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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아줌마 희망 한단에 얼마래요?” “희망유? 몰라유, 채소나 한단 사가슈∼선생님?” 장사익씨가 부른 소리판 ‘희망 한단’에 나오는 대목이다. 8년 전 어느날 미국에서 살던 한 아줌마가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화두를 던지며 고국땅을 밟았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조용했지만 입소문을 통해 삽시간에 퍼지면서 점차 요란해졌다. 그가 펴낸 책은 한동안 각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방송국의 특별 프로그램 등에 초청됐고 언론지면을 통해 그의 삶이 종종 전해졌다. 까닭이 있었다. 잡초처럼, 지독하리만큼 억척스럽게 살아온 한많은 여인네의 삶 그 자체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절망으로 쓰러질 때마다 희망의 지팡이에 의지해 오뚝이처럼 일어선 생생한 경험담이 많은 감동을 선사했던 것. 그 어떤 영화 속의 주인공보다 더 찐한, 말 그대로 신선한 ‘희망의 메신저’나 다름 없었다.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1948년 경상남도 월내라는 어촌마을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남동생 중 한 명은 미군 복무 중 사고로 요절했으며, 한 사람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시골에서 세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 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면서 풍문여고를 다녔다. 잡지판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다. 얼마 후에는 관악컨트리클럽 캐디로도 근무했다. 그러던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삯 100달러만 달랑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식모일도 하고 한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다. 1975년에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이를 피하려고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일등병일 때 용산의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고 상등병 시절에는 고된 훈련을 무사히 거쳐 장교로 임관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이후 독일과 일본 등 주로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대학을 전전한 끝에 1987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마흔두살 때인 1990년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고,2년 뒤에는 하버드대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대위 때 하와이에서 패트리엇 미사일 장교로 근무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한 그는 2006년 당당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딸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학을 다녀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졸업 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 중이다. 최근 그는 ‘서진규의 희망’이라는 3번째 책을 펴내 ‘희망전도사’로 전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또 한달에 한번꼴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판 책자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성공전략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잭 캔필드가 주도하고 있다. 잭 캔필드는 “미군과 하버드에서 살아남은 이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에 무한한 영감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며 영어판 발간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만한 소재로 여긴다는 것. 이래저래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서 박사를 만났다. 명함을 받았더니 이름 밑에 ‘희망연구소 소장’‘박사’‘예비역 소령’이라는 직함이 보였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가냘픈 소녀와 같은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저런 연약한 모습에서 어떻게 불굴의 정신이 나왔을까. 손에는 자신이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3권을 들고 있었다.‘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35만부,‘서진규의 희망’은 15만부 등 모두 50만부가 넘게 나갔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딸 얘기가 나왔다. “딸은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어요.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한 켤레에 2달러를 받고 구두를 닦았지요. 나중에는 특히 군화를 잘 닦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동네에 사는 군인들이 우리집에까지 군화를 들고 왔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딸의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느라 장교인 제가 퇴근 후 계급상 하급자들의 군화도 닦아주는 일이 많았습니다.(웃음)” 딸은 지금도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원씩을 꼬박꼬박 보내 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다.ROTC로 임관할 때는 어머니한테 거수경례로 선서를 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당시 하버드대측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서 박사는 이같은 사연과 함께 딸을 키운 이야기를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제목으로 2000년 책으로 펴냈으며 지금까지 17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또한 올해 안에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현지 출판사측에서는 “딸을 어떻게 키우면 딸이 부모에게 돈을 보내게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정하면 어떠냐.”는 농담 섞인 제안을 하고 있단다. 한국의 풍습과는 달리 미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출판일 때문에 매달 미국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 박사의 인생에는 영화가 몇 편 들어 있다. 미국사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해요.” 국내에 있을 때는 주한 미군병원에서 C형간염을 치료하면서 각종 단체와 지방 등지에서 ‘희망강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 지난 설 직전에는 국군방송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인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번 주어지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좌우된다.”면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줄 때 분명 꿈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처음 군입대했을 때 윗몸일으키기 한번 제대로 못해 겨날 뻔했으나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이겨낸 일화도 소개했다. 오늘날의 서 박사를 있게 한 것은 척박한 그의 집안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엿장수, 어머니는 술 장사를 했다. 이런 여건탓에 주위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반발심으로 ‘공부를 잘해야겠다’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히려 척박한 여건이 우물 안 개구리를 탈피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었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오빠에게 밀려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아메리칸드림’을 꾸었다. 미국에 가면 창녀가 된다는 주위 비아냥에 “내가 창녀가 되면 반드시 장을 지진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보다 멀리,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정해 도전을 거듭하며 소중한 결실을 맺게 됐다. 그는 요즘 틈틈이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왜냐고 했더니 “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면 내 마음의 꿈이 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어 “미 대통령은 내각에 영웅을 필요로 한다.”면서 “책 잘 팔리고, 영화화되고, 미국에서 강연도 휩쓸고, 하버드에서 국제사를 전공했으니 외교역량도 있고, 장차 미 국무장관감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며 웃는다. 그런 다음 여세를 몰아 노벨평화상과 맞먹는 ‘세계평등상’을 제정, 전세계인에게 꿈과 희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기에 10년 내에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이민자 출신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들이 해냈듯이 말입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경남 기장 출생 ▲67년 풍문여고 졸업. 가발공장, 골프장 캐디 등 근무 ▲71년 도미 ▲75년 미 육군 입대 ▲87년 미 메릴랜드대 경영학과 졸업 ▲92년 미 하버드대 석사 ▲96년 미 육군 소령 예편 ▲2006년 하버드대 국제외교사·동아시아언어학 박사 ■ 주요 저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1999),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2000), 서진규의 희망(2007)
  • [열린세상] 베네수엘라는 과연 사회주의일까?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열린세상] 베네수엘라는 과연 사회주의일까?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카라카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밤길, 가이드가 산동네 빈민가를 가리키며 ‘1년 내내 불을 밝히는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사뭇 진지한 조크를 한다. 불빛은 항구적인 빈곤도 지워 버린다. 정치적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던 그는 슈퍼마켓에 커피, 계란, 밀가루가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유가가 배럴당 80 달러가 상회하는 지금, 풍요로운 이 나라에 기초 생필품이 부족하다니.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오래 전부터 의문투성이였다.21세기 사회주의, 볼리바리안 혁명, 미션 로빈슨, 기적의 미션.‘헬로, 대통령’…. 이튿날 국영석유공사를 찾았다. 석유공사는 국가 속의 국가이다. 하루 석유 생산량 260만 배럴 가운데 160만 배럴을 생산한다.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정부 수입의 절반을 제공한다. 에너지만이 아니라 사회복지 사업도 직접 관장하는 무소불위의 국영기업이다.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지만 공사는 여전히 시장주의와 친화적이다. 원유 채굴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과거와 결별하고, 석유화학 부문과 천연가스 부문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한다. 외국기업들은 운영계약, 이익분배, 전략적 제휴 등의 방식을 통해 상류와 하류 부문 모두에 참여한다. 2001년 석유법의 개정으로 로열티를 1% 수준에서 20∼30%로 대폭 인상하였고, 합작투자의 경우 공사가 과반수 지분을 보유하는 의무조항을 만들었다. 일종의 자원 민족주의 경향을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떠난 외국기업은 하나도 없다. 고유가 시대여서 여전히 이득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 베트남도 여기에 가세했다. 파트너를 정하는 것은 차베스 정부이다. 이 나라가 과연 사회주의일까, 혹은 사회주의로 이행 중일까? 모두 아닌 것 같다. 과거 중산층에게 엄청난 보조금을 주던 국가가 이제 가난한 민중에게로 재원을 돌린 ‘페트로 포퓰리즘’에 가깝다. 휘발유 가격은 과거나 지금이나 ℓ당 5 센트 수준으로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이 나라는 ‘사우디 베네수엘라’였다. 스위스에서는 병원이 통째로 수입되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마라카이보 시는 제설작업차를 수입했다.1980년대 초 뷰익 센추리 모델은 미국보다 싼 9000달러 수준이었다. 조니 워커 블랙 레이블 값도 18 달러로 미국보다 쌌다. 자동차 조립업체도, 고급양주 수입업자도 보조금을 얻었다. 기득권층과 중산층은 흥청망청했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기득권층이 독식하던 석유 렌트를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온 빈민층과 중하층으로 돌렸다. 대중 생필품 가격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소비자 물가의 앙등을 막았다. 가끔 수급 불균형으로 품목에 따라 부족 사태도 생긴다. 빈민가에 병원을 짓고, 쿠바 의사 1만 8000명을 초빙하여 무료 의료사업을 시행한다. 각종 대중 공교육 투자도 대폭 확대했다. 토지개혁과 협동조합 사업도 열광적으로 추진한다. 모두가 미션 프로젝트이다. 차베스는 일요일 방송 프로그램 ‘헬로, 대통령’에 매주 출연하여 장광설을 쏟아 놓는다. 거의 선교사의 열정으로 이야기한다. 식자층들은 금방 짜증을 내지만,‘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그를 따르고 조직화된다. 민주주의 국가가 붕괴되고 있다고 외신이나 식자층은 한탄한다. 작년에 최대 공중파 방송사에 대한 허가권 취소로 언론탄압이란 정치적 비난이 있었다. 하지만 체재 중 일간지들에 실린 차베스 비난 기사들 가운데는 대통령의 행태를 무솔리니에 비유하는 칼럼도 있었다. 언론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작년 연말에 대통령 임기의 무제한 연장을 가능케 하는 헌법 개정에 국민들은 부(否)표를 던졌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여전히 건재하다.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0)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장 엘마르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0)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장 엘마르 신부

