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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찬균씨 회갑기념전… 사간동 갤러리 현대서

    금속공예가 강찬균씨(서울대 미대 교수)가 22일∼10월2일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02­734­8215)에서 회갑기념전을 갖는다. 십장생의 거북,포도,소나무,석류,대나무,복숭아,보리밭 등 조선시대 민화문양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초야용 촛대와 테이블 웨어,시계 등 은제(銀製) 소품으로 실용성 장식성과 함께 한국적인 정서가 짙게 밴 작품들이다. 강씨는 재래식 공예기법에 현대식 공예의 개념을 도입해온 금속공예계의 대부. 그래픽디자인 도자공예 목공예 석공예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기능과 조형미가 조화를 이룬 작품들을 통해 현대 금속공예의 지평을 넓혀왔다.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를 나온 그는 이탈리아의 카라라 공예학교와 피렌체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국전에서 특선과 문공부 장관상,상공미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있다.
  • APEC 조기 무역자유화 합의

    ◎에너지 등 6개 분야 관세 2005년까지 철폐 【쿠칭(말레이시아) AFP 연합】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는 2006년 이전까지 6개 분야 제품들의 관세를 없애는 내용의 자발적인 조기 무역자유화에 기본적으로 합의했다고 미통상 관계자들이 23일 말했다. 이들 관리는 또 APEC의 18개 회원국은 이른바 관세 ‘종료일’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환경 상품 및 서비스의 관세도 제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관세를 없애기로 합의한 6개 분야는 에너지(2004년까지 관세 제거),수산물 관련제품(2005년 말),목재 및 가구(2004년 초까지),펄프·종이 및 인쇄물(2002년 초까지),의료장비(2001년까지),장난감(2005년까지) 등이다. 이밖에 보석류에 대한 관세는 2005년까지 5% 이하로 축소되고 화학제품중 관세율 10% 이하인 품목은 2001년까지,그밖의 관세율 적용 품목은 2004년까지 관세율을 평준화하기로 했다. 통신에 대해서는 이달 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각료급 회담에서 이미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또 이같은 계획의 ‘유연성’에 관한 세부사항은 오는 9월 말레이시아의 콴탄에서 열리는 차기 APEC 통상회담으로 넘기기로 결정했다.
  • 네팔 카트만두(세계 문화유산 순례:72)

    ◎삶도 죽음도 없는 ‘지혜의 사원’/스와얌부나트 스투파에 새긴 ‘부처의 눈’/만물을 꿰뚫어 보는 ‘all­seeing eyes’/살아있는 여신 쿠마리는 종교 초월 숭앙받고/황금사원 옆에는 영원을 흐르는 바그마티강이… 【카트만두(네팔)=金鍾冕·金明國 특파원】 히말라야의 준봉을 우러러보고 있는 네팔왕국의 수도 카트만두. 네팔 사람들은 지금도 카트만두에 가는 것을 “네팔로 간다”고 말한다. 산간오지의 네팔인들에게 카트만두 분지는 곧 동경의 땅이자 마음의 주인이다. 그곳에는 깍아지른 듯한 계단식 밭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농사 지을 땅이 있고 유서깊은 사원들 또한 즐비하다. 전설에 따르면 카트만두 분지는 원래 하나의 커다란 산정호수였다.그런데 만주슈리 즉 문수보살이 나타나 ‘지혜의 칼’로 산허리를 자르고 물을 퍼낸 뒤 육지로 일궈냈다는 것이다.그때 맨처음 수면 위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른 곳이 바로 카트만두의 성지 스와얌부나트이다. ○룸비니 버금가는 성지 스와얌부나트는 지금부터 2천여년 전에 세워진 불교사원이다.카트만두 시내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사원 입구에 가루다상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면 힌두사원도 겸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가루다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는 상상의 새이다.사원은 온통 야생 원숭이들의 울음소리로 왁자했다.‘멍키 템플’로 불릴 정도다.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길은 300개가 넘는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카트만두의 평균 고도가 1천400m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숨이 더욱 차올랐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허위단심 사원에 올랐다.요란하게 치장된 거대한 탑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네팔 불교에서 룸비니 동산 다음으로 신성시되는 스와얌부나트 스투파였다.솔도파(率堵婆)라고도 불리는 스투파는 불사리를 봉안하거나 절의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쌓은 탑을 말한다.하지만 이곳의 스와얌부나트 스투파는 여느 스투파와는 달랐다.무엇보다 눈길을 끈것은 스투파 상단부 4면에 새겨진 사방을 응시하는 부처의 눈이었다.만물을 꿰뚫어 본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올 싱 아이즈(all­seeing eyes)’라고 부른다.대승불교에서는 과거겁과 현재겁,그리고 미래겁에 걸쳐 각각 1천명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한다.이곳의 스투파는 과거겁의 한 부처인 본초불(本初佛)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스투파 주변은 참배객들로 북적댔다.특히 부처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은 스투파의 둘레를 몇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스투파를 한바퀴 돌면 불경을 1천번 읽는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다.스투파 옆에 죽 늘어서 있는 기도용 휠 ‘마니차’ 주위에도 순례자들의 행렬은 이어졌다.그들은 라마교의 진언(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 새겨진 원형의 마니차를 연신 돌려댔다.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불경을 외우는 것과 같은 공덕행(功德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이 수수께끼 같은 사원에 서면 누구라도 성자가 되고 현자가 될 법했다. 스와얌부나트 스투파의 ‘예지의 눈’을 멀리서 다시 보았다.순간 네팔의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의 이마에 붙인 티카(tika)가 떠올랐다.쿠마리에게 있어 그것은 삼라만상의 이 법을 훤히 꿰뚫는 ‘제3의 눈’이다.기자는어느새 쿠마리의 자장(磁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발걸음은 이미 쿠마리가 살고 있는 쿠마리 바할로 향하고 있었다.카트만두 시내의 남쪽 뉴 로드라 불리는 신생 거리를 지나 바산트풀 광장에 닿았다.쿠마리 바할이 모습을 드러냈다.작은 창이 달린 3층의 낡은 목조건물이 세월의 무게를 전해줬다. ○불경 1천번 읽는 공덕 고대 경전을 보면 쿠마리의 신체조건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쿠마리의 신체는 반얀(banyan,벵골 보리수의 일종)나무와 같고,허벅지는 사슴의 그것과 같으며,목은 고둥 같아야 하고,눈꺼풀은 소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쿠마리 바할에서는 쿠마리를 볼 수 있지만 사진촬영 만큼은 엄격히 금했다.영화에서나 보던 쿠마리는 실제 어떤 모습일까.사원의 종이 울리고 비둘기 몇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마침내 2층 창문으로 쿠마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석류꽃같이 빨간 입술에 조붓한 어깨,호리호리한 목선,게다가 기품까지 갖췄지만 표정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쿠마리.아침이슬처럼 잠시 나타났다 이내 몸을 숨겨버리는 쿠마리는안쓰러움 바로 그것이었다.네와르족의 어린 소녀 중에서 선발되는 쿠마리는 힌두교 탈레주 여신의 현신(現神)으로 여겨지지만 종교를 초월해 두루 숭배받는다.나이가 들어 초경을 치르면 쿠마리는 사원을 떠나야 한다. ‘목조의 절’이라는 뜻을 지닌 카트만두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원과 마주친다.그 중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힌두교의 성지 파슈파티 사원이다.카트만두 시내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위치한 이 황금빛 2층 사원은 힌두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정면에는 시바신이 타는 성스러운 소 ‘난디’상이 수호신처럼 웅크리고 있다.이곳은 힌두교의 성인 사두(sadhu)나 요기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파슈파티를 한층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원을 휘감고 흐르는 바그마티 강이다. 이 강은 흘러 흘러 인도의 강가(Ganga,갠지스강)와 만난다.바그마티 강 역시 강가처럼 가트(ghat,화장장)로 성역시된다. 매캐한 화장 연기속에서 태연히 머리를 감는 여인,식기를 닦는 아낙,의지가지 없이 병들어 누워있는 노인…. 이들에게는 더이상 죽음도 삶도 없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종교의 비의(秘義)만 숨쉴 뿐.바그마티 강은 오늘도 영원을 안고 흐른다. ◎여행 가이드/대여 자전거 이용 편리/통행규제 심해 주의를 카트만두 시내를 여유 있게 둘러 보려면 대여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개조한 오토 릭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카트만두 시내의 일방 통행로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전거도 규제를 받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카트만두 시내 서쪽에 있는 국립박물관 앞을 거쳐 가는 것이고,또 하나는 구왕궁 앞 듀버 광장에서 서쪽으로 비슈누마티 강의 조교(弔橋)를 건너서 가는 것이다.이국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좋을 듯.카트만두에는 많은 여행사들이 밀집돼 있다.이들은 카트만두 성지 순례 외에 트레킹이나 래프팅 등도 주선해준다.
  • 日 관광객 1,100억원 쓰고 갔다/28∼4일 황금 연휴기간

