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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벽 넘어 600리 求道순례 오세요”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단이 종교의 벽을 넘어 600리 구도(求道)의 길을 함께 걷는 순례대회가 열린다. 종교의 벽을 뛰어 넘는 이번 대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다.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은 오는 11월 1∼11일 4대 종단 지도자와 신도 등 1만여명이 참가하는 세계순례대회를 전북 일원에서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1일부터 9박10일 간 걷고 10일에는 참가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종교화합 한마당이, 11일에는 세계순례포럼이 개최된다. 포럼에서는 티베트 종교문화부 삐마친조르 장관(불교), 세계평화회의 공동 대표인 이오은 교무(원불교), 로마 교황청 순례특사인 조셉 칼라피 파람빌 대주교(천주교) 등이 순례와 종교 화합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 순례대회가 열리는 순례길은 각 종단과 연구원이 2009년 전주∼완주∼김제∼익산을 잇는 240㎞를 연결하면서 ‘아름다운 순례길’이란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순례길은 1845년 한국인 첫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머문 나바위 성지(익산시 망성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10여명의 순교자가 묻힌 천호성지(완주군 비봉면), 불교문화의 정수인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호남 최초로 1893년 설립된 서문교회(전주시 다가동), 신라 말기에 창건된 송광사(완주군 소양면) 등으로 연결된다. 순례길 선포 이후 전국에서 해마다 1만여명이 이 길을 걷고 있다. 신도는 물론 일반인의 발길이 이어지자 문화재청은 이곳을 ‘2010년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길’로 지정하기도 했다. 매달 한 구간씩 나누어 순례하는 ‘도보 카페’가 마련되는 등 전국적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순례길은 성지와 함께 지역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길이다. 이들 성지에서는 신부와 목사, 스님, 교무 등 각 종단이 깨달음을 전하는 ‘종교 교류의 장’도 마련되고 일부 교회와 절 등에서는 숙박도 할 수 있다. 김수곤 조직위원장은 “순례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로 다른 종교의 상생과 화합을 위해 탄생했다.”면서 “4대 종교가 순례길을 통해 통합하듯 길을 걸으며 분열과 반목의 사회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석가탑 전면 수리… 1000년만에 속살 공개

    석가탑 전면 수리… 1000년만에 속살 공개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안뜰 서쪽에 서 있는 삼층석탑(석가탑·국보 21호)이 고려 현종 15년인 1024년 해체 수리된 이래 약 1000년 만에 전면적으로 해체해 수리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7일 경주시·불국사와 함께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해체수리 보고회’를 갖고, 탑의 상륜부 중 가장 꼭대기를 장식한 구슬 모양의 보주를 해체했다. 해체된 보주가 내려오자 이날 불국사 대웅전 안뜰에 삼삼오오 모여 석가탑의 해체의식을 바라보던 불자들과 스님, 300여명의 관람객들은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일제히 박수를 쳤다. 보주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 벼락을 맞아 파손된 채 방치됐다가 1970년 전북 남원 실상사 동서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복원해 놓은 것이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장은 “금세기 최대의 석탑수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석가탑 전체를 드러냈다가 다시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 여타 석탑 해체 복원과는 성격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배 단장은 석가탑을 해체 복원하게 된 배경에 대해 “2010년 12월 정기 안전 점검 결과 1층 탑신을 받치는 상층 기단의 뚜껑돌에서 길이 1.32m, 최대 폭 5㎜의 틈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원형인 석가탑은 상륜부의 보주 균열을 비롯해 노반 모서리 파손, 3층 우주 파손, 1층 탑신 파손, 상층기단 뚜껑돌 균열과 벌어짐 3곳 등 훼손된 곳이 수십여곳에 이른다. 석가탑은 상륜부·탑신부·기단부가 위로부터 순서대로 해체되고, 탑신 1층 중앙 사리공(舍利孔)에 있는 사리장엄구는 수습하며, 기단 내부를 채우는 돌무더기(기단 적심)도 해체될 예정이다. 기단부 밑의 땅속도 조사해 유물이 확인되면 발굴을 결정할 예정이다. 이번 해체·수리작업은 2014년 12월 완료된다. 석가탑의 조성 시기는 1966년 부분 해체해 수리할 당시 2층 탑에서 발굴된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에 기록된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고려 말에 쓰여진 것이고,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는 고려 초인 1038년 정종 4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건립 시기에 관련해서는 중수기가 더 믿을 만하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석가탑은 고려 현종 15년(1024)에 해체 수리된 이래 지진피해로 정종 2년(1036)과 정종 4년(1038)에 각각 다시 수리됐다. 1966년 부분 해체·수리는 도굴범들이 두 차례나 6t이 넘는 2층 옥개석을 밀어내고 탑신(塔身)에 들어 있는 사리함을 훔치려고 탑을 훼손하면서 이뤄졌다. 당시 부분 해체되면서 중수기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발견됐다. 이번 해체 복원에는 총 30억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됐다. 경주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책꽂이]

    ●정치질서의 기원(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함규진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현실사회주의권 몰락과 함께 ‘역사의 종언’ 테제를 제시해 스타덤에 올랐던 저자는 곧 곤혹스러워졌다. 역사가 종말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왜 역사가 후퇴해 버렸는지 원인을 찾기 위해 이미 끝났다는 역사를 다시 처음부터 들춰 보기 시작했다. 그 2부작 가운데 1권이다. 진화생물학을 기반으로 고대 중국, 인도의 국가 성립사에다 법치주의 등 여러 가지 얘기를 버무리고 있지만 결국 관건은 가산제로 복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 발전 논의를 쉽게 풀어서 요약 정리하고 있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3만원. ●시진핑 리더십(김기수 지음, 석탑출판 펴냄) 중국의 차기 지도자 시진핑을 분석한 책이다. 그를 유심히 지켜본 인사들은 후진타오보다 더 강력하고 배짱 있고 솔직한 지도자로 평가한다. 저자는 붉은 유전자가 강하게 배어 있지만 아버지의 실각으로 어린 시절 숱한 고생을 감내했던 인물이었기에 시진핑의 키워드를 통합과 창조로 압축해뒀다. 2만원. ●콘돌리자 라이스 최고의 영예(콘돌리자 라이스 지음, 정윤미 옮김, 진성북스 펴냄) 기독교 근본주의 부시 정권 아래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저자의 책이다. 정치가의 18번 레퍼토리는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인데 그 레퍼토리를 반복한 뒤 9·11 사태를 전후한 활동상을 기록해두고 있다. 냉정하게 평가받는 위치임에도 남들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대목들이 이채롭다. 영어판 출간 당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거리낌없이 노출해 이미 한번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만 5000원.
  • 경주 남산의 재발견…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

