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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⑨-KCC 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⑨-KCC 그룹

    KCC 하면 아직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페인트 ‘숲으로’ 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금강고려화학의 영문 첫글자를 아예 사명으로 정한 KCC는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과 매우 밀접한 기업이다.KCC 제품 없이는 집을 지을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유리, 창호재, 바닥재 등 웬만한 건축자재는 거의 다 만든다.“없는 것은 시멘트와 철골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1958년 8월, 스물두살의 대학생이 “장형의 유학 제의를 뿌리친 채” 직원 일곱명을 데리고 서울 영등포에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세운 게 KCC그룹의 출발이다. 땀에 흥건히 젖어 ‘슬레이트’를 직접 찍어내던 대학생 사장이 바로 오늘날의 정상영(69) 명예회장이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왕 회장)의 막내동생이기도 하다. “왕 회장의 형제나 자식들은 대부분 크든 작든 기업체를 떼어 받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오롯이 혼자 힘으로 기업을 일으켰다. 공장의 벽돌 한 장, 물빠지는 배수로 위치, 못 하나까지 직접 얹고 정하고 박았다.” 정 명예회장과 30년 가까이 동고동락해온 한 임원의 얘기다.KCC가 짧은 시간 안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현대’라는 확실한 납품처 덕도 있었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창업주의 저력을 빼놓을 수 없다. KCC그룹은 지난해 1조 9000억원의 매출과 1300억원의 순익을 올렸다.KCC건설(옛 금강종합건설), 코리아오토글라스(자동차유리 생산업체), 고려시리카(유리원료 제조사), 금강레저(골프장 운영업체) 등 7개 계열사 모두가 흑자를 내고 있는 재계 서열 29위(공기업 제외)의 알짜그룹이다. 특히 건축·산업자재 부문에서는 2위와의 격차를 갈수록 넓히며 독주하고 있다. 자산규모는 4월1일 현재 3조 5300억여원으로 현대백화점그룹(3조 7800억원)과 비슷하다. ●왕회장도 꺾지 못한 막내의 고집 그 자신 “공부가 싫어 소학교 졸업장이 전부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아우들은 유학 아니라 그 이상도 해주고 싶었던”(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가운데) 왕 회장은 동국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막내동생 상영(SY)도 유학보내려 했다. 그러나 SY는 “나도 내 사업을 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왕 회장의 한마디가 곧 법이었던 현대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가 사람들은 “막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유학자금을 불모지나 다름없던 건자재 사업밑천으로 털어넣은 SY는 “통금시간(밤 12시)에 맞춰 퇴근하고 해제 사이렌(새벽 4시)에 맞춰 출근”했다. 운도 따라주었다. 때마침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초가 지붕이 속속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금강스레트는 찍어내기가 바쁘게 팔려 나갔다. 제법 돈이 모이자 젊은 상영은 슬몃 욕심이 생겼다. 당시 인기있었던 초콜릿시장 쪽을 기웃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장형의 호된 꾸지람이 돌아왔다.“초콜릿은 네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다. 이왕 사업을 할거면 국가경제에 도움되는 것을 하라.” 정신이 번쩍 든 SY는 이때부터 건축·산업자재 국산화에 매달리며 한 우물만 팠다. 변변한 기술 하나 없이 선진국이 장악하고 있던 도료(74년), 유리(87년), 실리콘(2003년) 사업에 차례로 진출했다. 다들 “무모하다.”며 말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13년이나 걸려 완공한 전주의 실리콘공장은 SY의 뚝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몽진(45) 회장은 언젠가 사석에서 “전후복구사업과 수입대체 사업으로 국가경제에 이바지했다는 아버지의 자부심은 큰아버지(왕회장)에 못지 않다.”고 말했다. 불같은 성정도 비슷하다. 왕 회장에게 혼쭐나 넋이 나간 현대건설 임원이 출입문 대신에 캐비닛 문을 열고 들어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듯,KCC에는 한 임원이 정 명예회장에게 야단맞던 도중에 기절한 실화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아들들이 소신껏 일하도록 부러 13층 회장실에는 출근하지 않는 정 명예회장은 대신 지방공장 순시로 ‘취미’를 바꿨다. 전국 13개 시·도에 모두 공장이 한 곳씩 있어 발길 닿는 대로 불쑥 들러 젊은 날 자신이 직접 들여놓은 설비들을 살펴보곤 한다. ●5개국어 능통한 정몽진 회장 SY는 아들만 셋을 두었다. 지난 2000년 그룹 경영을 장남인 몽진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 앉았다. 이 해는 그룹의 양축인 ‘금강’(슬레이트 등 무기화학 전문)과 ‘고려화학’(페인트 등 유기화학 전문)이 합병돼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장남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 회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MBA(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귀국후 1991년 고려화학 이사로 경영에 합류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즈니스 영어는 그룹 안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 중국 곤산의 페인트공장 준공식 때는 유창한 중국어로 식사를 해 현지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실리콘 기술 개발을 위해 해외 과학자들과 담판을 벌일 때도 통역 없이 직접 설득에 나섰다. 이런 그를 보고 정 명예회장은 임원들에게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저렇게 잘 하는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왕 회장을 닮아 칭찬에 인색한 정 명예회장은 아들 앞에서는 일절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이 그룹의 기반을 닦았다면 정 회장은 ‘3대 키워드’로 제2 도약을 노리고 있다. 첫번째 키워드는 해외다.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현재 3곳(중국 2, 싱가포르 1)인 해외 생산공장을 앞으로 3년 안에 5개를 더 지어 8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환경 파괴를 대체할 차세대 성장산업인 실리콘과 건자재 유통도 핵심 키워드다.“유통을 빼앗기면 이름없는 하청업체로 전락한다.”는 것이 정 회장의 지론이다. 한 임원의 얘기다.“명예회장님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스타일이다. 그러다보니 다소 보수적이다. 반면 회장님은 해외유학파답게 세계시장의 변화와 큰 흐름을 빨리 읽어낸다.” 장남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세 아들 가운데 가장 털털해 친화력이 좋다. 한때 고려대 ‘막걸리 시범조교’로 활약했던 술 실력을 바탕으로 해마다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임직원들과 삼겹살 소주 파티를 벌이곤 한다. 요즘에는 위장이 나빠져 와인으로 주종을 바꿨다. ●SY의 또다른 자부심 둘째 아들 몽익 둘째 아들 몽익(43)씨는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경영정보시스템(MIS)을 전공했다. 이어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국제재정학 석사학위를 땄다. 그는 이 전과정을 4년만에 끝마쳤다. 금강과 고려화학 합병 직후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도록 경영시스템을 새로 구축한 주역이 바로 그다. 최근에는 사무실 기기를 최신 오피스용 가구로 교체하고 소프트웨어도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룹의 보이지 않는 경쟁력을 강화시켜온 덕분에 올 2월 KCC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물론 직급은 총괄 부사장으로 같은 대표이사인 형보다 아래다. 입사(89년 금강)는 형보다 2년 빠르다. 적절한 긴장관계를 통해 건전한 경쟁을 이끌어내려는 정 명예회장의 의도가 엿보인다.KCC 지분을 몽진(17.7%)-몽익(8.82%)-몽열(5.29%) 세 아들에게 모두 나눠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정 부사장은 형보다 더 꼼꼼한 편이다. 과묵해서 임원들이 말붙이기를 다소 어려워한다. 의외로 운동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잘한다. 고등학교 때는 전국체전에서 승마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농구·스키·수영 실력도 프로급이다. 골프는 싱글(핸디 10)에 가깝고 엄청난 장타다. 반면 정 회장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클래식이나 재즈 등 집에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정 회장이 동생 얘기가 나오면 사석에서 곧잘 하는 얘기가 있다.“딜(deal)은 아무래도 내가 좀 더 강하다. 그러나 디테일은 동생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내가 협상을 통해 골격을 세우면 그 골격에 맞게 디테일을 짜는 것은 몽익이다.” 유난히 용산고 출신이 많은 것도 KCC가의 특징이다. 막내 몽열씨를 빼고는 3부자(父子)가 모두 용산고를 나왔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도 용산고 출신이다. 모교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애정은 유명하다. 장남 몽진씨가 이른바 ‘뺑뺑이’로 용산고에 배정됐는데도, 발표난 그 길로 친구들에게 한 턱 냈을 정도다. 용산고에 승마반도 만들어줬는가 하면 농구 코트까지 지어줘가며 허재 등을 영입, 오늘날의 ‘농구 명문’으로 키워냈다. 몽진씨와 몽익씨는 고등학교-대학교(고려대)-대학원(조지 워싱턴) 동문이기도 하다. ●‘스위첸’ 성공시킨 ‘리틀 정상영’ 셋째 아들 몽열 89년 미국 FDU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스물여섯살의 나이에 고려화학에 입사한 셋째 아들 몽열(41)씨는 97년 금강종합건설 상무가 되면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건설 체질’이다. 공사판에서 소주잔 기울이기를 좋아하고, 낭만도 아는 기분파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그룹 임직원들이 정 명예회장 다음으로 무서워하는 존재다. 정 회장도 “우리 형제 가운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 막내”라며 “몽열이가 화나면 나도 무섭다.”고 농반진반 얘기할 정도다. 작고 단단한 체구나 사업 수완도 아버지를 빼닮았다. 2003년 사장으로 승진한 몽열씨는 주택사업 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2년 만에 ‘스위첸’(아파트)과 ‘웰츠타워’(주상복합)를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정 사장의 정보기술(IT) 지식도 한몫 했다. 컴퓨터학을 전공한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 기업 경영에도 IT를 일찌감치 접목시켰다. 선진국형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고, 공사를 맡은 주택의 소프트웨어에도 “유별날” 만큼 공을 들였다. 덕분에 KCC건설은 도급순위 32위, 신용도 9위의 중견업체로 성장했다. ●‘창업동지’ 조은주 여사 현대가의 가풍이 그렇듯 정 명예회장은 연애결혼을 했다.“큰형님 회사(현대건설)를 드나들면서 경리팀의 동갑내기 아가씨에게 반해” ‘작업’을 건 것이 결혼까지 이어졌다. 조은주(69) 여사다. 서울 진명여고를 나온 조 여사는 당시 이화여대에 합격해 놓고도 등록금이 없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독립군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된 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조씨는 ‘대학생 사장’을 남편으로 둔 덕분에 물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슬레이트공장 인부들의 밥이며 새참은 으레 그의 몫이었다. 직원들 식사를 지어 나르는 일은 그후로도 20년 넘게 이어졌다. 지금도 서울 서초동의 구사옥에서 근무하는 고참 직원들 가운데는 사원식당에서 밥을 짓는 조 여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다. ●큰며느리는 음대… 셋째며느리는 미대 자유연애로 결혼한 정 명예회장은 아들들의 ‘사랑’에도 너그러웠다. 몽진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홍은진(41)씨와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했다. 홍씨는 한때 아이스크림 ‘퍼모스트’로 유명했던 옛 퍼모스트유업 사장의 딸이다. 전자부품회사인 ‘퍼시픽 컨트롤스’ 홍준 사장이 처남이다. 그렇다면 소개팅 주선자는 누구일까. 다름아닌 사촌형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촌동생에게 친구의 처제인 음악도를 엮어준 것. 정 의장과 죽이 맞아 처제를 소개팅 장소로 내몬 이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치과 주치의이자 성균관대 교수인 임순호 박사다. “연애할 때 플루트를 불어주던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는 정 회장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며 “결혼후에는 한번도 플루트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투덜대곤 한다. 내로라하는 재벌 집안과의 혼사는 몽익씨에 이르러 이뤄졌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 최은정(42)씨가 부인이다. 가톨릭 계통인 일본 성심대학 교육심리학과를 나왔다. 최씨의 언니 은영씨는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과 결혼했다. 조 회장이 몽익씨의 손위동서인 셈이다. 막내 몽열씨는 큰형수의 영향을 받았는지 서울대 미대를 나온 이수잔(35)씨와 결혼했다. 독특한 이름 때문에 외국인이라는 오해를 받지만 한자이름이다.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장인이 ‘쌓을 잔( )’자를 썼다고 한다. 여자들의 사회활동을 싫어하는 가풍 탓에, 큰동서와 마찬가지로 결혼과 동시에 그림을 접었다. 막내 며느리답게 활달한 편이다. ●‘숙부의 난’ 할 말 많지만… 정 명예회장은 조카 며느리인 현대그룹 현정은(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였었다. 현대가 사정에 밝고 당시 분쟁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한 관계자는 “이 문제에 대한 명예회장님의 생각은 분명하다. 현 회장의 외가를 포함해 정씨 집안 사람이 아닌 제3자가 큰형님이 평생을 바쳐 일군 현대를 넘보려 한다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대상선 등 관련 지분을 팔지 않고 계속 갖고 있는 것은 이를 위한 최후의 보루다.”라고 설명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정몽헌 회장에게 200억원을 조건없이 내준 것이 ‘의리’가 아니라 ‘경영권을 염두에 둔 계산된 행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 “지나간 상처를 다시 헤집고 싶지는 않다. 명예회장님도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며 함구령을 내리셨다. 다만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명예회장님은 장조카인 고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이 아버지(왕 회장)와의 갈등으로 방황할 때 형님 눈치 보지 않고 우리 회사 부사장 자리를 선뜻 내줬다. 또다른 조카가 외환위기로 자금난에 시달릴 때 70억원을 조건없이 빌려준 분도, 몽헌 회장이 군 복무를 6년이나 할 때 뒤를 봐준 분도, 명예회장님이었다.” ●“숫자는 기본” 전문 경영인들 건장한 체격의 김춘기(59) KCC 대표이사 사장이 단연 첫손에 꼽힌다. 정몽진 회장이 “(그룹에)꼭 필요한 분”이라고 언급한 이다.75년 고려화학으로 입사해 꼬박 30년을 KCC와 함께했다. 특히 영업쪽에서 잔뼈가 굵었다. 마당발 인맥과 철저한 고객관리로 KCC의 영업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말단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력도 흔하지는 않지만 ‘국가대표 스키선수’라는 경력이 더욱 눈길을 끈다. 강원도 강릉에서 나고 자란 그는 중학교때 우연히 본 스키영화 ‘백령의 왕자’에 푹 빠져 스키선수가 됐다. 대학생(경희대)때는 동계 유니버시아드와 올림픽 대회에도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취직과 동시에 “스키는 깨끗이 잊었다.”고 김 사장은 털어놓았다. 꼼꼼함은 모든 임원들의 공통점이지만 김 사장은 유난히 치밀하고 숫자에 밝다.“노력은 능력을 앞선다.”는 게 30년 직장생활의 신조다. 김 사장의 좌우 양쪽으로는 정몽진 회장에 버금가는 영어 실력으로 수출을 책임지고 있는 김영호(55·부사장) 해외본부장과 전문 무기화학 지식으로 제품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정복동(58·부사장) 생산기술본부장이 포진하고 있다. 