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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우속 백제문화재 구했다/풍납토성 순찰중 토사 15m 유실 발견

    ◎송파구 직원 50명 밤샘작업 붕괴 막아 서울 송파구(구청장 金聖順) 직원들이 이번 집중호우때 밤샘작업으로 훼손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무사히 보호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지역에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 4일 문화공보담당관실 문화재 담당주임 咸大鎭씨(38·7급)는 상오 6시30분쯤 풍납토성을 순찰하다가 15m 구간에 걸쳐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날 순찰은 관내에 풍납토성과 방이동 고분군 등 백제시대 문화유적이 많아 비로 인한 피해가 클 것이란 생각에서 자청한 것. 토성이 붕괴될 수 있다고 판단한 咸씨는 우선 관리사무소에 긴급연락을 했고 곧이어 도착한 동료직원 50여명과 함께 토사유출 구간에 비닐을 덮고 마대를 쌓는 등 응급조치를 취했다. 대형 비닐로는 토성 전체를 덮었다. 이날 토성을 덮는데만 폭 4m,길이 500m의 대형 비닐롤 30개가 들어갔고 비닐이 바람에 날아갈까봐 덮어 놓은 마대수도 1,270개나 되는 힘든 작업이었다. 또 배수시설이 없는 방이동 백제고분군을 순찰하면서 정문 석축 윗부분과 1호분,화장실 등의 붕괴조짐을 발견했다. 정문 계단앞 산책로의 디딤돌 사이에 4㎡가량의 지반이 침수되자 급히 2.5t 트럭을 동원,인근 건축공사장에서 흙을 운반해 되메우기까지 했다. 자칫 크게 훼손될 위기에 처했던 문화재가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 동경성의 대종교(송화강 5천리:27)

    ◎발해 도읍지서 꽃핀 민족종교/1930년대 본거지 구축… 동북3성서 독립운동/발해농장·이상촌 건립… 조선족에 살길 열어/단군섬이던 교인들은 일제탄압에 뿔불이/자금난 본떠 만든 궁궐터엔 깨진 기왓장만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해동성국으로 일컬었던 발해국에서 따온 지명이다.발해역사 229년동안 두 번이나 도읍지가 되었던 상경용천부는 바로 발해진에 있다.동경성이라고도 불리는 상경용천부의 도성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서 조영했다는 것이다.장방형을 이룬 도성은 외성과 내성,궁성을 갖추었다. ○궁궐터를 밭으로 개간 오늘날 남아있는 외성에는 버드나무가 길길이 자라 숲이 되었다.북쪽 외성의 길이는 5.5㎞,남쪽 길이는 5㎞,동서 길이 3.5㎞에 달했다.외성안에는 마차가 다니는 80m의 거리가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어 당나라 장안을 방불케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이야기다.그리고 내성 역시 장방형으로 그 둘레가 4.5㎞에 이르고 있다.당시 삼성육부가 자리잡았던 내성에는 성터와 금원자리가 그런대로 남았다.이른바 어화원이라고도 하는 2만㎡의금원 자리에는 인공못과 조산흔적이 아직도 보인다. 궁성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다.궁성의 남문인 오문은 그 흔적이 뚜렷하다.오봉루로 더 널리 알려진 오문은 누각만이 없을뿐 높이 6m,너비 20m 규모로 잘 복원되었다.오문 북쪽 5개의 궁전터에는 크나큰 주춧돌만이 잡초속에 묻혔다.16부 130개 현을 호령했던 왕실의 권력이 오간데가 없는 이 황성을 누가 자금성이라 했던가.가장 큰 궁전터 동쪽에는 팔보 유리정이 있다.왕이 마신 어수가 솟아올랐다는 이 샘의 석축에는 이끼가 창연하다. 용천부를 두루 밟노라면 허무한 생각이 가슴에 쌓인다.세월과 함께 모든 영화가 사라진 궁궐 옛 터전에는 깨어진 기왓장만 나뒹군다.그래도 누군가가 궁궐터를 밭으로 부쳐서 여름이면 옥수수가 검푸르게 자랐다.이 땅은 발해 이전에는 고구려 강토였고,더 올라가면 고조선의 영토였다.청나라때인 강희16년(1677년)에는 청조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구가 되어 인적이 끊기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변경민들이 사선을 넘나들었다.새벽에 강을 건너 농사를 짓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조선인들을 더이상 막을수 없게 된 청조는 이른바 「혼춘영고탑초간장정」을 반포했다.이는 조선족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는데,영고탑은 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는 혼춘이 아니라 발해진에서 15㎞에 불과한 영안시에 있다.그래서 1889년께 이 일대에 조선개간민촌 고려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고려영은 주로 영고탑성향으로 형성되었다. ○1889년에 고려영 형성 그 당시 조선인은 1천200∼1천400명이었다.이후 조선민은 더 늘어나 1930년에는 3천88명,1932년에는 1만2천767명을 기록했다.이들은 바로 중국 동북3성에서 독립운동을 거의 주도한 대종교의 기반이 되었다.그러다 대종교는 1911년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을 거쳐 1920년에는 흑룡강성 밀산시 당백진 등으로 본거지를 옮겨다녔다.1928년에 다시 흑룡강성 영안시 남관으로 들어온 대종교 본부는 1934년 발해의 옛 읍지인 영안시 발해진 동경성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대종교는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기면서 조직과 기구를 정비했다.3·1학원을 세우고 발해왕궁터 바로 남쪽에 천진전을지었다.교주는 윤단애 선생이었다.그 무렵에 조만춘이라는 사람이 대종교 활동에 참여했다.그런데 조만춘이 만주국 사법과 밀정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그의 밀고로 대종교 요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 하는데,영안시 삼량향 남향촌의 이인희옹(70)은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그는 대종교 주요 멤버였던 이수원의 손자다. 『우리집은 대종교 총본사와 200m 밖에 떨어지지 않았디요.아침에 깨어보니 할아버지께서 본사에 다녀오신 모양입데다.그리고 나서 밖을 내다보았더니 일제가 동원한 경찰들이 떼로 몰려와 있었디요.할아버지께서는 옷을 챙겨 입으시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식구들이 울면서 만류했디 않았겠습네까.다 잡혀갔으니끼리 뒤에 수습을 하셔야 된다고….그래서 피신을 하셨디요.식구들은 대종교 서적과 서류를 마대에 넣어 한족집에 맡기는 것도 보았디요』 단군을 섬긴 대종교인들은 거의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영안시 동신촌 이병조(72)의 부친 이련건도 그런 분이었다.일제의 주구 조만춘의 유혹도 뿌리친 그는 옥중에서 동지들한테 보낸 한시에서 이런 구절을 남겼다.「발해성터에서/무엇을 해야 할꼬/나라일 걱정에/하룻밤이 일년 같구나」.나라를 잃고 독립을 위해 망명지에서 어렵사리 살았던 우국지사들의 고뇌가 엿보였다. 백산 안희제선생은 1933년 동경성에 정착한 대종교 요인이다.동만농장 토지를 사서 발해농장을 꾸리기도 했다.당시 논을 개간하며 쌓은 둑은 지금의 아보저수지에 묻혀버렸지만,그가 「발해농장」간판을 걸었던 건물의 잔영은 남아있다.발해진 상경로 17호 발해진청사에 절반쯤 남은 건물이 그것이다. ○격변의 세월 한족촌 탈바꿈 안희제 선생은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8월3일 병보석을 받았다.그러나 감옥문을 나선뒤 세상을 떴다.그는 동경성일대의 조선족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어 생전에 많은 추앙을 받았다.그와 더불어 추앙을 받았던 인물을 더 꼽으라면 김소래 선생이 있다.반일투사이자 교육가인 선생은 1928년 오늘의 영안시 와룡향 홍기임장에 이상촌을 건설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바뀌어 한족들이 그 자리에 살고있다.김소래 선생을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본래가 조선족 이상촌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를만큼 변해버렸다.지금 임장사무실로 쓰는 건물 뒤쪽으로 흐르는 실개천 건너의 언덕이 선생의 집자리였다고 한다.물론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그보다 더 애석한 일은 선생의 유해가 묻힌 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아마도 묵묘로 남았다가 세상이 바뀌어 자취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김소래 선생은 1933년에 피살되었다.선생은 피살전에 죽음을 예견했는지 몰라도 책과 서류를 산속 동굴에 감추었다고 한다.그런데 광복후 사냥꾼 이기송이 집으로 가져왔으나,마을 사람들이 담배를 말아 피우는 종이로 사용했다는 것이다.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발해 도읍지의 독립운동사는 그렇게 역사 뒤안으로 사라졌다.
  • 진귀하고 값비싼 보석/시중보다 30% 싸게 팝니다

