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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L기 희생자 선상 추모제 80분

    ◎8년전 그 바다 위에 진혼의 꽃다발만…/소 악대,「고향의 봄」 연주속 유족 통곡/소복차림 미망인,난간 붙잡고 절규/소 관계자도 눈시울… “진상조사 적극 지원” 약속 【유지노사할린스크=외무부공동취재단】 사고후 8년만에 처음으로 1일 사고현장에서 거행된 KAL기 추모제는 북위 1백41도 21분 동경 46도 32분 추락지점에서 유족들의 눈물바다를 이룬채 1시간20분가량 진행됐다. 소련측이 제공한 대형여객선 유리트리노프호(4천5백t급)선상에서 거행된 이날추모제는 비통한 분위기속에서 엄수됐으며 일부 유족들은 오열을 참지 못하고 시종 목놓아 통곡했다. ○…이날낮 12시20분쯤(한국시각 상오 10시20분) 소련군악대의 한소 양국 국가연주로 시작된 추모제는 고인들에 대한 묵념,추도사에 이어 분향및 선상 헌화순으로 진행. 소련작가의 이름을 딴 홈스크항을 떠나 두시간여 항해끝에 사고해역에 도착,뱃고동 소리와 함께 닻을 내리자 소련 육군 군악대는 「고향의 봄」과 양국의 전통 조곡을 연주하기 시작. 이어 한소 양국 정부대표의 추도사와 홍현모유족회장의 추도사로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사고비행기의 교체기장 고 김희철씨의 딸 김수지양(22)의 고별사에 이르자 유족들의 비통함은 절정에 달했다. 추도사는 공로명주소대사,표도로프 사할린주지사,홍유족회장의 순으로 진행됐는데 한결같이 KAL기사건의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 한국정부를 대표한 공대사는 『냉전대결 상황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진상이 소련의 급속한 변화에 발맞춰 규명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표도로프 주지사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떤 새로운 정보도 중요하다』고 강조. 홍회장은 『잦아진 왕래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해명과 사죄없이 사건을 얼버무리고 있어 우리의 아픈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며 『이 바다속에 검은 머리결을 물결에 너울거린채 아직도 눈을 감지못하는 희생자들의 얼굴을 쓸어내려주고 싶다』고 애도. ○…공대사와 소련측 대표들이 분향을 마치자 유족들은 소련군악대가 전통 러시아 조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선상 2층으로 내려와 차례로 헌화. 헌화는 권정달전의원을 비롯한 유족들이국화·백장미·백합등을 들고 갑판으로 내려오자 배의 선원과 사할린 거주 한인등 남녀 5명씩 10명이 대형화환 2개를 10여m아래 바다에 띄우면서 시작. 유족들이 뱃고동 소리와 함께 꽃송이를 던진 뒤에도 한동안 고인의 이름을 크게외치면서 통곡하자 이를 지켜보던 소련 관계자및 선원들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20여분간의 선상헌화가 끝난 이날 하오 1시40분쯤 여객선이 큰 고동을 울리며 홈스크항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일부 유족들은 『잘있거라』 『다시 찾아오겠다』고 오열을 터뜨리며 난간을 부여잡고 애통해 했다. ○…추모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련군악대의 「고향의 봄」연주가 울려퍼지자마자 일부 여자유족들은 오열을 참지 못하고 통곡. 윤정임씨(여)는 사고로 숨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식아,내가 어찌 여기있단 말이냐』라고 울부짖었고 하얀 소복차림의 임매심씨(70)와 석수원씨등 연로한 몇몇 여자 유족들도 목놓아 절규해 보는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가까스로 눈물을 참던 유족들도 홍유족회장이 비통한 어조로 추도사를 낭독하자 대부분눈물을 떨구면서,추모제 현장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사할린거주 한인대표로 참석한 서옥재씨(여·51)등 4명의 여자 한인들도 『유족들의 비통한 모습을 보니 우리도 눈물이 난다』며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사고로 아들 부부와 손자등 일가족 4명을 잃었다는 박윤섭씨는 꽃다발과 함께 과자꾸러미를 바다에 던지며 오열. 사고비행기의 부기장이었던 선동휘씨의 미망인 유행자씨는 집 앞뜰의 대추나무에서 따왔다는 대추 한접시를 바다에 뿌리며 고인의 넋을 위로. 선부기장의 아들 재곤씨(26)는 『기장복을 입고 집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눈물을 글썽. 기장 천병인씨의 미망인 김옥희씨는 시종 눈물을 흘리며 『진실이 반드시 규명돼야 고인도 눈을 편히 감을 것』이라고 진상규명을 촉구. ○…정재문(민자)이수인(신민)박찬종의원(민주)등 국회 대한항공기 피격사건진상규명 청원심사소위 위원들은 추모제가 시작되기전 선상에서 소련 연방정부의 키레예프 외무부본부대사와 표도로프 사할린주지사등과 면담을 갖고 사건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국회서한을 전달했다. 키레예프대사는 이 자리에서 국회서한을 판킨 외무장관에게 전달할 것을 약속했고 표도로프 지사는 『연방정부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할린지역의 조사활동에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 통일 현실화의 길은(사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소련에 세우고 초대강국에 걸맞는 붉은제국을 건설하는데는 70여년간 엄청난 재화의 소모와 많은 백성의 말할 수 없는 억압과 희생이 있었으나 천하대세에 밀려 한 제국이 해체되는데는 불과 며칠이 필요했을 뿐이었다.1991년의 세계는 이런 시대다. 허망할 정도로 너무 급속히 해체돼가는 크렘린제국의 종말을 보면서 우리는 「평화연변」(사회주의 파괴를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평화적 책동)을 강조하며 허둥대는 북한과 그 이웃의 모습에 할 말을 잊는다. 이제 우리는 이 급변하는 주변국제환경변화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대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접근방법 등을 신중하게 재점검 해 볼 시점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간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북방정책은 한소수교와 유엔가입의 절차를 끝낸 상황에까지 이끌어 냈다.우리의 북방정책은 어찌보면 북경에서 평양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 놓은 상태에 이르렀다.우리는 유엔에서 표를 얻기위해 외교관들이 가방을 들고 동분서주 해야하는 불모의 대결시대도 마감했고 북의 선전 선동정책에 일일이 고위관리를 순방시키며 소망외교를 펴야 할 필요 또한 없게 됐다. 남북관계 개선이나 대처에 번쩍이는 기상천외의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점 또한 지난 것으로 믿는다.북경과의 외교관계 개설을 위해 서두르고 머뭇거리는,평양을 회담에 끌어들이기 위해 불필요한 외교적인 역량을 소모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안으로 정부와 국민간에 신뢰감을 쌓고 민생안정과 차분한 민주화 조치의 추진으로 본다.안정되고 윤택한 국민의 생활을 증진해 나가는 것이 바로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추진해야 할 통일은 「통일의 노래」「학생의 데모」「수많은 시민이 모인 궐기대회」로 이뤄질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다.우리는 북을 위협하지 않으나 또한 위협 받지도 않는 그런 사회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이는 안으로 튼튼한 경제,사회적 여건 조성과 밖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혀 나갈 때 북은 어떤 몸짓으로든 우리에게접근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크렘린 제국이 무너지는데 우리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물론 지난 5년간의 자유와 민주의 물결이 넘쳐 흐르기는 했어도 그들은 사회주의 고수를 외치며 말을 바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명분을 붙여 보기도 했다.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전세계는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동구의 해방,소련 공산당의 해체 등을 보면서 굳이 북의 통치권자들의 안색을 살피지 않아도 그들의 심정은 알고도 남을 만하다. 소련의 연방이 해체된다고 해서 새로운 접근로를 모색한다며 서두르고 북방외교의 매듭을 짓는다며 북경당국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그저 차분히 먼 훗날의 통일을 기약하며 인내와 이성으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가며 점진적인 접근을 통해 동질성 회복에 힘을 기울여가는 것이 바로 통일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생각된다.
  • 검거된 「반제 PD그룹」의 실체

