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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윤지관)은 명지대·LG연암문고와 함께 추진하는 서양고서 국역출판사업의 일환으로 ‘그들이 본 우리’(Korea Heritage Books·살림출판사) 시리즈 1차분 세 권을 15일 첫 출간한다.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에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1만여점의 한국 관련 고서와 문서, 사진 가운데 엄선한 91종이 실린다. 번역원 측은 “이 가운데는 지금껏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와 유일본 등 희귀본이 적지 않다.”며 “동북아 지역 인문사회과학과 한국학 전반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출간될 도서는 ‘임진난의 기록-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백두산으로 가는 길-영국군 장교의 백두산 등정기’‘조선의 소녀 옥분이-선교사 구타펠이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등 세 권.‘임진난의 기록’은 16세기 임진왜란을 직접 목격한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의 서간문이다. 프로이스 신부는 당시 유일하게 제3국인으로 임진왜란을 목격한 주인공. 그는 임진왜란의 발발양상, 구체적인 한반도 침략과 평화협상 과정 등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내륙에서는 패배의 연속이지만 바다에서는 불을 뿜는 전함(거북선)으로 조선 수군이 우세하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영국군 대위인 카벤디시와 굴드 아담스의 백두산 등정기다.1891년 백두산을 오른 이들은 서울, 원산, 갑산, 보천의 모습과 기온, 고도, 각 지역의 가구 등을 상세히 적었다. 당시 대표적인 민속화가인 김준근의 풍속화도 여러 점 실려 있다.‘조선의 소녀 옥분이’는 미국 감리교 여성선교사 미너바 구타펠이 쓴 9개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이 중 4편은 실화로 조선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이 사업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계기이자 우리를 세계에 알리는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출간 의의를 밝혔다. 번역원 측은 “현재 연간 평균 예산은 1억 5000만원으로, 매년 10종씩 10년내에 마무리할 계획이나 예산이 늘어나면 앞으로 5년내에 완간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송도 ‘영어 열풍’ 진원지 부상

    새 정부가 영어 공교육 강화 방침을 발표한 이후 경제자유구역인 인천 송도국제도시를 중심으로 ‘영어 열풍’이 불고 있다. 20일 경제자유구역청 등에 따르면 태권도, 음악·미술학원에서도 영어를 가미해 교습이 이뤄지는가 하면 일부 교회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를 동원해 영어예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송도동 모 학원이 개최한 송도국제학교 예비반 모집 설명회에는 500여명의 학부모들이 몰렸다. 정모(48)씨는 “송도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아이들 영어 가르치는 데 최적지로 여겨진다.”면서 “때문에 무리를 해서 집값이 비싼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영어 열풍은 송도국제도시에 들어설 국제학교 및 영어마을 조성계획과 맞물려 이명박 정부의 영어교육 강화 방침이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내년 9월 문을 열 송도국제학교는 전교생의 30%를 내국인으로 선발하기에 굳이 먼 유학길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심리가 이 학교에 대한 인기 폭발로 이어지고 있다. 송도국제학교는 외국교육기관특별법에 따라 설립되는 국내 최초의 국제학교로 국제업무단지 내 6만 9000㎡에 2006년 3월 착공됐다. 유치원과 초·중·고교(12학년제) 과정을 갖추고 정원 2100명을 외국인 70%, 내국인 30% 비율로 선발해 200여명의 교수진이 영어로 교육할 계획이다. 송도국제학교는 인천은 물론 서울 강남지역 등에서도 학원에 예비반이 편성될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다. 한 학원 관계자는 “국제학교의 내국인 30% 입학 규정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문의가 급격히 늘었다.”며 “영어를 중시하는 정부까지 들어서 영어 열풍은 가속화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송도국제도시 발(發) 영어 열풍’은 다른 지역 학원비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학교 입학을 위한 학원 수강료가 월 80만∼100만원에 달하면서 여파가 타 지역에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인천 남구 주안동의 한 학원 관계자는 “송도 학원비 흐름을 좇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학원가의 현실”이라며 “학부모들은 학원비가 싸면 강사의 실력에 뒤진다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다.”고 강조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박기철의 플레이볼] 야구의 세계화와 중국

    한국 야구가 베이징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 남아공, 독일 등과 어깨를 겨루는 동안 베이징 야구장에선 메이저리그 시범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야구는 올림픽 예선이 열린 타이완에선 국기인 데 견줘 중국 본토에선 여전히 생경한 스포츠일 뿐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 중국에서 열린 시범경기에는 매진이나 다를 바 없는 1만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왔지만 이들은 파울볼에 환호를 보내거나 7회를 앞두고 노래 ‘야구장으로 날 데려다주오’가 흘러나와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야구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한국(1905년)보다 훨씬 빨랐다. 메이저리그 자료에 따르면 헨리 윌리엄 분이란 미국 선교사가 1863년에 상하이 야구클럽을 창단했다. 그러나 역사와 인기는 별개. 처음 도입 이후 50여년 동안 중국 야구는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었다.1913년 극동경기대회가 창설됐을 때 중국은 3위를 차지했다. 베이브 루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도 중국에 들러 상하이 팬더스란 팀과 시범경기를 가졌다.1940년대엔 인민해방군에도 팀이 생겨났고, 1959년 첫 전국대회가 열렸을 때는 전국에서 23개팀이 참가할 정도로 열기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11월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야구를 미국문화의 잔재로 몰아붙이며 그 싹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다시 중국에서 야구가 시작된 것은 마오쩌둥이 눈을 감은 1975년 이후. 특히 1980년 LA다저스 구단주 피터 오말리는 지도자를 파견한 데 이어 6년 뒤에는 야구장까지 세웠다. 오말리가 은퇴한 뒤로는 메이저리그 사무국 차원에서 짐 레파브아를 대표팀 감독으로 파견했고 데이브 윈필드, 칼 립켄 주니어, 조 토레 등이 코치 연수교실을 여는 등 지원을 계속했다. 메이저리그가 국제화에 눈을 돌린 것은 1888년 알렉산더 스폴딩이 자신의 팀을 이끌고 세계일주 여행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세월에 견줘 성과는 미미했다. 메이저리그의 국제화가 우리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를 선수 공급원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중계권을 포함한 상품을 판매할 시장으로 여기고 접근한다. 메이저리그는 중국 야구에 지원을 하면서 이미 선수 협정을 체결했다. 우수한 선수가 나올 경우 메이저리그가 우선적으로 데려갈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반면 우리가 생각하는 야구의 국제화는 야구 월드컵이 월드컵축구만 한 인기를 얻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국제화의 방향을 우리 생각에 가깝게 끌어올 길은 없을까?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cobb76@gmail.com
  • [나우@인터뷰] K리그 수원서포터 제임스 마스

