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선데이서울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기부금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사회공헌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주거복지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수능 영어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25
  • 딸자랑=新東상사 사장 신동건씨 막내딸 영숙양

    딸자랑=新東상사 사장 신동건씨 막내딸 영숙양

     신동(新東)상사 신동건(辛東建) 사장 막내딸  『조금이나마 틈이 있을 때 이것저것을 알아두면 값진 재산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가 발달해 가는 만큼 여자의 역할이 크고 다양하게 돼 간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그래서 졸업후 1년 동안 꽃꽂이와 양재 서예를 열심히 익히고 작년 9월에는 자동차 운전면허까지 받은 신영숙(辛英淑·22)양이다.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기악과를 72년 봄에 나온「피아니스트」.  『꽃꽂이와 서예는 어머님의 권고로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어머니는 꽃꽂이 사범 자격증을 따신 지가 꽤 오래 되시거든요』  품격있게 정돈된 응접실 벽에는 명필이라고 주위에서 소문난 어머니 이순희(李順禧·54) 여사의 서예 작품 몇점이 장식돼 있다. 『새벽에 일어나 차분한 가운데 글씨를 쓰고 나면 하루종일 마음이 가벼워져요』  아버지 신동건(辛東建·59·신동상사 사장)씨는 지방출장 중이라서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다.  맏오빠 상길(常吉)씨가 서독에서 정유(精油)학 박사「코스」를 밟고 있고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둘째 영길(英吉)씨가 KIST에 근무 중.  군복무를 마친 막내 오빠 학길(鶴吉)씨는 한양대 공대 공업경영학과에 복학해 다니고 있다.  이대(梨大) 출신의 큰 언니 영자(英子)씨는 서울고등법원 이순우(李淳雨) 판사의 부인.  『젊은이들에게 공연히 참견한다는 인상을 줘서 소외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나이 든 후에는 취미를 갖는 편이 나을 듯싶었어요』  영숙(英淑)양이 특히 감심(感心)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면학열(勉學熱).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 아버지가 큰 오빠가 독일로 간 뒤부터 독일어를 혼자 공부하셔서 지금은 퍽 잘하시는 편이에요』  무대에서는 화려한 꿈을 실현하기보다는 결혼 후 착실히 전공을 살려가고 싶다는 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영숙(英淑)양이다.  『대학 졸업 후에야 음악이 무언가를 알게 되면서 현실적인 결심이 선 거예요』  똑똑하면서도 한치 빈틈없이 사교적인 영숙(英淑)양이 바라는 배필의 조건은『살아가는 데 희망과 신념을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  『서로 협조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으면 족하다고 봐요』  상대방의 현재 직업이 무엇인가를 중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신(辛) 사장이나 이(李) 여사는 막내 딸의 장래가 탄탄하고 안심스럽게 보장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법관,「엔지니어」, 의사 같은 안정된 직업을 원하지만···.  음대(音大) 재학 때는 사진반 부장으로「카메라」를 부지런히 만졌고 운동에도 열의를 보이는 다양한 취미의 소유자다. <원(媛)>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기획]최고경영자=⑤신진(新進)「그룹」 김창원(金昌源)씨

    [기획]최고경영자=⑤신진(新進)「그룹」 김창원(金昌源)씨

     총알처럼 날아오는 탁구공을 빠른 속도로 반격하는 자세와 정신으로 일해 왔다.「코로나」에서「시보레」1700으로 제품을 바꾼 신진(新進)「그룹」의 김창원(金昌源·56) 사장은『탁구 선수의 정확성과 기민성 그리고 예리한 판단력이야말로 기업인이 지녀야 할 필수요건』이라고 했다. 72년 6월 일본(日本)측과의 제휴를 끊고 미국(美國)「제너럴·모터즈」와 합작 투자로「지엠·코리어」를 새로 설립한 김(金)사장은 언제나 탁구선수처럼 부산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충남(忠南) 공주(公州)가 고향인 김(金)사장은 어린 시절을 어두운 공장 속에서 탁한 공기와 요란한 기계의 소음과 함께 보냈다.  『누구나 다 겪어본 고생이지요. 인간의 성장 과정에는 반드시 역경이라고 하는 비료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자본금 2백억원의 대 회사「지엠·코리어」를 비롯 신진(新進)자동차공업, 신진(新進)자동차판매, 한국기계, 대원(大元)강철,「코리어·스파이서」(前 現代기아), 하동환(河東煥)자동차, 한국「카이저·알루미늄」, 신원개발, 신진(新進)학원, 경향신문 등 방대한 기업을 총괄하고 있는 최고경영자 김창원(金昌源)씨에게도 역경과 슬픔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홀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화가산현(和歌山縣)에 있는 현립상업학교를 나올 때까지, 그리고 6·25때 사업체를 버리고 대전(大田)에서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김(金)사장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을 몇번이고 겪어야 했다.  『왜놈들에게 조금이라도 지기 싫어서 유도, 탁구, 축구 등 운동이란 운동은 다했지요』  지금도 유단자의 유도 실력과 도(道)「챔피언」의 탁구 실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김(金)사장은 학생 시절의 역경을 뚫는 방법으로 운동을 택했었다고 한다.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테크닉」으로 맞설때 아무리 오만불손하던 강자도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더라는 그의 생활 철학이 최고경영자의 오늘을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부산(釜山) 피난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실의와 불안 속에서 허덕일때 나는 일했읍(습)니다』  미군(美軍)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동차 부품(폐품)들을 정성스레 수집해서 다시 조립해 놓으면 훌륭한 승용차가 될 수 있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미군(美軍)의 군수품은 풍부했고 그들이 쓰다 버리는 폐품들은 말이 폐품이지 얼마든지 재생해 쓸 수 있는 값있는 물품이었다.  그것을 다시 손질해 만들어 낸 승용차가「신진호」.  전쟁 직후까지 서울과 부산(釜山)일대에서 한동안 많이 눈에 띄던「새나라」차 모양의 납작한「택시」가 바로 김(金)사장이 만들어낸「신진호」그것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자동차. 나는 그것을 직접 내 손으로 만들고 내 손으로 운전하면서 어떻게 하면 보다 안전하게, 보다 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달릴 수 있을까 연구하고 또 연구했읍(습)니다 』  자동차 공업의 선구자 김(金)사장은 누구보다도 자동차를 잘 알고 자동차와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55년 2월 신진(新進)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도 김(金)사장은 꾸준히 자동차와 함께 살았으며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더운 공장 속에서 탁한 공기를 마시고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흥겨운 음악으로 듣곤 했다.  그래서 부실 운영으로 새나라 자동차가 문을 닫고 새주인을 맞아들일 때 관계 당국에서 선뜻 김(金)사장을 지목했던 것이다.  당시 새나라 자동차의 관리권을 맡고 있던 한일(韓一)은행에서는 많은 희망자를 모두 물리치고 자동차 공업에 경험이 많고 절대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는 김(金)사장에게 관리권을 넘겼었다.  『사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읍(습)니다. 자금과 시설이 불충분한 데다가 세상에서들 말을 오죽 해야지요』  특혜다 뭐다 말들이 많은 가운데 그는 의욕과 경험만을 믿고「새나라」를 인수했다고 한다.  『아마 내 평생에 그때만큼 밤잠을 못 자고 일해 보기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65년 겨울부터 66년초까지의 일이었다.  일본(日本)「도요다」자동차와의 제휴 조건도 처음 얘기와는 달리 자꾸 바뀌고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는 일도 뜻과 같지 않았다.  하루에 잠자는 시간은 단 2시간 뿐.  일에 쫓겨 시간도 없거니와 잠을 자려고 아무리 애써도 머릿 속에는 수없는 자동차가 오락가락할뿐 잠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내 생애에서 세번째로 겪은 역경이었던 셈이지요. 결국 그 역경을 뜷고 나오는 동안 나라고 하는 하나의 인간이 그리고 한국의 자동차공업이 성장을 하게 된 겁니다』  그 뒤 한달 동안 3천대를 돌파하고「코로나」가 완전히 국내 시장을 석권했을 때도 김(金)사장은 흡족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韓)·일(日)간의 미묘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쟁 의식, 그리고 자기가 생산해 내는 자동차가 완전 국산이 아니라는 불만과 초조 그런 것이 지금까지도 김(金) 사장의 잠자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신진(新進)제품 자동차 국산화율은 승용차가 32.8%,「버스」가 77.4%,「트럭」이 23.37%- 중요 부품은 모두 일제(日製)로 돼 있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 국산화는 못하고 있읍(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초조하고 마음이 아프다니까요』  그러나 완전 국산화의 날은 멀지 않았다고 김(金)사장은 장담하고 있다.  『물줄기는 높은 데서 얕은 데로 흐르기 마련인듯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 사회의 흐름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흐르게 된다고 나는 믿고 있읍(습)니다』  후진국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잡힌 기회는 유효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부터 일본(日本)은 별안간 중공(中共)에 근접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으로 흐르던 일본(日本) 경제의 흐름은 그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사람들을 조금도 나쁘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우리를 쳐다보지 않고 외면만 한다면 우리도 또한 새로운 물줄기를 우리 쪽으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일본(日本)과의 제휴를 끊고 세계적인 자동차「메이커」인 미국(美國)의「제너럴·모터즈」와 합작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자본금은 50%씩 4천8백만불.  그러나 자본금을 반밖에 안 냈다 해서 회사 운영의 방침이나 제도를 미국(美國)측에 양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한국이 주체고 김창원(金昌源)씨의 운영 방침이 우선합니다』 8천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신진(新進)「그룹」으로서는 성실하고 근면한 종업원이 주인라는 얘기다. 『미국이나「유럽」같은 선진국에서는 공장 직공들이 1주일에 몇시간씩이나 일하는 지 아세요. 겨우 32시간만 일하면 그들은 그만이에요. 그 이상은 더하려고 하지도 않고 또 시키려고 생각지도 않아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보십시오.1주일에 70시간 이상씩 일을 합니다. 나도 그들과 같이 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회사의 주도권을 쥔다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날품팔이 노동자들로부터 대 회사 사장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는 것이 김(金)사장의 주장이다.  『경영철학이요? 나는 그런 어려운 얘기는 모릅니다. 다만 정확한 판단에 의해 계획이 수립되면 지체없이 집행하라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정확한 판단·민첩한 행동, 그것은 역시 경기에 임한 탁구선수의 자세를 그대로 본받으라는 말인 것 같았다. 이(李)에리사 양의 세계 제패도 어쩌면 대한탁구협회 회장이기도 한 김(金)사장의 그런 정신과 자세를 본 받은 결과인지 모르겠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그 젊음에 찬 패기와 과단성이 있는 결단력, 그게 무척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자동차와 일반기계 부품공장인 현대(現代)「기아」를「코리어·스파이서」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미국의「데이나」회사와 제휴하면서 자주 미국에 가보고 다시금 미국의 힘을 재인식했다는 것이다.  「데이나」라고 하면 미국에서도 손꼽는 재벌급 회사다.  그「데이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30대의 젊은이들뿐이라는 점에서 놀랐고, 30대의 젊은이들이 해내는 일이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물론 풍부한 자원과 우수한 시설 이런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까 이루어지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원과 시설을 이용하는 인간의 자세와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장래를 낙관한다고 했다.  신진(新進)「그룹」의 장래도 몹시 희망적이라고 했다.  약동하는 젊은이들의 의욕적인 활동이 눈부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탁구공은 쉴새없이 날아옵니다. 잠시도 제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지요.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여야지, 민첩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입니다』  아직 결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신진(新進)「그룹」의 총수.  『자동차공업 육성만이 내 의무요 목적』이라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그가 반했다는 미국(美國)의 젊은 패기와 과단성 있는 결단력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의재(李義宰) 기자>   ◇김창원(金昌源)씨 약력◇  ▲1917년 8월 충남(忠南) 공주(公州)에서 출생  ▲1953년 일본 화가산현입(和歌山縣立) 상업학교 졸업  ▲1955년 신진공업 대표이사  ▲1966년 신진(新進)자동차공업 대표이사  ▲1969년 대한탁구협회 회장  ▲ “ 한국기계공업 대표이사  ▲ “ 주한「튜니지아」 명예영사  ▲1971년 경향신문사 회장  ▲1972년「제너럴·모터즈·코리어」대표이사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5)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5)