금강레저 박연구(51) 대표와 고려시리카 이성수(53) 대표는 대학 졸업장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전문인력들이다.“학교 공부는 다소 게을리했을지 몰라도 추진력과 친화력은 (전교 1등보다)훨씬 낫다.”는 KCC의 독특한 사풍이 반영된 결과다. 코리아오토글라스 주원식(62) 사장과 금강화공의 한상기(57) 중국 곤산·신세균(55) 베이징 법인장,KCC 박성완(47) 싱가포르 법인장 등은 전문 기술인맥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일본 아사히글라스 출신의 시마나가 모토야스(61) 부사장 등도 KCC를 떠받치는 핵심 인력들이다. hyun@seoul.co.kr ■ 정상영 일가 ‘밥상머리 교육’ 정상영 명예회장의 세 아들 부부는 한주 걸러 일요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이태원 본가를 찾는다. 온 가족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다.“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하다.”며 자식들과 아침식사-사실상 새벽밥-를 함께 했던 왕 회장에 비하면 며느리들의 부담이 한결 덜하다. 음식도 각자 집에서 ‘주특기’ 한가지씩을 싸들고 와 끓이기만 하면 된다. 며느리들의 음식솜씨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 정 명예회장은 며느리를 들이면 반드시 반년씩 데리고 살았다. 그래야 가풍도 익히고 속정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대학 내내 플루트만 불다온 큰며느리가 음식을 잘 할 리 만무했다. 둘째며느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요리학원을 다녔다는 재벌가의 둘째며느리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내놓았다. 견디다 못한 정 명예회장은 급기야 “이러다가 굶어죽겠다.”며 하소연했다고. 그 며느리들이 ‘사원식당 주방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시어머니의 특별지도 아래 지금은 ‘선수’가 됐음은 물론이다. 정 명예회장은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하다. 그 영향을 받아 정몽진 회장도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아들 명선(11)군을 굳이 외국인 학교나 사립학교가 아닌 집 부근의 일반 공립학교에 보내고 있다. 학교도 자가용을 태우지 않고 걸려서 보낸다.“어렸을 때부터 보통사람, 못사는 사람의 삶도 느껴봐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다만 큰딸 재림(15)양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귀국해 “성적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외국인 학교에 보냈다. hyun@seoul.co.kr ■ 정 명예회장 ‘씨름꾼 경영론’ 왕 회장이 ‘빈대의 철학’으로 유명하다면 정상영 명예회장은 90년대 중반 ‘씨름꾼 경영론’으로 회자됐다.“씨름은 씨름꾼에게 맡겨야 한다.”는 단순 명쾌한 논리였다. 정 명예회장은 “씨름꾼이 아닌 사람이 씨름판에서 승리하기 어렵듯 기업간의 경쟁은 기업가에게 맡겨야 한다.”며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강조했다.KCC그룹의 사시인 ‘맡은 자리의 주인이 되자’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는 왕 회장의 지론이기도 하다. 지역 거상들이 장악하고 있던 총판(판매실적에 관계없이 물건값 선지급) 체제에 맞서 팔린 만큼만 대금을 지급하는 코카콜라식의 ‘루트 세일’을 도입해 유통 혁명을 일으킨 것이나, 당시로서는 ‘생뚱맞기’ 그지없는 슬레이트 홍보영화를 만들어 275개 시·군에 배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큰형에게 영향받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렇듯 정 명예회장에게 있어 왕 회장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형이라기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차이만 스물 한살이었다. 조카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는 두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 잠깐 초콜릿사업에 눈돌린 것 외에는 한번도 한 눈을 팔아본 적이 없는 그가 1970년 8월 현대차 부사장으로 홀연히 옮겨간 것도 “와서 미수금 70억원을 해결하라.”는 장형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자까지 회수해주고 다시 KCC로 돌아왔을 때는 1년 반이 흘러 있었다. 훗날 정 명예회장은 “중요한 시기에 내 사업에 공백을 가져 아쉬워한 적은 있었어도 불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는 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왕 회장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막내동생을 가까이 대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KCC측은 펄쩍 뛴다. 한 임원의 얘기다. “92년 대선 패배 이후 두문불출하던 왕 회장이 다시 산업현장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95년 KCC의 여주 유리공장 3호기 점화식에서였다. 또 거동이 심하게 불편해지기 전까지 왕 회장이 거의 매일같이 들러 골프를 친 곳이 금강CC였다. 라운딩 멤버는 언제나 정상영 회장이었다.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면 왕 회장 성격에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정 명예회장도 세상 사람들의 짐작 이상으로 장형에게 극진했지만, 왕 회장 역시 막내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사우디는 기회의 땅?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10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시민권(국적)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하자 이집트와 예멘·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출신 체류자 수만명이 지원 서류를 얻기 위해 주요 도시의 출입국 사무소에 몰려들었으며 서류를 복사해 파는 암시장까지 등장할 정도라고 BBC 인터넷판이 2일 보도했다. BBC와 걸프뉴스 닷컴 등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가 처음으로 지원 서류를 배포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하루 동안 수도 리야드에서만 1만명 이상이 서류를 받아 갔으며 지다와 메카·담맘 등에서도 3000∼5000명이 장사진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발급된 서류만 3만장을 넘었다. 자이드 알 타미미 리야드 출입국 사무소장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우리도 놀랐다.”라며 “자격을 갖췄는지를 확인할 새도 없이 서류를 나눠 줘야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체류자들이 몰려든 것은 사우디 국적을 얻을 경우 고국에서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주는 직업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재산권을 누리며 저리의 융자를 얻을 수 있는 등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현재 자국민 채용을 늘리기 위해 600만명에 이르는 체류자들의 취업 직종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정부는 10년 이상 거주 외에 사우디인을 인척으로 둔 경우, 특정 직업과 연계된 학사나 석사학위 보유 여부 등을 점수화해 총점 33점 중 23점 이상을 얻으면 국적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우디는 이중국적을 불허하고 있어 국적을 취득할 경우 기존 국적은 포기해야 한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올해는 현대산업개발 정세영(77) 명예회장과 정몽규(43) 회장이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째 되는 해다. 자동차를 운영하던 경영인이 과연 건설을 잘 이끌겠느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대산업개발은 빠르게 새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일찌감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정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에 인생의 32년을 묶어두는 바람에 뒤늦게 독립했다. 정주영가의 다른 형제들이 현대건설에서 땀 흘리며 가꾸던 회사를 발판으로 분가한 것과 달리 정 명예회장의 ‘왕회장’ 독립은 2세 경영체계 구축과 함께 갑자기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만들어야 팔린다.”면서 ‘현대자동차 신화’를 건설에 접목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교수하면 배고파”, 현대와 인연 정 명예회장이 현대와 인연을 맺은 때가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이다. 고려대 정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 명예회장은 왕회장 밑에서 잡역부 아르바이트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손을 도왔다. 이미 두 형님(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 정순영 현대시멘트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큰형의 메시지가 작용했다.57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당리당략에 빠진 현실 정치에 빠져들기 싫어 정치 지망생의 꿈을 접고 대신 대학 교수의 길을 찾았다. 욕망은 모교 강단에 서고 싶었으나 우선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채용 사실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왕회장은 “나랑 같이 일하자.”고 소매를 잡았다. 늘 그랬지만 그에게 맏형의 말은 제의나 권유가 아닌 명령이나 다름없었고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내 사업으로 생각하고 32년 동안 일궜던 현대자동차도 왕회장이 사실상의 장조카 MK(정몽구)에게 넘겨주라는 한마디에 순순히 따랐을 정도다. 첫 직책은 신입사원 채용위원장. 동시에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하는 일도 겸했다. 왕회장이 처음 맡긴 프로젝트는 시멘트 공장 건설에 필요한 국제개발국차관(AID)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둘째형(인영·85)과 함께 충북 단양의 광산을 사들이는 한편 미국과 국내에서 공장 건설을 위한 교섭을 벌여 어렵사리 성사시켰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보다 더 무서운 시련이 찾아왔다.30대 초반인데도 건강에 이상이 감지됐다. 간경변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마와 씨름하느라 회사를 나가지 못했다. 아내의 정성어린 간병과 용기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일에 뛰어들었다. 새로 부임한 곳이 단양 시멘트공장 공장장이었다. 사선을 넘나들던 건강을 되찾으면서 일에 미쳤다. 65년 대한건설협회 해외시찰단 일원으로 동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마침 태국에 세계은행 자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캐낸 그는 이 사실을 서울 큰형님에게 보고한다. 정 회장은 왕회장으로부터 “태국에 그대로 눌러앉아 공사 진행상황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방문단에서 빠져 관련 정보 입수에 본격 나선다. 이렇게 해서 현대건설 방콕지점장이 됐고 파타니∼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고속도로건설 경험도 없었던 현대였고, 국내 최초의 해외건설 공사 수주로 기록됐다. ●‘포니 정’,32년의 자동차 인생 시작 1967년 시멘트 공장 기계를 사기 위해 미국에 있던 중 본사로부터 포드자동차와 접촉하라는 전보를 받는다. 포드 자동차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 조사단이 방문했는데 서울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미국에서 포드측에 관심있다는 뜻을 전하라는 메시지였다. 즉각 움직여 자동차 산업에 대한 현대의 관심을 전달하고, 포드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둘째형의 적극적인 협상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같은 해 말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는 현대자동차 회사가 설립됐고, 초대 사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이렇게 해서 ‘포니 정’의 32년 자동차 인생이 시작됐다. 자동차 진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포드와의 조립계약을 맺은 뒤 68년 3월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자동차 공장 구경도 못하고 자동차 공장을 지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수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워갔다. 본격적인 공장 건설과 함께 인재 사냥에 나섰다. 급한 대로 현대건설에서 유능한 사람을 빼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양섭 부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 이 부장은 20년 넘게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면서 사장까지 역임했다. 윤주원씨도 현대건설에서 스카우트해 사장까지 지냈다. 신동원씨는 당시 상공부로부터 추천받은 경우다. 신입사원도 뽑기 시작했다. 이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달리는 오늘의 현대차를 있게 한 일꾼들이었다. 마침내 68년 11월 제1호 ‘코티나’가 나왔다. 공장을 짓고 자동차를 생산하기까지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해 5월부터는 중형 승용차 포드 20M도 생산했고,8월에는 자체 설계한 첫 버스를 출고하는 저력을 발휘하면서 쾌속질주를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현대차의 질주를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소리도 들렸다. 경쟁사인 신진자동차와 정치권의 압박으로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70년초 1차 석유파동에 휩싸이면서 판매도 급감했다. 할부로 판매한 자동차의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때 막내 동생 상영(KCC명예회장·69)씨가 잠시 금강슬레이트 경영을 접고 부사장으로 와서 채권회수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 한 마디에 자동차 인생 종지부 언제까지 단순 조립생산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포드와 50대50 합작회사를 만들어 엔진 공장을 짓고 기술을 이전받아 자립의 길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포드가 약속한 지분 50%에 대한 자본 납입을 미루고 협상이 결렬되면서 ‘마이웨이’를 외쳤다.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74년 국산 1호차 조랑말 ‘포니’가 탄생했고 이를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내놓는 기염을 토했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76년 2월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고 중남미를 중심으로 수출까지 이끌어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 기업으로 커갔다. 아울러 96년 MK(정몽구 현대차 회장)가 그룹 회장을 맡을 때까지 9년 동안 왕회장을 대신해 현대호를 이끌었다. 이즈음 현대가의 2세 경영체제가 이뤄지면서 자동차 회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았다. 정 회장은 용산고, 고려대 경영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8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를 몰고가는 드라이버는 몽규 회장이었다. 하지만 삼성자동차 허가, 외환위기라는 거센 풍랑과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에 노사분규 시련도 덮쳤다. 젊은 정 회장에게는 경영자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정 회장은 의연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방주, 김수중, 김판곤 등의 임원이 정 회장의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하지만 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뒤 경영 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MK가 현대차와 기아차의 새 회장으로 오면서 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내려앉는다. 장차 밀어닥칠 일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마침내 99년 3월3일 왕회장은 명예회장을 부른다. 