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석사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 아동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097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5) 중공업 재건에 나선 현대가 최연소 오너 CEO 정기선 부사장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5) 중공업 재건에 나선 현대가 최연소 오너 CEO 정기선 부사장

    현대중 정기선 부사장, 지난해부터 경영전면에 나서선박수주절벽과 상속세 1조원 마련 등 과제 산적부친 정몽준 이사장은 FIFA 징계풀려 ‘권토중래’ 꾀해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해당화가 찬란하고 눈이 많은’ 강원군 통천군 아산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이 되는 게 싫어 소학교를 졸업한 14살 무렵무터 가출을 시도하며 경영인의 꿈을 키웠다. 학업에 미련이 많았던 정 회장은 8명의 아들중 6남 정몽준이 서울대에 입학하자 뛸 둣이 기뻐했다. 변형윤·이현재 교수 등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을 울산으로 초대해 크게 ‘한턱’을 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부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정몽준(67)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은 중앙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뒤 메사추세츠공과대(MIT) 경영대학원 석사와 존스홉킨스대 국제문제연구원(SAIS)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화려한 학력과 이력을 쌓았다. 경영인으로 외길을 걸었던 형제들과는 달리 정 이사장은 현대중공업의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두고 정치에 입문해 7선 의원과 한나라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을 맡으면서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기여했다. FIFA 회장에 도전했으나 윤리위원회로부터 자격정지를 당했지만 지난 2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로부터 제재와 벌금(5만 스위스프랑)이 취소돼 ‘권토중래’를 꾀하고 있다.  최대주주인 정 이사장의 ‘외도’로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찍부터 구축했다. 이재성-최길선 회장-권오갑 부회장 체제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2014년 조선업황이 나빠져 현대중공업이 3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내면서 오너 경영인 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 이사장의 장남 정기선(36)씨가 현대중공업에 재입사, 경영기획팀과 선박본부 부장을 겸임하면서 경영권 승계작업이 자연스레 시작됐다.   정기선 부사장은 대일외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 처럼 학생군사교육단(ROTC) 43기로 임관해 2007년 육군 특공연대(파주 701·흑표범부대)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 아버지의 ROTC 30기 후배인 셈이다.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 대리로 입사한 뒤 그해 8월 미국으로 유학,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은 뒤 2011년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 현대중공업에 다시 들어왔다. 이후 기획재무부문장 상무(2014년)-전무(2015년)를 거쳐 지난해 11월 현대중공업 부사장이자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 현대중공업지주 경영지원실장에 올라 경영 전면에 나섰다. 정 부사장은 지난 3월 현대중공업지주의 지분 5.1%를 확보했다. KCC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중공업지주 주식 83만 1000주를 매입한 것이다. 앞으로 현대중공업 경영권을 실질적으로 승계하려면 아버지 정몽준 이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지주 지분(25.8%)을 물려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속세로 1조원 정도가 필요하다. 정 부사장은 재벌 3세지만 겸손하고 소탈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사 중역들에게 몸을 낮추고 부하직원에게도 말을 높인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경영권 전면에 나선 정 부사장 앞에는 만만찮은 과제가 놓여있다. 세계적인 조선업계 불황으로 극심한 수주절벽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현대중공업그룹 조선 3사의 수주잔고는 2013년말 인도 기준으로 637억 달러에서 지난 5월말에는 234억 달러로 크게 줄었다. 후반기 들어 선박 수주가 늘고 있지만 호황기에 이르려면 갈길이 멀다.  이런 이유로 정 부사장은 선박 AS시장에 미래를 걸고 있다. 지난 2016년 선박의 정비와 수리, 친환경설비 설치사업, 스마트선박개발 사업 등을 담당하는 현대글로벌서비스 설립을 주도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배가 넘는 1억 2000달러를 수주하는 성과를 냈다. 2022년까지 매출 2조원, 수주 23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목표다.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지주 경영지원실장으로서도 그룹의 체질 개선과 사업 다변화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8월 100억 원을 출자해 카카오인베스트먼트, 서울아산병원과 함께 국내 첫 의료 데이터 전문회사인 ‘아산카카오메디컬데이터(가칭)’를 설립했다. 의료 빅데이터 시장은 2023년까지 약 56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용 로봇 분야 강화를 위해 전세계 로봇시장 점유율 3위인 독일 쿠카(KUKA)사와 협력해 2021년까지 국내 시장에 산업용 로봇 6000여대를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동생으로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와 선이, 예선씨가 있다. 정남이 상임이사는 연세대 철학과를 다니다 유학, 미 서던캘리포니아대 음대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공대(MIT) MBA 과정을 마쳤다. 2012년까지 다국적 컨설팅 전문회사인 베인앤컴퍼니에 다니다 2013년 1월 아산나눔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철강회사인 유봉의 서승범(43) 대표이사와 결혼했다. 정선이(32)씨는 미 MIT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다 만난 백종현(35)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백씨는 미국 유명건축사무소에서 근무중이다. 막내 정예선(22)씨는 연세대 철학과에 재학중이다. 2014년 4월 아버지 정 이사장이 서울시장 예비후보였을 당시 페이스북에 세월호 추모열기를 두고 국민정서에 반하는 글을 남겨 논란을 일으켰다. 정 부사장의 외할아버지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이다. 어머니 김영명(63)씨의 언니 영숙(73)씨와 영자(68)씨는 사위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아들인 방준오(44) 조선경제아이대표와 홍정욱(48) 헤럴드미디어회장을 맞는 등 외가가 언론계와 인연을 맺고 있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한국화, 특히 수묵화가 오랫동안 침체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수묵을 연구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대학에서는 동양화나 한국화 전공 학과가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그래도 나는 우리 고유의 수묵담채화 전통과 기법을 후세에 남기고 싶습니다.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길이 57m의 초대작을 그렸다는 오산 홍성모(58) 화백의 화실을 지난 12일 찾았다. 흰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었고, 빨간색 셔츠와 검정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나왔다. 악수하며 맞잡은 손에서 작은 굳은살들이 느껴졌다.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그의 화실로 들어서자 안쪽 벽에 걸린 가로 2.75m, 세로 1.7m 크기의 흑백 그림이 반겼다. 무슨 그림인지 묻자 “사자 바위”라고 짧게 답한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콧날, 수북한 갈기가 엿보이는 게 앞을 내려보는 사자처럼 보였다. 홍 화백은 “적벽강 사자 바위는 채석강과 함께 부안의 명물”이라고 설명해 줬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이다. 그가 작품 구상을 설명했다. “사자니깐 전반적으로 좀더 거칠게 사납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을 가리키며) 빛을 이쪽으로 넣고···.” 이 그림은 부안군의회 포토존에 걸릴 예정이다. 화실의 다른 벽에는 용 비늘 같은 껍질의 소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 마을, 살구꽃이 흐드러진 동네 어귀의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길이 57.4m짜리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던데. -계화도에서 줄포만생태공원까지 변산반도 83㎞의 해안 사계절을 담았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길이가 57.4m, 높이가 1.2m입니다. 가로 2.05m짜리 작품 28개를 그려 이었지요. 시작한 지 20개월 만인 지난 6월에 완성했습니다. 그사이 쓰러져 병원에 두 번 실려 갔죠. 지난 7월 부안군에 이 그림 ‘해원부안사계전도’를 기증했습니다. 군청 민원실 1층과 2층 사이 난간 벽에 길게 걸려 있습니다.→이런 초대형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3년 여름에 위도로 하얀 상사화 스케치를 하러 갔었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변산반도를 바라봤는데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연작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 쪽인 채석강을 보면 그야말로 신이 혼자 즐기려고 만든 정원같이 빼어난 절경입니다. 말 그대로 ‘해원’(海苑·바다의 정원)이지요. 이를 그려 기증하겠다고 제안하니 부안군에서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부안군이 많이 지원해 줬겠다. -부안군이 곰소항 쪽에 작업실을 마련해 줬습니다. 저는 월~목요일 서울에서 활동하다 금요일 부안에 내려가 일요일까지 작업했습니다. 주말마다 266㎞를 달려 내려갔지요. 해안을 스케치하러 낚싯배를 15번 빌려 타고 나갔지요. 낚싯배 한 번 빌리는 데 30만원, 그건 제 지갑에서 나갔습니다. 겨울엔 줄포만 쪽엔 수심이 얇아 배가 못 들어가니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 태우는 경운기와 트랙터를 얻어 타고 갔지요. 잠은 처음엔 여관방에서 자다가 비용 문제로 찜질방에서 자고···. →작업할 때 가장 큰 애로는. -먹는 것이었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깜빡 저녁 시간을 놓쳐 밤 8~9시쯤 나가면 식당들이 문을 닫아 먹을 데가 없어요. 또 간장게장이니, 무슨 찌개를 한 그릇 먹으려 해도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 이상만 팔더라고요. 그래서 2인분을 시켜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포장해 와서 다음날 먹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도시락을 두 끼 정도 싸 다니기도 했고···. 표구 값만 1000만원 넘게 들었는데, 모두 제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남다르게 깊은 고향 사랑 아닌가. -고교 졸업 후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고향이지요. 아름다운 풍광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마음입니다. 나이가 더 들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 작업이 힘들어지기 전에 그림을 남겨 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질 한 번에 산이 솟고, 나무에서 잎이 돋고, 길이 만들어지고, 강이 흘렀다. 그는 작품을 할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케치를 보고 바로 붓질을 하죠. 그러다가 잘못되면 작품을 고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종이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린 화선지 값만 해도 강남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심장병 어린이를 많이 도왔다던데. -제가 심장병으로 대학 4학년 때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때 의사가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요. 동료 학생들이 1000원씩 걷어 모금한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돈이 생기면 단 한 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시켜 주자고 결심한 것이 심장병 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13년 동안 어린이 50명에게 심장병뿐만 아니라 언청이 등의 수술을 해 줬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찾아 입원시켰습니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자랑 같지만 제가 졸업과 동시에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잘나갔죠. 병원비는 그때 작품을 그려 팔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려서 팔고, 후원금 계좌도 만들고, 그렇게 해서 해마다 병원에 2500만원가량을 한꺼번에 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니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후원금도 끊겼습니다. 병원에서는 외상 수술비 갚으라고 독촉도 오고···. 그때 병원 외상이 2억원 남짓 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할 때 와이프 몰래 결혼 반지,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모조리 팔아 병원비를 갚는 데 보탰습니다. 그래도 남은 빚은 병원에서 탕감해 줬습니다. 지금은 심장병 수술을 돕는 단체도 많고, 보험도 적용되고 해서 더는 안 합니다. →그림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요즘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최소 2시간씩은 붓을 잡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바꿨습니다. 동양화 특히 한국화의 맛과 멋, 선의 묘미를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팔이 아파 들지를 못합니다. 한참 풀어 줘야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도, 직업병 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오른손을 다시 만져 봤다. 