     ①황성(荒城)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폐허에 쓰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②성(城)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芳草)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루고,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1925년 초가을, 황해도 연안(延安)의 한 여인숙에는 비에 갇힌 순회 가극단이 묵고 있었다.  이른바 을축(乙丑)년 장마 때.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이들은 한달동안 공연을 못한채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취성좌(聚星座) 가요부의 20여명 단원들이었다. 그 속에는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가수 겸 배우 이애리수(愛利秀)가 있었다.  전수린(全壽麟)은 창밖에 내리는 궂은 비를 바라 보다가 문득 얼마 전 개성(開城)에서 본 황량한 성터를 생각했다, 만월대(滿月臺)에 한길 넘게 우거진 잡초, 발 끝에 부딪치던 기왓장 조각, 주춧돌만 남아 있는 궁터-. 그는「바이얼린」을 꺼내어 떠오르는 악상을 정리했다. 순회극단, 또는 유랑극단이라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기면서「집시」같은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 더구나 한달씩 돈벌이를 못하고 갇혀 있는 처지에서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경은 그 가극단의 책임자 왕평(王平)도 마찬가지 였다. 전(全)씨가「바이얼린」으로 악상을 정리하여 5선지에 옮겨놓자 왕(王)씨는 흥얼거리면서 가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황성(荒城)옛터』다. 가사,「멜러디」가 처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취성좌(聚星座)에서 공연을 할 때 청순한 미인 가수 이(李)애리수의 목소리로 불려졌다. 너무 슬프게 불렀던지 공연장인 단성사(團成社)는 눈물바다가 됐다. 너무 슬픈 노래라 하여 작곡·작사자는 고등계 형사한데 붙들려가 취조를 받아야 했다.  한 때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지만 전수린(全壽麟)은 이 한곡으로 충분히 유명해 졌다. 그 때 전(全)씨 나이 18살.  개성(開城) 태생인 전(全)씨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홍난파(洪蘭坡)씨가 조직한 연락회(硏樂會)에 들어갔다. 그것이 연예계 입문이지만 음악 공부는 이전부터 했다. 당시 개성에는 중앙회관과 고려여자회관이 있었는데 여기에「예뱃소년합창단」이 있어서 전(全)씨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접할 수 있었다. 호수돈(好壽敦) 여학교 초대 교장이던「루즈」부인에게「바이얼린」을 사사, 15살 때는 이미 습작곡을 내놓을만큼 천재적인 재질을 보였다.  이(李)애리수는 13살 때 취성좌(聚星座)의 아역 배우로 취성좌(聚星座) 대표 김소랑(金小浪)씨에 의해 발탁되었다.  전수린(全壽麟)씨와 같은 개성 태생으로 전(全)씨보다 3살 아래. 지금 66살인 전(全)씨는 48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李) 애리수의 목소리는 지금 이미자(李美子)와 흡사했다. 곱고 호흡이 퍽 좋았다. 그 위에 굉장한 미인이고 똑똑했다. 노래도 타고 난 예능인이었다.』  『황성(荒城)옛터』의「히트」가 이(李)애리수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빅타·레코드」사는 전(全)씨를 초청해서 전속 계약을 맺고 이(李) 애리수에게 전(全)씨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때 전(全)씨가 만든 일본말 노래가『와다나쓰께(仇情=미운 정)』. 이(李)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일본 안에서도「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한국조의 유행가가 등장하기도 했다.「사사기슝이찌」의『시마노 무스메』(섬처녀)는 바로 전(全)씨의『와다나쓰께』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고『나미다노 와다리도리』(눈물 젖은 새)는 신(申) 카나리아가 부른『삼천리(三千里) 강산』을 본딴 것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전(全)씨는 그 후 7년간 일본「빅타」의 정사원으로 일했고 이(李)애리수는 한국 일본 양국에서 똑같이 인기있는 가수가 됐다. 그럴 즈음 이 대망의 여가수를 은퇴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경우처럼 연예·정사사건이다.  일본서 돌아온 이(李)애리수에게 사랑의 불길을 지른 사람은 그때 연희(延禧)전문을 다니던 배동필(裵東弼)이란 청년. 돈도 가문도 당당한 부호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을 맹세했고 이(李)애리수는 아예 노래도 연극도 집어치우고 배(裵)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배(裵)씨 집에서『광대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완고하게 이를 거부하자 단성사 뒤의 한 여관방에서 정사(情死)를 기도, 팔 동맥을 끊었으나 여관 주인의 발견으로 이들은 다행히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 때 연예계의 지도층 인사였던 이기세(李基世)씨가 이 사실을 알고 배(裵)씨의 부모한데 달려가 담판을 지어 결국 고집 센 노인들의 결혼 허가를 받아냈다. 결혼 허가를 받은 이(李)애리수는 곧바로 은퇴해 버렸다.  20살 안팎에 최고의 인기 작곡가가 된 전수린(全壽麟)씨는 멋장이(멋쟁이)로도 소문났었다.그는 국내에 처음으로「아코디언」을 들여와 방송국에 출연했다. 서울에「라디오」방송국(京城방송국) 이 개국된 게 1926년. 국내서 처음인 신기한 악기「아코디언」을 방송국 직원들이 보고 하도 독촉하는 바람에 전(全)씨는 채 연습도 하지 못한채「아코디언」을 메고 출연했다가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 <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기획]최고경영자=④고려(高麗)「그룹」이학수(李學洙)씨

    [기획]최고경영자=④고려(高麗)「그룹」이학수(李學洙)씨

     창업 10년만에 국내 제1은 물론 오대양(五大洋)에 태극기를 날리며 세계 수산업계의 상위「그룹」에「랭크」된 고려(高麗)원양어업주식회사. 72년도 수출 실적 1천8백만불(한화 72억원)을 기록한 고려(高麗)원양은 고려(高麗)식품·범한이료(汎韓餌料)·고려(高麗)서적·광명(光明)인쇄·광명(光明)출판사 등 방계 회사만도 6개 업체. 이 엄청난 대형 기업의 창설자로서 지금까지 총수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이학수(李學洙·57)씨는『그러나 아직 내 기업은 바다 위의 한 조각 나뭇잎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다 위의 한 조각 나뭇잎』  그것은 이(李)씨의 겸손한 표현만이 아니라 미국(美國),일본(日本),「캐나다」등 세계 열강들이 할거하는 국제 수산무대에서 한국 원양어업이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솔직이 말해서 지금 원양어업을 시작하라고 한다면 감히 엄두도 못냈을 겁니다』  자본·기술·시장 이 3가지 요건 가운데 어느 한가지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멋 모르고 시작한 것이 고려(高麗)원양이며 지금도 국제적인 수준에서 볼때 한국의 원양어업은 걸음마 단계를 겨우 벗어난 상태라는 얘기다.  그런 상태에서 유독 고려(高麗)원양만이 세계 상위「그룹」에 끼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이학수(李學洙) 사장이 지닌 최고경영자로서의 역량과 경륜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63년 4월 자본금 5백만원으로 서울 서대문구(현재 중구) 만리동 1가67에 고려(高麗)원양어업주식회사 간판을 달았을 때 세상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이(李)씨의 행동을 바라봤었다. 이학수(李學洙)라는 이름은 수산업계에서보다 인쇄업계에서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인쇄인 이학수(李學洙)는 5·16혁명을 계기로 광명(光明)인쇄소와 함께 한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생명을 내걸고 이루어졌던 혁명 과정에서 그는 혁명공약(革命公約)을 비롯한 유인물의 인쇄를 책임 맡았었다.  『나는 결코 그 일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다만 주어진 심부름을 실수없이 했을뿐이며 심부름은 심부름만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공로라면 큰 공로일 수도 있는 일을 이(李)씨는 가볍게 흘러버렸다.  사실 이(李)씨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높은 공직에 나설 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럴만한 기회도 있었고 권유도 있었지만 이(李)씨는 자기 자신을『그럴만한 인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그 길을 사양했다고 한다.  『사회질서가 확립되고 산업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사업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지요』  고향이 함북(咸北) 명천(明川)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서 일하는 것이 소원이었으며 사업가의 기반을 굳힌 뒤에도 바다는 쉴새없이 그를 유혹했다고 한다.  『바다는 넓습니다. 또 깊습니다. 우리는 아직 바닷속에 잠긴 잠재 어획량의 40%밖에 잡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립한 것이 고려(高麗)원양이다.  『인쇄장이가 고기잡이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한 것 같기는 했지만 맨 주먹으로 월남해서 인쇄소를 경영하던 그 정열과 열의로 일하면 못할 게 뭐냐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나 회사를 설립하고 난 뒤 2년 동안 이(李)씨는 자신의 무모한 사업 확장을 몇번이나 후회했다.  그때만 해도 황무지와 다름없던 원양어업을 배 한척 없이 시작했으니 이(李)씨의 말처럼『무지와 만용이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65년 12월 자본금을 5천만원으로 증자하고 230t급 참치어선 광명(光明) 1호를 건조해 냈을 때 이(李)씨는『비로소 칼을 잡은 장수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어 66년 4월 광명(光明) 11호를 건조, 모두 10척의 참치어선을 확보하고 남태평양과 인도양에 출어를 했을 때 이(李)씨는『드디어 갑옷 투구를 갖추고 기치창검을 번쩍이며 말을 달려 적진으로 달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李)씨는『옳게 일하고 옳게 살자』는 자신의 경영철학에 따라 거칠기 파도같은 뱃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그 때부터 이 기업을 치부의 목적으로 경영하지 않고 하나의 국가 기관에 파견된 관리인의 입장에서 경영했던 것이지요』  수일만에 원양어업에서 돌아온 뱃사람들에게는 따뜻한 가정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주었고, 흉사를 만난 뱃사람에게는 직접 찾아 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같이 슬퍼해 주기도 했다.  『날더러 인색하다는 사람들도 있지요. 압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말이에요.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만은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어요 』  옳게 일하기 위해서는 가끔 인색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인색」은 1백원어치를 일한 사람에게 80원만 주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인색」이 아니고, 백원어치를 일한 사람이 마치 5백원어치쯤 일한 것처럼 분에 넘친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저지하는「인색」이라는 풀이다.  「사모아」어업기지 설치에 이어 69년 1월「사오·빈센트·타마타브」기지 설치를 계기로 1천t급 냉동운반선 제1 칠보산(七寶山)호를 바다에 내보냄으로써 고려(高麗)원양은 국제적인 수산업체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출어장만 하더라도 남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북태평양으로, 다시 대서양으로 그 활동 범위는 넓어져, 세계 구석구석 바다 있는 곳이면 어디나 고려(高麗)원양의 각종 어선이 모습을 나타내게 됐다.  지금은 국내 최대의 3천5백t급「스탄·트롤」어선(저인망 어선)을 비롯 모두 53척의 어선과 냉동운반선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금은 최초의 5백만원에서 6천배가 더 는 3백억원 규모로 크게 확장됐다.  『사실 우리나라의 입지 조건이나 산업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사업입니다. 그러나 그 전망은 결코 무지개처럼 화려하지는 못합니다』  이(李)씨는 원양어업은 곧 국력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들도 다투어 1백「마일」의 영해 선언을 하고 있으며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이미 2백「마일」의 영해 선언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우수한 장비와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제는 국가와 국가간의 협정이나 양해 없이는 단 한마리의 참치나 연어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어업국인 일본(日本)만 하더라도 정부에서「어업진흥단」을 만들어 후진국에 가서 어업 기술을 가르쳐 주고 그 댓가(대가)로 어획물을 받아오는 방법을 쓰고 있다,  국제적인 어업 분규 때문에 그 전처럼 아무 곳에서는 함부로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결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제 우리 나라의 원양어업도 벽에 부딪쳤다는 얘기지요』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수산인으로서의 이(李)씨의 꿈과 포부는 창업 당시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듯, 올해에는 22척의 어선을 건조해서 그 가운데 12척은「파나마」로 수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부산(釜山)에 이미 건립해 놓은 외자 60만불, 내자 7억원 규모의 종합식품「센터」를 활발히 운영하여 국민의 식생활 개선과 체력 증진에 기여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현재 고려(高麗)원양 산하에서 종사하는 직원 및 기술자만도 3천여명, 고려(高麗)서적과 광명(光明)인쇄 쪽에도 1천2백여명 모두 4천2백여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최고경영자 이(李)씨는『이것은 이미 나 개인의 기업이나 재산이 아니고 우리 고려(高麗) 가족 전원의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재산』이라고 좌우명처럼 되뇌고 있었다.  일본(日本)의「미끼·요노스께」(三鬼陽之助)가 쓴「경영자 오십계(經營者 五十戒)」를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이(李)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어떤 위정자가 이렇게 말했지요. 자기 자손을 위해 미전(美田·좋은 땅)을 사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말이지요』  빈 주먹으로 자수성가한 이(李)씨로서는 슬하에 있는 1남4녀의 자녀들에게도 자립과 근면의 정신을 키워주기 위해 결코 재산을 물려주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지금도 적수공권으로 일하던 그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이(李)씨는『남들처럼「골프」도 칠 줄 모르고, 여행을 즐길만한 여유도 없읍(습)니다』  이렇다 할 취미도 없고 남달리 즐기는 오락도 없다는 것이다.「골프」장에는 1년에 겨우 한두번 나가기는 하지만 외교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나갈 뿐이며 외국여행도 자주 하지만 단 한번도 환락에 젖어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에 대한 감각이 둔해서가 아니고 아직은 그럴만한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요』  「옳게 산다」는 것이 결국 자기 분수를 지키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입지전적인 이(李)씨의 자세는 그대로 고려(高麗)「그룹」의 표상이었다.  <이의재(李義宰) 기자>   이학수(李學洙)씨 약력  ▲33년=만주(滿洲) 용정 광명(光明)중학교 졸업  ▲39년=만주(滿洲) 척식공사 근무  ▲51년=부산(釜山) 관북인쇄소 경영  ▲53년=광명(光明) 인쇄공사 경영(현재)  ▲61년=고려(高麗)서적 사장(현재)  ▲63년=고려(高麗)원양 사장(현재)  ▲66년=재단법인 5.16 민족상 이사  ▲72년=고려(高麗)식품 회장 [선데이서울 73년 1월28일 제6권 4호 통권 제224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 김현(金炫)-고메즈전(戰)에 할말 있다

