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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낙원의 저편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낙원의 저편

    1882년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전까지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부르주아의 삶을 누렸다. 그림을 수집하고, 틈틈이 배운 솜씨로 인상주의 전시회에 작품을 내기도 했다. 일자리를 잃자 그는 전업화가가 되기로 했다. 고갱은 재능이 뛰어났다. 몇 년 만에 아방가르드 그룹 내에서 명성을 얻고 추종자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문명사회에 염증을 느끼던 고갱은 타히티에서 탈출구를 발견했다. 1891년 4월 프랑스를 떠나 두 달 넘게 항해한 끝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도착했다. 타히티는 그가 기대했던 낙원이 아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땐 폴리네시아인들이 서구 세계와 접촉한 지도 한 세기 이상이 흐른 뒤였다. 고갱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씁쓸히 실토한다. “선교 사업으로 이미 수많은 종교적 위선이 뿌리를 내렸고, 시는 사라져 버렸다오. 모든 종족들을 덮친 천연두는 말할 것도 없고.” 이 그림에는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선명한 원색들이 화면 가득하지만 어쩐지 서글프다. 두 여인은 매우 가까이 있지만,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객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꽃무늬 천 파레오를 두른 왼쪽 여인은 다리를 앞으로 뻗고, 굵고 튼튼한 팔로 바닥을 짚고 있다. 눈을 내리깐 옆얼굴은 표정을 알 수 없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오른쪽 여인은 책상다리를 한 채 바구니를 짜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시선은 관객의 어깨를 스쳐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두 여인 뒤로 검은 바다, 흰 선으로 표시된 파도, 푸른 개펄, 백사장이 보인다. 세상과 고립된 것 같은 이 장면에도 역사적 배경은 존재한다. 오른쪽 여성이 입은 헐렁한 원피스는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이다. 1819년 영국 선교사들은 타히티 왕 포마레 2세를 설득해 열아홉 가지 법령을 반포하게 했다. 그중에는 나체를 금하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두 여인이 입은 옷은 인도나 유럽에서 들여온 싸구려 면직물일 것이다. 고갱의 그림은 서구의 식민지 침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는 파리의 고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풍경을 그렸을 뿐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낙원. 미술평론가
  • 평양에서 연락 끊긴 호주 청년 시글리, 우리말 능숙한 연구자 겸 사업가

    평양에서 연락 끊긴 호주 청년 시글리, 우리말 능숙한 연구자 겸 사업가

    북한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호주인 알렉 시글리(29)는 어떤 이유에서 갑자기 연락이 끊긴 것일까? 그의 가족들은 지난 25일 아침(호주시간) 이후 가족들, 친구들과 디지털 접촉이 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일은 그가 북한에 거주한 몇년 동안 없었던 일이라고 밝혔다. 가족들은 북한을 여행하다 17개월 동안 구금됐다가 귀국한 뒤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고 있다고 영국 BBC가 27일 전했다. 가족들은 그가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됐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으며 호주 정부 관리들이 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족들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아주 심각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호주 서부 퍼스 출신인 그는 호주국립대에서 아시아학을 전공했고 교환학생 신분으로 서울에서도 1년 동안 생활했다. 지난해에는 평양에서 일본 태생의 여성과 결혼했다. 부친 게리는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UWA)에서 아시아학을 연구하는 중국 전문가며, 어머니는 중국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조선문학으로 석사 과정 수학 중이었으며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방송은 전했다. 그는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는 틈틈이 서구 관광객들을 모집하는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 북한을 찾은 것은 2012년이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북한을 찾았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지난 3월 그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를 북한에 사는 유일한 호주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중국에서 공부할 때 몇몇 북한인을 만난 뒤 흥미를 느껴 북한행을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학생 비자로 장기 거주 자격을 얻어 거의 전례가 없는 평양 접근권을 갖고 있다”며 “난 누구의 에스코트도 없이 자유롭게 이 도시를 방황할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스카이 뉴스 인터뷰를 통해 이토록 압제적인 정권 아래에서 사는 서구인들은 웜비어 같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살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북한에서 불법 월경, 나라에 적대적인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구금됐다. 2014년 호주인 존 쇼트는 관광지에 기독교 팸플릿을 놓아두고 떠났다는 이유로 구금돼 추방됐다. 종교 활동이 금지된 북한에서는 비슷한 이유로 선교사들이 여럿 체포된 적이 있다.호주는 많은 서구 국가와 마찬가지로 북한과 국교가 수립돼 있지 않아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아주 제한적으로 북한 당국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마침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28일 막을 올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차 일본 오사카에 머무르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120년 이어온 ‘청정절융’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 열 것”

    “120년 이어온 ‘청정절융’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 열 것”

    영남 최초 서양식 의료기관 제중원 전신병상 1041개 동산병원 성서캠퍼스 이전 “제2의 창립 각오 학생·교직원 뜻 모을 것”“계명대의 소중한 전통은 대학의 가치를 시대에 맞게 높이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올해 창립 120주년을 맞은 계명대 신일희 총장은 16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창립 120주년을 또 다른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신 총장은 계명정신인 ‘청정절융’을 강조했다. 청결·정직·절약·융합을 뜻하는 청정절융은 계명대학 창립의 근간이자 발전의 바탕이다. 1899년 대구에 설립된 영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계명대의 전신이었다. 제중원은 침·뜸 대신 현대적인 약으로 시술하는 현대식 병원이었다. 신 총장은 “계명대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지만 자체적인 역량을 통해 독립적으로 성장해 왔다”면서 “그런 모습에 외부 독지가들의 자발적인 재정적 도움도 이어졌다”고 했다. 이어 신 총장은 “계명정신에다 개척정신, 학문의 탁월성 추구, 봉사정신 등을 더해 학사운영을 했으며 대학 구성원들 모두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면서 “계명정신을 실현할 중장기 발전계획인 계명비전 2020도 세웠다”고 밝혔다. 이러한 노력으로 계명대는 전국 10위권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초창기 125명의 학생에게 근대의학과 인문학을 가르쳤으나 현재 15개 단과대학에 재학생만도 2만 4000여명에 이른다. 또 62개국 344개 대학, 45개 기관과 교류하는 등 글로벌 대학을 표방하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도 1000명이 넘는다. 취업·창업도 적극적이다. 1998년 중소기업청 대구경북 1호 창업보육센터로 지정된 후 최근까지 1200여개 창업 기업을 배출했다. 신 총장은 “대학들은 인구감소로 인한 수험생 감소, 등록금 동결에 따른 재정위기 등 다양한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위기 상황을 대학 발전을 위한 기회로 만들기 위해 계명정신을 바탕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계명대는 창립 12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계명대 행소박물관에서 다음달까지 ‘We are the Champion- 계명대 120년의 발자취’ 특별전이 진행 중이다. 제중원 상용 수술도구와 대학 설립 당시의 고문서, 사진 등 계명대 역사를 엿볼 수 있는 200여점이 전시돼 있다. 계명대 교수, 동문, 재학생 300여명이 출연하는 초대형 오페라 ‘나부코’ 공연도 지난달 했고 국제패션쇼도 개최했다. 계명대 동산병원은 지난 4월 달서구 계명대 성서캠퍼스로 이전했다. 4만 228㎡의 부지에 지하 5층, 지상 20층, 연면적 17만 9218㎡, 병상 1041개의 영남 최대 최첨단 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신 총장은 “학생과 교직원 모두 제2의 창립을 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면서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숭고한 사명이 빛을 내도록 구성원들의 의지와 노력을 모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켜켜이 쌓인 시간의 길, 골목골목 낭만을 거닐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길, 골목골목 낭만을 거닐다

