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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물류창고 등 548곳 안전 전검

    경기도는 28일부터 11월 22일까지 현재 운영 또는 공사 중인 도내 물류단지와 물류창고의 안전관리 실태를 점검한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안전점검에선 도내 물류시설 운영 물류단지 9곳, 공사 중인 물류단지 3곳, 물류창고 536곳 등 총 548곳를 점검한다. 공사 중인 물류단지는 경기도 담당자와 민간전문가인 경기도안전관리자문단 자문위원 합동으로 사면보호 시설 적정 여부, 옹벽·석축의 침하 세굴 발생 여부, 안전관리계획 수립여부 등 현장의 안전관리 실태를 점검한다. 사업시행자는 지적사항에 대한 조치계획 및 결과를 도에 제출한다. 운영 중인 물류단지는 시·군 및 관리기관에서, 물류창고는 시·군에서 ▲안전점검 상태와 교육일지 작성 여부 ▲전기·소방시설 정기점검과 조치 여부 ▲위험물 정기점검 여부 등을 점검하고, 물류창고 관리자와 근무자의 물류창고 기본 안전관리 매뉴얼 숙지 등 점검 결과를 도에 제출할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상·하반기 물류시설 안전관리 실태점검을 통해 물류시설 관리자와 근무자에게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안전한 물류산업 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행주산성에서 삼국시대 축성 석성 ‘최초’ 확인

    행주산성에서 삼국시대 축성 석성 ‘최초’ 확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경기 고양시 행주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한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조사됐다. 김수현 고양시 학예연구사는 8일 “그동안 행주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포곡식 토축산성(包谷式 土築山城)으로 알려졌으나, 서기 7세기 때 정상부 능선을 따라 축조한 테뫼식 석축산성(山頂式 石築山城)인 사실이 최초 확인됐다”고 밝혔다. 석성의 규모는 지형에 따라 높이가 1.6~4.3m, 전체 길이는 450m에 달한다. 축조 시기도 기존에 알려진 것 보다 수백년 앞섰다. 고양시는 문화재청의 국비를 지원받아 지난 7월부터 한양문화재연구원을 통해 국가 사적 제56호인 행주산성 내 석성구역을 발굴조사해 왔다. 발굴 성과와 출토유물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를 이날 오후 2시 행주산성 정상에서 갖는다. 김씨에 따르면 이번 발굴조사는 지난 3월에 실시한 7개 지점 시굴조사를 거쳐 석성의 범위와 축조 기법 등을 확인하기 위해 5개 지점을 구체적으로 선별해 진행했다. 조사 결과 석성은 장방형으로 자른 화강암을 이용해 지형이 낮은 부분부터 외벽을 쌓은 후 외벽이 내벽과 동일한 높이에 이르면 내부에 돌을 채우고 흙을 다져 내·외벽에 석성을 동시에 쌓는 기법이 사용했다. 석성은 축성 이후 한 차례 고쳐 쌓았으며, 동쪽 일부 석성에서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흙을 다져서 보강한 토성이 발견되기도 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한성백제기의 대옹편 및 신라시대의 토기, 선문 및 격자문 기와편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돼 행주산성이 오랫동안 한강유역의 전략적 요충지 였음이 증명됐다. 김씨는 “이번 발굴조사로 행주산성의 유적 가치가 한층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굴곡진 인간사도 흘러가는 별천지

    굴곡진 인간사도 흘러가는 별천지

    강원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에 있는 화음동 계곡은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뛰어난 비경의 장소다. 여기에 ‘인문석’이라 부르는 너럭바위가 있다. 원형과 사각형, 팔각형의 낯선 도형들과 몇 개의 한자들이 새겨진 바위다. 얼핏 보면 마치 외계의 미스터리 사인 같다. 그러나 이 기호들은 동아시아 인문학의 기초인 음양도, 하도와 낙서, 복희팔괘와 문왕팔괘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河.洛.羲.文.-하도, 낙서, 복희, 문왕-의 4자와 인문석(人文石)이라는 3자를 새겼다.●주택·정자··서재… 수양의 정원, 화음동정사 음양도는 두 개의 반원이 서로 교차하며 음양의 운동을 상징한다. 하도는 황하에 나타난 용마가 가져온 그림이며, 인류 문명을 창시한 전설적 제왕 복희가 하도를 얻어 우주 생성의 원리를 터득했다. 낙서는 낙수에 출현한 신성한 거북이가 가져온 책의 한 장으로, 하나라 우임금이 낙서를 얻어 우주 상극의 원리를 깨달았다. 복희는 하도에서 이른바 복희팔괘를 만들어 하늘의 원리에 통했고,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문왕이 낙서에서 문왕팔괘를 만들어 인간사의 원리를 통했다. 문왕은 더 나아가 두 팔괘를 곱해서 주역의 64괘를 완성했다.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는 이 상징적 과정들을 종합해서,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8괘를 낳았으며, 복희와 문왕의 8괘가 겹쳐 64괘를 낳았다는 거대한 인식론의 체계를 형성했다. 후학인 주희는 이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형이상학 즉 성리학을 정립했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성리학을 개인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화음동 계곡의 인문석은 자연 속에 새긴 성리학의 교과서요, 조선 지식계의 확신 선언이었다. 인문석을 새긴 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며 고위 관료인 김수증(1624~1701)이다. 그는 이곳에서 인문석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을 짓고, 정원을 만들어 ‘화음동정사’라 했다. 삼일천 개울의 서쪽에 주택을 조성해 거주공간으로, 동쪽에 정자와 서재를 지어 수양공간으로 삼았다. 기록에 따르면 서쪽 주택은 ‘부지암’으로, 작은 연못을 파고 냇가에 정자를 지었다. 주택을 위해 쌓은 석축과 정자의 기둥자리 흔적도 남아 있다. 계곡 가운데 월굴암이라는 우뚝한 바위가 있어 이곳에 건너편 바위인 천근석에 긴 나무다리를 걸쳐 건널 수 있게 했다는데, 현재는 월굴암 위에 초가정자인 송암정만 복원했다. 동쪽 인문석 위에는 삼일정이라는 특이한 정자를 지었다. 매우 희귀하게도 세모난 삼각정이다. 지형 때문에 기둥을 3개만 세울 수 있다고 했지만 오히려 천지인 삼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 인문석이 성리학의 우주관을 상징한다면, 위의 삼일정은 고유한 삼일사상을 상징해 비로소 전체 우주론을 완성하게 된다. 정자 뒤편에는 서재인 ‘무명와’를 지었고, 방 하나에 삼국지의 제갈량과 생육신 김시습의 초상화를 걸어 ‘유지당’이라 했다. 개울의 좌우에 두 영역을 배열하고, 자신은 깨우친 바가 없어 ‘부지암’에 살지만, 삶의 모델인 제갈량과 김시습은 깨달음의 경지에 달해 ‘유지당’에 모셨다. 좌우와 유무의 설정 자체가 음양론이며, 자연과 건물이 어우러진 변화무쌍한 경치를 즐겼다. 주역의 대가인 송나라 시인 소옹의 ‘음양소식관’을 구현한 결과다.●자연 속의 은거, 김수증의 주자 닮기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부터 인간의 심성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이치를 밝히고 하나로 엮은 학문이며 사상이었다. 이 거대한 체계를 완성한 송나라의 주희는 주자로 격상돼 조선조 지식인의 사표가 됐다. 그 추종은 거의 종교적이어서 그의 삶과 활동까지도 숭상의 대상으로 올라섰다. 주자는 젊어서 과거에 합격했으나 30대부터 향리에 들어가 일생을 은거했다.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 자락에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을 경영했다. 정사란 세속과 격리된 곳에 지은 수양용 건축이며, 구곡은 한 계곡의 절경 아홉 곳을 선택한 거대한 자연 정원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이상은 자신만의 정사에 머물고 구곡을 경영하여, 궁극적으로 주자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었다. 김수증 역시 화음동정사를 짓고, 인근 사내천에 곡운구곡을 경영했다. 김수증의 조부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이며, 큰할아버지는 항복 소식에 순절한 김상용이다. 정승까지 지낸 두 조부의 지조는 조선 선비들의 모범이 됐다. 김수증의 두 동생, 김수흥과 김수항은 모두 영의정을 지낸 대단한 형제였다. 또한 김창집 등 김수항의 여섯 아들은 모두 고위직이며 문예의 대가들로서, 아버지 3형제와 묶어 ‘삼수육창’이라 칭송받았다. 그들의 자손은 더욱 번창해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가를 이루었으니, 그 유명한 신안동(장동) 김씨 가문이다. 그러나 김수증은 세상 명예에 그다지 흥미가 없고 화천 골짜기에 은거하기를 즐겼다.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출세의 허망함을 깨달았을까? 그 시대는 그야말로 정치 광란의 시대였다. 왕가의 상복 입는 문제로 발단한 ‘예송’ 논쟁은 남인과 서인의 사활을 건 투쟁으로 치달았고, 왕들은 이들의 대립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오히려 당쟁을 부추겼다. 서인이 승리한 기해예송을 시작으로 갑인예송, 경신옥사, 기사환국, 갑술옥사까지 남인과 서인의 정권이 교체됐다. 서인의 핵심 세력은 김수흥·수항 형제였고, 옥사와 환국 정국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갑인예송(1674년) 전후로 김수증은 화천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를 짓고 이주했다. 이때부터 일대에 곡운구곡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1689년 기사환국 때 다시 화천으로 낙향해 화음동정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은거했다. 극과 극을 부침한 인간사에서 음양의 진리를 다시 깨달았을 것이다. 위로를 받을 곳은 오로지 자연이요, 믿을 것도 오로지 자연뿐이다. 구곡과 정사에서 은거하기는 주자가 가르쳐 준 유일한 행복의 방정식이었다.●곡운구곡, 물과 바위의 거대한 정원 곡(曲)이란 휘어져 흐르는 물 구비다. 물은 왜 휘어지는가? 산과 바위가 흐름을 막기 때문이며, 물은 휘어 흐르면서 바위를 깎아 절경을 이룬다. 그 가운데 단 아홉 곳만 선택했으니 구곡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김수증은 이곳을 발견하고 “금강산 만폭동 계곡에 비견할 만한 명승이고, 더욱이 매월당 김시습의 유적이 있는 곳이니 터를 잡아 의지할 곳”이라 했다. 이미 자연주의자 김시습도 인정했던 탁월한 곳이라는 말이다. 구곡은 하류부터 상류로 올라가며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각각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다. 1곡 방화계, 2곡 청옥협, 3곡 신녀협, 4곡 백운담, 5곡 명옥뢰, 6곡 와룡담, 7곡 명월계, 8곡 융의연, 9곡 첩석대. 흐르는 물은 그 모양에 따라 여러 이름을 가진다. 계는 평탄한 흐름, 협은 좁고 빠른 흐름, 담은 깊고 작은 고임, 뢰는 급하게 휘도는 여울, 연은 크게 고인 물을 의미한다. 그 앞에 붙은 꽃, 옥, 구름, 달 등은 도교적인 상징으로, 신선의 장소가 된다. 자신의 아들, 조카, 외손들에게 시를 지어 각 곡의 경치를 그린 ‘곡운구곡가’를 만들었다. 그중 9곡가는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 하고 끝을 맺는다.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는 그림으로 남겨야 한다. 주자의 ‘무이구곡도’는 조선 양반들이 최고로 선호한 소장품이었다. 가 보지 못하니 그림으로 즐겨야 했기 때문이다.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환국 때, 김수증은 잠시 서울로 거처를 옮긴다. 1682년 평양의 양반화가 조세걸에게 직접 현장에 가서 실경을 그리라고 특별 주문해 ‘곡운구곡도’를 제작했다. 화첩으로 만들어 멀리서도 구곡을 감상하려는 목적이었다. 화첩은 아홉 곡과 농수정 그림 하나를 더해 모두 10첩이다. 6곡은 삼일천과 사내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이곳에 농수정사와 정자를 지어 은거지로 삼았다. 현재 곡운영당이 있는 곳이다. 그림은 솔 숲 사이에 초가와 기와의 살림집, 담 밖의 정자와 정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곡운구곡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김수증의 이상이 응축된 소우주였고, 시와 그림으로 추상화한 거대한 건축이었다. 화음동 삼일정의 세 추녀에 각각 음양, 강유, 인의라고 썼다고 전한다. “인간사는 음양의 굴곡이 있으니, 때로 단단하고 때로 유연해야 하나, 늘 어질고 의로움은 잊지 말라”는 일생의 깨달음을 남긴 것이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기대다-영주 부석사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기대다-영주 부석사