    경북 칠곡군 왜관(왜관읍 왜관리 134-1)의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천주교 수도승들이 모여 사는 은밀한 곳이다. 독일인 수사(修士) 4명을 포함해 70여명의 수사들이 기도와 노동을 함께 하며 하느님을 찾는 독특한 공동체. 일반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막혀 있는 이곳엘 가면 뭇 수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70대 중반의 독일인 신부가 유난히 눈에 띈다. 이마가 훤하게 벗겨진 머리 양쪽 뒷부분에 금발이 조금씩 남아 있어 ‘황금박쥐’란 별명으로 통하는 장 엘마르(75·본명 랑 곳프리드·한국명 장휘) 신부.47년간 한국에 머물며 오로지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의 길을 걸어온 이방인이다. 성베네딕도 수도회는 조선교구장 뮈텔(1873~1949) 주교가 독일 오틸리엔 수도회에 요청해 한국에 들어온 선교회.1909년 독일인 수도승 두 명이 서울 백동(혜화동)에서 활동한 게 한국 수도회의 시초로 6·25전쟁 중 이곳 왜관으로 피란해 수도생활을 하다가 정착해 본원을 삼은 게 지금의 왜관수도원이다. 지난 음력 설 이틀 전, 세상의 달뜬 분위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수도원에서 강론 준비를 하다가 기자를 맞은 엘마르 신부는 짙은 밤색 수도복 차림이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 노 신부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는 처음”이라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의 수도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먼저 물었다.“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힘들고 불편한 것을 피해가려 들지 않지요. 더구나 내가 선택해 47년을 몸담아 살아온 ‘우리 집’인데 불편하고 힘들 게 있겠습니까.” ‘우리 집’이란 표현을 썼다. 철저한 공동생활을 하며 몸을 낮추는 수도 삶의 터전,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우리 집’ 가운데 하필 한국의 집을 택한 이유는 뭘까. 2006년 월드컵 개최지인 바바리아주, 인구 8000명의 작은 농촌 클라인오스트하임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엘마르는 가난하고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베네딕도회 수사였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도원엘 자주 갔고 그곳에서 읽은 한국 파견 선교사 이야기 책들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한국 천주교 초창기 중국에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복을 입고 주로 밤에 활동했지요. 어린 나이에도 책 속의 한국 이야기는 아주 독특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은 어릴 적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다른 길을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한 뒤 바바리아주립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쳐 사제서품을 받은 게 1959년.2년 뒤 베네딕도수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선교 총책임자가 우연치 않게 “한국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와 망설임 없이 한국행을 결정했다. “신학대를 졸업할 무렵 독일에선 동양 교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어릴 적 읽었던 책 때문이었을까요? 한국, 일본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던 참에 한국행 제의를 받고 보니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지요.” ● 2003년 뇌경색 진단 불구 하루 5번씩 기도 1961년 7월 왜관수도원에 몸을 담아 성주 본당 보좌와 상주·왜관 본당 주임을 거쳤고 2003년 1월 왜관수도원장 자리에 올랐지만 뇌경색으로 5개월 만에 원장 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원장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돼 강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였어요.20년 전 심한 근시로 망막이 파열된 적이 있어 비슷한 증상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뇌경색 진단이 내려지더군요.” “그때 섭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그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대답을 들려준다.“끊임없이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의 길을 걸어왔지만 돌이켜 보면 거꾸로 하느님이 더 나를 찾아주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만난 한국인들이며 본당 주임시절 맺은 인연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그에겐 모두 하느님이 찾아준 길이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 상주본당 주임이 되었는데 그때 신자 고백성사차 외진 공소를 찾아갔었지요. 장마철 불어난 시냇물로 돌아오는 길이 막혀 어쩔 줄 몰랐는데 한 번 본 적도 없는 한 주민이 집으로 안내해 재워 주는 것을 보고 한국에 정착할 맘을 굳혔지요.” 모르는 이를 하룻밤 재워 주면서도 아랫목을 내어주는 한국인들이 퍽이나 인상적이었고 그들에게서 안정감을 찾았다고 한다. 왜관 본당 주임 시절 자신을 아버지 대하듯 따르던 초등학생들은 결혼 후에도 엘마르 신부를 집으로 초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왜관 본당 주임시절 가끔씩 막걸리 잔을 나누던 촌로들이 이젠 거의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도 한다. 뇌경색 진단 후 “위험할 수 있으니 혼자 다니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있었고 약도 늘상 달고 살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이곳 수사들은 아침 5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는 첫 기도부터 저녁 8시 기도까지 하루 5번씩 빼놓지 않고 함께 기도를 한다. 기도 시간을 빼놓곤 모두 출판사며 목공소, 공예실에서 일을 하지만 엘마르 신부는 대신 강론 준비 같은 다른 일을 한다. ● 신학강사로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도 ‘독보적´ 천주교계에선 이름난 신학강사.1969년부터 무려 30여년간 대구 신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친 인물이다.1970년대 중반부터 20여년간 대학교수 4명과 함께 신약성경 번역작업을 벌여 1991년 새 번역 성경을 세상에 내놓았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단선율(單旋律) 전례성가인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도 독보적 존재. 천주교에선 전통적으로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진행하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각국 언어로 대체했지만 미사나 의례 때 부르는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는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는 편. 독일에서 수도회에 입회한 뒤 한국 땅을 밟을 때까지 그레고리오 성가를 배웠던 만큼 한국의 신부들이나 수사들에게 성가를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환상적인 목소리’를 가진 그레고리오 성가의 대가로 통하는 엘마르 신부는 지금도 변함없이 매주 일요일 낮 미사 때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이끈다. 토요일이면 모든 수사와, 서원을 앞둔 예비 수사들의 성가 연습을 지도하는가 하면 일요일 미사 직전에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독창하는 칸토레스들을 점검한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안동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를 찾아 강의와 고백성사를 하고 마산 ‘수정의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강의하는 것을 빼놓곤 수도원 문을 나서지 않는다. 지난해 4월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여기며 살아온 ‘우리 집’인 수도원이 누전으로 불탄 것은 큰 아픔이라고 했다.“내 삶의 터전이 불타 없어진 것도 그렇지만 개인적인 소지품은 물론 그동안 해온 강의 기록이며 모든 자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어요.‘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더군요.” “한국생활 초기 독일에 갔을 때는 이런저런 한국 이야기들을 전해주었지만 이제는 한국인이 된 내가 그들에게 해줄 새로운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엘마르 신부.“친구들과 형제들이 모두 이곳에 있고 하느님을 찾는 나의 영혼이 머무는 ‘우리 집’은 내가 영원히 살아야 할 소임의 터전”이라며 강론 준비를 마저 끝내겠다고 기자 곁을 떴다. 글 사진 왜관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장 엘마르 신부는 ●1933년 독일 클라인오스트하임 출생 ●1953년 성베네딕도회 입회 ●1959년 뷔르츠부르크 대학 신학과 졸업, 사제 수품 ●1961년 한국 입국, 왜관수도원 생활 시작 ●1962년 성주 본당 보좌 ●1963년 상주 본당 주임 ●1964년 왜관 본당 주임 ●1969년 대구 신학원 강사 ●1983년 왜관수도원 부원장 ●2003년 왜관수도원장 취임, 뇌경색으로 5개월 만에 사임 ●현재 왜관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지도 등 수도생활
  • 인수위·학부모 vs 일선교사 영어공교육 찬반 공방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영어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전용교사’를 2010년부터 초·중·고교 현장에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을 30일 발표했다. 그러나 이날 인수위가 개최한 공청회에서 일부 교사들이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육계 내부에서도 찬반이 대립되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영어능력 합격·불합격만 평가” 인수위 발표에 따르면 내년에 영어전용교사 6500명을 선발해 6개월 연수를 시킨 뒤 2010년부터 교육현장에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총 2만 3000명의 영어전용교사를 배치한다. 초등학교는 2011년, 중학교는 2012년, 고등학교는 2013년까지 영어전용수업이 100%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현행 주당 1∼2시간인 초등학교 3∼6학년 영어시간을 3시간으로 늘린다. 특히 현행 문제풀이 위주의 수능 영어 대신 ‘국가 영어능력 평가시험’을 도입, 실용 영어를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 시험은 읽기·듣기·말하기·쓰기의 4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현행 수능 영역인 읽기·듣기는 등급제로 평가하고 새로 추가되는 말하기·쓰기는 학교 수업만으로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합격·불합격만으로 평가한다는 게 인수위의 계획이다. 그러나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열린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대학교수와 학부모 등은 인수위의 방안에 찬성한 반면, 일선 교사들은 현실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교총·전교조 대립… 이념논쟁 비화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새 정부에서 영어교육을 종합적·단계적·연차별로 확대 강화하는 것은 매우 시기적절하다.”고 했다. 반면 김인정 일산 오마초등학교 교사는 “의사 소통 자체가 한국말로도 모자라는 아이들을 상대로 영어로 수업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정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나서 이념논쟁으로 확대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교총은 논평을 통해 “영어교사 심화연수 제공, 교원 양성기관 영어교육 과정 개편, 예산 확보 등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나온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반면 전교조는 “교육 불평등과 소모적인 입시 경쟁교육, 교육의 계층화를 심화시키고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공청회에서 영어전용수업은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수준별로 실시한다는 게 기본 방안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한국이름/함혜리 논설위원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우리말 이름을 갖고 활동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보다 빨리 한국인들과 친숙해지고, 한국 문화에 깊숙이 파고 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철학을 담은 이름들을 갖고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최초로 묻힌 존 W 헤론(1858∼1890년)은 뉴욕대 의대를 졸업하고 1885년 6월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알렌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의 주치의를 맡았던 그는 뛰어난 의술로 깊은 인상을 줬다. 고종이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헤론을 혜참판이라 불렀는데 그의 한국 이름 혜론(惠論)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다 정동에 최초의 민간병원을 열어 환자를 돌봤다. 고종은 스크랜턴의 우리말 이름 시란돈(施蘭敦)을 살려 ‘시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이름 그대로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진료하며 베푸는 병원이었다. 감리교 첫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亞扁薛羅), 장로교 첫 선교사 언더우드(元杜友), 한국 실내 체육의 개척자 반하트(潘河斗), 고종의 밀사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도 파견됐던 헐버트(訖法) 등 한국이름을 갖고 한국을 위해 살다 간 선교사들은 무수히 많다. 지난 1970년 외국인으론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도 빼놓을 수 없다. 세브란스의대 교수로 내한해 일제의 만행을 외국에 적극적으로 알렸던 그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虎弼).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에게 팬들이 붙여준 애칭 석호필의 원조다. 한·미친선회가 리사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 부인에게 박신예(朴信藝)란 이름을 지어 선물했다. 앞서 남편인 버시바우 대사에게 친선회가 선물한 박보우(朴寶友)란 이름에서 박씨 성을 따왔고, 예술을 사랑하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버시바우 대사부부가 박씨 부부로 불릴 리야 없을 테지만 한국이름을 갖게 됐다니 왠지 친근감이 간다. 이런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8)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섬유’ 대표 줄피카르 알리 칸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8)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섬유’ 대표 줄피카르 알리 칸