    ◎5만2천여명 방문/1인당 201만원꼴 지난달 28일부터 4일까지 이어진 일본의 황금 연휴기간 동안에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총 7천8백만달러(약 1천1백여억원)를 소비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관광공사가 이 기간중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인 관광객 3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방한기간중 일본인 관광객들의 1인당 지출경비는 쇼핑비 600달러를 포함,평균 1천490달러로 조사됐다.이는 1·4분기 외래관광객 평균 소비액 1천230달러보다 20%가량 많은 것이다. 관광공사는 “1인당 지출경비를 방한한 일본인 5만2천여명 전체로 환산하면 전체 소비액은 7천8백여만달러로 추정된다”며 “특히 쇼핑비로만 4백40여억원을 뿌려 IMF사태로 침체일로에 있는 국내 시장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즐겨 찾는 쇼핑품목으로는 식품(37.6%),의류(27.3%),피혁제품(24.9%),보석류(6.8%),신발류(5.9%),인삼(4.4%)의 순이었다. 여행중 불편사항으로는 언어불통이 72.2%로 가장 많았고 교통혼잡 12.7%,택시불친절 8.9%였다.
  • 大盜의 폭로/崔弘運 논설위원(외언내언)

    ‘단군(檀君)시대이래 최대의 도둑’‘한국의 빠삐용’‘의적(義賊)’‘대도(大盜)’로 불리는 趙世衡이 15년만에 모습을 나타냈다.지난 82∼83년 부유층과 권세가의 집만을 골라 금품을 훔치다 검거된 뒤 83년 4월 2심 재판중 탈주했으나 115시간만에 경찰의 총을 맞고 다시 검거돼 ‘한국판 빠삐용의 섬’으로 불리는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이래 처음이다.그는 이날 절도범으로는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아 살다 보호감호 부분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해 서울지법 형사합의 22부 심리로 열린 재심 첫 공판에 출두한 것이다. 그는 ‘엄중 독거(獨居)시찰자’로 분류돼 15년 동안 1평짜리 독방에서 생활한 사람답지 않게 건강해 보였으며 시종 웃음을 잃지않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지난 84년 중구금(重拘禁)시설인 청송교도소의 3중 담벽 가운데 두번째 담벽까지 넘는데 성공했으나 세번째 철조망을 넘는 순간 붙잡힌데 이어 92년 가을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람같지 않았다.당시 청송교도소가 폐쇄회로 TV를 통해 보여준 까까머리에 수척했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기독교 신앙을 갖게된 것이 여유를 찾게 된 원동력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모습과는 달리 “동정을 빌기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왔다”며 털어놓은 그의 폭로내용은 엄청나다.우선 피해자의 숫자가 당시 수사기관이 발표한 11명보다 훨씬 많으며 정·관·군·재계 실력자들이 총망라돼 있고 피해액수 역시 그때 발표된 10억원대가 아니라 수백억원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보석류만 마대자루 2개 분량이나 된다고 했다.또 도주후 체포되는 과정에서 투항(投降)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나 경찰관이 권총을 쏴 부상했고 처음 6개월 동안은 양팔과 양다리를 포승에 묶여 지내는 등 지난 15년동안 토굴같은 독방에 갇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이 사건은 이미 공소(公訴)시효가 지났다.그러나 실체적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에서도 그의 폭로내용에 대한 사실여부는 앞으로 계속될 공판과정에서 반드시 가려져야 한다.‘도둑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표현된 당시 각계 실력자들의 이름도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드러나 그 치부(致富) 내용에 대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아울러 교도소내 인권(人權)문제도 이 기회에 다시 살펴 수감자들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교도소가 될 수 있도록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다.
  • “당시 훔친 금품액수 수십억 아닌 수백억”

    ◎大盜 조세형 보호감호 재심/‘물방울’보다 희귀한 보석/주인에 반환 안되고 증발/다음엔 털었던 집 밝힐것 22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319호 법정.재판장의 호명에 따라 법정에 들어선 ‘대도(大盜)’ 趙世衡 피고인(54)은 15년 넘게 독방에 갇혀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5공 초기인 82년 재벌과 고위 공직자 등 부유층만을 털었던 趙씨는 걸인과 노점상 등에게 수십만원씩을 선뜻 쥐어주어 ‘의적(義賊)’으로도 불렸다. 이날 재판은 83년 절도 및 특수도주죄로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은 趙씨가 옛 사회보호법이 89년 위헌으로 결정된 만큼 보호감호 부분은 다시 재판을 해야 한다며 재심을 청구해 열렸다. 변호인인 嚴相益 변호사는 공판 직후 “실제 피해액수는 수백억에 이르고 물방울 다이아몬드 보다 훨씬 더 비싼 보석도 있었는데 피해자들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사라졌다”면서 “趙씨가 권세가의 집에서 턴 보석류만 마대자루 2개 분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趙씨가 신당동 JP 집에 들어갔으나 미술품만있고 보석은 없어 케네디 대통령이 선물했다는 은빗 하나만 들고 나왔다고 전했다”고 덧붙였다. 嚴변호사는 “다음 공판 부터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는 한 당시 피해자들의 실명을 거론해서 신문을 진행할 계획이며 필요하면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 올림픽 권투 銀 鄭申朝씨/주차장 관리원으로 새삶(조약돌)

    ○…지난 64년 동경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권투경기 사상 최고의 성적인 은메달을 따낸 권투영웅 鄭申朝씨(58 통영시 봉평동 352)가 공영주차장 관리원으로 변신,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한때 ‘인텔리 복서’로 유명했던 鄭씨는 동경올림픽에 앞서 62년 제 4회 아시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공로로 국민훈장석류장을 수상했다. 지난 88년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이사를 마지막으로 권투계를 떠난 鄭씨는 조선업 등 개인사업의 잇따른 실패로 어렵게 지내오다 최근 동료의 주선으로 통영시 주차장 관리원으로 일하게 됐다.
  • 김상옥 시인 창작활동 기념시집 펴내

    ◎‘느티나무의 말’에 담은 잔잔한 일상의 단상들 한국시조계의 원로 초정 김상옥 시인(79)이 잔잔한 일상의 단상을 담은 시집 ‘느티나무의 말’(상서각)을 펴냈다.1949년 첫시집 ‘이단의 시’를 낸 이래 꾸준히 창작활동을 해온 그는 “우리 전통시조에 현대적 감각을 도입,시조의 차원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자신의 작품에 대해 더할나위 없이 엄격한 초정.그는 한때 스스로 불만스럽게 여겼던 500여편의 원고를 찢어버린 적도 있다.이번 시집 역시 그런 엄혹한 문학정신으로부터 탄생했다.그는 이미 출간된 시집 ‘초적’ 시화집 ‘향기 남은 가을’,동시집 ‘석류꽃’ 등을 모두 폐기하고 오직 ‘느티나무의 말’만을 일생의 기념시집으로 꾸몄다.이 시집엔 ‘너만 혼자 어디로’‘아침소묘’‘한란’등 70여편의 작품이 실렸다.
  • 신라호텔 요리사 한영용씨(세계 최고에 도전한다:6)