    #배흘림기둥 #목조건축의_고전 #혜곡최순우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 1994. 학고재> 배흘림기둥. 영주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 주불전인 무량수전 기둥은 민흘림이 아닌 장독처럼 배부른 배흘림모양이다. 이 배흘림으로 인해 원래도 유명하였던 영주의 부석사는 더 큰 이름이 전국적으로 났다. 제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고미술사학자인 혜곡 선생이 부석사 배흘림기둥에 반하고 만다. 그는 배흘림기둥을 두고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라는 평가를 남긴다. 배흘림기둥에 다시금 기대어 서 보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오래된 목조건축물로는 부석사의 무량수전, 봉정사의 극락전, 수덕사의 대웅전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국보 제 15호 지정된 고려시대 양식의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지만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국보 제 18호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좀 더 윗길로 보는 견해도 많다.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로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부석사라는 절집 이름이 붙여진 유래는 이러하다. 당나라에서 의상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선묘라 부른다. 그녀는 용으로 변하여 봉황산까지 날아와 산채에 숨은 도적 500명을 바위를 날려 물리쳤다고 한다. 그 때의 바위가 무량수전 바로 뒤편에 있다. 큰 바위가 바닥에서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浮石(부석)’이라 하였고 사찰명도 ‘부석사(浮石寺)’가 되었다. #안양루의_풍광 #영주맛집 #석양풍경 사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안양루, 선묘각, 조사당, 취현암, 범종루, 선열당 등 많은 당우와 전각이 있지만 특히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은 무량수전과 안양루다. 부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사찰이 들어선 가람의 위치 때문이다. 누구라도 부석사의 범종각이나 안양루 오르면 눈 아래 펼쳐지는 소백산맥 휘어드는 봉우리들의 풍경에 넋을 놓고 만다. 신라 시대, 그 옛날에 봉황산 중턱 좁고 가파른 땅을 높은 석축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이렇듯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부석사의 본전(本殿)은 무량수전이다. 배흘림기둥이 있는 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창건 연대가 확인된 목조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또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대표되는 불전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순한 팔작지붕 집으로 기둥머리는 34cm, 중간 배흘림 부분은 49cm, 기둥밑은 44cm의 배흘림으로 내려와 건축에 대한 문외한인 관람객이 보아도 대단히 탄력적이며 역동적이다.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현종 7년(1016년) 원융국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배흘림기둥이 있는 무량수전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안양루도 유명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 오르면 뒤로는 무량수전, 앞으로는 경내의 여러 건물들의 지붕들과 선이 맞닿은 소백의 여러 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석양이 질 때 바라보는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운무와 붉은 구름 속의 산과 들은 부석사가 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 건축물로 손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국신발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 5개 만점) - 석양이 질 때 바라보는 무량수전 앞 풍광은 압권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혹은 연인 끼리도 좋다. 석양을 노려라. 3. 가는 방법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 영주 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20~30분 간격으로 부석사에 가는 버스가 많다. 4. 특징은? - 불교라는 종교적 의미보다 건축미학적인 의미가 더욱 더 짙은 곳.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유명세에 비하면 관람객들은 그리 많지 않다. 관광버스로 오는 중년의 관람객들이 주 방문객. 6. 꼭 봐야할 장소는? - 무량수전 뒤의 부석(浮石),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안양루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유명한 먹거리 맛집이 많다. 영주 축협 한우프라자, 한결 청국장, 묵호문어집, 명동감자탕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pusoksa.org/main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무섬마을, 소수서원, 영주선비촌전통시장, 영주인삼박물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부석사는 유명한 곳이다. 한 번은 다녀오면 좋다. 부석사 여행의 포인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석양 풍경을 또 한 컷.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느릿느릿 황톳길 맨발의 자유…다닥다닥 옛 동네 추억의 여유

