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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진정한 승자는 한국’

    “고요제(後陽成)천황을 북경으로 옮길 것이니,준비를 해주었으면 좋겠다.…천황에게는 북경 주변의 10개 영국(領國)을 헌상할 것이다.…너를 중국 관백(關白·왜의 최고 직위)에 임명한다.수도 주변의 100군데 영국을 줄 것이다.…조선의 국왕에는 기후(岐阜)의 재상을 앉힐 것이다.” 왜군이 서울에 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5월18일 중국 점령도 머지않았다며 ‘망상과 공상’을 담아 조카인 히데쓰쿠(秀次)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30여년 동안 일본에 머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국립진주박물관이 펴낸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만 장원철 번역)는 그의 ‘일본사’에서 히데요시와 임진왜란에 관한 부분만 발췌했다.히데요시의 편지도 이 책에 실려 있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왜군(倭軍)의,그것도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편에서 바라보았다.일본인들에게 인기 있는 히데요시는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로…극도로 오만했으므로 누구나 싫어했다.”고 평가절하한 반면 조선침략의 선봉에 선 고니시는 영웅적으로 묘사했다.히데요시가 천주교를 탄압한 ‘이교도(異敎徒)’였던 반면 세례명이 ‘아고스티뇨’인 고니시는,스페인의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전쟁이 한창인 조선 땅으로 초청할 정도로 독실했다는 사실이 한몫했을 것이다. 프로이스의 기록도 임진왜란의 승자가 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프로이스에 따르면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파죽지세로 조선군을 격파했지만,곧 어려움에 처했다.조선군은 처음에는 왜군을 두려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전력을 다하여 과격하게 저항했다.식량을 수송하는 군사들은 매복한 조선 병사들에 ‘약탈’당하기 일쑤였다.조선 수군도 일본 배를 발견하면 곧바로 습격하여 ‘해적질’을 했다.크고 견고한 조선 배는 왜군 것을 압도했으며,조선군은 해전에도 훨씬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왜군의 성채가 하루에 오갈 수 있는 거리마다 만들어졌음에도,300∼500명의 병력조차 기습이 두려워서 오가기가 어려웠다.당시 일본에서는 먹지도 않던 옥수수로 연명하면서,추위와 물기에 약한 짚신으로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던 왜군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중국으로의 원정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명나라의 원군은 고시니로 부터 평양성을 탈환하는 등 전투력도 강했다.중국인은 천성이 나약하여 왜군이 나타나기만 해도 도망갈 것이므로 쉽게 중국까지 점령할 수 있다는 인식은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일부 왜구(倭寇)가 중국의 해안지대를 노략질하면서 평생 무기를 잡아본 적이 없는 중국인의 무리를 쉽게 물리친 것을 두고 오판한 것이었다. 결국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속내는 조선을 점령하여 일본내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프로이스는 해석한다.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선 땅을 영지로 나눠주고,일본 땅은 자신의 가신으로 채운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도서출판 부키.1만 6000원. 서동철기자 dcsuh@˝
  • [오늘의 눈] 시민 외면한 시민단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과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최근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다양화가 진전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비정부기구(NGO)가 아닌가 싶다.역할과 권한의 확장만큼 이들 단체에 거는 시민의 기대치도 높다.그러나 현실에서 드러나는 인식차이는 NGO의 역할을 둘러싼 사회 구성원의 공감대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20년 남짓 가정폭력을 휘두른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노모(46·여)씨의 사례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노씨의 두 딸과 이들을 도운 선교사는 기자에게 “가장 서운했던 것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생색만 내는 것이었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16일 집행유예 판결 직후 한 여성단체는 ‘승리’를 자축하듯 환영 성명을 냈다.하지만 노씨측은 “이 단체를 포함해 4,5곳의 단체가 사건 초 변호사 비용 등의 명목으로 300만∼500만원씩 요구했다.”고 주장했다.반지하방과 봉제공장을 오가며 생계를 꾸리던 노씨와 가족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었다.두 딸은 “자포자기 하듯 변호를 받지 않을 테니 돕겠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실제 도움은 전혀 없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정작 변론은 언론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한 변호사가 무료로 맡았다. 이에 대해 해당 단체들은 “우리 역할과 성격을 오해한 것”이라면서 “취약한 재정기반으로 변호사 비용 등을 부담하기란 무리”라고 항변했다.대신 성명서 발표,기자회견 등으로 여론을 환기시켜 판결에 일조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무료 변론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무섭다.”는 노씨 가족의 절규는 내내 기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이들의 소외감도 감싸주고,시민사회단체의 도덕성도 살릴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는 없는 것일까.사회 전반의 내실있는 성숙과 조화를 기대해 본다. 채수범 사회교육부 기자 lokavid@
  • 폭력남편 살해 아내·딸 호흡기 뗀 아버지 “法은 관대했지만 마음은 늘 감옥에…”

    가치 상실과 혼돈의 시대를 맞아 우리의 가정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가정폭력과 불치병 치료에 따른 가계파탄에서 헤어나기 위해 남편과 딸을 살해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이들은 역설적이지만 “가족을 지키고 싶다.”고 절규한다.이웃 중의 하나일 수 있는 이들의 가슴속에 담긴 고통과 회한을 들어보며 다시한번 사회와 가족의 뜻을 되새겨본다. “그냥 언젠가 하느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이제 가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술을 마시고 자신과 두 딸의 생명을 위협하던 남편을 살해한 노모(46)씨와 희귀병을 앓던 딸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 숨지게 한 전모(50)씨.지난 15일 이례적으로 둘다 집행유예를 법원에서 선고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외부와의 일절 연락을 끊었던 이들은 18일 기자와 만나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여전히 마음의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법원은 노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전씨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면서 “피고인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할 형편이고 범행경위 등을 참작했다.”고 밝혔다.숙박시설과 집 등으로 돌아온 이들은 그나마 가정에 대한 지푸라기 같은 미련과 의지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 ●고통의 나날 계속되는 ‘비극의 가정’ 노씨와 두 딸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지난해 10월 사건 이후 세상 사람의 눈을 피해 이들은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서울 은평구 쉼터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어렵게 접촉한 큰딸 최모(24·전문대 졸업 예정)씨는 “우리 세 식구는 모두 심신이 피폐한 상태”라며 자신들을 돌봐주고 있는 원 베네딕트(37)선교사를 만나보라고 했다.원 선교사는 2001년부터 청소년 선교재단을 통해 최씨와 동생(22·대입 준비중)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이들을 위로해왔다. 원 선교사는 “두 자매는 사건 뒤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고,노씨는 정신적인 고통과 지병인 자궁암·협심증으로 구치소에서 사경을 헤맸다.”고 전했다.노씨가 수감된 석달 동안 두 딸은 하루도 빠짐없이 구치소 면회를 다녔다.노씨는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지만치료비는 물론 생활비조차 막막하다.유일한 재산인 집을 내놨지만 소문 탓인지 사려고 나서는 이가 없다.친척들도 ‘남편과 아버지를 죽였다.’며 인연을 끊었다. ●‘아버지가 쫓아오는 꿈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최씨가 그동안 원 선교사에게 보낸 수십통의 이메일에는 가족의 참혹한 삶이 담겨 있다.“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쉼터로 처음 도망간 날,아버지가 칼을 들고 쫓아오던 꿈이 갑자기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랐다.그냥 다 놓고 쉬고 싶다.”(2003년 4월4일) “‘다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뿐’이라는 아버지의 눈빛이 너무 무섭다.”(5월16일) “화장품이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두껍게 바르면 아버지께 엊어맞은 눈밑의 멍이 잘 안보인다.”(7월22일)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썼다가 스스로 놀랐다.”(9월29일)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다.”(10월9일)….10월 26일 새벽,어머니는 술에 취해 두 딸을 칼로 찌르겠다고 위협하는 남편을 흉기로 살해했다. 원 선교사는 “사건 발생 전 법원이 남편에게 접근금지 처분을 내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면서 “남성중심적인 법과 의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이런 불행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어 “이 사건으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노씨의 큰딸은 다음달 전문대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 중이다.둘째딸은 지난 연말 대입 수능을 치렀다.이들 자매는 “우선 어머니와 가정을 지키고,앞으로 언젠가,누군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그래도 희망은 역시 가족” 서울 용산구 후암동 전씨의 집 앞에는 쓰레기봉투에 담긴 수북한 담배 꽁초와 빈 소주병이 널려 있었다.몇차례나 거절하다 겨우 말문을 연 전씨는 “아직도 내가 딸을 왜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느냐.”면서 “더 이상 세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떨궜다. 전씨는 “5년 넘게 딸아이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아내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돼버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퀭한 전씨의 얼굴에는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지난 98년 15살의 딸은 경추탈골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택시운전을 그만두고 집까지 팔아 2억여원을 치료비로 쏟았지만,딸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고 빚만 1억원 가까이 지게 됐다.지난해 10월 12일 전씨는 딸의 인공호흡기 전원을 직접 껐다. 전씨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가족을 죽여야만 했던 심경을 어떻게 얘기한들 세상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면서 “이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은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되뇌었다. 유영규 채수범기자 whoami@