왕회장은 “MK한테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는 말로 자동차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잘못된 것 없다.”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그렇게 해.”라는 왕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내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이끌었던 사업이었지만 거역하지 않고 “예”라는 한마디로 32년 자동차 인생을 접었다. 아울러 왕회장의 생각과 달리 아들 몽규도 함께 자동차를 떠나 현대산업개발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지어야 한다 새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 일은 몽규 회장과 전문 경영인이 맡았다. 명예회장은 경영 자문만 할 정도다. 정 회장은 아파트에 자동차 제조업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사소한 하자가 나와도 불량품이 완전히 고쳐질 때까지 모든 공정을 멈추는 것이다. 현장 중시와 품질경영 기치를 내세웠다. 체면 따위는 내팽개쳤다. 경쟁사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삼성래미안 아파트 강남 일원동 주택전시관을 찾은 적도 있다. 지난해에는 용산 시티파크 모델하우스를 찾아 경쟁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파트 이름을 ‘I-PARK’로 바꾸는 등 변신도 꾀했다. 무리하게 덩치를 키우지 않는 것도 다른 건설사와 다르다. 안정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수주·매출 목표를 줄이는 것도 그에게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 만에 부동산 박사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서울 강남 역삼동 스타타워(아이타워)사옥 매각도 그의 판단이었다. 부채를 갚아 정상적인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로는 최고의 조건으로 넘겼고, 부동산 개발회사가 특정 사옥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돈이 된다 싶으면 정든 사옥도 팔 수 있고, 부동산 회사가 개발 이익을 남기고 사옥을 옮기는 것은 결코 흉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부동산업자는 시장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낭만적인 ‘포니 정家’혼맥 ‘포니 정’과 정 회장은 결혼 과정이 비슷하다. 낭만적이다. 처음부터 명문가를 골라 배필을 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소개해준 여성과 사랑을 싹 틔우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정 명예회장은 대학 시절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한때 사무실 여직원에게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유학길에 오르는 바람에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유학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봤고 현대건설 입사 이후에는 일에 파묻혀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의 소개로 박영자(69) 여사를 만난다. 박 여사는 부산에서 올라와 이화여대 3학년에 다니던 귀여운 단발머리 학생이었다. 첫눈에 사로잡혀 매일 데이트를 할 정도였고 세 번째 만나던 날 프러포즈를 했다.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큰형님과 형수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어했다. 명문대가를 따지지 않는 현대가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으로 내려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은 뒤 만난 지 100일이 안돼 약혼하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정 명예회장은 큰딸을 결혼시키면서 노신영 전 총리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사위 경수(51)씨가 노 전 총리의 장남이다. 노씨는 서울대 교수로 국제정치 전문가다. 노 전 총리 차남은 중앙일보 고 홍진기 회장 딸 홍라영씨와 결혼했다. 이로 인해 노신영가는 국내 굴지의 그룹인 현대, 삼성가와 동시에 사돈 관계를 맺었다. 정 회장의 결혼도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순수함 그대로였다. 역시 반 중매 반 연애로 이뤄졌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김나영(39) 여사를 만났다. 결혼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 몽규 회장이지만 몇몇 절친한 친구한테는 결혼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나영씨는 연대 수학과를 나온 재원. 키도 크고 미인이었다. 첫 만남에서 정 회장은 상당한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정 회장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키도 크고 집안도 좋고 미인인 데다 마음까지 곱다.(아까운데)친구 중 누구 소개 시켜주면 안 될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들이 오히려 격려해 줬다.“너보다 키 작은 여성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 천생배필이다.”며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영씨는 당시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화재는 기울어가는 회사였다. 정략적 결혼이었다면 잘나가는 집안과 결혼했을 터이지만 현대 집안에서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정씨 일가의 결혼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계기로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시절 사돈인 대한화재를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위장계열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중점 관리 대상으로 지정돼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회사는 뒤에 대한생명으로 인수된다. 범 현대가의 경영 특징이지만 현대산업개발에도 처가쪽 사람이 없다. 정 회장 처남이 잠깐 현대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근무했으나 지금은 독립,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 딸 유경(35)씨는 김석성 전 전방회장의 1남4녀중 막내인 종엽씨와 결혼했다. 몽규 회장에 이어 재계 인맥을 형성한다. 유경씨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한 뒤 현대산업개발에서 잠시 근무했다. 종엽씨는 미국 벨뷰대학 출신으로 전방 계열의 내의류 생산업체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역시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 1년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게 됐다. ●다재다능한 전문 경영인 포진 현대산업개발 전문 경영인은 삼각편대로 구성됐다. 자동차에서 정 회장과 함께 현대차를 키웠던 전문 경영인과 현대산업개발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통이 주력부대다. 여기에 금융기관 등에서 스카우트한 전문가 그룹이 한 축을 버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 이방주 사장은 정 명예회장과 정 회장의 핵심 브레인. 전형적인 재무통. 현대자동차 재경본부장과 사장을 거쳤다. 정 회장이 현대산업개발로 옮길 때 함께 배를 갈아탔으며 현대차·현대산업개발을 키운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너의 신임이 남달리 두터워 자동차에 이어 건설회사에서도 대표이사 사장을 6년째 맡고 있다.ROTC 포병장교 출신. 연극계 대부 고 이해랑씨가 부친이며 문화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다. 건설업계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주택협회회장을 맡을 정도로 부동산과 건설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보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정 명예회장과는 고교·대학 동문인 셈이다. 김정중 사장은 77년 현대산업개발에 입사, 국내외 현장을 누빈 건설업계 산증인. 기술연구소장, 건축본부장, 영업본부장을 거쳤다. 과거 현대아파트는 물론 I’PARK까지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아파트다. 마케팅팀 및 영업기획팀을 신설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전고와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김택 현대역사 사장은 현대산업개발 에 입사해 관리본부장, 리모델링 사장을 거쳐 2003년부터 현대역사 사장을 맡고 있다. 고속철도 용산역에 8만 2000평 규모의 복합쇼핑몰 ‘스페이스9’를 운영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소탈한 성격에 정확한 판단과 추진력을 갖춘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용산고, 고려대를 나와 정 회장과 고교·대학 동문이다. 인텔리전트 빌딩, 첨단 홈네트워크 시스템 구축 업체인 아이콘트롤스는 김대철 사장이 맡고 있다. 주거 공간의 유비쿼터스 환경을 구축, 주거혁명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현대산업개발 자재담당 임원과 기획실장을 지냈다. 서라벌고와 고려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출신이다. 장동열 아이앤이 사장은 음악·시·영화 등에 관심이 깊다. 따뜻한 카리스마로 감성경영을 한다는 평을 받는다. 의사결정까지는 심사숙고하지만 일단 정해진 일은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을 지녔다.2년전 현대산업개발의 기계·전기팀에서 떨어져 나간 회사다. 광주고와 전남대 건축공학과를 나왔다. 현대엔지니어링플라스틱 이건원 사장은 현대차 부품개발분야에서 27년 동안 몸담으면서 국내 자동차 부품 및 자동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현대산업개발 유화사업부로 출발,2000년 분사한 회사. 충남 당진에 공장을 갖고 있으며 자동차 내외장재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분야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제품 사용 범위를 밥솥, 김치 냉장고 등 생활가전으로 넓혀가는 중이다. 아이앤콘스는 부산 아이파크 프로축구단장과 현대산업개발 영업기획 임원을 역임한 곽동원 사장이 이끌고 있다. 경남고, 성균대를 나왔다. 중·소규모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건물 리모델링, 개발사업 등 부동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업체다. 유일한 금융관련 회사인 아이투자신탁운용도 있다. 유가증권 투자·운용과 투자자문 업무를 하면서 신뢰받는 금융서비스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표는 글로벌에셋운용 총괄본부장을 역임한 우경정 사장이다. 프로축구단 아이파크스포츠는 이준하 사장이 책임진다. 정 회장과 용산고 동문이자 오랜 친구다. 어려서부터 양쪽 집안끼리 가까웠다. 연대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를 받았다. 현대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영업·마케팅, 홍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 모험적이고 개척정신이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 경영 목표를 ‘한국형 클럽스포츠의 성공적 사업 모델 구축’으로 정했다. 우승과 동시에 스포츠단에도 사업 마인드를 접목시키기 위해 사업다각화와 경영합리화를 꾀하고 있다. chani@seoul.co.kr ■ ‘만능 스포츠맨’ 정몽규 회장 현대산업개발 CEO들은 유난히 스포츠에 애착을 갖는다. 스포츠로 뭉친 인맥경영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정몽규 회장은 스포츠광이다.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다. 선수 수준인 종목만 5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수영은 프로급이다. 승마, 수상스키, 스키(요즘은 보드를 탄다)도 수준급이다. 수상 경력이 있는 종목도 있다. 그는 격한 운동을 좋아한다. 철인3종경기,MTB(산악 자전거타기) 마니아다. 기업인 중심으로 구성된 철인3종경기 동호인이다. 얼마전에는 스키장에서 보드로 스피드를 즐기다가 안전 펜스를 뛰어넘으면서 어깨를 다친 적도 있다. 기계 위에서 하는 운동은 별로다. 가끔 한강변이나 남산에서 뛰기도 한다. 정 회장은 “콧구멍이 시커머지더라도 밖에서 운동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한다. 골프는 할 줄은 알지만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운동할 때는 운동에 전념해야 하는데 골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도 싫다. 정 명예회장도 30년 이상 수상스키를 즐겼다. 바쁜 일정 중에도 양수리에서 물 위를 활주하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수상스키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선수 육성과 보급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이방주 사장도 스포츠를 즐기는 CEO다.1년에 3∼4회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다. 최근 10㎞를 1시간 안에 뛰었다. 시간이 나면 등산을 한다. 회사 차원에서는 프로축구 아이파크 스포츠단을 운영한다. 회사 차원의 지원도 대단하다.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10여곳의 재개발단지를 수주하는데 상당한 보탬이 됐다고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단이 그렇듯이 아이파크 축구단도 해마다 적자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적극 밀어준다. 스포츠단 이준하 사장은 재미있는 스포츠에 사업성을 가미한 경영을 한다. 올해 적자폭을 줄이고 돈을 벌 수 있는 별도 사업을 추진, 스포츠단을 모회사에 손을 내밀지 않을 정도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chani@seoul.co.kr ■ 정세영·몽규 父子 ‘막노동 경영수업’ 정세영 명예회장과 몽규 회장은 경영 수업의 첫 출발도 비슷하다. 이 때 형성된 인맥은 건설이나 자동차 회사의 초석을 다지는 주역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부친이 부산 피란시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막 벌여놓은 현대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큰형(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둘째형(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이 미군 공사를 수주해 오면 시장에 나가 현장에 투입할 인부를 모아오고 자재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이 때 만난 이춘림씨는 훗날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다. 이 전 회장은 그래도 건축도(당시 서울대 건축학과 3학년생)라서 설계를 하고 공사 감독도 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잡역부이자 막노동꾼이었다. 막노동판에서 만난 인맥은 현대건설을 떠날 때까지 끈끈하게 유지된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외아들 몽규에게 혹독하게 경영 훈련을 시켰다. 대학생이었던 정 회장은 방학 때면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고된 잡일을 해야 했다. 임직원들도 모르게 했다. 땡볕 아래서 리어카를 끌고 숙식도 독신자 기숙사에서 해결하는 생활이었다. 정 회장은 울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것을 가장 기억이 남는 과거로 떠올린다. 자식뿐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도 가혹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강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게 훈련시켰고 인맥을 관리했다. 자동차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경영인들을 잘 관리했고, 그 뒤에 현대산업개발로 모셔와(?) 중역을 맡겼다. 이방주 사장을 비롯해 김판곤 전 현대역사 사장 등이 자동차에서 날리던 선수들이다. 이들은 정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키운 베테랑 경영자들이다. 정 회장 역시 자녀 교육에 엄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학생인 큰아들 준선(13)이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영국으로 홀로 유학보냈다. 준선이는 재능을 인정받아 당당히 이튼스쿨에 자력으로 입학했다. 따로 돌봐주는 사람 없이 기숙사에서 생활토록 하고 있다. 호랑이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식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은행원들 “PB가 꿈”

