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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인의 편지로 본 조선시대 삶과 역사

    지식인의 편지로 본 조선시대 삶과 역사

    옛 사람의 편지/손문호 지음/가치창조/416쪽/1만 5000원“지나치게 곧은 말과 교만한 행동이 스스로를 해치고 패망에 이르게 한다는 교훈은 내가 효직에게 굳이 깨우쳐 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릇 사람은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새처럼 높이 날아가 혼자 살 수도 없고 짐승처럼 멀리 달아나 혼자 살 수도 없다. 반드시 어느 정도 세속에 맞춰야 다른 사람의 미움을 면할 수 있다.” 오늘날 선배 세대가 후배에게 건네는 충심 어린 조언 같다. 하지만 대화는 조선 중종 때 막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가던 조광조에게 숙부 조원기가 보낸 편지글의 한 부분이다. 30대 젊은 나이에 초고속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해 개혁을 시도한 조카에 대한 근심을 적어 보낸 조원기의 진심은 결국 왕에게 버람받은 조카의 불행한 최후를 미리 건너다본 듯하다. 이처럼 옛사람들의 편지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삶과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시대와 인간의 삶에 대한 당대 인물들의 사상과 정서, 고민과 연민을 세심하게 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원대 총장을 역임한 손문호 전 교수는 조선조 지식인들의 편지를 발굴해 옛사람들의 궤적을 풍성하게 재생시키려 했다. 그 시도가 우리의 전통 인문학을 재조명하는 ‘사람을 향한 인문학’ 시리즈 첫 편이다. 거창하게만 보이는 인문학과 역사가 사람의 사소한 삶과 흔적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기획이다. 저자는 정도전, 이황, 기대승, 이순신,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 조선 역사의 큰 전환점을 이룬 인물들의 편지 32통을 골라낸 뒤, 해설을 곁들여 조선의 정치사와 생활사에 촘촘히 살을 입혔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호가 “편지를 쓰는 것은 선비의 일에 가까운 것”이라 말했듯, 문학의 한 형식인 편지글에 나타난 유려한 문장에서 고전의 풍류도 느낄 수 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숲, 백두산호랑이를 마주하다

    숲, 백두산호랑이를 마주하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입니다. 인체에 비유한다면 몸을 지탱해 주는 등뼈, 또는 온몸에 피를 공급해 주는 대동맥인 셈입니다.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를 두른 고장이 경북 봉화입니다. 이곳에 지난 5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수목원은 백두대간의 생태계를 보호하고 복원하는 데 힘씁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백두산호랑이, 하늘말나리나 흰까치수염 같은 야생화가 사는 이유입니다. 백두산호랑이의 번뜩이는 눈매에 시선을 빼앗기고, 허리 굽혀 야생화와 눈을 맞추며 백두대간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에 푹 빠져듭니다.◆축구장 7개 합친 크기의 숲에 호랑이가 산다 봉화는 첩첩산중에 자리한 탓에 발걸음하기 쉽지 않은 땅이지만, 최근 찾아오는 이가 부쩍 늘었다. 백두산호랑이를 볼 수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때문이다. 백두산호랑이가 야생에서 발견된 건 1921년 경주 대덕산이 마지막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의 일이다. 볼거리는 호랑이에 그치지 않는다. 27개 전시원은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식물을 포함해 다양한 야생화와 고산식물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다. 한국판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야생식물 종자 저장 시설, 시드 볼트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숲길을 수놓은 연분홍빛 야생화가, 암석 사이로 고개를 내민 고산식물이, 연둣빛 잎맥을 반짝거리는 네군도단풍 길이 여행자의 심신에 백두대간의 정기를 불어넣는다. 수목원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호랑이 숲이다. 숲으로 향하기 전, 방문자센터에서 호랑이 관련 전시를 보면 백두산호랑이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백두산호랑이의 또 다른 이름은 시베리아호랑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6종의 호랑이 중 가장 몸집이 크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본은 호랑이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인다는 구실로 무자비한 도륙 작전을 펼쳤다. 호랑이가 한반도의 정기와 한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동북아 지역에 남은 야생 호랑이는 130~150마리가 전부다.귀하디귀한 백두산호랑이 세 마리가 호랑이 숲에 산다. 열세 살 암컷 ‘한청’이, 일곱 살 수컷 ‘우리’, 열일곱 살 수컷 ‘두만’이가 주인공이다. 나이가 많은 두만이는 사육동에서 생활해 관람객이 볼 수 있는 건 한청이와 우리다. 호랑이가 숲으로 ‘출근’하는 시간은 오전 10시, ‘퇴근’하는 시간은 오후 5시다.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퇴근 시간이 1시간 빠르다. 출퇴근 시간에 맞춰 숲을 찾아가면 어슬렁거리거나 앞발로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한청이와 우리를 볼 수 있다. 해가 쨍쨍한 한낮에는 오수에 빠진 호랑이를 볼 가능성이 높다. 더위에 지쳐 몸놀림이 굼뜬 데다가 본디 야행성 동물이라 해가 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호랑이 숲은 축구장 7개를 합친 크기다. 나무와 연못을 놓아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꾸몄다. 관람객은 6m 높이의 철조망 사이로 호랑이를 만난다. 한청이와 우리는 뙤약볕을 피해 너른 바위 아래서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가르릉’ 숨소리가 들릴 듯하다. 몸을 뒤척이다 눈을 뜬 호랑이와 마주치자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매서운 눈빛에서 백두대간을 자유로이 활보하던 백두산호랑이의 용맹함이 드러난다. 백두산호랑이는 수목원의 일부일 뿐이다. 거울연못, 고산습원, 암석원, 백두대간 자생식물원 등 전시원만 27개에 달한다. 워낙 넓다 보니 방문자센터에 비치된 리플릿을 보고 동선을 정한 뒤 움직이는 게 편하다. 호랑이 트램으로 각 구간을 이동할 수 있는데 주중에는 15분,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1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삼림욕장·암석원·야생식물종자 영구보존시설… 돌틈정원부터 고산습원을 지나 호랑이 숲으로 이어지는 잣나무 숲길은 상쾌한 삼림욕장이다. 15분이면 걸을 수 있는 짧은 길이라 부담도 적다. 숲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산수국, 땅나리, 흰까치수염 등 야생화가 다정히 인사를 건넨다. 야생화는 깊은 숲속에 숨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스스럼없이 길가에 나와 여행자와 눈을 맞춰 준다. 고산습원은 연못이 움푹 팬 지형이라 이른 아침, 운무가 자주 피어오른다. 그 모습이 한 편의 시다. 수목원에서 색의 대비가 가장 도드라지는 공간은 암석원이다. 회색빛 암석이 뒤덮은 땅에 수목한계선 주변에서 자라는 초록빛 고산식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무 데크 전망대에 오르면 암석원은 물론 수목원을 둘러싼 능선이 너울너울 펼쳐진다. 단풍식물원의 네군도단풍길은 잊지 말고 들를 것. 길 양옆에 늘어선 네군도단풍 잎사귀들이 햇살을 받아 연초록빛 춤을 춘다. 일반인이 관람할 수는 없지만 야생식물종자 영구보존시설인 시드 볼트는 수목원의 핵심 공간이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의 재난에서 식물 종자 200만점을 영구적으로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국판 노아의 방주이자 사라지고 있는 식물들의 보관고인 셈이다.◆조선 중기 문신 충재 권벌 유적지가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차로 40분을 달리면 달실마을이다. 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재 권벌(1478~1548)이 터를 잡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권벌은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참판까지 올랐다. 고위관직에 몸을 담고 안락한 앞날을 보장받았지만 그가 택한 건 대의였다. 대쪽 같은 성정으로 옳은 것을 고하는 데 거침이 없었던 선비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두 번의 사화를 겪는다. 기묘사화 때 관직을 잃고 낙향해 1526년에 세운 정자가 청암정이다.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자를 올렸고, 물을 끌어와 섬처럼 만들었다. 연못에는 돌다리를 놓아 청암정과 독서당인 ‘충재’를 이었다. 관직에서 쫓겨난 선비에게 청암정은 마음의 거처였으리라. 선생은 이곳에 10년간 머무르며 책을 읽고 마음을 닦고 어지러운 나라가 나아갈 길을 고민했다. 청암정은 현재 마당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무분별한 관람과 훼손으로 다른 곳은 출입이 금지됐다. 청암정 옆에는 충재박물관이 있다. 아담한 규모지만 품고 있는 유물의 가치는 크다. 그중에서도 선생이 과거시험 때 작성한 답안지인 시권, 관직 이동 시 나라로부터 받은 교지,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올 때 명나라 태조에게 받은 ‘충’(忠) 자 족자는 당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석천계곡엔 소나무·숲길·정자가 그림처럼…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응방산을 지나고 유곡리에 이르러 제 모습을 드러낸다. 권벌 선생 유적지 가까이 있는 석천계곡 이야기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사이로 난 물길은 S자형으로 큰 굽이를 이루며 흐른다. 계곡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충재박물관에서 마을 중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넌 후 오른쪽에 난 좁은 숲길을 따라가거나, 봉화읍 삼계교에서 석천정사 안내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계곡에 들어서면 정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충재 권벌의 큰아들인 청암 권동보(1518∼1592)가 지은 석천정사다. 청청한 소나무를 뒤에 두르고 암반에 석축을 쌓은 뒤 팔작지붕 한옥을 올렸다. 정자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계곡 풍경이 일품이라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계곡의 너럭바위에서도 풍경을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물은 낭랑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고개 숙인 소나무가 ‘예서 쉬어가라’며 여행자에게 그늘을 내어 준다. 무더운 여름에 옛 선비들은 발을 씻으며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했다는데, 선비 되기는 어려워도 혼탁한 마음은 맑은 물에 씻어 볼 일이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권대홍(라운드테이블 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맛집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후문의 산촌식당(672-7700)은 토종닭과 막국수를 판다. 야외 평상 자리가 넉넉하고 주차장을 갖췄다.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5%를 책임지는 전국 최대 송이 주산지다. 솔봉이식당(673-1090)은 송이돌솥밥과 송이전골로 잘 알려져 있다. 봉화역 영동선에서 차로 5분 거리라 접근성도 좋다. 봉화한약우프라자(674-3400)에서는 봉화에서 나는 각종 산약초를 먹여 기른 봉화 한약우를 맛볼 수 있다. →잘 곳 : 봉화에는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바래미마을에 있는 소강고택(010-9189-5578)과 만회고택(673-7939), 토향고택(054-673-1112)이 대표적이다.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거침없는 필력의 문장가… 20대에 주몽 노래한 ‘동명왕편’ 남겨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거침없는 필력의 문장가… 20대에 주몽 노래한 ‘동명왕편’ 남겨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열전)고려사에 실린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문장에 대한 평가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은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긴 기다림 끝 명예 얻었으나…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찍부터 문재를 드러냈지만 과거에 몇 차례 낙방했다. 23세에 급제한 후 주변의 추천과 자신의 구직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임용되지 못했다. 32세인 1199년 6월 비로소 전주목 사록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1202년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병부 녹사 겸 수제원으로 종군해 1204년 3월 개선하는 군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해마다 첫 번째로 추천을 받고 칭찬하는 이도 많았으나 관직을 얻지 못했다. 1207년 한림이 된 이후에야 중앙 여러 관직을 거치며 오랫동안 국가의 문장을 담당했다. 재상의 반열인 종1품까지 승진해 1237년 70세로 치사했다. 63세에 잠시 부안의 위도로 귀양 간 일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할 만하다. 이규보의 관직 진출과 승진에는 당대의 권력자인 최충헌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한림이 되기 전 최충헌이 모정(茅亭)을 짓자 이인로 등과 함께 불려가 ‘모정기’를 지었다. 이보다 앞서 1199년 첫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도 최충헌의 집에 불려가 시를 지었다. ‘동사강목’에서는 최충헌과 관련된 이규보의 이러한 행적에 관해 “최씨에게 아첨해 사론의 죄를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규보 생전에 ‘권력자에게 아부했다’는 비방과 조소가 뒤따르는 계기가 됐다.#천마산의 백운거사 이규보는 18세 때 53세의 오세재와 망년지우가 돼 이인로, 오세재, 임춘 등과 ‘칠현’(七賢)이라 자칭하며 모인 죽림고회에 동참해 시와 술에 침잠했다. 과거에 급제했지만 곧바로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이규보는 부친상을 계기로 천마산에 은거해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백운거사어록’에서는 “거문고와 술, 시 세 가지를 매우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하고 싶지만, 좋아하기만 하고 잘하지 못하므로 백운의 장점을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규보는 운(韻)을 부르자마자 나는 듯이 붓을 달려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술에 취하면 시는 더욱 거침없어져 ‘만취한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지은 장편 율시에 한 글자도 고칠 것이 없다’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남다른 재능과 축적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솜씨로, 한림별곡에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로 남아 있다. 훗날 술 마시고 하는 시 짓기 내기는 쓸모없는 일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젊은 날에 지은 시 300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술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술이 없으면 시도 내키지 않고 시가 없으면 술도 시들해 시와 술이 모두 좋으니 서로 걸맞고 서로 있어야 하네 손가는 대로 시 한 구 짓고 입 당기는 대로 술 한 잔 마셨지 -‘우연히 읊다’ 나이 벌써 일흔을 넘었으며 벼슬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이제는 시 짓기를 버릴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밤에도 부엉이처럼 읊노라 -‘시벽’#주변에 미친 세밀한 눈길 이규보의 시 가운데에는 가족과 주변 사물을 노래한 것이 많다.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세밀한 관찰 결과가 담뿍 담겼다. 그의 시선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무거운 짐을 지고 매를 맞는 소, 거미줄에 걸린 매미, 고양이, 쥐 같은 동물이나 밤이나 햅쌀 같은 식물 그리고 몽당붓이나 깨진 벼루에도 고루 향했다. 이는 아무래도 오랜 기간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 미친 결과가 아닐까. 밤을 노래한 시에서 ‘밤은 사람에게 유익한 과일인데 밤을 노래한 시가 적어서 짓는다’고 창작 동기를 밝혀 놓기도 했다. 잎은 여름철에 돋고 열매는 가을철에 익네 방울 틈처럼 쩍 벌어지면 윤기나는 알밤 감싸고 있네 제사상에 대추와 함께 올라가고 신부의 폐백에 개암과 함께 놓였네 오는 손님 대접만 하는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지 -율시 사람은 하늘이 만든 물건 훔치는데 너는 사람이 훔친 것을 훔치누나 다 같이 먹고살려 하는 일이니 어찌 너만 나무라랴 - 쥐를 놓아주다#역사로 남은 시 천마산에 은거하던 20대의 이규보는 주몽의 사적을 노래한 ‘동명왕편’ 등 장편 시를 남겼다.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규보는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중략/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라고 구체적인 창작 동기를 언급했다. 또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주석으로 밝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나마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도 그의 역사의식 덕분이다.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살 때보다 팔 때 더 받은 집값을 돌려준 노극청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극청전’이나 나룻배를 타면서 겪은 일을 적은 ‘주뢰설’은 청렴과 탐욕으로 대비되는 당대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경종을 울리려는 생각의 발로다. 산문뿐만 아니라 보고 들은 일을 소재로 지은 시들도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 준다. 화계에서 찻잎 따던 때를 이야기하세 관리들 집집마다 늙은이 어린이 되는 대로 찾아내어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 아슬아슬 손을 뻗어 멀고 먼 서울까지 등짐 지고 날랐다네 이것이 바로 만백성의 고혈이라 수많은 사람 피땀 흘려 예까지 이르렀네 … 그대 훗날 간원에 들어가거든 부디 내 시의 은미한 뜻 기억하게나 산과 들 불살라 차 공납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기증하다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출판콘텐츠 실장■ 동국이상국집은 현전 본은 日서 구해 영조때 간행… 2000여 수의 시·표전·교서 수록 1241년 완성돼 그해 8월에 간행에 착수했지만, 이규보는 9월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함이 시문을 추가하고 ‘연보’, ‘묘지명’ 등을 더해 12월 53권 14책으로 간행됐다. 1251년 손자 이익배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중간했다. 조선 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잃어버린 것을 일본에서 구해 와 지금 다시 간행했다’는 내용이 ‘성호사설’에 기록됐다. 영조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0여수의 시와 왕명을 받아 지은 표전, 교서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수록됐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사시 ‘동명왕편’, 가전체의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 시화 ‘백운소설’ 등이 있다. 또 재조대장경 판각 경위를 밝힌 ‘대장각판군신기고문’과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간행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신서상정예문발미’ 등 중요한 사실을 전하는 글도 포함됐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번역문을 이용할 수 있다.
  • [백승종의 역사 산책] 오지 않은 ‘유교자본주의’를 기다리며