    경주 남산의 재발견…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

    남북 8㎞, 동서 4㎞. 경북 경주의 진산, 남산(495m)의 체격입니다. 산 치고는 작고 야트막한 편이지요. 한데 덩치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깊고 또 넓습니다. 과장 좀 보탤까요. 딱 ‘나무 반 유물 반’입니다. 확인된 절터만 150곳이고 불상은 129기, 탑은 99기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체 문화유적은 694개소이고요. 고(古)신라부터 통일신라 이후, 심지어 고려시대 유물까지 빼곡합니다. 산 전체가 절집이자 지붕 없는 박물관인 셈입니다. 그러니 국립공원으로 지정(1968년)된 건 당연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된 것도 어색할 게 없지요. 여름방학을 앞두고 아이들과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남산을 프로그램에 넣는 걸 잊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경주 남산(南山)은 옛 월성 왕궁의 ‘남’(南)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산의 이름도 이 같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 대릉원 등 문화재가 밀집한 도심이나, 불국사가 깃든 토함산 등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지역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남산이 늘 관광객들의 시선에서 한발짝 비켜 섰던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산엔 신라의 모든 것이 새겨져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품은 우물 나정(井)과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각각 남산 자락에 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화산으로 치자면 남산은 활화산이다.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다. 2007년에도 남산 열암곡에서 대형 마애석불이 발견됐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발견될지 모르니 ‘남산에선 구르는 돌 하나도 문화재급’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겠다. ●절터 150곳·불상 129기·탑 99기…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남산을 둘러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표도 두 가지 종류로 세워져 있다. 노란색 글씨는 문화재 탐방 코스, 흰색은 단순 산행 코스다. 가장 일반적인 건 삼릉~용장골 코스다. 바둑바위와 금오산 정상을 찍고 용장계곡으로 내려온다. 이 코스에선 ‘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한 문화재와 만날 수 있다. 단순 산행이라면 3시간 남짓 걸리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 문화재를 들여다보자면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들머리는 삼릉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잠든 봉분 셋이 연달아 솟아 있다. 삼릉을 찾게 하는 건 주변의 솔숲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들이 빼곡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솔숲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이다. 남산 일대 상당수의 불상들이 그렇듯, 이 불상도 목과 얼굴 부분이 없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의 희생양이었을 거란 게 유력한 추정이다. 인근 계곡에 쳐박혀 있던 것을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얼굴은 잃었지만, 불상의 자태는 당당하다. 넓은 어깨와 가슴, 선명한 옷 매듭 무늬 등에선 기백이 넘친다. 경주남산연구소의 김구석 소장은 “7~8세기 신라 초기의 불상들은 이처럼 가슴이 넓고, 목 주름 등이 박력 있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라며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허리 부분이 잘록해지고 가슴의 윤곽도 좁아지는 등 미려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석조여래좌상 위엔 아담한 크기의 마애관음보살이 서 있다. ‘미스 신라’라고 불리는 불상이다. 키 154㎝로 아담하고, 입술은 루즈를 바른 듯 붉다. 신라 석공이 붉은 빛 도는 돌 부분에 부러 입술을 새겼다니, 선인들의 해학에 설핏 웃음이 새어나온다. ●일곱 부처와 비승비속의 신선을 만나다 큰 바위에 아미타부처 여섯 분을 새긴 선각육존불을 지나면 선각여래좌상이다.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산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어린’ 마애불상인 셈. 코는 두리뭉실하고 입술은 썰면 반근은 족히 나올 만큼 두툼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은 실실 웃고 있다. 부둥켜 안고 있는 바로 옆의 부부바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계신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남산에서 얼굴이 가장 잘생겼다는 삼릉계 석불좌상과 기골이 장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면 바둑바위에 닿는다. 대릉원 등 경주의 주요 문화유적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 포인트다. 남산에 들면 최소한 두 번은 놀란다. 그 작은 산에 유물이 빼곡한 것에 놀라고, 암릉이 많은 것에 또 한 번 놀란다. 선 굵은 바위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데,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불상과 탑들이 이 같은 풍경과 기막히게 잘 어우러져 있다는 거다. 하나하나가 ‘있을 만한 곳에 있’다. 다리쉼을 하려는 고갯마루, 한 굽이 돌아 시선이 닿는 암벽마다 어김없이 유물들이 세워져 있다. 이는 유물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좋지만, 몇 발짝 떨어져서 완상하는 게 더 낫다는 뜻과 맥이 닿는다. 금오산(468m) 정상을 찍고 용장계곡으로 향한다. 골이 깊어질수록 풍경도 속도를 낸다. 하산길의 으뜸 명소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높이는 4.5m. 경주사람들은 이 탑을 ‘한국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부른다. 남산 자체를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원래 탑을 세울 때 기단을 쌓는데 이 석탑은 별도의 기단을 세우지 않았다.”며 “해발 380m만큼의 산을 기단 삼았으니 국내 최고 높이의 탑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산길에 가끔 뒤를 돌아보시라. 늘 이 석탑이 보일 만큼 풍경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삼층석탑 아래 삼륜대좌불도 인상적이다. 원반 모양의 세 돌받침(삼륜대좌) 위에 부처를 모신 특이한 구조다. 삼륜대좌불 아래는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사터다. 김시습은 용장사에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돌아봐도 나무랄 데 없다. 한데 기왕 나선 길, 봉화골의 칠불암까지는 다녀오는 게 좋겠다. 남산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 가운데 유일한 국보(312호)다. 다만 남산 동쪽의 통일전이 들머리여서 서쪽의 삼릉~용장골 코스와 하나로 묶자면 체력이 달릴 수 있다. 통일전에서 왕복 3시간 남짓 걸린다. 칠불암 바로 위는 신선암 마애불이다. 결가부좌를 튼 대부분의 불상과 달리 구름 위에 한 쪽 발을 떠억하니 담그고 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호방한 형상이다. ●신라의 건국 신화와 함께… ‘삼릉 가는 길’ 삼릉~용장골 코스가 산행을 겸한 답사길이라면 ‘삼릉 가는 길’은 남산 아래 자락을 따라 걷는 트레킹 길이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나정 등을 끼고 있어 신라의 건국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복원 공사 중인 월정교에서 삼릉까지 약 8㎞ 거리지만 코스의 중간쯤인 나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담긴 우물터다. 박씨 문중의 제각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 팔각건물지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발견됐다. 경주사람들은 나정이 박혁거세의 신궁(神宮)터라고 믿고 있다. 박혁거세 신화 또한 이 대목에서 역사로 굳어진다. 신궁의 실체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길은 1980년대까지 실제 사용됐던 남간 마을의 신라 시대 우물과 신라의 첫 왕궁터 창림사지, 배리 석불입상, 포석정 등을 거쳐 삼릉에서 끝난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와 35번 국도를 타고 곧장 가면 삼릉이다. KTX는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2시간 10여분이 소요된다. 경주남산연구소(www.kjnamsan.org)는 다양한 남산 답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 무료. 777-7142. ▶맛집:삼미정은 직접 빚은 동동주와 두부가 맛있는 집이다. 삼릉 초입에 있다. 745-8761. 고두반은 지역 농산물로 상을 내는 농가맛집. 담백하고 정갈한 맛이 일품이다. 748-7489. ▶잘 곳:가족 단위 여행객이라면 보문단지 내 한화, 대명리조트 등이 좋겠다. 최근 문을 연 블루원 리조트도 깔끔하다. 한옥 펜션인 야선미술관은 단체가 묵기 좋다. 자체 생산한 농산물로 차려낸 밥상도 맛있다. 010-9215-1618. 글 사진 경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정진행 현대차사장 은탑훈장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11일 ‘제9회 자동차의 날’을 맞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서울코엑스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정진행 현대차 사장이 은탑산업훈장을, 오원석 코리아에프티 회장이 동탑산업훈장을, 허성구 대성사 대표이사가 철탑산업훈장을, 김은기 대한솔루션 직장이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또 김형남 르노삼성차 전무, 이용주 한국지엠 상무, 김동일 기아차 상무, 이용주 자동차부품연구원 본부장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국민과 함께’ 자비의 불빛 10만개 밝힌다

    ‘국민과 함께’ 자비의 불빛 10만개 밝힌다

    ‘마음에 평화를 세상에 행복을’ 불기 2556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가 28일까지 전국에서 이어진다. 올해 봉축행사는 소외계층과 약자를 배려해 ‘국민과 함께’하는 행사에 초점을 맞춘 게 특징. 법요식에 소외계층을 초청해 공양의식에 동참케 하고, 이웃을 위한 희망등 달기며 난치병 어린이 돕기 거리 탁발, 자비나눔 3000배 정진기도 등 자비실천 행사가 많이 늘어났다. 봉축위원회(위원장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에 따르면 봉축기간 중 전국에서 1000여개의 관련행사가 열린다. 이 가운데 19, 20일 열리는 ‘어울림마당’과 ‘전통문화마당’은 봉축행사의 하이라이트. 19일 오후 4시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열리는 어울림마당은 연등법회를 봉행하고 연등행렬을 준비하는 행사. 연희단과 율동단들의 화려한 무대에 이어 오후 7시부터 대운동장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이 펼쳐진다. 올해 연등행렬은 연등회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더욱 알차게 진행된다. 연등회 지정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불자들이 행렬등과 전통장엄등 등 10만여개를 들고 서울 도심을 수놓는다. 특히 연등행렬에는 수박등, 팔모등, 연꽃등, 초롱등 등 전통등의 전승 맥을 보여주는 각종 등이 대거 복원돼 등장한다. 봉축위는 외국인의 참여가 늘 것에 대비해 탑골공원 사거리와 수표로에 외국인 관람 존을 설치하고, 4개 국어로 안내방송도 진행한다. 20일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서는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 외국인 등만들기대회, 연등놀이가 이어진다. 네팔과 스리랑카를 비롯한 아시아 10여개 나라가 참여하며 일본과 부탄, 방글라데시도 올해 처음으로 부스를 마련해 자국의 불교문화를 소개할 수 있게 됐다. 이 자리에선 관불의식과 길놀이, 승무, 영산재, 선무도 등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진다. 해마다 인기를 더하고 있는 외국인 등만들기에는 1000여명이 도전하며 오후 7∼9시 인사동과 조계사 앞길에서는 연등놀이가 진행된다. 28일 오전 10시 서울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과 암자에서는 봉축법요식이 일제히 봉행된다. 법요식의 화두를 ‘국민과 함께하는 법회’로 정한 봉축위는 법요식 공양의식에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정치인 의전과 축사는 생략하기로 했다. 한편 올해도 전통등 전시회가 18∼28일 서울 봉은사에서 열려 3층석탑등, 마고할멈등, 해태등, 물고기등 등 30여점이 전시된다. 15∼28일 서울 청계천 물 위에도 금강역사등, 선재동자등, 탄생불등, 연꽃등, 쌍잉어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엄등이 전시돼 시민들을 맞는다. 봉축위원회는 “올해는 부처님오신날에 앞서 연등회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봉축의 의미를 더하게 됐다.”며 “내년부터는 종단협의회 회원 종단과 힘을 합쳐 연등회의 전통을 더욱 알차게 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불 밝힌 봉축등