    부침의 세월 겪은 전주성 풍남문 위용 형형색색 이국적 향기 품은 전동성당 비밀처럼 뻗어 있는 경기전 대나무숲 한복 맵시 부린 관광객 노니는 태조로 오독대 누각 아래 시원한 휴식은 덤전북 전주는 한 해 1100만명 넘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국내 최고의 여행지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 중에서 안 가본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도시지만, 방문객은 해마다 늘고 있다. 보고 또 봐도 좋은 우리 옛것의 전통 위에 전주 토박이 문화가 세월따라 하나둘 쌓이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새것이 어우러지면서 지금의 전주를 꽃피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구도심의 한옥마을부터 새 옷을 입은 팔복예술공장까지 전주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시간을 천천히 걸었다. 전주 여행의 시작점은 조선시대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보물 제308호)이다. 이곳에서 오목대까지 이어지는 550m가량의 큰길을 중심으로 한옥마을이 뻗어 있다. 전주는 전라도 전체뿐 아니라 제주도까지 관장하던 전라감영 소재지였다.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한 옛 전주를 둘러싼 성곽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출입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 옛 위상을 알려주듯 우뚝 서 있다. 풍남은 풍패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으로 조선왕조도 자신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곳에 빗대 풍패지향으로 부르기도 했다. 국내의 많은 문화재들이 그렇듯 풍남문도 세월의 부침을 겪었다.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모두 파괴됐다가 영조 때 다시 지어졌다. 1767년 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재건했고 풍남문이라는 이름이 그때 붙었다. 세월이 지나며 다시 크게 훼손됐다가 40년 전 보수공사를 통해 제 모습을 찾았다. 서울의 숭례문처럼 주변을 에워싼 도로 가운데 섬처럼 덩그러니 남았지만 위용을 잃지 않은 모습에서 옛 전주성의 풍채를 상상해 본다.풍남문을 지나 한옥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전주한옥마을만의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전동성당이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10년 뒤 신유박해 때도 전라도 천주교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숱하게 처형됐다. 윤지충·권상연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 신부가 이곳에 교회 터를 마련했고 공사를 시작한 지 23년 만인 1931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완공됐다. 둥근 지붕 아래 오랜 세월이 묻은 회색 벽돌과 붉은 벽돌이 조화를 이루면서 한옥마을에서 가장 이색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소박한 내부에는 화려하기보단 단아한 느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퍼진다.미사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전동성당은 금요일 밤이면 색다른 모습으로 치장한다. 지난달 10일부터 시작한 미디어파사드 공연 ‘빛의 성당’이 오는 21일까지 7주간 열리고 있다. 천지창조, 순교자들의 숭고함, 평화의 메시지를 주제로 한 신비로운 빛의 마술이 성당 위에 흩뿌려진다. 전동성당 맞은편 경기전은 한옥마을의 중심 문화재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건물이 경기전이다. 주변으로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 어진 봉안 600주년을 맞아 2010년 지어진 어진박물관 등이 함께 있다. 경기전 한편의 작은 대나무숲은 놓치지 말아야 할 포토존이다. 잔바람에도 귓속말을 속삭이듯 바스스 떠는 대나무가 비밀처럼 난 문 위로 머리를 맞대고 뻗어 있다. 경기전을 빠져나와 한복을 차려 입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태조로를 따라 걷는다. 갖가지 길거리 음식이 즐비한 골목마다 한복을 차려 입은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서양 왕실의 드레스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치마와 그 위에 금실, 레이스 등 화려한 장식을 덧댄 한복이 가장 많이 보인다.진짜 옛 멋을 잃고 상업화된 거리, 우리의 전통 한복과는 거리가 먼 국적 불명의 옷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전주한옥마을에서의 한때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는 그것 그대로 소중한 추억이 된다. 1920년대 모던걸, 모던보이 스타일의 의상이나 1970년대 교복도 인기다. 어우동 차림으로 멋을 낸 중년의 친구들이 매순간을 사진에 담고, 어린 남학생들이 한복 치마를 입고 살포시 화장까지 한 얼굴로 유쾌하게 거리를 활보한다. 가장 한국적인 공간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전통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기보다 일상을 잠시 벗어나 저마다의 소소한 축제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색을 입힌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섬세한 감수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볼 수 있는 최명희문학관을 둘러본다. 전통한지원과 부채박물관에서 전통문화를 살펴보고 작은 갤러리들에 하나씩 발걸음을 멈춘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오목대 가는 길에 이른다. 오독대는 평지인 한옥마을 동쪽 나지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누각이다. 나무 데크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한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마주한다. 오목대까지 오르면 더 멋진 경치가 나올 것 같지만 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전망이 없는 것이 아쉽다. 다만 신발을 벗고 누각 위에 앉아 그늘 아래 시원한 바람을 마주할 수 있어 좋다. 글 사진 전주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오늘의 눈] 함께 돕고 슬퍼한 교민·헝가리인… 작은 영웅들 기억할게요/김지예 사회부 기자

    [오늘의 눈] 함께 돕고 슬퍼한 교민·헝가리인… 작은 영웅들 기억할게요/김지예 사회부 기자

    동유럽 내륙국가 헝가리는 ‘먼 나라’였다. 서울과 부다페스트는 직선거리로만 8164㎞ 떨어져 있고 직항편이 없어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겨우 도착한다. 동유럽 공산권 붕괴 직후인 1989년 수교해 올해 30주년이 됐지만 양국 사이에는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었다. 그저 50여개의 유럽국 중 하나 정도였다.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우리 국민 33명과 헝가리 승무원 2명이 탄 유람선 허블레아니호가 침몰했을 때 눈앞이 더 캄캄했던 건 심리적·물리적 거리 탓이 컸다. 한시라도 빨리 실종자를 구조해야 하는데, 과연 그 먼 나라에서 순조롭게 진행될까 하는 걱정이었다. ‘다뉴브강의 비극’은 지난 11일 허블레아니호가 인양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아직 실종자 3명을 찾지 못해 비상 상황이 끝나지 않았지만 수습의 한고비를 넘겼다. 현장 관계자들은 “내 일처럼 도운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우선 교민 사회가 움직였다. 헝가리의 우리 교민은 1400여명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봉사활동을 자원하고 필요한 물품을 기꺼이 내놓았다. 헝가리로 급파된 구조대원들을 위해 작업복 28벌 등 의류를 지원하고 간식과 한국 음식을 제공하며 마음을 보탰다. 2주 동안 대원들을 도운 선교사 박은영(49·여)씨는 “사고가 나던 날 구급차 소리를 들었고 소식을 알게 된 뒤 잔심부름이라도 거들자는 생각에 딸과 함께 나갔다”고 했다. 그는 “대원들은 몸도 지쳤지만 실종자를 찾아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이 컸다”며 “그들에게 물이라도 챙겨 주고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게 우리 역할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합동 작전을 펼친 양국 수색대원들의 언어 장벽은 유학생, 교민 2세 등으로 구성된 통역 봉사단 덕에 뛰어넘었다. 20여명의 통역 봉사단원들은 사고 생존자와 실종자 가족들의 현지 소통도 도왔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한인 치과의사는 실종자 가족 심리 치료 등 의료 통역을 지원했다. 헝가리 시민들은 이번 사고를 자기 일처럼 슬퍼하며 애도의 마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사고 현장 인근 머르기트 다리에는 추모의 꽃과 촛불이 매일 쌓였다. 수색 현장을 내려다보던 한 헝가리 할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취재진의 팔을 잡아끌며 손짓으로 사고 모습을 표현하곤 자기 가슴을 쓸어내려 보였다. 햇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는 한국 기자들에게 생수병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추모 열기는 지난 3일 머르기트 다리 위에서 외국인 수백명이 눈물의 아리랑을 부르며 절정을 이뤘다. 이 행사를 주도한 토마시 치스마지아는 “사고 당사자들의 얼굴도, 역사도 모르지만 헝가리에서 사고를 당한 것에 가슴 아파 한다는 것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양 이후 사고 현장은 차차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남은 실종자를 찾을 때까지 돕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헝가리 정부도 끝까지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 헝가리 유람선 참사에 손을 더한 모든 이들이 영웅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jiye@seoul.co.kr
  • [임지연의 내가갔다, 하와이] 하와이 섬의 숨겨진 비밀, ‘하와이 왕국’의 눈물 ②

