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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7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알성시에서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라고 시작한 조광조의 답변은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합일체,즉 ‘천인무간(天人無間)’의 명제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되어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각각 수양을 통해서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정치적 대표자인 왕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당시 군주인 중종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고,따라서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연에서 중종에게 공자의 도인 성리학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 하나는 현인군자를 적극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용현정신(用賢精神)이며,또 하나는 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세 번째는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언론 자유정책이었다. 지치주의를 구체화하려는 이 네 가지 방법은 결국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며,그러기 위해서는 갖바치와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하룻밤 사이에 대역 죄인으로 전락한 조광조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교의 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일과 향약을 실시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한 괄목할 업적도 있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인적 청산에 있었다. 조광조가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였다.과거제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려 광종 때에 쌍기의 제안으로 처음 시행된 이래 과거제는 고려의 전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그리고 이 제도는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와 결합됨으로써 귀족신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오히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이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그러나 이 과거제도는 결국 권력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변질되어 갔으며,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조광조는 단 한 번의 시험제가 아닌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과거제도의 혁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원래 인물이 적습니다.거기에다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등용하지 않습니다.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등용시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인재등용을 좁게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 한대의 현량방정과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대현인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조광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천거과는 중종 13년에 시행된다.육조 및 홍문관,사헌부,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수령들이 마땅한 인물을 선발하여 예조에 추천하면 예조는 추천된 사람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왕의 임석하에 중전에서 시행하여 뽑는 것이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즉 ‘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즉 ‘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 [차 이야기] 매화차

    남도에 매화가 한창이라는 소식이 봄바람을 타고 와 코끝을 유혹한다.꽃차를 즐기지 않는 이들도 매화차에 대해서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그만큼 매화차는 향이 풍부하고 깊다. 매화차는 향도 좋지만 마시면 무엇보다 머리가 맑아진다.선비들이 매화차를 즐겨마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또 피부를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며 기미·주근깨가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이밖에도 매화차는 해독,해열,이뇨 작용을 한다. 청매화,홍매화 모두 차로 마실 수 있지만 청매화의 향기 더 그윽하고 깊다.꽃을 따서 그대로 찻잔에 띄우거나 증기에 살짝 찐 다음 마시면 된다.90℃ 이상의 뜨거운 물에 우려내야 한다. 나길회기자 ■ 도움말 신성숙 차가람 대표˝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儒林(6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유훈으로 내려준 ‘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에 대한 설법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세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해서 가벼이 행동하지 않으며,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자기 뜻을 잃지 않습니다.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그들이 뛰어나게 홀로 바른 행실을 지킴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위로는 덮어놓고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아래로는 덮어놓고 제후들을 섬기지 않습니다.신중하고 냉정하며 관대함을 숭상하고,강직하고 꿋꿋한 자세로 사람들과 어울립니다.박학(博學)하면서도 옛 현인(賢人)을 따를 줄 알고,문장을 가까이하고 익히며 행실을 닦아 염치(廉恥)를 압니다.비록 나라의 땅을 쪼개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벼이 여기며,외국 신하가 되지 않고 함부로 벼슬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법도를 따름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키는 법도가 같은 사람과 뜻을 합치고,닦는 법술(法術)이 같은 사람과 도를 함께 추구합니다.친구와 같은 지위에 나란히 있게 됨을 즐기고,서로 남의 아랫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오래 만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친구에 관한 뜬소문은 믿지 않습니다.그들의 행위는 반드시 올바른 법도에 근본을 두고 있고 의로움에 입각(立脚)해 있으며,그와 뜻이 같은 친구면 나아가 협력하고 그와 뜻이 같지 않은 친구로부터는 물러섭니다.그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온화하고 선량한 것은 인(仁)의 근본이며,공경스럽고 신중한 것은 인의 기반이며,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은 인의 작용이며,겸손하게 사물을 대하는 것은 인의 효능이며,예의와 절조는 인의 외모이며,말과 이론은 인의 장식이며,노래와 음악은 인의 조화(調和)이며,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인의 베풂입니다. 선비는 모두 이런 것을 아울러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 감히 스스로 인(仁)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의 공경하고 사양함이 이와 같습니다.선비는 빈천하다고 해서 구차하게 굴지 아니하며,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임금의 권세에 눌려 욕을 보지 않으며,높은 자리의 사람들 위세에 눌려 끌려 다니지 않고,관권(官權)에 눌려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그들을 선비(儒)라 부르는 것입니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유가의 선비로서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답변한 공자의 설법은 예기(禮記) 유행(儒行)편에 기록되어 있다.공자의 가르침이 다른 부분은 되도록 짧고 간결함에 비해 유독 이 부분에서만큼은 길고 상세한데,이는 공자가 선비를 도의 구현자(具現者)로 본 때문이었을 것이다.따라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올바른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사명감이야말로 선비가 반드시 가져야 할 엘리트정신임을 강조하기 위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광조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 유훈을 평생 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능주로 가는 멀고 먼 유배 길에서 묵묵히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는 동안 조광조는 자신에 대해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공자의 말처럼 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었음일까.나는 과격하여 성급하게 지치(至治)를 이루려 하지 않았던가.스승 한훤당의 가르침처럼 온화하고 선량한 것이 인(仁)의 근본이고,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이 인의 작용이었는데,나는 과연 관대하고 너그러웠던 것이었을까. 나는 나 자신만이 옳다고 독선적(獨善的)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 儒林(6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유훈으로 내려준 ‘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에 대한 설법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세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해서 가벼이 행동하지 않으며,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자기 뜻을 잃지 않습니다.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그들이 뛰어나게 홀로 바른 행실을 지킴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위로는 덮어놓고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아래로는 덮어놓고 제후들을 섬기지 않습니다.신중하고 냉정하며 관대함을 숭상하고,강직하고 꿋꿋한 자세로 사람들과 어울립니다.박학(博學)하면서도 옛 현인(賢人)을 따를 줄 알고,문장을 가까이하고 익히며 행실을 닦아 염치(廉恥)를 압니다.비록 나라의 땅을 쪼개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벼이 여기며,외국 신하가 되지 않고 함부로 벼슬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법도를 따름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키는 법도가 같은 사람과 뜻을 합치고,닦는 법술(法術)이 같은 사람과 도를 함께 추구합니다.