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선비
    2026-08-04
    검색기록 지우기
  • 연구
    2026-08-04
    검색기록 지우기
  • 산성
    2026-08-04
    검색기록 지우기
  • 환불
    2026-08-04
    검색기록 지우기
  • 민원인
    2026-08-0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439
  • 儒林(85)-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85)-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연산군은 평소에도 사림파를 비롯한 선비들을 증오하고 있었다.이극돈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글이라며 사림파들을 불충한 무리로 몰아 일으킨 것이 무오사화였으며,이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 맨 첫머리에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계 조위였던 것이다.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참소하기를 ‘매계가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기록한 것은 선왕 세조를 비난하기 위한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니,연산군은 크게 노하였다.그때 매계는 하정사(賀正使)로서 중국의 사신으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연산군은 강을 건너오는 즉시 참살하도록 명하였다.매계 일행이 요동에 도착하여 이 소식을 듣자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매계의 서제(庶弟)로 신(伸)이라는 자가 있어 일찍이 그 지방에 점을 잘 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가서 길흉을 물었다.그 사람은 운수를 따지다가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시 한 수를 적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 신이 매계에게 말하기를 ‘처음 글귀는 화를 면하는 것 같기는 하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다.’하고 서로 근심하여 소리 없이 울었다. 모두 압록강에 도착하여 강변을 바라보니 매계를 척살하기 위해서 관인들이 기다리는 형상이었다.일행이 실색하여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형을 집행하기를 기다린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었고,매계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구나.’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마침내 강을 건너오자 정승 이극균이 다만 잡아다가 추문(推問)한다는 것을 알았다.일행이 기뻐하고 다행히 여겨서 이를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는 점쟁이의 시가 바로 맞은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아래 글귀는 해독되지 않았다.서울로 잡혀 왔으나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으로 귀양 갔다가 병들어 죽어 고향인 금산으로 이장되었는데,그로부터 6년 뒤 갑자사화가 다시 일어나 연산군은 전일의 죄도 따로 기록하여 매계의 관을 쪼개어 시체를 참시하도록 명하였다. 시체를 바위 밑에 끌어내다 두고 사흘 동안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에 모든 사람들이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점괘가 맞음을 신통해하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매계의 운명을 점지하였다는 사실에 탄식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매계의 그런 일화는 훗날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척언집(言集)에 수록되어 있는데,척언이란 문자 그대로 ‘주워들은 이야기’란 뜻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모은 잡록집이었다. 매계의 이 일화는 특히 유생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김종직이 사후에 관속에서 꺼내어져 참시되었던 것처럼 사림파의 운명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와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하여도 끝내는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고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매계의 일화를 스승 한훤당을 통해 이미 전해들을 수 있었다.스승 한훤당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조광조와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매계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 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더니 나도 천층 물결 속에서 헤쳐 나와 마침내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하면.” 조광조가 스승에게 물었다.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참언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준엄한 스승은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를 내가 어찌 알겠느냐.어차피 점술이란 미신이 아니겠느냐.”