가운뎃손가락의 마지막 끝 부분이 한쪽으로 뭉턱 들어갔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씨름한 훈장이지요.”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손톱은 다른 손가락과는 달리 먹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강원도 그림을 많이 그렸던데. -IMF 이후 병원 빚을 겨우 갚고 나서,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숨어 살려고 강원 영월에 들어갔습니다. 그전에 80년대부터 영월군 청령포를 처음 접했을 때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암절벽의 산과 계곡이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에 반해 영월의 폐교에 화실을 마련해 거기서 살았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다음 전시회는 언제 여나. -내년에 열한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약간 색다른 전시를 할까 합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정자나 경치, 나무 등에 얽힌 역사와 야사 등도 함께 적어서 그림 아래에 붙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안에 내려가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습니다. 한 100점 정도 전시할 생각인데, 지금 70점 정도 완성했습니다. 글 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홍성모는 누구 - 1961년 전북 부안 출생, 원광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졸업(석사), 개인전 10차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성균관대 겸임교수 역임, 동국대·원광대 강사 역임 ●작품의 대표적 소장처 - 한국은행 청주지점, 외교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천대 길병원, 싱가포르 대사관, 부안군청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길이 57.4m 초대작 남긴 홍성모 화백이 말하는 수묵화“한국화 특히 수묵화가 오랫동안 침체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저를 비롯한 수묵을 연구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그림에 발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동양화나 한국화 전공 학과가 없어지는 추세지요. 그래도 나는 우리 고유의 수묵담채화 전통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요.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길이 57m의 초대작을 그렸다는 소식에 동양화가 오산(悟山) 홍성모(58) 화백을 지난 12일 찾아갔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그의 화실이 찾아가는 길에서 그를 만났다. 화실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한 듯 홍 화백이 마중 나온 것이다. 흰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묵었고, 빨간색 셔츠와 검정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나왔다. 길거리에서 악수를 했다. 그의 손바닥은 작은 굳은 살이 박혀 거칠거칠했다. 그를 따라 화실에 들어서자 안쪽 벽에 걸린 가로 2m75cm, 세로 170cm 크기의 흑백 그림이 반겼다. ‘무슨 그림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처음 만난 기자가 다소 서먹한지 “사자 바위”라고 짧게 답한다.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다소 어색한 듯도 했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콧날, 수북한 갈기··· 앞을 내려보는 사자처럼 보였다. 홍 화백은 “적벽강 사자 바위는 채석강과 함께 부안의 명물”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이다. 어색함이 다소 풀린 듯 작품 구상을 설명했다. “사자니깐 전반적으로 좀 더 거칠게 사납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을 가르키며) 빛을 이쪽으로 넣고···.” 이렇게 큰 그림을 어디에 전시할 것이냐고 묻자 “부안군의회 포토존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화실의 다른 벽에는 용 비늘 같은 껍질의 소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 마을, 살구 꽃이 흐드러진 동네 어귀의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눈이 호사를 누렸다.- 길이 57.4m짜리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던데.☞ 변산반도의 4계절을 그렸습니다. 계화도에서 줄포만생태공원까지 83km의 해안 4계절을 20개월 만에 완성했지요. 지난 7월에 부안군에 이 그림 ‘해원부안사계전도’를 기증했습니다. 군청 민원실 1층과 2층 사이 난간 벽에 길게 전시돼 있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길이가 57.4m, 높이가 120cm입니다. 가로 2m5cm짜리 작품 28개를 그려 이었지요. 이 작품을 하다가 과로로 화실에서 쓰러져 병원에 두 번이나 실려갔습니다. - 이런 초대형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3년 여름에 위도로 하얀 상사화 스케치를 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돌아오면서 선상에서 본 변산반도가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연작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 쪽인 채석강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신이 혼자 즐기려고 만든 정원같이 아름다운 절경입니다. 말 그대로 ‘해원(海苑·바다의 정원)’이랍니다. 이를 그려 기증하겠다고 제안하니 부안군에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 부안군이 많이 지원해 줬겠다.☞ 부안군이 곰소항 쪽에 작업실을 마련해줬습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금요일 부안에 내려가 일요일까지 작업했습니다. 주말마다 266km를 달려 내려갔지요. 해안을 스케치하러 낚싯배를 15번 빌려 타고 나갔지요. 낚싯배 한번 빌리는데 30만원, 제 지갑에서 나갔습니다. 겨울엔 줄포만 쪽엔 수심이 얇아 배가 못 들어가니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 태우는 경운기와 트랙터를 얻어 타고 갔지요. 개펄이어서 발이 빠지니 걸어다니진 못하거든요. 잠은 처음엔 여관방에서 자다가 비용 문제로 찜질방에서 자고···. - 해원부안사계도 작업할 때 가장 큰 애로는.☞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깜빡 저녁 시간을 놓쳐 밤 8~9시쯤 나가면 식당들이 문을 닫아 먹을 데가 없어요. 또 간장게장이니, 무슨 찌개를 한 그릇 먹으려 해도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 이상만 팔더라고요. 그래서 2인분을 시켜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포장해와서 다음날 먹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도시락을 두 끼 정도 싸다니기도 했고···. 표구 값만 1천만원 넘게 들었습니다. 모두 제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 정말 고향 사랑이 남다르게 깊다.☞= 고교 졸업 후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친척들밖에 없지만, 그래도 고향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풍광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마음입니다. 나이가 더 들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 작업이 힘들어지기 전에 그림을 남겨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산반도를 쳐다보고 화폭에 담으면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새록새록 깊어졌습니다. 그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질 한 번에 산이 솟고, 나무에서 입이 돋고, 길이 만들어지고 강이 흘렀다. 그는 작품을 할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케치를 보고 바로 붓질을 하죠. 그러다가 잘못되면 작품을 고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종이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린 화선지 값이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 심장병 어린이를 많이 도왔던데, 계기는.☞ 제가 심장에 구멍이 생기는 질병으로 대학 4학년 때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때 의사가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요. 동료 학생들이 1000원씩 걷어 모금한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돈이 생기면 단 한 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시켜주자고 결심한 것이 심장병 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13년 동안 어린이 50명에게 심장병뿐만 아니라 언청이 등의 수술을 해 줬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찾아 입원시켰습니다. 가천 길병원 이길녀 이사장님이 의료팀을 만들어주었지요. 참, 고마운 분입니다. -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자랑 같지만 제가 졸업과 동시에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잘 나갔죠. 입원비는 그때 작품을 그려 팔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려서 팔고, 후원금 계좌도 만들고, 그렇게 해서 해마다 병원에 2500만원가량을 한꺼번에 수술비로 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니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후원금도 끊겼습니다. 병원에서는 외상 수술비 갚으로고 독촉도 오고···. 그때 병원 외상이 2억원 남짓 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할 때 와이프 몰래 결혼 반지,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모조리 팔아 병원비를 갚는데 보탰습니다. 그래도 남은 빚은 병원에서 탕감해 줬습니다. 이젠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기관도 많고, 의료보험도 되니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 젊은 시절 이름을 날렸군요.☞ 특선하고 나서 대학 졸업 직후 전북 익산에서 활동했는데 건달들 등쌀에 힘들었습니다. 건달들이 저를 납치해 여관방에 감금시켜두고 그림을 그리게 했거든요. 건달들은 제 그림을 강매해서 돈을 챙겼던 거죠. 그때 경찰서장이 건달들에게 저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던 1988년 서울로 도망쳐 왔습니다. 서울에서 한번은 검은 양복 차림의 20대의 깍두기가 제 화실로 찾아와 ‘오산 선생,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오산인데···.’라고 했더니 ‘너 말고, 너희 선생 어딨느냐’고 하더라고요. 서울은 사람도 많고 작가도 많으니 제게 관심이 없어진 거죠. - 그림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요즘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최소 2시간씩은 붓을 잡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바꿨지요. 유화 페인트 냄새에 머리가 아파서 작업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1985년부터 수묵담채화로 전향했습니다. 동양화로 바꾼 지 5개월 만에 한국미술대전에 입선하고 그다음 해에 특선하니깐 신동났다고 했지요. 화선지를 끼고 스케치를 나갔지요. 하지만 동양화 특히 한국화 맛과 멋, 선의 묘미를 깨닫는 데는 1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팔이 아파 들지를 못합니다. 한참 풀어줘야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도, 직업병 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오른손을 다시 만져봤다. 가운뎃손가락의 마지막 끝 부분이 한쪽으로 뭉턱 들어갔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씨름한 훈장이지요.”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손톱은 다른 손가락과는 달리 먹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 강원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IMF 이후 병원 빚을 다 갚고 나서,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숨어 살려고 강원도 영월에 들어갔습니다. 그 전에 80년대부터 영월군 청령포를 처음 접했을 때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암절벽의 산과 계곡이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에 반해 영월의 폐교에 화실을 마련해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영월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지금도 영월에 아는 사람이 고향 부안보다 더 많아요. - 전시회 계획은.☞ 내년에 열한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그림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약간 색다른 전시를 할까 합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정자나 경치, 나무 등에 얽힌 역사와 야사 등도 함께 적어서 그림 아래에 붙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안에 내려가 어른들한테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습니다. 한 100점 정도 전시할 생각인데, 지금 70점 정도 완성했습니다. - 꿈이 무엇인가.☞ 부안의 절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기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지내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기고, 그 작품들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일걸요. 또 와이프랑 전시회를 같이 여는 것입니다(그의 부인 강지우씨는 학교 과후배로, 수채화를 그린다). 그는 서울신문 기자인 점을 의식한 듯 “옛날에 서울신문 1층 갤러리에 자주 갔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개인전도 하고 단체전은 여러 번 했던 인연이 있다”며 “서울신문에 있던 미술관이 없어져 아쉽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홍성모는 누구 - 1961년 전북 부안 출생- 원광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졸업(석사)- 개인전 10차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성균관대 겸임교수 역임- 동국대·원광대 강가 역임 ●작품 대표적 소장처 - 한국은행 청주지점- 외교통상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천 길병원- 싱가포르 대사관- 부안군청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부천시, 빅데이터 활용해 주차난·감염병 예방한다