    [임지연의 내가갔다, 하와이] 하와이 섬의 숨겨진 비밀, ‘하와이 왕국’의 눈물 ②

    매년 6월 11일, 하와이 섬 중심의 호놀룰루 시 일대에서는 과거 하와이 원주민 왕국의 초대 대왕이었던 ‘카메하메하 데이(King Kamehameha day)’ 기념식이 성대하게 개최된다. 하와이 섬 문화에 대해서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본 이들이라도, 과거 이곳에 ‘하와이 왕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리고 오직 ‘여행지’로의 하와이에만 관심있게 지켜보는 많은 이들에게 보란 듯, 하와이에 존재했던 유일한 하와이 왕국의 초대 대왕을 기념하는 이날 하루만큼은 ‘킹 스트리트(King Street, 왕의 동상이 세워진 거리라는 점에서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거리명 역시 킹스트리트다.)’에 우뚝 선 킹 하메하메하 동상 위로 색색의 레이(lei) 장식이 등장하며 이 일대에서는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의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하와이 일부 관광지역을 중심으로 365일 쉬지 않고 실시되는 다채로운 축제에 현지 관광업 종사 업체들과 해외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것과 비견해, 킹 하메하메하 데이 행사에는 현지 원주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줄을 잇는 다는 것이 눈에 띄는 특징이다. 그런데 이날 하루 들뜬 축제 열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축제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원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 하와이 왕국을 상징했던 깃발을 한 손에 든 이들의 수가 제법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의 시선 속 이들의 모습은 비록 미국의 50번 째 주인 하와이에서 출생, 미국 시민으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섬의 원래 주인인 ‘원주민’ 출신이라는 의식을 가진 이들로 비춰졌다. 이들에게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까. 하와이 원주민 가운데 필자와 가깝게 지내고 있는 친구 중 한 사람인 A씨는 올해로 31세의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에서 인문학 박사 학위 과정 중인 학생이다. 학생이면서 동시에 현지에서는 시민 운동가로 꾸준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A씨가 꾸는 꿈은 ‘하와이 자치정부 수립’이다. ‘하와이 자치정부설(說)’은 외국에는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매우 생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하와이에는 그와 같은 하와이 자치 정부 수립에 대한 꿈을 가진 이들의 수가 제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과거 하와이대 명예교수인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그의 이름 역시 하와이 전통 언어식으로 지어졌다) 박사는 ‘하와이’에 대해서 ‘휴양 천국’이 아닌 ‘미국의 식민지’라고 평가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A씨와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 박사 등을 포함한 하와이 자치정부 수립에 대한 꿈을 가진 이들은 주로 현지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이들로,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그들 스스로 하와이 섬의 주인 의식을 가진 소위 이 땅에 대한 ‘역사적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칭할 때 미국인이라는 테두리 대신 ‘하와이 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검은 피부와 제법 큰 덩치의 외모를 가진 그들을 일컬어 미국 사람이라고 에둘러 부를 때마다 그는 ‘나는 하와이 원주민이며,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말과 문자,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한다.이 같은 의식에 대해 일각에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파라다이스인 하와이에서 무슨 ‘독립운동’이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세계인들이 상상하는 아름다운 지상낙원 하와이와 ‘독립운동’이라는 단어가 가진 ‘투쟁적 이미지’는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하와이 독립국’에 대한 의식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그 역사가 꽤 깊다. 원주민들이 하와이 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소망을 거론할 때마다 가장 먼저 불거지는 역사적 사건은 지난 1778년 무렵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섬에 처음으로 상륙한 직후 벌어진 현지 인구의 급감 사건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일명 ‘하올레(haole)’라는 원주민의 언어로 지칭되는 대륙에서 건너온 백인은 그들 자신들에게는 면역력이 있으나, 현지 주민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을 섬에 가져오게 되는데 그로 인해 무려 100만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구수가 4만 명으로 급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원주민 몰살 사건이다. 그런데 당시 백인들은 원주민 몰살 사건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명목 하에 하와이 왕국의 왕을 압박,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케 한 뒤 백인들을 위주로 한 이들이 스스로 농장주를 칭하고 원주민들을 농장의 노예로 전락시킨 사건이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1875년 무렵에는 백인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는 헌법을 추진, 이로 인해 백인들은 섬에서의 정치적인 권력을 원주민들로부터 찬탈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 당시 백인들은 자신들이 선거권을 갖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원주민들이 가졌던 선거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소득이 있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안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노예 수준에 머물렀던 원주민들은 이로써 섬에서의 완전한 정치력을 상실하게 됐다. 더욱이 ‘하올레’로 불리던 당시의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막강한 미군 해병을 동원, 왕조를 전복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뜻에 맞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현지 원주민들은 당시 사건에 대해 미국 해병대가 궁전 앞에 진을 쳤으며, 이름 뿐이었던 원주민 출신의 여왕은 1893년 무렵 미국에 정치력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이양했다고 기억해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다. 하지만 미국은 이날에 대해 ‘평화적인 이양, 합병’이라고 기록해오고 있다. 이는 현지 원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 오는 당시 기억과는 반대되는 기록이다. 이 뿐 만일까.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원주민들에게 ‘하와이 원주민은 식인 습성을 가진 난폭한 인종이자 영아 살해를 즐겼다’고 가르쳤다. 또, ‘독재 왕권은 하와이 농토를 모두 장악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부렸으며, 이를 해방시킨 것은 미국’이라고 교육해왔다고 현지 원주민들은 기억한다. 특히 미국 정부에 의해 주도된 ‘난폭적인’ 내용의 역사 교육은 하와이 국공립 교사과에 그대로 실렸고, 많은 수의 하와이 시민권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환경에 놓여졌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문서상으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원주민들이 기억한 ‘진짜’ 역사적 사실들은 살아있는 하와이 원주민 각 가정에서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 전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하와이 원주민의 수는 전체 인구의 20~25%에 불과하다. 이들은 지속적인 실업률과 낮은 교육 수준(대부분의 현지 거주 학사 학위 수여 이상자는 외지에서 온 백인, 동양인이다, 더욱이 이들은 학사, 석사, 박사 등의 학위 과정 이수 이후에는 섬을 떠나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저임금으로 고통 받는 ‘2등 국민’으로 전락한 셈이다. 또, 하와이를 떠올리면 항상 함께 기억되는 ‘훌라춤’은 본래 하와이 원주민의 전통 종교 의식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오직 세계인의 구경거리가 됐다. 여기에 더해, 하와이 주의 8개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의 상당수는 미군의 핵 잠수함이 드나드는 병영 기지로 전락했다. 때문에 실제로 하와이 시정부가 소재한 호놀룰루 도시는 가장 큰 섬이 아닌 그 외의 ‘나머지’ 섬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탓이다. 거주민들 역시 대부분 호놀룰루 시 일대에 밀집해 거주한다. 천해의 자연을 품은 대부분의 섬이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다는 지리적, 군사적 의미로 미군의 요충 기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와이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이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호놀룰루 시를 여행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하와이국기를 창문 밖으로 자랑스레 걸어 놓은 가정집들을 발견할 수 있다. 폭력적인 투쟁을 할 수 없는 미국 정부에 완전히 통제된 ‘하와이 군도’에서 원주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평화적인 ‘독립 의지 표명’ 방식이 바로 자신들의 전통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호놀룰루 시에 소재한 시청과 박물관 전시관, 경찰서, 초중고교 등 모든 관공서에는 미국의 성조기와 함께 하와이를 상징하는 전통 국기가 함께 게양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하와이 섬에 도착한 외국인 여행자들은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그 곁을 에둘러 싼 와이키키 해변이라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거기에 더해 ‘알라모아나’로 대표되는 거대한 쇼핑센터와 환상적인 여행지의 분위기 등에 취해 현지 원주민들의 이 같은 ‘독립’에 대한 염원을 눈치 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태평양 한 가운데 외떨어져 있는 하와이 섬의 진짜 주인인 원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면, 한 때 종교적인 의식을 위해 추었다던 그들의 ‘훌라춤’이 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호놀룰루=임지연 통신원 808ddongcho@gmail.com   
  • [부고]

    ●이옥희(선교사) 홍택(서울 강남구 선거관리위원회) 원택(전북도 정무부지사)씨 부친상 이은주(전북도 세외수입팀장)씨 시부상 6일 전주 효자장례타운, 발인 8일 오전 (063)228-4441 ●유철호(전 진안군 안천면장)씨 모친상 6일 진안군의료원 장례식장, 발인 8일 오전 9시 (063)430-7070 ●최병주(청주 광선표구사 대표)씨 모친상 6일 대전성모병원, 발인 8일 오전 9시 (042)220-9972 ●안호원(한국열린사이버대 실용영어학과 특임교수)호성(천일엔지니어링 사장)씨 모친상 삼성 서울병원, 발인 8일 오전 7시 (02)3410-6917 ●이상희(주식회사 한주)상록(대성건설)씨 모친상 이수천(울산신문 사회2부 차장)씨 장모상 6일 경주 동산병원, 발인 8일 오전 7시 010-3598-8222 ●김진(전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대표이사)씨 모친상 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8일 오전 9시 20분 (02)3010-2000 ●이진동(전 서서울정보산업고 교사) 유동(울산테크노파크 정책기획단장)씨 모친상 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8일 오전 7시 (02)3010-2232
  • 사라진 보물 지도·숭례문 목판, 식당·비닐하우스 창고서 찾았다

    사라진 보물 지도·숭례문 목판, 식당·비닐하우스 창고서 찾았다

    서울경찰청·문화재청, 장물업자 2명 검거 도난당한 ‘조선 最古 세계지도’ 등 회수 목판, 세종 큰형 양녕대군 친필로 알려져 국내에서 제작된 서구식 세계지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만국전도’(萬國全圖)가 도난된 지 20여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함께 1993~1994년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 함양박씨 문중에서 도난당한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와 1800년대 간행된 함양박씨 문중 소유의 고서적 116책을 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숨긴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A(50)씨를 검거하고 해당 유물을 지난해 회수했다고 29일 밝혔다. 문화재 범죄는 사실상 공소시효가 없다는 점을 재확인시킨 성과다. 문화재보호법 관련 범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지만 지난 2007년 장물인 줄 모르고 구입해도 처벌된다는 이른바 ‘선의취득 배제 조항’이 신설되면서 공소시효가 연장됐다. 경찰은 또 2008년 전남 담양 몽한각(夢漢閣)에서 사라진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2점과 ‘후적벽부(後赤壁賦) 목판’ 4점 등 총 6점을 2013년께 불법 취득해 자신의 비닐하우스 창고에 숨긴 B(70)씨도 같은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모르는 사람에게, B씨는 사망한 사람에게 각각 도난 문화재를 사들였으며 장물인 줄 몰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A씨와 B씨는 각각 고미술품과 골동품 매매업을 오랫동안 해 온 까닭에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높다”면서 “장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추후 경매업자를 통해 처분하려고 숨겨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가로 133㎝, 세로 71.5㎝ 크기의 ‘만국전도’는 보물 제1008호로 지정된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7종 46점) 중 일부다. 조선 중기 문신인 박정설(1612~?)이 1661년에 채색·필사한 세계 지도로,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됐다고 알려졌다.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1582~1649)가 1623년 편찬한 한문판 휴대용 세계지리서인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확대해 필사했다. 함양박씨 문중 고서적은 18세기 퇴계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로 평가받는 소산 이광정 문집과 의병장으로 활약한 나암 박주대가 쓴 친필본으로 구성돼 있다.이번에 회수한 숭례문 목판은 조선 태종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친필이 담긴 목판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보 제1호 숭례문 현판의 큰 글씨를 판각한 현존하는 유일한 목판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국내 최고 서구식 세계지도 ‘만국전도’ 등 도난 문화재 불법유통 업자들 덜미

    국내 최고 서구식 세계지도 ‘만국전도’ 등 도난 문화재 불법유통 업자들 덜미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서구식 세계지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만국전도’와 양녕대군의 친필 목판 등 도난당해 행방이 묘연했던 국가지정문화재 123점을 입수해 처분하려던 업자들이 덜미를 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골동품 업자이니 A(50)씨와 B(70)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29일 밝혔다. A씨는 1994년쯤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 함양 박씨 문중에서 도난당했던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萬國全圖)와 1800년대 간행된 고서적 116책을 지난해 8월 입수한 뒤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 벽지 안쪽과 주거지에 숨긴 혐의를 받고 있다. ‘만국전도’는 조선 중기 문신인 박정설(1612~?)이 외국인 선교사가 편찬한 한문판 휴대용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를 1661년 확대해 필사·채색한 서양식 세계지도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만국전도는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제작 서구식 세계지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지도에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아프리카 등 주요 대륙과 바다의 모습이 오늘날 세계지도와 흡사하게 묘사돼 있다. 만국전도와 함께 도난된 고서적은 을미사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나암 박주대(1836~1912) 등 함양 박씨 가문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B씨는 2008년 10월 전남 담양의 양녕대군 후손 문중에서 도난당한 ‘숭례문’ 목판 2점과 ‘후적벽부’ 4점을 2013년쯤 취득한 뒤 자신의 비닐하우스에 보관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숭례문 목판 2점은 조선 제3대 왕 태종(1367~1422)의 장자 양녕대군(1394~1462)의 친필이 담긴 목판으로 전해지며, 국보 제1호 숭례문의 현판에 쓰인 ‘崇禮門’을 새긴 것이다. 후적벽부 목판 4점은 양녕대군이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시 ‘후적벽부’를 초서체(흘림체)로 쓴 것을 19세기 후대 사람들이 목판에 기록한 것으로, 목판 말미에 제작 계기와 시기 등이 함께 새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A씨와 B씨가 도난 문화재를 유통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공조해 수사에 들어갔다.경찰 조사에서 A씨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B씨는 2015년 사망한 C씨한테서 각각 1400만원, 500만원씩을 주고 도난 문화재를 사들였으며, 장물인 줄 몰랐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골동품 매매업을 해왔고, 도난 문화재 정보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공시되기 때문에 장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처분하려고 숨겨 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경찰은 두 사람을 상대로 문화재 취득 경위와 여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교구보다 사람이 먼저’ 실천… 안동 유림들의 마음 연 두봉 주교