    김현(金炫)-고메즈전(戰)에 할말 있다

     프로복싱 한국 페더급 1위인 김현(金炫)이 지난 6월 베네스웰라(베네수엘라)에서 WBA 동급 2위인「안토니오·고메즈」와 비겼을 때『그런대로 적지(敵地)에서 잘 싸운 셈』이라는 것이 국내에서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베네스웰라에서 김현(金炫)과 함께 돌아온 매니저 김경호(金璟鎬)씨는『틀림없는 김현(金炫)의 승리였으나 베네스웰라 복싱 커미션측이 판정을 발표하기 전에 무승부로 꾸며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김현(金炫)은 큰 고기를 낚아 놓고도 도둑맞은 격이 된다.  지난 6월16일 베네스웰라의「마라카보」에서「안토니오·고메즈」와 맞붙은 김현(金炫)은 잘 싸웠다고 한다. 상대방인「고메즈」는 일본의「사이죠(西城)」를 때려뉘고 WBA 페더급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강호다.  베네스웰라의 영웅인「고메즈」가 김현(金炫)과 싸웠을 때의 랭킹은 WBA 2위.  김현(金炫)과 경기를 세계 타이틀 도전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그곳의 예상과는 달리 김현(金炫)은 다부지고 줄기차게「고메즈」와 싸웠다는 것.  매니저 김경호(金璟鎬)씨에 의하면 2회에 적극적으로 들어오던「고메즈」는 김현(金炫)의 레프트 훅을 맞아 크게 대미지를 입었으나 공이 울리는 바람에 구제를 받았다.  그러나「고메즈」는 이 때의 대미지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경기는 계속 김현(金炫)의 우세로 진행됐으며 8회는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나는「고메즈」가 쓰러질 것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손에 땀을 쥐었다. 10회전이 끝나자 나는 김현(金炫)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 까닭인지 주심은 경기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국과 남미는 텃세가 심한 소위「홈 디시즌」이 적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매니저 김(金)씨의 말이다. 관중들의『우우!』하는 야유 속에 시간은 흘렀다고 한다. 『나는 링 위에 올라가 저지 페이퍼를 보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심의 대답은 이곳에서는 저지 페이퍼를 공개 안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40분쯤 지났을까? 주심은 무승부를 선언하고 말았다. 세계 어느 곳에서 경기가 끝난 40분 뒤에야 결과를 발표하는 곳이 있겠는가?』  김경호(金璟鎬)씨는 주심에게 즉각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누가 보더라도 김현(金炫)이 적어도 3라운드 이상을 이긴 경기였다. 다음 날 베네스웰라의 신문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고 써 주었다. 이 경기를 이겼더라면 김현(金炫)은 세계 정상에 도전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니 아쉽고 분하기만 하다』  그러나 처음에「하포네(일본 사람)」라고 여겼던 베네스웰라 사람들에게 신문을 통해「꼬리아노」(한국인)를 알리게 된 것은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  68년 우리나라에 와서 허버트강(康)을 스탠딩 다운(서 있는 채로 의식이 흐려지는 상태)시켰던「로만·브랑코」는 베네스웰라 치안국장의 보디가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선데이서울 73년 8월19일 제6권 33호 통권 제253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특히 복싱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여서 세계 타이틀 매치는 최고의 관심거리 였습니다.
  • 해수욕장 뒤짚어 놓은 임자 없는 옷 한벌

    해수욕장 뒤짚어 놓은 임자 없는 옷 한벌

     말복을 앞둔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많은 사람이 더위를 피해 물가로 모여들고 있으며 갑자기 모여든 인파 때문에 물가에서는 갖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仁川) 송도(松島)에 마련된 여름경찰서를 찾아 바다와 피서 인파가 빚어낸 각종 신고와 얘깃거리를 모아 보면-. 제1화=배표 사러 노숙(露宿)하다 감기 걸려 바캉스 망친 4아가씨  A=정말 찌는 듯이 더운 날씨입니다.  D=어쨌든 예년에 없던 더위예요. 하인천(下仁川)에 있는 연안부두여객 터미널에 잠깐 들러봤는데 섬으로 가려는 피서객이 어찌나 많은지?  B=배표를 못 사서 노숙(露宿)까지 한다면서요?  C=옛날에 쌀배급 탈 때 하던 식이군요.  D=김(金)모양 최(崔)모양 등 어느 직장에 근무하는 아가씨들 4명이 덕적도로 가기 위해 내려 왔는데 배표를 못 샀어요. 여관에 가서 자고 아침에 나오면 그동안에 배표가 다 팔려 버릴까봐 4명이 모두 그 자리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에 배표를 사기는 샀는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데다 바닷바람에 그만 감기가 들어버렸다는군요. 4명이 일제히 콜록콜록 하면서 기진맥진, 결국 배표를 다시 무르고 서울로 되돌아갔나봐요. 제2화=숲속에서 잠자다가 익사자로 몰린 취객(醉客)  B=다음은 송도(松島)해수욕장 얘기나 해볼까요. 이곳 유원지의 총면적은 11만4천평이고 그 중 수영장의 넓이는 2만1천평이에요. 그 넓은 터에 모여드는 피서객은 보통 2만여명쯤 되지요.  E=올해는 훨씬 더 많았어요. 아마 매일 3만명씩은 들어왔을 거예요.  B=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여들다 보면 정작 익사자가 생겨도 그 당장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저녁 8시 수영금지 시간이 되고, 탈의장에 맡긴 옷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봐야만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지난 달 29일이었을 거예요. 탈의장 검사 결과 임자 없는 옷 한벌이 발견됐어요.  주민등록증을 보니 서울에 사는 30살의 박(朴)모라는 청년이더군요. 올해 들어 처음 생긴 사고라 우리 여름경찰관 20명은 전원 긴장해서 익사체 찾기 작업을 벌였지요.  E=해수욕장 자체 구조원 15명도 합세해서 대대적인 작업을 벌였답니다.  B=하여튼 해수욕장 밑바닥을 싹 훑었어요. 그런데 걸리느니 그저 깡통이나 걸레조각 뿐이지 영 사람의 시체가 나타나지를 않더군요, 송도해수욕장 주인을 불러서 물을 모두 빼달라고 지시했지요.  A=물을 한번 뺐다가 다시 새 물을 넣으려면 경비가 50만원 가량 든대요.  B=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죽은 사람의 시체는 찾아놓고 봐야 할 게 아닙니까. 그 때가 아마 밤 11시쯤 됐을 거예요. 주인도 할 수 없이 물을 빼려고 하는데, 어두운 숲 속에서 어떤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지 않겠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울에서 놀러온 박(朴) 아무개라고 하더군요.  E=술을 마시고 숲속에서 한잠 자다가 오는 것이라나.  B=반갑기도 하지만 어찌나 약이 오르는지,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어요.  제3화=고교생 혼성 캠핑 단속한 경찰관에 바락바락 대든 남학생  A=8월1일부터 남녀 혼성 캠프를 철저히 단속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읍(습)니다만 7월까지만 해도 사실 눈꼴사나운 일들이 종종 있었어요.  E=나이든 어른들보다 20대 젊은층에 그런 일은 더 많을 것 같더군요.  A=그게 아마 지난 달 20일 전후였을 거예요. 조그마한 텐트에 남녀 고등학생 8명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모두 이리로 데려 왔지요.  B=고등학교 2학년생들이라는 데 여학생들은 모두 어린애들 같더군요.  A=신원을 알아보니 인천(仁川) 시내 모 고등학교와 모 여자고교 학생들임이 분명하더군요.  어째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은 텐트에서 자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글쎄「그런 걸 뭣 때문에 묻느냐」「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끌어 왔느냐」면서 바락바락 대들지 않겠어요.  B=법대로 처리하자면 모조리 경범죄 대상이니까 충분히 구류 처분까지 시킬 수 있지요.  A=그러나 역시 학생이라 그럴 수도 없고 할 수없이 학교에 연락해서 훈육담담 선생님을 나오게 했지요. 경찰로서는 처벌하지 않고 일단 학교에 넘겨 줄테니 학교측 재량으로 처리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튿날 그 학생의 부모가 떼를 지어서 이리로 왔어요.  B=뭘 따질 게 있어서 저렇게 몰려 나오나 하고 저는 은근히 떨었어요.  A=그런데 그 학부모들 정말 고맙더군요. 자기 자식들이 탈선하기 일보 직전에 구출해 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제4화=5시간 보호한 미아(迷兒) 찾아온 어머니가 어린애 볼기를 “철썩”  C=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으레 보호자를 잃어버리는 미아가 생겨서 말썽을 부리곤 하지요.  D=이곳에서도 보통 하루에 20명꼴로 미아가 생긴답니다. 물론 나중에는 부모들이 모두 찾아갔읍(습)니다만-.  C=2,3일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서울 말을 쓰는 다섯살짜리가 엉엉 울고 있기에 마아보호소에 데려다 두고 곧 방송을 했지요.  꼬마의 이름은 물론 생긴 모습, 수영복 빛깔까지 몇번 되풀이 방송하면서 찾아가라고 했단 말입니다. 방송을 10분에 한번씩 하니까 아마 수십번을 했을 거예요.  점심때 데려 왔는데 6시가 넘어서야 겨우 어떤 아주머니가 나타나더니「너 왜 여기 와 있니」하면서 큰 소리로 야단치지 않겠어요. 5시간이 넘도록 부모를 찾았다고 야단치지 말랬더니 막무가내 였어요. 우리더러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꼬마의 엉덩이만 철썩철썩 때리면서 끌고가는데 정말 보기 민망하더군요.  <정리 이의재(李義宰)·이용희(李容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봉소아(bonsoir) 마담(4)=「나폴레옹」오미정 마담

