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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더걸스’ 선예 딸 출산… “홈벌쓰로 낳았어요”

    ‘원더걸스’ 선예 딸 출산… “홈벌쓰로 낳았어요”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득녀 소식을 전했다. 선예는 17일 자신의 트위터에 “많은 분들의 기도와 응원덕분에 예쁜 딸 홈벌쓰(Home Birth)로 8시간 만에 순산했습니다. 탄생축하선물도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건강히 잘 키우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선예는 글과 함께 딸의 작은 손과 발을 찍은 사진도 공개했다. 선예는 지난 1월 캐나다 교포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식을 올렸다. 선예는 결혼 뒤 원더걸스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상)

    >>한강 왜, 어떻게 달라졌나 옛 한강은 오늘의 한강과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달라졌을까. 한강은 한성 백제가 위례(풍납·몽촌토성)에 터 잡은 이후 2000년 동안 한민족의 젖줄이었다. 조선의 500년 도읍지 한양(한성부)의 식수원이자 하수구였으며 명승지였다. 한성부를 도읍지로 정하게 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큰 축이었으며 어느 한 곳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풍광을 뽐냈다. 조선시대 한강의 이름은 경강(京江)이었다. 서울의 중심부인 삼전도(송파)에서 양화진(합정) 구간을 경강이라고 했다. 그중 남산 기슭을 흐르는 강을 한수(漢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한강이 됐다. 한(큰) 가람(강)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그런 한강이 불과 100년 만에 천지개벽을 했다. 근대기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인식과 쓰임새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난리를 막아 보겠다는 치수(治水)에 대한 집착과 인구의 광적인 서울 집중에 따른 택지 제공, 교통로의 필요성이 개발을 불렀다. 게다가 휴전선이라는 인공 장애물이 한강의 서해 출구를 가로막으면서 안보적 측면도 겹쳤다. 아라뱃길을 새로 뚫은 까닭이다. 한강의 변화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섬(河中島)이 사라지면서 모래톱과 습지도 더불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강이 마치 활주로 같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중세도시를 흐르는 크고 작은 자연하천과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매년 1만 척을 헤아리는 황포 돛배가 사람과 물자를 싣고 광나루(광진), 삼밭나루(삼전도), 뚝섬나루, 한강나루, 동작나루, 마포나루, 노들나루(노량진), 양화나루를 오갔지만 흥청거리던 뱃노래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29개의 다리가 덩그러니 놓였고 나루는 다리 이름으로 남았다. 골재 채취용으로 폭파했으나 20년 만에 되살아난 밤섬(율도)을 제외하고 강폭이 최대 900m에 이르는 넓디넓은 강이 텅 비었다. 여울과 소(沼)마저 사라져 생명력과 자정력을 잃었다. 강변에 60㎞에 이르는 콘크리트 호안이 일사불란하게 펼쳐진 곳이 오늘의 한강이다. 한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한강이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 백제의 하남 위례성 시대와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시기에서 출발한다. 또 1392년 조선 건국,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과 이후도 의미 있다. 서울 숭례문 입구까지 물에 잠기게 한 을축년 대홍수는 땅밑에 숨었던 암사동 신석기 유적지를 드러나게 했지만, 제방 구축용 골재로 쓰려고 선유봉(선유도)을 폭파하는 빌미가 됐다. 결정적인 변화는 1967년 제1차 한강개발과 1982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몰고 왔다. 1차 한강개발은 여의도를 육속화하면서 서울의 경계를 사대문 안에서 남산 성곽을 넘어 한강변까지 확장했다. 여의도개발은 한강개발의 출발점이자 강남개발의 전초기지였다. 아파트공화국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여의도 제방을 쌓으려고 밤섬과 선유봉을 폭파한 원죄가 있지만 한강 상류에 팔당댐을 만들어 한강 수량을 조절했고, 한강 제방을 완성해 서울 시민들을 물난리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 여의도, 동부이촌동과 반포지구에 대단위 아파트 택지를 제공했으며 서울은 이때부터 사대문 중심 일핵도시에서 다핵도시로 나아갔다. 한강 제방은 워커힐호텔~김포공항을 잇는 강변북로를 부산물로 남겼다. 동호대교 아래 저자도는 압구정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데 온몸을 바치고 사라졌다. 제2차 한강개발 이후 오늘의 모습이 갖춰졌다. 홍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 맨살을 드러낸 채 가늘게 흐르던 한강이 365일 물로 가득 찬 사실상의 호수가 된 것이다. 두 개의 수중보가 한강을 수심 2.5m의 인공호수로 만들었다. 잠실대교 아래 잠실수중보와 김포대교 아래 신곡수중보가 물을 가두고 있다. 상전(桑田) 잠실섬을 강남 쪽으로 인위적으로 붙이면서 한강의 본류를 바꿔 놓았다. 이때 삼전도 나루 앞을 흐르던 한강 물길은 석촌호수가 됐다. 강남 쪽 한강 제방에는 올림픽대로가 개설됐다. 2007년 한강 복원을 외쳤지만 바뀐 물길과 사라진 섬, 습지와 백사장 그리고 파괴된 봉우리와 누정은 되찾을 수 없었다. >>한강의 옛 모습은 어땠나 옛 사람들은 한강을 강이 아니라 호수로 여겼다. 동호(東湖), 서호(西湖), 남호(南湖) 등 3개의 호수로 나눠 부르면서 풍류를 즐겼다. 강물이 하중도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굽이치는 장면이 그들의 눈에는 호수처럼 보였으리라. 동호에는 저자도와 독서당, 입석포(선돌개), 두모포(두뭇개), 제천정과 천일정(한남동의 정자), 압구정 같은 명승지가 즐비했다. 동호대교라는 지명이 동호에서 유래했다. 서호는 용산으로부터 마포와 선유봉, 양화진 잠두봉(절두산)을 아우르는 지역을 일렀는데 서강(西江)이라는 지명도 널리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에 ‘서강조박’(西江漕泊)이 포함될 정도였다. 남호는 용산강의 다른 이름이다. 여의도와 밤섬을 품고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을 조망할 수 있는 동작진과 노량진 구간이다. 옛 한강은 산수화와 지도를 통해 상상할 도리밖에 없다. 그림이라고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사진 뺨치게 정밀한 진경(眞景) 산수화여서다. 실경(實景) 산수화라고도 한다.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굽이치는 곳에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하중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와 바람에 나부끼는 수양버들, 갈대가 지천인 그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 개화기 이후 선교사들이 남긴 낡은 사진과 개발기의 각종 사진을 통해 20세기 이후 한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강수욕을 즐기던 백사장, 나룻배와 나루터, 얼음 캐는 채빙(採?)과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이 같은 한강의 풍광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에 인파가 붐비겠는가. 중국이나 일본 사신들에게 한강 유람은 필수 코스였다. 대개 동호변 제천정에서 시작해 저자도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고 서호쪽 양화진으로 내려오면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제천정은 왕실 소유의 정자로 서울에서 경치 좋은 열 곳(京都十詠) 중 한 곳으로 꼽혔다. 달 구경의 으뜸 명소였다. 사신들은 다녀간 흔적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겼다. 한강승경 그림을 요청해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한강은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문화공간이자 교류의 장이었다. 18세기 진경 산수화의 대표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에 한강 풍광 수십 점을 남겼다. 저자도는 잃어버린 섬이다. 닥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관을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저자도 서북단의 독서당을 그린 ‘독서당계회도’와 저자도 남단의 압구정을 그린 ‘압구정도’, 저자도 북단의 살곶이다리를 그린 ‘진헌마정색도’를 통해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1922년에 인쇄된 실측지도 ‘경성도’에 등고선과 초지 및 모래벌판이 표시돼 있다. 시인들은 저자도를 한강 유람의 백미로 여겼다.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 물굽이 언덕을 두르고 있으니 흰 모래 갈대 숲 그 경치가 매우 좋다”(15세기 정인지가 살곶이다리 인근 낙천정에서 내려다본 저자도의 풍경), “봄꽃이 만발하여 온 언덕과 산을 뒤엎었네”(15세기 강희맹의 저자도도(楮子島圖)의 발문), “봉은사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16세기 심수경이 독서당에 머물던 중 봉은사를 다녀오면서 남긴 글)는 글들이 남아 있다. 조선 개국 초 저자도는 왕들의 휴식처였다. 태종이 상왕이자 형님인 정종과 낙천정에서 술잔을 나눴고, 세종이 대마도 정벌을 떠나는 이종무를 격려하고 환송한 장소였다. 고종 등 왕이 집전하는 기우제 장소 중 한 곳 이었다. 왕실 재산으로 조선의 마지막 부마(철종의 사위) 박영효 소유였다. 동서 2000m, 남북 885m 길이에 넓이가 118만㎡에 이르는 모래벌판이었다. ‘신선이 노닐던’ 선유도는 섬이 아니라 산이었다. 선유봉은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잠두봉)을 마주 보는 높이 40m의 작은 봉우리였다. 두 산은 나란히 서 있었다. 선유봉은 홍수가 나면 봉우리만 물 위에 떠 있었다. ‘예조낭관계획도’ 등 잠두봉을 그린 16세기 후반의 실경 산수화 10여 점이 빼어난 경관을 보여 준다. 정선은 ‘선유봉’ ‘양화환도’ ‘소악후월’ ‘금성평사’ 등 4점의 그림을 통해 선유봉을 묘사했다. T S 엘리엇은 “역사란 언제나 동떨어진 원인에서 기묘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파했다. 옛 선비들은 한강을 호수로 미화해 풍류를 즐겼으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한강은 사실상 인공호수로 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joo@seoul.co.kr
  • 한국을 사랑한 美 선교사 한국에 묻히다

