등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뉜다. 지금의 서울은 한성백제의 위례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성 등 2000년 세월 동안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기에 궁궐과 내성, 산성의 3중 체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강 남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강을 따라 중곡동·옥수동·삼성동·암사동 토성과 대모산성, 양천고성 등이 외곽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 아차산성·이성산성·금암산성·남한산성 또한 백제왕성의 방어기지로 파악된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각축지였다. 한강권에서는 주장성, 이성산성,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이 뺏고 빼기는 삼국의 격전지였다.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워 이곳이 신라 영토임을 알린 까닭이다. 임진강권에도 칠중성·호로고루·고모리산성·당포성·아미성·계양산성 등이 산재했다. 고려시대 성곽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연흥전이라는 남경별궁을 세웠고, 최영 장군이 북한산성 자리에 중흥산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환인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북쪽 해발 820m의 솟아오른 암벽 위 조촐한 산성이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첫 둥지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성(도성)은 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국시대 초기 산성과 왕성의 이원적 구조가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에서 나타났지만, 후기 들어 산성과 왕성의 일체화가 정립되었다. 고려 송악에 이어 조선 한양 도성에도 이 같은 전통이 이어졌다. 중국에는 한국형 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성은 자생적 문화유산이다. 평지의 도성과 산지의 산성이 짝을 이루는 조합은 고대 삼국 이후 한반도 도성 축조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성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았다. 자연지형의 최고 경계점에 성곽을 쌓아 지형의 높낮이를 성곽으로 이용한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축조 기법과 다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 창의문을 나서 부암동 가는 산등성이가 내려가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세검정과 탕춘대 터가 있다.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군대(총융청)가 새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신영동(新營洞)이다. 탕춘대 터에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지만 본래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라는 절터였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파랑과 장춘랑 등 두 화랑을 기리는 사찰이었으나 연산군이 이를 허물고 연희장으로 만들어 ‘질퍽하게’ 놀았다고 해서 탕춘대라고 이름 붙었다. 장의사 당간지주가 세검정초등학교 교정 한 귀퉁이에서 1400년의 역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장의사는 비록 사라졌지만 이름은 장의동으로 남았고, 서울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장의동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장의문이라고도 불렀다. 인조반정 때 반군이 홍제원에 집결하여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으므로 창의문이 개선문인 셈이다. 풍수 최양선이 숙정문~창의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곳이니 길을 내어 지맥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여 태종 때부터 폐쇄한 문을 인조반정 이후 열어 놓았다. 영조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창의문 현판에 새겼다. 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사는 권문세족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경조 오부도 중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 그려진 성곽과 ‘서성(西城) 한북문(漢北門)’이라는 기록이 곧 오늘의 탕춘대성과 홍지문이다. 서성은 한양도성의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4㎞ 길이의 산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처음에는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한북문이라고 불렸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탕춘대성 안에 전시 식량을 비축하는 곳간을 만들어 평창(平倉)이라고 하였는 데 평창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은 도성을 중심으로 3개의 산성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북한산성, 남쪽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서쪽 산성이 탕춘대성이다. 원래 도읍은 궁궐과 내성 그리고 외성 등 삼중구조를 갖춰야 하지만 조선은 궁궐과 해자도 없는 도성만으로 버텼다. 외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양란을 호되게 겪고서야 도성의 군사적 방어체계를 고쳤다. 이를 본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한양도성을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고 찬탄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죽어 가는’ 서울·부산·대구

    ‘죽어 가는’ 서울·부산·대구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선조들의 옛말이 사라질 판이다. 서울, 부산, 대구 등 국가 발전을 이끌었던 주요 거점도시의 경제가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는 연구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들 도시는 공장 이전 등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제조업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해 지역 경제가 뒷걸음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풍선효과로 인해 경기, 인천, 충북, 충남 지역의 경제 활력은 큰 것으로 평가됐다. 산업연구원은 10일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지역경제 성장패턴 분석’ 보고서에서 16개 시·도의 소득과 인구 추이를 비교, 평가했다. 산업연구원은 연평균 소득과 인구 증가율이 모두 전국 평균을 웃도는 곳을 ‘성장지역’으로, 둘 다 밑도는 곳을 ‘쇠퇴지역’으로 분류했다. 인구 증가율은 평균을 넘지만 소득 증가율이 평균에 못 미치면 ‘정체지역’으로, 반대는 ‘잠재적 성장지역’으로 구분했다. 1기(1990∼1997년)와 2기(1998∼2012년)로 나눠 본 결과 서울·부산·전남·전북·강원·제주는 두 기간 모두 쇠퇴지역에 속했다. 1기 때 정체지역과 성장지역으로 각각 분류된 대구와 경남은 2기 들어 쇠퇴지역으로 편입됐다. 같은 기간 소득 증가율로 따지면 서울은 7→13위, 부산은 13→14위로, 대구는 11→16위로 내려앉았다. 인구 증가율에서 서울은 10위로 변함이 없었지만, 부산은 7→15위로, 대구는 6→9위로 밀려났다. 보고서는 지방 도시도 지역별 양극화가 심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조사에서 성장지역으로 꼽힌 충남과 충북, 경기, 인천 등은 지역 경제가 탄력을 받는 모습이지만 전남·전북·강원 등의 전통적인 낙후 지역은 여전히 각종 지표가 평균 이하를 기록하며 경제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오래된 대도시 경제가 쇠퇴하는 현상에 대해 산업연구원은 ‘보몰의 병폐’(Baumol’s Disease)라는 경제 이론을 들어 설명한다. 경제가 성숙될수록 산업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데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이 제조업보다 낮아 ‘고용 없는 성장’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해석이다. 실제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각 거점 도시들에선 90년대 이후 지가상승과 환경규제 등을 이유로 공장의 지방이전이 이어지고 있고, 그 자리를 서비스 업종이 메우고 있다. 보고서는 각 지역이 인구구조 등이 다른 만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가도록 각각 차별화된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허문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서울·부산·대구·대전 등 대도시권에는 고학력의 생산 가능 인구가 몰려 있지만 정작 만족할 만한 일자리는 부족한 것이 지역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면서 “대도시권에선 일자리 창출과 함께 은퇴자를 비롯한 고급 인력의 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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