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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실적 없는 교수 내년부터 승진 못해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은 일부 교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내년부터 교수업적평가제를 도입키로 했다.이에 따라 교육부가 ‘두뇌한국(BK)21’사업을공모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가 철회한 이 제도는 조만간 상당수 대학에서 시행될 전망이다. 25일 교육부에 따르면 서울대는 교수들의 연구업적뿐 아니라 교육 및 봉사활동도 평가하는 총괄평가제를 실시하기로 했다.평가항목은 ▲교육(강의,대학원생 지도) ▲연구·창작활동(단행본 출간,학술지 논문 게재,학술회의 발표,초청강연,전시 및 연주,특허 획득,연구과제 수탁) ▲봉사활동(교내 보직및 위원회 활동,기금 및 시설 유치,정부기관 등 자문) ▲기타(수상,서훈) 등이다. 고려대는 교수를 신규 채용할 때 연봉제를 도입하고,승진 심사때 조교수는2편,부교수는 4편,정교수는 6편 이상의 논문이 과학논문인용색인(SCI)에 게재된 사람만을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정교수는 2년마다 실시하는 호봉승진때도 논문 2편 이상씩을 요구하기로 했다.연구업적이 뛰어난 교수에게는 책임 강의시간을 1주당 3시간으로줄이고 연구인력 추가 지원,특별연구비지급,연구공간 확대 등의 혜택도 주기로 했다. 연세대도 부교수는 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수를 현행 2편 이상에서 10편 이상,정교수는 3편 이상에서 20편 이상으로 각각 높이기로 했다.또 부교수는 3건,정교수는 6건 이상의 산·학 협력을 유치하도록 의무화하기로 했다. 포항공대는 오는 9월 정년보장 교수를 시작으로 내년까지 성과급형 연봉제를 도입하고,2001년부터 학생 강의평가 결과를 승진 등에 반영할 방침이다. 올해부터 연봉제를 실시중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연구업적의 양(정량평가)뿐 아니라 질(정성평가)도 따지기로 했다. 문호영기자 alibaba@
  • ‘2與+α’ 한나라당 반응

    한나라당이 정계개편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여권일각에서 제기되고있는 2여(與)+α의 여권통합론을 ‘야당붕괴’시도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사정정국도 인위적인 정치판 흔들기를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19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여권은 사정(司正)을 통해 공동여당+α로 정계개편을 하려면 다시 큰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이어 “야당을 파괴하려는 의도는 용납할 수 없다”며 “무슨일이 있어도 당을 지키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한나라당은 특히 일부의원들의 탈당에 대비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2여+α 작전이 한나라당 중부권 세력과 TK(대구경북)세력을 겨냥한다고 보기 때문.안택수(安澤秀)대변인은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는 여권에 동조할의원은 한사람도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날 의원총회에서는 여권의 내각제 유보 합의에 대한 대여 공세의 포문이쏟아져 나왔다.김철(金哲)의원은 “공동정권이 원인 무효가 된 만큼 공동정권은 해체하라”고 촉구했다.서훈(徐勳)이사철(李思哲)의원등 일부 강경파초재선의원들은 당내 내각제론자인 일부 중진들을 겨냥,“지금 내각제를 찬성하는 것은 여당의 정략적 술수에 말리는 것으로 내각제 미련을 버리라”며‘집안단속’에 앞장섰다. 최광숙기자 bori@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與野, 총무접촉등 이모저모

    여야는 10일 총무회담을 갖고 국정조사 대상을 놓고 협의했으나 전날에 이어 평행선만 달렸다.공전중이던 204회 임시국회의 정상화를 위해 1차 본회의를 여야 합의로 연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拉箕ト릿? 국민회의 손세일(孫世一)·자민련 강창희(姜昌熙)·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는 오전 11시 25분 국회의장실에서 총무회담을 했으나 30분만에 결렬됐다. 여당은 검찰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의혹사건만 국정조사대상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반면 야당은 △옷로비사건 △‘3·30 재·보선’ 50억원 사용설 △유종근(柳鍾根)전북지사 거액도난사건을 포함한 소위 ‘4대 의혹사건’을 대상으로 하자고 맞섰다.전날의 두 차례에 걸친 총무회담에서 나온 입장을 되풀이한 셈이다.한나라당은 한발 더 나아가 특검제를 도입할 것을 추가로 요구했다.손총무가 새로 당선된 의원과 신임 국무위원들의 인사를 위해 본회의를 열자고 제의한 것을 이총무가 받아들여 본회의가 열렸다. ?擥뽁맛? 여야는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국정조사 대상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총무회담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다.한나라당 서훈(徐勳)의원은 “김대중(金大中)정권 1년 6개월동안 도덕성에 문제가 많았다”며 “내각은 책임지고 총사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한영애(韓英愛)의원은 “고급옷 사건은 이미 검찰수사가 끝났고 재·보선 50억원 사용설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며 반박했다.자민련 어준선(魚浚善)의원은 “우리들 앞에는 산적한 문제가 많다”고 말해 국정조사 대상을 확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톤으로 말했다. 의사진행 발언에 앞서 ‘6·3 재선거’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안상수(安相洙)의원과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한 국민회의 김태랑(金太郞)의원은 선서를 했다.이회창총재는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일해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한나라당 강경노선 민투委 매파가 주도

    한나라당 강경노선을 주도하는 매파(派)는 누구인가. 당내 민주수호투쟁위원회(민투위) 소속이 주축이다.위원장은 박관용(朴寬用)부총재다.이부영(李富榮)총무를 비롯,김문수(金文洙) 서훈(徐勳) 이재오(李在五) 정형근(鄭亨根)의원 등이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여당의 변칙적 법안통과 이후 당내 매파가 상당히 힘을 얻은 모습이다.이번 초강경 장외투쟁 결정에도 매파의 입김이 깊숙이 작용했다.옥내집회를 계획했던 이회창(李會昌)총재도 매파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장외투쟁으로 선회했다는 후문이다.또 당초 국정보고대회 형식으로 치러질 계획이었지만 매파의주장에 밀려 결국에는 ‘김대중정권 국정파탄 규탄대회’로 수위가 올라갔다. 박부총재는 지난 4일 열린 민투위회의에서 “야당은 장외로 뛰쳐나가야 여당에서 반응이 있다”며 대여 강경투쟁을 주도했다.한 참석자는 “대부분 위원들이 여당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초강경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매파의 목소리는 지난 6일 이총재의 기자회견에서도 드러났다.매파 의원들이 주로 포진하고 있는 민투위에서 이번 회견문 원안을 만들었다고 한다.당관계자는 “당내 한 조직에서 결정된 원안이었고 또 민투위원들의 입장이 워낙 강경해 이총재도 원안을 대부분 수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 매파의 목소리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박준석기자 pjs@
