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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 (25)

    ◆친일 미술가 金仁承·景承형제 작년 11월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있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 “해방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면서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서울 종묘공원의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등을 들었다. 김경승(金景承,1915∼1992)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유명한 조각가이다.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89·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賞)을 휩쓸었고,해방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 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중 장남과 차남으로 태어난 김인승·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과(科)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이 학교는 일본인 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다. 이들 형제 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하면서 우등생으로 졸업(1937년)하였다.재학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년)봉축기념전’에 출품,입선하면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 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부문의 심사위원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따라서 선전에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1940년 선전의추천작가가 되었다.이 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사람 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1939년 ‘S씨상’(흉상),40년 ‘목동’(전신상)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인 ‘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44년 그는 ‘선전’에 ‘제4반’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관변조직인 애국반(愛國班)의 반원인 조선여성이 전시하 후방에서근로봉사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다섯 점 모두가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일제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두 사람은 또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활동하였다.1941년 2월 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다.두 사람은 각각서양화부(김인승),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00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참조)를제작하였다.이 그림은 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지원병훈련소장,총력연맹 사무국 총장,경기도지사,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해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병사들의 행진모습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출전의 분위기를 조장하고있다.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그는 또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표기하였으며 ‘선전’ 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Kin’으로 표기하였다.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할 수 있다. 해방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선전’ 추천작가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 하였다.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주도,이화여대 미대 학장,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냈다.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나란히 수상하였다.남산의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것이다.
  • 공무원이 ‘독립운동사’ 연구서 출간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 관련 자료관리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등의 업무를 맡아온 공무원이 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연구서를 출간해 화제가 되고 있다.주인공은 李善雨 보훈선양국장(59).李국장은 최근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행적을 모은 책 ‘잃어버린 땅 잊혀진 영웅’을 도서출판 고려원에서 출간했다. 한말 의병에서부터 임시정부의 광복군까지 독립운동사 전체를 시기별로 정리한 이 책에서 그는 “독립운동은 지는 것을 알면서도 싸운 민족혼의 발로였다”며 러시아·만주 등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만난 애국선열들의 흔적도곁들이고 있다. 李국장은 “선열들의 빛나는 공훈이 한낱 흘러간 얘기로 망각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힌다.보훈처 홍성보훈지청장,자료관리과장,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 등을 역임한李국장은 ‘독립유공자공훈록’‘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등 독립운동사자료집 간행에도 관여해 왔다.
  • 효창공원‘백범성지’로

    백범 金九선생을 기념하는 ‘백범기념관’이 그의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 세워진다고 백범기념사업회 李壽成회장이 5일 밝혔다. 李회장은 이날 기념사업회 정기총회에서 “그동안 부지선정 문제로 다소 논란이 있었으나 효창공원으로 최종 확정했다”며 “효창운동장 일대를 정비해 ‘민족의 성지’로 가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같은 내용을 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金대통령으로부터 지원약속과 함께 기념관건립 명예위원장직 수락을 받았다”고 공개하고 “빠르면금년 백범 서거 50주기 때 기공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회측이 구상하고 있는 기본계획안은 백범묘소와 삼의사(三義士) 묘소등 선열묘역을 중심으로 1만8,000평 규모의 효창운동장과 철거될 인근 체육시설 부지를 통합해 그위에 백범기념관과 문화체육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총예산은 900억원 규모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재원조달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면서 정부예산도 지원받을 계획이다. 용산구의회는 지난해 12월21일 정기회 2차본회의에서효창공원 자리에 백범기념관과 옥내외 체육시설 및 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백범기념사업관 및 문화체육관건립추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 한편 사업회측은 기념관 건립과 관련,별도 조직으로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를 곧 발족시킬 계획인데 위원장은 李회장이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백범 金九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 李東寧·曺成煥·車利錫선생과 3의사(李奉昌·尹奉吉·白貞基) 등 순국선열 7위의 묘소와安重根의사의 가묘(假墓)가 있다.이번에 마련되는 백범기념관은 안중근의사기념관(70년 준공)·윤봉길의사기념관(88년 준공)에 이어 독립운동가 개인기념관으로는 세번째다. 鄭雲鉉 jwh59@
  • 종교인들 ‘제2의 3·1운동’ 펼친다

    80년전 3.1절에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듯이 종교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제2의 3·1운동’을 펼친다. 국내 7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3·1운동 80주년을 맞아 ‘범종교 3·1정신 현창(顯彰)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보성사(普成社)기념조형물 건립계획을 확정,발표했다. 종교지도자협의회 지덕(池德) 대표회장은 1일 “3·1 독립선언서는 2천만우리겨레의 염원과 시대정신을 함축한 민족의 성전(聖典)”이라면서 “우리는 33인 민족대표들이 제시한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보성사(普成社) 터에 기념조형물을 세우기로 하고 이미 터닦기작업과 함께조형물 제작에 들어갔으며 27일 제막식을 갖는다. 서울시립대 정대현교수가 제작중인 조형물은 높이 6.3m에 가로 세로 2m크기로 세 사람이 태극을 받들고 있는 형상의 청동구조물.기단의 바닥크기는 3·1운동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가로 세로 각각 3.1m로 했다.기단부의석재 조형물 둘레에는 보성사의 옛모습과 만세 부르는 광경,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 전문과 불교와 개신교,천도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민족종교및 문화관광부의 세움말이 새겨진다. 종교지도자협의회 관계자는 이 조형물을 “민족의 웅지를 상징하는 추상미술조각”이라고 설명하고 “21세기를 앞두고 3·1정신이 흐려져 있는 것이안타까워 종교지도자들이 조형물을 세우고 80년전 그때처럼 3·1정신 회복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성사 기념물 건립사업은 지난해 4월 천도교 김광욱(金光旭)교령이 취임하면서 추진됐다. 현재 연합뉴스와 조계사 사이 보성학교 뒷마당에 자리잡았던 보성사는 천도교 3세교조인 孫秉熙선생이 1910년말 보성학원을 인수하면서 운영권이 천도교로 넘어갔다.보성사는 천도교가 운영하던 창신사(彰新社)에 합병된 당시의 최대 인쇄소이다.1919년 2월27일 극비리에 2만1천부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냄으로써 역사의 현장이 됐으나 그해 6월 일제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전소됐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내달 1일 3·1운동 80주년 기념식도 80년전의 모습대로 성대하게 꾸미기로 했다.각 종단의 관계자들이 견지동 조계사,저동 영락교회,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원불교 원남교당,천주교 명동성당,명륜동 성균관,사직단,장충단 등에서 가두행진으로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에 집결,기념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기념식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제2의 3·1선언서’가 낭독되고 각 종단의 3·1운동 80주년 메시지도 발표된다.또 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염광여상 취주대의 선열 추모공연,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이와함께 전국의 각 사찰과 성당,교당,교회,향교 등에서도 이날 정오 일제히 ‘제2의 3·1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 200여곳에 종단별로 가두홍보대를 설치,3·1절을 전후한 3∼4일간 대국민 알림운동에 나선다. 이밖에 3·1정신 계승을 위한 범종교인 학술발표회를 비롯,청소년 국토순례,연극 ‘우리로 서는 소리’공연,3·1정신 계승방안 공모,3·1정신 현창 도서 간행,3·1정신 현창 미술전시회 등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朴燦 parkchan@
  • 3·1운동 기념탑 告由祭儀 거행

    3·1절 80주년을 기념해 건립중인 독립운동기념탑 고유제의(告由祭儀)가 21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장충동기념비 건립지에서 열렸다. 고유제의란 나라에서 큰 일을 할 때 조상과 천지신명에게 일이 잘 되기를비는 일종의 고사다.3·1독립운동 기념탑 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기념탑 건립을 천지신명께 알리고 3·1운동 선열들에게 애국애족정신 계승을 다짐하기 위해 마련됐다. 고유제의는 신령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음식을 바치는 전폐례(奠幣禮),술을 따르는 작헌례(酌獻禮),제사 지낸 음식을 먹는 음복례(飮福禮),신을환송하는 송신례(送神禮)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金義在 국가보훈처장,吳榮祐 한국마사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장,金三悅 독립유공자 유족회장,金光旭 천도교교령,柳興洙·徐尙敎 원로애국지사 등 각계인사와 광복회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기념탑은 다음달 중순쯤 완공돼 3월1일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李相錄 myzodan@
  • 국악 반주 애국가 본격 보급

