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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요칼럼] 돌배나무숲과 고분의 공존을 위하여/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돌배나무숲과 고분의 공존을 위하여/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두타산 삼화사라면 강원 동해 무릉계곡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사찰이다. 창건설화는 절의 역사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안내판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보면 뜻밖의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당초 삼화사가 있던 자리는 1977년 시멘트공장 채석장이 됐고, 그 결과 1979년 절을 지금의 터전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문화재 보존에도 시대정신이 있게 마련이다. 개발시대 시대정신은 안타깝게도 산업화가 문화재 보존에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삼화사가 아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자, 삼층석탑과 철조노사나불좌상이 각각 보물로, 수륙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유산의 보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국 어디서나 땅을 파기만 하면 나오는 매장 문화유산은 사정이 다르다. 굴착기 삽날에 걸려나오는 과거의 흔적은 공사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원흉일 뿐이다. 한때는 ‘그깟 땅속 문화재의 보존’보다는 ‘먹고사는데 필요한 개발’이 우선이라는 분위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지금은 21세기다. 적어도 공장을 세운다고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고찰(古刹)을 옮기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수록 매장 문화유산이 여전히 20세기적 위기상황에 머무는 것은 안타깝다. 경북 구미 송삼리 유적도 그렇다. 구미시는 2016년부터 올해까지 관내 무을면 일원 460㏊에 돌배나무를 심고 주변 도로 14㎞에도 돌배나무를 가로수로 심는다는 계획이었다. 올 가을 110㏊를 끝으로 나무를 모두 심으면 내년부터는 돌배의 상품브랜드화를 추진해 주민 소득을 높이고, 꽃이 피는 시기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구미시는 ‘무을 돌배나무 특화숲 조성 사업’이라 이름 붙였다. 문제는 구미시가 기초적인 매장문화재 조사도 하지 않고 사업을 강행해 지하 유적을 대거 파괴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송삼리와 무수리, 무이리 등의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39만 8915㎡ 가운데 7만 4310㎡가 훼손된 만큼 보호조치와 원상복구는 물론 발굴조사를 포함한 구체적인 보존대책을 수립하라고 구미시에 통보했다. 구미시의 대책은 그러나 더 큰 반발을 불러왔다. 영남고고학회는 ‘구미시 발표에는 재발 방지와 파괴된 유적의 보존을 위한 대책 수립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데다 봉분에 심어놓은 나무를 보호조치 없이 옮겨심는다면 더 큰 유적 파괴를 불러올 뿐’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이 저지르는 불법적 문화재 파괴의 재발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공무원의 중징계가 필요하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 사건은 ‘공장을 지으려면 바로 그 땅이 필요하다’는 개발시대 문화유산 파괴 논리와도 양상이 다르다. 돌배나무를 지역 특화 수종으로 만들어 주민 소득을 높이겠다는 사업계획은 나름대로 참신한 문화적 발상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문화를 기존 문화, 그것도 5세기 수장급 고분군(群)을 파괴한 자리에 만들겠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돌배나무숲과 고대국가의 옛 무덤군이 조화를 이룬다면 훨씬 더 매력있는 관광자원이 아닐까. 구미시는 재발 방지를 위해 모든 부서가 사업을 추진할 때 문화재 부서와 협의하도록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특화숲 조성 같은 대형 사업을 하면서 문화재 조사를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해당 부서가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최종 책임은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구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화유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중요한 지역 자산이다. 눈앞의 작은 성과에 집착해 이를 파괴하는 정치인이라면 주민들로부터 ‘표의 응징’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런 나라가 진짜 문화국가 아닌가.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가야불교, 삼국유사 오역에 승자 중심의 역사로 외면당해… 고대문화 북방전래설 극복할 수 있죠”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가야불교, 삼국유사 오역에 승자 중심의 역사로 외면당해… 고대문화 북방전래설 극복할 수 있죠”

