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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손학규의 길

    1994년 햇병아리 초선의원 손학규는 김영삼 대통령(YS)에게 독대를 신청했다. 국회의원 생활 1년을 갓 넘긴, 그것도 중하위 당직인 부대변인 위치에선 어울리지 않는 면담 신청이었다. 면담 날짜가 잡혀진 뒤 손학규는 절친한 사이인 송태호 당시 청와대 교육비서관을 만났다.‘김현철씨가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겠다고 귀띔했다.송 비서관은 펄쩍 뛰며 극구 말렸다. 그 문제는 청와대에서도 금기시되는 것이라고. 사실 그랬다. 당시 YS의 차남 현철씨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다. 그런 현철씨를 해외로 내보내야 한다고 건의하겠다니…. 손학규는 그러나 끝내 결행했다.이 건의를 들은 YS의 얼굴이 벌겋게 되고 굳어진 것은 당연한 일. 집권여당인 민자당과 청와대의 핵심인사들도 감히 이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그의 행동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셈. 그는 “까짓것 정치 안하면 되지 하는 생각에 할 얘기를 다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손학규는 ‘강단’이 있다. 집념과도 통한다. 재수 끝에 경기도지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그가 요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100일 민심 대장정’을 통해서다. 이른바 체험, 삶의 현장이다.‘국민의 바다’에 뛰어들겠다며 집 나온 지 70일이 넘는다. 하고 다니는 행색은 좀 심하게 얘기하면 ‘먹물 든 노숙자’나 진배없다. 더부룩한 머리털에 한번도 깎지 않은 수염. 어찌보면 자연을 벗삼아 전국을 누비는 옛 선비 같기도 하다. 혹자는 ‘두타행’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그에게선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언제 이런 여유를 가져보겠냐는 게 그의 얘기다.하지만 누가 뭐래도 고행이다. 이런 일을 한 대선주자도 없다. 대단한 끈기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년 대선정국의 거센 풍랑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체력 보강을 위해서도 그렇다. 1박2일간 그의 충남 일정을 동행 취재했다. 무게가 좀 나가는 배낭을 짊어진 채 먼 거리는 버스로, 짧은 거리는 택시를 이용하며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들으려고 꽤나 노력했다. 시장터에서 상인들을 만나건 밤 농장에서 밤을 줍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진정성’은 변함없었다. 어려움을 호소할 때면 어김없이 수첩을 꺼내들고 적었다. 서민들도 그의 이런 마음을 알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서민생활을 겪으며 얘기 듣는 것과 악수하며 얘기 듣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점차 늘고 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택시기사도 여럿 있었다. 시대정신과 콘텐츠에선 앞서지만 대중적 호소력과 정치적 감각, 이벤트 능력은 떨어진다는 손학규. 이번 민생탐방으로 그런 평가가 바뀔지 궁금하다.민생탐방 이후 그의 지지도가 4%대로 올랐으니 효과는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최근 중소기업인 대상 대선주자 지지도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에 상당히 고무돼 있다. 그는 기자에게 이 내용을 두 번이나 얘기했다. 문제는 정치히트상품으로 통하는 민심 대장정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언제나 1,2위를 다투는 식자층의 지지도와 대중 지지도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최대 현안이다. 방안이 있느냐는 여러차례 물음에도 그는 말을 아꼈다.“하늘이 알겠지. 때가 되면 바람이 불고 곡식이 여문다.” ‘저평가 우량주’인 손학규의 지지율이 연말쯤 10%대에 진입할 수 있을지는 대선정국의 주요 관전포인트다.jthan@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바다 이야기

    [한승원 토굴살이] 바다 이야기

    지하철 노약자석에 두 사람의 노숙자가 타고 있었다.50대인 그들은 똑같이 한 자동차 회사의 허름한 하늘색 제복 윗도리를 걸치고 있었고, 한 성당에서 주는 점심을 얻어먹으러 가고 있었다. 불콰하게 취해 있었다. 체구 크고 뻐드렁니 난 쪽이 말했다. “유치한 자식들, 차라리 동원 회사 배 납치한 놈들같이 해적질을 하지!” 체구 작달막한 쪽이 빈정거렸다. “아이고 형님, 우리민족은 신라 때부터 해적들에게 시달려 오기만 했어요. 우리민족이 바다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 아시오? 이 반도 땅 해변 해수욕장들은, 물 길 바람 길 파도 길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방파제나 부두를 설치하고, 아파트 지으려고 바닷모래 준설한 까닭으로 자갈들만 엉성해져가고 있어요. 썩은 시화호를 만들어놓고, 다시 썩은 냄새 풀풀 나는 새만금 바다를 또 만들어 놓았어요.” “김 박사, 말이 맞다. 바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이 땅을 경영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강진의 동생 정약용에게, 바다의 율동에 대하여 물은 바 있다. 실사구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중국의 고전 가운데 읽지 않은 것이 없는 그였지만, 바다에 대해서 무지한 대표적인 한국선비였다. ‘해변에 산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조수의 왕래와 성쇠는 해석이 불투명하다… 중국의 성인은 모두 서북 지방에서 났으며 해수의 변화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측량함이 없었다. 주역은 미묘한 이치를 담고 있으되 바닷물 흐름에 관해서는 조금도 설명이 없다.’ 주역의 저자는 대륙 한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율동만을 참고하여 주역을 만들었고 바다의 율동 원리를 가미시키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선인들은 바다가 도외시된 중화사상에 젖어 ‘무이 구곡’이나 ‘도산 십이곡’으로 흉내 내며 살았을 뿐이었다. ‘배타는 놈은 자식으로 치지 않는다.’는 말을 속담으로 사용할 만큼 바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바다를 멀리했다. 바다는 세상을 막 살아도 아까울 것 없는 상것들이나 사는 시공으로 여겼다. 신라의 귀족들은 광활한 바다를 경영함으로써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 장보고를 암살하고 그 세력들을 소탕했다. 그 이후, 해적의 발원지인 대마도를 정복한 일과 같은, 바다 경영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인들은 바다를 외면하고 중국대륙만을 지향했고 그쪽에서 생성 유포된 사상만을 숭상했다. 자연 바다를, 젊은이들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시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천사들은 거칠 것 없이 지껄거렸다. “규장각에 있어야 하는 보물들이 어째서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지 아시오. 프랑스 해적들이 뺏어간 것이오.” “일본 해적들이 뺏어간 조선왕조실록도 엊그저께 겨우 찾아왔네.” “영국 박물관 미국 박물관 일본 박물관, 일본 골동품 수집가들 창고에 우리 보물들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지 아시오?” 일찍이 바다에 눈뜨고 바다 경영에 뛰어든 나라 사람들은 바다 저 편 땅(보물섬)에 널려 있는 것을 강제로 훔쳐다가 잘먹고 잘살아왔는데, 바다에 대하여 무지한 우리 선인들은 그들에게 대대로 당하기만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이 해적들을 영웅시할 때 우리는 뱃사람들을 상놈으로 천시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바다 경영에 뛰어든 사람들, 고구려 역사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어려운 실랑이질을 하고 있어요. 땅덩이 동강나 있는 것도 그렇고 북한 핵문제도 그렇고 일본이 독도 빼앗으려 하는 것도 그렇고…” “야,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존심 상해 죽겠다. 아니, 그 대박 도깨비 기계에다가 왜 하필 ‘바다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 가지고 신선한 바다를 물 먹이고 있냐?” 소설가
  • 儒林(68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0)

    儒林(68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0)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0) 퇴계가 고봉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퇴계와 고봉사이에 오간 100여 통이 넘는 편지 중 첫 번째인 퇴계의 편지는 이처럼 단순히 문안 인사만을 나눈 엽서(葉書)형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사단칠정논변’의 발단은 해가 바뀐 기미년(1559년) 정월 5일, 퇴계가 고봉에게 두 번째의 편지를 쓴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마도 퇴계는 직접 찾아온 고봉으로부터 이의를 제기받고 해가 바뀌는 세밑에 두문불출하며 이 문제에 대해 골똘하여 심사숙고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기정자(正子:교서관, 홍문관, 승문원 등의 하급 관리인 정9품의 벼슬을 가리킨다. 이 용어로 보아 고봉은 최초로 권지승문원부정자란 벼슬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의 안부를 묻습니다. 헤어진 뒤로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느덧 해가 바뀌었습니다. 어제 박화숙(朴和叔)을 만나 다행히 그대가 부탁한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에 매우 위안이 되었습니다. 영예롭게 돌아온 뒤로(과거에 급제한 뒤 부모를 만나러 다녀온 사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나날이 더욱 귀하고 풍성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겉으로 처지가 바뀔수록 안으로 더욱 반성하고 보존함은 모두가 덕에 나아가고 어짐(仁)을 익히는 경지이니 그 즐거움에 끝이 있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갈 곳을 몰라서 부딪치는 일마다 잘못되고 병은 깊어져 고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의 은혜는 거듭 더해졌습니다. 정성을 다해 벼슬에서 벗어나기를 빌었습니다만 모두 쓸데없었습니다. 공조(工曹)가 비록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찌 병을 다스리는 곳이겠습니까(퇴계는 1558년 12월에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래서 물러갈 것을 꾀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처럼 소득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변에서는 오히려 물러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처세의 어려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이처럼 일상적인 다정한 안부와 올바른 처신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퇴계는 마침내 편지를 보낸 중요한 이유인 ‘사단칠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기 시작한다. “…지난번에 비록 만나고 싶었던 바람을 이루기는 했어도 한순간의 꿈과 같이 짧아서 의견을 깊이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기쁘게 들어맞는 것이 있었습니다. 또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의 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스스로 전에 말한 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충주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충주길