  • 부고/원일한 연세대 이사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던 원두우(元杜尤·H.G.Underwood) 선교사의 손자 원일한(元一漢)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가 15일 오후 11시2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87세.원 박사는 1917년 10월 서울에서 태어나 미 뉴욕 해밀튼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해 1939년 연희전문학교 영어 강사로 연세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한국전쟁 때는 미 해군 대위로 참전,휴전 회담 때 유엔측 수석통역관을 맡기도 했다.한미협회 부회장,대한성서공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유족으로는 부인 원성혜씨와 한광·한옹·한석씨 등 3남이 있다.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지고 빈소는 연세대 루스채플에 마련됐다.발인은 19일 오전 10시.(02)2123-2003.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4)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

    1898년 10월29일 종로 네거리 운종가 광장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다.외세의 국권 침탈위기에 맞서기 위해 정부 대표자와 민간인 각 계층 대표자가 한 자리에 모여서 국정개혁 원칙을 민중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결정된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다짐을 하자는 큰 모임이었다.이 모임은 거리에서 관민이 함께 참여하여 벌이는 한국 최초의 합동토론회였다. 오후 2시.광장에는 황국협회,황국중앙총상회,순성회,협성회,광무협회,진신회,친목회,교육회,국민협회,진명회,일진회,보신사 등 각 사회단체들이 모였다.순성회 부인들,각 학교 생도들,시전상인들,맹인,승려들,백정(白丁)들,정부부처 관료 및 신사들이 청첩장 받은 순서대로 참석해 있었다. ●무어에 세례받은 백정 만민공동회 연설자로 오후 3시.대회장인 윤치호가 먼저 만민공동회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사말을 했다.곧이어서 군중은 만세를 불러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질서유지에 힘썼다.그런 다음 만민공동회의 개막연설자가 단상에 올랐다.회의장은 순간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해졌다.연단으로 올라서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개막 연설자로 지명된 사람은 놀랍게도 백정 신분이자 새뮤얼 무어 목사한테서 세례받은 곤담골교회 박성춘(朴成春)이었다.박성춘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이에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저 차일(遮日)에 비유컨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심히 견고합니다.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적에 보답하고 국조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 회중은 연설을 끝낸 박성춘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고,연단 아래 모였던 수십명의 백정들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만세를 불렀다.이 광경은 여러 날을 두고 장안의 화제였다.박성춘,그는 이날의 연설로서 독립협회 주요인물인 안창호,서재필 같은 큰 인물들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민족자립을 논의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무어 목사는 한국에 온 이듬해인 1893년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었던 곤담골에다 교회를 열고 곤담골교회라 이름을 지었다.교회에는 마을 아이들을 위한 예수교학당을 함께 열었다.무어 목사는 늘 길거리에서 한국사람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아이들을 예수교학당에 보내라고 권했다.그 마을에 살던 박성춘이라는 백정도 무어 목사라는 사람의 진실된 성품이 싫지 않아서 그의 아들 박서양을 주일학교에 보냈다. 그후 박성춘은 발진티푸스를 앓아서 죽게 되었다.박서양은 주일학교에 나와서 아버지 병을 낫게 해달리는 기도를 하면서 울었다.이를 본 무어 목사가 그 까닭을 물었고 박서양은 아버지의 병환의 위급함을 말했다.무어 목사는 박서양을 돌려보낸 뒤 급히 다른 선교사를 만나러 갔다. 고종황제의 어의(御醫)인 에비슨(Oliver R Avison)을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황제의 전문의사에게 천민보다 더 핍박받는 계급 백정을 진료해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설혹 에비슨이 승낙한다 하더라도 그런사실을 정부 대신들이나 서울의 양반들이 알게 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에비슨은 무어 목사의 간곡한 청을 듣고 망설이지 않았다.무어 목사의 눈에 백정들의 참담한 생존이 가장 시급한 구원의 대상으로 비쳤듯이 에비슨의 눈에 비친 무어 목사의 행동은 천사로 비쳤기 때문이다. 두 명의 선교사들이 백정 박성춘을 찾아왔다.박성춘이 완쾌할 때까지 두사람의 발걸음은 계속되었다.박성춘은 임금님의 주치의가 자기 같은 천민을 치료해주기 위해 누추한 곳까지 와준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완치된 뒤 그의 자식들 모두를 주일학교에 보낸 그도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어 같이 설움받고 사는 백정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그런가 하면 큰아들 박서양이 의학을 공부하여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치료해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키웠다.박서양은 결국 1899년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면서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 무어 목사는 한국식 이름을 지었다.모삼열(牟三悅).소울음소리 모(牟)자를 즐겨 쓴 이유는 백정들의 애환과 고난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1895년 박성춘은 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곤담골교회는 교인 20명의 제법 뜻있는 교회로 자리잡아갔다. ●“양반전도 어렵다” 선교사들 불평·비난 받아 그 무렵 첫 차별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교회에 나오던 양반 신도들이 발길을 끊는 일이 생긴 것이다.사정을 알고보니 양반 신도들은 백정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심지어는 백정 같은 천민도 예수를 믿으면 죽은 뒤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백정이 가는 천당이라면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양반 신도도 있었다.백정이 믿는 하느님과 양반이 믿는 하느님이 동일하다는 것은 곧 양반을 능멸하는 짓이며,더욱이 한 교회 지붕 밑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천당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도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며 뉘우치는 이들이 생겼다.그들은 무어 목사에게 새로운 제의를 했다.자기들을 앞자리에 앉게 하고백정들을 뒷자리에 앉도록 좌석을 구별해준다면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무어 목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후 1904년 지금의 인사동으로 옮겨 1905년 승동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한국 기독교사상 가장 뜻깊은 역사를 간직한 교회의 하나가 되었다. 박성춘이 교인이 된 뒤 무어 목사는 에비슨 박사와 함께 뜻을 모아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1895년에서 189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정에 탄원서를 냈다.이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졌다.비로소 백정도 한국의 국민 자격을 얻어 호적에 오를 수 있었고 일반인들처럼 갓도 쓰고 두루마기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백정들은 머리에 갓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외출할 때에는 패랭이를 쓰고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디서나 한 눈에 백정 신분임을 드러내도록 했다. 2차대전 이전 독일의 유태인들이 가슴에 노랑색 별을 달고다녀야 하듯 했고,인도의 최하층 노예신분인 수드라가 항상 황토색깔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것과 같았다.그러다가 갓을 쓸 수있다는 법령이 공포되자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령을 발표했을 때 기뻐했던 흑인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도높은 기쁨이 한국 전역의 백정들을 울부짖게 만들었다.어떤 백정은 하도 좋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갓을 쓰고 살았던 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철도공사장 노동자 인권침해' 日에 항의 이와 같은 선지자적인 무어 목사의 행동은 많은 선교사들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서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이들은,교회가 백정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면 양반들에게 전도하기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에는 교회가 성장하는데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는 불평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또한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들을 교인으로 전도해야만 교회의 위상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실익이 생길 수 있지만,백정 같은 천민들이 아무리 교인으로 많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은 별로 커지지 않는다고 했다.백정들의 인간해방 운동을 위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아무 의논도 없이 임금에게 탄원서를 낸 것은미 국무부 정책을 위반하여 다른 나라 정치와 관습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899년 12월 무어 목사는 고종황제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알렌 공사로 하여금 주선해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그때 무어 목사는 한국의 백정들에 대한 인권탄압 정책과 제도를 혁파해달라는 요구를 고종황제에게 해볼 결심으로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거절당한 뒤 할 수 없이 문제의 그 편지를 직접 고종황제에게 보냈고,그로하여 알렌 공사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무어 목사는 아내의 건강이 몹시 쇠약해져 1902년부터 1년 동안 미국의 고향에서 요양을 끝내고 1903년 9월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그 무렵 무어 목사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어했다.알렌 공사와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천민이나 서민들보다 양반과 부자,귀족들에게 주로 선교활동을 펴면서 백정선교에 집중하는 무어 목사를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는데 지쳐갔다. 그는 살림도 할 수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장만하여 ‘기쁜 소식(The Glad Tidings)’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작은 어촌과 섬,그리고 한강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마음 속에서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런 중에 일본 군용철도 공사장에 강제로 동원된 한국 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일본영사관에 제기했다.일본영사관에서 아무런 반응을 안보이자 일본군의 잔혹행위를 고발하는 성명서를 해외선교부에 보내 도와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1906년 전도여행길서 병얻어 46세로 사망 그때 무어 목사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인들에게 그토록 짓밟히면서도 민중봉기가 없는 것은 한국인들이 수탈과 억압에 너무 익숙해져 인간의 혼이 죽어버린 탓이 아닌가 하고 통곡했던 적도 있었다.그때부터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자유사상을 고취시켜 나간다면 장차 인간의 혼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한국인을 사랑하던 무어 목사는 1906년 전도 여행길에서병을 얻어 그해 12월22일 세브란스병원에서 46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의 백정을 사랑한 인권의 은인이자 인간해방의 참뜻을 가르친 위대한 사도였다.그의 인권사상은 그가 죽은 지 16년 뒤인 1922년 백정해방운동으로 되살아났다.