    ◎“21세기는 발효음식시대” 한식세계화 선도/87년 한의대 중퇴… 주방으로/금주·금연·양치 하루 5회/조리입문 10년 계율 아직도…/외국인 입맛맞게 소스 30종 개발/별미반찬 100가지 조리법 정리/‘한영용의 별미전’ 등 요리책 출간 “조리는 바로 정치입니다” 신라호텔 외식부 한영용씨(29)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입맛은 제각각이다.저마다 다른 입맛을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조리사다.정치가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절충,합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조리와 정치는 일맥상통한다.시경을 보면 중국의 하,은 시대 재상들이 조리사였다.그래서 한씨는 “조리사는 바로 최고의 정치가”라고 강조한다. 한씨는 음식접시에서 우주를 보려고 하는 조리사다.그의 머리 속은 자나깨나 음식으로 꽉 차 있다. 그는 술,담배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양치질도 하루에 다섯번씩 한다.물도자주 마신다.또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는다.조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이후 10년 넘게 지키고 있는 계율이다. 금연 금주와 양치질 5회 습관 등은 혀와 코,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음식맛은 코와 혓바닥으로 볼 수 있다.음식맛은 또 손끝에서 나온다.맛을 느끼고 맛을 내야 하는 요리사로선 깨끗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수면시간이 4시간이라는 것은 그가 음식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조리사 자격증 획득 음식의 세계에 그가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지난 87년이다.고교를 졸업한 뒤 대구한의대에 입학했으나 1주일만에 그만둬야 했다.음식점을 운영하며 6남매를 뒷바라지하던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 눕게 됐기 때문이다.그는 어머니대신 앞치마를 둘렀다. “주방에 들어가니 왠지 마음이 편안하고 고향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당시 ‘내가 평생을 바칠 일이 바로 이거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어머니를 돕게 되면서 요리학원에 등록,요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러나 장사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음식점이 몰려 있는데다 손님들이 남자가 주인인 식당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한씨는 음식맛으로 승부를 내기로마음 먹었다. 어느 집 음식솜씨가좋다 하면 꼭 찾아갔다.처음에는 집 근처에 있는 유명한 집을 찾았으나 어머니 병이 차도를 보이자 음식 1번지인 전남,젓갈로 유명한 충남 강경 등 전국을 누볐다.군에 입대하기 전인 지난 91년까지 50여차례나 그렇게 찾아다녔다. 보고 배운 것은 되풀이하며 손으로 익혀야 한다.동네 주민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돌잔치나 혼인잔치,환갑잔치를 연다는 소식만 들으면 신이 나서 일손을 거들어 주겠다고 자청했다. 오랜 음식탐방과 답사,실습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음식맛은 장맛’이라는 것.음식은 화학 조미료가 아니라 바로 된장,고추장,간장 등 장맛이 좌우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식당에서 쓰는 장을 손수 담갔다.무침용,국거리용,반찬용 등 쓰임새마다 재료를 달리해 고구마고추장,보리고추장,감고추장 등을 담갔다.당연히 음식맛이 좋아지고 손님이 몰렸다. 91년 그는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 3년은 그 나름대로 지녔던 음식 만들기에 대한 자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자 반대로 조리실력이 한단계 고양되는 시기였다.그의 새 스승은 장군이었다.조리병으로 입대,이택형 9군단장의 당번병을 한 그는 이장군의 혹독한 조련을 받는다.이장군이 음식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음식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관사에는 미원,다시다 등 조미료를 둘 수 없었다.전주 한일관,군산 회집등 유명한 음식점 견학도 갔다.그러나 맛의 차원을 넘어 예술로 승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이장군의 높은 미각 수준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음식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영창에 가기도 했다.민물새우가 들어가는 세뱅이 매운탕을 만들 때였다.무심코 깻잎을 넣었다.이장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깻잎은 향이 독특해 민물새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대한 뒤 롯데호텔에 입사,호텔 한정식을 익혔다.94년에는 신라호텔로 옮겼다.지난해부터는 경희호텔전문대학 조리학과에 들어가 주경야독하고 있다.이론적 바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말레이지아와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음식축제에도 참가,견문을 넓혔다. 그의 꿈은 한식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음식은 바로 한식이라고 말한다.음식 가운데 가장발전된 것이 발효음식인데 한식은 절반가량이 발효음식이다. 튀기거나 굽는 것을 주로 하는 중국이나 불란서 음식과는 차원이 다르다.발효음식은 숙성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웬만한 감각과 훈련,고도의 손기술이 없으면 맛을 낼 수가 없다.또 발효음식은 건강식이다.김치 또는 된장찌개가 암을 예방해 준다는 것은 이미 의학이 증명했다. ○전문대입학 주경야독 그러나 발효음식은 배우기가 쉽지 않다.과학화,계량화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한식이 세계적인 것이 되려면 현대적 감각에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전을 혼자서 먹기 알맞게 크기를 줄였다.제 그릇에 제 것을 따로담아 먹는 서양사람들에게 우리처럼 여럿이 전을 찢어먹는 것을 요구해서는전이 보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토화젓에 무를 갈아 넣어 만든 토화전소스,된장에 깨를 갈아 넣은 된장소스 등 30여가지의 소스도 개발했다. 떡이 쉬 굳지 않고 서양인의 입맛에 맞도록 물 대신 우유와 버터로 떡을 만들었다.그는 김치와 토마토케첩 또는 마요네스가어울리면,과감히 토마토케첩 등 서양 소스를 가미한 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식을 보급하려면 한식에 대한 전문서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돼 그는 그는 최근 ‘한영용의 별미전,별미반찬’이라는 책을 출간했다.이 책에 석류전,더덕태극전 등 전 만드는 방법 50가지와 꼬막탕수,토화젓밀쌈 등 별미반찬 50가지를 소개했다.한식 국제화를 위한 노력이다.앞으로는 찌개,탕,떡,찜,조림 등 분야별로 책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다가올 21세기에는 반드시 한식이 세계 최고의 음식으로 떠오르리라고 그는 굳게 믿는다. ◎경희호텔전문대 조리과 김동승 교수/“한군의 음식은 금방 눈에 띄어요”/한식의 맛·모양·색깔 등 독특/97대학생부문 최우수상 수상 “한영용군이 만든 음식은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그를 지난 2년간 지도해온 경희호텔전문대 조리과 김동승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씨를 꼭 ‘한군’이라고 부르는 김교수는 “한군이 조리한 한식은 맛과모양,색깔이 독특하다”며 “한군은 전통한식을 현대인의 감각과 입맛에 맞게,현대화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교수는 한씨가 멀지 않아 한식 세계화의 선구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응용력이 뛰어나 한가지 음식을 다양하게 변형시키고 있는데다 기본적으로 한식 자체가 대부분 저칼로리 건강식이기 때문이다. 97광주김치대축제에 김치를 응용한 김치순대전,김치꽂감말이로 대학생부문 최우수상을 차지한 것이 거침없는 응용력을 말해 준다. 한씨는 한식의 현대화뿐만 아니라 음식을 종합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신라호텔이 주최한 ‘한국 국악의 밤’행사에서 ‘한국인의 통과의례’를 선보였다.돌상,폐백상,회갑상,한가위상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받는 상차림을 2시간 동안 춤과 음악을 곁들여 소개한것으로 행사에 초청된 주한 외교사절 등 귀빈의 극찬을 받았다. 김교수는 “한군의 연구자세는 진지하기 그지없다”면서 “한군의 노력으로 한식메뉴가 다양해지고 우리 음식이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수출상품이 될것”이라고말했다. ◎조리사가 되는길/요리학원 6개얼 수강땐 자격증 가능/전문대 조리과 이수자 필기시험 면제 조리사가 되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대부분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다.최근에는 조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높아져 전문대학에 다니면서 조리사가 되는 사람도 적지않다. 요리학원은 6개월 정도 다니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한다. 조리학과가 개설된 전문대학은 전국에 16개 있다.조리학과를 졸업하면 위생,건강학 등 필기시험이 면제된다.따라서 조리학과 이수자는 실기시험만 치르면 된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호텔,식당,연회장 등에 취업이 된다.취업이 되면 보통3∼9개월 정도 연수를 받는다.일종의 수습기간인 셈이다. 수습기간을 거치고 나면 보조조리사가 된다.3년 정도 지나면 2급조리사가되고 2∼3년 정도 일하면 1급조리사가 된다.이어 보조주방장,주방장으로 승진하는데,보조요리사에서 주방장까지 되려면 보통 15년 정도가 걸린다.주방장 다음은 조리과장,조리부장,조리이사 등의 직급이 있다. 주방은 일반적으로 ‘군기’가 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칼을 쓰기 때문인데 조리사들이 칼을 잡는 것은 총을 들고 사선에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 기술 전수도 비교적 인색하다.이론보다는 오랜 경험으로 기술을 터득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론과 경험으로 무장한 신세대 조리사들이 대거진출하면서 많이 개선되고 있다. 평생직장으로서 전망이 상당히 밝다.전문직인데다 외식산업이 팽창추세이기 때문이다.
  • 시인 김상옥(이세기의 인물탐구:160)