친구와 같은 지위에 나란히 있게 됨을 즐기고,서로 남의 아랫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오래 만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친구에 관한 뜬소문은 믿지 않습니다.그들의 행위는 반드시 올바른 법도에 근본을 두고 있고 의로움에 입각(立脚)해 있으며,그와 뜻이 같은 친구면 나아가 협력하고 그와 뜻이 같지 않은 친구로부터는 물러섭니다.그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온화하고 선량한 것은 인(仁)의 근본이며,공경스럽고 신중한 것은 인의 기반이며,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은 인의 작용이며,겸손하게 사물을 대하는 것은 인의 효능이며,예의와 절조는 인의 외모이며,말과 이론은 인의 장식이며,노래와 음악은 인의 조화(調和)이며,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인의 베풂입니다. 선비는 모두 이런 것을 아울러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 감히 스스로 인(仁)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의 공경하고 사양함이 이와 같습니다.선비는 빈천하다고 해서 구차하게 굴지 아니하며,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임금의 권세에 눌려 욕을 보지 않으며,높은 자리의 사람들 위세에 눌려 끌려 다니지 않고,관권(官權)에 눌려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그들을 선비(儒)라 부르는 것입니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유가의 선비로서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답변한 공자의 설법은 예기(禮記) 유행(儒行)편에 기록되어 있다.공자의 가르침이 다른 부분은 되도록 짧고 간결함에 비해 유독 이 부분에서만큼은 길고 상세한데,이는 공자가 선비를 도의 구현자(具現者)로 본 때문이었을 것이다.따라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올바른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사명감이야말로 선비가 반드시 가져야 할 엘리트정신임을 강조하기 위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광조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 유훈을 평생 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능주로 가는 멀고 먼 유배 길에서 묵묵히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는 동안 조광조는 자신에 대해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공자의 말처럼 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었음일까.나는 과격하여 성급하게 지치(至治)를 이루려 하지 않았던가.스승 한훤당의 가르침처럼 온화하고 선량한 것이 인(仁)의 근본이고,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이 인의 작용이었는데,나는 과연 관대하고 너그러웠던 것이었을까. 나는 나 자신만이 옳다고 독선적(獨善的)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 儒林(6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17살 되던 해,스승 한훤당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던 ‘유가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儒行)’에 대한 설법을 되새기던 조광조의 가슴으로 공자의 말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선비는 충정과 신의로서 갑옷과 투구를 삼고,예의와 정의로서 방패를 삼으며,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비록 폭정이라 하더라도 정의를 안고 처신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사자후(獅子吼)가 되어 조광조의 뇌리를 흔들었다. 사자후. 사자가 울부짖으면 뭇짐승들이 엎드려 떨듯이 2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선비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의 가슴에 사자후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승 한훤당으로부터 ‘평생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내린 유훈(遺訓)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지난 세월 자신의 처신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반추하고 있었다.한훤당의 유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비는 널리 공부하되 그만두는 일이 없으며,독실한 행동함에 지치지 아니하고,홀로 거처하더라도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위로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덕이 부족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예로서 사람들을 대하되 조화를 귀중히 여기며,충성과 신의를 찬양하고,온화하고 유순한 것을 법도로 삼으며,현명한 사람을 흠모하되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며,자기의 모난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과 화합하고자 합니다.그들의 관대하고 너그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안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친한 사람이라 하여 기피하지 않고,밖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원수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피하지 않습니다.그의 공로를 드러내고 한 일들을 종합하여 현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추천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하되 그 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임금이 그의 뜻을 이해하여 사람을 씀으로써 진실로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만 하지 부귀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이 현명한 이들을 천거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추천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훌륭한 것을 들으면 남에게도 알려주고,훌륭한 것을 보면 남에게도 보여줍니다.벼슬자리에는 서로 남을 앞세우고,환난을 당하면 서로 죽음을 무릅쓰며,오랜 동안라도 남이 먼저 승진(昇進)하기를 기다리고,먼 곳의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서로 불러 벼슬하게 합니다.그들이 벼슬하고 남을 내세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자신을 깨끗이 건사하고 덕(德)으로 목욕을 하며,임금에게 의견을 아뢰고는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고,고요히 물러나서도 홀로 올바른 길을 지킵니다.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낮은 사람들을 대함에 오만하지 아니하고,자기만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는 법이 없습니다….”˝
  • 儒林(6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17살 되던 해,스승 한훤당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던 ‘유가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儒行)’에 대한 설법을 되새기던 조광조의 가슴으로 공자의 말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선비는 충정과 신의로서 갑옷과 투구를 삼고,예의와 정의로서 방패를 삼으며,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비록 폭정이라 하더라도 정의를 안고 처신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사자후(獅子吼)가 되어 조광조의 뇌리를 흔들었다. 사자후. 사자가 울부짖으면 뭇짐승들이 엎드려 떨듯이 2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선비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의 가슴에 사자후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승 한훤당으로부터 ‘평생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내린 유훈(遺訓)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지난 세월 자신의 처신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반추하고 있었다.한훤당의 유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비는 널리 공부하되 그만두는 일이 없으며,독실한 행동함에 지치지 아니하고,홀로 거처하더라도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위로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덕이 부족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예로서 사람들을 대하되 조화를 귀중히 여기며,충성과 신의를 찬양하고,온화하고 유순한 것을 법도로 삼으며,현명한 사람을 흠모하되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며,자기의 모난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과 화합하고자 합니다.그들의 관대하고 너그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안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친한 사람이라 하여 기피하지 않고,밖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원수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피하지 않습니다.그의 공로를 드러내고 한 일들을 종합하여 현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추천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하되 그 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임금이 그의 뜻을 이해하여 사람을 씀으로써 진실로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만 하지 부귀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이 현명한 이들을 천거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추천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훌륭한 것을 들으면 남에게도 알려주고,훌륭한 것을 보면 남에게도 보여줍니다.벼슬자리에는 서로 남을 앞세우고,환난을 당하면 서로 죽음을 무릅쓰며,오랜 동안라도 남이 먼저 승진(昇進)하기를 기다리고,먼 곳의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서로 불러 벼슬하게 합니다.그들이 벼슬하고 남을 내세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자신을 깨끗이 건사하고 덕(德)으로 목욕을 하며,임금에게 의견을 아뢰고는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고,고요히 물러나서도 홀로 올바른 길을 지킵니다.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낮은 사람들을 대함에 오만하지 아니하고,자기만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는 법이 없습니다….”