    ‘법맥’ 화두 삼은 도명 스님이 말하는 ‘가야 불교’“불교가 가야시대인 서기 48년에 처음 들어왔다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일연(1206~1289) 스님이 쓴 삼국유사(국보 306호)에 기록으로 남아 있고,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는 증거물이 있으며 김해 일대를 비롯한 남해안의 지명과 사찰에는 가야불교를 방증할 설화와 민담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부 사찰에는 그 흔적들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옵니다. 물론 설화를 역사로 둔갑시킨다며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들도 불교의 남방 전래설, 즉 가야불교를 부정하는 학자들 역시 명확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 차원을 넘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지평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재조명이 절실합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사 일부를 다시 써야 한다. 한국에서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로,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으며,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라 게 학계 정설이다. 백제는 이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년), 신라는 눌지왕 41년(457년)에 전래됐다는 것도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보다 300여년 앞선 48년 가야에 불교가 전파됐다는 것도 삼국유사에 나오지만 외면받고 있다. 500여년간 존속했던 가야의 존재가 최근 재조명되는 가운데 가야불교는 더더욱 숨겨진 ‘다빈치 코드’로 다가온다.韓불교 고구려, 372년 첫 전래 ···학계 정설가야시대인 48년, 허황후와 함께 불교 전래기존보다 324년 빨라… 삼국유사 기록 근거 가야 불교라는 화두와 씨름하는 가야불교연구소 소장 도명 스님(여여정사 주지)은 “가야불교의 전래시기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전래 시기는 모두 같은 책인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그런데 학계는 고구려 등 다른 나라 기록은 인정하면서 유독 가야의 불교 수용 기록은 받아들이지 않는 모순을 보입니다”고 일갈했다. 방황 생활을 오래 했던 그는 1998년 정여 큰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 출가했다. 지난 7일 경남 김해에 있는 도심 속 포교원인 여여정사로 찾아가 가야불교에 대해 들었다. 그는 “대륙의 중국 선종에서 이어져 온 한국 조계종의 법맥은 법맥의 문제이고, 해양의 불교 전래는 역사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며 한국 불교계 역시 불교 역사 연구차원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둔 절집은 분주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제3권 제4 탑상(塔像)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김해)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 이름 황옥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에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 國所載來)중략탑은 4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다. 둘에는 약간 붉은 반점 무늬를 띠고 있고, 그 질은 매우 연하여 이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하략 - 가야불교, 배척하는 이들 역시 삼국유사를 인용하지 않나. “이는 잘못된 해석 탓입니다. ‘그때는 해동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아직 없었다. 상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이 믿어 복종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락국본기(일연 스님이 인용한 원전,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절지왕 2년 임진년(서기 452년)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웠다.(然于時海東 未有創寺 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 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불교 역사에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상교(像敎)를 뭉퉁그려 불교로 오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상교는 상법시대의 불교(부처님 열반 후 1000~2000년)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람을 짓는 등 외형 불교인 상법시대가 오지 않은 무불상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찰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 이전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화상적조탑비(국보 315호)에는 ‘비바사(毘婆沙·초기 불교라는 의미)가 먼저 오고 마하연(摩訶衍·대승불교라는 뜻)이 뒤에 들어왔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가야불교 인정 못받은 것은 삼국유사 오역 탓삼국유사 ‘像敎’ 상법시대 의미… 불교는 오역상법시대, 불상·가람 조성 안해… 흔적 남지 않아상법시대 초기 불교, 대승불교보다 먼저 들어와신라말 최치원 ‘지증화상적조탑비’서 기록 남겨”- 가야시대 불상, 왜 남아있지 않나. “가야시대의 불상이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의 유물은 문헌에서만 전해질뿐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가야시대에 들어온 불교는 인도와 스리랑카 등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혼재하던 시기여서 어떤 성향의 불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가야에 불교를 전해준 아요디아 왕국이 ‘무불상 시대’ 즉 불상도, 사찰도 조성하지 않은 시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외며, 탑과 부처님 발자국(불족)을 남기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불상이 전해진 것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가야불교는 금관가야 초창기 왕과 귀족들에겐 전래됐지만 일반 백성이 수용하는 데는 신라에서 보듯 토착신앙과의 갈등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불교가 공인된 것은 왕후사 창건인 452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 파사석탑, 정말 물 건너온 것 맞나. “가야불교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좌입니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스님은 파사석탑에 대해 ‘4각형의 5층 석탑이며, 붉은색을 미세하게 띠었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직접 보신듯합니다. 석탑의 재질이 이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일연 스님이 서술하였습니다. 이에 김해시 차원에서 지질학자 박맹언 부경대 교수에 의뢰해 2017년 분석한 결과 재질 학명이 ‘탄산염 각력암’이라 밝혔습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는 없는 돌이고, 강원도 정선, 양양, 영월에서 나지만 이 파사석탑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진단했습니다. 파사석탑의 돌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파사석탑, 인도 전래 가야불교의 강력한 증좌일연 스님 직접 본듯 구체 묘사… 현재와 달라석탑 재질 분석 결과 한국서 생산되는 돌 아냐”- 현재의 파사석탑, 일연 스님의 묘사와 너무 다르다. “일연 스님은 5층이고, 4면으로 모가 났다고 했는데 현재는 둥글넓적한 돌 몇 개를 쌓은 것처럼 보이지요. 그것이 이 탑의 재질이 물러 세월에 의해 많이 마모됐을 겁니다. 이 탑의 다른 이름이 바닷바람을 제압했다는 진풍탑(鎭風塔)입니다. 이런 연유로 과거 뱃사람들이 바다에 나가기 전에 이 돌을 가져가면 풍랑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돌을 조금씩 떼어갔다고 전합니다. 파사석탑의 가치를 더 일찍 알아보고 보존했더라면 원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훼손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현재 6층으로 보이지만 제일 위의 돌은 탑두였을 겁니다. 제일 아래층에 있는 가장 큰 돌을 보면 돌을 파서 조각한 흔적들이 역력하게 보입니다.” - 파사석탑이 현재 허황옥 무덤 옆에 있다. “파사석탑은 조선시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옵니다. 단지 삼국유사와 같은 호계사가 아니라 호계변(邊) 즉 호계라는 계천의 가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873년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허황후릉 근처로 옮겼다고 합니다. 현대에 들어 이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 현재의 자리에 옮기고 비각을 세웠습니다. 이를 보면 호계사에 있던 파사석탑이 허황후릉까지 이전한 과정은 잘 전해지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허황옥에 대해 ‘허왕후’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왕조시대에 살았던 일연 스님은 분명히 ‘허황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구가 더 필요한 대목입니다.” “일명 진풍탑…선원들 고기잡이갈 때 탑 떼어가석탑 원형 훼손 가속화 … 조각 흔적도 역력해석탑, 배 균형잡기?… 해체해보니 사리공도 발견사리는 사라져… 누구 사리함일지 관심도 증폭”- 파사석탑의 용도는. “허황옥 일행이 바다를 건너올 때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한 벨로스터가 아니냐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단지 배의 균형만을 잡기 위해서라면 탑을 실을 것이 아니라 모래나 다른 물건으로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파사석탑이 같이 온 것은 이유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파사석탑을 해체한 결과 그 가운데 사리함을 보관하는 사리공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게 누구의 사리를 담고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지금 사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또 탑신을 고정하기 위한 지지대를 받친 구멍도 발견됐습니다.” “가야불교 사라진 이유?… 패자의 역사는 말살패전국 역사 조작못해… 사실만 남았을 것 추정” - 그런데 왜 가야불교, 역사에서 사라졌나. “500년간 존속한 가야가 재조명되는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하물며 멸망한 나라의 종교와 문화는 꼭꼭 파묻히는 법이지요. 정복자 입장에서는 부흥운동, 즉 반란이라도 일어날까 싶어서 철저히 말살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문헌적으로 보면 일연 스님은 가야역사를 가락국기를 모본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삼국유사가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가야불교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승자의 역사 기록은 조작이나 과장이 가능할 수 있지만 약자, 패전국의 역사는 조작될 수 없잖아요. 정확한 사실만 남아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몇 줄 안 되는 가야의 기록이 더욱 중요하고 정확하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면에서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국보 322-1호)에서 가야사를 배제한 것은 아쉽습니다.”- 허황후의 오빠 장유 화상은 삼국유사에 안 나온다. “장유 화상(長遊和尙)이 허황후의 오빠이며, 허황옥과 같이 아유타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장유 화상의 부도탑에 나옵니다. 현존하는 이 부도탑은 고려말 또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문가들이 추정합니다. 후대에 이 사리탑을 다시 만들 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넣어 쓴 것이지, 없다면 망한 왕조에 몸담은 해외 출신 승려 이야기를 지어 넣었겠습니까. 그리고 남해안에는 장유 화상과 관련된 연기(緣起) 사찰이 많습니다. 수로왕의 일곱 왕자와 장유 화상이 성불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지리산 반야봉 칠불사 등이 대표적이죠.” - 연기 사찰의 특징은. “연기사찰들은 대체로 서쪽으로 바라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인도를 향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족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밀양시 삼랑진에 있는 부은사, 김해 무척산에 있는 모은암, 김해 봉하산에 있는 자암처럼 가족중심적입니다. 또 여기 김해에서부터 경남 하동군 칠불사에 이르기까지 연기 사찰이 이어집니다. 이는 당시 장유 화상 일행이 지나가면서 묵었거나 수행한 곳이 나중에 사찰로 조성됐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절에 가보면 당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00여년 동안 전란 등으로 소실되어 다시 짓고, 불교의 시대흐름에 의해 전파된 원형의 불교와 인도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그래도 일부 사찰에서는 요니와 링가로 가야불교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인도 전래설 뒷받침 연기 사찰… 인도쪽 바라봐부은사, 모은암, 자암처럼 가족 중심적인도 특징일부 사찰 남근석·여근석인 요니·링가 흔적도 전해허황옥 초야 치른 흥국사 미륵전에 거대 남근석도”- 사찰에 어떻게 요니와 링가, 그것은 음양이 아닌가. “김해 지역의 오래된 사찰인 장유사, 부은사, 모은암, 해은사 등에서는 요니와 링가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경내에 맷돌 모양의 석물이 그것이지요. 힌두교 남신인 시바 신과 그의 아내이자 여신 삭티의 상징인 요니와 링가는 어찌 보면 남근석과 여근석과 같은 음양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사찰에서의 요니와 링가는 불교에 영향을 준 힌두교의 요소여서 사실 초기 불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바는 나중에 불교에 수용되어 대자재천(大自在天)으로도 등장합니다. 실제로 허황옥이 초야를 치러 부부의 연을 맺은 장소에 세워진 흥국사(과거 이름은 명월사) 미륵전에는 거대한 남근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흥국사는 수로왕이 창건했다고 전합니다만…. 밀양 부은사에 있는 요니는 파사석탑과 같은 재질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아직 분석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부 요니는 자녀를 원하는 이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합니다.”- 아유타국이 정말 인도를 가리킬까. “허황옥은 자신을 아유타국 공주라고 했는데, 범어 Ayodhya의 음역으로 봅니다. 아요디야는 인도 여러 지역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쿠샨 왕조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인도 중부로 추정됩니다. 수로왕릉의 무덤인 납릉 정문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신어 문양이 나옵니다. 탑 위로는 코끼리의 코 부분이 보이는데, 탑이나 코끼리 코를 후대에서 약간 잘못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물고기는 아요디아 지방에선 신앙의 상징이라 합니다. 수로왕릉의 숭선전비(崇善殿碑) 윗부분인 비두에 조각된 태양 문양은 수로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아유타국의 불교문화와 흡사한 것으로, 태양 왕조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신어가 있는 납릉정문이나 태양 문양의 비석은 고대의 것이 아닌 조선시대에 새로 만든 것입니다만 훼손되고 마모된 문양들을 새로운 묘비를 조성하면서 되살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엄격한 유교가 지배하던 시절, 없는 것을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문양을 다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공주는 불법을 전파하러 온 것이 아닐지 몰라도, 문화의 전파자로서는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가야불교의 의미?… 남·북방 문화 융복합 과정 재조명가야 500년 존속 … 서로 인정하는 화쟁사상 곱씹어야”- 가야불교가 현대에 주는 의미는. “가야불교는 한국에 불교 전래를 300년가량 앞당긴다는 의미, 한반도 최초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특히 우리 문화가 오로지 북방에서 중국에서 전래했다는 사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연 스님도 안 써도 그만이었을 허황후 이야기를 남긴 것은 문화적 중화사상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인의 유전자를 분석해보면 북방계 뿐아니라 남방계도 많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좀 더 해양문화를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고, 이들 문화는 융복합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합니다. 가야가 500년 이상 존속했던 것도 서로를 인정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화쟁(和諍)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다문화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한 번쯤 곱씹어 봤으면 합니다.” 글·사진 김해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20년 보수공사 마친 미륵사지 석탑

    20년 보수공사 마친 미륵사지 석탑

    20년간의 보수공사를 끝낸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 앞에서 30일 열린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에서 송하진 전북도지사와 정재숙 문화재청장,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이 관람객들과 함께 복원된 서탑 가림막 제막을 하고 있다.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창건된 국보 제11호인 이 석탑은 서쪽 미륵사 금당터 앞에 세운 서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석탑이다. 익산 연합뉴스
  • 유물 1500여점 소장한 안양박물관 1종 전문박물관으로 승격

    유물 1500여점 소장한 안양박물관 1종 전문박물관으로 승격

    경기도 안양문화예술재단은 안양박물관이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승격됐다고 29일 밝혔다. 이로써 개관 15주년을 맞은 안양박물관은 시립박물관에서 보다 더 전문화된 연구기관으로서 기능이 확대된다. 지역의 대표박물관인 안양박물관은 지난해 9월 평촌아트홀에서 안양예술공원으로 이전 재개관했다. 827년(신라 흥덕왕 2년)에 세워진 보물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164호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안양 지명이 유래된 안양사의 유적이 있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안양사 터에서 발굴된 유물과 도자기류를 포함하여 1469점을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안양사 명문기와 등 250여점을 상설 전시한다. 1종 전문박물관은 100점 이상의 자료를 소장해야하고 학예사는 1명 이상 이어야 한다. 시설은 100㎡ 이상의 전시실과 2000㎡ 이상의 야외전시장을 갖춰야하고 수장고, 연구실, 화재도난방지시설과 온습도 조절장치도 필요한다. 이번 전문박물관 승격으로 역사적 가치에 더해 지역 대표박물관으로서 그 기능을 확대하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전문기관으로 새로워진다. 7월에서 9월까지 안양의 역사와 문화를 고대사부터 살펴볼 수 있는 특별전시와 어린이·성인 답사 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재단은 지역박물관의 정체성 강화를 위하여 다양한 전시·교육·연구 등 다양한 사업을 개최하고 국내외 관계기관과 교류협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승격을 계기로 관람객에게 알차고 쾌적한 문화서비스와 휴식, 힐링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여교수, 학생이 트위스트를…

