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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염둥이 김자옥(金慈玉)의 핑크빛 소문

    귀염둥이 김자옥(金慈玉)의 핑크빛 소문

    「데뷔」1년만에 일약「KBS의 얼굴」로 자란 인기「탤런트」김자옥(金慈玉·22)이 연애를 한다는「핑크」빛 소문이 방송가에 나돌고 있다. 앳되고 청순한「마스크」의 귀염둥이 김자옥(金慈玉)도 이제 한 여성으로서 성장해 가는 것일까? 인기가 오르면서 자연히 소문도 늘어가는 것이 연예가의 통례다. 김자옥(金慈玉)도 예외가 아닌듯.  71년 11월 매일극『심청전』의「히로인」으로 발탁되어 좋은 연기로 기반을 잡자 방송가에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김자옥(金慈玉)이 가수 이상렬(李相烈)과 뜨거운 사이라는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다음『한중록』에서 혜경궁 홍(洪)씨 역을 맡아 폭 넓은 연기로「팬」을 확보해 가자 이번엔 같은 방송국의「탤런트」이(李)모군과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났다.  그리고 그후『신부들』의 주역을 맡은 다음에는 또 그녀가 30대의 남자와 (서울 중구) 소공동 밤거리를 거닐더라는 소문이 번졌다.  결국 김자옥(金慈玉)이 일일극의 주연을 맡을 때마다 연문(戀聞)이 하나씩 늘어간 셈일까?  동료「탤런트」들은 이러한 소문을 두고 김자옥(金慈玉)이 예상보다 감쪽같이「데이트」를 잘하는 모양이라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다 큰 계집애가 연애하는 것은 하나도 어색할 게 없잖아요? 그렇지만 하나 같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화가 날뿐이죠』  소문의 진원을 묻는 기자에게 김자옥(金慈玉)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아빠가「탤런트」생활 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시지 않는데 이런 소문이라도 아신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실 거예요』  「아빠」의 얘기를 할 만큼 김자옥(金慈玉)은 아직도 어리고 순진한 편이긴 한데···.  『말이 많은 곳엔 그런 것이 다 화제가 되겠지만 너무 심해요.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밖엔···.』  억울해 죽겠다는 듯 예쁜 두눈에 눈물이 글썽해진다.  『해명을 하면 변명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또 있겠지만 저로서야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어요』 믿지 않아도 할 수 없다면서 김자옥(金慈玉)이 밝힌 해명은 다음과 같다.  『이상렬(李相烈)씨는 제 친한 친구 이상숙의 오빠예요. 상숙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였고. 그러니까 가끔 만났죠.「탤런트」가 되기 전부터「오빠」라고 따르던 사인데 무슨 연예예요. 그런 감정은 추호도 느껴본 적이 없고 그분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집에서는 다 알아요』  요즈음은 서로 바빠서 얼굴을 본 지도 아주 까마득하다고 말한다.  다음 동료「탤런트」이(李)모군은 언니의 서라벌예대(지금의 중앙대) 동창생이란다. 김자옥(金慈玉)이「탤런트」가 되기 전부터 가끔 집에 놀러 왔기 때문에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되었고 방송국에 들어오자 아는 사람이 없어 자연히 이(李)군과 방송국 근처의 다방에서「코피」를 들고 얘기를 나눈 정도로 만났을 뿐이라는 것.  이에 대해서는 이(李)군도 같은 얘기다.  『방송국에서 선배로 또 오빠로서 대했을 뿐인데 연애라니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결국 두 사람은 다 남매처럼 대했다는 것으로 해명이 끝난 셈.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데이트」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만하다.  다음 소공동을 같이 거닐던 사람은 누구일까? 이에 대해 김자옥(金慈玉)은 형부의 친구라고 말한다.  『재일교포인데 형부와 아주 절친한 친구예요. 형부를 통해 알게 되어 같이「볼링」을 하러 가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김자옥(金慈玉)의 말을 빌면 그건「데이트」가 아니고 그저 한번 만난 것뿐 그 사람이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뒤에는 다시 못만났다고.  혹시 맞선을 본 것이 아니냐고 묻자 자신이나 집에서나 아직 시집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림도 없는 얘기라고 펄쩍 뛴다.  『25살 넘어서 결혼을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지금은「데이트」는 해도 결혼 상대를 찾고 있지는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이제야 연기가 무언인지 알아가는 햇병아리예요.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헛소문을 진실처럼 험구하진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이러다간 아빠와 외출을 해도「핸섬」한 중년 신사와「데이트」하더라고 소문이 나겠다며 웃는다.  연예계 신입생인 그녀가 뒷공론 때문에 신경을 쓰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인기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 눈치.  『「탤런트」생활을 생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저도 여자니까 때가 되면 시집을 가서 가정을 꾸미는 것이 자연스런 일 아니겠어요. 꼭 맘에 드는 작품 하나만 흡족하게 하고 미련없이 떠날 생각이에요』  꼭 맘에 든 작품의 배역이 언제 주어질 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주어지면 심혈을 기울여 조용히 연기자 생활을 마무리 짓겠단다.  『연기자는 건강해아 하는데 전 몸이 좀 약해요.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  지난 여름『한중록』을 마치고 집에서 빈혈로 쓰러진 것을 봐도 연기자로서 치러야 할 중노동을 이겨내기에는 몸이 약한 것 같단다.  단시간내에 인기의 정상에 오른 김자옥(金慈玉)은 시인이자 무용 평론가인 김(金)모씨의 2남5녀 중 세째 딸.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아동극을 시작했으니 연기 경험은 퍽 많은 셈이다.  배화여중 1년 때부터 배화여고 2년 때까지 TBC-TV에 아역 배우로 출연,『우리집 5남매』등 많은「프로」에 나갔다.  성인으로「탤런트」가 된 것은 여고 졸업 후, 70년 2월 MBC-TV 「탤런트」2기생으로 들어가면서···. 그러나 MBC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다가 그만두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브라운」관을 떠났었다. 그러다가 1년 뒤인 71년 11월 KBS-TV의『심청전』에「스카우트」되면서 본격적인「탤런트」로「데뷔」, 1년만에 정상급에 오르게 된 것이다.  붙임성이 있고 상냥해서 동료「탤런트」들간에 귀염둥이로 통하고 있는 김자옥(金慈玉). 이제 그녀도 사랑할 나이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오(五)> [선데이서울 73년 2월11일 제6권 5호 통권 제226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책꽂이]

    ●코메리칸의 뒤안길(손남우 지음, 그루 펴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방생’으로 등단한 작가의 연작 장편. 1부 ‘딱지를 위하여’는 외환위기로 고단한 나날이 연속되던 시기, 순간적 감정에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난 주인공이 불법 체류자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영주권을 얻어내는 과정을 그렸다. 2부 ‘코메리칸 25시’는 쉰 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외국 생활을 시작한 작가가 미국에서 느끼고 보고 겪은 이야기를 각색해 엮은 콩트집. 미국 댈라스에 거주하는 작가는 “삶의 희로애락을 심각하기보다 재미를 더해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9300원. ●프로이트 1, 2권(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 인류에게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심리학적 모욕을 한 프로이트. 인간을 정신의 주인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노예로 끌어내린 그의 인생을 분석했다. 각 권 3만원. ●10년 후 세상(중앙선데이 미래탐사팀 지음, 청림출판 펴냄) 과학기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 등으로 사회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하고 우리 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또 가치관과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전상인 한국미래학회 회장 등이 참여해 10년 후 우리 세상을 진단했다. 1만 6000원. ●키워드로 읽는 동아시아(최원식 등 지음, 이매진 펴냄)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각국을 연구하는 학자 37명이 안중근, 마오쩌둥 사상 등 다양한 분야의 73가지 키워드로 동아시아의 현실과 미래를 진단한다. 1만 2000원. ●영어 단어 기억의 비밀(김윤환 지음, 미르에듀 펴냄) KBS 1TV ‘과학카페’에서 다뤘던 ‘영어 단어 기억의 비밀’이 방송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 책으로 나왔다. 단어부터 지배하라, 어원으로 암기하라, 정보를 부호화하라, 기억력의 기술을 개발하라 등 뇌 과학과 심리학까지 동원해 영어 단어 암기의 핵심 비법을 제시한다. 1만 3800원 ●족보와 조선사회(권기석 지음, 태학사 펴냄) 족보를 통해 조선시대 계보의식의 변화와 사회관계망을 고찰한 연구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인 저자는 족보의 형성 과정과 초기 족보의 특징, 족보의 변화 발전 양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3만 5000원. ●알튀세르 효과(진태원 엮음, 그린비 펴냄) 프랑스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1919~90)의 사상을 연구한 논문 모음집. 알튀세르에게서 사사한 마류세 피에르 릴 3대학 명예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연구자 논문 10편이 실려 있다. 3만 8000원.
  • [김문이 만난사람] 전설의 팝 DJ, 45년 음악인생 김광한씨