    한국을 사랑한 美 선교사 한국에 묻히다

    한국인을 위해 45년간 헌신했던 의사 선교사 하워드 마펫(1917~2013·한국 이름 마포화열)이 한줌의 재가 돼 다시 한국 땅을 찾았다. 마펫 선교사의 유해는 부인 마거릿 마펫의 유해와 함께 25일 대구 중구 계명대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장됐다. 은혜정원은 대구·경북에 기독교를 전하러 왔다가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 있는 외국인 묘지다. 안장식은 마펫의 막내아들 샘 마펫과 외손자 이안 테일러, 계명대 정순모 이사장과 신일희 총장, 김권배 동산의료원장, 이세엽 동산의료선교복지회장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마펫 선교사는 한국의 초대 선교사 새뮤얼 마펫 박사의 4남으로, 1948년 31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됐다. 이후 45년간 동산병원장, 계명기독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과 60병상이던 동산병원을 1000여 병상의 대형 의료원으로 발전시켰다. 6·25전쟁 후에는 고아와 난민,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수많은 여성과 그 가족들을 무료로 진료해 줬다. 샘 마펫은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이 ‘대구는 나의 집’이라고 하셨을 만큼 떠나시는 날까지 동산의료원과 한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기도를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길섶에서] 마리아관음/서동철 논설위원

    일본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은 1597년 가톨릭 선교사 6명과 신자 20명이 처형된 곳이다. 언덕 아래 ‘26인 순교 기념관’에서 가장 눈길을 붙잡는 유물은 마리아간논(觀音)이다. 불교의 관음보살과 많이 닮아 성모 마리아인지 알기 어렵다. 천주교 탄압에 따른 고심의 결과지만, 자비의 실천이라는 역할에서 성모와 관음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모셔진 관음보살은 성모 마리아를 닮았다. 불모(佛母)는 성모 마리아와 성모 이미지의 소녀상으로 명성을 날린 조각가 최종태다. 그는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따로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고 말한다. 법정 스님이 이 상징적 불사를 그에게 맡긴 이유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신을 믿지 않아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신은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말해 뉴스의 초점이 됐다. 자신의 종교만이 구원으로 이끈다는 독선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길상사 관음보살의 정신이 바로 그렇다. 마리아간논의 의미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뉴칼레도니아 원시기록