    첫 안동생활 버거워 교황청에 “못하겠다” 정직한 유림들 신자 되면 ‘매우 좋은 신자’ 이달 대통령 표창 ‘올해의 이민자상’ 받아 안동교구를 말할 때 초대 교구장 두봉(90·杜峰·본명 르네 뒤퐁) 주교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나 ‘기쁘고 떳떳하게’를 외치고 실천하는 프랑스 중부 오를레앙 출신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이젠 누가 봐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그는 가장 가난한 교구인 안동교구의 산증인이다. 22년간 초대 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도 처음엔 유림의 본향인 안동에서의 생활이 몹시도 버거웠단다.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사목을 하며 내 삶을 바치고 싶었다”지만 오죽하면 교황청에 ‘못하겠다’는 의견을 전했을까. 하지만 유림들과의 거듭된 만남 끝에 그들의 본 모습을 알게 된 뒤론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웃종교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대다수 유림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양심적으로 정직하지요.” 심지어는 “유교 전통에서 바르고 잘 사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가 되면 굉장히 좋은 신자가 된다”고까지 했다. 그 이유는 “바탕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안동교구에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마다 유림들이 솔선해 도움을 보탰고 꽉 막힌 문제도 풀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두봉 주교가 목숨처럼 여기는 사목의 으뜸 방향은 교구가 아닌, 사람이다. 농민의 인권에 무엇보다 치중했고, 특히 한국 사제가 교구를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네 차례나 교황청에 안동교구장으로 한국 주교를 임명할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낸 일화가 유명하다. 그에게 신앙과 사목은 ‘교회 따로, 사회 따로’가 아니다. 교구청에서 만난 기자에게도 “교회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 안동 문화회관을 세워 일반 모두의 열린 공간으로 내놓은 것을 비롯해 국내 최초의 전문대학인 상지대를 안동에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2년 프랑스 나폴레옹 훈장을 받았는가 하면 이달에는 국내에서 대통령 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도 받았다. ‘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 두봉 주교 자신은 “귀족이 아니라서 쓸 수 없다”며 주교라면 누구나 으레 정하는 사목표어를 한사코 사양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구에서 이 말은 모든 신행과 사목의 지침인 사목표어로 굳어져 있다. 신부로 15년, 주교로 21년 한국에서 40여년을 선교한 끝에 일선에서 물러나 지금은 의성 봉양문화마을의 작은 집에 머물고 있지만 지금도 한 달에 절반은 피정에, 강의에 아주 바쁘다. 안동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숨(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엘리 펴냄) 네 번의 휴고상, 네 번의 네뷸러상, 네 번의 로커스상을 받은 테드 창의 두 번째 작품집. 그는 단편들을 통해 새로운 기술이 인간 사회에 도래했을 때, 그것이 지닌 가능성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맞선다. 520쪽. 1만 6500원.에밀 타케의 선물(정홍규 지음, 다빈치 펴냄) 환경운동가인 정홍규 신부가 120여년 전 이 땅에 왔던 프랑스인 선교사 에밀 타케 신부의 자취를 탐사한 기록. 1898년 조선에 와 55년간 선교 활동을 한 타케 신부는 제주에 머물렀던 13년 동안 1만점 이상의 식물 표본을 채집해 유럽과 미국, 일본의 식물학자에게 보냈다. 272쪽. 2만원.왕좌의 게임의 과학(헬렌 킨 지음, 이현정 옮김, 에이도스 펴냄) 코미디와 과학의 융합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 낸 여성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쓴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과학 이야기. 드라마의 핵심 소재를 생물학, 심리학, 물리학, 수학 등 과학적 시각으로 하나하나 뜯어 본다. 288쪽. 1만 6000원.기념의 미래(최호근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세계 최다의 과거사위원회 보유국이지만 기억에 대한 갈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그 이유를 ‘부실한 기념의 반복’에서 찾는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지속하면 살아 있는 기억을 맞볼 기회를 얻지 못한 젊은 세대가 과거에 대해 무관심해질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464쪽. 2만 1000원.부유한 자본주의 가난한 사회주의(라이너 지텔만 지음, 강영옥 옮김, 봄빛서원 펴냄) 45명의 억만장자를 인터뷰해 그들의 성공 비결을 파헤친 책 ‘웰스 엘리트’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 라이너 지텔만의 저작. 그는 자유 시장경제가 어떻게 인간 삶의 질을 높이고 인류를 발전시켜 왔는지 각 나라의 사례로 이야기한다. 328쪽. 1만 6900원.죽음 1·2(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펴냄)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소설. 개미나 고양이, 천사와 신 등 독특한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는 이번에는 떠돌이 영혼의 시점을 빌렸다. 출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죽은 인기 추리 작가가 저승과 이승에서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을 그렸다. 각 328쪽. 각 1만 4000원.
  • 군사정권서 추방 명령받던 佛신부 “빈국 돕는 우리나라, 한국이 좋다”

    군사정권서 추방 명령받던 佛신부 “빈국 돕는 우리나라, 한국이 좋다”

    “한국전쟁 직후에 외국의 도움을 받던 한국이 이제 다른 나라를 도와주고, 세계인들이 와서 같이 사는 나라가 됐잖아요. 저 헛수고한 거 아니죠. 이제 됐다 싶어요.” 한국에서 보낸 65년을 회상하던 르네 뒤퐁(90) 주교는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지난 20일 법무부가 주최한 ‘12주년 세계인의 날’ 시상식 현장에서 대통령 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을 수상한 뒤퐁 주교를 만났다. 그는 1954년 프랑스에서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농어민·여성 교육과 한센병 환자 의료 지원 등에 힘써 왔다. 능수능란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주교에게는 이제 프랑스 이름보다 한국에서 얻은 ‘두봉’(杜峰)이라는 이름이 친숙하다. 두봉 주교는 “한국인 신부가 ‘뒤퐁’ 발음이 어렵다며 발음이 비슷한 ‘두봉’에 ‘산에서 노래 부르는 두견새’라는 의미를 더해 지어 줬다”고 설명했다. 두봉 주교는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안동교구장을 역임하며 ‘안동의 촛불’, ‘한국 가톨릭의 기둥’으로 불렸다. 그는 “무엇이든지 필요한 곳이 있으면 힘닿는 대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젠 한국이 외국과 외국인을 도와주는 ‘어른’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만큼 외국과 외국인에게 많이 주고, 그들을 포용하는 시각을 가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1979년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으로 박정희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적도 있다. 당시 경북 영양군 농민 오원춘씨가 농협에서 제공한 감자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며 항의한 뒤 보상받은 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부가 오씨를 강제 연행했다. 가톨릭교회가 강하게 항의하자 정부는 두봉 주교가 일을 꾸몄다며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이다. 10·26 사태로 실제 추방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두봉 주교는 “정부와 맞서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외국인 선교사가 국내 정치 문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의 마지막 소망은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두봉 주교는 한국이나 한국인을 말할 때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라고 이야기했다. 안동교구장에서 은퇴한 뒤 경북 의성군 봉양면 문화마을에서 살고 있는 두봉 주교는 “내 고향은 프랑스 오를레앙이 아닌 경북”이라고 웃었다. 그러면서 “비록 외국인 얼굴이고 한국어 발음도 완벽하지 않아서 100퍼센트 한국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스스로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베이징 엑스포, 에덴동산 재연한 바티칸관 최고 인기

    [특파원 생생리포트] 베이징 엑스포, 에덴동산 재연한 바티칸관 최고 인기

    지난달 29일 개막한 베이징 엑스포 세계원예박람회에서 역사상 최초로 엑스포에 참여한 바티칸 교황청의 국가관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바티칸 교황청은 명나라 때부터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나 아직 대만과 정식 수교를 유지하고 있는 유럽 내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교황청은 지난해 9월 중국과 주교 임명에 대한 협약을 맺으면서 관계 회복에 나서고 있으며 이번 베이징 엑스포 참여도 정식으로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한 과정으로 분석된다. 약 200㎡ 규모의 바티칸 국가관은 원예박람회란 주제에 맞게 정원과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에덴동산을 재현한 그림이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피터 벤첼이 그린 그림은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과 200마리의 동물을 담고 있는데 새 한 마리만 일부러 색깔을 칠하지 않았다. 관람객은 디지털 기구를 통해 새의 색깔을 입힐 수 있는데 가장 뛰어난 작품에는 상이 수여될 예정이다. 바티칸 국가관 내부에는 교황도서관의 문서부터 식물 종자, 약용 식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베이징 엑스포에는 남북한을 포함해 모두 110개 국가와 국제 기구가 참여해 162일간 각국 정원의 특색에 대해 국가관을 세워 홍보하게 된다. 바티칸 교황청은 9월에 중국에서 환경에 관한 콘퍼런스를 열어 중국 과학자와 연구진도 참여할 예정이다. 토마슈 트라피 바티칸 국가관 담당 추기경은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 확장 기회를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밟아가기를 희망한다”며 “중국과 교황청 간에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어떤 기회라도 환영하며 우리의 선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이라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트라피 추기경은 “지난해 중국과 교황청 간에 맺은 협약은 시작일뿐으로 정원과 같은 문화를 통해 서로 다른 이념도 교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바티칸 박물관은 중국 내 여러 기관과 문화 교류를 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달에는 베이징의 고궁박물관(자금성)에서 바티칸 박물관의 전시가 이뤄질 예정이라고 베이징시 정부가 지난 3월에 발표한 바 있다. 이 전시는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의 문화유산도 공개할 예정이며 바티칸의 소장품이 모국인 중국에서 전시되는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베이징 엑스포에는 남북한도 각각 국가관을 개설해서 참여 중이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베델 선생은 국가·민족 초월해 폭력 맞선 세계인”