    ◎정부 행사때 연주… 반응 좋아 CD·테이프 제작 문화관광부는 16일 국악 애국가를 보급하기로 하고 국악기로 반주한 애국가를 담은 테이프 및 CD를 제작,정부기관,단체 및 재외공관 등 865곳에 배포했다. 테이프 및 CD에는 애국가 외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광복절.개천절.한글날 노래 등 국가 의식음악과 아리랑 및 민속음악 접속곡 등이 들어 있어 행사는 물론 행사준비 전·후 음악으로도 쓸 수 있다. 문화부는 국악기를 사용한 애국가 반주가 정부 고위층 취임행사에 생음악으로 연주돼 호평을 받아 지난 7개월간 애국가 편곡작업과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완성하게 됐다고 밝혔다.연주는 국립 국악원 국악연주단이 맡았다. 문화부는 국악 애국가를 보급하기 위해 가능하면 공식행사에 국악 애국가 사용을 권장해 나가기로 했다.
  • 자유총연맹의 새 진로/楊淳稙 한국자유총연맹 총재(특별기고)

    ◎“이젠 민주시민교육 큰마당으로” 자유총연맹에 대하여 요즘 질책과 격려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질책은 과거처럼 관변단체로서 정권수호에 다시는 앞장서지 말라는 것이고,격려는 그런 구습에서 벗어나 참다운 민주시민운동을 적극 전개하라는 것이다. ○구태 벗고 거듭나기 진력 한때 반독재 투쟁대열의 말석에서나마 섰던 사람으로서 필자는 요즘 심한 당혹감에 빠져 있다.세상이 변한 것처럼 자유총연맹도 변화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나 누구 하나 이런 거듭남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않는것 같기 때문이다. 자유총연맹이 새롭게 내건 기치는 민주시민교육이다.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참된 민주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배우고 실천하며 교육하는 단체로 다시 출발하겠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어떤 국가든,지향하는 이념과 체제가 있게 마련이다.우리의 국가이념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이다.그 이념과 체제는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국가구성원 개개인이 이에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때만 이념과 체제는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서로 배우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민주주의란 말이 너무 쉽게 쓰여서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어디 그런가.민주주의의 기본이랄 수 있는 책임과 권리,질서의식은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의 간단한 모임이나 회의에서라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해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정권수호·정치교육 배제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이 생활화되어 있다.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민주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의식과 명예,책임과 의무,애국심에 대해 배운다.특히 독일에서는 연간 5,500억원을 들여 정치교육원이 중심이 되는 민주시민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모든 근로자는 2년에 10일간 정치교육을 받기 위해 유급연수휴가를 받는다.서독은 이 정치교육을 통해 형성된 성숙한 시민의식과 든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독을 끌어안아,마침내 통일을 이루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교육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정치교육과는 다르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교육을 “그 나라의 헌법정신에 맞게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어떤 체제건 그 체제의 헌법정신에 맞게 국민을 교육시킬 의무가 있다. 우리도 국가 차원에서 정치교육을 시도한 적이 있다.그러나 군사독재가 30여년간 계속되는 동안 정부는 원천적으로 민주적 절차와 비판의 자유를 앞장서 장려할 입장에 있지 못했다.생태적 한계였다. 그래서 민주시민 교육은 말잘듣고 왜소한 소시민을 양성하는데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유총연맹이 하려는 민주시민교육은 그런 정치교육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시민,정의감과 용기를 가진 시민,남의 자유와 권리를 내 것처럼 존중하는 시민,애국심과 사랑이 가득찬 시민들로 이 사회가 넘쳐나도록 하겠다는 시민교육이다. ○안보에 기여 큰 자부심 제2건국운동도 결국은 이 민주시민 양성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나는 해석한다.여기에는 정권수호 같은 구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자유총연맹의 그간 공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하지만 냉전의 절정기에 자유총연맹이 반공과 안보를 토대로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는데 기여해온 바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안보와 민주주의란 수레의 양바퀴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한 쪽만으로는 결코 굴러갈 수 없다. 자유총연맹은 이제 선열들이 다져놓은 반공의 굳건한 기초 위에서,한 손에는 국가안보라는 든든한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창을 들고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하고자 한다.21세기가 바로 눈 앞에 있다.아낌없는 성원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근현대사(대한광장)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예전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최근 역사관이 개관됐다.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겠다고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체포되어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거나 그 곳에서 순국한 민족독립지사들의 애국활동을 기리기 위해 형무소 자리에 역사관을 만든 것이다. 서울시 서대문구청은 95년부터 3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 11월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란 역사의 산교육장을 개관했다. 그 지역의 유지와 전문학자·관리 등 15명이 자문위원으로 참가하여 서대문형무소를 살아있는 민족교육장과 민족정기 고양을 위한 역사의 현장으로 가꾸는 데 크고 작은 정성을 쏟았다. ○민족정기 일깨우는 산 교육장 필자는 서대문형무소의 기능이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의왕시로 옮겨간 직후 독립공원 조성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옥사와 사형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민족지사인 ‘죄수’들이 입고 신고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분뇨 및 식기·숟가락·고무신 등이혐오스럽다며 모두 쓰레기로 처리됐다. 이 곳을 역사관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필자는 근현대사·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 있는 연유로 자문위원과 2명의 감리위원 중 한 명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해외에까지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정리하기도 했으며,역사관 개관을 위해 외국의 전시기법과 첨단기술 등도 도입됐다. 역사관은 1908년에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어났던 의병투쟁,3·1운동,6·10만세운동,수양동우회 및 독서회사건 등에서 개별투쟁에 이르기까지 항일독립투쟁의 처절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인영 김구 손병희 양한묵 유관순 이신애 강우규 이신호 이규창 등 당대의 뛰어난 민족독립지사 수만명이 이곳에 투옥되어 저항하다가 고문으로 순국하거나 반신불수,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정신은 조국독립의 밑거름이 됐다. 역사관을 개관한 이래 보름동안 2만9,477명(하루 평균 1,965명,최대 4,325명)이 관람했다고 이정규 서대문구청장이 최근 밝혔다. 관람시민의 설문결과에 따르면 조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선열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 되었다고 경탄하면서 이웃의 독립문·독립관 등과 함께 문화유적의 ‘답사 벨트’로서 관람할 가치가 높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청소년들이 애국애족의 참맛을 배우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日人들도 침략의 역사 배우게 앞으로 일정 기간마다 기획 아이템을 바꾸어 전시함으로써 늘 ‘거듭나며 생동하는 역사관’이 되게 해야 계속적으로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430평에 달하는 전시공간에 교대로 새로운 형무소의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게 꾸며 생산성 있는 역사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독립투사들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고문의 실상을 보여 줌으로써 자라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침략의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도록 할 필요도 있다. 역사관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下)