    문경새재 넘기가 숨이 차기는 찼던 모양이다. 제3관문을 넘어 산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마을이 나온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고사리마을. 조선시대 충청도로 접어드는 영남대로의 첫 숙박지 신혜원(新惠院)이 있던 곳이다.17∼18세기에는 주막만 100여가구가 될 정도로 많았으나 광복후에 자취를 감췄다.3관문을 지나 2㎞쯤 밑에 있는 고사리는 새재 7∼8부 능선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주민 이종언(73)씨는 “옛날에 제1관문과 대안보에 역촌이 있었는데 상놈이 많다며 양반들이 두곳을 피해 ‘고 사이에서 잠을 자고 가자.’고 하면서 ‘고사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고 전했다. 마을에는 말을 재우며 묶어놓았던 마방터가 있었으나 10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현재 민박집이 있고 이 집 유리문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진 ‘마방터’라는 글씨만이 옛날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고단한 나그네들의 쉼터 고사리 마을 1914년까지 이 마을은 연풍현(군) 고사리면이었다. 산속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상당히 번화했음을 알 수 있다. 면사무소가 있던 터에는 한 기독교인이 철제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세월이 꽤나 흘렀는지 녹이 슬어 있다. 마을 안으로 폭 2m쯤 되는 길이 나 있다. 이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에 갔다가 경호원을 따돌리고 혼자 문경새재를 넘어 이곳을 거쳐 충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귀경한 직후 도로포장을 지시, 공사가 시작됐으나 갑작스러운 서거로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고 김옥길씨가 이 마을에서 은거하기도 했다. 공사가 중단된 얼마 후 김씨의 별장을 찾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같은 사연을 듣고 도로를 완공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부인 홍기 여사가 김씨의 별장에 머물자 이곳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별장은 길 옆에 있다. 대문 양쪽에 ‘금란서원(金蘭書院)’과 ‘이화학당’이라고 새긴 문패가 달려 있다. 지금은 이화여대 수련원으로 쓰인다. 마을 밑에 이 대학 대형 수련원도 있다. 이 마을에서 문경장은 40리, 충주장은 61리이다. 이씨는 “어릴 적에 장날이면 걸어갔는데 충주장보다 문경장을 더 많이 다녔다.”고 회고했다. 관광지로 변한 이 마을 산기슭 여기저기에는 외지인들이 지은 펜션이 들어차 있다.20여가구 주민들은 관광객과 문경새재 신선봉을 찾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점과 상점을 열고 있다. 마을에서 내려오던 길은 다시 높아지며 작은새재(소조령)에서 이화령쪽으로 뻗어나온 국도 3호선과 만난다. ●냉천에서 목 축이고 수안보로 고사리 길이 소조령과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자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 사시마을이 나온다. 지난해 4월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는 ‘냉천(冷泉)’이 있다. 주민들은 ‘찬물내기’라고 부른다. 주민 김지연(84)씨는 “길(국도 3호선)을 넓히면서 샘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면서 “냉천의 전설까지 명맥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평생 약초를 캐 살아가던 노인이 삶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이 옹달샘에서 선녀와 동자가 ‘이곳에 한양가는 길이 나고 목마른 행인들이 많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노인은 이 물로 농주(濃酒)를 빚었고 이를 얻어 마신 한 유생이 이를 ‘냉천’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다. 이후 영남대로가 나면서 마을에는 목을 축이고 가려는 행인들이 줄을 이어 마방과 주막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2㎞를 채 안 내려와 ‘대안보’ 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 ‘안부역’이 있던 곳이다. 수안보보다 커 대안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역(驛)은 말만 갈아타는 곳이고 원(院)은 말도 바꿔타고, 잠까지 자던 곳이다. 마을 주민 허남순(83)씨는 “지금은 마을 옆으로 큰 도로가 났지만 옛날에는 마을 한가운데로 난 게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이었다.”고 내려오는 얘기를 전했다. 이 길은 마을 안에 있는 구릉 위를 오솔길처럼 지나는 형태로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회관 도로 옆에는 공덕비 등 비석 여러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옛길에 늘어섰던 것을 마을회관을 신축하면서 주민들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길경택 충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당시 이 길로 행인들이 많이 다니다보니 현감 등이 자기 공적을 자랑하려고 비를 많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마당처럼 넓은 바위 천하명당 ‘패랭이번던’ 대안보에서 2㎞ 더 가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가 있다. 당초 ‘물탕(온천이 나오는 샘)’만 있었던 거리였다. 수안보 전문 향토사학자 조일환(70)씨는 “수안보가 대안보보다 커진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됐다.”면서 “일제가 수안보 온천을 개발하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충주시내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수안보면 수회리가 나타나고 도로변에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이 산이 ‘패랭이번던’이라고 불리는데 유래가 재미있다. 번던은 ‘언덕’을 의미한다. 조선 명종 때 한 지관이 충주에 머물다 꿈에 선인을 만나 따라간다. 선인은 이 마당바위에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서쪽 산을 가리킨 뒤 구름을 타고 날아가버리면서 꿈에서 깨어난다. 다음날 지관은 선인이 가리킨 방면으로 가다 이 바위에 패랭이를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발견하고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를 보고 몰려든 행인들이 ‘패랭이번던’이라고 불렀고 이 길을 지날 때면 경치를 구경하며 쉬어가곤 했다. 이 산은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주민들은 이 바위가 국도 3호선 확장공사로 절반쯤 잘려나갔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길 실장은 “산림종자연구원 안의 ‘서유돈 불망비’가 새겨진 바위가 마당바위”라고 확인해줬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접근이 쉽지 않다. 서유돈은 조선조 현감이다. 이 바위 앞으로 영남대로가 지나갔었다. 1950년대까지 주막 3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국도 3호선이 생기면서 완전 폐쇄됐다. 길 실장은 “행인들이 많이 지나는 큰 길이어서 선정비를 새겨 넣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당바위 앞과 중앙경찰학교 등을 지난 옛길은 국도 3호선과 겹치거나 갈라지면서 충주시내로 들어간다. 글 사진 충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난동부리는 사람 곤장 30대씩 쳐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거나 길거리에서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은 서른대의 볼기를 치고 관청에 보고한다.” 1700년대 관청에서 고사리면 온정동(수안보온천)과 관련해 승인한 동규절목(洞規節目·향약)의 한 대목이다. 주민들이 8개 항목의 이 향약을 만들어 관에서 허가를 받아 시행할 정도로 질서가 문란했음을 보여준다. 향토사학자 조일환씨는 “당시에는 온천이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수안보가 대형 병원역할을 했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 잦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부모께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사람은 법적 조치한다.’‘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경멸하면 서른번 볼기를 친다.’‘남녀간에 분수를 모르면 볼기를 친다.’는 것 등이 있다. ‘소나무를 마구 베거나 산불을 내면 마을에서 볼기 서른대를 친다.’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조씨는 “환자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지만 숙박집이 부족해 노숙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난방이나 밥을 해먹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면서 산들이 모두 벌거숭이로 변해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관인’이 선명히 찍힌 동규절목 원본은 수안보면 온천1구사무소에 보관돼 있고 기념비도 물탕공원에 설치됐다. 수안보는 18세기 초 안보뜰에 보(堡)가 축조되면서 그 안쪽을 물탕거리라고 해 ‘물안보’로 불렸다가 ‘물’이 ‘수’자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한 걸인이 이곳으로 추위를 피해 왔다가 피부병이 나은 것을 보고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 때부터 수안보온천이 기록에 나타나고 태조와 숙종 등이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남녀탕이 따로 만들어진 것은 1885년에 이르러서였다. 현재 수안보에는 호텔과 콘도가 3개씩 있고 여관 등 숙박업소 21개, 욕탕 2개가 영업을 하고 있다. 조씨는 “동규절목은 영남대로상 교통의 요충지로 온천창과 온정원이 설치됐을 정도로 수안보온천이 큰 영화를 누렸음을 방증하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다른 온천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해외여행 선호 등으로 갈수록 찾는 이들이 줄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충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심층진단-수도권 대기개선책 (상)] 예산 4조원 ‘경유차 대책’ 실효성 의문

