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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어떤 장명등/서동철 논설위원

    파주의 명소 헤이리마을을 지나쳐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매번 지나쳤는데 며칠 전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지 궁금해 화살표를 따라갔다. 무덤 앞에 세워진 석등(石燈), 장명등(長明燈)이다. 무덤의 주인은 세종·예종·단종·세조에 걸친 사대문신(四大文臣)이라는 박중손(1412~1466)과 부인 남평 문씨다. 앞이 훤히 트여 문외한의 눈에도 보통 명당이 아닐 듯싶은 언덕배기 합장무덤 앞에는 밀산군과 정경부인이라는 주인공의 격에 맞게 석물이 즐비했다. 경건해야 할 무덤 앞이지만 박중손의 장명등을 보니 미소가 나왔다. 불을 밝히는 자리에 해당하는 화사석(火舍石)의 동·서쪽 화창(火窓)을 각각 둥근 해와 반달 모양으로 새겨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일월등’(日月燈)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어린이 그림책에 나올 듯 천진난만한 해와 달 모습을 보면 ‘햇님달님등’이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웃었다. 박중손은 서운관과 관상감 벼슬도 역임한 천문과 기상 전문가다. 그래서인지 해·달 조각이 그의 천체우주관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헤이리마을 곁에는 최근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도 문을 열었다. 가는 길에 장명등도 찾아 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는지도 헤아려 보길 권한다.
  •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이 5년의 보존 처리 작업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며칠 전 들렸다. 20년 전쯤 법천사터를 찾았을 때 주변은 모두 논밭이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절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절터 초입의 당간지주도 동네 한복판에 숨어 있듯 자리잡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찾은 법천사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체계적인 발굴조사로 옛 절터의 전모가 드러났고, 당간지주도 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부도권역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련된 조각을 자랑하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나란한 현묘탑 터의 빈자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마침내 그 공백이 메워지는 것이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현묘탑은 비운의 문화재다.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 돌아온 뒤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앞에 세워 놓았는데, 6·25전쟁 중 포탄에 맞아 지붕돌 위쪽이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탑을 1957년 보수하면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옆으로 옮겼고 보수 작업 끝에 1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남한강변에는 고려시대 대찰(大刹)의 옛터가 즐비하다. 경기 여주 고달사터와 강원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충북 충주 청룡사터가 그렇다. 한결같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대부분 불교국가 고려의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은퇴하고 머무른 하산소(下山所)였다. 일대는 개경에서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유사시에는 물길로 빠르게 오갈 수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은 ‘거물 스님’의 거처로 각광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편리한 남한강 수운은 역설적으로 이 일대 사찰의 석조 문화재가 일제강점기 집중적으로 수탈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법천사를 비롯해 앞서 거론한 사찰 가운데 청룡사를 제외한 다른 사찰은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부도며 탑비를 빼앗겼다. 고달사터 쌍사자석등과 흥법사터 진공대사탑 및 석관, 거돈사터 원공국사승묘탑 등이 그것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은 이 탑의 관리 주체인 문화재청의 결단 덕분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높은 진정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실제로 원주시는 법천사터를 정비한 데 이어 지광국사현묘탑을 돌려받아 ‘완전체’가 되면 새로운 역사문화 관광지로 크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을 채우고 있는 남한강변의 다른 석조 문화재들은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다. 법천사터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거돈사터는 2만 5000㎡ 남짓한 사역의 정비가 일찌감치 이루어졌다. 거돈사터에도 해동공자 최충이 비문을 지었다는 원공국사승묘탑비만 남아 있을 뿐 정작 승묘탑이 없는 것은 법천사와 닮은꼴이다.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자리에는 모조탑을 세워 놓았는데 기계자국 선명한 새하얀 탑이 폐사지 분위기와 어울릴 수는 없다. 흥법사터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변에 있다. 섬강은 법천사가 있는 흥원창 주변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흥원창은 강원 서부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실어 나르는 조창이다. 진공대사 충담이 머무른 흥법사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비문을 지었다는 진공대사 탑비가 역시 진공대사탑을 잃은 채 남아 있다. 이 밖에 남한강 하류인 양평 보리사터의 대경대사탑비와 상류인 제천 월광사터 원랑선사 탑비도 중앙박물관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이들 석조 문화재를 제자리에 보내면 훼손이 염려된다고 한다. 하지만 원주시만 해도 지광국사현묘탑을 제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는 방안과 전시관을 새로 지어 내부에 탑과 탑비를 옮기는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을 만큼 지방자치단체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다. 무엇보다 ‘너무도 귀중한 문화유산인 만큼 훼손되어선 안 되니 돌려줄 수 없다’는 논리는 서구 박물관이 약탈 문화재의 반환 요구를 거절할 때 쓰는 어거지일 뿐이다. 중앙박물관은 남북 관계의 진전에 따라서는 조만간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개성 경천사터 십층석탑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중앙박물관은 개성 남계원터 칠층석탑도 갖고 있으니 고민은 크다. ‘훼손 염려’ 논리로 붙잡고 있는 게 가능하겠는가. 석조 문화재를 과감하게 제자리에 보내는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당장 어렵다면 처리 원칙이라도 마련해야 할 때다. sol@seoul.co.kr
  •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는 하나… 대통합의 ‘화엄 도량’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는 하나… 대통합의 ‘화엄 도량’