    은행원들 “PB가 꿈”

    10년차 은행원 김모(39)씨는 요즘 하루 24시간이 짧다. 새벽에는 골프를 배우고, 출·퇴근 전철 안에서는 심리학 서적을 읽는다. 밤에는 동료들과 투자분석사 자격증 공부모임을 갖고 있다. 김씨가 이토록 자신을 닦달하는 이유는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은행원 생활로 무기력해져만 가던 김씨에게 도전정신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프라이빗뱅커(PB)의 꿈. 은행들이 저마다 갑부들의 자산을 관리해 주는 PB 사업에 열을 올리는 요즘 프라이빗뱅커는 많은 은행원들의 꿈이 되고 있다. ●미래 보장되고 몸값 높아져 인기 상한가 PB는 전통적인 은행원 개념을 뛰어넘는다.1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굴리는 부자 고객의 금융 포트폴리오는 물론, 집안 대소사와 취미까지 챙겨주는 펀드매니저이자 생활설계사이다. 증권이나 부동산 투자는 기본이고 세금, 상속까지 조언해 줘야 한다. 고객의 취미가 미술품 수집이면 그림을 볼 줄 아는 안목도 가져야 하고, 유언장을 작성하거나 중매를 서야 할 때도 있다. 맡은 일만 잘 하면 정년은 보장되는 은행원들이 굳이 PB가 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몸값’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PB들이 월급 외에 약간의 성과급만 받지만 PB사업 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PB의 몸값은 올라가게 돼 있다. 실제로 PB 업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하나은행 PB들이 수억원의 연봉을 받고 경쟁 은행으로 팔려가고 있다. 하나은행 PB사업본부 장재원 팀장은 “한국에서도 조만간 미국처럼 은행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PB들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PB는 은행원들의 마지막 기착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PB되기는 하늘의 별따기 하나은행 신한은행 한국씨티은행이 국내 PB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기업은행과 농협은 물론 산업은행까지 뛰어들 정도로 PB사업 경쟁은 치열해 지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은행들은 PB 인력을 발굴하고 키우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은행들은 대부분 신입행원을 뽑을 때부터 PB요원을 염두에 두고 지원자를 받는다. 기존 행원들 중에서도 매년 예비PB를 선발해 집중적으로 교육시킨다. 예비PB가 되기 위해서는 대체로 자산관리 및 투자, 부동산 분야의 자격증 3개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 은행별로 약간씩 다르지만 증권이나 부동산 외에 와인 시음법, 도자기 투자, 승마, 보석감정, 명품감별법, 음악감상, 해외 여행정보 등으로 꾸려진 PB전문과정도 운영된다. 예비PB가 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올초 신한은행은 42명의 예비PB를 선발했는데 경쟁률이 10대 1이었다. 부유층을 집중 공략하고 있는 한국씨티은행 PB사업 관계자는 “PB의 성공 요건은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관계”라면서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얼마나 많이 구성하느냐에 따라 PB의 몸값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베트남전 종전 30주년] “분노의 30년…위령비 찾는 한국인 이젠 친구”

    ■ 가족잃은 피해자들의 용서 “36년 전 총질을 해대던 그들에게 난 이미 죽었어. 하지만 정말로 눈 감기 전에 당신들이 날 찾아와 줬구먼. 우리 손자가 살아 있다면 딱 당신들 또래일 텐데….” 김현아(38·여)씨는 베트남 할머니 응웬티니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2003년 8월 어느날, 베트남 쾅남성의 시골마을 투이보촌. 마을 어귀에서 위태롭게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응웬티니 할머니는 그의 손을 꼭 감싸쥐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턱을 힘겹게 움직여 짓는 희미한 미소. 한국군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증오와 절망의 세월을 지내온 할머니는 그렇게 원수의 나라와 화해를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85세로 세상을 떴다. 김씨를 비롯한 시민단체 ‘나와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우연히 베트남의 항구 도시 다낭에 갔다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전해듣고 현장을 찾았다. 응웬티니 할머니를 통해 들은 67년 12월21일의 이야기는 참혹했다. 한국군 1개 소대가 닥치는 대로 총을 쏘며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땅굴로 숨은 주민들을 밖으로 끌어내 무차별로 총질을 했다.145명이 죽었다. 응웬티니 할머니는 아들과 딸, 사위를 잃었고 3살배기 손자는 품안에서 두개골이 산산조각났다. 자신도 왼쪽 턱과 혀 반쪽이 날아갔다. 쾅아이성 푹빈촌에서 만난 응웬리(75) 할아버지는 “66년 9월 한국군을 피해 사탕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와 형제, 조카 등 9명이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면서 내내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며 울부짖었다. 같은 마을 레티티엣(64) 할머니는 “갓난 아들을 보여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아들은 뇌손상을 입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끔찍한 기억을 가진 베트남 사람들과 그 말을 믿기 어려웠던 한국인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당혹스러웠다. 마을 어귀부터 서럽게 울면서 따라다니는 할머니도 있었고, 간간이 노려보거나 원망을 토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매월 할머니·할아버지 10명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고, 피해 지역 묘지 조성과 위령비 건립, 베트남 평화 기행, 한-베트남 평화 캠프 등을 통해 ‘속죄’를 구하면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66년 10월 112명이 죽은 쾅아이성 지엔니엔촌 사건의 생존자 팜티메오(85) 할머니도 그랬다. 가족 11명이 죽었고 자신도 가슴에 커다란 총상이 남아 있다. 나직이 말을 이어가다 울음을 터뜨린 할머니는 “내가 우니까 부담스럽지 않으냐.”며 오히려 마주앉은 한국 사람들을 걱정했다. “한국인인 제가 밉지 않으세요.” “그때의 한국 군인들은 증오하지. 하지만 당신들은 그때 겨우 태어난 사람들인걸. 그동안 아무도 묻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니 정말 고마워.” 69년 10월 쾅남 빈영사 사건에서 일가족 8명을 잃은 판반카(72) 할아버지는 “30년간 한국 사람들에게 치를 떨었지만 2002년부터 꾸준히 찾아와 위령탑에 진심으로 참배하는 한국인들을 이제는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벌인 전쟁에 군대를 보내야 했던 한국 역시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다. 그래선지 한 할머니는 2003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소식에 또다시 같은 일을 한다며 걱정해 주기도 했다. 김씨는 “우리가 먼저 화해니 용서니 하는 것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해지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삶에 작으나마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전쟁 피해자인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도 동참하고 있다. 평화 박물관 사업은 200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당시 83세)·김옥주(당시 77세) 할머니가 “더 이상 우리 같은 전쟁 피해자가 없기를 바란다.”며 낸 성금 7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해서 추진됐다. 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이옥선(79) 할머니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나와 우리’ 김정우 사무국장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한국군의 행위를 무조건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라면서 “그래야만 우리도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과거사 감추기에 당당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아직도 베트남전을 반공성전이나 국위선양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인접국 ‘진출’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베트남전을 진실되게 조명하는 노력이 진정한 한·베트남 관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포용의 戰前세대’ 딩반득 교수 “이제는 과거를 닫고 더 나은 미래를 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 2월부터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딩반득(62) 교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베트남 전쟁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한국이나 미국에 대해 크게 나쁜 감정은 없다.”고 말한다. ●베트남 복구위해 평화 택한것 “한국인이 미안하다고 얘기할 때면 저는 늘 괜찮다고 말합니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한국이 싫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평화를 원했고 썩은 시체와 말라버린 초목만 남은 나라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었기에 베트남은 증오를 버리고 평화를 선택했다고 딩 교수는 전했다. 그는 전쟁 당시 하노이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4년간 학생들과 산에서 숨어 지냈지만 도시에 떨어지는 폭탄, 곳곳에서 들려오는 총성 등 전쟁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썩어가는 시체들조차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잠을 설치게 만드는 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게 그에게는 커다란 괴로움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사과는 감정적인 문제”라면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과거에 대한 사과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베트남 투자, 영화, 한류(韓流)로 대표되는 문화적 교류로 양국이 함께 발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엽제 피해 대물림… 꼭 해결돼야 그는 양국의 우정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딩 교수는 “고엽제로 인한 고통은 전후 세대까지 대물림되고 있다.”면서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베트남의 동반자로 인정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냉정한 戰後세대’ 원지통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의료·교육 등 어떤 식으로든 베트남에 한국은 보상을해야 합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베트남 학생 원지통(26)은 한국에 대해 전쟁 세대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는 한국인의 모습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죠. 한국·베트남 우호 관계를 말할 때 흔히 투자를 얘기하지만 그건 한국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베트남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요.” ●“한국 투자가 우리를 위한 선행인가” 원지통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좋아하고 눈물나게 매운 불닭을 즐기며 세련된 차림의 한국사람들에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과거 문제는 별개다. 그는 “윗세대들은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꺼린다.”면서 “증오심을 꺼내 보이면 과거 악몽이 떠올라 자신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우리는 동반자’라는 미명 아래 모든 문제를 덮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달 미국 법원이 고엽제 소송을 기각한 데 대해 “고엽제 문제는 누가 누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는가의 차원이 아니다.”라면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가족이 고통받고 있는 만큼 미국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 나쁜감정은 없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한국군의 잔혹한 이미지까지 바꿀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갖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베트남 사람들이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베트남 사람들은 독도 분쟁과 비슷한 문제로 중국에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첫 무보수 총장 “모교개혁 봉사”

    첫 무보수 총장 “모교개혁 봉사”

    숭실대 이효계(70) 신임총장은 임기 4년간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28일 밝혔다. 국내 대학 총장이 연봉 전액을 반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총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학교를 바꾸는 초석이 되고자 마지막 봉사를 결심했다.”면서 “연봉 모두 학교발전기금에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숭실대 총장 연봉은 1억 2000여만원으로 4년간 약 5억원을 반납하게 된다. 서울 압구정동의 아파트 한 채와 승용차가 전 재산인 것으로 알려진 이 총장은 취임 후 공무원연금이 중단됐지만 이번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활할 예정이다. 그는 “개혁의 계기로 삼고자 결정한 일이기 때문에 생활인인 교수들의 월급 반려는 받지 않겠다.”면서 “학교발전기금으로는 지방에서 온 학생들을 위한 여학생 기숙사를 가장 먼저 짓고 싶다.”고 말했다. 오철호 대외협력처장은 “현재 의미있는 돈을 어떻게 더욱 값지게 쓸 것인지 검토 중”이라면서 “참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일 취임한 이 총장은 1963년 숭실대 법대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숭실대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시 13회 출신으로 광주시장, 전라남도지사, 내무부 차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거쳐 제49대 농림부장관을 지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내 인생의 등대] 추재엽 양천구청장