    [심층진단-수도권 대기개선책 (상)] 예산 4조원 ‘경유차 대책’ 실효성 의문

    수도권대기개선특별 대책이 심각한 돌발 변수에 맞닥뜨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이 대책의 타당성·실효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병(수도권 미세먼지 오염)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했는가, 지금의 처방은 옳은가?’란 물음이 환경부 연구용역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정부로선 곤혹스러운 점이다.2000만 수도권 시민의 건강개선을 위해 무려 5조원의 예산(국고·지방비 각 50%)이 책정된 초대형 프로젝트가 뿌리부터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서울 미세먼지 미스터리 풀리나 지난해 10월 확정된 특별대책의 골자는 2014년까지 서울·인천·경기도 24개 시의 대기질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한다는 것이다. 서울 미세먼지의 경우,2003년 현재 ㎥당 69㎍(마이크로그램·100만분의 1g)을 40㎍으로 낮춘다는 목표가 세워졌다.‘맑은 날, 서울 남산에서 인천 앞바다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란 캐치프레이즈도 걸렸다. 개선대책은 자동차, 그 가운데서도 경유차에 집중됐다. 정부는 그 근거로,“서울 미세먼지의 67∼73%는 자동차가 배출하며, 자동차 중에선 경유차가 100%를 차지한다.”는 통계를 제시했었다. 자동차와 공장·소각장 같은 ‘배출원별 오염물질 배출량 통계’에 근거해 자동차의 미세먼지 오염 기여율을 산출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당시에도 대기전문가들에겐 액면 그대로 먹혀들지 않은 게 사실이다. 수도권 대학의 한 교수는 “너무 기대치가 높은 약속이어서 당시 발표된 정책에 대한 신뢰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른 대기전문가도 “정부가 대기개선 정책수단과 비용을 ‘경유차 잡기’에만 쏟아붓었는데, 미세먼지 오염의 원인진단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정책이 나온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고 전했다. 전문가집단의 이런 불안감은 서울 미세먼지와 관련한 ‘미스터리’ 때문이다.‘오염도가 이렇게까지 높은 것은 자동차 요인으로만 볼 수 없다. 더 큰 다른 원인이 숨어있을 것’이란 의문이었다. 외국의 대도시 사례가 주로 거론돼 왔다. 한 대기전문가는 “미국 뉴욕시나 LA, 유럽의 여러 도시들도 서울처럼 자동차가 많지만 미세먼지가 20∼30㎍에 불과한 수준”이라면서 “서울시가 60∼70㎍까지 치솟는 것은 결정적인 다른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기정책 재검토돼야” 따라서 백도명 교수팀의 이번 연구결과는 과학적 근거자료를 통해 그동안의 의문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국내에서 처음 규명된 연구결과여서 파장도 작지 않을 전망이다. 우선 정부로선 현재 수립된 수도권 대기정책의 타당성, 실효성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요구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기질 악화의 다른 새로운 원인이 밝혀진 만큼 기존의 처방책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구팀에 참여한 서울대 보건대학원 이승묵 교수는 “자동차가 이산화질소나 이산화황, 오존 같은 다른 대기오염물질의 주요 배출원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미세먼지는 사정이 달라서 정부나 서울시가 자동차를 아무리 규제하더라도 (오염농도는)별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번 연구의 성과”라고 말했다. 자동차(휘발유+경유차)가 서울시 미세먼지 오염에 기여하는 비율이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70%가량이 아니라 14%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 데 대해선 연구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여서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교수는 “이산화질소의 2차 오염물질인 질산염 같은 애매한 요인을 자동차에 포함시키더라도 미세먼지 오염기여율은 25%를 넘지 않는다.”면서 “이런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며, 국가 대기정책 수립에 반드시 고려돼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한편으론 이번 연구의 한계점도 발견된다. 우선 연구팀은 미세먼지의 직경이 2.5㎛(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이하인 초미세먼지(PM2.5)를 대상으로 화학적 성분과 배출원 등을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부의 수도권대기개선대책은 이보다 입자 굵기가 더 큰 10㎛ 이하의 미세먼지(PM10)를 대상으로 수립돼 이번 연구결과를 단순 대입하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연구팀은 그러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초미세먼지가 미세먼지의 40∼70%나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팀은 현재 PM10에 대해서도 추가 분석에 들어간 상태다. 이번 연구는 여러 정책분야에 적잖은 파장을 예고한다. 자동차 연료비 상대조정 정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올려온 경유값 인상정책과 교통세 가운데 상당부분을 수도권대기질 개선비용으로 쓰겠다는 정부계획 역시 재검토 대상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울 도심내 경유차 운행제한 등의 정책도 타격이 예상된다. 한 학계인사는 “백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부인하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한동안 논란이 불가피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환경부 ‘철통보안’ 왜? 이번 연구결과의 파장을 의식해서인지 환경부는 그동안 용역보고서 내용에 대해 ‘철통 보안’을 지켜 왔다. 연구팀에 “보고서 책자를 다른 외부기관에 돌리지 말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언론의 거듭된 자료제공 요구도 번번이 거부해 왔다. 백도명 교수팀이 3년여 연구를 거쳐 최종보고서를 제출한 것은 지난해 7월. 이후 환경부와 산하기관 공무원, 민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연구과제 검토·심의위원회’에서 보고서 내용을 살펴본 뒤 지난해 11월 최종 통과 결정이 내려져 모든 절차가 마무리됐다. 서울신문은 지난 3월 연구용역 관리기관인 한국환경기술진흥원에 보고서 공개를 요청했지만,“환경부 본부에서 아직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료를 건네받지 못했다. 이후 지난 7월까지 환경부에 거듭된 자료제공 요청과 심지어는 정보공개 청구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전반적 환경정책 방향 설정과 연계되는 내용이라 심층 검토가 필요하다. 공개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미정 과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중엔 “(일반이나 언론에)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연구팀엔 “외부기관에 보고서를 배포하지 말라.”는 입단속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달 중순 이 보고서는 정부부처를 비롯한 유관기관 20여곳에 돌연 배포됐다. 연구팀이 보고서를 제출한 지 꼬박 1년이 흐른 뒤다. 한 학계인사는 “정부가 지난해 수도권대기개선계획을 이미 확정했기 때문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염려했을 수 있다. 공개를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어떻게 조사했나 미세먼지의 배출원이 어디인지, 오염원별 기여도는 얼마인지 등을 파악하는 분석 기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발생원을 중심으로 조사하는 ‘확산 모델’과 미세먼지 채취지점의 시료를 분석, 발생원을 역추적하는 ‘수용 모델’이다. 그동안 전자가 일반적인 기법이었지만, 백도명 교수팀은 후자를 활용했다. 초미세먼지(PM2.5) 분석에 이 모델이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백 교수팀은 보고서에서 “확산 모델은 여러 종류의 자연적·인위적 배출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기질 관리기법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확산모델이 적합하지 않은 현실적 사정도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허종배 연구원은 “정부가 통계를 내고 있는 자동차·공장 등 오염원별 배출량은 직접 측정치가 아니라 자동차 대수·연료 사용량 등을 근거로 추정한 것”이라면서 “오염원 기여도를 제대로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정부·서울시 발표와 이번 연구결과가 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시료 채취는 2003년 3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27개월 동안 이뤄졌다.3일마다 24시간씩 서울 종로구의 대기측정망에서 미세먼지를 포집했다. 국내에선 측정이 어려운 탄소성분(OCC)을 분석하기 위해 미세먼지 시료를 미국의 전문기관에 보내기도 했다. 포집된 미세먼지 덩어리(가스+입자)의 총질량을 구한 뒤, 모두 20여 가지로 확인된 미세먼지 구성성분별 질량을 더해 이를 총질량과 다시 비교,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 뒤, 미국 환경당국이 구축한 자동차·굴뚝·난방 등 배출원별 화학성분의 특성자료 등을 활용해 “서울시 미세먼지의 주 원인은 자동차가 아니라 중국발 오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구팀이 이를 거듭 검증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공기흐름을 역추적하는 방식.‘스모그 효과’로 미세먼지가 고농도였던 날 3일 전까지의 공기 덩어리가 어디를 통과해서 왔는지 등을 분석했는데, 강력한 증거가 나타났다. 이승묵 교수(대기오염관리 전공)는 “스모그가 발생한 날의 공기궤적들은 스모그 발생 하루 전의 공기궤적들보다 중국의 주요 산업지역을 훨씬 더 많이 지나쳤다.”면서 “특히 오염농도가 높았던 여름철 스모그 때엔 정확하게 중국의 산업지역만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열린세상] 박사가 뭐길래/이건영 중부대 총장

    한편의 코미디였다고 해야 할까? 얼마 전, 단명으로 끝난 교육부총리의 청문회는 교육기관 종사자들에게 참담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스승과 제자간의 서로 베끼기, 용역 주어 논문 초벌 만들기, 끼리끼리 심사하기 등 박사학위를 둘러싼 대학사회의 어두운 치부가 여과 없이 들추어진 것이다. 박사가 도대체 뭐기에 이 모양인가? 영국사람한테서 명함을 받아보면 이름 앞뒤에 수식어가 많이 붙어 있다. 이름 뒤에 붙어 있는 것은 대개 학사, 석사, 박사 등의 학위나 기술사 등의 면허 또는 가입한 학회 회원약칭 따위이고, 앞에 붙어 있는 것은 작위 같은 것이다. 편지를 쓸 경우 이름 앞에 붙이는 경칭은 경우에 따라 다르므로 아주 조심해야 한다. 요즘도 영국은 매년 심사를 하여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들을 귀족으로 서품하고 이에 합당한 작위를 준다. 대처여사도 남작 칭호를 받았고, 골프황제 이안 우스남도 작위를 받았다. 이름 앞에 이 같은 경칭을 붙이는 것은 대단한 영예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이 같은 봉건사회의 골동품보다 대신 전문직을 나타내는 칭호나 학위 칭호가 걸맞는다. 그중 박사는 명예로운 칭호로 되어 있다. 그래서 명함에도 버젓이 무슨 박사라고 박아서 드러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원래 선비를 숭상하던 유교적 관습 때문에 박사에 대한 사회적 예우는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 높은 편이다. 직업사회도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었다. 전문인들은 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므로 국가에서 그들의 자격을 검증하고 인정해 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소위 면허제도이다. 주로 ‘사’(士)자가 붙은 직업인들이다. 변호사가 있고, 건축사가 있고, 기술사가 있고, 의사가 있다. 국가기관에서 그 자격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소비자보호 차원에서 필요한 제도이다. 박사도 이와 비슷하게 공부하는 학자에게 주는 면허 같은 것 아닌가? 학자도 직업인이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거나 또는 연구소에서 학문을 하려면 남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시대에 앞서서 전문 분야별로 미지의 학문을 개척하고 기술개발을 선도한다. 그리고 사회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책무도 지니고 있다. 실용주의적인 미국은 전문가로서의 자격증을 더 높이 평가한다. 가령 건축가이면 족하지 건축박사는 뭐에 쓰나? 의사나 변호사면 그만이지, 의학박사, 법학박사는 학자들의 칭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들이 의학박사 학위를 가져야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실정이다. 박사를 알아주는 사회가 되니 너도나도 나서고, 또 대학이 학위를 남발하면서 학문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 박사학위 받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대학마다 박사가 쏟아지고 있다. 박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질인 것이다. 외국에서는 수년 동안의 엄격한 과정을 거치고 절차를 밟아 학문의 길이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학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부대학은 학위장사를 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학생들이 제대로 학교에 다니고, 논문다운 논문을 쓰고 있는가? 대학 주변에는 석사 학위 얼마, 박사 학위 얼마라는 식으로 논문을 대신 써 주는 곳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자격 미달자가 금전거래나 용역거래를 한다면 대학이 병들고 있다는 증거다. 외국의 유령대학을 나왔다는 가짜 박사 소동도 민망하다. 그뿐인가. 명예박사는 더욱 명예스러워야 할 터인데 힘있는 정치인들이 나누어 가지는 경향마저 있고, 심지어는 명예박사 학위를 세일하는 대학마저 있는 형편이다. 지난 청문회에 표본으로 드러난 서울의 유명대학 뒷모습이 물론 우리 대학사회를 전부 대표할 수는 없다. 작은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사회 전체가 흔들려도 대학만은 허물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건영 중부대 총장
  • [김석의 갯바위 통신] 남해 참돔낚시

    [김석의 갯바위 통신] 남해 참돔낚시

    참돔을 낚기 위해서는 곶부리와 홈통지형에 주목하자. 바다의 미녀라는 예쁜 별칭이 붙은 참돔은 요조숙녀(?)와 같은 겉모양새와는 달리 미끼에 대한 탐식성이 강하고 여러마리가 떼지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군집성이 강한 어종이다. 군집성과 탐식성이 강한 어종이라는 것은 낚시인에게는 행복한 일이라고 바꿔말할 수 있다. 미끼만 바다에 넣으면 낚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낚을 수 있는 참돔낚시도 몇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먼저 참돔낚시가 유리한 포인트 선별요령을 살펴보자. 낚싯배를 타고 갯바위에 도착하기 전 미리 섬의 지형지물을 살펴보아 툭 튀어나온 곳이나, 너비 10m 이상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홈통지형이 보이면 하선 1순위 포인트라 보면 된다. 참돔은 섬의 툭 튀어나온 곶부리지형에서 형성되는 조류의 조목지대(조류와조류가 만나는 곳, 또는 조류가 약간 머물다가 흘러나가는곳)에서 먹이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조류가 완만하고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홈통지역에서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런 두 곳을 특급 포인트로 선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미끼. 탐식성이 강한 참돔의 성질을 이용해 크릴밑밥으로 멀리 있거나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참돔들을 조목지대로 유인한 다음, 주간에는 크릴과 갯지렁이(참갯지렁이, 청갯지렁이), 야간에는 주로 갯지렁이류를 사용하여 낚시를 하면 된다. 야간에 갯지렁이류가 크릴보다 조과가 뛰어난 이유는 바늘에 꿰어 있는 갯지렁이의 활발한 움직임과 갯지렁이 특유의 인광과 냄새가 참돔의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참돔낚시채비는 5.3m 길이의 2∼3호 정도의 갯바위전용 낚싯대에 원줄 4∼6호, 목줄 3∼5호가 기본. 바늘은 크릴미끼에는 참돔전용바늘 6호, 갯지렁이류에는 7∼9호를 사용하면 된다. 야간 참돔낚시에는 3∼5호정도의 전자찌를 사용하고, 주간에는 최근 트렌드로 자리잡은 잠길찌나 B∼3B정도의 저부력찌를 주로 사용한다. 요즘은 바야흐로 참돔낚시의 절정. 남해안 참돔낚시의 메카로 알려져 있는 거문도에서 참돔낚시를 즐겨보자. 전남 여수시의 국동 잠수기 조합앞 부두에서 10여척의 낚시전용 가이드배가 매일 거문도로 출발하고 있다. 출조시간은 매일 새벽 2시, 철수는 거문도 현장에서 오후 1시30분쯤이다. 오후 3시쯤이면 다시 여수에 도착한다. 선비는 5만원이고 미끼, 밑밥은 현지 낚시점에서 구입 가능하다. 초보자라도 현지 바다낚시전문가들과 함께 출조하면 손맛을 볼 수 있다. 문의 여수 전국낚시(061)644-9023. 낚시칼럼리스트, 낚시춘추 객원기자
  • 25현 가야금 37대가 우려내는 사운드