    뉴칼레도니아 원시기록

    이 작은 섬나라에 ‘낙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소설1)과 드라마2)였다. 여행기자로서의 명명은 좀 달라야 한다는 부담감.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찬사는 이미 다 사용됐다. 검증만이 남았다. 1) <천국에 가장 가까운 섬> 일본 여류작가 모리무라 가쓰라가 1965년 출간한 소설로 우베아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베아는 뉴칼레도니아 본섬에서 북동쪽으로 자리잡은 로와요떼 군도 중 하나다. 소설(영화화되기도 했다)의 유명세 덕택에 일본인들이 종종 찾아오지만 아직 개발의 손길을 덜 타서 파라디 우베아라는 이름의 호텔이 하나 있을 뿐이다. 2) <꽃보다 남자> 2009년 초 방영된 KBS 드라마로 뉴칼레도니아에서 촬영된 장면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한국에 ‘프렌치 파라다이스’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민호(구준표 역), 구혜선(금잔디 역), 김현중(윤지후 역), 김범(소이정 역), 김준(송우빈 역) 등이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프랑스 죄수들이 건설한 도시 누메아에는 현재 뉴칼레도니아 인구의 40%가 살고 있다 New Caledonian History 그들은 배를 타고 왔다 섬이란 묘한 곳이다. 그 은근한 고립감은 사람을 유혹하기도 하고, 또 숨 막히게 하기도 하므로. 뉴칼레도니아는 침묵 같은 섬이다. 한번 흘러들어간 이야기조차 다시 나오는 법이 없다. 여기서 영원히 머물러도 좋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이 낙원의 속성이므로. 그 섬에 죄수들을 보낸 이유 1864년 5월, 처음 이 섬에 도착한 프랑스 죄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가장 가깝다는 대륙인 호주조차 1,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고립무원의 섬이 그들에게 낙원으로 보일 리 없었다. 정치범, 관습범, 매춘부, 강제 추방자들은 지금도 비행기로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를 몇 달간 배에 실려 항해한 끝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 지금은 본섬인 라 그랑드 떼르와 하나로 연결된 누메섬이 당시 입도하는 죄수들이 건강검진을 받던 관문이었다. 이 섬의 원래 주인은 3,000년 전부터 살고 있었던 카낙족Kanak1)이었지만 뉴칼레도니아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제임스 쿡(1728~1779) 선장이었다. 1774년 항해에서 자신의 고향이었던 스코틀랜드(옛 이름이 ‘칼레도니아’였다)를 연상시키는 섬을 발견하고 뉴칼레도니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853년 이 섬을 점령한 사람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였고 프랑스식 정식 명칭은 누벨칼레도니Nouvelle-Caledonie다. 수도 누메아Noumea를 프랑스처럼 만드는 과업은 죄수들의 몫이었다. 1864년 첫 이송 이후 22년 동안 2만1,000여 명의 프랑스 죄수들이 75회에 걸쳐 뉴칼레도니아에 실려 왔다. 98%의 남자, 2%의 여자(고아, 과부, 창녀, 알콜중독자 등)로 구성된 그들은 8년간의 의무 노동으로 항구와 도시를 건설했다. 우엔토로 언덕128m이나 F.O.L 전망대에 올라가면 당시에 지어진 ‘신식민지 스타일’, 혹은 ‘뉴트로피컬 스타일’ 건축물들이 알알이 섞여 있는 풍경이 촘촘하게 들어온다. 1877년 완공된 (현재의) 누메아 시립 박물관이나 1887년부터 10년 동안 건설한 생 조셉 성당2)도 그중 하나다. 형을 마친 사람 중 많은 인원이 섬에 남았다. 가족들의 여행 경비를 지원할 정도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이 적극적이었다. 누메아의 고아만Baie de L’Orphelinat에는 이름 그대로 고아원이 있었다. 이곳 출신들은 대부분 죄수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00만명 미군이 남긴 것 낙원이 따로 있겠나. 정 붙이고 살다 보면 낙원이지. 하지만 1853년 니켈3)이라는 노다지의 발견은 뉴칼레도니아를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만들었다. 땅속이 다 금고라서 이 ‘그레이 골드’를 그냥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그 수혜를 받는 뉴칼레도니아의 인구는 고작 25만여 명. 그래서 이 섬에는 치열한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구의 15%가 20세 이하라서 섬은 여유로우면서도 활기차다. 이주민과 기독교도의 증가에 따라 식민 체제를 굳힌 이 섬에 낯선 신인류가 착륙한 것은 1942년이었다. 이후 4년 동안 15척의 군함을 타고 자그마치 100만명이 넘는 미군이 이 섬을 거쳐 간 이유는 뉴칼레도니아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과 연합군의 태평양 사령부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퇴군길에 미군은 들고 왔던 무기와 군함을 거두어 갔지만 초콜릿, 껌, 코카콜라, 비타민, 파이, 담배 등을 남겨 놓았다. 재즈와 클럽 문화도 남겨졌다. 별다른 나이트라이프가 없는 섬에서 클럽은 여행자들의 오아시스가 됐다. 해상에 방갈로처럼 떠 있는 레스토랑과 바 ‘르 루프Le Roof’는 젊은이와 여행자에게 지나치기 어려운 방앗간이라 주중에도 항상 붐비고 주말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멜라네시안4) 혼열인 듯 건강한 피부색을 지닌 여인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미군들은 구매력이 높은 손님이기도 해서 뉴칼레도니아에 처음 상점이 생긴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린 파파야 사슴 구이, 생선 샐러드, 일데뺑의 달팽이 요리. 박쥐 스튜 등은 뉴칼레도니아에서 처음 맛보는 별미였다.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상점들도 생겨났다. 모젤 항구Port Moselle 앞 아침 시장의 풍경 너머에 그런 스토리가 있었다니, 생선 한 마리도 예사롭지 않다. 와인, 치즈 등 프랑스 식문화의 영향도 분명하고 낯선 열대의 과일, 아시아 음식들, 그리고 마이크로네시안의 주식인 타로토란와 얌참마 등, 작은 시장 안에 뉴칼레도니아의 역사와 문화가 모두 섞여 있었다. 뉴칼레도니아는 이제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니라 자치령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 가속화된 인종차별금지와 탈식민지화의 영향으로 1946년에는 시민권 권리 법규가 금지되었고 1957년에는 보통 선거권이 실행됐다. 1998년에는 누메아 조약을 통해 자치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점 때문에 실제로 완전 독립을 원하는 여론은 크지 않은 편. 하지만 낙원에도 만장일치란 없는 것인지, ‘선 경제자립, 후 독립’을 주장했던 카낙의 민족지도자 ‘장 마리 치바우Jean-Marie Tjibaou’는 1989년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2014년과 2018년에 독립과 관련된 투표가 있을 예정이지만 찬성이 다수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한다. 1) 카냑족 멜라네시안에 속하는 카냑족은 뉴칼레도니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며 나머지는 유럽 혼열과 아시안, 폴리네시안 등이다. 하와이 말로 ‘사람’을 뜻하는 ‘카나카’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전통의상인 뽀삐네popinee를 고수하며 아직도 짚으로 만든 지붕에 흙벽으로 이뤄진 전통 가옥 ‘꺄즈case’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2) 생 조셉 성당 꼬꼬디에 광장 근처 경사면에 우뚝 자리한 생 조셉 성당은 당시 남태평양 유일의 고딕성당이었다. 지금도 누메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소리 울림이 좋아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이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뉴칼레도니아 인구의 99%는 기독교이며 구교와 신교의 비중이 6:4 정도다. 3) 니켈 뉴칼레도니아는 캐나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3번째 니켈 수출국으로, 전 세계 매장량의 25%, 생산량의 12%를 차지한다. 채광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에는 산에 불을 놓아서 오래도록 꺼지지 않으면 니켈광산이 있는 곳으로 추정했다. 가볍고 단단해서 동전의 원료로 사용되는데 한국에서는 수년 전 포스코가 진출해 광산개발사용권과 한국수출권을 획득했다. 4) 멜라네시안 멜라는 ‘검다’는 뜻으로, 원주민들이 피부색이 어두워서 붙여진 이름. 오스트리아 북동쪽으로 파푸아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 솔로몬제도, 뉴헤브리디스, 바누아투, 피지 등이 멜라네시아Melanesia에 속한다. 서태평양 지역은 폴리네시아, 마이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로 구분되지만 그 기준은 그리 명확치 않다. New Caledonian Ecosystem 야떼를 여행하는 법 잠깐 사이였는데 일행을 놓쳤다. 좀 전까지 사람을 피해 일정한 거리를 두며 숨바꼭질을 하던 카구Cagou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상대가 수적으로 적다는 것을 파악하자마다 눈빛이 달라졌다. 빨간 눈동자로 레이저를 쏘듯 째려보며 포위망을 좁혀 왔다. 겁 없는 녀석들. 그러나 오싹한 기분.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쳐야 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지구상에서 오직 뉴칼레도니아에만 살고 있으며 국조로 보호받고 있는 카구새1)는 날지 못한다. 울음소리도 얄궂어서 마치 짖는 듯하다. 천적이 없어서 나는 기능이 퇴화할 정도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카구 새들은 개와 고양이 등 뉴칼레도니아에 살지 않았던 외래종이 유입되면서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현재는 400여 마리밖에 남지 않는 국제보호조류다. 놀라운 것은 카구새가 뉴칼레도니아에 사는 7,000여 가지 희귀 동식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 이 섬이 아니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나무와 꽃들의 원조는 공룡 시대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간단히 말해 뉴칼레도니아는 생태적으로 시간이 멈춘 섬이다. 그 이유는 지리적 환경에 있다. 뉴칼레도니아는 뉴질랜드, 호주와 남극과 함께 곤드와나Gondwana 대륙에 속해 있다가 약 6,000만년 전에 뉴질랜드와 함께 떨어져 나왔다. 그후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가라앉아 2,300만년 전 즈음에는 대륙의 93%가 바다 밑으로 잠겨 버렸다. 그때 가장 높은 지대에 속했던 지역이 현재의 뉴칼레도니아와 뉴질랜드다. 오랜 시간 동안 극적인 지각변동과 기후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뉴칼레도니아는 여전히 공룡시대와 가장 유사한 생태계를 유지고 있다. ‘생물학적 노아의 방주’, ‘생태계의 엘로라도’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종 다양성에 있어서 아마존, 인도-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마다가스카르에 이어 세계 5위로 꼽힌다. 그 원시의 자연은 멀리 있지도 않다. 누메아의 주택가에서는 마당의 정원수가 바오밥 나무다. 붉게 펄럭이는 꽃 때문에 불꽃나무라고 불리는 플레시아나도 흔한데 역시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나무다. 공원의 절반 정도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블루리버파크The River Blue Park라면 또 얼마나 많은 희귀종들을 보유하고 있겠는가. 수도 누메아에서 남동쪽으로 1시간 정도 차를 몰아 야떼Yate지역에 도착했다. 공룡보다 오래된 소나무 가이드 프랑소와 트랑Francois Tran씨는 생태학자이자 한번 들은 한국어 단어까지 정확하게 구사하는 비상한 기억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어려운 설명들은 하나로 지루하지 않았다. 뉴칼레도니아의 생태계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 공원으로 진입하는 동안 프랑소와씨가 가장 열정적으로 설명한 것은 아로카리아Aroucaria 나무였다. 뉴칼레도니아의 대표 수종인 이 나무는 사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기가 힘든 만큼 까마득한 소나무의 조상님이다. 2억5,000만년 전 중생대 초반에 나타났으니 공룡보다 오래 살아남은 셈. 공룡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뉴칼레도니아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로카리아가 추운 날씨에 적응한 것이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침엽수종의 소나무이고 더운 지방에서는 잎 모양이 넙적하고 부드러운 카오리 나무가 됐다. 그 잎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현재 전 세계에는 19종의 아로카리아 나무가 남아있는데 그중 13종을 블루리버파크에서 볼 수 있다. 숲에서 직접 마주친 수령 1,000년 이상의 카오리 나무는 그 그늘의 폭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높이 40m, 둘레 2.7m, 펼친 가지의 폭이 35m나 된다. 얼마 전에는 수령 700년 이상의 카오리나무 350그루가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4,500년 넘게 살고 있다는 카오리 나무는 어떤 모습일지는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야떼는 열대림과 건조림2)이 섞여 있는 거대한 산림이다. 완주하려면 며칠씩 걸리는 트레킹 코스에 캠핑장, 호수, 연못, 폭포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중에서 블루리버파크는 야떼 호수를 중심으로 9,000ha에 이르는 땅이다. 야떼Yate호수는 수력발전용 댐 건설로 생긴 담수 인공호수다. 호수에 잠긴 냐울리Niaouli3) 고사목은 물비늘을 뚫고 금방이라도 솟아오를 것 같았다. 오래 쳐다보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세기말적인 풍경이어서가 아니라 오후의 눈부신 은광 때문이었다. 드넓은 숲을 탐방하느라 점심 피크닉이 꽤나 늦어졌었다. 프랑소와씨가 만들어 온 새콤한 샐러드에 금방 구워낸 사슴고기, 멧돼지 소시지를 더하니 색다른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프랑스식인지, 원주민식인지 모르겠지만 이날의 점심은 2시간 가까이 충분한 휴식과 수다로 채워졌다. 우리와 계절이 반대인 뉴칼레도니아는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지금쯤은 평균 기온 15~25℃ 사이의 겨울을 관통하고 있을 것이다. 뉴칼레도니아 사람들은 이런 환경을 ‘에버 스프링’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뉴칼레도니아의 숲에는 분명 영원에 가까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블루리버파크 | 위치 누메아에서 동쪽으로 45km 거리. 차로 45분 정도 소요된다. 개장 오전 7시~오후 5시(입장은 오후 2시까지 가능, 월요일 휴관) 입장료 400퍼시픽프랑 문의 687-43-61-24 가이드 투어 예약 칼레도니아 투어스 687-78-68-38 caledoniatours@lagoo.nc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카구새 몸 크기가 평균 55cm로 눈동자는 빨간 색이고 부리도 다리도 붉다. 수명이 30년 정도 되는 카구새는 1년에 1개의 알을 낳아 35일간 품은 후 부화시키는데 분가할 때까지 7~9년 정도를 가족 단위로 생활한다. 날지 못하는 대신 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며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한쪽 다리를 세워 바로 도망갈 자세를 취한 상태로 멈춰서 경계한다. 2) 냐울리 껍질이 하얗고 속살은 검어서 나무다멜라누까(블랙 & 화이트)라는 별칭이 있다. 껍질이 마치 종이처럼 벗겨지는데 불이 붙어도 겉만 타고 안은 잘 타지 않아서 목재로 잘 사용된다. 수액에 여러 가지 효능이 있어서 감기약이나 비누를 만들고, 사탕으로 먹기도 한다. 3) 열대림 vs 건조림 칼레도니아의 서쪽 해안지대, 한 해 강수량이 50cm~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400여 종 이상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냐울리 나무는 대표적인 건조림 수종이다. 건조한 환경에 적응해서 자라는 키 작은 관목지대를 ‘마이닝 마키아Maquis miniers’라고 부른다. 반면 동쪽 해안의 한 해 강수량은 3~6m 정도라서 풍성한 열대우림을 이루고 있다. 이 중 82%가 고유종이다. New Caledonian Island 비오는 날의 일데뺑 일데뺑Ile des Pins으로 가는 에어칼레도니 비행기는 20분간 태평양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바케트를 닮았다는 본섬과 그 둘레로 푸른 띠를 그린 라군들, 그리고 작은 부속섬들을 감상하기 위해서였지만 날이 흐렸다. 뿌연 시야에 잡히는 것은 가물거리는 형상들뿐이었다. 그리고 흐린 날씨는 일데뺑 일정 내내 계속됐다. 부니 나무를 닮은 사람들 기대에 찼던 오로 자연풀장Baie d’Oro et Piscine Naturelle에 도착했을 때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얕은 수심, 투명한 물, 고운 모래사장, 앙증맞은 열대어 무리까지, 완벽한 스노클링 조건을 갖춘 오로 풀장이었지만 단 한 가지, 날씨가 받쳐주지 않았다. 수온이 뚝 떨어져 수영은 포기. 입고 온 비키니가 무색했다. 하지만 그런 날씨조차 자연의 일부가 아니던가. 쭉쭉 뻗은 아로카리아 나무의 결기도,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숨기고 있는 오로만의 청정함도 그대로였다. 해가 없어도 열대어들은 열심히 빵을 먹기 위해 모여들었고, 사위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게다가 아름다운 해변, 그 하나만을 기대하기에는 일데뺑은 의외로 큰 섬이었고 풍경은 여러 갈래다. 첫 갈래는 일데뺑의 남동부, 귀향자 수용소였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실패로 끝난 후 쏟아진 정치범들, 알제리에서 일어난 까빌 반란 사건의 정치범 등 중범죄자들은 외딴 섬 안의 또 다른 외딴 섬인 일데뺑까지 보내져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 규모가 꽤 컸던 이 수용소는 지금 폐허 위의 폐가로, 넝쿨에 휩싸여 있다. 시간의 옷을 입고, 숱한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을 장소의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수용소를 출발한 차가 쿠토 비치Baie de Kuto에서 카누메라 비치Baie de Kanumera로 연결되는 도로를 달릴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울창한 부니Bugny 나무가 드리운 그늘 터널이었다. 부니 나무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거대한 ‘엔트’처럼 금방이라도 어깨를 흔들며 걸어 다닐 것 같았다. 우락부락하지만 강하고 듬직한 모습. 바오 마을Vao Village에서 만난 카낙족의 모습은 부니 나무를 닮아 있었다. 어떤 경계도 느껴지지 않는 적당한 무관심, 그러나 건네는 인사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온정. 그리고 호기심보다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들. 이 마을의 중심인 바오 성당은 1860년 죄수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멀리서 보면 전면 입구의 파사드와 후면의 붉은 첨탑이 퍼즐처럼 겹쳐 스위스 산장처럼 아담해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생 모리스 기념비는 온통 산호석과 전통장승,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처음 가톨릭을 전파해 준 선교사들을 기리를 마음이 지극해 보였다. 바다거북과 함께 춤을! 일데뺑에서 다시 모터보트를 탔다. 마치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줄줄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작은 섬에서 또 작은 섬으로, 그리고 더 작은 섬으로 가는 중이다. 아직 정박할 만한 곳이 없는데 보트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거북이의 등장이었다. 뉴칼레도니아의 바다에는 녹색 바다거북, 큰머리 거북, 붉은 바다거북 등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배의 추격을 물리치고 도망가려는 거북이를 노칠세라 한 남자가 첨벙 물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이 거북이가 아니라 듀공dugong이었다면 그의 다이빙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돌고래와 인어 전설의 기원이라는 듀공은 해초를 먹고 살기에 ‘바다의 소’라고 불리지만 몸길이가 3m나 된다니 말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앵무조개1)도 뉴칼레도니아의 심해 속에 살고 있다.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새하얀 모래사장이 등장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이하나 한편으로는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솟구친다. 배에서 내려 모래섬 위에 발을 내딛고 나서야 비로소 이 새하얀 모래섬이 현실임을 실감케 된다. 지금 내가 내려선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노깡위Nokanhui Island라는 황홀한 현실. 이 풍경을 가능케 한 것은 라군2)이었을 것이다. 폭이 55~78km밖에 되지 않고 길이는 500km에 이르는 뉴칼레도니아는 섬의 둘레를 따라 세상에서 두 번째로 긴 1,600km의 라군석호이 띠를 두르고 있다. 섬과 산호초 사이의 바다를 이르는 라군은 파도가 없어 항상 잔잔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데뺑과 로와요떼 군도에 속하는 리푸, 마레, 우베아섬 등의 작은 섬들이 자리잡고 있다. 산호가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은 따뜻한 수온과 풍부한 햇볕이다. 산호초가 많으면 물속에 산호공급이 활발해 수중생물에게도 살아가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래서 산소탱크를 메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살아있는 바다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앙증맞은 조개껍데기와 산호 조각을 모아서 손바닥 위에 굴리면 만화경을 보는 것처럼 변화무쌍하다. 그런 자잘한 재미를 만끽하지 않는다면 노깡위를 섭렵하는 산책은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 산책을 잠시 방해했던 것은 트리코레예라고 불리는 무지개뱀Rainbow Snake이었다. 빠비용처럼 띠무늬를 지닌 이 바다뱀은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다 인기척에 놀라서 나무더미 사이로 몸을 숨겼다. 독이 있지만 입이 너무 작아서 사람을 물 수는 없다고 하니 두려워할 존재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손에 쥔 마트료시카 인형은 개인 소유인 메트르Maitre섬이었다. 파도를 헤치는 요트 항해 끝에 도착한 이 섬은 2004년 에스카파드 아일랜드 리조트Escapade Island Resort의 개장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뉴칼레도니아 유일의 수상 방갈로가 S자로 줄지어 선 풍경은 꿈꾸던 바다 위의 휴가를 현실로 재현한 느낌이다. 테라스에 설치된 계단의 마지막 스텝은 열대어가 유영하는 바다다. 비 오는 일데뺑 여행은 마치 그 마지막 계단에서 우뚝 멈춰 서 버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다시 뉴칼레도니아를 가고 싶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뉴칼레도니아 관광청 www.new-caledonia.co.kr, 에어칼린 www.aircalin.c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앵무조개 3억4,000만년 전부터 살았던 두족류 동물로 수심 150~600m의 심해에 살고 있다. 지름 20cm, 혹 9cm의 크기로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갈색의 방사상 띠로 이루어진 껍질의 무늬가 앵무새의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앵무조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누메아 아쿠아리움에서 살아있는 앵무조개를 볼 수 있다. 2) 뉴칼레도니아 라군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24,000㎢의 라군으로 2008년 7월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폭이 좁게는 30km, 최대 200km까지 펼쳐진 곳도 있다. 둘레의 총 길이는 1,600km로 호주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다음으로 길다. ▶travie info 항공편 2008년부터 에어칼린이 인천-누메아 사이를 주 2회(월, 토, 약 9시간 30분 소요) 운항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기내 환경 업그레이드로 이코노미 좌석이 기존보다 15도 더 젖혀지며 손잡이도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해졌다. 개인별 최신 통합 리모콘뿐 아니라 USB 및 애플용 포트도 탑재했다. 이 밖에도 한국인 통역원이 탑승하고 있으며 기내식으로 김치를 제공하는 등 지역 맞춤형 서비스도 충실하다. 동계시즌인 10월30일부터는 수·일요일로 요일을 변경해 신혼여행객이 이용하기에 더 편리해질 예정이다. 문의 02-3708-8581 시차 한국보다 2시간 빠르다. 날씨 평균 기온 15~32도 사이의 초여름 날씨. 계절은 한국과 반대다. 화폐 퍼시픽프랑을 쓴다. 한국에서는 달러보다 유로화로 바꿔 가는 것이 유리한데 환전 수수료가 높으므로 웬만한 것은 카드로 결제하는 게 낫다. 물가는 유럽 수준.
  • ‘인도판 도가니’ 선교사 “나는 결백…까말라 품행 안 좋은 아이” 반박