    봉소아(bonsoir) 마담(4)=「나폴레옹」오미정 마담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지기에는 어려운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꿈이기에 신비스러운 애착과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는가 보다. 지금은 한낱 스카치 코너의 마담. 그러나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고 지금도 그 꿈은 포근한 기대와 흥분을 그녀의 가슴에 안겨 주고 있다.  스카치 코너「나폴레옹」(서울 중구 소공동)의 주인 마담 오미정(吳美貞·28)씨의 꿈은 성실하고 인정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꿈 치고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실속있는 꿈이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도, 조건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고향은 부산(釜山)이라고 했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던가 웬만큼 교양도 지성도 갖추었다.  처녀시절(지금도 처녀지만)에 저지른 무슨 잘못이나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외모는?  160cm가 될까 말까 한 키에 50kg이 채 못돼 보이는 알맞은 몸매.  스물여덟살이라고는 하지만 미혼인 때문인지 몸 전체에 흐르는 탄력은 생고무만큼이나 탄탄해 보인다.  얼굴 윤곽은 흔히 말하는 동양미인의 그것과 같은 달걀형.  시원스러운 이마의 곡선, 화장붓 끝이 한번도 닿지 않은 듯한 자연미 그대로의 눈썹, 도툼한 코와 입술,모두가 미인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합격선을 상회한다.  다만 눈매가 약간 매섭게 보이기는 하지만···.  쌍꺼풀 없이 얄팍한 눈매가 예쁘면서도 만만치 않은 성깔을 말해 주는 듯하다.  『눈매가 그래서 팔자가 센가 봐요』  그녀는 스카치 코너 마담으로 일하게 된 원인이 그 눈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1년 동안 어느 대학생과 교제를 해 본 경험은 있어요』  그것이 이성교제의 전부라는 듯한 말투다.  『물론 믿지 않으실 거고, 믿어 달라고 사정도 안합니다만, 제 성격과 생활 환경이 그 이상의 경험을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  한때는 언론계에서 꽤 이름 있는 어버지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자 다섯식구 한 가정의 생활을 몽땅 책임맡게 됐다는 것.  그때 오(吳)마담의 나이 21살, 부산(釜山) 모 대학생과 한창 열을 올리고 교제하던 중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머니와 3명의 남동생을 거느리게 된 오(吳) 마담은 즉각 교제를 끊어버리고 부산(釜山) 보수(寶水)동에 음식점을 차렸다.  주인 겸 종업원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일해 봤으나 경험 부족 때문인지, 장사는 뒷걸음질만 쳤고 결국 1년여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동안에도 혼담은 여러 번 있었지만 제 자신이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모두 거절해 버리고 말았어요』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해서 서울로 올라온 오(吳)마담은 서울 종로구 수송(壽松)동에 조그만 한옥 한채를 전세로 얻어 가족을 정착시켰다.  취직을 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사를 해 보려 했지만 지난 경험에 비추어 두려움이 앞섰다.  궁리 끝에 손을 댄 것이 스카치 코너「나폴레옹」.  문을 연 것은 72년 10월.  10평 남짓한 홀에는 손님이 끊일 새 없지만 오(吳)마담의 얼굴에는 별로 기쁜 빛이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희생된 젊음의 아쉬움 때문인가,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꿈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가.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저는 남성에 대한 환멸을 크게 느꼈어요』  이름이「나폴레옹」이지「나폴레옹」을 상징할만한 사진 한장, 장식품 하나도 없는 좁은 홀을 지키고 앉은 오(吳)마담의 남성관이 펼쳐진다.  『그래도 손님들은 대개 대학 교수나 공무원, 언론인 등 수준이 높다면 높은 손님들이에요.그런 손님들이 간혹 참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할 때는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웃음기 없는 얼굴에 엷은 냉소가 흐른다.  『남자가 술을 마시면 으례(으레) 그렇다지만 숫제 술 한잔 안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아저씨들도 있어요. 남자란 그런 건가요?』  『남자란 그런 건가요?』무척 낯익은 표현이다.『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시대에 비롯된 표현이던가, 아니면 여류 풍류객 황진이(黃眞伊) 시대부터 던가, 아마도 남자 있고 여자 있던 시대부터 비롯됐다고 해 두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결혼은 물론 해야지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꿈인 걸요』  결혼을 어린 시절부터 꿈으로 간직할 만큼 동경했다는 조숙한 여자도 아마 드물 것같다.  『때가 되면 하게 되겠지요. 인연이 닿으면 좋은 남자도 만나게 되겠지요』  그녀는 다 그렇고 그런 남자들 속에서도 때를 기다리고, 인연이라는 것에 기대를 건다고 했다.  『고독이요? 꼭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야만 되겠어요?』  때가 오고, 인연이 닿을 때까지의 고독을 그녀는 웃음으로 시인했다.  여자 나이 스물여덟, 고독을 느끼기로 말한다면 그 정도를 어떻게 다 말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볼링, 수영, 테니스··· 그런 것이 고독을 달래주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운전면허증까지 받았어요. 남들이 한다는 것은 다 조금씩 해 봤어요』  북한산 테니스클럽 회원에 또 무슨 볼링클럽 회원에 정말 가뜩이나 쪼들리는 시간을 용캐도 짜내어 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오(吳)마담의 말처럼, 그 매서운 눈매 때문인가. 그녀의 얼굴에는 싸늘한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을뿐이다.  스카치 코너「나폴레옹」에는 오늘도 많은 손님이 찾아들고 있건만···.<재(宰)>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리즈·테일러』의 남편들

    『리즈·테일러』의 남편들

     『너무 지나친 질투 때문』에 최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나 또다시 이혼 선언을 해서 화제가 된「리즈」와「버튼」.  화제가 끊일 사이가 없는 이 두사람에게 새로운 화제를 주는 사진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리즈」와「버튼」이 처음 만난 건『클레오파트라』촬영 때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20년 전에 그와 만났던 것.  그 뒤「리즈」는「에디·피셔」와의 생활을 청산하고「버튼」과 결혼했다.  「버튼」은 그러니까「리즈」의 다섯번째 남편.  18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한 후 지금까지 23년동안 다섯번이나 남편을 바꾼 이 화려한 여인의 애정사를 훑어 보면···.  첫번째 남편은 미국의 유명한 호텔 재벌「힐튼」가의 장손「니키·힐튼」. 두 사람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소꿉장난같은 결혼 생활은 9개월만에 끝장나고 말았다.「리즈」는 나중에 첫번 결혼을 회상하며『나는 그 당시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몰랐다』고 술회했다.  두번째 남편은 영국 배우「마이클·와일딩」의 인기 하락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대두되고「리즈」의 성장이 부담이 되어 헤어졌다.「와일딩」과 이혼한 후 만난 세번째 남편이「마이클·토드」.70cm 영화를 개발한「토드」는 전 남편들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남편.「리즈」는 당시「토드」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은퇴할 결심까지 했었다. 그러나「토드」는 뜻밖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 또 다른 남편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래서 맞은 네번째 남편이 바로「에디·피셔」.「리즈」는 절친한 친구였던 배우「데비·레이놀즈」의 남편「피셔」를 가로챈 것인데 이로 인해「리즈」는 한때 영화가의 원성을 사기도.  「피셔」와의 생활도 결국은 오래 가지 못하고 별거에 들어간채 곧 이혼.  그리고는 또 다시 이혼을 발표한 다섯번째 남편「버튼」을 만났던 것.  「에디·피셔」를 남편으로 가졌을 때 초대받아 온「리처드·버튼」과 눈을 마주 친 이래『클레오파트라』촬영시 서로 반해 버려 결혼에 골인했던 것.  당시「리즈」는『버튼과는 그가 원하기 전에는 결코 헤어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으나 끝내는 결혼 생활 10년도 못채우고 파단되고 말았다.  세계 최고의 미모와 세계 최고의 명성을 누려온 만큼 화려한 남성 편력을 지녀온 그녀가 또다시 여섯번째의 남편을 맞아들일 것인지 자못 궁금.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미용사로, 식모로 여자 행세 15년

    미용사로, 식모로 여자 행세 15년

     남자같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같은 남자가 있다. 반양반음의 양성이라고 하나 외형상으로는 남자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자보다 남자가 더 그립단다. 그래서 15년 동안 여장을 하고 감쪽같이 여자로서 지내왔는데 지난달 30일 절도죄로 서울 동부서에 구속이 되자 정체가 드러났다.   화제의 주인공 김(金·30)모씨는 육체적으로도 완전한 남성이 아니다. 남성의 심벌이 있긴 하지만 수준 미달이며 한달에 한번 항문으로 조금씩 여자의 생리 비슷한 것을 한다.  가슴은 남자들보다 좀 볼륨이 있고 히프도 마찬가지. 나이 서른인데도 턱에 수염 하나 없다.  그러나 남성의 심벌이 있고 그 남성이 정상적으로 발기를 하는 이상 그는 어디까지나 남성이지 결코 여성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여성편에 속하기를 원하는지『 미스 김이라 불러 주세요, 호호호』- 하얀 바탕에 파란 무늬의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짙은 화장에 매니큐어까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여성처럼 웃는다.  경기도 김포(金浦)가 고향인 그는 5남매 중의 막내. 어릴 때부터 형님들보다 누님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남자 옷보다는 여자 옷을 더 좋아했다고.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여자들 자리에 가 앉아서 공부했단다.  17살때 단신으로 상경, 미용사 학원을 졸업하고 미용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어엿한 여자 노릇을 했다. 버는 돈으로 한복을 해 입고 화장품도 마음놓고 사 썼다.  스무살이 되자 이성(?)이 그리워 결혼을 했다. 상대는 미군 병사. 틀림없는 남자끼리의 결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른바 호모 생활을 했다.  본인의 말을 빌면『깨가 쏟아지는 신혼 재미』였다는 것. 1년 동안 살림을 산 뒤 남편(?)이 귀국하게 되자 그는 역시 다른 미군과 동거생활을 했다.  『그이도 그랬어요. 미국 가서 정식 결혼하고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남성의 심벌 때문에 두번째 남편도 본국으로 혼자 떠나버렸다.  다시 세번째 남편을 얻어 생활을 했다.  이번에는 한국 남자. 그러나 웬 일인지 별로 정이 들지 않아서 조금 살다 헤어지고 미장원에 나가 일을 했다.  명동 C미용실을 비롯,수원(水原)·안양(安養) 등지에서 꽤 인기있는 미용사가 되었다.  『아직 한번도 없어요. 그럴 수가 있겠어요?』  여자와 관계해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변.  그러나 혼자는 외로와(워) 못살겠던지 지난 5월, 이번에는 3남매를 가진 어느 40대 남편을 얻어 동거생활에 들어갔다.그런데 남편은 매일 술만 퍼마시고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지난 7월20일부터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조차 않더라고.  화가 나서 그녀도 집을 뛰쳐나와 전에 식모살이 한 적이 있는 유(柳·48·서울 성동구 천호동)모씨 집에 가서 며칠 신세질 것을 청했다.  마음 좋은 주인의 친절로 그 집에 몸담게 되었는데 자다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12인치 TV가 한대 보였다. 순간 돈 생각이 난 그는 새벽에 TV를 훔쳐가지고 나오다 순찰 중인 경찰에 적발, 수갑을 차게 되었던 것.  지난 69년 안양(安養) 어느 미용실에 근무할 때도 미용기구를 훔친 죄(본인은 그게 아니었다지만)로 6개월을 살다 나온 적이 있다.  『다시 교도소로 가게 되면 아까운 머리를 깎아야 되겠죠. 복역을 두배 하더라도 좋으니 머리를 깎지 않을 수는 없을까요?』  기다란 머리칼을 만지며 머리 깎이기를 먼저 염려하는 김(金)이다.  집에서는 구속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도 한명 면회 오지 않았다.  『까짓년 잘 됐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긴 하지만.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30만원을 벌어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것.  s대부속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완전하지는 못해도 성 전환수술이 가능하다는 게 김(金)씨의 이야기. 수술비가 약 30만원이 든단다. 그러나 모 대학 부속병원 비뇨기과장은『성전환 수술이 가능한 사람은 완전한 반음양(半陰陽)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세계 30억 인구에 2백여명밖에 없을 것이다. 본인을 진찰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성전환 수술은 무척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하(夏)> [선데이서울 73년 8월12일 제6권 32호 통권 제25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신문에 안난 뉴스=도둑무대 독점하려 한 패거리 밀고(密告)

    신문에 안난 뉴스=도둑무대 독점하려 한 패거리 밀고(密告)

