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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부 시행령 입법예고

    노동부는 23일 사무서비스분야의 유망 직업으로 조사된 ‘직업상담사’와‘전자상거래관리사’ 등 6개 종목의 국가자격증을 신설하기 위해 국가기술자격법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6개 신설 자격종목 가운데 직업상담사,사회조사분석사,전산회계는 올 하반기 첫 자격시험을 실시하며 소자본창업지도사,국제회의기획사,전자상거래 관리사 등은 올 하반기 검정기준 및 방법 등을 개발해 오는 2000년부터 시험을 실시한다. 직업상담사 전국 400여개 노동관서 및 인력은행 등에 근무하면서 구인·구직·취업알선을 상담하고 관련 직업정보를 수집·분석·제공하며 직업 적성검사,흥미검사 등을 수행하는 업무를 한다. 시험은 1급과 2급 두가지로 객관식과 주관식 논문형 등 2차에 걸쳐 실시되며 시험과목은 노동관계법규,고급직업정보론,행정론 등이다. 전산회계 중소기업,대기업의 회계실무자나 책임자로서 근무하면서 전산회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회계전반의 업무를 담당한다. 시험과목은 1차로 회계원리,원가원리,세무회계 각 20문항 객관식과 회계프로그램운용 1문항 실기시험이며 1·2·3급으로 나뉘어 실시된다. 사회조사분석사 각종 리서치회사나 연구기관,통계청,기업,정당 등에 근무하면서 시장조사 및 여론조사 등에 대한 계획수립 및 조사,결과분석 등 종합적인 조사업무를 담당한다. 시험은 1급과 2급으로 나뉘어 실시되며 시험과목은 조사방법론,사회통계처리·분석 등이다. 소자본창업지도사 소자본 창업자가 성공적인 창업을 할수 있도록 창업 여건과 사업종목,장소,투자자금을 상담 및 자문을 한다. 국제회의기획사 국제회의의 기획·운영·평가는 물론 관련 부대행사와 국제회의 참가자 숙박,전시회개최 등 국제회의 지원업무를 담당한다. 특히 2000년 ASEM 회의개최,2002년 월드컵 개최 등 매년 150여건 이상의 국제 행사가 유치돼 유망직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자상거래관리사 새로운 경영방식인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에 필요한 인터넷 시스템 개발,마케팅,홈페이지 설계 및 제작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정보통신업체,유통업체 및 재택근무가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이나 문의는 노동부 자격진흥과 (02)503-9758나 노동부 홈페이지 www.molab.go.kr. 조현석기자 hyun68@
  • 강서구 시설관리공단 이사장 공모

    지난 1일 지방공단의 설립허가원 관리권이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이양된 이후 처음으로 문을 연 강서구 시설관리공단이 이사장을 공개모집한다. 응모자격은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로서 경영관련분야에서 부교수 또는 책임연구원급,4급이상 공무원,정부·지자체 투자기관 임원 등으로 근무한 경력이 5년 이상인 사람.22일까지 응모를 받아 서류심사 및 면접을 거쳐 29일 선발한다.600-6124∼6.
  • 「오늘 ‘4·19’ 39돌」4·19세대-대학생 좌담

    4·19는 민주와 자유를 열망하는 지식인과 민중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혁명이었다.하지만 3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아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정치·사회·문화적 갈등구조와 맞물려4·19정신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구현되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4·19세대인이영일(李榮一) 국민회의 의원과 한영우(韓永愚) 서울대 인문대학장,고려대대학원 이준복(李準馥·신방과 석사 과정)씨와 연세대 손수진(孫秀眞·여·신방과 4년)씨의 좌담을 통해 4·19의 의미를 되새기고 4·19정신의 완성을위한 과제와 방안을 짚어본다. 이영일 4·19가 우리 정치사에 준 교훈은 4·19를 계기로 주권재민(主權在民)의식이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입니다.또 우리가 미래에 구현해야 할 비전을 민주주의 형태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4·19가 ‘미완의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1년 만에 군사정권에 의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4·19 이후 25년 동안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4·19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국민이 국회의원을 바꿀 힘은 가지게 됐지만 정권을 바꿀 만한 힘은 갖지 못했습니다.그러다가 97년 12월18일 비로소 국민의 손에 의해 정권까지 바꾸게됐습니다.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비로소 4·19의 이념이 구현된 것이지요.그래서 4·19의 지향성이 국민의 정부에서 꽃피웠다고 봅니다. 손수진 ‘4.19세대는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4·19세대는 사회적으로영향력 있는 위치를 점하면서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는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4·19세대가 변절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일 4·19때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투사로 살다 죽으라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백이(白夷) 숙제(叔齊)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물론 4.19때 불의에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4·19가 민족 대 반민족의 투쟁이라면 불타협의 투쟁을 계속해야 하겠지요.4·19세대에 대한 평가는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4.19때의 활약상을 소개하겠습니다.나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에 다니던 김치호라는 친구와함께 남산합창단 단원이었습니다.종로 5가에서 곤봉을 맞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문리대 앞 쌍과부집에서 우동을한 그릇 먹은 뒤 그 친구에게 시위하러 다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그랬더니 그 친구는 도서관에 가방을 가지러 간다고 하면서 경무대로 달려가 죽음을택했습니다.해마다 4·19묘소에 가면 그 친구의 묘에 꼭 들립니다. 한영우 나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4학년으로 후배들을 인솔해 시위를 했습니다.태평로에 있는 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외칠 구호가 없어옆에 있는 조선일보사에서 몇사람이 구수회의를 해 즉석에서 구호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4·19는 준비된 혁명이 아닙니다.그래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프랑스혁명은 계몽사상가들이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고 지지세력도 있어 폭발적 힘을 발휘했습니다.하지만 4·19는 혁명 뒤에 이념이 만들어져 왔습니다.당시에는 합의된 이념이 없었습니다.막연한 애국심을 가지고 시작된뒤 나중에 학문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당,야당,재야,혁신에 이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됐습니다.군사정권에 협조한 사람도 있고,군사정권에 대항해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4·19는 작게 보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도화선이 됐습니다.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선비들이 개혁의 선두에 나섰던 역사의 전통이 반복된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영일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에 살고 있습니다.4·19때 87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시민·사회단체,정당,이익집단,언론 등많은 집단이 더 이상 학생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학생은 이제 국민의 울분을 대변하는 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21세기는 정보화시대입니다.정보화에 관한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후배 대학생들에게 경쟁력을 갖춘 신지식인으로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영우 4·19때 군이 중립을 지켰던 것은 연구 대상입니다.논문에 따르면부정선거와 발포책임자인 최인규 내무부장관 등이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협력을 요청해 계엄을 선포했는데 국방부 자체가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미국이하야를 요구한 것은 이승만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정권은 한반도를 민주주의 진열장으로 만들려는 미국의 의도에 맞지않았습니다.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미·일 연합방위체제를 구축하려는 구상에 맞지 않았습니다.이승만은 강력한 반일(反日)주의자였기 때문에일본과 손을 잡기를 꺼렸습니다. 이준복 현재 전체 대학사회에는 다양성이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떨어집니다.이같은 변화는 93년 들어,특히 93학번부터 뚜렷합니다.90·91·92학번은 87년 6월항쟁의 경험이 있는 87·88학번이 군 복무 뒤 복학했을 때학교를 같이 다녀 80년대 학번들의 영향력 속에서 80년대의 정서를 지니고있습니다.그러나 93학번부터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이는 고교생 때부터 약자를 배려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정의감은 정권을 가진 사람에게 억압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입니다.그런데 이른바 ‘왕따’문화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없앴습니다.또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부모세대들의그릇된 생각과 모 재벌의 광고처럼 1등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화시켰습니다.지금의 대학사회는 4·19와 70·80년대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손수진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혁명은 진보세력이 혁명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4·19는 완성된 혁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지식인은 자기 만족에 빠져 자기들만의 우리에 갇혀 있었으며,민주화와 자립경제를 시급하게 수립해야 한다는 문제를 인식했으면 민중과 함께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을 형성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영우 4·19를 완전 성공으로도,완전 실패로도 보지 않습니다.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4·19는 미성숙 상태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풀어가는 과정입니다.4·19에 0점을 주는 것은 너무지나칩니다.역사는 단번에 100점으로 갈 수 없습니다.현재는 100점으로 가고 있는데 60∼70점에 도달한 상태입니다.지나치게 허무주의적으로 보면 도그마(dogma)에 빠지게 됩니다.도그마에 빠지면 현실에 입각한 생존논리를 주체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외래논리를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준복 해방 뒤 우리는 친일파와 변절자에 대한 청산 과정을 거치지 못했습니다.좌·우 이념대립이 반공주의로 나타나면서 청산의 문제가 흐지부지됐습니다.4·19 뒤 부정부패와 비리 청산이 다시 문제로 떠올랐지만 장면(張勉) 정부에서 청산이 되지 않았으며,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손수진 저는 4·19가 부패로 점철된 이승만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사회운동이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한 교수께서는 4·19등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건에서 지식인의 노력이 컸는데 지금의 지식인과 학생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영우 4·19를 바탕으로 1년 앞으로 닥친 21세기의 우리 모습을 그려 나가야 합니다.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적 민족주의입니다.우리 정서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신자유주의 경쟁원리도 적당한 수준에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민족주의를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이준복 언론은 학생운동의 이념성을 걱정합니다.그러나 그 이념성은 4·19를 촉발한 정의감과 다르지 않습니다.다만 이념이 더 선명해졌을 뿐입니다. 저는 학생운동의 이념이 불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수진 학생운동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폐쇄적인 면을 띠고 있습니다.운동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학생운동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설득력을 잃어가는 이념을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영우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21세기에는 사회과학적 이념보다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자애(自愛)의식을 기른 뒤 세계와 협력해야 합니다.그리고 전통문화를 정치·경제·사회 등모든 분야를이끄는 견인차로 승화시켜야 합니다.20세기 우리 전통문화를 무너뜨렸던 서양문명과 전통문화를 용해시켜 새 문명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준복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사상적 스펙트럼이 보다 다양화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공공연히 언급할 수 있는 분위기가조성돼 있지 못합니다.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포괄하지 못하면 4·19는 영원히 진행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진 자라나는 세대들이 통일 후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회의가 듭니다.교육을 통해 인도주의와 민족 동질성을 가르치고,통일이 앞으로 실현해야 할 미완의 과제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조현석 김미경기자 hyun68@
  • 여고생 임선욱 ‘그린여왕’…제주삼다수골프 우승/인터뷰/이모저모

