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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무대 오른 역사속의 인물들

    역사속의 인물들을 연극무대에 올리기란 쉽지 않다.무엇보다 철저한 고증이 뒷받침돼야 하고,특히 과거 인물의 성격을 지금의 연극언어로 표출하는 과정이 녹녹치가 않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최근 무대에 올려졌거나 공연될 세 작품은 눈여겨볼만한 것들이다.극단 연우무대의 ‘청산에 나빌레라’(25일까지 문예회관 소극장),극단 쎄실의 ‘엄마’(23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그리고 연희단거리패의 ‘시골선비 조남명’(10월6∼14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모두무대를 통한 역사의식을 강조해온 극단들의 의욕적인 시도다. ◆청산에 나빌레라(이응률 김학선 원작,정한룡 연출)= 송도삼절의 하나로 유명한 황진이.기생이었으면서도 자유로운예술혼을 지닌,진보적 여성으로 평가된다.이 극은 금강산의 사계를 씨줄로,황진이가 만나는 남자들에 따라 달라지는의복을 날줄로 하여 전개된다.죽음을 앞둔 황진이가 낡은의복에 죽장 하나를 쥐고 마치 저승길을 가듯 금강산에 오른다.금강산의 사계와 옷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총각,벽계수,지족선사,서화담,이사종 등과의 인연이 펼쳐진다. 마지막 대미에서 처녀 중년 노년 3명의 황진이는 함께 창하고 춤추며 죽어간다.연출자 정한룡씨는 “스토리보다는 한국적 형식미와 소리의 예술성을 살려 황진이의 바람같은 삶을 담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엄마(김현묵 작,채윤일 연출)=흔히 패륜아,폭군으로 알려진 인간 연산군을 새롭게 조명해본 무대.과거 연산군을 다룬 연극들이 대부분 그의 파행적인 패륜행각에 초첨을 맞춘 반면 이 작품은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심리학적 측면에서 접근한다.특히 연산이 어렸을 때 아버지인 성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그리움과 모성결핍,어머니를 죽인 데 가담한 자들에 대한증오 등이 그의 패륜적 행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출자 채윤일은 “그동안 연산의 생애를 조명한 작품은많았으나 대부분 연산의 패륜적 행각에 초첨을 맞췄지,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드물었다”며 “연산의 행동의 모태가 됐던 심리적 기제에 초첨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시골선비 조남명(이윤택 작·연출)=목숨을 걸고 ‘왕후는 궁정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임금은 고아일 뿐’이란 상소문을 올린 재야 선비 남명 조식의 무대.한국의 전통지식인이었던 선비의 실체를 통해 정치적 혼돈과 지식인의 위기를 겪고있는 지금 한국 지식인의 방향을 제시하는 무대다.친인척과 주위 척신들에 의해 왕권이 흔들리고 거듭되는 당쟁과 사화로 정치적 혼돈이 극에 달했던 이조 중기 명종조의시기를 혼란스런 지금의 우리사회와 연결하는 게 특징이다. 전통 지식인이었던 선비문화가 창출했던 시조 등 소리양식과 양반춤·택견 등 풍류도의 중심을 이루었던 몸짓을 공연양식으로 재창출해낸다. 김성호기자 kimus@
  • 후속 당정개편 6인 프로필

    ◇ 김명섭 사무총장. 대한약사회장 출신의 3선 의원으로 조직의 분위기를 중시하는 ‘화합형’.한나라당 김기배(金杞培) 사무총장과는 30년 지기. 신한국당에서 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철새 시비’에휘말리기도 했으나 지난해 4·13총선에서 야당 후보의 도전을 뿌리쳤다.부인 안정자씨(59)와 3남. ▲서울(62) ▲중앙대 약대 ▲구주제약 대표 ▲민주당 제3정조위원장 ▲국회 정보위원장. ◇ 강현욱 정책위의장. 화려한 경력의 정통 경제관료 출신 재선의원.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바 있어 여야 정책위의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 됐다. 경제관료의 선망의 대상인 재무부 이재국장과 경제기획원예산실장을 모두 거친 뒤 농림수산부,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부인 박선순씨(60)와 3녀. ▲전북 군산(63) ▲서울대외교학과 ▲전북도지사 ▲동력자원부 차관 ▲경제기획원차관 ▲농림수산부장관 ▲환경부장관 ▲15,16대 의원. ◇ 김성순 자방자치위원장. 민선 서울 송파구청장을 두차례 역임하고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협의회 공동의장을 지낸 지방행정전문가.매사에 성실하고 꼼꼼한 업무처리가 장점이나,소신이 너무 뚜렷한 나머지 ‘다소 튄다’는 지적도 있다.‘코뿔소의 눈물’ 등 시집을 펴낸 문인. 부인구문숙씨(59)와 2남1녀. ▲서울(61) ▲단국대 정외과 ▲한양대 행정학 박사 ▲서울시청 보건사회국장 ▲송파구청장▲당 제3정조위원장. ◇ 심재권 총재 비서실장. 서울상대 재학시절부터 유신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등 민주화에 온 몸을 바쳐온 재야 운동권의 대부. 지난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때 긴급조치 위반으로 퇴학당한 뒤 73년 유신반대시위 주동자로 10년간 수배를받았다.선비형 풍모에 침착한 언행으로 신망이 높다.부인정명숙씨(45)와 1남. ▲전북 삼례(55) ▲서울상대(제적)▲호주 멜버른 모나시대 정치학 박사 ▲당 시민사회특위위원장. ◇ 신광옥 법무차관. 호방한 성격으로 각계에 지인이 많다. 서울지검 2차장 때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사고 관련 수사를 지휘했다.92년남북고위급회담 때는 정치분과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법무부 특수법령과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맡았다.부인김복임(金福任·56)씨와 2남1녀. ▲광주(58) ▲고려대 법대 ▲사시12회 ▲서울지검2차장 ▲법무부기획관리실장 ▲대구지검장 ▲대검중수부장 ▲청와대 민정수석. ◇ 박준영 국정홍보처장. 겉으론 부드러워 보이나 소신과 원칙이 확고한 외유내강형이다.80년 7월 신군부의 언론계 숙정으로 해직된 뒤 한때 대우그룹에서 일하기도 했으며,성균관대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딸 정도로 학구파다. 골프는 싱글 수준.부인 최수복(崔秀福·51)씨와 3녀. ▲전남영암(55) ▲성균관대 정치학과 ▲중앙일보 뉴욕특파원·정치2부장·편집부국장 ▲국내언론비서관 ▲청와대 공보수석.
  • 이민우 SBS ‘여인천하’ 합류

    탤런트 이민우가 다음달 8일부터 SBS ‘여인천하’에 합류한다.이민우가 연기할 임백령은 시문과 경학에 능한 선비로 옥매향(박주미)과 사랑하는 사이다. 정치적으로는 윤원형(이덕화)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훗날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 학술원 회원 윤천주박사 별세

    문교부 장관과 서울대 총장 등을 지낸 학술원 회원 윤천주(尹天柱) 박사가 8일 오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80세.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윤 박사는 해방전 일본 동경대를 중퇴하고 4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이듬해부터 고려대 정경대 교수로 재직했다.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당시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후 64년 문교부장관,제7대 국회의원(전국구),73년 부산대 총장,75년 서울대 총장을 거쳐 78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학계와 교육계에 기여한 공로로 62년 서울시 문화상,76년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각각 받았으며 ‘선비와 관료는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신조로 지난 40년간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채 한옥에서 살아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희(李貞姬·75)여사와 장남 대근(大根·동부제강 사장),차남 태근(台根·사조 아메리카 사장)씨등 2남 2녀.한나라당 주진우(朱鎭旴)의원과 외교안보연구원 이서항(李瑞恒) 교수가 사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발인(장례미사)은 12일 오전 9시 서울돈암동 천주교회.(02)760-2011.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9)월북작가 김남천