    “베델 선생은 국가·민족 초월해 폭력 맞선 세계인”

    서울신문의 모태 ‘대한매일신보’ 창간 각계 인사·시민 등 100여명 모여 추모 “그의 항일·언론 활동은 3·1운동 밑거름” 본지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시리즈 류지영·오경진·민나리 기자 감사패 받아구한말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110주기 경모(추모) 대회’가 1일 그의 묘역이 있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서 열렸다. 베델선생기념사업회가 마련한 이 행사에는 이병구 보훈처 차장과 장영달 우석대 총장, 닉 메타 주한 영국대사관 부대사 등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시민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행사 대회장을 맡은 장 총장은 “베델의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은 1919년 3·1운동의 소중한 밑거름이 됐고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독립과 인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행동은 지금 봐도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서면으로 보낸 경모사에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평화를 위해 제국주의 폭력에 분연히 저항한 세계인”이라며 “그의 숭고한 뜻에 고개 숙여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고 전했다.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는 메타 부대사를 통해 대독한 추도사에서 “베델은 조용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과 건강을 희생했다”며 “그는 언론 자유의 챔피언이자 한국 독립의 챔피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홍기 서울신문 이사는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의 정신과 지력을 계승하고 있다. 베델의 정신과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취지를 다시금 확인하고 언론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베델은 1872년 영국에서 태어나 16세이던 1888년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으로 건너와 신보와 영자지 KDN을 발행했다. 그는 당시 일본의 노골적인 한국 침략 시도를 목격하며 언론의 자유와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대한매일신보사를 국채보상운동 모금소로 활용하고 항일 비밀단체 신민회(1907~1911)의 본부 역할도 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영국 법정에서 두 차례 재판을 받은 뒤 건강 악화로 37세에 생을 마쳤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이날 행사에서 본지 류지영·오경진·민나리 기자는 베델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지난해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기획 시리즈를 통해 베델의 생애를 널리 알리고 한국 언론학계의 주요 과제였던 베델의 영국 생가(현주소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를 찾아낸 성과를 인정받았다. 영국 내 베델 후손들이 보관하던 유품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왔고, 베델의 미공개 사진 6점을 새로 확인했다.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10년대 미국 작가의 소설 두 편도 발굴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달랑 205원 50전에 낙찰돼 사라진 돈의문…그 애환과 마주하다

    달랑 205원 50전에 낙찰돼 사라진 돈의문…그 애환과 마주하다

    대한민국 근현대 100년의 기억 보관소, 서울미래유산 현장을 찾아가는 ‘2019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가 2일 올해로 네 번째 시즌을 시작한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지난달 27일 제1회 돈의문 안과 밖을 시작으로 오는 12월 21일까지 모두 35회에 걸쳐 매주 말 서울 곳곳을 샅샅이 누빌 예정이다. 올해는 지역별 유형유산 탐방 횟수를 줄이고 문학과 영화, 대중가요 등 서울의 내밀한 과거를 품은 무형유산의 비중을 넓힌 게 특징이다. 시와 소설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정비석의 ‘자유부인’,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박완서의 ‘나목’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체취가 묻은 작품 현장으로 떠난다. 이만희의 ‘귀로’, 유현목의 ‘수학여행’ 등의 영화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같은 대중가요도 탐방의 대상이다.분야별 전문성을 갖춘 서울도시문화지도사 출신 베테랑 해설자 18명이 돌아가면서 해설을 맡는다. 답사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여 동안 진행된다. 7월 27일부터 8월 24일까지 5회는 무더위를 피해 야간 투어를 한다. 국내 도보답사 프로그램 중 최초로 도입한 오디오가이드 시스템을 이용, 품격 있는 탐방 환경을 제공한다. 참가 신청은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의 참여하기 코너에서 답사 신청을 하면 된다. 매주 월요일 40명을 선착순 무료로 모집한다. 참가자가 투고한 견문기는 서울신문 매주 목요일자에 게재한 뒤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한다.2019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회 ‘돈의문의 안과 밖’이 지난달 27일 광화문과 순화동 일대에서 산뜻하게 돛을 올렸다. 새로 지은 새문안교회 앞에서 모인 참가자 40여명은 구세군회관 생명의 말씀사~경희궁~돈의문박물관마을~4·19혁명기념도서관~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지~소덕문 터~평안교회로 이어지는 코스를 두 시간여 동안 탐방했다.우리가 보통 서대문이라고 부르는 문의 원래 이름은 돈의문(敦義門)이다. 돈의문은 애환이 많은 문이다. 4개의 대문 중 가장 늦게 지어졌고, 제일 먼저 헐렸으며, 유일하게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했다. 서대문구에는 서대문이 없다. 돈의문은 중구에 속하기 때문이다. 돈의문의 비극은 풍수학자 최양선이 경복궁 좌우 팔에 해당하는 창의문과 돈의문의 사람 통행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태종이 받아들여 문을 폐쇄하면서 비롯됐다. 대신에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새로 지은 문이 서전문(西箭門)이다. 세종 때 도성을 고쳐 쌓으면서 서전문을 막고 경교(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에 세 번째 문을 설치했다. 돈의문이 가장 늦게 지어진 까닭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이라면서 신문(新門)이라고 적고, 새문이라고 읽었다. 지명에 ‘새문안길’이나 ‘신문로’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가끔 ‘막힐 색(塞)’ 자를 써서 ‘색문’ 또는 ‘새문’이라는 기록도 나온다. 조선 개국공신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앞에 있어서 번잡함을 막으려고 문을 폐쇄했다는 야사에서 나왔다. 성문을 막은 집이라는 ‘색문가’(塞門家)라는 표현이 색문 또는 새문이라는 속칭으로 변했다는 얘기다. 1614년 이수광이 쓴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에 보면 “팔문(八門)의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 서소문이라 부른다.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문(소덕문과 광희문)으로 장사 지낼 사람이 나간다”고 썼다. 그렇다면 서대문이라는 명칭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발간된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기사에도 이 일대를 지칭할 때 새문의 안쪽은 ‘새문 안’, 새문의 바깥은 ‘새문 밖’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뤄 일제강점기 이후 서대문이라는 명칭이 정착됐다고 볼 수 있다. 1928년 마쓰다코가 지은 ‘조선만록’(조선총독부 간)에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고 설명한 대목이 유력한 근거다. 돈의문은 왜 사라졌을까. 1915년 3월 7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낙찰된 새문 목재만 205원, 입찰자 10명 가운데 경성 염덕기가 205원 50전에 낙찰…”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경매에 부쳐진 돈의문은 나무 값만 받고 헐렸다. 명목상 이유는 성곽도시 서울의 간선도로망 정비를 통해 공간 구조 재편을 꾀한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 공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915년 9월에 열릴 예정인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성공시키고,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신축해 식민통치를 굳히려는 속셈이었다. 경성시구개수 공사의 29개 노선 중 15번째 노선이 경희궁~서대문~독립문 노선이었다. 서울 서부 외곽의 주요 간선인 독립문에서 도심을 연결하는 전찻길을 넓히고 직선화할 목적이었다. 당시 서대문경찰서장이 ‘서대문의 존치를 바라는 조선인들의 여론’을 보고했지만 총독부는 철거를 강행했다. 문을 그대로 두고 도로를 내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돈의문과 문을 에워싼 성곽은 1915년 6월 시야에서 사라졌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입성한 개선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돈의문은 중국 사신이 드나들었다는 괘씸죄 탓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돈의문 밖은 1876년 조선과 일본 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개항장인 인천 제물포에서 양화진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제일 관문으로 부각됐다.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입국한 서양인 대부분이 이 길을 택했다. 돈의문에서 지척인 정동에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들어선 것도 편리한 교통 때문이다. 1899년 정동과 이어지는 서대문정거장~청량리 간 전차가 놓였고, 서대문정거장 옆에 서양식 스테이션 호텔(정거장호텔)이 들어서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 상인들이 새문 밖으로 몰려들었다. 1900년 한강철교가 놓인 뒤에는 서대문정거장에 서울 최초의 기차역이 들어서면서 서울을 찾는 외국인은 정동과 새문안에 집결하다시피 했다. 새문 안은 서울의 기점이자 종점이었고, 새문 밖 경기감영 앞은 도성 밖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돈의문 안팎은 중국 가는 의주로에 이어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았다.돈의문은 살아나지 못했다. 2009년 서울시는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계획을 발표했지만 원형 복원의 어려움과 예산 문제에 부딪혔다. 종로~신촌~마포 간 교통 흐름을 해결하고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려면 지하차도를 건설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시 지하차도 건설 비용은 1300억원 정도였지만 공사 기간에 우회도로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복원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돈의문 대신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독립운동가의 집, 돈의문구락부 같은 16개 동의 전시관과 한지공예 등 9개 동의 체험관, 드라마갤러리 등 9개 동의 마을창작소가 시민들을 맞는다. 서울미래유산관도 있다. 옛 새문안 동네에 있던 집 63채 중 40채를 활용했다. 1년 내내 전시와 공연, 마켓이 열리는 참여형 공간이다. 구릉과 골목, 계단이 공생하는 이 마을은 돈의문도, 서대문도 아닌 새문안 마을이다. 마치 흘러간 시간의 섬처럼 갖가지 추억을 간직한 채 인왕산과 안산의 품에 깃들여 있다. 돈의문이 존재하지 않는 덕분에 돈의문 안과 밖은 구분이 사라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선호 연구위원
  • 트럼프, 웜비어 석방 때 北측 23억짜리 청구서에 서명 …‘인질 몸값’ 지불 논란

