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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어가기˙˙˙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자동차 사장으로 출연했던 박신양 제작 협찬사였던 GM대우가 출시하는 ‘L6매그너스’의 실제 모델로 출연해 20일부터 팬들과 만난다.모델료는 3개월 단발계약에 무려 2억 5000만원.광고는 ‘로맨티스트 박신양’의 이미지를 한껏 살렸다.석양이 지는 황혼,차의 매력에 빠져 드라이빙의 재미를 만끽하는 박신양이 걱정할 아내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내용이다.
  • [세상속으로] 태풍감시 남단기지 ‘제주 고산기상대’

    [세상속으로] 태풍감시 남단기지 ‘제주 고산기상대’

    “태풍비상 1급 근무령이 떨어졌습니다.피크는 자정부터 새벽 3시 사이니 밤새 긴장을 풀지 마세요.” 태풍의 길목인 제주도의 서쪽 끝자락,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바닷가의 해발 76m 수월봉 정상에 자리한 고산기상대(대장 황창연) 기상관측실은 18일 오후 ‘전직원 비상 근무령’속에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제15호 태풍 ‘메기’의 통과를 앞두고 예상진로 등 15개 기상모니터를 주시하는 예보사들의 눈초리는 적 진지를 살피는 초병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13명 전직원 비상 근무령 당초 소형 태풍이었던 ‘메기’는 한반도로 접근하면서 강력한 대형태풍으로 세력을 키운 상황.시간이 갈수록 제주지방기상청과 중앙기상청으로 보내는 관측자료 타전속도도 빨라진다.관측실 왼쪽 벽에 걸린 기상실황판도 ‘메기’가 늪물에서 헤엄치듯 스물스물 다가오는 상황을 60초 간격으로 보여준다.이름 그대로 바다 위에 떠오르는 달빛이 환상적인 수월봉(水月峰)은 제주에서도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그러나 13명의 직원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람이 세다는 고산기상대는 ‘험한’ 근무지다. 고산기상대가 태풍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서·남방향에서 접근하는 모든 기상현상을 최초로 관측하는 지점이기 때문.게다가 고산기상대에는 제주 유일의 기상레이더가 있다.직경 3.6m짜리 기상레이더는 반경 240㎞ 범위의 기상현상을 커버한다.백령도 등 전국 10곳에 있는 기상레이더는 전자파를 발사해 빗방울이나 비구름에 부딪쳐 돌아오는 반사파를 탐지 분석한다.호우·우박·낙뢰 등 돌발적 기상현상과 태풍 및 기압골 접근을 추적하여 기상예보에 이용한다.‘라디오존데’를 띄워올리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고층기상을 자동측정하는 라디오존데는 지름 1.5m의 대형 수소풍선에 매달아 하루 두차례 띄워 올린다.태풍이 오면 하루 네차례로 늘어나는 데다,비바람을 뚫고 띄워올려야 하는 만큼 젊은 직원들이 총동원되어야 한다.라디오존데가 송신하는 지상 30㎞ 지점의 기압·기온·풍향·풍속은 일기예보뿐만 아니라 항공기 운항자료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순간풍속 60m… 한국서 가장 바람 센곳 고산기상대는 1987년 12월 제주고층레이더측후소로 문을 연 뒤 1992년 3월 제주고층레이더기상대로 이름이 바뀌었다.2002년 6월부터 황사관측과 파고관측 업무를 시작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여름휴가요?여름이 일년중 가장 바쁜 때인 걸요.” 김강훈(47) 예보관은 농담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난해 태풍 ‘매미’ 때 허리에 로프를 매고 풍향계까지 기어가 ‘순간풍속 60m’기록을 확인한 장본인이다. 황창연 대장은 태풍을 목전에 둔 긴장 속에서도 2005년을 기대했다.“내년 하반기에는 기상레이더를 8.5m짜리 최첨단 S-Band레이더로 교체합니다.국민들에게 더욱 정확한 기상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지요.”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우리 동네 이야기] 노량진동

    [우리 동네 이야기] 노량진동

    ‘천리나 되는 모래밭에 부슬비 새로 개이니/석양녘에 이별하는 마음이 외로운 배에 가득 차누나/오늘 밤이 지나면 그대는 강을 지나는데/길손의 가을 회포를 어디 가서 시로 쓰려나’(17세기 조선 인조 때 이명한의 시 -노량진에서 친구를 떠나보내며-) 말만 들어도 풍류가 연상되는 노량진은 서울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동작구 노량진동 주민들의 지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은 ‘최고’라 할 수 있다.노량진은 조선시대에 백로가 떼지어 노닐던 나루터로,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어서 군대가 주둔하는 진(津)이 설치됐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진은 한강 상류의 한강진,하류 양화진과 함께 3곳 있었다.옛날부터 노량진에는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고 불렸으며 도선장(渡船場)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노량진 하면 거대한 63빌딩 옆에 있는 수산시장을 떠올리게 된다.노량진1동에 위치했다.대지 6만 6635㎡(2만 200평),연건평 6만 8357㎡(2만 720평)규모로 웬만한 동 하나의 크기다.1971년 4월 설립된 전문 도매시장으로 현재 연간 거래 규모가 약 11만t이나 된다.금액으로는 3150여억원이다.서울시내 전체 수산물의 53.7%가 이곳에서 거래된다. 노량진1동 사육신묘를 가다 보면 ‘아차고개’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언덕길이 나온다.세조가 사육신을 처형할 때 생긴 것이다.한 선비가 처형의 부당함을 알리려 도성으로 말을 몰고 갔는데 이곳에서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됐다는 말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도2동 쪽 노량진파출소와 한빛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장승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노량진2동에 속한다. 여기에 옛날 장승들이 세워진 사연은 알고 보면 눈물겹다.뒤주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효자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얽혔다. 1777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당시 화산(현재 경기도 수원)에 있는 선친의 무덤 ‘현륭원’을 자주 찾아갔다.그런데 수풀이 워낙 우거져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정도였다고 한다.정조는 먼 길을 가다가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하기에 자신과 백성들을 지켜줄 장승 2개를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다.하나는 장수 모양의 천하대장군,또 하나는 여상(女相)을 한 지하여장군이었다. 철도 노량진역 역시 노량진동이 뽐내는 역사현장이다.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1897년 3월 경인선 철도가 바로 이곳에서 착공됐다.1899년 9월 개통한 경인선 역사 가운데 하나인 노량진역에는 지금도 ‘철도 시발지’라는 비석이 있다.현재 노량진은 1·2동을 합쳐 1.5㎢이며,거주자는 3만 5028명(1만 6916가구)이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시네마 천국]토요일엔 ‘북한강 음악축제’

    [시네마 천국]토요일엔 ‘북한강 음악축제’

    강물을 발갛게 물들이는 석양과 푸른 잔디의 싱그러움이 있는 북한강변에서 온가족이 모여앉아 음악을 감상한다면 더없이 좋은 피서로 기억되지 않을까. 양평군 서종면의 서종 잔디공원에서 열리는 ‘8월의 북한강 주말음악축제’는 부담없이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이자 축제다. 14일은 국립국악원 단원들로 구성된 다움 우리소리 앙상블과 사물놀이패인 서종어울림이 출연해 국악의 향연을 펼친다.21일은 체코를 대표하는 금관 5중주단인 프라하 브라스 앙상블이 카르멘 조곡 등 화려한 음색을 초록 잔디 위에 수놓는다. 이번 공연은 ‘문화모임 서종 사람들’이 4년동안 꾸려온 음악회 가운데 하나.작은 음악회로 시작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수도권 관객들의 주말나들이 명소가 됐다.특히 21일은 50회를 맞는 공연.이를 기념해 관객 50명을 추첨,서종면 거주 작가인 김용만의 소설과 황명걸의 시집,민정기 김인순 등 화가들이 그린 부채 등을 선물한다.학생 500원,어른 1000원.(031)773-8165.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훌쩍 떠나볼까] 말레이시아 페낭 & 콸라룸푸르