    부천시, 빅데이터 활용해 주차난·감염병 예방한다

    경기 부천시가 빅데이터를 활용해 시민생활에 밀접한 문제를 해결한다. 시는 지난 19일 시청 판타스틱큐브에서 ‘2018년 부천시 맞춤형 빅데이터 분석사업’ 완료보고회를 개최했다고 20일 밝혔다.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불법주정차와 주차장 현황, 감염병 발생현황 등을 분석해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던 문제해결방식에서 벗어나 빅데이터를 활용한 데이터 기반의 행정을 펼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주차 수요와 공급, 주차장 면수와 차량등록 현황 등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지역별 주민이 체감하는 주차장 면수를 수치로 제시했다. 또 불법주정차 다발 지역과 배후 특성을 비교해 지역별로 탄력적인 정책을 펴도록 제안했다. 특히 주차장 관리문제와 불법주정차 단속은 데이터를 협업해 교차 분석한 뒤 불법주정차 단속이 많은 지역의 주차 여유면을 비교하는 등 다양한 관리 방안의 예를 보여줬다. 또 매년 반복되는 감염병 발생 원인과 지역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원인을 알아보는 회귀분석을 적용했다. 부천내 전 지역을 대상으로 감염병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파악하고 변수별 가중치를 도출했다 그 결과 주요 발생지역과 시기를 사전 예측해 위험지역과 발생 시기별로 예방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김용익 행정국장은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앞으로 새로운 데이터 발굴과 축적·분석을 통해 데이터기반 행정의 선례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세상에 우주를 보여준 ‘망원경 성자’ 존 돕슨 이야기

    [이광식의 천문학+] 세상에 우주를 보여준 ‘망원경 성자’ 존 돕슨 이야기

    “이리 와서 망원경으로 토성 고리를 한번 보세요.” “목성 줄무늬와 4대 위성 한번 보실래요?” 밤의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이런 말로 호객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욱이 입성은 허름하고 흰머리를 뒤통수에다 질끈 맨 노인이 그런다면? 그 옆에 서 있는 사람 키만한 망원경 역시 주인을 닮아선지 값싼 페인트칠이 여기저기 벗겨지고 긁힌 자국이 뒤덮고 있어 영 볼품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여주겠다는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어렵다. 하나 둘 망원경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토성 고리와 목성 줄무늬를 보며 감탄하는 사람의 귀에 노인은 우주에 관한 지식을 열심히 속삭인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리와 국립공원들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우주를 보여주고 있는 이 노인이 바로 돕슨식 망원경의 발명자 존 돕슨이다. 그는 평생을 자신이 디자인한 돕슨식 망원경 한 대를 가지고 떠돌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주를 보여주는 일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 돕소니언이라고 불리는 이 망원경은 아이작 뉴턴이 발명한 반사 망원경을 더욱 단순한 설계방식으로 개량한 것으로, 경통 아래쪽에는 별빛을 모으는 오목거울이 앉아 있고, 위쪽에는 그 빛을 측면의 접안렌즈로 보내는 작은 평면거울이 비스듬히 달려 있다. 이 망원경의 장점은 아주 값싸고 쉽게 만들 수 있어 일반 소형 반사 망원경을 살 돈이면 대형 돕슨식 망원경을 만들거나 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존 돕슨은 이 망원경을 특허등록하지 않았다. 누구나 쉽게 만들어 우주를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망원경에 관한 그의 소신은 “많은 사람이 보는 망원경이 가장 좋은 망원경이다”라고 일찍이 밝힌 바 있었다. 값싸고 기동성이 있는 이 망원경의 등장은 천체관측을 돕소니언 이전과 이후를 가를 만큼 획기적이었다. 이 디자인은 합판, 호마이카, PVC 옷장 플랜지, 골판지 건축 튜브, 재활용 현창 유리, 카펫과 같은 일반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뉴턴식 망원경이다. 이 유형의 단순한 경위대 마운트는 일반적으로 아마추어 천문계에서 ‘돕소니언 마운트’라고도 한다. 이로써 전에 없는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하게 되어 천체관측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돕소니언은 제작과 조작의 단순함으로 인해 오늘날 특히 아마추어 천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디자인이다.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은 박물관의 관측대에서 다른 태양 망원경과 함께 돕소니언 망원경을 사용한다. 존 돕슨, 어떤 사람인가? 돕슨은 원래 수도승 출신이었다. 이 유니크한 인물의 생애를 간략히 더터보면, 그는 1915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베이징 대학을 설립했고, 어머니는 음악가였으며, 아버지는 동물학 교수였다. 돕슨과 그의 부모님은 1927년에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돕슨은 대학 연구실에서 근무한 1943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돕슨은 우주와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점차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돕슨에게 하나의 전기가 찾아왔다. 1944년 그는 힌두교의 한 교파인 베단탄 스와미(Vedantan swami) 강연에 참석했다. 돕슨은 “내가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베단타 공동체 수도원에 합류하여 청빈서약을 하고 라마크리슈나 수도회의 스님이 되었다. “수도원에서 돕슨의 책임 중 하나는 천문학과 베단타 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직분은 그에게 망원경 제작에 눈을 돌리게 했다. 그는 망원경에 바퀴를 달아 수도원 바깥으로 끌고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망원경 제작과 수도 생활을 병행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고, 1967년 그는 23년간 몸담았던 수도회를 떠나게 되었다. 수도회를 떠난 돕슨은 이듬해인 1968년 브루스 샘스, 제프리 롤로프와 함께 천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조직 ‘샌프란시스코 길거리 천문학회(San Francisco Sidewalk Astronomers)’를 창립했다. 그리고 망원경 제작과 천문학 대중화, 우주론 강연 여행으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의 강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87년 7월 25일 미국 버몬트주 스프링필드 부근 산꼭대기에서 한 것이 전설로 남아 있다. 그 산 정상은 스텔라파네(별들의 성지)라는 이름의 관측지로서, 쟁쟁한 아마추어 망원경 제작자, 별지기들이 모인 가운데 돕슨은 이렇게 우주와 인간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저는 망원경의 크기가 얼마이고, 광학장비가 얼마나 정교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이 광대한 세계에서 여러분보다 혜택을 덜 누리는 사람들이 함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저를 줄곧 앞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유일한 신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같은 존 돕슨의 철학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망원경을 내놓고 사람들에게 우주를 보여주는 별지기들이 적지 않다. 서울 청계천 같은 곳에서도 가끔 그런 별지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들에게 존 돕슨은 영원한 사표이다. 존 돕슨의 삶과 아이디어는 2005년 다큐멘터리 ‘길거리 천문학자(A Walkway Astronomer)’로 제작되었다. 그는 PBS 시리즈 ‘천문학자들(The Astronomers)'에도 출연했으며,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도 두 차례 출연했다. ​2004년 크레이터 레이크 연구소(The Crater Lake Institute)는 돕슨에게 천문학의 대중화에 대한 업적을 기려 그해의 공로상을 수여했다. 또한 2005년 스미소니언 연감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3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2014년 1월 15일 캘리포니아 버뱅크에 있는 성요셉병원에서 영면. 향년 98세였다.​ 사람들에게 우주를 보여주고자 하는 열정으로 평생을 떠돈 '망원경 성자' 존 돕슨은 한마디로 '사람들이 우주를 많이 볼수록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믿었던 낭만주의자'였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14년째 나눔사랑 작은실천” 부천 중3동 자치위 ‘사랑의 쌀독’ 행사

