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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어린이 70명 선비 교육 받는다

    ‘꼬마 선비들이 납신다.’ 한국정신문화재단이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어린이를 대상으로 조상의 올바른 선비 정신을 배우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9일 정신문화재단에 따르면 11일 경북 안동시 청소년수련관에서 지역 초등학교 5학년생 70명이 참가한 가운데 ‘초록 군자단’ 발족식을 한다. 이날 행사에는 이들 학생의 어머니 70명도 함께한다. 학생들은 연말까지 총 10차례(1박 2일 또는 2박 3일 일정)에 걸쳐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석주 이상룡 등 경북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배운다. 또 현장 체험 등으로 자기 꿈을 설계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실천과제도 토론한다. 부모들도 학생들과 같은 일정으로 자녀 인성교육 방법 등을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잊혀진 3·1절] “물려받은 건 가난뿐… 원망 많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잊혀진 3·1절] “물려받은 건 가난뿐… 원망 많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무명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이란 게 평탄할 리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항상 자랑스럽습니다.” 3·1절을 앞두고 27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증손자 이범증(71)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이야말로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냐”고 말했다. 석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내각수반)을 지냈다. 경북 안동 유림명문가의 99칸짜리 대저택(임청각·보물 182호)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국운이 기울자 모든 기득권을 버린 채 1911년 만주로 떠났고, 전 재산을 다 바쳐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학계 평가에 비해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씨는 “증조부를 비롯해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독립운동의 길은 가족들에게도 험난했다. 이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임청각과 토지 등을 다 팔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집안에 한 명이라도 독립운동을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삼 대가 했다”며 “광복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난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이 선생의 3형제와 아들, 손자, 조카들까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7남매 중 막내인 이씨는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자녀들을 돌볼 틈이 없었다”면서 “그나마 혼자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제일 늦게 태어난 덕분”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창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커녕 대학 시절에도 친구 자취방에서 얹혀 지내며 스스로 학비를 댔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30년 넘게 교사 생활을 하다 2007년 퇴직했다. 서울 중앙중 교장을 맡았던 마지막 8년 동안에는 3·1절이 되면 학교 홈페이지에 특별한 훈화글을 남겼다. 이씨는 “‘선열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는 글귀를 매번 썼다”면서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대인 만큼 학생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 등을 지냈고 1962년 건국훈장을 받은 동암(東岩) 차리석(1881~1945) 선생의 아들 차영조(71)씨의 유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씨는 “아버지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며 “어머니는 그때부터 충무로에서 사과궤짝 위에 양담배를 올려놓고 장사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양담배 판매가 불법이었지만 젊은 여자가 자식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니 어머니는 매일 단속을 당해도 다음날 좌판을 벌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차씨는 광복 이후 정부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친일파에게는 거꾸로 면죄부를 주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돈과 먹을 것을 달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게끔 교육이라도 시켜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도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13세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뒤부터는 ‘아이스께끼’ 장사, 여관 심부름 등 안 해본 일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씨는 병원 갈 돈이 없어 어머니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던 때, 처음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는 배고프게 살면서도 항상 ‘아버지는 훌륭한 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다”면서도 “유년시절엔 많이 원망했다”고 고백했다. 전력검침원과 건설노동자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는 1977년부터 홀로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했다. 차씨는 “2019년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그때까지 국내에 임시정부 기념관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지난 26일부터 이상룡·차리석 선생 등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인물 열전 60권을 전시하고 있다. 홍선표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공적이 뚜렷하지만 국민에게 낯선 이름들을 소개하는 이번 사업을 계기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김병일 사람과 향기] 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 선생처럼

    [김병일 사람과 향기] 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 선생처럼