    [훌쩍 떠나볼까] 말레이시아 페낭 & 콸라룸푸르

    페낭과 콸라룸푸르.말레이시아 하면 떠오르는,매우 귀에 익숙한 곳이다.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를 찾는 사람들 대다수가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하지만 페낭은 랑카위를 위한,콸라룸푸르는 말레이시아의 타지역 여행을 위한 경유지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억울하다.잠깐 스쳐가기엔.말레이시아로 가자.그리고 페낭과 콸라룸푸르에서 머물러보자. 시계바늘을 천천히 돌리는 듯한 느림 혹은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것이 웰빙시대의 여행법이다.그래서 요즘은 이곳저곳 바쁜 일정의 여행 대신 리조트에 머무는 휴가를 선호한다. 하지만 리조트에만 머물다보면 자칫 집 떠나와 잠만 자다 올 수 있다.페낭은 다르다.해변에 즐비한 리조트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저 ‘푹 쉬기만 하는 것’ 이상의,밋밋함을 벗어던진 웰빙여행을 즐길 수 있다. ●오전에 즐기는 지역 문화유물 탐방 혹은 페낭힐 등산 시원하고 조용한 오전 시간에는 시내를 한번 둘러보자.페낭 섬을 처음으로 발견한 프랜시스 라이트가 세운 ‘콘웰리스 요새’의 성벽에 올라서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쿠콩시’는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구(邱)씨 일가의 사당으로 규모는 작지만 화려하다.볼 만한 사원으로는 ‘케록시’가 있다.7층 규모에 1만개의 부처가 있는 만불탑이 이곳의 하이라이트.1890년에 짓기 시작해 2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등산을 좋아한다면 페낭의 명소로 꼽히는 페낭힐에 오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해발 830m의 정상까지 스위스 산악열차를 연상시키는 케이블카가 운행된다.원래 야경이 좋아 저녁 코스로 인기있지만 현재는 케이블 교체 작업으로 이용할 수 없다. ●점심 먹고 열대과일 농장 혹은 향신료 정원 방문 페낭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나비농장 외에도 볼거리가 많다.대표적인 곳이 열대과일 농장.각종 열대과일 나무를 실제로 보고 맛을 볼 수 있다.하지만 농장을 둘러보는 동안은 우리나라의 체험농장과 달리 한 두개 맛보는 정도.대신 투어가 끝나면 냄새는 심하지만 단백질로만 이뤄져 ‘과일의 왕’으로 불리는 ‘두리안’ 등 여러 열대과일을 맛볼 수 있다. 최근 페낭에 새롭게 문을 연 ‘향신료 정원(spice garden)’도 가볼 만하다.선보인지 8개월 남짓 돼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곳에서는 각종 향신료와 열대 식물들을 직접 볼 수 있다.내부에 만들어진 대형 그네에 앉아 즐기는 오후의 여유는 보너스. ●석양 바라보며 즐기는 해상스포츠 해양스포츠를 즐기고 싶다면 뜨거운 낮보다는 석양 무렵이 낫다.이곳 해변에서 많이 즐기는 스포츠 중 하나가 바로 패러세일링.모터보트에 달린 낙하산을 타고 내려다 보는 페낭섬과 석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치.귓가에 스치는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에 잠겨 있노라면 스트레스는 까맣게 잊게 된다. 본토와 페낭을 연결해 주는 ‘페낭대교’를 건너는 드라이브도 권할 만하다.페낭대교는 13.5㎞ 규모로 세계에서 세번째 긴 다리.1988년 개통.우리나라 현대건설이 만들었다. ■ 이것도 맛보세요 여행의 묘미,낯선 곳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에는 식도락 만한 것이 없다.페낭에 밤이 찾아오면 나가자.이때 만큼은 다이어트 걱정은 살짝 접어두고 현지 음식 탐험에 나서보자.페낭의 북쪽 해안에 자리잡은 ‘거니 드라이브’에 가면 다양한 먹을거리를 접할 수 있다.밤마다 수많은 음식노점상들이 이 거리로 나와 불야성을 이룬다. 현지 사람들이 추천하는 페낭의 대표적인 맛은 ‘락사(laksa)’라고 불리는 국수요리.지역에 따라 국물을 내는 재료가 다양한데 페낭에서는 정어리를 이용한다.장시간 푹끓여 비린 맛이 없고 매운 양념을 넣어 얼큰하다. 국수만으로 성이 안찬다면 ‘로작(rojak)’이라고 불리는 샐러드를 곁들여 먹자.각종 열대과일을 한입 크기로 자른 다음 자두와 칠리소스로 만든 드레싱을 뿌리고 땅콩 가루로 마무리.달작지근한 맛과 매운 맛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밖에 팥빙수와 비슷한 ‘아이스까장’,각종 튀김 요리,사탕수수 주스,각종 열대과일 등을 맛볼 수 있다. 수도이기 때문일까.콸라룸푸르 하면 거대한,그리고 복잡한 도시 이미지가 떠오른다.하지만 서울 면적의 40% 정도의 이 도시는 찾는 이들을 기죽이지 않는,여유와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곳이다.말레이시아의 중심이면서도 결코 오만하지 않은 곳,콸라룸푸르로 가자. ●하늘 빼앗지 않는 도시 콸라룸푸르에는 높이 452m에 이르는 쌍둥이 빌딩 ‘페트로나스 트윈타워’가 있다.영화 ‘엔트랩먼트’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보는 것만으로 시선을 압도한다.여기에 서울 남산타워를 닮은 ‘메나라 KL타워’ 역시 눈에 띄는 콸라룸푸르의 명소. 이처럼 콸라룸푸르에는 높이를 한껏 자랑하는 건축물들이 많다.하지만 그 어떤 건물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하늘 바라보는 여유를 빼앗지는 않는다.메르데카광장의 술탄압둘사마드 빌딩처럼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과 개성을 잃지 않은 현대식 건물들이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밤에 피는 장미,부킷 빈탕과 차이나타운 하늘과 건물들을 바라보며 여유를 만끽했다면 그 다음엔 부킷 빈탕으로 발길을 돌리자.콸라룸푸르 최고의 번화가로 쇼핑과 외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특히 밤에는 화려하게 변신해 회교도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이면을 볼 수 있다. 어느 도시나 차이나타운은 볼 것 많고 저렴한 물건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콸라룸푸르 역시 예외는 아니다.저녁 6시 이후 열리는 야시장은 각종 노점상들로 번잡하다.물건값을 흥정하는 즐거움에 맛있는 길거리 음식을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커피빈 근처의 3대째 내려오는 ‘룡안(과일의 일종) 주스’집은 들러서 맛볼 만하다. ■ 이곳도 가보세요 콸라룸푸르에서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나오면 또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들을 만날 수 있다. ‘진짜’ 더위를 피하고 싶다면 ‘겐팅 하이랜드’에 가보자.이곳은 해발 2000m에 이르는 울루칼리산 정상에 조성된 오락지대.높기 때문에 서늘하다 못해 밤에는 춥다.콸라룸푸르 사람들이 여름에는 가죽잠바,겨울에는 밍크코트를 입고 찾을 정도.놀이기구와 수영장을 갖춘 테마파크와 카지노,골프코스,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말레이시아의 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 역시 가볼 만하다.계획도시인 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것은 기본.어느 건물 하나,다리 하나 같은 디자인이 없을 만큼 곳곳에 신경쓴 흔적이 엿보인다.인공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먹는 저녁은 분위기 만점. ●항공편 그동안 페낭을 가려면 콸라룸푸르를 경유해야 했지만 지난달 28일부터 대한항공이 페낭 직항편을 마련했다.주3회(수·금·일) 운항하며 소요시간은 6시간.콸라룸푸르는 말레이시아항공 직항편이 매일 인천에서 출발한다.약 6시간30분이 걸린다.페낭에서 콸라룸푸르는 비행기로 약 50분 거리. ●숙박 바투 페링기 해변을 따라 고급 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다.이 가운데 샹그리라가 운영하는 라사 사양과 골든샌즈rk 권할 만하다.특히 라사 사양은 1973년 문을 연 이후 최고의 서비스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지난해 리노베이션을 마쳐 시설면에서도 훌륭하다.콸라품푸르의 경우최근 문을 연 베르자야 타임스퀘어 호텔이 괜찮다. ●기타 말레이시아의 화폐는 링기트며 RM으로 표기한다.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환전이 되지 않으므로 미 달러를 현지에 가서 바꿔야 한다.유명 관광지의 경우 호텔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도 환전소가 있지만 공항의 환율이 가장 좋다.신용카드의 경우 복제 사기에 주의해야 한다.반드시 본인이 보는 앞에서 계산하는 곳에서만 사용한다. 다른 동남아국가와 마찬가지로 덥고 때때로 소나기가 내린다.하지만 올해 우리나라보다는 오히려 시원한 편.따라서 긴 옷을 챙기는 것이 필요하다.특히 남자의 경우 반바지를 입고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많으므로 긴바지를 꼭 준비한다. 글 사진 페낭·콸라룸푸르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나의 디지털스토리] 업그레이드 테크닉

    한 단계 더 나아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알아보자. 보통 낮에는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데 경우에 따라 터뜨리면 더 좋다.얼굴에 그림자가 많이 생기는 경우,역광으로 얼굴이 검게 나오는 경우,그늘에 있는 인물을 밝은 배경에 찍는 경우에는 플래시 모드를 조정해 강제로 터뜨리는 편이 좋다.단 플래시를 터뜨릴 때는 피사체가 5m이내에 있어야 한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줌에서 망원쪽으로 찍는 편이 좋다.화면에서 피사체의 크기를 동일한 비율로 찍더라도 멀리서 망원쪽으로 찍는 편이 배경이 흐릿하게 나와 분위기 있는 사진이 된다.반대로 대웅전이나 아름다운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광각(넓게 찍히는)쪽을 사용하자.건물이 전체가 나오게 하고 인물을 카메라 앞쪽으로 이동시켜 화면의 비율을 정하면 된다. 야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인물을 찍을때는 플래시모드를 ‘별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사용하면 멋진 사진을 얻는다.또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할 때도 마찬가지다.이때는 사진이 흔들릴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러야 한다. 인물사진을 찍을 때 연속촬영 모드로 놓고 여러 장을 찍으면 좋다. 그래야 좋은 표정을 건질 수 있다.‘웃어 김∼치’라고 말을 해도 표정은 어색하다.연속적으로 여러 장을 여러 번 찍어야 좋은 표정이 나온다.˝
  • [나의 디지털스토리] 업그레이드 테크닉