    “14년째 나눔사랑 작은실천” 부천 중3동 자치위 ‘사랑의 쌀독’ 행사

    경기 부천의 한 동 주민자치위원회가 한가위를 앞두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의 쌀 지원행사를 14년째 이어오고 있어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부천시 중3동 주민자치위원회는 19일 오후 2시 덕유복지관 앞에서 ‘찾아가는 사랑의 물품’ 전달식을 가졌다고 20일 밝혔다. ‘나눔사랑 작은실천’을 슬로건으로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기적을 실천하는 중3동 주민자치위원회의 이날 행사는 조병순 주민자치위 부위원장 사회로 진행됐다. 사랑물품 전달식에는 안치완 중3동장을 비롯해 조연희 주민자치위원장, 김경문 순복음중동교회 담임목사, 천종수 대청마루 대표, 김영찬 굿모닝차이나 대표, 양경미 주민자치위 고문, 지역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2005년 관내 아파트단지와 학교 등에 쌀독 120개를 설치한 이후 해마다 훈훈한 사랑의 물품이 모아졌다. 14년째인 올해 기록적인 폭염에도 아파트단지 1087㎏, 학교에서 138㎏을 전달했다. 또 순복음교회 중동성전과 하나저축은행 상동지점에서 1000㎏씩, 반석사회교육센터와 덕유사회복지관 200㎏씩, 강서실업에서 100㎏ 등 쌀 3905㎏, 라면 20박스가 지원됐다. 아이스피부과와 예수마을교회 등에서 총 888만원의 성금도 들어왔다. 지난해에 이어 지원물품은 쌀과 라면 등 생필품으로 나누어 수혜자들 요구에 맞춰 지원할 예정이다. 이날 전달식이 끝난 뒤 어려운 658가구에 사랑의 물품을 주민자치위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전달했다. 행사를 주관한 조연희 위원장은 “어려운 경제 여건속에서도 어려운 이웃에게 이렇게 따뜻한 온정을 나눠 준 주민들과 모금에 협조해준 주민자치위원 등 자생단체원들이 너무 고맙다”며, “앞으로도 주위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틈새계층에게 희망의 디딤돌이 돼 달라”고 전했다. 이어 안치완 동장은 “순복음교회를 비롯해 지역병원, 학교, 아파트주민 등 관내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어 감사드리고 한가위가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훈훈한 정을 나누는 추석명절이 되기 바란다‘고 말하고, “우리 중3동이 이웃들과 함께 정답게 살아가는 살맛나는 지역이며, 이번 사랑의 쌀모으기행사로 주민들 간 깊은 배려와 관심이 많다는 게 입증된 셈”이라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스물넷’ 오페라 조연출 삶과 꿈 앗아간 안전불감증

    경찰 “매뉴얼 어기고 안전요원도 없어” 경북 김천의 한 공연장에서 무대 설치 작업 중이던 조연출이 무대 아래로 떨어져 숨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공연장 안전불감증이 또 도마에 올랐다. 19일 김천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6일 오후 1시 30분쯤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던 호남오페라단 조연출 박모(24·여)씨가 7m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무대 뒤편에서 작업을 하던 박씨는 중앙에 설치돼 위아래로 움직이는 리프트 장치가 내려가 있던 것을 모른 채 작업 결과를 확인하려고 뒷걸음치다 추락했다. 병원으로 실려간 박씨는 사경을 헤매다 4일 만인 지난 10일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사고 당시 공연 주최 측 관계자들이 ‘작업자들의 추락을 막기 위해 안전 울타리를 세우거나 조명을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연장 안전 매뉴얼’을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박씨에게 작업을 지시한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무대감독 송모(55)씨와 호남오페라단 무대감독 홍모(40)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 20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리프트가 내려간 상태였다면 박씨를 무대 밖으로 내보내거나, 안전 요원을 배치해 사고를 방지했어야 했지만 무대감독 2명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 성악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박씨는 호남오페라단 스태프의 권유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공연의 조연출로 참여했다가 변을 당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도와줄 줄 아는 딸아이였다”면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공연 주최 측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김천시문화예술회관 측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 입장을 밝히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12일 사고 재발을 막고자 전국 공연장에 ‘안전수칙을 준수하고 안전교육을 실시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내려보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글로벌 In&Out] 朝中의 역사에서 사라진 기념일, 조중우호월/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朝中의 역사에서 사라진 기념일, 조중우호월/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지난 9월 9일 북한 건국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리잔수가 이끄는 대표단이 방북하여 북한 고위간부들과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북한과 중국은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9월 10일 중국대표단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여’를 기념하는 조중우의탑(朝中友誼塔)에 헌화하였다.평양에 있는 이 우의탑은 올해 정주년(整週年)이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의 상징이다. 이 사건은 1958년 9~10월에 이루어진 중공군의 완전 철수이다. 중공군의 철수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장기간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사료 부족으로 60년이나 흘러간 오늘도 그 원인과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바꿨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중공군의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쟁은 끝났지만, 그 직후 군사분계선 이북에는 120여만명의 중공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중공 지도부에 한국전쟁 참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웃이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위신과 안보를 확보하는 데도 중요했다. 1953년 9월 중공군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회의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서방 침략자가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에서 대포 몇 발만 쏴도 한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던 시대는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공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를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는 정전협정의 제4조 60항을 실현하기 위한 회의 소집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제네바 회의는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0일까지 열렸지만, 성과 없이 끝났다. 중국은 100만 병력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부담과 극동지역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서 미국과 공동철수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국 공동철수는 포기하고 주둔군 규모를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1954년 9월부터 1955년 말까지 3차례에 걸쳐 56개 사단을 철수하고 약 25만명의 병력만 남겼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중국을 방문해 참전에 감사하고 복구건설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중국은 북한과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쟁 중 파괴된 북한 경제의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규모 원조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1954년 3월부터 중공 지원군의 역할은 수리건설, 농업노동 등 경제의 복구로 바꾸었다. 1957년 11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만나 중공군 철수를 논의했다. 김일성은 이후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철수에 대한 2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북한 정부가 외국군대의 한반도 철수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후 중국정부가 이에 응답하여 철수를 진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공개서한을 보내 소련의 지지를 받으며 중공군 지원군이 철수하는 것이었다. 중공 정치국은 소련과 상의한 후 12월 30일 중공군 철수의 계획을 세웠고 1958년 1월 24일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첫째 제안을 지지한다고 김일성에게 통지하였다. 북한은 1958년 2월 5일에 성명을 발표하고 2월 7일 중국도 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그해 2월 1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김일성은 ‘연합성명’에 서명해 중공군 철수를 공식화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마지막 부대들이 북한을 떠난 1958년 10월이 북한에서 ‘조중우호월’(朝中友好月)이 되었고 1959년 10월 25일 중공군 참전 9주년과 철수 1주년을 기념으로 우의탑이 건립되었다.
  • 예금보험공사 위성백 사장 공식 취임

    예금보험공사 위성백 사장 공식 취임

    위성백 신임 예금보험공사 사장이 18일 공식 취임했다. 위 사장은 이날 취임식에서 “예보의 차등 보험료율 제도를 발전시키는 등 부실을 사전에 예방하는 시스템 구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남 여수 출신인 위 사장은 순천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독문학 학사와 경제학 석사를 받았다. 행정고시 32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기획재정부 국고국장, 더불어민주당 수석전문위원 등을 지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朝中 역사에서 사라진 기념일, 조중우호월(朝中友好月)

    朝中 역사에서 사라진 기념일, 조중우호월(朝中友好月)

    지난 9월 9일 북한 건국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리잔수가 이끄는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여 북한 고위간부들과의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북한과 중국은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9월 10일 중국대표단은 중국인민지원군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여를 기념하는 조중우의탑(朝中友誼塔)에 헌화하였다.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위치한 이 우의탑은 올해로 정주년(整週年)인 60년이 되는 또 하나의 북·중 관계, 나아가서 한반도 정세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가져온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58년 9월~10월에 이루어진 중공군의 완전철수이다. 중공군의 철수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장기간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60년이나 흘러간 오늘도 그 원인과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도하로 시작된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전세를 역전시켰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북한과 중공군의 대표들이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쟁은 끝났지만, 군사분계선 이북에는 북한군 거의 3배 규모인 120여만 명의 중공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한반도는 미·소 1949년 철군 후 4년 만에 또다시 남북에 각각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상태로 돌아왔다.중국의 지도부에게 한국전쟁의 참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웃을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신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위신과 안보를 확보하는 데 중요했다. 1953년 9월 중공군 총사령관인 팡더화이는 회의에서 한국전쟁은 ‘서방 침략자가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에서 대포 몇발만 쏴도 한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던 시대는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이 극도로 약한 상태를 파악한 중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공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는 정전협정의 제4조 60항을 실현하기 위한 제네바 회의 소집을 기다리기로 했다.제네바 회의는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0일까지 진행되었으나 첫번째 안건인 한반도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100만 병력이 넘는 군대의 외국주둔을 유지하는 경제적 부담과 극동지역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서 미국과 제4조 60항의 공동 실현에 대한 협상을 사실상 포기했다. 미군과의 공동철수를 포기한채 북한 주둔군의 규모를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1954년 9월부터 1955년 말까지 3차례에 걸쳐 약 25만명의 병력만 남기고 거의 100만명에 달하는 56개 사단 등을 일방적으로 철수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조정된 것은 중공군의 규모만이 아니었다. 1953년 11월에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참전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복구건설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중국 정부는 북한과 ‘조중경제 및 문화합작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쟁 중 완전히 파괴된 북한 경제의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4년에 걸쳐 인민폐 8만 억 원의 대규모 원조를 무상으로 제공하기 시작하였고, 1954년 3월부터 지원군의 역할도 수리건설, 농업노동 등 경제의 복구로 바뀌었다.그러던 중 1958년에 중공군은 북한과 아무런 협정이나 상호방위 조약 체결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나머지 15개 사단의 철수를 진행하였다. 북한과 중국이 북중 우호와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는 시점은 1961년 7월이다. 중국 공간사(公刊史)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957년 11월 10월혁명 경축 행사에 참여하러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이 마오쩌둥과 만나서 중공군의 철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서 철수에 대한 2가지의 방안 제시하였다. 하나는 북한 정부가 외국군대의 한반도 철수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후 중국정부가 이에 응답하여 철수를 진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공개서한을 보내고 소련이 이에 대한 지지를 표시한 후 지원군이 철수하는 것이었다. 중공 정치국은 김일성 제안에 대하여 숙고하고 소련지도부와 상의한 후 12월 30일 중공군 철수의 계획을 세웠고 1958년 1월 24일 마오가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일성의 첫째 제안을 지지한다고 이 결정을 북한정부에 알렸다. 북한은 중국 정부와 합의한 대로 1958년 2월 5일에 외국군대 한반도 완전 철수를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2월 7일 중국정부가 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2월 1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김일성은 ‘연합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중공군의 철수의 과정을 정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중국인민지원군의 마지막 부대들이 북한을 떠난 1958년 10월이 북한에서 “조중우호월(朝中友好月)”이 되었고 1959년 10월 25일 중공군 참전 9주년과 철수 1주년을 기념으로 우의탑이 건립되었다. 이렇게나 비정상적인 철군은 왜 이루어졌을까? 오늘날 학계에 주요 학설이 2가지 있다. 첫번째는 중국 공간사가 제시한 ‘지원군 사명의 완수’와 ‘북한 국방력의 강화’ 등으로 북한에 군대를 주둔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학설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직후 유엔군의 상당부분이 철수하였지만 1954년 11월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정식적으로 발효되고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한미 간의 합의 의사록’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72만 명의 한국군을 육성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하였고, 1957년 6월 21일에 유엔군은 “한반도 밖에서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 휴전협정 13조 D항의 폐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1958년 1월 29일 한국에 원자무기를 들여온 사실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물론, 작전통제권은 아직도 유엔군 측에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군한 행위는 중공측 입장에서 모험적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많은 학자는 이보다 더 설득력이 강한 학설을 두 번째로 제시하고 있다. 1956년 말, 헝가리 봉기는 당시 소련의 헝가리 주둔군에 의한 유혈진압으로 끝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1956년말부터 마오쩌둥에게 철군을 계속 요구했다. 그 철군 요구는 싹트기 시작한 중·소 분쟁에서 북한을 중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물론, 이 관점도 어디까지는 공개된 사료에 기초한 추측에 불과하다. 중공국 철군 결정에 관한 사료가 비밀 해제되면 그 이유도 꼭 밝혀질 것이다. 글: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사진제공: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
  • 미술유학 포트폴리오 전문 ‘어바트 유학미술학원’ 개원