    [백승종의 역사 산책] 오지 않은 ‘유교자본주의’를 기다리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역사적 개념이 하나 있다. ‘유교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한국사회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그런데 이 땅에는 어떤 식으론가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이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교와 자본주의는 서로 얽힐 수밖에 없다.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사유재산을 근간으로 한 경제체제인데, 한 사회의 역사 문화적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가령 북유럽에서는 복지자본주의가 발달했다. 그렇다면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유교가 자본주의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본에 이어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이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중국과 베트남도 눈부신 성장세를 이어 간다. 덕분에 국내외의 많은 학자는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을 유교자본주의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물론 유교자본주의에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여러 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았다. 그때 한국 경제도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동아시아가 경제위기로 존망의 기로에 서자 서구에서는 유교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었다. 그들은 온정주의와 혈연주의를 유교사회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손꼽았다. 이후 국내외에는 유교자본주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됐다. 엄밀히 말해 공자와 맹자는 사적 이익의 추구를 금지했다. 그러므로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유교 사이에는 사상적 접점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은 여전히 유교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그들은 공동체의 기능이야말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숨은 힘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빈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생을 중시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다. 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유교자본주의는 장차 서구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멋진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졌다. 가령 재벌들의 행태를 살펴보라. 그들에게서 유교의 기본 가치인 ‘인의’(仁義)와 ‘대동’(大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공생의 가치를 실천하는 기업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 유교 도덕이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1960년대부터 군사정권이 산업화를 적극 추진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부정부패 사건을 저질렀다. 또 군사정권은 물론이고 한국의 역대 정권은 재벌과 유착 관계를 형성했다. 유교 사회의 미덕이었던 청렴과 공의(公義) 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사회적 불평등은 또 얼마나 심각했던가. 한국 사회에서 유교적 도덕성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고속 성장한 비결은 무엇인가. 결국 유교문화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유교 도덕의 힘이 아니라 유교 사회의 관행 덕분이었다. 자녀 교육을 극도로 강조했기에 산업화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 사회의 유풍 또한 근대적 조직 문화에 효율성을 더해 주었다고 본다. 진정한 의미의 유교자본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선비의 높은 사회적 감수성을 되살린 유교자본주의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첫 단추도 꿰지 못한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조선 최대 필화사건 일으킨 소설 ‘설공찬전’ 쓴 채수의 정자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조선 최대 필화사건 일으킨 소설 ‘설공찬전’ 쓴 채수의 정자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이안천이 내려다보이는 경북 상주의 기장리 언덕에는 쾌재정(快哉亭)이 있다. 조선 초기 문장가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부인 안동 권씨 고향에 정착해 지은 정자다. 상주와 점촌을 잇는 경북선 철도가 시내를 건너고 있어 급할 것 없이 달려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채수라면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소설을 써서 조선 최대의 필화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쾌재정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자주 찾았다는 중국 쉬저우(徐州)의 정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채수와 쾌재정에 얽힌 이야기는 문장과 글씨에 두루 뛰어났던 남곤(1471∼1527)이 지은 나재 무덤 앞 신도비 비문에 보인다.‘병인년(1506년) 반정 때 공이 공신의 맹약에 참여해 관례에 따라 가정대부로 승진하고 인천군에 봉해졌다. 그런데 동료 벼슬아치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주변에 없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이내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 아무런 욕심 없이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 사는 집 남쪽에 뚝 끊긴 산봉우리가 흐르는 물가에 자리잡았는데, 그곳에 작은 정자를 지은 다음 편액을 쾌재(快哉)로 붙여 놓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다시금 세상의 조그만 일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여유롭게 노닐며 천수를 마쳤다’이렇듯 나재는 중종반정에 가담해 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곧바로 낙향했다. 야사에는 여기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은 “오늘 일은 덕망 높은 선비로 무게 있는 인물이 없어서는 안 될 터이므로 채수를 청해 오라”고 했다. 누군가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박원종은 “오지 않으면 목이라도 취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채수의 사위 김감은 위협을 감지해 부인으로 하여금 장인을 만취토록 하여 대궐문 앞에 데려갔고, 나재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거사에 이름을 올렸다. 나재는 쾌재정에서 글을 쓰곤 했다. ‘늙은 내 나이 예순일곱인데, 지난 일 생각하니 아득히 멀구나’로 시작하는 한시 ‘쾌재정’도 그렇게 태어났다. 나재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도 쾌재정에서 지은 소설 ‘설공찬전’ 때문이다. 귀신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죽은 이의 혼령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 저승 세계의 소식을 전한다는 이야기다.하지만 ‘설공찬전’은 한동안 제목만 남아 있는 소설이었다. 조정의 공론으로 ‘설공찬전’을 모두 거두어 불살랐기 때문이다. 1511년(중종 4년) 사헌부는 “‘설공찬전’은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안팎이 현혹되어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며 채수를 탄핵했다. ‘언어’는 곧 한글이니 그만큼 인기가 높았다는 뜻이다. 사헌부는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인민을 선동한 율(律)’을 들어 채수를 교수(絞首)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런데 훗날 영의정을 지낸 만보당 김수동(1457~1512)의 변호가 흥미롭다. 그는 “형벌과 상은 중용을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면서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태평광기’나 ‘전등신화’를 지은 자들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태종의 명으로 정통 역사책에 실리지 않은 기록과 소설을 500권에 모은 중국 역대 설화집이다. ‘전등신화’는 명나라 구우의 소설로 조선에서도 필독서가 됐다. 매월당 김시습이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금오신화’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죽이는 것은 지나치다’는 중종의 뜻에 따라 채수는 파직에 그쳤다.‘설공찬전’이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일 것이다. 설공찬이 전하는 저승 소식의 일부다. ‘이승에서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에게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서 임금을 했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주전충(852~912)은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잔당을 평정해 실력자로 떠오른 뒤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양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중종 임금부터가 가습이 뜨끔했을 것이다. ‘설공찬전’이 다시 햇빛을 본 과정은 이렇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96년 이복규 서경대 교수에게 이문건(1494~1567)이 지은 ‘묵재일기’의 내용을 살피고, 뒷장에 적힌 한글 기록도 검토해 달라고 의뢰한다. 이 교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일부가 그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설공찬전’, 그것도 한글본이었기 때문이다.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는 사헌부의 탄핵 내용 그대로였다. ‘셜공찬이’라는 한글 제목 아래 3472자가 남아 있었다. 필사를 도중에 중단해 전체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게 ‘설공찬전’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제치고 한글로 적힌 최초의 소설이 됐다. 쾌재정은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나들목에서 멀지 않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3번 국도를 타고 문경 방향으로 북상하다 이안교차로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을 수 없으니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230-1’이라는 주소를 이용해 찾아가는 것을 권한다. 지금의 쾌재정은 18세기 중반 중건한 건물이다. 벌판 가운데 솟은 봉우리에 있으니 거칠 것 없는 시야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주변 풍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안천 건너에서 바라봐도 지붕의 모습만 어렴픗하다. 채수의 무덤은 쾌재정 남쪽의 공검면 율곡리에 있다. 포털사이트 지도에서 ‘나재채수신도비’를 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율곡리 길가에는 최근 것으로 보이는 신도비도 있다. 옛 신도비가 풍우에 시달려 비문을 읽을 수 없게 되자 199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셜공찬이’의 발굴이 계기가 됐음을 짐작케 한다. 북쪽 야산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옛 신도비의 비각이 보인다. 비석은 당당한 모습이다. 상주에 남은 신도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인상적인 것은 신도비의 받침돌이다. 대개 거북이 모양인데, 독특하게도 사자다. 커다란 비석을 등에 이고 있는 사자의 모습은 귀엽기만 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무덤이다. 채수의 위패를 모신 임호서원은 무덤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너머 동쪽에 있다. 역시 ‘상주시 합창읍 신흥리 377’이라는 주소로 찾아가는 것이 좋다. 서원은 1693년 함창 서쪽 10리 입암산 아래 검암서원으로 출발했다. 1871년 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88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간소한 데다 연륜도 짧은 만큼 서원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다. 사당에는 경현사(景賢祠)라는 편액이 붙었다. ‘설공찬전’의 배경은 전북 순창이다. 학계는 나재가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섞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설공찬의 증조할아버지로 나오는 설위는 대사성을 지낸 세종시대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설공찬이라는 이름은 족보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실록에는 채수에 대한 탄핵 과정에 검토관 황여헌의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이니, 반드시 믿고 혹하여 지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 설공찬은 채수의 친척인 실존 인물이었고, 소설 또한 체험담에 근거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순창군은 순창 설씨 집성촌이 있는 금과면에 ‘설공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삼국지를 사자성어로만 엮어