    [그때의 사회면] 여교수, 학생이 트위스트를…

    한양대가 올해 대학 축제를 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축제를 집행할 총학생회를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 축제의 절정기는 1960년대였다. 1963년 11월 2일 밤 서울의 창경원. 이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생 카니발’. 서울대와 이화여대생 1만 2000여명이 가득 메웠다. 서울대생이 7000여명, 이화여대생이 5000여명으로 서울대가 이화여대생들을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오후 4시 반까지 퇴장하도록 유도했다. 학생들이 입장하는 데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물론 대혼잡이었다. 행인들의 반응은 “여보시오, 남녀 학생 혼성데모가 일어났소?”였다. 특설무대가 마련돼 ‘장기놀이’, ‘포크댄스’, ‘쇼중의 쇼’, ‘보물찾기’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무리 속에서 짝을 찾느라 분주했다(동아일보 1963년 11월 11일자). 대학 축제는 봄, 가을에 열렸다. 서울대 문리대는 ‘학림제’, 연세대는 ‘무악축전’, 고려대는 ‘석탑제전’이라 불렀다. 대학가 최고의 관심사는 ‘메이퀸’ 선발대회, 남학생 초청 파티, 가장(假裝)행렬 등을 선보인 이화여대의 행사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맨 마지막 행사인 쌍쌍파티. 이화여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교정으로 불러들여 파티를 열어 준 것은 1962년 5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1000여쌍이 춤을 추고 게임을 했다(경향신문 1962년 6월 1일자). “숲에서 여학생, 남학생, 여교수가 한데 어울려 트위스트가 한창이다.” 축제 때가 되면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까지 트위스트, 고고춤을 추기도 했고 학생들은 파트너 찾기에 바빴다. 거의 광란의 분위기였다. 이에 ‘배움의 전당’에서 저속한 쇼나 술판을 벌이며 탈선을 부추기고 돈만 낭비한다는 대학 축제에 대한 반성이 잇따랐다. 독재 정치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격렬해진 상황도 축제에 대한 시선을 곱지 않게 했다. 특히 메이퀸 선발 행사와 쌍쌍파티에 비난이 집중됐다. 메이퀸은 연세대, 이화여대, 덕성여대, 경희대, 단국대, 수도여사대 등에서 뽑았다. 뽑힌 학생은 신상이 신문에 공개됐다. 메이퀸은 선망의 대상이 됐지만, 여성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덕성여대 메이퀸이 짝사랑한 청년의 청혼에 시달리다 투신자살한 사건도 발생했다. 1973년 이화여대와 숙명여대는 쌍쌍파티를 없앴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이화여대는 1978년 70년 만에 메이퀸 선발대회를 폐지했다. 대학들은 축제 프로그램을 학술·문화예술 행사 위주로 꾸미고 놀이도 농악이나 탈춤 등 민속적, 전통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대수술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탑’ 30일 준공식

    대수술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탑’ 30일 준공식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인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20년에 걸친 해체·보수 작업을 마무리하고 오는 30일 준공식을 연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30일 오후 2시 익산 미륵사지에서 전라북도, 익산시와 함께 ‘보수정비 준공식’을 연다고 25일 밝혔다. 준공식은 익산시립무용단의 무용극을 시작으로 사업 경과보고, 석탑 가림막 제막, 범패 의식, 기념 법회 순으로 진행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대 창건된 미륵사의 3개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조선시대 이후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우면서 흉물스럽게 변했다. 1999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석탑의 해체와 보수가 결정된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본격적인 해체 작업에 돌입했다. 연구소는 2017년 원래 남아있었던 6층까지 수리를 완료하고 보수 작업을 위해 설치한 대형 가설시설물을 올해 초 철거했다. 보수를 마친 석탑은 높이 14.5m, 너비 12.5m이다. 사용한 부재는 1627개로 무게는 약 1830톤이다. 연구소는 “추정에 의한 복원이 아닌, 원래의 옛 부재 중 81%를 다시 사용해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소는 5월 중 미륵사지 석탑 조사·연구와 보수 결과를 공유하고 문화재 수리 현황을 논의하는 학술포럼을 연다. 연말까지 그간의 연구 성과와 해체·보수 과정을 기록한 수리 보고서도 발간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왕이 후궁 처소를 찾을 때 썼던 이 물건,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왕이 후궁 처소를 찾을 때 썼던 이 물건, 아시나요”

