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선어
    2026-02-18
    검색기록 지우기
  • 희생자
    2026-02-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13
  • 세계수산대학 유치 전남 - 부산 “우리가 딱”

    정부가 수산업 리더를 양성하는 세계수산대학 설립 추진을 발표하자 전남과 부산시가 치열한 유치 다툼을 벌이고 있다. 25일 전남도에 따르면 해양수산부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세계수산대학 설립을 제안했고 FAO가 이를 수락, 조기 추진을 약속했다. 해양부는 오는 7~8월 2개월 동안 FAO와 협의해 운영방침 등을 정해 오는 9월 세계수산대학 설립 지역을 확정한 뒤 2015년 하반기에 개교할 계획이다. 이 대학은 석·박사 과정을 교육하는 대학원 대학이며, 개도국과 저발전국가 국민들만 입학할 수 있다. 풍부한 수산 자원을 가졌지만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도국과 저발전국들에 양식 기술과 수산 선진 정책 등의 기술을 전수해 이들 국가의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돕기 위해 설립되기 때문이다. 현재 유치에 가장 적극적인 지역은 부산시다. 해양부에 세계수산대학 설립을 먼저 건의한 부산시는 자체 용역을 통해 10년간 생산유발효과는 5300억원, 고용 유발 효과는 3388명일 정도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분석했다. 부산은 수산 분야 산·관·학이 모여 있고, 국제공항과 항만 등 대중교통체계가 잘돼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남도 바다 면적과 해안선, 어업생산량에서 전국 최고를 기록하는 제1의 수산지역이라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전남은 다른 지역보다 어선어업과 천혜 양식어업, 내수면어업 등 생산·기술면에서 발달했고 전남대 여수캠퍼스를 비롯한 수산분야 교육기관과 연구기관, 기술, 장비, 인프라 등을 충분히 보유해 세계수산대학 설립의 최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커버스토리] 낚시꾼만 바라보던 추자도, 조기 가공단지 세워 굴비시장 장악

    [커버스토리] 낚시꾼만 바라보던 추자도, 조기 가공단지 세워 굴비시장 장악

    제주 섬과 뭍을 잇는 바다 한가운데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입에 물도 다닌다’는 섬이 있다. 참굴비로 대박이 난 추자도다. 남들은 추자도를 바다 낚시의 천국이라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찾아오는 낚시꾼들만 바라보기에는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다행히도 여러 해류가 추자도를 교차해 바다에 물고기는 넉넉했다. 열심히 고기를 잡아다 팔면 자식들 학교 보내고 밥은 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뿐, 부자가 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추자 바다는 참조기의 노다지다. 추자도에 있는 60여척의 유자망 어선은 국내 참조기 생산량의 30% 이상을 잡아들인다. 하지만 어렵사리 건져 올린 조기를 헐값으로 전남 영광 등의 굴비 주산지에 팔아야만 했다. 굴비를 만들 생각도, 기술도, 굴비 가공공장도 없었다. 굴비 주산지는 추자산 참조기를 싼값에 사들여 비싼 값의 명품 굴비로 가공해 떼돈을 벌었다. 재주는 추자도 사람이 부리고 돈은 육지 굴비업자가 버는 식이었다. ‘우리도 굴비 한번 만들어 보자.’ 2007년부터 추자 사람들은 발품을 팔며 전국의 유명 굴비 특산지를 찾아다녔다. 쉬쉬하는 굴비 가공 기술을 어깨너머로 곁눈질하며 하나둘 익혔다. 굴비를 만들기 위한 공장도 짓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고 보니 추자 바다의 청정한 해풍은 굴비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민들은 굴비를 만들기 시작했고 굴비 축제를 열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추자 굴비의 탄생을 전국에 알렸다. 최첨단 냉동시설을 갖춘 참조기 가공단지는 최근 완공됐다. 하루 5t을 급냉동시킬 수 있고 냉장실은 일시에 500t의 굴비를 저장할 수 있다. 연간 가공 가능한 물량만 1800t 규모다. 이정호 추자수협 조합장은 “조기를 잡아 바로 급냉동하기 때문에 신선도가 높아 당연히 굴비 맛도 뛰어나다”며 “불과 수년 사이에 굴비시장에서 추자 굴비가 명품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1년에는 굴비 2100t을 생산해 285억원어치를 팔았다. 불과 몇 년 만에 전국 굴비시장의 30% 정도를 장악했다. 추자 주민 박광조씨는 “작은 섬에 외국인 근로자가 200명 이상 북적인다는 것은 그만큼 일거리도 있고 돈도 잘 돌아간다는 것 아니겠냐”라며 “제주 본섬 등에 집 한채를 더 갖고 있는 주민도 많다”고 말했다. 추자섬은 이제 ‘바다의 황제’라는 참치 메카를 꿈꾸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추자 바다가 뜨거워지면서 참치 치어가 나타나자 참치 연안 가두리 양식 사업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조동근 어선어업 담당은 “추자도는 섬 자체의 어족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시켜 부자 섬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찾던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행정의 적절한 예산 지원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팔자가 바뀐 섬 속의 섬 가파도의 변신도 놀랍다. 마라도를 이웃하고 있지만 국토 최남단이라는 마라도의 명성에 가려 가파섬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섬을 등지고 늙은 해녀들만 남아 미역이나 건져 올려 먹고사는 가난한 섬이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주민들의 손으로 탄소 배출이 없는 ‘카본 프리 아일랜드’(Carbon Free Island)를 만들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화석연료로 가동되던 발전소는 문을 닫았고 태양열과 풍력발전기가 세워졌다. 주민들은 기름 자동차 대신 전기차를 타고, 경관을 해치던 전봇대도 모두 땅 밑으로 사라졌다. 관광객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고 환경 전문가들의 필수 답사 지역으로 변했다. 제주 국제대 김의근 교수(관광학)는 “청정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는 가파도의 카본 프리 모델은 그 자체로도 수출 상품화 가능성이 높다”며 “가파도는 전국의 섬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섬은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안보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인천 옹진군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5도가 이를 방증한다. 지도를 보면 서해 북방한계선(NLL) 바로 아래 서해5도가 자리 잡고 있다. 북한 측에서 보면 이들 섬이 남의 집 안방을 훤히 들여다보는 형국이어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6·25전쟁 휴전협정 당시 우리나라 유격대가 서해5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2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서해5도 주변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의 안보관은 일반 국민과는 다르다. 막상 사건이 벌어져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생업에 종사한다. 사건 직후 육지로 잠시 피란 간 연평도 포격 사건만이 예외다. 그렇다고 서해5도민의 안보의식이 약한 것은 아니다. 상당수 주민은 북한 황해도 일대에서 피란 나와 정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북한을 증오한다. 대형 사건이 터져도 육지로 이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은 북한 관련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언론에 부각되는 것을 싫어한다. 섬에 위기가 조성될 경우 관광이 위축되고 어업이 통제되는 등 불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도 면사무소 관계자는 “주민들은 북한의 도발을 막는 것이 첫 번째 안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의 생계를 지키는 일이 첫째 못지않은 안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평도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손현주의 계절 밥상 여행] (1)제주 꿩·메밀 요리

    [손현주의 계절 밥상 여행] (1)제주 꿩·메밀 요리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꼭 챙기는 것이 바로 그 지방의 대표 음식과 맛집입니다. 그만큼 맛집 순례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요즘, 음식평론가이자 여행작가인 손현주씨가 1월 제주도의 꿩과 메밀을 시작으로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계절 따라 지역별로 맛볼 만한 제철 음식을 엄선해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라산에 눈이 고봉밥처럼 쌓였다. ‘직, 지익’ 빌린 소형 승용차의 라디오는 어떤 주파수도 잡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차는 어느새 중산간을 지나 서귀포로 접어들었다. 노란 귤 밭이 더러 남아 있다. 빨간 열매를 매달고 크리스마스 병정처럼 서 있는 가로수를 보니 더럭 반갑다. 문득 그녀와 주고받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무 이름이 뭐예요?” “먼나무.” “뭔 나무냐고요?” “먼나무라니까.” 허허, 서귀포를 촘촘히 수놓은 그 가로수 이름이 먼나무란다. 근래 ‘식탐’이라는 책을 쓴 ‘올레 개척자’ 그녀와 난 미식의 경계에서 죽이 잘 맞았다. 그러니 제주에 가면 포식자처럼 바닷가에서 산허리로 별난 식재료를 찾아 기웃거리거나 밤늦게까지 맛 유람기를 읊어댔다. 어떤 날은 오후에야 문을 여는 게으른 ‘봉수네 식당’ 구석방에 앉아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전통 돼지족탕에 감읍했고, 문섬 위로 달이 차올라 싱숭생숭한 날은 제주의 푸른 밤 유화가 걸린 그녀의 낡은 아파트에서 애술 언니가 담가준 기막힌 파김치에 막걸리 통을 비웠다. 이번 제주여행 또한 그 변주를 넘어서지 않았는데, 촉수에 잡힌 것은 마라도의 끝물 방어다. 물 좋아 젓가락으로 집으면 조릿대처럼 낭창거리는 붉고 기름진 선어의 향연을 맛보지 않고 어찌 모슬포의 겨울을 이야기할까. 하필 이름도 기이한 제주 여인 묘생씨가 옆자리에 앉았고, 토박이 식도락 기담은 밤새 냄비뚜껑처럼 벌름거렸다. “말도 마시라, 애 낳았는데 시어머니가 메밀자베기(수제비) 달랑 두 번 끓여 주더라고. 성에 안 찼지. 메밀가루 한 말을 구했어. 이레를 끼니마다 한 낭푼씩 먹고 나니 기운이 돌더라. 요리랄 것도 없어. 메밀가루를 묽게 반죽해서 끓는 물에 수저로 뚝뚝 떼어 넣으면 돼. 지금도 제주 산모들은 땀 뻘뻘 흘리며 메밀자베기를 퍼먹어야 젖이 돌고 기운을 차린다고 생각하지.” 허니, 제주의 겨울 맛은 메밀이야기로 풀렸다. 메밀의 걸쭉한 점성이 산모의 젖을 풍부하게 해 주고 피를 맑게 해 주기 때문에 제주 여인들은 미역국과 더불어 산후 조리식으로 메밀수제비를 먹는다는 것이다. 중산간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는 메밀은 제주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의 구황작물이다. 심한 흉년이 들면 메밀대를 삶아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고, 뜨거운 물에 타면 바로 식사대용 비상식량이었다. 꿩메밀칼국수, 꿩만두, 빙떡, 메밀수제비, 메밀고구마범벅, 메밀칼국 등 이 일상의 음식들은 모두 메밀이 섞이고 어우러지며 긴 시간 배고픈 제주를 먹여살렸다. 잔칫집에서 빠지지 않는 몸국(돼지고기 삶은 국물에 모자반을 넣고 끓인 국)이나 고사리육개장, 순댓국에도 어김없이 메밀가루가 들어간다. 국은 걸쭉하여 따로 밥을 먹지 않아도 한 끼 식사가 될 만큼 포만감이 있다. 이튿날 오전. 비자림 입구에서 제주시 쪽으로 식당을 옮겨 왔다는, 제법 알려진 꿩과 메밀요리 전문점을 찾아갔다. 빙떡과 꿩만두, 꿩메밀칼국수까지 오달지게 주문했다. 빙떡은 본래 명절 때 나눠 먹는 전통음식이다. 역사가 700년이나 되었다면 믿어질까. 철판에 잽싸게 지져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먹는 일만큼이나 노독을 풀어주는 흥밋거리다. 할망은 묽게 갠 메밀을 한 국자 얹어 손바닥만 한 피를 만들고, 데친 무채를 얹어 빙빙 굴렸다. 양 끝을 꾹 눌러 완성시킨 빙떡은 마치 멍석을 말아 놓은 듯 가지런하기까지 하다. 모양이 길쭉하다. 좀 식혀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부드럽다. 메밀의 담백한 맛과 무채의 시원함이 어우러져 풍미가 독특하다. 삼삼하다. 이것이야말로 고향을 떠나온 도회인들이 영혼을 부릴 수 있는, 만화영화 ‘라따뚜이’에서 평론가 안톤 이고를 감복시킨 어머니의 손끝 맛이 아닐까. 설설 국물이 끓고 할머니의 꿩 이야기는 과거로 흘러 들어갔다. “지금이야 사육이지만 예전에는 늦가을부터 사냥을 했어요. 어떤 마을은 개를 앞세워 수십 명이 패를 만들었죠. 그런 날은 무 나박나박 썰어 넣은 꿩국을 맛봤고, 메밀반죽 넓게 썰어 넣은 꿩칼국은 겨울 별미였어요. 잡은 꿩을 눈밭에 툭 던져 놨다가 꽁꽁 얼려 가슴살로 육회를 해먹어요. 꾸들꾸들 말린 육포는 술안주로 최고였죠.” 메밀 피에 꿩고기와 야채를 얹어 꿩만두를 빚고, 샤부샤부처럼 데쳐 먹는 꿩 토렴은 그야말로 제주의 오랜 풍습이 깃든 세시음식이다. 제주만의 꿩엿은 어떤가. 꿩 살코기 쭉쭉 찢어 넣고 국물까지 포함시켜 엿을 고았다. 저지방 고단백 식품으로 물질하는 해녀나 노인들의 보양식으로 최고였다. 여행 마지막 날, 동문재래시장에 들렀다. 꿩과 메밀요리로 입소문난 골목식당 안일수(58)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테이블 6개의 좁은 공간에서 안씨는 구이용 꿩을 다듬고 있었다. 가게는 40년 됐지만 15년 전 물려받았다고 한다. 부엌이 두어 평이나 될까.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들통에서는 꿩 육수가 끓고 있었다. 꿩메밀칼국수를 주문했다. 투박한 메밀덩어리는 도마 위에서 순식간에 재단되었고, 육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메밀가루가 상으로 올라오기까지 그 시간은 짧고 일정했으며 단단했다. 국수 한 그릇의 미망은 컸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저부터 들었다. 여전히 낯설다. 국물을 한 술 떴다. 맛이 깊다. 베지근하다는 제주 사투리는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국수를 젓가락으로 어설프게 건져 본다. 뚝뚝 끊어진다. 그러니 순수 메밀칼국수는 수저로 퍼 먹어야 옳다. 담백하지만 텁텁하다. 고기 살점이 씹히면서 특유의 꿩 향이 난다. 우리의 미각은 보수적이어서 추억과 경험에 의존해 판단하려는 경향 때문에 꿩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가 살갑지는 않은가 보다. 비리고 날것투성이인 시장통을 빠져 나오니 눈발이 성기게 흩날린다. 그런데 모를 일이다. 비행기를 타고 본토로 돌아오는 동안 왜 그 국물이 자꾸만 떠오르던지. 단순하고 정갈한 과거의 맛. 몸을 순화시키는 편한 맛. 이 영혼을 벼리는 국물이야말로 생명의 음식이고 팍팍한 일상의 기갈을 풀 힐링 푸드 아닐까. 정초부터 꿩메밀국수에 단단히 홀렸다. 글 사진 손현주 음식평론가·여행작가 [여행수첩] 바람 많은 제주의 겨울은 만만치 않다. 바람막이 등 옷을 든든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눈 소식이 있으면 한라산 어리목 입구만 가도 기막힌 설경을 만끽할 수 있다. 공항까지 차로 25분. 동문재래시장 입구에 빙떡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 →계절맛집 동문재래시장 ‘골목식당’(757-4890, 꿩메밀칼국수, 꿩샤부샤부, 꿩구이), 제주시 이도2동 ‘비자림꿩요리전문점’(783-3888, 꿩메밀칼국수, 꿩만두, 빙떡, 꿩샤부샤부), 제주시 구좌읍 ‘제주민속식품’(782-1500, 꿩엿, 전복엿, 감귤해초잼) →추천맛집 ‘봉수네식당’(763-5164, 돼지족찜, 고기국수), 표선면 ‘가스름식당’(787-1163, 토종흑돼지 삼겹살, 돼지고기 두루치기, 전통 순댓국과 몸국), 대정읍 ‘산방식당’(794-2165, 수육과 밀면, 이상 서귀포시) 제주시 삼도동 ‘미풍해장국’(724-8867, 중독성 강한 선지해장국)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예술과 삶을 말하다(하)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예술과 삶을 말하다(하)