  • 儒林(85)-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연산군은 평소에도 사림파를 비롯한 선비들을 증오하고 있었다.이극돈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글이라며 사림파들을 불충한 무리로 몰아 일으킨 것이 무오사화였으며,이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 맨 첫머리에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계 조위였던 것이다.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참소하기를 ‘매계가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기록한 것은 선왕 세조를 비난하기 위한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니,연산군은 크게 노하였다.그때 매계는 하정사(賀正使)로서 중국의 사신으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연산군은 강을 건너오는 즉시 참살하도록 명하였다.매계 일행이 요동에 도착하여 이 소식을 듣자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매계의 서제(庶弟)로 신(伸)이라는 자가 있어 일찍이 그 지방에 점을 잘 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가서 길흉을 물었다.그 사람은 운수를 따지다가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시 한 수를 적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 신이 매계에게 말하기를 ‘처음 글귀는 화를 면하는 것 같기는 하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다.’하고 서로 근심하여 소리 없이 울었다. 모두 압록강에 도착하여 강변을 바라보니 매계를 척살하기 위해서 관인들이 기다리는 형상이었다.일행이 실색하여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형을 집행하기를 기다린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었고,매계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구나.’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마침내 강을 건너오자 정승 이극균이 다만 잡아다가 추문(推問)한다는 것을 알았다.일행이 기뻐하고 다행히 여겨서 이를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는 점쟁이의 시가 바로 맞은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아래 글귀는 해독되지 않았다.서울로 잡혀 왔으나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으로 귀양 갔다가 병들어 죽어 고향인 금산으로 이장되었는데,그로부터 6년 뒤 갑자사화가 다시 일어나 연산군은 전일의 죄도 따로 기록하여 매계의 관을 쪼개어 시체를 참시하도록 명하였다. 시체를 바위 밑에 끌어내다 두고 사흘 동안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에 모든 사람들이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점괘가 맞음을 신통해하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매계의 운명을 점지하였다는 사실에 탄식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매계의 그런 일화는 훗날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척언집(言集)에 수록되어 있는데,척언이란 문자 그대로 ‘주워들은 이야기’란 뜻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모은 잡록집이었다. 매계의 이 일화는 특히 유생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김종직이 사후에 관속에서 꺼내어져 참시되었던 것처럼 사림파의 운명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와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하여도 끝내는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고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매계의 일화를 스승 한훤당을 통해 이미 전해들을 수 있었다.스승 한훤당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조광조와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매계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 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더니 나도 천층 물결 속에서 헤쳐 나와 마침내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하면.” 조광조가 스승에게 물었다.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참언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준엄한 스승은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를 내가 어찌 알겠느냐.어차피 점술이란 미신이 아니겠느냐.”˝
  •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이종호 지음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문인으로 태어나 문인으로 살다 문인으로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예는 조선 사대부들의 삶 그 자체이자 필생의 화두였다.유교라는 거대한 주제 아래 그들은 치열하게 책을 읽고 문장을 닦았다. 퇴계 이황 같은 이는 완물상지(玩物喪志),즉 하나의 사물에 몰두하는 것은 학문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길이라 해 문장에 지나치게 매혹되거나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에게 문예는 학문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문예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였던 것이다. 안동대 한문학과 이종호(49) 교수가 펴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도서출판 한길사)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조선조 사대부들을 탐구하고 해석한 책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문장’을 키웠고 어떤 문장에 빠져들었으며 또 비판의 시선을 보냈을까.저자는 조선조 문인들의 작업을 낱낱이 추적하며 그들의 문장을 독해하고 그 안에 담긴 문예인식과 비평의식을 읽어낸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분석 대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정약용이나 김시습,박지원 같은 조선 한문학의 ‘간판스타’들로 구색을 맞추기보다는 일반에겐 좀 낯선 인물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남긴 개성의 자취를 훑어간다.