    [나우@인터뷰] K리그 수원서포터 제임스 마스

    스물다섯 미국 청년은 5년 전 한국을 찾을 때까지 축구란 경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을 물었지만 같은 답이 돌아왔다. 여자친구 손에 이끌려 찾은 경기장에서 “ 필이 꽂혔다. “ 미국에 9개월 머무를 때에도 축구와 수원 삼성이 그리웠다. 결국 지난해 2월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구단을 찾아가 영문 홈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겠다고 자청했다. 수원 서포터들의 모임 ‘그랑블루’의 제임스 마스를 13일 경기도 성남 분당의 한 햄버거가게에서 만났다. ● 구단 찾아가 영문 홈피 구축 제안 190㎝ 큰키에 구레나룻이 거뭇했지만 순해 보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시간과 돈에 지나칠 정도로 인색한 미국인 특유의 기질도 엿보이지 않았다. 고교 이후 농구나 미식축구밖에 몰랐던 이 청년을 축구에 빠뜨린 힘은 무엇이었을까. “ 농구는 점수가 많이 나잖아요. 하지만 축구는 1,2점으로 승부가 갈리니 정말 짜릿했다. “ 왜 하필 수원일까. “ 내가 처음 경기장을 찾았던 날은 수원과 다른 팀이 경기를 벌였는데 수원 서포터들에 완전 둘러싸여 다른 팀을 응원하다가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랑블루란 걸 뒤늦게 알았다. “ 그는 200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와의 경기 이후 수원 서포터를 결심했다고 했다. 영문 홈페이지를 제안하고 나선 것도 미국에서 수원 소식이 궁금했지만 마땅히 찾아볼 기회가 없어서였다. 수원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수원 소식을 찾게 하자는 취지였다. 미국에서도 그는 집근처 고교 축구팀의 부코치를 두 달 맡았다. 하지만 축구전술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고작 한다는 얘기가 “ 발로 차. “ 뿐이었다고 멋쩍어했다. 미국에도 광적인 스포츠팬들이 널렸는데 한국은 무엇이 다를까.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요약했다. “ 미국인들은 경기 뒤 모두 집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하나가 된다. 경기 뒤 소주폭탄주를 마시고 흥겹게 춤을 추고 논다. 그런 문화가 미국엔 없다. “ 지난해 11월 셋에 불과하던 외국인 서포터가 22명으로 불어난 것도 이처럼 돈독한(?) 커뮤니티 활동 덕이다. ● 이관우·하태균 선수 가장 좋아해 동료 서포터인 영화배우 김상호 씨와는 동네친구다. 영화 ‘타짜’에 출연하는 등 ‘조역 단골’인 김씨는 집에서도 늘 그랑블루 저지를 입고 지낼 정도로 지독한 팬이라고 그는 혀를 내둘렀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는 이관우와 하태균을 꼽았다. 좋아하는 감독은 차범근 수원 감독이 섭섭하겠지만 박항서 전남 감독. 경남 시절 변변찮은 전력으로 정규리그 4위에 팀을 끌어 올린 점이 눈에 들어왔단다. 적지 않은 이들의 근심을 사고 있는 서포터들의 과격한 응원 행태에 대해 한마디 짚어 달라고 주문했다. “ 경기에 진 대전 서포터들이 수원 선수단 버스에 몰려왔을 때 페트병으로 뒤통수를 맞은 일이 있다. 하지만 괜찮다. 열정 때문에 그런 것이니 ‘노 프라블럼(괜찮다)’이다. “ 꿈이 있다면 수원 구단이 그를 정식 고용하는 것. 홈피 관리는 완전 자원봉사. 강사 일을 그만 둔 그는 주식투자로 용돈을 벌면서 홈피 관리와 축구사랑에만 매달리고 있다. 글=성남 임병선 김민희기자 arakis.blog.seoul.co.kr 사진=성남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제임스 마스는 누구 ▲ 출생 1983년 5월31일 미 텍사스주 브라운펠스 ▲ 가족 부모와 4남1녀 중 넷째 ▲ 학력 윔벌리 고교-텍사스주립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 경력 지역신문에 농구 기사 등 기고(중고 시절)-침례교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2003년)-경원대, 아주대 등에서 영어강사(2003∼2006년)-미국에서 고교축구 부코치 등(2006년)-수원 삼성 영문홈페이지 관리 자원봉사(2007년 2월∼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스포츠 라운지] 미국인 수원 서포터 제임스 마스

    [스포츠 라운지] 미국인 수원 서포터 제임스 마스

    스물다섯 미국 청년은 5년 전 한국을 찾을 때까지 축구란 경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을 물었지만 같은 답이 돌아왔다. 여자친구 손에 이끌려 찾은 경기장에서 “필이 꽂혔다.”미국에 9개월 머무를 때에도 축구와 수원 삼성이 그리웠다. 결국 지난해 2월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구단을 찾아가 영문 홈페이지를 만들어 관리하겠다고 자청했다. 수원 서포터들의 모임 ‘그랑블루’의 제임스 마스를 13일 경기도 성남 분당의 한 햄버거가게에서 만났다. ●구단 찾아가 영문 홈피 구축 제안 190㎝ 큰키에 구레나룻이 거뭇했지만 순해 보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시간과 돈에 지나칠 정도로 인색한 미국인 특유의 기질도 엿보이지 않았다. 고교 이후 농구나 미식축구밖에 몰랐던 이 청년을 축구에 빠뜨린 힘은 무엇이었을까.“농구는 점수가 많이 나잖아요. 하지만 축구는 1,2점으로 승부가 갈리니 정말 짜릿했다.” 왜 하필 수원일까.“내가 처음 경기장을 찾았던 날은 수원과 다른 팀이 경기를 벌였는데 수원 서포터들에 완전 둘러싸여 다른 팀을 응원하다가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랑블루란 걸 뒤늦게 알았다.”그는 200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와의 경기 이후 수원 서포터를 결심했다고 했다. 영문 홈페이지를 제안하고 나선 것도 미국에서 수원 소식이 궁금했지만 마땅히 찾아볼 기회가 없어서였다. 수원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수원 소식을 찾게 하자는 취지였다. 미국에서도 그는 집근처 고교 축구팀의 부코치를 두 달 맡았다. 하지만 축구전술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고작 한다는 얘기가 “발로 차.”뿐이었다고 멋쩍어했다. 미국에도 광적인 스포츠팬들이 널렸는데 한국은 무엇이 다를까.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요약했다.“미국인들은 경기 뒤 모두 집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하나가 된다. 경기 뒤 소주폭탄주를 마시고 흥겹게 춤을 추고 논다. 그런 문화가 미국엔 없다.”지난해 11월 셋에 불과하던 외국인 서포터가 22명으로 불어난 것도 이처럼 돈독한(?) 커뮤니티 활동 덕이다. ●이관우·하태균 선수 가장 좋아해 동료 서포터인 영화배우 김상호 씨와는 동네친구다. 영화 ‘타짜’에 출연하는 등 ‘조역 단골’인 김씨는 집에서도 늘 그랑블루 저지를 입고 지낼 정도로 지독한 팬이라고 그는 혀를 내둘렀다. 장 좋아하는 선수로는 이관우와 하태균을 꼽았다. 좋아하는 감독은 차범근 수원 감독이 섭섭하겠지만 박항서 전남 감독. 경남 시절 변변찮은 전력으로 정규리그 4위에 팀을 끌어 올린 점이 눈에 들어왔단다. 적지 않은 이들의 근심을 사고 있는 서포터들의 과격한 응원 행태에 대해 한마디 짚어 달라고 주문했다.“경기에 진 대전 서포터들이 수원 선수단 버스에 몰려왔을 때 페트병으로 뒤통수를 맞은 일이 있다. 하지만 괜찮다. 열정 때문에 그런 것이니 ‘노 프라블럼(괜찮다)’이다.” 꿈이 있다면 수원 구단이 그를 정식 고용하는 것. 홈피 관리는 완전 자원봉사. 강사 일을 그만 둔 그는 주식투자로 용돈을 벌면서 홈피 관리와 축구사랑에만 매달리고 있다. 글 성남 임병선 김민희기자 arakis.blog.seoul.co.kr 사진 성남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제임스 마스는 누구 ▲출생 1983년 5월31일 미 텍사스주 브라운펠스 ▲가족 부모와 4남1녀 중 넷째 ▲학력 윔벌리 고교-텍사스주립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경력 지역신문에 농구 기사 등 기고(중고 시절)-침례교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2003년)-미국에서 고교축구 부코치 등(2006년)-수원 삼성 영문홈페이지 관리 자원봉사(2007년 2월∼ )
  • “환갑에 영어선교는 예수오빠가 주신 선물”

    “환갑에 영어선교는 예수오빠가 주신 선물”

