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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가탑서 사리 46과 수습

    석가탑서 사리 46과 수습

    국보 21호인 불국사삼층석탑(일명 석가탑)에서 이미 확인된 사리 1과(顆) 외에 45과가 추가로 확인돼 모두 46과가 수습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달 29일 석가탑에서 사리 45과를 추가로 수습했다고 7일 밝혔다. 지난달 2일 수습돼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이송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탑 안에 넣는 공양구)에 봉안돼 있던 것이다. 유리제사리병(복제품: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 때 파손)에서 44과, 목제사리병에서 1과가 나와 모두 45과를 수습했다. 지난달 2일 은제사리호(銀製舍利壺) 내의 은제사리합(盒)에서 수습돼 불국사 무설전에 모신 1과를 합하면 석가탑 해체·수리 과정 중 수습된 사리는 모두 46과다. 그러나 사리의 수는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 때 수습된 것보다 2과가 부족하다. 당시 사리장엄구 안에는 유리제사리병 46과, 은제사리합 1과, 목제사리호 1과 등 모두 48과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고려 초 정종 4년(1038년)에 쓰인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에 유리제사리병에 47과의 사리가 들어 있다고 기록됐을 뿐 은제사리합과 목제사리호에 대한 기록이 없어 1038년 이후 최소 한 차례 이상 석가탑이 수리됐을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경주에서 1000여년 만의 전면적 해체·수리를 진두지휘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1966년 석가탑을 해체·수리한 뒤 당시 불국사 주지 스님이 재봉안하는 과정에서 유리제사리병을 떨어뜨려 병이 파손되고 사리는 흩어졌는데 이때 2과를 마저 수습하지 못한 것 같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수습한 사리를 석탑에 재봉안하기 전까지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내년 3월까지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광화문광장에 불 밝힌 ‘석가탑등’

    광화문광장에 불 밝힌 ‘석가탑등’

    ‘부처님 오신날 봉축위원회’가 오는 5월 17일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연등회의 시작을 알리는 석가탑등 점등식을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졌다. 전통 한지 등으로 제작한 석가탑등은 18m 높이로 불국사 삼층석탑을 재현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대각개교절·석가탄신일 앞두고 원불교·조계종 수장 ‘공존·상생’을 말하다

    대각개교절·석가탄신일 앞두고 원불교·조계종 수장 ‘공존·상생’을 말하다

    오는 28일은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를 창교한 대각개교절이다. 그런가 하면 다음 달 17일은 불교계 최고의 축일인 불기 2557년 부처님오신날이다. 원불교와 불교 조계종의 최고 행정수반인 남궁성 교정원장과 자승 총무원장이 대각개교절과 부처님오신날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나란히 대국민 메시지를 전했다. 두 수장의 간담회 내용을 정리한다.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강자는 약자 돕고, 약자는 강자 배워야” “이 세상엔 항상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둘이 대립하면 세상이 불행에 빠지는 만큼 강자는 약자를 이끌어주고, 약자는 강자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요” 지난 15일 전북 익산시 총부에서 기자들을 반갑게 맞은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우선 소태산 대종사의 초기법문 ‘강자약자 진화상요법’(强者弱者 進化上要法)을 소개한 뒤 “결코 갈등을 억압과 투쟁으로 풀지 말 것”을 거듭 강조했다. “약자는 강자를 투쟁 대상으로 삼을 게 아니라 인정하고 장점을 흡수할 때 진정 강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또 강자는 약자를 앞에서 끌어줘야 그 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이 시대에 원불교 대각개교절의 의미는 뭘까. “우리 모두가 어디에 있든 은혜로운 관계 속에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게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윈윈과 상생이야말로 대각개교절에서 새길 수 있는 가장 큰 의미란다. 그래서 원불교의 정신을 세상에 더 넓게 펴기 위해 2015년 창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원불교 경전을 세계 10개 국어로 번역 중이라고 한다. “원불교 교단 발전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을 살리는 게 장기적으로 원불교를 발전시키는 길이라 믿습니다. 교정원장은 특히 요즘처럼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시류와 시대를 읽되 편승하지 말고, 변화하는 시대가 가져올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고 귀띔했다.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선 “비단 남북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주변국과 공조해 풀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남북 상황이 긴박해도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대화로 문제를 풀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협상도 어떤 관계도 서로 이롭고 윈윈하는 방향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이른바 ‘자리이타’. “세상의 삶 속에서 은혜롭게 살기 위해 상대방에게 항상 감사하다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표현하다 보면 상호 은혜로운 관계로 바뀐다”고 힘주어 말했다. 원불교 수장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최근 성균관장의 구속 사태는 어떨까. “무엇보다 종단 내부의 화합을 이루지 못한 탓이 큽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언제나 진리 앞에서 긴장하는 마음이 식어선 안 될 터인데 교단 성장에 집착하거나 목표지향적인 종교가 된다면 과부하가 걸리기 마련입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유연한 남북관계로 국민 안심시키길” “지금 남북한이 갖고 있는 통일 인식은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양쪽 모두 평화를 강조하지만 그 개념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남과 북이 아무리 인식이 다르다 해도 우리 쪽에서는 언제까지나 평화를 공존과 상생의 개념으로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18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2층에서 기자들과 만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먼저 인사말을 통해 최근 초긴장 상태에 있는 남북관계를 의식, 단호한 어조로 평화론을 폈다. “남의 존재를 서로 이해하는 관계 속에서 이질감을 극복하고 동질감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처럼 ‘장군멍군’식의 치고받기보다는 유연한 입장을 견지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를 관심 있게 보았다”는 자승 스님. 새 정부의 중점과제 중 문화 융성에 특히 주목했다며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문화 융성을 이루려면 전통문화와 근대문화를 잘 아울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새 정부가 가장 중시하는 미래창조과학 중 창조야말로 불교에서 보자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라며 고정관념을 바꿔 새로운 발상을 일으킬 때 참다운 창조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의 주제 표어 ‘세상에 희망을 마음에 행복을’은 무슨 뜻에서 택한 걸까. “지금 우리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요. 최근 초긴장 상태의 남북관계를 포함해 양극화며 세대·계층 간 갈등 등 뭣 하나 시원한 게 없지요. 누구나 힘들고 살기 힘든 지금 진정한 마음의 행복을 다 함께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일상과는 괴리된 추상적 행복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현실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상태, 그 마음의 행복은 바로 공존과 상생의 화합정신에서 찾아질 수 있단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는 오는 23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있을 점등식을 시작으로 열린다. 광화문광장에 불을 밝힐 석가탑등은 문화유산 보호의 중요성과 함께 해체 수리 중인 석가탑의 원만 복원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통일신라의 화쟁사상을 상징하기도 하는 석가탑에 불을 밝혀 한반도 평화를 통한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것이다. 그 주변에 놓일 동자·동녀는 바로 국민의 희망과 행복을 뜻한다고 한다. “부처님오신날은 이제 더 이상 불교와 불교 신자만의 뜻깊은 날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는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함께 되새겼으면 합니다. 더불어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성찰하고 이웃과 모든 생명들에 대한 동체대비를 실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석가탑 속살 47년만에 세상에…