    느릿느릿 황톳길 맨발의 자유…다닥다닥 옛 동네 추억의 여유

    걷기가 좋은 줄 누가 모를까요. 걷기 앞에 우리는 늘 인색합니다. 생활이 바쁘다, 바로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운동복을 아직 안 샀다…. 군색한 변명 앞에 신발 속 발은 점점 하얘집니다. 꽉 조이는 신발에 길든 채 아스팔트 위를 건성으로 걷습니다. 발에도 숨 쉴 틈이 필요합니다. 부실한 몸을 받쳐 주느라 고생하는 발에 휴식을 주러 대전 계족산 황톳길을 찾았습니다. 보드라운 황톳길에 맨발을 올려놓자 발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발이 즐거워하자 걷기도 즐거웠습니다. 거대한 설치미술 작품인 양 황톳길에 찍힌 수백 수천 개의 발바닥 위에 신나게 발자국을 보탰습니다. 계족산 황톳길을 걸으면 몸이 알게 됩니다. 걷기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신발이 옥죄던 발이 얼마나 사뿐히 걸을 수 있는지, 맨발 걷기만으로 닫힌 감각이 얼마나 활짝 열리는지를.●말랑말랑한 찰흙 위를 걷는 듯… 맨발에 주는 휴식 계족산은 424m 높이의 아담한 산으로 대전시 북동쪽에 자리한다. 이곳에 산허리를 휘감은 황톳길이 있다. 길 한쪽에 황토를 깔아 맨발로 걸을 수 있게 했다. 총길이 14.5㎞, 장동산림욕장 입구를 출발해 임도삼거리, 절고개 등 산 중턱을 빙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꼬박 걸으면 너덧 시간 정도다. 완주가 부담스럽다면 장동산림욕장 입구에서 계족산성까지 편도 1시간 30분 정도만 걸어도 좋다. 길은 오르내림이 적고 유순하다. 발을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황토가 메마르면 물을 뿌려 수분을 보충하고 황토를 수시로 부어가며 길을 다진다. 황톳길 초입부터 계족산성 갈림길까지 중간중간 발 씻는 곳이 있어 일부 구간만 맨발로 걸어도 된다. 맨발이 찰흙 놀이를 한다. 말랑말랑한 찰흙 위를 걷는 듯한 느낌에 발이 한껏 신이 났다. 황토의 차진 촉감, 산뜻하게 차가운 온도에 걸음이 가뿐하다. 촉각이 곤두선다. 발바닥에 와 닿는 감촉만으로 황토와 나뭇잎, 여름 열매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발은 어서 걷자고 재촉하는 듯 경쾌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발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혈액순환에 좋다, 발바닥을 지압해 치매 예방에 효과적이다 등 맨발 걷기의 이로움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맨발 걷기가 몸에 좋은 줄은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계족산 황톳길은 길의 역사를 알고 걸으면 더욱 뜻깊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작은 사소했다. 지역 기업인 맥키스컴퍼니 회장이 계족산을 걷던 중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줬다. 맨발 걷기의 효력 덕인지 회장은 그날 맑은 머리로 단잠에 빠졌단다. 이후 더 많은 사람과 맨발 걷기의 경험을 나누고 싶어 2006년부터 계족산에 황톳길을 조성했다. 전국에서 황토를 모아 덤프트럭 100대분의 황토를 깔았다. 물을 뿌리고 뒤집기를 반복했다. 선한 사람이 선한 마음으로 만든 선의의 길은 이렇게 탄생했다. 장동산림욕장 입구가 계족산 황톳길의 출발점이다. 신발을 벗고 황토에 맨발을 디디자 차가운 기운이 발을 감싼다. “앗 차가워.” 다른 누군가가 응수한다. “진짜 시원하네.” 황토는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보다 온도가 낮다. 숲의 청량한 기운이 발바닥에서 온몸으로 퍼진다. 황톳길은 수분을 머금어 촉촉하고 차지다. 딛는 대로 발자국이 찍히고 발가락 사이로 황토가 비집고 올라올 정도다. 수백 수천 개의 발자국이 조각된 황톳길은 대형 설치미술 작품 같다. ●삼국시대 축조한 계족산성 … 대전시내·대청호가 한눈에 맨발로 걸은 지 1시간쯤 됐을까. 계족산성으로 오르는 나무 데크가 나온다. 선택은 세 가지. 여기에서 되돌아가거나 내처 걸으며 맨발 걷기를 계속하거나 계족산성을 오르거나. 체력적 여유가 된다면 욕심을 내어 계족산성에 오르기를 권한다. 계족산 황톳길의 또 다른 묘미가 산성 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황톳길이 순탄한 평지였다면 계족산성에 이르는 700m 구간은 제법 가파른 등산로다. 돌 섞인 등산로를 올라야 하므로 신발 착용도 필수다. 20분가량 걸으면 계족산성 정상이다. 계족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했다는 석축산성이다. 산봉우리 테두리에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성벽 길이가 1037m로 대전에 있는 산성 중 가장 길다. 서쪽 벽과 남쪽 벽에 문터가 남아 있고 우물터, 조선 시대까지 통신 시설로 사용된 봉수대 등도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주한 풍광은 근사하다. 견고한 성곽 너머 대전 시가지와 대청호가 펼쳐진다. 서문 터에서는 갑천, 대덕 테크노밸리 등 대전 시내가 훤하고, 곡성(성벽 밖에 볼록한 철(凸)자 모양으로 구부러지게 쌓은 성) 오른쪽으로 대청호 물결이 잔잔하다. 대전이 발아래 있는 듯한 느낌이다. 초록의 밀도가 응축된 숲 냄새에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숨을 들이마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시 맨발로 걷는다. 황톳길의 찰박이는 소리가 금세 그리웠기 때문이다. 미끄러질 듯 매끈한 황톳길을 느릿느릿 굴린다. 평소 총총거리던 걸음도 ‘빨리빨리’를 외치던 속마음도 내려놓는다. 속도를 내다 넘어질까, 길을 가로지르는 개미 떼를 밟을까, 황토의 부드러움을 잊을까 한 발 한 발 공들여 걷는다. 계족산 황톳길에서 맨발에 자유를 주고 걷기의 즐거움을 체화한다. ●대전 엑스포 당시 주차장을 꾸며 만든 한밭수목원 한밭수목원은 둔산대공원 내에 있는 도심 속 수목원이다. 1993년 대전엑스포 당시 주차장이던 공간을 활용해 수목원으로 꾸몄다. 한밭수목원의 강점은 접근성이다. 대개 수목원은 도심 밖에 있기 마련인데 한밭수목원은 대전 한복판에 자리한다. 교외로 나간다는 ‘큰마음’ 먹지 않고도 미끄러져 들기 좋은 위치다. 수목원은 대전엑스포 시민광장을 중심으로 동원과 서원으로 나뉜다. 6월의 수목원은 열대식물원, 장미원, 수생식물원이 인기다. 열대식물원을 출발해 장미원을 거쳐 수생식물원을 따라 암석원까지 가면 1시간여 동안 수목원의 핫플레이스를 얼추 둘러보는 셈이다. 열대식물원은 야자수, 열대과수, 맹그로브 등 열대 및 아열대식물 250여종을 보존한다. 워싱턴야자와 벵갈고무나무가 울창한 숲 그늘을 만들고, 말레이시아 국화인 하와이무궁화처럼 생소한 꽃도 지천에 핀다. 장미원은 오감이 호사를 누리는 공간. 모니카, 아바에 드 클루니, 에스메랄다 등 이국적인 이름의 장미가 저마다 진한 향기를 뽐낸다. 수생식물원은 호수와 정자가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름 바람에 몸을 맡긴 수생식물을 구경하며 동서로 뻗은 나무 데크 산책로를 따라가면 동원 북동쪽, 암석원에 닿는다. 암석원 끝자락의 전망대는 계족산, 엑스포다리, 한빛탑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숨은 명소다.●‘철도 도시’ 대전을 간직한 소제동 철도관사촌 대전역 뒤편 소제동에 철도 근로자들이 몸을 누이던 철도관사촌이 있다.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며 논밭밖에 없던 대전이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됐다. 철도 근로자들이 머물 곳이 필요해지자 1927년 소제동에 있던 호수 소제호를 매립해 철도 근로자용 관사촌을 만든 것이다. 일반 주택과 관사가 다른 점은 뭘까. 관사 외부는 삼각지붕과 ‘제00호’ 나무 현판이, 내부는 한 지붕 밑에 두 가구가 대칭으로 거주하는 구조가 특징이다. 마을에 오늘날까지 관사 40여채가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개·보수를 한 곳이 태반인 데다가 밖에선 내부 구조를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관사를 식별할 수 있는 건 뾰족한 삼각지붕 덕이다. 목재 비늘판을 인 삼각지붕, 나무 전봇대, 지금은 없어진 대전·충남지역 소주 ‘선양’ 포스터가 마을의 100여년 전을 증언한다.소제동 철도관사촌 일대에 솔랑시울길이 조성돼 있다. 솔랑시울길을 중심으로 솔랑길, 시울길이 잔가지 치듯 뻗어 있다. 비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터라 어디를 기점 삼아 무엇을 보면 좋을지 감을 잡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정표가 될 만한 곳이 있다. 60여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대창이용원, 주민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청양슈퍼다. 청양슈퍼 앞마당은 이따금 마을을 테마로 한 전시가 열린다. 관사촌 내 빈집을 창작 공간으로 쓰는 레지던시, 소제창작촌의 작가들이 기획한 것이다. 작가들은 마을 이야기를 보존하고 외부인에게 소개하며 문화해설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청양슈퍼에서 새둑길로 이어지는 길, 연노란 벽에 주민들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옛 동네에 얽힌 시간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어 철도관사촌은 아직 건재하다. 글 이수린(유니에스Inc. 여행작가) 장명확(사진작가) ■ 여행수첩 (지역번호 042)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와 신탄진로를 따라간다. 신탄진IC에서 신탄진 방면으로 우회전 후 신탄진로를 3.4㎞가량 가다 장동 방면으로 우회전하고 ‘계족산성, 황톳길, 산림욕장’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장동산림욕장 주차장이다. 주차장 맞은편이 계족산 황톳길 입구다. →맛집 : 띠울석갈비(627-4242)는 계족산 산행 후 빈속을 채우기 맞춤하다. 참숯에 초벌한 갈비를 돌판에 올려내 고기에 참숯 향이 은은하다. 광천식당(226-4751)은 두루치기를 잘한다. 널찍하게 썬 두부에 칼칼한 양념이 밴 두부 두루치기, 오징어 두루치기가 대표 메뉴다. 마약양꼬치(621-9492)는 중국에서 양꼬치 집을 하던 부부가 운영한다. 마파두부에 향신료를 쓰지 않고 양꼬치 양념에 고수를 적게 쓰는 등 한국인 입맛을 배려했다. →잘 곳 : 굿모닝레지던스호텔휴(489-4000)는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레지던스 호텔이다. 객실 내에 주방 가구와 드럼세탁기가 있어 취사와 세탁이 가능하다. 호텔 그레이톤 둔산(482-1000)은 대전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100m 거리다. 1~2인용 스마트 싱글 객실부터 온돌형 객실까지 객실 선택의 폭이 넓다.
  • 1억 그루 나무…‘숲속의 도시’ 춘천

    강원 춘천시가 도심 속에 1억 그루 나무를 심는 ‘숲속의 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춘천시는 20일 도시열섬과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2050년까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미세먼지 저감·차단에 효과적인 가로숲 길을 등하굣길, 학교 유휴공간, 사회복지시설 등에 조성한다. 6m 이상 보도에는 나무를 2열로 심고 도심 내 모든 녹지도 다층구조로 만들 계획이다. 춘천에서만 보고 즐길 수 있는 랜드마크형 숲도 조성된다. 옛 미군부대 터 캠프페이지와 상중도·고구마섬에는 숲 중심의 시민복합공원과 정원을 조성하고 하천 주변 생태숲과 의암호 수상공원도 추진한다. 횡단보도 변이나 버스정류장 주변, 옹벽, 석축, 자투리땅 등에도 교통섬과 그늘숲을 만든다. 숲속의 도시 조성은 시민 주도형 사업으로 확대, 추진된다. 시민 스스로 마을 입구와 공터·폐교에 나무를 심고 생일, 결혼, 탄생 등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수사업도 한다. 기업이 참여하는 반려 나무 나누기, 경관법에 따른 사유지 도시 숲 조성사업 등도 진행한다. 시민 참여를 위해 홍보 동영상·포스터도 제작, 배부한다. 이재수 춘천시장은 “별도의 추진팀을 만들고 녹색사업육성기금, 국비 등을 통한 사업비 확보에도 나선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고려 희종릉 주변에서 향로·동물 석상 나왔다