    ◎서울등 대도시 노동자에 의식화 교육/「강군 치사집회」등 불법 시위 배후조종 찰에 검거된 「반제·반파쇼 민중민주주의 혁명그룹」은 마르크스·레닌사상을 혁명의 지도이념으로 삼아 무장봉기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 한 이적단체라고 경찰은 밝히고 있다. 이들은 지난 1월초 박성인등의 주동아래 올해의 상황이 혁명적 시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서울 구로구 개봉동·시흥동·난곡동등 3곳에 비밀 아지트를 구축한 뒤 부산·울산·서울 구로공단·부천등 공장지대에서 노동자를 선동하는등 지하활동을 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4월 강경대군의 치사사건 뒤에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 조직원을 총동원,「천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민중권력 수립을 선포하자」는 등 폭력혁명을 선동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또 「전노협」「전국노련」등 재야 노동단체의 조직원들을 침투시켜 전국 총파업등 강경투쟁노선을 취하도록 배후 조종하고 서울 성수공단에서는 「동부민주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을 결성,노조 간부및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켜 왔다는것이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의 주도아래 민중과 연대,무장봉기를 일으켜 민중권력을 수립한 뒤 북한과 연공 통일을 실현한다」는 목표아래 좌익 지하조직들을 규합,「한국사회주의노동당」의 창당을 위한 강령안을 마련하는 등 체제전복 활동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들에 대해 지난 6개월동안 지속적으로 수사를 펼쳐 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광역지방의회선거 뒤 「민족해방계열(NL)」이 주도하는 운동권이 위축된 반면 「민중민주주의 그룹」이 최근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를 지지하는등 운동권내에서의 세력확장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지난21일 외국어대와 26일 고려대에 나붙은 소련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대자보와 옐친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주목되고 있다. 이들 대자보는 공산당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를 『제국주의와 소련내 부르주아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라면서 『소유스 그룹을 중심으로 한 당과 군부세력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는가 하면 『옐친은 소수에불과한 부르주아및 프티 부르주아의 이익만을 위해 소련사회주의체제를 서방제국주의에 팔아 넘겼다』고 억지를 썼다. 따라서 소련공산당과 연방마저 해체·붕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아직도 허망한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꿈꾸는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존재들이라는 것이 당국의 견해이다.
  • 옐친,그는 누구인가/이념과 사상

    ◎뜨거운 행동파… 급진개혁의 선봉/시장경제·다당제 당장실시 추진/문민우위 주장… 군부에 정적들 많아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은 행동파다.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유형이다. 그를 가리켜 뚜렷하게 정립된 사상도 없이 그때그때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꾼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는 지식층들이 있는가 하면 국민들의 가려운데를 찾아서 긁어줄 줄 아는 결단력있는 정치지도자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예전같으면 이래도 저래도 그만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 대한 옐친의 철학과 사상을 다각도로 해부해 볼 필요가 생겼다.그가 쿠데타 저지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공로를 발판으로 삼아 소련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실세로 자리를 굳혔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는 옐친은 현재 소련의 공산주의를 이미 존재의의를 상실한 실패한 실험으로 간주하고 있다.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외면한 채 소수특권층만을 위해 실현된 공산주의라는 것이다. 옐친은 지난해 2월 출판된 「고백」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지금 소련의 공산주의가 단 20여명(정치국원 및 후보위원)의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했다.구조적인 부패와 매너리즘의 만연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지난 85년 모스크바시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는 동안 최고급 질승용차를 마다하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시내 40개 지구당 책임자중 24명을 해임할 정도로 공산당 특권층의 부패에 맞서 싸우다 얼마가지 못하고 해임된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공산당 일당독재와 사회 각분야에 걸쳐 뿌리깊게 박혀있는 관료세력을 제거하고 국민 개개인의 권리보장을 강화하는 일이 정치개혁의 최대 급선무라고 그는 보고 있다.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입장이다.그의 민주독재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지만 지난 89년7월 개혁파 인민대회대의원 3백여명으로 「지역간 그룹」을 결성하는 등 줄곧 다당제 실시를 요구해왔다. 현역군인이 국방장관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문민우위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이때문에 군부내에 적이 많다는 평이다.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신봉하고있다.고르바초프처럼 산업구조조정과 보조를 맞추는 단계적인 시장화가 아니라 당장 일반기업에 1백% 자율권을 부여하는 급진적인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사유권을 인정하고 정부및 공공기관재산을 매각해 사유화시키며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국가보조금을 폐지해 가격자유화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옐친은 지난 89년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미국의 슈퍼마켓에는 3만여종의 식료품들이 가득하고 이런 것들이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며 미국을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등 자본주의 예찬론자에 가깝다.『40년전만 해도 소가 운송수단으로 쓰였던 한국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중의 하나가 됐는데 소련이 이제껏 이룩한 것은 무엇인가』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4월 가격인상조치 시행 당시 사재기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옐친이 무모하게 급진경제개혁을 추진할 경우 엄청난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연방체제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을 원하는 공화국들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독립을 허용해야하며 공화국들이 경제정책 결정권을 갖고 외국과 직접교역을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화국 국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한 소련 전체국민들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이같은 자유방임주의적 사고의 바탕에는 대러시아민족주의를 앞세운 자신감과 러시아주권강화 욕구가 깔려있다.소련 전체면적의 4분의3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공화국은 원유의 90%와 천연가스의 70%를 생산,국제시장가격의 5분의1에 불과한 싼 값으로 공급하고 있다.단적으로 말해 여타공화국에 대한 원유공급가격을 국제시장수준으로 끌어올려 러시아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발상을 옐친은 갖고 있다. 옐친이 위대한 정치가로 역사에 기록될지,한때의 풍운아나 혼란기의 선동가로 판명될지를 가리기에는 꽤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 「반제 PD그룹」 13명 구속/6명 조사

    ◎공단침투,“사회주의 국가 건설” 획책 경찰청은 26일 「지하 사회주의노동당」을 결성해 폭력혁명에 의한 「민중민주정부」를 수립하려 한 「반제·반파쇼 민중민주주의 혁명그룹」 중앙위원 박성인씨(32·연세대사회학과 3년 중퇴)등 13명을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 구성등)혐의로 구속하고 3명을 입건하는 한편,3명은 계속 조사하고 있다. 이날 구속된 박씨와 고민택씨(31·서울교육대 4년 제적),고춘원씨(30·여·동덕여대 약학과졸),이창우씨(27·서울대 기계과졸)등은 지난 1월 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반제·반파쇼 민중민주주의 혁명그룹」을 결성한 뒤 서울 구로구 개봉동·시흥동·난곡동 등지에 비밀 아지트를 구축하는 한편,구로공단등 전국 공단지역에 침투,노동자들을 선동한 혐의를 받고있다. 이들은 또 각종 시위현장에 조직원을 동원해 「천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민중권력 수립을 선포하라」는 등의 각종 불온 유인물을 제작,배포해 왔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들이 「전노협」「서노협」「전국노련」등 재야 노동단체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강경투쟁노선을 걷도록 배후조정한 것으로 보고 이들 침투자를 색출하기 위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 「공산당나팔수」소 언론 “대수술”/옐친의 「언론포고령」무얼 뜻하나

    ◎「선전선동」기능 배제… 「자유언론」으로/신문서 마르크스심벌 삭제/개혁지향적으로 면모 일신/재산도 국유화… 공산당과 연결 “원천봉쇄” 소련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심벌을 발행인란에서 삭제했다.쿠데타 실패 이후 권력구조개편과 함께 소련의 관영언론도 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소련 관영언론의 체질 변화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언론 포고령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옐친대통령은 23일 포고령을 통해 6개 공산당기관지를 잠정적으로 정간시키고 자산을 국유화했으며 관영 타스통신과 반관영 노보스티통신사 사장을 전격 해임시켰다. 옐친의 이같은 조치는 언론을 공산당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실패이후 정치적 힘을 크게 상실한 공산당은 언론에 대한 영향력도 함께 잃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옐친에 의해 정간된 신문들은 소련 언론의 상징인 프라우다를 비롯,소비에츠카야 로시야·글라스노스트·라보차야 트리부나·모스코브스카야 프라우다·레닌스코예 즈남야지 등이다. 이들 관영언론들은 과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주요 매체들이었다.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사회를 변화시키면서 이들 관영 매체들도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그러나 관영언론들은 늘 공산당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보수적 성향을 견지해온 것이다. 관영 타스통신을 비롯한 공산당기관지들은 이번 쿠데타에서도 쿠데타 주도 세력의 선전매체구실을 했다.이들은 고르바초프의 실정을 비난하고 신지도부의 공식발표들을 충실히 보도했다.어느 쿠데타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번 쿠데타세력들도 우선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에 관영언론들이 이들의 명령을 거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쿠데타 지도자들은 거사당일인 19일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8천5백여개로 늘어난 신문 가운데 9개를 제외한 모든 신문들을 정간시킨바 있다. 옐친대통령은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관영언론들이 쿠데타에 공모했다고 주장한다.그는 타스통신의 레프 스피리도노프사장과 노보스티통신의 알베르트 브라소프사장이 쿠데타세력에 「동조」했다며 이들을 해임시켰다. 옐친은 한 공화국의 대통령이면서도 전국적 기관인 타스통신의 사장을 해임하고 프라우다지를 정간시켰다.이는 옐친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말해주며 언론도 개혁지향적으로 대수술이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옐친대통령은 러시아공화국공산당이 소유하고있는 수백개의 출판관련 업체들도 국유화시켰다.공산당과 언론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옐친의 강경 언론정책에 대한 비판도 일고 있다.옐친이 공산당기관지를 정간시키고 통신사사장을 해임시킨 것은 언론의 자유 침해라는 측면에서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신문을 정간시킨 조치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프라우라지의 셀레즈네바 부국장은 『소련의 언론이 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같이 한목소리만을 낸다면 파멸적인 결과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은 많은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쿠데타의 와중에서도 이즈베스티야 기자들은 옐친의 성명서 게재를 허용하지 않자 신문제작을 거부하기까지 했다.이번 쿠데타 저항에서도 자유언론을 지키려는 소련 언론인들이 큰몫을 했다. 소련 언론인들은 옐친의 언론 대수술로 더욱 많은 언론의 자유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언론의 자유는 보다 빠른 속도로 소련을 개방적인 민주사회로 전환시킬 것이다.
  • 소 쿠데타 61시간만에 왜 실패했나