    올가을은 단풍빛깔이 예년보다 유난히 곱다. 국화향 또한 짙게 다가온다. 깊어가는 가을의 색과 향이 모처럼 우리들 몸의 감각을 어루만지며 한껏 즐겁게 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마저 즐겁게 하는 소식이 또 하나 있어 기쁨이 배가되는 느낌이다. 지난 17일 경북 안동 낙동강변에 있는 고성이씨 종가인 임청각에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내각수반)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발족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석주 선생 기념사업회의 발족이 즐거움을 더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석주 선생이 어떻게 살아간 분이기에 그럴까. 근래 우리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정신적으로는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가정과 학교, 직장,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들로 시달린다. 그전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데 오히려 정신적 피로감이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증대돼 가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그 물질적인 풍요만을 절대시하면서 ‘함께’, ‘더불어’가 아니라 ‘홀로’, ‘나만’의 삶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진단이 맞다면 해답은 분명해진다. 우리 모두의 삶이 자신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지금보다 더 비중을 두고 살아갈 때 문제는 풀린다. 모두의 삶의 지향점이 그렇게 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무엇보다도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 주변에 이 문제에 있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도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 점이 바로 석주 선생이 그립고 그분의 기념사업회 창립 소식이 유달리 반가운 이유다. 선생이야말로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명문가 종손으로서의 개인적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우리 근대사에서 선공후사를 솔선해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동의 500년 전통 명문가인 고성 이씨 문중의 17대 종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에 차례로 헌신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국권이 강탈당하자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한 후, 일가를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주도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선생 당대까지 고성 이씨 임청각파는 대표적인 ‘삼불차’(三不借) 종가로 꼽힐 정도로 명성과 자부심이 대단했던 문중이었다. ‘삼불차’란 대대로 ‘돈’과 ‘글’과 ‘후손(양자)’ 세 가지를 남에게 신세 지지 않은 종가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종가의 종손 신분으로 이유가 어디에 있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망명한다는 것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선생은 과감히 그 일을 결행했다. 개인보다 가문은 큰 가치이지만 국가라는 이보다 더 큰 공적 가치를 위해 가문을 작은 가치로 여기고 결연히 던졌다. 그야말로 선공후사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선생의 삶은 당대에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평가를 받았던 듯하다. 독립운동 동지들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선생을 합심하여 추대한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석주 선생의 선각자로서의 생애를 생각할 때, 이번에 창립된 기념사업회의 활동은 무엇보다도 선생의 그런 삶의 향기를 널리 전파하는 일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임청각을 하루속히 원상대로 복원해야 한다. 독립운동가의 집이라는 이유로 헐어버리고 그 앞으로 철길을 낸 일제의 만행을 떠올린다면, 이는 민족의 자존감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복원된 임청각을 선생의 선공후사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통해 늘 소아(小我)보다 대아(大我)를 앞세웠던 선생의 삶의 향기가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골몰하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정신문화의 불씨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 그녀들 내조·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녀들 내조·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에 맞선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성들은 많지 않다. 말없이 오직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쳤지만 역사적 평가는 미미하다. 드러내지 않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뒷바라지한 데다 공적으로 입증할 사료나 증언을 확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1만 2966명이다. 여성은 전체의 1.57%인 204명에 불과할 뿐이다. 유공을 인정받은 여성들의 활동 내역은 3·1운동이 64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국내 항일 운동 52명, 광복군 활동 24명,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15명, 임시정부 활동 13명, 국내 학생운동이 12명이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이 132명으로 전체의 64%이고, 해외 독립활동은 72명이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맏며느리 조계진 여사는 1919년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구한말 학부 대신을 지낸 조정구의 외동딸이자 영친왕의 외사촌인 조 여사가 보이지 않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점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이규학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종횡하는 동안 조 여사의 집에는 독립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저자에서 돈을 빌려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조 여사의 몫이었다. 먹거리를 마련하고 옷도 지었다. 신채호, 김창숙, 이을규 등 내로라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모두 한번쯤 조 여사에게 신세를 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 조 여사는 두 딸을 질병으로 잃기도 했다. 조 여사의 아들인 이종찬(전 국정원장)씨는 “상하이 시절 아버지가 마작을 배우자 어머니께서 백범 김구 선생께 일러 혼을 내고 다시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셨다.”면서 “독립에 대한 열의는 그 누구보다 높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 여사는 정부로부터 훈장은 물론 포장도 받지 못했다. 역사는 이회영 선생과 그의 아들들만 독립투사로 기억하고 있다. 광복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묻혔다.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헌신했지만 알려지지도 기억되지도 않은 것이다. 때문에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숭고한 일생을 치밀하게 복원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늦게 커지고 있다. 204명만 여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든든한 독립지원군 역할을 도맡았던 여성들의 활동이 제대로 평가될 리 없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이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의 삶도 마찬가지다. 1915년 서간도로 이사한 허 여사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어머니’가 된다. 겨울철 얼음을 깨 시린 손을 불어가며 군복을 빨았다. 아픈 학생들을 손수 간호했다. 수십리를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군자금을 날랐다. 국내에 남은 독립군의 아내들도 처지는 매한가지였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인 김희숙(85) 여사는 1943년 일본군 위안부인 이른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17세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다음해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영해 독립운동에 몸담자 24시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결혼 전 김 여사는 애국청년회에 가입, 독립운동의 연락책을 맡았던 전력이 있었다. 