    ◎臨政 선열의 애국혼 생생/54년만에 다시 찾은 그 건물 앞에 태극기 게양/金九 주석·李靑天 장군의 격려 눈에 선한데…/광복군 제1지대 거점 공사장 흙더미로 변해 “동해물과 백두산이…”.충칭(重慶)시 중심 치싱깡(七星崗) 린엔화츠(蓮花池)38호.‘대한민국 중경임시정부’청사앞이 애국가로 가득했다. 베이징(北京)을 떠나 쉬저우(西州),푸양(阜陽),시안(西安)을 거쳐 충칭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 9명이 청사앞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뒤 눈물을 글썽이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베이징 출발 9일만인 10월15일이었다. 54년전 대륙을 가로질러 73일만에 도착했던 임시정부.이들을 포함한 25명의 광복군은 44년 11월21일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에 도착했었다.출발지는 광복군 간부훈련(韓光班)을 마친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일본군 점령지역도 지나야 하는 목숨건 장정(長征)이었다. “청사앞에서 아무말없이 한사람씩 손 잡아주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金九 주석,장하다며 호기롭게 격려해 주시던 李靑天 장군 등이 지금이라도 불쑥 나오실것 같은데…” “정문에 들어서 바로 오른쪽 건물인 2호동 2층에 趙素昻 외무부장 집무실,그 위의 3호동에 申翼熙 선생 집무실,그리고 그 위는 내 방…”.44년말부터 해방전까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 이곳서 지냈던 尹慶彬 회장과 金九 주석 비서장출신의 鮮于鎭씨의 눈이 빛났다. 당시 충칭은 일본과 항전하던 중국의 임시수도.미국,영국 등 세계주요국 대사관,영사관이 집결돼 있었다.일본 명문대출신의 청년들이 일본군을 탈출, 대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중국정부와 제3국 외교관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 지식층조차 한국인은 식민통치에 동화돼 일본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 점에서 우리들의 탈출과 광복군 합류는 한반도내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나마 일본에 강력히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연합국에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임시정부와 합류한뒤 고 張俊河 선생과 金柔吉 부회장 등 일부는 시안(西安)으로 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훈련을 준비한다. 시 남쪽에 위치한 파난취(巴南區) 투치아오(土橋).일행들이 신치춘(新柒村) 1­49호 허름한 가옥에 도착하자 집 주인 저우한장(周漢江·72)씨가 환한 얼굴로 노 독립군들을 맞았다.임시정부 요인들과 閔弼鎬 선생(임시정부 외무차장)부인 등 독립군 가족 20여가구가 집단 거주하던 곳이다.임시정부가 환국하면서 조우씨 등에게 집을 물려주고 갔었단다. 시 서북쪽의 라오허커우(老河口).일행들은 ‘광복군 제1지대’ 거점지를 찾았다.창장(長江)부근에 있는 옛터는 다리건설 공사로 파헤쳐인 흙더미만이 쌓여있었다.“1지대는 좌익계열인사들이 주도했지만 金九선생은 이들까지도 하나로 묶어 대일항전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일행들은 10월16일 베이징출발 10일만에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45년 11월 金九 선생이 귀국길에 상하이를 드르셨을때 수천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연설하셨다는 훙커우공원(虹口공원·현 魯迅공원)의 옛 장소는 숲이 돼 있었다. 노 독립군들은 지난4월 공원안에 새로 세워진 尹奉吉 의사 의거 표석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11일간의짧고도 긴 장정을 마쳤다.“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27년동안 항저우(杭州) 등 9곳을 옮겨다니며 선열들의 피와 땀위에서 비바람을 견뎌냈는데…”.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안에서도 선배 독립군들과 지난 50여년전의 기억은 마지막 광복군들의 눈시울과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 대원들 상근/발족 당시 周恩來·孫文 아들 참석 축하 충칭시 중심가에 남아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옛 건물과 터가 도심 재개발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충칭의 명동,민족로(民族路)부근의 쩌우룽로(鄒容路) 37·38번지.웨이원(味苑)이란 국영음식점과 광고회사 등이 들어있는 낡은 3층건물이 42년 9월부터 45년8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대지 270여평.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명의 대원들이 상근했고 중국의 고위 장성들과 미군 OSS(전략사무국)관계자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현재 건물자체가 낡아 철거는 불가피한 상태. 柳在沂 주중대사관 문화관은 “현 위치에 50평정도의 땅을 확보,광복군들의 활동을 기리는 표지석과 건물 모형 설치 방안을 충칭시와 협의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당시 광복군의 활동은 국제적인 주목거리.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충칭서 발족될때 중국의 초대총리 저우은라이(周恩來),중국공산당 창시자중 한사람인 동삐우(董必武),쑨원(孫文)의 아들 순커(孫科) ,대군벌 바이쭝시(白崇禧)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참석,축하하기도 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관리 소홀… 복원 3년만에 곳곳 퇴락/金九 주석 집무실 벽·창문·마루 등 파손/밀랍인물 전시사업 등으로 관람객 끌어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곳곳이 관리소홀로 퇴락해가고 있다. 복원 3년여만에 일부 마루 바닥이 내려앉거나 칠이 떨어지고 창문이 부서져 나가는 등 보수가 아쉽다.5동의 건물가운데 전시실인 1호동과 의정원 건물인 2호동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전반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 金九 주석의 집무실 벽마저 습기로 칠이 떨어져 보기 흉한 상태.5호동의 외빈 접대실은 마루바닥이 부서져 있다.3·4호동 계단 곳곳과 창문도 부서진 채 있다. 청사관리를 맡고있는 펑카이원(彭開文) 부관장은 예산부족으로 보수·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지난 한해동안 중국인 200명을 포함,관람객이 800명에 불과,입장료 수입이 적은 것도 예산부족 이유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올 관람객은 10월중순까지 180명.현장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은 “보수뿐아니라 독립기념관처럼 당시 인물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등 다채롭게 꾸며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고 생동감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日軍 탈출 한국 청년 25명 臨政과 합류/中 언론들 “한국의 미래와 희망 보았다” 평가 50여년전 충칭의 주요 언론에게도 일본군에서 탈출한 韓光班 출신 한국청년 25명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충칭도착 4개월이 지나도록 관련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45년 2월 4일자 충칭의 유력지 따궁바오(大公報).“한국은 망하지 않았다.한일합방이후 성장한,일본 동화(同化)교육을 받고 일본서 유학한 한국청년들의 항일사상과 민족관념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었다.한국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고 보도했다. 이틀뒤인 6일에도 따궁바오는 ‘탈출 한국청년을 환영한다’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중문화협회에서 한국청년들의 환영회를 열어주었다고 보도했다.협회관계자뿐아니라 20여명의 내외기자들이 참석했다는 보도 내용은 당시 관심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중국의 三民主義靑年團,全國慰勞總會 등 사회단체들의 환영회와 중국군의 천청(陳誠)대장 등 주요인사들의 행사 참가소식도 중양르바오(中央日報) 등은 보도했다.언론의 대서특필은 당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환영을 보여주는 한 편린이었다.
  • 대한매일 제정 제14회 향토문화대상/대상에 정읍문화원장 崔玄植씨