    삼국지를 사자성어로만 엮어

    삼국지를 3000여개의 사자성어로 엮었다. 인물 성격도 사자성어로 풀었다. 저자는 번역을 위해 중국과 맞닿아있는 키르기스스탄으로 건너가 12년 동안 삼국지 완역에 몰두했다. 저자는 책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출판사의 의뢰 없이 저자 혼자 시작한 책이다.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한문을 번역해 말이 안 되면 틀린 해석이고, 말이 된다고 해도 상황고증을 해 틀리면 더더욱 틀린 해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예를 들면 국내 다른 삼국지에서 유비를 도왔던 중산 상인인 소쌍과 장세평이 말을 팔러 북쪽을 갔다고 하는데, 상황고증을 하면 당시 북쪽에는 유목을 하는 선비족이 거주했으니 말을 사러 북쪽으로 갔다고 번역해야 맞는 셈이다. 둘째 사자성어 체계로 번역했다. 원문 삼국지의 고사성어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썼다. 셋째 모종강의 평을 실었다. 원래 모종강의 서평은 매회의 서두에 실렸으나 가독성을 고려해 매회가 끝나는 곳에 실었다. 넷째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참고했지만 가능한 ‘삼국연의’의 소설적인 흐름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하에 고유명사 등 일부에만 국한해 바로 잡았다. 그 일부란 삼국지연의에서 의미 전달이 안 되는 부분, 즉 전위가 여포의 기마병에게 다가갈 때처럼 몇몇 곳에서는 반드시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참고했다. 다섯째 삼국지 처음으로 각주를 달았다. 마음에 드는 글귀나 상식적인 내용을 모아 삼국지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것이면 반드시 각주를 달았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서울신문 보도 그후] 소수서원 모노레일 설치 제동 걸렸다

    道 투자심사위서 재검토 의견 “공청회 개최 등 의견 수렴 필요” 경북 영주시가 소수서원(사적 제55호) 일대에 추진 중인 관광용 모노레일 설치 사업에 발목을 잡혔다. 경북도 관계자는 28일 “전날 열린 지방재정 도 투자심사위원회 심의에서 사업 재검토 의견을 받았다”고 밝혔다. 모노레일 설치 관련 공청회 개최를 전제로 꼽았다는 얘기다. 심사위원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소수서원 일대에 대한 특수성 등을 감안한 시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는 의견을 많이 냈다. 시는 100억원을 투자하는 대규모 사업을 벌이면서 주민공청회를 갖지 않고, 시의회 동의를 받는 데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영주시는 심사위에서 제시된 요건을 충족해 수시 심사위나 내년 3월 예정된 정기 심사위에서 심의를 다시 받아야 한다. 영주시는 2019년부터 2022년 3월까지 순흥면 청구리 소수서원~단산면 병산리 선비세상 관광단지 2.8㎞ 구간에 국비 50억원 등 100억원을 들여 모노레일을 설치할 계획이다. 영주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찾는 교통약자 등에게 이동 편의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사업이 태동했다. 시는 모노레일 설치에 필요한 국비 예산을 내년 정부 예산안에 전혀 반영시키지 못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단독] 영주 소수서원 일대 ‘코끼리 열차’ 추진 논란

    [단독] 영주 소수서원 일대 ‘코끼리 열차’ 추진 논란

    市, 청구리~병산리 2.8㎞ 구간 100억원 들여 관광용 열차 설치 산림·문화재 보호 해제 불가피 “경관 훼손 불보듯… 전면 백지화”경북 영주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소수서원(사적 제55호) 일대에 관광용 모노레일(일명 코끼리 열차) 설치를 추진, 논란이 되고 있다. 26일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영주시는 내년부터 2022년 3월까지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소수서원)~단산면 병산리(선비세상 관광단지) 2.8㎞ 구간에 총 사업비 100억원(국비 50억, 경북도비 5억, 영주시비 45억원)을 투입해 모노레일을 설치할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행정 절차를 모두 마치고 하반기부터 공사에 나설 예정이다. 이 사업은 27일 열릴 경북도 투자심사(대상 사업비 300억원 미만)에서 조건부 통과될 것으로 알려졌다. 영주시는 “소수서원~선비세상 관광단지(선비촌)를 찾는 교통 약자 등에 이동 편의를 제공하고, 소백산을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시는 모노레일 설치와 함께 탑승장 3곳과 정거장 5곳, 회랑(1548㎡)을 설치하고 모노레일 차량 14량(8인승)을 투입한다. 선비세상 관광단지는 영주시가 2020년 준공 목표로 영주 순흥·단산면 일대 96만 974㎡ 부지(총 사업비 1565억원)에 조성 중인 한국문화 테마파크다. 시는 이 사업으로 연간 소수서원 등지를 찾는 26만명(추정)에게 이동 편의 제공과 함께 생산유발 효과 221억원, 부가가치유발 효과 73억원, 취업유발 효과 139명 발생 등 각종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환경단체 등은 모노레일 설치 사업이 추진될 경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소수서원 일대의 자연경관 훼손을 우려하고 있다. 사업 구역 내 산림보호구역 지정 해제 및 산지 전용이 불가피한 탓이다. 2011년 11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소수서원은 거대한 은행나무들과 울창한 소나무 숲, 깨끗한 물길 등이 강학당·사당 등과 어우러져 기품 있고 수려한 경관을 담아낸다. 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천은 고려 시대의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이자, 퇴계 선생이 ‘죽계구곡’을 이름 지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또 모노레일 설치 사업 구간에 문화재 보호구역이 포함돼 문화재청으로부터 현상변경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주 내성천보존회 관계자는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소수서원·선비촌·한국선비문화수련원 일대에 흉물스런 모노레일 설치 사업이 추진되면 경관 훼손은 불을 보듯 뻔하다”면서 “영주시는 사업 추진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근래 구미 경실련 사무국장은 “지난달 개장한 경북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처럼 전기자동차 운행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영주시가 소수서원 등 선비 관련 문화를 보존하기보다는 지나치게 관광상품화해 돈을 벌려고 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영주시 관계자는 “사업안이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경북도 투자심사를 통과하면 사업을 확정해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재적 필력에도… 당나라·신라서 모두 소외당한 ‘한문학의 시조’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재적 필력에도… 당나라·신라서 모두 소외당한 ‘한문학의 시조’