    미술유학 포트폴리오 전문 ‘어바트 유학미술학원’ 개원

    ㈜유학피플에서 아트&디자인 해외대학 진학에 필수 요건인 포트폴리오 전문 유학미술학원 ‘어바트 유학미술학원’을 개원했다고 밝혔다. 강남역에 위치한 어바트 유학미술학원은 영국 아트유학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내에서 대학 강사로 있는 실력 있는 전문가가 원장으로 부임, 학생들을 양성한다. 어바트 유학미술학원은 원장을 필두로 영미권 미술대학을 졸업한 강사진들이 해외 대학에서 요구하는 창의력과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커리큘럼으로 미국∙영국∙캐나다 미술유학 준비생들의 포트폴리오 제작을 지도한다. 뿐만 아니라 소수정예로 구성된 수업을 통해 포트폴리오 준비기간 동안 실기능력 향상과 아이디어 확장 방법에 대해 배우고 진학 후에도 성공적으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자기주도적 학습법을 지도, 학생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한다. 이번 어바트 유학미술학원의 개원으로 ㈜유학피플은 입학상담부터 포트폴리오 준비, 희망학교 지원까지 아트&디자인 유학 전 과정을 통합 관리하는 올인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년간 축적된 수속사례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적의 유학경로를 제시한 후 포트폴리오 전문학원을 통해 전공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유피프랩 SAT 어학원을 통해서 미국 명문대 지원을 위한 시험대비까지 완벽한 통합 관리가 이루어진다. 어바트 유학미술학원에서는 개원을 기념하여 학비할인 이벤트를 진행한다. 선착순 5명에게 정규반 3개월 수업을 한 달 기준으로 50% 할인된 가격인 40만원에 제공한다. 또한 올인원 서비스 수속 시 다양한 프로모션과 혜택을 제공받아 합리적인 가격으로 통합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유학피플 이창훈 대표는 “파슨스디자인스쿨, ual, 로드아일랜드 등 해외 명문 미술대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포트폴리오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유학미술학원을 개원하였으며, 아트유학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전문기관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전했다. 포트폴리오 학원 수강문의는 어바트 유학미술학원 홈페이지나 ㈜유학피플 홈페이지 통해서 신청 가능하며, 선착순으로 이루어지는 수강료 할인 혜택은 조기 마감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4) 현대차 그룹 계열사 CEO의 면모는(하)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4) 현대차 그룹 계열사 CEO의 면모는(하)

    ‘기술통’ 우유철 부회장, 현대제철 세계 10위권 철강회사로 키워정몽구 회장의 둘째 사위 정태영 부회장, 한국대표 스타 경영인조리장 출신 이민 해비치호텔 대표, 입지전적인 현장형 CEO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계열 이외의 그룹사에는 두 명의 부회장이 있다. 우유철(61) 현대제철 부회장과 정태영(58) 현대카드 부회장이다. 각각 제철과 금융 계열사를 책임지고 있다.  우유철 부회장은 그룹 내 최고의 철강 전문가이자 업계에서 손꼽히는 기술통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 대학원 기계공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우 부회장은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뒤 현대로템을 거쳐 한보철강 인수를 추진하기 위해 현대제철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 기술개발본부장, 기술연구소장, 구매담당 부사장, 당진제철소장 등 현대제철의 주요 요직을 역임했다. 정몽구 회장의 신임이 두터워 2004년 한 해 동안 무려 세 단계 승진하면서 화제의 인물로 부각했다. 2009년 현대제철 사장에 오른 뒤 2014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우 부회장은 2010년 현대제철이 1고로가 본격 생산되면서 초기 안정화에 힘써 가동 개시 3개월만에 일 평균 1만 1650톤의 쇳물을 쏟아내는 등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 가동의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2, 3고로의 연이은 가동과 현대하이스코를 합병하며 대형 종합철강사로서 글로벌 경쟁력을 높였다.  정태영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차녀인 정명이(54) 현대커머셜 고문의 남편이다. 정 고문과의 사이에 1남 2녀가 있다. 오너가의 일원이지만 다른 기업에서 탐낼 정도의 브레인이다. 종로학원 설립자이자 유명 수학강사였던 정경진씨의 장남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미국 매사추세추 공대(MIT)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종합상사 기획실장, 현대정공 도쿄지사담당, 미주 법인장, 멕시코 법인장, 현대모비스 기획재정본부장, 기아차 구매본부장 등을 거쳤다. 정 부회장은 2003년 현대카드 사장에 오른 뒤 현대카드를 업계 상위권으로 키워냈다. 현대카드는 현대차그룹이 2001년 다이너스 클럽 코리아를 인수해 만든 회사로 인수 당시 현대카드의 시장점유율은 2% 미만에 불과한 하위업체였다. 정 부회장이 회사를 맡은 후 출시한 현대카드M이 1년 만에 회원 100만 명 돌파를 기록하는 등 현대카드가 삼성카드와 업계 2, 3위를 다툴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정 부회장은 카드업계에서 처음으로 카드 옆면에 색을 넣거나 카드 등급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도입하는 등 카드와 광고, 서비스, 업무 전반에 혁신적 디자인 기업을 도입하고, 다양한 문화 마케팅으로 ‘한국의 잡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생각을 자주 밝히는 등 활발한 소통과 탈권위로 한국의 대표 스타 경영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2015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강학서(63) 현대제철 사장은 성의고-영남대 경영학과-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현대제철에서 이사와 전무를 거쳐 2009년 재경본부장(부사장)에 오를 정도로 철강 원가관리 전문가로 꼽힌다.  김승탁(61) 현대로템 사장은 제주제일고와 제주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기아차 유럽사업부 전무, 현대차 해외영업본부 부사장, 현대모비스 기획사업본부장과 부품영업본부장을 거쳐 2015년부터 현대로템 사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룹내 손꼽히는 재무 전문가로 알려진 이용배(57) 현대차증권 사장은 영락상고와 전주대 경영학과를 거쳐 경희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대차 경영기획담당(부사장)·기획조정3실장(부사장)과 현대위아 기획·재경·구매·경영지원 담당(부사장)을 거쳤다. 지난해 현대차증권 대표를 맡아 재무건전성 개선, 사명변경 등 혁신작업을 이끌고 있다.  안건희(61) 이노션 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나온 그룹내 ‘최고 브레인’으로 꼽힌다. 현대차 수출사업부장(전무)·서유럽 판매법인장(전무), 현대모비스 경영지원본부장·기획실장(부사장)을 거쳐 2009년부터 광고회사인 이노션 대표로 재직중이다. 미주·유럽·중국·인도·호주 등 글로벌 사업 안정화에 성공했다. 현대·기아차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 강화를 위해 전세계 주요 시장에서 각종 미디어 광고·주요 프로모션 이벤트·스포츠 마케팅·스페이스 마케팅 등을 전개중이다.  이민(56) 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 대표는 조리장 출신으로 최고경영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경주관광교육원 조리과와 연세대 대학원(석사), 세종대 대학원(박사)을 졸업한 학구파다. 호텔 말단 사원부터 밟고 올라온 33년차 호텔리어인 이 대표이사는 웨스틴조선호텔에서 2000년 해비치 호텔 총주방장(이사)로 옮겼다. 식음조리총괄, 총지배인 등을 거쳐 2014년 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와 해비치 컨트리클럽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누구보다 호텔을 잘 아는 실무형 대표로 자체 브랜드 맥주 제작, 어메니티 개발, 서울에 첫 외부 레스토랑 오픈 등 브랜드 강화에 힘쓰고 있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3) 현대차그룹 계열사 CEO의 면모는(상)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3) 현대차그룹 계열사 CEO의 면모는(상)