    ◎“공산회귀는 불용”… 국민이 등돌렸다/명분없는 거사에 군수뇌부 적전분열/경원동결등 서방의 강경대응도 큰 몫 전세계에 충격을 던진 소련의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이유로는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강렬한 저항 ▲저항선봉장으로 나선 옐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 ▲쿠데타 지도부의 내분 ▲군장악의 실패등을 들수 있으며 그외에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소련에 대한 서방세계의 강력한 압력도 들수 있다.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소련국민들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 쿠데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그것은 또 쿠데타의 주역들이 처음부터 국민들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3일간의 짧은 기간동안이긴 하지만 탱크로 무고한 시민을 깔아뭉개는 무자비한 무력탄압 앞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시위금지령과 통금령을 무시하고 20일 하룻동안에만 8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반쿠데타 시위를 벌이는 한편 육탄으로 탱크를 저지한 소련국민들의 용기는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과거 수차례에걸친 소련에서의 정변때마다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소련국민들이 이처럼 용기있게 변한 것은 바로 고르바초프대통령의 개방정책이 소련국민들의 의식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결과라고 할수 있다.따라서 이번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것은 결국 쿠데타 주역들이 고르바초프의 신병은 체포할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이 국민들의 가슴속에 불어넣은 자유정신마저 가둬둘수는 없었던데 따른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지난 3일간의 쿠데타 진행과정을 지켜보면 이번 쿠데타의 주역들이 처음부터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일부터 일으키고 보자』는 형태로 상황이 벌어졌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이들은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난 20일 체결될 예정이었던 신연방조약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지해야겠다는 초조감에서 쿠데타 성패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군장악과 국민동향,지도부내의 결속등을 사전에 치밀하게 점검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사전준비가 미비된 상태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과거처럼 무관심으로 나타나지 않고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타나자 비상위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의 절대적 동조세력으로 생각했던 공산당이 중앙위원회 성명을 통해 쿠데타를 비난하고 나선 것은 비상위에 결정적인 정신적 타격이 된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타격은 비상위내부의 적전분열로 나타났다. 쿠데타 발생 이틀이 안돼 비상위의 8인 멤버중 3명이 『건강상의 이유로』사임했다는 것이 쿠데타 지도부의 내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도부내의 분열과 함께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것도 쿠데타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다.비상위는 당초 군부내에 냉전종식에 따른 군위상 축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판단,일단 쿠데타가 일어나면 군 대다수가 이에 동조할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군부가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평소 「국민의 군」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소련군은 『우리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수는 없다』는 쪽으로 급선회함으로써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이번 쿠데타에서 서방이 보인 대응도 쿠데타실패를 간접적으로 도운 한 원인이 됐다고 할수 있다.고르바초프의 실각소식이 전해지자 서방측은 한결같이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요구하며 서방의 경제지원을 갈구하는 소련에의 원조를 동결시켰다.서방세계는 또 반쿠데타 저항세력의 선봉에 선 옐친 러시아공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보냄으로써 옐친으로 하여금 국민저항을 극대화할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조속한 개혁의 완결이란 점을 무시하고 오히려 개혁을 지연내지는 후퇴시키는 쪽으로 기치를 들고 시작됐다는 점에서 소련에서의 쿠데타는 처음부터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국민들의 진정한 바람 앞에선 무력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준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할수 있다. ◎“3일천하” 쿠데타 일지/비상위 구성→불복선언→서방 경원동결→유혈충동→비상위 분열→병력 철수→고르비 귀환 소련의 강경보수파가 21일 소련역사상 처음 「월요정변」으로 기록될군사쿠데타를 야기한지 3일만에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해체됨으로써 이들의 꿈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모스크바정변 소식이 전해진것은 19일 상오4시.소련전역에 6개월시한의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언론과 출판물의 검열이 시작됐다.방송국들도 쿠데타군에 접수되어 방송이 통제됐다. 타스통신은 크리미아반도 휴양지에서 휴가중이던 고르바초프가 실각되었다고 전하면서 대통령직을 겐나디 야나예프부통령이 승계하고 8인으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인수했다고 보도했다.그러나 기세 좋게 몰아 붙이던 쿠데타세력들은 옐친의 시민 불복종운동촉구와 총파업선동으로 시작부터 예상치않던 장애물에 직면했다. 보수파들에 의해 야기된 쿠데타가 시련을 맞기 시작한것은 정변이 발생한지 8시간만인 19일 정오.옐친 러시아공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포고령을 무효라고 선언하며 반쿠데타 봉기를 부추기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미 모스크바시내에 진입했던 중무장 소련군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며 강력히 저항했다. 부시 미대통령은 이날 휴가를 중단하고 긴급대책회의를 연뒤 기자회견을 갖고 하오5시 소련의 군사쿠데타를 강력히 비난했으며 대소원조를 보류할것임을 시사했다. 이튿날 쿠데타세력들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상오6시 일류신76 수송기 60대를 동원,모스크바로의 병력을 증강했으나 이에 맞서는 소련국민들의 시위는 세를 더해갔다. 그후 러시아공내에 주둔하고 있던 무장병력들은 러시아공 의사당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며 21일 새벽 급기야 유혈충돌로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처음의 상황과는 달리 쿠데타세력이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주춤거리고 서방세계의 외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이날 최후의 「히든카드」를 내보였다. 군내 강경파인 모이셰프군참모총장이 전면에 나서고 그로모프중장(전아프가니스탄 주둔군사령관)과 바렌니코프 지상군총사령관이 실세로 급부상한 것이 그것이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듯 「최후의 항전」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으며 무력충돌도 불사하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뒤 10시간만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듯 강경입장을 누그러뜨리고 고르바초프와의 면담을 시도했다. 루키아노프 소연방 최고회의의장이 크림반도로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떠났으며 소련 국방부는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역에 배치됐던 병력들에 대해 철수명령을 내렸다.이어 모든 포고령이 무효화되고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 귀환길에 오름으로써 보수파들이 주연한 「쿠데타」드라마는 61시간만에 막을 내렸다.
  • 「사노맹」 성대조직/3명 구속 20명 수배

    【수원=김동준기자】 경기도 경찰청은 21일 사노맹(사로맹)산하조직으로 경기지역의 공공기관을 습격하고 극렬시위를 주도해온 성균관대 민주주의학생연맹(성민학련)을 적발,중앙위원 강병우(21·물리4)전 선동국장 김승권군(22·수학3)조직책 서영선양(20·조경3)등 3명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이적단체결성및 가입)를 구속했다. 경찰은 또 성민학련 위원장 이호성군(23·전기4)등 조직원 20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 박기평피고 논고문 요지

    피고인은 89년 11월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내에서 사회주의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백태웅등 소위 소수파와 함께 노동자계급의 주도하에 무장봉기를 통하여 혁명의 방법으로 현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국가기구를 장악하여 민주주의 민중공화국을 수립한 다음 토지 및 생산수단의 국유화등을 통하여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소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중앙상임위원에 취임하여 그 수괴로 활동했다. 89년12월부터 90년11월까지 사이에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선동하는 내용인 「1990년 남한사회주의자의 8대 과제」등 유인물·책자를 저술하거나 이를 자체 인쇄소에서 인쇄한 다음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배포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 본 사건은 조국의 운명과 발전을 외면하고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힌 피고인등이 정권탈취의 수단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에 따라 국가체제의 전복을 꾀한 사건이다. 특히 피고인등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조직이론과 투쟁방법을 답습하여 불과 1년이라는 단기간내에 3천여명의 조직원을 포섭하여 전국적인 방대한 규모의 철저한 비밀조직체계를 구축하는 한편,파출소방화등 각종 극렬시위 및 현대중공업파업등 노사분규를 배후조종함으로써 국가체제 전복을 획책했다. 피고인은 법정을 정치선전장으로 활용하라는 사회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여 본 사건 재판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주의를 찬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의 고문에 못이겨 자살을 하려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면서 공권력에 흠집을 내어 공권력을 무력화 시키려고 획책하고 있다. 피고인의 성행에 관하여도 전혀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습니다.피고인은 그동안 비폭력 노선은 민중에 대힌 테러라고 하면서 폭력사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민중정부수립을 위해 무장봉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서도 당 법정에 이르러서는 자신은 폭력을 가장 증오하는 평화주의자이고 무장봉기는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혁명자금모금 과정에서는 조직원들에게 사기·공갈나아가 강도의 방법까지도 사용하도록 하고 또한 자신이 이를 일부 실행하는 등 비도덕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조직원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돈으로 혼자서 호화로운 의식주 생활을 하는 등 이미 벌써 사회주의의 필연적인 병폐라고 하는 관료주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피고인의 성행 등을 종합하면 피고인에 대한 교정을 도모하기 보다는 피고인을 이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사상적 오염을 방지하고 국가의 존립기반을 안정시켜 국가의 보위와 대다수 선량한 국민의 안위를 보장토록 함이 더욱 절실한 요구라고 아니할 수 없다.
  • 사노맹 박기평씨 사형구형/검찰/“정권탈취 위해 국가체제 전복기도”