    25현 가야금 37대가 우려내는 사운드

    무대에 불이 켜지며 가야금으로 파헬벨의 캐논이 연주된다. 동시에 느린 템포의 비보잉과 가야금 리듬에 맞춘 비트박스가 시작되고 DJ는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어간다…. 한 아파트 건설업체의 광고중 한 장면이다. 국악과 클래식, 비트박스와 비보잉 등이 멋진 하모니를 이룬 이 광고는 음악팬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중심엔 숙명가야금연주단(이하 숙가연)이 있었다. 숙가연은 온라인 음원공급업체 벅스뮤직에서 집계한 8월 셋째주 가요인기차트에서 50위권에 무려 3곡을 동시에 진입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캐논 변주곡 ‘올 포 원’이 39위, 비틀스의 ‘헤이 주드’와 ‘렛 잇 비’가 각각 45위와 49위를 차지했던 것. 윤도현밴드의 신곡 ‘오늘은´이 38위, 댄스그룹 신화의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이 40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이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지난 5월 중순에 발매된 숙가연의 베스트 음반 ‘포유(For You)’는 3개월 동안 각종 음반판매량 국악분야 1위를 유지하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음반시장이 불황인 가운데 별다른 홍보나 이벤트도 없는 국악분야의 음반이 인기가수들의 음반 못지않게 지속적인 판매량을 보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포 유’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엄밀히 말하면 국악은 아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외국의 명곡들을 가야금으로 재해석한 것. 가야금 또한 5음계의 국악에 적합한 12현이 아니고 서양음악의 7음계에 적합하도록 25현으로 개조한 것이다.1999년 한국 최초의 가야금 오케스트라로 창단된 숙가연의 송혜진(46) 단장은 “전통적인 12현 가야금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며 파고 들어가는 음색이었다면,25현 가야금은 발산하는 음색을 갖고 있다.”며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차분하고 위로받는 느낌의 가야금 소리에 음악팬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고 최근의 인기비결을 분석했다. 숙가연은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재학생과 졸업생 등 37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오케스트라.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6명단위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연주활동을 벌인다. 이번에 히트를 친 ‘포 유’앨범까지 벌써 5집음반을 내놓은 ‘중고신인’이기도 하다. 정악을 주로 연주하던 숙가연이 대중음악팬들과 친숙해진 계기는 3집앨범인 ‘렛 잇 비’를 발매하면서부터. 비틀스의 음악을 가야금으로 새롭게 해석한 3집앨범에서 4집앨범인 ‘오리엔탈 무드 오브 가야금’에 이르기까지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큰일날 일’들을 벌여 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큰일날’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송 단장은 “한국 음악창작사의 첫출발은 언제나 가야금이었다.”며 “앞으로도 프런티어 역할을 자임할 것”이라고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그는 또 “가야금 연주에 해금을 동화시켜 볼 계획”이라며 “200년전 선비사회에서 유행했던 가야금 음악들을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리메이크해 보겠다.”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글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이주일의 어린이책] “얘들아! 옛날 얘기 한번 들어보렴”

    이번주 어린이 신간 서가에는 고아한 묵향(墨香)이 번져난다. 알마 출판사가 펴낸 ‘일곱 가지 밤’(이옥 원작, 서정오 글, 이부록 그림)은 초등생 독자들에게 독특한 글맛으로 독서의 외연을 넓혀주기에 맞춤한 고전이다. 고전의 참맛을 다치지 않고 어린이·청소년용 읽을거리로 다듬어낸다는 취지로 출판사가 기획한 ‘샘깊은 오늘고전’시리즈의 두번째 권이다.원작자는 조선 정조시대의 ‘삐딱이 문인’ 이옥(李鈺,1760∼1815). 노란색 책 띠지에 박힌 ‘임금이 뭐라 해도, 과거시험을 못 봐도 나는 쓴다!’란 글귀는 정조임금도 못 말렸다는 희대의 글쟁이 면모를 그대로 암시한다. 이옥이 한문으로 쓴 단편원작 12편이 현대감각의 한글문장으로 되살아났다. 유교경전에 바탕한 정통 문학을 거부한 원작자의 글은 당대에는 ‘도발’이었다. 이옥은 자신의 사생활과 보통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나 감수성을 붓끝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선비였다. 불온한 글꾼으로 지목되어 과거응시 자격까지 박탈당한 그의 글들은, 그러나 200여년이 흐른 지금 오히려 세련미 넘치는 문학세계로 인정받는다. 재미와 감동, 문학의 훈기까지.12편의 짧은 이야기들에는 문학적 가치가 넘치도록 푸지게 담겼다. 살가운 이야기체 문장이 딱딱한 고전읽기의 편견을 걷어내 주는 것도 장점.“송귀뚜라미 이야기를 하지. 송귀뚜라미는 서울 사람인데, 노래를 무척이나 잘 불렀어.”로 운을 떼는 첫번째 단편 ‘소리꾼 송귀뚜라미’편. 익살맞은 소리를 기차게 잘했다는 송귀뚜라미 일화는 해학과 여유가 살아넘치는 옛이야기의 재미를 고스란히 안긴다. 소리꾼 친구의 어머니 장례식에 조문간 송귀뚜라미의 거동에는 웃음보가 터질 만하다.상주의 곡소리를 듣고 있던 송귀뚜라미 왈,“저 곡소리는 계면조(어두운 느낌이 나는 곡조)잖아.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평우조(밝은 느낌이 나는 곡조)로 받아야지.” 그의 곡소리가 노래소리처럼 들리는 바람에 초상집이 일순간 웃음바다가 돼버렸다는 사연인데, 삶의 여유와 기지를 품은 행간을 더듬는 맛이 일품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세상을 버린 처녀’‘넉넉한 마음으로 호랑이를 길들인 며느리’‘장발장을 회개시킨 신부를 연상시키는 성 진사’ 등 친숙한 캐릭터들이 끌어가는 글들이라 더욱 흥미진진하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 닿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술술술 써내린 글맛은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게 묘하다. 때론 할머니의 구성진 옛이야기 같고 때론 씹을수록 단맛이 돋아나는 칡뿌리 같고…. 진득히 책장을 덮는 순간 독서의 지평이 서너뼘은 훌쩍 넓혀져 있지 싶다. 초등 고학년 이상.9000원.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열린세상] 추락한 교수 위상을 되찾자/안종범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

    우리 사회에서 교수는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올곧게 등장한 선비의 이미지가 그대로 교수에게 투영되면서 교수의 말 한마디에는 늘 무게와 신뢰가 실리곤 했다. 그래서 교수가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 또한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때 교수는 인기직업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그런 교수의 위상이 이제 땅에 떨어졌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사건이 전문가로서의 교수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면, 얼마전 김병준 교수의 논문 ‘자기복제’건은 인격자로서의 교수에 대한 존경이 경멸로 바뀌게 하는 역할을 했다.“이런 잣대로 평가하면 교수 중에 장관될 사람 하나도 없다.”는 김병준 교수의 말 한마디에 한국에 있는 교수 모두는 함께 수렁에 빠져 버렸다. 지금은 교수라는 직업이 갖는 최대의 위기라고 규정하고 철저한 자기비판이 필요한 때다. 우선 교수의 현실참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예로부터 선비는 말을 아끼고 글로 보여 왔다. 그래서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는 것이 주업이 되어야 한다. 다만 사회봉사 내지 국가봉사를 통한 현실참여가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가 있다. 현실 참여를 목적으로 가르치고 연구를 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교수가 갖는 전문성을 국가운영에 직접 반영시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학문분야에 따라서 현실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문분야에 따라 현실에 참여해서 교수가 갖는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실 참여의 출발은 연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놓을 만한 연구실적 하나 없이 논공행상으로 장관자리나 각종 위원회 위원장직을 차지하는 식의 현실 참여를 보고 일반 국민들은 교수에 대한 편견과 불신을 갖게 되고, 이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현실에 참여하는 교수일수록 연구실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의 학문적 소신이 현실 참여 후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제 연구실적 부풀리기와 같은 교수의 양심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짚어보자. 연구프로젝트를 통해 연구한 여러 결과물 중 학계에 보고해서 공헌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을 좀더 발전시켜 논문에 싣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논문 한 편을 여기저기 학회지에 싣는 것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학생의 논문을 지도한 경우, 학생과 공저자가 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학생 스스로 교수의 지도 없이 자발적으로 쓴 논문에 교수 이름을 올리는 것은 부당하다. 이제 추락해 버린 교수 위상을 되찾기 위해 교수 스스로 나서야 한다. 첫째, 국민들 앞에 교수들이 그동안 쌓은 연구실적을 하나하나 검증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이른바 교수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이라도 만들어 앞으로 관행이니 어쩌니 하는 변명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앞으로는 교수들이 연구로 말할 수 있도록 연구실적과 연구내용을 국민들에게 쉽게 알릴 필요도 있다. 그래야 국민들이 전문성에 대한 막연한 이해가 아닌 보다 실질적인 이해를 통해 합리적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여기서 언론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언론 스스로도 늘 교수 못지않은 전문성을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이슈를 꾸준히 파고드는 끈기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수의 주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찾아내서 국민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분야별 전문기자를 양성하고 활용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정치인과 관료가 정책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교수는 논문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것도 국민과 역사 앞에 두고두고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인, 관료에 이어 교수까지 믿을 수 없게 된 암울한 현실을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안종범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문경길(하)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문경길(하)