     <형사(刑事)들의 사건비화(事件秘話)><제1화=구의동(洞) TV 전문 절도단의 자폭 전말기>  C=「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이라지만 도둑의 경우는 더욱 지독한 것이더군요. 도둑 무대를 독점하려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이 된 김(金·29·뜨내기)모 이야기인데···.  A=오늘 아침(26일)에 구속이 집행된 그 능청스런 전과 5범 이야기군.  C=며칠 전 하오 6시쯤이었어요. 사환 아이가 나를 찾는 전화라기에 받아 보았더니 낮도 코도 모르는 바로 그 김(金)이었어요. 중요한 할 말이 있다면서 곧 S다당(다방의 오타)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A=10분안에 나오지 않으면 대규모 절도단을 놓치게 될 것이라고 겁까지 주었다면서요.  C=겁 주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뭏든(아무튼) 꼭 나와 달라는 것이었어요. 제법 점잖은 차림을 하고 있더군요. 용건을 말하라고 했더니 구의동(지금 서울 광진구) 일대를 쉽쓰는 TV 절도단을 잡게 해준다면서 자기를 정보원으로 써달라고 애원합디다.  B=그래서 쾌히 승낙했나요?   <말씀해 주신 분> 왼쪽으로부터 동부경찰서 김주영(金奏榮) 형사, 박창규(朴昌圭) 형사, 신두규(申斗奎) 형사, 장태석(張泰錫) 형사   C=일단 써보겠다고 대답은 했죠. 그리고 나서 일당이 누군지 아느냐고 캐어 물었더니 이름과 주소를 알아올테니 내일 다시 만나자는 거예요. 전화 연락처만 알아 놓고 헤어지면서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야릇한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 때문에 정보원이 되고 싶어하는 지가 수상쩍었어요. 그래서 그 길로 김(金)을 추적해서 은밀히 신원을 알아 보았더니 자그마치 절도 전과 5범이었어요.  A=김(金)은 그 일에서 손을 씻고 바르게 살려 했던 모양이군.  C=그런 게 아니었어요.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들과 같이 도둑질을 하는 한 패거리였어요.  A=노리는 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어리석은 놈이 있나.  C=어리석은 게 아니고 더 큰 욕심 때문이었지요. 김(金)의 목적은 1년 가까이 구의동 일대의 신 개발지 주택가를 무대로 함께 도둑질을 해 온 동료 3명을 깡그리 잡아 넣고, 그 공로로 자신만이 용서를 받게 되면 마음 놓고 혼자서 무대를 독차지하려 했던 거예요.  다음 날 만나 이야기해 주려 했던 김(金)은 마음이 밤새 달라졌던지 약속대로 나와 주지 않았어요. 도망칠까보아 형사를 긴급 동원하여 김(金)을 먼저 잡아들이고 나머지 3명을 잡아 대질을 시키니까 서로 죄를 낱낱이 폭로하더군요. 이들 일당은 구의동에서만도 그동안 10여대의 TV를 훔쳤어요. <제2화=바캉스 자금 만들려 타자기 욕심낸 소년>  A=부모들이 자녀에게 너무 인색해도 안되겠더군요. 바캉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가 쇠고랑을 찬 소년이 있어요.  B=정말 안됐어. 박(朴·18)군 집안도 꽤 잘 사는 편이더군요.  A=어저께 밤이었어요. 관내 T여관에서 수상한 소년이 도둑질을 한 물건을 팔려는 것 같다는 신고가 있었어요. 급습해서 문을 열고 보니까 타자기를 장사꾼 송(宋)모씨에게 팔려는 순간이더군요.  D=신고한 여관 종업원은 사람을 보는 눈이 보통은 넘었던 모양이야. 박(朴)군은 누가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곱살한 용모에 단정한 복장이었거던.  A=박(朴)군은 초범이었기 때문에「나, 경찰서에서 나왔다」니까 그 자리에서 얼굴색이 파랗게 변하면서 실토를 하더군요.  자기딴에는 제법 치밀하게 범행을 꾀했더군요. 열쇠 가게에서 웬만한 문은 모두 열 수 있는 열쇠 20여개를 마련해 가지고 숙직원을 두지 않은 사무실을 노린 거예요. 23일 밤 8시쯤 박(朴)군은 열쇠로 청진동(지금 서울 종로구) D빌딩 2층에 있는 K회사의 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 위에 있던 타이프라이터 1대와 넘버링 등 싯가(시가) 12만원어치를 훔쳤어요.  C= 아니, 회사의 숙직원은 없었다 하더라도 빌딩의 경비원은 있었을 게 아냐.  A= 경비원이야 엄연히 있었지요.  박(朴)군의 이야기로는 경비원이 길 옆에 야전용 침대를 펴고 자더라는 거예요. 경비가 허술한 바람에 거침없이 드나든 거죠. 경찰서로 데려와서 자초지종을 캐어 물어 보았더니 범행 동기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어요.  C=친구들과 제주도에 놀러 가기로 한 자기부담금 3만원을 만들기 위해서였나요.  <제3화=무더위 속 입씨름 끝에 동료 때려 숨지게>  A=무더위는 사고를 불러요. 얼마 전 잠을 이룰 수 없이 무덥던 날 밤 음료수병으로 머리를 얻어 맞고 그 자리서 숨진 폭행치사 사건이 발생했어요.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은 때린 차(車·21)모군이 장난기 섞인 자세로 힘주어 때리는 것 같지 않았다는데 얻어 맞은 설(薛·19)모군은 죽고 말았거든.  D=급소를 맞았던 모양이군요. 그러한 사고가 간혹 있었지요.  A=이날 밤 이들 친구 5명은 공장의 숙직실에서 쉬고 있었어요.  성수동2가(현재 서울 성동구)에 있는 M공장 직공이었읍(습)니다. 더워서 잠이 안오니까 모두들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죽은 설(薛)군은 전화를 걸고 있었어요.  이 때 차(車)군은『신경질 나게 무슨 전화를 그렇게 오래 쓰느냐』며 욕을 퍼부었지요. 평소엔 말대답을 안하던 설(薛)군이 이 날은 날카롭게 말대꾸를 했던 모양이에요.  순간적이었대요. 그것도 무더위 바람에 사다 마신『미린다』의 빈 병을 집어「쬐끄만 게 까분다」며 머리를 때렸는데 그 자리에서 거꾸러진 설(薛)군은 영영 숨을 거두고 말았읍(습)니다. <정리 배기찬(裵基燦)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대리출산(代理出産)’ 신문광고 낸 처녀

     <로칼 뉴스>  “본부인 허가얻는 조건” 달고  충청도(忠淸道)가 고향이라는 조모양(21)이 얼마 전 부산일보(釜山日報)에 기묘한 편지를 보냈다.  조양은 아기가 없어 고심하고 있는 부부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제안을 해왔는데,『부모 형제도 없고 미인도 아니지만 남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식없는 집안의 대를 이어 주는 것이라 생각되어 』색다른 결심을 하게 되었다면서 자식없는 집안의 아이를 낳아 주겠다고 요청.  여기엔 반드시 본부인이 있어야 하고, 본부인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조양은 자신은 절대로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고 강조. <釜山日報>  생일 같은 3형제 잔치도 합동으로   실로 희한하게도 3형제가 7월21일 똑같은 날 출생하여 전북 전주(全州)에선 떠들썩한 화제.  해마다 7월21일이면 합동 생일 잔치를 벌인다는 전주(全州)시 중노송동(中老松동) 김재택(金在澤·51)씨 집안은 4남2녀 자녀 중 가진(佳鎭·21·전북대)군 덕진(德進·15·전주고) 의진(毅進·10·풍남(豊南)국민교) 등 3형제가 희한하게 같은 달, 같은 날 출생한 것.  이 절묘한 기술(?)에 대해서 김(金)씨 부부는 자신들도 잘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7월21일은 인류가 최초로 달에 도착한 역사적인 날이라면서 서기 2천년대에는 우주 가족들이 될 것이라고 껄껄. 3형제 모두 이목이 수려하고 공부도 남 못지 않게 잘해서 모두 탄복.  모두들 수고 많이 하셨읍(습)니다요. <전북신문(全北新聞)>  처자 버젓하게 둔 교사 처녀장가 들려다 들통   경남 진주(晉州)경찰서는 19일 진양(晉陽)군 모 중학교 교사 이(李·32)모씨를 혼인빙자 간음 혐의로 입건.  이(李) 교사는 처와 3명의 자식까지 둔 가장인데 금년 4월부터 김(金·24· 경남 마산시)모양에게『미혼자』라고 속여 결혼을 약속. 아무래도 이상히 여긴 김(金)양이 수소문해 본즉 기혼자임이 밝혀져 고소. 경찰에서『왜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사법시험을 다섯차례나 치르는 바람에 늦어졌다고 변명하더라』고 울먹. <경남매일신문(慶南每日新聞)>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약물을 빌지 않은 성병예방

    약물을 빌지 않은 성병예방

     보균자와 관계하는 경우라도 성병에 감염되지 않는 수도 있다. Y군의 경우는 보균자와 여러 차례 관계했으나 감염되지 않았던 희한한 케이스-.  18살 Y군은 시골에서 갓 올라와 일자리를 얻은 게 목욕탕의 때밀이였다. 답답하고 고된 일이었으나 하고 있느라니 엉뚱한 부수입이 그를 유혹했다.  하루는 이 목욕탕의 카운터를 보는 하이 미스 J양이 난생 처음 희한한 체험을 맛보여 주었다. 여자를 알게 한 것이다. 여건이 그렇기 때문에 둘은 늘 목욕탕을 이용했었다.  그러한 어느 날 J양은 Y군에게 한 숙녀 고객을 소개했다.『잘 해보라』며 두툼한 사례가 있을 것이라는 귀띔까지 했다. 그는 J양이 시키는 대로 독탕에 들어가 있던 숙녀의 때를 밀어 주고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J양의 말대로 댓가(대가)가 손에 쥐어졌다.  수입은 J양과 반분해도 제법 큼직한 벌이였다. 그러나 몇달쯤 지나고 보니 도저히 자신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Y군은 그 일을 그만두고 직장을 옮겼다.  어느 중국음식점의 배달원으로 들어갔다. Y군은 이 집으로 옮겨오기에 앞서 J양을 불러내 여관방에서 고별의 밤을 지냈다.  그런데 이틀째 일을 하던 날이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고름이 흐르고 심하게 따가왔(웠)다.  Y군은 이웃 의사를 찾아왔다.  미스 J도 곧이어 세균 검사를 받았다. 둘은 같은 진단이 나왔다. Y군은 몹시 의아해 했으나 그것은 교섭 직전에 질내(膣內) 깊은 곳까지 세척하고 교섭 직후 남자의 성기를 깨끗이 씻으면 보균자인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성병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욕탕에서 일할 때는 자연히 몸을 깨끗이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병을 예방하는 결과가 된 셈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임균은 매우 약한 균이기 때문에 섭씨 40~45도의 더운 물에도 쉽게 죽는다.  성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①성교 전후에 비눗물로 깨끗이 씻을 것 ② 난폭하게 하지 말고(상처가 생기면 그곳으로 병균이 들어오니까) ③ 성교 도중 키스를 삼갈 것. 매독균은 키스로 침입하는 경우가 많다. ④ 상대가 감염 우려가 있는 사람이면 24시간 안에 전문의의 조치를 받을 것 ⑤항생제를 남용하지 말 것 ⑥외입을 했을 때는 적어도 잠복 기간인 1주일 이상 부인에게 접근하지 말 것 등이다.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선데이기자가 본 호므런왕 행크 아론