    ‘환갑을 넘긴 나이에 이역만리 브라질 땅에 선교사로 파견된다. 그것도 수녀의 몸으로….’ 다음달 중순 브라질 상파울루 남쪽 소로카바 수녀원에 영어 교사 선교사로 파견되는 백 젬마마리(63·본명 백순희) 수녀. 지난해 10월 자신이 소속한 서울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로부터 브라질 파견 제의를 받고 “하느님이 새롭게 열어주신 길이니 감사하며 따르겠다.”며 4년간의 선교사 소명을 승낙, 막바지 떠날 채비를 하고있다. 소로카바 수녀원에 살고 있는 브라질 수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특별한 소임. ●떠나기 전 ‘예수오빠´ 그림전 열어 “60년을 넘게 살아온 고국을 떠나 낯설고 먼 나라에서 나이든 수녀가 새로운 삶을 살기가 쉽지만은 않겠지요. 정든 이들과 헤어진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요. 하지만 마음을 정하고 나니 빨리 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환갑을 넘긴 수녀가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기란 흔치 않은 일. 최근 백 수녀가 펴낸 ‘예수오빠께서 누이야 부르시면’ 출간 기념으로 이 책의 본문 삽화를 그린 주정연(바오로)씨의 삽화 그림들을 모은 ‘예수오빠 작은 그림전’이 열린 서울 정동 품사랑 갤러리에서 7일 만난 수녀는 나이를 짐작키 어려울 만큼의 맑고 환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아빠 하느님, 오빠 예수, 엄마 마리아…. 백 수녀가 부르는 하느님과 예수님, 성모 마리아의 명칭은 아주 독특하다. 영성이 탁월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예수오빠’와 소통하는 것으로도 천주교계에선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수오빠께서 누이야 부르시면’은 백 수녀가 기도, 묵상을 하며 ‘오빠예수’와 소통했던 내용들을 소상히 적어 세상에 알린 책.1966년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한 후 42년간의 수도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성과, 성령 은사의 묵상집이다. 고교 2학년때 우연히 찾았던 대구 수녀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로 새벽 기도를 바치는 검은 수도복 차림의 수녀들 모습을 보고는 “여기가 바로 평생 내가 살 집이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고 한다. 원래 장로교회 신자였던 그가 단박에 천주교 수녀가 될 마음을 굳혔으니 오래 전부터 갈 길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천주교와는 아주 멀었던 부모들.“수녀가 되겠다.”는 맏딸의 고백에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부모의 가슴에 큰 아픔을 심고 서원, 수녀의 길을 걷던 중 임종의 아버지가 남긴 “네가 행복한 길을 찾아서 고맙다.”는 마지막 말씀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한국찾는 외국인 신부·수녀들에 24년간 통역 사실 브라질 선교사 파견제의는 이번이 두번째.2000년 로마에서 열린 총회 때 만난 소로카바 수녀원의 부원장 수녀로부터 “브라질 수녀들을 위한 영어교사로 일해달라.”는 말을 듣고는 거절했었다고 한다. “두번씩이나 파견 제의를 물리칠 수 없었어요. 이 나이에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소녀 적부터 책을 많이 읽고 문학인의 꿈을 키웠던 백 수녀는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대구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영문과에 편입, 졸업한 영문학도. 졸업하자마자 성의여자중상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해 1년간 살았고 상지여자중상업고등학교에서도 3년간 근무한 교사 출신이다. 예수회가 경영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영어교수법’석사 학위를 받을 만큼 평소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단다. 1984년 베네딕도 로마 총원 영성쇄신코스인 ‘국제만남의 주간’행사에서 통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24년간 통역 일을 해왔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 평신도 등 강사들의 통역을 도맡아 했으니 외국 수도회들이 눈독을 들일 만도 하다.“대학시절 연극 주인공을 맡아 무대에 서면서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는 백 수녀는 수녀가 아니었으면 연극배우가 됐을 것이라며 웃는다. 지금도 가끔씩 연극 공연장이며 영화 상영관을 찾는다고 한다. “수도자의 삶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인생의 큰 배역”이라는 백 수녀. 수녀회에 입회한 이후 서강대 교목실 근무를 포함해 29가지의 소임을 맡을 만큼 많은 일을 해보았다는 수녀는 “살아갈수록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이 커져만 간다.”며 브라질 선교사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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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국제교류재단 △감사 변태갑△기획조정실장 김회길△총무인사부장 유기성△인사교류〃 황오석△문화예술교류〃 송중석△문화센터소장 윤금진△한국학사업부장 박경철△한국어사업〃 함승훈△연구장학사업〃 박상배△미디어사업〃 박미숙△홍보〃 임정은△기금관리〃 홍성수△검사역 김찬곤△워싱턴DC사무소장 서아정△북경〃 문성기△호치민〃 이인혁△모스크바〃 임철우△베를린〃 민영준△동경〃 최현수△전문위원 인성기 이은중 연세대 (신촌캠퍼스) △기획실정책부실장 이동진△교무처정책부처장 겸 교육개발지원센터부소장 김영세△입학처정책부처장 이태규△연구처정책부처장 겸 산학협력단연구정책부단장 이원용△산학협력단산학협력부단장 최우영△시약센터소장 함승주△대외협력부처장 김희진△대학교회담임목사 한인철△삼애교회〃 박정세△건강센터소장 강희철△연세춘추주간 나종갑△에널즈〃 John Frankl(존 프랭클)△교육방송국〃 김현재△대학출판문화원장 겸 언어정보연구원장 김하수△리더십개발원장 김형철△리더십개발원제2부원장 손창완△언어연구교육원부원장 문상영△어린이생활지도연구원장 김명순△사회교육원장 홍종화△사회교육원부원장 하경심△국가관리연구원장 김동노△국가관리연구원부원장 김상준△생명과학기술연구원장 김영민△단백질네트워크연구센터소장 김유삼△생체인식연구센터〃 김재희△미디어아트연구〃 임정택△지식정보화연구센터〃 임춘성△의료법윤리학연구〃 손명세△학술정보관건설추진단본부장 홍갑표△학술정보관건설추진단부본부장 허준행△학술정보관건설추진단간사 이강△상경대학 부학장 김정식△생명시스템대학 〃 한균희△신과대학 〃 권수영△법과대학 〃 김종철△교육과학대학 〃 이규민△연합신학대학원 부원장 김상근△법무대학원 〃 백승민△경제대학원 〃 이학배(의료원)△암센터원장 노성훈△어린이병원장 김덕희△의료기술품질평가센터부소장 박종철(원주캠퍼스)△매지생활관장 겸 여학생지도교수 겸 성폭력상담소장 이정자△지역과학기술진흥센터소장 김경희△근대한국학연구소장 임성래△바이오신소재연구소장 최인호△인문예술대학 부학장 김종두△정경대학 〃 황재훈△과학기술대학 〃 문명상△보건과학대학 〃 김희중△정경대학원 부원장 양준모△보건환경대학원 〃 김희중 서울여대 △인문대학장 안윤모△사회과학대학장 배호순△정보미디어대학장 김명주△미술대학장 김태호△바롬교양대학장 심정섭△박물관장 이원명△홍보실장 조성원 덕성여대 △기획처장 朴佑昶△교무〃 朴明淑△학생〃 金炅姬△대외협력〃 權汶一△인문과학대학장 겸 인문과학연구소장 李善子△사회과학〃 겸 사회과학〃 이영자△자연과학〃 겸 자연과학〃 方孝春△정보공학대학장 李珠瑛△약학대학장 겸 약학연구소장 鄭春植△예술대학장 朴炫信△교양교직학부장 閔炯源△대학원장 朴敏子△특수〃 趙允玉△종합인력개발원장 겸 커리어개발센터장 尹貞粉△도서관장 柳在玉△평생교육원장 申殷秀△언어〃 金汶奎△산학협력단장 李恩玉△기획부처장 李種得△박물관장 崔聖銀△전산실장 崔丞勛△신문사주간 尹熙喆△방송국 지도교수 金英美△학생상담실장 겸 성폭력상담실장 金南載△교수학습개발센터장 李容淑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승진 △상무 허완△이사 유기홍 CBS △TV본부 TV편성제작국 TV보도부장 구성수△〃 선교협력국 선교사업팀장 이범윤△보도국 영상뉴스부장 황명문△〃 노컷뉴스〃 이기범△〃 문화체육〃 이전호△편성국 편성〃 이기운△〃 제작〃 손근필△기획조정실 매체정책〃 배재우△경영본부 관리〃 김순기△마케팅본부 마케팅정책〃 배상하△〃 마케팅기획〃 이종성△대구방송본부 보도제작국장 김일억△전북방송본부 총무〃 정예현△〃 보도제작국 편성팀장 이기완△〃 기술국장 이봉우△청주방송본부 기술〃 이상남△전남방송본부 보도제작〃 김규완
  • “한국서 봉사활동 계속할래요”

    “한국서 봉사활동 계속할래요”