    ◎시·서·화 3절의 시조문학 거두/글자 한자한자마다 ‘도자기의 자해’ 닮은 품격/조춘·옥적·백자부 등 명편 중고교과서에 실려 ‘무거운/덧문을 열고/뜨락을 한참 내다본다/ 이 아침/매연 속에/목련꽃 차츰 벙글어/ 사노라/때묻은 눈에도/봄은 이처럼 부신가!’(조춘) 초정 김상옥 시인의 시는 어느 시를 읽어도 절조를 울리지만 그중에서도 중고 교과서에 실린 ‘조춘’‘옥적’‘백자부’등은 ‘시상의 간명한 처리,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사고의 반전,멋들어진 은유와 섬세한 언어구사’로 더이상의 시를 생각할수 없게 만드는 명편들이다.마치 적설에 파묻힌 보석이 눈이 녹자 자태를 드러내듯이 말속에 숨겨진 온오와 시적 함축은 글자 한자한자마다가 옥구슬처럼 영롱하다.성격도 그렇다.그의 눈에 거슬리고 싫으면 싫은 것이다.이를 두고 소설가 김동리는 ‘인은 곧 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결곡하고 강개한 인품은 족히시에 반영되어있다’고 평한 바 있다. ○초판 1천부 모든 매진 ‘완벽을 기하려는 영악(영오)한 조사와 중속을 떠난 고매한 시혼은 우리문단의 한 이채’로써 ‘전통적 정서나 시인의 인식은 시대가 흐르거나 나이가 들어도 그 광채는 시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시작에 대해 얼마나 까다롭게 선별하는가는 지난 89년 고희기념시집인 ‘향기남은 가을’을 낼 때 시집 8권과 그동안 써두었던 1천여편중에서 103편을 고른 것만봐도 알수 있다.‘이미 활자화된 것은 어쩔수 없지만 그냥 써두었던 것’중에서 시집 30권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을 며칠동안이고 찢어버린 것이다.그리고 시집의 서문에다 ‘세상에 시는 넘치도록 흔하지만 정작 시는 드물다’고 자탄하고 ‘한 구절이라도 후일 남을 수만 있다면참으로 분외의 보람이겠다’는 겸양은 후학들의 문학에 대한 자세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경고가 아닐수 없다. 그의 인생역정은 ‘사환에서 점원, 연독이 자욱하던 시골인쇄소의 인쇄공과 도장장이’에 이르기까지 안해본 일이라곤 없다.해방직후 출판된 그의 첫번째 시집 ‘초적’은 편집 교정 문선 조판에서 인쇄 장정의 전과정을 손수해냈고 초판 1천부는 즉시 매진되어 고서점에서도 구할수 없는 희귀본으로 유명하다.고향에서 오랫동안 중고교교사로 봉직하다가 60년초에 서울에 올라와 골동상인 아자방을 경영한 것은 실은 ‘서화 골동을 감식하고 부자도 못한다는 연적 콜렉션’에 가까이 하려는 의도였으며 실제로 그의 서와 전각실력은 의재필선에 이르는 경지다. ○한때 고향서 중고교사로 지난 70년초 신세계미술관초청 ‘시·서·화전 이후 일본 교토초청 전시등 10여차례의 전람회를 가진바 있고 미술평론가 이경성씨와 그의 작품을 구입했던 작가 박완서씨는 ‘이것은 단지 문학의 여기가 아니라’고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이른바 ‘시·서·화 삼절’로 지칭되는 그의 글과 그림은 고루한 화풍에서 벗어나 진취적인 파격성과 독창성,소쇄한 여백처리로 도자의 품격을 흐트리지 않는다.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일화로는 지난 74년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최순우씨의 초청으로 ‘시와 도자’에 관한 특강에서 ‘시는 언어로 빚은 도자기라면 도자는 흙으로 빚은 시’라는 말을 남겼고 이는 지금까지도 ‘도자’나‘시’를 말할 때마다언제나 인용되는 명구다.그는 참으로 시를 사랑하고도 자를 사랑한다.‘일호의 작위도 없는 우리 고도를 나의 시로써 시못지않게 사랑’하여‘나의 치아보다 먼저 이빠진 항아리에게 순금의 의치를 만들어 끼워주는’ 자세이고 시에서도 ‘이빠진 자욱이 눈에 띠면’ 이만하면 되겠다고 마음에 찰 때까지 몇밤을 지새워 퇴고를 거듭한다. 초정은 경남 충무시에서 기호 김덕홍씨와 진수아씨 사이의 6녀1남중막내로 태어난 귀하디 귀한 외독자이다.6세때부터 동네에 있던 한문서당 송호재에서 수강하여 최연소자로서 ‘괴’를 받았고 일찍이 ‘동필’소리를 들었으며 역시 소년시절인 17세에 문단에 등단후 그가 18세때 쓴 ‘청자부’를 읽은 가람은 ‘글이 너무 절정에 올라가 있어 이런 글을 쓰면 단명하다’고 걱정스러워할 정도였다. ‘우기를 머금은 달무리/시정은 까마득하다//맵시든 어떤 품위든/아예 가까이 오지말라//이 적막/범할수 없어 꽃도 차마 못꽂는다’한평생을 그가 사랑해 마지않은 ‘백자’처럼 살아온 초정은 최근에는 금아 피천득과 만나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인사동에 나가 그가 좋아하는 골동품을 보는 기쁨이 낙이다.그런중에도 그가 보여주는 최근의 시는 누에고치에서 청명한 비단실이 뽑혀오르듯이 ‘밤마다 밤이 이슥토록/묵을 갈다가/벼루에 흥건히 괴는 먹물/먹물은 갑자기 선지빛으로 변한다/사람은 해치지도 않았는데/지울수 없는 선지빛은 온 가슴을 번져난다’고 노래부른다. ○한국시조사의 한획 그어 이미 ‘시’니 ‘시조’니 하는 경계에 묶여있지 않은 ‘무위자연인’으로서 그는 ‘시인의 말은 오직 시일뿐’이라는 것이며 ‘속세의만사는 한낱 군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말로 자신의 삶을 압축해 보인다.부인 김정자씨와의 사이에 3남매,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용산구 이태원동청화아파트에서 자녀들은 출가하고 부부만이 살고 있다. 그의 제자이던 시인 박재삼은 생전에 ‘스승의 시는 도자에 그려진 한송이 백매와 같다’고 찬사해 마지않았다. ‘기막힌 위치에 자리잡고있어 한치도 움직일수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 이유다.평자들로부터 ‘가람·노산을 뛰어넘어 한국시조사의 한 획을 그어놓은 시조시인’으로 받들어진 것도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진 곡진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시적 자존심은 사우세풍을 지나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간 사람’이라는 찬사와 함께이 시대 고고특절한 품성을 지닌 존재로서 언제까지나 찬연히 빛나게 될 것이다. □연보 ▲1920년 경남충무출생 ▲1926년 한문서당 송호재 수강 ▲1930∼35년 진산 이찬근 완선 김지옥 노제 장춘식사사 ▲1936년 시지 ‘아’동인 ▲1937년 시지 ‘맥’ 동인 ▲1938년 문예지 ‘문장’·동아일보에 시·시조·동요 추천,당선 ▲1945년 해방기념제전 시부 장원,삼천포문화동지회 창립,통영문협회원 ▲1946∼62년 중학교교사 봉직 ▲1947년 시조집 ‘초적’(수향서헌)출간 ▲1948년 시집 ‘고원의 곡’(성문사)출간 ▲1952년 문교부편수국 자문위원 ▲1954년 충무공 시비건립,통영문협재건,‘참새’지 복간 ▲1972년 일본 경도에서 서화화전개최,서울·부산·대구·대전·마산등 개인전 10여 차례 ▲1973년 삼행시집 ‘삼행시’출간▲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초청 ‘이조도자’에 관한 특별강연 ▲1977년 육필 몰자귀비 건립 ▲1986년 산청에 시비건립 ▲1989년 고희기념시집 ‘향기남은 가을’(상서각)출간 시집 ‘이단의 시’(49년)·‘의상’(53년)·‘목석의 노래’(56년)‘묵을 갈다가’(80년), 동시집‘석류꽃’ (52년)·‘꽃속에 묻힌집’(58년) 산문집‘시와 도자’(75년)등 12권 제1회 중앙시조대상·제1회 노산문학상·제2회 충무시 문화상 등
  • 사치·향락업소 중점 세무관리/국세청

