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석방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방송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1도움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택시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전염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777
  • 국제/대한매일 선정 1998년 10大 뉴스

    ◎아시아 경제의 몰락 아시아 각국이 금융경제위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6월 엔화가 폭락하고 중국 위안(元)화의 평가절하 압력이 가중되며 각국이 기업 도산과 실업자 양산의 악순환을 겪었다. 중국과 타이완(臺灣)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국들이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예정이다. 그나마 한국과 태국이 내년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다는 전망이 나와 위안을 주고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테러로 얼룩진 98년에 한가닥 빛과 같은 사건.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며 30여년간 지속된 북아일랜드 피의 역사를 마감시키는 낭보였다. 4월 협정체결에 이어 6월 협정에 따른 연합의회가 탄생됐고 세계는 평화협상의 주역 존 흄 사회민주노동당(SDLP)당수와 데이비드 트림블 얼스터 통일당(UUP)당수에게 98노벨평화상을 수여,평화를 향한 여정에 힘을 보탰다. ◎러 모라토리엄 선언 8월17일 러시아는 400억달러가 넘는 단기국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루블화 평가절하를 단행,사실상 국가부도를 냈다. 아시아를 도화선으로 타들어오던 금융위기가 러시아에서도 터진 것이다. 국내적으로 환율 폭등,살인적 인플레등에 건강악재까지 겹친 보리스 옐친 정권은 최대 위기에 빠졌고 돈을 물린 국제사회도 곤욕을 치렀다. 특히 루블 환투기를 일삼아온 서방 헤지펀드들이 비틀거리면서 여파가 국제시장으로 확산됐다. ◎피노체트 영국서 체포 런던 병원에서 치료받던 칠레 전 독재자 피노체트(82)가 스페인 사법부의 자국민 살해·고문 혐의 기소에 따라 영국 경찰에 체포된 것이 지난 10월17일. 이때만 해도 피노체트가 스페인행 판결에 처하리라고 내다본 관측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면책특권 불인정,스페인 송환 절차 개시등 잇따른 ‘법대로’ 판결로 전세계 인권기구의 갈채를 한몸에 받으며 ‘반인권 독재자에 공소시효 없다’는 새로운 판례를 창출했다. ◎美 이라크 군사공격 미국과 영국이 합동으로 16∼19일 나흘간 4차례에 걸쳐 이라크 군사거점에 미사일 400여발을 퍼부었다. 작전명 ‘사막의 여우’. 이번 군사공격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유엔 무기사찰을 훼방한 이라크 응징이란 명분을 붙였으나 러·중 및 아랍권의 강한 반발과 탄핵 모면용이라는 내부 비판에 직면했다. 대차대조표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국내입지를 더 굳힌 반면 클린턴은 하원서 탄핵돼 클린턴 적자로 나타났다. ◎인도 파키스탄 핵실험 인도가 5월 11일,13일 핵실험을 한데 이어 50년 앙숙지간인 파키스탄이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같은 달 28일 보복 핵실험을 강행했다. 국제사회는 핵실험 도미노 불안에 휩싸였고 미 시카고대 핵과학회는 지구종말의 시계를 자정 14분전에서 9분전으로 앞당겼다. 양국은 더이상 핵실험을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서남아 지역은 세계의 핵화약고로 떠올랐다. ◎성추문 클린턴 탄핵 1월 불거진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양과의 성추문. 이 사건으로 인해 클린턴 대통령은 미역사상 연방대배심에 선 최초의 대통령,하원에서 탄핵받은 두번째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르윈스키와의 성관계를 적나라하게 담은 ‘스타보고서’(9월)가 공개돼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이제 세계의 이목은 새해초 열리는상원의 판결결과에 쏠려있다. ◎지구촌 기상이변 지난해까지 극심한 가뭄을 유발했던 엘니뇨가 올해는 라니냐와 바통터치하면서 전 지구촌을 또한번 기상재앙속으로 몰고 갔다. 중국의 양쯔강은 폭우로 올여름 내내 범람하며 최악의 ‘홍수사태’를 만들어냈고 대형 허리케인 ‘미치’가 휩쓸고간 중남미 각국은 수천명의 인명피해와 함께 각 지역이 초토화됐다. 유럽에선 이상한파로 수백명의 노숙자가 얼어죽었고 동남아에선 극심한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비아그라 열풍 지구촌 뭇 ‘고개숙인 남성’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힘입어 올 최대 히트의약품으로 등극한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가 3월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후 전세계로 전파되며 부작용으로 수십명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세계 각국이 비아그라 밀수로 몸살을 앓을 만큼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제조사인 화이저사의 주식폭등으로 대주주인 영국 성공회가 뜻밖의 ‘비아그라 횡재’를 얻는 등 화제도 많이 낳았다. ◎印尼 수하르토 하야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대통령이 5월시민시위에 굴복해 물러났다. 경제난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지만 수하르토 일족의 부패한 족벌정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말레이시아도 안와르부총리가 민주개혁을 요구하자 마하티르총리가 동성애 혐의등 20여개의 죄목을 씌워 그를 구금해 버렸다. 이후 그의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 ‘사람 사랑’ 시인으로 거듭난 박노해씨(올해의 인물:4)

    ◎이념투쟁 오류 인정 ‘얼굴있는 제2인생’ 시작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된지 7년만에 지난 8월15일 특사로 풀려난 박노해씨(41).석방직후부터 종교계와 문화계 대학 등 갈만한 곳이면 마다않고 찾아 그동안 가슴에 묻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노동의 새벽’‘시다의 꿈’ 등 현장성 강한 노동시로 80년대 문단을 뒤흔들었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에게 올해는 잊혀질 수 없는 한해다.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얼굴없는 시인은 충격으로 다가왔다.올해 하반기 대학 강당에서,성당에서,허름한 무대에서 들불처럼 번져간 ‘박노해 신드롬’은 어찌보면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열악한 노동현장의 비애감을 실감나게 담아낸 ‘시다의 꿈’을 발표한게 지난 83년.군 제대직후 안양 시내버스 정비공으로 입사해 작업장과 기숙사에서 틈틈이 적어두었던 시 모음이 바로 84년 세상에 나온 ‘노동의 새벽’이다.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해간 것은 ‘노동의 새벽’을 발표한 바로 그 이듬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86년 5·3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지목돼 추적을 받다가 89년 세상을 뒤흔든 사노맹 사건의 핵으로 등장,마침내 91년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얼굴없는 시인이 마음을 바꾼 것은 감옥에서 동구권의 몰락을 바라보면서다.한때 노동운동의 한 이데올로기로 택했던 사회주의의 실패를 주저없이 인정했고 세인들에 대한 사죄에도 거침이 없었다. 노동현장에 몸담으면서 탄압에 맞서 가열찬 시어들을 쏟아냈던 정열은 이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으로 바뀌었다.경주교도소에서 준법서약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가 출옥직후 힘주어 밝힌 말 ‘사람만이 살길이다’는 그의 인생향로를 담은 선언이다.사상과 이념에 온몸을 던져 투쟁하다 갇힌지 7년만에 햇빛을 보게된 그의 모습은 지난 91년 구속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올 겨울 6년만의 시집을 준비하고 있고 내년 여름엔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오랜 산고끝에 세상에 나올 그의 새 작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성탄절 1,100명 가석방