    석가모니의 깨달음으로 불교가 시작했다. 스스로 해탈하려는 소승에 더해 중생을 구제하려는 대승불교로 확대되었다. 대승의 모든 신앙을 통합한 것이 화엄종이며, 그 방대한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이 화엄경이다. 지리산 화엄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사상을 건축으로 구현한 가람이다. 그러나 그 역사는 거대한 화엄경의 내용만큼 복잡하고 중층적이다.●화엄종, 화엄경, 창건 화엄사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처음으로 화엄사상을 들여왔으나 그는 계율학을 신라 불교의 근간으로 삼아 전제 왕권 강화에 이바지했다. 다음 세대인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해 2대 화엄종주 지엄의 수제자가 됐고, 삼국 통일 직후 귀국해 신라 화엄종을 세웠다. 계율학이 분단시대의 부국강병 수단이었다면 화엄종은 통일시대 통합의 국교였다. 의상의 후예들은 각지에 화엄도량을 열었고, 그중 중요한 사찰들을 묶어 화엄십찰이라 불렀다. 화엄사는 마땅히 그중에서도 핵심이었다. 544년 서역의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설은 전설일 뿐이다. 최근 발굴된 기록에 근거해, 연기조사는 국찰 황룡사에서 화엄경 사경을 주도한 이로 8세기 후반에 화엄사를 실질적으로 창건했다는 설이 합리적이다.현재 화엄사의 모습은 임진왜란 후 재건된 결과이며, 8세기 창건 당시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이 시기의 유적은 각황전의 기단과 초석, 그 앞의 큰 석등, 그리고 동5층석탑이다. 창건 가람은 동향으로 앉았고, 각황전 자리에 장육전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장육전과 동5층석탑 사이, 서5층석탑 자리에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축을 따라 (동)석탑, 금당, 석등, 장육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이었다.현 각황전은 2층이지만 장육전은 3층이었다. 내부에는 화엄경을 정교하게 새겨 넣은 거대한 석경벽을 세웠다. 화엄석경은 임진왜란 때 불타 파괴돼 1만 9000여 파편으로 남아 있다. 추정하면 600여매의 돌판에 총55만여자를 새긴 대규모 경판이었다. 내부 고주가 서 있는 5칸×3칸 기둥 사이 사방으로 석경벽을 두르고, 이를 순회하며 화엄경 전편을 읽을 수 있는 구조였다. 장육전은 곧 건축으로 쓴 화엄경이었고, 화엄사가 화엄종의 종찰이 되는 종교적 근거였다. 장육전 창건과 동시에 특이한 모습의 석탑과 석등을 뒤편 언덕에 조성했다. 탑은 사자 4마리와 가운데 승려 1명이 탑을 받치고 있는 모습의 4사자3층탑이다. 석등 역시 승려 1명이 꿇어앉아 석등을 받치고 있다. 4사자석탑의 인물은 스승이며, 석등의 승려는 제자인 연기조사로 사제 간의 전법을 묘사한 것 같다. 사자탑의 전통은 꾸준해서 고려시대의 사자빈신사지탑이나 홍천 괘석리탑이, 그리고 화엄사 원통전 앞에도 일부가 남아 있다. 화엄사의 사자탑은 그 효시일 뿐 아니라 가장 완벽한 유산이다. ●거듭된 중창과 가람의 대변화 화엄종은 신라 불교의 대세가 됐다. 종교의 거대화는 분열을 수반한다. 후삼국시대, 신라는 쇄락하고 왕건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던 때다. 거대 화엄종은 왕건 편에 선 희랑과 견훤 편 관혜의 무리로 분화됐다. 북악파인 희랑은 해인사와 부석사에, 남악파인 관혜는 화엄사에 근거지를 두었다. 결과는 왕건과 희랑의 승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다. 화엄사의 종단 내 위상이 크게 추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의 마지막 해, 943년에 고려 왕실은 화엄사를 크게 중창했다. 패자 남악파에 대한 승자의 마지막 배려였을까?기존의 대석단을 연장해서 현재와 같이 ㄱ자로 꺾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새로 조성한 북쪽 석단 위에 새로운 불전을 세웠다. 현재의 대웅전 자리다. 기존의 동5층석탑은 마치 대웅전에 속한 탑같이 되었다. 창건기의 금당을 없애고 서5층석탑을 세워 장육전 앞의 탑으로 삼았다. 두 개의 석탑이 동서로 놓여 마치 쌍탑식 가람 같아 보이지만, ‘장육전+서탑’과 ‘대웅전+동탑’의 1탑식 가람 두 개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것이다. 두 탑은 규모와 형태가 유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많다. 서탑은 일절 장식이 없다. 반면 동탑은 하층기단에 12지상, 상층기단에 8부신중, 1층 몸돌에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같은 듯 다른 이 형태적 차이는 적어도 150년 이상의 조성시기 차이 때문이다. 새로운 불전과 불상을 모셨다는 것은 신앙의 대상이 더해졌다는 것, 더 나아가 종파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엄석경이 봉안된 기존의 장육전은 여전히 화엄신앙의 중심이었다. 현 각황전 불단 안에는 신라 때 불상을 세웠던 대석이 남아 있다. 아마도 법신, 보신, 화신의 3신불상을 모셨고, 장육전이니 1장 6척(약 4.8m)의 거대한 입상이었을 것이다. 비로자나불 중심의 3신불은 화엄신앙의 핵심이다. 새로 더해진 불전, 현재의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으로 선종 계통의 중심 불전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화엄사는 줄곧 선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등장한다. 고려 불교의 4대 종파는 교종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의 천태종과 조계종이었다. 천태종은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선불교를 융합한 종파였고, 종조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사에 각별히 애착이 많았다. 여러 연유로 화엄사는 고려 초에 교종인 화엄종에서 선종인 천태종으로 종파를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기존 화엄에 더해 선불교를 습합한 것은 확실하다. 임진왜란 때 화엄사는 의승병의 근거지였고 불에 타 파괴된다. 남은 것은 석단과 석탑과 석등 그리고 산산조각 난 화엄석경뿐이었다. 40년 후인 1636년에야 중창 재건을 시작했다. 중창주인 벽암대사는 남한산성을 수축한 공을 세운 팔도총섭이었다. 인조의 신임을 얻어 불사를 벌였으나 대웅전 등 겨우 일부만 가능했다. 열악한 경제 여건으로 대규모 다층건물인 장육전 재건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입구에 일주문을, 그 위로 금강문과 천왕문을 세워 긴 진입로를 만들었다.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산중 가람이 되었다. 장육전은 1702년에야 왕실의 후원을 얻어 겨우 중창한다. 그나마 2층으로 줄이고 이름도 각황전으로 바꾸었다. 중창 대웅전에 이미 비로자나의 3신불을 모셨기에 각황전에는 석가불 중심의 3세불과 보살들을 모셨다. 신앙적 내용으로 본다면 대웅전은 대적광전으로, 각황전은 대웅보전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전쟁 후 순서 없이 재건했기에 벌어진 혼란이다. ●중창으로 이룬 연화장 세계 화엄사에는 두 개의 중심이 병존한다. 각황전은 크고 높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작고 낮다. 평범한 가람배치라면 각황전의 위세에 대웅전이 눌릴 지경이다. 두 중심을 동등하게 인식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진입 동선을 육중한 보제루 앞에서 동쪽으로 틀어 운고각 쪽으로 오르게 했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중심 공간을 마주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가까운 대웅전은 실제보다 크게, 멀리 있는 각황전은 작게 보인다. 결과적으로 두 중심은 거의 같은 크기와 높이로 인식된다. 건물의 위치와 규모를 바꿀 수 없으니, 인간이 바라보는 시점을 바꾼다.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실감형 배치법이다. 각황전은 후일 영조가 된 연잉군을 위해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시주한 법당이다. 대시주에 대한 화답으로 원통전으로 세워 연잉군의 원당으로 삼았다. 그후 사이사이에 나한전과 영전을 세웠다. 각황전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5개 건물은 높낮이가 다르다. 운고각 앞에 서면 이 다섯 건물이 ‘강, 약, 중강, 약, 강’의 리듬을 가진 하나의 연속체로 다가온다. 화엄은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가 하나라는 통합의 사상이다. 화엄법계 중 최상은 ‘사사무애법계’로, 부분들이 독자적이어도 전체 질서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세계이다. 화엄의 세계는 온갖 꽃들이 어우러진 무한한 정원인 연화장 세계다. 각황전과 대웅전, 원통전 등 화엄사의 전각들은 독자적인 중심성을 갖지만, 동시에 전체 속에서 조화된다. 화엄 법계를 이루는 동력은 ‘끝없이 펼쳐지는 원인과 결과의 그물’인 무진연기이다. 모든 만물은 변화한다. 1300년 역사 속에서 화엄사의 사상도 가람의 건축도 변화했다. 화엄종이 분열되어 종파가 바뀌고 전쟁의 파괴가 새로운 가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과거의 질서는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질서가 그 위를 덮는 중창의 무진연기 속에서 건축적 연화장 세계를 꽃피우고 있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더워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더워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징게맹갱 외에밋들’이라 부른다. ‘김제 만경 너른 들’이란 뜻의 사투리다. 한자는 약간 다르지만 ‘광활’이란 보통명사가 전북 김제에선 같은 의미의 지명으로도 쓰인다. 얼마나 넓고 평탄한 땅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평선이 귀한 나라에서 막힘없이 열린 땅은 자체로 진귀한 볼거리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어디쯤에선가 벼가 꼿꼿이 몸을 일으키고, 해바라기가 방긋 웃고, 백련은 살그머니 머리를 내민다. 시계추를 조금만 뒤로 돌려도 어느 논배미 하나 일제의 수탈과 탄식의 역사를 비껴가지 못했던 곳. 이제 그 땅 위로 평화와 풍요가 머문다.‘징게맹갱 외에밋들’이 만경강과 만나는 곳에 외줄기로 이어진 길이 있다. ‘새만금 바람길’이다. 만경강 둑방길, 서해를 지키던 초병들이 다니던 오솔길, 갈대숲을 지나는 갯벌길, 봉수대로 오르던 산길 등을 이어붙여 조성한 길이다. 만경강 하류의 진봉면 소재지에서 시작해 새만금 간척지와 만날 수 있는 심포리 거전 갯벌까지 10㎞ 정도 이어져 있다. 코스는 세 개로 나뉘었지만, 갈 길 바쁜 여행자들은 ‘새창이다리’에서 출발해 삼국시대 포구로 사용되던 전선포와 백제시대 창건된 망해사(望海寺)를 잇는 1코스 ‘과거의 길’을 걷는 게 보통이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도 많다. 만경강과 인접한 완주와 김제, 군산 등이 자전거 도로로 연결돼 있다. 다만 ‘새만금 바람길’ 구간만큼은 걷기 전용이다.●둑방길·오솔길·갯벌길·산길 이은 ‘새만금 바람길’ 들머리 구실을 하는 ‘새창이다리’의 옛 이름은 만경대교다. 군산 대야면과 김제 청하면을 잇는 콘크리트 다리로, 1933년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조성 목적이야 자명하다. ‘징게맹갱 외에밋들’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다. 1988년 바로 위에 새 만경대교가 들어선 이후 인도교로만 쓰이고 있다. 새창이다리 약 4㎞ 아래엔 노을전망대가 있다. 해발 고도가 2m쯤 되려나. 겨우 둔덕이라 할 정도의 높이지만 사방이 툭 트여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팔각정과 안도현 시인의 ‘만경강 노을’ 시비 등이 전망대 주변에 조성돼 있다. 저물녘에는 이름만큼이나 환상적인 노을이, 노을전망대에서 망해사까지는 갈대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망해사는 지평선의 끝자락, 그리고 막 수평선이 시작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400년 이상 살아온 팽나무 두 그루와 작고 소담한 경내 풍경이 인상적이다. 절집 위의 진봉산 꼭대기엔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징게맹갱 외에밋들’과 종착지에 다다른 만경강의 장쾌한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이맘때 청하산 아래 연밭에선 하소백련이 절정을 이룬다. 하소는 새우(蝦) 모양의 늪(沼)이다. 이름을 풀자면 ‘새우 모양의 늪에 핀 하얀 연꽃’이란 뜻이다. 늪이 깃든 산의 이름도, 이 일대의 행정명도 청하, 푸른(靑) 새우(蝦)다. 이름치고는 퍽 독특하다. 벽골제는 김제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달달 외웠던 삼한시대 3대 수리시설 중 하나다. 약 1700년 전인 백제 비류왕(330) 때 ‘징게맹갱 외에밋들’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됐다. 당시만 해도 최첨단 농수공급시스템이었던 벽골제는 둘레가 44㎞에 달할 만큼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4㎞ 정도의 둑과 비석 등이 남아 있다. 벽골제 관광지 안에 박물관, 미술관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시설들이 조성돼 있다. 차분히 돌아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밤의 벽골제도 독특하다. 쌍용 조형물 등 여러 시설물에 경관조명이 켜지면서 빛의 정원으로 변한다.●지평선 끝·수평선 시작의 절경 간직한 망해사 김제 동남쪽의 모악산 일대는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그 발치에 불교, 기독교를 비롯해 증산도 등 토착신앙의 성지들이 매달려 있다. 먼저 모악산 바로 아래 있는 대찰 금산사부터. 통일신라 때 창건돼 미륵신앙의 성지로 추앙받는 사찰이다. 절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미륵전(국보 62호)이다. 겉모양은 3층, 내부는 통층인 건물이다. 충남 부여 무량사의 극락전도 통층 구조지만 미륵전보다 한 층 낮다. 미륵전 안에는 높이 11.82m의 미륵불, 8.79m의 협시불 등 거대한 미륵삼존입불이 모셔져 있다. 미륵불 아래에는 거대한 철 좌대가 있다. 만지면 소원을 이뤄 준다는 영험한 좌대다. 현재는 출입이 금지됐지만, 사찰 측에서 일반에 공개할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라고 한다. 미륵전에는 층마다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내는 전각명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1층은 대자 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彌勒殿) 등이다. 미륵전 주변은 문화재의 보고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만나는 불전, 석탑, 석등, 방등계단 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라고 보면 틀림없다. 본전인 대적광전도 웅장하다. 서울 종묘처럼 단층 구조이면서 옆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개창 시기 이 절집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한때 보물(476호)이었으나 1986년 화재로 전소되면서 안타깝게도 지위를 잃었다. ●문화재의 보고 금산사… 남녀평등의 금산교회 금산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금산교회다. 익산의 두동교회와 함께 ‘남녀칠세부동석’의 ‘ㄱ’ 자 건물로 유명한 곳이다. 금산교회에선 유교적 제약이 엄연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여자와 남자가 함께 예배를 봤다. 비록 출입문이 나뉘었고, 천장 대들보의 상량문도 여자 쪽 언문(한글)과 남자 쪽 한문으로 다르지만, 평등한 공간을 지향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머슴이 목사가 되고 상전이었던 지주가 그를 받드는 동화 같은 이야기도 전해 온다. 더 아래 금평저수지 오른쪽엔 ‘동곡약방’이 있다.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이 1908년 약방을 차리고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환자를 돌봤다는 곳이다. 이 일대 농가들이 동곡서원, 황극후비소 등 증산도 관련 건물로 바뀌는 등 성지화되고 있다. 금평저수지 맞은편엔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와 삼청전이 있다. 등록문화재(185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증산법종교는 강증산의 외동딸 강순임이 창건한 증산도의 한 교파다. 영대는 강일순 부부의 무덤을 봉안한 묘각, 삼청전은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건물이다. 글 사진 김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평선장바지락죽은 바지락죽 전문점이다. 회무침과 전 등 바지락 요리를 주로 낸다. 김제 시내에 있다. 수미원우렁쌈밥은 이름처럼 쌈밥만 내는 집이다. 곁들여 나오는 제육볶음 등은 특이할 게 없지만, 김제 쌀로 지은 밥과 싱싱한 채소를 맛보려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다. 만경읍에 있다.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는 만경읍 시골마을에 터를 잡은 카페다. 마을 당산목 위에 지은 트리하우스를 보려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벽골제 경관조명은 밤 10시까지 이어진다. 오후 5시부터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벽골제농경문화관 등 벽골제 관광지 안의 실내 시설은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 [길섶에서] 나남수목원/오일만 논설위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주말, 경기도 포천 소요산 자락에 자리잡은 한 수목원을 찾았다. 한적한 오솔길과 수련이 운치 있게 뿌리내린 연못 주변을 산책하면서 모처럼 ‘느림’의 세계에 빠져든다. 주변 숲 전체를 조망하는 북카페, 커피 한잔의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듯하다.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와 오래된 석등 그리고 달랑 놓인 의자, 세심한 배려 하나하나에서 ‘주인장’의 예사롭지 않은 품격이 느껴진다. 20만평 규모의 나남수목원은 ‘책바치’ 41년 외길을 걸어온 조상호 회장의 작품이다. 10년 넘게 주말마다 밀짚모자를 쓰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하나하나 일군 노력의 결실이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한 뒤 외통수처럼 선택한 출판업, 그것도 돈이 되지 않는 학술서에 승부를 걸었던 우직한 인생과 닮았다. 아주 오래전 은행 대출 과정에서 떠안은 부실채권이 지금의 수목원 부지였다. 그동안 책을 펴내면서 베인 나무들에 ‘미안한 마음’이 첫 삽을 뜨게 했다. 몇 년 전 수필집 ‘나무 심는 마음’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삶의 시련과 풍파를 불평 없이 묵묵히 이겨 내는 것… 이것이 인생 아닌가.’
  • 쉬엄쉬엄, 길이 보인다