    ◎국내유일 익산보석가공단지 1,000여업체 조업/10만여종 취급… 전국의 예비부부들로 “북적”/세공·디자인 솜씨 세계적… 품질도 「완전보증」 『지구상에 여성이 존재하는 한 보석산업은 결코 「사양산업」이 될 수 없다』 이는 여성의 보석에 대한 애착과 특유의 허영심을 다소 비약시킨 표현이지만 보석산업의 성격이나 수요층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요즘 웬만한 중산층이라면 집안에 한두점씩의 보석은 갖고 있으며 결혼식 등 각종 기념일이면 보석을 구입하는 사람도 상당수에 이를 정도로 수요층이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유일의 보석시장이 있는 전북 익산시 영등동 익산공단어귀의 이리 귀금속·보석가공단지와 판매센터는 보석 애호가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결혼시즌인 요즘엔 전국 각지에서 결혼예물을 마련하기 위해 나온 예비부부들로 크게 붐비고 있다.판매센터 관계자는 지난 주말의 경우 1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현재 판매센터에는 30여개의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10만여점의 각종 귀금속이 진열돼손님을 맞고 있다.귀금속·보석가공단지에도 100여개의 업체가 조업중에 있다. 익산시도 귀금속·보석가공단지와 판매센터를 국제적인 판매장으로 키우기 위해 각종 지원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시청 공업과에는 보석가공계를 신설,보석산업에 대한 갖가지 행정지원을 해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서울의 보석수집가 김동섭 박사가 자신이 평생 모아온 35만점의 보석류를 익산시에 기증한다는 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시는 오는 99년까지 2백30억원을 들여 초대형 보석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으로 있어 몇년후면 희귀보석이 일반인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시장규모◁ 지난 76년 첫 가동을 시작한 이리귀금속·보석가공단지는 현재 100여개의 업체가 조업중인데 그동안 수출에만 주력해온 탓에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다가 내수판매를 시작한 87년부터 내국인에게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또 89년 개관한 판매센터에는 현재 30여개 업체가 입주해 영업을 하고 있는데 보석과 귀금속 전시보유물량이 자그마치 10만여점에 이를 정도로 다양해 단일시장으로는 동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단지내 근로자들의 세공과 디자인 솜씨는 매우 뛰어나 해외에서까지 인정받고 있다.판매센터에서는 보석전문교육을 받은 직원 60여명이 보석구입시 친절하고 자세한 상담을 해준다. 매주 화요일은 휴무일.국경일과 일요일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상오 10시부터 하오 6시반까지 정상영업을 한다.(0653)835­8007 해마다 보석축제도 열린다.축제는 전주∼군산간 벚꽃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개최되는데 올해는 4월10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이 기간에는 보석류를 평소보다 약 20%가량 싸게 팔고 사은품도 증정하며 고객이 소장하고 있는 보석의 디자인을 바꾸는 「리세팅」작업도 무료로 해준다. 이 판매센터의 박치수 기획실장(42)은 『보석제품에 있어서 이만큼 질좋은 보석을 많이 갖추고 있는 곳이 국내는 물론 동양권에도 없다』면서 『이곳에서 보석을 구입하면 일단 제품의 질이나 가격면에서 결코 손해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가격◁ 100여 가공업체들이 외국에서 직접 원석을 수입해 가공판매하기 때문에 시중보다 30%가량 싸다.요즘 결혼예물로 가장 많이 찾는 여성용 0.3캐럿짜리(1캐럿은 0.2g) 다이아반지는 50만∼60만원이고 0.2캐럿짜리 남성용은 40만∼45만원이다. 또 0.3캐럿 루비세트(세트는 반지·목걸이·귀걸이·팔찌 등 4가지를 말함)는 90만∼1백만원,0.3캐럿짜리 사파이어세트는 80만∼90만원,진주세트(8㎜기준)는 50만∼55만원,0.3캐럿짜리 에메랄드 세트는 1백만∼1백20만원선이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제품은 각종 보석류 외에도 순금(24금)제품과 18금·14금·은제품·백금제품 등이 있다. ▷보석 고르는 법◁ 보석은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보석과 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처럼 색이 있는 유색보석으로 나뉜다. 다이아몬드는 흔히 「4C」를 살피고 고르면 틀림없는 진품이다. 4C란 무게(Carat·캐럿)와 투명도(Clarity),색상(Colour),연마상태(Cut)를 말한다. 또 유색보석은 투명도·크기·형상·무게·원산지·천연 또는 합성여부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물론 이들 보석을 구입할 경우 모두 보석에 대한 감정서나 감별서를 내주는데 판매센터에서 발급하는 보증서의 내용은 일단 신뢰해도 된다. ▷관리요령◁ 흔히 다이아몬드는 매우 단단해서 쉽게 깨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잘못된 상식이다. 다이아몬드는 긁힘에는 매우 강하지만 의외로 쉽게 갈라지거나 깨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세척을 할 때는 다이아몬드나 루비·사파이어의 경우 초음파세척이나 증기세척을 해도 상관없으나 에메랄드나 아콰마린(남청색의 녹주석)·수정·진주 등은 광택을 잃고 금이 가거나 깨질 위험이 있으므로 35도 정도의 따뜻한 물에 중성세제를 타서 세척해야 한다.
  • 고대 「제사유물」무더기 출토/서울대 발굴단,충남 천안 위례산성서

    ◎토마­철마 16점·세발토기 등 다량 “햇빛”/제단 구조물 석축 확인… 백제 유물 추정 충남 천안시 북면 운용리 산81 해발825m 위례산성에서 토마와 철마를 비롯한 고대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이 산성은 백제 건국기의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는 유적.그래서 출토유물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고고학발굴조사단(단장 임효재 교수)이 지난 9월1일 착수한 제2차 발굴에서 11일 현재 거두어들인 토마와 철마는 모두 16점.진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토마 10점,쇠로 만든 철마 6점 등으로 되어있다.모두 같은 발굴지점에서 나온 이들 말모양 유물의 평균 길이는 8㎝.지난해 실시한 1차 발굴에서도 2점의 토마가 위례산성에서 나왔다. 이들 말모양의 유물이 나온 지점은 위례산성 정상 북쪽 낭떠러지 근처.유물과 함께 제단구조물로 보이는 석축 일부가 확인되어 말모양의 유물들은 제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말은 고대인들이 신성시한 동물.특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말은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정복지에서 마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토마와 철마는 백제계 산성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지난 1986년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 이성산성에서 토마와 철마 머릿부분을 포함한 말모양의 유물 4점이 나왔다.그리고 제사유적이 분명한 여러 흔적도 이성산성에서 찾아냈다.백제 건국집단의 뿌리인 부여족 신화에도 말이 영물로 등장한다.이같은 「삼국유사」 기록은 백제인들 심성에 깔린 말의 비중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위례산성 발굴에서는 말모양의 유물 말고도 백제 고유의 유물인 세발토기(삼족토기·삼족토기) 등 고대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이가운데는 원자가 들어있는 기왓장,멍석무늬토기,청색 대롱옥(관옥),당의 화폐 개원통보가 들어있다. 개원통보는 당에서 3차례에 걸쳐 주조되었는데,이번 출토유물은 크기와 무게(지름 2.5㎝·무게 2g)등으로 미루어 7세기쯤에 통용한 초기의 화폐로 보았다.따라서 위례산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되어 삼국시대 말기까지 백제가 방어기지로 사용한 산성이었다는 것이 발굴단의잠정적 견해다. 발굴현장을 답사한 건국대 최무장 교수(전 부여문화재연구소장)는 『이 산성은 백제산성의 전통축조방식인 퇴뫼식과 포곡식을 절충했다는 점이 중요시 된다』고 말했다.그리고 『출토유물을 근거로 문헌사학이 풀지 못한 하남위례성 위치를 규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천안=황규호 기자〉
  • 「고상가옥」 유적 발견/경산 임당지구/국내 처음…삼국시대 고비도