    고모산성을 지난 옛길은 문경읍을 거쳐 새재길로 들어선다. 문경읍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하늘재길을 이용했다. 안태현(38)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하늘재는 문헌상 가장 오래된 고개로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 이사금 3년에 개통됐다.”며 “신라시대에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도로 등의 역할을 했으나 조선초 문경새재에 그 역할을 넘겨주면서 관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옛길의 중심에 있다. 당시 새재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 일행과 중앙에서 부임하는 관리들, 과거길에 올랐던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들로 늘 붐볐던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이 새재를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다. ●조선시대 한양·동래 잇는 옛길의 중심 따라서 예로부터 ‘문경’이라 하면 ‘새재’를 연상케할 정도로 문경새재의 명성은 높았다. 새재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새들도 이 고개에 막히면 넘지 못한다고 해서 유래됐다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또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옛 문헌의 기록도 있다. 그리고 ‘새’를 ‘사이’로 풀어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새로운’으로 풀어 ‘새재’로 해석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엔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전멸당한 통한도 간직하고 있다. 새재공원 입구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는 3.5㎞.‘영남제일관’이라는 현판글씨가 보인다. 주흘관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으며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이 있어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제1관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편에 큰 기념탑이 하나 나온다. 경북도가 개도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96년에 세운 타임캡슐이다. 첨성대형을 띠고 있으며 100품목 475종의 물품이 매설돼 있다. 이 캡슐은 경북개도 500주년이 되는 2396년 10월 23일에 후손들의 손에 의해 개봉된다. 타임캡슐 건너편에는 고려와 백제시대의 왕궁, 초가집 등이 들어선 KBS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장이 보인다. 이 곳이 문경새재를 ‘한국의 할리우드’로 도약시켰다.‘무인시대’,‘불멸의 이순신’,‘해신’ 등의 대하드라마가 촬영됐고 최근 흥행 신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의 장면 일부도 문경새재에서 촬영됐다. 이 곳에서 30년째 살고 있다는 이승원(58)씨는 “드라마촬영장 일대에는 20여가구의 주민들이 살았으나 지난 1996년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밑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촬영장을 지나면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이용됐던 조령원터가 나온다. 지난 1977년 두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을 벌여 기와와 토기, 자기, 담뱃대, 손칼 등이 출토 되었다. ●드라마 ‘태조왕건´등의 촬영장 조령원터에서 용추로 오르다 보면 왼편에 초가 한 채가 보인다. 문경시청 엄원식(38) 학예사는 “이 초가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을 오르던 선비와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그리고 갖가지 사연을 품고 새재길을 넘다들던 사람들이 여행의 피로를 풀고 정분을 나누던 주막이다.”고 설명했다.1993년까지 장사를 했으나 지금은 건물만 남아있다. 팔왕폭포라고도 불리는 용추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인 팔왕과 선녀가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새재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도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추 바로 위 오른쪽 길가에 있는 교구정은 관찰사들이 업무를 인수 인계하던 곳이다. 안 학예연구사는 “교구정은 조선시대 새로 도임하는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하는 관찰사가 관인을 인계하던 곳”이라며 “지금은 건물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고 주춧돌만 남아 옛 정취를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500m쯤 더 가면 훈민정음으로 쓴 ‘산불됴심’표석이 눈에 띈다. 당시에도 산불이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제2관문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조곡폭포는 근래에 문경시에서 만든 폭포. 비록 인공폭포이긴 하나 시원한 물줄기가 무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관문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은 문경새재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 설치됐다. 제1,3관문보다 100여년 앞선 것이다.1907년 일제에 의해 없어졌으나 1975년 복원됐다. 문루이름도 옛 조동문을 버리고 조곡관이라고 적었다.2관문을 지나자 관광객들 발길이 뜸했다. 안 학예연구사는 “대부분 관광객들이 2관문 옆에 있는 조곡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되돌아 간다.3관문까지 왕복하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조곡관을 지나 500m쯤 가면 자연석을 깎아 ‘새재아리랑’을 새긴 비를 만난다.‘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문경새재 넘어 갈제/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라는 노래에서 갖가지 사연을 안고 고개를 넘나들었던 나그네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새재아리랑비에서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진을 쳤다는 이진터를 지나 1㎞쯤 가면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돼 있는 동화원이 길손을 맞는다. 동화원은 제3관문 못미쳐 있는 새재의 마지막 마을이다. 고려 왕건이 남쪽을 칠때 행재소로 사용한 곳이다. 고려 공민왕은 이 곳에 행궁을 짓고 홍건적의 난을 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떠났다. 마침내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했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때 쌓았고 숙종때 중창했다. 제3관문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충주다. 제3관문 오른쪽에는 군막터가 있다. 이곳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가 있었던 곳이다. 왼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새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여기에서 빌기도 했다. 새재를 넘으면 한양은 삼 사일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문경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장원급제 길’ 문경새재 예로부터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는 한양으로 가는 길이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문경새재가 있었다. 그런데 영남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경새재를 ‘과거길’ 또는 ‘장원급제의 길’로 부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문경새재입구에는 선비상이 우뚝 서 있다. 또 제2관문에서 동화원을 지나 제3관문 아래쪽에는 책바위가 있다. 책바위에는 장원급제와 관련된 전설이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해 용한 도사를 찾아가 물으니 “집을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정성을 들여 기도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 부자는 도인의 말대로 3년 동안 아들에게 담장의 돌을 하나씩 책바위 뒤로 옮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아들의 몸이 튼튼해졌으며 공부도 열심히 해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출세해 가문을 일으켰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선비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했다는 것. 현재의 책바위는 지난 1998년 문경시가 이 전설에 따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입시 철만 되면 하루 수백여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책바위를 찾아와 합격을 빌고 간다. 문경시는 최근 책바위 주변을 새단장했다. 책바위 뒤편 돌무더기 위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6m, 폭 0.5m크기의 입석을 세운 뒤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등산로를 보수했다.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경쟁률은 자그마치 수천대 1이나 되었다.”면서 “이런 이유로 문경새재를 넘은 영남선비들의 합격률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크게 높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경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열린세상] 공직자의 숙명적 윤리와 철학/이종철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조선조 양반사회에서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라 하였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악이고 사회적 부채일 수도 있다. 불평등이 절대악이라는 공산주의와 필요선이라는 민주주의의 이념 논쟁 속에서 우리는 불평등이 공정한 경기규칙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인가 아니면 불공정한 게임룰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문제삼는다. 옛 속담에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이웃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갑종 근로소득세나 세금 한 푼 안 내고 재산만 불린 일부 정치인과 소수의 엘리트층이 손에 옹이가 박이도록 일한 보통사람보다 재산소득이 엄청 많을 때 결과의 불평등을 필요선이라고 공감할 사람이 있겠는가. 변호사, 의사, 회계사, 고위공직자와 국민을 대표하는 선량이 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들은 모두 벌거벗은 국민의 혈세와 사랑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이다. 이제 현대의 귀족층인 그분들이 화사한 꽃들의 자태를 한껏 뽐내며 국민에게 마음의 보답을 해야 한다. 이것이 꽃의 아름다운 소명이다. 최고의 전문성을 가지고 국민의 생활향상, 복지실현, 지역경제와 기업의 활성화, 교육 문화 육성에 앞장서는 것은 우리들의 소망이다. 더불어 남모르는 자선과 이웃 사랑 또한 그들의 도리이다. 지금껏 자신을 키워준 가족과 사회, 국민을 위하여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눠 베푸는 것은 이 시대의 아름다운 책무이다. 조상을 잘 둔 탓에 또는 천운이 좋아서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지는 것은 보통의 행운이 아니다. 하지만 창조적 엘리트들은 돈이 인생 행복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수단이라는 것을 각심해야 한다. 건강공단의 2005년 통계에 의하면,1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고소득자가 9만 6500명에 달하지만 월급 100만원 미만의 직장인은 무려 180만 8000명이라 한다. 부디 2007년 공직자 재산신고 때부터는 1급 이상 공직자, 국회의원, 판·검사 등 1000여명 중 재산 신고액이 20억원이 넘는 사람들은 사회기부금이나 자선란을 만들어 작게는 1년에 1000만원에서 크게는 4000만원 정도는 불우이웃, 중증장애어린이집, 노인요양시설, 장학재단에 쾌척하는 선행이 있기를 빈다. 사회지도층이 되어 현직에 오르려는 선택된 계층은 검증에 앞서 스스로 기부하는 정신을 발휘하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남을 도와보지 못하고 겸손과 정직, 신념과 목표가 없는 명사는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독버섯일 뿐이다. 1993년 공직자 재산등록제가 실시된 이후 현직에 있는 고위직들의 재산이 공개될 때마다 천진한 국민들은 허탈감과 무력감, 때로는 배신감까지 느껴왔다. 최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의 자리는 돈과 부동산을 굴려서 재산을 증식하는 자리가 아니다. 업무상 우월적 직위를 남용한 부당한 부의 축적과 부정부패와 소득의 누락을 멀리하며 국민과 국가에 멸사봉공하여 헌신하는 자리이다. 국민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심어줄 참 공직자의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이 이루어질 때 갑작스러운 수마에 허탈하여 망연자실한 국민의 이반된 민심을 달랠 수 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 급속한 산업화의 발전 과정에서 30년 동안 수많은 공직자들이 건강까지 버리며 밤낮없이 일해왔다. 가족과의 정담과 자녀와의 사랑을 나눌 겨를도 없이 명예를 지키며 헌신한 창조적 엘리트 집단이 공직자이다. 국민은 공직자에게 전문성, 공정성, 정직, 성실, 멸사봉공, 애국애족과 함께 선비적인 청빈과 청백리를 기대한다. 이것이 곧 공직자가 품어야 할 숙명적 윤리이며 철학이다. 공직자가 국민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존경받는 풍토여야만 나라가 살고 정부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국민은 법적 논리에 앞서 정서적 공감을 기대한다. 이종철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 [공직 초대석] 취임 4개월 이용섭 행자부 장관