    법무부는 23일 성탄절을 맞아 모범수 등 1,100여명을 가석방한다고 밝혔다. 이는 매달 600∼700명 규모로 가석방 시켜온 것에 비할 때 50% 이상 늘어난 규모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성탄절 특사가 없는 만큼 가석방 대상에 민생치안과 관련이 없는 경제사범 등을 대거 포함시켜 평소 보다 규모를 늘렸다”고 말했다.
  • 잡힌 범인 풀어주는 경찰관/파출소장 등 2명 구속

    ◎강도 용의자 음주운전 적발… 운전자 바꿔치기 석방 부산지검 동부지청은 21일 강도 강간 등 혐의로 수배된 범죄용의자의 음주운전을 적발하고도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해 풀어준 부산진경찰서 부암2파출소장 權영덕 경위(37)와 전 해운대경찰서 형사과 李완근 순경(30)을 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구속했다. 權경위 등은 지난 1월3일 오후 11시쯤 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달맞이 언덕 부근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된 金모씨(30·무직·주거부정)의 청탁을 받고 金씨의 매제(28)가 운전을 한 것처럼 허위서류를 꾸며 풀어준 혐의다. 金씨는 부녀자를 상대로 10여건의 마취 강도 및 강간을 저지른 용의자로 최근 TV방송에 공개수배됐었다.
  • DJ·YS 정치적 고향 목포·마산 손잡는다

    ◎화합 차원 24일 결연식 金大中 대통령과 金泳三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전남 목포시와 경남 마산시가 오는 24일 자매결연식을 갖는다.마산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영·호남화합 차원에서 마련됐다.이전에도 영·호남 지방자치단체간의 자매결연식과 단체장간의 등반교류 등이 있었지만 이들 두 지역이 갖는‘정치적 상징성’때문에 이번 행사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지적이다. 그런 만큼 국민회의 지도부는 이날 행사에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金대통령의 장남이자 목포·신안갑위원장인 金弘一 의원을 비롯,韓和甲 원내총무,薛勳 기조위원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에서도 마산·회원을 출신 姜三載 의원과 마산·합포 출신 金浩一 의원등이 참석할 계획이다. 이번 자매결연식이 성사되기 까지 ‘마산고 출신’들의 역할이 컸다는 후문이다.한나라당 姜의원과 金의원,국민회의 薛의원은 마산고 선·후배 사이다.특히 薛의원은 처음부터 이 행사의 기획·연출을 맡아 일을 추진해왔다. 당초 마산시는 호남의 다른 지역과 자매결연을 추진했다.이를안 薛의원이 “마산이 이왕 자매결연을 추진하려면 영·호남 지역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목포와 해야 한다”고 김인규마산시장(한나라당)을 설득했다. 薛의원은 金시장이 지난 6·4지방선거와 관련,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직접 나서 탄원서를 내는 등 金시장 석방에 애를 써왔다.이는 金시장의 구속으로 급격히 영남 정서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행사는 나빠진 마산 정서를 돌이키는 ‘봉합’ 차원의 성격이 짙다.국민회의 지도부가 나서서 이번 행사를 직접 주선하고 챙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민족일보 조용수(金三雄 칼럼)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다이모니온을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 타락케 한 혐의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독배를 들기에 앞서 최후진술에서 “클리톤이여,아스크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다오”라는 유언을 남긴채 권력의 제물로 사라졌다. 2,000여년이 지난후 한 청년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이며 민족일보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데 썼는데,갚아주지 못하고 가게돼 미안하다”는,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의 유언이 그것이다. 1961년 12월2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조용수는 32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친구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건국 이래 수 많은 언론인이 정치적 수난을 겪었지만 순수한 언론활동을 이유로 극형을 당한 사람은 조용수 사장이 처음이다. ○박정권의 이념적 희생양 친일언론인 출신으로 해방후 평화일보·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정국은은 재일 조총련계의 국제공산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54년 2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월간 ‘청맥’과 관련한 김질락의 경우 간첩혐의로 박정희정권에 의해 72년 7월 처형되었다. 정국은과 김질락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첩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수 사장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친일과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에서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고 마침내 유망한 젊은 언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조사장은 61년 2월 4월혁명 공간에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부정부패를 고발하며,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한다는 사시 아래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하다가 5·16 쿠데타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확인절차로 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부는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언론인을 처형하는 잔인성을 보였다.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나왔다는 혐의와 북한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선동하여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조총련계 자금유입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평화통일론이 극형의 죄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가 유일한 ‘물증’으로 내세운 이영근씨는 민단계통의 인물이었으며,노태우정부는 1990년 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이유로 국민훈장을 추서하여 간첩이 아님이 입증됐다. 또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역대 정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더러는 정부가 훈장을 줌으로써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사장의 37주기에 즈음하여 지난 20일 낮 남한산성에 있는 묘소에서 추도식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 발족식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검찰이 자료공개를 거부해온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국회에서 특별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기념사업을 통해 평화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뜻이 모아졌다.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당시 검찰,재판관 등 생존자들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계도 건국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한 언론지도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신원(伸寃)하는데 뜻을 모았으면 한다.
  • 민주열사 열전:18회/前 조선대생 李哲揆(정직한 역사 되찾기)