    불 밝힌 봉축등

    오는 28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7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봉축 점등식이 열렸다. 봉축등은 국보 제35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본떠 전통 한지로 제작됐으며 높이가 18m에 이른다.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청도에서 만난 세 가지 추억…산과 물, 인심 맑은 三淸의 땅

    청도에서 만난 세 가지 추억…산과 물, 인심 맑은 三淸의 땅

    파릇한 잎, 울긋불긋한 꽃. 산과 들이 색색으로 물듭니다. 그야말로 화양연화(花樣年華)입니다. 내 나라 안 구석구석이 가장 화사해지는 이때, 경북 청도를 찾아 나섰습니다. 산과 물, 그리고 인심이 맑아 ‘삼청(三淸)의 땅’이라고도 불리지요. 어디 맑기만 한가요. 산마루 곳곳에 살구꽃, 벚꽃이 흐드러지고, 마을 어귀의 연분홍 복사꽃은 한없이 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혹시 가을철 ‘청도 반시’의 고장으로만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청도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시인의 연정, 그리고 편지 파란 하늘. 눈이 부시다. 시골마을 내호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청마 유치환(1908~1967)에게서 5000여 통의 연서를 받았다던 여류 시인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어렵게 찾아간 이호우·이영도 시조시인 생가(등록문화재 제293호)의 대문은 그러나 굳게 잠겼다. 시인과 외사촌 사이라는 옆집 노부부의 양해를 얻어 2층 베란다에서 생가 안쪽을 살핀다. 천리향의 그윽한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뜨락엔 키 작은 풀들이 뾰족뾰족 자라고 있다. ‘ㄱ’자 모양의 담벼락 옆엔 허우대만 컸지, 도무지 튼실해 뵈지 않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필경 시인 오누이도 저 나무 아래서 술래잡기,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을 게다. 정운 이영도(1916~1976)와 유치환, 두 시인의 사랑이야기는 애틋하기 짝이 없다. 이종기 청도군청 문화관광해설사 등에 따르면 경남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청마는 같은 학교 가사교사 정운에게 마음을 빼앗겨 거의 매일같이 연서를 보내 구애했다. 1947년부터 1967년 청마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년 세월이다. 그동안 보낸 편지가 5000통을 넘는다. 청마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물같이 까딱않는데//날 어쩌란 말이냐”라고 절규하면 정운은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라고 화답했다. 하지만 청마는 이미 결혼한 몸. 정운 또한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키우는 형편이니 그 사랑이 온전하게 결실을 맺을 리 없다. 결국, 청마는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란 시를 남기고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영도 시인은 그에게 받은 편지 중 200여 통을 추려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낸다. 시인의 생가 앞쪽 길은 꼭 영화 세트장 같다. 흙으로 쌓은 담과 여닫이 나무문이 달린 ‘영신정미소’,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사료판매소’, LP판에서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중앙소리사’ 등 낡은 풍경들이 이어져 있다. 시인의 집 바로 앞은 오래된 극장 건물이다. 영사기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영화를 보려고 줄 섰던 사람들 틈에서 시인 남매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가에서 50m쯤 떨어진 강변에 오누이 공원이 조성돼 있다. 동창천과 청도천의 함수머리로, 강물은 이웃한 밀양시에 접어들면서 밀양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공원은 단출하다. 남매를 기리는 시비 두 개와 몇 그루의 벚나무, 정자 한 채가 고작이다.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화양연화(花樣年華)라 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시인의 생가가 있는 청도의 끝자락에서 안쪽으로 되짚어 가는 길이 그렇다. 살구꽃, 자두꽃이 흐드러지고, 복사꽃도 연분홍으로 물들었다. 특히 청도는 복숭아 산지로 명성이 자자한 곳. 보이느니 복숭아밭이요, 즈려 밟고 가는 땅 위는 죄다 복사꽃잎이다. ‘새마을 운동 발상지’인 신도마을 앞 능수버들의 실핏줄 같은 가지엔 초록의 기운이 완연하다. 청도는 날개 펼친 나비를 닮았다. 도시가 옆으로 펼쳐진 형국이다. 이종기 해설사에 따르면 곰티재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산동, 왼쪽은 산서 지역으로 갈린다. 각 지역의 정서도 조금씩 다르단다. 평탄한 산서 쪽과 달리 산동 쪽은 상대적으로 험하다. 초야에 묻혀 살길 원했던 양반들의 고택이 즐비하고, 운문사 등 대가람도 산동 쪽에 몰려 있다. 매전면 동산리의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295호)와 하평리 은행나무(도 기념물 109호) 등을 줄줄이 지나면 금곡리 삼거리다. 동창천 맑은 물이 흐르는 삼거리 가운데엔 삼족대(三足臺)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대유가 후학양성의 근거지로 삼았던 정자다. ‘요족하지 않아도 먹을 게 떨어지지 않고, 나이 60세 넘게 산 데다, 벼슬도 할 만큼 했으니 이만하면 족하지 않으냐.’고 길손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갈래길 어느 쪽으로 가도 운문사에 가 닿지만, 다리 건너 오른쪽 길을 ‘강추’한다. 여든여덟 칸짜리 운강고택과 만화정 등 청도를 대표하는 고택과 정자가 죄다 이 길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선암서원도 잊지 말고 돌아봐야 한다. 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 지나치기 십상이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크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건물마다 세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신지리와 이웃한 임당리 마을의 김씨 고택도 독특하다. 임진왜란 직전부터 16대에 걸쳐 내시(內侍)들이 살았던 고택이다. 성이 다른 내시를 양자로 들이다가 18대 이후부터 자식을 통해 대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세상 모든 존재에게 진리를 발걸음을 채근해 신라 고찰 운문사로 향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이다. 가람 초입, 수백m 늘어선 솔숲이 객을 맞고 있다. 자태 단아하고 공기는 청량하다. 소나무 사이사이 진달래가 활짝 피어 화사함을 더하고 있다. 운문사에 들기 전, 꼭 찾아야 할 곳이 북대암이다. 솔숲 진입로를 지나면 왼편에 북대암 오르는 길이 나온다. 산자락 8부 능선까지 차로 오를 수 있으나, 그 뒤로도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북대암에 서면 운문사 대가람의 전경이 발아래 펼쳐진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인 동시에 수백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4년제 승가대학이다. 여승들의 수도 도량답게 깔끔하면서도 화사하다. 하지만 객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은 여느 사찰에 견줘 매우 적다. 운문사에선 ‘사물’소리를 꼭 들어야 한다. 가죽 있는 축생에게 진리를 전한다는 ‘법고’, 물속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목어’, 하늘을 나는 새와 허공을 헤매는 영혼을 천도하는 쇠로 된 ‘운판’, 지옥의 중생까지 제도한다는 ‘범종’을 통틀어 ‘사물’이라고 부른다. 새벽예불 직전과 저녁 공양 이후(오후 5시 45분경) 사찰 입구의 2층 종각에서 울려 퍼지는 사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운문사는 법보의 보고이기도 하다. 비로전(보물 제835호), 삼층석탑(678호) 등 보물이 7개다. 만세루 옆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180호)이다. 이 나무는 해마다 음력 삼월삼짇날 막걸리 12말을 받아먹고 기를 보충한다. 글 사진 청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중부내륙고속도로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대구JC에서 신대구~부산간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청도나들목으로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 매화로 유명한 삼랑진 나들목에서 되짚어 올라오는 것도 좋다. ▶맛집:청도읍 한재미나리마을은 평일에도 식도락가들로 북적댄다. 방문객이 돼지, 오리고기를 사와 농가 미나리밭에서 구워 먹는다. 미나리 한 접시에 1만원 안팎이다. 마을 초입에 미나리와 고기 일체를 파는 일반 식당도 즐비하다. 청도역 앞은 추어탕 거리다. 원조 청도추어탕(371-5510) 등이 알려졌다. 금천면 동곡리의 강남반점(373-1569)은 ‘스님짜장·짬뽕’으로 입소문이 났다. ▶잘 곳:비슬리조트관광농원(372-0900)은 한국관광공사 지정 ‘굿스테이’ 업소다. 각북면에 있다. 선암서원(070-4150-8445)은 한옥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 백제의 자취 간직한 충남 부여속으로