  • [정동주 역사문학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3)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

    “대황제 폐하께,나 새뮤얼 무어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만약에 황제폐하께서 폐하의 신하들과 함께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신다면 저를 불러주시길 황송한 마음으로 바라옵니다.” 한글로 적힌 이 편지는 겉봉에다 ‘코리아의 황제,서울시(The Emperor of Korea,City)’라 적고 그 안에 넣어져 우체통에 있었다. 이 편지는 고종황제께 전달되지 않고 내무부 관리의 손에 들어갔다.그 관리는 편지를 보낸 이가 그즈음 한창 한국의 백정(白丁)들에게 설교하는 일로하여 미국선교단과 서울 주재 외교관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새뮤얼 무어라는 사람임을 알았다.그 관리가 보기에 무어 목사는 불손하기 그지없었다.감히 일개 외국선교사가 사사로이 고종황제에게 편지질을 한 것은 크게 비난받을 무례한 짓이라는 공식 불평과 함께 그 편지를 미국 공사 알렌(H,N,Allen)에게 다시 보냈다. ●“무어는 정신이 건전치 못한 사람 같다” 편지 겉봉의 수신인은 ‘코리아의 황제’,수신인의 주소를 ‘서울(City)’이라고 적은 것은 우습기도 하고 기발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편지를 검토한 알렌 공사는 미 국무부에 보낸 공문서에서 “이런 겉잡을 수 없고 무례한 선교사는 공사관 영창에 가둬야 옳다.”고 했다.그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는 “무어라는 괴짜 선교사 한 사람을 감금시키겠다고 협박할수밖에 없다.”고 했으며,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Ellinwood)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무어 목사는 가장 어렵고 귀찮은 사람이며 내가 언젠가 그를 ‘미친인간’으로 보지 않으리라 장담 못하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 ‘정신이 건전치 못한 사람’같다.”고 썼다. 또한 “무어 목사가 고종황제를 만나겠다는 것은 그의 백정들(his butchers)을 인정받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며,‘정신 상태가 건전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서 공사관에 관계된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의 보호뿐만 아니라 무어 목사같은 괴짜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선교사 거류지를 차라리 부산,인천,원산과 같은 개항지로제한하는 것이 좋겠다.”고 까지 썼다. 알렌 공사는 1900년 가을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서,앞으로 무어 목사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알렌 공사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재한 미국인 거류민으로서 어울리는 행동을 하겠다는 서약을 받도록 했다.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는 회의록을 미국공사관에 전달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무어 목사는 이 통고를 받은 뒤 몹시 괴로워하다가 “내가 미국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나의 상관에게 매우 버릇없이 말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는 사과편지를 알렌 공사에게 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지을 수 있었다. 알렌 공사의 말대로라면 “무식한 토박이 글쟁이가 썼기 때문에 무례한 글”이었으나 무어 목사는,“그 편지는 지도를 받아 가장 존대하는 말로 썼으며,편지 겉봉의 표기가 잘못되어서 불손하다는 항의를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본의가 아니고 이 나라의 관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며,불손한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다만 황제폐하와 그가 다스리시는 나라의 현재와 영원한 복락을 염원해서 쓴 것이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비단 이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민 계급의 대명사이자 가장 탄압받고 사는 백정들에게 기독교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과 평등의 참뜻을 깨닫게 하기 위한 선교활동으로 인하여 알렌 공사와 무어 목사 사이에는 비난과 해명의 편지가 여러 차례 오고 갔다. ●1900년 서울 외교관들 화제의 주인공 무어 목사는 참기 어려운 마음의 괴로움을 선교본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편지로 토로했다.“나와 같은 사람을 파괴시키기 위해 알렌은 그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느껴집니다.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증오한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알렌에게 품었던 미워하는 감정은 몇 주간이었고,그 폭풍은 벌써 지나가버렸습니다.아마 누군가가 특별히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1900년 한해 내내 서울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단연코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던 무어 목사는 그때 40세였다. 새뮤얼 무어(Samuel F.Moore,한국 이름 모삼열·牟三悅)는 1860년에 태어나서 1906년에 이 세상을 떠났다.그가 한국에 온 것은 1892년 9월19일 제물포를 통해서였다.시카고 부근 그랜드 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889년 몬타나대학(College of Montana,현재 이름은 RoCky Mountain College)을 마치고,매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892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대학시절 학교 근처 감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렬하게 외쳤고,신학교 시절에는 경찰서 유치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그해 9월 로즈 엘리(Rose Elly)와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 선교사가 되어 두 달 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15년동안 한국에 살면서 아들 셋,딸 하나를 모두 한국땅에서 낳아 길렀다.딸은 무어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내의 복중에 있어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죽은 뒤에도 한국땅에 묻혀서 우리와 함께 살지만,그가 떠난지 10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한국인은 그토록 그가 차별받은 사람들을 붙들고 절규했던 인간평등과 사랑을 많이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다. ●3년만에 한국말로 완벽하게 설교 그는 한국에 온 뒤 빨리 한국말을 익히기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그 당시 선교사들은 정동이나 연동에 모여 살았다.신변의 안전과 가정생활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국인 마을에서 서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빼어난 언어감각으로 한국이 온지 반년이 채 못지나서 한국말로 주기도문을 유창하게 외웠고,간단한 기도는 거뜬히 할 수 있었다. 3년 뒤 그는 수원의 한 교회에서 한국말로 설교를 했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한국 서민이 사용하는 말로 교인들을 감동시킨 나머지 한 교인이 미국에서도 목사들이 한국말을 쓰는지 묻는 바람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한국사람이 양복만 입은 것 같다는 한국인들의 그에 대한 칭찬은 그의 한국말 솜씨가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생활 대부분이 한국인들과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 그의 말은 서민들의 생활언어여서 서민이라면 누구하고도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그즈음 미국의 선교사위원회에서는 선교활동을 돕기위하여 선교사들에게 ‘한국어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토록 한국말을 잘하는 무어 목사는 그 시험에서 늘 낙제점수를 받았다.이유는 사뭇 엉뚱했다.그 시험에서는 서울 양반계층들이 사용하는 유식하고 고급스러운 말들만 물었기 때문에 무어 목사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선교위원회에서는 무어 목사에게 양반의 고급 교양어를 배우도록 권고했다.무어 목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민중을 가르치려면 민중과 호흡해야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섬기고 싶은 것은 평범하고 진실된 한국 서민들이며,그들을 위하는 길은 양반들의 고급스러운 말을 이용한 성경운동 보다는 그들의 가난하고 낮은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그들의 마음이 되어서 그들의 눈과 가슴으로 인간이 평등해야 하는 까닭을 설명했다.자유를누리기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들의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 보다 현명한 것은 없다고 했다. 감리교의 초기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G.Appenzeller) 목사는 어느날 무어 목사가 어느 교회앞 길거리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국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적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민중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민중의 습속을 생활하면서 민중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이런 그의 진지하고 애정어린 태도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갖게 했고,향기롭게 새겨진 그의 인상은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남아 있다. 그의 집은 늘 한국 서민들로 북적거렸고,항상 그는 길거리에서 서민들을 만나 세상사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좋은 이웃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인의예지가(仁義禮智家)라 칭송했다. 오늘,같은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을 차별하는 저 천하에 몹쓸 지연,학연,혈연이 만든 질병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무어 목사를 그리워한다.