    고려 희종릉 주변에서 향로·동물 석상 나왔다

    양·호랑이·사람 형상 돌 조각 확인 지진구 용도 도기 항아리 등 주목고려 제21대 왕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인 강화도 석릉(사적 제369호) 동쪽 무덤에서 당시의 상장례(喪葬禮)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철제 향로 다리와 동물 석상이 발견됐다. 지난해부터 석릉 주변 고분군을 조사 중인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월 재개한 발굴조사를 통해 동물 모양의 철제 향로 다리와 도기 항아리, 돌을 양과 호랑이 형태로 조각한 석양과 석호, 피장자를 수호하는 상징물인 석인상 등의 유물을 출토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강화도 남부 진강산 동쪽 능선에 있는 석릉 동쪽 고분 9기를 대상으로 했다. 무덤은 돌덧널무덤(할석조 석곽묘)을 비롯해 판돌을 이용한 돌덧널무덤(판석조 석곽묘), 널무덤(토광묘) 등 다양한 축조 양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묘역은 여러 단의 석축을 이용해 구획했고, 봉분의 뒤쪽 주변에 낮은 담인 곡장을 둘렀다. 특히 석릉 주변 고분군에서 발견된 동물 모양의 철제 향로 다리와 항아리 등을 주목할 만하다. 이 유물들에 대해 연구소 측은 “건물을 짓기 전에 땅의 기운을 진압하고 안전을 빌기 위해 봉안하는 물품인 지진구(地鎭具)로 보인다”며 “무덤을 쌓아 올릴 때 제의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40호 돌덧널무덤 후면에서 양과 호랑이 모양의 석수(石獸·무덤 인근에 세운 동물 모양의 상)가, 인근 52호 돌덧널무덤에서 사람 모양의 석인상(돌로 조각한 사람의 형상)이 확인됐는데 연구소 측은 “고려 시대 묘역 구조를 밝힐 수 있는 기초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구소는 지난해 무덤 118기가 존재한다고 알려진 석릉 주변 고분군을 조사해 무덤 6기의 축조 형태 및 방법을 확인하고 도기병과 작은 유병(油甁)을 비롯해 북송전(北宋錢) 등 중국 북송대 화폐를 수습한 바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백제 성곽’ 정읍 고사부리성, 시대별로 색다르게 수리됐다

    ‘백제 성곽’ 정읍 고사부리성, 시대별로 색다르게 수리됐다

    백제~조선시대 축성방식 달라 ‘돌→흙→흙+돌’ 세 차례 개축 지리적·전략적 중심지로 확인백제 때 축조된 전북 정읍 고사부리성(사적 제494호)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된 것으로 드러났다. 고사부리성은 백제 때 지방 통치의 중심이었던 오방성(五方城) 중 하나인 중방성(中方城)으로 사용된 이후 1765년(영조 41년)까지 읍성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 1일 정읍시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정읍시 고부면 성황산에 위치한 고사부리성의 성벽 일부를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별로 각각 수리한 양상이 드러났다. 백제시대 성벽은 3~4개 구간으로 나눠 외벽과 내벽을 쌓은 뒤 그 사이에 다듬은 돌이나 흙으로 채우는 협축 기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하나의 성돌을 6개의 성돌과 서로 맞물리도록 축조한 육합쌓기 방식도 확인됐다. 육합쌓기는 고구려 성벽의 축성기법이라는 점에서 백제 석성과 고구려의 관련성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연구원은 강조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반적으로 백제 석축성벽의 전통이 유지됐고, 추가적으로 성 내부의 물을 배출하기 위해 성곽 일부를 파내서 만든 수구시설 2기가 확인됐다. 백제와 통일신라 시대에는 석축성이었으나 고려시대가 되면서 성벽은 토성으로 변했고, 조선시대에는 흙과 돌을 모두 사용한 성곽이 들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유물로는 다리가 세 개 달린 삼족토기, 항아리, 접시, 병 등 다량의 백제 토기와 고구려계 토기로 알려진 암문(暗文) 토기 등이 나왔다. 연구원 관계자는 “고사부리성이 성벽의 성돌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고 견고함와 안정성을 극대화하는 축성방법을 동원해서 축조됐을 뿐 아니라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장기간 이용한 성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면서 “고사부리성이 백제 때 지방통치의 핵심적인 성으로 조성된 이래 지리적·전략적 중심지로서 중요하게 다뤄졌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니 유한(遺恨)이 없다. 동포의 고난을 네 고난으로 알고 살아가거라. 가사(家事)든 국사(國事)든 오직 자력(自力)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58세의 백산 안희제를 일제는 9개월 동안이나 악랄하게 고문했다. 피가 눌어붙은 죄수복을 입고 반송장이 돼 풀려난 백산은 장남 상록에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몇 시간 후인 1943년 9월 12일 새벽 2시, 백산은 숨을 거두었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 두 해 전이었다.백산은 1885년 9월 12일 충절의 고장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설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의 생가가 지척에 있는 곳이다. 백산의 선조 안기종은 왜병과 싸운 의병장이었다. 입산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유곡천이 마을 앞에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백산의 집안은 700석 부자였다. 안향의 후손인 탐진 안씨가 조선 중기부터 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선생의 생가인 ‘백산고가’(白山古家)가 남아 있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백산의 장손자 안경하(80)씨를 만나 백산의 일생에 대해 들었다. 안씨의 어머니, 즉 백산의 며느리는 왕산 허위의 형인 방산 허훈 가(家)의 자손과 결혼했다고 한다. 안씨는 “할아버지는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했다”고 말했다. “새는 한가하여 벽곡(僻谷)을 찾았는데 해는 싫어하여 중천에 떠 두루 비치도다.” 한학에도 뛰어났던 선생이 유년 시절 지은 시다. 백산은 20세에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달이 밝은 날 밤 몰래 구국의 일념으로 상경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양정의숙으로 옮겼다. 백산의 조국독립 방략은 무력 저항보다는 실력 양성, 계몽운동이었다. ●발해농장, 실질적인 국외 독립운동기지 1909년 먼저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를, 의령에 의신학교를, 입산마을에 창남학교를 세웠다. 그해 9월에는 남형우, 김동삼, 서상일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26세 때인 1911년부터 3년 동안은 러시아와 만주를 돌아보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국민을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우리가 가난해서는 어렵습니다. 부산을 일본인 손에 넘겨줘서야 되겠습니까.” 귀국한 백산은 부산으로 가서 이렇게 호소해 1914년 9월 백산상회를 창립했다. 고향 논 2000마지기(40만평, 132만㎡)를 팔아 자금으로 썼다. 백산상회는 곡물, 면포, 해산물을 위탁 판매하는 개인기업이었다. 3년 후 합자회사로 전환, 경남 양산의 대지주 윤현태와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등 영남 자산가들로부터 거액의 협력을 받았다.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 무렵인 1919년 초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됐다. 주주들의 출자금 대부분은 임정 운영자금으로 보내졌다. 윤현태의 동생 윤현진은 아예 상해로 건너가 임정 재무차장을 맡았다. 백산상회는 국내외 20여 곳에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두었다. 겉만 기업이었지 독립운동 자금원이자 연락조직이었다. 김규식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백산은 경비를 제공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일제는 수색, 고문, 장부 검열을 계속했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장부상 결손으로 꾸며 추적을 따돌렸다. 백산은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일본인 여관에 묵었으며 금테 안경을 쓰고 일본식 복장을 했는데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위장술이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자금난이 심해졌고 주주들 간에 마찰이 생겼다. 경영 부실보다 독립운동 자금 탓이 컸다. 1928년 1월 백산상회는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최준에게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보여주자 최준은 백산의 묘소를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 그가 준 돈이 한 푼도 어김없이 임정에 전달됐음을 보았기 때문이다.백산상회를 경영하는 한편으로 백산은 자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후학 양성을 위한 기미육영회를 결성했다. 국회의원과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북한 조평통 위원장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신성모 등이 육영회 돈으로 독일, 영국에서 유학했다. 백산의 눈길은 언론으로 향했다. 이미 1920년 4월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창간에 참여했었다. 1928년 6월 당시 3대 일간지의 하나로 필화사건을 겪던 중외일보를 인수, 사장으로 취임했다. 임원진 중에는 독립운동가 최윤동, 임유동도 있었다. 백산은 조석간 발행 등 지면 및 경영혁신을 꾀했다. 그러나 일제 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다 1929년에 26회, 1930년에 31회 신문을 압수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그러는 새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1931년 9월 중외일보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조국 땅을 지키며 민중과 더불어 합법적인 조직과 방법으로 독립을 꾀하겠다던 백산의 계획은 뜻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좌절밖에 없었다. 백산은 지인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국은 감옥이다. 자유 천지에 나가서 활개를 펴고 조국 광복을 기어코 달성하는 데 죽는 날까지 싸워보겠노라.” 백산이 선택한 또 다른 길은 만주였다. 만주 땅을 일궈 빈농의 자립을 돕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김태원이라는 경제적 협력자를 구했다. 그는 경북 봉화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내 일약 거부가 되어 백산과 가까이 지내던 인물이었다. 만주 목단강성 영안현에 토지를 매입했다. 발해국 고도인 동경성이 있었던 곳이다. 1932년부터 목단강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고 수로를 내 황량한 땅을 개간했다. 백산은 발해농장으로 이름 짓고 조선에서 실농 300여호를 이주시켰다.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를 고안했다.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의 절반을 받아 다른 농지를 개간하고 수도를 개설하며 토지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으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35년까지 농장 직경은 4㎞가 넘었고 수로는 16㎞에 이르렀다. 수차 증자받은 돈은 농장경영 자금 외에는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몰래 보냈다. 백산은 청년기에 귀의했던 대종교에 심취했다. 발해농장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종교로 정신적 결집을 이루고자 했다. 대종교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겼다. 대종교 서적을 간행하고 단군전인 천진전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독립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백산 장손자 “후손들 할아버지 이름 기억” 농장 규모가 커지고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백산을 붙잡을 기회만 노렸다. ‘대륙 첩보의 귀신’ 난베가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백산을 체포할 빌미를 잡았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이극로가 대동교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 펴는 말’을 ‘조선독립선언서’로, 글 가운데 ‘일어서라’를 ‘봉기하자’로 조작했다. 일경은 대종교 간부 2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른바 ‘임오교변’이다. 입산마을에서 치병 중이던 백산은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포박되어 끌려갔다. 10명이 숨질 정도로 고문은 악랄했다. 사건 배후에는 밀고자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숨을 거두기 전 그를 용서하라고 유언했다. 광복 후 후손들은 밀고자를 찾아냈지만, 유언을 따라 응징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안민석 의원과 발해농장에 다녀온 장손자 안씨는 “지금도 개척자의 4~5세가 농장에 살고 있고 후손들은 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노트르담 화마 이긴 프랑스의 힘...매뉴얼·훈련·기부 ‘삼위일체’