    경북 경산시 임당동 택지개발지구에서 삼국시대의 명문고비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유적에서는 처음으로 고상가옥 유적 등이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원장 이백규)팀이 발굴,18일 공개한 고비는 길이 67㎝,너비 17∼33㎝,두께 19㎝ 크기의 화강암과 연석으로 모두 4행에 60여자의 글씨를 새겼다.비문내용은 현재 판독되지 않았으나 글씨체(해서)와 주변 수장층의 고분군과 출토유물로 미루어 AD7세기 전후의 금석문 자료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 발굴한 고상가옥유적은 동서방향으로 쌓은 석축위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길이 1m,너비 50㎝ 정도의 장대석과 돌멩이 등을 이용해 쌓은 석축이 현재 3단정도 남아있는데,고상가옥은 외부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한 시설로 판단했다.
  • 청주 용정동 조선 인면석상(한국인의 얼굴:54)

    ◎튀어나온 광대뼈… 장승같은 불상/작은 입·펑퍼짐한 주먹코 매우 인상적 충북 청주시 용정동 이정골에서 마주친 돌기둥 모양의 선돌(입석)에 새긴 인면상.조형성이 분명히 깃들었으나 표현코자 한 대상물은 선뜻 분간하기 어려웠다.불상이 아니면서 조금은 부처의 얼굴을 닮았고,전적으로 장승도 아닌 것이 장승 같은 얼굴을 했다.그래서 불상쪽에 비중을 두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장승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선돌은 길죽한 네모꼴 돌기둥이다.그 돌기둥 윗 부분에 돋을새김 질감을 안겨주는 얼굴을 배치했다.그러나 날카로운 면면이 전혀 없는 두루뭉실한 얼굴이다.눈은 좀 큰 편인데 타원형이다.코 밑부분을 약간 음각한 통에 그런대로 코가 드러났다.입은 가로로 길게 표현한 눈과 눈썹,평퍼짐한 주먹코에 비해 작다.아래 입술언저리에서 입가를 따라 올라간 선이 턱을 좁게 만들다가 볼로 올려붙여 광대뼈가 엄청 튀어 나왔다. 얼굴 생김새대로면 장승을 연상하기 충분했다.키도 길게 3m나 되어 장승으로 보는데 더욱 무리가 없다.그러나 이마에돋을새김한 백호가 너무 뚜렷하여 장승이 아니라는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불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새김글씨에 나오는 대목 화주나 시주,비구다.모두가 불교용어여서 의도적으로 형상화한 불두라는 견해다. 이들 불교용어가 나오는 새김글씨 머릿말은 석물의 조성연대를 순치9년7월16일(순치구년칠월십육일립)로 밝히고 있다.순치9년은 1652년이다.역사상 가장 큰 전쟁 임진왜란을 백성들이 참여한 의병전쟁으로 치른지 꼭 반세기가 되는 해이니까,민중의 자각기운이 가득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용정동 석물은 부처라고 해도 좋고,장승으로 불러도 시비할 사람이 없다.잠을 청할 겨를 도 없이 코를 골아대다 닭 울음소리에 깨어 들일을 나갔을 법한 민초 농부의 얼굴이다.그 모습에서 자기를 찾은 민초들의 마음속에 어느때부터인가 석물은 믿음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마을의 허술한 구석,이를테면 물이 빠져나가는 쪽은 눌러줄 수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용정동 이정골 마을에서는 수구맥이(수구막이),또는 장성(장승)으로 불렀다.마을사람들이 음력 정월달 한 날을 잡아 올리는 산제날(산제일)이면 지금도 대접을 받는다.제물로는 시루떡,삼색실과,돼지머리,나물 등이 올라온다.해마다 마을에서 뽑는 제주 밑에 도가와 축관,공양주가 따라붙은 가운데 제사를 올렸다.제비 마련을 위한 위토도 8백평을 가지고 있다. 제사 때 읽는 한글 입석축문에는 부처를 뜻하는 「불상」과 돌장승을 가리키는 「석장」이라는 말이 함께 나온다.그러니까 용정동 사람들은 선돌에다 불상과 장승 두가지의 기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 장군총과 장수왕 후손(압록강 2천리:12)

    ◎장대석 1만개 사용… 거대한 “동양의 피라미드”/밑면 넓이 9백㎡·높이 12m… 꼭대기 돔형/광개토대왕 아들 장수왕의 무덤 추정/하얼빈 거주 고지겸씨 “내가 장수왕 후손이다”/「고씨족보」 제시… 고구려 연구 귀종한 자료 평가 집안시에는 7천8백여기에 이르는 고구려 무덤들이 있다.이들 고분을 한데 뭉뚱그린 호칭이 이른바 연구고구려고분군이다.무덤은 신분에 따라 크기나 형태가 차이를 보였다.규모가 큰 무덤으로 천추총과 태왕릉,장군총이 꼽히는 데 모두가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이 가운데 장군총은 크기를 떠나 짜임새로 보아 고구려 돌무지 무덤의 백비라함이 옳을 것이다. 장군총이 누구의 무덤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대략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으로 압축해왔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장수왕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장군총 역시 집안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 처럼 오랫동안 잊어버린 유적이었다.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중국 동북대륙의 주인들이 자주 바뀌고 전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집안이 봉금지로 묶인 것도그 이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돌무덤의 백미 그런데 장군총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5백여년전이라고 한다.산동성 연대에 살던 유씨 형제가 살길을 찾아 집안땅으로 왔다가 이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형제의 본업이 석공인지라 돌을 다듬어 가지런히 쌓은 거대한 석조 조영물에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무덤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 형제는 무덤의 주인공을 놓고 서로 욱신각신 쟁론을 벌였다. 형은 무덤이 크고 돌을 쌓은 솜씨로 보아 황제가 묻힌 황릉일 것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이에 동생은 중국의 변방에 있는 무덤이라는 이유를 들어 변방수비를 담당했던 장군의 무덤이라고 맞섰다.동생의 추리가 더 설득력이 높았다.그래서 형제는 장군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렸다.그 뒤에 장군의 무덤이라는 말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 내려와 무덤이름이 장군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장군총은 통구평야를 서남향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축조되었다.무덤을 축조한 재료는 화강암이다.국내성에서 20㎞떨어진 오녀봉에서 채석한 돌이 분명하데,오녀봉은 선경을 방불케해서 고구려시대에 거선봉이라고 했다.전설에 따르면 오녀봉의 돌은 황금색을 띠어 옥황상제의 궁전을 짓는데도 사용했다는 것이다.그만큼 석질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불가사의 장군총은 피라미드형이다.쌓아올린 돌은 화강암을 장방형 입방체 규격으로 만든 장대석이다.장대석의 표면은 일일이 갈아 매끄럽게 처리했다.장군총을 쌓는데 1만1천여개의 장대석이 들어갔다니 당대의 대역사임에 틀림이 없다.돌의 크기는 일정치는 않으나 제1층은 가급적 큰돌을 쌓았고 올라가면서 조금씩 작아졌다.제1층에는 4단의 장대석을,2∼7층까지는 각층을 모두 3단씩 쌓았다. 제1층의 평면은 각변의 길이 31.5m나 되는 정사각의 네모꼴로 그 넓이는 9백㎡에 이르고 있다.이 무덤은 특이하게도 네 모서리를 동·서·남·북 방향에 맞도록 배치했다.그리고 제1층에는 쌓아올린 장대석들이 밀려나오지 않게 각 면에 길다란 버팀돌(호분석)을 3개씩 기대어 세웠다.무덤 높이는 12.4m로 맨 꼭대기는 돔형에 가까운 기단석으로 마무리했다. ○매년 태왕릉 찾아 참배 고구려는 장수왕 때인 서기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그럼에도 장수왕이 오늘날 장군총으로 불리는 돌무지무덤에 묻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장수왕이 생전 조상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떤 유언에 의해 집안(국내성)에 묻히는 꿈이 사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지금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연은 못 되지만 장군총을 발견한 유씨형제가 제5층 동남쪽 장대석을 반년에 걸쳐 징으로 쪼아 묘실에 들어갔다고 한다.그 때에 묘실안 황금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더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기적이 분명한 데 근년에 또 다른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장군총에 묻힌 장수왕의 후손이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현재 흑룡강성 하얼빈에 살고 있는 고지겸(67)노인이 그 장본인이다.1948년 하얼빈 의학부를 졸업하고 1956년 대련의과대학을 거쳐 흑룡강성 의학정보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그는 어려서 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부터 고구려 왕족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1921년에 필사한 족보가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불태워졌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현실로 다가오자 뿌리찾기에 나섰다.요령성 해성시 대고려방진에 사는 종친을 찾아가 족보를 다시 보고 자신이 고구려 제20대왕인 장수왕 후손임을 알게되었다.이어 길림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손옥량 소장에게 족보감정을 의로한 결과 고구려왕손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어내기도 했다.또 고씨종친들의 못자리판인 요양,대안,해성,철령 등지를 찾아다닌 끝에 「고구려 왕실후손­요양의 고씨족보」와 「명대 요양동녕위세습지휘사와 그 가족의 연구」등 설득력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요즘 「고구려사화」라는 저술의 집필을 끝냈다.생전에 조상의 뿌리를 모두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하얼빈방송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맏아들 고홍(47)을 끌어들였다.그는 1989년부터 청명절이 돌아오면 하얼빈에서 퍽이나 먼 길인데도 집안까지 와서 태왕릉과 장조묘를 배알하고있다.위대한 조상을 찾는 희열속에 살아가는 고지겸.그는 오늘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대고구려인이지도 모른다. 고구려 유적들,특히장조총을 돌아보고 집안시 태왕향에 들어서고 나서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고지겸과 같은 사연을 안은 고구려인 후예라는 착각에 빠지곤했다.호태왕(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기상이 넘쳐 흘렀을 옛 고구려 도읍지 집안에서 새삼 느껴야 한 애달픈 심사가 있다면 국내성이 오간데 없다는 현실이다.국내성 성벽의 석축이 사람들 키 만큼 겨우 남아 여느집 담장처럼 되었다. 그 나지막한 성벽 아래로 고구려인을 닮아보이는 집안 사람들이 노점을 차렸다.그리고 궁궐이 서있었을 법한 성벽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실감케했다.
  • 충북 미륵리 고려 석불입상(한국인의 얼굴:51)