    현대차, 지배구조개편 엘리엇의 공세에 골머리모비스 임영득-글로비스 김정훈 사장이 ‘키맨’현대의 모태인 현대건설은 박동욱 사장이 선도  현대자동차그룹의 최근 당면 과제는 지배구조 개편이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구조와 일감몰아주기를 해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인 상장사 기준을 총수 일가 지분 30% 이상에서 20% 이상으로 변경하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에 현대차는 지난 3월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모비스→현대차→기아차→모비스’로 이어진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지배구조를 ‘대주주→모비스→현대차→기아차’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물류유통기업으로 국내 일감이 많은 현대글로비스의 대주주 지분 29.9%를 모두 기아차에 넘겨 규제 대상에서 아예 벗어나려고 했다. 또 국내 일감이 많은 모비스의 모듈사업과 AS부품사업을 떼내 대주주 지분이 사라진 글로비스로 넘겼다.  하지만 헤지펀드인 엘리엇은 모비스 영업이익의 약 80%를 차지하는 알짜 사업인 AS부문을 자신들이 주식을 소유하지 않은 글로비스로 넘기는 것을 반대했다. 엘리엇은 현대차(3%)와 기아차(2.1%), 모비스(2.6%) 지분만 갖고 있어 현대차 개편안대로라면 단기 차익을 극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엘리엇은 모비스의 AS부문만 떼어내 자신이 지분을 보유한 현대차에 합병시키라고 요구하고 있다. 엘리엇의 지분만 놓고 보면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지만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가 엘리엇의 요구대로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다 반기업 정서 눈치 보기에 바쁜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까지 가세하고 있어 현대차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현대차는 결국 지난 5월 지배구조개선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김용환 현대기아차 부회장을 중심으로 순환출자 구조와 일감몰아주기를 해소하는 다른 방안을 강구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을 찾는 게 쉽지 않아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에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가 정점에 서 있다. 경영진들도 해결책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업체인 현대모비스는 임영득(63) 사장이 이끌고 있다. 임 사장은 대구공고와 영남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으며, 울산대에서 산업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룹 내 최고 생산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슬로바키아, 체코, 미국 등 해외법인을 두루 거치며 현대기아차가 성공적으로 글로벌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16년 현대모비스 대표이사 취임 이후에는 중국의 충칭, 창저우, 멕시코 공장 등 해외 신규 공장의 조기 안정화를 이뤄 냈다.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13배 증가한 약 60억 달러(6조 6800억원) 규모의 부품 수주에 성공했다.  김경배(54) 현대위아 사장은 성남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현대모비스 인사실장, 현대차 글로벌전략실장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현대글로비스 사장으로 재직하며 취임 당시 7조원 수준이던 현대글로비스의 매출을 2017년 16조원대로 끌어 올렸다. 올해 현대위아로 자리를 옮겨 엔진·모듈·AWD 등 자동차부품 사업과 스마트팩토리·공장자동화(FA)·공작기계 등 기계사업을 이끌고 있다.  올해 취임한 문대흥(58) 현대파워택 사장은 한영고-한양대 기계공학과-한국과학기술원(KIST) 기계과를 거쳤다. 현대차 가솔린엔진 설계팀장과 개발실장을 거쳐 파어트레인담당 부사장을 역임했다.  김정훈(58) 현대글로비스 사장은 부산중앙고와 영남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현대·기아차 통합구매사업부장(상무), 구매본부장(부사장)을 거쳐 올해 현대글로비스 사장에 취임했다. 김 사장은 물류사업의 해외진출확대와 종합상사 기반 구축을 추진해 현대글로비스를 글로벌 물류 선도 기업으로 만드는 전략과제를 추진중이다.  현대차그룹의 모태는 현대건설이다.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부터 현대건설 출신이 아니면 그룹에서 성장하기 어려웠고 건설 스타일이 아니면 그룹 일에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현대맨의 전형’으로 불리는 이명박 대통령도 1965년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해 5년만에 이사, 12년만에 사장이 됐다. 1991년까지 현대건설 회장으로 장수하며 정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현대건설은 2001년 자금난에 빠져 범현대 계열에서 분리됐지만 2011년에 다시 현대차그룹의 품에 안겼다. 이 현대건설을 박동욱(56) 사장이 이끌고 있다. 박 사장은 진주고와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현대차 재경사업부장(전무)과 현대건설 재경본부장(부사장)을 거친 ‘재무통’이다. 올해 현대건설 사장에 올랐다. 박 사장은 장기를 살려 지난해 신규수주를 전년 대비 2.3% 상승한 21조 7136억원을 기록했다. 수주잔고도 올해 상반기 기준 68조 5656억원을 유지하고 있어 4년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성상록(64) 현대엔지니어링 사장은 동아대 공업화학공학과를 나왔다. 화공사업부에서 근무를 시작해 35년간 한 분야에서만 경력을 쌓아 온 화공플랜트 전문가다. 화공플랜트본부장 시절 한국 건설업계의 불모지였던 CIS(중앙아시아)지역으로의 진출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노예 취급에 연구비 유용까지… 부끄러운 민낯 드러난 학계] “조교야, 개 밥 챙겨라”… ‘갑질’ 교수님

    [노예 취급에 연구비 유용까지… 부끄러운 민낯 드러난 학계] “조교야, 개 밥 챙겨라”… ‘갑질’ 교수님

    논문 지도 학생에게 폭언·유리잔 투척 인건비 가로채 車보험 갱신 등 다반사전북대 A교수는 자신의 연구년(강의를 맡지 않고 연구에 집중하는 기간)을 맞아 영국으로 출국하며 대학원생인 조교 B씨를 불러 ‘임무’를 줬다. “내가 없는 동안 개밥을 챙겨 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귀국 뒤 선물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논문 지도 한 학생들을 불러 회식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B씨에게 폭언을 하며 유리잔을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다. 그는 교육부 감사에 적발돼 경징계 처분을 받았다. 대학원생 제자를 수년간 폭행하며 인분을 먹이거나 A4 용지 8만장 분량의 스캔을 요구한 일부 교수의 갑질 행태 탓에 국민적 공분이 커졌지만, 학교 현장에는 여전히 대학원생을 노예처럼 여기는 교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12일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2017~2018년 대학 감사 결과 사례 자료에는 유명 대학 갑질 교수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벼룩의 간’ 수준인 학생 인건비를 가로챈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서울대 C교수는 대학 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석사과정 학생인 편집간사들의 인건비 일부와 인쇄 지원금 등을 ‘편집장 수당’ 명목으로 매달 45만원씩 본인 통장에 입금하도록 했다. 이렇게 가로챈 금액은 1170만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학내 연구 프로젝트를 보조한 학생의 인건비도 가로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자신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자동차보험을 갱신했고 자택 공기청정기와 가족들의 선불 휴대전화도 샀다. 손목시계를 고치는 데도 썼다. 사적으로 쓴 돈은 모두 99건에 333만 8120원이었다. 중앙대 D교수도 최근 6년간 자신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에게 지급된 인건비와 연구수당, 장학금 등을 빼돌려 쓰는 등 모두 3억 4204만여원을 사적으로 사용했다. 한양대 E교수도 2012년부터 5년간 석·박사 과정의 연구원 21명에게 돌아가야 할 인건비와 출장비 중 3735만원을 개인 용도로 썼다. 박 의원은 “갑질은 단순히 잘못된 문화가 아닌 범죄”라면서 “교육부가 철저한 실태 조사와 엄정한 처벌을 해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조교야, 개 밥 챙겨라”… ‘갑질’ 교수님

    “조교야, 개 밥 챙겨라”… ‘갑질’ 교수님

    논문 지도 학생에게 폭언·유리잔 투척 인건비 가로채 車보험 갱신 등 다반사전북대 A교수는 자신의 연구년(강의를 맡지 않고 연구에 집중하는 기간)을 맞아 영국으로 출국하며 대학원생인 조교 B씨를 불러 ‘임무’를 줬다. “내가 없는 동안 개밥을 챙겨 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귀국 뒤 선물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논문 지도 한 학생들을 불러 회식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B씨에게 폭언을 하며 유리잔을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다. 그는 교육부 감사에 적발돼 경징계 처분을 받았다. 대학원생 제자를 수년간 폭행하며 인분을 먹이거나 A4 용지 8만장 분량의 스캔을 요구한 일부 교수의 갑질 행태 탓에 국민적 공분이 커졌지만, 학교 현장에는 여전히 대학원생을 노예처럼 여기는 교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12일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2017~2018년 대학 감사 결과 사례 자료에는 유명 대학 갑질 교수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벼룩의 간’ 수준인 학생 인건비를 가로챈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서울대 C교수는 대학 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석사과정 학생인 편집간사들의 인건비 일부와 인쇄 지원금 등을 ‘편집장 수당’ 명목으로 매달 45만원씩 본인 통장에 입금하도록 했다. 이렇게 가로챈 금액은 1170만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학내 연구 프로젝트를 보조한 학생의 인건비도 가로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자신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자동차보험을 갱신했고 자택 공기청정기와 가족들의 선불 휴대전화도 샀다. 손목시계를 고치는 데도 썼다. 사적으로 쓴 돈은 모두 99건에 333만 8120원이었다. 중앙대 D교수도 최근 6년간 자신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에게 지급된 인건비와 연구수당, 장학금 등을 빼돌려 쓰는 등 모두 3억 4204만여원을 사적으로 사용했다. 한양대 E교수도 2012년부터 5년간 석·박사 과정의 연구원 21명에게 돌아가야 할 인건비와 출장비 중 3735만원을 개인 용도로 썼다. 박 의원은 “갑질은 단순히 잘못된 문화가 아닌 범죄”라면서 “교육부가 철저한 실태 조사와 엄정한 처벌을 해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영국 간 동안 개밥 좀 챙겨라”…교수 갑질 천태만상