    노트르담 화마 이긴 프랑스의 힘...매뉴얼·훈련·기부 ‘삼위일체’

    “노트르담 대성당의 구조와 특성은 반복 훈련 덕분에 평소에 잘 숙지하고 있었어요. 종탑의 나선형 계단을 수천 번 오르내리면서 훈련해 왔습니다. 막 출동해보니 현장에서는 성당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뤘지만 우리는 준비가 돼 있었지요.” 프랑스 파리 소방대(BSPP) 소속의 2년차 여성 소방대원인 미리암 추진스키(27)는 18일(현지시간) 일간 르 파리지앵 등 프랑스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15일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노트르담 성당 지붕 가운데 우뚝하게 솟은 96m 첨탑은 화재 발생 1시간여 만에 화염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추진스키를 비롯한 파리 소방대의 발 빠른 초기 대처 덕분에 성당 전체의 붕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무엇보다 프랑스 소방대원들이 화재 대응 매뉴얼에 따라 철저하게 반복적으로 훈련을 해왔고 개별 문화재별로 화재 매뉴얼이 있었다는 사실은 재난에서도 더욱 강한 ‘문화강국’ 프랑스를 만든 원동력이 됐다. 프랑스 문화와 역사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자부심과 애정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화재 현장에서 사투를 벌였던 소방대원 500명을 이날 파리 엘리제궁에 초청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시민들은 소방서에 초콜릿과 꽃을 보내는 등 소방 대원들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닮은 듯 다른 2008년 숭례문과 2019년 노트르담 화재 무엇보다 한국인에게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모습은 11년전인 2008년 2월 10일 밤에 일어난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화재를 떠올리게한다. 한국인들은 수도 서울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던 국보 1호가 불길에 휩싸인 모습을 보면서 상실감과 슬픔을 느껴야 했다. 숭례문과 노트르담 대성당은 한국과 프랑스 수도 중심부에 위치한 대표 문화재다. 숭례문은 건축 시기를 명확히 아는 서울 시내 목조 현존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한 뒤 세종과 세조 때에 보수 공사를 했다. 돌을 쌓아 조성한 석축(石築) 위에 무지개 모양 홍예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측면 2칸인 누각을 올렸다. 파리 시테섬 동쪽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유럽 고딕 양식 건축을 보여주는 전형으로 꼽힌다. 1163년 공사를 시작해 1345년 축성식을 열었고,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과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 장례식 등 프랑스 역사의 주요 사건이 펼쳐진 무대다. 빅토르 위고가 발표한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 무대로도 유명하고, 지금도 하루 평균 관광객 3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다. 숭례문 화재는 70세 남성이 토지 보상금에 대한 불만으로 홧깃에 일부러 불을 지른 방화였으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첨탑 보수 작업 과정에서 벌어진 실화로 추정된다. 화재 원인은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상층부에서 불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유사하다. 숭례문 방화범은 2층 문루에 불을 질렀고,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공사를 위해 첨탑 주변에 촘촘하게 설치한 가설물인 비계와 성당 내부 목재를 중심으로 불이 났다. 프랑스 당국은 성당 지붕 쪽에 설치된 비계의 전기회로에 이상이 없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으며 전기 합선과 같은 과부하로 발화했을 가능성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 숭례문과 노트르담 대성당은 모두 지붕을 잃었다는 점과 다행히 전소를 피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숭례문은 화재가 발생한 다음 날까지 불길이 잡히지 않자 지붕을 해체하기로 결정했고, 오전 2시쯤 누각이 무너져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도 화염 속에서 화재 1시간 만에 나무와 납으로 만든 첨탑이 사라졌다. 숭례문은 5년 3개월간 전통 방식에 가깝게 진행한 복구공사 끝에 2013년 5월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으며,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기간은 아직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비상 매뉴얼과 소방 당국의 적확한 판단력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로 첨탑과 전체 지붕의 3분의 2 가량이 무너졌지만 두 개의 종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가시면류관, 루이 9세가 입었던 튜닉 등 주요 유물들은 무사했다. 이는 사전에 갖춰진 매뉴얼과 훈련, 그리고 소방관, 문화재 직원, 사제를 넘어 드론과 로봇까지 동원된 총력전을 펼친 덕분이다. 프랑스는 유물 보호를 위해 번호를 매겨 화재 발생시 외부 반출 우선순위를 정해놓는 비상 매뉴얼도 갖추고 있다. 이번 화재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유물들이 안전하게 보호된 것도 바로 이런 매뉴얼을 바탕으로 한 훈련이 빛을 발한 결과다. 화재가 발생한 직후 문화재 관리 부처와 파리시 문화재담당자 100여 명이 곧바로 현장에 출동해 소방당국과 함께 문화재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논의를 거듭하며 진화작업을 벌였다. 프랑스 당국은 지난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두 차례 대규모 훈련도 실시했다. 이 훈련은 유물과 성화 등 예술작품을 구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화재에 투입된 소방관 500명 중 100명을 예술작품을 구하는데 배치한 것과 화재 당시 소방관들이 외부에서 헬기나 외부 호스로 끄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내부로 진입해 문화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 역시 이같은 훈련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이번 화재 때는 무게 13t의 종이 무너져 내리면 성당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소방관들은 첨탑은 포기하고 종탑의 나무 지지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했고 이는 올바른 판단이었음이 드러났다. ●복원 기부금 1조원 돌파한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직후 성당복원을 위한 프랑스와 전 세계 억만장자들의 기부금 행렬이 줄을 이어 하루 반만에 8억 8000만 유로(약 1조 1240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프랑스 정부가 문화재 관리를 위해 한해 편성하는 예산(3억 2000만유로)의 2배 이상이다.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 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강제 모금을 국민 성금으로 포장하고 정부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시킨다는 질타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 대기업들의 거액 기부를 놓고 프랑스 좌파 진영에서는 대기업들이 세액 공제 혜택을 받아 정부 세수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자발적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기금을 쾌척한 프랑스 대기업 회장들과 비교하면 한국의 현실은 초라하다. 이는 프랑스 정부가 기부금을 내는 개인에게 최대 66%까지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한국의 경우 받을 수 있는 세금감면 최대 공제율이 30%라는 차이가 있지만 문화재를 대하는 의식 자체의 차이라는 지적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금요칼럼] 선진리왜성의 벚꽃/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선진리왜성의 벚꽃/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여의도 봄꽃축제가 어제 막을 내렸다. 봄이 늦은 우리 동네 파주의 벚꽃도 벌써 끝물이다. 국립진주박물관이 펴낸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에는 벚꽃에 얽힌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오타 히데하루 일본 가고시마국제대 교수의 ‘사천왜성을 통해 본 한일관계’라는 글이다. 사천왜성의 문화재 지정 명칭은 ‘사천 선진리왜성’이다. 이곳에서도 지난달 30~31일 ‘선진리성 벚꽃축제’가 열렸다. 선진리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것이다. 다른 왜성들처럼 해안 구릉에 자리잡았고 부속 항구도 갖추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통양창성(通陽倉城)이 있었다.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나르는 전국 12조창(漕倉)의 하나였다. 조선은 다시 수군기지인 선소(船所)로 삼았다. 오타 교수에 따르면 왜군은 성의 중심부에 석축으로 천수대(天守臺)를 쌓고 위에는 검게 칠한 3층의 천수각을 지었다고 한다. 오사카성 등에서 보듯 망루와 지휘소를 겸하는 다층(多層)의 천수각은 일본식 성을 상징한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구로이타 가쓰미 도쿄대 교수에게 선진리왜성의 조사를 맡겼다. 1933년 선진리왜성은 1933년 부산 구포와 기장 죽성리, 김해 죽도, 창원 웅천과 안골, 순천, 울산과 서생포, 거제 장문포, 양산 물금 증산리 왜성과 함께 ‘고적’이 됐다. 총독부는 이어 왜성을 현창하는 사업에 나섰다. 선진리왜성의 경우 이곳에 주둔했던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이 참여했다. 시마즈는 남원에서 박평의와 심당길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을 납치해 일본으로 끌고가기도 했다. 왜성 곁에는 조명군총(朝明軍塚)도 있다. 왜란 당시 전사한 조선군과 명나라 지원군의 무덤인데, 일본에는 이들의 신체 일부를 묻은 귀무덤이나 코무덤이 있으니 조명군총은 바로 귀 없는 무덤이자 코 없는 무덤이다. 시마즈 일가는 선진리왜성 일대 땅을 사들여 총독부에 기증하고 성 내부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다. 모든 사람이 즐기는 이른바 만민해락(萬民偕樂)의 공간을 제공해 ‘국민국가 형성’에 기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왜성과 주변에서는 2002∼2006년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공원화를 추진하면서 왜성 당시의 석축을 상당 부분 되살리고 일본식 성문도 복원했다. 남해안의 왜성 가운데 일본식 건축물을 복원한 것은 선진리왜성이 유일하다. 남해안 왜성 11곳은 광복 이후에도 ‘고적’에 해당하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지금처럼 시도기념물이나 문화재자료로 ‘격하’된 것은 1997년이다. 김영삼 정부가 벌인 ‘역사바로세우기’에 따른 ‘일제잔재 청산’ 작업의 결과다. 경복궁 내부의 총독부 청사를 허문 것도 김영삼 정부 때였다. 개인적으로 ‘비극의 역사도 역사’라는 데 동조해 반대했지만, 그 건물이 사라진 뒤에는 없애기를 백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임진왜란 당시 모습에 가깝게 복원한 왜성에서 왜장의 후손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며 심은 벚꽃을 즐기며 축제를 벌이는 시대다. 근대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문화유산이 각광받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군산이 그렇고 목포가 그렇다. 걱정이 앞선다. 얼마 전 찾은 군산 동국사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일본식으로 지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니 보존가치는 있다. 하지만 최근 새로 지은 천불전까지 대웅전의 일본풍을 닮아 있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어느 쪽은 일본이 남긴 역사의 흔적에 관대한 반면 미디어는 또 온통 반(反)일본적 구호뿐이다. 왜성의 벚꽃이 그저 즐거운 사람과 어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무엇이 옳은지 알기 어려운 혼돈의 시대다.
  • “김포 개발제한구역 내 야영장·실외체육시설 설치 대상자 선정합니다”