    선데이기자가 본 호므런왕 행크 아론

     위대한 백인(白人)의 신화는 과연 흑인에 의해 깨질까? 지금 미국은 호므런(홈런) 7백개를 친「행크·아론」얘기로 온통 들끓고 있다. 선수생활 21년 동안 모두 7백14개의 호므런을 날린 전설적인 선수「베이브·루드」의 위대한 기록이 조용하고 겸손한 한 흑인 선수에 의해 도전받고 있기 때문. 뜨거운 한여름의 스타디움을 더욱 뜨겁게 만든「행크·아론」이란 과연 어떤 사내일까?   지난 7월2일 밤 3시, 기자는 외야석까지 빽빽이 들어 찬 2만3천여명의 관중에 섞여 어틀랜터 스타디움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요란한 함성을 들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고작 3천명의 관중밖에 모이지 않던 어틀랜터 스타디움이지만 올해는 꼬박 2만 가까운 관중이 몰려든다. 실상 이 구장의 주인인「내셔널·리그」소속 프로야구 팀「어틀랜터·브레이브즈」는 12팀 중 8위로 그리 인기가 없는 팀. 2만여명의 관중은 오직「행크」흑인 선수 한 사람만을 보려고 모여드는 것.  관중의 함성은 두 종류다.『해머링·행크!』(쇠망치 행크) 하며 새로운 호므런을 기대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배드·행크』(악당 행크)라고 소리 지르며 배트를 휘두를 때마다『지-』하는 야유를 보내는 축도 있다.  당자인「행크」는 말없이 조용히 타석에 들어선다. 6회말,「브레이브즈」는「마이크·럼」의「드리·런·호머」로「로스앤젤리스·다저스」를 5대4로 리드하고 있다. 1루엔 에러로 나간「에반스」가 서 있다.  「행크」는 열광하는 관중엔 아랑곳 없이 조용히 볼을 기다린다. 투 스트라익 원 볼에서 맞은 제4구는 인코스로 들어오는 드롭성의 약간 낮은 공.『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섰다. 공은「레프트·펜스」를 넘고「브레이브즈」는 7대4로 리드. 이 호므런이「행크」의 선수 생활 통산 6백93번째였고 울해 들어 20번째의 것.  「행크」는 열광하는 관중들에게 두어번 점잖게 인사한 뒤 그대로 덕 아웃에 들어갔다. 매너가 점잖기로 소문난「행크」다왔다.  「헨리·루이스·아론」. 올해 39살인 이 흑인선수는 앨러배머주「모빌」이란 작은 마을 태생으로 키 6척, 몸무게 82kg의 알맞은 체구다.  「행크」란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선수는 올해로 프로야구 선수생활 20년째. 72년부터 74년까지 3년동안 60만불을 받기로 계약한 미국 프로야구계의 최고액 소득자이며 생애 통산 타율 3할1푼1리. 호므런 7백개, 장타(長打·2루타 이상)에선 1천3백72개로「루드」의 기록인 1천3백77개에 불과 5개 처져 있을 뿐이다.  신화적 영웅인「루드」는 선수 생활 21년 동안 모두 7백14개의 호므런을 때렸는데 이것은 한해 평균 34개의 홈런을 때렸다는 얘기다.  「행크」가 매스컴을 타기 시작한 건 70년 5월17일 통산 3천개의 안타를 기록하면서부터 였다. 다음 해 4월27일엔 호므런 6백개를 기록했고 72년 6월10일엔 앞서가던「윌리·메이스」를 앞지르고 홈런 6백49개를 기록,「루드」의 기록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리곤 지난 7월21일 어틀랜터 스타디움에서 다시 7백개째의 호므런을 날림으로써 이제 14개만 더 때리면『위대한 백인의 신화』를 깨어버릴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되자『검둥이』가『위대한 백인』을 뛰어 넘는 것을 싫어하는 일부 백인 야구팬들은「행크」가 배터 복스에 들어서면 야유를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죽여버린다』는 협박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이런 일에 대해「행크」는 태연하다.  『나는 팬들의 협박편지보다는 상대방 투수와 신문 기자들에 더 신경을 쓴다. 투수가 내게 사구(四球)를 주어 걸려 보내면 호므런을 칠 수가 없고 신문 기자들은 공평하기 때문이다』고.  또 그는『내가 결코「루드」보다 더 위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을 따라 잡을 수 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실제로 일부 야구 팬들은「행크」가 7백14개의 호므런을 때려도「루드」보다는 못하다고 얘기하고들 있는데 그 까닭인즉「루드」가 선수 생활의 첫 4년을「보스턴·레드·속스」의 투수로 보내 이동안 호므런 9개밖에 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만약 투수가 아니고 이때부터 타자로 나섰더라면 기록은 8백대에 가까와졌으리라는 얘기들이다.  어쨌든 야구 사상『가장 위대한 선수』이고『야구 기록사상 캐딜락』이라고 불리는 호므런 7백14개는「행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건 사실. 남은 관심은 올해 시즌에「행크」가 과연 이 목표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  『올해에 30개만 치면 만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내년에 11개만 더 치면 되니까』  「행크」가 올 시즌 오픈때 한 얘긴데 이미 7백개를 돌파, 14개를 남겼을 뿐이니까「행크」자신의 계획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셈이다.「루드」는 34년에 7백7개를 기록했고 그 다음 해에 6개를 추가했다. 재미있는 것은 기록상의 비교다.「루드」가 7백개째의 호므런을 친 것이 34년 7월13일이고 「행크」는 73년 7월21일. 불과 7일이 늦었고 나이로는「행크」가 6개월 더 늙었다.  문제는「행크」의 건강인데 70~71년엔 무릎의 상처로 고전했으나 지금은 말끔히 나았고 체중도 71년에 89kg이던 것이 지금은 82kg으로 줄었다.  이 체중은「행크」가 처음「메이저·리그」에 출전하던 54년과 똑 같은 상태. 적어도 앞으로 2~3년은 더 현역 선수로 뛸 수 있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이런 건강 상태면「루드」의 기록을 깨는 것은 문제없고 과연 올 시즌에 깨느냐? 못깨느냐만 남았을 뿐.  검둥이 선수에 의해 남편의 기록이 도전받고 있는데 대해「루드」의 미망인은 태연하다.  『「행크」나 다른 사람이 남편의 기록을 뛰어넘어도 기억되는 건「베이브·루드」뿐예요. 첫번째니까요』  <어틀랜터=김창웅(金昌雄)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봉소아(bonsoir) 마담(3)=「스마일」의 박수연 마담

    봉소아(bonsoir) 마담(3)=「스마일」의 박수연 마담

     살롱이란 일반적인 객실 또는 응접실을 뜻한다. 프랑스에서는 사교적인 집이나 미술전람회 같은 것을 여는 장소를 살롱이라고도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다른 뜻없이 그저 술집으로 통한다. 칵테일 하우스나 스카치 코너 등과 함께 마담의 얼굴이 그대로 간판이 되는 살롱가 마담을 찾아 『봉소아(bonsoir)-』  서울 중(中)구 북창(北倉)동 11의 2. 조선호텔에서 덕수궁(德壽宮)쪽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두번째 골목.  살롱「스마일」의 마담은 박수연(朴洙蓮·30)씨.『위치는 괜찮은데 주변이 좀 지저분하지요? 일부러 찾아주시는 손님들에게 정말 미안해요』  몸에 밀착된 까만 롱 드레스가 무척 어울린다.  갸름한 얼굴에 시원한 눈매, 퍽 상냥스럽고 맑은 인상이다.  그렇게 뛰어난 미인이랄 것까진 없지만 누구에게나 포근한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줄 그런 얼굴이다.『「스마일」이 문을 연 것은 작년 5월이지만, 제가 맡은 것은 금년 2월부터예요』  원 주인 최우택(崔禹澤·52·대한요식협회 살롱분과위원장)씨가 경영하던 것을 동업 형식으로 맡았다고 한다.  『자본이 모자라서 실내장치도 남들처럼 화려하게 꾸미지를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박(朴)마담의 얼굴에 장식되는 웃음처럼「스마일」의 내부는 사실 소박할이(하리)만큼 꾸밈이 없다.  야트막한 칸막이로 가려진 8개의 독실, 카운터에 마련된 4개의 의자, 4인용 테이블 한 세트, 카운터에는 양주병과 양주잔이 진열돼 있고 꽃무늬 커튼이 벽을 가렸을 뿐, 그 흔한 외국영화배우의 사진 한장도 걸려 있지 않다.  꾸밈없는 살롱「스마일」의 실내, 그 속에서 오히려 주인 마담의 소박한 취미와 인간성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 흔한 속눈썹도, 아이섀도라든가 하는 시퍼런 눈 화장도 박(朴)마담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초라하지요?』  하기야「스마일」을 찾는 손님이 모두 소박한 것을 좋아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때로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손님이『살롱이란 게 뭐 이래, 시시하게-』한마디쯤 불평을 늘어 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朴) 마담이「스마일」을 맡은 지 5개월 동안 아직은 한번도 그런 손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술장사를 해 본 경험도 없고 남자를 대하는 솜씨도 없어요. 아마 마담 치고는 3등 마담일 거예요』  하루 매상고의 7할이 외상이라는 설명을 듣고 보니, 3등 마담이라는 자평(自評)도 어느 면에서는 옳을 지 모르겠다.  『다른 가게에서는 기껏해야 3,4할이 외상이라는데 저는 그렇게 안돼요』  외상이 많다 보니 자연히 손님은 단골이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니 술 마시러 오기보다 박(朴)마담과 잡담하러 온 손님이 더 많다고 한다.  『그래도 다 점잖으셔서 지난친 농담도 별로 없어요. 게다가 친한 손님은 제가 아기 엄마라는 걸 아시거든요』  전북 고창(高敞)이 고향인 박(朴)마담은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20살때 서울로 왔다.  어느 개인회사에 경리직원으로 3년 가량 근무하다가 부모의 권유로 결혼, 지금은 아기 엄마지만 남편과는 별거 중.  『그 이상은 묻지 마세요』꾸밈없는 웃음이 또한번 스쳐간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그 웃음은 한결같은 것인지, 결코 명랑하지 못한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도 처음과 다름없는 밝은 웃음이 가볍게 스치곤 한다.  12명의 호스테스를 거느리고 있는 박(朴)마담은 그들의 몸가짐에 대해서도 자신의 그것 만큼이나 신경을 쓰고 있단다.  『사실은 무리한 일인 줄 알아요. 젊은 여자들이 어디 그렇게 남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쉬운가요』  그래도 젊은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수긍할만한 논리다.  박(朴) 마담은 그러한 자기의 신조를 종업원 아가씨들이 가끔 못 알아줄 때가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럴 때는 할 수 없이 그 아가씨와의 인연을 끊습니다. 그리고 지나친 요구를 하는 손님에게는「나는 뚜장이가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말해주지요』  상당히 매서운 얘기를 하면서도 얼굴에는 예의 그 소박한 웃음이 또 살짝 스친다.  박(朴) 마담은 살롱「스마일」의 특징을 이렇게 소개했다.  『호스테스 차지를 절대로 따로 받지 않습니다. 다만 손님이 개인적으로 주시는 팁은 인정하지만 1천5백원에서 2천원을 넘지 못하게 합니다』  부당하게 주고 받는 팁이라는 것 때문에 술집 간판이 떨어지고 올라가고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믿어주셔도 좋고 안 믿어주셔도 좋습니다만 술값 바가지는 절대로 없읍(습)니다. 술집에서 마시는 술값이라는 게 처음부터 쌀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 집을 찾는 손님에게 터무니 없는 바가지를 씌워서 골탕먹일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말을 마치고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박(朴) 마담은 뒤늦게 생각이 나선지『그렇다고 다른 집에서는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빈 틈이 없다. 1시간 가깝게 얘기하는 동안 다른 방에서 마담을 찾는다는 전갈이 수없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일어서 봐야겠어요. 자주 좀 들러주세요』  또한번 꾸밈없는 웃음을 보여 주며 박(朴)마담은 롱 드레스의 앞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일어섰다.<재(宰)>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딸의 애인 밀고한 장물마담