  • 한국 근-현대사 정리 앞장 선 방선주-양기백박사 서훈 추진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문헌발굴과 정리에 평생을 바쳐온 재미 사학자방선주(方善柱·65)박사와 미 의회도서관 동양부 부장을 지낸 양기백(梁基伯·78)박사에게 정부의 서훈을 추진하는 운동이 관련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일고 있다. 건국대 신복룡(정치학과)교수는 “방박사는 한동안 금기사항으로 있던 현대사분야의 자료발굴로 현대사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분이며,양박사는 미국내에서 한국관련 자료수집의 최대공로자”라며 “근.현대사 전공자를 중심으로 두 분이 한국관련 사료발굴·정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정부의서훈을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움직임은 4월초 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인천대 총장) 발족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이 단체는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제정을 계기로 공공기록물의 효율적인 수집·관리·보존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현재 연구원측은 신교수 등과 공동으로 방·양 두 박사에 대한 공적 조서등 구비서류 준비를 마치는 대로 과당국에 서훈 신청을 할 계획이다. 49년 미국 정부의 주선으로 도미한 양박사는 6·25전쟁으로 귀국치 못하고이듬해 8월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방박사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등 미국 내 한국관련 자료발굴의 ‘1등공로자’로 꼽힌다.그동안 방박사는 한국근·현대사 자료 100만 점 이상을발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미국군정·한국전쟁 관련 자료는 이 분야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방박사가 발굴한 자료중일부는 방박사가 객원교수로 있는 한림대 등에서 자료집으로 출간됐다.최근임정80주년기념 학술대회 참가차 귀국했던 방박사는 백범암살 관련 미공개자료를 입수,본사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제공한 바 있다.두 사람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프로축구 전력 담금질

    프로축구가 새로운 증흥을 꿈꾸며 새해 벽두부터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시즌 출범 16년만에 처음으로 유료 관중 200만명 돌파 등 호황을 맞았던 프로 10개 구단들은 2일 소집된 포항 스틸러스를 시작으로 이번 주말까지 연이어 동계훈련에 돌입,본격적으로 시즌 개막에 대비한다.각 구단들은 올동계훈련 역시 대부분 해외로 나가 실전을 겸한 전력 담금질에 나선다.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가장 먼저 훈련에 들어간 팀은 지난해 정규리그 3위팀 포항.포항은 13일까지 포항에 머물며 컨디션을 점검한 뒤 14일부터 호주전훈에 나설 예정이다.신세대 스타로 떠오른 이동국과 노장 고정운의 콤비플레이를 다듬는 게 전훈의 지상과제다. 90년대 초부터 한국의 전훈지로 각광받고 있는 호주에는 특히 포항 외에도부산 대우,대전 시티즌,전남 드래곤즈,울산 현대 등도 이달 중순쯤 연이어전훈을 떠날 계획이라 한국 팀끼리의 윈터리그도 벌어질 전망이다. 8일부터 훈련에 들어갈 부산은 곧바로 호주로 떠나 다음달 7일까지 머문 뒤 중국으로 향해 아시아클럽컵 극동지역4강전을 치르고 2월 14일쯤 귀국할예정이다.신세대 스트라이커 안정환의 파괴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둘 계획. 지난 시즌 김은중의 등장으로 괄목한 성적 향상을 보였던 대전은 오는 10일 소집돼 1월말까지 경남 함안에서 합숙훈련을 한 뒤 2월초 호주나 남미로 해외 전훈을 계획하고있다. 신임 이회택감독이 첫 동계훈련을 지휘하게 될 전남 역시 5일쯤 광양에서훈련을 시작,16일 호주로 출국하며 지난시즌 정규리그 2위에 머문 울산은 6∼9일 사이 금강산,11∼16일 한라산 등반으로 체력을 다진뒤 1월말쯤 2주 일정으로 호주로 떠난다. 지난해 창단 3년만에 정규리규 우승컵을 거머쥔 수원 삼성은 가장 늦은 11일쯤 소집,거제도 등지에서 2월 중순까지 훈련한다는 계획을 잡아놓고 있다.이후 시즌 개막 직전까지는 역시 해외전훈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고 전훈지를 물색할 방침이다. 이밖에 안양 LG는 진주,전북은 2월초 쯤 일본이나 남미 등에서 전력를 점검할 계획이다.송한수 onekor@daehanmail.com
  • 행자부,퇴직자 포상제도 개선싸고 고심

    ◎훈·포상자 99%가 장기근속자 행정자치부가 퇴직공무원에게 훈·포장을 주는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金正吉 행자부장관으로부터 퇴직공무원 등 4,863명에 대한 포상계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공무원 훈·포장제도를 개선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4,863명 가운데 장기근속을 이유로 훈·포장 등을 받은 퇴직공무원은 4,807명.전체의 98.8%다. 정년단축과 정년 연장폐지로 퇴직자가 급증한 올해에는 훈장 수혜자만 하더라도 지난해의 2,298명보다 1,827명이 증가한 4,215명이었다.게다가 훈·포장과 포창비율을 2:8로 한다는 정부 포상업무지침과 달리 올해 퇴직한 1만8,103명의 경우,58%인 1만400명이 훈·포장을,나머지 42%가 포창을 받는 문제점도 나왔다.특히 내년에는 교원정년 단축에 따라 훈장수여 등 퇴직자 포상이 더 늘 것으로 보인다. 행자부측은 이에 따라 퇴직자 포상제도 개선문제를 검토하기로 했으나 공무원 사회에서는 정년퇴직 기준이 1년 단축된 만큼 훈장 수여기준도 1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반발이 일고 있어 개선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떤가/영예·권위 지키려 심사 엄격/최소 20년 이상 근무자 대상/품행·명망 갖춰야 수훈 가능 프랑스와 일본 등 선진국들은 훈장의 영예와 권위를 유지하기위해 매우 엄격하게 심사 수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국가훈장 레종 도뇌르는 훈장 수여가 개인 뿐아니라 가문의 영예로 여겨질 정도로 명예의 대명사이다. 훈장은 최소한 20년 이상 공직에 근무한 사람 가운데 수여되며 품행과 명망은 또 다른 필수조건이다. 훈장을 받은 사람이 한단계 높은 훈장을 받으려면 5년 이상 지나야 한다.적어도 자동적으로 훈장을 받는 사람은 없다. 훈장 수여사실이 호적에 실리고 사교클럽이나 국가적인 행사에 훈장을 달고 나가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도 이런 엄격함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1년에 봄 가을로 두번만 수여되며 생존자는 70세가 넘어야 받을 수 있다.수여식은 최고의 의전을 거쳐 장중하게 치러진다.비정기적으로 퇴직 관료들에게 수여하는 일은 없다.오직사건이 잇달아 터진 후생성은 97년 서훈을 추천하지 않고 자숙,훈장의 영예를 더럽히지 않기도 했다. 한편 한국의 경우 국내 서훈도 헤플 뿐 아니라 재외동포들에게도 너무 자주,너무 상급의 훈장을 수여해 훈장의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순국선열 기념일(金三雄 칼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웅변가 소대(蘇代)의 글에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木偶人)와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土偶人)의 대화가 전한다. 어느날 목우인이 토우인에게 “너는 어찌 얼굴이 두루뭉수리로 생겼나. 더구나 비가 오면 상판이 모두 풀어져 눈도 코도 분간 못하게 될 것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토우인 껄껄 웃으며 말하되 “나는 네 말대로 비가 많이 오면 얼굴과 몸뚱이가 젖어 모습마저 풀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흙으로 뭉쳤다가 흙으로 풀어져서 이 땅에 있는 것이라 언제고 다시 뭉치면 새 모습으로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웃으면서 반문했다. 토우인 다시 “그래 네 생각에는 네가 제법 눈 코가 똑똑하게 생긴 줄로만 알겠지! 그렇지만 너야말로 큰 물이 지면 물결에 둥둥 떠서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북방으로 갈지 남방으로 갈지, 그래 어디가서 네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하자 목우인은 부끄러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다.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궐기한 의병 독립군 항일지사의 대부분은 토우인같은한국사람들이었다. 목우인처럼 잘나고 영악한 자들은 외세에 영합하거나 앞잡이가 되었다. ○임정의 기념일 제정 뜻 오늘(17일)은 순국선열기념일이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러니까 1905년(을사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사실상 송두리째 빼앗고자 이른바 ‘을사조약’을 날조한 날이다. 