    ◎“쌍꺼풀 부처님” 드문 표현양식/상호 돋보이도록 몸뚱이를 돌기둥처럼 밋밋하게 처리/얕고 긴 인중… 꾹 다문 입엔 엷은 웃음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석불입상은 당대의 다른 불·보살상에 비해 세련된 얼굴을 하고 있다.오늘날 충남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고려 전기의 소박한 석조불·보살상들과는 다른 일면을 지녔다.다시 말하면 미륵리 석불입상 얼굴에서는 귀족적 풍모가 엿보이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6개의 화강암 석재를 쌓아올려 만들었다.키가 10m가 넘는 거구인데,부처의 얼굴을 일컫는 상호 언저리에 특별한 정성이 들어가 있다.그래서 머리에서 목에 이르는 부분의 조각은 매우 정교했다.이에 비해 몸뚱이는 그저 돌기둥으로 보일 만큼 거칠게 처리되었다.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더욱 돋보이는 것도 얼굴과 몸뚱이가 너무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얼굴은 둥글어 원형에 가깝다.그 둥근 얼굴 윤곽선 못지않게 눈썹도 둥글게 처리했다.직선으로 감은 눈두덩 아래에 쌍꺼풀이졌다.쌍꺼풀은 불상에 흔히 표현되지 않는 독특한양식이다.실하게 생긴 코가 날카롭지 않아 둥근얼굴이 훨씬 더 원만해졌다.인중은 긴 편이나 골이 얕아 얼핏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그 인중을 마감한 입술이 너무 어여쁘다.훤칠한 인물에 어울리는 입술을 슬쩍 다물고 입가에 보일듯 말듯 한 웃음을 지었다. 석불입상의 머리는 고대불상의 정형을 그대로 갖추었다.고수머리 나발이 뚜렷하고 살상투 육계도 올렸다.그리고 모서리를 많이 죽인 탓에 둥글게 보이는 덮개를 머리위로 이었다.귀는 다른 고려 석조불·보살상에 비해 그리 과장되지는 않았으나 큰 편이다.구슬 대신에 볼록하게 돋은 새김한 백호가 이마에 박혔다.논산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의 턱처럼 턱에 둥근 선을 오목새김하여 두 턱이졌다. 석불입상의 목은 퍽 굵다.그 목의 주름 삼도까지는 매끄럽게 조각되었다.그러나 마지막 목주름이 끝나고서부터는 거칠어 불상의 옷 천의자락이 유려하지 않게 늘어졌다.팔은 있지만 겨우 형체만을 표현했다.그래서 팔이 어줍다.손은 가슴에서 펴고 왼손에 약항아리를 들었다. 석불입상이 서 있는 자리는 본래 석굴형태의 주실이었다.주실을 만드느라 석축을 쌓아올리고 석축벽에 작은 불상을 모시는 닫집인 감실을 꾸몄다.그리고 석축위에 목조건물을 올려 앞에 세운 목조의 전실과 맞물려 있던 흔적을 남겼다.이를테면 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모방했다.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11세기 직전의 충주지역의 특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려 태조 셋째부인 신명순성태후의 아버지이자 벼슬이 소판에 이른 긍달이 충주 사람이다.태조의 혼인정책으로 인연을 맺은 지방호족인 것이다.태조와 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945∼949년)과 광종(949∼975년)은 그의 외손자다.그러한 인맥은 뒷날 석불입상과 석굴사원 같은 대불사를 추진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 경기 공동주택 2백58채 “붕괴 위험”/국감 자료

    ◎재건축 판정… 교량 3백곳도 부실 【수원=김병철 기자】 경기도에서 52개소의 공동주택 2백58채·6천1백63세대가 벽체균열 등으로 재건축 판정을 받았다.또 교량 3백3개가 상판의 철근 노출 등 위험시설로 지적됐고,상가와 시장 2백20곳이 대형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다.경기도가 27일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의 내용이다. 안양시 안양8동의 현대와 영남 등 연립주택은 벽체와 석축균열,설비노후 등으로 재건축 판정을 받았고 수원 장안구 화서동 서문아파트는 계단 처짐,굴뚝균열 때문에 특별 관리대상으로 지정됐다. 안양대교와 부천교는 상판이 노출돼 대형 사고의 위험이 있으나 안전표지판만 부착해 놓은 채 방치돼 있다. 수원의 삼호골든 프라자,화서상가,브라운 관광호텔과 성남의 동경신세계,중앙 종합시장 등 대형 시설 2백20곳은 소화전 펌프의 작동불량,방화문의 자동폐쇄 장치 미비 등 대형 화재에 취약한 상태이다. 시·군 별로 위험한 아파트는 안양시가 2천7백30세대로 가장 많고 남양주시 1천2백세대,부천시 6백11세대의 순이다.
  • 뉴욕 초강경 금연법 발효/35석이상 음식점… 첫적발 2백달러

    ◎식당들 흡연룸설치·좌석축소 법석 【뉴욕 연합】 뉴욕시는 10일 35석 이상을 갖춘 음식점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금연법을 발효시켰다. 이 금연법에 따르면 비흡연자의 고발 등으로 위법행위가 적발된 사람에 대해서는 2백달러의 벌칙금이 부과되며 두번,세번 되풀이 되면 벌칙금도 5백달러,1천달러로 높아진다. 뉴욕시내 1만5천여 음식점중 1만1천여 업소가 새 금연법의 영향을 받게되는 데 수만달러를 들여 별도의 흡연룸을 설치하는가 하면 좌석을 35석 이하로 줄이는등 업소마다 내부수리에 부산하다.
  • 횡령세금 사용처 집중 수사/5개은 압수수색