    한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은 대략 3만 5000여명, 서울에만도 1만 5000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슬람권 이주노동자들이 늘면서 무슬림들의 영역과 목소리가 차츰 커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이자 홀대받는 소수 종교인들로 머물러 있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출신의 사업가 줄피카르 알리 칸(36·무슬림섬유 대표)은 그래서 돋보이는 인물이다. 한국의 웬만한 무슬림들은 다 아는 독특한 이력의 한국 예찬자.9년째 서울에서 의류 원단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지만 한국인의 입장에 서서 종교를 내세우지 않은 채 한국과 더불어사는 이방인들에게 평화와 사랑 심기를 실천하는 독특한 무슬림이다. ● 아프간피랍사태 당시 구출순례 힘써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분당 샘물교회 봉사단원들의 석방 교섭이 난항을 거듭하던 지난해 8월 말. 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4명이 파키스탄 페샤와르와 이슬라마바드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본지 2007년 9월7일자 9면 보도). 공식 협상단들조차 현지 종교지도자들이나 탈레반측과의 접촉이 수월치 않은 상황. 그 와중에 몸을 사리지 않고 현지 부족장과 탈레반 수뇌부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교신하며 봉사단원들을 구출하려는 힘겨운 순례를 계속하던 참이었다. 이 순례단을 사실상 주도한 외국인이 바로 줄피카르 알리 칸이다. “내가 택해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내 고향에서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지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던 중 한국이슬람연합회(KMF)측이 현지로 가자는 제안을 해와 주저없이 나섰던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 새해인사가 무성하던 무자년 정초(正初), 서울 한남동 이슬람중앙사원에서 무슬림 예배복을 정성들여 갖춰입고 기자를 맞은 줄피카르는 “부끄럽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자꾸 피해가려 들었다.“얼마나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한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티끌만큼의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인터뷰를 묵묵히 지켜보던 한국인 이맘(예배인도자) 이행래씨가 안쓰러웠던지 슬쩍 거든다.“당시 봉사단 석방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던 페샤와르 파슈툰 부족에게 줄피카르가 그토록 명망 높은 줄 몰랐습니다. 줄피카르가 없었다면….” 줄피카르는 페샤와르 태생이지만 “솔직히 지난해 고향 땅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거듭되는 종교분쟁과 정쟁에 염증을 느껴 한국에 오기 5년 전부터 페샤와르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옮겨 살았던 그다. 그럼에도 마다않고 위험한 페샤와르 순례에 선뜻 동참한 고뇌가 읽힌다. 9년 전 줄피카르가 처음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무역에 관심이 많아 영국 에드워즈 칼리지의 페샤와르 분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이슬라마바드에서 해산물 업체를 운영하던 중 ‘한국의 의류원단 사업이 유망하다.’는 사촌의 말에 솔깃했던 것이다. 당시 주한 파키스탄 대사관에 근무하던 사촌의 말만 믿고 무작정 한국행을 결정했다. 하지만 줄피카르도 IMF의 환란은 비켜가지 못했다. 서울 옥수동 사촌 집에 머물면서 시장조사를 해보니 생각과는 영 딴판이었다.2개월 만에 실망감만 안고 보따리를 싸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갔지만 한국과 한국인들이 머릿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인연의 끈이 질겼을까. ● “이방인에 대한 한국인 배려 인상적” “한국인들이 무슬림들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더해졌어요.‘내 집을 찾은 사람을 섭섭하게 보내지 않는다.’는 무슬림처럼, 생면부지의 이방인인 나를 어떻게든 도우려는 한국인의 배려가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돈을 벌겠다는 내 자신이 초라해지더군요.” 그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동대문 종합시장 앞에 작은 원단가게를 차려 9개월간 장사를 하다가 2000년 명동에 ‘무슬림섬유’라는 무역회사 간판을 달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 만든 원단을 사들여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주로 이슬람·아랍 국가에 되판다. 한국인과 제대로 어울리려면 한국말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화여대 한국어학당도 6개월간 다녔다. 무슬림의 입장에서 한국인과 어울릴 길을 찾던 중 역시 모스크(이슬람사원)가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알게 됐다.“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모스크는 한남동 중앙사원 한 곳뿐이었어요. 힘겹게 살아가는 외로운 무슬림들이 맘을 통하고 정을 나누던 유일한 공간이었던 셈이지요.” ● 한남동 모스크사원서 봉사의 길 첫발 이들을 한국인들과 연결해 살게 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몸으로 보여주는 길을 택했다. 한남동 사원에 몸을 담아 봉사에 나선 것이다. 금요일 낮 예배는 물론, 평일 밤 9시부터 2시간가량 열리는 무슬림 친교·봉사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한다. 그가 참석하지 않는 친교·봉사행사는 열리지 않을 정도이다. 지금 한국에 있는 9개의 이슬람사원과 50개의 임시성원(무살라)이 세워질 때도 빠짐없이 그의 힘이 보태졌다. 사업을 하면서 한국인들을 대할 때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추스른다.“버는 만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자. 받는 만큼 되돌려주자.” 자신을 속이는 시장의 상인이나, 거리에서 마주쳐 까닭없이 핀잔을 주는 사람들에게도 웃음을 돌려준다. 그 때문일까.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는 자신을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단다.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자신과 관련있는 이들의 경조사엔 빠지지 않고 기쁨과 아픔을 나눈다. 힘든 일을 당한 이들에겐 아무리 일이 바빠도 달려가 손을 내민다. 무슬림이 사망하면 묻히는 충북 청주의 진달래공원묘역까지 장례객들을 차로 실어나르는 일도 일상사가 되었다. 외국의 무슬림 순례단들이 입국할 때 까다로운 수속을 도맡아 무슬림들에겐 ‘해결사’로도 통한다. ● “호전적 이미지 빨리 벗어났으면” 어쩔 수 없는 무슬림. 하루 다섯 번의 이슬람 예배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 한국인 지인들이 그와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이 예배시간이라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신앙이 우선일 뿐 돈 버는 일은 덤이다. 내년이면 한국생활 만 10년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도 얻었다. “이슬람은 바로 평화의 생활이고 실천이지만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이슬람의 본 뜻과는 달리 왜곡된 인상에 매몰돼 있다.”는 줄피카르.“처음 한국에 올 때의 초심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그가 요즘 가장 많이 관심을 갖는 일은 역시 ‘한국인과 더불어 잘사는 무슬림’이다. “내가 한국에서 잘 사는 길은 무슬림의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겠지요. 한국인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해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식의 호전적이고 왜곡된 이슬람 이미지를 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새해 들어선 한국인들과 외지의 무슬림들이 항상 어울려 교류할 수 있는 상설기구 만들기에 흠뻑 빠져 있다. 한국인 무슬림들도 종전과는 달리 적극 돕고 있단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저녁 예배시간을 알리는 이맘의 목소리에 기자의 눈치를 살피다 불쑥 한 마디를 던지며 사원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나는 결코 선교사가 아닙니다. 한국인들이 모두 무슬림 아닌 무슬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페샤와르에서 보낸 평화의 전령이 아닌가.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줄피카르 알리 칸은 ●1972년 파키스탄 페샤와르 출생 ●1991년 영국 에드워즈 칼리지 경영학과 졸업 ●1991∼1998년 이슬라마바드에서 해산물 업체 운영 ●1998년 의류 원단 사업차 한국에 와 2개월 만에 본국으로 귀국 ●1998년 한국 정착, 동대문에서 원단 가게 운영 ●2000년 명동에서 무역회사 ‘무슬림섬유’회사 창업 ●2000년∼ 한국 이슬람사원서 봉사활동
  • [사설] 울산발 교사 철밥통 깨기 꼭 성공해야