    ◎반독재 활동혐의 수배… 경찰 검문뒤 변사체로/행방불명 1주뒤 의혹에 싸인 시신 수원지에서 발견/검찰 ‘도주중 실족 익사’로 수사종결… 재부검 요청 거부 불모의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민주화투쟁을 위해 스스로 몸을 받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의문사 희생자로부터도 푸른 수액을 받아 자라난다. 비록 몸은 독재의 철퇴 아래 억울하게 스러졌지만 잠들지 않는 푸른 혼은 철퇴를 두고두고 산화시켜 녹슬게 한다. 직선제 정부라던 6공화국 때도 철권 군사독재의 5공과 마찬가지로 여러 의문사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광주 조선대생 李哲揆의 죽음은 10년이 거의 지난 지금도 선명한 의문들로 덮여 있다. 이 의문들은 거꾸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과 공권력의 정당성에 날카로운 의문을 던진다. 1989년 5월10일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 4)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철규는 교지에 게재한 자신의 논문과 관련하여 4월18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 전남지역 공안 합수부에 의해 수배중이었다. ○검문경찰 “추격하다 철수” 주장 수배받고 있던 그는 5월3일 밤 10시쯤 후배의 생일을 위해 택시를 타고 무등산장 쪽으로 가던 중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검문 경찰은 신원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피검문자가 인근 산 속으로 도주,뒤쫓아 갔으나 붙잡지 못한 채 얼마후 철수했다고 주장했다.택시강도 혐의자를 잡기 위한 일상적 검문 상황이었지 피검문자가 300만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린 공안 수배범 이철규인줄은 전연 몰랐다는 말이였다. 이철규는 검문 1주일 후 검문을 받던 청암교로부터 76m 떨어진 곳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는 물가에서 3m 떨어지고 수심이 70㎝ 정도되는 지점에서 얼굴을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검은 색으로 심하게 변색된 가운데 퉁퉁 부어 있었으며 왼쪽 눈알이 돌출된 끔직한 형상이었다. 특히 오른쪽 어깨는 왼쪽에 비해 크게 부어 있었다. 사체 상태나 실종의 정황에 비춰 단순한 익사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가족과 학생들은 즉시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었다. 5월11일 진상위에서 다수가 참관한 가운데 검찰 주도의 부검이 실시되었다. 진상위 측 참관인단은 위와 폐안에 물이 차 있지 않았으며 부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익사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검찰은 보다 상세한 검사가 필요하다면서 주요 장기를 국립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14일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좌측 눈의 돌출과 오른쪽 어깨의 부은 것은 단지 부패 때문이며 몸의 각 장기에서 플랑크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익사라고 결론내렸다. 보강 자료로 폐부종,국소출혈,폐포파열을 들었다. 검찰은 관련조사 및 부검 결과를 종합하여 익사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3일 밤 산 속으로 도주한 이철규는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시 광주 쪽으로 돌아 오려고 철조망을 넘어 수원지 내로 들어왔다가 다소의 술기운에 실족,추락하여 익사하였다는 것이다. 추락의 방증으로 사건 당일 일부 경찰이 현장 근처에서 “풍덩,어푸어푸”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점을 들었다.다만 소리를 듣고 후레쉬를 비춰 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수면도 잔잔해져 물가까지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학생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선대생 8,000여명 등 학생 시민 1만여명은 89년 5월11일 정오부터 시신을 안치한 전남대 병원 앞 도로를 가득 메우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 가졌다. 5·18 9주기를 앞둔 가운데 13일에는 전국 70여개 대학생과 시민 등 1만5,000천명이 전남대 금남로 조선대 등을 거쳐 시신이 안치된 병원까지 도심행진 시위를 벌였다. ○부거당시 슬라이드 공개안해 한때 2만5,000명까지 불어난 시위군중은 “이철규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으나 경찰과 큰 충돌은 없었다. 평화적으로 계속되던 시위는 그러나 25일 현장검증을 실시한 검찰이 30일 ‘실족 후 익사’ 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하려 하자 격렬한 항의시위로 급변했다. 25일부터 전남대 영안실 앞과 서울 명동성당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철규 고문살인 진상규명”을 소리높이 외치며 학생들은 눈으로 보면 누구라도 사인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며 사체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할 것과 진상위 측과 합수부 측이 TV공개토론를 가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여소야대의 국회도 개별 사안에 대해 십여년 만에 첫 국정감사를 6월1일부터 광주 현지에서 실시했다. 열흘 남짓 새에 60여명의 증인을 부르고 3,000페이지에 가까운 검찰수사 기록을 검토했으나 3주간의 조사에서 별다른 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인규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재부검 요청을 검찰이 거부해 의원들 역시 의문점만 재론했을 따름이었다. 유족과 진상위 측은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법의학자 로버트 커쉬너 박사를 초청하여 그의 참관 아래 재부검을 갖자고 했지만 검찰은 응하지 않았다. 나아가 1차 부검 당시의 슬라이드 요청마저 거부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철규가 실족해 익사한 뒤 1주일 동안 물 속에 있었다가 발견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일 밤 검문 때 경찰에 붙잡혀 연행된 뒤 조사를 받다가 살해되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발견 지점으로 옮겨져 익사체로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의문은 수사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실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늦게라도 6공 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폭발될 잠재력을 안고 있다. ○187일간 냉동안치뒤 안장 이철규는 82년 조선대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84년에 ‘학원 민주화 자율추진회’,85년에 ‘반외세 반독재 투쟁위원회’ 위원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85년 11월 ‘반외세’ 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87년 7월 가석방되었다.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나섰던 이철규는 전횡을 일삼던 조선대 재단을 밀어내는 학생들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89년 초 새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에 올랐다.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던 그는 죽어서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의 시신은 진상규명을 위해 187일이나 영안실에 냉동되어 있다가 의문의 얼음장을 깨지 못하고 89년 11월4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의문사 진상규명 노력/50건 육박… 80년대 집중/5共 청문회 특위 무산/인권법에 조사 명시 방침 군사독재 등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만큼 우리 현대사에서는 의문사가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 ‘타살당했다는 심적 및 물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어 사인이 철저하게 묻혀져 버린 죽음’인 의문사는 전국민족민주 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50건에 육박한다. 지난 73년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의 의문의 죽음을 필두로 한 이들 현대사 의문사는 8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나 문민정부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동안 유가족을 중심으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끈질기게 펼쳐져 왔다. 서슬퍼런 5공 때인 84년에 강제징집 희생자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다. 6공 초기 여소야대 직후인 88년 10월부터 유가족들이 기독교회관 3층 시멘트 바닥에 모포를 깔고 135일 동안 추위에 시달리고 전경과 부딪히면서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5공청문회에서 의문사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특위 일정까지 잡혔다. 그러나 가해자 측 증인이 나오지 않고 TV 중계도 않는다고 하자 유가족 측이 거부,무산되고 말았다. 90년부터 일반 시민 11만명의 서명을 받아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으나 끝내 폐기되고 말았다.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유가족들은 98년 11월4일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위해 또다시 국회 앞 도로에서 텐트를 치고 장기 농성에 돌입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전 정부와는 달리 현 정부·여당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에 대한 진상조사 문제를 곧 제정할 인권법에 명시하고 새로 설치될 인권위원회에 전담기구를 둬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세종로 청사 후문은 ‘시위 명소’

    ◎교원 정년 단축 등 교육부 관련 집회가 70%/점심시간 공무원 잦은 출입/전시효과 노리기에 알맞아 새 정부 출범 이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이 시위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민원인들의 집회 단골장소는 청사 후문 건너편.최근에는 유명 영화배우들이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구경꾼이 꾀기도 했다. 10평 남짓한 이곳에는 단골손님이 있다.바로 교육부 관련 민원인들.청사경비대측은 “거의 매일 번갈아가면서 시위대들이 청사후문 앞을 찾지만 70% 이상이 교육부 민원인들”이라고 귀띔한다. 올해는 이 가운데에서도 서원대 재단 비리 관련,과학고 학부모들의 특수목적고 내신제 폐지등의 시위가 가장 많았다.교사 정년 단축,입시제도 변화 등 굵직한 교육정책의 변화가 잇따르자 시위층도 학생으로부터 학부모,교사 등으로 다양해졌다. 세종로 청사에 입주해 있는 한 부처가 총리실 통일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교육부 법제처 등이지만 민원사항이 많은 교육부에 관련 시위도 집중돼 있다. 노동부 건설교통부 등 경제부처가 몰려있는 과천청사가 거리상으로 먼 것도 시위대가 세종로 청사로 몰리는 한 요인이다. 주변에선 행정을 관할하는 총리실이 세종로 청사에 있어 과천 청사에 입주한 부처사항이 세종로로 오는 경우도 많다고 진단한다.환경운동 단체나 양심수 석방 요구 시위,체불임금,재개발 관련 시위 등이 그것이다. 청사 정문이 바로 세종로로 통해 여유공간이 없는 데 반해 후문쪽 옛동화은행건물 앞에는 수십명이 자리를 차지하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다.또 공무원들이 대부분 점심시간에 후문으로 드나들어 전시효과도 노릴 수 있다. 이곳이 시위명소로 등장하면서 청사경비대도 종로경찰서에 신고된 집회일 경우 제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공무원이나 인근 회사원들도 시위대의 구호소리에 익숙해 있다.다만 일부 공무원들은 “시위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공무원들의 근무시간에 확성기로 상소리를 하는 것은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美­이­팔 3자 정상회담 결렬/중동카드로 탄핵위기 탈출