  • 시민문화유산 1호 탄생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문화유산 1호인 서울 성북동 ‘최순우 옛집’이 10일 개소식을 갖는다. 내셔널트러스트란 보전가치가 있는 자연 및 문화 유산을 시민들의 기증과 기부를 통하여 확보한 뒤 시민들이 주도하여 관리하는 시민운동.사단법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공동대표 김상원 김성훈 양병이)는 지난 2002년 12월 시민들의 성금으로 매입한 최순우 옛집의 복원·수리공사가 끝남에 따라 시민들에게 공개하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사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은 수많은 논저를 통하여 한국미술에 대한 국민의 이해의 폭을 넓힌 미술사학자.그가 1976년 사들여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최순우 옛집’은 전 국민의 필독서가 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곳이기도 하다. 성북동 고택은 192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조선말기 선비집의 운치를 그대로 이어받았다.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행랑채가 마주보고 있으며 소나무 산수유 등이 심어진 뒤뜰도 아름답다.집안에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는 혜곡 선생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문을 닫아 걸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라는 뜻이다. 대지 120평에 건평이 45평인 이 집은 혜곡의 외동딸이 관리해 왔으나 다가구 주택 건축바람이 불면서 보전에 어려움을 겪었다.2001년 1월 발족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위원회(위원장 김홍남 국립민속박물관장)는 같은 해 9월부터 국민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사들일 수 있었다. 집값은 7억 8000만원으로 모금액은 8억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매입 이후 보수·복원 자문회의를 거쳐 공사를 끝마치기까지 들어간 비용의 100%를 민간모금으로 충당했다. 최순우 옛집은 한국 전통공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거듭난다.시민참여 문화유산 보전의 명실상부한 첫번째 성과인 만큼 당연히 시민들에게 되돌려지는 것.사랑채에는 고택을 관리·운영하고,문화유산 보전에 필요한 민간기금 모금을 선도할 ‘재단법인 내셔널 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사장 김인회 전 연세대 박물관장)이 입주한다.최순우 옛집 개소식은 문화유산기금 발족식을 겸하게 된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최순우 옛집에 이어 오리 이원익(1547∼1634)선생의 유적지인 광명시 충현서원터와 서울 안국동의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던 집,안동 하회마을의 북촌댁,인천 근대문화유산 지역,대천 선교사수양관 등을 보전대상으로 선정해 놓았다. 이에 앞서 내셔널 트러스트는 2002년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를 시민자연유산 1호로 확보하여 시민들의 자연체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매화마름 군락지는 땅주인 사재구씨가 112평을 무상으로 기증했고,800평은 시민기금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한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오는 2020년까지 국민소득의 1%를 시민자산의 매입과 관리·운영을 위하여 적립하고,100만명의 회원과 5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며,전국토의 1%를 소유 관리하는 시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목표를 세웠다.최순우 옛집이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라고 있다.(02)739-3131.www.nationaltrust.or.kr 서동철기자 dcsuh@˝
  • 儒林(6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이때 김굉필은 찾아간 17세의 조광조에게 선비로서의 행동에 대해 먼저 가르치기 시작하였다.이는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유가선비로서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은 데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너는 마땅히 공자가 선비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평생 잊지 않고 명심하도록 하여라.” 조광조는 유배 길의 수레위에서 20여년 전 스승 한훤당이 일러준 내용을 묵묵히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겨 보았다. “선비는 보배(옛 성왕의 도)를 벌여 놓고서 초빙되기를 기다리고 부지런히 힘써 학문을 닦아 쓰여지기를 기다리며,충성과 신의를 품고서 등용되기를 기다리고,힘써 실천함으로써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들이 스스로를 닦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의관(衣冠)이 알맞아야 하며 동작이 신중해야 합니다.그들이 큰 것을 사양할 적에는 태만(怠慢)한 듯하고,작은 것을 사양할 적에는 거짓인 듯하며,크게는 위협을 받고 있는 듯이 하고,작게는 부끄러운 듯이 합니다.그들이 나아가는 일은 어렵게 하며 물러서는 일은 쉽사리 하며,유약(柔弱)하기 무능한 사람과 같습니다.그들의 용모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기거(起居)에 엄격하고 어려움을 두려워하며,그들의 거동은 공경하고 말은 반드시 신의를 앞세우며 행동은 반드시 알맞고 올바릅니다.길을 나서서는 편리한 길을 다투지 아니하고,여름이나 겨울에는 따스하고 시원한 곳을 다투지 않습니다.그의 목숨을 아끼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그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것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들의 대비(對備)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금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고 충성과 신의를 보배로 삼습니다.땅 차지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의로움을 세우는 것으로써 땅을 삼으며,재물을 많이 축적하기를 바라지 않고 학문이 많은 것을 부로 여깁니다.벼슬을 얻는 일은 어렵게 생각하되 녹(祿)은 가벼이 생각하며,녹은 가벼이 생각하되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은 어렵게 생각합니다.적절한 시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니 벼슬 얻는 일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의로움이 아니라면 화합하지 않으니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선비사상.비록 공자가 설법함에서 비롯되었으나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선비사상을 남긴 우리나라.