    [내 인생의 등대] 추재엽 양천구청장

    “80년대만 하더라도 다들 복지에는 관심이 없었죠. 대학원에서 손준규 교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복지행정가로서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양천구는 전국 기초단체 가운데 최고의 복지 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자원봉사제도와 연계된 노인복지 사업은 지방에서 배우러 올 정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추재엽 구청장이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전공한 복지행정학을 적극적으로 구정에 적용하고 있는 덕분이다. 추 구청장이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지난 89년. 당시만 하더라도 복지 분야는 높게 평가되지 못했다. 그도 당연히 홍보행정을 전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석사 2학기 때 복지행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21세기는 복지의 시대인 만큼, 정책을 수행하는 공무원들이 복지를 공부해야 우리나라가 복지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손 교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엘리트지만 진솔하면서도 서민적인 분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휴일마다 경로당 봉사활동 숙제를 낼 정도로 이론보다는 실천에 충실한 분이었지요. 손 교수님의 가르침에 복지의 중요성에 눈뜨게 됐습니다.” 추 구청장은 손 교수 밑에서 특히 노인복지학 연구에 주력했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노령화사회로 진입할 것이 확실한 만큼, 젊은 시절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린 분들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일본의 동 단위의 복지센터인 복지사무소와 북유럽의 복지 실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석사 논문도 ‘한국의 노인복지정책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후 국회정책연구위원, 한나라당 부대변인을 지내는 등 정계로 잠시 외도했지만 일반 주민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지난 2002년 지방선거에서 양천구청장에 출마, 당선된 것도 민생의 현장에서 발로 뛰며 선진국 못지않은 복지행정을 구현하겠다는 오랜 바람의 첫 단추를 꿴 것이다. 추 구청장이 3년 동안 양천구에서 새로 도입한 복지 제도는 장수문화대학, 자원봉사와 노인복지를 결합한 경로당결연사업,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로 말벗이 되는 해피콜제도 등 수없이 많다. 재활을 중심으로 한 장애인복지관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요즘도 손 교수와 성민선 교수 등 대학원 시절의 은사들을 꾸준히 만나 새로운 정책의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추 구청장은 “예산과 인력이 한정돼 있는 만큼,50만 주민들이 조금씩 힘을 모아 실천할 수 있는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예전의 미풍양속을 살리면서도 우리 모두의 노후를 준비하는 ‘자원 봉사의 노인복지화’를 발전시키는 데 힘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인간시대] 육근해 한국점자도서관장

    [인간시대] 육근해 한국점자도서관장

    “아버지의 유업인 데다 소외계층을 돕는 일이니 힘들어도 버텨야죠.” 서울 강동구 암사2동 햇빛4길 주택가 골목길에 자리한 한국점자도서관에서 육근해(44·여) 관장을 만났다. ●시각장애인 부친 유업 대물려 봉사 육씨는 시각장애인이었던 선친 고 육병일(1997년 작고) 관장의 뒤를 이어 점자도서관 운영을 맡은 ‘2세 사회복지인’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10억원 가까운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세웠지만, 여건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과 함께 점자 책을 만들기도 했어요.” 36년 전인 1969년 육씨 선친은 서울 종로5가에 한국 최초로 점자도서관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 문제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전무했던 때여서 그 뒤로 경제적 사정에 떠밀려 중구 북창동, 동작구 사당동, 강동구 성내동 등을 전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2남3녀 가운데 막내인 육씨는 자원봉사자로 거들다가 92년 사무국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부친이 별세한 뒤 어머니 장순이(72)씨가 관장을 맡았고, 지난해 10월부터는 육씨가 뒤를 이어 시각장애인들에게 지식의 등불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지금은 100% 이해되지만 아이들 교육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늘 원망스러웠습니다.” 중·고교 시절 등록금을 제때 낸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교졸업 뒤 직장을 잡아 2년 뒤 야간대학에 들어갔다. 학부에서는 컴퓨터통계학을 전공했지만 도서관 일을 잘 해낼 요량으로 사회복지학과 문헌정보학 석사학위를 땄다.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으며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한국점자도서관은 ‘손끝으로 여는 세상, 귀로 만나는 세상’을 표방한다. 관장실 앞 그림 한점에 새겨진 점자가 궁금했다. 육 관장은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둔 미술대 졸업생이 선물한 것인데 ‘갈매기에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라는 뜻”이라고 번역해줬다.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낮은 현실에서 점자도서관이 해내는 역할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내 점자 출판물 70% 소화 강동구 지원금 등으로 직원 20명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 점자도서관은 97년 이곳에 안착했으나 늘어가는 점자도서 수요에 비춰 공간이 비좁다. 지하 1층, 지상 4층 가운데 청소년 학습공간인 4층을 뺀 연면적 230여평을 쓰고 있다. 육 관장은 “현재 점자도서 출판을 위해 사용되는 원본 책자와 출판한 점자도서를 합쳐 2만여권을 장서했지만 이젠 찍어낸 만큼의 분량은 버려야 할 처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찍어내는 책만 연간 10여만권에 이른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각종 도서의 내용을 일일이 녹음한 녹음도서와 CD, 테이프, 각종 홍보자료의 점자도서 출판 등 연간 10여만권을 출판하고 있다. 국내 점자 출판물의 70% 정도를 소화하고 있다는 게 육 관장의 설명이다. 강동·성북·도봉구 등 지역 소식지와 점자 전화번호부, 우편번호부, 각종 선거의 투표안내문도 해당한다. ●장애인 인식 개선에도 앞장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이를 위해 점자명함 제작, 비장애인 대상 점자교육, 시각장애 체험 등의 일을 한다. 한국점자도서관은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저시력으로 각종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 노인, 질환자들을 위한 도서출판 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야말로 궁극적으로 꿈꿔야 할 최종목표라는 점에서다. 이런 차원에서 눈에 띄는 게 통합교재 발간이다. 일반 활자와 점자를 함께 새긴 도서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을 바로 머리에 심도록 하자는 뜻이다. 저시력자 사업으로는 보통에 비해 큰 활자를 사용한 도서(Large print)가 꼽힌다. 점자도서 편찬엔 구멍을 뚫는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종이가 훨씬 두껍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을 점역한 책은 무려 60권이나 된다. 원래 단행본 10권 분량이기 때문에 6배로 늘어난다. 또 한권을 펴내는 데에는 워드프로세서 입력, 교정, 제판, 인쇄, 제본 등 공정이 길게는 3∼4개월 걸린다.(02)3426-7411.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아이랑 대구 비슬산 올라볼까

    [조용섭의 산으路] 아이랑 대구 비슬산 올라볼까

    긴 기다림 끝에 맞이한 올 봄은 꽃소식이 더디다. 다소 늦어졌지만 남도의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북상하기 시작한 진달래꽃 소식은 봄꽃 산행을 기다리는 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대구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 등에 걸쳐 있는 비슬산(1083.6m)은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4월 중순부터 산상의 화원을 이루는 곳. 이맘때면 ‘참꽃축제’가 열린다. 참꽃은 진달래의 다른 이름이다. 비슬산은 정상(대견봉)부의 거대한 암괴, 능선의 평원에 펼쳐진 진달래와 억새 군락, 천년고찰, 산자락의 울창한 송림, 그리고 산사면 곳곳의 너덜겅 등 예사롭지 않은 풍광을 지닌 곳으로, 비슬(琵瑟)이란 이름은 산 정상의 바위 모습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산길은 대중교통 접근이 쉬운 유가사쪽에서 시작하여 도통바위를 거쳐 정상에 이른 뒤, 대견사지~수성골~유가사로 이어지는 원점회귀 코스로 잡았다. 유가사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극락교를 지나면 절 입구다. 산길은 정면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수도암 뒤쪽 산길로 접어들며 시작한다. 이 도로가 끝나는 곳에는 도성암이 자리잡고 있다. 유가사는 신라시대 도성국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인데, 최근 시방루 등 큰 중창불사가 이루어졌고, 아직도 공사중인 곳이 많아 다소 어수선한 모습이다. 천왕문에서 시방루, 대웅전까지 계단을 통해 좁은 문을 들어서야 다음 전각을 볼 수 있는 구도는 영주 부석사의 가람 배치를 떠올리게 한다. 산길 곳곳에는 통나무 계단 설치 준비가 한창이다.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출입문과 철망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도통바위고 바위 바로 아래에 도성암이 있다. 주차장에서 50분이 걸린다. 이제 10여분 힘들게 오르면 북서릉 능선 턱에 이르는데, 정상과 그 앞 벼랑지대가 한눈에 들어 온다. 다시 20분여 나아가야 비로소 평평한 능선이 시작된다. 이 곳 바위지대에서의 풍광도 매우 뛰어나다. 부드러운 능선 주위로는 무리지어 화원을 이루는 진달래꽃이 화사하고, 그 사이사이 들어서 있는 마른 억새의 모습에서는 가을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앞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3거리를 지나면 드디어 정상. 도통바위에서 50분이 걸린다. 평평하게 이어지는 능선 저 멀리로 조화봉이 아득하다. 정상에서 4㎞ 거리다. 편안한 능선길을 걷다 1004.9봉 아래 안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수성골로 해서 유가사로 하산할 수 있다. 꽃과 사람에 취해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1004.9봉이다. 오른쪽 산사면이 참꽃 군락지로 이름난 곳이다. 유가사로 가기 위해서는 조화봉에 못 미친 갈림길에서 대견사지로 내려선 뒤, 팔각정에서 수성골로 내려서는 지능선으로 하산하면 된다. 수성골 3거리에 닿으면 너르고 편안한 숲길로 유가사로 내려서게 된다. 정상에서 대견사지까지는 약 1시간40분, 대견사지에서 유가사까지 1시간30분이 걸린다. 대중교통을 탈 경우 대구서부정류장(053-656-2824)에서 현풍행 버스 이용. 현풍버스정류장에서 유가사행 버스를 이용한다. 주말에는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유가사행 601번 버스가 하루 12차례 운행한다. 현풍∼유가사행 택시요금은 8000원(현풍참꽃택시 053-611-2525). 자가용은 구마고속도로 현풍IC에서 빠져나와 유가사로 이동하면 된다. 비슬산 자연휴양림(053-614-5481).
  • 美 합참의장에 피터 페이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2일 임기가 만료되는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 후임에 해병대 대장인 피터 페이스(59) 부합참의장을 지명했다. 페이스가 상원의 인준을 받게 되면 해병대 출신으로 사상 첫 합참의장이 된다. 페이스는 지난 2002년 국방차관 재직 당시 한국을 방문, 주한 미군 감축을 처음 거론한 인물이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인 페이스는 지난 1967년 해군사관학교 졸업과 함께 임관했으며,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1985∼87년 서울 연합사령부에서 작전참모부장 보좌관, 지상군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어 주일 미군사령부 부사령관, 남부통합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으며 의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등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dawn@seoul.co.kr
  • [기고] “전문간호사 도입취지를 살리자”/박현주 대한간호협회 사무총장

    정부는 국민건강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지난 2003년 10월 전문간호사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를 통해 내년 2월이면 임상경험이 풍부하고 질적 수준이 높은 전문간호사들이 대거 배출된다. 전문간호사들은 정부가 교육기관으로 지정한 전국 36개 대학원에서 보건·마취·정신·가정·감염관리·산업·응급·노인·중환자·호스피스 등 10개 분야별로 석사과정의 교육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전문간호사 배출을 불과 10개월 남짓 앞둔 시점임에도 정부는 법적 업무범위를 명시하지 못해 당초 취지를 살린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편에서 국민건강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 자체가 일부 보건의료단체의 반대에 밀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오는 2007년 도입되는 노인요양보장제도의 경우 가정, 보건 등 노인관련 전문간호사를 의료법에 따라 활용할 계획으로 있다. 그러나 전문간호사에 대한 법적 업무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불법 의료행위에 따른 분쟁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소비자와 공급자 모두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우려된다. 지금까지 노인요양보장제도 실무기획단에서는 노인관련 전문간호사가 제공할 요양에 따른 방문간호는 전문간호사의 독자적인 판단 아래 수행되는 기본적 간호로 논의돼 왔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은 전문간호사의 종류와 자격기준만 시행규칙에 명시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양성과정 등에 대한 내용은 보건복지부 고시로 위임하고 있다. 한 예로 현재 마취전문간호사의 경우 업무범위 등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마취전문간호사는 1991년 ‘마취간호사가 수술집도의사의 지시 감독 하에 마취행위를 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정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소규모 의료기관에서 마취를 시행하고 있으나, 마취사고가 발생하면 의료법이 정하고 있는 간호사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인정, 형사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내년부터 매년 배출될 전문간호사에 대한 법적 정비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또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전문간호사제도 도입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의료법 시행규칙에 있는 전문간호사를 최소 시행령 수준으로 상향시켜야 한다. 아울러 법조문 안에 10개 분야별 간호사의 업무범위를 일일이 나열해야 하는 의료법 개정보다는 간호사 관련 단독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료법에서 간호사의 업무범위는 요양상의 간호와 진료의 보조, 대통령령의 보건활동으로 돼 있다. 요양상의 간호는 간호사 면허시험을 주관하는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대략 11개 분야의 168개 행위,447개 세부행위로 구성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요양상의 간호로만 명시돼 어느 누구도 요양상의 간호가 무엇을 뜻하고, 어떤 내용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에 따라 간호사의 임무를 진료의 보조로 한정짓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요양상의 간호에는 설명과 주의·교육의 의무가 포함돼 있다. 최근에는 이 같은 간호의 특성을 이해하는 법관들에 의해 간호사와 의사의 공동책임, 또는 단독책임으로 판결이 나고 있다. 이는 곧 간호사가 자신의 요양상의 간호라는 법적 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법적 정비가 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의료법상 간호사의 의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요양상의 간호, 진료의 보조, 보건활동으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다른 법에서는 건강교육 및 상담, 경미한 진료행위, 응급처치 등 간호에 대한 기본법인 의료법에서 제한하고 있는 규정보다 훨씬 다양하고 폭 넓게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개별법에 근거해 업무를 하는 간호사의 법적 권한과 기본법에서 주어진 법적 권한이 충돌했을 때, 판단이 모호해질 수도 있다. 시대적 조류에 따라 간호사의 단독법 제정을 통해 전문간호사의 법적 업무범위를 명시함으로써 제도 도입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 박현주 대한간호협회 사무총장
  • 포항공대 박사과정 이정은씨 세계인명사전 2곳 동시등재