    ◎안씨등이 받은 수표행방 추적/수뢰 전북구청 총무국장 수배 【인천=최철호·김학준기자】 인천 북구청 세금착복 사건을 수사중인 인천지검(주광일검사장)은 29일 구속된 안영휘씨(53·전북구청 세부1계장)와 이승록씨(39·세무과7급)가 가로챈 고액의 법인취득세를 어디에 썼는지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검찰은 이들이 착복한 돈의 사용처를 밝히면 고위층으로의 상납이나 횡령액 규모및 내역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이에따라 검찰은 이날 양지원공구에서 발행한 8천5백70여만원짜리 수표와 대우전자,계산동 새마을금고 등 고액취득세 납세자들이 발행한 수표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경기은행·주택은행·외환은행·신한은행 부평지점과 외환은행 산곡동출장소 등 5개 은행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추적에 나섰다. 이와관련,검찰은 전북구청 총무국장 김연성씨(60)가 지난 92년 8월부터 93년 4월까지,94년 5월부터 지난 10일 해직될 때까지 2차례에 걸쳐 안씨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1천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잡고 김씨를 긴급수배했다. 검찰은 또 이날 북구청 세무2과 기능직 10급인 정해숙씨(35)가 안씨의 지시에 따라 가짜영수증을 써주는 수법으로 1억1천만원을 챙긴 사실을 추가로 밝혀내고 이날 정씨를 불구속입건 했다. 정씨는 지난 92년 11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안씨와 공모,71차례에 걸쳐 돈을 횡령해 7대 3의 비율로 나눠가진 혐의가 드러났으나 현재 임신8개월인 점이 감안돼 불구속됐다. 검찰은 또 고액납세법인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이승록씨에게 취득세를 적게 내게 해달라며 6백만원의 뇌물을 건네준 동보건설 경리과장 이영익씨(32)를 제3자 뇌물공여혐의로,이남영법무사 사무실 변영찬사무장(42)을 뇌물공여혐의로 각각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와함께 안씨가 경기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 950 임야 1천45㎡에 무단으로 가묘 2기를 조성하며 석축을 쌓는등 산림을 훼손한 사실을 추가로 밝혀내고 안씨에 대해 산림법위반 혐의를 추가하기로 했다.
  • 남대문/문:상(서울600년만상:53)

    ◎“국보1호” 원형보존된 서울의 상징/정고1년뒤 창건… 세종때 대대적 개축공사/일재 1907년 양쪽 성벽 헐고 도로개설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서울시내 건물중 가장 오래된 서울의 대표적 상징물이다.도성 4대문 가운데 가장 큰 남대문은 그러나 1907년 도시계획에 밀려 양쪽 성벽이 헐리고 길을 내는 바람에 접근로가 끊긴채 남대문로 한복판에 고립돼 점점 그 상징성을 잃어가고 있다. 정도 1년뒤인 1395년 태조가 창건한 남대문의 문루는 3년만에 완성됐다.그후 세종 29년(1447)8월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시작,전라도 완주 지역의 인부 6천8백명과 목수,석수,대장,조각사등이 동원돼 이듬해 5월 마무리했으며 성종 10년(1479)과 고종때 증수됐다. 6·25동란으로 상동(상동)일부가 파괴되는 시련을 겪었으며 지난 56년과 62년 두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였다. 이에앞서 남대문은 1907년 10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조선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경인·경부·경의선 철도의 완공으로 서울역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는 교통량이 늘어나자 남대문과 주변의 성곽을 철거해 도로를 낼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특히 1907년 10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의 서울방문을 앞두고 『전차와 우마차의 통행으로 비좁은 남대문을 통해 황태자를 영접할수 없다』며 우선 남대문 서측 성곽을 헐고 도로를 새로 낼 계획을 강력 추진했다.당시 일본은 일본인 내무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성벽처리위원회를 발족까지 했으나 빗발치는 우리 조정대신들과 국민들의 반대로 주춤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듬해 10월 남대문에 이어진 성곽을 부수고 석축을 쌓은뒤 길을 내고 성곽의 돌은 인천항을 축조하는데 사용하는 횡포를 저질렀다.남대문 보호석축도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석축양식과는 달리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나타내는 일본식으로 축성돼 『일본식 건축물이 국보1호를 둘러싸고 있다』는 비판이 지금도 일고 있다. 남대문은 일본군과 한국군이 합방이후 처음으로 격렬한 전투가 치러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1907년 8월 일본의 군대해산으로 나라의 운명이 완전히 기울어지자 울분을 참지못한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성환이 『국가가 망해도 왜놈 한놈을 죽이지 못했으니 내가 군대해산을 명할수 없다』며 권총으로 자결했다.이 소식을 들은 우리군인들이 무기·탄약을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일본군들은 남대문 벽위에 기관총 2문을 설치해 우리를 공격했던 곳이다.또 석축에는 아직도 6·25전쟁의 탄흔이 남아있어 민족의 뼈아픈 한을 후세에 전해주고있다. 남대문의 「숭례문」현판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관악산이 화산이므로 도성안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다른 문들과는 달리 종서로 쓰여진 것으로 전해진다.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예」자는 불에 해당되고 「불」은 남쪽을 표시하는 것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위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아 불을 일으키면 맞불을 놓은 격이 되어 불길을 잡을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현판 글씨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글씨로 보는이가 많으나 태종때의 명필이던 공조참판 암헌 신색이 썼다고도 하고 중종때 공조판서를 지낸 죽당 유진동이 썼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 서·남해안 농경지 곳곳 침수/태풍 더그 영향

    ◎해일에 방파제 유실… 대피 소동 태풍 「더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든 제주와 전남 목포등 서·남해안지역 곳곳에는 10일부터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방파제가 유실되고 많은 농경지가 침수되는등 피해가 잇따랐다. 특히 전남 완도와 해남,충남 서산앞바다등에서는 11일 상오까지 최고 7m의 파도가 일고 초속 29m의 강풍이 불어 양식장시설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또 제주와 전·남북,충남과 경기도 서해안일대의 곳곳에서 도로가 파손돼 태풍 「더그」가 우리나라를 완전히 빠져나가는 12일쯤에는 재산피해액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제주지방은 이날 아침 순간 최대풍속 29m가 넘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부근 바다에는 6∼9m에 이르는 높은 파도가 밀어닥쳤다.이로 인해 남제주군 대정읍 동일1리 어항방파제 30m가 유실되고 서귀포시 천지연폭포 하류에 있는 해안석축 30m가 무너져 내렸는가 하면 곳곳의 가로수가지가 꺾이고 간판이 떨어져 나갔다. 해일이 예상되는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1리와 서귀포시 법환동등 해안주민 17명은이날 새벽 인근 노인회관으로 긴급 대피했다. ○…목포와 신안·해남·진도등 해안지역에는 이날 하오 순간 최대풍속 18m가 넘는 비바람이 불고 부근 바다에는 10m안팎의 높은 파도가 이는 가운데 해일로 인한 방조제붕괴사고가 발생했다.이날 상오5시 신안군 도초면 만년리 도락방조제 5m가 해수위가 만조위에 이르면서 붕괴돼 염전 포강이 바닷물에 침수됐다. 또 이날 새벽 2시쯤 진도군 고군면 금호도 김병래씨(58)의 멸치건조시설 3채가 파손되고 15평규모의 건조장이 높은 파도에 파손됐으며 고군면 벌포 물양장 10m와 임회면 강계리 도로 호안축대 20여m가 무너졌다.목포에서는 서산동 서산수협어판장앞 도로등 3개소와 충무동 달리도 남부방조제 20m가 침수되거나 유실됐다. ○…이날 상오 5시쯤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등 4개마을의 방조제 5곳 1천1백50m가 높은 파도로 유실되고 농경지 15㏊가 침수됐다. 고창군은 이에따라 군병력과 공무원 주민 등 1백여명의 인력과 포클레인 9대 등 장비를 동원,긴급복구작업을 벌였다.
  • 6세기 신라/경기북부까지 통치