    ◎고가 의류·보석 판매 등 1만2,000여곳/26일 마감 부가세 자료 분석… 탈세액 추징 1만2천여곳에 이르는 과소비 사치 향락조장업소와 대형 음식점 숙박업소 등이 국세청의 중점 세무관리를 받는다. 국세청은 8일 ‘97년 2기 부가가치세 확정신고 안내’를 통해 ▲고급 유흥업소 고가 의류·보석류 판매업소 등 불건전 소비 사치 향락업소 5천200곳 ▲연간 외형 5천만원 이상의 음식 숙박업소중 신용카드에 가맹하지 않거나 신용카드 결제를 기피하는 2천500곳 ▲부정환급 혐의자 4천명 등을 집중조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국세청은 또 무자료 거래업소 및 최근 환율 변동에 따른 가격 상승으로 사재기가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진 밀가루 라면 식용유 설탕 등 생필품 취급업소 등도 별도 관리할 방침이다. 국세청은 중점관리 업소에 대해 과거 신고내용 및 그동안 수집된 과세자료 등을 정밀 분석해 불성실 신고가 드러날 경우 세무조사를 실시,탈세액을 추징할 방침이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체제하의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해 제조·수출업체,경영애로 기업에 대해서는 일체의 세무간섭을 배제하고 환급금도 종전 15일 이내에서 10일 이내로 단축해 조기 지급하기로 했다. 이와함께 간이과세자 또는 과세특례자에 해당하는 영세 사업자에게는 우편신고가 가능하도록 신고서와 납부서 등 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개별 우송하기로 했다. 이번 부가세 신고·납부 마감일은 26일이며 신고대상자는 법인 17만명,개인일반과세자 95만명,간이과세자 38만명,과세특례자 1백22만명 등 모두 2백72만명이다.
  • 무서워하며 신성시한 ‘산중영물’/호랑이해 호랑이 이야기

    ◎소신으로 섬기며 호환의 두려움 달래/죽림맹호 경제난 쫓는 ‘벽사의 몫’ 기대/호랑이 살상 민족성정 안맞아 사냥 엽사들 중국옷 판 올해 1998년은 호랑이 해 무인년이다. 동물을 상징으로 한 열두 개의 지지에 따라 호랑이 해는 12년만에 한 차례씩 돌아온다. 그러나 열개의 천간을 하나씩 떼어 그 해의 지지에 앞세워 붙이기 때문에 무인년은 60년만에 맞는 호랑이 해다. 이를 갑년이나 회갑,또는 주갑이라 한다. 그 호랑이는 한민족 마음속에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단군설화에 곰과 함께 호랑이가 등장하니까 꽤나 오래되었다.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변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야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뛰쳐나와 결국 맹수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단군설화에 나온다. 렇듯 인간과 쉽게 동화할 수 없었던 호랑이는 무서운 동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곰과 함께 단군설화 등장 중국의 사서인 ‘후한서’동이전에도 호랑이가 기록되었다. 동이는 중국쪽에서 본 우리 한민족이다. 그 사서는 산천을 떠받드는 우리민족의 풍속을 소개하면서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신으로 섬긴다는 대목을 적어놓았다. 호랑이가 그만큼 두려워 제사로 달래준 옛 사람들의 마음이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885년 2월에 호랑이가 궁궐마당으로 뛰어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호환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식으로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호랑이를 진군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그 진군은 무당이 진산에서 올리는 도당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은 급기야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래서 산신은 호랑이로 상징되었거니와 그 별칭도 산군 말고도 산군자,산령,산신령,산중영웅등 숱하게 많다. ○호랑이 신앙의 이중성 한민족은 호랑이를 신성시했고,때로는 무서운 가해동물로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이를 학문적으로 말하면 호랑이 신앙의 이중성이라고 한다. 신성시하면서도 무서운 가해동물로 여긴 한민족의호랑이 신앙은 매우 지혜로운 민족의 성정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지극히 인위적인 생태보존운동을 버금하는 지혜인 것이다. ‘후한서’동이전의 기록처럼 산천(자연)을 떠받들었던 민족의 심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환경친화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민족의 자연관은 호랑이 번식을 방해하지 않았다. 다른 동물에 비해 번식력이 그리 왕성하지 못한 동물이 호랑이다. 그 호랑이가 민족의 마음속에 신성하고도 무서운 영물로 자리잡은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우리 마음이기도 하고,호랑이를 마구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웬만한 심산에는 호랑이가 서식했던 모양이다. ○백두대간 심산에 서식 한국의 호랑이는 유명했다. 1953년 1월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요시다(길전)일본 수상의 대화속에도 호랑이가 화제로 떠올랐던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요시다수상이 “한국에는 지금도 호랑이가 많은 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일본인들이 다 잡아서 없소”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사냥한 호랑이를 마치 전리품인양 내놓고 찍은 일본인들의 옛 사진첩이 지금도 돌아다닌다. 그 호랑이가 1946년 북한땅인 평북 초산에서 한 마리가 잡혔다는 풍문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민족에게도 호랑이 사냥이 물론 있기는 했다. 고려 공민왕이 그렸다는 이른바 전공민왕필 ‘음산대렵도를 보면 호쾌한 호랑이 사냥을 펼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사냥에 나선 엽사들의 입성은 모두 호복차림의 변복이다. 호랑이를 잡는 일이 민족의 성정이나 생활습관에 결코 어울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엽사들 옷 차림새를 중국옷으로 바꾸어 그렸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왕정의 중요행사였던 정렵만을 보더라도 규모가 크지 않았을 뿐 더러 기껏해야 매사냥 정도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다.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벽화 ‘수렵도’에도 박진감 넘치는 호랑이사냥이 나온다. 말을 탄 기사가 힘껏 시위를 당기는 참인데,호랑이 꽁무니를 명중할 수 있는 위치다. 시위에서 손을 떼기만 하면 화살이 호랑이 꽁무니를 꿰뚫을 찰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살을 들여다 보면 살상용이 아니다. 호랑이를 겁주어 기절을 시킬 요량으로 살상용 화살촉대신 명적을 썼다. 석류모양을 한 명적은 그저 소리만 요란하여 맞는다 해도 호랑이가 기절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산신탱화에 의레 등장 그 호랑이는 살상을 금하는 불교와도 연결되었다. 우리 고유의 산신신앙을 받아드린 불교의 산신탱화에는 의례히 호랑이가 들어있다. 탱화에 나오는 신선은 호랑이가 모습을 달리한 변화신이다. 그리고 탱화의 산신 곁에는 실제 호랑이가 늘상 자리를 같이하여 따라붙는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 소장 산신탱화의 호랑이는 평퍼짐한 자세로 앉아있는 산신을 감싸았다. 호랑이 꼬리를 S자로 그리며 하늘을 향했다. 그러니까 호랑이는 여러 모습으로 민족 앞에 다가왔다. 호랑이는 그림의 소재로도 자주 응용되었다. 정초 세화나 부적에 호랑이를 그렸다. 그리고까지 호랑이에는 까치와 함께 호랑이가 등장했다. 대나무숲속의 호랑이 죽림맹호같은 호랑이 그림도 있다. 그런데 대나무숲의 호랑이 그림은 요사스러운 잡귀를 물리친다는 벽사의 뜻을 담았다. ‘담문록’이라는 책에 대나무를 잘라 불속에 던져 큰 소리로귀신을 쫓아버렸다는 내용과 상응하는 그림이다. 올 오랑이 해 무인년에도 호랑이가 벽사의 큰 몫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경제위기를 물리쳐주는 그런 벽사를 호랑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 사재기 열풍… 한풀 꺾이긴 했으나(박갑천 칼럼)