    [공직 초대석] 취임 4개월 이용섭 행자부 장관

    요즘 정부에서 가장 바쁜 부처의 하나가 행정자치부이다. 무엇보다 폭우로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 만큼 복구가 시급하다. 매년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는 공무원 연금 문제도 연말까지는 개선대책을 매듭지어야 한다. 당장 9월부터는 새로 출범한 공무원노조와 단체교섭에 나서야 한다. 수해복구 작업을 독려하고자 여름휴가도 미룬 이용섭 행정자치부 장관을 4일 오후 정부중앙청사 장관실에서 만났다. ▶취임한 지 4개월이 지났는데 -행정자치부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목표를 새롭게 정립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들을 수립하는데 힘썼다. 직원들이 자기 업무에 긍지를 가지고 일 할 수 있도록 행정자치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주력했다. ▶가장 역점을 둔 일은 -정체성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직원들이 업무에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일터 만들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은 ‘가정의 날’로 야근을 못하게 했다. 가정에 봉사하도록 한 것이다. 대신 금요일은 ‘행자부의 날’로 지정해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을 하도록 시스템화했다. 희망인사시스템도 도입해 상향식 문제해결형자율팀도 운영했다. 앞으로 10대 과제를 선정해 중점적으로 추진할 생각이다. ▶공직사회의 혁신 체감지수는 -지난 5월 설문조사에서 공무원의 84%가 혁신 성과를 체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반 국민은 50%만이 체감했다. 공무원과 국민과의 격차가 매우 크다. 국민과 공무원 모두 전자정부쪽에서 성과를 느끼나, 행정 효율성 분야는 체감을 못한다. 국민들은 전자정부의 수준은 80%가 향상됐다고 답한 반면 행정의 효율성 향상에는 39%만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공무원연금 개혁 방안은 -급격한 고령화와 장기간 낮게 책정된 부담률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공무원연금 재정이 어려워졌다. 국민부담이 계속 증가하고 있어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다. 공무원연금의 수지를 맞추기 위한 방안을 단순하게 얘기하면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연금납부액을 인상하는 방안, 연금급여 지급액을 줄이는 방안, 정부가 계속해서 지원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재정부담수준, 공무원의 신뢰보호, 국민연금·사학연금·군인연금 등 다른 공적연금과의 형평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뒤 세 가지 방안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선에서 아주 정교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또한 퇴직자·재직자·미래공무원 등 연금수급 대상자별로 각자의 상황이 감안된, 차별화된 맞춤형 개선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운용이나 지급형식도 현재와 같이 퇴직금에 상당하는 지급액과 사회보장적 성격의 지급액을 함께 운용할 것인지, 구분할 것인지 등도 검토돼야 한다. ▶공무원노조는 연금법 개정을 반대하는데. -현행 공무원연금을 계속 유지하면 연금재정 적자가 매년 증가한다. 정부보전금이 과도하게 늘어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올해 8452억원, 내년 1조 2921억원,2010년엔 2조 4598억원을 보전해 주어야 한다. 공무원연금제도의 개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세부담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이해와 양보로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공무원노조 단체가 합법과 법외노조로 양분됐는데 -일부 공무원노조 단체는 노조 설립신고를 하지 않은 채 대정부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정부는 합법전환과 불법노조 자진탈퇴 명령을 내렸고 설득을 하고 있다. 그 결과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공노총)은 9월중 합법노조로 전환키로 결의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소속 일부도 합법화하고 있다. 합법노조에는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지원하고, 불법단체에는 사무실 폐쇄 및 소속 공무원 징계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정부대표로서 교섭원칙은 -공무원노조를 교섭의 대등한 당사자로 인정하고 성실하게 협의하겠다. 상생적 노사문화 구축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정당한 요구는 적극 수용·검토할 것이나, 부당·불법적인 요구는 한계를 명확히 하겠다. ▶장마와 수해로 많은 피해가 났다. 대통령은 행자부가 주도해 제대로 된 복구를 하도록 지시했는데. -중앙부처 합동조사반의 정확한 피해조사 결과를 가지고 복구계획을 세워 조기에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수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범정부적 차원의 근원적 복구계획과 정책적 대안을 수립하겠다. 산간 계곡의 급경사지에는 사방댐을 대폭 늘려 토사 유입을 차단할 것이다. 하천변이나 급경사지에 있는 주택은 안전한 곳으로 집단이주시킨다. 물론 주민들이 동의를 해야 한다. 반복적인 피해를 막자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난 물길은 가능한 한 물길로 살릴 계획이다. 자연에 순응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토지를 매입하고 하천폭을 최대한 넓혀 홍수 소통을 원활하게 할 생각이다. 하천폭보다 좁고 낮은 교량과 교각 간격이 좁은 교량은 장대교량으로 설치해 수목이 걸리지 않도록 하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복구를 하겠다. 기록적인 폭우에는 감당 못하더라도 통상적인 범위에서 비가 많이 올 때는 충분히 버틸 수 있도록 설계를 강화할 것이다. 강원도 평창은 내년 2월에 동계올림픽 실사단이 오는 만큼 충분히 감안해 복구를 하겠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참여정부들어 3년6개월동안 정부혁신을 잘 추진했다. 내부혁신에 주력한 것이다. 앞으로 1년6개월동안은 국민들이 체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훗날 국민들이 ‘참여정부’하면 ‘혁신’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행자부 장관에 임명된 것도 그런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또 지방자치를 성숙시키고 싶다. 자율과 분권의 취지에 맞게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 공무원연금개혁과 노사문화 정책도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이용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성실파’ 또는 ‘합리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자기관리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 전남대 무역학과 4학년 시절 행정고시(14회)에 합격한 뒤 경제부처에서 주로 일했다. 특히 세제분야의 ‘그랜드슬램’이라는 국세청장, 관세청장, 세제실장, 국세심판원장 등을 거쳤다. 이 장관은 30년동안의 공직생활에서 나름의 철학과 가치관을 정립했다. 그는 장관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혁신적 리더십’을 든다. 변화와 혁신을 리드하려면 전문성을 지녀야 하고, 구성원에게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장관은 공정하고, 투명하고, 청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장관은 공직자의 생활태도를 “명예와 부(富)는 공유될 수 없다.”는 말로 요약한다. 공직자의 최대 덕목은 청렴이고, 명예로워야 하며, 봉사정신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원칙이나 법에 벗어나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명예를 지키는 지름길이란다. 특히 돈·여자·술·청탁은 절대 경계사항이다. 자기와 주변에 대한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그래도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상대방의 장점을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단다. 상사나 인사문제에 대한 불평은 최대한 자제하라고 충고한다. 더불어 생각은 바다와 같이 깊게 하되 말과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어떤 일이든지 노력해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을 만나는데 매사를 이런 자세로 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직자로서의 자세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꼽았다. 국민의 입장에서 행정을 살피려고 노력한다는 설명이다. 인간관계에서는 ‘궁불실의 달불이도(窮不失義 達不離道)’를 실천하려 애쓴다. 맹자에 나오는 말인데,“선비는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으며, 잘 되어도 도를 벗어나선 안된다.”는 뜻이라고 소개했다. 는 ‘실천형 혁신장관’을 최고의 가치로 꼽고 있다. 이런 장관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경제부처 출신으로 행자부 업무에 다소 어려움은 있지만, 내부의 문제는 외부인이 보면 더 잘 보인다고 했다. 특히 행자부의 순혈주의엔 경제부처의 성과주의의 접목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그는 행자부의 가장 큰 단점으로 연고주의를 꼽았다. 총무처와 내무부가 통합한지 7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인사 때가 되면 총무처 출신과 내무부 출신으로 구분되는 것이 현실이란다. 그는 “연고주의시대는 끝났고, 반드시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이용섭 장관 약력 ▲전남 함평·55세 ▲전남대 무역학과 ▲행시 14회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재무부 조세정책과장 ▲재경부 감사관 ▲국세심판원장 ▲세제실장 ▲관세청장 ▲국세청장 ▲대통령 혁신관리수석
  • [Book Review] 이땅 풍류주인들 전기적 초상

    16세기 조선의 문인 농암 이현보의 집은 도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분천(汾川) 강가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퇴계 이황이 우리집 산이라고 한 청량산이 바라다 보였다. 그런데 집 앞에 소나무가 하나 있어 시야를 가렸다. 주위 사람들은 소나무를 베라고 했지만 농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소나무가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청량산을 바라봤다. 인간의 망령된 생각을 막는다는 뜻으로 두망대(杜妄臺)라는 근사한 이름까지 지어 붙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과 물이 한데 어우러진 조선시대 집이나 누정, 사찰 같은 문화공간에는 하나같이 문학과 예술, 풍류정신이 살아 숨쉰다. 서울대 국문과 이종묵 교수가 10여년에 걸쳐 쓴 ‘조선의 문화공간’(전4권, 휴머니스트 펴냄)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화공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다.‘태평성세와 그 균열’‘귀거래와 안분’‘나아감과 물러남’‘내가 좋아 사는 삶´ 등 각각의 부제가 암시하듯 조선 문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한 편의 생생한 서사시 혹은 격조있는 풍경화로 그려낸다. 태평을 구가하던 시절, 도성 안이나 근기(近畿)지방의 명가들은 원림(園林)과 가산(假山)을 경영하며 집안에 산수를 끌어들였다. 태평성세를 누린 대부분의 유명 문인들은 사산 아래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인왕산 앞뒤에 산 안평대군과 성임은 자신과 벗들의 글로 인왕산을 아름답게 꾸몄고, 백악은 맑은 선비 성수침이 있어 세상에 그 이름을 드리웠다. 또 낙산에는 신광한, 남산에는 김안로가 살면서 글을 지어 그 주인이 됐다. 조선 초기부터 풍광이 아름다운 한강에는 이름난 문인들의 정자가 들어섰다. 한명회의 압구정과 월산대군의 망원정은 시회(詩會) 공간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 초기 한강에서 가장 유명한 시회 공간은 단연 박은과 이행이 시를 즐긴 잠두봉. 부귀영화를 맛본 뒤 한강이 좋아 아예 강가에 집을 짓고 산 사람들도 있었다. 양성지와 강희맹이 그들이다. 강호로 물러난 사대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그저 농사를 짓고 산 것은 아니다. 호미와 쟁기 대신 붓을 잡고 고향에서의 안분자적하는 삶을 그려냈다. 조선의 문화공간은 아름다운 사람과 글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조선 후기 위항시인 장혼은 “미불자미(美不自美) 인인이창(因人而彰)”이라고 읊었다.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드러난다는 뜻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산과 물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뛰어난 인물을 만나고 또 그들이 남긴 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인왕산 자락의 옥류동은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장혼이 남긴 아름다운 글이 있기에 당시 눈에 띌 수 있었고 지금도 상상 속에서나마 옥같이 맑은 개울을 그려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 빛나는 글로 아름다운 땅의 주인이 됐다. 풍월주인(風月主人)인 셈이다. 진정한 선비라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홍대용은 목천에 자신의 과학정신을 담은 농수각을 세워 새로운 학문을 열고자 했다. 또 박지원은 현감으로 나간 안의에 ‘실학의 집’을 세우고 중국여행에서 깨달은 실학정신을 구현하려 애썼다. 책은 이들을 ‘내가 좋아 사는 삶’이라는 항목에 묶어 다룬다. 우리 옛 조상들은 와유(臥遊), 즉 누워서 유람하며 노니는 것을 즐겼다. 옛 글을 읽으면서 산수유람을 대신한 것이다. 저자는 옛 사람들의 와유처럼 이 책을 읽으며 마음 속에 상상의 정원을 꾸며보라고 권한다.‘그림의 떡’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자는 조선 후기 대학자 성호 이익의 말을 답으로 들려준다.“마음은 불빛처럼 순식간에 만리를 가므로 사물에 기대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기억의 단서가 없으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 선천적 맹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권당 2만∼2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660)-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儒林(660)-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퇴계가 말하였던 정자(程子)는 북송의 뛰어난 유학자였던 정호(程顥)와 정이(程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 유학사상 최초로 이기의 철학을 내세우고 유교 도덕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두 형제였으나 그들에게는 윤순(尹淳)이나 양시(楊時)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인 중에서 누구를 취할 만한가.’하고 왕이 물었을 때도 ‘취할 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던 고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대답한다.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전하를 속이고 누가 특별하다고 취할 만하다고 여쭈오리까.” 그러나 선조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선조는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으로 독대(獨對)를 하는 퇴계로부터 인물 하나를 반드시 천거받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학문을 착실히 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소.” 그러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기대승 같은 사람은 글을 많이 읽었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해서 그 견해가 유학에 정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퇴계는 기대승을 추천하면서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고 한다. “…다만 수렴공부는 아직 적은 듯싶사옵니다.” 수렴(收斂). 이 말은 ‘몸을 잘 단속하여 근신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학자로서의 정신수양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이를 통해 퇴계 역시 고봉의 거친 성정과 반골기질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조와의 독대를 끝으로 퇴계는 마침내 8개월간의 마지막 한성체류를 끝내고 우사를 떠난다. 도성을 나온 퇴계는 강변에 있는 목뢰정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튿날 한강을 건넌다. 이때 고봉은 사방에 수소문하여 스승 퇴계가 있는 목뢰정을 방문하게 되었고 새벽녘에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서 작별인사를 고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퇴계와 고봉이 이승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상봉. 고봉은 한강을 건너는 배 안에서 스승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이별시를 읊었던 것이다. “밤낮으로 도도히 흐르는 한강수야.(江漢滔滔日夜流) 선생님 행차를 네가 좀 말려다오.(先生此去若爲留) 강가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일부러 어정대며 시간을 끌었다.(沙邊 纜遲徊處) 애끓는 이별의 정 엄청난 이 슬픔 그칠 줄을 모르네.(不盡離腸萬斛愁)” 퇴계가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관리들은 관청을 비웠고 장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한강변에 몰려와서 떠나는 퇴계를 전송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배를 타고 따라왔고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퇴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작별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문경길(상)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문경길(상)