    낡은 봉고차를 몰고 다녀 ‘파란 눈의 청빈 총장’으로 알려진 충남 천안의 나사렛대 백위열(66·미국명은 윌리엄 패치) 전 총장이 19일 33년 만에 정든 교단을 떠났다. 이날 학교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 전 총장과 동갑내기 아내 백경희(미국명 게일 패치) 교수의 정년 퇴임식이 치러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난 백 전 총장은 로체스터대에서 상담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다 선교사를 자원해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1973년 3월 한국에 왔다.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이듬해 나사렛대 심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2∼3대 총장을 지냈다. 자신과 영어학과 교수인 아내도 한국 이름을 사용하고 우리나라 어린이를 입양하는 등 한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랐다. 총장 재직시 자가용 대신에 낡은 봉고차를 직접 운전해 출·퇴근하고 월급과 외부강사비 전액을 학교에 기부하는 ‘청빈 총장’으로 화제를 모았다. 총장 부임 직후인 1996년 국내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장애인 입학전형을 실시, 장애인의 대학교육 길을 열었다.2000년에는 장애인만을 위한 대학 부설 특수유치원 ‘새꿈학교’와 초등학교 교육과정도 잇따라 개설해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졌다. 이 같은 공로로 백 전 총장은 2003년에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주는 장애인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백 전 총장은 퇴임사에서 “30여년간 정든 교단을 떠나 아쉽다.”며 “퇴임한 뒤에도 한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사렛대 명예총장으로 추대됐고 선교사 활동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아줌마 희망 한단에 얼마래요?” “희망유? 몰라유, 채소나 한단 사가슈∼선생님?” 장사익씨가 부른 소리판 ‘희망 한단’에 나오는 대목이다. 8년 전 어느날 미국에서 살던 한 아줌마가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화두를 던지며 고국땅을 밟았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조용했지만 입소문을 통해 삽시간에 퍼지면서 점차 요란해졌다. 그가 펴낸 책은 한동안 각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방송국의 특별 프로그램 등에 초청됐고 언론지면을 통해 그의 삶이 종종 전해졌다. 까닭이 있었다. 잡초처럼, 지독하리만큼 억척스럽게 살아온 한많은 여인네의 삶 그 자체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절망으로 쓰러질 때마다 희망의 지팡이에 의지해 오뚝이처럼 일어선 생생한 경험담이 많은 감동을 선사했던 것. 그 어떤 영화 속의 주인공보다 더 찐한, 말 그대로 신선한 ‘희망의 메신저’나 다름 없었다.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1948년 경상남도 월내라는 어촌마을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남동생 중 한 명은 미군 복무 중 사고로 요절했으며, 한 사람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시골에서 세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 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면서 풍문여고를 다녔다. 잡지판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다. 얼마 후에는 관악컨트리클럽 캐디로도 근무했다. 그러던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삯 100달러만 달랑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식모일도 하고 한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다. 1975년에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이를 피하려고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일등병일 때 용산의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고 상등병 시절에는 고된 훈련을 무사히 거쳐 장교로 임관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이후 독일과 일본 등 주로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대학을 전전한 끝에 1987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마흔두살 때인 1990년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고,2년 뒤에는 하버드대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대위 때 하와이에서 패트리엇 미사일 장교로 근무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한 그는 2006년 당당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딸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학을 다녀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졸업 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 중이다. 최근 그는 ‘서진규의 희망’이라는 3번째 책을 펴내 ‘희망전도사’로 전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또 한달에 한번꼴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판 책자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성공전략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잭 캔필드가 주도하고 있다. 잭 캔필드는 “미군과 하버드에서 살아남은 이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에 무한한 영감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며 영어판 발간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만한 소재로 여긴다는 것. 이래저래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서 박사를 만났다. 명함을 받았더니 이름 밑에 ‘희망연구소 소장’‘박사’‘예비역 소령’이라는 직함이 보였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가냘픈 소녀와 같은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저런 연약한 모습에서 어떻게 불굴의 정신이 나왔을까. 손에는 자신이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3권을 들고 있었다.‘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35만부,‘서진규의 희망’은 15만부 등 모두 50만부가 넘게 나갔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딸 얘기가 나왔다. “딸은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어요.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한 켤레에 2달러를 받고 구두를 닦았지요. 나중에는 특히 군화를 잘 닦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동네에 사는 군인들이 우리집에까지 군화를 들고 왔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딸의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느라 장교인 제가 퇴근 후 계급상 하급자들의 군화도 닦아주는 일이 많았습니다.(웃음)” 딸은 지금도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원씩을 꼬박꼬박 보내 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다.ROTC로 임관할 때는 어머니한테 거수경례로 선서를 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당시 하버드대측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서 박사는 이같은 사연과 함께 딸을 키운 이야기를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제목으로 2000년 책으로 펴냈으며 지금까지 17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또한 올해 안에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현지 출판사측에서는 “딸을 어떻게 키우면 딸이 부모에게 돈을 보내게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정하면 어떠냐.”는 농담 섞인 제안을 하고 있단다. 한국의 풍습과는 달리 미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출판일 때문에 매달 미국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 박사의 인생에는 영화가 몇 편 들어 있다. 미국사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해요.” 국내에 있을 때는 주한 미군병원에서 C형간염을 치료하면서 각종 단체와 지방 등지에서 ‘희망강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 지난 설 직전에는 국군방송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인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번 주어지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좌우된다.”면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줄 때 분명 꿈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처음 군입대했을 때 윗몸일으키기 한번 제대로 못해 겨날 뻔했으나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이겨낸 일화도 소개했다. 오늘날의 서 박사를 있게 한 것은 척박한 그의 집안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엿장수, 어머니는 술 장사를 했다. 이런 여건탓에 주위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반발심으로 ‘공부를 잘해야겠다’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히려 척박한 여건이 우물 안 개구리를 탈피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었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오빠에게 밀려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아메리칸드림’을 꾸었다. 미국에 가면 창녀가 된다는 주위 비아냥에 “내가 창녀가 되면 반드시 장을 지진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보다 멀리,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정해 도전을 거듭하며 소중한 결실을 맺게 됐다. 그는 요즘 틈틈이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왜냐고 했더니 “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면 내 마음의 꿈이 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어 “미 대통령은 내각에 영웅을 필요로 한다.”면서 “책 잘 팔리고, 영화화되고, 미국에서 강연도 휩쓸고, 하버드에서 국제사를 전공했으니 외교역량도 있고, 장차 미 국무장관감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며 웃는다. 그런 다음 여세를 몰아 노벨평화상과 맞먹는 ‘세계평등상’을 제정, 전세계인에게 꿈과 희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기에 10년 내에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이민자 출신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들이 해냈듯이 말입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경남 기장 출생 ▲67년 풍문여고 졸업. 가발공장, 골프장 캐디 등 근무 ▲71년 도미 ▲75년 미 육군 입대 ▲87년 미 메릴랜드대 경영학과 졸업 ▲92년 미 하버드대 석사 ▲96년 미 육군 소령 예편 ▲2006년 하버드대 국제외교사·동아시아언어학 박사 ■ 주요 저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1999),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2000), 서진규의 희망(2007)
  • [열린세상] 베네수엘라는 과연 사회주의일까?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열린세상] 베네수엘라는 과연 사회주의일까?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카라카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밤길, 가이드가 산동네 빈민가를 가리키며 ‘1년 내내 불을 밝히는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사뭇 진지한 조크를 한다. 불빛은 항구적인 빈곤도 지워 버린다. 정치적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던 그는 슈퍼마켓에 커피, 계란, 밀가루가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유가가 배럴당 80 달러가 상회하는 지금, 풍요로운 이 나라에 기초 생필품이 부족하다니.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오래 전부터 의문투성이였다.21세기 사회주의, 볼리바리안 혁명, 미션 로빈슨, 기적의 미션.‘헬로, 대통령’…. 이튿날 국영석유공사를 찾았다. 석유공사는 국가 속의 국가이다. 하루 석유 생산량 260만 배럴 가운데 160만 배럴을 생산한다.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정부 수입의 절반을 제공한다. 에너지만이 아니라 사회복지 사업도 직접 관장하는 무소불위의 국영기업이다.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지만 공사는 여전히 시장주의와 친화적이다. 원유 채굴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과거와 결별하고, 석유화학 부문과 천연가스 부문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한다. 외국기업들은 운영계약, 이익분배, 전략적 제휴 등의 방식을 통해 상류와 하류 부문 모두에 참여한다. 2001년 석유법의 개정으로 로열티를 1% 수준에서 20∼30%로 대폭 인상하였고, 합작투자의 경우 공사가 과반수 지분을 보유하는 의무조항을 만들었다. 일종의 자원 민족주의 경향을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떠난 외국기업은 하나도 없다. 고유가 시대여서 여전히 이득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 베트남도 여기에 가세했다. 파트너를 정하는 것은 차베스 정부이다. 이 나라가 과연 사회주의일까, 혹은 사회주의로 이행 중일까? 모두 아닌 것 같다. 과거 중산층에게 엄청난 보조금을 주던 국가가 이제 가난한 민중에게로 재원을 돌린 ‘페트로 포퓰리즘’에 가깝다. 휘발유 가격은 과거나 지금이나 ℓ당 5 센트 수준으로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이 나라는 ‘사우디 베네수엘라’였다. 스위스에서는 병원이 통째로 수입되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마라카이보 시는 제설작업차를 수입했다.1980년대 초 뷰익 센추리 모델은 미국보다 싼 9000달러 수준이었다. 조니 워커 블랙 레이블 값도 18 달러로 미국보다 쌌다. 자동차 조립업체도, 고급양주 수입업자도 보조금을 얻었다. 기득권층과 중산층은 흥청망청했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기득권층이 독식하던 석유 렌트를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온 빈민층과 중하층으로 돌렸다. 대중 생필품 가격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소비자 물가의 앙등을 막았다. 가끔 수급 불균형으로 품목에 따라 부족 사태도 생긴다. 빈민가에 병원을 짓고, 쿠바 의사 1만 8000명을 초빙하여 무료 의료사업을 시행한다. 각종 대중 공교육 투자도 대폭 확대했다. 토지개혁과 협동조합 사업도 열광적으로 추진한다. 모두가 미션 프로젝트이다. 차베스는 일요일 방송 프로그램 ‘헬로, 대통령’에 매주 출연하여 장광설을 쏟아 놓는다. 거의 선교사의 열정으로 이야기한다. 식자층들은 금방 짜증을 내지만,‘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그를 따르고 조직화된다. 민주주의 국가가 붕괴되고 있다고 외신이나 식자층은 한탄한다. 작년에 최대 공중파 방송사에 대한 허가권 취소로 언론탄압이란 정치적 비난이 있었다. 하지만 체재 중 일간지들에 실린 차베스 비난 기사들 가운데는 대통령의 행태를 무솔리니에 비유하는 칼럼도 있었다. 언론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작년 연말에 대통령 임기의 무제한 연장을 가능케 하는 헌법 개정에 국민들은 부(否)표를 던졌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여전히 건재하다.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0)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장 엘마르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0)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장 엘마르 신부