이날을 기해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시작되고 일제의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어 순국선열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정하면서 ‘결정문’ 을 채택했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을 유루없이 다 알수 없으므로 1년중 1일을 정하야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하는 바이요, 이제 11월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야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야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야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은 을사년 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인고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측결되던 11월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 의사록) 1895년부텨 1945까지의 50년동안 항일전선에서 순국한 선열은 30만명이 훨씬 넘는다. 의병투쟁 의열투쟁 3·1항쟁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학생운동 지하투쟁과정에서 무명선열 무후선열 및 유후선열과 애국지사를 합친 숫자이다. 이들 중 극소수는 국립묘지의 임정묘역이나 효창동, 수유리 또는 가족묘지 등에 안장되었지만 대부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순국선열 유업 제대로 토우인처럼 조국강산과 이역에서 흙이 되고 넋이 되었다. 정부의 서훈 여부와 관계없이 국권회복전선에서 희생된 모든 순국선열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지난해부터 부활된 이날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19년부터 이날에는 정화수 떠놓고 앞서간 선열을 추념했고 이날만은 찬밥을 먹으면서 국권회복을 다짐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독립한 우리가 각종 기념행사때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정도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순국선열의 유훈이 잊혀지고 유족들이 기한에 떨고 의병기념관, 임정주석기념관 하나 짓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처지가 이날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는가.
  • 사우디에 인력수출 확대/金 총리·압둘라 왕세자 합의

    金鍾泌 국무총리는 23일 저녁 세종로 청사 집무실에서 압둘라 빈 알 사우드 사우디 왕세자와 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협력 등을 협의하기 위해 지난 75년 구성한 한·사우디 공동위원회 수석대표를 현재의 외교통상부 차관보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했다. 金총리와 압둘라 왕세자는 또 한국의 대(對)사우디 무역적자 축소를 위해 한국측 건설·의료 인력의 사우디 진출을 확대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회담에 앞서 압둘라 왕세자는 金총리에게 사우디의 서훈 서열 두번째인 ‘압둘 아지즈왕 훈장’을 수여했다.
  • 親日의 군상:7­1/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저항 포기… 親日로 명맥 이은 세도가 집안/고관대작 다수 배출… 화려한 가문 자랑/중시조 雄烈 ‘한일병합’후 男爵 받아/尹 전 대통령 숙부·사촌중 변절자 많아 우리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세도가 집안의 하나로 尹致暎 전 공화당의장서리(96년 작고) 가문을 들 수 있다.尹潽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집권당 의장서리,장관,서울대 총장 등 장·차관급 이상만 13명에 학자·의사가 60여명이나 나왔다. 尹씨 가문은 한말 尹雄烈에 의해 중흥된 후 자손도 번성하여 400여명에 이른다.尹雄烈의 아버지 取東은 늘그막에 웅달산에서 기도를 하고 첫 아들을 얻었대서 이름을 雄烈이라 지었다.15년 뒤 태어난 동생은 ‘영웅(英雄)’이라는 말에 맞추기 위해 英烈이라 지었다. 雄烈은 致昊·致旺·致昌 3형제를,동생 英烈은 致旿·致昭·치성·致昞·致明·致暎 등 6형제를 두었다. 열(烈),치(致)에 이어 다음 항렬은 선(善),구(求),영(榮) 순이다.선(善)자 항렬의 유명인사는 致昊의 아들 永善·璋善,致旿의 아들 日善·明善·昇善,致昭의 아들 潽善·源善,致明의 아들裕善 등이다.구(求)자 항렬에서는 日善의 아들 錫求·鐸求,潽善의 아들 商求·同求 등이 있다.번성한 자손과 함께 이 집안에서 배출한 유명인사들의 면면을 한번 훑어보자. 중시조격인 雄烈은 1856년 무과에 급제,한말 군부대신을 지냈다.동생 英烈은 연안부사·삼남토포사·육군참장(參將,현 준장에 해당)을 지냈다.雄烈의 장남 致昊는 학부(學部)·외부협판(協辦,현 차관)을,2남 致旺은 초대 육군의무감(육군소장 예편)·대한의학협회장을,3남 致昌은 초대 주영공사와 주터키대사를 지냈다. 英烈의 아들 중 장남 致旿와 차남 致昭는 대한제국 시절 각각 학무국장과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3남 致성은 일본육사(11기)졸업 후 군부 군무국 교육과장을,4남 致昞은 육군 보병 정위(正尉,현 대위에 해당)로 예편하였다.막내 致暎은 해방 후 초대 내무장관과 서울시장, 3공에서 공화당 의장서리를 지냈다. ○부귀영화에 장수까지 致旿의 장남 日善은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致昭의 장남 潽善은 서울시장·대통령을,3남 源善은 민선 경기도지사를 지냈다.致明의 아들裕善은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보사부 의정국장·국립의료원장을 지냈다.3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永善과 재미 원로 피아니스트 琦善은 모두 致昊의 아들들이다. 또 日善의 차남 鐸求는 원자력병원장을 역임한 후 동생 鍾求와 함께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보통 집안에서는 한명 나오기도 힘든 큰 벼슬아치가 이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속출하였다.그리고 장수(長壽)집안으로도 유명하다.중시조(中始祖)격인 雄烈(72세),英烈(86세)형제와 致昊(81세),致旺(88세)이 70,80세를 넘겼고 永善(92세),日善(91세),潽善(93세) 등은 망백(望百·91세) 이상 장수했다.부귀영화에 장수까지 겸했으니 한 가문으로서야 더 바랄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 집안의 역사가 이렇게 화려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친일’은 이 집안 중흥의 1등공신 雄烈(1840∼1911)로부터 시작된다.1856년(철종 7년) 무과에 급제,1861년 충청 감영의 중군(中軍)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그는 1880년 별군관으로 朴永孝·金玉均 등과 함께 수신사 金弘集을 따라 일본을 다녀온 후 이듬해 일본식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1882년 별기군과의 차별대우를 참다못한 구식군대가 반란(소위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그는 시위대에 쫓겨 원산을 거쳐 나가사키(長崎)로 줄행랑을 쳤다.도중에 원산에서 주민들에게 발각됐으나 한 일본인 승려의 도움으로 피신했다고 한다.도쿄 체류중 그는 ‘조야신문(朝野新聞)’(1882년 9월2일)과의 인터뷰에서 구식군대의 반란은 조선 내 수구파들이 세력을 잡기 위한 ‘폭거’라고 주장했다. 갑신정변 무렵 귀국한 그는 개화당 정권에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1886년 능주(綾州)로 귀양갔다.그후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다시 집권하자 경무사·군부대신을 지내다가 1896년 소위 ‘춘생문(春生門)사건’에 가담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일제말기에 지조 꺾어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서 궁내부 특진관·군부대신을 지낸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은사금 2만5,000원과 남작(男爵)작위를 받았다.그의 작위는 장남 致昊가 습작(襲爵)하였다.致昊는 1913년 ‘105인사건’의 확정판결로 실작(失爵)되었으나 이는 ‘충순(忠順)치 않은 행위’(‘조선귀족령’ 제7조),즉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박탈당한 다른 사람(남작을 거절하고 순국한 金奭鎭 등)들과는 구분된다. 雄烈·英烈 두 형제 중 친일 경력자는 동생인 英烈의 집안에 많다.英烈의 장남 致旿는 한말 중추원 참서관(9품)·학부(學部,현 교육부)학무국장을 역임했는데 한일병합 후 중추원 부찬의·찬의(1910∼15년)를 지냈다.차남 致昭 역시 한말 중추원 의관을 거쳐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1924∼27년,주임관 대우)를 지냈다.특히 致昭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14일 당시 쌀 120가마 값에 해당하는 2,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내고 같은해 9월9일 결성된 ‘애국경기도호(號)’ 군용기 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지냈다. 3남 致성은 일본육사를 마치고 구한말 정부에서 육군기병 부령(副領,현중령에 해당)으로 예편한 후 한일병합 후에는 실업계로 진출,분원자기 취체역(중역)·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특별위원을 역임했다.