    편지를 잡문 차원에서 본격적인 문학 토론의 마당으로 격조있게 끌어올린 사람은 김남천(金南天,본명 孝植·1911∼?)이다.평남 성천군청에 근무했던 아버지나,일본 유학중 결혼하게 된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가 성천 군수였다는 사실은 김남천의 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육중한 몸매에 미남이기도 했던 그는 일본 호세이(法政)대 시절부터 좌익운동에 투신,당대 운동권의 주역 임화,최승희의 남편 안막 등과 도쿄에서 카프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약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다.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나 임화와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카프 후반기를 제압하는 주역으로,비단 문학활동만이 아니라 평양고무공장 파업(1930년)에 참여하는 등 현장성 강한 운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1931년 8월)때 2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33년초 병보석으로 출옥하나 두 딸을 남겨둔 채 아내가죽어 조신하던 터라 이듬해 카프 제2차 검거 때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1935년 평양에서 상경한 그는 임화,김기진과함께 경기도 경무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여,10년에 걸친한국문학사에서 카프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이 사실 때문에 이들 셋은 두고두고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여운형이 발행인이었던 조선중앙일보(1933년 2월 창간)에입사했던 그는 근대 민족언론사의 획을 그었던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베를린 올림픽(1936년 8월1일)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을 국내에 처음소개한 것은 8월 25일자 동아일보였고,이 사건으로 사회부장이었던 작가 현진건이 언론계를 떠난 이야기는 다 아는 사실이다.신문사 끼리의 경쟁심리 때문에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를 없애고는 그 위에다 희미한태극까지 부각시켜 자진 휴간(9월5일)을 거쳐 아예 폐간되었다.바로 김남천의 실직 사연인즉슨 이러하다.이즈음 그는 창작과 비평의 양수잡이로 맹활약하면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내막이 담겨있다. 그는 최정희의 소설 ‘흉가’에 대하여 월평 ‘여류작가의난관과 ‘흉가’ 검토의 중점’(조선일보 1937년 4월8일)에서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가하고 있다.당시 김남천의 태도에 대해서는 출옥후 이미 전향했다는 관점과,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고수했다는 주장이 다 있는데,이 편지로 미뤄볼 때 후자 쪽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글이다.김남천의 비평활동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은 많았는데,편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한 건 극작가 김진수(金鎭壽.1909∼1966년)였다.평남 중화군 출신인 그는 릿교(立敎)대학 졸업 후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延吉縣) 용정가(龍井街) 은진(恩眞)국민고등학교에근무(1938∼45년)했다.1920년 캐나다인 부두일(富斗一)이 창립한 이 학교는 송몽규 문익환 윤동주가 다녔던,민족의식이강한 명문교인데 1946년 ‘룡정중학’으로 병합되어 오늘날중국 동북지역의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그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지는 바로 이 학교 공문서 서식용지이며,내용은 김남천의 평문 ‘동시대인의 거리감-9월 창작평’을 화두로 삼는다.최정희의 ‘지맥(地脈)’을 언급한이 평문이 김진수에게는 무척 못 마땅했었던 것으로 썼지만속내는자신의 분풀이가 더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글을 쓴 날자가 9월28일,책방에서 ‘문장’지를 샀다면서 그는 김남천을 한껏 물어뜯는다.누가 읽어도 편견과 속좁음이 느껴지는 이 글을 왜 썼을까.김진수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황순원등과 학생예술좌를 창립(1935년),연극활동을 했는데,문단활동은 극예술연구회(1931년 김진섭 유치진 이헌구 등이 창립) 공모에서 장막극 ‘길’이 당선(1936년)되고서였다.그가 단막극 ‘향연’을 ‘조광’에 발표한 것은 1938년 11월호였는데,김남천은 발 빠르게 조선일보 창작평 ‘미성년의 문학-김진수와 권명수’(1938년 11월11일)에서 “극연(劇硏) 당선작가(불행히 나는 당선작을 읽지 못했다)김진수씨의 희곡 ‘향연’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분이 미혼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는 서두로 시작하여 그리 탐탁찮은 평을 가해댔다. 김남천에 대한 유감은 아마 이때부터 똬리를 튼 것 같다. 불만은 또 있다.김진수는 애시당초 문학에서 사회니,민족이니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김진수의 울분 속에는 나름대로의 심미안이 탄탄하게 드러난다.작가 최명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바로 김진수의 미학적 체질을 엿볼 수있는 대목이다.친일작가 장혁주와 최대의 친일평론가 김문집은 긍정하면서 김남천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비꼰 김진수가 8·15 후에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는 물으나마나다.“유치진과 더불어 해방 이후부터 50년대 희곡계의 주도적 세력이었던 보수주의적 극작가들의 보편적인 유형”(박명진 ‘한국희곡 이데올로기’)이었다는 게 정평이다. 김진수에게 그렇게도 못 마땅했던 김남천은 8·15 후 임화와 함께 화려하게 재기,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월북,남로계의 몰락으로 남북한 문학사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버린 별이 되었다.통일은 아마 이들의 복권과 더불어 다가 올것이다.역사는 어떤 탄압으로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을 중퇴한 정비석(1911∼1991년)이 ‘성황당’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1937년)되어 상경을 꿈꾸다가 매일신보 기자가 된 것이 1941년 10월이니,그가 최정희의 소설 ‘인맥’(1940년 4월)을읽고 감동하여 보낸 편지는 이즈음의 것이다.그가 상경 직전 있었던 곳은 평북 용천군.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백천(白川)온천을경영하며 많은 문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던 장만영(1914∼1975년)은 뭔가 최정희와 토라짐 같은 게 내비치는 사연을 담고 있다.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시라. 이렇게 한쪽에서는 싸우며 고뇌하는 다른 한쪽에서는 그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또 어느 다른 곳에서는 친일에 열을 올려 그 대가로 호사를 누리는가 하면 어느 곳에서는 유유자적 즐기고 있는 속에서 역사는 흐른다.이럴 때대체 남도출신 문학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을까.김동리(金東里,본명 始鍾·1913∼1995년)는 이 무렵 참담한 심경으로 경신학교에다 휴학계를 내고 형 범부(凡父,1897∼1966년)가 살던 부산으로 내려갔다.동양사상의 대가인 이 당대의 수재이자 기인인 범부가 어렵사리 꾸려가는 살림살이에 얹히게 된 동리는 영도다리에 떨어져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으나,어찌 연이 닿아 형이 은신처로 삼았던 경남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거처를옮긴 게 1935년이었다.신춘문예 당선상금을 밑천 삼아 창작에 몰두하겠다는 결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17대손인 이들 형제의 성공담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없지 않다.무오사화에 얽혀 부관참시형을 당한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은 그 화를 피하여 월성군 서면 계림골로 숨어들어 정쟁을 피하곤 했다.이런 문중일수록 풍수지리에 밝아 김동리의 할아버지도 선산을 보유했는데,한 권세가가 그 터에다 묘를 쓰자 그는 겁도 없이 그걸 파헤쳐 버렸다고 전한다.권세가는 할아버지를 귀양보냈는데 돌아와서는또 그 권세가의 무덤을 파헤쳐 다시 귀양,또 귀향하여 파헤치기를 세 번 되풀이하자 세도가의 기가 꺾여 포기했다는 전설 아닌 사실이 전한다.그 할아버지의 본댁은 이 와중에서자살해 버렸고 재혼하여 얻은 아들이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壬守)이다.권력의 피해를 입으면 이를 피하거나 동경하거나 혹은 도전한다.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겸하기도 한다.김동리 일가가 지녔던 이런 가풍은 그의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샤머니즘적 인습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로 입문한 것은 어머니였고,그녀의 영향으로 동리는 경주 제일교회 부속학교를나와 대구 계성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의 경신으로 전학했지만 중퇴했다. 다솔사에서 이내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김동리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약간은 들떠서 상경하나 이 시골뜨기 신인에게 인정을 베풀기에는 당시 경성(京城,현 서울)문단은 너무 재재다사(才才多士)에다 각박했다.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료인 서정주와 어울리면서 울분을달래던 그는 이듬해에 다솔사가 세운 광명학원 교사로 내려가게 된다.처음에는 다솔사에 기거하며 광명학원까지 걸어다니던 김동리는 그 지방의 몰락 토호집에 하숙하다가 그 집 딸 김월계와 결혼(1938년),학교 부근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때 그는 쇠약과 우울증으로 수필 한 편도 쓸 수 없었던 지경인데도 선비의 후예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큰 불평이 있더라도 내 자신의 신념이,일테면 천지의 정기(正氣)와 통하는 것이라고 철칙같이 믿고 있으니까,그른 것은 현실의 그것이요,그 그른 현실은 천지의약속에 따라 시정될 것이라고,이건 ‘만만디’식이라고 웃으실는지 모르지만 여기엔 조곰도 독기(毒氣)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말하자면 결코 염세자(厭世者)도 아니겠습니다.”이 편지들은 대략 1940년부터 1943년 그가 징용을 피해 사천읍에서 양곡조합 촉탁이 되기 이전에 보낸 것들인데,입장이달랐던 선배에게 꺼내기 어려운 화두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이만큼한 절조 위에서라야 순수문학은 제 자리를 찾을 수있을 터이다.그의 발신지 주소는 정확히 ‘사천군 곤명(昆明)면 원전(院田)' 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빌딩주차장 야간개방때 시설비 지원·유료화 혜택