  • [씨줄날줄] 서울역

    “나는 복순이가 아니에요.복순이는 죽었어요.내 이름은 엘레나.김 엘레나예요….”어린 시절 숱하게 듣던 남보원 원맨쇼의 단골대사 한토막이다.복순이는 개발붐이 한창이던 60∼70년대초 서울역 무작정 상경파의 대명사쯤되는 여인.돈이 넘쳐나던 시절 유흥가 인기마담으로 입신,성공은 했지만 지지리도 못 먹고 못 입고 못 배웠던 어릴 적 생각,눈에 걸리는 동생들,배신한 애인생각에 술만 들어가면 이렇게 홀로 타령하는 것이다.상경 소년소녀를 꾀는 엉큼한 포주,호객꾼,소매치기,암표상,매혈꾼,광장의 선교사들….지난 시절 서울역전을 장식해온 주인공들이다.IMF위기 이후 노숙자들이 가세했지만 그 풍경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새해 첫날 환한 대형 유리건물의 고속철 서울역사가 문을 열면서 한많은 서울역 풍경도 함께 마감될지 모르겠다.대형 쇼핑몰과 함께 위용을 드러낸 새 역사는 마치 국제공항 대합실을 연상시키듯 너무 화려해 옛 서울역전의 주인공들이 머물기에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역사가 처음 들어선 것은 1900년 8월,염천교 아래 논 한가운데 10평 남짓한 목조건물이었다.첫 이름은 남대문정거장.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선 33㎞의 출발역이었다.경성시민들은 ‘불을 먹는’쇠덩어리 괴물의 등장에 기절초풍들 했다고 하니 그 문화충격이 가히 짐작된다.지금의 르네상스식 붉은 벽돌건물은 이후 서울인구가 30만명으로 늘어나 새 역사가 필요해진 1925년 준공됐다.일본 건축가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했고 설립주체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당시 동양 제1역은 도쿄역,제2역은 경성역이라고 했다 하니 대단한 건축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을 착취하려는 일제의 야욕이 숨어있는 부끄러운 유물이기도 하다.다행히 1919년 9월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신임 일본총독 일행에게 폭탄을 던져 의거한 곳이기도 하니 부끄러운 역사만 있는 자리는 아니다.1988년 대합실이 현대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지난 80여년간 서울역의 얼굴은 이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이었다.이 건물이 문화관으로 바뀌고 대신 활시위를 상징하는 역동적인 초현대식 고속철 역사가 들어섰으니 또 한 시대의 자리바뀜이 이렇게 해서 이뤄지는 모양이다. 이기동 논설위원
  • ‘날인없는 유언장’ 500억 법정공방

    날인 없는 유언장을 놓고 500억원대 법정공방이 벌어지게 됐다. 연세대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1월 숨진 김운초 전 사회개발연구원장이 학교에 예금 120억원을 포함,전재산을 증여하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했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돼 유족과 법적인 공방을 벌이게 됐다.”고 밝혔다.연세대는 “97년 작성된 유서는 고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고,우리은행 대여금고에 보관됐다가 최근 유족이 예금을 인출하려는 과정에서 공개됐다.”면서 “고인이 학교에 증여할 뜻을 밝힌 만큼 예금에 대한 권리는 학교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연세대는 김 전 원장의 유족이 낸 예금청구소송과 관련,최근 서울지법에 ‘독립당사자 참가’ 신청을 냈다.‘독립당사자 참가’란 타인끼리의 소송에 제3자가 당사자로 소송에 참가하도록 한 민사소송법 조항이다. 김 전 원장의 유족은 “유언장에는 고인의 서명 날인이 없어 법적인 효력이 없으며,유족에게 1차적인 상속권한이 있다.”며 은행을 상대로 서울지법에 예금반환 소송을 냈다. 연세대가 이날 밝힌 김 원장의 예금은 우리은행 97억여원,외환은행 23억여원 등 120억여원이다.연세대는 김 전 원장이 보유했던 부동산 등을 포함하면 총 자산규모는 5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김 전 원장은 세계기독교봉사회 최수열 선교사와 함께 지난 85년 서울 화곡동에 그리스도신학대를 설립했고,모교인 강남대에 3억원을 쾌척하는 등 사회사업에 큰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연세대 관계자는 “고인이 기여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기독교계 대학인 연세대가 세계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큰 돈을 선뜻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박지연기자 anne02@
  • 작가 정동주씨가 들려주는 작품방향/“응달에 가려진 역사의 진실 찾아낼 것”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은 그의 작품에 슬라브인의 고통만을 주로 담아냈습니다.소수민족의 아픔은 감춰져 있지요.러시아의 한인들,즉 ‘고려사람’들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 사대주의’ 노선으로 함몰해 들어갔습니다.마치 일제시대 친일로 목숨을 이어간 사람들처럼…” 작가 정동주씨는 95년 러시아 한인들의 신산한 삶을 다룬 책 ‘카레이스키,또 하나의 민족사’를 펴내며 이렇게 쓸쓸한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다.1930년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한인들의 운명이란 그야말로 시베리아 곳곳에 나뒹구는 자작나무 잎새 같은 것이었다. 작가는 서울신문에 연재할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을 이야기하면서 10여년전 러시아 한인 취재 때의 심정을 들려줬다.글쓰기라면 두려움이 없을 법한 그이지만 이번 연재에 임하는 각오는 그만큼 비장하고 가슴이 설렌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중적 독서풍토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꼽는다면 아마 신화와 팬터지의 유행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특히 그리스 로마신화가 널리 읽히면서 어린 학생들도 창과 방패를 든 아테나 여신이나 강력무쌍한 영웅 헤라클레스 같은 신화 속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형상을 그릴 수 있을 정도이지요.하지만 그 태곳적 서양의 신화가 ‘지금,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달빛에 물들어가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눈을 떠야 합니다.” 예컨대 운주사 천불천탑의 의미를 새겨보기보다는 그리스 파르테논의 폐허에서 낭만을 찾으려는 태도가 앞선다면 그것이 문화사대주의요 정신적 식민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그가 앞 뒤 꽉 막힌 문화적 국수주의자의 기미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우리 것,옛 것에 대한 맹목적인 향수야말로 곧 잊혀질 추억에 불과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는 따뜻한 체온과 숨결이 남아 있는 숨겨진 역사의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정사(正史)에서 부정하는 혹은 아예 치지도외하는 것이지만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온 유산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역사적 진실’이 아닐까요.진실은 발굴돼야 합니다.” 그는 때로는 야사(野史)가정사보다 진솔함을 믿는 편이다.우리는 흔히 야사를 풍속이나 전설,유언비어 쯤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 않다.정사의 결함을 보완하고 오류를 시정해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사보다 당대의 시대상을 더 잘 반영하기도 한다.정사의 눈가림 탓에 흔적도 없이 사장돼 버린 역사의 순간들을 작가는 진실에 육박하는 힘찬 글로 퍼올린다.그러면 고증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나는 학문적 엄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학자가 아닙니다.하지만 혹시라도 고증 노력을 소홀히 해 실감의 부피를 줄이는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낭만적 거짓이 역사의 진실을 가릴 수는 없으니까요.나름의 ‘비장의 자료’들이 축적돼 있습니다.‘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을 통해 보다 많은 독자들이 역사적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고 사유의 깊이를 더했으면 합니다.” ●‘인간해방'에 관심… 백정들 민권운동 조명 작가의 관심사라면 무엇보다 대하소설 ‘백정’‘민적’ 등의 작품을 통해 보여줬듯이 뿌리깊은 신분차별의 극복 문제다.역사의 바깥으로 쫓겨나 서성이거나 웅크리고 있다가 이내 잊혀져버리는 이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사뭇 눈물겹다.댓가지로 만든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초가에서 살며 짐승을 잡거나 버들고리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비단옷을 입어서도 말을 타서도 디새집에 살아서도 안됐던 사람들,호적도 없고 아예 인구에서조차 제외됐던 사람들.이들이 다름아닌 백정이다.“백정은 우리 봉건역사의 최대 희생자입니다.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은 곧 민권운동이었고 근대적 사회변혁운동의 원천이었습니다.백정으로 상징되는 신분차별을 극복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여성에 대한 성차별,지역차별,학력차별 등 인간에 의한 인간의 온갖 차별은 모두 선민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작가는 이번 연재를 통해 1923년 일제하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진주 형평사운동을 다시 한번 조명할 작정이다.“형평사 창립을 주도한 진보적 백정 출신 장지필과 양반출신 강상호라는 두 인물이 벌인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립은 한국 사회사상사의 흐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한국 사회운동의 원류가 된 셈이지요.” 작가는 ‘백정문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역사의 응달에 가린 인물들의 공적을 찾아내는 가외의 소득도 올렸다.초기 기독교 선교사에서 거의 잊혀진 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에 관한 자료를 접하게 된 것이 그 한 예다.“무어 목사에 의해 기독교에 입문한 백정 박성춘은 1898년 조선의 백정을 대표해 종로 만민공동회에 참석,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지금의 인사동인 개장수골의 한 교회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을 주도한 것도 백정계급이지요. 순수한 기독교 정신이 이러한 운동의 씨앗이 됐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에서 새롭게 다뤄진다.물론 한국인권해방운동사라는 관점에서다.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의 알맹이를 빚어내는 또 하나의 질료는 불교다.작가의 불교적 사유의 도저함은 최근 출간한 ‘부처,통곡하다’라는 책을 통해서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새벽 세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산과 들판,바닷가에서 기도를 올리며 청정수행에 드는그는 불교신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불교생활실천자라고 하는 표현이 옳다.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는 훼손된 불상을 볼 때마다 내 가슴에서는 의혹의 불길이 솟습니다.조선왕조 오백년이 배불(排佛)의 시대요 억불(抑佛)의 시대였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쉽게 생각한다면 역사에 정말 무책임한 일이지요.나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소설가이지만 모든 현상을 실증적인 눈으로 읽으려고 노력하는 쪽입니다.”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에는 과연 어떤 불교 이야기가 담길까.“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은 오묘한 문양에 있습니다.더이상 탑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를 풀지 못한 채 신비의 영역에 가둬둘 수는 없어요.” 