    사재면서 팔지않는다는 매점매석은 이문 따지는 장사꾼이 장삿속으로 하는‘짓’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도 이수법으로 돈을 번다. 과거도 보지않고 글만읽던 허생이 아내성화에 못이겨 서울제일부자 변씨한테 찾아가 만냥돈을 꾼다.그돈 갖고 안성으로 내려가 대추·밤·감·배·석류·귤·유자…등을 모조리 사버린다. 그러자 곧 온나라가 잔치나 제사도 못지낼 지경이 된다. 그는 그걸 나중에 10배나 넘겨 받는다. 그다음에는 제주도로 안팎장사 나가서 말총을 죄다 사버리니 망건값이 10배로 뛴다. 별로 돈욕심은 없는데도 오기로 한번 벌어본 거였다. 이 비슷한 얘기는 다른 전적에도 여기저기 보인다. 이를테면 [청구야담]등에 쓰인 내용은 이렇다. 가난한 훈장에게 시집온 신부가 시종숙되는 무장에게서 돈천냥을 꾸어 시중에 있는 감초를 사재기한다. 얼마 안가서 5배로 뛴 감초가 천세나게 팔려 재산을 모은다. 그밖에도 [기문습유]에 나오는 이영철의 부인은 집판돈으로 한약재인 택사를 사들였다가 값이 오른 다음 팔아서 셈평펴인다. [삽교별집](만록)에서는 강경의 한거간꾼이 잎담배를 사쟁였다가 팖으로써 10배의 이익을 남기고 있고. 이같은 장삿속의 이치는 증권시장 같은데서 오늘날에도 원용되고 있는듯이 보인다. 장사꾼 아니라도 장사꾼심보는 있는것같다. 무엇이건 값이오를 기미가 보이면 많이 사두는 버릇 아니던가. 기름값이 오른다네하면 주유소가 붐비고 하다못해 버스삯 오를 눈치만 보여도 표(토큰)를 사잰다. 그사재기가 IMF한파를 타고도 기승을 부렸다. 달러값이 오르자 잽싸게 사들여 곱쟁이이문을 챙기는가 하면 생필품값도 오를게 뻔해지자 눈에 불들을 켜고 싹쓸이해 갔고. 또 장사꾼들은 물건을 안내논다는것 아니던가. 이게 자중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라야 어찌되든 나만…”하는 벋나간 이욕들이 참으로 치사하다. 스스로도 부끄럽지만 남보기에도 부끄러워지는 대목. IMF빚지는 일보다 부끄럽다.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면 안된다. 부끄러움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줄 알게될때 부끄러운 일은 없게 될것이다”([맹자]진심상)고 한말이 있다. 부끄러운짓 부끄러운줄 모르고 하는 심성위에 부끄러운 일은 닥쳤다고 해야 할듯싶다. 하늘을 우러러본다. 차가움속에 성탄절은 다가와 있었구나.
  • 호화혼례·혼수 추방(경제위기 극복/우리 모두 나서자:6)

    ◎살아가며 살림살이 장만하자/결혼·혼수비 평균 3천6백만워… 성항의 7배/1천2백만원짜리 웨딩드레스 심심찮게 팔려/국내 신혼여행·저렴한 혼수의 ‘실속파’ 본받아야 지난달 말 결혼한 이모씨(27·여)는 결혼전 이른바 ‘시어머니 리스트’를 받았다. “시어머니 밍크코트 1천만원,시아버지 양복 1백만원,한복·두루마기·보료 5백만원,장롱·문갑·화장대 1천5백만원,이태리제 소파 1천만원,이태리제침대 6백만원,롤렉스시계 1천만원,5부 다이아반지 300만원,쏘나타급 이상 승용차…” 시댁이 요구한 혼수는 결혼식 비용과 예단값을 빼고도 1억4천만원어치 이상이었다.이씨는 “그만한 여유가 있는데다 비슷한 생활수준인 다른 집들도 그만큼은 해갔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없이 모두 다 해갔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한 웨딩드레스점에서는 1천2백만원짜리 웨딩드레스가 심심찮게 팔려 나간다.이곳 직원은 “이태리에서 디자이너가 직접 와서 만들어주는 최고급 드레스여서 가격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일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려는 부모들이 흔쾌히 맞춰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서는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방송무대를 방불케 하는 초호화판결혼행사가 펼쳐지기도 한다.드라이아이스 연기속에 신부가 천장에서 목마를 타고 내려오고 벤츠로 공항까지 가는 것 등을 한데 묶어 한 이벤트회사가 내놓은 상품의 가격은 3천만원대.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결혼식과 혼수 비용은 한쌍 평균 3천6백79만원에 이른다.일본의 3.3배,미국의 4.8배,싱가폴의 7.3배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 경제위기가 가중되면서 과도한 혼수와 해외 신혼여행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무조건 비싼 혼수를 고집하지 않고 저렴한 것을 찾아다니는 실속파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서울YWCA에는 지난 20일쯤부터 해외 신혼여행을 취소하려는데 계약금을 돌려받을수 있는지를 묻는 전화가 하루 3통 이상씩 걸려오고 있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의 ‘결혼문화원’을 찾는 예비부부들도 크게 늘고 있다.이곳에서는 예식과 혼수 등 모든 비용을 합해 평균 500만∼1천2백만원 정도가 든다.올들어 800쌍이 이곳에서 실속있는 결혼을 했다. 27일 생활개혁실천범국민협의회 등이 개최한 ‘바람직한 혼례모델 시연회’에도 2백여명의 예비부부와 부모들이 몰려 검소한 결혼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결혼문화원 신산철 총무(38)는 “사회구성의 최소 단위인 가정이 처음부터 과소비로 시작하다 보니 사회전체에 과소비가 자연스럽게 퍼져버렸다”면서 “현재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계기로 전체적인 소비 건전화 차원에서 결혼문화를 바로잡고 장기적으로 건전한 소비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YWCA 최수경 프로그램부장(43)은 “결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돼 있지 않은 가운데 상업주의가 무차별로 파고들어 그릇된 결혼문화가 자리잡게 됐다”면서 “값비싼 외제 가전제품과 보석류 등 과도한 혼수를 자제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살림살이를 장만해간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티파니(패션가 산책)

    티파니사(Tiffany&co)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왕위 계승식이 있던 1837년,당시 25세이던 찰스 루이스 티파니에 의해 설립됐다.티파니사가 자체 디자인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867년 파리박람회.티파니는 미국 디자인회사로는 처음으로 은공예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이로써 티파니는 미국 정상의 은세공업체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17명의 유럽 왕족들을 위한 금은 세공업체가 됐다.티파니는 은 순도 0.925 규격을 채택한 최초의 미국 회사이며 이 규격은 찰스 루이스 티파니의 노력으로 미 의회에서 스털링 실버 법정 기준으로 채택됐다. 티파니사의 은 세공작업실은 미국 최초의 디자인학교로 이 작업실내에는 견습생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스케치하며 진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학습분위기가 형성되었다.자연은 티파니 디자인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은 식기류 제품에서부터 시작돼 보석류까지 이어졌다. 1877년 티파니는 남아프리카의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채굴한 최상급의 황색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티파니의 우월성을 입증하게 됐다.이 원석은 무게 287.42캐럿으로 아직까지도 동종 다이아몬드 가운데 가장 크고 최상급의 표본으로 남아 있다.티파니사의 보석학자인 조지 프레덱릭 쿤츠 박사가 128.54캐럿으로 연마한 이 다이아몬드는 지금도 티파니의 5번가 본점 1층 매장에 영구 전시돼 있다. 찰스 루이스 티파니의 아들인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는 티파니사의 초대 디자인 실장으로 당시 자연에서 파상의 선과 곡선,그리고 형상을 도용하고자 했던 디자인계의 움직임인 아르누보 운동의 미국인 선구자로 명성이 높다.티파니의 창업이래 미국과 기타 외국 정부에서는 끊임없이 특별 제작 주문을 해왔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885년에 디자인한 미국의 인장.티파니에서 새로 디자인한 이 인장은 현재까지도 미국 달러 지폐의 뒷면 뿐 아니라 미국 정부의 공식 서류에 사용되고 있다.
  • 새콤달콤한 석류맛은 인생 맛이라(박갑천 칼럼)