    트럼프, 웜비어 석방 때 北측 23억짜리 청구서에 서명 …‘인질 몸값’ 지불 논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억류됐다 숨진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석방 조건으로 북한이 제시한 병원 치료비 명목의 200만 달러(약 23억 원)의 청구서에 서명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북한의 병원비 청구는 지금껏 북미 어느 쪽에서도 공개된 바 없으며,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인질 석방을 위한 ‘몸값 지불’은 없다고 공언해왔다. WP는 북한 측이 웜비어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미 당국자가 돈을 지불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청구서를 발행했다고 전했다. 버지니아 주립대 3학년이던 웜비어는 2016년 1월 관광차 북한을 방문했다가 평양에 머물던 호텔에서 정치선전 현수막을 훔치려 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과 함께 중노동에 처하는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17개월간 억류됐다. 2017년 6월 13일 석방돼 귀향했으나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엿새 만에 사망했다. WP는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측 특사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침을 받고 병원비 지급 합의서에 서명을 해줬다고 보도했다. 웜비어의 석방을 위해 의료진 두 명과 함께 방북했던 조셉 윤 당시 미 측 6자회담 수석대표 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의 청구서 요구를 전달했고 틸러슨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해당 청구서는 재무부로 보내졌으며 2017년 말까지는 미지급 상태였다고 관계자들이 WP에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그 이후 이 돈을 지불했는지 또는 이 문제가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거론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WP에 “우리는 인질 협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랬기 때문에(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 행정부 들어 인질 협상이 성공적이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WP는 국무부 대변인과 지난해 2월 은퇴한 윤 전 대표, 틸러슨 전 장관, 재무부·주유엔 북한 대표부 미국 담당 관계자 모두 아무런 반응을 내놓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5월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김학송, 김상덕 3명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대가 없이 나왔다. 반면 다른 사람들을 데려올 땐 현금 18억 달러를 냈었다”고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며 오바마 행정부 등 전임 정권들과 차별화에 나선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18억 달러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6년 1월 미 정부가 이란에 간첩 등 혐의로 수감돼 있던 미국인 5명과 미국에 억류돼 있던 이란인 7명을 맞교환하는 과정에서 약 17억 달러를 이란 측에 제공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가 터키에 장기 구금됐다 풀려났을 당시에도 “우리는 적어도 더는 이 나라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전에도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았으며 억류 미국인에게 막대한 병원비를 위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WP는 전했다. 북한에 2년간 억류됐던 선교사 케네스 배 씨는 당뇨로 병원 진료를 받았으며 진료비로 하루 600유로를 청구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의 첫 입원비는 10만 1000유로(약 12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2012년 11월 북한에 입국했다가 반공화국 적대행위 혐의로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북한은 2014년 11월 제임스 클래퍼 당시 미 국가정보국장의 방북을 계기로 그를 석방했다. 배씨의 진료비는 3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지만 그는 비용 지불 없이 석방됐다고 WP는 전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파리 한인교회 목사, 밖에선 성폭력·안에선 가정폭력

    파리 한인교회 목사, 밖에선 성폭력·안에선 가정폭력

    파리의 한 유명 한인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신도들을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충격을 주고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일 방송에 따르면 송목사는 파리의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프랑스 소도시에서 철학을 공부하다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세운 E교회에는 현지 유학생들이 많이 찾았다. 과거 E교회를 다녔다는 A씨는 송목사가 편두통을 고쳐주겠다며 성관계를 요구했고 결국 목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A씨의 고백 후 가해 목사를 포함한 신도들은 A씨를 추방하고 사이비 교도 취급을 했다. E교회 주최 유학설명회를 통해 E교회 교인이 됐다는 B씨, C씨 역시 송목사가 선교사 모임, 목회자 수업과 함께 개인적인 만남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B씨는 “메일로 논문 쓰는 것을 도와달라며 내용과 시간 장소를 보냈다. 당연히 여러명이 다같이 나가는 줄 알고 나갔다. 하지만 저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B씨는 “릴에도 한인교회가 있는 걸 아냐면서 차를 태웠다. 도착해보니 호텔이었다. 성폭행을 당했는데 당하자마자 또 하더라. 그냥 한 마디로 개보다 더 했다. ‘너도 날 원하고 있잖아.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냐?’라고 하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C씨 역시 “행위 자체가 더럽고 정상적이지 않았다. 목을 조르고 ‘주인님이라고 불러줘, 입 벌려봐’라고 말했다. 강압적인 성행위 후에는 울면서 자책하는 기도를 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구체적인 증언을 하는 피해 신도들의 외침을 송목사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외면했다. 그러나 피해 여성이 가지고 있던 사진 속 호텔 주인은 송목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호텔 주인은 송목사의 사진을 보고 “여자 분이랑 같이 왔던 그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보통 아침에 와서 점심에 떠난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송목사는 피해 신도들을 ‘음란한 여성’이라 낙인 찍어 인권과 명예를 실추시켰다. 이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송목사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강제적으로 맺은 관계임에도 자신의 죄라 생각하며 그동안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송목사가 아내와 아들을 폭행한 동영상과 음성 파일도 공개됐다. 이것이 밝혀지자 목사는 자신의 아내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해당 영상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송목사의 가족들은 목사를 고소한 뒤 모처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해당 자료를 토대로 송목사가 실제 폭행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가족들이 위험할 수 있다며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송목사의 아들은 “엄마를 의부증에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엄마가 맞았다”고 전했다. 목사의 친척은 “가정폭력은 상습적이었다. 목회자라고 하기 어렵다. 목회자 신분으로 자기가 이루고 싶은 권력과 돈과 명예, 여자 그걸 이루고 싶은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문제의 목사와 인터뷰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가자, 송목사는 예배 중에 “시청률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취재한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인터뷰 안하는 거다”고 제작진을 의식한 발언을 했다. 송목사는 성폭행, 가정폭력 등 의혹에 대해 “하나님의 교회가 큰 모욕을 당하고 다친다. 전 교인들의 거짓, 허위 진술로 교회가 위태롭다”고 주장했다. 앞서 E교회 측은 ‘그것이 알고싶다’ 측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기각됐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조선시대, 장애는 장애가 안 됐소

    조선시대, 장애는 장애가 안 됐소

    근대 장애인사/정창권 지음/사우/368쪽/2만원“폐질자(장애인) 가운데 산업(직업)이 있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 궁핍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는 소재지 관아에서 우선적으로 진휼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하라.”조선의 2대 왕 정종이 1400년에 신하들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직업이 있는 경증장애인 외에 중증장애인은 국가가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이런 정책은 힘을 잃는다. 편견과 차별, 배제 등 장애인에 관한 사회적 차별도 이때 생겨난다. 말하자면, 근대는 장애인에게 ‘암흑기’였다.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나온 ‘근대 장애인사´는 근대의 장애 관련 사건과 정책을 분석해 장애인에 관한 사회적 차별이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는 2011년 조선시대 장애인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글항아리)를 낸 바 있다. 이번에는 관에서 펴냈던 근대 관찬사료와 신문·잡지, 문학작품, 일기·문집류, 외국인 견문록 등을 토대로 장애사 연구 보폭을 한발 넓혔다. 저자는 조선 시대 장애인 정책과 장애인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근대보다 훨씬 나았다고 주장한다. 조선은 장애를 크게 경증과 중증으로 나눠 정책을 펼치고, 장애인이 직업을 갖고 자립하도록 유도했다. 특히, 장애인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장애에도 능력만 있으면 장관급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조선 건국 후 예악을 정비하고 국가 기틀을 마련한 허조는 체격이 왜소하고 어깨와 등이 굽은 척추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좌의정에 오를 만큼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은 왜소증 장애인이었다. 영조 시절 우참찬을 지낸 이덕수는 청각장애인이었는데, 임금과 자주 필담을 나눌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동지정사’를 맡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개화기에는 전 세계에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장애인 교육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정부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이 역할을 대신 맡았다. 예컨대 로제타 셔우드 홀과 같은 선교사는 조선 사람도 쓸 수 있는 점자를 고안하고 조선 최초로 맹아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기독교에 관한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도 이들의 노력은 높게 살 만하다. 일제강점기 들어서면서 장애인 숫자는 크게 늘고 반대로 정책은 각박해졌다. 일제의 수탈로 조선 사람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결막염을 비롯해 각종 전염병이 유행하며 장애인도 늘었다. 의료사고가 빈번했고 전차나 기차, 자동차 사고도 늘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태형과 고문을 당해 장애인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일제는 장애인을 격리하고 감금하는 데에만 힘썼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총독부 사회과의 장애인 어용단체인 ´조선사회사업연맹´조차 “장애인과 고아를 위한 구호법을 하루속히 실시하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1911년 일제가 설립한 거의 유일한 장애인 복지기관인 ‘제생원 맹아부’에는 일본인이 더 많았다. 1944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장애 걸인들을 위한 ‘불구자 수용소’를 세웠는데, 거리의 장애인을 잡아 가두는 시설에 불과했다. 저자는 결국 정부가 어떤 시각으로 장애인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장애인 정책이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조선시대에는 ‘완전함´에 중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식민지 상황으로 접어들며 장애인 정책은 심하게 망가지고, 이에 따라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도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장애인들이 병을 낫고자 인육을 먹고, 아이를 잡아 약을 만든다는 식의 흉흉한 소문, 장애인 생활을 견디다 못해 벌어진 각종 사건은 읽기에 섬뜩할 정도다. 조선과 근대의 장애 정책을 좀 더 풍부하게 설명했으면 좋았을 터다. 사회적 인식의 변화 역시 구체적이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여러 현상을 나열한 뒤 장애 정책을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는 정도여서 다소 아쉽다. 그럼에도, 장애인에 관한 올바른 제도 정립 차원에서 책은 환영할 만하다. 이번 책에 이어 인간이 노동가치로 전환된 현대의 장애사를 후속으로 기대해 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100년 첨탑의 눈물, 물길 따라 흐른다