    석가탑 속살 47년만에 세상에…

    국보 21호인 불국사 서쪽 삼층석탑(일명 석가탑). 불국사 스님들의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2일 오후 2시, 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처럼 덮은 돌)을 기중기로 들어 올려 해체했다. 1000년 만의 해체복원 사업이자, 1966년 도굴 미수로 드러난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뒤 47년 만이다. 이날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결과 확인된 사리는 1과(顆)였다. 석가탑 해체 수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이 옥개석을 들어 올리자 탑신(塔身)에 들어 있는 41㎝x41㎝ 정사각형의 사리공(사리를 모시는 공간)이 드러났다. 깊이는 19㎝이다. 비단 보자기가 덮여 있는 사리공이 드러나자마자 해체를 지휘하던 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산화하지 않도록) 유리를 덮고 가습기를 가동하라. 비닐 포장을 빨리 둘러라”고 소리를 질렀다. 47년 만에 외부에 드러난 붉은색이 도는 보자기 밑에는 바닥이 없는 구멍을 뚫어놓은 철제 덮개가 있고 그 안에 보석장식이 달린 금동 사리외합이 향나무 조각에 쌓여 있었다. 사리가 드러난 오후 4시 40분 경엔 돌연 천둥이 치고, 우박과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석가탑은 일부 석재에서 균열 등이 발견돼 2010년 12월 16일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를 결정했고, 지난해 9월 해체를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상륜부(上輪部·찰주 위에 석물로 된 장식물)가 모두 해체됐고, 최근 3층 옥개석도 해체됐다. 이날 2층 옥개석을 열고,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것이다. 석가탑의 사리공 존재가 밝혀진 것은, 1966년 사리공의 사리장엄 유물을 노린 도굴범들 덕분이다. 도굴범들은 6t에 이르는 2층 옥개석을 밀어내고 탑신에 들어 있는 사리함을 훔치려다 탑만 훼손하고 미수에 그쳤다. 이에 석가탑의 해체수리를 결정했으나,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떨어뜨리는 등 사고가 발생하자 포기했다. 당시 2층 탑신 사리공에서는 사리와 함께 금동제 외합, 은제 내합,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 고려 초인 정종 4년(1038년)에 쓰여진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도 발견됐다. 이후 석가탑 안에 재봉안된 은제 사리호와 목제 사리병을 제외한 28건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현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따라서 이날 모습을 드러낸 사리장엄구는 사리와 몇몇 유물을 제외하면 47년 전에 넣은 복제품이다. 당시 발견된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47과가 유리제 사리병에 들어있다고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1966년 사리함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유리제 사리병에는 46과의 사리만 존재했고, 사리가 1과씩 들어있는 은제사리호와 목제사리호가 각각 발견돼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모두 48과이다. 배 실장은 “따로 담긴 2과의 사리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볼 때 1038년 이후 최소 1차례 이상 더 수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현재 확인된 사리는 은제 사리합에 들어 있던 1과다. 목제 사리합은 열리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리제 사리병에 들어 있던 46과(추정)는 서로 달라붙어 있어 추후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정밀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 배 실장은 또 “은제 사리호와 목제 사리병, 그리고 사리를 다시 탑 속에 넣어 재봉안할지 여부는 더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국사는 수습한 사리를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내년 3월까지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원년(740)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발원하면서 세웠고, 고려 초 현종 시대에 경주 일대를 덮친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자 고려 현종 15년인 1024년 해체 수리된 뒤 1000년을 버텼다. 문화재연구소는 석가탑의 기단부분을 6월까지 해체한 뒤, 내년 6월 무렵 복원을 완료할 예정이다. 이번 해체 복원에는 총 30억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됐다. 경주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석가탑 사리공 노출 …47년만에 속살 드러내다

    석가탑 사리공 노출 …47년만에 속살 드러내다

    국보 21호인 불국사 서쪽 삼층석탑(일명 석가탑). 불국사 스님들의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2일 오후 2시, 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처럼 덮은 돌)을 기중기로 들어 올려 해체했다. 1000년 만의 해체복원 사업이자, 1966년 도굴 미수로 드러난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뒤로 47년 만이다. 이날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결과 확인된 사리는 1과(顆)였다.  석가탑 해체 수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이 옥개석을 들어 올리자 탑신(塔身)에 들어 있는 41㎝x41㎝ 정사각형의 사리공(사리를 모시는 공간)이 드러났다. 깊이는 19㎝이다. 비단 보자기가 덮여 있는 사리공이 드러나자마자 해체를 지휘하던 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산화하지 않도록) 유리를 덮고 가습기를 가동하라. 비닐 포장을 빨리 둘러라”고 소리를 질렀다. 47년 만에 외부에 드러난 붉은색이 도는 보자기 밑에는 바닥이 없는 구멍을 뚫어놓은 철제 덮개가 있고 그 안에 보석장식이 달린 금동 사리외합이 향나무 조각에 쌓여 있었다. 사리가 드러난 오후 4시 40분 경엔 돌연 천둥이 치고, 우박과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석가탑은 일부 석재에서 균열 등이 발견돼 2010년 12월 16일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를 결정했고, 지난해 9월 해체를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상륜부(上輪部·찰주 위에 석물로 된 장식물)가 모두 해체됐고, 최근 3층 옥개석도 해체됐다. 이날 2층 옥개석을 열고,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것이다.  석가탑의 사리공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1966년 사리공의 사리장엄 유물을 노린 도굴범들 덕분이다. 도굴범들은 6t에 이르는 2층 옥개석을 밀어내고 탑신에 들어 있는 사리함을 훔치려다 탑만 훼손하고 미수에 그쳤다. 이에 석가탑의 해체수리를 결정했으나,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떨어뜨리는 등 사고가 발생하자 포기했다. 당시 2층 탑신 사리공에서는 사리와 함께 금동제 외합, 은제 내합,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 고려 초인 정종 4년(1038년)에 쓰여진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도 발견됐다. 이후 석가탑 안에 재봉안된 은제 사리호와 목제 사리병을 제외한 28건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현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따라서 이날 모습을 드러낸 사리장엄구는 사리와 몇몇 유물을 제외하면 47년 전에 넣은 복제품이다.  당시 발견된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47과가 유리제 사리병에 들어있다고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1966년 사리함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유리제 사리병에는 46과의 사리만 존재했고, 사리가 1과씩 들어있는 은제사리호와 목제사리호가 각각 발견돼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모두 48과이다. 배 실장은 “따로 담긴 2과의 사리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볼 때 1038년 이후 최소 1차례 이상 더 수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현재 확인된 사리는 은제 사리합에 들어 있던 1과다. 목제 사리합은 열리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리제 사리병에 들어 있던 46과(추정)는 서로 달라 붙어 있어 추후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정밀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  배 실장은 또 “은제 사리호와 목제 사리병, 그리고 사리를 다시 탑 속에 넣어 재봉안할지 여부는 더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국사는 수습한 사리를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내년 3월까지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원년(740)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발원하면서 세웠고, 고려 초 현종 시대에 경주 일대를 덮친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자 고려 현종 15년인 1024년 해체 수리된 뒤 1000년을 버텼다. 문화재연구소는 석가탑의 기단부분을 6월까지 해체한 뒤, 내년 6월 무렵 복원을 완료할 예정이다. 이번 해체 복원에는 총 30억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됐다.  경주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석가탑 전면 수리… 1000년만에 속살 공개