    시인 고은(80)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예술과 문학론, 사랑과 술을 빼놓을 수 없다. 한 30대 문학평론가는 고은에 대해 “선생은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핀 이름 모를 꽃의 존재에 대해서도 경남의 꽃, 대한민국의 꽃, 아시아의 꽃, 지구의 꽃, 태양계의 꽃, 우주계의 꽃으로 인식하고 들여다보는 확장된 시각을 이미 1960~70년대부터 드러낸 것이 특징”이라고 평했다. 지금이야 당연한 시각인 것 같은데 당시에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시에 대한 고은의 욕망은 이런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야 끝나는 시. 아니 모든 멸망 뒤에 다시 이어지는 시. 우주 허공계의 시. 나라는 존재 따위 다 사라져 버린 영구 부재의 시. 시. 시.시. 미치겠다.” (1974년 9월 24일 일기) 고은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강화할 때 그의 문우이자 술친구인 민음사 박맹호 사장과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사장은 ‘문학을 지켜라. 정치의 자승자박은 안 된다’라며 찬성하지 않았지만, 고은은 자신의 방식대로 문학을 끌어안았다. “시대에 지지 말자./ 시대를 팽개치지 말자./ 시대는 가고 문학은 남는다./ 문학은 그가 태어난 시대를 떠난다.”(1974년 12월 23일 일기)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 서재에서 고은은 “내 운명은 시다. 평론도 소설도 써봤지만, 시로서 내 삶을 완결해야 한다. 이제 막 새로운 시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다른 시들이 들어오고 있다. 시인으로서 끝 무렵이 아니라 시작 무렵이다. 나에게는 종결이 없다”라고 말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1958년 등단한 고은은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년)을 시작으로 41살까지 6권의 책을 냈다. 그의 저작활동은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왕성해져, 1986년 1권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24년 동안 만인보 시집만 30권을 냈다. 외국에 고은이 ‘만인보’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이유다. 만인보 외에 시집과 소설, 평론집, 산문집, 시선집, 여행서, 동화집, 동시집, 전기, 자서전, 편집한 책까지 합치면 150여권이 된다. 2013년 새해 벽두에는 1973~1976년까지 일기를 묶은 ‘바람의 사상’과 평론가 김형수와 대담한 ‘두 세기의 달빛’을 한길사에서 펴냈다. 대담집은 앞으로 7~8권 더 나올 예정이어서 고은이 낸 책은 조만간 160여권을 훌쩍 넘을 것이다. 시인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고은은 “모국어로 시인이 되어야 할 운명인 사람인데, 소학교에 입학하니 조선어 사용이 금지됐다. 모국어를 상실함으로써 배움을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죄다.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밤이면 머슴 대길에게 비밀리에 한글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한글 덕에 해방되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했다. ‘국문을 아는 사람 손들어’라고 했을 때 고은이 유일했단다. 흔히 그의 프로필에 종교는 불교로 나와 있다. 20대에 10년을 승려로 살았으니, 으레 그리 짐작한다. 그러나 흰 종이에 육필로 시를 적어나가는 고은은 “나에겐 백지가 종교다. 다른 종교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완벽한 백지가 있으니까, 다른 완벽함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삶은 힘들어지고, 문학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고은은 “한국전쟁 당시 사람들 속에 진짜 시적인 것이 있었다. 그 시대를 견뎌온 힘은 강력한 정서, 시적인 품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시가 더 풍부했다. 시단의 시적인 성취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사람들은 시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지금은 시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줄었는데, 오히려 시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 시인들이 시적인 품성이 갖춰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설적이다”고 현상을 분석했다. 그는 오히려 예비 작가나 기성 작가들에게 조언했다. “자아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다. 산 너머 이웃마을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는 자아의 골짜기에서만 머물지 말고 나와서, 세상을 돌아보고, 바라보고 해야 한다. 현대인의 특징은 시력이 약해져, 먼 곳을 보지 못한다. 인류가 짐승일 때는 멀리까지 바라봤다. 문명 속에서 익숙해진 시야라서, 아파트 단지의 건너편 창문을 바라본다. 시야가 연장되지 않고 누에고치처럼 내면에 둥지를 튼다. 그러면 어떤 때는 자신에 충실하지만, 자칫 자폐가 된다. 예술은 끊임없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삐걱삐걱’ 소리가 들려야 하고, 뜨거운 숨결이 밖으로 나가고 밖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야 한다. 안 그러면 사막이 돼 양쪽이 다 죽어버린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를 맡아 ‘참여파’는 물론이고 ‘순수파’까지 101명을 그러모아 ‘101 선언’을 추진한 저항시인다운 문학론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이었느냐? 1974년 12월 27일의 일기를 보자. “문학은 비겁한 것인가. 문학은 현실에 대해, 힘에 대해, 이렇게밖에 존속될 수 없는 것인가. (중략) 절대로 권력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우리는 팔 하나씩 잘라버려야 한다. 자유실천문협은 한국문협, 자유문협, 그리고 한국문인협회의 그것일 수 없기 때문에 현대 한국문학사를 새로 쓰는 문학의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문학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는 일도 경계할 것이다. 문학은 문학으로 끝난다.” 지금은 하회탈 같이 속탈한 웃음을 짓는 고은이지만 1951년 교사시절이나 승려로 지낸 시절의 사진은 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여간 부담스러운 얼굴이 아니다. 고은은 “고비와 극한을 많이 경험해서 그렇다. 마음의 평화는 인생의 후반기, 지금부터 한 20여년 전에서야 얻었다”고 했다. “내 마그마는 마음의 지하에서 여전히 타고 있는데, 지층까지 올라오지 않도록 달래놓고 유보시키고 하는 것이다. 어느덧 내 무의식의 일상이 지하의 마그마를 노출시키지 않도록 조절하고 달래주고 있다. 나는 본능의 신성성을 인정한다. 본능은 천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아주 신성한 것이다. 그것을 내 규범에 의해 억압하면 내가 싫어한다. 그것이 나의 자연이다. 불이 나의 친구다. 그러니까 ‘얘가 덜 필요한가보다’ 하면 자기가 물러나주고, 필요한 듯싶으면 기꺼이 다가오고 그래준다.” 본능의 신성성을 높이 평가한 덕분인지 고은의 여성편력은 화려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그러나 그는 1974년 9월 5일에 만난, 당시 덕성여대 강의를 나가던 15세 연하의 이상화(66·중앙대 영문과 교수)를 만난 뒤로 사랑에 빠졌다. 이 즈음 고은은 “한 달도 안 됐는데 결혼을 생각해야 할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일기에 써놓았다. 결혼식은 만난 지 약 10년 만인 1983년에야 했다. 고은의 나이 50살 때다. ‘생활은 문학의 무덤’이라던 고은의 부인 사랑은 지극하다. 2008년 고은이 그림 전시를 한 뒤로는 생일이 되면 고은 부부는 그림을 그려 생일선물을 대신한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결혼 이후 성실한 가장으로 살았고, 특히 딸을 얻은 뒤로 우주를 얻은 듯 기뻐했다”고 회고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부인 이상화 교수는 고은의 통역을 자청해 왔다. 흔히 전문통역사들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고은의 발언을 풀어 설명한다면, 이 교수는 그러지 않는다. 이 교수는 “고은 시인은 발언 자체가 시다. 시를 산문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고은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이다. 고은은 “사람들이 그렇게 술 마시며 언제 시를 쓰느냐고 묻지만, 나는 일을 다 털고 난 뒤에 술을 마신다. 일을 했으니 나를 방임하고, 해방시켜줘야 한다”고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황홀했던 주막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주량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주량은 내가 측정한 적이 없다. 가장 오래 마신 기록은 이틀을 잠 안자고 계속 마신 적이 있다. 서너 명이 마시다 다 떨어지고, 최종적으로 둘이 대작했는데 내가 졌다. 고은을 이긴 사람이 누구냐고? 다들 죽었다”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고은에게 술은 대부분 “대취”와 “뻗었다” 사이에 있었다. 맑은 소주를 좋아했다. ‘대취’ 무렵의 그의 술친구를 직함을 생략하고 순서 없이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박맹호, 박성룡, 김현, 이청준, 이어령, 남재희, 한승헌, 김병익, 황석영, 손소희, 이시영, 김승옥, 조해일, 백낙청, 김동리, 이문구, 서정주, 최순우, 조세형, 김현종, 최인호, 김기영, 신경림, 염무웅, 권영민, 민음사 여직원 3명 등등. ‘황홀한 주막’은 서울 종로구 청진동 가락지와 열차집, 신촌 역전 술집, 낭만, 서린동 술집 등등으로 무교동과 청진동, 광화문 언저리다.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술자리는 1960년대 어느 날 새벽 1~2시에 혼자 마시던 술이다. 잠든 세상에서 비장한 비극성을 즐기며 “나는 세상을 숙직하는 자다. 세상을 지키는 취기다”라며 마셔댄 것이다. 연세도 있는데 술을 끊을 것인가? “술을 끊으면, 수사자에게 수염이 없는 것 같다, 원숭이에게 꼬리가 없는 것 같다, 조가비에게 진주가 없는 것 같다. 이별하지 말고 작별을 했다가 다시 만나야지. 옛날 삼거리 주막집에서 나그네들이 만나서 술 마신 뒤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하면서 손을 흔들면서 헤어지듯이 그래야지. 술에게 가혹하게 굴면 안 된다. 얼마나 헌신적으로 잘해줬느냐. 술이 운다. ”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2010년 3월 울산 중구 동동 613 일원에 문을 열었다. 최현배 선생은 1894년 울산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를 창립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드는 등 우리말 보급과 교육에 힘썼다. 해방 뒤에도 미 군정청에서 교과서 행정을 맡고 한글학회 이사장과 연세대 부총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주요 저서로 ‘우리말본’, ‘한글갈’ 등을 남겼다. 울산 중구는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 옆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은 외솔의 업적과 유품, 저서 등으로 채워진 전시관과 영상실, 한글교실 등으로 조성됐다. 1층 기념관에는 1만여점에 달하는 유물 및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전시 자료는 선생의 저서와 한글 관련 서적 1만여점, 타자기·지팡이·옷·초상화 등 유품 30여점 등이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다목적 강당 등에서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한편 문화해설사를 기용해 관람객들에게 외솔의 업적 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외솔 동상 제막식도 열렸다. 동상(높이 2.5m·청동)은 유족의 뜻에 따라 60대의 외솔 선생이 한복을 입고 오른손에 안경, 왼손에 책을 든 모습으로 제작됐다. 중구 관계자는 “한글을 목숨으로 여긴 외솔 선생의 철학과 업적을 전 세계에 알릴 예정”이라며 “특히 외솔 선생의 한글 사랑, 겨레 사랑, 나라 사랑을 되새기는 학술 세미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30회에는 전주 권삼득로를 소개합니다.
  • [中 시진핑시대 개막] 장더장 상무위원, ‘江得張’ 별칭… 김일성大 나온 북한통