    백제의 자취 간직한 충남 부여속으로

    1400여년 전 고구려·신라와 세력을 다투며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가 123년간 수도로 삼았던 곳이 있다. 지금의 충남 부여군이 바로 그곳. 부여는 백마강(부여를 지나는 금강을 일컫는 이름)의 왼편, 부소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부여에는 검소하면서도 화려했던 백제의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당연합군에 대항한 백제 장군들의 혼을 달래 주는 은산별신제를 비롯해 왕궁터로 추정되는 사비왕궁터 발굴 작업도 한창이다. 1400여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백제의 역사를 품고 흐른 백마강과 백제가 멸망하던 날 꽃잎 날리듯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은 궁녀의 전설이 깃든 낙화암까지…. 20일까지 매일 밤 9시 30분에 방영되는 EBS 한국기행 제작진은 봄기운이 젖어든 백제의 땅 부여에서 살아 가는 부여인들의 삶과 정취를 카메라에 담았다. 17일 방영되는 ‘백제의 향기’ 편에서는 백제의 오랜 향기가 남아 있는 부여의 곳곳을 살펴본다. 부여의 중심지인 부여읍에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있다. 백제의 세련되고 뛰어난 건축 기술이 석탑에 녹아 있어 백제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부여군 관북리에서는 사비시대 왕궁터로 추정되는 사비왕궁지구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백제의 잠든 흔적들을 일깨우는 역사적인 작업이다. 백제인들의 웅장한 장례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능산리 고분군과 무왕이 선화공주를 위해 만들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궁남지까지…. 제작진은 백제의 향기가 가시지 않은 흔적을 전한다. 18일 방영되는 ‘산에, 언덕에 봄이 오면’ 편에선 부여군 옥산면 중양리 언덕에 찾아온 봄을 알리는 반가운 산나물들을 소개한다. 향과 맛이 독특한 쑥과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인 돌미나리. 밀가루와 함께 쪄낸 쑥버무리와 살짝 데쳐 조물조물 무친 돌미나리 무침이 입 안 가득 봄의 향을 채운다. 겨울을 이기고 봄을 알리는 부여의 또 다른 손님은 맥문동. 부여군 은산면 장벌리는 우리나라 맥문동의 주산지로, 제철을 맞아 수확 작업이 한창이다. 백합과의 여러살이풀인 맥문동은 뿌리 끝의 땅콩처럼 생긴 알을 말려서 한약재로 쓰고 있다. 맥문동으로 끓여낸 맥문동 백숙과 맥문동으로 우려낸 맥문동 차는 봄철 건강을 책임지는 든든한 보양식이다. 봄의 향이 가득한 부여에서 봄의 맛을 맛본다. 19일 방송에선 부여 사람들의 정감 넘치는 살림살이를, 20일엔 백제의 깊은 역사를 품고 고요히 흐르는 백마강길을 이재무 시인과 함께 거닐어 본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신라로 넘어온 헤라클레스 금강역사·사천왕으로 변신”

    “신라로 넘어온 헤라클레스 금강역사·사천왕으로 변신”