    밤시간대에 활용도가 낮은 대형시설물 부설주차장을 일반에 개방하는 시설주들에게 시설비 지원 및 유료운영 혜택등 각종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서울시는 주택가 대형빌딩의 부설주차장을 지역주민들이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같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우선 부설주차장을 야간에 개방하는 시설주에 대해서는월 2만원 수준의 주차요금을 받아 주차장 관리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특히 주차장 야간개방에 필요한 시설개선비로 최고 200만원까지 지원하고 부설주차장의 50% 이상,또는 10대 이상규모로 주차장을 개방할 경우 교통유발부담금을 20% 감면해주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대한광장] 착한 말과 착한 정치

    조선 중기의 명재상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은 사망 직전,“지금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만들고있는데 이는 나중에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라는 유차(遺箚)를 올렸다.그러자 당시 많은 사대부들을 거느렸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자신을 겨냥한 말로 짐작하고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는 말이 착한 법인데이준경은 그 말이 악합니다”라고 반박했고,그를 따르던 관료들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그 4년후 실제로 붕당이 생기자 이이는 자신의 통찰력 부족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평생을 당론 조제에 힘썼다.이준경이 죽음을 앞두고 나라를 걱정하는 착한 말을 했다면 이이 또한 자신의 잘못을 겸허하게 반성하는 착한 정치로 받은 것이다. 옛날 어린이들을 가르치던 소학(小學)에는 가언(嘉言)이란항목이 있었다. 아름다운 말이란 뜻의 가언은 다름아닌 선언(善言),즉 착한 말을 뜻했다.착한 말로 가득찬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란 생각이다.율곡이 ‘착한 말’ 운운하며 비판한 것도 정치는 착한 말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는 ‘내 사전에 착한 말은 없다’는식으로 악한 말만 난무해 듣는 국민들을 짜증나게 한다.그리고 자신은 억울하다며 그 책임을 항상 상대방에게 돌린다.그러나 그 악한 말의 배경에 권력욕이 있다는 것쯤이야 누가 모르겠는가? 조선 중기의 유신(儒臣)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윤원형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에서 긴 유배생활을 보냈다.그러나 이언적이 유배지의 책상 위에 써놓은 말은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아니었다. “나는 날마다 세번 내 자신을 반성한다.하늘을 섬기는 데미진함이 있었는가? 임금과 어버이를 위한 정성에 부족함이있었는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 미진함이 있었는가?” 특히 세번째 것은 옛 선비들이 인생의 목표로 삼을 정도로중요시한 것이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조선 후기의 유신 백호(白湖) 윤휴가 대학지도(大學之道)에서 “마음이 바르면몸이 닦여지고…천자에서 서인까지 모두가 그 근본은 자기몸을 닦는 일이다”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옛 선비들의 인생의 목표는 권력이 아니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몸을 닦는 것(修身)이었다.권력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 점은 무장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목숨을 다해 봉사할 것이요,쓰이지 않으면 들에 나가 농사를 지으면 족할 것이다.권력과 귀함을 아름답게 여기거나 한때의 영화를 누리려 하는것을 나는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이언적도 이순신도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건만 오늘날은 입만 열면 악한 말을 쏟아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정치인들 투성이라서 일반 국민들도 은연중에 본받아 인간세상이 금수의 세상으로 변해 이민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느는것이다.이런 점에서 최근 법원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한 정당 대변인의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것은정치에 악한 말을 추방하고 착한 말을 복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바람직한 판결이다.이 판결이 악한 말의 정치,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될 것을 바라는것은 현 정치권의 실정을 볼 때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라는점은 잘알지만. 이덕일 역사평론가
  • 2001 길섶에서/ 銓官

    조선조 때는 인사를 다루는 이조(吏朝)의 벼슬을 전관(銓官)이라 했다.저울대가 수평을 유지하듯이 한쪽으로 기울지 말라는 뜻이다.그러나 이는 공리공론일 뿐 실제는 당쟁에서 승리한 쪽이 맨 먼저 챙기는 자리가 요즈음 행자부인사과장쯤 되는 이조 정랑이었다.그래야 뜻대로 논공행상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조선조 최초의 붕당인 동인과 서인도 김효원(金孝元·동인)과 심의겸(沈義謙·서인)의 이조 정랑 싸움이 발단이었던 것을 보면 ‘기울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은 이상일 뿐이었던 것같다.인사권 넘겨주는 것을 칼자루 넘겨주는 것으로 생각했으니 그 자리를 놓고 대를 이어 싸운 것 아닌가.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이면서도 잘해도 욕먹기 쉽고 잘못하면 두고두고 원망듣는 자리가 인사직이다.그래 그런지행자부가 인사계장 직위공모라는 모처럼 신선한 발상을 했는데 별로 지원자가 없어 싱겁게 끝났다나.하긴 옛날에도진짜 선비 집안에서는 “출사(出仕)해도 전관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니 그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짐작이 간다. 김재성논설위원
  • [민선2기 3년 단체장에 듣는다] 김우중 동작구청장

    김우중(金禹仲) 동작구청장은 실물경제에 밝은 기업가 출신이다.그러나 분위기는 의외로 선비에 가깝다.말씨 등 풍모가 그렇고 구정 스타일도 그렇다. 직원들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알토란같은 결실을 수확하는 구정을 보면 ‘민선 구정은 구청장을 닮는다’는 말이 실감난다”고 말한다. 주민들 역시 “유난히 달동네가 많았던 옛날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동작구는 민선 자치의 바람직한 기대치에 다가서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김 구청장도“지역발전은 물론 복지와 문화 측면에서 더이상 옛날의 동작이 아니다”고 말한다. 사실 동작구는 행정여건이 좋은 곳은 아니다.구역(區域)의 요지를 현충원이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80년대에 여의도가 뜨면서 동작지역은 그 그늘에서 오랫동안 침체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민선 자치와 함께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사당권 등 7개 지역의 지구단위계획과 수산시장이 포함된 노량진권 개발계획은 동작의 지도를 바꿀 역사(役事)”라는게 김 구청장의 설명이다. 복지 분야의 성과도 두드러졌다.99년 전국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자원봉사은행을 설립,현재 1만1,000여명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베푸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면 ‘따뜻한 겨울보내기사업’을 내실화해 서울시 구정평가에서 3년 연속 복지행정 최우수구로 선정됐다. 특히 경로효친에 대한 김 구청장의 열의는 각별하다.비록재정은 열악하지만 ‘노인이 편한 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지론에 걸맞게 노인과 여성,장애인 복지에 최선을 다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런가 하면 구청장이 현장에 나서 주민들과 현안을 논의하는 ‘현장민원센터’와 관내 20개 동에 설치된 주민자치위원회 등은 ‘주민이 가꾸는 구정’의 본보기로 손꼽히는시책들이다. 동작의 문화적 저력 역시 눈여겨 볼 부분.동작문화원의 경우 지난해 정부로부터 전국 최우수문화원으로 선정돼 개관3년만에 ‘문화 동작’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이에 고무돼99년 흑석체육센터에 이어 내년에는 사당동 문화회관과 신대방동 구민체육센터가 문을 연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도 김 구청장의 포부에는 턱없이 못미친다.“올해 7억∼8억,4∼5년 후에는 연간 40억∼50억원의흑자경영이 가능한 구립 시설관리공단 등 적극적인 경영행정을 통해 재정자립도를 개선하면 구정의 면모가 달라질 것”이라는게 그의 설명이다. “구청장이라는 직책은 돈이나 권력,정치적 발판이 아니라 명예로운 삶을 위한 일터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훗날 주민들로부터 ‘열심히 일해 동작 발전에 공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심재억기자 jeshim@. ■김우중 동작구청장 “관용차 공무외 사용도 안되죠”. “구청장 관용차를 개인 용무로 사용할 수는 없지요.공무가 아니면 제 차를 타는 것이 저를 격려해 주는 주민들에대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김우중 구청장은 퇴근해 구청을 벗어나면 관용차를 타지않는 것으로 유명하다.취임후 줄곧 그래왔다. 주변에서는 “기름만이라도 넣어 쓰시라”고 권했으나 여지껏 구청 돈으로 자기 차에 기름 한방울 넣지 않았다.“구청장이 그만한 모범도 보이지 않고 어떻게 주민들에게 ‘함께 구정을일구자’고 말하겠느냐”는 그다. 처음엔 주변에서 더 불편해 했다.퇴근에 맞춰 매번 차를갈아타는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의 ‘이유있는 고집’은 주변의 생각을 모두 바꿔 놓았다. 그래선지 지금은 그의 지론에 모두들 수긍한다. 그로서는 얼굴도 세우고 위세의 기분까지 느낄 수 있는 ‘완장’ 하나를 포기한 셈이었으나 결코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 때문에 과거 우리 공직사회가 경쟁력을 잃고 과시 위주의 사도(邪道)로 빠졌다”는 아픈 지적을빠뜨리지 않았다. 지금도 악천후가 아니면 걸어서 출근하며 주민들의 안색도 살피고 주민들의 생활현장을 직접 점검하는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로,절대 내세울 생각이 없다”며 “구청장으로봉직하는 마지막 날까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각오를 거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심재억기자
  • [김삼웅 칼럼] 최익현과 ‘얼빠진’ 지식인들