    [김문이 만난사람] 전설의 팝 DJ, 45년 음악인생 김광한씨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좋은 단어를 꼽으라면 무엇일까. 우선 사랑이겠다. 그 다음은? 아마 추억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니 말이다. 사랑도 쌓인 추억만큼 오래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연말 분위기에 맞춰 추억의 여행을 한번 해 볼거나. 아이돌 문화가 판치는 요즘 세상에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7080문화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세시봉’도 그렇고 ‘7080콘서트’도 그렇다. 해는 저서 어두운데, 갈 곳이 딱히 없거들랑 1970~80년대 많은 인기를 끌었던 스타들의 모습과 추억의 장소를 가 보면 무척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 다름 아닌 서울 세종로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이다. 제목이 그럴듯하다. ‘여기는 대한민국 1970KHz’, 이쯤 되면 대충 감이 잡히겠다.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로 기억되는 시절, 힘들고 지친 삶 속에서도 낭만과 꿈이 있었던 1970년대의 추억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국내 최대 규모로 1960~80년대 근현대 생활 유물들을 재현하면서 대한민국을 만들었던 역동력과 고단했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한껏 추억의 여행을 맛보게 한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TV광고 영상과 ‘국민체조’ 노랫소리 등 옛 기억의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선데이서울’ ‘소년중앙’ 등 각종 잡지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시절 구멍가게에서 팔았던 과자, 음료수, 껌, 담배 등의 물품도 진열돼 있어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이런 것을 반추하며 전시실 끝 부분에 가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추억의 음악실’이 있다. 197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음악다방 DJ가 직접 당시 가요와 팝송을 틀어 주기에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옛날처럼 DJ가 신청곡을 받고 노래를 들려주던 그 모습 그대로 재현한다. 특히 매일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는 당시 유명했던 DJ 김광한, 박원웅, 최동욱 등이 직접 출연해 팬들과 만난다. 지난 5일 추억의 음악실에서 김광한(65)씨를 만났다. 1966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FM 전파를 내보낸 서울 FM방송에서 DJ로 처음 일을 시작했으니 45년 동안 팝송 전문 DJ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특히 방송 사상 ‘최연소 팝송 전문 DJ’라는 이름과 함께 이 방면에서 ‘전설’로 통한다. 그는 이런 수식어가 별로 반갑지 않은 듯 “그저 영원한 현역일 뿐”이라며 웃는다. 이런 그에게 요즘 무슨 일로 바쁜지부터 물었다. “인천 교통방송(밤 10시부터 12시까지)과 인터넷방송, 그리고 남양주 김준 재즈 클럽에서 음악 DJ와 감독 일을 하고 있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나면 제 사무실(뮤직코리아)에서 팝송을 연구합니다. 또 이곳(추억의 음악실)에서 DJ도 하고 있구요. 참, 또 있네요. 번역가 최경순씨의 매니저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최씨는 그의 부인이다. 얼마 전 모리쓰 준코의 ‘내가 나에게 돌아가는 여행’을 번역 출간할 때 출판기념회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 김씨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고 지금도 닭살 돋는 신혼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다며 웃었다. 어렵게 살아가는 젊은 학생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도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 중 하나다. 억의 음악실에서 팬들과 만나는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분들을 보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보다 더 반갑게 느껴집니다. 낭만과 감성을 버무린 관계라고나 할까요. 팝스타 레이프 가렛 내한 공연 때 만났던 팬들도 가끔 만납니다. 그 얘기를 하면 정말 반가워하지요. 요즘 추억의 음악실에서 레이프 가렛 음악을 신청하면 당시를 떠올리고 서로 추억을 얘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지요.” 레이프 가렛은 자신의 수호신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30년 전 내한 공연 때 TBC FM 89.1MHz ‘탑 튠 쇼’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이때 공연 소식을 매일 전하면서 구름처럼 팬들의 귀를 불러들였다. 이후 김광한은 최고의 스타 DJ로 인기를 끌었다. 1983년부터 85년까지 3회 연속 인기 1위를 차지했다. DJ 사상 처음으로 CF를 찍고 영화 출연까지 했다. 또한 1987년에는 ‘김광한의 쇼 비디오 쟈키’라는 TV 프로그램에도 고정 출연했다. 출연료 대부분은 미국과 일본 등에서 음반을 직접 사 오는 일에 쏟아부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돈을 벌면 음반을 사고 책을 사고, 각종 비디오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라디오 시절 DJ는 선망받는 직업이었습니다. 특히 팝송을 안다는 것은 지식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팝송 DJ는 당연히 매력적이었지요.” 제대 후 그는 9년 동안 병아리 장사, 하숙집 관리인,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보험 판매, 아크릴 간판업 등 16가지 일을 경험했다. 정규 직업을 갖지 않은 것도 음악 공부에 올인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벌면 꼭 음반을 사고 음악 공부를 하는 등 일에 몰두했다. 음악다방 DJ 일도 그런 차원이었다. “1970년대에는 주로 음악다방 DJ였습니다. 이때 제가 원하는 팝송을 소개할 수 있었지요. 방송에 대한 대리만족도 됐지요. 음악다방 DJ는 무명 가수처럼 훈련 기간인 셈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신문 배달 시절을 떠올렸다. 이때 어려운 학생들을 접하면서 나중에 일이 잘되면 이들을 위한 공연을 하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결국 1986년 서울 이태원에서 신대철, 임재범, 김종서 등이 무료 출연하는 자선 콘서트를 열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방송을 떠나 있을 때에도 DJ라는 꿈을 결코 버릴 수 없었지요. 결국 1980년 4월 1일 TBC FM 89.1MHz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게 됐습니다. 2년 뒤에는 KBS 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이라는 이름을 걸고 매일 오후 2시 방송하기 시작했지요. 당시 MBC FM에서는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방송에 복귀한 것은 1979년 DJ 박원웅씨가 음악 애호가를 초대하는 코너에 해박한 음악 지식을 갖고 있던 그를 작가로 기용하면서 인연이 됐다. 이듬해 김씨는 꿈에 그리던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맡았다. 이후 KBS와 MBC FM은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1980년대 팝음악의 절정기를 이끌게 된다. 음악 인생 45년 동안 음반은 어느 정도 모았을까 궁금해졌다. “한 1만여장 됩니다. 돈만 생기면 음반 사는 데 올인했지요. 팝의 본고장인 미국 등 여러 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직접 음반을 사 오고 했으니 현금으로 환산하면 아마 몇억원대 정도는 될 걸요(웃음). 마포에 있는 개인 사무실에 잘 보관해 놓고 있습니다.” 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어 그동안 모아 온 음반이나 각종 음악 자료들을 통해 데뷔 50년 되는 해에는 ‘여기는 대한민국 1970KHz’처럼 ‘사색하는 김광한의 음악대학’을 열어 팬들과 정겹게 만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김씨는 2년 전부터 결식 아동을 돕기 위해 ‘찾아가는 김광한의 음악대학’을 열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악기에 대해 잘 모릅니다. K팝도 음악 소리가 아닌 율동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무엇으로 음악 소리를 내는지 알 수가 없지요. 저는 이들에게 영상을 통해 기타의 소리, 드럼의 소리 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음악인으로 성공했다고 말한 뒤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느 대학 인기학과에 가라는 식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뭘 하고 싶은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도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음악을 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거듭 역설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젊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별명이 17살 아저씨입니다. 젊게 생각하면 행동이 젊어지고 습관이 젊어집니다. 그러면 젊은 운명을 살게 되지요(웃음). 저는 40년 전 옷 스타일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진바지에 부츠, 헤어스타일, 잠바 등이 그러하지요. 유일한 스트레스는 부인과 싸울 때밖에 없습니다. 돈이야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고 하면 되는 것이구요.” 편집위원 km@seoul.co.kr ■김광한은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6년 서라벌예술대를 졸업했다. 그해 1월 우리나라 최초로 FM 전파를 내보낸 서울FM에서 최연소 팝송 전문 라디오 DJ가 됐다. 대학 시절부터 해박한 팝송 지식을 갖고 있던 것이 인연이 됐다. 1967년 군에 입대한 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후 9년 동안 병아리 장사,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 궂은일을 하면서도 음악다방 DJ 등을 하며 음악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다 1980년 TBC FM에서 다시 라디오 DJ로 복귀했다. 이듬해에는 KBS 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진행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인기 몰이를 시작했다. 이어 1999년 KBS 2FM ‘김광한의 추억의 골든팝스’, 2004년 경인방송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등의 진행을 맡았다. 현재는 인천 교통방송과 김준 재즈 클럽 등에서 DJ 일을 하며 여전히 팝송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내년 2월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계속되는 ‘여기는 대한민국 1970KHz, 추억의 음악실’ DJ를 맡고 있다.
  • 딸자랑=新東상사 사장 신동건씨 막내딸 영숙양