    석가탑 전면 수리… 1000년만에 속살 공개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안뜰 서쪽에 서 있는 삼층석탑(석가탑·국보 21호)이 고려 현종 15년인 1024년 해체 수리된 이래 약 1000년 만에 전면적으로 해체해 수리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7일 경주시·불국사와 함께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해체수리 보고회’를 갖고, 탑의 상륜부 중 가장 꼭대기를 장식한 구슬 모양의 보주를 해체했다. 해체된 보주가 내려오자 이날 불국사 대웅전 안뜰에 삼삼오오 모여 석가탑의 해체의식을 바라보던 불자들과 스님, 300여명의 관람객들은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일제히 박수를 쳤다. 보주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 벼락을 맞아 파손된 채 방치됐다가 1970년 전북 남원 실상사 동서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복원해 놓은 것이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장은 “금세기 최대의 석탑수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석가탑 전체를 드러냈다가 다시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 여타 석탑 해체 복원과는 성격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배 단장은 석가탑을 해체 복원하게 된 배경에 대해 “2010년 12월 정기 안전 점검 결과 1층 탑신을 받치는 상층 기단의 뚜껑돌에서 길이 1.32m, 최대 폭 5㎜의 틈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원형인 석가탑은 상륜부의 보주 균열을 비롯해 노반 모서리 파손, 3층 우주 파손, 1층 탑신 파손, 상층기단 뚜껑돌 균열과 벌어짐 3곳 등 훼손된 곳이 수십여곳에 이른다. 석가탑은 상륜부·탑신부·기단부가 위로부터 순서대로 해체되고, 탑신 1층 중앙 사리공(舍利孔)에 있는 사리장엄구는 수습하며, 기단 내부를 채우는 돌무더기(기단 적심)도 해체될 예정이다. 기단부 밑의 땅속도 조사해 유물이 확인되면 발굴을 결정할 예정이다. 이번 해체·수리작업은 2014년 12월 완료된다. 석가탑의 조성 시기는 1966년 부분 해체해 수리할 당시 2층 탑에서 발굴된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에 기록된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고려 말에 쓰여진 것이고,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는 고려 초인 1038년 정종 4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건립 시기에 관련해서는 중수기가 더 믿을 만하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석가탑은 고려 현종 15년(1024)에 해체 수리된 이래 지진피해로 정종 2년(1036)과 정종 4년(1038)에 각각 다시 수리됐다. 1966년 부분 해체·수리는 도굴범들이 두 차례나 6t이 넘는 2층 옥개석을 밀어내고 탑신(塔身)에 들어 있는 사리함을 훔치려고 탑을 훼손하면서 이뤄졌다. 당시 부분 해체되면서 중수기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발견됐다. 이번 해체 복원에는 총 30억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됐다. 경주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수학여행/최광숙 논설위원