    충남 청양에 모덕사(慕德寺)란 사당이 있다.해방후 환국한 백범이 임정요인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고유제(還國告由祭)를 지낸 곳이다. 고유제란 임정주석이 휘하 요인들과 함께 ‘정부가 조국땅에 돌아왔음’을 아뢰는 의식을 말한다.6·25전쟁후 피란지에서 서울로 환도한 국회의장 신익희도 국회의원들과모덕사를 찾아 ‘환도고유제’를 지냈다. 모덕사가 어떤 곳이기에 나라를 되찾은 임정 주석과 서울을 수복한 국회의장이 고유제를 지냈을까.“대한민국 28년(1947년)4월23일 후생 김구는 삼가 맑고 깨끗한 술을 따르고 향을 지피어 제사를 올리며 아뢰오니,춘추의 대의시며일월같이 높은 충절이었습니다”로 시작된 백범의 ‘환국고유제문’을 더 들어보자. “외로운 소자(小子)는 어렸을 때 스승의 가르침에 선생의 말씀을 받잡고 내내 잊지 못하였습니다.나라잃고 안팎의 난리속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선생의 위대한훈업에 격려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선생이시어!이제야 저의 힘을 다하여 산넘고 물건너서 여기선생의봉롱(封瓏)가까이 왔사옵고 산같이 높으신 뜻을 받들고 조촐한 차림으로 모시옵니다” ‘고유제문’의 주인공은 면암(勉庵) 최익현이다.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을사조약후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킨 의병대장,일본군에 체포돼 쓰시마(대마도)에 끌려가서도 단식으로 저항했던 지사,순국 뒤에 돌아와 묻힌 곳에 세운 사당이 바로 모덕사이다. 국적(國賊)을 포살한 안중근의사가 최후진술에서 “실로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이다”,매천 황현은 “재상과 유림이 모두 한몸에 맺혀지니 해동(海東)천년에 공의 말만 있으리다”,중국의 원세개는 “굴원(屈原)과 개자추(介子推)를 합한 절의(節義)”라고 격찬했던 분이 면암선생 아닌가. 한말과 왜정시대에 자진(自盡)하거나 창의(倡義)한 분이많거늘 유독 면암의 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낸 까닭은 을사조약 후 전국 의병장의 9할이 그의 문도 출신이란 이유다. 이는 곧 “면암이 의병장을 낳고 의병장은 독립군을 낳고독립군은 항일투사를 낳고…” 독립운동사의 요람인 셈이다. 국민의 기억에서 멀어진 모덕사의 사연을 꺼낸 것은 면암을 지식인의 사표처럼 받들어온 우리 근대 지성 풍토가 너무나 크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과거 행적으로 보아 ‘사회원로’로 대접받기 어려운 사람들까지 포함된 지식인들이 급조단체를 만들고 “옛 역사의 ‘낡은장부’를 뒤적이면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운운하는시국성명을 발표했다.매명주의 속성의 지식인들은 탈세언론의 비호에 나서고,평양 8·15통일축전에 참석했던 또다른 지식인들은 돌출행위로 남남갈등을 촉발시킨다.이래저래 지금‘얼빠진 지식인’의 공해가 심각하다. 족벌언론의 탈세를 꾸짖고 색깔론 따위의 시대착오를 질책하고 남북화해를 기피하는 북측의 태도를 비판하면서,사회정의와 민족화합을 주도하는 것이 ‘원로’나 지식인의도리이고 책무이다.친일도,헌정파괴도,탈세도,곡필도,용공음해도 묻어두자는 무책임한 반지성의 목소리야말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칼춤’이 아닐까. 진실을 밝히고 양심세력을 옹호하고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일진대 칼 뺄 때와 붓 잡을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선악시비도 가리지 못하면서,먹구름 덮이면 단시론(單是論),햇볕들면 양비론,안개끼면 양시론을 펴는 허명의 군상들이 날뛴다.면암의 선비 정신을 아는가 모르는가. 위당 정인보는 왜정시대 다수 지식인들의 정신상태를 ‘얼빠진 상태’라 규정하면서 “얼을 남이 빼앗아가는 것이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잃는 것이라”지적했다. 그렇게 ‘얼빠진’지식인의 전통이 지금도 활개치는가. 김삼웅 주필 kimsu@
  • 서울공연예술제 10월4일 팡파르

    서울을 대표하는 국제수준의 종합 공연예술축제를 기치로내걸고 서울연극제와 서울무용제를 통합해 출범한 서울공연예술제 첫 행사가 10월4일부터 11월17일까지 세종문화회관,국립극장,문예회관 및 대학로 일대 30여개 공연장에서 무용64편,연극 48편이 참가해 열린다. 통합 원년인 올해는 그동안 행사 일정과 방식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다 최근 행사가 확정된 만큼 촉박한 일정 등을 감안,일단 서울연극제와 서울무용제를 결합한 수준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공연예술제 집행위원회(위원장 조흥동)에 따르면 무용부문의 경우 기존 서울무용제의 경연제 성격을 줄이는 대신축제 성격을 강화했다.경연참가 단체가 4개로 준 반면 지난해 우수작품 초청공연 6편,갈라초청공연 10편,젊은 안무가를 위한 열린 무대 출품작 7편이 각각 참가하도록 정했다. 이에따라 발레블랑,정진한,춤다솜,현대무용 탐이 2개의 우수안무가상과 6개의 무용연기상을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됐으며 지난해 우수작품으로는 이영희,우현영,김긍수가 뽑혔다. 갈라초청공연은 축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자리.서울현대무용단,이미영 무용단,푸름현대무용단 등이 각 단체의 하일라이트를 선보이며 지제욱,박은성 등 젊은무용가들의 무대도 마련된다. 대중적인 행사가 삽입된 것도 이채로운 변화.댄스스포츠와재즈댄스를 공연형태로 바꾼 ‘대중춤 페스티벌’을 비롯해컴퓨터 등 첨단기기를 춤에 연결한 ‘춤과 테크놀로지’,뮤지컬에 등장하는 다양한 춤을 즐길 수 있는 ‘뮤지컬 속의춤’도 펼쳐진다. 재야 무용가 강남기,허순선,양태옥 등이 꾸미는 ‘우리 옛춤 한마당’과 역대 수상작들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나 공연으로 볼 수 있는 ‘역대 수상작 공연’도 기획됐다. 연극 부문에선 공식초청작 9편을 비롯해 공식참가작 15편,해외초청작 3편,자유참가작 21편이 참가한다.공식참가작에는 극단 갖가지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극단 미연의 ‘달님은 이쁘기도 하셔라’,실험극장의 ‘브레히트 죽이기’,극단 애플의 ‘유리가면’,연희단거리패의 ‘시골선비 조남명’이 뽑혔다. 종전엔 창작극에 국한했던 참가자격이 번역.번안극및 뮤지컬로 확대된 것도 공연제의 또다른 특징이다.해외초청작으로는 영국 가수 바브 정거의 콘서트,불가리아 크레도 극단의‘외투’,프랑스 거리극단의 ‘바로크 퍼레이드’가 선정됐다. 페스티벌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폐지된 경연제를 대신해 시상제를 도입,총 1억원의 상금을 놓고 부문별 시상여부와 시상내역을 사후 선정해 시상키로 한 점도 눈길을 끈다. 행사기간중 문예회관 옆에 설치된 임시 야외무대에서 아마추어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공연이 매일 오후2시,6시 두차례 계속되며 ‘대학로 옷 입히기’‘무지개 쇼’와 서울시내무용·연극과 학생들의 퍼포먼스 등 일반 관객참여를 위한다양한 부대행사도 마련된다. 김성호기자 kimus@
  • [전통주 이야기] (19)전남 담양 추성주