    서울지검 공안1부 이귀남검사는 19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중앙위원 박기평피고인(33·일명 박노해)에게 국가보안법위반(반국가단체구성·가입등)죄와 현주건조물 방화죄등 5개 죄목을 적용,사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날 서울형사지법합의23부(재판장 김동건부장판사)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논고를 통해 『사노맹」사건은 조국의 운명과 발전을 외면하고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힌 피고인들이 정권탈취의 수단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에 따라 국가체제의 전복을 꾀한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국가의 존립기반을 안정시켜 국가보호」와 대다수 선량한 국민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피고인을 이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켜 마땅하다』고 사형구형이유를 밝혔다. 검찰은 또 『피고인은 잘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자신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법정을 정치선전장으로 만드는등 개전의 정이 전혀없어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박피고인은 지난 89년 11월 백태웅씨(29·수배중)등과 함께 무장봉기를 통한 사회주의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노맹」을 결성,폭력혁명을 선동하는 각종 유인물과 책자를 제작·배포하고 학생들을 동원,파출소 방화를 기도한 혐의등으로 구속기소됐었다.
  • 평양특별시:2(새로 쓰는 북녘지리지:2)

    ◎“인민낙원” 선전… 곳곳 「외화내빈」 고층아파트/30층이상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어/만경대 이르는 거리는 노폭 1백m로 ▷도시개발과 시설◁ 이른바 「혁명의 수도」평양도심지는 지난 1989년에 열렸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전후해 그 면모를 일신했다.건물높이가 3백m나 되는 1백5층짜리 유경호텔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무렵. 북한은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외국인들에게 평양이 「노동자의 낙원」임을 과시하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을 몽땅 끌어다 고층아파트와 5·1경기장을 비롯한 대규모 체육시설 건설에 쏟아 부었다.그리고 세계 최고 최대의 기록을 움켜쥐겠다는 욕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공사현장으로 몰아붙였다. 착공때부터 그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됐던 유경호텔은 끝내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때까지 공사를 끝내지 못해 세계를 경악케 하려했던 당초의 북한야심이 물거품이 된 대표적인 케이스. 북한은 또한 대형건물 건설과 함께 평양시내에 광복·승리·천리마·통일·창광·영웅·봉화·비파 따위의 호전적 이름을 지닌 새로운 거리(노 또는 가에 해당)조성사업에도 극성을 떨었다. 광복거리는 팔골4거리(광복역앞)에서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까지 5.4㎞에 이르는 직선거리 구간.1986년이래 대규모 건설사업에 의해 7∼8m이던 노폭이 무려 1백m로 확장되었다.이 거리 일대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국제문화회관·영화관 등의 문화·위락시설과 12∼30층 규모의 고층아파트(약2만가구)로 꽉 메워져 있다. 창광거리는 평양역에서 보통문까지 이어지는데 80년대 초부터 시작된 대규모 사업으로 15∼39층짜리 고층아파트 30여동과 공공시설들이 세워졌다.거리의 좌우에는 북한정권의 심장인 조선로동당사와 김정일의 26호관저·당창건사적관·고려호텔·평양역전백화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이 거리는 특히 대형 식당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승리거리는 대동강변을 따라 대동교·옥류교·릉라다리까지의 구간으로 평양 시내 번화가의 하나.로동신문사가 있는 대동교로터리와 만수대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종로가 이 거리의 중심지이다.정무원청사와 김일성광장·제일백화점·유명한 냉면집 옥류관도 이 거리에 있다. 천리마거리는 보통문에서 평천구역 충성의 다리까지.1982년 이후 공사를 실시,길가의 옛 건물들을 철거하고 40여동의 고층건물(8∼30층)을 신축,조성한 거리이다. 청춘거리는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대비하여 건설된 「안골체육촌」에서부터 안골입체다리까지에 이르는 거리.1개의 주경기장과 9개의 크고작은 각종 경기장 및 부대시설들을 거느리고 있다. 특히 통일거리 일대에는 현재 5만가구를 입주시키기 위한 고층아파트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재난으로 계획에 큰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또한 외모만 그럴싸한 고층아파트를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존 고층아파트가 그러하듯 대부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거나 설치되어 있어도 출퇴근 시간에만 가동하는 형편이며 아침 점심 저녁 2시간씩 하루 6시간 제한급수를 실시하고 있다.또한 50%의 아파트가 개별 무연탄 난방에 의존하고 있다. 이같은 사정은 심각한 에너지 부족에 기인한 것이다.북한은 전력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전국에 걸쳐 정기 정전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평양특별시의 경우 구역별로 전력소비가 많은 시간대인 아침 저녁으로 1주일에 평균 3∼4회 정전(1회 1시간30분)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등 반환 운동」「낮전등 안쓰기운동」등을 펴고 있다. ◎평양특별시 행정구역표 ▲중구역=경상동 경임동 창전동 서문1·2동 신암동 신양동 남문동 중성동 보통문동 해방산동 종로동 만수동 대동문동 유성동 외성동 연화1·2동 역전동 오탄동 교구동 동흥동 서창동 동성동 창광동 신서동 동안동 ▲평천구역=북성동 간성동 봉지동 정평동 평천1·2동 봉학동 해운동 봉남동 육교1·2동 새마을1·2동 안산1·2동 ▲보통강구역=보통강1·2동 세거리동 서장동 석암동 서재1·2동 낙원동 경흥동 붉은거리동 봉화동 운하동 신원동 대보동 대타령1·2동 ▲모단봉구역=평화동 칠성문동 북한동 서흥동 인흥1·2동 월향동 진흥동 항미동 전우동 비파1·2동 흥천동 전승동 개선동 민흥동 장현동 성북동 긴마을1·2동 내좌1·2동 ▲서성구역=장산동 상흥동 석봉동 장경1·2동 서산1·2동 상신동 서천동 와산동 중신1·2동 연못동 하신동 남교동 긴재동 ▲선교구역=남신1·2동 장충1·2동 율곡1·2동 대흥동 산업1·2동 영제동 강안1·2동 등매1∼3동 옷메동 선교1∼3동 무진1·2동 ▲동대원구역=삼마1·2동 대신동 문신1·2동 동대원1·2동 냉천1·2동 신흥1∼3동 동신1∼3동 율동 신리동 새살림동 ▲대동강구역=문수1·2동 북수1·2동 탑제1·2동 의암1·2동 동문1·2동 문흥1·2동 사곡1·2동 소용동 청류1∼3동 릉라1·2동 ▲사동구역=사동 미림동 남산동 휴암동 장천동 송신1∼3동 동창동 이현동 오류리 대원리 덕동리 두루1·2동 금탄리 칠불리 삼골동 송화동 ▲대성구역=대성동 안학동 삼신동 임흥동 고산동 청암리 용남동 미암동 미산1·2동 용북동 용흥1·2동 청호동 ▲만경대구역=만경대동 궁골1·2동 옷고개동 당상동 선내동 용봉동 팔골동 용산동 칠골동 오류동 대평동 금천동 원로리 봉수1·2동 망일리 축전동 광복동 ▲형제산구역=천남리 학산리 신간1∼3리 서포1∼3리 제산리 하당1·2동 형산리 신미리 중당동 상당리 석전리 대양리 ▲용성구역=청계동 용성1·2동 화성동 마산동 어은동 중이동 룡추1·2동 용궁동 용문동 임원동 ▲삼석구역=광덕리 삼성동 도덕리 원흥리 원신리 호남리 성문동 대천동 삼석리 노산동 문영동 장수원리 ▲승호구역=승호1·2동 앞새동 이천동 입석리 봉도리 괴음리 삼청리 화천동 만달리 독골동 금옥리 남강동 ▲역포구역=유현리 소신리 장진1·2동 역포동 양음리 석정리 대현동 추당동 무진리 소삼정리 능금동 서현리 세우물리 ▲낙랑구역=송남리 보성리 정백동 토성동 낙랑동 유소리 남사리 정오동 동산동 원암동 두단동 중단리 금대리 금지도리 용호리 현골리 긴골리 ▲순안구역=순안동 오산리 성주리 구서리 안흥리 택암리 산양리 상송리 상서리 용복리 오금리 재경리 천동리 역전동 신원동 대양리 신성동 동산리 ▲강남군=강남읍 고읍리 문암리 동정리 용곡리 신흥리 삼암리 용포리 신정리 고천리 당곡리 장교리 마정리 용교리 유포리 이산리 영진리 간천리 석호리 ▲강동군=강동읍 문흥리 향목리 동리 맥전리 봉화리 용흥리 명의리 송가(노동자구) 대(〃) 흑령(〃) 문화리 향단리 구보리 난산리 태음리 자양리 화강리 하(노동자구) 순창리 고비(노동자구) 삼등리 ▲상원군=상원읍 신하리 대동리 영천리 노동리 릉선리 대천리 금성리 흑우리 대흥리 번동리 전산리 용곡리 귀일리 사기리 장리 중리 신원리 장항리 수산리 식송리 은구리 ▲중화군=중화읍 관봉리 삼성리 금산리 장산리 채송리 마장리 용산리 어용리 명월리 삼흥리 충용리 진광리 건산리 백운리 동산리 물동리
  • “콜레라 공포”… 횟집·수산시장 썰렁