영남 사림의 거두인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해 조선중기 한문 4대가 가운데 한 명인 상촌 신흠,홍길동전의 작가 허균,18세기 안동지역의 처사 권구,신유한,최성대,조구명,송백옥 등이 그들이다. 저자는 조선의 문예는 고려 중기 문예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여말 익재 이제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이제현은 최씨 무신정권기의 문예를 칼날 앞에 붓이 줏대를 잃고 형식과 기예의 노예로 전락한 ‘껍데기’ 문예로 보았다.그 대안으로 제창한 것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실용적인 고문 창작이다.조선의 문예는 숭유억불의 화신인 삼봉 정도전이나 양촌 권근 같은 이제현의 정신적 계승자들에 의해 시작됐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책은 15세기 조선 한문학의 거목 김종직을 조선조 문예 흐름의 원류에 속하는 인물로 규정한다.경상도 산골 출신의 선비인 김종직은 온건한 품성과 남다른 문장으로 훈구세력이 주도하는 ‘본류적 흐름’에 뛰어들어 그들을 압도했다.저자에 따르면 김종직이 씨앗을 뿌린 ‘도문(道文)합일론’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구현하고자 했던 퇴계와 율곡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교적 문학관은 이내 한계와 문제를 드러낸다.여기에 신흠이 등장해 양명학과 노장사상에 심취하게 된다.신흠이 문을 연 개방적인 사고는 허균에 와선 열정과 광기로 폭발하고,이어 18세기엔 다양한 인간상을 펼치는 작가군이 크게 늘어난다.권구는 민중의 삶을 담고자 했으며,조구명은 ‘나만의 글’을 쓰고자 했고,신유한은 일천한 가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문학적 재능으로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다. 저자는 이처럼 구체적인 인간 형상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문예를 논한다.76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미시적인 접근으로 통사에 버금가는 성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만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8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8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를 무사히 능주까지 호송하고 떠나려던 나장 하나가 다시 무엇인가를 들고 나타나 말하였다. “나으리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 다시 찾아왔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걸망이나이다.” 나장은 손에 든 걸망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이라면 쇤네가 이를 버리겠나이다.” 나장의 말처럼 그것은 소용이 닿지 않을 만큼 낡고 허름한 물건이었다. “남강을 건너기 전 갖바치가 방책 틈사이로 밀어 넣은 걸망이나이다.” 순간 조광조는 열흘 전 만났던 갖바치의 일이 떠올랐다.헤어질 무렵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바랑을 밀어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으리,걸망 속에는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들어 있나이다.하오나 청컨대 능주에 도착하기 전에는 들어있는 물건을 절대로 뒤져 보지 마시옵소서.필히 능주에 도착하신 후에야 이를 꺼내 보시옵소서.” 그뿐인가.갖바치는 이를 다짐이나 하듯 ‘이를 반드시 지키시겠나이까’하고 묻지 않았던가.이에 조광조가 ‘내 반드시 그리하겠네.’하고 대답하자 비로소 안심하고 갖바치는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물론 조광조는 갖바치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능주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동안 걸망 속의 물건을 꺼내 보지 않았던 것이다.그것은 갖바치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배 길에서 자신의 지난 행적을 반추해 보고,무엇을 잘못하고 어떤 과오를 저질렀던가를 반성하는데 심사숙고하느라 딴 것에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참위를 내리며 스스로 행방을 감추어 사라지지 않았던가. “공의 재능은 한 시대를 경제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임금님의 마음을 얻은 후에야만 그것이 능히 가능할 것입니다.지금 주상께오서는 명성 때문에 공을 쓰시지만 실제로는 공을 잘 모릅니다.만일 그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등용하려는 조광조에게서 사라져 행방불명되었던 갖바치가 남기고 간 예언대로 조광조는 결국 주상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 사이에 소인이 끼어들어 보다시피 참화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능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뒤져 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갖바치의 걸망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조광조의 운명을 예언하는 또 하나의 참언이 들어있단 말인가. “두고 가거라.” 조광조가 말하자 나장은 망태기처럼 얽어 만든 바랑을 조광조에게 두 손으로 바쳐 올리고 사라졌다. 그날 밤 조광조는 갖바치가 준 걸망을 뒤져보았다.이 자리에는 양팽손이 함께 있었다.양팽손의 나이가 조광조보다 6살 연하였으나 이곳 능주가 고향인 선비로 사마시를 함께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에,양팽손은 생원시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였던 인연을 갖고 있었다.특히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하였을 때 유생들은 양팽손을 ‘촌놈’이라 부르며 푸대접하였지만 조광조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가까이 지내왔던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조광조가 능주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단걸음에 양팽손이 달려온 것은 이런 각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양팽손은 조광조 앞에 놓인 걸망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이에 조광조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 안에는 소중한 것이 들어있다네.”