    수천 년 전 동양과 서양이 교류했는지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가장 빠르게 흔적을 찾는 방법은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특히 문화재에는 정복이나 경제적 교류의 증거들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랫동안 문화재 담당기자를 했던 서동철 서울신문 경영기획실장이 펴낸 ‘오래된 지금’(생각처럼 펴냄)은 동서 문화의 교류현장이 문화재에 어떻게 기록됐는지를 잘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인도문화, 신라불교에 스며들어 동양에서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그 기원은 1~2세기경에 제작된 간다라 불상 조각이다. 런던 영국박물관의 아시아미술관에는 부처님의 수행원인 금강역사로 ‘제우스의 벼락을 든 헤라클레스’가 나타난 조각이 전시돼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금강역사도 곱슬머리의 그리스 귀족의 모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BC 327년에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일대를 정복했다. 독자적인 예술전통이 없었던 인도 북부의 유목민은 간다라에 도시를 이루고 살던 그리스인들의 전통을 쉽게 수용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헤라클레스를 집안의 시조로 떠받들었기 때문에 정복전쟁을 벌일 때 사자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다녔는데, 그 모습 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메아 계곡에서 30일 밤낮으로 사자의 목을 졸라 죽인 뒤 그 사자의 가죽을 쓰고 다녔는데 여기서 모티브를 받은 것이다. 쿠샨 왕조의 간다라 불상 조각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 문화가 합쳐져 알렉산더 대왕 또는 헤라클레스가 간다라 미술에서 부처를 호위하는 금강역사가 된다. 금강역사가 된 헤라클레스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헤라클레스는 한반도로 오면서, 금강역사가 되기도 하고 사천왕으로도 변신한다. 신라 문무왕이 682년 세운 경주 감은사 석탑의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 나타났다. 1203년 지어진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금강역사는 올리브 몽둥이를 든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이미지가 강하다. 사자로 대표되는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는 통일신라 이후에 줄곧 사천왕상에 흔적을 남겼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봉은사의 목조 사천왕상의 서방광목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봉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여문의 사천왕상은 배에 사자머리가 장식됐고, 어깨 장식에도 사자가 나온다. ●수로왕릉 ‘쌍어문’은 메소포타미아 영향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릉 묘역에 들어가는 삼문 문설주에는 물고기 한 쌍이 마주 보게 그려진 ‘쌍어문’이 있다. 이 쌍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신어(神魚)사상의 표현으로 신라가 인도와 교류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다. 수로 왕비가 된 허황옥은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돛단배로 가락국 해안에 도착해 “가락 국왕 수로는 하늘이 보낸 왕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고 말하고, 가락국의 왕비가 됐다. ‘삼국유사’에 허황옥 공주의 고향은 인도 아유타국으로 나오는데, 1977년 아동문학가 이종기가 인도 아요디아의 수많은 건물에서 쌍어문이 새겨진 것을 보고, 수로왕릉과 연결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다. 인도의 아유타국은 인도의 아요디아였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어는 인도-중국-한반도-일본으로 연결된다. 이 연결을 따라가다 보면 아프리카 동쪽 해변의 인류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확산됐는지 그 경로를 찾을 수 있다고 서 실장은 말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석공의 흔적은 역사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흐른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은 신라로 건너와 석가탑을 만들었다. 아내 아사녀는 천리길을 달려와 탑의 그림자를 기다리다 지쳐 연못에 빠져 죽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아사달은 연못에 다가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는 아내의 모습을 앞산 바위에 새기며 뼈 아픈 한을 달랬다. 그러다가 ‘아사녀! 아사녀!’를 외치며 연못에 빠졌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고 했고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했다. 석공의 슬픈 전설은 지금도 그렇게 전해진다. 이렇듯 신라시대의 석공은 많은 전설과 함께 오늘날의 ‘국보’와 ‘보물’이란 이름으로 우리들과 만나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7년 처음으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120호) 석장(石匠) 부문을 신설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석공예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때 석조각 공예가 이재순(57)씨가 국내 최초로 무형문화재 석장이 됐다. 이씨는 김진영 선생의 제자로 경복궁의 석조물을 조각한 이세욱·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는 석조각계의 대가였기에 이 계통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씨는 요즘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숭례문 복원작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성곽 복원 전체 공정 중 85%가 진행됐고 오는 7월이면 거의 끝날 예정이다. 그는 12살 때부터 돌과 인연을 맺어 올해로 석조각 인생 45년째이다. 지난 26일 오후 경기 구리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입구에는 10여m 높이의 미륵상을 비롯해 사자상, 부처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돌이지만 다들 저마다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완성품도 있었고 아직 덜된 작품도 있었지만 다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습들이었다. 꽃샘추위를 담은 바람이 잠시 밀려왔다. 작은 부처상한테 물었다. “춥지 않으세요.”라고 했더니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여.”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궁…. # 성곽 85% 복원… 옛 석공의 번뇌 읽다 그러는 참에 웃으면서 나타난 이씨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요새 무슨 일로 바쁘냐고 했더니 숭례문 복원공사 얘기가 나온다. “숭례문 성곽 복원이 85% 정도 완료됐습니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의 길이를 대부분 복원했지요. 기나긴 세월의 풍화를 읽으면서 하는 작업이 정말로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 옛날 석공들의 고뇌와 번민 등 그런 부분을 알고 그대로 재현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씨는 석공 선현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숭례문에 쌓아 올려진 돌, 그러니까 오랜 세월을 간직한 유물들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비오는 날이었다. 돌에 구멍이 있었는데 빗방울에 의해 구멍이 뚫렸다. 이 순간 이집트의 신전이 생각났다. 커다란 돌을 옮겼던 기억이었다. 정사각형의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자리 이동을 해 벽을 쌓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숭례문 돌 모양들이 아주 자연 친화적으로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돌 가운데 구멍 뚫어 옮긴 흔적 발견 “숭례문에 있는 돌들은 아무렇게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하면서 그에 맞게끔 친자연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석수(都石手)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도편수는 그동안 많이 나왔지만 도석수라는 말은 이번 복원공사에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아마 당시 도석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관리 정도로 여겨집니다. 또한 돌마다 가진 물과의 관계, 즉 비가 오면 물이 밖으로 새도록 하는 등 아주 과학적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돌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점에 눈길이 쏠렸다. 얼핏 보면 부자연스럽고 서로 맞추기도 힘들 법한데 퇴물림 형식으로 쌓아놓은 돌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씨는 그런 돌을 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묻고 또 물었다. “선조들이 어떻게 돌을 다뤘으며, 또 어떻게 생각했을 것이란 상상을 하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중간중간에 놓인 장돌들을 볼 때에는 더욱 그랬지요. 위아래에서 누르는 압력을 장돌을 통해 견디도록 하는 지혜에 참으로 경탄했습니다.”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씨는 “(방화사건 직후) 처음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화재의 기운과 접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몇몇이 피부병에 걸렸을 정도였다.”면서 하지만 다들(20여명) 숭례문 복원공사가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했다고 술회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우리는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기계적으로 손을 대는 바람에 오히려 화재나 사고 등에 대해서는 무심했습니다. 정작 보존과 관리에 대해서는 진정성 없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아마 숭례문 복원은 이런 것들을 전부 고민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 都石手가 있었음을 처음 알게 돼 이씨는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앞에 언급한 도석수라는 단어였다. 원래 도편수라는 말은 있었지만 도석수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면서 선조의 존엄성을 몸소 느꼈던 것. 또한 부석소(浮石所), 즉 지금의 채석장을 두고 돌 문화 창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특히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것을 대비해 정교하게 빗물을 흘려보내는 것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을 깨는 방법이나 돌을 다듬는 방법이 정말 과학적이며 친자연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이동시켰다는 걸 알고 놀랐지요. 대체로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사방에 밧줄을 연결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밧줄을 빼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생깁니다. 그런데 숭례문의 돌을 보면서 이런 과정까지 염려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흔들림 방지, 비 올 때 물의 흐름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를 숭례문 복원 공사를 통해 깨달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씨는 이런 점을 소중히 메모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수할 책을 준비하고 있다. “옛날에는 돌을 다루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석공들 또한 자부심이 강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돌이 안 들어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소중한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돌의 미학, 석공의 예술을 책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이씨가 그동안 제작한 작품은 2000여점에 이른다. 전국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그의 손때가 대부분 묻어 있다.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일본 덕정사, 타이완 기륭 자항기념당, 프랑스 파리 7대학 등에도 이씨의 작품이 보관돼 있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일화 한토막. 2005년 일제가 가져간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비)의 환수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재청에서 북관대첩비가 환수될 때를 대비해 좌대와 옥개석을 복원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북관대첩비는 무사히 반환돼 남한을 거쳐 북으로 돌아갔다. 이때 북관대첩비는 이씨가 복원한 옥개석을 머리에 인 채 북한 국보 193호로 지정돼 북한으로 갔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돌을 만지는 장인으로서 더없는 영광이 아니냐.”고 말한다. # 선조의 지혜 책으로 펴낼 계획도 이씨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12살 때부터 외삼촌에게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평소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팽이, 썰매 등 전통 놀이기구 제작에 솜씨를 발휘했다. 그러던중 1970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스승 김씨는 40년간 석조계에 몸담은 베테랑으로 조선 철종, 헌종 시대 경복궁의 해태상 등을 조각한 이세욱 선생과 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이씨는 스승 김씨한테 10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을 따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보수작업을 하면서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으며 그 덕분에 불교미술 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돌 분야는 할 일이 많습니다. 현대와 전통을 접목시키는 것도 중요하고요. 사실 이제야 돌을 만지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돌은 정직합니다. 화난 사람이 돌을 마주하면 돌도 화가 나 있고, 예쁘게 돌을 보면 돌 또한 예쁜 대답을 합니다. 돌에는 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도 정이 많잖아요. ” 선임기자 km@seoul.co.kr 열두 살 때부터 돌 잡아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 1호 지정 1956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12살 때 석공이었던 외삼촌에게 돌을 고르는 일을 배웠다. 문화재 공사현장을 다닌 것도 이때부터. 이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한테 돌을 다듬는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다. 전국 기능인경기대회에서 연속 2회 금메달과 함께 한국문화재기능협회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지정됐다. 1995년 타이완의 자항기념당에서 석굴암보다 더 큰 석상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현재 부도를 비롯한 석조물의 복원과 정비, 각종 석조물의 해체 및 보수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성곽의 해체 및 복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본 오사카 보암사 석가노미불(1999), 경북 영주 석륜선원 부처 진사리석탑(2000),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기하형체(1977),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소상(1983), 북관대첩비 갑석(2005) 등 2000여점이 있다.
  • “돌사자 원래 위치에 놓고 일제 강탈 고발해야”

    “돌사자 원래 위치에 놓고 일제 강탈 고발해야”

    “다보탑 돌사자는 전통적 미술양식으로 볼 때에도 반드시 네 귀퉁이에 있어야 합니다. 국보 35호 화엄사 3층석탑,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의 경우 모두 네 귀퉁이에 돌사자가 위치해 있지요. 현재의 다보탑 돌사자처럼 중앙에 위치한 경우는 미술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원래의 자리인 귀퉁이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다보탑 돌사자의 위치 오류를 서울신문을 통해 지적한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은 21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문화재의 역사성’을 새삼 강조했다. 다보탑의 돌사자 중 3구가 일제에 의해 수탈되고 하나가 남았다면 현재의 중앙이 아닌 원래의 위치에서 사실 그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문화재란 수많은 세월을 함께하면서 가치를 더하는 것이기에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현장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불국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도 일제가 저지른 반문화적 행위에 대해 분명히 고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원위치 이동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돌사자 1구만 원위치에 있으면 미관상 좋지 않아 중앙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일부 의견에 대해서는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세월의 풍상 속에 3구의 돌사자가 사라졌지만 나머지 1구의 돌사자가 제자리를 찾는다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잘못을 고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1960년대 당시 문화재 보존정책이 지금처럼 학문적 고증을 거쳐 이뤄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의 실수를 변명하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화재 보존 및 복원에 있어서 ‘원형 보존’을 최고의 가치로 내걸고 있는 문화재청은 원위치가 확인된 돌사자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용만 두산 회장 등 3명 금탑산업훈장

    박용만 두산 회장 등 3명 금탑산업훈장

    박용만 ㈜두산 회장과 정윤택 ㈜효성 사장, 노희찬 삼일방직㈜ 회장이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제39회 상공의 날 기념식’을 열고 상공업 발전에 공이 큰 247명을 포상했다. 박 회장은 2000년 매출 2조원 규모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해 10년 만에 매출 9조원대의 글로벌 톱 3 기업으로 육성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 사장은 효성그룹의 글로벌 전략을 진두지휘해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 중전기기 제품 분야를 세계 1위로 성장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노 회장은 39년 섬유업에 종사하면서 지속적인 설비 투자와 연구 개발을 통해 회사를 고강력 레이온사 부문의 세계 2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탑산업훈장은 현대자동차㈜ 김충호 사장이 받았고 동탑산업훈장은 경남스틸㈜ 최충경 대표와 현대제철㈜ 홍승수 부사장이 받았다. 철탑산업훈장은 ㈜신창메디컬의 김용창 대표와 세운철강㈜의 신종택 대표에게 돌아갔고 석탑산업훈장은 ㈜구영테크의 이희화 대표와 ㈜우주일텍트로닉스의 노영백 대표가 받았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돌사자 4마리”… 나머지 3마리 어디갔나