    ‘인도판 도가니’ 선교사 “나는 결백…까말라 품행 안 좋은 아이” 반박

    한국인 선교사가 인도에서 고아원에 있던 소녀들을 수년간 성폭행한 것으로 알려져 인도가 발칵 뒤집힌 가운데 논란이 커지자 해당 선교사가 강력하게 반박했다. 인도의 성폭행 사건을 알렸던 류시화 시인은 22일 선교사 최모(75)씨가 자신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며 페이스북에 내용을 공개했다. 류 시인은 인도 현지 언론보도를 바탕으로 최씨가 까말라(가명)라는 소녀를 5년간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에 알린 바 있다. 류 시인에 따르면 최씨는 “나는 결백하고 까말라는 본래 품행이 좋지 않은 아이였다. 주위의 사주를 받아 나를 고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현재) 뇌물을 받고 무조건 잡아 가두는 인도 경찰을 피해 모처에 피신 중이다. 보석 허가가 나는 대로 경찰에 출두하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특히 현지 언론의 보도와 경찰 수사 내용을 전부 부인했다. 그는 “나는 고아원 소녀들을 직접 목욕시킨 적이 없으며 성폭행 장면 촬영도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최씨는 그러면서 이번 사건이 자신이 운영하는 고아원을 강탈하기 위해 공모된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이 모든 일은 내가 운영하는 고아원을 강탈하기 위해 또 다른 한국인 선교사가 인도인 목사와 공모해 피해자인 까말라에게 거액의 돈과 땅을 주기로 약속하고 나를 음해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나를 성폭행범으로 몰아간 한국인 선교사를 상대로 현재 고소·고발도 여러 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류 시인은 이에 대해 “대체 (최씨 같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종교적인 나라 인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이런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류 시인은 “현지 경찰은 까말라뿐 아니라 성폭행 피해 소녀를 여러 명 조사했다. 이 역시 (최씨를 음해하는) 한국인 선교사가 조작한 것인가”라고 반문한 뒤 “아직 보수적인 인도 사회에서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신분과 방송 카메라 앞에 공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텐데, 그것이 금품에 매수돼 할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앞서 인디아타임즈는 인도 남부 방갈로르에 있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최씨가 까말라를 비롯해 여자 원생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당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고 지난달 25일 보도했다. 까말라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기자회견을 통해 알리고 최씨에의 처벌을 주장하고 있다. 까말라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씨는 내가 13세 때부터 5년간 성폭행했고, 고아원의 다른 소녀들에게도 똑같이 했다. 다른 소녀가 없을 땐 나를 원하곤 했다”고 폭로했다. 또한 성폭행 장면을 고아원 직원을 시켜 촬영하도록 하거나, 고아원의 여원생을 직접 목욕시키며 은밀한 부위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인도 경찰은 까말라의 폭로 내용과 주위의 증언을 바탕으로 최씨가 성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확보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최씨는 경찰의 출두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채 도주해 20일이 넘도록 종적을 감춘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⑨ 정동과 덕수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⑨ 정동과 덕수궁