    길을 가다 보니 장사꾼 손수레에 석류가 그들먹하다.쩍 벌어진 껍질사이로 알알이 드러나는 연분홍보석.고향옛집 울밑 석류나무도 속살 내발리면서 군침을 돌게하고 있는 것이겠지. 많은 씨앗을 안고 있는 과일임으로 해서 혼례의식에 쓰였다.울센자손을 상징하면서.석류가 중국으로 전래되는건 한무제때.서역에 사신으로간 장건에 의해서였다.그것이 다시 우리나라로.중국에서는 처음에 안석류라 부른다.‘안석’은 나라이름이고 “유는 유다”(이시진)라 했듯이‘유’는“혹과같이 덕지덕지엉긴 열매”를 이름이었다.고대페르시아 파르티아(Parthia)를 중국에서 ‘안식’이라 적었는데 ‘안석’은 그나라 아닌가 어림치기도 한다. 로마시대에는 석류를 포메 그라나타(pomme granata:많은알맹이 가진 사과)라 했다.석류를 이르는 영어 포머그래넛(pomegranate)이 여기서 출발된다.그시대에는 또 푸니쿠스(punicus)라고도 했는데 이말은 ‘카르타고의’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있다.옛날에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쪽에 석류가 많았던 듯하다.그걸 지중해건너 가져와 심은 로마사람들이‘카르타고의 나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영어 퓨닉 애플(Punic apple)은 그 그림자라고 하겠다. 석류는 열매 못지않게 꽃도 곱다.“간밤에 비오더니 석류꽃이 다피겠다/부용당반에 수정렴 걸어두고/눌 향한 깊은시름을 못내 풀려 하노라”고 읊은 상촌신흠의 시조에서도 석류꽃에 부치는 정취를 느낄수 있다.우리가 흔히 보는 석류꽃색은 등홍이지만 노랑·하양도 있다.또 겹꽃잎의 꽃석류는 열매를 맺지않고 홑꽃잎에만 열매는 맺힌다. 열매나꽃의 아름다움과 함께 새콤달콤한 맛으로 가을의 정취를 전달하는 것이 석류.인재강희안은 도가에서는 그런석류를 삼시주라 했다고 말한다(〈양화소록〉).삼시란 인체에 있는 세가지 해충인데 석류를 먹으면 그것들이 취한다는데서 붙인 이름이란다.예로부터 각종 기생충을 없애려면서 쓴 석류고보면 아마도 취한 끝에 인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리라. 인생길은 석류맛이다.새콤하여 찡그리게 하는가 하면 달콤하여 웃음짓게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많이 심어 가을을 더 훈감하게 했으면 한다.〈칼럼니스트〉
  • ‘냥’자로 끝나는 말/유만근 성균관대 교수(굄돌)

    우리말 명사에 ‘­냥’자로 끝나는 말이 몇 개 있는데,그중에서 우선 ‘깜냥’을 보자.이말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히 쓰면 감칠맛 있는 말이다.그 뜻은 ‘일을 해낼만한 힘 또는 능력’이다.가령 ‘나는 그 일에 역부족이다’할 것을 ‘그 일은 내 깜냥에 부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그 다음,‘겨냥’이 있지만 건너뛰고,‘동냥’을 보자.‘동냥’은 한자말 ‘동령’에서 온 것이다.중(승)이 시주 받으러 집집에 다닐때,대문 앞에서 소리나는 방울을 흔들며 염불하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우리가 현대 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 ‘성냥’은 한자말 석류황(석류황)발음이 ‘석류황→성뉴왕→성냥’으로 변한 것이며,옛날부터 많이 쓰는 ‘사냥’은 원래 한자말 ‘산행’인데,용비어천가(1445)에는 ‘산’으로 적혔고,그 발음이 ‘산→산앵→사냥’으로 변한 것이다.요즈음 국어 발음변천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산행’을 무심코 ‘등산’의 뜻으로 쓰지만 당치 않다.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는 ‘산슈(수)’와 ‘산렵’이 나온다.‘산행/사냥’은 두말 할 것 없이 ‘수렵’( hunting)이니,제발 이 말을 ‘등산’의 뜻으로 쓰지 말 것이다. 여기서 꼭,한마디 덧붙여 말할 것이 있다.‘산행’이 발음상 ‘사냥’으로 바뀌면 마치 순 우리말처럼 들리는데,이렇게 국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귀화된 말이 많을수록 우리 국어의 동화력 자랑이 된다.외국말을 많이 받아들이는 영어는 원음을 무시하고 그것을 영어화하는 동화력 강한 언어로 유명한데,우리가 외래어를 수용할 때 크게 참고할 점이다.프랑스 한림원에서 불어를 다듬는 방식도 마찬가지다.될 수 있는 대로 외국말 사용을 억제하되,꼭 써야할 것이면 완전히 불어처럼 들리도록 어형을 다듬어 사용하는 것이다. 시종 외국어로 말할 때는 물론 외국어 발음이 정확해야 한다.그러나 국어 속에서 외국말이나 한자말 원음을 너무 고집하려 드는 것은 ‘외국어’와 ‘외래어’도 분간 못하는 예속인의 어리석은 짓임을 우리 모두 알았으면 한다.
  • 서지마·왕국유의 해령(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21)