    경북 칠곡군 왜관(왜관읍 왜관리 134-1)의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천주교 수도승들이 모여 사는 은밀한 곳이다. 독일인 수사(修士) 4명을 포함해 70여명의 수사들이 기도와 노동을 함께 하며 하느님을 찾는 독특한 공동체. 일반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막혀 있는 이곳엘 가면 뭇 수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70대 중반의 독일인 신부가 유난히 눈에 띈다. 이마가 훤하게 벗겨진 머리 양쪽 뒷부분에 금발이 조금씩 남아 있어 ‘황금박쥐’란 별명으로 통하는 장 엘마르(75·본명 랑 곳프리드·한국명 장휘) 신부.47년간 한국에 머물며 오로지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의 길을 걸어온 이방인이다. 성베네딕도 수도회는 조선교구장 뮈텔(1873~1949) 주교가 독일 오틸리엔 수도회에 요청해 한국에 들어온 선교회.1909년 독일인 수도승 두 명이 서울 백동(혜화동)에서 활동한 게 한국 수도회의 시초로 6·25전쟁 중 이곳 왜관으로 피란해 수도생활을 하다가 정착해 본원을 삼은 게 지금의 왜관수도원이다. 지난 음력 설 이틀 전, 세상의 달뜬 분위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수도원에서 강론 준비를 하다가 기자를 맞은 엘마르 신부는 짙은 밤색 수도복 차림이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 노 신부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는 처음”이라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의 수도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먼저 물었다.“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힘들고 불편한 것을 피해가려 들지 않지요. 더구나 내가 선택해 47년을 몸담아 살아온 ‘우리 집’인데 불편하고 힘들 게 있겠습니까.” ‘우리 집’이란 표현을 썼다. 철저한 공동생활을 하며 몸을 낮추는 수도 삶의 터전,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우리 집’ 가운데 하필 한국의 집을 택한 이유는 뭘까. 2006년 월드컵 개최지인 바바리아주, 인구 8000명의 작은 농촌 클라인오스트하임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엘마르는 가난하고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베네딕도회 수사였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도원엘 자주 갔고 그곳에서 읽은 한국 파견 선교사 이야기 책들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한국 천주교 초창기 중국에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복을 입고 주로 밤에 활동했지요. 어린 나이에도 책 속의 한국 이야기는 아주 독특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은 어릴 적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다른 길을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한 뒤 바바리아주립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쳐 사제서품을 받은 게 1959년.2년 뒤 베네딕도수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선교 총책임자가 우연치 않게 “한국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와 망설임 없이 한국행을 결정했다. “신학대를 졸업할 무렵 독일에선 동양 교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어릴 적 읽었던 책 때문이었을까요? 한국, 일본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던 참에 한국행 제의를 받고 보니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지요.” ● 2003년 뇌경색 진단 불구 하루 5번씩 기도 1961년 7월 왜관수도원에 몸을 담아 성주 본당 보좌와 상주·왜관 본당 주임을 거쳤고 2003년 1월 왜관수도원장 자리에 올랐지만 뇌경색으로 5개월 만에 원장 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원장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돼 강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였어요.20년 전 심한 근시로 망막이 파열된 적이 있어 비슷한 증상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뇌경색 진단이 내려지더군요.” “그때 섭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그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대답을 들려준다.“끊임없이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의 길을 걸어왔지만 돌이켜 보면 거꾸로 하느님이 더 나를 찾아주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만난 한국인들이며 본당 주임시절 맺은 인연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그에겐 모두 하느님이 찾아준 길이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 상주본당 주임이 되었는데 그때 신자 고백성사차 외진 공소를 찾아갔었지요. 장마철 불어난 시냇물로 돌아오는 길이 막혀 어쩔 줄 몰랐는데 한 번 본 적도 없는 한 주민이 집으로 안내해 재워 주는 것을 보고 한국에 정착할 맘을 굳혔지요.” 모르는 이를 하룻밤 재워 주면서도 아랫목을 내어주는 한국인들이 퍽이나 인상적이었고 그들에게서 안정감을 찾았다고 한다. 왜관 본당 주임 시절 자신을 아버지 대하듯 따르던 초등학생들은 결혼 후에도 엘마르 신부를 집으로 초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왜관 본당 주임시절 가끔씩 막걸리 잔을 나누던 촌로들이 이젠 거의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도 한다. 뇌경색 진단 후 “위험할 수 있으니 혼자 다니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있었고 약도 늘상 달고 살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이곳 수사들은 아침 5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는 첫 기도부터 저녁 8시 기도까지 하루 5번씩 빼놓지 않고 함께 기도를 한다. 기도 시간을 빼놓곤 모두 출판사며 목공소, 공예실에서 일을 하지만 엘마르 신부는 대신 강론 준비 같은 다른 일을 한다. ● 신학강사로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도 ‘독보적´ 천주교계에선 이름난 신학강사.1969년부터 무려 30여년간 대구 신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친 인물이다.1970년대 중반부터 20여년간 대학교수 4명과 함께 신약성경 번역작업을 벌여 1991년 새 번역 성경을 세상에 내놓았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단선율(單旋律) 전례성가인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도 독보적 존재. 천주교에선 전통적으로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진행하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각국 언어로 대체했지만 미사나 의례 때 부르는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는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는 편. 독일에서 수도회에 입회한 뒤 한국 땅을 밟을 때까지 그레고리오 성가를 배웠던 만큼 한국의 신부들이나 수사들에게 성가를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환상적인 목소리’를 가진 그레고리오 성가의 대가로 통하는 엘마르 신부는 지금도 변함없이 매주 일요일 낮 미사 때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이끈다. 토요일이면 모든 수사와, 서원을 앞둔 예비 수사들의 성가 연습을 지도하는가 하면 일요일 미사 직전에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독창하는 칸토레스들을 점검한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안동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를 찾아 강의와 고백성사를 하고 마산 ‘수정의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강의하는 것을 빼놓곤 수도원 문을 나서지 않는다. 지난해 4월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여기며 살아온 ‘우리 집’인 수도원이 누전으로 불탄 것은 큰 아픔이라고 했다.“내 삶의 터전이 불타 없어진 것도 그렇지만 개인적인 소지품은 물론 그동안 해온 강의 기록이며 모든 자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어요.‘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더군요.” “한국생활 초기 독일에 갔을 때는 이런저런 한국 이야기들을 전해주었지만 이제는 한국인이 된 내가 그들에게 해줄 새로운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엘마르 신부.“친구들과 형제들이 모두 이곳에 있고 하느님을 찾는 나의 영혼이 머무는 ‘우리 집’은 내가 영원히 살아야 할 소임의 터전”이라며 강론 준비를 마저 끝내겠다고 기자 곁을 떴다. 글 사진 왜관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장 엘마르 신부는 ●1933년 독일 클라인오스트하임 출생 ●1953년 성베네딕도회 입회 ●1959년 뷔르츠부르크 대학 신학과 졸업, 사제 수품 ●1961년 한국 입국, 왜관수도원 생활 시작 ●1962년 성주 본당 보좌 ●1963년 상주 본당 주임 ●1964년 왜관 본당 주임 ●1969년 대구 신학원 강사 ●1983년 왜관수도원 부원장 ●2003년 왜관수도원장 취임, 뇌경색으로 5개월 만에 사임 ●현재 왜관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지도 등 수도생활
  • 인수위·학부모 vs 일선교사 영어공교육 찬반 공방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영어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전용교사’를 2010년부터 초·중·고교 현장에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을 30일 발표했다. 그러나 이날 인수위가 개최한 공청회에서 일부 교사들이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육계 내부에서도 찬반이 대립되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영어능력 합격·불합격만 평가” 인수위 발표에 따르면 내년에 영어전용교사 6500명을 선발해 6개월 연수를 시킨 뒤 2010년부터 교육현장에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총 2만 3000명의 영어전용교사를 배치한다. 초등학교는 2011년, 중학교는 2012년, 고등학교는 2013년까지 영어전용수업이 100%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현행 주당 1∼2시간인 초등학교 3∼6학년 영어시간을 3시간으로 늘린다. 특히 현행 문제풀이 위주의 수능 영어 대신 ‘국가 영어능력 평가시험’을 도입, 실용 영어를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 시험은 읽기·듣기·말하기·쓰기의 4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현행 수능 영역인 읽기·듣기는 등급제로 평가하고 새로 추가되는 말하기·쓰기는 학교 수업만으로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합격·불합격만으로 평가한다는 게 인수위의 계획이다. 그러나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열린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대학교수와 학부모 등은 인수위의 방안에 찬성한 반면, 일선 교사들은 현실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교총·전교조 대립… 이념논쟁 비화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새 정부에서 영어교육을 종합적·단계적·연차별로 확대 강화하는 것은 매우 시기적절하다.”고 했다. 반면 김인정 일산 오마초등학교 교사는 “의사 소통 자체가 한국말로도 모자라는 아이들을 상대로 영어로 수업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정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나서 이념논쟁으로 확대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교총은 논평을 통해 “영어교사 심화연수 제공, 교원 양성기관 영어교육 과정 개편, 예산 확보 등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나온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반면 전교조는 “교육 불평등과 소모적인 입시 경쟁교육, 교육의 계층화를 심화시키고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공청회에서 영어전용수업은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수준별로 실시한다는 게 기본 방안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한국이름/함혜리 논설위원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우리말 이름을 갖고 활동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보다 빨리 한국인들과 친숙해지고, 한국 문화에 깊숙이 파고 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철학을 담은 이름들을 갖고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최초로 묻힌 존 W 헤론(1858∼1890년)은 뉴욕대 의대를 졸업하고 1885년 6월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알렌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의 주치의를 맡았던 그는 뛰어난 의술로 깊은 인상을 줬다. 고종이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헤론을 혜참판이라 불렀는데 그의 한국 이름 혜론(惠論)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다 정동에 최초의 민간병원을 열어 환자를 돌봤다. 고종은 스크랜턴의 우리말 이름 시란돈(施蘭敦)을 살려 ‘시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이름 그대로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진료하며 베푸는 병원이었다. 감리교 첫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亞扁薛羅), 장로교 첫 선교사 언더우드(元杜友), 한국 실내 체육의 개척자 반하트(潘河斗), 고종의 밀사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도 파견됐던 헐버트(訖法) 등 한국이름을 갖고 한국을 위해 살다 간 선교사들은 무수히 많다. 지난 1970년 외국인으론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도 빼놓을 수 없다. 세브란스의대 교수로 내한해 일제의 만행을 외국에 적극적으로 알렸던 그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虎弼).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에게 팬들이 붙여준 애칭 석호필의 원조다. 한·미친선회가 리사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 부인에게 박신예(朴信藝)란 이름을 지어 선물했다. 앞서 남편인 버시바우 대사에게 친선회가 선물한 박보우(朴寶友)란 이름에서 박씨 성을 따왔고, 예술을 사랑하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버시바우 대사부부가 박씨 부부로 불릴 리야 없을 테지만 한국이름을 갖게 됐다니 왠지 친근감이 간다. 이런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8)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섬유’ 대표 줄피카르 알리 칸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8)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섬유’ 대표 줄피카르 알리 칸