    장더장(張德江) 상무위원은 중국 옌볜(延邊)대 조선어학과를 졸업한 뒤 평양의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에서 유학해 북한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조선어’가 유창하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그의 최대 정치적 자신이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장 전 주석이 1989년 총서기 취임 후 이듬해 3월 방북할 때 수행한 것이 계기가 돼 상하이방(상하이 지역 정치세력)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방북 이듬해 옌볜조선족자치주 서기로 임명됐고 이후 지린(吉林)성 서기 등으로 중용됐다. 장 전 주석의 각별한 관심 탓에 ‘장쩌민의 아들’로 해석될 수 있는 ‘장더장’(江得張) 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광둥성 서기 재직 시절 농민 시위 등에 강압적으로 대응하는 등 악명이 높았다. 지난해 7월 원저우(溫州) 고속철도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관할 부총리로서 초기 대응에 실패한 점 등으로 구설에 올랐다. 일각에선 보시라이(薄熙來)의 실각에 따라 ‘어부지리’로 상무위원에 입성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 [시론] 세계 최초의 문자 경축일, 한글날/윤석민 전북대 국문학과 교수

    [시론] 세계 최초의 문자 경축일, 한글날/윤석민 전북대 국문학과 교수

    내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된다고 한다. 쉬는 날이 너무 많다는 이유 때문에 1991년 공휴일에서 제외된 지 22년 만이다. 참으로 반갑고 기쁜 일이다. 달력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일할 날이 줄어든다는 등 말이 많지만 그저 애교 섞인 불평으로 들린다. 한글날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문자를 위한 경축일이다. 세계 각국에 다양한 공휴일이 있지만, 언어나 문자를 기념하는 공휴일이 있다고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스스로 민족을 넘어 인류 보편적인 경축일을 가진 셈이다. 한글을 가리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문자”,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외국의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칭송한다. 외국의 어느 학자는 매년 한글날이 되면 가족과 친구를 모아 잔치를 벌이며 이날을 기념한다. 이런 한글날을 그동안 우리 스스로 ‘별로 특별하지도 않고 또 일할 시간만 낭비하게 하는’ 원흉처럼 대우한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에 따르면 경제적 걱정과 불안이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면 여가·휴식·관광 등으로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내수가 활성화돼 일자리도 늘어난다. 더욱이 한글에 대한 자긍심이 증대되고, 한국이라는 국가가치가 제고되며, 우리의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가 잘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해보자. 많은 사람이 한글날이 10월 9일인 것은 한글이 그때 창제되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10월 9일은 한글이 반포된 날이다. 세종이 한글을 반포한 것이 세종 28년 음력 9월 초였기 때문에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이다. 창제된 때는 세종 25년 12월 즉, 양력 1월이다. 그래서 북한은 한글날이 1월 15일이다. 왜 창제가 아니라 반포를 기준으로 하였을까? 그리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어연구회가 처음 한글날(그땐 ‘가갸날’)을 정할 때부터였다.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반포된 날이 더 중요하다. 세종도 창제보다 반포를 더욱 중시했다. 세종의 마음이나 한글날을 처음 기념하던 사람들의 마음이나 이날이 모든 국민에게 기쁨의 날이요, 자부심의 날로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한글 사용이 금지됐던 일제강점기 때부터 자발적으로 국민적 경축일로 기념해 왔다는 점은 한글날만이 가지는 특별한 의의이다. 그렇다고 한글날의 공휴일 재지정이 끝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 무엇보다 한글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첫째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널려 있는 국적 불명의 표기들, 외국어가 가득한 간판, 욕설과 외계어까지 난무하는 메시지나 댓글. 우리가 다듬고 가꾸어야 할 한글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우리가 먼저 한글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한다. 한글의 문화적 역량을 세계인에게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글은 누구라도 쉽게 배워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문자이다. 세계인이 배워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요즘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노래를 따라 부르는 젊은이들도 많다. 한글과 한국어의 세계화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세계 10대 무역 국가이며 2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 이상 국가)에 일곱 번째로 가입한 나라로 성장했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유일한 나라라는 칭찬을 듣는다. 그에 더해 ‘한글’을 만든 나라, 문화적으로 뛰어난 나라라는 칭찬도 들으면 좋겠다. 얼마 전 가수 싸이가 영국 옥스퍼드대 강연에서 “앞으로도 계속 한국어로 가사를 쓰고 노래하겠다.”고 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 순간 그가 느꼈을 한국어 및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생각해 본다. 한국어나 한글이 영어 못지않게 세계인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자부심과 자신감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백 마디 말보다는!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이름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사람들은 한양이라 불렀다. 한양은 북한산 남녘과 한강 북쪽 사이에 자리 잡은 양지바른 터전이라는 뜻이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경기도에 소속시켜 위상을 낮추었다. 서울을 일본의 오사카나 교토와 같은 지방 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1920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의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1935년에는 44만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25% 남짓이 일본인이었다. 식민지 도시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이남에는 본정통(오늘날 충무로), 명치정(지금의 명동)에서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남촌이 생겼다. 진고개 중심의 남촌 상가는 근대의 상품과 화려한 건물, ‘현대인의 신경’인 네온사인으로 덮였다. 카페, 우동집, 빙수집, 찻집이 즐비했다. 남촌은 ‘경성 속의 일본’이었다. 오늘날 명동 부근인 진고개는 본디 변두리 마을이었다.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작은 도쿄’를 세우고 주인으로 들어앉았다. 백화점과 카페, 당구장, 극장 같은 근대 유흥시설이 남촌에 몰려 있었다. 청계천 이북에는 조선인 상가가 많았던 종로통을 중심으로 북촌이 되었다. 북촌 지역은 전통 한옥과 나지막한 상점들이 있었으며 밤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식민 도시의 ‘원주민 상가’였던 종로는 중심에서 밀려났다. 종로의 밤거리에는 온갖 ‘싸구려’ 물건을 파는 야시가 열렸다. “극도의 생활난에 빠진 빈궁한 사람들이 혹시나 입에 풀칠이나 할까 하는 눈물겨운 생각”으로 야시에서 물건을 팔았다. 경성은 식민지 지배층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하이칼라 경성’과 식민지 빈곤층과 실업자가 넘쳐나는 ‘실업 경성’의 두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쾌락 추구 ‘모던 보이’ 1920년대가 되면서 양복 입은 남자와 양장한 여성이 늘어갔다. 옷과 장신구 등은 유행 바람을 탔다. 헤어스타일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면도를 하는 것을 ‘신식’으로 가는 길처럼 여겼다. 그럼에도 여자 단발은 아직 문제가 되었다. 단발한 여인들은 ‘단발미인’이라 하여 뭇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몇몇 여인이 단발했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단발이 크게 번졌다. 일부 여성은 단발에 ‘물결을 일으키는’ 파마도 했다. 겉모습만이 아니다. 생각과 취향이 남다른 사람이 생겨났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그들을 일컬어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고 불렀다. 모던 세대들은 사랑법도 새로웠다. 그들은 자유연애를 바랐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누구인지를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 모던 세대란 도시와 서구 또는 일본문화를 즐기며 근대를 적극 받아들인 신세대로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개 이들은 식민지 현실이나 사회모순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모던’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화가 문화 영역에서 터를 잡았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배우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대중음악 시장이 커졌다. 1930년대 초반 ‘레코드의 홍수, 유성기의 천하’라는 말이 떠돌았다. 모던 보이는 근대적 유흥공간을 찾아 여가와 유흥도 즐겼다. ‘거리의 오아시스’ 다방에서 근대의 상징처럼 커피를 마시며 서양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 무렵 다방은 하나의 문화공간이기도 하고 ‘도시인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페는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분위기를 좇던 모던 보이를 ‘에로’의 길로 안내한 것이 바로 카페였기 때문이다. 카페란 여급이 술시중을 드는 곳에서 비싸게 술을 먹는 곳이었다. 여급에게 팁도 주어야 했다. 카페는 ‘퇴폐적 취미’를 발산하는 곳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카페를 ‘에로의 신전’ 또는 ‘향락 제작소’라고 불렀다. 모던 보이들은 백화점 가기를 좋아했다. 1930년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이 문을 연 뒤 잇달아 히라다·조지야·미나카이·화신백화점 등이 문을 열었다. 백화점의 화려한 쇼윈도는 ‘시각의 쾌락’을 맛보게 한다. 최첨단 기기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들어선다. 갖가지 물건을 쓰임새에 따라 가지런하게 분류해 놓은 백화점은 ‘과학적’이다. 매장 앞에는 ‘어여쁜 숍걸’이 매우 상냥하다. 어디 그뿐인가. 백화점은 호화로운 식당과 전람회를 열 수 있는 전시공간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모던 보이들은 ‘도시의 심장’인 백화점에서 도시의 감각과 유행의 물결을 느꼈다. 모던 보이는 갑자기 닥쳐온 근대 도시의 습속을 하루라도 먼저 몸에 익혀야 했다. 그러한 모던 보이에게 경성은 근대의 훈련장이자 여가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흥의 도시였다. 그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근대가 ‘혼종의 근대’ 또는 ‘식민지 근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식민 도시를 거닐고 근대를 소비했다. ●이재유의 경성 1936년 12월 25일이었다. 농사꾼, 장돌뱅이, 노동자, 학생 등으로 변장한 32명의 경찰이 ‘검거 중대’를 만들어 창동 남쪽에서 시골 농민 차림인 30대 초반의 한 남자를 체포했다. 일제에 맞서 비합법 혁명운동에 몸을 던졌던 이재유였다. 이재유는 식민지 조선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불온’했다. 이재유는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해방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새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했다. 이재유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굳게 믿었다. 이재유의 정세 판단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낙관주의 없이 어떻게 온몸을 던질 수 있겠는가. 1930년대는 대공황이 닥쳐와 자본주의가 큰 위기에 빠졌다. 숨통을 연장하려는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을 더욱 수탈했다. 이에 맞서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은 아직 공장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농민투쟁도 기껏해야 군단위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툭툭 불거지는 여러 투쟁을 한데 묶어 한꺼번에 타오르는 들불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재유는 1920년대 노동조합·농민조합과는 다른 혁명적 노동조합·혁명적 농민조합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 조직은 선진 활동가들의 비합법 모임이다. 그러나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만으로 혁명운동을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재유가 보기에 혁명운동을 앞장서 이끌 혁명가들의 조직인 ‘조선공산당’이 없으면, 혁명이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공황을 벗어나려고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에 뛰어드는 형국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조직하려 해도 당은 꼭 있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재유는 1920년대처럼 전국적인 당 조직을 먼저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역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장하는 당 조직을 만들려 했다. 그는 운동의 근거지를 경성으로 삼았다.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이순금, 정태식 등 수많은 동지가 그와 함께했다. 이재유 수사기록에는 “요즈음 경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거의 모든 공산주의운동의 흑막으로 이재유가 활동함으로써 수많은 청년 남녀가 해를 입었다.”고 적었다.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재유 조직에는 학생과 노동자, 농민도 많았다. 이재유는 피검과 고문, 옥살이, 탈옥, 재검거를 되풀이했다. 일제 탄압으로 조직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서 굽힘 없이 혁명운동을 했다. 이재유는 1932년에서 1936년 말까지 ‘경성 트로이카’,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었다. 이재유에게 경성은 혁명운동의 근거지이자 그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발판이었다. ●모던 보이의 ‘핑크’ vs 이재유의 ‘적색’ 1930년대 일본에서 ‘에로’가 유행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공황과 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 청년들은 일본의 긴자거리를 배회하며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핑크’가 되거나 진지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이 되어 ‘아카(red)’가 되는 것, 둘 가운데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도 이와 비슷했다. 식민지 조선의 모던 보이는 경성의 혼마치(지금의 충무로)부근을 서성였다. 이 ‘핑크’들은 카페와 기생집을 드나들며 향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와 상반되는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도 조선에 있었다. 1920년대 근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크게 유행하여,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졌다.”고 했다. 이 새 세대를 일컬어 조선에서도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신문과 잡지에는 거의 빠짐없이 사회주의 관련 글이 실렸고,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비롯해 주요 사회주의 글도 번역됐다. “사회주의를 믿고 안 믿는 것은 다른 문제요, 사회주의가 실현되고 안 되는 것도 다른 문제다. 다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만 행세를 하게 된 것이 오늘의 형편이다.”는 책 광고까지 있었다. 일제 기록에 따르면, “예전의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 1905년에 태어난 이재유도 ‘마르크스 보이’였다. 개성 송도고보에 다닐 때부터 ‘마르크스 보이’가 된 이재유는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했다. 그 뒤 그는 여러 단체에서 실천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재유는 1932년 ‘경성트로이카’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적색’ 혁명가가 되었다. ‘트로이카’란 “몇몇 지도부가 먼저 당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이 회원 모두가 저마다 자유롭게 선전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재유는 “일생을 혁명가로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감옥에서도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 ‘수감자 대우 개선’ 등의 투쟁을 했다. 이재유는 형이 다 끝나고도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주보호교도소에 갇혔다. ‘핑크’의 모던 보이가 ‘메이크업’한 경성을 누빌 때 지하에서 혁명운동을 했던 이재유, 그는 1944년 10월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비합법 혁명운동사에서 최고의 기록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했다. 최규진(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 주시경 ‘말모이 원고’-‘조선말큰사전 원고’ 문화재 된다