    “오직 세상의 사람들만이 모두 너를 죽여 시체를 늘어놓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요,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암암리에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이 살벌한 표현은 최치원(崔致遠·857∼?)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한 ‘격황소서’(檄黃巢書)의 한 구절이다. 흔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불린다. 그 논조가 얼마나 준엄했는지 황소는 격문을 읽다 이 구절에 이르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글이 실린 출전이 바로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중국 당나라 말에 황소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치원은 토벌대장인 고변의 휘하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종사관이었다. 계원필경은 이 기간에 최치원이 지은 수많은 글을 엄선해 편찬한 문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천여 년 문학사에서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은 흔히 한문학의 비조로 불린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최치원은 문체를 크게 구비하여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했다. 신위는 “공이 높은 시조로서 처음으로 개창하였다”라고 말했다.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홍석주나 서유구 등도 비슷한 평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이규보는 “최치원은 미개지를 개척한 큰 공이 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주로 여긴다”라고 칭찬했다. 그는 격황소서에 대해서도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라고 극찬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시가 대단히 높지는 않으니 아마도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 이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성현도 “지금 그가 지은 것을 보자면 비록 시구에 능하기는 해도 뜻이 정밀하지 못하며, 비록 사륙문에 재주가 있으나 말이 정제되지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서거정, 허균 등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바 있다. 계원필경 산문은 대부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위주로 돼 있다. 최치원이 모시던 상사인 고변의 ‘변’(騈)과 그가 쓴 글이 사륙 ‘변’(騈)려문으로 같은 한자를 쓰는 일은 한마디로 ‘기이한 인연’이다. 사륙변려문은 글자 수를 4·6자, 4·6자로 배열하거나 아니면 4·4자, 6·6자 등으로 배열하는 등 대구를 철저하게 지키는 정형성이 특징이다. 변려문은 전체를 대구로 구성하는 데다 특히 어려운 고사를 많이 사용해 글이 매우 까다로운 특징이 있다. 그만큼 번역하기가 어려우며 각주도 일반 산문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거정 같은 대학자도 계원필경에 대해 “이해되지 못하는 곳이 많다”면서 “괴상하고 궁벽하여 족히 천하를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그만큼 최치원의 학문 수준이 높았음을 방증한다.최치원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면에는 당을 시대로 구분했을 때 가장 낮게 평가되는 만당(晩唐) 때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후대에 진실성이 모자랐다고 비판받는 변려문에 치우쳤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러나 후대에도 변려문은 옥책문, 전문, 반교문 등 궁중 의례문에 꾸준히 사용됐다. 또 매우 중요한 실용문인 상량문도 반드시 변려문으로 지어져 그 역할이 지속됐다. 관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이규보와 성현의 견해를 잘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 그에 관한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원필경은 최치원의 학문적 역량이나 당시의 시대상 등을 알려 주는 더없이 귀중한 문헌이다.#영원한 이방인,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되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가서 7년 만인 18세의 나이에 유학생을 상대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선주의 율수현위가 되어 하급 지방관을 지냈는데, 이때 지은 작품을 모아 ‘중산복궤집’(中山覆集)이라는 문집을 엮었다. 몇 년 뒤 23세 때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이 돼 약 4년간 군영에서 수많은 문서를 도맡아 저술하였다. 특히 24세 때 서두에 소개한 ‘격황소서’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유학 과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유명하다. “무협의 겹겹 봉우리 나이에 베옷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계 여러 별자리의 나이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오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무협의 봉우리 12개는 유학 갈 때 나이를 나타내며,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28개는 중국을 떠날 때 나이를 나타내는 식으로 활용한 것이다. 비단옷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출세하여 금의환향했다는 의미이지만, 신라에서의 삶은 기대에 충족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펴보려고 의욕을 가졌으나 골품제 한계로 좌절을 겪었다. 몰락해 가는 신라 말 정세 탓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10여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40여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사방을 소요했다. 경주의 남산, 영주의 빙산, 합천 청량사와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마침내 은거를 결심하고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널리 퍼져 마침내 신화가 되었다. 유학 생활한 당나라에서나 고국인 신라에서나 세상에서 소외된 이방인으로서 그의 내면 정서를 잘 드러내 주는 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秋風唯苦吟 갈바람 속 고심하며 시만 읊나니 世路少知音 이 세상에 진정한 벗 거의 없어라 窓外三更雨 창 밖에는 한밤중에 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엔 만 리 먼 곳 그리는 마음 이 시에서 ‘만리심’(萬里心)을 신라에서 당나라를 향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렇게 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역만리 당나라에 있을 때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근거가 없을 때에는 상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계원필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 中 회남시에서 지은 글 모음 최치원의 문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모두 20권 4책으로 편찬됐는데, 1∼16권은 회남 절도사인 고변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서 고변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따라서 글의 주인공은 최치원이 아니고 고변으로 돼 있다. 17권 이후가 자신에 대한 글이다. 대부분 산문이고 시는 17권에 30수, 20권에 27제(題) 30수가 실려 있다. 국역본 해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그동안 책 이름 중 ‘계원’의 뜻을 ‘문장가들이 모인 곳’이라거나 ‘한림원’ 등으로 잘못 풀이하고 있기에 이 기회에 분명하게 바로잡는다. 계원은 사전적으로는 몇 가지 뜻이 있으나 계원필경의 ‘계원’은 최치원이 글을 지을 때 머물렀던 회남의 별칭이다. 즉 계원필경집은 ‘계원(회남)에서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은 글 모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 회남시에는 ‘계원촌’(桂苑村)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또 다른 저술인 중산복궤집의 작명 원리와 똑같다. 여기에서도 ‘중산’은 글을 지은 곳의 지명을 가리킨다. 최치원의 다른 시문집으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고운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문선(東文選) 등 여러 문헌에 산재한 작품을 수집해 1926년에 간행한 것이어서 문헌적 가치는 높지 않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조선 최대 풍류·행락지… ‘대중문화 1번지’로 꽃피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조선 최대 풍류·행락지… ‘대중문화 1번지’로 꽃피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6회 홍대 편이 지난 16일 연남동~동교동~서교동~당인동~상수동 간을 포함하는 이른바 ‘홍대 앞’에서 진행됐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따온 연남동 센트럴파크를 줄여서 ‘연트럴파크’라고도 부르는 경의선 숲길과 김대중도서관, 경의선 책거리, 서교 365, 당인리발전소와 상수동 카페거리를 누볐다. 홍대 앞의 확장을 가로막던 옛 경의선 철길이 숲길과 책길로 변하면서 숲과 책에서 번갈아 부는 바람이 초여름 답사의 피로를 잊게 했다.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알찬 해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답사를 이끌었다. “이어폰 가이드 시스템을 귀에 꽂고 들으니 해설이 쏙쏙 들어와서 좋았다”, “늘 다니던 홍대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돼 유익했다”, “도시개발의 빛과 그림자를 이제야 알게 됐다” 등의 참가자 호평이 쏟아졌다.우리가 흔히 홍대 앞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학교 앞이 아니다. 행정적으로 홍대 앞은 상수동, 서교동, 창전동, 동교동 지역에 폭넓게 걸쳐 있다. 실제 ‘문화제국’ 홍대 앞은 서강동, 합정동, 망원동, 당인동, 연남동, 신촌까지 아우르고 있다. 준주거지구와 상업지구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2010년 이후 ‘협의의 홍대 앞’을 개척한 문화예술인들이 비싼 임대료를 피해 인근 지역으로 이동한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다. 경의선 숲길과 경의선 책거리는 홍대 앞의 무한 확장성을 예고한다. ‘광의의 홍대 앞’이 앞으로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홍대 앞의 유흥성과 확장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강의 나루 양화진(합정·망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다. 경강은 한강 800리 중 한양을 끼고 흐르는 물줄기를 다른 지역의 강줄기와 구분 짓는 이름이었다. 지금의 광진에서 양화진까지다. 경강은 구간에 따라 3강, 5강, 8강으로 이름을 달리했으며 12강까지 세분하기도 했다. 18세기 이전까지 한강, 용산강, 서강 3강 체제를 유지하다가 상공업이 발달한 18세기 중엽 들어 3강에 마포와 양화진을 가세시켜 5강이 형성됐다. 18세기 후반에는 여기에 두모포, 서빙고, 뚝섬이 합해져 8강이 됐으며 19세기 전반에 연서, 왕십리, 안암, 전농을 12강에 합류시켰다.경강을 나누는 구간의 중심은 나루였다. 광진~송파진~삼전도~뚝섬~두모포~한강진~서빙고~동작진~노량진~용산~마포~서강~양화진이 주요 거점이었다. 나루가 있던 곳에 한강다리가 들어섰다. 나루의 이름에 진(鎭), 진(津), 도(渡), 포(浦)가 붙은 것은 용도 및 기능에 따른 작명이다. 군사기지(광진, 한강진, 동작진, 양화진)와 나루(뚝섬, 서빙고, 용산), 항구(두모포, 마포)의 성격이 드러난다. 광나루와 삼전도가 북한강이나 남한강을 통해 전국으로 드나드는 동쪽 출입구에 해당한다면 양화진은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루로 강화도와 인천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도성의 관문 역할을 했다. 양화나루는 군사기지, 나루, 항구 등 세 가지 용도를 두루 갖춘 중요한 나루였다.버들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는 양화나루를 조선 초기에는 공암나루라고 불렀다. 삼각산과 함께 서울을 수도로 정한 ‘천도 풍수’의 한 축을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암나루는 양천 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나루로 북포(北浦)라고도 하는데 물속에 우뚝 선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대중문화 1번지 홍대 앞은 조선 최대의 풍류 및 행락지였다. 양화진과 서강 일대를 한양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명소로 손꼽아 서호(西湖)라고 했는데, 중국 사신의 접대와 양반, 선비들의 단골 모임 장소였다. 양화진 주민들의 비즈니스 마인드도 남달랐다. 한겨울 한강에서 채빙한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내다파는 장빙업(藏氷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망원정(희우정)을 세운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시초였다. 얼음에 채운 생선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빙어선(氷漁船) 영업을 독차지했다. 서빙고와 동빙고가 관영 얼음 창고였다면, 양화진은 사설 얼음 창고라고 할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를 전후로 쇄국책을 편 대원군은 양화나루에서 프랑스인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 2000여명을 처형했다. 나루 앞 20m 높이의 잠두봉에 절두산(切頭山)이라는 비극적인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양화진에 14개국 417명이 묻힌 외국인 묘지가 들어선 것도 배나 기차를 타고 인천에 내린 서양인이 가장 먼저 닿는 서울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홍대 앞은 조선시대 한양의 유흥과 행락의 장소로 근대 상공업과 서세동점의 바람을 가장 먼저 맞은 땅이었다. 한강의 시대가 끝나고 철도와 도로의 시대를 맞았지만, 홍대 앞은 경의선의 경유지라는 이점을 살려 한때 서울 전체 전력 사용량의 75%를 생산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를 등에 업고 살아남았다. 양화진 나루의 전설이 홍대 앞이라는 현대 문화나루의 관성으로 이어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 다음 일정 : 태릉(경춘선 폐철도) ● 일시 : 6월 23일(토) 오전 10시~낮 12시 ● 집결 장소 : 공릉역 2번 출구 앞 ●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경제·문화 DNA가 흐른다… 종로가 서울, 서울이 종로였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경제·문화 DNA가 흐른다… 종로가 서울, 서울이 종로였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5회 종로(종묘에서 사직까지) 편이 지난 9일 종로구 훈정동 종묘광장에서 사직동 사직단까지 종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서울시와 서울신문사가 제작한 서울미래유산 로고가 인쇄된 빨간색과 밤색 스카프로 멋을 내고 도심을 활보했다. 올해 처음 미래투어에 합류한 강영진 해설자는 집결지인 종묘광장과 세운상가 9층 옥상정원 일원에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의 작동이 일시적으로 원활치 않아 육성으로 답사단을 이끄느라 고군분투했다.이날 투어에는 미국에서 온 중년부부와 남매의 손을 잡고 나온 젊은 엄마, 여행 마니아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했다. 40명 정원을 채우는 만원사례를 이뤘다. 그랜드투어가 거듭되면서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예약 경쟁도 치열해졌다. 오전 9시 20분쯤 예약한 한 참가자는 “‘대기자5’였다”면서 서울미래유산의 열풍에 놀라워했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절대 통치자를 과거와 미래의 세계에 각각 연결하는 신성한 영적 공간이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의 으뜸 사당이요, 사직은 농경사회의 근본인 토지의 신(國社)과 곡물의 신(國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최고의 제단이다. 종묘사직의 줄임말인 종사(宗社)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국가나 왕조 그 자체였다. ‘좌묘우사’(左廟右社)란 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두도록 명문화한 것이다. 실제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 사직단은 서쪽에 있다. 조선 건국의 역사는 1394년 한양 천도 이후 종묘와 사직을 가장 먼저 세우고, 다음으로 경복궁을 건립했으며, 마지막으로 한양도성을 쌓았다. 일제는 한양도성을 헐고, 경복궁의 전각을 뜯어낸 뒤 총독부를 짓고, 제례를 폐지했다. 종묘에서 사직에 이르는 중심 길, 운종가(종로)는 사실상 서울의 최고, 최대 중심가였다. 사대문 안 서울은 남~북 간 육조가(세종대로)와 동~서 간 운종가(종로) 두 개의 큰길로 이뤄졌다. 지금도 두 간선도로가 강북의 뼈대를 이룬다. 종로가 영적 길이라면 육조가는 의전용 길이었다. 1830년에 그려진 ‘조선성시도’를 기준으로 보면 육조가 앞은 황토마루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버티고 앉았다. 광화문 네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율곡로를 잇는 사직로도 1967년 사직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막혀 있었다. 왕이 사직단에 행차하려면 육조가 공조 터(광화문 현대해상화재빌딩) 뒷길을 따라 서울경찰청 앞을 거쳐야 갈 수 있었다. 도심의 중앙에서 낙산 쪽은 넓고 평평했지만 높고 험준한 인왕산과 무악(안산) 고갯길에 가로막힌 서대문 쪽은 좁고 비탈졌다. 종묘에 비해 사직단 행차는 뜸했다. 20대 경종 이후로 2년에 한 번 정도 행차하는 데 그쳤다.종묘에서 사직에 이르는 동서 간선도로의 특징은 유교 국가 조선의 신성한 종교적 길인 동시에 이덕무가 ‘성시전도시’에서 읊은 것처럼 ‘팔만여 가옥에 세 개의 저자를 낀’ 도성의 저잣거리였다. 운종가 상점은 우산전, 생선전, 사기전(그릇), 상미전(쌀), 면주전, 면포전, 저포전, 지전, 선전(비단), 어물전, 철물전 등 17개 특정 물품을 파는 상점이 진을 쳤다. 종루에서부터 태묘(종묘) 앞까지 2000칸이 넘는 시전행랑이 빌딩처럼 솟았다. 박제가도 ‘온갖 장인이 붐비나니, 온갖 물화가 이문(이익)을 쫓아 수레가 연이었네’라고 한양의 영화를 노래했다. 종묘사직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탑골(인사동)에는 특이한 문사 집단이 깃들었다. 이름해 ‘백탑파’였다. 사대문 안에 들어오면 사방 어디에서나 보이는 하얀 탑, 원각사지십층석탑은 한양의 랜드마크였다. 연암 박지원을 좌장으로 유금, 유득공, 서상수, 이서구, 이덕무, 백동수, 홍대용, 박제가 등 쟁쟁한 ‘북학파’ 선비들이다. 이들 중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은 정조의 명에 따라 지은 13편의 ‘성시전도시’ 중 한양과 운종가의 거리풍경을 묘사한 걸작을 남겼다. 18세기 탑골을 주름잡은 백탑파는 노론명문가부터 서얼까지 출신 성분이 다양했지만 신분을 떠나 어울렸다. 오늘날 인사동의 예술문화 DNA를 심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 서얼 출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돼 정조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했다. 탑골이라는 지명은 대리석으로 빚은 흰 탑에서 따온 것이고, 인사동은 관인방의 ‘어질 인’(仁)자와 대사동의 ‘절 사’(寺)자를 합쳐 만든 국적불명의 지명이다. 오랫동안 종로가 서울이었고, 서울이 종로였다. 적어도 조선 500년간 한양의 굳건한 중심이었다. 매일 도성의 새벽을 깨우던 운종가는 출판문화의 터전이었다.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책 중개인(서쾌), 필사꾼과 함께 유통공간을 형성했다. 1918년 미국인 선교사 쿤즈는 ‘서울에 모두 36곳의 책 대여점이 성업 중인데 독자는 상인, 술집주인, 학생, 노동자와 가정주부’라고 기록했다. 대개 한 집에서 30~ 50책을 대여했다. 탑골과 종루(보신각) 앞에서는 ‘책 읽어주는 노인’ 전기수가 ‘숙향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을 읽어주고 돈을 벌었다. 훗날 종로에 출판사와 서점, 학원가가 형성된 이유다. 또 개화기 전차, 전기, 빌딩 등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이식된 첨단유행의 거리였다. 만민공동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삼일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민족저항의 무대였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활개를 치던 근대화의 최전선이었다. 백화점, 서점, 빵집, 음악감상실, 빈대떡집, 다방이 시전행랑의 맥을 이었다. 1980년대까지 대중문화와 민주화의 성지였던 종로는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야의 종 타종행사가 열리는 서울의 여러 도심 중 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홍대(경의선 철길) ●일시 : 6월 16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탄력받은 文집권 2년차… 개각 최소화·일자리 올인