    지난 19일 울산시교육감 재선거에서 당선한 김상만 교육감이 무능·불성실한 교사, 교육청 공무원을 퇴출시키겠다고 엊그제 밝혔다. 교사·교장으로 40년을 재직하고 정년퇴임한 뒤 출마한 김 교육감은, 공무원법상의 신분보장 규정이 무사안일한 교사까지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이 깨지지 않는 한 공교육이 제대로 설 수 없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울산시와 서울시에서 시행 중인 공무원 퇴출 제도를 모델 삼은 방안을 마련해 내년 2월 인사부터 적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적격 교사를 퇴출시키겠다는 김 교육감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노력이 순조롭게 결실 맺기를 바란다. 아울러 울산에서 새로 시작되는 교사 철밥통 깨기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도 기대한다. 현재 공교육 현장이 붕괴 위기에 직면했고 그 자리를 사교육 열풍이 채우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 또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무능·나태하거나 심지어 비리에 연루된 교사들이 버젓이 교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힘들다. 마침 내년 2월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는 민생과 교육을 양대 과제로 꼽고 있다. 따라서 새 정부 차원에서 강도 높은 교육개혁 방안이 나오겠지만, 그에 앞서 일선 교육행정을 맡은 교육청이 자발적으로 부적격 교사 퇴출 작업에 나선다면 부작용이 적으면서 더욱 큰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국회에 계류 중인 교원평가제 관련법이 하루빨리 통과돼 일선에서 시도하는 교사 철밥통 깨기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부적격 교사 퇴출은 성실하고 정직한 대다수 교사들의 명예를 살려주는 길이다. 일선교사들도 이를 인식하고,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교단 정화에 동참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겠다.
  • ‘입양포기’ 한인 어린이 홍콩서 미아 되나