    주시경 ‘말모이 원고’-‘조선말큰사전 원고’ 문화재 된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11년 무렵에 붓글씨로 쓴 ‘말모이 원고’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인 ‘조선말큰사전 원고’가 문화재로 등록된다. 문화재청은 이와 함께 ‘국한회어’(國漢會語), ‘국어문법(國語文法) 원고’,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 ‘국문정리’(國文正理), ‘전보장정’(電報章程) 등 한글 유물 7점을 566돌 한글날을 맞아 문화재로 각각 등록 예고했다고 8일 밝혔다. ‘말모이 원고’는 주시경이 중심이 돼 한글사전을 편찬할 목적으로 특별히 제작한 240자 원고지에 붓글씨로 쓴 글이다.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국어사전 역사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문화재청은 덧붙였다. ‘조선말큰사전 원고’는 조선어학회(1921년 12월 창립)가 사전 편찬을 위해 1929~1942년 작성한 역시 원고 뭉치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상태에서 민족의식을 고양했다는 죄목으로 조선총독부가 한글학자들을 탄압·투옥한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됐다가 1945년 해방 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됐다. 1947년 한글학회가 간행한 ‘조선말큰사전’ 두 권의 바탕이 됐다. 1895년 편찬된 대역사전인 ‘국한회어’도 문화재로 등록된다. 19세기 말 음운론은 물론 어휘사와 국어학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국어문법 원고’는 1910년 박문서관에서 발행한 ‘국어문법’(國語文法·1910년 출간)의 주시경 친필 원고다. 국문법 연구의 효시로 순한글 표기를 시도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의 기본 이론을 세운 책이다. ‘국문연구안’은 1907년 건립된 한글 연구 국가기관인 국문연구소 연구원(주시경·이능화·지석영·어윤적·송기용 등)의 국문 연구 관련 문제에 대한 논설과 의견서를 집대성한 국문연구 결과 보고서 등사본이다. 우리 문자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연구서로, 오늘날의 문자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담아 국어사적 의미가 특히 크다. 이봉운이 쓴 ‘국문정리’(國文正理)는 1897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순한글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서다. 국문 존중을 강조하고, 문자 학습에 힘써 개화함으로써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민생을 튼튼하게 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전보장정’(電報章程)은 1888년 우리나라에서 제정한 최초의 전신규정(電信規程)을 담은 문헌이다. 32개 항의 조문과 전신부호, 요금 등을 규정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한글의 기계화가 이루어진 결과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전남 억대소득 어업인 2200여명

    전남도는 13일 도내에 연간 1억원 이상 고소득 어업인이 22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도내 22개 시·군 2만 1000여 어업인을 대상으로 지난해 연간 소득을 조사한 결과다. 5000만원 이상 1억원 미만도 3209명으로 조사됐다. 규모별로 1억~2억원 1548명(7.1%), 2억~3억원 264명(1.2%), 3억~5억원 208명(1.0%) 등이다. 또 5억~10억원 151명(0.7%)이었으며 10억원 이상 고소득을 올린 어업인은 49명(0.2%)이나 됐다. 1억원 이상 고소득 어업인을 분야별로 보면 패류 양식이 713명(32.1%)으로 가장 많았고 어선어업 429명(19.3%), 해조류양식 394명(17.7%), 가공·유통 345명(15.5%), 어류 양식 163명(7.3%), 내수면양식 142명(6.4%) 등의 순이다. 시·군별로는 완도군이 707명으로 가장 많았고, 여수시(250명), 영광군(233명), 신안군(217명), 고흥군(179명), 진도군(133명), 해남군(115명), 목포시(110명) 순이다. 고소득 어업인이 100명 이상 되는 시·군을 분석한 결과 완도군은 전복양식(451명·63.8%)이, 여수시는 어선어업(128명·51.2%), 영광군은 가공·유통업(183명·78.3%), 신안군은 어선어업(115명·53.0%) 등이 주를 이뤘다. 고흥군은 미역·김 양식업(83명·49.6%)이, 진도군은 김·전복 양식업(66명·49.6%), 해남군은 김·전복 양식업(59명·51.3%), 목포시는 어선어업(90명·81.8%)인 것으로 나타났다. 도 관계자는 “일본 원전사고 이후 청정 수산물의 수요가 대폭 늘어났고 어업인들이 고품질 친환경 수산물을 생산하면서 경쟁력을 높여 소득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무안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여수-어느 하나, 맑지 않은 것이 없다 여수라는 그 바다