    ◎강남대 한국학연,포천 반월산성 발굴통해 확인/신라식 석성… 황룡사와 같은 기와 출토/궁예축조설 반전,삼국영토 연구 새자료 삼국의 각축이 한창이던 6세기에 신라는 이미 오늘의 경기 북부지역까지를 장악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강남대 한국학연구소가 단국대와 한국교원대의 협력을 얻어 발굴한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구읍리 청성산(해발 285·5m)반월성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조사결과 반월성은 궁예(?∼918년)가 쌓았다는 구전과는 달리 삼국시대의 신라계 산성으로 판명되어 당시 삼국의 영토연구는 물론 성곽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을 제시했다. 이 산성은 청성산 정상에 가까운 해발 245∼280m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지난 6월부터 7월말까지 실시한 1차조사에서 둘레 1천80m,동서길이 4백90m,남북 1백50m의 길죽한 반원형 석축산성으로 가려냈다.이 산성은 주변을 공격제압할 수 있는 자연지형을 갖춘데다 청성산 자락을 휘감고 지나는 구읍천,포천천,하성천 등의 3개하천이 해자구실을 했다.그래서 천연의 요새에 자리잡은 산성이라 할 수있다. 이번 조사에서 성과 관련한 시설물로 성문자리 2군데,치성(성벽에 붙어서 바깥쪽으로 돌출된 공격장소)4군데,건물지 6군데,망대터 2군데를 찾아냈다.이밖에 우물 및 수구터 각각 2군데,성벽위를 따라 순찰하는 회곽과 보도시설을 확인했다.특히 성벽 전체를 10m씩 모두 1백8구간으로 나누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주 출토품과 같은 특이한 기와를 발견,반월성이 신라계 산성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기와의 특징은 미구(기와가 서로 맞물리게 내밀어진 부분)에 무늬가 있다는 점이다.반월성에서 수습된 이들 평기와의 미구에는 수키와와 암키와에 통틀어 여러 형태의 줄무늬가 들어있다.막새기와의 초기형식으로 보이는 이같은 기와류의 출토 예는 경주 황용사와 석굴암 절터,안압지 임해전 터에서 나온 유물에서 찾아진다.조사단은 이들 두 지역의 기와유물을 근거로 반월성을 6세기 신라계 산성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 것이다. 이 성은 주로 화강암을 잘 다듬은 규격재로 축조했다.급경사지역은 유단식 성벽쌓기 방법을 채택,급경사에서 빚어지는 성벽의붕괴를 방지한 한편 활모양으로 곡선을 이룬 성벽 부분도 아직 남기고 있다. 이 반월성에 대해 동국대 이기동교수(한국고대사)는 『신라의 한수이북 공략은 AD550년 이후에 가능했기 때문에 그 이전은 고구려가 한수 이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우선 전제하면서 『신라가 포천까지 진출한 것은 아마도 5세기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그 이유는 북한산(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AD553년 무렵만해도 고구려가 압박해올 경우 신라는 한수 이남 광주지역(경기도 하남시)으로 퇴각한 사실을 상기시켰다.그리고 이교수는 역사시록에 이 산성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후세 사람들이 문학적 상념을 떠올려 지은 이름이 반월성일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 논산 모촌리 백제 고분군/“5세기 지방 수장급 무덤” 확인

    ◎호분 「말재갈·은고리칼」로 신분 추정/백제의 간섭 받던 마한 호족 통치 지역 충남 논산군 양촌면 모촌리에서 최근 발굴된 백제시대 고분군 가운데 일부가 이 지역 토착집단의 수장급 무덤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끌고있다. 공주대박물관팀이 백제문화개발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발굴한 이 고분군은 백제와 마한세력간의 관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주요 유적으로 떠올랐다. 논산 모촌리 고분들은 2기의 독무덤(옹관묘)을 제외하고 나머지 17기는 모두가 돌을 쌓아 만든 백제의 석축무덤.석축무덤들은 유형상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분)으로 분류되었다.이 가운데 17기는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아 널방(묘실)을 꾸몄다.널방 안에는 주검받침(시상대)을 마련하면서 한부분을 판돌로 막아 딸린덧널(부곽)을 설치했다.그리고 천장을 석재로 덮었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들 고분의 출토유물은 토기와 철기가 주류.토기의 경우 회청색의 경질토기와 함께 적갈색 연질토기가 간간이 나왔다.구덩식돌방무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굽다리잔(고배)이나 바닥이 둥글고 아가리가 넓은 항아리(원저광구호)이외의 삼발이토기(삼족토기)와 뚜껑달린접시(개배),병모양토기(병형토기)등은 논산 모촌리 고분들이 지닌 특징적 껴묻거리(부장품)로 지적되었다. 철기유물은 주로 4호분과 5호분에서 나왔는데,무기류와 말갖춤류(마구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특히 5호분 출토 말갖춤은 형태나 내용에서 특이성을 보여주는 유물.말재갈(마함)의 경우 3개의 재갈이 맞물려 고삐로 이어지도록 고안된 이른바 삼연함으로 되어있다.이와 더불어 말안장 아래 붙였던 철선형태의 장식과 띠고리(교구)도 함께 출토되었다.말재갈은 4호분과 14호분에서도 나와 말갖춤을 껴묻거리로 사용한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철제무기류 가운데 관심을 끈 유물은 5호분 출토 고리칼(환두대도)이다.칼 몸체(61㎝)와 손잡이 일부(5.5㎝)는 쇠로 만들었다.그리고 쇠손잡이 부분에 더 긴 나무를 결합시켜 손잡이 길이를 늘린뒤 은제 고리와 연결된 은판으로 나무를 감싸놓은 형태.그래서 은제고리칼로 불리는 이 고리칼의 존재는 말갖춤과 더불어 5호분에 묻힌 주검의 주인공을 이 지역 토착집단의 수장급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들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체로 5세기 중반에서 말기까지로 편년된다.발굴조사팀은 그 이유를 널방에 주검받이를 만들고,딸린 덧널을 설치했다는 점에서 찾았다.그리고 논산 모촌리 고분군을 영조한 집단이 토착세력이라는 사실은 구덩식돌방무덤을 고집했다는데 있다는 것이다.왜냐하면 웅진시대(475∼538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유행한 백제의 묘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기 때문이다. 공주대박물관팀은 5호분에서 나온 뚜껑달린접시와 병모양토기가 추가로 껴묻힌 흔적을 역력히 보였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했다. 이들 토기류는 굴식돌방무덤의 전유물이라는 점과 5호분 무덤의 주인공 신분을 고려하면 백제 중앙정권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이들 추가 껴묻거리 토기는 중앙정권이 내려보낸 조문품정도로 해석했다.그래서 학계는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중앙정권 영향을 받은 마한세력의 호족이 간접통치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있다.
  • “선진 도성” 사비성(백제를 다시본다:12)