    고미술 수집 40년 최형술씨가 말하는 골동품“이 향난로는 아마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약재를 가루로 만드는 약연과 한약을 달이는 약탕기, 약주전자, 약탕관 등 한약과 관련된 모든 도구가 한 세트입니다. 약주전자와 약맷돌에 새겨진 이 문양을 보세요. 용, 불로초, 사슴, 잉어가 보이죠. 그리고 이번에 청자철제귀면종에 대해 문화재 등록신청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 앞에 5층 8각 석탑 두기 서 있어“14세기 청자철제귀면종, 문화재 등록 신청해”서울에서 가장 큰 고미술점을 운영했다는 최형술(81)씨를 인터뷰하려고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청계8가 한국도자기 뒤에 있는 골동품점 갤러리 미(취강당)을 지난 17일 찾았다. 철물점 상가들 사이에서 두 기의 8각형 5층 석탑이 가게 앞을 지키고 섰다.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의 가게에 들어서자 세월의 더께에 쌓인 갑옷과 놋그릇, 제사용품과 서화, 가구 등이 가득했다. 그는 처음엔 골동품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사진이 나가면 짝퉁이 나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사화 하려면 사진이 필요하다고 설득한 끝에 촬영을 허락받았다. 사진을 찍으러 공예품 먼지를 털자, 먼지도 털지 못하게 했다. 최씨는 가리킨 약주전자에는 뚜껑은 용이 똬리를 튼 특이한 모양새다. 물이 나오는 주구 부분 역시 특이하다.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었다. 이 주전자를 끓일 아궁이 역시 커다란 돌덩이로 만들어졌다. 그 옆에는 향난로가 놓여있었다. 사각형의 돌상자에는 다시 작은 돌상자를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구멍이 2개에서 4개씩 나 있었다. 들어보니 아주 묵직했다. “장수곱돌로 만든 거예요. 이게 옛날에 임금님이 어느 후궁 처소로 가겠다고 하면 상궁들이 이것을 미리 그 후궁방에 두고 방을 따뜻하게 데우면서 향기롭게 하는 기능을 했다고 합니다. 저도 용도를 몰라 궁금해했는데 수년 전 한 스님이 이렇게 설명해 줬습니다만 좀 더 정확한 용도와 고증이 필요합니다.” 기자가 이 사진을 한의사에 보여줬지만 그 한의사 역시 처음본다고 했다. 이렇게 한약방과 관련된 도구가 100여 점에 이른다. “장수곱돌로 만든 한약방 도구 100여점용 무늬, 불로초, 잉어 등의 그림 새겨져충청도 대갓집에 3년간 공들여 수집해”- 한약 도구세트, 어떻게 소장하게 됐나. “1980년대에 충청도의 한 가문으로부터 수집했습니다. 99칸에 이를 정도의 대갓집이었는데 그 집 할아버지로부터 사들였습니다. 처음엔 안 팔겠다고 했는데, 한번 내려갈 때마다 술, 고기 등을 사들고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팔아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설득하면 그 할아버지가 한꺼번에 팔지 않고, 한점 팔고, 몇 달 뒤에 또 내려가면 3점 팔고…. 이렇게 해서 다 사모는데 한 3~4년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이 한약방 도구들의 출처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고, 집안에 내려오는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현재 소장한 가장 비싼 미술품은. “글쎄, 가격을 다 매겨보지 못해 잘 몰라요. 그런데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있습니다. 고려시대인 14세기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가마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철제귀면종’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어요. 청자로 만든 종의 사금파리는 전하고 있지만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청자 종(鐘)으로는 아마 국내에서 유일할 겁니다. 사찰에서 쓰였을 것 같은데, 전문가들의 감정을 받아보면 가치와 용도를 알 수 있겠지요. 또 한가지 백자대호(달항아리)는 다음 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한 달간 전시할 생각입니다. 18세기 전후에 광주 분원리에서 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고가품은 분청사기…신사동 땅값 100배골동품 안목 수업료로 집 몇 채 값 날아가”- 그러면 최고가 수집품은. “미련을 갖지 말아야지요. 박수근·김환기·이수근의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 그림도 제 손을 거쳐 간 것이 제법 됩니다. 한번은 평당 강남 땅값의 100배로 샀던 것도 있습니다. 1976년인가에 분청을 그때 돈 2000만원에 샀습니다. 그때 허허벌판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비포장이었지만 도로 옆에 붙은 좋은 땅은 평당 2만~3만원이었고, 안쪽 구석에 있던 것은 5000원도 안 되었습니다. 분청사기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 그 분청 아직도 갔고 있나. “벌써 임자를 만나 나갔지요. 비싸게 매입한다고 다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골동품과 관련해 수업료로 집 몇 채 값은 날아갔습니다. 수십년 골동품을 거래한 저도 사람의 손때를 탄 물건, 어찌 보면 혼이 담긴 물건이기에 알기가 무척 어려워요. 살 때 분명히 진품으로 보였는데, 가게에 와서 보면 다르게 보이고 해서….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일반인도 아닌 전문 장사꾼이라 무를 수도 없고 집 한 채 값 그냥 날아가지요.” - 그 분청사기 누가 사갔나. “이름은 말할 수 없지요. 의사와 변호사, 교수 등이 우리 집에서 물건 많이 사갔습니다. 예술품이나 골동품은 소장자가 누구냐에 따라 가치가 또 확 달라집니다. 같은 분청사기라도 골동품상인 제가 가진 가치와 유명 교수나 학자가 소장한 것의 가치가 다르다는 거죠.” - 현재 보유한 고미술품 수는. “고미술품과 민예품 등을 합쳐서 아마 1만 점이 넘을 겁니다. 중간 상인이 차로 100점~200점 갔고 옵니다. 그중에서 서너 점이 마음에 들면 차떼기로 전부 다 샀던 겁니다. 중간 상인도 값나가는 서너 점을 알거든요. 좋은 것만 사고, 나머지를 사지 않으면 다음엔 거래하러 오지 않아요. 그 서너 점으로 본전을 뽑고, 나머지를 팔아서 이익을 내는 구조입니다. 많을 때 10만 점가량 보유했습니다. 다 보관을 할 수가 없어서 팔기 시작한 겁니다. 가구와 같은 목제품, 그림이나 글씨와 같은 서화는 비바람을 맞아 곰팡이가 피면 안 되잖아요. 여기 가게에도 있지만 개운사 옆 카페 봄에도 삼국시대의 토기 등을 전시하고 있지요. 창고에도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자개 농과 같은 나무 제품은 공간도 많이 차지합니다. 사람이 쓰는 물건이 3만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을 다루어봤을 겁니다.” “50~90년대 광장시장서 복지점으로 돈 벌어1970년대 우리 민예품 해외 마구 팔려나가남아있는 게 없겠다는 생각에 수집 시작박물관 생각에 마구 수집…여건 달라져 포기수집품 한때 10만점쯤 …지금은 1만점가량 보유”- 고미술 수집엔 돈이 엄청 든다. “동대문과 광장시장에서 양복을 짓는 데 쓰는 옷감인 복지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58년부터인가 시작했는데, 그 당시 신랑이 장가갈 때 양복 한 벌 맞춰 입으려면 쌀 10가마의 돈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매와 소매를 겸해서 전국에 거래상을 두고 팔았지요. 그때 돈을 제법 만졌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닥친 1998년 복지 가게는 다 정리했습니다.” - 왜 고미술에 빠졌나. “1970년대에 보니깐 우리 공예품이 외국으로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심지어 수석까지 미국 일본 필리핀 이탈리아 등으로 팔려가가더군요. 소련에도 팔려나갔습니다. 이래서는 우리 것이 남아있지 않겠다는 생각에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을 사 모아야겠다는 사명감에 보이는 대로 사서 모았지요. 그러다가 우리 공예품, 민예품을 보는 눈도 생기고, 알게 되니깐 더 애착이 가더라고요. 어느 순간 더 이상 보관할 수가 없게 되어서 골동품 가게를 열었습니다. 매장 면적이 170평으로 전국은 몰라도 서울에서는 가장 컸습니다. 18~19년간 하다가 땅 주인이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해서 여기로 이사해 소일거리로 하는 겁니다.” - 아무리 고미술에 빠져도 그렇게 사모을 수 있나. “처음엔 박물관을 하나 운영할까 생각했습니다. 서울에다 박물관 하나 하려다 보니 땅값이 엄청나게 올라 있고, 박물관 운영비 마련도 쉽지 않아 보여서, 그냥 나자빠진 거죠. 결국, 이렇게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게 된 거죠. 한창때는 귀하거나 없는 물건을 보면 안 사고는 못 배겼어요.” - 고미술 수집과 복지점 운영하면 물려받은 게 많았겠다. “저는 1939년생으로, 고향이 전남 해남인데, 그때 꿈이 교사였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해남고등학교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집안이 어려워 진학 대신 농사일을 도우며 서당에 3년가량에 다녔습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싶어서 무작정 상경해서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해서 돈을 아끼고 모으고 해서 복지점을 낸 겁니다. 복지점을 낸 지 3년 만에 해남에서 농사짓는 아버지한데 논 20마지기(4000평)와 기와집을 사드렸습니다.” “아파트 거주공간에 고미술 둘 공간 없어져조상 손때 묻은 골동품, 갈수록 가치 올라”- 고미술 대신 강남에 땅을 샀다면. “강남에 땅을 샀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잖아요. 잘 되었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요. 신사동의 좋은 땅이 평당 2만원할 때 고려대 뒤 개운사 옆에 7500만원을 들여 큰 한옥을 지어 살았습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화목하게 살았으니, 강남에 땅을 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어요. 남들은 뭐라 생각하든 우리 고미술 보존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 고미술 찾느라 전국 많이 다녔겠다. “복지점을 할 때 전국 거래처를 다녔지만, 고미술을 할 때는 가지 않습니다. 골동품도 수십년 거래한 믿는 중간 상인들이 있습니다. 중간 상인들은 지역별로 골동품을 모아두는 사람들을 두고 있었지요. 그래야 탈도 없고, 외상거래도 떼어먹는 일도 없지요. 집안에서 대대로 쓰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정말 돈이 급하잖아요. 그래서 언제든지 현금으로 지불할 준비는 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속은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그 또한 제 안목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엔 곁눈질로 한번 보면 10가지 이상이 파악됩니다. 그리곤 가격이 바로 매겨집니다. 수십년 경험이지요.” - 문제는 없었나.“무슨 문제요? 아~, 한번도 경찰에 조사받은 일이 없습니다. 수십년 거래한 중간 상인들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거래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골동품이라는 것들이 무겁고, 부피도 커고 해서 귀금속과는 많이 달라요. 이 부근 한자리에서 20년가량 장사를 하는데 손님을 속이고 그렇게 운영해서는 오래 못가요. 손님들이 수년 지나서 찾아와 물러달라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손님들 요구대로 다 해줬습니다.” - 요즘 고미술 인기는. “한때 한국화가 잘 나갔습니다만 아파트가 못도 박지 못하게 하잖아요. 소품의 유화라도 그림을 걸어둘 곳도 없어졌습니다. 동양화는 액자나 족자를 하게 되면 무겁고 공간도 넓게 차지하는 단점이 있지요. 병풍을 쳐 놓을 공간도 없고, 조상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아요. 고미술을 사려는 사람도 적지만, 수요는 꾸준히 있습니다. 하지만 고미술, 골동품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가격도 비싸졌고…. 동묘에도 골동품상이 한두집 밖에 없어요. 요즘엔 물건이 안 나오니깐 못하는 거지요. 그래도 조상들의 혼이 담긴 골동품, 갈수록 가치가 올라갈 겁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열혈사제’ 음문석, 현장 스태프도 웃게 한 연기 ‘기대감 UP’

    ‘열혈사제’ 음문석, 현장 스태프도 웃게 한 연기 ‘기대감 UP’

    ‘열혈사제’ 음문석이 온몸을 던지는 열연으로 초강력 웃음폭탄을 예고했다. SBS 금토드라마 ‘열혈사제’ 지난 주 방송분에서는 이중권(김민재 분)과 그 일당의 등장에 따라 신부 김해일(김남길 분)과 검사 박경선(이하늬 분), 그리고 경찰인 구대영(김성균 분)을 중심으로 한 ‘구담 어벤져스’가 무참하게 쓰러지는 내용이 그려지면서 후속 스토리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냈다. 오늘(12일)과 13일 방송분에서는 김해일이 이중권과 일당과 맞섬에 따라 구담 어벤져스와 구담 카르텔간의 한판 승부 또한 예고되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 특히, 이 와중에 황철범(고준 분)의 부하인 ‘롱드래곤’ 장룡(음문석 분)이 온몸을 던지는 열연을 펼칠 예정이어서 그 배경에도 눈길이 모아진다. 충청도 출신의 싸움꾼으로 스스로를 ‘부여 돌대가리 삼층 석탑’으로 칭하던 그는 중국집 배달부인 태국인 쏭삭(안창환 분)을 향해 ‘간장공장 공장장’을 발음해보라며 놀리는 등 수차례 해코지해왔다. 그러다 최근 다시 중국집에서 그는 쏭삭에게 다시 시비를 걸다가 결국 일대일 거리대결에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김해일과 서승아(금새록 분)에 이번에는 쏭삭에게도 당하면서 톡톡히 망신당함과 동시에 체면까지 구긴 것. 이번에 제작진이 공개한 스틸컷에는 이명우 감독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음문석이 이내 바닥에 쓰러진 채 온몸을 바닥에 구르는 내용이 담겨있다. 심지어 감독의 요구에 그는 몸 연기에 더욱 디테일함을 가미, 단발머리부터 미세하게 떨더니 이내 팔과 다리, 심지어 손끝과 발끝에도 전에 없던 다급하고도 마치 숨 넘어가는 듯한 표정을 선보였다. 그러더니 알듯 모를듯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자신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그러다 이 감독의 우렁찬 “오케이! 아주 좋아요”라는 컷소리가 떨어지자 당시 같이 촬영중이던 이하늬와 김형묵, 김민재,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음문석 또한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들에게 화답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던 것. 한 관계자는 “그동안 사투리와 춤, 액션으로 극중 웃음을 담당했던 장룡역 음문석씨가 이번에는 온몸열연으로 초강력 웃음폭탄을 터트린다”라며 “그가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된 이유에는 깜짝 놀랄만한 사연이 숨겨져 있고, 여기에다 톡톡튀는 CG까지 가미되니 본방송으로 확인해 달라”라고 전했다. 한편, SBS ‘열혈사제’는 12일 오후 10시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춘향이 발그레하듯… 생기 도는 광한루, 몽심재·구룡폭포… 이몽룡 다녀간 듯