작가는 지금 그 무늬의 숨겨진 뜻을 풀어내기 위해 천불천탑과 절절한 밀어를 나누고 있다.“천불천탑의 비밀이 드러날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의 첫 편은 거대한 논쟁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생활문화 뿌리 찾는데도 애정 듬뿍 작가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인 ‘인간의 해방’ 문제 못지않게 우리 생활문화의 뿌리를찾는 일에도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차살림',찻그릇의 미학 같은 주제다.“한국 차살림에는 정체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하는 작가는 일본에서 역수입돼 형식에만 신경을 쓰거나,중화주의에 짓눌려 스스로 중국 차에 종속돼 온 우리의 차문화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한다.“우리 차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일본의 다도와 그 원류인 한국의 차살림을 비교해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도 매우 긴요한 일이지요.” 그는 “차예절은 기교나 기술이 아닌 정신의 깊이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도 덧붙였다.‘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은 한국 차살림의 중흥조인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동다송’,조선 전기 문신인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일할 때 차밭을 만들어 농민의 다세(茶稅) 부담을 덜어준 이야기 등을 다룬다. 국인의 혼과 한,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넓고 깊다.그는 마당극 운동을 하다가 82년 ‘농투산이의 노래’라는 시집을 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해 전국 순회공연까지 펼친 민족극 ‘진양살풀이’는 80년대 마당극운동의 이정표가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런가 하면 미술평론가로도 이름을 날렸다.특히 우리 민족색채인 오방색에 관한 연구는 유명하다.그래서인지 그가 좋아하는 화가는 강렬한 색채의 내고(乃古) 박생광이다. “박생광의 ‘동학 전봉준’이나 ‘무당’ 같은 작품에서는 왠지 민족의 자신감과 희망을 느끼게 됩니다.”“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으며,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는 내고의 예술관과 그의 문학관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우리 조상의 얼굴은 곧 인디언의 얼굴 작가는 요즘 새 연재물 집필을 앞두고 “한국의 ‘원주민’,즉 원래의 우리 얼굴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유난히 자주 한다.“고대 한국인들의 삶과 사고방식,습속은 인디언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다.”며 “인디언의 얼굴은 곧 우리 조상의 얼굴”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자신의 장시 ‘순례자’에 문명비판시라는 평을 달아준 영문학자 김우창 교수를 인생의 멘토로 삼고 있다는 그는 일찍이 김 교수가 자신에게 ‘인디언학’을 공부해보도록권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작가가 쓰고자하는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은 인디언에 관한 기록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주류에서 비껴난 ‘달빛의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작가가 강조하듯 ‘인간해방’이라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빛의 역사,문화의 새벽’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있는 에세이로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
  • 문화 단신

    지난달 13일 입적한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청화 스님의 사리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청화 스님 49재를 봉행 중인 성륜사 문도회는 3일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고 사리도 공개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사리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며 “스님의 사리는 49재를 봉행한후 부도탑을 조성해 인연있는 사찰에 봉안한다.”고 밝혔다.청화 스님 사리는 지난 2일 서울 광륜사에서 삼재 봉행에 앞서 공개할 예정이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길자연)는 미수교 공산국가인 쿠바와 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선교 교류를 시작했다. 한기총은 최근 박천일 총무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세계선교회(GMS) 관계자들이 쿠바기독교총연합회(CIC) 초청으로 쿠바를 방문,CIC측과 선교사 교환 등 교류 협정을 체결했다고 3일 밝혔다. 한기총은 이번 쿠바 방문 중 내년 4월 한기총 대표회장을 포함한 한국교회 대표단과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의 면담을 제의받았다.한기총도 이에 응답형식으로 3명의 쿠바 국회의원을 포함한 쿠바 교회 대표단 12명을 초청할 예정이다.
  • “이라크 파병원칙 불변”

    정부는 이라크에서 한국인이 피격됐지만,이라크 파병 원칙은 그대로 지키기로 했다.또 민간인에 대한 테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에 따라 강력히 대처하기로 했다.전투병 파병 비율을 당초 계획보다 늘리는 등 추가조치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1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 이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NSC 오찬회의를 잇따라 갖고 이같은 방안들을 검토했다. ▶관련기사 2·3·4·8·9·22면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3000명 추가파병’방침 철회를 요구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강해지고 있어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 대통령은 이날 “그동안 테러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해 왔고,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면서 “특히 이번 사건은 군대가 아닌 민간인을 상대로 한 것으로,민간인 테러는 더더욱 용납해서는 안 되는 비인도적 행위”라고 말했다.노 대통령은 “정부는 부상자 치료와 사망자 시신운구에 각별히 협조하고,교민보호에 한치의 빈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달라.”고 지시했다.윤영관 외교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라크 파병문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면서 “파병한다는 기존 방침은 변화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윤 장관은 “정치상황이 불투명하지만 내부지침에 따라 예정대로 파병논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상사 주재원과 선교사 등은 가급적 철수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재건업무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민간업체의 철수 여부는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위로서한을 보내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달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도 윤영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희생자들에 대한 심심한 애도의 뜻을 보냈다. 한편 이라크에서 테러로 부상한 이상원(41)씨와 임재석(32)씨 등 오무전기 소속 직원 2명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외교부가 밝혔다. 신봉길 외교부 대변인은 “당초 부상자들을 독일 남서부 란트스툴 소재 미군 병원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상태가 호전돼 이라크 자마라 소재 미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씨는 다리 관통상을 입었고,임씨는 머리에 충격을 받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전했다.테러로 현장에서 사망한 김만수(45)씨와 곽경해(60)씨 등 2명의 시신도 이 병원에 안치돼 있다. 외교부는 3일 정용칠 아중동국 심의관과 재외국민 영사국 직원을 바그다드로 추가 파견할 예정이다. 곽태헌 김수정기자 tiger@
  • [나의 건강보감] 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장 인요한 박사

    “사냥에는 저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습니다.1895년 처음 이 땅을 밟으신 저의 진외증조부(아버지의 외조부) 유진 벨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사냥을 했습니다.그 분들에게 사냥은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이자 이 땅 구석구석을 이해하는 길이었습니다.” 연대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장 인요한(44) 박사.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그를 ‘외국 사람’이라고 한다.금발에 파란 눈,체격도 110㎏이 넘으니 그럴 수밖에.그러나 마주보고 인사 한마디라도 나눈 사람치고 그를 외국인이라고 우길 사람은 없다.확실히 그는 ‘벽안(碧眼)의 한국인’이다. ●진외증조부 이후 5대가 109년간 한국생활 그의 가족은 5대 109년동안 이 땅을 지키며 살고 있다.그와 그 가족들이 이 땅에 씨뿌려 가꾼 사랑이라는 이름의 나무는 어느새 웅숭깊게 자라 그 허구한 세월을 과실처럼 매달고 우뚝 서있다.3대의 조상이 이 강산에 혼백을 묻었음에도 우리에게 더 건 그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저는 한국과 한국인에게서 받은 게 참 많습니다.이 땅에서 이국의 선교사 아들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자라 교육받고 또 이렇게 병마의 고통을 더는 구원의 일까지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딨겠습니까?”그러면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할지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이런 그에게 사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땅과 이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는 값진 지침’이다.그래선지 사냥이라면 밥먹다가도 숟가락을 놓는다.“최근엔 가족들이 전남 보성에서 사냥 휴가를 보내고 왔어요.일주일동안 꿩만 열댓마리 잡았지요.”사냥을 위해 여름 휴가를 미뤘다가 수렵장이 개설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가 보성의 산야를 훑고 왔다.네살난 막둥이는 물론 부인 이지나(41)씨도 사냥을 즐겨 최근 수렵 면허시험을 치르기도 했다.해마다 수렵장이 개설되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못가도 스무번은 사냥길에 나선다.“매년 번갈아 순환수렵장이 열리기 때문에 해마다 고을 하나씩을 섭렵할 수 있다.”며 덩치가 집채만한 그가 좋아라 웃는다. 그는 사냥을 ‘단순한 살생’으로 보는 시각에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지금처럼 먹이사슬이 붕괴된 상태에서 사냥은 생태계의 건강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그렇다고 그가 오로지 사냥에만 매달리는 건 아니다.그는 산,그중에서도 지리산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 천번넘게 찾아 “제가 지리산을 오른 횟수는 줄잡아 천번이 넘을 겁니다.보통은 수렵기가 끝나는 3월부터 10월 사이에 가는데,사연이 있습니다.”그와 지리산의 인연은 깊다.