    딸의 애인 밀고한 장물마담

     <말씀해 주신 분>  왼쪽부터 용산경찰서 현석각 형사4반장,진주철 형사, 김병국 330대장, 김윤호 형사1반장, 마희섭 형사  [제1화] 여대생을 사랑하다 징역살이 1년 한 똘만이  A=지난 주 잡혀온 서(徐)마담(49)에 얽힌 얘긴데-.  B=그의 딸을 사랑했던 똘만이 영철(永喆·가명·24)의 이야기군요.  A=서(徐)마담은 똘만이 서너명을 거느리고 있는 장물아비인데 그 중의 하나가 영철(永喆)이었거든. 마담에게는 H대학에 다니는 20살짜리 딸이 있었어요.  홍(洪)모양이라고 얼굴도 예쁘고 사근사근한 그 아가씨를 영철(永喆)이가 좋아했던 모양이라, 마담이 눈치를 챘어요···. 비록 자기는 도둑질 일지라도 대학까지 보낸 귀여운 딸을 일자무식이요 고아에다 도둑인 영철(永喆)에게 주고 싶지 않은 모정이 둘의 사이를 떼어 놓을 방법을 생각했는데 이게 좀 악질적이었다고 할까요.  C= 그래서 지난 해 영철(永喆)이를 밀고했었군요.  A=그랬어요. 아예 교도소에 보내 버리려고 그의 죄를 경찰에 밀고했었어요. 그래서 그는 특수절도 혐의로 1년을 살고 지난 주 나왔어요. 물론 자기를 마담이 밀고 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오는 길로 마담을 찾아갔지요. 그러나 마담은 그렇게 반기는 눈치도 아니고 또 마담이 자기를 고발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기회에 아예 도둑질에서 손을 떼겠다고 역 정보를 갖고 나에게 찾아왔어요.『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바로 그날 서(徐)마담이 다른 장물건으로 경찰에 잡혀와 있었거든요. 둘은 만났죠.  그 자리서 영철(永喆)이가 그러더군요.『언제고 홍(洪)양은 내가 정복할 테니 그리 알라』고.  D=그러니까···?  A=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게 서(徐)마담의 맞장구였죠.  영철(永喆)의 말이 걸작이야.『홍(洪)양의 등록금도 사실은 내가 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때문에 홍(洪)양을 자기 와이프로 삼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었어요.   [제2화] 포장준비까지 하고 신출귀몰한 유엔 빌리지 단골 도둑  D=외국인의 집을 골라 전자제품만을 털어온 전과 8범 안(安·51)모 이야기나 할까요.  E=안(安) 사장님 말씀이군요, 하하.  D=이태원 유엔 빌리지에 사흘이 멀다 하고 도둑이 들어 TV세트 등 고급 전자제품이 없어지는 통에 한동안 혼났읍(습)니다. 수법으로 봐서 3,4인조 절도단의 소행으로 보고 아무리 추적해 봐도 허탕이었어요. 잡고 보니 안(安)의 단독 범행이었는데 그 배짱 한번 좋더군요. 대부분 외국인들이 응접실에 귀중품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안(安)은 새벽에 담을 넘어 응접실에 있는 전자제품을 하나 하나 마당에 내어 놓고 미리 준비한 S상가 포장지와 노끈으로 차곡차곡 포장을 한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장충동 자기집으로 싣고 가는 겁니다. 만약 도중에 검문에 걸려도 그는 그 의젓한 정장차림과 신사다운 자세로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거예요.  집엘 가 봤더니 무지무지한 호화 주택에 피아노를 비롯 없는 것이 없이 다 갖춰 놓고 살고 있었어요. 동네에선 안(安) 사장으로 통하고요. 이렇게 훔친 물건을 일단 집 응접실에 진열해 뒀다가 며칠 뒤 장사꾼을 집으로 불러 싯가(시가)대로 다 받고 팔아 넘겼다는 겁니다.  그의 말을 빌면(빌리면) 아내에게는 밀수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나요. 경찰에 잡히고 나서 한다는 말씀이『나도 애국자입니다, 외국인 것만 털어 외화를 벌어들인 공도 좀 생각해 주셔야죠』하고 능청을 떨기까지 하더라니까요.   [제3화] 차삯 80원 들여 못받은 거스름돈 1원 찾아간 중학생  C=이건 새생활신고센터에 들어온 얘긴데요. W중학 2학년생인 박(朴·13·서울 영등포구(현 동작구) 흑석동)모군이 친구와 함께 학교 옆 H분식센터에서 콩국수를 먹었는데 거스름돈 1원을 안 주더라는 내용의 신고였어요.  A=1백원짜리부터 세금이 붙으니 세금을 안 내려는 장사아치의 얕은 수작이지요.  C=그래 식당 주인을 불러 조서를 받았더니 지금까지 늘 1원을 거슬러 주었는데 그날 따라 잔돈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 각서를 받은 뒤 훈방하고 말았는데 그 학생에게 미불한 1원을 받아 두고 학생에게 연락을 했죠.  그랬더니 버스를 두번 바꿔타고 왔다면서 1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학생은『1원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1원 때문에 우는 일이 생기며 자그마한 일이 귀찮다고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건 민주시민으로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고 어른 같은 말을 하며 기분좋게 가더군요.   [제4화] 정력이 유죄라 9번 교도소 신세진 초정력파  B=이건 좀 치사한 얘긴데 해도 괜찮을 지 모르겠습니다.  C=무슨 얘긴데?  B=초정력파 홍(洪)모씨의 이야기인데 그는 하룻밤도 여자없이 못사는 사람인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꼭 어린애들을 건드리려고 들어 탈이란 말입니다.  이 친구 어느 정도로 정력적이고 그 방면에서 기교가 있는가 하면 물론 본인의 말을 빈 이야깁니다만 밤거리 아가씨에게 일금 2천원을 지불하고 하룻밤 묵고 나오면 이튿날 아침 그 아가씨가 엊저녁 지불한 돈 2천원에 담배 1보루를 더 얹어 돌려주면서『다음 기회에 한번만 더 와 줄 수 없느냐』고 애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꼭 어린애를 건드리기를 좋아했단 말입니다.  지난 주에도 16살 난 어느 여직공이 귀가하는 길목을 지키다가 덮쳐 국부 파열상을 입혔지요.  그래서 미성년자 강제 추행 및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또다시 교도소로 가게 된 것이지요. 지금까지 8번이나 이와 비슷한 죄명으로 교도소 생활을 한 그였거든. 이번에 넘어가면서는『이번에 살고 나오면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합디다만 글쎄요, 믿을 수 있어야죠.  <정리 유창하(柳昌夏)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우리는 팬] 권투선수 유제두-배우 나오미

    [우리는 팬] 권투선수 유제두-배우 나오미

     「프로」권투 동양「미들」급「챔피언」유제두(柳濟斗·24·수도경비사령부) 선수는 영화배우 나오미의「팬」이다. 『연애교실』로「데뷔」하여 인기 상승 중인 나오미(22)도『권투라면 밥을 굶으면서도 꼭 봐야 하는 권투광』이며 유(柳) 선수의「팬」. 어느 날 나오미는 서울 신촌(新村)에 있는 유 선수의 체육관을 방문,「팬」과「팬」의 정담을 나누었다.  柳=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그전부터 연습하는 광경을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柳=언제부터 그렇게 권투를 좋아하셨나요?  나=아주 어렸을 때부터예요. 우리 집은 모두 권투「팬」이거든요. 오늘도 유제두(柳濟斗)씨 만나러 간다고 그랬더니 동생들이 야단이었어요.  柳=왜요?  나=같이 오겠다는 거지요.「미스터」유(柳)하고 사진을 같이 찍어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나요.  柳=그 동생들 다음 번에 모두 데리고 나오십시오. 내가 무료로 권투 지도를 해 주지요.  나=어머, 정말이에요?  柳=정말이지요. 동생이 몇명입니까?  나=지금 고등학교 3학년, 2학년 두명이에요.  柳=좋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두명 다 1류 선수를 만들어 놓지요.  나=그럼 난 어떡허(하)지요. 너무 미안해서-.  柳=제가 나오미씨를 좋아하니까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그보다 먼저 저 선수들의「스파링」하는 모습을 좀 보십시오.  나=어머, 어머 저 피. 아유 끔찍해.    柳=권투 구경을 자주 했다면서요.  나=그렇지만 저렇게 피투성이가 돼서 싸우는 건 처음 봐요.「텔레비전」에서야 어디 그렇게 자세하게 보이나요.  柳=저게 바로 권투라는 겁니다. 사나이들이 하는 운동이지요. 때리고 맞고 터지고 찢어지고. 그 고통을 정신력으로 이기면서 끝까지 상대방을 때려누일 때···.  나=그만하세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권투를 좋아한 건 아니니까요.  柳=물론 그러실 줄 알지만 진짜 권투가 어떤 것이라는 걸 좀 설명해 드리려고 한 겁니다. 나=「미스터」유(柳)는 언제즘 세계「챔피언」이 되시겠어요?  柳=오는 4월에 일본에 가서「타이틀·매치」를 가질 예정입니다.  나=일본의「와지마」선수가 현재 세계「챔피언」이지요?  柳=그렇지요. 잘 아시는 군요.  나=「미스터」유(柳)와 비교하면 어때요, 그 선수···.  柳=세계「챔피언」인 만큼 나에게 최대의 강적이지요. 그러나「테크닉」이나「펀치」는 오히려 내가 우세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읍(습)니다만···.  나=승산이 있다고 보시는군요.  柳=일단 그렇게 자신을 가져보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군요. 사실은 나도 나오미씨의 영화는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봤읍(습)니다.  나=뭐 뭐 보셨어요?  柳=『연애교실』부터 시작해서『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사랑하는 아들 딸아』『인왕산 호랑이』『홍살문』뭐 많지요. 꼬박꼬박 다 봤다니까요.  나=군에 계시면서 연습도 바쁠 텐데 언제 그렇게 다 보셨어요.  柳=솔직이 말해서 하도 얻어맞으니까 머리가 둔해져서 그런지 다른 취미라는 건 별로 없고 연습이 끝나면 극장 구경가는 게 그저 유일한 취미니까요.  나=그렇게 영화를 좋아하시는데 별로 좋은 연기를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柳=천만에요, 아주 잘 하시던데요 뭘.  나=「미스터」유(柳)가 올해에 세계「챔피언」이 돼 주신다면 나도 반드시 국내 제일의「톱·스타」가 돼 보겠어요.  柳=지금도「톱·스타」급인데 뭘 그러세요.  나=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올해에는 나도 꼭「스타」의 정상을 차지해 볼 생각이에요.  柳=틀림없이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나=감사합니다.  <재(宰)> [선데이서울 73년 2월 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100만원 현상(懸賞) 표지(表紙) 콘테스트

    100만원 현상(懸賞) 표지(表紙) 콘테스트

    「선데이 서울」은 연말연시「보너스」로 상금 100만원을 걸고 애독자가 뽑는 표지「콘테스트」를 218호부터 시작했습니다. 애독자 여러분이 직접 투표로 우리나라 최고의 주간지 표지를 뽑는 이 100만원 현상 표지「콘테스트」는 국내의 10대 유명「메이커」와 제휴하여「선데이 서울」이 애독자 여러분에게 드리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동안「선데이 서울」은 직업적「모델」이 아닌 직장의 여왕들을 표지 아가씨로 골라 소개해 왔읍(습)니다. 그러나 이번「콘테스트」는 본지가 고른 10대 유명「메이커」들과 유대를 맺고 있는 직업「모델」들을 차례로 소개, 이들 중에서 최고의 표지를 골라 내게 됩니다.  표지 촬영 역시 각「메이커」들이 유대를 맺고 있는 사진 작가들이 맡게 됩니다. 매호「퀴즈」와 상품이 주어지고 따로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이번 100만원 대현상 표지「콘테스트」에 애독자 여러분의 빠짐없는 참가를 기다립니다.  애독자 여러분은 매호 표지 아가씨가 낸「퀴즈」에 응모하시면 정답자 중에서 50여명씩을 골라 매회 해당「메이커」가 선사하는 상품을 드립니다.  표지「콘테스트」투표 요령과 시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투표 요령>  지난 218호부터 10대 유명「메이커」가 내놓은 표지 아가씨 10명이 매주 차례로 소개됩니다.  10명의 아가씨가 모두 소개된 뒤 결선투표를 실시합니다. (투표 요령은 결선 출제와 함께 발표) 이 결선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표지가 최우수작이 되며, 이 표지에 투표한 애독자들 중에서 1명을 추첨, 1등 상을 드립니다. 나머지 2·3등 및 행운상은 결선투표에 참가한 모든 애독자 중에서 추첨으로 결정합니다.  단 1·2·3등은 10차례의「퀴즈」중 6번 이상 응모하신 분에 한합니다.  <시상 내용>  1등=현금 20만원  2등=19「인치」TV(싯가(시가) 8만9천9백10원)  3등=14「인치」TV(싯가 6만2천2백35원)  행운상=결선투표 참가자 중 1백명을 골라 총 20만원 상당의 상품을 나눠 드림.  「퀴즈」상=매회「퀴즈」응답자 중 정답자 50명씩 5백명에게 상품을 드림.  최우수상 및 우수상=결선투표에서 1·2위를 차지한「메이커」에도 40만원 상당의 상장과 부상을 줌.  <응모 요령>  반드시 관제엽서에 응모권을 오려붙이고 빈칸을 채워 우편번호 100 서울 중구 태평로1가 31「선데이 서울」100만원 현상 독자계 앞으로 보내 주십시오.  정답을 맞히신 분 중 50명을 골라「락희(樂喜)화학」이 드리는 선물을 선사합니다.  ▲제6회 마감=1월 31일 본사 도착 ▲발표=「선데이 서울」제 226호 ------------------------------------------------------------------------  6번 참가자는「락희(樂喜)화학」나오미 양   100만원 현상 표지「콘테스트」의 6번 타자는「락희(樂喜)화학」의 전속「모델」인 영화배우 나오미 양(22).   나오미 양이 영화에「데뷔」한 것은 71년 봄, 신성일(申星一) 감독의『연애교실』에서다. 2년 남짓만에 나오미 양은 가장 장래가 기대되는「스타」로「점핑」해 왔다.  나오미 양 자신도『「데뷔」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 개봉을 앞둔『총각선생』(감독 최은희)을 비롯, 5편에 겹치기 출연 중.  나오미 양이「락희(樂喜)화학」의 전속「모델」로「픽업」된 것은 72년 3월. 그동안 주로「하이·타이」등 유지 제품의 선전을 위한「모델」로 일해 왔다.  『이국적인「마스크」를 가졌으면서도 우리 주부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 나 양의 특징입니다. 한마디로 측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이미지」를 풍긴다고나 할까요』  락희(樂喜)화학·금성사·호남정유·금성통신·금성전선 등「러키·그룹」의 선전 활동을 총괄하고 있는 장세순(張世淳) 선전사업부장의 나 양에 대한 총평.「러키·그룹」이 만들어 내는 상품은「플래스틱」품종이 워낙 많아 1만여종에 이른다.「러키·그룹」의 경우 1만여종의 상품 중 어느 하나를 골라 집중적으로 선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 결국 그동안의 선전 활동은「러키·그룹」에 대한「이미지」광고에 주력해 왔다. 이러한「락희(樂喜)」가 나 양을 전속「모델」로 기용한 이유는 연간 20억원에 이르는 화장비누 시장에서 으뜸의 시장율(률)을 확보하기 위해서.  화장비누를 직접 사는 것은 가정 주부가 대부분인데 이들에게 나 양의 비교적 발랄한 여성상으로「이미지」가 부각되어 있다고.  「러키」는 앞으로 전속「모델」이 일반에게 주는「이미지」를 더욱 신선하게 하기 위해 나 양의 앞으로 맡을 배역 등에까지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일 작정. 영화계에서 승승장구,「톱·스타」로의 길을 향한 나 양에게 아낌없는 뒷받침을 해 주겠다고 의욕이 대단하다.  홍익대 공예과 중퇴인 나오미 양의 본명은 정영일(鄭英一). 162cm 키에 46kg의 몸매다.  6남4년 중 4째. 순두부를 좋아하고「볼링」120의 실력.  요즘은 전자「오르간」을 만지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다. 너무 바쁘기 때문에『결혼은 생각도 못하고 연애라도 한번 했으면 하고 생각할 짬』조차 없단다.<표지 촬영 김한용(金漢鏞)> [선데이서울 73년 1월28일 제6권 4호 통권 제224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흙 없는 독도(獨島)로 흙 싣고 녹화원정(綠化遠征)