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와 상하이로 떠난 여성들은 독립군의 안살림을 맡아 생활을 돌봤다. 때로는 군자금 마련에도 나서는가 하면 일경의 눈을 피해 위험천만한 연락책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역사에 그들의 이름은 없다. 독립운동사의 한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 독립운동보다 해외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했다. 이에 따라 국내 독립운동가들보다 해외 독립운동가의 숫자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해외 독립운동의 경우, 발굴이 어려워 해외 활동으로 유공자가 된 여성 비율은 35%에 그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은 “3·1운동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하이로 떠났고,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면서 “현재 국가가 인정한 여성 독립유공자가 전체의 1.5%에 그치는 것은 그만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성의 발굴이 덜 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우당 기념사업회 관계자도 “당시 독립군 일가 모두가 중국이나 다른 곳으로 망명해 활동을 벌였다.”면서 “여성은 지아비를 따라 망명 가는 것이 당연했고 그곳에서 집안일을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을 뒷바라지했다. 지금도 군에서 지원병이 있지 않나. 이들이 한 역할이 바로 지원병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 역사학자도 “1920년대 이후 여성들의 활동이 좀 더 활발해진다.”면서 “하지만 당시 정서에도 여성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발기인으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기에 기록을 찾는 데 한계가 있다.”며 아쉬워했다. 보훈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이 덜 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공자 지정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보훈처 측은 “유공자 지정을 위해서는 1차 사료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원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문건이나 자료에 남아 있는 분들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한 1차 사료의 부족으로 공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구술이라도 이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면서 “독립기념관 등에서 이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부분이 고령인데다 구술사 정리사업 기간을 장기로 잡고 진행하고 있어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동현·김소라·김진아기자 moses@seoul.co.kr
  • ‘조선 로열패밀리’ 문헌 한데 모였네

    ‘조선 로열패밀리’ 문헌 한데 모였네

    “이거, 참 잘됐네.” 이항증(72) 선생은 꼼꼼했다. “이곳 전체가 오동나무입니다. 오동나무는 습할 때 물기를 머금고, 건조할 때 물기를 내뿜는 습성이 있습니다. 3층 전시장은 앞으로 더 많은 기증 기탁자료들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천장 높이를 7.5m로 설계했습니다.” 앞서 가던 송순옥 국학자료팀장이 수장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 선생은 그 말 하나하나 다 확인해 보려는 듯 수장고 내부를 일일이 손으로 만져 봤다. 5일 경기 분당시 하오개로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서 열린 장서각(藏書閣) 신축 개관식. 조선왕실의 모든 문헌이 집대성된 곳이다 보니 한중연은 또 한 가지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사대부 명문가의 문헌까지 모아 보자는 것. 왕실과 사대부를 합쳐 이른바 ‘조선의 로열 패밀리’를 집대성하겠다는 포부였다. 한중연은 이를 위해 227억원을 들여 장서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면서 고문헌을 기증한 43개 가문 가운데 8개 가문 대표들을 개관식에 초청했다. 이 선생은 이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선생의 증조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석주는 조선이 망하자 경북 안동에 있던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로 건너가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인물이다. 때문에 유학을 공부한 조선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 전형으로 꼽힌다. 이후 집안은 파란만장했다. 아들 이준형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내몰리다 결국 1942년 자살했고, 손자 이병화는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 정권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52년 숨졌다. 이로 인해 이 선생은 어린 시절 한동안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이 선생은 개인적 고난보다 증조부의 유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더 컸다고 한다. “고문서를 많이 갖고 있는 분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도난, 멸실 걱정이 제일 컸죠. 증조부가 남기신 소중한 자취를 내가 잘못 다루면 어쩌나 전전긍긍이었어요. 증조부가 가산을 정리해 고향을 떠난 뒤 안동 임청각에 제대로 된 주인이 살아본 적이 없어요. 눈에 띄는 대로 가져가면 그뿐이었죠. 그나마 다행인 건 1970년대 중반인가, 일부 유물을 정리해서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그게 언론에 보도되니 ‘이제 석주 집에는 더 볼 게 없다’며 도둑도 안 들어요. 그래서 한시름 놨죠. 하하하.” 그래도 결국 장서각 기탁을 결심했다. “솔직히 몇 년 동안 혼자 씨름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봤자 이걸 내가 지켜낼 방법이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기탁해버린 겁니다. 그 뒤 한중연에서 어떡하나 봤는데, 기록을 꼼꼼히 해제하더라고요. 동네 어르신이나 먼 친척분들이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던 것이 다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장서각이 재정비됨에 따라 한중연은 ‘21세기 장서각 연구사업’을 시작할 방침이다. 1년에 20억원씩, 5년간 100억원의 돈을 들여 보유하고 있는 왕실·사대부 문서를 전부 해제·정리하기로 한 것.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조사실장은 “새로 지은 장서각은 고문헌 보관에서부터 연구, 수리에 이르기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면서 “갈수록 고문헌 보존이 어려워지는 세상이니 장서각을 믿고 (고문헌을) 맡겨 달라.”고 당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5일 신축 개관한 장서각 수장고에서 송순옥 국학자료팀장이 ‘조선 왕실 족보’ 선원록(璿源錄) 편찬과정을 기록한 선원록의궤의 보관상태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내부가 모두 오동나무로 꾸며진 장서각 수장고 안에서 문헌 기탁자들이 문서 보관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용어클릭] ●장서각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뒤 황가의 문서를 한데 모으기 위해 1908년 설립했으나, 일제에 흡수되면서 유명무실해져 버린 기관이다. 요즘 떠들썩한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일부이고, 규장각은 이 장서각의 일부이다.