    쉬엄쉬엄, 길이 보인다

    삼정능선 골짜기 따라 매달린 칠암자 천왕봉 등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눈에 가장 높은 곳 상무주암, 번뇌 씻어내다올해는 부처님오신날이 두 번이다. 공휴일인 부처님오신날은 지난달 30일이었고 공식 법요식은 오는 30일에 열린다. 코로나19 탓에 빚어진 초유의 일이다. 지난 공휴일에 바이러스가 창궐해 나들이가 어려웠다면 생활 방역으로 접어들며 맞는 부처님오신날엔 명상하기 좋은 암자라도 찾는 것이 어떨까. 지리산에 ‘칠암자 순례길’이 있다. 지리산 자락에 매달린 일곱 암자를 이은 탐방로다. 찾는 이 적으니 거리두기야 자연스레 이뤄질 테고, 오랜 기간 쓰지 않았던 몸 여기저기에 긴장감을 잔뜩 불어넣을 수 있다. 울림과 여운이 남는 수행의 여정을 원한다면 이 길이 딱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칠암자 순례길’의 들머리는 도솔암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도솔암 가는 길이 비법정 탐방로란 것이다. 일 년에 딱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탐방로의 문이 열린다. 평일에 올랐다가 걸리면 꽤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찾아가는 이들이 있는지,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산객들 간에 막고 피하는 싸움이 꽤 치열하다고 한다. 오지 말라고 하는 곳을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 꼭 이름만큼의 구간을 돌아야 한다는, 명분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산객들이 선택하는 코스는 경남 함양 영원사에서 올라 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을 거쳐 전북 남원 실상사로 내려오는 것이다. 평일에는 사실상 도솔암을 뺀 ‘육암자 순례길’인 셈이다. 칠암자든 육암자든 무슨 상관이랴. 순례길을 걷는 목적이 숫자의 정복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칠암자 순례길’은 지리산 안에서 또 다른 지리산을 보며 걷는 길이다. 등산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리산 주능선의 삼각고지(1480m)에서 북쪽 방향으로 작은 능선 하나가 갈라져 나왔다. 이게 삼정능선이다. 칠암자는 이 삼정능선의 골짜기를 따라 매달려 있다. 그러니 암자와 암자를 잇는 순례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천왕봉 등 지리산 주능선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눈에 담게 된다. 들머리는 함양 마천면의 영원사(920m)다. 1971년 중건된 절집이지만 거쳐 간 스님들의 법명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사에 큰 공적을 남긴 백초월 스님 등이 이 절집에서 일정 기간 수행했다. 109명에 이르는 고승들의 면면은 이 절집에서 여태 보관하고 있는 안록(역대 큰스님들의 행장이 수록된 책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영원사 공양간을 돌아서면 오르막이 시작된다. 영원사에서 영원령을 넘어 상무주암에 이르는 1.8㎞ 구간 중에 1㎞가 넘는 구간이 오르막길이다. 이후에도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이 구간이 가장 힘들다. 코를 땅에 박고 오르다 보면 땅에 바짝 붙은 봄꽃들이 슬그머니 꽃술을 내민다. 하나를 찾고 나면 다른 녀석들이 눈에 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에 봄꽃들이 무성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여태껏 꽃길을 걷고 있었다는 걸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거다. 상무주암은 순례길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1162m에 있다.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上)에 있는, 머무름이 없는 자리(無住)라는 뜻이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2년여를 머물며 “옷 세 벌과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했는데, 경치가 그윽하니 천하제일인지라 선객이 거주할 만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할 만큼 전망이 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암자와 달리 상무주암에선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암자 입구에 사진촬영금지 팻말이 걸려 있다. 하지만 그걸 보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낯선 객이 제집인 양 안마당을 헤집고 다니자 주지 스님께서 조용히 한마디 하신다. 사진 찍지 말라고. 멀리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재차 읍소를 하니 단박에 나가라며 축객령이다. 따지고 보면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는 순례길의 암자들은 세상과 멀어지려 일부러 외진 곳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숨은 암자를 찾으려 하고, 결국 숨자고 들어선 곳이 외려 명소가 되는 희한한 역설이 생겨난다. 상무주암 주변에 홀로 명상에 잠길 만한 자리가 몇 곳 있다. 축객령으로 내쫓긴 이들에겐 그야말로 제격인 자리다. 눈앞에 펼쳐지는 지리산의 눈부신 봄 풍경 덕에 불편했던 마음 한 자락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문수암은 커다란 바위 아래 터를 잡은 암자다. 순례길의 풍경을 말할 때 최고로 꼽는 이들이 많은 절집이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여명이 숨었다고 전해지는 천인굴과 늘 마르지 않는 석간수로 알려졌다. 문수암은 오랫동안 암자를 지키던 도봉 스님의 보시로 유명한 절집이다. 암자를 찾는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먹거리를 나누곤 했다. 한데 도봉 스님이 암자를 내려간 이후로 절집은 적막한 공간이 됐다.산객들에게 풍경으로 보시하는 최고의 절집은 삼불사가 아닐까 싶다. 독특하고 소박한 건물과 비구니 스님의 손길이 묻어나는 각종 소품들이 산객의 마음을 산뜻하게 보듬어 준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암자 앞 작은 뜨락에서 맞는 너른 풍경이다. 지리산으로 향한 미닫이문이 활짝 열린 듯하다. 삼불사에서 남원 땅에 속한 약수암까지는 2.3㎞로 다소 길다. 내리막길이긴 해도 너덜지대의 연속이어서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약수암은 시원한 샘물이 유명하다. 목각탱화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421호)도 고색창연하다. 종착지인 실상사는 다른 암자들에 비하면 대찰이다. 평지에 있어 은둔의 느낌도 덜하다. 볼거리는 많다. 경내 극락전 앞의 석등(보물 35호)과 2기의 삼층석탑(보물 37호)을 비롯해 딸린 암자인 백장암의 삼층석탑(국보 10호) 등 문화재가 수두룩하다.산행 끝에 둘러볼 만한 명소 몇 곳만 덧붙이자. 함양 오도재는 지리산 전망이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곳이다. 조망공원이 따로 마련돼 있다. 이웃한 지안제는 사진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출사지다. 뱀처럼 휜 도로를 사진에 담을 수 있다. 글 사진 함양·남원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은 영원사 쪽에서 시작하는 게 낫다. 영원령 등 오르막 구간도 일부 있지만 대체로 내리막 구간이다. 반대로 실상사에서 오르면 급경사가 이어져 체력 부담이 커진다. 도솔암을 제외한 거리는 얼추 8㎞ 가까이 된다. 소요시간은 6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약수암에서 실상사까지는 구절양장 임도를 따라 내려와야 한다. 한데 영 산행하는 맛이 나지 않아 숲으로 난 샛길로 내려오는 이들이 많다. 다만 표지판이 없어 길을 잃고 함양 쪽 도마마을로 내려올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차를 가져갈 경우 실상사에 주차를 하고 함양 택시를 불러 영원사로 가는 게 보통이다. 영원사 앞에 차를 대고 실상사에서 택시를 불러도 된다. 어느 쪽이든 택시비는 2만 5000원이다.
  • 이순신 장군 공 기리는 ‘해남 명량대첩비’ 탁본한다

    이순신 장군 공 기리는 ‘해남 명량대첩비’ 탁본한다

    1597년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1688년 세운 보물 503호 해남 명량대첩비 등 문화재 13건을 올해 탁본한다. 3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는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 신청한 문화재 탁본 사업을 최근 허가했다. 불교중앙박물관은 올해 작업 대상으로 호남 지역 문화재 13건을 정했다.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비석과 석등, 자연 암반 등이 포함됐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구례 윤문효공 신도비, 영암 엄길리 암각 매향명은 처음으로 탁본한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담양 개선사지 석등,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등은 새로 탁본한다. 기존 탁본의 먹이 균일하지 않거나 일부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워서다. 탁본 대상 13건 가운데 개선사지 석등, 광자대사탑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엄길리 암각 매향명은 훼손을 우려해 전문가 조언을 받기로 했다. 불교중앙박물관은 종이나 비석 따위에 새긴 글자를 가리키는 금석문 탁본을 매년 진행한다. 2013년부터 학술용역사업으로 전국 금석문 총목록 조사 및 총람집을 제작하고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팩트 체크] 덜 쌓이고 더 공제하는 대한항공 일반석 마일리지

    [팩트 체크] 덜 쌓이고 더 공제하는 대한항공 일반석 마일리지

    “소비자의 편익을 생각해 최대한 합리적으로 조정했다.”(대한항공) “명백한 재산권 침해 행위일 뿐이다.”(소비자) 대한항공이 지난달 항공 마일리지의 적립·공제 방식을 바꾸자 소비자와 대한항공 간 갈등이 커지고 있다. 소비자단체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불공정거래행위 금지위반으로 신고서를 제출하자 대한항공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공정위의 별다른 제재가 없다면 개편안은 내년 4월부터 시행된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맞을까. 28일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제도 개편안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알아봤다. -소비자,“덜 쌓이고 더 소비되고…” “‘마일리지의 가치를 높이라’는 공정위의 권고로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제도의 전반적인 내용을 뜯어고쳤다. 회사는 항공권을 살 때 마일리지(최대 20%)와 현금·카드를 섞어서 쓸 수 있게(복합결제) 한다고 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마일리지의 적립·공제 방식을 좌석등급 또는 운항거리를 기준으로 하면서 불만이 생겼다. 결국 지금보다 마일리지가 덜 쌓이고 쓸 때는 더 많이 쓰이는 식으로 바뀌면서 피해가 막심하다는 게 소비자들의 주장이다.” -지금보다 마일리지가 덜 쌓이나. “절반은 맞다. 일반석 예약등급(K·L·U·G·Q·N·T)의 적립률이 깎인다. 특히 Q·N·T 등급은 현행 70%에서 개편한 뒤에는 25%로 대폭 깎였다. 일반석 Q등급 왕복 기준 인천~프랑크푸르트 노선으로 비교해 보자. 현행대로는 7504마일이 적립되지만, 개편안대로는 2680마일만 쌓인다. 무려 4824마일이나 준다. 다만 무조건 깎이는 것만은 아니다. 일등석·프레스티지석의 적립률은 대폭 오른다. P등급(일등석)은 현행 200%에서 300%로, J등급(프레스티지석)은 현행 135%에서 200%로 오른다. 적립이 실제로 줄어드는 등급은 일반석 일부라는 얘기다. 그런다고 불만이 사라지진 않는다. 대다수 소비자가 일반석을 이용해서다.” -공제 수준도 올라가는가. “대체로 그렇다. 마일리지 공제 방식을 ‘지역’에서 ‘운항거리’로 바꿨기 때문이다. 편도 기준으로 인천~호놀룰루(하와이)와 인천~뉴욕을 보자. 과거에는 같은 ‘미주’ 지역으로 묶어서 공제 마일리지가 3만 5000마일로 같았다. 그러나 두 지역의 거리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인천~호놀룰루는 4560마일, 인천~뉴욕은 6879마일이다. 이를 조정해서 운항거리로 개편한 결과 앞으로 호놀룰루는 3만 2500마일, 뉴욕은 4만 5000마일을 공제한다. 뉴욕을 기준으로 1만 마일이나 공제가 늘어난 것이다. 거리가 멀수록, 좌석등급이 높을수록 공제 마일리지도 커진다. 대한항공은 칭다오, 베이징 등 일부 거리가 가까운 지역을 예로 들면서 공제가 더 줄어든 곳도 있다고 강조하지만 이는 ‘아전인수’다. 거리가 가까운 지역에 갈 때 마일리지를 이용하는 것은 소위 ‘가성비’가 떨어져서다. 이것으로 소비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다.” -다른 변화는. “항공권을 살 때 마일리지와 현금·카드의 복합결제를 허용한 것이다. 마일리지를 최대 20%까지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반드시 대한항공 홈페이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가 받는 혜택에서 큰 차이는 없다. 홈페이지에서도 여행사와 동일한 특가 프로모션에 구매할 수 있어서다. 복합결제는 오는 11월부터 바로 시행된다.” -제도 개편을 막을 수는 없는가. “공정위의 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한다. 쟁점은 마일리지의 성격이다. 마일리지는 항공사에는 부채이자 소비자들에게는 재산의 성격을 지닌다. 대한항공의 이번 개편안이 소비자들의 재산가치를 일방적으로 줄여버린 것이라면 공정위 차원의 제재가 나올 수도 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두 보살, 조계종에 50억원 기부… 종단 개인 기부금 사상 최고액