    한 단계 더 나아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알아보자. 보통 낮에는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데 경우에 따라 터뜨리면 더 좋다.얼굴에 그림자가 많이 생기는 경우,역광으로 얼굴이 검게 나오는 경우,그늘에 있는 인물을 밝은 배경에 찍는 경우에는 플래시 모드를 조정해 강제로 터뜨리는 편이 좋다.단 플래시를 터뜨릴 때는 피사체가 5m이내에 있어야 한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줌에서 망원쪽으로 찍는 편이 좋다.화면에서 피사체의 크기를 동일한 비율로 찍더라도 멀리서 망원쪽으로 찍는 편이 배경이 흐릿하게 나와 분위기 있는 사진이 된다.반대로 대웅전이나 아름다운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광각(넓게 찍히는)쪽을 사용하자.건물이 전체가 나오게 하고 인물을 카메라 앞쪽으로 이동시켜 화면의 비율을 정하면 된다. 야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인물을 찍을때는 플래시모드를 ‘별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사용하면 멋진 사진을 얻는다.또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할 때도 마찬가지다.이때는 사진이 흔들릴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러야 한다. 인물사진을 찍을 때 연속촬영 모드로 놓고 여러 장을 찍으면 좋다. 그래야 좋은 표정을 건질 수 있다.‘웃어 김∼치’라고 말을 해도 표정은 어색하다.연속적으로 여러 장을 여러 번 찍어야 좋은 표정이 나온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칠산바다 지키는 수성당할머니

    ●깎아지른 절벽위 여신모신 성소가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새삼 에게해와 그리스신화가 관심을 끈다.아테네 도심의 파르테논 신전 못지않게,아티카반도 끝자락 수니온곶(串)의 포세이돈 신전도 낙조 풍경과 어울려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포세이돈 신전.에게해의 찬란한 석양이 비끼는 천애 절벽에 각인된 역사와 신화의 지문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신화시대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바다의 신 포세이돈.그의 뜻에 따라 질풍과 노도가 일어나니,바다의 모든 것이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포세이돈의 황금전차가 말발굽 요란하게 바다 위를 가로지를라치면 거센 폭풍은 간데없고 잔잔한 고요가 그를 옹위했다.원형은 파괴됐으나 15개의 도리아식 원주는 고스란히 남아 에게해의 험한 바닷길을 아우르고 있다.지금도 이 신전 앞을 지나는 그리스 어부들은 고개 숙여 예를 표한다.첨단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뱃길에 나선 사람은 누구나 포세이돈의 신화적 영력에 깊은 외경과 간절한 기원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도국가 그리스의 끝자락에 바다의 신전이 있다면,같은 반도국가인 우리의 사정은 어떠할까? 우리라고 왜 바다신을 모신 신전이 없을까만,남의 떡만 크게 보이고,내 것은 초라하게만 여기는 문화사대주의의 병폐가 여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나이아가라폭포의 웅장함에 취해 박연폭포 정도는 ‘애들 장난’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필자가 줄 수 있는 최선의 해답은 ‘우리 것부터 좀 챙겨 보라.’는 충고이다.포세이돈이 중요하다면,중국의 여자 해신 마조(祖)도 알 필요가 있으며,더불어 ‘문화 종다원성’을 위해서라도 한반도 바로 이 땅의 수성당할머니를 생각해야 한다. ●서해바다 거닐며 거친 물길 다스려 해신은 세계 어느 바다에나 있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변산반도의 끝자락 격포 수성당은 우리 해신의 위엄과 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신성(神聖)의 성소(聖所) 격이다.우선,위치가 눈길을 끈다.잘록한 자루처럼 돌출한 곶의 깎아지른 절벽을 ‘성소’로 선택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수성당 길목은 해안초소를 설치해 민간인 출입을 막는 군 작전구역이었다.그 후 전주박물관에서 이곳 일대를 발굴한 결과,고대의 제사터임이 확인되었다.민간의 구술(口述)전승이 이루어진 이곳에서 확인 발굴이 이루어졌음은 우리 문화에서 구술이 지닌 실증적 힘을 웅변한다.트로이문명이 애초에 구술과 신화에서 출발했다가,훗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된 것과 다를 게 없다. 수성당은 시누대가 창검처럼 밀집해 빼곡하게 들어찬 단애(斷崖)에 숨어 있다.바닷물이 밀물처럼 다가와 이 안에 들면 절벽에 서있다는 느낌을 잊게 된다.그러나 자칫 한발 잘못 내디디면 벼랑으로 곤두박질이다.오금이 저리도록 가파른 곶.벼랑 아래로는 여근처럼 갈라진 해식동굴이 있어 조수가 드나들며 보는 이의 현기증을 자아낸다.일명 용굴 혹은 여우골이라 불리는 이곳이 수성당할머니의 거처이다.서해 어업의 중심기지였던 위도가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관망대에 해당하는 곳으로,임진왜란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할머니가 무찔렀다는 전설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 ‘개양할미’라고도 불리는 수성당할머니는 딸만 여덟을 낳아 각도에 한명씩 시집보냈다고 전해진다.더러는 그녀가 딸 일곱을 낳았으며,그들이 수성당에서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일곱 섬 지킴이가 되었다고도 한다.수성당 할머니는 엄청나게 큰 키로 굽나무신을 신고 저벅저벅 서해바다를 걸어다녔다.위험한 곳에는 표지를 남겨 어부들이 해를 입지 않게 돌보았으며,심지어 수심까지 재어 어부들이 알도록 했다.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보여준 ‘서해 창건주’의 전설이므로 이 말이 맞느냐,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변산 격포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초에 정성껏 제물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다.세상이 바뀌어 서해 여신으로서의 지위는 볼품없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때의 마을굿 양식이 여전히 잔존해 있으며,무신도도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불타고 없다.‘1804년 상량(上樑)’이라고 적힌 상량문으로 미뤄 적어도 200여 년 전에 이 신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신당이 어찌 사람의 신탁(神託)의식과 같은 나이일 수 있겠는가.이 상량문과 무관하게 훨씬 이전에 신당이 있었고,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수성당할머니가 살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수성당은 변산반도 일대를 지켜주는 ‘지역신’으로 ‘강등’되었으나,그 해양문화적 원형은 바다를 지켜주는 거녀(巨女)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제주도의 설문대나 전국에 골고루 분포한 마고할매는 수성당할머니의 문화적 원형이다.마고나 설문대가 순 토속어인 반면 수성(水星)이라는 한문투 용어가 후대에 덧 씌워졌을 뿐이다.즉,마고식의 해양문화 원형질에서 수성이란 지역적 여신이 탄생한 것이다. ●거대한 치맛자락에 가려 어둠 내리고 사실,우리의 의식에는 가부장적 남신들만 가득 차 있었다.그러나 바다만은 달라 그곳은 늘상 여신들의 무대였다.바다는 모든 생명체가 탄생한 최초의 자궁이다.그런데도 기이하게 바닷가에서 여성은 사실상 금기의 대상이다.지금은 그런 금기의식이 많이 희석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권(神權)만큼은 여신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여신을 숭앙하는 바다’의 신권과,‘여성을 배척하는 바다’의 생활이란 두 측면은 바다문화를 둘러싼 대단한 역설을 설명해 주는 단초가 된다. 수성당에서 서쪽을 굽어보니 초여름 햇살을 받은 칠산바다가 싱싱한 비늘을 반짝이며 꿈처럼 펼쳐져 있다.그곳에 서서 신화적 상상의 날개를 펼쳐본다.수성당에 기대 칠산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의 물길을 따라 당할머니가 들어왔다.그녀는 저물어 수평선 아래로 잠겨드는 해를 안간힘으로 붙들려고 했으며,그러다가 이른 저녁의 별밭을 거닐어 내게 이른 것이다.그 덕분에 칠산바다는 여름의 붉은 황혼에 늦도록 젖어 있었다.흡사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가 첫마디를 속삭였을 때처럼 그렇게 붉게. 그녀는 깊은 바닷물에 겨우 발목만 적신 채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고 있다.아주 천천히,우리 역사의 태고적 울림은 그렇듯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서해바다가 아직 형성되지 않아 우리와 중국이 육지로 맞붙어 있던 그 옛날의 땅을 디디고 걸었음직한 그런 발걸음이다.생각해 보면 수성할머니 같은 거녀는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중요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여신들은 늘 바닷가를 뚜벅뚜벅 걸어다녔다.풍랑이 일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깊었다.깊은 곳으로 발을 잘 못 내디뎌 빠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젖었다.끝모르게 큰 여신들이었지만 치맛자락이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그녀는 젖은 치마를 벗어 산 위에 펼쳐 널었다.산에서는 난리가 났다.치마를 널자 지상이 온통 컴컴해졌고 동물들은 갑자기 맞은 밤이 두려웠을 것이다. 여신은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소피도 여러번 보았다.여신의 오줌이 물길을 만들어 곳곳에 강이 생겨났다.여신의 똥은 군데군데 섬으로 남았다.저녁 무렵에 찬 이슬을 맞자 마고는 기침을 했다.그러자 폭풍이 불어 풍랑이 일었고,산과 들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다.이윽고 밤이 왔다.여신은 하늘의 별을 만지고,달을 껴안고 그렇게 외로운 밤을 지냈다.참으로 외로웠다.사람이 탄생하기 전이라 그녀를 즐겁게 할 미물 인간이 아직 없었던 탓이다. ●위도 핵폐기장엔 인간사 갈등 고스란히 얼마나 컸으면 바다를 걸으며 치맛자락만 적셨을 뿐일까.참으로 막강한 여성의 위력이다.우리 신화의 들머리를 차지하는 마고,수성당할머니 등은 지모신(Great Mother,Mother Goddess)이다.수성당을 찾아온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잃어버린 여성의 힘.거녀로서 세상을 창조하는 거대담론을 이끌어 온 문화적 원형질을 당할머니에게서 발견한다.현대인들은 그만 그 거대한 신화적 힘,자연친화적 순응을 거부하고 말았으니,수성당 코앞의 새만금간척지나 위도 핵폐기장 같은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갈등이 그것이다. 당할머니가 바다를 걷는 발자국소리를 듣노라니 상상력은 멀리 상전벽해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왜 하필이면 국가적인 큰 제사터가 수성당에 자리잡고 있었을까.우리는 그동안 ‘전북지역은 곧 백제문화권’이라는 도식적 편견에 함몰돼 있었다.전주박물관 발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유병하는 이를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마한,백제,가야,왜의 노천제사라고 주장했다.3세기 후반에는 마한,4세기는 마한과 백제,5세기 전반과 6세기 전반은 백제,가야,왜의 제사가 이루어진 듯하다. 마한,백제는 그렇다치고 멀리 가야와 왜의 유물이 나온 사실은 흥미롭다.백제 땅으로 들어서자면 반드시 변산반도를 돌아,고군산열도를 비집고 들어가,금강하구로 들어서야 했을 것이니,수성당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해양의 길목이다.위도나 고군산에서 바라볼 때,곶의 신비로운 장소에 신당을 세우고 해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올렸으리라.채석강과 적벽강이 펼쳐진 천혜의 절경에 자리잡고 있으니 신들조차도 비경을 선호했음이다. 근년까지도 풍어기(豊漁旗)가 올라가던 수성당 앞바다에서 역사시대의 제사가 올려졌고,더 앞선 시대에는 마고할머니가 걸어다녔다는 사실에서,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수성당 신앙의 해양문화적 지속성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이렇듯 바다에는 인간 이전에 여신들도 살고 있었던 것이니,‘바다에 살어리랏다‘에서 어찌 이들을 모른 채 할 수 있을 것인가.˝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칠산바다 지키는 수성당할머니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칠산바다 지키는 수성당할머니