    한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은 대략 3만 5000여명, 서울에만도 1만 5000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슬람권 이주노동자들이 늘면서 무슬림들의 영역과 목소리가 차츰 커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이자 홀대받는 소수 종교인들로 머물러 있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출신의 사업가 줄피카르 알리 칸(36·무슬림섬유 대표)은 그래서 돋보이는 인물이다. 한국의 웬만한 무슬림들은 다 아는 독특한 이력의 한국 예찬자.9년째 서울에서 의류 원단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지만 한국인의 입장에 서서 종교를 내세우지 않은 채 한국과 더불어사는 이방인들에게 평화와 사랑 심기를 실천하는 독특한 무슬림이다. ● 아프간피랍사태 당시 구출순례 힘써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분당 샘물교회 봉사단원들의 석방 교섭이 난항을 거듭하던 지난해 8월 말. 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4명이 파키스탄 페샤와르와 이슬라마바드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본지 2007년 9월7일자 9면 보도). 공식 협상단들조차 현지 종교지도자들이나 탈레반측과의 접촉이 수월치 않은 상황. 그 와중에 몸을 사리지 않고 현지 부족장과 탈레반 수뇌부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교신하며 봉사단원들을 구출하려는 힘겨운 순례를 계속하던 참이었다. 이 순례단을 사실상 주도한 외국인이 바로 줄피카르 알리 칸이다. “내가 택해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내 고향에서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지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던 중 한국이슬람연합회(KMF)측이 현지로 가자는 제안을 해와 주저없이 나섰던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 새해인사가 무성하던 무자년 정초(正初), 서울 한남동 이슬람중앙사원에서 무슬림 예배복을 정성들여 갖춰입고 기자를 맞은 줄피카르는 “부끄럽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자꾸 피해가려 들었다.“얼마나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한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티끌만큼의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인터뷰를 묵묵히 지켜보던 한국인 이맘(예배인도자) 이행래씨가 안쓰러웠던지 슬쩍 거든다.“당시 봉사단 석방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던 페샤와르 파슈툰 부족에게 줄피카르가 그토록 명망 높은 줄 몰랐습니다. 줄피카르가 없었다면….” 줄피카르는 페샤와르 태생이지만 “솔직히 지난해 고향 땅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거듭되는 종교분쟁과 정쟁에 염증을 느껴 한국에 오기 5년 전부터 페샤와르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옮겨 살았던 그다. 그럼에도 마다않고 위험한 페샤와르 순례에 선뜻 동참한 고뇌가 읽힌다. 9년 전 줄피카르가 처음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무역에 관심이 많아 영국 에드워즈 칼리지의 페샤와르 분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이슬라마바드에서 해산물 업체를 운영하던 중 ‘한국의 의류원단 사업이 유망하다.’는 사촌의 말에 솔깃했던 것이다. 당시 주한 파키스탄 대사관에 근무하던 사촌의 말만 믿고 무작정 한국행을 결정했다. 하지만 줄피카르도 IMF의 환란은 비켜가지 못했다. 서울 옥수동 사촌 집에 머물면서 시장조사를 해보니 생각과는 영 딴판이었다.2개월 만에 실망감만 안고 보따리를 싸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갔지만 한국과 한국인들이 머릿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인연의 끈이 질겼을까. ● “이방인에 대한 한국인 배려 인상적” “한국인들이 무슬림들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더해졌어요.‘내 집을 찾은 사람을 섭섭하게 보내지 않는다.’는 무슬림처럼, 생면부지의 이방인인 나를 어떻게든 도우려는 한국인의 배려가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돈을 벌겠다는 내 자신이 초라해지더군요.” 그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동대문 종합시장 앞에 작은 원단가게를 차려 9개월간 장사를 하다가 2000년 명동에 ‘무슬림섬유’라는 무역회사 간판을 달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 만든 원단을 사들여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주로 이슬람·아랍 국가에 되판다. 한국인과 제대로 어울리려면 한국말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화여대 한국어학당도 6개월간 다녔다. 무슬림의 입장에서 한국인과 어울릴 길을 찾던 중 역시 모스크(이슬람사원)가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알게 됐다.“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모스크는 한남동 중앙사원 한 곳뿐이었어요. 힘겹게 살아가는 외로운 무슬림들이 맘을 통하고 정을 나누던 유일한 공간이었던 셈이지요.” ● 한남동 모스크사원서 봉사의 길 첫발 이들을 한국인들과 연결해 살게 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몸으로 보여주는 길을 택했다. 한남동 사원에 몸을 담아 봉사에 나선 것이다. 금요일 낮 예배는 물론, 평일 밤 9시부터 2시간가량 열리는 무슬림 친교·봉사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한다. 그가 참석하지 않는 친교·봉사행사는 열리지 않을 정도이다. 지금 한국에 있는 9개의 이슬람사원과 50개의 임시성원(무살라)이 세워질 때도 빠짐없이 그의 힘이 보태졌다. 사업을 하면서 한국인들을 대할 때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추스른다.“버는 만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자. 받는 만큼 되돌려주자.” 자신을 속이는 시장의 상인이나, 거리에서 마주쳐 까닭없이 핀잔을 주는 사람들에게도 웃음을 돌려준다. 그 때문일까.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는 자신을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단다.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자신과 관련있는 이들의 경조사엔 빠지지 않고 기쁨과 아픔을 나눈다. 힘든 일을 당한 이들에겐 아무리 일이 바빠도 달려가 손을 내민다. 무슬림이 사망하면 묻히는 충북 청주의 진달래공원묘역까지 장례객들을 차로 실어나르는 일도 일상사가 되었다. 외국의 무슬림 순례단들이 입국할 때 까다로운 수속을 도맡아 무슬림들에겐 ‘해결사’로도 통한다. ● “호전적 이미지 빨리 벗어났으면” 어쩔 수 없는 무슬림. 하루 다섯 번의 이슬람 예배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 한국인 지인들이 그와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이 예배시간이라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신앙이 우선일 뿐 돈 버는 일은 덤이다. 내년이면 한국생활 만 10년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도 얻었다. “이슬람은 바로 평화의 생활이고 실천이지만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이슬람의 본 뜻과는 달리 왜곡된 인상에 매몰돼 있다.”는 줄피카르.“처음 한국에 올 때의 초심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그가 요즘 가장 많이 관심을 갖는 일은 역시 ‘한국인과 더불어 잘사는 무슬림’이다. “내가 한국에서 잘 사는 길은 무슬림의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겠지요. 한국인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해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식의 호전적이고 왜곡된 이슬람 이미지를 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새해 들어선 한국인들과 외지의 무슬림들이 항상 어울려 교류할 수 있는 상설기구 만들기에 흠뻑 빠져 있다. 한국인 무슬림들도 종전과는 달리 적극 돕고 있단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저녁 예배시간을 알리는 이맘의 목소리에 기자의 눈치를 살피다 불쑥 한 마디를 던지며 사원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나는 결코 선교사가 아닙니다. 한국인들이 모두 무슬림 아닌 무슬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페샤와르에서 보낸 평화의 전령이 아닌가.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줄피카르 알리 칸은 ●1972년 파키스탄 페샤와르 출생 ●1991년 영국 에드워즈 칼리지 경영학과 졸업 ●1991∼1998년 이슬라마바드에서 해산물 업체 운영 ●1998년 의류 원단 사업차 한국에 와 2개월 만에 본국으로 귀국 ●1998년 한국 정착, 동대문에서 원단 가게 운영 ●2000년 명동에서 무역회사 ‘무슬림섬유’회사 창업 ●2000년∼ 한국 이슬람사원서 봉사활동
  • [사설] 울산발 교사 철밥통 깨기 꼭 성공해야