    ◎본상 전통문화부문·현대문화부문 3명씩 선정/새달 4일 본사 19층서 시상식… LG화재 협찬 대한매일신보사가 제정한 향토문화대상 제14회 수상자가 19일 결정돼 崔玄植 정읍문화원장(76)이 대상을 받았다. 본상에는 ▲전통문화 부문에 李性榮(75·향토사학자) 李在豊(61·강원 양양군 한남초등 교장 )許百榮씨(62·의령문화원장) ▲현대문화 부문에 柳在用(62·송파문화원장) 金泰勳(56·경기향토문화연구위원) 鄭英禮씨(47·여·목포시립무용단 상임 안무자)가 각각 선정됐다. 대상 수상자는 순금 30돈쭝 메달과 상패를,본상 수상자는 20돈쭝 메달과 상패를 받게 된다. 향토문화대상은,전통문화 계승과 지역문화 창달에 애쓰는 문화예술인·문화예술단체를 찾아 격려하고 나아가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대한매일신보사가 지난 81년 제정했다. 올해도 LG화재가 협찬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했다. 각 기초자치단체와 지역 문화예술단체가 추천한 20명이 후보로 올랐으며, 심사는 任東權(위원장·중앙대 명예교수) 車凡錫(문예진흥원장) 崔賢(무용가) 鄭永鎬(한국교원대 교수) 李世基씨(대한매일 논설위원)등 5명이 맡았다. 시상식은 12월4일 하오 3시 대한매일신보사·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 ◎대상 崔玄植 정읍문화원장/동학혁명 연구에 한평생 헌신/역저 ‘갑오동학혁명사’는 국내 사학계서 고전으로 평가/동학100주년 기념탑 건립 주도 역사현장 보존 힘쏟아 “제게 있어 향토는 거의 신앙에 가깝습니다. 실로 우연한 기회에 張奉善씨가 쓴 ‘전봉준 실기’(1936년 간행)를 읽고 40여년간 갑오동학혁명에 관한 각종 자료수집과 유적지를 답사,‘갑오동학혁명사’를 발간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이렇게 큰 상을 주니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대한매일신보사가 제정한 제14회 향토문화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현석씨(76 정읍문화원장)는 조금 쑥스러운듯 이렇게 수상소감을 밝혔다. 최씨는 지난 53년 고향인 전북 고창을 떠나 정읍에 정착,이곳의 각종 향토사 연구와 동학혁명에 관한 자료수집과 현장답사로 거의 반평생을 보낸 향토역사가다. 뿐만아니라 갑오동학기념사업회장직을 맡아 정읍 황토현에 갑오동학선열사우건립과 동학100주년기념탑건립등을 펼쳐 자라나는 후세들의 역사교육현장을 보존하는데 힘을 쏟았다. 최씨는 또 향토사와 관련한 18권의 저서와 7편의 논문을 발표하는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최씨의 ‘갑오동학혁명사’는 학자들사이에서도 역저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80년 초판된 이 저서는 지금까지 3판을 낼만큼 동학혁명을 연구하는 국내 사학계에서는 이미 ‘고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학혁명에 관련된 각종 자료수집과 유적지를 10여년간 직접 답사,희생인물과 그 행장을 찾아낸 최씨는 2000년에 완공할 예정인 황토현사당에 위패를 모실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최씨는 동학혁명이 60년대부터 동학난에서 동학혁명,동학운동,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등 정권의 부침에 따라 이름을 달리해 안타까와했으나 지난 8월 金大中 대통령의 전북도 방문으로 제대로 평가받고 국비지원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육관’을 건립하게 돼 큰 보람을 갖는다고 밝혔다. 최씨는 “연간 5∼6차례 일반인과 학생들을 상대로 향토사강좌와 사적지답사를 하고 있다”며 “2남4녀중 장녀인 길순씨(풍남중 역사교사)가 고적답사나 유적지탐방을 자주 다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듯해 흐뭇하다”고 말했다. □본상 6명 공적 ◎이성영 향토사학자/은평구 일대 지명유래 모아 책 발간 조선 중기 명신인 오성 이항복의 13세 손으로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쭉 살아온 토박이다. 남다른 향토사랑으로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일대의 지명,전설,구전동화 등을 꾸준히 수집했다. 이 가운데 은평구의 지명유래를 모아 지난해 ‘재미 있는 은평 이야기’를 발간했다. 지난 95년에는 일흔이 넘어 연세대 대학원 사회교육원에 진학,향토사 연구에 학문적 기반을 닦기도 했다. 또 집에서 전해내려온 270여년전의 관찬 지도,1795년산 물레를 비롯해 생활용품·농기구 등 전통물품 200여점을 소중히 보관해왔다. ◎이재풍 한남초등학교 교장/교육계 일선서 향토사랑 일깨워 교육계 일선에 있으면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고향사랑을 일깨운 것은 물론 양양군내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발전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지난 68년 양양향토지 발간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내 고장 이야기’‘襄州野錄(양주야록)’‘방언 자료집’등을 편찬·제작했다. 초등학교 4군데에 사물놀이반을 조직,육성했으며 재직 중인 한남초등학교에서는 ‘민속놀이 한마당’을 운영한다. 군내 초등학교 5·6학년생 중에서 50명을 뽑아 2박3일동안 유적지 답사,민속놀이·농악 교육을 하는 ‘청소년 향토문화 수련회’도 매년 연다. ◎허백영 의령문화원장·향토사연구회장/자연마을 260곳 향토사료 수집 지난 86년부터 의령군내 자연마을 260곳을 돌며 향토사료를 수집해왔다. 지명유래라든지 전설 등의 구비문학을 채록해 ‘의령월보’에 연재하고 책으로도 냈다. 93년 군립박물관을 세울 때는 소장한 유물 16점을 쾌히 내놓았고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 유물 및 민속자료 600여점을 모아 전시토록 했다. 이같은 공을 인정받아 지난 95년 의령군민대상 향토문화예술 부문 상을 받았다. 지난해 문화원장에 취임한 뒤로‘의령문화’를 연 2회 발행하고 ‘의령문학회’를 조직했으며 8가지 문화교실을 개설했다. ◎유재용 송파문화원장/임경업장군전등 현대어로 다듬어 중진 소설가로 문화원장을 맡자마자 계간지 ‘송파문화’를 발간,선조들의 얼과 전통을 발굴·보존·계승하는 데 앞장서왔다. 특히 송파구와 관련 깊은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인 ‘임경업장군전’을 비롯 ‘흥부전’‘심청전’등 고전들을 현대어로 다듬어 ‘송파문화’에 게재함으로써 고유의 충효사상을 구민들에게 널리 알렸다. 민담과 전설 발굴에도 힘을 기울여 이를 모은 ‘송파설화집’을 지난해 발간했으며 올해에는 지역 중요무형문화재인 ‘송파 다리밟기‘송파 백중놀이’‘송파 산대놀이’ 내용을 한데 묶어 책을 펴냈다. ◎김태훈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경기도 민속예술 발굴·전승에 앞장 지난 76년 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위원을 맡은 뒤 20년 넘게 경기도 문화의 조사·수집·연구·보존에 힘써왔다. 특히 부천에 ‘복사골’이란 이름을 붙여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케 함으로써 부천이문화예술 도시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경기도 민속예술 경연대회’‘경기도 청소년 민속예술제’‘경기도 학생농악 경연대회’등을 열어 경기도 민속놀이를 발굴,전승하기에 주력했다. 전통 민속놀이 자료를 모은 ‘경기도의 민속예술’(1∼2집),연구논문집인 ‘경기향토사학’(1∼2집)을 발간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정영례 목포시립무용단 상임 안무자/지방도시 무용발전·후진양성 기여 무용공연 시설이 열악한 지방도시의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창작무용 발전과 무용교육에 남다른 기여를 했다. 74년 무용학원을 연 이후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며 목포시립무용단 창단,서울시립무용단과 합동으로 광주 서울 인천 등지 순회공연,정영례 무용단 창단 등 끊임없는 열정을 쏟아왔다. 93년 제2회 전국무용제에서 창작품 ‘땅으로 불’을 발표해 대통령상과 안무상을 받아 목포 무용계의 성가를 드높였으며 78년과 85년에는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목포문화예술회관 건립 때는 이벤트를 벌여 기금 조성에 큰 몫을 했다.
  • 순국선열 기념일(金三雄 칼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웅변가 소대(蘇代)의 글에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木偶人)와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土偶人)의 대화가 전한다. 어느날 목우인이 토우인에게 “너는 어찌 얼굴이 두루뭉수리로 생겼나. 더구나 비가 오면 상판이 모두 풀어져 눈도 코도 분간 못하게 될 것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토우인 껄껄 웃으며 말하되 “나는 네 말대로 비가 많이 오면 얼굴과 몸뚱이가 젖어 모습마저 풀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흙으로 뭉쳤다가 흙으로 풀어져서 이 땅에 있는 것이라 언제고 다시 뭉치면 새 모습으로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웃으면서 반문했다. 토우인 다시 “그래 네 생각에는 네가 제법 눈 코가 똑똑하게 생긴 줄로만 알겠지! 그렇지만 너야말로 큰 물이 지면 물결에 둥둥 떠서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북방으로 갈지 남방으로 갈지, 그래 어디가서 네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하자 목우인은 부끄러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다.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궐기한 의병 독립군 항일지사의 대부분은 토우인같은한국사람들이었다. 목우인처럼 잘나고 영악한 자들은 외세에 영합하거나 앞잡이가 되었다. ○임정의 기념일 제정 뜻 오늘(17일)은 순국선열기념일이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러니까 1905년(을사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사실상 송두리째 빼앗고자 이른바 ‘을사조약’을 날조한 날이다. 이날을 기해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시작되고 일제의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어 순국선열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정하면서 ‘결정문’ 을 채택했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을 유루없이 다 알수 없으므로 1년중 1일을 정하야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하는 바이요, 이제 11월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야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야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야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은 을사년 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인고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측결되던 11월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 의사록) 1895년부텨 1945까지의 50년동안 항일전선에서 순국한 선열은 30만명이 훨씬 넘는다. 의병투쟁 의열투쟁 3·1항쟁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학생운동 지하투쟁과정에서 무명선열 무후선열 및 유후선열과 애국지사를 합친 숫자이다. 이들 중 극소수는 국립묘지의 임정묘역이나 효창동, 수유리 또는 가족묘지 등에 안장되었지만 대부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순국선열 유업 제대로 토우인처럼 조국강산과 이역에서 흙이 되고 넋이 되었다. 정부의 서훈 여부와 관계없이 국권회복전선에서 희생된 모든 순국선열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지난해부터 부활된 이날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19년부터 이날에는 정화수 떠놓고 앞서간 선열을 추념했고 이날만은 찬밥을 먹으면서 국권회복을 다짐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독립한 우리가 각종 기념행사때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정도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순국선열의 유훈이 잊혀지고 유족들이 기한에 떨고 의병기념관, 임정주석기념관 하나 짓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처지가 이날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는가.
  • “臨政 유적 찾아 보수·보존 추진”/金 대통령 임정 청사 방문