    요즘 삼청동 길이 예전과 달리 붐빈다. 봄나들이 온 상춘객을 실은 버스가 경복궁 앞을 꽉 막고 있어서다. 벚꽃이 한창인 봄과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는 늘 있는 일이다. 택시에 갇혀 갑갑해하는데 고교생 무리들이 눈에 띈다. 멀리 지방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왔는지 선생님들이 부는 호루라기에 맞춰 삼삼오오 걷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잠시 고교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갔던 일이 떠올랐다. 불국사의 석가탑·다보탑, 첨성대 등 문화재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의 일들이 더 기억속에 살아 있다. 호시탐탐 일탈을 꿈꾸는 여고생들인지라 깜깜한 터널을 지나칠 때면 인기 있는 총각 선생님들을 상대로 점퍼를 뒤집어씌우고 마구 때리며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경복궁을 찾은 학생들이 어떤 추억을 만들어 갈지 궁금해진다. 그들에겐 꽃의 아름다움도, 문화 유적지도 눈에 크게 안 들어 올 수 있다. 가까운 친구들과 선생님과의 추억이 더 소중할 나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석공의 흔적은 역사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흐른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은 신라로 건너와 석가탑을 만들었다. 아내 아사녀는 천리길을 달려와 탑의 그림자를 기다리다 지쳐 연못에 빠져 죽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아사달은 연못에 다가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는 아내의 모습을 앞산 바위에 새기며 뼈 아픈 한을 달랬다. 그러다가 ‘아사녀! 아사녀!’를 외치며 연못에 빠졌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고 했고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했다. 석공의 슬픈 전설은 지금도 그렇게 전해진다. 이렇듯 신라시대의 석공은 많은 전설과 함께 오늘날의 ‘국보’와 ‘보물’이란 이름으로 우리들과 만나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7년 처음으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120호) 석장(石匠) 부문을 신설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석공예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때 석조각 공예가 이재순(57)씨가 국내 최초로 무형문화재 석장이 됐다. 이씨는 김진영 선생의 제자로 경복궁의 석조물을 조각한 이세욱·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는 석조각계의 대가였기에 이 계통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씨는 요즘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숭례문 복원작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성곽 복원 전체 공정 중 85%가 진행됐고 오는 7월이면 거의 끝날 예정이다. 그는 12살 때부터 돌과 인연을 맺어 올해로 석조각 인생 45년째이다. 지난 26일 오후 경기 구리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입구에는 10여m 높이의 미륵상을 비롯해 사자상, 부처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돌이지만 다들 저마다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완성품도 있었고 아직 덜된 작품도 있었지만 다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습들이었다. 꽃샘추위를 담은 바람이 잠시 밀려왔다. 작은 부처상한테 물었다. “춥지 않으세요.”라고 했더니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여.”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궁…. # 성곽 85% 복원… 옛 석공의 번뇌 읽다 그러는 참에 웃으면서 나타난 이씨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요새 무슨 일로 바쁘냐고 했더니 숭례문 복원공사 얘기가 나온다. “숭례문 성곽 복원이 85% 정도 완료됐습니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의 길이를 대부분 복원했지요. 기나긴 세월의 풍화를 읽으면서 하는 작업이 정말로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 옛날 석공들의 고뇌와 번민 등 그런 부분을 알고 그대로 재현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씨는 석공 선현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숭례문에 쌓아 올려진 돌, 그러니까 오랜 세월을 간직한 유물들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비오는 날이었다. 돌에 구멍이 있었는데 빗방울에 의해 구멍이 뚫렸다. 이 순간 이집트의 신전이 생각났다. 커다란 돌을 옮겼던 기억이었다. 정사각형의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자리 이동을 해 벽을 쌓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숭례문 돌 모양들이 아주 자연 친화적으로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돌 가운데 구멍 뚫어 옮긴 흔적 발견 “숭례문에 있는 돌들은 아무렇게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하면서 그에 맞게끔 친자연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석수(都石手)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도편수는 그동안 많이 나왔지만 도석수라는 말은 이번 복원공사에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아마 당시 도석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관리 정도로 여겨집니다. 또한 돌마다 가진 물과의 관계, 즉 비가 오면 물이 밖으로 새도록 하는 등 아주 과학적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돌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점에 눈길이 쏠렸다. 얼핏 보면 부자연스럽고 서로 맞추기도 힘들 법한데 퇴물림 형식으로 쌓아놓은 돌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씨는 그런 돌을 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묻고 또 물었다. “선조들이 어떻게 돌을 다뤘으며, 또 어떻게 생각했을 것이란 상상을 하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중간중간에 놓인 장돌들을 볼 때에는 더욱 그랬지요. 위아래에서 누르는 압력을 장돌을 통해 견디도록 하는 지혜에 참으로 경탄했습니다.”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씨는 “(방화사건 직후) 처음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화재의 기운과 접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몇몇이 피부병에 걸렸을 정도였다.”면서 하지만 다들(20여명) 숭례문 복원공사가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했다고 술회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우리는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기계적으로 손을 대는 바람에 오히려 화재나 사고 등에 대해서는 무심했습니다. 정작 보존과 관리에 대해서는 진정성 없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아마 숭례문 복원은 이런 것들을 전부 고민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 都石手가 있었음을 처음 알게 돼 이씨는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앞에 언급한 도석수라는 단어였다. 원래 도편수라는 말은 있었지만 도석수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면서 선조의 존엄성을 몸소 느꼈던 것. 또한 부석소(浮石所), 즉 지금의 채석장을 두고 돌 문화 창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특히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것을 대비해 정교하게 빗물을 흘려보내는 것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을 깨는 방법이나 돌을 다듬는 방법이 정말 과학적이며 친자연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이동시켰다는 걸 알고 놀랐지요. 대체로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사방에 밧줄을 연결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밧줄을 빼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생깁니다. 그런데 숭례문의 돌을 보면서 이런 과정까지 염려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흔들림 방지, 비 올 때 물의 흐름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를 숭례문 복원 공사를 통해 깨달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씨는 이런 점을 소중히 메모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수할 책을 준비하고 있다. “옛날에는 돌을 다루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석공들 또한 자부심이 강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돌이 안 들어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소중한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돌의 미학, 석공의 예술을 책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이씨가 그동안 제작한 작품은 2000여점에 이른다. 전국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그의 손때가 대부분 묻어 있다.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일본 덕정사, 타이완 기륭 자항기념당, 프랑스 파리 7대학 등에도 이씨의 작품이 보관돼 있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일화 한토막. 2005년 일제가 가져간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비)의 환수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재청에서 북관대첩비가 환수될 때를 대비해 좌대와 옥개석을 복원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북관대첩비는 무사히 반환돼 남한을 거쳐 북으로 돌아갔다. 이때 북관대첩비는 이씨가 복원한 옥개석을 머리에 인 채 북한 국보 193호로 지정돼 북한으로 갔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돌을 만지는 장인으로서 더없는 영광이 아니냐.”고 말한다. # 선조의 지혜 책으로 펴낼 계획도 이씨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12살 때부터 외삼촌에게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평소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팽이, 썰매 등 전통 놀이기구 제작에 솜씨를 발휘했다. 그러던중 1970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스승 김씨는 40년간 석조계에 몸담은 베테랑으로 조선 철종, 헌종 시대 경복궁의 해태상 등을 조각한 이세욱 선생과 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이씨는 스승 김씨한테 10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을 따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보수작업을 하면서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으며 그 덕분에 불교미술 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돌 분야는 할 일이 많습니다. 현대와 전통을 접목시키는 것도 중요하고요. 사실 이제야 돌을 만지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돌은 정직합니다. 화난 사람이 돌을 마주하면 돌도 화가 나 있고, 예쁘게 돌을 보면 돌 또한 예쁜 대답을 합니다. 돌에는 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도 정이 많잖아요. ” 선임기자 km@seoul.co.kr 열두 살 때부터 돌 잡아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 1호 지정 1956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12살 때 석공이었던 외삼촌에게 돌을 고르는 일을 배웠다. 문화재 공사현장을 다닌 것도 이때부터. 이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한테 돌을 다듬는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다. 전국 기능인경기대회에서 연속 2회 금메달과 함께 한국문화재기능협회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지정됐다. 1995년 타이완의 자항기념당에서 석굴암보다 더 큰 석상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현재 부도를 비롯한 석조물의 복원과 정비, 각종 석조물의 해체 및 보수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성곽의 해체 및 복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본 오사카 보암사 석가노미불(1999), 경북 영주 석륜선원 부처 진사리석탑(2000),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기하형체(1977),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소상(1983), 북관대첩비 갑석(2005) 등 2000여점이 있다.
  • “다보탑 돌사자 보기 안좋고 비바람 맞아 스님들이 옮겼다”