막내 致暎은 미국 유학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歐美)위원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그러나 그 역시 일제 말기에 가서는 지조를 꺾은 것으로 보인다. 친일 잡지에 그의 이름으로 된 글이 실려 있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1941년 9월7일)했다.또 그해 12월20일에는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美英)타도 대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그는 회고록 ‘윤치영의 20세기’에서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 명의의 글은 이름을 도용당한 것이라며 “일제 전시하여서 명예훼손 소송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그의 건국포장 서훈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밖에 致旿의 아들 중에도 친일 경력자가 더러 있다.교토제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 지낸 장남 日善은 일제가 주최한 ‘미영타도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한 적이 있다.또 도쿄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차남 明善은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정부에서 총무청 통계과장·국무성 사무관·간도성(間島省) 차장을 지냈다.4남 昇善은 관동군사령부에서 대위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 가문과 사돈 맺은 아이러니/尹致昌 결혼 당시 심한 반발로 한때 감금되기도 자손이 많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안은 친일 가문은 물론 독립운동가 가문과도 더러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雄烈의 3남 致昌은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孫貞道 목사의 장녀 孫眞實과 결혼했다.초대 해군참모총장·국방장관을 지낸 孫元一 제독, 재미 원로의사 孫元泰(84세) 박사,YMCA 회장을 지낸 여성계의 원로 孫仁實(81) 등은 모두 眞實의 동생들이다.독립운동가 진영은 이들의 결혼을 거세게 반대하며 한때 致昌을 감금하기도 했었다. 致昊의 차남 光善(6·25때 납북)은 독립협회의 창건자이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을 지낸 南宮檍의 딸 南宮慈卿과 결혼,4남3녀를 두었다.致昊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집안 딸 중에는 독립운동가 당사자와 결혼한 사람도 있다.致旺의 장녀 善姬는 2차대전 때 OSS 대원으로 활동한 張錫潤(95) 전 내무장관과 결혼하였다.이밖에 致昭의 차남 浣善의 부인 李順貞은 한말 탁지부 대신 李容稙의 딸이자 ‘을사조약’후 자결,순국한 충정공 趙秉世 선생의 외손녀다.
  • 親日의 군상:5/시인 朱耀翰(정직한 역사 되찾기)

    ◎臨政 독립신문 편집국장서 ‘皇國臣民’ 변신/대표적 친일 행적­일 건국이념 八紘一宇서 따온 ‘松村紘一’로 개명.각종 잡지에 친일시 발표·친일단체 간부 역임.“천황 위해 목숨 바쳐라” 전국 순회 강연회 개최/해방후의 족적­전경련 부회장.국회의원 재선.부흥·상공장관.사망후 국민훈장 “아아 날이 저문다.西便하늘에,외로운 江물 우에,스러져가는 분홍빗 놀………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우는 밤이 또 오것마는,오늘은 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소리는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속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창조’ 창간호,1919년 2월) 4월 초파일 저녁 대동강변에서 벌어진 불놀이 장면을 보고 죽은 애인을 그리는 애상조의 이 시는 송아(頌兒) 朱耀翰(1900∼1979년)의 대표작 ‘불놀이’다.이 시는 종래 우리 시의 기본형식을 거부하고 상징적인 수법과 대담성 때문에 흔히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자유시’로 불려왔다.특히 일제하 우리민족의 아픔과 시대상황을 민족정서로 표현했다 하여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왔다.우리 역사앞에 처음 등장한 ‘시인 주요한’의 첫출발은 이처럼 좋았다. 주요한은 20세기가 시작된 1900년 10월 평양 목사집안의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2년 숭덕소학교를 마치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그는 메이지(明治)학원에서 중등과정 5년을 마치고 도쿄 제1고등학교에 진학했다.문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이 무렵 도쿄유학생이자 같은 문학청년 金東仁을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 동인지 ‘창조(創造)’를 탄생시킨다.‘3·1만세의거’가 터지기 꼭 한 달 전의 일이다.그의 대표작 ‘불놀이’도 바로 여기서 선을 보였다. ‘창조’ 2집이 나올 무렵 고국에서 ‘3·1만세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서둘러 짐을 싸서 귀국했다.그러나 그의 부친은 다시 도쿄로 돌아갈 것을 강권하였다.동생 耀燮(작가·72년 작고)이 몰래 삐라를 복사하여 돌리다가 체포되자 장남인 그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였다.결국 도쿄로 되돌아온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한인(韓人)YMCA 총무 崔承萬을 만나 상하이(上海)로 가라는 권고를 받는다.시인이자 애국청년으로 보낸 그의 상하이시절 9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상하이는 그를 반겼다.당시 임시정부에서는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발간을 준비중이었는데 문사(文士)가 필요했었다.‘독립신문’은 그 해 8월21일 창간호를 냈다.춘원 李光洙가 사장겸 주필이었다.그는 춘원 밑에서 편집국장겸 기자로 있었다.상하이 임정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시절 동지로 지내는데 나중에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변절,친일의 길로 들어서면서도 행동일치를 보이게 된다.상하이시절 그는 자신이 기자로 있던 ‘독립신문’에 ‘송아지’라는 필명으로 ‘조국(祖國)’등 수 편의 애국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송아’라는 그의 아호는 필명 ‘송아지’에서 따온 것이다. 1927년 그는 9년간의 상하이생활을 청산하고 돌연 서울로 돌아왔다.귀국동기는 분명치 않다.다만 그는 귀국후 곧바로 ‘동아일보’에 둥지를 틀었다. 입사 2년만에 편집국장이 된 그는 그 해 광주학생의거 관련 민중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말썽이 돼 일제로부터 곤욕을 치렀다.33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주(社主)와의 갈등 끝에 李光洙에게 편집국장 자리를 물려주고는 얼마 뒤 퇴사하였다.그 해 그는 화신(和信) 사장 朴興植의 권유로 ‘화신산업’에 입사,언론인에서 회사 중역으로 일대 변신을 꾀한다. 그는 이 무렵 李光洙와 함께 도산 安昌浩가 1913년 미국에서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의 국내단체인 ‘수양동우회’(1929년 11월 ‘동우회’로 개칭함)의 핵심간부(이사장)로 활약하고 있었다.이 단체는 친목단체로 위장한 민족단체였는데 당시로선 합법단체였다.회원들은 교육자·목사·변호사·의사 등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류였다.중일전쟁(中日戰爭)을 앞두고 이 단체가 일제의 표적으로 떠올랐다. 중일전쟁 발발(1937.7.7) 1개월전 일제는 동우회 해산명령과 함께 동우회원 일제검거에 나섰다.이는 민족주의 계열 인사에 대대적인 검거작전의 신호탄이었다.뒤이어 흥업구락부사건,천도교인사 탄압,조선어학회사건 등이 뒤따랐다.이 때 검거된 동우회 회원은 150여명.4년여에 걸친 재판기간 동안에 2명은 옥사하였고 그를 포함해 ‘화수분’의 작가 田榮澤,작곡가 玄濟明·洪蘭坡 등 18명이 ‘전향서’발표와 함께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 가입을 선언하였다(1938년 6월29일). 경기도경찰부가 작성한 비밀문건(特秘제2494호,38년 11월5일)에 따르면,李光洙·朱耀翰 등 보석출소자 28명은 11월 3일 서울시내 효자동 소재 李光洙의 집에 모여 사상전향에 관한 회의를 열고는 충성서약의 표시로 11월 말까지 동우회 입회금 300원(현재 약000)을 포함,총 2,888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로 결의하였다.