    딸자랑=新東상사 사장 신동건씨 막내딸 영숙양

     신동(新東)상사 신동건(辛東建) 사장 막내딸  『조금이나마 틈이 있을 때 이것저것을 알아두면 값진 재산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가 발달해 가는 만큼 여자의 역할이 크고 다양하게 돼 간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그래서 졸업후 1년 동안 꽃꽂이와 양재 서예를 열심히 익히고 작년 9월에는 자동차 운전면허까지 받은 신영숙(辛英淑·22)양이다.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기악과를 72년 봄에 나온「피아니스트」.  『꽃꽂이와 서예는 어머님의 권고로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어머니는 꽃꽂이 사범 자격증을 따신 지가 꽤 오래 되시거든요』  품격있게 정돈된 응접실 벽에는 명필이라고 주위에서 소문난 어머니 이순희(李順禧·54) 여사의 서예 작품 몇점이 장식돼 있다. 『새벽에 일어나 차분한 가운데 글씨를 쓰고 나면 하루종일 마음이 가벼워져요』  아버지 신동건(辛東建·59·신동상사 사장)씨는 지방출장 중이라서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다.  맏오빠 상길(常吉)씨가 서독에서 정유(精油)학 박사「코스」를 밟고 있고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둘째 영길(英吉)씨가 KIST에 근무 중.  군복무를 마친 막내 오빠 학길(鶴吉)씨는 한양대 공대 공업경영학과에 복학해 다니고 있다.  이대(梨大) 출신의 큰 언니 영자(英子)씨는 서울고등법원 이순우(李淳雨) 판사의 부인.  『젊은이들에게 공연히 참견한다는 인상을 줘서 소외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나이 든 후에는 취미를 갖는 편이 나을 듯싶었어요』  영숙(英淑)양이 특히 감심(感心)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면학열(勉學熱).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 아버지가 큰 오빠가 독일로 간 뒤부터 독일어를 혼자 공부하셔서 지금은 퍽 잘하시는 편이에요』  무대에서는 화려한 꿈을 실현하기보다는 결혼 후 착실히 전공을 살려가고 싶다는 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영숙(英淑)양이다.  『대학 졸업 후에야 음악이 무언가를 알게 되면서 현실적인 결심이 선 거예요』  똑똑하면서도 한치 빈틈없이 사교적인 영숙(英淑)양이 바라는 배필의 조건은『살아가는 데 희망과 신념을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  『서로 협조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으면 족하다고 봐요』  상대방의 현재 직업이 무엇인가를 중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신(辛) 사장이나 이(李) 여사는 막내 딸의 장래가 탄탄하고 안심스럽게 보장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법관,「엔지니어」, 의사 같은 안정된 직업을 원하지만···.  음대(音大) 재학 때는 사진반 부장으로「카메라」를 부지런히 만졌고 운동에도 열의를 보이는 다양한 취미의 소유자다. <원(媛)>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금융위기도 예측 가능?…1조5천억짜리 슈퍼컴퓨터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소원이자 꿈이다. 그런데 이런 꿈 같은 얘기가 앞으로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현재 유럽연합(EU)과 각종 연구기관이 협력해 미래의 다양한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개발에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4일(현지시각) 영국 선데이 타임스 등 주요외신 보도에 따르면 EU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라온 정보부터 정부의 통계 자료까지 온갖 정보를 활용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10억유로(약 1조 5,000억원)를 투입할 예정이다. 이 슈퍼컴퓨터는 총칭 ‘리빙 어스 시뮬레이터’(이하 LES)로 불리는데, 지난해 중순 미국 코넬대학의 온라인 저널을 통해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더크 헬빙 박사가 “10억유로만 있으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발표한 논문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LES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더크 헬빙 교수에 따르면 이 컴퓨터를 활용하면 돼지 독감 등의 전염병 확산 예측은 물론 기후 변화의 해결책을 마련하고 향후 일어날 수 있는 금융 위기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이 같은 소식이 현실화된다면 이 슈퍼컴퓨터의 등장으로 전세계의 모습이 크게 변화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유럽 전문가인 영국 런던정경대(LSE)의 이안 베그 교수는 “세계의 복잡성은, 단순히 헤아릴 수 없다.”면서 “우리는 2~3일 이상의 날씨 변화조차 쉽게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그는 “사회와 인간의 행동이란 그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흐름은 복잡하고, 시간과 함께 변화해 나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영국 런던대학교의 스티븐 비숍 교수는 “현재의 은행 시스템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처럼 복잡성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면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경제 위기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중국 GDP 상승은 ‘얼나이’ 때문?

    중국에서는 첩이나 둘째부인을 뜻하는 ‘얼나이’의 존재가 GDP(국내총생산)를 끌어올리는 요인 중 하나라고 일본 뉴스포스트세븐이 1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중국의 성문화에 대한 책을 집필한 저자의 말을 인용, 중국 내 얼나이 문화의 실태에 대해 전했다. 저자의 말을 따르면 중국에서 얼나이를 한 명 두려면 우선 고급 아파트와 고급 차를 사줄 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 수시로 고급 화장품, 명품 의류 등을 선물해야 하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가끔은 해외여행에도 데려가야 한다. 이에 대해 이 매체는 “현재 중국 부동산시장의 가격 상승이 얼나이가 불러온 효과인 것은 틀림없다.”면서 “이들은 중국의 자동차시장 확대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얼나이가 선호하는 자동차를 ‘얼나이 차’라고 부르는데, 중국 내에서 폭스바겐 비틀, 현대 제네시스 쿠페, 혼다 어코드가 베스트 3 내에 든다고 저자는 말했다. 또 화장품 시장의 규모도 1987년에는 불과 18억엔(한화 약 260억원)이었지만 현재 900억엔(1조 3000억원)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매체는 “얼나이 1명이 소비하는 금액은 일반 중국인 여성 50명에 해당한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 연안 대도시에서는 전체 인구의 5%가 얼나이이며, 그녀들의 소비액은 그 도시의 총 소비액의 20%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중국 내에서 돌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중국의 일부 시장이 얼나이가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주장은 이 매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영국 선데이 타임스 역시 “중국의 명품시장은 얼나이에 돈을 쏟는 부유층 남성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는 세계금융그룹 HSBC의 한 경제전문가가 제시한 분석 결과를 보도한 바 있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기획]최고경영자=⑤신진(新進)「그룹」 김창원(金昌源)씨

    [기획]최고경영자=⑤신진(新進)「그룹」 김창원(金昌源)씨

     총알처럼 날아오는 탁구공을 빠른 속도로 반격하는 자세와 정신으로 일해 왔다.「코로나」에서「시보레」1700으로 제품을 바꾼 신진(新進)「그룹」의 김창원(金昌源·56) 사장은『탁구 선수의 정확성과 기민성 그리고 예리한 판단력이야말로 기업인이 지녀야 할 필수요건』이라고 했다. 72년 6월 일본(日本)측과의 제휴를 끊고 미국(美國)「제너럴·모터즈」와 합작 투자로「지엠·코리어」를 새로 설립한 김(金)사장은 언제나 탁구선수처럼 부산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충남(忠南) 공주(公州)가 고향인 김(金)사장은 어린 시절을 어두운 공장 속에서 탁한 공기와 요란한 기계의 소음과 함께 보냈다.  『누구나 다 겪어본 고생이지요. 인간의 성장 과정에는 반드시 역경이라고 하는 비료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본금 2백억원의 대 회사「지엠·코리어」를 비롯 신진(新進)자동차공업, 신진(新進)자동차판매, 한국기계, 대원(大元)강철,「코리어·스파이서」(前 現代기아), 하동환(河東煥)자동차, 한국「카이저·알루미늄」, 신원개발, 신진(新進)학원, 경향신문 등 방대한 기업을 총괄하고 있는 최고경영자 김창원(金昌源)씨에게도 역경과 슬픔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홀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화가산현(和歌山縣)에 있는 현립상업학교를 나올 때까지, 그리고 6·25때 사업체를 버리고 대전(大田)에서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김(金)사장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을 몇번이고 겪어야 했다.  『왜놈들에게 조금이라도 지기 싫어서 유도, 탁구, 축구 등 운동이란 운동은 다했지요』  지금도 유단자의 유도 실력과 도(道)「챔피언」의 탁구 실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김(金)사장은 학생 시절의 역경을 뚫는 방법으로 운동을 택했었다고 한다.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테크닉」으로 맞설때 아무리 오만불손하던 강자도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더라는 그의 생활 철학이 최고경영자의 오늘을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부산(釜山) 피난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실의와 불안 속에서 허덕일때 나는 일했읍(습)니다』  미군(美軍)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동차 부품(폐품)들을 정성스레 수집해서 다시 조립해 놓으면 훌륭한 승용차가 될 수 있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미군(美軍)의 군수품은 풍부했고 그들이 쓰다 버리는 폐품들은 말이 폐품이지 얼마든지 재생해 쓸 수 있는 값있는 물품이었다.  그것을 다시 손질해 만들어 낸 승용차가「신진호」.  전쟁 직후까지 서울과 부산(釜山)일대에서 한동안 많이 눈에 띄던「새나라」차 모양의 납작한「택시」가 바로 김(金)사장이 만들어낸「신진호」그것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자동차. 나는 그것을 직접 내 손으로 만들고 내 손으로 운전하면서 어떻게 하면 보다 안전하게, 보다 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달릴 수 있을까 연구하고 또 연구했읍(습)니다 』  자동차 공업의 선구자 김(金)사장은 누구보다도 자동차를 잘 알고 자동차와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55년 2월 신진(新進)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도 김(金)사장은 꾸준히 자동차와 함께 살았으며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더운 공장 속에서 탁한 공기를 마시고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흥겨운 음악으로 듣곤 했다.  그래서 부실 운영으로 새나라 자동차가 문을 닫고 새주인을 맞아들일 때 관계 당국에서 선뜻 김(金)사장을 지목했던 것이다.  당시 새나라 자동차의 관리권을 맡고 있던 한일(韓一)은행에서는 많은 희망자를 모두 물리치고 자동차 공업에 경험이 많고 절대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는 김(金)사장에게 관리권을 넘겼었다.  『사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읍(습)니다. 자금과 시설이 불충분한 데다가 세상에서들 말을 오죽 해야지요』  특혜다 뭐다 말들이 많은 가운데 그는 의욕과 경험만을 믿고「새나라」를 인수했다고 한다.  『아마 내 평생에 그때만큼 밤잠을 못 자고 일해 보기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65년 겨울부터 66년초까지의 일이었다.  일본(日本)「도요다」자동차와의 제휴 조건도 처음 얘기와는 달리 자꾸 바뀌고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는 일도 뜻과 같지 않았다.  하루에 잠자는 시간은 단 2시간 뿐.  일에 쫓겨 시간도 없거니와 잠을 자려고 아무리 애써도 머릿 속에는 수없는 자동차가 오락가락할뿐 잠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내 생애에서 세번째로 겪은 역경이었던 셈이지요. 결국 그 역경을 뜷고 나오는 동안 나라고 하는 하나의 인간이 그리고 한국의 자동차공업이 성장을 하게 된 겁니다』  그 뒤 한달 동안 3천대를 돌파하고「코로나」가 완전히 국내 시장을 석권했을 때도 김(金)사장은 흡족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韓)·일(日)간의 미묘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쟁 의식, 그리고 자기가 생산해 내는 자동차가 완전 국산이 아니라는 불만과 초조 그런 것이 지금까지도 김(金) 사장의 잠자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신진(新進)제품 자동차 국산화율은 승용차가 32.8%,「버스」가 77.4%,「트럭」이 23.37%- 중요 부품은 모두 일제(日製)로 돼 있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 국산화는 못하고 있읍(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초조하고 마음이 아프다니까요』  그러나 완전 국산화의 날은 멀지 않았다고 김(金)사장은 장담하고 있다.  『물줄기는 높은 데서 얕은 데로 흐르기 마련인듯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 사회의 흐름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흐르게 된다고 나는 믿고 있읍(습)니다』  후진국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잡힌 기회는 유효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부터 일본(日本)은 별안간 중공(中共)에 근접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으로 흐르던 일본(日本) 경제의 흐름은 그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사람들을 조금도 나쁘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우리를 쳐다보지 않고 외면만 한다면 우리도 또한 새로운 물줄기를 우리 쪽으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일본(日本)과의 제휴를 끊고 세계적인 자동차「메이커」인 미국(美國)의「제너럴·모터즈」와 합작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자본금은 50%씩 4천8백만불.  그러나 자본금을 반밖에 안 냈다 해서 회사 운영의 방침이나 제도를 미국(美國)측에 양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한국이 주체고 김창원(金昌源)씨의 운영 방침이 우선합니다』 8천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신진(新進)「그룹」으로서는 성실하고 근면한 종업원이 주인라는 얘기다. 『미국이나「유럽」같은 선진국에서는 공장 직공들이 1주일에 몇시간씩이나 일하는 지 아세요. 겨우 32시간만 일하면 그들은 그만이에요. 그 이상은 더하려고 하지도 않고 또 시키려고 생각지도 않아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보십시오.1주일에 70시간 이상씩 일을 합니다. 나도 그들과 같이 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회사의 주도권을 쥔다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날품팔이 노동자들로부터 대 회사 사장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는 것이 김(金)사장의 주장이다.  『경영철학이요? 나는 그런 어려운 얘기는 모릅니다. 다만 정확한 판단에 의해 계획이 수립되면 지체없이 집행하라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정확한 판단·민첩한 행동, 그것은 역시 경기에 임한 탁구선수의 자세를 그대로 본받으라는 말인 것 같았다. 이(李)에리사 양의 세계 제패도 어쩌면 대한탁구협회 회장이기도 한 김(金)사장의 그런 정신과 자세를 본 받은 결과인지 모르겠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그 젊음에 찬 패기와 과단성이 있는 결단력, 그게 무척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자동차와 일반기계 부품공장인 현대(現代)「기아」를「코리어·스파이서」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미국의「데이나」회사와 제휴하면서 자주 미국에 가보고 다시금 미국의 힘을 재인식했다는 것이다.  「데이나」라고 하면 미국에서도 손꼽는 재벌급 회사다.  그「데이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30대의 젊은이들뿐이라는 점에서 놀랐고, 30대의 젊은이들이 해내는 일이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물론 풍부한 자원과 우수한 시설 이런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까 이루어지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원과 시설을 이용하는 인간의 자세와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장래를 낙관한다고 했다.  신진(新進)「그룹」의 장래도 몹시 희망적이라고 했다.  약동하는 젊은이들의 의욕적인 활동이 눈부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탁구공은 쉴새없이 날아옵니다. 잠시도 제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지요.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여야지, 민첩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입니다』  아직 결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신진(新進)「그룹」의 총수.  『자동차공업 육성만이 내 의무요 목적』이라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그가 반했다는 미국(美國)의 젊은 패기와 과단성 있는 결단력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의재(李義宰) 기자>   ◇김창원(金昌源)씨 약력◇  ▲1917년 8월 충남(忠南) 공주(公州)에서 출생  ▲1953년 일본 화가산현입(和歌山縣立) 상업학교 졸업  ▲1955년 신진공업 대표이사  ▲1966년 신진(新進)자동차공업 대표이사  ▲1969년 대한탁구협회 회장  ▲ “ 한국기계공업 대표이사  ▲ “ 주한「튜니지아」 명예영사  ▲1971년 경향신문사 회장  ▲1972년「제너럴·모터즈·코리어」대표이사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이젠 악기도 다루네…2012 ‘뮤지션 고양이’ 달력 화제