    ●깎아지른 절벽위 여신모신 성소가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새삼 에게해와 그리스신화가 관심을 끈다.아테네 도심의 파르테논 신전 못지않게,아티카반도 끝자락 수니온곶(串)의 포세이돈 신전도 낙조 풍경과 어울려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포세이돈 신전.에게해의 찬란한 석양이 비끼는 천애 절벽에 각인된 역사와 신화의 지문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신화시대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바다의 신 포세이돈.그의 뜻에 따라 질풍과 노도가 일어나니,바다의 모든 것이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포세이돈의 황금전차가 말발굽 요란하게 바다 위를 가로지를라치면 거센 폭풍은 간데없고 잔잔한 고요가 그를 옹위했다.원형은 파괴됐으나 15개의 도리아식 원주는 고스란히 남아 에게해의 험한 바닷길을 아우르고 있다.지금도 이 신전 앞을 지나는 그리스 어부들은 고개 숙여 예를 표한다.첨단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뱃길에 나선 사람은 누구나 포세이돈의 신화적 영력에 깊은 외경과 간절한 기원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도국가 그리스의 끝자락에 바다의 신전이 있다면,같은 반도국가인 우리의 사정은 어떠할까? 우리라고 왜 바다신을 모신 신전이 없을까만,남의 떡만 크게 보이고,내 것은 초라하게만 여기는 문화사대주의의 병폐가 여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나이아가라폭포의 웅장함에 취해 박연폭포 정도는 ‘애들 장난’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필자가 줄 수 있는 최선의 해답은 ‘우리 것부터 좀 챙겨 보라.’는 충고이다.포세이돈이 중요하다면,중국의 여자 해신 마조(祖)도 알 필요가 있으며,더불어 ‘문화 종다원성’을 위해서라도 한반도 바로 이 땅의 수성당할머니를 생각해야 한다. ●서해바다 거닐며 거친 물길 다스려 해신은 세계 어느 바다에나 있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변산반도의 끝자락 격포 수성당은 우리 해신의 위엄과 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신성(神聖)의 성소(聖所) 격이다.우선,위치가 눈길을 끈다.잘록한 자루처럼 돌출한 곶의 깎아지른 절벽을 ‘성소’로 선택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수성당 길목은 해안초소를 설치해 민간인 출입을 막는 군 작전구역이었다.그 후 전주박물관에서 이곳 일대를 발굴한 결과,고대의 제사터임이 확인되었다.민간의 구술(口述)전승이 이루어진 이곳에서 확인 발굴이 이루어졌음은 우리 문화에서 구술이 지닌 실증적 힘을 웅변한다.트로이문명이 애초에 구술과 신화에서 출발했다가,훗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된 것과 다를 게 없다. 수성당은 시누대가 창검처럼 밀집해 빼곡하게 들어찬 단애(斷崖)에 숨어 있다.바닷물이 밀물처럼 다가와 이 안에 들면 절벽에 서있다는 느낌을 잊게 된다.그러나 자칫 한발 잘못 내디디면 벼랑으로 곤두박질이다.오금이 저리도록 가파른 곶.벼랑 아래로는 여근처럼 갈라진 해식동굴이 있어 조수가 드나들며 보는 이의 현기증을 자아낸다.일명 용굴 혹은 여우골이라 불리는 이곳이 수성당할머니의 거처이다.서해 어업의 중심기지였던 위도가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관망대에 해당하는 곳으로,임진왜란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할머니가 무찔렀다는 전설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 ‘개양할미’라고도 불리는 수성당할머니는 딸만 여덟을 낳아 각도에 한명씩 시집보냈다고 전해진다.더러는 그녀가 딸 일곱을 낳았으며,그들이 수성당에서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일곱 섬 지킴이가 되었다고도 한다.수성당 할머니는 엄청나게 큰 키로 굽나무신을 신고 저벅저벅 서해바다를 걸어다녔다.위험한 곳에는 표지를 남겨 어부들이 해를 입지 않게 돌보았으며,심지어 수심까지 재어 어부들이 알도록 했다.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보여준 ‘서해 창건주’의 전설이므로 이 말이 맞느냐,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변산 격포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초에 정성껏 제물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다.세상이 바뀌어 서해 여신으로서의 지위는 볼품없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때의 마을굿 양식이 여전히 잔존해 있으며,무신도도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불타고 없다.‘1804년 상량(上樑)’이라고 적힌 상량문으로 미뤄 적어도 200여 년 전에 이 신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신당이 어찌 사람의 신탁(神託)의식과 같은 나이일 수 있겠는가.이 상량문과 무관하게 훨씬 이전에 신당이 있었고,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수성당할머니가 살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수성당은 변산반도 일대를 지켜주는 ‘지역신’으로 ‘강등’되었으나,그 해양문화적 원형은 바다를 지켜주는 거녀(巨女)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제주도의 설문대나 전국에 골고루 분포한 마고할매는 수성당할머니의 문화적 원형이다.마고나 설문대가 순 토속어인 반면 수성(水星)이라는 한문투 용어가 후대에 덧 씌워졌을 뿐이다.즉,마고식의 해양문화 원형질에서 수성이란 지역적 여신이 탄생한 것이다. ●거대한 치맛자락에 가려 어둠 내리고 사실,우리의 의식에는 가부장적 남신들만 가득 차 있었다.그러나 바다만은 달라 그곳은 늘상 여신들의 무대였다.바다는 모든 생명체가 탄생한 최초의 자궁이다.그런데도 기이하게 바닷가에서 여성은 사실상 금기의 대상이다.지금은 그런 금기의식이 많이 희석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권(神權)만큼은 여신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여신을 숭앙하는 바다’의 신권과,‘여성을 배척하는 바다’의 생활이란 두 측면은 바다문화를 둘러싼 대단한 역설을 설명해 주는 단초가 된다. 수성당에서 서쪽을 굽어보니 초여름 햇살을 받은 칠산바다가 싱싱한 비늘을 반짝이며 꿈처럼 펼쳐져 있다.그곳에 서서 신화적 상상의 날개를 펼쳐본다.수성당에 기대 칠산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의 물길을 따라 당할머니가 들어왔다.그녀는 저물어 수평선 아래로 잠겨드는 해를 안간힘으로 붙들려고 했으며,그러다가 이른 저녁의 별밭을 거닐어 내게 이른 것이다.그 덕분에 칠산바다는 여름의 붉은 황혼에 늦도록 젖어 있었다.흡사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가 첫마디를 속삭였을 때처럼 그렇게 붉게. 그녀는 깊은 바닷물에 겨우 발목만 적신 채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고 있다.아주 천천히,우리 역사의 태고적 울림은 그렇듯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서해바다가 아직 형성되지 않아 우리와 중국이 육지로 맞붙어 있던 그 옛날의 땅을 디디고 걸었음직한 그런 발걸음이다.생각해 보면 수성할머니 같은 거녀는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중요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여신들은 늘 바닷가를 뚜벅뚜벅 걸어다녔다.풍랑이 일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깊었다.깊은 곳으로 발을 잘 못 내디뎌 빠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젖었다.끝모르게 큰 여신들이었지만 치맛자락이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그녀는 젖은 치마를 벗어 산 위에 펼쳐 널었다.산에서는 난리가 났다.치마를 널자 지상이 온통 컴컴해졌고 동물들은 갑자기 맞은 밤이 두려웠을 것이다. 여신은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소피도 여러번 보았다.여신의 오줌이 물길을 만들어 곳곳에 강이 생겨났다.여신의 똥은 군데군데 섬으로 남았다.저녁 무렵에 찬 이슬을 맞자 마고는 기침을 했다.그러자 폭풍이 불어 풍랑이 일었고,산과 들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다.이윽고 밤이 왔다.여신은 하늘의 별을 만지고,달을 껴안고 그렇게 외로운 밤을 지냈다.참으로 외로웠다.사람이 탄생하기 전이라 그녀를 즐겁게 할 미물 인간이 아직 없었던 탓이다. ●위도 핵폐기장엔 인간사 갈등 고스란히 얼마나 컸으면 바다를 걸으며 치맛자락만 적셨을 뿐일까.참으로 막강한 여성의 위력이다.우리 신화의 들머리를 차지하는 마고,수성당할머니 등은 지모신(Great Mother,Mother Goddess)이다.수성당을 찾아온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잃어버린 여성의 힘.거녀로서 세상을 창조하는 거대담론을 이끌어 온 문화적 원형질을 당할머니에게서 발견한다.현대인들은 그만 그 거대한 신화적 힘,자연친화적 순응을 거부하고 말았으니,수성당 코앞의 새만금간척지나 위도 핵폐기장 같은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갈등이 그것이다. 당할머니가 바다를 걷는 발자국소리를 듣노라니 상상력은 멀리 상전벽해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왜 하필이면 국가적인 큰 제사터가 수성당에 자리잡고 있었을까.우리는 그동안 ‘전북지역은 곧 백제문화권’이라는 도식적 편견에 함몰돼 있었다.전주박물관 발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유병하는 이를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마한,백제,가야,왜의 노천제사라고 주장했다.3세기 후반에는 마한,4세기는 마한과 백제,5세기 전반과 6세기 전반은 백제,가야,왜의 제사가 이루어진 듯하다. 마한,백제는 그렇다치고 멀리 가야와 왜의 유물이 나온 사실은 흥미롭다.백제 땅으로 들어서자면 반드시 변산반도를 돌아,고군산열도를 비집고 들어가,금강하구로 들어서야 했을 것이니,수성당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해양의 길목이다.위도나 고군산에서 바라볼 때,곶의 신비로운 장소에 신당을 세우고 해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올렸으리라.채석강과 적벽강이 펼쳐진 천혜의 절경에 자리잡고 있으니 신들조차도 비경을 선호했음이다. 근년까지도 풍어기(豊漁旗)가 올라가던 수성당 앞바다에서 역사시대의 제사가 올려졌고,더 앞선 시대에는 마고할머니가 걸어다녔다는 사실에서,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수성당 신앙의 해양문화적 지속성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이렇듯 바다에는 인간 이전에 여신들도 살고 있었던 것이니,‘바다에 살어리랏다‘에서 어찌 이들을 모른 채 할 수 있을 것인가.
  • 儒林(11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가르쳐주고 또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성인의 심법(心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디까지나 옛 성인,즉 공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공자가 가르친 대로 행하고,공자의 심법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마음을 지켜나가는 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조광조의 개혁정신은 자명해지는 것이다.조광조는 공자의 마음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던 것이다.조광조는 자신뿐 아니라 중종도 공자가 되어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인과 공자의 덕은 바로 왕도이며 공자의 도덕과 윤리야말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경계하여 본받고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율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광조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발에 신겨진 검은 신과 흰 신.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바꾸지는 못하는 가죽신은 바로 공자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수수께끼의 참언은 이제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이제야 알겠으니 조광조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것이다.조광조는 비록 실패했지만 공자의 사상으로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선각자였던 것이다.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적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썼던 구도자였다.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유교적 이차돈인 것이다.따라서 조광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구도의 궁극(窮極)이었으니,조광조야말로 순교자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시는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지난 6개월 동안 추적해왔던 조광조의 생애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이제 내 앞에는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그것은 조광조의 발자취를 좇아 500년 전의 과거에서 25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자의 행적을 좇아가는 길일 것이다. 조광조가 신었던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마치 조광조로부터 바통을 전해받은 장거리주자처럼 계주(繼走)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조광조의 무덤을 우러러보았다.문득 조광조가 살아 생전 지었던 한 수의 시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길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 문왕은 어디가고 빈 배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조광조의 시처럼 언덕 위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석양의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는 시구처럼 풀밭 위로는 어지러운 나비 떼들만 춤을 추며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여,안녕. 개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조광조가 내게 준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서둘러 차가 주차되어 있는 심곡서원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어느덧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 儒林(11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가르쳐주고 또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성인의 심법(心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디까지나 옛 성인,즉 공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공자가 가르친 대로 행하고,공자의 심법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마음을 지켜나가는 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조광조의 개혁정신은 자명해지는 것이다.조광조는 공자의 마음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던 것이다.조광조는 자신뿐 아니라 중종도 공자가 되어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인과 공자의 덕은 바로 왕도이며 공자의 도덕과 윤리야말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경계하여 본받고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율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광조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발에 신겨진 검은 신과 흰 신.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바꾸지는 못하는 가죽신은 바로 공자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수수께끼의 참언은 이제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이제야 알겠으니 조광조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것이다.조광조는 비록 실패했지만 공자의 사상으로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선각자였던 것이다.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적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썼던 구도자였다.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유교적 이차돈인 것이다.따라서 조광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구도의 궁극(窮極)이었으니,조광조야말로 순교자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시는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지난 6개월 동안 추적해왔던 조광조의 생애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이제 내 앞에는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그것은 조광조의 발자취를 좇아 500년 전의 과거에서 25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자의 행적을 좇아가는 길일 것이다. 조광조가 신었던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마치 조광조로부터 바통을 전해받은 장거리주자처럼 계주(繼走)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조광조의 무덤을 우러러보았다.문득 조광조가 살아 생전 지었던 한 수의 시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길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 문왕은 어디가고 빈 배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조광조의 시처럼 언덕 위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석양의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는 시구처럼 풀밭 위로는 어지러운 나비 떼들만 춤을 추며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여,안녕. 개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조광조가 내게 준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서둘러 차가 주차되어 있는 심곡서원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어느덧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 [데스크 시각] 눈여겨볼 고이즈미식 訪北/황성기 사회교육 부장