    탄력받은 文집권 2년차… 개각 최소화·일자리 올인

    靑관계자도 “인적쇄신 논의 없다”6·13 지방선거에서 여당(더불어민주당)이 전례를 찾기 어려운 압승을 거두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동력에도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와 맞물려 개각 및 청와대 조직개편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4일 “대통령은 사람을 바꿔 쇄신하는 스타일이 아닐뿐더러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만한 귀책 사유가 없는 한 부분 교체도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아직 개각이 논의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청와대 참모진 역시 대폭으로 손본다면 3실(비서실·정책실·외교안보실) 체제를 바꾼다거나 수석실을 신설 또는 폐지하는 정도가 돼야 하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다”며 “빈자리를 채우고 업무가 중복되거나 과부하가 걸린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면전환용 인적 쇄신에 부정적인 데다 성과를 평가하려면 적어도 1년 이상 직무를 맡겨 둬야 한다는 게 문 대통령의 지론인 만큼 개각을 하더라도 ‘최소화’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개각 요인이 크지 않고 지난해 ‘부실 인사검증 논란’으로 홍역을 앓았던 점이 감안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우선 김영록(신임 전남지사) 전 장관 출마로 농림축산식품부가 공석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법무부(가상화폐 논란), 교육부(입시제도 혼선), 환경부(재활용 쓰레기 논란) 등 사회부처 교체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된다. 수차례 구설에 오른 송영무 국방부 장관 등 외교안보팀 교체설도 ‘여의도발(發)’로 흘러나왔지만 청와대는 현재로선 무게를 두지 않고 있다. 한 관계자는 “송 장관은 국방부 및 군 장악 능력 및 개혁 성과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논란’을 놓고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갈등설이 불거지고 ‘패싱(소외)론’이 제기됐던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경제팀의 교체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참모진 부분 개편은 예정된 수순이다. 정무비서관과 제도개선비서관, 균형발전비서관이 공석이다. 정무비서관은 지난해 11월 한병도 정무수석의 내부승진 이후 7개월째 빈자리다. 8월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21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진성준(정무기획), 백원우(민정) 비서관 등이 사의를 표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참모진 개편은 청와대 조직진단과도 맞물려 있다. 지난달 수석·비서관실별로 업무 현황과 개선 방향을 담은 의견서를 총무비서관실에 전달했고 비서실장실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균형발전비서관과 자치분권비서관 등 업무가 중복되는 조직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조정이 이뤄질 수도 있다. 재보궐선거 압승으로 의회 지형이 달라진 만큼 개혁 과제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도 가속페달을 밟을 전망이다. 문 대통령이 이날 입장문에서 “지켜야 할 약속과 풀어 가야 할 과제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쉽지만은 않은 일들”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하반기에는 일자리 창출과 혁신성장 등 민생경제에 ‘올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선 공약인 검경 수사권 조정안 등도 풀어내야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표면적으로는 민주평화당과 정의당, 무소속을 합쳐 안정적 과반을 확보한 듯 보이지만 지난해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보듯 각 당의 협조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으며 전적인 협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면서 ‘협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6·13지방선거 경남 산청군수 선거