헌금 전달자는 朱耀翰으로 결정되었다.상하이 임정에서 ‘독립신문’을 만들고 애국시를 쓰던 그는 어느새 이렇게 변해 있었다. 주요한의 친일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는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라는 그의 유별난 창씨명이다.이름에 해당하는 ‘紘一’은 일본의 건국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듯한데 실지로 그는 ‘팔굉일우’라는 시도 썼다.(‘삼천리’41.1) 철저한 일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40년 12월호)에 ‘동양해방(東洋解放)’ 기고를 시작으로 이후 각종 매체에 다수의 친일시·논설을 발표하였다.또 조선문인협회·문인보국회·조선임전보국단·언론보국회·대의당·대화당 등 대표적 친일단체에서 간부로도 활동하였다.그의 대표적인 친일문장 몇을 만나보자. ‘대동아전쟁’ 개전(1941년 12월8일) 직후인 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미영(美英)타도대강연회’에서 그는 ‘루즈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를 ‘위대한 어릿광대’라고 지칭하고는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성전(聖戰)의 용사 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포효했다.‘조선임전(朝鮮臨戰)’(‘신시대’,41년9월)이라는 글에서는 “지금 시국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이요,희생이요,무조건의 헌신”으로 “동아의 성전이 조선에 구하는 것은 땀과 피와 살과 생명”이라며 “오직 우리는 (천황이)부르실 때 바칠 뿐”이라고 했다.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맞아서는 “오늘에야 우리를/부르시는 높은 뜻을/서로 전해 말하며/눈물 흘리는 것을…”(‘오늘에야’제1절)이라며 감격해 했다.또 조선인 지원병으로서 최초의 전사자 李仁錫군의 죽음을 두고는 “보아라,너들의 피가/내 핏줄을 통해/여기 뿜는다.2,300만의/뜨거운 피가/1억의 피로/한덩어리가 되는/처음의 피가/지금 내 핏줄에서/콸콸 솟는다…”(‘첫피’제3연,‘신시대’41년 3월)고 했다. ‘동의어(同意語)’라는 시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사는 것은 아니다…폐하를 위해 살고 또,죽는 것만이 즉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이쯤되면 그를 조선사람으로 보기 힘들다.이 시들은 대부분 일본어로 번역돼 ‘손에 손을’이라는 그의 시집에 실렸는데 그는 이 시집출간으로 제4회 조선문예상 문학상을 수상했다.해방때까지 친일행각은 계속됐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불구속,기소됐다가 풀려난 후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대한무역협회장,국회의원(재선)을 거쳐 4·19후 張勉 정권에서 부흥·상공장관을,다시 5·16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대한일보 사장,대한해운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79년 그가 사망하자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주었다.지난 93년엔 서울의 한복판 세종로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 뒷면 약력란에는 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해방때까지의 친일경력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언급이 없다.그에 대한 서훈과 시비건립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八紘一宇’ 무슨 뜻인가/‘온세계를 병합해 한집으로 한다’/일본서기서 인용… 1940년 처음 사용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야마토(大和)에 도읍을 정하면서 ‘육합(六合)을 겸(兼)하여 도(都)를 개(開)하고 팔굉(八紘)을 병(倂)하여 우(宇)로 한다’(6대양 8대주를 병합하여 한 집으로 한다는 뜻임)는 내용의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여기서 생겨난 말이 ‘팔굉위우(八紘爲宇)’다. 1940년 8월 제2차 고노에(近衛)내각이 기본국책 요강에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위해 ‘황국(皇國)의 국시(國是)는 팔굉(八紘)을 일우(一宇)로 하는건국정신에 근거한다’고 밝혔는데 이 때 ‘팔굉일우’라는 용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됐다.그 후 이 용어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건설’의 기치를 내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본토와 일제의 식민지국가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으나 패망이후 지금은 거의 사어(死語)가 됐다. □주요한 연보 ▲1900년 평양 출생 ▲1918년 도쿄제일고교 입학 ▲1919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편집국장 ▲1921년 상하이 호강대 화학과 입학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33년 조선일보 편집국장,화신산업 입사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 ▲1938년 보석출소후 친일로 전향,해방때까지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함. ▲1949년 반민특위에 불구속,기소 ▲1951년 조선민주당 사무국장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당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당선 상공·부흥부 장관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1968년 대한해운공사 사장,대한 일보 회장 ▲1975년 능률협회 회장 ▲1977년 전경련 부회장 ▲1979년 숙환으로 사망
  • 민주열사 명예회복 학술회의 주제발표(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재에 왜곡된 현대사 재정립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학술회의가 1일 기독교회관에서 민주열사 유가족들과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열사범추위) 주최로 열린 98년도 2차 학술회의에서 李昌馥 열사범추위 상임대표는 기조연설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과 열사들의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특별법 제정 및 범국민 추모사업의 조기 현실화를 강력 촉구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마련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표됐으며 ‘각국의 사례에서 나타난 과거청산의 문제점과 올바른 방향’(李昌洙 한국 국제문제연구소 대표),‘국가 보훈사업의 문제점과 개선방향’(金三雄 서울신문사 주필) 등의 발제 강연과 토론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채택했다. ◎기조연설/과거 청산돼야 국민 대통합/李昌馥 열사 범추위 상임대표 우리 현대사는 외세에 편승하여 국민을 배신하고 독재를 행사해 온 세력들의 불의에 항거한 위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4·19민주혁명과 5·18광주민중항쟁,6월항쟁,87년 노동자 대투쟁,그리고 50년만의 민주적인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국민대중은 민주발전과 통일,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한결같이 싸워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열였고,통일을 위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의 ‘제2의 건국’ 선언이 의미하는 바 역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가 민주·통일시대를 향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면 올바른 과거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 총체적 개혁을 통해 독재시대의 기득권 구조를 깨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지역과 계층간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여 사회통합적 시민공동체를 건설하는 일,남북간 화해와 협력,평화체제를 구축하여 통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민주·통일시대의 역사를 개척하는 요체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민족민주열사의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은 꼭 이루어내야 한다. 