    이젠 악기도 다루네…2012 ‘뮤지션 고양이’ 달력 화제

    달력을 통해 모델 뺨치는 패션감각을 뽐내거나 고난도의 요가 동작을 소화하던 고양이들이 이젠 다양한 악기를 들고나서 화제다. 27일 영국 선데이 익스프레스 등 외신에 따르면 음악 하는 고양이들을 모델로 한 2012년 달력이 나와 고양이 애호가들에게 완벽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기가 높다. 달력에 공개된 사진을 보면 두 고양이가 전자기타를 매고 합주를 하는 모습, 한 고양이가 악보를 보이고 다른 고양이가 이를 보며 클라리넷을 부는 모습, 또 남성스러운 수고양이가 섹시하게 색소폰을 불고 있는 모습 등 여느 음악가들처럼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끈다. 물론 이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은 모델로 나선 고양이들과 컴퓨터 작업을 통해 완성됐다. 이번 고양이 달력 제작은 영국 ‘매버릭 아츠’의 스티브 빅넬이 담당했다. 그는 이번 달력을 위해 친구의 고양이들을 섭외했다고 한다. 그는 “고양이들과 촬영하면서 아주 많은 경험을 했으며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전했다. 한편 매버릭 아츠는 영국 웨스트서식스 풀보로우에 있으며 이번 달력은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9.99파운드(약 18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사진=숍위드매버릭닷컴(shopwithmaverick.com)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무려 1800억원’ 초호화 요트 주인은 前미스영국

    무려 1억 파운드(한화 1800억원)에 이르는 슈퍼 요트가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슈퍼 요트의 주인은 영국에서 가장 돈많은 여성의 것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요트의 주인은 전 미스영국 출신인 커스티 버타렐리(39). 버타렐리는 영국 선데이타임스(Sunday Times)가 지난 5월 발표한 영국의 억만장자 순위에서 총 자산 9억 2000만 파운드(한화 1조 6258억원)로 여성 1위를 차지했다. 이 슈퍼 요트의 제원은 말그대로 ‘슈퍼’다. 무려 96m 길이에 헬기장도 갖추고 있으며 최고급 침실도 마련돼 있다. 이 요트는 데번포트 조선소에게 200명의 장인들이 만들었으며 내년 2월 커스티에게 인도될 예정이다. 그녀의 이같은 초호화 요트 주문은 남편 에르네스토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47m의 요트를 소유한 에르네스토는 과거 2차례나 팀을 이끌고 아메리카 컵 요트대회를 우승한 전력을 갖고 있다.   2000년 커스티와 결혼한 에르네스토는 스위스 생명공학업체 세로노의 CEO. 둘의 재산을 합치면 68억 7000만 파운드(12조 1410억원)로 영국인 억만장자 순위에서 5위권에 해당되는 정말 돈많은 부부다. 한편 세계적인 그릇제조업체 ‘처칠 차이나’(Churchill China) 창업주의 딸인 버타렐리는 세계적인 억만장자들과는 다른 이색적인 경력을 자랑해 주목을 받았다. 1988년 17세 나이로 세계 미인대회 ‘미스월드’에 출전해 3위에 입상한 버타렐리는 재력과 미모를 갖춘 여성으로 공인을 받았다. 이후 편안한 삶에 만족하지 않고 작곡가로 변신해 ‘올 세인츠’(All Saints)란 밴드의 ‘블랙커피’(Black Coffee) 등을 내놔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알몸 구걸 中 11세 소녀 인터넷 논란

    중국에서 안데르센동화인 ‘성냥팔이소녀’보다 가혹한 삶을 살고 있는 11살짜리 소녀가 인터넷상에 공개돼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19일 일본 인터넷 매체 ‘초간선데이’에 따르면 중국의 한 번화가 노상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어린 소녀가 눈앞에 종이 상자를 두고 엎드려 절을 하면서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다. 하지만 행인들은 그 소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흥미롭게 바라보고 지나가기만 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사진 속 소녀가 옷을 살 돈이 없는지 아니면 구걸하기 위한 쇼인지 알 수 없지만 빈부 격차가 심한 중국만의 현상이라고 이 매체는 전했다. 이에 중국의 네티즌들도 “중국 사회의 실패”, “이것이 중국의 현황”, “소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답하는 등 사회에 대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5)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5)