    6·13지방선거 경남 산청군수 선거

    경남은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 특히 농촌 지역은 도시보다 보수성이 더 두드러져 역대선거에서 보수 정당으로 지지가 쏠리는 현상이 뚜렷했다. 그러나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는 군 지역에서도 역대선거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각 정당 선거캠프와 후보자 등에 따르면 정당을 보고 후보를 지지하는 특정 정당 편애가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심하지 않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분위기는 선거 판세에도 드러나 군수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여·야당 후보와 무소속 후보가 경합하는 지역이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산청·함양·거창·합천군 군수 선거도 판세 예측이 어려운 곳으로 분류된다. 6·13 지방선거 경남 산청군수 선거에는 현직 군수인 더불어 민주당 허기도 (65)후보와 전직 군수를 지낸 자유한국당 이재근(65) 후보, 도·군의원 출신 무소속 이승화(62), 배성한(66) 후보 등 모두 4명이 뛰고 있다.자유한국당 이 후보는 허 후보에 앞서 군수를 2번 연임했고 두 후보는 진주고 선후배(이재근 후보가 한해 선배) 사이다. 허 후보는 지난 2월까지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다가 탈당하고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해 공천을 받았다. 허 후보에 앞서 2차례 군수를 지낸 이 후보는 지난 선거에 3선을 접고 불출마 했다가 다시 나섰다. 무소속 두 후보도 자유한국당 소속이었으나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한 뒤 출마했다. 현지 여론 등에 따르면 현·전직 군수 출신 두 후보와 무소속 이승화 후보가 앞서있는 가운데 배 후보가 추격하는 구도로 분석한다. 당적을 바꾼 허 후보가 군수 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할 지 선거를 한차례 건너 뛰고 나온 이 후보가 현직 군수를 꺾고 3선에 오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허기도 더불어민주당 후보 “산청을 위한 일꾼이 필요하고 힘있는 여당 군수가 필요합니다” 허기도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경수 도지사 후보, 허기도는 한팀”이라며 “힘있는 여당군수 허기도가 1등 산청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한다. 허 후보는 “선거때만 되면 기호가 몇 번인지 따지고, 파란색이냐 빨간색이냐를 따지는데 군수는 일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면서 “땀에는 색깔이 없으니 당적을 따지지 말고 누가 일을 잘 할 것인지만 보고 선택해 달라”고 당적변경에 방어막을 쳤다. 그는 2021년 한방 항노화 엑스포를 개최, 70세 이상 노인에게 이·미용권 지급, 어르신 집 축담 낮추기 사업 지원 등의 공약을 내놨다. 모든 군내버스는 의료원을 경유하도록 노선을 조정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또 친환경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 민관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케이블카 설치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청정 자연환경을 활용해 100리 불로장생길과 100리 선비길을 조성하고 국립 산림체험원을 유치해 1000만 관광객이 찾는 고장으로 만들겠다고 공약도 제시했다. 허 군수는 경상대학교 사범대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사와 사업가를 거쳐 지방정치를 시작해 제6·8·9대 경남도의원과 도의회 의장을 지냈다. ●이재근 자유한국당 후보 “군수 재임시절 그렸던 밑그림을 구체화 하고 완성시키겠습니다” 이재근 후보는 “이재근이 다시 뛰면 산청이 다시 뜬다는 군민들의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온 마음과 열정을 바쳐 혼신을 노력을 다하겠다”면서 군민들에게 “다시 한번 힘을 모아달라”고 강조한다. 이 후보는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민간자본 투자유치촉진 대책팀을 구성해 지역에 대한 투자를 적극 추진할 것을 공약 1순위로 내걸었다. 어르신과 장애인을 위한 보조 보행기 전동휠체어 보급 확대를 비롯해 농촌지역 특성에 맞는 복지시책을 적극 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초·중·고교 무상급식 지원과 제2회 산청 세계엑스포 개최 추진도 공약했다. 그는 “군수로 재임하면서 산청의 백년대계 밑거림을 그려서 지도를 바꿔놓고 미래비전을 준비했다”면서 “산청의 비전과 희망을 되살려 시대를 앞서가는 자랑스런 산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 군수는 진주고 2년을 중퇴하고 옛 신한국당에서 당료 생활을 시작해 총무국장, 한나라당 조직국장과 연수원 교수 등을 거쳤다. 산청군수 퇴임 뒤 경남일보 대표이사를 지냈다. ●무소속 이승화·배성한 후보 이승화 후보는 한국국제대학교 경찰행정학부 3학년을 중퇴했고 제7대 경남도의원과 제7대 산청군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이 후보는 “현장에서 발빠르게 민원을 해결하는 민원군수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배성한 후보는 체육전문대학과 국민대 정치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산청군수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 직능특보를 지냈다. 배 후보가 내건 공약 가운데는 중앙정부와 협의해 지리산 자락에 탈북민 정착촌인 한민족 마을을 설립하고 전직 산청군수들의 행정실패 사례를 조사·평가해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한 산청군 전직군수 적폐청산위원회 설립 등이 눈길을 끈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도덕성·문장력 최고 외교관… 유일 초강국 원의 ‘고려 편입’ 막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도덕성·문장력 최고 외교관… 유일 초강국 원의 ‘고려 편입’ 막다