    여고 1학년의 임선욱(분당 중앙고등학교)이 프로 언니들을 제치고 그린 여왕에 등극했다. 아마추어로 출전한 임선욱은 15일 제주 핀크스골프장에서 올시즌 국내 프로골프 개막무대이자 스포츠서울 투어 첫대회로 벌어진 99스포츠서울 삼다수오픈 여자골프대회 마지막 2라운드에서 버디 5,보기 4개로 1언더파 71타를 쳐합계 6오버파 150타로 프로 2년생 한희원을 3타차로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임선욱의 이날 1언더파 71타는 1∼2라운드를 통틀어 출전 선수 가운데 유일한 언더파 기록이다.임선욱은 아마추어에게는 상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우승컵만 받았다. 1라운드에서 2위(4오버파 76타)에 올라 이날 마지막 조로 경기에 들어간 한희원은 17번홀까지 6오버파로 임선욱과 동타를 이뤄 역전 또는 동타로 연장전을 기대 했으나 18번홀에서 통한의 트리플 보기를 범해 우승의 영예를 아마추어에 넘겼다.한희원은 18번홀에서 티샷에 이은 세컨드 샷이 헤저드에 빠져 허무하게 무너졌다.그러나 한희원은 합계 9오버파 153타에 그쳤으나 프로 가운데는 최고의 성적을 올려 우승상금 1,800만원을 챙겼다. 1라운드에서 7위(7오버파 79타)에 올랐던 임선욱은 전반 9개 홀에서버디 4개,보기 1개를 기록,침착하게 경기를 풀어나갔다.임선욱은 후반 14번홀에서버디를 추가,상승세를 보였으나 15∼16번홀에서 잇따라 보기를 범했으나 17번홀에서 파 세이브를 하며 홈 홀에 들어섰다.그러나 임선욱은 18번홀에서다시 보기를 범해 더 이상 스코어를 줄이지 못했다. 한편 김애숙과 이종임은 이날 각각 2오버파 74타,6오버파 78타를 치며 나란히 합계 11오버파 155타로 공동 3위를 차지했고 아마추어 조경희은 3오버파75타로 합계 12오버파 156타로 4위에 올랐다. 또 첫날 강풍 속에 1위를 달렸던 고우순은 샷이 무너지며 버디 없이 보기 9개,더블보기 1개를 기록하며 11오버파 83타를 쳐 합계 14오버파 158타로 공동 8위에 그쳤다. [제주 곽영완기자 kwyoung@]- 삼다수 마지막 라운드 이모저모 15일 마지막 라운드를 맞은 핀크스골프장 일원은 그동안 강풍으로 선수들을 괴롭힌데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 잔잔한 바람만 간간히 불어올 뿐 쾌청한날씨를 유지하는 등 최적의 조건을 제공.이에 따라 선수들도 지난 이틀 동안과는 달리 큰 부담없이 경기에 몰입하는 모습. 선수들은 특히 첫홀에서 부터 마음껏 자신있는 샷을 날리는 등 모처럼 스코어에 의욕을 드러내는 표정이었지만 코스 적응이 제대로 안된 듯 언더파기록자가 우승자인 임선욱 단 한명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날씨가 풀렸음에도 기록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핀크스골프장의 난이도 때문.그린은 물론 페어웨이까지 양잔디로 조성된 핀크스골프장은 러프로 볼이들어갔을 경우 클럽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잔디의 질이 단단하고 그린도 딱딱해 핀을 직접 공략한 선수들은 그린을 넘기기 일쑤였다. 아마추어로 우승컵을 안은 임선욱은 마지막 18번홀에서 세컨드샷을 그린주변 해저드에 빠드린 뒤 가까스로 보기를 기록,16번홀에 있던 한희원과 합계 5오버파 동타를 이루며 위기를 자초.그러나 뒤 이어 홀에 들어선 한희원도 세컨드샷을 물에 빠드린 뒤 드롭해 올린 4번째 샷마저 그린 에지로 떨어뜨리며 트리플보기를범해 자멸했다. 이날 임선욱의 경기를 지켜본 성원제강의 서원석사장은 그 자리에서 임선욱에게 장학금 100만원을 흔쾌히 쾌척.서원석사장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의 부친으로 “체구도 크지 않은 아마추어선수가 프로들을 제치고 우승컵을 안는모습이 장해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 '삼다수 정상' 임선욱 인터뷰 아마추어로서 쟁쟁한 프로들을 물리치고 99스포츠서울 삼다수오픈 여자골프대회 원년의 우승컵을 거머쥔 임선욱은 앳된 모습으로 “부모님과 코치를 해준 안주환프로에게 고맙다”는 말부터 전했다. 160㎝ 60㎏의 또래에 비해 다부진 체격을 갖춘 임선욱은 지난해 4개 아마추어대회에 출전,스포츠조선배 2위를 차지했던 게 가장 좋은 성적.이번 대회에서 아마추어 예선 6위로 턱걸이,가까스로 참가자격을 얻었던 만큼 첫승을 거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마지막 홀에서 우승을 예상했었나. 스코어를 몰랐기 때문에 우승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마지막 홀 앞에 세워져 있는 리더보드를 보고 선두인줄 알았다. 1∼2라운드를 통틀어 유일하게 언더파를 기록했는데. 같은 아마추어인 조경희와 함께 라운딩,일반 아마추어 대회와 같은 편한 마음가짐으로 플레이를 한것이 잘된 것 같다.그러나 코스는 무척 어려웠다.바람도 많았고 그린이 특히 어려웠다. 자신의 장점이라면. 아이언 샷,특히 롱아이언에 자신이 있다.드라이버는 비거리는 220야드 정도다.앞으로 드라이버 비거리를 늘리고 쇼트게임을 더욱 다듬어 나가겠다. 마지막 홀에서 세컨드 샷이 물에 빠졌을 때의 기분은. 보기로 막아야 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155야드가 남아 4번 아이언으로 펀치 샷을 날렸는데 마음 먹은대로 안됐다.다행히 생각했던대로 보기를 막은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켈리 로빈스다. - '삼다수 준우승' 한희원 “비록 일본에서 뛰고 있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개막전에서 만큼은 우승을하고 싶었는데 아쉽기만 합니다” 프로 최고의 기량을 입증했으면서도 아마추어 복병 임선욱에게 뒤져 우승컵을 놓친 한희원(21)은 마지막 홀에서의 트리플보기가 믿기지 않은듯 한동안홀을 떠나지 못했다.한희원은 우승자가 아마추어였던 탓에 1위에게 주어지는 상금 1,800만원을 손에 쥐었지만 진정으로 원했던 건 우승컵이었다.그나마한희원이 위안을 삼는것은 이번 대회를 통해 프로 최강의 면모를 재입증했다는 점.지난 98년 프로에 입문한 한희원은 첫해 LPGA회장컵 우승을 포함,상금랭킹 7위를 기록하는 등 단숨에 정상권에 다가섰고 지난해 일본으로 진출,역시 신인왕을 수상하는 등 일본무대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올시즌 미국무대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는 171㎝,63㎏의 단단한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파워샷이 일품이다.
  • 野, 시민단체 달래기