    “돌사자 4마리”… 나머지 3마리 어디갔나

    경주 불국사의 국보 20호 다보탑 돌사자의 기구한 운명은 일제 침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문화재청이 2011년 낸 ‘불국사 다보탑 수리 보고서’에 따르면 도쿄대 교수를 지낸 세키노 다다시가 작성한 ‘한국건축조사보고’(1904년 간행)에 “다보탑 기단 모서리 4곳에 돌사자가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일제 병탄 직전까지는 돌사자 4마리가 온전히 제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돌사자의 위치는 세키노가 1916년부터 1935년까지 펴낸 15책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세키노는 1909년부터 1912년 사이에 조선의 문화유적을 한 차례 더 조사한 뒤 ‘조선의 건축과 예술’을 내는데 거기에 “다보탑의 돌사자 1쌍이 없어졌다.”고 기록했다. 나머지 2마리 중 1마리에 대해선 작가 현진건이 1929년 동아일보에 쓴 ‘고도순례 경주’란 칼럼에서 밝히고 있다. 현진건은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500만원을 주어야 내놓겠다고 하던가?”라고 적고 있다. 즉 1925년 이전까지 돌사자 4마리 가운데 3마리가 수탈돼 해외로 반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1마리는 어떻게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가. 수리 보고서는 “사자상의 경우 정수리, 꼬리, 입, 가슴 부위, 남측 다리와 발가락 등이 파손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지금 다보탑에 남아 있는 돌사자는 얼굴에 난 상처 덕분에 제자리를 지키게 됐다.”고 설명했다. 훼손됐다는 이유로 다행히 수탈을 면한 1마리는 1936~1944년 사이의 기록을 보면 불국사 극락전 앞에 있었다. 수탈을 위해 다보탑 기단에서 끌어내렸으나 훼손된 것을 알고는 극락전 앞에 방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돌사자는 광복 이후 원위치인 기단의 모서리에 배치된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의 다보탑 복원 공사 때 1마리만 모서리에 있는 모양이 어색하다고 판단한 불국사 측이 공사팀과 상의해 지금의 기단 서쪽 중앙부로 옮겨놓았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국립경주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복제품 다보탑은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이전의 다보탑을 그대로 살려놓은 모습이다. 경주박물관은 안내문에서 “분황사 석탑이나 화엄사 사사자석탑, 흥덕왕릉에 있는 사자 네 마리가 모두 네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다보탑도 네 귀퉁이에 불법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사자를 배치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보탑 돌사자 이동이 확정되면 다보탑이 들어가 있는 현행 10원 주화를 비롯해 역사 교과서, 국가 기증품 등의 수정, 이동이 불가피하다. 10원 주화는 다보탑을 기본 문양으로 1966년 8월 처음 발행한 데 이어 1970년, 1983년, 2006년 등 4차례 도안을 바꿔 가며 45년간 총 72억개를 발행했다. 1966년과 1970년에 발행한 주화는 다보탑을 정면에서 바라본 도안을 채택했는데 이 도안에는 돌사자가 없다가 1983년 발행분부터 지금의 다보탑처럼 기단의 중앙부에 돌사자가 들어갔다. 한국은행은 천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에 있던 도산서원의 금송(錦松)이 일본풍이라는 논란에 휩싸이자 2007년 1월 신권 발행 때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로 대체한 바 있다. 10원 주화 외에도 우리 정부가 칠레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해 칠레 수도 산티아고 리베라수르공원에 기증한 다보탑에도 돌사자의 위치가 잘못돼 있다. 또한 올해 2쇄를 낸 비상교육의 검정교과서 ‘중학교 역사(상)’의 101쪽에도 지금의 다보탑 사진이 실려 있다. 김문·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문화재 환수운동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스님

    [저자와 차 한 잔] 문화재 환수운동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스님

    2012년 2월 13일 창덕궁 앞 석등이 사라졌다. 멀쩡하던 석등이 왜 없어졌을까. 창덕궁에 달려 있는 우리 문화재로 착각했던 그 석등이 실은 일본풍 장식물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설치한 것일까. “1970년대 궁궐 주변 정비를 위해 설치한 펜스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화재청의 기가 막힌 대답. 석등의 오류를 지적하고 철거를 이끌어 낸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대표 혜문 스님이 얼마 전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작은숲 펴냄)를 출간했다.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의 환수를 주도하는 활동가답게 책은 시종 우리의 신물(神物)인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 문화재를 지켜 내야 할 당국의 무신경을 콕콕 집어낸다. 창덕궁 석등과 비슷한 사례가 일본식 석등을 어깨에 인 청와대 정문(사진①)이란 게 혜문 스님의 주장이다. 그는 “석등은 조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자(死者)의 영혼을 위로하거나 부처님께 공양을 하기 위한 법구(法具)로 우리나라에선 사찰이나 능묘에서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 신사에서나 있을 법한 석등은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의 그것(②)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분개한다. 청와대에는 지난 2월 하순 석등 철거에 관한 요청이 접수됐다고 한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지만 돌아오는 광복절 전까지 청와대가 철거하지 않으면 행정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2004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뛰어든 혜문 스님은 평생 50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포함해 16가지는 이뤘다.”는 그는 남은 34가지 중 우선적으로 해결할 ‘4대 목표’를 소개했다. 조선 왕실에서 전래되던 제왕의 투구,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석탑, 고려시대의 사리와 사리구, 금강산 종이다. 제왕의 투구는 일본 도쿄의 국립박물관, 두 석탑은 도쿄의 오쿠라호텔 정원, 사리구 등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 금강산 종은 중국 다롄에 있다. “남의 나라 왕실의 투구나 석탑, 사리를 그들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 우리 것이 제자리를 잡도록 찾아와야 한다는, 듣다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지금까지 왜 아무런 자각이 없었을까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게 없거나 엉뚱한 자리에 있는 것들이 유난하게 잘 보이는 신묘한 눈을 가졌냐고 물었더니 “이 일을 하다 보면 법력이 생겨 절로 보인다.”며 웃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눈을 부릅뜨고, 발로 뛰어 확인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일본식 배열을 한 석등, 환구단의 일본풍 석등, 비틀어진 광화문 등 그가 지적하는 문화재 오류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우리 것을 찾아내고 갈고 닦아 제대로 후손에 전해 줘야 할 문화재청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의 권위적이고, 한편으론 태평한 태도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보통 사람이 알기 힘든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는 고집이 우리 문화재의 오류, 오해를 낳는다.”고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과연 가능할까 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의 환국이 현실이 된 것처럼 다른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될 우리의 문화 유산은 찾아와야 하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는 혜문 스님. 제자리를 찾는다는 환지본처(還至本處)의 뜻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글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秋史도 반했던 금석문… 신라시대 창림사 석탑 발원기 발견