    지난 19일 울산시교육감 재선거에서 당선한 김상만 교육감이 무능·불성실한 교사, 교육청 공무원을 퇴출시키겠다고 엊그제 밝혔다. 교사·교장으로 40년을 재직하고 정년퇴임한 뒤 출마한 김 교육감은, 공무원법상의 신분보장 규정이 무사안일한 교사까지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이 깨지지 않는 한 공교육이 제대로 설 수 없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울산시와 서울시에서 시행 중인 공무원 퇴출 제도를 모델 삼은 방안을 마련해 내년 2월 인사부터 적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적격 교사를 퇴출시키겠다는 김 교육감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노력이 순조롭게 결실 맺기를 바란다. 아울러 울산에서 새로 시작되는 교사 철밥통 깨기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도 기대한다. 현재 공교육 현장이 붕괴 위기에 직면했고 그 자리를 사교육 열풍이 채우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 또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무능·나태하거나 심지어 비리에 연루된 교사들이 버젓이 교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힘들다. 마침 내년 2월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는 민생과 교육을 양대 과제로 꼽고 있다. 따라서 새 정부 차원에서 강도 높은 교육개혁 방안이 나오겠지만, 그에 앞서 일선 교육행정을 맡은 교육청이 자발적으로 부적격 교사 퇴출 작업에 나선다면 부작용이 적으면서 더욱 큰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국회에 계류 중인 교원평가제 관련법이 하루빨리 통과돼 일선에서 시도하는 교사 철밥통 깨기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부적격 교사 퇴출은 성실하고 정직한 대다수 교사들의 명예를 살려주는 길이다. 일선교사들도 이를 인식하고,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교단 정화에 동참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겠다.
  • ‘입양포기’ 한인 어린이 홍콩서 미아 되나

    네덜란드 외교관 가정에 입양됐다 파양된 한인 여자 어린이가 홍콩에서 국제 미아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9일 보도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제이드(8)양은 2000년 1월 생후 4개월 만에 당시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네덜란드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러나 이 외교관이 2004년 7월 홍콩으로 근무지를 옮긴 직후 그간 불임이었던 아내가 자녀 2명을 출산하자 지난해 상반기에 제이드양을 홍콩 사회복지국에 인계하며 양육을 포기했다. 이후 제이드양은 홍콩에서 선교사와 외국인 가정을 돌며 2년째 안타까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어는 못 하고 영어와 광둥화(廣東話) 구사만이 가능한 제이드양을 위해 지난 9월부터 현지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새 부모를 찾는 일이 시작됐다. 그동안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 교포 여성과 북한계 홍콩인 가정 등 세 곳에서 제이드양의 입양을 희망했으나 까다로운 절차와 자격요건 등으로 인해 입양을 포기해야 했다. 현재 한국 국적인 제이드양은 양부모에 의해 네덜란드 시민권을 부여받지도 못했고 홍콩 거주민 자격도 아니어서 홍콩 체류 자격이 모호한 상태다. 제이드양의 양육을 포기한 네덜란드인 외교관은 “입양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며 “아내가 파양을 결정한 이후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려 치료를 받고 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콩 총영사관 관계자는 “한국의 고아원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줄곧 외국 생활만을 하고 외국어만이 가능한 제이드양이 한국에서 적응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 하에 홍콩 현지에서 입양할 만한 한인 가정을 계속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홍콩 연합뉴스
  • [부고]

    ●정재윤(자영업)재학(국민일보 사회2부 부국장)씨 모친상 30일 대전 을지대병원, 발인 2일 오전 9시 (042) 471-1680●이기한(명지대 영문과 교수)경한(삼성의료원 교수)씨 부친상 김성철(덕성여대 경영학과 교수)엄영호(사회복지시설 원장)씨 빙부상 2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일 오전 10시 (02)3410-6912●장충수(전남 낙협 이사)봉화(나주 봉황고 교장)봉조(한국농촌공사 전남본부장)씨 모친상 30일 전남 나주장례식장, 발인 2일 오전 10시 (061)332-8114●이건호(수정코스메틱 이사)창호(치과의료선교회 파송선교사)은호(INI인테리어 부장)애자(경일초등학교 교사)씨 모친상 정해준(전 동아일보사 센터발전기획팀 기획위원)박윤식(CJ제일제당 상무)씨 빙모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일 오전 8시 (02)3010-2295●이성길(한국건설신문사 사장)씨 별세 29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일 오후 1시 (02)590-2560●이상혁(기아자동차 과장)씨 빙부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일 오전 10시 (02)3010-2263●송주원(현대자동차 부장)주인(사업)주상(삼성화재 부장)씨 부친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일 오전 7시 (02)3410-6901●채중겸(한국유도고단자회 회장)씨 별세 30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3일 오전 7시 (031)787-1506
  • ‘전통으로의 초대’ 전주 한옥마을