    한나라당이 시민단체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화해 제스처를 보내고 있지만 시민단체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15일 기자들과 만나 “최근 시민단체를 향한 우리의비판은 순수성을 잃고 정치단체화한 일부 단체의 행태를 지적한 것”이라며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다.또 이총재는 “시민단체는 정치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고 서경석(徐京錫)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박원순(朴元淳)참여연대 사무처장,손봉숙(孫鳳淑)정개련 공동대표같이 훌륭한 분들이 많다”며 은근히추켜 세우기도 했다. 이총재의 이같은 발언은 시민단체와의 장기적 대립이 당 운영에 걸림돌로작용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강경입장을 고수하던 이총재도 측근들의 화해종용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후문이다.그러나 이총재의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는 한나라당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로 하는등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치개혁시민연대(정개련) 김석수(金石洙)사무처장은 “시민단체를 매도한것에 공식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비난의 직격탄을 맞은 참여연대는 “사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정당과 시민단체와의 관계는 정당이개혁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실련도 “시민단체를 바라보는 한나라당의 인식과 관점이 잘못돼 있다”면서 “한나라당은 야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변화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시민단체협의회는 “수습국면으로 갈 수도 있는 발언”이라며 다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러나 서경석사무총장은 “정치인비리를 정치인들이 보호하려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박준석기자 pjs@
  • 대학가 하숙집 사라진다