    ◎클린턴 시도 무산될듯 중동평화협상 중개외교 성과를 탄핵위기 탈출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시도가 무산될 지경에 처했다. 14일 팔레스타인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헌장에서 반(反)이스라엘 조항을 공식 폐기,잠시 빛을 발하는 듯 했던 클린턴의 중개외교는 15일 열린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 3자 정상 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벽에 부딪쳤다. 네타냐후 이스라엘총리가 요르단강 서안 추가 철군과 팔레스타인 죄수의 석방문제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탄핵수렁을 벗어나기 위해 온건 공화당 의원 회유 등의 전략과 함께 최후의 수단으로 중동평화 중개외교를 택한 듯 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났다’면서도 아라파트 수반과의 공동 기자회견 도중 “탄핵절차를 강행하고 상원에서 심판하는 것은 미국과 미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의회와의 타협등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17일 있을 하원의 탄핵안 표결 결과는 클린턴에게는 ‘파멸’과 ‘기사회생’의 갈림길. 국민의 58%가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면 사임해야 한다는 여론 조사결과도 나온 마당에 중동평화회담의 성과는 더없이 중요한 요소.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중동평화협상을 앞당긴다면 그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고,의회 분위기도 탄핵 거부쪽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중동 순방 도중 모든 방법을 동원,미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지난 13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가진 만찬에서 신약 구절까지 인용했다. ‘용서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자비 없이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은 역시 자비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자비다.’ 팔­이를 겨냥한 화해의 문구였지만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호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3자회담결렬은 그가 바라던 중동중재외교성과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웠다.
  • 金佑錫 전 건설장관 보석 석방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宋基弘 부장판사)는 12일 경성측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항소한 金佑錫 전 건설부장관(61)이 낸 보석신청을 받아들여 보증금 2,000만원에 석방했다.
  • 효주양 유괴범 조기가석방 될듯/정규군 살해범 검거 결정적 공헌

    ◎경남경찰청,교도소에 요청 지난 79년 부산 효주양 유괴사건의 범인 李모씨(43)가 김해 梁正圭군 유괴살해사건의 범인 검거 때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조기 가석방될 전망이다. 경남지방경찰청은 李씨가 지난달 발생한 김해 梁正圭군 유괴살해사건 해결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을 참작,최근 법무부에 李씨의 조기석방을 건의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당초 경찰은 正圭군 유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범인인 朴珍奉씨(41·구속)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곳에 수감중이던 李씨를 만났다.이때 李씨는 교도소 내 목공소생활을 통해 알게 된 朴씨의 음성과 녹음된 협박 전화의 목소리가 동일하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수사관에게 확인해줬다는 것. 이씨는 지난 80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후 효주양 가족의 탄원과 모범적인 행형성적이 반영돼 20년으로 감형,현재 18년째 복역중이다. 한편 대전교도소는 이씨가 내년 2월 가석방 대상으로 법무부에 상신돼 현재 분류작업중이라고 밝혔다.
  • 10돌 맞은 인권콘서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오늘 장충체육관… 실직자도 함께하는 무대로/10년 개근 정태춘씨·김창완·안치환과 자유·꽃다지 출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해마다 세계인권선언일(12월10일)을 즈음해 열어온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 올해로 10주년을 맞는다. 12일 오후6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첫해부터 한번도 빠짐없이 ‘개근’한 가수 정태춘씨를 비롯해 안치환과 자유,꽃다지,사랑과 평화,김창완씨 등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공연을 갖는다.올해는 특히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이 겹쳐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전망.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은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양심수를 통해 인권회복과 인권실현이라는 전인류의 공동목표를 실천하려는 취지로 지난 89년 겨울 첫공연을 가진 이래 진정한 ‘인권콘서트’로 자리매김돼왔다.지금까지 가수,배우,시인등 수많은 예술인이 참여했으며,공연을 보고 간 관객만도 10만명에 달한다.올해는 양심수뿐만 아니라 IMF한파로 힘겨워하는 모든 실직자와 소시민들도 함께 어울리는 무대로 꾸몄다. 1부 시극 ‘98겨울 감옥’에서는 문성근과 가극단 금강 배우들이 박노해 시인등 석방된 양심수들과 함께 시극을 펼친다.이어 김창완이 양심수 자녀들과 ‘개구장이’를 부르고,10년 개근생 정태춘씨와 관객 등에게 개근상이 수여된다. 문호근 예술의 전당 예술감독과 김정환 시인이 연출을 맡고,주철환 MBC PD와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 등이 음악을 담당하는 등 문화계 인사들이 한마음으로 무대를 만든다. 하루빨리 전국 33개 교도소에 수감중인 양심수가 모두 석방돼 ‘양심수 없는 나라’로 10주년 공연을 맺는 것이 민가협의 진짜 바램이다.(02)763­2606
  • 국민훈장 받은 李敦明 변호사/세계인권선언 50주년