    포항공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이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두 곳에 잇따라 등재됐다. 포항공대 환경공학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정은(33·여)씨가 영국 국제인명센터가 발행하는 세계적 인명사전인 ‘21세기 위대한 과학자’와 ‘21세기 위대한 지식인 2000인’에 선정된 데 이어 미국 인명연구소가 선정하는 ‘21세기의 위대한 인물들’ 인명사전에도 등재된다고 학교측이 20일 밝혔다. 숙명여대 화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2002년 포항공대 환경공학부 박사과정에 입학한 이씨는 맹독성 환경오염물질인 다이옥신 화합물의 물리화학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계산 화학적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대학측이 밝혔다. 맹독성 화합물의 경우 다루기가 어려워 물리화학적 데이터가 매우 제한적인 것에 착안해 연구를 진행해 온 이씨는 그동안 이와 관련된 4편의 논문을 국제 유명 과학저널인 ‘미국화학회지’,‘미국 물리화학회지’ 등에 발표했다. 이씨는 “좋은 연구결과를 얻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연구에 더욱 매진해 후회하지 않을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고시플러스] 행자부, 기록연구직 45명 선발

    행정자치부에서 기록연구직공무원 45명을 선발한다. 재정경제부·교육인적자원부·통일부·외교통상부·국방부·문화광관부·농림부·산업자원부·정보통신부·보건복지부 등 45개 기관별 1명씩 뽑는다. 기록연구직공무원은 기록물 폐기 심사, 주요 기록물의 관리 등 관리업무 전반을 전담하게 된다. 기록관리학·역사학·문헌정보학 등 관련 전공 석사학위 이상자는 나이에 상관 없이 지원할 수 있다. 서류전형 기준은 자기소개서 10%, 대학성적 20%, 외국어 능력 20%, 학위논문 15%, 연구실적 20%, 직무경력 10%, 관련 자격증 5% 등이다. 지원서는 국가기록원 홈페이지(www.archives.go.kr)에서 내려받아 오는 26일부터 29일까지 정부대전청사 국가기록원 또는 정부중앙청사 정부행정자료실 등으로 방문 또는 우편접수한다.(042)481-6271∼3.
  • BK21사업, 논문質 껑충… 공정성시비 잡음도

    BK21사업, 논문質 껑충… 공정성시비 잡음도

    ‘석사 1만 2000명, 박사 5000명 배출, 대학 제도개혁 효과, 인력양성 지원 편중, 연구협력 저조’ 올해로 끝나는 두뇌한국21(BK21)사업의 성적표다. 국제 수준의 논문이 크게 늘고 산·학 연계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사업단 선정 과정에서 공정성 시비 등 잡음이 일기도 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일 오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내년부터 시작하는 2단계 BK21사업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BK21사업 한·중·일 심포지엄’을 열었다.BK21사업은 지난 1999년 세계 수준의 대학원을 키우고, 지역산업의 수요와 지방대 육성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다. BK21사업의 가장 큰 성과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분야 연구진이 낸 국제 수준의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은 사업 첫해 6340건에서 지난해 1만 3334건으로 배 이상 늘었다. 논문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피인용지수(IF)도 논문 한 편당 1.70에서 2.02로 높아졌다.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서울대 오세정 자연과학대학장은 “학부 정원이 줄고 교수 승진 요건이 강화된 것을 비롯해 교수 업적평가제가 도입되고, 대학원 교과과정이 개편되는 등 제도개혁 효과가 있었다.”며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사업단 선정과정에서 공정성 시비가 일고 ▲지역·대학간 균형을 명분으로 한 선택과 집중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은 점 ▲다른 부처의 사업과 연계성이 부족하거나 인력양성에 지원이 편중된 점 ▲대학간 연구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은 점 ▲사업에서 탈락한 대학의 상실감 등은 한계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오 학장은 이어 “내년부터 시작하는 2단계 사업은 교육부는 물론 다른 부처도 참여하는 범부처적 사업이 되어야 하며,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⑥- 현대백화점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⑥- 현대백화점