    두 보살, 조계종에 50억원 기부… 종단 개인 기부금 사상 최고액

    두 여성 불자가 대한불교조계종에 현금 50억원을 기부한다. 단체가 아닌 개인이 종단에 낸 기부금으로는 사상 최고액이다. 법명(法名)이 설매(73)와 연취(67)인 두 보살은 2일 서울 종로구 조계종 총무원에서 50억원 전달식을 가졌다. 37년 간을 도반으로 지낸 둘은 인도 부다가야에 한국 사찰을 짓는데 써달라며 돈을 기부했다. 설매 보살은 전달식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부 배경에 대해 “우리는 잠시 돈을 가지고 사용하다가 빈몸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며 “그것을 어디다 남겨둔다기보다 (돈은) 삶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름대로 발원을 했는데, 뜻밖에 금년에 조계종에서 (인도 부다가야에) 한국 사찰을 세우겠다는 총무원장 스님의 원력을 듣고서 인연을 지어야겠다고 결정했다”고 떠올렸다. 연취 보살도 “부처님의 업을 다시 펴는데 (기부금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바람을 전했다. 두 도반은 1982년 지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6살 위인 설매 보살이 연취 보살을 석가모니 가르침의 길로 인도했다. 이들의 기부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인 설매 보살이 먼저 1억원을 준비하며 시작됐다. 연취 보살은 본인 소유 건물를 판 돈으로 나머지 49억원을 마련했다. 두 보살은 내년 2월말까지 현금으로 50억원 기부를 완료할 계획이다. 인도 부다가야는 석가모니가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두 도반은 조계종 측에 현지에 사찰을 건립하면 그 이름을 ‘분황사(芬皇寺)’로 짓고, 사찰 마당에는 소박한 석등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분황사는 경북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절로,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곳이다. 조계종은 향후 종단 불사위원회를 열어 기부금 활용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화천 계성리서 국내 최초 육각형 건물터 발견

    화천 계성리서 국내 최초 육각형 건물터 발견

    강원 화천군 하남면 계성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육각형 건물터(위)가 발견됐다. 화천군과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보물 제496호 화천 계성리 석등 주변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육각형 건물터와 석탑터, 석등터, 중문터 등을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이 지역은 고려 전기에 지었다가 조선 시대 재건한 뒤 18세기쯤 폐사한 계성사 사찰 터(아래)로 추정된다. 이번에 발견한 육각형 건물터는 남북 중심선을 기준으로 중문지, 석탑지, 동서 석등지, 금당 추정 육각형 건물지가 위치하는 1탑 1금당 배치 형태다. 금당은 절의 본당으로 본존불을 모신 건물이다. 기단 한 변 길이가 약 5.4~5.7m, 마루 서까래 뒷목 보강을 위해 눌러 박은 큰 원목인 적심 지름이 약 1.8~2.2m이다. 면적은 기단을 기준으로 88.2㎡에 이른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평면 사각형으로 재건했다. 정면 3칸, 옆면 3칸 면적 약 132.7㎡로 확장했으며 중앙에 평면 육각형 할석(쪼갠 돌)이 깔려 있어 불상 불대좌가 놓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육각형 모양 법당지 발견은 국내 최초로, 북한 금강산 정양사와 비슷하다. 연구원 측은 고려 전기 관리 최사위의 묘지명에 계성사와 정양사 창건에 관여한 행적이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연구원 측은 “계성사와 정양사 모두 육각형을 모형으로 법당, 석탑, 석등을 축조했다. 최사위가 두 사찰을 거의 같은 설계구도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정양사가 금강산 관광 코스에 있는 만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면 남북이 두 사찰을 공동 연구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 국립광주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 국립광주박물관

    #빗살무늬토기 #국립광주박물관 #중흥산성쌍사자석등 “빗살무늬토기에는 금이 패어져 있었다...(중략)...예쁘라고 팠다. 금이 있어야 사람이 쓰는 물건이다라고 아빠는 그랬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김훈, 1995, 문학동네> 정말 우리 조상님들은 빗살무늬토기의 금을 예쁘라고 팠을까? 명쾌한 상상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빗살을 그었으리라.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한 소방대원과 맹인안마사의 죽음을 통해 신석기 시대의 농경문화와 현재의 기술 문명을 잘 잇고 있다. 더 이상 빗살무늬토기는 품질이 투박하고 조악한 토기가 아니라 문명의 시원(始原)을 증명하는 도구이자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 문명이라고 작가는 에둘러 말한다. 너무도 오래되어 어쩌면 잊혀진 시간들, 그러기에 더더욱 낯설게 남겨진 갈돌, 돌칼, 돌도끼, 빗살무늬토기를 만나러 간다. 빛고을 광주(光州)국립박물관이다.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이미 훌쩍 넘어가버렸다. 그러하기에 국립광주박물관 나들이는 ‘딱’ 제철을 맞았다. 광주체고 길로 올라가도 되고, 매곡동을 지나 직진해도 된다. 국립광주박물관은 광주 도심 안에 적당히 붙어 있으면서도, 외따로 떨어져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시간도, 풍경도 충분히 여유롭게 흘러가는 듯 모든 것들이 평화롭다.국립광주박물관은 지역박물관으로서는 단연 맏형이라고 불러도 된다. 왜냐하면 광복 이후에 우리 손으로 지은 최초의 지방 국립박물관이 바로 국립광주박물관이기 때문이다. 1978년 12월 6일에 개관한 국립광주박물관은 광주와 전남지역의 오랜 농경문화와 전통문화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박물관의 규모도 상당하다. 대지면적이 82,993㎡에 달하고 연면적은 15,127㎡, 건축면적 5,575㎡에 이르며 소장품만 120,000여점이 넘는 곳이다. #강진고려청자 #1975년신안해저유물 #광주나들이장소현재 국립광주박물관은 1층과 2층, 그리고 옥외전시실로 크게 구획이 나뉜다. 우선 박물관 로비로 들어서면 국보 제 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석등’이 보이고 이를 지나면 ‘선사, 고대문화실’이 바로 나온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신석기시대의 덧무늬토기, 청동기시대 간돌검을 비롯하여 국보 143호로 지정된 청동기시대의 화순 대곡리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1층에는 ‘농경문화실’도 있어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농경유적인 광주 신창동 유적과 아울러 철기 시대의 다양한 농사도구들도 볼 수 있다.박물관 2층에 올라가면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불교미술, 도자, 서화 등 다양하면서도 진귀한 유물들도 만날 수 있다. 2층 전시관에는 수준 높은 불교 미술을 증명하는 사리장엄구, 불교 의식구, 불상 등도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청자의 본향인 강진에서 만든 세련된 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 백자 등도 보존 전시되어 있어 선조들의 수준 높은 미의식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2만 4천여 점의 진귀한 유물들 중 13세기 후반 중국 원(元)나라 도자기와 연적 등도 전시되어 있어 14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동북아 국제교류의 양상도 이곳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또한 박물관 옥외 전시실은 편안한 휴식과 나들이 공간이자 광주 주변 지역 옛 절터, 유적 등에서 옮겨 온 문화재들도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청동기 시대의 전남 고흥의 고인돌 무덤방과 강진의 청자가마터, 광주 장운동의 오층석탑 등이 복원 전시되어 있어 가족 단위의 가을 나들이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 5개 만점) - 편안한 공원 같은 곳이다. 가을 나들이 공간으로는 제격이다. 2. 누구와 함께? - 연인끼리 조용한 데이트를,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공간. 3. 가는 방법은?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매곡동 430번지) - 버스 : 송정 29, 송정 33, 문흥 53, 상무 63, 용전 84, 용전 85, 첨단 95번 광주박물관 하차. 4. 특징은? - 호남 문화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광주를 넘어 호남 전역의 농경문화의 시작점을 확인.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늘 한산한 편이다. 가족 단위로 다녀오면 좋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1층 선사고대문화실, 2층 신안해저문화재실 7. 토박이들로부터 확인한 추천 먹거리는? - 매곡동 주변으로 가면 맛집들이 많다. ‘전승규의 감자탕이야기’, ‘윤씨네돼지갈비’, 돌솥밥 ‘넝쿨채’, ‘돼지전설’, 칼국수 ‘달자네집’ 8. 홈페이지 주소는? - 요금 및 운영 관련 자세한 내용은 https://gwangju.museum.go.kr/kor/index.do 으로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광주시립미술관, 중외공원, 광주어린이대공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 국립광주박물관은 광주 안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덜 붐비는 곳이지만 소장품이나 박물관 연혁으로 보아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박물관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까지 너끈히 아우를 정도의 박물관이 바로 국립광주박물관이다. 격(格)을 제대로 갖춘 정통 박물관.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밭을 갈거나 도토리 줍다가… 세상에 나온 국보급 문화재들