    북한과 일본의 22일 평양 정상회담은 누가 뭐라든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뉴욕타임스가 비꼬았지만 도시락을 싸들고 평양에 갔건,회담시간을 다 못 채웠건 그렇다.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납치피해자 자녀 5명을 데리고 귀국했다.일본인이지만 북한사람으로 살아온 자녀들이 일본정부 전세기에 오르려 석양을 받으며 순안공항에 얼굴을 드러낸 순간,잘 적응해 살기를 바랐다. 납치는 북한이나,일본이나 빨리 손에서 내려놓고 싶은 뜨거운 감자다.일본에 귀환한 피랍자 두 부부의 열여섯에서 스물두살된 가족들이 일본땅을 밟고,부모들과 1년 7개월만에 재회함으로써 30년 묵은 북·일 납치문제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는 국교수립을 위한 회담재개에도 합의했다.납치문제를 매듭짓고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고자 하는 바람은 북한이나 일본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성으로 생중계되는 NHK를 지켜보면서 보통 우리가 봐왔던 정상회담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납치 가족 몇명의 송환을 위해 정상이 국교도 없는 나라의 수도에 들어가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핵·미사일과 관련한 의제가 회담에서 논의되긴 했어도 사실 송환이 회담의 ‘모든 것’이었다.직접 가서 김 위원장을 만나,납치 피해자의 염원이자 많은 일본인이 바라던 가족을 데리고 온 것은 잘한 일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김 위원장과의 회담후 미군 탈영병 출신으로 피랍자와 결혼한 젠킨스씨,그의 두 딸과도 1시간가량 만났다.그들의 귀국의사를 확인했으나 동행을 거부했다.기자회견에서 총리는 젠킨스 가족과 나눈 얘기를 소상히 전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들 한다.자신도 걸린 ‘국민연금미납 태풍’을 비켜가기 위한 퍼포먼스라거나,여름의 참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려는 전략이라거나,나아가 납치문제를 해결하고 북·일 수교를 이뤄낸 지도자로서 역사에 기록되고자 하는 명예욕이 배경에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하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납치돼 젊음을 북에 파묻고,자식들마저 두고온 이산(離散)의 고통은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정치가로서 핵·미사일만큼이나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였다.그것을 풀러 갔다. 2002년 9월17일 평양 회담이 일본 외무성이 ‘한상 바쳐올린’ 것이었다면 22일 회담은 고이즈미 총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주변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험을 동반한다.”고 말렸다고 한다. 다녀오자 두번째의 평양행을 놓고 평가가 엇갈린다.미흡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행방불명자 10명의 가족들은 “최악의 결과”라고 절규한다.잘해보자고 했던 일이 그를 자칫 위태롭게 할 수도 있어 보인다.그럼에도 일단 5명이라도 귀국함으로써 북과 일본이 다음 단계로 옮겨갈 발판은 생겼다.두 나라 사이에 놓인 암초 중 가장 큰 덩어리 하나를 두 정상이 들어냈다. 이제부터다.북핵해결과 맞물려 있긴 해도 북·일 수교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양국관계가 진전되면 한반도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일본에서 주장하는 실종자 10명의 재조사에 북측은 성실히 응해야 한다.일본 조야도 지난 1년10개월간의 모진 ‘북한 때리기’를 접고,대승적 차원에서 북·일관계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얘기는 다르지만 우리의 피랍자가 마음에 걸린다.방식이야 다를 수 있겠으나,숙제 하나를 풀러 평양을 오간 ‘고이즈미식’은 눈여겨 볼 만하다. 황성기 사회교육 부장 marry04@˝
  • 카이스갤러리 김보희 개인전