    네덜란드 외교관 가정에 입양됐다 파양된 한인 여자 어린이가 홍콩에서 국제 미아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9일 보도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제이드(8)양은 2000년 1월 생후 4개월 만에 당시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네덜란드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러나 이 외교관이 2004년 7월 홍콩으로 근무지를 옮긴 직후 그간 불임이었던 아내가 자녀 2명을 출산하자 지난해 상반기에 제이드양을 홍콩 사회복지국에 인계하며 양육을 포기했다. 이후 제이드양은 홍콩에서 선교사와 외국인 가정을 돌며 2년째 안타까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어는 못 하고 영어와 광둥화(廣東話) 구사만이 가능한 제이드양을 위해 지난 9월부터 현지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새 부모를 찾는 일이 시작됐다. 그동안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 교포 여성과 북한계 홍콩인 가정 등 세 곳에서 제이드양의 입양을 희망했으나 까다로운 절차와 자격요건 등으로 인해 입양을 포기해야 했다. 현재 한국 국적인 제이드양은 양부모에 의해 네덜란드 시민권을 부여받지도 못했고 홍콩 거주민 자격도 아니어서 홍콩 체류 자격이 모호한 상태다. 제이드양의 양육을 포기한 네덜란드인 외교관은 “입양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며 “아내가 파양을 결정한 이후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려 치료를 받고 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콩 총영사관 관계자는 “한국의 고아원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줄곧 외국 생활만을 하고 외국어만이 가능한 제이드양이 한국에서 적응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 하에 홍콩 현지에서 입양할 만한 한인 가정을 계속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홍콩 연합뉴스
  • [부고]

    ●정재윤(자영업)재학(국민일보 사회2부 부국장)씨 모친상 30일 대전 을지대병원, 발인 2일 오전 9시 (042) 471-1680●이기한(명지대 영문과 교수)경한(삼성의료원 교수)씨 부친상 김성철(덕성여대 경영학과 교수)엄영호(사회복지시설 원장)씨 빙부상 2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일 오전 10시 (02)3410-6912●장충수(전남 낙협 이사)봉화(나주 봉황고 교장)봉조(한국농촌공사 전남본부장)씨 모친상 30일 전남 나주장례식장, 발인 2일 오전 10시 (061)332-8114●이건호(수정코스메틱 이사)창호(치과의료선교회 파송선교사)은호(INI인테리어 부장)애자(경일초등학교 교사)씨 모친상 정해준(전 동아일보사 센터발전기획팀 기획위원)박윤식(CJ제일제당 상무)씨 빙모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일 오전 8시 (02)3010-2295●이성길(한국건설신문사 사장)씨 별세 29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일 오후 1시 (02)590-2560●이상혁(기아자동차 과장)씨 빙부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일 오전 10시 (02)3010-2263●송주원(현대자동차 부장)주인(사업)주상(삼성화재 부장)씨 부친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일 오전 7시 (02)3410-6901●채중겸(한국유도고단자회 회장)씨 별세 30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3일 오전 7시 (031)787-1506
  • ‘전통으로의 초대’ 전주 한옥마을

    ‘전통으로의 초대’ 전주 한옥마을

    화창하게 갠 날 만경창파 푸른 물에 배 띄워 떠나가는 형국의 지세를 가졌다는 고을 전북 전주. 조선을 세운 임금의 관향(貫鄕)이기도 하다. 전주 한복판에 한옥마을(hanok.jeonju.go.kr)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시계추가 멈춰선 듯한 곳.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면서 급격한 현대화의 바람은 용케 피했지만, 그 때문에 도심 속 변두리로 전락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민원 공장´이었던 곳이 이젠 근대 생활양식이 녹아 있는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곳곳에 아직도 가을의 향기가 남아 있는 한옥마을을 다녀왔다. # 일본인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형성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을 들머리 삼아 마을구경에 나섰다. 고색창연한 건물 주변에 흩뿌려진 낙엽들에서 떠나기 아쉬워하는 가을의 향기가 전해온다. 한옥마을은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한 인사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면서 시작됐다. 이 지역 한옥군은 주변 일본 가옥들과 대조를 이루는 한편, 화산동 선교사촌 등 서구식 건물들과 어우러지며 기묘한 도시 풍경을 연출하게 됐다. 조선희 관광해설사는 “전통 암수기와가 얹혀진 지붕 아래 구들과 마루가 있고, 댓돌과 섬돌 등으로 터를 잡은 이곳 한옥들은 우리나라 근대 전통 주거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며 “도심 속에 녹아 있는 근대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전통마을과 다른 변별적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한옥 약 660채 사이사이에 120여채의 비한옥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지붕 한 번 고치는 데 양옥의 2∼3배가량 비용이 드는 등 한옥을 고수하는 데 고충이 따르는 것은 알지만, 한편으로 많은 아쉬움도 남는다. 대를 이어 300년 동안 살아온 집을 헐고 번듯한 2층 양옥에 ‘삼백년가 슈퍼´를 낸 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난다. 한옥마을 뒤편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의 꿈을 키운 곳이라 전해진다. 이성계가 전주 시내를 굽어보며 읊은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가 그와 길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장소이기도 하다. 해설사 조씨에 따르면 전주의 요지였던 만큼 근대에 이르러 신사나 성당 등을 짓겠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이를 물리친 것이 당시 관찰사였던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이었다고 한다. # 속속들이 살아 있는 한옥의 숨결 한옥마을의 장점 중 하나가 전통고택 체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많은 한옥 중 가장 독특한 건물은 학인당(學忍堂)이다. 이름 뒤에 전(展)자나 당(堂) 자 등을 붙여 건물의 역할과 신분을 표시했던 전통에 비춰볼 때 왕이나 왕족의 공식활동 공간으로도 생각되지만, 사실 궁중 건축양식을 도입한 상류층 저택이다. 뛰어난 효자로 알려져 있는 인제(忍齊) 백낙중이 조선 말기에 지은 근대 한옥. 당시엔 99칸짜리 저택이었으나, 현재는 본채와 솟을대문 등 7동만 남아 있다. 해설사 조씨는 “호박 주춧돌과 유려한 서까래의 곡선 등에서 전통 궁궐양식이 살아 있음을 보게 되죠. 건물 전체가 복도로 연결된 것은 일본 건축양식, 화장실과 욕조 등이 건물 내 한 공간에 배치된 것은 서양식 건축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문인 솟을대문은 잠겨진 채 옆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다소 안타깝다. 고택체험용으로 사용되는 방 문의 쇠문고리를 잡아 당기자 한지 특유의 향기가 오롯이 전해 왔다. 격자무늬 한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가득찬 툇마루를 삐걱대며 걷는 맛이 각별하다. 한 골목 건너 양사재(養士齋)는 이름 그대로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된 곳이다. 당연히 방의 크기가 학인당 등에 비해 작다. 실내는 정갈하게 보전된 편.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때 구들장을 덥히는 전통 난방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방금 전 유생이 앉았던 듯, 흑갈색으로 그을린 구들장에 온기가 남아 있다. 이 밖에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씨가 거주하는 승광재와 풍남헌 등에서 전통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최소 인원은 10인 이상.www.hanokmaeul.com이나 전화 063)287-6292 등을 통해 자세한 숙박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맛집, 찻집 등 즐비 식재전주(食在全州)라고 했다. 먹거리를 빼고 전주를 말하랴. 수량이 적어 ‘말라깽이 팔십 할머니 젖가슴만도 못한´ 전주천이지만, 팔십 할머니 품에 안긴 한옥마을 주변의 맛집만큼은 더없이 풍성하다. 감칠맛 나는 오모가리탕 집들이 늘어선 가리내길을 시작으로 서민들의 애환이 스민 자장면집 등 ‘골목길의 맛´ 가득한 향교로, 한정식 전문식당들이 많은 은행나무길 등이 씨줄날줄로 엮여 있다. 한옥마을은 현재 공사중이다. 전주시는 20억원을 들여 전통 솟대를 세우는 등 한옥마을 일대 8곳에 쌈지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물레방아 등을 주제로 테마공원도 조성된다. 전선을 땅 아래로 묻는 지중화 공사도 한창이다. 골목마다 땅을 파헤쳐 놓아 어수선하고 불편하지만, 흙을 밟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도시인에겐 그마저도 고맙다. 공사 후엔 땅 위에 다소 거친 돌을 깔아 옛정취를 살릴 계획이라고 공사관계자는 전했다. 내년쯤이면 한결 깔끔하게 단장된 한옥마을을 보게 될 것 같다. 글 사진 전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전주 한옥마을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전주 나들목→전주시청, 한옥마을 방면 직진→한옥마을. # 인근 관광명소 옛 전라감영 소재지였던 전주의 상징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객사(보물 제538호), 로마네스크 주조에 비잔틴풍이 가미된 전동성당 등이 한옥마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 한국농구 100주년