진외증조부 이래 그의 조상들은 지리산에서 지난한 선교의 영적 힘을 얻었는가 하면 종교적 근신을 하곤 했다. 또 지리산은 그의 선조가 콜레라 등 풍토병을 피하는 피난처이기도 했다.지금도 노고단과 왕시루봉 인근에는 이 땅의 고단한 선교 역사를 증언하는 이들 유적이 남아 있어 그들이 살았던 세월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전 강보에 쌓인 젖먹이때부터 이곳을 찾기 시작했어요.그 후 세상에 걷어 차이고 사람 때문에 울고 싶을 때마다 이곳을 찾아 묵상에 들곤 합니다.묵상 속에서 다시 용서와 화해의 힘,그리고 고난을 이겨내는 용기를 얻곤 하지요.”이를테면 인 교수 가족에게 지리산은 영혼의 안식처이자 그들이 하릴없이 엎어지지 않도록 건강을 준 어머니의 품같은 곳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아픔이 하나 있다.누군가 그곳에 선대의 희생을 모욕하듯 ‘이 곳은 무엇을 했던 곳일까요?’라는 제목의 안내판을 세운 것.제목 밑에는 선교사들이 마치 외세의 전위대인 것처럼 써놓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이 대목에서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 선조는 일제로부터 고종 황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고,폐교와 추방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신사 참배를 거부했으며,3·1운동 때는 일제의 학살 만행을 알리기 위해 사선을 넘었습니다.또 저는 부끄럽지만 광주민주화 운동때,그 처절한 살륙의 현장을 지키며 외신 기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다 추방되기도 했고요.전 감히 말합니다.역사는 온당하게 읽어야 한다고.”그 안내판은 그후 슬그머니 철거됐다. ●젓갈없으면 밥 못먹는 ‘진짜 한국인' 인 박사는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순천에서 보냈다.1895년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진외증조부 유진 벨 남장로교 선교사와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아버지 휴 린튼에 이어 그와 그의 자녀들까지 5대가 이 땅을 지키며 산다.처음 한국땅에 들어올 때 유진 벨은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한 전남 지역을 택해 그 소외의 땅에서 눈물겨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이런 선조의 고난을 두고 “그 분들은 이 땅에 간과 쓸개,혼까지 아낌없이 바쳤고,나는 그 분들의 음덕으로 편하게 사는 셈”이라고 회고했다.그러나 그 역시 선대가 그랬듯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진외증조부가 이 땅에 들어온지 100년이 되는 지난 95년 둘째형 스티브 린튼과 ‘유진벨 재단’을 설립,북한돕기에 나섰다. 처음에는 식량을 지원하다가 지금은 결핵 퇴치사업에 주력하고 있다.그들 형제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 지난 6년동안 북한에 물경 300억원이 넘는 의약품을 지원할 수 있었다.이 약품으로 북한의 결핵환자 15만명을 치료,이 가운데 13만여명이 완치됐다며 흐뭇해 했다. 그는 틀림없는 한국인이다.이 땅에서 오래 살았다거나 이름을 바꿨대서가 아니라 한국인과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식사는 한국식으로 합니다.양식은 한두끼만 먹어도 질리는데,한식은 안그래요.젓갈 양념에 버무린 김치와 청국장,보쌈을 모르고 사는 서구인들,불행해요.한번은 뉴욕엘 갔어요. 기내식에 질려 도착하자마자 우래옥이란 한식집을 찾아갔는데,그곳에서 먹었던 알탕 맛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유진벨재단 설립 北에 의약품 300억 지원 젓갈이 없으면 밥을 못먹고,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으며,사람을 좋아해 틈만 나면 달려나가 술판을 벌이기 일쑤인가 하면 ‘연세세브란스는 내 모든 것’이라는 한국적 연고의식,그러면서도 북한돕기의 열정을 감추지 않는 심지까지 가진 그가 한국에서 주변인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담소 말미에 덧붙인 그의 얘기는 우리에게 자괴스러운 부끄러움이었다.“북한을 오가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분단의 상처가 이렇게 큰데,지역이 다시 갈려 있다는 건 우리 민족의 건강성을 해치는 고질입니다.이젠 청산해야죠.” 심재억기자 jeshim@ ■사냥 건강예찬 “사냥만 한 스포츠가 어딨습니까?자연과 교감하며 몸과 정신을단련하는 것은 물론 스트레스도 물에 씻은 듯 털어냅니다.골프처럼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주색잡기처럼 몸이 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종종걸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사냥터를 누볐다.벌써 초등학교 5학년때 할아버지에게서 20구경 외대 단발총을 넘겨받아 품고 잤던 일도 생생한 기억.젊어서는 훌치기 총인 레밍턴 870을 사용하다가 5년전 거금 200만원을 들여 이탈리아제 베넬리123 자동연발총을 구입했다. 사냥에는 사냥개도 필수.아버지 대까지는 포인터종을 사용했으나 그는 냄새가 싫어 포인터 대신 영국산 코커스패니얼을 택했다.사냥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절대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열혈 헌터’답게 그의 사냥건강론은 막힘이 없다.“가장 멋진 매력은 이 땅의 곳곳을 내 눈으로 살피며 애정을 키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알다시피 사냥은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대자연 속에서 지향없이 걷고 뛰며 야성과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그뿐이 아닙니다.표적을 쫓아 격발하는 순간,세상의 모든 일들을 말끔히 잊곤 하죠.” 전국의 수렵장을 돌며 생경한 풍경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즐거움도 무시하지 못한다.더러 희귀 조수류와 만나는 것도 기쁨이다.최근에도 오소리와 산까치를 봤다고 자랑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탓에 그의 사냥원칙은 철저하다.아무리 그럴듯한 표적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안전핀을 풀지 않는다. 보호 조수를 지키는 일도 그의 몫.평소 보호 조수를 머릿속에 담아 실수로라도 그것들을 살상하지 않는 철칙을 어긴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바이러스성 간병(肝病)이 번져 야생토끼의 개체수가 줄고 있다며 수의사에게 원인 규명을 의뢰할 만큼 그는 지킬 것은 지키는 사냥꾼이다. 심재억기자
  • 한국인 2명 이라크서 첫 피살

    |김수정기자·바그다드 외신|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에서 30일 한국인 기업체 직원 4명이 피격돼 이중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외교통상부가 발표했다. 이라크전 이후 첫 한국인 희생자가 발생함에 따라 한국인에 대한 테러 우려가 현실화돼 앞으로 한국군 추가 파병에 대한 논란도 한층 더 뜨겁게 전개될 전망이다. ▶관련기사 2·3·8면 외교부는 사망자 신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들이 한국 기업체 직원들이며 이들이 탄 승용차가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의 고속도로상에서 피격돼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부상자 2명은 서울 소재 오무전기(대표이사 서해찬)에 근무중인 이상원씨와 임대식씨로 밝혀졌다.현재 미군 병원에서 치료중인 임씨는 소생 가능성이 있지만 이씨는 생명이 위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이광재 아중동국장은 30일 밤 “손세주 주이라크 대사관 대사대리가 전해온 바에 따르면 사상자들은 미국 회사의 하청을 받아 티크리트 인근에서 송전탑 공사를 하던 오무전기 직원들”이라고 밝히고 “이 회사 직원 20여명이 바그다드 모호텔에서 묵고 있었으며 이날 티크리트로 가던 중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오무전기는 서울에 본사가 있으며 대표인 서씨도 현재 이라크에 체재중이다. 서씨의 부인은 이날 새벽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직까지 남편으로부터 연락받은 바 없다.”면서 “그러나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상원씨와 임대식씨는 남편 회사 직원이 맞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사고 직후 바그다드에 체류중인 주 이라크 한국 대사관 직원이 사고현장에 급파돼 시신 수습 및 부상자 치료 등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이라크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은 대사관원과 KOTRA·국제협력단(KOICA) 직원,선교사 등 30여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이라크에서 복구지원 활동중인 일본 외교관 2명과 스페인군 장교 7명이 29일 오후(한국시간 30일 새벽) 이라크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피살되는 등 복구지원 참여국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공격이 자행되고 있다. 일본 외교관들은 바그다드 북쪽 500㎞에 위치한 티크리트 부근에서 일본 대사관 차량으로 이동중 피격됐다. 이들은 티크리트에서 개최될 예정인 이라크 재건회의에 참석하는 길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존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재천명했다.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상도 “테러에 굴하지 않겠다.”고 말해 자위대 파견방침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스페인 정보장교들은 일본 외교관 피습과 거의 같은 시각 바그다드 남쪽 18㎞ 마흐무디야에서 게릴라들의 매복공격을 받아 7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했다. 이들은 2대의 민간 차량에 나눠 타고 고속도로로 이동중 매복공격을 받았다.현장에서 매복하고 있던 게릴라들은 휴대용로켓발사기(RPG)와 소총을 발사했으며 이후 20여분간 양측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고 스페인 국방부가 발표했다. 현장을 목격한 스카이뉴스 TV 취재진은 “이라크 주민들이 시신을 발로 차고 춤추며 후세인을 연호했다.”고 전했다. 한편 30일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 2명이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에서 매복공격을 받고피살돼 11월중 미군 사망자 수는 모두 79명으로,지난 3월 이라크전 개전 이래 월별 최고 사망자 수를 기록했다. crystal@
  • 한국인 테러 현실로 파병 격론 불가피/ 이라크 한국인 피격 파장