    밭을 갈거나 도토리 줍다가… 세상에 나온 국보급 문화재들

    2009년 5월 한 주민이 화분 받침대로 쓸 돌을 찾으려고 포항 도로개설 공사장 돌무더기를 뒤졌다. 글자가 적힌 돌을 발견한 주민은 이를 포항시청에 신고했다. 조사 결과 돌은 신라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신라 시대 가장 오래된 석비로 알려진 국보 제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국민이 찾아낸 매장문화재 현황을 소개한 ‘우연한 발견’을 냈다고 21일 밝혔다. 2014~2018년 대구·경북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 사례를 모은 책으로, 감정평가를 거쳐 문화재로 확정한 유물 35건 93점이다. 발견 경위는 제각각이다. 하천에서 물놀이하다가, 산에서 도토리를 줍다가, 또는 밭을 갈거나 비닐하우스 공사를 하다가, 염소 사육장을 청소하다가 눈에 띄어 문화재가 됐다.이들은 사료로서 가치 있는 문화재들이다. 2013년 12월 경북 상주시 무양동에서 흙을 깎아 내다 발견한 ‘이수보 애민선정비’(李秀輔 愛民善政碑·1742년 건립), 2014년 4월 포항 법광사지 주변 문화재를 탐방하다 밭둑에서 발견한 포항시 북구 신광면 소재 선사비 등은 지역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2017년 금속 탐사 과정 중 경산시 갑제동에서 발견한 ‘청동유물 일괄’은 기원 전후 1~2세기 유물로, 원삼국 시대 분묘 문화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다. 이 밖에 경주시 나원리 발견 석등 옥개석, 황남동 발견 석조귀부는 경주 나원리사지, 황복사지와 같은 중요 절터 관련 유물이다. ‘우연한 발견’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nrich.go.kr/gyeongju)에서 열람할 수 있다. 사례집에는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 절차와 관련 법령도 담았다. 매장문화재를 발견하면 7일 이내 시군구 등 담당 지자체나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90일 공고 후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국가가 보관·관리한다. 가치에 따라 신고자에게는 보상금이나 포상금을 준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동학 기록물 등 문화재 지정 예고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등 5건이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전북도는 25일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물인 ‘소모사실’을 비롯한 5건의 유형문화재가 문화재 지정 심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지정 예고된 문화재는 익산 관음사 묘법연화경, 남원 용담사 석등, 전주 삼경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완주 구룡암 사법어 등이다. 소모사실은 1894년 조선 왕실이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한 조시영이 혁명에 관해 보고받고 목격한 내용을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는 혁명 당시 사회상과 조선 정부의 대응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한국산사가 간직한 고귀한 단청빛…이젠, 그 아름다움 드러낼 방안 고민할 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한국산사가 간직한 고귀한 단청빛…이젠, 그 아름다움 드러낼 방안 고민할 때”

    ‘사찰 사진 30년’ 노재학 작가가 말하는 단청의 세계사찰 사진만 30년 가까이 찍어온 노재학(56) 작가의 ‘한국산사의 단청세계, 고귀한 빛’이란 주제의 사진전이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린다기에 6일 그를 만났다. 지난 2월 부산에서 첫 전시를 한 이후 세 번째로 전국 순회 전시를 하고 있다. 전시회는 문화유산회복재단(이사장 이상근)이 주최했다. 지난해 한국 산사 7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해 마련된 전시회다. 전시회는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한국미술과 불교 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마련됐다. 노 작가는 “사찰은 건립 당시 최고의 건축과 회화, 문양, 조형이 결집된 미술관이자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조선민화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보물창고”라고 강조했다. - 절집 사진, 얼마나 많이 찍었나. “글쎄요, 약 30년간 사진을 찍었으니 대충 1억 컷이 넘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기준의 작품 사진은 3000컷에 하나 정도이니 작품 사진은 아마 3000장 남짓 보유하고 있습니다. 1년에 집에 있는 날이 50~60일 정도입니다. 보통은 한 절에서 2박3일 정도 머물며 사진을 찍습니다만, ‘내일이면 빛이 좋겠다’ 싶으면 하루 더 머물기도 합니다. 2박3일 머물며 찍어도 작품을 한 장도 못 건질 때가 더 많습니다. 1년에 자동차로 5만km 이상 달립니다. 지구 한 바퀴와 반지름 거리가 더 되지요.”  “절집 사진 대충 1억컷…작품 사진 3000장 정도1991년 제주교도소 출소 이후 자유찾아 돌아다녀1년에 300일가량 나가…자동차 5만km 거리 주행절집 방문횟수 몰라…부처님만 내발걸음 아실 것사진찍을 때 정장차림에 구두光…등산복 안입어”- 그러면, 절집을 얼마나 많이 갔나. “절집을 몇 번이나 갔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저도 사실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제 발걸음 소리를 기억하실 겁니다. 제가 새벽에 가면,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잖아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에는 어림잡아 1000번 이상 갔을 겁니다. 방방곡곡의 개들이 최소한 한 번쯤은 저를 보고 짖었을 겁니다.”  - 사진을 찍을 때 정장 차림이라고 들었다. 불편하지 않나. “천정의 저 세계가 숭고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등산복이나 청바지 차림으로 가지 않습니다. 최대한 예경을 갖춰야겠다고 싶어서 촬영을 나갈 때마다 집에서 가장 깨끗한 정장차림에 신발도 구두에 광을 내서 신고 갑니다. 절에서 만나는 일반 사람들은 제가 사진 찍는 줄도 모릅니다. 법당에서 기도하거나 예불 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 쵤영 작업을 멈춥니다. 예불이 끝날 때까지 다른 데로 가지 않고 그 절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때 빛의 방향과 길이를 관찰하고 확인합니다.”   노 작가는 인터뷰 내내 ‘천장(天障)’이라는 말 대신 ‘천정(天井)’이라는 단어를 고집했다. 국립국어원은 천장을 표준어를 취하고, 천정을 북한어라면서 버린다고 밝혀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장은 낮고 좁은 건물의 내부공간 위를 평평하게 막은 개념이라면 천정은 궁궐이나 사찰 건축물 등과 같이 넓고 높은 내부공간을 우물 정(井)자 격자 칸을 짜서 층급으로 위엄있게 꾸민 형태라고 차이를 설명했다. 사찰의 천정은 하늘을 막는(障) 단절의 개념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를 구현하기에 천정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뷰에서 그의 표현대로 천정으로 표기한다.  - 절 사진, 언제부터 찍었나.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망설여집니다만 1991년 제주교도소에서 출소하고 나서부터입니다. 한라산 자락 해발 300m 위치에 있던 제주교도소 시설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4중창으로 공기가 소통되지 않아 메케한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제가 있던 감방이 0.75평이었는데 구더기가 일렬로 구석을 따라 기어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미쳐버리기 직전이었죠. 그런데 저녁 무렵이면 한라산 자락에서 소와 말 울음소리가 창살 너머로 들려왔습니다. 내가 나가면 푸른 하늘을 무한정 보며 들판을 끝없이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자유의 소중함을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출소하자마자 들판을 쏘다녔습니다. 그게 결국 사찰로, 단청으로 이어졌습니다. 29년째인가요.”- 교도소, 왜 갔나. “아내는 알지만, 아이들은 아빠가 뭘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도 사실 머뭇거려집니다만 제가 부산대 82학번입니다. 당시, 많은 학생이 정권을 향해 돌을 던지고 할 때였으니, 저도 시국사건에 연루된 것입니다. 안양교도소 있다가 제주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8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제주교도소장이 ‘내가 알기로 뭍에서 제주도로 귀양온 사람은 네가 세 번째’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처음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고, 다음은 서울대 학생, 그다음은 저라고 농담 같은 말을 했습니다.”  - 들판을 쏘다닌 것이 어떻게 단청과 연결되나. “자유를 만끽하고, 마음을 다스리려 들판을 쏘다닐 때 처음엔 빈 절터만 찾아다녔습니다. 버려진 절터에는 역사가 무너져 있고, 바람이 있고, 푸르름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잔해가 깊은 감동을 주더군요. 덧없고, 자연만 푸르구나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필름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의 절터를 5년간 기행했습니다. 그러다 절터의 석탑이 보여서 석탑만 찾아서 사진을 찍다가, 그다음엔 마애불을 촬영하러 온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제 성격이 한 곳에 필이 꽂히면 그것에 집중하거든요. 석등만 보이다가 어느 날 절집의 노거수, 고목만을 보려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절집의 창호, 문짝의 꽃살무늬를 보게 됐어요. 점점 법당으로 가까이 가게 된 것입니다.”  - 그래서 법당문을 열었나. “꽃살문을 여는데, 법당 안의 천정 세계가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서…. 제가 수학을 전공했는데, 수학의 본질이 자연이나 현상에서 패턴의 통일성이나 규칙성을 찾는 것인데, 그것을 법당 천정에서 발견한 겁니다. 수학에선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대칭으로 남는 순간을 무한으로 해석합니다. 경북 안동 봉정사와 전북 부안의 내소사에서 이런 미학적 인식을 하게 됐습니다. 절집 천정의 단청이 이런 형식으로 무한을 의미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처음엔 빈 절터 찾다가 마침내 법당안 천정 봐좌우대칭에 패턴 반복…전공인 수학 본질 느껴법당 천정 컴컴…촬영시 플래시, 사다리 안 돼필름 10통 찍어도 작품 못건져…디지털로 바꿔”- 이번엔 절집 천정에 빠졌겠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의 천정에 이런 패턴의 단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습니다만 자료나 책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서 데이터를 구축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는 것은 습관처럼 해왔기에 한 2~3년이면 작업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때가 2003년이었습니다. 소임 스님으로부터 사진 촬영 허가 조건이 플래시를 터트리지 말고, 법당이니까 삼각대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절집 천정은 등에 가려 있고 어두워서 필름 10통을 써도 작품 사진 한 장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비용이 만만찮아서 디지털로 바꿨습니다. 천정 사진부터 디지털로 쵤영했습니다.”  - 스님들 반응은. “사진은 빛의 예술입니다. 스님들도 평소 육안으로 천정을 올려다보면 어두컴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찍은 사진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밝게 나왔느냐’고 감탄합니다. 햇빛이 법당 바닥에 들어와 반사되어 천정이 밝게 보이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지요. 한 절에 2~3일씩 머무는 것도 법당 마룻바닥에 비친 자연빛이 언제 가장 길고, 어디 쪽으로 가는지 관찰합니다. 그리곤 그 빛의 시간에 가서 찍었기 때문에 화사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 빛이 피사체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야 5분 정도, 보통은 2~3분 만에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그리고 저는 기계적 메카니즘이 저의 몸에 맞아 니콘카메라를 쓰는데, 아주 낡고 허름합니다. 이걸 한 스님이 보더니 ‘이런 낡은 구닥다리 카메라에서 이렇게 좋은 사진이 나오다니’ 하고 놀라더군요. 그래서 ‘빛이 언제, 어느 벽화에 들어오는지 그 순간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해줬습니다.” 노 작가는 조계종 소속 전통사찰 1000여곳 가운데 100년 이상 된 전통문양과 벽화를 가진 사찰은 140곳이고, 법당은 200여 곳이라고 단정했다. “어디 나온 통계는 아니고, 제가 30년 가까이 발품을 팔면서 샅샅이 조사한 결과입니다. 대다수 사찰은 고전의 빛을 간직한 법당이 한 곳인데, 통도사는 대웅전 영산전 용화전 등 11곳이나 있습니다. 마곡사처럼 서너곳인 경우도 있지요. 정말 놀라운 것은 사찰마다 법당 벽화 표현이 다 다릅니다. 하나도 같은 게 없습니다.” “법당천장 촬영 노하우?…마룻바닥 반사빛 관찰사찰 가면 2박3일 머물러…기도 하면 촬영 안해산사 유네스코 등재, 단청·벽화 아름다움 빠져단청작가 이름 없는 이유?… 無我 사상과 연결”- 사찰 단청과 벽화, 유네스코가 인정하지 않았나. “작년 6월에 한국의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만, 그것은 가람의 배치, 법당의 역사 등 기록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산사, 그 내부 세계 소개는 대단히 제한적이었습니다. 2011년부터 유네스코 등재를 준비했는데 불경스러운 이야기이겠지만 사찰에 있는 벽화와 문양 등에 대해 이야기는 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한 사찰에서 등재심사 실사를 나온 이코모스 조사단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사찰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법당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세밀히 살피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사찰 내부 장엄을 뺀 것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같은 천정벽화를 제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산사의 진정한 아름다움, 법당 내부에 있는 아름다움이 알려줬으면 합니다.”  - 작가 이름도 전하지 않는데, 그렇게 가치가 있나. “작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사찰 중건 과정에선 거의 모든 것을 사찰 스스로의 역량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단청도 당연히 스님 장인인 승장(僧匠)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청에 불교와 불교 철학이 깊이 투영된 것이지요. 단청을 한 사람이 이름 전하는 것은 전남 해남군 미황사의 대웅보전에 ‘무등산인단확야(無等山人丹艧也·무등산 사람이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유일합니다만 불교 철학이 무아(無我) 즉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지 말라는 가르침인데, 스님이 그 이름을 드러내겠습니까. 개인이 아니라 조직인 사찰의 힘으로 한 것이니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노 작가는 일 년 중 거의 300일을 길 위에서 보낸다. 사찰뿐만 아니라 고택, 궁궐도 그의 피사체다. 불교 매체인 현대불교에 ‘사찰천정 화엄의 빛’, ‘한국산사의 단청문양 세계’, ‘그 절집의 빛’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한국산사의 단청세계, 불교건축에 펼쳐진 화엄의 빛’을 내기도 했다. 그는 주지 스님의 성격이 다소 괴팍해 촬영허가를 해주지 않은 사찰에도 어떤 전통의 빛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카메라에 담고자 하고있다. “한국불교 習合사상… 태극·신선·민화 등장 이유한국 사찰 단청·벽화 지역적으로 미세한 차이 감지영남사찰 고전주의적 정형성…안동은 유교 요소도서남해안 사찰 낭만주의·자유분방… 20세 탈종교적통도사 ‘봉황 탄 문수보살’…고구려 고분벽화 원리”- 단청에 불교가 아닌 태극 등의 문양도 보인다. “한국 불교의 수용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의 태극, 도교의 신선, 사군자, 약리도, 화조도, 책가도 등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해학적인 그림들, 민화적 요소들도 들어와 있지요. 시대 상황에 따라 여러 문화요소가 관습처럼 합쳐지는 습합(習合)이 큰 특징입니다. 지역적 차이점도 보입니다. 조선시대 유교의 본향 같은 안동에서는 태극을 비롯한 성리학적 요소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봉정사 봉황도의 경우 사찰이 아니라 궁궐에 있을 법한 벽화도 보입니다. 범어사나 통도사의 조형미술은 고전주의적 정형성이 엄격합니다. 반면에 내소사, 미황사, 대흥사와 같은 서남해안 산사 단청은 대단히 세련되고 낭만주의적 경향으로 자유분방하고 정겹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사찰 공사도 거의 민간이 맡아서 하게 됩니다. 벽화도 종교적인 것에서 많이 벗어나지요.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불단에 보이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청룡, 황룡 조형이 그런 산물일 것입니다.”  - 가장 감동이 있는 단청 사진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2013년 통도사 대웅전을 보존처리 할 때였습니다. 비계를 설치하고, 위에서 뭔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천막을 쳐둔 상태입니다. 천정 쪽에 뭔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허락을 얻어 높이 10m의 비계에 올라갔습니다. 너무 어두워서 휴대폰 조명을 켜보니 ‘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너무 감격스럽고 놀라서 비계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미술조형 원리가 드러난 작품으로, 봉황을 탄 문수보살이었습니다. 휴대폰 조명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은 1640년대에 중수한 것입니다. 300여년 전의 빛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유일한 사진일 겁니다.”  - 애지중지하는 사진을 든다면. “역시 양산 신흥사 대광전 후불벽 뒷면에 있는 관음삼존도 벽화입니다. 옷 의습에 베푼 문양을 보면 고려불화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다른 후불벽화가 백의 수월관음도인데 여기는 특이하게도 검은 먹 바탕에 백묘로 그린 관음삼존도입니다. 수월관음과 함께 어람관음을 배치한 대단히 독창적인 벽화입니다. 어람관음은 중생구제를 위해 한 손에 물고기 바구니를 들고 맨발로 저잣거리에 나투신 보살니다. 어둠에서 빛이 나오듯 정말 숭고합니다. 양산 신흥사는 효종 8년(1657년)에 건립됐습니다. 어람 관음보살은 경주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서도 적외선 촬영결과 존재했다는 사실이 발견됐지만, 현재는 신흥사가 유일합니다.” “아름다운 벽화·단청, 등·불전함에 가려져 안타까워연등·불전함 재배치해 아름다움 공유, 고민할 시기” - 이런 벽화나 단청의 아름다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산사 벽화와 천정의 세계가 말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낸 것인데, 연등이나 불전함 등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세계인들이 다 공유할 수 있게 연등이나 불전함 배치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산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만큼 종단차원에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젠 불교미술의 정수인 벽화와 단청, 천정의 세계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요.”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황홀한 순천의 4월 밤거리 ‘순천 문화재 야행’