    ◎“2중의 방어벽”… 부소산성내에 왕궁 축조/오부관아행가는 산성 발치에 자리잡아/도로망·하수도등 도시체제 잘 갖춰/금동향로 출토지 능산리는 공방촌 추정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사비성은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나성의 개념을 갖는다.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그러면 사비성 안쪽에 해당하는 도성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왕궁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고,왕의 명을 받들던 관아는 어느지역에 모여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소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한다.테뫼식과 포곡형의 두 가지 축조방식이 복합한 이 산성은 부소산 위쪽 표고 1백6m를 중심으로 쌓아졌다.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부여읍 쌍북리,구아리,구교리,관북리에 걸쳐 위치한다.면적은 74만6천2백2㎡,성 둘레는 2천2백m에 이른다.부여 중심부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그리고 산성의 북쪽 끝이 백마강(금강)에 와닿는다. 이 산성의 형태는 군창지와 사비루 부근이 테뫼식을 이루었고,이들 테뫼식 산성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두가 포곡형이다.산성 둘레에는 문자리(문지)가 여러곳에 남아있다.군창지 부근의 남문은 테뫼식 산성을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또 동문과 서문은 포곡형 산성,다시말하면 부소산성 성벽에다 낸 문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 백마강 대안쪽에는 수구와 더불어 또다른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 동문자리를 발굴한 결과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판축을 기본으로 한 흙벽으로 밝혀졌다.그러나 흙벽 만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아니다.흙벽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돌을 쌓은 다음 안쪽에도 또 돌을 쌓고 흙벽을 한겹 더 덧붙였다.이를테면 돌­흙벽­돌­흙벽의 단면구조를 가진 견고한 성벽인 것이다.특히 판축과정에 1백20㎝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뒤 진흙을 쌓아올렸다.그 기둥구멍은 30㎝나 되고 주춧돌까지 받쳐놓았다. 이 성벽 안쪽에는 돌을 깐 도보가 아래로 계속 연결되었다.너비 80㎝의 이 도보는 비가 올 때에 쓰였던 순시용도로로 보고있다.특히 도보 안쪽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금제관장식편을 비롯해 금동제용두장식 2점,금동제귀면장식,금동제방울이 그것이다.또 갈고리,양지창,낫,창,도끼와 같은 철제무구와 함께 격조높은 토기,석간,벼루,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은 사비시대 왕이나 왕족과 관계되는 유물이다.그렇다면 부소산성 어딘가에는 왕의 상주거소가 있었을 것이다.아직은 왕궁유구나 이렇다 할 건물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비도성을 호령한 백제의 중심축은 부소산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왕실 관련유물 출토 그리고 지난 88년과 89년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동쪽 부소산 입구 발굴과 결부해도 부소산성은 왕의 거소일 가능성이 있다.이 발굴에서는 부소산성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쌓은 축대와 함께 그 축대 밑에서 축대와 병행한 석축의 배수구가 확인되었다.그리고 건물자리 5곳과 암반을 깎아서 만든 우물터를 발견한 바 있다.이들 유적을 부소산성 내에 왕궁이 존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부소산 발치의 축대와 배수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여문화재연구소(구국립부여박물관)는 부소산 기슭 남쪽 언덕에 있다.부여 시가지가 가장 가까운 자리다.조선시대 후기 관아이기도 하거니와 부근에 백제시대 석조유물이 산재되어 한때는 가장 유력한 왕궁자리로 추정되기도 했다.그래서 지난 82년 충남대가 이 지역 발굴에 나섰지만,그 성과는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정문 앞에서 네모꼴 백제시대 연못자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이후 87년 네모꼴 연못자리 동쪽에서 도로유적을 확인했다.남북과 동서로 통하는 도로유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남북도로의 너비는 10.7m,그 좌우 양쪽에는 너비 75㎝의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동서도로는 너비 4m로 밝혀졌다.이 일대가 바로 사비시대에 백제를 다스린 오부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사비도성의 관아가라 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살았던 사람들의삶은 가히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지난 92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천왕사터로 전해진 옛 부여경찰서 자리를 발굴할 때 2중구조의 우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위에 있는 샘터에서 일단 물을 받아 정수처리를 거친 뒤 밑의 샘으로 보내 물을 마시도록 한 시설로 보인다.윗 샘은 방형의 석축시설이고 아래 샘은 돌(하부)과 널빤지(상부)를 사용해서 만들었다.여기에서는 수막새기와와 토기류(사발과 동이),사람얼굴을 새긴 기와,방추차,곱돌제 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면서 사비성 사람들은 도성 안에서 불교를 가까이 대했다.나성 안에 있는 명찰 정림사와 천왕사에서 불심을 길렀던 것이다.그뿐이 아니라 군수리 절터나 동남리 절터와 같은 유적지에도 분명히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늘 부처를 섬길 수 있었다.또 중국의 양과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탓으로 외국문물을 쉽게 접했다.거기에 비옥한 옥토가 백제강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생활은 윤택했을 것이다. ○2중구조 우물 발굴 최근에 와서는 사비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큰일이 일어났다.지난해 연말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굴이 그것인데,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그것도 역사적 사건이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비도성이어서 금동향로가 갖는 제조상의 기술적인 문제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접어둔다.다만 금동향로를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발표대로 출토지를 공방으로 추정한다면,능산리는 공방촌일 수도 있다.바꾸어 말해서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금속산업을 일으킨 지역이 곧 오늘의 부여읍 능산리라는 이야기다.능산리는 사비성의 나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건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분명히 나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도성을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연결시켜 축조한 점은 고구려 평양성과 더불어 우리 고대의 도성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나성/길이 1만3천자…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성/사비성의 구조 사비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백제가 협소한 웅진(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16년)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에 유리한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어떻든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부소산성과 평지성으로서의 나성으로 이루어졌다.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이밖에 사비성,소부리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성터의 길이가 1만3천여자나 되며,치소가 그안에 있었다고 기술했다.치소는 왕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현재 부여시가지가 있는 나성안쪽은 사비시대에 도시체제를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이같은 가능성은 한성시대(BC18∼AD475년)백제의 도성인 서울 몽촌토성이 당시 구획정리가 된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을 올림픽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발굴한 결과 조방이 뚜렷한 도성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의 백제왕궁도 공주 공산성안에 자리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남기고 있다.
  • 고구려·발해유적 합동조사 추진/한·중 문화협정 체결 계기

    ◎이문체 새달 방중때 문화·학술교류 구체화/길림성·흑용강성·영변성관계자와 실무협의/장군총·광개토왕비·장성 공동연구 기대/발해에 대한 역사시각·항일독립운동사 오류 시정돼야 한국과 중국 사이에 지난달 28일 문화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역사를 비롯한 학술교류 및 문화유적보존에 관한 자료교환과 공동조사를 위한 정부 실무진들간의 접촉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우선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중국 문화부의 초청으로 오는 5월 중국을 방문,한·중 문화협정 체결에 따른 정부간 협력방안과 구체적인 교류문제를 협의할 계획이다. 이장관의 중국방문을 전후해 문화재연구소 장경호소장은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고고학연구소 초청으로 유적조사실 연구진·고고학계 인사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고고학연구소와 문화부 문물국,고구려·발해 유적이 주로 산재해 있는 길림성과 흑용강성·요녕성 등 중국 동북부 3개 성의 문물국 관계자들과 만나 조사지역과 조사기간·조사방법 등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를 협의한다.장소장 등은 이번 방문을 계기로 한·중합동조사단을 구성하는 등 「고구려·발해유적조사 7개년 계획」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이번 문화협정 체결로 다양하게 전개될 문화교류 가운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분야는 바로 고구려·발해유적에 대한 공동 발굴조사다.중국 동북부 지역은 우리 고대사의 무대일 뿐 아니라 근대 일본침략시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학술교류 성과가 크게 기대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의 경우 최근 중국학계에 의해 조사된 장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중국 길림성 혼춘에서 화용까지 이르는 장성의 길이는 7백여리.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한 가운데 군데군데 석축과 편축의 방어시설을 갖춘 이 장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길림성 집안시 부근에는 아직도 1만2천3백여기의 고분군이 남아 있다.학술적 공동발굴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지역이다.이미 발굴조사는 끝났다 하더라도 문화유적 보존차원에서 공동연구가 요청되는 유적도 얼마든지 있다.그 유명한 장군총을 비롯,장천 1호분·무용총·쌍영총 등이 그것이다.이들벽화고분의 인물풍속도나 사신도와 같은 중요자료를 영구보존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밖에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공동연구도 숙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왜냐하면 한국과 중국·일본의 고대국가교섭사가 객관적 시각으로 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발해는 특히 한국과 중국 사이에 큰 편차의 역사시각을 가지고 해석해온 고대국가다.「발해는 율말말갈사람들이 AD 698년에 세워 AD 926년 까지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지역에 존속했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중국의 공식입장이다.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집단은 아예 빼놓고 있다.이러한 역사시각의 오류를 사실에 입각,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공동연구기반이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 발해유적은 대부분 길림성과 흑용강성 일대에 흩어져 있다.도성유적으로는 흑룡강성 발해진의 상경성,길림성 화용의 중경성,길림성 혼춘의 동경성등이 꼽힌다.그리고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고분군,길림성 화룡의 용두산고분군,발해진의 삼령둔고분군도 공동발굴과 연구가 기대되는 발해유적이다. 이 기회에 중국 동북지역 항일독립운동사의 오류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이를테면 1920년의 길림성 안도현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을 홍범도로 부각시킨 가운데 서일,김좌진 등은 제외한 것도 그 하나의 예로 들수 있다.
  • “백제인 정수해 마셨다”/부여 쌍우물 유적서 침전시설 발굴

    ◎윗우물서 이물질 가라앉혀 가득차면 홈통따라 아래로 2차침전후 윗물만 떠마셔 낙동강의 수질오염 파동으로 온 나라가 물 걱정에 휩싸여있다.공해가 없던 그 옛날에도 우리 조상들은 깨끗한 물을 찾는 노력을 했을까.「그렇다」는 대답은 최근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읍 구아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백제시대의 정수시설에서 찾아냈다. 이 정수시설은 백제시대의 고찰인 천왕사 옛터로 전해지는 부소산 아래에 있다.조사팀은 여기서 2개의 우물로 이루어진 침전시설을 발굴했다.가로 1백65㎝·세로 1백85㎝ 크기에 석축으로 쌓아올려진 윗우물은 부소산의 옹달샘에서 흘러내려 오는 냇물을 받아 가라앉힌 침전시설.1차 정수된 물이 윗우물에 가득차 넘치면 가로 20㎝·세로 20㎝에 뚜껑에 달린 목재 홈통을 타고 3백60㎝ 떨어진 아래쪽 우물에 모이도록 설계되었다. 아래우물은 가로·세로 1백57㎝ 크기로 둘레에 석축을 쌓은뒤 상단에는 목재를 둘렀다.물이 이 아래우물에 모이면 다시 2차 침전이 일어나고 이 우물의 주인은 표주박으로 살며시 위에 고인 맑은물을 떠먹었을 것이다.일종의 상수도였던 셈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이 우물의 축조시기는 백제말.우물이 축조되기 전 아래부분에서 발견된 기와가 6세기 중반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같이 판단하고 있다. 쌍우물이 발견된 곳은 바로 부소산 밑.삼국시대 당시에는 완벽한 무공해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그럼에도 마시는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천왕사 터 쌍우물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물을 대하는 마음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식수오염시대에 더욱 돋보일수 밖에 없다.
  • 이키섬의 성모궁(일본속의 한국문화:12)