    대학가에 하숙집이 사라지고 있다. 대학가 주변의 하숙촌에 한때 200여곳 이상씩 몰려있던 하숙집이 이제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관악구 신림9동 등 서울대 인근의 하숙촌에는 20여집밖에 남지 않았다.연세·고려·한양·성균관대 등 주변도 마찬가지다. ‘잠만 자는 방’이나 고시원,원룸 등이 새로 들어서고 있다. 하숙집이 줄어든 이유는 IMF 이후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궁핍해졌기 때문이다.자신만의 공간과 생활을 선호하는 신세대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도 한몫했다.빨래방이나 ‘고시생 식당’ 등 편의시설의 증가도 하숙집이 사라지게한 요인이 됐다. 아침과 저녁식사가 제공되는 하숙집 독방은 월 35만∼40만원,2인1실은 25만∼30만원을 줘야 한다.그러나 밖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아 월 10만∼15만원 정도 식비가 추가로 들어간다.하숙을 하면 월 40만∼50만원 정도 드는 셈이다. 이에 반해 ‘잠만 자는 방’은 독방이라도 보증금 30만∼50만원에 월 18만∼20만원 정도만 내면 된다.고시원을 이용하면 월 17만원이면 빨래까지 해결된다. 식사는학교 구내식당이나 13만원만 내면 90∼100끼분 식권을 끊어주는 고시생 식당에서 해결한다.빨래는 5,000원이면 건조까지 되는 빨래방을 이용한다.하숙에 비해 월 10만∼15만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 서울대 앞에서 18년째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강동렬(姜同烈·61)씨는 “1,2년생들은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숙집을 기피한다”면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고시원이나 ‘잠만 자는 방’을 이용하고,상대적으로 여유있는 학생들은 임대료가 2,000만∼2,500만원 정도인 원룸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모(20·고려대 법대2)씨는 “PC방에서 혼자 채팅을 하거나 네트워크 게임을 즐기는 신세대 학생들에게 여러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하숙집은 인기를 잃은지 오래됐다”고 말했다.황지환(黃智煥·26·서울대 외교학과 석사과정)씨는 “하숙집의 최대 행사인 ‘입방식’조차 없어져 옆방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하숙촌의 인심도 야박해졌다.김모씨(22·연세대 경영학)는 “식사시간 무렵 친구가 찾아와도 친구 몫의 밥도 주지 않을뿐더러 눈총만 준다”고 꼬집었다.
  • [제2공화국과 張勉](12)少壯派의 도전/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張勉정부의 안정을 뒤흔든 내부 요인은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만이 아니었다.당내 젊은 의원들,특히 신파쪽 소장파들의 반발과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된 1960년 8월23일 밤 민주당 신·구파의 소장파 대표 두 사람이 만나 양 세력이 제휴해 내각을 견제한다는 데 합의한다.다음날신파 소장파의 주요 멤버인 金在淳의원은 “신·구파 소장의원들이 새로운서클을 형성해 정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제3서클론’을 제기하고 “앞으로 구파의 朴浚圭·金泳三의원 등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金의원은 이어 “우선 신파 중진들의 모임인 13인위원회 멤버를 제거해야겠다”고 발언했다.이날자 신문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張내각 무너뜨리기(倒閣·도각)에 나섰다’는 식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8월25일 신파쪽 소장파의원들은 정치혁신을 표방하고 ‘소장동지회’(후에‘신풍회’로 개칭)를 구성했다.참여의원은 모두 36명으로 대표 격인 총무는 李哲承,대변인은 金在淳,간사는 趙淵夏가 각각 맡았다.이들은 “당내당(黨內黨)으로서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공언했다. 張勉의 첫 내각에는 소장파의원 누구도 장관으로 끼지 못했다.禹熙昌(외무)金載坤(상공)金學俊(체신)등 세 사람이,내각에서 국회쪽 일을 처리하는 정무차관으로 발탁됐을 뿐이다.따라서 정가에서는 “소장파 리더인 李哲承이 국방장관 직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자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소장동지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그것은 張총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라기 보다 그를 둘러싸고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한 ‘고시파’에의불만이었다.고시파란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고급관리를 한 사람들을 지칭했다.張勉의 첫 내각에서는 金永善재무 曺在千법무 申鉉燉보사金善太 무임소장관 등이 이에 해당됐다.이 그룹의 지도자는 은행가 출신인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이었으며 이들을 흔히 ‘원내자유당계’로 불렀다. 실제로 내각이 출범하자 구파의 梁一東은 “張勉내각이 아니라 吳緯泳내각”이라고 깎아내렸고,신문에서도 “혜화동 吳씨 사랑방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던 분들이 전원 입각했다”고 비아냥댔다. 소장동지회는 또 李錫基의원이 원내총무 물망에 오르자 “원내자유당계가내각 요직을 독점한 데 이어 총무까지 차지하려느냐”면서 李哲承을 원내총무로 미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은 ‘7·29총선’직후부터이다.광복이후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李哲承은 4·19혁명에서 7·29총선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학생운동 동지들을 공천하고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총선이 끝나자 李哲承은 30∼40대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파 소장파가 이념적인 지향성을 공유(共有)하거나 결속력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초선의원으로서 張勉내각에서 내무차관을 지낸 金永求(79)는 내내 소장파모임의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그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힘은 없지만 청신(淸新)한 정치를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지 당내 서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자신도 고려대교수(정치학 전공)시절 李哲承을 가르친 인연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金永求는 “李哲承의 인맥이 많아 그에게 정치적 기반이됐던 것은 사실이고 張박사도 골치아파했다”면서 가끔은 張勉총리가 자신에게 소장파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고 공개했다. 어쨌든 소장파는 한때 신파 의원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할만큼 세력을 키웠고 그에 따라 張勉내각에 사사건건 공격을 가했다.또 張勉정부에서는 개각이 모두 세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요하게 물갈이를 요구했다.그렇지만 2차내각에 金在淳 외무차관·金永求 내무차관이,3차 내각에 朴珉基상공차관 등몇몇이 들어갔을 뿐 끝내 장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961년 1월24일 소장동지회는 ‘신풍회(新風會)’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으로 정파의 모습을 띤다.이틀뒤에는 신민당(민주당 구파)과 무소속의 소장파가 합세해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든다. 신파 지도부와 신풍회사이의 갈등은 61년 2월 ‘중석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한다.26일 신풍회의 咸종빈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중석이 일본 동경식품에 중석 400t을 수출키로 하면서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받는 이면계약을 맺었다”고 발설한 것이다.咸의원은 아울러 그 배후에는 吳緯泳 당시 무임소장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폭로’는 정가에 태풍을 몰고왔다.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신풍회는張勉정부 최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라고 흥분했고 언론도 날마다 의혹을 대서특필했다.급기야 배후로 지목된 吳장관은 咸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야당 요구대로 국회에는 ‘중석사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사건이 확대되자 咸의원은 “소문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발뺌하고 사과하지만 張勉정부의 이미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5·16후 쿠데타군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부패사례로 꼽아 철저히 수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張勉내각이 이 사건과 관련없음을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입증해준 꼴이 된 셈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두달여 지나 월간 ‘사상계’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당대의 독설가’로 불리던 申相楚는 張勉정부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3신(新)’을 꼽았다.‘3신’이란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간 세가지,곧 ‘정부를무조건 두들겨팬 신문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신민당,그리고 신풍회였다. 張勉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故 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신풍회가)시시비비로 나온다고 하지만 항상 ‘비(非)’쪽이라 과연 당내 서클인가 의심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30년전 신풍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공개정치를 표방하는 풍토였다고는 하나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 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李哲承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77)은 제2공화국 때 만4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도 3선의원인 그는,소장파 의원 30여명이 속한 신풍회의 리더로서 ‘실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풍회가 張勉정부를 흔들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정부나 당에 해를 끼친 일이 없어요.다만 당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의견이나 정책을 낸 것까지 트집잡는다면 할 말은 없소만은” 李의장은,신풍회가 당내에서세력다툼을 벌이는 ‘파벌적’인 성격을 띤 게 아니고 일종의 정책연구 모임이라고 못박았다.“신파 지도자들이 노장층이어서 정치에 새바람(新風)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택했지만 사실 당에서 내각에 보낼 장관이나정무차관 재목이 충분하질 않았어요.지방자치제도 시행 중이니 시·도의원들도 키워야 했고.신풍회가 사람을 키워 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張勉내각이 들어선 뒤 신풍회 멤버들이 정무차관으로 많이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라는 설명이다. 李의장은,張내각 출범때 국방장관 자리를 얻지 못해 곧바로 ‘도각 운운’했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 도각까지야….신문들이 과장한 거지”라고 부인했다.그러나 국방장관 자리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남들도 다 내가 국방장관이 된다고들 믿었어요.민주당 신파에서 군 인사들이나 국방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또 나는 그때 이미 장관이 될만한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노장의원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李의장은 그 까닭을 “내가 소장파 40명쯤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까지 쥐게 되면 총리 자리를 노릴까 걱정해서”라고 풀이했다.그러면서 “張박사가 총리를 한두차례하고 난 다음에는소장파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장관이 됐다면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면서 “(쿠데타 세력이)할 생각도 못했고 하려 해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나 제2공화국,그리고 張勉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부했다.민주당은 비록 파벌과 견해차를 갖고 있었지만 순수한 민주적 정당이었고,張勉정부도 정경유착이 없는 깨끗한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대화와 타협,그리고 법치(法治)가 민주당과 張勉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고 밝힌 李의장은 “통솔력이 부족해 질서를 잡지 못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시위를 단속하는 법이 없어 데모 자체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李의장은 5·16쿠데타를 일본 도쿄에서 맞았다.미국에서 열린 제16차 UN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미국으로 돌아가 망명생활을 하다 1964년귀국하지만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71년에야 8대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張박사는 덕망과 인격 면에서는 성직자보다도 깨끗한 분이었습니다.외유내강한 분이기도 하고.부통령 시절 저격당했을 때도 의연했고,형무소나 다름없는 순화동 부통령공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그렇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약했다고 봅니다”李의장은 요즘도 張勉총리가 그립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 과기부,산업현장 파견 기술개발 지원