    “다보탑 돌사자 보기 안좋고 비바람 맞아 스님들이 옮겼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 돌사자는 인간문화재에 맡겨서 모조품 3개를 만든 뒤 진품 1개와 함께 네 모서리에 앉히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다보탑의 돌사자 역사에 누구보다 밝은 단국대 석좌교수 정영호 박사는 21일 경기도 용인 단국대에서 서울신문 기자와 만나 이렇게 강조했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문화재위원회가 만들어진 1962년 문화재 전문위원 1호로 임명돼 2003년까지 문화재위원을 지낸 우리 문화재의 산증인이다. 정 박사는 “당시 돌사자 1개만 모서리에 앉아 있었는데 밸런스가 맞지 않았고, 사람들이 자칫 돌사자 1개만 있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었으며, 석조 구조물의 훼손을 고려해 기단 중앙부로 옮기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통인 1952, 53년 서울대의 부산 피란 시절, 사범대 역사과의 답사로 불국사를 봄철에 찾았는데 그때 불국사 극락전 오른쪽 축대에 있던 돌사자를 처음 목격했다.”면서 “이미 일제 강점기에 탑에 있던 돌사자가 극락전으로 옮겨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다보탑 돌사자를 처음 본 건 언제였나. -1952년, 53년 봄철 두번 봤다. 불국사의 연화교, 칠보교를 지나 안양문에 접어들어 가면 석등 안쪽으로 축대가 있고 극락전이 있는데, 극락전에서 절을 하고 나와서 왼쪽 축대 위에 있는 돌사자를 봤다. 즉, 돌사자는 극락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잘 모셔져 있었다. →그 뒤에 돌사자를 본 것은 언제인가. -1962년 창설된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유형문화재 담당인 1분과 소속으로 자주 출장을 다녔는데 그때 기억에 돌사자가 다보탑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돌사자가 탑 기단 중앙부로 옮겨간 경위는. -문화재 전문위원 겸 숙명여고 역사교사를 하던 시절이니 단국대 교수로 옮긴 1966년 이전의 일인데, 고등학생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으로 불국사에 갔다. 그때 학생들에게 휴식시간을 20분쯤 줬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불국사 스님들이 “돌사자 1개가 탑 귀퉁이에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탑이 찌그러진 것처럼 보인다. 비바람도 많이 맞는 것 같아 옮기려고 한다.”고 하길래 “돌사자 보존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해줬다. 당시로선 돌사자 훼손을 줄이고, 안정감도 생기고, 다보탑 돌사자는 귀퉁이에 있는 1개란 오인을 줄 우려가 있어 중앙부로 옮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박사님 말을 듣고 옮겨 놓은 것인가. -스님들이 이미 옮기려고 하는데 내 생각을 묻길래 말해준 것이다. 내가 감히 불국사에 가서 이리 옮겨라, 저리 옮겨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돌사자를 기단 서쪽에 놓은 이유라도 있는가. -보통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것보단 서쪽 방향에서 많이 본다. 많이 보는 쪽에 있어야 도둑도 안 맞는다. 게다가 서쪽이어야 석가탑을 보게 된다. →돌사자가 제자리(모서리)에 있는 게 맞지 않는가. -돌사자를 중앙부에 놓아도 큰 잘못은 아니다. 1개 이상을 더 찾으면 제자리에 놓자는 얘기를 1960년대 스님들에게는 했다. →1904년 일본 학자의 기록에는 돌사자가 탑 네 모서리에 있었다고 한다. -돌사자란 원래 네 귀퉁이에 있는 법이다. 탑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리를 넣는데 부처님을 지키는 사자는 네 모서리에 앉는다. 화엄사 사자탑 등을 보면 네 모서리에 있다. →제자리에 돌사자 진품 1개를 놓고 3마리는 해외로 반출된 역사를 적어놓으면 될 일 아닌가. -석조 문화재는 놓았을 때 원위치가 아니더라도 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산성비 때문에 석조물의 보존각을 짓는다든지, 마애불의 경우 전실을 짓거나 한다. 목조와는 다르다. 석조 문화재가 어렵다는 것은 자연조건도 있고, 잘못하면 풀이끼가 나오기 때문이다. 곰팡이가 피면 퍼석퍼석해진다. 이런 이유들로 석조 문화재를 다루는 게 힘들다는 거다. →문화재청에서 다보탑 돌사자와 관련해 의견을 구해오면. -돌사자 모조품을 3개 만들어 진품과 함께 네 모서리에 앉히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모조품은 인간문화재 석장부문 이재순 같은 분들에게 맡기면 된다. 다보탑 실측 도면 같은 것도 존재하니까 그대로 조각하라고 하면 손색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문화재청은 왜 모조품을 만들어 배치할 생각을 안 했나. -모조품 만들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 위원을 50년 한 나도 사실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의 여건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3개의 진품이 더 발견되면 모조품과 바꿔치기하면 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복제 다보탑처럼 진품 다보탑에도 돌사자 4마리가 앉아 있어야 한다. 모조품 제작에 대해 학계나 불국사에서 반대할 일은 없을 거다. 글 사진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정영호 박사는 1934년 강원 횡성 출신.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를 수료하고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1962년 문화재 전문위원 1호로 위촉된 뒤 2003년까지 문화재위원을 지냈다. 숙명여고 교사를 거쳐 단국대, 한국교원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미술사학회 회장, 한국범종연구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문화상(1979년), 만해학술상(2001년)을 수상했다.
  • 박정희, 다보탑 100년 못간다 회신에 복제품 만들라 특명

    박정희, 다보탑 100년 못간다 회신에 복제품 만들라 특명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다보탑, 석가탑 복제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명으로 만들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다보탑, 석가탑이 앞으로 천년은 더 갈 수 있는지를 문화재위원회 등에 물었다고 한다.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의 회고. “간접적으로 이 같은 질문이 내게도 왔는데 당시 석조 문화재 전문가들은 ‘100년도 못 갈 것’이라는 회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은 문화재관리국에 1975년 경주박물관의 개관에 맞춰 다보탑, 석가탑 복제품을 만들어 내라는 지시를 한다. 문화재관리국은 그래서 우리 기술진에 의해 처음으로 다보탑, 석가탑을 실측했다. 정 교수는 “그전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약식으로 한 실측 도면이 있었지만 우리 손에 의한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1975년 7월 2일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이 성대하게 열린다. 박 전 대통령,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해 대학 총장 및 불국사의 월산 스님 등이 테이프 커팅을 했다. 정 교수는 “나는 문화재 위원 겸 단국대 박물관장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그 행사에 박근혜씨가 대통령을 수행해 온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경주박물관 다보탑은 실측 자료를 토대로 진품과 똑같은 크기로 제작됐으며,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배치돼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한국 고대인의 ‘통치·생활·사상’ 문자로 만나다

    한국 고대인의 ‘통치·생활·사상’ 문자로 만나다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 등 고대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문자, 그 이후:한국고대문자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일부터 11월 27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한국의 고대 문자자료 5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국보 126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연가7연명 금동불상(국보 119호), 진솔선예백장 인장(보물 560호) 등 널리 알려진 국보급 문자자료는 물론이고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과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 문서 등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문자 자료의 수용과 발전 과정을 통해 고대인의 통치, 생활, 사상을 조명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자료인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은 일본 역사민속박물관 소장품으로 석회를 바르기 전에 뜬 탁본(돌비에 종이를 대고 먹을 두드리는 것)이다. 이 탁본은 5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1차 자료인 광개토대왕비의 원모습을 전해주는 일급자료다. 지금까지 10여종의 원석 탁본이 알려졌는데, 이번에 전시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일본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했다는 설)의 근거로 삼고, 석회로 훼손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고대사 연구의 뜨거운 감자였다. 일본 정창원의 문서는 신라 호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미노국(御野國) 호적 등이다. 문자로 파악 가능한 고대인의 생활은 다양하다. 신라 궁중에서는 가오리, 돼지, 사슴, 노루, 간장, 젓갈 등을 먹었다. 백제인은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튼튼한 품종의 벼인 적미를 개발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는 한탄, 죽은 가족이 극락 왕생하기를 비는 가족들의 바람, 가뭄에 비를 애타게 기다리며 용왕에게 기도하던 절박한 심정 등 전시 자료에는 옛 사람들의 내면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다. 7세기 백제 목간(木簡·글씨를 써넣은 나무조각)에는 이자가 5할이나 되는 고리대가 존재한 사실이 나와 있다. 신라 촌락 문서에서는 뽕나무를 심고 삼밭을 일구던 농촌 백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자 수용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문방구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낙랑지역의 봉니(封泥·문서를 봉함할 때 쓴 점토)와 인장, 경주 석가탑에서 출토된 먹, 안압지에서 출토된 종이자료 등 희귀 자료와 여러 종류의 벼루 등도 전시된다. 이용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문자 자료 속에서 옛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헤아려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미술플러스]