  • 애국지사 등 176명 3·1절 포상

     국가보훈처는 3·1절을 맞아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고(故) 강영소 선생을 비롯한 17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24일 밝혔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20명(독립장 2명, 애국장 55명, 애족장 63명), 건국포장 27명, 대통령표창 29명으로, 이중 여성은 1명이며 생존자는 없다. 2005년 발족한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이 수형인명부와 범죄인명부, 형사사건부, 판결문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 분석해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 미주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다수 발굴했다.  발굴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인 강영소 선생. 그는 1909년 1월 미주지역의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로 국민회를 결성하고, 1913년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을 조직했다. 1922년부터 1931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의연금을 제공했다. 역시 독립장을 받는 유상돈 선생은 1909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인 관리를 처단했다가 체포돼 투옥 중 탈옥, 러시아령으로 건너가 1910∼1920년대 중반까지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포상 대상자가 된 김안순 선생은 간호사로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돼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 선생은 그동안 관련 자료에서 ‘김안순’과 ‘김유운’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존재해 포상이 보류됐다가 두 차례에 걸친 현지조사와 경찰청에 지문 확인 의뢰를 통해 동일인임을 확인, 대통령표창을 받게 됐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이 밖에 1920년대 강원도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옥중 순국한 진홍거 선생과 중국 서간도에서 부민단·한족회 지방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1919년 안도현 내도산에서 독립군 병영지를 물색한 강호석 선생 등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특히 강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의 사위로 석주 선생 가문에서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10번째 인물로 기록돼 눈길을 끈다.  이들을 포함해 정부 수립 이후 포상받은 독립유공자는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09명, 애국장 3742명, 애족장 4627명, 건국포장 896명, 대통령표창 2246명 등 모두 1만 2443명에 이른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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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이사대우>△경영기획실 한준△고객만족부 이기석 ■신신제약 △대표이사 부회장 김한기△사장 이종규△부사장 손정대△전무 이영확△상무 이태완 김명일△이사대우 노화용 윤광철
  • 신채호 선생 국적 찾는다

    정부가 무(無)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 등록부’(옛 호적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 관계자는 15일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관계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는 ‘순국선열, 애국지사에 한하여 다른 법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등록을 창설할 수 있다.’는 조항(제6조 4항)이 신설됐다. 이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무국적 독립운동가 200여명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돼 대한민국 국적을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이들은 지난 1912년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개편하자 일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거부했고 광복 후 정부는 일제시대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 사실상 호적도 없는 무국적자가 됐다. 보훈처는 “일제 강점시 일본 호적 등재를 거부하거나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호적을 취득하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이 가족관계 등록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며 개정안이 마련된 배경을 설명했다. 보훈처는 이어 “가족관계 등록부는 생존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작성되므로 옛 호적법에 따라 호적이 없는 독립유공자는 이 등록부를 만들 수 없었다.”며 “현재까지 등록부가 존재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해 명예 선양과 그 후손들의 자긍심 고취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이 개정안은 관련 부처의 의견 수렴을 거쳐 이달 말 또는 다음달 중으로 예고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과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 등이 ‘일제시대에 무국적 상태에 있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사망한 사람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국적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해를 넘겨 자동 폐기됐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사설] 독립지사 국적회복 만시지탄이다

    국적도 없이 구천을 떠돌던 독립지사들의 국적이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비로소 회복될 것 같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마련 중이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200여명의 애국독립지사들이 꿈에서도 그리던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만시지탄이다.‘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은 3대가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우스갯말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환갑을 맞고서야 바로잡히게 될 셈인가. 순국선열들이 왜 무국적자가 됐는지 따져보면 그 말뜻을 알 수 있다. 일제가 호적제를 개편하자 지사들은 당연히 등재를 거부했다. 광복후 이승만정권은 일본호적이 있는 사람에게만 호적을 부여했다. 결과적으로 무국적 독립지사의 후손들을 재산상속은 물론 직업 선택, 교육 혜택도 못 받는 ‘법적 사생아’로 만든 것이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국적법 개정이 추진됐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법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우리 국민으로 여겨왔으며 사망자에게 소급해서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국적법 체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법조계의 주장을 뛰어넘지 못한 탓이다. 조선족, 고려족 등의 국적문제로 비화될 소지에 대한 정부의 우려도 있었다. 다 좋다. 하지만 왜곡된 역사진실을 바로 세우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첫 단추는 순국 독립애국지사에 대한 국적 회복이 되어야 한다.