    30일 밤(한국시간)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인 2명이 테러 단체의 피격으로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날 밤 10시쯤 로이터 통신이 한국인 피격설을 보도한 뒤 “바그다드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과 국제협력단(KOICA) 소속 직원,선교사 등 30여명의 한국인들이 모두 건재한 것을 확인하고서도 사업가가 피해를 봤을 가능성 때문에 초조해하던 정부는 한국인이 실제 피해를 당하자 당혹하다 못해 침통한 표정이었다. ●한국 민간인 공격의 심각성 일본 외교관 2명과 스페인 정보장교 7명에 대한 무차별 피격에 이어 한국인까지 참변을 당함으로써 우리 정부의 파병 방침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특히 정부는 외교관이나 군인이 아닌 현지에서 사업을 하던 순수 민간인들이 테러 공격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보고 있다.우리가 비전투병을 파병한다 해도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알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 단체들이 아프가니스탄 주재 한국대사관직원들을 대상으로 자살 폭탄으로 테러할 것이란 첩보가 최근 나와 박종순 대사 등 직원들이 인접국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그동안 정부의 파병을 반대해온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의 파병 반대 목소리는 더욱 더 거세질 전망이다.지난주 이라크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국회 조사단(위원장 강창희 한나라당 의원)은 30일 이라크의 한 지역을 전담해 공병·의료 및 전투병이 포함된 혼성부대를 파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등 정부의 파병 방침에 힘을 실어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정부,국회 파병 놓고 격론 불가피 외교관 2명이 총격으로 피살된 일본 정부의 경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무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테러 세력들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자위대 파병 방침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밝혔다. 최근 이라크에서 미군이 아닌 외국 군에 대한 잇따른 테러와 위협이 발생한 뒤 정부 핵심 당국자들이 “파병 방침은 변한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정부가 파병 자체를 빠른 시일내 번복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정부는 파병 방침만 결정했을 뿐 파병 시기나 규모 등에 대해선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을 관리해 나갈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테러 단체의 공격이 파병 방침을 정해 놓고 파병은 하지 않고 있는 미국 동맹국,즉 한국 일본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현재 파행중인 국회가 정상화된다 하더라도 국회가 파병 방침에 손을 선뜻 들어주기 힘든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내심 파병 찬성쪽에 섰던 한나라당조차 파병 강행을 주장하기는 힘들 것이고,따라서 국회에서의 격론도 예상된다. ●파병 시기 조절하며 상황 주시 오는 17일께 개최가 예상되는 북핵 6자회담 등과 사실상 파병을 연계하고 있는 정부로서도 쉽게 파병 철회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7일 방송 좌담에 출연,“이라크 파병 문제는 역사적 평가보다는 북핵 문제 등 현실을 고려해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우리 한국군의 파병 준비와 절차 등에 걸리는 시간이 최소한 4∼5개월이라는 점에서 정부는 상황에 대한 결정을 조기에 내리기보다는 예의 주시한다는 차원에서 파병 문제를 관리해 나갈 것이란 관측이다.정부 관계자는 “파병 시기가 아직 남아 있는 만큼 그동안 이라크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국제 질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우리 국민들의 여론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감안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수정기자 crystal@
  • 41년간 불우아동 1200명 키워/아산복지재단 사회복지대상 ‘새소망의 집’ 노주택 원장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온 것밖에 없는데 너무 큰 상이 주어졌습니다.상금(3000만원) 전액을 아이들을 위해 쓰렵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24일 사회복지대상 수상자로 ‘새소망의 집’ 보육원 노주택(魯周宅·사진·77) 원장을 선정,발표했다. 평생을 불우아동을 위해 살아온 노 원장의 별명은 ‘NO 주택’.희수(喜壽)의 나이에도 집 한칸 없이 사택에서 기거한 데서 나온 말이다.150㎝의 아담한 체구의 노 원장이 길러낸 아이는 모두 1200여명.지난 62년 대구 성광보육원에 근무한 뒤부터 41년간 줄곧 봉사해온 결실이다.황해도 옹진 출신인 노 원장이 아동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당시 피란지였던 연평도에서 선교사를 접한 뒤부터였다.그는 지금도 자신이 키워온 아이들의 이름과 성장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하다. 더구나 ‘새소망의 집’은 10여년 전부터 보육사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기거하는 독특한 운영방식을 택하고 있다.원생들에게 가정의 훈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제도다.그래서인지 이 집을 거친 아동중 71명이 대학에 진학,13명은 해외 유학을 했고,5명은 박사로 성장했다. 김성수기자 sskim@
  • NGO / 내셔널트러스트운동 3년 어디까지 왔나 정회원 1200여명… 존폐 기로

    ‘내셔널트러스트(NT)운동’은 훼손위기에 놓인 자연이나 문화유산을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증여를 통해 확보한 뒤 이를 영구히 보전관리하는 시민운동을 말한다.우리말로 하면 ‘자연유산 신탁운동’으로 풀이된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 1월 사단법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공식적으로 닻을 올렸다.하지만 출범 이후 만 3년이 흘렀지만,활동이 저조해 위기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참여율이 너무 낮은데다 기금 조성이 형편없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환경부가 자연과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이 운동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법제화를 추진하는 등 ‘수혈’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불씨가 살아날지 주목된다. ●매화마름·최순우 古宅 매입이 성과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태동시킨 영국이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역사만도 100년이 넘는다.전 국토의 1.5%와 해안지역의 17%를 소유해 영구적으로 보호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이웃나라 일본을 비롯,뉴질랜드 등 세계 26개국에서 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국내에도 이 운동의 성격을 띤 지역단위의 시민운동들은 90년대부터 있어왔다.무등산 지키기와 대전 오정골 외국인선교사촌 보존운동,경기도 맹산 반딧불이 자연학교 조성,고양시 고봉산 한뼘사기,용인 대지산 지키기 운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0년 1월 300여명의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본부가 출범되면서부터다. 당시 그린벨트 보전의 실패를 경험한 시민·환경단체들은 대안운동으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국토 1% 소유·관리가 목표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운동본부의 사업목표는 2020년까지 전국의 보호대상지 100곳을 발굴해 내셔널트러스트 방식으로 소유·관리하고 국민총생산의 1%가 이 운동을 위한 자산으로 적립되도록 하는 것이다. 또 회원 수를 100만명으로 늘리고,자원봉사자를 5만명까지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한 실천사업으로 자연자원에 대한 모니터링과 보전대상지 선정관리,후원인·국민모금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아울러 정부 차원의 법제도 정비와 특별법 형태의 ‘국민자연신탁법’ 입법 청원운동 등도 펼치고 있다.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지방 트러스트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연대를 모색 중이다.현재 200여명의 시민전문가들이 분과별로 활동하고 있으며 1200여명의 정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성과로는 시민들의 기금으로 강화군 매화마름 군락지와 미술사학자 최순우 고택(古宅)을 사들인 것이 꼽힌다.시민 자연유산 1호로 기록된 매화마름은 912평으로 112평은 무상 기증받았고,800평은 4800만원의 시민기금으로 매입했다. 최순우 고택 역시 10여명으로부터 8억여원을 기부받아 매입,시민 문화유산 1호가 됐다. ●정부 ‘국민신탁법' 추진 활성화기대 무엇보다 이 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회원 확보와 기금 조성이 시급하다.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지만 아직까지 참여율은 무척 저조한 편이다. 기금조성을 위해 각종 모금운동과 기부·기증운동,헌납운동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지금까지 3년간 모금액은 고작 11억여원에 불과하다. 국민자연신탁법 입법 청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는것도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다.여기에는 자연과 문화유산이 국민들의 공동소유라는 법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뜻도 담겨 있다. 하지만 기부문화가 불충분한 우리나라에서 이 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는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보전 대상에는 고가의 토지가 많아,국민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성금으로 보전지를 취득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또 취득 자산에 대한 법적 보장,즉 신탁으로서의 법적 지위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전문가들은 “이 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정부 차원의 재정적인 지원과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자연보전 차원에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적극 권장돼야 한다.”면서 “국민자연신탁법 제정의 필요성과 관련해 이미 용역을 의뢰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이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용역결과가 나오는 대로 입법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유진상기자 jsr@
  • “녹색 테이블 넘어 녹색평원이 내 무대”몽골서 선교활동 펴는 탁구여왕 양영자

    “이제 몽골은 ‘제2의 고향’입니다.저를 필요로 하는 이곳에서 선교할 때 제일 행복해요.” 88서울올림픽 여자탁구 복식에서 현정화(33)씨와 함께 금메달을 따는 등 ‘녹색테이블의 여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양영자(사진·39)씨가 이역만리 몽골 땅에서 선교사로 변신,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양씨는 지난 13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몽골국제대학(MIU) 준공식에 참석,선교사로 거듭 살면서 겪은 일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80년대 한국 탁구를 이끌었던 양씨는 지난 97년 선교사인 남편 이영철(42)씨와 함께 한 국제선교단체의 일원으로 몽골에 둥지를 틀었다.그는 “89년 2월 현역에서 은퇴한 뒤 1년 정도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한계를 느꼈다.”면서 “남편을 만난 뒤 선교에 이끌리게 됐고 쿠바 등지를 답사한 뒤 ‘몽골에 마음이 끌린다.’는 남편 뜻을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양씨는 몽골에서 2년 동안 어학공부를 하고,울란바토르에서 450㎞ 떨어진 고비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오지 마을로 들어가 1년6개월 동안 교회를 만들고 성경을 번역했다.지금은 울란바토르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내년 1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릴 예정인 12세 이하 동아시아 호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30여명의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개척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바이러스에 감염돼 안면근육이 마비되는 병을 두달 동안 앓았을 때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병을 앓으면서 오히려 ‘내가 아플 때 위로받을 수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를 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큰병을 앓았던 것이 오히려 큰 계기가 됐다.”