    한국화가 김보희(52·이화여대 교수)가 그리는 풍경은 단순히 거기에 있는 풍경이 아니다.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몰입하게 만드는 풍경,명상의 세계로 이끄는 구도적인 풍경이다.28일부터 6월30일까지 서울 청담동 카이스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보희 개인전’은 침묵과 관조 속에 자연의 숭고미를 한껏 체험하게 한다. 지난 20여년 동안 작가는 한결같이 자연의 풍경을 그려왔다.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한국의 산하가 단골 소재다.하지만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 않는다.실경에 바탕을 두되 일종의 색면추상의 형태를 취한다.구체적인 자연은 선과 평면의 추상적 이미지로 바뀐다.전통회화에 현대적 개념의 추상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작가는 “동양화와 서양화,구상화와 추상화를 보는 법이 다르지 않다.내 자신에 솔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는 수묵과 채색을 적절히 구사한다.중첩된 먹색이 끝없이 안으로 스며드는 듯 화면 전체를 감싸고 돌아 그림의 무게와 깊이를 더해준다.이번 전시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평면성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작가는 화폭의 위아래와 옆면까지 그림을 그려넣어 오브제적인 회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전통 한국화에 3차원적인 공간감까지 가미한 것이다. 이번 전시의 또다른 감상 포인트는 ‘김보희식 점묘화풍’을 이해하는 것.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섬세한 필촉의 점들은 미세한 떨림의 물살을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전시에는 네 개의 작품을 하나로 이은 웅장한 산세를 담은 초(超)대작,수평으로 기다랗게 펼쳐진 석양 무렵의 바다 풍경화 등 ‘무제’란 이름의 작품 15점 가량이 선보인다.(02)511-0668. 김종면기자 jmkim@˝
  • [산악문학인 안재홍의 산 오르記]포천 운악산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포천군 화현면 운악산(雲岳山·935.5m)은 이맘때 산행들머리인 현등사(懸燈寺) 입구 주차장부터 빈틈이 없다.신록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매표소를 지나면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2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만경로’란 이 나무 계단길은 능선까지 이어진다.눈썹바위에 이르러 전망이 트이기 시작한다.바위 아래에서 쳐다보면 눈썹을 닮은 오버행 바위가 보인다. 눈썹바위 상단에 오르면 푸른 잔디로 장식한 골프장과 꽃동네가 잘 보인다.이어지는 암봉은 우회로가 있고 위험한 곳엔 밧줄을 매놓았다.고인돌을 지나 암봉에 오르면 운악산 전경이 잘 보이고 현등사도 보인다. 암봉이 우뚝한 미륵바위(725m)가 버티고 있는 곳에 ‘병풍바위 촬영소’라는 안내판이 있다.병풍바위는 흰 바위에 소나무를 수놓은 듯하다.미륵바위와 병풍바위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풍광은 가히 선경이다.운악산에서 경치가 제일 빼어난 곳이다.금강산의 만물상이나 설악산의 천화대를 축소한 것 같다. 여기부터 등산로는 더욱 험해진다.바위에 쇠줄을 쳐놓고 발 디딤까지 만들어 놓았다.어른들의 놀이터 같은 길을 조심조심 오른다.‘48계단’을 오르면 노송 두 그루가 있는 암봉이 나온다.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분재 같은 소나무 두 그루가 한 폭의 그림같다.앉아 쉬며 내려다보는 세상도 볼만하다.산으로 둘러 쌓인 조종천 변의 상판리와 현리가 시원하게 펼쳐진다.동북쪽으로 명지산과 멀리 화악산이 하늘과 닿아 있다.남쪽으로 이어진 한북정맥의 산들이 몸을 낮춰 운악산을 경배하는 듯 하다. 정상을 향하여 철 계단을 내려간다.철쭉 밭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헬기장이다.족구를 해도 될 성싶은 넓은 헬기장 북쪽 끝에 정상비가 있다.‘운악산·935.5m·하판리 산162-1·1998.8.1 설립’.정상비 옆에 큰 바위가 있다.바위에 음각으로 ‘결사돌파대’라고 다섯 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여기는 정상이 아니다.정상은 여기서 한북정맥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더 가야 한다.서쪽으로 47번 국도를 따라 일동과 이동으로 이어진 마을이 보이는 곳,이곳이 한북정맥의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 중간 운악산의 정상이다. 하산은 절고개를 지나 동쪽 현등사가 좋다.현등사로 내려가는 길 왼쪽에 코끼리바위가 있다.코끼리 머리에 길게 늘어진 코가 웃음을 머금게 한다.너덜지대를 30분 내려가면 현등사다.천년고찰 현등사는 불사중이다.석탄일이 다가와 연등으로 장식해 놓았다.석양빛이 단청과 어우러져 고색이 창연하다. 구한말 궁내부대신이었던 민영환 선생이 기우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는 무우폭포(舞雩瀑布)에 ‘閔泳煥(민영환)’이라고 새겨진 암각서(岩刻書)가 있다.그 아래 이어지는 백년폭포를 지나 30분쯤 내려오면 주차장이다. 옛날부터 운악산은 가평 화악산(1468.3m),개풍 송악산(488m),파주 감악산(675m),서울 관악산(629m)과 더불어 ‘경기5악’으로 꼽는 산이다. 만경로로 정상에 올라 절고개를 거쳐 현등사로 내려오는 코스의 산행거리는 7㎞,네 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경춘 국도로 청평을 지나 청평 검문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3㎞ 가면 현리다.현리 중심을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온다.여기서 오른쪽으로 8㎞ 정도 가면 현등사 입구인 하판리다.왼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넓은 주차장이 있다.구리시에서 47번 국도로 내촌 베어스타운을 지나 신팔리 사거리에서 오른쪽 청평 방향으로 37번 도로로 현리까지 가도 된다. ●볼거리·먹을거리 현등사는 신라 22대 법흥왕(514~539)때 인도의 마라가미(摩羅呵彌)라는 승려가 신라를 찾았는데 이 때 그를 위해 세운 절이라 전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인 범종이 전해지는데 현등사의 본사인 봉선사에서 만든(광해 11년·1619년) 범종을 말사인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경기도문화재 자료 제17호인 삼층석탑이 축대 아래,해우소 옆에 있다. 현등사 입구는 식당가다.손두부 집들이 두부 맛을 겨룬다(할머니손두부집 031-585-1219).닭백숙과 민물매운탕집들이 즐비하다.민박도 많이 있고 주차장도 널찍하다.현리 중심을 벗어나 삼거리에 있는 양평해장국집(031-585-8008)의 선지해장국은 선지와 천엽을 많이 넣는다.천엽을 소스에 찍어 먹으면 별미다.멀리서 단골로 찾는 이가 많다. ˝
  • 피아노숲 갈까 동물원 갈까