    “김포 개발제한구역 내 야영장·실외체육시설 설치 대상자 선정합니다”

    경기 김포시는 개발제한구역 주민의 생활편익을 향상을 위해 ‘개발제한구역 내 야영장 및 실외체육시설 배치계획’을 공고하고 야영장 1곳과 실외체육시설 2곳 대상자를 선정한다고 3일 밝혔다. 신청 자격은 공고일 기준 김포 개발제한구역 내 10년 이상 거주자와 지정당시 거주자(개발제한구역 지정 당시부터 김포시 개발제한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나 마을공동에 주어진다. 대상지 3곳 중 1건만 신청할 수 있다. 야영장은 석축·옹벽 설치를 수반하거나 경지정리된 농지는 선정 대상지에서 제외된다. 실외체육시설은 임야나 경지정리된 농지는 제외된다. 또 주민들의 생활편익용 실외체육시설 배치를 위해 실외체육시설 중 야구장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접수기간은 오는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다. 이 기간 김포시청 도시계획과로 신청서와 신청자격 증빙서류 및 사업계획서 등을 제출하면 된다. 공고와 관련돼 자세한 사항은 김포시 홈페이지(http://www.gimpo.go.kr)를 확인하면 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국내 최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감사원 “일관성 없이 복원”

    국내 최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감사원 “일관성 없이 복원”

    백제 무왕시대 조성…국보 11호 지정감사원 “적절한 조치 방안 검토하라”“석탑 상·하부 내부 다른 형태 축석”230억 투입, 20년간 복원…23일 공개국보 제11호인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복원이 원형을 찾기 위한 사전 검토가 없었고, 석축(돌 쌓기)도 일관성이 없다는 감사결과가 나왔다. 복원 잘못으로 석탑의 상·하부 내부 형태가 애초의 원형과 달리 층별로 달라졌다고 감사원이 지적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대에 지은 것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1998년 시작돼 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최근 마무리됐으며 다음 달 말 준공식을 한다. 사업비로 230억원이 투입됐다. 23일 일반에 공개된다. 감사원은 이 내용을 포함한 ‘국가지정문화재 보수복원사업 추진실태’ 감사 결과를 21일 공개했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2011년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실시설계용역을 진행하면서 해체 당시 확인된 축석방식의 기술적 재현 가능성이나 구조적 안정성 여부 등 원형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검토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당시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적심(석탑 내부에 돌과 흙을 쌓아 올려 탑의 몸체를 구성하는 부분)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석재들로 쌓여 있고, 사이의 틈(공극)은 흙으로 채운 형태였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기존 적심부 석재들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품질이 저하됐다는 이유로 적심석 대부분(97.6%)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가공한 새로운 석재로 교체해 반듯하게 쌓기로 계획했다.문화재청은 이후 석탑의 2층 적심부까지 새로운 석재 가공작업을 진행하다가 2016년 초 원래의 축석방식과 부재를 보존한다는 이유로 당초 설계와 달리 3층 이상의 적심에 대해선 기존 부재를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로 인해 석탑 상·하부의 내부 적심이 다른 형태로 축석되는 등 일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축석방식을 변경하면서 구조안정성도 검토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적심은 석탑 상부의 하중을 하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석탑 구조의 안정성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륵사지 석탑의 3층 이상 부분은 구조계산을 거치지 않고 석탑 건축을 위한 설계도서 없이 축석됐다고 감사원이 지적했다.문화재청은 또 3층 이상 적심부의 틈을 채우기 위한 충전재를 기존에 계획했던 실리카퓸을 배합한 무기바인더에서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로 변경하면서 그 사유와 타당성에 대해 자문이나 연구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은 다른 무기질 보수재료와 비교해 강도 등 성능이 낮은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를 충전재로 사용한 것에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장에게 “구조계산 등을 거친 실측설계도서 없이 축석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구조안정성 검증 후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라”고 통보했다. 또 “앞으로 축석방식 보존과 기존 부재 재사용 가능 여부 등을 검토하고 계획을 수립해 일관성 있게 수리하며, 실측설계도서 없이 문화재를 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요구했다.한편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를 구성한 3개 탑 가운데 서탑으로, 목탑처럼 석재 2800여 개를 짜 맞춰 완성된 것이다. 1998년 이뤄진 안전진단에서 일제강점기에 보수할 때 사용한 콘크리트가 노후화하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문화재위원회는 이듬해 석탑의 전면적인 수리를 결정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최세일의 건축이야기] 불국사의 미학

    [최세일의 건축이야기] 불국사의 미학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진흥왕 때부터 대형 사찰들이 건립된다. 불국사는 그 선상에서 지어진 사찰이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를 기리며 감은사를 짓고 만파식적을 얻었다. 이후 문무왕의 증손인 경덕왕 때 불국사와 석굴암을 짓고, 석굴암의 방향이 문무왕릉을 향해 감은사와 같이 문무왕을 기리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을 재현한 절이다.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과거의 부처님이자 극락세계의 영주인 아미타불,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따로 모셨고,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보살 역시 따로 모셨다. 네 개의 영역은 크기는 물론 마당의 높이가 다른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다. 석가탑 앞에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모셨으니 부처님만 네 분을 모신 절이다. 이 중 중심은 현세의 부처를 모신 대웅전 영역이다. 청운교, 백운교 계단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여기부터는 불국이다. 계단을 교(橋)라 한 것은 부처의 나라로 들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또 범영루 우측의 수로에서는 물이 떨어지는데, 밑의 연못에 떨어졌을 것이며, 청운교 아치 밑에는 이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었으니 다리 교를 쓰는 것이 맞다. 자하는 자색 안개로 수구에서 물이 떨어지며 자색 물안개가 피어났다 한다. 자하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줏빛 금색 안개를 말한다. 자하문 안쪽에 해와 달이 함께 그려졌는데 자하문 안의 불국이 해와 달 위의 하늘에 있다는 의미다. 백제 석공 아사달을 청해 석가탑 등을 건조하는데, 몇 해가 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 아사녀가 불국사로 찾아간다. 아녀자가 불사를 조성하는 곳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하여 무영지에서 기도하며 기다리라 한다. 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무영지에 비치니 그때 아사달을 만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끝내 그림자는 비추지 아니하고, 아사녀는 무영지에 몸을 던졌다. 해와 달 위에 떠 있는 불국이니 어찌 그림자가 있을 수 있겠나? 불국사의 경내가 불국임을 이야기하는 설화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다는 것이다. 분별은 실체와 상관없이 개념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선과 악, 깨끗하고 더러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구별은 원래 하나인 세상을 인간이 나누는 것이다. 부처가 되면 이 분별이 없어지고 비로소 하나의 세상이 된다. 그림자가 없다는 이야기는 석가모니는 현세의 부처이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고 분별이 없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림자가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아사녀는 결국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의 그림자가 생기길 기다린 것이다.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자비의 부처님 전설에 희생된 아사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종교가 가진 한계를 보여 주는 서글픈 이야기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두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했다.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의 교주다. 스스로 어느 곳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나의 보탑이 솟아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 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역시 보탑이 솟아 나왔다 하여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석가탑과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함께 조성한 것이다. 해체 복원이 원래의 상태대로 복원해야 하나 불국사나 석굴암 등은 그러지 못했다. 불국사의 석축을 보면 원형과 복원이 확연히 다른 것이 보인다. 원 석축은 크고 넓은 자연 석축 위에 그랭이질된 장대석을 얹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보여 준다. 그랭이 공법으로 잘 맞춰진 석축은 지진을 버텨 낼 수 있는 힘이 됐다. 여러 전란에도 불국사의 석축 등이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 때문이었다. 대웅전은 기하학적으로도 거의 완벽하다. 중심축에서 완전히 대칭이다. 이 완벽한 대칭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형태에서 깨진다. 그 깨진 대칭은 양 끝의 범영루와 자경루에서 회복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한 석가탑의 연장선에 있는 범영루는 누각을 받치는 석조의 화려한 주초부터 건물까지 화려함을 자랑하고 화려한 다보탑의 연장선에 있는 자경루는 꾸밈없이 간결하다. 양쪽이 간결함과 화려함을 나누고 그 무게감을 맞추어 대칭 속의 비대칭, 비대칭합의 대칭을 완벽하게 구현한 미적·기하학적인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이다.
  • 세계문화유산 불국사가 품은 불교 이야기