     ①황성(荒城)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폐허에 쓰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②성(城)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芳草)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루고,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1925년 초가을, 황해도 연안(延安)의 한 여인숙에는 비에 갇힌 순회 가극단이 묵고 있었다.  이른바 을축(乙丑)년 장마 때.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이들은 한달동안 공연을 못한채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취성좌(聚星座) 가요부의 20여명 단원들이었다. 그 속에는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가수 겸 배우 이애리수(愛利秀)가 있었다.  전수린(全壽麟)은 창밖에 내리는 궂은 비를 바라 보다가 문득 얼마 전 개성(開城)에서 본 황량한 성터를 생각했다, 만월대(滿月臺)에 한길 넘게 우거진 잡초, 발 끝에 부딪치던 기왓장 조각, 주춧돌만 남아 있는 궁터-. 그는「바이얼린」을 꺼내어 떠오르는 악상을 정리했다. 순회극단, 또는 유랑극단이라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기면서「집시」같은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 더구나 한달씩 돈벌이를 못하고 갇혀 있는 처지에서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경은 그 가극단의 책임자 왕평(王平)도 마찬가지 였다. 전(全)씨가「바이얼린」으로 악상을 정리하여 5선지에 옮겨놓자 왕(王)씨는 흥얼거리면서 가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황성(荒城)옛터』다. 가사,「멜러디」가 처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취성좌(聚星座)에서 공연을 할 때 청순한 미인 가수 이(李)애리수의 목소리로 불려졌다. 너무 슬프게 불렀던지 공연장인 단성사(團成社)는 눈물바다가 됐다. 너무 슬픈 노래라 하여 작곡·작사자는 고등계 형사한데 붙들려가 취조를 받아야 했다.  한 때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지만 전수린(全壽麟)은 이 한곡으로 충분히 유명해 졌다. 그 때 전(全)씨 나이 18살.  개성(開城) 태생인 전(全)씨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홍난파(洪蘭坡)씨가 조직한 연락회(硏樂會)에 들어갔다. 그것이 연예계 입문이지만 음악 공부는 이전부터 했다. 당시 개성에는 중앙회관과 고려여자회관이 있었는데 여기에「예뱃소년합창단」이 있어서 전(全)씨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접할 수 있었다. 호수돈(好壽敦) 여학교 초대 교장이던「루즈」부인에게「바이얼린」을 사사, 15살 때는 이미 습작곡을 내놓을만큼 천재적인 재질을 보였다.  이(李)애리수는 13살 때 취성좌(聚星座)의 아역 배우로 취성좌(聚星座) 대표 김소랑(金小浪)씨에 의해 발탁되었다.  전수린(全壽麟)씨와 같은 개성 태생으로 전(全)씨보다 3살 아래. 지금 66살인 전(全)씨는 48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李) 애리수의 목소리는 지금 이미자(李美子)와 흡사했다. 곱고 호흡이 퍽 좋았다. 그 위에 굉장한 미인이고 똑똑했다. 노래도 타고 난 예능인이었다.』  『황성(荒城)옛터』의「히트」가 이(李)애리수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빅타·레코드」사는 전(全)씨를 초청해서 전속 계약을 맺고 이(李) 애리수에게 전(全)씨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때 전(全)씨가 만든 일본말 노래가『와다나쓰께(仇情=미운 정)』. 이(李)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일본 안에서도「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한국조의 유행가가 등장하기도 했다.「사사기슝이찌」의『시마노 무스메』(섬처녀)는 바로 전(全)씨의『와다나쓰께』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고『나미다노 와다리도리』(눈물 젖은 새)는 신(申) 카나리아가 부른『삼천리(三千里) 강산』을 본딴 것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전(全)씨는 그 후 7년간 일본「빅타」의 정사원으로 일했고 이(李)애리수는 한국 일본 양국에서 똑같이 인기있는 가수가 됐다. 그럴 즈음 이 대망의 여가수를 은퇴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경우처럼 연예·정사사건이다.  일본서 돌아온 이(李)애리수에게 사랑의 불길을 지른 사람은 그때 연희(延禧)전문을 다니던 배동필(裵東弼)이란 청년. 돈도 가문도 당당한 부호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을 맹세했고 이(李)애리수는 아예 노래도 연극도 집어치우고 배(裵)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배(裵)씨 집에서『광대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완고하게 이를 거부하자 단성사 뒤의 한 여관방에서 정사(情死)를 기도, 팔 동맥을 끊었으나 여관 주인의 발견으로 이들은 다행히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 때 연예계의 지도층 인사였던 이기세(李基世)씨가 이 사실을 알고 배(裵)씨의 부모한데 달려가 담판을 지어 결국 고집 센 노인들의 결혼 허가를 받아냈다. 결혼 허가를 받은 이(李)애리수는 곧바로 은퇴해 버렸다.  20살 안팎에 최고의 인기 작곡가가 된 전수린(全壽麟)씨는 멋장이(멋쟁이)로도 소문났었다.그는 국내에 처음으로「아코디언」을 들여와 방송국에 출연했다. 서울에「라디오」방송국(京城방송국) 이 개국된 게 1926년. 국내서 처음인 신기한 악기「아코디언」을 방송국 직원들이 보고 하도 독촉하는 바람에 전(全)씨는 채 연습도 하지 못한채「아코디언」을 메고 출연했다가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 <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기획]최고경영자=④고려(高麗)「그룹」이학수(李學洙)씨

    [기획]최고경영자=④고려(高麗)「그룹」이학수(李學洙)씨

     창업 10년만에 국내 제1은 물론 오대양(五大洋)에 태극기를 날리며 세계 수산업계의 상위「그룹」에「랭크」된 고려(高麗)원양어업주식회사. 72년도 수출 실적 1천8백만불(한화 72억원)을 기록한 고려(高麗)원양은 고려(高麗)식품·범한이료(汎韓餌料)·고려(高麗)서적·광명(光明)인쇄·광명(光明)출판사 등 방계 회사만도 6개 업체. 이 엄청난 대형 기업의 창설자로서 지금까지 총수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이학수(李學洙·57)씨는『그러나 아직 내 기업은 바다 위의 한 조각 나뭇잎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다 위의 한 조각 나뭇잎』  그것은 이(李)씨의 겸손한 표현만이 아니라 미국(美國),일본(日本),「캐나다」등 세계 열강들이 할거하는 국제 수산무대에서 한국 원양어업이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솔직이 말해서 지금 원양어업을 시작하라고 한다면 감히 엄두도 못냈을 겁니다』  자본·기술·시장 이 3가지 요건 가운데 어느 한가지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멋 모르고 시작한 것이 고려(高麗)원양이며 지금도 국제적인 수준에서 볼때 한국의 원양어업은 걸음마 단계를 겨우 벗어난 상태라는 얘기다.  그런 상태에서 유독 고려(高麗)원양만이 세계 상위「그룹」에 끼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이학수(李學洙) 사장이 지닌 최고경영자로서의 역량과 경륜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63년 4월 자본금 5백만원으로 서울 서대문구(현재 중구) 만리동 1가67에 고려(高麗)원양어업주식회사 간판을 달았을 때 세상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이(李)씨의 행동을 바라봤었다. 이학수(李學洙)라는 이름은 수산업계에서보다 인쇄업계에서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인쇄인 이학수(李學洙)는 5·16혁명을 계기로 광명(光明)인쇄소와 함께 한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생명을 내걸고 이루어졌던 혁명 과정에서 그는 혁명공약(革命公約)을 비롯한 유인물의 인쇄를 책임 맡았었다.  『나는 결코 그 일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다만 주어진 심부름을 실수없이 했을뿐이며 심부름은 심부름만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공로라면 큰 공로일 수도 있는 일을 이(李)씨는 가볍게 흘러버렸다.  사실 이(李)씨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높은 공직에 나설 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럴만한 기회도 있었고 권유도 있었지만 이(李)씨는 자기 자신을『그럴만한 인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그 길을 사양했다고 한다.  『사회질서가 확립되고 산업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사업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지요』  고향이 함북(咸北) 명천(明川)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서 일하는 것이 소원이었으며 사업가의 기반을 굳힌 뒤에도 바다는 쉴새없이 그를 유혹했다고 한다.  『바다는 넓습니다. 또 깊습니다. 우리는 아직 바닷속에 잠긴 잠재 어획량의 40%밖에 잡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립한 것이 고려(高麗)원양이다.  『인쇄장이가 고기잡이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한 것 같기는 했지만 맨 주먹으로 월남해서 인쇄소를 경영하던 그 정열과 열의로 일하면 못할 게 뭐냐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나 회사를 설립하고 난 뒤 2년 동안 이(李)씨는 자신의 무모한 사업 확장을 몇번이나 후회했다.  그때만 해도 황무지와 다름없던 원양어업을 배 한척 없이 시작했으니 이(李)씨의 말처럼『무지와 만용이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65년 12월 자본금을 5천만원으로 증자하고 230t급 참치어선 광명(光明) 1호를 건조해 냈을 때 이(李)씨는『비로소 칼을 잡은 장수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어 66년 4월 광명(光明) 11호를 건조, 모두 10척의 참치어선을 확보하고 남태평양과 인도양에 출어를 했을 때 이(李)씨는『드디어 갑옷 투구를 갖추고 기치창검을 번쩍이며 말을 달려 적진으로 달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李)씨는『옳게 일하고 옳게 살자』는 자신의 경영철학에 따라 거칠기 파도같은 뱃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그 때부터 이 기업을 치부의 목적으로 경영하지 않고 하나의 국가 기관에 파견된 관리인의 입장에서 경영했던 것이지요』  수일만에 원양어업에서 돌아온 뱃사람들에게는 따뜻한 가정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주었고, 흉사를 만난 뱃사람에게는 직접 찾아 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같이 슬퍼해 주기도 했다.  『날더러 인색하다는 사람들도 있지요. 압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말이에요.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만은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어요 』  옳게 일하기 위해서는 가끔 인색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인색」은 1백원어치를 일한 사람에게 80원만 주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인색」이 아니고, 백원어치를 일한 사람이 마치 5백원어치쯤 일한 것처럼 분에 넘친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저지하는「인색」이라는 풀이다.  「사모아」어업기지 설치에 이어 69년 1월「사오·빈센트·타마타브」기지 설치를 계기로 1천t급 냉동운반선 제1 칠보산(七寶山)호를 바다에 내보냄으로써 고려(高麗)원양은 국제적인 수산업체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출어장만 하더라도 남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북태평양으로, 다시 대서양으로 그 활동 범위는 넓어져, 세계 구석구석 바다 있는 곳이면 어디나 고려(高麗)원양의 각종 어선이 모습을 나타내게 됐다.  지금은 국내 최대의 3천5백t급「스탄·트롤」어선(저인망 어선)을 비롯 모두 53척의 어선과 냉동운반선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금은 최초의 5백만원에서 6천배가 더 는 3백억원 규모로 크게 확장됐다.  『사실 우리나라의 입지 조건이나 산업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사업입니다. 그러나 그 전망은 결코 무지개처럼 화려하지는 못합니다』  이(李)씨는 원양어업은 곧 국력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들도 다투어 1백「마일」의 영해 선언을 하고 있으며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이미 2백「마일」의 영해 선언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우수한 장비와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제는 국가와 국가간의 협정이나 양해 없이는 단 한마리의 참치나 연어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어업국인 일본(日本)만 하더라도 정부에서「어업진흥단」을 만들어 후진국에 가서 어업 기술을 가르쳐 주고 그 댓가(대가)로 어획물을 받아오는 방법을 쓰고 있다,  국제적인 어업 분규 때문에 그 전처럼 아무 곳에서는 함부로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결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제 우리 나라의 원양어업도 벽에 부딪쳤다는 얘기지요』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수산인으로서의 이(李)씨의 꿈과 포부는 창업 당시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듯, 올해에는 22척의 어선을 건조해서 그 가운데 12척은「파나마」로 수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부산(釜山)에 이미 건립해 놓은 외자 60만불, 내자 7억원 규모의 종합식품「센터」를 활발히 운영하여 국민의 식생활 개선과 체력 증진에 기여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현재 고려(高麗)원양 산하에서 종사하는 직원 및 기술자만도 3천여명, 고려(高麗)서적과 광명(光明)인쇄 쪽에도 1천2백여명 모두 4천2백여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최고경영자 이(李)씨는『이것은 이미 나 개인의 기업이나 재산이 아니고 우리 고려(高麗) 가족 전원의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재산』이라고 좌우명처럼 되뇌고 있었다.  일본(日本)의「미끼·요노스께」(三鬼陽之助)가 쓴「경영자 오십계(經營者 五十戒)」를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이(李)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어떤 위정자가 이렇게 말했지요. 자기 자손을 위해 미전(美田·좋은 땅)을 사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말이지요』  빈 주먹으로 자수성가한 이(李)씨로서는 슬하에 있는 1남4녀의 자녀들에게도 자립과 근면의 정신을 키워주기 위해 결코 재산을 물려주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지금도 적수공권으로 일하던 그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이(李)씨는『남들처럼「골프」도 칠 줄 모르고, 여행을 즐길만한 여유도 없읍(습)니다』  이렇다 할 취미도 없고 남달리 즐기는 오락도 없다는 것이다.「골프」장에는 1년에 겨우 한두번 나가기는 하지만 외교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나갈 뿐이며 외국여행도 자주 하지만 단 한번도 환락에 젖어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에 대한 감각이 둔해서가 아니고 아직은 그럴만한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요』  「옳게 산다」는 것이 결국 자기 분수를 지키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입지전적인 이(李)씨의 자세는 그대로 고려(高麗)「그룹」의 표상이었다.  <이의재(李義宰) 기자>   이학수(李學洙)씨 약력  ▲33년=만주(滿洲) 용정 광명(光明)중학교 졸업  ▲39년=만주(滿洲) 척식공사 근무  ▲51년=부산(釜山) 관북인쇄소 경영  ▲53년=광명(光明) 인쇄공사 경영(현재)  ▲61년=고려(高麗)서적 사장(현재)  ▲63년=고려(高麗)원양 사장(현재)  ▲66년=재단법인 5.16 민족상 이사  ▲72년=고려(高麗)식품 회장 [선데이서울 73년 1월28일 제6권 4호 통권 제224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LTE 전국網 내년4월 조기구축”… SKT의 승부수