  • 秋억속으로 ‘양반의 고장’ 안동

    秋억속으로 ‘양반의 고장’ 안동

    ‘양반의 고장’ 안동에서는 고즈넉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인 고택(古宅)과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270여점의 시대별 다양한 문화재들이 때묻지 않은 자연과 어우러져 멋진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양반 문화의 엄숙함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풍자와 해학, 민중의 애환을 담은 ‘하회탈 놀이’ 등 서민생활 속에 잠재돼 있던 갖가지 전통놀이도 맛볼 수 있다.10월9일까지 이곳에서는 신명나는 ‘2005년 안동 국제 페스티벌’이 열린다. 안동은 전통과 민속체험, 자연 등 삼박자를 갖춘 가을 여행지다. 지난 1999년 이곳을 방문했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일행은 ‘가장 한국적인 곳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경험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이 고택 체험장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안동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안동 내일부터 축제 한마당 안동은 태백산맥과 노령산맥이 시의 경계를 이루고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어 상쾌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맑은 계곡, 사시사철 색다른 표정을 전하는 울창한 자연림이 가을 나들이객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가을 경치를 만끽하고 싶다면 부용대를 권한다. 태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부용대에 올라서면 멋진 소나무 숲 사이로 하회마을의 가을 정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아름다운 낙동강과 마을을 감싼 화산의 풍광은 감탄을 자아낸다. ●고즈넉한 가을 느낌 이곳에서는 ‘화천’이라 불리는 낙동강이 마을 전체를 돌아 흐른다 하여 ‘하(河·물)회(回·돌다)’라 부른다. 마치 물에 떠 있는 연꽃과 같은 ‘연화부수형’지형이다. 높이 64m에 달하는 부용대는 연꽃을 의미하며, 마을 이름에서 유래됐다. 부용대는 화천서원에서 250m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길 자체가 무척 아름답다. 부용대에서 내려와 오른쪽 길로 조금 내려가면 서애 유성룡 선생이 낙향해 기거했던 옥연정사가 있다. 이곳은 서애가징비록(국보 132호)을 저술했던 곳이며,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의 촬영장소로도 이용됐다. 인근에 있는 병산서원(사적 제260호)도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서애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에서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자,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 꼽는 곳이다.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낙동강을 마주보며 서 있는 널찍한 누각 만루대가 버티고 서 있다.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휴식을 취하며 낙동강과 화산의 정취에 흠뻑 빠지곤 한다. 하회마을에서 동북쪽으로 35번 국도를 따라 30분쯤 달리면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사적 제170호)이 나온다. 다시 35번 국도를 타고 시내로 내려오면 가는 길에 월영교에서 안동댐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월영교는 길이 38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목책교다. 월영교에는 점핑날개 곡사분수대를 설치해 다리 양옆으로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다. 분수는 4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매일 낮 12시, 오후 1시,3시,5시,7시,9시에 20분간 물줄기를 뿜어낸다. ●하회탈 만들어 볼까 최근 문을 연 안동 공예문화전시관(www.acehall.co.kr·054-843-5531)에 가면 하회탈 만들기 등 각종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시내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가다보면 보이는 전시관으로 지난 8월 문을 열었다.1층에는 작품 전시관과 체험관이 있으며,2층에는 작가들의 공방과 작업실이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는 7000∼1만원 정도를 내면 도자기공예, 한지공예, 금속공예, 염색공예, 목공예, 칼라믹스 등 각종 체험에 참가할 수 있다.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찰흙으로 하회탈을 쓴 토기 인형을 만드는 것. 찰흙을 빚어 사람 모형을 만든 뒤 각종 하회탈 모형틀에 찰흙을 넣고 탈 모형을 찍어 낸 뒤 붙이면 멋진 토기 인형을 만들 수 있다. 작품은 택배비를 지불하면 집으로 보내 준다. 하회동탈박물관(www.tal.or.kr·054-853-2938)에서는 탈만들기와 탈 탁본체험 등을 할 수 있으며, 안동한지공장(andonghanji.com·054-858-7007)에서는 한지제작, 연만들기 체험 등을 즐길 수 있다. ■ 임청각 ●느낌있는 고택, 임청각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한 임청각(보물 제182호)에는 특별함이 배어 있다. 여느 고택(古宅)들과는 사뭇 다른 감동이 느껴진다. 특히 이곳에 얽힌 사연들을 알고 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강한 울림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 단아한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고택, 넓은 대청마루, 돌계단, 위폐 없는 사당뿐만 아니라 집앞으로 수시로 오가는 기차 소리에도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지촌종택(지례예술촌), 농암종택, 오천군자마을 등 수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안동지역의 다른 고택을 제쳐두고 임청각을 찾으면 한옥뿐 아니라 역사까지 알게 된다. 