    >> 정동 공사관거리 어떻게 형성됐나 서울 도심 한복판 중구 정동(貞洞)이 외국 공사관 거리로 바뀐 데에는 사연이 있다. 미국공사관이 1883년 정동에 처음 자리 잡으면서 열강이 속속 진입한 것이다. 서울에서 근대의 풍경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정동의 형성은 우연한 계기로 이뤄진 셈이다. 1880년 우리나라에 첫 공사관을 개설한 일본 공사관이 들어선 곳은 서대문 밖이었다. 조선은 외국 공관의 사대문 안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진압 과정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도성 안에 주둔하면서 금역은 깨졌다. 새 경계선으로 정한 것이 개천(청계천)이었다. 종묘사직이 있는 개천 안쪽만에라도 외세를 들여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일본과 청나라의 틈을 비집고 미국이 사대문 안 정동에 전격 상륙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정동이었을까?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미국 초대 공사 푸트에게 정동에 공관과 사택을 알선해 준 이는 수송동에 살고 있던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였다. 통역 윤치호의 처가가 정동에 있었던 이유도 컸다. 그러나 강원도 관찰사 민치상의 아들 민계호의 집을 외국인에게 선뜻 내어 준 것은 고종의 윤허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58세로 나이가 지긋하고 경력도 상당한 푸트에 대한 고종의 개인적 호감이 작용했다고 한다. 푸트는 1만냥을 주고 125칸의 건물이 딸린 한옥을 사들였다. 이 집은 미국 공사관을 거쳐 나중에 미국 대사관저(하비브하우스)가 된다. 푸트는 정동에 정착한 최초의 외국인이 됐다. 이어 영국 영사관(1884년), 러시아 공사관(1885년), 프랑스 공사관(1889년), 독일 영사관(1891년), 벨기에 영사관(1901년) 등이 합류하면서 정동은 양인촌(洋人村)이 됐다. 정동은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 그들의 가족에게 여러모로 좋은 곳이었다. 인천항이나 한강을 통해 서울 진입이 손쉬운 마포나루와 양화진이 가깝고, 경복궁이나 경운궁에 접근하기 좋다. 사대문 성곽 안이어서 안전하고, 토지와 가옥 매입이 쉬우며, 특정 지역에 모여 살기에 편리했다. 19세기 말엽까지 서울에는 9개 나라의 공관이 있었는데 이 중 7개 나라가 정동 권에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공관만 정동 밖에 있었다. 개항기 서울에서는 모두 226명의 서양인이 117채의 집을 차지했다. 대부분 정동이나 연지동에 거주했다. 여기에다 청국과 일본인을 포함하면 외국인 수는 모두 3200여명에 이른다. 독립신문 1897년 4월 1일자는 “프랑스인 28명에 가옥 7호, 러시아인 57명에 가옥 22호, 독일인 9명에 가옥 7호, 미국인 95명에 가옥 40호, 영국인 37명에 가옥 41호, 청국인 1273명에 가옥 110호, 일본인 1758명에 622호 등 모두 3257명에 가옥 767호이라더라”라고 보도했다. 이후 13년이 흐른 1910년 서양인 수는 308명으로 별 변화가 없었다. 같은 해 7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 수는 2344명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경성에 거류하는 외국인을 조사한즉슨 영국인이 88명, 미국인 131명, 프랑스인 57명, 독일인 19명, 러시아인 12명, 벨기에인 1명, 청국인 2036명이라더라”라고 보도했다. 미국 공사관의 정동 진입 당시 일본 공사관은 남산자락 아래 예장동에 있었고, 청나라의 공사관 격인 상무총서(商務總暑)는 남별궁터(조선호텔)에 있었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은 공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지낸 천수탕(陳樹棠)이 1883년부터 2년간 주조선(駐朝鮮) 상무위원(商務委員)이란 직함을 달고 활동했다. 실질적인 청국대사였다. 그는 외국사절단 회의석상에서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니 나의 직위는 외국 사신 중 우두머리이며, 조선의 정승보다 상석에 앉아야 한다”며 거드름을 피웠다. 후임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함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였다. 1885년부터 10년간 조선총독 행세를 한 위안스카이는 명동 옛 중국 대사관 자리에 총리아문이라는 집무실을 설치했다. 지금의 을지로입구와 마포나루에 청국경찰서와 청국파출소를 각각 두는 등 경찰력을 따로 운영했다. 이들의 위세를 업고 중국 상인들이 소공동을 중심으로 수표동과 관수동에 상권을 형성했다. 정동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만 왕자의 난을 치른 태종이 계모의 능을 정릉동으로 옮겨 버렸기 때문에 능의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았다. 미국 공사관 터가 정릉 터로 추정된다. 태조 때 정릉에 설치한 문인석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전성기 정동에는 외국 공사관을 비롯해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학교와 손탁호텔, 성공회, 구세군 본영, 정동 제일교회, 덕수교회 등 종교시설 등 모두 25개의 큰 건물이 들어서 서울에서 가장 화려하고 분주한 동네였다. 현재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노르웨이, 네덜란드, 러시아 대사관 등 6개국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대사관저는 웬만한 대사관을 압도하는 규모다. 정동에 근대의 향기는 여전하지만 자취는 거의 사라졌다. 정동의 옛 공사관과 거리가 그때 그 모습으로 보전됐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을 감출 길 없다. >> 덕수궁인가 경운궁인가 ‘도심 궁궐’ 경운궁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궁이었다. 고종은 백성이 모이기 쉬운 경운궁과, 청과 일본의 군사력이 미치기 어려운 정동 외국 공사관을 이용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정사를 본 1896년 아관파천 이후 1910년 국치일 이전까지 서울의 정치 중심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었다. 이곳에서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언했으며 원구단과 황궁우를 짓는 등 위상회복을 꾀했다.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간 8㎞ 거리의 단선궤도 전차를 1899년 개설했는데 이는 도쿄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경운궁은 을지로와 충무로 등 주요 도로와 사통팔달 식으로 연결되는 방사성 교통 요충지가 됐다. 조선 500년간 왕족이나 명문가의 거주지이자 사색당파(四色黨派) 중 서인(西人)의 주거지이던 정동이 하루아침에 양인촌으로 둔갑하면서 사실상 열강의 조계지(租界地)가 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고종은 먼 나라와 친교를 맺어 가까운 나라를 공략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 계책에 따라 서구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과 청의 야욕을 막으려고 했다. 고종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미국 공사관이 정동에 터를 잡은 지 13년 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야밤에 경복궁을 탈출, 미국 공사관 안 쪽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명성황후가 참변을 당한 경복궁에 더 머물길 원치 않았다. 이곳에서 1년 9일을 머물면서 경운궁을 정비했고, 이듬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궁(皇宮)으로 썼다. 1919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경운궁과 정동을 떠나지 않았다.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치러진 국장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나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동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이라고 이름을 바꿔 정문으로 썼다. 대한제국 시기 열강이 공사관과 교회, 학교 용도로 야금야금 잠식한 경운궁은 3분의1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1930년 덕수궁에는 전(殿) 6채, 당(堂) 7채, 헌(軒) 5채 등 18개 건물만 달랑 남았다. 궁궐 부지 2만여 평 중 절반을 또 공원용지로 떼어 냈다.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장충단공원, 남산공원과 함께 서울의 3대 공원으로 지정됐다.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를 심었다. 역사상 첫 황궁이던 경운궁은 창경궁과 함께 일개 공원으로 전락했다. 경운궁이라는 이름은 역사와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덕수궁이면 어떻고 경운궁이면 어떠하며, 대안문이면 어떻고 대한문이면 또 어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비록 우리 손으로 바꿨지만, 일제의 술수와 압력이 개명을 종용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운궁 명칭 회복운동이 몇 년 전 시작됐다.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경운궁으로 환원하자는 학계와 시민단체 등의 주장에 대해 문화재청은 잔재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덕수궁을 유지했다. 문화재위원회도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반대 의견이 많아 명칭 변경 안건에 대한 심의를 보류한다고 밝혔었다. 조선총독부를 해체한 이유를 망각하고 있다. 역사에는 곡절이 있다. 곡절의 진위를 캐묻는 의문과 왜곡 바로잡기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진실도 눈을 감고 말 것이다. joo@seoul.co.kr
  • ‘인도판 도가니’ 70대 韓선교사 고아원 소녀 상습 성폭행 ‘충격’

    ‘인도판 도가니’ 70대 韓선교사 고아원 소녀 상습 성폭행 ‘충격’