    “LTE 전국網 내년4월 조기구축”… SKT의 승부수

    ‘1페타(Peta·1000조 바이트) 바이트 시대를 준비하라.’ SK텔레콤이 당초 계획보다 8개월 앞당긴 내년 4월 전국 4세대(4G) ‘롱텀에볼루션’(LTE)망을 조기 구축하기로 했다. SKT는 자사 무선데이터 트래픽이 내년 0.64페타바이트(PB), 2013년에는 1.31PB를 돌파하는, 하루 1페타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고 LTE망에 ‘페타’ 기술을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1PB는 MP3 파일로는 2.7억개에 버금가며, 고화질 DVD를 767년 동안 볼 수 있는 데이터 양이다. SKT는 15일 서울 중구 을지로 SKT타워에서 당초 2013년 구축하기로 했던 LTE 전국망을 내년 4월로 앞당기고 영화·네트워크 게임 등을 지원하는 멀티미디어 요금제를 추가 도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SKT가 LTE 전국망 구축을 앞당기는 배경은 국내 LTE 시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LTE 시장은 3G 이동통신을 지원하는 아이폰4S 출시에도 폭발적인 상승세를 타고 있다. SKT의 LTE 가입자는 26만명으로 매일 1만 5000명이 LTE를 선택하고 있다. 이는 전체 일일 가입자의 35%가 넘는 수치이다. 장동현 SKT 마케팅부문장은 “LTE 가입자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해 연말 목표 가입자 수를 50만명에서 70만명으로 상향 조정했다.”며 “내년 1월이면 스마트폰 가입자의 70%, 4월이면 95%를 충족하는 전국 LTE 시대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SKT는 내년 1월 전국 28개 시에서 3개월 뒤 84개 시로 확대하고 시 외곽의 대학가, 고속도로 휴게소, 스키장 등 레저시설에도 촘촘한 LTE존을 조성할 계획이다. LTE망에는 최첨단 기술도 대거 적용된다. 안정적인 통화 및 데이터 품질을 제공하기 위해 LTE 전용 펨토셀(초소형 기지국)을 전국에 구축하고 100만개에 달하는 기존 3G 중계기를 LTE용으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내년 1월부터 클라우드 방식의 망 구축 기술인 ‘어드밴스드-스캔’(SCAN)을 적용한다. 세계 처음으로 상용화되는 기술로 LTE 체감 속도는 현재의 2배, 용량은 3배로 늘게 된다. 무인 기지국 스스로 트래픽 증감에 대응하고 자동으로 장애를 복구한다. 강종렬 네트워크 기술원장은 “SKT의 건물 내 LTE 접속 성공률은 98%, 지하 성공률은 96%로 경쟁 이통사를 압도하고 있다.”며 “경쟁사가 이 수치를 기록하려면 몇 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SKT는 현재 LTE 가입자의 월 평균 데이터 사용량이 1.6기가바이트(GB)로 3G 가입자보다 45% 더 많고 동영상·음악·네트워크 게임을 선호하는 만큼 특성에 맞는 차별화된 요금 상품을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영화는 편당 요금이 현재보다 최대 4분의1로 떨어지고, 게임은 월 정액 기준으로 절반 가격으로 제공된다. SKT와 LTE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LG유플러스는 연내 전국 82개 시, 내년 6월까지 읍·면·동 단위까지 LTE망을 구축할 예정이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국영수만 교육 아냐…인성 위한 유소년 축구교실 눈길

    국영수만 교육 아냐…인성 위한 유소년 축구교실 눈길

    한국의 교육은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주요 과목 만이 주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조기교육 역시 영어와 수학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한창 어린이 조기교육 열풍이 불던 2005년 당시 KBS2에서 방영한 ‘해피선데이-날아라 슛돌이’(이하 슛돌이)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프로그램이었다. 7~8세 어린이로 구성된 슛돌이 선수들이 축구를 통해 협동심과 경쟁력을 몸소 배우며, 건강하고 성숙하게 변하는 모습은 많은 학부모로 하여금 주요 과목만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줬다. 슛돌이의 회가 거듭해갈수록 어린이 축구교실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슛돌이 멤버들과 같은 성장 효과를 꾀했던 학부모들의 성원으로 어린이 축구교실은 늘 만원사례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KBS와 달리 추세에 편승하려 급하게 준비한 많은 어린이 축구 교실은 부실했다. 전문 강사진의 부족으로 축구 전문 강사진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축구를 가르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로부터 6여 년이 지난 지금의 축구교실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축구 한 종목에서 벗어나 어린이스포츠를 통한 창의력 개발 및 개개인에 맞춘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신체적·정서적·사회적 인지발달을 돕는 곳으로 발전했다. 분당에 있는 팀식스 스포츠 클럽은(이하 팀식스) 현 대학 교수진을 포함한 선수출신 강사진과 SK 프로농구단이 함께하여 성장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맞춤형 체육 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팀식스는 유아부터 어린이를 대상으로 ‘키 크는 농구교실’, ‘축구교실’, ‘B.I.Gym(유아체육)’, ‘수영’, ‘스키’, ‘생활체육’의 여섯 가지 종목을 지도하고 있다. 그 중 팀식스를 대표하는 팀식스F.C는 학업에 충실하고 축구를 사랑하는 재능있는 순수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대표팀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담당강사들의 추천과 감독 및 코치들의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팀식스F.C는 전국대회 및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으로 입상한 기록이 있어 유소년 축구팀으로써 명성이 자자하다. 그 바탕에는 15년 이상 어린이 축구를 지도해 온 강이용 팀식스 스포츠 클럽 대표팀 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승리보다는 팀 구성원을 위한 인성을 더욱 중요시하며 팀워크를 가장 우선으로 강조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뛰어난 주축선수 한두 명을 내세워 승리하는 것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함께 경험을 쌓으며 돈독한 팀워크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하도록 교육 철학을 펴고 있다. 진정 뛰어난 선수는 자신의 소중함을 알며,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회성과 통솔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에게 스포츠는 운동신경 발달을 돕고, 단체 속에서 협동심과 자립심을 길러준다. 또 건강 증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모든 교육이 책상 위에서 이뤄지는 시대는 끝났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며 곧은 인성을 갖고 자라날 미래의 꿈나무들을 기대해본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브래드 피트 “3년 후 배우에서 은퇴할 것”