    싱그러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5월.주말이 되면 가족끼리 연인끼리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을 따라 나들이를 나서고 싶어지는 계절이다.그런데 봄나들이에다 아름다운 음악까지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봄소풍 같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라이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이색콘서트를 소개한다. ●연인끼리…피아노의 숲 번잡한 서울 도심을 떠나 1시간30분 남짓 달려 양평 용문산 자락에 다다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야외무대가 나온다.일본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이사오 사사키의 피아노 선율이 흐를 공연장이 바로 이곳.오는 22일 오후6시,오후10시 두차례 공연될 ‘이사오 사사키의 피아노의 숲’콘서트는 저녁 석양,쏟아지는 별빛,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한데 어우러질 낭만적인 무대다. 이미 세 차례의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는 그는 일본의 조지 윈스턴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클래식을 바탕으로 재즈와 뉴에이지를 조화시켜 아름답고도 섬세한 연주를 들려준다.고 이수현씨 추모곡 ‘Eyes for You’를 작곡했고,‘공동경비구역JSA’의 삽입곡 ‘이등병의 편지’와 ‘번지점프를 하다’의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연인’을 새롭게 편곡해 리메이크하는 등 한국에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이번 공연에는 스탄 게츠,아트 블레키등 재즈계의 거장과 함께 연주한 경력이 있는 베이시스트 요시오 스즈키가 함께할 예정이다. 공연장 주변에는 1.2㎞의 산책로가 있다.식사,커피,생맥주도 제공된다.모처럼 한껏 기지개를 켠 자연의 품에 연인과 폭 안기고 싶다면 ‘강추’.개인출발 4만 5000원,단체출발 5만원. ●가족끼리…미술관 옆 ‘동물원’ 중장년층에게 추억의 한자락씩은 차지하는 그룹 동물원이 지난해에 이어 29·30일 오후 7시 ‘미술관 옆 동물원’콘서트를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옆 야외무대에서 열릴 이번 공연은 정해진 좌석이 없어 자유롭게 풀밭에 앉아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간단한 간식과 돗자리만 준비한다면 그 어떤 가족 나들이도 부럽지 않을 듯. 콘서트는 현악 앙상블과 함께 클래시컬하게 편곡한 동물원의 노래를 듣는 1부와,기타·베이스·드럼·건반 등 4명의 세션이 참여하는 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혜화동’‘시청앞 지하철 역에서’‘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등 귀에 익은 히트곡과 지난 2월 발표한 9집 수록곡 ‘수줍던 날의 이야기’‘어리석은 사랑의 노래’등이 불려질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4만 5000원 티켓 한 장으로 국립현대미술관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자녀들과 함께한다면 더없이 좋을 듯싶다.30분동안 미술관 안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을 하는 ‘미술관 투어’도 공연 당일 현장진행본부에서 신청할 수 있다.공연장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미술작품을 만드는 이벤트도 마련된다.두 콘서트 문의 www.ecell.co.kr (02)525-6929. 김소연기자 purple@˝
  • [기고] 휘호로 만나는 백범/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문무겸비’의 지도자로 백범 김구 선생을 든다면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동학혁명군 청년장교 경력과 ‘치하포 사건’ 당시 무기를 든 일본군 장교를 맨손으로 해치운 전설 같은 경력 외에,역사적인 ‘이봉창·윤봉길 의거’도 백범이 세운 치밀한 작전 하에서 실행된 것임을 감안할 때 김구 선생이 ‘실전’에 탁월한 역량을 가진 사람임은 쉽게 간파된다 할 것이다. 반면 ‘문인’ 백범에 대한 초상은 쉽게 스케치되지 않는다.먼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 당대의 지도자로 불렸던 사람들과 달리 백범은 이렇다 할 학력이 없기 때문이다.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백범은 서당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독학으로 ‘육도·삼략’ 등을 설파해 나가던 18세에 ‘동학혁명군’에 가담하게 된다.동학군 선봉에 섰으나 패한 뒤,안중근 의사 부친의 소개로 만난 당대의 유학자 후조 고능선의 가르침을 잠시 받았을까 백범은 세상에 내놓을 만한 소위 ‘학벌’이 없다. 그러나 백범이 생전에 남긴 ‘친필휘호’ 속의 글을 읽다 보면 동시대 그 어느 지도자에게서보다 원숙한 ‘문인의 향기’를 진하게 맛보게 되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수려한 글씨체뿐만 아니라,그 글의 내용 속에 녹아 있는 ‘백범사상’이 주는 숙연한 감동과 교훈 때문이다.청사에 길이 빛날 ‘3·1 민족저항권’ 행사를 발판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사’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하다.백범이 남긴 진귀한 이 휘호들은 환국(1945년 11월23일) 이후 숙소로 쓰여졌던 ‘경교장’(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현관)에서 씌어진 것이다.겨레의 장래가 걸린 민족적 현안을 앞에 두고 ‘유사(사이비) 독립운동가’들이 판을 치고 있던 상황에서,사선을 넘나들며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보낸 노 독립운동가는 붓을 들어 마음을 다스리며 진퇴여호(進退如虎)의 장고를 거듭했던 것 같다.‘신탁통치 반대’,‘남북한 단일정부 수립 반대’,‘4·8 남북연석회의 제안 및 결행’,‘5·10 단독선거 불참’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백범의 결단은 이러한 집필장고(執筆長考)의 산물이었으리라.‘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가정(幸福家庭)’ ‘민족정기(民族正氣)’와 같은 휘호와 함께 “명예와 치욕에 놀라지 아니하고,한가로이 뜰 앞에 피고 지는 꽃을 본다.…(중략)….맑은 하늘과 밝은 달은 어느 곳에나 떠 있건만,나방은 오로지 밤 촛불에만 뛰어드는구나.아! 슬프도다! 나방이와 올빼미 같지 않은 자 이 세상에 몇이나 될꼬.”와 같은 현실인식을 담은 한시도 있다.“굽이치는 장강은 동으로 흐르는데,부서지는 물보라에 영웅들 사라지고,푸르른 저 산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석양은 몇 번인가 황혼에 젖었던가.” 서정성 깊은 장문의 한시 등 백범이 남긴 친필휘호와 자작시는 의외로 많다. 지난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제85주년을 맞았다.월드컵으로 세계인의 호평을 받았던 대한민국이 부정한 정치자금이 판을 치는 ‘부패 공화국’에다 ‘탄핵정국’까지 겹쳐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맞은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이 구조적 혼란상은 광복 직후에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민족적 양심에 따른 ‘정의로운 건국’을 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오늘은 위기의 대한민국에 ‘전화위복’의 기회라 할 수 있는 ‘4·15 총선’ 투표일이다.후보자들은 물론 유권자들이 더욱 주목할 만한 백범이 애송하던 시가 있다.백범이 휘호로 써서 선물하기를 좋아했던 서산대사의 시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발걸음 함부로 남기지 말라. 오늘 네가 남긴 발자국은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가 바로 그것이다.신중한 언행으로 ‘언행일치’를 이룰 수 있는 진정한 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신중한 주권행사를 부탁하는 ‘백범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맹목적인 연고주의나 극단의 정당주의는 대한민국을 ‘두 번 죽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 [서울 탱고] 오은정의 ‘울산 아리랑’