    100년 첨탑의 눈물, 물길 따라 흐른다

    첫인상을 바꾸는 건 어렵습니다. 첫인상이 탐탁지 않던 사람이 좋아지려면 특별한 계기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여행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남 공주를 입에 올릴 땐 ‘백제의 수도’라는 말이 따라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공주의 첫인상이지요. 공주에서 백제를 걷어내고 새로움을 찾으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할 겁니다. 오늘의 발걸음은 공주 원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천, 제민천으로 향합니다. 제민천 주변의 근대 건축물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뾰족한 종탑을 인 고딕식 성당, 옛 충남도청에 들어선 박물관, 유관순 열사의 흔적이 남은 교회 등 공주의 근대를 증언하는 건축물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그러고 보면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제 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새로운 모습을 찾으러 간다. 기점은 금강에서 발원한 하천, 제민천으로 삼는다. 아담한 하천 주위에 공주중동성당, 충남역사박물관, 공주 제일교회 등의 근대 건축물이 모여 있다. 건물 간 거리는 도보로 10분 남짓. 슬렁슬렁 걸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다. 하천 따라 피는 벚꽃과 따사로운 햇살이 길동무가 돼 준다. 근대 건축물을 통해 공주의 100년 전을 들여다보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건축물을 매개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다. ●중세 고딕 양식의 장엄함… 공주중동성당 제민천 근처의 국고개 길, 언덕 위 뾰족한 종탑이 보인다. 공주 최초의 성당인 공주중동성당이다. 천주교가 서해안을 통해 충청도로 들어오면서 현대식 성당이 만들어졌는데 공주중동성당도 그중 하나다. 1936년에 착공해 1년 만인 1937년에 완공됐으니 바지런히도 지었다. 붉은 벽돌의 외관, 뾰족한 아치형의 창과 출입구, 하늘로 치솟은 종탑에서 알 수 있듯 성당은 서양 중세의 고딕 양식을 따른다. 성당 안 천장은 회백색 6각형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내부는 미사 시간 전후로 잠깐씩만 개방해 상시 관람이 어렵다. 성당 앞마당에 서면 맞은편 충남역사박물관과 공주 시가지가 보인다. 아득한 옛날의 백제 대신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공주의 모습이다. 공주중동성당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충남역사박물관이다. 옛 국립공주박물관이던 건물은 현재 충청남도의 역사·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박물관에 들어서려는데 벚나무 30여 그루가 발을 붙잡는다. 이맘때면 박물관 앞마당은 벚꽃 동산이 된다. 벚꽃 감상 최적의 포인트는 안내소 옆 언덕. 벚나무들이 성당 쪽으로 기울어 자라 우거진 벚나무와 성당이 훌륭한 구도를 빚는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이 공주의 봄이 한창이라고 속살댄다. 충남역사박물관의 1층 기획전시실은 ‘우리가 찾은 역사, 땅속 이야기’ 전시가 한창이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유적, 예산 가야사지 등 충남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모았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백제 시대 무덤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은 아직 금빛이 영롱하다. 동판을 금으로 도금한 신발을 신고 금동관모와 함께 잠들었으니 신발 주인의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눈길을 끄는 건 충남도청 옛 도지사실.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이래 충남도지사가 도정 업무를 보던 공간을 재현했다. 도지사 사무인계서, 충청남도의회속기록, 휴대용 주판, 타자기 등 충남도민들의 삶을 뒷받침한 행정도구들이 가득하다.●공주 항일운동거점지… 공주 제일교회 제민천교 근처의 빨간 벽돌 건물은 공주 제일교회다. ‘수원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는 수식어가 붙은 교회는 현재 기독교박물관으로 운영된다. 2층짜리 박물관은 교회 역사, 선교사의 옛 사진과 물품, 공주 항일운동을 주도한 교회 목사이자 독립유공자의 발자취 등을 전시한다. 100여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지만 교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길고도 깊다. 1902년 한 채의 초가집으로 시작해 1931년에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는 이야기, 6·25전쟁으로 폭격을 받았지만 굴뚝과 지하는 멀쩡해 교회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개척자 고(故) 이남규 선생의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 등등.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 외벽의 앳된 소녀와 외국인 선교사의 벽화다. 소녀의 정체는 유관순 열사, 외국인 선교사는 이곳에서 활동한 사애리시 선교사다. 둘은 천안 지령리 교회(현 매봉감리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유관순 열사의 총기와 신앙심을 알아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관순양이 공부를 하고 싶으면 내가 서울의 이화학당에 보내 줄게요. 우선 영명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때요?” 소녀는 이튿날 선교사를 따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 2년 과정을 수료한다. 영명학교는 공주 제일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다. 당시 교회가 선교와 교육 사업을 병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회와 유관순 열사의 인연이 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회는 사회와 호흡했다. 영명학교를 비롯해 방은두병원, 공주유치원, 중앙영아원을 건립하고 공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교회에 깃든 사연을 알고 나면 평범한 고딕식 교회가 달리 보인다. 원도심의 붉은 벽돌 건물이 묻는다. 시간이 오래될수록 좋은 건축물인가. 백제와 근대를 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백제의 문화유산도 공주의 근대 건축물도 소중한 우리의 보물이다. 공주의 근대 건축물은 그대로 아름답다.●소박한 시가 피는 풀꽃문학관 제민천 서쪽, 낮은 언덕에 진갈색 목조건물 한 채가 있다. 건물의 이름은 풀꽃문학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문학관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꽃을 가꾸고 풍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문인들과 소통한다. 시인은 공주와 인연이 깊다. 충남 서천 출신의 시인은 공주사범대에 입학한 뒤 언젠가 공주에서 살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 바람이 현실이 된 곳이 2014년 문을 연 풀꽃문학관이다. 공주시는 1930년대 초에 지어진 적산가옥을 사들여 문학관으로 단장했다. 일본 헌병대장의 관사가 문학관이 되자 공간을 둘러싼 공기도 변했다. 꾸밈없는 그의 시어만큼이나, 자세히 보아야 예쁜 풀꽃만큼이나 소박한 분위기다. 가장 큰 방인 강의실에는 12폭 병풍이 있다. 한 폭마다 시인의 대표작과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살펴볼 만하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 복도를 따라 시가 담긴 액자가 쪼르르 놓여 있다. 4월의 풀꽃문학관은 꽃으로 눈부시다. 앞뜰에 수선화, 할미꽃, 부채붓꽃 등 소담한 봄꽃이 앞다투어 핀다. 여름에는 애기원추리와 옥잠화가, 가을이면 쑥부쟁이와 상사화가 그 자리를 이을 것이다.●가장 많은 천주교 순교자가 나온 황새바위성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순교자가 나온 곳이 공주라는 사실을 아는가. 공산성 맞은편 언덕에 있는 천주교 순교 유적지, 황새바위성지가 바로 그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337위에 이른다. 공주에 천주교 순교자가 유독 많은 이유는 무얼까. 조선 시대 선조 때인 1603년, 공주에 관찰사가 근무하는 관청인 충청감영이 들어섰다. 오늘로 말하면 충청도청인 셈이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은 충청감영으로 이송됐고 배교를 거부하면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참수를 당했다.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공산성에 몰려와 구경을 하고, 순교자들 의 시신이 제민천을 피로 물들였단다. 오늘날 황새바위성지는 200여년 전의 슬픈 역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다. 성지에 얽힌 사연을 모르면 꽃구경하기 좋은 뒷동산 같다. 순교자 광장은 순교탑, 무덤경당, 열두 개의 빛돌이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순교탑 안에는 로마서의 한 구절과 성지 부근을 발굴하다 나온 십자가가 걸려 있다. 열두 개의 빛돌은 예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이곳에서 순교한 337위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간 황새바위 광장의 끝에 야외제대가 있다. 12개의 비석 뒤에는 337위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이존창 루도비코’처럼 이름과 세례명이 알려진 이가 있는가 하면 ‘이씨’, ‘강서방’처럼 이름이 없는 이들도 있다. 평범하지만 용감한 사람들, 믿음이 두려움을 이긴 사람들의 이름이다. 위대한 이름 위로 후두두 벚꽃이 떨어진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정철훈(사진작가) ■ 여행수첩 (지역번호 041) →가는 길 :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지난다. 천안논산고속도로 천안분기점을 통과해 공주IC 교차로에서 ‘공주보 시청’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웅진로를 거쳐 중동교차로에서 ‘대전 논산’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성당길을 따라가면 공주중동성당이다. →맛집 : 고가네칼국수(856-6476)는 농약을 쓰지 않은 우리 밀로 만든 칼국수를 낸다. 먹는 방식이 전골과 닮았다. 한우 사골육수에 갖가지 채소를 넣고 끓이다가 면을 넣는다. 시장정육점식당(855-3074)은 날밤을 육회에 버무린 육회비빔밥이 대표 메뉴다. 아삭한 밤과 쫀득한 육회가 잘 어울린다. →잘 곳 : 공주한옥마을(840-8900)은 기와집과 초가가 어우러진 한옥 리조트다. 개별 숙박동은 작은 마당과 담장을 갖춘 독채로 운영된다.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구들장 방식이라 전통 난방을 체험할 수 있다. 제민천 부근의 정중동호스텔(010-6360-4653)은 여관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다. 회백색 벽돌의 외관에서 근대 건축물이 연상된다. 1인실, 2인실, 패밀리룸 모두 개별 욕실이 딸려 있다.
  • 기억하라 존중하라 그리고… 치유하라