지금은 퇴색되어 흔적도 보이지 않으나 마땅히 그 명맥을 이어나가야 할 ‘선비의 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재물을 탐하는 태도를 버리고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이익을 위하여 의로움을 손상시키지 않고,여럿이서 위협하고 무기로써 협박을 하여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의 지조를 바꾸지 않습니다.사나운 새나 맹수(猛獸)가 덤벼들면 용기를 생각지 않고 그에 대처하며 무거운 솥(鼎)을 끌 일이 생기면 자기 힘을 헤아리지 않고 그 일에 착수합니다.과거에 대하여 후회하지 아니하고 장래에 대하여 미리 점치지 아니하며,그릇된 말을 두 번 거듭하지 않고 뜬소문을 두고 따지지 않습니다.그의 위엄은 끊이는 일이 없으며,그의 계책을 미리 익히는 법이 없습니다.그들의 행위가 뛰어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친근히 할 수는 있어도 위협을 할 수는 없고,가까이하게 할 수는 있어도 협박할 수는 없으며,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그들은 사는데 있어 음락(淫樂)을 추구하지 않으며,음식에 있어 맛을 탐하지 않습니다.그들의 과실은 은밀히 가려줄 수는 있어도 면대(面對)하여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그들의 꿋꿋하고 억셈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충성과 신의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고,예의와 정의로써 방패를 삼으며,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 정의를 안고 처신합니다.비록 폭정(暴政)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그들이 스스로 처신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옷을 갈아 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 儒林(6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이때 김굉필은 찾아간 17세의 조광조에게 선비로서의 행동에 대해 먼저 가르치기 시작하였다.이는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유가선비로서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은 데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너는 마땅히 공자가 선비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평생 잊지 않고 명심하도록 하여라.” 조광조는 유배 길의 수레위에서 20여년 전 스승 한훤당이 일러준 내용을 묵묵히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겨 보았다. “선비는 보배(옛 성왕의 도)를 벌여 놓고서 초빙되기를 기다리고 부지런히 힘써 학문을 닦아 쓰여지기를 기다리며,충성과 신의를 품고서 등용되기를 기다리고,힘써 실천함으로써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들이 스스로를 닦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의관(衣冠)이 알맞아야 하며 동작이 신중해야 합니다.그들이 큰 것을 사양할 적에는 태만(怠慢)한 듯하고,작은 것을 사양할 적에는 거짓인 듯하며,크게는 위협을 받고 있는 듯이 하고,작게는 부끄러운 듯이 합니다.그들이 나아가는 일은 어렵게 하며 물러서는 일은 쉽사리 하며,유약(柔弱)하기 무능한 사람과 같습니다.그들의 용모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기거(起居)에 엄격하고 어려움을 두려워하며,그들의 거동은 공경하고 말은 반드시 신의를 앞세우며 행동은 반드시 알맞고 올바릅니다.길을 나서서는 편리한 길을 다투지 아니하고,여름이나 겨울에는 따스하고 시원한 곳을 다투지 않습니다.그의 목숨을 아끼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그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것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들의 대비(對備)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금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고 충성과 신의를 보배로 삼습니다.땅 차지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의로움을 세우는 것으로써 땅을 삼으며,재물을 많이 축적하기를 바라지 않고 학문이 많은 것을 부로 여깁니다.벼슬을 얻는 일은 어렵게 생각하되 녹(祿)은 가벼이 생각하며,녹은 가벼이 생각하되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은 어렵게 생각합니다.적절한 시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니 벼슬 얻는 일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의로움이 아니라면 화합하지 않으니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선비사상.비록 공자가 설법함에서 비롯되었으나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선비사상을 남긴 우리나라.지금은 퇴색되어 흔적도 보이지 않으나 마땅히 그 명맥을 이어나가야 할 ‘선비의 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재물을 탐하는 태도를 버리고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이익을 위하여 의로움을 손상시키지 않고,여럿이서 위협하고 무기로써 협박을 하여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의 지조를 바꾸지 않습니다.사나운 새나 맹수(猛獸)가 덤벼들면 용기를 생각지 않고 그에 대처하며 무거운 솥(鼎)을 끌 일이 생기면 자기 힘을 헤아리지 않고 그 일에 착수합니다.과거에 대하여 후회하지 아니하고 장래에 대하여 미리 점치지 아니하며,그릇된 말을 두 번 거듭하지 않고 뜬소문을 두고 따지지 않습니다.그의 위엄은 끊이는 일이 없으며,그의 계책을 미리 익히는 법이 없습니다.그들의 행위가 뛰어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친근히 할 수는 있어도 위협을 할 수는 없고,가까이하게 할 수는 있어도 협박할 수는 없으며,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그들은 사는데 있어 음락(淫樂)을 추구하지 않으며,음식에 있어 맛을 탐하지 않습니다.그들의 과실은 은밀히 가려줄 수는 있어도 면대(面對)하여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그들의 꿋꿋하고 억셈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충성과 신의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고,예의와 정의로써 방패를 삼으며,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 정의를 안고 처신합니다.비록 폭정(暴政)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그들이 스스로 처신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옷을 갈아 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