    경제난으로 인한 미취업·실직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일선 기업에 제공해주는 ‘산업현장 기술지원 사업’이 이번달 250명 지원을 시작으로 99년도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에 참가하는 과학기술 인력들은 ‘과학기술지원단’으로 구성돼 이들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의 연구현장에 파견,기술지원이나 연구지원 업무를맡게 된다. 과학기술부와 한국 산업기술진흥협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 사업은 미취업·실직상태의 고급 과학기술 인력에게는 연구·기술활동을 계속해 연구력을유지하면서 취업을 모색하고,기업에는 고급 인재를 공급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모집인원 및 기간 기술지원 인력 800명(3∼6개월),연구지원 인력 120명(1년)■수당지급 학력에 따라 학사는 월 60만원,석사는 80만원,박사는 100만원.경력이 10년미만인 경우는 월 80만원,10년이상은 100만원(학력과 경력중 유리한 쪽을 적용)■지원자격 97년 1월1일이후 졸업자로 취업하지 못한 이공계 분야 석·박사 및학사학위 소지자(학사의 경우는 산업체 연수경력이나 취업교육이수 경력이 4주이상인자 또는 산업재산권 출원자,부양가족이 있는 세대주에 한함).단,학위과정의 학생이나 병역특례자로 특례기간에 소속된 자는 제외■신청기간 99년 2월11일부터 수시접수■신청방법 및 접수 과학기술지원단 참여 신청서를 작성,한국 산업기술 진흥협회 산업기술지원팀으로 접수 문의 (02)2185-8887
  • 韓-日 항공협상 성공적

    우리 정부가 올들어 처음 열린 한·일 항공협상에서 상당한 ‘전과(戰果)’를 올려 화제다.지난 1월20일 제주에서 열린 협상 결과를 토대로 건설교통부는 지난달 24일 기대이상의 결실을 따냈다.서울∼오사카(大阪) 노선은 주 9회 늘어나게 됐고 서울∼후쿠시마(福島) 노선은 주 4회 신설되게 됐다.서울∼센다이(仙台) 노선의 주 3회 화물기 증편도 관철됐다.이로 인한 연간 수익은 5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한일어업협상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가운데 이뤄진 일이어서 더욱 대비된다. 이같은 결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후일담을 통해 밝혀졌다.전문성과 끈덕짐,그리고 치밀한 전략의 3박자가 어울려 이뤄낸 결과였다. 우리측 협상팀인 건교부 국제항공협력관실 咸大榮국장과 鄭日永과장 등 모두 7명은 협상 6개월전인 지난해 7월부터 3개월동안 ‘적진(敵陣)’ 탐색에들어갔다.운수성의 항공정책과 공항 현황,일본 항공사별 입장 등을 체크해나갔다. 일본측 실무협상 책임자인 류에이 마에다(前田隆平) 운수성 국제항공과장을 서울로 ‘모셔와’ 회유공세도 병행했다.협상 때는 노선 증편을 반대하는 일본 항공사 대표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폭탄주까지 곁들였다.“한·일 양국이 협력하지 않은채 항공자유협정이 발효될 경우 (두나라 모두) 미국에 앉아서 당한다”고 설득했다.일본 대표단은 나중에 “가장 힘든 회담이었다.한국 대표들처럼 집요하고 공격적인 사람은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는 후문이다. 咸국장과 鄭과장등 우리측 협상팀 7명 전원은 항공 및 경제학 분야 석사이상 학위 소지자들. 협상이 성공하기 위해선 전문성,집요함,탄탄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건교부 안팎의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 대신증권 인턴사원 대규모 채용

    대신증권은 지난해 말 76명의 인턴사원을 1차로 선발한데 이어 다음달 중으로 250∼300명의 인턴사원을 추가 채용하기로 했다고 29일 발표했다. 이번에 채용되는 인턴사원은 4년제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자중 미취업자를대상으로 하며 인턴 1년후 정식사원으로 채용된다.대신증권 관계자는 “이번 대규모 채용은 올해 14개 영업점을 추가 개설하기로 한데 따른 것”이라며“증권분석사나 투자상담사 등 증권과 관련된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한다”고 말했다.문의는 대신증권 인사팀 (02)-769-2130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20)이애주 교수