임청각은 조선 중종 14년(1519년)에 형조좌랑이던 고성 이씨 이명이 지은 집으로 고성 이씨의 종택이지만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로 더 유명하다. 석주 선생과 그의 아들, 손자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충의의 종가’로 친족 9명이 서훈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수많은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석주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66)씨는 “낙동강변 영남산 자락에 지어진 99칸짜리 집은 일제가 집의 맥을 끊으려 집을 관통하는 철로를 놓아 집이 잘려나갔고, 현재는 70여칸만 남아 있다.”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당시 일제가 아예 집을 없애려 했으나 동네 주민들의 반발로 철로를 놓는 선에서 그쳤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도 대문 밖을 나서면 바로 철로가 있어 수시로 기차가 다닌다. ●체험장으로 문 활짝 고성 이씨 종택이지만 조상들의 위폐가 하나도 없다.1911년 석주 선생이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기 전에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며 위폐를 모두 땅에 묻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 종가는 석주 선생이 독립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세번이나 판 사연도 있다. 석주 선생이 집을 팔면 이씨 문중에서 구입하고, 다시 팔고, 구입하고를 세번이나 거듭했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온 이상진(40·경기 수원시)씨는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 법통을 따지면 사실상 이 집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의 생가나 다름없는 곳으로 전통 가옥 체험 이상의 느낌을 받았다.”면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웠다.”고 말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곳은 일본인 숙박객들이 많이 찾는다. 일부는 방명록에 ‘조상이 저지른 만행에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떠난다.’는 내용을 남겨 놓기도 했다. 수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고택에서는 단아한 선비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목조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남 선비들의 체취가 가슴을 파고든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퇴계 이황선생이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광복회 안동지회’라 쓰인 대문을 열고 돌계단을 오르면 영남산의 산세 모양에 따라 지어진 군자정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안동선비들이 대청마루에서 문학과 강학을 했던 공간이다. 군자정 내부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인 ‘임청각’이라는 편액과 이상룡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상룡 선생의 태어난 방 앞마당에는 종가의 생명수인 석산수가 아나는 우물이 있다. 산의 지기가 모인 우물을 마시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퇴실에는 지난 3월 이곳에서 머문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글씨도 볼 수 있다. 수십년간 폐가로 방치돼 있다가 이항증씨가 인근에 건립 중인 독립운동기념관과 연계해 고택 체험장으로 일반에게 문을 열었다. 석주 선생의 후손인 이상동(45)씨가 관리를 맡고 있는데 10개의 방에서 숙박할 수 있다.3∼4인용 작은 방은 5만원, 중간방은 7만원,8∼10인용 방은 12만원이며,20명 이상 묵을 수 있는 군자정은 20만원이다. 전통가옥이어서 화장실이 방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안동역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안동댐 쪽으로 1㎞ 정도 달리다 법흥 육거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나온다.(054-853-3455) ●가는길 안동 시내와 하회마을은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빠져나오면 이정표가 보인다.IC를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하회마을, 부용대, 병산서원이 나타나며, 우회전하면 시내와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3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버스는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열차는 청량리역에서 하루 8차례, 서울역에서 하루 1차례 떠난다. 시간은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안동역(054-856-7788)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안동관광정보센터(tour.andong.go.kr·054-856-3013)인 안동시 관광안내소(054-851-6397)로 문의하면 된다. ■ 안동 맛자랑 음식에도 양반문화의 전통이 배어 있다. 헛제삿밥과 안동식혜, 안동닭찜, 간고등어, 한동한우 등이 유명하다. 