    “퇴계선생은 로맨스나 스캔들이 없었나요?” “왜요,단양의 기생 두향(杜香)이 하고 연애한 것은 유명하잖아요.” “낮퇴계,밤퇴계가 달랐다면서요?” “그런 속전이 있지.” “자네 퇴계선생의 매화음(梅花吟)이라는 걸 들어봤나?” “아뇨.” “퇴계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알고 싶으면 매화에 관한 시를 읽어봐.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하셨고 내내 아무 말 없다가 저녁에 일으켜 앉히니 앉은 채로 서거하셨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서 저자와 한 퇴계연구가 사이에 오고 간 선문답이다. 혹자들은 100여년전에 ‘서유견문’의 유길준(兪吉濬)이 있다면 이 시대에는 ‘문화견문’을 쓴 유홍준(兪弘濬·55·명지대 미술사학)교수가 있다고 얘기한다.공교롭게도 둘은 이름의 ‘돌림자’도 같은 기계(杞溪)유씨 ‘충목공파’의 문장가 집안 출신이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 반도 구석구석 안 가본데가 없다.북한까지 다녀왔다.발품으로 일궈낸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3권이 이를 입증한다.1,2권만 합쳐 250만부나 팔렸다.작고한 소설가 이문구는 생전에 그를 가리켜 ‘문화재급 역마살’이라고 했다. ●‘살아 있는 국토 박물관’으로 불려 그는 지난 10년동안 ‘나의 문화유사 답사기’(이하 답사기)를 비롯해 ‘완당평전’‘화인열전’ 등 13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대부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특유의 감각적 글솜씨로 ‘해방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살아 있는 국토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어다닐 정도로 평판이 높다. 시인 박노해씨는 옥중에서 ‘답사기’를 읽고 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제 눈을 맑게 열어준 운명같은 마주침의 책,펼칠 때마다 선방의 죽비처럼 내 등짝을 때리는 책,내 마음속 가장 은밀한 자리에 꽂아둔 우리 시대 고전같은 책입니다.…유 선생의 ‘답사길’을 따라가다보면 내 속에 갇혀 있던 나 아닌 것들이 벌떼처럼 살아나서 나를 깨뜨립니다.나는 어쩔 수 없는 이 땅의 자식이구나,조상님들이 내속에 살아계시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답사기’를 읽고 이렇게 언론에 기고했다.“읽고 깨우친 바 기쁨이 하도 커서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다.기막힌 비경이나 특별히 맛있는 음식점을 발견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풍기고 싶어 입이 근지러운 심정이라고나 할까….” 지난 주말 명지대 행정관 4층 복도끝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을 노크했다.한창 집필중인 ‘답사기’ 4,5권의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연구실 문을 열자 ‘고색 창연한’ 냄새가 코끝에 확 밀려왔다. 산골 오지의 어느 노인이 밤새 새끼꼬아 촘촘히 기워만들었음직한 멍석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그위에는 낡은 궤짝 하나가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또 양쪽 벽에 쭉 늘어진 책꽂이에는 ‘답사의 노정’을 말해주듯 때묻은 고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만권은 훨씬 넘지요.이쪽은 한국미술사,저쪽은 중국미술사,저기 저쪽에는 서양미술사 책자들이지요.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마다 중독처럼 사다놓은 결과물입니다.” 담배 하나 꺼내 물었다.97년 이전에 3년정도 끊었으나 북한을 다녀오면서 다시 피우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네모난 성냥곽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성냥은 충청도 어딘가에 있는 국내 유일의 공장에서 만든것입니다.그런데 자동이래요.이렇게 열었다 놓으면 뚜껑이 저절로 닫히니까.나원 참….”답사도중에 얻어온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가지 놀라운 일,책상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컴퓨터가 없었다.600자원고지와 만년필이 대신해 있었다.그는 “컴퓨터로 글을 쓰면 이쪽저쪽에서 글을 퍼오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진다.쓰다가 잘못되면 원고지를 과감히 버리고 다시 써야 글이 살아 숨쉰다.”며 특유의 ‘원고지철학’을 늘어놓았다.컴퓨터는 인문적인 것을 쏙 빼버린 기계적인 빠름일 뿐,고뇌도 없고 과정도 없으며,잃어버린 게 많다고 했다. 문득 독자들을 사로잡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했다.기다렸다는 듯이 “최고의 취미는 여행이다.여행이라는 매체를 넣고 글을 썼다.마침 독자들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거침없는 답변이 계속됐다. ●“학자인지 문필가인지 나도 몰라” “가끔 내 자신이 학자인지,문필가인지,평론가인지를 물어보곤 합니다.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겐 문사(文士)가 없어요.고행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문사말입니다.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서 문사일 수 없으며 지조있는 선비정신이 내재돼야 합니다.‘답사기’를 3권까지 썼지만 갈수록 글쓰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현재 절반쯤 진행중인 4,5권 집필도 더 어려운 작업이라고 토로했다.제주도를 답사했더니 4·3사건을 안 다룰 수가 없고,경상도를 갔더니 거창학살사건을 다시 조명해야 하기 때문이란다.이런 과정을 거쳐 ‘답사기’의 완결편 2권을 올 상반기중 마무리할 작정이다. 그런 다음 일생의 또다른 역작,즉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어떤 강렬한 요구에 답을 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새로운 다짐이다.그것은 온국민이 함께 읽을 수 있는 ‘한국미술사’를 집필하는 일이다.준비는 오래전부터 해와 곧바로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미술사는 문화사의 꽃입니다.학식과 학덕을 쌓은 사람이 그 시대의 역사관을 잘 반영했을 때 더욱 향기나는 꽃이 되겠지요.또 복잡한 현상을 단박에 단도질할 수 있는 깊이와 연구업적이 뒤따라야 합니다.영어로 쓰여진 한국미술사는 물론 번역할 수 있는 마땅한 텍스트도 없습니다.” ●한국인 대부분 문화적 자존심 강해 이곳저곳 강의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인은 대부분 문화적 자존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그는 반면에 열등의식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했다.결국 ‘짬뽕’식이 되다보니 단군 이래 세계문화를 주도해본 적이 한번도 없이 중심부가 아닌,늘 주변부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이제는 주변이 아닌 중심적인 문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동아시아문화의 ‘주주’로서 다른 나라에 문화적 영향을 줘야 한다는 필연이 도래했다고 역설했다.한국미술사를 집필하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이란다. “일본은 동아시아를 주도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기네들만 살려고 해서 실패했습니다.더이상 도덕적으로 동아시아를 주도하기는 틀렸습니다.중국사람들은 우리보다 5,6년 뒤져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한류가 퍼져나가는 것을 보십시오.대중의 힘은 어마어마합니다.미국의 문화가 오기전에 마를린 먼로가 우리들에게 가장 먼저 왔지 않습니까.