열사들의 죽음은 개인차원이 아닌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사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민주열사의 명예회복은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되어졌던 우리 현대사를 바로잡는 성스러운 일이고,의문사 진상 규명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국가차원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며 민간차원에서는 열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루고자 했던 염원을 실현하는데 범국민적인 사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각국 사례로 본 과거청산 문제점과 올바른 방향/청치세력화된 시민사회가 주체로/李昌洙 한국국제문제연구소 대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94년 4월 흑인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 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란 헌법기관을 만들어 인권침해 조사,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인권침해 및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문제,국민 통합과 화해 촉진법 제정 등과거 청산 과제를 수행했다. 그러나 남아공 국민감정과 국가주도의 과거청산 활동간에는 일정한 괴리가 생기고 있다. 정치세력간의 타협성 때문이다. 또 흑빈백부(黑貧白富)의 구도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과거 독재정권이 구조적으로 수행했던 인종차별 정책을 해소시키는 데는 법적인 해결과 진실규명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과거청산 작업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와 공동체내의 빈부격차 해소 등과 같은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과거청산 문제는 주로 실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76년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조직적인 인권침해 과정에서 3만여명의 실종자를 낳았다. 83년 과도정부는 그러나 ‘국민화해법’을 통과시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형사적 범죄에 사면을 단행했다. 89년 메넴 정권도 거의 대부분의 군인들을 사면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과거 청산문제가 번번히 무산된 것은 군부의 조직적 반대 때문이다. 남아공과는 달리 아르헨티나는 군부중심의 구세력이 여전히 정치적실세로 작용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본다면 과거청산 작업은 과거청산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요구 수준을 벗어나 정치세력화 해 그 흐름을 주도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보훈법 문제점과 개선방향/국가유공자 예우 특별법 제정을/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우리나라 역대 정권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각급 보훈대상자와 그 유가족들을 홀대해 왔다. 특히 민주화와 통일운동,노동운동으로 희생된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는 이제라도 보훈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친일경력자의 독립운동가로의 둔갑 사례를 바로잡고 4·19 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사람가운데 유신을 지지한 사람이나,5·18 광주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훈장을 받은 쿠데타 주역들의 서훈을 치탈해야 한다. 아울러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해서는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예우하거나 광주민주항쟁 희생자와 똑같은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밖에정부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첫째,열사·희생자 중 긴급조치·반공법·보안법·계엄법 등에 의해 ‘범죄자’로 기록된 경우 유죄선고를 무효화해야 한다. 둘째,정부와 국회 주관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우는 한편,마석 모란공원을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성역화해 산재된 시신을 모셔야 한다. 셋째,희생자들의 정신을 승화시키기 위해 교과서에 사실을 기록하고 추모주간을 설정해야 한다. 넷째,국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의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다섯째,진실 규명과 국민화합을 위해 피해자와 가해자,그리고 국민대표로서 ‘과거청산과 미래창조를 위한 국민화합 위원회(가칭)’ 같은 것을 만들어 피해자의 한과 가해자의 참회가 한마당에서 융화되도록 해야 한다. ◎民辯 작성 2개 특별법 시안 열사 범추위는 민주열사 유가족 및 민족민주 운동단체들의 최대 현안인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민족민주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등 두가지 특별법이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제정되도록 힘쓰고 있다. 범추위는 이달말까지 자체 시안을 확정해 여야당에 보낼 예정이다. 이의 초기작업으로 민변이 작성한 두 특별법의 시안골자는 다음과 같다.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안) △의문사란 사인이 명백히 자연사로 확인되지 않고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대통령 직속하에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두며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각 3인씩 선출.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 검찰총장 등 관련기관의 장에게 수사협조 요청 및 소속공무원의 파견 등을 요청할 수 있음. △위원회가 관할 지방검사에게 영장청구를 요청하는 경우,검사는 이를 관할 지방법원에 신청하여야 함. △사건 조사기한은 2년 한정. △위원회는 혐의가 인정될 경우,관련자를 검사 등에 고발해야 하며 검사 등이 공소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관할 고등법원에 재정신청해야 함.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조사 사건과 관련된 공소시효는 정지되며,발효이전 공소시효가 만료된 경우에도 이 법률 적용.◆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안) △‘민족민주 유공자’는 해방 이후부터로 시기 제한. △민족민주 운동의 정의에 관해 전문가 의견 참고후 확정. △민족민주 운동을 위한 활동과 관련하여 사망했거나 상이를 입은 자와 함께 민족민주 운동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사망한 자도 유공자 적용. △유족의 범위,등록 및 결정,예우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국가유공자등 예우및 지원에 관한 법률 5조를 적용. △보상은 공헌과 희생의 정도 및 생활정도를 고려하여 달리할 수 있도록 하고 구체적 내용은 시행령으로 정함. △유공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는 9인으로 하고 대통령,국회,대법원장 각 3인씩 추천. △민족민주 운동을 이유로 한 유죄 확정판결에 대해 형사소송법 420조 및 군사법원법 469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재심을 청구할 수 있음. △민족민주 운동을 이유로 요시찰인 명부 등재,여권발급 절차 예외적 취급 등 불이익 행위를 당한 자는 서면으로 위원회에 불이익 행위의 판정을 신청할 수 있다. 심의 결과 불이익행위로 인정된경우 위원회는 수사기관에 고발해야 함. △정부는 민족민주 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함. 위원회의 의결에 의햐며 정부는 유공자를 추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에 사업비 등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음.