    ◎농축산물 수출·외국관광객 유치 타격/해수욕객 일정 앞당겨 귀가 「잊혀진 전염병」콜레라환자가 11년만에 집단으로 발생하면서 음료·식품·유통및 농축산·관광업계는 물론 전국의 생선횟집과 수산시장등이 심한 콜레라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관광업계는 8∼9월 황금시즌을 앞두고 관광수입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외국인의 안전한 관광여행을 돕기위한 대응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공항과 항만등도 출입국자에 대한 검역활동을 강화하는등 24시간 검역비상체제에 돌입했다. ▷횟집·시장◁ 콜레라 발생지역인 충남 서천군과 인근 군산·대천·보령 일대의 횟집 등 요식업소들은 대부분 개점휴업상태이며 일부 업소는 날음식 판매를 중단,매운탕 등 끓인 음식만 판매하고 있다.서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인 대천해수욕장을 비롯,무창포·비인해수욕장 등에선 막바지 피서철인데도 피서객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 썰렁하기 그지 없다. 서천군 장항읍 창선동 1가 강경횟집 주인 김흥옥씨(40)는 『콜레라가 발생하기 전에는 하루 평균매상액이 60만원을 넘었으나 14일에는 매상이 20만원도 안됐다』고 걱정했다. ▷식품·관광업계◁ 국내는 물론 일본등 외국의 검역당국이 수출입품목의 통관절차와 검역을 강화,농·수·축산물 수출입에 큰 타격이 예상되고 있다. 서울·경인지역및 영남일원 50여개 점포에 생선회 코너를 두고 있는 (주)한양유통은 14일부터 「코너」를 잠정적으로 폐쇄했다. 관광업계도 콜레라파문이 장기화될 경우 많은 외국관광객들이 발길을 돌릴 것으로 예상,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공항·항만방역◁ 김포공항과 인천·부산항도 콜레라 오염지역인 동남아·아프리카·중남미지역의 출·입국자에 대한 검역을 강화하고 있다. 보사부 서울검역소는 특별반을 편성,동남아지역에서 들어오는 입국자에 대해 이상유무를 살피는 한편 검사실을 24시간 가동,항공기에서 수거한 오수를 즉시 검사하고 있다.
  • 외언내언

    13일자 조간신문에 실린 두장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분단 46년만에 남북의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남과 북의 학생들이 서로 얼싸안은 사진도 있고 마주보고 웃는 사진도 있다.북한지역방문 취재를 준비중인 서울지역대학 신문기자연합대표 3명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 대표 3명이 사진의 주인공들.◆그런데 그 사진이 감격스럽기 보다는 생소하게 느껴지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지난12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의 학생들이 마주치는 순간 북쪽 학생들이 먼저 남쪽 학생들을 소련식으로 포옹했고 남쪽 학생들은 잠시 당황했으나 같이 끌어 안았다.북쪽 학생들은 또 회의실중간에 마주앉도록 되어 있는 의자와 책상을 치워버리고 『자유스럽게 이야기하자』면서 북측지역에 다시 자리를 만들었다.◆모든 것이 북쪽 학생들의 뜻대로 되어갔다.이런일들을 자연스런 모습으로 보면 그만이다.그러나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남쪽 학생들은 글자 그대로 학생이지만 북쪽 학생들은 「학생」의 가면을 쓴 이른바 「통일일꾼」들.◆남북 학생들의 나이만 비교해 보아도 그런 사정은 금방 드러난다.남쪽 대표들은 모두가 20살을 갓 넘겼지만 북쪽 대표들은 26살,27살,32살.북쪽에도 우리와 비슷한 나이의 대학생들이 많지만 이날 나온 북쪽 대표들은 군대와 직장을 거쳐 당에서 특별훈련까지 받은 통일전선의 전위대라고 봐야한다.◆그렇다면 북한의 의도는 불을 보듯 뻔하다.지난12일부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리고 있는 「범민족서울대회」를 부추기기 위한 선동굿판에 남쪽의 학생기자들을 이용해 보자는 것.우리는 모르고 끌려가고 때로는 알면서 따라가는등 선전·선동·전술면에서는 그들에게 말려드는 인상.천하대세는 이미 우리편.「통일」「민족」「민주」라는 마술적 용어에 걸려 북의 장단에 춤추는 어리석은 놀음일랑 이제 그만했으면.
  • 북한의 불성실한 대화자세(사설)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을 계기로 우리사회에는 남북관계개선과 통일에 대한 기대가 새삼 고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그러나 이같은 기대는 우리 한편만의 노력으로는 채워지기 어렵고 상대인 북한의 태도변화와 성의표시가 함께 해야 충족 가능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북한의 대남태도를 보면 그 기본전략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알수 있다.유엔가입결정이나 쌀 등의 소규모 물자교환 등 다소의 변화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김일성부자승계체제를 근간으로 한 대남통일전선전략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작금의 보도는 보여주고 있다. 소위 범민족대회의 개최로 마치 자기들만 통일을 열망하는듯 선전효과를 노리고 남쪽의 전대협대표와 재야일부를 끌어들여 사회교란을 노리는 선동전술에 전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철없는 입북 동조자 박성희양 성용승군이 구속된다면 27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고위급회담을 비롯한 남북대화와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위협성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또 북한유도대표 이창수선수의 귀순을 트집잡아 올림픽단일팀구성문제가 걸려있는 남북 체육회담도 무기 연기했다.각급 남북회담이 열릴 때마다 팀스피리트훈련중지나 구속자석방 등을 내걸고 위협 또는 연기하던 태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은 작태라 할수 있다. 겉으로는 범민족대회를 열어 통일열기가 고조된 듯이 선전선동하면서 사실상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밑거름이 될 정부레벨의 고위급회담 등에 걸핏하면 전제조건을 내걸거나 트집을 잡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가장 시급한 이산가족의 재회문제를 다룰 적십자회담에는 응대조차 하지않는 북한의 이중성은 대남적화전략을 포기하지 않은데서 나온 것이다.그들은 아직도 남한의 일부 극소수 반체제 인물들을 부추겨 사회를 혼란시키고 심지어 내부적 전복을 일으켜 보겠다는 환상에 젖어 있는 것 같다.북한은 이같이 비현실적인 몽상에서 깨어나고 반통일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때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같은 남북대화의 굴곡은 우리에게도 원인이 있다.북한을 대화에 끌어 들이기에만 급급한 우리의 태도는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마치무슨 선심 베풀 듯 줄다리기 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선전선동에만 뜻을 둔 상대와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원칙적인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보다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핵개발중지라든가 북한의 인권문제,심지어 김부자 독재체제까지도 문제로 제기해야 한다.당장은 대화에 지장을 줄지 모르나 진정한 대화와 민주통일의 대도를 닦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런 지적과 시정요구가 이제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한편 내부적으로 국민화합과 민주개혁을 도모하면서 경제의 안정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내정개혁없이 대화아닌 대화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통일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북한이 세계적인 민주와 개방의 물결에 어쩔 수 없어 남북간의 진정한 대화를 간청할 때가 곧 올 것이다.
  • “역상 위장” 자해공갈단 다시 기승