    한국인 선교사 최모(75)씨가 인도 시골마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수년간 상습적으로 10대 소녀들을 성폭행한 충격적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현지 언론에 보도된 것은 물론 최근 류시화 시인이 이 내용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국내에서도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류 시인은 페이스북에 “인디아타임즈에서 파헤쳐 인도인들의 공분을 사고 방갈로르 지역에 반한 감정까지 일게 한 부끄러운 사건”이라면서 “우리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다. 너희의 큰 눈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겠니”라고 비통한 심정을 적었다. 앞서 인도 언론 인디아타임즈는 지난달 25일 인도 남부 방갈로르에 위치한 고아원을 운영하는 한국인 선교사 최씨가 소녀들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고 보도했다. 피해자인 까말라(가명)는 8살이 되던 해 이 고아원에 맡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까말라는 13살 때부터 최씨의 성폭행이 시작됐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최씨는 목욕을 시킨다며 까말라의 은밀한 부위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일삼고 자신의 직원을 시켜 성폭행하는 장면을 촬영하기까지 했다. 까말라는 저항했지만 고아원에서 내쫓겠다는 협박에 성폭행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수년 뒤인 지난달 현지 언론이 최씨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카밀라의 피해 사실도 드러났다. 고아원에서 탈출하기 위해 2006년 결혼한 까말라는 결국 이 때문에 남편한테도 쫓겨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선교사 최씨는 현지 수사 직후 북인도 지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래는 류 시인의 페이스북 글 전문 까말라(가명)는 남인도 방갈로르 부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여서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까말라는 여덟 살 되던 해 한국인 선교사 최OO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곳은 일곱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의 소녀아이들만 받는 곳이었다. 모든 아이들은 날마다 이 선교사가 직접 은밀한 부위까지 손으로 만지며 목욕을 시켰다. 까말라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선교사는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강제로 성욕을 채웠다. 그는 알 수 없는 알약을 먹고 까말라에게도 먹였다. 까말라는 저항했지만, 고아원에서 쫓아내겠다는 협박에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성폭행은 5년 동안 반복되었고, 까말라는 결혼함으로써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 지역 신문이 최OO이 고아원 원생들을 성폭행한 내막을 폭로하자 까말라의 남편은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다. 마침내 까말라는 최OO을 경찰에 고발하고 OO수련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실을 밝혔다. 최OO은 고아원의 남자 직원 OOO을 시켜 자신이 까말라를 성폭행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시키기까지 했다. 출두 명령을 받은 최OO은 자신은 무슨 사건인지 알지 못하며 경찰에 가 봐야 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종적을 감춰 20일이 지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찰은 OOO을 체포해 비디오 테이프까지 압수한 상태이다. 인도인들은 경찰서 앞에 모여 연일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변호사는 최OO의 피해자는 까말라만이 아니라고 밝혔다. 최OO은 휴대전화기도 갖지 않은 채 북인도 지역으로 도주한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방갈로르까지 방문해 그를 하느님의 신실한 종으로 극찬한 서OO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75세인 최OO은 50대 초반까지 택시 운전을 하다가 교회의 장로가 된 뒤 한 달 만에 선교사 자격으로 방갈로르에 파견되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졸업에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보냈다는 것이다. 그후 20년 동안 그는 방갈로르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원생 살인 혐의까지 받은 적도 있다. 인디아 타임스에서 파헤쳐 인도인들의 공분을 사고 방갈로르 지역에 반한 감정까지 일게 한 이 부끄러운 사건에 대해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무관심, 무책임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co.kr
  • 대법, 北주민 친자확인訴 승소 확정

    6·25 전쟁 당시 북한에 남겨진 자녀들이 남한 법원에 낸 친자확인 소송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북한 주민 윤모(61)씨 등 4명이 “남한에서 사망한 남성이 친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해달라”며 제기한 친생자관계 존재 확인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대리인의 소송대리권이 인정된다”며 “원고들이 고인이 된 윤모(1918년생)씨의 친생자라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북한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고인은 6·25 전쟁이 나자 2남 4녀 중 큰딸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후 남한에서 권모씨와 재혼해 2남 2녀의 자녀를 남기고 1987년 숨졌다. 개인의원을 운영한 고인은 100억원대의 상당한 재산을 남겼으며, 대부분 남한의 자녀들에게 분배됐다. 이후 고인의 큰딸은 2008년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북한에 있던 동생들과 연락이 닿자 아버지의 사망사실을 전했다. 북한의 윤씨 형제들은 소송위임장과 영상자료, 모발 샘플 등 필요한 자료를 고인의 큰딸에게 전달했고, 2009년 2월 “고인의 친자식임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이와 함께 고인이 남한의 이복형제·자매와 새어머니에게 남긴 재산 100억원을 나눠달라는 상속회복청구 소송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한국인 등산객 조난’ 일본 중앙알프스 어떤 곳이길래

    한국인 등산객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실종된 조난사고가 발생한 일본의 ‘중앙알프스’는 나가노(長野)현에 위치한 기소(木曾) 산맥의 고산들을 가리킨다.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은 영국인 선교사 W.웨스턴이 히다산맥과 아카이시산맥의 여러 산에 등산을 한 뒤 ‘일본 알프스의 등산과 탐험’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일본에서는 통상 나가노현을 중심으로 히다산맥을 북알프스, 기소산맥을 중앙알프스, 아카이시산맥을 남알프스로 부르고 있다. 세 산맥이 모두 3000m 이상의 고봉들을 이루고 있는데 그 수가 모두 26개에 달해 일본 최고(最高)의 산악지대다. 이 가운데 중앙알프스는 길이가 65km에 달하고 너비는 15km에 이른다. 가장 높은 지점은 나가노현에 있는 높이 2956m의 기소코마 산이고 다음으로 쇼기카시라산(2956m), 교산(2296m), 호켄다케산(2931m) 등이 있다. 특히 이번 사고를 당한 한국인 단체 등반객들이 등반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 호켄다케는 해발 2931m로 중앙알프스를 대표하는 고산이다. 고산식물 꽃밭으로 유명해져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힐링 트레킹 코스 등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험한 암봉이 많아 낙상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28일 한국인 단체 등산객 20명은 나가노현 고마가네시의 이케야마에서 등반을 시작해 중앙알프스의 우쓰디다케(2864m)를 거쳐 중간의 한 산장에서 1박을 한 뒤 29일 아침 6시쯤 그룹으로 나눠 히노키오다케(2728m)를 거쳐 호켄다케의 호켄산장을 출발했지만 일행 중 8명만 예정된 산장에 도착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고]

    ●이구호(이산 상무)강호(유경산업 이사)군호(성균관대 초빙교수)미경(환경재단 사무총장)씨 부친상 조계순(영림초 교사)씨 시부상 정승아(조선대 교수)씨 장인상 28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30일 오전 8시 (02)2227-7556 ●김경태(연합뉴스 경기취재본부 차장)영태(리츠공인중개사 대표)기태(삼성물산 건설부문 과장)씨 부친상 권양숙(경향신문 편집부 차장)씨 시부상 28일 강원 삼척의료원, 발인 30일 오전 6시 (033)570-7451 ●김태원(한국산업융합협회 이사)씨 부친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0일 오전 8시 (02)3410-6903 ●이철종(사업)경종(선교사)윤종(대훈환경 대표이사)문종(대훈환경 상무이사)씨 모친상 백봉현(사업)민경석(전 대한생명 상무이사)씨 장모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0일 오전 8시 (02)3410-6915 ●이강덕(삼화택시 회장)씨 부인상 상재(삼화택시 대표이사)씨 모친상 권오채(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씨 장모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30일 오전 7시 (02)3010-2230 ●서민석(동일방직 회장)씨 모친상 김광덕(캐나다 거주)조정완(카이스트 명예교수)씨 장모상 서태원(동일방직 전무)승현(법무법인 양헌 변호사)씨 조모상 조원규(구글코리아 기술개발총괄 사장)김현주(CGV 근무)씨 외조모상 28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30일 오전 9시 30분 (02)3410-6917
  •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마포…새달 ‘포토&스토리’ 공모전

    마포구는 오는 8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간 마포 지역의 문화관광자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마포여행-포토&스토리 공모전’을 연다고 22일 밝혔다. 지난해까지는 마포의 매력을 담은 사진작품들을 공모해 왔으나 올해에는 공모전 방식에 변화를 줘서 사진뿐 아니라 사진에 담긴 이야기들까지 함께 모은다는 의미에서 ‘포토&스토리 공모전’이라 이름 붙였다. 작품은 마포에 관련된 것이면 어떤 것이나 가능하다. 가령 망원정 터, 최규하 대통령 가옥, 삼개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등 지역에 자리한 역사문화 자원이어도 되고 도화낭자 전설, 염리동 소금장수, 마포종점 등 옛이야기나 대중문화에 얽힌 것, 또는 토정 이지함이나 신숙주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것이어도 무방하다. 다만 사진은 인화한 것이나 디지털 파일로만 낼 수 있고 여기다 덧붙일 이야깃거리들은 A4 용지 1~2장 분량의 한글 파일이면 된다. 1인당 5점까지 응모할 수 있으며 금상 100만원, 은상 50만원, 동상 30만원, 입선 10만원의 상금이 각각 지급된다. 마포구 홈페이지(www.mapo.go.kr)에서 받은 신청서에다 사진과 스토리를 붙여 방문 또는 우편 접수하면 된다. 공모전 당선작은 오는 9월 16일 발표되고 10월 열리는 ‘제6회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에 전시된다. 박홍섭 구청장은 “자연환경, 관광명소, 문화·예술·축제 등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마포의 모습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발굴해 마포 관광자원의 매력을 대외적으로 알리자는 차원에서 기획한 행사인 만큼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이인선(인천지방경찰청장)씨 모친상 15일 서울경찰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 (02)431-4400 ●안재성(충남대병원 정형외과 교수)희진(온누리교회 목사)씨 부친상 노재규(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씨 장인상 김주연(카이스트부속의원 가정의학과 교수)씨 시부상 14일 충남대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42)280-7342 ●이건(대한항공 후쿠오카공항지점장)준(사업)씨 모친상 최병철(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심사위원)김찬성(사업)씨 장모상 1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6시 (02)3010-2291 ●이종원(서원양행 회장)종화(서원양행 감사)종복(신당중앙교회 선교사)씨 부친상 이석준(전 오뚜기 이사)이창훈(사업)씨 장인상 1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 (02)3410-6915 ●채만식(미국 변호사)종식(대전법원 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현주(자양고 교사)씨 모친상 1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2)3410-6903 ●김정호(전 해병대사령관)씨 별세 용섭(J글로리 대표이사)씨 부친상 이희열(씨엔이 회장)김동건(배재대 법학부 교수)씨 장인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 (02)3010-2265 ●이장영(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종현(천안 새서울치과 원장)씨 모친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2)3010-2292 ●구본중(국민은행 종로중앙지점 부지점장)본선(대검찰청 대변인)씨 부친상 김정아(YTN 차장)씨 시부상 15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18일 (02)2258-5940 ●문호상(서울시 미디어특보)씨 모친상 1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 (02)3410-6912
  • “미얀마 반군, 탈북자 60여명 억류”