  • 儒林(8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를 무사히 능주까지 호송하고 떠나려던 나장 하나가 다시 무엇인가를 들고 나타나 말하였다. “나으리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 다시 찾아왔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걸망이나이다.” 나장은 손에 든 걸망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이라면 쇤네가 이를 버리겠나이다.” 나장의 말처럼 그것은 소용이 닿지 않을 만큼 낡고 허름한 물건이었다. “남강을 건너기 전 갖바치가 방책 틈사이로 밀어 넣은 걸망이나이다.” 순간 조광조는 열흘 전 만났던 갖바치의 일이 떠올랐다.헤어질 무렵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바랑을 밀어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으리,걸망 속에는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들어 있나이다.하오나 청컨대 능주에 도착하기 전에는 들어있는 물건을 절대로 뒤져 보지 마시옵소서.필히 능주에 도착하신 후에야 이를 꺼내 보시옵소서.” 그뿐인가.갖바치는 이를 다짐이나 하듯 ‘이를 반드시 지키시겠나이까’하고 묻지 않았던가.이에 조광조가 ‘내 반드시 그리하겠네.’하고 대답하자 비로소 안심하고 갖바치는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물론 조광조는 갖바치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능주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동안 걸망 속의 물건을 꺼내 보지 않았던 것이다.그것은 갖바치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배 길에서 자신의 지난 행적을 반추해 보고,무엇을 잘못하고 어떤 과오를 저질렀던가를 반성하는데 심사숙고하느라 딴 것에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참위를 내리며 스스로 행방을 감추어 사라지지 않았던가. “공의 재능은 한 시대를 경제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임금님의 마음을 얻은 후에야만 그것이 능히 가능할 것입니다.지금 주상께오서는 명성 때문에 공을 쓰시지만 실제로는 공을 잘 모릅니다.만일 그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등용하려는 조광조에게서 사라져 행방불명되었던 갖바치가 남기고 간 예언대로 조광조는 결국 주상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 사이에 소인이 끼어들어 보다시피 참화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능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뒤져 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갖바치의 걸망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조광조의 운명을 예언하는 또 하나의 참언이 들어있단 말인가. “두고 가거라.” 조광조가 말하자 나장은 망태기처럼 얽어 만든 바랑을 조광조에게 두 손으로 바쳐 올리고 사라졌다. 그날 밤 조광조는 갖바치가 준 걸망을 뒤져보았다.이 자리에는 양팽손이 함께 있었다.양팽손의 나이가 조광조보다 6살 연하였으나 이곳 능주가 고향인 선비로 사마시를 함께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에,양팽손은 생원시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였던 인연을 갖고 있었다.특히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하였을 때 유생들은 양팽손을 ‘촌놈’이라 부르며 푸대접하였지만 조광조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가까이 지내왔던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조광조가 능주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단걸음에 양팽손이 달려온 것은 이런 각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양팽손은 조광조 앞에 놓인 걸망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이에 조광조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 안에는 소중한 것이 들어있다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술따라 맛따라] 藥담아 樂담아

    “반바지를 입거나,슬리퍼를 신고 오는 사람에겐 술이 다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합니다.술에 깃든 정성,임금이나 정승,판서들이 마시던 술의 품격이 훼손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민속마을에 사는 이득선(62)씨는 정말 요즘 시대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지식한 사람이다.술 한독 만드는데 남들 같으면 수십독 담그는 것 이상의 품을 들이고,돈을 갖고 사러와도 사람을 가려 술을 판다.우리 것,특히 그가 빚는 연엽주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착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씨는 부인 최황규(61)씨와 함께 연엽주를 빚는다.충남 무형문화재 11호인 연엽주의 제조 기능 보유자로는 최씨가 등록돼 있지만 술 빚기 작업은 부부 공동의 몫이다.이들은 연엽주를 ‘술을 빚는 게 아니라 약을 달이는 마음으로 만든다.’고 했다. “구한말 대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자 고종황제께선 잡곡밥과 서너가지 반찬으로 수라를 드셨다고 합니다.대신들은 임금의 기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특별한 약주를 수소문했는데,바로 충남 아산의 예안 이씨 집안의 연엽주가 채택됐다고 해요.” 이후 연엽주는 임금과 정승,판서들이 궁중에서 마시는 대표적 술이 됐다고 한다.연엽주(蓮葉酒)는 이름 그대로 쌀과 누룩에 연(蓮)의 잎을 넣어 빚는 술이다.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 등 연 잎을 구하기 어려우면 연근으로 대체한다.연잎이나 연근은 열이 많거나 과로가 심할 때,출혈과 어혈을 없애는 기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연엽주엔 연잎 말고도 녹두,옥수수,이팥,엿기름,대추,감초,솔잎,독고마리 등이 들어간다.