    ◎횡단길 중형차·여 운전자 노린다/신호등 없는 곳서 백미러에 충돌/횡단보도/여자·학생 자가운전차 골라 범행/아파트촌/혼잡한 골목길서 서행차 부딪쳐/시장주변/18차례 7천만원 뜯은 일당 6명 검거 한때 자취를 감췄던 교통사고를 가장한 자해(자해)공갈단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 자해공갈단은 끔찍스럽게도 스스로의 팔다리를 망치 등으로 부러뜨리고는 주로 으슥한 길목횡단보도 근처 등에서 지나가는 승용차에 뛰어들어 교통사고가 난듯 꾸미고는 갖은 공갈과 협박으로 운전자들을 괴롭히며 치료비와 위자료등 명목으로 거금을 뜯어내고 있다. 이들은 또 범행을 쉽게 하기 위해 사고에 밝은 고용운전자들이 몰고가는 고급승용차나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형승용차를 피해 사고경험이 적고 경제사정도 괜찮은 중산층들이 많이 타는 소나타나 콩코드등 중형승용차를 범행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와관련 서울 송파경찰서는 2일 자해공갈단 두목 신일성씨(34·전과9범·서울 관악구 봉천1동 1653의18)와 가해기술자 김충곤씨(25·전과9범·광주시동선동 4043 건아아파트102동 1058호)및 행동대원 김용재(26·전과4범·서울 성동구 옥수동 239),김영덕(20·주거부정),이모군(19·경기도 미금시),박모군(19·경기도 남양주군)등 6명을 상습공갈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김인덕씨(42·주거부정)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이들은 지난달 27일 하오 8시25분쯤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중소기업은행앞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신모군(23·대학생)이 몰고가던 소나타 승용차의 백밀러부분에 일부러 부딪쳐 이웃 K병원에서 전치 6주의 상해진단서를 받은뒤 2백만원을 합의금으로 뜯어내는 등 지난해 4월부터 같은수법으로 18차례에 걸쳐 7천3백여만원을 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 김모씨(58·여)는 『지난달 26일 하오3시쯤 서울 송파구 삼전동 3의3 횡단보도를 지나는 순간 20대 청년이 백미러에 살짝 부딪치면서 땅바닥에 뒹굴어 놀라 차에서 나오자 옆에 있던 3명이 청년을 이웃 J병원으로 옮기고는 30여분 뒤 40대로 보이는 피해자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횡단보도에서의 사고는 구속이 원칙이라면서 욕설로 공포감을 조성해 그자리에서 가지고 있던 현금 84만원을 몽땅 내주었다』고 말했다. 범인들은 교도소에서 서로알게된 사이로 교통사고를 위장,금품을 뜯어내기 위해 지난해 4월 망우리 공동묘지에 올라가 가해기술자 김씨가 나이어린 행동대원들을 눕히고는 두 다리 오금에 붕대를 감은 각목을 낀뒤 1m높이에서 3㎏짜리 돌을 떨어 뜨리거나 어깨 빗장뼈에 각목을 대고 그 위를 각목으로 다시 때리는 등으로 다리·팔·빗장뼈 등에 금을 가게한 뒤 범행을 저질러 왔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이들이 갈취한 합의금 말고도 치료비와 보험금을 보험회사로부터도 받아낸 것으로 밝혀내고 정확한 갈취금액을 조사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범행과정에서 X­Ray검사 결과 상해시기가 최소한 10일이상 지난 것으로 드러나 붙잡혔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1

    ◎한국부문/북한병력,남침 6일전 38선 집결/“개전 임박” CIA보고 극동 사서 무시/6·25 터지자 백악관·의회·군 “책임 논쟁”/휴일 미 보병학교서 야구중계 보다 “전쟁발발” 뉴스 들어 한국에서의 「미군」은 누구인가­.주한미8군참모장을 역임한 존 싱글로브장군(69)이 펴낸 회고록 「위험한 임무」(HazardousDuty)는 한국전쟁발발 및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77년 두번째 한국근무중 당시 지미 카터 미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하는등 소신을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싱글로브장군은 이 회고록에서 6·25는 미 CIA보고에 대한 미국정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서울신문은 이 회고록을 긴급입수하여 「미군」으로서 체험하고 느낀 주한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역할과 책임,그리고 공과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몇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 비내리는 일요일 새벽,날이 채밝기도 전에 10만여명의 북한인민군이 38선 전역을 가로질러 침공을 개시했다.남한에서는 이들을 편성도 채 갖추지 못한 3개사단 정도가 맞서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1945년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쪽은 미군이,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소련은 탱크와 중화기를 지원하는등 북한 인민군의 무력증강에 많은 투자를 했다.1948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공식적으로 북한땅을 철수한 후에도 수천명의 군사고문단이 잔류,지속적인 군비증강을 꾀했으며 침공을 감행할 무렵에는 13만5천의 병력과 소련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를 참관한 유능한 장교단들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군은 10만명이 채 못되었으며 미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고 미군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24군단 병력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것은 1949년 5월이었으며 군사고문단과 병참요원등 5백여명만이 잔류하고 있었다.한국군에는 탱크는 없고 몇대의 대포만 있을 뿐이었으며 제대로자격을 갖춘 장교도 드물었다.더욱이 소규모 작전의 지휘권까지도 워싱턴에 있었으며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와는 중계를 통한 무선통신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군은 바로 첫날 새벽부터 현대전 사상 유래가 없는 패주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의 방어에 미군을 사용한다는 극동사령부의 임시계획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같이 38선 전역에 걸쳐서,또 다량의 우수한 최신 소련제 탱크의 공격을 예상한 것이 아니고 고작 북으로부터의 소규모 국경충돌이나 게릴라침투 등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내가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을 안 것은 조지아주 베닝기지에서 였다.그 전날 보병학교에서 대대장교육을 수료한 뒤여서 그날은 숙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야구중계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에 한국전쟁 소식이 스포트로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만주에서 여러해동안 정보업무를 맡아왔던 나로서는 우선 몹시 화가났으며 놀라움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그 다음에는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봄철 내내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에 의한 철저한 준비와 위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의 높아져가는 긴장감을 분명히 CIA와 윌로그비소장 산하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CIA의 북한 정보망을 내가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의도에 관한 정보를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CIA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잘 훈련된 10여명의 젊은 한국인 정보원들을 북한에 투입했다.극동사령부의 맥아더원수와 윌로그비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략 조기경고의 특수한 임무를 부여해 북한땅에 헌신적인 반공주의자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그후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CIA는 마침내 서울에 지역본부를 설립했다.나는 그때 CIA의 중국담당 책임자였는데 서울본부는 아주 우수하고 믿을만한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해 중반부터 서울본부에는 북한으로 침투시킨 정보원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상당부분 북한의 전쟁준비 움직임에 대한 경고를 해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후에 CIA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정보 임무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민간및 군사정보 책임자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50년 6월 엄청난 「정보실패」의 미스터리를 풀수 있었다. 그해 봄부터 김일성의 공산당정권은 한국에서의 선거를 비난하고 군사적 도발의 위협을 가하면서 남한에 대한 악랄한 선동공세를 벌여왔다.그러는 가운데 소련지원을 받는 김의 군대는 침공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단계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북한에 있던 우리 정보원들은 이미 북한의 교통시설은 물론 정부기관이나 군내부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같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6월까지 몇몇 정보원들이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특별보고를 해오거나 38선을 실제로 넘어와서 서울에 있는 CIA간부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CIA 서울지역국 보고」라고 명명된 1950년 6월19일자로 된 한 중요한 정보보고를 보면 중장비 등을 수송하기 위한 38선 북측 도로의 확충,1945년이래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던 남측으로의 연결도로에 대한 일제 보수등 광범위한 병력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더욱 불길한 징조는 북한의 민간 교통수단들이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에서 38선으로 연결되는 철로변에 집결돼 있다는 것이었다.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이 원할때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배치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CIA국장 로스코 힐렌쾨터 해군대장은 북한의 침공이 있기 전 닷새의 시간동안 이 평가서는 백악관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등 트루먼대통령의 군사및 외교정책 핵심참모들에게 전달됐으리라고 확신했다.이 평가서의 요약본은 또한 전통을 통해 도쿄 극동사령부의 맥아더장군과 윌로그비장군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군부및 민간의 핵심 정책입안자들은 남침 이전에 이미 북한의 침공의도에 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이들 증거자료는 잘 훈련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연적인 의문점이 제기될수 있다.왜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 정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왜 어떤 작은 군사적 행위도 강력한 응징을 받을수 있다는 공식적인 주의를 북한에 주지 않았는가? 왜 적어도 미공군의 정찰기들이 북쪽의 뒤엉킨 산들로부터 단지 세개 뿐인 남쪽으로의 통로를 감시하지 않았는가? 당시 태평양지역에서 일했던 CIA 지역책임자들이 후에 나에게 이 문제들의 해답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윌로그비소장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그해 봄 서울에서 오는 모든 정보들을 분석평가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F6」정보,즉 「미숙한 정보원이 보낸 신빙성이 불투명한 정보」로 분류돼 거들떠보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작전은 맥아더사령관의 관할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보책임장교는 그 보고들을 심각한 고려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버렸던 것이다.그러한 등급으로는 워싱턴에서 절대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질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 이들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힐렌쾨터 CIA국장 한사람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임무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무방비상태에서 전쟁은 발발했고 개전 다음날인 26일부터 워싱턴은 한국전쟁발발의 책임문제를 놓고 의회와 백악관,CIA와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간에 「정보수집실패」냐 「정보판단실수」냐의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 토초세에 반발 지주/거의가 외지투기꾼/서 국세청장

    서영택국세청장은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인천·대구 등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토지초과이득세에 대한 집단 반발과 관련,『인천의 영종도와 용유도의 경우 3천8백여명에게 예정통지서를 발부했는데 이중 89%가 서울 등 외지인이었다』며 『최근 1천5백명이 서명해서 제출한 진정서에는 과세대상자가 1백38명밖에 없고 이들이 현지주민을 선동해 동원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서청장은 또 『대구 수성구 황금동 일대의 과세대상자 1백50여명도 집단민원을 통해 세부담이 1천만원이 넘는 것은 너무 과중하고 제도의 부당성까지 지적하고 있으나 이들중 83%가 시내 도심지 거주자들이며 이들이 변두리지역에 땅을 사둔 것은 투기를 위한 토지취득이 명백하므로 과세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서청장은 이어 『현행 토초세 시행령은 처음 실시되는 제도여서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현재 일선 세무서별로 민원사항을 접수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쳐 미비점을 보완해 나갈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 「정책위」가 주사노선 배후 조종/당국이 밝힌 「전대협」의 실체