    “운무를 품에 안고 사랑찾는 무룡산아/산딸기 머루 다래 따다주던 그 손길/앵두같은 내 입술에 그 이름 새겨놓고/꿈을 찾아 떠난 사람아/둘이서 거닐던 태화강변에/대나무 숲들은 그대로인데/…어느 곳에 정을 두고 나를 잊었나/석양을 품에 안고 사랑찾는 문수산아/…정자 바닷가 하얀 파도는 그대로 인데…” 가수 오은정이 부른 ‘울산아리랑’이다.울산이 고향인 사람들은 노랫말만 들어봐도 평온하고 아늑한 고향의 풍경을 한눈에 펼쳐낼 수 있는 정감어린 한 편의 서정시다. 울산아리랑은 1999년 발표된 뒤 한동안 별 반응이 없었다.지역을 주제로 한 가요는 히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가요계의 속설이라던가.오은정은 “발표 초기엔 역시 틀린 말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단다.단념했는데 노래가 방송을 타는 횟수가 점차 늘더니 8개월쯤 지나면서 KBS 전국노래자랑에 빠지지 않고 불리는 인기가요로 떴다.오은정의 지방공연 기회는 잦아졌고 그때마다 해당지역 지명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는 재치를 발휘해 노래의 대중화에 성공했다.중국교포들 사이에서는 1999∼2002년까지 3년동안 애창가요 1위의 인기를 누렸다.덕분에 오정은 2001년 추석무렵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중국동포 위문공연에 초청되는 등 활발한 가수활동을 하게 된다.당시 위문공연에서 중국동포 2명이 잇따라 울산아리랑을 불렀을 만큼 이 노래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됐다.울산아리랑은 오정은 대표곡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인기가수 대열에 올려 놓았다.인기에 비해 음반 판매는 많지 않았지만 대신 메들리 음반마다 빠지지 않고 끼는 노래로 자리를 굳혔다. 오은정은 “고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노랫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 노래가 뜬 것 같다.”고 말했다.그녀는 울산이 고향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연고가 있고,86년 가수 데뷔방송을 한 곳이어서 관심이 남다르다.이를 안 주변 울산출신 지인들이 “울산을 주제로 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졸라 기억을 더듬어 노랫말을 지었다.곡은 ‘흙에 살리라’ 등을 작곡한 김정일씨에게 부탁했다.그녀는 “공장이 많은 삭막한 공업도시일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울산이 실제 여러 차례 방문해보니 산·강·바다가 어우러진 살기좋은 곳이었다.”며 “노래로 이를 알리는 것도 나름대로 뜻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노래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울산아리랑의 인기가 한창이던 2001년 7월 개인사정으로 아쉽게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인 경기도 가평 에서 쉬고 있다.현재 신곡 준비작업이 거의 끝나 이르면 올가을,늦어도 내년부터는 활동을 재개할 계획이어서 울산아리랑을 열창하는 그녀의 모습을 곧 볼 수 있을 것 같다.공장이 유난히 많아 ‘울산=공해도시’라는 인식 때문에 고민하던 울산시는 이 노래가 히트하는 바람에 힘들이지 않고 ‘클린 이미지’를 전국에 심었다.이런 공을 인정해 오은정에게 지난해 명예시민증을 주고 시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노랫말속 정자바다는 울산도심에서 차로 30분쯤이면 갈 수 있다.동해안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꼽혀 외지에서도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다.울산시는 정자바다 일대를 세계적 해안관광지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무룡산(해발 452.3m)과 문수산(599.8m)은 도심 가까이 동서에 위치한 울산의 대표적 산이다.산정에 오르면 시가지와 동해의 시원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평일은 물론이고 휴일이면 가족단위 등산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바다 가까이 있는 무룡산 허리 위로 흐린 날이면 넘나드는 짙은 안개구름,해질무렵 문수산 너머 붉게 물든 석양은 예전 그대로다.도심을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며 흐르는 태화강에서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솟구쳤다 잠김을 되풀이하는 고기떼를 바라보며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을 평일에도 꽤 볼 수 있다.시민들의 쉼터이자 겨울이면 수많은 철새들의 도래지다.강 양쪽 10리에 걸쳐 조성된 울창한 대나무 밭은 울산의 12경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비경이다.일제때 홍수를 막으려고 조성한 게 오늘날 도심속 푸른 숲을 이루어 시민들의 산책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
  • 儒林(42)-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낚시질을 하고 있던 강상(姜尙),즉 강태공을 보자마자 바로 그가 점쟁이가 말하였던 ‘반드시 도움이 될 인재’임을 꿰뚫어본 문왕은 그를 도성으로 데려와 국사(國師)에 임명한다. 강상이 태공망(太公望)으로 불리게 된 데는 문왕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인물임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기 때문이었다. 강태공의 노력으로 주족(周族)은 발전을 거듭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는 한편 천하의 3분의2를 장악하여 상을 멸망시킬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마지막으로 상을 멸망시킬 계획만을 남겨둔 문왕은 큰 병에 걸리게 되는데,그는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 희발(姬發)을 불러 세 가지를 부탁한다.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 추앙받는 희창 문왕이 남긴 그 유명한 세 가지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첫째,좋은 일을 보면 게을리 하지 말고 즉시 가서 행해야 한다.둘째,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잡아야 한다.셋째,나쁜 일을 보면 급히 피해야 한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즉시 여기서 나부터’ 시작하라는 문왕의 행동철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고 있다. 문왕이 죽자 강태공은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마침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하는 것이다. 술에 만취하여 읊었던 조광조의 시조는 자신을 강태공에 비유하고 중종을 문왕에 비유하고 있었던 것이다.자신은 강태공처럼 임금인 중종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중종은 보이지 않고 마침내 빈 배만 남아 있구나.빈 배(虛舟). 함께 힘을 합쳐 중종을 유가에서 이상적인 군왕으로 추앙하고 있는 성천자로 만들고 자신은 문왕을 도왔던 강태공처럼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는 개혁가가 되고 싶었던 조광조.그러나 그러한 야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마침내 빈 배만 남아 있구나.그뿐인가.어느덧 하루해가 저무는 석양빛에 물차는 제비들,즉 자신의 이익을 좇아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정상배(政商輩)만 오락가락 하고 있을 뿐이로구나. 만취하여 읊는 조광조의 시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일행은 갑자기 숙연해졌다.정치를 개혁해보려던 젊은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반역죄로 갇힌 죄수가 되어 텅 빈 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처연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고 나서 조광조는 다시 땅을 치며 울기 시작하였다. “아아 우리 상감이 보고싶다.아아 우리 상감이 어찌 이를 알리오.” 그때였다. 갑자기 술을 마시던 김식이 술병을 쥐어들었다.그리고 술병을 거꾸로 세워 술을 쏟기 시작하였다.술병 속에서 술이 쏟아져 땅에 엎질러졌다. “무슨 일인가.” 보고 있던 김구가 크게 놀라 이를 만류하여 물었다.간신히 술을 얻어 마시긴 하지만 밤을 새워 마시기엔 턱없이 부족하여 아까운 술을 일부러 쏟아버리는 김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식이 울고 있는 조광조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였다. “쏟아버린 술을 다시 술병에 담을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가 없는 법이오.조대감.” 조광조를 힐문하는 김식의 말은 준엄하였다. “대감,우리는 이미 쏟아버린 술이오.엎질러진 물이오.” 김식은 쏟아버린 술로 흥건히 젖어 있는 흙을 두 손으로 떠올려 조광조의 얼굴에 바짝 들이대며 말하였다. “보시오,대감.이미 한 방울의 술도 남아 있지 않소이다.”˝
  • 儒林(42)-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2)-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낚시질을 하고 있던 강상(姜尙),즉 강태공을 보자마자 바로 그가 점쟁이가 말하였던 ‘반드시 도움이 될 인재’임을 꿰뚫어본 문왕은 그를 도성으로 데려와 국사(國師)에 임명한다. 강상이 태공망(太公望)으로 불리게 된 데는 문왕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인물임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기 때문이었다. 강태공의 노력으로 주족(周族)은 발전을 거듭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는 한편 천하의 3분의2를 장악하여 상을 멸망시킬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마지막으로 상을 멸망시킬 계획만을 남겨둔 문왕은 큰 병에 걸리게 되는데,그는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 희발(姬發)을 불러 세 가지를 부탁한다.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 추앙받는 희창 문왕이 남긴 그 유명한 세 가지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첫째,좋은 일을 보면 게을리 하지 말고 즉시 가서 행해야 한다.둘째,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잡아야 한다.셋째,나쁜 일을 보면 급히 피해야 한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즉시 여기서 나부터’ 시작하라는 문왕의 행동철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고 있다. 문왕이 죽자 강태공은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마침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하는 것이다. 술에 만취하여 읊었던 조광조의 시조는 자신을 강태공에 비유하고 중종을 문왕에 비유하고 있었던 것이다.자신은 강태공처럼 임금인 중종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중종은 보이지 않고 마침내 빈 배만 남아 있구나.빈 배(虛舟). 함께 힘을 합쳐 중종을 유가에서 이상적인 군왕으로 추앙하고 있는 성천자로 만들고 자신은 문왕을 도왔던 강태공처럼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는 개혁가가 되고 싶었던 조광조.그러나 그러한 야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마침내 빈 배만 남아 있구나.그뿐인가.어느덧 하루해가 저무는 석양빛에 물차는 제비들,즉 자신의 이익을 좇아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정상배(政商輩)만 오락가락 하고 있을 뿐이로구나. 만취하여 읊는 조광조의 시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일행은 갑자기 숙연해졌다.정치를 개혁해보려던 젊은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반역죄로 갇힌 죄수가 되어 텅 빈 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처연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고 나서 조광조는 다시 땅을 치며 울기 시작하였다. “아아 우리 상감이 보고싶다.아아 우리 상감이 어찌 이를 알리오.” 그때였다. 갑자기 술을 마시던 김식이 술병을 쥐어들었다.그리고 술병을 거꾸로 세워 술을 쏟기 시작하였다.술병 속에서 술이 쏟아져 땅에 엎질러졌다. “무슨 일인가.” 보고 있던 김구가 크게 놀라 이를 만류하여 물었다.간신히 술을 얻어 마시긴 하지만 밤을 새워 마시기엔 턱없이 부족하여 아까운 술을 일부러 쏟아버리는 김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식이 울고 있는 조광조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였다. “쏟아버린 술을 다시 술병에 담을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가 없는 법이오.조대감.” 조광조를 힐문하는 김식의 말은 준엄하였다. “대감,우리는 이미 쏟아버린 술이오.엎질러진 물이오.” 김식은 쏟아버린 술로 흥건히 젖어 있는 흙을 두 손으로 떠올려 조광조의 얼굴에 바짝 들이대며 말하였다. “보시오,대감.이미 한 방울의 술도 남아 있지 않소이다.”
  • 儒林(4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자신보다 먼저 체포된 8명의 동료들을 보자 기가 막힌 조광조는 즉시 술을 가져오도록 한 후 달빛이 가득한 뜰에서 함께 나눠 마시며 작별인사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개혁을 추진해오면서 훈구파의 반발 우려가 없지는 않았으나 중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조광조는 하룻밤 사이에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자 도저히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 상감을 보고 싶다.” 조광조는 술에 취해 울면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여전히 조광조는 중종의 믿음에 대해 의심치 않고 있었으므로 이 사태가 중종이 모르게 진행된 모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식이 이렇게 말하였다. “대감,우리 모두 신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하십시다.” 대사성 김식은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무인으로서의 기질이 있었다.훗날 조광조가 죽자 거창의 산 속으로 도망가 심정을 암살하려고 모략을 꾸미다가 실패하자 자살하여 죽은 김식은 이 거사가 다름 아닌 중종이 꾸민 사화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다만 우리 상감을 보고 싶소이다.” 조광조는 여전히 이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울며 통곡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우리 상감이 어찌 이 일을 알리오.” 이 자리에서 몇 사람은 서로 술을 나눠 마시면서 시를 읊어 마음을 달랬는데,조광조도 화답하여 시조 한 수를 읊었다.조광조가 남긴 시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문왕은 어디가고 빈 배만 남았는고.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조광조가 사화가 일어난 바로 그 밤에 이 시조를 지었는지,과거에 지었던 시조를 달 밝은 의금부 뜨락에서 다시 외어 읊었는지,그 사실은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조광조가 읊은 시조의 내용은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강태공에 비유하고 중종을 문왕으로 비유하였던 조광조. 일찍이 주(周)나라를 건국한 문왕 희창(姬昌)은 뛰어난 영웅이었는데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은 그의 뛰어난 재주를 두려워하여 그를 한적한 시골에서 구금생활을 하게 한다.그곳에서 치욕을 참으며 시간을 보내던 희창은 그의 부하들이 보낸 뇌물과 미녀들에 의해서 구사일생으로 풀려나게 된다. 복수를 결심한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찾다가 위수(渭水)의 지류 반계반(磻溪畔)에 이르러 수염과 머리가 반백인 노인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침 사냥을 나가려던 희창은 점쟁이를 불러 사냥감을 점쳤을 때 점쟁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오늘 잡히게 될 물건은 용도 아니고 곰도 아니옵니다.그러나 대왕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낚시를 하고 있던 노인을 보자 바로 그 사람이 점쟁이의 말대로 반드시 사냥해야 할 인재임을 꿰뚫어 본 희창은 유심히 노인을 살피고 있었는데,노인은 미끼도 없는 곧은 낚시 바늘로 낚시를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하는 놈은 걸려라.원하는 놈은 걸려라.” 천하의 인재를 사냥하기 위해서 전국을 순회하는 문왕 희창이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천하의 영웅을 낚기 위해 미끼도 없는 곧은 낚시로 ‘원하는 놈은 걸려라.’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강태공,결국 두 사람 모두 천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왕과 강태공, 두 영웅은 서로 손을 잡고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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