    기억하라 존중하라 그리고… 치유하라

    800여명 나환자 밤에만 걸어 140㎞ 이동… 눈물로 지은 공동체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켜켜이 쌓은 가치… 그 가치 담은 공간●애양원에 대한 무섭고 슬프고 아름다운 단편들 #기억 1. 초등학교 때 아버님을 따라 시골의 할아버지 댁을 두어 번 갔었다. 그곳은 전기도 대중교통도 닿지 않는 ‘깡촌’으로 어린 내게도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마을 뒷산을 넘으면 바로 바닷가로 내 또래 아이들과 물놀이하는 큰 재미도 있었다. 바다 건너편에 교회가 보이는 녹음 우거진 섬이 있어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친척 아이들이 들려준 얘기는 정말 무서웠다. ‘문둥이’들이 사는 곳이며 그 섬에 헤엄쳐 갔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기억 2. 배정받은 중학교는 성경과목을 가르치는 미션스쿨이었다. 어느 날 담당 목사 선생님이 한 권의 책을 가져와 한 인물을 소개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으로 주인공은 손양원 목사였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해 6년간 옥살이를 하다 해방 후 지방 교회의 목회를 맡았다. 공산당의 반란이 일어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총살을 당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아들을 살해한 주범을 용서하고 오히려 양자로 삼는 사랑을 실천했다. 6·25전쟁 때 그 역시 목사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기억 3. 10년 전, 여수공항 뒤에 있는 한 병원을 방문하게 됐다. 애양원이라는 이곳은 원래 미국 선교사들이 세워 나환자들을 수용해 치료하던 곳이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김인권 원장(현 명예원장)은 나환자 섬인 소록도에 공중보건의로 자원 복무했고 제대 후 바로 애양병원에 부임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는 우리 시대의 의인이었다. 동행했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포함한 일행들은 김 원장의 고귀한 삶에 크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40여년 전, 어릴 때 단편적 기억들의 무대는 모두 이곳 전남 여수 애양원이었다. 이제는 강같이 좁은 애양원 앞바다 건너편 공단 지역이 아버님 고향마을이 있던 곳이다. 육지에서 돌출한 반도의 끝을 본 것을 섬이라 착각했고 ‘문둥이’라 두려워한 가상의 대상은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이곳 애양교회에 부임해 한센인들을 돌보다 여순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에 휘말려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세 부자의 순교묘지와 손양원기념관이 있는 이곳은 개신교의 성지로 많은 신자들의 순례지가 됐다.●나환자들 사회서 격리돼 비참한 삶… 1909년 벽돌가마터에 환자 첫 수용 처음 방문한 애양원 일원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애양원의 역사는 안타깝고 처절한 이야기다. 한국의 개신교는 조선말 개항기에 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됐다.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 기술을 겸비한 이들이 많았는데, 미국 영사관 의사로 와서 제중원을 설립한 알렌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100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활동했는데 그들은 기독교 전파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료시설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을 정착시켰다. 1909년 봄날,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견한 목포선교부의 포사이트 선교사는 광주의 동료 선교사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도중 길가에서 여자 나환자를 발견해 광주로 호송했고 광주진료소 인근의 벽돌가마터에 수용해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환자들은 치료는커녕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불가촉천민으로 저주의 대상이었다. 당시 벽돌가마터 여환자의 비참한 모습은 이랬다. “몇 달 몇 년 동안 빗질도 않고, 옷은 더러운 넝마이며, 손발은 짓물렀다. 온몸에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한 발은 짚신을, 다른 발은 두꺼운 판자조각을 묶어 걸을 때마다 심하게 절뚝거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선교부에 한센환자의 집이 설치됐고 2년 후에는 광주나병원이 출범했다. 애양원의 역사는 바로 1909년 4월 7일, 벽돌가마터에 여환자를 수용한 날부터 시작한다. 초대 원장인 윌슨(우일선) 선교사는 체계적인 치료는 물론 나환자들의 자립자생을 위해 목공, 석공, 직조, 의료기술까지 자체 기술자들을 양성했다. 또한 교회를 설립해 신앙을 통한 재활을 시도했다. 이 신앙적 한센공동체는 이후 애양원의 전통이 됐다.일제는 도시 공공위생을 문제 삼아 나병원 이전을 강권했고 1926년 여수 율촌면 신풍리 바닷가로 이전 명령을 내렸다. 800여 나환자와 가족들은 기차도 못 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만 걸어서 무거운 침상과 짐을 들고 140㎞를 이동했다. 이른바 ‘눈물의 이주’ 끝에 애양반도에 한센인의 자치 공동체, 애양원을 건설하게 된다. 반도의 중앙에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그 남쪽에 여환자 숙소를, 북쪽에 남환자 숙소를 각 20여동 지었다. 이외에도 기술학교, 이발소, 창고, 오락실 등 총 110동의 건물을 세웠다. 현지에서 채취한 응회암과 사암들로 돌벽을 쌓고 목조 지붕틀을 올린 간략한 서양식 건물들이었다. 목수, 석공, 토공 등은 모두 훈련된 한센인들로, 자체 인력과 기술로 완성한 공동체 건축이었다. 해방 후에는 한성신학교를 세워 한센인 교역자를 양성했다. 첫 방문 당시, 남환자 숙소는 모두 철거돼 그 터에 한센인 정착지인 도성마을이 자리잡았다. 병은 완치됐지만 신체적 불구로 남은 음성한센인들의 자립갱생을 위한 마을이었다. 여환자 숙소는 폐가인 채로 14동이 남았고 한성신학교는 토플하우스라는 숙소로 개조했다. 원래 병원 건물을 애양병원역사관으로 개조했고 입구 쪽에 새 병원 건물을 크게 세운 상태였다. ●1967년 건축가 조자룡 설계·김종규 전시관 증축 계획… 장장 한 세기 걸친 건축 애양원 설립부터 1950년대까지 건설된 모든 건물들은 선교사들이 계획하고, 한센인들이 건설한 일종의 민간건축이었다. 굳건한 막쌓기 돌벽과 직선적인 서양식 지붕들은 마치 18세기 유럽의 마을에 온 듯 이국적인 경관을 이룬다. 경제적 부족과 기술적 제약으로 건물은 비록 낮고 허술하지만, 소외된 이들의 초보적인 안식처로서 충분한 근원적인 건축들이다.1967년 새로운 병원을 세우게 되는데 설계를 건축가 조자룡(1926~2000)이 맡았다. 해방 직후 하버드대학원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고 스웨덴 설계회사에서 실무를 쌓은 후 귀국해 1950~60년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그분을 뵙게 돼 1박2일로 말씀을 들었는데, 아마도 설계한 건물이 150개 이상은 되리라 회고했다. 그럼에도 조자룡은 늘 한국의 전통미에 관심을 두었다. 1970년 민학회를 조직했고, 최대의 민화 수집가로서 사설 민속박물관까지 경영했다. 새 애양병원에 도입된 휘어진 처마나 쌍사자석 등을 모티브로 한 현관 기둥도 그가 노력한 전통 계승의 표현이었다.2010년 애양원 방문 때 2년 후 열릴 여수해양엑스포에 대비해 여환자 숙소 잔해들을 철거하고 새롭게 펜션을 지을 계획이라고 들었다. 나는 남겨진 건축적 흔적을 살려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그 설계를 자원해서 맡았다. 기존 건물의 돌벽을 최대한 보존하고, 그 뒤편에 단순하고 무성격한 새 숙소를 부가했다. 원 숙소부는 새 숙소의 안마당이 되고, 원 건물의 정면만이 돋보이도록 설계 전략을 세웠다. 애양원 개척 당시의 소중한 건축유산을 보존하고 새롭게 쾌적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치유의 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 병원이었던 역사관은 외벽의 풍화가 심하고 비좁았다. 함께했던 서 회장이 비용을 쾌척해 기존 역사관을 수리하고 넓은 새 전시관을 증축하게 됐다. 이 설계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창조적 건축가 김종규가 맡았다. 그 역시 기존 건물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뒤편에 단순한 형태의 백색 전시관을 덧붙였다. 기존 건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내부공간의 깊이와 빛의 변화를 담은, 외유내강형의 세련된 건축이다.거의 한 세기에 걸쳐 애양원은 수많은 이들의 건축적 노력을 결집해 왔다. 선교사들과 한센인들, 조자룡, 김봉렬, 김종규 등 전문, 비전문 건축가들은 이국적인 돌집부터 미니멀한 현대적 공간까지 다양한 형태와 공간을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과거의 의미를 기억하고, 앞선 건축의 흔적들을 존중하며, 총체적인 환경의 상처와 기억의 아픔들을 치유하려는 소중한 가치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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