    【상하이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오전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봤다.金대통령은 먼저 백범 金九 선생 등이 사용하던 청사 1층 회의실에 들러 베이민디앙(貝民强)청사관리소장으로부터 청사 복원배경 에관해 설명을 듣고 백범 선생이 사용한 탁자에 앉아 방명록에 서명했다. 金대통령은 ‘불석신명 유방만세(不惜身命 遺芳萬世)’라고 쓴 뒤 “애국지사·선열들이 신명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이 향기가 돼 만세에 남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이말 뒤에 ‘한중우의(韓中友宜)’도 추가했다. 회의실엔 장방형 테이블과 의자,대형 태극기 2개,찻잔,주전자 등이 옛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金대통령은 청사관리소로 옮기는 도중 기념품판매대에서 백범선생의 ‘독립정신(獨立精神)’ 친필이 담긴 기념품을 샀다. 金대통령은 “상하이 임시정부는 중국내 여러곳으로 옮겨다녔으므로 앞으로 그 유적도 찾아 보수·보존하는 일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의 보존·개선에 협력해준 중국정부와 상하이시에 감사드린다”고 사의를 표시했다. 한편 관리소측은 김대통령이 지난 94년11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서명한 방명록과 金대통령 가족 사진을 전시해놓는 등 세심한 준비를 했다.
  • 대한매일 재탄생 金 대통령 축사 전문

    ◎참여민주주의·지식사회 앞장/일류 경제국가 건설 횃불되길 우리는 오늘 뜻깊은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기독교에 부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대한매일이 93년 만에 부활한 것입니다.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1905년 8월11일 대한매일은 일제 강점에 항거해 국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습니다.朴殷植 申采浩 梁起鐸 선생 등 선각자들과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해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일제 손아귀로 들어간 이 나라 국권을 지키는 것이 이 신문의 유일한 최고 목표였습니다.1907년 임금께 드린다는 글을 써서 을사보호조약이 일제 강권에 의해 이뤄진 만큼 무효이니 세계여론에 호소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글을 썼다가 裵說 사장은 잡혀가고 여러가지 곤욕을 치렀습니다.또한 일제에 대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우리 경제가 일제 지배에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글을 썼다가 역시 裵說 사장이 잡혀가고 모진 탄압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통감부의 농간에 의해 일제 손아귀에 떨어져 36년 치욕의 세월을 보내게 됐던 것입니다.우리는 오늘 대한매일 부활의 날에 그 정신을 살펴볼때 첫째로는 이미 말한 대로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있는 그때에 국권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굳은 결의와 열망을 담아 대한매일이 이를 대변하고 일어섰던 것입니다. 둘째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말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경제를 지키는 것입니다.우리가 일본 경제에 매달려 있는 한 국가 독립은 없으므로 국채를 사서 이를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또 그 당시 단순히 대한매일만 창간한 것이 아니라 코리아데일리뉴스를 같이 창간,영자신문까지 만들어 우리 주장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로서는 놀라운 일을 선각자들은 했던 것입니다.그 때는 일본이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을 가장 어렵게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영국사람을 데려다 사장을 시켜 우리 국권을 지키는 데 활용했던 것입니다.또한 대한매일은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국민과 힘을 합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룩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대한매일의 정신은 첫째는 국권을 지킨 것이고,둘째는 경제적 자립을 지킨 것이고,셋째는 세계와 더불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세계주의 생각을 가졌던 것이고,넷째는 국민의 참여속에 국민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이러한 대한매일의 정신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으로서 오늘 서울신문이 대한매일 이름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결코 복고주의가 아니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과거의 탁월한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속에서 이 나라 국운을 개척하는 길로 나가기 위해서 서울신문이 대한매일의 정신을 다시 계승하는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그러지 않고 만일 복고주 의로 간다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신문은 이제 대한매일로서 완전히 새로 태어나 21세기에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지식산업사회·문화관광사회로 나가는 선두에 서야할 것이고 민족주의 시대에서 열린 세계주의 시대로 나가는,그런 정신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민주주의,그것도 국민이 주인으로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경제를 어려운 여건속에서 국민과 더불어 반드시 되살려 멀지않아 세계의 일류국가 대열에 설수 있는 경제국가를 세우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2건국,참여민주주의,시장경제,지식기반사회,건전한 정의사회,남북간 안보·화해·협력 추진,그리고 열린 세계주의로 가는 방향에 서울신문이 아닌 대한매일이 적극적으로 선두에 서 횃불이 되고 선구자가 될 것을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그것만이 지금부터 93년전 이 신문을 일으켜 민족 운명을 살리고자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우리 선열들,외국인이면서 이 땅을 사랑하고 이 국민에게 한없는 동정심과 친밀감을 갖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이 땅에 생명을 바친 裵說 사장 등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서울신문이 이름을 대한매일로 바꾸는 것으로 끝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21세기 내일을 위해 과거정신을 훌륭히 살려나가는 일이 꼭 이뤄져야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 각계서 보내온 격려 메시지(대한매일에 바란다:Ⅰ)