    세계문화유산 불국사가 품은 불교 이야기

    2018년에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7사찰에 앞서 24년 전에 이미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먼저 찾았다.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진흥왕 때부터 대형 사찰들이 건립된다. 진흥왕 때 황룡사가 건립되고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가 건립 되었다. 무열왕이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할 무렵 신라에는 원효와 의상이라는 걸출한 승려가 있었고 이중 의상은 당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돌아와 통일 신라에 화엄경을 설파하고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후 그의 제자들이 신라의 불교를 더 융성하게 한다.불국사는 그 선상에서 지어진 사찰이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며 감은사를 짓고 만파식적을 얻었다. 이후 문무왕의 증손인 경덕왕 때 불국사와 석굴암이 지어졌고 석굴암의 방향이 문무 왕릉을 향해 감은사와 같이 문무왕을 기리고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문무대왕의 유지대로 외세를 억누르기 위한 기원의 의미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불국사에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그 하나는 김대성에 대한 설화고 또 하나는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설화다. 김대성에 대한 전설은 불국사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고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은 무영탑이라 부르는 석가탑에 대한 이야기다. 2대의 왕을 위해 왕명을 받들어 김대성이 지은 것이 효자로 이름난 재상 김대성이 지은 것으로 잘못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을 재현한 절이다.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과거의 부처이며 극락세계의 영주인 아미타불,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보살 역시 따로 모셨다. 네 개의 영역은 크기는 물론 마당의 높이가 다른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다.석가탑 앞에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모셨으니 부처님만 네 분을 모신 절이다. 이중 그 중심은 현세의 부처를 모신 대웅전 영역이다. 도솔천의 33천을 상징하는 청운교 백운교 33계단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여기부터는 불국이다. 계단의 수에 대해서는 34단이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첫 단을 지반과 같은 높이였다고 보면 33단이 된다. 다른 사찰의 경우라면 자하문은 불이문이 되었을 것이다. 계단을 교(橋)라 한 것은 부처의 나라로 들어가는 다리역할을 한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또 범영루 우측의 수구에서는 물이 떨어져 밑의 연못에 떨어졌을 것이며 청운교 아치밑에는 이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었다면 다리교를 쓰는 것이 맞을 것이다.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한 기록을 보면 지금의 불국사 앞 마당에도 연지의 터가 발견되었고 여기서 기와등이 발견되었다. 자하는 자색 안개를 뜻 하는데 수구에서 물이 떨어지며 물안개가 피어났는데 그 안개가 자색이었다고도 한다. 또 자하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주 빛 금색 안개를 말한다. 자하문의 안쪽에 해와 달이 함께 그려진 것은 자하문 안의 불국이 해와 달을 위의 하늘에 있다는 의미로 불국임을 다시 알려준다. 자하문에 평주와 고주를 연결하는 계량 또는 소 꼬리같이 생겨 우미량이라고 하는 부재를 하나는 위로 휘고 하나는 아래로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니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지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해와 달이 다 있는 불국을 표현하였다.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청하여 석가탑을 비롯한 석조물을 건조 하였는데 몇 해가 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 아사녀가 불국사로 찾아간다. 아녀자가 불사를 조성하는 곳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하여 그녀를 들이지 않고 무영지에서 가서 지성으로 기도를 하며 기다리라한다. 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무영지에 비칠 것이니 그때가 되면 아사달을 만날 것이라 하였다. 지성으로 기도를 하며 기다렸으나 끝내 그림자는 비추지 아니하였다.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는 무영지에 몸을 던졌다 한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이다.해와 달 위에 떠있는 불국이니 어찌 그림자가 있을 수 있겠나? 불국사의 경내가 불국임을 이야기 하는 또 하나의 설화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다는 것이다. 분별은 실체와 상관없이 개념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 깨끗하고 더러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같은 구별은 원래 하나인 세상을 인간이 둘로 나누는 것이다. 부처가 되면 이런 분별이 없어지고 비로써 하나의 세상에 있게 된다. 그림자가 없다는 이야기는 석가모니는 현세의 부처이기 때문에 분별을 하지 않고 분별이 없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림자가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석가탑은 애초에 그림자가 없는 탑이었다. 아사녀는 결국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의 그림자가 생기길 기다린 것이다.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자비의 부처님 전설에 희생된 아사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종교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서글픈 이야기다.석가탑과 다보탑은 두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아미타불이 과거의 부처이며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라면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의 교주다. 몸 전체가 진신사리가 되어 보석처럼 빛나는 화려한 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스로 어느 곳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나의 보탑이 솟아나와 그 설법을 증명 하리라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역시 보탑이 솟아 나왔다 하여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석가탑과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함께 조성한 것이다. 석가탑은 2단의 기단 아래 자연석의 기반이 있다. 석가모니가 앉아있던 바위를 상장한다. 남산 용장사지의 석탑이 바위 위에 앉은 모습이 연상된다. 석가탑의 해체 복원 시 사리함과 함께 무구정광 다라니경 목판 인쇄본이 나왔다. 이 목판 인쇄본은 최초의 목판 인쇄기록을 바꾸는 중요한 문화재로 천년이 넘은 한지의 우수성도 함께 입증되었다. 다보탑의 다섯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의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한 사리장엄구와 이불 병좌상이 없는 것은 일제 때 해체 복원되며 사라진 것이라 추측한다. 이불 병좌상은 다보여래가 자신의 보탑 안에 자리의 반을 내어주어 석가모니 부처와 다보여래가 함께 나란히 앉은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해체복원이 원래의 상태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나 불국사나 석굴암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그렇지 못하였다. 불국사의 석축을 보면 원형의 석축과 복원된 석축이 확연히 다른 것이 보인다. 원래의 석축은 크고 넓은 자연석위에 그랭이질 된 장대석을 얹어 자연과 인고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편 그랭이 공법으로 잘 맞춰진 석축은 지진을 버텨낼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여러 전란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 등이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 때문이었다.불국사의 대웅전의 영역은 기하학적으로도 거의 완벽하다.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은 정확히 중심이 일치하는 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석가탑과 다보탑, 영역을 구획하는 회랑은 그 중심축에서 완전히 대칭이다. 또 석가탑과 다보탑의 중심거리의 반을 기준 척으로 계산하면 대웅전 영역의 가로는 기준척의 네 배고 길이는 다섯 배가 된다. 또 석가탑과 다보탑의 하부 기단너비는 같으며 대웅전의 폭은 이 기단 너비의 세배가 된다. 또 대웅전 영역의 전면 두 꼭지 점과 대웅전 뒷벽의 중심을 연결하면 정삼각형이 된다. 기준척도를 가지고 그 비율로 만들어낸 정확한 규칙이 보인다. 이 완벽한 대칭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형태에서 깨진다. 백제 미륵사의 경우 같은 쌍탑 이지만 두 탑의 모양이 같다. 이에 비해 불국사는 그 대칭의 경직성이 두 탑에서 깨진다. 그 깨진 대칭은 영역 전면의 양 끝에 범영루와 자경루에서 회복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한 석가탑의 연장선에 있는 범영루는 누각을 받이는 석조의 화려한 주초부터 건물까지 화려함을 자랑하고 화려한 다보탑의 연장선에 있는 자경루는 꾸밈없이 간결하다. 양쪽이 간결함과 화려함을 나눠서 그 무게감을 맞추어 대칭속의 비대칭, 비대칭 합의 대칭을 완벽하게 구현 하였다.아미타 부처가 있는 영역은 그 지반의 높이와 계단의 단수가 낮다. 극락왕생을 빌어준다는 그 극락이 이곳이니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렸을까?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 들어가는데 이는 극락정토가 연화와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이를 의미한다. 서방 극락정토의 부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연화교의 계단석 바닥에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한 장의 꽃잎으로 볼 수도 있고 한 송이의 꽃으로 볼 수도 있다. 꽃잎이라 보면 꽃잎을 즈려밟고 오르는 것이고 꽃송이라면 피지 않은 봉우리를 보며 올라가서 부처님을 만나고 내려올 땐 부처의 법력으로 활짝 핀 연꽃을 보며 내려오는 형상이 된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축소판이고 조금 간결해진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아미타불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안양문 이고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은 극락전이다. 아미타불은 화엄종에서 본존불로 모시는 극락정토의 부처이며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부처님이다. 불국사는 경덕왕 때 지어졌다고 하나 무설전은 문무왕 때 지어졌고 대규모 사찰이 아닌 작은 사찰로는 경덕왕 이전에 존재 했으며 경덕왕 때 대규모로 중수되어 큰 사찰이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80여종 2000여 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덕왕은 불국사 외에 석굴암을 조성하였고 불교유적의 보고인 남산과 월성의 남쪽 끝을 연결하는 월정교를 축조하는 등 신라의 대표적 유적들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불심과 효심이 깊고 예술적 감각도 뛰어난 성군이 아니었을까 싶다. 임진왜란 때 석조물과 일부 건물만 남기고 전소 되었고 중수와 방치를 거쳐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문화공보부 시절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 되었다.복원된 현재의 불국사가 원형에 비해 미흡하다는 지적들이 많음에도 지금의 모습으로도 우리의 대표적 유적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불국사 앞의 마당과 연못을 비롯 원형이 복원된 모습을 상상해본다. 경주에 가면 작년 가을에 복원된 월정교도 꼭 들러보시길 권한다.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가 생각나는, 누각으로 덮인 누교로는 유일한 다리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무를 시간을 벌기위해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젖게 하여 요석공주와 설총을 만들었다는 낭만적인 설화가 깃든 곳이니 사랑하는 이와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글 사진: 최세일 한건축 대표
  • 철기시대 권력 상징 ‘호랑이 띠고리’ 보물된다