    신선주로 불리는 추성주(秋成酒).찹쌀과 한약재를 함께 숙성시켜 전통기법으로 빚어낸 증류주다. 가사(歌辭)문학의 대가인 면앙 송순(1493∼1583)의 과거합격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잔칫날.전국에서 모여든 선비들이3일동안 맘놓고 마셨으나 숙취가 없어 선비들이 극찬했던것으로 문헌에 전해져 내려온다. 추성주는 고려 문종(1060년) 때 담양 금성산성 안에 있는연동사에서 스님이 공양 밥을 약초에 섞어 나뒀더니 발효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술이름은 통일신라때 전남 담양군이추성으로 불린 데서 붙여졌다. 89년 담양군 용면 두장리 양대수(梁大洙·46)씨가 어렵사리 이 전통주를 재현했다.92년 민속주로 지정됐고 지난해 12월 양씨는 한국전통식품 명인(22호)이 됐다. 양씨는 “집안에 내려오던 가양주 비법을 어깨 너머로 배우고 담양골 용면 일대의 구전을 토대로 추성주를 재현했다”고 말한다. 만드는 방법은 우선 찹쌀과 멥쌀을 쪄 만든 고두밥에 엿기름과 물을 넣고 발효시킨다.인근 추월산에서 채취한 두충·구기자·음양곽·오미자 등 토속 한약재13가지를 넣고 10일동안 숙성한다.온도 65도에서 알코올만을 뽑아낸 뒤 40도로 식혔다가 다시 숙성하는 과정에서 한약재 6가지를 추가한다.마지막으로 한약재 찌꺼기를 걸러내고 대나무 숯으로여과해 100일이상 재워두면 된다. 발효주가 아닌 증류주로 오래오래 묻어 둘수록 향이 배어나 술맛이 감겨든다.혈액순환과 신경통에 좋고 강장 효과가뛰어나다. 부드러운 한약 향과 순한 맛에 덜컥덜컥 마시다간 취기가 빠르게 올라온다.알콜도수 25도지만 숙취가 오래가지 않고 뒷맛이 담백하며 속쓰림이 덜하다. 육각형 도자기에 든 400㎖ 1병이 1만3,000원,700㎖(대나무형) 2만2,000원.문의(061) 383-3011. ■조보훈 전남 정무부지사 맛평가. “상당히 독한 술인 데도 숙취가 지속되지 않고 자고나도머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애주가로 이름난 조보훈(趙寶勳) 전남도 정무부지사는 추성주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10여년 전 담양 추월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친구들과반주로 한 잔 술맛을 보고 은은한 향과 맛에 반했다고 한다.기회가 있을 때마다다른지역 인사들에게 ‘선물용’으로적극 추천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강장과 보신 효능이 있는 한약재를 엄선해 건강에도 좋고뒷맛도 깨끗하다는게 권주(勸酒)의 변이다.외국 위스키처럼오크통 맛이 나는 게 아니라 단맛, 쓴맛, 신맛 등 5가지 맛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있다고 조 부지사는 말한다. 담양 남기창기자 kcnam@
  • [50대 국가요직 탐구] (20)법무부 검찰국장

    ‘검찰국장을 잘못 임명하면 검찰의 3년 농사를 망친다’고 한다.법무부 검찰국장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단적으로보여주는 말이다.법무부와 검찰의 검사장급 30여자리 가운데서도 최고의 요직으로 꼽힌다. 검찰국장은 1,200명이 넘는 검사들의 인사권과 검찰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사정과 공안,일반 형사 범죄의 수사를 지휘하고 정보를 수집한다.사면·감형·복권 업무도 맡고 있다.검찰국장 아래에는 검찰 1∼4과장이 있다.그중에 검사 인사와 예산의 실무 담당자인 검찰 1과장은 ‘검찰의 황태자’로 불린다. 검찰국장을 거치면 출세길이 열린다.최경원(崔慶元) 현 법무부장관과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도 검찰국장 출신이다. 최장관은 99년 6월 차관으로 있다 사시 8회 동기생인 박순용(朴舜用)씨가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용퇴했다가 지난 5월 금의환향했다.90년대 이후 역대 검찰국장 13명 가운데 김종구(金鍾求)씨도 장관에,박종철(朴鍾喆)·김도언(金道彦)·박순용씨는 총장에 올랐다. 인사와 기획 분야의 요직인 검찰국장은 수사 쪽에서 핵심보직인 대검 중앙수사부장과 비교되기도 한다.두 자리를 다거친 사람은 드물다.사시 동기생의 선두주자인 검찰국장과중수부장은 인사 때가 되면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지검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 최근에는 ‘검찰국장→서울지검장’이라는 코스가 빗나가고 있다.인사 당시의 특별한 상황에 따른 차별 또는 역차별 때문이다.90년대 이후의 검찰국장 가운데 검찰국장에서 서울지검장으로 곧바로 영전한 사람은 김종구·최영광(崔永光)·최환(崔桓)씨 등 3명뿐이다.박종철·박순용씨는 대검 중앙수사부장으로 갔다가 서울지검장이 됐다. 김진세(金鎭世)·한부환(韓富煥)·김학재(金鶴在)씨 등도동기생이나 후배에게 서울지검장 자리를 양보하고 검찰국장에서 고검장으로 ‘떠밀린 승진’을 하거나 다른 자리로 옮긴 경우에 속한다.지난 5월 인사에서 서울지검장으로 거론되던 김학재 당시 검찰국장도 서울지검에 입성하지 못하고 대신 법무부차관으로 승진했다.신총장과 목포고 동문이라는 점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서울지검장은 사시 13회 동기생인김대웅(金大雄)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에게 돌아갔다. 사시 4회 동기생인 최영광(崔永光)씨와 김태정(金泰政)씨가 벌인 선의의 경쟁은 유명하다.최씨가 검찰 1과장이던 82년김씨는 중수부 3과장을 거쳐 1과장이 됐다.90년 서울지검에서 1차장과 2차장을 나란히 지낸 뒤 93년 최씨는 검찰국장에,김씨는 중수부장에 임명됐다.다음해 9월 서울지검장은 최씨가 차지했고 김씨는 부산지검장으로 전보됐다.그러나 97년 8월 김씨는 최씨를 제치고 검찰총장 임명돼 최후의 승리자가됐다. 90년대 이후 검찰국장 출신 가운데 현직에는 최장관과 신총장,한부환 대전고검장,김학재 차관,송광수 현국장이 남아있다. 한부환 대전고검장은 인사·기획과 특수수사 요직을 두루거쳤다.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나재사(才士)로 알려져 있다. 목포 출신인 김학재 차관은 과묵하지만 소신이 뚜렷한 ‘선비형’.상사에겐 직언을 서슴지 않지만 부하의 의견을 존중해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경남 마산 출신인 송광수 현 국장은 김차관과 사시 동기생으로 검찰 4·2·1과장을 차례로 거쳐 일찍부터 검찰국장감으로 꼽혔었다.기획력과 추진력을 겸비했다는 평이다.바둑실력이 아마추어 최강급이다. 손성진기자 sonsj@
  •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가장 한국적이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말에 박수를 치는 사람들에겐무척 반가울 책이 두 권 나왔다.토종 약초 전문가 최진규의 ‘약이 되는 우리 풀·꽃·나무(한문화)와 문화재 지킴이 손영학의 ‘한국인의 솜씨’(다 미디어 펴냄). 두 책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단순히 우리 것을 소재로 했기때문이 아니라 그 현장을 직접,발로 뛰면서 거둔 ‘수작업’이라는데 있다. ‘우리 풀…’은 ‘우리 시대의 약초꾼’인 지은이가 지난 30년 동안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빈 결실이다.지은이의말대로 “피의 반은 수액(樹液)”이 될 정도로 자연과 한몸이 되고 “산과 물은 함께 숨쉬었”던 기록들이다. 책은 질환·증상별로 효험이 좋은 약초들을 소개한다.미리 준비해 두면 좋은 응급약초를 일러주면서 일반 약초들을 채취해 다듬고 보관하는 요령 등을 담았다.약초를 다룬탓에 ‘딱딱하다’고 미리 고개저을 필요는 없다.약초에얽힌 이야기와 속담,지은이의 경험들을 양념으로 버물렀기에 재미도 곁들였다. 그 중엔 어느 의약책에도 등장하지않는 약초도 나온다. 해안이나 갯벌,염전 주위에 자라는 ‘무명의 풀’ 함초에게 ‘변비 고치는 천연 식물소금’이라는 제 얼굴을 찾아준다.봄에는 콩팥·간질환에,가을엔 심장병에 좋다고 세세하게 설명한다.이는 발로 캐지 않고서는 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식물 중에 약초 아닌 것이 없다”는 지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민간요법’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일듯.저자 자신이전문 연구기관에 성분분석을 의뢰했고,한의사들과 함께 임상실험을 하면서 과학성을 갖추려고 힘을 쏟았다. ‘한국인의 솜씨’도 ‘육성’의 면에선 ‘우리 풀’ 못지 않다.10여년 동안 전국을 돌며 현장답사한 땀이 배어있다. 선비들의 기개와 멋이 배어있는 사랑방과 그 속을 채우고있는 내부 장식물,여인네의 섬세한 숨결이 담긴 누비와이불·베개,반짇고리,혼례 때 쓰던 목기러기,시골 구석 처마에 걸려 있는 멍석 등 무심코 지나쳐왔던 옛 물건들에게애정의 숨결을 불어넣는다.잊혀지거나 죽어가는 ‘솜씨’ 하나하나가 살아난다.눈에 뭐가 씌면 객관성을 잃고 주관적 탐미론에 흐르기쉽다.지은이는 여기서 벗어나 있다.이는 사라지는 전통 놀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전통 놀이를살려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놀이학’의 대가인 네덜란드 석학 요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나 그 후속편인 프랑스의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의 담론에 기대 객관성을 갖춘다.뒷부분에 전국 박물관 주소와 소장품을 덧붙인 자상함도 돋보인다. 이종수기자
  • [김삼웅 칼럼] ‘한 말들이’ 정치인들의 비극