    상주 옛길은 경북선(김천∼영주) 철로를 건너 문경시 모전동으로 들어선다. 곧바로 문경 시외버스정류장 앞에서 충북 보은군으로 통하는 국도 3호선과 만난다. 이어 공설운동장을 지나 1㎞쯤 거슬러 오르면 공평동 표석골 마을에 다다른다. 표석골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당교(唐橋)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승기념비를 세웠다는 데서 유래됐다. 그러나 그때의 표석은 찾아 볼 수 없다. ●유곡 찰방역의 ‘둔전’ 공평·유곡들 이곳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길은 올해 초 왕복 4차로로 넓혀져 시원스럽게 나 있다. 길 양쪽으로는 공평·유곡들이 온통 푸르름을 자랑하며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 이 들판은 유곡찰방 소속 1300여 역졸들의 군량을 충당하던 둔전(屯田)이었다. 둔전 북쪽 끝자락에는 장승백이 마을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 도로 중앙에는 ‘장승백이’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현재 장승은 없다. 63년전 이 마을로 시집왔다는 이분남(78) 할머니는 “마을 앞 길가에 조상대대로 세워졌던 장승은 올해 길이 확장되면서 사라졌다.”며 서운해한 뒤 “빨리 다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시대의 장승은 세워진 위치에 따라 그 역할이 달랐다고 한다. 동행한 안태현(40·민속학 전공)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길가의 것은 이정표 또는 경계 등의 구실을 했고, 마을 입구의 것은 주로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전염병이나 역병 등을 물리치는 주술적 역할도 겸했다.”고 설명했다. 장승백이 마을을 벗어나 국도 3호선을 따라 곧장 가면 유곡동에 도착한다. 영남역지상의 유곡 찰방역이 있던 곳이다. 유곡역은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역도체계에서 상주도의 으뜸역이었다. 이 역은 덕통·낙동·구미·지보·소계역 등 지금의 문경을 비롯한 상주·의성·예천·안동·구미·군위·청송 등지의 19개 역을 관할했다. 이곳에는 역리 1238명과 노비 67명 등 모두 1305명이 소속됐었다. 상등마 2마리와 중등마 5마리가 배치됐다. 특히 유곡 찰방역의 규모는 문헌상 조선시대 찰방역 가운데 가장 자세히 남아 있다. 영남역지에는 유곡 찰방역의 경우 찰방이 역무를 총괄하는 행정 관서인 동헌 6칸을 비롯해 찰방이 잠을 자는 침소인 내동헌 및 사환고 각 4칸, 마구간인 마단 5칸, 천교정·내삼문·문루·형사청·사령청 각 6칸, 역리들이 실무를 보는 곳인 작청 10칸, 진휼창 20칸 등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상주도의 으뜸역 유곡 찰방역 안 학예사는 “찰방역 전체에 대한 상세 기록은 유곡 찰방역이 유일한 정도”라며 “따라서 복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곡동 한복판을 지나는 옛길변에는 관찰사 박문수, 어사 박이도 등 관리 15명의 선정비 또는 불망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 아낙들이 빨래판으로 쓰거나 버려진 것들을 이곳에 모아 정비했다고 한 주민은 귀띔했다. 유곡역을 벗어난 옛길은 3번 국도 왼쪽 아래로 잠시 비켜난 뒤 불정동 원골에서 다시 만난다. 원골은 고려시대 원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원골로 불린다. 원골 앞을 지난 길손은 영강 상류지점의 견탄(犬灘)을 건너야 했다. 옛날 견탄 여울에는 개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견탄을 건넌 옛길은 대성광업소 직원 사택촌으로 잘 알려진 호계면 견탄 3리 입구에서 영강과 나란히 1㎞쯤 상류 불정마을 건너편까지 강변쪽으로 난다. ●한양길 최대 험로 토끼벼랑 이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산허리를 올라서면 관갑천 잔도(串甲遷 棧道)가 나온다. 일명 토끼벼랑(兎遷)으로 옛길상의 험로로 가장 악명(?) 높은 곳이다. 잔도는 강가의 험한 벼랑부분의 암반을 파서 낸 길을 말한다. 또한 토끼벼랑은 이곳에서 길을 잃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토끼가 달아나면서 벼랑길을 열어 주어 진군했다는 데서 연유했다. 역시 동행한 엄원식(38) 문경시 학예사는 “토끼벼랑은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옛길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며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험난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과연 잔도 400여m 전 구간은 전율을 느낄 만큼 위험하다. 폭이 1m 내외로 좁고 위쪽은 깎은 듯한 절벽이, 아래쪽은 70도 이상 경사진 낭떠러지이다. 마침 장마철인 관계로 길마저 미끄러워 다리를 후들거리게 한다. 잔도 끝부분은 바윗길로 표면은 금세 길손이 짚고 간 듯 반질거린다. 불현듯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지나다녔으면 이처럼 반질반질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잔도를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오면 고모산성이 자리하고 있다.1500여년전에 축조된 이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의 접전지로, 둘레가 1.6㎞에 이른다. 산성은 막바지 복원공사가 한창이며, 탐방로도 말끔히 정비돼 있다. 산성 초입에서 몇 발짝 옮기면 돌고개가 나온다. 달리 ‘꿀떡고개’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과거객들에게 꿀떡을 팔았던 곳이라 해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인근 마성면 오천리 새터 주민들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꿀떡을 사 먹으며 과거에 붙게 해 달라고 기원했던 곳”이라고 들려줬다. 돌고개 옆 옛길가의 주막거리가 정겹다. 문경시가 올해 초 복원한 것이다. 주막은 2동의 초가와 헛간, 창고 등 옛 양식대로 지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막에는 주모가 없어 목을 축이거나 요기를 면할 수는 없다. 옛길은 돌고개를 넘어 눈앞에 펼쳐지는 문경새재로 향한다. 글 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길손들의 쉼터 ‘주막’ 주막은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 옛 풍물 중 하나이다. 선조들의 삶의 애환과 체취가 오롯이 묻어 있는 곳이어서 못내 아쉽다. 주막은 17세기를 전후해 국가 관할인 원(院·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사상(私商)의 발달과 함께 본격화됐다. 주막집·탄막(炭幕)·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鋪)·봉놋방이라고도 했다. 주막은 개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했던 일반 여관으로 민초들이 단골고객이었다. 관리나 거상(巨商)들이 주로 출입했던 고급여관인 보행객주(步行客主)와는 구분됐다. 주막 또는 주막촌은 주로 시골장터와 삼거리 길목, 나루터 등 길손의 통행이 잦은 곳에 자리잡았다. 옛길에는 평균 4㎞ 간격으로 100여곳의 주막촌이 분포했다. 그러나 팔조령 등 험로지역에는 1∼2㎞ 간격으로 자리했다. 주막은 대개 한두 개의 침실과 술청을 갖춘 작은 건물로 형성됐으며, 식당·주점·여관 기능을 함께 했다. 또 상거래 장소이자 팔도의 소식과 문물을 교류하는 문화적 기능도 겸비했다. 메뉴로는 국밥이나 국수가 전부였고, 술도 탁주가 주종이었다. 방값은 음식 등을 사 먹고 잠을 자는 곳이라 별도로 받지 않았다. 대신 많게는 10여명씩 혼숙을 해야 했다. 잠자리는 선착순으로 아랫목·구석·마루를 차지했지만, 지위와 권세가 낮으면 순서와 상관없이 구석이나 마루로 밀려나야 했다. 주막은 경우에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층민이 주로 이용한 주막은 도박꾼과 강도들로 득실댔다. 때문에 죄인 색출의 요지이기도 했다. 일부 주막의 주모들은 자신이 직접 몸을 팔거나 들병이(술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술을 파는 장수)를 고용한 윤락업도 병행했다. 주막의 바깥 주인인 ‘식주인’은 관아의 끄나풀로 손님들의 동향을 정탐해 밀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막은 보행에 의존하던 길손들의 문화가 70년대 이후 교통수단으로 대체되면서 급격히 사라졌다. 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Book Review] 19세기 조선 전업작가 홍길주의 투명한 일상記