    秋史도 반했던 금석문… 신라시대 창림사 석탑 발원기 발견

    신라 제46대 문성왕 17년(855) 지금의 경주 남산 창림사에 삼층석탑을 건립하면서 조성 내력을 적어 봉안한 발원기가 발견됐다. 이 발원기는 1824년 석공(石工)이 창림사 삼층석탑을 무너뜨릴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당시 금석학의 대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글자를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이후 추사의 발원기 모사본은 조선총독부가 경주 남산 일대 불적(佛蹟·불교유적)을 조사하고 성과를 묶어 정리한 보고서 ‘경주 남산의 불적’(1940년)에 수록됐지만, 발원기의 실물 행방은 묘연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산하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미등 스님)는 ‘한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사업’ 중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서 문제의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를 발견했다고 28일 밝혔다. 이 발원기는 문성왕(재위 839~857)이 대중(大中) 3년(855)에 탑을 세우면서 납입한 금동판 형태의 발원문으로 밝혀졌다. ‘경응’(慶膺)은 문성왕의 생전 이름이며 무구정(無垢淨)은 통일신라시대에 탑을 세우는 근거가 된 불교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의미한다. 이 발원기는 세로 22.4×가로 38.2㎝, 두께 0.08㎝의 순동에 금을 입힌 판형이다. 앞뒷면에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발원 내용, 조탑(造塔)에 관여한 인물들을 기록했다. 이 발원기는 경기 화성시 용주사(龍珠寺) 말사인 이천시의 영원사(靈源寺)에서 1968년 대웅전을 해체하다가 기단에서 발견된 것으로 밝혀졌다. 발견 이후 줄곧 영원사에 비장(秘藏)되다가 지난해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기탁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6)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6)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사람의 시간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긴 세월을 살아가는 나무의 침묵은 언제나 견고하다. 역사의 침묵을 닮았다. 결코 스스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과거에 대한 관심에 기대어서야 비로소 숱한 사실들이 생명을 얻고 일어난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침묵하는 생명이지만, 그를 둘러싸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은 마침내 나무가 세월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지나온 많은 이야기들을 드러내게 한다. 이 땅의 큰 나무를 찾아보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결국 사람의 역사를 찾아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현재의 질문들이 긴 역사를 풀어내고, 나무의 견고한 침묵도 깨뜨릴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나무를 찾아야 하는 확실한 이유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옛 절집… 오롯이 그 곁을 지키다 남도 끝자락, 진도의 임회면 상만리에는 내력이 정확하지 않은 절터가 있다. 흔히 ‘상만사지’(上萬寺址)라고 부르는 폐사지다. 한때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했을 전각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남은 건 오로지 오층석탑 한 기뿐이다. 사라진 옛 절집의 이름도, 그 절을 스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그곳에 비구니 스님의 절집, ‘구암사’가 있다. “탑이 남아 있어서 절터라고 짐작할 수는 있지만, 절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어요. 1950년대 초반에 마을 사람들이 근처의 밭에서 돌부처를 찾았다고 해요. 그때 초가를 지어 절을 일으키고, ‘만흥사’라고 한 게 구암사의 시작이에요.” 아담한 절집 구암사의 용운(庸芸) 스님은 세월 속에 흩어진 구암사의 토막난 역사를 퍼즐 맞추듯 가만가만 꿰어 맞춘다. 그러나 빈 자리는 여전히 크기만 하다. 밭에 나동그라져 있던 돌부처 외에 절집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을이 상만리여서 사라진 옛 절을 상만사라고 하는 건데 근거는 없어요. 그보다는 구암사라는 이름이 맞지않나 싶어요. 진도 향토사에는 아주 옛날에 구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에 있던 절인지는 모르죠. 그런데 이 뒷산의 바위를 마을에서 ‘비둘기 바위’라고 부르더군요. 그렇다면 비둘기바위라는 뜻의 이름인 구암(鳩巖)사는 이곳에 있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절집은 사라졌지만, 그 부침의 역사를 지켜본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비자나무다. 전하는 이야기처럼 옛 절집이 사라지기 전부터 있던 나무라면 필경 절집 앞마당, 최소한 담벼락쯤에 있던 나무라고 볼 수 있다. 절집의 자취가 없어 지금은 마을 당산나무, 혹은 ‘천연기념물 제111호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라고 부른다. #넉넉하지 않은 시절 영양간식으로 비자나무 심어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는 구암사가 깃든 그 비둘기 바위와 마을 사이의 언덕 길가에 서 있는 큰 나무다.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옛 절과 이 나무가 일정한 관계를 가졌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절집에 주석(駐錫)한 스님이 직접 심고 키운 나무까지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절집의 흥망성쇠를 또렷이 지켜본 나무임에는 틀림없다. 절집의 흔적인 오층석탑은 대략 고려 후기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바탕으로, 사라진 사찰의 역사는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오래됐다고 보아야 한다. 1000년쯤 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근거다. 오층석탑에서 불과 100m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비자나무는 600년쯤 이 자리에서 살아왔다. 적잖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큰 절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 결코 모자란 세월이 아니다. 누구도 그 시절의 자취를 알 수 없지만, 나무는 필경 이 자리에서 절집의 살림살이를 빤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비자나무는 남부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예전에는 절집의 스님들이 공들여 키운 나무로 알려져 있다. 비자 열매는 영양이 풍부해서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에 좋은 간식거리였을 뿐 아니라, 구충제 성분까지 갖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스님들은 비자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둬서 절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장성 백양사, 고흥 금탑사, 화순 개천사 등의 비자나무 숲이 모두 그런 까닭으로 스님들이 조성한 곳이다. “비자나무에 대한 기록도 있을 리가 없지요. 나무가 있는 위치를 절집 마당쯤으로 볼 수도 있다지만, 사실 절집의 위치가 정확한 건 아니거든요. 비자나무와 옛 절과의 관계는 어떤 내용으로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2m 옹골찬 품… 마을의 쉼터이자 수호신으로 상만리 비자나무는 키가 12m쯤 되고 가슴높이에서 잰 줄기의 둘레는 6.5m, 밑동 부분의 둘레는 7.5m 가까이 된다. 얼핏 봐서 그리 큰 나무는 아니지만, 유난히 옹골찬 수형을 가졌다. 키에 비해 굵직한 줄기는 물론이고 나뭇가지도 매우 촘촘하게 돋았으며, 사철 푸르름을 유지하는 바늘잎도 무성하다. 사방으로 펼친 품 또한 만만치 않다. 동서 방향으로 12m, 남북으로는 8m를 펼친 품은 무척 넉넉한 모습이다. 절집의 기억을 줄기 안 깊숙이 간직한 채 나무는 이제 마을의 정자나무로 살아간다. 나무 줄기에 바짝 붙여 놓은 평상은 십여 년째 그대로다. 나무는 마을의 쉼터이면서 사람들의 안녕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매달렸다가 떨어져도 별로 다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을 위할 줄 아는 나무라는 이야기다. 용운 스님도 한마디 덧붙인다. “비자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잘 거둬서 이용하는 모양이에요. 옛날에는 당산제도 지내고 나무 앞에서 줄다리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안 해요.” 종종 세월은 사람살이의 흔적을 송두리째 삼키곤 한다. 그러나 세월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나무는 사람살이를 지킨다. 옛 절터에 살아남은 비자나무의 속내가 점점 더 궁금해지는 이유다. 글 사진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681-1: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인 진도대교를 건넌 뒤 ‘진도대로’로 불리는 국도 18호선을 이용해 진도군청이 있는 진도읍까지 간다. 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5㎞쯤 가면 임회면으로 들어서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2.5㎞ 더 가면 다시 진도대로와 만나게 되는데, 오른쪽 길을 이용해 6㎞ 가면 송월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좌회전하여 1.5㎞ 가면 상만리에 이른다. 나무는 왼편의 마을 안쪽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350m쯤 들어가면 있다.
  • 강서둘레길 개화산 구간 3.35㎞ 개방

    강서둘레길 개화산 구간 3.35㎞ 개방

    새해를 맞아 강서둘레길 개화산 구간이 개통돼 주민들에게 선보인다. 강서구는 강서둘레길 개화산 구간 3.35㎞의 조성 공사가 끝나면서 5일부터 주민들에게 개방한다고 4일 밝혔다. 구는 지난해 10월 개화산 구간 공사를 시작해 5억원을 들여 산책로에 목재데크와 전망대, 휴게공간, 숲속쉼터 등을 만들었다. 시설물 명칭은 홈페이지를 통한 설문조사와 향토사학자 자문을 거쳐 개화산 전망대, 봉화정, 아라뱃길 전망대, 숲속쉼터, 신선바위, 하늘길 전망대, 심정 쉼터 등으로 확정했다. 산책 코스는 방화근린공원에서 시작해 개화산 약사사와 전망대, 정상을 지나 호국충혼비, 풍산심씨사당을 거쳐 다시 방화근린공원으로 이어지며, 1시간 10분가량 걸린다. 약사사에서는 지름 1m의 화강암으로 제작된 높이 3.3m의 석불과 3층 석탑을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건축 변천 과정을 느낄 수 있다. 해맞이 명소로 주민들이 자주 찾는 정상에서는 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조선시대 공신인 풍산심씨 50여개의 묘역도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6개의 분묘와 묘비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구는 둘레길 건설에 태풍 피해목과 고사목 등을 재활용해 야외 탁자와 의자, 계단 등을 만들어 480여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1억 7000만원의 예산도 절감했다. 노현송 구청장은 “지난해 강서둘레길이 서울시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된 만큼 여가 생활과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는 마음으로 꼼꼼히 만들었다.”면서 “나머지 2, 3단계 구간도 주민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자연과 하나되는 녹색도시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1) 해남 두륜산 천년수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1) 해남 두륜산 천년수