  • 親日의 군상:3/3·1문화상과 皇國예술인(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 짓밟고 해방후 민족상까지 받아 ‘3·1문화상’이라는 상이 있다.1960년에 제정돼 올해로 39회째 수상자를 냈다.3·1문화재단(이사장 文仁龜)에서 주관하는 이 상은 대한유화 창업자 李庭林(작고)씨가 제정한 것으로 시상분야는 학술·예술·기술 등 세 분야.재단측이 밝힌 이 상의 제정취지는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하여……”다.상 이름에도 ‘3·1’이 들어가고 또 매년 3·1절 당일 시상식을 갖는 것으로 봐 이 상은 3·1정신을 길이 계승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분명하다.그런데 이 상의 역대 수상자·심사위원 중에는 일제 당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친일 작품을 남긴 예술가 상당수가 포함돼 있다.예술분야 수상자중 13명,심사위원 중에는 20여명(일부 수상자와 중복됨)이 이에 해당된다.그들의 면면과 구체적인 일제시대 행적을 살펴보자. ◎상받은 예술인 13명의 친일행적은…/문인·화가 등 30여명 ‘위대한 3·1정신’ 왜곡/식민정책 전위대 역할… 청년 징병 내몰아 우선 예술분야 수상자가운데 문학가는 趙演鉉(13회)·安壽吉(14회)·白鐵(17회)·毛允淑(21회)·崔貞熙(24회)·李周洪(28회)등 6명,미술가는 李象範(4회)·金景承(5회)·金殷鎬(6회)·金仁承(9회)·朴泳善(10회)·金基昶(12회)등 6명,음악가는 金聖泰(22회) 1명이다. 문학 분야의 趙演鉉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동양에의 향수’(1942년 5월),‘아세아부흥론 서설’(42년 6월)등 친일성향의 평론을 썼다.이중 아세아부흥론 서설은 ‘동양지광’이 현상공모한 ‘지상(紙上)결전 학생웅변대회’에서 3등으로 입선한 작품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고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아시아부흥의 투사로 나설 것을 부추긴 내용이다.‘북간도’로 유명한 소설가 安壽吉은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42년 2월)에 발표한 ‘원각촌’ 이외에도 ‘벼’,‘북향보’등의 친일성향의 작품을 쓴 바 있다. 평론가 白鐵은 작품보다는 친일단체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회장 李光洙) 상무간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지냈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시절 친일 미술가 沈亨求(해방후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됨)와 함께 조선미술가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여류문인으로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毛允淑,崔貞熙 두 사람이다.이들은 모두 조선문인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41년 2월27일 부민관(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에서 개최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에 참석해 강연을 했다.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李周洪 역시 상당수의 친일 작품을 남겼다.그는 친일 잡지인 ‘동양지광’에 수필 ‘청년과 도의’(43년 7월)를 비롯해 단편소설·시 등도 남겼다.그는 유일하게 사후에 이 상을 수상했다. 미술계의 친일논쟁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됐다.문화예술인의 최초 조직이었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金殷鎬·金基昶·金景承·沈亨求·李象範·尹孝重 등을 친일 미술가로 규정,회원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이들의 대다수는 41년 2월21일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황민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조선문인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예술단체와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단체로 활동하면서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기도 했다.43년 1월9일∼17일 정자옥(丁子屋·일제 당시 현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있던 백화점)에서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은 것이 그 예다. 미술가로서 첫 수상자인 李象範(4회)은 沈亨求와 더불어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지냈으며,金景承·金仁承 형제는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평의원을 지냈다. 특히 金仁承은 朴泳善과 함께 선일(鮮日)합작 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단광회는 43년 3월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회원 21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으로 ‘조선징병제 실시’(100호 규모)를 제작,제1회 단광회 유화전에 출품하였는데 나중에 이 그림은 조선군 애국부를 경유하여 군에 헌납되었다. 순종(純宗)의 초상화를 그린 金殷鎬 역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37년 중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여성들이 당시 용산 사단사령부 모 일본군 장성에게 금비녀·금반지 등을 바치는내용의 ‘금채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기도 했다.金基昶은 최근까지도 친일논쟁이 있었던 인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등의 친일성향의 그림을 그린 바 있다. 음악가로는 金聖泰가 유일하다.그는 玄濟明 등과 함께 ‘가창지도대’,‘경성후생실내악단’등 친일 음악단체에서 활동하였다.이 단체들은 ‘음악보국음악회’,‘비행기헌납 음악대연주회’등을 개최,황민음악을 보급하였다. ◎‘역사의 심사’받아야 할 심사위원은… 3·1문화상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도 20여 명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들이 포함돼 있다.이들중 申奭鎬와 李丙燾는 총독부·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뿌리내린 장본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의료계의 鄭求忠과 尹日善도 학병권유 논설을 쓰고 시국강연회에 참석했다. 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경제학자 高承濟는 ‘국민문학’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등에 수많은 친일 평론을 남겼다.언론인 高在旭은 경성배영(排英)동지회와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서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여류 교육가 高凰京은 金活蘭·毛允淑 등과 같이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문인중에서는 金八峰·朴鍾和·兪鎭午·郭鍾元 등도 다소 차이는 있으나 모두 친일 논설·작품을 남겼고 극작가 柳致眞·徐恒錫,음악가 金元福(피아니스트) 등도 모두 친일 예술활동을 한 적이 있다.柳致眞의 경우 친일 행적이 문제가 돼 고향 충무에 세워졌던 그의 흉상이 95년 주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아니! 이럴수가…” 독립유공자 심사까지/‘식민학자’ 등 10여명 18년간 활동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차원의 포상은 지난 62년 군사정부가 6·25 전상자를 위한 ‘군사원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됐다.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에서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 기념일에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 왔다. 현재까지 독립유공 공로로 포상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모두 8,514명(외국인 40명 포함)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사람이 포함돼 있다거나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 ▲서훈자가 서로 뒤바뀐 경우 ▲형평에 어긋난 포상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또 이들중 일부 친일 경력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돼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역대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중에도 친일 단체나 기관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일부 포함됐었다는 지적도 있다. 첫 포상이 실시된 62년도 이후 80년까지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는 10여명(일부 중복자 포함)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가 포함돼 있다. 1962년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의 위원 7명(위원장 포함)가운데 申奭鎬·李丙燾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申奭鎬는 1930년∼37년의 총독부수사관보(修史官補)를 거쳐 37년부터 수사관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으며,李丙燾는 1925년∼27년에 총독부 수사관보,이후는 촉탁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에서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2명 중에는 4명의 친일인사가 들어 있다.高在旭·申奭鎬·柳光烈·李甲成 등이 그들이다.高在旭은 1937년 7월 12일 결성된 경성배영동지회와 같은 해 8월5일 결성된 전조선배영동지회에서 상무이사를 지냈다.柳光烈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친일논설 및 친일 시국해설 다수를 발표한 언론인이다.李甲成은 상해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1명중 高在旭·白樂濬·申奭鎬·柳光烈·李丙燾·李瑄根·洪鍾仁·金聲均 등 8명의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들어 있다.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을,李瑄根은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洪鍾仁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를 지낸 사람이다.金聲均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언론·출판 검열담당)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다. 1977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 11명 가운데도 柳光烈·李殷相 등 2명이 포함돼 있는데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지 ‘만선일보’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포함된 친일 경력자 논란은 1980년까지 계속됐다.이 해 원호처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 11명 중에는 申奭鎬가 ‘끈질기게’ 포함돼 있다.그는 62년 첫 심사부터 63년,68년,80년도에 걸쳐 독립유공자 심사에 참여했었다. 친일파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林鍾國씨는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논하는 자리나 대일(對日)외교 무대 등에는 친일파들이 나서서는 안될 자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母國法서 금지” 이임 加 대사 훈장 거절

    ◎외통부 뒤늦게 서훈 취소 소동 외교통상부가 상대국의 관행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임하는 서방국 대사에게 훈장을 주려다 정중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31일 외교통상부 등에 따르면 외통부는 지난 23일 3년6개월동안 근무하다 이임하는 미셀 페로 주한 캐나다대사에게 수교훈장을 주기로 하고 행정자치부에 서훈을 건의했다.행자부는 이에 따라 30일 차관회의를 거쳐 다음주 국무회의에 상정키로 하고 일을 추진했다. 외통부는 그러나 지난 28일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전화로 통보받고 행자부에 긴급연락,서훈신청을 취소했다.행자부도 훈장수여안을 안건에서 빼냈다. 외통부는 3년 이상 근무한 외국 대사는 자동적으로 서훈을 추진하도록 돼 있고,전임 대사도 훈장을 받은 적이 있어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서훈을 추진한 것이라고 밝혔다. 레오나르드 에드워즈 전임대사는 지난 94년 외무부에 비망록을 보내 “개인적인 차원에서 훈장을 받는 것은 좋으나 공식석상에 훈장을 차고 나가지는 못한다”고 훈장을비공식적으로 받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캐나다 대사관측은 “캐나다의 어떤 대사도 공식업무와 관련해 주재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돼 있다”고 밝혔다. 한 공무원은 “러시아 외교관 사태에 이어 훈장 취소소동은 외통부의 업무처리 미숙을 드러낸 일”이라고 지적했다.