고 환하게 웃었다. 울란바토르 장택동기자 tae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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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언론학 교육(원우현·유일상 지음,삼영서관 펴냄) 미국을 비롯, 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독일·일본·중국 등의 언론학 교육 실태를 분석.국내에는 현재 약 100여개 4년제 대학에 신문방송학과 또는 그 유사학과가 개설돼 있다.신문방송학은 양적 팽창을 거듭해 ‘공룡학문’이 되고 있다.유학을 꿈꾸는 이들 또한 많다.학부 및 대학원의 저널리즘 교육 과정과 대학별 평가 순위 등을 실어 유학준비생들에게 특히 도움이 되도록 했다.1만 8000원. ●행복의 발견(히로 사치야 지음,이미령 옮김,대숲바람 펴냄) 300자도 채 되지 않는 ‘반야심경’은 한국 불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경전이다.절에서는 예불 때마다 독송되고 수행의 하나로 이뤄지는 사경도 ‘반야심경’을 가장 많이 한다.이 책은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반야심경’을 88가지 주제로 나눠 에세이식으로 풀어쓴 것.‘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인 ‘공(空)’의 철학은 선입관을 갖고 세상을 고정화된 시각으로 보지 않고 집착하기 말자는 것이다.9500원. ●빠빠라기(투이아비 지음,유혜자 옮김,동서고금 펴냄)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의 작은 섬에 사는 투이아비 추장이 유럽을 방문한 뒤 자기가 목격한 문명세계를 비판한 연설문 형식의 글.한 예로 추장은 빠빠라기들이 ‘육신은 죄악’이라고 말하면서 온갖 도롱이들을 두르고 다닌다고 전한다.문명의 폐해를 원주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이 글은 독일인 선교사 에리히 쇼이어만이 1920년 문명 세계의 언어로 번역한 것.‘빠빠라기’는 사모아 제도의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부르는 말이다.7500원. ●기이한 직업들(낸시 리카 쉬프 지음,김정미 옮김,문학세계사 펴냄) 미국 신시내티의 50년된 힐탑 실험실에선 겨드랑이,숨결,발,기저귀 악취 등을 감식하는 일이 매일 진행된다.방취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악취를 맡아 1부터 10까지 단위를 매기는 것이다.이 직업의 이름은 ‘악취감식가(odor judge)’.또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엔 ‘공룡 뼈 먼지청소부(dinosaur duster)’가 있다.부드러운 깃털로 공룡 뼈를 절대 건드리지 않으며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업이다.이 책에는이처럼 별난 직업들이 망라돼 있다.7200원. ●가둘 수 없는 영혼(팔덴 갸초 지음,정희재 옮김,꿈꾸는 돌 펴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후 티베트 사람들의 3분의 1이 죽었고,6000여개의 사원이 파괴당했다.15만명 이상의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하거나 감옥이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한 때 숨어있는 이상향이라 불리던 티베트는 그렇게 파괴됐다.이 책은 중국치하의 티베트 참상을 30여년간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혀 지낸 한 라마승의 입을 통해 낱낱이 고발한다.저자는 티베트 최장기수이자 고통받고 있는 티베트의 현실을 유엔에서 증언한 최초의 티베트인이다.9900원.
  • 오피니언 중계석/한국교회 ‘지성전 체제’ 문제점

    한국교회,특히 대형교회들은 일반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양적 팽창위주의 선교와 이기주의의 수렁에 갈수록 깊이 빠져들고 있다.그 단적인 경우가 바로 대형교회의 지교회 늘리기인 ‘지성전 체제’.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른다는 시장 원리로 교세를 확장시키려는 종교상업주의의 전형으로 불신임받고 있다.기독교사상이 27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마련한 심포지엄에서는,최근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같은 ‘지성전 체제’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견해들이 쏟아졌다.이 가운데 장신대 한국일 교수의 ‘지성전은 선교가 아니라 선전이다’ 주제의 발제문을 요약한다. 지성전 혹은 지교회란,표현 그대로 개척하여 설립한 본 교회에 종속되어 있는 교회이다.모두 대형교회에 의해서 운영되며 본 교회의 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 그 목회정책과 방향,행정의 지시를 받는다.지교회 예배시 설교는 본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위성방송 혹은 테이프를 통해서 선포되며,재정이 본교회 중심으로 통합되기 때문에 지교회의 헌금은 모두 본교회로전달되며 재정적으로 독자권이 없다. 대형교회들이 표면상 주장하는 지교회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활성화,한국사회의 복음화 등 일반적 선교적 동기로 모아진다.그러나 이면에 있는 실제적 동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지교회를 통해서 본 교회와 똑 같은 교회들을 각 지역에 설립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본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목회 철학을 그대로 실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요즘 지교회 제도에서 선교와 선전이 서로 혼동되는 현상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선교와 선전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나,선전은 교인을 얻기에 급급하여 선교활동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선교는 결과적으로 어느 교회에 소속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선전은 지명도가 있는 목회자와 교회의 인지도를 사용하여 기존의 지역교회에 소속된 교인들을 유혹할 수 있다. 지교회 체제는 교회를 잘못된 선민의식을 갖도록 오도할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어느 특정 교회의 소속감으로 인식하게 될 때 교회는 배타적 공동체가 된다.그러나 교회는 본질상 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이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세속적인 계층을 뛰어넘어 하나가 됨을 선언하고 실천해야 한다.앞으로의 교회는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지역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다른 교회를 배려하고 약한 교회를 세워주며 함께 지역과 한국사회를 복음화하는 일에 각 교회들이 소유한 자원을 모아 힘을 합하여야 한다. 교회,특히 신생교회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교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바른 교회관과 선교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만 하고 비판적 성찰을 하지 못하면 교회의 본질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교회성장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며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표징이다.그러나 교회성장이 선교의 전부가 아니다.중요한 것은 교회가 복음에 충실한가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부패상을 개혁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위해 절대적 권위를 하나님에게만 부여하고 교회자체를 상대화시켰다.개혁교회는 자신을 상대화할 수 있는 토대에서만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올바른 선교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한 올바른 선교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비판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건강한 교회만이 건강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지교회 문제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성호기자 kimus@
  • 향년 106세 타계 쑹메이링 여사/ 中현대사 격랑 헤친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23일 타계한 장제스(蔣介石) 전 타이완(臺灣) 총통의 미망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는 중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미·중 관계의 교과서라 할 정도로 미·중 관계의 처음과 끝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쑹메이링 여사는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될 때 남편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의 상징이 됐다.‘영원한 퍼스트 레이디’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 부인 우수전(吳淑珍) 여사로부터 ‘독재자 부부’로 폄하되기도 하는 등 과거의 명성이 다소 퇴색하기도 했다. 1898년 3월 20일 중국 3대 재벌로 꼽혔던 쑹야오루의 셋째딸로 태어나 9살 때 미국으로 유학,미국의 명문 여자대학 웨슬리대를 졸업했다.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장제스의 영문담당 비서로 일하던 쑹 여사는 1927년 장제스와 결혼,2차대전 당시에는 영어를 잘 못하는 남편을 도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펴 서방세계로부터 많은 호감을 샀다. 그녀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36년 남편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감금되는시안사건이 발생하자 장쉐량과 담판 끝에 남편을 구해내면서부터였다. 이 때문에 1937년 미 시사주간 타임은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으로 선정했다. 빼어난 미모로 민간외교관 역할도 훌륭히 수행한 그녀에 대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중국에 전했다면 중국을 미국에 알린 것은 쑹메이링 여사”라고까지 극찬했다. 그녀는 또 1943년 미 상·하 양원 합동 연설을 통해 중국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이 연설은 중국인이 미 상·하 양원에서 행한 최초의 연설이기도 하다. 2차대전 종전 50주년인 1995년에는 밥 돌 당시 상원 공화당 원내총무의 초청으로 미 의회에서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을 해 고립감에 빠져 있던 타이완 국민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안겨주며 ‘영원한 퍼스트 레이디’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권력과 미모,장수 등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의 조건을 두루 갖춘 것같지만 그녀의 삶이 꼭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쑨원(孫文)의부인인 둘째 언니 쑹칭링(宋慶齡)과의 대립은 그녀들을 ‘불운의 자매’로 불리게 만들었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의 가슴에 애증의 엇갈리는 감정을 갖게 한다. 언니 칭링이 남편 쑨원이 죽은 뒤 투철한 혁명운동가로 공산정권 수립에 크게 기여한 반면 그녀는 타이완으로 건너가 남편과 함께 반공의 선봉에 서며 평생을 대립했다.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는 데다 남편 전처 소생인 장징궈(蔣經國) 전 타이완 총통과 사이가 나빠 남편의 사후 미국 뉴욕 인근으로 옮겨 혼자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유세진기자 yu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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