    현대백화점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3남인 정몽근(63) 회장이 이끌고 있다. 9남매(8남 1녀) 가운데 작고한 몽필씨를 제외하면 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이어 두번째 ‘큰 형님’이지만 MK(몽구),MH(몽헌),MJ(몽준) 등 이른바 3M으로 불리는 화려한 다른 형제들에 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원래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처음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이래저래 세간에서 멀어진 ‘황태자’가 됐다. 하지만 현대백화점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부친의 후광으로만 생각하지 못할 정 회장의 ‘몫’이 있다. 역시 ‘왕 회장’의 아들답게 때로는 부친과의 담판을 통해 새 사업을 추진하고, 때로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경영상의 문제들을 다른 형제들과 대화로 풀어내며 회사를 일궈왔다. 그가 1974년 현대백화점의 전신인 금강개발산업주식회사를 맡을 당시 회사는 현대그룹 주력사인 현대건설의 외곽 지원업체에 불과했다. 개발시대에 쭉쭉 뻗어나가던 현대건설이 진출하는 국내외 현장에 식품과 의복 등 잡화류를 공급하고 동부이촌동 등 6개의 금강슈퍼마켓 등을 운영하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현대백화점그룹은 현재 주력사업인 백화점외에 홈쇼핑, 지역케이블 방송사업 등 계열사 20개를 거느린 유통그룹으로 우뚝 섰다. 지난해 매출이 5조 2500억원, 영업이익은 3300억원에 이른다. ●부친 설득해 한강가에 세운 명품백화점 현대백화점 사람들은 정 회장을 사실상의 창업자라고 말한다. 다른 형제들이야 자동차, 중공업 등 부친이나 삼촌들이 키워온 중후장대한 기업을 물려 받았지만 정 회장의 출발은 그들과 다르다는 설명이다. 현대백화점 한 임원은 “기껏해야 현대건설의 하청업체 수준이었던 회사가 그룹사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을 지으면서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그룹의 모태가 된 압구정 본점을 짓고 그 이후 이윤을 남겨 1988년 무역점을 짓고 또 다른 백화점을 문여는 등 새 점포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그룹사로 발전된 것이라는 얘기다. 70년대 중반 이후 압구정동은 대규모 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건축법상 근린상가를 의무적으로 지어야 했다. 당시 현대아파트의 건설주체인 한국도시개발(현대산업개발)은 롯데, 신세계 등 유통업체에 백화점 진출 의사를 타진했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당시 아파트만 덩그러니 서 있고 배나무 밭으로 황량했던 이 곳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누가 봐도 백화점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현대가 백화점 사업에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극언을 서슴지 않던 기업인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 정 회장은 백화점 진출 의사를 밝혔다. 예상대로 그룹 안팎의 반대에 부딪혔다.“현대가 유통경험이 없는 데다 아파트 단지 배후에 한강이 흐르고 백화점 옆에 고가도로(동호대교 연결)가 가로지르는 등 사업 타당성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일본 도쿄에 있는 다카시마야 백화점 후다코다마가와점의 성공을 예로 들며 부친을 적극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백화점은 현대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강이 흐르고 부촌에 자리잡고 있어 입지 여건이 비슷했다. 정 회장은 청운동 본가를 찾아가 사업 보고서를 보이며 백화점 사업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왕 회장도 아들의 집념 어린 설득에 결국 사업 참여를 결심했다. 현대가에서는 이를 두고 “몽근이한테도 이런 사업에 대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었느냐.”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때 정 회장의 뚝심이 발휘된다. 다른 유통업체들이 구조조정을 하며 신규 출점을 주저하고 저가 정책을 추진할 때 정 회장은 오히려 거꾸로 가는 정책 결정에 손을 들어줬다.98년 부도위기에 놓인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인수해 신촌점으로, 울산 주리원 백화점 2곳을 인수해 울산점으로 탄생시키고, 서울 천호점도 문 열었다. 최고급 인테리어와 상품을 앞세워 ‘명품 백화점’임을 일반에 각인시키며 고급화 전략을 폈다. 이같은 정 회장의 역발상 기조에 대해 당시 유통의 흐름을 거슬렀다는 지적도 있지만 내부에서는 이런 정 회장의 정면 돌파형 리더십이 현대백화점의 성공 기반이 됐다고 평가한다. ●삼국지 꿰뚫는 ‘리틀 왕회장’ 정 회장의 이런 일면은 평소 삼국지 등 각종 전략 서적을 즐겨 읽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신규 백화점 출점후 임원들과 갖는 자리에서 ‘적벽대전’ 등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들을 즐겨 인용한다. 중국 삼국시대 양쯔강 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위나라 조조가 오나라의 손권, 촉나라의 유비 연합군과 치른 전투 내용을 줄줄이 꿰며 승전 전략을 소개한다. 현대백화점의 한 임원은 “정 회장은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 이름과 전투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고 전했다. 그는 실제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형상이다. 골격이 큰 몸집에 굳게 다문 입, 솥뚜껑처럼 큰 손과 발은 여지없이 현대가의 혈통을 지닌 남자임을 보여준다. 나이 들면서 얼굴에 돋아나는 검버섯과 걸음걸이를 보면 부친인 왕 회장과 흡사하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세간에는 한때 ‘건강 이상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매일 오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내에 있는 백화점 본사 4층 회장실에 출근, 굵직한 사업의 방향타 역할을 한다. 서울 시내 6개 백화점과 중동점 등 7개 백화점 가운데 하루에 2∼3군데의 백화점을 순시하는 이른바 ‘점 순회’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점포당 30분 정도 걸린다. 비슷한 시간대에 항상 나타나는 정 회장을 보고 매장 직원들이 인사하면 “어잇!”하며 꼭 화답을 한다.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니 직원들도 정 회장을 낯설어 하지 않는다. 매장을 지나다 고객들을 만나면 먼저 지나가도록 자신은 비켜 서는 서비스 정신도 몸에 배었다. 정 회장의 현장 중시 스타일도 부친과 닮은 꼴이다. 백화점 신축 공사 현장에는 늘 그의 발걸음이 닿는다. 공사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안전모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왕 회장’을 보는 듯하다고 현대백화점 맨들을 말한다. 그는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대화로 풀 것을 강조한다. 한번은 건설 현장에서 이뤄진 브리핑 도중 간부들간에 이견이 생기자 정 회장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함께 반영되는 것이 최선이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투박한 외모와 달리 자상한 편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얘기한다. 백화점을 둘러보아도 상품이 진열돼 있는 멋진 매장보다 주차장, 식품 작업장 등 구석진 곳을 먼저 찾는다. 어려운 여건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봉투에 넣지도 않고 자신의 지갑에서 20만∼30만원씩 꺼내 “소주에 삼겹살이나 하라.”며 격려금을 건넨다. 다음날 이들을 만나면 “회식 잘 했냐.”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지난해 정 회장 생일에는 시내 모음식점에서 전·현직 임원들을 초청,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이날 정 회장 부부는 물론 장남 지선씨 부부도 나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 ‘주차장 제일론’을 갖고 있다. 임원들이 상품과 서비스, 매장 환경을 중요시한다면 정 회장은 임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설은 주차장”임을 내세운다. 현대백화점 목동점·미아점의 주차장 진입로 폭이 다른 백화점과 비교해 훨씬 넓은 것은 여성 고객들을 위해서다. 주차장 하나에도 “고객을 최우선으로 배려하라.”는 정 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겨있는 셈이다. ●황산덕가(家) 손녀 며느리로 맞아 경복고,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정 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평사원으로 있던 우경숙(54)씨와 결혼, 슬하에 지선(33), 교선(31) 등 2남을 뒀다.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여성스러우면서도 야무진 외모에 차분하고 깔끔한 성격의 우씨를 내심 며느리감으로 점찍었다는 후문이다. 우씨의 친정은 평범한 집안으로 부친은 우호식 전 현대그룹 고문이다. 우씨는 중앙여고를 졸업했다. 장남 지선씨는 경복고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현대가 3세들이 대부분 미국 유학파이듯 그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촌형제들 가운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외아들 의선(35)씨와 가깝다. 아무래도 지선씨가 손아래 동생이다보니 의선씨로부터 사업상 조언을 받는다는 후문이다. 사업외에 여러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다. 지선씨는 고교 동창의 소개로 만난 동갑내기 황서림씨와 2001년 10월 정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결혼, 장남 창덕(1)군을 두고 있다. 서림씨는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로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성격이 활달하고 대인관계가 좋아 선후배와 교수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지난 97년 삼성문화재단이 선정한 문화예술인재로 뽑혀 장학금을 받으며 미국 뉴욕대에서 미술관 경영을 전공했다.99년부터 1년간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뉴욕 근대미술관 뉴미디어 부서에서 부지배인을 맡았고,2000년 3월부터 5개월 동안 세계적인 일본 멀티미디어 작가 마리코 모리의 스튜디오 조교를 지냈다.2000년 7월부터 뉴미디어와 교육 인터넷사이트에서 웹 프로듀서로 근무하기도 했다. 지선씨는 서림씨를 처음 보는 순간 아내로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특히 밝고 쾌활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서림씨 역시 정 부회장의 과묵하고 남자다운 면이 좋았다고 한다. 교선씨는 경복고, 외국어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아델파이대에서 경영학석사를 땄다. 대학시절 청바지와 면티를 입고 다니는 등 소탈하게 생활해 같은 학과 친구들조차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현대가의 3세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다.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들에 따르면 지갑에 돈도 별로 없이 구내식당에서 밥먹고 버스를 몇번씩 갈아타고 통학하는 등 검소한 생활을 했다. 부드러운 성격에 논리도 갖춰 친구들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중재역할을 맡곤 했다. 한때 미대 진학을 고려 했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2녀 중 장녀인 승원(30)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승원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 치과대에 다녔던 재원이다. 교선씨와 승원씨는 학교가 같은 미국 뉴욕에 있어 유학시절 자연스럽게 1년6개월 정도 사귀었다. 현대가와 사돈을 맺은 허 부회장은 32년간 스프링과 차량 시트 등 자동차 소재의 국산화에 앞장선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인 대원강업의 오너겸 전문경영인이다. 연 매출 3600억원 정도다. ●현대백화점 이끄는 파워 엘리트 하원만 현대백화점사장은 1978년 입사해 기획·관리·영업·구매·마케팅 등 백화점 업무를 두루 거쳐 2003년 1월 현대백화점 사장에 오른 백화점통이다.“백화점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생활문화를 제안하는 곳”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다른 업체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라이프 스타일리스트 현대백화점’을 새 전략으로 내걸고 있다 부드러운 외모이지만 승부욕과 추진력을 갖췄다는 평이다.“음식재료나 요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식품 책임자를 할 수 있냐.”며 지난해 식품 책임자 전원을 요리학원에 다니게 했다. 또 여성 심리를 모르고는 유통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직원들에게 여성 심리를 알 수 있는 책 읽기와 ‘엄마를 잡아라’나 ‘왓 위민 원트’와 같은 영화 감상도 권하는 섬세한 스타일이다. 지난해 백화점협회장으로 취임, 일본백화점협회와의 68년 만의 교류방문 등을 펼치고 있다. 경청호 현대백화점 기획조정본부 사장은 영업·관리·기획 등 백화점의 주요 포스트를 두루 거쳤다.2003년 부사장을 달고 현대백화점그룹 경영지원실장을 맡아오다 지난 1월 경영지원실의 기능과 역할이 대폭 강화되면서 기획조정본부 사장을 맡고 있다. 기획조정본부는 그룹내 투자·인사 등 주요 핵심 업무를 조정, 통합하는 조직으로 다른 대기업의 구조조정본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 경기침체로 인한 유통업계 불황 타개를 위해 구조조정의 중추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회사내 권위, 형식, 온정주의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 사장은 평소 메모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기억력이 비상해 보고하는 임직원들이 땀을 흘릴 정도다. 열가지 사안을 한가지로 압축해 신속정확히 처리하는 업무방식과 건강 및 체력관리 등 자기관리가 워낙 치밀해 빈틈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간부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는 회식자리에서는 위트나 유머로 웃음바다를 만들곤 해 인간적 매력도 있다는 평이다. 김태석 현대백화점 H&S·현대푸드시스템 사장은 78년 현대백화점에 입사해 경리·회계·재무 등 관리 및 지원업무를 거쳤다. 지난해 말까지 백화점 영업본부장직을 맡다가 올부터 현대백화점H&S와 현대푸드시스템의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 사장은 일, 생활 모든 면에서 폭이 넓은 CEO이다. 특히 진솔한 대화를 통한 친화력있는 리더십이 돋보인다. 일본 전국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다룬 ‘대망’을 임직원들의 필독서로 권한다. 김 사장은 임직원들이 자기 업무에 자긍심을 가질 것과 직무에 필요한 다양한 자격증 취득을 독려하는 등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광균(부사장) 한국물류 대표는 74년 현대그룹에 입사, 현대백화점 천호점장·무역센터점장·현대백화점 H&S 대표이사를 거쳤다. 낙후된 물류 시스템을 바꿔 유통 경쟁력을 높이는 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백의 머리와 걸쭉한 목소리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오랜 지기처럼 느껴지게 하는 친화력을 갖고 있다. 홍성원(부사장) 현대홈쇼핑 대표는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출신으로 ‘열린 CEO’라는 의견수렴 제도를 운영, 현대홈쇼핑의 무형상품 경쟁력을 높이는 데 성공했으며, 홈쇼핑업계의 후발주자로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일 새벽 집 근처 산 바위에 앉아 하는 명상으로 하루를 연다. 명상에서 얻은 업무 관련 아이디어를 감성적으로 표현한 일일쪽지를 이메일 형태로 아침마다 전직원에게 보내 새로운 업무 활력을 제공한다. 최신 유행가도 따라 부르고 패션 감각을 갖고 있으며 젊은 직원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 bori@seoul.co.kr ■ 장남은 백화점, 차남은 H&S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후계 구도는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정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두 아들에게 백화점 관련 주식을 증여하며 자신의 지분을 계속 축소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장남 지선(33)씨는 현대백화점 지분 15.72%에 현대푸드시스템의 현대백화점 지분 4.3%를 더해 사실상 20.02%의 백화점 지분을 확보, 최대 주주가 됐다. 차남 교선(31)씨도 지난해 처음으로 부친으로부터 현대백화점 H&S의 주식 56만주(10%)를 증여받아 2대 주주가 됐다. 지선씨는 현대백화점, 교선씨는 현대백화점 H&S로 형제간에 경영권 관할이 가시화된 것이다. 현대백화점 H&S는 여행사 현대드림투어와 기업들의 명절 선물사업을 하는 백화점 특수판매 회사로 이뤄져 있다. 지선씨는 2001년 현대백화점 기획실장(이사)으로 기획·인사·재무·조직관리 등 핵심 업무를 두루 맡아왔다.2003년에는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부회장 직함을 달면서 지선씨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던 백화점 경영에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백화점 등 계열사들을 세차례에 나눠 한달에 한번씩 경영전략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계열사의 투자·인사는 물론 업무 조정·통합 역할까지 진두지휘한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외부에서는 여전히 경영수업 중이라고 생각하지만 정 부회장은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 전반에 걸쳐 부회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선씨는 부회장이 되자 마자 어려움에 처했다. 경기침체로 백화점 업계가 불황을 겪으면서 현대백화점은 다른 유통업체와 달리 할인점이 없는 사업구조와 신규사업 진출 부진으로 미래 성장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 부회장은 최근 회사의 미래성장 엔진 발굴에 적극적인 자세를 강조한다.“유통이든 유통이 아니든 수익을 내 회사에 도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신사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회사 역량 강화를 위해 외부 자문도 구하라.”는 제안도 했다. 그렇지만 “사업을 하다보면 구름도 끼고 햇볕도 드는 것”이라면서 자신감을 보이기도 한다. 또 지난 1월 조직개편을 단행, 기존의 경영지원실을 기획조정본부로 승격시키며 조직 장악에 나섰다. 사회공헌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최근 경영전략회의에서 ‘매칭그랜트’제도 도입을 지시하기도 했다. 임직원이 매달 봉급에서 일정 금액을 자발적으로 기부하면 회사에서도 그만큼의 금액을 출연해 사회공헌기금을 마련하는 이 제도는 유통업계에서는 처음 시도됐다. 정 부회장은 사내에서 “과묵하면서도 매우 꼼꼼하고 생각이 깊다.”는 평을 듣는다. 주요 회의에서도 다른 임원들의 의견을 경청한 뒤에 소신껏 자기 의견을 제시한다. 소수의견이라도 타당성이 있으면 흔쾌히 수용하고 정책방향을 수정하는 합리적인 스타일이다. 정 부회장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는다. 올해 계열사별 신년 업무 브리핑 이후 간부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버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 스타일로 나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웬만해서 지치지 않는 강인한 체력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다. 동생 교선씨는 지난해 1월 경영지원실 산하 경영관리팀장(부장)을 맡은 데 이어 올해 기획조정본부 기획담당 이사로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 일을 배우는 단계여서인지 매사에 열심이다. 형 지선씨보다 선이 굵고 상당히 활동적인 성격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들 형제는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사 사무실 4층에서 나란히 근무하고 있다. bori@seoul.co.kr ■ ’숨은 실세’ 우경숙 고문 정몽근 회장의 부인 우경숙(54) 고문은 현대가의 다른 며느리들과 달리 회사 경영에 참여한 활동파다. 현대가의 딸과 며느리들이 대부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로 소리없이 문밖 출입을 했던 집안 분위기를 감안할 때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다. 훗날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전면에 나선 것과도 사뭇 다르다. 우 고문은 사실 정 회장과 결혼후 현대가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남편을 내조하는 전형적인 주부에 머물렀다. ●비서실 근무하다 며느리 낙점 현대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현대가에 시집와서인지 우 고문은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본격적인 백화점 사업을 하기 전인 70년대 후반 울산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시절, 우 고문은 수시로 울산 방어진 수산시장에서 ‘참전복’을 공수해 청운동 본가로 보냈다.“정말 복 덩어리 음식이 참전복인 만큼 어른들 건강에 좋다.”며 살이 통통한 자연산만 고집했다. 잘 익은 제철 과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가정사에만 신경쓰던 당시 우 고문의 대외 활동이래야 1985년 백화점사업을 시작하기 전 서울 압구정동 본사의 작은 건물 직원식당에서 창립기념일 등에 참석하는 수준이었다. 우 고문은 회사 행사에서 시어머니인 변중석 여사와 함께 임직원들에게 직접 떡과 과일 등을 담아주는 일을 했다고 당시 직원들을 기억한다. 그러던 우 고문은 백화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96년까지 우고문은 상무 직급을 달고 현대백화점의 신상품 개발 담당 업무를 맡았다. 유통업계 후발주자인 현대백화점으로서는 롯데, 신세계백화점과 경쟁하기 위해 고급화·차별화 전략이 절실했던 시기다. 그래서 백화점 PB(자체브랜드)개발에 주력했다. 상품개발부 직원 30여명과 함께 그가 개발한 자체브랜드는 ‘시그너스’‘벨라지’‘아르모니아’ 등이다. 특히 아르모니아는 강남의 전문직 여성들 사이에 한때 붐을 일으킬 정도로 히트를 쳤다. 96년에는 전세계에 10개의 매장만 운영할 정도로 신규 매장 출점에 까다로운 이탈리아 하이패션 브랜드 ‘지비에르돈나’를 압구정점에 유치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명품 브랜드 유치 수완도 당시 상품개발 부문에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로부터 우 고문은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패션을 보는 안목과 미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계절에 앞서 주력 상품을 고르는 과정에도 직접 참여하고 의견을 내놓아 담당 바이어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틈틈이 집에서 그리는 서양화 실력은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나면 미술전이나 각종 전시회를 찾는 것도 우 고문의 패션 센스와 맥을 같이 한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그는 최근 몇년사이 점포수 확대와 홈쇼핑 등 사업 다각화가 이뤄지고, 현대백화점이 현대백화점 H&S와 분할되는 과정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계열사간 투자, 인사에 관한 업무조정 및 중재가 필요한 시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역할이 부각됐던 것이다. 때문에 그룹 안팎에서는 ‘우씨’집안에서 백화점 경영을 섭정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2003년 장남인 지선씨가 그룹 부회장을 맡으면서 우 고문에게 쏠리던 시선은 상당 부분 거두어졌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장남의 후계구도를 굳히는 과정에서 우 고문의 역할이 다소 과장되면서 실제 이미지와는 다르게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두 아들이 경영에 적극 참여하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다만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 사무실을 두고 이곳에서 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백화점 분위기도 살핀다. 가끔 백화점 영업이나 환경에 대해 세심한 조언을 해 매장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500평 규모의 현대백화점 본점 옥상을 잔디공원으로 바꿔 고객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토록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지난해부터 백화점 직원과 협력사원이 함께 하는 지역 사회단체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우 고문이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bor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원자력연구소장에 박창규씨