    김관중 작가 ‘뷰티 인 코리아’ 전시회 오는 20~26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경인미술관 5전시관에 김관중 작가의 ‘뷰티 인 코리아’(Beauty in Korea) 전시가 열린다. 부석사 나무기둥, 도산서원 기와지붕, 경복궁 석조장식, 다보탑과 석가탑의 실루엣 등 전통 문화 요소에서 패션 디자인의 모티프를 따왔다. (02)733-4448. 11일까지 서향화 작가 개인전 11일까지 서울 관훈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서향화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다. 한국 전통 민화를 팝아트적인 키치풍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02)733-1333.
  • 봄맞이 풍류 여행 경북 영덕 침수정

    봄맞이 풍류 여행 경북 영덕 침수정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계곡이면 어김없이 정자 하나쯤 세워져 있기 마련입니다. 예전처럼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여는 등 풍류를 즐기는 일이 없으니 정자 자체야 거개가 쇠락했지만, 정자가 들어앉은 계곡 치고 풍경이 빼어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경북 영덕의 침수정도 그렇습니다. 시루떡을 쌓은 듯한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너른 너럭바위를 타고앉아 비췻빛 옥계계곡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원래 이름인 옥계계곡보다 침수정계곡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침수정을 품은 달산면은 영덕에서도 이름난 복사꽃밭입니다. 머지않아 만개한 복사꽃이 봄바람에 흩날릴 테고, 계곡물에 실려 오는 복사꽃잎을 따라 위로 오르다 보면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무릉도원도 열리지 않을까요. ●청송·영덕·포항 물길이 만나는 옥계리 계곡의 주인은 여름뿐만이 아니다. 버들강아지가 복슬복슬하고, 얼었던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봄 또한 화사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노오란 생강나무꽃과 산수유꽃이 다투어 피어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청송과 영덕, 그리고 포항의 끝자락이 한데 만나는 곳이 옥계리다. 옥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다는 뜻이다. 청송 주왕산 남쪽 자락에서 발원한 물이 옥계리 어름에서 저 유명한 포항의 하옥계곡에서 흘러나온 물과 합쳐진 뒤 영덕의 젖줄인 오십천으로 흘러간다. 이름에 걸맞은 맑고 깨끗한 계류가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과 부딪치며 돌아드는 자태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옥계계곡은 찾아가는 길부터 범상치 않다. 마을 개천들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주응리와 흥기리 등 고즈넉한 마을들을 지나는데, 여느 시골마을 실개천들과 달리 기묘하고 기골이 장대한 바위들이 줄이어 펼쳐진다. 옥계계곡에 들면 알싸한 향기가 나는 듯하다. 혹 침수정 주변의 생강나무로 인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는 아닐지. 생강나무는 가지를 꺾어 문지르면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마다 이맘때 꽃을 틔우는데, 노오란 빛깔이 영락없이 산수유꽃과 닮았다. 누군가 생강나무를 꺾어 놓은 것도 아닌데, 알싸한 향기를 좇느라 애꿎은 코만 바쁘다. 침수정(枕漱亭)은 생강나무꽃과 산수유꽃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옥계계곡의 합수머리에 터를 잡았다. 경북도 문화재 제45호. 한자로는 ‘베개 침’(枕)자와 ‘양치질할 수’(漱)자를 쓴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뜻으로 중국의 역사서 진서 손초전에 나오는 ‘침류수석’(枕流漱石)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옥계 37경 위로 봄이 가만히 내려앉다 정자를 지은 이는 1607년 조선 광해군 때 손성을이란 선비다. 정자 건너편 바위 벼랑에 문패 삼아 ‘산수주인 손성을’(山水主人 孫星乙)이라고 또렷이 음각해 놓았다. 너럭바위 위에 당당하게 선 침수정 주변으로 옥계 37경이 벌여 있다. 정자 오른편엔 병풍암이 둘러치고, 바로 앞엔 촛대암과 향로봉의 자태가 장하다. 구정담 푸른 물은 사자암과 삼귀암을 돌아 나가고, 멀리 삼층대와 구슬바위는 진경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푸르디푸른 계곡물을 바라보면 빼어난 물색에 잠시 정신이 몽롱해진다. 계곡물을 손으로 내리치면 쨍하며 깨질 듯하다. 어디가 그림이고, 어디가 자연인가. 산수의 주인은 그 자리에 서서 풍경을 가슴에 담는 이일 터다. 전 영덕군 의원으로, ‘내고장 역사마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대씨는 “옥계 37경 중 귀남연, 둔세굴 등 여섯 곳은 포항시 죽장면 하옥계곡에, 나머지 서른한 곳은 옥계계곡에 산재해 있다.”며 “다만 정자의 주인 손성을이 ‘달기가 젖과 같은 맑은 샘이 흐른다.’고 극찬했던 다조연과 마음을 씻는 세심대 등 네 곳은 종적이 묘연하다.”고 일러 준다. 옥계계곡의 또 다른 볼거리는 계곡 곳곳의 소와 폭포. 수백만년을 쉼 없이 흐른 물길은 암반을 파 8개의 소와 15m 높이의 옥계폭포 등을 만들었다. 침수정에서 청송 얼음골 방면의 학소대와 영덕 방면의 ‘하늘 부엌’ 천조(天竈) 등도 멋들어지다. ●출렁다리 너머 산성계곡 달산면 소재지에서 침수정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대서천 위로 느닷없이 70m짜리 철제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까닭 없이 관광용 다리가 들어섰을 리는 없을 터. 다리는 산성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팔각산 산행길의 날머리 구실을 한다. 다리를 건너면 전국의 산악회에서 내건 형형색색의 리본들이 나무마다 빼곡하다. 이미 많은 산꾼들이 산성계곡을 오갔다는 증표다. 산성계곡은 팔각산 뒤편 산자락에 형성된 조그마한 계곡이다. 옥계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옥산리에서 합류한다. 산성계곡은 지역 주민과 일부 산꾼들 외에는 아는 이가 드물다. 그 덕에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물을 쉼 없이 영덕으로 흘려보낸다. 옥계계곡의 현란함에 견준다면 산성계곡의 자태는 소박하기 짝이 없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의 차이쯤 될까. 하지만 작은 계곡 치고는 제법 묵직하고 웅숭깊다. 계곡길은 경사를 느끼지 못할 만큼 평탄하다. 거리는 2㎞ 남짓. 왕복 두 시간이면 족하다. 산책 삼아 자분자분 걷다 오기 딱 좋은 코스다. 소수의 사람들만 찾다 보니 여느 산책로처럼 잘 정비되지는 않았다. 많은 돌다리와 냇물을 가로지르며 가야 하는데, 외려 그 덕에 장식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제2목교 주변의 웅장한 암릉과 삼국시대 병사들이 뚫었다고 전해지는 바위구멍 ‘개선문’, 파란빛 감도는 청석바위 등이 볼거리다. 옥산리 유성모텔을 끼고 우회전하면 출렁다리다. 팔각산 등산로의 급경사가 시작되는 독가촌이 사실상 계곡의 끝이다. 글·사진 영덕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서안동나들목으로 나와 안동 시내를 지나 영덕방면 34번 국도로 갈아탄다. 영덕 읍내 못 미쳐 신양리에서 69번 지방도 옥계계곡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한 뒤 곧장 가면 된다. 영덕군청 문화관광과 734-2121. ▲잘 곳 영덕군이 풍력발전단지 안에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덕군해맞이캠핑장을 조성했다. 인터넷(camping.yd.go.kr)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4만원. 730-6337. 침수정 인근에서는 팔각산장이 깨끗하다. 3만∼7만원. 732-3920. ▲맛집 강구항 인근에 대게종가(733-4147) 등 대게 전문점들이 몰려 있다. 오십천 인근 화림산 가든(733-1077)은 은어요리로 입소문이 난 집. 창수면 현대식당(732-6033)은 메밀묵을 잘한다. 예약을 해야 맛볼 수 있다. ▲인근 볼거리 풍력발전단지와 삼사해상공원, 어촌민속전시관, 해맞이공원 등이 영덕 읍내에서 10∼20분 거리에 있다.
  • “한반도 규모 6.5이상 대지진 가능성”