    ◎자민통등 4개그룹이 핵심조직/김일성부자 우상화 투쟁에 앞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그동안 「대학가 민주세력의 결집체」로 자처해 왔으나 그 조직의 실체와 활동내용이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87년5월 이른바 민주화물결을 타고 「백만학도의 결집」을 기치로 출범한 「전대협」은 지난달 1일 제5기 조직이 발족하기까지 전국의 전문대학을 포함한 2백50개대학 가운데 1백77개대학 총학생회를 수용하는 거대한 조직체로 커왔다. 국가안전기획부가 밝힌 이 조직의 규약상 체계는 의장이 주재하는 총회 아래 전국 24개 지구대협 의장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있으며 이는 다시 각 대학 총학생회를 지역별로 연락하는 각 지역·지구대표자협의회로 이어지고 있다. 중앙위원회 아래 방계조직으로는 토쟁노선과 정책을 세우는 「정책위원회」와 함께 이를 집행하는 사무국·선전국·편집국·연대사업국·투쟁국·문화국 등 6국을 둔 「중앙집행위원회」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안기부는 「전대협」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핵심세력조직은 주체혁명사상과 이념에 철저한 골수 「주사파」의 지하세력인 「정책위원회」라고 밝히고 있다. 안기부의 수사결과 지난 87년부터 88년까지의 「전대협」제1·제2기 조직은 북한의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전위조직을 자처하던 「반미청년회」가 침투해 조종해온 것으로 나타났다.이 「반미청년회」는 당국의 수사로 이미 해체됐다. 89년뒤로는 서울의 동·서·남·북지역을 중심기반으로 하면서 주체사상을 주된 이념으로 삼아 「한민전」의 지도아래 결성된 주사파 지하조직으로 밝혀진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조통그룹」「관악자주파」「반제청년동맹」등 4개 조직이 「전대협」을 움직이고 있다. 「전대협」은 이같은 조직체를 배후로 전면의 조직체계를 내세우며 전국대학생의 유일한 조직과 백만학도의 전국대중체를 자처,정부의 정책이나 어두운면을 부각,비판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최근에는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와 「범민련 해외본부」등과 긴밀히 연락하며성용승군(22)과 박성희양(22)을 대표로 북한에 파견하려 하기도 했다. ◎베일 벗은 지하조직 「정책위」/모두 20여명… 조직원끼리도 가명사용/「의장」 추대 사전조정등 전위역할 담당 형식상 「전대협」의 중앙위원회 아래 방계조직으로 돼있는 「정책위원회」는 실제에 있어서는 이 단체와 각 대학 총학생회에 투쟁지침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핵심조직으로 안기부는 수사결론을 내렸다. 「정책위」는 「자민통」 「조통그룹」 「관악자주」 「반제청년동맹」등 실질배후세력에서 선별된 정책위원장등 중앙정책위원 5명과 각 지역 지구대협 정책위원 15명등 2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전대협」규약에 『각 지구에서 선발된 자들로 구성,월1회 정례회의를 통해 정책과 노선을 연구하고 정치사업을 수행하며 전대협의장과 중앙위원회를 보좌한다』고 규정,이 단체를 이끌어 왔다. 이론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따르며 사상적으로 확고한 사람을 선별해 정책위원으로 선발하며 모두 「전대협」집행간부보다 선배들로서 의장을 배후에서 조종해 왔다. 서로서로철저히 가명을 사용해 노출되지 않는 이 조직은 김종식군을 한양대총학생회장에서 「전대협」의장으로 추대토록 내정하는등 의장선출부터 노선수립·투쟁방법 등을 지시했다. 특히 지난 2월말에는 이명곤정책위원장이 손성표정책실장과 함께 『연방제통일방안 합의를 위해 전대협대표를 밀입북시키자』고 합의,끝내는 두사람의 「전대협」대표를 베를린으로 출국시켰다. 안기부 수사결과 이들은 회의때마다 북한의 대남심리전공작기구인 「한민전」에 충성할 것을 결의하고 일부가사만 바꾼 「한민전가」노래를 부르며 북한방송을 유인물로 작성·배포하는 등 이적활동을 해왔다. 이들은 최근들어 손성표정책실장 앞으로 재일북한 공작조직인 「한통련」부의장 곽영문이 연락처를 알려주고 통일대축전내용등 활동을 논의하려하는등 재일 「한통련」과 「전대협」이 연계활동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별 혐의사실 ▲김종식(24·전대협의장·한양대 사회학과4년)=지난달 정책위원장 이명곤,「조통위」위원장 한철수,「조통위」정책실장 손성표등과공모,베를린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참석 및 밀입북을 위해 성용승,박성희를 「전대협」대표로 파견.지난 4월 강경대군 치사사건 「범국민대책회의」공동의장으로 참여,불법 폭력소요 주동. ▲한철수(22·전대협 조통위위원장·경희대 신방과4년)=김종식등과 공모,성용승·박성희를 「전대협」대표로 독일에 밀파.그 뒤 「백만통일 전사여,대표의 뜻을 이어받아 통일대축전 성사시키고 조국통일의 대장정에 거침없이 나서자」는 제목의 연방제 통일방안 지지내용의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손성표(25·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원·고려대 법과4년 휴학)=김종식등과 공모,베를린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참석 및 밀입북을 위해 성용승,박성희를 물색,이들에게 입북시 활동사항등을 교육시키고 전대협대표로 밀파. ▲허동준(23·전대협대변인·중앙대 법과4년)=지난 4월 강경대군치사사건과 관련 「범국민대책회의」부대변인으로 선임돼 제1차 범국민대회등 불법집회 및 시위주도.지난 4월 김종식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7·7판문점 통일대축전 실무회담」을 제의했으며 같은 내용의 서한을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에 전달키 위해 대표단 5명을 판문점으로 파견. ▲하태경(23·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원·서울대 물리학과4년)=손성표등과 공모,제5기 「전대협」산하 제2기 조통위를 구성하고,조통위정책실원으로 활동하며 연방제통일투쟁 선동.지난 4월 손성표로부터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와 해외청년학생측에 보내라며 제공받은 「통일대축전」관련 유인물 7장을 「전민련」팩시밀리로 베를린 「범민련해외본부」를 통해 북한에 발송. ▲김시몽(23·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원·목포대 경제과4년)=손성표·하태경등과 공모,구속된 조통위 정책실원 염동성의 후임으로 정책실에 가입,연방제 통일투쟁선동등 활동.지난 2월 김일성 주체사상 관련 논문및 「한민전」명의의 「상반기대중운동 총화」 유인물을 소지,대학노트에 요약·정리해 은닉. ▲신현욱(23·전대협의장 수행비서·한양대 사회학과4년)=지난 1월 한양대 사회학과 동기생인 김종식의 수행비서가 되어 각종 집회에 김종식을 수행,이동경로 확보및 신변안전 보호임무수행. ▲정진성(22·전대협의장 수행운전사·한양대 중문과3년)=「전대협」의장 김종식의 승용차를 운전하는 등 편의제공.「통일전선론」(부제―남한혁명 승리의 근본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방도)및 「혁명 전통에 관한 이론」의 제목으로 주체사상등 이적내용이 담긴 글을 노트에 작성하여 은닉.「주체의 혁명관을 튼튼히 세운데 대하여」,「주체사상에 대하여」등의 유인물을 탐독 보관. ▲정미연(20·전대협 2차밀입북 예정자·전남대 회계학과4년)=지난달 손성표 「남총련」 조통위소속 고정훈(가명)등과 공모,「범민련」일본본부를 통해 「전대협」대표로 밀입북 추진.
  • 「교원 노동·정치운동」 논란에 종지부/사립학교법 합헌결정의 의미