녹두는 여러가지 초독(草毒)을 중화시키고,이팥은 위벽을 튼튼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연엽주는 술을 빚은 후 1주일 정도면 술이 완성된다.보름에서 100일까지 발효와 숙성기간을 거치는 다른 약주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씨는 “쌀의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밑술과 덧술 과정 없이 한번만 빚어 맛을 낸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술을 빚기 전 누룩에 쏟는 이씨의 정성은 대단하다.공장 누룩도 써 보았으나 제맛이 안나 일일이 통밀을 빻아 디뎌 누룩을 띄운다.약쑥을 깔고 그 위에 누룩을 놓고,다시 약쑥을 깔고 누룩을 놓는 방식으로 서너층을 쌓아 띄운다.날씨에 따라 한달에서 두달 정도 걸리는데,그동안 대여섯번 누룩을 뒤집어 말려준다.누룩이 잘 뜨면 부수어 다시 말린 뒤 솥에 넣어 살짝 데쳐서 또 말린다. 술을 빚을 때도 일진 등을 보아 가장 좋은 날을 택하고,술독은 그 해의 운세와 지세 등을 보아 방향을 정해 묻는다.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에 현대적 생산설비가 끼어들 틈이 없다.민속주 생산자중엔 거의 유일하게 순수한 전통방식의 술빚기를 고집하고 있는 것.한달에 서너말 들이 한 독 담그는 정도다. 이씨는 “술이 반쯤 팔려야 비로소 다시 술을 담근다.”며 “그나마 여름엔 술이 쉽게 쉬어버려 거의 담그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암리민속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이득선씨의 집은 ‘참판댁’으로 불린다.이씨의 4대조가 이조참판을 지낼 때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집이다. 선비의 꼿꼿함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씨는 197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를 그대로 실천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당시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조교를 하던 그는 서울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향에 내려와 매일 같이 3년간 집과 묘소를 오가며 상례를 지켰다. 그는 “묘막을 짓고 3년간 기거하지도 못했는데 매스컴이 지나치게 부각시켜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연엽주엔 이처럼 첨단의 시대에도 한국 전통의 예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씨의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연엽주 가격은 도자기병에 든 선물용(800㎖)이 1만 7000원,1.5ℓ짜리 페트병에 담은 것은 2만원이다.선물용은 직접 방문해야 살 수 있고,페트병에 든 것은 택배로도 보내준다.(041-543-3967). 글 아산 임창용기자 sdragon@ ●따라 빚으세요 재료:찹쌀,멥쌀,누룩,연근(또는 연잎),독고마리,녹두,이팥,엿기름,옥수수. (1) 찹쌀과 멥쌀을 반반씩 섞어 찬물에 10시간 정도 담가둔다. (2) 쌀을 건져 물기가 빠지면 시루에 고두밥을 짓는다.이때 시루 바닥에 솔잎을 깐다. (3) 고두밥을 돗자리에 펴서 차게 식힌다. (4) 누룩을 콩알 크기로 부순다. (5) 고두밥에 밥 양의 절반 정도의 누룩과 연잎,독고마리,녹두,이팥,엿기름,옥수수 소량을 섞어 물과 함께 고루 비빈다. (6) 술덧을 술독에 담고 맨 위에 연잎을 얹어 뚜껑을 덮는다. (7) 20도 정도 되는 실내에서 1주일 정도 발효시킨다. (8) 술이 익으면 용수를 박아 술을 떠내거나 술덧을 보자기에 싸 술을 짜낸다.14도 정도의 연엽주가 완성된다,˝
  • 이대앞 수선골목

    잠자고 있던 옷을 꺼내 보니 어느 부분은 좀 작고,어느 부분은 좀 크다.버리긴 아깝고,그냥 입자니 나의 패션 감각이 허락하지 않는다.이화여대 앞에는 센스 만점의 수선집이 많다는데….문제는 어떤 집에 가서 어떻게 고쳐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지. 이런 분들을 위해 수선거리 10년 단골,박소연(31왼쪽·퓨처컴 과장)씨와 윤항기(31·주부)씨가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살짝 공개했다. “이대 앞에는 허름한 건물 지하에 2평 남짓한 곳부터 분점을 가진 곳까지 40여개의 수선집이 있어요.모두 실력이나 감각이 뛰어나고,수선비는 대동소이하죠.차이점이라면 오랜 전통이냐 새롭게 부상하느냐 정도랄까? 이곳저곳 가본 뒤에 단골집을 정하는 게 좋습니다.” 정문쪽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들이다.뒷골목쪽에 있다가 인기에 힘입어 ‘전면배치’된 곳들이 많다.수선집치고는 큰 규모에 자체 공장을 가진 경우도 있다.여러 직원 중 원하는 사람에게 수선을 맡길 수 있다.옷감과 디자인을 주면 20만원선에 정장을 맞춰 주기도 한다. 옷가게가 많은 정문과 전철역 사이는 주로 구입한 옷을 즉석에서 고쳐주는 곳이지만 요즘은 전문수선집도 많이 생겼다. “실패가 두려우신 분들은 가진 옷 가운데 좋은 디자인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세요.가격이 부담되신다고요? 단골이 되면 에누리도 할 수 있어요.” ●30분이면 뚝딱 ‘인디안‘ 옷 수선은 감각도 필요하지만 세월에 묻어나는 경험도 중요하다.‘인디안 수선’(02-362-1219)은 40년째 옷을 만져온 베테랑의 솜씨를 만날 수 있다.기다리는 손님이 없을 경우 30분 이내에 대부분의 수선이 다 가능하다.수선비 바지 밑단을 줄이는 데 2000원(워싱처리를 할 경우 5000원),허리 줄이는 데 8000원.영업시간 오전 7시∼오후 10시. ●핸드메이드는 ‘이태리‘ 기계로 만든 옷보다 핸드메이드 의류가 고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이태리 수선’(02-364-6441)에서는 35년 경력의 주인 부부가 까다로운 핸드메이드 옷 수선까지 깔끔하게 해준다.의상학과 학생들이 작품을 맡길 정도로 솜씨가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수선비 핸드메이드 코트 사이즈 줄임은 10만원선.영업시간 오전 9시∼새벽 1시. ●청바지도 척척 ‘리더‘ 10·20대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주는 ‘리더 옷수선’(02-312-0818).감각과 꼼꼼함이 입소문을 타 이대 근처에 자리잡은 지 1년 만에 유명해졌다.디자인이 독특해 고치기 까다로운 고가의 브랜드 청바지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수선비 리바이스 엔진의 경우 밑단 줄이기는 1만원,허리와 통을 줄이는 데는 2만원.