    ◎신공황후의 신사… 임난·일제침략 악용/“궁밑에 적의 목10만구 묻었다” 악감정 촉발/성모상은 한국과 일본 잇는 “뱃길의 수호신” 신공황후를 모신 이끼섬의 성모궁은 크지도 않고 오래되어 보이지도 않았다.그러나 통신사가 이곳에 묵고 가던 3백년전에도 확실히 성모궁이 있었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신사임에 틀림없다. 옛날의 통신사들은 성모를 모셨다는 설명을 듣고 일본인들의 미신을 비웃었다.그런 신공황후라는 무당이 신자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한국침략의 구실로 이용되었다.한가지 신화가 이토록 오래 침략전쟁에 이용된 예는 달리 없다할 정도로 성모궁에 모신 귀신은 우리에게 무서운 마귀인 것이다. 중상씨가 두주를 찾는동안 안내판을 들여다 보았더니 엄청난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중애천황의 부인 신공은 구주의 당진에서 이끼섬을 향해 3천2백70척의 군선을 출발시켰다.그때 배가 항해하는데 좋은 동풍이 불었다.일기를 그래서 풍본이라 했는데 황후는 이곳에서 잠시 바람을 기다려 다시 대마도의 악포로 갔다.삼한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황후는 이곳에 다시 들러 앞서 지어주신 풍본이란 이름 대신 승본이라 지어주셨다. ○안내판에 학살 숫자 안내판을 읽고 있노라니까 사주가 흰 제복을 갈아 입고 나왔다.손에는 항아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는데 표면의 커피색 유약이 일부 떨어지고 깨어지기까지 한 골동품이었다. 『이것좀 보아 주십시오.혹시 도자기를 볼줄 아신다면 이 항아리의 제작연대를 가리켜 주십시오』 속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올듯하였으나 웃을수는 없었다.도자기 감정을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신공황후라는 무녀의 존재 자체가 하늘로 올라간 이마당에 이 항아리 하나를 가지고 다시 지상에 끌어내릴수 없기 때문이었다.항아리에 쓰인 글귀는 이러했다. 『진입,일본이끼섬 풍본궁 성모대보살 귀신을 위한 다항아리.이것을 바치나이다.희재 백양내촌생천정 20연 경백』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항아리가 제작되었다는 천정20연이란 해다.본시 천정은 19년으로 끝나고 임진위란이 일어나는 천정20년을 문록 1연으로 고쳤다.그래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문록·경장의 역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항아리가 제작된 해가 1592연 바로 임진년이었다.그러고 보니 이 항아리의 내력을 알법도 하다. 희재 백양내촌이란 자는 풍신수길의 침략군이 대거 이끼섬에 도착하니까 기뻐서 이 항아리를 성모궁에 바친 것이다.그 뜻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공황후가 옛날에 삼한정벌을 하고 돌아왔듯이 이기고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안내판의 끝부분을 읽어보니 끔찍한 학살사실이 숫자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적의 목 10만1천5백을 들고 돌아온 황후는 풍본의 해안가에 굴을 파서 묻고 그 위에 석축지를 쌓아 보전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성모궁의 기원이다』 ○조작된 역사의 표본 필자는 10만1천5백의 목을 잘라서 바로 이 성모궁 밑에다 묻었다는 구절을 보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물론 신공황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조작된 역사왜곡의 표본이지만 이 거짓말이 그뒤 정말 있었던 일처럼 꾸며져서 일본인의 대한인감정을 촉발시키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침략전쟁을 자행하여 수백만명의 인명을희생시켰으니 치가 떨리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공황후의 신화는 임진왜란때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19세기에 와서는 일제침략전에 이용되어 『한국은 본시 일본땅이었다』『조선은 신공황후때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 왔다.그러니 지금의 한일합방은 잃었던 우리땅을 되찾는 것이고 조선인은 본래의 주인을 찾아 돌아오는 것이다』라는 침략논리를 발전시켰다. 일본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신공황후의 신화만 가지고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니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문을 훼손하여 1백년,2백년 틀리는 기사를 신공황후에 맞추는가 하면 백제왕이 위왕에게 하사했다는 칠지도를 거꾸로 위왕이 백제왕에게 바친 것처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지금도 비교적 양심적이라 평가되고 있는 고대사학자,예컨대 이노우에 히데오(정상수웅)와 같은 일본학자가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아주 부정하는데 망설이고 있다.신공황후의 이야기는 어린이용 만화같은 것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 우화 하나때문에 한 민주이 한 민주을 증오하고 죽이고 한 2천년 역사가실제로 벌어지고 만 것이다. 과거의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수 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다.그러나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끼섬의 성모궁 같은 것을 과감히 헐어 없애거나 본래의 성모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성모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항군의 수호신의 어머니였다.뱃사공들이 그녀에게 빌고 그녀를 배안에 간직하고 떠나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는 해신이었다.그런데 어느듯 위구가 이바다에 득실거리게 되자 도적놈들과 침략자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바뀌고 말았다.성모가 어디 도적놈을 지켜주어서야 되겠는가.도적을 막아주어야 한다.침략자를 응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한 마귀할머니란 누명은 벗기 어려울 것이다.
  • 39개 골프장 「환경평가」 무시/국감자료

    ◎서서울 등 “법 연말시행” 맹점 악용/토사유출 방지시설 등 외면/농약 과다살포로 농가피해 우려 현재 건설중이거나 완공된 골프장 가운데 절반이상이 사업이전에 승인받은 환경영향평가 협의내용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4일 환경처가 국회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올해 건설중이거나 완공된 전국74개 골프장을 대상으로 지난 8월말까지 환경영향평가 이행여부를 점검한 결과 수도권지역의 39개 골프장이 영향평가협의내용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향평가를 이행하지 않은 사업자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할수있도록 하기위해 지난 6월 공포된 환경영향평가법이 올 연말부터 시행토록 돼있는 맹점을 이용,대부분 골프장이 고의적으로 영향평가를 무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골프장의 위반내용 가운데는 토사유출방지시설미흡이나 석축주변의 녹화시설미비,농약오염도미조사등의 내역이 포함돼 홍수나 농약과다사용등으로 인근 농가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수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해강개발의 김포골프장의 경우 공사시 폭파소음·진동대책미수립,세차시설미비,진입로 복구미흡등 8개항을 위반해 이행촉구조치를 받았다. 이천관광의 동진골프장은 토사유출방지시설때 전문가의 안전진단을 받도록한 규정을 위반했고 지하수오염방지시책도 수립하지 않아 이행촉구명령을 받았고 서서울관광의 서서울 골프장은 지류의 부영화방지대책등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극동개발이 건설중인 극동골프장은 사후환경관리계획 미수립등 2개항을 위반했고 오봉개발의 아시아나골프장도 도로에 나무를 심지 않는등 3개항을 지키지 않은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 나다레저의 나다골프장,뉴경기관광의 코리아골프장,코오롱의 우정헬스,영진건설의 엑스포골프장,한라레저관광의 한라레저골프장등도 협의내용을 제대로 지키지 않다가 적발됐다. 현재 환경영향평가를 무시할 경우 환경처는 현지확인후 미이행사항에 대한 이행촉구를 할수있고 계속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승인기관에 공사 일시중지요청을 할수 있지만 해당사업장이 공사를 강행하더라도 이를 제재할 수있는 근거가 없다. 올 연말부터 시행되는 신설 환경영향평가법에는 공사중지명령을 받고도 계속 공사를 강행할 경우 5년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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