    한반도에서 농구공이 ‘통통’거리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됐다.1907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국내에 농구를 소개했던 것.26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는 지나간 100년을 돌이키고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기 위한 기념식이 열렸다. 한국 농구 코트의 어제와 오늘을 뜨겁게 달궜던 스타들이 대거 참석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기념식 앞뒤로 열렸던 여자 올드스타(고명화 유영주 정은순 조문주 천은숙 등 24명), 남자 올드스타(강동희 강정수 김유택 김진 박종천 안준호 유도훈 정인교 허재 등 24명) 경기. 올드스타 대부분 몸매가 달라졌다. 점프도 낮아졌고, 달리기도 느린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폼은 전성기의 흔적을 찾기에 충분했다. 여자 올드스타전은 유영주 등이 활약한 백팀이 37-27로, 남자 올드스타전도 허재 등이 뛴 백팀이 청팀을 53-40으로 이겼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씨줄날줄] 스타벅스/함혜리 논설위원

    커피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구한말이다.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커피는 미개국이 아닌 개명국의 상징으로 통했다. 다방과 인스턴트 커피의 보급, 자동판매기 등으로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은 지금도 일부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스타벅스 커피숍이다. 사람들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마치 세련된 뉴요커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이런 이미지는 대중문화의 영향이 크다. 그 효시는 1998년 제작된 영화 ‘유브갓메일’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멕 라이언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드라마 ‘프렌즈’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에서도 스타벅스 커피는 빠지지 않는다. 테이크아웃 스타벅스 커피는 바쁘게 살아가는 뉴요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상징으로 쓰인다. 5개의 스토어를 갖고 있는 시애틀의 조그만 커피 소매업체였던 스타벅스는 1987년 하워드 슐츠 회장이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이후 공격적인 점포확장 전략으로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은 42개국에 1만 4000여개나 된다.1999년 이대 앞에 1호점을 개설한 이후 현재 200개에 가까운 점포를 가진 한국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 스타벅스 커피가 상륙하지 않은 곳이 없다. 최근엔 원두커피 생산국이자 최대 소비국인 커피의 나라 브라질도 사로잡았다. 브라질 토종 커피 가격보다 3배나 비싼데도 점포에는 손님이 밀려든다. 스타벅스 커피점이 브라질 사람들에게 ‘미국 문화를 공유하는 부자들의 공간’이라는 이미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타벅스가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5P 전략, 즉 제품(Product)·가격(Price)·장소(Place)·프로모션(Promotion)·사람(People)을 중시한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스타벅스에서 찾는 것은 부자 나라 미국의 분위기가 아닐까.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사기 위해 지갑을 열고,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린다. 어느덧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에 버금가는 글로벌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스타벅스 커피. 거대 자본주의의 위력에 커피 문화의 다양성마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부고]

    ●김희문(에코제니스 대표)씨 모친상 2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3일 오전 9시 (02)3410-6906●이영직(예비역 육군 준장·전 로템 부사장)씨 별세 경식(기아자동차 수출기획팀 대리)씨 부친상 이승원(나우아이비캐피탈 대표)오석훈(새마을금고연합회 파트장)씨 빙부상 2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2)3010-2295●윤만철(전 한국전력공사 부처장)성철(전 대생개발 총무이사)혜자(일본 선교사)씨 부친상 이양배(행복한교회 목사)류영기(일본 선교사)씨 빙부상 김복희(반석영광교회 원로목사)씨 시부상 윤상은(반석영광교회 목사)상현(한국경제TV)씨 조부상 이종립(삼성전자 책임연구원)씨 외조부상 2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3일 오전 9시 (02)3010-2231●함용민(자영업)씨 모친상 현필주(자영업)정태호(연예정보신문 대표)조경호(회사원)씨 빙모상 21일 경희의료원, 발인 23일 오후 1시 (02)958-9546●박대열(전 고려증권 영업부장)흥렬(한텍 전무)성열(덕원건설 상무)수열(울산방송 광고사업국장)중열(동남유화 차장)씨 부친상 21일 울산 우리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 (052)269-0119●이연순(영남대 섬유패션학부 교수)씨 상부 한세현(수의사)윤경(영남대 강사)민경(위덕대 교수)씨 부친상 배장호(영남대의료원 의사)씨 빙부상 21일 영남대의료원, 발인 23일 오전 6시(053)620-4241●지민석(그린그래스호텔 전무)씨 별세 2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3일 오전 6시 (02)3010-2232●백승도(승민비젼 대표)승혁(사업)승영(전 아시아나 싱가포르지점장)승모(관세청 고객지원센터 팀장)씨 모친상 윤정세(엠피알비젼 대표)씨 빙모상 2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 (02)3010-2292●김영진(전 프로야구 LG 트윈스 매니저)씨 상배 21일 대전 을지대학병원, 발인 24일 오전 (042)611-3979●이두진(씨앤피아쿠아 대리)희승(보건복지부 콜센터)연승(성남시 공무원)씨 부친상 정승원(넥스트리인터넷 대표)류춘록(타임페이스 이사)씨 빙부상 21일 강북삼성병원, 발인 23일 오전 5시30분 (02)2001-1096
  • (35) 아프리카의 카멜롯 - 곤다르 기행