    ◎“현정권 인권보호 진일보 환영”/‘정부가 주는 賞’에 세상 변화 실감/인권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약자들 위해 정부가 끝까지 노력해야 “인권을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입니다.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상까지 받게 돼 쑥스럽습니다” ‘인권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李敦明 변호사(76)는 1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 인권선언 50돌 기념식에서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데 대해 “앞으로도 흔들림없이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35년동안 변호사로 재직하면서 한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인권침해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던 李변호사는 스스로 말하듯 꿈도 꾸지 않았던 ‘정부가 주는 상’에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이같은 사회진보에 작게나마 역할을 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그는 덧붙였다. 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법조계에 투신한 그는 54년 대전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10년동안 법관을 지냈다. 지방판사여서 정치적 사건을 맡을 기회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속적부심을 적용,피의자를 석방해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대통령 비방으로 구속된 한 야당 정치인을 적부심으로 풀어 준 것이다. 63년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도 법률신문 기고를 통해 “변호사로 성공과 실패의 판단기준은 돈을 많이 벌어 큰 집을 사고 자가용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실천했느냐로 따져야 한다”는 올 곧은 법조인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72년 10월유신 선포는 그가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유신이 선포되던 날 정부가 입법 및 사법권을 독점하고 무엇보다 국민에게서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 간데 대해 분노하며 밤잠을 설쳤다”면서 “이 때문에 인권운동에 앞장 서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金芝河씨 사건 변론 李변호사가 인권운동차원서 첫 변론을 맡은 사건은 지난 75년 시인 金芝河씨의 반공법 위반사건이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사건,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삼민투 사건,權仁淑양 성고문사건,金槿泰씨 고문사건 등 한국 인권운동사의 한가운데에 늘 자리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연루된 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사건의 변론도 그의 몫이었다.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땐 동료 변호사들의 협조를 얻어 광고게재운동을 주도했었다. ○5共때까지 암흑시대 그는 “유신이후 全斗煥 정권때까지 인권의 암흑시대라고 할만큼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극심했다”면서 “당시만 해도 인권변호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여서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부지런히 뛰었지만 법관이 용기있는 판결을 내리지 않아 항상 졌다”면서 “나중엔 법관을 보고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방청객을 향해 변론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李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인권변호사 그룹은 80년대 이르러 그 趙永來씨. 李相洙 국민회의 의원 등 소장변호사들의 합류로 세를 불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조직했으며 李 변호사는 초대 고문을 맡았다. 87년에는 5·3 인천사태로 수배중이던 李富榮 현 한나라당의원을 숨겨준 죄로 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정치보복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단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88년 모교인 조선대의 총장직을 제의받고 적임자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학교측에서 수십 번을 찾아와 부탁해 할 수 없이 승낙했다.어차피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승인이 나 총장을 맡게 됐고 재직중 李哲揆군 변사사건,어용교수 해직 등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92년부터 한동안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떼고 재야운동에만 전념했다. 현재 덕수합동법무법인에 적은 둔 李변호사는 건강문제로 사건 변호는 맡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고문과 지난달 발족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도 맡는 등 인권운동에 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던 인권변호사가 이젠 인권 신장에 관심을 갖는 후배들이 많아 든든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李변호사의 세례명은 ‘유토피아’의 저자 이름과 같은 토머스 모어. 성인(聖人) 이름을 쓰는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정의를 위해 단두대에 선 용기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라는 신념이다. 李변호사는 “현 정권이 전 정권보다 인권에 관한 한 진일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환영한다”면서 “아직도 그늘 속에 있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은 만큼 정부가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 “벌금 200만원 이하 수형자 석방”

    ◎대검,1년내 분납 약속때… 2,000여명 풀려날듯 대검찰청은 6일 벌금형 수형자 가운데 벌금이 200만원 이하이거나 200만원을 넘더라도 3분의1 이상을 낸 경우 신원보증을 받아 1년안에 분납키로 약속하면 형집행을 정지해 석방토록 일선 지검에 지시했다. 경제사정을 이유로 벌금형 수형자에 대해 형집행정지 처분이 내려진 것은 처음으로 지난 4일 현재 벌금형을 선고받고 수용중인 3,074명 가운데 2,000여명이 이번 조치로 풀려나게 된다. 검찰 관계자는 “IMF 이후 생계형 범죄에 연루된 재소자가 급증,수용시설 부족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 배설과 장지연(대한매일 秘史:7)

    ◎배설 출옥 기념 상해파티서 조우/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구속/대한매일 용기 찬양·석방 요구 인연 배설이 출옥하자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그의 출옥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우연하게도 이 자리에는 황성신문 사장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이 참석했다.장지연과 배설은 3년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때에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장지연은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음을 통렬히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가 구속되자,대한매일신보는 그 용기를 크게 찬양하면서 석방을 요구하였고,문제가 된 논설을 영역하여 호외로 발행하여 국내외에 이를 알린 일도 있었다.이같은 인연의 배설과 장지연은 멀고 먼 이국땅 상해에서 우연히 만나 밤새 통음(痛飮)하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것이다. ○두사람 나라 걱정하며 통음 장지연은 1909년 5월1일 배설이 서울에서 사망한후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묘비의 비문을 지었는데 비문에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할 적에 비분강개 하야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20일자 황성신문에 우리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논설로 손꼽히는 유명한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실어서 그 통분함을 천하에 토로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 논설에서 장지연은 보호조약의 체결로 동양 3국의 평화가 깨어지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또한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하였다.그 일부를 현대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장지연 배설 사망후 묘비문 작성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 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 자(字)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김청음(金淸陰)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鄭桐溪)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단군 기자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루 밤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인용문 가운데 고딕체는 본문(4호) 보다 한 호가 더 큰 활자인 2호 활자를 사용하여 강조하는 편집기법을 활용하였다.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여 강조한 것이다.장지연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五件條約)청체전말(請締顚末)’이라는 기사를 실었다.역시 4호 본문에 2호 활자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 편집이었다.이등박문이 11월10일 경부철도편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한 전말을 소상히 폭로한 내용이었다.이날짜 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 체결에 관한 기사는 검열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면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장지연은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이 신문을 배포하였다. 주한 일본헌병사령부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한국 언론에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일본은 이해 7월 군사경찰 실시를 한국에 통고하였다. 작전상 한국의 치안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의 군과 경찰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한국은 이를 거절했으나,일본은 군사경찰 실시를 일방적으로 강행하였다.
  • 배설의 상해 복역(대한매일 秘史:6)

    ◎더위·모기떼 시달리며 3주간 혹독한 옥고 치러/판사 “한국민 선동” 판결.英 군함으로 상해 이소/한국인들 연일 몰려오자 형무소 면회 아예 금지/영어 공판기록 번역 대한매일 한달반 연재 4일째인 6월18일(1908년) 판사 보온은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禁錮)형을 선고했다.또한 복역 후 6개월간 근신을 서약해야 하며 350파운드의 보증금(피고 200파운드,보증인 150파운드) 납부를 판결했다.판사는 문제된 논설 3건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한 봉기를 선동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단정했다.그러므로 앞으로 계속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재판정 밖의 많은 한국인들은 실망하고 격분했다.어떤 사람은 돈 4천환을 가지고 와서 배설의 금고형을 돈으로 대신 면제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말했고,변호인 크로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다.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는 한국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는 배설의 처벌로 그들의 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미국의 한국교포들이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을 보더라도 그런 위험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영국 총영사관 부근에 경찰관을 순회시키는 등의 예방조치를 취해달라는 편지를 일본측에 보냈다. 배설을 어디에 수감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서울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수 있는 형무소 시설이 없었다.편법으로 호텔이나 집을 세내어서 감금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 당국이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그렇다고 일본인 관할 하의 형무소에서 복역케 한다면 영국이 배설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었다.마지막으로는 배설을 상해로 호송,그곳의 형무소에서 복역케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었다.그러나 배설을 어떻게 상해까지 보내느냐 하는 것이 난관이었다.당시 인천­상해간 정기 배편이 없고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그러나 배설이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가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코번은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배설을 인천에서 상해로 직접 싣고 갈수 있도록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을 보내달라고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외무성은 이를 받아들여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군함 클리오(Clio)호를 단 한 사람의 죄인 배설을 상해로 호송하기 위해 급히 인천으로 파견했다.배설에게는 6월18일 오후에 금고형을 언도하였으나 상해로 싣고 갈 군함이 올때까지 일단 석방,이틀 뒤인 6월20일에 출두하도록 명령하였다.이에 따라 배설은 20일 오후 4시 총영사관에 출두,곧장 서울역으로 가서 5시20분 발 인천행 기차를 타라는 지시를 받았다.배설이 서울역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많은 군중들이 서울역에 몰려올 것이고 그러면 소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상해로 가는 낡은 군함을 탄 이후부터 배설의 고생은 시작되었다.배 안의 생활은 이미 복역 기간이었다.더욱이 상해 형무소에 들어간 후에는 밤이면 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팔다리를 격렬하에 휘저어대며 방안을 거니는 것으로 겨우 모기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배설은 자신을 「온정적으로 처리」한다면서 상해로 이송,복역하도록 결정한 판사가 원망스러웠다.판사가 감옥의 혹독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고 출옥 후 일본의 영국인 발행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실은 옥중기에서 밝혔다. 배설의 상해도착 소식을 들은 상해거주 한국인들은 연일 면회를 왔다.형무소 당국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재소자들의 면회마저 금지시켰다.감옥의 3주간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한없이 느리게 갔다.그가 출옥한 날은 7월11일이었다. 한편 서울의 대한매일은 국한문판과 한글판에 배설이 상해로 떠나던 바로 그날인 6월20일부터 공판의 상세한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무려 한 달 반이 넘도록 연재되어 배설이 돌아온 뒤인 8월7일까지 실렸다.영어로 진행된 공판 내용을 번역하여 거의 완벽하게 게재하였다.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피고의 주장과 변호인 크로스의 변론,증인들의 증언 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 “테러진압 한치 허점도 없다”/평창서 對테러모의훈련