    춘향이 발그레하듯… 생기 도는 광한루, 몽심재·구룡폭포… 이몽룡 다녀간 듯

    ‘이편에는 함양 저편에 담양/ 꿈에는 가끔가끔 산을 넘어/ 오작교 찾아찾아 가기도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해 돋고 달 돋아 남원땅에는/ 성춘향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김소월의 시 ‘춘향과 이도령’ 중) 퇴기 월매의 딸 성춘향과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의 신분을 뛰어넘은 로맨스는 전북 남원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사랑 이야기다. 춘향가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으뜸으로 꼽히고, 이들의 사랑을 노래한 명시만도 여러 편이다. 춘향제가 열리는 매년 5월이 다가올 무렵이면 남원은 이팔청춘 춘향이처럼 생기가 돈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살랑이던 날 지리산 자락의 맑은 정취, 천년고찰의 운치, 민족의 문학혼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남원을 다녀왔다.●기왓장과 나무로 지어진 옛 서도역 수도권에서 남원으로 향한다면 남원 시내에 이르기 전 시 북동쪽에 자리한 옛 서도역에 먼저 들르는 것이 동선을 짜는 데 좋다. 임실군과의 경계에 위치한 옛 서도역은 전라선 철도에 놓인 기차역으로 일제강점기인 1931년 영업을 시작했다. 2002년 전라선이 정비되면서 도보로 5분 남짓 떨어진 곳에 새 역사가 생겼고 철거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보존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요구에 남원시가 철도청으로부터 역사와 부지를 매입했고, 기왓장과 나무로 지어진 과거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거듭났다.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 세월을 거슬러 서 있는 듯한 옛 서도역을 돌러보던 중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들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산책을 나온 생후 1개월 된 강아지가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뛰어다니고 있었다. 젊은 시절 군대에 가기 전 서도역에서 급사로 일했었다는 이길무(76) 할아버지는 지금도 서도역 맞은편에 살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기차가 다니던 시절엔 줄을 서서 표를 끊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며 “그때는 역 앞에 여관도 있었고 하루 한 마리씩 돼지를 잡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역 앞 벚나무는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도 컸고 수령 100년은 족히 넘었다고 한다.●소설 속 여러 장면 볼 수 있는 혼불문학관 최근에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 중 한 곳으로 소개되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이 된 곳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다. ‘혼불’은 1930년대 말 전라도의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 3대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아낸 작품이다. 소설 속 종가집 효원이 마을로 시집을 오는 장면, 주인공 강모가 전주로 전학하는 장면 등에서 서도역은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옛 서도역에서 차로 3분가량 떨어진 곳에 혼불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문학관 내부에서는 소꿉놀이, 혼례식, 액막이연 날리기, 명혼식, 장례식 등 소설 속 여러 장면들을 디오라마(입체전시)로 볼 수 있고 각 장면마다 전통 풍속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생전 집필실이 재현돼 있고 자필 원고 등 여러 전시물을 통해 작가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다. 문학관 옆 최명희 가문에서 100여년 전 만들었다는 청호저수지는 둘레로 짧은 산책을 하기 좋다.●몽룡이 춘향이 보고 첫눈에 반한 곳,광한루 혼불문학관을 나서 차로 25분쯤 달려 남원 시내의 광한루원으로 향한다. 광한루에 올라앉아 있던 이도령이 단오날 그네를 뛰는 춘향이를 보고 첫눈에 반한 그곳이다. 보물 281호인 광한루는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419년 남원으로 유배를 오게 된 황희 정승이 지은 누각으로 처음에는 광통루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인지가 이곳의 경치에 취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광한청허부’로 부른 것을 계기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1461년에는 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보수하면서 남원 시내를 흐르는 요천의 물을 끌어다 둘레에 연못을 만들었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따 섬을 만들고 정자를 세웠다. 금실 좋은 원앙 한 쌍이 노니는 연못 위로 돌다리 오작교가 가로놓여 있다. 버드나무 가지가 수면에 닿을 듯 드리우고 그 너머 광한루가 고즈넉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가 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로 2만 여평 부지에 조성된 광한루원에는 수중누각 완월정, 춘향 어머니의 집인 월매집, 이도령과 춘향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 춘향전기념관 등이 있어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한편에서는 춘향이 된 듯 커다란 그네를 타고 투호놀이 등도 즐길 수 있다. 춘향의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워진 영정각에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단아한 모습의 춘향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뤄진다고 하니 광한루원을 찾은 연인이라면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을 떠올리며 소원을 빌어 봐도 좋겠다.●요천 따라 산책로 양옆으로 벚꽃 활짝 광한루원을 나서면 맞은편 도로변에 활짝 핀 벚꽃이 장관이다. 남원 중심부를 흐르는 요천을 따라 숭사교에서 춘향교 부근까지 산책로 양옆으로 벚나무가 빽빽이 심겼다. 사방으로 풍성하게 뻗은 가지마다 핀 벚꽃이 연분홍 장막을 드리운다. 군밤, 솜사탕 등을 파는 노점이 즐비하고, 엿장수의 구성진 입담에 지나가던 어르신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벚꽃으로 물든 요천변과 광한루원 일대는 다음달 8일부터 12일까지 춘향제의 무대로 변신한다. 완월정 무대에서는 개막공연과 춘향선발대회, 춘향국악대전 등 공식행사가 펼쳐진다. 평소 출입이 제한되는 광한루각은 1년에 단 한 번 축제 기간 동안 개방된다. 이 밖에 명인·명창·명무들의 국악 향연과 전국에서 온 버스커들의 거리공연도 풍성하게 열린다.●춘향테마파크 지나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요천 벚꽃길 남쪽의 춘향테마파크를 지나 춘향의 흔적에서 벗어나 본다. 춘향테마파크 남쪽 출구 부근에 옅은 회색의 깔끔한 외관이 인상적인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서 있다. 지난해 3월 개관한 공립미술관으로 남원 출신 김병종 작가가 남원시에 기증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문을 열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나지막한 오르막길 주위로 계단식 물의 정원이 조성돼 있다. 작품 감상에 앞서 잡념을 씻어 주는 듯하다. 1층에서는 김병종 작가의 상설전이, 2층에서는 기획전이 열린다. 약 2000권의 미술·문학·인문학 서적이 비치된 1층 북카페는 물의 정원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몽심재, 조선 후기 상류 가정 가옥 형태 그대로 시내를 벗어나 ‘숨은 보석’을 찾아 떠난다. 차를 타고 남쪽으로 15분가량 가다 호곡삼거리를 지나면 몽심재에 다다른다. 내비게이션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다면 ‘수지면 내호곡2길 19’로 주소를 입력하면 찾아갈 수 있다. 마을 입구 빨간 하트 모양 표지판이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몽심재’라고 길을 안내한다. 몽심재는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한 고택이다. 경사진 지형 위에 뒤로는 대나무숲을 두고 앞으로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자란 낮은 언덕을 마주한다. 잿들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당 앞으로 흘러 연못을 이루고 배산임수의 명당을 완성시킨다. 솟을대문을 높게 세웠는데, 여인네들이 가마를 타고 마당 안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문 오른편으로는 하인들이 기거하는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 앞으로는 거북 모양의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어서 사랑채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 하인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조경이라고 한다. 가옥 중심에 있는 사랑채는 정교하게 쌓인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해 고고하고 위엄 있는 인상을 준다. 사랑채 뒤편 안채에는 양편으로 다락이 있다. 다락방의 창을 열면 사랑채 지붕 너머로 집 앞 아미산의 눈썹 같은 능선이 내다보인다.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높낮이를 알맞게 조절해 완성한 배수시설에서는 몽심재의 세심한 건축기법을 엿볼 수 있다. 몽심재를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서 묵어갈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 등의 일곱 칸을 묵어가는 방문객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지리산 자락 구룡폭포·회덕마을도 가볼 만 이번에는 남원 동남쪽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내비게이션에 ‘구룡폭포 주차장’을 찍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경사가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된다. 40분가량 달려 도착한 주차장에서 구룡폭포까지는 400여m. 가까운 거리지만 산길을 타고 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 산을 오르다 작고 가파른 계단 400여개를 내려가야 폭포를 만날 수 있다. 4월 초파일에 아홉 마리의 용이 내려와 놀다가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룡폭포는 굽이쳐 흘러내리는 물살을 보면 그 전설에 왠지 수긍이 간다. 작지만 아찔한 출렁다리에서 폭포를 감상한 뒤 비폭동, 지주대, 유선대, 육모정으로 이어지는 절경을 둘러볼 수도 있다.구룡폭포 주자창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덕마을이라는 동네가 있다. 지리산 둘레길 상에 놓인 이 마을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오래된 샛집이 있다. 평범해 보이는 시골마을인 회덕마을 경로당 뒤편에 자리잡은 덕치리 초가는 1985년 박창규씨가 지은 것이 시초로,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51년 재건했다. 억새풀로 지붕을 이은 샛집은 조선시대 일반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어 지리산 골짜기 마을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을 느낄 수 있다.●신라 흥덕왕 때 창건한 천년고찰 실상사 마지막 목적지는 경남 함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천년고찰 실상사다. 회덕마을에서 40여분 차를 달리면 닿는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 증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문을 열었을 만큼 유서 깊다. 이곳에는 국보 제10호 백장암 3층석탑과 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등 1000년 넘는 세월을 견딘 유물이 가득하다. 막상 절 문턱을 넘으면 글로 쓰인 거창한 역사 대신 고즈넉한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지리산 자락 봉우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한가운데 너른 평지에 자리잡아 부처님 품에 감싸인 듯한 안온한 느낌이 든다. 절 오른편에 조성된 크지 않은 대숲에서는 마음을 툭 내려놓고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글 사진 남원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여행수첩 전북투어패스를 이용하면 남원을 포함한 전북 여행을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다. 광한루원, 춘향테마파크, 지리산허브밸리 등 남원의 유료 관광지를 여러 곳 방문할 계획이라면 전북투어패스를 사용하는 것이 저렴하다. 관광형 카드 기준 1일권 8300원, 2일권 1만 3900원, 3일권 1만 9900원 등이 있다. 전북 14개 시·군의 60여개 주요 관광시설에 해당 기간동안 제한 없이 입장할 수 있다. 교통형 카드 이용 시 시내버스, 공영주차장 무료 이용 등 혜택이 추가된다. 관광안내소 등 40개 판매점과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다.
  • 보물 지정 조사 때 누락된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 됐다