이제는 세계에서 1등이 나와야 합니다.노무현 대통령도 동아시아물류중심국가를 외쳤는데 이는 반쪽에 불과합니다.물류와 문화가 합쳐진 그런 정책이어야 하지요.” 나이 40이 넘어가면 과거의 이력이 얼굴에 하나둘 새겨진다는 말을 꺼내자 그는 “파란과 곡절도 많았다.93년 이전까지는 정말 별볼 일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14년반만의 대학졸업,교수직 박탈,8년동안의 백수상태,운동권 이론가라는 제도권 교수의 따돌림 등만 떠올려도 그렇단다. ●고3때 담임선생님 권유로 미대 진학 청운초·중학을 나온 그는 경복고교 입학시험에 낙방했다.중동고로 방향을 튼 그는 1967년 고3때 국문학과를 택하려고 했으나 담임선생의 권유로 서울대 미학과에 진학했다.그러나 ‘예술학개론’‘예술비평’ 등의 딱딱한 강의가 많아 연극회에 가입해 유치진의 ‘토막’,천승세의 ‘만선’ 등 민족극 공연에 적극 참가했다.공부는 뒷전이었다.연출은 주로 서울대 미학과 선배인 김지하씨가 맡았다. 대학시절 그의 서울 종로구 창성동 집에는 소위 ‘의식있는’ 친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보안 경찰관에게 데모꾼 소굴로 인식됐다.결국 69년 4월 ‘3선개헌 풍자극’의 대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그해 7월 무기정학을 받았다.시련을 호되게 겪은 그는 서둘러 군입대를 하게 됐다.제대 후 한국미술사 연구에 필생을 걸고 뜻을 세우지만 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됐다.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현상수배중이던 이철(전 국회의원)에게 남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75년 2월 그는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방황하던 그는 7개월 뒤 군복무중 미술관에서 만난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원래는 장준하 선생이 주례를 맡기로 했으나 의문의 실족사로 리영희 교수로 바뀌었다.결혼 후에는 금성출판사,공간사 등에 다녔다. 80년 10월,입학한 지 14년 반만에 겨우 졸업장을 받고 이듬해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전공에 들어갔다.대학원을 마친 그는 건국대 교수로 채용됐으나 미복권 상태임이 밝혀져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이때 그는 ‘미술속에서 현실을 찾자’는 구상 아래 그 유명한 슬라이드강좌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를 열어 떠돌이 생활로 대중속에 파고들기 시작했다.‘답사기’라는 역마살도 이때 시작됐다. “인세요? 한 15억원정도? 세금 한 4억 냈을테고….집사람한테 물어봐도 안 가르쳐줘요.장관이라도 돼야 정확히 알 수 있을란가?(웃음)” ‘답사의 달인’에게 꼭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전문화의 진수는 경주,건축의 아름다움은 병산서원·부석사라고 했다.또 자연의 풍요로움을 느끼려면 제주가 으뜸이라고 했다.그러면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알면 보이나니,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유홍준 교수는 ▲1967년 중동고 졸.80년 서울대 미학과 졸.83년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98년 찰학박사(성균관대). ▲77년 공간 편집부.78년∼83년 중앙일보 계간 미술부 근무.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91년∼2002년 영남대 회화과 조교수.2002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2003년 문화재위원. ▲저서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다시 현실과 비평에서,정직한 관객,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나의 북한유산 답사기,완당평전,화인열전 등. ˝
  • 儒林(5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실제로 조광조와 정몽주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중종 12년,8월7일. 권진(權嗔)이라는 성균관의 유생이 비교적 긴 분량의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렸는데,그 내용은 정몽주와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것이었다. 학문과 덕이 있는 인물들의 신주를 문묘에 모시자는 것인데,정몽주는 성리학에 밝을 뿐 아니라 충효와 예절에 뛰어났으며,교육을 일으켜 후세에 끼친 공로가 크고,김굉필은 바른 행실과 교육으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으니,문묘종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권진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광조는 이에 전적으로 찬성하였다.평소 조광조의 신념대로 정몽주는 정신적 스승이고,김굉필은 실제적 스승이었으니 마땅히 억울하게 죽은 김굉필에게 작록과 시호를 내리고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종사케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이를 중종에게 청하였던 것이었다.그러나 조광조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정몽주를 종사토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굉필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의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우대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중종의 견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김굉필이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만약 김굉필을 문묘종사케 한다면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의 세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염려한 훈구파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마음 속에서 한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백골이 진토된 들 임향한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를 읊는 것으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을 노래한 조광조는 마침내 이자와 헤어지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충의는 본래 없어질 수 없는 것/평소부터 닦아온 사람 그 또한 없었던가/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더욱 보기 어렵더니/이제야 고려의 한 충신을 내 알겠구나.” 조광조가 읊은 이 노래는 훗날 왕위에 오른 태종이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기려 문충이란 시호를 내리며 지은 노래였다. 태종은 정몽주를 기리며 또 하나의 시조를 짓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쇠망함에 이조(李朝) 문득 일어나니/현명한 인사들이 떼 지어 붙었구나/조용히 죽음을 택한 오천(烏川)의 선비/조선 땅에 절의(節義)의 길 열어주었네.” 