    여수-어느 하나, 맑지 않은 것이 없다 여수라는 그 바다

    남도에 가기로 했다. 해안을 따라가도 좋고, 내륙을 훑으며 가도 좋다. 일찌감치 그려 오던 길이지만 맘 잡고 부지런히 떠나게 된 건 곧 여수세계박람회가 개최된다는 소식 때문이다. 1 고소동 벽화골목에서 만난 계단. 여수의 하늘과 바다, 땅과 벽은 모두 하나였다 2 오동나무가 빽빽이 있어 그리 이름 붙여진 ‘오동도’에선 바다를 바라볼 때도 나무가 내려앉아 있다 어느 하나, 맑지 않은 것이 없다 여수라는 그 바다 남도에 가기로 했다. 해안을 따라가도 좋고, 내륙을 훑으며 가도 좋다. 일찌감치 그려 오던 길이지만 맘 잡고 부지런히 떠나게 된 건 곧 여수세계박람회가 개최된다는 소식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심상치 않다. 여수를 비롯한 남해안 곳곳이 전무후무한 활기를 띠고 있다. 남해의 온기를 머금은 쾌청한 바람을 싣고서. 글·사진 전은경 기자 뻔히 아는, 혹은 미처 몰랐던 여수 여수는 시골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때’ 시골이었다. 지금도 대도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최근 여수가 이뤄낸 변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에게 반전을 선사한다. 2012년 여수는 옛부터 그려 오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한다. 여수 신항에 우뚝 솟은 엠블호텔은 두바이의 칠성급 호텔인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을 똑 닮았고, 곳곳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버금가는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가히 구약의 천지창조에 비유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나 눈을 사로잡는 것이 비단 건축물뿐이라면 여수를 향한 그 많은 찬가를 뒷받침할 길이 없다. 여수가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는, 꼿꼿한 건물 뒤로 유유히 흐르는 ‘쪽빛’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피사체와 배경이 착 달라붙어 끈적한 교감을 이뤄낼 때, 피사체는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지금 여수는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오동도, 진남관, 향일암.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 여수에서 새로운 여수, 미처 몰랐던 여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또다시 여수에 매료된다. 다행히도, 여수라는 바다가 낳은 보물은 어느 하나 맑지 않은 것이 없다. 벼랑 끝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움 금오도 비렁길 당신이 몰랐던 첫 번째 여수, 비렁길. 혹 길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면 한번쯤은 워킹walking리스트에 올렸을 법하지만, 2010년 12월에 조성된 이 길은 아직까진 범국민적인 ‘길 열풍’에 합류하진 못했다. 그러나 이 길에 매혹된 이들이 풀어놓는 백문은 가히 일견을 위협할 만큼 호기심을 자극했다. ‘비렁’은 ‘벼랑’이라는 말의 사투리다. 함구미포구에서 시작되는 8.5km의 비렁길은 남해안의 빼어난 섬들을 눈에 담으며 오르게 된다. 길 구석구석 피어난 감국을, 이름 모를 풀꽃들을 따라 걷다 보면 20~30분 걸리는 산행도 금방이다. 숨이 가빠올 때쯤 이내 해안에서 90m 높이의 낭떠러지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낭떠러지 전망대에 서면 비로소 비렁길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한국에도 이런 바다가 있다니, 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니까!” 여수에 가기 전 ‘호들갑’이라 치부했던 지인의 찬사를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눈을 비비고 고개를 다시 들어도 여수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여전히 놀라웠다. 정말이지, 물감으로 뒤덮은 듯 티끌 하나 없는 바다는 묘한 이질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여수의 보고 시장 탐방 시골 장터의 풍경. 어느 지역이나 으레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풍물시장, 수산시장 등 이름만 다를 뿐 속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도 접어두자. 시골의 시장만을 찾아 엮은 책이 있을 정도로 우리네 시장은 지역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여수에서 시장을 방문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식당에서 알싸한 돌산 갓김치를 맛보니 가족들 생각이 난 것이었다. 추천받은 여수 수산시장에서 갓김치만 재빨리 사고 말 생각이었는데 맞은편 교동시장, 건너편 수산시장까지 들르는 통에 시장에서만 반나절을 써버렸다. 여수의 갓김치는 물론이고 각종 건어물, 여수의 명물 서대회까지 특산품이 즐비한 데다가 ‘거저 주는’ 가격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것. 8개가 한 묶음인 서대회가 만원 안팎이며 무게로 달아 파는 간장게장은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싸다. 작은 방석만한 봉지에 가득 든 말린 문어도 만원밖에 하지 않아 선물하기에 좋다. 시간대별로 시장을 즐기는 법을 하나 추천하자면, 오전장이 열리는 교동시장에서 건어물을 잔뜩 사들이고, 점심으로 수산시장에서 신선한 전복과 굴을 맛본 후, 해가 지면 포장마차 촌으로 변신한 교동시장에서 여수 시장 구경을 마무리하면 좋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 clip. 교동시장과 여수 수산시장은 바로 맞닿아 있다. 여수 수산시장에서는 수산물을 골라 2층에서 바로 맛볼 수 있고 수요일에는 전품목을 1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1 금오도에서의 특별한 하루를 원한다면 민박도 나쁘지 않다. 저렴할 뿐더러 낚시 배를 소유한 곳도 있다 2 여수의 간장게장은 주로 돌게를 사용한다. 2.5kg에 3만원 정도 3 돌산 갓김치는 매운맛이 적고 만드는 방법에 따라 톡 쏘는 향을 내기도 한다 4 신기항에서 출발해 여천항에 도착하기까지 소요시간 총 20분. 치명적인 배멀미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5 비렁길은 아직 관광객에게 잠식되어 않아 소위 ‘뜬’ 길에 비해 한갓지게 걸을 수 있다 6 바다를 주제로 한 1~2구간 벽화는 중앙동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바다를 품은 벽 고소동 벽화골목 여수에는 길이 1,004m짜리 골목이 있다. 일명 ‘천사골목’이라 불리는데, 이 길을 아우르는 하나의 주제는 바로 ‘벽화’다. 단순히 그림만이 아니라 여수의 역사, 문화, 전설 등 이야기가 있는 벽이어서 꽤 긴 거리임에도 심심하지 않다. 게다가 고소동 벽화골목은 시민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골칫덩이가 아닌,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라는 벽화의 순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착한 벽화’다. 이곳의 벽화는 다른 지역 벽화와는 사뭇 다르다. 온통 파란 벽은 바다를 나타내고, 그 속엔 유영하는 물고기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고소동표 해양 조감도’ 한 켠에는 ‘EXPO’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여수세계박람회가 온 여수시민을 하나로 모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 벽을 보고 있노라면 ‘곱고 아름다운 물’이라는 뜻의 여수 작명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전방으로는 곱고 아름다운 바다 그림, 어깨 너머로는 여행 내내 곁에 있어 알아채지 못한 실제 바다가 있다. 벽화를 통해 자연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소동 벽화가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T clip. 벽화골목은 여수구항에서 시작해 진남관까지 이어진다. 여수구항 해양공원 인근의 패밀리마트 골목에서 시작되며, 아직 미완성인 5~7구간은 엑스포 직전까지 완성될 예정이다. 우연한 미식여행 여수 당신이 굳이 식도락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남도에서는 자연스레 ‘맛집 탐방’을 하게 된다. 아니, 지역마다에서 특산품 한두 가지 먹었을 뿐인데 어느새 미식여행으로 변질되어 있달까. 게다가 남도 밥상은 어찌나 반찬이 많은지 도청에서 ‘적당히 줄이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다. 그중에서도 여수로 말할 것 같으면, 이곳 식탁은 간장게장에서 시작해 양념게장으로 끝난다. 서대회나 삼치회가 들으면 적이 서운할 이야기지만, 그만큼 게장의 입지는 굳건하며 8,000원이라는 가격대비 만족도도 독보적 수준. 그러나 여수를 떠나는 날까지 입 안에 계속 맴돈 것은 다름 아닌 삼치회였다. 삼치회는 대표적인 ‘선어’로 잡자마자 바로 회를 뜨지 않고 하루 정도 숙성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부드럽고 고소한 맛은 물론이고, 혹시나 입 안에 넣자마자 녹아버릴까 두툼하게 썬 그 배려마저 잊지 못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여수 봉산동 게장골목에 가면 7,000~8,000원에 푸짐한 게장백반을 먹을 수 있다 2 삼치는 살이 약해 살짝 얼려 회를 뜬 뒤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다. 수온이 찬 겨울이 제철 3 여수 수산시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말린 생선을 살 수 있다 허영만 맛객의 순례지 여수돌게식당 2대째 이어진 게장전문점으로 여수세계박람회 지정업소이다. 간장돌게장과 양념꽃게장을 향해 ‘손이 가요 손이 가’도 무한리필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거기다가 밑반찬이라기엔 황송한 갈치조림, 새우조림, 멍게젓갈까지 더해지니 밥도둑이 한둘이 아니다. 이 모두가 단돈 7,000원이며 1인 상도 가능하다. 주소 전남 여수시 봉산동 265-24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9시 문의 061-644-0818 삼치회만 취급한 지 20년째 사시사철 거창한 겉치레나 상다리 휘청거리게 하는 밑반찬이 없어도 오로지 삼치회 하나만으로 승부하는 곳. 관자, 새우, 꼴뚜기 등 신선한 수산물 몇 가지로 입맛을 돋우고 나면 접시에 가득 올려진 두툼한 삼치회가 만족감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삼치회는 여수 돌김에 싸서 간장에 찍어 먹는 게 제맛이다. 아참, 주인아주머니의 구수한 전라도 말씨는 친절과 불친절 사이를 미묘하게 오간다(그리하여 정겹다). 주소 전남 여수시 교동 450 운영시간 오전 8시~밤 10시 문의 061-666-1445 2012 여수세계박람회 여수, 세계의 바다가 되다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이 유난히 빠르게 느껴진 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서울 용산역에서 종점 여수엑스포역까지 도착하는 데 4시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KTX열차가 첫 운행을 시작한 건 불과 지난 10월. 여수세계박람회가 열리는 5월쯤엔 3시간 초반대로 운행시간을 단축한다고 한다. 한국 최남단에 있는 여수역은 더는 먼 곳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여수세계박람회의 개막도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인류 최초의 발명’이라든지 ‘세기의 발명품’ 같은 것들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게 언제였던가. 일찍이 서구에서는 1851년부터 ‘만국박람회’를 통해 최신과학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뽐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박람회라는 것은 현실보다는 꿈에 가까웠다. 텔레비전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50년대 후반의 일이니까. 그러나 그로부터 약 40년 후, 한국은 급속한 산업성장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는 IT강국으로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였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박람회는 별세계의 일이 아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고 정보는 넘쳐흘러 주워담기 급급하다. 그럼에도 세계박람회는 여전히 인류의 발전에 유효한 화두를 던진다. 달라진 것은 방향일 뿐. 이제 세계는 과학발전의 산물 대신 그 폐해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여수세계박람회가 이야기할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다. 잠시 2007년 11월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보자. 그때 바로 거기서, 2012년 세계박람회의 개최지로 대한민국 여수가 최종 결정됐다. 이유는 명확했다. 여수는 그간의 세계박람회와는 다른 길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라는 여수세계박람회의 주제는 현재 지구가 직면한 쟁점을 고스란히 다루고 있었다. 시나브로 녹아내리는 남극을, 그 해수면의 상승으로 가라앉을 작은 섬의 존재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수세계박람회는 여수 바다를 무대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장이 될 것을 공표했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기간 5월12일~8월12일 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 여수신항 및 덕충동 일대 문의 1577-2012 입장료 성인 3만3,000원, 청소년 2만5,000원, 경로우대 및 어린이 각 1만9,000원 / 4월30일까지 예매시 5% 할인, 여수세계박람회 홈페이지(www.expo2012.or.kr)와 인터파크(www.interpark.com)에서 예매 가능 주제관 주제관의 주제는 ‘바다와 인류의 공존’이다. 전시 구성이나 주제는 둘째 치더라도, 바로 이곳에서 가장 주요한 전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은 기억하자. 바다 한가운데 세워진 주제관은 건물의 웅장함이나 규모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다. 주제관으로 연결된 바닷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물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여수세계박람회에 왔다면 이 산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부제관 여수세계박람회의 부제관은 기후환경관, 해양산업기술관, 해양문명·도시관, 해양생물관 등 4개 동으로 구성돼 박람회장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주제관의 전시를 좀더 세밀하게 다루는 이곳은 3D영상과 가상 체험 등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잠수정을 타고 여수에서부터 남극, 갈라파고스와 페루를 누비는 경험이 또 어디에서 가능하겠는가. 부제관은 박람회가 제공하는 각종 즐거움이 집약된 공간이다. Big-O ‘본식 후의 디저트’,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를테면 여수세계박람회의 야외무대 빅오Big-O가 주연보다 더 사랑받는 조연이 될 공산이 큰 것처럼. 각종 이벤트와 문화행사, 쇼 등이 펼쳐지는 빅오는 사실상 여수세계박람회의 대표적 상징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태양을 닮은 거대한 이 건축물은 박람회 건축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이고 실내에서 구현할 수 없었던 대규모 신개념 전시가 펼쳐질 예정이다. 전시관 관람이 끝난 늦은 밤에도, 전시관 입장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에도 감초 같은 빅오의 이벤트 덕에 박람회의 감칠맛이 한층 더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수+남도 습지라는 자연, 그 위대함에 관해 순천 순천만은 유럽 북해연안, 캐나다와 미국 해안, 아마존 하구 연안 등과 함께 세계 5대 습지에 속한다. 무려 아마존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곳은 약 23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갈대밭과 그 10배가 넘는 2,600만 평방미터의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갈대밭에서 2km 가량 떨어진 용산전망대에서는 순천만 전경을 내다볼 수 있는데, 황금빛 갈대밭만을 상상하던 여행자는 이 광활한 광경 앞에서 어김없이 아연하고 만다. 그러나 순천만을 규모만 놓고 말한다면 단지 겉핥기에 불과하다. 순천만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자연습지로 흑두루미, 검은 머리 갈매기 등의 조류를 볼 수 있는 자연생태공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200여 종 철새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드넓은 생태공원을 좀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다면, 대대포구에서 출발하는 생태탐사선을 타면 된다. 35분간 수로를 따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운항시간은 물때에 따라 달라진다. 요금 어른 4,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 문의 061-749-4059 1 순천만 갈대밭은 시각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대개는 황금빛이지만 노을과 별빛에 물든 갈대밭도 장관이다 2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는 가을이면 초가지붕의 짚단 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3, 4, 5 대한다원이 국내 최대의 차 생산지가 된 이유는 습도 때문이다. 밤새 율포만에서 생겨난 바다 안개에 촉촉이 젖어 있어 항상 향기를 머금는 것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한 걸음 더 순천 역사 여행┃순천왜성-낙안읍성 민속마을-순천고인돌공원-송광사 순천은 여러모로 교육적이다. 희귀 조류와 갯벌 생물을 조우하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서 생물 공부를 했다면, 오후엔 순천왜성과 낙안읍성에서는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 ‘정유왜란 최대의 격전지’, ‘왜군의 일시적 승리를 안겨준 왜군 주둔지’ 등 순천왜성에 관련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은 이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터를 미로로 만든 듯한 순천왜성에서는 400년 전 한국을 떠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오랜만에 발동된 상상력은 이윽고 낙안읍성에서 결실을 맺는다. 흙담을 쌓아올린 이 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었으며, 다른 읍성에 비해 조선시대 생활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직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은 계절마다 다양한 민속 행사를 열어 볼거리를 한층 풍성하게 한다. 봄에는 민속문화축제, 가을에는 남도음식문화축제 등이 열린다. T clip. 순천 시티 투어를 활용하면 하루 동안 순천 곳곳을 둘러볼 수 있다. 요일에 따라 다르게 편성해 운영하는데, 순천역 관광안내소 앞 승강장에서 매일 오전 9시50분에 출발해 오후 5시30분에 순천역으로 돌아온다. 요금 어른 8,000~9,000원, 청소년 6,500~7,500원 문의 061-749-3107 tour.suncheon.go.kr 남도의 차 이야기 하동·보성 드넓게 펼쳐진 푸른 차밭. 십중팔구는 보성을 떠올린다. 보성에는 국내 최대의 차 산지인 대한다원이 있다. 그러나 이 계단식 차밭에서 누릴 수 있는 유흥은 고작 차밭 가운데를 산책하거나, 그럴싸한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만족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눈앞 가득 넘실대는 초록의 싱그러움 때문이다. 사실 대한다원은 차밭만큼이나 입구의 삼나무 길도 장관이다. 그러나 차에 관해서 결코 보성에 밀리지 않는 곳이 바로 하동이다. 대한민국 차 시배지이자 소설 <토지>의 주 무대라는 특징은 하동 녹차의 맛을 더욱 깊게 우려내기 충분했다. 현재 하동에서는 이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하동 차문화센터와 매암차문화박물관 등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그 각별한 하동차를 맛볼 수 있는데, 전시관부터 체험관까지 다양한 시설이 있어 차의 역사와 문화 및 예절까지도 알 수 있다. 대한다원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500원 문의 02-511-3455 한 걸음 더 하동 문학 기행┃토지문학관-악양 들판-고소성-이병주문학관 1990년대 우리네 책장에는 으레 장편소설 <토지>가 있었다. 21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인지라 완독은 쉽게 못하더라도 25년간 집필에 몰두한 박경리의 삶을 훑어볼 수는 있다. 하동 여행을 통해서 말이다. 하동에 도착해 한적한 포장길을 따라가면 토지의 주 무대인 최 참판 댁이 나온다. 주인공 서희가 어릴 때 살던 집이자 안채와 사랑채, 초당, 행랑채 등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집 모습을 갖춘 곳이다. 최 참판 댁 대문 앞에 서면 드넓은 악양 들판이 내려다보이는데, 이곳 역시 토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작가가 우연히 친척집을 방문하러 왔다 이 들판을 보고서 토지의 무대를 떠올렸다 하니 누구라도 들판 풍경이 새롭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근의 고소성에 오르면 탁 트인 악양 들판 전경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남쪽으로 섬진강, 동북쪽으로 지리산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T clip. 좀더 활기찬 풍경을 보고 싶다면 전라도와 경상도가 한곳에 모이는 화개장터로 갈 것. 가수 조영남의 노래로 알려지기 이전에 이곳은 김동리 소설 <역마>의 배경이 된 곳이다. 1997년부터 4년간 복원을 거쳐 기존 5일장이 상설 시장이 되었다. 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연중무휴 남해안 100배 즐기기 남해안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서적부터 찾았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과장된 정보와 지루한 사진 나열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역시나 꼼꼼하게 정리된 여행서를 참고하는 게 좋다. 약 16개 남해안 주요 도시의 핵심 정보가 빼곡히 적힌 <남해안 100배 즐기기>는 여행정보를 뒤적이는 시간을 줄여 준 대신, 무리해서라도 여행일정을 늘이게 만드는 책이다. 2011년 개정판으로 출시돼 최신 정보가 가득한 이 책 한 권이면 ‘남도에 볼거리, 먹을거리가 이렇게 많았나’라며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될 것. 지은이 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 및 여행작가 13명 펴낸곳 랜덤하우스코리아 정가 1만4,000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시흥 군자신도시 명칭 논란