    미얀마와 중국·태국 접경 지역의 미얀마 반군 관할지에 탈북자 수십명이 억류돼 강제 노역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탈북자지원단체인 ‘북한인권개선모임’ 김희태 사무국장은 12일 “미얀마와 태국 국경지역 타지렉에서 북동쪽으로 80㎞ 떨어진 미얀마 반군 관할지역에서 최소 64명의 탈북자가 억류돼 강제 노동을 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성매매를 강요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북한을 탈출, 미얀마를 거쳐 태국으로 가려다 반군에 붙잡힌 탈북자들로, 이 가운데는 9년간 억류된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은 족쇄를 차고 마약에 중독된 채 마약 밭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예노동 중 사망한 탈북자들을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25개의 무덤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사무국장은 “반군의 첩이 된 탈북 여성이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와 최근 근황을 전해 듣게 된 것”이라며 “확인된 게 64명(여성 70~80%)이고, 이보다 더 많은 탈북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관계부처에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북한인권단체들이 관련 사실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아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한국교회, 돈으로부터 복음 오염 막을까

    개신교계가 ‘교회 회계처리 기준(안)’을 만들기로 결의한 가운데 한국교회의 재정 투명성과 관련한 공청회가 처음 열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4일 오후 2시 기독교회관 2층 에이레네홀에서 개최하는 ‘한국교회와 재정 투명성’ 주제의 공청회. 한국교회의 위기와 침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불투명한 재정으로 보고 이와 관련한 일선 교회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인 만큼 교계 안팎의 각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공청회는 지난 4월 18일 NCCK 제61회기 제2회 정기실행위원회의 결정이 발단. 실행위는 이날 회의에서 ‘교회 재정 투명성 제고위원회’(투명성 위원회)를 조직, 핵심과제로 교회의 재무제표 작성과 회계처리 기준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NCCK는 (사)한국회계기준원이 마련 중인 비영리조직회계기준초안 작업에 투명성 위원회 부위원장을 파송해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다음 달쯤 기준원의 초안을 토대로 한국교회의 회계상황을 반영한 ‘교회회계기준(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NCCK가 교회 재무제표 작성 및 회계처리 기준을 마련, 발표할 경우 회원 교단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NCCK 회원 교단들은 납세를 비롯한 교회 재정 측면에서 비교적 일치된 입장을 보여 개신교계에 파급효과가 클 전망이다. NCCK는 이와 관련, “재정(돈)과 영혼은 완전히 다른 실체지만, 이 둘은 분명 상호관계가 있다는 인식 아래, 한국교회가 재정(돈)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염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 재정과 선교사명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미리 배포된 발제문을 통해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정 사용의 공공성”이라며 “이제 기독교인들이 형편과 관계없이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규모나 형편을 떠나 재정의 일정 부분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도 “교회 재정의 투명성은 공동체의 수준을 가늠하는 핵심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면서 “목회자를 포함해 모든 신도들이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는 겸허함을 바탕에 깔면 상호 견제 시스템은 불신이 아니라 오히려 신뢰와 신앙을 도모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불한성경 한·불 수교 127년만에 나와

    불한성경 한·불 수교 127년만에 나와

    한글 성경과 불어 성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불한 성경이 출판됐다. 한국불어권선교회(CCMF·이사장 홍문수 목사)가 지난달 29일 서울 신반포교회에서 봉헌예배를 통해 세상에 내놓은 성경이 그것. 한·불수교 127년 만에 국내에서 불한성경이 처음으로 출판된 셈이다. 한국불어권선교회는 불어권 지역 선교를 위해 설립된 초교파 해외선교단체. 1992년 무지개선교회라는 명칭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지난 19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번에 출간된 성경은 이 선교회가 2007년 3월 작업을 시작해 그해 10월 홍보용 요한복음을 먼저 출간한 뒤 6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40여명의 불어과 교수 및 전공자, 선교사·신학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불어 전공자로 구성된 자원봉사자 20여명이 편찬을 도왔다. 이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등 66권 전권을 불어와 한국어로 비교해 가며 볼 수 있도록 한 불한 대조 성경. 한글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의 ‘성경전서 개역 개정 4판’, 불어 성경은 ‘프랑스성서공회의 ‘Nouvelle Version Segond Revisee 1978년판’을 사용했다. 특히 하단에 불어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단어·문법·표현 설명을 함께 붙인 게 특징이다. 불한 성경은 이 선교회 홈페이지(www.ccmf.com)와 기독교 인터넷몰을 통해 구매할 수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풍경1> 흐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고갯길·골목길들 육조대로·운종가 조선시대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길 현대를 도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만약 신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 도시는 인간의 걸작품이다. 사대문 안 ‘원(原)서울’은 인간의 도시라기보다 마치 자연이 만든 무위(無爲)의 도시 같다. 풍수지리와 도교 사상이 저변에 깔렸다. 도성 앞뒤에 산이 있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지형이다. 모든 인공건조물은 구릉과 물을 거스르지 않았다. 고갯길과 골목길이 자연 생성됐다. 서울 지명에 황토마루(세종로 사거리), 구리개(을지로입구), 운현(운현궁), 진고개(충무로), 박석고개(명륜동), 배고개(종로4가), 맹현(삼청동), 안현(안국동), 야주개(당주동), 무학재 등 고개(현)가 유독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종로가 생성됐고, 중랑천을 따라 동부간선도로, 홍제천과 정릉천을 따라 내부순환도로가 지어진 것도 물길에 순응한 결과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은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곳에 만들어졌다.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 그렇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되 인위적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크기나 위치에 따라 오솔길, 한 길, 두렁길, 골목길, 고갯길, 샛길이 됐다. 상태에 따라 흙길, 황톳길, 진창길, 박석길(포장길)이 됐으며 쓰임새에 따라 피맛길, 순라길이 됐다. 조선시대 서울의 숱한 길 중 정사(正史)에 지명이 등장하는 길은 단 두 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길은 육조대로(세종로)와 운종가(종로)뿐이다. 태조실록에 운종가라는 기록이 나오고, 인조실록과 영조 당시 승정원일기에 육조대로가 나온다. 그 밖에는 관도(官道), 어가(御街)라는 불특정 길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과천로, 시흥로, 강화로, 고양로 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간선도로명이 기록됐다. 대한제국 시기 들어 정동을 공사관거리라고 부르거나, 황토현이나 신작로라는 길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풍경2> 좁고 불결, 그리고 황량 : 개항기 외국인 눈에 비친 도성 길 먼지·진흙 뒤범벅… ‘눈 돌리면 매혹적인 풍경’ 애정 어린 눈길도 개항 이후 길에 관한 기록의 칠팔 할은 소설이나 외국인의 여행기, 수기와 함께 전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트인 길, 트인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다”는 인상기를 남겼다. 당시 대표 길인 육조거리와 운종가는 폭이 각각 60m, 20m로 큰길이었다. 이 길을 본 외국인의 입이 벌어졌다. 16세기 중세 도시로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예를 찾기 어려운 마치 광장 같은 길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길은 대체로 좁고 지저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양 문물을 일찍 접한 실학자들이 저서를 통해 도로의 확장과 정비를 지적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시중의 주민들이 길을 차지해 말을 탄 사람이 서로 만나면 다닐 수 없는 때도 있다”면서 가로 정비를 촉구했다.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는 무슨 말인가. 수레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도로가 나빠서 그렇고 도로가 나쁜 것은 사대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실학자들과 개화파 주도로 도로의 정비 개선이 실제 이뤄졌다. 외국인들은 길이 좁고,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렸다. 1883년 미국인 천문학자 로웰은 “제물포와 서울 간의 풍경은 황량하다”고 썼고, 1894년 영국인 여행가 비숍은 “네 사람의 가마꾼이 멘 가마 한 채가 지나는데도 양쪽 인가의 처마에 걸려 애를 먹기 일쑤였다”고 전했다. 1882년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는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1908년 펴낸 ‘서울견문기’에서 “당나귀, 마차, 전차 그리고 사람들이 먼지와 진흙 속에 뒤범벅되어 있다”라고 혹평했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도 “좁고 불결하며 늘 오물이 널려 있다”, 미국 해군장교 보스트윅은 “하이에나의 소굴보다 더한 지독한 악취로 진동하고 있다”고 악평했다. 혹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특유의 풍광에 반한 외국인의 칭송도 있었다. 1892년 ‘서울풍물지’를 발간한 미국인 신학자 길모어는 “한국인들은 누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결하지 않으며 서울 근교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 눈을 매혹할 전경을 발견하게 된다”고 감탄했다. 비숍도 1897년이 되자 “인구가 25만명에 이르는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이며, 이만큼 좋은 입지를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면서 “내가 처음 한국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은 이제 거의 애정 수준의 관심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풍경3> 모든 길은 한양으로 :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 상경·낙향… ‘어떻게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광적인 인구집중 증보문헌비고나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서울 밖으로 나가는 길이 나온다. 주요 국도라고 보면 될 터다. 제1로는 중국 가는 길인 의주로였다. 서대문~홍제동~고양~파주~장단~개성~의주로 이어졌다. 제4로는 남대문~한강진~판교~용인~부산의 부산 가는 길이다. 이 밖에 평해 가는 길, 고성 가는 길, 상주와 통영 가는 길, 정읍을 거쳐 제주 가는 길, 강화 가는 길 등이 있다. 고전소설 ‘이춘풍전’에는 “무악재 넘어 홍제원(홍제동)에 다다르니…”라면서 개성과 평양을 지나 의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춘향전’에서 “역졸을 거느리고 숭례문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 동작강 얼른 건너”라는 구절은 한강을 건너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는 길이다. 오늘의 숭례문~이문동~청파동~노량진 구간을 이른다. 또 ‘홍길동전’에서는 “양천 강변을 지나 서울 서강으로 대령하라” 하였는데 숭례문~약현(만리동)~노고산(신촌 뒷산)~양화~서강(서강대교 북단)에 이르는 길을 이른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라고 읊은 구절은 동쪽 방면의 동대문~왕십리~살곶이다리~송파로 가는 길의 하나다. 조선시대는 한양이 곧 나라였다.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가 판쳤다.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낙향(落鄕)이라고 할 정도였다. 문외송출(門外送出)이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성문 밖으로 내쳤다. 사대부가 서울 밖에 사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유배 살던 정약용은 “너는 사정이 어지간만 하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라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낼 정도였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 집중은 예고된 ‘참사’였다. <풍경4> 청계천 따라 북촌-남촌 : 계층 생활권 나뉜 이중도시 오늘날엔 한강을 경계로 강북 -강남으로… ‘스타일’ 차이 뚜렷 오늘의 서울에 강북과 강남의 문화 차이가 있듯이 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북쪽 5대 궁궐 주변 일대에는 사대부 지배층과 궁 관련 아전들이 주로 살았다. 청계천 아랫동네는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와 상민들의 거처였다. 청계천 변에는 하층민과 거지들이 살았다. 엄연한 계층 차이가 존재했다. 남산 기슭의 남촌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됐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묘사된 것처럼 끼니가 없으면 냉수로 주린 배를 채우고서 갓을 고쳐 쓰고 앉아 헛기침하며 글을 읽는 ‘남산골샌님’이 그들이다. 진흙탕 길에 나막신을 신어야 했기에 ‘딸깍발이’로 불렸다. 북촌과 남촌은 다시 한번 진화한다. 1935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수가 서울 총인구의 30%에 육박하는 11만 4000명에 이르렀다. 일본인 거주 지역이 급속도로 확장된다. 남산 아래 필동, 회현동을 비롯해 후암동, 청파동 등 용산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로 변했다.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이 사는 곳으로 양극화됐다. 일본인 거주지를 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남대문통(남대문로)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전기와 전차, 상하수도가 갖춰졌다. 조선인 중심지인 종로는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소설가 박태원은 ‘천변풍경’에서 “전차도 전차려니와 웬 자동차며 자전거가 그렇게 쉴 새 없이 이어서 달리느냐. 어디 장이 선 듯도 싶지 않건만, 사람은 또 웬 사람이 그리 거리에 넘치게 들끓느냐”라고 남촌의 휘황찬란한 풍경을 비아냥댔다. 북촌과 남촌 간 민족적 갈등이 밤거리의 주먹 세계에서 격렬하게 분출된 시절도 있었다. 서울은 일찍부터 민족적·계층적으로 분리되거나, 생활권과 상권 그리고 문화가 갈리는 ‘이중도시’(Dual City)의 양상을 보였다. <풍경5> 일제의 길 확장 : 서울다움을 잃다 전차 궤도 부설 핑계로 도읍 상징 성곽 허물어 깊은 생채기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시행한 길 확장이 서울의 서울다움을 결정적으로 훼손시켰다. 인력거 및 자전거의 도입과 마차를 대체한 달구지, 자동차, 전차의 도입은 한양도읍의 상징인 성곽을 철거하는 구실이 됐다. 전차 궤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1899년부터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 성곽 일부가 차례차례 헐렸다. 일제는 1907년 성곽처리위원회를 구성해 동대문 북쪽 성곽과 남대문 남쪽 성곽을 뜯어냈다. 성곽의 철거는 서울의 공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곧게 뻗은 포장도로와 전차 궤도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홍보됐다. 일제는 성곽 철거를 통해 ‘낡은 도시구조’와 ‘왕조의 잔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역사가 살아 있는 구시가지의 파괴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전쟁과 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서울은 600년 된 전통 도시의 향기를 잃었다. joo@seoul.co.kr
  • 이렇게 힘들었는데…강제북송 된 10대 소녀의 손