헛제삿밥은 도산서원 등 유명 서원의 많은 유생들이 쌀이 귀하던 시절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축과 제문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허투루 제사를 지낸 뒤 제사 음식을 먹는 데서 유래했다. 후식으로 안동 식혜를 즐겼는데 일반 식혜와 달리 식혜에 생강과 고춧가루를 넣어 발효시킨 특유의 먹을거리다. 안동댐 월영교 앞 ‘맛 50년 헛제사밥’(054-821-2944)에서는 6000원,1만원 두 종류를 판매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원조 안동찜닭을 맛볼 수 있다. 안동 구시장 내에 찜닭집이 즐비하다.1마리에 1만 8000원인데 4명이 먹기에 충분하다. 안동역 건너편 한우골목에서는 값싸고 질좋은 한우고기를 맛볼 수 있다. 안동의 한우는 소백산 자락에서 자라 육질이 부드럽다.250g에 1만 4000원. ■ 국제 탈춤축제 국내외 전통탈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2005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www.maskdance.com)이 오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 10일간 안동 탈춤공원과 하회마을에서 펼쳐진다. ‘할미의 억척’을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페스티벌에는 국내외 전통탈춤 및 안동문화재 현장 축제, 민속놀이마당 등 270여개 행사가 준비돼 있다. 올해 행사에는 러시아와 스리랑카, 타이, 타이완, 일본 등 15개국의 대표적인 공연단체가 참가해 수준높은 공연을 선보인다. 국내에서는 하회별신굿 탈놀이, 봉산탈춤, 양주별산대놀이 등 각 부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0개 탈춤 공연단이 참가한다. 특히 하회마을과 만송정 솔숲, 부용대의 절경과 어우러져 펼쳐지는 한국전통불꽃놀이인 ‘선유줄불놀이’와 하회마을 만송정 무대에서 열리는 국내외 탈춤공연이 이번 행사의 백미로 꼽힌다. 관광객들이 자신이 만든 탈과 가면 등을 직접 쓰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마스크 댄스 경연대회’(총상금 2000만원)와 함께 놋다리 밟기 등 30여종의 민속행사를 체험할 수 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추진위원회 (054)840-6398.
  • 임청각 고문서 5천여점 정문연 기증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國務領·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의 고문서 5000여 점이 정신문화연구원에 기증된다. 정신문화연구원은 고성 이씨 가문이 임청각의 고문서 4419점과 고서 502점, 유물 35점 등 총 4966점을 정문연에 기탁한다고 21일 밝혔다. 기탁식은 23일 오전 11시 정문연에서 열린다. 기증되는 자료는 분량이 방대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생활사 및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조선 초기의 고문서로 서울시유형문화재 97호로 지정된 ‘오공신회맹축(五功臣會盟軸)’, 임진왜란 이전 고성 이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안동부입안(安東府立案)’, 현존하는 효경 중 최고 판본인 ‘효경’(孝經) 등이 포함돼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김락여사 死後 72년만에 훈장

    일제때 시아버지와 남편·아들 3대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하고 자신도 3.1운동을 지원하다가 일경의 고문끝에 두눈까지 실명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맏며느리가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게 됐다. 주인공은 퇴계의 13대 손으로 구한말 의병장인 향산(響山) 이만수(李晩壽·제59호 건국공로훈장독립장)선생의 맏며느리이자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처제인 김락(金洛)여사(1863∼1929). 김여사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광복 제56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일제경찰 극비본 고등경찰요사 폭도사편집자료’ 제1장총설 제2쪽에는 ‘김락여사는 안동 양반가 이중업의 아내로 대정 8년(1919년) 3·1만세운동 소요 당시 일본 경찰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던 중 두눈을 실명,11년간 고초를 겪다가 소화 4년(1929년) 2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씨의 시아버지인 향산선생은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단식투쟁에 들어가 24일만에 6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남편 이중업선생은 안동 3.1운동과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했다.아들 동흠·종흠 형제도 군자금 모금에 연루돼 두번씩 투옥되는 등 김씨는 시아버지와남편·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독립운동내조에 평생을 바쳤다. 안동 한찬규기자 cghan@
  • 中 동북3성 항일유적지 답사기 낸 박도씨

    이대부속고등학교 국어교사이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소설가 박도(朴鍍·55)씨가 최근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우리문화사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은 박씨가 지난해 8월 초순 10여일동안 중국 동북3성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후 여행기 형식으로 펴낸 것.답사에 쏟은 열정과 애국선열에 대한 박씨의 추모의 정이 책 곳곳에 흠씬 담겨 있다. 박씨는 답사에 앞서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찾아 “선열들의 발자취를 백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보고 바로 쓸 수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고 한다. 