    황홀한 순천의 4월 밤거리 ‘순천 문화재 야행’

    순천시 대표 야간 문화향유 프로그램 ‘순천 문화재 야행’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다시 열린다. 오는 26일부터 3일간 문화의 거리와 근대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매산등 일원에서 개최된다. 문화재 야행의 주제는 ‘승평지로 본 순천의 문화재’다. 승평지는 조선시대 이수광 순천부사가 이 지역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한 책이다. 지역의 명승 고적과 문화 유산을 둘러보는 글이 적혀있다. 이 내용을 쉽게 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얘기거리로 삼았다. 문화의 거리에서 옥천서원, 매산관 등 원도심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8가지 40여종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민참여와 공모를 통해 진행된다. 특별히 준비한 ‘순천문화재 탐방’은 허석 시장과 서정진 시의장 등이 참여해 시민들에게 순천의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청렴을 상징하는 순천 팔마비(전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주변에서는 문화재 배지투어 체험, 최석 부사 캐릭터 주머니 만들기, 팔마비 타각 체험 등을 할수 있다.또 순천향교(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일대에서는 명륜당 탁본체험, 석전제 습의 등의 전통문화체험을 할 수 있다. 나만의 호패 만들기, 장명석등 만들기, 주령구 체험 등 다양한 역사문화자원을 접목한 야간형 문화재 체험프로그램도 만날수 있다. 순천문화재 야행 주제관 및 승평지 터널이 운영되고, 한옥글방에서는 ‘손억 부사와 호호여인의 사랑이야기’ 인형극을 관람할 수 있다. 순천향교와 선비문화체험관 주변은 포목전, 어물전, 주막, 가마니꾼, 지게꾼 등 1960~70년대 전통시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터를 재현했다. 아트마켓(공방)에서는 직접 개발한 창업 상품과 각종 예술작품들을 판매한다. 매산고 앞 분수광장 음식코너에서는 가래떡, 한과, 인절미, 주먹밥, 부침개, 명절음식 만들기 등을 체험하고 구입할 수 있다. 탁종수 시 문화예술과장은 “문화재와 함께 하는 뜻깊은 시간뿐 아니라 도심에 꾸며진 아름다운 경관도 볼 수 있다”며 “즐거운 공연도 준비돼 있어 멋진 순천의 문화유산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을것이다”고 말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다양한 토속 향연 속 쏟아지는 별빛 판타지… ‘꿀잼·힐링’ 만끽

    다양한 토속 향연 속 쏟아지는 별빛 판타지… ‘꿀잼·힐링’ 만끽

    충남 공주시 마곡사 인근에는 장승 3000여 점이 모여 있는 공간이 있다. 당연히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라도 그럴싸하게 있을 것 같은 곳이다. 예로부터 유지되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게 느껴질 정도다. 카라반 야영과 독채 펜션으로 오랫동안 인기를 끌어왔고, 근래 SNS에서는 ‘고양이 마을’로 종종 등장하는 공주 장승마을 이야기다. 장승마을은 한 사람의 순수한 지역 사랑에서 시작됐다. 약 20년 전, 김소라 장승마을 대표의 아버지가 “우리 지역에 볼거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장승을 모아 세우면서 지금의 장승마을이 시작됐다. 또 그곳을 관리하면서 묵을 목적으로 지은 방은 현재 독채 펜션의 바탕이 됐다. 장승을 구경 온 손님들이 방에 묵고 싶다고 해 한두 번 빌려주다가 결국 방을 늘리게 됐던 것. 어쩌면 우리네 토속신앙처럼 장승들이 마을에 길한 기운을 불어넣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볼거리 가득한 ‘테마펜션’ 현재는 3000여 점의 장승 외에도 다양한 조각품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장승들과 조각들을 보는 데에도 1박2일이 부족할 정도다. 비가 오지 않으면 연중무휴로 펼쳐지는 빛 축제 또한 볼거리다. 1만 평 조각공원에 나무와 길을 따라 밤을 밝히는 조명이 켜지면 오로라를 가까이 보는 듯 신비로운 빛이 공원 전체를 감싼다. 또 가장 높은 석등으로 한국 기네스 기록에 등재된 마야불 석등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현재 세계 기네스 등재도 추진 중이다. 장승마을에선 공원을 둘러보고 숙소로 가야 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분리된 독채 펜션에서 우리 일행끼리만 특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바비큐 공간도 별도로 이용할 수 있으며, 바비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숙소에서 바로 구입도 가능하다. 바비큐가 아닌 식사도 따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숙소 안에서 취사도 가능하기 때문에 일행끼리 숙소 안에서 음식을 해서 즐기는 것도 문제없다. 카라반은 편하고 깔끔하게 야영을 하면서 텐트 캠핑의 매력을 살짝 느껴볼 수 있는 방법이다. 숙박에 필요한 것들이 갖춰져 있는 카라반을 이용하면서, 그 바로 앞에서 캠핑 문화를 즐길 수 있다. 캠핑 붐을 거치면서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숙박 방식으로 카라반이 떠올랐다. 다른 캠핑장과 달리 장승마을에서는 공원과 음식을 즐기면서 카라반에서 숙박을 할 수 있어 가족 단위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빛 축제에서 라이브 공연까지 장승마을의 중심은 분명히 3000여 장승들과 조각품들이지만 다른 즐거움들도 그에 못지 않다. 매일 밤 펼쳐지는 빛 축제를 비롯해 주말이면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 여름에 설치되는 수영장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는 노래자랑 무대가 펼쳐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고양이가 많은 곳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고양이가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꼽히는 만큼, 고양이들이 알려질수록 젊은 세대의 발길도 늘어나는 추세다. 장승마을 측에 따르면 수백 마리가 공원 곳곳에 영역을 잡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산을 끼고 있어서 뱀과 쥐의 출몰이 잦았지만 고양이들이 자리를 잡은 뒤로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처음 공원이 조성되고 펜션이 시작되던 것처럼, 고양이들의 등장도 장승의 길한 기운이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이 외에 편의점과 세미나실, 운동장 등 잘 갖춰진 부대시설도 장승마을의 특징이다. 이 때문에 휴양이 아닌 회사 워크숍 같은 행사에도 유용한 공간이다. 대학생 MT나 OT 등 단체행사 장소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서 재배한 지역 농산물을 사용하는 음식도 보통 수준이 넘는다. 정태기 객원기자 jtk3355@seoul.co.kr
  • 경주 남산 ‘무단 분묘 이전’ 지지부진…국립공원공단 몸부림 역부족