    보물 지정 조사 때 누락된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 됐다

    보물 지정 조사에서 누락된 ‘보령 성주사지 동(東) 삼층석탑’이 드디어 보물이 됐다. 문화재청은 사적 제307호 ‘보령 성주사지’에 있는 충남유형문화재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이하 동 삼층석탑)을 보물 제2021호로 승격했다고 28일 밝혔다. 낭혜화상(신라 후기 승려 무염)이 847년에 지은 성주사 터에는 동 삼층석탑 외에도 이미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제19호), 중앙 삼층석탑(제20호), 서(西) 삼층석탑(제47호)과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가 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이후 이듬해 서쪽과 중앙에 있는 석탑을 보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동쪽 석탑만 홀로 제외된 걸로 추정된다. 성주사지에는 금당을 기준으로 앞쪽에 오층석탑이 있고, 뒤쪽에 탑 세 개가 일렬로 늘어섰다. 이같은 건물 배치는 국내에 유사한 사례가 거의 없다. 학계에서는 금당 앞쪽에 오층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을 조성한 뒤 이후 석탑 3기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뒤쪽에 추가로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동 삼층석탑은 조성 양식으로 보아 다른 2기의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같은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4.1m 높이로 2층 기단 위에 3개의 층을 올렸으며 기단 상부에 돌로 만든 받침석이 있고 1층 탑신에는 문고리와 자물쇠를 표현한 문짝 모양을 새겼다. 다른 2기의 석탑에 뒤지지 않는 균형미와 우수한 조형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조선시대에 중창한 전남유형문화재 제50호 ‘천은사 극락보전’은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지리산 남서쪽 구례 천은사(泉隱寺)는 828년 덕운선사가 창건해 감로사(甘露寺)라고 부르다 1679년 조유선사가 재건하면서 사찰 명칭이 현재와 같이 바뀌었다. 주불전인 극락보전은 섬세하고 화려한 우물천장과 내부 닫집 등 조각 기법이 우수한 편이다. 18세기 말 다포식 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이미 보물로 지정된 해남 미황사 대웅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 나주 불회사 대웅전과 비슷한 특색을 지녔다는 점에서 보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은 30일 간의 예고 기간에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여부를 확정할 예정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고려청자음각모란문장 2억… 피아노 3500만원

    ‘고려청자음각모란문장(2억원), 신라 3층석탑(1억원), 갑주 및 환두태도(삼국시대·1억원) 등….’ 28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유천호 강화군수의 재산 목록 가운데 일부다. 13억 4804만원을 신고한 유 군수의 재산 80%(10억 5000만원)가 도자기를 비롯한 예술품이었다. 그는 도자기 27점과 회화 2점, 석탑·석좌불·석검 등 모두 35점을 재산으로 신고했다. 작품당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한다. 재산신고 대상자인 고위공직자 1873명의 이색 재산이 눈길을 끈다. 유 군수만큼은 아니지만 도자기 애호가가 의외로 많았다. 장재성 광주시의원은 조선시대 상감용문호로병(1400만원)과 청화운용문호(1400만원) 등 도자기 7점(7000만원)을 고지했다. 김이재 전북도의원도 도예가인 이광진 원광대 교수의 2017년작 ‘기’(1200만원)를 비롯해 도자기 3점, 회화·공예 7점 등 10점(8000만원)을 신고했다. 예술작품을 사랑하는 공직자도 종종 눈에 띄었다. 오거돈 부산시장은 김춘수의 추상화 ‘울트라-마린(80호)’(4000만원)과 김순향의 조각작품 ‘해돋이’(3000만원), 이철주의 동양화 ‘호산언덕’(3000만원) 등 1억원어치를 신고했다. ‘동양화 마니아’로 알려진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의재 허백련(1891~1977)의 작품(2500만원)를 비롯해 동양화만 6점(6400만원)을 갖고 있었다. 고가의 클래식 악기를 재산으로 밝힌 공직자도 있었다. 김혜경 한국문화예술회관 연합회장은 일본 야마하 피아노를 3500만원에, 정상환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도 배우자 소유의 세바스티안 클로츠 바이올린을 3500만원에 신고했다. 고흥 서울고검 차장검사는 비올라(2500만원)와 활(1500만원)을 합쳐 4000만원에 고지했다. 유재수 부산시 경제부시장도 프랑스산 비올라(3000만원)를 갖고 있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포토] 보수 마치고 일반 공개된 ‘익산 미륵사지석탑’

    [포토] 보수 마치고 일반 공개된 ‘익산 미륵사지석탑’

    18년간 해체·보수 공사를 마친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일반에 공개된 지 이틀째를 맞아 24일 이를 보려는 시민들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19.3.24 연합뉴스
  • 230억 든 미륵사지 석탑 주먹구구 복원… 감사원 “설계와 달라”

    230억 든 미륵사지 석탑 주먹구구 복원… 감사원 “설계와 달라”

    “실측설계도서 없이 해체·보수 공사 사전 검토 제대로 안해 일관성 없어 상하부 내부 형태 층별로 달라져 축석 방식 변경 붕괴 가능성 우려도”지난 20년에 걸쳐 진행된 국보 제11호인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보수복원 사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21일 국가지정문화재 보수복원사업 추진실태 감사를 벌인 결과 “문화재청이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정비하면서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한 사전 검토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의 상하부 내부 형태가 원형과 달리 층별로 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축석 방식을 변경하면서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아 구조적으로 불안정해 향후 붕괴 가능성에 대한 우려마저 나온다. 1998년 시작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20년의 작업 끝에 최근 마무리돼 다음달 준공식을 한다. 총 230억원이 투입됐다.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할 당시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적심’(석탑 내부에 돌과 흙을 쌓아 올려 탑의 몸체를 구성하는 부분)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석재들로 쌓여 있었고 사이의 틈은 흙으로 채운 형태였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기존 적심부 석재들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과 품질 저하를 이유로 적심석 대부분(97.6%)을 직사각형 모양의 새로운 석재로 교체해 반듯하게 쌓기로 계획했다. 이후 석탑의 2층 적심부까지 새로운 석재 가공작업을 진행하다가 2016년 초 원래의 축석 방식과 부재를 보존한다는 이유로 당초 설계와 달리 3층 이상의 적심에 대해선 기존 부재를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로 인해 석탑 상하부의 내부 적심이 다른 형태로 축석되는 등 일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특히 축석 방식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안정성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적심은 석탑 구조의 안정성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구조 계산 등을 거친 후 설계도서를 마련해 시공해야 하는데도 설계도서 없이 탑을 쌓아 올렸다. 문화재청은 또 3층 이상 적심부의 틈을 채우기 위한 충전재를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무기질 접착제)로 변경하면서 자문 등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보수 전 미륵사지 석탑의 붕괴 원인 중 토사 유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을 감안하면 성능이 낮은 황토를 배합한 충전재를 선택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장에게 “석탑 복원에 도입한 축석 방식이 틈을 유발해 구조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구조 안정성 검증 후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라”고 통보했다. 여기에 “앞으로 축석 방식 보존과 기존 부재 재사용 가능 여부 등을 검토하고 실측설계도서 없이 문화재를 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석탑 1, 2층은 당초 설계대로 대부분 새로운 석재를 사용했으나 전문가 자문과 문화재위원회 검토 결과 새로운 석재가 과다하게 들어가고 기존 적심석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3층 이상부터 옛 석재를 재활용해 보수했다”고 밝혔다. 최광숙 선임기자@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 주먹구구 복원 …감사원 “원형과 달라”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 주먹구구 복원 …감사원 “원형과 달라”