    춤꾼은 발딛고 선 땅의 이야기를 허공에 퍼뜨리며 땅과 하늘을 잇는다.하지만 대개의 우리 춤은 관념적인 동작에 머무르며 현실과는 따로 놀았다.87년시위 현장과 노제에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풀어낸 이애주교수(당시 40·서울대 체육과)의 ‘바람맞이춤’은 이런 통념을 깨뜨렸다. “춤의 본질은 인간의 건강성과 바르게 사는 법을 몸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긋나게 흘러왔지요.정부의 탄압과 사회현실을 모르쇠한 춤꾼들의 의식이 주요 원인이죠” 이른바 ‘시국춤’이라 불린 그의 춤작업은 당시 민족·민주운동의 상징이었다.‘춤꾼,더구나 국립대 교수라는 점잖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삐딱한(?) 선입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그러나 거친 무명옷을 입고 온 몸으로 불사르는 이교수의 춤사위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 70년대초 음악의 이종구·김영동·김민기,마당극의 임진택·채희완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문화운동 1세대와 어울리며 탈춤과 우리춤,민요 등을 연구했다.밤을 새며 토론한 내용은 동작이나 기교로서 탈춤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지혜였다. ‘조국은 하나다’(김남주시집) ‘대륙의 붉은 별’(모택동평전)등 무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책들이 연구소를 채우고 있는 것도 그의 춤을 살찌워온 것이 ‘사회’였음을 보여준다.74년 ‘땅끝’ 공연을 준비하다가 경찰에끌려간 것이나 놀이패 ‘한두레’ 활동,탈춤보급운동 등은 그의 세계관이 어디에 있는가를 대변한다. “민주화운동 현장에 참여한 것은 저의 춤과 삶을 깊이 있게 만들어 줬습니다.예술과 현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값진 교훈을 주었죠.‘씨·물·불·꽃춤’을 담은 ‘바람맞이춤’도 역사와의 만남때문에 가능했지요” 생명을 잉태하는 ‘씨’와 그것을 살리는 ‘물’은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고문에 대한 대항논리로 만들었고 권인숙을 고문했던 불지짐에서는 ‘불’을보았다는 이교수는 이 모든 양심들이 다시 태어나라는 염원을 ‘꽃’에 담았다고 말한다.“누님은 사회가 춤을 추게해야 한다”는 당시 풍물패 후배 조경만교수(목포대)의 격려도 큰 힘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런 치열한 의식이 빚는 춤사위 덕택에 이한열,조성만,문송면(수은중독으로 사망),이석규(분신한 대우노동자)등 당시 열사들의 원혼은 비로소 구천을 떠날수 있었다.차마 감지 못한 눈들이 그의 살풀이춤을 빌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갔다.무대춤 형식으로는 맺힌 것을 풀어주고 극복하는게 불가능했기에 거리로 나선 것이다. “한열이가 최루탄을 맞고 죽는 장면을 재연하면서 베를 가르고 나가는데한열이 어머니가 실신하고 누나는 ‘한열이가 왔다’면 통곡합디다.할복 투신한 조성만의 거리춤 재연때도 비슷했습니다.제가 유족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역할을 한거죠” 과거를 회상하는 이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어 알듯 말듯한 미소로 표정을 바꾸었다.그 뜨겁던 역사의 현장에서 묵묵히 ‘춤’의 세계로 침잠할 때처럼.이교수는 역사의 현장과 잠시 거리를 둔 상황을 에두른다. “88년 범민족대회를 평가하는 모임에서 크게 실망했습니다.주체세력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보고는 ‘내 춤이 계속 여기 머물러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소신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닐 바에는 차라리 들어 앉아 춤이나 정리하자고 결심했죠” 그동안 10년이 흘렀다.사람들은 ‘이애주가 운동권과 단절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어떤 이는 ‘역사의 현장에서 춤의 뿌리로 돌아왔다’며 애써 이애주의 변신(?)을 반겼다.모두 단편적이고 좁은 시각이었다.모두 그의 춤에서 현실 참여만을 떼서 본 탓이다.애초에 둘은 따로 있지 않았다.그는 전통춤에서 저항이라는 뿌리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춤을 계승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일부 언론에서 ‘운동권 단절’ 운운해 당황했습니다.무엇보다 운동권에 누를 끼친 것같아 미안했습니다.하지만 저는 결코 단절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애주에게 춤은 무엇인가.어릴 때에는 몸에서 배어나온 ‘흥’이었다.아버지 직장의 야유회 여흥시간은 그의 무대였다.‘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알아본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민요나 전통춤을 그럴듯 하게 흉내내는 딸을 데리고 이왕직 아악부’(국립국악원 전신)로 갔다.민요춤 소고춤 칼춤을 배웠다.그곳에서 한성준류 ‘승무’를체득했던 김보남선생을 사사한 것은 ‘운명’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를 눈여겨 본 한영숙선생(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보유자)은 첫 제자로 받아들였다.이애주에게는 몸에 익은 춤사위였다.그러나 한때 스승은 제자의 ‘외도’를 이해하지 못했다.춤만 배울 것이지 이상한패거리들과 어울리다 자신의 연습장에 경찰이 들이닥치지 않나,툭하면 형사들이 찾아와 ‘이애주에게 무얼 가르쳤소’라고 다그치곤 했기 때문이다. “저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어요.내색은 않으셨지만 좋아하지 않으셨죠. 나중엔 이해해 주셨는데 제 마음속의 미안함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최근 이교수는 고구려 벽화에 푹 빠져 있다.그림속 고구려인들에게서 우리춤의 원형을 보았다.그곳에서 새 밀레니엄을 우리식으로 열어 젖힐 방도를찾고 있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그는 다른 약속장소로 향했다.멀리보이는 관악산 위에 그의 단아한 몸이 떠오르면서 수많은 집회·장례식장의 춤이 겹쳐졌다.87년 대통령선거때 백기완후보의 TV유세 찬조연설를 하는 강렬한 인상이 지나가는가 싶더니 하얀 장삼과 붉은 가사,남색 치마를 입고 북채를 들고 있다. 부드럽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춤사위로 개인의 번민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토해 내고 있다.그 속엔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통과해 온그의 큰 깨달음이 들어 있었다. - 그의 길(이애주 교수) 47년 황해도 사리원 출생 54∼63년 ‘이왕직 아악부’에서 김보남 사사 59∼61년 이화여대 주최 전국무용대회 3년 연속 우승 64년 문화공보부 신인무용경연대회 특상 65년 서울대 체육교육과 입학,석사 학위,서울대 국문과 편입 졸업 6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 한영숙 사사 82년 서울대 체육교육과 전통무용 전임강사 83년 공간 전통예술의 밤’ 공연 95년 서울대 정교수 96년 무형문화재 지정 98년 ‘이애주 춤’ 공연
  • [朴康文 코너] ‘미스 리’의 슬픔

    “어이 미스 리,커피 한잔 줘.”‘미스 리’는 고개를 들어 동료 남자 사원을 쏘아보았다.남자 사원이 퉁명스럽게 다죄었다.“커피 좀 갖다 달라니까그래.” ‘미스 리’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거기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입만 있어요?” 사무실 안의 공기는 썰렁해졌다.웬 여자가 저리 거세냐는 듯놀란 눈길의 얼굴들…. 대학원 공부까지 해서 석사가 되어 선망하던 큰 기업체에 남자와 동등하게시험을 치고 들어가,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이 여사원의 하루하루는 기분잡치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아무개라는 성명 석자는 제쳐놓고,상사나 한두 해 먼저 들어온 선배 사원,심지어 함께 입사한 동기 남자들까지 ‘미스 리’하고 부를 때마다 속이 끓었다.저들은 자리에 한가롭게 앉아 있으면서 여자 동료 사원의 커피 ‘서비스’를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꼬웠다.분위기를 위해 좀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 “미스 리,오늘은 섹시한데” 어쩌구 하는 따위의농지거리를 걸어 오는 것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몇 달 동안 견디다 대학 강사자리가 나오자 미련없이 회사를 떠났다.막상대학 시간 강사를 해 보니,강사료는 교통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것도 없고,대학사회라고 성차별이 덜하지 않았다.같은 무렵 시작한 남자 강사들은 몇 해지나자 하나 둘 전임 자리를 얻는데,10년이 가깝도록 여자에게는 오라는 데가 없었다. 대학 강사로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노라니,‘때려 치운’ 옛 직장이 더러 생각나기도 했다.월급 괜찮은 그 곳에서 고분고분 차 심부름이나 잘 하면서 초년을 국으로 죽어지낼 걸 그랬지 후회까지 하는 자신이 처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 또 하나.올해 취업 전선에 나선 ‘미스 리’ 후배도 가장 괜찮다는대학을 괜찮은 성적으로 나왔다.두어 가지 외국어 실력을 자신이 있을 만큼닦았으며,생활과 밀접한 몇 가지 법률을 공부하고 컴퓨터도 익혔다. 국내에서 괜찮은 곳으로 알려진 회사에서 급여가 괜찮은 신입 여자 사무원을 공채한다고 해서 응시했다.영어 필기 시험과 회화 시험이 있었다.국제시대니까 국제적인 업무도 있을 것이고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겠구나 하고기대감을 품었다. 기대는 면접 때 벌써 깨지고 말았다.면접위원으로 사무원 고참인 듯한 여성이 나왔는데,영어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영어로 볼 업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면접위원이 이력서를 훑어보고 나서 하는 질문은 더욱 가슴시린 것이었다.“아침에 출근해서 차 몇 잔씩 ‘서브’해야 하는데 그런 일할 수 있어요?” 또 물었다.“은행 심부름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요?” 여성 스스로 여성의 설자리를 한정하고 다른 여성한테도 그리 하도록 다짐을 놓는다.급사가 필요하면 급사를 따로 채용해 쓰도록 해서 제 본분을 찾으려고 여성들이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구직 초년생이 말할 수는없었다. 세상 형편이 선배가 첫 취업하던 때하고 또 달라서 남자와 동등하게 겨룰만한 곳에서는 여자를 거의 뽑지 않았다.몇몇 군데 알아본 자리들이란 것이그렇고 그랬다.급여 수준이 신통치 않거나 구실이 고작 ‘고학력 급사’에가까웠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해 보지만 선배의 곤고한 삶이 눈앞에 어른거린다.요즘같은 취업난 시대에 너무고르지 말고 안정된 일자리라면 자존심 눅이고 잡으라는 주위의 충고를 귓곁으로 흘릴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안다. 또 한 사람의‘미스 리’가 될 사회 새내기는 제 앞길에 놓인 장벽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 [이런사람이 대접받는 사회]정보통신부 崔世河사무관