    ◎인질구출작전 3분만에 상황 끝 2일 오후 2시. 하얀 눈으로 뒤덮인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용평스키장 타워콘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이곳에서 국방부·행정자치부 등과 합동으로 대테러 종합모의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에는 경찰특공대,육군 대테러특공대,119구조대 등 300여명이 참가했다. 훈련은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국제테러분자 7명이 타워콘도 7층에 침입,99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 선수와 임원 7명을 인질로 잡고 동료 석방 등을 요구하며 군경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진행됐다. 인질범들과의 협상은 수포로 돌아가고 대책회의에서는 무력진압이 결정됐다. 곧 진압작전이 개시됐다. 헬기로 옥상에 내린 경찰특공대 50여명이 줄을 타고 내려와 유리를 깬 뒤 건물 안으로 날렵하게 들어갔다. 기관단총을 들고 저항하는 테러범들을 공포탄을 쏘며 진압하고 인질 전원을 무사히 구출했다. 작전에 걸린 시간은 단 3분. 거미처럼 건물위를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는 대원들의 묘기에 관람객 400여명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육군대테러 특공대의 사격시범이 이어졌다. 저격수들은 200m나 떨어진 표적을 정확히 맞혔다. 또 환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스키 및 스노 모빌 사격과 테러범이 탄 버스진압 시범도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 민주열사열전:17/88년 투신·분신3명의대학생(정직한역사되찾기)

    ◎‘허울뿐인 민주’ 항거… 생명의 불꽃 살라/조성만­민주화운동 통일논의 새장 열어/최덕수­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 요구/박래전­“양심수 석방… 죽음 더 없어야” 유서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함께 1988년 6공화국이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민주정부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직선제란 모양을 갖췄을 뿐 6공 盧泰愚 정권은 5공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다. 6공은 공식 출범 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민주화’ 정책을 차례로 발표했다.군사독재 정권인 5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인 셈이었다.그러나 6공 출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부터 20일간에 걸쳐 3명의 대학생들이 ‘노태우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젊은 목숨을 잇따라 내던졌다. 87년 12월 대선 때 문민정부의 도래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함께 6공 출범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나아가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80년 5·18 광주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민주화추진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그러나6공이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내놓은 민주화정책들은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정권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진정한 개혁이 절실한 때에 어설픈 개랑주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모습이었다.세 젊은 학생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대학생의 잇따른 투신·분신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운동권의 좌절감과 방향감각 상실을 웅변해준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정권도 이런 쪽으로 몰고갔다.그러나 수십,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세 학생은 직선제 정부의 출현에 만족해하려는 현실순응의 추세를 질타하면서 우리에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민주 현안이 산적해있음을 죽음으로 일깨웠다.이에 많은 국민들이 각성하고 공감을 표한 것이었다. ○시청앞 장례식 노제 30만 인파 운집 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 등 재야 민주단체 주최로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다른 한쪽에서는 100여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 주최 ‘광주항쟁계승 마구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출발신호를 기다리던 오후 3시38분.서울대생(화학과 2년)으로 명청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인 趙城晩이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사이렌을 울린 뒤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1분여 동안 외쳤다.이어 흰색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은 오른손에 든 칼로 복부를 찌르고 몸을 뒤로 날려 마당으로 떨어졌다.투신 직후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진 조성만은 이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5월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뤄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 3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1년전 시민항쟁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는 군중모임으로 4월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당시 야당의 金大中 평민당총재와 金泳三 민주당총재도 참가했다.조성만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주 도심을 지날 때와 망월동 묘역으로 떠나기 전 광주 도청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조성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신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그는 투신 오래전에 일기에서 ‘10년 세월에 휼륭한 사제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한순간에 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했다.조성만은 투신 당일 아침 작성한 유서에서 특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논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 전사’로 불리는 조성만은 유서 말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어머님 얼굴,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오월항쟁 계승 군부독재 타도” 외쳐 조성만의 장례식이 있기 하루전인 5월18일 오전 10시30분 단국대 천안 캠퍼스 시계탑 밑에서 이 학교 법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중인 崔德秀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했다.성명서를 통해 ‘광주학살 비리주범 노태우를처단하자’‘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을 발동하라’고 주장한 최덕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이어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9일만인 26일 운명했다. 빈한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쉬고 공장과 고향 농촌을 오르내려야 했던 최덕수가 분신할 당시 정가는 4월 총선후 국회개원을 앞두고 광주항쟁 진상조사 특위구성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그의 30일 서울역 노제에는 1만5,0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도청 분수대 노제에는 3만여명이 모였다.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 호소 그리고 6월4일 오후 4시30분 대학생들의 통일논의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가운데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朴來佺(국문3)이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했다.박래전은 이미 분신 이틀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학살원흉 노태우 처단’ ‘통일논의 자유보장’ ‘양심수 즉각석방’ 등을 주장했다.그는 특히 학생들과 사회인 모두에게 안일과 무감각 그리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의 투쟁 대오를 갖추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손실일 뿐입니다.”“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개량의 환상,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지금은 슬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날이 오면,두분 부모님,아니 그날이 오기까지 힘드시더라도 눈감지 마세요.” 분신 이틀 뒤인 6일 운명한 박래전의 장례식은 12일 수천명이 참가한 시청앞 노제와 함께 치뤄졌다. ◎박래전의 형 박내군씨/인권운동 사랑방 사무국장 활동/동생보다 먼저 민주화운동 투신/유가협 일맡아 희생자 50여명 처리 인권 ‘지킴이’로 이름높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朴來群 사무국장(37세·연세대 국문과졸)은 분신자살한 숭실대생 박래전의 바로 윗형이다.민주 열사 가족들 가운데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그러나 박래군 사무국장은 동생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의식화(?)한 것은 전연 아니다.그는 “대학 학회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뿐이며 동생은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수원에서 버스로 한시간 달려가야 하는 남양반도 끄트머리 시골 출신으로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어렵게 대학에 보낸 두 아들이 모두 민주운동을 한다면서 감옥에 가고 그러다 끝내 분신하는 아들까지 나오게 된 시골 부모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박래전이 유서에서 염려했던 부모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래전이 대학 1학년 때인 82년 가을부터 가두 시위에서 형제는 서로 마주치곤 했다.박 사무국장이 86년부터 2년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87년 6월 항쟁으로 석방돼 나온 뒤에 형제는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래전이는 특히 몇몇 운동한다는 사람들의 불성실 무책임에 가슴아파했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유가협 일을 맡아 5년동안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50구가 넘는 민주화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동생의 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같은 무렵 통일논의에 물꼬를 튼 조성만의 분신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보 ◆박래전 63년 경기 화성 출생 82년 숭실대 국문과 입학 83년 휴학,입대 86년 제대 87년 복학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선전국장 88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88년 6월4일 학생회관 분신 88년 6월6일 운명 ◆최덕수 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87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88년 휴학 88년 5월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 낭독 88년 5월18일 분신 88년 5월26일 운명 ◆조성만 64년 전북 김제 출생 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84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 85년 군입대 87년 제대,복학,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87년 12월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데모 관련 구류 10일 88년 5월15일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 투신,운명
  • 친일의 군상:15/조선인 첫 神職 李山衍(정직한 역사 되찾기)