    11일자로 서울신문에서 제호를 바꿔 대한매일로 재창간하는 본지에 각계에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 왔다.(가나다순) ◎金美蓮 이화여대 국문과 2년/소외된 사람들의 아픔 함께 대한매일로 재창간을 하면서 제호 뿐 아니라 신문내용도 더욱 참신해지기를 바란다. 소시민의 일상과 소외된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함께 해주는 신문이면 좋겠다. 요즘 신문들이 독자의 관심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기사의 가치를 정하는 경향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읽고 함께 대화를 만한 소재를 많이 싣기를 기대한다. 독자와 함께 하는 신문이 되기 위해 독자의 소리에 많은 신경을 써주기 바란다. 일부 신문은 광고가 너무 많다. 광고 게재를 절제있게 해서 독자 각 계층이 꼭 필요한 내용이 빠지지 않도록 해주면 좋겠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림이 없고,어느 정권이나 잘못했을 때는 비판할 수 있는 참 언론의 모습을 기대한다. 대한매일로 재창간을 하면서 제호 뿐 아니라 신문내용도 더욱 참신해지기를 바란다. 소시민의 일상과 소외된 사람들의어려움이나 아픔을 함께 해주는 신문이면 좋겠다. ◎金範鎰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책임있는 비판과 대안 제시 그동안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정부와 국민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며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온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다시 탄생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어려운 때에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던 대한매일신보처럼 당면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국력을 결집하고 지혜를 모으는 구심체 역할을 다하리라 믿는다. 앞으로도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특히,정부와 공무원이 일하는 모습을 올곧게 알리는 한편,책임있는 비판과 대안제시로 하는 신문이 되기를 기원한다. ◎金宇中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대우그룹 회장)/위기극복 국민단합에 앞장 구한말 수난기에 정론을 통해 국난극복의 의지를 북돋웠던 ‘대한매일’이 경제위기 극복과 21세기 선도언론의 기치를 내걸고 재탄생하게 된 것을 반갑게 생각한다. 옛 대한매일은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적 추진체로서 국민의 구국의지를 하나로 모은 바 있으며,일제 식민의 참상을 세계에 소상히 알리는 일에 앞장선 언론이었다. 올 초 우리 국민들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으로 일컬어지는 금모으기 운동에 대대적으로 참여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과시하고 세계인의 감동을 일으킨 바 있다. 대한매일의 재탄생이 위기극복을 위한 국민들의 이러한 열의와 단합을 이끌어내는 또 하나의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 ◎朴鍾雄 의원(한나라당)/독립언론으로 거듭 나기를 권력과 자본에게서 독립된 언론으로 거듭 태어나 21세기를 선도하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 그동안 언론이 과도한 양적·상업적 경쟁이나 소유의 집중으로 인해 여론을 독점·왜곡하고 국민 불신과 우려를 자아낸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언론사 소유와 경영의 분리,무가지(無價紙)살포 등 불공정거래행위 금지,과당경쟁중단 등 과감한 언론개혁 조치는 언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언론계가 당면한 극심한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조속히 실천되어야 한다.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경영과 편집을 획기적으로 개선,언론개혁을선도하는 시대적 역할을 다해 주길 기대한다. ◎白京男 교수(동국대)/왜곡되지 않은 民意 전달을 수송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혁명적 변화로 국경을 넘는 인간들의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이 증대되는 문명사적 대변혁 앞에서 서울신문의 거듭남을 축하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세계화’의 거친 파고 앞에서 ‘이대로는 안된다’,‘변해야 산다’는 우리 사회의 요구에 대한 회답으로 보고 싶다. 왜곡되지 않는 민의를 모으고,올바른 여론 주도층을 고르게 형성하여 우리 사회의 막힌 곳을 뚫고,어두운 곳이 있으면 비추고,또 국민의 참다운 비판을 수용하여 사람이 대접받고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부의 성숙하고 단단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토록 해 우리 나라를 용기있고 성실한 사람들의 고향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辛格浩 롯데그룹 회장/21세기 문화 밝히는 횃불로 대한매일신보가 어려운 시절 민족의 기상을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듯이 그 전통과 정신을 계승한 대한매일 또한 지금의 어려운 우리나라 현실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을 보탤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좋은 언론 하나가 나라를 살린다고 했다. 대한매일이 재탄생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역할을 기꺼이 짊어지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나라를 살리는 신문으로,21세기 문화를 밝히는 신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 대한매일에 기대와 성원을 보낸다. ◎申東爀 한일은행장 직무대행/정보화시대 첨병 역할해야 서울신문이 뿌리를 찾아 대한매일로 재창간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서울신문의 전신이며 구한말 민족지로서 국권수호의 기치를 드높였던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을 계승하여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건국 이후의 최대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국민의 지혜를 모아 여론을 선도하기를 바란다. 특히 대한매일이 정보화시대의 첨병으로서 많은 분야의 정보를 신속·정확하게 전달하여 모든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국가경쟁력을 드높이는 데 앞장서 줄 것을 기대한다. 나아가 독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는 신문으로 크게 발전하기를 바란다. ◎安德均 태평양종합산업 해외영업팀 대리/경제난 풀고 평화통일 기여 IMF한파로 전국민이 고통받는 어려운 시기에 재창간을 하게 되는 대한매일은 경제난을 풀어 나가고 조국 통일에 기여하는 민족정론지가 되기를 바란다. 특히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민족을 계몽하고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의 역할을 이어받아 서민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신문이 됐으면 한다. 제호를 바꾸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만큼 과거 권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 신선한 목소리로 다가 올 줄 믿는다. 경제난 극복에 앞장서는 직장인 독자들에게 가장 올바른 시각에서 믿음을 주고 정보를 주는 가장 유익한 신문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다. 대한매일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柳鍾星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구국항일 민족지 전통 계승 대한매일의 제2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구한말 암울했던 시기에 구국항일의 민족지로서 출범한 대한매일신보의 전통을 계승해 21세기 민주시민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통일된 민족의 앞날을 개척해 나갈 정론지로서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기 바란다. 지금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개발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총체적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개혁에 성공하는냐의 여부에 따라 21세기 한국과 한반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롭게 탄생하는 대한매일이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는 언론매체로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주길 기대한다.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고 시민단체와 연대하는 ‘개혁언론’으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다시한번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李浩哲 소설가/천편일률적 제작행태 쇄신 서울신문이 창간 때의 본래의 이름인 ‘대한매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육지책(苦肉之策)의 결단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만 새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명실공히 새로운 발상법과 새로운 창조성이 뒷받침됨으로써만 새길은 열릴 것이다. 오늘 우리 신문독자들은 천편일률적인 제작행태들에 대해 지겨워 하고 있고 거의 진저리를 치고 있다. 발상법의 대담한 전환,이 길 밖에는달리 없어 보인다. 고육지책 끝에 기왕에 이름도 바뀌었으니,한번 독자들이 왕창 놀라며 당황할 만한,우리 신문의 천편일률적인 구태에서 확 벗어난 그런 물건이 나와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趙東子 주부(서울 성동구 금호3가동)/증면보다 알찬내용이 중요 주부에게 가사,육아,여가 등 생활정보는 중요하다. 대한매일도 주부들을 위해 생활정보를 많이 실어 줬으면 한다. 다른 신문과 비교해 볼 때 과거 서울신문은 이런 면에서 부족했다. 일반적인 사고기사는 모든 신문이 비슷하다. 그러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사면에서는 차이가 나고 독자들은 이런 신문을 선택하게 된다. 또 선정적인 기사나 광고를 싣지 않았으면 한다. 자녀와 함께 신문을 보다 보면 낯뜨거울 때가 많다. 또 하나 지면의 증면보다는 내용을 알차게 담았으면 한다. ◎崔在昇 의원(국민회의)/정론지로 자리매김할 계기 21세기를 눈 앞에 둔 역사상 중요한 시기에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 93년전 암울했던 시기에 민족의 등불이 되고자 밀려오는 외세에 굴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梁起鐸 張志淵 선생 등 위대한 선열의 숭고한 정신과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아 새시대의 정론지로 자리매김할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가 재창간하면서 밝힌 ‘공공이익을 위한,국리민복에 앞장서는,민족화합을 앞당기는,2000년대를 앞서가는 신문’이라는 다짐이 반드시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대한매일신보의 전통과 정신이 신문 곳곳에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사명을 다해 줄 것을 기원한다.
  •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