    공자와 자공(子貢)이 나눈 ‘정치인(선비)문답’은 생명력이 길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가 담겼기 때문이다. 사제간의문답을 풀어보자. 제자-어떤 사람을 정치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스승-언제나 수치심을 가지고 언행을 욕되게 하지않고 책임과 사명을 다하면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제자-그 다음 부류는 어떠합니까? 스승-일가친척에게 효자소리를 듣고 주변에서 정의롭다고칭찬받는 사람이다. 제자-그 다음은? 스승-말하면 반드시 실행하고 실행하면 성과를 받는 사람이지. 제자-오늘날 정치를 맡고있는 사람들은? 스승-아! 한 말들이밖에 안되는 작은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야 논할 바 못된다.([논어] 자로편) 정치가 표류한지 오래다. 나라 사정과 민생이 어려워도 정치는 자기들 ‘밥그릇’싸움뿐이다. 퍼담을 밥이라도 넉넉하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형편도 못된다. 수출이 막히고 내수도 어렵다. IMF의 여파가 경제를 주름잡고 남북관계는 소강상태가 장기화된다. 고이즈미 일본의 우경화가 날을 세우고 부시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애꿎은 한반도가 냉한풍이다. 우리는 흔히 지정학을 탓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거기서 내부투쟁을 벌인다. 외세에는 온유해도 동족끼리는치열하다. ***눈을 들어 주변을 보라 중국 사서(史書)에서 ‘동이(東夷)’로 불리는 한민족의 터전은 원래 요하 이동의 만주일대와 한반도가 그 중심인데,만주를 잃으면서 생각과 그릇이 쪼그라 들었다. 백산흑수(白山黑水)라 불리던 백두산과 흑룡강의 강역이 백두에서 한라로, 다시 설악에서 한라로 좁혀들더니 근년에는 지리산을 경계로 동서로 토막쳐서 ‘신후삼국시대’를 열려자 한다. 세계는 지금 이데올로기블록이 사라지고 경제연합체가 형성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미주자유무역협정(FTAA), 유럽연합(EU), 안데스공동체(ANCOM),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 2002년 초 출범예정)가 대표적이다. 다른나라끼리도 연합하거나 자유무역지대를 만드는데 우리는 핵분열을 거듭하니 어찌 개탄하지 않을까. 필부들도 해가 바뀌면 계획을 세우고 지난날을 돌이키는데 100년의 첫해를 보내면서도 묵은 날의 행태를 벗지 못하니어찌 개탄하지않을까. 대통령선거가 1년4개월이나 남았는데도 이미 대선정국에 들어선지 오래이다. 아니다. 대선이 끝난 다음날부터 ‘차기’가 논의되고 ‘차차기’가 운위되면서 매일 대권싸움으로 격돌하니, 만만한 것은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새우요, 코끼리싸움에 짓밟히는 민초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적어도 21세기 첫해인 올해만큼은 신세기의 비전을 준비하고, 그것이 너무 거창하다면 5년, 10년후의 국가문제를 계획하고 토론하는 정치의 모습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변화의 물결 외면하면 인류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종으로는생명공학, 횡으로는 세계화의 파고, 옆길에는 보수반동의 일본, 뒷길에는 기지개 켜는 메머드 중국이 다가온다. 북한은다시 커튼을 닫고 미국은 한반도에 현상고착의 말뚝을 박으려든다. 일본에 대비하고 중국을 연구하고 북한을 달래고 미국을 설득하면서 국력을 키우고 민생을 보살펴서 통일을 이뤄야 할일차적 책임은 정치인들의 몫이다. 고이즈미의 일본, 부시의 미국, 포스트 장쩌민의 중국을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일도 정파를 넘는 정치인의 몫이다. 영수회담이 예정대로 열려야 한다. 감정적인 한 두마디, 괴문서 한 두장에 정치판이 들끓는 ‘한 말들이’ 속좁은 그릇이 아니길 기대한다. 영수회담이 정치개혁의 시발점이 되도록, 영수들은 물론 여야의 책사들, 정치권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김삼웅 주필 kimsu@
  • 빈뇨증 ‘들락 날락’ ‘안절 부절’

    총각인 K씨(30)는 요즘 밤만 되면 괴롭다.잠자리에 누우면조금 있다가 소변이 자꾸 마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정작 화장실에 가면 소변은 조금밖에 나오지 않고 그것도 한참을 기다려야 쥐오줌 만큼 찔끔 나온다.그는 하루에 셀 수없을 정도로 화장실을 들락거린다.병은 아니겠지 하며 그동안 병원을 찾지 않았지만,주변의 권유로 얼마전 비뇨기과를 찾았다.진단결과는 전립선염에 의한 빈뇨였다. 48세의 주부 K씨 역시 평소 하루 10번 넘게 급히 소변을보러 간다.또 소변을 보고나서도 시원치 않아 항상 찜찜한느낌을 갖고 있다. 집에서는 어느 때라도 화장실에 갈 수 있지만 외출하면 불안한 마음에 어느 곳을 가든지 화장실 위치부터 알아본다. 친구들을 만나도 눈치가 보여,자연스레 외출을 꺼리게 됐다. ‘혹시 당신은 오줌을 너무 자주 누지 않습니까’ 정정윤 을지병원 비뇨기과 교수는 “배뇨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특히 빈뇨일 때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당황스럽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며 심각한 병이 생긴 것은 아닌 지 걱정하게 되지만 쉽사리 병원을찾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배뇨 횟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성인은 보통 깨어있는 동안 4∼6회,자는 동안 0∼1회 배뇨하는 것이 정상”이라면서 “이보다 자주 배뇨하면서 적은 양을 누는 것을빈뇨,특히 야간에 소변을 자주 적게 보는 것을 야간빈뇨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자주 소변을 보더라도 한번에 200∼300㏄의 정상적인 양을 배출하면 다뇨증이라고 한다”는 것이 그의 얘기이다. ◆원인=주명수 서울중앙병원 비뇨기과 교수는 “뇌졸중,뇌종양,파킨슨씨병,골반강 내의 수술 등으로 인한 신경계 이상이나 전립선 비대증,요도협착,급성방광염,요도염,질염,요로결석 등이 있는 경우 발생하지만 그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남자의 경우 특히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한 야간 빈뇨가 많이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수면중 오줌은 자기전 수분을 과도하게 섭취하거나 방광의 크기가 작거나 방광 염증,요붕증,울혈성 심부전등이 있는 경우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하영 한림의대 강동성심병원 비뇨기과 교수는 “카페인성분에 예민한 사람들은 카페인이 함유된 녹차,홍차,커피,콜라,사이다,박카스 등이 빈뇨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이를 마셔서는 안된다”면서 “산성 식품도 방광 자극을 일으켜 빈뇨증상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정교수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서도 심리적인 이유,불안감등으로 빈뇨 증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연령별 빈뇨증상과 치료=대한배뇨장애 및 요실금학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빈뇨 유병률은 남녀가 비슷하고 40대에 14.3%,50대에 15.6%,60대에 16.7%이며 70대가 되면 22.7%로 증가한다. 김 교수는 “빈뇨증상이 있으면 소변검사,방사선 촬영,방광 내시경 등으로 확인한다”면서 “방광염은 성생활이 왕성한 20,30대 여성에게서 가장 흔하다”고 밝혔다. 그는 “40세 이후 여성에게서는 출산으로 인해 방광을 받쳐주는 근육이 약해질 경우 뛰거나 웃거나 재채기를 해서복압(腹壓)이 올라갈 때 자기도 모르게 소변이 새는 복압성 요실금이 올 수 있다”면서 “복압성 요실금 환자 가운데절반쯤은 빈뇨증상이 동반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60세 이상의 여성은 노화 현상으로 방광이 예민해져 하루 밤에 서너 차례 소변을 보아야 하는 빈뇨 증상이 오기도 하는데 이 때는 약물치료를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20∼50세의 남성들에게는 만성 전립선염이나 전립선통이있을 때 흔히 빈뇨증상이 나타나며 약물요법,온열요법 등으로 치료하지만 재발될 가능성이 높다. 김 교수는 “50세 이상 남성은 반수 이상에서 전립선비대증이 온다”면서 “비대해진 전립선이 요도를 눌러 빈뇨뿐아니라 소변누기가 힘들어지고 소변줄기가 가늘어지며 심하면 소변을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이같은 경우에는 상태에 따라 약을 복용하거나 비대해진 전립선을 깍아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 유상덕기자 youni@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김동환 가족사