    (35) 아프리카의 카멜롯 - 곤다르 기행

    곤다르 시내에서 차로 약 20분쯤 떨어진 곳에 ‘웰레카’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폐허처럼 변모해 관광객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는 곳이지만 1991년에 에티오피아 멩기스투 정부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과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아베샤(아비시니아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하는 것에 반해 웰레카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색깔은 같지만 ‘팔라샤(‘외지인’ 혹은 ‘이스라엘 가문’을 의미)’라고 부른다. 19세기 중엽 영국인 선교사들은 외부와 단절되어 1600년 이상 자기들 고유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유대인 신앙을 실천하는 이 사람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들은 언젠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전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의 한 뿌리였던 것이다. 4세기에 기독교가 에티오피아의 국교가 되지만 이들은 개종하지 않고 그때까지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믿고, 또 살고 있었던 것이다. 1991년 5월 24일 25시간 만에 진행된 엑소더스로 약 10만 4천여명의 팔라샤가 에티오피아를 떠났는데 웰레카에 사는 사람들은 그 후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토지를 강제로 몰수당해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갖은 종교적인 핍박을 받으면서도 도자기, 대장장이, 천짜기 기술 등으로 생활을 하며 유대인 고유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간 덕택에 수준 높은 수공예품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이제는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어져 마을에는 좀처럼 생기가 없다. 검은 피부의 유대인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번 가볼만한 곳이다. 랄리벨라에는 팔라샤 마을 정도는 아니지만 팔라샤가 경영하는 호텔이 있다. 호텔 이름이 ‘ALEF’라는 곳인데 이스라엘어로 ‘first’라는 의미다. 이곳에 가면 이스라엘에서 온 배낭여행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주인이 처음부터 본인과 그곳에 드나드는 친구들이 팔라샤임을 실토한 건 아니었지만 호텔 이름과 방문객들의 국적이 연관성이 있어 보여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더니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곤다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120Km정도 떨어져있는 시멘국립공원을 강추한다. 표고 4,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연이어 이어진 협곡으로 ‘아프리카의 천장’으로 불린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이 되었지만 삼림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현재는 위험유산으로 분류가 되어 있으니 방문을 하더라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자제하기를 권한다. 시멘국립공원은 경관이 수려하고 ‘비비’나 ‘에티오피아 여우’ 등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야생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트레킹 코스로 적당하며, 곤다르 시내의 여행사를 통하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상품들이 많다.       <윤오순>
  • “임의 삶은 거울입니다”

    “임의 삶은 거울입니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N 알렌(1858~1932)은 이땅에 개신교가 전래될 무렵 가장 먼저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전파에 나섰던 선교사로 꼽힌다. 알렌이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올린 예배는 바로 남대문교회(담임목사 조유택)의 모태이다. 그런가 하면 2004년 입적한 전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선 최고의 해외 포교사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개신교계와 불교계가 두 사람의 업적과 삶을 되새기는 대규모 행사를 나란히 열어 주목된다. ●교회 설립 120주년에 돌아보는 선교사 알렌 한국 기독교사를 볼 때 알렌이 1887년 11월 21일 제중원에서 올린 예배의식은 남대문교회의 출발로 기록된다.1884년 9월 상주 선교사로 한국에 온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뒤 조정의 신임을 얻어 1885년 설립한 게 제중원. 이후 제중원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창구로 한국 개신교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내에선 청량리 중앙교회를 비롯해 25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15년간 선교 중이다. 당시 을지로 구리개(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의 제중원이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어 그곳에 있던 교회가 남대문밖 복숭아골로 이전하면서 남문밖교회, 남문외교회, 남대문밖 제중원교회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으로 부통령까지 지낸 함태영이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영도 남대문교회 출신이다. 특히 의료계 인사 중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김필순을 비롯해 한국 정형외과의 태두라는 이용설,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한 김명선 등 많은 의사들이 이 교회에 몸을 담았었다. 올해로 창립 120주년을 맞는 남대문교회가 오는 17일 오후 2시 이 교회에서 여는 세미나는 초기 선교사 알렌을 다시 보는 자리. 의료선교를 통해 교회를 설립한 알렌의 가족사를 비롯해 선교, 의료, 외교 활동을 조명하게 된다. ●외국인 제자들이 마련한 숭산스님 3주기 행사 “단지 모를 뿐 오직 할 뿐”이라는 명언으로 회자되는 숭산(1927~2004). 생전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베트남의 틱낫한,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와 더불어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재에 소개될 만큼 세계 각국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려 한국불교 최고의 해외포교사로 꼽히는 스님이다. 올해 3주기를 맞아 열리는 추모제는 예년과 달리 30여개국 선원 120곳의 외국인 제자 170여명과 국내의 문도들이 뜻을 모은 행사.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스물여섯 살 때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 포교 중인 계룡산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과 같은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숭산 스님과 해외포교를 다녔던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이 추모제를 주도한 눈 푸른 선승들이다.20∼2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로비에선 스님의 생전 활동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영상물도 방영한다. 모두 외국인 제자 스님들이 애지중지하던 소장품들이다. 전시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폴란드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 출간된 숭산 스님의 법어집이 소개된다. 추모제 참가차 방한한 외국인 스님들은 24∼26일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에서 수행 정진한 뒤 27일 오전 10시 수유리 화계사 대적광전에 모여 추모다례재를 봉행한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그레그 “한반도 비극에 美도 일부 책임”