    흙 없는 독도(獨島)로 흙 싣고 녹화원정(綠化遠征)

     한국의 동쪽 끝, 독도에 흙을 싣고 들어가서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다. 울릉도 토박이인 정종태(鄭宗泰·37)씨.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독도에 울릉도산 나무를 심어 다시는 더 독도가 일본의 땅이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한국판「엑소더스·송」의 주인공이 엮어내는 감동이 얽힌 이야기-.    독도에는 현재 0명의 파견 경찰관만 살고 있다. 이들의 근무 기간은 한달씩. 매달 울릉도의 경찰관들이 교대로 독도에 들어가서 섬을 지키고 있다.(경찰관이 교대로 독도에서 근무하지만 기사를 쓴 당시에는 잠시 근무자가 없었다는 뜻)  독도는 섬 전체가 기암절벽. 나무 한 그루는 커녕 풀 한포기 없는 바위섬이다.  이런 섬에서 한달씩 지내야 한다는 것은 여간 큰 고역이 아니다. 독도를 찾아드는 손님이라곤 갈매기뿐. 어쩌다 길 잃은 물개가 올라오는 수도 있지만 이것은 1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횡재.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 한대가 있어 소일거리가 되었는데 그만 안테나가 비바람에 꺾어져 고장이 나고 말았다.  또 독도는 나무 뿐아니라 물도 없는 섬. 물이라곤 한방울도 나지 않기에 식수를 울릉도로부터 실어 날라야 하고 이것이 동이 나면 빗물을 받아 마셔야 한다.  이런 독도를 찾아 해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바로 정종태(鄭宗泰)씨. 정(鄭)씨는 3대째 울릉도에 사는 토박이로 해산물 위탁판매상. 울릉도 근해에서 무진장으로 잡히는 오징어와 미역 등을 도시에 내다 팔고 있다.  정(鄭)씨가 독도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지난 해부터. 독도에는 나무가 뿌리를 내릴 한 줌의 흙도 없기에 울릉도에서부터 흙을 싣고 들어가서 심어야 했다.  『왜 독도에 나무를 심느냐구요? 아, 요즘에도 일본 사람들이 독도가 저희 땅이라고 헛소리를 한다지 않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다시는 이런 얘기가 입밖에도 못 나오게 해마다 독도에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제 꿈입니다』  72년 5월, 정(鄭)씨는 50그루의 울릉도산 향나무를 독도에 심었다. 이중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 10그루. 독도 경비원들은 만 1년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안절부절이었다(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한다. 10그루가 살아 남은 것은 이들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기적. 정(鄭)씨는 올 4월 또 50그루의 향나무를 싣고 들어가 독도에 심었다.  『한 그루만 살아 남아도 좋아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가서 나무를 심겠읍(습)니다. 그러다 보면 독도도 나무로 뒤덮이지겠지요. 내 생애에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 아들이, 그래도 안 되면 내 손자가··· 언젠가는 독도도 푸른 섬이 될 수 있겠지요 』  정(鄭)는 현재「울릉도 애향회」회장. 울릉도 애향회란 울릉도 토박이의 청년 25명이 모여 만든 모임. 울릉도 주민 2만7천여명이 하나같이 잘 먹고 잘 사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이색 모임이다.  사실상 정(鄭)씨는 오징어 장사보다「애향회」일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 형편, 독도에 나무를 심고 도동항을 청소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나서고 있다.  애향회 회원 25명의 공통점은 서울·부산 등지의 육지에 나가 공부를 하고 돌아온 왕년의「유학생」이라는 것.  고향에 돌아온 이들이 모여「애향회」를 만들었고 그 첫 사업이자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독도에 나무 심기』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독도가 푸르러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울릉도에서 신근수(申槿秀)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노총각 하청일 간호원과 짝자쿵

    노총각 하청일 간호원과 짝자쿵

     가수 하청일(河淸一)이 간호원 아가씨와 지금 데이트 중이다.『가을쯤 결혼하게 될 지도 모를』만큼 무르익은 연애다. 서수남(徐守男)과 함께 인기 듀엣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청일(河淸一)은 지금 31살. 그의 데이트 상대 이청옥(李淸玉)양은 25살, H대(大) 부속병원 무 중. 한여름 하오 이들의 랑데부 현장을 잡고 본즉-.  7월 말, 하청일(河淸一)이 서울 퇴계로의 한 살롱에서 젊은 아가씨와 찻잔을 기울이면서 한쌍의 잉꼬처럼 정다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기자와 시선이 맞부딪치자 그는 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에 멋적은 미소를 띠며 옆의 아가씨에게 눈짓을 했다.『미스 리』라고, 은근한 말투로 기자한테 소개했다.  수줍은 듯이 고개만을 떨구고 있던 이(李)양은 간신히 고개를 약간 들며 모기 만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를 했다.  -실례지만 어떤 사이인가요?  하청일(河淸一)은『특별한 사이는 아니고 그저 아는 사이』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웃음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눈치였다.  그렇게 얼버무리려는 표정이 스스로도 못마땅했던지 곧 수정했다.『결혼 여부는 좀더 두고 봐야 결정될 것 같지만 교제 중인 아가씨인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청일(河淸一)이 소개하는 신부 후보생 이청옥(李淸玉)양은 25살에 서울 토박이이고 71년도에 W의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아가씨. 현재 H대학 부속병원의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도 이름 가운데 자인「청(淸)」자가 같다.『그것도 인연이 아니겠느냐』며 하청일(河淸一)은 연방 싱글벙글.  -두분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4월이에요. 작은 아버지(하청일의 숙부가 H대학 교수) 소개로 이(李)양과 선을 보게 되었죠. 먼저 양가의 어른들만 만나 양측의 의견을 나누었어요. 그 다음에야 우리의 순서로 말하자면 맞선을 보았답니다』  결과는 부모나 당사자나 별로 다른 이의없이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일단 OK쪽으로 기울었다는 얘기.  양가 부모님들의 엄격한 중매 절차를 밟아 알게 된 이들은 곧바로 데이트에 들어갔다. 서로를 좀더 상세히 알 수 있는 탐색전에 들어 간 셈.  주위의 눙을 피하느라고 자주 만날 수 없었고 만나는 장소도 눈에 잘 안 띄는 차속. 주로 드라이브 하면서 교제에 들어갔다.  -교제해 본 결과는?  『이(李)양은 내가 오래 전부터 찾고 있던 바로 그런 여자 같아요』하청일(河淸一)은 짐직 의젓한 얼굴 모습을 지으면서 이(李)양의 칭찬을 했다.  『은근히 설득력이 있는 말솜씨와 차분한 행동에 마음이 끌렸다고 할까요』  과분스러운 칭찬이라고 느꼈던지 이(李)양은 무안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얘기를 시켜보았다.  -하청일(河淸一)씨의 어느 모가 좋은가요?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연예인 티가 안나는 거』라고 입을 열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둥글둥글한 인상 그대로 성격이 원만하고 연예인 티가 전혀 흐르지 않는 것 같아요. 저한테 원채 잘해 주어 그런지는 몰라도 현재까지는 아무런 불만을 느껴보지 못했어요』이(李)양의 말에 하청일(河淸一)은 연방 벙글벙글-.  당사자끼리 말하는 태도나 선을 볼 때 양가 부모들도 OK쪽으로 기울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의 결합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인상이다.  그러나『결혼은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결정될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결혼을 한다면 10월쯤에 할 생각이에요. 아직도 3개월이나 시일이 남았는데 만약 그 안에 어떻게 될 것인지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 아녜요. 서로가 실수없이 하기 위해서죠』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하청일(河淸一)이 선뜻 결혼한다고 단정지어 밝히지 못하는 이유라고.  그렇다면 만약에 그 안에 어떤 일로 인해 양가 부모가 반대한다면 당사자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둘이 모두가『부모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입장』이라는 대답이다.  두 집안이 철저하게 완고하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니까 이들의 결합은 당사자보다 부모들에게 더 결정권이 있다는 인상이다.  이(李)양은 소띠이고 하청일(河淸一)은 양띠. 궁합 같은 것은 아예 보지도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천생배필이라고 말한다는 귀띔.  -결혼을 한다면 결혼 후에 하청일(河淸一)의 연예활동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 또 이(李)양은 직장엘 그대로 나갈 것인가 하는 물음에 이(李)양이 먼저 말을 꺼낸다.  『한번 잡은 직업을 쉽사리 바꿀 수 있겠어요. 연예인이든 무엇이든 자기가 잡은 직업에 충실하며 보람을 찾아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하청일(河淸一)의 동의를 구했다. < 걸(杰)> [선데이서울 73년 8월5일 제6권 31호 통권 제25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조영남 제대 날짜 손꼽는 윤여정…결혼식 올해 안넘길 듯

    조영남 제대 날짜 손꼽는 윤여정…결혼식 올해 안넘길 듯

     조영남(趙英男)과 윤여정(尹汝貞)이 결혼하리란 소식. 두 사람의 관계는 전부터 잘 알려진 사이였지만 육군에서의 제대를 5개월 앞둔 조(趙)이기에 결혼이 구체적으로 무르익은 것.  『아직 날짜를 잡거나 하진 않았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스타」가 중매를 섰다는 둥 집안 누구가 중매를 섰다는 둥 하는데 터무니없는 얘기예요. 걔(尹양은 趙군을 이렇게 부른다)와 새삼스럽게 언제 결혼하자 하는 것도 쑥스럽죠』뭐 다 아는 얘기 아니냐는 것.  『6월 말 아니면 7월 초에 제대한대요. 제대하자 마자 식을 올릴지 어떨지 어떻게 알아요? 아무 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그런데 올해 26살이 된 윤(尹)양이고 보면 두 사람의 결혼은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막연히 추측해 왔던 것이 그녀의 입을 통해『결혼은 영남(英男)이와』라는 사실이 후련하게 밝혀진 셈. [선데이서울 73년 2월4일 제6권 5호 통권 제225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