    “영국 간 동안 개밥 좀 챙겨라”…교수 갑질 천태만상

    대학원생에 유리잔 던진 교수도 ‘경징계’ 학생 인건비 3억 빼돌린 교수도대학원생 10명 중 2명, “교수 개인 업무 지시받고 거부 못했다”전북대 소속 A교수는 자신의 연구년(강의를 맡지 않고 연구에 집중하는 기간)을 맞아 영국으로 출국하며 대학원생인 조교 B씨에게 불러 ‘임무’를 줬다. “내가 없는 동안 개밥을 챙겨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귀국 뒤 선물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논문 지도 한 학생들을 불러 회식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B씨에게 욕설 등 폭언했고 유리잔을 던지는 등 행패 부렸다. 그는 교육부 감사에 적발돼 경징계 처분을 받았다. 대학원생 제자를 수년간 폭행하며 인분을 먹이거나 A4용지 8만장 분량의 스캔을 요구한 일부 교수의 갑질 행태 탓에 국민적 공분이 커졌지만, 학교 현장에는 여전히 대학원생을 노예처럼 여기는 교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12일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2017~2018년 대학 감사 결과 자료에는 유명대 소속 갑질 교수들의 민낯이 담겼다. ‘벼룩의 간’ 수준인 학생 인건비를 가로챈 교수도 많았다. 서울대 C교수는 대학 사회발전연구소가 펴내는 영문학술지 편집장을 맡으면서 석사과정 학생인 편집간사들의 인건비 일부와 인쇄 지원금 등에서 ‘편집장 수당’ 명목으로 매달 45만원씩 본인 통장에 보내도록 했다. 이렇게 가로챈 금액은 1170만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학내 연구 프로젝트에서 보조원 역할을 맡은 학생의 인건비도 가로채 개인 용도로 썼다. 이 돈으로 자신의 SUV 차량의 자동차 보험을 갱신했고 자택 공기청정기와 가족들의 선불 휴대전화도 샀다. 손목시계를 고치는데도 썼다. 그가 사적으로 쓴 돈은 모두 99건에 333만 8120원이었다. 중앙대 D교수도 최근 6년간 자신의 연구에 참여한 학생에게 지급된 인건비와 연구수당, 장학금 등을 빼돌려 사적으로 쓰는 등 모두 3억 4204만여원을 사적으로 사용했다. 한양대 E교수도 2012년부터 5년간 석·박사 과정의 학생 연구원 21명에게 돌아가야 할 인건비와 출장비 중 3735만원을 개인 용도로 썼다. 이같은 교수 갑질은 대학 사회 도처에 퍼져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5년 대학원생 19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정리한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중 19.5%는 ‘교수의 개인적 업무를 지시받고도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또 34.5%는 ‘교수 공동연구나 프로젝트 수행으로 인해 학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박 의원은 “갑질은 단순히 잘못된 문화가 아닌 범죄”라면서 “교육부가 철저한 실태조사와 엄정한 처벌해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대학 간판 대신 적성 따져 선택… 직업계高서 취업문 열어볼까

    대학 간판 대신 적성 따져 선택… 직업계高서 취업문 열어볼까

    중학교 내신 합격선 상위 20~50% 중위권, 꿈·진로 명확하다면 유리 가업 승계·미래인재 등 전형 다양 취업률 높지만 고용 질 천차만별 현장 실습 안전사고 우려는 단점10월부터 1월까지 이어지는 고교 입시 시즌이 다가오면서 학생과 학부모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영재고(과학고)-외국어고·자율형사립고-일반고’ 순으로 서열화된 국내 고교 지형에서 학부모들은 아이를 어떤 학교에 보내야 대학 진학에 유리할지 주로 따진다. 하지만 “대학 나와 봐야 별것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부모라면 서열에서 조금 비켜선 ‘이 학교’에 주목해볼 만하다. 직업계고(마이스터고·특성화고)다. 과거 상업고·공업고 등 실업·전문계고였던 이 학교들은 2010년 마이스터고·특성화고 등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부활을 알렸다. 특성화고 취업률은 매년 조금씩 올라 지난해 50%를 넘겼고, 마이스터고는 2013년 이후 꾸준히 90%를 상회한다. 마이스터고는 보통 10월 22~26일 사이 원서 접수를 하고, 특성화고는 교육청별로 다르지만 대부분 11월 이후 전형이 시작된다. 내 아이도 직업계고에 보내면 좋은 선택이 될까. 직업계고의 특성과 진학을 고려할 때 따져 봐야 할 사안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꿈 확실한 중위권 학생에게 좋은 선택” 현재 전국에는 직업계고(일반고 직업반 제외)가 510곳이 있다. 마이스터고가 47곳(학생수 1만 8105명), 특성화고가 464곳(24만 9430명)이다. 세부 학과는 1021개로 다양하다. 마이스터고는 로봇·원전·항공·바이오 등 유망 산업 분야의 인력 수요에 맞춰 ‘젊은 장인’ 양성을 목적으로 운영한다. 학교와 기업이 산학 협력을 맺고 필요한 인력을 키우는 형태라서 졸업생 대부분이 탄탄한 기업에 취업한다. ‘직업계고 중 특목고’로 보면 된다. 특성화고는 경영·미디어·미용 등 다채로운 분야의 인재를 키워 낸다.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 모두 3년간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 조민희 서울교육청 진로직업교육과 장학관은 “인기 전공도 사회상과 유행에 따라 바뀐다”면서 “최근에는 조리와 방송·연예, 미용, 실용음악 등이 인기가 좋다”고 말했다. 어떤 특성의 아이들이 직업계고 진학을 고려해볼 만할까. 교사 등 입시 전문가들은 우선 “진로·적성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가 명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주 이화여대 병설 미디어고 교감은 “요즘은 자유학기제(중학교 한 학기 동안 지필고사 대신 진로·적성 활동을 위주로 하는 제도)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한 아이들이 많다”면서 “꿈이 확실하다면 직업계고에 도전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또 중학교 내신 성적이 상위 40~60% 정도인 중위권 학생이라면 더 관심을 둘 만하다. 인기 특성화고의 중학교 내신 성적 합격선은 상위 20~50%로 알려졌다. 서울의 한 마이스터고 교사는 “일반고에 입학하면 보통 내신 석차가 중학교 때보다 10%쯤 떨어진다”면서 “점수에 맞춰 대학 가기에 급급하면 취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 실습·근로 환경 미리 체크해 봐야 직업계고 입시는 크게 일반전형과 특별전형으로 나뉜다. 일반전형은 중학교 내신 교과 성적과 면접 등으로, 특별전형은 교육청 또는 학교가 정한 기준에 따라 신입생을 뽑는다. 특히 특별전형은 내신 성적을 전혀 보지 않고 학생부 비교과 기록과 면접만으로 뽑아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마이스터고·특성화고에 진학할 수 있다. 예컨대 가업 승계자 특별전형을 통해서는 음식점을 하는 부모의 뒤를 이을 학생이 조리학과에 진학할 수 있다. 이 밖에 미래인재, 학교장 추천, 북한이탈주민 특별전형 등이 있다. 직업계고에 진학한 뒤 전공 등이 적성에 맞지 않으면 1학년 2학기 또는 2학년 1학기가 시작하기 전 일반고 전학이 가능하다. 특성화고에 입학해도 대학 진학의 길은 열려 있다. ‘특성화고 동일계 특별전형’과 ‘재직자 특별전형’ 등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동일계 특별전형은 고교 졸업 뒤 특성화고 전공과 같은 계열의 대학 학과에 수시 지원하는 전형이다. 김 교감은 “예를 들어 영상과에 다니는 학생 중에 ‘PD를 하려면 석사 학위를 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동일계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재직자 특별전형은 고교 졸업 뒤 기업 등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재직자가 고교 +학생부와 면접 등을 통해 대학에 입학하는 제도다. 최보영 교육부 중등직업교육정책과장은 “지난해 전국 71개 대학에서 4629명을 뽑는 등 매년 선발 인원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마이스터고는 졸업 뒤 반드시 취업해야 한다. 동일계 특별전형은 지원할 수 없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라 직업계고의 장점이 부각되지만 학부모들의 우려도 여전하다. 가장 큰 걱정은 ‘고용의 질’이다. 지난해 11월 제주의 음료 공장에 현장실습 나갔던 특성화고 학생 이모군이 기계에 깔려 사망하자 서울 등 전국 특성화고들이 정원 미달 사태를 겪었다. 또 특성화고 졸업생 중 고용보험에 가입된 일자리에 취업한 비율은 2015년 58.8%에 불과했다. 특성화고의 취업률은 각 학교에 따라 편차가 크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운영하는 특성화고 포털(http://www.hifive.go.kr/)에서 학교별 정보를 확인하거나 매주 수요일마다 각 특성화고에서 운영하는 견학·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미리 학교 현장을 둘러보면 좋다고 말한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아하! 우주] 지구 2배 만한 외계행성 발견…대학원생이 찾았다