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9시. ●재킷 전문 ‘정수선’ 정문 옆 뒷골목에 자리잡은 ‘정수선’(02-363-2782)은 ‘한번 맛을 보면 다른 곳은 못간다.’는 자부심으로 10년째 꾸려가고 있다.모든 종류의 옷을 수선하지만 백문희 사장의 특기는 재킷 수선.수선비 재킷 전체수선은 옷감,스타일에 따라 4만∼6만원,바지 허리 수선은 5000∼6000원.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일요일 휴무. ●수선 사관학교 ‘영수선’ 27년째 같은 자리를 지킨 ‘영수선’(02-312-0627).이곳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수선집을 차려 이곳은 ‘수선 교육기관’이나 마찬가지다.직원층이 다양해 유행 스타일까지 소화가 가능하다.수선비 재킷 어깨나 품이 각각 1만∼1만 5000원,니트를 카디건으로 바꾸면 1만∼1만 5000원.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10시. ●고객 개성 살려 ‘이대’ 18년간 수선거리를 지킨 ‘이대수선’(02-312-1309)은 고객의 체형과 개성에 맞는 스타일을 알려주는 게 특징.눈썰미와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김상영 사장의 조언을 듣고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수선비 재킷 전체 수선은 2만∼5만원(명품),바지는 수선 위치에 따라 3000∼8000원,실크블라우스 2만 5000원선.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9시. ●가방 전문 ‘신대륙‘ 몇몇 수선집에서는 옷은 물론 가방도 고쳐주지만 역시 전문점이 믿을 만하다.‘신대륙 수선’(02-392-8306)은 8년째 가방만을 수선·리폼·제작하는 이대 근처의 유일한 가방 전문 수선집이다.수선비 안감교체는 2만원선,지퍼 교체는 1만원선.제작은 가죽 가방은 15만원 정도.택배로 받으려면 2000원 추가.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30분. 최여경 나길회기자 kid@˝
  • [18일 TV 하이라이트]

    ●일요일 일요일 밤에(오후 6시) 우주 비행사 용만과 ‘국민약골’ 이윤석의 타잔 문제 코너가 진행된다.날렵한 동작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는 매트릭스 용만,귀여운 율동을 따라하는 올챙이와 개구리 문제 등을 푼다.경찰대학교 합기도 사범인 합기도 공인 6단,경력 22년의 조영준 사범에게 정통 합기도를 배운다.휴대전화 호신술까지 다양한 종목을 배운다. ●인사이드 월드(오후 1시25분) 전 세계의 유기농법을 살펴본다.러시아의 옥상 텃밭에서는 짧은 여름을 이용해 야채를 재배한다. 쓰레기를 퇴비로 활용하고 야채 판매로 약간의 수익도 얻을 수 있다.시멘트 옥상이 자연에 가까워졌고 생활 쓰레기도 자체 처리된다.쿠바에서는 도로와 철길사이의 땅에 염소를 키우고 집 뒷마당을 활용해 야채재배를 하고 있다. ●사이언스대전(오전 11시20분) 사이언스 물로켓의 제왕을 가리는 결승전을 포함해 3,4,5라운드가 펼쳐진다.3라운드는 물로켓에 바퀴를 단 물로켓 자동차로 대형 볼링핀을 쓰러뜨린다.마지막 5라운드는 1:1경기로 대형 블록을 쌓아올려 만든 기둥을 쓰러뜨리는 경기.4팀이 준결승전을 치르고,승리한 두 팀만이 동일한 라운드를 치러 물로켓의 제왕을 가린다. ●게릴라 리포트(오후 8시20분) 봄·가을이면 10여만 마리의 도요새들의 군무로 장관을 이루던 전북 군산의 옥구염전.하지만 올해는 도요새를 한 마리도 찾아볼 수가 없다.경쟁력을 잃은 데다 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정부가 제대로 보존하고 있지 못한 문화유산,자연 환경등을 시민의 힘으로 지켜내는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현장을 찾아간다. ●결정!맛대맛(오전 10시50분) 동해와 서해의 자존심 대결.서해안 숏다리 꽃게가 펼치는 맛의 향연을 보여준다.감칠맛 나게 버무린 양념꽃게장,게딱지에 밥 넣고 비벼 먹는 별미 간장게장으로 일요일 아침을 즐겁게 한다.동해안 롱다리 대게.입안 가득 씹히는 영덕 대게찜을 맛본다.서수남,김청·임호·김학도·양혜승·원영·테이·박효주·조혜련이 출연한다. ●애정의 조건(오후 7시50분) 금파는 진주를 만나 이쯤에서 정리해달라며 자존심을 굽힌 채 사정한다.마침 진주의 연락으로 카페에 들이닥친 정한은 오히려 금파에게 화를 내며 진주를 싸고 돈다.그럼에도 정한을 붙들 수 밖에 없는 신세가 처량하다.한 달 계약연애가 다 끝나자 애리는 윤택에게 정식으로 사귀자고 한다.그러나 윤택은 서로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도전 골든벨(오후 7시10분) ‘선비의 고을’이라는 대전 유성고등학교에서 100명의 학생이 출연한다.제40대 골든벨을 목표로 유성고 학생들이 펼치는 지적 도전이 치열하기만 하다.50개의 문제 고비를 넘을 때마다 속출하는 탈락학생들,그리고 그들이 남긴 오답 인터뷰를 엿본다.남학생들의 우상 최원정MC가 유성고에서 세 명의 남학생들에게 사랑고백을 받는다. ˝
  • 儒林(7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알성시에서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라고 시작한 조광조의 답변은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합일체,즉 ‘천인무간(天人無間)’의 명제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되어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각각 수양을 통해서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정치적 대표자인 왕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당시 군주인 중종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고,따라서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연에서 중종에게 공자의 도인 성리학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 하나는 현인군자를 적극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용현정신(用賢精神)이며,또 하나는 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세 번째는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언론 자유정책이었다. 지치주의를 구체화하려는 이 네 가지 방법은 결국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며,그러기 위해서는 갖바치와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하룻밤 사이에 대역 죄인으로 전락한 조광조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교의 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일과 향약을 실시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한 괄목할 업적도 있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인적 청산에 있었다. 