    ◎본지서 최초로 발굴·소개/神社 근무하며 민족혼 말살 선봉에/22세때 청주신사 祭官으로 취직/“신사갹출비 내라” 체납자 닥달/가족에게도 일본식 생활양식 강권 흔히 대표적‘친일파’라고 하면 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나 일제강점기에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그들 외에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조한 관료·지식인이나 민족진영에서 변절한 인사들도 빼놓을 수 없는 친일파들이다.그러나 그들만이 친일파는 아니다.35년간에 걸친 일제 통치기간 동안에는 실로 다양한 형태의 친일파들이 준동했었다.배운 자는 지식을 팔아 출세길에 나섰고 부자는 돈을 바쳐 재산을 보전하였다.그도 저도 없는 자들은 매신(賣身)을 통해 일제의 식민정책에 부화뇌동했었다.그런 자 중에서 더러는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상까지도 아예 일본인 조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했다.이번에 본지가 발굴,최초로 소개하는 친일파 李山衍 이 바로 그런 부류중의 한 사람이다. 李山衍(1917∼?).친일파로선 생소한 이름이다.해방후 반민특위 시절 잠시 그의이름이 거론된 이후로는 단한번도 친일파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없다.이유는 그가 특수한 분야에서 활동한 ‘숨은’ 친일파이기 때문이다.그는 일제하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신직(神職)을 지낸 사람이다.신직이란 일본인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神社)에 근무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사찰로 치면 스님에 해당하는,일종의 종교인인 셈이다. 반민특위가 한창 활동을 벌이고 있던 1949년 5월22일 오전 10시 40분.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 소속 金相喆 조사관은 청주부(현 청주시) 석교동 50번지 자택에서 이산연을 체포,당일로 청주형무소에 수감했다.죄명은 반민법 제4조 11항 위반(종교·사회·문화·경제 부문의 친일행위자).6월1일 반민특위 충북 조사부에서 첫 신문이 시작된 후 그는 두 차례 구속기간 연장 끝에 7월8일 불기소로 풀려났다.죄상은 인정되나 ‘악질성’은 없다는 것이 특별검찰부의 석방이유였다.이로써 그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은 끝났는지 모른다.그러나 ‘역사의 법정’은 아직 그에 대한 심판을 내린 적이 없다.반민특위와 특별검찰부가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밝혀낸 사실을 토대로 그의 죄상을 살펴보자. 이산연은 1917년 서울 사간동에서 태어났다.그의 부친 李洹雨(70년 사망)는 법전(法專) 졸업후 경부(警部)로 특채돼 충북 경찰부를 비롯해 청주·충주 등지의 경찰서에서 20여 년간 사법주임 등을 역임한 친일경찰 출신이었다.그가 신직이 된 배경에는 이같은 집안의 친일적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주위 사람들이 증언한 바 있다. ○신사참배 대열에 동포 내몰아 1937년 청주고보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몇 군데 시험을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다.집에서 놀고있던 중 신문에서 조선황전강습소(朝鮮皇典講習所,신직 양성기관)에서 강습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서울로 올라가 조선신궁(朝鮮神宮)부설,조선황전강습소에 지원하였다.당시 조선황전강습소는 관할 도지사의 추천이 있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그는 부친을 통해 당시 충북 도지사 金東勳의 소개장을 가지고 이듬해 5월 입소하였다.입소생은 그를 포함해 조선인이 3명,일본인 4명 등 총7명이었다.입소해서는 일본역사를 비롯해 제관(祭官)으로서의 기본교육에 해당하는 축문(祝文),제차(祭次,제사 관련 절차) 등을 교육받고 그 이듬해(1939년) 3월 졸업하였다.당장 자리가 나지않아 잠시 청주군 사회계 고원(雇員)으로 있다가 2개월 후 청주신사(淸州神社) 출사(出仕)로 첫 발령을 받았다.한국인인 그가 일본인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의 제관(祭官)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가 신직을 자원한 동기중의 하나는 당시 일제가 신직에 한해 ●봉급외 6할 가봉(加俸)지급 ●일본인과의 동등한 대우 보장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다.당시 일제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꺼리는 신직에 조선인을 채용하기 위해 이같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것으로 보인다.이무렵 일제는 중일전쟁(1937년 7월7일) 발발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본격 추진하면서 조선 전역에서 황민화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일제는 황민화 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동조동근(同祖同根) 등을 내걸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뿌리라고 선전하며 조선인의 일본인화(化)를 강요했다.창씨개명,일본어사용,내선통혼(內鮮通婚),신사참배 등이 이 때 추진된 황민화 정책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이 가운데 신사참배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인의 혼을 빼려는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그는 바로 이 대열의 선봉에서 활동한 친일파였다. ○조선인의 일본인화 강요 청주신사 출사로 근무한지 2년만에 조선인 최초로 정식 신직으로 승진한 그는 해방때까지 5년간 일본신(神)을 모시는 일에 종사했었다.매일 평균 1∼2회씩 신사내의 대소 제사를 집행하였으며 틈틈이 일본가정을 순회하며 집안의 제사를 지내주었다. 또 전쟁기간 중에는 황군(皇軍,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주관하였으며 충북지역내 각 군(郡)의 신사 낙성식 때마다 진좌제(鎭座祭)를 주관하기도 했다.그는 신사거출비를 징수하면서 “신사거출비는 다른 세금과 달라서 제일 먼저 내지않으면 비(非)국민이 될 것”이라며 체납자들을 혹독하게 다뤄 조선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1943년 겨울 그는 조선총독부 주최 소위 ‘미소기연성(鍊成)대회’에 신직의 대표로 참가했다.‘미소기’란 겨울에 얼음을 깨고 찬물에 들어가 축문(祝文)을 외면 신(神)과 통할 수 있다는 일본의 전통적인 신도식(神道式) 수양법이다.이같은 행사는 종교차원을 넘어 일반인들의 생활속으로까지 파고들어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촉진시켰다.친일파 가운데 더러는 ‘미소기’를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일본인화를 공공연히 과시하기도 했다. 이무렵 그는 주위의 조선인들과는 교류를 끊은 채 언어·의복은 물론 모든 생활양식을 일본식화하고는 가족들에게도 이를 강요했었다.주위에서는 그를 두고 ‘일본인 이상의 조선인’이라는 말이 자자할 정도로 완전한 ‘황국신민’으로 지내고 있었다.일제 당국은 황민화 정책의 최일선에서 혼신을 다한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통해 보상해 주었다.그는 일제말기 일본인과 동등한 ‘앵급(櫻級)’의 배급을 받으며 조선인이라는 호칭을 면하게 되었다.당시 일제는 물자배급의 등급을 앵(櫻)­송(松)­죽(竹)­매(梅)의 4단계로 나눠놓고 이중 일본인에게는 앵급을,조선인은 사회적 지위와 생활정도에 따라 송­죽­매 3단계로 차등 지급했다.조선인으로서 앵급 배급을 받은 자는 도지사급에 드는 수 명에 불과했다.당시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일제의 협박이나 고문에 못이겨 친일로 전향한 인사들과는 분명히 구분된다.친일가문에서 태어나 일제통치의 특혜를 온몸으로 누린 사람이 바로 그다.특별검찰부는 그가 악질적인 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키 어렵다며 ‘면죄부’를 주었지만 ‘역사의 법정’은 그의 죄상을 기억하고 있다. 일제하 조선인으로 태어나 항일운동은 커녕 일본조상을 제 조상인양 떠받들면서 일신의 안위를 누린 그는 해방후 청주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1950년대 중반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호적에 나와 있다.그는 3남을 두었는데 막내아들도 그와 같은날 행방불명된 것으로 호적에 나와 있다.청주지법은 1968년 그에 대해 최종 실종선고를 내렸다.비참한 말로는 ‘역사의 업보’인가? ◎‘神職’이란 무엇인가/神社에서 제사·기도 집행/日帝땐 정식관리로 대우 ‘신직(神職)’이란 글자그대로 ‘신성스런 직업’또는 ‘신을 모시는 직업’이란 뜻이다.구체적으로는 일본의 신사(神社)에 근무하면서 제사와 기도 등 신사(神事)를 집행하는 사람을 통칭한 용어다.다른 용어로는 신주(神主),신관(神官),사사(社司),궁사(宮司) 등으로도 불렸다. 일제당시 각 지역의 신사는 도(道) 지방과에서 관리하였는데 출사(出仕)는 고원(雇員)에 해당하는 낮은 직급이었으나 신직부터는 정식 관리로 임명돼 판임관 대우를 받았다.신직은 신사에서 행하는 각종 제사(祭祀)를 주관하는 자로 일제당국으로부터 물자배급과 신분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신직 가운데 궁사(宮司)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이나 남산중턱에 있었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같은 대형 신사에 근무한 신직의 장(長)으로 일황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급이었다.
  • 사장 배설의 재판(대한매일 秘史:5)