    경기 시흥시가 추진 중인 군자신도시 명칭을 놓고 시의회와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20일 시에 따르면 서울대 국제갬퍼스 등이 들어설 정왕동 군자신도시(490만㎡) 명칭을 설문조사 및 연구용역을 통해 ‘배곧신도시’로 정해 지난해 말 발표했다. ‘배곧’은 ‘배우는 곳’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시는 이를 군자신도시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기억하기 쉬운 말로 보고 있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을 연구할 인재를 기르기 위해 1907년 ‘국어강습소’를 열었는데 1911년 ‘조선어강습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14년 ‘한글배곧’으로 바꿨다. 이곳을 통해 장지영, 최현배, 정열모 같은 다수의 국어학자가 배출됐다. 하지만 시의회 측이 자신들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공표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지금까지 새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괘씸죄인 셈이다. 한 시의원은 “관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도시 명칭을 바꾸려면 적어도 의회에 사전설명을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지금까지 군자신도시로 홍보됐는데 갑자기 바꾸면 새로운 브랜드를 홍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글학자들을 중심으로 유감을 나타내고 있다. 국립국어원 김세중 공공언어지원단장은 “행정구역상 군자동과 떨어져 있어 ‘군자신도시’라는 기존 명칭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서 “신도시의 상징은 서울대 국제캠퍼스이고, 앞으로 이곳에서 숱한 인재가 배출될 텐데 ‘배곧신도시’는 신도시의 성격을 더없이 잘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의회 눈치를 보지 말고 (배곧신도시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며 “시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19일 TV 하이라이트]

    ●한국인의 밥상(KBS1 밤 7시 30분) 설을 앞두고 친정어머니를 찾아가는 권복순씨. 그리고 딸을 기다리는 구난회 할머니. 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마음. 지난해 말려두었던 시래기며 손수 만든 매작과는 어머니가 딸에게 해 주면서도 쑥스럽고 미안한 선물이다. 이렇게 딸이 올 시간에 맞춰 준비한 어머니의 밥상에 차려지는 마음을 함께한다. ●쥬로링 동물탐정(KBS2 오후 3시 5분) 아름드리시 시청에 닥치는 대로 종이를 먹어치우는 하얀 염소와 까만 염소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이린은 쥬로링 동물탐정단에 염소의 정체를 밝혀달라고 한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세계유산 등록 계획 서류가 모두 염소의 배 속으로 들어가고, 미사는 격노한다. ●고향을 부탁해(MBC 오후 6시 50분) 밤 12시면 트럭으로 나무 궤짝에 선어를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여수 전역의 바다에서 들어오는 선어가 집합하는 여수 교동의 선어시장. 겨울이면 삼치부터 아귀, 물메기와 원양어선으로 들어오는 서대, 문어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새벽 12시부터 2시간 동안 전날 여수 앞바다에서 어부들이 얼마나 분주했는지를 알 수 있다. ●퀴즈쇼 곱하기 9(SBS 오후 6시 30분) 다가오는 설을 맞아 9명 전원이 혈연으로 맺어진 딸 부잣집 8자매와 8사위가 출연한다. 본격적인 퀴즈 도전에 들어가자 다소 긴장한 탓인지 초반부터 ‘딸 부잣집’팀에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9명 전원이 일치해야 3단계 ‘전원 정답 퀴즈’에 진출할 수 있는데 계속된 오답 속출로 탈락 위기를 맞이한다. ●나를 닮은 얼굴(EBS 밤 12시 5분)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낸 명자는 아들인 브랜트를 30년 만에 다시 만나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공중파 방송을 통해 처음 만나고 다시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또다시 가족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입양 가족이 겪는 일반적 문제인 언어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서로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설날특집 김구라, 문희준의 검색녀(OBS 밤 11시 10분) 설을 맞아 ‘검색 유부녀’에서는 기존 미녀 10명을 대신해 꾸밈없는 입담으로 사랑받는 미시 연예인이 출연한다. 선우용여, 최란, 이승신, 김지혜, 슈, 조향기, 심진화 등 총 8명의 여자 연예인이 결혼 생활을 공개한다. 특히 엉뚱한 4차원 아내 이승신은 남편 김종진에게 집 밖으로 쫓겨난 사연까지 공개한다.
  • ‘묵호항’ 뱃사람들 애환 오롯이 내 마음속 등대가 되어…