    “실측설계도서 없이 해체·보수 공사 사전 검토 제대로 안해 일관성 없어 상하부 내부형태 층별로 달라져 축석 방식 변경 붕괴 가능성 우려도”지난 20년에 걸쳐 진행된 국보 제11호인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보수복원 사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21일 국가지정문화재 보수복원사업 추진실태 감사를 벌인 결과 “문화재청이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정비하면서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한 사전 검토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의 상하부 내부 형태가 원형과 달리 층별로 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축석 방식을 변경하면서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아 구조적으로 불안정해 향후 붕괴 가능성에 대한 우려마저 나온다. 1998년 시작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20년의 작업 끝에 최근 마무리돼 다음달 준공식을 한다. 총 230억원이 투입됐다.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할 당시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적심’(석탑 내부에 돌과 흙을 쌓아 올려 탑의 몸체를 구성하는 부분)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석재들로 쌓여 있었고 사이의 틈은 흙으로 채운 형태였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기존 적심부 석재들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과 품질 저하를 이유로 적심석 대부분(97.6%)을 직사각형 모양의 새로운 석재로 교체해 반듯하게 쌓기로 계획했다. 이후 석탑의 2층 적심부까지 새로운 석재 가공작업을 진행하다가 2016년 초 원래의 축석 방식과 부재를 보존한다는 이유로 당초 설계와 달리 3층 이상의 적심에 대해선 기존 부재를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로 인해 석탑 상하부의 내부 적심이 다른 형태로 축석되는 등 일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특히 축석 방식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안정성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적심은 석탑 구조의 안정성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구조 계산 등을 거친 후 설계도서를 마련해 시공해야 하는데도 설계도서 없이 탑을 쌓아 올렸다. 문화재청은 또 3층 이상 적심부의 틈을 채우기 위한 충전재를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무기질 접착제)로 변경하면서 자문 등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보수 전 미륵사지 석탑의 붕괴 원인 중 토사 유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을 감안하면 성능이 낮은 황토를 배합한 충전재를 선택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장에게 “석탑 복원에 도입한 축석 방식이 틈을 유발해 구조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구조 안정성 검증 후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라”고 통보했다. 여기에 “앞으로 축석 방식 보존과 기존 부재 재사용 가능 여부 등을 검토하고 실측설계도서 없이 문화재를 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요구했다. 최광숙 선임기자@seoul.co.kr
  • 국내 최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감사원 “일관성 없이 복원”

    국내 최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감사원 “일관성 없이 복원”

    백제 무왕시대 조성…국보 11호 지정감사원 “적절한 조치 방안 검토하라”“석탑 상·하부 내부 다른 형태 축석”230억 투입, 20년간 복원…23일 공개국보 제11호인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복원이 원형을 찾기 위한 사전 검토가 없었고, 석축(돌 쌓기)도 일관성이 없다는 감사결과가 나왔다. 복원 잘못으로 석탑의 상·하부 내부 형태가 애초의 원형과 달리 층별로 달라졌다고 감사원이 지적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대에 지은 것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1998년 시작돼 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최근 마무리됐으며 다음 달 말 준공식을 한다. 사업비로 230억원이 투입됐다. 23일 일반에 공개된다. 감사원은 이 내용을 포함한 ‘국가지정문화재 보수복원사업 추진실태’ 감사 결과를 21일 공개했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2011년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실시설계용역을 진행하면서 해체 당시 확인된 축석방식의 기술적 재현 가능성이나 구조적 안정성 여부 등 원형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검토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당시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적심(석탑 내부에 돌과 흙을 쌓아 올려 탑의 몸체를 구성하는 부분)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석재들로 쌓여 있고, 사이의 틈(공극)은 흙으로 채운 형태였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기존 적심부 석재들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품질이 저하됐다는 이유로 적심석 대부분(97.6%)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가공한 새로운 석재로 교체해 반듯하게 쌓기로 계획했다.문화재청은 이후 석탑의 2층 적심부까지 새로운 석재 가공작업을 진행하다가 2016년 초 원래의 축석방식과 부재를 보존한다는 이유로 당초 설계와 달리 3층 이상의 적심에 대해선 기존 부재를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로 인해 석탑 상·하부의 내부 적심이 다른 형태로 축석되는 등 일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축석방식을 변경하면서 구조안정성도 검토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적심은 석탑 상부의 하중을 하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석탑 구조의 안정성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륵사지 석탑의 3층 이상 부분은 구조계산을 거치지 않고 석탑 건축을 위한 설계도서 없이 축석됐다고 감사원이 지적했다.문화재청은 또 3층 이상 적심부의 틈을 채우기 위한 충전재를 기존에 계획했던 실리카퓸을 배합한 무기바인더에서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로 변경하면서 그 사유와 타당성에 대해 자문이나 연구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은 다른 무기질 보수재료와 비교해 강도 등 성능이 낮은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를 충전재로 사용한 것에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장에게 “구조계산 등을 거친 실측설계도서 없이 축석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구조안정성 검증 후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라”고 통보했다. 또 “앞으로 축석방식 보존과 기존 부재 재사용 가능 여부 등을 검토하고 계획을 수립해 일관성 있게 수리하며, 실측설계도서 없이 문화재를 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요구했다.한편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를 구성한 3개 탑 가운데 서탑으로, 목탑처럼 석재 2800여 개를 짜 맞춰 완성된 것이다. 1998년 이뤄진 안전진단에서 일제강점기에 보수할 때 사용한 콘크리트가 노후화하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문화재위원회는 이듬해 석탑의 전면적인 수리를 결정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보수공사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온전한 모습 23일 일반 공개

    보수공사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온전한 모습 23일 일반 공개

    18년에 걸쳐 해체·보수 공사를 마친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온전한 모습이 23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석탑 주변을 둘러싼 가설시설물을 철거하고 주변 정비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21일 밝혔다. 백제 시대에 지은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에서 일제강점기에 보수할 때 사용한 콘크리트가 노후화하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듬해 문화재위원회는 심의를 거쳐 석탑을 해체·수리하기로 결정했다. 연구소는 2001년 본격적인 해체 조사에 착수했고 2017년 6층까지 보수를 완료했다. 최근에는 공사를 위해 석탑 주변에 설치한 가설시설물을 모두 없앴다. 연구소는 4월 중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을 열고, 연내에 그동안의 조사 연구와 해체 수리 과정을 기록한 수리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경주 남산 ‘무단 분묘 이전’ 지지부진…국립공원공단 몸부림 역부족

    경주 남산 ‘무단 분묘 이전’ 지지부진…국립공원공단 몸부림 역부족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남산에 공동묘지처럼 조성된 분묘를 언제까지 이장(移葬) 할꼬’ 국립공원공단이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남산에 공동묘지처럼 조성된 분묘 이장을 놓고 몸부림 치고 있다. 28일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2011년부터 경주 남산지구에 조성된 분묘 6200여기를 대상으로 이장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립공원이자 사적지이기도 한 남산지구 문화 및 생태경관 복원을 위한 절박한 사업으로 판단됐기 때문. 국보 312호인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지 삼층석탑 등 보물급 문화재 13점 등 문화유적 672점(절터 147곳, 불상 118기,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이 곳곳에 산재한 경주 남산은 예로부터 천하 명당(名堂) 자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암매장 등 분묘가 마구 조성되면서 문화유적들이 훼손될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사업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지난해까지 8년간 국비 등 25억 5000만원 투입해 700여기의 분묘를 이장하는데 그쳤다. 전체의 11.3%에 해당된다. 공원공단의 분묘 이장 사업에 대한 정부 및 국민들의 낮은 관심으로 공단의 적극적인 예산 확보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해서다. 이 사업은 매년 희망자에 대해 기당(단장, 합장, 삼합장 등 매장 방식에 따라) 200여만~500여만원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올해는 5억원을 들여 분묘 125기를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이다. 현재 경주국립공원사무소(054-778-4111)에서 신청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주 남산 분묘의 체계적인 정비와 관리에 적극 나서야 할 문화재청과 경북도, 경주시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비판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등은 2014년부터 뒤늦게 분묘 이전 사업에 참여해 올해까지 5년간(2017년 제외) 7억 8000만원 지원에 불과했다. 특히 남산지구 국립공원 전체 면적(21.85㎢)의 45%를 차지하는 9.86㎢(일부 사적지 포함)를 보유한 경북도는 고작 7600만원에 그쳤다. 이런 추세라면 남산 전체 분묘 이전에는 대략 70년 정도가 걸릴 전망이다. 경주지역 문화재 관련 단체들은 “문화재청과 경북도, 경주시, 국립공원공단이 국비 확보에 공동 대처하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남산은 1969년 12월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와 1985년 사적 제311호로 지정돼 관련 법에 따른 발굴 등을 제외한 각종 행위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안동·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인도 총리, 김해시에 불교 신성목 ‘석가모니 보리수’ 후손 기증…2014년 이어 두번째