박씨의 답사길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증손 이항증(李恒曾)씨와 일송 김동삼(金東三)선생의 손자 김중생(金中生)씨가 동행했다.박씨는 “중국에서 활동한 애국선열 가운데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거나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분이 많아 가슴아팠다”며 “반면 친일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 역사가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이 책은 박씨가 쉬운 작가적인 필치로 쓴 것으로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독립운동 관련 서적이 드문 현실에서 중국 일대의 항일투쟁사를 쉽고도 재미있게 접근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썼다. 책속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100여 장의 현장사진과 현지에서 만난관계자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어 자료가치도 우수하다. 박씨는 내년쯤 책 한 권을 더 낼 계획이다.새 책에서는 자신과 같은경북 구미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한 허형식(許亨植,일명 許克)과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근무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제 하의 대비된 삶을 다룰 예정이다. 금년 여름 박씨는 두 사람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답사를 마쳤다. 정운현기자 jwh59@
  • 臨政 80돌…독립정신 되새겨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돌을 맞아 13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한 기념식은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등 3부 요인,임정관련 독립유공자 유족,광복회원,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경빈(尹慶彬)광복회장의 임정수립 경과보고,독립정신 선양공로자 포상,김총리 기념사,기념축시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광복회는 이어 오전 11시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김총리와 천용택(千容宅)국방장관,최규학(崔圭鶴)국가보훈처장,독립유공자 유족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정 수립 80주년 자료전시회’ 개관식을 갖고 한달간의 전시에 들어갔다. 전시품 가운데는 임정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이 가족의 안부를 묻는 내용의 친필편지와 러시아 동포들에게 무기구입을 요청하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의 서한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용산구 효창원에서는 오후 2시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선생등임정요인 7명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효창원 7위 선열 추모제전’이 열렸다. 이밖에 오후 1시30분 효창공원 등 전국 10개 지역에서 초·중·고교생 5,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임정수립 80주년 기념 청소년 백일장’이 개최됐다.
  • 추모제·전시회등 행사다양

    국가보훈처는 13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등 3부 요인,임정관련 독립유공자 및 유족,광복회원,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이날 임정 청사가 있던 중국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에서도 현지 거주독립유공자 후손 등의 주관으로 기념식 및 기념논문 발간 행사 등이 열린다. 오후 2시 효창원 의열사(義烈祠)에서는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 차이석(車利錫)선생과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의사 등 7위 선열의 위업을 기리는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광복회(회장 尹慶彬)는 특히 이날부터 다음달 12일까지 한달간 전쟁기념관에서 임정요인들의 활동사진 및 사료 등 임정 27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있는 각종 자료를 전시한다. 전시회에서는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서찰 진본과 무기구입을 요구하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의 친필 서신이 처음으로 공개되고 덕수궁 앞 3·1운동 시위군중 사진 및 임정청사사진 등 총 280여점의 사료가 전시된다. 광복회는 또 효창공원 등 전국 10개 지역에서 초·중·고교생 5,000명을 대상으로 임정 수립 80주년 기념 청소년 백일장을 개최한다.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및 독립유공자 후손 등 20명은 오는 27일부터 7박8일간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杭州),충칭,시안(西安),베이징(北京) 등을 돌며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선열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한다. 국가보훈처는 이밖에 임정 법령집 3,000부를 발간,전국 국공립도서관과 독립운동단체,연구기관 등에 배포하고 기념전화카드와 우편엽서를 각각 50만장과 20만장 제작해 발매한다. 광복회원과 동반가족 한명은 13일 하룻동안 전철 지하철 시내버스를 무료로 승차할 수 있으며 13∼14일 이틀간 고궁 능원 독립기념관 박물관 등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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