    이렇게 힘들었는데…강제북송 된 10대 소녀의 손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이 중국 거처에서 지낼 당시의 모습들을 박선영 전 의원이 4일 공개했다. 북송된 탈북 청소년 가운데 장국화(17) 양이 지난해 초 중국 거처에 도착했을 당시 거친 손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의 이 사진은 탈북 청소년들을 중국에서 라오스까지 안내했던 주 선교사가 촬영한 것이라고 박 전 의원이 설명했다. 박선영 전의원 제공 사진
  • 라오스 “한인 선교사가 인신매매”…탈북단체 “손바닥으로 하늘 가려”

    라오스 “한인 선교사가 인신매매”…탈북단체 “손바닥으로 하늘 가려”

    라오스 정부가 탈북자 9명 추방 이유 등과 관련, “한국인 선교사가 자행한 인신매매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탈북지원단체 등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태”라고 라오스 정부와 북한을 강력히 비난했다. 1일(현지시간)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라오스 외교부는 RFA에 공식 입장을 담은 이메일을 보내 “국경 지역에서 체포된 11명 가운데 9명은 14~18세의 북한 국적자이고 2명은 한국 국적자로 (탈북 청소년에 대한) 인신매매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J선교사 등이 북한 청소년들을 인신매매했다는 뜻이다. 라오스 외교부는 “이에 따라 북한 국적자인 탈북자 9명을 지난달 27일 북한대사관에, 한국 국적자 2명을 한국대사관에 각각 인도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박선영 전 의원은 2일 “이번에 북송된 아이들의 상당수가 중국에서 노동과 성적 착취를 당하는 비참한 생활을 했고 J선교사가 인신매매됐던 아이들을 오히려 구조한 것”이라며 “라오스와 북한이 인신매매 주장을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수잰 숄티 미국 북한자유연합 대표도 “15~23세인 탈북자들의 나이를 라오스 측이 14~18세로 적은 건 이들이 한국행을 원한다는 등의 결정을 할 수 없는 미성년자로 부각하려는 술책”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라오스 정부의 이 같은 행태에 비춰 중국-라오스-한국으로 이어지는 탈북자들의 주요 탈출 경로, 일명 ‘라오스 루트’가 상당 기간 차단될 것으로 우려된다는 점이다. 라오스 정부가 공개적으로 자국에서 적발된 탈북자 사건을 인신매매로 규정한 건 북한의 입장과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태도로 풀이된다. 탈북지원단체들은 라오스 정부가 앞으로도 미성년 탈북자나 탈북 여성·노인 등이 적발될 경우 이 같은 인신매매 논리를 적용해 북한대사관에 인계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편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외교부는 이달 중순 동남아 지역의 한 공관에서 재외공관 탈북자 담당관 회의를 열어 라오스 사태 재발 방지 대책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탈북자 담당관 회의는 매년 1~2차례 탈북 루트에 있는 동아시아 지역 공관 담당자들이 탈북자 관련 정보 교환 및 업무 협의를 하고 보호·관리 개선 방안 등을 논의하는 회의다. 정부는 라오스의 탈북자 추방 조치 및 북한의 개입을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판단해 분석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탈북자 체포조’에 대한 정보와 이들의 활동 반경이 확대됐는지 등을 점검하고 외교부뿐 아니라 관련 부처와의 범정부적 협력 방안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외교부·WSJ “우리가 맞다” 진실공방

    ‘꽃제비’ 출신 탈북자 9명을 강제 북송한 사건의 파장으로 한·라오스 관계에 난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31일 라오스 외교부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한국 정부와 상반된 라오스 측의 주장을 보도하면서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라오스 외교부 측과의 인터뷰를 통해 탈북자들이 한국행을 요청하지 않았고,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이 라오스 정부에 공식 면담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전면 반박했다. 외교부 측은 탈북 고아 9명이 라오스 국경지역에서 이동 중 적발된 지난 10일 한국인 안내인 J 선교사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두 시간 뒤 라오스 주재 한국대사관이 그 지역의 공안국을 직접 접촉했다고 설명했다. 외교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라오스 공안국 당국자들은 우리 측에 “중앙정부를 믿어 달라.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라오스 대사관은 라오스 이민국, 해당 지역 보안 담당 직원 등에게 협조 공한을 전달한 뒤 다음 날부터 라오스 외교부 관리들을 접촉했다. 대사관 측은 지난 27일 오전 9시 30분 라오스 외교부의 차관급 인사를 면담했을 때만 해도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지만 라오스 정부가 돌연 태도를 바꿔 오후 2시 45분발 비행기로 이들을 추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라오스가 4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입장을 바꾼 배경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라오스 측 주장과 달리 지난 17일 탈북 고아들을 안내한 J 선교사가 우리 대사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들이 모두 한국행을 원한다고 했고, 이에 대사관 측은 “22일쯤 라오스 공안국이 신병을 한국 측에 인도해 줄 테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외교부는 관련 통화 기록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박선영 전 의원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J 선교사의 어머니가 주라오스 대사관의 영사에게 보낸 문자 내용 등을 공개하며 “(J 선교사의 어머니가) 수도 없이 문자를 해도 답이 없었고, 전화를 해도 안 받았다”고 반박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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