조광조가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였다.과거제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려 광종 때에 쌍기의 제안으로 처음 시행된 이래 과거제는 고려의 전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그리고 이 제도는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와 결합됨으로써 귀족신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오히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이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그러나 이 과거제도는 결국 권력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변질되어 갔으며,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조광조는 단 한 번의 시험제가 아닌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과거제도의 혁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원래 인물이 적습니다.거기에다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등용하지 않습니다.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등용시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인재등용을 좁게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 한대의 현량방정과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대현인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조광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천거과는 중종 13년에 시행된다.육조 및 홍문관,사헌부,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수령들이 마땅한 인물을 선발하여 예조에 추천하면 예조는 추천된 사람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왕의 임석하에 중전에서 시행하여 뽑는 것이었다.˝
  • [술따라 맛따라] 충주 ‘청명주’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다가오면 전국 방방곡곡의 선비들이 충주에 모여들었다고 한다.‘청명주(淸明酒)를 마시면 과거에 붙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아마 24절기중 하나인 청명에 술이 나오니 이를 마시고 맑고 밝은 기운을 받으면 시험을 잘 치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충주에서 청명주를 한 잔 마시면 문경새재 마루턱에 가서 비로소 취기가 가신다는 일화도 있다.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기쁜 마음에,낙방한 이는 울적한 마음에 또 한번 청명주를 마시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듯싶다. 청명주가 청명일에 마시기 위한 술이었는지,아니면 청명일에 담근 술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 수록한 청명주 주조법에 ‘…봄철 청명때에 찹쌀 두 말을 깨끗이 씻어서‘라며 청명때 담근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청명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명주였던 것 같다.이익은 ‘나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고 ‘양계처사에게 배우고 혹시 잊어버릴까 두려워서 기록해 둔다.”고 그의 저서(성호사설)에 청명주 주조법까지 수록해두었던 것이다. 청명주를 최초로 빚은 시기나 인물에 대한 기록은 확실치 않다.그러나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에 여러대 살아온 김해 김씨 집안에선 조선조 이전 선조대부터 고유한 비방에 의해 청명주를 빚어 가용주로 전승해왔다. 충북도 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돼 있는 청명주 기능 보유자인 김영기(83)씨가 그의 조모와 숙모에 이어 청명주의 계보를 이어왔으나,최근엔 노환으로 청명주 전수보조자인 아들 영섭(30)씨가 ‘중원 청명주’란 이름으로 술을 빚고 있다. “누대로 구전돼온 청명주 비방을 100여년 전 할아버님이 책자에 기록해 두셨어요.지금도 가끔씩 들여다보는 ‘鄕戰錄’(향전록)이란 소책잡니다.술 주조법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에 대한 민간요법 등 집안 살림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향전록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해 수록했다.붓으로 촘촘히 써내려간 글씨와 수시로 들여다보느라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손때가 묻은 책장에서 빈틈없는 살림살이를 꾸려온 후손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청명주는 찹쌀,그리고 재래종 통밀을 빻아 띄운 누룩으로 제조한 순곡주다.밑술을 담글 때 약간의 밀가루도 들어간다.저온에서 100일간 발효,숙성을 거치는데 알코올 도수는 17도로 약주로선 높은 편.색깔은 진한 감색을 띠며 감칠맛이 뛰어나다. “무거운 듯하지만 깊고 은근한 맛이 청명주의 특징입니다.가볍고 경쾌한 맛을 선호하는 젊은 층보다는 진한 맛을 좋아하는 어르신들이 많이 찾으시는 편입니다.” 김씨는 “우리의 민속주가 깔끔하고 가벼운 일본식 청주 맛을 자꾸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판매가 다소 어렵더라도 청명주는 가능한 한 우리 고유의 맛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청명주를 사려면 우체국 주문판매를 이용해야 한다.또 충주와 청주의 일부 할인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으며,중원당(043-842-5005)에 직접 주문해도 된다.700㎖ 1만 1000원,360㎖ 5000원. 글 충주 임창용기자 sdragon@ ■ 따라 빚으세요 -술 재료:찹쌀,누룩,밀가루 ① 찹쌀 3되를 깨끗이 씻어 하룻밤 불렸다가 곱게 간다. ② 물 3되를 쌀가루에 붓고 풀어서 솥의 끓는 물 6되에 붓고 고루 저어 준 다음,한소끔 끓여 퍼서 술독에 담아 둔다. ③누룩가루 2되 1홉과 밀가루 3되를 술독에 담아 넣고 큰 막대로 오랫동안 저어준다 ④ 술독을 싸매둔다.(밑술 완성) ⑤ 찹쌀 3말을 깨끗이 씻어 불렸다가,건져서 물기가 빠지면 시루에 고두밥을 짓는다. ⑥ 밑술을 체에 밭쳐서 걸러내는데,맑은 술은 따로 받아 두고,약주를 떠내고 남은 주박은 물을 치지 말고 주물러 짜서 막걸리를 걸러 놓는다. ⑦ 술 빚을 독에 고두밥 한 바가지,주물러 짠 막걸리 한 바가지를 떠 넣는다. ⑧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하여 술을 안치고,막걸리가 다 떨어지면 맑은 술을 들어 붓고 주걱으로 고루 저어 준다. ⑨ 고두밥 남은 것을 모두 붓고 맨 나중에 걸러 둔 술을 맨 위에 붓고 주걱으로 대여섯 번 내리 쑤셔 고르게 골라 준다. ⑩ 술독은 이불을 싸매 주고 2∼3월은 30일,삼월에는 21일 만에 술을 뜬다.˝