    한국원자력연구소는 15일 박창규(54·원자력수소사업추진단장) 박사가 제16대 소장으로 선임됐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경기고·서울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 석사·미시간대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9년부터 연구소에서 일해왔다.
  • 치과의사서 보석사업가 변신 DY인터내셔널 이교보 이사

    치과의사서 보석사업가 변신 DY인터내셔널 이교보 이사

    “우리의 보석 문화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형식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부의 과시나 과소비로 비난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전 보석의 거품을 빼고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남가주대학병원에서의 치과의사 생활을 접고 보석사업가로 변신한 DY인터내셔널의 이교보(35) 이사. 그가 관심을 끄는 것은 치과의사의 변신이란 유별난 이력때문만은 아니다. 보석 문화를 바꾸겠다는 의욕과 실천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최근 강남에 보석 편집매장 ‘르 플뤼(Le Plus)’를 런칭했다.‘최고’라는 뜻의 이곳에 이탈리아의 칼가로, 프랑스의 마리옹, 일본의 리츠 등 최고의 주얼리를 선보였다. 그중 칼가로는 얇은 금·은으로 뽑아낸 실로 다양한 주얼리를 만들어낸 제품. 주얼리 하나로 목걸이, 팔찌, 벨트 등으로 다채롭게 연출할 수 있는 창의력이 가득하다. 이런 세계적 명품을 들여온 것은 ‘짝퉁’이 판치는 국내 보석업계를 파트너로 삼길 원치 않는 유럽시장에 한국에 대한 편견을 없앴다는 의미도 갖는다. 왜 하필 보석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는 질문에 그는 “치아 하나를 다듬기 위한 정교한 작업은 보석의 세공기술과 흡사합니다. 예술성과 미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것도 비슷한 점이죠.”라고 답한다.199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던 길에 200년간이나 가업을 이어오는 보석회사의 장인정신과 열정을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보석가공업을 운영해온 어머니의 대를 잇는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수입으로 시작했지만 앞으로 소비자 욕구, 품질, 가격의 삼 박자가 고루 갖춰진 제품을 일본, 중국에 역수출해 아시아의 보석시장을 공략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홍보전문가 채용 기준 대폭 완화

    각 부처가 채용하는 홍보전문가의 응모 자격이 대폭 낮춰졌다. 중앙인사위는 홍보 분야를 시작으로 다른 분야의 기준도 대폭 완화할 방침이어서 향후 민간의 공직진출이 훨씬 쉬워질 전망이다. 13일 중앙인사위에 따르면 홍보 인력의 민간 수혈을 쉽게 하기 위해 정책홍보담당 채용 자격기준을 완화했다. 자격기준이 다소 엄격해 정책홍보담당의 전문인력(일반계약직 4급 또는 5급)채용이 어렵다는 각 부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는 일반계약직 4급(서기관)의 경우, 박사학위 취득 후 5년 이상 관련분야에서 실무경험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었지만, 실무경력 2년으로 완화했다. 석사학위자는 취득 후 9년 이상 실무경력자에게 자격을 주었으나 6년 이상으로 낮췄다. 학사학위자는 12년 이상 관련분야에서 실무경력이 있어야 했지만 9년으로 축소했다. 학사학위 취득 후, 관련분야가 아니더라도 11년 이상 실무경력이 있으면 된다. 아울러 학위가 없어도 15년 이상 실무경력이 있으면 응모가 가능하다. ‘5급 또는 5급 상당’(사무관)의 현행 공무원이 4급에 응모할 경우는 5년 이상 관련분야 실무 경력이 있어야 했으나 2년으로 완화했다. 5급(사무관)의 경우 석사학위자는 취득 후 4년에서 1년으로, 학사 취득자는 7년에서 4년 이상으로 관련분야 실무경력을 완화했다. 관련분야가 아니면 학사취득 후 6년 이상 실무경력이 있으면 된다. 인사위 관계자는 “이번에 완화된 기준은 현행 공무원에 비해 전문가를 우대해 주는 수준”이라면서 “홍보 전문분야의 채용기준 완화를 계기로 다른 분야도 완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정부는 홍보업무를 강화하기로 하고 부·처·청에 모두 67명의 홍보인력을 증원하기로 했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자기투자 올인 ‘自테크’ 바람

    자기투자 올인 ‘自테크’ 바람

    젊은 직장인 사이에 ‘10년 안에 10억 만들기’가 상징하는 재(財)테크 열풍이 유행처럼 번진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한창 젊을 때부터 열심히 모으고, 효과적으로 투자해 앞날을 준비하자는 당찬 미래설계였다. 하지만 이제 그 투자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자신에 대한 투자로 부가가치와 자기 만족을 동시에 높인다는 ‘자(自)테크’족이 늘고 있는 것.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1년치 연봉을 몽땅 투자해 해외 연수를 떠나고, 주경야독하며 자격증을 준비하는 등 유형도 다양하다. 물론 포기해야 하는 시간과 돈 등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들은 “갈수록 험난해지는 세상, 몇년 동안의 과감한 투자로 원하는 일을 찾고 ‘몸값’도 올리는 것이 재테크보다 더 가치있고 확실한 투자”라고 입을 모은다. ●“1억원 이상 기회비용 기꺼이 감수” 맹계원(31)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지난달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에 다닌다. 연세대와 포항공대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에서 3년 동안 연구원으로 일한 그의 지난해 연봉은 성과급을 합해 6200만원 정도. 맹씨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자리를 미련없이 포기한 것이다. 그는 “이공계통의 학문적 배경과 연구직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큰 틀에서 기업 전체를 조망하고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변신의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진학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2년 전 결혼한 그가 수입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한 학기 600만원이 넘는 학비를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석사학위가 없는 것도 아닌데 또다시 2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는 데 대한 우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은 지금 투자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면서 “정말 하고 싶고 또 전망있는 일을 위해 과감히 투자했고 후회없이 공부하고 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지난 2월 KAIST에서 테크노MBA를 마치고 삼성코닝정밀유리에 대리급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유종현(32)씨도 비슷한 케이스.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3년 동안 삼성코닝 해외영업팀에서 일했던 그는 2003년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유씨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시기를 놓치면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투자했다.”면서 “2년 동안 1억원 이상의 기회비용이 들었지만 나 자신을 보다 가치있게 만든 ‘경제적인 투자’였다.”고 자부했다. ●전문성 강화·인생의 전환점도 이화여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수출팀에서 4년 동안 일했던 윤희선(가명·35·여)씨는 거의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동시통역사로 직업을 바꿨다.2000년 회사를 그만둘 때 “남들은 못가서 안달인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는 만류도 많았지만 “평생직장 개념이 이미 사라진 마당에 더 늦기 전에 좀 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다.”며 주저없이 사표를 던졌다.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올해부터 GM대우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윤씨는 3년 동안의 진학 준비와 2년 동안의 학비로 이전에 직장생활을 하며 저축한 돈 모두를 투자했다. 그는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승진하고 연봉도 올랐을 테니 지금 수입이 결코 많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하지만 그저 돈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유롭고 전문적이며 평생 할 수 있는 ‘내 일’을 얻기 위해 집중적으로 투자한 돈과 시간, 에너지는 결코 아깝지 않은 ‘남는 장사’”라고 강조했다. 경기 성남 S고교 영어교사인 임혜진(가명·29·여)씨는 2003년 한해동안 1년치 봉급을 몽땅 털어 어학연수를 다녀왔다.3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실전 영어의 중요성을 절감하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도 불안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1년을 외지에, 그것도 자비로 나가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의 대학 부설 언어교육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틈날 때마다 여행을 하며 대학시절에도 누리지 못한 자유를 만끽했다. 연수기간 동안의 다양한 경험과 회화실력으로 가르치는 일에도 자신감이 붙었고 삶의 활력도 얻었다. ●“재테크보다 더 확실한 투자” 자기계발 열풍은 더욱 경쟁이 치열해가는 사회환경의 변화 및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가치관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기대감이 교차한 결과이다.‘공부하는 직장인’이라는 뜻의 ‘샐러던트’가 늘어나는 것도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 욕구가 더욱 뚜렷해지는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윤창한 연세대 경영대학원 사무부장은 “최근 2∼3년 사이 학생들 연령이 5∼7세 낮아져 지금은 30대 초·중반이 대부분”이라면서 “그만큼 일찍부터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자기 투자에 ‘올인’하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박희제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의 모습으로는 당장 내일도 보장받기 힘들 만큼 지식과 사회 구조가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면서 “격화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김경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무조건 일터에서 성실히 일한다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젊은시절 투자로 주변 여건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실한 무기를 갖추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익률 높은 ‘고급 인력’이 되는 것이 재테크보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노후 보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효용 박지윤기자 utility@seoul.co.kr ■자테크의 좋은 점 5가지 ▲전문성을 강화해 ‘몸값’을 높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투자다. ▲몇년 동안의 투자로 평생 전문직으로 탈바꿈해 ‘고수익’을 얻는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비로소 찾아 자아를 실현한다. ▲인생의 전환점이자 훗날까지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믿을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인 불확실성의 시대에 자신감으로 무장한다.
  • 서로 밀어주니 몸값 쑥쑥 미래 쑥쑥

    서로 밀어주니 몸값 쑥쑥 미래 쑥쑥

    재(財)테크든, 자(自)테크든 선택의 핵심은 결국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하는 문제다. 미혼일 때는 선뜻 공부에 투자를 아끼지 않다가도 결혼을 하고 나면 이런 저런 돈 쓸 곳이 많아지면서 자기계발은 뒷전으로 밀리곤 한다. 그럼에도 부부가 함께 노력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2030 부부가 늘고 있다. 김용섭(33)·전은경(30)씨는 “지속적인 자기계발로 부부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가는 것은 ‘1+1’이상의 시너지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부부 자테크족’이다. 김씨 부부는 결혼을 앞둔 2001년 2월 ‘능력과 전문성 키우기 5년 계획’을 세웠다. 당시 김씨는 컨설팅회사에서, 전씨는 디자인 전문교육기관에서 그래픽디자인 강사로 일하며 각각의 분야에서 책을 내는 등 이미 상당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보다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서로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기로 했다.5년 동안 석사학위를 하나씩 따고, 전문성을 키워나가면서 해마다 두 사람이 함께 책을 한권씩 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두 사람은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대학원 공부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학비와 정보수집 비용 등으로 해마다 3000만원 이상을 썼다. 4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은 “투자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숙명여대 원격대학원 등에서 디지털콘텐츠와 웹미디어 전략을 가르치고 있다. 미디어전략을 분석하는 컨설팅과 각종 칼럼을 쓰는 일도 꾸준히 했다. 전씨도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매니지먼트를 공부하면서 현재는 디자인 전문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책 쓰기 목표도 거의 이루었다. 지금까지 김씨가 8권, 전씨가 5권의 책을 펴냈다.‘1위 웹사이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2003년)’,‘전략적인 웹디자인(2002년)’ 등은 두 사람의 전문 분야를 접목시켰다. 부부칼럼니스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결혼은 안 미친 짓이다(2004년)’ 등 함께 쓴 책도 3권이다. 김씨는 “디지털 시대에 조직에 기대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미지와 가치를 바탕으로 한 ‘1인 기업’이 되겠다는 목표를 차근차근 달성하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한 사람이 열 걸음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에게 투자하면서 같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더 의미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또 “자신에 대한 투자에도 시기가 중요한 만큼 20∼30대가 최적기”라면서 “결혼은 자기발전의 걸림돌이나 사회활동의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동기부여이며 상호 발전을 위한 기회”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물론 투자에는 책임과 노력이 따라야 하고 때로는 기대 이하의 결과도 감수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모든 투자가 다 그렇고, 그것이 또 투자의 매력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것보다 자기계발로 3000만원짜리 몸값을 1억원짜리로 만들어 낸다면 이보다 현명한 투자는 없을 것”이라면서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에 자기 자신만큼 좋은 대상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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