    ‘묵호항’ 뱃사람들 애환 오롯이 내 마음속 등대가 되어…

    잎을 모두 떨군 나무가 시나브로 야위어 갈 쯤, 바다는 짙푸른 감청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푸르다 못해 검게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한 포구는 추운 계절에 찾아야 제격입니다. 찬바람 부는 선창가와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어민들의 뒷모습이 어딘가 포구의 쓸쓸한 이미지와 닮았기 때문이지요. 강원 동해시 묵호항을 다녀왔습니다. 한때 동해안 제일의 어업전진기지였다가 이제는 이름으로만 남은 포구지요. 세상에서 묵호는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묵호 빌딩 언덕’이라 불렸던 판자촌엔 아직도 옛 향기 오롯합니다. 어여쁜 어달리와 묵호등대 등 둘러볼 곳도 제법 많고요. ●조붓한 고샅길 수놓은 담장 벽화 묵호항 뒤편 가파른 언덕. 작가 심상대가 소설 ‘묵호를 아는가’에서 “불이 켜지면 빌딩숲 같다.”고 표현했던 묵호동 언덕이다. 예전 외항선원들이 묵호항에 입항할 때면 두 번 놀랐단다. 항구 맞은편 묵호 언덕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놀랐고, 이튿날 아침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빌딩 숲 자리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들어찬 판잣집들의 몰골을 보며 또 놀랐다. 이 모두 묵호가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묵호동은 인근 어달리와 대진리를 합친 행정 구역명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묵호진동’이라 부른다. 영화를 누렸던 옛 묵호진(津)의 기억이 아련한 때문일 터다. 이제 옛 묵호는 없다. 1980년, 옛 명주군 묵호읍은 삼척군 북평읍과 합쳐져 동해시가 됐다. 그 이후 동해안 제1의 무역항이자 어업전진기지였던, 그리고 한때 금강산 관광선의 출항지였던 묵호는 이제 동해시의 한 동(洞)으로만 남아 있다. 갯바람에 밀려 묵호 언덕에 정착한 사람들이 그 위로 조붓한 길을 냈다. 논골마을이다.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다고 했던 묵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달동네다. 여느 바닷가 마을이 그렇듯, 붉고 푸른 지붕들이 낮은 담장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비좁은 골목길은 집을 에둘러 아슬아슬하게 언덕을 타고 오른다. 그 사이로 묵호등대가 들어섰다. 요즘에야 많은 사람들이 재미삼아 그 길을 오르지만, 고샅길에 박힌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묵호 사람들뿐이지 싶다. 후줄근했던 논골마을은 몇 해 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논골담길’ 프로젝트에 따라 고샅길 담벼락마다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졌다. 스케치는 미대생 출신들로 구성된 ‘공공미술 공동체 마주보기’ 회원들이, 채색은 60~70대의 마을 노인들이 맡았다. 담벼락 벽화가 그려진 시골마을을 찾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지만, 논골마을 벽화는 확실히 남다르다. 단순히 낡은 집을 그림으로 가린 게 아니라, 한평생 바다와 함께한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연작시처럼 그림 속에 듬뿍 녹여 냈다. 논골마을 둘러보기는 묵호항 어판장 맞은편 논골3길에서 시작된다. 묵호등대까지 차로 오른 뒤, 되짚어 걸어 내려오는 편한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샅길 초입부터 차곡차곡 밟아 올라야 제격이다. 골목길은 뭉툭하다. 닳고 닳았다. 오랫동안 수많은 주민들이 한숨 쉬며 짚고 오른 흔적이다. 맨 먼저 이방인을 맞는 건 ‘논골갤러리’다. 빈집에 크고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밤바다에 촘촘히 불을 밝히고 있는 오징어잡이 배와 불덩이처럼 솟아오르는 태양,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묵호벅스’까지. 하지만 어쩌랴. 그림의 뒤편에서 풍겨오는 날카로운 쇠락의 흔적마저 가리진 못하는 것을.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 논골갤러리를 지나면 담벼락에 널린 오징어 그림이 눈길을 끈다. 1980년대만 해도 묵호의 열 가구 중 세 가구는 오징어를 말리는 일을 주업으로 삼았다. 남자들은 오징어잡이 배를 탔고, 아낙들은 밤새 오징어 배를 갈랐다. 아이들은 오징어를 입에 문 채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마을엔 늘 오징어 냄새가 가득했고, 항구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그림은 바로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장화가 잔뜩 그려진 벽화도 그 기억의 연장이다. 제목이 재밌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라나. 묵호가 잘나가던 시절엔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고샅길 바닥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단다. 그래서 장화는 묵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필품이었던 것. 수많은 사람들이 신고 다녔던 장화가 담벼락 가득 그려졌다. 이처럼 벽화 하나하나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문득문득 가슴 뭉클해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묵호동은 사실 그리 높은 언덕이 아니다. 해발 67m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슴이 느끼는 마을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는 벽화들을 감상하며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마을 꼭대기다. ‘묵호동 종점’이란 띠 두른 전봇대가 박혀 있고, 그 위로 묵호등대가 우뚝 솟아 있다. 바다의 수호천사를 상징하는 ‘천사날개 포토존’과 불꽃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구가 새겨진 소공원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등대 안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다. 눈앞에 검푸른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묵호(墨湖)에 담긴 뜻이 예서 보면 확연해진다. 너른 바다는 가슴 속 앙금을 말끔히 씻어낸다. 상처받은 이에겐 한 잔 소주 같은, 바닷가가 고향인 이들에겐 어머니 젖가슴 같은, 그런 바다다. ●작고 예쁜 어달리 해변… 조각 작품같은 기암괴석 볼만 언덕을 에두른 고샅길은 버스 종점 앞 매점에서 다시 게구석길, 덕장길 등으로 구불구불 흩어진다. 어달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방법은 두 가지. 등대 오른쪽은 묵호 수변공원에서 시작된 ‘등대오름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길이다. 바다 쪽으로 트인 이 길에도 아름다운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등대 왼쪽은 출렁다리 방향이다. 예전 TV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이승기와 한효주가 입맞추는 장면을 찍었다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큰길로 내려 서서 왼편으로 돌면 왜구를 물리쳤다는 호국 문어상과 만난다. 그 옆의 거무튀튀한 바위는 까막바위다. 서울 숭례문에서 정확히 동쪽 방향에 있다는 바위다. 현지 어민들은 이 바위에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까막바위 굴에 문어의 영혼이 산다고 해서 해녀들도 다가가지 않는다고. 까막바위에서 모퉁이를 돌면 느닷없이 예쁜 마을이 튀어나온다. 어달리다. 모래해변의 길이가 300m, 폭이 20~30m에 불과한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다. 여느 동해안 해수욕장과 달리 경사가 완만한 데다, 모래가 곱고, 수심 1m를 넘지 않는 해변이 바닷가 쪽으로 이어져 있어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낚시 포인트로 명성이 자자해 평일에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넘친다. 기왕 예까지 온 터에 동해 제1경 추암해변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재상 한명회가 추암해변의 절경에 탄복해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촛대바위와 능파대 주위로 파도와 비바람에 깎인 기암괴석이 조각 작품처럼 늘어서 있어 ‘작은 해금강’이라 불린다. 묵호등대에서 삼척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20여분 달리면 나온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강릉분기점→동해고속도로→망상 나들목→묵호 방향→묵호항 순으로 간다. 논골담길은 선어판매센터에서 북쪽으로 300여m 가면 나온다. 묵호등대로 곧장 가려면 일출로에서 논골3길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묵호동주민센터를 끼고 우회전해 곧장 가면 된다. ▲맛집 묵호항은 오징어와 가자미 등의 물회가 유명하다. 가자미 물회의 경우 묵호항 선어판매센터 앞 횟집들에서 1만 5000원이면 맛볼 수 있다. 까막바위 인근 ‘오부자횟집’(533-2676)은 냄비 물회 전문점. 횟집으로는 부흥횟집(531-5209)이 유명하다. ▲잘 곳 묵호항 인근 동해관광호텔(533-6035)과 꿈의궁전모텔(532-9996)은 바닷가에 붙어 있다. 침대에 누워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바로 아래에도 펜션이 있다. 글 사진 동해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1934년 식민도시 경성의 여름은 뜨거웠다. ‘조선중앙일보’에 7월 24일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작품 ‘오감도’(烏瞰圖) 때문이다. 작가는 2000여편 중에서 30편을 골라 연재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5회를 넘기지 못했다. 띄어쓰기 무시! 문법 파괴! 기호와 숫자가 문자를 대신하는 시! 독자들은 분노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당장 원고를 불살라라, 작가가 미쳤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그가 보기에 대중은 게으르고 편협했다. 자신은 지금 시대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뛰어넘고 있는 중인데 독자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문학관만 소비하는 중이니 말이다. ‘오감도’의 작가 이상(李箱·1910~1937). 그는 정말 시대와 불화한 천재였을까. 시대가 박제시켜 버린 천재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이나 영감에 의지해 개성을 뽐내는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모두가 문명화, 근대화라는 덧없는 망상 속에서 허둥댈 때, 그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문명의 메커니즘을 보고, 시대의 이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비상(非常)한, 비상(飛上)을 꿈꾼 지식인이었다. ●모던 경성, 적빈(赤貧)의 시공간 1910년 9월생인 그는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세상에서 태어나 문화통치 기간인 1920년대에 학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제국 일본의 식민 경영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아울러 경성의 도시경관은 총독부 건물, 경성제국대학, 백화점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의 풍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근대적 학교교육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출판산업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동시대의 근대문화를 흡수하고 소비하는 ‘대중’이 유럽풍 옷가지와 장신구로 몸을 두르고 커피 한잔을 찾아 방랑하는, 보들레르가 명명했던 ‘산보객들’이 경성 한복판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경성고등보통학교 건축과 학생이었던 이상 역시 화구통을 메고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가난이었다. 끼니를 잇기 힘든 가난한 중인 가문의 장남이었던 그는 현미빵을 팔아 학교를 다녔다. 그가 배우는 최신 기하학과 건축학이 식구들과 이웃의 허기를 달래줄 날은 참으로 요원했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의 가난이었다. 생활은 점점 더 돈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돈은 아비와 자식, 친구와 애인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의리도 인정도 돈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은 가난한 서민들뿐 아니라 도시인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소비와 향락, 학교에서 강요하는 청결하고 근면한 생활. 이상이 보기에 이것은 실상 일본식 유행풍속을 좇아 양복을 입고 몇 개 안 되는 다방을 전전하면서 ‘교양입네’ 하는 꼴이었다. 제국 일본의 식민도시 경성은 제대로 문명화를 구가하지도 못하면서 박래품 소비에만 열광하는 ‘무늬만 근대도시’였다 경성의 도시인들은 모두 ‘모던’(modern)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정작 자신의 텅 빈 정신은 보지 못하는 불구자들이었다. 왼팔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기묘한 형국처럼 도시인들은 자신을 비추는 문명의 거울 앞에서 분열증에 시달렸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 속에서도 겉으로는 잘사는 척, 문명인인 척하기에 급급한 삶이라니! 이상은 이 사태가 공포스러웠다. 그 수선스러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가난에 맞서야 한다! ●나의 펜은 나의 칼이다 1930년 ‘조선’에 연재된 첫 장편소설 ‘십이월 십이일’을 필두로, ‘이상한 가역반응’,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기하학과 일본어가 맞물린 시들과 ‘지도의 암실’ 등의 소설, 다양한 수필이 발표된다. 문명을 지탱하는 정신의 가난과 대결하면서 그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어가 국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조선어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가난과 소외가 무엇보다도 언어와 그 언어 사용자 사이에 놓인 간극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1930년대를 지배하는 ‘모던’이라는 말 안에는 그 어떤 진지한 성찰도 부재했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양복(洋服), 양행(洋行)과 같이 서양풍을 내세운 습속에만 매달릴 뿐 왜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에서 나온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았다. ‘모던’이란 말은 식민지 조선에서 텅 빈 기호였다. 그 안에서 어떤 정신적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은 그런 시대를 ‘활자허무시대’라고 명명했다. 이상은 그렇게 기호에 갇혀 자기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문명인의 삶을 해부하기로 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런 그에게 문학은 대중이 기대하는 여가선용이나 위안의 도구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 특정한 계급의 현실을 드러내고 정치적 방향을 선동하는 이념의 도구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문명의 매커니즘을 해부하고, 소외된 삶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문학의 일차적인 임무여야 했다. 이상에게 펜은 그런 가난한 문명과 나태한 정신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어야 했다. 그의 시 ‘오감도’는 숫자와 여러 가지 기호들을 통해 근대적 삶의 폐쇄성과 불구성을 해부하는 ‘메스’로서의 문학이었던 셈이다.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 자신의 시도가 불러일으킨 적대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몰라보는 대중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관광객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관조하지도 않았다. 속악한 돈의 횡포나 비정한 이기주의를 직시하면서도, 그는 자신 역시 허위에 찬 근대의 산물임을 처절하게 의식했다. 박태원과 김기림 같은 지인들은 이상이 퇴폐적 카페를 열고 여급들과 연애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문학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문명을 비판하고 자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감추려고도, 미화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배반과 궁핍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근대문명을 고민하고, 그 안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이상, 시대의 혈서를 쓰는 자 1936년 가을, 이상은 일본 도쿄로 떠났다. ‘날개’를 통해 평단으로부터 큰 주목과 호평을 받은 직후였다. ‘날개’는 돈으로 마음과 정신을 사고파는 근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서 이상은 주인공이 날개를 얻어 비상할 것을 꿈꾸는 장면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해부를 넘어 새로운 도덕을 발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그 도덕적 비전이 식민지 조선 바깥에, 현해탄 건너 문명의 본산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허영의 낙원이었다. 특가품, 할인품, 온갖 상품들로 넘쳐나는 긴자 거리에서 사람들은 모두 성병에 걸린 듯 화려하게 치장한 채 돌아다녔으며, 최신 서적들은 그저 교양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거기에도 자기 삶의 정열을 태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가 더 노골적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영국 런던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딜 가도 적막, 암흑, 권태뿐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도덕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20세기가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는 문명이란 정신의 가난만 키우는 황금만능의 허위 세계임을, 이상은 낯선 땅에서 뼛속 깊이 절감한다. 그해 겨울 도쿄 거리에서 이상은 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감방에 갇히게 된다. 도일(渡日)하기 전부터 앓았던 폐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문명의 속악성은 그의 마음에서 한 가닥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글을 쓰면서 돌파구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17일. 채 십년이 되지 않는 창작 기간 동안 오직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글을 썼던 이상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친구 김기림의 말대로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을 갖고 제 혈관을 짜서 쓴 시대의 혈서였다. 죽기 몇 달 전 탈고한 소설 ‘종생기’(終生記)에서 이상은 자신의 묘지명을 작성한다. “일세의 귀재(鬼才) 이상은 그 통생(通生)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일천구백삼십칠년 정축(丁丑) 삼월삼일 미시(未時)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이십오세와 십일개월.” 자신을 죽이고, 그 시체로부터 생과 예술의 본질을 투시하려 했던 자.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이상은 그렇게 끝까지 예리한 언어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오선민 남산강학원 연구원
  • [종교플러스]

    가톨릭신문출판인協 영어명 변경 국내 신문, 출판에 종사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인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가 국제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UCIP)에 대한 교황청의 인준 철회에 따라 영문 명칭을 기존의 UCIP/Korea에서 CJPA로 변경했다. 서울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는 최근 영문 명칭 변경에 관한 공문을 주교회의 및 서울대교구 매스컴위원회에 보냈다고 13일 밝혔다. CJPA/Seoul 측은 “지난 4월 교황청 평신도평의회가 부실한 운영 등을 이유로 UCIP에 대한 교황청의 교회법적 인준을 철회했다.”고 새 명칭 선정 배경을 설명하고,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는 영문 명칭만 바뀔 뿐 조직이나 기능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대안연구공동체 ‘불교시민 강원’ 인문학 운동단체인 대안연구공동체는 오는 19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에 일반 시민과 함께 불교 경(經)·논(論)·선어록을 공부하는 ‘불교 시민 강원’을 연다. 동아리 활동 형태로 진행하는 이 강원에서는 초기 불교 경전인 한역(漢譯)·국역 아함경을 영역해 국역 ‘5부 니까야’와 함께 읽는 것을 시작으로 불교사, 선학(禪學) 및 선(禪)사상사, 아비달마구사론, 청정도론을 포함한 대승불교개론 등을 폭넓게 공부한다.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인 원철 스님과 국제선센터 국제국장인 광전 스님, 금강선원의 학승인 능안 스님 등이 지도 법사로 참여한다. (02)777-0616.
  • [기고] 국어기본법 흔들지 말라/구법회 한글학회 정회원·전 연수중 교장