    경주 남산 ‘무단 분묘 이전’ 지지부진…국립공원공단 몸부림 역부족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남산에 공동묘지처럼 조성된 분묘를 언제까지 이장(移葬) 할꼬’ 국립공원공단이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남산에 공동묘지처럼 조성된 분묘 이장을 놓고 몸부림 치고 있다. 28일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2011년부터 경주 남산지구에 조성된 분묘 6200여기를 대상으로 이장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립공원이자 사적지이기도 한 남산지구 문화 및 생태경관 복원을 위한 절박한 사업으로 판단됐기 때문. 국보 312호인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지 삼층석탑 등 보물급 문화재 13점 등 문화유적 672점(절터 147곳, 불상 118기,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이 곳곳에 산재한 경주 남산은 예로부터 천하 명당(名堂) 자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암매장 등 분묘가 마구 조성되면서 문화유적들이 훼손될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사업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지난해까지 8년간 국비 등 25억 5000만원 투입해 700여기의 분묘를 이장하는데 그쳤다. 전체의 11.3%에 해당된다. 공원공단의 분묘 이장 사업에 대한 정부 및 국민들의 낮은 관심으로 공단의 적극적인 예산 확보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해서다. 이 사업은 매년 희망자에 대해 기당(단장, 합장, 삼합장 등 매장 방식에 따라) 200여만~500여만원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올해는 5억원을 들여 분묘 125기를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이다. 현재 경주국립공원사무소(054-778-4111)에서 신청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주 남산 분묘의 체계적인 정비와 관리에 적극 나서야 할 문화재청과 경북도, 경주시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비판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등은 2014년부터 뒤늦게 분묘 이전 사업에 참여해 올해까지 5년간(2017년 제외) 7억 8000만원 지원에 불과했다. 특히 남산지구 국립공원 전체 면적(21.85㎢)의 45%를 차지하는 9.86㎢(일부 사적지 포함)를 보유한 경북도는 고작 7600만원에 그쳤다. 이런 추세라면 남산 전체 분묘 이전에는 대략 70년 정도가 걸릴 전망이다. 경주지역 문화재 관련 단체들은 “문화재청과 경북도, 경주시, 국립공원공단이 국비 확보에 공동 대처하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남산은 1969년 12월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와 1985년 사적 제311호로 지정돼 관련 법에 따른 발굴 등을 제외한 각종 행위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안동·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2030 세대] 양갱을 들여다보자면/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2030 세대] 양갱을 들여다보자면/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어렸을 땐 뭐든 단정해 버리기 쉽다. ‘나름 다르다’, 이런 말은 밋밋하고 설득력이 없다.방학 때 집에 돌아오면, 한국과 외국 생활을 비교했다. 한국에선 무엇이든 신속하고 편리하고 정확하다. 길도 시원스럽다. 영국은 오래되고 낡아 불편하지만 아름답다. 풀과 나무는 짙푸르고 화려하다. 반면 한국의 색은 왠지 어둡다. 어린 나에겐 이 점이 특히 거슬렸다. 유럽의 색은 다채롭다. 사람들도, 심지어 하늘도, 잔디도 그렇다. 풀벌레도 자지러지지 않고 점잖게 우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건 서양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대학에서 들었던 ‘동양의 미와 예술’ 같은 강의도 나의 이런 억지를 막지 못했다. 그럴 즈음 읽었던 책이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다. 나쓰메는 나처럼 영국 유학 경험이 있었다. 정확히 100년 전이다. 나쓰메도 동서양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박쥐처럼 쥐와 새 사이를 오갔다. 일본은 서구화되고 있었고, 나쓰메는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동양의 미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양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도 한다. ‘서양 과자 중에서 이토록 쾌감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크림의 빛깔은 약간 부드럽기는 해도 다소 답답하다. 젤리는 언뜻 보석처럼 보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어 양갱만큼의 무게감이 없다. 백설탕과 우유로 오층탑을 세우는 짓은 언어도단이다.’(송태욱 역) 동양의 아름다움을 처음 나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 준 글이었다. 감각적인 미,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있었다. 양갱에도 있고, 양갱과 같은 어두움을 품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정원 석등 위에 자란 이끼에도 있다. 양갱 하나로 나쓰메는 내가 동양의 색깔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 놓았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축을 다시 잡았듯이. 서양의 색이 발랑 드러내놓은 색이라면 동양의 색은 감추고 여민 색이다.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양갱을 먹을 때마다 나는 나쓰메를 떠올리고 동양의 색을 음미하게 된다. 동시대의 일본의 또 다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동양의 색과 어둠을 얘기했다. ‘음예예찬’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말한다. 일본인은 원래 외광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의 맛을 선호하고 즐겼다. 거무스름한 그림자. 그게 일본인의 색이라는 거다(혹은 동양의 색이다). 서양식 화장실은 하얀 타일로 바닥을 깔고, 밝은 전등불로 밝히는데 일본의 화장실은 어둡다. 굳이 화장실이 훤히 밝아 민망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겠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또한 옻칠한 검은 그릇에 담긴 된장국의 깊은 색을 얘기한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이게 내 ‘색’이다 말하는 색은 부담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듣고 있다. 이 독일 음악보다 내 마음을 움직일 음악은 없을 듯하다. 동서양을 너무 따지면 민망하다.
  •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건축물은 시간과 공간을 담는 그릇입니다. 건축물을 둘러본다는 것은 그 안에 쌓인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헤아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의 건물에는 개항 후부터 지금까지 130여년의 시공간이 담겨 있습니다. 모르고 보면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과 서양의 르네상스식 건물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1883년 개항 당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 했던 열강들의 세력 다툼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이 읽힙니다. 적산가옥이 늘어선 거리를 거닐자 오늘과 당시의 시간이 겹쳐집니다. 세월에 빛바랜 건물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또 다른 기억이 덧씌워지는 중인 현재를 마주합니다.뚜우우우. 뱃고동이 울린다. 배에서 치파오를 입은 중국 상인이 내린다. 부두에는 쌀가마니를 발밑에 내려놓은 나가사키 상인들이 모여 있다. 1883년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하자 한적하던 어촌에 외국의 신문물이 쏟아진다. 외국인 전용 거주지, 바다 건너온 물건을 파는 가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역회사와 호텔이 들어선다. 일본은 조선 수탈을 위한 방편으로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등을 세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일대는 인천의 개항기를 간직한 건축물로 가득하다. 거리 전체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 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인 셈이다. 인천역 부근의 인천아트플랫폼부터 신포국제시장 인근의 답동성당까지 찬찬히 걸으면 반나절도 걸리는 거리지만 핵심 장소는 일본풍 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개항기 역사가 오롯이 담긴 거리의 건물은 오늘날 박물관, 아트플랫폼, 카페로 변모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개항기 인천의 모습을 겹쳐 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여행의 출발점은 인천아트플랫폼이다. 세월이 깃든 건물과 아티스트의 예술적 기운이 만난 공간이다. 인천시는 1888년에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해 개항기와 1930~40년대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국내와 일본의 물류 운송을 담당하던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해방 후에 지어 최근까지 대한통운 창고였던 건물은 공연장, 1940년대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금마차다방은 생활문화센터로 재단장했다. 전시장, 공연장, 창작 스튜디오 등 총 13개 동이라 규모가 상당하니 홈페이지에서 관심 있는 전시를 확인하고 가는 편이 좋다. 인천아트플랫폼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과거의 시공간이 펼쳐진다. ‘혼마치도리’라고 불리던 은행 거리다. 길가에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등 이국적인 석조 건축물이 나란하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을 개항기에 멀끔한 외국 건축물이 들어섰으니 조선인이 느끼는 웅장함은 지금의 수십 배였으리라. 인천개항박물관은 당시 일본 제1국립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였다. 은행의 설립 목적은 조선 수탈이었다. 은행은 조선에서 나는 금괴와 사금을 사들였고 인천항에 들어오는 무역 상인에게 해관세를 받는 업무도 병행했다. 개항기 인천을 갈무리하는 박물관으로 문을 연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20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우편제도 등 개항 후 인천으로 들어온 다양한 근대문물을 전시한다. 건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크다. 좌우대칭을 이룬 르네상스식 석조건물 내부는 붉은 벨벳 커튼, 아치형 창문, 샹들리에 조명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개항장 일대의 건물 모형을 한데 모았다. 이곳의 전신은 일본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이 조선 쌀을 싼값에 사서 되파는 일을 했던 나가사키 상인들을 지원하고자 설립한 금융기관이었다. 일본, 청나라 등 각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조계지 건물부터 지금은 소실된 건물, 개항장 거리에 현존하는 건물까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계단으로 나뉜 일본 조계지와 차이나타운 은행 거리의 이국적인 분위기는 일본식 목조주택이 늘어선 거리, 일본풍 거리로 이어진다. 인천 중구청 앞은 개항기 일본인이 거주하던 일본 조계지였다. 가옥은 점포가 딸린 2층 목조주택과 나가야식(일본식 다가구주택) 1층 목조주택이 대부분이다. 목재 골조, 반듯한 직사각형 창, 검은 기와의 어울림은 언뜻 봐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거리에는 조계지 시절에 지어진 건물과 최근에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 뒤섞여 130여 년 전의 아픔을 말없이 전해준다. 건물의 역사성은 유지하되 쓰임새는 달리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일도 한창이다. 개항기 하역회사 사무실이던 건물은 2011년,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거쳐 카페 ‘팟알’로 문을 열었다. 목조 골격을 살린 카페 내부는 낮잠이 들 만큼 아늑하다. 팟알 바로 옆의 관동갤러리 역시 목조가옥의 외관을 유지한 채 갤러리가 됐다. ‘1883년 일본이 조계지를 만들자 1년 후 청나라는 반대편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한다.’ 이 역사적 사실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일본풍 거리와 차이나타운이 맞닿은 지점에 자리한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청국과 일본 조계지의 경계가 되는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중국식 건물, 오른쪽은 일본식 건물이다. 계단 양쪽 석등도 모양이 다르다. 30여개 계단 끝자락에는 중국 칭다오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다. 뒤를 돌면 차이나타운의 오색찬란함과 일본풍 거리의 차분함이 한눈에 담기고 저 너머 인천항이 펼쳐진다.●배다리 헌책방 골목 읽혔으나 누군가에게 다시 읽히길 기다리는 책을 우리는 ‘헌책’이라고 부른다.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빛바랜 책이 모인 거리다. 헌책방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 절판된 책을 찾아 헤매는 이, 오래된 책의 종이 냄새에 파묻히고 싶은 이를 품어 주는 골목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배다리에 헌책방 골목이 들어선 것은 한국전쟁 후. 남루한 마을에 책을 쌓은 리어카가 모이고 책이 주는 지혜에 목마른 이들이 몰려들며 헌책방이 하나둘 생겨났다. 한때 헌책방이 40여곳까지 늘며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 등 다섯 곳만이 남아 배다리를 지킨다. 45년 전 6.6㎡(두 평) 남짓 쪽방에서 시작한 아벨서점은 오늘날 헌책방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내년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주인은 찾는 책이 없어 헛걸음하는 손님이 없도록 ‘어느 책방이 문을 닫는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것이 4만여권, 창고에는 그의 세 배가 넘는 책이 쌓여 있다. 도서 검색대 대신 책장마다 ‘프랑스 문학’, ‘여행’ 등의 견출지가 붙어 있고 비범한 기억력의 주인이 책을 찾아준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시 낭송회는 어느덧 100회를 넘겼다. 최근에는 인천 출신의 이설야 시인이 시를 읊었다. ‘살아 있는 글들이 살아 있는 가슴에.’ 아벨서점 간판 옆에 붙은 글귀다.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며 살아 있는 글과 정신을 호흡하는 곳,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다.●동심 한 조각을 되찾다, 송월동 동화마을 동화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진 어른이 됐다. 꿈속에서 피터 팬과 같은 편이 돼 후크 선장을 물리치던 때도 있었는데. 차이나타운의 북쪽 끝과 맞닿은 송월동 동화마을은 고마운 공간이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동화 속 주인공들을 되살려 냈으니 말이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세계 명작 동화를 테마로 조성됐다. 입구의 아치형 조형물을 지나면 도로시 길, 빨간 모자 길, 전래동화 길 등 열한 가지 테마의 골목이 발길을 붙잡는다.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이 담벼락에 들어가 있는가 하면 벤치에 피터 팬이 앉아 있고 계단은 색색의 무지개다리다. 사람들은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으며 동화 속 공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개항 후 독일인이 주로 거주하며 부촌이던 송월동은 1970년대 젊은이들이 인천 주변 도시와 서울로 빠져나가며 노인만 남게 됐다. 낙후된 마을은 2013년 중구청의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통해 동화마을로 되살아났고 인천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알록달록한 동화 세상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주민들의 생활상과 동화 속 장면이 뒤얽힌 면면이다. 가스계량기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의 몸통이고, 전봇대는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다. 가스 사용량을 재는 생활은 현실이고 동화는 비현실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되는 순간은 동화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 준다. 전봇대에서 하룻밤 새 하늘까지 자라던 콩나무를 상상할 때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팍팍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2) →가는 길: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인고속도로와 인천대로를 지난다. 경인고속도로 신월IC 통과 후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17㎞가량 이동한다. 인천항사거리에서 제2외곽고속도로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수인사거리에서 중구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인중로와 제물량로218번길을 지나 신포로23번길을 따라가면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의 시작점, 인천아트플랫폼이다. →맛집:인천의 맛을 이야기할 때 짜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식 짜장면은 1883년 인천 개항 후 중국인들이 인천 부두 근로자에게 국수에 볶은 춘장을 비벼 먹는 음식을 팔며 시작됐다. 붉은 간판과 홍등이 수놓은 거리, 차이나타운의 만다복(773-3838)은 하얀 짜장으로 유명하다. 취향대로 고기장과 육수를 넣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동인천 삼치거리에는 삼치와 막걸리를 파는 생선구이 집 10여개가 모여 있다. 인천집(764-6401)은 삼치구이와 조림을 반반씩 맛볼 수 있는 ‘반반 삼치’가 대표 메뉴다. 쌀밥에 겨울이 제철인 삼치 한 점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잘 곳:인천중구청 뒷길에 자리한 호텔아띠(772-5233)는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등과 가까워 인천의 대표 여행지를 둘러보기 수월하다. 베니키아 월미도 더 블리스 호텔(764-9000)은 월미 문화의 거리에 자리한 호텔이다. 비즈니스센터와 세미나룸이 있어 출장 시 묵기 편리하며 객실에서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한눈에 내다보인다.
  • 육로로 내금강… DMZ 레저촌 ‘평화 관광’ 길 트는 강원 접경지