    해를 가리키는 네 자리 숫자 가운데 한 자리만 바뀌었지만, 새해가 되면 늘 새로운 마음으로 부풀게 마련이다. 설레는 마음 한편에는 분명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담겨 있다. 한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채 이루지 못한 사람살이의 꿈이 남기 때문이다. 결국 넘어가는 해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세월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달력을 바꿔 걸 즈음이면 새해의 설렘과 함께 지난해에 대한 안타까움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지는 해를 붙들어 안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적지 않은 게 사람살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산꼭대기의 절터에 홀로 남아 “두륜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있어요. 해를 붙잡아 두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있거든요.” 전남 해남의 대흥사 주차장 앞에 자리한 식당 주인의 너스레다. 그는 환하게 웃음 지으며 두륜산 정상에 서 있는 신비의 나무 ‘천년수’를 천천히 소개했다. “올라가서 보면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예요. 1200년이나 됐다니까요. 높이 뻗은 나뭇가지가 산을 넘는 해를 붙잡고도 남죠. 나이 먹기 싫으면 그 나무에 해를 붙잡아 놓으면 돼요.” 대흥사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두륜산 천년수는 이름처럼 1000년을 넘게 산 매우 큰 느티나무다. 대개의 느티나무가 마을 어귀에서 살아가는 것과 달리 산 꼭대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1000년이라는 믿기 어려운 나이와 해를 붙잡아 둔다는 전설까지,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나무다. 천년수가 있는 자리는 천년고찰 대흥사의 산내 암자인 만일암 마당이다. 만일암은 17세기 후반에 지은 대흥사의 산내 암자라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더구나 만일암의 모든 전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우 고려 때의 석탑 양식을 볼 수 있는 오층석탑만 남아 있을 뿐인 폐사지다. 그 만일암 터 바로 앞, 암자가 있던 시절이라면 법당 앞마당쯤 되는 자리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바로 해를 붙잡아 둘 만큼 큰 천년수다. 만일암이 있던 시절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암자가 사라지면서 한 그루는 죽어 없어졌다.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늙은 나무 천년수를 찾아가려면 대흥사를 거쳐 해발 703m인 두륜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오르는 길은 비교적 가파르다. 두 시간쯤 산길을 올라 정상인 가련봉 가까이에 이르면 만일암 터를 찾을 수 있다. 한 기의 초라한 오층석탑만이 옛 자취를 보여주는 쓸쓸한 폐사지 아래쪽으로는 무성한 대숲이 이어졌다. 천년수는 그 대숲 길 20m쯤 아래에 있다. 무려 1200살이나 된 느티나무다. 산림청 보호수로 등록된 느티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나이가 많다. 규모도 식당 주인의 표현처럼 어마어마하다. 키가 22m나 되고, 가슴높이에서 잰 줄기둘레도 9.6m나 된다. 천연기념물 가운데 가장 큰 느티나무인 전남 장성의 단전리 느티나무보다 2m나 키가 더 크다. 줄기둘레는 10.5m인 단전리 느티나무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이지만, 한눈에도 그 장대한 규모에 감탄사를 내놓을 만하다. 비좁은 자리에서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15m나 펼쳐서 실제보다 더 우람해 보인다. 산 정상 가까이에서 이처럼 큰 나무를 만날 수 있다는 건 뜻밖이지 않을 수 없다. 나무와 어우러지는 주변 풍광을 함께 바라보기 위해서 물러설 공간도 없다. 나무를 온전히 바라보려면 그저 나무 앞에 서서 고개를 한껏 젖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나무 앞에 서면 단박에 나무의 위용에 압도당할 만큼 융융한 나무다. 깊은 산 정상이라고 해서 느티나무가 자라지 못할 이유야 없지만, 함께 어울릴 다른 나무도 없이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이토록 우람하게 자랐다는 건 나무가 사람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분명한 증거다. 사람이 심어 키우지 않고서는 느티나무가 이토록 멋지게 자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전에 만일암 스님들이 암자의 너른 마당에 손수 심고 정성껏 보살펴 온 나무임에 틀림없다고 보는 근거다. ●지는 해 붙잡아 두고 하루를 늘려 두륜산을 넘어가는 해를 이 나무에 붙잡아 둘 만도 하다는 생각이 생뚱맞지 않은 건 거칠 것 없이 빈 하늘에 한가득 펼친 나뭇가지 탓이다. 이 나무에 전하는 흥미로운 전설도 바로 그런 생각에 알맞춤하게 지어진 이야기다. 옛날 하늘에 천녀와 천동이라는 두 젊은이가 죄를 짓고, 두륜산으로 쫓겨 왔다. 옥황상제는 그들을 땅으로 보내면서 용서의 마음으로 하루 만에 불상을 짓는다면 하늘로 다시 올려주겠다고 했다. 천녀와 천동은 하루라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해를 붙잡아 나무에 매어두고 불상을 조각했다. 얼마 지나 불상을 완성한 천녀는 느티나무 앞에 돌아와 천동을 기다렸지만 천동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급해진 천녀는 홀로 밧줄을 끊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불상을 완성하지 못한 천동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서 나중에 두륜산의 신령이 됐다는 이야기다. 흔히 마을에서 보던 나무를 산 위에서 보게 된 생경한 느낌이 자연스레 이루어낸 이 이야기에는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야속해한 옛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세월이 무정한 건, 늙는 게 아쉬운 때문만은 아니다. 지나온 자취를 새겨 둘 여유도 없이 새해를 맞이하는 게 안타까운 건 아닐까. 두륜산 천년수에 넘어가는 해를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은 옛사람에게만 드는 건 아니지 싶다. 글 사진 해남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도립공원 내 만일암 터. 출발지에 따라 해남을 가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서울에서 가려면 서해안고속국도를 이용해 종점인 목포 나들목까지 가야 한다. 목포에서 국도 2호선과 13호선을 이용해 해남군청까지 간다. 해남군청에서 지방도로 806호선을 이용해 남쪽으로 10㎞ 남짓 가면 대흥사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두륜산 천년수를 보려면, 대흥사 경내를 거쳐 등산로를 이용해 두륜산 정상으로 3㎞쯤 올라가야 한다. 나무는 만일암 터 아래의 비좁은 공간에 우뚝 서 있다.
  • 서동설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서동설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국경과 신분을 뛰어넘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서동설화’다. 그런데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국민 설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15일 오후 10시부터 50분간 KBS 1TV에서 방영되는 역사스페셜은 서동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현장을 집중 조명한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을 위한 7년간의 해체 작업 중 국보급 유물들이 탑의 중심부에서 발견됐다.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보여 주는 걸작 중 학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단연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이 적힌 금제사리봉안기였다. 사리봉안기의 해석으로 서동이 백제의 왕이 되고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지었다는 ‘서동설화’의 사실 여부에 대해 학계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서동설화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기존의 통설인 서동 ‘무왕설’을 뒤엎는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됐다. 풀리지 않는 서동설화의 미스터리, 진짜 서동은 누구일까. 백제 역사상 신라와 가장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무왕. 계속되는 전쟁 중에 신라 공주와의 혼인과 미륵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 건축이 가능했을까. 백제사를 연구하는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는 무강왕(무왕)이 백제 부흥을 일으킨 ‘무령왕’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무강왕의 ‘康’(편안 강)은 ‘’(편안할 령)과 뜻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의 기해(己亥)년 명문은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도 해당된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이 신라 고위관료의 딸과 혼인한 기록이 등장한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은 동성왕.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모대(牟大), 모도(牟都)로 서동(薯童)의 우리말 음인 ‘맛동’과 흡사해 또 다른 서동으로 거론된다. 서동설화의 고장 익산. 백제의 익산천도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무왕에게 익산은 국가경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최근 국립김해박물관의 박중환 학예실장은 웅진 시기에 이미 동성왕의 익산 경영이 이루어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익산 출토의 파문수막새가 공주 공산성의 파문수막새와 거의 같은 양식이라는 것. 제작진은 동성왕과 익산이 어떤 인연이 있는지 조명해 본다.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 연대는 완공시기일 뿐 정확한 건립 시작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양한 백제의 유적들이 발굴되는 가운데 7세기 무왕대에 맞춘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 백제사 연구의 현장을 조명한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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