    [기고] 국어기본법 흔들지 말라/구법회 한글학회 정회원·전 연수중 교장

    공문서에 한자를 혼용하자는 내용의 국어기본법 일부 개정안이 비슷한 내용으로 국회에 두 건이나 발의되어, 지난 제헌절을 맞아 한글단체들이 성명을 냈다. 현행 국어기본법 14조는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김광림 의원 대표 발의안(111명)에는 ‘……한글로 작성하되 한자어의 경우에는 한자를 쓸 수 있다.’라고 했고, 이강래 의원 등의 발의안(22명)은 ‘한자를 오른쪽 괄호 속에 병기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한자어에 한자를 함께 적도록 하는 강제성을 띠고 있다. 이 두 법안의 공통 핵심은 공문서에 한글과 한자를 혼용 또는 함께 적자는 것이다. 이 두 개정안은 온 국민이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쓰고 지키고 가꾸어 온 우리 말글을 뿌리째 흔들겠다는 심각한 사안이다. 이들 개정안의 제안 이유를 보면 우리말의 70%가 한자어로 되어 있고, 그중 동음이의어가 90% 이상이어서 한자로 쓰지 않으면 의미 구별이 안 되며, 한자는 국자(우리나라 글자)이므로 의무교육과정에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 등이다. 우리말의 70%가 한자어로 되어 있다는 말은 일제강점기 때 국어말살정책에 따라 만든 ‘조선어사전’(1920)에 바탕을 둔 것이고, ‘표준국어대사전’(1999)에는 한자어가 57.3%를 차지하고 있다. 사전의 올림말에 한자어의 비율이나 수효가 많은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한자어는 이미 한글화되어 한자로 쓰지 않아도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학교’를 한글로 써도 한글을 깨우친 어린이라면 그 뜻을 알게 되며, ‘경제, 검찰, 문화, 철학, 학문 …’ 따위의 한자어를 한자로 쓴다고 해서 그 뜻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다. 더 어려운 한자어는 국어사전을 찾는 것이 빠르며, 배우기가 어려워 시간과 경제성에서 이득이 없다. 한자어 중 동음이의어가 90% 이상이어서 한자로 쓰지 않으면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궤변이다. ‘정당(政黨)과 정당(正當)’, ‘공기(工期)와 공기(空器), 공기(空氣)’, ‘하수(下水)와 하수(下手)’ 등 일상생활에서 쓰는 동음이의어들은 말과 글에서 앞뒤의 문맥을 보고 구별할 수 있다. 한자가 국자이니 의무교육과정에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이것도 국한혼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똑같은 말인데, 한자가 국자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임어당이 한자를 동이족(동쪽 오랑캐)이 만들었다고 말했다는 것을 믿고 하는 말이다. 의무교육과정에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한자의 짐을 지우는 가혹한 일이다. 현재 상용한자는 중·고교에서 가르치는 1800자로 충분하며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치면 한자 사교육을 부추기는 부작용이 더 클 것이다. 공교육에서 한자교육은 현재 상태로 충분하다. 공문서에 한자를 섞어 쓰도록 하겠다는 위 두 개정안은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고 공무원의 업무를 과중시키는 개악 안이다. ‘국어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은 모두 철회해야 마땅하다.
  • “올 추석선물은 과일보다 한우”

    이번 추석 선물세트로는 과일보다 한우가 각광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갖가지 기상악재로 올 과일 가격이 크게 뛴 반면 공급 증가로 한우는 예년에 비해 몸값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9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작황 부진에다 열흘 빠른 추석으로 물량 수급이 어려워진 과일의 가격은 전년보다 평균 20%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추석 대표 과일인 사과·배의 경우 물량이 예년에 비해 10% 이상 감소했다. 최근 태풍의 영향으로 주요 산지가 타격을 입어 추석이 다가올수록 과일 가격은 더 오를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백화점업계는 과일 가격이 얼마나 뛸지 가늠하기 어려워 추석선물용 카탈로그를 펴내면서 청과선물세트 가격을 이례적으로 ‘시세 기준’으로 표시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지속된 악천후와 이른 추석으로 물량 확보가 쉽지 않아 가격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태풍으로 주요 산지 피해가 크기 때문에 과일값은 더 뛸 것”이라며 “오는 12일부터 시작되는 예약판매 기간을 이용하면 현재 시세로 살 수 있는 데다 5~15% 할인혜택을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유통업체들은 과일을 대체할 상품을 구성하고 과일 가격의 거품을 빼기 위해 힘쓰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10만원대의 더덕, 버섯 선물세트 물량을 20% 이상 확대했다. 현대백화점도 멜론, 망고 등을 섞은 혼합과일선물세트의 품목과 물량을 늘렸다. 롯데마트는 과일 가격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부자재 사용을 최소화하는 등 포장 개선 작업도 벌이고 있다. 이상기후로 어획량이 감소한 굴비와 선어 등 수산물 가격도 10%가량 상승할 것으로 점쳐진다. 이에 따라 지난 설에 구제역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한우세트가 올 추석 대표 선물로 부상할 전망이다. 출하 물량 증가로 시세가 예년에 비해 10~15% 하락했기 때문이다. 유통업체들은 한우가 가격이 크게 오른 과일과 수산물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하고 선물세트 물량을 최대 30% 늘려 잡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한국불교 수행법 간화선의 원리 美·日·中 학자들 체험으로 만난다

    한국불교 수행법 간화선의 원리 美·日·中 학자들 체험으로 만난다

    화두를 참구해 깨달음을 얻어 가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은 유일하게 한국 불교에 전통이 오롯이 살아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 간화선 수행이 다시 살아나고 일본에서도 간화선 수행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그 맥은 일천하기만 하다. 한국의 간화선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서방의 많은 선 수행자들이 한국의 간화선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고 있지만 수행의 어려움으로 인해 세계화의 흐름에선 별 진척이 없는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 상황에서 철저하게 간화선의 구조와 원리에 집중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불교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가 15일부터 23일까지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를 주제로 여는 학술대회가 그것이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미국의 선불교 학자 22명이 참가해 간화선을 집중 해부하게 된다. 참가자 중에는 당송 시대 선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스미스대학 피터 그레고리 교수, 서장(書狀) 전문가인 미국 테네시대학 미리엄 레버링 명예교수, 서구권에서 한국학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는 UCLA 로버트 버즈웰 교수, 중국 송대 선어록 전문가인 아이오와대학 모턴 슐터 교수, 일본선 연구가인 일본 하나조노대학 나카지마 시로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 황셴녠 교수도 들어 있다. 이번 학술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단지 학술발표와 토론에 그치지 않고 참가자들이 직접 간화선 수행과 실참을 진행한다는 점이다. 15일부터 19일까지 인제 백담사에서 동국대 국제선센터 선원장 수불 스님의 지도로 진행하는 간화선 수행엔 외국학자 16명과 국내학자 13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들은 철저히 조사어록에서 설해진 방법에 의한 화두 참구를 진행하며 일상생활과 수행에 방해되는 요소를 줄이기 위한 묵언도 감내해야 한다. 매일매일 수행의 과정에선 수불 스님의 소참법문을 통해 지도 점검도 받는다. 22∼23일 선지식과의 대담도 종전엔 볼 수 없던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은 충주 석종사, 문경 봉암사, 대구 동화사, 김천 직지사를 방문해 각각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과 간화선 수행을 주제로 한 대담도 갖게 된다. 본행사인 주제발표와 토론에선 중국선 7편, 한국선 6편, 일본선 2편 등 모두 15편의 연구 논문이 발표된다. 간화선 탐구법과 장애, 점검, 인가, 본질, 원리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가 있을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논문 중 ‘간화선 원리와 구조’와 관련된 것들은 올해 말까지 한국어 판으로 출간된다. 이어 내년 말까지 영어판 논문집으로 발간돼 세계 각국에 배포된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소장인 종호 스님은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의 대표적 수행법이 바로 선수행이고 한국에는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 전통이 오롯하게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수행법이 되지 못하고 있다.”며 “외국 학자들의 간화선 수행 실참은 체험을 통한 학문 연구 차원에서 새 장을 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콜럼버스 ‘강리도’ 가졌다면 동쪽으로 항해 떠났을 것”

    “콜럼버스 ‘강리도’ 가졌다면 동쪽으로 항해 떠났을 것”

    올해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세상의 빛을 본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특별전시회와 학술대회를 시작했고 전국 곳곳에서 잇따라 전시, 강연행사를 가진 뒤 오는 10월 20~21일 서울대에서 종합학술대회를 연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기념학술사업준비위원회’가 마련한 150주년 기념행사의 결정판이다. 성대하면서도 꼼꼼히 김정호를 기념하고, 그의 손길이 깃든 성과의 현재적 의미를 따져 보는 자리다.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 제대로 된 지도가 한 장도 없어 김정호는 10년 동안 조선팔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8번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조정은 나라의 기밀을 적들에게 알려줬다며 김정호에게 억울한 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지도와 판목은 압수해 불살랐다.’ 이제껏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을 만든 김정호에 대한 보통의 인식이었다. 시대와 불화한 삶 속에 관련 문헌의 부족, 게다가 비극적 최후까지 더해졌다니 ‘전설’ 또는 ‘영웅’이 될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춘 셈이다. 하지만 이는 1934년 일제 총독부가 만든 ‘조선어독본’에 실린 내용이 해방 이후 교과서에까지 이어지며 빚어진 오해와 편견이다. 일제는 김정호 이전에는 제대로 된 지도 한 장조차 없는 것으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며 왜곡하는 식민사관을 주입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학계 일각에서 ‘김정호 바로세우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이뤄져 온 인식의 벽은 여전히 두껍다. 최근 번역 출간된 ‘한국 고지도의 역사’(장상훈 옮김, 소나무 펴냄)가 반가운 이유다. 한국역사학의 권위자인 게리 레드야드(79)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석좌명예교수가 쓴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한국 지도학의 발달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 세계 지도학계에 알린 노작(勞作)이다. 레드야드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을 ‘김정호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개하며 ‘김정호 이전의 성과’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지난 22~23일 두 차례에 걸쳐 레드야드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사 전문가인 그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지만 “고령으로 귀가 어두워 전화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한국사와 한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이글이글했다. →한국사 전문인데 지도학에 관심을 두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저는 사실 평생에 걸쳐 한국사를 연구해왔고 한국의 지도학은 역사의 한 부분으로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1990년 위스콘신대 지리학부로부터 한국의 지도학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습니다. 바로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해당되는 원고였죠. 애초 60쪽 정도로 예상했으나 정리하다 보니 300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 편집위 또한 한국 고지도의 중요성을 흔쾌히 인정했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세 권을 펴낸, 전 세계와 고금을 아우르는 세계 지도학의 종합연구서 시리즈입니다.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제2권의 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수록돼 있습니다. 모두 8권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적어도 20년 더 걸려야 마칠 수 있는 현재진행형 작업이죠. 애초 위스콘신대에서 편집기획을 시작한 영국 출신 지리학자인 J B 할리 교수와 데이비드 우드워드 교수는 이미 돌아가셨고 새로운 편집기획위원을 선정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 디지털 과학기술의 발달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서관이 이 책을 비치해 두고 있습니다. →김정호 팬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지도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부터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대동여지도가 중요한 연결 고리였군요. 그런데 왜 대동여지도의 팬이 되신 겁니까.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세계의 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대동여지도와 같이 구체적인 성취에 대한 것은 잘 모르죠. 제가 ‘세계 지도학 통사’ 원고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그는 이것을 ‘동아시아 최초의 진정한 세계지도’라고 일컬었다-에도 관심이 남다릅니다. 아시아편 표지 사진으로 ‘강리도’를 실은 이유이지요. 아마 콜럼버스가 1492년 이 지도를 갖고 있었다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항해를 떠났을 겁니다. 세계사도 많이 바뀌었을 테고요. →한국의 옛 지도를 연구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글을 쓰는 데만 2년 반이 걸렸습니다. 한국의 많은 저작은 물론 일본, 중국, 유럽 학자들의 이론도 충분히 검토하고 종합했어요. 그 과정에서 김정호나 대동여지도 외에도 한국 지도학에 많은 성취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 대동여지도에만 관심을 쏟으며 다른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앞서서 노력한 이들, 예컨대 양성지(梁誠之·1415~1482), 정척(鄭陟), 정상기(鄭尙驥·1678~1752) 등에 대해 좀 더 주목했으면 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한국 뉴스를 챙겨 본다.”는 레드야드 교수는 “김정호와 같은 천재를 둔 한국인 여러분에게 축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정겹게 말했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행사에 대해서도 축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국내판은 흑백 도판을 쓴 원서와 달리 컬러 도판으로 바꿨다. 번역을 맡은 장상훈 박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 3만 5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