    지난 14일 방한한 할리우드 톱스타 브래드 피트(47)가 3년 후 은퇴를 선언했다. 피트는 최근 호주 TV프로그램 ‘60 Minutes’와의 인터뷰에서 “3년 후에 배우를 그만둘 것” 이라고 밝혔다. 피트는 과거 선데이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도 “배우로서의 유효기간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토로한 바 있어 갑작스러운 은퇴선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은퇴 후 계획에 대해 피트는 “연기는 하지 않지만 영화 제작 일을 하고 싶다. 제작과 기획 등에 관심이 많다.”고 말해 영화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피트는 현재 ‘플랜B 엔터테인먼트’라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디파티드’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개봉을 앞둔 ‘머니볼’에 출연 뿐 아니라 프로듀서로도 참여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김현(金炫)-고메즈전(戰)에 할말 있다

    김현(金炫)-고메즈전(戰)에 할말 있다

     프로복싱 한국 페더급 1위인 김현(金炫)이 지난 6월 베네스웰라(베네수엘라)에서 WBA 동급 2위인「안토니오·고메즈」와 비겼을 때『그런대로 적지(敵地)에서 잘 싸운 셈』이라는 것이 국내에서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베네스웰라에서 김현(金炫)과 함께 돌아온 매니저 김경호(金璟鎬)씨는『틀림없는 김현(金炫)의 승리였으나 베네스웰라 복싱 커미션측이 판정을 발표하기 전에 무승부로 꾸며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김현(金炫)은 큰 고기를 낚아 놓고도 도둑맞은 격이 된다.  지난 6월16일 베네스웰라의「마라카보」에서「안토니오·고메즈」와 맞붙은 김현(金炫)은 잘 싸웠다고 한다. 상대방인「고메즈」는 일본의「사이죠(西城)」를 때려뉘고 WBA 페더급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강호다.  베네스웰라의 영웅인「고메즈」가 김현(金炫)과 싸웠을 때의 랭킹은 WBA 2위.  김현(金炫)과 경기를 세계 타이틀 도전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그곳의 예상과는 달리 김현(金炫)은 다부지고 줄기차게「고메즈」와 싸웠다는 것.  매니저 김경호(金璟鎬)씨에 의하면 2회에 적극적으로 들어오던「고메즈」는 김현(金炫)의 레프트 훅을 맞아 크게 대미지를 입었으나 공이 울리는 바람에 구제를 받았다.  그러나「고메즈」는 이 때의 대미지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경기는 계속 김현(金炫)의 우세로 진행됐으며 8회는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나는「고메즈」가 쓰러질 것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손에 땀을 쥐었다. 10회전이 끝나자 나는 김현(金炫)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 까닭인지 주심은 경기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국과 남미는 텃세가 심한 소위「홈 디시즌」이 적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매니저 김(金)씨의 말이다. 관중들의『우우!』하는 야유 속에 시간은 흘렀다고 한다. 『나는 링 위에 올라가 저지 페이퍼를 보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심의 대답은 이곳에서는 저지 페이퍼를 공개 안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40분쯤 지났을까? 주심은 무승부를 선언하고 말았다. 세계 어느 곳에서 경기가 끝난 40분 뒤에야 결과를 발표하는 곳이 있겠는가?』  김경호(金璟鎬)씨는 주심에게 즉각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누가 보더라도 김현(金炫)이 적어도 3라운드 이상을 이긴 경기였다. 다음 날 베네스웰라의 신문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고 써 주었다. 이 경기를 이겼더라면 김현(金炫)은 세계 정상에 도전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니 아쉽고 분하기만 하다』  그러나 처음에「하포네(일본 사람)」라고 여겼던 베네스웰라 사람들에게 신문을 통해「꼬리아노」(한국인)를 알리게 된 것은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  68년 우리나라에 와서 허버트강(康)을 스탠딩 다운(서 있는 채로 의식이 흐려지는 상태)시켰던「로만·브랑코」는 베네스웰라 치안국장의 보디가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선데이서울 73년 8월19일 제6권 33호 통권 제253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특히 복싱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여서 세계 타이틀 매치는 최고의 관심거리 였습니다.
  • 해수욕장 뒤짚어 놓은 임자 없는 옷 한벌

    해수욕장 뒤짚어 놓은 임자 없는 옷 한벌

     말복을 앞둔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많은 사람이 더위를 피해 물가로 모여들고 있으며 갑자기 모여든 인파 때문에 물가에서는 갖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仁川) 송도(松島)에 마련된 여름경찰서를 찾아 바다와 피서 인파가 빚어낸 각종 신고와 얘깃거리를 모아 보면-. 제1화=배표 사러 노숙(露宿)하다 감기 걸려 바캉스 망친 4아가씨  A=정말 찌는 듯이 더운 날씨입니다.  D=어쨌든 예년에 없던 더위예요. 하인천(下仁川)에 있는 연안부두여객 터미널에 잠깐 들러봤는데 섬으로 가려는 피서객이 어찌나 많은지?  B=배표를 못 사서 노숙(露宿)까지 한다면서요?  C=옛날에 쌀배급 탈 때 하던 식이군요.  D=김(金)모양 최(崔)모양 등 어느 직장에 근무하는 아가씨들 4명이 덕적도로 가기 위해 내려 왔는데 배표를 못 샀어요. 여관에 가서 자고 아침에 나오면 그동안에 배표가 다 팔려 버릴까봐 4명이 모두 그 자리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에 배표를 사기는 샀는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데다 바닷바람에 그만 감기가 들어버렸다는군요. 4명이 일제히 콜록콜록 하면서 기진맥진, 결국 배표를 다시 무르고 서울로 되돌아갔나봐요. 제2화=숲속에서 잠자다가 익사자로 몰린 취객(醉客)  B=다음은 송도(松島)해수욕장 얘기나 해볼까요. 이곳 유원지의 총면적은 11만4천평이고 그 중 수영장의 넓이는 2만1천평이에요. 그 넓은 터에 모여드는 피서객은 보통 2만여명쯤 되지요.  E=올해는 훨씬 더 많았어요. 아마 매일 3만명씩은 들어왔을 거예요.  B=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여들다 보면 정작 익사자가 생겨도 그 당장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저녁 8시 수영금지 시간이 되고, 탈의장에 맡긴 옷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봐야만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지난 달 29일이었을 거예요. 탈의장 검사 결과 임자 없는 옷 한벌이 발견됐어요.  주민등록증을 보니 서울에 사는 30살의 박(朴)모라는 청년이더군요. 올해 들어 처음 생긴 사고라 우리 여름경찰관 20명은 전원 긴장해서 익사체 찾기 작업을 벌였지요.  E=해수욕장 자체 구조원 15명도 합세해서 대대적인 작업을 벌였답니다.  B=하여튼 해수욕장 밑바닥을 싹 훑었어요. 그런데 걸리느니 그저 깡통이나 걸레조각 뿐이지 영 사람의 시체가 나타나지를 않더군요, 송도해수욕장 주인을 불러서 물을 모두 빼달라고 지시했지요.  A=물을 한번 뺐다가 다시 새 물을 넣으려면 경비가 50만원 가량 든대요.  B=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죽은 사람의 시체는 찾아놓고 봐야 할 게 아닙니까. 그 때가 아마 밤 11시쯤 됐을 거예요. 주인도 할 수 없이 물을 빼려고 하는데, 어두운 숲 속에서 어떤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지 않겠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울에서 놀러온 박(朴) 아무개라고 하더군요.  E=술을 마시고 숲속에서 한잠 자다가 오는 것이라나.  B=반갑기도 하지만 어찌나 약이 오르는지,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어요.  제3화=고교생 혼성 캠핑 단속한 경찰관에 바락바락 대든 남학생  A=8월1일부터 남녀 혼성 캠프를 철저히 단속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읍(습)니다만 7월까지만 해도 사실 눈꼴사나운 일들이 종종 있었어요.  E=나이든 어른들보다 20대 젊은층에 그런 일은 더 많을 것 같더군요.  A=그게 아마 지난 달 20일 전후였을 거예요. 조그마한 텐트에 남녀 고등학생 8명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모두 이리로 데려 왔지요.  B=고등학교 2학년생들이라는 데 여학생들은 모두 어린애들 같더군요.  A=신원을 알아보니 인천(仁川) 시내 모 고등학교와 모 여자고교 학생들임이 분명하더군요.  어째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은 텐트에서 자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글쎄「그런 걸 뭣 때문에 묻느냐」「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끌어 왔느냐」면서 바락바락 대들지 않겠어요.  B=법대로 처리하자면 모조리 경범죄 대상이니까 충분히 구류 처분까지 시킬 수 있지요.  A=그러나 역시 학생이라 그럴 수도 없고 할 수없이 학교에 연락해서 훈육담담 선생님을 나오게 했지요. 경찰로서는 처벌하지 않고 일단 학교에 넘겨 줄테니 학교측 재량으로 처리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튿날 그 학생의 부모가 떼를 지어서 이리로 왔어요.  B=뭘 따질 게 있어서 저렇게 몰려 나오나 하고 저는 은근히 떨었어요.  A=그런데 그 학부모들 정말 고맙더군요. 자기 자식들이 탈선하기 일보 직전에 구출해 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제4화=5시간 보호한 미아(迷兒) 찾아온 어머니가 어린애 볼기를 “철썩”  C=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으레 보호자를 잃어버리는 미아가 생겨서 말썽을 부리곤 하지요.  D=이곳에서도 보통 하루에 20명꼴로 미아가 생긴답니다. 물론 나중에는 부모들이 모두 찾아갔읍(습)니다만-.  C=2,3일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서울 말을 쓰는 다섯살짜리가 엉엉 울고 있기에 마아보호소에 데려다 두고 곧 방송을 했지요.  꼬마의 이름은 물론 생긴 모습, 수영복 빛깔까지 몇번 되풀이 방송하면서 찾아가라고 했단 말입니다. 방송을 10분에 한번씩 하니까 아마 수십번을 했을 거예요.  점심때 데려 왔는데 6시가 넘어서야 겨우 어떤 아주머니가 나타나더니「너 왜 여기 와 있니」하면서 큰 소리로 야단치지 않겠어요. 5시간이 넘도록 부모를 찾았다고 야단치지 말랬더니 막무가내 였어요. 우리더러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꼬마의 엉덩이만 철썩철썩 때리면서 끌고가는데 정말 보기 민망하더군요.  <정리 이의재(李義宰)·이용희(李容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英언론 “엠마 왓슨 새 남친은 옥스퍼드 대학원생”