    한 여인이,생신을 보름 남짓 앞둔 91세의 한 여인이 1993년 3월 18일 세상을 떠났다.‘백구 신원혜지묘(白鷗 申元惠之墓)’라는 묘비명만으로는 이 여인의 죽음이 한국 문학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할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이름위에 있는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란 각자(刻字)를 보노라면 ‘아,파인의 본처가 그때까지 생존했더란 말인가’라는 자못 회고조의 감탄사가 나올 법하다.1903년 원산에서 태어난 신원혜가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블라디보스토크,간도,원산 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서사시 ‘국경의밤’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두 살 연상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한 건 1926년 3월 14일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3남 1녀를얻은 그녀는 1942년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남편의 관계가알려지자 시인의 “우유부단한 처신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 극심한 어머니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여관으로 잠시의 거처를 정하였다”고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68)은 회상한다.“그 후 어머니는 교회 일과 모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봉사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픈 상처를 홀로 달래고” 지냈는데,나중 동네 아낙들에게 “아무리 남편이 속을 썩이더라도 집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김영식,‘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조혼이 아닌 어엿한 신여성과 연애를 거쳐 사랑이 그득한결혼을 했던 파인의 예기치 못했던 탈선이 문단에서는 가십이었으나 그의 고향을 비롯한 애독자들로부터는 마침 휘몰아친 친일문학과 함께 따가운 매도의 대상이었다.어쩌면 이 두가지 탈선은 오히려 동시에 수행되면서 인간과 민족의존재론적 본질을 벗어나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파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은 정작 남편이 버린 여인 신원혜였다.아니,파인 조차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파인은 홀연히 귀가했다.피신 차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비록 짧았으나 단란했는데,이내 최정희의 자수 권유를 받고 나간(7.23) 뒤 그대로 납북,생사도 모르게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앓은 게 이 일가족이었다.가족이랬자 두 아들은 일찍세상을 떠나버려,셋째 영식과 딸 영주(英珠·63)뿐이었다. 영식은 서울 경복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통령 비서실,주불 한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았고,영주는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등단,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이 한많은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해 둔 유품 속에는파인의 사진과 애증이 교차하는 몇몇 증빙 서류들,그리고자신이 묻힐 묘소와 묘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살아서 쫓아냈던 지아비를 죽어서야 한 문패 안으로 맞은 것이다.보따리 속에 파인이 보낸 편지도 한 묶음 있었다.파인은 맨몸으로 집을 나갔으니 여러 유품들은 저절로 신원혜가 간직했을 터여서 여간 소중한 자료가 아니리라는 기대에 부푼다.신원혜는 파인에게 보냈던 기라성같은 문인들의 편지를 그 격변의 역사를 헤치면서 고이 간직해 왔었다.신혼초 서울의정동,다동을 거쳐 종로구 돈의동 74번지로 호적을 옮긴 뒤,적선동(1927.5),인사동(1930.7),견지동(1933.12),필운동(1935.10),옥인동(1936.11),통인동(1938.1),효자동(1940.2)을전전하다가 1941년 6월 12일 적선동 183번지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만주로부터 돌아온 피난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방세도 안받고 그대로 살게 했던 이창규씨가 어느날 정전(停電)이 되자 성냥불을 켜들고 초를 찾다가 넘어져 석유난로에 점화,순식간에 집이 불타 버렸다.바로 1946년 12월 12일 오후 7시쯤,파인의 유품이,그리고 그가 ‘낭자 신원혜’에게 보냈던 달콤한 연애편지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순간이다.일가는창성동 자교(紫橋)교회 목사 사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청운동(1948.5∼1953.2)으로 옮겨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도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려나 싶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았다.이제 파인과 신원혜는 갔고,사랑의 편지도 불타버렸다.그러나 1947년부터 납북당했을 때까지의 격랑을 헤치며 파인이 한 지아비와 육친의 정으로 아내 신원혜와 자녀에게보냈던 32통의 편지는 문단 비사의 차원을 넘어 가난했던글쟁이의 인생론적인 비애를 느끼게 한다. 중학생 아들(영식)과 초등생 딸(영주)을 아내에게 맡긴 빈털터리 시인 김동환은 이 무렵 최정희로부터 지원(1942년생),채원(1946년생) 두 딸을 가진,허리가 휘청거리는 아버지였다.최정희와의 보금자리였던 덕소에서 8·15를 맞은 파인의 심경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그의 뇌리에는 선비적 지조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18대 후손으로서 민족운동에투신했던 화려한 투쟁 경력들-민요 전설시의 거봉,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중앙위원,침략주의에 항거했던민완 기자,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폭발적인 성공과 민족의식이 강한 각종 출판물 간행,신간회 집행위원 등등이스쳤을 것이다.이런 경력 때문에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보였던 친일행위의 오점들은 그로 하여금 발빠른 자성과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진흙 속에 빼앗긴 두 발 겨우 뽑고/오래 가뒀던 옛 날개 와락 펴 멀리 쳐다보니”(‘돌아온 날개’),“새나라 백성들은 이래서는 안된다/우리는소생하지 않으면 안된다”(‘소생’)는 참회와 함께 “올해엔콩팥을 맘대로 심어/천리객은 몰라도 십리의 벗 맞아들여/소찬에 약주라도 싫도록 대접할꺼나”(‘起耕’)라는 은인자중의 자세를 보여줬다.반민특위 때 그가 자수(1949.2.28)할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이승만 정권이나 한민당 추종이 아닌,조선민주당 대변인격으로 정당활동에 몸담았던 것(1946.2)은 나름대로의민족관을 지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혼란 속에서 숙원이었던 잡지 ‘삼천리’ 복간에 온 정력을 쏟았는데,민족 독립노선이나,문인으로 발 빠르게 자아비판한 채만식을 부각시킨 걸로 봐서 다분히 참회적인 자세를 취했다.을지로5가 여관에서 업무를 시작한 파인은 틈틈이 아내와 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시키려고 난필의 쪽지를 보냈다.우편 배달이 아닌 사환이나 인편을 통해 직배시킨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라 겉봉에는 ‘영식 모(英植 母)’ 혹은 아예 ‘영식 전(展)’이라 쓰고는 원고지나 적당한 백지에 절박한 용건만적어 보냈다.서른 두 통의 편지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내용은 잡지 일로 인쇄소에 붙어 있어야 한다든가,당장 돈이없으니 우선 얼마만 보내고 며칠 뒤 더 보내겠다는 등등이다.신원혜의 이성적인 결벽과는 달리 어린 남매들이 아버지에게 귀가와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데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이 역마살의 시인을 신원혜와 함께 묻고 딸 영주는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시를 만드시던/파인,내 아버지//하늘 밑을 파고/그를 묻었다.//그가 다니던 길도/함께 넣었다.//눈물도 못 내고/기어 가/나도 묻힌다.//아 아,내 아버지 파인”(‘아름다운 작별’)이라고 마음을 추스렸다.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김영주와는 달리,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던 딸로서의 김영주는 무척 신랄했다.“친일행동과 여자 문제로 부끄러운 아버지 책을 써서 알리는 것은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라며,“아버지는 실패한 인간입니다.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 살라고 주신 한 가정의 책임을 저버리므로 해서,어머니와 우리 자녀는 가장아픈 불행을 체험했으며,어머니의 고통과 수치와 배반에 대한 증오와 세상이 보내는 그 부끄러운 수근거림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김영식,위와 같은 책)라고 통매했다. 그러나 파인의 애틋한 조각편지들은 실패한 인간의 자료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헤어날 길 없었던 인정미 넘치는 나약한 한 서정시인이 치러야만 했던 가정과 사랑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일 것이다. “몸 무고히 학교에 잘 다니느냐.마음에 어느 날 잊은 적이 없었다”거나,“추위가 심하니,남대문 야미(暗)시장에 가서,영식이나 영주의 외투 한 벌 사서,한 아이라도 입히오”,“한방의 침술 운운하지만 큰 아이들 때(장남 영사는 16세로 1942년에,차남 영창은 17세로 1947년에 사망)에 보아도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 되니 더 보이지 말고,내가 정초에 영식이를 데리고 전문 신의(新醫)들에게 보여 충분히 치료할 터이니,아이에게 겁나는 말을 일체 말고,내가 가기를 기다려 주오”라는 등등의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얼마나가슴으로 울었던가를 알법도 할 것이다.“내일 산소에 가는 일은 중지하고,5월 단오에나 가기로 하오”란 구절은 바로 두 아들이 묻혔던 미아리 공동묘지로,거길 가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묘소에 절하라’고 말한 후 묵념을 했고,어머니는 쌍봉 무덤 앞에 엎드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부짖었다고 김영식은 회고한다.살뜰한 지아비와 부정(父情)이 넘치는 글이기에 오히려 다른 서간문에 못지 않게 돋보이는 이 글들을 쓴 주인공이 어째서 가정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임 헌 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공무원 봉급 인상예비분 일괄지급