    ‘말없이 지내면서 책을 뽑아들고 베개를 베고 있자니 졸음을 물리칠 방법이 없는 것이 괴로웠다. 문득 벌떡 일어나 붓을 들고 공책에다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현묘한 이치를 깨달을 것도 없고 사물을 널리 상고하여 살펴본 것도 없다.∼하인이 장독 뚜껑을 덮기에나 꼭 알맞지 싶다. 잠시 기록하여 남겨두고 ‘수여방필’이란 제목을 붙인다. 을미년(1835년) 10월 하순. 베개를 벤 채 책을 읽고, 졸음을 쫓고자 무언가 끄적거리는 모습이 18세기 사대부가의 사랑방 풍경이란 게 참 생경하다. 서안 앞에 정좌하고 끊임없이 책을 읽는 ‘선비의 전형’ 대신 입신양명의 욕심을 접은 한량의 모습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이 글의 주인공은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1786∼1841)다. 한때 과거를 준비했으나, 출세의 꿈을 접고 독서와 글쓰기를 벗삼았던 선비다. 그는 한가로움을 소견하기 위해 생각나는 것들을 그때그때 적기 시작했고, 이를 ‘수여방필’‘수여연필’‘수여난필’이란 제목으로 정리했다. 홍길주의 아들 홍우건은 부친의 또 다른 글을 정리해 ‘수여난필속’을 정리했다. 고전을 발굴해 이를 현대적 사유의 틀에 맞춰 재생산해 내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닌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이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놓칠 리 없다. 정 교수는 대학원 제자들과 매주 토요일 모여 홍길주의 네 문집을 완역했고, 이를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창고’(정민 등 옮김, 돌베개 펴냄)란 책으로 묶었다. 역자가 보기에 홍길주는 천재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논문이 적지 않게 제출되었지만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천재문인의 진면목을 이번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방필(放筆)’은 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붓을 내달린 비망록이란 뜻. 이를 부연한 게 ‘연필(演筆)’이고,‘난필(瀾筆)’은 그 나머지 넘쳐흐른 것을 수습했다는 뜻이다. 책은 19세기 지식인의 내면을 아주 밝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소한 일상사에서부터 그때그때 스쳐지나간 생각의 궤적,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의 구체적인 관심사들을 경쾌한 필치로 스케치하듯 그려내고 있다. 특히 개별 사물의 이치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건져 이를 다양한 일상의 의미로 확산하는 글쓰기가 돋보인다. ‘추위를 막는 옷으로는 면포만 한 것이 없다. 값비싼 비단은 보기에만 아름다울 뿐이다.∼아름다운 문장이나 화려한 문체는 실용에는 합당함이 없다. 재주와 덕은 풍족하여 정치에 베풀 수 있어야 한다.∼천하에서 기이한 보배라고 일컫는 사람이라 해서 진실로 모두 일을 맡길 만한 그릇은 아니다.’(때에 맞는 문장) 옷과 그릇, 문사와 재덕을 비유하며 겉보기에 화려하고 번드르르한 것이 실제로는 쓸모가 없다는 결론을 재치있게 이끌어내고 있다. 책은 19세기 전반 조선의 학계와 문단 흐름을 파악하는 데 긴요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연암 박지원 이후 활기를 띠던 문단은 정조의 문체반정 이후 표면적으로는 정체 보수 국면을 보인다. 하지만 홍길주는 연암의 개성적이고 발랄한 문체와 사고를 선호했으며, 이는 다음과 같은 그의 글 속에 숨김 없이 드러나 있다. ‘나는 청나라 사람 중 정림과 고염무의 시를 좋아한다.∼문장은 당연히 위희와 왕완을 거벽으로 삼는다.∼만약 우리나라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서 태어나게 했다면 마땅히 깃발과 북채를 잡고 이들과 나란히 섰을 것이니….’ 이밖에도 직접 겪은 부모 형제의 언행과 당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견해, 소비문화와 관련된 보고, 여가활동의 표방과 실천,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 등 예전 문헌에선 볼 수 없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19세기 조선의 일상을 거대 담론이 아닌 미시적 관점으로 써내려간 천재 선비의 지적 사유와 재치가 돋보이는 책이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젊은이들이 국악 꿈 펼칠 장 마련해야”

    “젊은이들이 국악 꿈 펼칠 장 마련해야”

    서울대 국악과 최초 입학, 국내 가야금 전공 최초 석사학위 취득, 국내 최초 가야금 독주회 개최,26세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 임용,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 최초 여성 악장 역임, 가야금 산조 여섯 유파 최초 완주(完奏). ‘최초’라는 수식어로 빽빽한 서울대 음대 이재숙(65·여) 교수의 프로필이다. 이 교수가 다음달 31일 39년 3개월간 정들었던 강단을 떠난다. ●가야금 산조 여섯 유파 모두 섭렵 이 교수는 가야금 산조 여섯 유파를 각각의 명인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현존 유일의 연주자다.1994년 김죽파류를 시작으로 95년 강태흥류,97년 성금연류,98년 김윤덕류,99년 김병호류에 이어 2000년 최옥산류 산조까지 모두 완주했다. “김죽파류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데 비해 최옥산류는 남성적인 기품과 절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김병호류는 심오함, 강태흥류는 발랄함, 성금연류는 화려함이 특징이고 김윤덕류에서는 점잖은 ‘선비가락’이 느껴지지요.” 그는 유파마다 다른 짜임새와 느낌을 비교·분석해 후학들에게 이어주는 것이 ‘가야금 1세대’로서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30여년 전 명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채보(採譜·곡조를 듣고 악보로 만드는 것)해 최초로 책을 내기도 했다. 이후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산조의 느낌을 연구하는 작업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가야금 산조도 옛 명인들이 원래 짰던 가락에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럴수록 저같은 사람이 원형을 보존하는 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봅니다. 원형이 있어야 변화와 발전도 가능하니까요.” ●‘박사 가르치는 석사’ 이 교수는 산조 여섯 유파를 총정리한 ‘한국 가야금 산조 총집’(가칭) 발간을 준비하며 40년간의 교수생활을 정리 중이다. 여기에는 명인들로부터 채보한 내용과 녹음자료 등 국내 가야금 산조의 모든 것이 담긴다.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임용될 당시만 해도 가야금에는 박사과정이 없었다. 석사학위 소지자인 이 교수가 최고 학력이었다. 그러다 3년 전 서울대에 박사과정이 개설되면서 그동안 박사 학위 없이 학생들을 가르쳐 왔던 나이 지긋한 교수들이 대거 등록했다. 이 교수는 현재 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교수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인기 있는 퓨전 국악단 ‘가야금 앙상블 사계(四界)’ 팀을 만든 주역이다. 서울대 젊은 선·후배로 구성된 ‘사계’를 만든 데 이유가 있다.“젊은이들이 국악의 꿈을 펼칠 장(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저를 비롯한 원로들이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국악 발전의 원동력이죠.”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방방곡곡 150여개 지명의 유래

    방방곡곡 150여개 지명의 유래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는 연기군(燕岐郡)은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으로, 금강과 미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명당이다. 757년 신라 경덕왕때 연기로 고쳐 불렸는데, 옛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손색이 없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주둥개산에 있는 ‘말무덤’은 말(馬)의 무덤이 아니라,‘언어’의 무덤이다. 굳이 한자로 바꾸면 ‘언총’(言塚)이다. 여기서 무덤은 곧 침묵의 상징이다. 마을 사람들은 주둥개(‘입’을 뜻함)산의 주둥이를 막아야 싸움이 없어질 것이라 해서 이 산에 말(言)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후부터 언쟁하는 일이 없어지고 마을이 평화롭게 됐다고 한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의 김기빈 지명조사위원이 지난 2년간 국토 곳곳을 찾아다니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지명의 유래를 소개한 ‘국토와 지명’시리즈 네번째인 ‘땅에 새겨진 문화유산’을 펴냈다. 전국의 의미 있는 지명 150여개를 소개하고 유래를 밝혀 그동안 몰랐던 지명들에 담긴 조상의 깊은 지혜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또 김 위원이 직접 촬영한 200여장의 사진도 지명에 얽힌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한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과 신대방동은 조선 정조가 지금의 상도동 장승배기에 세운 대방장승으로 인해 생긴 이름. 또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의 ‘문득현’(文得峴·문드러니 고개)은 이 곳을 지나던 아홉 선비 중 4명이 대과에 급제, 고개이름을 ‘글(文)을 얻었다(得)’는 뜻으로 부르게 됐다. 저자는 이 땅 곳곳에 붙여져 있는 지명들이 선인의 지혜와 경험의 소산이며,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한다.(031)738-7764.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영화 황진이 시사회 北서 갖자”

    북한에서 조선작가동맹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홍석중(65)씨의 소설 ‘황진이’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27일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다. 송혜교와 유지태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황진이’(제작 씨네2000)는 9월쯤 촬영을 마치고 하반기에 개봉될 예정이다. 영화는 남북 첫 영화 협력사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파주, 개성, 금강산 등 남북을 오가며 촬영할 계획이라 관심을 모으고 있다.●`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의 손자 26일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의 신동호 문화협력위원장은 홍씨가 ‘황진이’ 영화제작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홍씨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의 중개로 지난해 5월 남측 씨즈엔터테인먼트와 ‘영화각색권 양도에 대한 계약서’를 체결하고 북측에서 촬영 계약까지 체결했다는 것이다.●“혜교도 좋지만 수애 생각했는데…” 벽초 홍명희(1888∼1968)의 손자인 홍씨는 사전에 시나리오를 꼼꼼히 살펴봤으며 남측 영화제작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영화가 완성되면 평양이든 금강산이든 시사회를 갖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지난달 5일 평양 양각도호텔에서 장윤현 감독과 씨네2000, 씨즈엔터테인먼트 관계자를 만나 “원작을 잘 살려 시나리오를 써줘서 고맙다.”며 작가동맹 동료들과 한 달간 시나리오를 검토한 결과를 논의했다. 홍씨는 대사 가운데 ‘많이 많이’란 표현은 ‘매니 매니’(many many)처럼 미국식 표현 같다며 재검토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여배우는 누구냐.”고 묻고, 송혜교라는 말을 듣자 “아!가을동화의 그 배우?”라며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송혜교도 좋지만 사실 나는 ‘해신’(KBS 드라마)의 수애(정화 역)였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황진이는 슬플 때, 웃을 때, 반항할 때 더욱 예뻐” 홍씨는 그 이유에 대해 “황진이가 평소에는 예쁘지 않은데 슬플 때, 웃을 때, 반항할 때 더욱 예쁘다.”고 설명한 뒤 “송혜교도 그런 연기를 잘 해줬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황진이를 중심으로 치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원작 소설의 느낌을 가감 없이 살려달라는 당부였다. 그는 “김희열이라는 선비가 (소설) 마지막에 죽지만 사실과 맞지 않다.”며 “그가 후에 크게 출세하는 것이 보다 사실적인데, 이 문제를 같이 고민해 보자.”고 덧붙였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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