    ◎변호사·검사 ‘무죄’·‘처벌’ 뜨거운 설전/증인들 “반일감정·의병봉기 일본침략때문” 증언 1908년 6월16일 열린 이틀째 공판에는 배설과 양기탁이 출두하였다.오전에는 배설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 신문이 있었고,오후에는 양기탁이 나왔다.그밖에 피고 측에서 신청한 한국인 증인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재판정에 나타나기를 두려워했고 겨우 출두한 증인도 자유로이 증언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인 재판장이나 검사,변호사도 증인들의 이같은 사정은 모두 알고 있었다.재판장은 증인들이 후환을 두려워할 것 같은 질문은 삼가라고 검사에게 주의까지 할 정도였다.그런데도 증인들은 한결같이 반일감정과 의병봉기는 대한매일신보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 침략과 탄압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증언하면서 일본경찰의 고문 사실까지 폭로하였다.재판정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도 기지(機智)에 넘치는 질문과 답변이 나올 때면 청중들은 때로는 조소를,때로는 공감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의병장 출두 소문에 방청객 몰려 3일째 재판은 6월17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궁내부 전무과 기사 김철영이 출석했다.의병장 출두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지 재판정 바깥에는 전날 보다 더 많은 한국인 방청객이 몰려들었다.어제처럼 극소수만이 법정 안에 들어왔고,대다수는 법정 문밖에 몰려 서서 재판을 지켜보았다. 귀족 출신으로 신수가 좋은 민종식은 갓쓰고 도포 입은 한복 차림으로 증언대에 섰다.그는 을사조약에 반대,1906년 3월17일 3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충남 정산(定山)에서 홍주로 진격했으나 일본 헌병대의 기습으로 일단 피신했다.5월14일 다시 봉기,19일에는 의병 250명을 지휘하여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했다.그러나 그의 휘하 의병이 500여명으로 늘어나자 일본군이 출동,30일 치열한 격전 끝에 일본군에 함락되었다.의병 82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포로가 되는 큰 전투였다.민종식은 그해 11월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변호사는 민종식에게 왜 항일 의병의 주동인물이 되었는지를 물었다.의병활동과 대한매일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민종식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황실의 위엄과 정부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으므로 일인을 축출하고 빼앗긴 본국의 독립권을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켰다고 대답했다.의병을 일으킨 것은 일본을 반대한 것이지 대한제국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 함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이어서 김철영(金澈榮)이 증인으로 나왔다.그는 1887년 조선전보총국의 위원으로 임명된 후 공무아문 주사,통신원 체신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구한국 체신업무를 개척한 사람의 하나였다.그는 궁중과 의병들의 연락을 취해주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고 증언했다. 또 하나의 증인으로 채택된 심우택(沈雨澤)은 피신해 끝내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그도 전무과 기사였는데 고종이 배설에게 하사한 신문사 운영경비를 전달하였다는 혐의로 김철영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당했다.그는 배설에게 고종의 양위사실 등 궁중 동정을 알려준 혐의로 체포,진도로 귀양 경험이 있었다.심우택의 심문조서를 보면 고종은 손탁호텔을 경영하던 손탁의 권유로 매월 1천원 정도씩 대한매일에 운영자금을 대주었으나 주변의 감시가 심해서 전달이 어려웠다고 진술했었다. 그밖에도 김택훈(金澤薰:학생),김두해(金斗海:한문교사),김창한(金彰翰:전직 순검) 등 세사람이 차례로 나와서 자신들은 대한매일을 구독하고 있지만 폭동을 선동하는 내용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이로써 증언은 모두 종결되었다. ○증인들 한결같이 ‘대한매일 무죄’ 주장 변호인 크로스는 의병봉기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일본이 한국인을 학대하고 침략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는 것이며 대한매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따라서 배설에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변론했다.그러나 검사는 배설에게 무죄를 선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한국은 현재 치안이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는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므로 비록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배설은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고 논고했다.이로써 3일간에 걸친 재판 절차는 모두 끝이 났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