    ◎솔직한 참회 재탄생 초석으로 정론 벗어났던 일 냉혹히 자성/날카로운 시선·질책 겸허히 수용 서울신문이 지령 16851호,1998년 11월10일자를 마지막으로 영욕 53년의 나래를 접습니다. 11일자로 우리의 뿌리,자랑스런 항일 민족정론지 대한매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수십만 독자와 함께 해온 서울신문 반세기를 마감하며 지난날의 정도(正道)를 벗어났던 일들에 대해 냉혹한 자기반성을 하고자 합니다. 시대에 따라 국민과 독자의 애증(愛憎)이 교차되는 시선 속에 우리 서울신문 가족들은 땀과 눈물로 서울신문을 가꾸고 키워왔습니다. 53년의 연륜을 지닌 서울신문 제호를 새시대 역사의 흐름 속으로 띄워보내며 회한(悔恨)이 서리지 않을리 없습니다. 서울신문은 6·25전란(戰亂) 가운데서도 진중신문을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전황을 알려주는 사명감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고 약자를 부축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에도 힘썼습니다. 환경지키기에 앞장서고 농촌경제 발전을 지원했습니다. 한글 전용신문 발행과학자·문필가·예술가 지원 등 민족문화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회면,격조높은 문화면으로 언론계의 선두에 서기도 했습니다. 자본에 휘둘리거나 상업적 사익(社益)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우선하는 논조,센세이셔널리즘에 흐르지 않는 품위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결코 스스로에게 관대(寬大)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울신문 구성원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거나 소유구조상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등의 변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령 열을 잘했다고 해도 하나의 잘못이 그대로 용서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성의 아픔이 클수록 재탄생하는 대한매일의 정론(正論)을 향하는 발걸음이 곧고 굳건한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유당 정권의 나팔수로 검은 것을 희다고,흰 것을 검다고 한 부분에 대한 응징으로 4·19 민주혁명 당시 사옥이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며 언론의 본분을 벗어난 세월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며 참회하고자 합니다. 한 세기 한국언론사에 이토록 진솔하게 과거의 잘못을 고해(告解)한 언론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극적 식민지 역사 속에,그리고 권력의 부침(浮沈)속에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생존술과 상술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해오며 민주언론의 선봉을 자처하는 사례가 없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한 참회를 재탄생하는 대한매일 앞날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합니다. 언론의 본분을 지키는 데 피와 땀을 흘림으로써 과거의 잘못들을 속죄코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이미 공익정론지 대한매일로서의 변신을 시작했습니다. 재경부 포항제철 한국방송공사가 대주주인 소유구조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작과 경영에 일절 간여치 않는다는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편집권 독립에 관한 노사(勞使)합의라는 공정보도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우리의 이같은 처절한 자성과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익(公益)정론지 대한매일로 재탄생할 것임을 국민과 독자앞에 다짐합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애정의 질책으로 대한매일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권 독립을 위한 대한매일 노사 공동선언문 노조와 회사는 편집권을 존중한다. 회사는 편집권의 독립성을 침해 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기자는 언론의 정도(正道)나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반(反)한 기사를 쓰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기자는 공정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노사는 편집권 독립과 공정보도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점에 합의한다. 1.편집권은 회사의 사시(社是)와 독자의 알 권리에 반하는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다. 2.노조와 회사는 외부로부터의 지면제작 개입을 배제한다. 3.회사는 객관성과 타당성이 없는 편파적인 취재와 보도를 지시할 수 없다. 4.취재기자는 자신이 취재해 보도한 내용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 됐을 때에는 데스크,편집자,국장단에 시청을 요구할 수 있다. 5.언론 자유를 위협사는 사태가 생기면 노사는 합심해서 이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한다. 6.회사는 기자에 대해 회사의 영업 및 수익활동 등 본연의 업무와는 직접관련없는 일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영업 및 수익활동 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줄 수도 없다. 7.노사는 이상의 내용을 성실하고도 적극적으로 지킨다. 1988년 10월19일 ◎남긴 功/재벌 비판·신문말 다듬기 성과/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 결집/문화예술 활동 전폭 지원 서울신문이 진취적으로 남보다 앞서 계획하고 이루어낸 업적은 적지 않다. 특히 한글 전용과 신문말 다듬기를 연구하고 실천한 것은 한국 신문사상 선구적인 것이다. 1956년부터 60년까지 ‘한글판 서울신문’을 부분적으로 냈던 서울신문은 23돌 창간기념일인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기사와 제목을 한글로 썼다. 70년 2월14일 ‘신문말다듬기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신설했다. 위원회에는 국어학자와 문인 등 7명의 심의위원을 두어 신문말을 다듬거나 새로 만들었다. 심의위원은 정인승 허웅 한갑수 李應百 朴木月 柳周鉉 정재도씨였다. 신문 제작 방침이 수정돼 74년 1월4일 종전 체제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 위원회가 정리한 낱말은 1,600여개에이르며 71년 6월28일까지 33회에 걸쳐 지면에 연재됐다. 이때 만든 새 말 가운데 ‘사재기’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이 많다. 요즘 신문들의 한글 전용 편집에도 긴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가 낸 ‘韓國新聞協會二十年’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서울신문이 힘쓴 이 말다듬기의 성과는 모든 신문의 신문제작현장 종사자들에게 많은 준용과 새로운 대응어를 발굴,사용해 나가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신문은 상업주의와 선정주의(煽情主義)에 휩쓸리지 않고 공익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재벌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를 비판하는 데 과감했다. 재벌에 약한 여느 신문과는 달랐다. 지난 10월9일과 10일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언론정보학회 정기 학술대회에서 박용원씨(동아대 신방과 석사과정)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신문은 재벌을 가장 많이 비판한 신문이다. 상업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서울신문은 과장,억지윤색,냄비열정의 폐풍을 벗어나 침착하게 보도하는 전통을 세웠다. 서울신문을 매개로해 수행된 공익사업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서울신문이 애국선열조상건립워원회를 조직하여 성금을 모아 세웠다. 서울신문사 주도로 1966년부터 72년까지 세운 애국선열의 동상은 15기에 이른다. 서울신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신각종도 서울신문의 노력으로 새해를 여는 울림을 계속하게 되었다. 금이 간 원래의 종을 대신할 새 종을 서울신문이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보도와 행사 개최를 통해 어느 신문보다도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열성적이었으며 농어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서울신문이 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를 결집하고 국력을 집중하도록 하는 데에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발전에 기여한 서울신문 53년의 공이 전적으로 무시될 수는 없다. ◎끼친 過/절대권력 정당화·비호로 점철/10월 유신 지지·군부정권 미화 급급/4·19혁명때 태평로 사옥 불타기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서울신문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뼈아픈 족적을 남겼다. 1960년 4월19일 오후 2시. 성난 데모대는 태평로 사옥 앞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먼저 취재차량에 불을 질렀고 이어 윤전실로 들이닥쳐 다시 불을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에 번졌다. 곧바로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데모대원들이 물탱크차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몰고 사라져 버렸다. 자유당 李承晩 독재권력을 비호한 관제언론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최근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선정한 한국언론의 대표적인 왜곡보도사례 50건 가운데는 서울신문의 보도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자유당 4捨5入 개헌 정당화(56년),10월 유신 지지(72년),全斗煥 권력 장악 정당화와 미화(81년),4·13 호헌(護憲)조치 옹호(87년) 등이다. 절대권력의 정당화에 앞장서고 민주화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언론의 선두로 꼽혀왔다. 일반 국민들에게 각인된 서울신문의 이미지는 항상 권력의 편에서 당시의 권력자를 옹호하는 전위대였다. 10월 유신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해바라기 지식인’을 동원,유신대통령의 선출을 정당화하는 글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10·26사태후 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는 이른바 안개정국 시절엔 신군부 등장의 역사적 필연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5공의 全斗煥정권이 등장하자 “동천의 붉은 해가 불끈 솟았다.‥‥‥”며 그를 찬미하는 연재물을 게재했다.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도 “북괴방송,광주사태 집중적 선동” “광주시위 선동 남파간첩 검거” “공포의 유혈 무법천지” 등으로 ‘대공(對共)’문제와 ‘파괴성’을 권력의 편에 서서 부각시켰다. 해방후 53년에 걸쳐 점철되어온 서울신문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일관된 허물은 ‘권력의 대변지’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나온 시대는 역대 독재권력이 한국전쟁 이후 가열된 냉전시대의 안보논리를 그들의 체제유지논리로 위장한 시대이기도 했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시대를 같이 한 한국 제도권 언론의 곡필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울신문이 적어도 이같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선두에 섰다는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언론의 본분을 벗어났던 대목은 이밖에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정치문제에서 집권여당의 논리를 지나치게 앞세우고 상대적으로 야당의 입장을 폄하하는 지면을 제작함으로써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비판도 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정부의 정책적 입장을 심도있게 보도한다는 취지를 왜곡하여 절대권력자의 일방적인 논리를 전파하는 데만 급급했던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제 대한매일은 서울신문의 지나온 역사를 깊이 자성하면서 철저한 자기비판을 토대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사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5일 개관했다.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린 현장이 역사의 배움터로 단장하고 문을 연 것이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 강점기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어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달리해 수형시설로 사용되다가 지난 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후 88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92년 독립공원으로 꾸며졌다. 일제는 이곳에 의병장에서부터 독립운동가·항일투사를 무수히 투옥하여 한민족의 혼을 짓밟았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파란곡절의 현대사와 함께 수많은 반독재 민주인사·학생·통일운동가들이 고난의 세월을 보낸 곳이었다. 물론 흉악범·경제사범·보안사범 등도 거쳐갔으나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수난의 현장이자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범 金九 선생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이곳에 수감돼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柳寬順 열사는 이곳 지하감방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숨졌다. 사이토(齊藤) 일본총독을 사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姜宇奎 의사도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일제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감옥과 사형장,망루 등과 역사전시관으로 이루어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우리 애국선열들의 민족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일제때 고문과 취조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옛 보안과 건물을 최근 보수한 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변천과정,일제때 전국 형무소 현황,항일저항사,옥중시설,고문실 등을 영상과 밀랍인형 및 각종 모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애국선열의 넋을 후손들이 기리는 한편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시절을 되새겨 보며 다시는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산 교육장이다. 국민 모두 순례의 발걸음을 디디고 애국심을 다지는 성지로 계속 가꾸어 가야 겠다. 나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웅변으로 증언하는 역사 유적으로 전세계인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주고 있듯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일제의 만행을 우리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증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
  • 본사 주최 국가보훈정책 학술세미나