    올해 예비비로 책정된 공무원 봉급 인상예비분이 내달 일괄 지급될 예정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중앙인사위원회 관계자는 7일 “민간부문의 임금상승률을집계한 결과 인상폭이 5%를 넘어서 예비비로 책정된 공무원봉급 추가 인상분을 지급키로 했다”고 밝혔다.정부는 올해공무원 임금 추가인상분으로 예비비 2,000억원을 책정해 둔상태다. 정부는 지난해 봉급 관련 예비비를 책정하면서 민간 기업의 임금 상승률이 5%를 넘을 경우 공무원 처우개선비로 사용하고, 민간기업 인상률이 미미할 경우 이를 지급하지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에따라 중앙인사위는 노동연구원에 의뢰,민간기업의 임금상승률을 조사한 결과 평균 5%를 넘어섰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조사대상이 지난해 6월부터 지난 5월까지 임금협상을 마무리한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어서 조사기간과 조사대상 기업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지난5월까지만해도 국내 경기의 상승이 기대됐지만 최근 상당폭의 하락 전망으로 급격히 분위기가 바뀌면서 대부분의 민간기업들이 구조조정 실시와 함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있기때문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최근의 경기하락 분위기는 IMF때처럼 심각한 상태”라면서 “이런 시점에 공무원의 봉급을 인상하면 민간기업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부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일본에서 민·관 급여 격차를토대로 인상폭을 결정하는 제도가 도입된 후 지난해 공무원봉급을 동결하는 등 정부가 앞장서 허리띠를 졸라맨 예를 들며 예비비 책정분을 지급하려는 정부의 처사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대해 중앙인사위는 민간부문의 임금 상승률에 연동시켜 지급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올해 공무원 봉급 인상률은 지난해보다 6.7%로 올랐고,이번 예비비를 지급할 경우 1.2% 더 오르게 돼 평균 7.9%상승하게 된다. 홍성추기자 sch8@
  • 후학양성 50년 김수연 훈장…사재털어 국내 최대 서당 건립

    전북 김제시 성덕면에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 서당이 문을열었다.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대석마을에 부지 2,796㎡ 건평 280㎡ 규모로 문을 연 ‘학성(學聖)강당’은 정부나 자치단체,독지가 등의 지원을 받지 않고 순전히 개인의 사재를 털어 건립된 곳이다. 개인서당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안채와 별채 등 5채로 된 전통한옥 양식인 학성강당은 크고 작은 방 26개로 구성돼 있다.한꺼번에 100여 명의 수강생이 기거하며 한학을 배울 수 있다. 이곳 훈장(訓長)은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76·사진 오른쪽)선생.50여년 동안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이 시대 마지막 훈장으로 불리운다. 김 선생은 성장한 자식들(5남2녀)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 소망하던 서당을 세웠다.29세 때부터 집에서 일체의 학채(일명 수업료)를 받지 않고 한학을 가르쳐온 그가더욱 많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낡고 비좁은 정읍시 산외면 집을 팔고 이 곳으로 서당을 옮긴 것.그가 배출한 후학만도 줄잡아 5,000여명에 이른다. 김 선생이 처음 이 강당을짓는다고 했을 때 수백 명의 후학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건립비용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순수한 뜻은 알겠지만 그럴 수 없다”며 끝까지 거절했다. ‘학문이란 자신 속에 이미 갖춰진 올바른 양심을 본인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지 없는 것을 스승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에 제자로부터 일체의 학채나 지원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기고] ‘막가는’이문열

    연암 박지원은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혜택이 천하에 미친다”고 했지만,나는 “소인이 위세를 얻게 되어 지식의날을 마구 휘두르면 그 화가 천하에 미친다”고 말하고 싶다.지난 13일자 ‘조선일보’ 지상을 도배한 이문열의 인터뷰는 그를 그냥 보수적 지식인,상처받은 허무주의자로 인정하려 했던 필자의 생각을 확실히 바꾼 계기가 됐다.작년 총선연대 공격 발언 이후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발언등을 통해 볼 때 이문열은 단순한 보수성향의 소설가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세력의 입이 돼 궤변과 왜곡을 서슴지 않는 선동가의 모습 그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홍위병론’이다.그는 작년의 총선연대 활동이나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지하는 일부 언론이나 운동세력을 아무런 논거 없이 홍위병과 같다고 선동적인상비평을 하고 있다.과연 그가 주장하듯이 문혁(文革) 당시의 홍위병이 권력층의 방침을 마구잡이로 따라한 폭력집단이었는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군사독재 시절부터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버텨왔으며 그와는 달리 언론자유나 정의를 위해 사익(私益)을 버린 사회운동가나 해직언론인들을 일개 정권의 돌격대라고 공격하는 그의 논조는단순한 사실조작,혹은 선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신공격,언어폭력이자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다.그는 80년대말 문단내 운동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일을 ‘시대와의불화’라고 과장한 적이 있지만,사실상 그는 일찍이 연좌제의 멍에가 가져다 준 ‘시대와의 불화’를 청산하고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과 언론에 ‘봉사’하면서 출세의 길을택했다.그가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우 독재정권과 ‘조선일보’에 순응한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기도 했던 비정상적인 정치현실과 ‘말의 독재’를 극복하자는 사회운동에 대해 이런식으로 돌팔매질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용납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어려움을 각오하고 ‘불화’의 길을 걸은 사람들과 그의 삶은 어떤 잣대로도 비교될 수 없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운동세력은 권력과 돈을 가져본 적이 없는 소수자이며,이 정권이 운동세력의 정권도 아니다. 언론개혁은 이 정권이 수립되기 훨씬 전인 90년대 초부터제기된 가장 중요한 의제다.설사 현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일정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온갖 비리와 부패를 간직한 일부 언론이 이런 식으로 면죄부를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그가 ‘홍위병’이라 부르는 세력들은 오늘의 언론개혁이 단순한 세무조사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권력과 언론이 또 야합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질적 팽창이 멈추었다고 한탄하고 있다.그것은 민주화운동과 그 수 많은 희생자를 모독하는 말이다.그가 정말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한다면 “국가안보와 경제안정을 위해 우익독재,보수언론의 비리는 정당화될 수 있다”“나는 5공시절이 차라리 좋았다고 생각한다.민주주의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 김 동 춘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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