    ‘도덕의 으뜸(道德之首), 문학의 종장(文章之宗).’ 고려 말 문신이었던 이색이 지은 이제현의 묘지명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힘 겨루기에 대한민국은 위태위태하다. ‘한반도의 봄’에도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 이런 때일수록 강대국들을 이용하는 노련한 외교관이 필요하다. 고려 후기 문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 선생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나를 돌아보니…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였으니 도를 들은 것이 자연 늦었도다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랴 백성에게 무슨 덕을 베풀었다고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단 말인가 요행으로 그렇게 된 일이기에 온갖 비난을 불러들였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 그려서 또 무엇에 쓰겠는가만 나의 후손에게 고하여 주노니 한 번 쳐다보고 세 번 생각하여 그런 불행 있을까 경계하며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불행을 면하게 될 것을 알리라 -익재난고(益齋亂藁) 제9권 ‘익재진자찬’ 중 선생이 자신의 초상화에 대해 쓴 글이다. 80세가 넘게 살며 여섯 왕을 섬기고 네 차례나 재상을 지내는 등 영화를 누렸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했다. 실은 이것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15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자 선생은 ‘과거는 작은 재주이니, 이것으로 나의 덕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학문 성취가 목표였던 선생에게는 평생의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대제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의 신하로, 두 나라를 수없이 오가며 줄타기하듯 외교술을 펼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문화의 힘으로 선생은 원나라를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원나라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충선왕이 원나라 수도 연경에 만권당을 지어 놓고 선생을 불러들여 조맹부 등 천하의 명사들과 어울리게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충선왕이 “닭 울음소리가 마치 문 앞의 버들가지 같도다” 하고 읊었다. 자리에 모인 중국의 문사들이 그 말의 출처를 물었다.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고 난처해하자 익재 선생이 “우리나라 시에 ‘해가 뜨자 지붕 위의 닭이 우니, 늘어진 수양버들처럼 길구나’라는 구절이 있으며 한퇴지의 시에도 이와 비슷한 시구가 있소” 하니 좌중이 다 칭찬하였다. -청장관전서 제32권 ‘청비록 계성사류’ 중 해박한 지식으로 위기에 빠진 충선왕의 체면을 살리면서 동시에 종주국에 맞서 우리 문화의 위상을 드높인 유명한 일화다. 한시를 읊으며 상대국 대표를 위압하던 모습이 겹쳐진다. #할 말은 하자 충숙왕 때 고려의 간신들이 고려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키려 한 일이 있었다. 원나라 황제도 이를 받아들여 고려에 정동성을 설치하려 했다. 이때 선생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도당에 글을 올렸다. 중용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 아홉 가지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를 시행해 가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끊어진 세대를 이어 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 주며, 혼란을 다스려 주고 위기를 돌보아 주며, 주는 것을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을 박하게 함은 제후들을 감싸주는 일이다’ 하였습니다.…(중략)…패자(覇者)도 오히려 이것에 힘쓸 줄 알았는데, 더구나 큰 중국을 차지하여 사해를 한 집안으로 삼는 자이겠습니까? -익재난고 제6권 ‘원(元)나라 서울에서 중서도당에 올린 글’ 원나라는 천하의 대국이니 경전의 말씀대로 남의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이어 선생은 과거 원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고려가 도왔던 일들을 열거한 뒤 원나라가 고려왕을 부마로 삼은 은혜와 의리를 부각시킨다. 또 고려에는 쓸모없는 땅이 많으니 재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인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크게 경계할 것이니 경제적, 외교적으로 조금도 실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삼가 바라건대, 집사 각하께서는 역대 황제들께서 고려의 공로를 생각하시던 의리를 본받으시고, 세상을 가르친 중용의 말씀을 명심하시어, 그 나라는 그 나라에 맡기시고 그 나라의 백성은 그곳 백성끼리 살게 하십시오. 자기들의 정사(政事)는 자기들 스스로 닦도록 직책을 부여하여 번방으로 삼으시며, 우리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신다면 어찌 삼한의 백성들만 집집마다 서로 경하하여 천자의 성덕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종묘사직의 영령들도 모두 감격하여 지하에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선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이어 과거 은혜와 의리를 거론한 뒤 실리적인 측면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강대국에 부탁하는 글이지만, 이 정도라면 오히려 당당한 요구에 가깝다. 선생의 글 덕택인지 원나라의 이 시도는 곧 중지됐다. #문인 이제현 선생은 수많은 역사서를 저술하는 한편 문학 부문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말기 학자 김택영은 선생의 문학을 두고 ‘조선 3천년에 제일의 대가(大家)’라고 극찬한 바 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종이 이불 썰렁하고 등불 침침한데 어린 중은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는구나 자던 길손 일찍 문 연다 꾸짖겠지만 암자 앞의 눈 쌓인 소나무 보려 한다네 -익재난고 제3권 ‘산중설야’ 겨울밤 눈이 내린 산사의 풍경과 나그네의 심경이 선명하다. 눈 온 새벽의 한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 외에도 선생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영사시도 많이 지었고, 패관문학의 대표작인 ‘역옹패설’을 남기기도 했다. 역옹패설은 일종의 수필 문학으로, 딱딱하고 골치 아픈 관직 생활과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대한 선생 자신의 설명이다. “무료하고 답답함을 달래기 위하여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것이니 실없는 이야기가 있은들 뭐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공자도 ‘박혁(쌍륙과 바둑)놀음이 아무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으니, 장구(章句)를 다듬어 꾸미는 것이 박혁놀음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역옹패설 중 또 익재난고 제4권 ‘소악부’에는 고려가요를 배경 설화와 함께 한역한 작품들이 수록됐다.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옛날 신라의 처용 늙은이 바닷속에서 왔노라 말을 하더니 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솔개 어깨 자줏빛 소매로 봄바람에 춤추었네 -처용가 바윗돌에 구슬이 떨어져 깨지긴 해도 구슬 꿴 실만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낭군과 천추의 이별을 하였지만 한 점 붉은 마음이야 어찌 변하리 -서경별곡 뛰어난 문장가이자 정치가로서 원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선생의 삶은 오늘날 강대국 사이에 처한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수백 년 전의 지혜가 지금 소중한 이유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익재난고는 10권 3책의 이제현 문집 조선시대 여러 차례 重刊 1363년(공민왕 12년)에 처음 간행된 이래 조선조에 들어서도 세종, 선조, 순조 때 등 여러 차례 중간했다. 모두 10권 3책으로 됐으며 권1~4에는 시(詩), 권5에는 서(序), 권6에는 서(書)·기(記)·비문(碑文)이 실려 있다. 권7에는 비명(碑銘), 권8에는 표(表)·전()이 실렸다. 권9는 상·하 2편으로 이루어졌으며 상권은 고종의 세가이다. 하권에는 사찬(史贊)·사전서(史傳序)·책문(策問)·논(論)·송(訟)·명(銘)·찬(讚)·잠(箴)이 실려 있다. 권10에는 장단구(長短句)가 들었다. 이어 이색이 지은 선생의 묘지명과 중간할 때 추록한 습유가 실려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익재난고’와 ‘역옹패설’ 전·후집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서를 출간했다.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DB)에는 원문과 번역문을 모두 구축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사직터널 사이로… 서쪽 서울 사람들의 시간을 잇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사직터널 사이로… 서쪽 서울 사람들의 시간을 잇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회 서울사방 서대문 안과 밖 편이 지난 26일 진행됐다. 봄바람과 봄볕을 따라 걷는 5월 마지막 주 해설이 있는 주말 나들이였다. 정원 30명과 대기자 및 진행자까지 40명이 결원 없이 모두 참가해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40개 전량이 동났다. 부부, 친구, 모녀, 동호인 등 다양한 관계와 연령의 조합이 환상적인 팀을 이뤘다.일행은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는 한세화 해설사를 따라 체부동 생활문화지원센터와 체부동 시장골목을 둘러본 뒤 사직터널로 향했다.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수동과 신문로 골목을 이리저리 헤치고 나아가 옛 경희궁 궁역인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서대문 안이다. 경교장이 있는 강북삼성병원부터 서대문 바깥이다.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조성하면서 서대문을 복원하지 않은 건 두고두고 아쉽다. 일제는 1915년 도시계획을 핑계 삼아 서대문을 철거한 뒤 목재값 205원 50전을 받고 팔아 버렸다. 100년이 지난 뒤에도 ‘서대문이 없는 서대문’은 여전하다. 참가자들은 4·19혁명기념도서관, 충정아파트, 미동아파트, 충정각, 손기정체육공원 등 우리 근현대사가 남긴 서대문 밖 풍경을 2시간 30분 동안 차근차근 돌았다. 독립문에서 광화문을 잇는 찻길인 사직터널로 말미암아 끊어진 서울의 서쪽 사람 길을 회복하는 여정이었다. 일행 중 답사 경험이 풍부한 몇몇은 우리가 서촌이라고 부르는 우대(웃대)에서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이 사직터널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문안길을 통해 두 장소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일깨웠다. 서촌이라는 지명의 유전(流轉)이 증명하듯 장소의 역사는 머물지 않고 쉼 없이 흐른다. 서촌의 유래는 한양을 구성하는 5촌(동촌·서촌·남촌·북촌·중촌)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서촌은 서소문과 덕수궁 주위를 이른다. 요즘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르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경복궁 동쪽에 있는 북촌을 동촌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동촌은 엄연히 낙산 아래 대학로 주변이다. 북촌은 북악산, 남촌은 남산 아랫동네이며 중촌은 사대문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 주변을 지칭한다. 조선의 5촌 또는 5부는 현대 서울의 25개 자치구 격이다. 굳이 서촌을 고집하겠다면 ‘인왕산 서촌’이라고 한정했으면 한다. 1929년 9월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 실린 ‘옛날 경성 각급인의 분포 상황’이라는 글을 보면 ‘서소문 내외를 서촌이라고 하고…(중략)…서촌에는 양반이 살되 문반 중 서인이 살며…(중략)…우대에는 육조 이하의 각사에 소속된 이배(吏輩)·고직(庫直)이 산다’고 적었다. 18세기 문인 이가환이 당대 우대에 사는 경아전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모임 ‘송석원시사’의 시화첩에 붙인 서문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서쪽은 좁은 땅이다. 이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함이 적다’고 묘사했다.우대라고 불리는 경복궁 서쪽과 서북쪽 누하동 근처는 궁에 소속된 대전별감, 내시가 각각 살았다는 사실도 적시돼 있다. 우대는 인왕산 아래 옥인동·누상동·사직동·효자동·창성동·통인동·신교동 등을 이른다. 17세기 말 한양의 풍속을 묘사한 정래교의 ‘임준원전’을 기준으로 보면 인왕산~경복궁 사이, 사직로~북악산 사이쯤이다. 이배·고직이란 서울의 중인 계급인 경아전의 통칭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 서리 또는 겸인이라고도 했는데 행정관청에서 실무를 맡은 말단 관리이자 양반가의 비서에 해당하는 청지기를 이른다. 양반촌 서촌과 중인촌 우대는 별개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촌은 한양도성의 서남쪽 서소문 일대이며 지금도 행정구역상 서소문동을 이룬다. 양화진과 마포 및 서강나루에 도착한 어물과 세곡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지였기에 점차 양반촌에서 상인 거주지로 변했다.우대 중인과 서촌 상인들이 사실상 서울의 주인 노릇을 했다. 17세기 한성부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 사람 열에 일곱은 노비였다. 서울의 특성상 지방보다 노비가 많기도 했지만 조선 전체로 따져도 1200만명 중 30~40%는 노비 계층이었다. 한양 인구 20만명 중 왕족과 양반·관료 및 유생·선비는 10% 안팎이었고, 경아전·별감·서리·겸인·내시 및 역관·의관·화원·율관 등 중인 계층과 시전을 운영하는 부유한 상인 계층 그리고 서울에서 근무하는 하급 장교와 일반 군사 등 중인·평민 계층이 20~30% 정도였다. 임지를 전전하거나 낙향이 잦았던 양반과 달리 중인 및 상인이 서울 사람의 주류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인왕산 서촌’과 서대문은 별개의 동네이면서도 늘 연결됐다. 인경궁과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은 두 개의 궁이다. 인왕산 아래 인경궁은 누상동·누하동·누각동이라는 지명을 낳고 곧 사라졌다. 신문로(새문안) 일대의 왕기를 지우려고 세운 경희궁은 서궐의 역할을 했다. 도성 서쪽에는 서대문(敦義門)과 서전문(西箭門)이 있었다. 태종 때 세도가 이숙번이 자기 집 앞 서대문을 닫고, 문을 다른 곳에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새문은 ‘성문을 막은 문’(塞門)이라는 뜻과 더불어 ‘새로 지은 문’(新門)이라는 복합 의미를 가진다. 서대문을 대신한 서전문은 지금의 사직터널 앞쯤에 있었다. 사직터널을 뚫고 사직천을 복개해 사직로를 놓기 이전에는 고개로 막혀 있었다. 광화문을 돌아서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조선의 왕들도 사직단에 갈 때는 광화문 육조대로를 지나 지금의 세종대로 네거리까지 나온 뒤 세종문화회관, 정부서울청사, 서울지방경찰청 앞길을 따라 사직단을 오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사방 북촌(북촌개발자 정세권의 길)●일시 및 집결 장소 : 6월 2일(토) 오전 10시 안국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꽃의 이치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꽃의 이치