    ‘전통으로의 초대’ 전주 한옥마을

    화창하게 갠 날 만경창파 푸른 물에 배 띄워 떠나가는 형국의 지세를 가졌다는 고을 전북 전주. 조선을 세운 임금의 관향(貫鄕)이기도 하다. 전주 한복판에 한옥마을(hanok.jeonju.go.kr)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시계추가 멈춰선 듯한 곳.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면서 급격한 현대화의 바람은 용케 피했지만, 그 때문에 도심 속 변두리로 전락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민원 공장´이었던 곳이 이젠 근대 생활양식이 녹아 있는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곳곳에 아직도 가을의 향기가 남아 있는 한옥마을을 다녀왔다. # 일본인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형성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을 들머리 삼아 마을구경에 나섰다. 고색창연한 건물 주변에 흩뿌려진 낙엽들에서 떠나기 아쉬워하는 가을의 향기가 전해온다. 한옥마을은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한 인사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면서 시작됐다. 이 지역 한옥군은 주변 일본 가옥들과 대조를 이루는 한편, 화산동 선교사촌 등 서구식 건물들과 어우러지며 기묘한 도시 풍경을 연출하게 됐다. 조선희 관광해설사는 “전통 암수기와가 얹혀진 지붕 아래 구들과 마루가 있고, 댓돌과 섬돌 등으로 터를 잡은 이곳 한옥들은 우리나라 근대 전통 주거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며 “도심 속에 녹아 있는 근대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전통마을과 다른 변별적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한옥 약 660채 사이사이에 120여채의 비한옥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지붕 한 번 고치는 데 양옥의 2∼3배가량 비용이 드는 등 한옥을 고수하는 데 고충이 따르는 것은 알지만, 한편으로 많은 아쉬움도 남는다. 대를 이어 300년 동안 살아온 집을 헐고 번듯한 2층 양옥에 ‘삼백년가 슈퍼´를 낸 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난다. 한옥마을 뒤편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의 꿈을 키운 곳이라 전해진다. 이성계가 전주 시내를 굽어보며 읊은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가 그와 길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장소이기도 하다. 해설사 조씨에 따르면 전주의 요지였던 만큼 근대에 이르러 신사나 성당 등을 짓겠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이를 물리친 것이 당시 관찰사였던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이었다고 한다. # 속속들이 살아 있는 한옥의 숨결 한옥마을의 장점 중 하나가 전통고택 체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많은 한옥 중 가장 독특한 건물은 학인당(學忍堂)이다. 이름 뒤에 전(展)자나 당(堂) 자 등을 붙여 건물의 역할과 신분을 표시했던 전통에 비춰볼 때 왕이나 왕족의 공식활동 공간으로도 생각되지만, 사실 궁중 건축양식을 도입한 상류층 저택이다. 뛰어난 효자로 알려져 있는 인제(忍齊) 백낙중이 조선 말기에 지은 근대 한옥. 당시엔 99칸짜리 저택이었으나, 현재는 본채와 솟을대문 등 7동만 남아 있다. 해설사 조씨는 “호박 주춧돌과 유려한 서까래의 곡선 등에서 전통 궁궐양식이 살아 있음을 보게 되죠. 건물 전체가 복도로 연결된 것은 일본 건축양식, 화장실과 욕조 등이 건물 내 한 공간에 배치된 것은 서양식 건축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문인 솟을대문은 잠겨진 채 옆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다소 안타깝다. 고택체험용으로 사용되는 방 문의 쇠문고리를 잡아 당기자 한지 특유의 향기가 오롯이 전해 왔다. 격자무늬 한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가득찬 툇마루를 삐걱대며 걷는 맛이 각별하다. 한 골목 건너 양사재(養士齋)는 이름 그대로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된 곳이다. 당연히 방의 크기가 학인당 등에 비해 작다. 실내는 정갈하게 보전된 편.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때 구들장을 덥히는 전통 난방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방금 전 유생이 앉았던 듯, 흑갈색으로 그을린 구들장에 온기가 남아 있다. 이 밖에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씨가 거주하는 승광재와 풍남헌 등에서 전통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최소 인원은 10인 이상.www.hanokmaeul.com이나 전화 063)287-6292 등을 통해 자세한 숙박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맛집, 찻집 등 즐비 식재전주(食在全州)라고 했다. 먹거리를 빼고 전주를 말하랴. 수량이 적어 ‘말라깽이 팔십 할머니 젖가슴만도 못한´ 전주천이지만, 팔십 할머니 품에 안긴 한옥마을 주변의 맛집만큼은 더없이 풍성하다. 감칠맛 나는 오모가리탕 집들이 늘어선 가리내길을 시작으로 서민들의 애환이 스민 자장면집 등 ‘골목길의 맛´ 가득한 향교로, 한정식 전문식당들이 많은 은행나무길 등이 씨줄날줄로 엮여 있다. 한옥마을은 현재 공사중이다. 전주시는 20억원을 들여 전통 솟대를 세우는 등 한옥마을 일대 8곳에 쌈지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물레방아 등을 주제로 테마공원도 조성된다. 전선을 땅 아래로 묻는 지중화 공사도 한창이다. 골목마다 땅을 파헤쳐 놓아 어수선하고 불편하지만, 흙을 밟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도시인에겐 그마저도 고맙다. 공사 후엔 땅 위에 다소 거친 돌을 깔아 옛정취를 살릴 계획이라고 공사관계자는 전했다. 내년쯤이면 한결 깔끔하게 단장된 한옥마을을 보게 될 것 같다. 글 사진 전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전주 한옥마을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전주 나들목→전주시청, 한옥마을 방면 직진→한옥마을. # 인근 관광명소 옛 전라감영 소재지였던 전주의 상징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객사(보물 제538호), 로마네스크 주조에 비잔틴풍이 가미된 전동성당 등이 한옥마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 한국농구 100주년

    한반도에서 농구공이 ‘통통’거리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됐다.1907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국내에 농구를 소개했던 것.26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는 지나간 100년을 돌이키고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기 위한 기념식이 열렸다. 한국 농구 코트의 어제와 오늘을 뜨겁게 달궜던 스타들이 대거 참석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기념식 앞뒤로 열렸던 여자 올드스타(고명화 유영주 정은순 조문주 천은숙 등 24명), 남자 올드스타(강동희 강정수 김유택 김진 박종천 안준호 유도훈 정인교 허재 등 24명) 경기. 올드스타 대부분 몸매가 달라졌다. 점프도 낮아졌고, 달리기도 느린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폼은 전성기의 흔적을 찾기에 충분했다. 여자 올드스타전은 유영주 등이 활약한 백팀이 37-27로, 남자 올드스타전도 허재 등이 뛴 백팀이 청팀을 53-40으로 이겼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씨줄날줄] 스타벅스/함혜리 논설위원

    커피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구한말이다.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커피는 미개국이 아닌 개명국의 상징으로 통했다. 다방과 인스턴트 커피의 보급, 자동판매기 등으로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은 지금도 일부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스타벅스 커피숍이다. 사람들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마치 세련된 뉴요커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이런 이미지는 대중문화의 영향이 크다. 그 효시는 1998년 제작된 영화 ‘유브갓메일’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멕 라이언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드라마 ‘프렌즈’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에서도 스타벅스 커피는 빠지지 않는다. 테이크아웃 스타벅스 커피는 바쁘게 살아가는 뉴요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상징으로 쓰인다. 5개의 스토어를 갖고 있는 시애틀의 조그만 커피 소매업체였던 스타벅스는 1987년 하워드 슐츠 회장이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이후 공격적인 점포확장 전략으로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은 42개국에 1만 4000여개나 된다.1999년 이대 앞에 1호점을 개설한 이후 현재 200개에 가까운 점포를 가진 한국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 스타벅스 커피가 상륙하지 않은 곳이 없다. 최근엔 원두커피 생산국이자 최대 소비국인 커피의 나라 브라질도 사로잡았다. 브라질 토종 커피 가격보다 3배나 비싼데도 점포에는 손님이 밀려든다. 스타벅스 커피점이 브라질 사람들에게 ‘미국 문화를 공유하는 부자들의 공간’이라는 이미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타벅스가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5P 전략, 즉 제품(Product)·가격(Price)·장소(Place)·프로모션(Promotion)·사람(People)을 중시한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스타벅스에서 찾는 것은 부자 나라 미국의 분위기가 아닐까.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사기 위해 지갑을 열고,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린다. 어느덧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에 버금가는 글로벌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스타벅스 커피. 거대 자본주의의 위력에 커피 문화의 다양성마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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