    철기시대 권력 상징 ‘호랑이 띠고리’ 보물된다

    철기시대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 호랑이모양 띠고리’가 보물이 된다.문화재청은 2007년 경북 경산 신대리 1호 목관묘에서 출토한 ‘청동호랑이모양 띠고리’와 조선 초기 불경인 ‘불정심 관세음보살 대다라니경’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6일 밝혔다. 일반적으로 호형대구(虎形帶鉤)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호랑이모양 띠고리는 의복과 칼자루 등에 부착하는 장식품이다. 호형대구나 마형대구(馬形帶鉤·말모양 띠고리) 같은 동물형 띠고리는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지배층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으로서, 북방계 청동기 문화와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또 ‘호랑이모양 띠고리’는 현존하는 유물이 적은 데다 대부분 파손이 심하거나 입수 과정이 명확하지 않은 사례가 많다. 반면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산 신대리 호형대구는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온전한 편이다. 정식 발굴조사로 찾아 출토 위치 역시 확실하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전남 장흥 묘덕사 소장품인 ‘불정심 관세음보살 대다라니경’은 몸에 지니거나 독송(讀誦·소리 내어 읽거나 외움)하면 관세음보살의 영험한 힘을 통해 액운을 없앨 수 있다는 다라니의 신통력을 설교한 경전이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경전은 조선 세종 7년(1425년) 전북 고창 장사현의 지방관인 윤희와 석주가 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 등을 기원하며 새긴 책이다. 3권 1첩으로 이뤄진 수진본(袖珍本·소매에 넣도록 작게 만든 서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판본이다. 더불어 문화재청은 신라의 유서 깊은 사찰인 분황사가 있었던 ‘경주 분황사지’와 통일신라 시대 석축, 담장, 우물 등의 유적이 발견된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두 유적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지만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서로 다른 시기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은 30일의 예고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물 및 사적 지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공주 송산리 고분군 30년 만에 재조사 완료… 3단 석축시설 성격 규명 못해

    공주 송산리 고분군 30년 만에 재조사 완료… 3단 석축시설 성격 규명 못해

    백제 웅진도읍기 왕릉인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최정상부(D지구)의 계단식 석축 시설이 제사와 관련된 시설일 가능성이 커졌다. 1988년 시굴조사 이후 30년 만에 발굴조사를 시행했지만 시설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 문화재청은 공주시와 함께 백제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 석축 시설 2곳에 대해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5일 공개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지난 6월부터 능선 하단부 A지구와 고분군의 최정상부 D지구를 발굴조사했다. D지구에서는 폭 1단 15m, 2단 11.4m, 3단 6.92m, 전체 높이 3.92m의 3단 석축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30년 전에 밝혀졌다. 이에 대해 적석총(돌무지무덤)설, 석탑설 등이 제기됐다. 30년 만에 조사를 재개했지만 이번에도 시신을 두는 매장 주체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남쪽에서 나무기둥을 세운 구멍이 발견돼 제사 관련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원 측은 밝혔다. 석축 하부는 흙을 켜켜이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을, 상부는 기반층을 깎아내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쌓는 삭토 기법을 쓴 것으로 파악됐다. 연구원은 유구(건물의 자취) 주변에서 쇠못이 출토돼 적석총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편 A지구에서는 20.5m 가량의 네모난 석축시설과 함께 그 중앙에서 가로 5.2m, 세로 2.1m, 깊이 3.1m의 거대한 구덩이를 확인했다. 석축 남쪽에서는 중앙부 구덩이보다 작은 구덩이가 발견됐다. 연구원 관계자는 “남쪽 구덩이를 폐기한 뒤 중앙부 구덩이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 구덩이에는 신성 구역임을 표시하는 시설이 설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설명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SH, 분양가 공개항목 12개→61개로 늘려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앞으로 분양하는 공동주택 분양 가격 세부 내역을 현재 12개 항목에서 61개 항목으로 대폭 늘린다. SH공사는 시민들의 알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려는 취지로 분양 가격 세부 내역을 5배 확대해 공개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조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달 22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SH공사 분양 아파트 원가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당시 국정감사에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SH공사가 분양원가를 62개 항목으로 공개하다가 12개로 줄여 공개하나 마나 한 것으로 날려버렸다. 후퇴한 공공주택 정책을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시장은 이 지적에 동의하며 원가 공개 방침을 밝혔다. 그간 SH공사는 2007년부터 주택법에 따라 아파트 분양 가격을 택지비 3개 항목, 공사비 5개 항목, 간접비 3개 항목 등 12개 항목으로 공개해 왔다. 앞으로 이에 더해 토목 분야에서 토공사, 옹벽공사, 석축공사, 공동구공사, 조경공사 등 공사 종류별로 13개 공사비를 공개한다. 건축공사비에서는 기초공사, 철골공사, 미장공사, 목공사, 창호공사, 도장공사 등 23개 항목을 추가로 알린다. 기계공사비는 급수설비공사, 자동제어설비공사, 난방설비공사, 승강기계공사 등 9개 항목의 가격을 공시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몰라보게 달라졌네…종로 안골마을 재생사업으로 탈바꿈

    몰라보게 달라졌네…종로 안골마을 재생사업으로 탈바꿈

    서울 종로구는 부암동에 자리한 안골마을이 1년여간의 재생사업을 마치고 아름답고 안전한 곳으로 거듭났다고 18일 밝혔다. 안골은 현재 창의문이라 불리는 자문 밖(자하문 바깥)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암동 내에서도 청정하고 소박한 멋을 뽐내는 곳이다. 대략 60여년 전부터 몇몇 가구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현재 1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인왕산 둘레길이 시작되는 곳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지만 부암동 내 구석자리에 위치해 주택과 계단 등이 노후화한 상태였다. 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산 2억원을 들여 지난해 10월부터 재생에 나섰다. 주인을 알 수 없던 위험한 담장과 석축을 보수·보강했다. 또 하수도 정비는 물론 거동에 어려움을 겪는 노약자를 배려해 맞춤형 계단을 조성했다. 구릉지역임을 감안해 구에서 개발하고 특허까지 받은 ‘굴절형 핸드레일’을 시범 설치했다. 김영종 구청장은 “부암동 일대는 무계정사지와 현진건 집 터 등이 있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면서 “앞으로도 주민과의 협업을 통해 맞춤형 재생사업의 기틀을 다지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부산 배산성지에서 대형 건물터 발굴…신라시대 축성기법 확인

    부산 배산성지에서 대형 건물터 발굴…신라시대 축성기법 확인

    부산시 기념물 배산성지에서 대형 건물터가 확인됐다. 부산시립박물관 문화재조사팀은 배산성지 2차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면서 높이 6m 규모의 건물 축대와 길이 13m 이상의 대형 건물터를 발굴했다고 16일 밝혔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 산61번지 일원에 있는 배산성지는 흙을 쌓아 만든 토축산성이다. 이번 2차 발굴조사에서는 배산성지 정상 아래 토성 유무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며 집수지 서쪽 약 30m 떨어진 경사지에서 건물 축대와 대형 건물터를 확인했다.축대 내부는 크고 작은 깬돌이나 하천석을 채워 넣었고 외벽 바깥으로는 6단 높이의 석축을 쌓아 보강했다. 대형 건물터는 축대 서쪽 상부에서 길이 12.8m,너비 10m 규모로 남-북 기단열과 초석,배수시설을 갖췄으며 3칸으로 나눴다.성벽 중심부 서쪽은 삼국시대 축성기법인 직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은 것과 달리 동쪽은 통일신라시대 축성기법인 돌을 층단식으로 쌓아 석축산성의 수리나 축조 기법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부산 시립박물관 관계자는 “1,2차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배산성지는 동남해안에서 동래로 진입하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적 요충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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