조광조는 이자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태종이 노래하였던 시를 통해 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여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이자와 작별을 고한 조광조는 다시 머나먼 유배 길을 떠나게 되는데 용인을 지난 수레행렬이 남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이미 구름처럼 모였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날이 저무는 강물 위로는 붉은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는데,바로 그 때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한 사람 하나가 홀연히 나타나 조광조의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물럿거라.” 압송하던 나장 하나가 따르는 사람을 향해 쫓아내려 하였으나 그 사내는 오히려 크게 소리 지르며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나으리,대사헌 나으리.” 마침내 나졸이 손에 든 주장을 휘둘러 사내의 몸을 세차게 후려치며 말하였다. “썩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분명히 쓰러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으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서운 눈빛으로 나졸을 노려본 후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네 이놈,내가 개상에 얹은 곡식단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어디서 함부로 태질이란 말이냐.”˝
  • 儒林(5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5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실제로 조광조와 정몽주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중종 12년,8월7일. 권진(權嗔)이라는 성균관의 유생이 비교적 긴 분량의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렸는데,그 내용은 정몽주와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것이었다. 학문과 덕이 있는 인물들의 신주를 문묘에 모시자는 것인데,정몽주는 성리학에 밝을 뿐 아니라 충효와 예절에 뛰어났으며,교육을 일으켜 후세에 끼친 공로가 크고,김굉필은 바른 행실과 교육으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으니,문묘종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권진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광조는 이에 전적으로 찬성하였다.평소 조광조의 신념대로 정몽주는 정신적 스승이고,김굉필은 실제적 스승이었으니 마땅히 억울하게 죽은 김굉필에게 작록과 시호를 내리고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종사케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이를 중종에게 청하였던 것이었다.그러나 조광조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정몽주를 종사토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굉필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의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우대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중종의 견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김굉필이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만약 김굉필을 문묘종사케 한다면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의 세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염려한 훈구파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마음 속에서 한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백골이 진토된 들 임향한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를 읊는 것으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을 노래한 조광조는 마침내 이자와 헤어지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충의는 본래 없어질 수 없는 것/평소부터 닦아온 사람 그 또한 없었던가/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더욱 보기 어렵더니/이제야 고려의 한 충신을 내 알겠구나.” 조광조가 읊은 이 노래는 훗날 왕위에 오른 태종이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기려 문충이란 시호를 내리며 지은 노래였다. 태종은 정몽주를 기리며 또 하나의 시조를 짓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쇠망함에 이조(李朝) 문득 일어나니/현명한 인사들이 떼 지어 붙었구나/조용히 죽음을 택한 오천(烏川)의 선비/조선 땅에 절의(節義)의 길 열어주었네.” 조광조는 이자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태종이 노래하였던 시를 통해 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여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이자와 작별을 고한 조광조는 다시 머나먼 유배 길을 떠나게 되는데 용인을 지난 수레행렬이 남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이미 구름처럼 모였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날이 저무는 강물 위로는 붉은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는데,바로 그 때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한 사람 하나가 홀연히 나타나 조광조의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물럿거라.” 압송하던 나장 하나가 따르는 사람을 향해 쫓아내려 하였으나 그 사내는 오히려 크게 소리 지르며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나으리,대사헌 나으리.” 마침내 나졸이 손에 든 주장을 휘둘러 사내의 몸을 세차게 후려치며 말하였다. “썩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분명히 쓰러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으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서운 눈빛으로 나졸을 노려본 후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네 이놈,내가 개상에 얹은 곡식단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어디서 함부로 태질이란 말이냐.”
  • 美대선은 돈싸움