    ◎“보훈정신은 공동체의식의 발로”/단순 생활지원보다 사회결속 역할 절실 서울신문사는 4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21세기에 대비한 국가보훈정책의 역할을 모색하기 위한 ‘보훈정책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국난 극복과 국가 보훈정책’을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는 朴忠錫 이화여대 교수의 사회로 金義在 국가보훈처장의 기조연설 및 李澤徽 서울대 교수와 劉準基 총신대 교수의 주제발표,金學俊 인천대 총장 南泫旭 세종대 사회과학대학장 崔弘運 서울신문 논설위원 權熙英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裵燦福 명지대 교수 李在承 세계일보 논설위원의 토론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金義在 국가보훈처장은 기조연설에서 “국가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최고의 가치로 존중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바치는 풍토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면서 “보훈은 단순한 생활지원이 아니라 21세기 무한 경쟁시대에 대비해 우리사회를 하나로 묶는 정신가치와 공동체의식을 창출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李澤徽 교수도 ‘보훈문화 확산을 통한 공동체의식 제고 방안’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국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과 공동체의식의 강화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면서 “보훈정신의 계발과 보훈문화의 확산은 특히 오늘의 한국과 한국인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요청되는 국민적 의지와 역량의 집결에 필수 불가결한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李교수는 이어 “국가유공자들의 공헌과 희생정신을 민족공동체 의식의 귀감으로 삼는 보훈문화의 확산은 국민을 통합하고 공동체의식을 제고하는 강력한 방법의 하나”라면서 “학교교육 및 사회교육,이벤트성 행사,실증적 자료발굴 등 보훈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劉準基 교수는 ‘역사상의 보훈제도와 보훈정신 교육의 강화방안’이란 주제발표에서 “보훈정신은 국난극복의 원동력이며 민족의 번영과 민족문화 발전의 내적 동인”이라면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립함으로써 국가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통한 민족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劉교수는 또 “경제난을 비롯,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 위기는 확고한 역사의식과 국가관이 결여된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하고 “초중고교 교과서에 보훈의 의의 및 기능,내용 등을 수록하는 등 보훈정신교육을 강화,보다 확고한 민족관과 세계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 성균관장 선거 3파전/최근덕 현관장·이완희 이사·최장규 전 의원

    ◎최 관장 재선에 자신감/이 이사 재단서 지원설/최 전 의원 ‘막판복병’ 최근덕 성균관장,이완희 재단이사,최창규 전 국회의원이 차기 성균관장 자리를 놓고 격돌하게 됐다. 지난 96년 6월이후 유교의 개혁문제를 놓고 종권 다툼을 벌여온 성균관과 재단법인 성균관은 최근 23일 서울 종로 명륜동 유림회관 강당에서 성균관의정,부관장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10일 성균관장 후보 등록을 마감한 결과 3명이 출마했다. 94년 성균관장에 취임한 최근덕 관장(62)은 96년 종헌을 개정,성균관장 재선에 성공했으나 재단측에서 “재단의 승인을 받지 않은 종헌은 무효”라고 주장,분규에 휘말려왔다. 정신문화원 교수와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및 유학대학원장 등을 지냈으며 국제유학연합회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재단측에서 미는 것으로 알려진 이완희 이사(71)는 검찰서기관과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을 거쳐 유도회총본부 사무총장과 성균관 가족법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최창규 전 의원(61)은 제11·12대 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청년유도회 회장 등을 지냈다.독립운동가 면암 최익현선생의 후손. 현재 순국선열유족회장과 국가상징자문위원. 유림 사이에서는 최관장이 무난히 재신임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이사의 도전도 만만치 않은 듯. 최 전의원은 성균관측과 재단측의 분규에 염증을 느낀 유림들 사이에 지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균관과 재단측은 서울고등법원 민사20부의 권고에 따라 그동안 자격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양측의 대의원을 모두 배제한 채 각각 95명씩의 대의원을 새로 추천하기로 했다. 성균관장 선거에는 190명의 대의원을 비롯해 전국 234개 향교의 전교와 시도 향교 재단이사장,재단법인 이사,성균관 및 재단 간부,성균관대 총장 및 이사장 등 모두 468명이 참여한다.
  • 金 대통령,성실한 국회 답변 주문/국무회의

    ◎“옳은 일엔 의원과 과감한 논쟁해야할 것” 20일 국무회의는 동절기 실업대책과 국정감사 대책이 중점 현안이었다.金大中 대통령도 이부분에 대해 특별히 당부했다.특히 陳념기획예산위원장은 야당의원들이 국감자료를 통해 구조조정의 부분적인 내용을 가지고 새로운 사실인양 공개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무엇보다도 예산국회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를 강조했다.金대통령은 “이번 새정부 첫 예산국회가 정부에 대한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며 장관들에게 나름대로 구상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먼저 “선진국에서는 의원과 장관이 일문일답을 하고 있으나 우리는 의원과 장관 비서관들간의 정책질의가 되고 있다”며 우리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이어 “장관들이 이제는 메모를 보고 답변을 할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든 지식으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나아가 장관들의 소신과 설득력,그리고 옳은 것에 대해서는 의원들과 과감히 논쟁을 하라고 지시했다.또 “국회답변때 회피하거나 무책임한 답변을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면서 자료도 성실하게 제출하도록 했다.다만 과거정부와 현정부가 하고 있는 내용을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의원들의 지적이 옳을 때는 받아들이되 무리한 경우나 정부로서 그대로 넘어가지 못할 사항에 대해서는 논쟁을 해야 할 것”이라며 공격적인 자세를 갖도록 강조했다. ○…아울러 金대통령은 “일용직 167만명 가운데 42만명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며 “겨울이 오면 더 증가할 것이므로 차질없이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특히 부산 영도구청 직원들이 205명을 취직시킨 사례를 적시하며 高建 서울시장에게 노숙자대책과 실업자 직장알선 등에 만전을 기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처리된 안건은 다음과 같다. ■법률안 △공기업의 경영구조개선 및 민영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 △해외뇌물거래방지법안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 개정안 △중앙행정권한의 지방 이양 촉진에 관한 법률안 △도로교통법 개정안 △지방재정법 개정안 △지방공무원교육훈련법 개정안 △한국교육방송원법 개정안 △잠엄법폐지법안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 폐지안 △산업구조고도화촉진법안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한국석유개발공사법 개정안 △전기용품안전관리법 개정안 △수출품 품질향상에 관한 법률 폐지안 △우정사업 운영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소프트웨어 개발촉진법 개정안 △자동차관리법 개정안 ■대통령령안 △사립학교법시행령 개정안 △특수학교 시설·설비기준령 개정안 △수도권정비계획법시행령 개정안 ■일반안건 △1999년도 비료계정의 한국은행 차입원리금 상환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 △1998년도 국유재산관리계획 변경안 △1998년도 일반회계 예비비 지출(법무부 소관 재소자 수용관리 등 추가 소요경비,동절기 일용실업자 생계대책을 위한 공공근로사업 및 능력개발훈련 소요경비) △국제상거래에 있어서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제공행위 방지를 위한 협약 비준안 △에티오피아와의 문화협정안 △청소년헌장 개정안 ■보고안건 △순국선열의 날 기념행사 기본계획안 ■즉석안건 △외무공무원법 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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