    농고출신의 말단 공무원이 대학교수가 됐다.9급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 끝에 일궈낸 결실이어서 더 값지다.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진흥과에서 소프트웨어(SW)진흥정책을 맡고 있는 崔世河사무관(48).70년 강원도 평창농고를 졸업,다음해 정보통신부의 전신인 체신부 9급 전송기술직으로 공직사회에 첫 발을 디딘지 30년만에 대학강단에까지 서게 됐다. 최근 산업인력 교수요원제에 도전,70대 1의 경쟁을 뚫고 모교인 동양공전전문대 정보통신학과의 겸임교수로 선발됐다.이번 학기부터 주 1회씩 강의한다. 정통부 출범 이후 말단관리 출신의 공무원이 대학강단에 서기는 처음있는일.그는 “어려서부터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생각을 실천에 옮긴 결과”라고 말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남다른 의지와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 농고를 나와 마땅한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독학으로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체신부 전송기술직 9급에 응시해 합격,서울전파감시국에서 말단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그의 인생을 바꾸는전환점이었다. 73년 야간인 동양공업전문대 전자통신과를 나온 뒤 75년에는 명지대 전자공학과로 편입해 학사학위를 받았고 기술직 공무원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위해 85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연세대 산업대학원전자공학과에서 국비위탁생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2월에는 청주대학교에서 전자공학과 박사가 됐다. 그렇다고 직무에 소홀했던 건 아니다.그는 “공부때문에 일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남보다 2배 이상 더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말했다.국무총리상과 체신부장관상을 4차례나 받는 등 상도 6차례 받았고 무선설비기사 1급과 전자기사 1급 등 자격증도 4개나 갖고 있다.한국통신학회 등에 그동안 14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통신관련 전문서적 4권을 내놓기도 했다.
  • [굄돌]튀는 끼 전성시대

    ‘30여년 동안 주말이면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요.바람기가 없었다면 이 방대한 작업도 불가능했을 겁니다.’우리나라의 춤과 민속예술의 지킴이 정병호 교수가 최근 전통춤을 연구한 ‘한국의 전통춤’을내놓으면서 한 마디 감회 어린 말씀이다. 그 변함없는 ‘바람기’를 우러러보면서,내가 시쓰기를 염원하는 눈푸른 젊은이에게 강조하는 것이 ‘튀는 끼’이다.어느 누구도 못말릴 끼가 없다면시인으로서 자격이 없다.즉 보통 사람이 유행 따라 빨간 옷을 입을 때 유독검은 옷을 입는 것도 튀는 끼일 것이다.이 끼 있는 행위에서 독창적인 창조물이 생산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개성을 요구하는 이 세기말의 첨단시대.튀는 끼를 으뜸으로 삼는 기업 채용기준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합리적이고성실한 사람을 선호했던 과거와 달리 특정분야에서 자기만의 주특기를 가지고 있거나,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인재를 원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이는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인력을 채용해서는 전문화,다양화 시대에 적응할수 없다고 판단한 자구책으로 풀이된다. 한 기업은 올 하반기부터 평범한 인재 대신 범죄심리전문가,공인회계사,경영학석사,바둑기사 등 전문가와 해외 경험자,수학경시대회 우승자,신춘문예·대학가요제 입상자나 동아리회장,학생회장 등 독특한 경력 소유자 채용을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또 체육특기자를 상당수 뽑아 저돌성과 적극성이 요구되는 마케팅부서에 배치할 계획이란다.그리고 각종 국가고시 합격자,경시대회나 디자인 공모전에서 입상한 사람도 우대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도 서서히 채용방식을 바꿔가고 있다.지금까지 적용해왔던 범용성 인재,평균적인 인재,순응 협조적인 인재상을 버렸다.대신 개성과 튀는끼가 넘치는 인재,도전적이고,적극적인 인재를 뽑고 있다.바야흐로 튀는 끼전성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 갈곳없는 석·박사들…기업硏들 채용 꺼려

    경제 위기로 기업들의 병역특례자 채용률이 크게 낮아져 석·박사 학위를소지한 상당수 이공계 고급연구인력들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채용됐더라도 장기간 무급휴직을 시켜 특례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대기업인 H사 부설연구소에 채용된 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 41명은사내 연수가 끝나자마자 1년간 무급휴직 통보를 받았다.무급휴직 기간은 군복무기간으로 산정되지 않아 특례자들로서는 시간만 허비하는 셈이다. S대 공대 석사 출신의 A씨(26)는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다른 회사로 옮길 생각도 했으나 조건이 더 좋은 기업을 찾을 수 없어 1년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회사측은 무급휴직 기간에는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8월초부터시작될 감원을 피하게 하기 위해 무급휴직을 실시했다고 해명했다. S사 부설연구소에 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으로 채용됐던 B씨(30·S대 공대박사과정)는 지난해 9월 갑자기 입사가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고 일단 학교연구소에 들어갔다.같은 회사에 취직하기로 돼 있던 C씨(25·H대 석사출신)도 취업이 취소돼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D씨(25·S대 공대 석사졸)는 취업하려 했던 회사에서 지방 공장에 내려가든지 입사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D씨는 그동안 받은 장학금을 돌려주기도 어렵고 입대 유예기간인 3개월 안에 다른 회사를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지방으로 내려갔다. 한국산업진흥협회에 따르면 민간기업에서 채용한 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의채용률과 채용인원은 IMF체제 이전인 96년과 97년에는 각각 병무청 허가 인원의 83%인 1,687명,84.4%인 1,685명이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채용률이 69.2%로 떨어져 1,486명만이 취업했다.97년 7조7,000억원이던 민간기업의 연구개발투자비가 지난해에는 7조2,000억으로 6%나 줄어든 여파라는 협회측의 설명이다. 이 협회 丁海赫씨(35)는 “고급 인력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큰손실”이라면서 “미래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 [포커스 투데이]플로레스 엘살바도르 새 대통령

    92년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좌우익의 12년에 걸친 내전으로 7만명이 희생된 ‘피의 땅’ 엘살바도르에 30대 철학자 대통령이 탄생했다. 7일 실시된 선거에서 좌익 정치조직 FMNL의 파쿤도 과르다도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승리한 집권 민족공화동맹(ARENA)의 프란시스코 플로레스(39).오는 6월1일 5년 임기에 공식 취임하는 그는 8일 “거국내각을 구성,범죄·빈곤과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국정운영의 포부를 밝혔다. 그는 유세 중 정책제시에 중점을 둔 미디어 선거전으로 국민들을 사로잡았다.선거때마다 서로를 ‘공산주의자’와 ‘착취계급’으로 몰아부치는 이데올로기 싸움에 식상한 엘살바도르인에겐 신선한 바람이었다.이는 새로운 제3세계의 선거양태로도 주목받았다. 미국 앰허스트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플로레스는 80년대 초반 인도에서 힌두교 신비주의자 사이 바바를 사사하고 그 정신적 교훈에 바탕을 두고 설립된 미국 월드대학에서 철학석사를 받았다. 80년 조부가 좌익게릴라에 의해살해당했으며 정부 고위관료이던 장인도 89년 암살 당한뒤 정치판에 뛰어든그는 90년 행정부 관료로 출발,94년 국회의원이 됐고 집권당 원내총무로 있다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매일 20여명이 살해되는 치안부재상태에다 국민의 반수가 절대빈곤상태에 있어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그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 ‘문화 공공근로’에 우수인력 수두룩