    한반도에서도 규모 6.5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가 제시됐다. 특히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월성과 고리에서 대규모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헌철 박사는 23일 서울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한반도 지진과 원자력 안전’을 주제로 한 포럼에서 “한반도의 역사적 지진 기록이나 지체 구조 등으로 미뤄볼 때 규모 6.5 이상의 지진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 박사는 그러나 한반도에서 7.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게 봤다. 한반도는 지진이 많은 중국 탄루 단층대와 일본 열도의 지각 사이에 놓여 있지만 이들 두 곳에서 지진 등으로 인해 에너지가 분출되기 때문에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지진 에너지가 축적될 여지가 적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 박사는 한반도에서의 강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려·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고려사에는 ‘불국사와 석가탑이 지진으로 무너져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의 승정원 일기에는 1643년 7월 24~25일 ‘울산 동쪽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땅에 구멍이 나고 물이 솟아 높이 모래가 쌓였다.’고 기록돼 있다. 지 박사는 “이는 진도 8~10, 규모 7 정도의 강진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지진 발생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는 추가령·옥천·양산단층 부근이 꼽혔다. 지 박사는 원전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월성이 가장 위험하고, 다음은 고리이며, 영광과 울진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특히 월성 원전이 위치한 경주 지역에는 많은 활성단층이 존재해 대규모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토론자로 나선 이진한 고려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일본 혼슈·홋카이도 서북연안에 대규모 역단층 있어 규모 7.0 이상 지진이 수년~수십년에 한번씩 발생한다.”면서 “이곳에서 강진이 발생할 경우 우리나라 해안에는 지진해일의 피해도 우려되는 만큼 원전 설계 시 예상되는 지진해일의 높이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조양희(인천대 교수) 한국지진공학회장은 “후쿠시마 원전 설계 시 고려한 강도가 지반가속도 0.4g이었지만 실제로 받은 힘은 5배가 넘고, 실제 지진해일의 높이도 설계 높이 5.5m의 2배가 넘는 14m에 달했다.”면서 “우리 원전도 설계기준 사고만 가정해 안전하다고 주장하지 말고, 이번 일본 지진을 계기로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씨줄날줄] 금 간 석가탑/김성호 논설위원

    불국사 대웅전 뜰에 마주 선 다보탑과 석가탑. 과거 불의 현신이라는 다보탑이 복잡한 구조를 띤다면 현재 불인 석가탑은 정제된 아름다움의 극치로 빛난다. 그중에서도 석가탑은 탑 곳곳에 적용된 황금비율의 확인으로 아름다움이 더 배가된 석탑이다. 신의 비율이라는 황금분할과 황금구형, 황금사선 말이다. 감은사지탑, 고선사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걸작 석탑으로 꼽힘이 괜한 게 아니다. 오죽하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이란 극찬까지 나올까. 그림자가 없다 해서 무영탑으로 통하는 석가탑. 무영탑이야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구현이란 불국사 창건에 연결된 이름일 듯. 하지만 석가탑은 어려운 불교이론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대중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숱하다. 석가탑 건조에 참여한 도공 아사달·아사녀의 전설이 그렇고, 현존 최고의 목판본이라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발견이 대표적 사연들이다. 아사달·아사녀의 전설이 석탑 조형미로 해서 각색된 전설이라면,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가탑 자체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복장유물일 것이다. 걸작 석가탑에는 오랜 세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가 붙었다. 신라 경덕왕10년(751년) 불국사 창건 때 세워진 뒤 단 한번도 수리·보수가 없었다는 온전함의 신화다. 그런데 1966년 도굴을 맞아 해체·수리에 들어가면서 발견된 종이뭉치 묵서지편은 이 신화를 산산조각냈다. 고려 현종기(1024년)와 정종기(1038년) 지진을 맞아 대규모 중수가 있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묵서지편은 이 중수 말고도 고려후기∼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수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연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무영탑이니 선대의 보존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일 석가탑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표가 있었다. 상층 기단석에 난 길이 132㎝·폭 5㎜ 크기의 금. 도굴사건 후 해체 보수로 모습을 되찾은 끝이었으니 큰 낭패다. 방치한다면 탑 전체가 무너진다는 위기론이 만만치 않다. 오래된 석재며 지진 탓이라는 말들이 분분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미궁. 느닷없는 균열을 놓고 불교계와 문화재청의 공방이 뜨거운 가운데 조계종 문화부장의 발언이 새삼스럽다. “종교적 관점에만 미룬 채 문화재 측면에서의 관심과 유지보수에 소홀했다.” 어차피 금 간 국보에 날 선 공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복원된 광화문 현판 균열의 전철은 밟지 않기를….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석가탑 기단석 균열