    계절이 계절이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꽃을 들여다볼 때가 좋다. 그러나 꽃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 사진을 한두 장 찍어 올리면 곧 대답을 해주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다. 신기하고도 고마운 앱이다. 동호인들이 사진을 보고 대답을 해 주는 앱인데 그 정성이나 정확도가 대단하다. 그렇게 꽃 이름을 알고 나면 이어 궁금해지는 것이 꽃말이다. 이름 모를 꽃을 보고 앱에 사진을 찍어 올렸더니 송엽국이라고 했다. 송엽국이라니 난생처음이었다. 사철채송화 혹은 솔잎채송화라고도 불리는 송엽국은 번행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남아프리카가 원산이었다. 소나무의 잎과 같은 잎이 달리는 국화라는 뜻이라 했다. 꽃말을 찾아보니 나태, 태만이었다. 이런 예쁜 꽃이 그런 꽃말을 갖고 있다니 의외였다. 다산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난폭하고 태만함을 멀리하는 것’(斯遠暴漫), ‘비루하고 천박함을 멀리하는 것’(斯遠鄙倍), ‘진실을 가깝게 하는 것’(斯近信)을 ‘삼사’(三斯)라 하여 서재 이름을 삼사재라 붙이도록 했다. 그런데 송엽국처럼 곱기만 하면 때로 태만함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중에 패랭이꽃도 보았다. 산비탈 같은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고 우리네 사랑을 듬뿍 받아 온 꽃이지 않은가. 민초들이 쓰던 모자인 패랭이를 닮았대서 꽃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는 “꽃이 변화가 많기로는 패랭이꽃만 한 것이 없다”고 했는데 흰색, 분홍색을 기본으로 과연 여러 색깔들이 곱게 밀물지고 있었다. 또한 매달려 있는 이상한 꽃을 물었더니 박쥐나무꽃이라 했다. 은거를 하거나 유배생활 하는 선비들이 처량한 자기 모습과 닮았다며 흔히 심었다고 했다. 한편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박쥐와 닮았다고 바굼지오름이라 부르는 ‘단산’ 밑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오름의 나쁜 기운을 막아야 한다며 ‘거욱대’라는 돌탑을 쌓았다. 중국인들은 박쥐를 뜻하는 ‘복’(?)이 복을 뜻하는 한자 ‘복’(福)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박쥐를 좋아한다니 박쥐나무꽃이 일견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한라산 근처에 사는 탓에 가장 익숙한 꽃은 철쭉이다. 철쭉은 영산홍, 백철쭉, 황철쭉, 아까도철쭉, 자산홍, 겹철쭉, 산철쭉, 홍철쭉, 만병초, 서감철쭉 등 품종이 다양하다. 특히 왜철쭉이라 부르는 영산홍은 연산군이 좋아하여 연산홍(燕山紅)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런데 영산홍은 꽃이 필 때는 그 화려함이 다른 꽃과 비교할 수 없지만 꽃이 시들 때는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말라붙은 채 오래간다. 시든 후에는 영산홍보다 더 추한 꽃이 없을 정도다. 이를 눈여겨본 실학자 신경준은 “때가 이르러 번화함과 무성함이 생겨나면 이를 받아들이고, 때가 달라져서 번화함과 무성함이 가 버리면 결연하게 보내 주는 것이 옳다”며 ‘늙어 추함’을 경계했다. 이렇게 꽃들마다 이야기가 풍성하다. 꽃 이야기는 우리네 우여곡절의 인생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기에 나이가 들면서 꽃에 대해 애정이 더 가는지도 모르겠다. 꽃은 때에 맞춰 피고 진다. 봄꽃은 봄에 피고 진다. 봄날이 가는데도 굳이 피어 있겠노라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이 뿌리 내린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타고난 그 빛깔과 향기로 꽃은 최선을 다해 피고 그리고 진다. 유배인들이 꽃을 좋아한 이유도 이런 이치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제야 그 이치를 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내 봄날도 간다.
  • “퇴계 묘 방치는 안 돼”…서울시설공단 직원들 ‘2.5t 등짐 재능 기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과 맏며느리의 허술한 묘소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공기업 임직원들이 말끔히 정비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29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 따르면 최근 서울시설공단 임직원 20여명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퇴계 선생의 맏며느리인 봉화 금씨의 묘소를 찾아 말끔히 정비했다. 도로에서 200여m 떨어진 가파른 산 중턱의 묘소까지 뗏장 2.5t을 등짐으로 나른 뒤 무너진 봉분을 다시 세우고 듬성듬성한 잔디를 모두 걷어내 새로 입혔다. 산소의 잔디 성장을 방해하는 주변 소나무의 가지치기도 곁들였다. 작업에 꼬박 이틀을 보냈다. 지난해 이맘때도 이렇게 정성을 담아 50여m 떨어진 곳의 퇴계 선생 묘소를 손질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산소 정비에 1년이라는 시간 차를 둔 것은 무엇보다도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존중한 때문. 이전만 해도 이들 산소는 만든 지 오래된 데다 관리마저 제대로 안 돼 허술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안동시 홈페이지엔 퇴계 묘소를 새로 단장해야 한다는 글이 쏟아져 안동시를 곤혹스럽게 했다. 시 측이 몇 차례에 걸쳐 퇴계 문중에 산소를 정비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번번이 내쳐졌다. 문중이 선생 묘소 관리에 단 한푼의 예산도 쓸 수 없다며 극구 마다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이 임종을 앞둔 1570년 형의 아들 영(寗)에게 “내가 죽으면 반드시 조정에서 예장(현대의 국장)을 내릴 것인데 사양하라”고 유언한 데 따른 것이다. 퇴계의 17대 종손 이치억(43)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29일 “퇴계 할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화려한 예우를 거부하고 겸양과 검소함을 추구한 높은 뜻을 받들기 위한 것으로,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지난해 3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선비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 서울시설공단 임직원들이 퇴계 선생 묘소 등을 참배한 게 묘소를 정비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김윤기 복지경제본부장 등 임직원들이 한목소리로 “조선 최고 성리학자로 불리는 선생의 초라한 묘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김병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에게 정비를 제안했고, 김 이사장이 문중과 상의한 끝에 수락했다. 김 이사장은 “서울시설공단 임직원들이 재능 기부를 통해 퇴계 선생과 큰며느리의 산소를 정성껏 돌봐 준 데 대해 거듭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경북 ‘청년·기업 매칭 협력’ 모집

    경북도가 기업 맞춤형 교육을 통한 청년 취업 지원에 나섰다. 도는 ‘청년-기업 매칭 협력사업’을 벌이기 위해 직업능력개발시설 등을 갖춘 대학 및 각종학교, 평생교육시설, 평생직원교육학원 등 사업에에 참여할 전문교육훈련기관을 상시 모집한다고 28일 밝혔다. 경북도경제진흥원 홈페이지(http://www.gepa.kr)를 참고해 신청하면 된다. 2개 이상 기관과 기업의 컨소시엄도 가능하다. 사업 대상에 선정되면 교육위탁훈련비로 1인당 60만원이 지원되며, 청년고용 촉진기업으로 선정돼 고용환경개선비 지원 등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전강원 도 일자리청년정책관은 “청년 실업을 해결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왜장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 논개 기리는 진주논개제 25~27일 개최

    왜장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 논개 기리는 진주논개제 25~27일 개최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한 의기(義妓) 논개와 7만 민·관·군의 충절을 기리는 진주논개제가 오는 25~27일 진주성과 남강 일원에서 열린다.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촉석루 절벽 아래 바위(의암)로 유인한 뒤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경남 진주시는 21일 ‘제17회 진주논개제’를 비롯한 진주지역 여러 봄축제가 25~27일 3일간 진주성과 남강, 진주시가지 등에서 다채롭게 열린다고 밝혔다. 진주논개제는 진주시와 (재)진주문화예술재단,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가 주최하고 진주논개제 제전위원회가 주관한다. 본행사와 체험·부대행사, 동반행사 등으로 나누어 모두 47개 행사가 열린다. 첫날 논개 신위를 모시는 ‘신위순행’ 행사는 취타대와 기생, 선비, 탈출 길놀이팀 등 모두 450여명이 참여해 시가지 퍼레이드를 펼치며 축제 시작을 알린다. 이어 진주성 김시민 장군 동상앞에서 여성이 제관으로 참여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독특한 여성 제례의식인 의암별제가 진행된다.축제기간에 매일 오후 8시 의암주변 수상무대에서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뮤지컬 ‘논개순국 재현극’이 공연되고 야외공연장에서도 줄타기, 솟대쟁이 놀이 등 매일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행사장 주변에 마련된 역사문화 체험 공간에서는 의암별제 체험, 교방문화체험, 조선시대 진주목사 집무 체험, 진주검무 만들기 체험 등 역사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여러 체험 행사가 마련된다. 논개제 기간에 해외민속예술 초청공연, 진주남강물축제, 진주탈춤한마당, 2018 진주 스트릿 댄스 페스티벌, 진주국악제, 진주덧배기춤 한마당, 진주남가람 수학축제, 진주시 밴드 음악축제 등 13개 동반축제·행사가 이어진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역사 속 행정] 조선의 진정한 ‘소통왕’ 영조

    [역사 속 행정] 조선의 진정한 ‘소통왕’ 영조

    궁궐 밖에서 백성들 만나 나랏일 토론하고 의견 취합 영조의 ‘조선판 공론화위’1750년 7월 3일 진시(오전 7~9시)에 영조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에 나섰다. 이때 영의정 조현명과 좌의정 김약로, 우의정 정우량 등 당대 고위 관원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성균관 유생 80여명을 비롯해 도성 주민들도 이 광경을 지켜보려고 나왔다. 이 자리는 영조가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양역(16~60세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 문제를 해결하고자 선비와 일반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참석자들을 확인한 영조는 강한 어조로 “양역 문제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간 논의됐던 양역변통론(양역제 개혁을 주장하던 여러 논의) 가운데 유포론(세금을 내지 않는 양인 가정을 찾아내 세금 징수를 늘리자는 논의)과 구전론(성인 남녀 모두에게 인두세 개념의 돈을 징수하자는 주장)은 시행할 수 없고 호포론(신분에 관계없이 집집마다 면포를 내게 하자는 의견)과 결포론(대동법처럼 토지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만 갖고 논의하라”고 전교했다. 일반 백성들의 이해를 돕고자 성균관 유생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게 했다. 이 논의는 숙종 때부터 시작됐지만 그간 양역 징수 대상에서 제외됐던 양반들의 반대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양역 문제는 더욱 수렁에 빠져들었다. 영조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날 모임을 주도했다. 자기 의견을 밝힌 영조는 재상을 시작으로 고위 관리, 유생, 주민에게 각자 의견을 말하게 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이날 만남은 석양이 내릴 때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의견이 좀처럼 모아지지 않았다. 신료들은 국왕의 건강을 우려해 모임 중단을 요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되레 “좋은 대책을 얻은 뒤에 파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고는 각자 생각에 따라 북쪽과 남쪽에 나눠 서도록 했다. 오늘날 퀴즈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OX’ 문제 같은 것이었다. 아쉽게도 이날 만남에서는 하나의 의견이 도출되지 않았다. 결국 국왕이 신하들에게 “5일 안에 하나의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모임이 일단락됐다. 조선 시대 국왕이 조정 관리가 아닌 일반 백성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앞의 사례처럼 각자 소견을 들은 뒤 자신의 의견에 따라 남북으로 나눠 서게 해 의견을 취합하는 방식은 거의 없었다. 실제 조선 시대 국왕이 궁궐 밖에 출입하는 일은 국가적 제사 때나 왕실 행사, 선대 국왕이나 왕비의 능 행차, 사신 접견 등으로 제한됐다. 궁궐 안에서만 생활하는 임금이 일반 백성을 접촉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국왕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백성들과 만났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차가 쉬는 곳에서 기다리다가 상언(국왕에게 올리는 문서)을 올리거나 징·꽹과리를 두드려 호소하는 격쟁으로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궁궐 밖으로 직접 나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백성의 의견을 청취하는 소통 방식은 영조대에 시작됐다.실제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30여 차례 이상 궁궐 밖으로 나왔다. 조선 후기 궁궐은 ‘동궐’이라 불리던 창덕궁과 창경궁, ‘이궁’이란 별칭을 가진 경희궁(경덕궁으로 불리다가 1760년 개칭)이 주로 활용됐는데, 국왕은 이들 궁궐을 오가며 국정 의견을 나눴다. 흥화문을 비롯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도 다양한 계층의 백성을 스스럼없이 만났다. ■한국행정연구원 ‘역사 속 행정이야기’ 요약 이근호 연구교수 (명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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