    英언론 “엠마 왓슨 새 남친은 옥스퍼드 대학원생”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헤르미온느’ 엠마 왓슨(21)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영국 선데이 텔레그래프는 “ 왓슨과 캠퍼스에서 만난 대학원생 윌 아다모비치 사이에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있다.” 며 “옥스퍼드의 한 술집에서 연인의 모습으로 손을 잡고 나오는 것이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같은 보도는 지난 6일(현지시간) 데일리메일이 전한 “왓슨이 남자친구 조니 시몬스과 결별 위기에 놓였다.”는 뉴스와 이어져 있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데일리메일은 “왓슨과 시몬스의 사랑이 파탄 직전” 이라며 “시몬스가 영국으로 함께 건너가자고 한 엠마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부터 둘사이가 멀어졌다.”고 보도했다. 한편 왓슨은 현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등록해 공부하고 있으며 3학년을 옥스퍼드에서 보내고 마지막 학년은 브라운대로 돌아가 학업을 마칠 예정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리즈·테일러』의 남편들

    『리즈·테일러』의 남편들

     『너무 지나친 질투 때문』에 최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나 또다시 이혼 선언을 해서 화제가 된「리즈」와「버튼」.  화제가 끊일 사이가 없는 이 두사람에게 새로운 화제를 주는 사진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리즈」와「버튼」이 처음 만난 건『클레오파트라』촬영 때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20년 전에 그와 만났던 것.  그 뒤「리즈」는「에디·피셔」와의 생활을 청산하고「버튼」과 결혼했다.  「버튼」은 그러니까「리즈」의 다섯번째 남편.  18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한 후 지금까지 23년동안 다섯번이나 남편을 바꾼 이 화려한 여인의 애정사를 훑어 보면···.  첫번째 남편은 미국의 유명한 호텔 재벌「힐튼」가의 장손「니키·힐튼」. 두 사람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소꿉장난같은 결혼 생활은 9개월만에 끝장나고 말았다.「리즈」는 나중에 첫번 결혼을 회상하며『나는 그 당시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몰랐다』고 술회했다.  두번째 남편은 영국 배우「마이클·와일딩」의 인기 하락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대두되고「리즈」의 성장이 부담이 되어 헤어졌다.「와일딩」과 이혼한 후 만난 세번째 남편이「마이클·토드」.70cm 영화를 개발한「토드」는 전 남편들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남편.「리즈」는 당시「토드」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은퇴할 결심까지 했었다. 그러나「토드」는 뜻밖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 또 다른 남편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래서 맞은 네번째 남편이 바로「에디·피셔」.「리즈」는 절친한 친구였던 배우「데비·레이놀즈」의 남편「피셔」를 가로챈 것인데 이로 인해「리즈」는 한때 영화가의 원성을 사기도.  「피셔」와의 생활도 결국은 오래 가지 못하고 별거에 들어간채 곧 이혼.  그리고는 또 다시 이혼을 발표한 다섯번째 남편「버튼」을 만났던 것.  「에디·피셔」를 남편으로 가졌을 때 초대받아 온「리처드·버튼」과 눈을 마주 친 이래『클레오파트라』촬영시 서로 반해 버려 결혼에 골인했던 것.  당시「리즈」는『버튼과는 그가 원하기 전에는 결코 헤어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으나 끝내는 결혼 생활 10년도 못채우고 파단되고 말았다.  세계 최고의 미모와 세계 최고의 명성을 누려온 만큼 화려한 남성 편력을 지녀온 그녀가 또다시 여섯번째의 남편을 맞아들일 것인지 자못 궁금.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봉소아(bonsoir) 마담(4)=「나폴레옹」오미정 마담

    봉소아(bonsoir) 마담(4)=「나폴레옹」오미정 마담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지기에는 어려운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꿈이기에 신비스러운 애착과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는가 보다. 지금은 한낱 스카치 코너의 마담. 그러나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고 지금도 그 꿈은 포근한 기대와 흥분을 그녀의 가슴에 안겨 주고 있다.  스카치 코너「나폴레옹」(서울 중구 소공동)의 주인 마담 오미정(吳美貞·28)씨의 꿈은 성실하고 인정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꿈 치고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실속있는 꿈이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도, 조건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고향은 부산(釜山)이라고 했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던가 웬만큼 교양도 지성도 갖추었다.  처녀시절(지금도 처녀지만)에 저지른 무슨 잘못이나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외모는?  160cm가 될까 말까 한 키에 50kg이 채 못돼 보이는 알맞은 몸매.  스물여덟살이라고는 하지만 미혼인 때문인지 몸 전체에 흐르는 탄력은 생고무만큼이나 탄탄해 보인다.  얼굴 윤곽은 흔히 말하는 동양미인의 그것과 같은 달걀형.  시원스러운 이마의 곡선, 화장붓 끝이 한번도 닿지 않은 듯한 자연미 그대로의 눈썹, 도툼한 코와 입술,모두가 미인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합격선을 상회한다.  다만 눈매가 약간 매섭게 보이기는 하지만···.  쌍꺼풀 없이 얄팍한 눈매가 예쁘면서도 만만치 않은 성깔을 말해 주는 듯하다.  『눈매가 그래서 팔자가 센가 봐요』  그녀는 스카치 코너 마담으로 일하게 된 원인이 그 눈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1년 동안 어느 대학생과 교제를 해 본 경험은 있어요』  그것이 이성교제의 전부라는 듯한 말투다.  『물론 믿지 않으실 거고, 믿어 달라고 사정도 안합니다만, 제 성격과 생활 환경이 그 이상의 경험을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  한때는 언론계에서 꽤 이름 있는 어버지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자 다섯식구 한 가정의 생활을 몽땅 책임맡게 됐다는 것.  그때 오(吳)마담의 나이 21살, 부산(釜山) 모 대학생과 한창 열을 올리고 교제하던 중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머니와 3명의 남동생을 거느리게 된 오(吳) 마담은 즉각 교제를 끊어버리고 부산(釜山) 보수(寶水)동에 음식점을 차렸다.  주인 겸 종업원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일해 봤으나 경험 부족 때문인지, 장사는 뒷걸음질만 쳤고 결국 1년여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동안에도 혼담은 여러 번 있었지만 제 자신이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모두 거절해 버리고 말았어요』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해서 서울로 올라온 오(吳)마담은 서울 종로구 수송(壽松)동에 조그만 한옥 한채를 전세로 얻어 가족을 정착시켰다.  취직을 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사를 해 보려 했지만 지난 경험에 비추어 두려움이 앞섰다.  궁리 끝에 손을 댄 것이 스카치 코너「나폴레옹」.  문을 연 것은 72년 10월.  10평 남짓한 홀에는 손님이 끊일 새 없지만 오(吳)마담의 얼굴에는 별로 기쁜 빛이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희생된 젊음의 아쉬움 때문인가,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꿈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가.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저는 남성에 대한 환멸을 크게 느꼈어요』  이름이「나폴레옹」이지「나폴레옹」을 상징할만한 사진 한장, 장식품 하나도 없는 좁은 홀을 지키고 앉은 오(吳)마담의 남성관이 펼쳐진다.  『그래도 손님들은 대개 대학 교수나 공무원, 언론인 등 수준이 높다면 높은 손님들이에요.그런 손님들이 간혹 참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할 때는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웃음기 없는 얼굴에 엷은 냉소가 흐른다.  『남자가 술을 마시면 으례(으레) 그렇다지만 숫제 술 한잔 안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아저씨들도 있어요. 남자란 그런 건가요?』  『남자란 그런 건가요?』무척 낯익은 표현이다.『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시대에 비롯된 표현이던가, 아니면 여류 풍류객 황진이(黃眞伊) 시대부터 던가, 아마도 남자 있고 여자 있던 시대부터 비롯됐다고 해 두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결혼은 물론 해야지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꿈인 걸요』  결혼을 어린 시절부터 꿈으로 간직할 만큼 동경했다는 조숙한 여자도 아마 드물 것같다.  『때가 되면 하게 되겠지요. 인연이 닿으면 좋은 남자도 만나게 되겠지요』  그녀는 다 그렇고 그런 남자들 속에서도 때를 기다리고, 인연이라는 것에 기대를 건다고 했다.  『고독이요? 꼭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야만 되겠어요?』  때가 오고, 인연이 닿을 때까지의 고독을 그녀는 웃음으로 시인했다.  여자 나이 스물여덟, 고독을 느끼기로 말한다면 그 정도를 어떻게 다 말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볼링, 수영, 테니스··· 그런 것이 고독을 달래주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운전면허증까지 받았어요. 남들이 한다는 것은 다 조금씩 해 봤어요』  북한산 테니스클럽 회원에 또 무슨 볼링클럽 회원에 정말 가뜩이나 쪼들리는 시간을 용캐도 짜내어 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오(吳)마담의 말처럼, 그 매서운 눈매 때문인가. 그녀의 얼굴에는 싸늘한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을뿐이다.  스카치 코너「나폴레옹」에는 오늘도 많은 손님이 찾아들고 있건만···.<재(宰)>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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