  • 2시간만에 깨진 ‘신사협정’/“비방·독설 하지맙시다”

    ◎4당 대변인 전격 합의/하루도 안가 없던일로 7·21재·보궐선거에 당운을 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최전방 공격수를 자임하는 4당 대변인들이 9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국민회의 辛基南,자민련 邊雄田,한나라당 金哲,국민신당 金忠根 대변인은 서로 덕담을 주고 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얘기를 나눴다.앞으로 잘 하자며 성명서에 사인도 했다. 성명에서 여야 대변인들은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상대당과 후보를 흠집내는 인신공격성 성명 또는 논평을 내지 않기로 결의했다.정책대결의 장(場)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내용도 보탰다.지난 대선과 6·4지방선거때 이뤄진 고소·고발을 일괄 취하하는 전향적인 방안을 검토키로 한 것도 눈에 띤다.한마디로 대변인들이 앞장서 정치권 전체의 품격을 높이고 신뢰받는 정치풍토를 만들자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여야 4당 대변인의 ‘신사협정’은 불과 2시간여만에 깨졌다.자민련 金昌榮 부대변인이 대변인 회동이 끝난 지 2시간여만에 한나라당 張光根 부대변인의 성명을 반박하는 논평을 냈다.金부대변인은 한나라당이 서초갑 朴俊炳 후보의 서훈 사실을 문제삼은데 대해“한나라당이 우리 후보를 비방한 것은 생래적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며 고의적인 흠집내기”라고 논평했다. 앞서 張부대변인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진압공로로 받은 서훈을 유지하고 있는 朴후보의 모습은 이시대 정치의 아이러니이며 군부독재의 잔영”이라고 비난했다.
  • 상훈치탈 ‘제자리 걸음’

    ◎79명중 충청작전관련 鄭鎬溶·崔世昌씨만 박탈/全·盧 前 대통령 등 14명 대상 제외… 憲訴제기 상태 5·18은 193명의 사망자와 47명의 실종자(95년 검찰발표 기준)를 낳았다.그리고 광주시민 모두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그러나 그 희생을 있게한 ‘공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훈장을 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이른바 충정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당시 특전사령관 鄭鎬溶씨와 제3특전여단장 崔世昌씨 등 79명(2개단체 포함).이들중 鄭씨와 崔씨만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상훈을 취소토록 규정하고 있는 5·18특별법 제7조에 의거 지난해 훈장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5·18특별법에 따라 법원에서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16명중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충정작전이 아니라 ‘국가안보 공헌’명목으로 훈장을 받았다는 이유와 ‘상명하복 관계에 있던 영관급 이하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국방부측 논리로 치탈대상에서 제외됐다.全 전대통령은 전쟁영웅에게나 수여되는 최고훈격의 태극무공훈장을,盧 전대통령은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국방부는 ‘3년이상 형을 받은 자에대해 서훈을 취소한다’는 상훈법 8조 적용도 검토했으나 지난 63년 제정된이후 적용된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 또한 무산됐다. 그러나 국방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법조계 일각에서는 ‘대상자를 축소하기 위해 5·18특별법과 상훈법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특히 ‘유죄가 확정된 全·盧 전 대통령 등 14명에 대해 훈장을 박탈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헌’이라며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 제출돼 있는 상태다. 헌법소원을 제출했던 卞禎洙 변호사(68·정일종합법률법인)는 “일단 헌법소원이 심판에 회부되면 180일 이내에 위헌여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서 “이는 헌법재판소의 명백한 직무태만”이라고 비난했다.그는 새 정권에서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일 대장성 포상 미끼 업계 향응받아

    ◎관방실서 서훈자 결정권/수백만엔대 접대 일반화 【도쿄=강석진 특파원】 금융기관 등으로부터 뇌물성 접대를 받은 현직 관료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는 일본 대장성이 이번에는 업계에 수여되는 훈장을 둘러싸고도 접대를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나 혀를 차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훈장 서훈은 우리나라보다는 헤프지 않다.받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이나 느끼는 기쁨은 대단하다.90년부터 95년까지 금융업계에서 훈3등 이상을 받은 것은 은행이 31명,증권이 7명. 마이니치신문 최근 보도에 의하면 대형 시중은행과 증권회사가 각사의 최고 경영진에게 훈장이 수여되게 하고 수여될 경우에는 격을 높이기 위해 대장성 관방실,은행국,증권국 등에 수백만엔에 달하는 접대공세를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대장성 관료들이 금융행정이외의 분야에서도 접대를 받아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민간인에 대한 서훈은 업계단체 또는 경제단체가 후보자를 각 감독관청 해당국에 추천한다.각 국은 이를 받아 관방실로 넘기며,관방실은 숫자와 서훈순위 등을 결정해 총리부 상훈국에 올린다.여기서 심사한 후 각의에서 결정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부처 관방실 단계에서 최종 결정된다고 여겨진다. 훈장을 받기 위해서는 공적조서,이력서 등 복잡한 서류가 필요하고 감독 관청과 절충해야 하기 때문에 각 기업은 총무부나 사장실 등에 전임자를 두고 회사차원에서 대처하는 경우가 많다.금융기관 관계자들은 “회장이나 사장이 훈장을 타면 회사로서도 대단한 영광이기 때문에 대장성에 대한 접대는 빼놓을 수 없다.관방실을 중심으로 접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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