    ◎근로자신분 내세워 교육의 본질 침해는 부당/“사립교사에도 「공립규정」준용은 타당”/전교조 정당성 상실,입지·활동에 타격 헌법재판소가 22일 사립학교법 제55조와 58조1항에 대해 합헌(합헌)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교육계에서 큰 논란이 돼왔던 사립교원의 노동운동문제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사립학교법 제55조는 사립학교교원의 복무에 대해 국·공립학교교원에 관한 규정을 준용토록 해 노동운동·기타 공무이외의 일에 집단행위를 할 수 없게 한 규정이며,제58조1항은 정치운동 또는 노동운동을 하거나 집단행위·정당지지행위·학생선동행위 등을 할때 면직시킬 수 있도록 한 규정이다. 따라서 이번 위헌심판의 쟁점은 국·공립교원과 사립학교교원의 신분상 차이,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기본권의 한계와 노동기본권과 학습권의 관계 등에 관한 한계를 분명히 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헌재는 이에 대해 9명의 재판관 가운데 절대 다수인 6명이 합헌의견,1명은 한정합헌,2명은 위헌의견을 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우선교육의 목적과 교원의 의의,그리고 직무의 특수성을 전제로 이같은 합헌결정을 내렸다. 즉,교원이 교육활동이란 노동을 대가로 수입을 받는 근로자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는 하나 장기간 훈련을 받고 이에 필요한 지식·소양과 함께 사회적 책임이 요구되는 직무상 특성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일부 교원들이 국·공립교원과의 차이점으로 자율성을 갖는 사립학교재단에 속해 있음을 주장하는데 대해 『교원은 공교육을 담당하고 교육목적·교육과정 등에서 차이가 없으며 교원임용에서 사립교원은 교육공무원과 비교해 임용절차만 다를 뿐 그밖의 자격요건·복무·연수의무·신분보장 및 사회보장 등의 모든 부분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돼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헌재는 이같은 전제에 따라 이 두가지 규정이 노동3권을 규정한 헌법 제33조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존중을 규정한 헌법 제37조 2항에 위배된다는 일부 주장을 잘못된 해석으로 결론지었다. 사립학교교원도 직무상 공무원개념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현행 헌법과 국가공무원법에 의해 규정된 국·공립학교교원의 노동운동금지조항을 준용,집단운동을 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헌재는 이에 대한 법해석에서 『비록 근로자인 사립학교 교원에게 헌법 제33조가 정한 근로3권의 행사를 제한 또는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이들 교원이 가지는 근로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그 제한이 공공의 이익인 교육제도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 적정하게 결정된 것이므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풀이했다. 이는 『교원의 노조활동은 최종적으로 수업거부와 학내외에서의 시위농성을 수반,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게 되므로 이같은 결과를 부를 노동권은 교육자에 있어서 제한돼야 한다』는 합헌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재의 이날 결정은 그동안 교원의 집단행동을 주장하며 일부 교사들의 동조를 받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는 타격이 될 수밖에 없고 교육법에 규정된 유일한 교직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지난 89년5월 설립돼 교육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전교조」는 법률적인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전교조」는 설립과 함께 집단행동에 나서 첫해에 모두 1천5백여명의 교사들이 해직됐고 현재는 1만5천여명이 가입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위헌심판도 「전교조」활동과 관련,지난 89년5월 학교법인 선일학원의 선일여자중에 근무하다 해직된 정순남·최금숙교사 등 2명이 해직무효청구소송과 함께 낸 신청에 따라 그해 10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이 제청한 사건 등 같은류의 사건 1백건을 단일사건으로 묶어 결정된 것이다. 「전교조」는 헌재의 이날 결정에 대해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결정』이라면서 『이는 최근 국가보안법의 합헌결정,노동쟁의 조정법의 제3자개입금지조항 합헌결정 등과 같은 맥락으로 교원의 탄압을 정당화했다』고 주장,앞으로도 헌재결정에 불복,법외노조로 활동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은 사법권 최후의 해석이기 때문에 이번 결정에 의해 그 활동에 정당성을 같지 못하게 된 「전교조」로서는앞으로는 법률적으로 아무것도 내세울 방법이 없게됐다. ◎사립학교법 합헌결정문 /“교원은 특수신분… 고도의 자율성과 책임성 지녀” ▷교원의 특수성◁ 학교교육의 수행자인 교원은 학생을 지도·교육한다는 노무에 종사하고 그 대가로 받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로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그 직업이 요구하는 소양과 지식을 갖출 수 없으며 고도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성을 아울러 가져야 한다는 직무상 특성을 가진다. 교원의 근로관계는 일반근로자의 근로관계와는 여러가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고 교원의 근로관계를 법적으로 규율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교육제도의 독특한 구조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전통적인 노동관계법의 원리가 교원의 경우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현행 교육법제는 교원의 소속여하를 묻지 아니하고 교원을 일반국민에 대한 봉사자로 보고 있고 교육의 전문성과 관련하여 국·공립학교 교원 또는 사립학교 교원을 가리지 아니하고 동등한 처우를 하도록 규율하고 있다. ▷헌법 제33조제1항◁ 헌법 제31조 제6항은 단순히 교원의 지위와 권익을 보호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규정이 아니고 국민의 교육을 받을 기본권을 실효성 있게 보장하기 위한 것까지 포함하여 교원의 지위를 법률로 정하도록 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교원의 신분보장,경제적·사회적 지위보장 등 교원의 권리에 해당하는 사항 뿐만 아니라 국민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저해할 우려있는 행위의 금지 등 교원의 의무에 관한 사항도 포함될 수 있다. 헌법 제31조 제6항을 근거로 하는 사립학교법 제55조와 제58조 제1항 제4호가 교원인 근로자의 근로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근로3권에 관한 헌법 제33조 제1항의 규정을 내세워 바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헌법 제31조 제6항은 국민의 교육을 받을 기본적 권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교원의 보수 및 근무조건등을 포함하는 개념인 「교원의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법률로써 정하도록 한 것이므로 교원의 지위에 관련된 사항에 관한 한 위 헌법조항이 헌법 제33조 제1항에 우선하여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 제37조제2항◁ 교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위하여 제정된 여러 법률의 규정들은 결국 일반근로자에게 보장된 근로3권의 행사를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기할 수 있도록 한 것에 갈음하여 직접 사립학교 교원의 보수와 신분을 보장하는 한편 그 신분에 걸맞는 교직단체인 교육회를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비록 근로자인 사립학교 교원의 근로3권 행사를 제한 또는 금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로써 근로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 것으로는 볼수 없고 그 제한이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비추어 보아 교육제도의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므로 헌법 제37조 제2항에도 위반되지 아니한다. ▷평등의 원칙◁ 사립학교 교원의 근로3권을 제한하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를 제한하여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며 사립학교법의 규정이 국·공립학교 교원에 대하여 적용되는 규정보다 반드시 불리한 것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헌법 제11조 제1항에 정한 평등원칙에 위반되지 아니하고,나아가 헌법전문이나 헌법 제6조 제1항에 나타나 있는 국제법존중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 통일을 위한 대행진(사설)

    「통일대행진」의 남북공동주최와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을 골자로 한 최호중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의 7·15대북제의는 우리정부의 통일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시의적절한 조치로 이 제의가 실현되기를 기원한다.노태우대통령의 「밴쿠버지시」를 구체적으로 다듬은 이 제의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들을 가능한 것부터 차근 차근 추진해 나간다」는 합리적인 명제를 토대로 하고 있어 북한도 호응해 올 것으로 믿는다.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남북의 국토를 종단하는 통일대행진은 이미 북한이 제의한 것을 우리정부가 전향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은 순수한 인도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통일대행진에 대한 우리정부의 구상을 보면 남북의 각계각층과 해외동포를 망라한 남북 각1천명씩 2천명으로 통일행진단을 구성하되 쌍방정부의 지원과 보장아래 민간기구의 주도로 추진하게 되어 있다.북한의 「국토종단순례」계획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차이가 있다면 이행사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다.북한은 이른바 「범민련」이라는 친북단체를 조종하면서 국토종단 순례행사를 이미 그쪽부터 시작했으며 순례가 끝난뒤 우리정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서울에서 「범민족대회」를 갖겠다고 고집하고 있다.우리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북한 당국은 「민간 통일운동탄압」 운운의 논리를 내세워 극렬한 대남비방과 선동을 일삼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이같은 태도를 지켜보면서 남북양측 정부의 지원과 보장없이 남북관계 개선이나 민족동질성회복을 위한 행사와 운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으며 설사 어느 한쪽 정부를 제쳐놓고 이런 행사와 운동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오히려 불신과 갈등의 폭만 넓힐뿐이다.따라서 우리는 북한이 지금이라도 국토종단순례계획을 포기하고 우리정부의 제의에 호응해줄 것을 바란다.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비방과 선동을 중단한뒤 통일대행진을 함께 추진하고 실현시킨다면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크게 빛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획기적인 기틀도 마련될 것이다. 북한이 내부사정때문에 통일대행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이것을 제외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펼쳐질 「통일문제대토론회」나 판문점에서의 「통일문화축전」등 우리정부의 제의를 선별적으로 수용해도 좋을것이다.우리정부는 남북관계개선과 민족동질성회복을 위한 것이라면 북한의 선별적수정제의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남북이 함께 풀어야할 또하나의 과제는 이산가족의 슬픔을 덜어주는 일이다.지금 남과 북에는 1천만 이산가족이 뼈저린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다.이들의 슬픔을 외면하고서는 통일의 길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따라서 우리정부가 올 추석(9월22일)을 기해 70세이상의 이산가족만이라도 고향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하자는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인도적인 제의이며 북한도 흔쾌히 호응해야 한다.이제 통일은 관념적인 명분이 아니라 실천적 의미를 갖는 현실적과제로 대두되고 있다.북한의 당국자들도 이 엄연한 현실을 직시해야 하며 이것만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임을 명확히 인식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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