    그레그 “한반도 비극에 美도 일부 책임”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던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이 8일 한반도의 역사적 비극에 미국의 책임이 일부 있음을 인정해 관심을 끌었다. 이날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한·미협회 주최 ‘한·미 친선의 밤’행사에서 ‘한·미우호상’을 수상한 그레그 이사장은 수락사를 통해 “1973∼75년 중앙정보국(CIA) 직원으로 한국 근무를 하는 동안 처음으로 1950년 이전 미국이 한국에서 한 역할을 알게 됐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근무때)미국 선교사들의 훌륭한 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지만 미군 함정 셔먼호의 불행했던 평양 항해(셔먼호 사건),1871년 미 함대에 의한 한강하구 한국 요새 파괴,1905년 카쓰라-테프트 협약,1945년 미국에 의한 부주의한(heedless) 한반도 분할 등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레그 이사장은 “나는 뒤늦게 이들 행위의 함의를 알게 되면서 일본의 한국 점령에 길을 열어준 카쓰라-테프트 협약, 한국전쟁으로 연결된 1945년 남북 분단 등 한반도의 비극적인 일들에 미국이 최소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서울광장] 멀지만 가야 할 복수국적제/황성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멀지만 가야 할 복수국적제/황성기 논설위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인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박사는 귀화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포기했다. 귀화 절차를 밟는 데 갖출 서류가 산더미처럼 많았다. 무려 38가지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귀화에 미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 부인의 한국 국적 회복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 손 들었다. 선교사 후손으로 순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그는 그렇게 귀화 희망을 접었다. 지금은 인 박사 부부 모두 영주권(F5)을 지녀 외국인이지만 큰 불편없이 살고 있긴 하다. 그런 그에게 법무부가 이중국적 허용을 추진한다는 소식은 듣던 중 반가운 일이었다. 그는 국적법이 개정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겠노라고 빙긋 미소를 던졌다. 국적 유지 여부가 애국심을 판단하는 기묘한 잣대가 된 것은 오슬로 국립대 박노자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박정희 시대의 병영국가’에서이다. 이 시대의 잔재가 병역 기피와 맞물려 지금껏 국적 포기나 이중국적을 반국민적 행위로 인식토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국적 포기자는 17만명에 이른다. 취득자는 5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저출산으로 2050년에는 인구의 10%를 외국인으로 채워야 할 판이다. 두뇌 확보에 고심해온 정부는 병역필자에 한해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외국인 인재도 우리 국적을 지닐 수 있도록 한 방안을 내놓았다. 9세기 신라에도 ‘이중 국적자’가 있었다. 김진이나 김자백 같은 재당(在唐) 신라인들이다. 이들은 당나라와 일본, 신라를 무대로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쳤다. 당은 외국인이 귀화하면 10년간 조세를 면제해주고 출입국과 교역, 재산과 노비는 물론 국내 여행과 혼인, 의복에 이르기까지 중국인과 같은 처우를 누리도록 했다. 산둥 반도를 중심으로 신라방에 거주했던 이들은 때로는 신라인, 때로는 당인으로 살았다. 지금으로 치면 재미·재일 교포처럼 재당 교포였던 셈이다. 역사학자 권덕영은 이민족을 받아들인 개방 정책이 당나라 번성의 한 이유라고 봤다. 정부는 이중 국적제가 외국인 인재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하지만 국적을 복수로 갖도록 한다고 해서 선진국이든, 중·후진국 출신이든 두뇌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기대는 장밋빛에 가깝다. 고3 딸을 둔 인요한 박사는 다른 직원들은 다 받는 학자금 보조 혜택을 국제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못 받도록 한 병원 규정이 못마땅하다. 외국인이든 귀화인이든 한국인 학교에 보내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법률이나 세제만 고친다고 인재가 오는 게 아니다. 교육, 의료나 주거, 레저 면에서 삶의 질이 인재를 유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사회 곳곳을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잠재적 이중국적 대상자인 700만 재외 동포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중국적이라는 말만 들어도 반발하는 히스테릭한 심리가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표현을 가치중립적인 복수 국적으로 바꾸고, 의식을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중국적을 병역필에 한해 허용할 때 생기는 여성 역차별이나 단일 국적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 정부 등과의 협의도 난제다. 외국인 100만명 시대라지만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여야 생존할 수 있는 ‘문명사적 전환기’에 우리는 서 있다. 길은 멀어도 언젠가는 가야 할 여정에 복수국적제가 놓여 있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김보록 신부의 죽음체험 피정 11일 명동서

    자신을 위한 장례미사와 고별식, 유언 작성, 입관 체험까지 죽음을 체험하는 독특한 피정이 열린다. 천주교 살레시오 수도회의 김보록 신부가 11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실시하는 ‘죽음체험 하루피정’. 천주교에서 ‘위령성월’은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살아있는 이들이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하고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잘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맞는 성월.‘죽음체험 하루피정’은 김보록 신부가 매년 위령성월에 실시한 피정행사로 관심을 모아왔다.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되는 피정은 죽음에 대한 강의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을 위한 장례미사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묘비와 유언서 작성, 입관체험 등 스스로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프로그램들이 들어있다. 1940년 일본에서 출생한 김보록 신부는 1960년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해 광주 살레시오 수도원장, 부관구장을 맡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선교사로 일한 뒤 현재 서울 돈보스코 정보문화센터원장으로 전국 각지에서 피정을 지도하고 있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배목사 상혼에 또 죽다?

    배목사 상혼에 또 죽다?

    아프간 탈레반 무장세력에게 납치·살해된 고 배형규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출간됐다가 비난이 거세지자 출판사 측이 4일 만에 스스로 판매를 중지했다. 25일 출판사 한솜미디어에 따르면 김성웅(49·우림과 둠밈 성경연구소 대표) 목사 등 3명이 공동 집필한 ‘아프간의 밀알:순교자 배형규 목사의 삶과 죽음’을 지난 20일 출간했다가 책을 지난 24일 전량 회수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저자가 원고를 가져와 ‘이 내용을 책으로 만들 수 있겠냐.’고 제안해 원고를 읽어본 뒤 특별한 문제가 없어 책을 내게 됐다.”면서 “한국 교회 선교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는 책이라고 생각해 출간하게 됐는데 이 정도로 파장이 커질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한국의 기독교 선교 100년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1866년 한국에 왔다가 평양 주민들의 공격으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서 사망한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로버트 토머스는 현재 한국 선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프간에 선교를 떠났던 분당샘물교회 청년회와 배 목사를 다루면서 배 목사를 ‘아프간의 토머스’로 칭송하고 순교자로 평가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 책은 ‘그들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갔는가?’라는 주제 아래 ‘분쟁지역 선교 더욱 확대해야’,‘세상 사람의 막말은 사탄의 짓’,‘복음전파의 땅 끝은 이슬람 지역’,‘아프간 사태, 우연 아닌 하나님의 계획’ 등의 소제목이 논란을 낳았다. 책이 출판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 사이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한 네티즌은 “납치돼 있을 때만 해도 ‘아프간에는 선교가 아니라 봉사하러 갔다.’고 말하더니 이제 와서 순교라고 포장하는 것이 우습다.”면서 “이런 행태 때문에 (기독교에) 오히려 반감만 생긴다.”고 비난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아직도 피랍 사태에 대한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시기에 이런 책을 출간하는 것은 고인의 이름을 팔아 인세를 챙기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분당샘물교회 관계자도 “저자나 출판사 측에 책의 출간을 요청한 적도, 이들로부터 책의 출간을 통보받은 적도 없다.”면서 “피랍자 문제가 조용히 마무리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겨나 우리도 무척 안타깝다.”고 말했다. 종교비판자유실천시민연대 신용국 사무국장은 “배 목사가 죽을 각오를 하고 아프간에 간 것도 아니었는데 이를 순교로 미화하는 것은 망자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오히려 일부 교계가 자신의 과오를 덮고 추후 선교사업의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배 목사의 죽음을 악용하려는 의도마저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서울대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는 “사실 순교는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배 목사 죽음에 대해 순교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면서도 “아프간 피랍 사태에 책임이 있는 교계가 이런 식으로 배 목사의 죽음을 미화하려고만 한다면 수긍할 수 있는 일반인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종교플러스] 27일 교회와 청소년 부훙대축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유소년위원회는 27일 오후 5시 총신대 대강당에서 ‘교회와 청소년을 위한 부흥대축제’를 연다. 기독청소년들의 영성회복을 위한 행사. 유리상자, 자두 등 크리스천 연예인과 복음성가 가수들의 콘서트, 이재환 선교사와 하재호 목사의 강연회로 짜여진다.(02)741-2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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