    |워싱턴 백문일특파원|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는 ‘돈 싸움’이 될 전망이다.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이 쓸 총 비용은 5억달러(약 5900억원)로 11월2일 대선은 역사상 가장 ‘비싼 선거’가 될 것이라고 AP통신이 보도했다.2000년 대선 당시 부시 후보와 앨 고어 전 부통령이 세운 2억 9000만달러의 기록을 훨씬 상회한다. 부시 대통령이 지금까지 모금한 자금은 목표치 1억 7000만달러를 넘었고 8월 전당대회까지 2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케리 의원은 지난해 모금액 2500만달러를 포함,7월 전당대회까지 1억 500만달러의 목표액을 정했다. 두 후보는 9월 정부로부터 각각 7500만달러씩의 선거자금을 받는다.여기에다 공화당과 민주당 및 시민단체들이 지출하는 수천만달러의 자금을 합치면 총 대선비용은 5억달러를 웃돌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3월에만 TV광고 등으로 1750만달러를 쓰는 등 지금까지 6700만달러를 써 현재 유용자금은 1억달러 남짓이다.예비선거에서 대부분의 돈을 다 쓴 케리 의원은 20개 도시를 순회하는 모금행사를 계획하고 있으며 인터넷으로 1400만달러 이상의 모금계획을 갖고 있다.˝
  • 파이낸스센터는 맛있多

    ■5개식당 고재길조리장의 “이래서 최고” 서울 파이낸스센터 지하 1·2층의 식당가는 이국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만큼이나 다양한 음식점들이 몰려 있다.양식당부터 에스닉푸드와 실내 포장마차에 이르기까지 20여개의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이들이 강남의 청담동에 맞서 강북의 외식 트렌드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강북의 트렌드를 이끄는 만큼 가격도 만만찮다.보통의 샐러리맨들이 자주 가기엔 벅차다.지하 1층은 비교적 캐주얼한 반면 지하 2층엔 품격있는 식당들이 자리잡고 있다.따라서 주로 외국인들이나 기업의 임원,고위 공무원들이 찾는 편이다.이런 트렌드 중심에는 아일랜드식 선술집이자 뷔페인 벅 멀리건스의 고재길(53) 조리장이 있다.그는 파이낸스 빌딩 식당가 이탈리안 식당 메짜루나,중식당 싱카이,일식당 이키이키,오리엔탈 바 뭄바 등을 총괄하는 수석 조리장을 맡고 있다. 1971년 육사 장교식당에 근무하던 것이 계기가 돼 조리사의 길로 접어든 그는 세계를 돌며 음식 주유(周遊)를 통해 ‘안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다.33년간 조리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지난 81년 부산 해운대의 조선비치,96년 그랜드호텔,2000년 파이낸스센터의 SFC몰 오픈 멤버로 참여했다.조선호텔의 아일랜드식 선술집 오킴스도 그의 작품이다. “요리도 자기를 표현하는 도구이자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정통의 아일랜드 음식 ‘제임슨 치킨’과 ‘코트치즈 샐러드’,‘엉클 아서 파이’를 제안했다.아일랜드 음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취향에 딱 맞는다는 것이 그가 추천한 이유다.아일랜드인들은 한민족처럼 정이 많으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 특징이다.음식을 만드는데는 우리처럼 무척이나 손질이 많이 간다.또 모양보다는 듬뿍 담아내고,식재료도 다양하다. 그가 매일 식단을 짜는 벅 멀리건스는 강북의 실속파들이 찾는 식당으로 입소문이 나 있다.85가지의 메뉴가 뷔페식으로 나오는 점심이 특급호텔보다 20∼30% 싼 1만 8000원(세금포함).야간에는 흑맥주로 떠들썩한 아일랜드풍의 레스토랑 겸 바 분위기다.저녁 메뉴로는 제임슨 치킨,엉클 아서파이 등이 인기다.맥주통에 냉각시스템이 달려 있어 흑맥주는 아일랜드에서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걸쭉하면서 감칠맛이 난다.라이브 연주 무대와 당구대도 준비돼 있다.(02)3783-0244 ■고재길씨 요리 따라하기 ●코트치즈 샐러드 재료 야채(양상추·겨잣잎·치커리 등 4∼5종) 200g,망고 ½개,고트치즈 50g,붉은 양파 ¼개,방울토마토 4개,치아바타(또는 식빵) 1장,잣 10g,크레송·비트·당근채 약간씩,발사믹 드레싱(발사믹 식초 100㎖,올리브 오일 50㎖,바질·다진 양파·소금·후추 약간씩). 만드는 법 (1) 야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드레싱을 뿌리며 골고루 섞는다.(2) 그릇에 야채를 담고 망고를 굵게 잘라 얹는다.(3) 슬라이스한 치아바타를 노릇하게 익힌 다음 코트치즈를 올려 굽는다.(4) 야채 위에 (3)을 올리고 그 위에 크레송을 얹는다.(5) 잣을 팬에 튀겨 올리고 방울 토마토·비트·당근채로 장식한다. ●제임슨 치킨(3인분) 재료 닭 가슴살 3쪽,베이컨 6줄,알감자 40g,양파 ½개,버터·허브(세이지·타임·로즈마리) 약간,위스키 소스(생크림 50㎖,닭육수 30㎖,화이트 와인 10㎖,표고버섯 30g,(제임슨)위스키 20㎖,황설탕 약간). 위스키 소스 만드는 법 (1) 표고버섯을 잘게 썰어서 볶는다.(2) (1)의 절반을 화이트 와인을 넣어 졸인 다음 생크림을 넣고 표고버섯·육수를 넣고 걸죽해질 때까지 끓인다.(3) (2)를 믹서기에 갈아서 (1)을 첨가해서 한 번 더 끓인다.(4) 위스키를 넣는다. 만드는 법 (1) 다진 양파를 빵가루와 버터에 볶아 허브를 넣고 적당한 크기로 뭉쳐 스터핑을 준비한다.(2) 닭가슴살을 칼로 저며 편다.(3) (1)의 스터핑을 (2)로 말아 베이컨을 감는다.(4) (3)의 닭을 오븐에서 180℃의 온도로 20분 익힌다.또는 전자레인지에서 5∼6분 조리한다.(5) 알감자는 4등분해서 버터·소금 간을 해 오븐에 익힌다.(6) 접시에 감자를 깔고 (4)의 치킨을 3등분해서 얹는다.(7) 위스키 소스를 뿌리고 허브·토마토로 장식한다. ●엉클 아서 파이(3인분) 아일랜드의 요리사들이 가장 신경쓰는 음식이란다.선남선녀가 처음 데이트를 할 때 주문하는 음식.포크로 페이스트리 가운데를 찔렀을 때 김이 나면 결혼까지 골인한다고 믿는다.하지만 김이 나지 않으면 남녀는 그자리에서 돌아선다고. 재료 쇠고기 200g,(기네스)맥주 300㏄,버섯 100g,양파 1개,당근 100g,셀러리 50g,월계수 잎 2장,허브(타임·로즈마리)·후추·데미글라스 소스(시중 판매)·레드와인·흑설탕·식초 약간씩,페이스트리(밀가루(중력분)·소금·녹인 버터 약간씩·계란 1개를 섞어 반죽한다.) 만드는 법 (1) 쇠고기를 가로·세로 각 1㎝ 크기로 잘게 잘라서 맥주에 하루 정도 재워둔다.(2) 쇠고기를 건져내 소금·후추 간을 하고 밀가루에 묻혀 센불에서 갈색이 나도록 볶는다.(3) 양파를 다져서 팬에 볶고 버섯·당근·셀러리는 쇠고기와 같은 크기로 잘라 볶는다.(4) 쇠고기와 야채를 한데 넣고 고기를 절인 맥주를 넣고 끓인다.(5) (4)에 허브와 월계수 잎·데미글라스 소스를 넣고 농도를 맞춰가며 끓인다.(6) 고기가 충분히 익으면 마지막으로 식초와 설탕을 반으로 졸인 식초를 넣으면 스튜가 완성된다.(7) (6)의 스튜를 그릇에 담고 페이스트리를 덮어 180℃ 오븐에 구워낸다.(8) 페이스트리에 버터를 바르고 허브로 장식하면 완성. ●여기도 가보세요 파이낸스센터에서 샐러리맨들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지하 2층의 노는 아이(540-6930).이 건물에서 소주를 파는 유일한 음식점이다.소주 한병에 900원이다.대표 구성완씨는 “소주는 1병에 20원씩 손해보고 판다.”고 말했다.안주는 홍합탕 1000원.파격적인 가격이다.나머지 30여가지 안주의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점심 때는 볶음밥 등의 식사도 된다.이탈리아 말로 ‘반달’이란 뜻의 메짜루나(3783-0003)는 이탈리아식 음식이 주류다.점심때 클럽 샌드위치와 토노 샌드위치가 인기가 많다.모든 샌드위치에는 야채피클과 감자칩,샐러드가 제공된다.정통 인도요리를 즐길 수도 있다.강가(3783-0610)는 바비큐와 카레요리가 가장 대표적이다.인도식 숯불가마에 굽는 왕새우와 치킨 바비큐가 유명하다.또 카레 음식의 원조답게 다양한 카레 요리를 맛볼 수 있다.한국인들을 위해서 비프카레까지 나와 있다. 이탈리아식에 프랑스 요리를 가미한 퓨전식당 My x-Wife’s Secret Recipe(777-0927)도 유명하다.집에서 먹는 듯한 분위기다.점심엔 주로 면요리인데 8000∼2만원,저녁엔 스테이크 위주로 3만원 이상이다. 이기철기자 chu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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