  • 儒林(7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알성시에서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라고 시작한 조광조의 답변은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합일체,즉 ‘천인무간(天人無間)’의 명제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되어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각각 수양을 통해서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정치적 대표자인 왕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당시 군주인 중종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고,따라서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연에서 중종에게 공자의 도인 성리학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 하나는 현인군자를 적극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용현정신(用賢精神)이며,또 하나는 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세 번째는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언론 자유정책이었다. 지치주의를 구체화하려는 이 네 가지 방법은 결국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며,그러기 위해서는 갖바치와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하룻밤 사이에 대역 죄인으로 전락한 조광조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교의 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일과 향약을 실시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한 괄목할 업적도 있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인적 청산에 있었다. 조광조가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였다.과거제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려 광종 때에 쌍기의 제안으로 처음 시행된 이래 과거제는 고려의 전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그리고 이 제도는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와 결합됨으로써 귀족신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오히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이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그러나 이 과거제도는 결국 권력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변질되어 갔으며,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조광조는 단 한 번의 시험제가 아닌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과거제도의 혁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원래 인물이 적습니다.거기에다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등용하지 않습니다.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등용시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인재등용을 좁게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 한대의 현량방정과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대현인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조광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천거과는 중종 13년에 시행된다.육조 및 홍문관,사헌부,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수령들이 마땅한 인물을 선발하여 예조에 추천하면 예조는 추천된 사람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왕의 임석하에 중전에서 시행하여 뽑는 것이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즉 ‘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즉 ‘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 [차 이야기] 매화차

    남도에 매화가 한창이라는 소식이 봄바람을 타고 와 코끝을 유혹한다.꽃차를 즐기지 않는 이들도 매화차에 대해서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그만큼 매화차는 향이 풍부하고 깊다. 매화차는 향도 좋지만 마시면 무엇보다 머리가 맑아진다.선비들이 매화차를 즐겨마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또 피부를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며 기미·주근깨가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이밖에도 매화차는 해독,해열,이뇨 작용을 한다. 청매화,홍매화 모두 차로 마실 수 있지만 청매화의 향기 더 그윽하고 깊다.꽃을 따서 그대로 찻잔에 띄우거나 증기에 살짝 찐 다음 마시면 된다.90℃ 이상의 뜨거운 물에 우려내야 한다. 나길회기자 ■ 도움말 신성숙 차가람 대표˝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