    ◎양자강하류 자리잡은 수향이자 문향/주변에 운하·호수·정자 산재… 문인 대거배출/임정 중경 전진할때 첫 봇짐풀던 가흥 인근에 상해와 항주 중간점에 가흥이 있다.가흥의 원명은 화흥.들판에 벼가 저절로 난다는 고장이다.그만큼 농산품이 넉넉한 곳이다.우리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경을 전전할 때 맨 처음 봇짐을 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도 물이 많다.그래서 수향이라고 한다.수향이 문향임은 전례에서도 볼 수 있다.그것도 전체 중국문학사에 올려도 그 시대 그 장르의 엄지 손가락인 굵직한 사람들이다.가흥으로부터 줄곧 남하하여 전당강에 이르는 불과 50㎞의 연도에서 말이다. 가흥에서 10여㎞ 남쪽인 왕점은 청나라때 일락과 태평을 노래했던 사를 써서 ‘절서파’를 창설한 사가요,8만권의 진기한 선본을 수장했던 장서가 주이존(1629∼1709)의 출생지이며,왕점에서 거의 10㎞인 해령시 협석에서는 우리나라의 소월만큼 중국의 문학소년소녀들에게 애독되고 있는 요절 서정시인 서지마(1897∼1931)가 태어났다.그런가 하면 15㎞쯤 남쪽 전당강언덕인 해령 염관에서는 중국 희곡·소설·비평등 장르에서 세계적인 연구를 남기고 끝내 염세 자살한 비극의 평론가인 왕국유(1877∼1927)가,다시 염관에서 서북쪽으로 30여㎞ 거슬러 올라간 동향시 오진에서는 20년대부터 ‘한 밤중(자야)’‘부식’ 등 중국 최고의 걸출한 사회주의적 현실주의계열의 혁명 소설가 모순(1896∼1981)이 각각 출생 성장해서 그 지방들은 이미 그들 문인의 유적으로 관광 상품을 만들고 있다. ○혁명소설가 모순도 출생 왕점의 ‘폭서정’은 문물과 자연이 어울려서 한판 잔치를 벌이고 있다.거기 굽이굽이 연못과 곡교,들쭉날쭉한 가산과 문장들은 주이존의 서재로 쓰였던 구방재와 서고로 쓰였던 폭서정,그리고 전망대로 쓰였던 육봉정들과 함께 서로 화음하고 있다.구방재는 마치 유람선처럼 3면의 물속에 떠있었고 폭서정은 8만권의 장서를 8진분류법에 따라 수장했던 300년 전의 개인 도서관.그래서 강희 황제는 ‘연경박물’이란 어필을 내렸다. 이렇듯 공원에 상당한 원림 도서관의 시설이 방대했지만 이들을 소박하게도 여름날 책을 햇볕에 쬔다는 폭서로 이름지은 그 시인의 마음에 미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협석은 필자 가슴속에 오래 간직했던 연인이었다.다만 시인 서지마의 고향이라서.중국의 신문학을 개도했던 호적의 말대로 그는 ‘사랑’과 ‘자유’‘미’ 등 세가지만을 견결하게 신앙했던 시인이었다.그러면서도 목숨에 연연하지 않은 구름같은 시인이었다.그의 명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나는 하늘에 구름 한조각’이라서 ‘살며시 왔듯이/살며시 떠난다’했고,끝내 ‘나는 옷 소매를 턴다./행여 구름 한조각이라도 묻힐세라’,짧은 34년을 공중에다 산산이 없애버린 시인이었기에 그랬다. 협석 지방 부호의 독자로 태어난 그는 불처럼 꽃처럼 살다가 갔다.중국의 명문 북경대학을 거쳐 영·미를 유학했고,신문사 주간과 남경중대·북경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4권의 시집 속에 주옥의 229편을 남기고 있다.이러한 서지마의 생가와 유택이 있는 협석을 답사하는 것은 그의 전부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었다.그 나머지는 모두 구름이라고. 그의 생가는 협석의간하가.그 옆으로 운하가 흘렀다.본시 지마의 집은 커다란 저택이었다.지금 협석영화관 앞이요,상해만국 증권의 뒷집이었다.지금은 2층으로 개축한 연립주택,물론 주인은 벌써 몇번이나 바뀌었다.현지 주민에게 슬쩍 물었더니 72가구나 산다고 귀띔해 주었다. ○백낙천기리는 자미정도 지마의 무덤은 생가로부터 서북쪽 5.6㎞에 있는 서산,그 서북쪽 산허리 짙푸른 송백의 숲속에 묻혔다.‘시인 서지마지묘’란 묘표를 세우고.그와 서산은 각별한 관계였다.우선 그가 공부했던 ‘개지학당’이란 초등학교가 그 남쪽 기슭에 있었고,그 정상에는 당나라 시인 백낙천을 기리는 ‘자미정’이란 높은 정각이 선데다 그보다 서지마를 더욱 애련하게 묶어둔 일은 세살때 독일에서 요절한 그의 아들 서덕생의 무덤이 바로 서산 서쪽,그러니까 지금 서지마의 무덤으로부터 불과 20여m 아래에 있다. 지마가 1931년,남경에서 북경을 비행중 제남근교 개산에 추락사한 뒤,협석의 동산에 묻혔다.그러나 불운이었다.문화혁명때는 자본주의 봉건시인으로 매도되어 그의 무덤조차 파헤쳐진 것을 1983년에야 뼈를 수습,다시 지금의 서산으로 이장하기에 이르렀다.필자는 여기 비록 해발 50여m의 동산이었지만 휘휘하게 솔바람소리가 몰려오는 지마의 무덤앞에 묵상하지 않을수 없었다.그의 심미신앙과 초탈적인 생명관을 승복해서요,필자에게 맨 처음 중국 현대시의 눈을 뜨게 한 인연때문이다. ○왕국유 염세비관 끝내 자살 염관은 천하의 장관을 연출하는 전당강옆에 있다.매년 8월보름에서 18일 사이에 전당강에 썰물이 천군만마처럼 일어나서 관조의 인파를 모으게 하는 곳이다.그 방축 너머의 안술문 밖에는 왕국유가 살던 집이,염관읍 쌍인항,지금 염관버스 터미널 북쪽에는 왕국유의 생가가 있었다. 왕국유도 지방 토호의 자체로서 일찍이 서양 철학에 흠탄하여 동경물리학교에 유학했고,북경대학·청화대학 등 명문의 교수로서 중국 사곡을 비롯,문자학·성운학·지리학·철학·심리학 등을 연구 강의하는 화려한 길을 걸었음에도 한창 중년인 50 체구를 북경 이화원 곤명호에 내던졌다. 왕국유는 그의 명저 ‘인간사회’에서 문학의 미학적 경지를 천착했는가 하면 ‘홍루몽평론’에서 인간의 해탈과 색공을 주장하면서 그의 내재의식에 축적되었던 염세 비관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그의 옛집은 당당하고 담박했다.널따란 마당에 후원까지 갖추었다.정문에는 ‘서중관학,심정대박’이란 현판,단적으로 동서를 겸비한 그의 박식을 압축한 말이었다.대문안에는 양쪽으로 계수나무와 석류.그의 성격처럼 심미적이면서 고독했다. 더구나 앞 마당에서 한길을 건너면 눈처럼 하얗게 갈대가 파도를 치고 있다.갈대밭 위로 전당강 방축이 평행선을 긋는다.왕국유는 이 길을 걸으며 쇼펜하워에 심취했었을지 모른다.
  • 퇴직교원 2,252명 훈·포장­표창

    정부는 21일 이달말로 정년 또는 명예 퇴직하는 교원 1천893명과 경력 15년 이상의 의원 퇴직 교원 359명 등 2천252명에게 훈·포장 및 표창장을 수여하기로 했다.〈명단 18면〉 퇴직 교원 중 김동선 전 부산외대 총장 등 4명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오동희 경북고 교장 등 52명은 모란장,권부선 서울 동원초등학교 교장 등 834명은 동백장,백기렬 대구 월배초등학교 교사 등 370명은 목련장,송희화 인천 작전초등학교 교사 등 347명은 석류장을 각각 받는다. 홍진삼 광주 우산중 교감 등 234명은 국민포장,손정자 대전 유성농업고 교감 등 105명은 대통령 표창,최문규 전북 삼례여고 교감 등 117명은 국무총리 표창,유정희 경기 성남서중 교사 등 189명은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는다.
  • 보석체인점 「탤런트 마케팅」

    ◎「신혜 반지」 「승연 목걸이」로 20·30대 여성에 인기몰이 저가 보석 체인점이 등장했다.숙명여대 앞과 부산,대전 등 3곳에 동시에 문을 연 「탤런트 마케팅」은 14캐럿 제품과 다양한 보석류를 구비하고 20·30대 여성을 집중 공략,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탤런트 마케팅은 신세대 여성들이 주로 혼수용 보석류를 취급하는 금은방을 기피하고 백화점의 오픈 매장을 찾지만 수수료 탓에 제품의 가격이 비싸 쉽게 보석류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장조사를 토대로 체인점 개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탤런트는 2천500여가지의 다양한 모델을 공장에서 직접 제작,체인점에 공급하고 있으며 애프터 서비스와 재고처리를 해주고 있다.소비자들이 구형모델을 가져오면 가맹점 주인이 가공비와 무게 등을 따져 추가요금만 받고 신제품으로 바꿔준다.본사는 이들 구형모델을 수거해 녹인뒤 새모델로 제작,전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한다는 설명이다. 디자인 개발도 고객확보에 주춧돌이 됐다.최근 TV 드라마에서 연예인들이 사용한 소품을 모델로 한 「승연목걸이」「신혜반지」 등을 개발,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값은 15만∼20만원이다.수요가 많은 것은 1만∼2만원대의 딱지귀고리(귀에 붙는 귀고리)와 5만원대 커플링반지가 주종이다. 체인점은 5∼7평이 적당하다고 설명한다.인테리어 비용(평당 2백만원 정도),소품값(5백만원),미스반지,메달,일반 귀걸이,팬시귀걸이,체인 및 은제품 등의 물품대금(4천만원) 등과 건물임대료·보증금 등을 합쳐 약 8천여만원 정도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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