    인도 총리, 김해시에 불교 신성목 ‘석가모니 보리수’ 후손 기증…2014년 이어 두번째

    경남 김해시는 최근 방한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석가모니 보리수’ 후손을 선물했다고 24일 밝혔다. 2000년 전 허황옥을 시작으로 한 한국과 인도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한 것이다. 모디 총리는 방한 첫날인 지난 21일 허성곤 김해시장을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나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에 있는 석가모니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기증했다. 이 묘목은 기원전 6세기 석가모니가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 구역에서 득도할 때 주변에 있던 보리수의 직계 후손이다. 이런 연유로 인도에서는 불교의 3대 신성목(神聖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인도가 2014년 한·인도 우호의 상징으로 ‘석가모니 보리수’를 우리나라에 기증한 적이 있지만, 특정 도시에 선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김해시는 강조했다. 인도는 그동안 태국, 스리랑카 등 7개국에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한국은 두 그루의 석가모니 보리수를 선물받은 유일한 국가가 됐다. 김해시는 석가모니 보리수를 국립수목원 열대온실에서 일단 키운 후 김해시로 옮겨와 일반에 공개한다.김해시는 인도와 특별한 관계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현재 김해시 일대에 있었던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인도 출신으로 나온다. 허황옥은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에 파사석탑 등을 싣고 건너와 김수로왕과 혼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해시는 허황옥을 매개로 허황옥 출신지로 추정되는 인도 아요디아시와 200년 자매결연을 하는 등 인도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허성곤 시장은 지난해 12월 주한인도대사를 만나 이런 역사적 인연을 강조하며 석가모니 보리수 기증을 건의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국운 짓누른 일제, 조선왕실 태실 부장품 빼돌리고 집단 이장했다

    국운 짓누른 일제, 조선왕실 태실 부장품 빼돌리고 집단 이장했다

    20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허름한 보리밥집 앞 이름도 없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삼릉 서쪽 끝 가까이 된다. 1시 방향 숲길을 따라 150m를 걸으니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선 묘비 50여기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왕가 ‘태실’(胎室)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출산 때 나오는 태를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항아리에 정성껏 담아 땅속에 묻었다.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심을 보여주는 우리의 대표 풍속 중 하나다. 보관하는 방법은 신분의 지위고하에 따라 다르다. 왕실은 국운과 관련 있다 해 전담 부서에서 전국 명산의 좋은 터에 석실과 석탑을 만들어 보관해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 서삼릉에 집단화 그런 조선왕가의 태실 중 54기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이후 서삼릉 경내로 옮겨 집단화됐다. 태조 등 역대 왕의 태실이 22기, 왕자·대군·왕녀·왕비의 태실이 32기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던 태조의 태실을 비롯해 서삼릉역으로 옮겨온 태항아리 등은 시멘트 원통 속에 자갈을 깔고 묻었다. 바깥 가장자리에는 일제를 의미는 ‘일’(日)자형 시멘트 담장을 쌓고 일본식 철 대문으로 걸어 잠갔다. 효율적인 관리와 도굴 방지를 구실로 한곳에 모아놨으나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고 태항아리와 함께 묻었던 부장품을 빼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이은홍 종묘제례보존회 전례이사는 “태실을 신격화했던 일본인들이 조선국왕 태실을 훼손한 것은 조선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서 였다”고 밝혔다. 심현용(고고학박사) 한국태실연구소 소장도 “죽음을 의미하는 서삼릉에 삶과 미래를 의미하는 태실을 집장한 것은 조선의 국운을 말살하려는 의도다”고 했다. 그는 “전통방식은 내항아리에 태를 담아 외항아리에 다시 집어넣는 방식인데 일본은 서삼릉 땅속에 일장기를 상징하는 시멘트 원통을 묻고 태항아리를 넣은 뒤 시멘트 뚜껑 2개를 덮어 일제를 상징하는 日 모양이 되도록 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바깥을 日 모양의 담을 더 쌓아 조선왕가의 정기와 국운을 이중 삼중으로 억누르려 했다”고 강조한다. 이 담장은 가로 28m, 세로 24m, 높이 1.5m, 총 둘레 104m이다. ●일제, 태실 훼손에 대해 사죄해야 일제강점기 조선 왕실은 일본 황실에 부속돼 이왕가(李王家)가 됐고, 조선총독부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행정관청을 둬 세입세출 및 의전을 담당케 했다. 이왕직은 1928년쯤부터 전국에 흩어진 조선왕실의 태실을 옮기면서 ‘태봉’(胎封)이라는 복명서로 기록을 남겼다. 태실을 옮기는 이봉작업은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와 태지까지 포함됐다. 태봉 기록에 따르면 1928년 8월 5일부터 30일까지 태종대왕, 세조대왕, 인종대왕, 세종대왕 태실을 조사해서 태항아리와 지석을 경성 봉안실에 보관했다. 이후 서삼릉경에 태실 49기를 이장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장 시기는 1930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이다. 49기의 태실 외 5기의 태실은 1930년 이후에 새롭게 조성됐다. 태실군 주위를 둘러싼 日 모양의 담장은 고양시민들의 민원과 건의를 받아 문화재청이 1995년 3월 27일 중앙을 가르는 담장을, 외곽의 담장과 철문은 1996년 3월 6일 철거했다. 이듬해 3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하면서 태실의 실체와 태항아리 등의 보존 상태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각각의 태실은 시멘트를 이용한 조잡한 이장으로 방수가 안 돼 물이 차고, 태항아리는 물에 둥둥 떠 있다 쓰러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출토된 태항아리 중 일부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교체한 사실도 확인했다. 문화재청은 보존관리를 위해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로 태항아리 등을 옮겼다. 태를 생명체의 근원으로 여기며 태의 봉안을 신성시했던 우리 민족에 일제가 속죄해야 하는 이유다. ●자발적으로 집단화했다는 주장도 일부 있어 반면 서삼릉 태실은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설립 주체를 더 파악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안재성 고양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은 “왕세자였던 이구의 태실은 왕자녀의 태실에 있어야 함에도 국왕의 태실 반열에 있다. 이는 다음 왕이 될 신분이므로 그같이 조처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이왕가 왕실을 일본 황실에 부속된 한 왕실이 아니라 예전 대한제국의 황실임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밝혔다. 태실 서삼릉 이전이 이왕가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시행한 것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태실을 서삼릉역으로 집단 이전한 이유는 뭘까. 당시 조선왕조 태실이 망국과 함께 이를 보호하는 방어막도 점차 엷어졌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가운데 이왕직에서는 서둘러 왕가 태실의 태를 한곳으로 옮겨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수호하려는 명분을 찾았고 당시 총독부의 허수아비 이왕가는 자진해 태실을 포함한 태봉산을 불하해 이왕가 재정을 충당하려 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태실 이전 장소를 서삼릉역으로 잡은 것은 서울과 가깝고 역대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으며, 당시 이왕가 소유였기 때문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아니다”라는 입장이 더 우세하다. 정동일 고양시 향토사전문위원은 “서삼릉에 집결돼 조성된 태실은 이전 각지에 세운 조선시대의 격조 높은 왕실의 태실과 너무도 차이가 나는 작고 단순하며 볼품없는 모습 즉 공동묘지처럼 집단화한 모습으로 볼 때 수긍할 수 없다”면서 “태실을 둘러싼 담장이 일본을 상징한다는 일자인데다, 철문 모양도 일제 양식이기 때문에 더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왕직 장차관 임면권을 일제의 총독이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더 많다는 설명이다.●운명 결정짓는 태… 삼국사기에 유래 남겨져 태실을 조성하고 태항아리와 지석을 묻는데 이것을 장태 또는 안태라고 한다. 태의 처리에 대해서 옛 선인들은 다음 아이를 잉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어서 재앙이 없는 방향에서 태우거나 매장했다. 태장경에는 태의 의미를, 귀인이 되고 못 되는 게 태에 달렸으며, 어질거나 어리석어지거나 쇠망하고 성하는 것은 모두 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쓰여 있다. 안태에 대한 기록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그 기원이 신라 때부터 시작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삼국사기에는 진천현 태영산에는 신라 때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자를 지어 고려 때까지 국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중소기업을 빛낸 얼굴들’ 헌정식 개최

    ‘중소기업을 빛낸 얼굴들’ 헌정식 개최

    중소기업중앙회는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제6차 중소기업을 빛낸 얼굴들 헌정식’을 열고, 기업인 27명의 동판을 헌정했다. 이에 총 220명의 동판이 중소기업중앙회 2층 로비에 전시됐다. 중소기업인대회에서 산업훈장을 받거나 이 달의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수상자를 대상으로 동판 제작이 이뤄진다. 이날 헌정된 기업인 중에는 업력 50년을 넘은 장수기업을 이끈 기업인들이 포함됐다. 대호테크 정영화 대표는 스마트폰에 적용되는 3D 곡면유리 성형장비와 스마트폰·의료기기에 주로 적용되는 비구면 렌즈 성형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에 납품한 공로로 2016년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동구바이오제약 조용준 대표는 세계 최초로 지방유래 줄기세포 추출 키트(스마트X) 의료기기 승인을 받았으며, 국내 피부과 처방 1위 및 코스메슈티컬(화장품과 의약품의 합성어) 분야로의 사업 확장을 통해 최근 연 매출액 1000억원을 돌파한 벤처기업인으로 2017년 석탑사업훈장을 받았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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