    [아하! 우주] 지구 2배 만한 외계행성 발견…대학원생이 찾았다

    태양계 밖에 위치한 지구보다 2배 정도 큰 외계행성이 새롭게 발견됐다. 최근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과 미국, 독일 공동연구팀은 지구에서 약 145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계행성을 발견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케플러 우주망원경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체가 드러난 외계행성의 이름은 'Wolf 503b'. 처녀자리에 위치한 Wolf 503b는 지구보다 2배 이상 크지만 놀랍게도 태양보다 온도가 낮고 차가운 오렌지색 왜성 주위를 단 6일 만에 돈다. 이 정도 거리면 태양과 수성사이의 거리보다 10배 이상은 가까운 셈. 행성의 크기로만 보면 슈퍼지구의 조건에는 맞지만 항성에 딱 붙어있기 때문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은 되지 못한다. 국제 공동연구팀은 케플러 우주망원경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행성찾기 프로그램을 가동해 ‘트랜싯’(transit) 현상을 찾아냈다. 일반적으로 행성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기 때문에 주위 별 빛으로 그 존재가 확인된다. 행성이 항성 앞을 지나가는 경우 잠시 빛이 잠식되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이같은 현상을 트랜싯이라 부른다. 특히 이번 발견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일등공신이 바로 몬트리올 대학 대학원생인 메린 피터슨이라는 사실로 이번 논문의 제 1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부터 이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있는 피터슨은 "이렇게 빨리 새로운 외계행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면서 "연구성과에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며 이번 논문은 지도교수와 팀으로서 연구한 여러 과학자들 덕"이라고 밝혔다. 피터슨의 지도교수인 비요른 베네케 박사는 "Wolf 503b는 지구와 같은 바위형 행성이거나 가스형인 작은 해왕성일 수도 있다"면서 "Wolf 503b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최종 확인은 차후 발사되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하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블우주망원경의 후계자인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WST·James Webb Space Telescope)은 역사상 가장 비싸고 강력한 우주 망원경으로 현재는 2021년 이후로 발사가 연기된 상황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2) 위기탈출 선봉에 나선 현대기아차 CEO들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12) 위기탈출 선봉에 나선 현대기아차 CEO들

    양웅철-권문식 부회장, 기술개발 ‘쌍두마차’김용환 부회장, 정몽구 회장 ‘그림자 보좌’박한우 기아차 사장, 부회장 없는 대표맡아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글로벌 판매실적이 725만대에 그쳤다. 이는 2013년의 755만대에 미치지 못하고 2011년 712만대를 조금 넘겨 6년 전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어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위기상황을 입증하고 있다. 지난해 신차 출시지연으로 인한 미국시장의 부진과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등의 영향으로 인한 중국시장의 부진이 뼈아팠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불황도 한몫했다. 현대차그룹은 도요타, GM, 폭스바겐, 르노·닛산에 이어 글로벌 완성차 가운데 5번째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올해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다. 반등의 기회를 맞지 못하면 ‘글로벌 메이커 빅3’의 꿈은 영원히 좌절될 수도 있다. 현대차그룹의 운명은 전문경영인들이 쥐고 있는 셈이다.  윤여철(66)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서울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자동차 판매영업 직원 출신인 윤 부회장은 운영지원실장, 경영지원본부장, 노무관리지원담당, 울산공장장 등을 거쳐 현대차와 기아차의 노무관리와 국내생산 부문을 총괄하는 부회장에 올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연속 무분규 타결이라는 전례없는 노사협상을 이끈 장본인으로 그룹내 최고의 노무관리 전문가로 불린다. 또한 윤 부회장은 그룹을 대표해 대외 활동을 하는 등 선임 부회장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양웅철(64)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광주고-서울대 기계설계학-미 텍사스대 기계설비학 석사-미 UC 데이비스대 기계설계학 박사학위를 딴 ‘학구형’이다. 현대기아차의 연구개발 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1987년부터 미국 포드자동차 연구·개발(R&D)센터에 근무하다, 2004년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로 합류했다. 하이브리드카 개발실장, 전자개발센터장 등을 맡았고, 연구개발본부 본부장, 사장 등을 거쳐 2011년 4월 현대차 연구개발총괄본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양 부회장은 그동안 현대기아차의 친환경차와 전장기술 개발에 주도적이 역할을 해왔다. 친환경차 시장 본격 진입을 위한 초기 하이브리드카 개발부터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전기차, 수소전기차에 이르기까지 현대기아차의 친환경차 포트폴리오 확장에 남다른 리더십을 발휘했다. 최근에는 자율주행,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스마트카 부문에서 오픈이노베이션 전략을 통한 기술 협력 등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권문식(64)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경복고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왔다. 독일 아헨공대 생산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양 부회장이 ‘미국파’라면 권 부회장은 ‘독일파’인 셈이다. 1991년 현대정공에 입사한 권 부회장은 현대차 연구개발본부에서 선행개발실장, 선행개발센터장, 연구개발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치며 엔지니어의 길을 걸었다. 현대제철 제철사업관리본부장과 제철사업총괄 사장에 올라 현대차그룹의 숙원 사업이었던 일관제철소 건설을 진두 지휘했다. 이후 자동차 전장부품 계열사 케피코 대표, 차량용 반도체 개발을 맡은 신생 계열사 현대오트론을 맡았다. 2012년 현대기아차로 복귀해 연구개발본부장 사장을 맡았고, 2015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공학부문 최고 영예인 공학한림원 정회원이자, 2016년부터 제29대 한국자동차공학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용환(62)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인창고, 동국대 무역학과,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유럽사무소장 등을 거쳐 2003년에는 기아차 해외영업본부장을 맡았다. 2008년에는 현대차로 복귀해 해외영업본부 사장, 기획조정실 사장을 지낸 후 2010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 부회장은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기획조정실을 맡아 현대건설 인수, 신사옥 건립 등 그룹의 굵직한 주요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특히 2010년 현대건설을 놓고 현대그룹과의 인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로 회자된다. 정몽구 회장의 해외 출장이나 중요 행사 때는 대부분 수행하는 등 정회장의 신임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회장 아래 ‘실세라인’으로 알려진 현대정공 출신이 아닌데도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경영진 반열까지 올랐다. 이원희(58) 현대자동차 사장은 대광고, 성균관대 경영학과, 웨스턴일리노이대 회계학 석사 출신이다. 현대차 재정팀장, 국제금융팀장, 미국판매법인 재경담당 상무, 재경본부장 전무, 부사장, 사장으로 승진하는 등 ‘재무통’으로 통한다. 현대차 미국판매법인 재무담당으로 일하면서 공격적 마케팅으로 실적을 개선해 미국 금융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2010년 재경본부장을 맡은 이후에는 현대차가 글로벌 완성차 회사로 입지를 다지고 재무건전성과 수익성 측면에서 진일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현대차는 2010년부터 5년 여간 10% 안팎의 높은 영업이익율을 기록하고 글로벌 신용등급이 상향되는 등 높은 외형성장을 달성했다. 박한우(60) 기아차 사장도 현대차그룹 내 손꼽히는 재무관리 분야 전문가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부회장이 없는 기아차 대표를 맡고 있다. 중앙상고와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박 사장은 2003년부터 2012년까지 현대차 인도법인에서 재경담당으로 이사, 상무, 전무를 거친후 법인장(부사장)까지 역임했다. 법인장 시절 i10, i20 등 현지전략 차종들을 성공적으로 히트시키며 인도시장에서 현대차가 2위 업체로 입지를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2년 기아차 재경본부장(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2014년에는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했다.   피터 슈라이어(65) 사장은 현대기아차의 디자인 변천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슈라이어 사장은 독일 뮌헨의 산업디자인 전문학교와 영국 런던의 왕립예술학교에서 자동차디자인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아우디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근무하며 TT, A6 등 아우디 디자인의 변혁을 주도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폭스바겐의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근무했다. 2006년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되며 현대기아차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피터 슈라이어의 영입에 각별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BMW의 크리스 뱅글, 아우디의 월터 드 실바와 함께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에 꼽힌다. 그는 기아차의 디자인 방향성을 ‘직선의 간결함’으로 제시하고, 호랑이 코 모양의 라디에이터 그릴로 상징되는 패밀리룩을 정립시켰다. 이러한 디자인 혁신을 바탕으로 기아차는 2008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2010년 출시된 K5는 현재까지도 슈라이어 사장이 탄생시킨 역대급 명작으로 남아 있다. 슈라이어 사장은 최근 제네시스 브랜드의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알버트 비어만(61) 사장은 현대기아차의 차량성능 시험과 고성능차 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독일 출신인 비어만 사장은 독일 아헨공대에서 기계공학 석사를 전공했다. 1983년 BMW에 입사해 고성능차 주행성능, 서스펜션, 구동, 공조시스템 등의 개발을 담당했으며, BMW M 연구소장직을 맡아 고성능차 개발을 총괄했다. BMW의 모터스포츠 참가 차량 개발 주역으로, 30여년간 고성능차 개발에 매진해온 세계 최고의 전문가다. 2015년 현대기아차에 부사장으로 영입된 비어만 사장은 남양연구소에서 출시전 차량의 안전성, 내구성, 소음진동 등 성능시험과 함께 현대차 N으로 대표되는 고성능차의 개발 총괄을 담당해오고 있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추석 코 앞인데 한숨 쉬는 사과재배 농가

    추석이 코 앞으로 다가왔으나 전북 장수지역 사과농가들은 시름에 빠져 있다. 7일 장수군과 장수사과조합에 따르면 올 봄과 여름에 기상이변이 많아 사과 품질이 크게 떨어져 농가소득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장수지역은 올 봄 냉해를 입어 착과율이 예년 보다 20% 이상 낮았다. 더구나 폭염으로 수분 부족현상까지 겹쳐 비대기에 열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록적인 폭염 이후 집중호우가 내리자 열매가 갑자기 자라면서 꼭지부분이 갈라지는 열과현상까지 발생했다. 이때문에 추석사과로 유명한 장수지역 사과농가들은 정품률이 20%를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수사과조합은 상품률이 지난해 보다 50% 이상 떨어져 백화점 등에는 납품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밝혔다. 전체 생산량도 30% 정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생산량 감소는 수정 불량과 영양 불균형, 낙과, 비정상품 발생 때문이다. 강서구 장수군 사과담당은 “현재 농가들이 사과가 고루 햇볕을 쬐도록 잎을 따주는 작업을 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판매와 소득은 미지수”라고 말했다. 한편 평균 고도가 해발 400m인 장수지역은 904농가에서 1085㏊의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이같은 장수 사과 재배면적은 전국의 30%에 이른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