    석가탑 기단석 균열

    경북 경주에 있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국보 21호)의 기단석에서 균열이 발생해 40여년 만에 전면 해체보수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일 중요 문화재를 대상으로 정기 안전 점검을 실시한 결과 석가탑의 동측 상층 기단 갑석(甲石) 부분에서 길이 1.32m, 최대폭 5㎜ 크기의 균열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균열의 원인은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석탑이 조성된 지 1200여년이 지나면서 석재의 재질이 약화된 데다 탑신(塔身)의 무게와 풍화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다음주 중 관계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현지 조사를 실시해 균열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균열이 발생한 부위가 석탑 상부가 아니라 탑 전체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석 부위라는 점에서 전면 해체 보수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우리 겨레는 수학의 달인(안소정 지음, 최현정 그림, 창비 펴냄) 천년 고도 경주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 첨성대 등에 정교한 수학 비례가 숨어 있고, 석굴암에는 1만분의1의 어긋남도 없이 만들어진 수학적 비밀이 있다. 문화 유산을 둘러보며 수학 원리를 배우고 수학적 사고를 갖추게 도와주는 일종의 ‘수학 문화답사기’다. 수학 공식을 달달 외우고 대입시키는 기계적 공부에서 벗어나 비례, 도형의 성질, 다면체 만들기 원리, 확률 등 어려운 내용이 쉽게 풀려짐을 느낄 수 있다. 1만원. ●소원을 들어주는 황금사자(그레그 폴리 글·그림, 장미란 옮김, 베틀북 펴냄) 오로지 흑백으로 이뤄진 색에 황금색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강렬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 사자를 만난 주인공 월러비가 사자를 위해, 친구를 위한 마지막 열 번째 소원을 이야기한다. 우정과 배려의 가치는 설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친구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와 배려의 기쁨을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그림책이다. 1만 500원.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함께하는 평화학교(이반 수반체프·돈 키퍼드 엥글 지음, 이순미 옮김, 다른 펴냄) 전세계 60만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활동하는 평화단체 피스잼(PeaceJam)의 유쾌하고 유익한 활동 보고서다. 달라이 라마, 아웅산 수치, 데즈먼드 투투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 10명과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나눴던 소박하지만 근본과 맞닿은 활동이다. 인권, 행복, 용기, 도덕, 정의 등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 초등학생부터 중등, 고등, 대학생까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나눠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청소년교육전략21(www.yes21.org)이 관련 활동을 펼치고 있다. 1만 2000원. ●무서움이 깃털처럼 날아갔어(신순재 지음, 양정아 그림, 아이세움 펴냄) 학교에서 발표하려면 얼굴부터 빨개진다. 반 아이들의 눈이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 것만 같다. 길가에서 짖어대는 개 때문에 먼 길을 빙 둘러 갔던 기억도 선명하다. 아이들 마음 속에 드는 떨림, 불안함, 무서움의 정체와 과학적 실체 등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무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용기를 갖도록 도와준다. 8500원.
  • 아사달·아사녀 예술혼 설화공원서 만난다

    경북 경주에 신라시대 명장(名匠)으로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든 아사달의 예술혼과 아내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잇따라 조성되고 있다. 경주시는 19일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는 외동읍 괘릉리 영지(影池) 16만 5천여㎡에 오는 2016년까지 총 100억원을 들여 아사달·아사녀 설화공원을 조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시는 올해 10월까지 2억원을 들여 설화공원 조성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과 기본설계를 완료하고 내년부터 사업 추진에 들어갈 계획이다. 시는 영지 주변 조경 및 정비 사업, 탐방로·전망대 설치,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를 주제로 한 스토리텔링 개발 등을 통해 설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석가탑 축조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영지는 불국사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있는 저수지로, 아사달이 아사녀의 모습을 조각했다는 영지석불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이 있다. 앞서 시는 지난해 11월 경주 불국사 관문인 불국동 구정광장에 ‘아사달 아사녀’의 설화를 표현한 조형물을 세웠다. ‘영원’이란 주제로 설치된 이 조형물(높이 8m)은 분수를 포함한 연못형태에 연꽃 봉오리 모양을 배치하고 그 위에 아사달 아사녀 설화를 표현했다. 경주 석공들의 모임인 경석동우회와 동해지구석재협의회도 2006년 경주 토함산 동리·목월문학관 광장에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을 기린 ‘아사달·아사녀 사랑탑’을 조성했다. 시 관계자는 “백제 사람인 아사달 부부가 신라땅 경주에서 만들어낸 부부애를 기리고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테마가 있는 체험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지설화 공원을 조성키로 했다.”고 말했다. 한편 8세기 중엽 가장 뛰어난 석공으로 이름난 아사달은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에 의해 신라로 초청돼 석가탑을 만드는 일을 했다.아내 아사녀는 몇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만나러 경주까지 왔으나 탑을 완성하기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금기로 인해 결국 만나지 못하자 영지못에 빠져 죽고 만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영지못으로 달려갔으나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바위에 아내 모습을 새기고는 사라졌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석가탑서 最古문양 비단 발견

    석가탑서 最古문양 비단 발견

    불국사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문양의 비단이 나왔다. 그동안 청동으로 알려졌던 ‘청동제 비천상’은 금동제인 것으로, 은제 매화판은 청동제라는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6일 최근 보존처리 작업을 완료한 석가탑 발견 유물에서 8세기 문양 비단의 조각 더미를 비롯, 통일신라·고려 시대 유물 수백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고대 비단 중 문양이 확인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1966년 도굴사건을 계기로 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석가탑 내 발견 유물은 1967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다 박물관은 2007년부터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보존처리와 정리·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뭉쳐져 있던 흙덩이에서 조각 난 상태의 문양 비단이 발견됐다. 이들은 금(錦), 나(羅), 주(紬), 능() 등의 직제 방식이 혼재돼 있었으며, 이어 붙인 조각에서는 위아래로 늘어선 마름모꼴이 반복되는 문양이 확인됐다. 비단은 석가탑 내 사리함을 쌌던 것들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다양한 재질의 구슬 370여점과 불국사 석가탑의 중수(重修)과정을 기록한 중수문서 등도 발견됐다. 또 다라니로 알려졌던 종이뭉치는 향을 담은 봉투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이 석가탑 내 발견유물 일체는 17일 조계종으로 이관돼 한국불교역사박물관에 보관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신라 아사달·아사녀 조형물로 ‘환생’

    신라 아사달·아사녀 조형물로 ‘환생’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든 신라시대 명장 아사달과 아내 아사녀가 1200년 만에 조형물로 재탄생했다. 경북 경주시는 27일 불국사 관문인 구정광장에서 백상승 시장을 비롯해 불국사 주지 성타스님, 지역 기관·단체장,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아사달·아사녀’의 설화를 표현한 조형물 준공식을 가졌다. 이 조형물은 분수를 포함한 연못 형태에 연꽃 봉오리 모양을 배치하고 이 위에 아사달·아사녀 설화를 표현했다. 경주의 전통적인 소재를 현대 조각의 형태로 재해석한 이 조형물은 화강석과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폭 10.9m, 높이 8m 규모다. 경주시 관계자는 “‘영원’을 주제로 이번에 설치된 조형물은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와 ‘아사달·아사녀’ 설화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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