    육로로 내금강… DMZ 레저촌 ‘평화 관광’ 길 트는 강원 접경지

    강원도 평화(접경)지역 자치단체들이 남북 교류사업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화천·양구·인제·철원·고성군이 남북한 육로 루트 개설에 나섰고, 강원도환동해본부가 동해 수산자원 개발의 극대화에 팔을 걷어붙였다. 자치단체마다 다양한 남북 교류사업의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며 지혜를 모으고 있다. 내금강 육로 관광 루트 개발(양구·인제)에서부터 평화의댐~금강산댐을 잇는 수로관광 개발(화천), 동해 공동 어로조업(환동해본부)까지 지역 특성에 맞는 교류 사업들을 면밀하게 준비하고 있다. 강원도 내 평화(접경)지역 지자체들이 구상하는 남북 교류사업들을 8일 들여다봤다.양구, ‘내금강 가는 길’ 최단 노선 개척 남강원도 최북단 내륙에 깊숙이 자리한 양구군은 최단 노선 ‘금강산 가는 길’ 육로 루트에 적극적이다. 양구 월운리~북한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31호선이 연결되면 최단 코스로 장안사가 있는 내금강으로 곧바로 통하기 때문이다. 국도 31호선은 현재 양구군 동면 월운리까지 통행 가능하고, 두타연 북방 4㎞ 지점까지 도보 접근이 허용된다. 국도 31호선은 부산 기장군 일광면에서 북한 함경남도 안변군 위의면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이 도로는 일본 강점기에 건설돼 강원도와 경북도에서 수탈한 산림과 광물, 전쟁 물자를 운반하던 임산업 도로였다. 양구군은 내금강 육로 관광 루트 개발과 함께 동서고속철도와 연계한 내금강까지의 고속철도 연결, 남북 농업교류 협력, 북한 금강군과 자매도시 체결, 평화지역 교류협력 등도 계획한다. 동서고속철도 건설 계획과 연계해 내금강까지 이어지는 철도건설도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조인묵 양구군수는 “금강산 가는 길인 국도 31호선이 조기에 연결돼 내금강 관광길이 열리면 양구는 장안사 등 내금강으로 이어져 관광객들을 맞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화천, 북한강 평화 물길 58㎞ 개발 화천군은 파로호~평화의댐~북한 금강산댐~내금강 평화물길 관광 루트 개발(약 58㎞)에 나섰다. 1단계 사업으로 파로호에서 평화의댐까지 23㎞ 권역에 민간자본을 유치해 유람선 운행과 수상 레포츠타운 조성, 인근 평화관광 자원과의 연계 등을 구상 중이다. 2단계인 평화의댐에서 금강산댐까지 약 35㎞ 구간 개발은 남북 교류협력과 균형발전, 관광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국책사업에 반영할 계획이다. 1단계 사업을 위해 연말까지 기본 여건 분석과 민간유치 사전 조사에 나선 후 내년 타당성 검토와 기본계획 수립 등의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2단계 사업은 강원도와 통일부, 환경부 등 중앙부처 및 한국수자원공사 등과 연내에 본격 협의를 이어 나갈 예정이다. 금강산 물길을 통한 수로 관광이 실현되면 평화의댐, 세계 평화의 종공원, 국제평화아트파크, 진행 중인 백암산 평화생태특구 등과 함께 국내 최대 평화관광단지를 조성할 수 있게 된다. 최문순 화천군수는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 강원도와 협의해 평화관광을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며 “군청에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대외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등 꼼꼼하게 준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인제, 비무장지대 평화생명특구 조성 인제군은 평화지역 개발사업으로 비무장지대(DMZ) 평화생명특구 조성, 금강산 가는 길 지방도 승격, DMZ 생태 레저촌 조성, 평화지역 생물자원 사이언스파크 조성을 비롯해 35개 사업 과제를 발굴했다. 이들 사업은 강원도와 경기도 내 다른 평화지역 시·군의 교류사업과 각축전이 예상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인제군 특성에 맞는 사업을 선정할 예정이다. 평화지역 특별 도시재생사업, 평화지역 경관 조성 마스터플랜 등 실·과·소 협업을 통해 선점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하늘내린 키즈파크 조성, 원통전통시장 주차장 구축사업을 비롯한 30개 신규사업과 인제문화원 신축 등 32개의 계속사업을 포함, 내년도 국비 1400억원 확보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기대도 높다. 최상기 인제군수는 “남한의 설악산과 북한의 금강산을 연계한 관광사업 개발이 재개돼 활기를 띠게 되면 내설악을 낀 인제 지역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성, 대북 부서 창설·산림협력센터 구상 고성군은 남북 산림협력 전진기지를 위해 남북산림협력센터를 구상하고 있다. 남북산림협력센터는 DMZ 산불 예방 및 진화, 북한 산림 황폐지 복구, 조림용 묘목 생산과 지원, 산림 병해충 방제, 산림전문가 양성 등 산림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북한과 교류할 계획이다. 부군수를 단장으로 대북사업을 전담할 남북 교류협력 추진단도 만들었다. 추진단은 교류협력분과, 기반조성분과, 평화발전분과 등 3개 분과로 구성됐다. 교류협력분과는 분야별 실현 가능한 사업 발굴,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 지도와 연계한 고성군 발전 로드맵 구상, 기반조성분과는 통일경제특구 모델 제시 및 적합지 조사, 평화발전분과는 강원도 평화지역발전본부 사업 적기 추진 및 내년 신규사업 발굴, 평화지역 경관 조성 마스터플랜 수립, 평화지역 시설 현대화 등을 전담한다. 산림공무원 출신인 이경일 고성군수는 “DMZ, 관광, 농업, 산림, 해양, 사회간접자본(SOC), 평화 등 비교 우위에 있는 분야와 평화지역 발전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철원, 궁예 태봉국도성 발굴·복원 기대 철원군은 ‘태봉국도성 발굴·복원사업’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지난달 평양 정상회담 부속합의에 포함되고 조사가 시작되면서 탄력을 받고 있다. 국방부에서도 “남북 군사 당국은 남북 간 문화교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지뢰 제거, 출입 및 안전보장 등 군사적 보장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태봉국도성은 궁예가 904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풍천원에 토축으로 외성 4370m, 내성 577m를 쌓고 그 안에 궁전을 건립해 통치한 곳으로 성내의 어수정과 석등은 일제 말까지 보존됐으나 6·25 전쟁 때 모두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태봉국 수도였던 철원군은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발굴·복원사업을 위한 기초연구를 진행하고 올 2월 태봉학회를 창립했다. 이현종 철원군수는 “태봉국도성은 남북공동 발굴이 실현된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태봉국 궁예왕의 웅지가 1100년이 지난 지금 남북한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道, 환동해본부 ‘평화의 바다 공원’ 추진 강원도환동해본부는 이미 남북 수산 교류협력사업 추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동해 평화의 바다 공원 조성 등 다양한 방안을 내놨다. 남북 접경 해역에 ‘평화협력 특별 교류지대’를 설정하고, 남북 수산자원 공동조사와 공동어로 조업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바다 목장화를 비롯해 명태와 털게, 해조류(다시마) 등 해양자원 회복에 함께 나서고 남북 접경지에 어촌 평화·상생 특화마을을 조성하는 등 민간 차원의 어촌 특화 및 복합해양관광 사업 방안도 제시했다. 중국 어선의 북한 수역 싹쓸이 조업으로 인한 피해 방지를 위해 강원지역 어선의 북한 동해 수역 입어를 바란다. 박종완 환동해본부 어업진흥과 주무관은 “동해에서 평화의 바다가 실현되면 남북 공동어로도 곧 이뤄질 것으로 본다”며 “강원도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사업들을 구체화해 나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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