    문화부문의 정보화 공공 근로사업이 고학력 실업 해소와 숙원사업 해결의일석이조효과를 거두고 있다.IMF사태하에서 피어나는 슬픈 ‘성공이야기’인 셈이다. 일반 공공 사업이 나무가꾸기,하천정비 등 단순 노무형인 것과는 달리 문화체육부의 정보화 공공근로사업은 영화자료 정리,한국 소개자료 정비 등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들이다.이 때문인지 지원자들의 대부분이 대졸자들이고 해외 유학파,연구원 출신 등 고급 인력도 적지 않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최근 영상관련 시나리오 DB구축,영상 관련 논문 DB구축,LP·CP 음반자료정리,극영화 필름 디지털화 등 종합영상자료 DB구축사업에 참여할 공공근로인력 331명을 선발했다.이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불문학,고미술분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여성 2명과 국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40대남자를 포함,석사학위 이상 소지자가 30여명에 이른다. 해외문화홍보원이 추진하고 있는 한국관련 영문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에는 240명 모집에 2,225명이 지원했다.지원자 중에는 석사 이상이 82명이나 된다.미국 댈러스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하던 A씨(43),미 해군 미사일연구소 연구원 출신으로 국내 중견 해외방산부문에서 일하던 B씨(46),경영학 석사출신으로 정부 및 대기업 산하 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던 C씨(41) 등 쟁쟁한 경력을 자랑한다. 문화부의 한 관계자는 “이들 사업은 문화 인프라 구축차원에서 필요한 사업이었지만 그동안 재원과 인력이 없어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며 “이들의경력을 최대한 활용,숙원사업을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공공근로인력들에겐 업무에 따라 2만2,000∼3만2,000원의 일당이 월급여 형태로 지급된다.
  • 문화산업 전문대학원 세운다

    이르면 2000년부터 신기술 육성을 위한 영상 방송 광고 애니메이션 분야의전문대학원이 설립된다.첨단분야의 기술자,석·박사 등 고급·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인력풀제’도 도입된다. 또 앞으로 4년동안 2,000명의 전문어업경영인력이 양성되고 신규 택시운전자를 위한 택시운전양성대학이 설치되는 등 전문교육훈련기관이 다원화된다. 국가차원에서 국민의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중앙단위의 평생교육센터와 지역별 평생교육센터도 운영된다. 정부가 8일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대비해 노동부 교육부 산업자원부 등 관련부처와 협의를 거쳐 마련한 ‘중기 직업교육훈련 기본계획안(1999∼2003년)’에 따르면 고부가가치 창출이 예상되는 영상 애니메이션 등 문화산업분야의 전문대학원을 설립하고,중등단계의 영상고등학교도 설립해 전문인력을 조기에 육성하기로 했다. 전문대학원은 석사 2년·박사 3년의 전문학위,박사 3년의 학술학위 및 단기 비학위과정을 설치하는 형태가 적극 검토되고 있다. 또 직업교육훈련시장 인프라 구축의 일환으로 ‘관광인력센터’를 설립해관광분야의 전문인력 육성프로그램 등의 업무를 맡기기로 했다. 교육훈련의 특성화를 위해서는 실업계고교 및 전문대학,일반대학 등에 산업체가 직접 지원하는 ‘특약학과’가 설치된다.여학생의 공학분야 진출을 넓히고 공고·공대 진학자를 우대하는 등 여성기술인력 개발도 적극 추진된다. 이와함께 공공직업훈련기관을 단계적으로 독립법인화하고,기관운영도 민간전문기관에 위탁하거
  • 대기업→벤처기업 고급두뇌 대이동

    벤처기업에 ‘고급두뇌’들이 몰리고 있다.IMF한파에 따른 구직난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우수인력들이 몰리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 유수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유학파들도 많다. 대기업 구조조정과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 추진되면서 대기업을 나와 전도유망한 벤처기업으로 옮기는 ‘스카우트 역류현상’도 두드러진다.창조적이면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우수인력들의 도전정신도 작용했다. 인터넷 마케팅업체로 코스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골드뱅크사의 경우전체 직원 45명 가운데 지난해말 이후 수시로 채용한 인원이 15명이나 된다. 대부분이 ‘일류 직장’인 굴지의 대기업에서 옮긴 이들로,석사만 5명이다. 이 회사 金鎭浩사장은 “구조조정 회오리속에서도 근무하던 회사에서 붙잡으려 했을 만큼 인정을 받았지만 스스로 원해서 나온 이들이 많다”고 소개했다.석사출신으로 대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다 지난해 11월 입사한 崔모씨(35)는 “대기업 신화가 깨진 것도 이직의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창의적인 일을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방송장비업체 건잠머리도 직원 30명가운데 23명이 석·박사들이다.대부분지난해 이후 신규채용된 인력들이다.현재 사업규모에 맞게 적정인력을 유지하려고 이 정도만 선발했지, 필요하다면 고급인력 확보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지원자들이 자원을 우수했다는게 회사측 설명이다. 위성인터넷 시스템업체 텔리맨은 지난해 하반기이후 고급인력이 몰리기 시작,29명 가운데 석·박사학위 소지자만 13명이나 된다.이 가운데 미국 콜롬비아·일리노이주립대,일본 게이오대에서 전자·컴퓨터를 전공한 이들도 포함돼 있다.지금도 유학파나 대기업,연구소 등의 고급 엔지니어 10여명이 입사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 회사 金容萬사장은 “창업초기였던 2년전만해도 뿌리깊은 대기업 선호의식때문에 인재확보에 어려움이 컸다”면서 “정부가 벤처기업 인력지원책으로 내놓았던 병역특례를 통해 고급인력을 충원하려 했던 것도 옛날 일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 소프트웨어 진흥원 許勳과장은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융성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 구조조정에서 빚어진 고급인력의 이동 때문이었다”고 소개하고 “인력이 가장 중요한 자산인 벤처기업의 특성상 지금이 호기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金煥龍 dragonk@
  • 민초의 사랑 받아온 ‘이발소 그림’ 정리

    고등학교 미술교사인 박석우씨가 펴낸 ‘일상속의 미술:이발소 그림’은 근·현대적인 의미로서의 이발소 그림을 대중미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최초의 시도이다. ‘소녀의 기도’,‘만종’,물레방아 도는 초가집 풍경 등 이발소에서 흔히만났던 그림들은 서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지만 제도권 미술로부터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 민화의 연장인 이발소 그림은 진정한 소통력과 생명력으로 시대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이발소 그림은 대중의 주변에서 풀뿌리처럼 모질게 자생했다.막걸리처럼 밀주처럼 민초 속에서 만들어져 민초들에게 사랑받았다.그것은 바로 생활 속의 미술,살아 숨쉬는 미술이다”고 저자는 말한다.이발소 그림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발표했던 그는 1990년부터 8년동안 전국을 누비며 수집한 3,000여점의 그림중 155점을 선정,수록했다.동연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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